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1)

지난번 예배 때는 어디까지 교제했느냐?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중에서 ‘내려놓기’ 부분에 관한 내용, 그중에서도 결혼에 관계된 주제를 교제했다. 결혼이라는 분야의 주제는 이미 몇 번 교제한 적이 있는데, 지난번에 주로 교제한 내용은 무엇이냐?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고, 기혼자들이 결혼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릇된 견해와 이해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정욕을 바르게 대하라는 내용도 있었고, 마지막에는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저희 사명이 아니라고 교제하셨습니다.)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주제에 관한 교제를 너희는 얼마나 받아들였고, 얼마나 기억했느냐? 주로 결혼에 대해 사람이 가진 비현실적이고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유치하고 비이성적인 생각과 바람에 대해 교제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결혼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이를 올바르게 대하는 것은 사람이 결혼에 대해 갖추어야 할 태도이다. 결혼을 오락으로 생각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온갖 환상이나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여러 가지 추구를 충족시키는 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에는 어떤 내용이 있었느냐? 이런 환상은 사람이 생활을 대하는 여러 가지 태도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주로는 사람이 세상과 사회로부터 받아들인 여러 가지 결혼과 관련한 주장과 해석, 태도와 관계가 있다. 그런 주장과 해석, 태도는 사회와 인류의 여러 종족에서 비롯된, 실제에 맞지 않고 사실과 어긋나는 갖가지 주장이자 관점이다. 왜 이런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느냐? 왜냐하면 결혼에 대한 이런 갖가지 관점과 태도는 패괴된 인류에게서 온 것이고, 사악한 세상에서 생겨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과 태도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정해 준 결혼에 대한 올바른 정의와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준 결혼의 개념과 정의는 사람의 책임과 의무에 더욱 치중되어 있고, 또한 사람이 생활에서 마땅히 구현해야 하는 인성과 양심, 이성에도 치중되어 있다. 하나님이 결혼에 대해 내린 정의는 주로 사람이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의 책임을 어떻게 올바르게 짊어져야 하는지를 일깨우는 것이다. 만약 네가 미혼이어서 결혼 생활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과 관계가 없다면, 너는 하나님이 내린 결혼의 정의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한 가지다. 또 하나는 사람이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짊어질 준비를 하라고 일깨우는 것이다. 결혼은 오락이 아니고, 어린아이들 소꿉장난과 같은 놀이가 아니다. 우선 결혼은 책임의 상징이라는 사상 관념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정상 인성 안에서 자신이 다해야 할 책임을 준비하거나 예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과 사악한 세상에서 나온 결혼의 개념과 이해, 결혼에 대한 주장은 무엇에 더 중점을 두느냐? 감정과 정욕을 가지고 놀면서 육체의 욕망,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을 더 중시하고, 당연히 사람의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것도 중시한다. 그 안에는 책임도 인성도 없고, 하나님이 정해 준 결혼의 양 당사자인 남녀가 결혼의 틀 안에서 어떻게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남녀 각자가 해야 할 모든 일을 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다루지 않는다. 세상이 사람에게 주입한 결혼에 대한 각종 해석과 주장, 태도는 사람의 정과 욕망을 충족시키고, 탐색하고, 따르는 것에 더 중점을 둔다. 그러므로 네가 사회로부터 온 결혼에 대한 그런 각종 주장과 이해, 또는 태도를 받아들인다면, 그 사악한 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더 확실히 말하자면, 세상으로부터 온 그런 결혼관에 의해 패괴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상 관점에 의해 패괴되고 영향을 받게 되면 거기에 좌우되는 일은 피할 수 없고, 동시에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너 역시 그런 관점에 우롱당하고 지배당할 것이다. 결혼에 대한 이런 사상 관점을 받아들인 후로 이방인들은 애정, 그리고 정욕의 충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너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상 관점을 에누리 없이 받아들인다면, 너 역시 애정과 정욕의 충족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는 피할 수도 없고, 비켜 갈 수도 없는 일이다. 결혼에 대한 올바른 정의와 이해, 태도가 없을 경우, 너는 자연스레 세상과 사회, 인류로부터 온 결혼에 대한 각종 관점과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듣기만 하고 보기만 하고 알기만 해도, 그런 사상을 방어할 면역력이 없다면, 너는 무의식중에 그런 사회 풍조에 영향을 받고, 결혼에 대한 그런 관점과 주장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네가 받아들일 경우, 그런 사상 관점은 결혼에 대한 네 태도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네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세상과 사회, 인류로부터 온 결혼에 대한 갖가지 주장에 영향을 받고 심지어 통제되기 십상이다. 그런 말이 너를 통제하게 되면 스스로 벗어나기 힘들고,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결혼은 당연히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환상을 품게 될 것이다.

지난번에 우리는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교제하면서 그런 환상은 사악한 인류가 결혼에 대해 가지는 여러 가지 그릇된 이해와 관점에서 비롯되며, 그 이해와 관점은, 그것이 구체적이든 포괄적이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내려놓아야 한다고 교제했다. 한편으로는 결혼에 대한 여러 가지 그릇된 정의와 이해를 내려놓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배우자감을 올바르게 선택해야 한다. 또 하나, 기혼자들이 자신의 결혼을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이 ‘올바름’이란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일깨우고 부탁한, 결혼에 대한 태도와 책임을 말한다. 너희는 잘 알아야 한다. 결혼은 애정의 상징이 아니다. 결혼한다는 것은 결혼의 전당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웨딩드레스, 다이아 반지, 교회, 굳은 언약, 촛불 저녁 식사, 낭만, 둘만의 세상 등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것들이 결혼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결혼을 얘기할 때는 우선 마음속에 심어진 결혼에 대한 환상 및 그 환상에서 비롯된 상징적인 것들을 없애야 한다. 결혼에 관한 올바른 해석에 대한 교제와 사탄과 사악한 세상에서 비롯된 결혼에 관한 온갖 그릇된 사상에 대한 분석을 통해, 너희는 결혼에 대한 정의를 어느 정도 올바르게 인식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이런 얘기를 들으면 좀 안정적인 태도로 결혼을 대할 수 있지 않겠느냐? 또 식견도 좀 넓어진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면에서 식견이 넓어지느냐? (전에는 결혼을 생각하면 생화, 다이아 반지, 웨딩드레스, 굳은 언약과 같이 허무맹랑한 것들을 상상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알았습니다. 결혼은 사실 하나님이 정하신 일로, 두 사람이 함께 살면서 서로 보살피고, 서로 챙겨 주고, 서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일종의 책임감이죠. 결혼에 대해서는 이런 관점이 허황되지 않고 보다 실제적입니다.) 식견이 어느 정도 넓어지지 않았느냐? 넓은 면에서는 식견이 어느 정도 높아졌고, 세부적인 면에서는 사모하고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과거 자신의 기준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전에는 키 크고, 돈 많고, 잘생긴 남자나, 돈 많은 미녀만 만나려 했다면, 지금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가장 기본적으로 인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람이 착실하고 책임감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말해 보아라. 사람이 그런 방향과 목표, 방식에 따라 배우자를 선택한다면, 결혼이 행복할 확률이 크겠느냐, 아니면 불행해서 이혼할 확률이 크겠느냐? (행복할 확률이 큽니다.) 행복할 확률이 좀 더 크다. 우리가 이런 결혼이 백 퍼센트 행복할 것이라고 언급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느냐? 가장 기본적인 한 가지는 바로 사람이 가끔 눈에 뭐가 씌어서 상대를 간파하지 못하고 그와 결혼해 버리는 경우다. 또 한 가지는 결혼하기 전에는 다 좋아 보이는 경우다. ‘우리는 성격도 잘 맞고, 마음도 잘 맞아. 그이도 그랬지. 결혼하면 나한테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절대 내게 미안할 짓은 안 하겠다고 말이야.’ 그런데 막상 결혼해서 살다 보면 모든 게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게 잘 흘러가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비록 겉보기에는 딱히 인성이 나쁘거나 악하지 않지만,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고, 진리도 추구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결혼해서 같이 살다 보면, 얼마 안 되는 인성이 지닌 책임감과 의무감도 점점 사라지고 변해서 본모습이 드러난다. 네가 볼 때 부부가 한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고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을 경우, 즉 너만 일방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상대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얼마나 참아 낼 수 있겠느냐? (오래 참지 못합니다.) 생활 습관이나 인성이 안고 있는 작은 문제나 결함은 그래도 억지로 포용하고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공통된 얘깃거리도 없고, 공동으로 추구하는 것도 없어질 것이다. 상대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고, 언제나 세상의 사악한 시류만 좇는 자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줄고,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책임감도 곧 사라지고 만다. 이런 결혼이 행복하겠느냐?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두 사람이 같이 가지 못하고 일찌감치 헤어집니다.) 그렇다. 이별을 생각하고 실제로 헤어지기까지 얼마나 걸리느냐? 처음에는 둘이 서로 적응하고, 적응한 다음 또 싸우고, 싸우고 나서는 다시 화해하고, 화해하고 나서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상대를 보며 또 참고, 한동안 참았다가 또 싸우기를 반복한다. 결국에는 갈등이 극에 달했다가 다시 냉랭해진 분위기 속에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우리는 안 맞아. 처음 생각한 거랑은 다르고 말이야. 같이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니 이혼해야 하지 않을까? 근데 또 이혼하자니, 여기까지 오기도 쉽지 않았잖아. 수도 없이 싸우고 화해하면서 왔는데, 이렇게 가볍게 이혼하면 안 되지. 참고 살아 보자. 아무렴 혼자보다는 둘이 나으니까.’ 1, 2년을 참으며 사는데, 상대는 볼수록 맘에 들지 않고, 거슬리기만 해서 같이 사는 게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 서로 간 대화도 갈수록 사라지고, 상대의 문제만 더 눈에 들어오고, 포용하고 참으려는 생각도 갈수록 사라진다. 5, 6년 뒤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해서 완전히 갈라서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 완전히 갈라서려고 할 때는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이혼한 다음 어떻게 살지도 철저하게 잘 생각해 봐야 한다. 한 번으로는 결심이 서지 않아서 여러 번 생각 끝에 아쉬워도 두 눈 질끈 감고 포기한다. ‘헤어지자.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혼자 조용히 살자.’ 허구한 날 싸우고, 사이 좋을 때가 없었다. 전에는 참았는데 이제 더는 참지 못한다. 상대만 보고 있으면 짜증이 밀려오고, 그가 말하기만 하면 부아가 치민다. 심지어 목소리만 들어도, 생긴 것만 봐도, 상대가 입던 옷, 상대가 썼던 물건만 봐도 속이 뒤틀리고 역겹다. 이미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 사람이 이제 서로를 낯선 사람 취급하고 있는 이상, 이혼밖에는 답이 없다. 이혼할 수밖에 없다면 그 전제는 무엇이냐? 두 사람이 같이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혼자 사는 것만 못한 경우다. 이 정도까지 왔다면 인연을 계속 이어 나가기 힘들다. 더 이상 정도 없다.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혼자 사는 것이 더 낫겠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초라한 더블보다 화려한 싱글이 낫다.”라고 한 것처럼 말이다. 안 그러면 속으로 늘 상대를 염려해야 한다. ‘밥은 먹었나? 옷은 잘 입고 다니나? 잠은 잘 잤을까? 밖에서 일하는 건 피곤하지 않을까? 누가 못살게 굴지는 않았나? 기분은 어떨까?’ 이렇게 늘 걱정해야 한다. 지금 보니까 역시 혼자 조용히 사는 게 낫다. 누구를 생각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 사람 때문에 그렇게 살 필요가 없다. 그는 네가 염려하고 아껴 줄 가치가 없고, 책임을 다할 가치가 없다. 사랑스러운 구석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나중에 이혼 수속을 밟고 두 사람의 결혼이 끝이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원히 후회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결혼도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또 어떤 결혼은 전생의 은혜와 원한 등 여러 가지 원인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 우리가 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빚을 갚기 위한 것 말이다. 부부 양쪽이 서로 빚을 진 경우도 있고, 여자 쪽이 남자 쪽에 빚을 지거나, 남자 쪽이 여자 쪽에 빚을 진 경우도 있다. 전생에 어느 한 쪽이 너무 덕을 보고 신세를 많이 져서 이번 생에 함께 살면서 갚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결혼은 대개 행복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헤어지지도 못한다. 가정 때문이든, 자녀 때문이든, 아니면 모종의 관계 때문이든, 어쨌든 두 사람이 사이가 안 좋아서 늘 싸우고 다투기만 하고, 성격, 취향, 추구, 취미 할 것 없이 전혀 맞지 않는 데다 서로를 좋아하지 않고, 같이 사는 게 전혀 행복하지 않지만, 여전히 헤어지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함께한다. 그리고 죽을 때도 기어이 상대의 속을 긁어 놓는다. “다음 생에는 당신이랑 마주치고 싶지도 않아요!” 뼈에 사무치게 미워하면서도 이번 생에서 헤어지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한 것이다. 이 각양각색의 결혼은, 그 구성과 내력이 어떻든 관계없고, 사람이 결혼을 했든 안 했든 관계없다. 어쨌든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결혼에 대한 각종 유치한 환상을 내려놓고 올바르게 결혼을 대해야 한다. 정욕을 가지고 놀아서는 안 되고, 더욱이 사회가 주입한 그릇된 결혼관의 함정에 빠져서,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네가 상대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지, 네가 여전히 상대를 사랑하는지, 상대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되는지, 상대는 네게 아직 느낌이 있는지, 너는 상대에게 아직 느낌이 있는지 등 결혼에 대한 느낌에만 탐닉해서도 안 된다. 그런 것은 느낄 필요도 없고, 음미할 필요도 없다. 하나같이 모두 터무니없고 시시한 생각들이다. 네가 그런 것을 음미할수록 더욱 결혼에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네가 그런 생각에 빠져들수록 결혼의 함정에 빠졌음을 증명하게 된다. 그러면 너는 행복도, 안정감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상 관점과 생각에 빠져들면서 네 결혼이 기형적으로 변하고 네 인성도 비뚤어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너 역시 사회로부터 온 결혼에 대한 각종 사상 관점에 꼼짝없이 통제되고 얽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와 사악한 인류에게서 비롯된, 결혼에 대한 각종 관점과 주장은 한편으로 정확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한편으로 그런 관점과 주장을 거절해야 한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결혼에 대한 그들의 주장이 어떻게 달라지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결혼에 대해 내린 정의를 내려놓아서는 안 되고, 사악한 세상의 각종 결혼관에 영향을 받아 시선이 교란되어서도 안 된다. 쉽게 말해, 결혼은 한 사람이 청소년에서 성인이 된 후, 인생의 다른 단계로 진입하는 데에 있어 시작점이다. 즉, 네가 성인이 된 다음, 인생의 다른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이 단계는 바로 결혼해서 너와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다. 그와 생활하는 첫날부터 너는 아내, 혹은 남편으로서 결혼 생활의 모든 영역에 대해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고, 더 많은 경우 두 사람이 결혼 생활 전반에 걸친 일들을 함께 마주해야 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결혼은 한 사람이 부모를 떠나고 독신 생활과 결별한 뒤, 다른 사람과 둘만의 생활에 들어가는 것으로, 두 사람이 함께 생활을 마주하는 단계다. 이 단계는 네가 인생의 다른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는 의미이며, 당연히 생활하면서 다양한 검증에 직면하게 된다는 뜻이다. 네가 결혼의 틀 안에서의 생활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결혼의 틀 안에서 부딪히는 전반적인 일을 어떻게 둘이서 공동으로 마주할 것인지 등은 네게 있어 검증이 될 수도 있고, 온전케 되는 것일 수도 있고, 재난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인생에서 더 많은 경험을 얻는 원천이 될 수도 있고, 인생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과 이해를 얻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결혼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이라는 이 주제는 여기까지 돌아보기로 하자.

지난번에는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너의 사명이 아니다’는 주제도 교제했다. 이 주제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내용은 무엇이었느냐? (일생의 행복을 자신의 배우자에게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되고,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고 소위 애정을 지키려고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본인이 피조물임을 잊지 말고, 결혼 생활에서 본인이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피조물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는 것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일생의 행복을 본인의 결혼에서 찾으려 한다. 그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목표는 바로 결혼의 행복과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배우자와의 결혼이 행복하면 자신의 인생이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결혼의 행복을 일생에서 노력을 쏟아부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이 결혼하면 신선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많은 일을 하느라 머리를 쥐어짠다. 신선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 바로 그들이 얘기하듯,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얼마가 되었든, 언제나 찰싹 붙어 다니는 갓 만난 연인들처럼 둘이 꼭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싶어 하는 것이다. 또 언제 어느 때나 속으로 늘 상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마음은 상대의 웃는 모습, 상대가 하는 말과 행동으로 가득한 것이다. 하루라도 상대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마음이 허전하고, 하루라도 상대의 모습을 안 보면 넋이 나간 듯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행복한 결혼의 상징이자 지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집에만 있는 소위 전업주부들 중에는 집에 들어올 남편을 기다리는 게 가장 큰 행복인 사람들도 있다. 남편이 제때 들어오지 않을 때 이들이 전화해서 제일 먼저 물어보는 말이 무엇이냐? (“당신 언제 들어와요?”입니다.) 너희도 자주 듣는 말인가 보구나. 이 한마디가 벌써 많은 사람들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첫 마디는 당신 언제 돌아오느냐는 말인데, 이 말을 하고 난 뒤 정확한 대답을 듣고 못 듣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어쨌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여자의 그리운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이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활에서 흔히 보이는 모습이다. 집에서 조용히 배우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느라 외출을 해도 멀리 못 나가고 집을 오래 비우지도 못한다. 남편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 아무도 없으면 얼마나 상심하고 실망하고 슬플까 하는 마음에서다. 이런 사람들은 결혼의 행복을 추구함에 있어 희망과 자신감이 가득하다. 또한 어떤 대가도 마다하지 않고, 어떤 변화도 아끼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예전처럼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고 속으로 상대를 사랑하려고 한다. 그리고 틈만 나면 상대도 자기를 사랑하는지 묻곤 한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도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한다. ‘그이가 들어왔나 모르겠네. 들어와서 밥은 먹었을까? 피곤하진 않을까? 계속 여기서 예배드리고 있자니 맘이 편치 않네. 좀 미안하기도 하고.’ 다음번 예배 때는 상대에게 물어본다. “당신 보통 몇 시에 들어와요? 내가 예배드리느라 집에 없으면 혼자 쓸쓸해요?” 남편이 대답했다. “안 그럴 리가 있나? 텅 빈 집에 나 혼자 있는데. 평소에 늘 둘이 같이 있다가 졸지에 혼자 있게 됐잖아. 맨날 무슨 예배야? 예배 나가는 건 괜찮은데, 내가 집에 오기 전에 당신이 먼저 들어오면 얼마나 좋아!” 그녀는 알아차렸다. ‘아, 남편이 바라는 게 많지 않구나. 남편이 들어오기 전에 내가 집에 있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그리고 다음 예배 때는 시계만 계속 들여다본다. 곧 남편 퇴근 시간이면 더는 앉아 있지 못하고 말한다. “마저 예배드리세요. 저는 집에 일이 있어서 얼른 가 봐야 해서요.” 그러고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이가 아직 안 들어왔네. 잘 됐다! 얼른 밥하고 청소해야겠다. 그이가 들어왔을 때 집안이 깔끔해야지. 맛있는 냄새에 인기척도 있고 말이야. 식사 시간에 둘이 함께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좋겠어! 예배 시간을 다 못 채워서 많이 못 듣고 덜 얻었지만 그래도 내가 먼저 집에 와서 그이한테 따뜻한 밥을 해 먹이는 것도 좋잖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그 후로 예배는 늘 이런 식이었다. 어쩌다 한 번 예배가 늦게 끝나서 부랴부랴 집에 가 보니 남편이 이미 집에 와 있었다. 아내에게 불만스럽고 심기가 불편한 남편이 볼멘소리를 한다. “예배 좀 덜 나가면 안 되나? 집에 들어왔는데 당신이 없으면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견디기 힘들다고!” 그 말에 아내는 너무 감동했다. ‘그 말은 날 너무 사랑해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거잖아. 내가 안 보이면 견디기 힘들다니, 너무 행복해! 말에 가시가 좀 돋긴 해도 날 사랑하는 게 느껴져. 다음엔 조심해야지. 예배가 몇 시간 진행되든 꼭 미리 집에 들어와야겠어. 그이의 사랑을 저버릴 수야 없지. 예배에서 좀 덜 얻는 게 별건가. 하나님 말씀 좀 덜 듣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다음 예배 때는 예배 시간 내내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남편 사랑 앞에 떳떳하고, 또 본인이 결혼 생활에서 추구하는 행복을 지키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녀는 은근히 걱정되었다. ‘먼저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남편의 사랑을 저버리는 거야. 계속 그렇게 그이를 실망시키면 남편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지 않을까? 전처럼 날 사랑해 주지 않는 건 아닐까?’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은 언제나 행복한 일이기에 그녀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이 관계를 일생동안 추구하고, 또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꿋꿋하게 그렇게 행동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밖에 나가 본분을 이행하게 되면 리더에게 자꾸 요구한다. “저는 저녁에 외박은 안 돼요. 결혼했잖아요. 제가 집에 안 들어가면 그 사람이 얼마나 쓸쓸하겠어요? 밤에 자다 깼는데 제가 없는 것도 견디기 힘들고, 아침에 일어나서 제가 안 보여도 힘들 거예요. 자주 집을 비우면 그이가 내 충절과 결백을 의심하지 않겠어요? 결혼할 때 우리 둘은 서로 충성심과 지조를 지키기로 합의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약속은 지켜야 하고, 그이한테 떳떳해야 해요. 왜냐하면 세상에 이렇게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은 또 없으니까요. 내 결백을 증명하고 내 충성심과 지조를 증명하려면 절대 외박은 안 돼요. 아무리 교회 사역이 바쁘고 본분이 급해도 저녁 늦게라도 꼭 들어가야 한다고요.” 자신의 결백과 충절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은 단지 형식적으로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데, 사실은 결혼이 불행해지면 끝이 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차라리 본분을 잃고, 또 본인이 다해야 할 본분을 포기해서라도 결혼의 행복을 지키려고 한다. 마치 결혼의 행복이 본인이 하는 모든 일의 동력이자 원천이어서, 결혼의 행복이 없으면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피조물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녀는 상대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 것, 계속해서 사랑받는 것을 행복한 결혼의 지표로 삼고, 또 자신이 평생 추구해야 할 목표로 삼았다. 어느 날 자신이 전처럼 그렇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혹은 상대의 사랑을 저버리는 어떤 잘못을 저질러 상대가 실망하고 낙담하고, 자신에게 불만이 생긴다면 그녀는 넋이 나갈 것이다. 예배도 안 드리고 하나님 말씀도 안 읽고, 심지어 교회에서 본분을 맡겨도 몸이 안 좋다거나 집에 급한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심하면 앞뒤가 안 맞는 엉뚱하거나 황당한 말로 둘러대는 등 온갖 이유를 찾아 이를 거절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결혼의 행복을 인생에서 큰일로 생각한다.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결혼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상대의 마음을 붙잡아 두려 하거나 사로잡으려고 한다. 상대가 계속 자기를 사랑하게 만들어서 신혼 초의 달콤함과 처음 결혼했을 때의 느낌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여자들은 그 때문에 더 큰 희생을 치르기도 한다. 코를 높이고, 턱을 깎고, 가슴 성형술, 지방 흡입술을 받는 등 어떤 고통도 기꺼이 감수한다. 두꺼운 종아리 때문에 고민 끝에 축소술을 받았는데 신경이 손상되어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편이 이를 보고 말했다. “종아리가 굵긴 해도 정상이었는데, 지금은 서지도 못하고 폐인이 됐군. 헤어져!” 보아라. 그토록 큰 대가를 치르고 맞이한 결과가 결국 이런 것이다. 어떤 여자들은 매일 예쁘장하게 단장하고 향수도 뿌리고 분칠도 한다. 립스틱이니, 볼 터치니, 아이섀도니 하는 온갖 화장품을 얼굴에 찍어 바르는데, 그 목적은 젊음의 아름다움을 유지해서 상대 마음을 사로잡고, 처음처럼 사랑받기 위해서다. 남자는 남자대로 결혼의 행복을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른다. “형제님은 하나님 믿는 것으로 잘 알려졌어요. 주위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 신고를 당해 잡혀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가서 본분을 이행해야 해요.”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들으면 근심에 휩싸인다. ‘만약 떠나게 되면 내 결혼은 파탄 난다는 말이 아닐까? 이것으로 끝나는 거 아닐까? 내가 집을 떠나면 아내가 다른 사람한테 가 버리지나 않을까? 우리 관계는 여기서 단절되는 건가? 다시는 함께하지 못하는 건가?’ 괴로운 나머지 흥정을 시도한다. “안 가면 안 됩니까?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집에 가면요? 가정을 건사해야 한다고요!” 사실 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가정을 건사하는 문제가 아니라 아내가 다른 사람하고 달아날까 걱정되고, 결혼의 행복이 여기서 끝날까 두려운 것이다. 그의 마음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결혼의 행복이 이렇게 사라지는 것을 정말 원치 않는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결혼의 행복이 어떤 일보다도 커서 그게 없으면 영혼이 없는 것과 같다. ‘사랑은 결혼의 행복을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해. 내가 상대를 사랑하니까, 또 상대가 나를 사랑하니까 결혼이 행복하고, 오늘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 내가 하나님 믿고 본분 이행하는 것 때문에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여기서 접는다면 결혼의 행복은 이제 끝나서 없어지는 거고, 다시는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 아닌가? 결혼의 행복이 없으면 삶이 어떻게 되겠어? 내 사랑이 없으면 아내는 어떻게 살지? 아내의 사랑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사람이 피조물의 본분을 다해서 창조주 앞에서 사람의 사명을 완성한다고 이 결핍을 채울 수 있을까?’ 이들은 모른다. 답이 없고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결혼의 행복을 최고로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집 사역의 필요로 인해 집을 떠나 외지에서 복음을 전도하며 본분을 이행해야만 하는 경우, 결혼의 행복을 곧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늘 낙담하고, 안타까워하고, 심지어 불안해한다. 어떤 이들은 결혼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본분 이행을 포기하거나 거절하기도 한다. 심지어 하나님 집의 중요한 안배를 거절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결혼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늘 상대의 감정을 살핀다. 상대가 자신의 신앙과 자신이 하나님 믿는 길을 가는 것, 자신이 본분 이행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거나 조금이라도 불쾌하거나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면 얼른 방향을 바꿔 타협하곤 한다. 결혼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늘 상대와 타협한다. 설령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포기하고 예배드리며 하나님 말씀을 읽고 영 생활 하는 시간을 포기하더라도 상대가 쓸쓸하고 적막하지 않도록 자신의 존재, 자신의 사랑을 느끼게 하려 한다. 이렇게 해서라도 상대의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신앙, 혹은 하나님 믿는 길을 걷기 위해 상대의 사랑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혼의 행복을 포기한다는 뜻이고, 그의 생각에 결혼의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은 외로운 사람,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아무도 사랑하고 아껴 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비록 도리를 어느 정도 알고, 하나님이 구원 사역을 하는 의미를 알고, 또 당연히 피조물로서 피조물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해도,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고, 또 자신의 행복을 당연히 결혼의 행복에서 찾기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해하고 알더라도, 결혼의 행복에 대한 추구를 내려놓지 못한다. 그들은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이번 생에 추구해야 할 사명, 피조물이 추구하고 완성해야 할 사명으로 삼았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은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그것이 하나님이 결혼에 대해 내린 정의, 결혼의 양 당사자에게 한 부탁에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며 그를 위하여 배필을 지으셨고 그 배필이 그와 짝이 된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는 이 정의가 들어 있지 않습니까? 서로 곁에 있어 주고, 서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결혼의 틀 안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과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을 온전히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 둘은 다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디서 문제가 생겼느냐? (그는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을 자신의 최대 사명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사람이 살면서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최대의 책임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추구 목표를 잘못 이해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또 말해 보아라. (사람이 결혼 생활에서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바르게 대하지 못할 경우, 자신의 결혼 생활을 지키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의 책임을 바르게 대한다면, 먼저 자신이 피조물임을 잊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이 맡긴 일과 사명을 완성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결혼의 틀 안에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는 차이가 있습니다.)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이 결혼하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인생의 목표이냐? 그것과 하나님이 정한 결혼이 관계가 있느냐?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결혼을 허락한 것은 너에게 결혼의 틀 안에서 남녀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할 상황을 마련해 준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결혼을 허락한 것은 너를 동반할 반려자를 준 것이다. 이 반려자는 네가 일생을 마칠 때까지, 또 네가 인생의 각 단계를 지나는 동안 너를 동반할 것이다. 동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너를 도와주고, 돌봐 주고, 또 네가 생활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일을 분담한다는 뜻이다. 즉, 얼마나 많은 일에 부딪히든 네가 더 이상 그것들을 혼자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대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는 것이 보다 홀가분하고 쉬워질 것이다. 두 사람이 각자의 책임을 다하고, 각자의 장점과 강점을 발휘하며 살아가면 된다. 이렇게나 간단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너에게 결혼을 허락했으니, 너는 결혼하면 상대를 언제나 끝까지 사랑하고 기분을 맞춰 주어야 한다. 이것에 네 사명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너에게 결혼을 허락하고, 반려자를 주고, 다른 생활 환경을 주고, 이런 생활 환경과 배경 안에서 배우자와 네가 모든 일을 함께 분담하고 대면하게 해서 네가 더욱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살게 한다. 동시에 네가 인생의 다른 단편을 체험하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를 결혼에 팔지 않았다. 결혼에 팔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바로 네 일생과 운명, 네 사명, 또 네가 인생에서 어떤 길을 걷고, 어떤 방향을 선택하고, 어떤 신앙을 가지는가 하는 이런 것들은 네 배우자가 결정하도록 맡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 여자는 운명과 추구가 어때야 하고, 어떤 인생길을 걸어가야 하고, 어떤 인생관을 가져야 하는지를 반드시 남편이 결정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고, 한 남자는 운명과 추구, 인생관이 어때야 하고,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반드시 아내가 결정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한 적도, 그렇게 정한 적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이 최초의 인류에게 결혼을 정하면서 그런 말씀을 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또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남녀의 일생의 사명이니, 네가 반드시 결혼의 행복을 지켜야 일생의 사명이 완성되고, 피조물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한 적이 없다. 또한 “너는 반드시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네 인생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네가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네 결혼에 달려 있고, 네 배우자에게 달려 있다. 네 인생관과 운명은 반드시 네 배우자가 결정해야 한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에게 결혼을 운명적으로 정해 주고, 배우자를 주어서 네가 결혼했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네 신분과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너는 여전히 너이다. 네가 여자라면 하나님 앞에서도 여전히 여자이고, 네가 남자라면 하나님 앞에서도 여전히 남자이다. 하지만 너희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너희가 남자든 여자든 창조주 앞에서는 모두 피조물이라는 사실이다.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너희는 서로 포용하고 아껴 줘야 하고, 서로 돕고 붙잡아 줘야 한다. 이것은 모두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네가 마땅히 다해야 할 책임, 마땅히 완성해야 할 사명은 네가 배우자에게 다해야 할 책임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배우자에 대한 네 책임과 하나의 피조물이 하나님 앞에서 다해야 할 본분이 서로 충돌을 일으킬 때, 네가 선택해야 할 것은 상대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가 선택해야 할 방향이자 목표이고, 물론 네가 당연히 완성해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혹은 배우자를 보살피고, 돌봐 주고, 사랑하는 등 배우자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삼고, 배우자를 본인의 하늘, 본인의 운명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네 운명은 하나님이 주재하는 것이지 네 배우자가 주재하는 것이 아니며, 결혼은 네 운명을 바꿀 수 없고 하나님이 네 운명을 주재한다는 이 사실도 바꾸지 못한다. 네가 어떤 인생관을 지니고,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는 너 스스로 하나님의 가르침과 하나님이 요구하는 말씀 안에서 찾아야 하지, 네 배우자에게 의지하거나 그가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너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 이외에, 그는 네 운명을 좌우해서도 안 되고, 너에게 인생의 방향을 바꾸라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네가 어떤 길을 갈지 결정해서는 안 되고, 네가 어떤 인생관을 수립할지 결정해서도 안 된다. 너를 옭아매거나 구원받기를 추구하지 못하게 막아서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결혼에 관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준 결혼의 정의에 따라 부부 양쪽이 서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서로가 상대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고, 전생과 현생, 내세를 결정할 수도 없으며, 영원은 더더욱 결정할 수 없다. 네 종착지와 운명, 네가 가는 길은 오직 창조주만이 결정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의 피조물로서, 네 역할이 아내든 남편이든, 네가 일생동안 추구해야 할 행복은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고 피조물의 사명을 완성하는 데서 오는 것이지, 결혼 자체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결혼의 틀 안에서 아내나 남편의 책임을 다하는 데서 오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네 길을 선택하고 인생관을 수립하는 일은 결혼의 행복이 바탕이 되어서도 안 되고, 결혼한 어느 한 당사자가 이를 결정해서도 안 된다. 너는 이 점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결혼한 사람들 중에서, 결혼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그런 사상 관점을 내려놓고, 자신의 실행 방법과 인생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너는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한 대로 배우자와 결혼하고 함께 생활하는 것일 뿐이다. 함께 생활하는 동시에 아내나 남편의 책임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네가 어떤 길을 가고 어떤 인생관을 지니는지, 상대방에게는 이를 결정할 의무도 권리도 없다. 비록 네가 이미 결혼해서 반려자가 있지만, 소위 반려자는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한 반려자의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반려자가 다해야 할 책임만 지면 되고, 나머지 그와 무관한 것들은 너 스스로 선택하고 너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네 선택과 결정이 네 기호나 이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제 이 사실에 대한 교제가 이해되었느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혼의 틀 안에 있는 어떤 한 쪽이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그 어떤 대가도 마다하지 않거나 어떤 희생도 기꺼이 치르는 것은 모두 기념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네가 배우자에게 다하는 의무와 책임이 아무리 훌륭하고 완벽해도, 또 아무리 배우자 앞에서 떳떳하다 해도, 바꿔 말하면 네 결혼의 행복을 아무리 완벽하고 훌륭하게 지키더라도, 아무리 남들의 부러움을 살지라도, 그것은 네가 피조물의 사명을 완성했다는 뜻도 아니고, 네가 이미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었음을 증명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너는 완벽한 아내, 혹은 완벽한 남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결혼이라는 틀에 한정된다. 창조주의 입장에서 네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할 때는 네가 그 앞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어떻게 이행했는지, 네가 어떤 길을 가는지, 네 인생관이 무엇인지, 네 인생의 추구는 무엇인지, 네 피조물의 사명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근거로 한다. 하나님은 이런 것으로 너라는 피조물이 가는 길과 미래의 종착지를 판단하지, 네가 아내나 남편으로서 다한 책임과 의무가 어떤지, 배우자에 대한 네 사랑이 상대를 만족시켰는지를 근거로 하지 않는다.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 네 사명이 아니라는 이 주제에 관해, 우리는 오늘 이 부분을 보충해 보았다. 이 문제들을 교제하지 않았다면, 사람은 아마 어느 정도 이해하고 아는 것 같지만, 막상 실제로 어떤 일에 부딪혔을 때, 여전히 그럴듯한 여러 가지 문제에 가로막히고 걸릴 것이다. 아내 혹은 남편의 의무도 다하고 싶고, 한 사람, 하나의 피조물이 해야 할 일도 잘하고 싶은데 이 두 가지가 상충되거나 모순되고 혹은 서로 방해가 될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잘 모를 것이다. 이렇게 교제하고 나니까 명확해지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관념으로 좋고 옳다고 여기는 것과 진리에서 말하는 긍정적인 사물, 옳고 좋은 것에는 차이가 있다. 이 부분을 잘 알면 명확해진다. 사람이 생각하는 긍정적 사물, 좋은 것들은 많은 경우 사람의 관념 상상이 가득하고 사람의 감정이 가득한 것이다. 그것은 진리와는 관계가 없다. 관계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바로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잘못된 것, 진리가 아닌 것을 긍정적인 사물로 여기고 진리로 여기면서 이를 지키고, 고수하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리라고 믿는다면,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길로 들어설 수 없고, 결국 진리에서 너무 멀어지고 말 것이다. 그건 누구의 책임이냐?

방금 교제한 화제는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을 내려놓아야 하며 다만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을 내려놓는 것에 관한 교제는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또 다른 문제를 하나 교제해 보자. 바로 ‘너는 결혼의 노예가 아니다’는 주제다. 이 측면의 문제는 응당 교제해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결혼한 다음 어떤 생각을 하느냐? ‘이번 생은 이렇게 정해졌으니 이 사람과 한평생을 살아야 할 운명이구나. 부모님이나 어른들은 평생을 의지할 대상이 아니고, 친구도 마찬가지야. 그러면 누구한테 평생 의지해야 할까? 바로 나와 결혼한 그 사람이지.’ 이런 생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결혼만 하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고, 바람을 피할 곳이 생기고, 하소연할 대상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여자들은 말한다. “결혼하면 제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어깨가 생기는 거잖아요.” 남자들은 말한다. “결혼하면 안정적인 가정이 생기고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아도 되니까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제 주변의 싱글들을 보면 여자들은 하루 종일 떠돌면서 의지할 곳도 없고, 정해진 집도 없고, 기댈 어깨도 없어요. 남자도 마찬가지로 따스한 집도 없고 얼마나 딱한데요!” 그러니 본인에게 결혼의 행복이 생긴 게 사뭇 흐뭇하고 만족스럽다. 그리고 만족한 나머지 본인이 결혼 생활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이 집을 위해서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결혼한 후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결혼 생활에 뛰어들려고 하고, 자신의 결혼 생활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분투하고 목숨을 바치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돈을 벌고 죽기 살기로 고생한다. 물론 본인 일생의 행복을 자신의 반려자에게서 찾는 사람들은 더 많다. 그들은 자신의 일생이 행복하고 즐거울지는 자신의 반려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달렸다고 믿는다. 반려자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자신의 성격과 지향점이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돈을 잘 벌어서 가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미래에 내가 먹고살 걱정 없이 살게 해 줄 수 있는지 없는지, 자신에게 행복하고 안정되고 아름다운 가정을 선사해 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자기가 어떤 고통과 환난, 실패와 좌절을 만났을 때 자기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달렸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검증하기 위해 그들은 상대와 같이 생활하면서 속으로 상대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상대의 사상 관점, 언행, 일거수일투족, 상대의 장단점 등을 아주 주의 깊게, 유심히 관찰하고 기록하고, 상대가 생활하면서 드러내는 모든 사상 관점, 모든 언행을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는데, 상대를 더 잘 이해하려는 것이다. 동시에 상대도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를 바라며 상대가 자기 마음에 들어오게 하고, 자기도 상대 마음에 들어가려 한다. 서로 간에 상대를 더욱 구속하거나 혹은 상대가 어떤 일을 만났을 때 자신이 그 앞에 제일 먼저 나타나 도와주는 사람, 제일 먼저 일어서서 그를 지지하고 격려해 주고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줄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생활 상황에서는 양쪽 모두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거의 분별하지 않고, 완전히 상대에 대한 정 속에 살아가고, 정으로 그를 보살피고 포용하며 그의 모든 결점과 문제, 추구를 대하고, 심지어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예배 시간이 너무 길다며 30분만 예배드리고 들어오라는 남편의 말에 아내는 되도록 그렇게 하겠다고 순순히 대답한다. 그리고 다음 번 예배 때는 정말 30분 만에 집에 들어간다. 그러자 남편이 말한다. “진작에 이랬어야지. 다음에는 얼굴만 내비치고 들어오도록 해.” “아, 당신 생각이 그렇다면 알았어요. 그렇게 해 볼게요.” 다음번 예배 때도 역시 남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참석한 지 10분 만에 집에 들어간다. 그러자 남편은 무척 흡족하고 기뻐한다. “이 정도는 돼야지!” 아내는 남편이 동으로 가라고 하면 서쪽으로는 엄두도 못 내고, 웃으라고 하면 우는 건 생각조차 못한다. 아내가 하나님 말씀을 읽고, 찬양을 부르는 걸 보자 남편은 못마땅하고 반감이 든다. “하루 종일 말씀 읽고 찬양 부르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내가 집에 있을 때는 말씀 읽고 찬양 부르는 거 좀 안 할 수 없나?” “알았어요, 알았어요. 안 볼게요.” 그녀는 이제 말씀 읽는 것도 찬양 듣는 것도 감히 못 한다. 상대의 요구에 마침내 그녀는 남편이 자기가 하나님 믿는 것도, 말씀 읽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남편이 집에 있을 때는 그 옆에서 같이 TV도 보고, 식사하면서 얘기도 나누고, 남편의 고충도 들어 주는 등 무슨 일이든 한다. 상대가 좋아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녀는 이런 일들이 반려자로서 다해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하나님 말씀은 언제 읽느냐? 남편이 나가자 그녀는 문을 걸어 잠그고 얼른 말씀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 여는 소리가 들려서 후다닥 책을 덮었다. 다시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살짝 문을 열고 내다보았는데 남편이 들어온 게 아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말씀을 읽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읽어 나가는데 역시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긴장되고 겁이 났다. ‘만에 하나 그이가 정말 들어왔으면 어쩔 뻔했어? 우선은 그만 읽고 전화해서 지금 어딘지, 언제 들어올 건지 물어보자.’ 남편에게 전화했더니 오늘 업무가 바빠서 서너 시나 되어야 들어온다고 했다. 물어보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 말씀을 읽을 수 있겠느냐? 마음은 가라앉지 않고 어지럽기만 했다. 그녀는 얼른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려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나님 믿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남편이 무섭다고, 마음을 차분히 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을 수 없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차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어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없다. 하지만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고 잠시 조용히 있었더니 마음이 그렇게 심란하지만은 않았다. 이제 읽어 보려고 하는데, 집중이 안 된다. ‘아까 어디까지 봤더라? 어디까지 묵상했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슬슬 짜증이 나고 마음이 불편하다. ‘오늘은 관두자. 영 생활 한 번쯤 빠뜨려도 괜찮아.’ 어떠냐? 이것이 잘 지내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것은 결혼의 번뇌이냐, 아니면 결혼의 행복이냐? (번뇌입니다.) 이때 일부 독신들이 말했다. “그것 봐요.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든 거 맞죠? 결혼은 전혀 아름답지 않잖아요? 제가 지금 얼마나 멋지게 사는지 보세요. 초라한 더블보다 화려한 싱글이 낫다는 말도 있잖아요. 아무 때나 예배드리고 본분을 이행해도 전혀 지장이 없어요.” 너는 배우자가 너에게 만족해서 네가 가끔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예배드리는 것에 동의하게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밥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닭 모이 주고 개밥 주고 하면서 힘든 일을 모두 도맡아 했다. 남자가 할 일도 다 했다. 남편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녀처럼 뼈 빠지게 일만 했다.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남편 구두도 반짝반짝 닦아 놓고, 슬리퍼도 가지런히 놓아두고, 남편이 들어오면 잽싸게 몸에 묻은 먼지도 털어 주고 외투도 받아서 걸어 놓는다. “오늘 날씨 진짜 덥네요. 안 더워요? 목 안 말라요? 오늘은 뭐 먹고 싶어요? 새콤한 거? 아니면 매콤한 거? 옷 안 갈아입어도 돼요? 벗어 두면 빨아 놓을게요.” 꼭 하녀나 노예 같다. 이건 결혼의 틀 안에서 해야 할 책임의 범위를 한참 벗어났다. 상대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고 그를 자기 주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가정에서 두 사람의 지위는 명백히 차이가 난다. 한쪽은 노예, 다른 한쪽은 노예주이다. 한쪽은 머리를 조아리고, 다른 한쪽은 눈을 부라린다. 한쪽은 굽실거리고, 다른 한쪽은 기세등등하다. 확실히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두 사람의 지위는 불평등하다. 왜 그럴까? 이 노예는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비굴하게 굴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정해 준 결혼 생활에 대한 책임을 지키지 않고 너무 지나치게 행동했다. 다른 한쪽은 어떤 책임도 다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런 배우자에게 너는 무조건 복종하고 무릎 꿇었다. 기꺼이 노예가 되고 하녀가 되어 그를 위해 애쓰고,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 이건 어떤 인간이냐? 도대체 너의 주인이 누구냐? 하나님에게는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느냐? 배우자가 네 생활을 책임지는 것, 이는 하나님이 정한 일이므로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네가 빚을 진 것이 아니다.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네가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다했는데, 그러면 그는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느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 했느냐? 결혼한 두 당사자는 둘 중 사나운 사람이 주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일 잘하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노예가 되는 것도 아니다. 결혼한 양쪽은 서로 책임을 다하고, 서로 동반해 주는 것이다. 양쪽 모두 서로에게 책임이 있고, 양쪽 모두 결혼의 틀 안에서 자신이 다해야 할 의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 너는 너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네 역할이 어느 쪽이든, 너는 그쪽이 할 일을 해야 한다. 자기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너는 정상 인성이 없는 것이다. 속된 말로 형편없는 인간이란 의미다. 그렇다면 이 형편없는 인간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기꺼이 노예가 되어 주는 것은 너무나 멍청한 짓이고, 가치 없는 행동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게 어때서 그러느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악을 행하는 것이냐?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이 문제가 되느냐? 이것은 떳떳하고 당당한 일이다. 나라와 정부에서 하나님 믿는 사람을 박해한다는 건 무얼 뜻하느냐? 이 인류가 너무나 사악하다는 뜻이다. 정부는 사악한 세력을 대표하고 사탄을 대표한다. 진리를 대표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표하지 않는다. 따라서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네가 남보다 낮은 자리에 있고, 남보다 등급이 낮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보다 고귀하고, 또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존귀하다. 하나님은 너를 눈동자로 여긴다. 그런데 너 자신이 너를 짓밟고 배우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스스럼없이 노예가 되었다.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때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 왜 그걸 못 하느냐? 이것이 사람의 비천한 부분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너에게 결혼을 운명적으로 정해 준 것은 책임을 다하는 법, 다른 사람과 잘 지내고 함께 사는 법을 배우고, 배우자와 함께 사는 삶, 직면하는 갖가지 일을 배우자와 함께 처리하는 방법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여 네가 더욱 풍부하고 특별한 인생을 살라는 뜻이다. 하지만 너를 결혼에 팔아넘긴 것도 아니고, 배우자에게 노예로 팔아넘긴 것도 물론 아니다. 너는 그의 노예가 아니고 그 역시 네 노예주가 아니며, 너희 둘은 평등하다. 너는 배우자에 대해 아내 혹은 남편의 책임밖에 없고, 그 책임만 다하면 하나님 편에서 너는 아내로서 합격이고 혹은 남편으로서 합격이다. 네가 상대보다 뭐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본분을 다할 수 있고, 자주 예배에 참석하고, 또 자주 하나님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자주 하나님 앞에 나아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좋아하는 일이고, 피조물로서 해야 할 일, 피조물로서 보내야 할 평범한 일상이다. 그것은 면목 없는 일이 아니다. 이런 생활을 한다고 해서 배우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다. 네가 그에게 무슨 빚을 진 게 아니다. 원한다면 너는 그에게 하나님 사역을 증거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너와 뜻이 맞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에게 네 신앙과 네가 가는 길에 관련된 어떤 일이나 정보도 해명하고 설명할 필요가 없고, 또 그래야 할 의무도 없다. 그 역시 알 권리가 없다. 너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지켜 주는 것, 이것은 그의 책임과 의무다. 만약 그걸 못 한다면 그는 인성을 갖춘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 것이냐? 네가 가는 길은 바른길이며, 또한 바른길을 가는 너 때문에 네 가정과 배우자도 너와 함께 축복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으니 그는 이 부분에서 너에게 감사하는 것이 옳다. 네가 신앙으로 인해 박해를 받는다고 해서 멸시하고 괴롭히거나 그것 때문에 네가 집안일을 더 많이 하고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네가 자기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는 감정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떤 면에서도 그에게 빚지지 않았다. 빚은 그가 졌다. 네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더 많은 별도의 은혜와 축복을 누렸다. 그는 덤으로 적잖이 얻었다. 덤으로 적잖이 얻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그런 사람은 전혀 얻을 자격도 없고, 얻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왜 얻으면 안 되느냐?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이 이런 은혜를 누리는 것은 네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혜택을 본 것이고, 네 덕분에 복을 누린 것이므로 그는 너에게 감사해야 마땅하다. 바꿔 말하면 본인이 별도의 축복과 은혜를 누렸기 때문에 그는 더 책임을 다해야 하고, 네가 하나님 믿는 일을 더욱 지지해야 한다. 부부 중 어느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에 집안의 장사가 순조롭게 풀리고 잘 돼서 돈도 많이 버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덕분에 가정 형편도 좋아져서 물질생활도 풍요로워지고 삶의 질이 올라간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냐? 너희 집에 하나님을 믿는 그 사람이 없었다면 네가 그런 걸 얻을 수 있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이 돈을 많이 벌게 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잘되게 해 준 것은 맞다. 그런데 만약 그 집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면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는 장사에서 원래는 그토록 많은 은혜와 축복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믿는 그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추구하고, 기꺼이 버리고 헌신했기에, 믿지 않는 쪽이 그 은혜와 축복을 덤으로 얻은 것이다. 그건 하나님에게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만족을 모르고 하나님 믿는 사람을 여전히 억압하고 괴롭히려 한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에게 국가와 사회의 박해는 재난이 된 지 오랜데, 이제는 설상가상으로 집안 식구마저 이들을 구박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해 스스로가 기꺼이 결혼의 노예를 자처한다면 이것은 너무나 바람직하지 못하다. 네가 하나님 믿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 것도 괜찮고, 네가 하나님 믿는 일을 지켜 주지 않는 것도 괜찮다. 이것은 그의 자유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너를 노예로 생각하는 것은 안 된다. 너는 노예가 아니다. 너는 사람이다. 당당하고 떳떳한 사람이다. 최소한 하나님 앞에서 너는 피조물이고, 누구의 노예도 아니다. 노예가 되겠다면 오로지 진리의 노예, 하나님의 노예가 되어야지, 어떤 사람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물며 그 노예주가 네 배우자여서야 되겠느냐? 육적인 관계의 차원에서 보면 부모를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너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사실 너의 배우자이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그가 너를 원수처럼 생각하며 공격하고 핍박한다면, 네가 예배드리는 것도 반대하고, 밖에서 무슨 소리만 들렸다 하면 돌아와서 너를 질책하고 욕하고 때린다면, 심지어 네가 집에서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 읽는 일이 본인의 정상적인 생활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데도 너를 질책하고 반대하고 잔인하게 때린다면, 이건 대체 어떤 인간이냐? 마귀가 아니냐? 그런 자가 너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냐? 그런 자가 너더러 본인에게 무슨 책임을 다하라고 할 자격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이런 결혼 생활에서도 배우자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그를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하려 하는 것, 자기가 본분을 이행할 시간, 본분 이행할 기회, 심지어 자신이 구원받을 기회마저 희생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최소한 그런 생각은 내려놓아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 말고는 누구에게도 빚진 게 없다. 부모에게도, 남편이나 아내에게도, 자녀에게도 빚진 게 없고, 당연히 친구에게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누구에게도 너는 빚진 게 없다. 결혼을 포함해서 사람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빚진 것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하나님에게만 빚졌다. 물론 하나님은 너에게 갚으라고 하지도 않는다. 단지 바른 인생길을 걸으라고 할 뿐이다. 그렇다면 결혼 생활이라는 일에서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은 바로 결혼 생활 때문에 존엄과 인격을 상실하지 말고, 올바른 추구의 길을 잃지 말고, 자신의 인생관과 추구 방향을 잃지 말고, 심지어 진리 추구를 내려놓지 말고, 구원받을 기회를 내려놓지 말고, 하나님이 네게 맡긴 일과 사명을 내려놓지 말고, 기꺼이 결혼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네가 그런 식으로 결혼 생활에 대처한다면, 오히려 결혼하지 않은 것만 못하고, 독신이 너에게 더 어울린다. 만약 아무리 애써도 결혼 생활의 이런 현 상황과 결혼 생활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너는 이런 결혼 생활에서 빠져나와 자유인이 되는 것이 차라리 낫다. 역시 이 말을 해야겠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결혼을 운명적으로 정해 준 목적은 단지 사람이 반려자를 만나서 순탄하지만은 않은 인생의 마디마디를 함께 걸어가게 하려는 것이고, 네 인생의 마디마디가 외롭고 쓸쓸하지 않도록 너와 함께하면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하고 챙겨 줄 사람이 있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혼을 이용해 너를 속박하지 않았고, 네 손발을 묶은 적도 없고, 스스로의 길을 선택할 네 권리를 없애고 너를 결혼의 노예로 만들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너에게 결혼을 운명적으로 정해 주고 배우자를 안배한 것은, 너에게 노예주를 찾아 준 것이 아니고, 또 스스로를 결혼 생활 안에 가둬 놓고 자신의 추구와 인생 목표, 올바른 추구 방향, 구원받기를 추구할 권리를 잃어버리라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네가 결혼했든 안 했든 자신의 인생 목표를 추구하고, 올바른 인생관을 세우고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네게 부여한 최고의 권리로, 그 누구도 박탈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 네 배우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결혼 생활에서 노예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생활 방식을 내려놓고, 결혼의 노예가 되려는 그런 생각과 행동을 내려놓고, 그런 상황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또 상대의 기분, 관점, 말, 태도, 나아가 행동에 의해 영향이나 제한, 속박과 구속을 받지 말고 거기서 걸어 나와 대담하고 용감하게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싶으면 읽고, 예배드려야 할 시간에 예배드리도록 해라. 너는 사람이지 개가 아니기에 누구로부터 본인의 행위를 규제받을 필요도 없고, 누구로부터 본인의 생활을 구속받고 통제받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너는 스스로의 생활 목표와 방향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네게 부여한 것이고, 특히 네가 가는 길이 바른길이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 집에서 네 사역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 본분을 맡길 때, 당연히, 무조건, 완전히 모든 것을 내려놓고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이 네게 준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사역이 열흘 또는 한 달간 집을 떠나야 하는 것이라면 너는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서 하나님이 맡긴 일을 완성하고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하는 쪽을 택해야 한다. 이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태도이자 의지, 바람이다. 만약 그 사역이 반년 혹은 일 년을 떠나 있어야 하거나 혹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해도, 너는 당연히 가정을 내려놓고 배우자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준 사명을 완성해야 한다. 그 기간은 네 결혼 생활과 네 배우자에게 네가 가장 필요한 때가 아니라, 하나님 집 사역과 네 본분에 네가 가장 필요한 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는 결혼하면 결혼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결혼이 끝나거나 결혼이 해체되는 것을 치욕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사실 치욕도 아니다. 그 결혼이 어떤 상황에서 끝이 났고, 하나님이 어떻게 안배했는지 봐야 한다. 그 끝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고 주재한 것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영광이고 영예로운 일이다. 네가 정의로운 사업을 위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피조물의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 결혼 생활을 포기하고, 결혼을 끝냈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기념하고 기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치욕이 아니라 영예로운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설령 일부 사람들의 결혼 생활이 상대 배우자가 그를 포기하고 배반해서 끝난 것이라 해도, 속된 말로 버림받아 쫓겨난 것이라 해도 이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것이 제게는 영광입니다. 왜냐고요? 제 결혼 생활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이런 식으로 끝난 것,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시고 주재하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제가 결혼 생활에서 나오도록 이끄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남편이 저를 내쫓게 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거기서 나올 자신도 용기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재에 감사드리고, 하나님의 인도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것은 영예로운 일이다. 수많은 결혼 생활 가운데 네가 이런 체험을 얻은 것, 하나님의 인도 아래 바른길 가길 선택하고 하나님이 네게 준 사명을 완성할 수 있게 된 것, 이런 전제와 동력 아래 상대와 헤어져 네 결혼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은 기뻐하고 축하할 만한 일이다. 최소한 정말 다행인 한 가지는 네가 더 이상 결혼의 노예가 아니고 결혼의 노예 역할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고, 더 이상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결혼의 노예라는 처지 때문에 고민하고, 고통받고, 발버둥 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순간부터 거기서 빠져나와 자유로워졌으니 이는 좋은 일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당연히 과거 고통 속에서 결혼을 끝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진정으로 그 결혼 생활을 내려놓고, 그 결혼 생활이 자신에게 남긴 그림자를 내려놓고, 그 결혼 생활이 자신에게 남긴 증오와 분노, 아픔을 내려놓고, 더 이상은 본인이 과거에 상대를 위해 했던 모든 희생과 노력이 상대의 불충과 배반, 냉소와 비아냥으로 돌아온 것 때문에 고통받고 분노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거기서 나와 더 이상 결혼의 노예가 아닌 것에 기뻐하고, 더 이상 결혼의 노예주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부질없는 희생도 치르지 않아도 되는 것에 기뻐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주재 아래 인생의 바른길을 걸으며 피조물이 다해야 할 본분을 다하고, 나아가 어떤 고민도 하지 않고, 뒷일을 걱정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물론 결혼한 상대방을 염려하고, 걱정하고, 마음 쓰지 않아도 되고, 그가 마음에 걸릴 일도 없다. 앞으로 모든 게 다 잘될 것이다. 본인 일을 배우자와 의논할 필요도, 그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그저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 말씀 안에서 원칙과 근거를 찾으면 된다. 지금 너는 이미 자유인이지 더는 결혼의 노예가 아니다. 다행히 결혼 생활이라는 악몽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오게 되었고, 결혼 생활의 제약이 없이 하나님 말씀을 읽을 시간도 많아지고 예배드릴 시간도 많아지고 묵상할 시간도 많아졌다. 완전히 자유로워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고, 누구의 냉소와 비아냥도 들을 필요 없고, 누구의 기분이나 감정도 생각할 필요 없다. 혼자 사는 건 정말 좋다! 이제는 노예도 아니고, 남에게 여러 가지 책임을 다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진정한 피조물이 될 수 있고, 창조주의 권세 아래 있는 피조물이 되어 피조물의 본분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그것만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너무 좋다! 영원히 결혼 생활의 그런 일 때문에 싸우고 고민하고 따지고 포용하고 인내하고 모욕당하고 분노하지 않아도 되고, 그런 열악한 환경과 복잡한 상황 속에서 살지 않아도 된다. 얼마나 좋으냐! 모든 게 다 좋고, 모든 게 다 순조로워지고 있다. 사람이 창조주 앞에 와서 말과 행동이 모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고 진리 원칙에 따르면 모든 게 순조로워진다. 시시비비를 따지는 어지러운 일도 없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건 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그런 열악한 결혼 생활 환경에서 노예를 자처하며 빠져나오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찌 됐든 이들이 결혼을 끝내지 않더라도, 결혼 해체라는 형식으로 생활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결혼의 노예는 되지 말기를 바란다. 네가 결혼한 상대가 누구든, 그가 어떤 재능과 인성을 지녔든, 어떤 지위에 있든, 그의 능력과 재주가 어떻든, 그는 네 주인이 아닌 반려자이다. 너와 대등한 위치에 있다. 그가 너보다 고귀하지도 않고, 네가 그보다 비천하지도 않다. 그가 만약 결혼 생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너에게는 그를 질책할 권리가 있고, 그를 관리하고 징계할 의무도 있다. 그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거나 그가 너를 싫어하고 미워할까 겁내지 말고 그가 너를 버릴까 겁내지 마라. 혼인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굽실대고, 억압을 견디고, 저자세로 그의 노예가 되고 결혼의 노예가 되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것은 결혼의 틀 안에서 사람에게 있어야 할 모습도 아니고, 한 사람이 결혼의 틀 안에서 다해야 할 책임도 아니다. 하나님은 너에게 노예가 되라고 하지도 않았고, 주인이 되라고도 하지 않았다. 단지 책임을 다하라고만 했다. 따라서 결혼 생활에서 네가 다해야 할 책임을 바르게 이해하고, 또 본인이 결혼 생활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을 바르게 이해하고 간파해야 한다. 만약 네 역할이 기형적이고 인성에 어긋나고, 하나님이 정한 내용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너는 그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 검토하고 반성해야 한다. 만약 상대가 질책한다면 너 역시 질책할 수 있다. 네가 상대를 질책해서 그것이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더 현명하고 적절한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고 싶다면, 결혼의 노예가 되려는 생각과 행동을 내려놓고 결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결혼의 노예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람, 진정한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자신의 본분도 다해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방금까지 ‘사람은 결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를 교제하면서 결혼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했다. 즉, 일부 사람들이 결혼 생활은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면서 결혼의 해체와 종결을 최대한 막으려고 하며 이 목적을 위해 저자세를 취하고, 차라리 자신의 수많은 긍정적 추구를 희생해서라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 하고 기꺼이 결혼의 노예가 되려 하는데, 이 관점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결혼의 존재와 결혼의 정의를 잘못 해석하고, 결혼에 대해 그릇된 태도를 보인다. 그러니 이 측면의 잘못된 사상 관점을 내려놓고 그 기형적인 결혼 생활 상황에서 빠져나와 결혼 생활을 올바르게 대하고, 결혼 생활에서 생긴 문제들을 바르게 처리해야 한다. 이것이 결혼에서 사람이 내려놓아야 할 세 번째 측면의 문제다. 이제 결혼에 관한 네 번째 측면의 문제를 교제하겠는데, 그건 바로 ‘결혼은 너의 종착지가 아니다’는 문제다. 우리가 교제하는 주제인 이상, 그 주제는 결혼의 현주소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문제이자 여러 가지 결혼 상황에 존재하는 문제이고, 또한 사람이 결혼을 대할 때 갖는 일종의 태도 혹은 생활의 현주소이다. 따라서 이 주제 역시 자세히 교제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하면, 여자의 경우 이렇게 생각한다. ‘마음에 드는 낭군을 찾았어. 이 사람은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고, 내 인생에서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줄 거야. 누군가 의지해야 할 때 이 사람이 든든하고 기댈 만한 어깨를 내어 줄 거야.’ 남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았군. ‘아름답고 대범하고’, ‘상냥하고 다정하고’,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하고’, 이해심도 많아. 이 사람 덕분에 나도 안정적인 생활이 생기고 마음 편하고 따뜻한 가정도 생겼어.’ 사람이 결혼하면 자신이 행운을 만났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결혼하면 상대는 본인이 선택한 미래 생활의 상징이고, 당연히 자신의 결혼도 이번 생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종착지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이게 무슨 뜻이냐? 사람들은 누구나 결혼하면서부터 결혼을 본인의 종착지라고 여기며, 자신이 맞이한 이 결혼이 바로 자신의 종착지라고 믿는다는 말이다. 종착지가 무슨 뜻이냐? 바로 자신의 도착점이란 뜻이다. 자신의 앞날, 자신의 미래, 자신의 행복을 모두 이 결혼에 기탁하고, 자신과 결혼한 배우자에게 기탁하기 때문에 그들은 결혼만 하면 더 이상 바랄 것도, 걱정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이미 종착지가 생겼고, 종착지는 바로 그 사람이자 그 사람과 함께 이룬 가정이며, 종착지가 생긴 이상 더 이상 어떤 추구와 바람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이 결혼에 대해 가지는 태도와 관점으로 볼 때 그것은 결혼 구조의 안정에 유익하다. 적어도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결혼 생활의 반려자로 삼을 고정적인 이성이 생겼으므로 그는 더 이상 바람을 피우거나 다른 이성과 애매한 관계에 놓이는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대부분의 결혼 당사자에게 유익해 최소한 남녀 문제에 있어서 마음이 안정되고, 고정적인 이성에 끌리고 고정적인 이성 반려자에 의해 기본 생활 환경이 고정된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한 사람이 결혼한 다음부터 결혼을 자신의 종착지로 생각하는 대신 자신의 모든 추구, 자신의 인생관과 인생길, 그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모두 별도의 일, 여가 시간에 하는 일로 치부한다면, 어느 틈에 ‘결혼은 사람의 종착지’라는 이 사실은 좋은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올바른 인생 목표를 추구하고 올바른 인생관을 수립하고, 나아가 구원을 추구하는 데 걸림돌, 장애물이 되고, 방해가 되고 말 것이다. 결혼한 사람이 그 배우자를 바로 자신의 종착지이자 일생의 숙명으로 여길 경우, 그는 배우자의 희로애락, 배우자의 행불행이 자신과 관계가 있고, 자신의 행불행, 희로애락 역시 배우자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배우자의 삶과 죽음, 행복과 즐거움이 자신의 삶과 죽음, 행복과 즐거움과 관계되고 하나로 연결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에게 결혼이 내 인생의 종착지라는 이런 생각은, 그들이 인생길을 추구하고, 긍정적 사물을 추구하고,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일에서 더디고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게 만든다. 즉, 결혼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르는데 그 배우자가 하나님을 따르는 쪽이 아닌 세상을 추구하는 쪽을 선택한다면 하나님을 따르는 쪽은 배우자로부터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보자. 한쪽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일을 내려놓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헌신하고, 봉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한쪽은 이런 관점이다. ‘하나님 믿는 것은 좋지만 생활도 해야 하는데, 둘 다 본분을 이행하면 돈은 누가 벌지? 식구들은 누가 먹여 살리지? 이 가정생활은 누가 유지하지?’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일을 하고 세상을 추구하면서, 딱히 하나님을 안 믿겠다고도, 반대한다고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는 쪽에서는 이런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내 배우자가 바로 내 종착지야. 저 사람이 잘돼야 나도 잘되고, 저 사람이 안되면 나도 잘될 수가 없어. 우리 둘은 한배를 탔으니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그가 가는 곳은 나도 따라가야 해. 지금 우리는 길을 선택하는 문제에서 의견이 갈리고 불협화음이 발생했는데, 어떻게 조정해야 하나? 난 하나님을 따르고 싶은데 그이는 하나님 믿는 일엔 관심이 없어. 그이가 안 믿으면 나도 제대로 믿을 수 없고, 하나님 따를 마음도 사라질 거야. 처음부터 난 그이를 내 하늘, 내 운명으로 여겨 와서 헤어질 수가 없어. 안 믿으면 둘 다 안 믿는 거고, 믿으면 둘 다 믿어야지. 그이가 안 믿으면 마치 내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뭔가 허전하단 말이지.’ 그녀는 하루 종일 그 일로 걱정되고 고민돼서 상대도 하나님을 믿기를 바라며 계속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어떡해야 좋을지 몰라 속이 탔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해 배우자가 시간이 나서 집에 있을 때, 옆에 앉히고 하나님 말씀을 읽었다. 상대는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면서 반감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교제하지도 않았다. 그저 부부이기 때문에 아내를 반박하지 않을 뿐이었다. 찬양을 배우라면 따라서 배우긴 하는데, 배운 다음에는 제대로 배웠는지, 마음에 들었는지 피드백도 없다. 예배드리라고 하면 어쩌다 한가할 때 같이 드리긴 하지만 평소에는 일하고 돈 버느라 바빠서 하나님 믿는 일은 언급조차 없고, 먼저 나서서 예배드리고 본분을 이행하자고 한 적도 없다. 어쨌든 뜨뜻미지근하고, 하나님 믿는 일에 반대하지도, 지지하지도 않았는데 태도가 불분명했다. 하나님 믿는 쪽은 속으로 늘 이 일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이와 부부이고 우리 둘이 한 가족이니까 내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면 그 사람도 꼭 들어가야 해. 그이가 같이 믿지 않아서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다면 나도 살고 싶지 않고 죽고 싶을 거야.’ 비록 지금은 죽지 못하지만 속으로 늘 이것 때문에 고민하고, 고통받고, 속을 끓였다. ‘만약 어느 날 재난이 닥쳐서 그이가 재난 속에서 죽는다면 나는 어떡해야 하나? 지금 전염병이 이렇게 심각한데 그이가 만약 전염병에 옮으면 나도 살 생각이 없어. 지금은 반대한다는 말이 없지만, 언젠가 정말 나한테 하나님 믿지 말라고 하면 난 어떡해야 하나?’ 그녀는 자기도 그때가 되면 상대를 따라 하나님을 안 믿고 배반하는 길을 택하게 될까 걱정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배우자는 자신의 영혼이자 생명, 나아가 자신의 하늘, 자신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 마음속에는 배우자가 그녀를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이고, 그녀 역시 상대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난관에 봉착했다. ‘남편이 만약 내가 하나님 믿는 걸 반대하고 기도해도 소용이 없으면 어떡하지?’ 그녀는 항상 이 일이 걱정이었다. 외지로 나가 본분을 이행해야 할 때, 그녀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본분을 이행하려면 멀리 나가야 해서 집을 오래 떠나 있어야 한다는 말에 그녀는 속으로 울고 심지어 피눈물을 흘렸다. 왜 그랬겠느냐? 자기가 집을 떠나면 배우자를 돌봐 줄 사람이 없는 게 걱정이었고, 자기가 배우자를 보고 싶어 하고 내려놓지 못할까 걱정이었다. 그를 염려하고 그리워하며 심지어 그가 곁에 없으면 살아갈 수 없고, 삶의 희망, 삶의 방향을 상실하고, 본분 이행에도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 이렇게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픈데, 그 일이 자기에게 정말로 일어나면 어떨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다른 곳에 가서 본분을 이행하겠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또한 장시간 외출하거나 밖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사역이 있으면 그 사역을 하겠다고 차마 나서지 못하고, 그런 요구에 차마 승낙할 수가 없었다. 그저 힘닿는 대로 형제자매를 도와 편지를 전달하거나 가끔 형제자매들이 자기 집에 와서 예배드리도록 접대할 뿐, 자기 배우자와 하루 종일 떨어져 있는 일은 엄두도 못 냈다. 정말 특별한 일이라도 있으면, 이를테면 배우자가 출장을 간다든가 며칠 외출이라도 하려 하면 2, 3일 전부터 집에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야 한다. 왜 울겠느냐? ‘남편이 비행기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해서 시신도 못 찾으면 어쩌나? 나는 어떻게 살지? 어떻게 먹고살지? 내 하늘이 없어지는 건 마음을 도둑맞은 거나 마찬가지야.’ 생각만 해도 무섭다. 그래서 생각만 했다 하면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배우자는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2, 3일째 울기만 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올 때까지도 울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상대는 짜증이 났다. “무슨 사람이 저래?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저렇게 울고 있으면 이건 나보고 죽으라고 저주하는 거 아냐?” 그래도 방법이 없다. 그녀는 계속 울면서 말한다. “당신을 보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내 시야에서 떠나는 게 싫어요.” 그녀는 자신의 운명과 종착지를 자기와 결혼한 배우자에게 걸었다. 이런 행동이 미련하든 유치하든, 어쨌든 이런 사람은 있다. 이런 사람은 남자가 많으냐, 여자가 많으냐? (여자가 많습니다.) 여자가 많은 것 같다. 여자들은 좀 겁이 많다. 남자가 여자를 떠나든, 여자가 남자를 떠나든, 생활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누가 누굴 떠나든, 그것은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냐? 네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냐? (통제할 수 없습니다.) 통제할 수 없다. 그러면 네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울고, 속상해하고, 마음 졸이고, 괴로워하는 것이 소용이 있느냐? (소용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를 바라보며, 또 상대의 손을 잡은 채 상대와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되어 평생 의지할 존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안정제를 먹은 것처럼 말이다. 평생 먹고살 걱정도 없고, 고민도 없으며, 그가 바로 본인의 종착지라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이를 두고 “이번 생에 당신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 내면 깊은 곳에 지닌 결혼과 배우자에 대한 생각이다. 상대가 기쁘면 자기도 기쁘고, 상대가 슬프면 자기도 슬프고, 상대가 괴로우면 자기도 괴롭다. 상대가 죽으면 자기도 살고 싶지 않다. 상대가 변심하면 어떻게 하느냐? (죽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살고 싶지 않다며 자살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정신이 이상해지기도 한다. 이게 무슨 꼴이냐? 정신이 이상해진다면 그건 어떤 사람이냐? 정신이 이상하다는 것은 귀신 들렸다는 뜻이다. 어떤 여자가 배우자는 곧 자기 일생의 종착지라고 생각하며 본인에게 이렇게 남자가 있으니 앞으로 다른 남자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바로 “이번 생에 당신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배우자가 그녀를 저버리고 변심해서 더 이상 그녀를 원하지 않는다면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그녀는 세상의 모든 이성을 증오하고 이성만 보면 침을 뱉고 욕을 해 대고, 때리고 싶은 마음이 들고 폭력 성향이 생기는 등 이성이 비정상적으로 변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말 정신이 이상해지기도 한다. 이런 것은 모두 결혼에 대한 사람의 그릇된 이해로 초래된 결과다.

이런 사람들은 결혼을 자신의 성공적인 행복 추구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또한 자신이 자나 깨나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져 얻은 인생의 종착지이자 인생의 목표로 간주한다. 결혼은 바로 그들 인생 목표의 마지막 역인 셈이다. 배우자와 이번 생을 함께하며 서로의 곁에 끝까지 있어 주고 생사를 함께하는 것, 이것이 결혼에 대한 그들의 추구다. 그들은 결혼이 자신의 종착지라는 이 사상 관점을 검증하기 위해, 결혼 생활에서 이성을 넘어서고 사람의 책임 범위를 넘어서는 일을 많이 저지른다. 사람의 책임 범위를 넘어선 이런 일에는 인격과 존엄성, 자아의 추구 목표를 상실한 극단적인 행동들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배우자가 매일 누구와 함께 있고, 나가서 뭘 하는지, 다른 이성과 접촉하지는 않는지, 다른 이성과 우정의 범위를 넘어선 교제나 친분을 쌓지는 않는지 항상 관심을 두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에 대한 배우자의 태도가 어떤지, 배우자의 마음속에 과연 자신이 있는지, 아직도 자기를 사랑하는지 관찰하고 시험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배우자가 집에 들어올 때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기도 하고, 그의 몸에 이성의 머리카락은 없는지, 셔츠에 다른 여자의 립스틱 자국은 없는지 살핀다. 또 휴대 전화를 검사해서 자기가 모르는 이성의 전화번호는 없는지, 심지어 배우자가 전화는 과연 몇 통이나 했는지, 누구와 통화했는지, 매일 자기한테 전화해서 얘기한 게 진짜였는지 확인한다. 예를 들면, 전화할 때 상대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당신 지금 어디예요? 뭐 해요?” “일하는 중이지. 서류 검토하고 있어.” “그럼 당신 검토하는 서류 좀 찍어서 보내 줘 봐요.” 상대가 사진을 보내면 그녀는 또 캐묻는다. “지금 사무실에 또 누가 있어요?” “나 혼자야.” “그럼 카메라 켜서 사무실에 또 누가 있는지 좀 보여 줄 수 있어요?” 카메라가 켜지고 딱 보니까 한 여자의 형체가 얼핏 스쳐 지나간 것 같다. “아닌 것 같은데요. 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 “청소하는 아주머니야.” “아, 알았어요.” 그제서야 안심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배우자의 휴대 전화를 확인하고, 그의 행적을 확인하고, 그가 매시간 뭘 하는지 확인한다. 그들은 결혼에 대해 큰 기대를 품고, 동시에 더 많은 불안감을 가진다. 당연히 결혼한 상대에 대해서도 커다란 소유욕과 통제 욕구가 있다. 그들은 상대를 자신의 종착지라고 믿고, 평생을 반드시 또 마땅히 서로 의지해야 할 사람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결혼에 어떠한 빈틈도 있어서는 안 되고, 결혼에 어떠한 파열음도 발생해서는 안 되고, 심지어 어떤 흠이나 사소한 문제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건 모두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상대를 감시하고, 시험하는 일, 상대의 행적과 행방을 염탐하는 일, 그리고 상대를 단속하는 일에 더욱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특히 상대가 바람을 피우는 경우, 이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들은 데굴데굴 구르며 난리를 치고, 울고불고 야단을 피운다. 심지어 그 일을 예배 자리까지 가져와서 형제자매들과 대책을 의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이는 제 첫사랑이에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라고요. 저는 평생 다른 남자랑은 손도 잡아 본 적 없고, 스킨십도 해 본 적 없어요. 제게는 그 사람이 유일한 남자고, 하늘이에요. 저는 평생 그이만 인정했는데, 그이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다니, 정말 분이 가라앉질 않아요.” 사람들이 말한다. “분을 못 가라앉히면 어쩔 건데요? 자매님이 이 사실을 바꿀 수 있나요? 자매님 남편이 그런 일을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눈치챘다고요.” 그녀는 말한다. “그 사람이 그걸 좋아하든 말든 저는 이 사실을 못 받아들이겠어요. 누가 그 여자 혼내 줄 방법을 좀 생각해 봐요. 그 여자한테 안방을 내어 줄 수는 없죠.” 보아라,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이 일을 예배 자리에까지 가져와서 교제한다. 이런 것도 교제라고 할 수 있느냐? 이런 걸 두고 부당한 여론을 방출하고 부정적인 소식을 방출하고 부정적인 정보를 퍼뜨린다고 한다. 너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집에 들어가 문을 닫고 싸워도 좋고 소란을 피워도 좋다. 그건 너 자신의 일이다. 그렇지만 그 일을 예배 자리에 가져와서 얘기하는 것은 안 된다. 만약 네가 예배 시간에 진리를 구하고 싶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 보자. “이번 일을 만났는데 제가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고, 그에게 얽매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이 일이 하나님 믿고 본분 이행하는 데 지장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진리를 구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네가 예배 자리에 와서 시비를 논하는 것은 안 된다. 왜 그런 것이냐? 네가 이 일을 만나고 지금의 이런 생활 상황에 놓인 것은 모두 결혼에 대한 너의 그릇된 이해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런 시비와 결과를 형제자매들 가운데에 가지고 와서 교제한다면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너 자신에게도 좋을 게 없다. 네가 이런 시비의 문제를 얘기하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분량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지 방법을 생각해 주고, 옳고 그름을 가려 주는 것밖에는 해 줄 수가 없다. 이는 네가 긍정적으로 진입하는 데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설상가상으로 문제를 더 심각하고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바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뜻을 깨닫지 못한 그들이 너에게 무슨 유익하고 가치 있는 도움을 제공해 줄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언제까지라도 자매님이 본처예요. 가짜가 진짜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죠.” 이것이 진리이냐? (아닙니다.) 또 이런 사람도 있다. “그 여자한테 자리 내 주지 마세요. 그 여자가 어디 이길 수 있나 보세요!” 이것이 진리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는 이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겠느냐, 아니면 화가 나겠느냐? 혈기가 폭발하겠느냐, 아니면 진리를 깨닫고 실행 길을 얻겠느냐? 또 이런 사람도 있다. “이제 알겠네요. 요즘 남자들은 괜찮은 인간이 하나도 없어요. 돈만 있으면 다들 변한다니까요.” 이것이 진리냐? (아닙니다.) 이런 사람도 있다. “이번 일은 참으면 안 돼요. 그 여자한테 자매님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 줘야 해요. 본때를 보여 주세요. 회사로 찾아가서 그 여자가 정부(情婦)라고 다 소문내고 엎어 버리세요. 틀림없이 본처인 자매님 편을 들지, 그 여자 편을 들지는 않을 거예요. 그쪽이 양보하고 물러나게 해야죠.” 이것이 진리냐? (아닙니다.) 이런 의견은 대부분 사람들의 억지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 밖에 조금 보수적인 의견도 있다. “남편이랑 평생을 살았는데 아직도 안 질려요? 그냥 자기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으라고 해요. 집에 돈만 잘 갖다 주고, 자매님 먹고사는 데 지장만 없으면 되잖아요.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남편이 귀찮게도 안 하잖아요. 그래도 집에 들어오고 자기 집이라고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화낼 게 뭐 있어요? 자매님이 이득이잖아요.” 듣고 있으면 위안은 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진리냐? (아닙니다.) 여기에 착실한 사람이 하는 말이 하나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전부 이간질하거나 화를 돋우는 말 아니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적당히 구워삶는 말이다. 이 일을 대할 때 지녀야 할 올바르고 진리에 부합하는 관점이 한 마디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이렇게 말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사람들이 대개는 바보 같고, 생각해 낸 방법들은 당사자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바보다.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고, 진리를 깨닫지도 못했다. 결국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다. 더 구체적으로 결혼이라는 일만 놓고 볼 때,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의견과 정의에서, 결혼 생활에서 나타나는 이런 문제를 사람이 어떻게 대하는 것이 혈기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사람이 전혀 모른다는 뜻이다.

어떤 일을 만나든, 그게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혼 생활에서 생기는 이 문제들을 대할 때 근거가 되는 하나님 말씀은 무엇이냐? 여기에서의 진리 준칙은 무엇이냐? 네 배우자는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 않았고, 그것은 그의 문제다. 하지만 그의 문제로 인해 결혼 생활에 대한 너의 올바른 태도와 책임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는 잘못을 저지른 쪽이지만,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결혼 생활을 대할 때 네가 지녀야 하는 태도가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너는 그가 너의 종착지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네 생각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렇게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운명적으로 정하지도 않았다. 단지 네가 감정과 사람의 뜻, 물론 더 확실히 말하자면, 사람의 혈기 때문에 억지로 그가 네 종착지이고, 네 운명의 남자라고 생각했던 것에 불과하다. 네가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네가 전에는 어떻게 생각했든 관계없이, 어쨌든 지금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생각과 태도를 지녀야 올바른 것이라고 했는지 돌이켜 봐야 한다. 배우자가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 않을 때 너는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싸워서도, 소란을 피워서도 안 되고, 데굴데굴 구르며 난리를 피워서도 안 된다. 네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네 종착지의 꿈이 깨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네 결혼이 끝나거나 산산조각이 난다는 뜻도 아니고, 네 결혼이 실패했거나 막다른 길로 접어들었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사람은 누구에게나 패괴 성품이 있고, 이 세상의 사악한 조류, 사악한 풍조의 영향을 받지만 그것을 막아 낼 면역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결혼 생활이라는 일에서 과오를 범하고, 충실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 불륜을 저질러 상대를 실망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만약 이런 각도에서 문제를 바라본다면 이건 별로 큰 일이 아니다. 모든 결혼 가정이 세상이라는 큰 환경, 사회의 사악한 조류와 풍조의 영향을 받는다. 또한 개인의 경우, 육적인 정욕을 가지고 있는 데다, 멜로 영화나 드라마, 사회의 에로틱한 조류와 같은 이런 현상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런 큰 환경에서 사람이 견지해야 할 원칙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즉, 사람의 도덕적 마지노선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사람의 정욕이라는 관문은 돌파하기가 매우 쉬운데, 정욕 자체는 패괴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패괴 성품이 있는 데다 이런 큰 환경 아래 생활하기 때문에, 남녀 관계 영역에서 잘못을 저지르기가 쉽다. 사람은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패괴 성품을 지닌 그 누구도 이런 큰 환경에서는 시험과 유혹을 이겨 낼 수 없다. 사람의 정욕은 언제 어디서나 흘러넘치고,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일탈을 저지를 수 있다. 이는 정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게 문제가 있어서다. 사람은 정욕을 이용해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탈, 불륜, 외도 등의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이런 일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다면 이성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너는 패괴된 사람이고, 그 역시 패괴된 사람이다. 따라서 너는 본인이 결혼 생활에 대한 충절을 지킬 수 있다고 해서 그에게도 반드시 너처럼 이 부분을 잘 지키고, 결혼 생활에 충실할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는 올바르게 문제를 대해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그런 상황, 그런 시험은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어서, 네가 막거나 감시해도 소용이 없다. 네가 감시하면 할수록 그런 일은 더 빠르게, 더 일찍 발생한다. 사람은 누구나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어 이런 사악한 사회 환경에서 생활하면서 음행을 범하지 않는 자는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지 배경이나 조건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사람은 짐승보다 나은 점이 별로 없다. 짐승은 최소한 육적인 본능에 따라 반응하지만, 사람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음행을 범하고, 불륜을 저지른다. 음행을 좋아하는 존재는 사람뿐이다. 따라서 이런 사악한 사회 환경에서는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며, 이 문제는 회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데, 너는 어째서 그에게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느냐? 사실 그건 정상적인 일이다. 네가 그에 대해 감정적 갈등이 있는 까닭에 그가 너를 버리고 뿌리치면 감당하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일이 생기면 너는 빙긋 웃으면서 곰곰이 생각할 것이다. ‘이상할 것도 없지. 요즘 세상이 다 그렇잖아?’ 그 무슨 마누라니 애인이니 하는 말이 있지 않으냐? (“집에서는 마누라와 잘 지내고, 밖에서는 애인과 잘 지낸다.”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사악한 조류 안에서 유행하는 말, 유행하는 일이며, 남자로서 자랑할 만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아내와도 애인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면 그건 남자가 수완이 없는 것이고, 사람들은 비웃을 것이다. 그런데 여자가 이런 일이 생겼다고 데굴데굴 구르며 혈기를 발산하고, 밥까지 굶어 가며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고, 목매달아 죽는다고 자살 소동을 일으키고, 심지어 화를 못 이겨 정신까지 이상해지는 것은, 알게 모르게 본인이 결혼 생활을 대하는 태도와 관계가 있다. 물론 ‘배우자가 자신의 종착지’라고 믿는 그녀의 관점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그녀는 상대가 결혼 생활을 깨뜨린 것을 곧 일생의 종착지에 대한 기탁, 자신의 아름다운 바람을 파괴한 것으로 생각한다. 상대가 먼저 이 평형 상태와 선례를 깨고, 너를 뿌리치며 결혼의 맹세를 어기는 바람에 너의 미몽은 악몽으로 바뀌었고, 그 때문에 너에게서 이런 모습과 과격한 행위가 나오게 된 것이다. 사람이 만약 하나님에게서 온, 결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받아들인다면 조금은 이성적인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을 만나면 정상적인 사람은 가슴이 저미고, 눈물이 나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냉정을 찾은 뒤 하나님 말씀을 생각해 보고, 이 사회 환경을 생각해 보고, 또 모든 사람이 패괴 성품을 가진 이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죽자 살자 물고 늘어지는 대신, 그 일을 올바르고 이성적으로 처리하고, 손을 놓게 될 것이다. 손을 놓는다는 건 어떤 뜻이냐? 이왕 그가 그렇게 행동하고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 않은 이상,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다음 그와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어야 한다.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지낼 건가요? 둘 사이의 결혼을 계속 유지할까요, 아니면 여기서 끝내고 각자의 삶을 선택할까요?” 앉아서 얘기하면 싸우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다. 만약 상대가 결혼을 끝내기를 고집한다 해도 뭐 그리 놀랄 것도 없다. 이방인들이 늘 하는 말이 있지 않으냐? “세상 천지에 널린 게 남자다.”, “다리 셋 달린 두꺼비는 찾기 힘들어도, 다리 둘 달린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또 어떤 말이 있느냐? “나무 한 그루 때문에 숲 전체를 포기하지 말라.”라는 말도 있는데, 게다가 이 나무는 볼품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고목이다. 이 말들이 옳으냐, 그르냐? 이방인들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이런 말들이 진리와 관계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사상 관점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 이런 일이 닥쳤을 경우, 우선은 혈기를 부려서는 안 되고 화가 나도 참아야 한다. “우리 차분하게 얘기 좀 해요.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난 그래도 당신하고 잘해 볼 생각이야.” “그렇다면 우리 잘해 봐요. 앞으로 바람 같은 건 피우지 말고, 남편의 책임을 다했으면 해요. 이 일은 여기서 끝내자고요. 만약 그렇게 못 하면 헤어져서 각자 갈 길 가는 거고, 하나님이 정하신 우리 결혼은 거기서 끝인 거죠. 그렇게 될 경우에 난 하나님의 안배를 따를 거예요. 당신은 당신 갈 길 가면 되고 난 하나님 믿는 길을 갈 테니 서로 지장은 없을 거예요. 나도 당신 간섭하지 않을 테니 당신도 날 제약하지 마세요. 당신이 내 운명을 결정할 수도 없고, 내 종착지도 아니니까요. 내 운명과 종착지는 하나님이 정하세요. 내 인생 마지막 역이 어딘지, 어디까지 가야 내 종착지가 나오는지 하나님께 물어봐야 해요. 하나님이 아시고, 하나님이 주재하시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따르고 싶어요. 어쨌든 당신이 나랑 이 결혼을 계속 이어 가고 싶지 않다면 우리 좋게 헤어져요. 내가 비록 재주도 없고, 이 집안 생계를 당신한테 의지했지만, 당신이 없어도 난 여전히 살 수 있고, 또 잘 지낼 거예요.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도 굶어 죽게 놔두시지 않는데 나처럼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손도 있고 발도 있고, 혼자 충분히 먹고살 수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요. 하나님께서 내 남은 생을 당신 없이 쓸쓸하게 지내도록 정하셨다고 해도 거기에 순종하고, 원망 없이 그 사실을 받아들일래요.” 일을 이렇게 처리하면 좋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아주 좋다. 그렇지 않으냐? 다툴 필요도, 싸울 필요도 없고, 그 일을 가지고 동네 시끄럽게 해서 남들이 다 알게 할 필요도 없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결혼 자체가 두 사람의 일이므로 둘 사이에 생긴 갈등은 둘이 해결하고 그 결과도 둘이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너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 물론 결혼은, 어떤 균열이나 결과가 나타나는지와 무관하게, 존재해도 좋고, 존재하지 않아도 좋고, 또 새로운 결혼 생활을 시작해도 좋고, 여기서 결혼을 끝내도 좋지만, 어쨌든 결혼 자체는 너의 종착지가 아니고, 배우자 역시 너의 종착지가 아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해 네 생명과 생활에 나타나고, 네 인생길에서 너를 동반하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그가 길 끝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너와 함께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으니,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중간에 어떤 문제가 생겨서 균열이 생겼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든 그로 인해 결국 결혼이 끝났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네 종착지가 사라져서 그때부터 네 인생이 암울해지고, 광명과 미래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어쩌면 이 결혼의 끝이 더 근사한 생활의 시작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손에 달렸고, 하나님이 지배하고 안배한다. 어쩌면 이 결혼이 끝남으로써 네가 결혼에 대하여 깊은 이해와 깨달음을 얻고 더 깊은 인식을 얻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이 결혼의 끝이 아마도 너의 입장에서는 인생의 목표 및 방향, 그리고 가야 할 길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 결혼의 끝이 너에게 가져다준 것은 암울한 추억도, 고통스러운 기억도, 모든 부정적인 체험과 수확도 아닌, 결혼 생활에서는 얻지 못한 바람직하고도 긍정적인 체험일 것이다. 만약 그 결혼 생활이 계속된다면 너는 아마 끝까지 계속 무미건조하고 평범하게 살 것이다. 하지만 결혼이 끝나고 해체된다면, 그것이 너의 입장에서는 꼭 좋은 일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과거에 너는 결혼의 행복, 결혼 생활의 책임, 배우자에 대한 관심, 돌봄과 보살핌, 근심, 걱정 등과 같은 모든 정서 혹은 생활 방식 따위에 얽매였다. 하지만 결혼이 끝난 날부터 너의 생활 상황, 생존 목표, 인생의 추구에 철저하고도 어마어마한 변화가 나타날 것인데, 그 변화는 결혼이 끝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런 수확, 전환과 변화는 하나님이 네게 정해 준 이 결혼 덕분에 얻게 되는 것임과 동시에 네가 결혼을 끝내도록 하나님이 이끌어 준 덕분에 얻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네가 어느 정도 아픔을 겪고, 굽은 길을 가긴 했지만, 비록 네가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무모하게 희생하거나 타협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 네가 얻는 것은 결혼 생활 자체에서는 얻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어찌 되었든 ‘결혼은 바로 너의 종착지이다’는 사상 관점을 내려놓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네 결혼 생활이 계속되거나 위기에 직면하거나 관계없이, 혹은 네 결혼이 해체되거나 이미 끝났거나 관계없이, 어찌 되었든 결혼 자체는 한 사람의 종착지가 아님을 사람은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사람은 ‘결혼은 한 사람의 종착지이다’는 사상 관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런 사상 관점은 상당 부분 너의 자유와 네가 인생길을 선택할 권리를 위협할 것이다. 위협한다는 것은 어떤 뜻이냐? 왜 내가 이런 단어를 사용하겠느냐? 그건 바로 네가 어떤 선택을 할 때, 혹은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관점을 받아들일 때, 그것이 네 결혼의 행복이나 결혼의 완벽함에 영향을 미친다면, 나아가 배우자가 너의 종착지이자 궁극적으로 기댈 곳이라는 이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면, 너는 손발이 묶이고, 심지어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조심 또 조심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은연중에 너의 자유 의지, 인생길을 선택할 권리, 긍정적인 사물을 추구하고 진리를 추구할 권리는 너의 그런 사상 관점에 의해 속박당하고 심지어 박탈당할 것이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 앞에 올 확률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네가 하나님 앞에 올 확률이 줄어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네가 구원받을 희망은 점점 작아지고, 네가 살아가는 상태는 옹졸하고, 가련하고, 음침하고, 구질구질하다는 뜻이다. 왜 그런 것이냐? 네가 모든 희망과 기대,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전부 너와 결혼한 배우자에게 고정시키고, 그를 너의 전부로 삼았기 때문이다. 네가 그를 너의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너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너의 시야를 어지럽히거나 가리고, 네 인격과 존엄성, 정상적인 사유와 이성을 박탈하고, 네가 하나님 믿으면서 인생의 정도를 걷고, 올바른 인생관을 수립하고, 구원받기를 추구할 권리를 박탈한다. 그와 동시에 너의 이런 권리들은 모두 배우자에 의해 제어되고 통제된다. 그래서 내가 이런 사람들의 삶을 가련하고 구질구질하고 비천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배우자가 심기가 좀 불편하거나 몸이 어디가 불편했다 하면, 심지어 배우자가 심장이 좀 불편하다는 소리만 해도, 그는 가슴이 철렁해서 며칠 동안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울면서 기도한다. 지금껏 어떤 일로도 이처럼 마음을 졸인 적 없었던 사람이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배우자에게 이런 일만 생겼다 하면 자기가 당장에라도 어떻게 잘못될 것만 같다. 왜 그런 것이냐? 그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하늘이 무너지고 든든한 버팀목이 쓰러지는 것이고, 이는 곧 본인도 끝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의 생사가 창조주 손에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하나님이 배우자를 앗아 가면 본인이 반려자를 잃고, 기댈 곳을 잃고, 하늘을 잃고, 영혼을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이 얼마나 패역한 짓이냐! 하나님이 준 결혼으로 기댈 곳이 생기고 반려자가 생기자 너는 하나님을 잊고, 더는 하나님을 원치 않게 되었다. 네 배우자가 너의 하나님, 너의 주인이 되고, 너의 기댈 곳이 되었다. 이것은 대역무도한 일이고, 하나님을 가장 크게 거역하는 행위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배우자가 조금만 화를 내도, 혹은 무슨 병만 생겨도 가슴이 철렁해서 며칠을 예배도 안 드리고, 연락도 하나 없고, 손에 있는 본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도 않는다. 마치 증발해 버린 것처럼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가 이번 생에서 가장 관심을 쏟고 걱정하는 일은 배우자의 생사로, 어떤 일도 이보다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도, 하나님이 맡긴 일도, 그의 본분도 이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로서 지녀야 할 신분, 가치, 의의를 잃어버린 자이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자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안정적인 생활과 반려자를 준 건, 네가 더 잘 지내고 누군가 너를 보살피고 동반하라는 뜻이었지, 반려자가 생긴 뒤로 하나님도 잊고, 하나님 말씀도 잊어버리고, 본분을 이행할 의무,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인생 목표도 포기한 채 배우자를 위해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었다. 네가 정말 그렇게 했다면, 정말 그렇게 살고 있다면 하루빨리 돌이키길 바란다. 그 누가 너에게 아무리 중요해도, 네 생명과 생활, 심지어 인생길에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는 너의 종착지가 아니다. 그는 단지 패괴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지금의 반려자를 안배했기에 너는 그와 함께 생활할 수 있지만, 만약 하나님이 마음을 바꿔 너에게 다른 누군가를 안배해도 너는 여전히 잘 지낼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의 네 반려자는 너의 유일한 사람도 아니고, 너의 종착지도 아니다. 하나님만이 네가 종착지를 기탁할 수 있는 분이고, 하나님만이 인류가 종착지를 기탁할 수 있는 분이다. 너는 부모를 떠나서도 생존하고 살아갈 수 있고, 배우자 없이도 당연히 전처럼 잘 살아갈 수 있다. 부모도 너의 종착지가 아니고, 배우자 역시 너의 종착지가 아니다. 배우자가 생겼다고 해서, 네 마음과 영혼, 육을 기탁할 대상이 생겼다고 해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부탁을 잊어버리고, 피조물이 다해야 할 본분, 네 신분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양심과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는 짓이다. 지금 네 생활 상황을 떠나, 결혼 유무를 떠나, 창조주 앞에서의 네 신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네 종착지가 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네 기탁이 될 수 없다. 하나님만이 너에게 적합한 종착지를 줄 수 있고, 하나님만이 인류가 생존을 기탁할 수 있는 분이다. 이 사실은 언제까지나 변함없다. 잘 알겠느냐? (잘 알겠습니다.)

결혼이라는 주제는 여기까지 교제하기로 하자. 본인 생각이나 관점, 혹은 조금이라도 느끼는 바가 있다면 지금 얘기해도 좋다. (전에는 저도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혼은 한 사람의 종착지라고 믿어서, 상대가 일탈을 저지른다면 죽느니 사느니 하면서 이번 생을 더는 못 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비슷한 일을 겪은 형제자매들 얘기도 들었는데, 이런 일이 닥치면 다들 무척 괴로워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 교제를 듣고 나니 이 일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게 됐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 사악한 사회에서 사람은 외부 세계의 사람과 일, 사물의 유혹을 받아 쉽게 이 측면에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니, 그런 일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배우자를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결혼한 반려자는 저희 인생의 종착지가 아니며, 하나님만이 사람의 종착지이고, 하나님께 의지해야만 진정으로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새로운 인식을 얻었습니다.) 훌륭하구나. 우리가 교제한, 진리에 관계된 이 모든 관점과 태도는 사람이 그릇되고, 옳지 않고, 부정적인 온갖 사상 관점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준다. 그런 다음 상응하는 일을 만났을 때 사람이 버팀목이 되는 올바른 사상 관점을 지니고, 올바른 실행 길을 찾게 해 준다. 그릇된 길로 가지 않고, 더 이상 사탄의 미혹과 통제를 받지 않고, 또한 그 어떤 과격한 행동도 하지 않고, 범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하나님 안배에 순종하며 진정한 피조물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이 옳은 것이다. 그럼 오늘 교제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다. 다음에 보자!

2023년 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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