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을 아는 것은 성품 변화의 기초이다

사람은 사탄에 의해 너무 깊이 패괴되어 모두 사탄의 본성과 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바보와 멍청이조차도 모두 매우 교만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겨 승복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사람이 깊이 패괴되어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교만과 독선 때문에 비이성적으로 변해 누구에게도 승복하지 않는데, 설령 다른 사람의 말이 맞고 진리에 부합해도 승복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교만함 때문에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만한 성품은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사람이 자제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교만한 성품을 해결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점차적으로 교만한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교만한 성품을 해결하지 못한다. 내가 본 바에 의하면, 본분을 이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능력이 좀 있으면 교만해지고, 특기가 있으면 자기가 대단한 줄 알고, 경험에만 의지하며 현 상태에 안주한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듣지 않고, 자신이 갖고 있는 보잘것없는 그것이 바로 진리이고 지극히 높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무슨 성품이냐? 이것이 바로 교만한 성품이다. 그런 사람은 지나치게 비이성적이다. 교만한 성품을 갖고 있는 사람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따를 수 있겠느냐? 이는 더 어렵다. 교만한 성품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체험할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진정으로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자신의 패괴 본질과 교만의 뿌리를 꿰뚫어 본 다음, 이를 분별하고 분석해야만 자신의 본성 본질을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 자기 내면의 패괴된 것들을 파내어 진리에 근거해 대조하고 인식해야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패괴 성품이 가득하고, 비이성적이고 순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너무나 많이 부족하고 진리 실제가 전혀 없고 매우 가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교만해지지 못한다. 이렇게 자신을 분석하고 인식하지 않으면, 본분을 이행할 때 분별없이 우쭐대어 자기는 뭐든 다 훌륭하고 다른 사람은 뭐든 다 나쁘니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 다음 곳곳에서 다른 사람의 우러름과 숭배를 받고자 자신을 드러내니, 이는 지나치게 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늘 자신을 드러내는데, 다른 사람이 눈에 거슬려 그에게 교만하다고 질책하면 승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능력과 수완이 있다고 여긴다. 이는 어떤 성품이냐? 지나치게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이다. 이렇게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 진리를 갈망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만약 계속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지 못한다면, 그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분명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뜻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고, 절대 다른 사람의 건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한 가지 방안을 제공하면, 그 당시에는 적어 놓고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지만, 나중에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계속 자신의 뜻대로 한다. 이는 어떤 성품이냐? (독선적이고 교만한 성품입니다.) 여기에 강퍅함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사람은 다 강퍅함과 교만함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이 맞고 일리가 있을 때, 사람이 양심과 이성에 따라 그 일을 대한다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실행해 낼 수 있느냐? (반드시 실행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태도를 갖춰야 실행해 낼 수 있느냐? 우선 올바른 태도를 갖춰야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상상과 판단 또는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이해를 내려놓고, 올바른 건의를 가지고 고민하고 진리를 구해야 하며, 그런 다음 옳고,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는 확신이 들면,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땅히 갖춰야 하는 태도 아니겠느냐? 이런 태도에 교만이 있겠느냐? 교만이 없다. 이는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이며,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이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태도이다. 매우 일리 있으며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당시에는 체면이나 일시적인 이해 때문에 입으로는 받아들였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일을 할 때 여전히 자신의 뜻대로 하고, 마음속으로 옳다고 인정했던 말을 한쪽으로 치워 버린다면,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런 태도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겠느냐? 이는 어떤 성품이냐? 이것이 바로 교만과 패역이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뜻을 최고로 치며, 자신의 의견과 주장에 따라 결정하고, 진리 원칙, 긍정적인 사물, 하나님 말씀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앞에서는 칼같이 약속해 놓고는 나중에 일이 닥쳤을 때에는 실행하기 싫어서 마음속으로 주판알을 튕긴다. ‘만약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진리를 명백하게 교제하고 또 사람의 관념을 바로잡아야 해. 난이도가 매우 높고 말도 많이 해야 하는데, 어쩌면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할 수도 있어.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고, 너무 번거로워! 일을 덜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해. 모두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내 말을 들어야 해. 결정은 내가 해.’ 이는 어떤 태도이냐? 이는 간사하고 교활한 태도이다. 약속할 때는 간곡하고, 진실되고, 성실하고, 경건하게 보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고 진리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일을 처리할 때는 그렇지 않았고 태도가 변했다. 왜 변했느냐? 왜 그의 태도가 180도 변했겠느냐? 무엇으로 인한 것이냐? 그렇게 하면 육이 너무 고생하고 번거롭다고 생각하여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그런 고생을 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한 맹세나 약속한 것들이 다 상관없어진 것이고,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든 안 하든 상관없어진 것이다. 자신의 육을 만족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가 되었으며, 하나님이 맡긴 일을 맨 마지막에 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 것이다. 이는 책임을 지는 사람이겠느냐?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겠느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겠느냐? 아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을 처리할 때 앞에서는 잘할 수 있다고 보장하며 마음 푹 놓으라고 하지만, 일을 처리할 때 어려움이 닥치면 바로 한쪽으로 치워 두고 포기해 버린다. 이것이 신용을 중시하는 사람이겠느냐? 이것이 원칙에 따른 일 처리이겠느냐? 특히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 집을 위해 일할 때에는 더더욱 진리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때로는 설령 자신이 손해를 보고 수치를 당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집의 이익을 수호해야 한다. 절대로 교회 사역이 손실을 입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늘 하나님 집을 위해 고려할 수 있는 정직한 사람이다. 간사한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늘 자신의 이익을 염두에 두며, 무슨 일을 하든 조금이라도 손해를 봐서는 안 된다. 하나님 집의 이익이 손해를 보더라도 그 자신은 손해를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본분 이행이 과연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 아닌지 다 알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한다. 만약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고 사악하여 일을 할 때 육적 이익을 탐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을 감찰해 낸다면, 하나님은 이 사람을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 스스로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겠느냐? (느끼지 못합니다.) 왜 느끼지 못하느냐? (사람이 본성에 지배받아 일을 할 때는 육적 이익만 충족되면 자신을 성찰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내면에 생존을 위해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냐? 사탄의 패괴 성품이다. 사람의 본질이 바로 사탄의 본질이다. 사람은 사탄의 성품대로 살며 자신의 허영심과 체면, 육적 이익만 지키게 된다. 이런 이기적이고 비열한 생각이 이미 본성이 되어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진리 원칙과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하라고 하면, 사람은 매우 힘겹고 힘들다고 느끼게 된다. 이는 어떤 문제이냐? 바로 사람이 사탄의 성품에 결박과 통제를 당해 마음속에 부정적인 것이 지나치게 많고 진리를 실행하기 너무 어렵고 쉽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만약 패괴 성품이 정결함을 얻게 되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면, 진리 실행에 장애물과 어려움이 없어져 힘들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사람이 진리를 갈망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전혀 없다면, 그 사람의 내면에는 취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일이 닥칠 때마다 사탄의 철학에 따라 살 줄밖에 모르기 때문에, 특히나 빈곤하고 가련하며 눈이 멀어 보인다. 즉, 사람의 내면이 너무도 가난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죄를 이길 능력, 자신의 육을 저버릴 능력, 진리를 실행할 동력, 자신의 관점을 바꿀 결심, 하나님에게 완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빈곤하고 가련하며 눈이 먼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자신의 뜻에 따라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할 때는 힘이 넘치는데, 하나님의 요구와 진리 원칙에 따라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겉으로 보면, 어떤 사람들은 말도 잘하며 지식도 있고 은사와 특기도 좀 있어 능력이 있는 사람인데, 왜 빈곤하고 가련하다고 하겠느냐? 이는 어떻게 가늠하는 것이냐? 사람이 진리를 전혀 갖추고 있지 않으면, 빈곤하고 가련한 것이다. 지식수준, 은사, 특기가 진리를 대체할 수 있느냐?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난관을 헤쳐 나가도록 도울 수 있느냐? 사람이 굳게 서서 증거함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기호, 욕망, 관념, 상상에 따라 하기를 좋아하는데, 매우 즐거워하고 만족스러워하며, 수월하게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려 하면, 자신이 그럴 능력이 없다고 느끼고 전혀 흥미를 못 느끼고 심지어 반신불수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린다. 이는 어찌 된 일이냐? 그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냐? 은사와 지식에 따라 일을 하고, 사람의 선의와 기호에 따라 일을 하면, 사람의 능력이 십분 발휘되고 잔꾀도 많아 그야말로 기운이 펄펄 넘친다. 그런데 어째서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하라고 하면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라도 다들 속수무책으로 어찌 할 줄 모르는 것이냐? 그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왜 사람은 진리 실행과 진리 원칙을 구하는 일에서는 멍청이같이 빈곤하고 가련하면서도 여전히 허풍을 떨고 큰소리를 칠 수 있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겨 누구에게도 승복하지 못하는 것이냐? 이는 무엇 때문이냐? (사람이 자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 이는 한 측면이다. 주요 원인은 바로 사람이 패괴 성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바로 그런 추한 모습, 그런 꼴, 그런 가련한 모습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진리가 없는 사람은 모두 이렇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지위가 높아도, 드러내는 것마다 다 추한 모습이고 궁상맞다. 하나님과 진리 앞에서 사람은 바로 이렇게 빈곤하고 가련하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내가 접했던 어떤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과 대화하고 일을 처리할 때, 그들은 무감각하고 우둔하며 빈곤하고 가련한 모습이었다. 외부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래도 좀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진리 원칙과 관련이 되면 그들은 관점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아니면 아예 관점이란 것이 없었다. 하나님을 그렇게 오랫동안 믿었고, 하나님 말씀을 그렇게 많이 읽었고, 설교를 그렇게 많이 들었으며, 날마다 영 생활을 하였는데, 왜 이렇게 무감각하고 우둔하며 빈곤하고 가련할 수 있는 것이냐? 일이 닥쳤을 때 어째서 올바른 관점을 갖지 못하는 것이냐? 왜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 것이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맞다. 설교를 많이 듣기는 했지만 도리만을 들었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기는 했지만 도리만 이해했으며, 예배도 많이 드렸지만 얻은 것이라고는 문자적인 것이나 규례적인 것들뿐이다. 이는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왜 이런 것들을 얻은 것이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리를, 생명을, 진리 실제를 공급했는데, 사람에게서 맺은 결실은 어째서 이런 것이냐? 너희는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한 적이 있느냐? 이는 심각하고 큰 문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네가 하나님 말씀을 마음속 깊이 먹고 마셔 자신의 실제가 되게 해야 한다. 자기 내면의 상태와 내적 상태를 변화시켜 직면한 모든 일에 올바른 관점과 올바른 태도를 갖도록 해야 한다. 이는 마땅히 실행해야 하는 길 아니겠느냐? 마땅히 구해야 하는 방향 아니겠느냐? 너희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어떻게 해야 이러한 길을 갈 수 있겠느냐? 너희의 생각은 무엇이냐? (하나님, 저는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의 속셈, 동기, 드러내는 패괴 성품을 반성하고, 그런 다음에 의식적으로 옳지 않은 속셈과 패괴 표출을 저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따라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이 맞다. 하지만 실행 과정에서 자신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느냐? (발견할 때도 있고, 발견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늘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늘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의 모든 행동을 성찰해야 한다. 성령은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을 깨우쳐 줄 것인데, 성령의 깨우침이 있으면 이 문제는 해결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의지하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없다.

내가 예를 들어 볼 테니, 너희가 자신을 반성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에서 자신에게 존재하는 문제를 볼 수 있는지 분석하고 살펴보아라. 예전에 나와 함께 지냈던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무슨 일을 하든 나의 의견을 물었고,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든 굽실거리며 진지하게 들었다. 그의 내면에는 ‘당신은 하나님이시니 제가 당신을 노하시게 하면 안 됩니다. 이 경계를 넘어서면 안 됩니다. 당신의 말씀에 따르고, 당신이 하시라는 대로 그대로 따를 것입니다.’라는 경계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어떤 문제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함께 지내며 교류를 좀 하고 나니, 그는 나의 말하는 방식과 말투가 익숙해지고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당신과 제가 비록 평등하지 않고 신분과 지위도 서로 비슷하지 않지만, 저는 자유롭게 당신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어요. 감추고 숨길 필요 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되었어요.’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사람과 하나님의 이런 관계가 깨졌을 때, 그는 생각했다. ‘저는 당신이 어떤 성격인지 알게 되었고,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게 되었어요. 어떤 일을 해야 당신이 화를 내지 않고 저를 책망하지 않는지 알기 때문에 책망받을 일은 피하고 하지 않아요. 설령 했다 하더라도 당신에게 안 보이게 하고 모르게 하죠. 당신이 알면 안 되니까 당신과 가까운 사람에게는 제가 몰래 한 일을 말하지도 않아요. 이렇게 하면 당신이 모르지 않겠어요? 모르면 저를 책망하지 않지 않겠어요? 그럼 제가 체면이 깎이고 고통을 겪을 필요 없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당신이 하라는 다른 것은 여전히 그대로 따르고 순종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상대적인 자유가 필요해요.’ 이는 문제가 생긴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여기에 사람의 간사한 마음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남 앞에서든 하나님 앞에서든, 늘 자기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을 숨기려 하는데, 이런 마음가짐과 성품이 바로 간사함이다. 사람이라면 다 가지고 있다. 여기에 또 다른 성품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만함이다. 어디에서 교만함이 나타났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당신도 이렇게 잡담하고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도 별로 대단하지 않으시네요. 당신은 그저 이런 말씀만 할 줄 아시는 거죠. 제가 당신과 친해지면, 제가 당신보다 말을 더 잘할 거예요. 당신은 이런 옷을 입으시나요? 제가 당신보다 더 잘 꾸미고 예뻐요. 당신은 그저 저보다 진리를 더 갖추고 있을 뿐이죠. 그러니 시간이 흘러 친해지면, 제가 감히 거침없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거고, 또 하는 말이 틀리지 않을 거예요.’ 이는 교만함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는 두 가지 성품이다. 여기에 또 숨겨진 성품이 하나 있는데, 너희는 발견했느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함과 간사함을 드러내고 외식할 때, 마음 깊은 곳에 의식이 있느냐? (의식이 있습니다.) 이 의식이 있을 때, 사람은 어찌 하느냐? 자제하느냐? 조심하느냐? 자신을 반성하느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교만한 성품을 드러낸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지 않고, 누군가 지적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위해 궤변을 늘어놓는데, 이는 무슨 성품이냐? (강퍅한 성품입니다.) 맞다. 이것이 강퍅함이다. 이런 강퍅한 성품이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나타나든, 어떤 상황에서 이런 태도를 드러내든 상관없이 이런 사람이 바로 성품이 강퍅한 사람이다. 사람이 아무리 교활하고 위장을 해도, 이런 강퍅한 성품은 쉽게 드러난다. 이는 사람이 진공 상태에서 사는 것이 아니며, 네가 사람들 앞에 있든 아니면 뒤에 있든,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감찰하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늘 제멋대로이고, 방탕하며, 단속을 받지 않으며 이런 생각이 생기고 이런 패괴 표출이 있으면, 이를 감지했음에도 돌이키지 않고, 이를 인식했을 때에도 회개하지 않으며, 솔직하게 털어놓고 교제하지 않고, 진리를 구해 이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강퍅함이다. 강퍅함의 특징을 통해 볼 때, ‘강(剛)’은 완고하고, 돌이키지 않으며, 부드럽지 않다는 의미이고, ‘퍅(愎)’은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통증을 느끼기 때문에 차마 건드리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다 딱딱한 물건을 접촉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통 사람은 다들 강퍅한 성품의 사람과 접촉하기 싫어한다. 부드러운 것은 질감부터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사람은 다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는데, 강퍅함은 이것들과는 완전 정반대이다. 강퍅함은 사람의 태도로 드러난다. 이러한 태도는 바로 우매함과 고집스러움이다. 여기에 있는 성품은 무엇이냐? 바로 강퍅한 성품이다. 일이 닥쳤을 때 비록 의식이 있거나 또는 이것이 좋지 않고 옳지 않은 태도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을지라도 강퍅한 성품에 지배받아 ‘다른 사람이 발견한들 어쩌겠어? 난 원래 이래!’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무슨 태도이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이것을 좋지 않은 것,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 사탄에게서 나온 것, 사탄 성품의 표출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보든, 하나님이 아무리 혐오해도 그가 느끼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이 문제의 심각성이다. 강퍅한 성품이 좋으냐? (좋지 않습니다.) 이는 사탄의 성품으로, 사람이 쉽게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회개하기는 더 어렵게 한다. 사탄의 성품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부정적인 사물로, 하나님이 모두 증오하는 것이고, 긍정적인 것이 없는 것이다.

방금 간사함, 교만함, 강퍅함, 이 세 가지 성품을 이야기했는데, 이 세 가지 성품은 모두 치명적이다. 만약 사람에게 교만함과 간사함 또는 강퍅함을 드러낸다면, 이는 단지 성품과 인성이 나쁜 것이다. 하나님에게 교만함, 간사함, 강퍅함을 드러낼 수 있다면,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태도로,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기 쉽다. 회개하지 않으면 매우 위험해진다. 네가 사람 앞에서 이런 성품을 드러낸다면, 사람들은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만약 네가 하나님 앞에서도 여전히 이런 패괴 성품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게 되는 것이다. 비록 의도적이거나 고의로 한 것은 아니지만, 사탄 본성의 지배를 받아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패괴 성품을 드러낼 때 자신을 반성하지 못하고, 진리를 사용해 해결하지 못한다면, 조만간 병이 되고, 일단 고질병이 재발하면 아주 골치 아파진다. 만약 여러 차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른다면 틀림없이 도태된다.

방금 든 예에서 그 사람의 행동에는 또 어떤 성품이 있느냐?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진리를 싫어하는 것을 어떤 일을 통해 알 수 있느냐? 겉으로 볼 때, 그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며, 하나님이 하라고 요구한 것, 자신의 본분, 교회 사역 범주 내의 일이라면 모두 마다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진리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이냐? (그는 한 번도 진리를 구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구한 적이 전혀 없다는 것, 이는 명확한 증거이다. 그렇다면 세부적인 면에서 어떤 모습들이 그가 진리를 싫어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느냐? (하나님의 요구와 그 자신의 뜻이 상충할 때, 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따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부적인 면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은 주로 어디서 나타나느냐? 긍정적인 사물을 봤을 때, 그는 진리로 가늠하지 않고 무엇으로 가늠하느냐? 그는 사탄의 논리로 가늠하여 그 일이 멋지게 행해졌는지, 형식은 어땠는지, 기세는 어땠는지를 본다. 그는 사탄이 사람을 가늠하는 방식, 즉 이방인이 사람을 가늠하는 방식과 원칙으로 모든 것을 가늠한다. 그는 일을 할 때 진리를 구하지 않으며, 무슨 일을 하든 출발점은 모두 자신의 상상과 관점이고, 진리는 한쪽 구석에 내버려둔 채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처세술과 지식으로 가늠한다. 무슨 일을 하든 다 이렇게 한다. 그는 사람의 관점과 사탄의 논리로 가늠하는데, 이리저리 가늠해 봐도 그의 눈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만 못하고, 그 자신이 가장 훌륭하다. 그렇다면 그의 마음속에 여전히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있겠느냐? 여전히 진리 원칙이 있겠느냐? 없다. 그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보지 못하고, 진리가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임을 보지 못하며, 진리가 모든 것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성육신한 하나님을 깔보고,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옷차림, 언행에 늘 관념을 갖게 된다. 접촉한 시간이 길어지면 그는 ‘당신은 제가 상상한 것만큼 그렇게 존귀하고, 위엄 있고, 깊이가 있지 않으시네요. 기품이 저만 못해요. 제가 이곳에 딱 서면, 어떻게 봐도 큰 인물 같은 기품이잖아요? 당신의 말씀에 진리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하나님의 모습은 아니에요. 당신은 늘 진리와 실제에 진입하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어째서 비밀을 밝혀 주시지는 않으세요? 어째서 셋째 하늘의 언어로 조금 말씀하시지 않으세요?’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무슨 논리이고 무슨 관점이냐? (사탄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이는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다. 말해 보아라. 이런 일들을 내가 어떻게 대하겠느냐? (이런 사람을 혐오하고,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틀렸다. 완전 반대이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에게 접근해 정상적으로 교제할 것이다. 공급할 수 있으면 공급하고, 도울 수 있으면 도울 것이다. 만약 그가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고집불통이라면, 나는 그와 정상적으로 함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기면 최대한 그와 상의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보기에 이렇게 하면 될까요? 이 몇 가지 방식 중 당신이 보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하죠. 적합한 게 하나도 없으면, 당신이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가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할수록, 나는 더 그와 이런 식으로 함께할 것이다. 나는 누구와 함께하든 잘난 척하지 않는다. 만약 높고 낮은 의자 두 개가 있다면, 높은 의자에 그가 앉게 하고 나는 낮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고 그와 말을 할 것이다. 결국에는 그를 부끄럽게 하여 그가 조금씩 깨닫고 자신이 진리가 없어서 빈곤하고 가련하며 무감각하고 우둔하다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이런 방식은 어떠하냐? (좋습니다.) 그럼 내가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좋겠느냐? 사실 이것도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그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그가 하나님 믿는 일에 진심과 인성이 좀 있다면, 구제할 수 있으니 그를 상대하는 것도 괜찮다. 결국 언젠가 그가 진리를 깨닫게 되면, 스스로 낮은 의자를 선택해 앉을 것이며 거만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만약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히 그렇게 무지하고 어리석을 것이다. 늘 어리석은 말을 하고 어리석은 일을 하는 빈곤하고 가련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의 추한 모습이다. 긍정적인 사물을 보면 마음속으로 깔보고 멸시하며, 다른 사람이 정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며, 늘 진리를 실행하지만 간혹 지혜가 부족한 것을 보면 마음속으로 업신여긴다. 이런 사람을 무능하고 못났다고 생각하고, 역시 자기가 영리하고 따질 줄 알며, 권모술수에 능하고, 수완도 있고, 은사도 있고, 하기도 잘하고, 말도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완전히 정반대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싫어하는 대상이다. 이는 바로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의 성품이다.

어떤 사람은 나와 접촉을 오래 해 비교적 친해지면, 의형제처럼 대등하게 지내지는 않더라도, 별다른 구속을 받지 않게 된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점점 겁이 없어지고, 마음속 경계도 점점 없어지게 된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해 늘 자신이 아는 것을 나에게 말하는데, 마음속으로는 다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성품이냐? (교만한 성품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함이다. 외부의 일들은 한번 보기만 하면 알 수 있지만 그가 늘 잘난 체하니 사람들이 싫어한다. 교만한 성품이 이성까지 없을 정도가 되면, 사람이 악을 행할 수 있으며, 그 교만한 성품은 흉악한 성품으로 변하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똑똑하지만 말하거나 행동할 때 늘 꿍꿍이가 있는 지독한 사람이어서 네가 그와 함께 있을 때 그가 늘 너를 통제하고 간섭하려 한다면, 네 마음속에서 이 사람은 선량한 사람이냐, 아니면 흉악한 사람이냐? (흉악한 사람입니다.) 너는 마음속으로 그를 두려워해 ‘이 사람은 늘 나를 통제하려 하니, 빨리 피해야 해.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가 보복할 거야. 어쩌면 나를 괴롭힐지도 몰라.’라고 생각한다. 네가 그의 성품이 흉악하다는 것을 느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느끼게 된 것이냐? (그는 늘 자신의 요구와 생각대로 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일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 이것이 꼭 틀린 것이냐? 다른 사람이 너에게 요구하는 것, 이 자체가 틀린 것이냐? 이 논리가 옳으냐? 이것이 진리에 부합하느냐? (진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불편함을 느낀 것은 그의 행위이냐, 아니면 그의 성품이냐? (그의 성품입니다.) 맞다. 그의 성품 때문에 네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성품은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며, 너를 교란하고, 통제하고, 결박한다고 느끼게 된다. 네가 불편함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괴롭힘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다. 이런 사람은 성품이 지나치게 흉악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너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강력하게 너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요구하는데, 여기에는 성품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너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요구할 뿐만 아니라, 너라는 사람을 통제하려 한다. 너를 통제하면 네가 그의 꼭두각시가 되고 그의 손안에 있는 노리갯감이 될 것이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무엇을 하든, 어떻게 하든, 모두 그의 말을 듣게 되면, 그는 기뻐할 것이다. 네가 이런 성품을 느낄 때, 마음속에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네가 두려움을 느낄 때, 너는 그의 이런 성품을 어떻게 정의하겠느냐? 책임감 있고 선량하다고 하겠느냐, 아니면 흉악하다고 하겠느냐? 흉악하다고 느낄 것이다. 어떤 사람의 성품이 흉악하다고 느낄 때, 너는 즐거움을 느끼겠느냐, 아니면 혐오, 반감, 두려움을 느끼겠느냐? (혐오, 반감,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이런 좋지 않은 느낌이 모두 들게 된다. 혐오, 반감, 두려움을 느낄 때, 너는 해방과 자유를 느끼겠느냐, 아니면 결박당한 느낌을 받겠느냐? (결박당한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이런 기분과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사탄에게서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은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누리게 하느냐? (해방되고 자유로운 느낌을 누리게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해방되고 자유로우면, 책망과 훈계, 꾸짖음, 징계 또는 심판과 형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어떤 기분과 느낌을 받겠느냐? (마음속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뉘우칩니다. 자신이 그렇게 한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겨 진실하게 회개하고 올바른 방향을 향해 걸어갈 수 있습니다. 비록 마음은 좀 고통스럽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평온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성과를 얻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행사이다. 사탄이 일을 한 결과는 무엇이냐? (사람이 결박당해 해방받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고통받지만 어떻게 해야 벗어나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구속을 받고 알 수 없는 괴이한 두려움을 갖게 되고, 마음이 속박과 구속을 당한다. 일을 할 때 위축되고 두려움에 떨게 된다. 이는 사탄이 행한 것이고,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다. 사탄,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행동하는데, 이는 어떤 성품이냐? 이것이 바로 흉악한 성품이다.

흉악한 성품의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 한다. 다른 사람을 통제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냐? 단지 네가 어떤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냐? 단지 네가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냐? 분명 아니다. 이는 말과 생각의 문제가 아닌, 그의 성품이 흉악하다는 것이다. ‘흉악’이라는 두 글자를 놓고 봤을 때, 이런 성품을 드러내면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느냐? 우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한다. 지배란 무엇이냐? 바로 교회 안의 모든 일에 그가 다 개입하고, 간섭하고, 안배하려 하는 것이다. 그가 너에게 규율을 정해 주면 네가 그것을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않으면 화를 낸다. 그가 너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너는 반드시 동쪽으로 가야 하고, 서쪽으로 가라고 하면 서쪽으로 가야 한다. 그는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하는 것인데, 이런 것을 지배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사람의 운명을 지배하고, 사람의 삶, 생각, 행위, 기호를 지배하고 통제하려 한다. 이로써 그 사람의 마음, 생각, 기호, 염원이 모두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그 자신의 말과 뜻을 따르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지배라고 한다. 그는 늘 자신의 뜻에 따라 사람이 이것저것을 하게 안배하려 하는데, 원칙에 따라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의 속셈과 기호를 따른다. 그는 네가 어떤 느낌을 받든 상관하지 않고 그냥 강제로 명령하며, 너는 반드시 그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그의 뜻대로 하지 않으면 너를 처리하려 하는데, 너는 무력함과 어찌 할 방법이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음속으로는 이것이 우롱당하고 통제당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분별할 줄도 모르고, 더구나 감히 반항하지도 못한다. 그의 이런 행동은 사탄의 행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사탄의 행위이다. 사탄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우롱하고 지배한다. 따라서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사탄 성품은 바로 늘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통제와 지배라는 목적의 달성 여부를 떠나, 사람이라면 다 이런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어떤 성품이냐? (흉악한 성품입니다.) 이것이 바로 흉악함이다. 왜 흉악하다고 하는 것이냐? 이런 측면의 성품은 무엇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느냐? 여기에 강제성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강제성이 있다. 즉, 네가 듣든 안 듣든, 어떤 느낌이든, 즐겁든 아니든, 이해를 했든 못했든, 그는 너에게 그의 말을 들으라고, 그가 말하는 대로 하라고 강제로 요구한다. 그때, 상의의 여지란 전혀 없고, 너에게 말할 기회와 자유도 주지 않는다. 이런 의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흉’이다. 그렇다면 ‘악’은 무엇을 말하느냐? 바로 강제적인 주입과 억압이라는 수단으로 너를 통제해 그의 지배를 받게 하는 효과를 거두면 그가 만족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악’이다. 사탄은 일을 할 때 너의 자유 의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네가 곰곰이 생각하는 법과 분별하는 법을 배우게 내버려두지 않으며, 진리를 깨달아 생명이 점점 성장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탄은 네가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너를 통제하려 한다. 사탄은 네가 진리를 구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지 않으며, 너를 하나님 앞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사탄은 너를 자신의 앞으로 데려가 자신의 말을 듣게 한다. 마치 자신이 진리이고, 자신이 한 말은 모두 옳고, 자신이 만물의 중심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너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하고, 옳고 그름을 분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강제로 난폭하게 사람의 행위와 생각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 이런 성품이 바로 흉악함이다. 이런 태도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볼 수 있지 않느냐-않으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접했을 때, 그것이 흉악한 성품의 표출임을 알 수 있느냐?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이런 일을 하고 이런 성품을 드러낸다면, 너희가 느낄 수 있고 분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너희 자신이 이런 일을 하고 이런 성품을 드러낸다면, 너희는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느냐? ‘이런 성품은 흉악해! 이렇게 하면 큰일 나! 늘 다른 사람을 강점하고 강제로 통제하려는 욕망과 야심을 갖는 것은 옳지 않아. 이는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고 사탄의 성품이야. 이렇게 하면 안 돼. 진리에 부합하는 방식을 찾아 사람을 대하고 교류해야 해.’라고 깨달을 수 있겠느냐? 이것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데다 여전히 이런 성품을 종종 드러낸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너희는 아느냐? (형제자매가 그와 함께하려 하지 않고 그를 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함께 지낼 수 없고, 다른 사람이 그에게 지독한 반감을 갖게 된다. 마치 전염병처럼 그가 오기만 하면 다들 자리를 떠야 하는데, 어째서 이런 것이냐? 어느 누구도 그의 통제를 받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따르기를 원하지 사탄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데, 그가 늘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 하면, 다른 사람이 그를 버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우선, 형제자매가 늘 그를 버리고 싫어할 것이다. 만약 회개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본분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것이고, 또한 오래 이행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는 그가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태시켜야 한다. 이것 말고 또 어떤 결과가 있겠느냐? (교회 생활을 교란시킵니다.) 이것 또한 한 측면이다. 형제자매 가운데서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되어 교회 생활을 교란시킨다. 그 사람 개인은 이로 인해 어떤 손실을 입겠느냐? (그의 생명이 성장하지 못합니다.) 분명 생명이 성장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최후에는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분명 징벌을 받고 도태된다. 어떤 사람이 형제자매에게 늘 버림을 받고 생명이 도무지 성장하지 않는다면, 게다가 늘 다른 사람을 통제하여 자신의 말을 듣게 함으로써 사람 마음속 하나님의 지위를 대체하려 한다면,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고립되었는데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도무지 변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대답해 보아라. 하나님이 구원하는 것은 인류이냐 아니면 비인류이냐? (인류를 구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정의하느냐? (비인류로 정의하십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비인류로 정의하고 구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결말이 정해진 것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은 희망이 없으며,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 비인류로 정의되는 것, 그건 너무나 가련하다!

생명 진입을 추구하려면 일상생활 속 모든 일에서 자신의 언행과 생각을 성찰하여 자신의 내적 상태를 파악한 후, 다시 하나님 말씀과 대조하여 진리를 구하고, 깨달은 만큼 실행해야 한다. 실행하고 체험하는 과정에서는 또한 시시각각 자신의 내적 상태를 성찰하여 자신의 마음속에 또 어떤 소극적인 상태와 진리 실행을 방해하는 것이 있는지 살피고, 그것을 파헤쳐 낸 후 다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간구하여 이런 비정상적인 내적 상태를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깨달은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다. 소극적인 상태, 관념, 상상을 끊임없이 해결해야만 진리 실행을 보장할 수 있다. 어떤 측면의 진리를 실행하든 모두 어느 정도의 어려움이 있으며, 환경과 배경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어려움도 생겨난다. 이 밖에도 사람의 다양한 관념, 상상, 불순한 의도, 이런 것들이 모두 진리 실행을 방해할 수 있다. 그러니 늘 진리를 깨달은 사람과 솔직하게 털어놓고 교제하며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길과 진리 원칙을 구해야 한다. 그래야 각종 환경과 배경 속에서, 그리고 다양한 일에서 모두 진리 원칙에 따라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다. 이렇게 진입을 구하고 실행해야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이 항상 자신을 반성하지 못하면, 자신의 내적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진리 실행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장애물이 얼마나 큰지도 모르게 되는데, 이러면 진리 실행을 보장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내적 상태를 파악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앙망할 수 있고, 쉽게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늘 관념과 상상에 따라 규례를 지키기 때문에 장애물도 많고 어려움도 많다. 사실, 사람이 직면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여전히 패괴 성품이고, 그다음이 바로 실행 원칙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두 문제를 해결하면 쉽게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되려면,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면, 우선 진리 실행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만약 매일 직면하는 다양한 일에서 몇 가지 측면의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면, 이는 이미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이다. 네가 늘 이렇게 훈련하여 하나님 말씀 속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실행의 길을 찾는다면, 점차적으로 자신의 패괴된 내적 상태를 해결할 수 있다. 또한, 진리의 실행과 진입에 있어서도 길이 생기고, 동시에 각 측면의 진리에 대한 실행 원칙을 기본적으로 다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내적 상태와 각 측면의 진리를 진실하게 인식하게 되면, 사람은 마음으로 충만함을 느끼게 되고 나날이 부유해져 더 이상 무감각하고 우둔하며 빈곤하고 가련한 모습이 아니게 된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외부의 일에 대해서는 몇 마디 할 수 있지만, 이런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들 속에서 그들에게 올바른 관점을 말하라고 하거나 이런 일들에 대한 인식, 이런 일들에 대한 처리 방식과 실행 방법을 말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마음이 공백 상태이다. 일부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 말씀은 옳지 않아요. 우리는 공백 상태가 아니에요. 우리는 비가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주재이고, 봄에 나무에서 싹이 나는 것은 하나님의 안배이며, 새가 언제 둥지를 트는지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규칙이라는 것을, 그리고 각각의 꽃들이 왜 다 다르고, 다양한 색깔 차이가 있는지, 나뭇잎이 왜 초록색인지를 알아요.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규칙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칙에 따라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잠을 자며, 하루에 세끼를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요. 또한 사람에게는 누구도 깰 수 없는 생로병사의 규칙이 있다는 것도 알고, 게다가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아요. 오늘 살아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내일 죽어도 여전히 하나님께 감사해요. 우리는 지독하게 빈곤하고 무감각하고 우둔하지 않아요.” 사람이 단지 이런 도리를 안다고 해서, 이것이 진리를 깨달은 것이겠느냐?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이것들을 아는 것은 그저 시작일 뿐이지만, 이 또한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에 기대 살아야 하며, 어떤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지,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패괴 성품을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못한다면, 너는 생명 진입이 없고, 진리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일이 공허하지 않겠느냐? 마음속은 여전히 공백 상태인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예전에 저는 분량이 작아서 저에게 닥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서 배치하신 것임을 몰랐고, 이런 일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할지도 몰랐어요. 그래서 그런 일들이 발생했을 때, 저는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전부 사람의 방법으로 처리했어요. 지금은 매일 닥치는 일이 아무리 소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모두 하나님께서 배치하신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전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임을 깨달았으니 ‘하나님, 당신의 주재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운명도 당신의 손에 맡겨 당신의 지배에 따르길 원합니다. 저는 거역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기꺼이 당신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반드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저의 충성심과 혼신의 힘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할 거예요. 제가 이것들을 다 깨달았는데, 설마 여전히 빈곤하고 가련하겠어요?” 사실은 빈곤하고 가련하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이겠느냐? (그가 자신의 사탄 성품과 본성 본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영적 도리를 이야기할 줄은 알지만, 일이 닥치면 여전히 사탄 성품대로 살고, 하나님을 오래 믿었음에도 생명 성품의 변화가 전혀 없습니다.) 그가 그것들을 깨달은 것은 단지 거짓된 영적 겉옷을 걸친 것에 불과하다. 마치 하나님을 믿는 모습과 성도의 품위를 갖춘 것 같고, 또 일부 심오하고 영적인 신학 이론을 파악한 것 같지만, 그러나 그가 깨달은 그것들은 진리가 아닌 일종의 신학 이론에 불과하다. 그것으로는 사람의 인생 방향을 바꿀 수 없으며, 사람의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처세 원칙도 바꿀 수도 없고, 사람의 패괴 성품은 더더욱 바꾸지 못한다. 그런 신학 이론과 영적 도리로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전혀 정상화시킬 수 없으며, 사람이 자신의 패괴 성품을 알게 할 수 없고, 사람이 그런 패괴 성품을 벗어버리게 할 수도 없다. 더 나아가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할 수도 없다. 따라서 그런 소위 영적인 글귀와 도리는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고, 그저 사람을 교만하고 방자하게 만들어 점점 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게 할 뿐이다. 그런 쓰레기 같은 것들은 진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전부 외식하는 것이니 마땅히 철저하게 포기하고 버려야 한다.

지금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핵심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 (성품 변화입니다.) 많은 도리를 말할 줄 알면 사람의 성품에 변화가 생길 수 있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품 변화란 대체 무엇이냐? 성품이 변화하면 성격이 매우 상냥해지고 대하기 쉬워져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이냐? 성품이 변화하면 과묵해지고 근엄해지는 것이냐? 성품이 변화하면 온갖 시련을 다 겪은 듯하고 노련하고 성숙해지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품 변화란 무엇이냐? 성품이 변화되려면 우선적으로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 우선 성품 변화의 기초는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즉, 반드시 사탄에 의해 패괴된 사람의 본성 본질이 무엇인지, 성품이 무엇인지를 우선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러면 자신의 패괴된 본모습을 알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매우 간사하면, 이 간사함이 바로 그의 본성이자 그의 성품이고, 어떤 사람이 매우 교만하면, 이 교만함이 바로 그의 본성이자 그의 성품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 네 내면에 자신의 속셈이 있다고 하자. 이 속셈은 무엇에 지배를 받아 생기는 것이냐? 우선, 분명 너의 성격이 지배한 것은 아니다. 또한 가정 배경이 지배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지배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너의 속셈은 너의 성품에 지배를 받은 것이다. 그러니 너는 우선 그것이 어느 측면의 성품인지, 교만함, 사악함, 흉악함인지 아니면 강퍅함인지를 성찰해야 한다. 그다음에 이런 측면의 성품이 어떤 내적 상태를 초래할 수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간사함을 예로 들어 보자. 사람의 간사한 짓은 어떤 속셈에서 비롯되겠느냐?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겠느냐?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명리와 지위를 얻기 위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익을 추구하는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이익을 그 무엇보다 높이 본다. 이익을 얻기 위해 간사한 짓을 하며, 간사한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먼저 이익이란 무엇인지, 그것이 과연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이익을 추구한 결과는 무엇인지 분별하고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밝히 알지 못하면 이익을 포기하기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익을 포기하기가 그 무엇보다 어려울 것이다. 사람의 생명 철학이 바로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사람은 재물 때문에 죽고, 새는 먹이 때문에 죽는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람은 누구나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은 모두 이익이 없다면, 또는 이익을 잃는다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치 사람이 생존하려면 이익을 떠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오직 이익만을 좇으며, 이익을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 사람에게 이익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목숨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겠느냐? 반드시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를 깨달아야만 이익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고, 포기하고 저버리는 법을 배워 고통을 감내하면서 내려놓을 수 있다. 네가 고통을 감내하면서 내려놓고 이익을 포기한다면 어느 정도 홀가분하고 평안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육을 이긴 것이다. 만약 네가 한사코 이익을 끌어안고 놓지 않으며,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이익을 얻을 거야. 절대 손해 보지 않을 거라고. 이게 뭐가 잘못됐어? 하나님도 나를 벌하지 않으셨는데 사람이 나를 어쩌겠어?’ 누구도 너를 어쩌지는 못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마지막에는 진리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럼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큰 유감이 되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이익을 추구하는 자의 최종 결말이다. 사람이 명리와 지위,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영원히 진리 생명을 얻지 못한다. 결국, 손해 보는 것은 자신이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네 패괴 성품을 돌아보고 인식하지 않는다면 진실한 회개를 할 수 없고, 생명 진입도 불가능하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아는 것, 이는 너의 생명이 성장하여 구원에 이르는 길이고, 네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감찰과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 진리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이다. 만약 네가 명예와 지위,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진리 추구를 포기한다면, 이는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네가 선택하는 것은 명리와 지위, 자신의 이익이지만 네가 포기하는 것은 진리이고, 네가 잃게 되는 것은 생명과 구원받을 기회다. 어느 쪽이 가볍고 어느 쪽이 무거우냐? 이익을 선택하고 진리를 포기한다면 너는 어리석은 자 아니겠느냐? 한마디로 소탐대실이라고 할 수 있다. 명리와 지위, 돈, 이익은 모두 잠시적인 것,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고, 반면 진리 생명은 영원한 것이고, 영원불변한 것이다. 사람이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게 하는 패괴 성품을 해결한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생긴다. 이 밖에, 사람이 얻는 진리는 영원하여 사탄도, 어떤 사람도 빼앗아 갈 수 없다. 너는 이익을 포기하지만, 진리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며, 이 성과는 너에게 돌아간다. 이는 너 자신을 위해 얻는 것이다. 사람이 진리 실행을 선택한다면, 비록 이익을 잃을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누구보다 총명한 사람이다. 만약 사람이 이익을 얻기 위해 진리를 포기한다면, 생명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잃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누구보다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익과 진리 앞에서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그 사람을 너무나도 잘 드러내 준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선택할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이익을 버릴지언정 진리를 추구할 것이다. 아무리 큰 고난을 겪을지라도 굳게 서서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기본적인 길이다.

패괴 성품은 모든 사람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적게 또는 많이 패괴되었다고 할 수 없다. 사람의 일을 바라보는 관점, 관념, 상상, 패역의 정도는 모두 비슷해 별로 차이가 나지 않고 대동소이하다. 다들 사탄의 권력 아래에 살고 있으며, 또한 사탄의 성품에 따라 살고 있다. 여기에서 평등한 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기회를 주고, 하나님이 동일한 태도로 모든 사람을 대하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공급하는 진리와 생명 또한 동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 또한 같다. 만약 네가 드러낸 패괴 성품을 보고 다들 너를 싫어하게 되었으니, 자신이 구제 불능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심각하게 패괴되었다고,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자포자기하고, 의욕을 내지 못하며, 무엇을 하든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의미가 없으니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런 태도는 어떠하냐? 이는 성숙한 태도가 아니며, 하나님이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사람의 이런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수많은 옳지 않은 내적 상태를 돌이켜야 한다. 또한 끊임없이 자신이 추구하는 관점을 바로잡아야 하며, 끊임없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의 감찰,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것이며, 하나님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최대한의 인내, 은총, 긍휼, 관용으로 모든 사람을 인도할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추구하고 정의와 광명을 지향하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와 염원에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된다. 또한 하나님의 인류 구원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의 본질에 의문을 품어서도 안 된다. 너희는 이 말들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에게 이런 말들을 알려 주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느냐? 바로 어느 때라도 진리 추구를 포기하지 말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소극적이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소극적일 때, 하나님이 왜 그렇게 많은 진리를 선포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바로 더 많은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자신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공급하기 위해서이다. 네가 하나님 말씀에서 직접적으로 많은 것을 얻을 뿐만 아니라, 형제자매와 진리를 교제하면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너에게도 공급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만약 네가 이렇게 생각하고, 이것도 느낄 수 있다면, 그럼 너는 왜 포기하려는 것이냐? 어째서 네 마음속에 원망이 생긴 것이냐? 어째서 너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진심에 의문을 품는 것이냐? 사람은 우매할 수도 있고, 분량이 작을 수도 있으며, 연약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구원받는 일에 대한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나는 언젠가 또다시 너희와 이야기하고 교류할 때에는, 너희에게서 빈곤하고 가련하며 무감각하고 우둔한 모습이 아니라, 다들 얻음과 수확이 어느 정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너희는 적지 않게 들었고, 적지 않게 보았으며, 적지 않게 이해했다. 하지만 너희가 대체 진리를 얻었는지, 온전케 될 수 있는지 여부는 너희의 추구에 달려 있다. 사람이 추구하면 얻을 수 있지만, 사람이 말을 듣지 않고 추구하지 않으면 영원히 얻지 못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너희가 진실되게 진리를 추구하기만 한다면, 베드로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추구하고 성품 변화를 추구한다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이건 확실하다.

2018년 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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