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이 단계에서 우리는 계속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 관한 실행 중 가장 중요한 ‘내려놓기’에 대해 교제했다. 지난번에는 ‘내려놓기’의 세 번째 항목인 ‘하나님과의 거리 및 하나님에 대한 적대시 내려놓기’라는 새로운 내용에 관해 교제했다. 이 내용에는 하나의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항목과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 내용들은 모두 하나님이 역사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체험한 것으로 사람의 생활과 추구에 직접적으로 관련되기 때문에 첫 번째 항목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대해 교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길을 걸어가면서 피할 수 없는 주제이다. 지난번에 이 내용 중 일부를 교제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교제했는지 말해보아라. (지난번에 하나님께서 하나님과의 거리 및 하나님에 대한 적대시 내려놓기에 관해 교제하시면서 먼저 하나님 사역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상상을 폭로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날이라는 측면에 관해 관념과 상상을 품고 있고, 하나님의 사역이 매우 초자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사람을 감동시키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패괴 성품도 변화된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런 관념과 상상을 폭로하시면서 아울러 일상에서 일이 생길 때 우리가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을 우리의 내면에 심는 것이 하나님 사역이 거두고자 하는 성과라는 점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누가 또 보충해서 말해 보겠느냐? (지난번에 하나님께서 사람은 하나님이 일시적인 사람의 모습을 바탕으로 사람을 규정하는 줄 안다고, 또 사람이 겉으로만 규례를 지키고 좋은 행실을 보이면 하나님을 흡족게 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줄 안다고 교제하셨습니다. 이는 모두 사람의 관념과 상상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연약해지거나 패역과 패괴를 표출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고 징벌하는 줄 아는데 이 또한 관념과 상상의 일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이런 관념과 상상을 폭로하신 것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보이는 사람의 좋은 행실을 원하시거나 사람이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규례를 지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이 생겼을 때 진리 원칙을 구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관념과 상상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아직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을 때나 진리를 깨닫지 못해 아직 진리를 얻지 못했을 때는 이런 관념과 상상에 따라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억측하거나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할지 단정 지을 것이다. 이와 함께 사람은 이런 억측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규정할 것이다. 자신의 결말을 규정하고 앞으로 복을 받을지 화를 입을지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런 관념과 상상은 사람이 하나님 사역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추구하며, 진리를 얻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 다시 말해 사람이 만약 이런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속 그것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원동력이자 원천으로 여긴다면 그 관념과 상상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얻는 것을 심각하게 가로막아 결국 관념과 상상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가치, 신분, 지위를 규정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하나님 집에서 자신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 자신의 종착지가 어떨지, 어떤 복을 받을지, 권병은 얼마나 될지, 몇 개 도시를 맡게 될지, 천국에서 기둥일지, 대들보일지, 혹은 현세에서 얼마나 받고 내세에서는 얼마나 받을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런 관념과 상상은 사람의 삶과 추구에 연관되기 때문에 사람이 걷는 길에 영향을 미침은 물론 사람의 마지막 결말과 종착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사람이 관념과 상상 속에 살아가고 추구하면 모든 것을 관념과 상상에 따라 바라보고 평가하며 판단하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떻게 진리를 공급하여 사람이 가져야 할 관점과 걸어야 할 길을 알려주든, 사람이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지 않으면 관념과 상상에 따라 살아가기 마련이고 이 관념과 상상은 자연스럽게 사람의 생명이자 생존 법칙이 된다. 그러면 사람이 여러 사물을 처리하는 방식과 방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 및 준칙이 되면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추구하든, 얼마나 고생하고 대가를 얼마나 치르든 전부 헛수고이다. 사람이 관념과 상상에 따라 살면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고, 적대시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이나 하나님의 요구를 진실하게 순종하지 않는다면 결국 비참한 결말을 맞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아무리 오래 믿고 하나님을 위해 아무리 헌신하며 열심히 뛰어다니고 아무리 많은 대가를 치러봤자 네가 하는 모든 일의 출발점과 근원이 네 관념과 상상이라면 너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받아들이거나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그 관념과 상상이 책에서 비롯된 것이든, 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든, 그도 아니면 네 사사로운 욕망과 흥미에서 비롯된 것이든, 결론적으로 그것이 관념과 상상이라면 그것은 진리일 수 없고,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그것은 진리를 적대하는 것이자,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걸림돌이며, 하나님과 진리의 원수이다. 그러니 네가 관념과 상상에 따라 살아간다면 너는 관념과 상상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고 바라볼 것이니 너는 필경 관념과 상상으로 인해 하나님이 네게 배치한 환경과 너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와 주재를 거역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여기에 진실한 받아들임과 순종이 없을 거란 말이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왜냐하면 네가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든 네가 관념과 상상에 따라 사는 이상 그렇게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것은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으며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네가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 것은 네 관념과 상상, 사람의 기호에 따른 것이며, 사람의 육적인 욕망을 채우고 사람의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바울이 보인 모습처럼 말이다. 그는 많은 사역을 했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유럽 전역에 복음을 전했지만 그가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며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든 그는 시종일관 진리에 부합하는 생각이나 관점을 지니지 않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태도나 진실한 체험 없이 자기만의 관념과 상상 속에 살았다. 구체적으로 그의 관념과 상상이 무엇이었느냐? 열심히 뛰어다니고 나면, 그리고 싸움을 끝내고 나면 공의로운 면류관이 자기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바울의 관념과 상상이다. 그의 관념과 상상의 이론적 근거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니고 대가를 치르며 고생했느냐로 하나님이 한 사람의 결말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관념과 상상의 이론적 근거 위에서 자기도 모르게 적그리스도의 길에 올랐고, 그 결과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을 대적한 자신의 행위와 모습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을 대적한 것에 대해 아무런 인식도 하지 않았고 더구나 회개하지도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관념과 상상을 품은 채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에게 조금도 진실하게 순종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자신의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얻어낼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얻어낸 것은 그럴싸한 말과 지적인 말이었다. 사실 얻어낸 것도 아니고, 심지어 거래한 것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직접 독촉하고 요구했다. 하나님에게 어떻게 요구했느냐? “제가 열심히 뛰어다니고 나면, 그리고 싸움을 끝내고 나면 영광의 면류관은 제 것입니다. 그건 제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니 하나님께서 당연히 제게 주셔야 합니다.”라는 그의 말대로이다. 바울이 간 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로서 그를 멸망으로 이끌어 결국 징벌받는 결말로 떨어뜨렸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념과 상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관념과 상상을 품고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급한 진리와 생명의 도를 제쳐두고 거들떠보지 않는 것도 모자라 경멸하는 태도를 취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이라는 사실마저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마지막에 가서도 그는 계속 그의 관념과 상상을 고수하며 계속 하나님과 힘겨루기하다 끝내 멸망이라는 필연적 결과로 향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각종 부정적인 정서나 현실 생활에서 사람의 진리 추구를 가로막는 것들은 내려놓으면서 하나님과의 거리나 하나님에 대한 적대시를 내려놓지 못한다면 이는 무척 안타깝고 비참한 일일 것이다. 결국 사람이 바울처럼 징벌받는 결말을 맞게 되리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내려놓기’의 실행에서 ‘하나님과의 거리와 하나님에 대한 적대시 내려놓기’ 항목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간과할 수 없는, 무엇보다 중요한 항목이다.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어떤 관념과 상상이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그렇게 성찰하고 비춰보고 나서 그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내려놓는 목적은 그저 형식적으로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준 이런 측면의 진리 원칙을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네 관념과 상상 대신 이런 진리 원칙을 가지고 네가 추구하는 관점과 방향을 바꿔 생활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네 관념과 상상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하는 목적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해결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는 목적 역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해결함으로써 사람이 올바른 생각과 관점, 올바른 입장과 시각으로 하나님이 배치한 모든 환경을 대하게 하고 생활에서 직면하는 모든 일을 대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하고 말씀으로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는 것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온전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쳐서 사람이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아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예전에 하나님 사역 측면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관해 조금 교제했었다. 이런 관념과 상상외에도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내려놓아야 할 하나님 사역에 관한 관념과 상상이 더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은 하나님 사역을 받아들이고 나서 진리를 추구할 수만 있으면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는 줄 안다. 사람에게 생명이 되는 하나님 말씀이 생기면 그에게 전혀 새로운 생명이 생겨서 환골탈태하여 새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자질이 좋아지고 본능도 어느 정도 변화되면 사람은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데, 그 일이란 바로 사람이 자신의 자질과 본능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굉장히 자유자재로 그리고 수월하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나니 자신의 성격과 성질이 좋아졌고, 눈빛도 예전보다 똘망똘망해졌으며, 청력도 좋아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수시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기가 갈수록 천사를 닮아 예뻐진다고, 전보다 생기가 넘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활 습관도 변해서 생활 리듬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너무 늦게 자서 하품이 끊이질 않았다면 진리를 추구하고 나서는 이런 현상이 모두 사라졌다며 신기해한다. 사람은 관념과 상상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여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변화를 일으킬 줄 안다. 즉 사람의 자질이 보통 수준이거나 형편없었는데 하루아침에 좋아져서 유능하고 노련해져 자질과 지혜를 겸비한 사람이 되고 생각의 차원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처음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때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대해 허황되고 엉뚱한 상상을 한다. 어쨌든 실제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 생각들이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기만 하면 사람의 많은 측면이 모두 향상되고, 월등해지며 심지어 어떤 측면은 보통 사람을 초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칭 여초(吕超)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초(馬超)나 우초(牛超)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말인즉슨 나귀, 말, 소를 뛰어넘는다는 뜻으로, 말보다 빠르고, 나귀나 소보다 힘이 세다는 의미이다. 나귀는 짐을 끌 때 굳세고 말은 다리의 힘이 매우 좋다. 그리고 소는 고역을 잘 견딘다. 그래서 여초, 마초, 우초라고 하는 것이다. 이 이름들을 가만히 보면 지을 때 법칙이 있다. 이렇게 이름을 짓는 것에서 사람이 하나님 사역의 측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런 이해는 진리에 부합하지도 않고 긍정적이지도 않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다. 이 관념과 상상이 치우치든, 극단적이든 결국 그것은 사실과 진실에 부합하지 않은 무척 공허하고 초자연적인 생각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역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어떤 자질이나 사역 역량, 일 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든, 또 사람의 타고난 본능이 무엇이고, 사람의 성격이나 습관, 생활 리듬, 흥미, 기호가 어떻든, 심지어 사람의 성별이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하나님은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는 자질, 본능, 성격, 습관, 사람의 올바른 생활 리듬 그리고 정당한 흥미, 기호 등을 바탕으로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이며 진리에 순종하게 해서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두도록 역사한다. 그렇다면 이런 성과는 무엇을 전제로 이루어지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을 갖춘 것을 전제로, 사람이 정상 인성을 지닌 것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소위 향상된 인성이나 초자연적인 인성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측면의 진리에 관해 교제하든 네가 정상 인성을 갖추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을 전제로 진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관념과 상상은 이와 정반대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고 진리를 선포하여 거두는 성과가 사람 본래의 자질과 본능은 물론, 사람의 성격, 습관, 흥미, 기호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착실하게 진리를 구하는 일에 힘을 쏟는 게 아니라 항상 자신에게서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일, 자기가 생각지도 못한, 자신의 자질과 본능을 뛰어넘는 일이 일어나길 바란다. 이 사실이 무엇을 증명하느냐?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일을 대단히 초자연적이고 공허하게 보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는 방식을 대단히 초자연적이고 공허하게 보고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항상 자기가 진리를 추구할수록 자질이 나아지기를 바라고, 혹은 자기가 설교를 많이 듣고 진리를 받아들여서 많은 진리를 깨달으면 자질이 전보다 나아지기를 바란다. 이것이 관념과 상상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한 가지 업무를 배우는 것을 예로 들어 보자. 과거 학교에 다닐 때는 한 가지 업무를 배우려면 무조건 암기하고 밤낮으로 틈만 나면 학업에 힘을 쏟아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나서는 성령이 역사하기만 하면 사람의 자질이 나아지고 사람이 변화되어 예전과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든 사람은 협력하기만 하면 되고, 힘들여 진리를 추구하고 업무나 지식을 배울 필요 없이, 본분만 이행하면 그만이라고,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 성장할 거라고 규정한다. 사람이 이렇게 상상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대답해 보아라. 이렇게 추구해서야 되겠느냐? 이렇게 추구하면 진실한 변화가 생기겠느냐? (그러지 않을 겁니다.) 변할 리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예전에는 노래를 잘하려면 밤낮으로 연습하고 벤치마킹하며 여러 곡을 들어보면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본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나서는 노래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는 일이고 사람의 자질과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사람이 연습할 필요는 없으며 노래할 때 성령이 역사하여 감동을 주기만 하면 노래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정을 담아 노래할 수 있으니 다른 사람도 즐겁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늘 이런 환상을 품고 있다. 이것이 관념과 상상이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은 그렇게 힘들여 업무와 지식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니 사람의 무의미한 희생은 쓸데없는 헛수고이며, 하나님이 한 번 역사하는 게 사람이 얼마간 힘을 쓰는 것보다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에게 마음을 바치고자 하면 성령이 역사하여 사람의 자질과 역량이 단숨에 향상되고, 정상 인성의 범위를 초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깨치지 못한 사람이 이제 깨치게 되고 예전에는 한눈에 두 줄도 못 보던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는 한눈에 열 줄을 봐도 까먹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안 되면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내려주지 않으시는 건가? 본분을 이행할 때 내 수고와 진심이 아직 부족한 걸까?’라고 생각한다. 그렇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너는 네가 초자연적일수록, 네 자질과 능력 범위를 벗어날수록 하나님이 한 것임이 증명된다고 생각하고, 네가 진심이 있고 협력하는 마음이 있을수록 하나님이 너에게 역사하고, 네 자질과 능력이 그만큼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특히나 이렇게 생각하기 좋아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결과가 무엇이냐? 실패만 하고, 또 실현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나는 하나님께 무척이나 진심인데, 하나님은 어째서 나에게 좋은 자질을 베풀어 주지 않으시지? 어째서 내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주지 않으시지? 왜 난 아직도 늘 연약하지? 자질도 향상되지 않고, 어떤 일도 간파하지 못하고, 복잡한 일이 닥치면 얼떨떨하고 말이야. 전에도 이랬는데, 왜 지금까지도 이럴까? 게다가 본분을 이행하고 문제를 처리할 때 난 왜 늘 육체를 초월하지 못할까? 도리를 좀 깨닫기도 했지만 일을 바라봐도 여전히 간파하지 못하고, 일 처리도 여전히 우유부단해. 여전히 자질이 뛰어난 사람들보다 못해. 사역 능력도 부족하고, 본분 효율도 낮아. 이 자질은 향상되지도 않았어! 어찌 된 일일까? 설마 하나님에 대한 진심이 부족한 걸까? 아니면 하나님이 날 좋아하지 않으시나? 내가 어디가 부족할까?’ 어떤 사람들은 각종 원인을 찾고, 또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서 이 사실을 바꾸려 한다. 예를 들어 설교도 많이 듣고, 하나님 말씀도 많이 외우고, 큐티 메모도 많이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진리 교제도 많이 듣고, 많이 구한다. 하지만 최종 결과는 역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자질과 사역 능력은 아직도 그대로이고, 하나님을 3~5년 믿어도 별로 향상되지 않았다. 자신의 성격을 봐도 역시 원래와 마찬가지로 나약하고 소처럼 느릿느릿하거나, 혹은 성격이 급해서 무슨 일이든 조바심을 낸다.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어떤 사람은 최근 자신의 취미와 관심사를 보니 아직 바뀌지 않은 것 같고, 결함과 습관, 버릇도 바뀌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은 늦게 자고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런 생활 습관도 바뀌지 않아서 고민한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설마 성령께서 내게 역사하지 않으시나? 설마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설마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지 않으시나? 설마 내가 가는 길이 잘못된 길인가? 설마 내가 추구하는 방식이 옳지 않은 건가? 설마 내가 본분 이행할 때 정성이 부족한가? 설마 내가 치른 대가가 충분하지 않은 건가?’ 각 방면에서 원인을 찾아도 결국 이렇다 할 결과를 얻지 못했다. 결과가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 (계속 자신의 관념과 상상 속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은 후로는 하나님께 진심만 있다면, 하나님이 역사할 때 그의 자질이 향상되고 사역 능력도 좋아질 거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그의 관념과 상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은 사람의 추구 목표, 방식을 결정하고, 사람이 걷는 길을 결정하고,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수확과 결말을 결정한다. 사람에게 이런 관념과 상상이 있으면 사람은 무엇을 거두겠느냐? 진리를 거두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참된 사랑을 거두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참된 순종을 거두겠느냐?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도 거둘 수 없다.

하나님을 믿을 때는 하나님의 사역이 과연 사람의 무엇을 바꾸는지, 사람의 패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이 확실하게 교제해야 할 문제가 아니겠느냐? 쉽게 말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여 거두고자 하는 성과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이번 사역은 진리를 선포하여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는 사역은 사람의 현실 생활에서 각종 사람과 일을 만날 때 반드시 준수해야 할 진리 원칙을 교제하여 깨닫게 한다. 사람이 깨닫고 나면 이런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며 일을 처리하게 되니 이를 바탕으로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여 사람이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 진실하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한다. 물론 이는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하나의 상징이자 마지막에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구원 받은 자의 진실한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는 전체 과정에서 해결해야 하는 주된 문제는 무엇이었느냐? 크게 두 가지 측면의 문제가 있다. 첫 번째 측면은 사람의 관념을 해결하는 것이다. 사탄에게서 비롯된 각종 그릇되고 터무니없으며 고집스러운 생각과 관점을 모두 사람의 관념이라고 통칭한다. 이런 잘못된 생각과 관점은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여 이미 사람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며 일을 처리하는 기본적인 생각과 이론이 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철저하게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사람의 생각 측면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다. 다른 한 측면은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이다. 패괴 성품은 교회 생활을 하면서 자주 교제하고 이야기하며 해부하는 주제이다. 패괴 성품 중에는 사람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생각과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 있는가 하면, 순전히 사탄의 성품에 속하는 패괴 성품도 있다.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이 사람에게서 해결하는 것은 사람의 관념과 사람의 패괴 성품 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것과 관련되고 하나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 두 가지가 해결되고 사람이 진리를 얻으며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과 합하면 하나님의 사역은 성과를 거두게 되고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 사역의 전체 과정에서 하나님 사역의 방식이든, 아니면 하나님 사역의 구체적인 절차이든, 혹은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진리이든 모두 사람의 성격, 자질, 역량, 본능, 생활 습관, 생활 리듬, 사람의 흥미, 기호 등의 측면에 관한 것이 아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 사역의 목표나 목적, 의의가 사람의 본래 자질이나 역량, 사람의 본능, 성격 등을 바꾸는 데 있지 않다는 말이다. 네가 어떤 자질과 사역 역량을 갖추었든, 혹은 네가 타고난 성격이나 생활 습관, 네 본능 등 각 측면이 어떻든, 하나님은 이런 것을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네가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인지만 보고, 이를 바탕으로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고 역사한다. 하나님이 어떤 측면의 진리를 사람에게 공급하든,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든,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원래 자질이나 본능을 바꾸려는 것도 아니고, 네 자질이나 본능을 더 낫게, 더 좋게, 혹은 초자연적으로 만들려는 것도 아니다. 이런 측면은 모두 하나님이 역사하여 바꾸려는 목적이 아니다. 그러니 네가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네가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든, 그리고 네가 하나님 말씀에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든, 네 원래 자질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일 것이다. 네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또 오랫동안 열심히 뛰어다니고 헌신했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사람의 성격, 본능, 생활 습관, 사람의 흥미나 기호 등 측면도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했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바뀐다는 말은 분명 사람의 관념 속에서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전보다 나아지고 좋아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사역이 어떤 단계에 있든,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든, 사람의 원래 자질이나 사역 역량 혹은 사람의 본능이나 성격 등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만약 네 자질이 떨어지고, 네가 지금 리더 일꾼이나 어떤 사역의 책임자가 될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면 20년, 30년이 흘러도 갖추지 못할 것이다. 설사 네가 결국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는다고 해도 여전히 갖추지 못할 것이다. 네 자질이 변하지 않는데 네 본능이 변하겠느냐? 모든 사람은 생로병사를 겪고, 큰일이 생기면 긴장하고 두려워하며 무서워하기 마련이니 이 본능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굉음이 들리면 모든 사람은 머리를 감싸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것이다. 그게 본능이다. 불이나 뜨거운 물건에 손이 닿으면 본능적으로 움츠리고, 혹여 불길한 소식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흠칫 놀라 두려워한다. 위험이 닥칠 땐 본능적으로 ‘내가 안전한가? 이 위험이 내게 닥치려나?’라는 생각부터 할 것이다. 그건 본능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손을 들어 때리려고 하면 본능적으로 피해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먼지나 물이 눈에 들어가면 본능적으로 눈을 감으며, 이가 아플 때는 손으로 이를 누를 것이다. 너는 본능에 의해 조건 반사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이거나 본능적인 행동을 할 것이다. 이런 본능적인 반응은 사람이 타고나는 것으로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하나님도 사람을 바꿔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본능적인 반응은 사람의 이성으로 보든, 아니면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사람에게 예비한 조건으로 보든, 결론적으로 이런 것들은 너를 보호해 주는 것이며 피조된 인간의 육체에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는 하나의 조건이니 하나님은 빼앗아 가지 않을 것이고 너 역시 진리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이 본능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네가 진리를 추구하여 진리를 많이 깨닫고 하나님에게 진실하게 순종한다고 한들 불길에 휩싸여도 두렵지 않고 기름 솥에 손을 집어넣어도 뜨겁지 않은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증거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그를 어떻게 보겠느냐? 부러워하고 탄복하겠느냐? 너는 어떻게 평가하고 규정하겠느냐? 최소한 이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본능이라는 것을 만들어 주었는데 네가 진리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네 이런 본능을 빼앗아 가지 않을 것이고 또한 네 본능을 다른 초월적인 능력으로 바꿔주지도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두운 공간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너는 손을 뻗어 더듬고 주위 소리를 분별하려 귀를 기울이면서 본능적으로 탐색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네가 진리를 추구한다고 해서 어두운 곳일수록 눈이 밝아져서 사물을 또렷이 볼 수 있거나 방향을 제대로 파악하는 등 육을 초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초자연적인 것으로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네가 설령 진리를 추구하여 많은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순종하며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고 한들, 이런 측면의 본능은 마지막까지 변함없이 그대로일 것이다. 퇴화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인데 초자연적으로 되길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 사람이 일을 바라보고, 처리하는 능력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역시 하나님 사역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일 처리 능력이 어떤지는 사람의 자질에 달려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타고난 지능에 달려 있다. 이 지능에는 사람의 은사도 포함된다. 어떤 사람은 외부의 일을 처리하는 데 특별한 능력과 은사를 타고나서 생각하고 사교하는 데 능하다. 선천적으로 일종의 특수한 사교 능력이 있어서 사람을 사귀고 상황을 파악할 줄 알고 일을 처리할 줄도 안다. 머릿속으로 각종 일의 맥락을 무척 분명하게 구분하고, 논리적이기까지 해서 일을 바라볼 때 핵심을 파악하여 치우치지 않고 문제를 꽤 정확하게 처리한다. 이런 부류는 일 처리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이 능력을 갖추지 못했는데 독서를 즐기고, 화초를 키우며 새 키우기를 좋아한다. 이를 무엇이라 하느냐? 여유롭고 품위 있게 고상한 척하기를 좋아하는 부류이다. 그들은 사교적이지 않고 외부 일을 처리하는 데도 서툴다. 이런 능력이 없는 것이다. 밖에 나가서 일을 처리하고, 변호사를 구하거나 어떤 사람과 왕래해야 할 때 겁을 먹고 두려워서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그 사람이 자기한테 질문하면 우물쭈물하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 머저리가 아니냐? 이런 사람은 일이 생기지 않을 때는 허풍이 대단하다. “제가 예전에 어떤 일을 했고, 어떤 화려한 이력이 있으며, 어떤 사람과 왕래했고, 어떤 유명인을 알았냐 하면요…” 그러다 정말 그를 보내 일을 처리하게 하면 꽁무니를 뺀다. 그는 허풍만 칠 줄 알지, 실질적인 재능이나 학식은 없고 일 처리 능력도 그다지 좋지 않다. 진리를 추구한다고 일 처리 능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달라지겠느냐? 불행하게도 달라지지 않는다. 성격이 내성적이라 어려서부터 사람 만나기를 꺼리다가 이삼십 대가 되어서도 남들과 대화하거나 일을 처리할 때 몹시 긴장하고 중년의 나이에도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할 때 부끄러워하고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을 보아라. 이런 사람은 평생 큰 그림을 볼 줄 모른다. 이와는 다르게 십 대 때부터 남들과 수다 떨며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어떤 사람과 교류하게 해도 겁먹지 않고 어떤 일을 시켜도 조급해하지 않고 허둥대지 않는다. 그는 똑똑해서 주눅 들지도 않고 사람이 많을수록 즐겁고 신나서 자기를 드러내 보이려 한다. 사람의 성격, 일 처리 측면의 능력이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바뀌겠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이런 것들을 바꾸지 않는다. 자신의 일 처리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인성 측면의 흠이라는 것을 알고 극복하려 노력하다 보면 중년이나 노년 단계에 이르러 몇십 년의 단련을 통해 풍부한 체험이 생겨 눈앞에 닥친 일들에 간신히 대처할 수도 있겠지만 핵심적이고 생사가 걸린 중대한 일은 여전히 역부족일 것이다. 특히 노년에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무슨 일이든 엉망으로 해서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자기 집안일도 감당하지 못하니 어떻게 하겠느냐? 일 처리 능력이 있는 자녀가 있으면 자녀에게 대신 시켜서 자기는 숟가락만 얹는다. 그러고는 ‘나도 한몫했어. 일 처리할 능력은 나한테도 있다고.’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자녀가 장성해서 가장이 되어 그 일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일에 대처할 때 젊었을 때만큼 긴장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의 일 처리 능력에 변화가 생겼다거나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여서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체험을 많이 하고 사물의 규칙을 파악하여 일에 달관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정말 위험한 일에 직면해도 겁먹지 않고 ‘결국 그게 그거야. 나한테 돈은 없어도 목숨이라면 하나 있지. 될 대로 돼라!’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에게 발전이 있겠느냐? 발전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여전히 일을 야무지게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예전에 덤벙대고 조급했으면 지금도 덤벙대고 조급하고, 예전에 일을 처리할 때 일머리가 없었다면 지금도 변함없이 그 모양일 것이다. 너희 생각에도 사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연령대가 다양한데 지금까지 특수한 일을 겪어본 적이 있느냐? 다시 말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네 자질이 완전히 변해서 예전보다 훨씬 나아지거나 본능이 달라진 경험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러면 “예전에 전 정말 나약했어요. 말주변도 없고, 별다른 능력이나 재주도 없었죠. 사교적이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하나님 사역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언변도 늘고, 사교성도 좋아졌어요. 일 처리도 지식과 노하우가 생겨서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냐? 이런 경험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일은 없었지만 하나님을 믿은 후 하나님 사역을 경험하면서 제 성격이 변한 것 같긴 합니다. 원래 전 말이 느려서 늙은 소라고 불렸어요. 굼벵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죠.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나서는 반응이 빨라졌어요. 말과 동작이 빨라지고 일 처리 속도도 빨라져서 효율이 올랐죠.”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한 가지 경우는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의 경우 처음 연습할 때는 말이 굉장히 느리다. 한 글자씩 말하다 보니 주위에서 그 사람의 말이 이렇게 느린 건 천성이 느린 탓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3, 5년의 세월이 흐르면 남들과 자주 접촉하고 대화하면서 모국어만큼 빠른 속도로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 사람 성격이 변했네. 원래 남들이 답답해할 정도로 말을 느리게 했는데 이젠 유창하게 말하고 성격도 활달해졌어. 말을 명료하게 하는 것만 봐도 이 사람이 일 처리가 깔끔하고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겠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성격이 변한 경우겠느냐? (아닙니다.) 사실 이것은 정상적인 흐름이다. 특정 업무를 배우는 정상적인 성장 과정이지 성격이 변하는 과정은 아니다. 어떤 측면이든, 자질이나 능력, 본능이 되었든, 아니면 성격이나 습관, 흥미, 기호가 되었든 이는 모두 하나님 사역이 바꾸려는 것들이 아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이 사역하고 말씀하고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는 목적이 단지 사람의 이런 본능적인 것을 변화시키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얘기하는, 진정한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그것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다. 사람은 이런 것들을 깨달은 뒤 이 방면의 관념과 상상, 억측, 혹은 느낌을 내려놓아야 한다. 즉,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느낌 혹은 추측에만 기대어 언제나 다음과 같은 것을 정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 자질은 향상되었나? 내 본능은 달라졌나? 내 성격은 아직도 예전처럼 좋지 않은가? 내 생활 규칙은 달라졌나?’ 이런 걸 고민하지 마라. 고민해도 소용없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고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은 이런 것을 겨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사역을 통해 사람의 자질, 본능, 성격과 같은 요소를 바꿀 계획이 없으며, 결코 사람의 이런 요소들을 바꿀 목적으로 말씀한 적도 없었다. 그 숨은 뜻은 곧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는 조건을 바탕으로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고, 이로써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경지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네가 어떤 자질을 가지고 있든, 네 성격과 본능이 무엇이든, 결국 하나님이 하려는 것은 진리를 네 내면에 만들어 주고, 네 낡은 관념과 패괴 성품을 바꾸려는 것이지, 네가 원래 가지고 있는 자질과 본능, 성격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역을 통해 바꾸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겠느냐? (하나님께서 사역을 통해 바꾸려는 건 사람 내면의 낡은 관념과 패괴된 성품입니다.) 사람이 이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런 초자연적이고 실제에 맞지 않는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아야 하고, 그런 관념과 상상을 가지고 스스로를 판단하거나 스스로에게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네게 준 각 방면의 원래 조건을 바탕으로 진리를 구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목적이 무엇이냐? 바로 네가 본인의 원래 조건을 바탕으로 진리 원칙을 깨닫고, 또 여러 상황에 직면했을 때 실행해야 할 여러 방면의 진리 원칙을 깨닫고, 네가 이런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한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역사하는 목적은 진리를 사람의 내면에 심어서 실행 원칙과 준칙이 되게 하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며 일을 처리하는 근거가 되게 하며, 사람의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이지, 사람을 슈퍼맨이나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슈퍼맨,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본능이나 사람 능력의 한계, 사람의 자질을 뛰어넘는 것, 심지어 성별을 뛰어넘어 트랜스젠더로 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언어를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는데도 몇 개 국어 혹은 십여 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런 초자연적 능력은 사람의 자질과 능력, 본능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에 더해 몇 개 국어를 하면서 남자 여자의 목소리까지 유연하게 구사하여 말한다면 더욱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가 몇 개 국어를 하든 헛갈리지 않고, 얼마나 오래 이야기하든 지치지 않으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아도 갈증이 나지 않는 데다가 말하면 말할수록 눈빛이 밝아지고,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온몸에 빛이 난다면 초자연적인 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심지어 말하다가 총을 한 발 맞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이야기한다면 더더욱 초자연적인 게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가 총알을 보고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서 총알이 가슴을 관통했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다면, 그리고 머리카락 한 가닥 상하지 않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면 본능을 뛰어넘은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갖가지 현상들은 모두 사람의 본능을 뛰어넘은 것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초자연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람으로서 정상인의 자질과 능력을 뛰어넘고, 정상인의 본능을 뛰어넘어 다방면에서 보통 사람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굉장히 초자연적인 사람 말이다. 이러면 낭패다. 이게 정상인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악령입니다.) 이게 바로 악령이다. 너희는 이런 것을 추구하길 원하느냐? (원치 않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으면서 하나님 사역이 사람을 그 정도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느냐? 하나님 사역의 목적이 사람을 초자연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을 체험하게 해서 그로부터 하나님 사역의 각별한 배려를 인식하든, 자신의 부족함과 결핍을 인식하든, 그도 아니면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든 그 인식을 바탕으로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실행하여 차츰차츰 진리에 진입하게 한다. 이는 전혀 초자연적이지 않은 더딘 과정이다. 어떤 사람은 소극적으로 변하면 이런 말을 자주 한다. “하나님을 이렇게 오래 믿었는데 제가 얻은 게 뭐가 있죠?” 얻은 게 없다고 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많은 일을 깨닫지 않았느냐? 믿으면 믿을수록 마음이 평안하고 든든해지지 않았느냐? 또 믿을수록 이것이 인생의 참도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 만약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네게 수확이 있다는 뜻이다. 비록 돈, 지위, 명예와 이익과 같이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만 네 마음속 깊이 진리를 깨달았고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고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 너는 하나님의 뜻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깨달았고, 무엇이 피조물이고 어떤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제는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게 하면 괴롭고 삶이 공허하다고 느끼게 되었으니 이는 네가 하나님을 믿고 이미 수확이 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냐? 네가 얻은 것은 그 어떤 물질적인 것보다 가치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여 거두는 성과가 바로 이런 것이다. 즉 사람에게 인성과 본능이나 육의 정상적인 필요와 정상적인 모습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변화가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서 여러 가지 환경을 경험하게 하여 그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그리고 천천히 여러 인식과 경험을 얻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점진적이고 더딘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의 생각과 관점이 조금씩 변하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며, 각 유형의 사람과 일에 대한 관점과 방식이 변하고, 사람의 패괴 성품도 더 이상 예전처럼 뚜렷하지 않게 되며, 사람의 양심과 이성이 어느 정도 회복된다. 실질적인 수확은 바로 이런 것이지 비현실적이고 허무맹랑하며 공허하다 못해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 사역을 순차적이고 점진적으로 해나간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한 가지 원칙은 순리대로 사역하는 것이다. 이 순리대로라는 말을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무엇을 순리대로라고 하느냐?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거나 말씀할 때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환경을 배치하여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는 것처럼 너에게도 진리를 공급한다.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서 그 일을 네가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관점과 태도로 대하고 처리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말씀으로 명시하였고 명확한 진리 원칙도 알려주었다. 네가 어떻게 대할지에 관한 선택은 자유다. 너는 진리를 받아들여서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진리를 거부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또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으로 인해 네가 드러나는 것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할 수도 있고, 하나님 사역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에 너는 선택의 자유가 있으니 자유롭게 택하면 된다. 예를 들어 네가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마음과 힘을 다해 임하는 것을 택할 수도 있고, 건성으로 임하는 태도를 선택할 수도 있다. 이는 완전히 네 개인의 선택에 달린 일임은 물론 네 개인의 자질과 능력, 본능 등의 측면에 달린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추가적으로 역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보통의 경우 하나님은 추가적으로 독촉하거나 강요하는 사역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환경을 배치한 것은 네게 잔칫상을 차려준 것이나 다름없다. 찬요리, 익힌 요리, 밥이며 국이며, 과일에 음료까지 온갖 음식이 다 차려져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네게 선택할 자유를 주었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모두 네 자유고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사람에게 공급할 진리를 선포하는 일만 신경 쓴다. 어떤 사람은 잔칫상을 대충 훑어 보고는 잔칫상의 진수성찬이 어떤 맛인지 맛도 안 보고 품평만 한다. 그렇게 한 바탕 도리를 연설하고는 가버린다. 또 어떤 사람은 구경하는 것을 택한다. 이 진수성찬을 방치한 채 아무런 태도나 관점을 보이지 않고 그냥 가버린다. 반면 어떤 사람은 직접 맛보고 진수성찬을 체험하며 음식의 조리법을 배운다. 하나님이 배치한 이런 환경에서 네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호응하든 아니면 거절하고 부인하든, 혹은 업신여기고 적대시하든 하나님에게는 모두 하나의 태도이다. 사람의 여러 가지 태도를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고 처리하겠느냐? 사람에게 수많은 진리를 공급하고 나면 하나님은 사람을 관찰하고 기록하기만 할 뿐이다.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과 상관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과 관계되겠느냐? 네가 어떤 길을 택하느냐와 관계되고, 네가 결국 무엇을 수확하느냐와 관계되며 네 마지막 결말과 관계된다. 이 일에 대해 하나님은 보조적인 사역을 추가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저 하나님이 해야 할 책임과 의무만 다할 뿐이다. 하나님이 네게 진리를 공급하고 각 유형의 사람과 일을 처리하는 원칙을 알려주고 나서 네게 환경을 배치해 줄 수는 있지만 네가 결국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길을 갈지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게 한다. 예를 들어 네가 리더 일꾼으로 뽑히면 네가 진리 원칙과 하나님 집의 사역 지침대로 할지, 아니면 제멋대로 자기 입맛대로 할지는 네가 택할 수 있다. 네가 만약 모든 일을 진리 원칙대로 처리하고 사역 지침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택한다면 하나님이 지켜보고 기록할 것이니 결국 너는 진리를 얻게 되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결말이다. 그런데 만약 네가 네 뜻에 따라 제멋대로 굴면서 하나님 집의 사역 지침과 진리 원칙을 어긴다면 이것 역시 사람이 가는 길을 상징하는 하나의 선택이니 이 또한 하나님이 지켜보고 기록할 것이다. 물론 네 결말이 어떨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네가 진리와 생명을 얻는다면 하나님에게 칭찬도 받고 네게 좋은 종착지도 주어질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사역에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가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는 사람의 관념과 상상 속에서 무엇이냐? 조종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몰래 커다란 그물로 사람을 덮어서 사람의 모든 행동과 그가 처한 환경을 조종하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이 생겼다면 그 경계심과 두려움은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대한 관념과 상상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런 두려움과 경계심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순종이나 경외가 아니라 패역과 대적의 일종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무소불위하고 무소 부재해서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모든 걸 하늘이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항상 너를 살펴 보고 지켜보고 있는데 그 목적은 네 마음과 손발을 구속하여 선택의 자유를 주지 않고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바꾸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도록 강요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는 모두 사람의 관념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사실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사람의 뜻을 옭아매거나 조종하려는 태도를 취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전혀 속박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너는 자유다. 설사 네가 하나님 집에 있다 해도, 그리고 네가 하나님이 예정하고 택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너는 자유다. 너는 하나님의 각 요구와 안배를 거절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받아들이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네게 자유롭게 선택할 기회를 준다. 다만 네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 네가 한 가지 일에 직면했을 때 그 일을 처리하는 관점이 무엇이든, 또 결국 어떤 수단과 방식으로 해결하든 너는 네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네 마지막 결말은 네 개인의 평가와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많은 진리를 선포한 뒤 사람이 그 많은 진리를 듣고 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 사람에게 정해준 원칙에 따라 모든 사람의 잘잘못을 엄격하게 판단하고 모든 사람의 마지막 결말이 어떨지 판단할 것이다. 이 일에서 하나님의 감찰과 배치, 안배는 사람을 옭아매거나 구속하는 게 아니다. 너는 자유다. 너는 하나님을 경계할 필요도 없거니와 두려워하거나 불안을 느낄 필요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는 자유인이다. 하나님이 네게 자유로운 환경을 주고 자유롭게 선택할 의지와 여지를 주어서 스스로 선택하게 하였으니 마지막에 네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는 오롯이 네가 스스로 간 길에 달린 것이다. 그게 공평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결국 구원받아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사람, 하나님이 열납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너의 올바른 선택으로 얻은 결과이다. 반면 네가 끝내 구원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못하며 하나님에게 얻어지지 않고 하나님에게 열납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또한 너 자신의 선택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그래서 하나님 사역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많은 선택의 여지를 주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결말이나 종착지 등 모든 사람과 일을 진리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결말과 종착지 역시 진리로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 사역에서 영원불변의 취지이다.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계한다고 해서 저자세로 쩔쩔매다가 끝에 가서 너를 열납하고 은혜를 내려 구원받게 하지 않을 것이며 네가 무슨 공로를 세웠다고 해서 구원받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결국 얻어서는 안 될 결말이나 좋은 종착지를 파격적으로 얻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란 말이다. 모든 사람이 마지막에 어떤 결말을 맞는지는 자기가 가는 길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보자. 가령 하나님이 네게 하나의 환경을 배치하면 그 환경에서 네가 해야 할 것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인식하는 것,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는 것, 자신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생각과 관점을 인식하는 것, 자신의 결핍과 부족함을 인식하는 것이나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오해와 원망을 인식하는 것이다. 더 이상 이치를 따지거나 교활한 궤변을 늘어놓지 않고 순종하면서, 상응하는 진리를 구해 현재 상태를 바꾸고 진리를 받아들여 진리 원칙대로 하면 성과를 거둘 것이다. 같은 유형의 일이 또다시 닥친다면 너는 자연스럽게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것이니 하나님이 너를 도와주려 특수한 환경을 배치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사람이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무의미한 사역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태도가 달라진다. 어떤 사람들은 일이 닥치면 진리를 구하지 않고 스스로 반성하지도 않으면서 한결같이 소극적으로 원성만 높인다. 하나님과 사람을 원망하며 하나님에 대해 관념을 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판단한다. 그를 책망하고 폭로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스스로 변명할 구실을 찾고 소극적이고 태만하게 사역하는 것도 모자라 망쳐 놓기까지 한다. 이런 사람은 구제 불능으로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사람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어서 설교를 들어보려 하고 진리에 이르고자 하며 긍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면 하나님은 여기에서 네 마음을 감찰하여서 네가 진리를 구할 때 네게 감동을 준 다음 네가 진리를 실행하는지 감찰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자신을 인식하거나 회개하는 것을 택하지 않고 소극적이고 태만하게 사역하면서 이치를 따지며 변명하고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소란을 일으키는 것을 택한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고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하나님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고 네게 감동을 주거나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구하라고 독촉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관여하거나 간섭하지 않고 네가 실컷 네 모습을 드러내게 할 것이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선가 네 양심에 ‘이러면 안 돼.’라는 생각이 들거나, 간혹 자기가 처한 환경과 유사한 체험 간증을 듣고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다가 문득 자신의 행동이 부적절하고 비이성적이며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리게 된다. 이때부터 너는 소극적이지 않고 연약해지지 않는다. 자기 입으로 변명하는 게 겸연쩍어지고 교란하고 망치려는 생각이나 행동이 점점 줄어들고 정도가 약해진다. 결국 어떤 지경에 이르든 어쨌든 모두 개인적인 행동이고 하나님은 은밀히 그리고 묵묵히 지켜보기만 한다. 지켜보는 목적은 증거를 찾아 마지막에 너를 평가하기 위함이다. 니느웨가 멸망하려 할 때 하나님이 요나를 보내 니느웨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게 했을 뿐 그들이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며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주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요나를 보내 말씀을 전하고 은밀히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다. 그들이 그 통보를 듣고 어떤 일련의 반응과 행동을 보이는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각 부류의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의 그 통보에 대해 각 부류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은밀히 지켜보기만 했다. 지켜본 의도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방관자처럼 사태가 커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일이 어떤 쪽으로 전개되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어떤 개입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전하게 한 그 몇 마디 말씀 외에는 추가적으로 아무런 사역도 하지 않았고 그 어떤 권면의 사역도 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불필요한 말씀을 전하지도 않았다. 오직 요나의 입을 통해 전한 몇 마디 말씀이 전부였다. 물론 현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 원칙 역시 변치 않는다. 하나님은 여전히 이렇게 역사하고 인간에게 시종일관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한 사람을 바꾸려는 것이든, 아니면 한 사람에게 무엇을 온전케 하려는 것이든 하나님 사역의 태도와 원칙, 방식은 변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지은 것은 살아있는 사람이며 자유 의지를 가진 피조된 인간이지 기계나 꼭두각시가 아니다.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하거나 하나님이 어떤 일을 이루려 할 때 먼저 환경을 배치하거나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사람에게 분명하게 알려준다. 나머지는 사람의 자유 의지나 사람이 갖추고 있는 각 측면의 조건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태도로 니느웨 사람을 대했고, 지금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 역시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 사역의 원칙은 변하지 않았고 영원히 이렇게 역사할 것이다. 그가 지은 인간에 대해 하나님이 역사하는 원칙은 영원히 이러할 것이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에게 전부 통보하고 나서 쉴 곳을 찾았다. 그러고는 그 도시 사람들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하나님 말씀을 모두 전하여 하나님이 니느웨를 멸하려 한다는 소식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된 후 그들 가운데 어떤 동요가 일어날지 또 어떤 움직임이 일어날지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는 그저 관찰할 뿐이었다. 물론 관찰에는 시간이 걸린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만약 사태가 좋은 쪽으로 전개된다면 물론 하나님은 기뻐할 것이다. 반면 사태가 나쁜 쪽으로 전개된다면 하나님은 아마 비통할 것이다. 그런데 상황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이 비통한 이유는 그가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멸망에 직면하면 하나님은 비통하고 한 생명이 사라지려 하면 하나님은 비통하다. 하지만 패괴된 인간이 이렇게나 무감각하고 미련하며 이렇게 거역한다면 하나님은 비통하지 않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대로, 하나님이 역사하는 방식, 그리고 피조물을 처리하는 방식과 원칙대로 그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여기에는 사람이 생각하는 정이나 기분이 없고 오직 창조주가 행사하는 원칙과 준칙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런 측면에 관해 사람은 피조된 인간의 얄팍한 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짐작하거나 억측하지 말고, 자신의 관념을 내려놓고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와 방식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여 환경을 배치하고 사람과 일을 안배하여 훈련하고 단련시켜서 진리를 내면에 심는 것은 무엇에 따른 취지겠느냐? 생명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원칙을 따른 것이다. 이는 피조된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정이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정이 없다. 이런 취지의 원칙은 사람의 육적인 혈연의 정을 뛰어넘는다. 물론 이것은 어떤 인정도 아닌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원칙에 따라 생긴 것이다. “이건 하나님의 구도가 아닐까요? 이런 게 차원이 높은 게 아닌가요?”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맞는 말이겠느냐? (아닙니다.) 차원이나 구도는 사람에게 써도 되지만 하나님에게까지 쓰지는 말아라. 이것은 구도나 차원의 것이 아니다. 이런 측면은 창조주의 사랑스러운 점이라고 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신분과 본질의 표출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한다. 하지만 이렇게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원칙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 원칙은 정이나 육에 속하지 않는다. 무엇에 속하느냐? 하나님 고유의 진리 원칙에 속한다. 생각해 보아라. 사람은 자녀가 생기면 대단히 예뻐한다. 자녀에 대한 정이 너무나도 깊은 나머지 받들어 모시지 못해 안달이고 온종일 자녀 곁을 지키려 하지 않느냐.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런 정이나 인정이 없다. 사람은 혈연관계로 인해 자녀에게 이런 정을 품는데 그런 정은 사람이 이성과 원칙을 상실하게 만든다. 이는 정상 인성의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표출이나 사랑의 실현이 아니라 순전히 정과 혈기에 속하는 것으로 혈연관계 때문에 생긴 정이다. 정은 진리가 아니며 정상 인성이 갖추어야 할 것도 아닌 부정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할 때 남달리 사랑하고 귀여워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어떤 태도로 인간을 대하더냐? 하나님은 피조된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생명을 존중하는 원칙에 따라 너를 택하였고, 너를 책임지며, 네게 역사하고, 대가를 치르며, 네게 말씀으로 진리와 생명을 공급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사람을 꽉 잡고 놔주지 않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는다. 속된 말로 휘어잡는다고 하는데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휘어잡지 않고 결코 사람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을 받으려고 하나님을 한손에 휘어잡으려고만 하고, 하나님이 복을 내리게 강요하는 것도 모자라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나님에게 들러붙고 하나님을 휘어잡으려고만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휘어잡지 않았다. ‘휘어잡는다’는 속된 말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구체적이어서 사람이 이해하는 데 용이하다. 하나님은 너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게 아니다. 너는 자유다. 네가 만약 하나님을 귀하게 여긴다면 네 생명을 존중하고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서 네게 하는 이 모든 사역과 관련하여, 너는 하나님이 이 모든 환경을 네게 배치하고 안배하면 경계하거나 오해하고 맞서거나 거부하지 말고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을 하고 피조물이 창조주를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인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측면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교제하였다.

하나님 사역을 대하면서 사람은 관념과 상상을 표출했다. 이 관념과 상상이 무엇이더냐? 사람은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를 사람에 대한 조종과 통제로 이해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더냐? (그러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마음속 깊은 곳에 하나님에 대한 은근한 두려움을 품고 있다. 하나님이 언급되면 하나님이 사랑스럽지 않고 무섭다고 느낀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배치와 안배에 순종할 때까지 하나님은 사람을 온전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관념이 아니냐? 사람은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상상하느냐? 하나님을 독재자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의 통치와 정책을 반드시 받아들이고 깍듯한 자세로 그의 어떤 말이나 계획도 받아들여야 하며 뒤에서 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해서는 안 된다고, 그가 환경을 배치하면 받아들여야 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징벌받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하더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를 존중하고 책임지며 피조된 인류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니 사람은 배은망덕하게 은혜를 모르면 안 된다. 은혜를 안다면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그 안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 안의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하여 자기가 실행하고 바꿔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를지언정 최소한 하나님을 경계하거나 오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너는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설령 네가 이런 환경에서 아무런 수확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곡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네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 너같이 미천한 피조물에게 기대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네 생명, 오늘날 네가 누리는 모든 것은 전부 하나님이 준 것이고, 네가 깨달은 그깟 도리 역시 하나님이 네게 내려 준 것이다. 네 자유 의지, 자질과 은사, 크고 작은 능력과 재주 모두 하나님이 내려 준 것인데 하나님이 네게 무엇을 기대하겠느냐? 하나님이 진리를 네 내면에 심어 네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하나님은 영광 받는데, 이것을 하나님이 네게 기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는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생각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어떤 영광을 받을 수 있겠느냐? 결과적으로 실질적인 득을 보는 쪽은 사람 자신이다. 하나님은 사역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영광을 받았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의 진리와 권병이 사탄을 물리친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다. 하나님 자신이 영광인데 너라는 미천한 피조물로부터 그런 시시한 영광을 받을 필요가 있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다. 굳이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사람이 결국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하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은 안식할 수 있다. 인간이 구원받음에 따라 하나님이 안식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대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실질적인 득을 보는 쪽은 사람 자신이 아니냐? 사람은 진리를 얻었고, 더이상 삶이 막연하지 않게 되었으며, 방향과 길이 생겼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더이상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게 되었고, 다시는 그 어떤 사악한 세력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진정한 피조물이 되었으며 죽음을 맞이할 일도 없어졌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냐! 가장 큰 득을 보는 쪽은 인간이다. 하나님 사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구원을 받아들인 인간 말이다. 이 측면이 확실하게 교제되었느냐? 여기에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를 사람에 대한 조종과 통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측면을 교제하지 않으면 사람은 말할 수 없거나 하나의 체계적 이론으로 형성되지 않은 사상과 관점을 늘 마음에 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본분 이행을 속박하지 않고 사람의 삶에 뚜렷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사람의 진리 추구와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한다. 따라서 사람은 이런 것들을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 이 측면의 문제가 해결되면 너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고 진리 추구의 길에서 한 측면의 장애물이 제거되며 진리 추구가 수월해질 것이다. 실제적인 어려움이 해결되면 하나님과의 거리나 걸림돌이 줄어드니 너는 훨씬 자유자재로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실행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전쟁터에 나갈 때와 마찬가지이다. 너희가 보기에 전장에 가볍게 무장하고 나가는 게 좋겠느냐, 아니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나가는 게 좋겠느냐? 어떤 쪽이 더 편하겠느냐? (가볍게 무장하는 쪽이 편합니다.) 가볍게 무장하는 쪽이 편하다. 무기만 메고 나가면 되니 이편이 단출하다. 만약 솥과 행장에 화장품이나 운동기구까지 메고 가면 부담이 너무 크다. 이렇게 많은 물건을 메고 전장에 나가면 너무 힘들고 싸울 때도 불편하다. 이런 관념과 상상은 사람이 짊어진 각종 짐과 같아서 어딜 가도 성가시고 번거롭다. 결론적으로 이런 것은 네게 수시로 지장을 주고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것을 가로막을 것이다. 중대한 일이 없을 때야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겠지만 중대하고 원칙적인 문제가 생기면 이것들이 너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을 것이다. 이것들이 나타나면 너는 너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나 갈등이 있다는 생각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이상 순수하지 않게 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이것들을 내려놓는다면 대단히 좋을 것이다. 마음이 가볍고 후련할 것이고 더이상 속박되지 않고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들이 무의식이나 마음속에서 문득문득 떠오르겠지만 네가 그것을 거의 해결했기 때문에 다음번에 일을 처리할 때는 훨씬 수월하고 쉬울 것이다. 비록 이런 관념과 상상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은밀히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네 주관적 의지로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분별했기 때문에 주관적인 측면에서 너는 그것을 내려놓을 것이고 그것에 영향받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너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는 기본적으로 사라지고 해결될 것이다.

진리 추구라는 주제에 관해 자주 이렇게 교제하는데 너희는 진리 추구의 중요성이 느껴지느냐? 주변에 잘 아는 사람이 교회에 의해 처리되거나 심지어 제명되고 출교당하는 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경험이나 교훈을 정리해 보았느냐? B팀으로 구분된 사람과 제명당한 사람의 주된 문제가 무엇이더냐? (주변에 잘 아는 사람이 B팀으로 조정되거나 제명당하는 것을 보면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지만 확실히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일이 생겨도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면 저도 결국 그들처럼 도태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처리하는 하나님 집의 원칙이 무엇인지 아느냐? 단지 인성이 나쁘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그들을 제명했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처리되지 않은 사람은 인성에 문제가 없고 진리를 사랑하며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자들이겠느냐? 그런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하나님 집이 사람들을 제명하거나 B팀으로 구분한 이유가 단지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싫어하기 때문이겠느냐? 그들의 인성이 나빠서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겠느냐? 아니면 외모가 형편없거나 일시적인 과오로 그들을 처리했겠느냐? 그것이 사람을 처리하는 하나님 집의 원칙이겠느냐? (아닙니다.) 누군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 집이 그를 처리하거나 그의 본분 이행 자격을 취소하며 쫓아내더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을 처리하고 쫓아내느냐? (그들이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여 하나님 집 사역에 심각한 손실을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된 원인이냐? (그렇습니다.) 또 어떤 이유가 있느냐? 거짓말을 밥먹듯 하여 쫓겨난 사람은 없느냐? (없습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싫어해서 쫓겨난 사람은 없느냐? 본분 이행에 충성을 다하지 않아서 쫓겨난 사람은 없느냐? (없습니다.) 대답해 보아라. 쫓겨난 사람들이 안타까우냐? 억울하게 쫓겨난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백이면 백 억울하게 쫓겨난 사람은 없다. 그들이 행한 악에 따르면 그들은 영계에서 열여덟 번 죽어도 모자란다. 그들은 징벌받아 죽은 다음 다시 살아나 징벌받아 죽고 또다시 살아나 징벌받아 죽는 식으로 열여덟 번 죽어도 마땅한 자들이다. 그만큼 온갖 못된 짓을 일삼고 극악무도한 것이다! 어째서 이런 사람들을 처리하고 출교시키겠느냐?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게 아니라 방해하고 교란하며 망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처리하는 것은 그들이 툭하면 거짓말을 하고 인성이 나쁘거나 지위와 권력을 놓고 다투며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자들도 있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사랑하느냐? 쫓겨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느냐?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사실상 그들이 처리되고 출교당한 이유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방해하고 교란하며 망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탄, 마귀, 큰 붉은 용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일을 저질러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을 심각하게 거스르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다. 쫓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쫓아낸 것이다. 하나님 집이 사랑이 없어서 사람에게 야박하게 굴거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게 아니라 그들이 도가 지나치게 행동해 방해와 교란을 일으켜 교회 사역에 너무나 큰 손실을 일으킨 것이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본분 이행이 아니고 봉사조차 아니다. 그들은 방해하고 교란하고 있으며 악을 행하고 있다. 하나님 선민 중 그 누구도 교회에 이런 사람이 존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네가 교회에서 비꼬는 말이나 거짓말을 조금 한다면 이는 그저 개인의 행동으로서 개인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방해나 교란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아무도 너를 처리하지 않는다. 네가 때때로 조금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성과가 있고 방해나 교란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하나님 집은 원칙대로 대하여 네게 계속 머무르면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방해와 교란을 일으켰다. 그들이 제멋대로 굴고 여기저기서 원칙을 어기면서 소란을 일으키고 불안을 조장하는 바람에 교회 각 측면의 사역이 무너지고 많은 형제자매의 본분 이행 성과가 물거품이 되었다. 그들의 방해와 교란이 야기한 결과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들여야 복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반드시 내쫓아야 한다! 그래야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여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형제자매들을 잘 보호할 수 있다. 이런 악인과 적그리스도를 제명해야만 형제자매에게 적절한 사역 환경과 생활 환경을 조성해 줄 수 있다. 이런 악인과 적그리스도는 교회에 남아 있으면 골칫덩이가 될 뿐이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난장판이 되고 아수라장이 된다. 그들의 행동은 봉사의 기준에도 못 미치고 그들은 그저 교란하고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짓만 일삼는다. 무슨 일을 하든 그들의 목적은 교회 사역과 교회 생활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이다. 이는 사탄의 심부름꾼이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이 교회에 남을 수 있겠느냐? 그들은 보통의 패괴된 인간이 아니라 사탄의 심부름꾼이다! 이런 자가 무슨 짓을 하더냐? 제물을 함부로 쓰고 하나님의 제물을 이방인에게 조건 없이 준다. 이방인에게 돈을 줄 때는 유독 통이 커서 받지 않게다고 해도 억지로 준다 이방인에게 일을 맡길 때는 보수는 백 위안이면 된다고 해도 기어이 삼백 위안을 주고 삼백 위안을 달라고 하면 굳이 오백 위안을 준다. 보수를 주고 난 뒤엔 추가로 보너스까지 챙겨 준다. 제물을 얼마나 지출할지 상부에 묻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어떤 사역을 하든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집이 당부한 원칙을 따르지도 않는다. 물론 진리 원칙을 따르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 성질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은 눈곱만큼도 돌보지 않는다. 이방인의 사정을 돌볼지언정 하나님 집의 이익은 돌보지 않고, 하나님의 제물을 가져다가 여기저기서 물 쓰듯 쓴다. 그 돈이 그가 벌어 온 돈이더냐? 이방인에게 보너스를 주고 선물을 줄 때는 거침이 없다.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도 소용없고 오히려 반대하는 사람을 훈계한다. 대답해 보아라.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냐? 이는 인간 말종이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을 제명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또 어떤 악행을 저지르더냐? 복음을 전한 숫자를 속여서 보고하여 하나님 집을 기만한다. 숫자를 속이지 않고 보고하는 사람은 호되게 괴롭히고 억압하여 숫자를 거짓으로 보고하도록 강요하며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다. 이런 자는 어떤 사람이냐? 이런 자가 사람이냐? 그들을 두고 단지 인성이 나쁠 뿐이라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을 뿐이라고 한다면 말이 되겠느냐? 헛소리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을뿐더러 정상 인성조차 갖추지 못했으니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한다고는 더더욱 말할 나위가 못 된다. 그들이 바로 마귀이다! 이제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들은 어떤 본성을 가졌느냐? (마귀의 본성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마귀의 본성을 가졌다. 그들은 제명당해도 “억울합니다. 전 그런 적 없어요!”라며 불복하고 원통해한다. 누가 보나 사실인데도 인정하지 않고 죽어도 굽히지 않는다. 이것이 그들을 제명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말해 주지 않느냐? 이런 부류를 제명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겠느냐? 그가 회개하겠느냐? 계속 본분을 이행하도록 그에게 기회를 주고 책망과 훈계만 한다면 그가 회개하여 개선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는 절대 회개할 리 없다. 이는 어떤 본성 본질이냐? 어떤 부류가 회개하지 못하고, 사실과 마주해도 회개하지 않느냐? (마귀입니다.) 마귀, 사탄의 본질을 지닌 자, 악령, 더러운 귀신은 회개할 줄 모른다. 네가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그는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악을 행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기를 인식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악을 행한 사실을 인정하면 진리를 받아들일 기회가 생기는데도 그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한 짓이 어떤 성질인지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소돔 사람처럼 말이다. 그들에게 “계속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이 도시를 멸하실 겁니다.”라고 알려 줬지만 그들이 받아들였느냐?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 마치 못 들은 것처럼 계속 자기 입맛대로 행동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전혀 회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멸망이라는 결말을 맞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준 기회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은 채 기어이 하나님에게 끝까지 대항했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그들을 동정할 가치가 있겠느냐? (그럴 가치가 없습니다.) 이렇게 동정할 가치가 없는 자들을 위해 나서는 사람이 있겠느냐? 그들에게 탄복하고는 ‘그들은 오랫동안 고생하면서 대가를 치렀고 열의를 다해 힘들게 사역했어. 그리고 개중에는 사역 역량과 리더십을 갖춘 자질이 준수한 사람도 있는데 쫓아내면 아쉽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아쉽겠느냐? (아쉽지 않습니다.) 아쉽지 않다는 것은 그들을 내쫓는 게 옳다는 의미이다. 그들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어떤 길을 가는지 지켜보아라. 만약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방해하고 교란한다면 이는 인간 말종이다! 피조물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책임을 다해야 하며 설령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방해와 교란은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방해나 교란은 사탄이나 하는 짓이지 패괴된 인간은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패괴된 인간이 사탄에게 패괴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본분을 이행하면서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교란하는 짓은 정상 인성이나 양심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양심과 이성에 구속받기 때문에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집 사역을 방해하거나 교란하거나 망치지 않을 것이다. 합격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평범하게나마 본분을 이행한다면 그런대로 괜찮다. 최소한 양심과 이성의 기준에는 부합한다. 그런데 그들은 이 기준에도 못 미치니 결국 악행을 일삼다 하나님 집에서 제명되거나 출교당하는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인간 말종이다!

이어서 어떻게 진리를 추구할 것인가에 관한 실행 가운데 ‘내려놓기’ 항목의 제3조 ‘하나님에 대한 거리감과 적대감 내려놓기’의 내용 중 관념과 상상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지금까지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관해 이야기해 보았는데 지금 다시 보면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더 있지 않느냐? 이 관념과 상상이 사람의 하나님 사역을 대하는 방식이나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방식, 하나님 사역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느냐? 교회에 보이는 각 부류의 사람 중 한 부류는 악인이고, 적그리스도이다. 그들이 어떤 악행을 저질러서 처리되든, 그리고 교회가 어떤 일을 계기로 그들을 제명하고 출교시키든 좌우간 하나님 집이 불신파, 악인, 적그리스도를 정리하는 것에 대해 관념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이 관념과 상상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과 주재에 대한 사람의 몰인식에서 비롯된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 속에서 교회는 하나님이 이 땅 위에서 역사하는 장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를 가장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장소이자 하나님의 주재를 가장 단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람은 항상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과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다. 사람은 교회가 하나님 사역과 관계된 장소라면 화목과 화평, 사랑과 관용, 희락과 위로가 넘치는 무사 평온한 곳이어야 한다는 관념과 상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교회에는 악인이나 적그리스도 따위가 있어서는 안 되고, 악인이 악행을 저지르는 일이 일어나서도 안 되며, 하나님의 주재 아래 진리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부류의 불법적인 사람, 불법적인 일, 혹은 사람의 마음이나 인정, 인성에 부합하지 않는 일은 더더욱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토록 화목하고 차분하며 상냥하고 긍정적이며 낙관적이고 진취적이어야 하며 심지어 그 어떤 다툼도 없고, 인성에 불필요한 그 어떤 추악하고 더러운 일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사람의 관념이다. 하지만 사실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교회에는 어떤 시기, 혹은 어떤 사역 단계에서든 악인이나 적그리스도가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여 하나님 집의 특정 사역을 망치고 교회 사역의 질서를 무너뜨리며 교란하는 일련의 일이 항상 일어난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사람은 의아해하면서 머릿속이 온통 어쩔 수 없다고, 이해되지 않는다고, 당혹스럽다는 생각뿐이다.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시긴 할까? 대체 어떻게 우리 인간을 주재하시고 그의 교회와 가족을 관리하시는 거야? 과연 신경 쓰시기나 할까?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데? 이런 불법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악인이 출몰하여 교란하는데 왜 나서서 저지하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도 나서서 저지하지 않으시는 걸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 아니었나?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민이잖아?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선민이 안식처와 피난처에서 평안하게 살도록 지켜주지 않으시는 거지?’ 사람에게 이런 풀리지 않는 의혹이 생기는 것은 사람의 온갖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관념은 주로 무엇에 관한 것이냐? 하나님 사역과 하나님의 주재에 관한 것이 아니냐? 교회에 악인이 악행을 저지르고 방해하며 교란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이 이런 일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은 그 일의 이면에 있는 경위나 그 마지막 결과가 어떨지 꿰뚫어 보기가 쉽지 않다. 사람이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에게 여러 가지 생각과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생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 집은 악인과 적그리스도를 사랑으로 대해야 해.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사회와 다를 게 뭐야? 사회에서는 이쪽 사람들이 저쪽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기 싸움을 하는데 하나님 집이 악인을 제명하고 출교시킨다면 이 역시 사람을 괴롭히는 게 아니겠어? 하나님 집에서 지내는 것도 그다지 안전하지 않네! 정말 시련이라도 닥치면 억울하게 제명될지도 몰라. 나 대신 나서주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하나님은 대체 어디 계신 거야? 어째서 목소리를 내주지 않으시고 일하지 않으시는 거지?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전능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주재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해주시면 우리 마음이 얼마나 든든하겠어?’ 교회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을 때마다 마음에 불안감, 의구심이 드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도망가고 싶은 사람, 소극적으로 변하는 사람도 있고, 특히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고 농락당하면 자포자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당하거나 이용당해 적그리스도와 한패가 된 후 교회로부터 격리되어 반성하거나 제명당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이 모든 일이 이해가 안 되고 또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는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이 대부분 하나님이 만물과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만유를 주재하며 인간의 운명을 주재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믿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의 주변에서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하고 동요하게 하는 일이 발생하면 이로 인해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게 되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도 흔들리는 등 일련의 문제가 나타난다. 만약 하나님의 주재라는 측면에 대해 사람이 온갖 관념과 상상을 품는다면 이런 관념과 상상은 분명 진리에 부합하지 않거나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의 그릇된 해석이나 오해일 것이다. 이어서 네 주위에서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사람과 일을 하나님이 어떻게 주재하는지,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주재하는 원칙이 무엇이고, 이루려는 목적은 무엇인지 교제해 보자.

‘하나님의 주재’라는 말에 관련된 내용은 무척 광범위하니 거시적인 내용은 제쳐두고 교회에 관해 살펴봤을 때,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한다는 사실은 실재적이다. 하나님의 주재는 헛된 말이 아니며 하나의 현상에 머물지도 않는다. 여기에는 실질적인 사례와 성과가 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하나님이 주재하는 원칙이 무엇이냐? 우선 이것부터 살펴보자. 교회가 받아들인 사람에게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가 있느냐? (있습니다.) 이는 허무맹랑한 얘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복음과 말씀이 누군가에게 임하여 그가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교회에 들어갈 수 있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이 정하심이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의 인성이 어떤지, 그가 악인인지는 일단 차치하고 그가 교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정한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심은 하나님이 주재하는 것 중 하나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일단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각 사람이 교회에 들어간 것에는 하나님의 정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심’이라는 단어가 다소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하나님 뜻대로 하심, 하나님이 주관하심’이라고 해보자.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대문이자 교회의 대문이다. 어떤 사람이 교회와 하나님 집의 정식 구성원이 되는지는 하나님이 주관한다. 몰래 들어온 불신파나 악인이든,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것에 관심이 있거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을 따르는 훌륭한 사람이든, 그가 교회에 등록하여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면 이는 어떤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에 모종의 속셈이나 목적이 있든 없든, 그의 인성이 어떻고, 교양 수준이나 사회적 배경이 어떻든, 그가 교회에 등록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결정하고 주관한 것이다. 사람이 주관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것을 결정할 수 없다. 이것은 사람의 뜻에 달린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회에서 지위가 있고 똑똑한 사람을 보고 나서 너는 ‘이 사람이 하나님 집에 와서 교회 리더가 되면 좋을 텐데. 우리 교회엔 이런 사람이 부족하단 말이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원하지 않아서 그에게 감동을 주지 않으니, 남들이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말씀을 교제해 주어도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것은 들으면 전부 깨우치는데 유독 하나님 말씀만 들으면 바보처럼 깨우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겠느냐? 복을 받는 것에는 관심이 있겠지만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진리에 대한 교제를 들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고 좌불안석이 돼서 설교를 두세 번 듣고 나면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진실한 믿음이 없는데 그에게 호의를 갖는다고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그를 교회에 데려다 놓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이 결정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은 안 된다고 하면, 그가 봉사하든 혹은 다른 어떤 역할을 맡든 하나님이 안 된다고 하면 네가 선의를 가지고 억지로 잡아끌고 와도 소용없다. 결국 그는 떠날 것이고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 누가 끌고 와도 소용없다. 이 일은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고 주관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별다른 사회적 지위가 없고 걸출한 인물도 아닌 데다가 자질도 그저 그렇고 이목을 끄는 외모도 아니지만 무척 순수하고 솔직하며 하나님을 믿는 것에 관심이 있다. 어떤 어려움이 있든 그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열정도 대단하다. 이런 열정만 봐도 형제자매의 기분이 좋아지고 하나님도 보고 좋아한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감동을 주어서 생긴 열정이다. 그가 교회에 등록하고 나서 매일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를 교제하는 훌륭한 사람을 보고는 자극을 받아 그것이 인생의 참도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누가 결정한 것이냐? (하나님께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했다. 하나님이 그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다. 하나님이 역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감동을 준 것이 아니라면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사람이 강제로 끌려왔다면 그는 조만간 떠날 것이다. 사람에게는 선천적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관이 없기에 그가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했다는 증거다. 하나님이 역사하면 그는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각 부류의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는 전제이며 그 전제는 하나님이 그를 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든 어쨌든 하나님 집의 문은 하나님이 주관한다. 못 들어오게 하는 사람은 문밖에 있고, 들어오게 하는 사람은 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원칙에 따라 한 사람을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는 물론 하나님의 원칙이 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원하고 어떤 사람을 원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교제하지 않겠다. 너무 복잡한 문제다. 왜 복잡하다고 하겠느냐? 어떤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서, 어느 시기에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지, 어느 시기에 어떤 본분을 이행하고 혹은 어떤 중요한 사역을 담당하는지, 어느 시기에 하나님 집 사역의 필요와 인력의 필요에 따르는지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시적이고 전반적으로 조정하지 당장 어떻게 하지는 않는다. 이는 매우 복잡한 일이라 말 몇 마디로 분명하게 알려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어쨌든 사람이 하나님 집의 대문에 들어가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 들어가고 나면 각 부류의 사람이 각종 본분을 이행하고 각종 역할을 감당하며 다양한 길을 간다. 각양각색의 사람이 저마다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그 모든 게 하나님의 주재와 관리 아래에 있다.

하나님이 주재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관리하에 섭리에 따라 나타나고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의 전개와 변화는 어떤 한 사람이 일으키거나 결정하는 게 아니며 거기에는 하나님의 주재가 있다. 물론 어떤 일이 결국 어떤 결과를 맺고 어떻게 규정되는지도 이런 사람이나 이런 일의 본질에 달렸다. 규정의 근거는 완전히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요구와 원칙을 따른다. 어떤 일이든 우연히 일어나지 않으며, 어떤 일이 결국 어떤 결과를 맺을지 역시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어떤 일이든 그 발단은 하나님이 안배하고 일으킨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일으키면 그 일을 할 한 부류의 사람을 안배하는데 그 사람은 봉사자나 부각물의 역할을 맡게 될 수도 있고 부정적인 역할을 맡게 될 수도 있으며 긍정적인 역할을 맡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역할이든 이 모든 일의 시작은 하나님이 안배한다. 하나님이 안배한다는 것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한 가지 해석은 긍정적인 인물이 그 일을 일으키고 수행하도록 하나님이 직접 긍정적으로 안배하고 감독하며 지도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안배’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이다. 다른 한 가지 해석은 하나님이 그 일을 수행할 영을 파견하고 보낸다는 것이다. 이 일이 사람이 보기에 부정적이고 사악하다면 이 부정적이고 사악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필경 부정적인 인물일 것이고, 애초에 하나님이 그들을 하나님 집에 들어가 부각물이나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는 인물로 정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런 역할을 시키는 것은 그들의 본성 본질이 그런 역할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을 실컷 표현하고 부각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전체 과정에서 긍정적인 인물의 모습이든 아니면 부정적인 인물의 모습이든 이 모든 일을 대하고 처리하는 하나님의 원칙은 섭리를 따르는 것이다. 긍정적인 인물은 이런 일을 바라보고 처리할 때 긍정적인 관점, 인성과 양심 기준에 부합하는 관점을 갖는다. 설령 일부 사람이 패괴 성품을 표출하고 줏대 없이 무조건 좋다고만 하거나 다른 패괴 성품을 표출하더라도 최소한 인성의 양심과 이성, 즉 처신의 마지노선은 지킨다. 하지만 부정적인 인물이 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이 개입하거나 인도하지 않고 섭리에 따라 그들이 실컷 자신을 표현하고 추태를 보이며 행동하도록 한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이 폭로한 악인, 적그리스도 등의 부정적인 인물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감당함으로써 어떤 사람이 마귀이고 악인이며 적그리스도인지, 하나님이 폭로한 적그리스도, 악인, 사탄, 마귀의 추태와 몰골이 과연 어떤지 실생활에서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준다. 만약 실생활에서 이런 부정적인 인물을 생생한 교재로 삼아 주지 않으면 네 마음속에 마귀, 사탄은 영원히 형태가 없는 일종의 짐작이나 이미지로만 남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생생한 사례들이 네 눈앞에 있다. 사람의 탈을 쓴 마귀가 생생하게 네 눈앞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들의 말과 행동거지, 그들의 언행 하나하나와 표정, 심지어 그들의 말투까지 생동감 있게 네 삶과 네 눈앞에 나타나 네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이는 네게 좋은 일이다. 교회에 이런 일이 거듭해서 일어나면 네가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불안일 것이니 하나님에게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두 번째로 너는 ‘진리로 나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배워서 다음에 또 이런 부류의 사람을 만나면 피해야겠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너는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고 악인을 멀리할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다. 세 번째로 이런 부류의 사람이 다시 나타나면 너는 이런 고민을 할 것이다. ‘이런 부류가 하는 말은 어쩜 큰 붉은 용이나 사탄의 말과 똑같을까? 그가 하는 말은 사람을 미혹하는 말이잖아? 그는 악인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적그리스도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그를 분별하고 폭로해야지 그에게 미혹되어서는 안 돼. 그를 멀리해야겠어.’ 이렇게 하나씩 체험하면서 너는 적그리스도, 악인, 사탄, 마귀를 분별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무엇이 방해와 교란인지에 대해 점점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고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글귀나 도리, 나아가 이미지에 머무는 게 아니라 점점 실제 생활에서 비춰보는 동시에 진리를 통해 이런 사람들을 바라보고, 일어난 일들을 진리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나면 끊임없이 자신의 관점과 입장을 바로잡고 자기가 과연 어떤 입장에 서서 이들을 대해야 하는지, 과연 어떤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봐야 하는지, 그들과 어떤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지 고민하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일에 직면하면 너는 너도 모르게 이런 문제를 고민하면서 끊임없이 진리를 구해 답을 찾고 결론을 도출하여 마침내 수확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하는 것은 그저 사람이 진리를 깨닫도록 그에게 진리를 공급하는 것뿐이다. 진리를 교제하든, 아니면 사람이 직면한 일에서 진리를 깨닫게 하든 어쨌든 하나님은 이런 환경이 일어나기도 전부터 억누르지 않는다. 만약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고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과 교회 사역에 도움이 된다면 하나님은 그것이 사람에게 일어나도록 허용한다. 그것을 저지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이 섭리대로 전개되도록 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하는 목적의 한 측면은 사람을 도태시키는 것이고 또 다른 측면은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물론 도태시키는 대상은 분명 봉사의 자격도 안 되어 부각물의 역할만 맡고 있는 사람일 것이고 온전케 하는 대상은 하나님의 선민,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일 것이다. 여기엔 두 가지 측면의 의의가 있다. 한 측면은 악인이 보이는 모습을 통해 악인을 드러내어 도태시키고 교회에서 제명하는 것이고, 다른 한 측면은 악인이 차츰차츰 자신을 표현하여 부각물이 되는 과정에서 하나님 선민이 분별할 줄 알게 하고 하나님 말씀 속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에 의해 진리가 사람의 내면에 실제로 심어지게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폭로한 각 부류의 악인, 적그리스도, 사탄, 마귀의 온갖 사악한 본질의 모습을 사람의 실생활에 보여줌으로써 사람이 사악하고 추하며 부정적인 여러 유형의 사람과 일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인지하게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네게 “숯불을 만지면 안 된다. 손을 데어 아플 것이다.”라고 알려주었는데 네가 숯불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숯불을 만지면 어떤 느낌인지도 모른다면 네게 말해줘도 네가 이해한 것은 하나의 도리일 뿐이다. 숯불이 공이나 막대기 모양일 거라고 상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숯불의 색깔은 어떨 거 같으냐? 만지면 어떤 느낌이겠느냐? 과연 어떻게 아프겠느냐? 모른다. 숯불에 대해 그가 가지고 있는 인상은 그의 사고력으로 상상할 수 있는 하나의 이미지일 뿐, 실물과는 영원히 무관하다. 그러니 어느 날 하나님이 숯불을 한 바가지 가져다 네 앞에 놓으면 너는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그것이 무척 뜨거울 것 같다는 느낌만 받는다. 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것을 만져본다면 더 뜨겁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만져봐도 되지만 너무 오래 대고 있지는 말아라. 그러지 않으면 피부에 화상을 입을 것이다.”라고 말하면 멍청한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움켜쥐었다가 데는 바람에 손이 온통 물집투성이가 된다. 반면 똑똑하고 신중한 사람은 한 손가락으로만 살짝 대보았다가 1초 만에 오므린다. “앗! 뜨거워! 진짜 불이잖아!” 다섯 손가락으로 만지든, 한 손가락으로 만지든 어쨌든 네가 만진 것은 이미지나 글자가 아닌 실물이다. 너는 숯불을 만진 느낌과 체험이 어떤 건지, 숯불이 네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다음에 다시 숯불을 본다면 너는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알려 줄 것이다. “몸을 녹이거나 옷을 말리고 곡물을 볶는 건 괜찮은데 절대 손을 대지는 마세요. 댔다가는 화상을 입고 물집이 잡힐 겁니다.” 그 사람이 “물집 잡히면 어떻게 되는데요?”라고 물으면 너는 “적어도 손으로 물건을 잡지 못하게 되겠죠. 밥 먹기도 불편하고 일할 때는 더 불편할 거예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경험담 아니겠느냐? 그때 뼈저린 경험을 하고 나서 숯불에 데는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두 번 다시 숯불을 함부로 만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고 각종 일이 사람에게 일어나게 안배하는 목적은 사람이 그를 통해 공과를 배워 유익을 얻게 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급하는 진리와 말씀을 사람의 내면에 똑똑히 심기 위함이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더 이상 하나의 도리나 구호, 규례가 아닌 사람의 생명, 사람이 의지하는 원칙과 준칙, 생명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역이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나님의 주재에서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한 가지 일의 발단을 안배하고 나면 그 일이 전개되는 과정을 인도하고 이끄는데 그 일의 최종 결과가 어떤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무엇을 얼마나 얻게 되는지, 사람과 일의 궁극적인 목적과 안배가 어떤지는 당연히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모든 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원칙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모든 일의 시작과 과정, 결과만 정해 놓을 뿐, 전반적인 일의 과정은 하나님이 정한 방향대로 자연스럽게 전개되게 하는데 그 목적은 모든 것이 자연법칙을 따르게 하거나 혹은 모든 것이 아무 왜곡이나 가공이 없는 상태에서 제 역할을 함으로써 하나님이 거두려는 성과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한 가지 일이 시작되고 일어나도록 안배하면 이 일을 접하는 사람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어떤 관점으로 이 일을 대하는지 관찰한다. 마음을 기울여 바라보는지 아니면 신경 쓸 생각이 없는지, 열심히 이 일에 몰두하는지 아니면 그 일에 반발하고, 그 일을 거부하고 회피하는지 하나님은 각 부류의 모습을 관찰한다. 그렇다면 각 부류의 모습에 하나님이 개입하느냐? 개입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게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준다. 너는 집중하면서 이 일을 진지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고, 거들떠보지 않고 아무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를 취할 수도 있으며 물론 권리를 포기하고 회피하거나 관여하지 않는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일 전체는 하나님이 나타내고 일으킨다. 이는 하나님이 한 가지 일을 주재하는 첫 단계이다. 그 일이 전개되기 시작할 때 어떤 사람들이 이 일에 관여하고 어떤 사람들이 연관되는지, 연관된 후에는 그 일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는지와 관련하여서는 물론 하나님이 그 모든 사람을 동원하고 안배해서 일이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하나님이 바라는 성과로 전개되게 한다. 마찬가지로 이 일이 공개되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각 부류의 사람이 어떤 태도와 모습, 주장과 관점을 지니는지도 하나님이 지켜본다. 네가 그 일에 열의를 가지고, 그것을 진지하고 신중하며 참답게 대하는지 아니면 냉담한 자세로 그 일을 거들떠보지 않고 무감각하게 대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회피하거나 반감을 갖는 태도를 취하는지 지켜보면서 네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 진리를 참답게 대하는 사람인지 살펴본다. 일이 전개되는 전체 과정에서 네 태도가 점점 명확해질수록 하나님도 너라는 사람이 진리와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을 대하는 태도를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며, 진리 추구를 대하는 태도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일 전체가 마지막에 이르러 필연적인 결과가 생겼을 때 하나님은 여전히 일 전체에서 네가 무엇을 얻었고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네게 무슨 속셈이 있는지, 네가 이 일에서 체험과 교훈을 얻어 자기를 보호하고 줏대 없이 무조건 좋다고만 하는 데 집중하는지, 아니면 예전처럼 얼간이같이 굴지 않고 진리 원칙을 따르는지 지켜본다. 그리고 하나님은 네가 어떤 태도로 그 일을 대하는지 냉담하게 자기 관점을 드러내지 않고 남의 일처럼 여기는지, 아니면 그 일에 처했을 때 또다시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원망을 심화시켜 더 많은 관념과 상상을 품고 나아가 회피하려 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너는 교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관념과 의혹을 품는다… 각 부류의 사람이 각 유형의 일이 전개될 때 품는 저마다의 생각과 관점을 하나님은 관찰하고 기록한다. 어느 해, 어느 날, 몇 시, 몇 분, 몇 초에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네가 무슨 속셈을 가지고 어떤 계획을 세우는지, 네가 어떤 측면의 진리를 깨달았고 누군가 어떤 측면의 진리를 교제했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반발하고 귀찮아하며 듣기 싫어한다든가 줄행랑을 놓는다든가 하는 것을 하나님은 전부 감찰한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와 하나님 집, 주변에 일어나는 사람과 일에 대해 시종일관 무감각한 목석처럼 아무런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관점을 죽어도 포기하지 않는다.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만 않으면 돼. 그리고 어떤 사람이나 일과 마주하든 평가하지 않고 특별한 태도나 관점을 보이지 않으면서 로봇처럼 꼬박꼬박 본분을 이행하고 잘 봉사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이 또한 일종의 생각과 관점이다. 물론 이런 생각과 관점도 하나님이 관찰하고 기록한다. 하나님이 모든 일과 만물을 주재하고 사람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구체적인 일을 주재하는 목적은 사람에게 환경을 배치하고 생생한 교재를 주어서 각 부류의 사람이 각종 일에서 자신의 가장 솔직한 면, 자신의 가장 솔직한 생각과 관점,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자신의 가장 솔직한 태도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이런 태도는 완전히 자유분방한 상태에서 보이는 모습이며 하나님은 결코 간섭하거나 개입하지 않고 조종하지도 않는다. 그저 각 부류의 사람이 섭리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실컷 표현하게 하고 자신의 태도를 취하게 하여 마지막에 사람의 이런 모습에 따라 사람을 드러내고 각 부류의 사람을 대할 뿐이다. 여기에서 각 부류의 사람에는 무엇이 포함되느냐? 그리고 각 부류의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안배하느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얻게 하고, 진리에 관심이 없지만 봉사는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마음 놓고 봉사하게 하며, 진리에 반감을 품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 또한 진리를 싫어하는 그들의 태도를 드러낸다. 만약 그들이 마음 놓고 봉사할 수 있거나 봉사에 적합하다면 하나님은 우수한 사람을 골라 그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자격을 줄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봉사에 부적합하거나 그들이 진리를 싫어하는 정도가 일정 정도에 이르러서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기회를 통해 그들을 제명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사역은 사람의 관념에 어긋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관용과 사랑스러운 점을 알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이런 실제적인 사역을 통해 사람을 인도하여 경험하게 하시는데 그 이면에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이 일을 통해 알게 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각별한 마음, 하나님 사역의 지혜 그리고 그가 구원하려는 인간에 대한 책임감 있는 태도가 담겨 있다. 또 한 가지 측면은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은 인간이 지니지 못한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 결코 건성으로 하지 않고 매우 신중하고 성실하게 임한다. 특히 사람이 진리를 얻는 일에 대해서는 각별히 신중하고 성실하게 한다. 사람의 생명을 책임지고 사람의 결말을 책임지려면 하나님은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 관점에서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은 이렇다. 사람이 자신의 생명과 결말, 종착지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든, 진지하고 신중한 태도이든, 건성으로 임하는 태도이든, 어쨌든 만약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너를 택했다면, 하나님이 네게 진리를 공급하여 너를 구원하고자 한다면 너의 모든 언행, 모든 일에서의 네 태도를 훤히 꿰뚫어서 네 모든 태도에 따라 최종적으로 네 결말을 규정하고 네 모든 태도에 따라 네가 결국 진리를 얻는 사람인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너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을 참답게 대하거나 깊이 묵상해 본 적이 없어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구원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피조된 인간을 주재하는 창조주는 사람처럼 어리석지 않기에 인류 구원 사역을 진지하게 수행한다. 그는 너를 지었고 너를 택했다. 그가 사람을 완전히 구원하겠다고 사람에게 약속했다면 이 사역을 이루어야 하고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 사역을 이루고 끝까지 책임지는 데는 실제적인 모습이 있고 실제적인 사역의 내용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행사하고 하나님의 태도는 이렇게 명확하다. 하나님은 너를 속이지 않을 것이고 하나의 구호로 대충 얼버무리지 않을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치른 진실한 대가와 사람에 대한 책임감 있는 태도가 더더욱 구현된다.

사람을 구원하고 모든 것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원칙과 목적을 사람이 깨닫고 나면 하나님의 이런 측면에 대한 관념과 상상이 어느 정도 해결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은 무엇을 깨달아야 하겠느냐? 하나님이 각종 일을 주재하든 아니면 어떤 구체적인 일을 주재하든 사람의 협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80퍼센트, 나아가 90퍼센트라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관점, 그 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네게 일이 생겼을 때 끽소리도 하지 않고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으면 하나님이 너를 상대하지 않고 등한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너를 등한시하는 게 그렇게 좋다면 차라리 하나님을 믿지 말아라. 네가 하나님 집에서 지내는 이상, 하나님이 널 택한 이상 하나님은 절대 너를 등한시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만물을 감찰하는데 하물며 너같이 작디작은 사람은 어떻겠느냐? 네가 설령 한 마리 개미일지라도 하나님이 택했다면 하나님은 수시로 너를 감찰하고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이 감찰하는 이상 너는 회피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회피하는 게 현명한 선택은 아니다. 마주해야 한다. 네가 마주하고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하나님이 네게 배치한 환경에서 그가 깨닫게 하려는 진리를 얻을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회피하면 은연중 진리를 깨닫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상 측면의 진리 외에 대부분의 진리, 즉 사람이 생활하고 생존하는 다방면에 관련된 진리는 모두 하나의 환경이나 일, 한 부류의 사람을 통해 실생활에서 일어나고 나타남으로써 사람에게 진실한 체험과 인식, 체험을 준다. 그러고 나서야 사람은 그 측면의 진리를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다. 이 점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미온적인 태도로 진리를 대하면서 늘 회피하려고만 하고 진리에 따라 각 부류의 사람과 각 유형의 일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지도 않으며 진리를 적용하여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훈련도 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런 태도나 관점을 보이지 않고 교제와 토론에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매일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으며 찬송을 배우고 본분을 잘 이행하는 데 만족하는 것으로 끝이다. 그렇다면 내가 알려 줄 것이 하나 있다. 봉사자의 특징은 힘만 쓰려고 하지 어떤 측면의 진리에도 관심이 없고 참답게 대하지 않으며, 귀찮게 여긴다. 이것이 바로 봉사자다. 네가 만약 사탄에게 부역하는 자가 아니고, 악인이나 적그리스도 아니라면 기껏해야 봉사자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다르다. 그는 봉사하고 힘쓰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각 유형의 사람과 일에서 각 진리를 배우고 깨달아 그 진리로 각 유형의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리한다. 그러면 각 진리가 차츰차츰 사람의 내면에 심어져 사람의 생명이 되고 사람이 행동하고 처신하는 원칙이 된다. 진리가 네 생명이 되어야 네가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날 수 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성과에 도달할 수 없다. 일을 체험하는 것을 두려워 말고 사람을 분별하는 것을 두려워 말아라.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 거기엔 하나님의 주재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하는데 두려울 게 무엇이냐?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한다면 그 일이 일어난 것은 적어도 네게 악의가 아니며 시험도 아니다. 그것은 네가 공과를 배워 도움을 얻고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함이며 너를 온전케 하기 위함이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고 네게 일어난 일을 긍정적인 교재로 대하며 진리를 구해 배워야 할 공과를 배울 수 있다면 진리는 자연스럽게 은연중 네 내면에 심어져 네 생명이 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각 유형의 일이 일어날 때 그 일에 냉담하고 회피하며 참여하지 않고 몰두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면서 관점을 밝히지 않고 교제하지도 않는 것은 잘못되었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어째서 잘못되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겠느냐? 이런 태도를 통해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의 구원과 아름다운 뜻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온전케 함에도 무관심하며 그것을 거들떠보지 않고 거부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너의 이런 태도를 보고도 너를 구원하고 싶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려 해도 네가 협력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구원하겠느냐? ‘주는 떡도 못 받아먹는다’는 말은 이런 부류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전체 경륜 중 특히 마지막 이번 사역에서 많은 진리가 선포되었다. 네가 들어서 얼마나 체험하고 깨달았든 최소한 네가 알았다면 하나님은 추가로 개입하거나 붙들어주는 사역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저 네 태도와 모든 일에서의 협력을 기다릴 뿐이다. 하나님은 네 태도와 네 관점, 네 추구와 네가 가는 길을 보려 한다. 만약 네가 사람이나 일과 마주할 때마다 아무런 태도나 관점을 보이지 않고 늘 말이 없다고 하나님에게 기록되었다면 너는 바보가 아니냐? 어떤 사람이 늘 말이 없느냐? 귀머거리, 벙어리, 바보, 백치가 아니더냐? 네가 아무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기록했다면 최종적으로 점수를 매길 때 하나님은 네게 0점을 줄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이 “너는 대가를 치르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면 너는 “원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의지가 있느냐? 맹세했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의지만 있을 뿐 이번 환경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물어보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네가 환경을 체험할 때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결국 하나님은 네게 2점밖에 주지 않을 것이다. 왜 2점을 주겠느냐? 너의 그 얄팍한 의지로 2점을 얻은 것이다. 망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네게 구원의 희망이 있겠느냐? 구원의 희망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며 진리 추구의 길을 택하여 받는 보상이다. 따라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두려워하면서 회피하거나 머리를 싸맨 채 겁쟁이가 되지 말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마주해야 한다. 네가 겁을 먹고 일을 두려워한다면, 누구와 관련된 일이든 너는 평가하지 못할 것이다. 말실수해서 정체가 탄로나 다른 사람이 꿰뚫어 볼까 봐 늘 걱정하고 참여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기권하는 것이다! 네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사실 너는 스스로의 결말을 결국 2점밖에 받지 못하는 것으로 진작에 정해버렸다. 얼간이가 아니냐? 2점은 얼간이가 아니냐? 네가 2점밖에 받지 못한다면 평생 하나님을 믿은 것이 허사가 아니냐? 이번에 헛믿으면 정말 허사가 된다. 인류가 종말에 이르러 하나님이 더 이상 인류 구원 사역을 하지 않을 경우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텐데 이 마지막 기회도 잡지 못해 구원 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깝겠느냐! 네가 90점, 80점, 하물며 70점이나 60점만 받아도 구원의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가서 0점이나 2점만 받지 말아라. 그러면 희망이 없다. 하나님이 배치한 모든 환경에서 너는 방관자가 되지 말고 참가자가 되어 그 일원이 되어라. 단, 최소한 한 가지 원칙은 지켜야 한다. 바로 교란하지 않는 것이다. 참여해서 자신의 관점을 밝히고 평가할 때 그것이 전문적인 의견이 아닌 글귀나 도리더라도 상관없다. 다만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실행하며 진리에 순종하는 원칙과 마음으로 모든 일에 참여하여라. 그래야 네 구원에 희망이 생긴다. 구원의 희망은 무엇을 바탕으로 생기느냐? 일이 생길 때마다 진리에 이르고 진리를 향해 생각하며 진리에 공을 들이는 것을 바탕으로 희망이 생긴다. 이것을 바탕으로 해야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실행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일이 일어날 때마다 늘 방관자가 되어 평가하지 않고 규정하지 않으며 개인적인 의견을 밝히지 않으면, 또 그 어떤 일에도 관점을 갖지 않고, 설사 관점을 갖더라도 밝히지 않으며, 옳고 그름을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마음을 걸어 잠그고 속으로만 생각하면 결국 진리를 얻지 못한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빛 좋은 개살구다. 불쌍하지 않으냐? 하나님의 사역에서 네가 십 년 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십 년 동안 방관하고 이삼십 년간 믿으면서 이삼십 년간 방관했다면 최종적으로 네 결말을 규정할 때 하나님은 네 기록에 2점이라는 점수를 매길 것이니 그렇다면 너는 얼간이다. 진리를 얻을 기회, 구원받을 희망을 제 손으로 완전히 끊어버렸으니 말이다. 마지막에 얼간이라는 명칭을 얻어도 할 말이 없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얼간이가 되지 않는 비결이 무엇이겠느냐? (방관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방관자가 되지 말아라.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해야만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무슨 일에든 참여하라는 말씀인가요? 그런데 사람들은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걸요.” 참여하라는 것은 일이 일어났을 때 진리를 구해 공과를 배우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한 부류의 사람을 만나면 너는 그 부류의 모습과 행동을 통해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 그가 진리를 어겼다면 그의 어떤 행동이 진리를 어겼는지 분별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사람이 악인이라고 한다면 너는 그의 어떤 말과 행동, 어떤 악행을 저지르는 모습으로 인해 그가 악인으로 규정되는지 분별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 않고 팔이 밖으로 굽는다고 하면 너는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봐야 한다. 알아보고 끝이 아니라 너는 생각해 봐야 한다. ‘나도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런 짓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사람이 없으면 나도 그와 같은 결말을 맞게 되지 않을까? 그럼 너무 위험하잖아? 하나님께서 이런 환경을 배치해서 내게 알려주셔서 다행이야. 이건 내게 최고의 지켜주심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한 가지를 인식하게 된다. 그런 부류의 사람이 걷는 길을 가면 안 되고 그런 부류가 되지 않게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닥치든 공과를 배워야 하고, 꿰뚫어 보지 못해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드는 일에 대해서는 질문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를 구해 실상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이것은 호기심이 아니라 참답게 대하는 마음이다. 참답게 대하는 마음은 형식적으로만 하거나 부화뇌동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 있는 태도다. 문제를 똑바로 이해하고 나서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다음에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실행의 길을 가지고 정확하게 실행할 수 있어 마음이 평안하고 든든하다. 어떤 일이든 다른 사람이나 대세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실상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거기에서 진리를 얻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원칙을 배워 참답게 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본분을 늘 건성으로 이행하다가 본분 이행 자격을 박탈당한 사람이 있으면 너는 “겉으로 보기에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왜 저는 그가 건성으로 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요? 제가 그에게 미혹된 걸까요? 그가 본분을 어떻게 건성으로 이행했나요? 그가 어떤 일을 건성으로 했죠?”라고 말한다. 건성으로 하는 그의 몇몇 모습을 다른 사람이 알려주면 너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 위장에 능한 사람이군요! 겉으로는 정말 훌륭하고 말도 잘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얼마나 내리셨습니까! 우리는 양심 없이 굴면 안 됩니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해요!’라고 했어요. 이런 그의 말에 저는 그가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줄만 알았죠. 그가 이렇게나 심각하게 건성으로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이건 저를 미혹한 게 아닌가요? 저는 사람을 분별하지 못했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사람을 대할 때 진리 원칙을 따르지 않았어요. 오로지 그의 그럴듯한 말만 듣고 그의 본분 이행 성과, 구체적인 행동과 모습, 그의 본질은 살펴보지 않아서 이 일에서 실수를 범했습니다. 사람이 겉으로 훌륭해 보인다고 해서 정말 훌륭한 건 아니고, 그럴싸하게 말한다고 해서 꼭 양심과 인성이 있는 사람은 아니군요. 앞으로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사람을 보고 사람을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겠어요. 두 번 다시 속아 넘어가선 안 되겠죠!” 잘 보아라. 어떤 일이 일어나든 조금만 참답게 대하고 진리를 구하여 결론을 도출하면 수확이 생긴다. 네게 이런 수확이 생긴다면 좋은 일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네가 사람을 분별하는 일에서 식견을 키우고 유익을 얻는 것이 바로 진리를 참답게 여기고 진리에 공을 들이면 돌아오는 수확이다. 네가 이렇게 참답게 대하지 않고,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다가 쫓겨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그가 어째서 건성으로 임했죠? 왜 쫓겨났나요?”라고 물어보지 않고, 그저 속으로 ‘건성으로 하는 게 대수야? 어쨌든 나만 쫓겨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라는 생각만 한다면 네가 이 일에서 경각심이 들고 교훈을 얻으며 분별력을 키울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왜 그러지 못하겠느냐? 이 일에 관심이 없고 이 일을 참답게 대하지 않으며 자신의 생명 진입이나 진리 추구에 부담이 눈곱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남들이 진리 추구나 생명 진입에 관한 일을 교제해도 관심이 없고 참여하지도 않으며 기껏해야 무성의하게 한두 마디 호응해 주고 그만이다. 이런 부류가 많지 않으냐? 일이 일어나면 대충 형식적으로 하는 것만 좋아하고 자신의 생명 진입과 진리 추구에 아무런 부담이 없다. 남들과 친교 할 때 시비 따지기를 좋아하는 것 말고는 생명 진입과 관련되거나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서 사람이 배워야 할 공과에 관련된 일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 자기가 맡고 있는 대단치 않은 일을 마치고 나면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정신을 놓고 쉬고 싶어 할 뿐 자신의 생명 진입에는 아무런 부담이 없다. 이런 사람은 결국 의지나 바람 외에는 아무런 진리도 얻지 못하니 결국 2점밖에 받지 못한다. ‘2점짜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망한 인생인 것이다. 이번에 망했다면 정말 망한 것이다.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 네 결말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최종적으로 몇 점을 받았는지에 따라 결말이 정해진다. 점수마다 그에 맞는 결말이 있는데, 그 결말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쟁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없다면 네 운명은 완전히 결정된 것이다. 알겠느냐? 이것이 놀라우냐? (아닙니다.) 대답해 보아라. 하나님은 인류 구원 사역을 경영하면서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각 진리를 모두 사람에게 공급하는데 이런 사역을 하나님이 몇 번이나 하겠느냐? (이번 한 번만 하십니다.) 예전에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한 번뿐이다. 이번에 역사하고 나면 하나님의 대업은 완전히 이루어진다.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느냐? 다시는 하지 않고 다시 할 계획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번에 인간의 최종 결말이 무엇이든 그대로 규정되고 변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다시 행동하거나 다시 살 기회를 한 번 더 주지도 않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그 어떤 변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잡지 못하면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다. 만약 네가 하나님이 배치한 여러 가지 환경과 각 유형의 사람과 일을 거들떠보지 않고 무감각하게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처리한다면 너는 얼간이다. 자기조차 스스로의 결말과 종착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누가 너를 신경 써 주겠느냐? 네게 몇 번을 말해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니 네가 얼간이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구원받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물론 사람의 마지막 결말은 하나님이 주재하는 각종 환경에서 보이는 사람의 종합적인 모습으로 결정된다고 했기 때문에 사람은 일상에서의 자신의 종합적인 모습을 중요시해야 한다. 이는 너더러 시비를 걸어 시비에 휘말리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환경과 조건을 바탕으로 최대한 진리를 깨달아 진리에 진입하고 진리 추구의 길에 오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기 전에 기본적으로 우리가 교제한 ‘내려놓기’의 세 번째 내용에 진입하도록 노력한다면 너는 60점 이상의 점수로 합격할 것이고 구원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세 번째 내용 중 그 어떤 항목과도 거리가 멀거나 아무 항목에도 합격하지 못하고 실제에 진입하지도 못한다면 네 점수로는 합격하지 못할 것이고 너는 구원받는 대상도 아닐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지금 너희가 집중해서 실행해야 할 게 무엇이냐?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서 진리를 구해 공과를 배우는 것이다. 만약 네가 매일 힘써 일하는 것에만 만족하고 진리는 전혀 추구하지 않는다면 너는 봉사자일 뿐이다. 네가 힘을 쓰고 하나님이 배치한 각종 환경도 체험하여 진리를 깨달았다면, 진리를 얼마나 얻었든 결국 어느 정도 크고 작은 수확이 있을 것이다. 설령 이것들을 수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네 성장이 느리더라도 최소한 너는 하나님 사역의 흐름 안에 있고 수확이 있는 사람이니 네게 구원받을 기회가 있다. 지금 너희가 가장 기본적으로 해내야 할 일이 무엇이냐? 온갖 잡다하고 무의미한 일에서 벗어나 진리 추구에 마음을 쏟고 빨리 자신의 각종 내적 상태를 파악하여 자신의 취약한 곳, 약점, 문제를 인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진리를 구해 해결하여 자신의 갈 길과 추구할 목표, 이행하고 있는 본분에서 지킬 분명한 진리 원칙을 지녀야 한다. 너는 자신의 허물, 자신의 본분, 자신의 환경에 대해 추구할 분명한 목표와 방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 머리 없는 파리처럼 좌충우돌하며 되는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위험하다. 너는 힘만 쓰고 진리는 얻지 못하는 이런 내적 상태, 이런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방관자가 되지 말고 각종 시비에 휘말리지도 말아라. 시비에 얽히지 않으려면 진리 원칙에 공을 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각 진리 원칙을 깨달으면 사람은 각종 시비에서 벗어날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네가 각 진리를 깨달아야 진리에 진입할 수 있고 진리 실제에 진입할 희망이 있다. 그리고 네가 각 유형의 일에 참여하면 원칙이 생겨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만약 네가 방관하지만 않을 뿐 어떤 진리든 엉망으로 대해서 아무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도리나 글귀만 이해할 뿐 각 부류를 분별할 줄도 모른다면, 또 일이 일어났을 때 그저 일의 경과만 이야기하거나 누가 맞고 틀린지 평가만 하고 만다면 결국 진리를 얻지 못할 것이고 어떤 일이든 참여해봤자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참여가 어떻게 바뀌느냐? 시비 거는 행동으로 바뀐다. 그러니 너는 진리 원칙에 공을 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네가 점점 명확하고 정확하게 진리 원칙을 적용하게 된다면 진리의 진입에 희망이 생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 네 구원에도 희망이 생길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배치한 환경에서 어떻게 진리를 얻는지에 관해 방금 총 몇 가지 실행 원칙을 교제했느냐? 방관자가 되지 않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었느냐? (힘만 쓰지 않는 것입니다.) 힘쓰는 데만 만족하고 진리는 추구하려 하지 않는 내적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또 무엇이 있었느냐? (각종 시비에 휘말리지 않는 것입니다.) 각종 시비에 휘말리거나 온갖 잡다한 일에 매몰되지 말고, 이런 것으로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을 대신하지 말아라. 이 몇 가지는 모두 너희가 준수해야 할 것들이다. 이것을 지키면 너는 진리 추구에 가까워져 머지않아 진리 추구의 실제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실행하기가 쉽겠느냐 어렵겠느냐? 이토록 오랫동안 교회 사람과 접촉해 오면서 내게 생명 진입이나 진리 원칙에 관한 문제를 묻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개인의 내적 상태를 이야기하고 나서 실행의 길을 구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진리와는 무관한 문제를 물으면서 ‘구한다’는 단어를 쓰는 사람은 있었는데, ‘구한다’라는 단어를 듣고 나는 무척 진지하고 엄숙하게 귀를 귀울였지만 결과적으로 질문의 내용은 자질구레한 외부의 일이었다. 역겨운 마음이 들어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물은 일은 교회 사역이나 생명 진입과 아무 관계가 없다. ‘구한다’는 단어를 쓰지 말아라. 너는 ‘구한다’라는 말을 더럽혔다.” ‘구한다’라는 말을 함부로 써도 되느냐? (안 됩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아이의 등에 점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런 점이 나면 팔자가 사납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점이 난 부위에 병이 있을 우려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저는 팔자가 어쩌니저쩌니하는 이야기는 개의치 않는데 그게 정말 몸에 안 좋다면 점을 빼야 할까요?” 이 문제를 너희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너희는 이 문제가 진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교회 사역에는 관련되느냐? (관련이 없습니다.) 관련이 없다면 내가 이 일에 신경 쓸 의무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럴 의무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네 아들 몸에 점이 나는 것은 진리와 무관하니 내게 묻지 말고 의사를 찾아가거라. 나는 네 주치의가 아니다.” 대답해 보아라. 이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느냐? (신경 쓰지 않아야 합니다.) 누구에게 묻든 아무도 이 일에 신경 쓰려하지 않는다. 책임져야 할까 봐 걱정돼서가 아니라 그 일에 신경 쓸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네 아들이 점을 빼든 말든 교회 사역에 영향을 미치겠느냐? 네 개인적인 본분 이행에 영향을 미치겠느냐? 그 일은 나와 아무 관계도 없으니 나한테 묻지 말아라. 시답지 않은 일이다.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너는 구한다면서 ‘구한다’라는 말을 더럽혔다. 역겹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도 한다. “저희 집 정원에 거북이 한 마리가 들어왔는데 잡아야 할지 구하고 싶습니다.” 그가 이렇게 질문하면서 구하는데 너희 생각에 대답해 줘야겠느냐? (대답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그러면 제가 잡았다가 법을 어기면 어떡해요? 제가 법을 어기면 당신도 저지하지 않았으니 책임이 있는 겁니다!”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느냐? (당신이 원해서 잡은 거니 법을 어긴 건 저랑 아무 상관 없습니다.) 법을 어기고 말고는 그의 일이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교회 사역 원칙, 진리 원칙 등의 문제에 관해 묻는 건 괜찮다. 법률에 관한 일은 변호사를 찾아가거라.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의 변호사와 상담하여라. 나는 변호사가 아니니 그런 일은 내게 묻지 말아라. 나는 진리를 선포하여 인류 구원 사역을 하러 왔다. 그저 진리를 공급하고 원칙을 교제할 뿐 네 구원 여부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너 자신의 일이다. 하물며 네 일상에서의 사적인 일은 더더욱 내게 묻지 말아야 한다. 내겐 대답할 의무가 없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역에 관한 이 주제와 사람의 마지막 결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사람은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체험해서는 안 되며 이런 관념과 상상을 근본적으로 내려놓아서 그것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생각과 관점, 태도로 하나님의 사역을 대해야 진리를 깨닫고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올바른 태도와 올바른 생각과 관점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대해야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체험하여 결국 하나님의 사역에서 사람이 얻어야 할 진리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네가 내려놓은 것이 무엇이든 결국 그 목적은 네가 정상 궤도에 올라 진리 추구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최종 결과와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네가 진리 원칙을 깨닫고 얻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 내용을 교제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무엇을 교제했든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하는 것이다. 네가 만약 진리를 깨달아 많은 일에서 진리 원칙을 근거로 삼고 더 이상 방향이나 목표 없이 행동하지 않으며 더 이상 막막하지 않다면 이는 네 자질이 좋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와 말씀이 네 행동과 처신의 준칙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네 원래 자질과 능력, 재주를 토대로 네가 진리를 깨닫고 처신의 준칙이 생기면 너는 천지간 홀로 생존하고 만물 가운데 홀로 생존하는 지음 받은 인간이 된 것이다. 이런 인간이야말로 진정으로 합격한 지음 받은 인간이며 이것이 바로 모범적인 지음 받은 인간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교제는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보도록 하자!

2023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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