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행위가 성품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금 어떤 이들은 본분 이행을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침식을 잊고 몰두할 수 있다. 육을 쳐서 복종시키고 육의 어려움도 저버릴 수 있다. 심지어는 병을 앓으면서 사역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렇게 배울 점들이 있는 좋은 사람, 옳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도 아직 내려놓지 못한 것들이 있으니 바로 명예와 지위, 허영이다. 이런 것들을 끝내 내려놓지 못한다면, 그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냐? 이런 건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힘든 일은 성품 변화에 이르는 것이다. 아마 너는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고, 좋은 음식, 좋은 옷 없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평생 고생하고, 평생을 외롭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묵묵히 견디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곁에 함께하시니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육적인 고통과 어려움은 쉽게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다.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바로 사람의 패괴 성품이다. 패괴 성품은 극복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은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훗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이런 육적인 고통은 다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고통받고 대가를 치를 수 있다고 해서 사람의 성품이 변화했다고 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다. 한 사람의 성품 변화 여부를 가늠하려면 그 사람이 겉으로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좋은 행위가 얼마나 있는지를 볼 게 아니라, 그 사람의 행동의 출발점이 어떤 것인지, 의도와 동기가 무엇인지, 일 처리의 원칙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어떤 것인지 등을 봐야 한다. 이 몇 가지 부분을 통해 판단해야 정확히 평가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뒤로는 세상 풍조도 좇지 않고, 더 이상 외모 가꾸기에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또 고생을 견디고, 육을 쳐서 복종시키고 육을 저버릴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본분 이행과 처세의 과정에서 정직한 말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정직한 사람으로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늘 나서기 좋아하고 자기를 과시하려 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는 언제나 속셈이 있다. 남들한테 잘 보이려고 온갖 궁리를 다하고, 인심을 사서 사람들이 자기를 칭찬하고, 숭배하게 만들고, 심지어 일이 생기면 자기에게 구하도록 만든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에게서는 어떤 성품이 드러나느냐? 사탄 성품이다. 이런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 겉으로는 규칙을 잘 지키고, 고통을 감내할 줄 알고, 기꺼이 헌신하고, 세속적인 일도 내려놓을 수 있고, 진리를 추구하려는 의지와 바람도 있고, 기본적으로는 하나님 믿는 길에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유독 패괴 성품만은 고스란히 남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진리를 알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범사에 자기 뜻대로만 하고, 사탄 성품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이렇다. 행동에 옳지 못한 속셈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도 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부정하지도 않고, 진리 원칙도 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구하며 교제하지도 않고,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마음 가는 대로 할 뿐이다. 행동에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고, 결과도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겉보기에 악을 행한 것은 아니지만 진리를 실행한 것도 아니다. 여전히 제멋대로 행동하며 사탄 성품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렇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이 어떻고 진리가 어떤 건지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한다. 자기 내면의 욕망과 야심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은 잘못된 행동, 방해하고 교란하는 행동, 하나님이 혐오하는 행동임을 잘 알면서도 자꾸만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하나님 믿는 것은 결국 복을 받기 위한 것 아닌가? 내가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지? 내가 그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직업도 내려놓고, 세상에서의 미래도 버린 건 하나님께 칭찬받고 축복받기 위해서야. 내가 그렇게 고생했으니 복을 받을 수 있게 하나님이 당연히 나를 기념하고 축복해야 해.’ 들어 보면 이런 말은 사람에게 구미가 당기는 말이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복을 받으려는 속셈이 약간 섞여 있는 것은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말이 진리에 부합하고, 진리 실제에 해당하는지 진지하게 묵상해 본다면, 그렇게 버리고 고생한 것은 모두 사람이 생각하는 좋은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을 받으려는 속셈에 지배당한 것이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사람의 도덕 기준으로 한 사람의 행위를 판단했을 경우, 이 사람은 근검절약하고, 고생을 견딜 줄 알고, 때로는 일에 매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또 어떤 사람은 돈을 주워도 갖지 않고, 기꺼이 남을 돕고, 선행을 즐기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아주 관대하고 너그러우며, 계산적이지도 않고, 심지어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남에게 줄 줄도 안다. 이런 모습은 하나같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이런 사람은 공인된 좋은 사람이다. 겉보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칭찬이 절로 나온다. 무슨 일이든 도덕적이고, 공평하고 합리적인 데다 은혜는 반드시 보답할 줄 알고,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심지어 한번 친구가 되면 그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 친한 친구를 위해서 설사 칼산에 오르고 불바다에 뛰어드는 일이 있을지라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기꺼이 고생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이런 좋은 사람을 칭찬하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람이 정말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냐? 정말로 목숨 걸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느냐?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인지,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인지를 판단할 때, 사람의 관념과 상상, 사람의 도덕관과 윤리관으로 판단한다면, 그것이 정확하겠느냐?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만약 사람의 관념 상상, 도덕관, 윤리관이 진리라면 하나님은 진리를 선포할 필요도, 심판 형벌 사역을 할 필요도 없다. 너는 이 세계와 이 인류가 어둡고 사악하며, 눈곱만큼의 진리도 없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한다. 패괴 인류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 하나님만이 진리요, 하나님 말씀만이 사람을 정결케 할 수 있고, 하나님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사람의 행위가 아무리 좋다 한들 그것은 진리 실제가 아니고, 진리에는 더더욱 이를 수 없다. 비록 그 좋은 행위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널리 행해지고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 해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영원히 진리가 될 수 없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너는 친구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 칼산에 오르고 불바다에 뛰어들 수도 있는 사람을,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그는 무신론자이기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에 대해 관념과 상상으로 가득한 사람을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바꿀 수 있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사람은 관념이 가득해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종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행위가 많다고 한들 그가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느냐? 그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 그가 하나님을 높이고 증거할 수 있느냐? 그는 절대 그럴 수 없다. 너는 주님을 위해 전도하고 사역하는 그 사람들이 모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람이 아무리 좋은 행위가 많다고 해도 그것이 그 사람이 진실로 회개하고 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 사람의 생명 성품이 변화했다는 의미는 더욱 아니다.

너희는 무엇이 사람의 좋은 행위이고, 무엇이 진리를 실행해 성품 변화가 생기는 것인지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성품 변화는 진리 실행과 관련이 있으며,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고 살아가는 것이겠느냐? 예를 들어, 마음이 통하는 친구 둘이 있다고 해 보자. 그들은 한때 서로 돕고 환난을 헤쳐 나갔으며, 상대가 도움이 필요할 때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 실행이겠느냐? 이는 의리를 지키는 것이고 남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버리는 것으로, 사람의 좋은 행위이지 절대 진리 실행이 아니다. 진리 실행은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대로 실행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의 행위는 전부 육적인 관계를 만족게 하고 감정적인 관계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리를 지키고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돕고 관용을 베풀고 상대를 만족시켜 주는 것은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일에 속한 것으로, 진리 실행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럼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라고 요구하겠느냐? (하나님은 원칙을 갖고 다른 사람을 대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만약 상대가 옳지 않은 일,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일을 하면 설령 그 사람이 친부모라고 해도 들어선 안 됩니다. 반드시 진리 원칙을 견지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형제자매들 간에 서로 도와주되, 상대의 문제점을 발견하면 지적하고 교제해서 함께 진리 원칙을 구해 해결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돕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지난날 어떤 관계였든, 상대를 대하는 방식이 반드시 진리 원칙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만약 이 원칙을 벗어난다면 그것은 진리 실행이 아니다. 예를 들어 둘 중 한 명이 교회 사역에 해가 되는 일을 해서 모두 일어나 그를 폭로하고 반대할 때, 다른 한 사람이 “그가 잘못하긴 했지만, 모두 일어나서 그를 폭로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그의 친구이니 먼저 그를 이해하고 포용하고 도와줘야지, 당신들처럼 그렇게 폭로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가 상처받지 않게 달래 줄 거고, 이 정도 잘못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겁니다. 당신들 중 누구라도 다시 그를 폭로해서 고통스럽게 한다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우리 둘은 누구보다 가깝고 친한 친구이니, 저는 무슨 상황에서도 그를 지켜 줄 겁니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그것은 처세 철학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론적 기초가 있다. 그는 ‘예전에 그가 나를 도와준 적이 있지. 내가 가장 어렵고 힘들 때, 모두가 나를 버릴 때, 오직 그만 나를 챙겨 주고 도와줬어. 이제 그가 어려움에 처해 있으니 내가 도와줘야 해. 이렇게 하는 게 양심과 인성을 갖춘 거야.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 정도 양심조차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도 다 빈말 아니겠냐고?’라고 생각한다. 듣기에는 맞는 말 같아서 평범한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 자신조차 분별하지 못한다. 그는 이런 행동의 출발점이 진리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르겠느냐? 사실 그렇지 않다. 자세히 분별해 보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전부 인륜과 도덕, 양심에서 나왔다. 윤리나 삼강오륜으로 판단했을 때, 그는 양심과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다. 친구를 그렇게까지 지켜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 ‘좋은 사람’의 뒤에 숨어 있는 성품이 무엇인지, 그 본질은 무엇인지 어찌하여 모른단 말이냐?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먼저, 일이 임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을 바라보거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진리를 구하지 않고, 이방인의 윤리와 도덕, 인생 격언으로 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탄의 사설과 궤변을 진리로 여기는 한편, 하나님의 말씀은 한쪽에 제쳐 두고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했는지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그는 진리를 멸시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는 사람의 관념과 윤리, 도덕 그리고 사탄의 인생 격언으로 진리를 대신했으며, 사탄의 철학으로 일을 처리했다.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그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것이라고, 그런 행동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정의라는 기치를 들고 진리를 위배한 것 아니겠느냐? 사람의 행실과 태도를 보면 이런 경우가 많지 않으냐? 글귀와 도리에만 매달릴 때 너도 속으로는 자신에게 진리가 부족하다는 사실과 역시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 가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것이다. 이 어둡고 사악한 세상에서 진리를 얻은 사람만이 삶에 희망이 있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너도 속으로 잘 알 것이다. 하지만 막상 큰일이 생겨서 그것들을 직면하고 선택해야 할 때는 아무래도 사탄 철학과 윤리와 도덕이 진리 같고, 쓸모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음속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가 그때만큼은 소용이 없다. 이것은 무엇이 문제이냐?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면서 어째서 적용하고 실행할 수 없느냐? 너는 왜 진리를 실행하기를 주저하느냐?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 것이냐? 너는 남들의 비방과 판단을 겁내고, 세속적인 앞날을 잃을까 봐 두렵고, 자신의 이익이 훼손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이 중요한 시기에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탈영병이 되어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의 가치를 부정한다는 것은 네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네가 사랑하는 것은 사탄의 철학, 사탄의 사설과 궤변이고, 네가 추구하는 것은 세속적인 앞날, 육의 이익, 명예와 지위라는 증거다. 또 말끝마다 진리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건 가식일 뿐이다. 이런 것들은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한 번도 진리를 받아들인 적 없고, 진리를 실행한 적이 없다는 증거인데,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느냐?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느냐? 너는 평소에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할지 모르지만 막상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마음에 없다. 자신을 크게 높이며 인간관계, 처세술, 윤리, 삼강오륜, 양심, 도덕 기준과 같은 것들을 진리로 생각할 뿐이다. 원래 사탄에 속하는 이런 것들이 네 마음에 이미 진리의 대체물로 자리잡았다면, 너는 타락한 것이 아니냐? 너는 지금 이미 하나님을 철저하게 배반하고 완전히 흑암에 떨어졌다.

어째서 많은 이들이 다년간 하나님을 믿는 동안 바쁘게 뛰어다니고도 진리 실제가 없느냐? 사실, 문제의 근원은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그에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는 억울해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사람이 느끼는 그 억울함이 타당한 것이냐? 그렇지 않다. 많은 설교를 듣고, 많은 도리를 이해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진리를 실행해야 할 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리 원칙대로 행동하지 않았고, 일을 처리할 때나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할 때 진리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 늘 자기 주장만 할 뿐이다. 어떤 사람은 나와 대화할 때 늘 이런 식이다. “제 말 좀 들어 보십시오. 제 관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관점이 어떤지, 제 생각이 어떤지 말씀드리지요.” “저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 당신은 제 얘기를 들어줄 수 있습니까?” 네 뜻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니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 네 뜻은 진리도 아니고, 네가 알아듣게 설명한다고 해도 역시 진리가 아니다. 네가 태어날 때부터 진리를 갖추었다고 생각한다면 왜 또 하나님을 믿으려 하느냐? 하나님이 선포한 일체의 진리를 보면 다 이해가 되고, 마치 무슨 진리든 다 알고, 네 자신이 바로 진리여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왜 굳이 와서 하나님을 믿느냐? 이런 사람도 있다. “왜 매번 당신 말만 옳고, 당신 말만 들어야 합니까? 왜 제 말은 듣지 않습니까?” 이건 무슨 소리냐? 여러 해 네가 하는 말을 들었지만 옳은 말, 진리에 부합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는데 왜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하느냐? 나도 사람에게서 올바른 의견을 좀 듣고 싶다. 좀 걱정도 덜하고, 애도 덜 쓰고 싶다. 하지만 듣지 못했다. 내가 들은 것은 죄다 궤변에다 패역의 말이었고, 원망의 말, 부정적인 말이었다. 하나같이 진리에 위배되는 말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들어야 하느냐? 사람에게 네 말을 듣게 했다가는 다들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고, 하나님께 대항할 것이다. 다들 사탄을 따르다가 결국에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네가 내 말을 듣고 묵상하면 진리를 알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올 수 있고,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하나님 말씀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진리를 알고 실행해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어야만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는 나도 형제자매들이 요즘 어떤 진리에 진입했는지 듣고 싶다. 사람과 일, 사물을 분별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면에서 어떤 발전이 있었고, 어떤 상태인지, 잘못된 상태를 바로잡고 달라졌는지, 자신의 패괴 성품을 얼마나 인식했는지, 그런 패괴 성품이 흘러나오는 과정에서 자신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얼마나 해소했는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또 얼마나 늘었는지, 나도 그런 체험 인식을 듣고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이 그런 체험 간증을 할 줄 모른다. 그에게는 진리 실제가 없고, 그가 내뱉는 것은 공허한 글귀와 도리뿐이다. 죄다 치우친 말, 편집적인 말, 원망하는 말,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드러내거나 공을 내세워 상을 받으려는 소리뿐이다. 이런 말을 듣는 내가 어떤 기분이겠느냐? 기분이 좋을 리가 있느냐? (좋을 리 없습니다.) 실제로 진리를 체험하고 실제로 깨달은 얘기,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얘기를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얘기는 거의 없고, 공을 내세워 상을 달라는 소리 아니면 엉뚱하고 쓸데없는 소리뿐이다. 그런 텅 빈 도리를 나에게 얘기할 필요가 있느냐? 그 무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얘기하고 미혹하는 것도 겨우 하면서, 나에게 얘기하겠다는 것은 비이성적인 짓이 아니냐? 어떤 사람들은 나와 얘기할 때 언제나 거짓된 영적 도리만 말한다. 무슨 일을 논의할 때면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 손안에 있고, 전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는 외적인 일을 말하는 것은 영적이지 않고, 영적인 도리를 얘기해야만 영적인 줄 안다. 내가 그에게 실제적인 얘기를 하고, 생활에 관한 세부적인 일을 얘기해도 귀담아듣지 않고, 그저 고고한 얘기, 거창한 영적 도리만 들으려 하는데, 이런 사람은 실제가 있는 사람이냐? 실제만이 아니라 이성도 전혀 없는, 정말이지 교만하고 무지한 사람이다.

성품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우선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어떤 일이 성품 변화와 무관한지, 즉 어떤 일이 성품 변화의 범위를 벗어난 일이고 외적인 좋은 행위인지, 하나님이 말하는 성품 변화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변화를 바라는 부분은 무엇인지를 사람은 알아야 한다. 사람이 생각하는 성품 변화는 단지 행위에서의 변화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말하는 성품 변화와는 전혀 다른 일이고, 전혀 다른 길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성품 변화가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대적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게 된다는 보장이 있느냐? 결국에는 굳게 서서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말하는 성품 변화는 사람이 진리를 실행함으로써, 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훈계와 책망, 시련과 연단을 겪음으로써, 하나님 마음을 이해하고, 진리 원칙을 알고, 진리 원칙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과 경외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품지 않고, 진실로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하는 것은 사람의 성품 방면에서의 변화다. 그런데 사람이 말하는 성품 변화란 어떤 것이냐? 행위가 좋게 변하는 것으로, 착실하고 얌전해 보이고, 차분하고, 고상하고 단정한 말씨에, 방정맞게 행동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말하고 행동할 때 양심과 이성을 중시하고, 도덕 기준을 갖추는 것이다. 사람이 말하는 성품 변화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성품 변화와 차이가 있느냐, 없느냐? 어떤 차이가 있느냐? 사람이 말하는 성품 변화는 외적인 행위의 변화로,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는 변화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성품 변화는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 진리를 아는 데서 비롯되는 생명 성품의 변화이고, 사물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인생관,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사람을 대하든 일을 대하든 너의 출발점, 너의 행동 원칙과 판단 기준은 전부 진리에 기반해야 하고, 진리 원칙을 구해야 한다. 그래야 성품 변화에 이를 수 있다. 행위만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판단하고, 외적인 행위의 개선에만 중점을 두고, 몇 가지 좋은 행위를 했다고 본인이 사람답게 살았으니 하나님께 칭찬받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커다란 착각이다. 사람은 패괴 성품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배반할 위험이 있다. 네가 진리를 구해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는 한, 외적인 행위가 제 아무리 훌륭해도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날 수 없다. 훌륭한 외적인 좋은 행위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느냐?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날 수 있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날 수 없다면, 좋은 행위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좋은 행위가 아무리 많아도 사람의 성품 변화를 의미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선비처럼 말씨도 고상하고, 비속어도 절대 쓰지 않는다. 심지어 문학가나 연설가처럼 내뱉는 말은 그대로 문장으로 써도 될 정도이다. 이런 외적인 행위나 태도로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없는데, 너는 어떻게 이 사람 성품에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느냐? 어떻게 그의 성품이 달라졌는지 가늠할 수 있느냐? 무엇을 통해 볼 수 있느냐? (그가 진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것도 한 가지 평가 지표다. 또 있느냐? (그의 행동 원칙과 사물 보는 관점입니다.) 바로 핵심을 짚었구나. 그가 말하는 방식이 어떤가를 보아서는 안 된다. 고상한 말씨든, 저속한 말씨든, 유식한 말이든 관계없다. 외적인 것은 보지 말아라. 어떤 사람들은 수다스럽고, 표현력도 떨어지고, 급하면 몸짓을 섞기도 하는데 이것이 성품과 관계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건 단지 외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 사람의 성격, 또는 가정 교육 문제이지, 성품과는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그가 어떤 성품인지, 그의 성품이 달라졌는지, 그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인지는 어디를 보면 알 수 있느냐? 그가 말하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하는 말이 전부 사실이고,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말이고, 어떤 욕망이나 야심도 없고, 말 속에 숨겨진 의도도 없이 언제나 솔직하게 말하고, 자신의 어려움과 약점을 사람들에게 털어놓을 수 있고, 자신이 얻은 빛 비춤과 깨우침을 다른 사람과도 교제하고 나눌 수 있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솔직하게 얘기하고, 스스로를 온전히 드러낸다면, 이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냐? 그의 성품이 달라졌는지, 또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둘째 치고, 그에게서 드러난 태도와 모습으로 볼 때 그는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봐도, 그는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고, 남을 억압하지 않고, 나약한 형제자매를 붙잡아 주고 도와주고, 남을 비웃는 일도 없다. 그 밖에도 본분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하나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본분을 내팽개치는 일 없이 하나님 집 이익을 지킬 줄 안다. 이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비교적 정직하고 진리를 사랑한다. 말씨도 고상하고, 옷차림도 깔끔해서 겉보기에 무척 경건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말하는 내용은 어떨까? “전에 아무개 리더와 협력했는데, 말이 좀 어눌하더라고요. 그래서 예배 시간에 교제할 때 제가 말을 많이 했어요. 능력 있는 사람이 일복이 많다잖아요. 결국 형제자매들은 저를 숭배했죠. 저를 숭배하는데,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계속 교제를 하는 수밖에요. 제가 직접 양육해서 저랑 친한 형제자매들이 많아요. 누가 어려움이 있으면 제가 대부분 해결해 줄 수 있었고, 연약해진 사람은 제가 교제해 주면 강해질 수 있었어요. 저는 다른 건 다 좋은데, 마음이 약한 게 가장 큰 문제랍니다. 남들이 고생하는 걸 못 봐요. 고생하는 사람만 보면 안타까워서 제가 고생을 대신해 주고 싶을 지경이에요.” 이건 무슨 뜻이냐? 얼핏 듣기엔 별 문제가 없는 말 같지만, 그가 말하는 출발점에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고 증거하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성품이냐? 교만하고 간사한 성품이다. 그는 이런 방식을 통해, 그가 하는 이 말을 통해, 일종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 그의 말 속에서 또 다른 뜻을 감지한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고 숭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이런 말을 한 속셈이자 목적이다. 분별이 없는 바보들은 그 말을 듣고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은 정말 대단해. 어쩐지 리더를 거뜬히 해내더라니. 우리보다 낫잖아. 저런 사람이 리더를 맡아야지.’ 바보들은 사물을 통찰하지 못하고 이렇게 생각한다. 분별이 있는 사람은 들으면 눈치를 챈다. ‘한참 얘기해도 자기 잘난 얘기, 자기가 고생해서 공을 세운 얘기, 형제자매가 자기 때문에 유익을 얻고 도움 받았다는 얘기뿐이네. 그러면서 남들이 자기를 우러러보게 만드는구나. 남들이 우러러보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신나게 뛰어다니는 게 다 자기를 우러러보고 숭배하라는 거지 뭐. 저 사람은 교만한 것도 모자라서 정말 간사하구나! 사람들을 구슬려서 하나님과 지위를 두고 다투려는 거야. 이런 식으로 사람을 미혹하다니, 바울이랑 뭐가 달라? 저건 마귀라고! 한참을 떠들어도 자기 잘못이나 결점에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안 하고, 마치 자기는 패괴 성품이 없는 것처럼 말하네. 자기 단점을 말해도 꼭 사람을 부럽게 만들고 탄복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다들 자기는 그만큼 될 수 없다고 생각하잖아. 비록 직접적으로 자기를 숭배하고 높여 달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저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보고 숭배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어. 저 사람은 사람 마음을 매수해서 가로챘고, 바보 같은 사람, 분량이 작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미혹했어. 이건 사람을 미혹하는 거잖아? 저런 말을 하는 저의가 참으로 사악하고 음흉하구나! 적그리스도 부류에 해당하는 저런 사람은 쉽게 분별할 수 있어.’ 이 두 종류의 사람은 확연히 다르다. 한쪽은 언변도 그렇게 화려하지 않고 평범하지만 사람이 진실되고 마음에 있는 말, 사실만을 얘기한다. 그가 어떻게 말하든 사람들은 단지 속으로 수긍할 뿐 그를 숭배하지는 않는다. 그는 사람 마음을 가로채지도 않고, 사람들 마음에서 자리를 차지하지도 않고, 사람들과 대등하게 지낸다. 사람들도 그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에게 지배되거나 통제되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좋은 사람이다. 그의 언행과 인품을 볼 때 야심과 욕망은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을 통제하고 사람들 마음에서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런 성품이 없다. 이것이 인성 있는 사람이다. 반면 남을 통제하려는 야심을 품은 사악한 사람들은 권세와 지위를 무척 숭상한다. 늘 자기를 드러내고 증거하는 말을 하고,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는 행동을 한다. 이것은 분명한 사탄 성품이고, 이런 사람이 바로 인성이 없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별다른 재주나 특기도 없고, 능력도 별로 없다. 순하고 어리숙해 보여서 사람들 사이에서 괴롭힘과 따돌림의 대상이 될 것 같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한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들은 야심이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왜 그런 사람도 야심이 있다고 하느냐? (사람은 누구나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패괴 성품이 있는 한 그도 야심을 품고 있다. 다만 그 야심을 펼칠 곳이 없었을 뿐이다. 그럴 기회를 주는 이도 없었고, 그 역시도 기회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 그의 야심은 그렇게 숨어 있지만, 야심을 펼칠 기회만 주어진다면, 적당한 상황, 적당한 때에 그의 야심이 드러날 것이다. 너는 그때 비로소 그 순하고 어리숙해서 말도 똑바로 못하는 사람들이 패괴 성품이 없는 사람, 야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 인성이 훌륭하고 패괴가 적은 사람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런 사실이 밝혀지지 않으면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좋은 사람이니까 성품 변화가 필요 없어. 나는 진리를 알고, 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야. 진작부터 진리 실제가 있었다고. 당신들은 전부 패괴 성품이 있으니까 심판과 형벌, 훈계와 책망이 필요해. 왜냐하면 당신들은 깊이 패괴되었으니까. 다들 자질이 있다 보니 아주 교만하단 말이지.’ 그가 이런 이유를 대는 것은 치우치지 않았느냐? 이 역시 일종의 교만이다.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는데, 교만 하나만 보더라도 다양한 형식만큼 모습도 여러가지라서 분별이 쉽지 않고, 막기도 쉽지 않다. 못난 인간, 모자란 인간들은 교만한 성품이 없느냐? 패괴 성품이 없느냐? 누구에게나 있다. 바보라고 해도 교만하긴 마찬가지다. 지식을 좀 갖춘 사람은 교만할 뿐만 아니라 가장할 줄 알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을 미혹할 것이다. 그러면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이방인이 사람을 분별할 때는 전통적인 도덕 기준에 따라서만 사람의 좋고 나쁨을 분별하고, 사람의 행위와 태도에 따라서만 사람의 좋고 나쁨을 규정한다. 그러면 사람의 본성 본질을 간파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사람을 분별해야 하느냐?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을 분별해야 정확함에 이르고, 사람을 간파할 수 있느냐?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리를 기준으로,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해야만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람을 분별할 때 사람의 관념과 상상, 전통적인 도덕을 기준으로 사람의 행위를 대조해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사람을 간파할 수 있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그 사람이 드러내는 사상과 관점, 의도를 관찰하고,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동기와 출발점이 어떤 것인지를 봐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의 패괴 성품과 본성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든 그가 자신이 사물을 보는 수많은 관점을 드러내고, 어떤 일에서든 자신의 주장을 발표한다면 쉽게 그의 패괴 성품, 본성 본질을 분별할 수 있다. 만약 그의 관점과 주장이 진리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의 패괴 성품과 사탄 본성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고, 진리에 근거해서 사람을 분별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패괴 성품과 사탄 본성이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쉽게 사물을 간파하고 사람을 분별한다. 너희는 사람을 분별할 줄 아느냐? 생활 속에서 다양한 종류의 사람과 일, 사물을 관찰할 줄 아느냐? 그렇지 않다면 그건 너희가 아직도 진리를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사람을 분별하려면 우선 자신이 하는 말이 진리에 부합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원칙이 있는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이 내뱉는 말과 자신이 하는 일을 분별한 다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발견하고 해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분별하는 단계에 이를 수 있다.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을 분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글귀와 도리를 얘기할 줄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일을 겪어야 한다. 최소한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어야 자신을 알 수 있고, 자신을 인식하는 일에서부터 연습을 거치면서 서서히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을 분별할 줄 알게 된다. 먼저 자신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면 자신의 행위, 자신의 패괴 성품을 확실히 분별하고, 자신의 오류, 자신의 상태, 자신의 결점을 확실히 분별하고, 그 본질을 모조리 간파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분별할 줄 아는 것이다. 자신을 제대로 분별해야 다른 사람도 분별할 수 있다. 자기 일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도 정확히 분별한다는 보장이 없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 문제는 아주 정확히 분별하면서 자기가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문제냐? 성품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사실 다른 사람을 분별하는 것과 자신을 분별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은 정확하게 분별하면서 정작 자신은 반성해서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렇다면 네 마음이 비뚤어진 것이고 네 성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참 기가 막히게 분별하는 사람이 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정작 자기 문제는 분별할 줄 모른다면 이것이 진실된 것이냐? 그건 허울이고 거짓된 모습이다. 사실 그는 자질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분별이 있으면서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된 건지 속으로는 알면서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고, 너무나 정직하지 못하다. 말을 정직하게 하지 않으면 정직한 사람이 아니다.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 거짓말을 내뱉는 사람이다. 사람이 자신을 정확하게 분별하고 또 해부해서 솔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남들이 유익을 얻도록 한다면, 이 사람은 정말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다. 그의 인품 역시 바르고, 곧고, 정직하다. 솔직하게 자신을 털어놓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알면 실행해 낼 수 있고, 틀림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이다. 진리를 알고 실행해 내기 위해서는 먼저 인품이 발라야 한다. 정직한 사람만이 그걸 해낼 수 있다. 비록 사람은 모두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지만,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관건은 진리 추구와 진리 실행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매일 이 부분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와 어려움을 만나든 진리 실행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구해 자신을 반성하는 법을 배우고 마지막에는 진리를 실행해 내는 것, 이것이 가장 핵심이다. 절대 자기 이익을 지키려 해서는 안 된다. ‘이익’이라는 단어를 내세우면 진리는 실행할 수 없다.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한 명도 없다.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은 모두 정직한 사람, 진리를 사랑하는 선량한 사람,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다. 하나같이 자신의 이익, 허영과 체면을 내려놓고 육을 저버릴 줄 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다. 진리를 실행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바로 자신의 사심과 이익을 추구하는 성품이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진리를 구해 해결할 수만 있다면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패괴 성품 문제는 해결될 수 없고, 그러면 진리를 실행하지 못한다. 진리를 실행함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패괴 성품, 특히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비열한 성품이다. 패괴 성품 문제만 해결되면 다른 어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교만하고 독선적인 패괴 성품 때문에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기도 한다. 늘 자기만 옳고,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며 항상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으로, 이런 성품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것이 그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만약 진리를 구해서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만 한다면, 그가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 외 다른 문제는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고, 진리를 구하면 된다. 즉, 그와 관계된 하나님 말씀을 몇 단락 찾아서 묵상하고 교제하면 어떤 문제든 손쉽게 해결될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매일 진리를 묵상하고 구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사람은 매일 본분을 이행하는 것 말고도 진리 실행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몇몇 일들과 부딪히기 마련이다. 꼭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아니더라도 진리 실행과 관계된 일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루의 생활을 무엇을 위주로 어떻게 안배하는지, 어떤 본분을 이행하는지, 본분에서 생긴 문제는 어떻게 진리를 구해 해결하는지, 마음속으로 반성하고 인식하고 해결해야 할 패괴는 어떤 것인지와 같은 일들은 모두 다양한 진리와 관계가 있다.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으면 그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는데, 이것이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냐? 매일의 일상 가운데 네가 생각하는 것이 모두 자신의 패괴 성품을 어떻게 해결하고, 어떻게 진리를 실행하고, 어떻게 진리 원칙을 깨닫는지 하는 문제와 관계된 것이라면, 너는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진리를 이용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이고, 생명 진입이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따르면서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조금씩 진리 실제에 진입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여전히 명예와 지위에 집중하고 스스로를 뽐내 남들의 우러름을 받는 데 집중한다면,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네가 추구하는 것은 진리나 생명이 아니라 네가 좋아하는 것, 명리와 지위이다. 그렇기에 네 모든 행동은 진리와 무관한 악행에 속하며, 이는 봉사하는 것에 속한다. 만약 네가 마음속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향해 매진하며 성품 변화를 추구한다면,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고, 무슨 일을 하든 스스로 단속하면서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면 네 상태는 점점 좋아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가는 길은 각자 다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탄 철학으로 살아가는 삶에만 관심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좋은 행위, 겉으로 드러난 경건함에만 만족하며 마음에 여전히 야심과 욕망을 품은 채 명예와 이익, 지위를 추구하고, 여전히 복을 받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는 마음뿐이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줄곧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매사에 진리를 구한다. 또 스스로를 돌아보고 인식하며 진리 실행에 집중한다. 마음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가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관념과 오해가 생겼을 때 얼른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 해결한다. 또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하는 데 집중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자 하며, 진리를 향해 노력하고 하나님 알기를 추구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모든 악행을 멀리하게 된다. 이런 사람이 바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2018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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