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2)
지난 몇 차례에 걸쳐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기’ 중 결혼 측면에 해당되는 주제에 관해 교제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결혼 측면에 해당되는 주제는 거의 다 교제하였으니 이번에는 가정 측면에 해당되는 주제를 교제하도록 하겠다. 그럼 먼저 가정이라는 주제 중 어떤 측면이 사람의 추구, 이상, 바람과 연관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가정이라는 개념이 사람에게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 주제를 언급하면 사람은 먼저 가정의 구조와 구성원 그리고 가정과 관련되는 일과 사람 등을 떠올릴 것이다. 가정과 관련된 주제는 무척 많다. 네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이미지와 내용이 있든, 오늘 우리가 교제할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기’와 관계가 있느냐? 사람은 교제하기 전에는 모른다. 그렇다면 교제하기 전에 사람이 생각하는 가정이란 무엇인지, 혹은 너희가 가정이라는 측면에서 내려놓아야 할 내용과 관련하여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어떤 게 있는지 먼저 나눠 보지 않겠느냐? 예전에 우리가 다뤘던 사람의 추구, 이상, 바람과 관련된 몇 가지 측면의 주제에서 각 측면의 주제를 교제할 때 해당되는 내용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느냐? 어떤 측면의 내용에 해당되든 사람이 내려놓아야 할 것은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바라보는 사람의 그릇된 생각과 관점, 그리고 그 일에 있어 사람에게 존재하는 여러 가지 문제이다. 이런 여러 문제가 바로 우리가 교제할 측면에 관련되는 주제의 핵심이다. 이런 문제들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진입하는 것을 가로막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의 일에 있어 네 인식에 오류나 문제가 있다면 그 일에 대한 너의 태도나 방법, 처리 방식 역시 그것에 상응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이런 상응하는 문제가 바로 우리가 교제할 주제인 것이다. 왜 교제해야 하겠느냐? 이 문제들은 네가 진리를 추구하거나 한 가지 일에 대해 정확하고 원칙에 부합하는 견해를 갖는 데 상당히 많은 혹은 절대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한 가지 일에 대한 너의 순수한 실행 방식이나 처리 원칙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정이라는 주제를 교제하는 것은 개인의 흥미와 취미, 결혼이라는 주제를 교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가정에 대해 수많은 부정확한 생각과 관점, 태도를 가지고 있거나 가정 자체가 네게 수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부정적 영향은 네게 부정확한 생각과 관점을 야기할 것이고, 이런 부정확한 생각과 관점은 너의 진리 추구에 영향을 미쳐 너를 극단으로 내몰아 가정과 관련된 일이 일어났을 때 혹은 가정과 관련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정확한 관점이나 방법 없이 그것을 대하거나 처리하고 그것이 네게 초래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게 할 것이다. 이 역시 우리가 각 주제를 교제하는 원칙이며, 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럼 가정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가정이 너희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나 너희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원칙을 구하며 진리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가정이 네 생각과 네 처신의 원칙, 네 인생관과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방해가 되었느냐? 다시 말해, 네가 한 가정에서 태어난 후 그 가정이 네 믿음의 일상이나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인식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고 어떤 부정확한 생각과 관점을 야기하였으며, 어떤 방해와 교란이 되었느냐? 가정이라는 주제에 대한 교제는 결혼을 주제로 한 교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원칙을 준수한다. 네게 형식적으로나 생각과 관점상으로 가정이라는 개념을 내려놓으라거나 구체적인 유형의 가정이나 그 속의 어떤 구성원을 내려놓으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저 가정 자체가 네게 야기하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영향과 네 진리 추구를 저해하는 방해와 교란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가정이 네게 어떤 구체적이고 확실하며 네가 체감할 수 있는 얽매임과 불편을 초래하여 네가 속박받고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게 하거나 진리를 잘 추구하지 못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얽매임과 불편은 ‘가정’이라는 두 글자 혹은 그중의 특정인이나 특정 사건에서 비롯된 얽매임이나 영향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가정의 존재, 혹은 가정이 네게 초래한 부정적 영향 때문에 압박을 느끼게 한다. 또 이런 얽매임과 불편은 네가 양심에 가책을 받고 몸과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게 하며, 가정으로부터 비롯된 생각이나 관점에 위배되면 항상 자신에게 인성이 없고, 도덕성이 결여되었으며 사람됨의 마지노선이나 처신의 원칙을 상실한 것처럼 느끼게 한다. 가정과 관련된 문제일 경우, 너는 늘 도덕의 마지노선과 진리의 실행 사이에서 방황하며 자유롭지 못하고 그 상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생각이 나느냐? 위에서 내가 말한 것들을 너희는 일상생활에서 어느 정도 느끼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의 교제를 통해 가정에 대한 그릇된 관점 때문에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진리를 실행하면 양심에 가책을 느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예전에 제가 학업을 마치고 본분 이행을 택했을 때 마음이 전쟁터 같았습니다. 다 커서까지 생활이며, 학업이며 가족에 기대다가 대학을 졸업했는데도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지 않으면 제가 불효자에 인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 양심에 참소를 받았습니다. 당시 이 일로 몇 개월을 끙끙 앓다가 마지막에 하나님 말씀에서 길을 찾아 본분을 잘 이행하기로 했습니다. 가정에 대한 이런 그릇된 관점은 확실히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이것은 가정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보이지 않는 족쇄이자 가정에 대한 사람의 느낌 혹은 생각과 관점이 사람의 삶과 추구, 신앙에 초래하는 불편이다. 이 불편은 네 마음속 깊은 곳에 어느 정도 압박과 부담을 가해 네 마음속에 수시로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또 누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 저는 자녀가 장성하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근심 걱정을 덜어 드려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느라 부모님께 효도는커녕 뭐라도 해 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아직도 생계를 위해 애쓰시는 것을 보면 죄스럽기만 합니다. 갓 하나님을 믿었을 때는 이런 면으로 인해 하나님을 배반할 뻔했습니다.) 이 역시 가정의 가르침이 사람의 생각과 관점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의 일종이다. 너는 하마터면 하나님을 배반할 뻔했지만 정말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도 있다. 가정 관념이 강해서 가정을 내려놓지 못해 결국 본분 이행을 포기하고 계속 가정을 위해 사는 삶을 택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가정이 있고, 특정 가정에서 자라다가 특정 가정 환경을 떠난다. 가정은 모든 사람에게 무척 중요하다. 평생에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며 마음속 깊이 지울 수도 없고 내려놓을 수도 없다. 사람이 내려놓을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는 것은 그 가정의 집도, 그 안에 있는 각종 집기나 물건도 아니다. 그것은 그 가정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이나 그 가정을 관통하는 분위기와 정서이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가정의 개념이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 연장자인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 자신과 동년배인 형제, 자매와 배우자, 그리고 다음 세대인 자녀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사람의 개념 속 가정의 중요한 구성원이자 모든 가정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가정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사람이 감정적으로 기댈 곳이나 정신적 지주를 의미한다. 가정은 또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람이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곳, 또한 사람이 제멋대로 굴면서 방종할 수 있는 곳이다. 가정은 안전한 피난처이고 감정적으로 기댈 수 있는 곳이며 한 사람의 인생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또 무엇이 있느냐? 너희가 표현해 보아라. (하나님, 제 생각에는 가정이란 사람을 성장시키고 가족끼리 함께하면서 의지하는 곳인 것 같습니다.) 좋다. 더 있느냐? (예전에 가정은 따스한 항구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밖에서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어도, 집에 오면 가족들이 지지해 주고 이해해 줍니다. 그러면 제 온 맘과 정신의 긴장이 풀리니 가정은 이렇게 안전한 피난처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은 따스함과 온기가 넘치는 곳이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의 마음속에서 가정은 무척 중요하다. 사람이 기쁠 때는 그 기쁨을 가족들과 함께하고자 하고 힘들고 괴로울 때는 가족들에게 털어놓으려 한다. 어떤 희로애락이든 아무런 압박이나 부담 없이 가족들과 나누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가정은 따뜻하고 아름다우며 평생에 지울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정신적 지지대이자 사람의 마음, 정신, 육체를 든든하게 지탱해 주는 곳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가정은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사람의 생명과 삶에 중요한 곳이 사람의 진리 추구에는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하느냐? 우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삶과 생명에서 가정이 얼마나 중요하든, 그리고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든 그것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서 크고 작은 문제들을 야기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데 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불편과 문제들도 초래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가정이 사람에게 초래하는 여러 가지 정신과 생각 면의 문제, 그리고 형식 면의 문제는 사람에게 많은 불편을 가져다준다. 이 문제는 대체 어떤 내용과 연관되겠느냐? 물론 이런 내용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많든 적든, 혹은 크든 작든 이미 어느 정도 경험한 것이다. 단지 사람이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내기 위해 꼼꼼히 따져 보거나 많이 고민해 보지 않았을 뿐이며, 그것을 통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아가서는 그 속에서 사람이 깨닫고 준수해야 할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럼 오늘 우리는 가정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사람의 진리 추구에 가정이 초래하는 불편과 방해, 그리고 가정의 문제에서 사람이 어떤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아야 하는지에 대해 교제하도록 하자. 이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이다.
가정은 무척 커다란 주제이지만 세부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오늘 우리가 교제하려는 세부적인 문제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서 가정이 가져다주는 부정적인 영향과 교란, 방해이다. 가정과 관련하여 사람이 제일 먼저 내려놓아야 하는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신분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가 구체적으로 교제해 보도록 하자. 모든 사람에겐 특정한 출신 가정이 있고, 모든 가정은 특정한 배경과 생활 환경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의 삶의 질과 구체적인 생활 방식, 생활 규율이 있다. 가정생활의 환경과 생활의 배경은 모든 사람에게 특정한 신분을 부여한다. 이 특정 신분은 사회에서나 사람들 속에서 특정한 사람의 가치이자 특정한 표식이나 상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상징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한 사람이 사람들 속에서 갖는 가치의 귀천을 의미한다. 이 특정한 신분은 사회, 사람들 속에서 한 사람의 지위를 결정하고 그 지위는 한 사람의 출신 가정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사람이 어떤 가정에서 살고 그 가정의 배경이 어떤지는 한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들과 사회에서의 신분과 지위에 관여되기 때문이다. 네 신분과 지위는 네 사회적 신분이 귀한지 아니면 천한지, 사람들에게 존중과 우러름, 앙망을 받는지 아니면 무시와 차별, 억압을 받는지를 결정한다.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신분이 사회에서의 처지와 그의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치기에 한 사람이 가정으로부터 받은 신분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결정적이고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사회에서의 네 명망과 지위, 가치 그리고 평생의 영욕에 영향을 미치기에 스스로 자기 가정의 배경과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을 아주 중시하는 것이다. 네게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도 크기에 이 일이 네가 살아가는 길에서 매우 중요하고 중대한 일일 것이다. 그것이 매우 중요하고 중대한 일이기에 네 영혼 깊은 곳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너 역시 이 일을 매우 중시하는 것이다. 너는 가정으로부터 부여받은 신분을 중시할 뿐 아니라 네가 알거나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신분을 동일한 관점과 시선, 그리고 방식으로 바라보며 또한 네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이런 관점으로 평가할 것이다. 그들의 신분으로 그들의 인격을 판단하고,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면서 지내야 하는지를 판단할 것이다. 그들과 우호적이고 대등하게 지낼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게 굽신거리면서 군말 없이 따를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무시하고 백안시하며 지낼 것인지, 나아가서는 비인도적이고 불평등한 방식으로 그들과 왕래하며 지낼 것인지를 말이다. 이렇게 사람을 바라보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상당 부분 한 사람의 가정의 신분에서 결정된다. 네 가정 배경과 가정의 신분에 따라 네 사회적 지위가 생길 것이고, 네 사회적 지위에 따라 네가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원칙이 결정될 것이다. 그러니 한 사람의 일을 처리하는 태도와 방식은 상당 부분 한 사람의 가정이 그에게 부여한 신분에 좌우되는 것이다. 어째서 상당 부분이라고 하겠느냐? 일부 특수한 경우는 언급하지 않겠다. 절대다수가 그렇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은 가정이 자기에게 부여한 신분과 사회적 지위의 영향을 받고 가정에서 부여받은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고 대하는 상응의 방식을 취한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고 가정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받은 생존관이기 때문에 사람의 이런 생존관과 생존 방식의 근원은 한 사람의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한 신분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한 이런 신분은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고 대하는 방식과 원칙을 결정하고,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고 대함에 있어 선택하는 태도를 결정한다. 이는 사람에게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고 대하는 사람의 생각과 관점의 근원은 불가피하게 가정의 영향을 받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한 신분의 영향을 받는데, 사람이 이런 영향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영향은 사람이 정확하고 이성적이며 공평하게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공평하게 타인을 바라보지도 못하게 만든다. 또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사람이나 모든 일을 대하지 않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신분에 따라 재량껏 처리하고 적용하며 선택하게 한다. 사람이 사회에서나 사람들 속에서 일을 대하고 처리하는 방식이 가정 신분의 영향을 받는 이상,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일 처리 원칙과 방식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로 적대적이고 상호 배치되고 위배되는 것이다. 사람의 일 처리 방식이 만약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한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근거한다면 사람은 분명 자기 혹은 타인의 서로 다른 신분이나 특수한 신분에 따라 다르거나 특수한 일 처리 방식 혹은 원칙을 취할 것이다. 이 원칙은 진리가 아니며 진리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인성이나 양심, 이성에 위배될 뿐 아니라, 더욱 심각한 것은 진리에도 위배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사람의 취향이나 이익 그리고 사람과 사람 간 상호 필요성에 따라 취사선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일을 대하고 처리하는 방식의 원칙은 불공평하고 진리에 부합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사람의 감정이나 이익의 필요에 따라 생기게 된다. 네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 귀하든 천하든, 그것이 네 마음속 한편에 자리 잡고 있거나 어떤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네가 만약 진리를 추구하려 한다면 그것이 네 진리 추구에 영향을 주고 교란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일을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나 중요한 일에 연관되면, 사람은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한 신분의 관점이나 시선으로 사람이나 일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런 원시적이거나 사회화된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으로 인해 네가 느끼는 사회적 지위가 귀하든 천하든, 결국 그 신분은 네 진리 추구에 영향을 주고 너의 정확한 인생관과 정확한 진리 추구의 길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네가 일을 처리하는 원칙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알겠느냐?
각 가정은 사람에게 다양한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부여한다. 좋은 사회적 지위, 높은 신분은 사람이 즐거운 마음으로 누리지만, 낮고 천한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한 신분은 사람이 고개를 떨구고 남들로부터 존중과 우러름을 받지 못하고 항상 무시당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마음속 깊은 곳에 고통과 열등감을 일으킨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부모는 농사를 지어 채소를 파는 농민이고, 어떤 사람의 부모는 작은 장사를 하는 장사꾼으로, 노점을 하거나 길거리에서 호객 행위를 한다. 어떤 사람의 부모는 수공예에 종사하면서 옷을 만들거나 수선하여 손재주로 생계를 유지하고 온 가족을 부양한다. 서비스 업계에 몸담고 있는 부모도 있다. 미화원으로 청소를 하거나 보모를 하거나 이삿짐을 날라 준다. 또 운수업에 종사하거나, 마사지나 미용 혹은 이발업에 종사하는 부모도 있다. 어떤 부모는 신발, 자전거, 안경 따위의 물건을 수리한다. 솜씨 좋은 부모는 액세서리, 손목시계류를 수리하기도 한다. 또 어떤 부모는 사회적 지위가 낮아서 폐품을 주워 팔아 자녀와 가정을 돌보기도 한다. 이런 부모들은 사회에서 종사하는 직업의 지위가 비교적 낮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지위 역시 낮을 것이 분명하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이런 가정 출신의 사람의 신분, 지위는 천할 것이다. 사회는 이런 방식으로 한 사람의 신분을 바라보고 그의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에 누군가 네게 “부모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나요?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나요?”라고 묻는다면 부모가 농민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저희 부모님은… 그게… 말해서 뭐해요.” 겸연쩍어서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동기나 친구를 만나거나 회식을 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좋은 가정 배경과 사회적 지위를 소개하지만 농민 가정이나 장사꾼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끄러워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사회에는 “영웅은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라는 유행어가 있다. 이 말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일부 사람들에게 얼마간의 희망과 한 줄기 빛 그리고 위안을 주는 고상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어째서 사회에서 이런 말이 유행하겠느냐? 사회에서 사람의 신분과 가치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지나치게 중시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천한 출신의 사람들은 항상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이런 말로 자신과 남을 위로하며 비록 자신의 지위와 신분은 낮지만 수준이 높다고, 이는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네 신분이 아무리 낮아도 네 수준이 높다면 이는 네가 고상한 사람이며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보다도 고상하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문제를 설명하느냐? “영웅은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일수록 스스로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연연해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특히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낮고 천한 사람일 경우 이 말로 자위함으로써 자기 마음속의 공허와 불만을 달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모가 장사꾼에도 못 미치고 농민, 수공업자 혹은 사회적으로 무시받고 소득 수준도 매우 낮은 업종에 종사하는 하층민 부모보다도 못해서 그들이 부모로부터 부여받은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더 낮은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부모는 사회적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고 정당한 분야에 정당하게 종사하는 것도 아니다. 또 고정 수입도 없어서 한 가정의 생계를 지탱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부모는 도박에 빠져 있는데, 지기만 해서 가산을 남김없이 탕진하니 하루하루가 살기 힘들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입을 것,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아 생활이 곤궁하다. 학교에서 학부모회가 열려도 부모가 불참하니 도박하러 간 것을 선생님까지 알 정도이다. 이 아이의 신분과 지위가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뻔한 일이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는 분명 사람들 사이에서 낯을 들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노력한다 해도, 아무리 승부욕이 강하고 출중하다 해도 이런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지위와 신분은 이미 결정된 것이다. 이는 사람이 억압과 고통을 크게 느끼게 만든다. 이런 고통과 억압은 어디에서 오겠느냐? 학교, 선생님, 사회에서 비롯되고, 나아가서는 인간이 사람을 바라보는 부정확한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부모는 사회적으로 나쁜 평판을 받지는 않지만 과거에 옳지 못한 행동을 저지른 전력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부모는 횡령으로, 불법 행위로, 투기 사건으로 법을 어겨 형을 받아 옥살이를 한 적이 있다. 이로 인해 온 가족이 수치를 당하는 부정적이고 나쁜 영향을 가정에 미쳤다. 이런 가정이 한 사람에게 부여하는 신분은 은연중 더 큰 충격을 초래하게 되는데,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추락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들에게 더 무시당하거나 심지어는 ‘횡령범’, ‘도둑 가족’ 등의 딱지가 붙게 되는 것이다. 이 딱지가 한 번 붙으면 사람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더 큰 충격을 줄 것인데, 그는 설상가상의 처지에 놓일 것이고 사회에서 더욱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낸다고 해도 네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바꿀 수는 없다. 이런 결과 역시 가정이 한 사람의 신분에 미치는 영향임은 물론이다. 또 어떤 가정은 그 구조가 상대적으로 복잡하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어머니는 친모가 아닌 계모라서 그다지 살뜰하게 대해 주지 않는다. 그는 자라면서도 이렇다 할 보살핌이나 모성애를 받지도 못했다. 무의식적으로 그는 이 가정으로부터 ‘불필요한 존재’라는 특수한 신분을 부여받는다. 이런 특수한 신분의 배경으로 인해 그의 마음속에는 더 짙은 어둠이 드리워지고 사람들 가운데 그의 지위가 그 누구보다 낮다고 생각하게 된다. 행복하지도 않고 존재감이나 삶의 의지도 없이 심한 열등감과 불행만 느낀다. 가정의 구성이 복잡한 또 다른 사람은 어머니가 특수한 사정으로 결혼을 반복하여 대체 계부가 몇 명인지 모른다. 자기조차 생부가 누군지 모르니 이런 특수한 가정에서 그에게 주어지는 신분은 불 보듯 뻔하다. 사회에서 사람의 눈에 비치는 그의 지위는 낮다. 이런 가정 측면의 문제나 발언으로 헐뜯으면서 그를 모욕하고 자극하는 사람이 수시로 나타날 것이고, 이로 인해 그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가 낮을 뿐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그가 낯을 들 수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특수한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특수한 신분과 사회적 지위, 혹은 평이하고 평범한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평이하고 평범한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는 각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남모를 아픔이다. 그것이 일종의 족쇄이자 부담인데도 사람은 그것을 벗어던지기 아쉬워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가정은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는 곳이기도 하고 충분히 기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정이 부여한 사회적 지위와 신분이 미천하고 낮은 사람에게 가정은 아름다우면서도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정신적으로 가정을 떠날 수 없지만 실제적, 객관적 필요의 측면에서는 가정이 저마다 다른 정도의 수치를 안겨 주고, 그로 인해 사람들 속에서나 사회에서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과 이해를 받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 가정은 애증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가정 자체는 전 사회로부터 중시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차별당하고 무시당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도 같은 신분과 지위 그리고 가치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가정이 사람에게 주는 수치는 사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늘 사람의 정서에, 그리고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 영향을 미치고, 사람의 일 처리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불가피하게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데는 물론, 그 과정에서 진리를 실행하는 데까지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네 가정에서 부여받은 신분이 어떻든, 너는 내려놓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이 방금 말씀하신 가정들은 모두 부모가 농민이나 소상인, 청소부, 허드렛일이나 해 주는 사람이에요. 이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으니 내려놓는 게 당연하죠. ‘사람은 높은 곳으로 가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이 있잖아요. 사람은 높은 곳을 보면서 높은 곳으로 가야 해요. 이렇게 낮은 것들을 보면 안 되는 거죠. 예를 들어, 누가 농민이나 장사꾼이 되고 싶겠어요? 사람들은 모두 큰돈을 벌고 높은 관직에 오르고 싶어 해요. 사회적으로 지위를 가지고 출세 가도에 오르고 싶어 하는 거죠. 어려서부터 농민을 꿈꾸며 농사를 잘 지어 먹을 것만 충분하면 된다고, 그걸로 일생에 출세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런 가정이 사람의 신분에 부여하는 것은 수치나 불공평한 대우이기 때문에 사람은 내려놓아야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냐? (아닙니다.) 아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형편이 좋은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가정은 생활 환경이 좋고 사회적 지위도 높다. 그에게 주어진 신분과 사회적 지위는 존귀하여 어디서든 중시받는다. 가정에서 그는 부모와 어른들로부터 금지옥엽으로 자라나고 사회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특별하고 고귀한 가정 배경 덕에 학교나 선생님, 학급 친구들로부터 중시받고 아무도 그를 깔보지 못한다. 선생님은 상냥한 태도나 세심한 말로 그를 대하고, 학급 친구들 역시 그를 무척 존중한다. 우월한 가정 환경과 존귀한 가정 배경 덕분에 사회에 진출해서도 그의 신분은 고귀하고 존중을 받으니 그는 우월감이 들고 자신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존귀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집단에서든 자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감정은 고려할 필요 없이 자신 있게 말하며 무슨 일이든 거리낌 없이 한다. 남들이 보기에 품위와 기품이 있고, 말이며 생각이며 행동이 과감하다.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가정 배경의 강력한 지지 덕분에 귀인의 도움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린다. 일이 잘 풀릴수록 우월감은 강해지니 어디서든 거드름을 피우고, 잘나야 하며, 남들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먹는 것도 양이 많은 걸로 가져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화를 낸다. 형제자매와 함께 생활할 때는 채광이 좋고 난방기에서 가까우며 공기가 좋은 명당자리를 독차지하려 한다. 이것이 우월감이 든 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돈을 잘 버는 부모를 둔 사람도, 공무원 부모를 둔 사람도, 고연봉직 부모를 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가정 경제 조건이 무척 풍족하고 유복하여 먹고사는 데 걱정이 없으니 그런 사람은 무척 우월감을 갖는다. 입고 싶은 대로 입을 수 있으니, 유행하면 입고 유행이 지나면 버린다. 먹고 싶은 게 있을 때는 말만 하면 대령하니 걱정이 전혀 없다. 우월감이 대단한 것이다. 이런 우월한 가정이 그에게 부여하는 신분은 은연중 사람들의 눈에 여자는 공주, 남자는 귀공자로 비쳐진다. 이 가정이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고귀한 신분과 사회적 지위이다. 이런 가정이 그에게 주는 것은 수치가 아닌 영예이니 어떤 환경에서든 어떤 집단에서든 그는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저희 부모님이 재력가라서 집에 돈이 많아요. 쓰고 싶을 땐 언제든 쓸 수 있죠. 따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어요.”, “저희 부모님은 고위 관직에 계셔서 저는 어디서든 말 한마디면 일을 처리할 수 있어요. 정식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죠. 여러분은 일을 처리하려면 얼마나 피곤해요. 절차도 밟고, 기다려야 되고, 여기저기 부탁해야 되잖아요? 저는 말이죠, 부모님 쪽 사람한테 인사만 하면 일이 처리돼요. 이게 얼마나 대단한 신분이고 사회적 지위겠어요!” 우월감을 갖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우리 부모님은 사회적으로 유명 인사예요. 진짜인지는 인터넷에서 우리 부모님 이름을 검색해 보면 아실 거예요.” 사람들이 검색해서 사실임을 알게 되면 그는 우월감을 느낀다. 어디서든 사람들이 “당신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라고 물어보면 “제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 부모님이 아무개시거든요.”라며 부모의 이름을 먼저 밝혀서 자기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알린다.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한다. ‘당신네 집은 지위가 있고 부모님은 관직에 계시거나 유명 인사거나 재력가시니 당신은 정계나 재계의 2세인데 나는 뭐지?’ 그렇게 고심하다가 말한다. “우리 부모님은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노동자에 평범한 월급쟁이라 내세울 만한 것도 없어요. 하지만 제 조상님은 어떤 왕조 때 재상을 맡은 적이 있죠.” 그럼 누군가 말한다. “당신의 조상님이 재상을 맡은 적이 있다고요? 아, 당신은 특별한 신분의 사람이네요. 재상의 후대시잖아요. 재상의 후대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죠. 이 역시 명사의 후대라고 할 수 있어요!” 어떻게든 유명인과 얽히면 사람의 신분이 특별해지고, 사회적 지위도 단숨에 상승해 사람들에게 존중받는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희 조상님은 한때 거상이셨어요. 그 일대의 제일가는 부자셨죠. 후에 사회와 제도가 변하면서 재산이 국유화되었어요. 지금 주변 수십 리에 사는 많은 사람의 집이 원래는 모두 저희 조상님의 집이었답니다. 옛날 저희 집은 방이 사오백 개는 안 되어도 이삼백 개는 되었고 부리는 사람만 어림잡아 수백 명이었어요. 저희 할아버지가 주인이라 일 한 번 하지 않으시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부리셨어요. 할머니도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으셨지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옷 입고 씻을 때도 하인들이 시중을 들었어요. 시간이 흘러 사회 환경이 변하면서 집안이 몰락해 더 이상 귀족이 아닌 평민이 되었어요. 예전에 저희 집안은 워낙 크고 명망도 높아서 마을 전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저는 이런 집 출신입니다. 어때요? 평범하지 않죠? 절 우러러봐야 되지 않겠어요?” 또 어떤 사람이 말한다. “당신 조상이 근방 제일가는 부자라는 건 대단한 게 아녜요. 저희 조상은 황제였다고요. 그것도 건국 황제 말입니다. 듣기로는 저희 성씨가 그로부터 전해졌다고 해요. 그것도 방계가 아닌 직계로 말이죠. 어때요? 저희 조상님의 배경을 듣고 나니 제가 달리 보이지 않나요? 저를 상당히 존중해야 하지 않겠어요?”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희 집 조상님은 황제를 한 적은 없지만 장군이었던 조상님은 계십니다. 적군을 수없이 물리쳐 전공을 셀 수도 없이 세우신 조정의 중신이었어요. 우리가 바로 그의 직계 후손입니다. 저희 가족은 지금까지도 조상님이 남기신 무공 동작을 배우고 있어요. 외부에는 비밀로 하면서 말이에요. 어때요? 특별한 신분 아닌가요? 존귀한 지위죠?” 이렇게 소위 아득한 조상의 가정과 현대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특별한 신분은 사람에게 영예이자 영광이고 사람은 그것을 수시로 끄집어내어 들먹이고 자랑한다. 자신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서 말이다. 이는 자기 신분과 지위의 특별함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더 높은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여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가치를 비범하고 특별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비범하고 특별하게 만드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존중과 동경, 앙모와 우러름을 받아 더 쾌적하고 자유로우며 존엄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일부 특수한 상황에서,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아무런 존재감을 찾지 못하고 남들에게 존중과 우러름을 받지 못한다. 그러니 기회를 보고 수시로 자신의 특별한 신분이나 가정 배경을 이용해 존재감을 나타낸다. 이를 통해 그가 평범하지 않음을 알리고, 남들에게 중시받고 존중받음으로써 사람들 가운데서 위신을 세우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제 신분, 지위, 자질만 보고 평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저희 조상님이 명나라 왕작 가문에서 책사를 하셨습니다. 혹시 아무개라고 아시나요? 그분이 바로 제 증조부의 조부가 되시는 저희 조상이십니다. 왕작 가문의 핵심 책사로 계실 적에 위로는 천문, 아래로는 지리에 해박하고 고금과 대내외 사정에 능통하며 점술에 능해 사람들에게 ‘지다성(智多星)’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분이 사용하던 나침반이 아직까지도 저희 집에 보관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지금은 자주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자기 조상의 눈부신 역사를 수시로 끄집어내어 일장 연설을 하는데 그 말의 진위는 알 수 없다. 과장된 부분도 있을 것이고 사실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신분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사람 가운데서 사람의 신분과 지위 그리고 사람 가운데서 받는 대우, 사람 가운데 놓이는 처지와 계급을 결정한다. 이렇게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신분에서 비롯된 것들을 사람 가운데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매우 중요시한다. ‘영예롭고’ ‘찬란한’ 가족사는 수시로 끄집어내어 과시하지만, 떳떳하지 못하거나 무시당하고 괄시받는 가정 배경이나 가정에서 일어난 일은 자꾸 회피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하는 신분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사람은 특별한 일을 경험할 때 늘 자신의 특별한 가정 신분을 자격, 혹은 자신을 과시할 이유로 삼고는 사람들에게서 높이 평가받고 사람들 가운데서의 지위를 얻으려 한다. 한 가정이 네게 부여한 것이 영광이든 수치이든 네게 부여한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고귀하든 비천하든, 네게 가정이란 그 정도가 고작이다. 그것은 결코 네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지, 진리를 추구할 수 있을지 결정하지 못하고, 네가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을지도 결정하지 못한다. 그러니 사람은 그것을 중요한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이 한 사람의 운명이나 미래는 물론 더욱이 한 사람이 걷는 길을 결정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가정이 네게 부여하는 신분은 사람들 가운데서의 네 감정이나 느낌만을 결정할 뿐이다. 네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 볼품없든 자랑스럽든 그것이 네가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을지를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서 가정이 네게 어떤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부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설령 그것이 네게 부여한 신분으로 인해 네가 우월감을 갖거나 영예롭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 혹여 그것으로 인해 네가 느끼는 감정이 수치나 비천함, 열등감일지라도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피조물의 신분에도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네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하나님이 보기에 모든 사람에게는 동일한 구원의 기회와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할 동등한 지위와 신분이 주어진다. 한 가정이 한 사람에게 부여하는 신분이 영예롭든, 수치스럽든 그것이 네 인성을 결정하지 않으며, 네가 걷는 길을 결정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네가 만약 그것을 중요시하고 네 인생과 생명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으로 여긴다면 너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손에 꼭 쥐고는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다. 만약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 고귀하다면 너는 그것을 하나의 밑천으로 생각할 것이고,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 비천하다면 너는 그것을 수치로 여길 것이다.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 고귀하여 영예롭든, 아니면 수치스럽든, 이는 모두 네 개인적인 이해로, 네가 패괴 인성의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본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 이해일 뿐으로,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네 진리 추구를 위한 밑천이 아니며 네 진리 추구의 장애물도 물론 아니다. 네 사회적 지위의 존귀함과 높은 계급은 네 구원의 밑천이 아니며, 네 사회적 지위의 비천함과 미천함 역시 네 진리 추구의 장애물, 더 나아가 네가 구원을 추구하는 데 장애물은 더더욱 아니다. 가정의 환경과 배경이 어떻든, 삶의 질이나 여건이 어떻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진정한 신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출신 가정이 어떻든, 가정 배경이 눈부시든 보잘것없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는 피조물이다. 설령 네 가정 배경이 눈부셔서 네 신분과 지위가 존귀할지라도 너는 피조물이고, 네 가정 지위가 비천하여 무시당할지라도 하나님 눈에는 여전히 평범한 피조물이다. 특별할 게 없는 것이다. 가정의 배경은 사람에게 저마다 다른 성장 환경을 제공하고, 서로 다른 가정생활 환경은 사람이 물질과 세계, 삶을 바라보는 저마다 다른 관점을 갖게 한다. 생활이 넉넉하거나 곤궁한 것, 가정 여건이 우월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은 각 사람에게 있어 그저 서로 다른 체험에 불과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말하자면, 빈곤하거나 가정의 생활 여건이 평범한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삶에 대한 더욱 깊은 체험이지만 생활이 넉넉하고 가정 여건이 무척 우월한 사람은 이런 점을 체험하기가 어렵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어떤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든, 그 가정 환경이 네게 어떠한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부여했든 네가 하나님 앞으로 나올 때, 네가 하나님께 하나의 피조물로 인정받고 받아들여질 때 하나님 눈에 너는 다른 사람과 똑같고 다른 사람과 평등하다. 그 어떤 특별함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똑같은 방식과 요구 기준으로 네게 요구한다. 네가 “제 사회적 지위는 특별합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특별합니다’는 부분을 빼 버려야 하고, 네가 “제 사회적 지위는 보잘것없습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것없습니다’는 부분을 빼 버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가정이 네게 부여하는 신분이라는 일에서 벗어나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네게 준 피조물의 신분을 받아들여서 피조물의 신분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한다. 네 가정이 좋고, 네 신분이 고귀하다고 해서 네가 자랑할 것이 아니고 남보다 고귀하지도 않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하나님 눈에 피조물인 이상, 너는 패괴 성품으로 가득하고 하나님이 구원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네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 비천하거나 미천해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네게 부여한 피조물의 신분을 받아들여야 하며 피조물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저희 가정의 사회적 지위가 낮다 보니 제 신분도 낮아서 사람들이 무시합니다.”라고 말해도 하나님은 상관없다고 할 것이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너는 더 이상 가정이 네게 준 신분으로 나아온 사람이 아닌 것이다. 지금 네 신분은 피조물이며 네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하나님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 가정 배경이 어떤지, 네 신분이 어떤지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눈에 너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사탄의 패괴를 거친 패괴된 인류 중 하나이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니 하나님이 구원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네가 정계나 재계의 2세인지, 귀공자나 공주인지, 농민이나 평범한 사람의 자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예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대상은 너라는 사람이며 네 패괴 성품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지 네 신분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 패괴 성품은 네 신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네 가치 역시 네 신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네 패괴 성품은 네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려는 것 역시 네 지위가 비천해서가 아니며 더욱이 네 지위가 존귀해서도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경영 때문에, 네가 사탄의 패괴를 겪은 패괴된 인류 중 한 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를 택한 것이다. 네 가정이 네게 어떤 신분을 부여했든, 하나님 앞에서 너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탄의 패괴를 겪은, 패괴 성품을 가진 인류 중 한 명이니 특별할 게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만약 사람들 중 또 누군가 “전 현장(縣長)이었어요.”, “전 성장(省長)이었습니다.”, 아니면 “저희 조상이 황제였습니다.”, “전 의원을 했었습니다.”, “전 대통령 후보였습니다.”, “전 대기업 총수였습니다.”, “전 공기업 사장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리 대단할 것이 있겠느냐? 네가 사장이나 장관이었다 한들 그것이 중요하겠느냐? 이 세상, 이 사회는 사람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매우 중요시하여 사람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너를 어떻게 대할지를 결정하지만 여기는 하나님 집이다. 하나님은 네게 그런 눈부신 이력이 있다고 해서, 찬란하고 영예로운 신분을 가졌었다고 해서 다른 시선으로 너를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은 네게 진리를 추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네가 너의 자격과 사회적 지위, 사회적 가치를 내세운다고 소용이 있겠느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런 것들을 가지고 남들과 비교할 것이다. 분량이 없고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일부 초신자들은 사회나 가정에서의 일을 가지고 남들과 자주 비교하지만 믿음에 기초가 있고 분량도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일반적인 상황에서 그런 말이나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족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밑천으로 여기는 것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렇게 많이 교제했는데 가정이 네게 부여하는 신분과 관련한 일이 이해가 되느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말해 보거라. (하나님, 제가 한 가지 말해 보겠습니다. 사람은 종종 자신이 태어난 가정이나 그 가정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가정에서 태어나면 사람은 속으로 열등감에 젖어 자신의 출신이 비천하다는 생각에 사회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좋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노력합니다. 신분과 지위가 상대적으로 괜찮은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비교적 교만하여 자기를 드러내기를 즐기고 태생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신분과 지위는 모두 피조물로 똑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신분과 지위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할 수 있을지, 구원받을 수 있을지를 결정할 수 없기에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로 자신을 통제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 훌륭하구나.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많이 따지기 때문에 일부 특수한 상황에서 그들은 “교회에서 누구누구는 있는 집안 사람들이랍니다!”라고 떠든다. ‘있는 집안’을 언급할 때 그는 눈을 번뜩이면서 극도의 부러움과 질투의 마음을 내비친다. 속으로 얼마나 오래 부러워했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부러웠는지 침을 흘리는 줄도 모를 지경이다. “아, 누구누구 중, 아무개 아버님은 고위 간부고, 어떤 분은 현장, 어떤 분은 시장, 또 어떤 분은 정부 부처의 비서랍니다!” 좋은 옷을 입고 꾸밀 줄 알며 품위나 식견이 있고 쓰는 물건도 명품이면 속으로 부러워한다. ‘있는 집안 사람인가 보네. 고정 자산만 수십억이겠지.’라고 감탄하면서 대단히 부러워하는 것이다. 아무개가 기업체 사장이라고 하면 당사자보다도 그 일에 신경을 더 쓴다.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매번 그 얘기를 꺼내고, 심지어 교회 리더를 선출할 때에도 그를 뽑는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 그는 특별한 감정과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아부하고, 그들에게 접근하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며 자기 신세를 한탄한다.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관직 한 번 못 하셨을까? 난 어째서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거지? 어째서 우리 집 얘기는 입에 담지도 못하는 걸까? 사람들이 태어난 가정을 보면 다들 관료 집안 아니면 자산가 집안이잖아. 근데 우리 집은 정말 아무것도 없어. 형제자매 모두 평범하기 그지없어. 농사짓는 농민이라 사회 하층민이고.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지. 교육 수준이랄 것도 없으니까. 정말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겠어!’ 부모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말을 돌린다. “그런 것보다는 우리 다른 얘기 해요. 교회의 아무개 씨 있잖아요? 사장님이셨다는 분 말이에요. 역량이 탁월했나 봐요. 임직하고 몇십 년간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었대요. 관운을 타고난 거죠. 전 어림도 없어요. 그분이 이제 하나님까지 믿으니 금상첨화 아닌가요? 정말 복 있는 분이에요. 사회에선 없는 게 없었고, 하나님 집에 오고 나서는 하나님나라에까지 들어가서 아름다운 종착지도 생길 수 있으니까요.” 그는 관직에 있던 사람이 하나님 집에 오면 교회 리더가 되어야 하고 아름다운 종착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누가 결정하는 것이냐? 그가 결정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것은 딱 봐도 불신파의 말이다. 어느 정도 역량 있고 실력 있으며, 잘 입고 잘 살며, 좋은 차를 몰고 큰 집에 사는 사람이 보이면 어김없이 접근해서 아부하며 비위를 맞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높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집에 와서 특권화를 꾀하려 한다. 형제자매에게 거들먹거리면서 노예처럼 대하는데 공직자의 직업병인 것이다. 형제자매가 네 부하냐? 교회 리더를 선출할 때 그가 선출되지 않으면 그는 화를 내며 말한다. “안 믿을래요. 하나님 집은 불공평해요. 기회도 주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다니요!” 세상에서 공직자였던 것이 습관이 되어 자기가 특출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집에 와서도 늘 자기가 결정권을 잡으려 한다. 무슨 일에든 나서려 하고 특권화를 꾀하려는데, 하나님 집을 세상으로 여기고 사회로 여긴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관료 아내인데 하나님 집에 와서도 사모님처럼 굴고 싶어서 사람들이 자기를 대우해 주고 자기를 중심으로 돌기를 바란다. 예배 시간에 형제자매가 인사를 소홀히 하면 화가 나서 다음 예배에는 불참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신경 쓰지 않으니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사회에서 네 신분이 얼마나 특별하든 하나님 집에 오면 그 신분은 모두 사라진다. 하나님 앞에서, 진리 앞에서 사람에겐 오직 한 가지 신분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피조물이다. 세상에서 네가 고위 공직자였든 공직자 아내였든, 사회에서 엘리트였든 말단이었든, 장군이었든 사병이었든, 하나님 집에서 너는 피조물이라는 오직 하나의 신분만을 가질 뿐이다. 달리 특별한 것이 없으니 특권화를 꾀하지도, 개인을 우상화하지도 말아야 한다. 또한 특수한 기독교 가정이나 대대로 주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어머니는 신학대학에 다녔고, 아버지는 목사인 터라 종교계에서 평판이 좋고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이고 나서도 그는 자신을 예전과 같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이다! 꿈은 무슨 꿈이냐,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네가 목사이든 리더이든 하나님 집에 왔으면 하나님 집의 규칙을 알고 신분을 전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너는 고위 공직자나 말단 사원도 아니고, 자산가나 빈털터리도 아니다. 하나님 집에 오면 너는 단 하나의 신분만을 갖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준 피조물이라는 신분이다. 피조물은 무엇을 해야 하겠느냐? 자기 집안의 내력을 자랑하는 것도, 가족이 네게 부여한 사회적 지위를 자랑하는 것도, 나아가 네 우월한 사회적 지위로 하나님 집에서 날뛰면서 특권화를 꾀하는 것도, 사회에서 쌓은 경험이나 사회적 지위를 통해 얻은 우월감으로 하나님 집에서 왕 노릇 하며 결정권을 잡으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 집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착실하게 처신하라는 것이다. 네 가정 배경을 언급하지 말고,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갖지도 말아야 한다.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우월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요컨대 피조물로서 해야 할 일을 착실하게 하고, 피조물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그게 바로 용도 웅크려야 하고, 호랑이도 엎드려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다. 너는 웅크릴 필요도, 엎드릴 필요도 없다. 굽실거릴 필요도, 나아가 우쭐거릴 필요도 없고 네가 굳이 나설 필요도 없으며, 가식을 떨거나 참고 양보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고 그 방식도 공정하다. 하나님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많은 말씀을 하고 많은 것을 요구했는데, 궁극적으로 네게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피조물이 해야 할 모든 일을 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가정이 사람에게 신분을 부여하는 일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할 것을 요구한다. 가정의 우월감을 과시하지 말고, 노골적이고 공개적으로 본인의 가정 형편이 얼마나 안 좋은지 모두에게 털어놓을 필요도 물론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럼 하나님 집에서는 ‘영웅은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를 요구하는 건가요?” 이 말이 진리더냐? (아닙니다.) 이 말은 진리가 아니다. 그러니 너는 어떤 일도 이 말에 따라 평가할 필요가 없으며 이 말을 준칙으로 해서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지킬 필요도 없다. 가정이 사람에게 신분을 부여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네 본분을 이행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네 유일한 신분은 피조물이니 너는 제대로 된 피조물이 되는 것에 영향을 주거나 그렇게 되는 것을 막아서는 것을 마음속에 담아 두거나 너무 중요시하지 말고 내려놓아야 한다. 형식 면에서든 태도 면에서든 너는 가정이 네게 부여하는 신분을 내려놓아야 한다. 어떠냐?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가정이 네게 영예로운 신분을 주었을 수도 있고 가정의 배경이 네 신분에 그늘을 드리웠을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이를 진지하고 엄숙하게 대하길 바란다. 그런 다음 특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이런 일들이 네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사람을 대하는 것에 영향을 주거나 일을 처리하고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너의 정확한 원칙에 영향을 줄 때, 네가 가정으로부터 부여받은 신분의 영향을 받지 않고 모든 사람을 정확하게 대하며, 모든 일을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본분을 늘 건성으로 이행하고 교란한다면, 너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느냐? ‘그녀를 책망해야겠다. 책망하지 않으면 그녀는 교회 사역에 영향을 줄 거야.’ 너는 고민 끝에 그녀를 책망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수긍하지 않고 구구절절 핑계를 늘어놓는다. 그래도 너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교제하고 책망한다. 그녀가 말한다. “당신 내가 누군지 몰라요?” “당신이 누구든 저와 무슨 상관이죠?” 그녀가 말한다. “당신 남편의 상사가 제 남편이에요. 오늘 절 힘들게 굴면 남편분이 곤란해질 텐데요.” 너는 말한다. “이건 하나님 집의 사역입니다. 당신이 제대로 하지 않고 늘 교란한다면 당신 본분을 교체하겠어요.” 그녀가 말한다. “어쨌든 저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어떻게 할지는 알아서 하세요!” 알아서 하라는 게 무슨 의미냐? 자기를 감히 교체하면 네 남편을 해고하겠다고 통보하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고민할 것이다.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어쩐지 평소 말투가 오만방자하다 했어.’ 그런 다음 말투를 바꿔 말한다. “그럼 이번은 그냥 넘어갈게요. 대신 다음에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 별다른 뜻은 없었어요. 다 교회 사역 때문에 그러는 거죠.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 형제자매고 한가족이잖아요. 아시다시피 제가 교회 리더인데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되겠어요? 제가 책임지지 않는다면 여러분도 저를 뽑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나요?” 말이 두리뭉실해진다. 여기에 원칙이 있겠느냐? 마음속의 심리적 마지노선이 무너져 원칙을 감히 지키지 못하고 몸을 사리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녀의 사정을 봐주게 된 것이다. 너는 네 신분이 그녀의 신분만큼 고귀하지 않고 그녀의 사회적 지위가 너보다 높은 것이 부끄러운 나머지 그녀에게 통제받고 그녀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협박을 받을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너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너는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진리를 실행하지 못할 것이며, 너는 하나님 앞에서 충성심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에게 충성심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너를 열납하고 신뢰하겠느냐? 그리고 중요한 사역을 네게 맡기겠느냐? 너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다. 중요한 순간 너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 자신의 이익을 지켰기 때문이다. 중요한 순간 너는 사회와 사탄에게서 비롯된 사악한 세력이 두려워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 버리고 굳게 서지 못한 것이다. 이는 심각한 과오이며 하나님을 욕되게 한 기호이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너는 그 일을 할 때 피조물의 신분에 반하는 일을 했으며,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원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너는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신분의 영향을 받아 그 일을 처리했다. 모든 일 앞에서 네가 가정으로부터 부여받은 신분이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너는 일이 생겼을 때 너도 생각지 못한 일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은 한편으로는 네가 진리를 어기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를 혼란하게 하여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 것이다. 이는 자신에게 과오와 아쉬움을 초래하기 쉬워 하나님 앞에 오점을 남김으로써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일깨워 준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원칙을 위배하게 된다. 이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방금 교제한,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을 내려놓는 것이 쉬운 일이겠느냐? (쉬운 일입니다.) 쉽겠느냐? 어떤 상황에서 이런 일이 네게 영향을 미치고 교란하겠느냐? 사람이 이를 정확하고 순수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특수한 환경에서 이런 일의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것은 네 본분 이행과 일 처리 방식 그리고 그 결과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가정이 신분을 부여하는 것을 정확하게 대하고 그것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것에 좌우되지 않고, 정상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방식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면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가져야 할 태도와 원칙을 갖게 될 것이다. 이어서 우리가 교제할 내용은 너에 대한 가정의 영향을 내려놓기이다.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사람의 처세 원칙, 삶의 방식, 생존 방식 심지어는 종교나 신앙을 대하는 태도와 관념 그리고 사람이나 일, 사물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관념과 관점은 가정의 교육에 물들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나이가 얼마든, 어떤 성별이든, 직업이 무엇이든,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가 극단적이든 아니면 이성적이든 결국 다방면의 일에 있어서 사람의 생각과 관점, 그리고 일을 바라보는 태도는 가정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달리 말해, 가정이 한 사람의 다방면에 미치는 교육은 상당 정도 한 사람의 일 처리에 대한 태도와 방식 그리고 생존관을 결정하고, 나아가 사람의 신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미치는 가정의 교육과 영향이 크다면 사람의 일 처리 방식이나 처세 원칙, 생존관 그리고 신앙을 바라보는 관점, 그 근원은 가정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가정 자체는 진리가 생기는 곳이 아니고 진리의 근원도 아니므로 가정이 네게 교육한 모든 사상 관점, 생존 방식의 원동력이나 목적은 거의 하나밖에 없다. 바로 네가 잘되라는 것이다. 네가 잘되기 위한 것들이 부모에게서 오든, 조부모에게서 오든, 아니면 네 조상에게서 오든 그 누구에게서 비롯되든 그것은 결국 모두 사회나 사람들 속에서 네 이익을 지키고 남에게 차별받지 않으며 더욱 자유롭고 원만하게 사람들 가운데서 생존하여 네 이익을 최대한 지키기 위한 것이다. 너에 대한 가정의 교육은 너를 보호하고 네가 차별이나 수치를 받지 않게 하며 뛰어난 사람이 되게 한다는 뜻으로, 네가 남을 얕보거나 괴롭힐지언정 본인에게만 해가 되지 않으면 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가정이 네게 영향 준 것 중 가장 중요한 일부이며 네게 영향 준 모든 사상의 정수이자 주요 목적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가정이 네게 영향을 미친 모든 것의 목적과 핵심에서 봤을 때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설령 그것이 인성적 윤리나 인성의 정당한 이익과 권익에 부합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와 상관이 있느냐? 그것이 진리이겠느냐? (아닙니다.) 확실히 말하건대 진리가 아니다. 가정이 네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긍정적이고 정당한 것일지라도, 아무리 인성화 되고 도덕적 준칙에 부합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며 진리를 대표할 수 없음은 물론 진리를 대신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이런 측면의 것 역시 가정이라는 주제에서 사람이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 주제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너에 대한 가정의 영향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는 가정에 해당되는 주제 중 두 번째 측면에서 사람이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가정이 네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얘기가 나왔으니 우선 가정이 네게 미치는 영향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해 보자. 사람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에 따라 구분한다면 어떤 것은 상대적으로 정확하고 긍정적이어서 공개 석상에 꺼내어 놓을 수 있고, 어떤 것은 이기적이고 비루하며 추하여 상대적으로 부정적인데,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가정으로부터 받는 이러한 영향은 사람에게 일종의 방호복으로, 사람의 육적인 이익을 보호하고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의 존엄을 유지하여 업신여김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가정이 네게 미치는 영향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교제해 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 가정에서 어른이 자주 말하는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것은 네가 명예를 중시하고 체면이 서는 삶을 살면서 망신당할 일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을 긍정적으로 이끄느냐, 아니면 부정적으로 이끄느냐? 너를 진리로 이끌겠느냐? 네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한다. 네가 과오를 저지르거나 잘못된 일을 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진리에 위배되는 일을 하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자기를 인식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해부하고 진정으로 회개한 다음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 되려 할 때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말과 상충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부분이 상충되겠느냐?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말은 사람이 화려한 모습을 살아 내는 것을 중시하여 체면이 서는 일을 많이 하라고 하지, 옳지 않은 일, 불명예스러운 일을 해서 자신의 추한 면을 드러내라고 하지 않는다. 망신을 당하거나 존엄하지 않게 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체면과 체통, 명예를 위해 자기를 쓸모없는 사람처럼 말하면 안 되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어두운 면이나 떳떳하지 못한 부분을 남에게 말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체면을 세우고 존엄하게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존엄은 사람의 체면에 달려 있고, 사람의 체면은 가식과 포장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이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과 상충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정직한 사람으로 살 때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말에 정확히 위배되는 것이다. 네가 정직한 사람이 되려면 체면을 차리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체면은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진리 앞에서 사람은 자신을 폭로해야지 위장이나 가식을 떨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진정한 생각과 잘못한 일, 진리 원칙에 위배되는 부분 등의 실상을 낱낱이 하나님에게 보이고 형제자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한다. 체면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진정한 피조물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구원받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때 종종 가정의 교육에서 비롯된 것들에 지배되어 잘못된 일을 저지르면 포장하고 위장하며 생각할 것이다. ‘말하면 안 돼. 아는 사람도 말하면 안 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끝장을 보겠어. 내 체면이 우선이야. 산다는 건 다른 걸 위한 게 아니라 바로 체면을 위한 거지. 체면이 무엇보다 중요해. 사람이 체면을 잃으면 존엄도 잃는 거야. 그래서 사실도 사실대로 말해서는 안 되고 위장하고 포장해야 하는 거야. 안 그러면 체면이나 존엄은 실추되고 삶의 가치도 없어지는 거야. 존중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싸구려가 되는 거야.’ 네가 이렇게 실행한다면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자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해부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정이 네게 교육한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말을 따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네가 만약 이 말을 내려놓고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한다면 이 말이 네게 아무런 작용을 하지 못할 것이고 더 이상 네 좌우명이나 행동 원칙이 되지 않을 것이니, 네가 하는 행동은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말과 상반될 것이다. 네가 체면이나 존엄을 위해 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며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산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진정한 피조물 되기를 추구하기 위해 산다면, 네가 이런 원칙을 따른다면 너는 가정이 교육한 그런 것들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사람에 대한 가정의 교육은 한두 마디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수많은 명언이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라는 말은 집안 어른이나 부모가 자주 하는 말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일생에 다른 게 아닌 바로 이름을 위해 살아야 한다. 사람들 가운데 좋은 명성을 남기고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어디서든 덕담과 칭찬을 많이 하고 선의의 말을 많이 해야 한다. 남에게 미움을 사지 말고 좋은 일과 착한 일을 많이 하라.”라고 알려 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가정의 교육은 사람의 행위나 행동 원칙에 일정한 영향을 미쳐 사람이 명예와 이익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즉, 자신의 명성과 명망,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인상, 그리고 자기가 하는 모든 일, 나타내는 모든 관점이 사람들로부터 받는 평가를 매우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명예와 이익을 중요시하면 무의식중에 본분 이행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원칙에 부합하는지, 하나님을 흡족게 하는지, 본분 이행이 합격인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차순위, 후순위로 본다. 반면 가정이 네게 교육한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라는 말은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네가 사람들 마음속의 사소한 부분까지 주목하게 만든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뒤에서 남들이 하는 그에 대한 평가까지 너무 신경 쓴 나머지 몰래 훔쳐 듣기도 하고 심지어는 남들이 그에 대해 적은 평가를 훔쳐 보기까지 한다.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나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좋게 얘기하는지 얼른 들어 봐야겠다. 아, 내가 게으르고 좋은 음식을 즐겨 먹는다고 하네. 그럼 고쳐야지. 앞으로는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해야겠다.’라고 생각한다. 한동안 부지런하게 지내다가 고민한다. ‘다들 아직도 날 게으르다고 하는지 들어 봐야겠다. 최근엔 별말 없었던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그는 안심이 되지 않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모두에게 말한다. “제가 좀 게을러요.” 그럼 사람들이 말한다. “게으르지 않아요. 예전보다 훨씬 부지런해지셨어요.” 그는 곧 마음을 놓고 기쁨과 위안을 얻는다. ‘거봐. 나에 대한 모두의 평가가 달라졌어. 내 행동을 모두가 눈여겨봤나 보군.’ 네가 한 모든 것은 진리를 실행하기 위한 것도,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닌 자신의 명성을 위한 것이다. 그러면 무의식중에 네가 한 모든 것이 어떻게 변하겠느냐? 종교 행위가 된다. 너란 사람의 본질은 어떻게 변하겠느냐? 전형적인 바리새인이 된다. 네가 걷는 길은 어떻게 변하겠느냐? 적그리스도의 길이 된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렇게 규정하는 것이다. 네가 한 모든 일의 본질은 변질되어 바뀌어 버린다.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도,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것도 아닌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네 본분 이행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불합격이란 한 마디로 끝난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네가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과 피조물의 본분이 아닌 오로지 자기 명성에만 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정의하면 네 기분이 어떻겠느냐? 그간 하나님을 믿은 것이 헛믿음이 아니겠느냐?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았다는 의미 아니겠느냐?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의 명성만 매우 중시한 것은 근본적으로 너에 대한 가정의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가 교육받은 것 중 가장 중요한 말은 무엇이냐?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라는 말이 네 마음에 깊이 뿌리내려 네 좌우명이 된 것이다. 어려서부터 이 말에 영향받고 교육받아 커서도 자주 그 말을 되뇌면서 네 후대와 네 주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을 네 행동 및 일 처리 방식과 준칙으로 삼고, 나아가서는 네 인생에서 추구하는 목표나 방향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목표와 방향이 잘못되면 마지막 결실은 부정적일 것이 분명하다. 네가 한 이 모든 일의 본질은 그저 이름을 위한 것이었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라는 말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데도 너는 그것을 여전히 모르고 있다. 넌 사람은 이름을 위해 살지 않느냐며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이 말은 긍정적이고 정당해 보여서 너도 모르게 이 말에 물들어 이 말을 긍정적인 사물로 간주한다. 네가 이 말을 긍정적인 사물로 간주한다면 너는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추구하고 실행할 것이고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얼떨결에 그것을 진리로 여기고, 진리 준칙으로 여길 것이다. 네가 그것을 진리 준칙으로 간주한다면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든 듣지도 않을뿐더러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다. 네가 무조건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라는 네 좌우명에 따라 실행하고 일을 한 결과로 얻는 것은 좋은 명성일 것이다. 너는 바라는 것을 얻겠지만 진리를 위배하고 진리를 포기했기에 구원받을 기회도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결과가 이럴 것이니 가정이 너에게 교육한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라는 사상을 내려놓아야 하며 거부해야 한다. 그것은 네가 보류해야 할 것도 아니고 네가 평생의 노력과 시간을 기울여 실천해야 할 말과 사상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사상 관점의 주입이자 영향인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내려놓아야 한다. 네가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너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멸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과가 아주 심각하다. 네게 있어 그것은 단순히 말 한마디가 아니라 하나의 암 덩어리이며 사람을 패괴시키는 수단과 방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좋은 명성이나 명망을 추구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으며, 사람들 가운데서 좋은 인상을 남겨서 남들의 지지를 받거나 남들이 엄지를 치켜세우게 만들라고 한 적도, 이름을 위해, 좋은 명성을 남기기 위해 살라고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하나님과 진리에 순종하라고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은 네가 내려놓아야 하는, 너에 대한 가정의 영향 중 하나인 것이다.
가정이 네게 미치는 영향에는 하나가 더 있다. 예를 들면, 부모나 어른이 너를 채찍질할 때 “고생을 해 봐야 뛰어난 사람이 된다.”라는 말을 자주 할 것이다. 그 목적은 네가 고생과 끈기, 근면을 배워서 무슨 일을 하든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생하고, 인내하고, 근면하고, 불굴의 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만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사람은 무슨 뜻이겠느냐? 사람들에게 얕보이거나 무시당하거나, 차별받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 높은 위신과 지위, 발언권과 의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나은 삶, 수준 높은 삶을 살고 남들로부터 우러름과 감탄을 받으며 부러움을 사는 것이다. 즉, 모든 인간 중에서 네가 상위층이라는 것이다. 상위층이란 무슨 의미겠느냐? 바로 네가 많은 사람들을 밟고 있어 그들에게 수모를 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이것이 ‘뛰어난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이런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네가 ‘고생을 해 봐야’ 한다. 그러니까 남이 못하는 고생을 네가 해야 한다는 말이다. 뛰어난 사람이 되기 전까지 너는 반드시 사람들의 백안시와 조롱, 비아냥, 비방 그리고 사람의 몰이해, 나아가서는 미움 등을 견뎌야 한다. 육적인 고생 외에도 사람은 여론으로부터 받는 비아냥과 비방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야 사람 가운데 성공한 모습을 보일 수 있으며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이 말의 목적은 뒤처진 사람이 아닌 뛰어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뒤처지면 고생을 하고 수모와 억울함을 겪으며 존엄과 체면을 잃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 비롯되는 이런 측면의 교육의 목적 역시 네가 잘되라는 것이다. 네가 잘되기 위한 목적은 바로 네가 사람들 가운데서 수모를 당하지 않고, 권력을 쥐며 유명해지고, 좋은 것을 먹고 즐기며, 어딜 가도 무시당하지 않고, 어디서든 집단을 주름잡고 좌지우지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네게 허리 숙여 머리를 조아리게 하려는 것이다. 뛰어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너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문과 조상을 빛내고 부모와 가족이 덕을 보고 수모를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네가 고생을 해서 뛰어난 사람이 되어 승용차를 몰고 호화 주택에 살며, 고위 공직자가 되어 주변에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으면 네 가정이 너로 인해 덕을 볼 것인데, 가족들도 승용차를 타고 좋은 음식을 먹을 것이다. 너는 산해진미를 먹고 싶은 만큼 먹고, 가고 싶은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며, 떵떵거리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제멋대로 살 수 있을 것이고, 기가 죽거나 몸을 사릴 필요 없이 오만방자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심지어는 법을 초월하여 겁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가정이 이런 면에서 교육하는 목적인데, 억울한 일을 당하지 말고 뛰어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대놓고 말하자면, 남을 이끌거나 지휘하며 다른 사람을 부리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고, 남을 업신여길지언정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며, 남에게 이끌리는 사람이 아닌 뛰어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면에서 가정의 영향은 네게 유익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어째서 유익이 없다고 하느냐? 만약 모든 가정이 다음 세대를 이렇게 가르친다면 사회 갈등이나 사회의 경쟁 압박이 증가하여 사회가 더욱 불공평해지지 않겠느냐? 사람들은 모두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고자 하지 피라미드 아래에 있지 않으려 하며, 평범한 사람보다는 남을 관리하며 업신여기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그 사회가 좋을 수 있겠느냐? 이는 분명 긍정적인 사회의 지향점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사회 갈등을 첨예화하고 사람 간 경쟁의 압박을 강화하며 사람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킬 뿐이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학생끼리 경쟁하는데 뒤에선 열심히 공부하면서 만나서는 “아, 주말에 또 공부 못했네. 좋은 데 가서 하루 종일 놀기만 했어. 넌 어디 갔었어?” 상대방이 바로 대답한다. “나도 하루 종일 자느라 공부 못했어.” 사실, 속으로는 서로가 하루 종일 공부하느라 피곤한 것을 알고 있지만 말로는 아무도 자기가 몰래 공부했고,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두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 남들이 자신을 뛰어넘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말로는 공부를 안 했다고 하는 것은 남들이 모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네가 그런 거짓말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는 너 자신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지 남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거짓말을 하면 사회에 나가서 올바른 길을 걷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에 나가 이익, 돈, 지위와 관련된 일에서는 오로지 치열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극단적인 수단도 불사하며 무슨 일이든 하려 하고, 또 하게 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려 할 것이다. 계속 그렇게 한다면 사회가 잘될 수 있겠느냐? 만약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한다면 인류가 잘될 수 있겠느냐?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사회의 각종 부정한 풍조와 사악한 조류의 근원은 사람에 대한 각 가정의 영향에서 비롯된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어떤 요구를 하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서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 세속적인 사람, 일반인이 되지 말고, 위인이나 유명인,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더냐? 하나님이 그렇게 요구하더냐? (아닙니다.) 아주 분명한 것은 가정이 네게 영향을 미친 “고생을 해 봐야 뛰어난 사람이 된다.”라는 말은 긍정적인 지향점이 아님은 물론 진리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가정이 네게 고생하라고 하는 목적은 불순한데, 그 속엔 졸렬하고 떳떳하지 못한 저의가 숨겨져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고생하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되려면 사람은 고생해야 하는데,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그 밖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고생은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이며 정상적인 사람이 감수해야 하고 가져야 할 태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게 뛰어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말씀에 따르고 순종할 수 있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한다. 하나님이 네게 깜짝쇼를 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으니 네가 세상을 뒤흔들 일을 하거나 그 어떤 명사나 위인이 될 필요도 없다. 너는 그저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실제적인 사람이 되면 그만이다. 네가 얼마나 고생할 수 있든, 혹은 고생할 수 있든 없든, 결국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나면 그것이 최고의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진정한 피조물이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고 정상 인성,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지, 이방인이나 패괴된 인간이 생각하는 어떤 높은 사람이나 위인이 아니다. 이런 측면으로 예전에 많이 교제했으니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고생을 해 봐야 뛰어난 사람이 된다.”라는 말은 분명 네가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이겠느냐? 네가 가정에서 이런 측면으로 영향을 받아 생긴 추구하는 방향이다. 즉, 네가 추구하는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람들 가운데서 출중하고 빼어나기 위해, 남들로부터 우러름 받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마음가짐과 목적, 원동력을 내려놓고 진정한 피조물이 되기 위해 매사에 착실하게 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착실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방식과 원칙에 따라 모든 일에 임하는 것이다. 설령 그 일이 놀라운 업적도, 남들에게 인정받는 일도 아니고, 나아가 누구에게도 지지를 받거나 중시받지 못한다고 해도 너는 그것을 해야 하며 그것을 피조물로서 이행해야 할 본분으로 삼고 견디고 지속해야 한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이 보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다. 바꿔야 하는 것은 네가 처신에서 추구하는 바와 인생관이다.
가정이 네게 미치는 교육과 영향은 몇 가지가 더 있는데, 예를 들면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라는 말이다. 가족들은 늘 이렇게 가르친다. “선의로 남을 대하고 남과 다투지 마라. 적을 만들지 마라. 적이 많으면 사회에서의 입지가 좁아진다. 너를 해하거나 적대시하는 사람이 많으면 사회에서 안전하지 못할 것이고, 언제든 위협받을 것이다. 네 생존과 지위, 가정, 신변의 안전, 나아가 직업에서의 발탁 등에 있어서 해코지를 당할 수 있고,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누구든 다정하게 대해야 하고 불쾌하게 해서는 안 된다. 무슨 말이든 여지를 남기고, 다른 사람의 체면을 깎거나 단점을 들추어서는 안 된다. 또 남이 껄끄러워 하는 말은 삼가거나 아예 하지 말고 입에 발린 말만 하는 것이다. 아첨이 죄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리고 크고 작은 일을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한순간을 참으면 무사 평온하고, 한발 물러서면 세상이 넓어 보인다’는 것이니까.” 생각해 보아라. 한 번에 두 가지 생각과 관점을 주입한다. 하나는 선의로 남을 대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내하며 입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할 말이 있으면 참았다가 집에 와서 하라고 한다. 심지어는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기 때문에 말이 새어나가서 네게 좋을 게 하나 없다는 말이다. 이 사회에서 발붙이고 살아남으려면 사람은 한 가지를 습득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회색분자가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모나지 않고 교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자기 생각을 그대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 현명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같은 성질이라 생각나는 대로 말해 버리니 상사에게 미움을 사서 곤욕을 치른다. 상사는 그의 상금을 취소하고 별일 아닌 일에도 흠을 찾는 것이다. 더는 버티기 어려워서 퇴사하자니 생계가 걱정이고 퇴사하지 않으려 하니 버틸 수가 없다. 너는 진퇴양난에 빠져 당할 수밖에 없으니 이를 무엇이라 하겠느냐? ‘걸렸다’고 한다. 스스로 걸려 버린 것이다. 그러면 가족들이 말한다. “당해도 싸지. 그러게 누가 너더러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를 잊으라던! 그리고 누가 너더러 경솔하게 곧이곧대로 말하라고 하대? 원만하게 지내면서 말하기 전에 신중했어야지, 생각 없이 그대로 말했잖아. 상사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겠니? 사회가 그렇게 만만하던? 늘 자기가 야무지다고 생각하더니 이번에 쓴맛 좀 봤겠네.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으라고. 앞으로는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는 말을 기억하도록 해!” 너는 교훈으로 삼고 명심하게 된다. ‘부모님 말씀이 정말 맞는구나, 이것이 인생의 깨달음이자 정수이니까 듣지 않으면 안 되겠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하니 명심해야지.’ 하나님을 믿은 후 하나님 집에 와서도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는 말을 기억하면서 형제자매를 만나면 안부를 묻고 듣기 좋은 말만 한다. 리더가 “제가 한동안 리더를 맡았습니다만 사역 경험이 아직 부족합니다.”라고 하면 그는 재빨리 아첨한다. “잘하셨습니다. 당신이 리더를 맡지 않으면 저희는 헤맬 거 같아요.” 또 “저는 자신을 인식하게 됐어요. 전 정말 간사한 사람이에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말한다. “간사하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정직하신대요. 저야말로 간사하죠.” 그리고 누군가 귀에 거슬리는 말을 몇 마디 하면 그는 고민한다. ‘귀에 거슬리는 말 몇 마디 하는 게 대순가? 이보다 더 심한 말도 참아 봤는 걸 뭐. 당신이 아무리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해도 난 한 귀로 흘리고 당신 비위 맞추면서 계속해서 아부할 거야. 아부가 죄는 아니니까!’ 누군가 그에게 의견을 묻거나 마음을 터놓고 교제해 달라고 해도 그는 진심을 얘기하지 않고 누구와도 화기애애하다. 사람들이 “어째서 늘 그렇게 화기애애하세요? 혹시 양의 탈을 쓴 늑대 아녜요?”라고 말한다.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양의 탈을 쓴 늑대로 살아도 손해 본 적이 없으니 이것이 내 최고의 처세 원칙이지.’ 이것이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에서 다년간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 집에 와서도 똑같이 생활한다. 전혀 진심을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터놓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인식하는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형제자매 중 누구든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아도 그가 진심을 이야기하지 않으니 아무도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한다.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관점을 가졌는지 드러낸 적이 없다. 누구와도 관계가 무척 좋으니 그가 어떤 유형의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성격의 사람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사람에게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개가 어떤지 그를 통해 알아보려고 하면 그가 말한다. “하나님을 믿은 지 십여 년 정도 됐는데 무척 좋은 사람입니다.” 누구든 그에게 알아보면 그는 언제나 좋은 분, 멋진 분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결점이나 흠을 발견한 적이 있으세요?”라고 물어보면 그는 말로는 “여태껏 발견하지 못했어요. 앞으로 주의 깊게 살펴보겠습니다.”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나더러 미움받는 짓을 하라고 하는데, 그럴 내가 아니지! 내가 사실대로 말해서 그 사람 귀에 들어가면 내 적이 되지 않겠어? 옛날부터 적을 만들지 말라던 가족들의 말을 명심하고 있거든. 내가 어리숙하다고 생각하고, 진리 몇 마디만 교제하면 나에 대한 가정의 교육과 가르침을 잊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어림없지!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 ‘한순간을 참으면 무사 평온하고, 한발 물러서면 세상이 넓어 보인다’는 말은 언제든 옳아. 이 말이 내 부적인 셈이지. 누구의 흠이든 말하지 않을 거고, 내 신경을 건드리는 사람이 있어도 참을 거야. 내 이마에 붙어 있는 글자 못 봤나 보지? 참을 ‘인(忍)’ 자 말이야. 아무리 듣기 싫은 소리를 해도 참고, 누가 책망 훈계를 해도 참는 거야. 그 목적은 모두와 화목하게 지내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거야. 원칙만 고수해서도 안 되고, 어리석게 굴어서도 안 돼. 고집부리지 말고 융통성을 배워야지! 거북이가 왜 그렇게 오래 사는지 생각해 봐. 단단한 게 보이면 껍데기 속으로 숨어서 그런 거 아니겠어? 그러면 스스로를 보호하여 천년만년 살게 될 것이고. 이게 장수의 비결이자 처세의 비결 아니겠냐고.’ 너는 그의 입에서 사실이나 진심 어린 말을 듣지 못한다. 그는 진정한 관점이나 처신의 마지노선을 밝히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하고 고심하기 때문에 그 자신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누구에게나 상냥해서 선해 보이고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곤경에 빠뜨리지는 않지만 사실은 명실상부한 회색분자, 빛 좋은 개살구이다. 교회에는 항상 이런 유형의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크게 잘못하는 것이 없고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며 교회 리더나 형제자매가 그를 누구와도 잘 지내는 사람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본분 이행도 그럭저럭 하고 무슨 일이든 시키면 한다. 특히 말을 잘 듣고 환심을 사며 사람과 이야기하고 일을 처리할 때에도 결코 사람을 해하거나 남의 덕을 보려 하지 않는다. 또 사람에게 나쁜 말을 전혀 하지 않고 뒤에서 판단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하는지, 속으로 각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가 좀 괴상하고 짐작하기 어려운 것 같아서 그를 머물게 하면 골칫거리란 생각이 들 것이다. 어찌하면 좋으냐? 너무 난감하지 않으냐? 본분을 이행할 때 그를 보면 일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 집에서 당부한 원칙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어쨌든 큰 실수를 하지 않고 형식만 거치면 그만이어서 책잡히거나 흠잡힐 여지를 남기지도 않는다. 일 처리는 완벽하지만 속으로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 하는 것이겠느냐? 만약 교회 행정 법령이나 교회의 리더와 형제자매의 감독이 없다면 그가 악인과 한패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들과 나쁜 짓을 저지르고 악행을 일삼지 않겠느냐?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다. 할 수 있지만 아직 그러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가장 골칫거리이다. 이는 전형적인 빛 좋은 개살구이자 교활한 여우인 것이다. 그는 누구와도 실랑이를 벌이지 않는다.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거나 그의 존엄과 연관되는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 ‘내가 참는다. 너랑 실랑이하지는 않겠지만 망신살이 뻗는 날이 올 거다!’ 정말 그 사람이 처분되거나 망신을 당하는 날이 되면 그는 남몰래 즐거워한다. 그는 남들과 리더를, 그리고 하나님 집을 비웃으면서 자기는 비웃지 않는다.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있고 흠이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남에게 해가 되거나 남이 자기를 간파할 수 있는 일은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드러내지 않는다. 남의 경계를 늦추거나 남을 미혹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이든 드러내 보인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가장 음흉하고 다루기 어렵다. 그러니 하나님 집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겠느냐? 쓸 수 있으면 쓰고 그렇지 않으면 제명하는 것이 원칙이다. 어째서겠느냐? 이런 부류의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집과 형제자매, 그리고 리더를 비웃을 수 있는 불신파이다. 그가 하는 역할이 무엇이냐? 사탄 마귀의 역할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가 형제자매를 인내하는 것은 진정한 포용이나 사랑이 아니다. 그는 자기를 보호하고 적을 만들지 않으며 위험이 생기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형제자매를 보호하거나 사랑에서 우러나와서 형제자매를 포용하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진리 추구를 취지로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 것도 아니다. 완전히 남에게 해를 끼치고 남을 미혹시키려는 태도인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회색분자이자 빛 좋은 개살구이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무의미한 세월을 보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이런 부류의 사람이 받은 가정 교육은 그들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처세 방식과 처세 원칙은 그의 인성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가정 교육까지 더해지니 그의 행동이 좀 더 철저하고 구체적이게 되고 그의 본성 본질이 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만약 원론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집의 이익과 연관된 일에서 적절한 취사선택을 하고,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는 자신의 처세 철학을 내려놓음으로써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고 네 과오와 하나님 앞에서의 악행을 줄인다면, 이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최소한 훗날 하나님이 한 사람의 결말을 정할 때 너에 대한 징벌과 처벌을 줄여 줄 테니 그렇게 실행하면 너로서는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지 않으냐? 그에게 전부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는 인성 본질에 연관되는 문제이고 이런 부류의 빛 좋은 개살구나 회색분자는 완전히 진리를 받아들이지는 않기 때문에 그들이 오랫동안 가정에서 물든 사탄의 철학을 내려놓기란 그렇게 간단한 일도, 쉬운 일도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 교육 외에 그들 자신도 사탄 철학을 맹신하여 개인의 주관적인 처세의 태도인 이런 처세 태도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만약 똑똑하다면 자신의 이익에 아무런 위협이나 손해가 없는 상태에서는 이런 방식을 내려놓고 적절하게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킬 것이다. 이것은 네게 좋은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 네 죗값과 너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 줄어들 것이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을 상과 기억으로 바꿀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측면은 여기까지 얘기하도록 하자.
네가 받은 가정 교육에는 또 무엇이 있느냐? 부모는 항상 네게 일러둔다. “가벼운 입으로 무턱대고 떠들고 다니면 언젠가는 그 주둥이 때문에 고생할 날이 올 거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을 명심해라! 이게 무슨 뜻이겠니? 말이 많아지면 반드시 빈틈이 생긴다는 뜻이야. 어딜 가든 입을 조심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먼저 들어 본 다음에 말해라. 대세를 따르면 무탈하겠지만, 늘 나서면서 혼자 떠들면 장관, 상사, 다른 사람들의 의사를 알 수 없어. 네가 먼저 의견을 말했는데 장관, 상사가 그런 의사가 아니라면 그로 인해 네가 곤욕을 치를 텐데 좋은 결과가 따르겠니? 이 녀석아, 앞으로는 조심해야 한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니, 말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입은 먹고 숨 쉴 때나 쓰고, 상사나 남들에게 아부할 때 써야지 속 얘기할 때 쓰는 것이 아니란다. 말도 골라서 하고 말에 기교와 방식이 있어야 한다. 머리를 써야 하는 거야.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 전에 마음속으로 곱씹어 봐야 한다. 곱씹고 난 다음에도 조금 기다렸다가 말해야 해. 그리고 말을 할 때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만약 의사를 약간 밝혔는데 다들 반기지 않고 반응이 썩 좋지 않으면 즉시 멈추고 어떻게 말해야 모두가 좋아할지 고민해 본 다음에 말을 이어 가거라. 그래야 똑똑한 거야. 그렇게 하면 너는 화를 면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너를 좋아할 거다. 사람들이 모두 너를 좋아한다면 네게 좋은 일 아니겠니? 앞으로 기회도 많아지지 않겠어?” 너에 대한 가정 교육은 네가 어떻게 해야 좋은 평판을 얻고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사람들 가운데서 입지를 굳힐 수 있을지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겉모습으로 어떻게 남을 속일 수 있는지를 알려 주고 진심을 이야기하지 말고 마음속 얘기를 전부 쏟아내지 말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진심을 얘기했다가 손해를 좀 보고는 가정에서 들었던 이 말을 떠올리며 교훈으로 삼는다. 갈수록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을 실행하려고 하고 그 말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어떤 사람은 손해를 보기도 전에 그가 받은 이런 측면의 가정 교육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어떤 장소에서든 계속해서 이 말을 실행한다. 그가 이 말을 실행하면 할수록 ‘아버지 어머니가 정말 내게 잘해 주셨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내게 잘해 주셨어. 그들은 내게 항상 진심이셨던 거야. 내가 잘 되기를 바라시면서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을 내게 알려 주셔서 다행이야. 알려 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이 가벼운 입 때문에 엄청 손해를 보고 곤욕을 치르고, 또 많은 사람의 백안시와 비아냥, 조롱을 받았을지 몰라. 정말 유용하고 실용적인 말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말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실제적인 이득을 많이 보았다. 물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때에도 이 말이 가장 유용하고 실용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형제자매가 개인의 내적 상태나 패괴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체험적 인식을 교제할 때 그도 교제하고 싶어 한다. 털어놓고 자기 마음속 생각이나 인식을 솔직하게 말해서 수년간 스스로 억눌렀던 마음을 잠시 이완시키거나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매번 아버지, 어머니가 늘 신신당부했던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나팔이 되지 말고 수신기가 되어라. 남의 말을 듣는 법을 배워라.”라는 이런 말들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속 가득한 하고 싶었던 말을 삼킨다. 모두가 말을 다 하고 나서도 그는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한다. ‘좋았어. 이번에 말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말하고 나면 다들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잖아. 어쩌면 손해일지도 모르니 말하지 않는 게 훨씬 낫지. 그러면 모두들 줄곧 내가 간사하지 않고 정직하다고, 선천적으로 과묵한 사람이라 별로 잔꾀 부리지 않고 그렇게 패괴되지도 않았다고 생각할지 몰라. 특히 하나님에 대해 별다른 관념이 없어서 순수하게 털어놓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을지도 모르지. 나한테 이런 인상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어?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은 여전히 내게 유효한 것 같으니 계속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이 말을 지키는 것이 스스로 멋지고 얻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 번, 두 번 얘기하지 않다가 어느 날 정말 답답해서 형제자매에게 털어놓고 싶은데 입에 자물쇠를 채운 듯, 붕대를 감은 듯하여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다. 형제자매에게 말할 수 없다면 하나님에게 말해 보고자 ‘쿵’ 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한다. “하나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아무개….” 속으로는 다 생각해 놓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표현도 못 한다. 영락없이 벙어리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문장을 어떻게 맞춰야 할지조차 모른다. 이렇게 오랫동안 답답하게 살았으니 스스로 억압을 느끼고 자신의 삶이 어둡고 옹졸하게 느껴진다. 하나님께 마음속 얘기를 시시콜콜 얘기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말문이 막힌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어째서 하나님께 할 말이 없겠느냐? 그저 자기소개만 할 뿐이다. 하나님께 털어놓고 싶었던 속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결국 한 마디밖에 하지 못한다. “하나님, 제가 해야 할 말을 베풀어 주세요!” 하나님이 말한다. “네가 해야 할 말은 무척 많았다. 네가 말하려 하지 않았고, 기회를 줘도 말하지 않았으니 하나님은 네게 주었던 모든 것을 다시 거두어 갔다. 너는 받을 자격이 없으니 네게 주지 않을 것이다.” 그때서야 너는 지난 몇 년간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기 자신을 빈틈없이 완벽하게 포장하여 존엄하게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형제자매가 한동안 결실을 얻는 것을 볼 때, 형제자매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패괴를 털어놓을 때 자기는 한마디도 못 하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으니 자신을 인식한 것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험과 체험을 이야기하고 싶고, 하나님으로부터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고 얼마간 수확도 얻고 싶지만 아쉽게도 자기가 늘 지키던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 때문에, 또 그런 생각에 얽매이고 통제되어 오랫동안 이 말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깨우침이나 빛 비춤도 얻지 못했다. 생명 진입에 있어서도 가진 것 없이 빈털터리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과 생각을 제대로 실행하고 철저히 준수했지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진리에 있어서는 아무런 수확도 없이 빈궁하고 눈이 먼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입을 주었는데 그에게는 진리를 교제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이 없고 자신의 감상과 인식을 이야기할 능력도 없으며, 더욱이 형제자매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더욱 가련한 것은 하나님과 대화할 능력마저 잃어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가련하고도 슬픈 일이다. 너는 말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느냐? 말이 많으면 실수할까 봐 걱정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너는 영원히 말을 하지 마라. 너는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네게 준 것을 포장하고 억누르고 봉인하여 밖으로 발산하지 못하게 했다. 그저 네 체면이 깎일까, 위협을 받을까, 남들에게 간파당할까 염려하고, 더 이상 남들의 눈에 완벽하고, 정직하며,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여 스스로를 포장하고 진실된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결국 어찌 되었느냐? 너는 철저하게 벙어리가 된 것이다. 누가 너를 해친 것이냐? 근본적으로는 가정 교육으로 인한 것이다. 하지만 너 자신에게서 보면 네가 사탄의 철학에 따라 사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너는 가정 교육이 옳다고 믿으면서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긍정적인 것임은 믿지 않았다. 너는 너에 대한 가정 교육을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 너에 대한 하나님의 공급과 도움, 가르침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자 부정적인 사물로 간주했다. 그러니 하나님이 처음에 네게 얼마를 베풀어 주었든 여태껏 네가 경계하고 거부한 결과는 하나님이 네게 주지 않고 모든 것을 거두어 간 것이다. 넌 가질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아직 이런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을 때 너는 이런 측면으로 가정이 주입한 것을 내려놓고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너를 더욱 폐쇄적이고 음흉하며 위선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고 마음을 터놓으라고 한 하나님 말씀에 정확하게 위배되고 배치된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마땅히 진리를 추구할 때 너에 대한 이른바 올바른 가정 교육을 마땅히 내려놓고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가정이 네게 어떤 교육을 했든, 그것이 네게 얼마나 좋고 유리하든, 또 너를 얼마나 든든하게 보호해 주든 그것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내려놓아야 한다. 반면 하나님 말씀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설령 그것이 네가 받은 가정 교육과 상충하고, 나아가 네 이익을 침해하고 네 권리를 박탈하며, 심지어 네가 생각하기에 너를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네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네가 창피를 당하게 하는 것일지라도 너는 그것을 긍정적인 사물로 여겨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네가 가정 교육으로 받은 것이 사람의 생각, 처신에 해당되거나 사람의 생존관과 걸어가는 길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너는 그것을 고수하지 말고 내려놓아야 한다. 그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상응한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을 대체하고 아울러 그 속의 문제와 본질을 끊임없이 분별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더욱 정확하고 실제적이며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실행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생각을 받아들이고,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실행 원칙을 받아들이는 것은 피조물의 마땅한 책임이자 피조물로서 지니고 행해야 할 생각과 관점이다.
가정에서 어떤 부모는 사람이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 사람의 생존과 앞날, 미래에 유익한 것 외에도, 상대적으로 극단적이고 왜곡된 생각과 관점도 주입한다. 예를 들면, 어떤 가정의 부모는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마라.”라고 말한다. 이는 네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말이다.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마라.”라는 말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다. 뒤에서 남몰래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차라리 진짜 소인배가 되어 대놓고 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설령 네가 한 일을 남들이 썩 좋게 보지는 않더라도 네게 탄복하고 너를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 어떤 나쁜 짓이든 앞에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가정은 자녀를 이렇게 가르치고 교육한다. 그들은 사회에서 생각과 행동이 비열하고 야비한 사람들을 경멸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자녀를 이렇게 교육한다. “이런 사람들을 무시하지 말거라. 사실 이들이 꼭 나쁜 사람은 아니다. 어쩌면 거짓 군자보다 나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네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알려 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고, 어떤 사람을 부정적으로 봐야 하는지 알려 주고,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분별하는 법, 처신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너를 교육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르침은 은연중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겠느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 선악과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럼 우선 인간이 이른바 소인배와 거짓 군자를 어떻게 보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인간은 진짜 소인배가 꼭 나쁜 사람은 아니며 진정한 거짓 군자야말로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뒤에선 나쁜 짓을 하면서 겉으로는 착한 척하는 사람을 거짓 군자라고 하는데, 그는 앞에서는 인의(仁義)와 도덕을 외치면서 뒤에서는 나쁜 짓을 일삼는다. 온갖 나쁜 짓은 다하고 다니면서 온갖 미사여구를 입에 달고 다니니 이런 사람이 혐오의 대상인 것이다. 반면 진짜 소인배는 앞에서나 뒤에서나 한결같이 나쁜데도 혐오의 대상이 아닌 오히려 사람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자 장려의 대상이 된다. 이런 견해와 관점은 한 가지 개념을 헷갈리게 만든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인지 개념이 모호하여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가정 교육을 받으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생각한다. ‘내가 진짜 소인배로 사는 건 정직하다는 말이야. 무슨 일이든 숨김없이 떳떳하게 하고, 할 말 있으면 앞에서 하잖아. 내가 누굴 속이든, 싫어하든, 누구에게서 이득을 보려 하든 그 사람이 알게끔 앞에서 한다고.’ 이것이 무슨 논리이냐? 어떤 본성 본질이겠느냐? 악인이 나쁜 짓을 하고 악행을 하는 것에 이론적 근거를 찾으려 하는 논리인 것이다. “생각해 보세요. 제가 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거짓 군자보다는 낫잖아요. 앞에서 대놓고 해서 모두가 알고 있어요. 이런 걸 정직하다고 하는 거예요!”라면서 소인배가 오히려 정직한 사람이 된다. 이런 생각이 사람의 마음속에 생기면 자기도 모르게 진정한 정직과 진정한 사악이라는 두 개념이 모호해져 무엇이 정직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럼 사람은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이든 아니든, 맞는 말이든 아니든, 사리에 맞든 그렇지 않든, 원칙에 맞는 말이든 아니든, 진리에 부합하든 그렇지 않든 거리낌 없이 말하고, 뒷일은 생각지도 않으며, 솔직한 성품, 직설적이고 호방한 사람이기만 하면, 그리고 음흉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않으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시비가 전도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면 부정적인 사물이 모두 긍정적인 것으로 변한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이런 말에 따라 보란 듯이 처신하며 ‘어쨌든 내가 당신에게서 이득을 보거나 남몰래 계략을 꾸민 게 아니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한 일이니, 당신 맘대로 생각해. 나는 이렇게 정직하거든! 옛말에 ‘몸이 반듯하면 그림자가 기울어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어. 좋을 대로 생각해!’라고 생각한다. 이는 사탄의 논리가 아니냐? 강도의 논리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네가 나쁜 짓을 하고, 억지를 부리며, 제멋대로 굴고,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악행은 악행이다. 본질이 악행이면 악인 것이다. 무엇으로 판단하겠느냐? 네게 의도가 있는지, 네가 떳떳한지, 네가 진솔한 성품인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진리는 모든 사물을 판단하는 준칙이니 여기에 적용하는 것이 아주 적합하다. 진리가 악으로 판단하면 그것은 악이고, 긍정적인 사물로 판단하면 그것은 긍정적인 사물이며,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긍정적인 사물이 아닌 것이다. 반면 사람이 생각하는 진솔한 성품이나 직설적인 성격, 정직 따위는 무엇이냐? 그것을 터무니없는 억지, 개념 혼동, 망언이라고 하고, 그것을 바로 사람을 오도한다고 하는 것이다. 네가 사람을 오도한다면 그것은 악행이다. 뒤에서든 앞에서든 악은 악이다. 뒤에서 하는 악은 사악한 것이고, 앞에서 하는 악은 진짜로 악독하고 흉악한 것인데, 모두 악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럼 너희가 대답해 보거라.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마라.”라는 말을 사람이 받아들여야 하겠느냐?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 군자의 행동 원칙과 진짜 소인배의 그것 중 어떤 것이 긍정적인 것이겠느냐? (둘 다 아닙니다.) 그렇다. 모두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니 거짓 군자가 되지도, 진짜 소인배가 되지도 말고 부모의 망언을 듣지도 말아야 한다. 어째서 부모가 늘 망언을 늘어놓겠느냐? 왜냐하면 네 부모가 그렇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항상 ‘난 진솔한 성품의 진짜 사나이야.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에 의협심이 강하지. 내 몸이 반듯하니 그림자가 기울어도 걱정하지 않아. 품행이 바르고 반듯한데 무서울 게 뭐야? 양심에 찔릴 일은 하지 않으니 귀신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아!’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귀신이 널 찾아오지 않았지만 네 악행이 적지 않으니 언젠가는 징벌을 받을 것이다. 네 몸이 반듯하여 그림자가 기울어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몸이 반듯하다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진리이냐? 몸이 반듯한 것이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냐? 너는 진리를 깨닫긴 했느냐? 자기가 저지른 악행을 위해 어떤 핑계나 이유를 찾지 마라. 소용없다!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한 그것은 악이다! 그런데도 자기가 성품이 진솔하다고 생각하는데, 성품이 진솔하면 남에게서 이익을 챙겨도 된다는 것이냐? 성품이 진솔하면 남을 곤경에 빠뜨려도 된다는 것이냐? 이게 무슨 논리이겠느냐? (사탄의 논리입니다.) 이것을 강도의 논리이자 마귀의 논리라고 하는 것이다! 악을 행하고도 당당하게 좋은 결과를 바라고, 좋은 말을 들으려 하는데, 이것이 뻔뻔스러운 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한 말씀에 진짜 소인배가 되라거나, 거짓 군자가 되지 말라는 말은 언급된 적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 진짜 소인배나 거짓 군자가 되라는 말 따위의 요구는 없는 것이다. 이런 말은 모두 사람을 기만하거나 미혹하는 마귀적인 말이다. 이 말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을 미혹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너는 진리를 깨달았으니 더 이상 이런 말을 고수하지도 말고 이런 말에 영향받지도 말아야 한다. 거짓 군자든 진짜 소인배이든 모두 마귀이고 짐승이며 머저리로, 좋은 작자가 아닌 사악한 자들이다. 그들은 악과 불가분의 관계로, 사악하지 않으면 흉악한데, 단지 그들의 연기 방식이 다를 뿐이다. 하나는 공개적으로 연기하고, 다른 하나는 은밀하게 연기하는 것이다. 또 그들의 행동 방식이 다르다. 하나는 공개적으로 악을 행하고, 다른 하나는 뒤에서 수작을 부린다. 하나는 비교적 음흉하고 괴상하며, 다른 하나는 비교적 난폭하고 포악하며 횡포하다. 또한 하나는 비교적 옹졸하고 은밀하게 행동하고, 다른 하나는 비열하고 방자하게 행동한다. 이는 사탄의 두 가지 행동 방식으로, 하나는 공개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밀한 것이다. 공개적인 경우는 진짜 소인배가 되는 것이고, 은밀한 경우는 거짓 군자가 되는 것인데 자랑할 것이 있겠느냐? 그런데도 너는 그것을 좌우명으로 삼으니 어리석지 않으냐? 그러므로 네가 만약 가정에서 받은 이런 측면의 교육과 주입의 악영향을 깊이 받고 있거나 그것을 고수하고 있다면 너는 그것을 내려놓고 하루속히 분별하고 꿰뚫어 보길 바란다. 더 이상 그 말을 고수하지도 말고, 그 말이 너를 지켜 주고 네가 진정한 사람, 인격과 인성을 갖춘 시원시원한 사람이 되게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것은 처신의 기준이 아니다. 나는 그 말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 말이 나는 아주 역겹다. 거짓 군자뿐만 아니라 진짜 소인배도 역겹다. 이 두 부류의 사람 모두 역겨움의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만약 거짓 군자가 된다면 나는 너를 좋은 작자가 아닌 구제 불능의 대상으로 볼 것이다. 네가 만약 진짜 소인배가 된다면 더 절망적이다. 너는 분명히 참도를 알고 있음에도 일부러 죄를 범했고, 진리를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버젓이 진리를 위배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공개적으로 진리에 맞서니 더 빨리 죽을 것이다. ‘나는 직설적인 성격이라 거짓 군자는 못 하겠어. 소인배이긴 하지만 난 그래도 진짜 소인배야.’라고 생각하지 마라. 진짜는 무슨 진짜란 말이냐? 너의 ‘진짜’는 진리도 아니거니와 긍정적인 사물도 아니다. 너의 ‘진짜’는 교만한 성품과 흉악한 성품의 본질을 드러낸 것이다. 네 ‘진짜’는 진짜 사탄, 진짜 마귀, 진짜 흉악하다는 진짜이지 진리나 진실을 뜻하는 진짜가 아니다. 그러니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마라.”라는 가정에서 받은 교육도 네가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처신의 원칙과 접점조차 없을 정도로 아무런 관련도 없기 때문에 너는 하루빨리 그것을 내려놓고 더 이상 고수하지 말아야 한다.
가정에서는 또 한 가지를 교육한다. 예를 들어, 가족은 항상 네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사람들 가운데서 너무 출중해선 안 되고,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다. 언행이나 개인의 재능, 역량, 지능 따위를 자제하면서 나서는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 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뾰족한 서까래가 먼저 썩는다’는 속담이 잘 말해 주잖니. 자기를 지키면서 사람들 속에서 오랫동안 평온하게 지내고 싶으면 네가 모난 돌이 되지 말고 자제해야지 설치면 안 되는 거야. 피뢰침의 경우를 생각해 보거라. 번개가 치면 피뢰침이 먼저 맞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침이 제일 먼저 맞기 마련이다. 태풍이 불면 높은 나무가 먼저 바람을 맞아 피해를 입고, 날씨가 추우면 높은 산이 먼저 얼어붙어. 사람도 마찬가지야. 사람들 가운데 네가 늘 나서서 당의 눈에 띈다면 당이 너를 혼내 줄 생각을 할 거다. 그러니 모난 돌이 되어 혼자 튀려고 하지 말고 돌 더미 속에 머물러 있거라. 그러지 않으면 어떤 사회적 운동이 있을 경우 너 같은 모난 돌을 혼내 주려 할 테니 말이다. 교회에서도 리더나 팀장이 되려 하지 마라. 혹 하나님 집의 어떤 사역에 손실이나 문제가 생기면 우선적으로 리더이자 책임자인 너부터 처분할 것이다. 그러니 모난 돌이 되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기 마련이니까. 너는 거북이처럼 안으로 움츠리는 법을 배워서 머리 숨긴 거북이가 되어야 한다.” 너는 부모의 말을 명심하고 리더를 뽑을 때 리더직을 사양하며 말한다. “아, 전 안 돼요! 제겐 가정이 있고 아이가 있거든요. 저는 가정에 많이 얽매여 있어 리더직을 맡을 수 없어요. 절 찍지 마시고 여러분이 하세요.” 리더로 뽑혀도 맡으려 하지 않는다. “아, 저는 사직해야 할 것 같아요. 리더는 여러분이 하세요. 여러분께 기회를 양보하고 저는 기권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흥,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야. 높은 곳일수록 처참하게 추락하고 추위도 심하다고. 선출되면 큰코다칠 날이 있을 테니 리더는 당신이나 해. 난 리더는 전혀 하고 싶지 않고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높은 곳에서 떨어질 일도 없지. 아무개가 리더가 되었다가 교체된 거 못 봤어? 교체된 다음 제명됐잖아. 평신도가 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어졌다고. ‘모난 돌이 정 맞고, 뾰족한 서까래가 먼저 썩는다’는 말에 딱 들어맞는 경우잖아. 어때? 혼쭐났지? 사람은 스스로 보호하는 법을 배워야 해. 머리는 뒀다 뭐 해? 머리가 있으면 스스로를 지키는 데 써야지. 이걸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사회나 집단이나 마찬가지야.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당신이 나서면 체면이 설지는 몰라도 정을 맞는 순간 깨닫게 될 거다. 사람이 설치면 언젠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이야.’ 이는 모두 부모와 가정이 네게 단단히 일렀던 당부이며 그들의 경험담이자 그들의 인생에서 얻어낸 정수이다. 이를 하나도 빠짐없이 네게 조곤조곤 알려 주는 것이다. 조곤조곤 알려 준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어느 날 어머니가 네 귀에 대고 말한다. “엄마 말 잘 들어. 엄마가 평생을 살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는데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거야. 사람이 너무 나서기 좋아하고 설치면 혼쭐나기 십상이란다. 네 아빠를 보렴. 왜 지금도 숨죽이고 얌전히 지내시겠니? 예전에 사회 운동 때 억압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야. 네 아빠는 글재주가 있어서 글도 잘 쓰고 언변도 뛰어난 데다 리더로서의 역량도 겸비하고 있었어. 너무 출중했던 거지. 결국 사회 운동에 의해 억압받았지 뭐야. 생각해 보렴. 그 이후로 네 아빠가 왜 공무원이 되거나 얼굴을 내미는 것에 대해 얘기하지 않겠니? 바로 이런 이유가 있어서야. 엄마가 너한테 하는 속 얘기나 진심 어린 말은 꼭 귀담아 듣고 잊지 말고 명심해야 된다. 어딜 가서도 기억해야 해. 이건 엄마가 네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란다.” 그때부터 너는 기억하게 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을 생각하면 곧바로 아버지가 떠오르고, 아버지를 생각하면 바로 이 말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 당시 정 맞은 모난 돌이었고 지금 아버지의 불운과 낙담한 모습이 네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다. 그래서 나서려는 생각이 들거나 마음속 얘기를 하고 싶을 때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 집에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싶을 때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고 조곤조곤 얘기하던 엄마의 진심 어린 그 한 마디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스스로 움츠러든다. ‘어떤 재능과 특기가 있든 드러내선 안 돼. 참고 견뎌야 해.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도 적당히 취사선택해야지, 무턱대고 뛰어들면 안 돼. 그렇게 무턱대고 나서서 교회 사역을 맡았다가 만에 하나 하나님 집 사역에 무슨 문제라도 생겨서 책임을 물으면 어쩌려고? 내가 어떻게 감당하겠어? 제명당하지 않을까? 내가 희생양이나 모난 돌이 되는 거 아냐? 하나님 집이라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러니 무슨 일이든 살길을 마련해 놔야 돼. 일단 나부터 지키는 법을 꼭 배워야 되는 거야. 일단 자구책부터 최대한 확보해 놓은 상태에서 말을 꺼내고 행동하는 거지. 이것이야말로 현명한 행동이지.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엄마가 말했잖아.’ 이 말은 그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그의 일상생활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본분 이행에 대한 그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 때문에 본분 이행에 진심으로 헌신하고자 할 때마다, 그리고 성심성의껏 자신의 온 힘을 다 쏟고 싶을 때마다 항상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에 발목 잡혀 결국 자기 살길을 마련해 두고 여지를 남기게 된다. 자기 살길을 마련한 다음에야 본분을 적당히 이행하는 것이다. 어떠냐? 이런 측면에서 받은 가정 교육이 네가 드러나지 않고 처리되지 않도록 최대한 지켜 주느냐? 네게 또 하나의 부적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교제했는데, 사람이 가정 교육으로 받은 부적이 몇 개나 있었느냐? (일곱 개입니다.) 이렇게 많은 부적이 있어서 일반적인 요괴와 마귀가 감히 너를 침해하지 못하는 것이냐? 부적 하나하나는 네가 이토록 안전하고 편안하며 행복하게 이 세상을 살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고, 아울러 네게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에 대한 가정의 보호와 가정이 네게 준 부적이 얼마나 적절하고 중요한지 느끼게 해 준다. 이 부적이 네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너를 보호해 줄 때마다 너는 가정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하고 나아가 가정은 영원히 의지할 만한 대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려움이 생겨 방황하거나 막막해질 때마다 너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볼 것이다. ‘엄마가 뭐랬지? 아빠는 뭐라셨지? 어른들이 내게 어떤 능력을 가르쳐 주셨고 어떤 좌우명을 알려 주셨지?’ 너는 곧 너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가정에서 주입받은 여러 가지 생각과 환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너에 대한 그것들의 보호를 찾고 얻고자 한다. 이럴 때 가정은 네게 피난처이자 비빌 언덕이며, 네 뒤에서 영원히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을 든든한 의지처이자 원동력이다. 너를 계속 살아가게 하고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하는 정신적 지주인 것이다. 이때 너는 감회에 젖을 것이다. ‘내게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가정은 내게 막대한 정신력이고 정신적 지주의 근원이지.’ 그리고 너는 늘 스스로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엄마 아빠가 해 준 말을 따라서 다행이야. 그러지 않았으면 지금 난 정말 곤란한 지경에 처해서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괴롭힘을 당했을지도 몰라. 내게 비장의 무기랑 부적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 덕분에 하나님 집이나 교회에서, 또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난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을 거고, 내가 교회에서 제명당하거나 처리당하는 곤경에 놓일 일도 없을 거야. 가정 교육의 보호로 이런 일은 영원히 나한테 일어나지 않겠지.’ 하지만 너는 잊어버렸다. 네가 줄곧 소위 부적이라는 것과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다 보니 네가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너는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을 소홀히 했고, 피조물이란 너의 신분도 소홀히 했다. 또 네가 피조물로서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소홀히 했으며 네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갖춰야 할 태도와 바쳐야 할 모든 것을 소홀히 한 것이다. 네가 갖춰야 할 진정한 인생관과 가치관은 가정에서 교육받은 관점이 차지했고, 네가 구원받을 기회 역시 네가 받은 가정 교육에 의해 영향받고 좌우되고 있다. 그러니 가정 교육으로 받은 많은 것들을 내려놓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는 반드시 실행해야 할 한 측면의 진리이자 시급히 진입해야 할 하나의 실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사회에서 들은 말이라면 네가 이성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거절할 것이고, 외부인이나 너와 무관한 사람에게서 들은 말이라면 네가 이성적으로 혹은 적당히 걸러 듣겠지만, 가정에서 네게 알려 준 말이라면 너는 주저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분별없이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보이지는 않지만 네게 무척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너는 가정이 한 사람에게 영원히 무해하고, 가정이 네게 하는 모든 것은 너를 위해서, 너를 지키고, 너를 생각해서 하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이 원칙을 바탕으로 사람은 가정이라는 유무형의 것으로 인해 쉽게 시달리고 영향을 받는다. 유형의 것은 가정의 구성원이나 가정에서 생기는 모든 일을 말하고, 무형의 것은 너에 대한 가정의 다방면의 사상 교육에서 비롯된 것과 처신이나 일 처리에 관한 교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가정 교육이라는 이 측면의 내용은 무척 많다. 오늘 교제를 마친 이것들에 대해서 너희가 묵상하면서 정리해 보고, 오늘 내가 말한 것 외에 또 어떤 생각과 관점들이 너희의 일상생활에서 악영향을 끼치는지 살펴보아라. 우리가 앞서 교제한 것의 대부분은 처세의 원칙과 방식에 해당되는 것이고, 소수의 나머지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것에 해당되는 주제이다. 사람에 대한 가정 교육의 범위에 해당되는 내용은 거의 이런 것들이며, 사람의 인생관이나 처세 방식에 해당되지 않는 일부 문제들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고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자.
2023년 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