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0)
오늘은 지난번 예배 내용에 이어서 교제해 보자. 지난번 예배에서는 무엇을 교제했느냐? (지난번에는 하나님께서 주로 두 가지를 교제하셨습니다. 먼저 ‘인류가 이상과 바람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이 지금까지 발전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과 관련된 내용을 교제하셨고, 이어서 결혼에 대한 사람의 잘못된 생각과 관점, 그리고 결혼의 올바른 개념과 정의에 대해 교제하셨습니다.) 지난번에는 커다란 주제인 결혼에 대해 교제했다. 결혼은 모든 인류와 관계되고, 인류 발전사를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다. 이 주제는 사람의 일상생활에 관계되므로 모든 사람에게 무척 중요하다. 지난번에는 이 주제에 관계된 일부 내용을 교제했는데, 주로 결혼의 기원과 형성, 또 결혼 당사자 양측에 대한 하나님의 분부와 정함, 그리고 양측이 짊어지는 책임과 의무를 다루었다. 이 내용들을 주로 무엇에 근거해서 교제하였느냐? (성경 기록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다음 인류에게 결혼을 정해 준 말씀, 해당 구절을 근거로 교제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지난번 교제를 통해, 지난번 성경에서 봤던, 인류의 결혼을 두고 했던 하나님의 말과 일을 통해, 너희가 결혼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얻게 되지 않았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희는 아직 어려서 결혼에 대한 개념도 없고 경험도 없는데, 결혼을 정의하라고 하시니 좀 난감합니다.” 난감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난감하지 않다면, 결혼이라는 일을 어떻게 정의하겠느냐? 인류의 결혼에 대해 하나님이 한 말과 일을 근거로, 결혼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결혼에 대해서라면, 네가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지금 교제하는 이 내용은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네가 깨달아야 할 진리 중 하나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네가 결혼에 대한 경험이 있든 없든, 결혼에 관심이 있든 없든, 혹은 결혼에 대해 어떤 생각과 계획이 있었든 관계없다. 어쨌든 그것이 네 진리 추구와 관계된 일이라면 마땅히 그것을 인식해야 한다. 또 그것은 네가 잘 알아야 할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에 관계되고, 사람의 사상 관점에 관계되고, 사람의 진리 추구에 관계되고, 또한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서의 실행 원칙, 실행 길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가 결혼 경험이 있든 없든, 결혼에 관심이 있든 없든, 혹은 네 결혼 상황이 어떻든 관계없이, 진리를 추구해 구원에 이르고 싶다면, 결혼이라는 일에 대해서도 진리에 관계된 다른 그 어떤 일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인식, 올바른 사상 관점을 가져야 한다. 속으로 반발하거나, 색안경을 끼고 보거나, 모종의 관념을 가지고 대해서도 안 되고, 자신이 처한 배경이나 환경에 따라 대해서도 안 되고, 결혼에 대해 취사선택해서도 안 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잘못된 관점이다. 결혼도 다른 어떤 일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이 일을 대하는 관점과 입장, 각도와 관련이 있다. 네가 이 일을 대하는 사상 관점, 사물 보는 각도와 입장이 올바르고 진리에 부합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이 일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정의해야 한다. 이것은 다 진리에 관계된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올바르게 인식해야 하고, 거기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주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네가 그 안에 담긴 진리를 깨달아야만, 결혼이라는 일이 닥치거나 네 생활에서 결혼과 관계된 일을 만났을 때, 그 일을 올바른 사상 관점으로 마주하고, 올바른 입장과 각도로 바라볼 수 있다. 물론 결혼에 관계된 문제도 정확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저는 절대 결혼에 발을 들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네가 발을 들이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결혼에 대해서는 크고 작은, 혹은 옳고 그른 사상 관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또 생활하면서 결혼이라는 방면의 문제와 관련해서 사람이나 일을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대하고 처리하여 해결할 것이냐? 결혼에 관계된 그런 문제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해야 정확한 사상 관점, 정확한 입장, 정확한 실행 원칙을 가질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해야 하나님 마음에 합할 수 있겠느냐? 이는 네가 알아야 할 것, 또 알고 난 뒤 추구해야 할 것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아마 결혼이라는 일이 자기와 무관하다고 생각해서 귀담아듣지 않을 텐데, 그 관점이 맞느냐? (틀렸습니다.) 틀렸다. 어떤 주제를 교제하든 그것이 진리에 관계되고 진리 추구에 관계된 것이라면, 또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와 준칙에 관계된 것이라면 마땅히 받아들이고, 진지하고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그것은 어느 한 방면의 상식도, 지식도, 업무도 아닌, 한 방면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일에 대해, 주제로 다시 돌아가 교제를 계속해 보자. 결혼의 정의는 무엇이어야 하느냐? 우리가 지난번 교제했던,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정함과 안배, 그리고 결혼 당사자 양측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과 분부에 근거하면, 너희는 결혼의 개념과 정의가 모호하지 않고 아주 뚜렷하고 명확할 것이다. 결혼은 당연히 하나님의 정함과 안배에 따른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다. 결혼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으니, 하나님의 정함과 안배 아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해서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론상 결혼에 대한 이런 정의가 정확하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정확하다고 하느냐? 너희는 어떻게 그것이 정확하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 그것은 성경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거기서 흔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 기록에는 결혼의 내력이 명확하게 나와 있다. 그것이 결혼에 대한 정의다. 명확하게 제시된 결혼의 정의를 바탕으로 다시 한번 결혼 당사자들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 보도록 하자. 지난번 예배에서 읽은 성경 구절에 분명히 나와 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결혼 당사자 양측이 짊어져야 할 책임 중 가장 간단한 한 가지는 서로 동반하고 서로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여자에게 어떤 분부를 했느냐? (하나님은 또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자식을 낳을 때 고생을 하게 될 것이라. 너는 너의 남편을 사모하고 너의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창 3:16)) 그건 성경 원문에 나온 말이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말로 하면, 하나님이 여자에게 분부한 것은 바로 여자의 책임이다. 여자의 책임은 무엇이냐? 자녀를 낳아 기르고 부양하는 것, 또 자기 남편을 돌보고 사모하는 것, 이것이 여자에게 한 하나님의 분부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남자에게 분부한 책임은 무엇이냐? 남자는 한 집안의 주인으로 가정생활의 중대한 임무를 떠맡아야 한다. 힘을 들이고 땀 흘려서 집안을 돌보고 먹여 살려야 한다. 또한, 가족 구성원을 관리하는 중요한 임무도 있다. 자기 여자를 관리하고 자기 생활을 관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자와 남자에게 분배한 책임이다. 여자와 남자의 책임이 명확하고 뚜렷하다. 그렇지 않으냐? 이는 결혼의 정의와 형성, 그리고 결혼 당사자 양측이 져야 할 책임과 다해야 할 의무다. 이것이 바로 결혼 자체이자 결혼의 실제 내용이다. 우리가 얘기하는 결혼 방면의 내용에 무슨 부정적인 요소가 있느냐? (없습니다.) 부정적인 요소가 없다. 하나같이 가장 순수하고 올바르고, 진리와 사실에 가장 부합하고, 또한 하나님 말씀의 근거에 부합한다. 성경 기록을 근거로 했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일이 지금 사람들에게는 아주 뚜렷하고 명확해졌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전제를 깔거나 장황한 말로 결혼의 유래를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결혼의 정의도 분명히 알고, 결혼 당사자 양측이 짊어져야 할 책임과 의무도 뚜렷하고 명확히 알게 되었다. 뚜렷하고 명확히 알게 된 후 그것이 진리 추구에는 어떤 작용을 하겠느냐? 결혼의 정의와 형성, 당사자 양측의 책임을 알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냐? 즉, 이런 내용을 교제하는 것이 사람에게 어떤 효과를 내고, 어떤 작용을 하느냐? 쉽게 말해, 너희가 그런 내용을 들으면 어떤 점이 좋으냐? (저희에게 결혼이 닥쳤을 때, 혹은 결혼이라는 일을 대할 때 올바르고 진리에 부합하는, 사물 보는 관점을 가질 수 있고, 사악한 시류와 사탄이 주입한 사상에 영향을 받거나 오도되지 않게 됩니다.) 그것도 긍정적인 작용 중 하나다. 결혼의 정의와 형성, 결혼 당사자 양측의 책임을 교제하면 사람이 결혼을 대할 때 올바른 사상 관점을 지니게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올바른 사상 관점이 생겼을 때의 장점 및 긍정적 작용은 사람의 사상 의식에 올바른 결혼관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올바른 결혼관, 올바른 사상 관점이 생기면, 반대적이고 부정적이고 사악한 시류에 해당하는 사상 관점에 어느 정도 저항력과 면역력을 갖게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저항력과 면역력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최소한 세상과 사회로부터 비롯되는, 결혼과 관계된 사악한 사상 관점에 대해 분별이 생긴다. 분별이 생긴 다음에는 더 이상 세상의 사악한 시류의 그런 사상 관점으로 결혼을 대하지 않게 되고, 더 이상 그런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그런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너에게 좋은 점은 무엇이냐? 그건 바로 결혼에 대한 네 생각과 행동이 그런 사상 관점에 좌우되지 않고, 더 이상 그것으로 인해 네가 패괴되는 일도 없으며, 다시는 너에게 그런 사악한 사상 관점이 심어지는 일도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네가 사악한 세상 시류에 따라 결혼을 대하지 않게 되고, 사악한 시류에 사로잡히지 않게 된다. 그러면 너는 결혼이라는 일에서 굳게 설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의미에서 볼 때, 너는 결혼과 관련해서 사탄에게 속하고 세상에 속하는 일부 사상 관점이나 생각을 이미 내려놓은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결혼에 대해 정확한 정의가 생긴 후, 사람은 결혼에 대한 추구와 이상, 바람을 일부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된 것이냐? 결혼에 대한 추구와 이상, 바람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느냐? 아직 멀었다. 사람은 단지 결혼에 대해 정확한 정의와 개념만 가지게 되었고, 사상 면에서 결혼에 대해 초보적이고 기본적인 개념과 인식만 가지게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세상과 사회에서 유포하는 결혼에 관계된 각양각색의 사상 관점과 화제는 여전히 네 사상 관점에 영향을 주고, 결혼에 대한 네 생각, 심지어 행동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결혼에 대해 정확하게 정의했어도 사람은 여전히 결혼에 대한 추구와 이상, 바람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내려놓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제 결혼이라는 일에서 사람에게 생기는 여러 가지 추구와 이상, 바람에 대해 교제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상으로 결혼의 정의에 대한 교제는 일단락되었다. 이제는 결혼으로 해서 생겨나는 각종 추구와 이상, 바람을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지 교제하기로 하자. 먼저 결혼에 대한 사람의 온갖 환상에 관해 교제해 보자. 환상이라고 하면 사람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화면들이다. 이 화면들은 아직 사실로 나타나지 않았고, 단지 일상생활에서 혹은 사람이 마주하는 환경에서 일어나는 상상일 뿐이다. 이런 상상이 사람의 머릿속에서 그림이 되고 환영이 되고, 심지어 결혼에 대한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으로 변한다. 따라서 결혼에 대한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으려면 먼저 네 머리와 마음 깊은 곳에 심었던, 혹은 지금도 심어져 있는 온갖 환상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것이 너희가 결혼에 대한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즉,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그러면 먼저 결혼에 대한 환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얘기해 보자. 수백 년, 수천 년 전 사람들이 결혼에 대해 했던 말들은 지금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으므로 넘어가기로 하자. 근대 인류에게는 결혼과 관련해서 어떤 참신하고, 세련되고, 유행되고 주류가 된 말과 행사들이 있는지 살펴보자. 이런 것들은 너희에게 영향을 주어 마음 깊은 곳에서, 혹은 머릿속에서 결혼에 대한 여러 가지 환상을 끊임없이 만들어 냈다. 결혼에 대한 말들이 사회에서 먼저 유행했고, 그다음에는 각종 문학 작품에도 결혼에 대한 작가의 사상과 말이 등장했다. 이런 문학 작품은 드라마나 영화로 촬영되어 스크린에 옮겨졌는데, 이를 통해 결혼에 대한 인류의 온갖 말, 추구와 이상, 바람이 더욱 생동감 있게 연출되고, 그것들은 많든 적든, 음으로 양으로 계속해서 너희에게 주입되었다. 너희가 결혼에 대해 정확한 개념이 전혀 없을 때, 사회에서 생겨난 결혼에 대한 그런 각종 말이나 정보가 선입관으로 자리 잡고 너희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러고 나서 너희도 자신의 결혼이 어떻고 자신의 반쪽은 어떨 것이라는 환상을 품기 시작했다. 네가 그 정보들을 받아들인 경로가 드라마나 영화, 소설이든, 아니면 네 생활 범위, 네가 속한 그룹이든 그 어느 쪽을 막론하고, 그런 정보는 모두 사람에게서, 사회에서, 세상에서 온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모두 사악한 시류로부터 진화하고 파생되어 온 것이다. 물론 더 정확히는 사탄에게서 온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과정에서 너희가 결혼에 관해 어떤 사상 관점을 받아들였든, 어쨌든 사람은 결혼에 대한 각종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머릿속으로 결혼에 대해 끊임없이 환상을 품는다. 이런 환상은 모두 한 가지를 둘러싼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알겠느냐? (애정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유행하거나 주류가 되는 정보는 애정을 중심으로 결혼을 다룬다. 결혼이 행복한지는 애정이 있느냐,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유행하는 결혼에 대한 이런 말들, 사람의 사상, 영혼 깊숙이 침투한 것들은 주로 애정이다. 이런 말들이 사람 내면에 주입되어 사람은 결혼에 대한 다양한 환상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결혼 상대에 대한 자신의 요구는 무엇인지에 대한 환상이다. 특히 사회 곳곳의 정보는 모두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해야 진정한 애정이 있는 것이고, 애정이 있어야 결혼도 가능하고, 애정이 있는 결혼이야말로 아름답고 행복한 결혼이고, 애정 없는 결혼은 비도덕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도 전에 자신의 애정을 찾으며 결혼을 미리 준비해 놓고,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자신의 애정을 추구하고 실현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예전 사람들은 애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위 결혼은 자유라느니, 애정은 무죄라느니, 애정이 최고라느니 하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결혼, 연애, 애정이란 말도 꺼내기 부끄러워했다. 특히 이성에 관계된 경우 다들 쑥스러워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은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애정에 관해, 결혼에 관해 거리낌 없이 얘기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도 그렇게 얼굴 붉히거나 가슴 떨리는 일 없이 대범하게 애정과 결혼을 논하고 싶고, 나아가 자기가 추구하는 상대를 만나면 과감하게 고백하고, 마음을 보여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자기가 구애를 하거나 구애를 받는 온갖 장면을 상상하기도 하고, 자기가 사랑하고 추구하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상상하기도 한다. 여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상대를 백마 탄 왕자로 상상한다. 키는 적어도 180 이상이고, 유머러스하고, 교양 있고, 고학력에 집안도 좋고, 거기다 차도 있고, 집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고, 경제적 기반도 있으면 금상첨화다. 남자는 자신의 반쪽을 백설공주, 집안일을 안팎으로 다 잘하는 슈퍼우먼으로 상상하고, 심지어 자신의 반쪽이 집안 좋은 부잣집 딸이면 더욱 좋다고 상상한다. 그리고 둘이 결합해서 사람들에게 선남선녀, 환상의 커플, 천생연분 등으로 불리며 부러움을 자아내는 그런 커플이 되어, 서로 언성 높이거나 얼굴 붉히지도 않고, 무슨 일로 싸우지도 않으며, 서로 깊이 사랑해서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굳은 언약과 변치 않는 사랑으로 백년해로하며 영원히 서로 미워하지 않고, 서로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는 것 등등을 상상한다. 여자는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식장에 들어서서 목사의 축복 속에 서로 반지를 나눠 끼고, 아플 때도 가난할 때도 서로의 곁을 지키며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영원한 사랑을 서약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남자도 어느 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식장에 들어서서 목사의 축복 속에 반지를 나눠 끼고 서약하는 상상을 한다. 신부가 나중에 젊음과 미모를 잃더라도 그녀 곁을 지키겠다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선물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맹세하는 것 말이다. 남자든, 여자든 다 이렇게 상상하고 추구하며, 또한 이렇게 현실 생활 속에서 계속해서 결혼에 대한 각종 추구와 이상, 바람을 학습해 나간다. 동시에 내면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이런 환상들을 반복하며 어느 날 자신의 환상이 현실 생활에서 연출되어 그것이 더는 이상과 바람이 아닌 현실이 되기를 희망한다. 여자는 현대 생활의 영향과 사회에 넘쳐나는 온갖 소식과 정보의 영향으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되기를 바란다. 또 자기 소유의 다이아 반지를 끼는 게 소원이다. 1캐럿 이상에 품질도 최상이고 흠집 하나 없이 완벽한 다이아 반지를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가 끼워 주는 것, 이것이 결혼에 대한 여자의 환상이다. 여자는 첫째로 그런 결혼 형식에도 환상을 품고, 둘째로 결혼 생활에도 온갖 환상을 품는다.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연애할 때와 마찬가지로 결혼 생활에서도 자기를 깊이 사랑해 주기를 바라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행복하게 해 주고, 약속을 실현하고, 오래오래 영원히 서로의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셋째로는 연애 상대에게도 온갖 환상과 요구가 있다. 최소한 백마 탄 왕자는 되어야 하고, 백마 탄 왕자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흑마 탄 왕자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여자가 생각하는 이상형은 꼭 왕자급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토록 낭만적이고 멋진데, 평생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사람이 결혼에 대해 품은 환상의 근거는 사회와 대중, 혹은 온갖 정보, 각종 서적, 문학작품, 영화나 드라마에서 오는 것이다. 거기에 내면 깊은 곳의 사치스럽고도 개인의 기호에 부합하는 것들이 더해져 각양각색의 연애 대상, 각양각색의 이상형, 각양각색의 결혼 형식과 결혼 생활을 상상해 낸다. 결국, 사람의 온갖 환상은 모두 결혼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해석, 결혼에 대한 온갖 말들에 기반한다. 여자도 그렇고 남자도 마찬가지다. 결혼에 대해 남자가 가지는 여러 가지 추구는 결코 여성 못지않다. 남자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찾으려 한다. 정숙하고, 상냥하고, 착하고, 세심하고, 자기를 잘 챙겨 주는 사람, 게다가 작은 새처럼 남자에게 의지하고 자기만 바라보고 자기가 어떤 결함이나 단점이 있어도 싫어하지 않고 심지어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그가 낙담할 때든, 실의에 빠졌을 때든, 실패했을 때든, 손 내밀어 도와주고 붙잡아 주며 이렇게 말하는 사람 말이다. “자기야, 괜찮아. 내가 있잖아. 어떤 고비도 이겨 낼 수 있으니까 걱정 마. 언제까지라도 내가 곁에 있어 줄게.” 여자가 남자에게 다양한 요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 역시 여자에게 다양한 요구가 있다. 그러니 남자도 여자도 모두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반쪽을 찾는데, 짝을 찾는 근거는 바로 결혼에 대해 남녀가 가진 여러 가지 환상이다. 물론 남자는 더 많은 환상이 있다. 자기가 사회에서 자리를 잘 잡아서 사업을 이루고 경제 기반을 다지고 어느 정도 자본이 생긴다면 더 나은 짝, 자신의 지위와 신분에 어울리고, 자기 눈에 맞고 자기 취향에 맞는 짝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 요구에 부합하는 사람이라면, 그녀를 위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하고, 심지어 불구덩이에도 기꺼이 뛰어들려고 한다. 물론, 더 현실적인 방법으로 그녀에게 좋은 물건을 사 주면서 그 어떤 물질적 필요도 충족시켜 주려 한다. 차도 사 주고, 집도 사 주고, 다이아 반지도 사 주고, 명품 가방, 명품 옷도 사 준다. 거기다 조건이 되면 개인 유람선도 사고, 개인 비행기도 사서 사랑하는 여자를 데리고 바다로 나가 둘만의 세상에서 지내거나, 사랑하는 여자를 데리고 세계를 유람하며 세계의 유명한 산, 유명 관광지를 돌아다니려 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생활이냐! 여자는 결혼에 대한 온갖 환상을 위해 갖은 대가를 치르고, 남자도 마찬가지로 결혼에 대한 온갖 환상을 위해 분투하고 노력하고 있다. 결혼에 대한 환상이 어떻든 그 환상이 세상으로부터 왔다면, 결혼에 대한 패괴된 인류의 각종 이해와 말에서 왔다면, 혹은 세상과 패괴된 인류가 너에게 결혼에 대한 정보들을 주입했다면, 이런 결혼에 대한 각종 사상 관점은 많든 적든, 깊든 얕든 네 생활과 신앙에 영향을 주고, 네 인생관과 인생길에 영향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결혼은 성인이라면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고, 피할 수 없는 화제이기 때문이다. 네가 설령 이번 생에서 독신을 선택해서 결혼할 일이 없다고 해도 결혼에 대한 환상은 여전히 존재한다. 네가 설령 독신을 택한다 해도, 결혼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개념과 생각을 갖기 시작한 후로 너는 결혼에 대해 온갖 다양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이 환상은 네 사상을 점유할 뿐만 아니라 네 일상생활을 가득 채우고, 여러 가지 일을 대하는 네 사상 관점과 선택에 영향을 준다. 간단하게 말해, 한 여자가 연애 대상에 대한 기준이 있다면, 그게 성숙한 기준이든 아니든, 성립이 되든 안 되든 그녀는 이 기준으로 이성의 인성과 인품을 판단하고, 이성이 자기가 사귀고 싶어 하는 유형인지를 판단한다. 이 기준은 그녀가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기준과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녀가 좋아하는 타입의 남성은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 희고 말쑥한 장방형의 큰 얼굴에 말투는 세련되고, 지적이고, 매너가 좋은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의 연애관에 따라 이런 이성에게 호감이 가고, 상대적으로 이런 이성에게 끌린다. 따라서 생활 속에서 이런 이성이 자기의 연애 상대이든 아니든, 그녀는 그에게 분명 호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이성을 만나면 그의 인성이 좋든 나쁘든, 인품이 어떻든, 음험한 사람이든 아니든, 사악한 사람이든 아니든 다 나중 문제다. 이런 것은 그녀가 이성을 대하는 기준이 아니다. 그녀의 기준은 무엇이냐? 바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이다. 만약 상대방이 그녀의 배우자 선택 기준에 부합한다면, 설령 그 사람이 그녀가 배우자로 선택할 상대는 아니더라도 그녀가 어울리기 좋아하는 대상이 된다. 이 문제는 무엇을 말해 주느냐? 한 사람의 연애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연애 상대, 혹은 결혼 상대에 대한 기준은, 본인이 모든 이성을 바라보는 관점에 상당 부분 영향을 끼친다. 자신의 배우자 선택 기준에 부합하는 이성을 만났을 때는 그 사람의 어딜 봐도 맘에 들고, 목소리도 듣기 좋고, 언행을 봐도 마음이 편안하다. 설령 그가 자신이 연애하고자 하는 대상, 추구하고자 하는 대상이 아니라 해도, 어딜 봐도 맘에 든다. 이렇게 맘에 든 것이 문제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너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의 모든 게 다 좋아 보이고, 다 옳은 것 같고, 뭘 하든 다 좋아 보인다. 네가 그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하면서 점점 그에게 탄복하고 숭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탄복과 숭배는 어디서 오는 것이냐? 그 근원은 네가 연애 상대와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기준이다. 이 기준이 어느 정도는 네가 사람을 잘못 보게 만들 것이다. 더 정확히는 네가 한 이성을 대하는 준칙, 근거를 더욱 모호하게 바꿔 놓는다는 말이다. 그의 겉모습이 네 심미관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품이 어떤지, 그의 행동이 원칙에 부합하고 진리 원칙이 있는지,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하나님에게 참된 믿음과 순종이 있는지 등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너에게 아주 모호해지고, 너는 쉽게 감정에 지배되어 그 사람을 대하게 된다. 네가 그에게 호감이 있고, 또 그가 감정 면에서 네 기준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네 눈엔 좋아 보이고 훌륭해 보인다. 그래서 너는 그를 두둔하고 숭배하며, 심지어 그가 악한 일을 해도 분별하거나 폭로하지 못하고, 끊어 내지도 못한다. 그 원인이 무엇이냐? 바로 그 부분에서 감정이 작용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감정이 작용하면 원칙대로 일하기가 쉽겠느냐? 감정이 앞서면 원칙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일이 야기하는 결과가 심각하다고 하는 것이다. 네 연애 상대도 아니고, 너와 결혼할 상대도 아니지만, 그는 네 심미관에 부합하고, 감정적 필요에 부합한다. 이런 전제라면 너는 감정의 영향과 통제를 받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 사람을 대하고, 그 사람에게서 발생한 문제를 처리하고, 너 자신의 문제를 처리하기가 쉽지 않다. 감정이 일단 너를 지배하고 주도하게 되면, 너는 감정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진리 실행의 실제에 진입하기 힘들다. 내가 하는 이런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결혼에 대한 여러 가지 환상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네가 전혀 다른 세상, 다른 별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미성년자도 아니고, 정신 지체자나 바보는 더더욱 아니다. 너는 성인이고 성인의 생각을 가졌다. 그와 동시에 너도 모르게 사회에서 형성된 결혼에 대한 말들을 받아들인다. 즉, 사회나 사악한 인류에게서 온 결혼에 대한 각종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고 나면, 너는 자기도 모르게 연애 상대가 누구일지 상상하게 된다. 이 상상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바로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공허한 생각들이다. 우리가 지금 교제하고 폭로하는 내용에 근거하면, 주로 사회와 사악한 인류에게서 온 결혼에 대한 온갖 말들을 겨냥한 것이다. 너는 진리에 부합하는 올바른 결혼관이 없기 때문에 사회와 사악한 인류에게서 비롯된 결혼에 대한 각종 말에 영향을 받아 타락하고 패괴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너는 그걸 모르고,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너는 그것이 일종의 타락, 일종의 패괴임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고, 알게 모르게 그것이 모두 합리적이고 당연한 것이라고, 성인이 가져야 하는 생각이라고 여기게 된다. 너는 너무나 당연하게 그것을 자신의 정당한 요구, 정당한 필요, 성인이 가져야 할 정당한 생각으로 변모시킨다. 따라서 네가 처음에 이런 정보들을 받아들이면서부터 결혼에 대한 네 환상은 점점 높아지고 깊어지고, 동시에 결혼에 대해 갈수록 염치가 없어지거나,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너는 갈수록 자기도 모르게, 대담하게 네 연애 상대를 상상하고, 결혼의 다양한 시나리오와 여러 관계되는 일을 상상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회와 사악한 인류에게서 오는 결혼에 대한 온갖 말과 정보를 받아들일수록, 사람은 더 대담하고 거리낌 없이 자기 결혼을 상상하고, 연애 상대를 찾고 추구한다. 동시에 자기 연인이 연애 소설이나 드라마, 멜로 영화에서 묘사한 것처럼 무조건 자기를 사랑하고 죽어서도 변치 않기를 희망한다. 본인도 드라마나 연애 소설에서 얘기한 것처럼 자기 연인을 깊이 사랑하고 오래도록 변치 않기를 바란다. 어쨌든 이런 환상은 현실 생활에서 인성의 필요, 생활의 필요와는 괴리된다. 물론 인성의 본질과도 괴리된다. 그것은 현실 생활과 전혀 맞지 않고, 사람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느 일들처럼 상상에서 생겨난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생각일 뿐이다. 이런 생각이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안배에 부합하지 않는 이상, 사람은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추구해선 안 되는 그런 사상 관점을 내려놓아야 한다.
결혼에 대해 실제와 어긋난 그런 환상을 사람은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겠느냐? 연애나 결혼에 대한 자신의 사상 관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우선, 소위 애정관을 내려놓아야 하고, 오래도록 변치 않고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 사랑하겠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말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한평생을 끝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다시 태어나도 오래도록 변치 않겠다니, 오래도록이 몇 년이냐? 사람이 그때까지 살면 요괴가 되지 않겠느냐? 지금 생을 잘 보내고, 잘 이해하고, 명확히 알면 그것으로 훌륭하다. 결혼 생활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한 남자 혹은 한 여자가 해야 할 일을 잘하고,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고, 서로 붙잡아 주고 협조하며 한생을 함께한다면 그것으로 훌륭하다. 그게 바로 완벽하고도 정당한 결혼이다. 나머지 소위 애정이니, 굳은 언약이니, 다음 생이니 하는 것들은 다 쓸데없는 것들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운명으로 정한 결혼과 관계가 없고,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에게 하는 분부, 부탁과도 관계가 없다. 어떤 결혼도, 결혼의 전제가 무엇이고 남녀 각자의 조건이 어떻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어떤 재능이 있든, 어떤 사회적 지위와 배경을 가졌든, 또는 남녀가 잘 어울리는 한 쌍, 선남선녀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결혼이 첫눈에 반해서 성사되든 아니면 부모가 정해서 성사되든, 우연한 만남으로 성사되든 아니면 오랜 연애 끝에 성사되든 관계없이, 어떤 종류의 결혼이든 관계없이, 양쪽이 맺어져서 결혼 생활에 들어가면 그 결혼은 반드시 현실 생활로 돌아오고, 반드시 먹고사는 그런 현실 생활로 돌아오게 되는데, 어느 누구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결혼도, 애정이 있는 결혼이든 아니면 애정이 없는 결혼이든, 결국에는 일상생활로 돌아와야 한다. 예를 들어, 수도 요금, 전기 요금 낼 때가 되면 아내가 불평한다. “아휴, 요금이 또 올랐네. 월급 빼고 다 오른다니까. 물가가 이렇게 올라서야 어떻게 살라는 건지 원.” 원망은 원망이고 그래도 요금은 사용한 만큼 내야 하는 것이니 별수 있느냐? 요금을 내고 나면 덜 먹고 덜 써서 오른 가격만큼 아껴야 한다. 시장에서 할인하는 채소를 보고 남편이 말한다. “오늘은 단콩을 싸게 파니까 2주 치 넉넉히 먹을 수 있게 좀 많이 사 둬야지.” 아내가 말한다. “도대체 얼마나 사려고 그래요. 그렇게 많이 사면 다 먹기도 전에 상한단 말이에요. 게다가 냉장고에 다 들어가지도 않잖아요!” “안 들어가면 많이 먹으면 되잖아. 하루에 두 번 먹어. 맨날 비싼 것만 사려고 하지 말고.” 월급날 남편이 말한다. “이번 달에도 보너스 나왔어. 연말에 보너스 두둑이 받으면 여행이나 한번 다녀오자고. 다들 말리부니 발리니 하면서 여행 다니는데, 나도 당신 데리고 놀러 좀 다녀야지. 당신 기분 좀 내라고.” 과일 농사가 잘되자 부부가 또 의논한다. “작년엔 수확이 별로였는데, 올해는 과실이 커서 돈이 좀 되겠는데. 돈 들어오면 집 리모델링 좀 할까? 알루미늄 새시도 좀 큰 것으로 바꾸고, 현관문도 큰 철문으로 바꾸자고.” 겨울이 돼서 날씨가 추워지자 아내가 말한다. “이 솜저고리도 7, 8년쯤 입다 보니까 점점 얇아졌어요. 당신 월급 받으면 좀 덜 쓰고 내 솜저고리 살 돈 좀 남겨 줘요. 패딩 하나 사려면 못해도 3, 4백 위안, 5, 6백 위안은 한다고요.” “알았어. 돈 좀 남겨 뒀다가 당신 오리털 패딩 따뜻하고 좋은 걸로 하나 사 줄게.” “당신 것도 없으니까 내 거 살 때 같이 하나 사요.” “여유 있으면 사고, 안 그럼 나는 1년 더 버티지 뭐.” 남편이 말한다. “근처에 큰 식당 하나가 새로 들어왔대. 해산물이 없는 게 없다는데, 우리도 한번 가 볼까?” “그래요. 요즘은 좀 여유 있잖아요. 우리 형편이면 충분히 갈 만하죠.” 해산물 요리를 먹고 와서 기분도 좋고 행복해진 아내는 곰곰이 생각한다. ‘지금 사는 걸 보니까 시집은 제대로 왔구나. 해산물 요리도 다 먹고 말이야. 옆집 왕씨 부부는 해산물 요리 먹을 형편이 안 되던데. 요즘 정말 살맛 나네.’ 이런 것이 다 결혼 생활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아끼면서 지지고 볶으며 사는 것이다. 매일 정신없이 바쁜 직장 생활, 8시에 출근하려면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알람이 울린다. ‘정말 일어나기 싫지만 밥벌이해서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구나. 일어나야지.’ 겨우겨우 몸을 일으킨다. ‘다행히 지각은 면했으니까 보너스 깎일 일은 없군.’ 퇴근해서 집에 돌아온다. ‘오늘도 겨우 버텼어. 정말 녹록지 않구나! 언제면 직장에서 벗어날까?’ 급여를 받고 밥그릇을 지키려면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한다. 편안하게 지내려면,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또 본인도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려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다가 나이를 먹고 노년에 접어든 어느 날 아내가 말한다. “아이고, 영감, 내 흰머리 좀 봐요. 이젠 눈가에 잔주름도 있고 팔자 주름도 생겼어요. 나 늙어 보여요? 늙어서 보기 싫다고 다른 여자 찾아갈 거예요?” 남편이 대답한다. “그럴 리가 있나? 바보 같긴. 나랑 평생을 살았는데도 그렇게 모르겠어? 내가 그런 사람이야?” 아내는 자기가 늙었다고 남편이 싫어할까 봐 늘 걱정한다. 갈수록 수다 떠는 아내와 갈수록 말수가 없어지는 남편, 둘 사이의 대화는 갈수록 적어지고, 이제는 각자 TV만 보면서 서로 관심도 주지 않는다. 어느 날 아내가 말한다. “영감, 우리 그동안 싸우기도 많이 싸웠죠. 당신이랑 사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다음 생에는 당신 같은 남편이랑은 안 살래요. 밥 먹고 나서 식탁 한 번 안 치워 주고, 다 먹으면 앉아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당신 그 버릇은 평생 못 고쳤죠. 갈아입은 옷 자기 손으로 빨아 본 적도 없고, 맨날 내가 빨아서 챙겨 주잖아요. 나 죽으면 누가 그런 거 해 주나 보라고요.” 남편이 말한다. “흥, 당신 없으면 내가 못 살까 봐? 나랑 살겠다는 아가씨들이 줄을 섰어. 떨어지지도 않아.” 아내가 말한다. “이 양반이 허풍은. 그 지저분한 꼴 좀 봐요. 나 아니면 누가 당신이랑 살겠어요?” 남편이 말한다. “쳇, 발끈하기는. 밖에 가면 나 좋다는 사람 많아. 당신이나 날 무시하고 하찮게 생각하지.” 두 사람이 사는 게 어떠냐? 아내가 말한다. “어이구, 당신이랑 평생 살면서 기분 좋을 일도 없고, 무슨 좋은 추억이 없긴 해도 늙어서 생각해 보니까 지금 당신 곁을 떠나면 뭔가 허전할 거 같아요.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간다고 생각하니 서글프네요. 수다 떨 사람도 없고, 나 혼자 외롭게 지내긴 싫어요. 내가 당신보다 먼저 가야지. 당신 혼자 외롭게 살아 보라고요. 빨래해 주고 밥해 주는 사람도 없고, 챙겨 주는 사람도 없으면 내 생각이 간절할걸요. 쫓아다니는 아가씨들이 줄 섰다면서요? 나 죽으면 빨리 다른 사람 찾아요.” 남편이 말한다. “걱정 말라고. 내가 당신보다 오래 살 테니. 당신 가면 꼭 당신보다 좋은 사람 만날 거야.” 사실, 남편이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겠느냐? ‘당신 먼저 가. 당신 먼저 가면 나야 혼자 외로움을 견디면 되지. 차라리 내가 괴롭고 고생하면 했지 당신 고생하게 두진 않을 거야.’ 아내는 남편이 이것도 저것도 별로고, 이런저런 버릇이 문제라고 늘 불평해 대지만, 남편 버릇이 안 고쳐져도 그렇게 살면서 서서히 익숙해진다. 결국, 여자는 인정하고 남자는 참으면서 그렇게 평생을 살아간다. 결혼 생활이란 이런 것이다.
결혼해서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많고, 다툴 때도 많고, 아플 때도 있고, 궁핍해서 생활이 곤란할 때도 있다. 심지어 경사나 비극 등 온갖 일을 만날 때도 있다. 하지만 비바람을 함께 헤쳐 나간 두 사람에게 상대는 자기가 떠날 수 없는 짝이자 마지막에 눈을 감기 전에는 내려놓을 수 없는 짝이다. 짝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바로 반려자를 가리킨다. 남자는 여자를 평생 책임지고, 여자도 남자에게 평생 책임을 다한다. 여자는 남자의 일생을 동반하고, 남자도 여자의 일생을 동반한다. 누가 누구를 더 많이 동반하는지,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누가 더 크게 이바지하고 누구의 과오가 더 큰지, 나쁜 버릇은 누가 더 많은지,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누가 생활에서 주로 버팀목이 되고 주된 수입원이 되는지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누가 한 집안의 주인인지, 누가 ‘주’이고 누가 ‘부’인지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과연 누가 누구를 떠날 수 없는지, 남자가 여자를 떠날 수 없는 건지, 아니면 여자가 남자를 떠날 수 없는 건지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살면서 말다툼을 벌일 때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생활이다. 이것이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남녀의 정상적인 생활이고, 또 가장 정상적이고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인류의 생활 현상이다. 생활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인성의 여러 가지 결함과 떨어질 수 없고, 인성의 편집적 특성과도 떨어질 수 없고, 인성의 여러 가지 필요와는 더더욱 떨어질 수 없다. 물론 양심과 이성의 지배 아래서 인성으로 행하는 어떤 올바르거나 그릇된 선택, 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인 선택과도 떨어질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생활이다. 이는 가장 정상적인 생활이다. 그저 상대적으로 정당하고 규칙적인 생활 현상과 실제 상황일 뿐,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의 실제 상황과 생활 현상은 사람에게 어떤 사실을 알려 주느냐? 그것은 바로 결혼에 대해 실제와 어긋나는 각종 환상을 내려놓고, 결혼의 올바른 정의 및 하나님의 정함, 안배와 무관한 여러 가지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모두 사람이 내려놓아야 하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정상 인성의 생활과도 관계가 없고, 정상적인 사람이 생활에서 다해야 할 의무, 책임과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사회와 사악한 인류에게서 비롯된 결혼에 대한 각종 정의와 말들을 내려놓아야 하고, 특히 현실의 결혼 생활과 눈곱만큼도 관계가 없는 소위 애정을 내려놓아야 한다. 결혼은 평생의 맹약도 아니고, 평생의 굳은 언약도 아니며, 평생 서로에게 맹세한 약속을 실행하는 것도 아니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 안에서 마주하는 현실 생활이고, 남자와 여자가 현실 생활 속에서 필요로 하는 것, 현실 생활 속에서 나타내는 모습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결혼이라는 주제를 교제할 때 애정이나 굳은 언약, 오래도록 변치 말자는 약속, 상대에게 하는 맹세와 같은 내용을 빼고 무슨 얘기를 하려 하십니까?” 인성을 논하고 책임을 논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탁, 하나님의 분부에 따라 한 여자 혹은 한 남자가 해야 할 일을 잘하고, 한 여자 혹은 한 남자가 다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한 여자 혹은 한 남자가 짊어져야 할 의무와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그래야 네 의무, 네 책임, 혹은 네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교제하려는,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는 일은 정확히 어떻게 실행해야 하느냐? 사악한 인류, 사악한 시류에서 온 여러 가지 사상을 근거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 하나님이 결혼에 대해 한 말씀을 근거로 해서, 즉 하나님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 원칙이 정확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는 것, 이 주제는 이제 거의 다 교제한 것 아니냐? 대부분 이해되지 않았느냐? (이해했습니다.)
방금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는 일을 교제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만약 제가 독신을 원하지 않아서 연애를 하고 결혼 상대를 찾으려면,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실행해야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는 겁니까? 이 원칙을 어떻게 실행해야 합니까?” 이것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원칙,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원칙에 관계된 것이 아니냐? 세상이 너에게 주입한 배우자 선택 원칙은 무엇이냐? 백마 탄 왕자, 백설공주, 돈 많고 잘생긴 남자, 돈 많고 예쁜 여자, 제일 좋은 건 재벌 2세다. 이런 사람과 결혼하면 20년 치 고생이 단축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반드시 다이아 반지와 웨딩드레스를 사 줄 능력이 되고, 화려한 결혼식을 치를 능력이 되는 사람이어야 하고, 사업 마인드가 있어서 돈을 잘 버는 사람이거나 이미 경제적 기반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세상이 주입한 사상 관점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꼭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거야.” 그러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아니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꼭 널 사랑한다는 보장은 없어. 사랑은 서로 주고받는 거야.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도 널 사랑해야지. 그가 널 사랑한다면 절대 먼저 너를 버리거나 포기하는 일은 없어. 하지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널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느 날 갑자기 버림받게 될 거야.” 이 관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말해 보아라. 어떤 원칙에 따라 배우자를 선택해야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냐? 지금 너희가 갖춘 올바른 사상 관점에 따라 이 화제에 관해 얘기해 보아라. (배우자를 찾으려면 최소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 사람은 진리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에서 추구하는 바가 저와 같고, 서로 뜻이 맞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서로 뜻이 맞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니, 구체적인 선택 기준이구나. 누가 또 얘기해 보아라. (그 사람이 인성을 갖춘 사람인지, 결혼 생활과 가정에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는지도 봐야 합니다. 또 한 가지가 있는데, 결혼은 꼭 지금 상대를 찾고 싶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안배가 있으니 순종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구체적인 실행도 있고, 구체적인 사상 이론의 근거도 있구나. 순종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 일을 하나님에게 맡겨서 안배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동시에 속으로는 이 일에 대해 원칙이 있어야 한다. 또 누가 얘기해 보아라. (하나님, 제 관점도 저분들과 같습니다. 사탄이 주입한 결혼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내려놓고, 서로 뜻이 맞고 인성과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본분에 마음을 쓰고 하나님 주재에 순종하고 하나님 안배를 기다려야 합니다.) 다이아 반지를 사 줄 형편이 안 된다면, 너는 그 사람을 선택하겠느냐? (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이아 반지를 못 사 준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수중에 돈이 좀 있어서 1캐럿짜리 다이아 반지를 사 줄 수 있는데도 0.3캐럿짜리 반지를 사 준다면 그래도 좋으냐? (이 부분에서는 그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요구하지 않는 것도 좋다. 돈을 남겨 두었다가 나중에 쓰겠다는 것은 길게 내다보는 것이다. 배우자를 만나기도 전에 살림 생각부터 하니 이 얼마나 소박하냐! 누가 또 말해 보아라. (하나님, 제가 생각하는 것은 우선 자신의 그런 세상적인 배우자 선택 기준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백마 탄 왕자나 돈 많고 잘생긴 사람, 혹은 낭만적인 사람을 만나려는 환상은 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을 내려놓고 올바른 관점으로 결혼을 대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순종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저와 뜻이 맞아야지, 세속적인 관점으로 자기를 챙겨 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인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가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본분을 이행하러 나가고 늘 집에 없다면 어떻겠느냐? 가정생활을 너 혼자 꾸려야 하는데, 어느 날 가스가 다 떨어져서 너 혼자 가스통을 메고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면 어떡하겠느냐? (그러면 저 혼자 옮기겠습니다.) 혼자서 옮기지 못하겠으면 시급 알바를 부르면 된다. (형제자매들에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그것도 방법이다. 그런데 1, 2년이 지나도, 3, 5년이 지나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화가 나지 않겠느냐? ‘이건 완전 생과부 아냐? 그 사람이랑 결혼한 게 다 무슨 소용이야? 결혼 안 한 거나 똑같아. 지금도 나 혼자 살고 있잖아. 뭐든 다 나 혼자 해결해야 하고. 이런 사람과 결혼하다니 정말 재수가 없구나!’ 이렇게 생각해서야 되겠느냐? (안 됩니다. 남편은 본분을 이행하고 있고, 그건 정의로운 사업입니다. 그러니 불쾌한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잘 생각했다. 현실 생활에서 이 모든 걸 이겨 낼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만난 사람이 특히나 올곧고, 평소에 웃거나 말하지도 않고, 낭만도 없어서 예쁜 옷 하나 사 준 적 없고, 꽃다발 한 번 안겨 준 적 없고, “사랑해.” 같은 말은 더더욱 해 본 적이 없다면, 너는 속으로 그가 널 사랑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정말 좋아서 살면서 너를 잘 챙기고 보살펴 주는데, 단지 그런 말을 할 줄 모르고, 그런 낭만적인 행동도 할 줄 모르고, 심지어 네가 울적할 때 달래 주거나 위로할 줄 모르는 것이라면, 속으로 그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들겠느냐? (하나님을 믿기 전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원망하겠지만,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니 그가 그런 말이나 그런 낭만적인 행동을 하고 말고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모두 세상 사람들의 사물 보는 관점에 해당하지, 정상 인성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원망하지 않게 됩니다.) 원망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지금은 네가 그 상황에 처해 있지 않으니 본인이 그런 환경에 놓였을 때의 심정이 어떤 건지, 기분이 어떻게 요동치고 어떻게 변화하는지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본인이 하나님을 믿는 이상 상대방에게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 되고,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상대방에게 원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건 자신이 바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느냐? 그렇게 행동하기가 쉬우냐? (자신의 기호를 버리고 자신의 세속적인 관점을 버려야 그나마 내려놓기가 수월할 것입니다.) 이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려 주마. 남자, 여자는 결혼 생활에서 이런 문제를 마주할 것이고, 그런 생각, 그런 기분을 가질 것이고, 또한 그런 것이 필요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있다. 네가 선택한 상대가 네 이상형이라면, 그 일은 하나님이 네게 안배해 준 것이라는 얘기는 접어 두자. 본인이 선택한 사람이니 너는 그의 모든 면이 만족스럽다. 특히 그가 너와 뜻이 맞아서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하는 일이 모두 정의롭다면, 너는 이성적으로 그를 대해야 한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하고, 그가 너의 감정에 무심한 것도 허용하고, 심지어 그가 네 존재에 대해 무심한 것도 허용해야 한다. 이것이 이론적으로 네가 해야 할 것이다. 그 밖에도 특별한 상황, 혹은 특별한 일로 인해 네게 그런 필요가 생기거나 그런 기분이 들면 너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해야 한다. 기도했다고 해서 그런 것들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느냐? 그렇지 않다. 어디까지나 사람은 정상 인성으로 살아가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생각은 사람에게 여러 가지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그 정서가 옳은지 그른지는 잠시 접어 두기로 하자. 지금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바로 그 정서를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번에 내려놓더라도 어떤 객관적인 상황에서 그게 또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것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론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너는 그런 추구, 혹은 그런 필요를 이미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성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 사람은 다양한 연령대에서, 다양한 정도로, 많든 적든 그런 필요가 있고, 그런 정서가 있다. 이런 실제 상황을 잘 알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이번에는 내려놓더라도, 혹은 그런 정서가 그렇게 심하지 않아서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다음번에는 또 분명 그런 정서가 생길 것이다. 그러면 너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 하느냐? 거기에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넘겨도 된다. ‘나도 참, 아직도 이쪽 성품이 안 변했구나.’라고 하는데, 그건 무슨 성품이 아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정서일 뿐 네 성품과는 관계없으니 호들갑 떨 필요 없다. ‘어휴, 아직도 내가 왜 이럴까? 난 진리를 추구하는데, 어쩜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지? 이거 정말 큰일이네!’ 호들갑 떨지 않아도 된다. 그건 정상 인성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의 정서가 표현된 것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것은 정서를 처리하는 일종의 태도다. 또한, 그것이 네 정상적 생활의 질서와 규칙에 지장을 주지 않고, 네 영 생활과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 된다. 예를 들어, 남편(아내)이 본분 이행에 바빠서 오랜 시간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고, 같이 대화할 시간도 없었다고 해 보자.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자매 부부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너는 갑자기 마음이 울적해졌다. ‘다른 부부는 저렇게 같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행복하고, 깨가 쏟아지는데, 우리 집 형제는 어쩜 저렇게 무심할까? 어떻게 된 게 요즘 어떠냐, 잘 지내느냐는 안부 인사 한마디도 없네. 어쩜 나한테 관심도 없냐고. 날 아끼고 사랑할 줄 모르는구나.’ 이런 기분이 들다가도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어휴, 이렇게 기분 상하면 안 되겠지.’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알지만 속으로 슬그머니 화가 나서 혼자서 신경전을 벌인다. ‘나도 모른 체할 거야. 먼저 연락 올 때까지 기다리겠어.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화를 낼 거야. 몇 년째 부부로 살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못 만났는데도 보고 싶단 말 한마디 없구나. 대체 내가 보고 싶긴 한 걸까? 날 모른 체하면 나도 모른 체할 거라고!’ 혼자서 신경전을 벌이면서 이런 기분으로 사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이렇게 화가 나고 우울할 때, 정상적으로 먹고 자고,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예배 드리고 본분을 이행하고, 형제자매들과 정상적으로 지낼 수만 있다면, 그런 정서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속으로 그냥 원하는 대로 생각해라. 생각이야 어떻든 네 이성이 정상적이고 본분을 정상적으로 진행하면 된다. 강제로 그런 정서를 억누르지 않아도 되고, 억지로 하나님께 징계와 채찍질을 달라고 기도하거나 무슨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더더욱 없다. 호들갑 떨지 않아도 이런 정서는 조금 지나면 사라진다. 만약 남편이 너무 보고 싶으면 전화해서 안부도 묻고, 둘이 마음을 나누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그런 일시적인 정서와 서먹함은 사라지지 않겠느냐? 사실 그가 네게 뭘 해 주지 않아도 된다. 가끔 드는 일시적인 기분일 수도 있고,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일시적으로 외롭거나, 일시적으로 서글프거나 언짢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럴 때면 그에게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그러면 남편도 잘 보내고 있고 역시 전처럼 너를 아끼고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단지 사역이 바쁘거나 남자들이 비교적 세심하지 못해서, 정신없이 본분을 이행하느라 시간이 가는 것도 몰라서 연락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남편이 바쁘게 보내고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냐? 그건 네가 바라 마지않던 일이 아니냐? 그가 악행을 저지르고 방해와 교란을 일삼다가 제명되기라도 한다면 그건 또 걱정거리가 아니겠느냐? 그가 지금 모든 게 정상이고 모든 게 전과 같으면 네가 안심이 되지 않겠느냐? 뭘 더 바라느냐?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전화를 걸어 두 사람이 몇 마디라도 주고받으면, 이방인들이 말하듯 내면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어느 정도 풀면, 이 문제는 해결된 것 아니냐? 어려울 게 뭐 있느냐? 전화를 걸어 서로 관심을 표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정죄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둘은 합법적인 부부다. 전화로 말 몇 마디 주고받고, 서로 그리움을 토로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고, 인지상정이다. 이것은 인성의 범위 내에서 해야 할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결혼을 운명으로 정해 준 것에는 이런 게 있다. 그건 바로 서로 동반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붙잡아 주는 것이다. 그가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 네가 그를 대신해서 그 책임을 다하면 되는 것 아니냐? 이건 간단한 일이고,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실행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 마음속에 온갖 정서가 싹틀 필요가 있느냐? 그럴 필요가 없다. 아주 간단하게 실행할 수 있다.
아까 내가 제시했던,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문제에 대해 너희는 각자 자기 생각을 얘기해 보았다.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으려면 우선은 신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안배와 정함에 순종해야 한다. 사람은 결혼에 대해, 자신의 반쪽이 과연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주관적이고도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그 어떤 환상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로 하나님의 안배와 정함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너에게 가장 어울리는 사람을 예비해 준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순종하는 태도는 필요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다음으로는, 사회의 사악한 시류로부터 주입된 배우자 선택 기준을 내려놓고 올바른 배우자 선택 기준을 확립해야 한다. 즉, 본인의 반쪽이 최소한 자기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자기와 같은 길을 가야 한다. 이것이 큰 방향이다. 또한, 결혼 생활에서 남자 혹은 여자의 책임을 다하고 한쪽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방면은 어떻게 봐야 하느냐? 그 사람의 인품이 어떤지, 책임감이 있고 양심이 있는지 봐야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양심이 있는지, 인성이 있는지는 어떻게 아느냐? 같이 지내보지 않으면 그의 인성이 어떤지 알 방법이 없다. 같이 지내더라도 시간이 짧으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가 본분과 하나님의 부탁, 하나님 집 사역을 책임감 가지고 대하는지를 봐야 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지, 본분 이행에 충성심이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이는 한 사람의 인품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만약 인품이 아주 올곧아서 하나님 집에서 맡긴 사역을 대할 때 특히 마음과 책임을 다하고, 엄격하고 진지하고, 빈틈이나 소홀한 구석이 조금도 없고, 전혀 태만하지 않다면, 또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이 무슨 말을 하든 진지하고 자세히 들어서 이해하고, 알아듣고는 바로 실행에 옮긴다면, 이런 사람은 꼭 자질이 높지 않더라도 최소한 본분과 교회 사역을 대충 건성으로 대하지 않고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본분을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대한다면, 분명 너와 한마음 한뜻으로 지낼 수 있고, 너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다. 이런 사람의 인품은 검증을 이겨 낼 수 있다. 설령 네가 늙고 병들고 추해지더라도, 혹은 네게 어떤 버릇이나 결함이 있더라도 그는 이런 것들을 올바르게 대하고 너를 포용할 수 있다. 또한, 최선을 다해 너와 가정을 지키고, 너를 보호해 줄 수 있다. 너에게 안정적인 생활을 선사하고 네가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이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의 결혼 생활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다. 그 사람 덕분에 풍족하고 사치스럽고 낭만적으로 살거나 감정적으로 혹은 다른 면에서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너는 안심할 수 있고, 그가 있어서 생활이 안정적이고, 별다른 위험이나 불안이 없다고 느낄 수 있다. 그를 보면 그 사람이 20, 30년 후, 심지어 노년에 이르러 어떻게 생활할지 알 수 있다. 이런 사람이 네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조금 높은 기준이라서 지금 사람들 중에서 찾기가 쉽지는 않다. 그렇지 않으냐? 한 사람의 인품이 어떤지, 결혼 생활에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려면 그 사람이 본분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된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또 하나는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보면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적어도 인성과 윤리 도덕을 상실한 짓은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너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눈에 뵈는 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혹은 인성이 흉악하고 간사하고 거만해서 마음에 하나님도 없고, 다른 사람도 안중에 없다면, 사역과 본분을 대할 때, 심지어 하나님의 부탁과 하나님 집의 중대한 일을 대할 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멋대로 처리하고, 함부로 행동한다면, 신중함은 눈 씻고 찾아보려야 볼 수도 없고, 원칙도 구하지 않고, 특히 제물을 대할 때 거리낌 없이 독차지하고 유용하는 등 겁대가리를 상실했다면, 그런 사람은 절대 만나지 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는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 그가 지금은 너에게 달콤한 말로 굳게 맹세하겠지만 어느 날 기분이 나쁘거나 네가 그의 필요를 채워 주지 못하고, 그의 눈에 더 이상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곧바로 널 사랑하지 않는다느니, 너에게 아무 느낌이 없다느니 하는 말도 할 수 있고, 갑자기 너를 버릴 수도 있다. 아직 이혼도 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밖에서 함부로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닐 수도 있다. 이게 전부 가능한 일이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너를 버릴 수 있고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인간이다. 그런 사람은 네가 평생을 맡길 가치가 없다. 네가 그런 사람을 연인이나 남자 친구, 배우자감으로 만났으면 정말 큰일이다. 설령 키 크고 돈 많고 잘생기고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또 널 지켜 주고 보살펴 준다 해도, 겉으로 볼 때 남자 친구로나 남편으로나 충분히 합격이라고 해도,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네 배우자감이 아니다. 만약 그에게 반해서 그와 연애하고 결혼한다면, 그는 네 평생의 악몽이자 재난이 될 것이다. 너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진리를 추구하니까 두렵지 않아.” 하지만 너는 이미 악마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가 하나님을 증오하고 대적하면서 네가 하나님을 못 믿게 갖은 방법으로 교란한다면 견딜 수 있겠느냐? 네가 가진 그만한 분량과 신심으로는 그의 괴롭힘을 이겨 내지 못한다. 단 며칠이면 너는 그의 괴롭힘에 굴복해서 용서를 빌고, 하나님을 믿지 못해 신심을 잃어버린다. 네 머릿속은 온통 은혜와 원한, 애증으로 가득해서 마치 분쇄기에 던져진 고기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사람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안에 철저하게 함몰되어 결국 마귀와 같이 망하고, 네 인생은 끝이 난다.
한 사람이 결혼에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방금 두 가지 기준을 교제해 보았다. 기억하고 있느냐?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는 모두 사람의 인품에 관계된다. 하나는 그가 본분을 진지하고 책임 있게 이행하는지, 교회 사역과 하나님 집 이익을 지킬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겉으로 봐서는 간파하기 힘들 수도 있다. 아마 지위를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혹은 지위가 있을 때라면 그도 본분을 이행해서 교회 사역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위가 없어지면 그는 어떻게 되겠느냐? 네가 아직 잘 모르니, 이때는 그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하지만 그가 지위를 잃은 다음 행패를 부리고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며 하나님을 욕하고 모독할 때면 너는 그에게 분별이 생길 것이다. ‘어머나, 저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구나. 다행히 때마침 정체를 드러냈네. 안 그랬으면 결혼 상대로 선택할 뻔했지 뭐야.’ 보아라. 배우자를 선택하는 또 하나의 기준,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도 무척 중요하다. 이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보고 판단한다면 결혼의 악몽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이 두 가지 기준이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이제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어떤 여자는 돈에 욕심이 많았는데, 남자랑 연애할 때 무척 상냥하고 세상 물정을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 귀여운 여자야. 새처럼 맨날 내 주위를 맴돌면서 떨어지질 않아. 남자가 여자에게서 바라는 꿈과 목표에 완벽하게 들어맞는군. 남자에게는 상냥한 말투에다 남자를 의지하면서 존재감을 높여 주는 이런 여자가 필요해. 이런 여자가 날 그리워하고 함께해 준다면 정말 행복할 거야.’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 그 여자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리를 잘 추구하지 않고, 본분 이행 얘기만 나오면 시간 없다는 핑계만 대고, 피곤해서 고생하는 게 싫다고만 한다. 집에서는 밥도 안 하고, 청소도 안 하고 TV만 본다. 누가 명품 가방을 사고, 호화 주택에 살고, 좋은 차 사는 것을 보면 그 집 남자는 능력도 좋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평소에 돈을 물 쓰듯 해서 금은방, 액세서리 가게, 사치품 가게만 가면 돈을 못 써서 안달이고, 좋은 것만 사려 한다. 너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원래는 정말 귀여운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어쩌다 이런 여자가 된 거지?’ 봐라, 변하지 않았느냐? 처음에 너랑 연애할 때는 본분도 이행할 수 있었고, 고생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불과했고, 막상 결혼하고 나니 그게 아니다. 네가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자 그녀는 너를 원망한다. “왜 돈 벌러 나가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본분 이행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하나님 믿으면 밥이 나와요? 하나님 믿으면 돈 많이 벌 수 있나요?” 이렇게 불신의 말이 튀어나오는데, 그렇다면 이 여자는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녀는 지금껏 본분을 이행하려 한 적도 없고,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는 그런 일들도 마음에 없었다. 결국, 대역무도한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속으로 무슨 생각만 하고 있느냐? (먹고 입고 즐기는 것입니다.) 오로지 금전이나 육적인 즐거움밖에는 없다. 그것은 돈 욕심이 많은 것이고 세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녀와 결혼하면 그녀는 네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가로막고, 본분을 포기하고 세상을 추구하도록 부추길 것이다.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고 싶어 하면서도 그녀를 따른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 네가 만약 그녀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녀는 너와 다툼을 벌이고 이혼할 것이다. 이혼한 다음 배우자 없이 혼자 산다면 견딜 수 있겠느냐? 처음부터 혼자였다면 그래도 괜찮다. 하지만 지금 몇 년째 배우자와 함께 살아서 둘이 사는 생활에 익숙해졌는데, 졸지에 이혼해서 상대가 없어지면 견딜 수 있겠느냐? 이겨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어느 방면이든, 생활하는 것도 그렇고 감정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배우자가 필요해서 이겨 내기가 힘들다. 네 생활이 원래 방식에서 다른 방식으로 달라지면, 원래의 네 생활 규칙, 생활 리듬, 생활 방식은 철저하게 교란된다. 이 결혼은 어떠냐? 너에게 가져다준 것이 무엇이냐? 행복이냐, 재난이냐? (재난입니다.) 재난이다. 그러니까 네가 만약 사람을 볼 줄 모르고 사람을 판단할 때 정확한 원칙이 없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면, 될 수 있는 한 아무렇게나 연애하는 것을 삼가고, 가급적 연애하고 결혼하고 결혼 생활에 들어가려는 이런 생각과 계획을 갖지 마라. 지금 이 세계의 사악한 시류는 사람에게 너무나 커다란 유혹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수많은 시험에 직면하고 있다. 누구나 생활에서 온갖 시험을 만나는데 이겨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네가 설령 진리를 추구한다고 해도 이겨 내기가 쉽지 않다. 만약 진리 추구를 통해 진리를 깨닫고 얻는다면 이겨 낼 수 있겠지만, 진리를 깨닫고 얻기 전이라면 시험은 네게 언제까지나 시험이고 언제까지나 위험한 것이다. 더군다나 너희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또 하나 있으니 바로 사람을 볼 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의 본질을 간파할 줄 모르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문제다. 너희는 단지 무엇을 볼 줄 아느냐? 남자는 단지 이 여자가 예쁘게 생겼는지, 대학을 나왔는지, 집에 돈이 있는지, 잘 꾸밀 줄 아는지, 낭만을 아는지, 분위기가 있는지를 보고, 더 세부적으로는 그녀가 현모양처인지, 미래에 자녀를 잘 교육할 수 있을지, 가정을 잘 꾸려 나갈 수 있을지를 알아볼 뿐이다. 기껏해야 그런 것을 볼 정도다. 여자는 남자의 무엇을 보느냐? 이 남자가 낭만을 아는지, 능력이 있는지, 부를 이루어 집안을 일으킬 수 있을지, 가난한 팔자인지 부유한 팔자인지, 세상을 잘 살아갈 수완이 있는지를 본다. 좀 더 본다면 이 남자가 고생을 잘 견디는지, 살면서 집안을 잘 이끌지, 이 남자와 살면 잘 먹고 잘 입을 수 있을지, 어떤 집안인지, 부유한 집안인지, 집 있고 차 있는 집인지, 기업을 소유한 집인지, 장사하는지 아니면 농사짓거나 직장을 다니는지, 현재 집안의 경제 상황은 어떤지, 부모가 결혼 자금을 마련해 뒀는지, 고작해야 이 정도만 파악할 수 있다. 당사자의 인성 본질이 어떤지, 하나님을 믿는 길에 대한 선택이 어떨지를 간파할 수 있느냐? (간파할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지는 않을지, 악인인지 아닌지, 그의 인품이 드러내고 나타내는 모습을 종합해 볼 때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인지, 그가 진리 추구의 길을 갈 수 있을지, 구원받을 수 있을지, 네가 그와 결혼하면 부부가 나란히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 너는 꿰뚫어 볼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왜 꼭 꿰뚫어 봐야 합니까? 세상에 결혼한 그 많은 사람이 꿰뚫어 보지 못해도 다들 잘 살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이 결혼이라는 일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좋은 사람, 착실하게 사는 사람을 만나 평생을 같이 보내면서 큰 굴곡 없이 평탄하게 살고 크게 고생하지만 않으면 그래도 괜찮은 삶이고 괜찮은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을 꿰뚫어 보지 못한 일부는 그저 외모나 지위만 중시하다가, 상대에게 낚여서 결혼한 뒤에야 그 사람이 악인이고 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 사람과 같이 사는 삶은 하루가 일 년 같다. 여자는 눈에 눈물 마를 날이 없고, 남자도 속아서 피해가 막심하다. 그러다 결국 몇 년 후 이혼하게 된다. 어떤 부부는 서너 살 혹은 열 살쯤 된 아이가 있어도 이혼하고, 심지어 어떤 부부는 손자 손녀까지 있는데도 같이 지내지 못해 이혼한다. 이런 사람들이 결국 뭐라고 하겠느냐? ‘결혼은 무덤’이라느니, ‘결혼은 화장장’이라는 소리를 한다. 그렇다면 이런 결과가 빚어진 것은 남자 쪽 잘못이냐, 아니면 여자 쪽 잘못이냐? 모두가 잘못이다. 양쪽 다 잘한 게 없다. 그들은 결혼의 본질이 무엇이고 결혼 생활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른다. 결혼의 본질은 바로 서로가 책임을 다하고, 현실 생활로 들어가 서로 붙들어 주는 것이다. 이때는 부부 양쪽의 인성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결과적으로 행복하고 평온하게 마지막까지 갈 수 있다. 그렇다면 결혼 생활의 본질은 무엇이냐? 역시 부부 양쪽의 인성에 기반을 두어야 걱정 없고, 안정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또 양쪽 모두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부부가 나란히 손잡고 마지막까지 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부부가 나란히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해도, 부부가 결국 마지막까지 함께하려면 둘 다 최소한 양심과 이성이 있어야 하고, 인성이 어느 수준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교제하니, 너희는 결혼에 대해 신심이 더 생겼느냐, 아니면 신심이 더 없어졌느냐, 아니면 올바른 태도와 관점이 생겼느냐? (올바른 태도와 관점이 생겼습니다.) 신심이 더 생겼다거나 더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은 결혼을 포기하거나 거부하라는 말이 아니다. 올바르고 이성적인 태도로 이 일을 대하라는 것이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일을 생각하고 대하고 해결하라는 뜻이지, 결혼이라는 일은 생각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생각하지 않는다고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올바르고 정확한 사상 관점을 갖추는 것이 바로 진정으로 내려놓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교제를 통해 너희는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일부 내려놓게 되었느냐? (네.) 너희는 결혼이 더 두려워졌느냐, 아니면 결혼을 더 갈망하게 되었느냐? 사실 둘 다 아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갈망할 필요도 없다. 네가 독신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난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싶어. 당분간 결혼은 생각하지 않을 거야. 결혼에 대해 아무 계획이 없어. 그러니 결혼이라는 일은 마음속에 공백으로 두고 싶고, 그냥 백지로 놔두고 싶어.” 이런 관점은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교제해 주시는 이쪽 방면의 진리는 저희가 갖춰야 할 필요가 있고, 저희가 깨닫고 실행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도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원칙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 결혼 생각이 있든 없든 이쪽 방면의 진리를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맞느냐? (맞습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으냐? “저희는 독신인데 이방 세상에서는 독신을 귀족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집에서는 저희 같은 독신은 모두 성결하고, 결혼한 사람들은 불결하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으냐? 결혼에 대한 일부 기혼자들의 인식에는 늘 잘못된 부분이 있다. 그들은 결혼하면 생각이 결혼 전만큼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하고 깨끗하지 않고, 일단 결혼하면 생각이 복잡해진다고 생각한다. 특히 결혼한 사람은 이성과 관계한 이상 더는 성결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인 후 배우자에게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난 하나님 사역을 받아들였으니 오늘부터 성결을 추구해야 해. 당신과 같이 잘 수 없으니 당신 혼자 자. 난 다른 방에 가서 잘게.” 그때부터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간다. 두 사람이 잠은 따로 자면서 생활은 함께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일종 육체의 성결이다. 이것은 결혼에 대한 일종의 오해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 오해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느냐? 일부 결혼한 사람들은 이성과 관계하면 성결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곧 이성과 관계하지 않고 결혼 생활에서 물러나 결혼 생활을 청산한다면 성결해진다는 뜻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 성결해진다면, 결혼하지 않으면 더 성결하지 않겠느냐? 이런 치우친 이해로 인해 생긴 사람의 일부 선택, 혹은 행동은 배우자의 몰이해와 분노를 자아낸다. 불신자 남편이나 아내는 오해한 나머지 신앙에 반감을 품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너희가 볼 때, ‘성결’을 추구하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우선은 생각에 문제가 있다. 그의 생각에 어떤 문제가 생겼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우선, 결혼에 대해 그는 치우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 성결함과 불결함에 대한 그의 정의와 이해가 치우쳤다. 그는 이성과 관계하지 않는 것을 성결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불결함은 무엇이냐? 성결함은 무엇이냐? 성결함은 패괴 성품이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냐? 사람이 진리를 얻고 성품이 변화하면 패괴 성품이 사라진다. 그럼 이성과 관계하지 않으면 패괴 성품이 사라지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은 이성과 관계를 맺어서 생겨난 것이냐? (아닙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네가 결혼해서 이성과 관계를 가졌어도 네 패괴 성품은 더 심해지지 않았고, 원래와 마찬가지다. 네가 결혼하지 않고 이성과 관계하지 않았다고 해서 패괴 성품이 없느냐? 패괴 성품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니 남자건 여자건 패괴 성품이 있는지 없는지는 결혼 상황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고, 그가 결혼하고 이성과 관계했는지를 근거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과 행동을 보이는 사람은 결혼에 대해 왜 이런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되었느냐? 왜 이런 행동이 생겼느냐? 이 문제는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해결할 수 있느냐? 한 사람이 이성과 접촉하고 이성과 관계하면 불결해지고 패괴가 심해지느냐?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하나님이 정한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잘못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이 문제가 생겨난 근원이 무엇이냐? 그 근원을 해부하고 인식하면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너희도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 모두 결혼에 대해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생겨난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 (무엇이 성결함이고 무엇이 불결함인지를 사람은 잘 모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결함이고 불결함인지 잘 모르는 근원은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을 순수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방면에서 하나님 말씀을 순수하게 이해하지 못하느냐? (결혼은 사람이 인생에서 정상적으로 체험해야 하는 일이자, 하나님이 사람에게 운명으로 정하신 일입니다. 사람은 결혼해서 이성과 관계하는 것을 성결함과 연결 짓지만, 사실 성결함은 패괴 성품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지 결혼 여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성당의 수녀들을 보면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모르기에 평생 결혼하지 않더라도 성결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패괴 성품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성결함과 불결함의 구분이 결혼 여부와 관계가 있느냐? (관계없습니다.) 관계가 없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많은 증거가 있다. 예를 들어, 정신지체자나 백치, 정신병자, 수녀, 비구니, 승려는 다 결혼하지 않았는데, 이들이 성결하냐? (성결하지 않습니다.) 정신지체자나 바보, 정신병자는 모두 정상인의 이성을 갖추지 못했기에 결혼할 수 없다. 장가도 못 가고, 시집도 못 간다. 그들은 성결하지 않다. 수녀, 비구니, 승려, 그 밖에도 결혼하지 않는 특수한 무리가 있는데, 이들도 마찬가지로 성결하지 않다. 성결하지 않다는 건 어떤 뜻이냐? 불결함을 뜻한다. 이 불결함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패괴 성품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 패괴 성품이 있다는 뜻이다. 이들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패괴 성품이 있고, 모두 성결하지 않다. 그렇다면 결혼한 사람은 어떠냐? 결혼한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그들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 (차이가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그들과 별 차이가 없다. 차이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다들 사탄에게 패괴된 사람이고 모두 패괴 성품이 있습니다.) 그렇다. 다들 사탄에게 패괴되어 누구나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지 못한다. 모두가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사람도 아니고, 구원받는 사람도 아니고, 불결한 자들이다. 따라서 사람이 성결한지, 아니면 불결한지는 미혼이냐 혹은 기혼이냐를 가지고 판단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사람이 왜 결혼과 관련해서, 결혼한 사람은 성결하지 않고 불결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느냐? 이 오해는 어디에 초점을 두고 있느냐? (결혼이라는 일에 대한 견해가 치우쳤습니다.) 결혼과 결혼 생활에 대한 견해가 치우친 것이냐, 아니면 다른 일에 대한 견해가 치우친 것이냐? 정확히 얘기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방금 어떤 결혼도 결국 현실 생활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이 결혼 생활은 사람이 생각하는 불결함의 근원이냐?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불결함의 근원이 아니다. 사상 속에서 생각하는 불결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사실 사람은 머릿속으로, 또 마음 깊은 곳에서 다 알고 있다. 바로 사람의 정욕이다.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이 기혼과 미혼으로 사람의 성결함과 불결함을 경계 짓고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고, 잘못된 부분이다. 이 근본 원인은 바로 사람이 육체의 정욕을 그릇되고 터무니없이 이해하고, 부정확하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이해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부분이 어디냐? 사람은 인간에게 정욕이 있어서 결혼하면 이성과 관계하게 되고, 이성과 관계한 뒤 소위 육체 정욕의 생활을 하게 되면서 불결해진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정욕이 과연 무엇인지 얘기해 보자. 정욕을 올바르게 이해해서 그것에 대해 정확하고, 바르고, 객관적인 이해와 인식을 갖춘다면 너는 불결함과 성결함에 관한 난제와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사람은 결혼한 후 정욕을 채움으로써 정욕과 육욕을 해결한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같이 결혼한 사람은 성결하지 않고, 불결해졌어. 역시 독신으로 사는 처녀 총각이 성결한 사람들이야.’ 이것은 명백히 치우친 인식이다. 이 치우친 인식은 정욕이 무엇인지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 그럼 먼저 최초의 인류인 아담은 정욕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하나님이 만든 인간은 생각이 있고, 언어가 있고, 오감이 있는 동시에 자유 의지가 있고, 감정적 욕구도 있다. 감정적 욕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바로 함께하고, 붙잡아 주고, 대화를 나누고, 지켜 주고, 보살피고, 아껴 줄 반려자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이것이 감정적 욕구다. 또 한편으로 사람에게는 정욕도 있다. 이 말의 근거는 무엇이냐? 아담을 만든 다음 하나님은 그에게 반려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반려자는 생활에 필요하고 감정적으로 필요하다. 그렇다면 다른 방면의 필요에 관해서도 하나님이 한 말씀이 있는데, 그건 어떤 말씀이냐? 창세기 2장 24절 말씀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이 말씀의 뜻은 분명해서 우리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 않느냐? 분명 하나님이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만들 때 아담은 이쪽 방면의 욕구가 있었다. 물론, 이 말은 객관적인 표현이다. 더 주요하게는, 하나님이 그를 만들었을 때 그는 이 감각 기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생리적 조건과 생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최초로 만든 인류의 조상인 아담, 최초의 육적인 인류인 아담의 실제 상황이었다. 그는 언어, 청각, 시각, 미각을 가진 동시에 감각 기관, 감정적 욕구가 있었고, 또한 정욕과 생리적 욕구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자유 의지도 있었다. 방금 얘기했듯이 이 몇 가지가 전체적으로 어우러져 하나님이 만든 하나의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 상황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남자의 생리적 구조다. 그렇다면 여자는 어떠냐?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와 다른 생리적 구조로 만들었다. 물론 남자와 같은 정욕도 만들었다. 이 말의 근거는 무엇이냐? 창세기 3장 16절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자식을 낳을 때 고생을 하게 될 것이라.” ‘자식을 낳는다’라는 표현에 등장한 자식은 어떻게 해서 생기느냐? 여성으로서 이런 생리적 욕구가 없다면, 더 구체적으로 말해 여자에게 여성의 정욕적인 욕구가 없다면 잉태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이것은 매우 분명한 일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두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이 만든 남자와 여자는 각기 다른 생리적 구조를 갖고 있지만, 공통적인 생리적 특징으로 둘 다 정욕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증거는 하나님이 행한 이 일들과 인류에게 내린 지시의 행간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만든 인류는 생리 구조를 갖춤과 동시에 생리 구조의 욕구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정욕이라는 것은 사람 몸의 한 기관처럼 육의 일부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아침 6시에 밥을 먹으면 정오 12시가 됐을 때 음식이 거의 다 소화되어 위가 빈다. 그러면 위는 대뇌로 정보를 보내고, 대뇌는 너에게 위가 비었으니 밥 먹을 때가 되었다고 메시지를 보낸다. 그럴 때 위는 어떤 느낌이겠느냐? 속이 비고 불편해서 뭔가를 먹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뭔가 먹고 싶은 느낌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바로 너의 모든 신경계와 기관이 작동하고 대사 작용을 한 결과다. 이렇게 간단하다. 정욕도 신체의 여느 기관과 마찬가지 성질이다. 모든 기관은 신경계와 연결되어 있고, 신경계는 너의 각 기관을 지휘한다. 예를 들어 보자. 코는 냄새를 맡는 기관이다. 네가 악취를 맡았을 때 그 냄새가 너의 신경계로 들어오면 신경계는 대뇌에 이렇게 알린다. ‘이 냄새는 지독하고 안 좋아.’라고 말이다. 너는 이 정보를 받고 얼른 코를 막거나 손 부채질을 한다. 이렇게 일련의 동작이 발생하는 것이다. 보아라. 이 일련의 움직임과 행동, 이런 감각과 의식은 모두 네 신체의 어느 한 기관과 신경계가 지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아주 크고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를 들었다고 치자. 네 귀가 그 정보를 받아들이면 너는 견디기 힘든 느낌이나 반감이 생겨서 양쪽 귀를 틀어막을 것이다. 사실, 귀가 받아들인 것은 일종의 소리이자 정보일 뿐이다. 하지만 대뇌를 통해 귀는 이 소리가 사람에게 좋은 것인지 아닌지를 구별한다. 만약 별 영향이 없을 경우, 네가 듣고 분별해서 아무렇지 않으면 그냥 통과시킨다. 만약 네 심장이나 신체에 부정적인 영향이 있으면, 대뇌가 분별한 다음 너에게 귀를 막거나 입을 크게 벌리라고 알려 주는 등, 일련의 행동 혹은 생각을 발생시킨다. 사람의 정욕도 이와 마찬가지로 상응하는 기관이 있다. 상응하는 기관이 상응하는 신경의 지배를 받아 다양한 판단과 해석을 내린다. 사람의 정욕은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이것은 육체의 여느 기관과 동급이고 동등하다. 다만 나름의 특수성이 있어서 사람은 늘 정욕에 대해 각양각색의 다양한 시선과 관점, 혹은 생각을 가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제를 통해 너희가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정욕은 신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든 것으로, 인류가 생겼을 때부터 존재해 왔다. 정욕은 하나님이 정한 것이고 하나님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정욕에 대해 다양한 오해와 관념을 지닌다고 해서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 되거나 불결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람의 다른 감각 기관과 똑같이 사람의 신체 안에 존재한다. 만약 하나님이 안배하고 정한 정당한 결혼의 틀 안에서라면 그것은 합리적이다. 하지만 사람이 방종하거나 그릇되게 사용한다면 정욕은 부정적인 것이 된다. 물론, 정욕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나 생각들이 부정적일 뿐이다. 예를 들어, 삼각관계, 음란 행위, 근친상간, 강간, 성범죄 등등 정욕과 관계되는 그런 일들이 부정적인 것이 되었더라도 이는 사람 육체의 원초적인 정욕과는 무관하다. 육체의 정욕은 육체의 기관과 똑같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인류의 사악함과 패괴로 인해 정욕과 관계된 온갖 사악한 일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정당하고 정상적인 정욕과는 관계가 없다. 이 두 가지는 성질이 다른 문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삼각관계, 혼외정사, 근친상간, 성범죄, 이런 것은 모두 패괴된 인류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욕과 관계된 사악한 일들이다. 이 일들은 정당한 정욕, 결혼과는 관계가 없다. 이는 불결한 것에 속하고 정당하지 않으며,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제 잘 알겠느냐? (네.)
이번 교제를 통해서 기혼자들의 치우친 이해와 행동을 확실히 인식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느냐? (네.) “저희는 하나님 사역을 받아들였는데, 그럼 저희 부부는 따로 살아야 할까요?” 새 신자가 이렇게 물으면 너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야 합니다.) 그에게 이렇게 말하면 된다. “왜 따로 살려 하십니까? 두 분이 다투셨나요? 아니면 한쪽이 코를 크게 골아서 다른 한 분이 잠을 못 주무시나요?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그건 개인적인 문제니까 따로 지내셔도 되지만, 다른 이유라면 안 그래도 됩니다.” 이런 사람도 있다. “에고, 저희 둘이 같이 산 지도 40년이 다 돼 갑니다. 이 나이에 아이들도 다 컸는데, 따로 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같이 지내서 아이들한테 웃음거리가 될 게 아니라 만년의 지조를 지켜야죠.” 이게 말이 되느냐? (말이 안 됩니다.) 말이 안 된다. 만년의 지조를 지키다니, 만년의 지조가 어떤 것이냐? 여태 뭘 하다가 왔느냐? 무슨 내숭이냐? 이런 사람들은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얘기해 줘라. “하나님을 믿는 데 그런 얘기는 없습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그런 요구를 하지 않고, 그런 규정도 없습니다. 그건 차차 알게 될 겁니다. 본인이 지내고 싶은 대로 지내시면 됩니다. 그건 개인적인 사정일 뿐,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일과는 관계가 없고, 구원받는 일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일은 구하지 않아도 되고, 그것 때문에 뭘 희생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문제는 이제 해결되었느냐? (네.) 결혼에서 사람의 정욕이라는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가장 어려운 부분이 해결된 셈이다. 이렇게 교제하니 잘 알겠느냐? 아직도 정욕이라는 것이 신비하게 느껴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정욕이 불결한 것, 더러운 것으로 느껴지느냐? (아닙니다.) 이를 놓고 볼 때 정욕은 불결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고, 정당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장난한다면 더는 정당한 일이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별도로 다루어야 한다. 어쨌든 이렇게 교제하니 결혼에 대한 여러 가지 현실적, 혹은 비현실적인 그런 환상이 모두 해결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결혼의 정의와 개념을 교제한 뒤 사람의 사상 속에 들어 있는, 결혼에 대한 기형적이고 치우친 추구와 이상, 바람을 기본적으로 일부 내려놓았다면, 나머지는 사람이 현실 생활에서 차근차근 자신과 대조해 보고 경험하고 체험해야 한다. 물론 가장 주된 것은 결혼 자체에 대해 사람이 올바른 이해와 관점을 지니는 것이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미래에 결혼할 계획이 있든 없든, 결혼에 대한 네 태도와 관점은 진리 추구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이쪽과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자세히 읽어 보아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결혼에 대한 올바른 관점과 인식을 가져야 하며, 최소한 그것이 진리에 부합해야 한다. 이 일에 관한 교제가 끝나고 사람의 식견이 넓어지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이제는 식견이 유치하거나 좁지 않다. 그렇지 않으냐? 네가 다른 사람과 이 일에 대해 논할 때, 상대는 나이도 많지 않은 네게 이 일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을 보고 묻는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됐어요?” “아직 미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인만큼 잘 알아요? 어떻게 성인들보다 더 깊이 있어요?” 그러자 네가 대답한다. “저는 진리를 깨달았어요. 또 제가 깨달은 진리는 다 근거가 있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제가 성경에서 찾아 드릴게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을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보세요. 제 말이 맞나 틀리나.” 결국, 그는 네 말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네가 말한 것은 다 순수하고 올바른 인식과 이해이고, 거기에 사람의 상상과 관념, 사람의 어떤 치우친 관점도 섞이지 않았고, 모두 진리에 부합하고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기혼자들의 치우친 이해와 행동에 관한 문제를 교제했으니 이제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너의 사명이 아니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교제해 보기로 하자. 사람이 결혼에 대한 각종 환상을 내려놓았다는 것은 그저 결혼의 개념과 정의에 대해 올바르고, 또 상대적으로 진리에 부합하는 이해와 견해를 갖추었을 뿐이지, 결혼에 대한 추구와 이상, 바람을 철저하게 내려놓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결혼한 사람들은 어떻게 결혼의 행복을 지키느냐? 많은 사람이 아직도 결혼의 행복을 올바르게 대하지 못하고, 또는 결혼의 행복과 사람의 사명, 이 둘의 관계를 올바르게 대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역시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결혼한 사람은 흔히 결혼을 일생에서 큰일로 생각하고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일생의 행복을 자신의 결혼 생활에서 찾으려 하고 배우자에게 맡기려 한다. 그리고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일생에서 추구해야 할 유일한 목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결혼의 행복을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고, 많은 대가와 희생을 치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결혼한 다음 상대에게 어필하기 위해, 이른바 신선한 결혼, 신선한 애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한다. 어떤 여자는 남자 마음을 붙잡아 두려면 남자의 입을 즐겁게 해 줘야 한다면서, 친정 엄마나 어른들에게 요리도 배우고, 맛있는 음식, 빵이나 과자 만드는 법도 배웠다. 그리고 남편이 좋아하는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서 남편을 즐겁게 해 주려고 애썼다. 남편이 배가 고플 때마다 그녀가 만든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고 집을 떠올리면, 그다음에는 자연스레 그녀를 떠올리며 얼른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독수공방하지 않고 항상 남편이 곁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에게는 좋은 요리로 남자의 입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이것이 결혼의 행복을 유지하는 방식의 일종이자 여자로서 결혼의 행복을 위해 응당 치러야 할 대가, 다해야 할 책임이기 때문에 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열심히 자기의 결혼 생활을 지켰다. 또 어떤 사람은 결혼 생활에 안전감을 느끼지 못해 늘 갖은 방법으로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고, 상대에게 어필하고, 또 여러 가지로 상대에게 암시를 했다. 예를 들면 상대에게 둘이 처음 만난 날, 처음 데이트한 날, 결혼기념일 등을 기억하는지 자꾸만 물어보는 것이다. 만약 상대가 그걸 기억하면 자기를 사랑한다고, 자기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느끼고, 기억하지 못하면 토라져서 상대를 원망한다. “그렇게 중요한 날도 기억 못 하다니, 사랑이 식은 거 아니에요?” 이렇게 끊임없이 상대에게 어필하고, 주의를 끌어가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남녀 모두 세속적인 방식으로 상대에게 암시하며 무의미하고 시시한 짓거리를 하고 있다. 어떤 대가도 마다치 않고 자기 건강을 해치는 짓을 하는 여자들도 있다. 일례로, 어떤 여자는 서른 살 넘어서 예전의 희고 부드러운 피부, 말갛고 고운 얼굴이 망가지는 것을 보고 리프팅을 하고 히알루론산 주사를 맞는다. 또 어떤 여자는 더 예뻐지려고 쌍꺼풀 수술도 하고 눈썹 문신도 한다. 이렇게 항상 예쁘고 섹시하게 꾸며서 상대에게 어필하려는 것이다. 심지어 결혼의 행복을 위해 남들이 하는 낭만적인 일을 항상 따라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느 특별한 날, 여자는 근사한 저녁 식탁을 차리고 와인과 초도 준비해 놓고 전등을 껐다. 그리고 집에 들어오는 남편에게 눈을 감으라고 한 다음 물어봤다. “오늘이 무슨 날이게요?” 남편은 한참을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초에 불을 붙이는 것을 본 남편은 그제야 그날이 자기 생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우와, 정말 기분 좋군. 당신, 정말 사랑해요. 나도 기억 못 하는 내 생일을 이렇게 기억해 주다니, 당신은 너무 사랑스러운 여자야!” 이 여자는 행복하고 흐뭇했다. 그 말 한 마디면 충분했고 마음이 놓였다. 남자, 여자는 모두 결혼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짠다. 여자는 커다란 변화와 희생을 치르고,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인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나가 죽어라 돈 벌어서 지갑을 두둑이 채우고, 점점 많은 돈을 집에 갖다 줘서 자기 아내가 갈수록 좋은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결혼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남들처럼 장미도 사고, 생일 선물도 사고, 크리스마스 선물도 사고, 밸런타인데이에는 초콜릿도 사는 등, 자기 여자를 기분 좋게 해 주려고 머리를 쥐어짜며 온갖 쓸데없는 짓을 다 한다. 어느 날 실직해도 아내에게 말도 못 한다. 아내한테 이혼당하고 자신의 결혼 생활이 전처럼 행복하지 않을까 봐 매일 시간 맞춰 출퇴근하는 척하면서 동시에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닌다. 월급날은 다가오는데 집에 돈을 못 갖다 주게 생겼으니 이를 어쩌냐? 여기저기서 빌린 돈을 갖다 주며 아내를 기쁘게 한다. 게다가 이런 말까지 덧붙인다. “봐, 이번 달은 보너스도 2천 위안 나왔어. 당신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는 정말로 사치품을 샀다. 가슴 가득한 괴로움을 쏟아 낼 곳 없는 남편은 근심이 더욱 커져만 간다. 남자도 그렇고 여자도 그렇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고 상당한 노력과 시간, 에너지를 쏟아붓고, 심지어 마음에 없는 짓도 많이 한다.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도 당사자는 그 일을 올바르게 마주하고 처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심지어 결혼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남에게 경험을 전수받고, 조언을 구하고, 따라 하는 등 갖은 애를 쓴다.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 본분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집의 부탁을 받아들였음에도 오히려 결혼의 행복과 단란함을 지키느라 본분을 엉망으로 이행한다. 원래는 타지에서 복음을 전해야 해서 일주일 혹은 얼마 만에 한 번밖에 집에 못 오기도 하고, 각 방면의 자질과 조건에 따라 집을 떠나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배우자가 자기한테 불만을 가질까 봐, 자기 결혼이 행복하지 않을까 봐, 결혼이 깨질까 봐 겁을 낸다. 그리고 결혼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시간을 많이 포기한다. 특히 배우자가 원망하고 불만을 갖거나 투덜거리기라도 하면 그들은 더욱 조심하며 자기 결혼 생활을 지킨다. 최대한 배우자를 만족시켜서 결혼 생활이 행복하도록, 파탄에 이르지 않도록 애쓴다. 물론 더 심각한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 집의 부름을 거부하고 본분 이행을 거부한다.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해야 할 때는 차마 배우자만 혼자 남겨둘 수 없어서, 혹은 본인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직장을 그만두고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배우자 부모가 반대하기 때문에, 그는 타협하고, 본분 이행을 포기하고, 행복하고 완전한 결혼 생활을 지키기로 한다. 그들은 행복하고 완전한 결혼 생활을 지키기 위해, 결혼이 파탄 나고 끝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결혼 생활에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쪽을 택하고, 그 대신 피조물의 사명을 포기한다. 어찌 모르느냐? 네가 가정이나 사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무엇이든, 그것이 아내든, 남편이든, 자녀든, 부모든, 또 직원이든 아니면 다른 어느 쪽이든, 또 네가 결혼 생활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중요하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 앞에서 네 신분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피조물이다. 하나님 앞에서 두 번째 신분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 집에서 너를 부를 때는 바로 너의 사명을 완수해야 할 때이다. 다시 말하면, 너는 하나의 피조물로서, 행복하고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지킨다는 전제 아래 너의 사명을 완수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이상 하나님이 너에게 부여한 사명,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사명을 무조건 완수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건 너는 마땅히 하나님이 네게 맡긴 사명을 우선시해야 한다. 결혼이 너에게 부여한 사명과 책임은 그다음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부여한, 피조물로서 완수해야 할 사명은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도 1순위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결혼의 행복을 지키고 싶은 네 바람이 얼마나 크든, 또는 네 결혼 상황이 어떻든, 네 배우자가 결혼 생활을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든, 그런 건 모두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사명을 거부할 이유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네 결혼 생활이 아무리 행복하고 완전해도 피조물인 네 신분은 변하지 않는다. 피조물이라는 신분은 달라지지 않으니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사명은 마땅히 가장 먼저 완수해야 하고, 조건을 달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명을 맡겨서 네게 피조물의 본분과 사명이 생겼을 때, 너는 행복한 결혼 생활에 대한 추구를 내려놓고, 완전한 결혼을 지키려고 추구하던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과 하나님 집이 너에게 맡긴 사명을 1순위에 두어야 한다.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라. 결혼의 행복을 지키는 것은 그저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남편 혹은 아내로서 네가 짊어지는 일종의 책임일 뿐,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서 가지는 책임과 사명이 아니다. 그러니 너는 결혼의 행복을 지킨다는 이유로, 창조주가 너에게 맡긴 사명을 포기해서는 안 되고, 아내 혹은 남편의 책임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많은 일, 그런 어리석고 유치하고 하찮은 일들을 해서도 안 된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에 따라, 즉 최초의 하나님 분부에 따라 아내 혹은 남편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만 하면 된다. 최소한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안에서 아내 혹은 남편의 책임을 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무슨 ‘남자 마음을 붙잡아 두려면 남자의 입을 즐겁게 해 줘야 한다’느니, 낭만 타령을 하면서 끊임없이 각종 기념일을 챙기는 것도 그렇고, 둘만의 세계니 뭐니 하면서 ‘두 손 꼭 잡고 백년해로하는 것’을 추구한다느니, ‘오늘처럼 한평생 사랑할래요’라느니 하는 무의미한 일들, 그런 건 모두 정상적인 남녀의 책임이 아니다. 물론 더 확실히 말하자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짊어져야 할 책임과 의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생활 방식, 생활의 추구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것들이 아니다. 따라서 가장 먼저 생각 깊은 곳에서부터 이런 따분하고, 어리석고, 유치하고, 얄팍하고, 역겹고, 낯간지러운 말과 관점, 행동을 내려놓아야 한다. 네 결혼을 변질시키지 않도록 하고, 또한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느라 손발이 묶이고 생각이 묶이고 발걸음이 묶여서 유치하고 어리석고 저속하고 심지어 사악해지는 일이 없도록 해라. 행복한 결혼에 대한 이런 세상적인 추구는 정상 이성을 지닌 사람이 다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이 사악한 세상과 패괴된 인류로부터 발전해 온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의 인성과 사상도 다 그것에 의해 부식될 수 있다. 그것은 네 사상을 부패시키고, 네 인성을 왜곡시킬 것이다. 또한, 네 마음을 사악하게 만들고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하며, 심지어 극단적으로 변하게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여자가 보기에 다른 남자는 참 낭만적이다. 결혼기념일에 아내에게 장미꽃을 선물하기도 하고, 여자가 화가 나고 기분이 안 좋을 때는 같이 바람 쐬러 나가기도 하고, 안아 주기도 하고, 특별한 선물을 하거나 깜짝 이벤트로 달래 주기도 한다. 이런 얘기나 방법을 받아들이게 되면 너는 네 배우자도 그렇게 해 주길 바라거나 너도 그런 생활과 그런 대우를 받고 싶어진다. 그렇게 되면 네 이성은 비정상적으로 변하고, 그런 얘기나 생각, 방법에 교란되고 부식되고 만다. 만약 네 배우자가 장미꽃을 사 주지 않거나, 널 달래 주지 않거나, 낭만적인 일을 해 주지 않으면 너는 화도 나고, 원망과 불만도 생기며, 여러 가지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이다. 네 생활이 그런 것으로 가득할 때 네가 여자로서 다해야 할 의무, 피조물로서 하나님 집에서 이행해야 할 본분과 책임은 모두 흐트러지고, 너는 불만스러운 정서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불만스러운 정서와 사상으로 인해 네 정상적인 생활, 정상적인 질서는 교란된다. 따라서 너의 추구는 네 정상 인성의 생각과 논리에 영향을 미치고, 네 정상적인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당연히 정상인으로서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만약 네가 세속적인 것들을 추구하고, 결혼의 행복을 추구한다면 너는 소위 세속화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네가 결혼의 행복만을 추구한다면 틀림없이 상대로부터 “사랑해.”와 같은 말을 들으려고 할 것이다. 만약 배우자가 “사랑해.”라는 말을 한 적 없다면 너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 내 결혼은 정말 불행하구나. 내 남편은 목석 같고 바보 같아서 기껏해야 집에 돈이나 가져오고, 힘이나 쓰면서 일만 하는 사람이야. 밥 먹을 때 되면 ‘먹자.’ 한마디, 밤에 잘 시간 되면 ‘자자. 좋은 꿈 꿔. 잘 자.’ 이게 다야. 어쩜 ‘사랑해.’ 이 한마디를 못 하냐? 낭만적인 이 말 한마디면 되는데, 이걸 못 해?’ 속으로 이런 생각이 가득한데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 수 있겠느냐? 언제나 비정상적이고 감정적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상의 이런 사악한 시류에 대해 분별도 없고, 저항력이나 면역력도 없는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낭만적인 말을 하는 것, 이런 현상을 행복한 결혼 생활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것을 추구하고 모방하고 손에 넣으려 하며, 그걸 얻지 못하면 화를 내고, 툭하면 남편을 물고 늘어진다. “당신 말이에요. 대체 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마는 거예요?” 퍼붓는 질문 공세에 혈압이 오른 남편은 금세 얼굴이 벌게져서 대답한다. “I love you, baby.” “어이구, 다시 말해 봐요.” 답답함에 목까지 벌게진 남편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한 마디 내뱉는다. “Baby, I love you.” 봐라, 점잖은 사람이 손발 오그라드는 말을 하려니 마음에서 우러나오지도 않고, 어색하기만 하다. 여자는 그 말에 입이 헤벌쭉해진다. “그래도 봐줄 만하네요!” 그 남편이 뭐라고 하겠느냐? “꼴 좀 봐라. 그래, 기분 좋아졌어? 어떻게든 트집을 잡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이런 식으로 결혼 생활을 해 나가는데, 이것이 행복이냐? (아닙니다.) “I love you.” 한 마디면 행복해지느냐? 결혼의 행복을 이렇게 해석하느냐? 이다지도 간단하냐? (아닙니다.) 어떤 여자는 늘 남편을 물고 늘어진다. “여보, 나 늙은 것 같아요?” 그 남편은 현실적인 사람이라 사실대로 대답한다. “좀 늙었네. 40이 넘었는데 안 늙는 사람이 어딨어?” “어머, 당신 이젠 날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왜 나보고 젊다고 안 해 줘요? 내가 늙어서 싫은 거예요? 이제 다른 여자 찾아갈 거예요?” 남편이 대답한다. “참 까다롭네. 사실대로 말도 못 하고, 이게 뭐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안 늙는 사람이 어딨냐고. 당신 오래 살아서 요괴라도 되고 싶은 거야?” 이런 여자는 비이성적이다. 소위 이런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속된 말로 미친년이다. 점잖은 말로 표현하면 무엇이냐? 정신병자다. 정신병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정상 인성의 사유가 없는 것이다. 40, 50세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아직도 인생이 무엇인지, 결혼이 무엇인지 간파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 쓸모없고 낯간지러운 일들만 좋아한다. 그녀는 그게 바로 결혼의 행복이자 사람의 자유와 권리이므로 그렇게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고, 결혼 생활을 그렇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이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이방 세상에는 많이 있다. 하나님 집에는 있느냐, 없느냐? 많으냐, 적으냐? 낭만, 선물, 포옹, 깜짝 이벤트, 그리고 “사랑해.” 한 마디 등은 모두 사람이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지표이자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목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도 여전히 이렇게 추구하고, 이런 관점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10여 년 동안 설교도 어느 정도 듣고 진리도 그만큼 깨달았지만, 결혼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상대와 함께하기 위해, 또 전에 결혼을 두고 했던 약속,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겠다고 맹세한 목표를 지키기 위해, 창조주 앞에서 자신이 다해야 할 책임과 본분은 이행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한 발짝도 집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나님 집 사역이 아무리 바빠도 집을 떠나지 않으며, 자신의 배우자를 내려놓고 자기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고 지키는 일을 자기가 평생 노력을 아끼지 않고 쟁취해야 할 목표로 생각한다. 이렇게 추구하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냐? 분명히 아니다. 그들은 사상 면에서도, 내면 깊은 곳에서도, 심지어 행동에서도 결혼의 행복에 대한 추구를 내려놓지 않았고,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일생의 사명’이라는 사상 관점과 인생관을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에 결코 진리를 얻을 수 없다. 너희는 지금 미혼이고 결혼 생활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결혼할 때도 이런 관점이라면 너희도 마찬가지로 진리를 얻을 수 없다. 결혼의 행복을 얻는다면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여긴다면 창조주 앞에서 사명을 완수할 기회를 내려놓고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네가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의 사명을 완수할 이 기회와 권리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진리 추구를 포기하는 것이고, 당연히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 자신의 선택이다.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을 내려놓으라고 교제한 것은 형식적으로 결혼을 포기하라고 하거나 이혼을 독려하려는 게 아니라 결혼의 행복에 대한 그런 추구를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우선 네가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지배하는 그 관점들을 내려놓고, 그런 다음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행동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자신의 시간과 세월, 에너지를 상당 부분 쏟아야 한다. 결혼은, 그것이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일과 부딪히거나 저촉되지 않는다면, 결혼의 틀 안에서 네가 다해야 할 의무, 네가 완수해야 할 사명, 네가 수행해야 할 역할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에게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혼을 포기하거나 형식적으로 이혼하라는 말이 아니라, 결혼 생활에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피조물의 사명을 완수하고, 이행해야 할 본분을 잘 이행하라는 뜻이다. 물론,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그 일이 네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데 지장을 주고, 걸림돌이 되고, 심지어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면, 너는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만 포기할 것이 아니라 결혼 전체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를 교제하는 궁극적인 목표와 의미는 무엇이냐? 바로 결혼의 행복에 발목 잡히고, 두 손이 묶이고, 눈이 가려지고, 시선이 어지러워지고, 마음이 혼란해지는 등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거기에 마음을 내어 줘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네 인생길과 생활이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로 가득 차는 것도 안 된다. 결혼 생활에서 네가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올바르게 대하고, 올바르게 버리고 취할 수 있어야 한다. 더욱 바람직한 실행은,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본분에 쏟아서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이 네게 맡긴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이든 네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또 하나님이 너를 지금까지 살도록 이끌었고, 네게 결혼과 가정을 베풀어 주고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다해야 할 책임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너 스스로 결혼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까닭 없이 그냥 결혼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능력이나 힘으로 결혼의 행복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일은 이제 분명히 설명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않았느냐? 길이 뚜렷해지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결혼 생활에서 네가 다해야 할 책임 및 의무가 네 피조물의 본분 및 사명과 아무런 충돌과 갈등을 빚지 않는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네가 마땅히 따라야 할 방식으로 책임을 다하도록 해라.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네가 짊어져야 할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책임을 미루지 말고, 상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상대의 생활, 상대의 감정, 상대의 모든 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만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네가 짊어져야 할 책임과 의무가 네 피조물의 사명 및 본분과 충돌할 경우, 네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본분과 사명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져야 하는 책임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거는 기대이자 너에게 하는 부탁이다. 물론 하나님이 모든 남자 혹은 여자에게 하는 요구이기도 하다. 그렇게 할 수 있어야만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게 안 돼서 그렇게 실행할 수 없다면, 너는 그저 이름만 걸어 놓고 믿을 뿐이다. 네가 하나님을 따르는 마음은 진실하지 않고,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지금 다른 나라에 가서 본분을 이행할 기회가 있고 조건이 마련되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해외에 나가서 본분을 이행하려면 배우자는 집에 혼자 두고 가야 하는데, 그러면 앞으로 만나지 못하고 둘이 따로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중에 결혼이 무효가 되는 건 아닐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것저것 고려한다. ‘아, 내가 없으면 그가 어떻게 살지? 내가 없으면 우리 결혼은 깨어지지 않을까? 우리 결혼이 끝나는 건 아닐까? 그러면 난 앞으로 어떡하지?’ 앞으로의 일이 네가 고려해야 할 일이냐? 네가 가장 고려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고려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내려놓으라고 한 것을 어떻게 내려놓고, 하나님이 완수하라고 한 일을 어떻게 완수하는가 하는 문제다. 미래에, 앞으로 결혼이나 반려자가 없어도, 너는 그냥 살던 대로 끝까지 살 수 있고, 원래대로 잘 지낼 것이다. 하지만 네가 만약 이 기회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네 본분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포기한 것과 같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기에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고, 구원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네가 원해서 자신이 구원받을 기회와 권리를 포기하고, 사명을 포기하고, 그 대신 결혼을 선택하고, 부부가 같이 있는 쪽을 택하고, 배우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배우자를 만족시키는 쪽을 택하고, 완전한 결혼을 택한다면, 결국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기 마련이다. 네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는 너 자신도 잘 알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결혼이 너의 전부가 아니고, 결혼의 행복도 너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네 운명을 결정할 수 없고, 네 미래를 결정할 수 없으며, 네 종착지는 더더욱 결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이 마땅히 어떻게 취사선택해야 할지, 즉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을 내려놓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할지 말지는 사람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라. ‘결혼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의 사명이 아니다’라는 이 방면에 관한 화제는 이제 분명히 교제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다 듣고 나서도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르는, 너희를 난처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느냐? (없습니다.) 듣고 나니 더 명확해지고, 정확한 실행 길과 실행 목표가 생겼느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겠느냐? (네.) 그렇다면 오늘 교제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자. 안녕!
2023년 1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