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2)

지난번에 우리가 어떤 주제에 관해 교제했느냐? 선천적인 조건과 인성, 패괴 성품 이 세 가지 측면의 구체적인 모습에 관해 교제하고, 이런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그 모습들이 이 세 가지 중 어떤 측면에 해당하는지 분별했다. 너희가 교제하며 다뤘던 이런 모습들을 일상에서 본다면 그것이 선천적인 조건에 속하는지, 인성에 속하는지 아니면 패괴 성품에 속하는지 대체로 규정하여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제하지 않은 모습의 경우 이런 원칙이나 그것이 표출하는 본질에 따라 구별할 수 있겠느냐? (예전보다는 나아져서 이런 측면으로 생각하겠지만 완전하게 분별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교제했던 모습은 대체로 분별할 수 있지만, 교제하지 않은 모습이나 예전에 교제했던 모습과 전혀 관련이 없는 모습은 분별할 수 있을지 모를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난 몇 차례에 걸쳐 선천적인 조건 중 흥미와 기호, 특기 등 몇 가지 측면의 모습들에 관해 교제했고, 이 몇 가지 측면을 통해 사람에게 나타나는 문제들에 관해서도 교제했다. 물론 이 문제들과 관련된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와 실행의 길 그리고 흥미나 기호, 특기를 가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교제하기도 했다. 이것들을 교제한 주된 의도는 흥미나 기호, 특기에 관해 사람이 지녀야 할 생각과 관점, 사람이 깨달아야 할 실행의 길, 그리고 사람이 깨달아야 할 이 측면에 관한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알려주는 것이다. 흥미, 기호, 특기 등 몇 가지 측면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만 교제하고, 이에 대해 사람이 어떤 잘못된 생각과 관점, 잘못된 실행의 길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런 측면에 관한 하나님의 요구를 어떻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교제하지 않았다. 그러면 사람의 이런 문제들을 바탕으로 흥미, 기호, 특기 중 사람이 깨달아야 할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자세히 교제해 보자.

너희는 흥미, 기호, 특기 등 몇 가지 측면에 대한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인식이나 치우친 이해에는 어떤 게 있는지 알아차렸느냐? 많은 문제에 관해 내가 교제한 만큼 너희도 깨달았느냐? 나중에 생각해 보거나 비춰보지도 않고 자기가 무엇이든 다 안다며 이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느냐? 그렇다면 이 문제부터 생각해 보자. 흥미, 기호, 특기에 차이가 있느냐?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느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면 어떤 측면의 차이였느냐? (흥미와 기호는 그저 어떤 사물을 상대적으로 좋아하는 것일 뿐 꼭 그 분야에 특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차이점을 대략적으로 말해주었다. 대체적으로는 그렇다. 인성의 관점에서 보면 흥미와 기호는 한 사람이 특정 업무나 사물에 흥미를 느껴서 보고 싶어 하거나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즉 개인의 취향이 자기가 흥미를 느끼고 좋아하는 사물에 편향되는 것으로서 해당 분야의 기술 업무를 조금 좋아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보통의 사물을 선호하고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흥미를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흥미와 기호이다. 하지만 그의 자질의 관점에서 그가 흥미를 느끼고 좋아하는 업무나 사물을 보면, 그에게 소질이 있는지, 제대로 할 수 있는지, 어느 정도까지 해낼 수 있는지는 단언할 수 없다. 그래서 흥미와 기호는 사람이 흥미를 느끼고 좋아하는 일로서 일상에서 항상 접하고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관심을 가지고 하고 싶어 하는 일이지만 그 일을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는 그의 자질과 그에게 소질이 있느냐에 달렸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 일이 그가 대단히 흥미를 가지고 좋아하는 일이며 동시에 그가 잘하는 일이라면, 즉 자신의 흥미와 기호를 바탕으로 그가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고 성과와 성취가 상당하다면, 다시 말해 그 분야의 흥미와 기호에 대한 소질이 출중하고 그 일에 대한 통찰력이나 학습 속도, 원칙을 파악하는 속도가 보통 사람보다 월등한 모습을 보인다면 특기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은 장시간의 정규 업무 훈련, 교육, 지식 습득, 실무 그리고 업계 종사자의 도움과 지도, 확인, 점검, 조언 등을 거쳐야만 일을 잘할 수 있는 반면 이렇게 특기를 가진 사람은 대체로 전문적인 훈련이나 체계적인 학습 없이도 자기에게 소질이 있는 업무나 기술에 통찰력이 있고 실질적인 깨달음이 있으며 실무 경험이나 개인적인 성취가 있다. 여기에 전문적인 훈련과 교육까지 받으면 이 분야의 특기가 한층 향상된다. 결론적으로 특기는 그가 흥미를 느끼고 좋아하는 일을 보통 사람에 비해 월등하게 잘하는 것이다. ‘잘한다’는 게 무슨 의미겠느냐? (특정 분야에 특기가 있고 그 일을 제법 잘 이해하고 있어서 비교적 능숙하게 해낸다는 뜻입니다.) 잘한다는 것은 비단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천적으로 그 분야의 자질이 특출나고 꽤 훌륭한 소질을 타고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조언해 주지 않아도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으며 이에 더해 정규 훈련이나 장인의 지도까지 받으면 그 분야에서 더 잘하게 된다. 특기라고 하는 것은 특정 분야의 흥미나 기호가 대단하고 그 분야의 훌륭한 자질을 타고나는 것이다. 이해력, 통찰력, 학습 능력이 특출나고 파악도 빨라서 그 분야에서 보통 사람보다 확연하게 잘하는 것을 특기라고 한다.

특기가 어떤 건지 알았다면 이제 흥미와 기호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다. 흥미와 기호는 특기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 흥미와 기호가 특기와 같겠느냐? (다릅니다.) 왜 특기와 다르냐? (왜냐하면 어떤 일에 흥미가 있다고 해서 꼭 잘하거나 소질이 있는 것은 아닌 데다가 이해 속도도 빠르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흥미와 기호는 단지 좋아하는 일이지만, 특기는 그 분야에 대한 받아들이는 능력이나 학습 능력, 통찰력, 타고난 자질이 어떤지, 그리고 그 분야의 소질을 타고났는지 등을 살펴봐야 한다. 만약 소질이 있다면 그것은 네 특기이고 그렇지 않다면 네 기호일 뿐이다. 이 분야의 일에 흥미는 있지만 자질이 형편없고 타고난 소질도 부족하다면, 즉 네가 흥미를 느끼고 좋아하는 이 사물에 대해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고 잘하지 못하며 서툴고 효율이 떨어지며 아무런 성과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 분야는 네 특기가 아닌 흥미나 기호의 차원일 뿐이다. 어째서 네 흥미나 기호일 뿐 특기가 아니겠느냐? 네가 잘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 노래 부르는 게 참 좋아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정도로 좋아하느냐? 아침에 눈 뜨자마자 가요를 튼다. 팝송이며 오페라며 경극이며 온갖 장르의 곡을 듣는다. 음악이라면 가리지 않고 듣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데 큰 문제가 하나 있다. 선천적으로 음치이거나 이 분야에 특기가 없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몇 년 동안 노래를 배워도 기교가 늘지 않는다. 어떻게 불러야 듣기 좋고 감동을 주는지 모르고, 어떻게 불러야 성과가 좋은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했고 하나의 흥미이자 기호였지만 개인적인 선천적 조건의 한계 때문에 그의 흥미와 기호가 특기가 되지 못한 채 그저 하나의 흥미와 기호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찬양을 한 곡 배울 때 세 번 정도만 불러 보면 주요 멜로디는 부를 수 있고, 네댓 번 불러 보면 한 곡을 거의 완벽하게 부른다. 반면 노래는 좋아하지만 잘 부르지 못하는 부류는 세 번 들어 봐도 멜로디를 기억하지 못하고 다섯 번을 들어도 썩 잘 부르지 못한다. 그저 가사와 악보 보기 바쁘다. 정식으로 찬양을 불러야 할 때일수록 감을 잡지 못하고 음정이 불안하며 가사까지 까먹는다. 심지어 불협화음이 날 때도 있다. 게다가 비교적 감성적인 곡은 감정을 잘 살리지도 못한다. 남들이 그의 노래는 듣기 싫다고, 기분 좋게 들을 수가 없다고 하는데도 그는 기죽거나 포기 하지 않고 끈질기게 노래를 배운다. 물론 노래하는 건 개인의 자유고 권리이니 아무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 교제할 내용이 흥미와 기호, 특기의 구분이니 이 모습에서 보면 그의 흥미와 기호는 그의 특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일을 분명하게 교제해야 하겠느냐? 자신의 흥미와 기호는 자신의 특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타고난 각 측면의 조건으로 볼 때 네가 특정 분야에 소질이 없다면 그것이 네 흥미나 기호더라도 타고난 조건의 한계로 인해 네 흥미나 기호는 네 특기가 아닌 것으로 결정된다. 네가 좋아하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목숨만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불행하지만 그것은 네 특기가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춤추는 것을 좋아해서 음악만 들리면 박자와 멜로디를 따라 기분 좋게 몸이 들썩이지만 선천적으로 못난 외모에 키도 작고 팔다리가 날씬하지 않으며 몸매도 예쁘지 않아서 춤이 전체적으로 썩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춤추는 게 좋다. 심지어 많은 사람 앞에서나 길거리에서 자아도취에 빠져 춤을 출 때도 있다. 행인이 그 광경을 보고 킥킥대도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춤춘다. 좋을 대로 생각하라는 식이다. 마치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처럼 춤에 심취해 있다. 그 자신은 춤을 잘 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에게는 소질이 없다. 춤의 정수를 모르고 어떤 동작부터 해야 좋은지, 어떤 동작이 아름다운지, 어떤 동작이 인간적인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즉 춤과 관련된 많은 일을 그는 그다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설령 전문가의 지도나 전문학교의 교육을 받는다고 해도 개인의 타고난 자질로 보면 그는 소질이 없어서 그 안의 정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가 타고난 다방면의 조건으로 보면 그가 좋아하는 춤이 그의 소질은 아닌 것이다. 그가 대단히 좋아하고 심취해 있어서 카메라와 거울 앞에서 춤추는 자신의 자세나 자태를 자주 감상하지만 사실 그는 춤에 소질이 없다. 다시 말해 춤은 그의 흥미나 기호일 뿐 특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문학을 좋아한다. 글을 쓰거나 시를 짓는 것을 좋아하고 문학계 인사의 강연을 좋아하며 소설이나 각종 문학 저서를 읽는 것도 좋아한다. 국내외 작품, 현대 문학, 고전 문학 등 작품을 모두 좋아하고 문학 작품에서 작가가 사용한 여러 어휘나 문체는 물론 문학 작품에서 작가가 표출하는 여러 생각들도 좋아한다. 이것이 그의 흥미나 기호이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그의 흥미나 기호인 것은 분명하다. 한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의 생각과 마음이 어떤 사물에 흥미를 가지는지는 타고나는 것이지 사람이 후천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부모나 가정이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다. 문학을 좋아해서 수많은 문학 저서를 읽은 사람이 있고, 대학에서 인문계열을 전공해서 문학을 체계적으로 배운 사람이 있으며, 해당 전공의 문과 교수를 역임했거나 문학 분야의 일이나 직업에 종사했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이런 직업에 장기간 종사한 사람도 있다. 인생의 대부분을 자신의 흥미나 기호와 관련된 일을 상대하는 데 보냈으니 거의 매일 자기가 흥미를 느끼고 좋아하는 문학과 함께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흥미와 기호가 정말 그의 특기이겠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가 문학 분야에서 지식, 생각과 관점 측면에서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남다른 무언가가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만약 그가 문학 분야에서 파악하고 이해한 것이 그저 책에서 배웠거나 보통 사람도 배우고 파악할 수 있는 상식이라면 특기라고 할 수 없다. 예컨대 그에게 글을 한 편 써보라고 하면 문법에 오류가 없고 문장 부호도 정확하게 사용하며 단락도 적절하게 구분하고 전체적인 글의 구조도 훌륭하며 심지어 글에서 미사여구가 많이 보인다. 다만 한 가지, 어떤 사물이나 관점, 줄거리를 표현할 때 접해 보지 못한 표현 방식이나 예술적이고 기발한 표현 방식 등이 그의 문학 작품 전체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시 말해 그가 지은 글은 깔끔하고 굉장히 전문적이며 단어 선택도 섬세하지만 거기에 문학에 소질이 있는 종사자라면 지니고 있어야 할 생각이나 관점, 현상, 줄거리를 표현하는 고유의 방식은 없다. 그가 쓴 글은 대부분 단조롭고 평범하다. 구성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형식이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으며, 교조적이고 진부하며, 독창적이지 않고 지혜롭지 않으며, 기발하지 않으니 고상함은 논할 나위도 없다. 이런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가 글쓰기에 소질이 없고 그 분야에 자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글쓰기에 소질이 없다. 한 사물의 당시 배경이나 이런 일의 모태를 바탕으로 그 이야기를 유연하게 써 내려갈 줄 모르니 결국 남들 눈에 그의 글이나 문학 저서가 천편일률적이고 똑같은 패턴으로 보이는 것이다. 어째서 천편일률적이라고 하겠느냐? 전체적으로 보면 글이 깔끔하고 정제되었으며 전문적인 데다가 보통 사람은 지식 등과 관련한 것에 대해 흠잡을 수 없고 심지어 구조까지 거의 똑같다. 비록 그가 외국 시, 산문, 서술문 등 각종 형식의 문학 작품을 배울 수 있다고는 하겠지만 그는 결코 변통하거나 그것을 자신의 문학 창작물에 적용할 줄 모른다. 이는 그의 문학 수준이나 문학적 조예가 영원히 흥미나 기호라는 차원에 머물러 특기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학 분야에 관한 그의 지식수준이 높을 수도 있지만 문학 분야에서의 조예는 그리 깊지 않다. 즉 문학 분야에서 그는 그다지 창의적이지 않으며 자신의 대표작이 있을 리 없고 독창적인 생각이나 관점, 표현 방식도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문학 분야가 그의 특기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그가 문학 분야의 지식이나 상식을 갖춘 것은 그저 그가 이 분야에 흥미가 있고 이 분야를 좋아하기 때문일 뿐, 그가 문학 분야에 특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책과 여러 문학 저서를 읽는 많은 사람을 보아라. 자기가 문학 애호가, 문학 창작자라고 우쭐대는 사람은 많지만 이들 문학 창작 분야의 종사자 중 정작 자신의 저서가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또 오랜 세월의 검증을 이겨내고 고전이 된 문학 작품을 집필한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적지 않으냐. 선천적으로 문학에 대한 흥미와 기호를 가지고 있었고 후천적으로 전문적인 학교의 학습과 교육, 훈련을 거쳤으며 때마침 문학 관련 직업에 종사하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학 관련 직업에 종사한다고 하니 그가 마치 흥미나 기호와 평생 함께하는 것 같으나 그가 문학계에서 종사한 기간 몇 작품이나 완성했는지, 얼마나 기여했는지, 얼마나 독창적이었는지는 그가 문학 분야에 특기가 있는지에 달렸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선호하고 좋아하는 직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득을 보지만 그 직업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는 그가 좋아하고 선호하는 그 직업이 그의 특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반면 자신의 흥미나 기호와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그의 특기이다 보니 작품들을 완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예로 발명하고 창작하는 사람들, 각 분야에 걸출한 기여를 하는 사람들, 각 분야에서 독자적인 일가를 이룬 사람들 그리고 각 업계의 선구자적 인물 등을 꼽을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경우를 보면 사람이 흥미나 기호가 있다고 해서 꼭 그 분야에 특기가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흥미나 기호와 특기의 관계를 분별하지 못해 자신의 흥미나 기호가 곧 특기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그 결과 오랫동안 그가 흥미를 느끼고 좋아하는 일에 종사하는데도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알고 나면 사람은 흥미와 기호, 특기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간단하다. 올바로 대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 집에서 네가 흥미를 느끼고 좋아하는 분야의 업무나 기술, 재능과 관련된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면 너는 거부하거나 요령 피우지 말고 또 무턱대고 나서지도 말고 본분 이행 원칙에 따라 대하여라. 만약 네게 소질이 없거나 네 능력이 부족해서 할 수 없어도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올바로 대하여라. 올바로 대한다는 게 무슨 의미겠느냐? 네 생각에 이 분야에 대한 자신의 흥미와 기호가 다른 사람에겐 없는 것 같은데 이 일을 할 때 늘 하나님 집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하나님 집이 요구하는 원칙에도 이르지 못한다면 이를 수 있는 만큼 이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결코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라고 하지 않는다. 네가 얼마나 이를 수 있는지, 네가 책임을 얼마나 질 수 있는지 하나님은 다 안다. 네가 많이 체험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실제 여건과 네가 타고난 조건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말아라. 네가 이를 수 있다면 미루지 말고, 이를 수 없으면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무리하지 말고 올바로 대하여라.

사람이 이토록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으니 본분을 3년 이상 이행한 사람이 많다. 하나님 집에서 한 분야의 본분을 이행하면 다들 한두 해만 이행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이행하고 있는 본분이나 맡고 있는 업무나 사역을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역량을 얼마나 어느 정도까지 발휘할 수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대체로 가늠하고 있다. 현재 이행하고 있는 분야의 본분이 아직 숙달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연습량이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역을 다년간 수없이 연습했지만 여전히 하나님 집이 요구하는 원칙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이는 그 분야에 소질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 분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무척 선호하고 좋아하며 해당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영광스러워하고 행복해하지만 소질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 집이 아무리 요구해도 이르지 못한다. 자기가 거역해서 말을 안 듣거나 협력하지 않는 게 아니라 타고난 조건이 이르지 못해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럼 어쩌겠느냐? 섭리에 따라라.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연약해지지 말고 속으로 원망하거나 불공평하다고 불평하지 말아라.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춤추는 게 좋아요. 그런데 팔다리가 따로 놀고 얼굴도 못나서 춤추는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데 어쩌죠? 정말 춤추고 싶단 말이에요.” 춤추고 싶은 것은 네 개인적인 욕망이고 네 기호이다. 그런데 그 기호를 하나님이 꼭 충족시켜 주어야 하느냐?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집은 하나님 집이 요구하는 원칙이 있고 하나님 집의 규정이 있다. 누구에게 어떤 사역을 맡길지는 다 원칙이 있는 것이다. 너는 개인적인 욕망이나 기호, 기분에 따라 하나님 집이 꼭 자신에게 맞춰줘야 한다고 강요하면 안 된다. 이는 적절하지 않다. 네가 그 분야의 본분을 이행하기에 부적절하다면 너는 그 분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을 조용히 축복해 주어라.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거나 묵묵히 뒤에서 일하는 사역자가 되면 된다. 지도하고 점검하는 것을 돕거나 사전 리허설이나 최종 춤 영상 편집을 돕고, 각종 자료 수집을 돕거나 진리를 구하는 것을 돕는 일 말이다. 각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사역은 많고 네 흥미나 기호와 관련된 사역이나 업무는 광범위하다. 네가 꼭 화면 속의 그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런 사역을 맡아도 된다. 이 또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이러면 네 개인적인 바람에도 부합하고 하나님의 원칙과 기준에 부합하게 본분을 이행할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이게 바로 일석이조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선천적인 조건에 그 분야의 특기가 없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본인에게 해당 분야에 선천적 결함이 있어 자기가 그 분야의 인재 선발에 대한 하나님 집 기준에 미달한다는 이유로 불평하고 원망하며 앙심을 품거나 그 분야의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하면 안 된다. 하나님 집이 네게 요구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는 본분을 이행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면 해라. 네가 적격하지 않다거나 소질이 없다는 이유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 집이 요구해도 네가 하지 않으면 이는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이고 자기 영업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태도나 하나님에 대한 진심 어리고 충성하는 태도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적절하지 않다. 사람은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한편으로는 흥미와 기호, 특기를 올바로 이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흥미와 기호, 특기를 올바로 대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문학과 관련된 사역에 종사하는 것을 좋아해서 늘 글을 첨삭하고 다듬으며 매일 글을 상대하고 싶어 하지만 주관적 이유, 객관적 이유 등 여러 이유로 인해 그 일을 하기에 부적합하다. 하나는 인문학 분야의 기초 지식이 부족하고, 또 하나는 그의 자질이 형편없으며 받아들이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문학을 좋아하지만 몇 년 동안 훈련해도 작문 능력이 기준에 못 미친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최소한의 자질을 갖추어야 문서 사역을 맡을 수 있는데 그의 자질은 문서 사역에 부적합하다. 즉, 글을 첨삭하고 다듬는 수준이 기준에도 못 미친다면 다른 본분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사무 사역이나 자료 수집 정도는 시켜도 괜찮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본인이 좋아하는 문서 분야의 사역을 할 수 없다. 정리하지 않더라도 그는 그저 장식품에 불과해서 실질적인 성과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이런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순정하겠느냐?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하고, 이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큰 틀이고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실행해야 하느냐? 치우친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다들 흥미와 기호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천적 조건이라고 하니, 하나님이 제게 이런 흥미와 기호를 주셨다면 분명 하나님 뜻은 제가 제 흥미와 기호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도록 예정하시는 것이예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거라면 하나님 집에서 제 흥미와 기호에 관련된 사역은 제게 맡기셔야 해요. 저도 참여해야 합니다. 이 사역을 제게 맡기지 않으시면 사람의 문제가 됩니다. 사람이 저를 무시하는 것이고, 리더 일꾼이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이죠. 천리마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백락이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에 소질이 있어서 글 첨삭은 누워서 떡 먹기인데 복음 전파나 허드렛일을 하는 곳에 배치된다면 재능 낭비 아닌가요? 재목을 썩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황금을 땅에 묻어 놓는 게 아닐까요? 어쩔 수 없죠. 처마가 낮으면 머리를 숙일 수밖에요! 그런데 황금은 언젠간 빛난다는 말이 있죠. 두고 보세요. 지금 하나님께서 저를 단련하고 검증하고 계시는 것인지도 모르죠. 언젠가 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제 관심사와 관련된 사역을 맡게 될 겁니다. 좋은 일이라면 늦어도 괜찬아요. 여러분이 모두 도태되고 나면 제가 실력 발휘할 차례가 되는 거죠. 제 독무대가 될 겁니다! ‘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는 10년 걸려도 늦지 않다’, ‘푸른 산이 있는 한 땔나무 걱정은 없다’라는 속담도 있잖아요.” 이 관점이 어떠냐? 틀렸다. 그렇지 않으냐? 원대한 계획까지 세우다니 꿈도 야무지다. 그런데 정말 능력이 있는지는 미지수다. 이런 말을 하며 억울해하는 사람도 있다. “전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는데 허드렛일에 배치됐어요. 온종일 흙탕물과 씨름하고 있어요. 이걸 어디 가서 따지겠어요? 별수 없죠. 하나님이 이렇게 배치하신 걸 제가 어쩔 수 있나요?” 사실 문서팀이 그를 테스트해 봤는데 그의 글솜씨가 썩 좋지 않았다. 기본적인 소양도 없고 문장 부호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문장을 끊거나 멈춰야 할 곳에 죄다 쉼표를 찍으니 말이다. 이런 사람이 자기는 문학 천재라 힘쓰는 일을 하는 것은 재능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의 머릿속은 억울하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난 태생적으로 문학을 좋아해서 어려서는 이야기책 보는 것을 좋아했고, 커서는 명사들의 저서를 즐겨 봤어. 국내외 문학 명작들을 적지 않게 봤고, 각종 희곡, 문예, 산문, 시 등 어떤 소재의 작품이든 가리지 않고 많이 봤어. 문서 사역을 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글 한 편 쓰는 거야 식은 죽 먹기지. 그런데 지금 내 꼴 좀 봐. 힘들고 지저분한 일에 힘만 빼고 있잖아. 반평생 문학을 좋아한 게 하나님 집에서 부정당하고, 평생 배웠던 지식은 하나님 집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어. 문학 인생이 이렇게 끝나다니! 하나님 집에서는 진리가 권세를 잡고 공평과 공의가 권세를 잡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세상에서는 나 같은 큰 재목, 문학 애호가가 실력을 발휘할 곳이 없고,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고, 존중해 주지 않더라도, 하나님 집에서는 내 남은 열정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부푼 마음을 안고 문서팀에 신청했는데 결과는 낙방이었어. 지금 거기 서 있으면 내가 문학 애호가이고 문학 인재라는 걸 누가 알아보겠어? 이렇게 힘들고 지저분한 일을 하느라 그런 기질도 다 닳아 없어져 버렸는 걸. 이젠 입에서 나오는 말이 죄다 저속하고 상스러운 말뿐이야.’ 그는 억울한 마음이 든다. 말로는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하고 하나님 집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위치를 잘못 파악하고, 자신의 흥미와 기호를 자신의 특기로 착각하고, 하나님이 쓰기에 적합하다고 착각하는 바람에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자신의 실제 상태를 똑바로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의 능력을 모르고, 자기가 흥미를 느끼고 좋아하는 일에 과연 소질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것들을 다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자기가 문학 재목이라고 우쭐대고, 문학의 거장이라고 할 판이다.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했느냐? (교회의 안배에 불만이 가득해 순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전력을 다해 이행하면서 억지로 순종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억울하다는 생각 때문에 이런 말이 수시로 튀어나온다. “세상에 천리마는 늘 있지만 백락이 늘 있는 것은 아니군.” 웬 천리마, 백락 타령이냐? 사람이 어떤 분야의 일에 흥미를 좀 가지거나 좋아하고, 이에 더해 후천적으로 체계적인 학습을 거치면 안하무인이 되어 자기가 천리마이고 인재인 줄 안다. 이는 자기 주제도 모르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는 흥미와 기호가 하나님이 준 것이라는 점만 믿을 뿐, 하나님이 자기에게 어떤 자질을 주었는지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흥미를 느끼고 좋아하는 일에 과연 소질이 있는지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흥미와 기호에 관련된 사역이나 본분을 과연 제대로 할 수 있는지, 감당해 낼 수 있는지, 책임질 수 있는지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이는 문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자기 위치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제대로 찾지 못해서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겉으로는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늘 한탄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지를 보이면서 언젠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어서 자기를 위해 나서 주고 억울함을 풀어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가 바라던 대로 자신의 흥미와 기호에 관련된 본분을 이행하게 해 주기를 바란다. 그가 늘 부르는 노래가 ‘내일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생각하지 않으리’인데, 다음 소절이 무엇이더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소임으로 여길 뿐’입니다.) 정말 그런 분량과 실제가 있고,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노래를 부른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합당하고 알맞은 일일 것이다. 이런 부류 역시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가 어떤 심경으로 부르겠느냐? 어떤 배경에서 부르겠느냐? (원망스럽고 억울할 때입니다.) 원망스러운 마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노래하는 것이 죄다 원망이나 불복, 불만이고 온통 설움뿐이다. 그가 이 노래를 부를 때는 바로 가장 서운할 때이다. 중국에 어떤 속담이 있더냐? ‘걱정될 때 남자는 노래하고, 여자는 울며, 할머니는 궁시렁댄다.’ 각 부류의 사람이 걱정될 때 보이는 모습이 다른 것을 보아라. 어떤 여자들은 이런 일이 생기면 울고, 몰래 눈물만 훔친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서럽고 억울한 마음이 든다. 그녀는 그 일을 올바르게 대하지 못한다. 사실 이것은 간단한 일이다. 흥미와 기호는 특기 자체와는 별개의 일이다. 네게 어떤 분야에 특기가 있다면 그 분야에 흥미나 기호가 있든 없든 너는 그 분야의 특기와 관련된 사역을 하기에 적합하다. 다시 말해 네가 자질과 재능 혹은 소질을 타고나서 그 일을 아주 잘하고 그것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네가 그 사역에 종사할 경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을 테니, 상대적으로 적합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네가 만약 그저 그 분야에 흥미와 기호만 있을 뿐 특기를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것을 잘 해내리라는 보장이 없다. 무척 간단한 것이다. 고집과 치우침, 여기에 어리석음과 무지까지 더해져 사람은 자기가 흥미를 느끼는 일에 종사하지 못하면 낙담하고 의기소침하며, 소극적으로 변하고 원망하는 등, 온갖 부정적인 정서에 빠진다. 따라서 자신의 흥미와 기호, 특기가 어떤지 실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대단히 필요하다. 파악하고 나면 올바로 대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의 측면이다. 다른 한 측면은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종하고, 하나님 집이 요구하는 원칙에 따라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 집이 어떤 분야의 본분을 이행할 것을 네게 요구할 경우, 네가 그 분야의 사역에 소질은 없고 흥미나 기호만 있어서 그 사역을 좋아할 뿐이라면, 그리고 하나님 집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으로 봤을 때 간신히 감당할 수 있다면, 너는 거부하거나 사양할 다른 객관적인 이유를 찾지 말고 순종하고 열심히 협력해야 한다. 물론 네 개인이 지닌, 각 측면의 선천적 조건의 한계나 어떤 실제적인 문제로 인해 하나님 집이 네게 이 분야의 본분을 맡길 수 없다고 해도, 너는 원망하지 말고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연약해지지 말아야 한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흥미나 기호는 너 혼자 즐겨라. 네가 어떤 분야의 일을 좋아하고 그 일에 흥미를 가질 권리를 교회 사람이 간섭하거나 막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네 사적인 일이다. 하지만 본분 이행과 관련하여 흥미나 기호, 특기 등 다방면의 문제는 확실하게 구분해서 올바로 대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어떤 분야에 흥미와 기호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런 흥미나 기호가 없는 사람도 있다. 즉 세상의 직업, 업무 혹은 사람이 자주 접하는 다방면의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특별한 흥미나 기호가 없는 평범한 사람 말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문학을 좋아하는지, 평소에 일기나 글을 쓰는지 물으면 그는 “좋아하지도 않고 소질도 없습니다. 책을 보거나 글을 읽기만 하면 머리가 아파요.”라고 답한다. 문학 명작을 읽으라고 하면 그는 머리가 터질 것 같고, 속으로 여간 내키지가 않는다. 심지어 이렇게 답하는 사람도 있다. “글자만 보다 보니 눈이 침침한 게 노화가 시작됐어요. 그래서 문학을 좋아하지 않죠.” 그에게 춤추는 게 좋은지 물으면 그는 “춤 추는 건 본연의 일이 아닙니다. 배부른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죠. 전 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면서 춤이 본연의 일이 아니라고 핑계를 대는 것 좀 보아라. 사람이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 얼마나 긍정적인 일이냐! 노래하며 춤추고 비파와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예부터 있었고 하나님이 칭찬하는 일인데 어찌 본연의 일이 아닐 수 있겠느냐? 그는 자기가 싫어하는 일은 깎아내리면서 부정적인 일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춤추는 게 싫으시면 노래하는 건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노래는 무슨 노래요? 노래만 하면 음정이 틀려서 제가 들어도 못 들어 주겠는 걸요. 안 좋아해요. 하나님을 믿고 나서 이제 겨우 하나님 말씀 찬양을 배우고 체험해 봤는 걸요. 예전에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땐 절대 노래하지 않았어요. 남들이 하는 노래도 듣기 싫었어요.”라고 말한다. “그럼 기분 좋을 땐 어떻게 표현하세요?” “기분 좋을 땐 잠을 잠깐 자요.” “그럼 힘든 일이 있어서 괴로울 때는 어떻게 하세요?” “그럴 땐 간식을 좀 먹거나, 그렇지 않으면 잠을 좀 잡니다.” “노래하는 게 싫으면 음악 듣는 것은 좋아하시나요?” “그런 것에 흥미가 없어요. 음악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게 뭔지 이해하지도 못하고요. 음악 속에 인간의 희로애락과 생각과 정서가 표현되어 있다고들 하는데, 저는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그럴 능력도 없어요. 음악은 고상한 예술이잖아요. 저희같이 교양 없는 사람들은 음악을 몰라요. 좋아하지도 않고요.” “맛있는 음식은 좋아하세요?” “맛있는 음식도 안 좋아합니다. 아무거나 먹으면 되죠. 저는 원래가 투박한 사람이라 옥수수가루 음식도 잘 먹고 케이크도 잘 먹어요. 중식, 양식 가리지 않고 다 먹죠. 배고파 죽겠는데 먹을 게 없으면 개밥이라도 먹을 거예요.” 이 사람은 이렇게 거칠고 투박하다. 어떤 여자에게 “화장을 좋아하시나요?”라고 물으면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관심 없어요.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거죠. 볼 테면 보고 말 테면 말라죠!” 어떤 남자에게 “전자기기나 자동차 같은 기계를 좋아하시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그런 거 좋아해 봤자 무슨 소용입니까? 신경만 쓰이고 머리만 아파요. 그럴 시간에 잠을 자든가 그냥 얘기나 하는 게 낫죠!”라고 대답한다. 그는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고 어떤 흥미나 기호도 없다. 생물이든, 과학기술이든, 고급이든, 싸구려든 전부 좋아하지 않는다. “인성에 관련된 것은 고상하든 속되든 모두 싫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고양이나 개, 새 같은 소동물은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그런 건 더 싫어요. 동물은 사람이랑 소통도 안 되는데 그런 걸 좋아해서 뭐 해요?”라고 답한다. 개에 흥미가 있는 사람은 자주 개와 대화를 하는데 개도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 좋아하는 게 아무것도 없고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흥미나 기호는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특히 어떤 분야에 특기가 있는 사람, 선천적으로 그 분야에 재능이 대단하고 특출난 사람이 있죠. 이는 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고, 높여 주시고, 마음에 들어 하신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하나님 집에서 관련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의 신분과 지위는 더없이 존귀합니다. 평범하지 않죠. 아무런 기호나 특기도 없는 사람은 막노동이나 기술이 필요 없는 사역밖에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접대나 식사 준비, 청소, 농사, 양돈, 양계 따위의 일 말이죠. 그렇다면 흥미나 기호, 특기에서 볼 때 사람 간에 우열이나 귀천의 구분이 있지 않겠습니까? 계급의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관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기를 주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흥미나 기호를 예정했다. 하나님이 예정하지 않아서 아무런 특기가 없는 사람도 있다. 노래도 못 하고, 춤도 못 추고, 문학도 모르고, 각 분야의 기술이나 업무에 대해 까막눈인 것이다. 마침 접대 가정에서 개 두 마리를 키우고 있으니 그에게는 개를 먹이는 일이 적합할 것이다. 이것은 가장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 그는 개에게 먹이는 주는 것 말고는 산책도 시키지 않고, 돌볼 줄도 모른다. 1, 2년간 개에게 먹이를 주었는데도 개는 그를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아 그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다. 대답해 보아라. 그는 어떤 사람이냐? 이런 부류와 한 분야에 흥미와 기호, 혹은 특기를 가진 사람을 비교했을 때 차이가 있느냐? 두 부류는 선천적 조건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한 부류는 우월감을 느끼며 내실 있고 재미나게 살지만, 다른 한 부류는 삶이 공허하고 우월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 사람 간에 지위와 신분의 차이를 구분한다면 이 원칙에 따라 구분하는 게 적절하겠느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원칙에 따라 구분하는 게 적절하겠느냐? 너희가 생각하기에 사람과 사람 간에 차이가 있느냐?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느냐? 어떻게 구별하느냐? 적어도 사람이 진리를 좋아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진리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근거로 사람의 본질, 우열과 귀천, 사람 유형을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론적으로 간단하게 구별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구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별하는 것은 다소 단순하지 않으냐? 타고난 특기가 하나도 없고 흥미나 기호도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진리를 좋아하고 깨닫고, 진리에 대한 체험과 인식이 있어서, 진리를 교제할 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식을 이야기할 수 있고 생명 진입 측면도 보통 사람보다 나아서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면, 이런 부류를 천하고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사람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사람의 본질, 우열과 귀천, 유형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구분하느냐?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 교제해 보겠다.

사람의 유래에 따라 구분한 사람의 세 가지 유형

한 사람의 선천적인 흥미, 기호, 특기의 유무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이 주면 있고, 주지 않으면 없다. 네가 배우려 해도 배울 수 없고 따라 하려 해도 따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네가 어떤 분야의 특기를 가지고 있다면 “이 분야의 특기와 관련된 본분을 이행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이 분야의 특기는 원치 않습니다.”라며 싫다고 해도 떼어낼 수 없고, 다른 사람이 빼앗을 수도 없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빼앗을 수 없고, 네게 없는 것을 남에게서 빼앗아 오거나 쟁취할 수도 없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예정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네게 한 분야의 흥미나 기호, 특기를 주었다고 해서 반드시 네 흥미나 기호, 특기와 관련된 본분이나 사역을 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 분야의 본분을 이행하거나 이 분야의 사역에 종사하게 할 것도 아니면서 왜 제게 이런 흥미나 기호, 특기를 주신 겁니까?” 하나님은 절대다수의 사람에게 저마다의 다양한 상황에 따라 흥미와 기호를 준다. 물론 이는 여러 측면을 고려한 것이다. 한 가지 측면에서 보면 사람의 생계와 생존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한 가지 측면에서 보면 사람의 인생을 다채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한 분야에 대한 흥미와 기호가 필요할 때가 있다. 취미를 즐기거나 본연의 일을 좀 하면서 알차게 생활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보든 하나님이 준 것은 모두 이치에 맞는 것이며, 하나님이 네게 주지 않은 것에도 하나님의 도리나 이유가 있다. 네 인간적인 생활이나 생존에 하나님이 준 흥미나 기호, 특기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너는 다른 경로를 통해 네 생계를 유지하거나 네 인간적인 생활을 알차고 풍부하게 해도 된다. 어쨌든, 하나님이 사람에게 흥미나 기호, 특기를 주었든 주지 않았든, 그것은 사람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설령 특별한 특기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성의 결함이 아니니 사람은 올바로 받아들이고, 올바로 대해야 한다. 만약 한 분야에 대한 흥미나 기호, 특기를 가졌다면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올바로 활용해야 하며 가지지 못했어도 원망해선 안 된다. 흥미나 기호, 특기의 관점에서 본 실제 상황은 이렇지만 그것이 곧 한 사람의 가치나 지위, 신분이 어떻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겠느냐? 설사 하나님이 네게 준 고상한 흥미나 기호, 특기가 네 사유 재산이자 우월한 조건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네가 다른 사람보다 고귀하고 우위에 있으며 어떤 일을 할 특권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기에 누가 어떤 선천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든 그는 패괴된 인간 중 한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비록 선천적 조건에 패괴의 요소는 없지만 선천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 역시 사탄의 패괴를 거쳐 사탄의 성품에 따라 살아간다. 그들의 생명 본질이 사탄의 패괴 성품인 것이다. 그래서 네 선천적 조건이 무엇이든, 흥미나 기호, 특기가 있든 없든 하나님 눈에 사람의 생명 본질은 똑같기 때문에 네 가치는 다른 사람과 동등하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한 분야에서 우월한 조건이나 우위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사람의 본질이나 패괴 성품으로 보면 사람의 본질은 똑같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람은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이 구원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육의 생명 본질에서 보면 사람은 모두 똑같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람 간에는 차이도 있다. 이 차이에 대해 우리는 구체적으로 교제해 봐야 한다. 어떻게 구별하겠느냐? 사람의 유래를 통해 살펴봐야 한다. 유래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겠느냐? 사람이 무엇에서 환생했느냐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네가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에 따라 구별한다는 말이다. 개괄적으로 말하면 사람은 세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 두 번째는 각종 마귀에서 환생한 부류, 세 번째는 사람에서 환생한 부류이다. 이 세 가지 유형은 사람 간의 차이를 유래로 구분한 것이다.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 이유는 각 부류의 유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짐승에서 환생했고, 누가 마귀에서 환생했으며 또 누가 사람에게서 환생했는지 어떻게 아느냐? 그의 삶과 행동의 특징을 봐야 한다. 예전에 민간이나 다른 어떤 경로를 통해 이런 내용을 들어 본 적이 있지 않으냐? (들어 봤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가 너희에게 아주 생소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 마귀에서 환생한 부류, 사람에서 환생한 부류 중 어느 것부터 듣고 싶으냐? (첫 번째 부류입니다.) 첫 번째 부류는 짐승에서 환생한 경우다. 너희가 정말 이 일의 실상을 알게 된다면 너희 삶에 지장이 생기지 않겠느냐? 골치 아픈 일이나 장애물이 생기지 않겠느냐? (아마도 자기가 무엇에서 환생했는지 생각해 볼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부류의 사람이고 특정한 부류의 사람과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정말로 알게 됐을 때 사람에서 환생한 경우에는 다행이라며 좋아하겠지만, 사람에서 환생한 게 아니면 괴로워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고충이 생길 것이고 괴로울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괴로워지고 고충이 생길 수 있다면 사람이 아는 게 낫겠느냐, 모르는 게 낫겠느냐? (그래도 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점이 좋겠느냐? (이 측면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또 주위 사람과 일, 사물을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교제해 보자.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

우선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부터 교제하겠다. 짐승에서 환생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 사람이 전세나 전생에 한 마리 짐승이었다는 것이다. 짐승의 범위는 굉장히 넓다. 사람으로 환생할 수 있는 짐승이 얼마나 되는지는 우리가 교제할 범위가 아니다. 어쨌든 전생에 짐승이었던 부류가 있는데, 그의 원래 신분이나 피조된 유형은 피조된 인류의 일원이 아니다. 그 사람의 최초, 가장 원시적인 생물 유형은 짐승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생물계에서 짐승의 신분이었던 그가 이번에 사람으로 환생한 것이다. 즉 이 짐승이 더 이상 짐승들 사이에서 윤회하면서 다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환생하여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가정, 특정한 가족, 특정한 국가에서 태어난 것이다. 짐승에서 환생하여 인간 중 한 명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그는 전생에 사람이 아닌 짐승이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짐승계에서 생존하면서 짐승계에서 짐승 간에 서로 윤회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짐승계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되었고, 신분이 전환되어 인간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이것을 짐승에서 환생했다고 한다. 짐승이 사람으로 환생하면 그 생김새의 특징이나 본능은 보통 사람과 거의 일치한다. 다시 말해 직립 보행을 할 수 있고, 인간의 외모나 사고,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데다가 인간 고유의 언어 능력까지 가지는 등 사람의 특징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 짐승이 사람으로 환생했다고 한다. 즉 육의 형태나 외관, 육의 생활 특징에서 짐승의 특징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인간의 특징만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짐승에서 환생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사람이 가장 관심을 갖는 문제가 이것이다. 당연히 알아볼 수 있다. 만약 짐승에서 사람으로 환생한 부류가 사람에서 사람으로 환생한 부류와 차이가 없다면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의 사람에게는 아무런 분명한 특징도 없을 것이다.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와 진짜 사람에서 환생한 부류 사이에 명확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두 부류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에게는 어떤 특징들이 있느냐? 첫 번째 특징은 이 부류가 치우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두 번째 특징은 대단히 무감각하다는 것이며, 세 번째 특징은 무척 흐리멍덩하다는 것이고, 네 번째 특징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 특징을 통해 짐승에서 환생한 사람과 진짜 사람의 차이를 충분히 구별할 수 있다.

짐승에서 환생한 사람의 특징

1. 첫 번째 특징, 치우침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의 첫 번째 특징은 치우침이다. 치우침은 먼저 무엇에 관련되느냐? 그의 사상과 관점 측면의 문제와 관련되고 사물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이해하는 인지 능력과 관련된다. 이 부류는 한 가지 사물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올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며 일을 처리할 때 특히 황당하고 고집스럽고 터무니없으며, 정상 인성의 사고나 사물을 바라보는 정상 인성의 사상과 관점에서 완전히 어긋난다. 물론 이렇게 치우친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은 어림도 없고 결코 진리에 이르지 못하며 진리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대하든 그의 관점은 죄다 치우쳐 있다. 그에게 교제해 주면 그는 도리상으로는 이해하지만 얼마 지나면 그의 인식은 여전히 치우쳐 있다. 좀 더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사례를 들어 주면 그땐 알아듣지만 시간이 지나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의 관점은 여전히 치우쳐 있고 아무리 교제해도 시정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이런 상태나 사물을 받아들이는 이런 방식은 계속 유지되어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 누가 진리를 교제해도 그를 바꿀 수 없다. 설령 내가 교제하고 설교할지라도 그의 이런 치우친 생각과 관점, 치우친 이해 방식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니 이런 부류는 골치 아프다. 예를 들어 그가 어떤 일을 잘못해서 그에게 “이 일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원칙에 어긋나요. 사람의 불순물이 들어있습니다.”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요. 당신들이 그렇게 잘났고, 모두 진리를 가지고 있고, 할 줄도 알면서 왜 직접 하지 않고 저한테 시키죠? 제가 잘못했다는 건 제가 눈에 거슬린다는 말 아닌가요? 당신들 모두 인성이 있는데 저만 없으니 저는 지옥에 가고 당신들은 천국에 가겠군요!” 그는 심지어 핑계를 대면서 변명하고 해명하며, 책임을 회피할 구실을 찾는다. 그는 그 일을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앞으로 반드시 시정하겠다는 올바른 태도도 보이지 않으며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절대로 이렇게 인식하지 않을 것이고 인성의 관점에서 그 일을 순수하고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사역할 때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고 진리를 교제해 주면 이런 말을 한다. “지금 저를 무시하시나요? 저를 못 배운 촌놈이라고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제 신분을 천시하는 거 아니냐고요. 하나님께서도 내치시지 않는 저를 당신이 뭔데 내쳐요!” 그는 절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진리를 구해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하고 인식해서 올바른 실행의 길을 찾아 해결하지도 않는다. 그는 왜 그렇게 할 줄 모르겠느냐?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정상인의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나타난 잘못을 정상인의 방식으로 대하지 못하며 잘못을 대할 때 정상인이 가져야 할 태도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부류를 본 적이 있느냐? 이참에 너도 자기 이성이 정상적인지 반성해 보면 좋다. 예를 들면 방금 바닥을 닦아서 바닥이 젖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모르고 지나가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 사람이 일어나서는 이렇게 말한다. “바닥을 닦고 나서 물기를 안 훔쳤으면 주의 문구가 적힌 입간판을 세워 놨어야죠! 다행히 저는 젊어서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었지만 노인이었으면 골절되지 않았겠어요? 더 세심하게 신경썼어야죠!” 정당하고 정상적인 말 아니냐? (정상적인 말입니다.) 그는 이 일을 할 때 세심하게 신경쓰지 못했으니 다음번에는 세심하게 신경쓰면 된다. 사람을 넘어지게 만든 것은 분명한 잘못이지만 실수일 뿐이니 아무도 정죄하지 않는다. 시정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의 관점에서 사람의 사고를 통해 이 일을 올바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대할 줄 모른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바닥이 젖어 있는 게 안 보여요? 눈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겁니까? 당신은 넘어져도 싸요! 자기가 못 봐 놓고 왜 제 탓을 합니까? 방금 닦아서 젖어 있는 바닥을 왜 지나가고 그래요? 제가 지나가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넘어진 건 본인이 재수 없어서 그런 거죠. 저랑은 상관없다고요!” 이 말이 이성적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비이성적이다. 속된 말로 뭐라고 하느냐? 억지를 부린다고 한다. 바닥을 닦고 물기를 훔치지 않아 사람이 넘어졌다. 반드시 미안해하거나 사과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남들이 자신의 문제를 깨우쳐 주고 지적하면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다치진 않으셨어요? 병원에 가서 검사나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태도이다. 인성의 관점에서 실수한 일을 대할 때는 이렇게 이성적으로 대하고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는 인성이 없고 치우치게 받아들인다. 그는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고 문제를 이렇게 생각하기는커녕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릴 것이다. 바닥을 닦고 나서 물기를 훔치지 않아 사람이 넘어졌으면 다음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게 주의하고 잘못을 시정하면 그만이다. 그럼 이 일이 해결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일이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고 아무도 그를 정죄하지 않으며 그 역시 법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당신들만 잘났고, 인성을 갖췄죠. 저는 나쁜 놈이라 일부로 사람을 해친 거고요. 악의적으로요! 당신들은 천국에 가고 전 지옥에 가겠군요!”라고 한다. 정상인이 이런 말들을 내뱉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오직 이렇게 짐승에서 환생한 사람만이 몹시 극단적이고 고집스러우며 터무니없는 관점으로 모든 사물을 받아들이고 바라본다. 사소한 일이나 지극히 정당한 일에도 그는 온갖 억지스럽고 잘못된 논리를 늘어놓아 듣는 사람을 어이없게 만든다. 책망이나 훈계를 받을 때면 그는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자기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렇게 하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온갖 논리를 대며 필사적으로 해명하고 변명한다. 그에게 왜 그를 책망하고 훈계하는지, 잘못했을 땐 어떻게 시정하고 어떻게 진리 원칙을 구해야 하는지, 그 일을 하는 원칙은 무엇인지 교제해 주어도 그는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속으로 분해하고 답답해하며 억울함과 치욕을 삼키면서 뒤에서 남들한테 이런 말을 한다. “쳇! 이런 문제들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고의로 그렇게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방해하고 교란했다며 저를 정죄하다니. 제가 그렇게 나빠요? 제가 나쁜 놈인가요?” 그는 진리 원칙에 관한 일에 결코 이르지 못하고, 그 일을 알아듣지도 못하며, 대단히 치우치고 터무니없게 받아들인다. 어떤 진리 원칙을 교제해 주어도 그의 관점에서 그것은 한마디 말, 한 가지 행동 방식이나 형식, 일종의 의식이나 규례일 뿐이다. 단지 단편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무척 터무니없고 황당하게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이런 부류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법은 유독 우둔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어느 정도로 어리석겠느냐? 남들이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구역질이 나고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을 정도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더 말해 봤자 헛수고이다. 더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니 더 이상 이들과 진리 원칙을 논하면 안 된다. 그들은 어떤 일이든, 그 일이 설사 삶의 지극히 사소한 일이더라도 몹시 비정상적이고 터무니없으며 치우치게 처리하고, 인성과 이성의 범위 안에서 바라보거나 처리하지 못한다. 또 무슨 일이든 고집스럽고 터무니없이 바라본다. 그가 어떤 일에 대한 견해를 말하든 듣고 나면 너는 평생 구역질이 날 것이다. 네가 마침 밥을 먹고 있을 때 그 말을 듣는다면 다 토할 수도 있다. 대답해 보아라. 어느 정도로 치우쳐 있겠느냐? 이것이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가 보이는 한 측면의 주된 특징인 고집스럽고 터무니없는 모습이다. 인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고집스럽고 터무니없는 모습은 주로 인성의 정상적인 사고가 없기 때문에 나타난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인성의 정상적인 사고로 생각하지 못하고 매우 극단적이고 치우쳐 있으며 고집스럽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하고 객관적 사실이나 구체적인 상황을 교제해 줘도 그는 자신의 논리를 포기하지 않고 물고 늘어지면서 ‘이번에는 내 말이 맞아. 트집 잡히지 않게 물고 늘어질 테야. 이게 나한테는 진리야. 당신이 뭐라고 하든 소용없다고!’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가 보이는 특징 중 하나인 치우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2. 두 번째 특징, 무감각함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의 또 다른 모습은 많은 사람과 사물 앞에서 무척 무감각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일을 고집스럽고 치우치게 바라볼 뿐만 아니라, 어떤 사물이 나타나든 그것의 성질이나 본질, 근원이 무엇인지, 어떤 영향을 일으킬지,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 전혀 분간하지 못한다. 즉, 어떤 사람들이 말과 행동을 통해 어떤 조짐이나 징조를 보였는데도 그는 바보처럼 분간하지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그가 분간할 때쯤이면 일은 이미 벌어졌고, 결과도 이미 초래된 뒤이다. 그는 그토록 많은 진리를 듣고 나서도 주위 사람이 어떤 부류의 사람이고, 어떤 본질의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며 분명 문제가 있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느끼지 못한다. 이를테면 허풍을 떨고 큰소리치며 으스대면서 자기를 과시하는 사람 말이다. 이는 분명 교만한 성품을 표출하고 있는 것인데 그는 이런 문제를 분간하기는커녕 그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탄복하며 선망하는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이런 사람을 따르려 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바로 무감각함이다. 악인이나 악행, 패괴 성품의 표출이 확실하고, 어떤 일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는 게 분명한데도 분간하지 못한다. 이 일의 본질이 무엇이고,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하며 그런 의식조차 없다. 이런 사람이 바로 우리가 늘 이야기하는 영이 없는 죽은 사람이다. 이런 부류는 진리 원칙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기준 미달이다. 그에게 그 일을 어떤 원칙에 따라 실행해야 하는지 알려줘도 그는 알아듣지 못한 채 그저 지켜야 할 규례가 무엇인지만 기억한다. 교제해 준 원칙을 깨닫지 못하고 그 원칙에 이르지도 못하는 것이다. 네가 그의 한 측면의 내적 상태가 패괴 성품에서 표출된 모습이라고 지적해 주어도 그는 남 얘기인 줄 안다. 입으로는 자기에게도 그런 측면의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자기의 어떤 말과 행동이 그 측면의 내적 상태나 모습에 해당하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는 알아듣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예배 시간에 진리를 교제할 때 남들은 다음 주제로 넘어갔는데도 그는 계속 이전 주제에 관해 이야기한다. 둔감하고 무감각하지 않으냐?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그의 생각이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질이 뒤처지고 기준 미달이라서 그런 것이다. 악인이 그를 속이고 농락하며 괴롭히려 하는데도 그는 감지하기는커녕 그를 형제자매로 대하며 가깝게 지낸다. 그 결과 악인에게 해를 당하고 나서야 자기가 속아 넘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내가 어리석었어. 나는 참 사람 볼 줄 모르고 분별할 줄도 모르는구나! 이번 일을 교훈 삼아서 다음부터는 나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믿지 않겠어. 이게 바로 최고의 지혜지!’라고 생각한다. 한 번 속고 나더니 그는 자기에게 식견이 생겼다고,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한쪽 극단에서 반대쪽 극단으로 치닫는 것이다. 짐승에서 환생한 이 부류는 무슨 일에든 무감각하다. 예를 들면 그가 양식을 하고 식물을 재배하는 일을 맡았었는데 어느 날 기온이 떨어져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저녁 기온이 영하 5도라고 한다. 추위에 약한 식물이나 동물을 살펴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가 듣더니 “제게 패딩 점퍼가 있습니다. 저녁에 이불이랑 담요까지 덮고 자면 안 추울 거예요.”라고 한다. 그가 내 말의 뜻을 알아들었느냐? 그의 대답을 들어 보니 못 알아들었다. 이것이 무감각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에게 “오늘 영하 5도라고 한다. 꽃이 정원에 있으면 얼어 죽을 것이다. 추위에 약하고 몸이 허약한 동물을 우리 안으로 들여라. 문에는 발을 더 치고 우리에 외풍이 부는 곳이 있으면 막아 놓아라.”라고 하면 그는 이 말을 듣고 고민한다. ‘하나님은 동물이랑 식물을 말씀하시는 거였구나. 그렇다면 꽃은 집 안으로 옮기면 되잖아? 하지만 동물은 저렇게 많은데. 어떤 동물이 추위에 약하고, 어떤 동물이 추위에 강한지, 어떤 동물을 우리로 들이고, 어떤 동물을 우리 밖에 두어야 하는지 말씀도 안 해 주시네.’ 내가 말해 주지 않으면 원칙에 따라 일할 줄 모르느냐? 겨울에 꽃이 밖에 있으면 얼어 죽지 않을지 의식하지도 못하고 네 할 일을 안배해 주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은 어떤 문제냐? 이것이 무감각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감각함이다. 예를 들어 지금 날이 좋아 정원에서 옷을 말리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오후에 비가 올 것 같은데 옷을 밖에서 말리면 젖지 않을까요?”라고 한다. 이 말에는 알리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정상인의 사고대로라면 이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조심해야겠어. 날이 흐려지면 재빨리 옷을 걷어야지.’ 반면 정상 인성의 사고를 갖추지 못한 사람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낮에 비가 올 거란 말을 들으면 그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랑 상관없는 일인데 그런 말은 뭐 하러 하지? 난 지금 집에 있는데 말이야. 밖에 비가 와도 내가 젖을 일은 없어. 더군다나 비가 온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나한테 말해 봤자 소용없다고!’ 그는 왜 자기에게 이런 말을 하고 이런 일을 꺼내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뭐라고 해야 그가 알아듣겠느냐? 이렇게 알려줘야 한다. “오후 몇 시에 비가 올 거예요. 비가 오기 전에 날이 흐려지면 얼른 옷을 걷어 오세요. 걷지 않으면 옷이 젖어 버려서 다시 빨아야 할 테니까요. 그리고 옷을 걷을 때 정원에 습기에 약하거나 비를 맞으면 안 되는 게 있는지 보고 같이 가져오세요.” 이렇게 당부해야 한다. 이렇게 당부하지 않으면 그는 옷을 걷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비에 젖으면 안 되는 다른 물건들도 함께 수거해 와야 한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다. 그는 이렇게 할 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그가 너무 무감각해서 정상 인성의 사고를 갖추지 못해 정상 인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그의 지능과 자질이 정상 인성의 기준에 못 미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이다. 그에게 한 가지 일을 시킬 경우, 그런 일을 여러 번 당부했고, 그 또한 여러 차례 처리해 봤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당부해야 한다. 당부하지 않으면 그는 의식하지 못하고 처리하지도 못한다. 그러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든 단계를 일일이 당부해야 한다. 한마디라도 빼먹었다간 그는 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그 일을 망쳐놓을 것이다. 네가 다시 그의 문제를 지적하면 그는 치우친 논리를 잔뜩 늘어놓으면서 막무가내로 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감각한 모습이다.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의 무감각한 특징은 무척 뚜렷하다. 예를 들면 그는 진리에 대한 교제를 통해 교회 리더가 실제 사역을 하는지, 합당한 자격을 갖춘 리더인지 아니면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인지 분별하는 방법을 도리상으로는 이해한다. 그런데 본 교회의 리더가 어떤 부류인지 분별해 보라고 하면 교회 리더의 모습을 보고도 어떻게 분별해야 할지 모른다. 그에게 “당신네 교회 리더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매일 예배하고 활발하게 일을 돌보는 걸 보세요. 형제자매한테 책도 배포하고 복음 전파 사역도 확실하게 하더라고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그가 사역하는 건 어떤가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가요?” “그는 직장과 가정을 모두 버렸습니다. 부모가 찾아와도 본분을 이행하느라 만날 시간이 없어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일 겁니다.” 그는 교회 리더의 겉모습만 볼 줄 알지, 리더가 뒤에서 아무리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봐도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것이 문제인 줄도 모른다. 이런 문제들이 아무리 그에게 일어나도 그의 눈엔 보이지 않는 듯하다. 그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마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런 사람은 무감각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감각함이다. 평소 초자연적인 일에만 집중하고 “제가 어떤 소리를 들었는데요. 하나님께서 깨우치고 빛을 비춰주셔서 인도해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또 제 안에 계시해 주셨지요.”라며 늘 느낌에 관한 일만 이야기하는 악령이 역사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는 이런 생각을 한다. ‘저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계시를 받는데 왜 나는 그러지 못할까?’ 그는 이것이 악령의 역사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사람에게 지병이 도져서 사람들 앞에서 발광하며 벌거벗고 온 거리를 쏘다니는 걸 보고 나서야 그가 악령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조짐은 그 사람에게 지병이 도지기 전부터 적잖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근거로 그 사람을 악령이 역사하는 사람으로 규정하여 진작에 제명하고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무감각해서 분간하지 못했고 그런 사람이 교회에 남아 있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의식하지 못했다. 이러면 재앙을 불러일으키기 쉽지 않겠느냐? 심지어 악령과 마귀가 사람을 해치는 지경에 이르러도 무감각한 사람은 분간하기는커녕 그가 하나님을 무척 사랑하는 줄 안다. 늘 밤새 하나님 말씀을 읽고 찬양을 배우며 며칠 동안 끼니를 거르고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해하지 않고 힘이 넘친다. 누가 봐도 정상적이지 않은데 그는 항상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니 너무 무감각하지 않으냐? 무감각한 사람은 한편으로는 일을 간파하지 못해 표면적인 현상을 통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볼 줄 모른다. 이럴 경우 하나의 문제를 정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무감각한 사람은 정상적인 사고방식과 변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주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이런 부류는 한 곳에서 삼 년, 오 년 동안 살아도 “그쪽 날씨에는 어떤 특징이 있나요? 계절마다 어떤 특징이 있죠? 사람이 살기 괜찮나요?”라고 물으면 답을 하지 못한다. “특징은 무슨 특징이요. 저도 몰라요. 어쨌건 4월이 되면 꽃이 피고, 9월, 10월이 되면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긴 해요. 겨울이 되면 눈도 내릴 거고요.”라고 말한다. “그쪽 풍토나 인심은 어때요? 사회 제도는요? 인종 차별 같은 건 없나요? 정부 정책은 어떤가요? 외지인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죠?”라고 물으면 아무것도 모른다. 눈만 껌뻑일 뿐 아무 말도 못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종교나 신앙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에 대해서도 답을 못 한다. 그저 “어쨌든 저희가 생활하면서 정부가 성가시게 군 적은 없었습니다.”라는 말만 할 줄 안다. 그가 목석처럼 아무것도 모르니 너무 무감각하다. 본분을 이행하느라 너무 바빠서 그런 일을 정리할 겨를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건 핑계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핑계가 틀림없다. 이렇게 간단한 일에 특별히 신경 쓰거나 기록할 필요가 있겠느냐? 필요 없다. 네가 정상 인성의 사고를 갖췄고 한 곳에서 삼 년 이상 살았다면 현지 기후의 특징, 풍토나 인심, 관습, 신앙 환경, 정부의 정책 및 외지인에 대한 태도를 거의 파악할 것이다. 특별히 알아보고 파악하거나 정보를 수집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정상 인성의 사고를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정상인이 알 수 있고 똑똑히 볼 수 있는 문제를 네가 모른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네가 정상 인성의 사고와 이성을 갖추지 못했고 정상 인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상 인성에 미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런 부류가 사람이 아닌 짐승에서 환생했기 때문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무감각함의 특징이 뚜렷하다면 이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방금 교제한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의 특징을 통해 너희는 무엇을 깨달았느냐?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 치우침과 무감각함이라는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느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이런 부류에게 이 두 가지 모습이 보이겠느냐? 그의 인성에 무엇이 부족하겠느냐? (정상적인 사고입니다.) 꽤 적절했다. 사람의 지능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겉으로 봐도 이런 부류는 자질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정도로 떨어지느냐? 치우치면서 무감각하다. 정상 인성은 늘 직면하며 혼자 힘으로 처리하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그는 감당하지도, 해결하지도 못하며 유치하고, 황당하며 미숙한 모습을 보인다. 더 심각한 것은 일부 사람들은 혼자 힘으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제 몸 하나도 건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가서 일하거나 어떤 직업에 종사해도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니 어딜 가도 고용주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퇴짜를 맞는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활 반경에 존재하는 여러 측면의 문제, 이를테면 살면서 자주 부딪히는 문제는 물론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무엇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굉장히 간단한 문제도 그는 엉망으로 처리하고 규례도 엉망으로 지킨다. 그가 처리하는 수법이나 방식은 대단히 우둔하고 미련하다. 성인으로서 세상일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수단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사람의 지능을 갖추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려서 늘 몸이 아팠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어떤 심각한 중병에 걸렸을 것이라고 한다. 극심한 두려움에 떨던 그는 병원을 찾아가 검사를 받았다. 의사의 말은 이랬다. “심각한 병이군요. 치사율이 무척 높아요. 치료받지 않으면 병세가 심해져 죽을 겁니다. 수술해야 나을 수 있어요. 그러지 않으면 길어야 3개월밖에 못 살 겁니다.” 그는 기겁하여 당황한 나머지 재검해서 확인해 보지도 않고 의사의 말대로 수술하기로 한다. 수술 전에 어떤 주의 사항이 있는지, 치료하고 나면 후유증은 없는지 묻지도 않는다. 그는 이런 문제들을 물어볼 줄 모르고 의사의 말에 덜컥 겁을 먹고는 의사의 말에 따라 고분고분 수술대에 오른다. 그 결과 수술하고 나서 여기저기가 아픈데 약을 먹어도 소용없다. 얼마 후 이 병은 수술할 필요가 없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게 된다. 그다지 심각한 병도 아니라서 운동하고 흔히 볼 수 있는 약만 먹으면 악화되지 않고 서서히 호전된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돈을 벌려고 무서운 말로 환자에게 겁을 줄 때가 있다. 아무런 생각도 없고 판단할 줄도 모르는 그는 의사의 말에 겁을 먹고 의사가 하자는 대로 수술한 것이다. 이런 일이 생겼을 때 그의 곁에서 대신 확인해 줄 수 있는, 생각이 있고 주관이 있으며 똑똑한 사람이 있었다면 시행착오를 막고 수고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에게 이런 일을, 특히 중요한 일을 혼자 처리하라고 하면 좌우로 치우쳐서 다른 사람 때문에 곤경에 처하거나 해를 입는다. 늘 극단적으로 치달린다는 말이다. 그는 원칙에 따라, 혹은 이런 일을 처리할 때 흔히 적용하는 방식과 방법에 따라 종합적으로 판단한 다음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을 찾아 대할 줄 모른다. 그러니 누구라도 그를 속일 수 있고 농락할 수 있으며 그를 휘두르거나 미혹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부류는 주관이 없는 것 아닌가요?” 정말 주관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나쁜 짓을 하고 궤변을 떠들 때는 자기 생각을 갖는 것을 보아라. 그는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듣지 않고 자기에게 불복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그릇되고 비뚤어진 논리를 떠들어 댄다. 정말 정상적인 이성과 사고로 대응하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올바로 대하고 처리해야 할 때 그는 어떤 방식과 절차로 처리해야 하는지 모르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방식이나 방법도 없고 주관도 없으니 결국 남들에게 휘둘리다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상 인성의 지능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릇되고 비뚤어진 논리를 고집하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입 밖으로 쏟아내고 여기저기 떠들겠느냐? 이것이 바로 그의 지능으로는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그릇된 논리인지, 무엇이 정상 이성에 부합하고 무엇이 이성에 부합하지 않은지 분별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그는 구분할 줄 모르기 때문에 옳은 논리를 말해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고,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치우친 논리와 비뚤어진 논리를 고집하며 그것이 옳은 줄 안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말하든, 또 그 방식이 아무리 훌륭하고 지혜로와도 그는 듣지 않고 알아듣지도 못한다. 이러면 끝장이다. 이게 바로 정상 인성의 지능이 없는 것이다. 설령 그에게 일상 중의 지극히 정상적인 일에 관한 도리를 말해 준다 한들 전혀 말이 통하지 않고, 그는 여전히 자신의 비뚤어진 논리를 고집하려 한다. 남들이 보면 ‘뭐 저런 이상한 사람이 다 있어? 어쩜 저렇게 말이 안 통하지? 저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 같기도 하고 어린애 같기도 해. 왜 저렇게 철없는 말만 할까?’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그가 어린 것도 아니다. 오륙십 대에도 이렇고 팔십 대가 되어서도 여전하다. 평생 지능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니 죽을 때까지 정상인의 사고와 지능을 갖추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짐승에서 환생한 사람의 특징이다. 이 특징이 뚜렷하지 않으냐? (뚜렷합니다.) 예를 들면 얼굴이 예쁘장해서 건달에게 꼬여 그와 함께 지내는 어리석은 여자가 있다. 그런데 그녀는 남자가 밖에서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고도 화내지 않는다. 어쨌든 자기한테 잘하면 됐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가 또 다른 여자를 꾀어서 놀아나는 걸 알고도 그녀는 개의치 않고 끝까지 그를 따르며 이런 말까지 한다. “그가 절 버리지만 않으면 돼요.” 그녀에게 “남자가 저러는데 그와 지내지 마세요.”라고 말리는 사람이 있어도 그녀는 “안 돼요. 그와 헤어질 수 없어요. 그가 절 사랑하고 저도 그가 좋단 말이에요.”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건달을 평생 따라다니며 맘고생 해도 싸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제대로 된 사람인지 분별할 줄 모르니 건달을 만났고 그가 자기를 무척 사랑하는 줄 안다. 그 건달은 그녀에게 그럴싸한 말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사주면서 구슬린 다음 그녀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그러면서 뒤에서 바람을 피우다 그녀에게 들켰는데도 말 몇 마디로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자기를 속였는데 그녀는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그녀는 그 남자에게 재산과 집을 모두 빼앗긴 채 버림받았다. 그녀는 양심이 없는 놈이라며 그를 욕하지, 자기가 사람 볼 줄 몰라서 속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 건달이 왜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를 속였겠느냐? 그녀가 어리석어서 그런 게 아니겠느냐? 이런 부류의 주된 특징에는 무슨 일을 받아들이고 대하든 고집스럽고 터무니없다는 것 말고도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상 인성의 지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류를 두고 짐승에서 환생했다고 한다. 그가 짐승이기 때문에 사람의 지능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가 사람의 지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내면의 본질이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람의 일에 대응하지 못하며, 정상인이라면 처리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일상생활이나 세 끼 식사, 의식주 그리고 인간관계, 주변 환경 등에 대해서도 그는 무감각하다. 더구나 어떤 일들이 일어나서 대응하고 처리해야 할 때 그는 정상인의 지능이 없으니 지혜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겠다. 이런 문제에 직면하면 그는 처리하는 데 애를 먹고 힘들어하는데 게다가 미련하기까지 하다. 그는 나이를 꽤 먹었고 살아온 세월도 짧지 않은데 어째서 이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겠느냐? 그의 말을 들어 보면 어찌 이토록 역겹고 거슬리겠느냐? 어찌 정상인 같지 않겠느냐?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많은 일을 겪었을 텐데 이토록 간단한 일을 처리하면서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냐? 최소한 갖추어야 할 인성의 기본이나 사람이 지니고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조차 없다.

3. 세 번째 특징, 멍청함

치우치고 무감각하게 받아들인다는 두 가지 특징 외에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대단히 멍청하다는 것이다. 예전에 진리를 교제할 때는 전부 큰 틀에서 큰 방향에 관해 비교적 개괄적으로 교제했다. 진리의 여러 측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개념적인 말과 내용을 토대로 교제하고 구체적으로 교제하지는 않았다. 최근 몇 년 동안의 교제를 통해 각 측면의 진리를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교제했는데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의 사람에게는 지금 교제하고 있는 이야기가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게 들릴 것이다. 화법이 조금 바뀌고 내용이 풍부해졌으며 교제량도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는데 어째서 들을수록 아리송해하겠느냐?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설교를 듣고도 들은 성과가 없다.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사람을 대하며, 어떻게 자신을 인식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여 하나님을 인식하는지, 특히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애당초 확실히 분별하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그렇다면 여간 멍청한 게 아니라 대단히 멍청한 것이다. 다시 말해 각 측면의 진리를 아무리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어도 그는 구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가 파악하고 있는 것은 구호나 도리일 뿐이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을 다하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해!’ 그는 규례나 구호, 이론들을 파악하고는 그것이 진리의 실행을 대신하는 줄 안다. 네가 구체적으로 교제해 줄수록 그는 멍해지면서 역부족이라고 생각하고, 예전에 교제한 것처럼 간단히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세히 설명해 줄수록 어려워할 것이다. ‘이렇게 자세히 설명하면 어떻게 기억하라고? 원래 실행하기 참 쉬웠는데 이젠 교제할수록 왜 이렇게 내용이 많아지는 거야? 어째서 내용이 많아질수록 실행하지 못하는 걸까? 원래 본분을 이행하는 건 쉬웠어. 버리고, 헌신하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복음을 많이 전하고 하나님을 많이 증거하는 거지. 이젠 본분 이행 측면의 진리를 자세히 설명해 주시고, 각 측면의 진리도 자세히 설명해 주시니까 점점 못 알아듣겠어. 역부족이야.’ 설명해 줄수록 역부족이라는 것은 멍청한 게 아니겠느냐? 여간 멍청한 게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각 측면의 진리를 자세히 설명해 주어도 그는 개념적이고 정의적인 단어조차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언제나 흐리멍덩하다. 예를 들어 무엇이 악인이고 무엇이 거짓 리더인지 모르고 간파하지 못한다. 무엇이 좋은 인성이고 무엇이 나쁜 인성인지도 모르고 진리 원칙을 실행하는 것과 규례를 지키는 것, 이 두 가지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구체적인 문제들을 똑바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개념적인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뒤죽박죽으로 생각하는 데다가 무슨 일을 하든 원칙을 찾지 못하고 절차나 구체적인 방안도 가지고 있지 않다. 또 어떤 방식을 취하고 어떤 성과를 거두어야 하는지 모르고 어떻게 행동하면 어떤 결과가 뒤따르는지도 분간하지 못한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그런 일은 뭐 하러 신경 써? 잘 모르면 적당히 하면 되지. 어차피 하나님에 대한 마음만 진심이면 되는 거야.’ 네가 보기에도 이런 사람은 굉장히 멍청하지 않으냐? 그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도 자기가 어떤 측면의 진리를 깨달았는지, 진리를 실행하긴 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생명에 진입했는지 물으면 “어쨌든 하나님을 믿은 햇수도 오래됐고 가족도 버렸는 걸요.”라고 대답한다. 이런 것들을 똑바로 알고 있지 않으니 여간 멍청한 게 아니다. 예배 시간에 찬양하고 춤출 때는 기운이 넘치지만 설교를 듣고 진리를 교제할 땐 졸고, 기면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잠이 든다. 그러다 힘쓰는 일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그는 마다하지 않고 “본분을 잘 이행합시다.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자고요!”라고 말한다. 진리를 교제해 보라고 하면서 그에게 “요즘 수확이 있었나요? 본인에게서 어떤 측면의 패괴 성품이 표출됐는지 인식했나요? 인식하고 나서 해결의 길이 있던가요?”라고 물으면 그는 “그걸 누가 알겠어요. 기껏 인식해 봤자 그게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는 걸요. 어차피 실행해도 그게 정확한지 정확하지 않은지 모르기도 하고요.” 그는 어떤 일이든 꿰뚫어 보지 못하고 머릿속이 흐리멍덩해 분명히 알지 못한다. 자기가 무엇을 잘하는지 모르고 자기의 결점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패괴 성품을 교제하고 인식하면 그도 자기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 거짓말을 한다는 것, 교활하게 자기 잇속을 챙길 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실제로 일이 일어나서 그에게 “당신은 왜 교활하게 자기 잇속을 챙기나요? 왜 거짓말을 하시죠?”라고 물으면 그는 “그런 적 없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게 맞는 줄 알고 그렇게 한 건데요.”라고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은 그렇게 하는 게 맞는 줄 알았다고 하는데 속으로는 사사로운 속셈이나 꿍꿍이가 있었던 게 아닌가요? 스스로 반성할 줄은 아시나요? 당신의 이런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기나 하세요?”라고 그를 폭로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꿍꿍이만 없으면 되잖아요.” “꿍꿍이만 없으면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는 겁니까?” “저야 모르죠.”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게 많은 진리를 듣고 그렇게 많이 교제했으며 일상에서 여러 측면으로 진리와 관련된 문제를 접했지만 그는 각 진리를 모두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고 있지 않다. 또한 어떤 것이 진리이고 어떤 것이 진리가 아닌지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도 모르며, 자신의 행동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 자기가 좋을 대로 행동하니 이는 멍청한 짓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어떤 일이든 원칙 없이 처리하고 어떤 사람이든 원칙 없이 대한다. 예를 들어 악인을 대할 때 어떤 특기나 전문 기술을 가진 악인이 있는데 현재 봉사를 할 수 있다면 그에게 봉사를 시키면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싫어하시지 않나? 왜 그들을 쓰실까?’라며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에게 이것이 지혜이자 한 측면의 원칙이라고 교제해 주면 그는 이런 생각을 한다. ‘원칙은 무슨? 사기 치는 거 아냐? 사람을 이용하는 거잖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다. 너는 그가 정상 인성의 사고를 한다고 생각하느냐? 실제 상황에 따라 일하는 원칙을 변별할 줄 모르는데 이런 사람이 정상인의 지능에 이를 수 있겠느냐? (이를 수 없습니다.) 정상 인성의 사고를 하는 사람,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일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지만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는 이런 일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지난번에 그 일에 관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왜 또 이렇게 말씀하세요? 당신 말씀도 확실하진 않군요. 왜 말씀하실 때마다 다르죠?” 그는 일의 전개 양상에 따라 처리 방안도 조금씩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하지만 원칙과 목표는 바뀌지 않는다. 단지 처리 방식이 조금 바뀔 뿐이다. 즉 여건에 따라 다르다는 말이다. 사안의 전개 양상에 따라 때에 맞게 대처하고 대응하여 더 나은 성과에 도달하는 것이다.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간파하지 못하고 그저 진리 원칙은 언제든 변함없이 지켜야 하는 하나의 규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리 원칙에 따라 일하는 방식이 바뀌면 그는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며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정죄하고 꼬투리를 잡기도 한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사물의 본질이나 성질도 분명하지 않다. 생각이 흐리멍덩한 그는 어떤 사물이든 교조적으로 보고, 영원히 진리 원칙에 따라 판단할 줄 모르며, 사물의 발전 규칙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고 대응할 줄 모른다.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가 가지고 있는 멍청한 특징이 명확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는 사람을 분별할 줄 모른다. 말은 무척 정직하게 하지만 괴상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그는 그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간파하지 못한다. 복잡하고 분석이 필요한 상황에 놓이면 그는 똑바로 말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있는다.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의 머릿속은 뒤죽박죽 어지러워서 늘 두서를 잡지 못한다. 여러 차례 원칙을 설명해 주어도 그는 진리 원칙을 적용하여 각 유형의 사람과 일을 분별할 줄 모른다. 예를 들어 문제를 보고할 때 그는 상황에 따라 정확하게 보고하지 못한다.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있는 리더 중에는 단지 개별 상황에서 일부 사역을 하는 데 편차가 있고, 패괴 성품의 표출이 있을 뿐 인성과 사역 역량으로 보면 대체로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일부 있다. 그런데 멍청한 사람은 리더의 실제 사역을 할 수 있는 점이나 인성이 우수한 점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그의 흠이나 허물, 지엽적이고 사소한 문제를 들춰 보고하기 바쁘다. 반면 진짜 적그리스도나 악인, 심각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고 글귀나 도리를 떠들며 사람을 미혹한다. 외형적, 형식적으로는 굉장히 거드름을 피우지만 실제로 이런 부류의 인성은 죄다 기준 미달이고 그들이 택한 길 역시 모두 옳지 않다. 인성은 악인이나 적그리스도에 속하고 그들이 가고 있는 길은 적그리스도의 길이나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길인데도 멍청한 사람은 이를 간파하지 못한다. 그는 이들이 사역하는 겉모습의 기세가 대단한 것만 보고 이들이 리더십과 조직력을 갖추고 있고 사역을 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이 사역한 성과가 어떤지, 회개하고 변화되었는지, 인성이 기준에 맞는지는 모른다. 적그리스도가 자기를 미혹하고 통제해도 인지하지 못한 채 적그리스도를 따르고 순종하면서 스스로는 하나님을 따르고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을 증거하는 줄 안다. 사실은 적그리스도가 진작에 그를 통제했고 자기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따르고 사탄과 마귀를 따랐다는 것을 그는 모른다. 그의 내면은 진작부터 어두웠으며 그 안에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았고 성령도 역사하지 않았다. 그는 무감각하고, 치우치게 이해하며 그 어떤 진리 원칙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일을 간파하지 못하고 사람을 분별할 줄 모르며 문제를 보고하지 않을뿐더러 적그리스도를 파면하기는커녕 그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실제 사역을 할 수 있는 리더 일꾼의 경우에는 사소한 흠이나 문제 등 원칙적이지 않은 문제가 하나라도 보이면 죄다 보고하고 들추려 한다. 이런 사람은 여간 멍청한 게 아니다! 어떤 원칙적인 문제도 그는 간파하지 못하고 일상에서 어떤 사람과 교류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 어떤 사람을 멀리해야 하는지 분별할 줄 모르고 간파하지 못한다. 불신파나 이방인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이들이 지식과 자질을 겸비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 교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나아가 그가 숭배하는 사람이 능력과 명성을 가졌다며 늘 칭찬한다. 마귀를 우상으로 떠받드니 멍청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멍청함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느냐? (자질이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자질이 떨어진다는 것은 대략적인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떤 일이든 정확한 생각과 관점으로 분별하지 못하고 모든 일을 원칙이나 근거 없이 바라본다는 것이 멍청함이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그밖에 이런 부류는 시비나 선악을 구별하지 못해 항상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고,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이라고 하면서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것인지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이 “당신네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입니다.”라고 하면 ‘아냐, 내가 믿는 분은 하나님이야. 사람이라면 어떻게 진리를 선포할 수 있겠어? 내가 믿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확실해.’라고 생각한다. 이 점은 헷갈리지 않는다. 그런데 “당신들이 믿는 신은 돈을 갖고 야반도주했어요. 인생을 즐기러 미국으로 도망갔죠.”라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멍해져서는 미혹된다. 만약 지능이 있는 사람이 이런 말을 들으면 이것이 유언비어라는 것을 분별할 것이다. 무엇을 두고 돈을 가지고 야반도주했다고 하느냐? 세관을 통과할 때는 엄격한 심사를 받고 사람마다 소지할 수 있는 현금에 제한이 있다. 그때 돈 몇 푼 가지고 있었다고 돈을 가지고 야반도주했다고 할 수 있느냐? 더군다나 그 돈이 누구의 것이냐? 남의 돈을 횡령하고 빼돌린 것이라면 돈을 가지고 야반도주한 것이다. 그런데 자기 돈이라면 그것을 돈을 가지고 야반도주한 것이라고 하겠느냐? 돈을 가지고 도망친 것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소지한 것이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또한 무엇을 야반도주라고 하느냐? 지명 수배자가 법을 어기고 도망가는 것이 야반도주이다. 성육신 그리스도가 법을 어겼느냐? 그저 중국 본토에서 많은 진리를 선포하고 심판 사역을 하면서 한 무리의 추종자를 얻었을 뿐이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잔혹한 탄압과 광적인 체포에 시달리다가 결국 일부 사람들을 데리고 해외로 나가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 이를 어찌 돈을 가지고 야반도주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완전히 정상적으로 세관을 거쳐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갔으니 이는 정상적인 출국이다. 출국한 이유는 중국 공산당의 추격과 체포로 인해 몸을 누일 곳이나 거처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독재 통치하에서는 신앙의 자유는 고사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체포당하고 박해받아야 한다. 진리를 선포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는 체포당할 경우 사형에 처해 십자가에 못 박힌다. 사역을 해야 하기에 그리스도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택한 것이고 정상적인 경로로 여권과 비자를 발급받아 미국에 왔다. 미국에서는 연고도 없을뿐더러 사람도 환경도 낯설어 일상적인 가정식을 먹으면서 평범한 사람으로 지내고 있다. 그러니 삶을 즐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삶을 즐긴다는 말은 다른 꿍꿍이를 가진 사람의 어휘 선택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거짓말이 아니냐? 미국에서 평범한 삶을 보내면서 북방 사람의 일상적인 가정식을 먹었을 뿐 결코 고급 호텔에서 미식을 즐기지 않았고, 더욱이 고급 호텔에 묵은 적도 없었으며 여행도 거의 가지 않았다. 그저 근교를 둘러보는 것으로 족하다.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먹는 것을 좋아해서 먹어보지 못한 음식은 죄다 맛보려 하고 해외 구매 대행을 통해서라도 먹어 보려 한다. 내가 그렇게 하더냐? 그런 적 없다. 꿍꿍이가 있는 사람들이나 이 일로 생사람을 잡는 것이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에게 적대적인 마귀이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천성이며 그들은 주로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을 모독한다. 그들이 마귀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마귀의 거짓말을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당연히 그들 역시 마귀가 틀림없다. 오직 마귀만이 마귀의 말을 믿는다. 어떤 사람이 “당신들이 믿는 그리스도는 돈을 갖고 야반도주했습니다.”라고 하면 그들은 그 즉시 그 말을 완전히 믿고 받아들인다. “당신들이 믿는 그리스도는 인생을 즐기러 미국으로 도망쳤습니다. 산해진미를 질리도록 먹고 호화 호텔에 묵으면서 외출할 땐 고급 세단을 타죠. 전담 요리사와 하인을 두는 것도 모자라 해외 여러 명승 고적지를 여행하며 인생을 실컷 즐기고 있죠.”라고 사탄이 세뇌하기만 하면 멍청한 사람들은 그대로 믿어 버린다. 이런 부류는 사탄에게 넘겨 버리겠다. 그에겐 하나님을 믿을 자격이 없다.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알아듣기는커녕 이런 유언비어를 믿으니 이런 자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짐승이다. 악인은 아니지만 여간 멍청한 게 아니다. 좋고 나쁨,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고, 진리와 사악, 비뚤어진 논리도 똑바로 구분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정리해야 한다. 그가 스스로 나가지 않아도 교회에서 정리해 내보내야 한다. 당장 내쫓고 환송해야 하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교회가 사람들을 제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을 제명하고 출교시키는 것이 힘을 과시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사탄과 마귀가 무슨 일이든 엉터리로 이해하는 것을 보아라. 공산당이 힘을 과시하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 대목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공산당은 교회가 사람을 정리하는 것도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공산당은 남들도 그들처럼 생각하는 줄 안다. 교회의 이런 조치는 완전히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교회를 정화하는 것은 교회의 행정 법령이라는 것을 공산당은 영원히 깨닫지 못할 것이다. 마귀는 사악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마귀는 참으로 사악하다! 멍청한 사람도 참 많은데, 마귀가 아무리 사악해도 그는 마귀가 사악한 줄 모른다. 마귀가 퍼뜨리는 하나님에 관한 유언비어나 하나님을 모독하고 모욕하는 발언은 죄다 믿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진실하고 긍정적이어도 믿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유익을 가져다주는지 알지 못하면서 사탄의 말 한마디에 미혹되어서는 사탄을 철석같이 믿는다. 그가 사탄의 족속이라고는 하지만 사탄도 그를 거부한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그와 같은 바보, 멍청이는 어리석어서 사탄마저 싫어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배신하도록 미혹하면 그만이다. 네가 아무것도 못 하니 사탄마저 너를 거부하는 것이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특수 임무를 맡긴다면 네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겠느냐? 사람의 지능조차 없어서 세 마디 말도 채 다하기 전에 신분이 발각될 테니 네가 공산당을 위해 특수 임무나 간첩 노릇을 해주고 싶어도 퇴짜를 맞을 것이다. 어리석고 멍청하며 쉽게 속아 넘어가고 사람의 지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사탄조차 네가 미덥지 않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집이 네게 본분을 맡기는 것을 두고 하나님이 너를 높여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니 억울해 말아라. 너는 사탄이 하는 말은 다 믿으면서 하나님이 아무리 사역하고 말씀해도 믿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진실한 믿음 없이 의혹이나 품으면서 사탄의 말 한마디에 낚여 버리니 너란 놈은 무엇이겠느냐? 네게 무슨 존엄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멍청이인 주제에 스스로가 훌륭하고 존귀하다고 생각한다. 사탄의 그토록 확실한 거짓말을 분별하지 못하고 사탄의 목적이 무엇인지 분간하지도 못하니 너무나도 멍청하지 않으냐? “너희가 믿는 그리스도는 돈을 갖고 미국으로 도망쳐서는 희희낙락하며 살고 있다.”라는 공산당의 말을 이런 부류의 멍청이가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난 아무것도 몰랐는데! 그럼 내가 바친 돈을 그분이 싹 다 가져갔단 말이야? 교회 사역을 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 그분이 사적으로 누리는 거 아냐? 그 돈으로 그분이 좋은 음식, 좋은 옷, 금은보화를 사진 않을까? 나는 누리지도 못하면서 그분이 누리는 데 돈을 갖다 바치다니. 이젠 안 할래. 못 믿겠어. 돈을 다시 받아낼 테야!’ 돈을 바친 것이 후회된다면 하나님 집은 돌려줄 수 있다. 단, 그 순간 너와 하나님 집은 남남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설교를 들으며 네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거저 얻었느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보호, 돌봄을 그토록 오랜 세월 누리면서 네가 한 푼이라도 들였느냐? 하나님이 네게 돈을 요구하더냐? 네 목숨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은혜, 축복, 돌봄, 보호는 하나님이 내려 준 것이다. 하나님이 내려 준 것을 네가 돈으로 살 수 있느냐? 네가 무엇으로 바꿀 수 있겠느냐? 네 부정한 돈으로 바꿀 수 있겠느냐? 이것들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라 네가 무엇을 바꿔서 얻을 수 없으며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해서 네게 준 것이고 네게 베푼 은혜이며 너를 피조물로 대해서 내려 준 것이다. 결코 네가 돈으로 사거나 대가를 치러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멍청한 사람은 이를 간파하지 못하니 혼란스러운 마음에 이런 생각만 한다. ‘하나님께 말 못 할 다른 비밀이 더 있지 않을까? 설교 말고도 우리에게 분명히 하고 확실히 해줘야 할 일들이 많지 않을까? 여기에 관해 설명하고 해명해 주셔야 하는 거 아냐? 우리 뒤에서 하고 있는 생활이나 언행을 모두에게 공개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 멍청이들의 심리가 대부분 이렇다. 대놓고 이런 말을 하진 않지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사를 패괴된 인간에게 모두 공개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 하나님이 그렇게나 많은 진리를 선포한 것이 바로 최고의 공개이다. 모든 사람에게 밝혀 주었는데 네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가 진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네 마음대로 하나님을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격하고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진리를 공개한 것은 진리에 따라 일을 바라보라는 것이고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시각으로 일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어떤 관점과 원칙으로 처신하고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는 모두 하나님 말씀 속에 있는데 네가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네가 어리석기 때문이며 멍청이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이나 하나님 집의 일에 대해 멍청이는 알 자격이 없으며 마귀에게는 더더욱 없다. 멍청이, 마귀는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규례에 대해 교조적이며, 막무가내로 판단하고 정죄할 줄만 알며, 분별력이나 원칙이 없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멍청이, 마귀는 하나님 집에 머물 자격이 없다는 것이니 쫓아내야 한다. 멍청이, 황당무계한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구원받을 기본적인 조건도 갖추지 못해 언제 어디서든 사탄에 걸려들 수 있다. 하나님이 언제 짐승에게 설교하거나 진리를 가르치더냐? 그래서 사람이 진리를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이렇게 많은 설교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이 높여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네가 만약 늘 하나님을 의심하면서 ‘내가 믿는 분이 정말 하나님일까?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시기는 할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시나? 하나님께서 과연 인간을 잘 대해 주시는 걸까? 아니면 그러는 척하시는 걸까? 하나님이 진리일까?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런 태도로 하나님을 대한다면 너는 죽게 될 것이다. 언젠가 하나님이 환경을 배치하여 너를 사탄에게 넘길 것이다. 그렇게 너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질 것이고 다시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니 그때부터 넌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게 될 것이다.

4. 네 번째 특징, 어리석음

방금 교제한 내용은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의 세 번째 모습인 멍청함이었다. 또 한 측면의 모습은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 역시 지능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이 부류는 어느 정도로 어리석냐? 그들의 어떤 모습이 어리석겠느냐?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몸 누일 곳이 없는데도 각별하게 마음을 쓰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대단히 고된 일이라고요!”라고 하면 이방인이 듣고서 이렇게 말한다. “엉터리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네가 하는 말을 이방인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네 말이 무슨 뜻인지, 네 말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네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부분이 어리석냐? 말하는 대상이 틀렸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멍청이가 체포되자 악질 경찰이 물었다. “당신들은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무슨 일을 시키는가? 당신들은 하나님을 믿는 게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나 있나? 당신들은 나라의 법률을 어기고 있어. 우리나라는 이런 신앙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사실 이 악질 경찰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정죄할 꼬투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자는 간파하지 못하고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법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시고 바른길을 걸으며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마귀가 듣고는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했다면 당신네 교회의 리더가 누구고, 교회의 돈을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말해봐!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당신의 하나님이 정죄할 거라고!”라고 하자 그 어리석은 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리석은 짓이 아니냐? 어찌 마귀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있겠느냐? 어찌 진리를 마귀에게 알려 줄 수 있겠느냐? 어떤 것도 그에게 말해 주어서는 안 된다. 또 어떤 어리석은 자는 경찰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들은 왜 늘 저희를 체포하나요? 어째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 겁니까? 왜 우리에 관해 헛소문을 퍼뜨리죠?” 왜 너는 모르느냐? 그가 답해 줄 거라 생각하느냐? 답을 얻을 수 있겠느냐? 그에게 이유를 묻는 게 황당하지 않으냐? 어리석은 짓이 아니냐? 이 어리석은 자는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 그는 이해하지 못해 늘 묻는다. “공산당은 왜 항상 저희를 박해하나요? 어째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를 늘 체포하고 우리에 관해 헛소문을 퍼뜨리기까지 하죠? 우리는 분명 체포돼서 집에 못 가는 건데 그들은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는다고 하죠. 이 마귀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아요! 헛소리가 아닌가요? 저희가 문예 프로그램을 만들어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사탄, 마귀는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걸까요? 늘 우리 집에 와서 가족과 친척, 친구들을 위협하며 으름장을 놓고, 감시카메라까지 달아서 감시해요. 왜 그러는 거예요?” 그걸 물어볼 필요가 있느냐? 어리석은 질문이 아니냐? 네가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영문을 모르는 거라면 정상이겠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도 아직 그걸 모르느냐? 네가 알고 있다면 왜 물어보겠느냐? 어떤 사람은 이해가 되지 않아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공산당이나 국가에 반기를 들거나 정치 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정부를 전복하거나 그들의 통치를 전복하지도 않았잖아요. 그렇다고 그들이 지배하는 데 위협이 된 것도 아니고요. 왜 공산당은 항상 저희를 체포하고 박해하는 거죠? 우리는 늘 이렇게 숨어다니느라 집에 가고 싶어도 못 가고 집에 전화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중국 공산당은 왜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는 걸까요?” 네가 정말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너는 대단히 우매하고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편을 만났는데 그 남자는 연애하면서 “나도 당신을 따라 믿을게요. 함께 천국에 가요.”라는 솔깃한 말을 했다. 사실 불신파요 마귀인 그는 그녀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자 그는 화를 내며 예배고 본분 이행이고 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 말씀도 읽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도 이 어리석은 여자는 이런 생각을 한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정말 날 사랑해 주고 아껴줬어. 예전엔 나를 이해해 주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 걸 지지해 주더니 지금은 어째서 딴사람이 된 거지? 예전엔 그도 믿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이렇게 변했을까?’ 그녀는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한 지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고민한다. ‘그이한테 다른 여자가 생길 리 없어. 그는 날 제일 사랑하거든. 그에게 난 유일한 여자이고 첫사랑이야. 그가 다른 여자를 다시 사랑할 수는 없을 거야. 더군다나 그이는 점잖은 사람인걸. 남편같이 별 능력도 없는 사람을 누가 쫓아다니겠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 자신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녀는 그가 계속 자기를 기다려 주기를 바라지만 사실 그녀가 집을 나오기 전부터 그는 하나님을 믿느라 매일 같이 본분을 이행하는 그녀를 보고 진작에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럴 리 없다면서 ‘아무도 그와 바람날 수 없을 거야.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닌걸. 내가 집에 있을 때 그는 하나님을 믿겠다는 말도 했어!’라고 생각한다. 여간 어리석은 게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녀는 최근 몇 년 동안 집을 비웠다. 남편의 외도는 둘째치고 자녀, 부모와의 인연도 끊겼다. 진작에 그 집 식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녀를 뭐라고 욕하고 어느 정도로 미워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녀는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니 어리석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로 어리석냐? 정상인의 지능을 가지지 못해 정상인의 사고로 사람이나 일을 바라볼 줄 모르고 그저 자신의 유치하고 치우치며 미련한 생각과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판단한다. 결국 항상 스스로 곤경에 빠져 수동적으로 변하고 우매하게 일을 처리하고 만다. 어리석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자가 일부 있다. 어리석다는 것은 정상 인성의 지능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일을 처리할 때 좋은 성과를 뒷받침할 기본적인 원칙이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결론적으로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의 주된 특징을 진리로 판단하면 대체로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이는 높은 기준이다. 만약 정상 인성의 지능으로 판단해 본다면 그는 일상에서 직면하는 사람과 일, 환경도 정상 인성의 사고로 바라보지 못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런 부류는 일상의 의식주조차 자기 힘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대응하지 못하며 해결하지 못한다. 설사 굶어 죽지 않고 겨우 살아남는다고 해도 각 측면의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 이런 사람은 미련하고 굼떠 보이니 진정한 정상 인성과는 거리가 멀다. 먹이를 먹을 때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 모르는 짐승을 보아라. 이런 짐승은 사람이 때에 맞춰 적당량을 먹여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 개의 경우처럼 말이다. 개에게 얼마를 먹든 괜찮다며 마음대로 먹게 놔둔다면 그 개는 너무 많이 먹을 것이다. 더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불러야 그만 먹는다. 그러니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의 명확한 특징은 바로 본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을 혼자 힘으로 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어째서 혼자 힘으로 해내지 못하겠느냐? 그들은 시종일관 이런 일을 할 때의 원칙이나 기본 조건, 마지노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마치 짐승이 먹이를 먹을 때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사람이 관리해 주지 않고 알아서 먹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배가 터질 때까지 먹을 것이고, 사람이 관리하고 사육한다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는 이 특징이 매우 뚜렷하다. ‘밥을 먹어도 배고프거나 배부른 줄 모르고, 잠을 자도 밤낮이 바뀌는 걸 모른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 부류는 인간의 지능을 갖추고 있겠느냐? 분명 갖추고 있지 않다. 사시사철 몸에 어떤 증상이 나타나고 음식으로 어떻게 조절하는지, 어떤 계절에 어떤 음식이 몸에 좋고 어떤 음식이 몸에 해로운지, 어떤 게 건강한 생활이고, 건강하지 않은 생활인지 정상인이라면 20대에는 모르다가 30대에는 조금 알게 되고 40대에는 조금 더 알게 되며 50대에 이르러 자기 몸 상태와 객관적인 환경을 토대로 자신의 건강에 맞는 생활 규칙을 도출해 낸다. 이 규칙은 거의 확정적이고 틀이 잡혀 있어서 여기에 큰 변수는 없다. 하지만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는 80대가 되도록 규칙을 도출하지 못한다. 과식하지 않으면 소식하고, 먹고 나면 배탈이 나거나 소화 불량에 걸린다. 몸에 어떤 문제가 생겨도 어떤 생활 습관이나 어떤 음식 때문에 생기는지도 모른 채 아무렇게나 먹어버린다. 자기 체질에 어떤 게 맞고, 어떤 게 안 맞는지, 다방면의 정보를 근거로 자신에게 적합한 식습관이나 섭취 방식을 정리해 보라고 해도 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이 달걀 껍데기에 칼슘 함량이 높으니 달걀 껍데기를 먹으면 칼슘을 보충할 수 있다고 하면 그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키가 작은 건 칼슘 부족 때문이야. 그러니 달걀 껍데기를 먹어서 칼슘을 보충하자.’ 그 결과 한동안 먹어도 칼슘이 보충되는 것 같지 않다. 치우친 행동이 아니냐? 인터넷에서 달걀 껍데기에 석회질이 많아 칼슘을 보충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으면 너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 달걀 껍데기를 먹는 부류는 치우친 사람이 분명하다. 그는 올바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치우치고 극단적이며 미련하게 실행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겠느냐? 달걀 껍데기는 칼슘 함유량이 많지만 음식은 아니다. 여기에 칼슘 보충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고, 그것을 먹는다고 해도 위가 흡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더군다나 달걀 껍데기를 먹어서 칼슘을 보충할 수 있다는 말에 근거가 있느냐? 그것이 검증된 견해더냐? 사실 칼슘을 보충하는 방법에는 의학적으로 검증된 많은 종류가 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황당한 것이다.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는 칼슘 영양제를 먹으면 보충되지 않겠느냐? 위나 치아가 상하지 않고 먹기도 편한 데다가 효험도 볼 수 있다. 이것이 올바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치우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고 극단적으로 행동한다. 그는 ‘달걀 껍데기가 칼슘을 보충해 준다는 설이 있다면 달걀 껍데기쯤이야 먹을 수 있지. 칼슘을 보충하려면 꼭 먹어야 해.’라고 생각한다. 먹으면 흡수되는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 이는 치우치고 극단적인 생각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바나나 껍질은 비타민 함량이 높아서 먹으면 미용 효과가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먹겠느냐? (먹지 않습니다.) 왜 먹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지으신 음식은 정상적인 법칙에 따라 껍질을 벗겨 먹습니다. 기어이 껍질을 먹으려 하는 것은 극단적인 행동입니다. 비타민을 보충해서 미용 효과를 보려면 정상적으로 먹을 수 있고 미용 효과도 있는 음식을 먹으면 됩니다.) 이것이 올바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은 저 극단적인 멍청이를 보아라. 그는 기어이 억지로 먹으면서 “전 육을 저버리고 바나나 껍질을 먹어서 특정 측면의 영양소를 보충하겠어요.”라고 한다. ‘바나나 껍질은 맛없어. 음식이 아니니 안 먹을래. 대신 그 영양소가 함유되어 있는 다른 음식을 먹으면 되잖아?’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것이 올바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네가 이렇게 판별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네가 사람의 지능을 갖추었다는 증거이다. 만약 이렇게 판별할 줄 몰라서 바나나 껍질에 특정 영양소가 함유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기어이 먹으려 하고 먹기 거북해도 먹으려 한다면 이런 사람은 바보이고, 짐승에서 환생한 자로서 정상적인 사람의 사고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그 어떤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에도 미혹되는 그는 각종 정보의 옳고 그름이나 진위를 분별할 줄 몰라 기만당하기만 한다. 이것이 바로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가 각종 구체적인 일을 대하는 한 측면의 모습이다. 여간 어리석지 않으며 치우치고 황당하게 받아들이고 극단으로 치달린다. 연구 결과 먹어도 된다고 한다는 사람들의 말이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그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말도 아니다. 만약 진리를 대신할 수 있는 이론은 없다고 한다면 이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말이지만 이런 영양소는 물질적인 것이니 대신할 수 있는 게 없을 리 없다. 하나님이 지은 음식의 종류는 다양하다. 각종 영양소가 함유된 음식이 많으니 규례를 지킬 필요 없이 저마다 체질과 연령, 몸 상태에 따라 정확하게 취사선택하면 된다.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부류는 하나의 정보를 들으면 올바르게 대할 줄 모르고 분별할 줄도 몰라서 항상 이런 것들에 미혹되어 결국 “인터넷에 떠도는 말은 다 거짓말이에요. 사실이라고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라고 한다.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보아라.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봐도 된다. 단, 사람의 지능과 올바른 사고방식을 활용해서 그것을 변별하고 올바로 취사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네게 유익한 것은 취해도 되지만 네게 아무런 유익도 없고 네게 적합하지 않다면 참고만 하거나 상식으로 대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사고를 통한 실행법이다. 사람의 사고를 갖추지 못한 실행법은 좌우 둘 중 한쪽으로 치우치고, 속아 넘어가거나 절대로 믿지 않는 것 중 하나이다. 그는 심혈을 기울여 이 일을 분별할 줄 모른다. 이런 부류는 각종 정보를 대하거나 현실 생활에서의 실제적인 일을 처리할 때 굉장히 고집스럽고 터무니없으며 흐리멍덩하고 미련해 보인다. 이런 미련한 사람, 옳고 그름이나 시비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매일의 일상을 어떻게 보내겠느냐?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걱정이 되는데 그들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

어떤 여자는 건달에게 시집 가서는 ‘우리 그이는 나를 무척 사랑해. 난 진정한 사랑을 얻었고 사랑에 빠졌어.’라는 생각에 더없이 행복해한다. 남들은 그녀의 남편이 사람이 아니라 마귀라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왜 그렇게 빠져서 즐거워하겠느냐? 다들 그녀 대신 화를 내고 걱정하는데 말이다. 결국 그녀는 아이 몇 명을 낳고는 그자에게 버림받아 이혼녀가 되었다. 그 얼마나 힘든 나날들이겠느냐!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가 하는 이런 어리석은 짓들을 통해 이런 부류가 살아가고 생존할 수 있는 데는 하나님의 은혜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그에게 숨을 불어 넣어서 그가 살아갈 수 있고, 그에게 먹을 밥을 주어서 그가 그 음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의 새와 땅 위의 작은 짐승들, 심지어 개미조차 먹이가 있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느냐? 네가 사람으로 환생하면 하나님은 네게 먹을 것을 주거나 너를 키워줄 사람을 준비해 주고 혹은 네게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을 만한 특기를 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이 너를 굶겨 죽이지 않고 네게 살길을 마련해 주면 너는 늙어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이런 부류는 자신의 선천적 자질에 따라 살아야 할 텐데, 정상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문제 해결 능력이 전혀 없으니 밥벌이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도 제법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각 측면의 재주와 지능에서 보면 이토록 복잡하고 사악한 세상에서 먹고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푼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짐승에서 환생했든 사람에게서 환생했든 결국 하나님이 보기에 피조물이라면 하나님은 네게 숨을 불어넣을 것이고, 네가 생활하고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을 정상적으로 공급할 것이다. 그래서 네가 생명을 유지하며 계속 생존하게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만약 “전 밖에서 열심히 돈을 벌어서 잘 먹고 잘살았습니다. 단출하게 사는 것도 꽤 좋잖아요? 저한테 어리석다고 하는 건 절 모욕하는 게 아닌가요?”라고 한다면 그건 틀린 생각이다. 네가 돈을 벌어서 먹고사는 것을 정말 네 능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 99퍼센트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네가 힘을 써서 일해서 밥값을 벌도록 하나님이 네게 힘을 주었고, 네가 한 가지 직업에 종사하여 돈을 벌고 가정을 돌보며 생존하도록 하나님이 네게 한 측면의 특기와 더불어 좋은 신체까지 준 것이다. 이는 무엇을 바탕으로 하느냐? 하나님이 네게 가장 기본적인 선천적 조건을 주어서 네가 사람의 정상적인 노동에 종사하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먹고 살면서 생계를 이어 나가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네가 어리석든 멍청하든 어쨌든 지금 너는 외관상 사람이라는 피조물로서 자신의 신분과 가치를 알아야 한다. 또 하나님의 베풂과 공급,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올바로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만약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의 몇 가지 특징에 해당해서 자기가 확실하게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라고 생각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어려울 것 없다. 네 유래가 무엇이든, 네가 선천적으로 사람의 지능, 사람의 사고를 갖추었든 갖추지 않았든, 어쨌든 너는 지금 사람의 신분이다. 사람의 신분이니 너는 사람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이행할 수 있는 만큼 이행하고, 이행할 수 있는 수준 만큼 이행해야 한다. 그리고 최대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고 또 제대로 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의 특징이 치우침, 무감각, 멍청함, 어리석음이라고 하시는데 이 또한 사람의 지능을 갖추지 못한 것이잖아요. 절대다수의 사람은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했는데 어떻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적절하게 이행할 수 있겠습니까?” 엄격하게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너는 본분을 제대로 그리고 적절하게 이행할 수 있다. 지금 너는 필경 사람의 신분이기 때문에 네가 말을 잘 듣고 그릇된 논리를 펼치지 않으면 이행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하지 못한다면 내가 보기에 정말 위험하니 너는 교회에서 정리되어야 한다. 만약 네가 “이 두 가지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릇된 논리를 펼치지 않고 옳은 말을 받아들이거든요. 제게 시키는 일은 시키는 방식대로 이행하죠.”라고 말한다면, 네가 정말 이렇게 실행할 수 있다면 너는 제대로 할 수 있고 적절하게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저는 제대로 이행했고 적절하게 이행했습니다. 여기에 진리 원칙에 따라 이행하는 것까지 하고 싶어요.”라고 한다. 네가 정말 제대로 이행하고 적절하게 이행하는 것을 바탕으로 진리 원칙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 된다. 그걸 요구하지는 않는다. 네가 우기지 않고 그릇된 논리를 펼치지 않으며 자신의 이유를 강조하지 않고 멍청한 짓을 하지 않으며 어리석은 짓을 하고 나서 부인하지만 않으면 된다. 진리 원칙에 따라 이행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너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해라. 이런 부류에 대한 요구치는 높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진리 원칙에 이르는 것이 조금 어렵기 때문에 그의 선천적인 조건을 고려해서 그에게 반드시 진리 원칙에 따라 이행하라고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는다. 어째서 요구하지 않겠느냐? 그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억지로 요구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무리하게 시키는 꼴이 될 것이다. 마치 짐승에게 끼니마다 너무 배불리 먹지 말고 적당히 먹으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짐승이 그럴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한다. 한 끼에 최대한 먹을 수 있는 만큼 다 먹어버린다.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말이다.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가 바로 이렇다. 그에게 진리 원칙대로 이행하라고 요구해도 그는 그러지 못한다. 그것이 이런 부류를 포기하는 것이냐?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 곧 너더러 진리 원칙을 깨닫고 진리 원칙에 진입하라고 요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을 올바로 대할 수 있어야 하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면 하라는 말이지 네 본분 이행의 자격을 취소한다거나 진리 추구의 자격을 취소한다는 말이 아니며 네 구원의 자격을 취소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할 것을, 범사에 진리 원칙에 이를 것을 엄격하게 요구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일 뿐이다. 즉 너 자신이 행할 수 있는 만큼 행하라는 것이다. 네가 고의로 교란하지만 않으면, 그리고 핵심적이고 원칙적인 문제에서 그릇된 논리를 펼치거나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지만 않으면 된다. 이런 부류에 대한 요구치는 높지 않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에 대해서 우리는 본질적인 모습들을 교제했다. 물론 그다지 자세히 교제하지 않은 모습도 일부 있었다. 더 구체적으로 교제하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되기 때문에 다소 개괄적으로 교제하면서 여지를 남겼다. 네가 무엇에서 환생했든 결국 너는 지금 사람의 신분이다. 네가 사람의 신분이라 체면이 서고 존엄해지고자 한다면 우리는 너를 존엄하게 대할 것이다. 이 측면에 관해서는 그렇게 상세히 교제하지 않겠다. 대략적으로는 이러니 스스로 비춰보아라. 자기가 짐승에서 환생한 사람의 모습에 해당할 경우 굉장히 기분 나빠 하고, 본인의 신분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한편,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고 존엄에 위협을 받았다는 생각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문득 자신의 지위가 곤두박질쳐서 남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자신에게 존귀한 구석이 있다거나, 자신의 인격이 고상하고 가치가 존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별안간 마음속에 희망과 기댈 곳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고, 앞으로의 종착지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모습이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뉘우쳐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람직하지 않고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들이 잘 지낼 수 있게 우리가 길을 찾아 주어야 한다. 이는 그들을 기만하거나 속이는 게 아니라 그들이 올바르게 대하고 진리 원칙을 바라보며 실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짐승에서 환생한 부류는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먼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무엇에서 환생했든 이는 하나님이 정하는 것이지 사람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다. 사람에게 선택하게 하면 짐승에서 짐승으로 환생하는 것을 택하겠느냐? 아니면 짐승에서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을 택하겠느냐? (짐승에서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을 택합니다.) 왜 짐승에서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을 택하느냐? (짐승에서 사람으로 환생해야 하나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생기고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짐승에서 짐승으로 환생하는 경우는 어떻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사라집니다.) 이 경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가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래서 네가 짐승에서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더더욱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처신의 기회를 준 것을 감사해야 한다. 더군다나 이는 천재일우의 기회이지 않으냐.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성육신이 인간을 구원하러 왔는데 너는 많은 사람이 받지 못한 이 구원의 은혜를 받아 운 좋게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이 선포하는 진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은 네 복이다. 이는 피조된 생물로서는 몇 세대 혹은 몇몇 시대에 걸쳐 구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 이 시대에 하나님이 너를 택해 사람으로 환생하게 했고, 하나님 집에서 생활하며 사람들과 함께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게 했다. 네 신분을 짐승에서 인간 중 한 명으로 바꾸어 사람의 본분을 이행하게 해주었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영예로운 일이냐! 이는 몇몇 생물은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것인데 너는 오늘 얻었고, 누리고 있다. 이런 기회는 절대 흔치 않다. 어떤 생물한테든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그래서 의기소침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괴로워하거나 자신의 지위가 남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고 높여준 것에 감사해라. 하나님의 역사는 너무나도 좋은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분명 피조물에 대한 은혜와 긍휼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나면 너는 하나님이 네 신분과 속성을 바꿔준 것에 감격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감사만 하고 끝나서는 안 된다. 감사하는 것 외에도 이 기회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원래 신분에 상관없이 사람의 현재 신분에 따라 본분을 이행할 수 있으니 이것은 신분을 바꾸고 피조된 속성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꾸겠느냐? 우선 한 가지는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다방면의 선천적 조건의 제약으로 인해 오로지 힘쓰는 일만 하고, 지저분하고 고된 일밖에 할 수 없다면, 그리고 네 신분과 가치에 따라 네가 이행하는 본분이 영원히 그 범위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고, 완화될 여지나 개선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겠느냐? 어떤 측면의 모습에서 보든, 네 지능, 네 인품, 네 선천적 조건에서 보면 사람들 속에서 네 가치는 영원히 이와 같을 것이다. 너는 쓸모없는 인간, 바보, 멍청이, 무감각한 사람, 치우친 사람인 것이다. 네 가치가 올라가지 않는다면 너는 본분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네 가치가 영원히 올라가지 않아서 사람들 속에서 너는 영영 이렇다 할만한 존엄을 갖지 못하고 하나님 눈에도 그런 놈으로 영원히 정형화된다. 네 속성에는 아마 겉으로 보기에도 명확한 특징이 있을 것이고 영원히 짐승에서 진정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네게는 구원의 희망도 없다.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사람의 지능도 갖추지 못했으며 이상과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에 하나님 집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각 분야의 업무와 본분도 이행하지 못하며, 그럴 능력도 안 된다. 너는 영원히 더럽고 힘든 일만 하고 이를 돌이키지 못한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느냐? 자포자기할 수 있겠느냐? 삶에 의욕이 없어지는 사람도 있지 않겠느냐? “살고 싶지 않아요. 살길이 없는 걸요. 이렇게 살아서 뭐 해요?”라고 하지 않겠느냐? 만약 네가 아무리 노력하고 열과 성을 다하며 공을 들이고 대가를 치러도 영원히 네 가치가 변하지 않고, 하나님 집에서 영영 힘쓰고 땀 흘리는 사람, 남에게 무시당해 전혀 존엄하지 않은 비천한 사람이라면 본분을 대하고 하나님의 부탁이나 여러 측면에 대한 창조주의 요구를 대할 때 어떤 실행법을 택해야겠느냐?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칙과 이론적으로 네 가치와 신분은 정해져 있지만 사실상 현재 사람들 속에서 혹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네 진정한 신분은 사람이다. 왜 사람이라고 하겠느냐? 네가 이행할 수 있는 본분, 일상에서의 표출, 선천적 조건의 각 본능이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범주 안에 있고, 사람의 기본 조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너는 네 본분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짐승은 어떤 진리 원칙도 알아듣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어떻게 해야 자신의 본분을 지킬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해서 끝까지 봉사를 이어 나갈 수 있는지 모른다. 짐승은 이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현재 사람으로서 네가 깨닫고 이해한다면 너는 이행해야 한다. 네가 이행할 수 있기에 하나님이 그 원칙에 따라 네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만약 신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낙심하여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또 삶이 창피하고 존엄하지 않다는 생각에 본분 이행을 포기하고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는다면 너는 대역무도한 자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너는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아닌 별종이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지금 네 신분이 존귀하든 비천하든, 네가 무엇에서 유래했든, 네 선천적 조건에 어떤 문제가 있든, 어쨌든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이행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 이행해도 진리 원칙에 이를 수 없는 경우 하나님은 각 부류의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요구 기준을 가지고 있다. 즉, 네가 최선을 다하고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면 기준에 부합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만점을 요구하지 않는다. 60점이면 족하다.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느냐?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네 태도이다. 네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태도로 자신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어야 할 일을 아쉬움 없이 제대로 한다면, 이런 태도는 하나님에게 열납되고 칭찬받을 것이며 네가 가는 길을 하나님이 끝까지 보호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가면 어떤 결과가 있나요?”라고 묻는다. 미리 알려 주지 않고 나중에 말해 주겠다. 끝까지 가면 알게 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이 일을 어떻게 대하고, 하나님이 준 본분을 어떻게 대하며, 그 본분을 어떻게 제대로 이행하느냐는 것이다. 그 본분이 무엇이든 하나님 집이 네게 부탁한 일이라면 온 힘을 다해 이행해야 한다. 네가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안다면 그릇된 논리는 최대한 펼치지 말고, 하나님에게 죄짓는 일이나 말도 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과 하나님 집에 유익한 일이나 말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그런 건 아직 못 하겠어요.”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라. 오늘 못 하면 내일 하고, 올해 못하면 내년에 하도록 노력하는 식으로 천천히 해라. 그런데 만약 결말을 선포할 때까지 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고스란히 너의 몫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아무도 네 온갖 행위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 일은 쉽게 해결될 것이다. 사람의 이성이 어떤지,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지에 달렸다. 알아듣는다면 이 일은 너무나도 쉽게 해결될 것이다. 몇몇 사람은 조금 어렵다고 하겠지만 이런 방향으로 노력하면 결국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네가 이 길을 따라가지 않아도 어쩌면 살 수 있겠지만 결국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아무도 네게 장담해 주거나 보장해 주지 않는다.

오늘 교제한 주제를 듣고 어떤 느낌이 들었느냐? 무척 괴로운 기분이 들지는 않았느냐? 하나님을 믿은 이래로 가장 꺼려지는 주제는 아니었느냐? 힘만 쓰는 자에 관한 주제를 듣는 것보다 괴롭거나 받아들이기 어렵지는 않았느냐? 받아들일 때 어려움이 있었느냐?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신분을 확실히 파악하고,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찾는다면 이런 말과 이런 측면의 문제는 사람에게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몇몇 어려움이 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듣고 나면 대부분은 자신의 가치나 신분이 어떤지 따져 묻지 않을 것이다. 정말 자기가 해당하더라도 올바로 대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오늘 교제는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보도록 하자!

2024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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