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3)

최근 한동안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중에서 ‘내려놓기’에 관한 주제에 대해 교제했다. 너희는 이 주제에 해당되는 각 내용을 묵상해 보았느냐? 우리가 내려놓아야 한다고 교제한 내용을 사람이 내려놓기가 쉽겠느냐? 교제를 다 듣고 난 후 너희는 교제한 내용을 묵상하고 성찰해 보았느냐? 일상에서 드러내거나 나타내는 모습과 대조해 보았느냐? (평소에도 묵상해 보았습니다. 지난번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받은 가정 교육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교제하셨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사탄의 처세 철학에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정에서 주입한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와 같은 사상을 받아들여 어떤 일에서든 체면과 지위를 중시하면서 체면이 깎일까 걱정해 정직한 사람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여러 사물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교제한 내용은 주로 여러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사상 관점을 겨냥한 것이다. 즉, 여러 사물에 대한 사람의 부정확한 사상 관점을 폭로함으로써 사람이 그것을 분별하고 분명하게 인식하게 한 다음 긍정적인 측면으로 그것을 내려놓아 그것의 속박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사상 관점에 구애받지 않고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준칙으로 삼아 살아가고 생활하는 것이다. 각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려면 각 측면에서부터 인식과 체험이 있어야 한다. 특히 각 사물에 대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상 관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분별해야만 사람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그것을 내려놓고 더 이상 그것에 미혹되거나 구애받지 않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고, 진리 추구의 결실을 맺으려면 사람은 항상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여러 사상 관점이 자기를 어떻게 구속하고 통제하는지 생각해 보거나 일상생활에서 자기가 각 사물에 대해 어떤 사상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늘 묵상하고, 이런 사상 관점이 정확한 것인지, 진리에 부합하는지, 긍정적인 것인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사람의 뜻이나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분별해야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공과이며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매일 진입해야 하는 한 측면의 실제이다. 다시 말해, 일상생활에서 여러 사람과 일, 사물에 직면한 때이든 그렇지 않든 항상 자기가 어떤 사상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그 사상 관점이 정확한 것인지, 진리에 부합하는지 늘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이 공과는 무척 중요하다. 네 일상생활에서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이런 측면에 진입하는 시간이 생활의 80~90%는 되어야 한다. 그러면 사람은 여러 부정적인 사상 관점에서 벗어나 진리 실제에 진입할 희망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할 수 있어야 희망이 있고 마지막에 구원에 이를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만약 매일의 일상에서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시간 외에 80~90%의 시간을 아무 생각 없이 보내거나 자신의 육적인 삶과 지위, 명예를 위해 머리를 굴리며 고민한다면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며, 진리 추구의 결실을 맺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여의치 않다면 네 구원은 아득하기만 하다. 그러므로 구원은 무엇에 달려 있겠느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어떻게 행사하는지, 성령이 네게 역사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에 이르는 일에 대가를 얼마나 치렀는지, 노력과 시간을 얼마나 들였는지 등 네 주관적인 노력에 달려 있다. 네가 만약 대부분의 시간에 하는 생각과 행동이 진리 추구와 상관이 없다면 네 행동은 구원과 무관할 것이니 이는 필연적인 사실이자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럼 다음으로 너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느냐? 한편으로는 지금 교제하고 있는 모든 주제를 잘 따라가면서 교제를 다 듣고 나서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스스로 묵상하고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주제에 대한 교제가 끝나면 너는 쇠뿔도 단김에 빼듯 스스로 성찰하여 진실하고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진실하게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의 진리에 대한 교제를 갓 마쳤거나 이제 막 부분적으로 깨달은 직후에는 곧바로 이 측면의 진리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 하는데, 그 목적은 사람이 자기의 사상 관점에 가장 기본적인 의식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그다음 일상생활에서 관련된 일이 생기면 예전에 진리 원칙에 대해 가지고 있던 네 인식과 이해가 네가 그 일을 경험하는 데 기초가 되는 사상 관점이 될 것이다. 최소한 네게 의식이 생기고, 정확하고 틀림없는 인식이 생기고 나면 그 일에 대한 네 태도와 인식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 너는 이미 예방 접종을 해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실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네가 실패할 확률과 하나님을 배반할 가능성은 낮아지며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할 가능성은 대폭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전염병이 돌 때 네가 예방 접종을 하지 않으면 외출하지 않고 봉쇄된 집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감염될 리 없겠지만 네가 외부 활동을 위해 외부와 접촉하려면 예방 접종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예방 접종을 하면 감염될 가능성이 없는 것이냐? 그렇지는 않다. 단지 감염될 확률만 낮아질 뿐이다. 그러나 어쨌든 항체는 생긴다.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은 각 진리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각 진리의 정확하고 긍정적인 가르침과 원칙을 인식하고, 아울러 각 진리가 폭로하는 여러 부정적이고 그릇된 사상 관점도 어느 정도 인식하면 이런 일이 또다시 닥칠 때 너는 더 이상 사탄이 주입한 그런 그릇되고 부정적인 사상 관점을 준칙으로 삼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고, 네 태도 역시 사탄이 네게 주입한 사상 관점을 더 이상 고수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때 너는 아직 이런 측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고 네 관점이 중립적일 수도 있겠지만 긍정적인 사상 관점을 받아들인 후에는 부정적인 사상 관점을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 관련된 일이 닥쳤을 때 최소한 너는 그런 종류의 일과 연관된 많은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사상 관점에 대해 분별이 생기고 어느 정도 준칙이 생기게 된다. 이 준칙을 바탕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 인성을 갖춘 사람은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 더욱 치중할 것이고, 진리 준칙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고, 네가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이 네게 배치한 사람과 일, 사물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람이 깨달은 진리가 많을수록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할 가능성이 크고, 부정적인 것을 확실하게 인식할수록 부정적인 것을 저버릴 확률이 크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진리를 추구하길 바라든 안 바라든, 진리를 추구하기로 마음먹었든 안 먹었든, 혹은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도중이든 그렇지 않든, 네 자질이 어떻고, 네가 진리에 대한 이해가 어떻든, 결국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준칙을 깨닫고 진리를 실행하고 진입하고자 한다면, 여러 부정적인 사물을 분별하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는 모두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전제 조건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해 지금 교제하고 있는 여러 주제에 대해 늘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 주제는 제가 생각해 본 적도, 겪어본 적도 없는 거라 이런 주제를 제게 있는 여러 문제와 패괴 성품, 패괴 표출에 비춰볼 수가 없어요. 당신이 이런 얘기를 하시는 게 제가 진리를 추구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죠? 제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거랑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요? 왜 좀 더 고상하고 사람의 긍정적인 진입에 관련된 얘기는 하시지 않나요? 어째서 늘 이런 부정적인 일상의 사소한 일만 폭로하시는 거죠?’ 이런 생각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을 이야기하면, 특히 삶의 사소한 일을 사례로 들면 반감을 갖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생각한다. ‘이야기가 너무 속되고 가벼워요. 고상하지도 않고 말이에요. 들으면 바로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단순해서 너무 쉽단 말이죠. 진리가 이럴 리 없어요. 진리라면 이보다는 심오해야지요. 사람이 반복해서 들어 봐야 알아듣고 한두 마디 겨우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에요. 지금 당신이 이야기하시는 건 일상생활에서의 사소한 일들이자 일상생활에서 보여지는 정상 인성의 모습들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 가벼운 거 아닌가요?’ 이런 관점을 지닌 사람들의 사상 관점이 옳다고 보느냐? (옳지 않습니다.) 어째서 옳지 않으냐? 어디가 옳지 않겠느냐? 우선 사람의 사상 관점이 사람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져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사람의 여러 모습과 태도는 사람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져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패괴 성품, 사상 관점, 여러 사물에 대한 사람의 생각과 의도, 구체적인 방식 그리고 머릿속에 언뜻 나타나는 생각들은 모두 일상생활 중 사람의 여러 모습, 표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여러 표출과 모습, 그리고 여러 가지 일이 닥쳤을 때의 사상 관점, 태도는 모두 사람의 패괴 성품에 연관되는 구체적인 것들이다. 진리 추구로 달성하려는 목적은 바로 사람의 이런 잘못된 사상 관점을 바꾸고, 사람의 사상 관점, 여러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사람의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게 하고,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거역과 배반, 그리고 하나님과 대립하려는 사람의 본성 본질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면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일상생활에서 여러 잘못된 사상 관점을 없애고 바꾸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얕고 일상적인 것을 얘기하더라도 너희는 반발심을 갖지 마라. 이것들은 절대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차지하고 모든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한 너의 사상 관점을 통제한다. 네가 이런 일상 중의 잘못된 사상 관점을 고치거나 없애지 않는다면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 실제가 생겼다고 하는 말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마치 사람이 암에 걸리면 적극적인 측면으로부터 치료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암세포가 어느 장기에 있든, 혈액 속이든, 피부이든, 겉으로 드러나 있든 깊숙이 숨어 있든, 어쨌든 사람 몸속에 있는 암세포부터 해결해야 한다. 암세포가 해결되어야 네가 섭취하는 여러 영양소가 흡수되어 몸속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인체의 각 기관이 제 기능을 되찾아 병이 낫고 네 몸이 점점 건강해지며 정상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병이 완치되는 사람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는 과정이자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는 과정은 사람이 여러 잘못되고 부정적인 사상 관점을 고치고 거기서 벗어나는 과정임과 동시에 여러 정확하고 긍정적인 사상 관점을 갖추는 과정이기도 하다. 긍정적인 사상 관점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진리의 실제, 원칙, 준칙에 해당되는 것이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면 사람의 생활,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사람의 생존과 관련된 여러 잘못된 사상 관점을 진리를 구함으로써 반드시 일일이 해부하고 인식해서 해결하고 없애야 한다. 결론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사람이 잘못되고 부정확한 사상 관점을 모두 없애고, 여러 사물에 대해 정확하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사상 관점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여 궁극적으로 맺게 되는 결실이자 사람이 마지막에 구원받아 살아 낼 수 있는 진리 실제인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지난 예배 시간에 우리는 ‘내려놓기’ 측면 중 가정에 해당되는 주제를 교제했다. 가정에 해당되는 주제 중 지난번에 교제한 내용은 무엇이었느냐? (가정이 우리의 진리 추구에 초래하는 불편과 방해에는 무엇이 있는지, 또 가정이라는 문제에서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추구와 이상, 바람에는 어떤 게 있는지 교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가정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신분을 내려놓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가 받은 가정 교육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가정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신분을 내려놓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교제를 다 듣고 나서 내가 구체적으로 정리해 주지 않았다면 너희가 스스로 정리할 수 있겠느냐? 이런 내용을 교제하고 다시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교제한 다음 이런 측면의 진리와 관련해서 사람이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 정리해 보았느냐? 네가 정리할 줄 안다면 너는 실행할 수 있을 것이고, 정리할 줄 몰라 그저 흩어져 있는 빛 비춤에 머물러 있고, 여기에 연관되는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모르면 너는 실행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 실행하지 못한다면 너는 이 측면의 진리 실제에 영원히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설령 네가 자신의 문제를 발견한다고 해도 네가 대조하지 못하고 상응하는 원칙을 찾아 실행하지도 못할 것이다.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을 내려놓는 측면의 주제를 교제하는 주된 목적은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가정이 네게 부여하는 다양한 신분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만약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 존귀하다면 너는 그 신분을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 자신이 존귀하다고 생각하거나, 자기가 남보다 가치 있다거나 신분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훈계하는 원칙에 따라 남들과 올바르게 지내면서 각 사람을 똑바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존귀한 가정적 배경을 밑천으로 삼고 어딜 가든 자신을 드러내거나 남들에게 우러름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만약 가정으로부터 부여받은 신분을 내려놓지 못하고, 가정 배경을 밑천으로 삼아 몹시 건방을 떨고 제멋대로이고 큰소리친다면,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서 늘 자기를 드러내고 뽐내면서 자기 가족의 배경과 가정으로부터 부여받은 특별한 신분을 과시한다면, 또 마음속 깊이 매우 거만하고 고자세를 취하면서 남들과의 대화에서도 기고만장하고 아주 방종하다면, 그리고 항상 이를 밑천으로 삼아 남을 질책하고 억압한다면, 사람이 보기에 이런 사람의 이성은 비정상이다. 그는 누구든 서민으로 보고, 특히 사람을 접하거나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 그보다 신분이 낮고 비천한 사람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대화할 때는 몹시 건방을 떨고 위협적이고 난폭하게 굴며, 늘 남을 질책하려 하고, 노예라도 되는 것처럼 부리고 고함치려 한다. 그리고 항상 자기 신분이 존귀하다 자부하면서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을 똑바로 대하지 못한다. 이는 모두 패괴 성품이며 사람이 벗어 버려야 할 것들이다. 이런 측면으로 드러나는 패괴 성품은 사람이 존귀한 가정 배경, 존귀한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되면 생겨나고 야기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신의 언행을 반성하고 자신의 사상 관점, 특히 가정의 신분에 대한 자신의 사상 관점을 반성해야 한다. 이런 사상 관점을 내려놓고 특별한 사회적 지위로 인한 자신의 여러 인성의 살아 냄을 바로잡아야 한다. 즉, 이런 부류의 사람은 가정이 그에게 부여한 신분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회에서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차별과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신분이 미천하고, 특수한 가정 환경 때문에 갖게 되는 수치심으로 인해 자신이 무척 비천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감정은 그를 자주 열등감에 젖게 하여 남들과 잘 어울리거나 대등하게 지내지 못하게 만든다. 물론 이런 부류 사람의 모습도 가지가지다. 어떤 사람은 지위나 신분이 존귀한 사람을 추앙하면서 아부하고 아첨을 떤다.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환심을 사면서 늘 부화뇌동하는 것이다. 원칙도 없고, 존엄도 없이 기꺼이 그 사람의 졸개가 되어 그 사람의 지시나 놀림을 받으면서 노예 취급을 당한다. 이런 부류 사람의 일 처리 원칙도 마찬가지로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신분이 미천하고 태어날 때부터 천민이기 때문에 부자나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과 대등하게 지낼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다. 태어날 때부터 남들의 노예가 되어 그들의 눈치를 보며 행동하고 남의 지시를 받는 것은 굽실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며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사상 관점이겠느냐? 스스로 기꺼이 타락하고자 하는 사상 관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또 한 부류는 오만 방자하고 제멋대로이며 막무가내에 건방지게 사는 부자를 보면 무척 부러워하고 추종한다. 그러면서 기회가 되면 자기도 부자처럼 제멋대로 오만 방자하게 살아 보고 싶어 한다. 그는 그렇게 오만 방자하고 제멋대로인 것을 문제가 아닌 멋이자 낭만이라고 여긴다. 이런 사람의 사상 관점 역시 옳지 않으니 내려놓아야 한다. 네 신분이나 지위가 어떻든, 결국 그것은 하나님이 정한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어떤 가정과 가정의 배경을 정해 놓았든, 네게 주어진 신분은 수치도 영광도 아니다. 네가 신분을 바라보는 원칙은 영광이나 수치를 따르는 원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너를 어떤 가정에 두든, 너를 어떤 가정 출신으로 정하든, 하나님 앞에서 너는 피조물이라는 오직 하나의 신분만을 갖는다. 하나님 앞에서 너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눈에 너는 사회에서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가 다른 그 누구와도 평등하다. 모두 패괴된 인간 중 하나이고 하나님이 구원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동등한 기회가 있으며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에 이를 동등한 기회도 있다. 이런 측면을 바탕으로, 하나님이 네게 베풀어 준 피조물의 신분을 바탕으로 너는 네 신분을 중시하지 말고, 네 신분을 경시하지도 말며,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피조물의 신분을 올바로 대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치고 훈계하는 원칙을 똑바로 지켜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고 평등하게 지내야 한다. 그의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신분이 무엇이든, 너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하나님 집에 와서는, 하나님 앞에 와서는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단 하나의 신분만을 갖는다. 그러니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비천한 사람도 열등감을 갖지 마라. 네게 재능이 있든 없든, 네 자질이 높든 낮든, 네 역량이 어떻든, 너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내려놓고 가정 배경, 가족사에 따라 사람의 등급이나 귀천을 나누는 사상 관점도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가 비천하다고 열등감을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너는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비록 자신의 가정 배경이 그다지 막강하거나 눈부시지는 않아서 자기에게 부여된 신분이 비천한데도 하나님은 너를 버리지 않고, 거름 더미와 먼지 속에서 일으켜 세워 다른 사람과 똑같은 피조물이라는 신분을 네게 부여하였으니 말이다. 하나님 집과 하나님 앞에서 너와 하나님이 택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신분과 지위가 평등하다. 이 점을 알았다면 너는 열등감을 더 이상 갖지 말고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회적 지위가 존귀하고 높은 사람이나 너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굽실거리거나 웃어 보일 필요도 없고, 더욱이 그들을 우러러볼 필요도 없다. 그들을 같은 눈높이로 똑바로 바라보면서 올바로 대해야 한다. 설사 그들이 늘 기고만장하고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자부하더라도 너는 그들을 똑바로 대해야 하지, 그들에게 위축되거나 기가 죽는 것을 기꺼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어떤 모습을 보이든, 그가 어떤 방식으로 너를 대하든,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와 똑같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구원하려고 택한 인간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너보다 특별한 것이 없다. 소위 특별한 신분이나 지위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는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의 속박을 받을 필요가 없고, 이 문제로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또 네 사회적 지위가 비천하다고 다른 사람과 평등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거나 하나님 집,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네게 부여한 권리, 책임, 의무를 포기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네가 구원받을 권리와 희망을 포기하는 일도 더더욱 없어야 한다. 하나님 집, 하나님 앞에서는 부자와 가난뱅이라는 말이나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의 구분이 없다. 더욱이 가정 배경이 특별한 사람을 특별 대우하거나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도 없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단 하나의 신분만을 가지며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본성 본질은 똑같다.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간은 패괴된 인간 오직 하나의 부류이다. 그러니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의 귀천을 떠나 모두가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간인 것이다.

만약 누군가 네게 “집이 가난해서 제대로 된 옷 한 벌 없구나. 집이 가난해서 초등학교만 나오고 중학교는 못 갔구나. 집이 가난해서 초콜릿, 피자, 콜라는 먹어 보지도 못하고 입에 풀칠만 하는구나.”라고 한다면 너는 그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열등감을 느끼겠느냐? 의기소침하겠느냐? 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겠느냐? 그의 이런 말 한마디에 위축되겠느냐? (이젠 안 그럴 것입니다.) 이제는 그러지 않겠지만 예전에는 그랬다는 말이구나. 그렇지 않으냐? 예전에는 돈 많은 집의 부유한 사람만 보면 ‘아, 남들은 양옥에 살면서 차도 있고 해외를 얼마나 다니는지 셀 수 없을 정돈데, 나는 마을 밖조차 나가본 적 없고 기차는 구경도 못 했네. 남들은 고속 열차, 1등석, 크루즈도 타고, 프랑스 명품을 입고, 이탈리아 액세서리로 치장한다는데 어째서 나는 들어 본 적조차 없는 걸까?’라고 생각하면서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작아지는 것 같았다. 만약 진리를 교제하고 믿음에 대해 교제하면 그나마 의욕이 조금 생기지만 가족, 가정 생활 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자기는 남들보다 못하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난 왜 하필 이런 집에서 태어났을까? 뭐라도 본 게 있어야지. 남들은 손에 핸드크림을 바른다는데 난 바세린이나 쓰고 있고. 남들은 얼굴에 크림 같은 거 안 바르고 그냥 메이크업 숍을 간다는데 난 그런 데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어. 남들은 자가용 타고 외출하는데 난 자동차는커녕 자전거라도 있으면 다행이지. 수레나 달구지를 탈 때도 있는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남들과 대화할 때 적극적이지 않고 자기 신분이 부끄러워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이다. 속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투정을 부린다. ‘다 같은 피조물인데 하나님께서는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좋은 것을 누리게 하시나요? 어째서 저 사람은 저런 가정, 저런 사회적 지위로 정해 놓으신 거죠? 왜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한가요? 왜 우리 부모님은 아무런 재능이나 능력도 없는 사회 하층민이죠? 생각할수록 화나요. 이 얘기만 나오면 부모님을 언급하기도 싫다고요. 부모님은 아무런 수완도 없고 무능하단 말이에요! 자가용이나 양옥은 둘째 치고, 저를 데리고 버스나 고속 열차를 타거나 시내 공원에 놀러 몇 번 갔어도 좋았잖아요. 단 한 번도 없었다고요. 견문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거죠. 맛있는 걸 먹어 본 적도, 좋은 차를 타 본 적도 없어요. 비행기는 더더욱 꿈도 못 꿉니다.’ 생각할수록 열등감만 느끼고 항상 이 일로 속박을 받으니 언제나 자신의 신분과 지위가 비슷한 처지의 형제자매와 어울린다. 속으로는 ‘유유상종이라더니 저쪽 무리 좀 봐, 죄다 부자, 정부 관료, 갑부, 재벌 2세, 거물 사업가, 유학생, 대학원생, 그룹 임원, 호텔 경영자네. 우리를 보면 농민이나 백수에 집은 시골 산골이고, 초졸이라 식견이랄 것도 없어. 소를 키우거나 노점상을 하거나 신발을 수선하지. 우리는 어떤 사람이야? 오합지졸 아니겠어? 저 사람들 럭셔리한 것 좀 봐.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억울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오래 하나님을 믿었어도 이것을 내려놓은 적이 전혀 없고 항상 열등감과 억압만 느낀다. 이런 사람의 사물을 바라보는 사상 관점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똑바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사상 관점은 사회 조류와 사회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물론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악한 인류,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상 관점이다. 그것이 패괴되었고, 사악한 조류에 속한 것이라면 너는 이런 사상 관점에 시달리거나 속박당하지 말고 내려놓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제가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건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에요. 이런 사상 관점이 수시로 제 마음을 옭아매니 내려놓기가 쉽지 않아요.” 내려놓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네가 늘 잘못된 사상 관점에 머물러 있는다면 너의 그런 사상 관점을 영원히 내려놓을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만약 올바른 사상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너는 이런 잘못된 사상 관점을 점차 내려놓게 될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쉽게 말해, 네가 그것을 단숨에 내려놓을 수는 없을 것이란 말이다. 네가 단번에 부자나 지위가 높고 이름값이 높은 사람과 대등하고 정상적으로 지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네가 이 일에서 해방될 수는 있을 것이다. 네게 비록 여전히 열등감이 있고 마음 깊은 곳이 너도 모르게 그것의 방해를 받겠지만 너는 어느 정도는 이미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물론 그 후로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너는 점차 더 많은 해방과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실이 드러나면 너는 여러 사람과 일, 사물의 본질을 점점 꿰뚫어 보게 될 것이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 정도도 점점 깊어질 것이다. 또 이 측면의 일을 점점 확실하게 보게 될 것이고 네 이력, 네 식견이 늘어나는 동시에 진리를 대하는 네 태도는 더욱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변할 것이며 네가 부정적인 사물의 속박을 받는 정도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되면 네가 변화한 것이 아니겠느냐? 또다시 네 신분과 지위와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을 만나 대화하고 왕래하게 되면 너는 적어도 속으로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올바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속박을 받지 않고 그가 정말 대단하고 존귀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패괴 본질을 알고 나면 여러 부류의 사람을 똑바로 대할 수 있고 원칙에 따라 그들을 대하며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왕래할 수 있게 된다. 우러러보지도, 얕잡아 보지도, 경시하지도, 추앙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진리 추구로 맺어야 할 결실에 점점 도달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결실에 도달하면 너는 더욱 진리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에 마음이 더 쏠리고, 하나님과 진리를 앙모하는 것에 마음이 더 쏠리게 된다. 사회나 세상에서 존귀한 신분과 지위를 가진 사람을 앙모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앙모하고 우러러보는 대상, 네가 따르고 숭배하는 대상이 달라진다. 부정적인 사물에서 긍정적인 사물로, 진리로 점점 바뀌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이런 측면에서 점차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측면의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사탄의 결박에서 점점 벗어나 차츰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과정인 것이다. 어렵다고 할 수는 없다. 길은 네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네가 진리를 추구하기만 하면 너는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결국 어떤 실제에 진입하게 되겠느냐? 바로 네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 어떻든, 그것이 존귀한지 비천한지 신경 쓰거나 시달리지 않고 피조물의 신분으로 네 본분을 잘 이행하고, 피조물의 신분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 처리하며, 피조물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서 현재의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인데, 이런 결실을 맺도록 추구하는 것이다. 이 결실이 좋지 않으냐? (좋습니다.) 사람이 이 측면의 실제에 진입하게 되면 사람의 마음은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적어도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에 관한 일에서는 더 이상 시달리지 않을 것인데, 그 신분의 높고 낮음에 더 이상 개의치 않게 된다. 만약 네 신분이 존귀하여 널 추앙하는 사람이 생기면 너는 거북할 것이고, 만약 네 신분이 비천하여 널 무시하는 사람이 있어도 너는 속박받거나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고 의기소침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는 자기가 고속 열차를 타 봤는지, 메이크업 샵에 가 봤는지, 외국에 가 봤는지, 양식을 먹어 봤는지, 부자처럼 특별한 물질생활을 누려 봤는지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열등감을 느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이 일로 인해 속박받거나 시달리지 않고 여러 부류의 사람, 일, 사물을 올바로 대하고, 네 본분을 정상적으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유와 해방을 얻은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러면 마음에 해방을 얻게 된다. 네가 이 측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되면 너는 이 일에서 너에 대한 사탄의 결박으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이 원하는 피조물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 교제했으니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한 신분과 지위를 내려놓는 측면의 길을 사람은 분명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너에 대한 가정 교육 내려놓기’라는 주제도 교제하였다. 한 사람에 대한 가정 교육은 일찍이 유년기 때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삶의 여정에서 사람이 점차 그것을 활용하면서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면 사람은 가정 교육에서 비롯된 여러 사상 관점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게 된다. 또 이를 토대로 더 심오하고 구체적이며 자기에게 유리하게 일 처리 원칙과 방식, 일 처리 수단을 정리하게 된다. 가정 교육은 한 사람이 사회와 사람들 속으로 발을 내딛어 그 속에서 일을 처리하는 여러 방식과 수단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길잡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이 길잡이이기 때문에 가정 교육은 모든 사람에게 고질적이고,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이것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주며 인생관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역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윤곽을 드러내었든 그렇지 않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했든 그렇지 않든, 더 나아가 그것이 네게 물들인 사상 관점이 네 삶의 여정에서 증명되었거나 이행되었든 그렇지 않든, 이것은 현재나 미래에 나름대로 네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네가 인생의 길을 선택하는 데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일을 처리하는 태도와 원칙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절대다수의 가정은 한 사람이 사회에 들어가면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생활과 삶의 처세 수단, 처세 철학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지난번에 우리가 교제했던 부모가 늘 하는 말, 그러니까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 “고생을 해 봐야 뛰어난 사람이 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등과 같은 것이다. 또 무엇이 있었느냐?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가 있다. 이렇게 가정 교육에서 비롯된 여러 사상 관점은 삶의 여정에서 네가 그것을 분명하게 활용하고 이행하고 있는지를 떠나서 그것은 네게 하나의 길잡이이다. 길잡이는 무슨 뜻이겠느냐? 네가 사탄의 처세 철학을 받아들이게 하는 일깨움이자 원동력이라는 말이다. 가정 교육에서 비롯된 이런 말은 가장 기본적인 처세의 방법, 생존의 방식을 네게 주입하여 네가 사회에 들어간 후 명예와 이익, 지위를 열심히 추구하고, 자신을 좀 더 잘 위장하고 포장하는 법, 자신을 좀 더 잘 보호하는 법을 추구하며, 걸출한 사람, 큰사람,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되는 것을 추구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가정 교육은 네가 사회에 들어가 사악한 조류에 녹아들도록 부추기는 처세의 법칙이자 수단이다.

지난 시간, 우리는 사람에 대한 가정 교육에 대해 교제하였다. 가정 교육은 단지 그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이어서 교제해 보도록 하자. 예를 들면,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라고 가르친다. 이는 누구의 말이더냐? (공자입니다.) 이는 공자 선생이 한 말이다.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말한다. “어딜 가서든 능력을 키워야 해. 네가 능력을 키우면 재주가 하나 생길 테니 어딜 가서도 먹고살 걱정은 안 할 것이고 어디서든 거물이 될 거야. 옛 성인(聖人)이 말 한번 잘 했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남과 함께 있을 때 능력 있는 사람이 보이면 들키지 않게 몰래 배워서 손에 넣으면 그게 능력이지. 그럼 넌 돈을 벌어서 걱정 없이 먹고살 수 있게 된단다.” 부모가 너더러 사람들 가운데에서 능력을 키우라고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해서입니다.) 능력을 키우는 목적은 자기를 강하게 해서 큰사람이 되는 것이고, 사람들 속에서 기술을 몰래 배워 자기의 실력을 차츰 키우는 것이다. 사람들 속에서 막강한 실력을 갖게 되면 밥벌이가 생기고 명예와 이익이 생긴다. 명예와 이익을 모두 차지하면 사람들은 너를 우러러볼 것이다. 네게 진정한 능력이 없고 아무도 너를 우러러보지 않으면, 너는 사람들 속에서 기술을 훔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남들의 장점과 기술을 배워서 사람들 속에서 점점 강해져야만 큰사람이 될 수 있다.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남들 앞에서 고귀한 사람이 되려거든 남몰래 고생해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그 목적은 자녀들이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우러름 받게 하기 위함이다. 네가 남몰래 부지런히 노력하고 많이 고생하여 기능을 배우고 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너를 무시하고 얕볼 때 네가 한 수 선보이면 아무도 너를 감히 얕잡아 볼 수 없을 것이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고 눈에 띄지 않고 과묵하지만 네가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고, 평범한 사람은 따라올 수 없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남들이 네게 탄복하여 네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굽실댄다. 이렇게 되면 너는 사람들 가운데 가치가 오르는 것이 아니겠느냐? 네 가치가 오르면 고귀해지지 않겠느냐? 사람들 가운데 존귀한 지위를 차지하고 싶다면 남몰래 수고하고 고생해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고생하든 참고 내색하지 않다가 남들 앞에서 네 실력이 얼마나 좋은지 선보이게 되면 네 수고가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네게 “남들 앞에서 고귀한 사람이 되려거든 남몰래 고생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 목적은 바로 네가 사람들 가운데 존귀한 지위를 얻고,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으며 남에게 차별이나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뿐 아니라 남들에게 존중과 지지를 받게 하려는 것이다. 사회에서 이런 지위를 가진 사람은 남들에게 얕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잘 풀린다. 네가 가기만 하면 “어머나, 어서 오세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슨 용무가 있으신가요? 제가 처리해 드릴게요. 표를 사시려는군요. 줄 서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제일 좋은 자리를 마련해 드리죠. 우리가 어떤 사인데요!”라고 한다. 너는 잠시 생각한다. ‘와, 유명인이라는 이름표가 쓸모 있네. ‘남들 앞에서 고귀한 사람이 되려거든 남몰래 고생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이 맞았어. 사회가 정말 그렇구나. 정말 현실적이야! 내게 이런 유명세가 없었으면 누가 신경이나 써 주겠어? 원래대로 줄 섰겠지. 어쩌면 내가 맘에 안 든다고 내 차례가 되었을 때 표를 안 팔고 퇴짜를 놓을지도 모를 일이지.” 병원에서 진료를 보려고 줄을 서는데 멀리서 누가 너를 보고는 말한다. “◯◯◯ 아니신가요? 접수는 무슨 접수에요. 제가 바로 전문가에게 모셔다 드리면 되죠. 줄 설 필요 없어요.” 네가 말한다. “아직 진료비 납부도 못 했는걸요.”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내겠습니다.” 너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유명인이 되는 건 참 좋은 거야. 고생한 보람이 있어. 정말 사회에서 특별 대우를 받는구나. 사회란 참 현실적이야. 이런 사람이 대접받는다니 너무 좋다!’ 다시 한 번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남몰래 수고하고 고생하길 잘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감격한다. ‘병원에 오면 접수하느라 대기할 필요 없고, 항공권을 사면 좋은 자리가 바로 생기고, 어딜 가도 특별 대접을 받고 편법까지 쓸 수도 있으니 너무 좋다! 사회가 이래야지. 평등할 필요가 뭐 있어. 사람은 뿌린 만큼 거둬야지. 당신이 남몰래 고생하지 않았다면 남들 앞에서 고귀한 사람이 될 수 있겠어? 날 봐. 남몰래 고생했으니 남들 앞에서 이런 특별 대접을 받는 건 당연한 거라고.’ 이렇게 봤을 때, 사회에서 사람이 사람과 왕래하고 일을 처리하려면 무엇에 의지해야 하느냐? 역량, 실력이 사람의 일 처리 능력을 뒷받침한다. 사람이 사회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잘 풀리는지, 일 처리 능력이 어떤지는 사람의 재능이나 인성에 달려 있지 않고, 사람이 진리를 갖추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도 않다. 사회는 공평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네가 충분히 부지런하고 남몰래 고생하며 거칠고 포악하기만 하면 사람들 가운데 높은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옛날에 사람들이 무림의 맹주를 놓고 겨루는 것처럼 말이다. 무술 연마로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는지 모른다. 마지막에 주요 문파의 무공을 모두 연마하고 자기만의 필살기까지 익혀 무공이 천하무적, 신의 경지에 도달하면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무림 대회에서 주요 문파가 그에게 패할 것이고 무림 맹주의 자리는 그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남들 앞에서 고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고생하든 상관없고, 심지어 사악한 무술을 몰래 연마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 최고의 경지까지 무공을 연마하면 무림에서 그에게 맞설 자가 없고 그를 해할 자가 없다. 독약을 먹어도 능히 이겨 낼 수 있으니 무림의 맹주 자리는 견고하다. 아무도 그의 자리를 넘볼 수 없다. 이를 남들 앞에서 고귀한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선인들은 고귀한 사람이 되려고 과거를 보았고 현대인들은 남들 앞에서 고귀한 사람이 되기 위해 대학에 가고 대학원에 가거나 박사 과정을 밟는다. 오랜 세월 형설지공(螢雪之功)으로 해마다 밤낮으로 쓸데없는 공부만 한다. 가끔 너무 지쳐서 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부모에게 혼쭐난다. “너,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긴 하니? 남들 앞에서 고귀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네가 남들 앞에서 고귀하려면 남몰래 고생 좀 해야 되지 않겠어? 지금 잠깐 쉬지 않으면 죽기라도 한다니? 가서 공부나 해! 숙제도 좀 하고!” 네가 말한다. “저 숙제 다 했어요. 오늘 수업한 거 복습도 했고요. 잠깐 숨 좀 돌리면 안 될까요?” “안 돼! 남들 앞에서 고귀한 사람이 되려거든 남몰래 고생해야 된다고!” 넌 곰곰이 생각한다. ‘부모님은 다 내가 잘되라고 이러시는데 난 어쩜 제멋대로 놀 생각이나 할까? 부모님 말씀 듣자.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댔어. 아무렴 부모님 말씀 잘 들어야지. 부모님은 평생 이렇게 사셨는데 내가 못나게 굴면 면목이 없지. 게다가 내 인생은 아직 많이 남았는데 이 정도 고생쯤 뭐가 대수라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번쩍 들어 공부하고 복습하며 숙제를 한다. 그렇게 12시가 되도록 공부하면서 아무리 피곤해도 이겨 낼 수 있게 된다. 삶의 여정에서 사람은 가정에서 주입받은 “남들 앞에서 고귀한 사람이 되려거든 남몰래 고생해야 한다.”라는 생각과 말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으면서 계속해서 자신을 고무시키고 격려한다. 자신의 미래와 앞날을 위해, 그리고 남들 앞에서 고귀한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남몰래 능력을 키우고 지식을 배운다. 그리고 지식과 여러 재능으로 자기를 무장하고 강하게 만들며, 여러 선인이나 성공한 사람의 행적을 통해 자기를 고무시키고 투지를 불사른다. 그 목적은 자신의 미래를 가난하고 평범하며 비천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하고 차별받는 운명을 바꾸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훗날 큰사람, 상류층, 남들에게 우러름 받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이렇게 받은 가정 교육은 사람의 머릿속에 계속 맴돌면서 차츰차츰 이런 말과 가르침이 사람의 사상 관점, 그리고 처세 방식으로 굳어져 고유의 생존관과 추구하는 목표가 된다.

어떤 부모는 아이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사람들 속에서 친구를 사귈 줄 알아야 한단다. 이를 잘 말해 주는 속담이 있어. ‘울타리 하나에도 말뚝 세 개가 필요하듯 대장부도 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진회(秦檜)한테도 친구가 세 명 있었어. 어딜 가서든 남과 함께 지내는 법을 배우고 대인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해. 아무리 못해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는 사귀어야 된다. 사회에 나가면 네 생활, 직업, 일 처리에서 여러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데, 친구의 도움이 없다면 넌 혼자 그 모든 곤경과 궁지에 직면해야 하는 거야. 네가 만약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수완이 있다면 네가 곤경이나 궁지에 처했을 때 그런 친구가 나서서 네가 그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것이고, 일을 성취하도록 도와줄 거야. 큰일을 성취하려거든 거만한 태도를 버리고 친구를 사귀어서 자기 사업, 자신의 미래의 인생과 삶을 도와줄 각 영역의 세력을 유지해야 한단다. 여러 사람을 이용하여 너를 위해 일을 처리하게 하거나 그들이 너를 도와주게 할 줄 알아야 해.” 이런 사상 관점을 부모는 일반적으로 글이나 말로 직접 알려 주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친구를 사귀고, 남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하며, 네가 사업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줄 친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에서 지위나 신분이 있거나 수완이 무척 좋고 재치 있는 일부 부모는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또 일상생활에서 그들의 언행에 담긴 사상 관점, 처세 방식을 보여 주고, 들려줌으로써 영향을 받게 한다.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거나 분별할 수 없는 상태에서 너는 너도 모르게 부모의 언행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거나 너도 모르게 이런 사상 관점이 네 마음속 깊이 뿌리내려 네가 일을 처리하는 데 기본 근거나 원칙이 된다. 비록 부모가 네게 직접 “친구를 두루 사귀어서 남들이 너를 위해 일을 처리하게 할 줄 알아야 하고 남의 힘을 활용하거나 주위 사람을 이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부모의 방식, 그들의 사상 관점은 언행을 통해 너를 물들이고 네게 영향을 주게 된다. 이 일에 있어서 부모는 너의 최초의 스승이 되어 네가 어떻게 일을 처리하고 사람들과 왕래하며 사회에서 친구를 사귀는지, 친구를 사귀는 목적은 무엇이고 왜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지, 어떤 친구를 사귀고 어떻게 사회에 발붙일 수 있는지, 발붙일 토대는 무엇이며 그 방식은 무엇인지 등을 일깨운다. 그들은 이렇게 언행을 통해 네게 영향을 미친다. 네가 어린 데에서부터 점차 성숙해지면서 이런 사상 관점도 하나의 단순한 의식에서 윤곽이 갖춰진, 그리고 구체적인 사상 관점, 행동 방식이 되고, 너도 모르게 차근차근 네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려 네 처세 방식과 처세 철학으로 변모한다. “울타리 하나에도 말뚝 세 개가 필요하듯 대장부도 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런 처세 방식이 어떠하냐? (좋지 않습니다.) 세상에 진정한 친구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울타리 하나에 왜 말뚝이 세 개가 필요하냐? 말뚝 세 개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더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다. 두 개로는 불안하고 하나로는 더더욱 안 될 말이다. 그럼 여기에 해당되는 처세 원리는 무엇이냐? 바로 대장부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고장난명(孤掌難鳴)이니 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일을 성취하고 싶다면 너를 도울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너를 도울 사람이 필요하다면 너는 처신과 처세하는 법을 배우고 좋은 친구를 두루 사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세력을 형성해야만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성취하려는 일이 크든 작든, 네가 사업을 하려거나 사회에 발붙이려거든, 그리고 더 큰 성취를 원하거든 네가 신뢰할 수 있거나 존중하는, 네가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어야 한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네가 성취하고자 하는 사업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결국 고장난명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그 규칙은 당연하게도 모두 이런 식이다. 왜냐하면 사회는 공평하지 않고 계략과 싸움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네가 바른길을 가고 정의로운 사업을 한다면 아무도 동조해 주지 않고 이 사회에서 빛을 볼 수 없다. 네가 어떤 사업을 하든 조력자가 있어야 하고 사회에서 세력을 형성해서 어디서든 이를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 너는 사회에서 자리 잡을 수 있게 될 것인데, 네 사업이 훨씬 수월할 것이며, 네게 길을 터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처세의 태도이자 처세의 방식이다. 네가 무엇을 하든 부모는 늘 네게 말한다. “울타리 하나에도 말뚝 세 개가 필요하듯 대장부도 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처세 원칙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어째서 옳지 않으냐? (사람이 일을 성사시키는 여부는 세력이나 그가 가진 재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달려 있다. 이것이 하나의 측면이다. 그 밖에 사람이 사회에서 조력자를 원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입니다.) 그렇다. 말뚝 세 개를 세우는 목적은 일정한 자리를 차지해서 발붙이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누구도 발로 차서 넘어뜨릴 수 없는데, 이걸 차면 저게 받치고, 저걸 차면 이게 받친다. 사람이 어느 정도 세력이 있으면 사회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식은 죽 먹기다. 법이나 인정, 사회적 여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런 목적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사회에서 결정권을 가진 사람, 발언권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법이나 어떤 여론도 네 발목을 잡을 수 없고 널 흔들 수 없다. 네가 사회의 조류에서, 사회의 모든 집단에서 결정권을 가진 거물이라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너는 법, 인정, 사회적 여론, 윤리, 양심의 가책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사람이 달성하려는 목적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달성하려는 목적이다. 이것은 사람이 야심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취하는 기본적인 행위의 근거이다. 생각해 보아라. 어떤 사람이 사회에서 의형제를 맺는데 형은 어떤 그룹 회장이고, 동생은 어떤 그룹의 대표 이사이고, 어떤 형제는 정치인이나 조직폭력배 두목이다. 어떤 사람은 병원장이거나 주치의, 수간호사 같은 친구가 있고, 어떤 사람은 동종 업계에서 친구를 사귄다. 그가 친구를 사귀는 목적이 진정한 의기투합이겠느냐? 정말 정의로운 사업을 위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무엇을 위한 것이겠느냐? 그는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고 이 세력을 크고 강하게 만들어 결국 그 세력에 힘입어 사회에서 자리 잡고 생존하며 큰사람의 삶, 호화롭고 방종한 삶을 누리려 하는 것이다. 그를 업신여길 사람은 없고, 죄를 짓는다 해도 법이 제재하지 못한다. 그가 죄를 지으면 형님과 아우가 나서서 도와주고, 이 친구가 그를 두둔하고 저 친구가 법원을 찾고 윗선 정치인에게 사정을 말하면, 24시간도 안 되어서 경찰서에서 풀려난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멀쩡하고 돈을 낼 필요도 없다. 그러면 결국 서민들은 말한다. “아, 저 사람 능력 참 좋네. 저리 큰 죄를 짓고도 어쩜 이렇게 빨리 풀려났지? 나였으면 진작 끝장나서 형을 살지 않았을까? 저 사람 친구 좀 봐. 난 어떻게 저런 친구 하나 두지 못하고 저런 사람이 되지도 못한 걸까?” 오히려 부러워한다. 이런 일은 사회가 불공평하기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고, 사회에 사악한 조류가 끊임없이 생겨남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은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아무런 안전감을 느끼지 못해 늘 세력에 아첨하거나 힘을 겨루려고만 한다. 특히 사회의 하층민들은 설사 생계의 대책이 있더라도 언제 위기에 놓이거나 곤경에 처할지 모른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뜻밖의 재앙을 만나거나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고, 특히 걱정인 것은 법과 관련된 일이다. 평생 경찰서나 법원을 드나드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아무런 안전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고 비빌 언덕을 찾는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아이들은 학교에 있을 때 같이 놀 친구 두세 명 정도는 사귀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혼자 있으면 괴롭힘을 당한다. 그렇다고 선생님한테 이를 수도 없다. 선생님한테 이르면 하굣길에 봉변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설사 선생님이 널 예뻐하고, 네 성적이 우수하다고 해도 네가 친구를 사귈 줄 모르고, 주위 문제아들을 피해 다니다가 그들에게 찍히면 큰일이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아도 그들은 네가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너를 물들이고 싶어할 것이다. 네가 말을 듣지 않으면 너는 얻어터지고 왕따를 당해야 할 것이다. 학교 환경조차 안전감을 주지 못하는 마당에 이 세상은 얼마나 무섭겠느냐! 따라서 네가 가정에서 받는 이런 측면의 영향은 한편으로는 부모의 솔선수범에서 비롯되고, 다른 측면은 사회에 대한 사람의 불안감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이 사회는 공평하지 않고, 네 권익과 인권을 보호할 세력이나 유리한 조건이 없기 때문에 사람은 사회에 대해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 결과 사람은 자연스럽게 “울타리 하나에도 말뚝 세 개가 필요하듯 대장부도 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라는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의 환경에서는 이런 사상 관점으로 삶을 지탱하면서 사람의 삶을 적막과 고독에서부터 안전감이나 기댈 곳이 있는 상황으로 바꿔 줄 필요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세상에서 세력이나 친구에 의지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가정에서 받는 교육에는 방금 언급한 “울타리 하나에도 말뚝 세 개가 필요하듯 대장부도 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외에 좀 더 구체적인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부모는 딸을 이렇게 교육한다. “‘여자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치장하고,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세상에 못생긴 여자는 없다. 단지 게으른 여자만 있을 뿐이다’라는 말은 여자는 자기를 사랑할 줄 알고, 꾸밀 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자기를 아름답게 꾸미면 어딜 가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너를 위해 일을 처리해 주며 길을 터 줄 것이란 말이다. 사람들이 너를 좋아하면 당연히 너를 곤란하게 하거나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또 어떤 부모는 딸에게 일러둔다. “여자는 옷을 잘 입고 꾸밀 줄 알아야 한단다. 화장도 할 줄 알아야 하고, 더 중요한 건 온화해야 하는 거야.” 이 말의 저의는 자기를 과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여자는 기가 세면 안 돼. 여자가 기가 세고 자립심이 있어 봤자 무슨 소용이겠니? 온종일 꾸미지도 않고 정신없이 쏘다니면서 사내처럼 살아갈 뿐, 온화하지도 않겠지.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받으려고 태어났으니까 자립할 필요도, 별다른 능력을 갖출 필요도 없어. 그저 자기를 꾸밀 줄 알고 남자의 환심을 살 줄만 알면 돼. 여자가 해야 할 일을 하면 그만이라고. 자기를 좋아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있으면 여자는 평생 행복하단다.” 어떤 여자들은 이런 부분에서 부모의 영향을 받으며 한편으로는 자기 어머니가 여성으로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펴보고, 또 한편으로는 부모의 교육을 받은 후 계속해서 자기를 꾸미고 아름답게 하여 정말 남의 눈에 흡족한 여자가 된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이런 가정 환경에서 자란 여성은 자신의 외모, 옷차림, 여성이라는 신분을 매우 중시하여 외출할 때면 반드시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어떤 사람은 일이 아무리 바빠도 외출할 땐 꼭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며 향수까지 뿌린다. 안 그러면 외출 자체를 하지 않는다. 별일 없어도 거울을 보면서 머리를 만지니 하루에 거울을 몇 번이나 보는지 모른다. 그들은 “여자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치장하고,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라는 생각과 관념에 깊이 영향받아 자신의 몸매와 용모를 몹시 중시하는데, 안색이 조금이라도 좋지 않으면 외출하지 않는다. 또 얼굴에 여드름이라도 나면 아무도 만나지 않고, 화장할 기분이 들지 않는 날에는 외출하지 않는다. 또 머리를 잘랐는데 예쁘지 않아서 남들이 좋아하지 않고 거들떠보지 않을 것 같으면 일하러 나가지 않는다. 온종일 이런 생각만 하면서 사는 것이다. 손에 모기 물린 자국이 있으면 손을 내밀지 않고, 다리에 모기 물린 자국이 있으면 다리를 보이지 않는다. 치마를 입었는데 예쁘지 않으면 나가지 않고 본분도 이행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고 그녀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데, 사는 게 너무 피곤하고 지친다. 여자로서의 존엄을 지키고 추녀가 되지 않기 위해 그들이 자기 얼굴과 몸매, 헤어 스타일에 얼마나 공을 들이며 부지런을 떠는지 모른다. 추녀가 되지 않기 위해 나쁜 버릇과 게으름을 고치고, 일이 아무리 바빠도 열심히, 세심하게 화장하고 꾸민다. 눈썹을 잘못 그렸으면 지우고 다시 그리고, 볼 터치가 잘못됐으면 지우고 다시 바른다. 화장을 시작하면 한두 시간 안에 집을 나설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씻고,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는 데도 고민하고 바꾸기를 반복하여 정오가 되어서도 집을 나서지 못한다. 이 고충이 얼마나 크겠느냐? 그녀의 유한한 세월과 에너지를 이런 따분한 일이 차지하니 말이다. 본연의 일은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눈만 뜨면 자기를 아름답고 예쁘게 꾸미는 일만 한다. 이런 부류 중엔 어머니의 사상 관점의 영향을 받은 사람도 있고, 어머니가 분명하게 알려 준 사람도 있으며, 어머니가 몸소 모범을 보이면서 언행으로 가르친 사람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는 모두 가정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부 가정은 또 “딸은 귀하게 키우고, 아들은 궁하게 키워야 한다.”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똑같은 아이인데 어째서 하나는 귀하게 키우고 하나는 궁하게 키우겠느냐? 사람들에게는 ‘남존여비’의 성향이 있는데 이럴 때는 어째서 반대란 말이냐? 딸을 귀하게 키우면 결국 어떤 딸이 되겠느냐? 어떤 존재가 되겠느냐? (응석받이에 버릇없는 딸이 될 것입니다.) 제멋대로에 나약해서 어떤 고생도 감내하지 못할 것이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비이성적인 데다 억지까지 쓰면서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할 것인데, 이런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올바른 교육법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아이를 망칠 뿐이다. 딸을 귀하게 키우면 그런 가정 환경에서 먹고 입을 걱정을 하지 않을 것이고 식견도 좀 생기겠지만, 그녀가 진정한 사람됨의 원칙을 알겠느냐? 만약 알지 못한다면 이런 양육법은 그녀에게 해가 되고 그녀를 망칠 뿐이지, 그녀를 지켜 주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이런 원칙으로 딸을 양육하는 취지는 무엇이냐? 이렇게 자란 딸은 식견이 있어 좋은 옷을 사 주거나 돈을 조금 주거나 작은 은혜를 베푼다고 해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일반적인 남자는 그녀를 데려갈 수 없다. 돈이 무척 많거나 신사적인 사람, 식견이 넓고 주도면밀한 사람, 생각이 많은 사람이어야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녀를 데려가고 얻을 수 있다. 네 생각에는 딸을 이런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느냐, 나쁘겠느냐? 좋은 일이 아니지 않겠느냐? 게다가 네가 귀하게 키운 딸이 누리고 꾸미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 외에, 사람을 분별할 줄 알겠느냐? 생계를 위한 기술이 있겠느냐? 다른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겠느냐?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자기의 삶을 돌보는 것마저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쓸모없다. 응석받이에 독단적이고 제멋대로고 건방지고 방종하고 포악하다. 고집만 부리고 놀고먹을 줄만 알지, 그것 말고는 살면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상식을 알지 못한다. 이는 은연중 그녀의 훗날 삶과 가정 생활에 불편을 야기할 것이다. 부모가 딸을 이렇게 교육하는 것은 그녀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사람됨의 원칙은 가르치지 않고 오로지 누리는 것만 알려 주었으니 훗날 돈을 벌지 못하면 고생하지 않겠느냐? 괴로워하지 않겠느냐? 그녀가 감내할 수 있겠느냐? 훗날 곤경에 처하면 연약해지지 않겠느냐? 이 모든 고난을 헤쳐 나갈 의지가 있겠느냐? 장담할 수 없다. 물질생활을 너무 많이 누린 사람, 삶이 너무 순탄하고 사치스러운 사람, 고생이라고는 조금도 안 해 본 사람의 인성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연약하고 고생을 감내할 의지가 없는 것인데, 이런 사람은 망하게 되는 것이다. 자녀에 대한 가정 교육이 부모에게서 비롯되었든, 사회의 흐름에서 비롯되었든 결국 그것은 인간에게서 기인한다. 이 다방면의 말들이 한 가지 사상 관점을 형성하든, 아니면 사람의 생활 방식이나 생존 방식으로 변모하든, 사람으로 하여금 과격하고 고집스러우며 치우친 시각으로 이런 문제들을 바라보게 만든다. 결국 가정에서 비롯된 말은 사람이 사물을 바라보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사람의 처세와 일 처리에도 영향을 준다. 그것이 네게 영향을 주는 이상 네 진리 추구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니 부모에게서 비롯된 말이나 사상 관점이 고상하고 대단한 것이든, 아니면 저급하고 어리석은 것이든 모든 사람은 다시 면밀히 살피고 직시하면서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약 그것이 네게 일정한 영향을 미치거나 네 삶과 진리 추구에 걸림돌이 되어 네 삶을 엉망으로 만든다면, 혹은 네가 사람이나 일, 사물을 직면할 때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가로막는다면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회에서는 EQ니 IQ니 하는 말도 유행한다. 즉, 사람은 IQ가 높을 필요는 없고 EQ만 높으면 된다는 것이다. IQ는 한 사람의 자질을 중시하고 EQ는 한 사람의 처세 수단을 중시한다는 것이 두 단어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이해이다. 어쩌면 너는 IQ가 무척 높아서 공부를 잘하고 지식도 매우 많으며 표현 능력과 생존 능력이 뛰어날 수 있다. 허나 EQ가 높지 않아서 세상 물정에 어둡거나 수완이 좀 있다고 해도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다면 네 지식과 기술, 장기로는 사회에서 입에 풀칠할 정도의 밥벌이만 겨우 할 수 있을 것이다. EQ가 높은 사람들은 무척 약삭빨라서 사회에서 여러 세력이나 유리한 지리적 환경, 기회, 정보를 활용하며, 보잘것없는 일을 부풀리고 과장한다. 그리하여 사회나 사람들 가운데서 일정한 영향력을 형성하여 자신의 명성을 키우는 한편, 최종적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두각을 나타내 명망 있고 지체 높은 사람이 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EQ가 높고 수완이 좋은 사람이다. 수완이 좋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질이다. 현대 사회는 EQ가 높은 것을 장려하기에 일부 가정에서는 자녀를 이렇게 교육하기도 한다. “네 IQ가 높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EQ도 높아야 한단다. 주위 동창이나 동료, 친지와 함께 지낼 때는 높은 EQ가 필요해. 이 사회가 가장 장려하는 것은 실력이 아니라 사람의 수완이거든. 자기를 포장하고 부풀릴 줄 알고, 사회의 각 세력과 여러 유리한 조건을 이용해서 자신에게 힘을 보태고 자기를 위해 봉사하게 할 수 있는 수완 말이야. 기회를 잡아 큰 부를 쌓든 아니면 이름을 날리든 그런 사람은 모두 EQ가 높은 사람이란다.” 일부 특별한 가정이나 사회에서 이름난 부모는 자녀를 이렇게 교육하곤 한다. “EQ가 높은 남자는 남녀 구분 없이 모두에게 사랑받지만 EQ가 낮은 남자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 또 EQ가 높은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나 여자는 셀 수 없이 많고, 그녀를 쫓아다니는 이성도 많단다. 하지만 EQ가 낮은 여자는 외모가 아무리 예뻐도 따라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지.” 사람이 오늘날 이 사회에 살면서 가정에서 이런 말을 전혀 분별없이 듣는다면 무의식적으로 이런 사상 관점에 영향을 받을 것이고, 항상 자신의 IQ가 어떤지 가늠할 것이며, 더 나아가 자신에게 EQ가 있긴 한 건지, 자신의 EQ는 어떤지 비춰 볼 것이다. 이 일에 대한 네 의식이 강하고 명확하든 그렇지 않든, 이런 측면의 가정 교육은 이미 네게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것이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리고 네 생각 속에서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진 않지만 그것을 분별없이 들을 때 너는 어느 정도 그것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가정에서 받는 교육은 이게 끝이 아니다. 예를 들어, 부모는 항상 자녀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사람들 가운데서 야무지지 못하고 늘 어리숙하게 나사 빠진 사람처럼 구는 사람한테 좋은 속담이 있지. ‘징과 북소리에서 음을 듣듯 남의 말을 듣고 그 속뜻을 파악해라.’ 다른 사람과 수다를 떨 때는 속뜻을 들을 줄 알아야 해. 그러지 않으면 남한테 속은 줄도 모르고 고마워할 테니까!” 늘 이렇게 말하는 부모가 있지 않더냐? 그 속뜻은 무엇이냐? 정직한 사람이 되지 말고 야무지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즉, 상대방 말의 저의를 알아야 하고, 말 속에서 그가 말하지 않은 또 다른 측면의 의미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의 뜻을 예측하는 법을 배워 그 속뜻에 따라 알맞은 조치나 수단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굴면 안 되는데, 그러지 않으면 남들에게 이용당하고도 고마워하게 될 것이다. 이는 부모의 입장에서 좋은 의도로 하는 말인데, 너를 지켜 주고 네가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또 네가 이 사악한 사람들 사이에서 배신당하지 않도록 하고, 호구가 되거나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지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부합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다 보면 확실히 속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때가 있다. 굳이 주의 깊게 듣지 않아도 속뜻이 들리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부모가 네게 알려 준 “징과 북소리에서 음을 듣듯 남의 말을 듣고 그 속뜻을 파악해라.”라는 말을 따른다면, 남을 경계하고 어디서나 조심해야 하며, 그와 동시에 남이 너를 해하고 괴롭히기 전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수동적으로 굴면서 진퇴양난에 빠지지 말고 선수를 쳐야 하는 것이다. 부모의 말이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은 이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남들과 함께 지내면서 남들이 너를 해하든 해하지 않든 수동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주도권과 칼자루를 쥐라는 것이다. 그럼 그가 너를 해하려 할 때 너는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공격해서 그보다 강하고 매섭게 그를 해치울 수 있다. 부모가 그런 말을 한 목적과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분석한다면 그 말은 분명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라는 말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이 원칙과 지혜의 방식은 남의 간계를 분별하게 하며,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인과 어울리지 않게 자신을 지켜 준다. 악한 방식으로 악을 상대할 필요 없이 진리 원칙으로 모든 악행과 악인에 맞서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가 알려 주는 “징과 북소리에서 음을 듣듯 남의 말을 듣고 그 속뜻을 파악해라.”라는 방식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다. 그가 악하면 너는 그보다 더 악하게 굴고, 그의 말에 뼈가 있다면 너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속뜻을 읽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그의 저의에 알맞은 방식과 수단으로 그를 상대하고 맞서며 제압하여 너를 두려워하게 하고 굴복시키는 것이다. 네가 결코 호락호락하거나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라는 뜻이다. 이는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말이 알려 주는 실행의 길, 실행의 준칙, 그리고 도달하려는 결과는 네가 악을 행하고 참도에서 벗어나도록 이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처신하라는 부모의 가르침은 너를 진리를 갖춘 사람이나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 진정한 피조물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악인 앞에서 더 악한 방식으로 악을 견제하고 제압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부모의 의도이다. “너를 공격하는 악인이 있으면 참으렴. 너는 그를 상대하지 말고 분별해라. 한편으로는 그에게서 악인의 본질을 분별하여 악인에 대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비슷하거나 공통된 자신의 악행이나 패괴 성품을 인식한 다음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부모가 있느냐? 자녀에게 이렇게 알려 주는 부모가 있느냐? (없습니다.) 부모는 네게 이렇게 알려 준다. “징과 북소리에서 음을 듣듯 남의 말을 듣고 그 속뜻을 파악해라. 조심해야 돼. 그러지 않으면 남에게 속는 줄도 모르고 그에게 고마워할 거야. 그러니 너는 기선 제압하는 법을 배워야 해.” 부모의 원래 의도이든, 아니면 최종 결과이든, 결국 이런 말은 네가 좀 더 사납고 강하고 독단적이고 난폭하고 흉악해져서 악인이 두려움에 너를 피해 다니고 감히 너를 건들지 못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부모가 네게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은 정의로운 사람이나 진리를 갖춘 사람이 되라는 것도,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도 아니다. 그 목적은 사회에서 세력을 가지고 남보다 악한 사람, 악으로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부모가 네게 “징과 북소리에서 음을 듣듯 남의 말을 듣고 그 속뜻을 파악해라.”라고 알려 줬는데, 그 의도이든 궁극적인 결과이든, 아니면 부모가 알려 준 이런 일의 원칙, 실행법 혹은 이런 일을 바라보는 사상 관점이든, 그것들은 분명 다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 부모는 너더러 정직한 사람이나 지혜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악인이 되라고 한다. 너에 대한 부모의 가르침과 교육은 분명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며, 올바른 길도 아니다. 비록 그들의 의도가 너를 보호하는 데 있고, 그 보호가 선의라고 할지라도 그 결과는 부정적인 것이다. 그들은 너를 보호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릇된 길을 알려 주어 네가 악을 행하고 악인이 되게 했다. 또한, 그들은 너를 보호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너를 해하여 시험과 불의에 빠뜨렸으며,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너에 대한 가정 교육은 너를 이기적이고 거짓되게 만들고, 명예와 이익, 사회적 지위에 연연하게 만들어 사악한 조류에 휩쓸리기 쉽게 했다. 그리고 더 뛰어난 수완을 갖고 남들과 함께 지내게 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매끄럽고 흉악하며 독단적이고 제멋대로에 아무도 감히 건드리거나 부딪칠 수 없게 만든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이런 방식의 가정 교육이 사회에서 너를 보호해 주거나 어느 정도 존엄을 갖추게 했겠지만,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네가 진정한 피조물이 되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가르침과 하나님이 네게 훈계한 처신의 방식에서 멀어지게 하고, 이와 동시에 하나님이 네게 알려 준 추구 목표에서도 점점 멀어지게 한다. 너에 대한 부모의 교육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들이 가르친 사상이 결과적으로 네게 가져다준 것이라고는 명예와 이익, 공허함, 네가 살아 내고 드러내는 각종 악행뿐이다. 또한, 네 부모의 가정 교육은 사회에서의 실용성밖에 없다는 것을 더 분명히 입증했을 뿐이다.

“징과 북소리에서 음을 듣듯 남의 말을 듣고 그 속뜻을 파악해라.”와 같이 가정 교육에서 듣는 말만 놓고 보면 너는 고개가 갸우뚱할 것이다. 이런 말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듣고, 자주 하는 말이라 이런 말과 사상 관점들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들을 진리와 비교하고, 진리로 자세히 해부해 보면 문제가 심각하다. 예를 들면, 부모는 항상 “징과 북소리에서 음을 듣듯 남의 말을 듣고 그 속뜻을 파악해라.”라고 하는데, 이런 삶의 방식을 네가 자유자재로 적용한다면 사람들을 만날 때 은연중 무의식적으로 ‘저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의미가 뭘까?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 거지?’라며 자연스레 남의 말뜻을 추측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습관적인 사고방식으로 남의 말을 들으며, 사람들과 교류할 것이다. 어떻게 남과 지낼지, 남과 지낼 때의 원칙은 무엇인지, 남과 대화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남의 말에서 읽어 낸 다른 측면의 의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가르쳐 준 방식은 무엇인지, 이런 부류의 사람을 어떻게 분별하고 대해야 하는지 등 진리 쪽으로는 고민하지 않는다. 이런 실행 원칙은 부모가 알려 준 적이 없다. 부모는 네게 타인의 심중을 짐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실행법은 네가 워낙 잘 적용한 나머지 이미 몸에 배어서 절묘한 경지에 도달해 있다. 그러니 이런 문제는 사람이 항상 차분하고 면밀하게 생각해야 하고 신경 써야 한다. 이런 문제를 해부하고 확실하게 분별하는 한편, 이런 일이 발생할 때 사고방식을 고치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방식을 고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이런 일을 대하는 사상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남의 말을 듣고 그 의미를 짐작하고자 할 때는 이런 사고방식과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내려놓고 이렇게 생각해 보아라. ‘그가 이런 말을 한 건 무슨 의미일까?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자꾸 돌려 말하는 거 보니 간사한 사람이구나. 그가 말한 그 일이란 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 일의 본질이 뭘까? 내가 간파할 수 있을까? 내가 간파할 수 있다면 진리에 부합하는 말과 견해로 그와 교제하고 그 일을 분명하게 얘기해서 그가 이 측면의 진리를 깨닫게 해 줘야지. 그의 잘못된 사상 관점을 바로잡을 수 있게 도와줘야겠다. 그건 그렇고, 그가 말하는 방식이 간사해. 도대체 그가 무슨 의미로 말한 건지, 왜 그런 식으로 빙빙 돌려 말하는지 알고 싶지 않아. 그의 생각을 애써 짐작하고 싶지 않고 그런 수고를 치르고 싶지도 않아. 이 일 때문에 굳이 뭘 하는 것도 싫고. 그냥 이 사람이 간사하다는 것만 분별하면 됐지. 그가 간사하다고 나까지 그의 간사함에 놀아나진 않겠어. 그가 아무리 빙빙 돌려 말하든, 난 그에게 직설적으로 말할 거야.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할 말 다 할 거라고.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 5:37)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간사함을 정직함으로 대처하겠어. 이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최고의 준칙이니까.’ 네가 이런 방식으로 실행하여 부모가 가르치고 지도한 방식을 내려놓고 네 실행 원칙도 바뀌게 되면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교육 중 어떤 것을 내려놓든 그에 상응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에 대한 잘못된 사상 관점을 바꾸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삼고 진리를 준칙으로, 그리고 너의 가장 정확하고 긍정적인 사상 관점으로 삼는다면, 즉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근거와 실행 준칙으로 삼아 그 일을 판단하고 바라보며 처리한다면, 너는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네가 부모가 가르쳐 준 방식이나 주입한 사상 관점을 준칙, 근거, 실행 원칙으로 삼아 그 일을 대한다면 이런 실행은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도,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한 끝에 얻는 것은 진리에 대한 체험과 경험이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진리에 대한 체험과 경험은 얻을 수 없고, 그저 부모가 네게 가르친 그 말을 실행한 체험과 경험만 얻을 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험과 체험을 이야기할 때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네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네게 있는 것이라고는 가정에서 교육받은 사상 관점에 대한 실제적 체험과 경험뿐이니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나누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실행하는 대로 체험할 것이다. 네가 실행한 것이 진리라면 얻는 것도 하나님 말씀, 진리에 대한 체험과 경험일 것이고, 네가 실행한 것이 부모의 가르침과 당부라면 체험하는 것도 가정 교육, 전통 교육의 경험일 테니 네가 얻는 것 역시 사탄이 주입한 사상과 너에 대한 사탄의 패괴일 뿐이다. 그리고 체험이 깊어질수록 너는 사탄이 패괴시킨 사상 관점이 유용하고 실속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너는 사탄에게 더 깊이 패괴될 것이다. 네가 진리를 실행한다면 어떻겠느냐? 진리에 대해, 하나님이 네게 알려 준 말씀과 원칙에 대해 점점 더 체험과 경험이 생길 것이고, 진리가 가장 가치 있음을, 하나님이 사람 생명의 근원임을,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명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가정이 너를 키우면서 먹이고 입히며 학교에 보내는 것 말고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이냐? 가져다주는 것이라고는 전부 골칫거리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만약 이런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너에 대한 갖가지 가정 교육은 없었을 것이다. 가정 교육은 없다 해도 사회의 교육이 있으니 너는 벗어날 수 없다. 어떤 시각으로 보든, 이런 교육이 비롯된 곳이 가정이든, 사회이든 이런 사상 관점은 거의 모두 사탄에게서 비롯된다. 단지 가정마다 받아들이는 사회의 여러 말에 경중의 차이나 주안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상응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다음 세대를 가르치며 교육했고, 각 가정의 구성원들은 저마다 여러 가지 가정 교육을 받았다. 사실 이런 교육은 근본적으로 사회와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단지 부모의 좀 더 구체적인 말과 행동을 통해, 직접적이고 사람이 더욱 쉽게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주입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를 사람이 받아들임으로써 사람의 처세 원칙, 처세 방식이 되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도 되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징과 북소리에서 음을 듣듯 남의 말을 듣고 그 속뜻을 파악해라.”라는 이 사상 관점 역시 너에 대한 가정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정이 어떻게 교육하든, 사람은 가족 구성원의 관점으로 그것을 긍정적인 사물, 자신의 부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자신을 보호할 것이다. 사람은 부모로부터 비롯된 것은 부모가 실천과 체험을 통해 얻은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해가 되지 않는 유일한 사람, 자기가 더 잘 지내기를 바라고 자기를 보호하려 하는 유일한 사람이 부모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모에게서 비롯된 갖가지 사상 관점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사람은 갖가지 사상 관점에 대한 부모의 가정 교육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부모에게서 비롯된 갖가지 사상 관점의 교육을 받아들이고 나면 사람은 그것을 전혀 의심하거나 분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모로부터 자주 이런 말을 듣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상에 틀린 부모는 없다.”라는 말이 무슨 뜻이더냐? 부모의 옳고 그름을 떠나 아무튼 부모가 너를 낳고 키웠기 때문에 부모가 하는 모든 것은 네게 옳은 것이고, 시비를 가리거나 거부할 수 없고, 더욱이 거역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이것을 효도라고 한다. 설령 부모가 잘못했어도, 일부 사상 관점이 뒤처지거나 잘못되었어도, 혹은 너를 가르치는 방식이나 사상 관점이 옳지 않거나 긍정적이지 않더라도 의심하지 말고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틀린 부모는 없다.”라는 말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모에 대해 그들의 옳고 그름을 영원히 분별하지도, 평가하지도 말라는 말이다. 자녀 입장에서 보면 자녀의 생명, 자녀의 모든 것은 부모에게서 비롯되었으며, 부모는 지극히 높은 존재이기 때문에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부모가 틀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틀렸거나 옳지 않거나 쓸모가 없다 해도 부모는 부모다. 너를 키운 가장 친한 사람이자 네게 가장 좋은 사람이고, 네게 생명을 준 사람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말이 아니더냐? 부모에게 이런 심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너를 함부로 대하고 여러 방식으로 네가 여러 일을 하게끔 인도하며 네게 갖가지 사상을 주입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내 취지는 옳아. 다 널 위한 거라고. 네 모든 것은 내가 준 것이고, 넌 내가 낳고 키웠으니 널 어떻게 대하든 틀린 게 아니야. 내가 하는 일은 모두 널 위한 거니까 네게 해가 되거나 널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자녀의 입장에서 “세상에 틀린 부모는 없다.”라는 말을 근거로 부모를 대하는 것이 옳은 태도이냐? (옳지 않습니다.) 결코 옳지 않다. 그럼 이 말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겠느냐? 몇 가지 측면에서 이 말의 잘못된 점을 해부할 수 있겠느냐? 자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녀의 생명과 몸이 부모에게서 왔고, 부모가 자녀를 키워 주었으니 자녀는 부모의 말을 청종하고 효도해야지 부모의 잘못을 들추면 안 된다. 그 숨은 뜻은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분별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분석하면 이 관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이 일은 진리를 근거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겠느냐? 어떤 말이 올바르겠느냐? 자녀의 몸과 생명이 부모가 준 것이더냐? (아닙니다.) 사람의 육체는 부모가 낳았는데, 그럼 부모의 출산 능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냐?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럼 사람의 영혼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역시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그러니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하나님이 만들었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이 그 가정에서 네가 태어나게 정한 것이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그 가정에 보냈고 그 후에 네가 이 가정에서 태어나 너와 부모 사이에 이런 인연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의 주재와 정함으로 인해 네 부모가 너를 갖게 되었고, 네가 그 가정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근원적인 관점이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 놓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러면 부모는 영원히 너를 가질 수 없게 될 것이고, 너는 영원히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가 없을 것이며, 아무런 혈연관계나 가족애도 없고, 하등의 관련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생명은 부모가 주었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녀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부모가 자녀보다 한 연배 높긴 하지만 모든 인류를 놓고 보면 부모 역시 다른 모든 사람처럼 패괴된 인류 중 한 명이고 사탄의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기에 남들과 다를 바 없고 너와도 다를 게 없다. 비록 형식적으로는 부모가 너를 낳았고 육적인 관계에서 너보다 한 연배가 높지만 사람의 성품 본질로 보면 너희는 똑같이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사탄의 패괴 성품이 있는 사람이다. 사탄의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보면 사람 간의 본질은 모두 똑같다. 연배의 구분을 떠나, 나이가 많든 적든, 출생이 빨랐든 늦었든 본질적으로 사람의 패괴 성품 본질은 모두 똑같다. 사탄의 패괴를 거친 인간이라는 것은 다를 바 없다. 인성이 악하든 선하든, 패괴 성품이 있기에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진리를 대하는 시각과 입장은 매한가지다. 그리고 똑같이 이 사악한 인류 가운데서 살면서 말로든 생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이념적으로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은 사악한 세상에서 비롯된 갖가지 사상 관점이다. 국가 교육이든 사회 풍조의 영향이든, 받아들이는 것은 모두 사탄에게서 비롯된 여러 사상으로, 진리에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진리가 있지도 않기에 사람은 무엇이 진리인지 더욱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부모와 자식은 평등하며 사상 관점도 똑같다. 단지 부모가 20, 30년 먼저 이런 사상 관점을 받아들였고 네가 조금 늦게 받아들였을 뿐이다. 다시 말해, 네가 정상인이라면 같은 사회적 배경에서 너와 부모가 받아들인 것은 똑같이 모두 사탄에게서 비롯된 패괴와 사회 풍조에서 비롯된 영향, 그리고 사회의 여러 사악한 시류에서 비롯된 사상 관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자녀와 부모는 같은 부류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정함, 하나님의 예정과 택함이라는 전제를 내려놓고 본다면 자녀이든, 부모이든 모두 피조물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피조물이든 그렇지 않은 피조물이든 모두 피조물로 통칭되며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 안배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자녀와 부모의 지위는 하나님이 보기에 사실은 평등하다. 모두가 똑같이 평등하게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객관적 사실이다. 만약 하나님에게 택함 받고 평등하게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기회가 모두에게 있다면, 평등하게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일 기회, 평등하게 구원받을 기회도 당연히 있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은 위의 공통점을 제외하면 오직 하나의 차이점만 있다. 바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연배가 자녀보다 앞선 점이다. 이런 연배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바로 나이가 20, 30살 많아 한 연배가 앞섰으니 나이를 그만큼 더 먹었다는 말일 뿐이다. 부모의 특별한 신분 때문에 자녀는 반드시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녀의 도리를 다해야 하겠지만 부모에 대한 책임은 여기까지이다. 하지만 자녀와 부모는 똑같이 패괴된 인간이기 때문에 부모라고 해서 자녀에게 윤리적 모범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녀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 푯대나 본보기가 되는 것은 아니며, 자녀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본보기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부모가 진리의 화신은 아니기에 자녀가 부모를 윤리적 본보기나 청종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의무나 책임도 없다. 자녀가 부모의 행동과 성품 본질을 분별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다시 말해, 자녀는 “세상에 틀린 부모는 없다.”라는 사상 관점으로 부모를 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관점은 부모의 특별한 신분, 즉 하나님의 정함으로 너를 낳았고 너보다 20, 30살, 나아가 40, 50살이 많다는 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단지 육적인 측면에서 그들의 신분과 연배가 자녀와 다를 뿐이다. 이 차이점 때문에 부모를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이것이 옳으냐? 이것은 옳지 않다. 비이성적이며 진리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부모와 자식이 이런 관계라면 부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 부모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대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으로 대하며,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그에 해당되는 진리 원칙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가 마귀이면 마귀라고 말하고, 그에게 인성이 없으면 인성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가 네게 가르친 사상 관점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너는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며, 더 나아가 분별하고 폭로해도 된다. 부모가 만약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라고 하면서 울고불고 죽겠다 한다면 너는 신경 쓰겠느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부모가 믿지 않는다면 네가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가 이렇게 요란을 떠는 것을 보니 너는 그가 마귀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관한 이런 진리는 사람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사상 관점인데 그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귀 기울이지 않으니 그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니 그는 사람이 아니지 않겠느냐? 너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 부모이긴 하나 인성이 없어. 이런 사람이 날 낳았다니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네! 내면에 사람의 영이 없어서 진리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이번에 분별하게 됐어. 이렇게 확실하고 단순한 이치마저 알아듣지 못하고 함부로 지껄이면서 헐뜯는 말이나 하다니. 이제 확실히 알겠어. 속으로는 확실히 선을 그었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비위를 맞추면서 자녀의 책임과 도리는 다해야지. 여건이 되면 건강식품도 좀 사 드리고, 여의치 않으면 문안만 드리고 말자. 뭐라고 하든 대꾸하지는 않겠어. 그냥 틀린 대로 놔두지 뭐. 말이 안 통하는 마귀와 무슨 할 말이 있겠어. 날 낳고 키운 세월을 봐서 문안하고 돌봐 드려야겠다. 그것만 아녔으면 절대 상관하지 않았을 테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을 거야.’ 어째서 너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고, 어떤 친분 관계도 맺고 싶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네가 진리를 깨닫고 사람의 본질과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갖가지 사상 관점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으로부터 사람의 어리석음, 강퍅함, 사악함을 보고 그가 마귀임을 알아차려서 속으로 증오하고 역겨워하여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있는 일말의 양심은 자녀의 책임과 효도를 다하여 겨우 명절에나 문안하고 끝내도록 너를 지배할 뿐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그가 가로막지 않으면 시간이 날 때 찾아가 문안하고, 도무지 보고 싶지 않으면 안부 전화나 드리고 가끔 용돈을 부치거나 필요한 물건을 사 주면 그만이다. 돌봐 주고, 문안하며, 옷을 사 주고, 안부를 묻거나 병이 들면 수발하는 것은 그저 사람의 감정과 양심의 필요를 충족시켜 효도하는 것일 뿐,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네가 아무리 그를 역겨워하거나 그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고 해도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자녀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해야 하고 필요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너를 돌보고, 부모가 늙었을 때는 여건이 되는 대로 네가 그들을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가 잔소리를 하고 싶어 하면 하게 두어라. 그래도 네가 그가 주입하는 사상 관점을 듣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의 방해와 속박을 받지 않는다면 훌륭한 것이다. 이는 네 분량이 자랐음을, 그리고 네가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서서 증거하였음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네가 그들을 돌본다고 해서 정죄하지 않을 것이며,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정에 이끌리느냐?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왜 그를 돌보느냐?”라고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이는 처신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이자 의무이며, 여건이 허락하는 한 네 의무를 다하는 것이지 정에 이끌린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물론, 세상에서 네가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하는 대상인 부모 외에 형제간, 친지, 친척들은 모두 네 책임이나 의무와 아무 관계가 없다. 너는 그들에게 잘 보이거나 살갑게 굴거나 그들을 도와줄 아무런 의무나 책임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세상에 틀린 부모는 없다.”라는 말이 명확하게 설명되었느냐? (그렇습니다.) 부모는 어떤 사람이냐? (패괴된 인간입니다.) 그렇다. 부모는 패괴된 인간이다. 만약 가끔 부모가 그리워 ‘요새 부모님 건강은 어떠신지 모르겠네. 내가 보고 싶으시려나? 퇴직은 하신 건가? 생활에 어려움은 없으신가? 편찮으실 때 돌봐 줄 사람은 있으려나?’와 같은 생각을 하다가 또 이런 생각까지 한다고 치자. ‘세상에 틀린 부모는 없다잖아. 예전에 부모님이 날 때리고 호통치신 건 다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라시는 자식 사랑이었던 거야. 역시 내 부모가 최고지. 세상에서 날 가장 아끼는 분들이잖아. 부모님이 나쁘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사실 그런 게 아니었던 거지. 세상에 틀린 부모는 없으니까.’ 이렇게 생각할수록 그들이 더욱 보고 싶어진다. 이런 생각이 좋은 것이냐? (좋지 않습니다.) 좋지 않다. 그럼 어떻게 생각해야겠느냐? ‘어렸을 때 부모님은 날 두들겨 패고 욕하면서 내 자존심에 상처만 내고 다정하게 말해 준 적도, 격려해 준 적도 없었어. 공부하라고, 또 무용, 노래, 올림피아드 수학 같은 걸 배우라고 등 떠밀었는데 난 전부 싫었어. 부모란 정말 귀찮아. 지금은 하나님을 믿고 해방되어서 대학 졸업 전부터 나와 본분을 이행하는데 역시 하나님이 좋아. 부모님은 보고 싶지 않아.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로막으니 부모님은 마귀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또 이렇게도 생각한다. ‘아냐. 세상에 틀린 부모는 없어. 가장 가까운 사람이 부모인데 보고 싶어 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옳으냐? (예전에 저희는 부모님이 뭘 하든 그건 저희를 위한 것이니 저희에게 좋은 일이고, 영원히 저희에게 해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방금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서야 부모님 역시 패괴된 인간이며, 사탄에게서 비롯된 여러 사상 관점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은연중 부모님이 저희에게 여러 가지 사탄의 관점을 주입하여 저희의 처신과 일 처리가 진리와 동떨어졌고 사탄의 철학대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제 부모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분별되니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나 생각도 훨씬 줄게 될 것입니다.) 부모를 대할 땐 먼저 이성적으로 혈연이란 관계에서 벗어나 네가 받아들이고 인식한 진리로 그들을 분별해야 한다. 그들의 행동이나 처신의 기저에 깔린 사상 관점, 동기 그리고 그들의 행동이나 처신의 원칙과 방식을 바탕으로 그들을 분별하면 그들 역시 사탄에게 패괴된 사람임을 확증할 수 있다. 진리의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분별해야지 늘 부모가 대단하고 사심 없으며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런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너는 영원히 그들에게 존재하는 문제를 찾지 못한다. 가족애나 자녀의 관점으로 부모를 바라보지 말고 이런 틀에서 벗어나 그들이 세상과 진리, 사람, 일, 사물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그들이 네게 가르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사상 관점을 보아라. 이를 통해 그들을 인식하고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인성과 인품 그리고 그들이 사탄에게 패괴된 사실이 조금씩 분명해질 것이다. 그들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태도로 진리를 대하는지, 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진리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지,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어떤지 등을 바탕으로 그들을 분별한다면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분명해지면 네 마음속에서 대단하고 존귀하며 흔들리지 않던 부모의 지위가 변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변하게 되면 부모가 내보인 모성애와 부성애, 구체적인 언행이나 그들의 대단한 이미지는 네 마음속에서 조금씩 흐려지게 될 것이다. 너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사심 없고 위대하든, 얼마나 너를 정성껏 보살피고 돌보며 더 나아가서는 애지중지하든, 은연중 네 마음속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지 않게 된다. 사람은 항상 말한다. “저희 엄마 아빠는 절 너무 아끼세요. 집을 떠나 있으면 엄마는 항상 ‘밥은 먹었니? 제때 챙겨 먹은 거야?’라고 묻고, 아빠는 늘 ‘쓸 돈은 있니? 없으면 아빠가 보내 줄게.’라고 해요. ‘돈 있으니까 괜찮아요.’라고 말하면 ‘아냐, 아냐. 있어도 아빠가 좀 보내 줄게.’라고 하세요.” 사실 그들은 자기가 덜 먹고 아껴 쓰면서 씀씀이를 줄이고, 네가 밖에서 넉넉하게 지낼 수 있게 그 돈을 보내 주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늘 “집에서는 검소하게 지내도 외출할 땐 지갑이 두둑해야지. 밖에서는 여윳돈을 가지고 있어야 해. 돈 부족하면 말만 하렴. 엄마가 보내 줄게. 카드에 넣어 줄게.”라고도 한다. 부모의 이런 사심 없는 관심과 사랑, 보살핌, 돌봄, 더 나아가 자녀를 과보호하거나 응석받이로 키우는 것은 네게 있어 영원히 잊히지 않는 무조건적 헌신이다. 이런 사심 없는 헌신은 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커다란 온기가 되어 너와 그들의 관계를 얽어 네가 그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마음을 쓰게 만들며, 늘 그들을 염려하고 그리워하게 한다. 심지어 너는 항상 이런 정 속에 파묻혀 그들의 정에 붙들린 채로 살려고 한다. 이는 어떤 현상이냐? 부모의 사랑에는 사심이 없다. 그러나 부모가 너를 얼마나 정성스럽게 보살피든, 혹시 아끼고 아낀 돈을 네게 쓰라고 주고 네가 필요로 하는 온갖 물건을 사 주더라도, 지금 당장은 네 눈에 행복으로 보일 수 있는 그것이 장기적으로 네게 좋은 일은 아니다. 그들에게 사심이 없을수록, 네게 잘해 줄수록, 네게 관심을 가질수록 이런 정을 너는 포기할 수 없고 내려놓을 수 없으며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럴수록 너는 그들을 더욱 그리워하게 된다. 네가 효도를 하지 못하고, 자식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할 때, 그들에게 더욱 미안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너는 그들을 냉정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그들의 사랑과 헌신, 네게 해 주었던 모든 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여 냉정하게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지 못한다. 이는 네 양심 때문이다. 그런데 양심이 진리를 대변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어째서 널 그렇게 대하겠느냐? 그들에게 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들이 네게 잘해 주는 것이 그들의 인성 본질을 대변하느냐? 진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대변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다. “넌 내 몸에서 떨어져 나온 몸뚱어리고 고생해서 키운 자식이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모르겠니?”라는 어머니의 말처럼 그들이 가족애와 육의 관계를 바탕으로 네게 잘 대해 주는 것이 진정으로 잘 대해 주는 것이겠느냐? 이것이 그들의 진면목이겠느냐? 또 그들의 인성 본질의 진정한 표출이겠느냐? 꼭 그렇지만은 않다. 네가 그들과 혈연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네게 잘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녀로서 너는 그들이 네게 잘해 주는 것을 다 갚지 못할 은혜라고 생각한다. 네가 만약 보답하지 못하거나 보답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너는 양심에 가책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양심에 가책을 받을 때 느끼는 감정이 진리에 부합하느냐? 다시 말해, 그들이 네 부모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어서 사람들 속에서 너와 정상적으로 지낸다면 그들이 너를 이렇게 대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네 부모가 아니어서 너와 혈연관계가 없었다면 그들이 너를 대하는 방식과 태도는 아마 여러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돌봄, 보호, 과보호, 보살핌은 분명 아닐 것이고 네게 그 어떤 것도 사심 없이 바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너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들은 아마도 네가 어리고 사회 경험이 없다고 너를 얕볼 것이다. 네 낮은 신분과 지위를 보고 너를 차별할 것이고, 대화할 때는 언제나 거드름을 피우며 너를 가르치려 들 것이다. 어쩌면 네 얼굴이 그저 그렇다는 이유로 네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상대해 주지 않아 다가가지도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너를 쓸모없다고 여겨서 애초에 너와 교류하거나 상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네가 성실하여서 궁금한 일이 있으면 너부터 찾아와 떠볼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쩌면 그는 네게 빈대 붙을 생각만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네가 저렴한 물건을 사면 그는 늘 자기에게도 좀 나눠 주기를 바라거나 가져가고 싶어 할 것이다. 어쩌면 네가 길에서 넘어져 그의 부축이 필요할 때 그는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것도 모자라 발길질을 하려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버스를 탈 때 네가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그는 “내가 이렇게 나이가 많은데 어째서 양보하지 않니? 어린 녀석이 어쩜 사리 분별도 못 하는 게냐? 이놈이 어미도 없이 자랐나!”라면서 욕까지 할 수도 있다. 만약 이렇다면 네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부성애와 모성애라는 가족애가 그들 인성의 진정한 표출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너는 항상 너에 대한 그들의 사심 없는 헌신과 위대한 모성애와 부성애에 감동하면서 그들을 걱정하고 그리워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으로 그들에게 보답하고자 한다. 이는 대체 무엇에서 기인한 것이냐? 만약 단지 양심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이 정도로는 심각하다고 볼 수 없다. 구제가 가능하다. 그런데 만약 정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골치 아프다. 그것이 갈수록 깊어져서 거기서 발을 뺄 수 없을 것이다. 너는 항상 이런 정에 젖어서 그들을 그리워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저버리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할 때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병세가 중해 입원했다거나 부모에게 큰일이 생겨서 그 어려움으로 인해 괴롭고 마음 아파한다는 소식을 듣거나 부모가 임종에 가깝다는 소식을 들으면 넌 어쩌겠느냐? 그때는 네 양심이 정에 이끌려 가겠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네게 가르친 진리, 하나님의 말씀이 네 양심을 주도하여 일을 결단하겠는지 그건 알 수 없다. 이 일의 결과가 어떨지는 평소 네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부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진리에 어느 정도 진입했는지에 달려 있으며, 네가 그들을 얼마나 꿰뚫어 볼 수 있는지, 인간의 본성 본질을 얼마나 인식할 수 있는지, 자기 부모의 인성과 인품, 인성 본질, 패괴 성품을 얼마나 인식했는지에 달려 있다. 네가 가족애라는 이런 관계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네가 가져야 할 올바른 관점이 어떠한 것인지,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는 네가 아직 일이 닥치지 않았을 때 갖춰야 할 각 측면의 진리이다. 나머지 친지, 친척,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등 제삼자, 즉 이처럼 사람의 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 부모 외의 사람들은 내려놓기가 어렵지 않다. 오직 부모만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여겨지고,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사람의 일생에 중요한 작용을 하는 사람이기에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만약 가정 영향으로 생기는 여러 사상들에 대해 오늘 네게 명확한 인식이 생겼다면 부모에 대한 정을 내려놓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가정에서 받은 영향이라는 것은 그저 모호한 말에 불과하고, 사실 가장 구체적인 영향은 부모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부모의 말 한마디, 어떤 일에 임하는 부모의 태도, 부모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수법, 이런 것들이야말로 네가 받은 영향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이다. 부모로부터 배운 사상과 행동 방식, 논조를 네가 구체적으로 분별하고 인식하고 나면 부모라는 역할의 본질, 그들의 인품, 그들의 생존관, 그들의 일 처리 방식에 대해 정확한 평가와 인식이 생기게 된다. 정확한 평가와 인식이 생기고 나면 은연중 네 마음속에서 부모의 역할이 긍정적인 것에서 차츰 부정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다. 부모가 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완전히 부정적인 역할이 되면 그때 그들에게 붙였던 정과 심리적 의존, 그리고 그들에 대한 큰 사랑을 차츰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그때가 되면 너는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가지고 있던 부모의 이미지가 무척 대단했음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특히 교과서에서 배웠던 <아버지의 뒷모습>, 그리고 몇 년 전 유행했던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라는 중화권을 강타한 대만 영화의 주제가는 인간에 대한 사회와 세상의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가 이런 일들 이면의 본질이나 진면목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는 이런 교육을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여 너는 기존 인성을 바탕으로 부성애와 모성애의 위대함을 더욱 인정하고 신뢰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네 마음속에 초래되는 결과는, 네가 부성애와 모성애를 사심 없고 위대한 것이자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부모가 아무리 나빠도 그들의 사랑이 사심 없고 위대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며 이를 부인하거나 그들을 모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너는 그들을 분별하거나 폭로하려 하지 않고 마음속에 그들의 자리를 어느 정도 남겨 놓으려 한다. 왜냐하면 너는 부성애와 모성애가 영원히 지고지순하고 위대하며 신성불가침한 것이고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네 양심의 마지노선이자 네 사람됨의 마지노선이다. 만약 부성애와 모성애가 위대하지 않고 완전무결하지도 않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너는 필사적으로 그에게 맞서려 할 것이다. 이는 비이성적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양심의 작용으로 전통적인 사상 관점을 고수하거나 새로운 사상 관점이 생기는데,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사상 관점은 비이성적일 때가 많다. 네가 진리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너는 정상 이성의 범위에서 이런 일을 대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사람의 인성에는 양심도 있고 이성도 있으니 양심이 이르지 못하고 미치지 못하거나 양심의 작용하에서 규범화되지 않고 긍정적이지 않은 것을 이성으로 규범화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성적으로 될 수 있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더욱 확실하고 정확하게 모든 사물을 대하고 선택하며 분별할 수 있다. 그러면 진정 이성적으로 되고 이성이 양심을 뛰어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하면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 말을 너희가 당장 알아듣기는 어렵겠지만 네게 진실한 체험이 생기고 진리를 깨달으면 알게 될 것이다. “세상에 틀린 부모는 없다.”라는 말은 이성에서 비롯되었느냐 아니면 양심에서 비롯되었느냐? 이성이 아닌 양심의 작용하에 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 이 말이 이성적이겠느냐? 비이성적이다. 어째서 비이성적인 것이냐? 정에서 비롯되었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언제 부모를 이성적으로 바라보고 대할 수 있겠느냐? 바로 진리를 깨닫고 이런 일의 본질과 근원을 꿰뚫어 보는 때이다. 이를 꿰뚫어 보고 나면 네가 다시 그들을 대할 때 양심에 기대지 않게 되고 정이나 양심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진리에 따라 그들을 바라보고 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성적인 것이다.

부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제가 확실히 교제되었느냐? (네.) 이것은 중요한 일이다. 가족들은 “세상에 틀린 부모는 없다.”라고 말하는데, 너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받아들인다. 그리고 부모가 지나친 일을 하면 생각한다. ‘다들 ‘세상에 틀린 부모는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부모님이 틀렸다고 할 수 있겠어? 집안의 허물을 밖으로 드러내면 안 되는 법. 남한테 얘기하지 말고 혼자 삭혀야겠다.’ “세상에 틀린 부모는 없다.”라는 잘못된 말의 영향 외에 “집안의 허물을 밖으로 드러내면 안 된다.”라는 말까지 더해졌다. ‘자기 부모인데 누굴 원망하겠어? 망신스러운 일은 남한테 얘기하지 말고 혼자 감당해야지. 부모님이랑 따져서 뭐 해?’ 이런 가정 교육이 사람의 일상, 사람의 인생길,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 언제나 가득해서 사람이 진리를 깨닫기 전이나 진리를 얻기 전에는 가정 교육에서 비롯된 여러 사상 관점을 근거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 사람은 늘 이런 사상에 의해 좌우되고 시달리거나 속박을 받아 손발이 묶인다. 심지어는 이런 사상에 이끌려 자주 사람을 잘못 보고, 일을 잘못 처리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어긴다. 설령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많이 듣고, 항상 하나님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교제한다고 해도, 가정 교육에서 비롯된 관점이 사람의 생각과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이를 분별하지 못하고 막아 낼 아무런 능력이 없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과 공급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여전히 이런 사상에 좌우되며, 이런 사상이 사람의 언행과 생존 방식을 이끌어 간다. 그래서 가정에서 교육받은 사상의 주도하에 자기도 모르게 항상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을 어기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정에서 배운 여러 말들이 결코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렇게 가정에서 교육받은 말이 한번 또 한번 사람을 진리에 반하는 길로 이끄는데도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면 먼저 가정에서 받은 여러 영향을 분명하게 분별하고 인식해야 하며, 다음으로 가정이 네게 미친 갖가지 사상적 영향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네가 가정에서 받은 영향을 끊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그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이렇게 행동하고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네게는 그들의 전통이나 그들이 일을 처리하고 행동하는 여러 방식과 방법을 계승할 아무런 책임이나 의무가 없다. 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너는 오늘 하나님에게 선택되었으며 네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구원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가정에서 영향받은 여러 사상을 근거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여러 가르침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너는 마지막에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정에서 영향받는 것에는 위에서 열거한 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한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가정마다, 가족마다, 또 사회나 민족, 종교에서 생겨난 저마다 다른 다양한 가정 교육이 더 있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가정 교육은 인간에게 다양한 사상적 영향을 준다. 이런 다양한 사상적 영향이 어떤 민족, 어떤 종교 문화에서 비롯되었든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사람은 그것을 내려놓고 끊어 내야 한다. 그것을 고수해서는 안 되고 계승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이 포기해야 할 것이며 벗어 던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사람은 진정으로 진리 추구의 길을 걸을 수 있으며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우리가 교제한 가정 교육에서 비롯된 이런 말은 한편으로는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늘 언급되는 것이다. 특수하고 대표성이 없는 내용에 관해서는 다루지 않도록 하겠다. 가정에 관한 주제를 교제했는데 어떠했느냐? 도움이 좀 되었느냐? (도움이 되었습니다.) 교제의 필요성이 있었느냐? (있었습니다.) 누구든 가정이 있고 가정의 영향을 받는다. 가정이 네게 주입한 것은 모두 독이고 정신적 마약이라 널 엄청난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부모가 네게 주입했을 때 처음에는 무척 좋다고 생각될 것이다. 마치 마약을 한 것처럼 온몸이 편안해져서 낙원에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말짱 도루묵이니 이런 자극을 더 찾아야 한다. 정신적 마약이 네게 가져다주는 것은 끝없는 고뇌와 혼란일 뿐이다. 이제 와서 벗어나려 해도 정말이지 벗어나기 쉽지 않다. 단숨에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이런 것들을 내려놓으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그것을 인식하고 낱낱이 파헤쳐 똑똑히 알고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관련된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내려놓고 저버려서 그 원칙에 따라 처리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방식으로 실행하고 처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몇 마디 말들은 단순하게 들리지만 20~30년, 심지어 평생에 걸쳐 실행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평생 가정이 네게 주입한 말에서 생겨난 사상 관점과 싸우고 그것을 잘라 내고 끊어 내기 위해 감정과 노력을 쏟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육적으로 어느 정도 고통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을 대단히 원하는 마음과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을 갖춰야만 차츰 변화되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와 생명을 얻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설교를 많이 들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에 관한 도리를 좀 깨달을 수 있지만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고 사람에 대한 가정의 교육과 이방인의 사상 관점을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설령 설교를 듣고 진리를 깨달을지라도 하루아침에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고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자!

2023년 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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