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3)

우리는 한동안 계속 진리 추구라는 주제에 대해 교제했다. 진리 추구라는 주제와 관련된 내용은 상당히 광범위하지만, 내용이 얼마나 광범위하든 그것은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리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문제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사람의 삶 속 현실적 문제이고, 사람의 일상생활이나 정상 인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또 그런 문제에는 사람이 각종 일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 사람의 생존 과정이나 인생의 길과 관련된 다양한 측면의 큰일이 포함된다. 지난번 교제 때 다룬 내용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서 ‘내려놓기’ 실행의 한 측면, 즉 ‘하나님에 대한 거리감과 적대감 내려놓기’였다. 이 실행은 무엇과 관련 있느냐?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와 관련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몇 차례 교제하면서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이 요구하는 원칙과 기준에 따라 각 부류의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리해야 하는가’에 관해 교제하였다. 또 지난번에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교제하면서 사람과 하나님 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하나님의 요구와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여러 현실적 문제를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그것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길을 걷고 생존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현실적 문제이다. ‘하나님에 대한 거리감과 적대감 내려놓기’라는 큰 주제를 우리는 네 가지 측면의 내용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관념과 상상이었고, 두 번째는 무리한 요구였으며, 세 번째는 경계와 의심이었고, 네 번째는 연구와 엿보기였다. 우리는 먼저 관념과 상상부터 교제를 시작했다. 관념과 상상이라는 첫 번째 항목은 하나님의 사역과 관계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사람이 어떤 관념과 상상을 품고 있는지 교제했다. 이 측면의 교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의 인식과 생각에 어떤 오류나 관념과 상상이 있는지 등과 관계된다. 사람은 그런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고 진리를 구한다면 하나님의 사역을 인식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역이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지 않을 때, 사람은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며 자신의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아야지, 자신의 관념과 상상에 기대 하나님의 사역은 어때야 한다거나 하나님의 사역이 사람에게서 이루려는 성과는 어떤 것이라고 가늠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측면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은 사람의 생명 진입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에 직접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관념과 상상을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이 기존에 갖고 있던 자질과 성격, 본능 등의 측면을 바꾸지 않는다고 교제했다. 사람의 태생적인 천성이나 육적 본능 같은 것들은 하나님이 사역하는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대상은 사람의 패괴 성품과,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이 사역으로 사람의 자질과 본능, 심지어 성격과 습관, 생활 리듬 등을 바꾸려 한다고 상상한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이 하는 여러 가지 실행은 모두 자신의 관념과 상상에 영향받고 좌우될 것이며, 치우친 부분이나 극단적인 것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치우친 부분과 극단적인 것은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고, 사람이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서 이탈하고 정상 인성의 궤도에서 벗어나게 한다. 예를 들어, 네가 관념과 상상 속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자질과 능력, 심지어 본능까지 바꾸려 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바꾸려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추구하겠느냐? 너는 편집적으로 추구할 것이다. 뛰어난 자질을 추구할 것이고, 여러 기능을 배우고 각종 지식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어 뛰어난 자질과 능력, 높은 식견과 소양, 심지어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재능을 갖추려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표면적인 능력과 재주를 중시하게 된다. 그럼 이런 추구가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불러오겠느냐?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서기는커녕 오히려 바리새인의 길에 들어설 것이다. 또 사람들은 누구의 자질과 은사, 지식이 더 높은지, 누가 더 능력과 특기를 갖추었는지, 누가 사람들 사이에서 더 위신이 높아 추앙과 우러름을 받는지 서로 비교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떠나는 길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은 사역하면서 사람의 정상 인성 범위 안에서 사람의 패괴 성품과, 그릇되고 터무니없으며 진리에 위배되는 온갖 사상 관점을 변화시켜 사람의 양심과 이성을 회복시키고 완전하게 한다. 즉, 진리를 깨달을수록 양심과 이성은 더욱 정상화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부분은 전혀 없다. 여기서 ‘정상’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사람이 양심과 정의감을 갖고 선량해지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이해심을 갖고 정직하고 사리에 밝아지며 편집적으로 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인성 측면에서 이루려는 성과이다.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수록 인성이 점점 더 정상화되는 부수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다. 반면 사람이 자신의 관념과 상상대로 추구한다면, 관념과 상상이 그의 추구에 많은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인도하여 온갖 편집적이고 극단적이고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길로 끌어들일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관념과 상상 속에서 하나님은 사역을 통해 사람의 인성을 높이고 사람이 본능이나 자질, 심지어 나이나 성별을 초월하게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은 그 방향으로 추구하고 노력하고 모색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어떤 것들을 중시하겠느냐? 한편으로는 지식과 능력, 재능, 은사, 재주를 중시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초자연적인 것을 중시할 것이다. 초자연적인 것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너희는 알고 있느냐? (초자연적인 것이란, 사람이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어떤 일들에 곧장 질적인 변화가 생기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던 사람이 일이 닥쳤을 때 갑자기 하나님 말씀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노래도 못 부르고 춤도 못 추던 사람이 격려를 받은 뒤 갑자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수 있게 되는 것, 그것도 꽤나 잘 추게 되는 것, 한 번도 외국어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외국어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은 초자연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급하게 외출할 일이 생겼지만 운전을 못하는 사람이 다급한 나머지 기도를 했더니 피가 끓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갑자기 운전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마치 숙련된 운전자처럼 안정적으로 운전을 하게 되었다고 해 보자. 누가 “어떻게 그렇게 운전을 잘하나요?”라고 물으면 너는 말할 것이다. “저도 모르겠어요. 모두 하나님의 행사고 성령의 감동이죠. 보세요. 이 손도 제 손이 아니라 성령께서 붙들고 계신 거예요!” 사실 이는 성령이 역사한 게 아니라 또 다른 영이 네 안에 들어가 제어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되어 스스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능을 초월한 것 아니냐? 초자연적인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초자연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좋은 현상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비정상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일정 기간 배우지도, 그 어떤 전문가의 지도를 거치지도 않고 갑자기 한 가지 언어를 구사하고 기능을 수행하고 지식을 갖추게 된다면 그것은 초자연적인 일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필요도, 구하거나 기다릴 필요도, 체험할 필요도 없이 생명 성품에 변화가 생긴다면 이는 아주 끔찍한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마음과 무의식에 여전히 수많은 관념과 상상 속의 것들을 품고 있다면 내려놓아야지, 그런 것들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진실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과 원칙에 부합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절대 너의 정상 인성을 초월하여 사역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이 사역으로 네게서 이루는 성과는 절대 너의 정상 인성을 끌어올려 초자연적인 인성으로 바꿔 놓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정상인에서 비범한 사람으로 바꿀 리도 없다. 만약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양심이 점점 더 민감해지고 갈수록 염치를 알게 되며 마음씨도 고와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면, 교회 사역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는 데다가 양심과 이성을 위배하는 언행을 하지 않게 되고 점차 진리 원칙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네가 하나님을 믿으며 걷는 길이 올바르다는 증거이다. 만약 네가 아직도 기도할 때 어떤 목소리를 들었는지에 중점을 둔다면, 하나님에게 구하고 간청할 때 여전히 어떤 영감이나 빛의 번뜩임, 혹은 초자연적인 계시를 기다린다면, 네 양심과 이성이 전혀 회복되거나 바로잡히지 않고 정의감을 갖거나 하나님에게 순종하지도 못한다면 그것은 네 추구와 네가 걷는 길에 여전히 문제가 있다는 증거이고, 너는 결코 진리 추구의 길에 오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너는 여전히 무의식 속에서 늘 초자연적인 사람이 되기를 추구한다. 게다가 늘 자신이 육체를 초월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고 며칠간 잠을 자지 않거나 쉬지 않아도 힘들거나 졸리지 않아야 한다고, 심지어 본분 이행 과정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배운 적 없는 것도 급한 상황에서는 갑자기 이해하고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초자연적인 상상은 모두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잔뜩 상상한다. 사실 하나님의 사역은 가장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며,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근거해 행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에게 그런 사역을 하지 않고, 단지 특수한 상황에서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초자연적인 사역을 좀 할 뿐이다. 그러나 그 사역도 그저 일시적이거나 특수한 상황에서 필요에 의한 것일 뿐,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할 때 사람에게 자주 나타나는 사역 방식은 아니다. 하나님은 경영 사역을 통해 사람을 구원함으로써 사람이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 구원받도록 하려고 한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기본 방식은 바로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여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상황에서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네 마음과 무의식 속에 어떤 관념과 상상이 있든, 네 관념과 상상이 논리나 너의 정신적 필요에 얼마나 부합하든, 이유가 어떻든 그것은 영원히 관념과 상상일 뿐이니, 너는 마땅히 그것을 내려놓아야지 고수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어느 정도로, 언제까지 사역하든 사람은 영원히 사람일 뿐 천사가 될 수는 없다. 설사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흰색으로 변한다고 해도,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얼굴도 하얗게 칠하고 흰색 옷과 흰색 바지를 입으며 두 날개를 단다고 해도, 너는 천사가 될 수 없다. 사람은 영원히 사람에 불과하다. 게다가 여기서 ‘사람’이란 정상 인성과 양심, 이성을 갖춘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지,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며, 비범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조금도 초자연적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그는 악을 행하지 않고 진리를 깨달으면 곧장 실행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의 요구와 진리 원칙대로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또 그는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온갖 사상과 관점이나 패괴 성품에 기대 살아가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자신의 관념과 상상대로 얼마나 오랜 시간 추구하든, 얼마나 수확이 있다고 느끼든 하나님에게서는 인정되지 않으며 기억되지도 않는다. 이게 무슨 뜻이겠느냐? 관념과 상상에 기대 자기 육체의 여러 정상적인 필요를 억제하거나 자신의 본능, 자질, 능력, 성격, 나아가 생활 리듬과 생활 습관을 열심히 바꾼다고 해도, 그런 것들을 아무리 열심히 억제하고 바꾼다고 해도, 설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다 할지라도, 진리를 실행하는 길에서 수확을 얻었다는 뜻은 아니며,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은 비록 형체가 없고, 겉보기에 사람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하고 어떤 길을 걷도록 강요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람의 마음 깊은 곳과 무의식 속에서 사상과 마음을 강력히 통제한다. 왜 그렇겠느냐? 사람이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몹시 부합하는 데다가 육적인 필요에도 영합하여 온갖 욕망과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관념과 상상 속에서 하나님이 사역으로 사람을 비범한 자,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자로 바꾸려 한다고,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여러 가지 언어를 할 줄 알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명백히 사람의 본능과 정상 인성의 범주를 초월한 것이지만, 사람의 허영심과 호기심, 승부욕을 극도로 충족시킨다. 진리를 얻기 전까지 사람은 초자연적인 것들을 좋아한다. 초자연적인 것들은 사람이 스스로 존재감이 크다고, 평범한 사람보다 뛰어나거나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느끼게 하는데, 패괴된 인류는 마침 이런 것을 사랑하고 동경한다. 사람은 모두 자신이 사람들 사이에서 출중한 인물이기를, 그 어떤 사람과도 같지 않기를, 유일하고 하나뿐인 존재로서 우러름과 추앙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패괴된 인류 사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있는데, 만약 어떤 물건이 하나만 생산된 경우 돈 많고 신분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구입하려고 한다. 결국 어느 정도로 구입 경쟁이 치열해지겠느냐? 그 제품은 원래 가격보다 몇 배, 심지어 열 배 이상 높은 가격에 판매된다. 또 제품을 손에 넣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봐 봐.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을 내가 손에 넣었어. 대단하지 않아? 남보다 낫지? 나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어!’ 그는 속으로 뿌듯해하며 자신이 남다르고 비범하며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성품이냐? (교만입니다.) 이는 교만한 성품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남과 같은 옷을 입으면 속으로 불편해한다. 반면 남들은 감히 사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는 옷을 입어서 보는 사람마다 부러워한다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뿌듯해할 것입니다.) 그는 유독 뿌듯해하면서 자신이 남다르고 뛰어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어떤 성품으로 인한 것이냐? (교만한 성품으로 인한 것입니다.) 이 역시 교만한 성품으로 인한 것이다. 보아라.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심리를 가지고 있다. 기술적 업무를 하나 수행할 줄 알면 자신이 남보다 낫고 자신만 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누가 똑같은 기술적 업무를 수행할 줄 알면 질투하면서 모두가 자신보다 못하길 간절히 바란다. 왜 이런 심리를 갖겠느냐? (자신이 남다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만이 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면 그는 그 무리에서 보통 사람보다 뛰어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수행할 줄 아는 그 기술적 업무를 남들이 배울까 봐 두려워한다. 남들이 그에게 도움을 구하면 가르쳐 주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중요한 비법은 남겨 놓고 조금만 가르쳐 주며 나머지는 네가 스스로 깨닫도록 한다. 네가 다시 물으면 이렇게 말한다. “저도 예전에 이렇게 배웠어요. 여러 번 보면 할 수 있을 거예요.” 사실 그의 속마음은 무엇이겠느냐? ‘당신에게 가르쳐 주면 내가 돋보이겠어? 모두가 할 줄 알게 되면 나는 평범한 사람이 되는 거잖아? 당신들이 다들 할 줄 모르면 나는 여기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되고 당신들은 내게 잘 보이려 하겠지. 그러면 존재감이 생기지 않겠어? 당신들 사이에서 가장 지위가 높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되지 않겠냐고. 그러면 내가 당신들 사이에서 최고가 되겠지?’라는 것이다. 그는 업무 기술을 좀 수행할 줄 안다고 해서 남들이 배울까 봐 두려워하며 남들이 자신과 같아지길 원하지 않는다. 또 누가 자신과 똑같은 업무 기술이나 특기를 가지고 있으면 속으로 기분 나빠하면서 늘 무언가를 배워서 남을 뛰어넘을 방법을 생각하고 남보다 뛰어나지려고 하고 남의 어깨 위에 서서 존재감을 확인받으려 한다. 이것이 올바른 추구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패괴된 인류는 이런 것을 동경하고 추구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이런저런 관념과 상상을 품게 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어 지위와 위신, 존재감을 가지려고 노력하며, 남과 달라지고자, 심지어 남들 눈에 초인이나 비범한 사람으로 보이고자 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 측면에 대한 관념과 상상은 내려놓아야 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대단한 은사나 재능을 추구하지 말고, 자신의 자질이나 본능을 바꾸려 하지도 마라. 대신 자신이 원래 가진 자질, 능력, 본능 등의 조건하에서 하나님의 요구대로 본분을 이행하고 모든 일을 하여라. 하나님은 네 능력이 미치지 못하고 네 자질로 이룰 수 없는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너도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말고, 네가 인식하고 할 수 있는 것에 따라 최선을 다해 하고, 네 조건에 맞춰 할 수 있는 만큼만 실행하면 된다. 예를 들어, 네 자질과 재능이 팀장이 되기에 적합하다면, 팀장 역할을 잘 해내라. 팀장의 역할 범위 내에서 어떤 사역과 업무가 있는지 정리해서 하나씩 해결해 나가고, 하나님이 가르친 방식과 원칙대로 시행하면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네가 관념과 상상에 기대 ‘나는 지금 팀장을 맡을 수 있으니까 좀 더 노력해서 위로 올라간다면, 고생도 좀 하고 대가도 좀 치른다면, 거기에 성령께서도 크게 역사하신다면, 교회 리더나 결재팀 팀장까지 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보기에는 안 되겠지만,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할 거야. 하나님한테는 어려운 일이 없으니까! 나는 팀장 사역을 하고 싶지 않아. 하나님께 기도해서 더 큰 사역을 맡게 해 달라고, 리더나 일꾼이 되게 해 달라고 해야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식의 추구가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다고 하겠느냐? (항상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하려고 할 뿐, 자신의 자질과 재능에 맞춰 안분지족하며 자기가 맡은 사역을 제대로 지키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늘 초인이 되려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는 정상적인 사람이 추구해야 할 바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늘 ‘하나님께는 쉽게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사실이고 다들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치우치게 이해하여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에게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모두 이루어 주고,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에게 의지하면 자신의 본능을 초월해 초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쉽게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라는 말은 분명 하나님의 능력과 본질, 하나님의 전능함을 가리키며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고 하나님은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지 사람이 정상 인성에서 벗어나 초자연적으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능하더라도 사람에게서 하는 사역은 모두 사람의 정상 인성을 기반으로 하고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만유를 지배하거나 배치하고 사람과 일, 사물을 동원해 여러 일을 이루도록 봉사하게 하며 하나님이 곧 이루고자 하는 사실을 이룬다. 하나님이 여러 일을 이루는 기간에도 사람은 여전히 정상 인성 안에 있고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여전히 사람일 뿐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능하더라도, 하나님이 어떤 방식을 활용해 한 가지 일을 주재하거나 이루든 피조된 인류는 영원히 피조된 인류일 뿐이며, 피조된 인류는 여전히 정상 인성 안에서 살지 조금도 초자연적이지 않다. 너희가 보기에도 사실이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초자연적이지 않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이 사람과 일, 사물을 지배할 때 사람은 저도 모르게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서 생활하고 생존하며 매사를 처리하고, 현재에 집중해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네가 현재에 집중해 살아갈 때 네 의식이 흐릿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네 의식은 여전히 또렷하다. 그럼 네 자질이 순식간에 제고되고 변화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원래 모습을 유지한다. 그럼 사람의 본능이 순간적으로 변화하느냐? 그렇지도 않다.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 안배 아래에서 네가 얼마나 많은 일을 체험하든 네 성격과 습관, 생활 리듬, 나아가 네 정상 인성의 자질과 능력, 여러 기능은 전혀 변화하지 않는다. 단지 사람이 하나님 사역을 체험할 때 각자의 환경에서 다양한 일과 여러 부류의 사람을 체험할 뿐이다. 최종적인 결과는 사람이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식견이 생기고 어느 정도 공과를 배우는 것이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진리나 하나님을 인식하는 일에서 수확을 거둘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사유는 정상적이고 의식은 흐릿하지 않으며 사람의 자질과 능력, 본능 역시 변함없이 원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쉽게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전능하고 만유를 지배한다는 뜻이지 사람을 초자연적으로 바꾼다거나 피조된 인류의 본질을 바꾼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본질을 바꾸지 않는다. 인류는 여전히 인류일 뿐이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런 측면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만유를 지배하고 무소불위한 것은 하나님이 가진 본질이고 하나님이 갖춘 것이지 사람이 초자연적으로 변한다거나 무소불위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설사 극소수의 사람이 때때로 자신의 자질이나 육적 본능을 뛰어넘는 것에 도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또한 성령이 역사한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런 측면의 은사를 베푼 것이지 사람 스스로가 태생적으로 그 능력을 갖춘 게 아니다. 왜냐하면 피조된 인류는 하나님이 정한 이 모든 것을 바꿀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능이라는 일에 관해 한 가지 간단한 예시를 들어 보겠다. 예를 들면, 놀라 겁먹은 목소리를 들으면 사람은 두려워서 본능적으로 움츠러든다. 나이가 몇이든 어릴 때부터 그랬고, 죽을 때가 되어서도 여전히 그렇다. 이는 본능이다. 본능이란 무엇이냐? 육체의 고유한 기능으로, 이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정상인은 고유한 본능을 보유해야만 비로소 정상 인성의 생활과 생존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의 본능은 하나님이 바꾸려는 대상이 아니다. 이해가 되느냐?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이 무소불위하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나님 자신의 권병이나 하나님의 전능함을 가리킵니다.) 사람과 관련이 있겠느냐? (사람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사람이 초자연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서 사람이 무소불위하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서도 무소불위할 수 없다. 왜 그렇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고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일무이합니다.) 그렇다.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은 영원히 사람일 뿐 다른 종이 될 수 없는 것은 물론 하나님은 더더욱 될 수 없다. 사람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속성이 변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본능은 변하겠느냐?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본능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생활 습관이나 리듬, 나아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고유한 성격도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생활 리듬의 경우, 인류는 대다수 생물과 마찬가지로 해가 뜨면 활동하고 해가 지면 휴식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뇌가 충분히 쉬었고 몸도 가뿐해져서 일을 시작하고, 밤이 되면 몸이 피곤해져서 하품을 하고 뇌도 지쳐서 휴식 상태에 들어간다. 이는 아주 정상적인 생활 리듬이다. 이는 인류의 공통점이자 본능이며, 당연히 하나님이 인류에게 정해 준 생활 리듬이기도 하다. 이 리듬은 바로 일월성신이 운행하고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근거로 정한 것이다. 이 생활 리듬을 깬다고 해도 단기간 내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가끔씩 피곤해서 자고 싶을 때 그런 느낌을 억제하고자 차나 커피를 마시면 몸의 피로는 어느 정도 완화될 것이다. 그러나 장기간 지속되면 몸에 문제가 생긴다. 왜 문제가 생기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준 생활 리듬을 위배했기 때문이다. 몸에 문제가 생겨 진찰을 받으러 가면 의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밤에는 꼭 일찍 주무셔야 해요. 10시에 잠에 들고 새벽 네다섯 시에 일어나는 거죠. 그러면 몇 달 뒤에 병이 나을 거예요." 의사의 당부대로 실행하면 3개월 뒤에는 몸에서 여러 불편한 증상이 대체로 사라져서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몸에 문제가 생기는 건 큰 병이 있는 게 아니라 정상적인 리듬대로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보아라. 사람의 생활 리듬은 깨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생활 리듬은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해가 뜨면 활동하고 해가 지면 휴식하는 것이다. 물론 부엉이 같은 생물도 일부 있긴 하다. 그런 생물들은 낮에 휴식하고 밤에 나와서 활동하는데, 그것들의 생활 리듬은 인류나 기타 생물과는 다르지만 네가 그것들의 리듬을 깨려고 해도 깰 수 없다. 그 밖에, 일부 생물은 겨울이 되면 겨울잠을 잔다. 그럼 인류도 이런 리듬을 가지고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는 겨울잠을 잘 필요가 없다. 인류의 생활에는 리듬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일주일에 하루이틀은 쉬는 것이다. 이렇게 해가 뜨면 활동하고 해가 지면 휴식하면서 계속 정상적인 일과 휴식의 리듬을 유지하면 생활이 보장되고 계속해서 생존해 나갈 수 있다. 인류에게는 인류만의 생활 리듬이 있는데, 이런 리듬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으로 모두 의미가 있고, 인류의 정상적인 생활과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역은 절대 사람이 상상한 것처럼 사람의 생활 리듬과 생존 리듬을 깨지 않는다. 그런 관념과 상상도 내려놓아야 한다. 인류가 만약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정해 준 그런 리듬을 강제로 깨거나 일부 초자연적인 생각에 지배되어 늘 그것을 바꾸려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만약 그것을 바꾸는 게 네 생명을 한 차원 높이고 네 인성을 제고시킨다고 생각한다면 한번 바꾸려고 시도하여 네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 앞으로 다가올 나날에 어떻게 변화할지, 네 정상 인성이 제고될지, 네가 초인이나 천사가 될지 살펴보아라. 네가 하나님이 사역할 때 초자연적인 부분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사역이 네 생활 리듬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강제로 그것을 바꾸어 스스로 평범함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한번 시도해 봐도 된다. 3년이나 5년간 시도하여 정말로 생활과 생존의 리듬을 바꾼다고 해도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은 딱 한 가지뿐이다. 그건 바로 네 육체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정말로 초자연적인 존재가 되어 한 줄기 연기로 변하고 '득도한 신선'이 될 것이다. 사람의 육체를 정상적이고 건강하게 만들려면,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을 받아들이려면 자신의 관념과 상상대로 소위 초인이 되는 것이나 소위 제고된 인성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정상 인성 안에서 살며 자신의 정상 인성의 생활과 생존 리듬, 정상 인성의 본능을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 네 무리한 요구들은 모두 상상과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며 네 본능과 생활 리듬 등은 모두 하나님이 바꾸려는 대상도, 하나님이 사역으로 바꾸려는 것도 아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결코 관념과 상상으로 가득찬 사람도 아니고 초인이나 특출난 사람은 더더욱 아니며 정상 인성이나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진리 원칙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 모든 일에서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도 초자연적이지 않으며 인성도 특히나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다.

사람은 정상 인성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많은 육체적 본능과 필요에 제약을 받는다. 예를 들어, 너무 피곤하거나 병에 걸려 휴식을 필요로 할 때 본분 이행이 이틀 정도 지연되기도 하고, 긴장된 환경으로 인해 두려움을 느껴 마음을 평온히 하고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기도 하며, 혹은 자질과 능력 부족으로 어떤 사역이나 본분을 잘 감당하지 못해 늘 마음속으로 죄스러워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정상 인성의 범주에 속하는 정상적인 모습이다. 때로는 감정이나 육체적 필요에 속박되고, 때로는 육체적 본능이나 시간 또는 성격에 제약받는 것은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를 들어, 어릴 때부터 성격이 매우 내성적이어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사람들과 교류하지 못하는 자가 있는데, 삼사십 대의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런 성격을 극복하지 못해 말을 잘하지 못하고 말솜씨가 없으며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도 서툴다. 그는 리더가 된 후에도 이런 성격 때문에 사역에서 어느 정도 제약받고 가로막혀 늘 이로 인해 괴로워하고 고뇌하며 심각하게 속박받는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모두 정상 인성의 모습이다. 이런 것들이 정상 인성의 모습이라면, 하나님은 과오로 보겠느냐? 전부 과오가 아니며, 하나님은 이를 올바르게 대할 것이다. 네게 어떤 문제와 결함, 허물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원래부터 갖추고 있는 정상 인성의 조건하에서 네가 어떻게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며, 어떻게 진리 원칙대로 행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지를 본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고자 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진리 원칙과 관련된 일에서는 정상 인성의 자질이나 본능, 성격, 습관 또는 생활 리듬 등 기본적인 조건에 제약받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 기본적인 조건들을 극복하는 데 정력과 시간을 쏟아붓지도 말아야 하며, 이를 바꾸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 예를 들면, 성격이 내향적이고 과묵하며 언변이 좋지 않은 데다가 사람과 잘 어울리거나 접촉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외향적인 사람은 비록 말이 많긴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이 반드시 유용하거나 진리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내향적인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바꾸려고 시도할 필요도 없다. 너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하나님을 따르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성격이 내향적인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저는 지금 리더 일꾼과 결재팀 팀장을 맡고 있으니 내향적인 성격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네가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어떻게 사람과 어울려야 하는지 한번 배워 보거나 하루에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일을 얼마나 많이 처리하며 몇 가지 부류의 사람과 교류할지 스스로 정해 봐도 된다. 네가 정말로 네 기존의 성격을 바꿀 능력이 된다면 당연히 교회 사역을 하는 데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성격이 태생적으로 내향적이고 언변이 좋지 않으며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왕래할 줄도 모른다면 아무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성격이 내향적이라서 남과 접촉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게다가 말도 그리 많지 않으며 속으로 늘 쓸모 있는 말을 해야 하고 불필요한 말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려 하지 않는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경험이 없고 언어 표현이 서투를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나이도 어리지 않고 경험도 있지만 여전히 그런 내향적인 성격일 수도 있다. 만약 네가 그런 성격을 바꾸려고 시도하며 바꾸려고 다양한 방식을 취한다면, 말하건대 그런 성격은 평생 변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런 측면의 사역은 하지 않는다. 네 용모나 외모가 아버지를 닮았든 어머니를 닮았든, 아니면 어떤 친척을 닮았든 외모는 변화하지 않는다. 특히 성격은 더더욱 변화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내향적인 것이 잘 변하지 않는다면 외향적인 것은 변하기 쉬운가요?" 외향적인 것도 마찬가지로 변하기 쉽지 않다. 외향적인 사람은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마음속에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에게 말을 못하게 하거나 말을 적게 하라고 해도 그는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며, 누가 그가 말하는 것을 제한한다면 그건 마치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을 서로 어울리게 한다면 그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겠느냐? 처음에는 아마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두 사람은 체면 때문에 서로 타협하고 포용하거나 양보하고 용서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서로가 어떤 성격인지 속으로 명확히 알게 되어 양보하거나 양해할 필요가 없게 되면 금세 원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성격이 원래 내향적이었다면 여전히 내향적일 것이고 말하고 대화할 때 그저 몇 글자나 몇 문장만 말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외출했었나요?"라고 물으면 "외출했었어요."라고 말하고 "언제 돌아왔어요?"라고 하면 "방금 돌아왔어요."라고 답할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고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성격이 외향적인 사람은 속사포처럼 끊임없이 말하고, 설사 말을 끊어도 잠시 후 또 말하려고 한다. 사람의 성격이 변하기 쉽겠느냐? (변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는 모든 피조된 인류가 타고나는 것으로 패괴 성품이나 인성의 본질과는 무관하다. 이는 사람이 겉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상태이자 사람이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표현을 잘하는 사람도 있지만 못하는 사람도 있다. 묘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고 겉으로 표현해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어야 비로소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사람이 삶을 대하고 사람과 일, 사물을 처리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게 바로 한 사람의 성격이다. 성격은 타고나는 것으로, 여러 번 시도했지만 바꿀 수 없었다면 말하건대 이제는 그만두어도 된다. 그렇게 고생할 필요 없다. 성격은 바뀌지 않으니 바꾸려 하지 마라. 네가 원래 어떤 성격이든 그대로 두고, 구원받기 위해 성격을 바꾸려 하지 마라. 그것은 사람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사람의 성격은 객관적 사실로, 너는 그것을 바꿀 수 없다. 객관적 원인을 보면,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고자 하는 성과는 네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와 아무 관계가 없고, 네가 구원받을 수 있는지 여부 역시 네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 또한, 네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인지,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인지도 네가 어떤 성격인지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본분을 이행한다거나 어떤 사역의 책임자가 되었다고 해서 성격을 바꾸려 하지 마라.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럼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느냐? 어떤 성격을 지녔든, 어떤 선천적 조건을 갖추었든 네가 지키고 실행해야 할 것은 진리 원칙이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네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지,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판단할 때, 네가 어떤 성격인지, 어떤 자질이나 능력, 재능, 은사, 재주를 타고났는지 등은 보지 않는다. 물론 네가 육체적 본능과 필요를 얼마나 억제했는지도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했는지,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와 다짐이 있는지를 본다. 결국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데 이르렀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고자 하는 바이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어떤 여성은 다부지고 화끈하며 재빠르게 행동하고, 성격도 꼭 남자 같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면 무엇이냐? 여장부이다. ‘여장부’는 더이상 예전에 사람들이 말하던 것처럼 우락부락하고 볼품없지 않다.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의 단어이다. 그러나 이 긍정적인 의미의 단어를 하나님은 어떻게 보겠느냐? 네 행동은 화끈하고 박력 있으며 과감하다만, 네가 그렇게 실행하는 원칙과 그렇게 행동하는 근거는 무엇이냐? 진리이냐? 하나님의 말씀이냐? 이게 핵심이다. 어떤 남자가 느긋하고 세심하게 행동한다면 이방인은 마치 전족한 여자처럼 답답하다고 할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를 사용해 ‘계집애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보느냐? 행동이 화끈하고 박력 있으며 과감하든, 전족한 여자처럼 답답하고 계집애 같든 그게 문제가 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화끈하고 박력 있으며 과감한 것이 장점이겠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럼 행동이 전족한 여자처럼 답답한 것이 단점이겠느냐? (이 역시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비록 ‘여장부’와 ‘계집애 같다’라는 두 표현 중 하나는 의미가 긍정적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가 부정적이지만 이 두 가지 행위나 행동 방식의 본질을 문자적인 의미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럼 무엇을 근거로 해야겠느냐? (그가 실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근거로 해야 합니다.) 그가 하는 행동의 근거와 이루려는 성과를 근거로 해야 한다. 그가 하는 행동의 근거가 만약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이라면 그 일은 기본적으로 틀리지 않을 확률이 90%이다. 그가 진리 원칙을 근거로 행동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증거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고 더 많은 형제자매에게 도움을 주는 성과를 이루려는 것이라면 틀리지 않다고 100% 확신할 수 있다. 그가 박력 있고 과감하든 전족한 여자처럼 답답하든 신경쓰지 말고, 그의 표면적인 행동 방식이 어떠하든 신경쓰지 마라.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하는 행동의 근거가 진리 원칙인지, 행동의 목표와 이루려는 성과가 하나님 집의 이익과 교회의 사역을 지키고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인지이다. 그럼 행동하는 형식은 중요하겠느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장부인지 전족한 여자인지는 하나님이 보려는 것이 아니다. 그건 하나님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아니다. 그러니 여자가 여장부처럼 행동이 화끈하고 박력 있으며 과감하다고 해서 칭찬하고 추앙할 만한 가치가 있겠느냐? (그럴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화끈하고 박력 있으며 과감한 것이 행동의 원칙이냐? (아닙니다.) 남자든 여자든 박력 있고 과감하며 화끈한 것은 행동의 원칙이 아니다. 그럼 행동의 원칙은 무엇이냐? (행동은 진리 원칙을 근거로 해야 하고, 이루려는 성과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고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게 원칙입니다.) 그게 구체적인 원칙이다. 그 원칙을 근거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그 원칙을 근거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내 생각에 박력 있고 과감하며 화끈한 것을 규정하기에 가장 적절한 말은 바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진리 원칙을 근거로 행동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겉보기에는 행동이 과감하고 거침없으며 지도자나 제왕의 풍모를 가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제멋대로 행동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방해하고 교란하며 교회 사역을 망친다. 그럼 하나님이 기억하겠느냐?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죄도 할 것이다. 따라서 네가 자신을 여장부라고 하거나 화끈하고 박력 있으며 과감하게 행동한들 소용 있겠느냐? (소용없습니다.) 진리를 구하고 진리 원칙대로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고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하는 것이며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다. 네가 “저는 원래 성격이 이렇고 바꿀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 라고 말하더라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네 성격이 급한지 느긋한지는 모두 문제가 되지 않으니 그 일에 휘둘리지 마라.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자신의 행동 방식을 바꾸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어떤 방식이든 네 행동의 근거가 진리 원칙이고 네가 이루려는 성과가 하나님의 증거와 하나님의 이익, 하나님 집의 사역을 수호하는 것이라면 그게 바로 선행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할 것이다. 반대로 네가 겉보기에 전족한 여자처럼 쭈뼛쭈뼛하든 리더나 제왕처럼 화끈하든, 네 행동의 표면적인 형식이 무엇이든 네가 진리 원칙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이자 악행으로, 하나님에게 정죄되고 하나님에게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선한지 악한지 평가하는 원칙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런 말씀에 대한 교제를 마치고 나니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측면에 대해 사람이 어떤 관념과 상상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해하고 나니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갖게 되는 일부 오류에 대해 알게 되지 않았느냐?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도 명확해지지 않았느냐? (명확해졌습니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이해하는 목적은 한편으로는 사람이 더이상 그런 관념과 상상에 기대 살아가며 잘못된 인생 길을 걷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그런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는 동시에 가볍고 즐겁게 정상 인성 안에서 살며 자신의 직책과 본분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자신에게 힘든 일을 강요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도달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하고, 자신의 자질과 능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과 협력하거나 다른 형제자매의 도움을 구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한다면 그게 바로 원칙이다. 요컨대 이 일에서 사람이 이해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역 기간에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고 기존의 인성이 가진 기본적인 조건의 범위 안에 있으며 사람의 인성은 점차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지, 기형적 혹은 초자연적으로 변하거나 특출나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행하는 본분이 업무 기술과 관련 있다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마음을 쏟아 기술 업무를 배우고 깊이 연구해야지, ‘하나님께서는 무소불위하시니 하나님께 기도드리기만 하면 사람이 못하는 일도 이룰 수 있어’라는 사상 관점에 기대 초자연적인 상상으로 무작정 하나님이 행사하기를 기다리기만 할 뿐 자신은 공을 들여 배우지 않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자질로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행동해야 하고, 자신의 자질과 능력으로 도달할 수 없다고 해도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그 어떤 짐이나 부담, 중압감도 갖지 말고 자신을 놓아주어야 한다. 예를 들면, 컴퓨터 사용법을 배우는 측면에서 네가 나이가 많다면 네 나이와 자질, 나아가 현재 여건을 고려할 때 타자 치는 법을 배우는 것만 해도 쉽지 않다. 만약 온라인상에서 형제자매와 연락하고 사역하는 법도 배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하다. 그러나 너는 늘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내어 프로그래밍과 네트워크 보안 유지까지 배워 일부 네트워크 엔지니어나 첨단 기술 인력만이 할 수 있는 사역을 하려 한다. 이는 어리석은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배우지 못하면 너는 소극적으로 변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하나님, 저는 왜 이런 것들을 배우지 못할까요? 왜 제게 이런 자질을 주셨나요? 제 나이가 이렇게나 많은데 왜 저를 회춘시켜 주지 않으시죠? 하나님께서는 무소불위하신 것 아니었나요?’ 이렇게 생각하고 요구하는 것은 잘못됐다. 소위 힘 닿는 데까지 하고 사람의 자질과 능력, 본능을 초월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은 네 자질과 능력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네게 요구하되 도달할 수 없는 것은 네게 요구하지 않으니 네 스스로도 자신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고, 네가 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할 수 있으니 하나님도 네게 반드시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는 “저는 나이가 많아서 영상을 업로드하지도 못하고 네트워크 보안을 유지하지도 못해요. 코딩은 더더욱 할 줄 모르죠.”라며 기어코 배우려고 하는데, 너는 네가 그런 사역을 해야 하냐고 하나님 집에 물어 봤느냐? 네 본연의 사역은 제대로 했느냐? 네 자질로 도달할 수 있는 사역은 제대로 했느냐? 제대로 하지도 못했으면서 기어코 자신이 도달할 수 없고 닿지 못하며 심지어 평생토록 배울 수 없는 것을 하려고 한다면 너는 자신과 겨루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하나님과 겨루는 것이겠느냐? 아주 골치 아프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는 늘 자신을 초월하고 초인이 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네게 그러라고 한 적이 없다. 네가 초인이 되려고 하는 이유는 단 하나일 것이다. 바로 자신을 과시하고 싶기 때문이다. 너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늙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너는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며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려는 것도 아니고, 착실하게 처신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는 원칙대로 본분을 이행하려는 것도 아니다. 너는 자신의 자질과 능력에 도전함으로써 자신이 늙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저도 아직 괜찮아요. 남들 못지않다고요. 남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저도 할 수 있어요!” 이런다고 의미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의미 없다. 네가 들이는 공은 다 헛수고이고 가치가 없다. 네가 자신의 조건으로 도달할 수 있는 일을 마음과 뜻, 힘을 다해 제대로 해내면 하나님은 그것으로 만족한다. 스스로에게 도전하지 말고, 한계에 도전하지 마라. 네 자질과 능력이 어떤지 하나님은 알고 있다. 하나님이 너에게 어떤 자질과 얼마나 큰 능력을 주었든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은 것이다. 네가 늘 뭔가를 뛰어넘고자 한다면 그건 교만하고 분수를 모르는 것이고, 그런 걸 두고 사서 고생한다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은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착실하게 처신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본래 자리를 지키며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원칙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언제나 한 수 보여 주려고만 한다. 헐후어 중에 이런 말이 있지 않으냐? “할머니가 립스틱을 바르는 것, 본때를 보여 준다.” 그 목적이 무엇이냐?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너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다. “할머니인 난 보통이 아니지. 내가 너에게 한 수 보여 주마.”라는 것을 말이다. 남들에게서 무시당하기 싫고 우러름과 숭배를 받고 싶어서 한계에 도전하고 자신을 뛰어넘으려는 것이다. 이것이 교만한 본성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교만한 본성이 있는 자는 점잖지 않다. 교만한 본성이 있으면 너는 착실하게 지내지 않고, 언제나 스스로에게 도전하려 한다. 다른 사람이 할 줄 아는 일이라면 자기도 할 수 있길 바라고, 다른 사람이 뭔가를 해서 체면도 세우고, 성과도 내고, 공헌하고, 모두에게 칭찬을 받으면 너는 속으로 괴롭고, 질투가 나고,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면 너는 하던 일을 내려놓고 체면이 서는 사역을 하고 싶고 남들에게 우러름을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사역을 너는 할 수 없으니, 이는 시간 낭비가 아니겠느냐?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본연의 일을 하도록 해라. 본연의 일을 하지 않으면 마지막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시간을 허비하고 세월을 낭비해서 사람들에게 멸시당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도 혐오받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자신까지 소극적으로 만들게 된다. 젊은이, 중년, 노인을 막론하고 한 사람의 자질과 재주에는 모두 한계가 있고, 완벽한 사람은 없다. 너도 완벽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라. 뭐든 할 줄 알고, 뭐든 가능하고, 뭐든 다 아는 사람이 되려 하지 마라. 네가 이런 성품이라면 매우 골치가 아프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과정에서 각 부류의 사람에게 말씀할 때 어떤 주제나 어떤 측면의 문제를 이야기하든 왜 같은 일을 다양한 내적 상태나 상황별로 반복해서 말씀하겠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너무 세세하고 수다스럽게 말씀하시네. 우리는 다 알아들었는데.’ 너는 알아들었더라도 다른 사람은 알아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설사 알아들었다고 한들 네가 여러 내적 상태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해결하지 못한다면 너는 여전히 절반만 이해한 것이니 이해한 척하지 마라. 사람의 여러 내적 상태는 모두 다르다. 각 부류의 사람들이 가진 다양한 내적 상태를 언급하여 여러 내적 상태를 모두 포괄적으로 다루어야, 즉 이 큰 문제 아래에서 각 부류의 사람들이 가진 내적 상태를 모두 이야기하고, 이 방면의 진리를 모든 사람이 다 이해해야, 이 문제가 비로소 명확하게 설명되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모든 사람은 자신의 조건 아래 살아가면서 서로 다른 문제에 직면한다는 뜻이다. 각자의 문제가 다 다르고, 성격과 장점, 장기도 다 다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다 자신만의 조건과 어려움, 서로 다른 사상과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개인적인 조건이 얼마나 다르든, 능력과 자질, 일을 바라보는 눈높이나 성격, 습관이 얼마나 다르든, 인류의 패괴 성품과 본성 본질은 같다. 즉, 사람의 인성이 가진 여러 측면의 조건이 아무리 달라도 인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왜 인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겠느냐? 인류가 생존을 의지하는 성품 본질은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부류의 사람이 가진 내적 상태와 문제를 폭로한 다음 인류가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진리와 원칙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류의 공통적인 문제는 해결된다. 성격과 자질이 어떻든, 능력이 얼마나 뛰어나든, 남자든 여자든, 서양에서 태어났든 동양에서 태어났든, 남방 사람이든 북방 사람이든, 너의 패괴 성품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임으로써, 또한 진리를 실행함으로써 해결된다면, 너의 어려움도 해결된다. 그러면 인류의 공통적인 문제로 인해 생겨난 여러 내적 상태도 모두 해결될 수 있다. 사람에게는 왜 여러 내적 상태가 생겨나겠느냐? 사람마다 갖추고 있는 인성의 고유한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방에서 생활하면 남방 사람의 생활 습관과 생활 규칙, 남방 사람만의 독특한 성격과 생활 방식을 어느 정도 가지게 된다.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은 특별한 관념과 상상, 특별한 사상과 관점, 특별한 내적 상태를 가지게 된다. 만약 북방에서 태어난다면 북방 사람의 성격과 생활 습관, 혹은 북방 사람의 고유한 풍속과 문화적 배경, 교육 방식 등이 만들어 낸 내적 상태를 어느 정도 가질 것이다. 이렇듯 남방 사람과 북방 사람이 가지게 되는 내적 상태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같은 문제로 인해 생겨나는 내적 상태의 근원과 본질은 같기 때문에 같은 진리를 이용해 해결할 수 있다. 그러니 북방 사람인지 남방 사람인지, 동양인인지 서양인인지와 상관없이 네가 피조된 인류라면 네 문제는 모두 진리로 해결할 수 있다. 알겠느냐? 이 문제가 복잡하냐? (듣고 나니 복잡하지 않게 느껴집니다.) 왜 이 문제는 복잡하지 않다고 하겠느냐? (비록 사람이 가진 개인적인 조건과 배경, 성격의 차이가 자연스레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만들어 내지만 그런 여러 가지 내적 상태를 만들어 내는 근원은 같고, 사람의 패괴 본질도 같습니다. 패괴 성품을 얼마나 표출하든 모두 같은 진리를 이용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진리는 우리 모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남방 사람이든 북방 사람이든,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청년이든 노인이든, 사람의 개인적인 조건이 어떻든 사람의 패괴 성품은 똑같다. 그런 패괴 성품이 만들어 내는 여러 내적 상태와 여러 사상 관점, 나아가 진리를 대하는 여러 태도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공통점은 무엇이냐? 그런 패괴 성품이 만들어 내는 것은 모두 사탄에 속하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물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리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패괴된 인류의 인종, 종교, 문화에 어떤 차이가 있든, 사람의 피부가 노랗든, 하얗든, 갈색이든, 검은색이든 모두 패괴 인류에 해당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류의 본질은 똑같다. 이게 공통적인 부분이다. 따라서 국가나 종족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패괴된 인류라고 통칭하는데, 피부색이나 외모, 생활 습관이나 종족 문화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들이 존귀하든 비천하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어떤 교육을 받든, 결국 그가 생존을 의지하는 법칙은 사탄에서 비롯되었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설사 그가 부유하고 고귀한 인종이며 고상한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의 본질은 패괴된 인류이고 사탄에 속하며 하나님을 대적한다. 통칭하자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류이고, 모두 하나님이 사역하고 구원하려는 대상에 속한다. 이는 무슨 뜻이겠느냐? 구원받기 전에는 문화적, 교육적, 종교적 배경이 아무리 고상하더라도 본질은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적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인류의 본질은 인류의 피부색이나 종교, 출생국가, 나아가 교육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느 인종에 해당하는 사람이든 본인의 조건 때문에 하나님이 보기에 고귀하거나 미천해지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을 고귀하거나 미천하다고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오직 한 가지,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는지 아닌지이다.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너는 인종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고귀하다. 반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저는 흰 피부에 금발, 파란 눈이고, 저희 가문은 대대손손 황족이에요.”라고 말한들 소용없다! 설사 인류 가운데에서는 고귀하더라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보기에 너는 여전히 패괴된 인류이다. 그 어떤 패괴된 인류와도 다르지 않고 차이가 없다. 인류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너를 앙망하고 추앙하고 금품을 갖다 바치든 소용이 없고, 하나님 눈에 비친 네 지위와 신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류를 판단하는 기준은 당연히 하나님이 인류를 판단하는 고유한 눈높이와 기준이기도 한데, 그것은 바로 진리로써 판단하는 것이다. 진리를 좋아하고 실행한다면 너는 고귀한 사람이지만,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네 늙은 육은 패괴된 인류에 불과하고, 한 푼의 가치도 없으며, 땅 위의 개미만도 못하다. 사람이 볼 수 없는 미생물을 제외하면 개미는 모든 생물 중에서 상대적으로 작다. 개미의 생활 규칙과 생존 법칙, 본능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정한 규칙을 따른다. 개미는 사계절의 기후, 온도에 따라 자신의 생활 패턴을 바꾸며, 결코 자발적으로 그런 규칙과 법칙을 바꾸지 않는다. 이와 달리 인류는 늘 현재 상황과 세상을 바꾸려 하고 항상 야심을 품으며 배신하고 반역한다. 개미는 비록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관도 없고 진리를 이해하는 기능도 없지만 최소한 하나님을 대적하지는 않는다. 이와 달리 인류는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나님을 공격하고 대적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기에 진리를 얻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인류는 가치가 없다. 이는 사실이 아니냐?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은 진리 원칙에 완전히 부합한다. 이런 문제를 교제함으로써 사람은 인류의 본질과 하나님이 사역으로 이루려는 성과에 대해 올바른 견해와 인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런 측면의 진리를 깨닫고 나면 어떤 부류의 사람에게든, 종교적 배경이 있든 없든, 사회적으로 신분이나 지위가 있든 사회적 지위가 낮든, 백인이든 유색 인종이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그렇고 그들과 어울리고 교제할 때도 그렇고, 별로 속박받는 일이 없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사람은 다른 인종을 늘 우러러보거나 그들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고, 어떻게 그들과 교제하거나 왕래해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 이런 진리를 깨닫는 것이 그들과 어울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이는 너희가 올바른 입장에서 올바른 관점으로 모든 인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게 바로 진리를 깨닫는 것의 장점이다. 진리를 깨달으면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올바르게 바뀌고 상대적으로 더 넓어져서 그다지 편협하지 않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리더 일꾼의 역할을 맡을 때 늘 자신감이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이 경력도 없고, 체험도 없고, 말재주도 없다고 생각하고, 대다수 사람의 내적 상태를 꿰뚫어 보지도 못하며,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을 보면 두렵고 긴장되어 감히 말도 하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오랜 종교인이 성경 지식을 좀 아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속으로 겁도 나고 제가 한없이 작게 느껴져요.” 진리를 그렇게나 많이 깨달았는데 무엇이 두려우냐? 이는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 아니냐?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그런 일이나 문제는 해결할 수 있고, 그런 일들에 더이상 속박되지 않는다.

오늘 교제한 이런 주제를 통해 너희는 어느 방면의 진리를 깨달았느냐?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고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는지, 사람의 어느 측면을 바꾸는지 명확히 알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명확히 알고 나니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의 중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더욱이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어떤 일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각 부류의 사람, 각국 사람, 각 민족 사람도 꿰뚫어 보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바로 바보이자 얼간이다. 어떤 사람은 안경 쓴 사람만 보면 교수나 지식인이라고 생각해서 눈치를 보며 감히 말도 못하고, 키가 크거나 잘생긴 사람을 보면 자신이 열등하다고 생각한다. 진리를 깨닫고 나면 사람은 이런 것들에 그다지 영향을 안 받지 않겠느냐? 한편으로는 자신을 옭아매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와 관점을 어느 정도 개선하며 인간관계에서도 식견을 좀 갖게 된다. 그러면 본분 이행에 유익이 되고, 특히 각급 리더 일꾼의 사역에 유익이 된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대상과 하나님 사역의 진실한 함의를 깨달은 뒤에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의 고유한 조건을 올바르게 대하는 것이겠느냐? 몇 가지 원칙이 있느냐? (제 생각에 사람은 자신의 성격과 자질 등의 조건을 올바르게 대하고 더이상 초자연적인 것이나 초인이 되는 것을 추구하지 않아야 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되 하지 못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고 인성도 점점 더 정상화됩니다.) 먼저, 사람이 우매하거나 어리석은 일을 하고 싶지 않다면 우선 자신의 조건을 이해해야 한다. 네 자질이 어떤지, 네게 어떤 특기가 있는지, 네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나이와 성별, 네가 파악한 지식, 나아가 식견과 경력에 따라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즉 네가 이행하는 본분과 종사하는 사역에서 어떤 강점이나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의 성격상 결함이나 장점이 무엇인지를 스스로가 명확히 알아야 한다. 자신의 조건과 장단점을 명확히 알고 난 뒤, 어떤 장점과 강점을 유지해야 하는지, 어떤 결점과 흠을 극복할 수 있고 어떤 것들은 결코 극복할 수 없는지 스스로가 명확히 알아야 한다.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스스로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맞춰 보며 묵상하고 인식해야 할 뿐 아니라 드러내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구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의 형제자매에게 물어보며 일깨워 주고 지적해 달라고 해도 된다. 그러면 자신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자신을 인식하는 일에서 좀 더 갈피를 잡고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남들과 대화할 때 쉽게 긴장하거나 어떤 일을 맞닥뜨릴 때 자신의 생각과 관점이 있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 많은 사람 앞에서 극도로 긴장하며 두서없이 말하고 입술까지 덜덜 떨리는 것 등이 있다. 심지어 말을 더듬는 사람도 있고, 이성이 있는 자리에서는 더욱 말실수를 하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도 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을 것입니다.) 최소한 단기간 내에는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너의 선천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만약 몇 달 동안 연습해도 여전히 긴장한다면, 그 긴장은 압박감으로 변할 것이다. 그 압박감은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와 네가 말을 하는 것, 사람을 만나는 것, 예배에 참석하는 것, 설교하는 것 등을 두려워하게 할 것이며, 이런 두려움은 너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도 좋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보고, 너도 그렇게 실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 예배에서 상태가 좋았고 기분도 즐거웠으며,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매우 컸다고 해 보자. 마침 팀 예배에 몇 사람밖에 없기에 몇 마디 교제하고자 시도했는데, 느낌이 괜찮았고 긴장하지도 않았다. 아무런 압박감도 없고 준비도 없는 상황에서 자유롭게 표현했는데, 매우 잘 말해서 모두가 감동받고 도움을 얻었다. 이는 성장한 것 아니겠느냐? 팀 예배처럼 사람이 얼마 없을 때 말하고 교제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점차 정상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고, 긴장감도 사라진다. 이렇게 연습하면 최고의 성과를 이룰 수 있다. 먼저 팀 예배처럼 사람이 적은 자리나 비공식적인 자리를 골라 연습해 보아라. 한담을 나누듯이 즉흥적으로 말하고 교제하면서 자신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것이다. 어떨 때는 1분 정도 말한 후에 긴장이 되면서 점점 자신감이 없어져 말수가 줄어들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말을 그만하고 서둘러 마무리한 후 멈추어라. 때로는 어느 정도 말했을 때 모두가 듣고 싶어 하며 무척 자유로운 분위기가 될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감과 압박감이 사라진다. 너의 그 문제는 극복되는 게 아니라, 오직 이런 상황 속에서만 조금씩 개선될 수 있다. 한 달 동안 연습했는데도 내적 상태가 별로 개선되지 않고, 심지어 마음에 압박감이 들어 점점 더 긴장되는 바람에 정상적인 사역과 삶, 본분 이행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더 이상 연습할 필요 없다.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만 있으면 된다. 본분을 잘 이행하는 데만 주력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니, 네 그 결함과 문제는 마음속에 두고 조용히 하나님에게 기도하라. 그리고 적당한 상황을 찾아 사람들과 대화하고 교제하기를 연습하면서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조리 있게 표현해 보아라. 그러면 네 결함과 문제는 점차 개선될 것이다. 어쩌면 1~2년 후, 나이가 들어 성숙해지고 주변 사람들과 더 친숙해지면, 그들의 시선이나 견해, 그리고 함께 있을 때 만들어지는 분위기가 더 이상 너에게 압박이나 결박, 통제로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네 문제점이 그들 사이에서 극복되고 해결될 수도 있다. 이는 이런 문제가 가장 심각한 사람의 경우로, 이런 환경에서 오랫동안 단련하고 연습해야만 극복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사람은 3~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도 점차 좋아져서 규모가 큰 자리에서만 긴장할 뿐, 보통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과 접촉하고 대화할 때 긴장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이 결함과 문제점을 단기간에 극복할 수 있다면 극복하고, 극복하기 힘들다면 그냥 신경 쓰지 마라. 그것과 힘겨루기를 하거나 자신에게 도전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극복하지 못한다고 해서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서도 안 된다. 네가 평생 극복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그것은 패괴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소 공포증을 갖고 긴장하며 두려워하는 것, 이런 모습은 패괴 성품이 아니다. 그것이 선천적인 것이든 후천적으로 어떤 환경 때문에 생겨난 것이든, 기껏해야 인성의 한 가지 결함이자 문제점일 뿐이다. 오랫동안, 혹은 평생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을 마음에 둘 필요는 없다. 그것에 속박되지 말고 그것 때문에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지도 마라. 그것은 패괴 성품이 아니니 바꾸려 하고 힘겨루기를 해 봤자 소용이 없다. 그것을 바꿀 수 없다면 받아들이고 존재하도록 내버려두며,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너는 그 결점, 문제점과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점과 문제점이 있어도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힘닿는 데까지 본분을 이행할 수만 있다면 여전히 구원받을 수 있다. 그것은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구원받는 데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성의 어떤 결점이나 문제점 때문에 늘 속박받고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거나 낙담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본분과 진리 추구를 포기하여 구원받을 기회를 놓쳐서도 안 될 것이다. 그것은 하등의 가치가 없으며, 그런 자는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를 때 중음까지만 낼 수 있고 아무리 훈련해도 고음은 내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러면 중저음역대에서 부르면서 중저음을 잘 부르면 된다. 만약 늘 도전하려 하면서 “저는 중음은 잘 부르니까 고음에도 도전할 거예요.”라고 한다면 설사 도전에 성공하더라도 별로 의미가 없고 진리를 얻었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기술을 하나 더 익힌 것이고 본분을 하나 더 이행할 수 있게 된 것뿐이다.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좀 늘어나고 얼굴을 좀 더 내비칠 수 있게 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얼굴을 많이 내비치는 것이 진리를 많이 실행하는 것이냐? 이 두 가지가 관련이 있느냐? (없습니다.) 중음을 부를 수 있으면 중음이나 잘 불러라. 잘 부르지도 못하면서 기어코 힘주어 고음을 부르면 결국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고 힘들어서 병을 얻으며 하나님에게 기억되지도 못한다. 고음을 부를 수 있든 중음을 부를 수 있든 노래를 잘 부르고 충성과 최선을 다해 본분을 이행한다면, 건성으로 임하거나 꾀부리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큰소리치지 않는다면, 기교나 감정, 음색이나 음표 등의 측면에서 기준에 맞춰 아름답고 마음에 와닿게 부를 수 있다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평온한 마음을 가지게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노래를 들을 때 도움을 얻도록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합격한 본분 이행이다. 늘 극한에 도전하며 항상 자아를 극복하고 초월하려 한다면 그것은 사탄의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 본연의 사역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잘 한 다음 여유가 있을 때 본분 이행에 유용한 것을 좀 배워도 되긴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는다. 중음을 잘 불러서 여가 시간에 고음을 훈련해 얼마 뒤 진전을 좀 보이고 이삼 년간 각고의 노력을 거쳐 고음도 잘 부르게 된다면, 중음뿐만 아니라 고음도 부를 수 있어서 두 방면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면, 어느 방면의 본분이든 진리 원칙대로 이행할 수 있고 심혈을 기울여 노래할 수 있다면, 건성으로 임하거나 꾀부리지 않고 큰소리치지도 않는다면 물론 더욱 좋다. 그것은 선행이고 하나님에게 기억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도 못하면서 늘 ‘하나님께서는 내게 높은 기대를 품고 계신데 내가 중음만 부르면 꾀부리는 거 아니겠어? 하나님께서는 만족하지 못하실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네 상상일 뿐이다. 너는 하나님을 넘겨짚는 것이고,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생각을 헤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네게 그렇게 요구한 적 없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네가 고유한 자질과 능력 범위 내에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한 원칙대로 잘했다면 하나님은 진작에 네게 백 점을 매겼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제대로 하지 않고 원칙대로 하지도 않으며 늘 꾀나 부리고 큰소리나 치면서 노래에 관한 여러 기교도 연습하지 않은 채 극한에 도전하려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교만하며 무지한 모습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저 자는 중음을 부를 줄 아는데 고음까지 부르려 하는구나. 잘 부르지는 못해도 그 마음이 참 갸륵하다. 마음만 있으면 그만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그렇게 보지 않을 테니 스스로가 대단히 괜찮다고 착각하지 마라. 하나님은 네가 착실하게 처신하는지, 네가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사람인지를 보고, 네가 본분을 이행할 때 하나님이 네게 준 원래의 조건 아래서 마음과 힘을 다하는지,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서 하나님이 바라는 성과에 이르는지를 본다. 네가 만약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은 너에게 백 점을 매긴다. 만약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지 않았다면 네가 노력하고 공을 들였다 해도 네가 한 것은 전부 스스로를 뽐내고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네 본분 이행은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도 아니고, 진리 원칙대로 하는 것도 아니라면 네 모습과 표출, 네 행위는 하나님에게 혐오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왜 하나님이 혐오하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본연의 일을 하지 않고, 본분 이행에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지 않고, 바른길을 가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네게 준 자질, 은사, 재주는 이미 충분하다. 네가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너는 본분에 충성심이 없고, 그러면서도 늘 분수를 모르고, 언제나 큰소리만 치면서 자신을 드러내려 하고, 결국 본분은 엉터리로 이행한다. 하나님이 네게 준 자질, 은사, 재주를 발휘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지 않고,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다. 비록 너는 신나게 바쁠지라도, 하나님은 너를 날뛰는 광대라고, 분수에 맞게 본연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너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네 계획과 목적이 무엇이든, 궁극적으로 네가 하나님이 준 원래의 자질, 은사, 재주, 능력 등의 조건을 바탕으로 마음, 뜻, 힘을 다하지 않고, 하나님이 요구한 원칙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네가 한 일을 기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본분을 이행하는 게 아니라 악을 행하는 것이다.

자신의 선천적인 조건을 어떻게 올바르게 대해야 하는지, 자신의 조건과 장단점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실행 원칙은 이해가 되지 않느냐? (이해가 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무엇이냐? 우선 하나님이 네게 준 고유한 기존의 은사와 능력, 특기, 나아가 네가 닿을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업무 기술을 남김없이 전부 발휘해야 한다. 만약 그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고, 네 스스로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낀다면 네 자질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또 어떤 업무 기술을 향상시키고 개발할 수 있을지 살펴보고 자신의 자질에 따라 닿을 수 있는 것은 더 배우고 향상시켜도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으려면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우선 네 선천적인 조건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네게 무엇을 주었는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어떻게 그것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하게 하고 그것을 극도로 발휘할지 파악하여 그것이 장애물이 아니라 네가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기본 조건이 되도록 해야 한다. 자신의 강점은 파악하여 발휘해야 하고, 자신의 흠과 결점은 파악한 다음 단시간 내에 고칠 수 있으면 고쳐야 한다. 고치기가 쉽지 않더라도 그것이 본분 이행 과정의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에 휘둘리고 영향받거나 결박되고 손발이 묶이지 않도록 해라. 예를 들면, 선천적으로 몸이 건강하지 않고 체질이 좋지 않아서 늘 그런 점을 극복하고 싶고 정상인처럼 먹고 마시고 밤도 새우고 싶다고 해도 하나님이 네게 그런 밑천을 주지 않았다면 너는 자신의 조건대로 하루의 일상에 대처해야 한다. 하나님이 요구한 원칙대로 행동해야지 자신에게 도전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흠과 결함이 하나님을 따라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 위의 걸림돌이나 장애물, 혹은 자신을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게 하는 도화선이 되게 해서는 안 되고, 자신이 특정한 측면에서 결함과 흠이 있고 부족하다고 해서 진리 추구나 본분 이행을 포기하거나 남을 질투하고 증오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자신의 결함과 흠을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만약 그것을 고치지 못한다면 그것이 존재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그런 다음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 그것을 올바르게 대하고 그것에 속박되지 않을 수 있다. 왜 그렇게 해야겠느냐? 이는 정상 인성이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이성이다. 네 인성과 이성이 정상이라면 자신의 결함과 문제를 바르게 마주하며,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너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속박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 때문에 늘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에 속박되지 않고, 자신이 그저 평범한 패괴 인류 중 한 명임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다. 너 자신에게 문제와 결함이 있고 아무것도 자랑할 게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높여 주어 본분을 이행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과 생명을 사람 내면에 만들어 사람이 구원에 이르고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이는 완전히 하나님의 높여 줌이다. 누구나 문제와 결함이 있다. 그 문제와 결함이 자신과 공존하도록 허용해야지, 그것을 회피하거나 감춰서는 안 되며, 그것 때문에 늘 마음이 억눌리거나 심지어 자기는 남보다 못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너는 결코 남보다 못하지 않다. 본분 이행에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고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며 진실한 마음을 보인다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황금같이 귀한 존재일 것이다. 반면, 본분 이행에 대가를 치르지 않고 충성심도 보이지 않는다면, 설령 네가 타고난 조건이 남보다 좋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너는 귀하지 않으며, 모래만도 못한 존재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선천적인 외모든, 선천적인 자질이나 재주든, 혹은 인성의 특정한 방면이든 그것에 결함이나 부족이 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속박되어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과 순종, 진리 추구가 영향받아서는 안 된다. 물론 그것으로 인해 구원받는 큰일이 영향받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 네 결함과 부족을 올바르게 대하고 그것이 너와 공존하도록 해야 한다. 즉, 더이상 그것을 고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네가 마음, 뜻, 힘을 다하여 본분을 이행하는 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은 물론, 네가 원칙대로 본분을 이행하는 데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 데다가, 네가 하나님을 믿으며 일생 동안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추구 과정에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도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너도 늘 ‘이 흠을 표출해서는 안 돼. 남들에게 내 결함을 들켜서는 안 돼. 남들에게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고!’라며 자신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아주 피곤하게 살게 된다. 만약 너의 결함과 흠이 너와 공존하도록 허용한다면, 너는 그것이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이고, 설사 남이 네 결함을 보더라도 그것은 어쩌면 네게 이롭고 네가 교만하고 방자해지지 않게 너를 보호할 수도 있다. 물론 자신의 결함과 흠을 표출하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다들 자신의 강점이나 장점을 표출하지, 일부러 자신의 단점이나 결함을 표출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일부러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표출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겁이 많아서 사람이 많은 데서 말할 때 항상 긴장한다면 자진해서 이렇게 말해라. “저는 말할 때 쉽게 긴장해요. 그래도 다들 트집 잡지 말고 양해해 주세요.” 자진해서 결함과 흠을 표출하여 사람들이 양해하고 포용하며 너를 이해하도록 하면 남들이 너를 이해할수록 너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결함과 흠에 속박되지 않는다. 그러면 오히려 네 자신에게 이롭고 도움이 된다. 늘 자신의 결함과 흠을 감춘다면 그것은 네가 그것과 공존하려 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네가 그것이 너와 공존하도록 허용한다면 너는 드러내야 한다. 창피하다고 느끼거나 낙담하지도 말고, 남보다 못하다고 느끼거나 자신은 형편없고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마라. 진리를 추구하며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여 원칙대로 본분을 이행할 수만 있다면, 마음이 진실하고 하나님을 무성의하게 대하거나 속이지 않는다면 너는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만약 누가 “당신의 그 나약한 꼴을 좀 봐요. 고작 몇 마디 하면서도 그렇게 긴장하고 얼굴이 벌게지다니.”라고 하면 이렇게 말해라. “저는 자질이 떨어져서 말을 잘 못하지만 여러분이 격려해 준다면 용기 내어 연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이 형편없고 창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왕 그것이 네 결함이고 네 인성이 가진 한 측면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그것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으로 인한 그 어떤 영향도 받아서는 안 된다. 그 결함과 흠을 언제 고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이렇게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데만 신경 써라. 인성의 그런 결함과 흠은 부정적인 사물도, 패괴 성품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패괴 성품만 아니면 본분 이행이나 진리 추구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구원받는 데는 더더욱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물론 더욱 중요한 점은 너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마음이 놓이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남들이 무시할까 봐 여전히 걱정된다면 그건 네 자신이 가진 교만한 성품의 문제이니 교만한 성품을 해결해야 한다. 이게 바로 자신의 결함과 흠을 올바르게 대하는 실행 길이다. 이렇게 실행하면 내려놓기가 쉽고 속박을 받는 일도 없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본분 이행, 그리고 인성의 결함과 흠이라는 이 두 가지가 서로 영향을 끼치겠느냐? (하나님의 교제를 통해 이제 이해했습니다. 인성의 결함과 흠은 패괴 성품이 아니고, 사람의 정상적인 본분 이행에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진리 원칙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기만 하면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성의 결함과 부족은 극복할 수 있다면 극복하면 되고, 단기 내에 극복할 수 없다면 그것의 존재를 허용해야 하며 올바르게 그것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네 소양이 부족한데 본분을 이행할 때 소양과 지식이 필요하다면 이는 한 측면의 결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 고충을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한편으로는 자신의 소양 수준에 따라 자신에게 적합한 본분을 이행하면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그 본분이 자신에게 적합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 소양과 지식도 필요하다면 일부 소양을 갖춘 형제자매들과 협력하여 서로 장점을 배우고 단점을 보완하며 함께 그 본분을 잘 이행해도 됩니다.) 소양이 부족하면 진리로 보완할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를 갖추면 일을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양은 지식이라는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말하거나 글을 쓸 때 문법만 맞을 뿐 진리에 관한 문제는 명확히 말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한다. 따라서 소양은 중요하지 않다. 진리가 소양보다 중요하다. 물론,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지 않았는데 이행하는 본분이 소양이나 지식과 관련 있다면 본분을 능히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진리를 깨닫는다면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있고 진리 원칙에 따라 점검할 수 있다. 만약 소양이 부족하고 표현 능력이 떨어지는데 설교도 하고 진리도 교제하고 싶다면 소양을 갖춘 사람에게 대신 정리해 달라고 한 다음 네가 직접 교제하고 설교하면 쉽게 성과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너는 최소한 진리는 깨달아야 한다.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소양도 없다면 소양과 지식이라는 측면에 관한 본분은 이행할 수 없다. 그러면 네 소양의 수준에 적합한 본분을 이행하면 된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진리 추구는 어떤 각도에서 말하든 가장 중요하다. 인성 측면의 결점과 부족함은 피할 수 있지만 진리 추구의 길은 절대 피할 수 없다. 네 인성이 아무리 완벽하고 고상해도, 혹은 다른 사람보다 결점이 적고 특기가 많아도 그것이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진리 추구를 대체할 수도 없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여 깨달은 진리가 많으며 깨달은 진리가 매우 깊고 실제적이라면 인성 측면의 여러 결점과 문제를 보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네가 겁이 많고 성격이 내향적이며 말을 더듬는 데다가 소양 수준도 높지 않고 결함과 부족이 많더라도 실제적인 체험이 있다면, 비록 말은 더듬거리겠지만 진리를 명확히 교제할 수 있고 사람들은 듣고 나서 도움을 얻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소극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오해를 해소할 수 있다. 보아라. 말을 더듬더라도 문제는 해결할 수 있으니 그런 말들이 얼마나 중요하냐! 잘 모르는 사람은 네 말을 듣고 네게 무식쟁이라면서 말할 때 문법도 틀리고 가끔씩 별로 적절하지 않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속된 말이나 구어체를 쓴다며 소양이 뛰어난 사람이 조리 있게 말하는 것처럼 품위가 있지도 않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교제하는 말에는 진리 실제가 있어서 사람들의 고충을 해결해 줄 수 있다. 사람들이 네 말을 듣고 나면 모든 먹구름이 다 사라지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보아라. 진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설사 지식을 갖추고 말재주가 좋다고 해도 사람들은 네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당신이 하는 말은 전부 도리일 뿐 진리 실제는 하나도 없고 실제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해. 그러니 당신이 하는 말들은 다 빈말 아니겠어? 진리도 깨닫지 못하니 당신은 바리새인 아니야?’ 너는 수많은 도리를 이야기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다. 너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진심을 다해 간절하게 말하는데 당신들은 왜 못 알아듣는 거지?’ 너는 도리나 한 무더기 말했으니 소극적인 사람은 여전히 소극적이고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은 여전히 오해하며 본분 이행 과정에서 존재하는 고충은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니 네가 한 말은 모두 헛소리이다. 네 인성에 결함과 흠이 얼마나 많든 네가 하는 말에 진리 실제가 있다면 네가 교제하는 말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반면 도리만 이야기하고 실제적인 인식은 조금도 없다면 네가 아무리 많이 말해도 사람의 실제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든 네가 말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사람의 내적 상태에 맞지 않으며 사람의 고충을 해결할 수 없다면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와 사람의 개인적인 조건 중 어느 측면이 중요하냐? (진리가 중요합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인성에서든 선천적인 조건에서든 네가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에 속박되지 말고 진리를 추구해야 하며,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네가 가진 여러 결함을 보완해야 하고, 결점을 발견하면 서둘러 바로잡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진리 추구는 중시하지 않고 인성의 고충과 흠, 결함을 해결하는 것과 자신의 인성에 있는 문제를 바로잡는 것만 중시한다. 결국 몇 년간 공들여도 두드러진 성과를 얻지 못해 자신에게 실망하고, 자신은 인성이 너무 형편없으며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한다. 몹시 어리석지 않으냐?

어떤 사람은 겉보기에는 온화하고, 포용하고 양보할 줄 알며 말도 교양 있게 한다. 사역할 때 화끈하고 위엄 있으며 인성도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데다가 전형적인 리더의 풍모를 보인다. 그러나 아무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어느 측면의 문제이든 모두 도리로 해결하며 본질적인 사역은 전혀 할 줄 모르는 데다가 사역지침도 시행하지 못한다. 이런 자는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냐? 이런 자가 바로 전형적인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은 겉보기에는 옷차림이 멀끔하고 단정하며 점잖은 데다가 교양도 있고 규율을 잘 지키며 예의를 중시한다. 자애롭고 포용적이며 인내할 줄 아는 것은 물론 행동거지가 특히나 분수에 맞다. 남과 말할 때도 아주 상냥하며 몹시 겸손하고 자신을 낮춘다. 아무런 허점이나 빈틈, 결함도 찾아낼 수 없으며 인성 측면에서 보면 유독 믿음직하고 식견이 있는 데다가 고상하고 기품도 있어서 마치 중국인이 말하는 품위 넘치는 군자 같다. 인성이 완벽하고 겉보기에 흠잡을 데 없다 한들 그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겠느냐? 다양한 일을 처리하는 원칙을 깨달았겠느냐? 예배 때마다 몇 시간씩 말을 하니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머리를 조아리며 탄복하고 그가 언변이 뛰어나고 하는 말마다 조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듣자마자 그가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 도리이며 결코 사람의 문제에 맞추어 실제적인 고충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는 사람의 실제적인 고충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고 쓸데없이 도리만 이야기하고 거창한 얘기만 늘어놓으며, 말을 끝내고 나면 상당히 기가 살아서 자신이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 실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인성의 겉모습을 완벽하고 우아하게 위장해 고급스럽고 격조 있고 세련되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패괴 성품과 본질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패역, 오해와 경계와 의심, 특히 하나님에 대한 무리한 요구나 사치스러운 욕망이 생각 전체에 가득하며 진리는 전혀 추구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니 그의 인성이 ‘완벽’하다고 할 때 여기에서 ‘완벽’은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이다. 왜냐하면 완벽한 인성은 없기 때문이다. 그의 그 ‘완벽’은 순전히 포장하고 위장해 만들어 낸 것이다. 결함이 없는 인성은 존재하지 않고 포장해 낸 것이니 그를 믿어서는 안 된다. 겉모습이 완벽한 사람일수록 경계하고 관찰하고 분별해야 한다. 어떻게 분별하느냐? 많이 접촉하고 대화하며 그가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만약 그가 “저는 마귀요, 사탄이며 하나님을 대적해요. 저는 패괴되었다고요! 저는 죄인이자 원흉이니 하나님께서는 저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혐오하세요!”라고 하거나 “저는 눈이 멀었고 어리석은 데다가 가난하고 불쌍해요! 더럽고 불결하다고요!”라고 한다면 그가 하는 이런 말들 속에 실제적인 사실이 있겠느냐? 본질적인 인식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패괴 성품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저 빈말이나 이론만 늘어놓을 줄 안다. 그런 빈말이나 이론은 그가 마음속에서 느끼고 경험하고 체험한 인식이 아니다. 그는 듣기 좋은 말만 하는데, 전부 자신을 포장하는 말들뿐이다. 그에게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말해 보라고 하면, 자신의 패괴 성품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어떤 책망과 훈계를 겪었는지,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결했는지 말하라고 하면 그는 못 들은 것처럼 쓸데없는 말만 한 무더기 쏟아 낸다. “저는 자질이 떨어져요. 선천적으로 죄인이며 두엄더미 속의 미천한 사람이니 하나님에게 구원받을 자격이 없어요! 저는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어디에 가든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하고, 그저 지위를 갖는 것만 좋아해요.” 그에게 어떻게 그런 문제를 해결했냐고 물어도 그는 이렇게 동문서답한다. “사람은 지위를 가져서는 안 돼요. 지위를 가지면 끝장나죠. 지위를 추구하는 건 사치스러운 욕망이에요. 제일 하찮은 존재가 되어야 해요. 어디에 가든 가장 낮은 의자에 앉고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앉아야 해요.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야 하잖아요. 그게 바로 겸손이죠.” 본질적인 변화가 있겠느냐? 진실한 체험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가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느냐? (인식하지 못합니다.) 인식하지 못한다. 그럼 그가 진리나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만약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말과 행동, 패괴 표출을 대조해 볼 것이고, 패괴를 표출할 때 왜 특정한 상황에서 패괴를 표출할 수 있었는지, 당시에 어떻게 생각했고 무엇에 지배받았는지 자신을 반성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폭로를 통해 비춰 보고 그게 바로 패괴 성품이라는 것을, 알고 보니 자신은 자기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고결하고 순수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도 간사함과 사심, 야심과 욕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코 진리 실제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가 이런 체험을 해 봤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많은 말을 했지만 그가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도 없다. 그는 하나님을 믿은 지 오래되었지만 진리를 전혀 체험하지 못해서 도리만 이야기하고, 어떻게 자신을 포장하고 치장하고 자기 인성의 흠과 결함을 숨길지만 고민한다. 그는 영적인 척하는 표면적인 행위와 행동 방식, 표정, 기질, 태도로 자신을 치장하고, 패괴 성품은 필사적으로 확고하고 치밀하게 내면에 감춘다. 하나님이 폭로하는 사람의 패괴 성품이 가진 여러 측면의 문제나 여러 말씀을 그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유의하지 않으며 마음에 새기지도 않고, 그저 인성의 겉모습에만 공들인다. 그에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식에 대해,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 인류의 패괴 성품을 폭로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성품과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인식하고 체득하는지에 대해 말해 보라고 하면 그는 그런 현실적인 주제는 회피하고 영적인 이론만 한바탕 떠든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만유를 주재하세요. 하나님의 행사는 기묘하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칭송하고 찬미할 만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유일무이하시고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은 더할 수 없이 높죠!” 누가 “그럼 당신의 체험에 대해 한번 말해 보세요. 당신은 어떤 일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고결함을 보았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몹시 위대하시고 사람은 아주 보잘것없어요. 사람은 자격이 없다고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은 땅 위의 개미만도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높여 주시죠!” 인식이 있느냐? (없습니다.) 아무런 인식도 없다. 이런 자는 어떤 사람이냐? (외식하는 바리새인입니다.) 이런 자가 바로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다. 그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그가 보기에 모두 구호나 도리일 뿐이다. 그도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묵상 일기를 쓰며 예배에 참석해 하나님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이런 절차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빠짐없이 이행한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무엇을 받아들이겠느냐? 무엇을 얻겠느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패괴 성품이나 관념과 상상, 치우친 사상과 관점에 맞춰 대조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며 실행하는 과정에서 갈 수 있는 길을 얻으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가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은 도리를 무장하고 예배 시간에 강의를 하여 남들을 지도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매번 다른 내용을 이야기하며 오랜 시간 끊임없이 말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골라 교제하여 남들에게 우러름과 숭배를 받는다. 어떤 사람은 위장에 특히 능한데, 심지어 어느 정도까지 비열해질 수 있겠느냐? 그는 내가 했던 말을 듣고 유용하다고 생각하면 외워 놓았다가 예배 시간에 기회를 틈타 한 수 보여 주려고 한다. 특히 하나님을 막 믿기 시작한 무리에 있는 사람들은 설교를 많이 듣지 않았고 설사 하나님의 말씀을 좀 읽었더라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는 이런 허점을 노려 새신자들 사이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뽐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한다. ‘이 사람은 성령의 깨우침이 있어. 영적인 사람이야.’ 남들에게 우러름과 숭배를 받기 위해 이런 수단으로 자신을 뽐내는 것은 비열하지 않으냐? 이는 사람을 미혹하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평생에 걸쳐 진리 원칙과 하나님 말씀의 근거를 구해 자신의 패괴 성품이나 자신에게 있는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해결한다면 결국 너는 반드시 구원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반면, 평생 자신의 인성에 있는 흠과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공들이고 길을 찾는다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자신을 아무런 흠이나 결함도 없게 만들어 남다르고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심지어 어떤 사람처럼 “저는 순수한 사람, 고급스럽고 격조 있고 세련된 사람, 모든 정상 인성을 초월한 사람이 될 거예요.”라고 한다면 말하건대 너는 실패하고 말 것이다! 인성에 있는 어떤 흠과 결함을 해결하는 것은 구원받는 것과 무관하다. 왜냐하면 진리를 추구해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성에 있는 결함과 흠을 해결하더라도 기껏해야 표면적으로 인성의 흠이 보이지 않게 되어 겉보기에 완벽하고 고아해질 뿐이다. 인성에 있는 흠과 결함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설사 변한다 하더라도 더욱 큰 흠이자 결함인 패괴 성품은 여전히 내면에 숨겨져 있다! 자신을 포장할수록, 자신의 인성이 아무 결함 없이 완벽해지는 것을 추구할수록 패괴 성품은 더욱 깊이 뿌리내려 너를 얽매고 묶어서 네가 더욱 교만하고 간사하며 사악하고 강퍅해지도록 만들 것이다.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너는 진리와 진리 추구의 길에서 더욱 멀어져 결국 도태되는 결말을 맞이하고 끝장날 것이다. 하나님은 네가 겉보기에 완벽하고 순수한 사람 같다고 해서 특별히 너를 구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네가 아무 결함 없는 완벽한 인성을 추구할수록 하나님은 너를 혐오하고 네게 사역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늘 자신이 패괴 성품을 표출했다는 이유로 뉘우치고 괴로워한다. 뉘우치는 동시에 진리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생겨서 진리를 얻기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수 있게 되며,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읽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진리를 구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갈수록 진리를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고, 점차 여러 방면의 진리에 어느 정도 진입하여 수확을 얻으며 실제로 살아 내게 된다. 결국 다양한 방면의 사람과 일, 사물을 맞닥뜨렸을 때 상응하는 진리 원칙으로 실행하고 점검한다. 이렇게 몇 년간 체험한 뒤에는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 책망과 훈계를 통해, 스스로 진리를 추구해 치른 대가를 통해 내면에 점차 진리를 갖추어 생명으로 삼게 되고 구원받을 희망은 갈수록 커지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할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 비록 그의 인성에 있는 결함과 흠, 고유한 조건은 기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았지만 패괴 성품은 오히려 갈수록 줄어들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어 더욱더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되고 남들에게 도움이 되며 쓸모 있어진다. 이런 사람이 이런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반드시 구원받는 대상이 된다. 이런 자가 바로 하나님이 사역하여 구원하려는 대상이다. 주변 사람들을 한번 관찰해 보아라. 누가 겉모습이나 인성에 있는 결함과 흠, 약점에 한결같이 공들이고 전력을 다해 자신을 포장하고 위장하여 남들에게 우러름과 칭찬, 숭배를 받으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지위를 가지려 하는지 살펴보아라. 그런 부류가 바로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이 최종적으로 맞이하는 결과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바로 쥐새끼 같은 자들과 함께 멸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런 부류는 끝장나고 도태된다고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사람의 인성에 있는 결함과 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이 가진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회복시키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이 바꾸려는 것은 사람의 패괴 성품이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구원받도록 해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기도 한다. 그러니 정상 인성의 회복은 무엇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겠느냐? 사람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는 것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의 정상 인성이 점차 회복된다는 것은 사람의 양심에 감각이 생기고 이성이 정상화되며 정상 인성의 관점에서 옳은 일을 하고 옳은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고 충동적이거나 맹목적이거나 혈기에 휘둘려 말하고 행동하지 않으며 온전히 하나님 말씀의 원칙을 근거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 이성은 유독 정상화되고 인성은 유독 정직하고 선량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반으로 이런 것들을 이룰 수 있고 이런 수준을 회복할 수 있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이 변화하는 것,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는 것을 기반으로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패괴 성품을 바꾸지 않고 벗어 버리지 않는다면, 설사 네가 인성이 비교적 좋고 양심과 이성을 좀 갖추고 있더라도 진리를 생명으로 삼지 않는다면 네 양심과 이성은 주인이 될 수 없으며 너는 늘 패괴 성품에 영향받고 종용당하고 부추김당해 양심과 이성에 위배되는 일을 저지를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설사 어느 정도 정의감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은 일종의 바람과 의지일 뿐이며 얼마 안 되는 선량한 인성을 가진 것일 뿐이다. 그런데 내면에서는 패괴 성품이 생명이 되어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악을 행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남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만 이를 수 있다. 이 정도만 되어도 나쁘지 않다. 혹은 자신의 직접적인 이익이 영향받지 않는 상황에서만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고, 일단 직접적인 이익이 영향받으면 패괴 성품이 곧장 튀어나와 양심과 이성을 억누르고 자신의 이익과 권익을 지키도록 한다. 이런 경우 양심과 이성이 주인이 되게 하기 어렵다. 왜 그렇겠느냐? 진리를 생명으로 삼지 않고 사탄의 패괴 성품을 생명으로 삼기 때문에 손해 보지 않는 상황에서만 인성의 양심이나 이성을 약간 표출할 수 있을 뿐이고, 일단 손해 보거나 위협받으면 패괴 성품이 곧장 튀어나와 양심과 이성을 억누르고 양심과 이성에 위배되는 일을 저지르게 한다. 설사 도덕과 도의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해도, 심지어 어떤 일이든 다 저지를 수 있다. 물론 하는 행동마다 전부 진리에 위배된다고 할 수도 있다. 이는 필연적이다. 따라서 사람이 무엇을 살아 내는지는 그가 가진 인성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그의 내재적인 생명 본질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다면 그의 생명 안에는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도가 있으며, 그렇다면 그가 가진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은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영향을 발휘할 것이고 그는 결국 진리를 실행해 내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만약 한 사람의 생명 본질이 패괴 성품이라면 그의 양심과 이성은 단지 인성의 최저선을 넘지만 않을 뿐 최저 기준까지 떨어질 것이다. 그 최저선은 무엇이냐? ‘남이 나를 범하지 않는 한 나도 남을 범하지 않지만, 만약 남이 나를 범하면 나도 반드시 남을 범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 사람의 방법으로 그 사람을 상대한다.’ 등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가짜 군자가 되지는 않겠다.’ 이는 수많은 이방인이 처신할 때 지키는 최저선이다. 이방인으로서 이렇게 실행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이미 훌륭한 것이다. 너희는 이를 통해 무엇을 이해했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없고, 생명 본질은 변화하지 않는다. 생명 본질이 변화하지 않으면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은 본질적으로 회복될 수 없고, 그저 형식적으로 인성의 최저선을 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생명의 본질이 변화한다면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은 어느 정도 완전해지고 발전한다. 여기서 ‘완전’과 ‘발전’은 무슨 뜻이냐? 양심과 이성이 정상적으로 발휘되고, 단지 최저선을 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리 실행의 기준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이방인 가운데 소위 좋은 사람도 단지 양심과 이성을 좀 중시하고 눈에 띄는 악을 행하지 않으며 도의의 최저선을 넘지 않을 뿐인데, 이 정도만 되어도 훌륭하고 꽤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 사람은 단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시비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양한 시비와 여러 부류의 사람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럼 그의 근거는 무엇이냐? 진리 원칙이다. 그는 진리 원칙을 갖추고 있다. 이는 양심과 이성이라는 기준보다 훨씬 높은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를 생명으로 삼으며 다양한 일을 분별하는 근거가 일반적인 패괴된 인류의 기준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복잡한 사물을 직면했을 때 항상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한다. 진리 원칙을 파악한 뒤로 그의 생각은 더이상 흐리멍덩하지 않고 사고는 뚜렷해진다. 뚜렷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이성적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복잡한 일을 맞닥뜨려도 그는 실행하는 진리 원칙을 마음에 깊이 새긴다. 그는 진리를 제대로 명확히 파악하여 진작에 그의 생명으로 삼았다. 여러 복잡한 사람과 일, 사물을 직면할 때도 그는 최고의 준칙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진리 원칙이다. 이 진리 원칙은 사람이 여러 복잡한 사물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 문제를 조종하는 배후 세력이 누구인지 꿰뚫어 볼 수 있게 한다. 그는 분별해 낼 수 있다. 이게 바로 그의 이성이다. 이 이성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런 수준에 이르면 이성이 발전되고 완전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정상 인성을 원하지 멍청이를 원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는 정직하고 야무지지 못해서 늘 괴롭힘만 당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자질이 형편없고 능력이나 재주도 없어요.” 하나님은 이런 것들은 다 중요하지 않고 진리 원칙을 깨달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씀한다. 진리 원칙을 깨닫고 정직한 사람의 기준과 원칙대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설사 이방인에게 어리석다며 비웃음당해도 정말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왜 그렇겠느냐? 진리 원칙을 깨달으면 이성이 건전하고 완전해지며 보통 사람보다 나아지기 때문에 어떤 일을 맞닥뜨리든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않고 올바른 원칙과 입장, 목표를 근거로 삼아 그 일을 처리하며 머리는 깨어 있고 생각은 또렷하다. 원칙과 기준에 맞추어 행동하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행동한다. 그 일을 마치고 난 뒤에는 당시에 그 일을 꿰뚫어 보았든 꿰뚫어 보지 않았든 시간이 흐르면 이해하고 수긍할 것이며 그 일을 하여 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이런 성과를 이루는 근원은 무엇이냐? 진리를 생명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성이 어떤 사람이든, 어떤 일이든 정확하게 판단하고 규정하고 결론짓도록 하고, 정확한 실행 원칙을 가지는 것은 물론 사람을 돕고 지도하는 정확한 원칙을 가지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성이 발전되고 완전해진 것 아니냐? 정상 인성이 이런 이성을 가지는 것은 무엇에서 비롯되겠느냐? (진리에서 비롯됩니다.)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는 인류이다. 어리석고 정직하고 야무지지 못해서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남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보려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능력이 뛰어나서 유독 눈치를 잘 살피고 흐름을 읽을 줄 알며 임기응변을 잘한다고 해도 소용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이 건전한 것은 아니다. 오직 진리를 받아들이고 깨달으며 여러 진리를 다 파악하고 실행해야만, 경험과 체험을 얻고 진리가 생명이 되어야만 비로소 다양한 일에 대해 정확히 분별하고 판단하고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예전에 양심이라는 측면을 다루었다. 그때 양심이 무슨 뜻이라고 했었느냐? 정상 인성의 정의감과 선량함이라고 했다. 사람은 반드시 정직하고 선량해야만 비로소 양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상 인성의 정직함과 선량함은 하나님을 믿고 난 뒤에는 어떻게 해야 비로소 완전해지고 발전하겠느냐? 이는 반드시 진리를 깨닫는 것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진리를 깨닫고 나면 사람이 처신하고 행동하는 준칙은 긍정적인 목표가 된다. 이는 그 자신과 모든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과 가치, 의미를 가진다. 진리를 깨달은 뒤 그는 어떤 사물을 바라보고 처리하든 하나님이 지도하는 진리 원칙에 기대며, 남들의 눈에 그 사람은 상당히 정직해 보인다. 정직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바르다는 뜻이다. 즉,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혈기나 감정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사적인 이익이나 인간관계, 개인의 의도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가장 올바르고 정당하며 가장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추앙받고 우러름받는 목표를 향해 실행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좋다고 여기고 칭찬하는 목표를 향해 실행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는 일반적인 패괴된 인류가 바라보는 정직함보다 수준이 높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정직함은 무슨 뜻이냐? 진리 원칙에 완전히 부합하고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며 양심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문제를 해결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원칙을 갖추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의 양심은 상당히 완벽하지 않겠느냐? 완전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람, 진정한 피조물은 이런 양심을 갖춰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의미의 정직함을 갖춰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람은 진리에 부합하는 이런 의미의 정직함을 갖춰야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는다거나 광명정대하다거나 ‘사내대장부는 떳떳해야 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 것들은 혈기일 뿐 실제 내용은 없고, 순전히 사람이 꾸며낸 것이다. 정직함은 진리를 근거로 하고 실제로 살아 내는 것이다. 즉, 정상 인성은 진리를 근원이자 출발점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다양한 일을 대하고 처리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정직한 것이다. 그렇다면 선량함은 더욱 말할 것도 없이 최소한 양심과 이성의 기준을 뛰어넘는다. 선량함 안에는 꾸밈이 없고 흉악함은 더더욱 없다. 완전히 사람에게 이롭고 도움되며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방식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며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목표와 준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이는 이 세상에서, 온 우주에서 가장 선량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 사람은 누구보다 마음씨가 착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기준을 완전히 충족한다. 그가 이런 인성을 갖추었다면 그를 정직하다고 해도 적절하고 선량하다고 해도 적절하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개인의 사욕도, 혈기나 감정도, 야심이나 욕망도 없으며 사탄이 말하는 도덕경도 섞이지 않은 데다가 도덕과 인성에 대한 평가 기준에 그 어떤 사탄의 철학이나 사상과 관점도 섞여 있지 않아 완전히 진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해 보거라. 이런 양심과 이성을 갖춘 인성은 이미 완전한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진리를 갖추었기 때문에, 그가 살아 내는 생명의 본질은 진리이기 때문에 이런 생명 본질을 갖춘 인성은 완벽하다. 만약 ‘완벽하다’는 말이 듣기 싫다면 ‘완전하다’라고 말해도 된다. 최소한 하나님이 보기에 그는 완전하며 하나님이 사랑하는 대상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있는 얼마 안 되는 양심과 이성, 수치심을 빌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사람 내면에서 행사한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가 사람 내면에서 행사될 때 양심과 이성은 약화되거나 은폐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정상화되고 완전해진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인류를 원한다. 우리는 완벽하다고 하지 않고 완전하다고 할 것이다. 왜 완벽하다고 하지 않겠느냐? 완벽하다고 하면 일부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완벽한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요?” 따라서 나는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이 단어를 피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의 눈에 완전해 보인다면 피조된 인류들 사이에서는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완벽함은 사람의 상상 속 완벽함이 아니라 아름답고 선한 사물이고 정의로운 힘이며 긍정적인 사물로서 사람들이 칭찬하고 동경하고 사랑하고 존중하고 아낄 만한 것이다. 따라서 양심을 단순히 인성의 최저선을 넘지 않게 처신하는 수준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예민하고 지각 있게 만들고 자신의 이성이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게 하려면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다. 그 길은 인성의 여러 흠과 결함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도하는 여러 진리에 공들이고 하나님이 여러 사람, 일, 사물에서 요구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그런 사람, 일,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고 처리해야 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여러 방면의 일에서 하나님은 다 요구하는 원칙과 기준이 있다. 네 임무는 무엇이냐? 그런 기준에 맞추어 그런 방향과 목표를 향해 실행하는 것이다. 우선 진리 실행의 기준이 무엇인지 구하고 이해한 다음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대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 동시에 자신의 관념과 상상 속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여러 사상과 관점, 규율과 관례 등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이 조금씩 네 실행 원칙이 되게 해야 한다. 내려놓기를 배우는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내려놓기의 목적은 너를 속이 빈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네가 내용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내용이란 무엇이냐? 하나님이 각 방면의 일에 대해 요구하는 원칙이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이 여러 방면의 실행 원칙을 공허한 이론으로 만들어 그저 입으로만 떠들 뿐 실행하지는 않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런 진리 원칙을 착실하게 생명 속의 일부분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 생활 속에 적용할 수 있길 바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본분 이행이라는 일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착실하고 성실하게 처신하는 것이다. 즉, 본분을 착실히 이행해야지 건성으로 대충 임하고 얼렁뚱땅 해치우며 형식만 차리거나 남들에게 보여 주려 하고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물론 더욱 중요한 점은 바로 진리 원칙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하지 않을 수 없다면 하는 횟수를 줄이는 것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사욕과 기호를 배반하며 점차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러면 쉽게 실행해 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구원받는 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폭로하는 여러 패괴 성품을 해결하고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물론 내려놓기는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다. 최종적인 목적은 내려놓는 전제하에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은 기분을 전환하거나 존엄 있게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최종 목표이다. 왜냐하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야만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의 패괴 성품이다. 소양이 부족하고 나이가 많거나 말주변이 없고 표현 능력이 떨어지는 것 등은 구원받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아니다. 본분을 이행할 때 업무 능력이 떨어지거나 이해력이 형편없는 것도 구원받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구원받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이냐? 패괴 성품이다. 물론 하나님 말씀이 폭로하는 각 부류의 내적 상태와 문제를 사람이 해결하고 내려놓기란 쉽지 않다. 이는 사람이 내려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도, 사람의 사상과 관점이 진부하기 때문도 아니다. 당연히 사람이 가진 인성 방면의 결함과 흠 때문은 더더욱 아니고, 사람이 무감각하고 반응이 느리기 때문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 때문이다. 예를 들면, 네가 교회 리더인데 실수를 저질러 책망과 훈계를 받았다면 받아들이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하며, 회개하고 잘못된 행동 방식을 바로잡아 진리 원칙대로 행동해야 한다. 이는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너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렇게 고민한다. ‘이렇게 책망하고 훈계하는 건 내가 못마땅해서 나를 교체하려는 게 아닐까?’ 속으로 원망하고 오해하며 심지어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기까지 한다. ‘제가 못마땅해서 저를 교체하고 도태시키려는 것이라면, 좋아요. 분명히 따져 보자고요. 저는 열여덟 살 때부터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어요. 지난 세월 계속 리더 역할을 하며 가족과 생계를 버렸고 결혼과 가정도 포기했어요. 이런 것들은 다 어떻게 계산하실 거죠?’ 너는 계산할수록 기가 산다. 이게 단지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냐? 아니다. 너는 왜 그런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여기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책망과 훈계를 받았을 때 너는 억울해서 속으로 원망하고 불복하며 이치를 따지고 변명도 한다. 심지어 남들에게 네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요구한다. 네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과 근본적인 원인은 오직 하나, 네게 해결되지 않은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제가 선천적으로 자질과 능력이 부족해서 사역을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자질이 떨어져서 사역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고 진리도 깨닫지 못해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게 단지 자질이 떨어지기 때문이겠느냐? 그건 한 가지 측면에 불과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양심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양심에 문제가 있는 것은 패괴 성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저질러 책망과 훈계를 받는다면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자신이 사역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네가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은 다 문제가 되지 않고 너는 올바르게 대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은 그런 일을 맞닥뜨리면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이치를 따지고 원망하며 소극적인 상태에 빠진다. 심지어 혈기를 가지고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제가 자질이 떨어지고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 자질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것 아닌가요? 그러면서 사역을 못한다고 저를 탓하시다니요! 제가 못마땅하면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책망하는 말씀이 더 엄하기라도 하면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복받을 희망이 없지 않을까? 이번 생에서도 지위를 못 지켰는데 다음 생에서도 희망이 없겠네.’ 그는 진리를 구하려는 뜻이 있느냐? 속으로 순종할 수 있느냐? 순종하기 쉽지 않다. 이 모든 모습은 결국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자질이 떨어져서 사역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인성의 자연적인 흠과 결함일 뿐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설사 자연적인 흠과 결함이 아주 커서 네가 사역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결코 네게 반감을 품거나 너를 혐오하지 않는다. 그러나 네가 사역을 능히 감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원망하며 반항한다면, 결국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고 사역을 내팽개친다면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패괴 성품이니 너는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고 나면 너는 자신의 자질과 인성의 조건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사역에서 쓸모 있어진다. 그러나 만약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고 진리대로 실행하지 못하며 책망과 훈계, 그리고 너에 대한 폭로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너는 자질이 아무리 좋고 인성 방면의 조건이 아무리 뛰어나도 쓸모가 없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말해 보거라. 방금 교제한 말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을 믿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는 것이고, 중점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도 패괴 성품이지 표면적인 인성의 결함이나 결핍이 아닙니다. 저희는 어떤 환경을 맞닥뜨리면 늘 외부의 일에서만 맴돌고 본질적인 문제는 결코 해결하지 못하며 책망과 훈계,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에 순종하지도 못합니다.) 네 패괴 성품이 해결된다면 너는 맞닥뜨린 일에서 진리 원칙을 파악할 수 있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방법도 알게 된다. 그러면 너는 본분 이행에서 쓸모 있어진다. 자질이 뛰어나든 떨어지든, 재주가 얼마나 많든 패괴 성품이 해결되지 못하면 어느 자리에 놓아도 너는 쓸모가 없다. 반대로 자질과 능력이 제한적이더라도 여러 진리 원칙과 사역 범위 내에서 깨달아야 하고 파악해야 하는 진리 원칙을 깨달았으며 패괴 성품이 해결됐다면 너는 쓸모 있는 사람이다. 알겠느냐? 이런 말들은 아마 한동안 곱씹어 봐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대다수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여전히 은사에 기대고 규례를 지키면서 죄를 범하지 않고 악을 행하지만 않으면 본분을 잘 이행한 것으로 생각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일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다수가 단지 행동 방식과 행위에서만 맴돌고 얽매이지만 진리를 구해 원칙에 따라 일 처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으로 만족하며 가급적 방해하지 않고, 교란하지 않고, 파괴하지만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대다수가 여전히 책망과 훈계를 받거나 폭로를 당하지 않았고 형벌과 심판을 겪지도 않았으며, 호된 시련이라는 단계는 더더욱 겪지 않았기에 그들의 패괴 성품이 아직도 변화되기 시작하지 않았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 아니지만 사실이다. 내가 예를 들면 너희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볼 때 지금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하게 따르는 자들로, 지위가 없다. 지위와 권력이 있는 상태에서 사역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기에 대다수가 실행하는 기본 원칙은 바로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다. 어쨌든 리더 역시 상부의 사역지침에 따라 교제하는 것이므로 리더가 시키는 일을 하고, 리더가 시키는 방법대로 하면 된다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필요도 없고, 진리에 부합하는지 따져 볼 필요도 없이 그저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 원칙이 생명이 된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 너에게 진리가 생명이 되었는지를 증명할 수 있느냐? 바로 네가 리더로 선출되어 교회 사역을 수행할 때이며, 이때가 사람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이다. 네가 일 처리에 원칙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네가 드러내는 패괴 성품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면, 네게 진리 실제가 있는지 없는지, 리더 일꾼을 하기에 적합한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만약 너에게서 패괴 성품이 표출되면 너는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솔직하게 털어놓고 진리를 교제해야 하느냐, 아니면 감추고 위장해야 하느냐? 이때도 사람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이다. 교회에서 대부분은 진리 원칙을 근거로 일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사람의 기호에 따라 일을 바라보고 평가한다. 대다수가 이렇게 생각한다. ‘본분 이행은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되고, 사역이 이렇게 계속 앞으로 진행되기만 하면 돼. 만약 큰 실수를 저질러서 격리되어 반성해야 하거나 B조로 분류되면 내가 재수가 없는 거지.’ 이런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네가 비록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말을 잘 듣고 순종하며 시키는 대로 한다 해도 그것이 너에게 진리가 생명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며, 네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아니다. 네가 리더로 선출되어 리더의 자리에 있게 되면 너는 드러난다. 왜 그런 것이냐? 네게 지위가 생기면 너는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모든 일을 도맡아 할 수 있고,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독립 왕국을 세울 수 있다. 혈기와 패괴 성품에 따라 행동할 수 있고, 자신의 욕망과 야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그러니 네가 아직 쓰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99%에 달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와 상황이 이렇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대다수가 오랫동안 본분을 이행하면서 겉으로 볼 때는 비교적 말도 잘 듣고 착실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없음을 뜻하느냐? (아닙니다.) 행위상으로도 방탕하지 않고 겉모습도 착실해서 성도의 품위가 조금 있어 보이지만 사람의 패괴 성품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네가 자발적으로 진리를 구해서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역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리더에게서든 상부로부터든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너는 기껏해야 이렇게 생각할 뿐이다. ‘좋아, 고치라면 고쳐야지. 좀 더 고생하고 시간을 들여서 얼른 다시 하면 되잖아.’ 그저 이런 태도와 마음가짐이다. 이것은 진리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참된 순종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런 마음가짐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때 일종의 긍정적인 지향점을 갖게 되는데,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고자 한다. 이런 소망은 그 사람의 일상생활에서의 마음가짐, 본분을 이행할 때의 마음가짐을 형성한다. 사람의 말로 표현하자면 ‘말썽 일으키지 말고 잘해 보자’는 것이다. ‘잘해 보자’는 말이 무슨 뜻이냐? 그것이 진리 원칙이냐? 그것은 단지 말을 잘 듣고, 규칙을 지키고, 말썽 피우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요구일 뿐 진리 원칙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리 원칙은 무엇이냐? 너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너에게 패괴 성품이 드러나고 사욕과 혈기가 나타날 때, 패괴 성품으로 인해 어떤 내적 상태가 생길 때 자발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대조해 보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 도움과 붙들어 줌, 심지어 하나님 말씀의 준엄한 심판과 형벌 아래 너는 조금씩 하나님 말씀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하나님 말씀을 점점 많이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을 점차 인정하고 그 말씀에 아멘 해야 한다. 그런 후 하나님 말씀을 내면에 받아들이고,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내려놓고, 더 이상 사람에게서 물려받은 것을 고수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네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을 처리하고,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네 관점과 입장, 견해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지금 이렇게 자발적으로 실행하고 있느냐? 내가 볼 때는 99%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이 쓴 체험 간증문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겪고 행동 방식에서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속으로 뿌듯해하면서 자신에게 진리 실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네가 간증문을 쓰긴 했지만 사실은 본인을 치켜세우고 증거하거나 본인을 내세우는 것이다. ‘보세요, 저는 간증이 있잖아요. 저는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고, 안 좋은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본분을 지켰다고요!’ 또 어떤 사람들은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본인을 반성하고 인식하는데, 자기가 건성으로 임해서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지 못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회개하고자 한다. 비록 한동안은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며 건성으로 임하지 않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패괴 성품이 달라졌느냐? 그렇지 않다. 뒤에서는 여전히 교만하고, 건방을 떨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리하는 입장과 관점, 견해가 전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그러니 네 패괴 성품은 지금까지도 변화되기 시작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변화는 무엇이냐? 단지 행위가 달라지고 생활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아마 사람을 대하는 말투와 어조, 스타일에도 조금은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또 네 믿음도 강해졌는데,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번 책망과 훈계를 겪고 난 뒤 진리를 구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진리도 많이 깨닫고, 하나님을 따르려는 의지도 전보다 확고해졌다. 이런 면에서 모두 변화가 생겼다. 이런 변화로 인해 사람은 구원받는 일에 대해 더욱 믿음을 갖게 되고, 진리를 추구하려는 마음도 더욱 강해지고,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 대해서도 더욱 큰 희망과 낙관을 품게 된다. 그 어떤 환난과 시련이 닥쳐도 소극적이 되어 믿음을 포기하고 물러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것은 그저 겉으로 살아 내는 정상 인성의 모습에 변화가 생긴 것일 뿐이다. 비교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이런 사상 관점이 점차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 이는 사람의 마음이 깨어나고 소생하고 있다는 징후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비교적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변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비교적 동경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비교적 믿음을 가지고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행하려는 가장 중요한 사역인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이런 조건을 기반으로 많은 사람들이 본분을 이행할 때 예전보다 착실하고, 예전보다 고분고분하고 말을 잘 듣고, 본분 이행의 효율도 좀 더 높아졌는데 특히 기술을 요구하는 사역의 진행이 전보다 상대적으로 빨라졌다. 2~3일 걸리는 일을 7~8일이 되어도 해내지 못하던 전처럼 그렇게 지지부진하지 않아서 지금은 3일이면 성과를 낸다. 물론 이것도 좋은 소식이다. 그렇다면 나쁜 소식은 무엇이냐? 그것은 너희가 드러내고 나타내는 것이 그저 행위상의 변화, 생각과 의식 형태상의 변화에 불과하고, 잠재의식에서 비교적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것이 깨어나는 징후일 뿐, 이런 징후가 너희의 패괴 성품이 변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비록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지만 패괴된 인류가 구원받으려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기도 하다. 사람은 이토록 가련하고 곤궁하며, 이토록 어리다. 생명 진입과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는 속도도 이렇게나 느리다. 속도가 느린 원인은 결국 인류에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관이 없어서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 하나님에게서 오는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이토록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지 10여 년, 20년, 30년이 된 지금에서야 자신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지만 단지 표면적인 행위가 조금 변화하고 마음이 조금 되살아났을 뿐 패괴 성품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가 조금 변화한 것을 보고는 생명 성품이 변화했다고 생각하며 남에게 과시하기도 한다. “보세요. 제 생명 성품이 변화하지 않았나요?” 사실 단지 행위만 변화했을 뿐 성품이 변화한 실제 모습은 없으며 정상 인성을 살아 내지도 않고 있다. 그렇다면 성품이 변화했는지 여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관상을 보는 것이 아니니 겉모습을 봐서는 안 되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듣는 것으로도 안 된다. 자신의 의지와 바람을 설명하는 것을 들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의지와 바람은 가장 공허한 것이다. 그럼 무엇을 봐야겠느냐? 어느 누구의 독촉이나 감시, 관리도 없으며 심지어 아무도 붙들어 주거나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모든 일을 바라보고 처리하는 방법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삼아 모든 행동을 구속하는지를 봐야 한다. 만약 이런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면 좀 더 단순하게 이야기해 보자. 하나님의 말씀을 원칙으로 삼아 행동하고 말하려는 의식이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이런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면 안타깝게도 너는 진리를 생명으로 삼지 않은 것으로, 패괴 성품이 여전히 네 생명이고 여전히 언제 어디서든 너를 통제하고 네 의식, 네 사상과 관점을 지배할 수 있다. 너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감정과 기분, 염원과 판단, 관점과 기호에 따라 어떤 사람, 일, 사물을 대하고 처리할 수 있기에 여전히 위험하다. 너는 독립적으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못하고 독립적으로 생활하지도 못하여 늘 남에게 의지해야 하고 남이 붙들어 주지 않으면 넘어진다. 이게 바로 분량이 몹시 작은 것이고, 네가 진리를 얻어 생명으로 삼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진리를 얻어 생명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나쁜 짓이나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너를 구속하는 원칙이 겨우 한두 가지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네 이성이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아무도 너를 부추기거나 종용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너는 절대 일부러 하나님을 모독하고 욕하거나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일부러 하지 않는다는 것이 네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너는 자발적으로 하지는 않더라도 수동적으로 할 수는 있다. 여기서 수동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패괴 성품이 언제든 튀어나와 네가 어떤 말이나 어떤 행동을 하도록 지배할 수 있고, 언제든 네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패괴 성품으로 일과 사람을 처리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네가 실수를 하나 저질렀는데 그 일을 상부나 리더, 혹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알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어쨌든 너는 꿍꿍이를 품은 채 숨기고 말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이는 패괴 성품이 주인이 된 것이냐, 진리가 주인이 된 것이냐? 두말할 나위 없이 패괴 성품이 주인이 된 것이다. 패괴 성품이 숨기고 말하지 않도록 너를 지배하여 너는 뚫고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뚫고 나가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너도 깨달은 진리를 실행하고는 싶지만 실행해 낼 힘이 없고 결코 네 패괴 성품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너는 아주 골치 아파진다. 진리를 행하지 못하게 된다. 네가 숨기고 속이려 하면 너는 반드시 숨기고 속이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 특히 상부에 숨기고 상부를 속이며, 좋은 일은 알리고 나쁜 일은 알리지 않는 데다가 심지어 윗사람을 기만하고 아랫사람을 속이기도 한다. 너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진리를 몹시 사랑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진리를 열심히 기록하고 묵상하고 정리해서 현실 생활에서 실행하죠.”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염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진리를 실행해 낸다는 뜻은 아니다. 왜 그렇겠느냐? 네 내면에 있는 수많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과 관점이 이미 네 마음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패괴 성품이 네 생명이 되고 주인이 되어 네 사상과 행위를 지배한다. 그러니 네가 진리를 실행하려 해도 소용없고 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따라서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으면 설사 네가 본분을 이행하고 있더라도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없다. 자발적이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거나 대적하거나 모독하지 않을 수만 있어도 훌륭하다. 그러나 패괴 성품이 네 마음의 주인이 되어 너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한다. 너는 아마 수동적이거나 긴박한 상황에서만 상부를 기만하고 하나님을 속이는 짓을 저지른다고, 긴박한 상황에서만 사람을 억누르거나 혈기를 드러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게 한때 마음이 조급해서 그런 것이겠느냐? 아니다. 그것은 뿌리깊은 패괴 성품이 주인이 되어 초래된 결과이다. 그것은 필연적이다. 왜 필연적이겠느냐? 왜냐하면 네가 깨달은 진리는 네게 단지 하나의 염원이나 신념에 불과할 뿐 아직 네 생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지식을 갖추었든 갖추지 않았든, 자질이 뛰어나든 떨어지든 최소한 진리는 네 생명이 되지 않았다. 즉, 진리가 네 내면의 주인이 되지 않고 사탄의 성품과 사탄의 철학이 주인이 되었다. 사탄 성품이 너를 지배하면 너는 사탄 성품에 기대 살아가고 여전히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아간다. 너는 손해를 보거나 체면이 깎이지 않는 상황, 네 지위나 명예, 이익과 관련 없는 상황에서는 진리를 좀 실행하려고 하지만 일단 네 명예와 이익, 지위, 네 종착지와 관련 있을 때는 패괴 성품이 단단히, 필사적으로 너를 붙들고 통제해 너는 여전히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하지 못하고 100%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한다. 이런 현상들로 보아 네가 패괴 성품을 해결했느냐? 벗어 버렸느냐? 진리를 네 생명으로 삼았느냐? 한 가지 일이 발생했을 때 네가 깨달은 진리가 네 패괴 성품, 선택과 염원, 욕망과 야심, 지위와 명예를 이기지 못한다면 네가 깨달은 진리는 네 생명이 아니다. 진리가 네 생명이 되었을 때 너는 자연스레 그런 패괴 성품들을 이길 수 있다. 패괴 성품을 이기지 못한다면 진리가 네 내면에서 아직 주인이 되지 못했고 네 생명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네가 진리를 사랑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네 동경과 바람일 뿐 진리가 네 생명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긍정적인 동경을 품는다. 그러나 네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동경한다는 것이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냐? (아닙니다.) 네가 진리와 공평, 정의를 사랑한다는 것이 네가 진리와 공평, 정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냐?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동경하는 것일 뿐이다. 동경은 무슨 뜻이냐? (사람의 아름다운 바람입니다.) 그렇다. 일종의 바람일 뿐 실제로 어떻게 처신하는지와는 무관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지금 진리를 생명으로 삼고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지 여부는 어떻게 확인하느냐? 네 이익이 진리와 충돌할 때, 네가 손해를 입고 위협받을 때 네가 깨달은 진리가 네 패괴 성품을 이길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이길 수 있다면 너는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 사람이다. 이길 수 없다면 네 분량이 작다는 증거이다. 어느 정도로 작겠느냐? 진리를 생명으로 삼지 못할 정도로 작다. 실제 상태가 그렇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만약 진리를 생명으로 삼지 않는다면 저희가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수 있겠어요?”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이미 어느 정도 충성심이 있어요. 이미 승자가 되었다고요.” 사실 이런 말에는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어느 정도 섞여 있다. 사람이 의지와 이상을 품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니지만 빛과 정의를 동경하는 것, 진리 추구와 구원받음을 동경하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바람은 사람의 일부 의식과 사람이 걷는 길의 방향은 물론 사람의 일부 행위도 바꿀 수 있으며, 표면적으로는 사람의 기질과 생존 방식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 여기서 바꾼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예를 들면, 현재 네가 내적 상태도 특히 좋고 믿음이 있으며 소극적이지 않고 본분도 아주 순조롭게 이행한다면 너는 자신이 유독 충성심이 강하다고 느끼고 구원받고자 하는 바람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어떤 고생을 겪든 상관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 가지 않는다. 네가 본분 이행 과정에서 일부 좌절과 실패를 겪고 책망과 훈계를 받으며 우여곡절을 많이 겪는다면, 심지어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거나 억눌려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면 너는 마음이 불편해진다.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도 알지 못하며 하나님에게 기도해도 답을 얻지 못해서 괴로워한다. 그런 일들이 발생하면 진리와 빛을 동경하는 네 바람과 의지는 상당히 큰 타격을 입고 망가지며, 그 후 너는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 않고 본분 이행이 의미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어떻게 된 일이냐? 어째서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겠느냐? 어째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냐? 네가 분량이 있고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다면 네 충성심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는 진리를 생명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내면의 내적 상태와 마음가짐, 하나님을 믿으며 기울이는 열정이 늘 기복이 심하고 불안정한 것이다. 한동안 모든 일이 다 순조롭고 기분이 좋으면 너는 흥이 나서 기도할 때 말도 많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읽으려 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도 최선을 다하고 조금 바쁘거나 힘들어도 상관하지 않으며 어떤 고생도 다 견디려 한다. 그러나 일단 순조롭지 않게 되면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고 연약해지며 본분을 이행할 때도 기운을 내지 못한다. 밥을 한 끼 덜 먹거나 잠을 좀 덜 자면 엄청난 고생을 한 것처럼 생각하며 속으로 불평한다. ‘뭐 하러 이렇게 고생하지? 본분을 이행해 봤자 돈도 못 버는데. 그럼 아무 가치도 없잖아!’ 보아라.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라졌다. 왜 이렇게 크게 변화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생명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패괴 성품이 여전히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은 열정이 있을 때는 자신이 야심과 욕망이 없고 하나님에게도 요구 사항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패괴 성품이 여전히 내면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들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적극적일 때는 열정이 가득하고 유독 흥이 넘쳐 아무도 막지 못하지만, 소극적일 때는 녹초가 되어 아무도 일으키지 못하고 늘 극단적인 태도만 취해 조금도 안정적이지 못하다. 이게 바로 정상 인성에 부족함이 있는 것이다. 무엇이 부족하겠느냐?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 것이 부족한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이다. 내적 상태가 기복이 심해서 소극적이었다가 적극적이었다가 한다면 이는 누가 초래한 것이냐? 패괴 성품이 초래한 것이다. 패괴 성품은 오늘은 네가 이렇게 생각하게 하고 내일은 네가 저렇게 생각하게 하는데, 어쨌든 모두 네 염원과 혈기, 당시의 내적 상태나 기분, 감정에 부합한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에 진리가 있으면 달라진다. 진리가 네 생명이 되면 너는 언제든 자신이 하는 일을 정확하고 진실하게 정의하게 되고, 영원히 변하지 않게 된다. 기복이 심해지지도 않고, 한 번 실패하고 넘어졌다고 해서, 책망과 훈계를 좀 받고 좌절을 조금 겪었다고 해서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거나 주저앉지도 않는다. 성난 젊은이들처럼 3일 동안 잠도 안 잘 정도로 적극적으로 변하지도 않고,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생명으로 삼으면 사람은 이상(異象)이 뚜렷해지고 자신이 왜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본분을 이행해 어떤 성과를 이루어야 하는지, 이런 고생을 견디는 목적과 의미, 가치가 무엇인지와 같은 진리 원칙들에 대해서도 희미하거나 흐리멍덩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훤히 알게 된다. 따라서 고생해도 달갑게 여기고 불평하지 않으며 무슨 일을 하든 규율과 원칙을 지키는 데다가 언제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 소극적일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버리지 않고 적극적일 때도 하나님에게 별도로 요구하지 않으며 내적 상태도 아주 정상적이다. 너희는 지금 이런 상태이냐?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지금부터 진리를 추구해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을 중시해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말하건대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 계속 패괴 성품이 주인이 되고 생명이 된다면 좋은 종착지를 얻지 못하고 기껏해야 봉사자가 되고 말뿐이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한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커지고 결국 큰 복을 받을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면 패괴 성품에 결박되지 않을 것이고, 패괴 성품을 더 이상 생명으로 삼지 않으면 정말로 구원받을 희망을 보게 된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패괴 성품이 해결되지 않으며 계속해서 억제와 의지력에만 기대 좋은 일을 하고 악을 행하지 않으려 한다면 길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도 말하기 어렵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해결해야 하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냐?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핵심이다. "저는 지금 하나님 집에서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며 제 모든 시간을 들이고 있어요. 그러니 제가 바로 승자예요!"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한 무리의 승자를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승자란 무슨 뜻이냐?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계 14:4) 이것이 간단한 의미의 승자이다. 승자가 되는 것에만 만족하고 끝내서는 안 된다. 간단한 의미의 승자가 되는 것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거나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종적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되는 것은 단지 승자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승자는 단지 세상과 사탄, 사악한 흐름, 사악한 정권에 이길 뿐이다. 이런 자가 승자이다. 단지 진리 원칙을 좀 깨달았고 일시적으로 육체와 감정을 이기거나 각종 유언비어의 속박과 악인이나 불신파의 교란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것만으로는 승자의 기준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다. 단지 이런 작은 경험만 가지고 있을 뿐이라면 그 가치는 크지 않다. 그렇다면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냐?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비로소 진리가 생명이 되게 할 수 있느냐? 오직 한 가지 길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실행하고 체험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진리를 얻어 진리를 생명으로 삼을 수 있다. 진리가 인생과 생활, 행동하고 처신하는 원칙을 주도하도록 실행한다면 진리 실제가 있는 것이다. 진리 실제를 갖출 때 기존의 사탄 성품은 물러난다.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하기 전에 먼저 고민해야 한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진리 원칙인 것은 아니야.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살펴봐야 해.' 매번 이렇게 고민하고 매번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하고 실행한다면 진리가 조금씩 네 생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겠느냐?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처럼 진리가 조금씩 네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 네 생활과 관점, 생존 상황, 내적 상태를 바꾸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네 내적 상태는 점차 변화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며 악을 행하거나 방해하고 교란할 확률, 자신을 과시할 확률은 점차 줄어든다. 반면 진리 원칙에 기대 실행하는 증거는 갈수록 많아진다. 근본적인 시비를 가리는 일에 맞닥뜨릴 때 진리 원칙이 사탄의 패괴 성품을 이기고 개인적인 염원과 기호, 계획을 이겨야만 비로소 진정한 승자이고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 사람이며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 단지 자신의 기호에 따라 '이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나는 기꺼이 행동한 거고 불평도 없어.'라고 생각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불평이 없다고 해도 네가 실행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순전히 패괴 성품의 기호, 잘못된 사상과 관점, 사심, 야심과 욕망, 감정, 혈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부 다 패괴 성품이 주도하는 것이다. 이는 패괴 성품을 표출하는 생명이지 진리를 표출하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죄할 것이다. 너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네가 살아 내는 것, 하는 말과 행동, 표출하는 사상과 관점이 모두 진리에 부합하도록 해야 하고, 패괴 성품에서 생겨난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과 관점이 네 마음속에서 갈수록 줄어들도록 해야 하며, 네가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것과 네가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모두 진리에 관련되고 진리에 부합하도록 해야 한다. 너는 이 방면으로 추구하고 중시해야 한다. 그러면 네 내면은 갈수록 변화할 것이고 내적 상태는 더욱더 좋아질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글귀와 도리는 구구절절 조리 있게 이야기하지만 진리 실제를 언급하면 말이 없어지고 실제 인식은 조금도 말하지 못한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겠느냐?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여전히 패괴 성품의 생명이고 사탄의 생명이지 진리의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방금 교제한 이런 내용들을 다 알아듣지 않았느냐? 만약 너희가 자신이 패괴 성품을 아직 벗어 버리지 못했고 여전히 패괴 성품에 기대 살아간다는 것을 정말로 인식한다면 너희는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겠느냐? (방금 하나님께서 저희의 패괴 성품이 아직 변화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속으로 크게 좌절했습니다. 지난 세월 계속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셨고 일부 특별한 환경에서도 진리 실행을 중시했는데 어째서 패괴 성품이 아직 변화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조금 낙담했고 소극적인 상태에 빠졌지만 하나님께서 조금씩 인도하고 교제해 주신 덕분에, 저는 단지 표면적으로 조금 좋은 행위를 했을 뿐 패괴 성품이 여전히 내면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고 확실히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행동할 때는 우선 고민해 봐야 한다고, 사람의 생각이 아무리 좋아도 진리 원칙은 아니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어떻게 말했는지 살펴야 한다고, 행동할 때마다 진리를 구해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서서히 내적 상태가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교제를 다 듣고 나니 다시 희망을 본 것 같고 길이 생긴 것 같아서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면 안 된다.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는 것은 구원받는 것과 관련된 큰일이다. 심각한 패괴 성품일수록 더욱더 중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반드시 전력을 다하고 똑바로 정신을 차려야지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비록 너희는 이제 진리 추구를 중시하기 시작했지만 때로는 여전히 실행할 줄 모른다. 지금 너희에게 실행의 길을 말하는 것이 너희의 생명 진입에 더욱 유리할 뿐만 아니라 너희에게 위기감을 심어 줄 수 있고 너희가 진리를 중시하며 가능한 한 빨리 진리를 깨달아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할 수 있다. 스스로 자만해서는 안 되고 현재 상태에 만족해서도 안 된다. 지금 너희는 단지 말을 듣고 규율을 지키며 예전보다 조금 철들었을 뿐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려면 아직 멀었다! 사실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소극적인 상태에 빠진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도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찾아보고 거기에서부터 해결하기 시작해야 한다. 지금 해결에 착수해도 늦지 않다. 그럼 언제가 되면 늦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면 늦는다. 너희는 진리 실제에 진입해 진리를 얻어 생명으로 삼을 의지가 있느냐? (이제 그런 의지가 있습니다.) 사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알다시피 진리를 교제하는 말씀은 아주 많이 했고 세부 사항도 많으며 아주 구체적이라 내용이 상당히 많아 보이지만 원칙과 실행 길은 변하지 않는다. 패괴 성품이 표출될 때는 의식적으로 그 생각이나 뜻을 붙잡고 속으로 묵상해라. '이건 패괴 성품이야. 그럼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예전에도 해결해 본 적이 없어. 하나님을 믿은 지 이렇게 오래되었지만 외부에서 행하는 데만 중점을 두고 자신을 과시하는 것만 중시했지 내게 아직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은 고민해 본 적 없어. 그런데 오늘 갑자기 내 내면에 여전히 이런 생각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 이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지? 패괴 성품에서 비롯되었어. 그럼 패괴 성품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진리를 구한 다음 주변에 체험해 본 사람에게 물어 봐라. 그들이 네가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다 같이 서로 붙들어 주고 도와주며 양해해 주어야 한다. 모두 분량이 같으니 누구도 다른 사람을 우러러보거나 멸시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서로 도와주고 붙들어 주면 분량이 점점 자라나 결국 함께 구원받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좋지 않겠느냐? (좋습니다.) 자, 오늘 교제는 여기에서 마치겠다. 이상!

2023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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