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1)

무엇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느냐? 은혜와 축복을 얻기 위함이냐? 공허하지 않게 살고 저급한 취미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냐? (진리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진리를 얻기 위해서이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매일 하는 일은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 아니겠느냐? 네가 매일 본분을 이행하고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는 것은 이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얻겠다는 명확한 목표가 없으며, 마음속에 이 측면의 이상(異象)도 뚜렷하지 않고,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지도 알지 못한다. 마치 마음속으로 단지 복받기 위한 것이라고만 알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는 복을 받으려면 반드시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고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그 자신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는 ‘이건 큰 문제가 아니야.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겠지. 남들이 나를 가리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체험 간증이 있는데 자기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괴롭기도 하고 조금은 조급해지기도 하지만,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가 더 많다. 이렇게 훌쩍 5년이 지나가고, 또 훌쩍 10년이 지나가 30~40대가 된 사람도 있고 50대가 된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줄곧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얻었느냐? 생명은 있느냐? 그 자신도 확신하지 못한 채, ‘적지 않은 진리를 깨달은 것 같아. 또 많은 도를 이야기할 줄 아니까 생명이 있겠지?’라고 생각할 뿐이다. 예배든 본분 이행이든, 하나님을 증거할 때는 그도 모든 진리를 다 깨달은 양 장황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본분 이행 과정에서 진리 원칙과 관련된 일이 닥치면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지 못한다. 심지어 많은 일에서 여전히 자기 뜻을 따르며, 진리 원칙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내가 과연 진리를 깨달은 사람일까?’라는 의문을 품는다. 자신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그 자신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과연 진리를 얻었겠느냐? 이것도 여전히 의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생명이 있겠느냐? 생명이란 대체 무엇이냐? 생명이 있는 사람은 어떤 느낌이겠느냐? 사람의 생활에 어떤 변화가 생기겠느냐? 사상에 어떤 변화가 생기겠느냐? 인성에 어떤 변화가 생기겠느냐? 그는 이런 것들을 전혀 모른다.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어떤 측면의 진리에 대해 말할 때는 글귀와 도리를 어느 정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진리 실행 원칙과 관련될 때는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원칙을 어긴 일 처리로 책망을 받을 때면, 소극적으로 변할 뿐만 아니라 당혹감을 느끼고 자신을 의심하며 “내가 과연 생명을 얻었을까? 진리가 내 마음속에서 지위를 갖고 내 생명이 되었을까? 내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듯 진리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흐리멍덩하지만, 외적이고 진리와 관련이 없는 일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 몇 개월 며칠이 되었는지, 어떤 교회 사역을 했는지, 어떤 본분을 이행했는지, 어떤 급의 리더를 했는지, 어떤 사역의 책임자를 했는지, 얼마나 많은 곳을 가 봤는지, 특히 복음을 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얻었는지, 복음을 전한 성과가 어땠는지, 또 얼마나 많이 헌신하고 바쳤는지, 얼마나 많이 기부했는지, 무엇을 기부했는지, 판결을 받아 얼마나 오래 옥살이를 했는지, 얼마나 많이 맞았고, 어떤 고문을 당했으며, 굳게 서서 증거했는지 등등을 똑똑히 기억한다. 이런 외적인 일을 전부 마음 깊이 새겨 두는데, 마음속에 장부가 하나 있어서 머릿속에서 수시로 생각이 난다. 마치 회계사가 기록한 장부처럼 하나하나 모든 항목을 또렷이 기억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달았는지는 늘 분명하지 않다. 자신이 각각의 진리를 실행하고 실천했는지, 이 측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했는지, 어느 정도 진입했는지 등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다. 또 자신의 어떤 패괴 성품에 참된 인식과 실질적인 변화가 생겼는지, 이와 관련된 진리를 실행하고 진입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하나님을 이렇게 오랫동안 믿었는데, 어떤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지, 어떤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는지, 어느 측면의 진리에서 성장했는지, 또 얼마나 성장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 밖에, 자신의 인성이 대체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양심과 이성을 지니고 있는지, 정상 인성을 살아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자신이 이행한 본분에 얼마나 충성을 바쳤는지, 진심으로 임했는지, 일부러 건성으로 대충한 건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합격했고 얼마나 합격하지 못했는지, 원칙대로 처리해서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아직 진리 원칙을 파악하지 못해 하나님을 흡족게 하지 못한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 또한 분명하지 않다. 또 자신이 대체 어느 측면에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으며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는지, 하나님에게 어느 정도로 순종할 수 있는지, 어느 측면에서 아직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는지, 무엇 때문에 순종하지 못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진입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계획과 생각도 없으며, 당연히 명확한 길도 없다. 이 밖에,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선행을 예비했는지 알지 못하고, 얼마나 많은 악을 행했는지, 얼마나 많은 방해와 교란을 했는지도 알지 못한다. 어느 정도 한 것으로 기억하기는 하는데, 악을 행한 후 회개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악을 행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고 괴로워했으며, 또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자백하기는 했지만, 사함은 받았느냐? 마음속에 참소가 있지는 않으냐? 그도 알지 못한다. 그는 ‘참소가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지금 당장은 편하게 살고 있고, 여전히 본분을 이행하고 있잖아.’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가 이행한 본분 중 선행은 얼마나 되겠느냐? 그 자신도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면서 ‘그래도 선행을 좀 하기는 했어. 최근에 복음을 전해 두 명을 얻었으니까.’라고 생각한다. 그가 약간의 선행을 하기는 했지만, 일 처리에 원칙이 없으며 여전히 자기 뜻대로 하고 제멋대로 함부로 굴 수 있다. 이를 악행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 자신도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는 교회가 자신에게 처분을 내리지 않고, 리더 또한 자신을 책망하거나 이 일을 추궁하지 않으니 악행이 아니라고, 추궁한다면 그것이 악행일 거라고 생각한다. 또 그는 얼마나 많은 선행을 예비했는지 알지 못하며, 지금 한 일이 선행인지 악행인지, 선행의 성분이 얼마나 되는지, 악행의 성분이 얼마나 되는지,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것은 얼마나 되는지, 사역 지침과 진리 원칙을 위배한 것은 얼마나 되는지 등도 모두 알지 못한다. 그는 이런 일들을 한 번도 기록한 적이 없다. 어차피 매일 제때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시간이 되면 일어나 묵상이나 사역을 하고, 매일 전날의 사역 상태와 단계를 그대로 이어서 하고, 자신이 예전부터 해오던 일을 할 뿐이다. 진리를 추구하여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며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계획하거나 기록한 적이 없다. 그래서 그는 진리 추구나 생명 진입과 관련된 일들이 전부 분명하지 않다. 말해 보아라. 사람이 매일 이런 생활 상태 속에서, 이런 내적 상태로 살아간다면 정신없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정신없다’는 문어체 표현이고, 속된 말로 하면 바로 ‘그럭저럭 대충 사는 것’이다. 그럭저럭 대충 사는 이런 생활 상태와 생존 상태가 좋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행위와 모습은 없지만, 진리와 생명 진입 추구라는 일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되는대로 하는 것, 이런 상태가 바로 ‘정신없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문제를 잘 드러내며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길을 걷는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언급되는 진리 추구와 생명 진입 등의 일에 대해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든, 주관적인 바람이 무엇이든, 어떤 모습을 보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보기에는 그 사람이 처한 상태가 바로 그가 걷고 있는 길을 보여 준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부터 진리를 싫어하고,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데, 이들이 걷는 길은 바로 지옥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길이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하나님의 요구를 이해하지 못해 오직 복받고 천국에 가는 것만 추구하지만,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진리를 깨달으면 진리를 추구할 수 있으며, 진리를 얻기 위해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를 수 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자신이 걷는 길이 빛과 천국으로 통하는 길임을 알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생명 진입의 일에서도 마찬가지로 목표가 그다지 명확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흐리멍덩한 그런 상태에 처해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며 본분도 항상 건성으로 대충 이행한다. 이런 자들이 걷는 길은 바로 지옥과 멸망으로 통하는 길이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본분을 이행할 때도 훈계와 책망을 받아들일 수 있어 점차 본분 이행에 합격하게 된다. 이런 자들이 걷는 길이 바로 빛과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다. 멸망의 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은 삶 속에서, 본분 이행 과정에서 끊임없이 악을 행하며, 끊임없이 진리에 어긋나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짓을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몇몇 ‘특이한’ 모습이 있다. 이 ‘특이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그들은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부터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본분을 항상 건성으로 대충대충 이행하며, 꾀를 부리고, 몸을 사리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수호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특징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한 부류다. 또 다른 부류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고, 함부로 굴며, 절대 사역 지침대로 실행하거나 실천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 늘 지위를 다투고,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며, 사람을 회유하여 독립 왕국을 세운다. 이 밖에도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제물을 훔쳐 먹고 낭비하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긴다. 이것이 긍정적인 모습이겠느냐, 부정적인 모습이겠느냐?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그들은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부터 이런 모습을 보이지만, 하나님 집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기회를 준다. 어떤 사람이 자질이 좀 있으면 책임자의 본분을 이행하도록 안배하지만, 일정 기간 좋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한 가지 일만 하는 본분을 이행하도록 안배한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 일만 하는 본분도 여전히 건성으로 대충대충 이행하고,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며, 멋대로 함부로 굴고, 방해와 교란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지위와 권력을 다투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수호하지 않으며, 심지어 기회가 생기면 제물을 훔쳐 먹거나 낭비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아무리 오래 믿어도 그들의 이런 모습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결국, 그들에게서 보이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한결같이 건성으로 대충대충 하고, 꾀부리고, 몸을 사리며, 심지어 육적인 편안함을 즐기며 무책임하게 군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가끔 또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늘 한결같이 나타나며, 그래서 문제가 된다. 그들은 본분을 한결같이 건성으로 대충 이행하고,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며, 방해하고 교란한다. 누가 말해도 고치지 않으며, 도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회개하지 않고, 후회하는 마음도 없다. 또 어떤 사람은 한결같이 지위를 다투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전혀 수호하지 않는다. ‘한결같이’라는 말은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어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건성으로 대충 임하거나 제멋대로 함부로 굴 때, 또는 안 좋은 모습을 보였을 때, 하나님 집은 여러 번 회개할 기회를 준다. 일시적인 모습 때문에 사람을 쫓아내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게 하는 일은 없으며, 여러 차례 권유하고 진리를 교제하며 사랑으로 도와주고 붙들어 준다. 성령 또한 각별히 감동을 주고 질책하며 깨우쳐 준다. 사람도 사역하고 성령도 역사하지만, 이런 부류의 사람은 강퍅하고 진리를 싫어해서 절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형제자매들의 도움, 질책과 점검, 감독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으며, 성령의 깨우침과 채찍질은 더더욱 받아들이는 법이 없다. 하나님을 믿은 지 3~5년이 되어도 그렇고, 하나님을 믿은 지 10년,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렇다. 20년 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이제 와 만나니 그는 나이가 들어 성숙해지고 노련해졌지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보니 그 모습은 여전했다. 사정을 아는 사람의 전언에 따르면, 그 사람은 한결같이 건성으로 대충대충 임하고,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한다고 한다. 20년 전과 전혀 변한 게 없이 똑같은 것이다. 그 사람은 예전에도 늘 거짓말만 할 뿐, 절대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와 교류를 해 보니, 여전히 예전과 똑같고 솔직한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을 20년 동안 믿으면서 많은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르며 복음을 전해 많은 사람을 얻었지만, 성품은 전혀 변하지 않아 여전히 교활하고 능글맞으며 특히 약삭빠르고 간사해서 솔직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바로 이런 증거들로 그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 아님을 입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한결같이 건성으로 대충대충 하는 사람이자, 한결같이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고 멋대로 함부로 구는 사람이며, 한결같이 방해하고 교란하면서 권력을 다투는 사람이자, 한결같이 수단을 부리고 거짓말로 속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능구렁이, 마귀, 사탄, 교활한 자로, 매우 교활하고 간사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모든 행위 앞에는 반드시 ‘한결같이’라는 관형어를 붙여야 한다. ‘한결같이’라는 말을 붙이면 그것은 그에 대한 남들의 편견이 아니라 그 자신의 행동이 초래한 결과가 된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이미 한두 번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상습범이다. 각국의 경찰서는 상습범을 어떻게 대하더냐? 상습범의 범죄 기록은 모두 보관해야 하며, 일단 범죄 사건이 발생하면 이 상습범들이 첫 번째 용의자가 되어 가장 먼저 지목당해 사건 수사와 조사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하나님 집에서 한결같이 건성으로 대충대충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어떻겠느냐? 건성으로 대충 임하고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는 모습은 어쩌다 한두 번이 아니며, 특수한 상황에서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평소에 이러한 내적 상태와 모습으로 본분을 대한다. 본분을 대하는 평소 모습을 통해 진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어떤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태도로 진리를 대하겠느냐? (싫어하고 거부합니다.) 싫어하고 거부하며,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속 깊이 멸시한다.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멸시하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고, 아무리 많은 기회를 주어도 소중하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자기가 하고 싶고 기분 내키는 대로 하며, 성령의 감동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고 귀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또 다른 사람이 권유하는 것을 싫어하고, 남의 도움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만약 다른 사람이 또 책망하고 훈계하면 성질을 내고 분노하며, 상대방에게 화를 내고 마음속으로 반감을 품는다. 교회는 각 사람의 시기별 모습을 전부 평가하는데, 이 평가는 사람의 결말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는 모습에 ‘한결같이’라는 말을 붙여 규정해 버리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들이 대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가 매우 명확해지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는 길은 대체 어떤 길이겠느냐? 멸망으로 향하는 길이겠느냐, 아니면 구원받는 길이겠느냐? (멸망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멸망으로 향하는 길이다. 결과가 왜 이렇겠느냐? 이것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실제 사정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겠느냐?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어야겠느냐? 어떤 사람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면 안 됩니다. 언젠가는 회개할지도 몰라요.”라고 말한다. 니느웨 사람들은 수많은 악을 행했고, 그들의 악행은 하나님의 귀에 들어갔다. 그들을 멸망시키려 할 때, 하나님은 요나를 파견해 미리 편지를 보내 40일 후에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니느웨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어떤 모습을 보였느냐? 그들은 40일 동안 굵은 베를 입고 재를 뒤집어쓴 채 하나님에게 회개하였다. 그런데 지금 본분을 이행하면서 한결같이 불량한 모습을 보인 사람들에게는 회개할 시간으로 몇 번의 40일이 주어졌느냐? 그들은 회개하였느냐? 그들에게 회개하려는 의지가 있느냐? 회개하려는 기미가 있느냐? (없습니다.) 지난 10년, 20년 동안 그들은 한결같이 악을 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10년, 20년 동안 그들이 변할 수 있겠느냐? 더 이상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미지수일 것이다. 하지만 지난 10년, 20년 동안의 여러 가지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행위와 모습은 모두 진리에 위배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대립하는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이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하고, 본성 본질이 사악하여 진리를 사랑하는 성분이 없으며, 진리를 사랑하고 실행하는 인성도 전혀 갖추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들의 지난 10년, 20년 동안의 모습을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지금까지의 결론이 이렇다면, 그 인성과 본질을 볼 때, 앞으로 10년, 20년, 30년 동안 그들 중 진정으로 회개하고 변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30명 중 한 명이라도 있겠느냐? 50명 중 한 명이라도 있겠느냐? 100명 중 한 명이라도 있겠느냐? 앞으로 10년, 20년 안에 그들 중 갑자기 양심적 자각이 생겨서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에 흥미를 느끼고,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이며, 자신을 인식하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지난날 자신이 행했던 악을 후회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나올 수 있겠느냐? 너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 비율이 얼마나 되겠느냐? 1,000명 중에 한 명이라도 있겠느냐? (저는 1,000명 중 한 명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그는 하나님을 10년, 20년 믿으면서도 진리에 한결같이 반감과 거부감을 가졌으며, 전혀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앞으로도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증거입니다.) 이 견해가 정확하겠느냐? (정확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관용과 포용으로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지난 10년, 20년 동안 그가 회개하지 않은 것은 어려서 철이 없었거나 가정 환경이 좋아 응석받이로 자랐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특기가 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이는 특수한 상황과 환경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그들이 앞으로 10년, 20년 동안 그런 가정 환경과 좋지 않은 요인의 영향에서 벗어나면 변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들의 과거 모습을 볼 때, 모습 앞에 ‘한결같이’라는 관형어가 붙는다면, 그 사람은 매우 위험하다. 백 명, 천 명 중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만약 그의 모든 악행 앞에 아직 ‘한결같이’라는 관형어가 없다면, 이런 부류는 그래도 조금은 희망이 있으며, 앞으로 3~5년 동안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만약 그가 어려서 철이 없거나 하나님을 믿는 기초가 없어서, 또는 자질이 부족하거나 어떤 객관적인 환경 요인으로 인해 진리를 받아들이고 깨닫는 데 영향을 받았다면, 이런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그런 것일 뿐 그의 악행은 단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좀 더 지켜봐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끊임없이 악을 행하는 그런 사람들, 즉 모습에 ‘한결같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그런 사람들은 아직 자신의 종착지를 위해 충분한 선행을 예비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많은 악행을 저질렀는데, 단지 그들이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자격과,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른 것을 내밀고 따져가며 스스로를 위해 변명해야 한다. 그들이 걷는 길은 그들 앞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들이 표출한 모습과 행위, 본분 이행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이미 그들의 본질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본분과 진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 또한 그들이 걷는 길을 분명히 드러냈다.

사람은 어떤 길을 걷느냐에 따라 최종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사람이 멸망의 길을 걷는다면, 결국에는 지옥의 문을 밀어 열고 지옥에 떨어지는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걸어온 길이 결국 그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으면서 많은 과오를 저지르고 잘못된 길을 걸으며 바른길에서 벗어나는 일을 했다면, 심지어 명백히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며 본분을 건성으로 대충 이행했다면, 이는 좋지 않은 모습이며, 하나님이 보기에 정죄받을 짓이다. 그렇지만 너는 패괴 성품을 표출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함과 동시에 몸소 실천하고 진심으로 대가를 치렀으며,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대함으로써 자발적으로 많은 선행을 예비하였다. 예를 들어, 적그리스도와 악인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거나 형제자매들을 미혹할 때, 너는 적그리스도와 악인의 악행을 적시에 폭로하여 그들의 방해와 교란을 저지하였으며 형제자매들을 보호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켰다. 또한, 본분 이행 과정에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장애가 많았지만, 네 시간과 정력, 체력을 바쳤으며, 개인의 육체가 쾌락을 누릴 시간을 희생하면서 최선을 다해 이런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했다. 네가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른 덕분에, 너의 독촉과 감독, 점검 덕분에, 교회의 복음 전파 사역이 정상적이고 원활하게 전개되고 진행되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너는 자질이 훌륭하고 진리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전도하여 각종 진리를 명확하게 교제함으로써 그들이 참도의 기초를 다지고,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해 각 사역의 유능한 조력자가 되게 하였다. 너는 또 하나님 집의 특수한 업무 사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여, 효과적인 사역 방식이나 절차를 통해 사역을 진전시키고 사역 성과를 높이기도 하였다. 또는 교회 생활 중에 소극적이고 나약하거나 길이 없어 방황하는 형제자매들을 도와 그들이 나아갈 길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으며, 의지를 갖고 진리를 추구하게 해 주기도 하였다. 더 좋은 점은, 네가 이런 사람들을 격려하여 그들이 기꺼이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도록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너는 또 어떤 업무적인 사역에서 꼭 필요한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고되고 힘들며 더럽고 지명도가 없는 일일지라도, 너는 기꺼이 묵묵히 배후에서 사역하는 사람이 되어, 이를 위해 헌신하고 보수를 바라지 않았으며, 오직 네 진심과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긍정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눈에 기억할 만한 선행으로 보인다. 반대로, 이런 일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본분과 책임을 이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 몰라라 하고, 옆에 서서 지켜보거나 비웃고, 무관심하게 대하고,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하며,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고, 심지어 건의조차 귀찮아서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번거로워지거나 피곤해질까 봐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숨을 수 있으면 숨으며, 가만히 있을 수 있으면 가만히 있는다면, 너에게는 이런 일들이 너와 상관없고, 번거롭고, 짐이 되고, 부담이 되는 일일 뿐이다. 비록 이런 모습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악행과는 차이가 있지만, 또 하나님이 너를 나쁘게 평가하지는 않겠지만, 너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겠느냐? 바로 네가 이런 일들에서 선행을 예비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에게 기억될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너는 이런 일들이 닥쳤을 때 선행을 예비할 기회를 놓친 것이니, 어리석은 데다가 신뢰하고 발탁할 가치가 없으며, 높여 줄 가치도, 하나님이 일을 부탁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다. 너를 노아나 아브라함과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이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어떤 일도 맡길 수 없는 사람이 마지막에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알 수 없다고밖에 할 수 없으며, 그 뒤에 수많은 물음표를 붙여야 한다. 즉, 불확실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그 사람의 한결같은 모습에 근거한 것이다. 네가 모든 사람에게 “왜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믿어 천국에 가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지옥에 가려는 것입니까?”라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며 너를 비웃을 것이다. “지옥에 가고 멸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누군들 천국에 가서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 말은 정말 물어봐야 하며, 어리석은 질문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번도 이렇게 자신을 돌아본 적이 없다. 그는 일이 닥치면 늘 번거로워질까 봐, 말썽이 생길까 봐 두려워한다. 특히 악인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며, 하나님 선민들이 미혹되고 이용당해 교회 사역을 전개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이런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이 사람을 감찰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며, 이것이 바로 선행을 예비할 기회라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다. 그는 무골호인이 되어 진리 원칙을 버리면서도 전혀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다. 너의 책임은 무엇이냐? 너의 의무는 무엇이냐? 하나님이 너에게 부탁한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고 이렇게 많은 사역을 하였는데, 너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이냐? 너는 하나님에게 만족스러운 답변을 할 수 있느냐? 너는 선행을 예비하였느냐? 이런 일들에 있어서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속으로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한다.

사람은 모두 복을 받고 싶어 하지, 아무도 멸망해 지옥으로 떨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거듭 악을 행하며, 지옥으로 통하는 길을 질주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준 본분 이행의 기회를 무시하고, 성령의 감동과 질책을 무시하며, 하나님의 기대 역시 무시한다. 그저 건성으로 대충 대하려고 하고, 제멋대로 함부로 행동하려 하며, 방해하고 교란하려고 하고, 약삭빠른 사람이 되려 하고, 악을 행하려고 한다. 아무도 너에게 그 일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하나님 집에서도 너에게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분명 너 개인의 선택이자 너 개인이 원하고, 좋아하고, 열중하는 일이다. 네가 걷는 길이 지옥으로 향하는 멸망의 길이라고 하면 괴로워하고 소극적이 되는데, 그럴 게 뭐가 있느냐? 그것은 네가 자초한 일이고 자업자득 아니겠느냐? 당연한 결과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은 “저는 어쩔 수 없이 악을 행했습니다. 항상 좋은 쪽으로 행동하고 싶었지만, 일을 마치고 보니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한다. 너는 악을 행하여 방해와 교란을 일으키고, 교회 사역에 손실을 끼쳤다. 네 과오를 추궁하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네 과오는 잠재적 위험을 남겼으며, 이후에도 똑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으니 이는 매우 위험하다. 사람이 걸어간 길에는 반드시 발자국이 남는 것처럼 말이다. 네가 남긴 과오를 깨달았느냐? 후회는 하고 있느냐? 죄스럽고 괴로운 마음이 드느냐?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겠느냐? 뉘우쳤느냐? 네가 저지른 악행을 진정으로 증오하느냐? 손으로 행하는 악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했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도 저 자신이 밉습니다. 뒤에서 얼마나 많이 제 뺨을 때렸는지 몰라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하며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들을 거치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너의 그런 과정만 보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너의 모습을 본다. 똑같은 일이 또 닥쳤을 때, 똑같은 본분이 다시 주어졌을 때, 너는 어떻게 대할 것이냐? 너는 충성심이 있느냐? 진심이 있느냐? 대가를 치를 수 있느냐? 하나님 말씀대로 할 수 있느냐? 네가 돌아섰다는 것이 어떤 모습에서 드러나느냐? 네 손안의 악을 내려놓았느냐? 예전의 악행을 계속하고 있지는 않느냐? 너는 여전히 거짓말을 하고, 제멋대로 함부로 행동하고, 사역 지침과 진리 원칙을 위배하고, 자신의 야심과 욕망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악인과 결탁해 교회 사역을 방해하며 교란하고 있다. 계속 그런다면 너의 회개와 대성통곡은 거짓이며, 그저 형식만 취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형식만 취하는 것과 거짓 회개는 어떻게 규정되느냐? (외식하는 것으로 규정됩니다.) 외식하는 것으로 규정되느냐? 기만으로 규정된다. 이 말이 정확하지 않겠느냐? (정확합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이런 대성통곡과 회개는 기만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올해 수확한 쌀을 나에게 5kg 바쳐라.”라고 했다고 치자. 그것이 싫었던 한 사람은 쌀은 자기가 먹으려고 남겨 두고, 겨 5kg을 제단에 올려 놓았다. 그에게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이 “나는 너에게 쌀을 요구하지 않았더냐?”라고 하자, 그는 “벼가 바로 쌀입니다.”라고 답했다. 이는 기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노골적인 기만이다. 악을 행한 후에 죄를 인정할 수 있고, 말끝마다 하나님에게 죄스럽다고 하며 대성통곡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예전처럼 군다면, 하나님은 너의 이런 행위를 기만이라 할 것이다. 이런 기만적인 행위는 하나님 눈에 악행이나 마찬가지로 보인다. 만약 네가 정말로 변할 결심이 있고 진리 원칙대로 하려고 한다면, 뜻을 세울 필요도, 대성통곡할 필요도 없다. 먼저 행동한 후, 해내고 나서 하나님에게 서원하고 맹세해라. 만약 할 수 없다면 절대 서원하지 마라. 네가 서원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정말로 여기고 너에게 서원한 일의 결과를 요구할 것이다. 네가 그 결과를 내놓지 못한다면,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바로 기만이다. 너는 하나님을 기만했으니, 또 하나의 악행이 장부에 기록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진실로 회개하지 못하면서도 서원으로 하나님을 기만한다면, 네가 걷는 길은 멸망으로 향하는 길일 것이다. 네가 저지르는 모든 악행은 지옥문을 두드리는 것이 될 테니, 언제 지옥문이 열려 죽음이 닥칠지 알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악행을 쌓으면서 지옥문을 두드리고 있고,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를 쌓으며 하나님의 징벌이 임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긍정적이고 바르며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그들이 걷는 길이 바로 천국으로 향하는 길이다. 그 기간에 비록 패역과 패괴 성품의 표출도 있고,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도 있으며, 본분 이행에 자기 생각을 투영시키기도 하겠지만, 그들은 이런 모습이나 행위들을 드러냄과 동시에 끊임없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변화시키며, 회개하고, 진정으로 돌아서고, 진실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종하는 모습과 실제를 보인다. 이 부류는 비록 과거에 많은 과오를 저지르고, 하나님이 혐오하고 정죄하는 짓들을 하기도 했지만, 진리를 깨닫고 돌아선 후에는 점차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렸으며, 더 이상 악을 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회개하고 돌아서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르겠다는 결심과 의지를 보여 하나님을 감동케 한다. 이와 동시에 그들이 대가를 치르고, 행하고, 예비한 선행은 조금씩 하나님의 열납과 인정을 받게 되며, 하나님은 이를 기억하게 된다. 이 부류의 종합적인 모습을 봤을 때, 너희가 늘 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이들은 기본적으로 ‘올바른 사람’이다. 이 올바른 사람이 걷는 길은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자 구원받는 길이며, 이들은 구원받는 길을 걷는 사람이다. 물론 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남들의 부추김과 감독, 또는 관리, 책망 훈계, 교회 행정 법령의 규제에 의존해 행동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서며, 자신의 생명 진입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과 계획이 있고, 자신만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의지도 있다. 이들이 걷는 길은 올바른 길이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은 자신의 종착지를 위해 선행을 예비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관적인 추구는 그들이 걷는 길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결정한다. 마지막에 그들은 자신의 주관적인 추구 덕분에 하나님이 주는 적합한 결론과 종착지를 얻게 될 것이다.

말해 보아라, 사람이 어떤 내적 상태와 상황에서 어떻게 정의로운 일을 해야 선행을 예비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최소한 일을 할 때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태도가 있어야 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충성심을 보여야 하며, 진리 원칙대로 일을 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것이 핵심이다. 늘 수동적으로 군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그런 너는 마치 하나님 집 사람이 아니며, 본분을 이행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너는 급여를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용주의 요구대로 일하며, 자발적이 아니라 매우 수동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듯하다. 이익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면 아예 하지 않을 것이고, 또는 아무도 네게 요구하지 않는다면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니, 이런 방식은 선행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부류의 사람을 가리켜 몹시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수동적이고, 생각이 미치는 것도, 시간과 정력을 들이면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으며, 그저 기다리고 관망하기만 하니 골칫거리가 된다. 이는 참으로 가련한 일이다. 어째서 참으로 가련하다고 하겠느냐? 첫째, 너는 자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둘째, 경험이 부족한 것도 아니며, 셋째,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도 아니다. 너는 그 일을 할 자질을 갖추고 있으며, 시간과 정력을 들이면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고 선행을 예비하지 않았으니, 너무도 안타깝다. 왜 안타깝다고 하겠느냐? 네가 몇 해가 지난 후 돌아보면 후회할 것이다. 그 해 그달 그날로 돌아가 그 일을 하고 싶어도 세월이 흘렀으니, 두 번 다시 같은 기회가 오지는 않는다. 그 기회는 그렇게 지나간 것이고, 그렇게 놓쳐 버린 것이다. 만약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 등 육적인 누림을 잃은 것이라면 별것 아니다. 그것은 헛된 것이며, 네 생명 진입과 선행 예비, 종착지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 일이 너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나 평가와 관련되고, 심지어 네가 걷는 길과 종착지까지 관련된다면, 그 기회를 놓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 일은 앞으로 네 생존의 길에 오점과 유감으로 남을 것이며, 네 평생 다시는 만회할 기회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안타까운 일 아니겠느냐? 만약 네 자질이 너무 형편없어서 그 일을 맡을 수 없다면 그것은 안타깝지 않다. 하나님 집에서는 다른 사람을 안배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그 일을 잘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준 기회거늘, 너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 기회를 잡지 않고 손에서 놓쳐 버렸으니, 너무나 안타깝다! 이는 너에게는 안타까운 일이고 하나님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은 네가 그 일을 꿰뚫어 보고 감당할 수 있도록 너에게 자질과 수많은 좋은 조건을 주었건만, 너는 올바른 태도도, 충성심도, 진심도 없었으며, 온 힘을 다해 잘하려 하지도 않았으니, 하나님을 너무나 실망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이 게을러서 번거롭다고 생각하며 하기 싫어하고, 마음속으로 ‘왜 다른 사람은 시키지 않고 나한테 하라고 하는 거야?’라고 불평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본분이 너에게 주어지는 것은 불운한 일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일이니,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이 그런 일로 지치거나 죽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일을 잘 처리하고 온 힘을 다해 제대로 해내면, 마음이 편안하고 든든해질 것이며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니 하나님 앞에 올 때 자신 있게 고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그 일을 하지 않았거나 건성으로 대충 했다면, 비록 손실은 없다고 할지라도 너 자신에게는 평생의 유감으로 남을 것이다! 그 일은 끝없는 블랙홀과 같아서 너를 평생 고통스럽고 불안하게 할 것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 충성심과 진심을 갖고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마음이 바늘로 찌르는 듯 괴로울 것이다. 너는 그 일로 기쁨이나 자부심, 영광을 느끼기는커녕 고통스러운 감정에 평생 시달릴 것이다. 양심의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괴로워할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보기에는 어떻겠느냐? 하나님이 진리 원칙으로 이 일을 규정하면, 그 성질은 네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해진다. 알겠느냐? 그래서 하나님은 네 일상적인 모습, 진리와 본분을 대하는 태도를 종합하여 네가 걷는 길을 바라본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진리와 본분을 대하는 태도가 늘 건성이고,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뒤에서는 실행하지 않고, 꾸물거리며 서두르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적극적인 태도가 없다면, 비록 겉보기에는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고 악을 행하지도 않으며 제멋대로 굴지 않고 나쁜 짓을 일삼지도 않아서 점잖고 주제를 아는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요구한 일을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하지 않고 몸을 사리고 농간을 부리며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다면 너는 도대체 어떤 길을 걷고 있는 것이겠느냐? 적그리스도의 길은 아니라 해도 최소한 거짓 리더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본분을 이행할 때, 겉으로는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며 상부에서 배치하는 대로 따르지만, “당신은 본분을 이행할 때 대충 건성으로 임하지는 않습니까? 원칙대로 하고 있나요?”라는 질문을 들으면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하면서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제멋대로 굴지는 않습니다.”라고만 한다. 또 그에게 책임을 다했느냐고 물으면 “어쨌든 제가 해야 할 일은 다 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보아라. 그는 늘 이런 태도로 본분을 이행한다. 서두르지 않고, 느릿느릿 행동하며, 안일하게 대한다. 막상 결점을 찾으려면 딱히 없지만, 진리 원칙대로 가늠해 보면 그가 이행한 본분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불합격이다. 그런데도 그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예전에 하던 대로 한다. 자발적으로 해야 할 일도 늘 그랬던 것처럼 하지 않으며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는 구제 불능 아니겠느냐? ‘당신이 천 가지 묘책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내 생각은 변함없어. 60kg짜리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나를 당신이 어쩔 건데? 내 태도는 그냥 이거야!’라고 생각하며 줄곧 이런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다. 그는 비록 심각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선행도 그다지 많지 않다. 너는 그가 어떤 길을 걷고 있다고 보느냐? 하나님을 믿는 것과 본분 이행을 대하는 이런 태도가 좋으냐? (좋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이 나온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 미지근한 물처럼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이런 태도가 좋으냐? (좋지 않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악을 행하고 방해하면 금방 정죄되겠지. 하지만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임하면 고생스럽잖아. 게다가 만에 하나 실수라도 하면 책망받고, 심하면 교체될 수도 있다고. 그러면 얼마나 창피하겠어! 그러니 차지도 더웁지도 않게, 미지근하게 있으면서 시키는 것만 좀 하고 시키지 않는 건 절대 하지 말자. 그러면 힘들지도 않고, 남들도 흠을 잡을 수 없을 테니 얼마나 좋아!’ 이렇게 처신하는 것이 좋으냐? (좋지 않습니다.) 이러면 좋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실행할 때 어떻게 변해야겠느냐? 만약 네가 시종일관 진리 추구의 길을 가고자 구하지 않고 사탄의 철학대로 살기를 고수한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세상에서 이렇게 처신한다면, 이는 분명 장점이 될 것이다. 너의 처세 철학과 태도는 너를 보호해 줄 것이며, 너 또한 다른 사람에게 밉보이지 않을 것이다. 또한, 명망 있는 상류층 인사들도 네가 위협이 된다고 느끼지 않고 다들 너를 칭찬할 것이며, 지위가 낮은 하층민 역시 감히 너에게 밉보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어디서든 환영을 받아 하층민이나 상류층 인사 모두가 원하는 대상이 될 것이다. 즉, 어른과 아이 모두가, 합법적인 세력과 불법적인 세력 모두가 환영하는 인기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도,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도 여전히 이런 처세 태도를 보인다면 통하지 않을 것이다. 진리와 관련된 각 측면의 원칙은 너에게 하나의 태도를 요구한다. 그 태도는 옳고 그름, 흑백, 시비가 매우 명확하며 무척 원칙적이어서, 중용의 도가 아닌 정확한 관점과 입장이 필요하다. 진리 앞에서 중용의 길을 걷는 사람은 굳게 서지 못한다. ‘내 수법이 얼마나 뛰어난지 봐.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런 방식으로 나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았고, 이런 걸 제일 잘했어. 보라고. 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지금까지 처벌받은 적도, 면직된 적도, 책망 훈계를 받은 적도 없고 큰 연단과 시련을 겪은 적도 없어. 내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잘 처신하는지 보란 말이야.’라고 생각하지 마라. 틀렸다! 너는 처신할 줄 모른다. 그저 약삭빠른 방식으로 모든 일과 진리를 대할 뿐이다. 이는 매우 잘못된 방식으로, 굳게 설 수 없다. 요행을 바라며 ‘예전에는 이렇게 해서 성공했지. 한 번도 실패하거나 망신을 당하거나 우스워진 적이 없었어.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지금도 계속 이 최고 수준의 처세술을 고수해야 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말하는데, 이는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왜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겠느냐? 바로 이런 말씀의 인도하에 인생의 바른길이 무엇인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사람이 깨닫게 하기 위함이고, 선택하게 하기 위함이지, 여기에서 혼란을 틈타 한몫 챙기라는 것이 아니다. 만약 너에게 혼란을 틈타 한몫 챙기라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런 사역들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 각 유형의 일을 교제할 때, 진리에 어긋나는 일들을 명확하게 말하겠느냐? 그것은 바로 긍정적인 사물이 무엇인지, 부정적인 사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어 네가 그것들을 분명히 구분하고 확실히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은 하나님 앞에서는 혼탁하지 않으며 전부 공개되어 있고, 드러나 있고, 투명하다. 그러므로 너에게 무슨 일을 하라고 하든, 어떤 길을 선택하라고 하든 하나님의 요구는 명확하다. 너는 태도도, 사상과 관점도 명확히 해야지, 애매모호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진리와 진리 원칙에 있어서는 애매모호한 것이 없다.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이며, 맞는 것은 맞는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거짓말은 만 번을 말해도 거짓말일 뿐, 진리로 바뀔 수 없다. 세상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별로 없어도, 또는 아무리 많은 나라에서 진리를 버리거나 정죄해도, 진리는 여전히 진리이다. 진리는 영원히 진리로, 절대 억지 논리나 그릇된 주장이 될 수 없다. 사탄에 속하는 부정적인 사물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추종해도, 아무리 오랫동안 세계적인 흐름이 되어도, 여전히 부정적인 사물이고 사탄에 속하는 것일 뿐 영원히 긍정적인 사물은 될 수 없다. 반면 긍정적인 사물은 이 세상에서 공격받고 탄압받고 정죄될지라도 여전히 긍정적인 사물이며, 영원히 부정적인 사물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며, 영원히 정의의 화신이고, 영원히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대표이다. 하나님의 지위는 변하지 않고, 그 본질 또한 변하지 않는다. 반면 사탄은 영원히 사탄이며, 영원히 사악함의 화신이고, 영원히 악의 축의 대표이다. 사탄은 영원히 부정적인 존재로서, 영원히 긍정적인 사물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저는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진리를 그다지 잘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진리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열의도 별로 없는, 이중적인 모습이 대부분인 사랍입니다.”라고 하길래, 나는 “이중적인 사람이라면, 너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긍정적인 사물에 반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인 사물을 비판하지도 않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아첨하거나 그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지만, 그들에게 다가가지도 않고요.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를 멀리하지도 않죠. 그렇다고 당신이 저를 어쩔 건데요? 제가 얼마나 현명하게 살고 있는지 좀 보십시오.” 이게 현명한 것이냐? 이는 현명한 게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며, 머리가 멍한 것이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그저 어리석은 사람에 불과하다. 이렇게 살면 결국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결말과 종착지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종착지를 망쳐 버릴 것이다. 그는 비록 긍정적인 사물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본질적으로는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대하지 않는 것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며, 부정적인 사물을 비판하지 않는 것이 내려놓는 것은 아니다. 너는 자신이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적인 사물을 비판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관점을 내려놓은 것이겠느냐? 내려놓지 못했다. 사람은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부정적인 사상과 관점, 사탄에 속하는 사악한 사상과 관점을 점차 내려놓을 수 있고 깰 수 있으며, 그제야 비로소 긍정적인 사상과 관점,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실행, 식견, 인식, 준칙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다시 말해, 네가 긍정적인 사상과 관점, 진리를 받아들이고 싶고 진리를 네 내면의 생명으로 삼고 싶다면, 내면에 있는 것들을 다 비워 낸 후 진리를 받아들여 진리가 마음속에서 권세를 잡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 것이다. 진리 추구는 이렇게 실행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주요 목적은 진리를 얻는 데 있다. 진리를 위배하는 다양한 사상과 관점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사탄 철학을 신봉하는 그런 부류는 중용의 도라는 약삭빠른 사상과 관점을 내려놓아야 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저버려야 한다. 일이 닥쳤을 때 그런 사상과 관점이 튀어나오면,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인식하고 반드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언급된 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진리 원칙에 부합하도록 능동적으로 열심히 해야 해. 중용의 도라는 사상과 관점에 지배받지 말고, 또 그것이 내 진리 실행을 가로막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그리하여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본분 이행의 준칙이 되게 해야 해.’라고 말이다. 이렇게 실행하면 달라진다. 설령 이 일이 너무 사소해서 하나님이 기억할 만한 가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하나님에게 정죄받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쌓아 나가면, 선행이 조금씩 예비된다. 하나님 눈에 선행으로 보일 수 있다면, 너에게도 희망이 있다. 너는 올바르고 긍정적인 방향과 목표를 갖기 시작하고, 긍정적인 사람, 올바른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지옥으로 통하는 멸망의 길에서 멀어져 점점 천국으로 통하는 길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회개하고 뉘우쳐 얻을 수 있는 좋은 결과이다. 이것을 이루기가 쉽겠느냐? 이는 사람이 얼마나 진리를 사랑하는지에 달려있다. 만약 네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단순히 “전 저 자신이 정말 미워요! 어떻게 그렇게 비열하고 야비한 짓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정말 제 뺨을 몇 대 때리고 싶네요.”라며 자신을 미워하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다. 핵심은, 잘못했다면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의 지배를 받았는지, 왜 진리를 실행하지 못했는지,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그 일을 한 근거와 원칙은 무엇인지, 일이 닥쳤을 때 의식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따랐는지, 의식적으로 사탄에 속하는 자신의 사상과 관점, 야심과 욕망, 속셈과 계획을 저버렸는지 등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몇 가지 ‘의식적으로’를 모두 해냈다면, 그것이 바로 선행을 예비한 것이다. 이는 좋은 일이고, 어느 정도 수확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결과가 좋지 않으냐? 이런 결과가 너희가 보고 싶어 하는 것 아니냐? 너희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 바로 ‘나는 악을 행하지 않고, 방해도 교란도 하지 않아. 풀타임 교회에서 제명되지만 않으면 돼. 비록 많은 선행을 예비하지 않았고, 본분 이행에 그다지 충성을 다하지도 않았으며, 진심도 별로 없고, 진리 원칙에 따라 진지하게 실행하지도 않았지만, 악을 행하거나 방해와 교란을 하지는 않았어. 그러니 된 거 아니겠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관점이 어떠하냐? 이는 타락한 사상과 관점이자, 진취성이 결여된 사상과 관점이다. 악을 행하지 않고 방해와 교란만 하지 않으면 좋은 사람, 고상한 사람이라고, 굳게 설 수 있다고, 자신이 한 일 또한 진리에 부합한다고 절대 생각하지 마라. 내가 알려주겠는데, 그 생각은 틀렸다.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선행을 예비하는 것은 아니다. 악을 행하는 것과 선행을 예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개념이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 마땅히 지녀야 할 모습이다. 예를 들어 보자.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은 살인을 했지만 저는 하지 않았고, 그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쳤지만 저는 훔치지 않았으니, 저는 좋은 사람이에요.” 이것이 자랑할 만한 일이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게 옳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개념을 혼동하는 것이다. 도둑질을 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않고, 방화를 하지 않고, 간음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악한 짓을 하지 않고 법을 어기지 않는 것은 좋은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만의 기준이 있다. 악을 행하는 것과 선행을 예비하는 것 또한 서로 다른 개념이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정상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선행을 예비한다는 것은 주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요구와 진리 원칙에 따라 진리를 실행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며, 충성을 다하고, 기꺼이 고생을 하며 대가를 치르고, 책임을 지고,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원칙에 따라 행한 것은 기본적으로 다 선행이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사람들이 기억할 만한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기는 일이든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일이든, 또 사람들이 눈여겨볼 만한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하나님에게는 다 선행으로 보인다. 네가 선행을 예비하면 마지막에 네게 오는 것은 화가 아니라 복이다. 선행을 전혀 예비하지 않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하고, 가라는 대로 갈 거야. 나는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아. 말썽을 부리거나 방해하고 교란하지 않아. 그냥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게 굴 거라고.’라는 데만 만족한다면, 늘 이런 태도를 보이면서 본분을 이행할 때도 주동적으로 진리를 구하거나 원칙을 고수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나 잘못을 발견해도 제때 바로잡아 고치지 않으며, 자신이 패역과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것을 발견해도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진리를 구하여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고 자기 뜻대로 행한다면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실을 끼치지는 않고 교회 사역에 영향을 주지도 않았을지라도 네가 한 일은 기껏해야 힘만 쓴 것에 불과하다. 힘만 쓴 것은 본질적으로 선행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선행은 결국 어떻게 정의되겠느냐? 네가 한 일이 최소한 너 자신과 형제자매들의 생명 진입에 도움이 되고, 하나님 집의 사역에 이로움이 되어야 한다. 너 자신과 다른 사람, 하나님 집에 모두 이로움이 되면, 네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효과적일 것이고,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것이며, 하나님은 네게 점수를 줄 것이다. 그러니 이 몇 년간 너희가 예비한 선행이 얼마나 되는지, 그 선행들이 너희의 과오를 상쇄할 수 있는지, 상쇄한 후에 선행이 얼마나 남는지 판단해 보아라. 스스로 점수를 매기고 마음속에 확신이 있어야지, 흐리멍덩해서는 안 된다.

말해 보아라. 내가 이런 것을 교제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주의를 환기시키는 목적은 너희의 적극성을 없애려는 것도, 너희를 비웃기 위함도 아니고, 너희를 정죄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너희의 주의를 환기하고 경종을 울려서 지금, 현재, 이 순간 너희가 처한 배경이 무엇인지, 너희의 내적 상태는 어떤지, 잠재적인 위험은 무엇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마음속으로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언제나, 시시각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내적 상태가 어떤지를 성찰해야 하고,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어떤지, 너와 하나님 사이에 갈등이나 장벽은 없는지,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나 오해는 없는지, 하나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는 않는지, 하나님이 사람의 전반적인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늘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고 알아야 하며, 이는 생명 진입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이렇게 실행하는 목적은 바로 사람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고, 잘못된 길을 가지 않으며,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고, 자신과 타인을 기만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잘못된 길을 가지 않는 것은 자신만의 치우친 길을 가지 않는 것이다. 너는 스스로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며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계속 그 길을 가지만, 결국은 바른길에서 벗어나게 되며, 하나님은 일찌감치 너를 버리고 성령도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혐오하는데도, 너는 여전히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며 수확을 얻었어. 이제는 고난을 겪을 수 있고, 악을 행하지도 않으며, 어떻게 해야 방해하지 않는지도 알아.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들이 왜 제명되고 격리되는지, 왜 그들이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게 하는지도 알지.’라고 말이다. 이런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너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인지,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 등을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무척 중요하니, 한동안 되돌아보고 종합해야 할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치겠다. 계속해서 최근 줄곧 다룬 주제에 대해 교제하도록 하자.

최근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중 ‘내려놓기’라는 실행 원칙과 관련된 세부 주제,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에 대해 교제하였다. 여러 번 교제하였으니, 이제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이라는 이 세 측면과 관련된 구체적인 모습과 표출을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예전보다 좀 더 잘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늘 인품과 패괴 성품을 혼동했지만, 하나님께서 몇 번에 걸쳐 분별하도록 교제해 주신 덕분에 좀 더 잘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들을 왜 구별해야겠느냐? (자신에게 존재하는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어떤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고, 어떤 문제는 올바르게 대하기만 하면 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훌륭한 대답이다. 이렇게 세부 사항을 교제하면 선천적인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이라는 세 측면을 좀 더 명확하게 구별하게 되고, 인품이 지나치게 나쁜 모습과 패괴 성품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다. 특히 나쁜 인품, 패괴 성품, 선천적인 조건을 구분할 수 있게 되어, 인성의 결함을 패괴 성품으로 여기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선천적 조건의 부족함이나 결함을 패괴 성품으로 여기지도 않게 될 것이다. 사람이 이런 분별력을 갖게 되면, 패괴 성품의 다양한 모습을 점점 더 명확히 알게 된다. 그러면 패괴 성품과 관련 없는 문제들 때문에 과도하게 반응하지 않게 되고, 동시에 패괴 성품이 대체 무엇인지 더 명확히 인식하게 된다. 그렇다면 패괴 성품이란 대체 무엇이냐? 너희는 명확하게 말할 수 있겠느냐? 패괴 성품과 선천적인 조건은 관련이 있겠느냐? 패괴 성품이 선천적인 조건에 영향을 받겠느냐? (영향받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쁘고 뽀얀 데다가 이목구비가 단정하다면, 외모가 훌륭하니 패괴 성품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의 인성이 그의 외모처럼 완벽하고 깨끗하며 전혀 교만하거나 사악하지도 않고 무척 성결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교제하니 기본적으로 패괴 성품, 선천적 조건, 인성 이 세 측면의 차이점이 명확해지지 않으냐? (명확해졌습니다.) 이는 분별하기 쉽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사업하기 좋아하는 것’에 대해 교제하였다. 그렇다면 사업하기 좋아하는 이런 모습은 어느 범주로 포함시켜야겠느냐? (선천적인 조건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선천적인 조건이다. 어째서 선천적인 조건이라고 하겠느냐? (사람의 취미와 기호이기 때문에 선천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측면에서 보면 취미와 기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만약 어떤 사람이 사업하기 좋아하고 사업에 능통하며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않았어도 사업을 잘한다면, 다른 사람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깨닫고, 어떻게 해야 돈을 벌고 이익을 내며 사업 기회를 잡을 수 있는지 등을 안다면, 그는 바로 선천적인 조건 중 사업 분야에 특기가 있는 것이다. 선천적으로 이 분야에 특기가 있다면, 이는 선천적인 조건이 분명하다. 선천적인 조건은 후천적인 영향과 그다지 관계가 없다. 보아라. 어떤 사람은 15, 16세에 이미 학교에서 장사하는 걸 배운다. 좀 좋은 물건이 있으면 어떻게든 돈을 받고 팔려고 하고, 부모님이 준 생일 선물도 팔아서 현금화하며, 자신의 용돈도 쓰지 않고 모두 모아 장사하는 데 사용한다. 그러다가 18, 19세가 되면 작은 장사를 할 수 있게 된다. 학교 성적은 그저 그렇지만, 사업적인 머리가 좋고 계산이 빠르며 장사도 요령 있게 잘한다. 이것이 바로 특기이다. 사업하기 좋아하는 측면은 선천적인 조건의 특기, 또는 흥미와 기호에 속한다. 요컨대 이는 선천적인 조건 중 하나로, 이런 모습을 포함한다. 하지만 꼭 사업 분야에 기호와 특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주로 남을 해치거나 속이는 방식으로 사업을 한다. 자신의 노력과 정당한 경영 수단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남을 속이고 사취하거나 법의 허점을 이용해 이익을 내고 돈을 버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이 부류는 늘 이런 식으로 사업을 하는데, 이는 인성의 본성과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좋은 인성이겠느냐? (좋지 않은 인성입니다.) 어떤 부분이 좋지 않으냐? 종합적으로 봤을 때, 이런 부류의 인성은 인품이 좋지 않다. 사업하는 목적이 돈이 아닌 사람이 있겠느냐? 만약 정당한 경영 수단으로 돈을 벌었다면 그것은 너의 능력이자, 하나님이 너에게 부여한 특기가 가져다준 혜택이다. 하지만 경영 수단이 정당하지 않으며, 정당한 거래 루트를 통해 돈이나 이익을 벌어들인 게 아니라 속이고 사취해 손에 넣었다면, 이런 부류의 인격과 인품은 저열하다. 이런 부류에게 양심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속된 말로 이런 부류는 양심이 아주 많이 망가져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어째서 양심이 없다고 하겠느냐? (일반적으로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을 해치고 속이는 짓을 한 후 양심에 참소를 받아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양심이 없는 사람은 이익을 얻기만 하면 되기에 양심에 어떠한 지각도 없이 계속해서 그런 짓을 합니다.) 그는 양심이 작용하지 않는데, 이는 양심이 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약 양심이 있다면, 양심이 작용할 것이다. 남을 한 번 속이면 양심이 질책을 받을 것이고, 비록 이익을 얻어도 마음이 괴로울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을 쓸 때는 낯 뜨겁고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고, 자신이 한 짓이 더럽고 저속하다고 느껴 앞으로 다시는 속이지 않을 것이다. 이윤이 아무리 커도 다시는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의 작용이다. 하지만 남을 해치고, 속이고, 기만하는 것에 능한 사람들은 매번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으며, 성공한 후에 그 돈을 쓰면서도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돈이 손에 들어오면 자신이 똑똑하고 잘났다고 느끼며, 남을 속이는 자신의 수법에 감사하며 매우 의기양양해한다. 그들은 물건을 팔 때 무게를 속이거나, 가짜 약, 가짜 인삼, 물 먹인 고기를 판매하는 등, 무엇을 팔든 가짜 상품을 섞어 팔고 부풀리며, 어떤 사업을 하든 전부 사기 수법과 함정이 숨어 있다. 그들은 항상 사기 수법을 통해 돈을 버는데, 어떤 사업을 하든 정직하게 제값을 받는 경우가 없다. 보아라.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할 때 주로 단골손님을 속인다. 예를 들어, 네가 늘 그 사람 가게에서 물건을 산다면, 그는 네가 돈이 있는 것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10위안에 파는 물건을 너에게는 100위안에 팔 것이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한테는 이 물건을 팔지도 않아요. 다 당신을 위해 남겨둔 거예요. 보세요. 우리가 이렇게 끈끈한 사이라니까요. 정말 사길 잘한 거죠!”라며 속은 사람이 오히려 고마워하게 만든다. 이 얼마나 능숙한 사기꾼이냐! 양심이 참소를 받지 않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며 양심의 지각도 없다. 그러므로 이런 부류는 양심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이성이 어떻든, 양심만 놓고 볼 때, 이런 부류는 인성이 없고 인격이 저열하다. 어느 정도까지 저열하겠느냐? 양심과 인성이 없다. 즉, 정상적인 사람이 갖고 있는 양심의 작용, 양심의 제약, 양심의 지각이 그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런 제약이 없기 때문에 그는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다. 사업을 하면 남을 해치고 속이며, 어떤 업무를 하든 몰래 속임수를 쓰고, 그곳의 규칙을 위반하며, 어떤 비도덕적인 짓도 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집을 지을 때면 전부 저질 자재를 사용하는 것이다. 중국의 ‘기울어진 건물’과 건물 붕괴 문제가 왜 생긴다고 생각하느냐? 바로 건설사가 폭리를 취하기 위해 콘크리트 안에 철근이 아닌 대나무 장대를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건물이 무너져 압사 사고가 나기도 했다. 그 악덕 건축업자는 양심이라고는 전혀 없어서 사람이 죽자 재빨리 자신의 배후 지지 세력을 찾아가 대응책을 취했다. 배후 지지 세력이 아주 강력하고 대응책이 있으면 쉬쉬하고 넘어갈 수 있다. 몇 사람이 죽어도 장례비만 좀 주면 그걸로 끝날 뿐, 악덕 건축업자를 추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악덕 건축업자의 양심은 아무런 지각도 없어서 몇 명이 죽든, 심지어 몇십 명, 몇백 명, 몇만 명이 죽든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악덕 건축업자에게 사람의 목숨은 개미나 마찬가지라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이 양심이 있겠느냐? 양심이 없는 사람은 인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사업을 할 때 남을 해치고 속이는 모습에서 나타나는 이런 수법들은 패괴 성품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패괴 성품이 있다. 어떤 패괴 성품이겠느냐? (흉악함과 간사함입니다.) 특징적이고 대표적인 패괴 성품이 바로 간사함과 사악함이다. 남을 속이고 사취할 수 있는 사람은 특히 간사하다. 그가 남을 해치고 속이는 수법은 때로는 네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라서, 속고도 그가 잘해 준다고 기뻐할 정도이다. 너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각성하고 자신이 속았음을 문득 깨달아 다시 그를 찾지만, 그는 이미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후다. 이러니 사람을 속이는 그의 수법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냐! 1980~1990년대에 중국 광둥(廣東) 지역은 상공업이 비교적 발달했는데, 몇몇 최신 가전제품은 아직 내륙으로 유통되지도 않아, 유행에 민감한 일부 내지인(內地人)들이 광둥에 가서 구매하곤 했다. 상인들은 그들이 내륙에서 온 것을 알고는 속일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내지인이 녹음기와 TV 등 전자제품을 구매하고 돈을 지불하면, 상인은 보증 기간을 알려주며 만약 제품에 문제가 있으면 교환 가능하다고 알려주었고, 이 말을 들은 구매자는 애프터 서비스도 좋다고 느꼈다. 구매자가 떠날 때가 되자 판매자는 포장해야 한다며 전자제품을 뒤쪽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구매자가 집에 돌아가 포장을 풀어 보니 그 안에는 전자제품이 아니라 벽돌과 돌만 들어 있었다. 구매자는 그제야 판매자가 물건을 바꿔치기했고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 찾아가기에는 너무 멀고 교통비도 적잖이 들기에, 그저 재수가 없었다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물건을 살 때는 물건을 받으면서 돈을 지불해야 하고, 그 자리에서 물건을 확인해야 확실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런 일은 출장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겪었는데, 지금은 이런 일이 어떤 한 도시에서만 드물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속이고 사취하는 일도, 사업을 하면서 남을 속이는 사람들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어째서 예전에는 이렇게 많지 않았겠느냐? 그 당시에는 아직 이런 속임수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속임수가 사회에 유행하기 시작하자 상인들이 너도나도 따라 하고 모방하다가 다들 이렇게 하게 된 것이다. 그들 모두가 이러는데, 설마 나중에야 양심이 패괴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 사람들은 그전에도 원래 양심이 없었다. 단지 그 당시 그들의 경험이나 식견으로는 그런 식으로 남을 속이고 해치는 법을 몰랐을 뿐이다. 이런 부류는 원래 양심이 없었는데, 거기에 더해 사회 풍조마저 패괴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면서 점점 더 무자비하고 모질게 된 것이고, 그 성질도 점점 더 악랄해진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사업을 할 때 남을 해치고 속이는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일을 할 때도 남을 해치고 속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의 사업 수단과 방식, 남을 해치고 속이는 일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그의 인성을 대표한다. 그와 같은 인성은 무슨 일을 하든, 설령 그것이 남을 해치고 속이는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남을 해치고 속이는 것보다 별로 나을 게 없다. 바로 이런 인성의 기초 위에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성질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즉, 양심의 지각이 전혀 없다. 이런 사람들은 관료가 되어도 말과 행동이 사업을 할 때와 차이가 없으며 양심이 작용하지 않는다. 남을 곤경에 빠뜨리고 속이며, 사람을 해치고 죽이고 법을 어기는 등, 인성, 도덕, 도의를 어기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사업을 해도 마찬가지이고, 정치를 해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과학 연구에 종사한다면, 다른 분야에 발 담고 있으니 그의 인성에도 변화가 있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말해 보아라. 만약 이런 부류가 교회에서 사무 사역을 한다면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는 것이겠느냐? 어떤 사람은 “아무개는 속세에서 사장과 CEO를 역임한 바 있습니다. 사업 수완이 특히 뛰어나죠. 다만 한 가지 떳떳하지 못한 면이 있는데, 간혹 남을 해치거나 속이곤 합니다. 이런 사람을 발탁해 교회 사무 사역을 맡기는 것이 적절한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이 좋은 사람이겠느냐? 진정한 인재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혹자는 늘 이런 사람들을 인재라고 생각한다. 몇 년 전 일부 교회에서 이런 사람들을 추천한 바 있다. 누구는 기업 CEO이자 고위 임원이고, 또 누구는 사회 10대 우수 청년이자 선진 인재, 모범 청년이며, 또 누구는 석사이자 교수이고, 또 누구는 국장, 시장, 기자를 역임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탓에, 하나님 집의 각종 사역을 사회에서 흡수한 다양한 직종의 인재와 엘리트가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들을 하나님 집의 각종 사역 책임자로 추천했다. 하지만 그들은 책임자가 된 후, 사역을 제대로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로 인해 교회 사역에서 혼란스러운 상황이 많이 발생했는데, 그야말로 엉터리였다! 이런 사람들은 막무가내로, 제멋대로, 겁 없이 함부로, 오만방자하게 일부 사역을 했을 뿐, 진정으로 진리 원칙에 따라 한 사역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무슨 일을 하든 절대 진리를 구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책임자가 될 수 있었겠느냐? 먼저,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온 엘리트이자 인재이고 기둥 같은 존재이니 하나님 집에서 반드시 중책을 맡고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며, 명망과 지위가 있어야 한다고, 하나님 집에 자신들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서서 책임자가 되어 사역을 감당하려 했다. 이 밖에, 하나님 집이 그들에게 기회를 준 것도 있다. 그들이 하기를 원하니 한번 해 보게 한 것이다. 노새인지 말인지 끌어내 써 봐야 아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재능과 견실한 학식이 없다. 그들이 진리를 깨달았는지, 진리 원칙대로 행할 수 있는지는 차치하고, 그들 자신의 자질, 재능, 식견, 다양한 사물에 대한 이해 능력, 통찰력과 일 처리 능력만 놓고 봐도, 대부분 진정한 재능과 견실한 학식을 갖고 있지 않다. 진정한 재능과 견실한 학식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중책을 맡아 사역을 감당하려고 하겠느냐? 바로 사람의 야심과 허영심 때문이며, 뻔뻔해서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늘 실력을 뽐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역을 제대로 하지 못해 웃음거리가 되었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들이 각종 사역의 책임자로 있는 동안, 그 사역들이 전부 두서없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두 글자로 표현한다면 바로 ‘혼란’ 그 자체였다. 사람을 쓰고 일을 처리하는 데 원칙이 없었고, 제물도 불합리하게 사용되었으며, 각종 사역을 적시에 점검하고 처리하지 않았고, 심지어 기본적인 사무 사역도 대부분의 사람이 감당하지 못해서 엉망진창으로 해 버렸다. 농사짓기, 닭 사육, 양 사육 등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어떤 계절에 무엇을 심어야 하는지, 언제 땅을 갈고 비료를 주고 잡초를 뽑아야 하는지, 언제 수확해야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해 사역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애초에 이런 사람들을 쓰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 집이 자신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더니, 그들을 쓴 결과가 어떠하였느냐? 사역이 엉망진창이 되는 바람에 결국에는 하나님 집에서 나서서 그 난장판을 뒷수습해야 했다. 어떤 사역이든 모두 상부가 지도하고 점검해야 했고, 심지어 실내 및 환경의 청결 유지와 같은 사소한 일조차 상부의 지도를 받아야 했다. 결국, 상부의 엄격한 관리, 계획, 총괄을 통해 처음부터 조금씩 지도하고 지휘하였으며, 이제야 비로소 정상 궤도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농장에 존재하는 문제만 보더라도, 청결 관리를 해 줄 적합한 사람이 없으면 안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야생 동물처럼 아무 곳에나 쓰레기를 버렸으며, 말할 때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정말이지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세부 사무에 직면했을 때, 이 소위 ‘인재’ 중에는 이를 체계적으로,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심지어 청결과 환경 관리 같은 사소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런 표면적인 일들은 진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그저 약간의 자질과 양심만 있다면 제대로 해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표면적인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쓸모없는 자일 것이다. 그들은 양심과 이성도, 자질과 재능도 없다. 그런데도 관료가 되어 결정권을 가지려 하고, 관료가 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으면 반항하고 따진다. 이는 마귀 아니겠느냐? 이런 쓸모없는 자와 마귀가 도태된 후, 농장은 상부의 관리, 지도, 계획을 통해 매우 잘 지어졌다. 다들 매우 좋아했으며, 현지인들도 무척 부러워하고 약간은 질투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농장이 이렇게 깨끗하고 예쁘게 관리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10년이 걸려도 이렇게 바꾸지 못했는데, 당신들은 어떻게 이렇게 빨리 관리를 잘할 수 있었나요? 이렇게 바꾸는 데 몇 년이 걸렸나요?” 사실 일 년 만에 그렇게 대대적으로 바뀌었다. 폐허를 형제자매들 눈에 공원과 화원으로 보이도록 바꾸었더니, 심지어 그곳이 파라다이스나 그림 같다고, 계획적으로 건설하니 정말 다르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곳은 원래 사방에 흙과 진흙이 드러나 있고 쓰레기와 난장판으로 가득했었다. 하지만 추후 정리하고 관리하면서 점점 좋아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들 이런 생활 환경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조금만 더러워지거나 난장판이 되면 오히려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아라. 이렇게 관리한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이 혜택을 받게 되었고 좋은 생활 습관을 지니게 되었다. 상부가 직접 지도했기 때문에 이렇게 건설된 것이다. 반면, 소위 인재라는 이들 중에는 사실 실질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다. 그들은 가장 기본적인 청소 작업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방 안을 어떻게 배치해야 적합해 보이는지도 알지 못하며, 누구에게 어떤 본분이 적합한지도 꿰뚫어 보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무슨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역도 하지 못한다. 자신의 생활 환경도 관리할 줄 모르는데, 그런 그들이 무슨 인재겠느냐? 그들이 추천한 사람은 지능조차 없고, 말도 명확히 하지 못하며, 일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의견이 전혀 없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이 말하는 ‘인재’란 따옴표가 붙는, 진정한 재능과 견실한 학식을 갖춘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인재라면 먼저 인성에 안목, 감상력, 식견 등 몇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만약 이런 것들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면, 구체적인 일을 할 때 망신만 당할 것이다. 정원이나 한두 마지기 땅조차 관리하고 계획할 줄 모르고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한다면, 이는 인재가 아니다. 너에게 지구 전체를 관리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몇 마지기의 땅만 잘 관리하라는 것이다. 예쁘고 깨끗하게 정리하여 아름다운 환경을 조성하면, 그 안에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워지겠느냐! 새들조차 그곳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소위 ‘인재’라고 불리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구체적인 일은 전혀 하지 못한다. 이는 인재가 아니라, 인성에 무언가가 결여된 것이다.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자신을 드러내 리더 일꾼이 되고 싶어 하고, 책임자가 되어 중책을 맡으려 하니, 이는 어떤 성품이냐? 이는 교만한 성품이다.

사업을 하면서 남을 해치고 속이기를 좋아한다는 주제로 돌아가 보자. 남을 해치고 속이는 것은 어떤 문제에 속하겠느냐? 한 가지 측면에서 보면 인성이 나쁘고 양심과 이성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행위를 봤을 때, 그가 표출하는 것은 어떤 패괴 성품이겠느냐? 우선 이런 부류는 성품이 간사하고 사악하며, 그다음으로는 진리를 싫어하고 강퍅한데, 사람을 해칠 때의 그 독기가 바로 흉악함이다. 그는 남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돈이 있든 없든, 똑같이 속이며 가차 없이 군다. 이런 부류는 모든 측면에서 패괴 성품이 매우 심각하다. 말해 보아라. 이런 부류가 쉽게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패괴 성품을 보면, 구원받기 쉽지 않다. 그럼 인성을 본다면, 어떤 측면이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어렵게 하겠느냐? 한 가지 근원이 있지 않으냐? (양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맞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구원받기 쉽지 않다. 양심이라는 기관이 이미 없어지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양심의 작용이 없어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기본 조건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구원받기 어렵다. 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부류가 힘쓰기를 원하고, 또 얼마간 힘을 쓸 수도 있어서 마지막에 그 덕에 하나님의 은총을 좀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구원받는 게 아니며, 구원받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기에, 일부 봉사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기준에 맞게, 그것도 끝까지 힘을 썼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힘쓰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설령 끝까지 힘을 써서 살아남는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구원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살아남는 것과 구원받는 것은 별개의 개념이며, 이는 구원받는 것과는 차이가 있고 구별된다.

사람의 일 처리 원칙과 마지노선, 일 처리 방향과 목표는 대부분 인성과 관련이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거나 약간의 정의감이 있다면, 이는 양심의 지각이 있다는 의미이며, 그래도 약간의 양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사람됨 자체가 정의감이 별로 없고, 이렇다 할 긍정적인 선택도 하지 않으며, 사악한 일 하기를 좋아하거나 긍정적인 사물에 큰 반감을 갖는다. 특히 누가 긍정적인 행동 방식을 이야기하거나, 사람이라면 인성, 양심, 도덕적 마지노선을 갖고 있어야 하고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설교한다고 생각한다. 좋게 말해 설교라는 거지, 사실은 멸시하고 비웃는 것이다. 그는 ‘당신 사는 꼴이 얼마나 비참한지 좀 봐! 당신은 속이고 사취할 줄 모르고, 교활한 수단으로 이익을 볼 줄도 모르지. 사람이 늘 그렇게 착실하고 겁이 많아. 요즘은 간 큰 놈은 배불러 죽고, 간 작은 놈은 굶어 죽는 세상이야. 겁내면 안 돼!’라며 네 그런 처신은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너처럼 양심과 원칙에 따라 처신하는 것을 겁이 많다고, 자신처럼 속이고 사취하는 것을 대담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대담해서 그렇겠느냐? 어떤 사람은 큰 붉은 용 국가에서 하나님을 믿다가 박해를 받고 체포를 당해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 이것이 대담하거나 겁이 많은 것과 관계가 있겠느냐? (관계없습니다.) 이는 사람의 추구와 관계가 있다. 그는 인성 속에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추구와 지향점이 있으며, 이는 대담하거나 겁이 많은 것과는 무관하다. 어떤 사람들은 사업을 할 때 속이고 사취하는데, 체포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할 위험, 또는 파산과 도산의 위험에 여러 번 직면해도 속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속이다가 사람을 죽게 해도 개의치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사업을 해 남들을 속이려고 아예 유령회사를 차리기도 한다. 사실 그 회사는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런 실체도 없고 제품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저 말발로 여기저기서 주문을 받고는 상대방이 계약금을 내면 도망쳐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한 건씩 속이고, 속여서 번 돈으로 온 가족이 호의호식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속였겠느냐? 어떤 상급 기관이든 다 속이는데, 때로는 일촉즉발의 위험한 순간에 누가 그의 속임수를 꿰뚫어 보고 폭로해 체포될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번에 잡히지 않은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다음번에도 속이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속여서 돈을 손에 넣으면 ‘이겼다’고,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네가 그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정부가 범죄로 규정하고 체포하니, 용기가 안 나네요!” 그는 속이고 사취할 때는 체포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예배를 드리러 가면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정말 대담하군요. 지금 나라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강력하게 단속하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예배를 드릴 수 있나요?” 네가 “정부는 당신들처럼 속이고 사취하는 사람들도 강력하게 단속하고 있습니다. 유령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잡고 있죠. 그런데 당신은 왜 무서워하지 않나요?”라고 하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나쁜 짓을 할 때는 잡힐까 봐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고 바른길을 갈 때는 오히려 잡힐까 봐 두려워하다니, 이는 대체 어떤 작자냐! 이는 인성의 차이 아니겠느냐?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바로 이런 차이가 존재한다. 패괴 성품은 다 똑같고, 모두 그 몇 가지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인성의 차이를 보면, 어떤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 집의 사람이 되지도 못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도 구원받을 수 없다. 어떤 측면에서 알 수 있겠느냐? 인성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을 믿는 일에는 특히 겁을 내고 용기를 내지 못하지만, 사업을 할 때는 속이고 사취하며 어떤 불법적인 일도 다 할 수 있고, 어떤 수단도 다 사용한다면, 정부가 아무리 강력하게 감시하고 법률이 아무리 정죄하고 형을 내려도 개의치 않는다면, 처신에 마지노선이 없고 일 처리에 뒷일을 고려하지 않으며 오직 이익만 좇는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도 진리를 얻지 못해 구원받을 수 없다. 그는 진리가 아닌 돈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업을 하기만 하면 남을 해치고 속이며 농간을 부릴 수 있다. 악독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인데, 이런 인품을 갖고 있다면 완전히 끝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럼 이런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 집에 헌금한다면요?”라고 말하는데, 하나님 집은 이런 돈을 원하지 않는다. 바른길에서 번 돈이 아니라면 하나님 집은 원하지 않는다. 사업만 했다 하면 속이고 사취하는 이런 사람은 인성이 매우 나쁘다. 어느 정도로 나쁘겠느냐? 네가 그에게 양심에 손을 얹어 보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아무 느낌이 없어요. 양심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양심이 뭔지도, 양심이 한 근에 얼마인지도 모르겠어요.” 이 말을 듣고 너는 깨닫게 된다. ‘어쩐지 같은 사업을 해도 다른 사람보다 돈을 빨리 벌더라니. 어쩐지 손님들이 다들 그의 물건을 사더라니. 이 사람은 수단이 있어. 사업에 흑막도 있고, 사기 행위도 심각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부끄럽다고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보세요. 당신들은 정직하게 사업하죠. 사람을 한 번 속이기만 해도 놀라서 심장이 계속 뛰잖아요. 하지만 저는 두렵지 않아요. 공상국(工商局)과 경찰이 증거를 찾지 못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요. 절 고소하고 싶다고요? 증거가 없잖아요. 제가 얼마나 기막히게 속였는지 보세요! 당신은 저처럼 할 수 있나요? 못 할걸요! 당신은 속이려고 하면 바로 들통이 나잖아요. 당신은 그런 수단도 없고 자질도 부족하죠!”라며 뽐내고 자랑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악인이다. 그가 구제받을 희망이 있겠느냐? 구제 불능이다. 이런 사람은 패괴 성품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이 너무 나빠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점이 나쁘겠느냐? 인성과 양심이 없으며, 양심을 잃어버린 점이 나쁘다. 양심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바로 일 처리에 양심의 마지노선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마지노선은 양심의 기초 위에 세워지며, 양심이 바로 그 마지노선이다. 네가 어떤 일을 해서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누군가를 해친다면, 결국 그 행위는 도덕, 양심, 인성에 어긋나므로 그 일을 하는 순간 영원히 양심의 참소를 받게 된다. 이는 평생의 오점이니,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누구를 속였든, 네가 속인 금액이 얼마든, 설령 네가 속인 대상이 악인과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 또한 속인 것이다. 그러니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사람도, 속이지 마라. 이것이 바로 양심의 마지노선을 갖고 처신하는 것이자, 양심이 작용해 너를 제약하는 것이다. 양심이 작용하면 일 처리에 마지노선이 생기지만, 양심이 작용하지 않으면 마지노선을 깨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된다. 그럼 너는 인성이 없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정도의 일로 짐승만도 못하다고 하는 것이 다소 지나치다고 생각된다면, 좀 더 보수적으로 그 사람은 짐승이나 마찬가지이며 인성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말해 보아라. 사람인데 인성이 없다면, 그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짐승 아니겠느냐?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은 사람은 직립 보행할 수 있고 언어를 사용할 수 있지만, 짐승은 인류와 같은 언어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너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식으로 속이고 사취하는데 짐승은 이런 수단이 없으니, 이런 부류를 짐승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사실 이런 부류는 정말 짐승만도 못하다.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들은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돈만 좋아하는데, 이는 본성의 문제라서 아무도 바꿀 수 없다. 이런 부류가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수탉이 알을 낳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같은 패괴 인류의 일원이지만, 살인, 강도,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 부류가 인성이 매우 나쁜 편이라고, 인류 중에서도 인간쓰레기이자 인간 말종인 셈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경제가 무척 발달한 시대에는 사업을 하며 속이고 사취하는 이런 부류가 특히 많다. 하지만 이 부류가 얼마나 많든, 결국 이런 모습은 인성 한 측면의 문제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한 사람의 양심이 어떤지, 양심의 마지노선이 있는지 등은 인성을 가늠하는 한 가지 지표이다. 인성조차 없는 사람이 무슨 구원을 논한단 말이냐? 최소한 너의 인성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속이고 사취할 수 있는 부류의 인성에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조건이 아예 갖춰져 있지 않다. 그러니 네가 그에게 진리를 받아들여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 구원받을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양심에 어느 정도 지각이 있어서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양심이 얼마간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에게 진리를 교제하고, 어떻게 진리에 진입해야 하는지, 어떻게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야 하는지, 어떤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고 어떤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면,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에게 진리를 교제하는 것은 적절하며, 그들은 교제 대상이 맞다. 하지만 남을 해치고 속이는 것을 사업의 주요 수단으로 삼는 부류와 진리를 교제한다면, 그것은 쇠귀에 경 읽기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사업을 하는 이 부류를 대할 때는 사업을 할 때나 다른 사람과 거래를 할 때 그가 사용하는 수단이 정당한지, 양심의 마지노선이 있는지, 양심의 제약을 받는지, 거래할 때 양심이 작용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만약 양심이 작용하고 양심의 제약을 받는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니 교제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이런 사람에게는 복음도 전할 수 있다. 이런 사람에게 진리를 교제하여 그가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는 것이다. 사업하기 좋아하는 측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치겠다.

다시 문예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문예를 사랑하는 이런 부류의 사람은 천성적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것과, 악기 다루는 것을 좋아하고, 공연하는 것도 좋아한다. 사람이 많을수록 흥이 나서 모두가 즐겁게 여가 시간을 보내도록 만담, 단막극, 노래, 춤, 악기 연주 등과 같은 공연을 하려 한다. 문예를 사랑하는 것은 어떤 측면의 모습에 속하겠느냐? 우선 문예의 내용이 긍정적인 사물인지 부정적인 사물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너희가 명확히 말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먼저 물어볼 테니 대답해 보아라.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인성의 정당한 욕구이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인성의 정당한 욕구이다. 즉, 사람은 노래나 신체 언어, 또는 어떤 예술적인 방식을 통해 생활을 더 재미있고 즐겁게 만들며, 어떤 기분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문예를 사랑하고 노래, 춤, 악기 연주, 공연을 좋아하는 이런 모습은 어느 범주에 속하겠느냐? (취미와 관심사입니다.) 취미와 관심사라면, 어느 측면에 포함되겠느냐? (선천적인 조건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음악과 춤을 좋아한다. 막 걸음마를 뗐을 때부터 음악이나 북소리만 들으면 손발을 움직이며 춤을 추고 싶어 한다. 말은 못 해도 마음속으로 이런 느낌을 받으니, 이는 천성적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아이는 대여섯 살이 되어도 노래나 춤곡을 틀어줬을 때, 혹은 텔레비전에서 방송하는 어떤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틀어줬을 때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 음악을 들으면서도 별다른 표정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 또한 천성적인 것이다. 반면, 천성적으로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음악 연주를 들으면 손발을 움직여 춤을 출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이 노래하는 것을 한 번만 들어도 몇 소절을 흥얼거리며 부를 수 있다. 보아라. 이렇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뼛속 깊이 이런 것들을 타고났으며, 마음속으로 이런 것들을 좋아하고 잘해서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할 줄 안다는 증거이다. 심지어 일부 특출난 아이들은 일고여덟 살밖에 안 됐는데도 특정 지역의 전통극을 몇 소절 부를 줄 아는데, 꽤 멋들어지게 부르고 음정과 박자도 정확하다. 참으로 드문 일 아니냐! 또 유행가를 부를 줄 아는 아이도 있고, 인도 춤, 신장(新疆) 춤, 현대 무용 같은 춤을 출 줄 아는 아이도 있다. 이런 아이는 춤곡이나 음악을 들으면 내심 즐거워하며, 음률을 따라 재빨리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면, 아이는 마음속으로 몰래 부르거나 적당한 장소를 찾아 큰 소리로 부른다.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해서 아무도 못 말린다. 이런 아이는 부모의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고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어렸을 때부터 이런 특기나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선천적인 조건으로, 선천적으로 문예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예에 관심이 있으면 반드시 그 분야에 종사해야 하고, 평생 반드시 그 분야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냐?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정해 놓았는지에 달려 있고, 하나님이 어떻게 주재하고 안배하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하나님이 문예 분야에 종사하도록 안배했다면, 평생 그 분야를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분야에 종사하도록 안배하거나 정해 놓지 않았다면, 그런 취미와 관심사가 있는 것에 불과할 뿐, 좋아하더라도 그 분야에 종사할 수 없다. 어떤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문예를 좋아했는데, 아이에게 그런 취미와 관심사가 있는 것을 알게 된 부모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럼 시켜야지 뭐. 우리 집에서도 문예 인재가 한 명 나오는 거야. 어쩌면 유명해지거나 대가가 될지도 모르지!’ 그러고는 아이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결국은 아이도 예술대학에 합격했다. 졸업하고 나서까지 아이의 문예에 대한 취미와 관심이 식지 않더라도, 반드시 그 분야에 종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분야에 종사하려 할 때 마음이 바뀌어 그 일에 대한 태도와 견해가 변할 수도 있고, 또 어쩌면 객관적 환경과 관련된 다양한 이유 때문에 그 분야와 어깨만 스치고 지나갈 수도 있다. 이는 모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볼 때, 사람의 취미와 관심사는 그의 선천적인 조건이다. 즉, 그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런 특기를 안배하고 그의 인성에 특수한 무언가를 더해 주어 그가 선천적으로 음악이나 춤과 같은 문예 측면에 특히 민감하고 뛰어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생활 속에서 노래와 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성격이 활발하든 수줍음이 많든, 말하기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어쨌든 그의 뼛속 깊은 곳에는 노래, 춤, 공연을 좋아하는 그런 떼어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를 때는 무척이나 흥겨워하고 영적으로 자유롭지만, 막상 그와 대화를 나누어 보면 무척 수줍어하고 말도 잘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는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는 무척 조심스럽고, 긴장하고, 두려워하며, 그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무대에 올라 공연할 때는 매우 능숙해서 마치 다른 사람 같다. 이방인은 이를 두고 “조상님이 먹고살 길을 마련해 주셨다.”라고 하는데, 이 말이 맞느냐? 사실 이는 하나님이 정해준 것이다. 사람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기, 취미, 관심사는 하나님이 정해준 것과 관계가 있으며,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기와 관심은 모두 하나님이 정해준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취미와 관심사를 주어야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것을 좋아하고, 맘에 들어 하며, 그것에 특히 열중하게 된다. 또한 그런 일 또는 그런 일과 관련된 일을 할 때, 마음이 무척 평온하고 차분해지며, 특히 흥미를 느끼게 된다. 그러니 만약 네가 어떤 측면의 특기가 있다면 하나님 집 사역에서 이를 필요로 할 경우, 마땅히 특기와 관련된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그것이 너에게는 특기를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측면의 특기는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이므로 너의 사유재산이 아니니 마음대로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집 사역에서 필요로 할 때 특기를 발휘해 하나님에게 바쳐야 하며, 본분 이행에 사용해야 한다. 그것은 네가 구원받는 유리한 조건이자 하나님이 너에게 준 우월한 조건이다. 그러니 너는 그것을 남김없이 잘 발휘하고 활용해야 한다. 그러면 너는 특기를 발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도 있으니, 매우 좋지 않으냐? (매우 좋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특기 중 문예 측면의 특기는 고대에나 현대에나 모두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이에 종사하는 사람은 천한 부류로 여겨졌다. 특히 비교적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사회 환경에서는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문예를 대했기에, 문예는 시종일관 일부 사람들에게 경시당했다. 문예가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규정되고, 이런 등급이나 지위, 또는 정의를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사람의 관념과 봉건사상, 혹은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치우치거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과 관점 때문이다. 또 다른 요인은 바로 사악한 사회와 사악한 흐름의 영향을 받아 이 업계에 나쁜 풍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문예를 나쁘게 평가하게 된 것이다. 이 업계에 종사하는 일부 사람들이 문예 측면의 취미와 특기를 이용해 반면교사적이고 부정적이며 사악한 일을 저질러서 문예를 희화화하고 변질시켰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문예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많이 갖게 되었으며, 문예에 종사하거나 관련된 취미와 관심사가 있는 사람들조차 부정적인 인물로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회와 인류가 이 측면의 특기를 어떻게 보든 간에, 하나님 집의 사람이든 하나님 집 밖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결국 누구든 이 측면의 특기나 취미와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 특기와 관심이 선천적인 조건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바로 그것이 선천적인 조건이기 때문에, 그것은 부정적인 것도 아니며 사악한 것도 아니다. 단지 어떤 특정한 시대에 모종의 잘못된 사상과 이론의 주도하에 문예와 문예 종사자를 사악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뿐이며, 이는 역사에서 종종 발생하는 일이다. 마치 노란 콩으로 두부를 만들면 맛있어서 사람들이 먹으려 하지만, 두부가 발효되어 곰팡이가 생겨 취두부(처우더우푸, 臭豆腐)가 되면, 터무니없는 사람은 두부와 노란 콩을 나쁜 것으로 규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관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취두부의 냄새가 고약해 먹기 싫다고 해서 두부가 나쁘고 노란 콩도 나쁘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논리적 추론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분명 옳지 않으며, 치우친 것이다. 따라서 사회에 있는 문예 단체에 사악하고 어두운 일이 많더라도, 문예 자체가 사악하고 어둡다거나 추악하고 부정적인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되며, 문예를 좋아하고 문예에 능한 사람들을 사악하고 추악하며 부정적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추론이며,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만약 그중 일부 사람들이 사악하다고 해서 그들이 잘하는 문예 또한 사악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다양한 특기는 모두 인류 세계에 봉사하는 것이며, 인류에게 문화생활이 없다면 너무나 무미건조할 것이니, 하나님이 사람에게 문화생활을 안배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한 사악한 것들은 모두 마귀와 사탄이 기회를 틈타 교란한 결과이다. 비록 지금은 하나님이 만든 이 인류가 완벽한 인류, 즉 최종적으로 온전케 된 인류에 비해 완벽하지 않고 결함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만든 인류가 사악하고 부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개념이다. 이해되지 않았느냐? 이 사악한 시대와 세계가 문예를 어떻게 정의하든, 노래와 춤 등 문예 측면의 취미와 관심, 또는 특기를 어떻게 정의하든, 결국 문예는 인성이 필요로 하는 것이자, 일부 특별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취미와 관심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취미와 관심사가 사람이 타고나는 것이자 사람이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며, 하나님이 준 것이다. 즉,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사람을 각기 다양한 직업에 배치하는데, 어떤 이는 상업 분야에, 어떤 이는 교육 분야에, 어떤 이는 농업 분야에, 어떤 이는 문예 분야에 배치한다. 사람이 태어날 때 선천적으로 미리 그 측면의 특기를 사람의 내면에 심어놓는 것이다. 즉 사람의 육적 생명 안에는 각자 다른 취미와 관심사, 또는 특기가 있는데, 이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너에게 무언가 특수하고 남다른 것을 부여한 것이다. 만약 너에게 취미와 관심사, 또는 특기가 없다고 해도 너에게 부여해 주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이 없어도 너는 여전히 살아갈 수 있으며, 여전히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 너는 다른 사람보다 부족하지 않다. 왜냐하면 너에게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본분을 이행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너와 다른 사람의 패괴 성품은 동일하다. 단지 사람마다 선천적인 조건이 달라 각기 다른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핵심은 무엇이겠느냐? 핵심은 인성의 차이다. 선천적인 조건으로 특별한 취미와 관심사, 또는 특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무슨 특별한 인재인 것은 아니지만, 선천적인 조건으로 어떤 취미와 관심사 또는, 특기를 가지지 않은 사람 또한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사람은 다 비슷하다. 그저 하나님이 너에게 어떤 것을 주었다면 너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주지 않았다면 요구하지 않는 것뿐이다. 비록 하나님이 너에게 취미와 관심사, 또는 특기를 주지 않았더라도, 너의 인성에 있는 각 측면의 것들, 또는 조건만으로도 충분히 하나의 사역이나 본분을 감당할 수 있다. 만약 네가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문예를 사랑하는 측면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다. 이 측면의 특기에 대한 정의가 명확해졌을 것이니, 문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별종이라거나 사악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 치우치게 이해한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을 올바르게 대하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올바르게 함께하며, 그들이 잘하는 것과 할 줄 아는 것을 본분에 활용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만약 네가 리더 일꾼이라면, 그들이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도록 올바른 방식으로 돕고, 지도하고, 인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정상 궤도에 올라 취미나 관심사와 관련된 본분을 이행하여 기준에 맞는 피조물이 됨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각 측면의 취미와 관심사, 또는 특기를 헛되게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취미와 관심사와 관련된 본분을 이행할 수 없다면 다른 본분을 이행해도 괜찮지만, 그들이 자신만의 취미와 관심사를 갖는 것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니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다. 지금 하나님 집에서 몇몇 새로운 가수들이 노래를 녹음했다. 새로운 가수는 업무 지식을 열심히 배우고 노래를 연습해서 마침내 완성된 곡을 녹음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무대 뒤에서 무대 앞으로 나오게 되었다. 비록 이들의 노래가 전문적인 수준과는 거리가 있고 전문 가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아직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고 별로 성숙하고 노련하게 부르지 못하는 노래도 좀 있지만, 목소리가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가수들도 몇몇 있고 퍼포먼스 또한 그다지 훌륭하지 않지만 그들의 본분 이행 태도는 격려할 만하다. 일반인이 화면 앞에 서는 새내기 가수나 아마추어 가수로 변했다는 것만으로도 격려할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이 일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그들을 좀 격려하라는 것이다. 이런 새내기 가수와 신인 가수들의 노래 영상이 인터넷에 업로드되면 많이 격려해 주고 ‘좋아요’를 눌러주라는 것이다. 깐깐하게 트집을 잡지도 말고, 멸시하거나 우월감에 젖은 태도로 그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지도 말아라. 그런 태도는 좋지 않다. 인성이 없는 것이며, 적어도 사랑과 포용이 없는 것으로, 형제자매를 대할 때 마땅히 가져야 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그들이 용기를 내어 화면 앞에 나서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좋아요’를 눌러주고 격려의 박수를 보내야지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논하지는 말아야 한다. 만약 네가 이러쿵저러쿵 논한다면, 너라는 사람은 인격이 저열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그들은 화면 앞에 서서 노래할 용기라도 있지만, 너는 그런 용기라도 있느냐?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느냐? 그러지도 못하면서 그런 험담과 비인간적인 말을 한다면, 이는 네가 질투하고 있으며 너의 인성이 좋지 않다는 의미이다. 질투하지 말고, 하나님 집에 노래하는 인재가 더 많아지는 것을 기뻐하고 축하해야 한다. 이는 좋은 일이니, 이 측면의 특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기능을 발휘하도록 기회를 주어라. 사람은 본래 믿음이 그다지 크지 않으며, 기껏 가지고 있는 취미와 관심을 발휘할 곳도 없다. 만약 그가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마음으로 노래 영상을 녹음했다면, 너는 적어도 두세 번은 진지하고 자세하게 들어보고 격려해야지 뒤에서 방해해서는 안 된다.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그가 부른 노래를 많이 듣고 ‘좋아요’를 많이 눌러 달라고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무척 잘 부르고, 진심을 다하며, 각 구절을 명확하게 부르고, 옷차림과 행실도 바르고 단정해서 사람들이 보기에도 매우 적절해 보이지만, 어떤 사람은 목소리와 기교가 조금 부족하다. 그런 경우, 만약 네가 음악을 좀 알아서 단점을 찾아낼 수 있더라도, 비웃지 말고, 올바르게 대하며, 계속해서 격려하고 지지해야 한다. 이것이 가족으로서, 형제자매로서, 마땅히 가져야 하는 태도이다. 나쁜 사람들이 남을 폄하하고 공격하는 짓을 따라 하지 말아라. 자신은 무대에 오르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무대에 오르면 질투하고 방해하며 뒤에서 험담하는 것은 인성이 없는 것이다. 이런 처신은 좋지 않으며 비열하다. 설령 네가 단점을 찾아낼 수 있더라도 그들을 격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형제자매이며, 전문 가수가 아니고,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이렇게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모색하고 연습하며 힘들게 노력한 성과인데, 왜 격려하지 않는 것이냐? 네가 격려하고 포용하는 법을 배우면, 그들의 노래에 결함이 좀 있는 것을 발견하더라도 사랑으로 포용하고 올바르게 대할 수 있게 되며, 이는 너라는 사람이 인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은 늘 하나님 집의 가수를 이방의 전문 가수와 비교하며 하나님 집의 가수를 무시하고 이런저런 단점을 찾아내는데, 이는 인성이 없는 것이다. 항상 남의 결점만 들추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우월하다고 느끼면서, 왜 너는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좋은 노래도 한 곡 못 부르는 것이냐? 남의 단점을 들추지 말아라. 교회의 가수들은 모두 전문 가수 출신이 아니지만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 바로 그들이 하는 이 사역은 어떤 직업이나 이 업계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본분을 이행하는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그들의 본분 이행은 바로 노래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증거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격려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성이 있는 것이다. 신인 가수의 노래를 듣자마자 단점부터 찾으며, “이 사람 목소리가 별로입니다. 아직 미숙하고, 박자도 맞지 않아요. 음정도 정확하지 않고요. 안 들을래요. 다들 듣지 말고, ‘좋아요’도 누르지 마세요!”라고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에 왜 그렇게 진지하게 구는 것이냐? 노래를 좀 못한다고 해서, 미숙하고 노련하지 않으며 전문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 원칙을 위배한 것이란 말이냐? 아니다.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본분 이행 원칙에 따라 판단해야지, 너 자신의 입맛과 안목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듣기 싫은 말을 한마디하자면,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는 것이냐? 만약 네가 정말로 잘 안다면, 어째서 유명한 찬양도 한 곡 부르지 못했느냐? 너 스스로도 부르지 못했으니 남을 평가할 자격도 없다. 물론, 설령 네가 불렀다고 해도 남을 평가할 자격은 없다. 애초에 그들이 이 사역을 하는 것은 본분을 이행해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지, 문예 업계나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성격이 다르다. 노래를 잘 부르든 못 부르든, 그들은 마음을 다해 일을 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 전문적인 수준이 어떤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전문적인 수준은 학습하고 장기간에 걸쳐 실천해야만 조금씩 도달할 수 있다. 하나님 집의 신인 가수는 지금 이런 수준이지만, 그래도 올바르게 대해야 하고 격려하고 지지해 주어야 한다. 남의 단점을 들추지 말고, 자신을 과시하지 말아라. 네가 과시하면 사람들은 너를 역겨워한다. 반대로 네가 과시하지 않고 여러 번 듣는다면, 사람들은 너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고, 마음이 하나님 집을 향해 있으며, 포용력이 있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네 인성의 장점이자 강점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너를 좋아할 것이며, 하나님 또한 너를 좋아할 것이다. 만약 네가 자신을 드러내고, 항상 남의 단점을 들춰내며 자신이 뛰어나고 전문가라고 과시한다면, 이는 하나님 집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이다. 방해하는데 하나님이 너를 좋아할 수 있겠느냐? (아니요.) 하나님은 물론 형제자매들도 너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노래하는 사람이 너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느냐? 왜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고 남을 방해하려고 하는 것이냐? 네가 그 사람 한 명만 방해하는 것이겠느냐? 너는 하나님 집 사역과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너를 좋아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다른 사람이 부른 노래에서 단점을 발견해도 판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전문적인 일에 종사하든 결코 하루아침에 전문적인 수준에 도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쉬운 일은 없으며 전부 단련과 연습을 거쳐야 하고, 전문가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게다가 사람마다 자질도 다 다르다. 하나님도 그들에게 전문적인 수준을 요구하지 않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들에게 요구하느냐? 늘 다른 사람에게 어떤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비이성적이다. 그것은 네가 교만한 것이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앞에 나서면 마음이 불편해져서 기어코 험담이나 듣기 거북한 말로 비꼬고 조롱하면서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고 질투심을 해소하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느냐? 이 얼마나 상스럽고 저속하냐! 이것이 바로 비열하고 야비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인성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질투가 나더라도 남들 앞에서 말하지 말아라. 정말로 참지 못하겠다면 아무도 없을 때 혼자 말해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도 말고, 다른 사람을 부추겨 너와 함께 판단하게 하지도 말아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 다른 사람이 감탄하고 하나님도 기억할 만한 일을 해야지 남을 방해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네가 관용을 베풀고, 지지하고, 격려하고, 보호하고, 옹호할 수 없다면, 너에게 그럴 인성이 없다면 적어도 방해하는 말이나 행동은 하지 말아라. 그것이 최소한의 도리이자 마지노선이다.

문예를 사랑하는 측면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마쳤으니, 이제 연예인의 사생활에 관심 갖기를 좋아하는 측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런 사람은 연예인이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는지, 어디로 놀러 가는지, 성형을 했는지, 누구와 친한지, 어떤 이성 친구들이 있는지, 어떤 성적 파트너들이 있는지, 심지어 사생아를 몇 명이나 낳았고 어떤 고위 관리나 재벌과 관계를 맺었는지 등 연예인의 사생활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다. 이 부류는 연예인의 사생활에 관심도 많고 연예인의 의식주, 말과 행동, 생활 태도 모방하기를 특히 좋아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들의 행보 및 각종 사상과 관점 따르기를 매우 좋아한다. 예를 들어 보자. 연예인이 특정 품종의 강아지를 키우면 그도 키우고, 연예인이 입은 어떤 브랜드의 옷이 시중에서 유행하면 그도 똑같은 옷을 사려 하며, 돈이 없어 같은 옷을 사지 못하면 카피 제품이라도 사서 입는다. 연예인이 어떤 화장품을 사용하는데, 돈이 없으면 신장이나 피를 팔아서라도 사서 치장하려 한다. 심지어 연예인이 어떤 장소에서 공연을 하거나 기자 회견을 열거나 영화 작품 발표회를 하면, 어디든 쫓아간다. 그는 자신이 따르는 그 연예인의 말과 행동, 일거수일투족, 모든 행보에 관심을 기울이고 추적하며, 연예인에게 푹 빠져 있다. 자신의 삶과 올바른 사상 관점, 생활 방식이 없어서 연예인의 사상과 관점, 생활 방식에 미혹되고 통제되는 것이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이것이 선천적인 조건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사회 환경과 관계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약간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현재, 같은 환경에 있는데도 왜 모든 사람이 아니라 일부만 늘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것이겠느냐? 이는 무엇과 관계가 있겠느냐? 말해 보아라.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이 사람들이 문예를 좋아하는 것이겠느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문예에 능하겠느냐? 이 또한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문예계 사람과 관계가 있으며 문예의 트렌드와도 관계가 있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이는 패괴 성품 아니겠느냐? 이것은 패괴 성품의 표출이다. 그렇다면 이 부류는 인성에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어째서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인생의 길 중 이런 길을 선택했겠느냐? 이는 인품의 문제와 관련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인성의 결함이며, 천성적으로 아둔하고 우매해서 쉽게 미혹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이 원인이겠느냐?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고 유치하며 허영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회 흐름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젊기 때문이겠느냐? (아닙니다.)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사람 중에는 중년이나 노년도 있으며, 모든 연령대가 다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젊고 유치하고 아직 인생사를 몰라서 사회 흐름에 미혹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사람은 모두 젊고 유치하다.”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젊고 유치하기 때문이 아니라면, 그건 바로 인성의 문제이다. 인성의 어떤 측면 문제겠느냐? 본연의 일에 충실하지 않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본연의 일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다소 성실하지 않고 분수를 모르는 것이기도 하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바른길을 걷지 않습니다.) 맞는 말이다. 바른길을 걷지 않는 것, 이는 그들이 걷는 길과 관련된 문제이다. 사람이 성인이 된 후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이 사회와 군중 속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모두가 직면해야 하는 필수 과제이다. 그 사람이 분수에 만족하며 본분을 지키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인지, 떳떳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인지, 본연의 일에 충실하고 바른길을 걷는 사람인지 등은 그의 인성이 무엇을 좋아하고 따르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각 분야의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은 무술을 배우고, 어떤 사람은 건강 관리법을 배우고, 어떤 사람은 과학 기술 업계에 종사하고, 어떤 사람은 패션 업계에 종사하며, 어떤 사람은 영상 산업에 종사하고,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하고, 어떤 사람은 정치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불교를 믿고, 어떤 사람은 도교에 입문하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선택을 한다. 어떤 사람은 제대로 된 직업도 없고, 자신의 인생 목표를 찾지도 않으며, 매일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데만 몰두한다. 어느 정도로 쫓아다니겠느냐? 먹고 자는 것도 잊을 정도이다. 만약 자신이 쫓아다니는 연예인이 이상형이라면, 배우자마저 언제라도 버릴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연예인을 쫓아다니다가 푹 빠져서 그것이 그의 삶과 그가 선택하는 길을 좌우할 정도가 되고, 그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일부가 된다면, 그의 현실적인 삶은 어떻겠느냐? 분수에 만족하며 본분을 지키는 삶을 살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여성이라면, 남편을 내조하고 자식을 가르치며 분수에 만족하는 가정주부나 현모양처가 될 수 있겠느냐?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미친 것이다. 자기 이상형이 어디에서 콘서트나 기자 회견을 열든 가서 사인을 받아야 하는데, 그곳이 아무리 멀지라도 비행기를 타고 심지어 국경을 넘어서라도 따라가며, 가족도 말리지 못한다. 또 인터넷에서 수시로 연예인의 스케줄을 추적해 그 장소에 가서 기다리며, 만약 허탕을 치게 되면 몇 날 며칠을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계속 울기만 한다. 평소 그가 인터넷과 TV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모두 연예인과 관련된 일들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한 명의 연예인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남자, 여자, 젊은이, 중년, 노년을 가리지 않고 여러 연예인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들의 외모, 결혼 생활, 감정 상태, 사생활에 관심을 가지며, 머리를 쥐어짜 가며 관련 정보를 검색하는 것이다. 그는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일을 삶의 재미와 흥미의 원천이라고 생각하고, 본연의 일로 여기며 이행한다. 이런 사람의 생활 상태는 어떻겠느냐? 살아 있는 시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사상과 생활 상태, 일상의 모습과 기분의 좋고 나쁨은 전적으로 그가 쫓아다니고 모방하는 그 대상의 영향을 받는다. 만약 자기가 쫓아다니는 그 연예인에게 연인이 생기면, 몇 날 며칠을 먹고 마시지도 못하면서 괴로워한다. 하지만 만약 그 연예인이 연인과 헤어지면, 기뻐서 진탕 먹고 마시고 샴페인을 터뜨리며 SNS에 축하 글을 올린다. 그는 매일 꿈속에서까지 자신이 쫓아다니는 대상과 함께하는 달콤한 꿈만 꾼다! 자기가 쫓아다니는 대상이 바로 이상형이기에, 누구를 봐도 그 사람만큼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생활 상태가 비정상적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정도까지 빠졌다는 것은 어떤 악령에게 통제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류는 인성에 결함이나 결점이 있는 것이냐, 아니면 문제가 있는 것이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정신이 약간 비정상적인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도 간혹 연예계 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면 한가할 때 한두 마디 하기는 하지만, 실생활로 돌아오면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어머니라면 어머니의 책임을 다하고, 아버지라면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며, 자신이 종사하는 일에 전혀 영향을 받거나 지장을 주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어디에서 콘서트를 하든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평소대로 생활하고 영향을 받지 않는다. 비록 연예인을 약간은 숭배하고 부러워하지만, 또 약간의 애정을 품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 생활로 돌아오면 자신만의 독립적인 사상, 생활, 사업, 신앙, 그리고 자신이 추구해야 할 것과 나아가야 할 길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인성과 사유가 정상적이고, 정신이 정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연예인을 쫓아다니기 좋아하는 부류는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과정에서 이미 자기 통제 능력과 자아를 상실했다. 이른바 연예인들에게 이끌려 완전히 코가 꿰인 채 끌려다니며, 그의 사상과 생활 상태는 철저히 연예인의 말과 행동, 희로애락에 좌우되고 통제된다. 이는 단순히 인성의 문제일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으로, 희로애락이 비정상적으로 변했고 일상생활 상태도 혼란해져 완전히 방향을 잃은 것이다.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것이 그의 생활의 전부가 되고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삶에서 연예인 쫓아다니는 것을 즐기고,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것으로 매일 시간을 보낸다. 연예인을 쫓아다니지 않으면 허무하고 재미가 없으며, 삶에 목표와 방향이 없다고 느껴 마음속으로 방황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 현재 생활 상태가 어떤지, 언제 콘서트를 여는지, 지난번 영화에서 연기는 어땠는지, 그들의 결혼 상태와 가정 상황은 어떤지 등과 같은 정보를 인터넷에서 수시로 검색하느라 시간을 보낸다. 이를 통해 공허하고 갈팡질팡하며 막막한 자신의 삶을 채워 나가는 것이다. 이는 연예인에게 완전히 통제당하는 것 아니겠느냐?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이런 사상 또는 이런 흐름에 통제당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류에게 여전히 양심과 이성이 있겠느냐? 그들의 정신은 이미 착란을 일으켰고 비정상적이며, 외부의 어떤 흐름이나 현상에 미혹되고 교란되어 방향을 잃었다. 또 그는 이미 자신이 하는 일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며, 사리를 구분할 줄도 모르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말려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3~5개월 치 월급을 기꺼이 바치거나, 심지어 값나가는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려서라도 자기가 숭배하는 그 연예인의 콘서트에 가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돌아온 후에는 빚까지 갚아야 하는데, 이런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목적을 달성한다. 이런 부류가 정상적인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렇게 푹 빠져 자제가 안 되는 상태로 보아, 이 부류는 이미 정상 인성의 이성을 상실했으며,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연예인을 쫓아다니기 위해 돈을 쓰거나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을 더 이상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보면, 그들을 정상인으로 분류하기 어렵다. 정상인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이상, 그들은 이성에 문제가 생겼으며, 이미 이성을 상실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양심이 여전히 작용하겠느냐? 그들이 여전히 양심을 갖고 있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양심도 이성도 없는, 빈 껍데기만 남은 인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정상 인성의 현실 생활에서 이미 점점 더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현실 생활에 융화되기 어려우며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현실 생활의 일들에 종사하기도 매우 어렵다. 그들의 삶에는 오직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것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정신세계는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이 일에 통제받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이미 빈 껍데기만 남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빈 껍데기만 남은 이런 부류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산송장입니다.) 맞다. 산송장이다. 그들에게 신앙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긍정적인 추구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들이 긍정적인 사물은 무엇인지, 부정적인 사물은 무엇인지, 정의란 무엇인지, 사악함이란 무엇인지를 알겠느냐? (모릅니다.) 그들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요즘 무대 위의 가수들은 점점 더 노출이 심하고 섹시한 옷을 입으며, 점점 더 사악한 동작을 한다.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무대 아래의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점점 더 신이 나서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점점 더 좋아하고 도취한다. 특히 무대 위의 가수가 팬 서비스로 옷을 한 겹 벗기라도 하면, 무대 아래 사람들은 완전히 미쳐 버린다. 이런 장면을 보고 흥분해서 심장이 뛰지 않고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질식한 채 기절해서 응급처치를 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응급처치로 깨어나는 사람도 있지만, 깨어나지 못해 불행히 요절하는 사람도 있다. 이삼십 대가 연예인을 쫓아다니다가, 가수나 영화배우가 무대 위에서 옷을 벗거나 매혹적인 동작을 하는 것을 보고 흥분한 나머지 기절해 죽어 버리는 것이다. 말해 보아라. 이는 천박한 운명 아니겠느냐? 이렇게 단명해 버리니 말이다. 그들의 희로애락, 그들이 좋아하는 것, 그들이 흥분해서 비명을 지르는 장면을 볼 때, 그들이 부끄러움을 아는 것 같으냐? 무엇이 긍정적이고 정의로운 사물인지, 무엇이 사악한 사물인지 아는 것 같으냐? (모를 것입니다.) 그들은 모른다. 정상적인 사람은 이런 장면을 보면 반감을 갖는다. ‘요즘 세상은 어떻게 이 정도로 사악해진 거지? 너무 사악해!’라고 말이다.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은 이런 장면을 보면 기뻐하고 뿌듯해하고 만족하며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 비명을 지르고 환호할 수 있으니, 평생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사람들은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무엇이 사악한 일인지, 무엇이 정의로운 일인지,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부정적인 사물인지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가수, 영화배우의 어떤 여성 팬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의 거처까지 찾아가 몸을 바치려 하다가, 상대방이 거절하니 화를 내며 ‘못난 놈’이라고 욕하기도 했다. 이런 사람이 체면을 차리겠느냐? ‘염치’라는 단어를 알겠느냐?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알겠느냐? (모릅니다.) ‘염치’라는 단어조차 몰라서, 좋아하는 연예인이 생기면 바로 몸을 바치려 하다가 상대방이 거절하면 욕하는 이런 자들이 사람이겠느냐? 이는 인성에 뭔가 결여된 것이 아니다. 이는 정신병이고, 더러운 귀신이자 악령이다!

다양한 무리의 사람 중에는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데 푹 빠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은 정확하게 말하면 산송장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비인류(非人類)이다. 그들은 무대와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연주하고 노래하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이들을 쫓아다니는 것을 일종의 사업으로 여긴다. 그들은 사람들 속에서 이런 생활 방식과 길을 선택해 자신의 인생을 무의미하게 보내고 소모한다. 전체 사회에서 이런 부류는 특수한 집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본연의 일에 충실하지 않은 사회 최하층 사람들과 비슷하여, 모두 인간쓰레기고 무가치한 존재이다. 그들은 신앙도 없고 긍정적인 추구도 없으며, 긍정적인 욕구나 동경, 요소가 인성에 전혀 갖춰져 있지 않다. 그래서 문예계가 아무리 사악하고 어두워도 전혀 개의치 않으며 역겹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들 이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열정적으로 쫓아다닌다. 이들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인간쓰레기라고 할 수 있다. 영적 세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부류가 바로 더러운 귀신이자 악령이다. 더러운 귀신과 악령이라도 사람으로 태어나면 정상적인 사람처럼 밥을 먹고 일을 해야 하는데, 그들은 본연의 일에 충실하지 않으며,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같은 부류와 어울려 향락을 추구하며 밥만 축낸다. 또 이 업계에 종사하지 못하면 이 업계 사람을 쫓아다니고, 이 업계의 각종 사악한 흐름을 쫓으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래서 이 부류가 무엇을 잘하든, 사회에서 이런 추구를 하고 이런 길과 생존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볼 때, 그들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며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이 부류가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인성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이 ‘텅 비어 있다’라는 말에는 따옴표를 붙여야 한다. 왜 따옴표를 붙이겠느냐? 그들의 인성에는 긍정적인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온갖 더러운 귀신과 악령이 지닌 요소를 갖고 있어서, 사악함과 어둠을 따르고 숭배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악한 전 사회에서 사악한 흐름의 최전선에 있는 추종자이자 전달자이기도 하다. 문예계의 여러 가지 사악하고 황당한 이론과 치우친 사상, 관점은 컴퓨터, TV, 신문과 잡지,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된 후, 점차 사람들 사이에 퍼지며 광범위하게 퍼져 나간다. 그중 각종 영화와 드라마, 문예 작품 속의 사악한 사상, 또는 사악한 흐름과 행동 방식을 전파하는 선봉대가 바로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각종 사악한 사상과 치우친 사상 및 관점을 전달하는 1차 인수자이다. 대중은 그들의 입을 통해, 그들의 실제 행동과 모습을 통해, 각종 사악한 사상과 흐름을 점차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런 다음, 조금씩 영향받고 물들어 결국에는 이런 사악한 사상과 흐름, 치우친 사상과 관점이 각 집단과 각종 사회 제도 속에서 점차 자리를 잡고 형성된다. 과거의 결혼을 보면, 결혼 적령기가 되면 중매인의 소개를 통해 인연을 맺었으며, 양가 부모님의 동의도 얻어야 했다. 그다음, 날짜를 정해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었다. 과거의 사회적 환경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남녀의 결혼을 존중하고 신중하게 대했으며, 결혼을 중대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에 엄숙하고 진지하게 대할 수 있었다. 특히 자녀들에게 방탕하게 굴지 말 것, 근친상간하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지켜야 했고,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속에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인성과 양심의 제약을 받아 많은 사람이 간음과 음란한 악행을 피했기에, 어느 정도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까지도 보호했다. 물론 사회 풍조에도 일정 부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작용과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시대가 발전하면서, 그리고 다양한 문예 작품이 등장하면서, 성 해방과 결혼의 자유 등을 주장하는 각종 사상과 관점이 끊임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일부 사람이 이를 주장하는 한편, 사회는 다양한 문예 형식의 연출과 공연을 통해 이런 사상을 한층 더 추앙하고 널리 전파하였는데, 이런 사상은 먼저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인정되었다. 즉, 최초의 수용자는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연예인을 쫓아다녔기 때문에 무대 위나 은막 위, 또는 어떤 문예 형식에서 연예인이 주장하는 이런 사상을 매우 빨리 받아들이고 인정했으며, 이를 깊이 인정한 다음에는 일상생활에서 자신들의 자녀와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런 식으로 한 명이 열 명에게, 열 명이 백 명에게, 백 명이 천 명에게, 천 명이 만 명에게 전파하면서 광범위하게 퍼진 것이다. 그다음, 사람들이 1~2년 동안 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5~10년 동안에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20~30년이 지나면, 사람들 사이에 이런 사상이 점점 형성되며, 점점 더 광범위하게 사회 구석구석으로 전파되고, 개인의 마음속에 깊이 주입된다. 이때, 이런 사악한 사상과 흐름이 점차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져, 사람들은 결혼, 남녀 관계, 남녀 간의 그렇고 그런 일들을 점점 더 자기 멋대로 하게 되며, 점점 더 제약받지 않고 방탕해지게 된다. 사람들은 ‘이게 바로 깨어 있는 거고 식견 있는 거야. 이건 인성이 성숙한 모습이지.’라고 여기며, 부정적인 일을 긍정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이야기하게 된다. 이때가 되면, 사회 전체에 사악한 풍조가 급격히 상승하여 우위를 점하고 주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럼 대부분의 사람이 남녀의 결혼과 남녀 관계에 대한 올바른 사상, 관점을 가지지 못해, ‘아무래도 상관없어’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동성애가 점점 많아지고 불륜도 점점 늘어나며 이혼율도 점점 높아지게 된다. 더 많은 어린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잃고, 한부모 가정이나 계부, 계모가 있는 가정에서 생활하게 된다. 또 더 많은 사람이 결혼 전에 성적 파트너가 많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게 정상이지. 다들 이래. 이게 뭐!’라며 그것을 평범하고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때건 사악한 것은 영원히 사악한 것이고, 긍정적인 것은 영원히 긍정적인 것이다. 설령 네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도, 그것은 이 사악한 흐름과 이 사회의 타락으로 초래되었다. 그것은 인류가 사탄에게 패괴되고 사악한 사상과 흐름을 주입받아 완전히 물든 결과이지, 긍정적인 사물을 부정적인 사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거나, 부정적인 사물이 이제 와서 긍정적인 사물로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네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며, 긍정적인 사물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타의에 의해 사악한 흐름과 사악한 사상을 처신의 원칙이자 근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사회와 인류는 바로 이렇게 조금씩 깊이 패괴되어 왔다. 그래서 사악한 흐름이 널리 전파되어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는 과정에서,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사악한 흐름 및 사상과 관점을 전파하는 선봉장 역할을 담당한다고, 그들이 바로 1차 전파자라고 하는 것이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킨다고 하면, 다소 막연하거나 추상적이다. 하지만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을 사탄의 사상과 사악한 흐름을 전파하는 실제 창도자라고 한다면, 이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이는 그들이 문예계나 각종 사악한 사상 및 사악한 흐름과 가장 가까운 무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근접 거리에서 이러한 영화배우, 가수들과 접촉한다. 만약 그들이 추종하지 않았다면, 푹 빠져서 성원하지 않았다면, 이른바 가수와 영화배우들은 그렇게 큰 매력을 갖지도, 그렇게 높은 명성을 얻지도, 그렇게 강한 영향력과 매력을 갖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열광적으로 성원하고 적극적으로 모방했기 때문에 각종 사악한 흐름과 사상들이 사람들 사이에 비정상적인 속도로 전파된 것이다. 그들은 실제 행동과 행위를 통해, 문예계에 등장한 각종 사악한 일, 치우치고 사악한 사상과 관점들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들이 매우 정상적이고 정당한 것이라고 대중들에게 알려주었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이 점점 이러한 사악한 행동 방식 및 사상과 관점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이른바 유명인, 가수, 영화배우의 불륜, 음란 행위, 또는 어떤 사악한 사상과 관점, 행동 방식에 대해 무감각해졌고, 아무도 올바른 주장과 평론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유명인, 가수, 영화배우들이 아무리 음란하게 굴어도 도태되거나 정죄되지 않고, 여전히 무대 위에서 자신을 과시하게 된 것이다. 이는 사회에서 유행하는 “가난은 비웃어도 매춘은 비웃지 않는다.”라는 말과 정확히 들어맞는다. 또 이는 인류가 타락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모습이자 증거이다. 보아라. 네가 하나님을 믿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면, 사람들은 다들 너를 비웃고 업신여기겠지만, 사실 그들도 네가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지 신앙이 있는 것일 뿐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천당에 가고 싶어 하는 것, 여성은 매춘하지 않고 창녀가 되지 않으며, 남성은 강도질하지 않고 착실하게 처신하는 것일 뿐인데, 그런데도 그들은 너를 못마땅해한다. 만약 외모가 아름다운 미녀가 고위 공직자나 재벌을 스폰서로 두고 날이면 날마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한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부러워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능력이 있고 수완도 좋군요. 좋은 것을 먹고 입으시도록 부모님께 돈을 벌어다 드리니, 부모님은 당신을 키우느라 헛고생하지 않으셨네요. 예뻐하신 보람이 있겠어요. 부모님이 물려주신 외모도 헛되이 쓰지 않았고요. 당신 외모가 재산이네요!” 보아라. 사람들은 다들 부러워하고 감탄한다. 하지만 만약 네가 얼굴이 예쁜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시집을 간다면, 사람들은 너를 비웃을 것이다. 비웃는 데 그치지 않고, 네가 박해받는 것을 보면 오히려 더 너를 괴롭힐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이 무리가 하는 이런 일 중에는 의미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사탄의 사악한 사상과 흐름의 전파를 촉진한다. 요즘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일부 여성들은 무대에 올라가 노래하라면 노래하고 춤추라면 춤을 추며, 가수를 보면 숭배해 마지않는다. 이는 40~50년대의 여성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이방인의 언어로 표현하면 ‘개방’된 것인데, 사상과 성이 개방되었고, 모든 것이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평생 한 남편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아이만 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요. 그러니 필요하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죠. 즐길 건 즐겨야 해요!” 보아라. 이게 다 무슨 사상이란 말이냐! 이 얼마나 끔찍하냐! 만약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면, 이것이 좋은 징조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런 사상과 관점을 가지고 있고, 이런 사람을 부러워하고 숭배하며,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면, 끔찍하고 위험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끔찍하고 위험한지는 일단 제쳐 두고 본질만 놓고 볼 때, 이 사람들은 영혼 깊이 연예인을 무척 부러워하고 존경하고 사랑해서 연예인의 각종 행위, 사상, 관점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 아무리 사악한 사상이라도 말이다. 그들은 ‘사람이라면 이래야 해. 이런 게 자유지. 어떤 사상과 관점이든 모두 용인해야 한다고. 사회잖아. 원래 온갖 사람이 다 있는 거니까.’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사상에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구분이 없으며, 옳고 그름과 맞고 틀림의 구분도 없다. 이는 정신이 비정상적인 것 아니겠느냐? 만약 자질이 부족해서 옳고 그름을 판별할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염치를 알고, 어떤 일이 맞다는 것을 알면 끝까지 고수하고 어떤 일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 절대 하지 않으며, 그것이 사악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 마음속으로 증오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그래도 정상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되고 사악한 일인지 분명히 알면서도, 반항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혀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이기까지 한다면, 게다가 부러워하고 따라서 점점 더 깊이 빠져든다면, 이는 사람이 아니라 산송장으로, 이미 끝났으며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부류의 사람은 인성이 나쁘다거나, 인격이 저열하다거나, 인품이 악랄하다거나, 양심과 이성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이 부류의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인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무엇이겠느냐? 더러운 귀신이자 악령, 살아 있는 시체이다. 그들은 각종 사악한 흐름과 사악하고 치우친 사상, 관점의 창도자이자 계승자이고 전파자이다. 이는 꼭 전염병 같아서 한 사람이 바이러스를 가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퍼뜨리면, 그가 이동한 곳이 많을수록 바이러스가 더 광범위하게 전파된다. 즉, 연예인을 쫓아다니는 그들은 바이러스를 갖고 전파하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절대 인류의 일원이 될 수 없는, 비인류이다. 이른바 비인류의 정의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악한 흐름과 사상, 관점의 창도자이자 전파자라는 것이다. 이해했느냐? 만약 네가 마음속으로 여전히 이런 연예인들을 부러워하거나, 또는 과거에 이런 부류의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면, 내가 말해 주마. 그것은 돌아올 수 없는 길,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길이다. 절대 그런 사람이 되지 마라! 만약 너희가 예전에 어떤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역을 맡은 적이 있거나, 과거에 영화배우나 유명인이 되고 싶어서 그런 길을 걸으려 한 적이 있다면, 알려주겠는데 당장 브레이크를 밟아 그 발걸음을 멈추어라. 이는 징벌이나 상을 받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길이니, 절대 가지 마라! 만약 네가 일시적으로 미혹되거나 나약해져서, 또는 순간적인 부러움과 흠모 때문에 이런 사람을 따르고 싶어한다면, 내 경고와 권유를 듣고 지금 당장 멈추어라. 절대 그 업계에 들어가지 말고, 그 행렬에 합류하지도 마라. 그들의 일원이 되면 안 된다. 올바른 길을 걷거나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을 고수하지 못한다 해도, 사악한 흐름과 사상, 관점의 전파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저주받는 길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네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어떤 배역을 맡았든, 너 자신을 그 배역, 유명인, 혹은 어떤 지위 높은 인물이라고 여겼든,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했든, 그런 것들은 이미 모두 과거가 되었으며, 잘못된 것이다. 만약 네가 지금 이미 멈추었다면, 그때의 네가 분량이 작아서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라는 의미이니 앞으로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 길로 가지도 마라. 만약 네가 배역을 맡고 싶고, 유명인이 되고 싶고, 사람들이 너를 숭배하고 따르게 하고 싶다면, 내가 오늘 한 이 말을 어서 잘 생각해 보아라.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은 누구에게나 불행한 소식이자 무엇보다 나쁜 소식이다. 그것은 저주받은 길이니, 절대로 그 길을 가지 마라. 절대로 그런 더러움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 그 길을 가는 것은 바로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파멸에 빠지는 것이다. 착실하게 살아야 한다. 너는 피조물이고 창조된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 집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든, 어떤 사역을 했든, 어떤 공헌을 했든, 결국 네 위치를 제대로 정해야 한다. 무슨 위치겠느냐? 네가 피조물이고 창조된 인류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너는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하며, 기준에 맞추고 하나님이 만족할 수 있도록 본분을 이행해야 하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이 네가 평생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이자 선택해야 하는 길이다. 사탄의 사악한 흐름을 따르며 사악한 사상과 관점을 전하는 전파자나 계승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 말종이자 악령이고 더러운 귀신이니, 저주받아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만약 사람이 그 길을 간다면 소 열 마리가 끌어도 되돌릴 수 없으니, 그렇게 되면 죗값을 치러야 해서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신이 창조된 인류임을 알고,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아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내용을 교제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인생의 길과 관련된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수시로 한 번씩 들어 줘야 하고, 틈틈이 묵상해야 한다. 이는 너희가 생명 진입을 하고 올바른 인생의 길을 가는 데 이로움과 도움이 되며, 좋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작용을 하니, 이 말을 잊지 마라.

오늘 교제는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

2023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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