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8)
성육신 측면의 진리에 관해 우리는 이전에 많은 내용을 교제하였고, 성육신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에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도 이미 여러 차례 교제하였다. 너희는 이 측면의 내용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성육신, 즉 그리스도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 그리고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알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에 대한 관념과 상상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단순히 한 사람을 알아 간다고 할 때, 그의 성품을 알아 가든, 처신하는 면을 알아 가든 대개는 이 평범한 사람의 여러 측면, 즉 그의 성격과 기질, 혹은 그가 처신하는 방식과 방법, 그의 처세 철학, 그리고 그의 추구, 일부 흥미와 기호, 혹은 그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을 알아보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니 기껏해야 이 사람의 인성 측면을 알게 된 것일 뿐, 진리와는 전혀 무관하다. 이는 평범한 한 사람을 알아 가는 것에 국한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네가 인류 가운데 어떤 사람, 어떤 부류의 사람을 알아 가든 그 사람을 얼마나 많이 아는지, 얼마나 깊이 아는지, 얼마나 속속들이 파악하는지는 모두 진리와 무관하다. 하지만 성육신을 알아 가는 것은 다르다. 성육신에 관한 여러 측면의 내용을 알아 가는 이러한 주제는 모두 진리와 관련된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사역의 필요에 따라 취한 특수한 형식이자, 하나님의 신분,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성품 등 하나님과 관련된 여러 측면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데다가 성육신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의 일부분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되고, 사람이 마땅히 깨달아야 할, 하나님을 아는 측면의 진리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데 이르기 위해 반드시 알고 인식해야 할 한 측면의 진리이다. 성육신 하나님을 알고, 성육신이 선포한 여러 측면의 진리를 아는 이러한 내용은 모두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마땅히 깨닫고, 마땅히 진입해야 할 진리 실제와 관련되므로, 성육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나 패괴된 인류를 아는 것과 견줄 수 없다. 견줄 수 없는 이유는 성육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진리와 관련되며, 이는 창조주를 아는 것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의 내용이 어떠하든 결국 창조주를 아는 것과 관련되고,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과 관련되며, 당연히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을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가와도 관련된다. 네가 성육신 하나님을 알고, 성육신에 관한 이 측면의 진리를 알게 되었다면, 상당 부분 너는 이미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 성품의 일부분을 인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그에 상응하여 너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 즉 하늘의 하나님, 창조주에 대한 관념과 상상을 상당히 많이 내려놓게 될 것이다. 네가 이러한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으면, 최소한 하나님에 대해 더 정확히 알게 되고, 더 확실하고 참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식과 앎은 어떤 역할을 하겠느냐? 그 역할은 실로 크다. 네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는 하나님이 사람의 머릿속이나 마음속에 있는, 혹은 사람이 전통 관념 속에서 익히 알고 있는 그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그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성육신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을 알고 인식하며, 성육신의 성품과 본질을 알고 인식하게 되었을 때, 너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참된 인식은 네가 관념과 상상 속에서 거짓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게 해 준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 속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가진 후 하나님에게 갖는 믿음과 순종 중 어느 것이 더 진실하고 더 정확하겠느냐? 너희는 판단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인식함으로써 생겨난 이 믿음은 관념과 상상 속의 믿음이 아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참되고 정확한 인식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믿음은 네가 현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 정확하게 찾고 깨닫게 해 주며, 현실에서 마주치는 하나하나의 환경이나 현실의 사람과 일, 사물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정확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앙망을 갖는 것인지 더 정확하게 알게 해 준다. 어느 측면에서 보든 성육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결코 평범한 사람을 알고 인식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사람의 본질, 피조물과 창조주 등 여러 측면의 진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내가 몇 가지 예를 들며 하나님을 아는 측면의 진리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사람은 이러한 주제를 평범한 주제로 대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주제를 한 측면의 진리로 간주하여 인식해야 한다. 성육신은 어찌 됐든 하나님의 영이 실제적으로 실체화한 육신이자, 신성 본질을 지닌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땅에서의 대표이자,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의 발현이다. 사역으로 보나, 그의 본질로 보나 하늘의 하나님을 대표하기에 충분하다. 형식적으로는 한계가 있고, 겉보기에는 하늘의 하나님을 대표하기에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의 본질과 그가 갖춘 성품으로 볼 때 하늘의 하나님을 대표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 성육신과 관련된 여러 측면의 진리를 사람은 모두 마땅히 진지하게 대하고, 자세히 알아 가야 한다. 네가 진지하게 대하고, 마음을 다해 알아 가야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네가 땅의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아야만, 하늘의 하나님을 상당 부분 알 수 있고, 창조주를 상당 부분 알 수 있다. 창조주, 즉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주 만물 가운데서 어떻게 말씀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어떤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지, 그가 어떻게 일을 하고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 등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본질에 관련된 여러 측면의 이런 문제들을 사람은 전혀 볼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땅에 와서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때, 형상과 모양이 있고 뼈와 살이 있는 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의 성품과 그의 본질은 그가 사역하는 동안, 그가 사람과 함께 지내고 어울리는 동안 사람이 알아 갈 수 있다. 그의 여러 측면의 언행과 희로애락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의 희로애락이 표현되는 방식이 어떠한지,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과 태도, 그리고 일하는 원칙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사람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고, 더 구체적으로 만져 보고 볼 수 있으며 들을 수 있다. 이것이 네가 하늘의 하나님을 아는 데 더 도움이 된다. 성육신 하나님은 사람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그가 한 말씀은 사람이 직접 귀로 들을 수 있고, 그가 일을 처리하는 원칙과 방식은 네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곧 네가 성육신의 말씀과 사역을 몸소 느끼고, 성육신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 것과 같으며, 이로써 너는 하늘의 하나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앎과 인식을 갖게 된다. 성육신이 선포한 진리를 네가 깨달았다면, 너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으며, 네가 안 것은 바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이 측면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이 땅에서 어떻게 사역하고 어떻게 말씀하는지, 어떤 성품을 나타냈고 그에게 어떤 본질이 있는지는 상당 부분 네가 이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언행,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방식, 나아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본질을 이미 정확하게 목격하고 직접 귀로 듣거나 알고 인식하도록 해 주었다. 성육신 측면의 진리는 예전에도 조금 이야기했지만, 다 그리 구체적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많이 이야기했으니, 너희가 듣고 난 후 이 측면의 진리를 일반적인 실행 측면의 진리나 각 부류의 사람을 아는 일반적인 진리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을 아는 측면의 진리로 대하기를 바란다. 이론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성육신 하나님과 하늘의 하나님은 하나이고, 성육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땅에서의 발현이자 나타남이며, 또한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는 사역을 맡은 자이기 때문이다. 어떤 표현이든 성육신한 이 인자는 우선 본질과 성품 면에서 하늘의 하나님, 창조주와 하나이고 합한다. 하나인 이상, 성육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하늘의 하나님을 아는 하나의 경로이며, 당연히 성육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을 아는 가장 좋은 기회이자, 가장 유리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보기에 내가 한 말이 과장되었느냐? (과장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에 부합하느냐? (사실에 부합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한다.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주재하시며,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실 수 있는데, 성육신하신 하나님도 그러실 수 있습니까? 성육신과 하늘의 하나님이 하나이시고, 그분이 하늘의 하나님을 대표하실 수 있다면, 그분도 만물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까? 만물을 주재하실 수 있습니까?” 누군가 이런 관점을 제시한다면, 너희는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성육신이 만유를 창조하고 만유를 주재하는 사역을 할 수 있겠느냐? (하실 수 있습니다.) 네가 말한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한 말이냐? 네 관점을 말해 보아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성육신 역시 하나님 자신이시기에 만유를 창조하시고 만유를 주재하시는 사역을 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성육신께는 성육신께서 하셔야 할 사역이 있기 때문에 그런 사역을 하지 않으실 뿐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설명이다. 이 설명이 이론적으로 맞느냐? 치우치거나 틀린 부분은 없느냐? (없습니다.) 이 설명은 성육신도 분명 만유를 창조하고 만유를 주재하는 사역을 할 수는 있지만, 사역을 할지 말지는 그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고, 그가 하지 않으면 너는 보지 못하겠지만, 그가 한다면 틀림없이 능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우리가 교제한 성육신의 본질, 그리고 그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을 인식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어떻게 교제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제가 한 가지 덧붙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진리이고, 하나님의 영은 진리를 선포하실 수 있으며, 성육신하신 하나님도 주로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진리의 권병은 모든 것을 주재하고 모든 것을 주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이 성육신하신 하나님과 하늘의 하나님이 하나이시며, 성육신하신 하나님 역시 만유를 주재하실 수 있음을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설명이 맞느냐? 설명은 맞지만, 여전히 문제의 근원을 이야기하지는 못했고, 실제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설명이 하나의 이론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성육신이라는 형식에서 보면, 그는 선천적인 조건과 육신의 본능이라는 제약을 받아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영처럼 일할 수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사실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한 이상 성육신이 담당해야 할 사역을 하러 온 것이니, 본연의 사역과 무관한 사역은 하지 않는 것이다. 성육신에게는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육신이라는 선천적인 조건의 제약과 온갖 객관적인 원인의 제약을 받아 하늘의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성육신이라는 본질을 놓고 보면, 그는 만유를 창조할 수 있고, 만유를 주관할 수도 있다. 그의 본질이 하나님의 본질이고, 그의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이기에 그가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방금 말한 것은 모두 이 문제의 근원을 이야기하지 못했고, 이 문제의 핵심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핵심은 어디에 있느냐? 성육신이 만유를 창조하고 만유를 주재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하나의 주장이 아니며, 더욱이 사람의 관념 중 하나도 아니다. 그렇다면 성육신이 만유를 창조하고, 만유를 주재하는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에서 나타나느냐?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권병을 가지고 있고, 능력을 가지고 있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고,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음은 물론, 모든 것을 주재할 수도 있다. 이것이 사실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선포한 말씀을 스스로 이룬다. 더구나 그 어떤 세력도 이를 가로막을 수 없다. 보아라, 성육신이라는 평범한 사람이 한 말은 어떤 종류의 말이든, 어떤 측면의 말이든 모두 권병을 가지고 있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다른 한 측면으로 그가 한 말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하나하나 이루어지고 실현되며, 하나도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면 반드시 책임지고, 책임지는 이상 반드시 이루며,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영원까지 지속된다.”라고 친히 말한 것처럼 말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하고 만유를 주재한다는 것에 대한 가장 진실하고 가장 구체적인 해석이다. 그의 입에서 첫마디 말씀이 나온 뒤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마디 한마디가 정도에 차이만 있을 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차츰차츰 실현되고 성취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일을 성육신이 해낼 수 있겠느냐? (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측면의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느냐? (알게 됐습니다.) 이것이 한 측면의 사실이다. 또 다른 한 측면으로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선포한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이번 단계 사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온 사람, 이 말씀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생명이 되어 네 인생관을 바꾸고, 네 처신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이 말씀들을 받아들인 사람은 이 말씀들에 의해 심판받고, 형벌받고, 폭로되고, 정죄되며, 심지어 저주까지 받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이 말씀들에 의해 정복된다. 이 말씀들에 의해 정복되고 나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 이 말씀들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가 곧 사람의 생명이 될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될 때, 사람은 새로운 인류로 변한다. 하나의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는 것이다. 말해 보아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거둔 성과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비록 이 새로운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한 아담과 하와라는 인류와 마찬가지로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지만, 창조의 형식과 방식이 다르다. 이 새로운 인류의 탄생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다시 한번 창조해 낸 것이다. 그렇다면 말해 보아라, 성육신이 말씀으로 인류를 창조한 것을 두고 성육신이 만유를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지금 이번 단계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여 정결함을 얻은 사람은 아담과 하와 시대의 인류나 패괴된 인류와는 확연히 다른 부류이며, 서로 다른 생명을 가진 두 부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으로 삼은 사람은 새로운 인류이다. 그는 패괴된 인류의 옛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었으며, 새로운 인류가 되었고, 곧 새로운 시대, 새로운 기원에 진입하게 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또다시 새로운 인류를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가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 새로운 인류를 창조한 것이다. 이것이 한 측면이며, 이것이 성육신이 하는 사역이다. 그가 한 사역의 성과와 최종 결과로 볼 때, 그는 만유를 창조하고 만유를 주재하는 사역을 할 수 있다. 이 사역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이 육신 속에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고, 신성 본질이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권병이 있음은 물론, 더욱이 하나님이 갖춘 진리가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하나님, 곧 창조주는 말씀으로 만유를 창조했다. 있으라 명하면 생겼고, 세워지라 명하면 세워졌다. 그런데 성육신이 하는 마지막 단계의 사역이 정확히 하늘의 하나님이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고, 말씀으로 만유를 창조하는 사역과 똑같고, 그 성질이 똑같다. 하나님이 이번 단계의 사역을 하며 입은 육신은 비록 겉보기에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고,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어떤 위대한 업적이나,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행사는 없지만, 그는 지금껏 수년간 한 말씀과 선포한 진리로 이미 한 무리의 사람들을 얻었고, 이미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사람의 내면에 만들어 주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 새로운 인류가 곧 탄생할 것인데, 이것이 바로 성육신이 하는 사역이다. 무슨 사역이겠느냐? 말씀으로 하나님의 마지막 단계 사역을 성취하고, 말씀을 사람 내면에 만들어 주며, 또한 말씀으로 다시 한번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또 한 측면으로 하나님이 두 번째로 성육신하여 사역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의 두 번째 단계 사역, 곧 은혜시대의 사역은 이미 끝을 고하고, 마침표를 찍었다. 은혜시대가 끝났으니, 은혜시대의 성령 역사와 하나님이 은혜시대에 한 모든 사역이 끝을 고한 것이다. 종교계 전체는 종교의 형식으로 보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 보나 모두 과거형이 되었다. 은혜시대의 교회와 단체에서는 하나님이 말세 심판 사역을 시작할 때 성령의 역사가 거두어졌다. 즉,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나타나 사역하고, 음성을 발하고 말씀한 그 순간부터 종교계 전체는 하나님이 보기에 종교적 장소, 종교적 무리로 규정되었다. 더 이상 하나님이 사역하는 장소가 아니며, 더 이상 하나님이 돌보는 대상도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을 떠났다. 다시 말해, 성령이 더 이상 그들에게 역사하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든, 천주교든, 유대교든 모두 종교로 규정되었고, 성령은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역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 새로운 기원으로 진입했다. 즉, 하나님이 두 번째로 성육신하여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은혜시대는 완전히 끝났고, 종교계의 모든 사역과 활동 역시 성육신이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하고, 이번 단계 사역의 여러 측면의 진리를 선포하기 시작하면서 끝을 고했다. 여기서 끝을 고했다는 것은 곧 인류 전체가 신앙 측면에서, 종교의 형식 측면에서, 그리고 종교 이름의 규정 측면에서 새로운 표현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시대는 지나갔다. 다시 말해, 은혜시대는 완전히 끝난 것이다. 이 새로운 표현이 생긴 후로는 기독교나 천주교가 더 이상 인류 가운데서 인류 신앙의 흐름을 인도하는 주체적인 종교로 추앙받지 못하고, 이미 과거형이 되었다고 확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이미 인류를 이끌고 곧 다음의 새로운 시대로 진입할 것이고, 곧 새로운 시대로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성육신이 다음 시대로 들어서기 시작할 때, 기독교는 인류 전체 가운데서 과거형이 되었고, 낡은 종교가 되었다. 당연히 성육신이 사역하기 시작하고,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류 전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시대로 인도되었고, 새로운 기원으로 인도되었다. 인류 전체는 종교와 관련된 측면의 주제나 유행어든, 아니면 각 분야의 어떤 풍향계든 모두 새로운 방향을 향해 발전하며, 새로운 기원으로 인도되었다. 당연히 성육신이 선포한 말씀과 한 사역, 그리고 교회 안에서 유행하는 각종 영적 용어와 표현, 혹은 신앙 측면과 관련된 일부 사상 관점은 2천 년 동안 기독교가 인류 전체의 각 분야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앞으로 한 시기 동안 이 인류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이 확장되고, 복음이 확장됨에 따라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한 말씀이나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이번 단계 사역 범위 내에 있는 일부 표현과 사상 관점은 점차 다음 시대의 인류를 인도하고 이끌며, 다음 시대 인류의 삶을 이끌 것이다. 이것이 추세이다. 당연히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이번 단계 사역을 시작할 때, 성령 역사의 이동으로 인해 종교계는 성령 역사를 잃고 황량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으며, 종교계는 거의 이번 단계 사역에 의해 도태되고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성육신 하나님의 도래와 하나님의 이번 단계 사역의 시작은 전 세계에 대한, 인류에 대한, 인류의 신앙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자, 하나의 정죄이며, 당연히 하나의 변화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하고, 이번 단계 사역을 시작한 이래로 인류 전체의 신앙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었고, 종교계 역시 완전히 바뀌었다. 이것들은 모두 사실이다. 성육신이 한 이 말씀들, 진리의 여러 측면과 관련된 이 주제들은 앞으로 모두 점차 세계 각 나라 각 지역으로 전해지고, 각 분야와 각 종교 단체로 전해질 것이다. 이 말씀들 속에 담긴 관련된 각종 사상 관점은 곧 종교계에 영향을 미치고 이 인류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며, 당연히 곧 이 인류를 변화시키고 곧 종교계를 변화시킬 것이며, 인류의 현재 상황을 변화시키고 종교계의 현재 상황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이번 단계 사역이 다시 한번 그의 말씀으로, 그가 선포한 각종 사물에 대한 관점으로 인류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고, 종교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다. 이 말씀들로 말하자면, 인류를 변화시키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종교계를 변화시켜 인류를 각기 부류대로 나누고, 유형을 구분하며, 인류의 결말을 선고하고, 인류의 종착지를 선고할 충분한 권병이 있고, 충분한 능력도 있다. 물론, 하나님의 이 모든 말씀이 선포됨에 따라 하나님의 영 역시 쉴 새 없이 각종 정세를 변화시키고 있고, 만유를 주재하고 있다. 성육신이 한 이 말씀들이 이르는 곳마다 듣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받아들이든, 반발심을 품든 간에 이 말씀들은 그들에게 모두 자극이 되며, 접한 사람은 모두 점차 드러나고 유형이 구분된다. 바로 이 말씀들 앞에서 각 부류의 사람, 즉 진리를 사랑하는 자와 진리를 싫어하는 자, 패괴된 인류, 마귀, 동물, 살아 있는 송장, 각종 추구가 있는 자, 각종 사상 관점이 있는 자, 그리고 각종 관념을 품고 있는 자, 각종 야심과 욕망을 품고 하나님을 믿으러 온 자, 그들의 본모습이 모두 드러났다. 이렇게 사람들은 모두 각기 부류대로 나뉘어 진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양은 하나님 집으로 돌아왔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하나님의 양이 아닌 자들은 문밖으로 쫓겨나고 정죄되고 도태되었다. 정죄되고 도태된 이 부류의 사람은 곧 하나님 말씀에서 말한 큰 날의 심판, 즉 하나님 말씀에서 말한 악인에 대한 징벌을 기다리게 된다. 하나님이 이번 단계 사역을 하고 이 말씀들을 한 것이 인류의 현재와 미래에 미치는 영향은 모두 하나님 말씀이 거둔 성과이고, 모두 하나님 말씀의 위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이 성육신한 기간에 한 사역이고, 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러한 영향력이나 이미 거둔, 사람이 볼 수 있는 온갖 성과로 볼 때, 성육신이 그의 본질로 보나, 그의 신분으로 보나 만유를 창조하고 만유를 주재하는 사역을 할 수 있겠느냐? (하실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하나의 도리나 설명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비록 성육신이 형식적으로는 하늘의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영처럼 그렇게 신비롭고 헤아리기 어렵거나 그렇게 큰 능력이 있지는 않지만, 그의 본질과 그의 생명으로 볼 때, 그가 선포한 말씀으로 볼 때, 충분히 새로운 인류를 창조할 수 있고, 충분히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인류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충분히 이 인류를 주재할 수도 있다. 성육신이 말씀으로 이 모든 것을 이루는 것과 하늘의 하나님이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는 이 점은 완전히 합하고,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성육신이라는 이 형식과 외관으로 볼 때, 성육신은 하늘의 하나님이 하는 사역을 할 수 없고, 하늘의 하나님의 권병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 같지만, 그의 본질과 생명으로 볼 때, 그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고,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며, 말씀으로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이 사역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보아라, 지금 종교계든 이 세상이든 그들이 어떤 형식을 띠고 있고, 현재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가 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한 말씀이 실현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역시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이 선포되고, 진리가 선포됨으로 인해 도태되는 것이다. 어느 측면에서 보든, 그들이 현재 어떤 상태에 처해 있든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변화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생겨났으며, 하나님이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이 말씀하는 여러 측면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복음이 확장됨에 따라, 하나님 말씀이 더 광범위하게 전파됨에 따라 더 많은 사람, 즉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 각 인종과 각 분야의 사람이 하나님의 이번 단계 새 사역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변화될 것이며, 또한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얻어 새로운 인류가 될 것이다. 물론, 복음이 확장됨에 따라, 하나님 말씀이 더 광범위하게 전파됨에 따라 머지않은 미래에, 여기서 말하는 머지않은 미래는 분명 은혜시대의 2천 년보다 훨씬 짧을 것인데, 이 인류의 신앙, 여러 측면의 일에 대한 이 인류의 사상 관점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변화될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각기 다른 정도로 이 말씀들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들로 볼 때, 결국에는 성육신의 말씀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고,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이 측면 진리의 사실로 귀결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제한 이 몇 가지 측면의 내용으로 볼 때, 성육신이 하는 사역과 말씀이 하늘의 하나님이 하는 사역, 그리고 말씀과 차이가 있느냐? (없습니다.) 성육신이 만유를 창조하고 만유를 주재하는 이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하고 주재한다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으며, 둘 사이에는 거리도 없고 차이도 없다. 이 점은 확실하다. 이처럼 확실하다는 것은 결코 이론도 아니고, 관념과 상상도 아니며, 듣기 좋은 소리는 더더욱 아니다. 이는 사실에 근거하여 하는 말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성육신이 어떤 말씀을 했든, 어떤 사역을 하려고 하든 한편으로는 말씀 자체에 권병과 능력이 있어 모든 것을 이루는 성과에 도달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말씀이 발해질 때 하나님의 영도 하나님의 말씀과 동시에 이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는 그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어떤 평범한 사람, 예를 들어 예언가나 유명인, 또는 전문가가 어떤 일을 추측하고 예측하든, 아니면 어떤 현상을 이야기하거나 어떤 보고서를 발표하든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나 결과가 어떨지는 그 자신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이 말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반드시 사실이 됩니다.”라고 감히 100%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도 못한다. 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성육신이 하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본질의 발현이고,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가 어느 측면의 말씀을 하든 반드시 이루어지고 실현된다. 이는 한편으로는 하나님 말씀의 위력과 권병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이 행사하는 것임을 너희도 알아야 한다. 이는 성육신이 사역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영도 사역하며, 육신과 영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말해 보아라. 성육신이 말씀할 때 이 육신이 말씀하는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영이 말씀하는 것이냐? 이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이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말씀이 모두 이루어지고, 또한 모두 실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내용을 교제하고 나니 방금 우리가 말했던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느냐? (해결되었습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 말씀이 모든 것을 이루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유를 창조한다는 이 말은 진리가 아니냐? 사실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는 진리이자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이 하는 사역이 도달하는 성과는 평범한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가 하는 사역과 말씀의 성질과 본질은 평범한 사람이 말을 하는 성질과 본질이 아니다. 만약 “사람이 만유를 창조하고 만유를 주재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확실하게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만유를 창조하고 만유를 주재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말고 “그렇습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이 말은 이론이 아니라 진리이자 사실이다.
예전에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이 제1권만 선포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러 나섰다. 종교계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이번 단계 사역을 받아들였으며, 종교계는 철저하게 와해되었다. 이제 제2, 3, 4, 5, 6, 7권이 모두 발표되었고, 이후 각 민족과 각 국가의 구석구석, 각 종교적 장소로 전해졌다. 이 말씀이 온 인류를 향해 공개될 때, 너희가 생각하기에 어떤 성과가 있겠느냐? 어떤 광경이 펼쳐지겠느냐? 이 인류는 달라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중국 대륙에서 복음이 대대적으로 확장되던 어느 해,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와 공장, 마을을 누비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이 제1권만 선포되었을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참도(道)로 믿고 인정했다. 비록 큰 붉은 용이 미친 듯이 탄압하고 체포하고 박해하는 바람에 어떤 사람들은 참도임을 인정하면서도 감히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중국 대륙 전역에 널리 전해졌고, 각 성(省)과 시(市), 현(縣)마다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가 생겨났다. 이에 큰 붉은 용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전력을 다해 탄압과 체포에 나섰고, 심지어 “근절하지 않으면 병사를 물리지 않겠다.”라며 호언장담까지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하게 10년 뒤 하나님의 말씀은 세계 각 나라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특히 아시아의 필리핀, 북미와 남미, 그리고 유럽과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모두 복음 사역이 끊임없이 널리 전해지는 것을 보았다. 대륙에서 복음을 전할 때, ‘단체 전도’라는 용어가 있었다. 몇 명 혹은 수십 명에게 동시에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성과가 매우 좋았으나 나중에는 큰 붉은 용의 광기 어린 탄압과 체포로 이 방식은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방식은 해외 몇몇 국가에서 다시 일어났다. 아시아의 일부 국가에서는 이를 ‘단체 전도’라 부르지 않고 ‘마을로 확장, 학교로 확장, 공장으로 확장’이라 불렀고, 심지어 정부 기관과 경찰서, 군부대로까지 확장했다. 그러고 나서 중국 대륙에서와 똑같은 광경이 펼쳐지며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인류 전체는 어떤 업종에 종사하든, 어떤 무리, 그리고 어떤 민족을 막론하고 모두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무기력함과 막막함 속에 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른다. 인류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 이 구원은 어떤 형식이 아니고 어떤 의식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고 하나님 말씀의 이끎이 필요하고, 하나님 말씀의 인도와 깨우침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명확한 말씀으로 사람에게 방향과 길을 가리켜 주고,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마주치는 각각의 일에서 어떤 원칙을 따라야 할지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 인류에게는 이 진리들이 너무나도 필요하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마을로 확장하고, 도시로 확장하고, 학교로 확장하고, 공장으로 확장하고, 군부대로 확장하고, 경찰서로 확장해 나갈 때,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일부 읽어 주고 하나님의 3단계 사역을 증거하자 대다수 사람이 기꺼이 듣고 받아들이려 했고, 동시에 교회 생활에도 참여하고 싶어 했다. 다만 당시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다소 제약을 받았다. 하지만 복음이 확장되는 이런 현상들을 볼 때, 이 인류는 참으로 비참하고 가련하게 살아가고 있고, 이들에게는 하나님 말씀의 인도가 필요하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 인류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목표를 가져다줄 수 있으며, 이 인류가 더 나은 삶을 살고 이 인류가 계속해서 생존해 나갈 수 있게 하며, 더 이상 사탄에게 해를 입지 않고 사악한 흐름에 해를 입지 않게 할 수 있다. 만약 인류가 모두 하나님의 이 말씀들을 받아들이고,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공급과 하나님 말씀의 인도를 받아들인다면, 너희가 생각하기에 이 인류는 아주 행복하게 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만약 이 인류가 하나님 말씀의 공급과 인도를 받아들인다면, 이 인류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며 더 이상 사탄에게 해를 입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인류의 결말은 지금 이 패괴된 인류의 결말과는 다를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며 일어난 이런 상황들에 대해 너희도 어느 정도 들어 본 적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햇수가 오래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런 말씀들을 오래 읽다 보니 속으로 그저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고, 좋은 말씀이며, 진리야.’라고만 생각할 뿐, 그다지 감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말씀들을 갓 들은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이 윤택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하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다.”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학교의 학생들, 경찰서의 경찰과 간부들, 그리고 정부 관료들까지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며, 심지어 종교계의 목사들은 앞장서서 받아들이고는 일부 사역자와 신도들까지 모두 교회로 이끌고 왔다. 어느 모로 보나, 성육신이 한 말씀과 그가 선포한 진리는 인류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운명까지 바꿀 수 있다. 그러므로 성육신을 아는 방면의 진리는 아주 중요하며, 이는 하나님을 아는 것의 일부분이다. 이 점은 틀림없다. 이제 알겠느냐? (하나님께서 이렇게 교제해 주시니 조금은 알겠습니다. 과거 성육신에 대한 인식은 전부 이론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 사실을 보지는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교제해 주시고 나니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분명해지니까 더욱 믿음이 생기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어느 날, 네가 소속된 모 교회의 대다수 사람이 정부로부터 박해받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하나님에게 의혹을 품고 감히 믿지 못하며 믿음을 잃어버려서 결국 너 혼자만 남게 된 데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들이 믿는 것은 한낱 사람일 뿐이고, 당신은 미혹되었습니다.”라며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너는 어찌하겠느냐?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믿을 겁니다.) 너는 영향을 받지 않겠느냐? 외롭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너도 ‘이 세상에 안 믿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내가 믿는 게 과연 맞을까? 이렇게 계속 믿는다고 한들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맞이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지 않겠느냐? 너희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이제 수많은 하나님 말씀이 성취되고 실현된 것을 보았기에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가끔씩 다소 연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연약해지는 것은 겁낼 것 없다. 네가 단 한 가지만 확실히 할 수 있다면 그 연약함은 너를 넘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한 가지를 명심해라. 성육신이 아무리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라도, 설령 그에게서 네가 생각하는 어떤 결함이나 부족함을 좀 보게 되더라도, 심지어 네가 어떤 유언비어를 듣거나, 혹은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 질병이 있거나 고통스럽고 연약한 모습이 있음을 알게 될지라도 그런 것들은 다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입은 이 육신이 얼마나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든, 얼마나 평범하든, 겉모습이 어떠하든 너는 이 한 가지, 즉 그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는 점만 확신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네가 그를 따르는 이유이자 네가 하나님을 믿는 근거이다. 이 한 가지만 확신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그를 따르는 것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며 그가 너를 하나님 앞으로 데려갈 수 있고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곧 하나님의 나타남이자 하나님의 발현이며,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는 사역을 맡은 자이기 때문이다. 네가 그를 따르는 것은 옳다. 네가 그를 따르는 것은 한낱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고, 하나님의 양이다. 너는 길을 잘못 들지 않았다. 그를 따르는 한 너는 영원히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방향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를 따르면 너는 곧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영원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 점을 확신하면 하나님을 믿는 뿌리가 단단히 자리잡게 된다. 네가 보기에 성육신이 얼마나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든, 네가 어떤 유언비어나 황당한 논리를 듣든, 혹은 네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어떤 관념들이 남아 있든 모두 중요하지 않다. 설령 네게 연약함과 고통이 있다 해도 괜찮다. 네게 참된 믿음만 있다면, 어떤 문제에 부딪히든 진리를 구하여 해결하고, 어느 때든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면, 최후에 너는 틀림없이 하나님이 얻는 대상이 될 것이며, 다음 시대에 진입할 신인류의 일원이자 복 있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순간에도 외부 환경에 영향받지 말고, 그 어떤 말에도 영향받지 마라. 네가 위인이나 유명인이라 여기는 그 어떤 자들, 혹은 네가 숭배하는 그 어떤 자들에게도 영향받지 마라. 너는 그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인 그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 하나만 확신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교제한 것은 성육신을 아는 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것이었다. 성육신은 충분히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가 하는 말씀과 그가 하는 사역이 인류 전체에게 미치는 영향 역시 차츰 나타날 것이고, 차츰 네가 보게 될 것이다. 어찌 되었든, 성육신이 하는 사역은 곧 하나님 자신이 하는 사역이고, 그가 선포하는 말씀 역시 하나님 자신이 선포하는 말씀이다. 즉, 성육신의 형상이 어떠하든, 겉모습이 어떠하든 그는 충분히 하나님 자신을 대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육신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의 일부분이기도 하니, 이 측면의 진리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네가 하나님을 알고 싶고 하늘의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하늘의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고자 한다면, 먼저 땅의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성육신한 하나님을 알아야 하며, 성육신에 대한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을 더욱 키울 수 있고, 네가 하나님을 따르는 기반을 더욱 견고하게 할 수 있다. 네가 성육신이 곧 하나님 자신이며, 그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임을 확신한다면, 너는 그를 한낱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를 따르면 따를수록, 그의 말씀과 사역을 체험하면 할수록 너는 ‘이 평범한 사람은 평범하지 않구나.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을 지닌 평범한 사람이야.’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점을 깨달으면, 너는 그를 평범한 패괴된 인류 중 한 명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지닌 자로 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를 대할 때는 평범한 패괴된 인류를 대하듯, 사람 사이에 적용되는 처세 철학이나 일 처리 방식을 써서 대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으로 성육신을 대하게 될 것이다. 네가 이런 방식으로 성육신한 이 인자를 대하면 비로소 그를 아는 데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그를 대하면 되는데, 너는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도,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굴 필요도 없고, 경계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하나님을 대하는 가장 올바른 방식과 태도로 그를 대하면 된다. 이렇게 대하는 방식은 물론 피조물이 하나님을 대할 때 마땅히 취해야 할 방식이기도 하다. 이전에 우리가 이야기했던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은 무엇이었느냐? 너희는 아직 기억하느냐? (첫째는 솔직하게 대하기, 둘째는 존중하기, 셋째는 말 잘 듣기입니다.) 솔직하게 대하기, 존중하기, 말 잘 듣기 이 세 가지이다. 보아라, 이 세 가지는 다 합쳐 봐야 몇 글자 되지도 않고 겉보기에는 꽤 행하기 쉬워 보인다. 하지만 네가 서 있는 위치가 바르지 않고, 네 태도가 바르지 않다면 행하기가 몹시 어렵다. 보다시피 문자적인 의미는 이해하기 쉬우나, 행하기는 쉽지 않다. 말해 보아라, 사람이 성육신한 하나님에 대해 솔직하게 대하지 못하고, 존중하지 못하고, 말을 잘 듣지 못하는데, 하늘의 하나님에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할 수 없느냐?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 없으면 그저 관념과 상상에 기대어 하나님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의 본질이 결정하는 것이고 사람의 패괴 성품이 결정하는 것이다. 네가 속으로 아무리 억제하고, 네가 어떤 소망을 품든 관계없이,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으면 이 세 가지를 행하기란 매우 어렵다. 만약 패괴 성품이 일부 해결되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이해와 인식이 생긴다면 어느 정도는 해낼 수 있다. 피조물의 위치에 바르게 설 수 있고,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게 된다. 이 세 가지를 해내려면, 한편으로는 패괴 성품을 어느 정도 해결하여 이성을 좀 회복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성육신한 하나님을 대하는 것도 이렇고, 하늘의 하나님을 대하는 것도 당연히 이렇다. 네가 성육신한 하나님에게 이 세 가지를 행하지 못한다면, 하늘의 하나님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하늘의 하나님이 사역하고 말씀하는 것을 네가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그것에 닿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빈말이다. 태초의 인류를 보아라, 하나님이 그에게 제사를 올리고 한 해 수확한 농작물을 십일조로 바치라고 했을 때, 사람은 속으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반드시 드려야 한다는 점을 이해했다. 하지만 막상 하나님에게 바칠 때가 되니 하나님에게 주기가 싫어졌고, 심지어 바치고 나서도 도로 가져오려 했다. ‘농사를 지은 것도 아니고 일도 안 했으면서 대체 무슨 자격으로 달라는 거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칠 때부터 내키지 않았고, 속으로 불편해하고 화를 냈다. 이것이 존중하는 것이냐?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러니 하나님을 대할 때 존중하고 말 잘 듣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람의 패괴 성품이 해결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 성육신에 대한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으려면 먼저 성육신의 본질과 성육신과 관련된 여러 측면의 진리를 알고 이해해야 하며, 자신의 관념과 상상을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성육신의 이런 측면의 진리에 대해 참된 깨달음을 얻고,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에 대해 참된 인식이 생기고, 그런 다음 비로소 하나님을 순종하고 경외하는 데에 다다를 수 있다.
이전에 우리는 성육신에 대한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교제했다. 첫 번째 원칙은 성육신 하나님을 하늘의 하나님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 원칙은 성육신 하나님을 패괴된 인류와 견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원칙을 교제할 때, 성육신은 기만하지 않고, 다투지 않고, 싸우지 않고,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고, 공격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는다고 했고, 이것들은 모두 이전에 교제를 했다. 이제 다음 주제인 ‘꾀지 않는다’에 대해 교제하겠다. 성육신의 성품 본질에서 표출되는 처신 방식이나 사람과 어울리는 방식, 또는 사역하는 방식 안에는 꾀지 않는다는 점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꾀지 않는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과 성육신이 말씀하고 행동하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꾀지 않는 모습이 일치하겠느냐? 만약 사람의 이해와 성육신의 모습이 모순된다면, 사람이 이해한 것은 사람의 관념이 아니겠느냐? 사람의 관념과 상상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면 성육신의 인성과 그의 본질에서 표출되는 ‘꾀지 않는다’라는 주제에 대해 교제해 보자. 이 주제에 대해 너희는 어떤 기본적인 인식을 갖고 있느냐? 하나님이 말씀할 때 취하는 일관된 방식이 어떤 것인지 너희는 아느냐?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과 말씀하고, 어떤 방식으로 말씀을 선포하는지 정리해 본 적이 있느냐?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 꽤 직설적이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에는 도움과 인도, 이끎이 있고, 또한 차근차근 깨우쳐 주시는 방식이 있을 뿐, 꾀는 요소는 없습니다.) 꾀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람은 여전히 세부적으로는 이 ‘꾀지 않는다’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 하나님이 말씀할 때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표현 방식과 언어 스타일을 보면, 하나님이 하는 말씀은 평이하고 직설적이다. 되도록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똑똑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말장난을 하지 않고 거짓되고 과장되며 공허한 말을 늘어놓지도 않으며 더더욱 언어의 표면적인 형식에 치우치지도 않는다. 오직 일 자체를 두고 얘기하고, 어떻게든 인류의 언어로, 인류가 적응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을 들려준다. 말씀의 성질은 일깨우고,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이며, 때로는 경고하는 것이다. 물론 더 많게는 공급하고, 돕고, 붙들어 주는 것이며, 나아가 밝히는 것, 즉 사람의 패괴 본성을 밝히고 문제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주로 밝히고, 공급하고, 인도하고, 붙들어 주며 돕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이런 방식 중에는 구체적인 예를 드는 경우도 있고, 생생한 비유를 드는 경우도 있다. 어떤 생물이나 동물, 또는 어떤 현상이나 일상생활 속 사람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비유로 삼기도 한다. 이는 한편으로 하나님이 하는 말씀 안에서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 또는 깨달아야 할 실제가 무엇인지 더 명확히 알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극소수의 특수한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예로 들고 그것들을 교훈으로 삼거나 실제 사례로 삼아 그 속에 담긴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지,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사람이 드러낸 패괴가 무엇이며 관련된 진리는 무엇인지 알게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사람에게 한 측면의 진리를 알려 주고, 사람이 그 측면의 진리를 깨달은 바탕 위에서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하나님 뜻에 맞고,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원칙에 맞는지 알게 하려는 것이다. 가장 직설적이고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언어 형식을 사용하는 목적은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기 위해서이다. 진리를 공급하는 목적은 사람이 각종 사람과 일, 사물에 부딪혔을 때, 부정적인 측면에서 사람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인식하고, 사람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의 모습과 본질을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동시에 긍정적인 측면에서 사람을 인도하여 진리 원칙을 깨달아 실행의 길을 찾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진리를 공급하여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인식하고, 진리 원칙을 알게 하는 최종 목적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하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형벌과 심판, 연단과 시련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는 사람이 되고 진정한 피조물, 기준에 맞는 피조물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고 행동하는 원칙, 즉 모든 일을 행하는 세부적인 원칙이다. 이 안에서 하나님이 하는 구체적인 말씀과 구체적인 행동에는 꾀는 성분이 없다. 모든 것이 공개되어 있고 모든 것이 드러나 있으며, 모든 것이 공명정대하고 빛 가운데 있다. 떳떳하지 못한 음모나 계략 따위는 없으며, 인류에 대한 그 어떤 획책이나 남에게 말 못 할 속셈과 목적은 더더욱 없다. 하나님 말씀 이면의 목적과 의의부터 하나님이 하는 사역에 이르기까지, 사람에게 어떤 불순한 의도를 품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모두 긍정적인 것이며, 모두 사람에게 유익을 주려는 것이고,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얻어 인생의 바른길을 걷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역하는 목적과 의의,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볼 때,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 사역의 근원에는 꾀는 요소가 없다.
‘유혹하다’라는 단어가 성경에 아주 일찍부터 등장했다는 것을 너희 모두 알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처음으로 사탄의 유혹을 받아들이기 전에 하나님은 말씀을 한마디했다.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했느냐?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한 이 말씀 안에는 몇 가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느냐?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다 먹어도 된다는 것은 사람에게 먹을 수 있는 범위를 알려 주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공급으로, 사람에게 무엇을 먹어도 되는지 알려 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아주 간단하고 직설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맞다. 분석할 필요도, 연구할 필요도 없이 사람은 듣자마자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다음 구절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인데, 이 구절에서는 한 가지 예외를 언급하고 있다. 어떤 예외이냐? 사람에게 동산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나무에 열리는 열매는 먹지 말라고 알려 주고 있다. 이 말씀은 간단하고 직설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로 간단하고 직설적이냐? (사람이 듣자마자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분석하고 연구할 필요 없이 귀가 있고 머리가 있는 이상 이 구절을 듣고 나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바로 알 수 있다. 무엇은 먹을 수 있는 것이고, 무엇은 먹을 수 없는 것인지, 하나님은 사람에게 다 알려 주었다. 먹을 수 없는 것은 어떤 것이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이다. 하지만 사람은 듣고 나서 속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곧이어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왜 먹으면 안 됩니까?” 하지만 사람이 묻기도 전에 하나님이 말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 말씀은 간단하지 않으냐? (간단합니다.) 얼마나 간단하냐!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참으로 큰일이니, 하나님은 반드시 당부해야 한다. 하나님이 당부하는 말씀이 잘못되었느냐? (아닙니다.) 잘못된 말씀이라고는 한 마디도 없고, 꾀는 말씀 역시 한 마디도 없다. 모두 명명백백하게, 명확하게 너에게 무엇을 먹어도 되고 무엇을 먹으면 안 되는지 알려 주는 것이고, 먹으면 안 되는 것을 먹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까지도 하나님은 사람에게 알려 주었다. 이 간단한 말씀 세 구절을 듣고 나면, 너는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된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피조물은 창조주가 하는 말씀을 듣고 나서 명확히 이해하고 깨달아 마음속에 새긴 뒤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고,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이 먹어도 된다고 한 것만 먹고, 하나님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한 것은 먹지 않으며, 하나님을 시험해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는 차치하고, 하나님이 한 그 말씀들로 보자면, 하나님 말씀의 형식과 언어 방식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이해하기 아주 쉽다. 심오하지 않고, 뜸 들이지도 않으며, 다른 속셈은 더더욱 없다. 하나님이 한 이 몇 마디 말씀은 비록 간단하긴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이 뚜렷하고, 명료하고, 쉽고 간단하다는 것을 사람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느냐?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과 정직함, 신실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사랑은 어디에서 드러나느냐? 바로 하나님의 이 몇 마디 당부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의 당부는 아주 구체적이고, 아주 정확하다. 이 몇 마디 당부로 볼 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책임감과 염려가 있다. 가장 간단한 언어로 사람을 이해시키고, 사람이 이해한 뒤에는 안심하고 떠났다. 보아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느냐? (아무런 의도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염려 안에는 사람이 그저 한 가지만은 해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바로 말을 잘 듣고,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고, 하나님을 넘겨짚지 말며, 하나님을 의심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 세 마디 당부에 담긴 목적이자 기대이다. 말을 잘 듣고, 하나님을 의심하지 마라. 하나님이 하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진실하고, 하나님은 신실하다. 하나님은 사랑과 염려로 이 책임을 다하고, 사랑과 염려로 인류에게 이 세 마디 말씀을 당부하고 있다. 여기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본질을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말씀하는 방식과 출발점도 볼 수 있는데, 그 목적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이해하고, 마음속에 새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대하든 하나님의 출발점은 결국 하나님의 출발점이다. 그는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며, 괴상하거나 어두운 속셈과 목적 따위는 없다. 게다가 하나님의 이 몇 마디 당부에서 볼 수 있듯,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은 단도직입적이며, 말씀의 목적은 바로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에게 에둘러 말씀하지 않고, 언제나 단순하고 명쾌하게 말씀한다. 사람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일상 언어로 사람과 대화하여 사람이 알아듣고, 기억할 수 있게 하며, 말씀한 게 헛되지만 않으면 충분하다. 하나님이 말씀할 때 지위를 내세우더냐? 사람을 꾸짖더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류와 대화하고 사람에게 당부할 때, 비록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류의 부모나 어른과 유사한 관점에서 당부하더라도 가장 직설적이고, 가장 간단한 언어로 사람과 대화한다. 이 대화라는 게 사실은 패괴된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어법의 형식, 인류의 지식과 언어라는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평이하고 알기 쉬운 언어이자, 어린아이에게나 할 법한 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 말씀은 심오하지도 않고, 고급스럽고 격조 있고 세련되지도 않은 데다가 아무 기세도 없어요. 무슨 수준 높은 단어나 화려한 미사여구를 쓴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는 방식이다. 비록 하나님은 전능하고, 하나님에게는 풍성함이 넘치고, 하나님은 만유를 초월하지만, 하나님이 인류와 대화할 때는 가장 간단하고, 가장 직설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하나님의 눈에 인류는 마치 어린아이 같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인류에게 당부하는 것이다. 무엇을 먹어도 되는지, 무엇을 먹으면 안 되는지, 먹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를 이토록 간단한 말씀으로 인류에게 당부하여 인류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패괴된 인류의 입장에서는 이를 무엇이라고 하느냐? 몸을 낮추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편에서는 어떠냐?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표출이다. 하나님은 위장할 필요가 없고, 이 일을 행할 때 미리 초고를 쓸 필요도 없으며, 미리 준비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연스러운 표출이다. 보다시피 이 말씀은 심오하지 않고, 신비하지도 헤아리기 어렵지도 않기 때문에 사람은 흔히 이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지 못하며, 말을 잘 듣지도 순종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패괴된 인류의 패괴된 부분이며, 최초 인류의 무지한 부분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주장이 나타나자, 인류는 하나님을 경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기 시작했고, 하나님 말씀의 의도를 억측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인류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 인류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들여 하나님을 억측하고 의심하게 된 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다.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빛을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결과는 무엇이냐? 사탄에게 패괴되어 오늘날까지 패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조금 전 다룬 내용은 성경에 ‘유혹’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는 방식과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하나님이 인류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를 갖춰야 한다. 하나님의 본질에 꾀는 요소가 없는 면은 성육신 하나님 역시 똑같이 갖추고 있다. 이는 인식하기가 아주 쉬울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한 말씀과 하나님이 행한 일은 많지 않아서 사람이 확실하게 인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말세의 이번 단계 사역에 이르러 하나님은 성육신하여 많은 말씀을 하고, 많은 일을 행했다. 이토록 오랜 세월 너희와 함께하며 말씀하고 교제하고, 심지어 일상생활 속에서 어울리기까지 하며 했던 말씀과 행동은 기본적으로 방금 다룬 성경 속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인류를 대하는 태도와 똑같다. 너희가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게 말씀하려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말씀이 아주 세세하고, 아주 구체적이며, 심지어 되풀이해서 말을 한다. 그러다 보니 다소 장황하게 들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유는 단 하나, 창조주, 즉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 사역하든 간에 인류를 대할 때 결코 떨쳐 버릴 수도 없고, 바꾸기도 어려운 습관적 태도와 습관적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습관적’이라는 표현과 ‘떨쳐 버릴 수 없다’는 표현은 아마 별로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인류의 언어는 너무도 빈약하여 일단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럼 이 관점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 서서 인류를 바라볼 때, 인류는 어느 때든 상관없이 항상 하나님이 손으로 창조한 최초의 그 무지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인류이자, 겉모습은 어른처럼 보이지만, 마음속 본질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와 같은 인류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류를 대하는 태도는 사람이 인류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태도와는 늘 다르다. 바로 이 ‘다름’으로 인해 많은 경우 하나님이 인류에게 말씀하거나 인류에게 당부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는 방식이나 출발점은 대개 인류의 언어를 빌려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이 더 잘 알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고 사람에게 말씀하는 목적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무엇인지, 사람이 매사를 처리할 때 하나님이 요구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사람이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할 때 지녀야 할 관점이 무엇인지 더욱 명확하게 알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의 관점에서 인류에게 이런 말씀을 할 때, 그것은 연설도 아니고, 외침도 아니며, 당연히 호소도 아닌 공급이다. 공급이란 무엇이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과 사람에게 모자란 것을 근거로 채워 주는 것이 바로 공급입니다.) 공급에는 붙들어 주고 도와주는 것이 포함되며, 때로는 권면하고, 일깨워 주고, 격려하는 것 등도 공급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공급이란 무엇이냐? 인류가 나이가 어떻게 되든, 얼마나 많은 생존의 기술을 터득했든, 혹은 지식수준이 얼마나 높든 진리라는 이 측면에서 인류는 영원히 백지상태이다. 인류가 아는 지식은 진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고, 사람이 깨달아야 하는 진리는 너무도 많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공급은 바로 진리와 생명의 공급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에게 가장 좋은 공급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과 일, 사물 앞에서 네가 지니고 있는 관점, 네 인식, 네 태도는 모두 진리와 무관하다. 네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든, 네가 얼마나 뛰어난 처세 수단을 가지고 있든, 네 경험이 얼마나 많든 진리라는 측면에서 너는 백지상태이고, 네게는 진리가 없다. 설령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은 지 오래되어 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사실 면에서 너는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했고,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르며, 특수한 일이 닥치면 멍해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적인 원인도 하나 있는데, 바로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패괴 성품이 너를 가로막고 옭아매어 진리를 실행할 수 없게 만들고, 너는 그나마 깨달은 얼마 안 되는 진리조차 실행해 내지 못한다. 진리를 실행하는 일은 네 입장에서 어려움이 있고, 걸림돌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 인류는 영원히 갓난아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의 눈에 사람은 영원히 갓난아이라고요? 단계별로 다르지 않나요?” 단계별로 다르지 않다. 왜 단계별로 다르지 않다고 하겠느냐? 사람의 본질에 따르면, 인류는 영원히 인류이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갓난아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럼 아브라함과 욥도 갓난아이인가요?” 그렇다. 왜 아브라함과 욥은 간증이 있는데도 여전히 갓난아이이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전능과 비교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급하는 진리를 사람이 얼마나 깨닫든, 하나님에게 얼마나 순종할 수 있든 사람이 아는 하나님의 성품 본질과 사람이 깨닫는 진리는 전부 제한적이다. 여기서 제한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냐? 바로 사람의 생활하고 생존하는 범위 내로 제한된다는 것이다. 설령 네가 여러 측면의 진리를 모두 깨닫고, 하나님에게 온전케 되었다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은 여전히 네게 공급한다. 하나님은 영원히 네 생명과 생활의 근원이고, 너는 영원히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생명이 공급하고 양육하는 대상이다. 이 점으로 볼 때, 인류는 하나님 눈에 영원히 갓난아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포대기 속의 갓난아이인지, 아니면 젖을 먹는 갓난아이인지, 또는 어떤 시기에 해당하는지는 네가 깨달은 진리를 근거로 구분한다. 그러나 어떤 시기에 해당하든 인류라는 이 피조된 생물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주의 눈에는 영원히 갓난아이다. 그렇다면 갓난아이라는 이 신분과 본질로 볼 때, 하나님이 인류에게 말씀하는 주된 목적과 성질은 바로 공급이다. 물론, 이 공급 안에 포함되는 범주는 다소 넓어서 밝히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고 징계하기도 하며, 때로는 폭로하고, 때로는 책망하고 훈계한다. 또한 직접적으로 알려 줄 때도 있고, 명확하게 알려 줄 때도 있으며, 예를 들어 원칙을 알려 줌으로써 네가 스스로 묵상하고, 스스로 체험하게 할 때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 말씀하든 간에 창조주가 피조된 인류에게 말씀한다는 이 성질로 보면, 언제까지나 그것은 공급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공급에서 너희가 보기에 꾀는 요소가 없지 않으냐? (없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인류가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것은 영원히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며, 얻는 것은 유익이고, 인류가 거두는 것은 생명이다. 설령 네가 마침내 온전케 된다고 해도 너는 여전히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여야 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 너는 여전히 하나님의 공급을 받아들여야 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하며, 너는 여전히 피조물이고, 네 신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때의 신분과 지금 이 신분 안에 있는 생명과 분량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때는 더욱 합당한 자격을 갖추게 되고, 새로운 인류의 생명을 지니게 된다. 이 생명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다. 이 인류는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으며, 사탄을 경배하지 않고, 사탄을 저버려 더는 사탄에게 유혹받지 않고, 짐승의 표가 없다.
성육신이 한 이 모든 말씀은 너희가 첫날부터 지금까지 읽어 왔고, 또 앞으로도 읽겠지만, 너희가 읽은 말씀 하나하나, 너희가 듣고 받아들인 말씀 하나하나, 매번 한 말씀 가운데 어느 한 마디에도 꾀는 요소는 없다. 설령 너희에게 질문을 좀 던질 때도 직설적으로 너희의 관점을 묻고, 너희가 어떤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바라보는지 묻거나, 혹은 내가 질문을 하나 던져 너희가 묵상하게 한 뒤 너희가 묵상해도 깨닫지 못하고,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하는 것 같으면, 그때는 내가 직접적으로 말한다. 내가 다 말하고 나서 너희가 깨닫고 이해했으면,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때때로 내가 말하는 중에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듣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거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거 아닌가?’ 내가 말하건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대다수가 이삼십 대 이상의 성인으로, 정말이지 어린아이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은 나이가 몇이든 간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결국 어린아이고, 영원히 어린아이다. 너희가 보다시피 하나님 집 사람들 중에는 온갖 직업이 다 있다. 노동자, 농부, 기술자, 고위 공직자는 물론 대학생도 있고, 심지어 석박사나 교수 등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진리에 닿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내가 이렇게 설교를 해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내가 세세하게 말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다들 문자적인 의미만 좀 이해할 뿐, 실행하고 체험할 때가 되면, 길을 찾지 못한다. 그러니 반드시 세세하게 말하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며, 예시까지 들어 가며 설명해야 한다. 이 중 한 가지 방법이라도 빠지면 안 된다. 만약 누가 이건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말이 맞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정말이지 어린아이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럼 너희가 말해 보아라,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이지 않으냐? 너희 중 하나님 말씀에 닿을 수 있고,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너희가 만약 정말로 자신을 어린아이로 여긴다면, 그야말로 이성적인 것이다. 너희는 마땅히 자신을 어린아이라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며, 이런 마음가짐이 옳다. 보아라, 내가 어린아이를 대하듯 하는 이런 말을 들으면, 너희는 기운이 솟고 ‘아멘’ 하게 되지 않느냐? 내가 이렇게 말하니, 너희의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았느냐? 너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느냐? 만약 너희의 문제가 정말로 해결되었다면, 이런 말씀들이 바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그야말로 완전히 적절하고, 패괴된 인류에게는 진정으로 내가 이렇게 얘기할 필요가 있다. 예시와 비유를 들며, 귀찮아하지 않고 반복해서 여러 관점과 다양한 방식으로 말하는 것 말이다. 게다가 모든 말씀이 마치 어린아이의 언어와 같은데, 이는 가장 간단하고 가장 직설적인 말씀으로, 이렇게 말해야만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이 모든 말씀 가운데 거짓말이나 너희들을 미혹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다. 전부 너희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어야지 절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면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이고, 사탄의 올무에 빠지는 것이라고 알려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이렇게 말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그렇다면 사탄은 어떻게 사람을 미혹했느냐? 사탄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죽지 않을 수도 있노라…”(창 3:4) 이렇게 해서 사람을 미혹했다. 내가 하는 말 가운데 사탄의 말과 유사하거나,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 말이 있느냐? 이런 성질을 띤 말이 단 한 마디라도 있더냐?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이런 말은 한편으로는 너희가 사탄의 패괴 성품과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하는 여러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알게 하여 인식하고 해부한 다음 벗어 버리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도(道)를 준행하는지, 하나님의 도가 어떤 건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여러 일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은 네가 사탄을 멀리하고, 사악한 흐름을 멀리하며, 사탄을 저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악한 흐름 속에서 구별되어 나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고, 여러 사람과 일, 사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진리 원칙을 구하며,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은 너희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린 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너희에게 세상의 흐름을 좇고 세상의 여러 사상 관점을 따르라고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너희에게 참도를 떠나고 하나님을 떠나라고 하는 말 역시 한 마디도 없고, 너희에게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에게 불만을 가지라는 말도 한 마디도 없다. 물론 성육신의 관점에서 그릇되게 하나님을 대표하는 일은 더더욱 없고,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 너희가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에게 경계심을 품게 하는 일도 없다. 오히려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잘못된 사상 관점, 하나님에 대한 여러 관념과 상상을 해결하여 너희를 하나님 앞으로 데려오고, 심지어 하나님 앞으로 밀어 주어 너희가 사악한 흐름에서 멀어지고, 온갖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내려놓게 한다. 보다시피 온갖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해부하는 이 모든 말씀, 즉 결혼, 가정, 일, 정치, 이상, 앞날, 금전, 지위, 명예와 이익, 남녀 관계, 나아가 이 세상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걷는 길, 사람이 어떻게 다양한 정서를 분별하고 어떻게 감정을 대하는지에 대한 교제를 포함한 이 모든 것은 전부 너희에게 올바르고 긍정적인 사상 관점을 공급해 주고, 진리를 공급해 준다. 이런 말씀은 모두 진리이며, 최선을 다해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관점에서 사람이 온갖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분별하고, 이 세상의 어두움과 사악함을 분별함으로써 이 세상을 확실히 인식하고 사탄을 저버린 다음, 하나님이 사람에게 갖추도록 요구하는 올바르고 진리에 맞는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게 해 준다. 그리고 사람을 바른길로 이끌어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 내가 하는 이런 말들에 만약 속셈이 있다고 한다면, 오직 한 가지 속셈뿐이다. 바로 어떻게든 너희가 진리를 깨닫고, 개인의 육적인 앞날과 이익 등 각 방면에서 육에 속하는 것들을 내려놓은 다음,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각기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에게 진리와 관련된 다방면의 주제를 이야기해 주어 너희가 진리에 흥미를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특히 비교적 해학적이고 재미있는 방식을 써서 너희가 흥미를 느끼고, 듣고 싶게 만들며, 너희가 새겨듣게 만들고, 그런 다음 그 안에 담긴 진리를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해학적인 이야기나 재미있는 이야기 한 단락으로 너희의 이목을 끌어 너희가 듣고 싶게 만들고, 듣고 나서는 이 이야기를 기억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그런 일이 닥쳤을 때 그 방면의 이야기가 떠올라 그 문제와 관련된 진리를 구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진리를 구할 때 성령의 깨우침을 얻어 그 안에 담긴 진리 원칙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사람이 실행해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곧 네가 온갖 일들을 만났을 때, 더 이상 막막하지 않고, 손발이 묶여 제약받지 않으며, 더 이상 곤혹스러워하지도,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고 실행의 길을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한 가지는 더 이상 예전처럼 사탄의 사상과 사탄의 패괴 성품에 통제되지 않고, 더 이상 사탄의 패괴 성품을 생명으로 삼지 않으며, 더 이상 사탄이 네게 주입한 사상 관점으로 갖가지 일을 처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 원칙으로 그것을 대체하게 하려는 것이다. 보아라, 내가 하는 모든 말은 어떤 방식이든, 네게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식이든, 아니면 충분히 네 이목을 끌 수 있는 방식이든 최종 목적은 바로 최선을 다해 네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설령 때때로 우스갯소리를 좀 하고,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더라도 이 역시 너희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득하게 앉아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래야 너희가 진리를 듣고 싶어 하고, 진리를 받아들일 기회를 얻는다. 목적이라고 하면, 이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특히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짧고 체험이 얕은 일부 젊은이들, 이 세상에 대해 아직 기대와 호기심이 가득한 일부 사람들, 이런 초 신자들이 참도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해 나는 많은 말을 하고, 많은 사역을 했다. 하나님을 따르는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 다양한 상황의 사람들, 여러 민족 사람들에 대해 내가 말을 하는 이면의 유일한 의도나 속셈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는 동시에 진리를 얻고, 진리 원칙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따라 바른길을 걷는 것이고, 더 이상 세상의 흐름을 좇지 않고, 더 이상 사탄의 패괴 성품에 통제되지 않고, 더 이상 사탄의 패괴를 계속해서 받아들이지 않고, 참하나님을 경배하고 창조주를 경배하는 것이고, 사람이 피조물이라는 자기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창조주를 경배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이 유일한 목적으로 볼 때, 설령 때때로 조금 특별한 방식이나 특별한 내용으로 말할지라도, 설령 어떤 말은 다소 깊이가 있어 이해하기 쉽지 않을지라도 어떤 상황이든 간에 이 안에 꾀는 요소는 없다. 오직 너희를 공급하고 인도하려는 한 가지 의도만 있을 뿐이다. 이 공급과 인도는 바로 차근차근 잘 유도하는 것이다. 다소 적절하지 않은 말로 하자면, 너희를 공급하고 인도하는 것은 마치 온실 속의 꽃을 가꾸는 것처럼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너무 더워도 안 되고, 너무 추워도 안 되며, 날씨가 좋을 때는 꽃에 햇볕을 쬐어 주어야 하고, 수시로 온도도 살펴야 한다. 너무 더우면 꽃이 말라 죽고, 온도가 갑자기 내려가서 너무 추우면 어린 꽃이 얼어 죽는다. 너희의 분량은 바로 이토록 연약하다. 연약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너무 어리고, 아무 분량이 없다는 뜻이다. 아무 분량이 없는 실제적인 모습은 무엇이냐? 바로 대다수 사람이 실생활 속에서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 거의 생명 진입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생명 진입이 없는데 어찌 분량이 있겠느냐? 분량은 날마다 조금씩 쌓이는 생명 진입을 바탕으로 누적되고 모이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에게 말할 때, 나는 귀찮아하지 않고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입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예를 들어 다양한 주제로 공급하고 인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차근차근 잘 유도하는 것이다. 여기서 ‘유도한다’는 것은 꾀는 것이 아니라, 인도하고 공급하는 것으로, 일종의 이끎이다. 이런 이끎에는 그 어떤 부정적인 작용도 없고, 아무런 불순한 속셈도 없다. 속셈으로 보든, 말씀하는 방식과 내용, 형식으로 보든, 너희는 내가 하는 말을 설교 녹음으로 듣거나 글로 읽어서 한번 점검해 보아라. 이런 말씀들 속에 사탄이 사람을 유혹하는 방식이 있느냐? (없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자세히 살펴보아라. 길이가 길든 짧든 말씀 한 편 한 편이 교제하는 내용은 모두 한 측면의 진리이고, 전부 진리와 관련 있다. 모두 진리와 관련 있는 이상 너희에게는 모두 공급이고, 너희가 필요로 하는 것이며, 너희가 장차 얻게 될 생명과 연관되고, 너희의 미래, 종착지와도 관계된다.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결코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다. 너희 스스로 늘 하나님의 말씀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면, 너희는 어리석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 어리석다고 하겠느냐? 너희의 분량이 너무 작아 진리에 닿지 못하고, 치우치게 이해하며, 참으로 유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를 세 살배기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것은 전혀 지나치지 않다. 너희를 존중하지 않고 얕잡아 봐서가 아니라, 너희가 실제 분량이 너무 작고, 조금도 분별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말이 정확하지 않으냐? (정확합니다.)
방금 교제한 ‘꾀지 않는다’는 측면의 주제에 대해 너희는 어느 정도 이해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교제한 이런 내용은 기본적으로 성육신의 말씀과 사역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본 것이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고 사역하는 사실과 하나님의 고심으로 볼 때,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본질 안에 패괴된 인류나 마귀 사탄이 사람을 유혹하는 요소가 정말 없으며, 이런 속셈도 들어 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육신이라는 이 평범한 겉모습을 가진 사람에 대해 너희는 또 얼마나 알고 있느냐? 또 어떤 사실들이 성육신의 인성 측면과 신성 본질 측면이 서로 하나가 되고, 모순되지도 충돌하지도 않으며, 일치하는 데다가 두 측면 다 똑같이 사탄이나 패괴된 인류가 사람을 유혹하는 모습도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 이 측면에 대해 너희는 얼마나 알고 있느냐? 또는 성육신의 어떤 모습과 표출에서 그것을 인식하게 되었느냐? 아마 대다수 사람이 아직 이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가 알지 못하니, 내가 직접 구체적으로 소개해야 하는데, 늘 이렇게 소개하자니 나도 참 번거롭다. 사실 너희와 상대하고 어울릴 때, 온라인에서든 현실 생활에서든 너희가 만약 주의를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여 느낀다면, 성육신의 이런 측면의 모습과 표출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세심하지 못한 데다가 이런 측면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이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발견하지 못한다. 너희가 주의를 기울였든 아니든 이 측면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측면의 진리와 관련된 이상, 우리는 교제해야 한다. 꾀지 않는다는 측면을 교제할 때, 성육신이 사람과 어울리는 방식으로 보자면, 우선 네가 알아야 할 한 가지는 바로 나는 너희와 말하고 일을 처리할 때 속내를 떠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나눌 때는 이야기만 나누며, 단도직입적이고 직설적으로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말한다. 설령 때때로 네 연약함을 헤아려서, 혹은 네 분량이 작아서 네 체면을 세워 주느라 어느 정도 지혜로운 방식으로 너와 말할지라도 나는 속내를 떠보지 않으며, 네가 말을 하도록 꾀지 않는다. 네가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말하고 싶지 않으면 나도 묻지 않는다. 나는 네 속내를 떠보지 않는다. 설령 내가 어떤 사람들의 상황을 알아보려 하더라도 나는 직접적으로 묻는다. “너희 교회 리더는 어떠냐? 너와 협력하는 그 자매는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이 되었느냐? 그 자매는 하나님을 믿는 기초가 있느냐? 네 생각에 그 자매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냐? 너희가 협력하는 데 문제는 없느냐?” 너희가 들어 보니, 이 몇 마디에 속내를 떠보는 성질이 있느냐? (없습니다.) 네가 만약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나는 네게 강요하지 않고, 그 어떤 수단이나 계략을 써서 꾀지 않으며, 어떻게든 네 마음속 말을 끄집어내지도 않는다. 나는 그런 취미도 없고, 그런 행동 방식에 관심도 없으며,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네가 만약 얘기하고 싶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얘기하고, 비교적 객관적으로 말하든, 개인의 편견이 섞여 있든 네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면 된다. 내가 다 듣고 나서 구체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 보자면, 내가 너에게 말할 때는 아주 직설적이고, 하는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다. 나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직접적으로 묻는다. 만약 네가 늘 에두르며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나와 말장난을 하거나 잔머리를 굴린다면, 나는 너와 대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말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계략을 꾸미지도 않으며, 갖은 방법으로 알아내려 하지도 않는다. 나는 어떤 사람의 상황을 알고 싶으면, 예를 들어 그가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이 되었는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지, 진리에 대한 이해는 어떤지,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는지, 양성할 가치가 있는지 등 사역을 위해 이런 상황을 알 필요가 있으면, 직접적으로 묻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 개인에게 어떤 사생활이 있는지, 남몰래 개인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너라는 사람이 추구하는 것, 네가 진리를 대하고 본분을 대하는 태도이고, 만약 너를 리더로 뽑는다면, 네 의지와 부담, 인성이 어떻고, 네 믿음이 얼마나 크냐 하는 것들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알아본다. 너 개인의 사생활, 예를 들어 한 달에 돈을 얼마나 버는지, 혹은 어떤 떳떳하지 못한 짓을 했었는지, 어떤 이성들과 엮였었는지, 누구를 속이고 누구에게 해를 끼쳤는지와 같은 일들에 관해서라면, 나는 정말이지 알고 싶지 않고, 결코 알아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자기가 예전에 남녀 관계에서 과오가 있다고 말하는데,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 일은 내게 말하지 말고, 너 혼자 안 보이는 데 가서 하나님에게 기도해라. 하나님이 만약 너를 용서한다면, 네 마음에 감동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만약 너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계속 기도하고 내게 말하지는 마라. 나는 그런 일에 대해서 듣고 싶지 않다.” 나는 너희와 만날 때 주로 하나님을 믿는 일, 교회 사역에 관한 일, 생명 진입에 관한 일이나, 네가 묻는 개인의 내적 상태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좀 이야기한다. 대부분은 이런 일들이고, 가끔은 국제 정세에 대해서도 좀 이야기한다. 어느 측면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든 나는 그저 그 주제에 대해서 내 개인적인 견해와 관점을 밝힐 뿐이다. 구체적으로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든 다 괜찮다.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든 얘기하고, 하고 싶은 만큼 얘기하면 된다. 만약 네가 나는 경계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해라. 만약 네가 마음속으로 나를 경계하고 의심하며, 내가 네 속사정을 알거나 네 비밀을 누설할까 봐 두려워 말을 많이 하고 싶지 않다면, 나도 강요하지 않고, 네 자유에 맡긴다. 내가 사람과 어울릴 때는 바로 이런 원칙이다. 나는 결코 네가 마음속에 할 말이 있는데 안 한다고 해서 어떻게든 사람을 시켜 뒤에서 너에 대해 알아본다거나, 대놓고 여러 방식으로 네 속내를 떠보며 네가 스스로 털어놓게 만들지 않는다. 나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나는 결코 그 누구에게도 자발적으로 내게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하지 않는다. 너는 내게 무언가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필요가 없다. 나는 네게 이런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네가 내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모든 일을 내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네가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네가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고 해서 네가 곧장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네가 진리를 추구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네가 형벌과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네가 어떻게 하든 나는 내 방식대로, 마땅히 대해야 할 방식으로 너를 대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만약 대화가 오가거나 어떤 교류가 있을 경우, 만약 네가 내게 무언가를 숨기려 하고, 내게 잔꾀를 부리거나 말장난을 하거나 나와 숨바꼭질을 하려 한다면, 나는 절대 그 어떤 방식이나 수단으로도 네 속내를 떠보며 네가 걸려들거나, 네가 솔직하게 털어놓게 하지 않는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속내를 떠보지 않는 측면에 관하여 너희가 명확히 알아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하나님이 인류를 아는 것은 인류가 현실 생활에서 드러내는 일부 구체적인 표출이나 살아 냄, 또는 생활 방식에 기반한 것도 아니고, 사람이 어떤 일들을 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류를 아는 것, 그리고 인류를 알게 된 뒤에 가지는 태도는 무엇에 기반하느냐? 하나님이 사탄의 본성 본질을 아는 것에 기반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류를 아는 것은 인류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인류의 패괴된 본질을 알고, 인류가 사탄에게 패괴되고 우롱당했다는 것과 사탄이 인류에게 어떤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주입했는지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으로 너를 심판하고 형벌하기에 충분하고, 네게 진리 생명을 공급해 너를 구원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니 너는 나와 교류하거나 나와 대화할 때, 반드시 내게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과 어울릴 때는 우선 솔직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솔직한 것은 일종의 태도이지,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는 것이 아니다. 네가 패괴된 인류라고 해서, 네가 죄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내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무슨 일이든 내게 명확하게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나는 그걸 원하지도 않고, 너에 대한 나의 태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만약 네가 내게 솔직하다는 것이 반드시 무슨 일이든 내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되었고, 네 오해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러니 설령 네게 내 앞에서 말하기 곤란하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나 이야기가 아주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솔직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며, 네 마음가짐이 어떤지에 달려 있다. 말하기 불편하거나,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절대 내가 네 속사정을 몹시도 알아내고 싶어 하고, 네 비밀을 무척이나 알고 싶어 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절대 오해하지 마라. 나는 조금도 알고 싶지 않다. 나는 네가 예전에 어땠는지 알고 싶지 않고, 네가 앞으로 어떨지도 알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네가 지금 어떤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지금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지금 네가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는지, 네가 매일 생명 진입이 있는지, 정직한 사람이 되고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범사에 진리 원칙을 구하는 등 현실 생활에서 진입해야 할 이런 진리에 진입했는지, 나는 오직 이런 것들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니 너희는 마음속으로 절대 내게 그 어떤 우려도 품지 말고, 이렇게 걱정할 필요도 없다. “정직한 사람이 되려면, 무슨 일이든 당신께 명확히 말씀드리고, 무슨 일이든 다 알려 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으면, 어떻게든 제 속내를 떠보고 제가 말하도록 유혹하시지 않을까요?” 내가 말하건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든, 대화하든, 일을 처리하든, 교류하든 서로에게 솔직한 태도와 마음가짐만 지니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속내를 떠보지 않는다. 속내를 떠보는 것은 패괴된 인류가 서로 간에 교류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인 수법이자 상투적인 일 처리 방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사생활이나 다른 사람이 남몰래 하는 일들, 특히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평가하는지, 과연 대단하게 보는지 아니면 하찮게 보는지, 존귀하게 여기는지 아니면 비천하게 여기는지 등에 아주 관심이 많다. 그래서 늘 속내를 떠보는 방식으로 이런 일들을 알아본다. 너희에게 솔직하게 말하건대, 나는 이런 일들에 조금도 흥미가 없다. 너희는 나를 너희가 상대하는 그 어떤 평범한 사람과도 똑같다고 여기지 마라. 나는 내가 너희 마음속에서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다. 존귀하든 미천하든, 대단하든 하찮든 나는 이런 일들에 관심이 없으니, 너희는 나와 대화하고 교류할 때, 그런 우려는 품지 마라. 패괴된 인류는 어떤 사람과 교류하든 늘 이렇게 신경을 쓴다. ‘나는 다른 사람 마음속에서 과연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을까? 남들에게 내 인상이 과연 좋을까, 나쁠까?’ 또 어떤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고민한다. ‘내가 저 사람이랑 교류하면,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을까? 무슨 덕을 볼 수 있을까? 나는 이 무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나를 존중해 줄까?’ 사람은 늘 이런 일들을 염려하고, 이런 일들에 관심을 갖는다. 나는 결코 그런 일들을 묻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을 알아보지도 않는다. 사람은 항상 이런 일들을 알아보기 좋아하는데, 이는 사탄의 패괴 성품의 자연스러운 표출이자, 패괴된 인류의 공통점이다.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알아보는 것을 특히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아주 관심이 많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가지는 위치와 가치를 몹시 알고 싶어 한다. 특히 일부 리더 일꾼이나 은사와 재능이 좀 있어 교회에서 명망이 좀 있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가지고 있는 지위, 그리고 무리에서 차지하는 서열과 위치를 무척 중시한다. 대다수 사람은 특히나 이것을 신경 쓴다. 그들은 때때로 다른 사람에게 몇 가지 특별한 질문을 하는데, 그 속셈과 의도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숭배하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다른 사람 마음속에서 자신이 가지는 위치에 무척 신경 쓴다는 뜻이다. 네가 이런 걸 안다고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다른 사람이 너를 우러러본다고 뭘 어쩔 수 있느냐?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느냐? 다른 사람이 너를 얕본다고 한들 네가 소극적인 상태가 되어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냐? 다른 사람이 너를 우러러본들 그게 무슨 작용을 하느냐? 채찍질로 작용하느냐, 아니면 격려로 작용하느냐? 아무런 작용을 못 한다. 또 일부 악인은 늘 다른 사람의 정보를 조사하고, 다른 사람이 뒤에서 자신을 두고 뭐라고 했는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본다. 누가 자신을 가장 반대하고, 자신의 원수인지 파악하려는 것이다. 심지어 온갖 수단을 동원해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떠본다. 어떤 사람들은 유혹에 넘어가 마지막에는 사실대로 털어놓고, 결국 악인의 계략에 빠진다. 악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공격하고 보복하며 온갖 상황에서 그를 억누르고 배척하는데, 그를 억압해 숨도 못 쉬게 만들고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게 만든다. 마치 대재앙이 닥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에게 기도해도 하나님의 인도를 느끼지 못하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다. 그는 악인에 의해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결국 믿음마저 잃어버린다. 하나님을 믿어도 악인을 만날 수 있고, 악인에게 박해와 괴롭힘을 당할 수 있으니, 너무 힘들고 그만 믿고 싶다. 악인은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악인에게 미움을 사면, 마치 전갈에게 물린 것과 같아서 떨쳐 내도 떨쳐지지 않고, 뿌리쳐도 뿌리쳐지지 않는다. 본인도 그와 싸울 자신이 없어 결국 악인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이 패괴된 인류는 사탄에 속하는 마귀든, 패괴 성품을 지닌 인류든 관계없이 모두 이런 경향이 있고, 이런 본질이 있다.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 다들 자신의 명예와 지위,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속내를 떠보고, 심지어 꼬투리를 잡아 사람을 괴롭히기도 한다. 중국 건국 초기를 한번 보아라. 공산당은 우파를 숙청하려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가 건설에는 인재가 필요하니, 여러분이 당에 무슨 의견이 있거나, 국가 건설에 대한 어떤 고견이 있으면, 전부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말이든 죄를 묻지 않고, 기꺼이 경계로 삼을 테니, 다들 직언해 주십시오!” 그러자 이 말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말했다. “아, 나라가 폐허에서 다시 일어나려면, 우리 같은 인재가 필요하겠어요. 나라에서 이토록 인재를 중시하니, 우리가 사실을 말해야죠.” 이런 지식인과 고위 인사들은 모두 솔직하게 얘기했고,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다. 보아라, 사탄은 듣기 좋은 말로 사람이 솔직하게 말하도록 유혹한다. 사람은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속마음을 모조리 털어놓고, 결국 사탄의 계략에 빠지고 만다. 사탄은 이렇게 말한다. “옳거니! 이제 꼬투리를 잡았구나. 너희 죄를 다스릴 증거가 생겼어!” 곧이어 공산당은 반우파 운동을 일으켜 사실대로 얘기한 사람들을 모조리 우파로 몰아세웠고, 이들 지식인과 고위 인사들은 결국 응징을 당했다. 그 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어 유명인이나 능력 있는 사람들은 전부 ‘외양간’에 처박히고, ‘주자파’나 ‘반혁명 분자’라는 팻말을 목에 걸었다. 결국 숱한 이들이 처참하게 응징당했다. 보아라, 사탄은 사람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그 스스로도 바른길을 가지 않으며, 사람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사실을 말하도록 사람들을 유혹한 뒤 꼬투리를 잡고 정죄하여 사람을 죽도록 짓밟는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했다. 인류는 사탄에게 패괴되어 차츰차츰 갈수록 깊이 패괴되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두 눈으로 목도했고,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적절한 때를 택해 사람을 구원하러 온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상의하지 않고, 사람에게 의견을 구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때가 되자 성육신해 사람 가운데 와서 진리를 선포하고, 사람의 패괴 성품을 폭로하고, 사람의 각종 문제를 폭로한다. 그리고 사람의 문제를 폭로함으로써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하고, 스스로를 인식하게 한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여 사람이 바른길을 걷도록 한다. 이런 방식, 이런 방법을 통해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한다. 반면, 사탄은 늘 천방백계로 인류를 미혹하고, 인류를 패괴시킨다. 사탄은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이 모자라든 그저 사람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들고, 사람을 유혹해 하나님을 떠나고 배반하게 만들려 한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못하게 가로막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사탄은 늘 사람을 시험하고 유혹하려 한다. 사람을 유혹해 악을 행하게 만들고, 사람을 유혹해 그 어떤 경계심도 내려놓게 만든다. 사람은 사탄에게 그 어떤 경계심도 없는 상황에서 사탄이 진심이라고 믿고, 사탄이 진실되다고 믿고, 그런 다음 그것에게 의탁한다. 뒤이어 아무런 경계심도 없는 상황에서 그것의 우롱을 받아들이고, 그것의 패괴를 받아들이게 되어 결국 그것에게 완전히 삼켜지고 만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본질을 알고, 인류의 패괴 성품을 알고, 인류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근원을 안다. 그러니 하나님은 네가 안 보이는 데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생각하고 어떤 일들을 했는지, 네가 아직 어떤 사생활을 고백하지 않았는지 알아보지 않아도 네 본성 본질을 충분히 밝힐 수 있다. 네 패괴 성품과 본성 본질을 전부 폭로하여 그 실체를 낱낱이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네가 기꺼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네가 자신의 본질을 인식하게 하는 목적은 네가 진실로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에게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지, 결코 너를 괴롭혀 네가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고, 타락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 너는 하나님의 고심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네게 책임감과 염려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일을 아주 지혜롭고 단계적으로 행하며, 충분히 너를 고려한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너를 고려하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정성껏 세심하게 안배하고 계획한다. 비록 사람의 관념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고심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구원받는 일에 대해 조금도 소홀함이 없으며, 오히려 고심하고, 그의 심혈을 전부 여기에 쏟아붓는다. 사람의 패괴 본질을 밝히는 것을 바탕으로 여러 측면의 문제를 교제함으로써 사람이 자신의 문제와 자신의 본성 본질을 더욱 잘 알게 한다. 그런 다음 긍정적으로 너에게 공급하여 네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황당한 논리인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깨닫고 나서 점차 바른길을 걷게 한다. 보아라, 하나님이 너를 위해 한 이 모든 것은 전부 너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성육신이 한 이 모든 사역으로 볼 때, 그의 출발점은 인성의 관점에서 보든 아니면 신성의 관점에서 보든 그와 창조주의 출발점은 일치한다. 그러니 성육신한 이 인자가 너희와 교류하고 접촉할 때도 마찬가지로 이런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 목적은 바로 너희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로 인도하고, 너희를 붙들어 주어 구원받는 길을 걷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와 대화하고 교류할 때는 결코 속내를 떠보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너희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더라도 그저 단순하게 물어볼 뿐, 속내를 떠보는 방식을 써서 너희가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꾀는 일은 없다. 그런 일은 없다. 이제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또 한 가지 측면으로, 나는 너희가 뒤에서 내게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결코 관심이 없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너희가 보기에 나는 키도 크지 않고, 생김새도 이렇게 평범한 데다가 말하는 방식이나 어조도 이러하니, 나한테 어떤 관념을 품게 되지 않을까? 나는 너희의 마음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까?’ 나는 결코 이런 것들을 알아보지 않는다. 나는 너희와 교류할 때도 결코 그 어떤 방식으로도 너희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 은근슬쩍 알아보지 않는다. 나는 이런 일들에 관심이 없다. 왜 관심이 없겠느냐? 나는 이런 일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존귀하다거나, 대단하다거나, 지위가 있다거나, 신분이 높다거나, 유일무이하다거나, 위대하다거나, 고상하다거나 하는 것 따위에 나는 관심이 없다. 고상한지 아닌지가 무엇을 대신할 수 있느냐? 설령 너희가 나에 대해 아무런 관념도 품고 있지 않고, 내 말을 그대로 따른다고 한들 그게 또 어쨌다는 것이냐? 내가 말과 사역을 줄일 수 있겠느냐? 아무것도 대신할 수 없다. 물론, 이는 부차적인 것이고, 주된 이유는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왜 관심이 없는지는 나도 모른다. 난 그저 그런 것에 관심 갖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위해 몇 가지 일을 할 때, 너희의 생활 속 일이든, 너희의 생명 진입에 관한 일이든, 아니면 너희의 종착지와 미래에 관한 일이든, 내가 말을 했든 구체적으로 일을 했든 나는 결코 ‘뒤에서 내게 감지덕지하는 사람이 있을까? 감격해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이런 일들을 했는데, 내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그야말로 무관심하고, 이런 것들을 알아보지 않는다. 한편으로 나는 너희와 예배하고 교제할 때, 결코 이런 일들을 알아보지 않는다. 그 밖에도 나는 너희와 사역에 대해 교제할 때도 이런 일들을 알아보지 않는다. 어느 팀에 가든 나는 이런 것만 알아본다. “요즘 어떠냐?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없느냐? 본분을 이행할 때 원칙을 파악할 수 있느냐?” 이런 얘기만 한다. 나는 내가 하는 이런 말들, 이런 일들이 너희들 사이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몇 명이 내게 감사하고 몇 명이 감사하지 않는지, 내가 어떻게 이 사역을 보완해야 더 많은 사람이 내게 감사하게 만들지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의 본분 이행 상황을 알아보고, 너희의 문제와 편차를 지적하여 너희가 바로잡게 하는 것은 사역을 잘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사람은 감사히 여기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여기까지밖에 해 줄 수가 없다. 생활 면에서 너희에게 안배하고 도와주는 건 내가 최선을 다했다. 일부 불만을 품는 사람이 있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건 그 개인의 요구치가 너무 높은 것이다. 나는 그저 하나님 집에서 이 일을 하는 원칙과 목적이 무엇인지 거듭 강조할 뿐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어떤 곳에 가서 어떤 사람들이 교제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어떻게 행동했다고 얘기하는 걸 보면, 서둘러 그 자리를 뜨지, 몰래 엿듣지 않는다. 나는 궁금하지 않고, ‘나를 두고 뭐라고 할까? 내 험담을 하지는 않을까? 내게 관념을 품고 하는 말은 없나?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든 너를 한바탕 괴롭혀서 기를 죽여 놓아야지.’ 하며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나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너희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해라.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공과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너희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교제하는 것에 관념이 섞였든, 진실로 인식했든 모두 옳고 그름과는 관련이 없고, 단지 진리에 부합하는지 아닌지와만 관련 있을 뿐이다. 그러니 너희가 교제하는 주제에 만약 치우친 부분이 있다면, 내가 바로잡아 줄 수 있다. 만약 관념과 상상이 있다면, 같이 교제하고, 만약 너희가 교제한 것이 모두 정확하고 진리에 부합하나 단지 조금 얕을 뿐이라면, 천천히 알아 가면 된다.
속내를 떠보지 않는 측면에 관해 너희는 이제 이해가 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속내를 떠보지 않는 것은 바로 너와 말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 평범한 사람의 위치에 서서 거만을 떨지도, 너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너를 억압하지도 않는 것이다. 너와 함께 지내는 원칙은 바로 마음과 정직함으로 너와 대화하며, 유혹하지 않고, 속내를 떠보지 않는 것이다. 즉, 너에게 덫을 놓지 않고, 그럴싸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어떤 말이 만약 주요 화제가 아니라면, 두루뭉술하게 개괄적인 말 한마디로 넘기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을 그럴싸하게 하지는 않는다. 즉, 내가 하는 말은 너를 유혹해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생각하게 만들지 않고, 너를 유혹해 죄를 저지르게 만들지 않고, 너를 유혹해 타락하게 만들지 않고, 너를 유혹해 하나님에게 관념을 품게 만들지 않고, 너를 유혹해 네가 하나님에게 오해와 경계심을 품게 만들지도 않고, 네가 한 측면의 진리에 의심하는 태도를 품게 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내가 하는 이런 말에는 사탄이 말하는 “너희가 먹어도 죽지 않을 수도 있다.”와 같은 말은 없다. 이 ‘않을 수도 있다’가 바로 유혹하는 성질에 속한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에는 ‘않을 수도 있다’와 같은 유혹하는 성질의 말은 없다. 너희는 내가 교제한 모든 내용 안에 그런 유(類)의 말이 있는지 살펴보고 찾아봐도 된다. 다만 한 가지 단어는 너희가 확신하지 못하고 확실히 알지 못할 텐데, 바로 ‘어쩌면’이나 ‘아마도’ 같은 단어들이다. 너희는 아마 이런 단어를 쓰는 원칙이나 이유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단어를 쓰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 우리가 교제하는 각 측면의 진리는 한 부류의 사람만을 겨냥하거나, 특정한 개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이라고 하면, 그 안에는 온갖 다양한 사람의 내적 상태가 다 포함된다. 똑같은 문제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상황과 환경에서 가지는 내적 상태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쩌면’이나 ‘아마도’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이나 ‘아마도’는 무슨 뜻이냐? 어쩌면 너는 이런 내적 상태일 수도 있고, 어쩌면 너는 저런 내적 상태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너는 이런 환경에 처해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너는 저런 환경에 처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어쩌면’은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일부 사람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 ‘어쩌면’이나 ‘아마도’는 사탄이 말하는 ‘죽지 않을 수도 있노라’처럼 유혹하려는 의미가 아니라, 실제 상황에 근거해서 네가 스스로 자신이 어떤 내적 상태에 속하는지, 네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 비춰 보게 하려는 것이다. 마주하는 무리가 너무나 많고, 사람이 품는 각종 내적 상태가 너무도 복잡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쩌면’이나 ‘아마도’라는 단어로 표현한 뒤 너희가 스스로 비춰 보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측면의 문제를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이 측면의 문제를 이해했으니, 이제는 다음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꾀지 않는다는 원칙 안에는 한 가지 주제가 더 있는데, 바로 부추기지 않는 것, 너를 부추겨 어떤 일을 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부추김이 배후에서 겨냥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은 일, 잘못된 일,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일들이나 너를 타락시키고, 네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바른길에서 엇나가도록 하는 악행들이다. 성육신이 너희와 대화하거나 너희와 교류하고 접촉하고 너희를 이끌며 하는 말씀과 사역은 모두 너희를 하나님 앞으로 데려오고 바른길로 인도하려는 것이다. 성육신이 하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너희가 사실의 실상을 더 잘 이해하여 올바른 관점과 입장을 가지고 사람과 일, 사물을 인식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을 더 정확하게 알게 하려는 것이다. 부추기는 방식으로 너희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탄과 싸우다 무모하게 희생하도록 만드는 말씀은 단 한 마디도 없다. 하나님을 대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피조물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대하게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닥치든, 우선 사람이 갖춰야 할 태도는 바로 피조물의 관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큰 틀이다. 당연히 이는 내가 하는 모든 말씀의 목적이자 너희에게 요구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탄을 대할 때, 세상을 대할 때, 너희를 핍박하는 적대 세력이나 너희를 핍박하는 그 어떤 사람을 대할 때 내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원칙은 바로 지혜로 대하라는 것이다. 주 예수가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라고 말씀했던 것처럼, 너는 비둘기처럼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하며, 뱀처럼 지혜롭게 이 세상을 대하고, 네게 적대적인 사람을 대하고, 악인을 대하고, 강력한 적대 세력과 하나님을 적대하는 강력한 정권을 대해야 한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는, 교회에서 어떤 악인과 적그리스도를 마주했을 때, 그리고 외부의 적대 세력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몇몇 더욱 구체적인 지혜와 대처 방식을 교제했다. 이런 대처 방식과 구체적인 실행 원칙은, 한편으로는 네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원칙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더욱 정확히 알게 해준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또한 온 힘을 다해 너희를 보호하는 것으로, 너희 육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며,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고 사탄에게 유혹당하지 않고 사탄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고 사탄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보호한다. 또한 적대 세력에게 시달리고 지배당해 곤궁에 빠지거나 소극적이고 연약한 상태에 빠져 하나님을 따를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보호한다. 요컨대 어떻게든 너희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너희에게 지혜를 가르쳐주고 너희에게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르쳐주는 목적은 너희가 자신의 본래 자리를 굳게 지켜내고, 순조롭고 기준에 맞게 하나님이 너희에게 맡긴 본분을 완수하여 이 길을 잘 걸어가게 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시험에 빠지고 온갖 곤경에 빠지고 사탄의 올가미나 포위망에 걸려 곤경에 직면하고 생명의 위험에 직면한다면, 하나님이 네게 맡긴 본분을 완수하고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여부는 그야말로 미지수이고, 커다란 의문이고,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에게 비둘기처럼 온순하고 뱀처럼 영리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뱀처럼 영리하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는 네가 지혜롭게, 원칙 있게 각 부류의 악인을 대하고 적그리스도를 대하고 온갖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대하고 너를 핍박하고 탄압하는 여러 세력을 대하게 하고, 안전하고 순조롭게 길을 끝까지 걸어가고 구원받을 희망을 갖게 한다. 그러니 보통 외부와 상대하는 일들이 닥치면 하나님 집에서는 지혜롭고 경력이 있는 형제자매들을 찾아 처리하게 해라. 일부 분량이 작고 젊거나 아무 경력도 없는 우매한 자들, 심지어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우리가 나서라고 격려하지 않고 하나님 집에서도 그렇게 안배하지 않는다. 어떤 자들은 겉으로는 꽤나 간이 크고 능력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지혜가 없다. 지혜는 없으면서 간만 큰 것을 두고 뭐라고 하느냐? 무모하게 날뛴다고 하며, 시쳇말로 얼간이라고 한다. 만약 이런 부류의 사람이 외부와 상대하는 일을 처리한다면 문제가 생길 게 뻔하다. 그러니 외부와 상대하는 이런 일들을 만났을 때 교회에서 이 사역을 처리해야 한다면 우리는 적합한 사람을 찾아 시킨다. 이렇게 하면 아주 좋다. 성령에게 쓰임받는 사람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너희가 거리에 나가 시위를 벌이도록 안배한 적은 결코 없고, 너희에게 정치적 권익을 수호하거나 어떤 유명 인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요구한 적은 더더욱 없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 집에서 단 한 번도 행한 적 없다. 네가 보기에 하나님 집에서 이런 유형의 사역지침을 내린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설령 복음을 전한다고 하더라도 종교계에 있는,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전해야지, 바리새인과 떡으로 배를 불리는 사람들은 상대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 집에서는 결코 너희를 부추겨 위험을 무릅쓰게 하지 않고 너희가 시험에 빠지거나 사탄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하지 않는다. 즉, 너희를 불구덩이로 밀어넣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하나님 집의 능력과 하나님 집의 현재 여건으로 너희를 보호하려 한다. 너희가 보기에 하나님 집에서 이렇게 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곳에 불이 났다면 소방서에 전화해서 불을 꺼야 한다. 형제자매는 얼른 자리를 피하고 불을 끄는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비교적 안전하다. 이게 바로 너희를 보호하여 너희가 위험을 무릅쓰지 않게 하고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고 너희가 사탄의 올가미에 걸려들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나타나는 적그리스도와 악인, 불신파 등 각종 부정적인 인물들과 맞닥뜨리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다. 나는 너희와 교제하여 너희가 분별하는 법을 배우게 한 다음 어떤 방식으로 대해야 할지 너희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마지막에는 하나님 집에서 이런 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행정 법령을 마련하여 각 부류의 사람을 모두 분류하고, 적그리스도와 악인, 불신파,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을 모두 명확히 분별한 뒤 정리해 내보냄으로써 너희가 안심하고 본분을 이행하게 할 것이다. 너희가 말해보아라. 하나님 집에서는 이 사역을 어떻게 하느냐? (잘합니다.) 이 사역을 잘하고 나면 각국 교회에는 방해하고 교란하는 자가 없어져 교회 생활이 평온해진다. 악인이 정리되어 나가면 교회는 금방 평안해지고, 많은 이들이 마음이 안정되고, 정상적으로 예배할 수 있게 된다. 교회 생활의 질서도 정상을 되찾고 여러 사역도 정상적으로 진행된다. 그럼 이 점으로 보아, 하나님 집에서는 진리가 권세를 잡고 있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이 사역을 하는 것은, 다수의 기꺼이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본분에 조금이라도 진심을 다하는 사람들이 마음잡고 본분을 이행하고, 마음잡고 설교를 듣고, 마음잡고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교회의 사역 차원에서 하는 얘기다. 그 밖에 내 개인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내가 너희와 접촉하고 어떤 일을 할 때 너희를 고려하는 것은 온 힘을 다해 너희를 보호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를 부추겨 악인이 하는 일을 하고 악인이 걷는 길을 걷게 하더냐?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너희에게 진리를 공급해 너희가 진리 원칙을 깨닫고 일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하고, 각 부류의 사람을 분별하여 지혜롭게 여러 부류의 악인을 대하고 여러 부류의 악인을 멀리할 수 있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한 일들이 닥쳤을 때 너희에게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지배에 대한 순종을 기반으로 사탄의 시험에 빠지거나 사탄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는지 알려준다.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재앙을 보면 곧장 멀리하고 피하라고 하지, 결코 위험한 곳에 가라고 너희를 선동하지 않고, 부추기지 않고, 격려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너희에게 만약 이 성에 위험이 있고 핍박이 있거든 저 성으로 피하라고 알려준다. 보아라. 이러면 실행의 길이 생기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렇게 말한 적 없다. “중국 공산당이 우리를 이토록 탄압하고 학대하다니, 인류의 사악함이 이 지경에 이르러 우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구나. 우리는 그들과 싸워야 한다! 피켓을 들고 현수막을 내걸고 거리로 나가 시위하며 이 세상의 어두움과 사악함을 폭로하자!” 나는 이런 말을 한 적 없고 너희에게 이런 일들을 하라고 한 적도 없다. 내가 그토록 많은 말씀을 한 것은 너희에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추구하라는 뜻이다. 또한 어디에서 거주하든 바르고 착실하게 살고 규율을 준수해야 한다고, 이방인에게 약점을 잡히거나 폐를 끼치지 말라고 자주 이야기했다. 우리는 이방인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그 어떤 정부와 대립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본분을 이행할 뿐이다. 소리 없이 조용히 본분을 잘 이행하고 해야 할 사역을 완수하며 하나님을 제대로 증거하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하며 다른 일은 신경 쓸 필요 없다.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인식하고 사악한 흐름을 인식하고 패괴된 인류의 패괴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시류를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이 아니고 어떤 국가나 정부와 맞서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욱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기 위해서이며, 그 목적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바른길에 들어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우리와는 무관하다. 우리는 세상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렇지 않으냐? 부추기지 않는 측면에 대해 너희는 이제 잘 알게 되지 않았느냐? (잘 알았습니다.) 부추기지 않는 측면에 대한 교제에서는 주로 너희에게 매사에 일을 처리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하고, 매사에 혈기에 기대고 일시적인 만용에 기대 사람들과 다투거나 잘잘못을 따질 것이 아니라, 매사에 원칙을 가지고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도(道)를 준행하며 온 힘을 다해 진리 원칙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라고 이른다. 이 측면에 대해 이제 잘 알게 되지 않았느냐? (잘 알았습니다.) 성육신이 하는 바와 드러내는 바가 너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부추기지 않는 것이다. 이 측면 또한 너희가 인식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너희는 인식하고 나서 너희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너희가 준행해야 할 도(道)가 무엇인지 더욱 확신해야지, 도리적으로만 알고 끝내서는 안 된다.
유혹하지 않는 것 안에는 또 한 가지 구체적인 모습이 있는데, 바로 선동하지 않는 것이다. 선동하지 않는 것은 부추기지 않는 것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비슷한 부분은 말하지 않고 다른 부분만 간단히 말하겠다. 교회 안에서 각 부류의 사람을 분별할 때 적그리스도와 악인, 그리고 하나님 집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여러 부류의 사람을 분별하는 것과 관련하여, 한편으로는 이런 자들의 인품을 분별하여 이런 자들을 저버려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 집에서 이런 자들을 그에 맞게 처리하는데, 너희가 가장 해야 할 일은 바로 각 부류의 사람의 패괴 성품과 패괴 본질을 인식하고, 사람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이다. 인식한 다음에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런 일을 해서도 안 되며, 너와 그가 똑같이 가지고 있는 내적 상태와 태도, 그리고 구체적으로 일을 처리할 때 품고 있는 속마음, 동기, 관점을 인식하고 내려놓아야 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을 분별하는 목적은 사람들 한 무리를 선동해서 다른 무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파벌 싸움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이 점은 명확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보아라. 우리는 정식 예배에서 적그리스도와 악인의 일부 행위와 태도에 대해 교제할 때 결코 사람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고 이런 부류의 사람의 태도만 거론한다. 그런 다음 이런 부류의 사람의 몇몇 행위 본질과 그들이 지닌 관점을 폭로하고 해부하며, 마지막으로 그들의 본질이 무엇인지 규정한다. 교제의 의도와 목적으로 말하자면, 너희가 사탄의 본모습과 사탄의 본질을 인식하고 똑똑히 보게 하는 것이고, 너희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지, 어떤 사람을 혐오하는지 더욱 명확히 알게 하는 것이다. 그 밖에, 너희 본인에게 있어서는, 너희가 어떤 길을 걷는 것이 올바른지 알게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면 너희는 그런 사람을 마땅히 경계해야 하고 그들의 그런 잘못된 행동 방식을 저버려야 하며 그들의 그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도 마땅히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문제에 대해 교제하는 본연의 목적은 너희를 선동해 이런 부류의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설령 교제를 통해 사람들이 그들을 분별하고, 마음속으로 그들을 싫어하고, 그들을 저버리고 그들과 상종하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이렇게 교제하는 것은 선동이 아니다. 즉, 이런 내용과 주제에 대해 교제하는 것은 이방 세계에서 사람을 괴롭히고 혼내는 운동이나 당파 싸움, 파벌 싸움과는 관련이 없다. 파벌 싸움은 권력을 위해서이고, 욕망을 위해서이고, 이익을 위해서이다. 반면 우리가 이렇게 어떤 사람들에 대해 교제하고 폭로하고 분별하는 것은 사람들이 진리를 더 잘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 목적은 너를 하나님 앞에 데려와 바른길을 걷게 하고,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분별하게 하고, 이 일을 통해 시비를 분별하는 능력을 제고하게 하는 것이다. 폭로된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가 만약 뉘우칠 수 있고 회개하는 마음이 있다면 너희 사람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하나님 편에서는 받아들인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바로 하나님이 그의 회개를 열납한다는 것이다. 그가 만약 회개했으면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얻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회개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그가 만약 악을 행했고 과오가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그를 도와주어야지, 단번에 사람을 때려잡듯 이 사람은 구제받을 수 없고 다시는 그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된다고 단정 지은 채 곧장 교회에서 제명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에서는 풀타임 본분 교회, 파트타임 본분 교회, 일반 교회, 그리고 B조를 설립하고, 구제받을 수 없는 정도만 아니라면 모두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 심지어 수많은 사람의 모습이 적그리스도나 큰 붉은 용과 같고, 그야말로 같은 부류의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곧바로 제명하지 않았다. 오직 사안이 매우 심각한 적그리스도라서 수많은 형제자매를 미혹하고 교회 사역에 초래한 손실이 너무도 심각해 금전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경우에만, 이런 자를 곧바로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출교시켰다. 이런 가장 심각한 상황을 제외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곧바로 멸망할 대상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기회를 주는 이유는 누구나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처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다들 하나님 사역을 수년간 체험했고 설교를 수없이 들었고 수차례 과오를 범했는데도 기회를 남겨 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겠느냐? 많은 사람이 악을 행한 것이 처음이거나, 고의가 아니었거나, 혹은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가 얼마나 많든, 사실 실제 상황대로라면 악을 행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그래도 사람에게 여지를 주고, 회개할 기회를 주고, 몇 번이고 반복하여 그들의 모습을 관찰한다. 어떤 사람들은 악을 행하고 나서 회개하지 않아 곧바로 풀타임 본분 교회나 파트타임 본분 교회에서 일반 교회나 B조로 쫓겨나는데, B조에서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계속 악을 행하고 교란하다가 마지막에 비로소 교회에서 제명된다. 어떤 사람이든 제명되는 것은 다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오랜 세월 아무런 회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그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집에서 그에게 몇 번이나 회개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그가 소중히 여기지 않고 다 놓쳐버렸으니 이는 남을 탓할 수 없다. 어쨌든, 이런 일들에 대해 말하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분별하든 어떤 사람들을 처리하든, 그 목적은 사람들을 선동해 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선동해 파벌 싸움이나 패싸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분별하는 법을 배우고, 각 부류의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런 다음 악인에 대해 상응하는 징벌과 보응을 취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피해 입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들의 악행을 목도한 뒤 교훈을 얻고 사람을 분별하게 되고 한 측면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어떤 사람들이 악을 행한 구체적인 모습을 교제하는 것은, 너희를 선동하여 그들을 미워하게 한 다음 너희를 구슬려 더욱 나를 믿고 더욱 나를 신뢰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목적이 아니다. 게다가 너희에게 교제하는 것은 단지 그가 겉으로 드러내는 그런 행동 방식일 뿐, 그의 이면에 있는 수많은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아직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다. 때때로 내가 몇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주제가 나오면 좀 더 말하기도 하는데, 그 목적 역시 선동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들고일어나 그를 비판하고 싸우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네가 진리를 근거로 사람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게 하고,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처리하는 원칙이 과연 무엇인지 알게 하고,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처리하는 원칙은 공평하고 공정하며 사람을 괴롭히고 혼내는 것이 아님을, 네가 마음속으로 이를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설령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좀 더 말한다고 해도 선동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만약 네가 그를 정말로 분별하게 되었다면 거기서 멈추면 된다. 혈기가 왕성한 어떤 사람들은 늘 싸우려고 하는데, 내가 말하지만 그건 적절하지 않다. 공적인 일은 공적으로 처리하고 원칙대로 사람을 대해야지 싸울 필요가 없다. 만약 그가 회개했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하고 그를 형제자매로 여겨야 한다. 만약 그가 여전히 기존의 잘못된 행동 방식을 고수하며 조금도 회개하지 않는 데다가 변명하고 해명하며 가는 곳마다 자기 논리를 내세우고 심지어 뒤에서 판단하고 퍼뜨리기까지 한다면 우리는 그를 원수로 여기고 끝까지 그와 상종해서는 안 되며 그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도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면 적절하지 않겠느냐? (적절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모든 방식을 너희가 보아라. 단계 하나하나 모두 진리 원칙을 따르고 있지 않느냐? 올바른 원칙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느냐? 사람의 뜻이 있느냐? 혈기가 있느냐? (없습니다.) 기분의 작용이 있느냐? 감정의 작용이 있느냐? (없습니다.) 사람을 괴롭히고 혼내는 방식이 있느냐? 지위를 지키고 교회의 명성을 지키거나 어떤 사람의 존엄을 지키거나 나 본인의 존엄과 체면을 지키려는 어떠한 목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조금도 없다.
어떤 부류, 어떤 사람을 처리하든 간에 우리가 처리하는 방식은 항상, 교회에 맡겨 원칙대로 처리하게 하는 것이다. 대개는 의사 결정팀의 형제자매가 이런 일들에 참여하며, 만약 더 많은 형제자매가 참여해야 한다면 해당 사례를 더 많은 교회 리더나 각 교회의 형제자매에게 보내 명확히 파악하게 하고, 그런 다음 투표를 하고 관점을 제시하게 하고, 마지막에는 형제자매들에게 어떻게 그 사람을 처리할지 결정하게 한다. 이 권한을 교회에 부여하고 형제자매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교회가 어떻게 처리할지는 온전히 너희의 방안에 따른다. 그렇다면 형제자매가 각 부류의 사람을 처리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바로 이토록 오랜 세월 내가 교제한, 그리고 성령에게 쓰임 받는 사람이 교제한 원칙을 근거로 가늠하는 것이다. 처리하고 나서 너희가 상부에 종합해 보고하면 나도 보고 성령에게 쓰임 받는 사람도 보고, 둘 다 한 번씩 훑어본다. 어떤 때는 내가 보기에 너희가 비교적 적절하게 처리하고, 어떤 때는 처리 결과가 내 뜻과 다소 들어맞지 않는다. 몇몇 사람에 대한 처리 결과는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 무겁기도 하고, 당연히 어떤 처리 결과는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보다 좀 더 가볍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여태껏 그 어떤 제안도 하지 않았다. 나는 너희의 선택을 존중한다. 나는 이 권한을 너희에게 부여했고, 교회에 부여했다. 너희에게 부여한 이유는 무엇이냐? 이토록 오랜 세월 설교와 교제를 들었으니, 나는 너희 대다수가 악인에 대해, 하나님 집의 이익을 해치고 형제자매의 이익을 해치는 사람의 악행에 대해 판단 기준을 다 가지고 있으리라 믿는다. 이런 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도 80퍼센트 이상의 사람이 모두 마음속에 저울을 하나 가지고 있어서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처리하는 게 적절한지 알고 있을 것이다. 설령 교회의 어떤 리더 일꾼이 처리하는 데 약간의 편차가 있다 하더라도 큰 방향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은 확실하다. 이는 무엇에 기반을 두느냐? 이토록 오랜 세월 내가 너희에게 한 말씀,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고 공급한 관점을 너희가 알아듣고 충분히 숙지하고 있으며, 내가 너희를 믿는다는 점에 기반을 둔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들로 보아, 하나님 집에서 어떤 부류의 모습을 교제하고 폭로하든, 혹은 어떤 부류를 처리하든 간에 결코 이방 세계에서 말하는 선동과는 관련이 없다. 어떤 부류, 어떤 사람을 처리하든, 그것은 모두 한 차례의 운동이 아니라 악인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대항하여 필연적으로 드러난 것이며, 이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 밖에,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건 바로 하나님이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과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배치한 하나하나의 공과요, 하나하나의 환경이며, 네가 하나님 사역을 알고 악인을 분별할 기회이자, 네가 이해하고 깨달은 진리에 대한 하나하나의 실천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공과를 배우는 것으로, 이렇게나 간단하다. 이는 공과를 배울 절호의 기회이고 악인을 분별할 절호의 기회이다. 만약 너에게 이런 악인과 적그리스도들을 배치하지 않고, 이런 악인들이 어떻게 악을 행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하는지 네가 직접 보게 하지 않는다면 내가 지난 몇 년간 악인과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라고 교제했던 말씀들이 너희 입장에서는 그저 하나의 도리일 수도 있다. 너는 교회 안에는 그렇게 악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이런 말씀들에 대해 늘 물음표를 그릴 것이고, 비록 이런 말씀들을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늘 하나의 도리로 여길 것이다. 만약 일부 악인과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실제 사례가 발생한다면 너는 진실로 알게 될 것이다. ‘사탄이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는구나. 사탄과 적그리스도는 이토록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를 증오하는구나. 사탄 마귀는 이토록 사악하고, 이토록 간사하고, 이토록 탐욕스럽고, 이렇게나 하나님을 대적하는구나. 하나님께서 사탄은 결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사탄은 그저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를 증오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야 내 눈으로 봤어. 이런 악인과 적그리스도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 사실이 눈앞에 놓여 있는데도 궤변을 늘어놓다니, 그야말로 살아있는 사탄이야! 사탄은 정말이지 본성을 못 고치는구나!’ 하나님이 이런 사람과 일, 사물을 배치하는 것은 바로 네가 공과를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이 점은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느냐?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집에서 어떤 사람들을 제명하고 처리하든 간에, 어떤 사람들을 폭로하고 분별하든 간에 세상의 그 어떤 단체나 그 어떤 세력 내부의 싸움과 운동과도 성질이 다르다. 하나님 집에서 발생하는 이런 일들은 적어도 모두 하나님이 배치한 것이다. 일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은 이런 환경들을 마련하고 악인을 출연시킨 다음, 악인이 밝혀지고 폭로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공과를 배우도록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교제하고, 교제를 통해 모두가 점점 더 많이 알고 더 분별하게 되며, 점점 악인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심지어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를 증오하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사탄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제야 악인의 본성 본질을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 사례가 생겼기 때문이다. 하나님 집에서 하는 이 모든 것은 전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모든 하나님 선민이 반드시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모두 하나님이 배치하는 것이므로 운동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닥쳤을 때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씀은 너희 입장에서는 그 어떤 한 차례의 설교 교제와 같은 것이고, 일종의 공급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큰 환경에서 이런 일을 배치해 놓았는데, 내 입장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하겠느냐? 나는 그저 너희를 한 번 거들어줄 뿐이다. 너희가 이런 일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할 때 진리를 교제하여 너희를 돕고, 너희를 지도하고 일깨워주는 것이다. 무엇을 일깨워주겠느냐? 바로 너희가 이런 일의 핵심과 이런 문제의 본질을 똑똑히 알게 하는 것이다. 몇 마디 간단한 말로 너희를 일깨워주고 살짝 일러 주면 너희는 곧바로 명확히 이해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된다. 이렇게 살짝 한 번 보조해 주기만 해도 너희는 이런 일을 겪으면서 가볍게, 또 원하는 대로 관문을 통과하여 하나님에게 만족스러운 답안지를 제출하게 된다. 악인에 대해서 분별력이 생겨 더 이상 그를 숭배하지 않고, 더 이상 그에게 미혹되지 않고, 더 이상 그가 하는 허튼소리를 믿지 않는다. 또한 그에 대해 분명한 인식이 생겨, 그가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결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야말로 마귀라는 사실, 이 점이 확고해진다. 예전에는 그래도 그를 꽤나 숭배하고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원하는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했다면, 이제는 그에 대해 분별력이 생겨 이런 부류는 구원받을 수 없고, 그야말로 하나님의 원수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어떤 일들이 발생하든, 혹은 너희가 사역하면서 어떤 유형의 일이 발생하든, 내가 하는 이 사역들과 내가 하는 이 말씀들은 끊임없이 너희를 이끌고 잡아당겨 있는 힘껏 하나님 앞으로 데려오고 바른길로 데려온다. 이로써 너희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게 하는가 하면, 너희가 더 이상 우매하지 않고, 눈멀지 않고, 더 이상 혈기에 기대거나 낡은 관념을 고수한 채 그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지 않게 한다. 내가 말씀하는 의도와 목적이 마지막에 너희에게서 어떤 성과를 이루든, 결국 목표와 방향은 오직 하나이다. 바로 너희를 하나님 앞으로 데려오고 너희를 피조물의 지위에 바로 서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는 선동이 아니다. 선동에는 사람의 뜻이 담긴 계략과 목적이 있어서, 다른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게 하고 뒤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일이 너희를 선동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나는 너희가 진리를 얻고 공과를 배우기만 하면 만족하고, 다른 속셈은 없다. 내가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이러겠느냐?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대가를 치러야 하고, 마음을 쏟아야 하며, 입이 닳도록 너희에게 인내심 있게 교제하면서 어떻게든 핵심을 일일이 너희에게 분명히 말해줘야 한다. 예를 들어, 이 일에 열 가지 핵심이 있는데 내가 만약 핵심 서너 개를 빠뜨린다면 너희는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만약 이 열 가지 핵심을 내가 그저 간단히만 교제한다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얻는 것이 더욱 적어질 수밖에 없다. 자질이 좋은 사람도 무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명확하게 교제해주어야만 하니,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그야말로 여러 차례 교제해주어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열 가지 핵심을 모두 분명히 말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예배할 때 다시 서로 나누고 소통하면서 모두들 서서히 얻게 된다. 하나님 집은 대가족이다. 어느 한 사람도 모든 진리를 완전히 먹고 마실 수 없으니 다들 서로 나누어야 하고, 항상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나누고, 교제해야 한다. 그래야만 더 많이, 더 두루두루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이 반드시 필요하고 사람과 사람 간의 교제와 나눔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마 내가 말하는 그 열 가지 핵심 중에서 너는 당장은 서너 개만 얻을 수도 있지만, 나중에 다 같이 서로 나누다 보면 일고여덟 개를 얻을 수 있고, 다시 몇 년이 흘러 다른 사람이 또 나누어주면, 천천히 세월이 흐르면서 이 열 가지 핵심을 모두 얻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내가 하는 말씀이 헛수고가 되는 일은 없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가 진리를 얻게 되고 너희의 분량이 자라났을 때 내가 무언가를 바라겠느냐? 내가 너희가 내게 맛있는 것을 해주기를 바라겠느냐? 내게 좋은 옷 몇 벌을 사주길 바라겠느냐? 커다란 집을 사주길 바라겠느냐? 그런 건 별로 아쉽지도 않다. 예전에 다윗이 하나님에게 성전을 지어주려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네가 보기에 하나님이 그 성전을 탐냈겠느냐? 그때 사람은 정말이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고 참으로 우매했다. 하나님은 비록 원하지 않았지만 그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고 하나님도 열납하고 묵인했다. 그 시대적 배경 속에서는 사람의 분량이 딱 그 정도였기에 하나님도 사람에 대한 요구가 높지 않았다. 만약 지금에 적용해 말하자면,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도 우매한 것이고 진리 원칙에 너무도 부합하지 않는다.
나는 결코 선동하는 말을 하지 않고 선동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나는 비록 악인을 증오하고 적그리스도를 증오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다들 일어나 악인과 적그리스도를 증오하고 저버리라고 사람을 선동하지는 않는다. 내가 하는 수많은 말씀은 모두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사실의 실상을 똑똑히 알게 하려는 것이므로 선동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어느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든 간에 너희는 올바르게 대해야 하고 올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사역을 할 때는 바로 이렇게 해야 한다. 나는 그저 귀찮아하지 않고 진리를 교제하고 진리를 공급하며, 귀찮아하지 않고 진리에 대한 인식과 체험을 나누고, 온갖 사물에 대한 관점을 나누고, 각 부류의 사람에 대한 인식을 나누고, 각 부류의 사람에 대한 견해와 태도를 나눈다. 이렇게 귀찮아하지 않고 교제하는 최종 목적은 바로 너희가 진리를 깨달아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측면의 성과로 볼 때 나는 해낸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사역하여 이 성과를 이룬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어떤 자들은 늘 잘못 믿었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사탄의 유언비어들을 믿고 자신이 미혹당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믿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한낱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네가 미혹당했다고 하는데, 그럼 네가 읽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란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란 말이냐? 하나님 집에서 예배하고 교제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란 말이냐? 네가 사람을 믿는데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하는 어떤 사역이 너를 미혹하느냐? 네가 미혹당했는지 아닌지는 무엇을 근거로 규정하느냐? 만약 네가 믿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그것이야말로 미혹당한 것이다. 만약 네가 믿는 것이 진리라면 미혹당했다고 할 수 없다. 설령 네가 진리를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미혹당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저 너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옳은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너는 너 자신에 의해 곤경에 빠진 것이다. 네가 오랜 세월 주를 믿었는데도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은 무슨 문제냐? 너는 틀림없이 목사를 숭배하며 사람을 따랐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미혹당한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는 늘 사람을 공평하게 대한다. 네가 기꺼이 본분을 이행하려 하면 하나님 집에서는 네게 본분을 주고 네 생활비까지 책임져 주면서도 네게 계산적으로 따지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높여 줌이 아니겠느냐? 너는 특별한 은혜를 얻은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럼 네게 본분을 주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피조물로서 창조주와 고정되고 안정된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나님은 네게 진리를 공급하고, 각종 환경도 배치해주어 공과를 배우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집에서도 늘 네게 진리를 교제해주고 각 본분을 이행하는 원칙을 교제해준다. 사람이 진리를 얻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쏟는 마음이 많지 않으냐? 하나님 집에서 하는 사역이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사람은 가장 큰 수혜자다. 너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그저 명예와 이익, 그리고 지위만 추구하면서도 자신이 손해를 봤다고 말하는데, 네가 보기에 이 말은 흑백이 전도된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양심이 있느냐, 없느냐? 어떤 사람은 말한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건 너무 고달파요. 늘 할 일이 끊이지 않는다고요!”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효율이 이토록 낮다면 서둘러 해야지, 늘 일은 안 하고 공짜 밥만 먹으려 한다면 그것도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늘 공짜 밥만 먹고 일은 안 하려 하는데, 이는 무슨 문제냐? 이런 사람들은 밥버러지가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들은 아귀가 환생한 것이다! 하나님 집에 와서 공짜 밥만 먹으려고 하니 말이다.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은 공짜 밥 먹기를 원치 않는다. 하나님 집에서 그를 배불리 먹게 하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줄 알며, 고단함과 수고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늘 공짜 밥만 먹으려 하고 일을 조금 하고는 손해 볼까 두려워 밥이라도 많이 먹어 하나님 집에서 덕을 보려 한다. 이런 사람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내가 보기에 언젠간 도태되고 말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도 한다. “하나님 집에서 일하는 건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너는 다른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일하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세상으로 돌아가 돈벌이를 해야 한다. 그 일은 안 힘들겠느냐? 그럼에도 너는 하나님 집에서 공짜 밥을 먹으려 하는 것이냐? 하나님 집은 양로원도 아니고 자선 기관도 아닌데 늘 공짜 밥을 먹으려 하다니, 너는 양심이 없는 것 아니냐? 하나님 집에서 너희가 먹고 입고 생활하도록 공급하는 경비로 얼마를 쓰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그저 네가 얻은 진리만 하더라도 무엇으로 살 수 있겠느냐? 황금으로 살 수 있겠느냐, 아니면 다이아몬드로 살 수 있겠느냐? 무엇으로도 살 수 없다. 진리는 값을 매길 수 없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공급하면서 너희에게 돈 한 푼이라도 요구했느냐? (아닙니다.) 나는 너희에게 설교하면서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이고 대가를 치르는지 모른다. 진리를 교제하면서 너희가 유익을 얻게 하지 않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느냐? 예배하면서 너희가 정력과 시간을 헛되이 소모하게 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충분히 떳떳하다. 매번 설교할 때마다 너희가 조금이라도 수확을 얻게 했다. 너희와 수다를 떨고 한담을 나누더라도, 설령 우스갯소리를 좀 하더라도 다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나는 끈질기게, 쉬지 않고 말함으로써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미혹당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미혹당한 것이냐? (아닙니다.) 미혹당했다고 하는 그 사람에게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양이 아니기에 그는 진리를 깨닫는 이 복을 누릴 수 없다. 그는 마땅히 죄로 인해 시달려 고통 속에서 살고, 사탄이 제멋대로 그를 괴롭히고 계속해서 그를 패괴하게 두어 결국 사탄과 함께 멸망해야 한다. 이것이 그가 가져야 할 종착지이다. 그는 하나님의 양이 아니기에 이 복을 누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만 하면 속으로 견디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한다. 마치 어떤 사람은 명이 짧아 복을 감당하지 못해 너무 좋은 것을 누리면 요절하게 되는 것과 같다. 너희가 말해보아라. 내가 너희와 이토록 오랜 세월 예배하고 교제하면서 너희에게 돈 한 푼 요구한 적 있느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직접 몇 백 위안을 건네며 영양제라도 좀 사서 건강을 챙기라고 하는데,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필요 없다. 나는 쓸 만큼 충분히 있으니 이 돈은 네가 두고 써라. 아니면 교회에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보고 그것을 좀 사도록 해라. 어떤 형제자매들이 생활비나 교통비가 필요한지 보고 그들에게 줘도 된다. 나한테는 줄 필요 없다.” 또 어떤 사람은 내게 직접 좋은 물건을 좀 주기도 하는데, 나는 일절 받지 않는다.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개인의 손에서 돈 한 푼, 물건 하나 받은 적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이런저런 물품을 바쳤는데 대부분의 경우 나는 거절했다. 만약 정말로 내가 필요한 것이라면 조금 받긴 하지만 반드시 감사를 표한다. 나는 그 어떤 사람의 개인 물품도 달라고 요구한 적 없고, 네가 입은 옷이 꽤 좋아 보여도, 또는 네가 먹는 음식이 꽤 맛있어 보여도, 하나 달라고 하거나 좀 보내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달라고 한 적이 없다. 이토록 오랜 세월, 내가 너희에게 예배하고 교제한 것은 모두 무상이었다. 너희에게 돈 한 푼 요구한 적 없고 너희더러 돈 한 푼 내게 한 적도 없다. 게다가 우리는 예배하고 교제할 때 한 번도 봉헌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왜 어떤 사람들이 이번 단계 사역을 받아들이고 오랜 세월 믿어놓고도 미혹당했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무슨 너를 미혹했다는 것이냐? 너한테서 돈을 뜯어냈느냐, 아니면 성적으로 농락했느냐? 둘 다 없다. 그런데도 그가 이런 말을 한다면 너희는 이런 자를 무엇으로 규정하겠느냐? (불신파입니다.) 이런 자가 바로 불신파이다. 그는 하나님의 양이 아니다. 그는 마귀이므로 악랄한 말로 사람을 모함할 수 있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늘 진리를 교제하는데, 이토록 오랜 세월 교제했으니 너희도 드디어 기초를 조금 터득했다. 내가 보면 지금 수많은 체험 간증이 있는데, 사람은 생활 속에서, 특히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온갖 일들에서 모두 어느 정도 체험과 인식을 얻었고, 모두 진리에서도 어느 정도 수확을 거두었으며 생명에서도 얼마간 성장했다. 이것은 바로 너희가 늘 나의 말씀과 설교를 듣고 올바른 사상 관점이 생겨나 진실한 체험과 인식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내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다. 나는 너희에게 체험 간증문을 많이 쓰라고 격려한다. 설령 인식이 얕고 살짝 근접한 정도라고 해도 쓰도록 해야. 쓰면 쓸수록 인식이 더욱 깊어진다. 사람이 진리를 인식하고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체험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네가 진지하게 접근할수록, 마음속으로 중요하게 생각할수록, 진리에 대한 인식에서 너는 더욱 명확한 사상 관점을 가지게 된다. 명확한 사상 관점을 가질수록 너는 글을 쓸 때 더욱 쓸 게 많아지고 더 잘 써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만약 네가 늘 무의식중에 사색하거나 그저 간단하게 생각만 한다면 이는 그 어떤 명확한 사상 관점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니 너는 글을 쓸 때 ‘나는 인식이 있는데 어째서 글을 써내지 못하는 거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네가 글을 써내지 못하는 것은 바로 네게 사상 관점이 없어서 어떻게 쓰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상 관점이 없으면, 네가 글을 쓸 때 영혼도 없고 방향과 목표도 없어서, 그 글을 어느 방향으로 써야 할지 정하지 못한다. 네가 그 글을 쓰는 목적이 무엇인지, 이루고자 하는 성과가 무엇인지, 네가 인식한 관련된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관련된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확정하지 못하면 너는 글을 쓸 수 없다. 만약 네가 확정할 수 있다면, 진리가 대체 무엇인지 인식했다면, 네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부분이 어디에 있고 치우친 부분이 어디에 있는지, 네가 지금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무엇을 바로잡았고 무엇을 얻었는지 등을 모두 명확히 알았다면 너는 글을 쓸 수 있다. 이 측면에서 많은 사람이 이미 어느 정도 수확을 거두었다. 하나님 집에서 업로드한 체험 간증문들들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명확한 생명 진입이 생기기 시작했고, 당연히 어떤 사람들은 진리에서 명확한 수확을 거두기도 했다. 진리에서 수확을 거둔 이 사람들은 이미 일부 진리 원칙이 그들 안에서 생명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아주 좋은 시작이자 아주 좋은 현상이다. 이 수확을 거둔 것은 이토록 오랜 세월 우리가 각 측면의 진리에 대해 점점 더 세밀하고 점점 더 구체적으로 교제했기 때문에 이룬 성과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예를 드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그건 바로, 이토록 오랜 세월 나의 설교와 교제를 들었으니, 너희가 깨달은 진리만 놓고 보더라도, 이론적 차원에서 보든, 실제적인 차원에서 보든 더 이상 하나님 집을 이른바 사람의 단체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려주려는 것이다. 어느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고 어느 측면의 구체적인 일을 인식하든, 또는 특수한 악인의 행위나 사건들을 교제하든 더 이상 이방인의 사상 관점으로 가늠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 열심히 공과를 배우고 진지하게 대한 다음, 마음을 다해 그 안에서 깨달아야 할 진리를 묵상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는 이 점을 기억해라. 내가 교제하든, 아니면 성령에게 쓰임 받는 사람이 교제하든, 또는 아래의 형제자매가 교제하든, 만약 그것이 정말로 사람이 마땅히 분별해야 하는 악인 부류나 마땅히 배워야 하는 공과와 관련된 것이라면, 진리와 관련된 것이라면, 네가 깨달아야 하고 파악해야 하는 한 측면의 진리라면, 너는 마땅히 이를 올바르게 대하고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설령 몇몇 사람의 행동 방식이 다소 과격하고 고집스럽더라도 네가 그렇게 하지만 않으면 된다. 네가 진리를 중시하고, 진리에 공을 들이고, 사건의 실체의 본질을 인식한다면, 부정적인 인물을 인식하고 분별한다면,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길을 따라 실행한다면, 그러면 성과를 이룰 것이고, 너는 수확을 거둘 수 있다. 너는 이방인의 관점으로 이 일을 바라보면서 늘 ‘하나님 집에서 악인을 폭로하고 악인을 정리하는 것을 교제하는 건 운동을 벌이는 것이고 우리가 어떤 일들을 하도록 선동하고 유혹하는 거야. 악인을 폭로했다가 화를 자초하고 괜한 말썽을 일으킬 텐데.’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 집에서는 절대적으로 진리가 권세를 잡고 있다. 하나님의 주재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공의를 믿는다면, 너는 마땅히 이 일을 올바르게 받아들여야 하고 마땅히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일을 하나하나 마주할 때마다, 이런 특수한 사건을 마주할 때마다 진리에서 수확을 거두도록 노력해야지, 방관자로서, 혹은 불신파로서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보전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너희가 보기에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너희에게 도움이 되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만약 방관자가 되어 지나치게 조심하며 살아간다면, 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너무도 작고, 하나님이 공의롭고 전능하며, 만유를 주재한다는 이런 사실들을 믿지 않는 것이다. 설령 너를 불신파라고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너는 의심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맡기지 않았고, 하나님에게 진심이 없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있다. 즉, 겁이 많아서, 교회가 정리 사역을 하여 적그리스도와 악인을 폭로해야 할 상황이 닥치면, 그는 움츠러들고, 도망치고, 타협한다. 또다른 불신파 부류가 있는데, 이런 일이 닥치면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 집에서 또 운동을 벌이는구나. 난 절대 참여하지 않아. 절대 말도 안 해. 만일 잘못 말해서 나를 출교시키면 어떡해? 난 아무도 폭로하지 않고 누구도 적대하지 않을 거야. 내 한 몸만 잘 지키면 돼. 나 자신만 보전할 거라고. 누가 어떤 악행을 저질러도 난 안 보이고, 누가 무슨 터무니없는 말을 해도 난 안 들려. 누가 무슨 방해와 교란을 일으켜 하나님 집의 이익을 해치는 짓을 해도 나는 모르는 일이고 내 눈에는 안 보인다고. 나와는 상관없어.’ 이는 불신파의 관점이다. 너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돌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집을 비웃고, 그러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보호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긴다. 이런 자는 하나님 눈에 어떤 사람이겠느냐? 하나님이 좋아하겠느냐?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눈에 이런 자는 이방인입니다.) 하나님은 너를 이방인으로 여긴다. 너는 본분을 이행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자신의 피조물임을 인정하지 않고, 이것은 큰일이다. 너는 자신을 꽤 잘 보호하겠지만, 네가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소용이 없고, 하나님이 너를 보호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보호하면 너는 조금도 잘못될 일이 없고, 하나님이 너를 보호하면 너는 진리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열납을 얻을 수 있다. 너는 마땅히 하나님의 보호를 구해야 한다. 너는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과 책임을 이행하면 된다.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려 들지는 마라. 네게 자신의 목숨을 보호할 만한 능력이 얼마나 있느냐? 네게 자신의 종착지를 보장할 만한 능력이 얼마나 있느냐? 네게는 그런 능력이 없고, 너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 만약 네가 똑똑하다면 마땅히 자신을 내맡기고, 어떤 일이 닥치든 피조물의 자리를 지키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 만약 네가 충성을 다해 본분을 잘 이행하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킨다면, 네가 보기에 하나님이 너를 사탄에게 넘길 수 있겠느냐? 네가 죽을 리가 있겠느냐? 네가 보기에 교회에서 너를 출교시킬 수 있겠느냐? 만약 네가 이 부분조차 확신하지 못한다면 너는 그야말로 영락없는 불신파이며, 너는 이방인이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구원하지 않고 온전케 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은 원하지 않는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런 사상 관점이 생겼다면, 그 뒤로는 어떤 일이 닥쳤을 때 팔짱만 끼고 있으면 안 된다. 너는 자신을 하나님 집이라는 대가족의 일원으로 여겨야 한다. 하나님 집의 이익은 형제자매 한 명 한 명의 이익에 관계되고 너의 이익에도 관계된다. 하나님 집이 손해를 입으면 너 자신도 손해를 입었음을 의식하고, 마땅히 나서서 제지하고 분별한 다음 형제자매와 교제하여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집에 있는 사람이 마땅히 행하고 보여야 할 행위이고,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나라의 정병이 해야 할 일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다음에 또 보자!
2024년 10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