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조 사람을 미혹하고 회유하고 위협하고 통제한다

참고 다바오와 샤오바오의 이야기

오늘 본격적으로 교제하기 전에 이야기를 하나 해 보도록 하자. 너희는 다들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듣는 것에 원칙이 있지 않겠느냐? 이야기 속에서 한 측면의 진리나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또는 사람의 일부 본성 본질에 대해 인식하거나 이야기 속에서 사람이 마땅히 실행하고 진입해야 하는 진리 실제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이야기를 하는 의의이다. 이는 심심해서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며, 시시비비를 논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저 사건만 이해하는데, 이런 부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자질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은 바로 생각이 없다는 것인데, 주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듣든 이야기 속의 사건들만 기억하거나 이야기한 사건들 속에서 약간의 규례만 얻을 뿐, 그 이야기 속에 있는 사람이 깨달아야 하는 여러 진리는 듣고도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하며, 깨닫지도 못한다. 이는 가장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모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 중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느냐? 듣고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그 이야기가 재미없다고, 이야기를 하든 안 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말이다. 이런 사람에게 이해 능력이 있겠느냐? 너희는 이야기를 들을 때, 이야기 속 사건을 통해 도움을 어느 정도 얻을 수 있느냐? 그 속에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든 없든, 너희는 방금 내가 말한 이야기를 듣는 원칙을 알아야 한다. 그럼 이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자.

샤오바오(小寶)라는 아이가 있었다. 최근에 샤오바오네 집에 한 아저씨가 오게 되었는데, 그 아저씨는 자주 샤오바오의 부모와 복음을 전하러 나가곤 했다. 어느 날 샤오바오의 부모는 일이 있어 밖에 나가고, 집에는 아저씨와 샤오바오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샤오바오는 아저씨에 대해 별로 익숙하지 않았는데, 샤오바오가 놀고 있을 때 아저씨가 다가와 샤오바오를 알고 있고 샤오바오의 이름도 안다면서 친근하게 굴었다. 그러자 샤오바오는 굉장히 기뻐하며 아저씨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아저씨는 샤오바오에게 물었다. “샤오바오, 평소 부모님이 얘기하실 때 아저씨 얘기하신 적 있니?” 샤오바오가 잠시 생각해 보고 모르겠다고 하자, 아저씨는 “샤오바오는 정직한 아이야. 있는 그대로 말해야 착한 아이란다.”라고 하더니, 이어서 또 “엄마 아빠가 아저씨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니?”라고 물었다. 샤오바오가 여전히 모른다고 대답하자, 아저씨는 또 이어서 “샤오바오는 착하지. 샤오바오가 솔직히 말해 주면 사탕을 주마.”라고 했다. 이번에도 샤오바오는 잠시 생각하더니 모른다고 했다. 아저씨는 어떻게 하면 이 아이가 그에게 솔직히 말하게 할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샤오바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샤오바오, 엄마 아빠는 하나님을 믿고, 아저씨도 하나님을 믿어. 아저씨는 네 엄마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란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믿고 샤오바오도 하나님을 믿지. 그럼 하나님께서 어떤 아이를 좋아하시는지 알고 있니?” 샤오바오는 잠깐 생각해 보고는 말했다. “몰라요.” 그러자 아저씨는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아이, 거짓말하지 않는 아이를 좋아하신단다. 알면 안다고,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 아이가 바로 정직한 아이란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이를 좋아하셔.”라고 말했다. 샤오바오는 잠시 생각하더니 “네.”라고 대답하고는 다시는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곧이어 아저씨가 또 “만약 샤오바오가 아저씨한테 사실대로 말하면, 샤오바오는 정직한 아이, 바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아이란다.”라고 하자, 샤오바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럼 좋아요.”라고 했다. 아저씨가 “‘그럼 좋아요’라는 건 무슨 뜻이니?”라고 하자, 샤오바오는 “바로 엄마 아빠가 아저씨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는 뜻이에요.” 아저씨는 곧바로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캐물었고, 또 재차 샤오바오에게 정직한 아이가 돼야 한다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샤오바오는 “엄마 아빠가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 아니고, 솔직한 사람이 아니라고, 아저씨와 이야기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어요.”라고 했다. 아저씨는 또 “엄마 아빠가 또 무슨 말을 하셨니?”라고 묻자, 샤오바오는 “기억나지 않아요.”라고 했다. “착한 아이가 되어야지!”라고 하자, 샤오바오는 “엄마 아빠가 아저씨한테는 아무 말이나 다 하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에도 아저씨는 계속해서 캐물었고, 샤오바오는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아저씨는 마음이 점점 더 불안해져 샤오바오에게 “샤오바오는 정말 착한 아이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아이지. 왜냐하면 샤오바오가 정직한 사람이고 아저씨에게 모든 걸 말해 주기 때문이지.”라고 했다. 이때 샤오바오는 더 이상 처음처럼 그렇게 이 아저씨를 경계하지 않았고, 또한 더 이상 처음처럼 그렇게 뭘 물어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아저씨가 모르는 모든 일을 다 알 수 있도록 아저씨가 물어보는 것이라면 다 알려 주고 싶었다. 아저씨도 샤오바오에게 털어놨다. “아저씨의 아명이 다바오(大寶)란다. 봐봐. 넌 샤오바오고, 난 다바오니까, 우리 둘이 제일 친한 친구가 되어야 하지 않겠니?” 샤오바오는 “맞아요.”라고 했다.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했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더 즐거워졌다. 샤오바오도 사탕을 먹고는 더 이상 아저씨를 경계하지 않았다. 아저씨가 샤오바오에게 “앞으로 엄마 아빠가 또 아저씨에 관한 말을 하면, 아저씨에게 알려 줄 수 있을까?”라고 요구하자, 샤오바오는 “물론이죠. 우린 좋은 친구니까요.”라고 했다. 샤오바오는 더는 그 아저씨를 경계하지 않았고, 아저씨는 그런 샤오바오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얻었다. 그때부터 둘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샤오바오의 엄마 아빠가 아저씨에 대해 말하면, 샤오바오는 곧바로 아저씨에게 알렸고, 아저씨 역시 샤오바오에게 약속했다. “난 절대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네 엄마 아빠한테 말하지 않을 거야.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앞으로 먹고 싶은 거나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아저씨가 꼭 사 줄게. 엄마 아빠한테 알게 하기 싫은 일이 있으면 아저씨가 비밀을 지켜 줄게.” 이렇게 샤오바오는 더욱 마음을 놓고 아저씨를 철석같이 믿으며 진심으로 교제하게 되었다. 그렇게 둘은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

이게 이야기의 전반적인 내용이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은 많지 않으며, 주인공은 다바오와 샤오바오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바오라는 아저씨가 어떻게 샤오바오라는 아이를 미혹하고, 종용하고, 회유해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아이가 털어놓게 했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야기와 대화이다. 이런 간단한 줄거리와 대화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겠느냐? 여기에서는 어떤 인물의 특징을 주로 이야기하였느냐? 아이이냐, 아니면 어른이냐? (어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설명하려는 것은 무엇이냐? 말하고자 하는 주된 내용은 무엇이냐? 바로 이 어른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수단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어떤 수단을 사용했는지 다들 알아들었느냐? (회유하고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익으로 회유했고, 옳은 말로 미혹했으며, 이익으로 유혹도 했다. 무엇을 이용해 유혹했느냐? 이익이다. 이익으로 유혹했다. 회유하고, 이익으로 유혹하고, 미혹하는 것, 이는 이익에 의한 유혹이기도 하고 미혹이기도 한데, 옳은 말로 유혹하는 것이고, 또한 위협하는 성질도 지닌다. 다 옳은 말처럼 들리지만, 그는 이 말들을 어떤 일에 사용하였느냐? (자신의 목적 달성에 사용했습니다.) 자신의 은밀한 목적에 이용했다. 그가 쓴 수법을 거의 명확히 파악했는데, 이게 정상적인 인성이 갖추어야 하는 모습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런 모습은 어떤 방면의 사탄 패괴 성품이겠느냐? (사악함입니다.) 왜 간사함이 아닌 사악함이라고 하느냐? 사악함은 간사함보다 더 심각하다. 간사함보다 더 음험하고 비밀스러우며, 미혹하는 성질이 더 강하고, 사람들이 알아차리기가 더 어렵다. 사악함 속에는 또 이익에 의한 유혹, 종용, 회유, 농락, 매수, 시험이 포함되며, 이런 행동과 모습은 간사함을 훨씬 뛰어넘은 사악함이며, 한치도 틀림이 없다. 그는 “말하지 않으면 때리고, 발로 차고, 죽일 거야.”라고 하지 않았다. 이런 수법을 쓰지 않았고 겉으로 보면 악독해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건 악독함보다 더한 것이었다. 그게 바로 사악함이다. 왜 사악함이라고 하겠느냐? 간사함은 보통 사람이 그래도 간파할 수 있지만, 그의 수법은 더 괴이하다. 겉으로는 점잖게 말하고 인정에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면 깊은 곳에는 더 비밀스러운 것이 숨겨져 있었다. 그의 행동 방식과 수법은 사람이 흔히 보고 접할 수 있는 간사함보다 더 비밀스럽고 음험하며, 그 수법은 더 교묘하여 사기성과 미혹성이 더욱 강하다. 이게 바로 사악함이다.

너희는 일상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이 표출하는 사악한 성품과 모습을 식별하고 분별할 수 있느냐? 간사한 사람은 약삭빠르기는 해도 일정 기간 접하다 보면 보통 사람은 여전히 간파할 수 있다. 하지만 성품이 사악한 사람을 간파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아서 본질과 결과를 볼 줄 모른다면, 간파할 수 없다. 사악한 사람은 간사한 사람보다 더 음험해 그의 말 한두 마디만으로는 전혀 그를 간파할 수 없다. 성품이 사악한 사람의 경우, 일정한 시기나 짧은 기간에는 그가 왜 그 일을 하는지,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지를 네가 꿰뚫어 보거나 간파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느 날, 그가 철저히 폭로되고 완전히 드러나면 그제서야 다들 그것이 단지 간사함만이 아니라 사악함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악한 성품을 분별하려면 일정 기간 체험해야 하고, 때로는 결과를 봐야만 분별해 낼 수 있다. 이는 단기간에 분별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보자. 큰 붉은 용이 몇십 년 동안 인류를 미혹했는데, 지금에서야 소수의 사람만이 약간 분별한다. 큰 붉은 용은 항상 가장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말과 듣기 좋은 말을 하며,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사람을 미혹하고, 정의의 기치를 내걸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를 배척하며, 무수히 많은 좋은 사람을 해친다. 그런데도 분별해 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는 큰 붉은 용의 말과 행동이 사람이 보기에는 모두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들 큰 붉은 용이 한 모든 것이 명분이 있고, 합리적이며, 합법적이고, 또한 인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몇십 년 동안 사람을 미혹했고, 큰 붉은 용이 완전히 폭로되고 무너지게 되면 사람은 비로소 큰 붉은 용의 진정한 면모가 마귀임을, 그 본성 본질이 사악함을 알게 된다. 큰 붉은 용이 이렇게 오랫동안 인류를 미혹해서 사람의 내면에 큰 붉은 용의 독소가 생겨 다들 큰 붉은 용의 자손이 되었다. 너희가 큰 붉은 용이 했던 그런 짓을 하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은 말하는 방식이 큰 붉은 용과 같아서 말은 정말 듣기 좋게 하지만, 실질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실질적인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척 음험하고 사악하다. 이런 부류 사람의 미움을 사게 되면 그게 누구라도 절대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언젠가 반드시 적절한 기회를 잡아 상대방에 대한 보복이라는 목적을 이룰 뿐만 아니라, 남들에게 약점을 잡히지도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나서지도 않고 일을 처리한다. 이것이 사악함 아니겠느냐? 사악한 자가 일을 하는 원칙과 방식, 그리고 그의 속셈, 동기, 출발점은 모두 매우 은밀해 남들에게 말할 수 없다. 사악한 사람은 모두 간계를 써서 남을 해친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사람을 해치거나, 죄를 저지르도록 사람을 유혹하거나, 법률을 통하거나 각종 비열한 수단을 통해 사람을 괴롭힌다. 이는 모두 사악한 모습에 속하며, 공명정대한 수법이 아니다. 너희에게 이런 모습과 표출이 있느냐? 너희는 분별할 줄 아느냐? 이것이 사악한 성품임을 의식할 수 있느냐? 간사함은 통상적으로 겉에서부터 드러난다. 어떤 사람이 빙빙 돌리거나 매우 번지르르하게 말해 아무도 그의 마음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간사함이다. 그런데 사악함의 주된 특징은 무엇이겠느냐? 더없이 듣기 좋게 말해 겉으로는 모두 옳은 것 같고 어떤 흠도 잡아낼 수 없으며, 모든 면에서 다 괜찮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일을 할 때도 그가 어떤 수단을 취하는지 보이지 않는다. 겉으로는 허점과 빈틈이 전혀 없이 목적을 달성한다. 그는 매우 은밀하게 일을 한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사람을 미혹해 이 부류의 일과 사람을 분별하기가 가장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늘 옳은 말을 하는데, 듣기 좋은 말, 사람의 인정에 맞는 이치와 주장, 또는 행동으로 남의 이목을 가리고, 겉과 속이 다른 행동으로 차마 밝힐 수 없는 목적을 이룬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사람들은 보통 그런 모습을 간사함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사악함에 대해 아는 것이 적어 분석도 적은 편이다. 사실 사악함은 간사함보다 더 분별하기 어렵다. 사악함이 더 은밀하고, 수단이나 행동 방식도 좀 더 빼어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내면에 간사한 성품이 있다면, 보통 이삼일만 접하면 다른 이들이 그가 간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는 그가 일을 하거나 말을 할 때 표출하는 것이 간사한 성품임을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사악하다면 며칠 만에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시간 내 큰일이나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저 그의 말만 듣고서는 분별하기가 몹시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죄다 옳은 말과 일만 하며, 도리도 청산유수처럼 말한다. 그래서 며칠 접하고 나면 너는 그 사람이 훌륭하다고, 버리고 헌신할 줄 알며 영적인 이해력도 있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며, 이성과 양심을 갖고 일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일을 몇 번 처리하고 나면 그의 말과 일 처리에 불순물이 몹시 많으며, 꿍꿍이와 속내도 너무 많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가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 간사한 사람이고, 사악한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늘 옳은 말, 진리에 부합하고 인정이 넘치는 듣기 좋은 말로 사람들과 왕래하여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한편, 남들도 미혹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명성과 지위를 얻고자 한다. 이런 사람은 미혹하는 능력이 대단해 일단 권력과 지위가 생기면 많은 이들을 미혹하고 해칠 것이다. 사악한 성품을 지닌 사람은 너무나 위험하다. 너희 주변에 이러한 사람이 있느냐? 너희 자신은 이런 부류의 사람이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어느 정도로 심각하냐? 말과 행동에 털끝만큼의 진리 원칙도 없이 완전히 사악한 본성에 따라 일하면서 늘 다른 사람을 미혹하려 하고 가면을 쓰고 살려고 하여 다른 사람이 너를 꿰뚫어 보거나 간파하지 못하게 하고, 너의 인성과 지위를 숭배하고 앙망하는 태도를 취하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너희는 평소 이런 사악한 모습을 어쩌다 가끔 보이는 것이냐, 아니면 대부분 이런 모습이고, 자신이 바로 이런 사람이라 벗어나기가 힘든 것이냐? 어쩌다 가끔 이런 수단을 보인다면, 그래도 변화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이런 사람이고, 늘 약삭빠르고 간사하게 일을 하며, 항상 수단을 써서 일을 한다면, 이것은 바로 가장 교활한 마귀이다. 그렇다면 너희에게 솔직하게 말해 주겠다. 이런 사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 속 다바오는 이러한 수단을 써 샤오바오가 그에게 솔직하게 말하도록 미혹했다. 이렇게 하라고 누가 다바오에게 가르쳤겠느냐?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이러한 얕은꾀는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본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본성에서, 패괴 본질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인 것이다. 어린아이마저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니 이 얼마나 비열하냐! 솔직한 말을 듣고 싶으면 어른에게 가서 물어보거나 자발적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타인에게 마음을 열면, 어쩌면 상대방이 솔직히 말해 줄지도 모른다. 이런 수단을 사용해 뒤에서 떳떳하지 못한 졸렬한 짓을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바로 성품이 사악한 사람이 하는 짓이다. 말해 보아라.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그는 어린아이마저 내버려두지 않았는데, 어린아이라 만만하고 속이기 쉽다고 생각해 어린아이에게 꾀를 부린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상대가 정직하고 선량한 어른이라는 것을 알면, 그는 어떻게 대하겠느냐? 내버려두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만약 자신과 비슷하고,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수단을 쓰기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그는 어떻게 하겠느냐? (상대방이 자신처럼 사악하다는 것을 알면, 경계하고 쉽게 뭔가를 드러내지 않을 겁니다.) 경계 외에 또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다툴 것입니다.) 바로 음으로 양으로 다툴 것이다. 딱 이 두 가지이다. 이것이 바로 성품이 사악한 사람의 모습이다. 이 부류의 사람은 타인과 음으로 양으로 다투기 좋아하며 어떤 기회도 그냥 놓치지 않는다. 그들의 명언이 하나 있는데, 네가 만약 이런 부류의 사람을 만나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된다면, 그는 분명 성품이 사악한 사람이다. 어떤 명언이냐? 예를 들어, 네가 그에게 다른 사람과 협력해 본분을 이행하라고 했을 때, 그가 “아이고, 난 그 사람과 다투면 못 이겨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다툼’을 먼저 떠올린다. 그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과 협력해 사역을 잘해 낼까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다투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명언이다. 그가 어떤 무리에 있든, 이방인이든 형제자매 사이에 있든, 또는 가족들 사이에 있든, 그의 유일한 법칙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다투는 것이다. 드러내 놓고 다퉈 이기지 못하면 몰래 다툰다. 이런 성품이 바로 사악함이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투고 있다. 각종 수단과 기교를 동원해 에둘러서 상대방을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것이다.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 술책을 간파하지 못하는데, 그들이 간파했을 때는 이미 승패가 결정된 후이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사악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할 때 음으로 양으로 다투는데, 각종 음모와 간계, 또는 수단을 써서 상대방을 무너뜨려 굴복시키고 결국에는 모두가 자신에게 승복하게 한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지금까지, 전체 인류의 역사는 모두 ‘투쟁’으로 가득 차 있다. 크게는 국가에서부터 작게는 가정에까지, 그리고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르기까지, 겉으로 드러난 투쟁이든 드러나지 않는 투쟁이든, 또는 글과 말로 하는 투쟁이든 무력 투쟁이든 투쟁으로 가득 차지 않은 무리는 하나도 없다. 중국 역사상 여러 민족 전쟁이 가장 빈발했던 시기는 바로 춘추전국시대이다. 유명한 병서들이 거의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손자병법≫의 계략들도 모두 그 시기에 생겨난 것이다. 또한 ≪삼십육계≫라는 책에서는 다양한 계략을 기록해 전쟁에 응용했다. 일부 병법과 계략은 지금까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모두 어떤 계책들이 있느냐? (고육계(苦肉計)가 있습니다.) (조호리산계(調虎離山計)가 있습니다.) (반간계(反間計), 공성계(空城計), 미인계(美人計)가 있습니다.) 무릇 이런 유명한 계략은 앞 글자가 미인이든, 공성이든, 아니면 조호리산이든, 뒤에는 다 ‘계’ 자가 붙는다. ‘계’는 무슨 의미이냐? (계략과 음해를 의미합니다.) 음험하고, 간교하며,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은밀한 계책이다. 이러한 ‘계’는 계획의 ‘계’가 아니라 음모이다. 이러한 ‘계’의 이면을 통해 무엇을 보았느냐? 그들이 한 행동과 드러낸 모습, 전쟁을 할 때 응용한 이런 계책과 행동 방식들이 인성과 진리에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이렇게 하겠느냐? (아닙니다.) 절대로 그러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 방식은 누구를 대표하겠느냐? 사탄을 대표하고, 이 사악한 인류를 대표한다. 사악한 인류는 이런 계략을 어디에서 얻었느냐? (사탄에게서 얻었습니다.) 사탄에게서 얻었다는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마왕에게서 얻은 것이라고 말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마왕은 누구이겠느냐? 바로 인간 세상에 환생해 나쁜 짓을 하고 인류를 해치는 마귀와 사탄인데, 이들이 계략을 만든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기록에서 하나님이 한 번이라도 공성계나 조호리산계를 사용한 것을 본 적이 있느냐? 하나님의 경륜 중 이런 ‘계’가 있느냐? 하나님은 그의 경영 사역에 결코 이런 ‘계’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계략은 모든 사악한 인류가 사용하는 것이다. 크게는 국가나 왕조, 작게는 종족 혹은 가정에 이르기까지, 더 작게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패괴된 인류가 있는 곳이라면 투쟁이 빠지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다투느냐? 무엇 때문에 싸우느냐?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이냐? 바로 권력, 지위, 이익을 위해서인데,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이다. 국가 간의 다툼은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서이며, 종족 간의 다툼 역시 세력 범위, 사람, 주권을 다투기 위해서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툼 또한 우열을 가리고 이익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인류가 있는 곳이라면 다툼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인류가 있는 곳이라면 사탄의 패괴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가 사탄에게 패괴되었기에 인간 세상이 투쟁과 살육으로 가득 차 있다. 패괴된 인류가 일을 할 때 사탄 성품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전체 인류의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각의 모든 역사는 전부 인류의 사악한 투쟁으로 점철된 부끄러운 역사이다. 인류는 그래도 이를 명예로운 일로 생각한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중국의 삼십육계를 배우고 있다. 너희도 배우느냐? (배우지 않습니다.) 만약 네가 일부러 이것들을 배우고 거기에 있는 경험, 교훈, 수단, 방식, 방법을 받아들여 너의 머리를 채우고 네 생존 능력으로 삼는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너는 틀림없이 점점 더 사탄과 가까워지게 될 것이고, 너라는 사람은 점점 더 사악해지고 나빠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네가 만약 관점을 바꾸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것을 분석하고, 분별하고, 폭로한다면, 어떤 성과를 얻겠느냐? 네가 사탄을 더 증오하게 되고, 자신을 더 잘 인식하고 증오하게 된다. 더 좋은 성과는 무엇이겠느냐? 사탄을 버리고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하나님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사탄은 이러한 소위 전통문화와 몇천 년에 걸쳐 종합한 인류의 각종 지식과 이론을 이용해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를 사람들에게 주입하여 더 깊이 사람을 패괴시키고 통제한다. 만약 네가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배우고 활용할 줄 알게 된다면, 너는 살아 있는 사탄이 되어 철저히 하나님에 의해 도태된다.

예전에 예배에서 자기 인식에 관해 교제할 때, 대부분의 사람이 항상 교만한 성품 문제를 언급했는데, 이는 사람에게 가장 흔하고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패괴 성품이다. 비교적 흔한 패괴 성품으로 또 어떤 것이 있느냐? (간사함과 강퍅함이 있습니다.) 간사함, 강퍅함, 진리를 싫어함, 흉악함, 이런 것들은 사람이 자주 접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악함을 비교적 적게 접하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는 것도 비교적 적다. 사악한 성품은 가장 인식하기 어려우며, 또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비교적 은밀한 패괴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예를 들어,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데, 둘 다 진리를 싫어하고 추구하지도 않으며, 또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하지도 않는다고 해 보자. 겉으로는 두 사람이 매우 조화롭게 함께 살아가고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다들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여전히 각종 패괴 성품이 존재하는데 네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보지 못하는 것이냐? 이 두 사람 모두 무척 간사해서 일 처리가 교활하고,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전혀 분별이 없기 때문에 네가 그들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이다. 네가 깨달은 진리가 적고 분량이 지나치게 작아서 여러 복잡한 문제들을 꿰뚫어 볼 수 없고, 다른 사람을 도와 문제를 해결하려 해도 그럴 능력이 없다. 리더인 너희가 이런 부류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네가 그를 폭로하고 분별하면, 그가 쉽게 받아들이겠느냐?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의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방법이 있느냐? 이런 부류의 사람을 대하는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그가 기술과 업무를 약간 알고 있어서 하나님 집을 위해 힘을 쓸 수 있다면, 형제자매로 대하고 요구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니 그가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에게 충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모습으로는 무엇이 있느냐? 이런 부류의 사람은 체면치레를 특히나 잘하지 않느냐? 다른 사람이 없을 때는 놀면서 느릿느릿하게 하다가, 누가 오는 것을 보면 재빨리 한다. 게다가 이렇게 해도 되는지 저렇게 해도 되는지 많은 질문을 한다. 그러다가 사람이 가고 나면, 그는 한가해지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질문도 전혀 없어진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널 놀린 거야. 난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라고 되뇐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체면치레만 하며, 자기 자신을 특히 잘 포장하고 남에게 허상을 꾸며 보여 주는 것에 능숙하다. 많은 사람이 그와 여러 해를 함께해도 그의 간사하고 교활한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상황을 알아볼 때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누구에게나 다 잘해 주고, 한 번도 다른 사람을 해친 적이 없는 무골호인이에요. 누가 일을 잘못해도 책망하거나 훈계하지 않고, 한결같이 권면하고 위로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방법과 수단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바로 적당히 분위기 맞춰 행동하기와 누구에게나 두루 곱게 보이도록 처세하기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다들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너희 주변에 이런 부류의 사람이 있느냐?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패괴 성품이 표출된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사람은 특히나 꽁꽁 포장해 아무도 그의 문제를 발견할 수 없다. 이는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역사상 어떤 황제가 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어도, 후세 사람들은 그가 명군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째서 사람이 그를 이렇게 보는 것이냐? 그가 자신의 명성을 위해 공을 들이고 뭔가를 한 것 아니겠느냐? 그는 한편으로는 치적을 위해 선한 일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를 왜곡했으며 사실의 진상을 쓴 사람을 살해하여 자신이 저지른 나쁜 짓을 은폐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은폐해도 그가 저지른 짓은 분명 기록이 남는다. 그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지는 못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런 짓들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밝혀졌고, 이를 알게 된 사람들은 속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 폭로로 사람들은 전체 인류의 실제 사정을 새롭게 인지하게 된다. 어떻게 인지하겠느냐? 군왕에서부터 평범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전체 인류가 모두 악인의 권력 아래에 놓여 있고,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다들 사악해졌는데, 악하거나 나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다들 나쁜 짓을 많이 했으며, 다들 매우 사악하고, 좋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든 청렴한 관리가 한 두 명은 있는데, 그럼 그런 청렴한 관리도 사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요?”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만약 네가 그런 청렴한 관리의 권력 아래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가 너를 잡아들이는지를 살펴보아라. 네가 청렴한 관리에게 하나님을 증거했을 때, 그가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를 살펴보면, 그가 사악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바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타남과 사역은 사람을 가장 잘 드러내며,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는 사람을 가장 잘 드러낸다. 일부 통치자와 관리들은 치적도 있고 좋은 일도 좀 하는데, 그것은 어떤 성질의 좋은 일이겠느냐? 누구에게 유리한 좋은 일이겠느냐? 통치 계급이 원하는 좋은 일이다.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선행이겠느냐?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치적’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그들의 치적과 좋은 일은 모두 진리와 전혀 관계가 없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도 전혀 관계가 없다. 그들이 한 알량한 좋은 일과 치적은 모두 속셈과 목적이 있는데,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좋은 일을 아무리 많이 해도, 또는 아무리 많은 치적을 쌓아도, 이것이 그들이 마음이 선량한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하며, 더구나 그들이 악을 행한 적이 없고 사악한 본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아느냐? 이런 일들을 통해 너희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느냐? 좋은 일을 좀 하면 남들이 다 알게 자랑하고 싶어 하면서도, 겉으로는 떠벌리거나 건방 떨면 안 된다고,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런 행동을 너희가 하느냐? 예를 들어, 네가 새로운 교회에 사역하러 갔는데, 남들이 네가 리더인 줄 모른다고 해 보자. 너는 남들이 네가 리더임을 알도록 온갖 방법을 생각할 것인데, 밤새도록 머리를 쥐어짜 드디어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낸다. 어떤 방법이겠느냐? 모든 사람들을 소집해 예배할 때 “오늘 예배에서는 리더인 제가 합격인지 아닌지를 교제하겠습니다. 불합격이면 여러분이 폭로하고 파면시키시고, 합격이라면 제가 계속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다들 네가 리더임을 알게 된다. 이러면 목적을 달성한 것 아니겠느냐? 그 목적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바로 사악한 본성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야심을 가지고 있지만 똑같이 야심이 있어도, 어떤 사람은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다양한 언어, 수단, 방식을 활용해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룬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사악한 본성에 관한 이런 종류의 주제는 앞으로도 자주 다뤄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이 방면의 진리와 패괴 성품을 점점 더 철저히 인식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사람들을 분별하게 되어 진리에 더 깊이 진입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저 대략적인 개념이나 어느 한 방면의 정의만을 교제한다면, 너희가 비교적 얕게 인식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과 예를 가지고 교제한다면, 너희가 좀 더 깊이 인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아이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자. 한 아이가 “오늘 숙제했어?”라고 물었을 때, 다른 아이가 “안 했어.”라고 대답하자, 첫 번째 아이가 “나도 안 했어.”라고 했다. 아이들은 진실된 말을 하였느냐? (그렇습니다.) 틀렸다. 한 아이는 거짓말을 하였다. 그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였겠느냐? ‘바보야. 내가 정말 안 했다고 생각해? 난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 숙제를 안 하면 벌을 받는데 안 할 수 있겠어? 일부러 네가 나도 안 한 것처럼 생각하게 한 거야. 그러면 너도 안 할 테고, 결국은 벌을 받겠지. 널 웃음거리로 삼으려 한 거야.’ 나쁜 아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이런 짓을 한 적이 있느냐?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다. 월요일에 등교할 때, 한 학생은 일요일인 어제 쇼핑을 했다 하고, 다른 학생은 일요일에 남의 집에 놀러 갔다고 했다. 사실 두 명 모두 집에서 공부를 했다. 중국인들은 특히 경쟁이 심한데,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상대의 경계심을 늦추게 함으로써 상대를 뛰어넘으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수단이라고 하며, 생활 속 곳곳에서 이런 일들을 볼 수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가고, 이러한 성품이 표출될 때가 있다. 친구 사이에서도 이러한 것들이 표출된다. 이러한 성품들이 표출되는 것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네가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무엇을 위해 관찰하느냐? 소재를 얻거나 한담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시비를 가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이야기를 지어내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분별력을 키워 다른 사람이 한 일과 그들이 표출한 모습을 자신과 대조해 보고, 자신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함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그가 이런 성품이 있다는 것을 네가 알지만, 너 자신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있을 때, 그때도 자신이 이런 성품이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느냐? 만약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에 대한 너의 인식은 가짜이고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혹은 네가 전혀 영적인 이해력이 없어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런 주제들은 몇 날 며칠을 이야기해도 끝이 없다. 조금만 이야기해도 너희가 좀 얻는 것이 있고, 진리에 대한 인식이 좀 더 깊어질 것이다. 네가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한다면 더 깊이 진입할 수 있을 것이며, 네 체험과 진입의 깊이는 너의 인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네가 얼마나 깊이 체험하고 진입할 수 있는지에 따라 그만큼 깊이 인식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네 인식의 깊이 또한 네가 얼마나 깊이 체험하고 진입했는지를 증명할 수 있다.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에 진입하는 길이다. 진리에 진입해야 실제를 갖출 수 있다. 이 주제는 일단 여기까지 하고, 이어서 오늘 교제할 본론을 이야기하겠다.

적그리스도가 어떻게 사람을 미혹하고 회유하고 위협하고 통제하는지 해부하다

1. 적그리스도가 어떻게 사람을 미혹하는지 해부하다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 중 제4조는 지난번 예배 때 다 교제하였다. 오늘은 제5조 적그리스도가 어떻게 사람을 미혹하고, 회유하고, 위협하고, 통제하는지에 관해 교제하겠다. 이 측면에 있어 적그리스도의 모습은 4개의 동사로 표현된다. 이 4개의 동사를 통해, 그리고 적그리스도 부류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 그들의 성품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동사는 ‘미혹한다’이다. 이 안에는 어떤 성품이 있느냐? 바로 사악함이다. 그렇다면 ‘회유한다’는 어떤 것이냐? 통상적으로 사람을 회유할 때 듣기 좋은 말을 하느냐, 아니면 듣기 싫은 말을 하느냐? (듣기 좋은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위는 어떤 성품이 지배하는 것이냐? 사악함이다. 그렇다면 위협하고 통제하는 것은 어떤 성품이 지배하는 것이냐? (흉악함입니다.) 그렇다. 흉악함이다. 제5조에서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서 주로 보이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떤 것이냐? (사악함과 흉악함입니다.) 사악함과 흉악함이라는 두 가지 측면의 성품이 매우 두드러지고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럼 하나씩 이야기해 보자. 우선 미혹하다에 대해 말해 보자. ‘미혹하다’는 단어는 대략 어떤 의미이냐? 여기에 정직한 모습이 있겠느냐? 진실된 말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진실된 말이 없고 전부 거짓이다. 허상, 거짓된 말, 속이는 말로 자기가 한 말이 옳다고 사람들을 믿게 만들어서 자신을 인정하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미혹하는 것이다. 그렇게 미혹된 사람들이 진리를 얻었느냐, 아니면 바른길을 갔느냐? 모두 아니다. 미혹하는 이런 행위와 행동 방식은 결코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이다. 미혹된 사람은 속아 넘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진상과 실상, 실제 배경을 모른 채 잘못된 길과 방향을 선택했고, 잘못된 대상을 선택해 따랐다. 이것이 바로 미혹된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효과이다. 마치 쇼핑몰의 광고가 매우 그럴싸해서 광고를 본 사람들은 진짜라고 믿지만, 구매 후에는 전혀 효과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속은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미혹하는 행위를 하는 적그리스도의 목적은 무엇이냐? 그는 어떤 방식, 어떤 말, 어떤 일로 사람을 미혹하느냐? 우선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자. 만약 그에게 아무런 목적이 없다면, 공을 들이거나 듣기 좋은 말을 해서 사람을 회유하고 미혹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방인의 말 중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네가 간파하지 못하면 속아 넘어가게 된다. 인간 세상은 이렇게 사악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를 음해하고 해치는데, 이것이 바로 패괴된 인류의 삶이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왜 애써 에둘러 말하면서 사람을 미혹하느냐?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바로 권력을 쟁탈하고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정치인의 행동 목적과 동일하다. 그럼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는 수단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그는 어떻게 하느냐? 그는 우선 네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만든다. 호감이 생기면 그를 경계하지 않고 신뢰하게 되고, 그런 다음에는 그의 인도를 받아들여 기꺼이 그에게 순종하게 된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시키든 너는 모두 기꺼이 따르려고 한다. 따르려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냐? 바로 분별하지 않고 원칙 없이 따르고 순종한다는 의미이다. 적그리스도가 정죄하는 말이나 방식을 사용한다면, 사람을 미혹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럼 그는 통상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미혹하는 효과를 거두느냐? 많은 경우 그는 사람의 관념, 인정과 이치에 부합하는 말을 사용하며, 때로는 진리에 부합하는 글귀와 도리를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쉽게 사람을 미혹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며, 사람들도 쉽게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보자. 형제자매가 잘못을 저질러 교회 사역에 손해를 입혀 마음이 소극적이고 연약해졌을 때,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교제해 붙들어 주거나 도움을 주지는 않고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연약해지는 것은 늘 있는 일로, 정상입니다. 저도 자주 연약해져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마음에 두시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마음에 두는지 아닌지 그가 알겠느냐? 모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을 제대로 못 했어도 별거 아니에요. 다음에 고치면 됩니다. 하나님 집에서도 모르고 추궁하는 사람도 없어요. 이 일을 제가 상부에 보고하지만 않으면, 윗선 리더가 알 리 없고, 상부는 더더욱 알 리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모르시니, 이 일에 상관하지 않으실 겁니다. 우리는 모두 패괴된 사람입니다. 당신에게 패괴가 있듯, 제게도 패괴가 있어요. 리더인 제가 가장이나 마찬가지이니, 여러분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면 그건 전부 제 책임입니다. 전부 제가 분량이 작아 여러분을 붙들어 주거나 도와주지 못해 여러분이 잘못을 저지른 거예요. 만약 제가 분량이 커서 여러분을 도와줄 수 있었다면, 여러분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 일은 전부 제 책임이에요. 이 일이 비록 교회 사역에 손실을 입혔지만, 우리끼리 소화하면 됩니다. 누구도 추궁하거나 상부에 보고하지 맙시다. 그냥 당신과 저만 아는 겁니다. 제가 다른 형제자매에게 말하지 않으면 상부에 보고하는 사람이 없을 테고, 그러면 이 일은 흐지부지 지나갈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앞으로 절대 다시는 이런 일이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됩니다. 리더인 저는 여러분을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고 높으신데요. 그런 하나님께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입니까? 게다가 하나님 또한 사람들의 이러한 생활 속 소소한 일들은 상관하지 않으시니, 여러분을 보호하는 책임은 자연스럽게 리더인 제가 짊어지게 된 셈입니다. 여러분은 분량이 작으니, 실수하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나중에 상부에서 이를 발견하거나 알게 되면, 제가 여러분을 대신해 나서겠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한다. ‘다행이다. 안 그래도 책임지는 게 두려웠는데. 이 사람 정말 괜찮은 리더군!’ 미혹되지 않았느냐? 적그리스도의 말 중 진리에 부합되는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사람들에게 이롭고 도움이 되는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원칙에 따라 일 처리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모두 어떤 말이냐? 바로 인정, 이해, 관용을 통해 관계를 맺고, 감정과 우정을 중시하며 그만큼 관계를 돈독히 해서 그가 무척이나 사람의 마음을 잘 배려하고, 남들을 포용하고 관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원칙과 진리가 없다. 표면적인 이해,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고 어린아이를 구슬리는 식이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수단은 모두 어떤 것이냐? 구슬리고 속이고, 관계를 맺고, 적당히 넘어가고, 좋은 사람인 척하는 것이다. 하나님 집과 형제자매의 이익을 팔아넘기는 대가로 그는 다른 사람을 속이고, 구슬리고, 미혹하는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에 이르느냐?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고 경계하며 그와 친근해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미혹된 후에도 여전히 “제가 잘못을 저지른 후 그렇게 걱정이 되어 여러 번 기도했는데도 하나님께선 저를 위로해 주지 않으셨어요. 마음이 놓이지 않고 불안했지만, 하나님에게선 결과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이제 됐어요. 리더를 찾아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돼요. 이런 리더가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입니다. 우리 리더가 최고예요!”라고 말한다. 이 지경에 이르면 사람의 마음과 관점이 이미 적그리스도 쪽으로 기울었고, 사람은 이미 적그리스도에게 통제된 것이다. 어째서 그가 적그리스도에게 통제될 수 있는 것이냐? 적그리스도에게서 안전감을 찾고 이해를 얻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만족감과 위로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러면 미혹된 것이다.

예전에 상부에서는 어떤 교회에 인성이 나쁜 사람 하나가 방해와 교란을 일삼으며 회개할 생각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현지 교회 리더에게 그 사람을 정리해 내보내라고 했다. 그 리더는 그 말을 듣고는 ‘그를 정리하라고요? 생각 좀 해봐야겠네요. 그는 제 사람이니, 당신이 멋대로 정리하면 안 돼요. 제가 그를 책임져야 해요. 상부에서 실상을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이렇게 정리한다면 큰일이네. 그럼 내 사람이 얼마나 상처를 받겠어!’라고 생각했다. 말로는 정리하겠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네 생각에 그가 어떻게 대처했겠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일을 어떻게 응대해야 아랫사람들이 나라는 리더에게 만족하고, 상부에서도 나에게 반감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을 거듭한 끝에 묘안을 떠올린 그는 예배를 소집했다. “오늘 특별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일일까요? 상부에서 어떤 사람에게 조금 불만이 있어 그를 정리해 내보내려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들 정리하는 게 좋을지 생각해 보고 투표로 결정합시다.” 투표 결과 80~90%의 사람이 정리하는 데 동의했지만, 몇 명은 동의하지 않았다.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이 과연 그 악인과 절친한 자들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동의하지 않았는지는 얘기하지 않겠다. 어쨌든 몇몇 사람이 정리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자 리더가 말했다. “투표를 통해 다른 목소리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건 큰일입니다. 우리는 다른 목소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행해야 해요. 보세요. 서양의 민주주의 제도가 얼마나 훌륭한가요? 우리 교회에서도 이렇게 실행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실현해야죠. 지금 몇몇 반대표가 있어 그 사람을 정리할 수 없습니다. 형제자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해요. 형제자매가 누구인가요?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하나님 선민의 의견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단 한 명이라도 반대하는 선민이 있으면 정리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그의 이런 말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없는데, 그가 되는대로 지껄인 것이다. 나중에 상부에서 그 악인이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것을 알고 빨리 정리하라고 했을 때, 그는 “알겠습니다. 곧 정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무슨 의미였겠느냐? 바로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정리하라고 하셔도 당장 정리할 수는 없어요. 어쩌면 시간을 끌면 당신이 이 일을 잊어버리실지도 모르죠. 그럼 제가 정리할 필요가 없지요.’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중에 그는 또 예배를 소집해 투표했다. 다들 교제하면서 분별이 생겨서 그 사람을 정말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반대표는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반대표가 하나 있었다. 그는 또 “반대표가 하나라도 있으면 정리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상부에서 정리하라고 했으니 정리해야지요. 상부에서 꿰뚫어 보지 못하겠어요? 실수하겠어요?’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다. 상부의 안배에 순종하는 것이 원칙 아니겠느냐? 진리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리더는 이것이 진리임을 알지 못한다. 그는 어떻게 했느냐? 그는 “아직 반대표가 하나 있으니 정리할 수 없습니다. 형제자매의 의견을 절대적으로 존중해야 해요. 이것이 최고 인권입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상부에서 다시 이 일을 물었을 때, 그는 여전히 대충 둘러대며 계속 시간을 끌었다. 결국 상부에서는 그가 악인을 정리하지 않자 그를 교체하고 정리해 내보냈다. 상부에서 너를 리더로 임명했는데, 네가 상부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상부는 너를 임명할 권리도 있지만 교체할 권리도 있다. 이것이 행정 법령이다. 곧이어 그와 한패였던 사람도 모두 정리되어 내보내졌다. 상부가 안배한 일을 투표로 결정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째서이냐? 너희가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너희도 그 어리석은 리더와 별반 다르지 않구나. 그렇지 않으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내가 너희와 교제하는 이러한 말들이 도리이냐, 실제이냐? (실제입니다.) 그렇다면 정확히 실행하고 실천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하다면 다 같이 투표해 결정할 필요가 있겠느냐? (필요 없습니다.) 위에서 누구를 정리한다고 할 때, 그를 억울하게 정리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상부에서 그 악인을 정리해 내보내라고 했는데 리더가 정리하지 않았다면, 이는 무슨 문제이겠느냐? (공개적으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공개적으로 대항하는 것만이 아니라 독립 왕국을 세우는 것이다. 상부에서 악인을 정리하라고 했는데, 그 거짓 리더는 질질 끌면서 실행에 옮기지 않고 투표를 하고 민의를 알아봤다. 무슨 민의를 알아본다는 것이냐? 민의란 무엇이냐? 다수 사람들은 무엇이냐? 다수 사람들이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를 갖추고 있느냐? (아닙니다.) 다수 사람들은 분별도 없는데, 그들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일 수 있겠느냐? 민의를 알아봤다고 해서 정말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다수 사람들이 분별이 없고, 상부가 직접 점검해 악인을 정리하라고 했는데, 적그리스도는 질질 끌면서 정리하지 않고, 악인을 비호하고 감싸서 그들이 계속 교회에 남아 교란하게 놔두었다. 악인이 있는 곳은 늘 혼란하고 무질서해서 하나님 선민이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없고, 교회 사역 또한 정상적으로 진전되지 않는다. 악인을 제때 정리해 내보내야만 교회 사역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은 곳에서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해치는 자, 교란하고 방해하는 자, 진심이라고는 전혀 없이 본분을 이행하는 자들이 정리되지 못한다. 적그리스도는 교회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며, 이런 악인과 불신파를 비호하고 감싼다. 그가 내건 기치는 무엇이냐? ‘관료는 백성들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관료 노릇 하려고 하나님 집에 왔으며, 게다가 그런 자들의 주인이 되려 한다. 말해 보아라. 사람의 주인은 누구이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의 주인이며, 진리만이 사람의 주인이다. 네까짓 게 무엇이란 말이냐! 게다가 너는 그런 자들에게 주인이 되어 주려고 하면서도 자기 주인이 누구인지도 아직 모른다! 머저리 아니냐? 그는 이런 방식으로 남들에게 “제가 여러분을 대신해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억울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있거나, 또는 누명을 쓰거나 어려움을 겪게 되면, 리더인 제가 여러분을 대신해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실상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런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어 그들을 조상이나 하나님으로 여겨 따르고 받든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이런 적그리스도를 보면 어떤 느낌이겠느냐? 역겹고 반감이 든다. “당신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 우리를 통제하려 하는데, 꿈도 꾸지 말아요! 우리가 당신을 리더로 선출한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라는 것이지 당신에게 인도하라는 것이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간계를 간파한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사람들을 위해 주인이 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사람들을 미혹하며,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의 감정적, 심리적, 정신적 필요 등 다방면의 필요에 부합한다고 느낀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실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종종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며, 심지어 미혹된 후에는 돌아보거나 반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적그리스도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해명한다. 그들이 적그리스도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해명할 수 있다는 것, 이는 그들이 정말 미혹되었음을 충분히 설명해 준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느냐? 구원을 받기 위해서 아니겠느냐? 만약 네가 적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과 적대되는 세력 쪽에 서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그래도 너를 원하겠느냐? 네가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을 따르지만 사람을 따르고 있는데,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보고 대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저버렸으니, 하나님이 너를 혐오하여 버리지 않겠느냐? 이만한 도리도 알지 못하는데,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이런 자는 어리석은 자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는 일은 가끔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항상 있는 일이다. 이것이 그들의 일관된 일 처리 원칙, 또는 그들의 일 처리 근거, 수단, 방식이고, 그들의 일관된 일 처리 스타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들을 높이 평가할 수 있겠느냐? 첫째, 그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둘째, 그는 인성도 나쁘다. 셋째,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없다. 그런데 그가 무엇으로 사람들이 그에게 완전히 승복하고, 그를 높이 평가하고 앙모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냐? 바로 다양한 방식과 수단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어 사람들이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숭배하게 만든다. 이런 수단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하고, 사람들에게 그가 영적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대가를 치르고, 늘 옳은 말과 이론을 이야기하고, 형제자매의 이익을 수호한다는 허상을 보여 준다. 그런 다음 그런 허상으로 사람들이 그에게 탄복하고 추앙하는 마음이 생기게 함으로써 사람을 미혹해 자신을 추종하게 하는 목적을 달성한다. 그는 이렇게 사람을 미혹한다. 그렇다면 그가 한 이런 일들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비록 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분명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분별이 없는 사람은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다. 사람을 미혹하는 본질을 통해 볼 때, 그는 자신이 하는 짓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티 나지 않게 한다. 만약 티가 난다면 사람들이 간파하지 않겠느냐? 사실 그가 하는 짓과 표출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적인 척하는 것은 어떤 모습이겠느냐? 영적인 척하는 많은 행위, 행동 방식, 주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 맞지만, 실제로는 표면적인 행동 방식일 뿐, 진리 실행과는 관계가 없다. 예수를 대적했던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손에 성경을 받쳐 들고 큰 거리 어귀에서 큰 소리로 “나의 주여….”라고 기도하여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이 아주 경건했지만, 결과적으로 오늘날 바리새인은 외식하는 부류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바리새인 앞에 붙는 수식어는 무엇이냐? ‘외식하는’이다. 사실 ‘외식한다’고 하지 않아도, 지금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분명 좋은 단어가 아니라 ‘나쁜 놈’이나 ‘마귀’와 똑같은 말, 똑같은 뜻이다. 영적인 척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지금은 영적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영적’이라는 말이 나오면 그 뒤에 무슨 말이 붙느냐? (‘척한다’입니다.) 맞다. ‘척한다’이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는 모습은 대부분은 사실 바로 영적인 척하는 모습이다. 영적인 척하는 말, 행동 방식, 행위들은 보기에는 매우 훌륭하고 경건하며, 진리에도 부합한다. 그는 연약한 사람이 보이면 끼니를 거르는 한이 있어도 얼른 가서 붙들어 주고, 어느 집에 일이 생기면 자신의 개인사는 제쳐 놓고 얼른 가서 도와준다. 하지만 그의 도움이란 옳은 말이나 듣기 좋고 사려 깊은 말이나 좀 해주는 것일 뿐이라서, 아무리 떠들어대도 다른 사람의 실제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들이 그의 행위에 매우 감동해서 일이 닥쳤을 때 그와 같은 리더가 버팀목이 되어 주어 너무 좋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말로 사람을 미혹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각종 행위로 사람을 미혹하여 그가 매우 영적이고 대단하며,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다고 여기게 만든다고 하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소 공허한데, 우리 리더를 믿는 건 실제적이야. 매우 현실적이고 진실해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어. 무슨 일이 있으면 직접 물어보거나 이야기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결과에 이르면 적그리스도의 목적은 이루어졌지만, 그에게 미혹된 사람들은 곤경에 빠져 고통을 겪게 된다. 적그리스도에게 일정 기간 미혹되고 나면, 그들은 다시 하나님 앞에 와도 기도할 줄도, 하나님께 어떻게 마음속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된다. 또한 그들은 그들끼리 서로 아첨하고, 영적인 것처럼 가장하며, 서로를 미혹하고, 기만한다. 마지막에 적그리스도는 또 “우리 교회의 형제자매는 모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일이 닥치면 다들 훌륭합니다. 큰 붉은 용에게 잡혀간다 해도 모두 굳게 설 수 있으며, 유다가 될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제가 보증합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잡힌 후 대부분이 유다가 되었다. 이는 나쁜 놈들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이런 빈말과 구호로 형제자매를 속이고, 미혹하고, 기만한다. 사람은 대부분 우매하고 무지하며 분별이 없어 그가 멋대로 하게 내버려둔다. 상부의 사역지침에서는 일찍이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처리하고, 어떤 사역들을 해야 하는지 강조하였는데, 이렇게 한 목적은 바로 모든 하나님 선민이 안전한 환경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체포와 박해에 직면하면 최대한 손실을 줄이기 위함이다. 만약 하나님 선민이 모두 잡혀서 감옥에 들어가면 교회 생활을 완전히 잃게 될 텐데, 그러면 사람의 생명 진입에 손해가 되지 않겠느냐? 감옥에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못할 텐데 생명이 성장할 수 있겠느냐? 겨우 찬양 가사만 약간 기억해 내서 매일 그 찬양 가사에 기대어 살아가는데, 저녁에 기도할 때도 마음속으로만 묵상하고 입술을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한다. 마음속에는 오로지 ‘배반하지 않아. 유다가 되지 않겠어. 굳게 서서 증거하여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겠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겠어.’라는 생각만 있고, 다른 것은 모두 사라진다. 사람은 이 정도 분량밖에 안 된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왜 적그리스도라고 하겠느냐? 그는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해치고, 형제자매를 곤경에 빠뜨리면서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는다! 상부의 사역지침에서는 사람이 안전한 전제하에 본분을 이행하고 최대한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요구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사역지침에 따라 사역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뜻에 따라 함부로 소리치고 행동하며 안전을 고려하지 않는다. 분별력이 없는 일부 우매한 사람들은 ‘상부에서는 왜 늘 안전을 언급하실까? 왜 이렇게 사고가 나는 것을 두려워하시지? 두려울 게 뭐가 있어?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있는데!’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한다니, 우매하지 않으냐? 네가 분량이 작아 이해가 안 되고 일을 간파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상부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어떤 원칙들을 준수하라고 안배하는데, 이렇게 자세하게 안배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의 선민이 정상적이고 안전하게 예배를 드리고 본분을 이행할 수 있도록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안전해야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정상적으로 교회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있다. 안전하지 않다면, 큰 붉은 용에게 잡히면 감옥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찬양도 부를 수 없으며, 예배도 드리지 못하는데, 네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느냐? 이름만 걸어 놓은 신자가 될 수도 있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일들을 상관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생사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 같이 일어나 “환경이 닥쳐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라고 마구 외치게 한다. 우매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런 말에 미혹된다. 사람은 누구나 막연하고 공허한 생각을 갖고 있어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거야. 우리에게 사고가 생겨도 그건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는 공허한 말 아니냐? 적그리스도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한다. 형제자매는 모른다 해도 늘 사역지침에 대해 교제하는 리더인 네가 그런 일들을 알지 못할 리 없다. 너는 사역지침에 따라 사역해야지, 너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얘기를 하려 하고, 또 듣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고, 사람이 많을수록 이야기할 기운이 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적그리스도는 아랫사람을 포섭하고 사람들이 모두 그의 지휘에 따르게 하기 위해 안전한 상황인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툭하면 사람들을 소집한다. 결국 이 사람들을 모두 망치게 된다.

적그리스도는 허풍을 잘 떤다. 공허하고 영적인 척하는 이론과 근거를 이야기하여 사람을 미혹한다. 분별력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그가 조종하는 대로 순종하다가 결국 사고가 발생해 잡히고 만다. 왜 사고가 발생하느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보호해 주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 아니냐? 이 일은 하나님을 탓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여러 환경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한다. 네가 사역지침에 따라 원칙대로 실행하고, 환경이 허락하는 상황에서 몇 명이 됐든 함께 모여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이행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너를 인도하고 너에게 역사할 것이다. 만약 네가 상부의 요구를 어기고 자기 뜻에 따라 멋대로 굴다가 사고가 난다면, 이것이 바로 우매하고 무지한 것이다. 하나님이 일부러 모든 사람을 감옥에 넣어 연단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먹고 마시며, 하나님 역사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이를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논리만을 믿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보호 원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함부로 규례를 끼워 맞추고 늘 하나님을 규정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미혹되어 그를 따라 그런 식으로 함부로 하고, 아무도 상부의 안배에 따르지 않다가 결국 사고가 나게 된다. 감옥에 잡혀 들어가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된다. 사고가 났을 때, 이 사람들의 분량은 어떠하냐? 그들은 그저 열정이 좀 있고, 도리를 약간 깨달았으며, 구호를 좀 외칠 줄 알 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다. 진리에 대한 참된 이해, 인식, 체험도 없고, 하나님이 대체 어떻게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열정만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의지가 약간 있을 뿐이다. 그들의 분량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데, 감옥에 잡혀 들어가면 증거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일단 배반하면, 그 결과가 어떻겠느냐? 그는 ‘하나님은 전능하시지 않나?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손에 있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구하지 않으시지? 어째서 내가 이런 고통을 받게 하시는 거지? 대체 하나님이 계시기는 하나? 우리의 이렇게 큰 열정이 설마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만약 리더가 인도를 잘못했다면, 어째서 하나님께서 징계하지 않으시는 거지?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거지?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가 이런 상황을 만나도록 허락하신 거지?’라고 생각하며 원망한다. 그러고는 곧바로 하나님을 부인한다. ‘하나님의 행사가 사람의 뜻에 맞지 않으니, 하나님의 행사라고 모두 다 옳다고는 할 수 없고, 하나님 역시 진리라고는 볼 수 없어.’ 결국에는 숱한 고통을 겪으며 어느 정도 버티다 보면 알고 있던 약간의 도리와 그나마 갖고 있던 열정조차 모두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을 부인하며 믿지 않게 되고, 더 나아가 유다가 된다. 출소 후에는 또 ‘이제 더 이상 환경을 걱정할 필요 없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봐봐. 얼마나 좋아 보여. 밖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봐. 뭐 하러 숨어서 몰래 믿어? 나라에서 믿지 말라고 하면 믿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훗날 다시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느냐? (믿을 수 없습니다.) 왜 믿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너를 택하는 것은 단 한 번 뿐이며, 너는 이미 네게 준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이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구원받을 희망이 얼마나 되겠느냐? 제로이다. 희망이 없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제멋대로 행동해 영적인 척하는 이론으로 사람을 미혹하여 사람들이 겉으로만 영적이고 열정적인 것을 추구하게 만들어 최종적으로 초래되는 결과이다. 그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망치는 것입니다.) 구원할지 말지는 하나님의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 보기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길이 이 지경에 이르면, 사람의 장래와 종착지는 기본적으로 망치게 된다. 결국 누가 이렇게 만든 것이냐? 바로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만들었다. 만약 그가 그렇게 멋대로 하지 않고 사역지침에 따랐다면, 상부의 요구대로 형제자매를 인도해 하나님 앞으로 데려왔다면,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구원받을 희망이 여전히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전히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적그리스도는 야심과 욕망이 지나치게 팽배해 자신을 옹호하거나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삶이 재미없고 무료하다고 느낀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어리석은 자들을 총알받이나 장난감처럼 다뤄서 이들이 자기 말을 따르게 만든다. 그러면 스스로가 수완도 좋고 즐겁고 자기 인생이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른바 듣기 좋은 영적인 말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을 미혹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미혹된 사람들이 참도와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을 떠나 그를 추종하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게 한다. 최종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이들의 앞날과 종착지가 모두 사라지고, 구원받을 기회가 없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고 사람을 따르면, 결과가 어떻겠느냐? 만약 또 영적인 누군가를 보게 되면, 너희는 또 부러워하겠느냐?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영적이다’라는 말은 어떠하냐? 공허하다. 사람은 육에 속하고 피조물이다. 만약 네가 정말로 영적이라면 네 육체가 사라지는데, 그러면 네가 영적일 수 있겠느냐? 그것은 빈말 아니겠느냐? 그러니 ‘영적이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성립되지 않는 빈말이다. 다음에 누가 또 자신이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말하면 “정직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 앞에 살기를 추구하는 것이 더 실제적입니다. 당신이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죽음의 길이에요! 절대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 마세요. 영적인 것은 사람이 추구할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전혀 말이 되지 않아요.”라고 말해라. 너희가 말해 보아라.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어서 영적인 사람이 된 사람이 누가 있느냐? 종교계의 유명인이나 성경 해석가들이 영적인 사람이 되었느냐? 그들은 모두 외식하는 사람으로, 영적인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영적’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바로 이 공허한 말로 사람을 미혹하려는 것이며, 이 말을 만들어 낸 자가 바로 나쁜 놈이고 마귀이다. 이런 빈말을 할 수 있는 자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있겠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무엇을 추구해야 하고 무엇에 속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너 자체가 바로 피조물이고,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인간이니, 만약 무언가에 속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육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속성이다. 물론, 육에 속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사탄에 속하는 것으로, 세상의 길을 걷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해야 하며, 이것이 옳다. 만약 영적이고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추구한다면, 사람이 닿을 수 있겠느냐? 아무리 추구해도 소용이 없고, 이는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길이 아니다. 그러니 영적인 것과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구호일 뿐이며, 영적인 척하는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 이는 진리와 관계가 없다. 네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리 실제이다.

적그리스도는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가 깨닫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도리이며, 그는 자신이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는 그런 말들을 자기 생각대로 가공해서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는 영적 도리로 바꾼 후,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사람들에게 들려준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거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이를 듣고 매우 옳다고 생각해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고, 그 결과 미혹되어 적그리스도를 숭배하기 시작하는데, 이러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사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가 하는 소위 옳은 말들을 자세히 듣고 분별해 보면, 모두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는 공허한 이론이다. 물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다들 이런 말들을 옳다고 여겨 쉽게 속는다. 너희는 이런 일들을 경험하지 않았느냐? 실제 사례를 들 수 있느냐? 만약 너희가 실제 사례를 들 수 있다면, 글귀와 도리를 말하기 좋아하는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을 미혹하는지 분명히 볼 수 있다면, 이는 너희가 듣고 이해했으며 자신과 대조했다는 증거이다. 반면, 만약 너희가 예를 들지 못한다면, 이는 아직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으며 자신과 대조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니, 글귀와 도리를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분명 분별할 수 없을 것이다. (저에게도 이러한 내적 상태가 있습니다. 책망과 훈계, 채찍질과 징계에 맞닥뜨린 형제자매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 저에게 구하면, 사실 저도 그 문제의 본질과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지만 그에게 공허한 말을 해 줍니다. 예를 들어, 책망과 훈계, 채찍질과 징계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구원이며,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의 패괴 성품을 겨냥해 하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그가 지닌 문제의 본질을 확실히 말해 주지 않았음을 저 자신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왜 그런 환경에 처하게 되었는지, 그의 그런 행동 방식과 표출은 어떤 패괴 성품에 속하고 무슨 성질인지, 하나님의 뜻은 또 무엇인지 등과 같은 것들을 그에게 교제해 주지 않았지요. 그저 올바른 도리와 듣기 좋은 구호만 말해서는 분명 남을 도울 수 없습니다.) 너 자신도 진리를 그다지 분명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형제자매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는 것은 이것과 다르지 않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선의로 남을 도와주지 않으며, 그의 속셈과 목적은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이런 일을 할 때, 그가 구호를 외칠 때 어떤 모습과 성품을 표출하는지가 바로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핵심이다. 어떤 사람은 분량이 작고 진리를 밝히 알지 못해 사역 강도는 필연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하지만, 사람을 미혹하거나 통제하려는 속셈과 목적은 없다. 그도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싶어 하지만, 단지 마음만큼 능력이 따라 주지 않을 뿐이다. 비록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해도, 사람들은 그의 본심이 옳다는 것을, 그가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적그리스도의 목적은 무엇이냐? (사람들이 그에게 동조하고,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하는 말은 마음만큼 능력이 따라 주지 않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마음만큼 능력이 따라 주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속마음을 말한다. 그저 문제의 본질과 근원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명확하게 교제하지 못해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공급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가 하는 그런 말들은 무엇이냐? 그것이 자신의 속말이겠느냐? (아닙니다.) 분명히 아니다. 그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된 말이다. 그는 왜 거짓된 말을 하겠느냐? 너를 속이고 미혹하려는 것이다. ‘리더로서 해야 할 사역은 이미 했고, 교제해야 할 것도 다 했습니다. 제가 하는 이런 말들은 다 옳습니다. 만약 당신이 받아들이지 않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건 당신 탓이죠. 저를 탓하지 마세요.’라는 의미이다. 그는 진정으로 너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겉치레만 하는 것이고, 자기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이런 옳은 말을 하는 것이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기 때문에, 말했다 해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며 마음속으로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일부 적그리스도는 평소에 옳은 말을 배워서 하고, 다른 사람이 소극적인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기도 하지만, 자신이 책망과 훈계를 받거나 교체되면 극도로 소극적으로 변하는데, 시종일관 자신을 인식하지 못해 오히려 형제자매가 도와주어야 한다. 이런 일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이런 일은 너무 많다. 그가 온종일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그런 글귀와 도리는 자기 자신조차 돕지 못한다. 그럼 이런 말들이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겠느냐? 그의 실제 체험에서 나온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가 하는 말은 글귀와 도리일 뿐, 그의 실제 분량을 대표하지 않는다. 그가 사역하여 남을 돕는 것은 순전히 표면적인 허상, 행동 방식, 좋은 행위를 통해 자신이 리더임을 남들이 승인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하는 과정을 밟는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그를 리더로 인정하기만 하면, 그에게 승복하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그에게 승복하면, 그가 지위를 갖게 되지 않겠느냐? 그의 지위가 공고해지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그의 목적이다. 어떤 리더 일꾼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해 사역할 때 마음은 있으나 능력이 따라주지 않는데, 이 경우는 기껏해야 분량이 작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리더가 아닐 뿐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사역할 때 형제자매를 돕고 붙들어 줄 수 있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지위와 이익만을 고려한다. 이것이 바로 이 둘의 차이점으로, 그들은 성품이 다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가 듣기 좋은 말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실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본심에 어긋나게 말하는데, 그저 겉으로 보기에 옳은 도리와 구호, 혹은 인정에 부합하는 말로 다른 사람을 타이르며 형식만 거칠 뿐이다. 그는 어째서 이렇게 형식을 거치겠느냐? 누군가 소극적이고 연약해진 것을 보고도 손 놓고 방관하면, 남들이 그에게 실제적인 일을 하지 않으며, 리더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할까 봐 할 수 없이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목적은 순수하게 본분을 이행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형제자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이 가장 먼저 나서서 형제자매를 돕고 공급해 주어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형제자매가 그를 지지하지 않고, 다음 선거에서 그를 뽑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자신이 명실상부한 리더가 아닌 헛된 명성만 남게 될까 두려운 것이다. 헛된 명성만 남는 것을 그가 원하겠느냐?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는 실질적인 권력과 지위를 원하며, 형제자매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그를 숭배하고, 지지하고, 따르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매번 리더 선거 때마다 자신이 당선되도록 애를 쓴다. 이것이 그의 목적이다.

일부 소위 리더 일꾼들은 선거가 다가오면 특히 열성적으로 곳곳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이런 사람은 아마 적그리스도 부류일 것이다. 만약 정말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이건 너무 비열하다! 정말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속셈과 목적을 가지고 일하면 자연히 마음에 가책이 생긴다. 양심과 이성의 구속을 받아 자신이 예전에는 그렇게 열성적이지 않았는데 지금 갑자기 이렇게 열성적인 것이 너무 티가 나서 자신도 역겨울 정도라 차라리 선거에 참여하지 않을지언정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된다. 몇 년간 하나님을 믿으면서 생긴 얼마 안 되는 분량과 수치심 때문에, 결국 자신을 단속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자신을 단속하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는 야심, 각종 속셈과 목적, 음모를 갖고 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다 알고 있지만 기어코 그렇게 하며, 매사에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고려한다. 교회와 형제자매를 위해 일하는 것이 매우 손해이며 수지 타산이 안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팔이 안으로 굽듯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다. 선거 때가 되면, 그는 온 힘을 다해 각 지역 유세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을 뽑도록 미혹하고 회유한다. 또 나중에 투표할 때는 몰래 자신에게 두 표를 더한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행위가 역겹지 않으냐? 만약 야심이 없다면, 그가 뭘 위해 그렇게 공을 들이겠느냐? 이는 야심 때문 아니겠느냐? 야심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야심 때문에 한 일도 분명 역겹고 입에 올릴 수 없는 짓일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거짓되고 기만하는 짓만 하며, 허상으로 사람을 미혹하는데, 진상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이를 보고도 ‘리더가 요즘 참 애를 많이 썼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일했지. 무슨 일이든 다 앞장서서 하느라고 참 고생이 많았어. 과로로 많이 여위고 흰머리도 늘었어.’라고 생각한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하다가 결국에는 선거 때 그에게 투표한다. 적그리스도가 목적을 달성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를 음모라 하고, 수단이라 하며, 사악함이라 한다. 이처럼 적그리스도는 말로만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행위와 행동 방식도 이용해 자신이 얼마나 열성적이고 순종적인지, 형제자매를 위해 생각하는지를 소리 없이 사람들에게 알려 준다. 그는 이처럼 좋고 옳은 것처럼 보이는 말과 겉으로 드러나는 허상을 이용해 자신은 합당한 자격을 갖춘 리더이고, 사람들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는 좋은 리더라고 사람들에게 거듭 알려 주고 강조한다. 이는 마치 민주 국가의 경선에서 후보자가 각지에서 연설과 유세를 하며 표를 끌어모으고, 심지어 투표할 때 부정행위를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배짱이 없으면 장부가 아니다.”라는 말을 신봉하는데, 어떤 수단을 쓰든 선거에서 이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의 사상 관점이다. 그럼 적그리스도들도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권력과 지위를 위해서라면, 그들은 마음속 깊은 곳의 들끓는 피와 벅차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 모든 일들을 할 것이며, 게다가 머리를 쥐어짜며 그 일들을 할 것이다. 그들이 결코 분수를 지킬 리 없다. 그래서 권력과 지위를 향한 열의가 아주 큰 사람, 즉 야심을 통제하지 못하는 이 부류의 사람이 결국 리더로 선출되면, 단순히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는 야심이 있느냐? 너희의 야심을 인성과 이성의 범위 내에서 통제할 수 있느냐? 통제할 수 있다면,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위험을 피할 수 있으니, 적그리스도가 되어 내쳐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너희가 자신이 야심이 너무 커서 종종 지위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먹고 마시지도 않으며, 어떤 고난도 달게 받을 수 있고, 어떤 비열한 수단도 다 쓸 수 있다고 느낀다면, 이미 수치를 모르고 제어가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고 느낀다면, 이러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네가 적그리스도임이 분명하다. 만약 적그리스도의 이러한 모습들만 가지고 있다면, 아직은 구원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험에서 벗어났겠느냐? 아직 아니다. 너에게 적그리스도의 이런 모습들이 있다면, 너는 여전히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저버릴 수 있거나, 하나님이 한 어떤 일이 너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연구하고, 오해하고, 판단하며,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퍼뜨린 후 하나님을 저버리고 떠나 결국 하나님께 내쳐질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사람이 표출하는 것은 그의 성품을 대표한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표출되는 것이 바로 성품의 표출이다. 왜 늘 성품 변화에 대해 언급하겠느냐? 성품이 변화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는 죽어도 회개하지 않으며, 끝까지 하나님에게 대항하고 적대시한다.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이 인류를 만들었음을, 또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음을 인정할지라도 자신의 본성 때문에 걷는 길을 바꾸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적대시하는 본질도 바꾸지 못한다.

적그리스도 부류 사람들의 행위의 본질은 바로 끊임없이 온갖 수법과 방식으로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시켜 다른 이들을 미혹하고 우롱하고, 높은 자리를 차지해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숭배하게 만드는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마음속으로는 인류를 두고 일부러 하나님과 다투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바로 그들이 인류를 두고 하나님과 다투지 않더라도, 사람들 가운데서 지위와 권세를 얻으려 한다는 것이다. 설령 어느 날 자신들이 지위를 두고 하나님과 다투고 있음을 의식하고는 조금 삼갈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명예와 지위를 추구할 것이다. 그들은 일부 사람들만 찬성하고 승복해도 정당하게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요컨대, 적그리스도가 하는 모든 행동은 겉으로는 본분을 이행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과적으로는 사람을 미혹해서 자기를 숭배하고 따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이다. 사람을 통제하고, 교회에서 지위와 권력을 차지하려는 그들의 야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자가 바로 영락없는 적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 어떤 말씀과 일을 하든, 사람에게 어떤 요구를 하든,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에 따라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나 자신들의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다는 이유로 권력과 지위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이든, 그들의 야심과 욕망은 여전히 존재하며 늘 그들의 마음을 점령하여 그들 자신을 온전히 통제하고, 그들의 행위와 생각, 그리고 그들이 가는 길을 좌우한다. 이런 자가 바로 영락없는 적그리스도이다. 적그리스도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무엇이겠느냐? 어떤 이들은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두고 하나님과 다투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믿으며, 또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고 싶어 하고, 진리도 추구하고자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어 악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듣기 좋은 말을 아무리 늘어놓을 수 있을지라도 그에게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권력과 지위에 대한 그의 야심과 욕망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실패와 좌절을 겪거나 하나님이 그들을 내버려두고 포기했다는 이유로 권력과 지위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성이다. 고난을 많이 겪었거나 진리를 좀 깨닫고 하나님을 알게 되어 개과천선하고 진리를 추구하게 된 적그리스도를 본 적이 있느냐? 이런 사람이 있겠느냐? 우리는 본 적이 없다. 지위와 권력에 대한 적그리스도의 야심과 추구는 어떤 순간에도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단 권력을 잡기만 하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이로써 그들의 본성 본질이 대체 무엇인지가 결정된다. 하나님이 이들을 적그리스도라고 정의를 내린 것은 지극히 정확하다. 이는 그들의 본성 본질에 근거해 결정된 것이다. 혹자는 ‘적그리스도란 인류를 두고 하나님과 다투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때로는 그들이 꼭 하나님과 다투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은 그저 지위와 권력에 대한 인식, 이해, 욕구가 정상적인 사람과 다를 뿐이다. 정상적인 사람도 때로는 허영심을 가지며, 사람들 사이에서 체면을 세우려 하고, 자기주장을 내세우려 하고, 서열을 다툰다. 이는 정상적인 사람의 야심이다. 만약 리더였던 그가 교체되어 리더의 지위를 잃게 되면, 그도 괴로워할 것이다. 하지만 환경 변화나 분량의 성장, 그리고 진리 진입과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짐에 따라 그의 야심은 조금씩 옅어질 것이다. 그가 걷는 길과 나아가는 방향에 변화가 생기면서 지위와 권력에 대한 추구가 조금씩 옅어지고 욕망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지위와 권력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지 못한다. 어떤 순간에도,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또 그의 나이가 얼마가 되었든, 그의 야심과 욕망은 변하지 않는다. 적그리스도의 야심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디에서 알 수 있겠느냐? 예를 들어 보자. 어떤 교회의 리더일 때, 그는 마음속으로 늘 어떻게 교회의 모든 사람을 통제할지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그를 다른 교회로 보내고 리더를 시키지 않는다면, 그가 달가운 마음으로 평범한 따르는 사람이 되겠느냐? 절대 그러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지위를 얻고, 모든 사람을 통제할지 궁리할 것이다. 그는 어디를 가든 늘 왕권을 잡으려 한다. 그를 사람이 없는 곳이나 양 떼 속에 둔다 해도, 그는 양 떼를 통솔하려 할 것이며, 개나 고양이와 함께 둔다면, 또 고양이와 개의 왕이 되어 동물들을 통치하려 할 것이다. 이는 야심으로 가득 찬 것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의 성품은 마귀의 성품 아니겠느냐? 사탄의 성품 아니겠느냐? 사탄이 바로 이런 존재이다. 사탄은 하늘에서 하나님과 동등해지려 했으며, 땅에 내쳐진 후에는 늘 인류를 통제하여 인류가 그를 경배하고 하나님으로 대하기를 원했다. 적그리스도가 언제나 사람을 통제하려 하는 것은 사탄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탄 성품에 따라 살며, 이미 정상인의 이성 범주를 벗어났다. 이는 조금 비정상적이지 않으냐? 이 비정상적이란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느냐? 그의 모습이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춰져야 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그것은 어떤 모습이겠느냐? 무엇이 지배한 것이겠느냐? 이는 본성이 지배한 것이다. 그는 악령의 본질을 지니고 있어 정상적인 패괴된 인간과는 다르다. 이것이 바로 차이점이다. 적그리스도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권력과 지위를 추구하는데, 이는 그들의 본성 본질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추악한 몰골이 바로 사탄과 마귀의 본모습임을 사람들에게 보여 준다. 그들은 지위를 두고 사람들과 다투는 한편, 감히 하나님과도 지위를 다투는데, 하나님의 선민을 자신의 소유로 삼고 자기 손안에서 완벽하게 통제해야 만족한다. 적그리스도는 어느 교회나 집단 속에서도 늘 지위와 권력을 얻어 사람들이 자기 말을 따르게 하려 한다.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는 다 자기가 결정하려 하며, 남들이 그에게 순종하고, 그를 받아들이게 하고 싶어 한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본성 아니겠느냐? 사람들이 그의 말을 따르기를 원하겠느냐? 그를 뽑고 추천하겠느냐?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자기가 결정하려 한다. 남들이 동의하든 말든, 그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 말하고 일하려 하며, 남들 앞에 나서려 한다. 또한 자신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데, 상대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이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뻔뻔한 것이다. 이런 부류가 바로 진짜 적그리스도이다. 리더든 아니든, 그는 적그리스도이다. 그는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을 지니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늘 교회의 리더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그들이 어디에 사는지, 누구와 가깝게 지내는지 등을 집중적으로 알아본다. 언제나 사탄의 첩자처럼 이런 상황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들은 어째서 늘 이런 일에 관심을 두겠느냐? 많은 사람이 그들의 속셈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저 그들이 약간 이상하다고만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일에 관심을 두기 싫어한다. 자신의 본분만으로도 매우 바쁘니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저 자신의 본분 이행에 집중하고 진리 실행을 중시하며 자신도 모르게 성품이 변화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하지만 어떤 부류의 사람은 교회의 각종 일들을 알아보는 데 무척이나 열중한다. 리더를 만나기만 하면 “교회에서 모모 악인은 어떻게 처리하셨어요?”라고 묻는다. 리더가 “어떻게 처리하든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왜 그 일을 물어보시는 거죠? 그 사람 아십니까?”라고 반문하자, “그냥 관심을 갖는 겁니다. 하나님 집의 일이니까요.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서 하나님 집의 일에 열정적으로 관심을 가져야죠. 관심을 갖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말한다. 리더가 “그 일을 캐묻지 마세요. 설교를 들을 때는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릴 때는 예배를 드리세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게 바로 당신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당신은 열심히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하자, 그는 “그건 아니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한다. 아무도 알려 주지 않자, 그는 어디에 가서 알아봐야 할지를 고민한다. 상급 리더가 그의 집에서 사역자 모임을 할 때, 모임에 참석할 명분이 약했던 그는 물을 따라 주러 들어간 척하며 그 악인이 출교되었는지 아니면 교회에 남았는지를 알아본다. 남들이 말해 주지 않자 방에서 나간 후 문을 조금 열어 놓고 문 옆에 서서 몰래 듣는다. 이는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자는 미친 사람이다. 쉽게 말해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고도 한다. 이런 자는 분명 야심이 있다. 그는 리더가 되고 싶은데 되지 못하자 쓸데없는 참견을 하며 이를 통해 자신을 위로하는 한편, 자신이 아는 것이 많고 똑똑하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 준다. 그러면 나중에 그를 리더로 뽑아 줄 수도 있다. 그는 리더가 되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 참여하고, 알아보고, 알려고 한다. 그는 날마다 이런 일에 참여하면 리더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총무 같은 사람은 될 수 있고, 또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진리에는 전혀 흥미가 없고, 오로지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는 것만을 중시한다.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집중적으로 캐묻고, 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쫓아간다. 마치 악취가 나는 파리처럼 말이다. 이런 사람은 역겹지 않으냐? 이렇게 어리석은데도 꽤 열정적으로 살아간다. 본연의 일을 하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집에서 접대 본분을 이행할 때, 부엌 바닥이 더러워도 닦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큰일을 할 사람이니 바닥을 닦는 것처럼 보통 사람이 하는 일은 그와 같은 자질을 가진 사람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실제적인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며,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전혀 감당해 내지 못하고, 어떤 본분도 잘 이행하지 못하며, 진심으로 착실하게 일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교회 사역에 대해, 교회 리더 일꾼과 형제자매의 큰일들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 한다. 무슨 일이든 다 아이디어를 내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면 “제 말을 듣지 않으면, 손해 볼 겁니다!”라고 하는데, 이는 비이성적인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일부 적그리스도는 숨겨져 있는데, 그가 꼭 지위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지위가 없어도 이리저리 마구 날뛰는데, 지위가 있다면 얼마나 심각하겠느냐? 얼마나 미쳐 날뛰겠느냐? 날뛰다 죽는다고 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을 리더로 선출하면, 하나님 선민들이 편안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겠느냐? 일부 적그리스도는 숨겨져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지위를 갖고 나서 적그리스도로 변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적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단지 사람들이 분별력이 없고 분량이 작기 때문에, 또는 일부 교회가 아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열정이 있고 일을 계획할 줄 알며 다리품을 팔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선택한 것이다. 그를 선출한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일단 제쳐 두고, 그가 적그리스도임을 발견하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그를 폭로하고 저버려야 한다. 만약 적그리스도로 규정된 사람이 교체된다면, 그 후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을 리더로 뽑아야 하겠느냐? (안 됩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그의 본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그리스도로 규정되면 더 이상 리더로 선출해서는 안 된다. 그의 본성 본질은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는 오직 사탄을 위해 일하고, 그는 그저 사탄의 노예일 뿐으로, 절대 진리를 위해 어떠한 일이나 말도 하지 않는다. 적그리스도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과 적대되고, 진리를 싫어하고, 버리고, 멸시하는 것이다. 그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리더가 아니라면, 그를 리더로 뽑지 말아야 한다. 만약 과거에 리더를 했다가 교체된 자가 나중에 또 리더가 된다면 변하겠느냐? (변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적그리스도이다. 이는 그의 본성 본질로 결정되는 것이다.

2. 적그리스도가 어떻게 사람을 회유하는지 해부하다

방금 얘기한 것은 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는 모습이다. 미혹하는 것과 회유하는 것은 비슷한 뜻이다. 다만 성질과 수단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미혹하는 것은 허상으로 사람을 오도하여 진짜라고 믿게 하는 것이며, 회유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수단을 써서 남이 자기 말을 듣게 하고 자기 길을 따르게 하는 것으로, 그 속셈이 아주 명확하다. 미혹하고 회유하는 것은 옳은 말로 사람을 미혹하고, 사람의 관념에 매우 부합하는 말과 사람이 받아들이기 좋아하는 말로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그를 믿고 따르고, 그와 같은 전선에 서서 한패가 되게 한다. 적그리스도는 그렇게 옳은 자들 무리에서 자기 진영으로 사람을 끌어들인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만약 적그리스도의 이런 행동 방식을 받아들인다면, 사람은 적그리스도를 믿고 숭배하게 되며, 그런 다음에는 적그리스도가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자기도 모르게 적그리스도를 따라가게 된다. 이것은 속아 넘어가는 것 아니겠느냐? 일부 적그리스도는 사람들과 접촉하고 이야기할 때 늘 수단을 써서 사람을 미혹하고 회유하는 목적을 달성한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편 가르기가 일어나고 파벌과 무리가 생겨난다. 예를 들어, 적그리스도가 남방 사람이라고 하자. 그는 남방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다 남방 사람입니다. 다들 같은 강의 물을 마시고 자랐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죠. 북방 사람과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친해질 수가 없어요! 비록 같은 하나님을 믿지만, 북방 사람들은 우리와 생활 습관이 다르고 성격도 맞지 않아서 서로 할 말이 없어요. 그러니 우리야말로 한 가족이니 하나로 뭉쳐야 해요.” 이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고, 그저 어떤 관점을 표현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속셈과 목적을 가지고 이 말을 하였으니 사람은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사실 적그리스도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의 진심이 아니며, 상대방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하는 것뿐이다. 북방 사람을 만나면 적그리스도는 “북방이 좋죠. 북방이 공기가 좋아요. 저는 비록 남방에서 태어났지만, 북방의 물을 마시며 자랐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물로 맺어진 사이예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말을 들은 북방 사람은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와 교류하게 된다.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미혹하고 회유하는 것에 능하다. 다양한 수단으로 교회를 분열시켜 교회 내 남방 사람과 북방 사람이 각기 다른 파벌을 형성하게 만드는데, 그가 중간에서 이익을 취하고, 자신의 파벌과 무리를 만듦으로써 자신의 파벌과 세력 형성이라는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다. 특히 교회에서 선거할 때, 북방의 형제자매가 선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선거 중 암암리에 부정을 저질러 표를 바꾸고, 결국 교회 리더와 집사는 모두 남방 사람들이 당선된다. 적그리스도는 이처럼 거리낌 없이 사람을 미혹하고 회유하여 편을 가르고 파벌을 나누며, 이런 수단으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통제한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독립 왕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독립 왕국을 세우는 것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그리스도와 양립할 수 없고, 하나님 선민들을 자기 소유로 삼고, 하나님과 대립하는 것이다. 이건 하나님께 반기를 드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한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이는 교회 사역을 심각하게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이며,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짓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를 발할 것인데, 이러한 적그리스도는 모두 징벌을 받고 멸망할 것이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율법시대에 모세를 판단한 250명의 족장은 바로 징벌을 받았다. 은혜시대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 또한 바로 징벌을 받았는데, 모두 저주를 받아 비참하게 죽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맞선 결과이며, 또한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의 필연적인 결말이다.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회유해 교회를 분열시키느냐? 먼저, 적그리스도는 은사가 있는 사람과 말을 잘하는 사람을 회유하여 일단 그들의 호감을 산 후, 친구가 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세력권을 넓힌다. 가난한 사람, 자질이 부족한 사람, 비교적 솔직한 사람은 상대하지 않으며, 심지어 배척하기까지 한다. 어떤 사람이 사회적 지위와 돈이 있으면, 그는 방법을 강구해 이들을 자신의 손안으로 끌어들인다. 하지만 진심으로 헌신하지만 집이 가난한 사람, 또는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별다른 세력이 없어 쉽게 괴롭힘당하는 형제자매는 교회 내 이등 국민으로 분류한다. 이렇게 하면 어느새 몇십 명이 있는 교회가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뉘게 된다. 이는 누가 한 짓이겠느냐?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짓을 할 것이다.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좋은 리더는 교회에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진리로 해결하여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등급을 나누거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분류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는 교회를 분열시키지 않을 것이며, 모든 형제자매가 어디에서 왔든,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 말씀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도록 할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패괴 성품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룬다. 그는 사회적 지위와 돈이 있는 사람을 회유할 것이다. 어떻게 회유하겠느냐?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의 사회적 지위는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이러한 조건을 활용해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 리더를 하고 있는데, 현지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꽤 유명하기도 하고 가족들의 핍박도 꽤 심해 리더를 하기가 다소 위험합니다. 저는 안전을 확보해 줄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안전이 확보되면, 당신은 앞으로 큰 복을 받고 생명이 빠르게 성장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사람을 회유하고 유혹해 자신을 따르게 한다. 만약 그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거나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그 사람에게 쉽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는 본분을 안배해 주어 있는 힘껏 그를 치켜세운다. 그는 그 사람이 하나님 집의 사람을 쓰는 원칙에 부합하는지 상관하지 않으며, 그저 이 사람이 사회적 지위가 있어 자신에게 유용하기만 하면 회유한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돈이 많고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 접근하고, 아첨하고, 회유한다. 이와 동시에 그들에게서 이익을 취한다. 돈, 권력, 지위가 있는 사람을 대하는 그의 두 번째 회유 방식은 바로 방임하는 것이다. 그들이 교회에서 항상 나쁜 짓을 저질러 형제자매의 적극성에 타격을 입힐 뿐만 아니라 교회 생활을 교란해도, 적그리스도는 이를 보고 기뻐하며 그들이 나쁜 짓을 하도록 내버려둔다. 적그리스도가 그들을 방임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이 또한 회유하기 위함인데, 회유해서 그들에게서 이익을 취하기 위함이다. 적그리스도는 짐짓 그들에게 “비록 당신들이 저를 리더로 선출해서 제가 당신들을 인도할 책임이 있기는 하지만, 이 교회가 저 혼자만의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제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당신들도 도와야 해요. 어떤 일이 생기면 당신들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협력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 말을 돈과 권력이 있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만 한다. 이런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회유해 통제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른다. 반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지만 돈과 사회적 지위가 없고, 또 별다른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배척하고 공격하거나 아예 무시해 버린다. 그의 무시는 어떤 의미이겠느냐? ‘우리끼리 하나로 뭉쳐 철옹성이 되면, 너희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별로 힘을 쓰지 못할 거야. 네가 얌전히 내 말을 듣는다면, 네가 따라서 믿게 내버려두겠지만, 만약 네가 늘 꼬투리를 잡으며 나에게 불만을 갖고 윗선에 나의 문제를 보고한다면, 내가 너를 혼내 주고 출교시키겠어!’ 그는 바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분별이 없어 두려워한다. ‘그들에게 밉보이면 안 돼. 그들이 파벌을 형성했으니 밉보일 수 없어. 우리는 지위가 낮아 말도 무시당해. 만약 말이라도 잘못해서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고 진짜로 출교당하게 되면, 하나님을 믿을 기회도 없어질 거야.’ 이들은 이렇게 겁에 질려 있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회유하는 이런 행위 그 내면에는 사악하고, 악독하고, 흉악한 성품이 있다. 그가 사람을 회유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이 또한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다. 패거리나 무리를 형성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그의 세력 범위를 확장하여 그의 권력과 지위가 더 공고해지게 누군가가 그를 돕도록 하기 위함이다. 너희는 이런 일들을 접한 적이 있느냐? 적그리스도가 어떤 교회를 통제하면, 교회 내의 돈과 지위가 있고 횡포를 부리는 자들이 모두 그와 함께 권력을 잡고 무리를 형성한다. 4명, 혹은 5~6명이 패거리가 되어 어느 누구도 그들의 문제를 폭로하지 못하게 된다. 적그리스도가 이들을 회유하는 이유는 자신이 이들을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반드시 이들을 자기편으로 회유해 자신의 조력자로 만들어야 하며, 이래야 그의 지위가 공고해진다. 또한, 이들이 이용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회유하는 방식으로 이들을 대하는 것은 이들이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도록 이들을 진정시킨다는 의미도 있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회유하는 이 측면에 관해, 방금 두 가지 모습을 이야기했다. 너희가 있는 교회에 이러한 현상이 있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일이 있느냐? (있습니다.)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회유와 관련된,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회유하는 이런 성질에 속하는 모습으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회유의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왜 사람을 회유하겠느냐? 그가 만약 사람을 회유하지 않는다면, 사람을 통제하려는 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느냐? (달성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의 말을 따르고 그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만 그가 지위를 갖게 되고 권력을 행사할 대상이 생기게 된다. 만약 적그리스도 곁에 그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없다면, 지위와 권력을 얻고자 하는 그의 야심이 충족될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회유할 수 있는 모든 부류의 사람을 회유해야만 그가 지위와 권력을 갖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회유할 수 없는 사람들을 그는 어떻게 처리하느냐? (배척하고 공격합니다.) 공격하고 배척하기 시작한다. 적그리스도가 교회 내 회유할 수 없는 사람들을 ‘청강생’으로 만든 경우가 있지 않으냐? 교회에서 하달한 설교와 찬양, 그리고 하나님 말씀 서적을 아예 그들에게 발급하지 않거나 긴 시간 동안 이들에게 예배를 통지하지 않는 것 말이다. 분명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이며, 이는 모두 적그리스도가 하는 짓이다. 적그리스도에게 공격과 배척을 당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제명된 것도, 자발적으로 교회를 떠난 것도, 자발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모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적그리스도를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늘 배척당하여 하나님 말씀 서적을 제때 얻지 못하고, 혹은 설교, 찬양, 교회에서 하달한 각종 사역지침을 제때 얻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못한다. 반면 적그리스도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 회유당하고, 그에게 항복한 사람들인데, 그들은 하나님 집에서 하달한 각종 서적과 영상을 우선적으로 얻을 수 있는 대우를 누린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행위와 행동으로 인해 교회는 엉망진창이 되고 사분오열되며,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된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회유할 때 조건이 있지 않으냐? 그가 진리를 사랑하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을 회유하겠느냐? (회유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은 다들 분별이 있어 적그리스도가 회유하지 못하며, 그들도 적그리스도를 따라가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어떤 사람들을 회유하겠느냐? 적그리스도가 마음속으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지위가 있는 사람의 환심을 사는 것에 능한 사람, 아첨과 아부를 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또 나쁜 짓을 해서 출교당할까 두려워 적극적으로 그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이다. 적그리스도는 그들을 보호하는 조건으로 사람을 회유하고 사람의 마음을 매수하여 이들이 자신을 가까이하게 만든다. 적그리스도가 회유하는 이런 사람들은 이제 막 믿기 시작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무릇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있겠느냐? 이런 사람들 중에는 좋은 인간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택하지 않는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사람들을 회유해 마치 어릿광대처럼 이들을 이끌면서 자신이 무슨 감투라도 쓴 듯, 무슨 지위라도 생긴 듯 느끼고 매우 만족해하는데, 이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또 어떤 부류의 사람을 회유하겠느냐? (인성이 비교적 악한 사람을 회유합니다.) 바로 악인이다. 적그리스도는 악인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는 악인을 보호한다. 예를 들어, 교회에 악인이 한 명 있다고 치자. 형제자매들이 모두 그가 무척 나쁘다고, 그가 교회에 있기만 하면 아무도 마음 편히 있을 수 없다고, 그가 다른 사람들의 본분 이행뿐만 아니라 교회 사역도 교란한다고, 그에게 본분을 이행하게 하기만 하면 교회 사역이 손해를 입는다고 말해도 적그리스도는 이런 악인을 이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회유해 자신의 곁에 두고 자신을 위해 봉사하게 한다. 적그리스도는 악인을 출교시키지 않고 오히려 보호한다. 그는 오직 악인이 자신을 옹호하지 않고 분별할 때만 처리한다. 그에게 아첨하는 자나 그를 지지하는 자, 그를 반대하는 자만 아니라면, 그는 이들을 모두 회유하고 매수해 자신의 세력을 키운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이러한 사람과 어떻게 지내겠느냐? 그들은 기본적으로 서로 아첨하고 아부하는 방식으로 왕래한다. 적그리스도가 어디를 가든 악인들은 몰려드는데, 마치 똥파리처럼 늘 함께 모인다. 그들은 함께 모여 있어도 결코 진리를 교제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다들 진리를 싫어하고, 그들 중에 진리를 교제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구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방인의 말만 한다. 대부분이 이간질하거나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며 자신을 높이는 말을 하고, 남들을 괴롭히는 짓을 상의한다. 또한,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 집을 경계할지를 연구하고, 어떻게 상부와 대립할지를 상의한다. 만약 누군가가 그들의 문제를 보고하려 하면,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미리 알 수 있을지, 그리고 알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상의한다. 이 악인 무리는 바로 이런 짓들을 상의한다. 그들은 함께 있어도 결코 본분 이행에 관해 교제하지 않으며, 결코 진리를 교제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자매들이 나약하고 소극적이어서 본분을 이행할 의욕이 없는지, 어떻게 그들을 돕고 붙들어 줘야 하는지, 또는 교회의 어떤 방면의 사역이 성과가 좋지 않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나 길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과 같은 일들 말이다. 그들은 결코 이런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을 상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어떻게 상부와 하나님 집을 속이면서 하나님 집에서 그들의 실상을 알지 못하게 할 수 있을지만을 의논한다. 일단 누군가가 상부와 연락하거나 그들의 상황을 보고한 것을 발견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당했고 자신들의 일을 망쳤다고 판단하고는 집요하게 책임을 추궁하여 미심쩍은 사람을 찾는다. 미심쩍은 사람을 찾은 다음에는 바로 그 사람을 다른 곳으로 보내 격리시키고, 또 아무도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지 못하게 명령을 내린다. 이렇게 하면 아무도 감히 그들의 상황을 보고하지 못하게 된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교회를 완전히 통제하게 된다. 그들이 뒤에서 어떤 악을 저질러도 상부에서 알 수 없게 된다. 상부가 상황을 알고 그들의 허점을 발견해서 그들을 조사하라고 명령하고, 결국 그들을 모두 교체시키고 출교시킬 때까지 말이다. 이러한 적그리스도와 악인 무리들은 단지 몇 달 만에 교회 사역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으며, 형제자매들이 서로 시기하고, 훼방 놓고, 폭로하고, 공격하게 하여 교회를 분열시킬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고 교회를 통제한 결과이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미혹하고, 또 이용할 수 있는 악인들을 회유해 교회를 통제하여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공고히 한다. 악인이 그의 말을 들으면 보호해 주지만, 악인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악인을 우선적으로 처리한다. 만약 악인이 그를 따르고, 그에게 귀순하고 회유될 수 있다면, 그는 악인을 자신의 공범으로 만들어 자신이 나쁜 짓을 할 때의 조력자나 감시자가 되게 한다. 그러고는 이들을 형제자매들 사이에 침투시켜 누가 그에게 의견을 가졌는지, 누가 그가 한 일에 분별이 있는지, 그가 한 어떤 나쁜 짓들이 발견되었는지, 누가 늘 상부와 연락해 그의 문제를 보고하려 하는지를 알아보게 한다. 적그리스도와 악인은 바로 이런 일들을 전문적으로 조사하는데, 이런 일들은 적그리스도가 가장 걱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들은 종종 함께 대책을 논의해 자신들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과 자신들을 의심하는 사람을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대한다. 오늘은 핑곗거리를 찾아서 이 사람을 괴롭히고, 내일은 꼬투리를 잡아서 저 사람을 괴롭히며, 심지어 이유와 핑계를 대고 이런 사람들을 제명하고 출교시키도록 하나님 선민을 선동하기도 한다. 적그리스도가 일단 리더 일꾼이 되면 바로 이런 짓들을 하는데, 몇 달 만에 교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도 있다. 새 신자가 많은 교회라도 불처럼 타오르다가 그들이 끼얹은 물로 그 불이 꺼지고 만다.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이자 하나님 선민의 원수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전혀 지나치지 않고, 너무나 정확하다!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은 곳과 악인이 권력을 잡은 곳에서는 교회가 난장판이 되어 교회 생활이 전혀 없으며, 하나님 말씀을 정상적으로 먹고 마시지도 못하고, 진리를 교제하는 분위기도 없다. 오로지 아귀다툼과 못된 짓을 일삼는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권력을 잡은 것이다. 마귀가 권력을 잡으면 결과가 좋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 선민에게 재난을 가져올 뿐이다. 이는 틀림없다.

어떤 적그리스도는 어떤 교회의 리더가 되면, 먼저 교회에서 누가 예전에 늘 상부에 문제를 보고했는지를 연구하고 이런 사람을 멀리하려고 한다. 설령 이 사람의 집에서 그를 접대할 수 있어도 가지 않는다. 만약 누가 아부와 아첨을 잘하고, 늘 리더 주변을 맴돌 뿐만 아니라, 비위를 잘 맞춘다면, 그는 이런 사람의 집에 머물 궁리를 한다. 다른 사람이 “그의 집에서는 두 명의 자매를 접대하고 있어요.”라고 하면, 그는 “안 됩니다. 자매들에게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하세요.”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당신 마음대로 움직이면 안 됩니다. 두 자매가 그곳에 묵는 게 적합해요. 마음대로 움직이면 본분 이행에 영향을 줄 겁니다.”라고 하면, 그는 “제가 리더이니 제가 결정합니다. 당신은 반드시 제 말을 들어야 해요!”라며 두 자매를 강제로 옮기게 한다. 그가 왜 꼭 그 집에서 지내려 하는 것이겠느냐? 바로 그 집 사람들이 온순하고 나약해서 그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든, 뒤에서 어떻게 방탕하게 굴든, 그 집 사람들은 보고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바로 이런 곳을 찾아 머물려는 것이다. 일정 기간 거주한 후에는 악인도 불러들인다. 그들은 바로 그곳에서 나쁜 짓을 하고, 대책을 논의하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괴롭힐 방법을 궁리한다. 적그리스도와 악인이 교회에 나타나면, 그는 먼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먼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공고히 한다. 그는 일단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는데, 이는 자신의 지위에 불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일단 현재의 질서를 깨지 않고, 먼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한 후 적절한 조력자를 찾는다. 그다음은 진리를 추구하는 형제자매들을 괴롭히고 해결할 대책을 논의한다. 그는 어떻게 괴롭히고 해결하겠느냐? 우선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 그에 대해 분별이 없는 사람, 그에게 이용당할 수 있는 사람을 회유한다. 아무리 해도 끌어들이지 못하는 사람과 그에 대해 분별이 있는 사람은 핑계와 이유를 대고 격리하거나 제명한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행위는 어떤 성품을 표출한 것이겠느냐? (흉악한 성품입니다.) 그가 어디서 리더를 하든, 그곳은 난장판이 되며, 교회 생활의 질서가 모두 깨진다. 네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억압과 제한을 받고, 심지어 제명되고 출교된다. 일부 적그리스도는 불량배, 건달, 막돼먹은 여자 같다. 하나님을 믿는데도 지위를 얻고자 하며, 하나님 집에서 권력을 마구 휘둘러 하나님 선민을 통제하려 한다. 바로 이렇게 교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그에게 미혹되고 통제당해 결국 자신을 망치게 된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회유하는 측면의 모습은 거의 다 이야기했다. 내가 이야기한 이런 일들이 너희에게는 매우 희한하게 들리지 않느냐? 그런 일이 상상조차 안 돼서 ‘정말 그런 일이 있나? 아니겠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경우도 있다. 사람들 앞에서는 모두 번듯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뒤에서의 모습이 바로 그들의 진짜 모습이다. 사람들 앞에서 하는 말과 행동은 모두 위장된 것이고 허상이며, 뒤에서 하는 말과 행동이 바로 본모습이다. 만약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과 뒤에서의 모습이 다르다면, 어느 쪽이 진짜이고 어느 쪽이 가짜인지 분별할 수 있지 않으냐? 적그리스도는 사람들 앞에서는 아주 점잖은 척한다. 하지만 그가 뒤에서 하는 그런 짓들을 만약 사람들이 알게 되면 역겨워할 것이고, 그가 군자가 아니라 비열한 소인배라며 그와 어울리는 것조차 수치스러워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정상적인 사람과 잘 지낼 수 있겠느냐? 잘 지내지 못한다. 그의 경우는 정상적인 사람이 나쁜 습관을 지닌 경우가 아니라, 성품의 문제이다. 그의 이런 성품을 보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며 마귀이다. 네가 말해 보아라. 사람이 짐승과 상대하면 어떤 느낌이겠느냐? 마치 네가 돼지를 방안에 두고, 깨끗이 씻긴 다음 옷을 입혀 반려동물로 키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다음 날, 너는 집안이 돼지우리가 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돼지는 집안에서 먹고, 마시고, 배설하며, 위생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때야 너는 돼지를 이렇게 키우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돼지는 짐승이다!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정도 자질과 교양이 있거나 과거 사회에서 명망이 있었던 사람이어서 어느 정도 다른 사람들의 존중을 받는다. 하지만 대부분은 짐승처럼 양심과 이성조차 없다. 그에게 정상 인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정상 인성이 없다면, 여전히 사람이겠느냐? 그렇다면 너희는 그의 인도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만약 형제자매가 이런 사람의 수중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느냐? 미혹되고 회유되는데, 고통을 겪게 될 것이 분명하다. 적그리스도와 같은 부류의 사람은 바로 마귀이며, 이들에게는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일부 사람에게는 사랑이 매우 많고,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어려움, 나약함, 감정적 욕구를 배려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이런 사람들은 전부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 그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의 지위와 명성에 위협이 된다면, 그는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악독한 방법으로 그들을 대할 것이다. 티끌만큼의 배려와 포용도 없이 말이다. 적그리스도의 사랑과 포용은 모두 허상이며, 결코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을 숭배하고 따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사람을 구슬리는 목적은 바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남들의 숭배와 추종을 받기 위함이다. 적그리스도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미혹하고 회유하든 상관없이,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들은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각종 방식을 써서 자신의 목적을 이룬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들이 어떻게 하든 그 모든 것은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본분을 잘 이행하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며, 자신이 교회에서 권력을 잡으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하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아예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 선민의 이익은 더더욱 고려하지 않는다. 적그리스도의 사전에는 이 두 가지를 결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애당초 이 두 가지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직급의 리더가 되든, 그들은 하나님 집과 하나님 선민의 이익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의 사상 관점으로는 교회 사역과 하나님 집의 이익은 그들과 무관하며, 그들이 멸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지위와 이익만 고려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은 사악할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이기적이고 비열하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명예와 이익, 지위를 위해서만 일하며, 다른 사람의 사활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모든 사람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억압하고 배척하여 죽도록 괴롭힌다. 때로는 적그리스도가 나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러 고발을 당해 상부에서 알게 되기도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지위를 잃을 것 같아 대성통곡한다. 겉으로는 통회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이 우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무엇 때문에 후회하겠느냐? 그들은 자기가 인심, 지위, 명망을 잃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들의 눈물에는 이런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동시에 그들은 또 다음 단계에서 어떻게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어떻게 교훈을 얻어 재기할 것인지를 계획한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모습을 보면, 그들은 자신의 과오나 자신이 표출한 패괴 성품에 대해 전혀 후회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며, 참된 인식이나 회개는 더더욱 없다. 설령 그들이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자신을 반성하고 저주한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사람을 미혹하는 허상일 뿐인데, 그걸 진짜로 믿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그 순간 그들의 마음은 진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해라. 적그리스도는 영원히 참된 회개를 하지 않는다. 어느 날 드러나 도태되어도 그들에게 참된 회개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실패했음을, 제대로 연기하지 못했음을, 악행이 전부 드러났음을 인정할 뿐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바로 진리와 하나님을 증오하는 적그리스도의 본성에 따르면, 그들은 영원히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의 자기 인식은 영원히 가짜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권력을 잡고 지위를 공고히 할 기회를 잡지 못해 인심을 잃었다는 것만 인정할 뿐이다. 그들은 이 때문에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적그리스도도 고통스러울 때는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겠느냐? 어떤 상황이겠느냐? 그들은 수많은 악행이 폭로되어 지위를 잃었기 때문에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잘못을 저지른 게 하나님께 죄스러워 후회하고 통곡할 수 있다면,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며, 자신의 악행을 인정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진정으로 뉘우칠 수 있겠느냐? 그들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뉘우치지 않고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저 웃음거리가 됐다고 느껴 의기소침해질 뿐이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굴지만, 실제로는 벙어리 냉가슴 앓는 것처럼 고통이 있어도 말 못 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마음속에 오만 감정이 다 뒤섞여 있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눈물도 흘리지만, 진정으로 뉘우치지는 않는다. 이것이 실상이다. 때로는 적그리스도도 듣기 좋은 말을 하기도 한다. “저는 자질이 부족해 사역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방해하고 교란하는 짓을 좀 저질렀습니다. 선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으니 리더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징계하고 저주해 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저를 리더로 뽑지 않는다 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고는 곧이어 울기까지 한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 동정심에 “울지 마세요. 앞으로도 당신을 뽑을게요.”라고 하면, 그는 이 말을 듣자마자 울음을 그친다. 본모습이 드러난 것 아니겠느냐? 그가 좋은 말을 몇 마디 하는 것도 인심을 매수하고, 사람을 미혹하며 속이기 위해서인데, 어떤 사람들은 정말 속아 넘어간다. 적그리스도가 눈물을 흘린다면, 이는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그를 숭배하는 사람이 그를 의심해 지위가 불안정해질 때, 그는 운다. 괴로워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면서 끊임없이 가족에게 “앞으로 리더를 안 하면 어떻게 살지?”라고 말한다. 가족들이 “예전에 지위가 없었을 때도 잘 살았잖아? 왜 못 산다고 하나?”라고 하면, “지위가 없으면, 이런 좋은 것들을 얻을 수 있겠어? 우리가 이렇게 잘 살 수 있겠어? 당신은 어쩜 이렇게 어리석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집에서 대놓고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지위가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살아?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우리 가족은 몇 명 안 되는 데 집에서는 내가 가족 몇 명밖에 관리할 수 없어. 그저 가장으로 살 수밖에 없는데, 지위가 높은 것도 아니잖아. 나는 교회에서 감투를 써야만 해. 그래야 인생을 헛살지 않는 거야. 게다가 내가 교회에서 이런 지위가 없었다면, 우리 가족이 이렇게 잘 살 수 있었겠어?” 뒤에서 진실한 말을 했고, 야심이 모두 드러났다. 이는 뻔뻔한 사람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는 것은 어쩌다가 범하는 과오가 아니다. 무의식중에 저지르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만약 어쩌다가 무의식적으로 나쁜 짓을 한 번 했다면, 그건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적그리스도는 사탄 본성의 지배를 받아 속셈을 가지고 사람을 미혹하기 때문에, 일관되게 사람을 미혹할 수 있다. 목적을 가지고 미혹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자기 손안에 통제하여 결국에는 권력을 얻는다. 사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는 목적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말을 듣게 하고, 그를 따라가고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이다. 그의 목적은 매우 명확하다. 바로 하나님과 사람을 놓고 다투려는 것이다. 이는 일시적인 패괴 표출이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며, 특수한 환경에서 핍박을 당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그의 본성이 사악하고, 그의 야심과 야망이 너무 크며, 그의 성품이 음험하고, 간계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이런 짓들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의 본성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모두 그가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이런 속셈과 계획이 마음속에 있었는데 일단 리더가 되면 이런 꿈을 실현하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기다렸던 것이다. 이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적그리스도 내면의 실제 내적 상태이다.

이제까지 이야기한 이런 내용 속에서 너희는 자신이 진입해야 하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행위와 본성 본질이 있는 적그리스도와 악인을 분별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 대조해야 하는데, 자신에게 이런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 만약 자신이 적그리스도와 같은 말을 하거나 같은 상황에서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을 너희가 대조할 수 있다면, 적그리스도와 유사한 성품이 표출되거나 유사한 행동 방식이 있을 때, 너희가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는 내가 말한 사례들을 통해, 혹은 사례에서 기술한 세부 사항과 언행을 통해 여기에서 교제하고자 하는 진리를 이해하거나, 여기에서 폭로하고자 하는 사람의 패괴 성품을 알 수 있겠느냐? 이렇게 들을 수 있겠느냐? 너희는 어떤 입장에서 들었느냐? 만약 전적으로 방관자의 입장에서 적그리스도의 이러한 성품과 본질을 분별하고, 이러한 행위와 행동 방식을 대한다면, 너희가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럼 너희는 어떤 입장에서 들어야 하겠느냐? (자신과 대조해야 합니다.) 자신과 대조하는 것, 이것이 기본이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진리를 갖춰야 합니다.) 맞다. 바로 내가 말한 각각의 사례를 통해 너희가 깨달아야 하는 진리를 알아야 한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사실만 알아들을 수 있지만,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과 자질이 훌륭한 사람은 그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얻을 수 있다. 너희는 이야기나 사례에 담긴 진리를 요약해 낼 수 있겠느냐? 이야기나 사례를 교제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 사정과 결합하여 실제 사정에서 구현된 각종 문제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이 방면의 진리와 관련된 각종 모습과 본질에 대해 더 깊은 인상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즉, 이 방면의 진리 및 본성 본질과 관련이 있을 때, 너는 하나의 사례와 장면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자신을 인식하고 다른 사람을 분별할 때 그림을 보는 것처럼 이해하게 된다. 이는 단순하게 이론과 글만 읽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이해하기 쉽고, 더 실제적이며, 더 구체적이다. 만약 글만 있고 너의 체험이 없다면, 글에 대한 너의 이해 또한 어쩌면 글귀에만 머무르게 될 것이고, 늘 자신의 한정된 체험에 속박당해 이 범위 안에 멈춰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 사례를 덧붙이고, 여기에 이야기, 화면, 구체적인 언행과 모습을 결합하면, 이 방면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 보조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만약 이 역할이 달성되었다면, 네가 이미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증거이다. 그럼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백 퍼센트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 방면의 진리에 대한 이해, 정의, 개념, 그리고 인식은 이미 확고해져야 한다. 여기서 확고해진다는 것은 무엇을 지칭하겠느냐? 비교적 올바르고 순수하여 기본적으로 사람의 지식, 관념, 상상, 억측이 뒤섞여 있지 않거나 비교적 적게 섞여 있는 것이다. 이런 사례들이 바로 이런 역할을 한다. 내가 말한 사례 속의 사람이나 일을 네가 알 수도 있고, 심지어 이런 사람을 접해 봤거나 이런 사람과 잘 아는 사이일 수도 있으며, 혹은 네가 이런 일을 접해 본 적이 있고, 심지어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 이런 일을 하는 과정 전체를 직접 본 적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네가 진리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데 무슨 이점이 있겠느냐? 어쩌면 네가 예전에 이런 사람과 함께 생활했을 수도 있고, 이런 이야기를 본 적이 있을 수도 있으며,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발생한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내가 말하는 그 일과 사람을 네가 알고 인식하고 있다고 해서 세부 사항이나 그 안에서 교제한 진리와 구체적인 내용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설령 그 사람이 네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네가 이미 그 안의 진리를 깨닫고 인식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왜 이 점을 일깨우겠느냐? 바로 너희가 그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런 짓들을 해서 하나님이 그를 예로 들면, 너희는 그런 부류의 사람을 비웃거나 경멸한다. 이것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어떤 태도이냐? 한쪽으로 치우친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편향되게 이해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생생한 예와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각각의 사람들이 사람의 패괴 성품의 표출이 어떤 것인지 실감 나게 경험하며, 사람의 패괴 성품과 사람의 본성 본질의 표출은 어떤 것인지, 사람의 본성 본질이란 무엇인지, 패괴 성품이란 무엇인지, 이런 패괴 성품을 지닌 사람과 이런 본성 본질을 지닌 사람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의 희로애락은 어떠하며, 그의 사람됨과 처신, 그리고 인생관은 무엇인지, 그의 일 처리 원칙은 무엇인지, 그가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는지, 그가 어떤 태도로 진리를 대하는지를 실감 나게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실례들, 그리고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진리 실제의 일면을 하나님이 폭로한 사람의 본질적인 면과 더 잘 결합해 훨씬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이런 이야기들을 가볍게 보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누구의 이야기를 하든, 어떤 부류 사람의 이야기를 하든, 그 목적은 오직 하나이다. 바로 네가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네가 그 속에서 진리를 얻으면, 그것이 바로 성과를 얻은 것이다. 그러니 네가 이런 이야기들을 한 번 들으면 그저 그 안의 얕은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고, 글자의 표면적인 의미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분량이 끊임없이 성장함에 따라,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람이 다양한 환경에서 생활하면서 성장함에 따라 생명 또한 점차 성장하여 이러한 이야기 속의 사건에 대해, 그리고 그 속에 나타난 다양한 사람의 본성 본질과 그들의 행위에 대해 다른 인식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겠느냐? 이러한 이야기들과 관련된 진리에서 오는 것이지 이야기 그 자체에서 얻는 것은 아니다. 만약 단순히 이야기만을 해서 “늑대가 왔다”라는 이야기를 한다면, 듣고 나면 그만이다. 그것은 진리와 관련이 없으며, 그저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것으로, 매우 간단하고 얕은 것이다. 하지만 진리와 관련이 되면, 이 이야기의 깊이는 단지 이야기 표면에 드러나는, 사람들이 알아듣는 그러한 의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의 패괴 성품 및 본성 본질과 관련이 있으며, 어떻게 사람을 분별하고, 길을 선택하고, 진리를 대하는지와 관련이 있고,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를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하는지, 사람이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만약 너희가 이렇게 듣는다면, 너희는 매번 설교를 들을 때마다 수확을 얻을 것이며, 매번 여러 방면의 진리에서 빛 비춤을 좀 더 얻을 것이고 더 많은 원칙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어느 정도 생명 진입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고, 세월이 흐르고, 사회 환경이 변하고, 전체적인 흐름이 변함에 따라 진리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작용하고, 그러면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게 되고, 진리에 근거해 사람과 일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래야 생명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데,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어떤 이야기라도 한 번 듣고 끝내지 말고 여러 번 들어야 한다. 만약 듣고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교제해도 된다. 만약 이 단계에서 듣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는 어쩌면 너의 분량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닿을 수 있는 것을 먼저 들으면 된다. 자신의 분량에 맞춰 선택적으로 들으면 된다. 만약 이야기를 들은 당시에는 아주 잘 이해한 것 같았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매우 심오하여 도달하기 좀 어렵고, 자신이 현재 단계에서 체험하는 일 및 생활 환경과 결합할 수 없다면, 이 이야기를 우선 마음속에 담아 놓고 인상을 남기도록 하여라. 네가 이런 일을 다시 접하게 될 때, 네 마음속에 담겨 있는 것들이 아마 반응하게 될 것이다. 마치 네가 배웠던 어휘와 용어, 또는 뇌에 수집해 놓은 정보처럼 말이다. 너는 매일 그것들을 생각하느냐? 아닐 것이다. 네가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정보, 어휘, 용어와 관련된 환경에 처하게 되면, 일부 어휘들이 생각나게 된다. 사람은 기억이 있어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어떤 것들을 저장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너의 일상생활에서 네가 사용하기에 충분하고, 너에게 이로운 점이 좀 있다. 하지만 네가 일부러 그것을 사용해 억지로 규례에 맞추면 실수하기 쉽다. 너는 자신의 분량에 맞춰 자신이 체험한 상황에 따라 선택적으로 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빠르게 성장한다. 들을 줄 아는 사람은 많이 얻을 것이며,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적게 얻거나 어쩌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 중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고, 진리와 관련된 것이 하나도 없으며, 어째서 진리를 말하지 않고 하루 종일 일상적인 이야기와 옳고 그름을 따지기만 하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는 내가 설교할 때 이러한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니 그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별다른 일이 없을 때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네가 알고 있는 옳고 그름이 어쩌면 내가 말하는 이 이야기들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말하는 것이 진리와 관련이 있겠느냐? (관련이 없습니다.) 진리와 관련이 없으면 함부로 말하지 마라. 이야기했다 하면 겉면의 일로 이야기가 샌다. 내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니 너희가 함부로 모방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진리를 구하고 깨달아 원칙에 따라 일을 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말이나 행동이 모두 진리 원칙에 부합하도록 중시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서서히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된다.

3.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어떻게 위협하는지 해부하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고 회유하는 두 가지 모습에 대한 교제를 마쳤으니 이제 적그리스도가 어떻게 사람을 위협하는지에 대해 교제하겠다. 적그리스도의 이러한 수단들은 점점 더 심각해진다. 미혹이나 회유와 비교했을 때, 위협은 그 수단이 더 교묘해졌느냐, 아니면 더 졸렬해졌느냐? (졸렬해졌습니다.) 미혹과 회유가 통하지 않으면, 위협을 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위협하겠느냐? 왜 위협이라는 수단을 쓰려고 하겠느냐? (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목적을 이루지 못해서이다. 위협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느냐? (‘본색을 드러내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다른 표현을 생각해 보아라. (‘부끄러운 나머지 분노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미가 좀 비슷하기는 하지만,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겠느냐? (‘노발대발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맞다. ‘노발대발하다’이다. 쉬운 말로 ‘눈에 쌍심지를 켠다’라고도 하는데, 이런 뜻이다. ‘내가 좋게도 얘기하고 나쁘게도 얘기하고, 평소에 너희에게 섭섭하게 대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내 말을 듣지 않는 거지? 그렇다면 본때를 보여 주겠어. 위협이라는 수단을 써야겠군!’ 또다시 수법을 바꾸는 것이다. 사탄은 많은 수법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모두 비열한 수법이다. 보통 위협은 ‘이익을 내세운 유혹’과 연결되어 있다. 만약 그가 단순히 위협만 한다면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그가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때로는 이익을 내세워 유혹해야 한다. 이렇게 해도 안 되면 저렇게도 해보며, 당근과 채찍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어째서 사람을 위협하려는 것이냐? 어떤 상황에서 사람을 위협할 수 있겠느냐? 만약 두 사람이 서로 무탈하게 잘 지내고, 각자의 길을 가며, 두 사람 사이에 이익 충돌이 없다면, 그가 위협을 하겠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 위협이라는 행위와 행동 방식이 생기는 것이겠느냐? 당연히 그의 이익이나 명성과 관련되고, 자신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는 독한 방법을 쓴다. ‘내 말을 안 듣는다는 거지? 그렇다면 그 결과를 보여 주겠어.’라는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이겠느냐? 네가 무엇을 두려워하면, 바로 그런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너희가 본 위협하는 사례로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어떤 적그리스도는 형제자매가 그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리더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로 사람을 위협합니다.) (또 다른 사례가 생각났습니다. 누가 리더의 말을 듣지 않으면, 리더가 수중의 권력을 이용해 그를 교체합니다.) 어쨌든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한다. 그렇다면 그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듣게 하는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늘 “리더에게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리더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이니 반드시 순종해야 해요. 리더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리더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는 바로 도태되는 것으로, 가벼운 경우에는 반성하게 격리되지만, 심한 경우에는 교회에서 출교됩니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럴듯하지만 황당한 논리로 그에게 순종하라고 강요한다. 또 다른 적그리스도들은 어떻게 사람을 위협하겠느냐? 다른 사람을 교사해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버리게 한다. 또한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교체하거나 그 사람의 본분을 조정한다. 어떤 사람들은 진짜로 이행할 본분이 없을까 두려워한다. 그들은 본분을 이행해야 구원받을 기회가 있으며,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적그리스도는 마음속으로 ‘난 너의 약점을 알아.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본분을 이행할 권리를 박탈해 네가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게 하겠어!’라고 생각한다. 그가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 이는 그 사람의 본분 이행이 불합격이거나 하나님 집 이익에 손해를 끼쳤기 때문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런 것이겠느냐? 바로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위협해 자신의 말을 따르도록 하기 위함이다. 위협은 결코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을 대하거나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갈, 협박, 강요를 통해 사람들이 순순히 그에게 순종하고 그의 말을 따르게 하며, 말썽을 일으켜 그의 일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그에게 불복하거나, 그를 중시하지 않거나, 그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이는 단지 그중의 일부 원인일 뿐이다. 또 다른 측면의 원인은 바로 다른 사람이 그가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해 폭로하려 하거나 상부에 보고하려 할 때 상부가 알게 될까 봐,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될까 봐 어떻게든 이 일을 은폐하고 억눌러 절대 그 일이 폭로되지 않도록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들은 그를 버리고 저주할 것이며,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숭배하지 않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의 지위와 권력은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적그리스도가 위협이라는 이런 방식으로 일을 하는 목적은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에 대해 분별을 갖게 된 형제자매들이 다음 선거에서 그를 뽑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자신은 평범한 신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신자가 된다는 것이 그에게는 어떤 의미이겠느냐? 그가 권력을 잃고, 아무도 그를 따르며 그의 추종자가 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의 지위와 권력이 모두 박탈되고, 야심과 욕망이 충족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평범한 신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평범한 따르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위협이라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겁주고 협박해서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 순종하도록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계속해서 권력과 지위를 갖고 사람을 통제하며 일부 사람들의 옹호를 받으려고 한다. 적그리스도가 하는 모든 일은 지위를 중심에 둔다. 자신의 지위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는 방식이나 수단을 써 필사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보호하고 지킨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상부에서 그에게 어떤 일들에 대해 물어볼 때에도 그는 여전히 눈을 똑바로 뜨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상부에서 그에게 이번 달 교회에서 복음을 전해 몇 명을 얻었느냐고 물어보면, 분명 한 명도 얻지 못했으면서도 다섯 명을 얻었다고 말한다. 사정을 아는 형제자매가 “그 다섯 명도 그저 알아보는 중인데, 어째서 다섯 명을 얻었다고 말하나요? 상부에 사실대로 말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적그리스도는 뭐라고 하겠느냐? “왜 다섯 명을 얻은 게 아닌가요? 내가 다섯 명이라면 다섯 명인 거고, 당신이 말해 봤자 소용없어요. 한 명도 못 얻었다면 어떻게 상부에 설명합니까? 보고할 테면 하세요. 하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상부에서 당신을 책망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당신 같은 사람들을 모두 교체시킬지도 몰라요. 또 어쩌면 복음팀이 없어져서 당신은 본분을 이행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죠. 그 일로 저를 원망하지 마세요.” 그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얼이 빠져서 감히 보고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위협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적나라한 위협이며, 이렇게 공개적으로 위협한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정직한 사람이 되면 뒤탈이 있구나. 정직한 사람이 되면 이행할 본분이 없어지니, 상부에는 보고하지 말아야지. 꼭 다섯 명이라고 얘기해야 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불안해하며 “우리가 사람을 얻지 못한 건 얻지 못한 거지요. 상부에서 어떻게 처리하든 순종해야 해요.”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적그리스도는 어떤 관점을 보이겠느냐? ‘순종이라고? 그것도 상황 봐 가면서 해야지. 지금 복음 전파가 얼마나 어려운지 상부에서 알기나 해? 상부에서 신경이나 쓰나?’라는 것이다. 상부에서 복음 전파 상황을 묻는 것은 복음 전파의 어려움을 몰라서가 아니다. 매달 최소 몇 명의 사람을 얻을 수 있는지 상부에서는 알고 있으며, 한 달 동안 사람을 얻지 못하면 복음팀을 해산시킨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의 이런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겠느냐? (지어낸 것입니다.) 그 자신이 지어낸 것이다. 자신의 거짓말을 둘러대기 위해, 그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의 거짓말을 상부와 형제자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여 교체되지 않기 위해 그는 이렇게 마귀적인 말을 지어낸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그를 폭로할 수 있지만,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이런 말을 듣고 미혹되어 ‘맞아. 본분이 오는 것도 쉽지 않으니, 상부에 사실을 말하면 안 돼. 다섯 명이라고 하면 다섯 명이라고 하지 뭐. 이번 달에 다섯 명을 못 얻었어도 다음 달에 노력하지 뭐. 어쨌든 다음 달에 얻으면 거짓말은 아닌 거야.’라고 생각한다. 적그리스도가 속인다고 그도 따라서 속이다니, 이는 사기꾼 무리이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위협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들이 그에게 순종하고 그의 말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악을 행하고, 교회를 통제하며, 사람을 미혹하고, 원칙과 사역지침에 따라 사역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제멋대로 나쁜 짓을 저질러도 형제자매가 폭로하거나 상부에 보고하지 못하게 한다. 누군가가 상부에 보고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위협한다. 어떻게 위협하겠느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래에서 하는 사역은 난이도도 높고 큰 붉은 용에게 잡힐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데, 상부는 늘 사역지침에 따라 실행하라고 요구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고 위험을 감수하는데요! 성과가 안 좋은데도 상부에 보고하려 하다니, 보고하면 상부에서 당신을 책망할 겁니다. 그러고 나면 리더인 제가 교체되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여러분이 이행할 본분이 없어질까 봐 두렵습니다. 여러분이 이행할 본분이 없어져도 저를 탓하지 마세요!” 이 얼마나 그럴듯한 말이냐! 그는 또 말한다. “대체 누가 보고하려고 하는 겁니까? 여러분이 보고하고 싶다면, 막지는 않겠습니다. 어쨌든 다들 이 일들을 알고 있으니까요. 상부에 말하지 않으면 상부에서는 탓하지 않아요. 하지만 상부에 말하면 우리가 책망을 받을 겁니다. 여러분이 선택하세요. 보고하고 싶으면 하세요. 지금도 보고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어 보세요.” 사람들은 그의 말투를 듣고는 ‘대체 보고를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라며 고민에 빠진다.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어떤 사람이 손을 든다. 적그리스도는 이것을 보고 생각한다. ‘그래도 보고하겠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 아냐? 알았어. 기억해 두지.’ 그 후, 그는 이 사람을 괴롭힐 기회를 찾는다. 그는 핑계를 대며 말한다. “요즘 당신의 본분 이행이 영 성과가 없어요. 본분을 이행한 지 3개월이 되었는데도 성과가 없으면, 본분 이행 권리를 박탈합니다. 만약 태도가 계속 안 좋으면 격리하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제명하고 출교시킬 겁니다!” 이러면 네가 감히 보고할 수 있겠느냐? 멍청이, 못난 인간은 이 말을 듣고는 ‘날 위해서 보고하는 것도 아닌데, 보고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보고하고 나서 리더에게 공격과 보복을 당하고 형제자매도 나를 저버린다면, 교회에서 고립될 거야. 아무래도 리더의 말을 듣는 게 낫겠어.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도 모르겠고, 그분이 내 생사를 신경이나 쓰시겠어?’라고 생각해 보고하지 않는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위협에 겁을 먹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죄짓는 건 상관없어. 하나님께는 사랑, 긍휼, 관용, 인내가 있어서 쉽게 노를 발하시거나 저주와 징벌을 내리시지 않아. 하지만 리더에게 밉보이면 고생길이 훤하지. 문제를 보고해도 좋을 것도 없고, 오히려 모두에게 버림받을 수도 있어. 난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한다. 이는 줏대가 없는 사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줏대 없는 사람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느냐? 불쌍하게 여길 가치가 있겠느냐? 이런 줏대 없는 사람은 사탄과 적그리스도에게 넘겨 적그리스도에게 혼이 좀 나 봐야 한다. 그는 이렇게 당해도 싸다! 그는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는 믿음이 없으며, 의지와 의욕도 없다. 하지만 적그리스도에게 순종할 때는 기운이 넘쳐 시키는 대로 하며 의욕이 넘친다. 적그리스도가 위협하고 겁을 주면, 그는 문제를 감히 보고하지도 못한다. 이는 못난 자가 아니냐? 쉬운 말로 뭐라고 하겠느냐? 겁쟁이다. 적그리스도만 만나면 겁을 먹는다. 교회에는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위협하기만 하면 겁쟁이가 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라는 이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적그리스도가 그를 위협하고, 버리고, 격리하면, 그는 의지할 데가 없다고 느낀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도 믿지 않으며,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 적그리스도가 겁주고 협박하는 말 몇 마디만 하면, 그는 겁을 집어먹고 굴복하고, 감히 보고하지도 못한다.

적그리스도가 상부에 사역을 보고할 때 전혀 거리낌 없이 거짓말하고 속이면, 실제 상황을 아는 사람들이 이를 듣다못해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려고 한다.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엄하게 통제하고 늘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누가 상부에 문제를 보고하려는 기미만 보여도 단번에 알아차린다. 그는 심심하면 집중적으로 말과 표정을 살피며 사람을 관찰한다. 누가 그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그에게 딴마음을 품고 있는지, 누가 그에게 불복하는지, 누가 그의 지위에 위협이 되는지, 누가 그를 본체만체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자리에 앉을 때도 상석을 양보하지 않고 식사 때도 먼저 먹도록 양보해 주지 않는지 등을 살핀다. 이러면 골치가 아파진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겠느냐? 일부 음험한 적그리스도는 우선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있다가 기회를 잡아 너를 처리한다. 정 안 되면 모진 말로 너를 위협해 너의 목숨이 그의 손안에 있으며, 네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을지, 끝까지 갈 수 있을지, 교회에 있을 수 있는지가 모두 그의 손에 달려 있고, 그의 말 한 마디에 달려 있고 그가 결정할 수 있다고 느끼게 한다. 네가 만약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의 통제에 복종하지 않으며,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게다가 늘 그의 문제를 보고하려고 한다면, 봉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는 너를 괴롭힐 궁리를 할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형제자매가 상부에 자신의 문제를 보고하는 이런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고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그는 그것을 상황을 보고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고자질이라고 생각한다. 고자질이란 무엇이겠느냐? 바로 그가 저지른 각종 진리를 위배한 짓과 악행을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고, 또는 그가 남몰래 저지른 일을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다. 그는 바로 이것을 고자질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고자질한 것을 발견하면, 그는 바로 그 사람을 괴롭힐 것이다. 일부 어리석고 줏대가 없는 사람은 적그리스도의 이런 위협, 이런 기고만장하고 못된 분위기에 겁을 먹는다. 적그리스도가 누가 상부와 연락했는지 물으면, 그는 자기한테 물어본 것도 아닌데 성급하게 대답한다. “저는 안 했어요.” 적그리스도가 “그 일을 상부에서 어떻게 알게 된 거죠?”라고 물으면, 잠시 고민 후 “저도 모릅니다.”라고 답한다. 그는 적그리스도의 괴롭힘에 늘 마음 졸이고 겁에 질려 있다.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교회에서 출교시킬까 봐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만약 적그리스도의 이런 위협이 없었다면, 그가 이렇게 두려워하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밖에도 그는 하나님에게 참된 믿음을 지니고 있느냐? 참된 믿음이 없다. 이런 자는 줏대 없는 자, 어리석은 자이다. 적그리스도를 만나면 겁을 먹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에게는 참된 믿음이 없고, 적그리스도에게는 고분고분하게 복종한다. 타고난 사탄의 심부름꾼이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위협하는 행동 방식에는 또 어떤 것이 있겠느냐? 일부 적그리스도는 옳은 도리, 듣기 좋은 도리를 말하는 데 능숙해서 그것으로 너를 속박하고 옭아맨다. 그는 말한다. “당신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진리를 사랑한다면, 제 말을 들어야 해요. 제가 리더이니까요. 제 말은 모두 진리에 부합해요.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순종해야 합니다. 제가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서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딴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며, 다른 의견을 갖거나 함부로 참견해서도 안 됩니다. 제가 말하는 게 바로 진리예요.” 네가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는 마음속으로 너를 미워하거나 정죄한다. 뭐라고 정죄하겠느냐? 그는 “당신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진리를 사랑한다면, 제가 리더이고 제 말이 옳은데, 어째서 제 말을 듣지 않는 건가요?”라고 말한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옳은 이론과 도리로 너를 통제하고 제약한다. 또한 일부 적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사적인 일을 맡기며 이렇게 말한다. “제가 지금 리더를 하느라고 개인적인 일들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리더이니, 저의 일이 하나님 집의 일이기도 하고, 하나님 집의 일이 저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똑 부러지게 나눌 수 없으니, 저희 집 일을 여러분이 좀 분담해 주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를 돌보거나, 농사를 짓거나, 장보기, 집 짓기와 같은 일들, 그리고 집에 돈이 부족한 경우 등이죠. 원래 이런 일들은 저의 본분이지만, 제가 지금 리더를 맡고 있으니 이런 일들은 여러분의 본분입니다. 여러분이 분담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제가 늘 집안일을 걱정하느라 그것 때문에 마음이 분산될 텐데, 그러면 제대로 리더를 할 수 있겠습니까?” 갈수록 말하는 게 뻔뻔스럽다. 일부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도 ‘우리가 당신 마음을 헤아려 주지도 못했네요. 정말 무심했어요! 더 이상 말 안 해도 앞으로 당신 집의 일은 우리가 다 도맡겠습니다.’라고 생각한다. 적그리스도는 자기 가정의 사적인 일과 생활 관련 일들을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서 무엇으로 둔갑시켰느냐? 사람의 본분으로 둔갑시켰다. 그러니까 그는 남들이 그의 가정을 위해 힘을 들이는 것, 자기 집안의 노인과 아이,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생활을 돌보는 그런 일을 모두 하나님 집의 일로 둔갑시켰다. ‘하나님 집의 일이니, 모든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한다. 리더가 시키는 것이 바로 너의 본분이다.’ 얼핏 들으면 옳은 말 같지 않으냐?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다 옳다고 생각한다. 리더는 바빠서 가정일을 돌볼 틈이 없고, 자신은 자질이 부족해서 어떤 본분도 이행할 수 없으니 리더 대신 집안일을 좀 분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틈만 나면 리더의 집에 가서 안팎으로 바삐 움직이며 일을 한다. 이것을 본분을 이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느냐? 이는 그저 열정적으로 남을 돕는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만약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인데 그의 가정에 어려움이 있다면, 교회에서 사람을 배치해 도울 것이다. 이런 상황은 본분 이행에 해당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되지 않겠느냐? 적그리스도는 교회에서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느라 바빠서 자신의 집안일을 형제자매에게 시키면서 이 또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부 형제자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미혹되어 기꺼이 즐겁게 한다. 마지막에는 리더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기까지 한다. ‘리더가 우리를 위해 마음 졸이고 입이 닳도록 말했는데, 우리도 참 못났어요. 그렇게 많은 일을 했으면서 어째서 아직까지도 진리를 하나도 깨닫지 못하는 걸까요?’ 네가 하루 종일 리더를 위해 일을 하느라 예배를 드리지도 않고 설교를 듣지도 않는데,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이는 목숨 걸고 아첨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를 따라 잘못된 길을 걷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항상 옳은 주장을 이용하는데 그것을 포장하고 가공해서 옳은 말로 둔갑시킨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런 말들이 진리라고, 사람이 지키고 실행해야 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사람은 이런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오해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리더가 한 짓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 자신이 지키는 것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 분별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렇지 않으냐? 이런 것을 바로 미혹이라 하며, 위협이라고도 한다. 적그리스도는 이러한 옳은 이론과 주장으로 사람들을 통제한다. 어느 정도로 통제하겠느냐? 기꺼이 그를 대신해 힘을 들이고, 죽도록 일하며, 그를 대신해서 그의 모든 개인적인 일을 돌보게 된다. 자신이 예배를 드리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몫의 일을 내버려두더라도, 자신이 영 생활을 하거나 예배드리거나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시간을 모두 포기하더라도 적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시간을 전부 쏟아부어 봉사하고 죽도록 일하려 한다. 그들은 어째서 이렇게 죽도록 일할 수 있는 것이냐?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무슨 이유이겠느냐?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런 일들도 잘하지 못하는데, 무슨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어요? 본분도 이행하지 못하면 하나님 집의 일원일 수 있습니까? 그러면 저는 당신을 인도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인도하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님 집의 일원에 속하지 않습니다. 제가 리더로 선출된 이상 제가 바로 이 교회의 문입니다. 교회에 들어오고 싶은 사람은 저의 동의를 얻어야만 하고, 제가 동의하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누군가를 제명할 때도 제가 동의해야만 교회에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여러분에게 안배한 사역과 제가 여러분에게 맡긴 일들이 바로 여러분의 본분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을 기회가 없을 것이며, 하나님 집의 일원에 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위협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위협한 것이겠느냐? (옳은 말로 위협한 것입니다.) 이는 옳은 말과 진리에 부합하는 듯한 말로 사람을 위협한 것인데, 이를 ‘개념 바꿔치기’라고 한다. 적그리스도는 본분 이행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하지만 그 사람 개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겠느냐? 그는 자기 개인을 위해 일하는 것을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이라고 말하고는, 본분 이행의 원칙과 기준에 따라 형제자매에게 자신을 위해 죽도록 일하라고 요구한다. 또한 그를 위해 죽도록 일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기회가 없어진다고, 교회에서 제명되고 하나님 집에서 제거될 것이라고 위협한다. 우매하고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결과가 이렇게 심각하다는 말을 듣고는 서둘러 리더의 집안일과 생활 전반의 일을 도맡고, 일을 끝내면 마음이 편안함을 느낀다. 심지어 뿌듯해하며 이렇게 생각한다. ‘이번에는 본분을 제대로 이행했어. 게으름도 전혀 피우지 않고 리더의 마음까지 세심하게 헤아렸지. 리더가 시킨 일뿐만 아니라, 리더의 집안일도 도맡아 했어. 이런 게 바로 하나님을 헤아리는 거야! 리더가 만족했으니 하나님께서도 만족하실 거야. 이제 구원받을 희망이 생겼어!’ 이것이 희망이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의 노예가 된 것이 아니냐? 적그리스도에게 유괴된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여기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느냐? 브로커가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성품이 사악하며, 사악함은 당연히 간사함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따라서 그는 어떤 말과 이론으로 사람을 구속해야 자신의 은밀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 사람의 마음을 농락할 수 있는지, 사람의 행위와 생각을 통제할 수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는 이런 것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적그리스도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일을 해서 어떤 목적을 이루려 하는지는 모두 깊이 생각하고 오랫동안 계획한 것이지, 결코 무심코 던진 말이나 한 일로 예상 밖의 효과를 거둔 것이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봉사하고 죽도록 일할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의 이런 말에 미혹된 것일 뿐만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일종의 말에 위협받고 협박당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이 적그리스도를 위해 그런 일을 한 것은 기꺼이 원하는 마음에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기꺼이 원하는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따옴표를 붙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결코 진정한 본분 이행이 아니라, 어떤 이론, 옳고 듣기 좋으며 사람을 미혹하는 논조와 말에 미혹되어 생긴 결과이다. 본분을 이행하지 못할까 봐, 출교될까 봐, 또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적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맡긴 임무를 기꺼이 받아들여 놓고는, 하나님을 위해 본분을 이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으냐!

적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위협한 일을 통해 사람은 그의 진면목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너희도 이렇게 사람을 위협하겠느냐? 위협하는 것은 경고하고 일깨우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를 분별할 줄 아느냐? 그 차이는 무엇이겠느냐? 그 차이점을 찾아내면, 너희는 이해하고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출발점이 다릅니다.) 그 출발점과 의도에 분명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위협이란 무엇이겠느냐? 위협하는 것은 그가 하는 말이 아주 듣기 좋고 옳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크게 자극받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반면, 일깨우고 경고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는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고, 먼 길을 돌아가거나 편향된 길을 걷거나 미혹되지 않도록 해 주며, 손실을 줄여 주거나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으로, 개인의 이익이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것이다. 이런 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위협하는 모습을 교제했다고 해서 너희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경고해야 하는데도 감히 경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 경고해야 할 때는 해야 한다. 경고하고 일깨우는 것은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경고하는 것은 정말 다른 사람을 도와주어 본분을 잘 이행하게 하고, 하나님 집 사역이 손실을 보지 않게 하려는 것으로, 정당한 목적을 갖고 있다. 위협하는 목적은 정당하지 않고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자신의 야심과 사심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적그리스도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집 일을 시키는 경우, 그의 사심은 무엇이겠느냐? 지위가 주는 복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집안의 더럽고 힘든 일을 전부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게다가 세끼 식사도 다른 사람이 차려 주기를 원한다. 그는 이제 지위가 생겼으니 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그를 위해 일하라고 시키면 명분이 서지 않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이유를 만들어 낸다. “지금 제가 리더라 본분이 바쁘니 여러분이 부담과 인성이 있다면 협력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은 힘을 좀 들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 집 텃밭을 가꿀 사람이 없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도와준다면, 여러분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제 일을 돕는 것 또한 본분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의 리더이니 저의 일이 바로 여러분의 일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의 일이라면, 바로 여러분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면, 바로 여러분의 본분 아니겠습니까?” 그가 너에게 이런 부당한 책임을 뒤집어씌우면, 너는 리더의 말도 맞다고 생각하고는 그의 일을 해 준다. 이는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자신만의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전에 적당한 구실과 이론을 준비해 포석을 깐다. 그러고 나서 이런 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를 위해 일을 하면, 그는 목적을 달성하고 지위가 주는 복을 누리게 된다. 이는 교회에 얹혀사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 얹혀사는 것이다. 본인은 게을러 일하기 싫어하며, 육적인 편안함을 즐기고, 지위의 복을 누리며, 권모술수를 쓴다. 그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면 하나님 말씀과 자신이 이해한 도리 중에서 합리적이고 사람이 비교적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말들을 찾아내고는, 이런 말들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우매한 사람을 미혹하고 구속한다. 이로써 자신의 은밀한 목적을 이루고 남들이 기꺼이 자신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리더의 말을 듣지 않거나 리더가 시킨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이것을 곧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죄스럽다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너무나 어리석지 않으냐? 구역질이 날 정도로 어리석다.

적그리스도는 늘 위협적인 방식으로 말을 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지만 때로 적그리스도의 위협은 옳은 말과 부드러운 방식을 사용해 마치 뱀처럼 너를 휘감을 것이다. 너를 휘감고 나면 너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적그리스도에게는 또 다른 위협의 방식이 있다. 그것은 부드럽지 않으며, 딱딱하고 흉악하다. 마치 늑대가 양을 보고 흉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 의미는 남들에게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큰일 날 거야. 그 결과는 스스로 책임져야 해!’라고 알려 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위협하는 카드는 무엇이 있겠느냐? 사람의 종착지와 본분, 더 나아가 교회에서의 지위와 거취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위협한다. 물론 더 많은 방식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종류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때로는 듣기 좋은 말로 너를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직접적으로 강경하고 악독한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위협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첫째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듣게 하는 것이다. 그는 남들에게서 이익을 얻고, 지위가 주는 복을 누리고, 지위가 그에게 가져다주는 다양한 혜택과 즐거움을 누리려 한다. 또한,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아무도 그의 지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며, 사람이 어떤 일을 하든 그의 지위에 위협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들이 상부에 그의 상황을 보고하려 하거나, 누군가가 그를 분별하여 형제자매와 연합해 그를 버리고 파면시키려고 한다면, 그는 위협이라는 수단을 쓸 것이다. 이러한 위협의 목적은 지위가 가져다주는 많은 혜택을 누리기 위함이기도 하고, 또한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함이기도 하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위협하는 목적은 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으며, 그 중심에는 지위가 있다. 그의 다양한 이익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겠느냐? 이 또한 지위에서 비롯된다. 어떤 적그리스도가 “이 일을 제 말대로 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본인 책임입니다!”라고 했을 때, 그를 분별한 누군가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적그리스도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는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지위를 지킬 수 있는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는 온 힘을 다해 반항할 것이다. 지위에 대한 적그리스도의 열정은 보통 사람보다 강하다. 이 열정은 마치 늑대가 양을 발견한 것과 같은데, 잡아먹기도 전에 벌써 침을 흘리고 눈에는 흉악한 빛을 뿜으며 잡아먹을 생각만 한다. 바로 이런 욕망이다. 이는 본성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지위에 대한 욕망은 양에 대한 늑대의 욕망과 같다. 이는 그의 악독한 본성 내면에 존재하는 욕구이기에, 사람에 대한 위협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4.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어떻게 통제하는지 해부하다

사람을 통제하는 것, 이 또한 적그리스도가 일을 하는 수단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사람을 통제하겠느냐?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통제하는 수단은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는데, 너희는 본 적이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리더를 한 적은 없어도 사람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는데, 이런 사람이 바로 적그리스도 종자이다. 나이가 얼마나 되었든, 어떤 곳에서든, 어떤 일이든 그는 사람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밥을 먹거나 일을 할 때도, 각종 업무나 전문 분야에 관한 일에서도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듣기를 원하며, 그게 누구라도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교회에서 권력을 잡고자 하는 욕망은 아무리 통제하려 해도 통제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바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본분 내의 일이라 생각하며, 그것이 야심이고 욕망이며 패괴 성품임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사람을 통제하겠느냐? 예를 들어 보자. 리더로 선출되면 그는 첫날부터 ‘이 사람들은 식사하고, 일하고 쉬는 것조차 규칙적이지 않네. 할 일이 많구나. 리더인 나의 책임이 막중하고 짐이 무겁네!’라고 생각한다. 그는 방안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두세 페이지의 내용을 쓴다. 어떤 내용이겠느냐? 첫째는 식사와 관련된 것이다. 식사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양을 먹어야 한다. 아침은 6시 반, 점심은 12시 반, 저녁은 6시 반, 바로 이 정해진 시간에만 식사해야 하고, 이보다 더 빠르거나 늦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시간을 준수해야 한다. 비바람이 불어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식사할 수 없다. 그다음에는 일과 휴식 시간인데,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아침 6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데, 저녁에 아무리 늦게 잤어도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오후 1시에는 식후 휴식을 해야 하며, 저녁 10시 정각에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식사와 취침 시간을 정한 것 외에도 많은 세부 규정이 있다. 예를 들어, 식사는 반드시 지정 장소에서 해야 하며, 식사할 때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되고, 또 각자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등이다. 규정이 어찌나 세세한지,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 규정보다 훨씬 더 세세하다. 이러한 생활 속의 소소한 일들은 진리와는 관련이 없다. 일상생활과 식사가 규칙적이고 적절하며 건강에 나쁘지만 않다면, 이 원칙을 따르면 된다. 그렇게 세세하게 규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이렇게 세세하게 규정하겠느냐? 그는 말한다. “사람은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지만, 이러한 세부 사항이 없으면 방만하고 불규칙하게 생활해 사람다운 모습을 잃게 됩니다. 이제 제가 리더가 되었으니 여러분은 구제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흩어진 양이 아닙니다. 관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식주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규정한 후, 그는 또 너에게 ‘비밀’을 알려 준다. “이러한 구체적인 생활의 세부 사항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알면 안 되는 것은 아니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이러한 세부 사항들에 관련된 사역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 외에도 자기가 또 다른 각종 규정을 만든다. 마치 그것이 매우 세부적인 명문 규정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는 이것으로 진리를 대체하고, 사람을 인도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명문 규정을 배포한 후에는, 그의 이른바 규정들을 사람들에게 지키게 한다. 만약 누군가가 지키지도 따르지도 않거나 무시하고 위배하면 책망하며, 책망한 후에는 또 그에게 이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게 한다. 그가 이런 것들로 진리를 대체하고, 사람을 인도하니, 사람이 어떤 길로 가겠느냐? 사람은 규례와 의식만을 지키게 되고, 형식만을 따르게 된다. 이러한 인솔하에 사람은 관념으로 ‘외적인 규례와 형식을 잘 지키고, 기상 시간, 취침 시간, 식사 시간을 잘 지키면, 내가 진리를 실행한 것 아니겠어? 그럼 앞으로 구원받는 것 아니겠어?’라는 오해가 생기게 된다. 구원받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겠느냐? 진리를 얻는 것이 그렇게 쉽겠느냐? 진리가 사람의 행위에만 관련된 것이겠느냐? 아니다. 적그리스도는 사람의 성품 변화와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을 무엇으로 생각한 것이냐? 공공질서나 국가의 법률을 준수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런 각종 규례가 하나님 말씀보다 더 높고, 더 구체적이며, 더 실제적이라고 사람들이 오해하게 만든다. 실제로 그는 이런 것들로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여 사람의 행위를 철저히 통제한다. 그는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며, 사람이 진리 원칙에 따라 생활하고, 일하고, 본분을 이행하게 하지 않는다. 그는 인위적으로 각종 규례와 규정을 만들어 내어 사람들이 지키게 한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게 굴복하게 하고,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하고, 이런 각종 규칙을 실행하고 지켜 그의 인도에 복종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목적이 달성된다. 그는 사람의 행위를 구속하고 규범화함으로써 사람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다. 그가 일을 하는 출발점을 놓고 보면, 드러내놓고 지위를 얻고자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사람을 통제하는 결과를 얻게 되며, 사람은 온전히 그가 정한 각종 규례대로 생활하고 일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의 마음속에 진리의 자리가 있겠느냐? 없다. 적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네가 그와 함께 교회 생활을 하면, 그는 오늘은 너에게 이렇게 하라고 했다가 내일이 되면 저렇게 하라고 한다. 그는 전혀 진리 원칙을 교제할 줄 모르고, 오로지 규례만을 지키게 한다. 네가 지키기 힘들어도 지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너를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게 놔두지 않는다. 이것이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통제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통제할 때, 주로 무엇을 통제하겠느냐? (사람의 생각입니다.) 맞다. 주로 사람의 생각을 통제한다. 그는 단지 사람의 견해와 행동 방식만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리를 교제한다는 명분하에, 공허한 이론과 교묘한 궤변으로 너를 미혹하여 너의 생각을 통제하고 네가 그를 따르고 그가 정한 대로 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네가 그의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너는 마음속으로 마치 진리를 위배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죄스러움과 미안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 이미 통제된 것이다. 하지만 네가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죄스러움을 느끼겠느냐? 만약 그렇지 않다면, 너는 바로 양심과 인성이 없는 사람이다. 네가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오히려 적그리스도에게 순종하면서도, 마음이 전혀 불안하지 않으며,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에게 통제된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통제할 때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바로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고 있는 범위 내에서 오로지 그 혼자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가 없을 때는 아무도 감히 의견을 내거나 최종 결정을 하지 못한다. 그가 없으면 다른 사람들은 엄마가 없는 아이처럼 기도하고 구할 줄도 모르고, 또 다 같이 상의할 줄도 모른다. 마치 허수아비나 죽은 사람처럼 말이다. 적그리스도가 늘 어떤 말들로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분명 다양한 주장과 수단들이 있을 것이며, 그로 인한 결과 또한 미혹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보겠다. 몇몇 사람이 있는데, 자질이 평범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부족하지는 않고, 본분도 충성스럽게 이행하며, 거의 소극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적그리스도와 협력해 일정 기간 본분을 이행하면, 적그리스도를 의존하게 된다. 무슨 일이든 적그리스도의 말을 따르기 좋아하게 된다. 적그리스도가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 일단 이런 적그리스도를 떠나면 그들은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적그리스도가 없으면, 그들의 본분 이행은 제자리를 답보하고, 문제가 있어도 교제를 통해 결과를 도출해 내지 못한다. 그저 적그리스도가 와서 해결해 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사람들의 자질과 두뇌, 경험과 경력을 놓고 봤을 때, 적그리스도에게 통제되기 전에는 그들이 이런 일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에게 통제된 후, 일단 적그리스도를 떠나면 아무도 감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또한 아무도 일을 처리하도록 명확한 방안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이들의 생각은 마치 속박이라도 당한 듯 반 식물인간 같은 성질을 지닌다. 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을 통제한 적그리스도가 어떤 일을 했기 때문이겠느냐? 분명 명확한 주장과 말로 그들이 마음으로부터 따르게 했을 것이며, 또 분명 주장과 관점, 또는 행동 방식이 사람들의 동조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결코 진리 실제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들의 주장과 관점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이 역시 사람을 미혹하려는 것이며, 그들에게 진리 실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에게 감탄하는 것은 적그리스도가 확실히 어느 정도 은사와 재능이 있기 때문이지만, 결코 이런 것들이 사람에게 진리 실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적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진리가 없어 사람을 분별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를 숭배하고, 심지어 일부 영적인 유명 인사와 위인도 숭배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 또한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어느 날 그들이 적그리스도가 영적인 이론만 말할 줄 알 뿐 진리를 실행해 내지 못하며, 교회 사역을 수호하는 일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진정으로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진짜로 알아차리게 되면, 적그리스도를 버리고 증오하게 될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은사와 말재주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을 미혹하는데, 이런 사례는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보자. 네가 합리적인 건의를 하면, 다들 이 옳은 방안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교제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길이며, 본분에 충실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생각한다. ‘너의 그 방안을 왜 나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는 마음속 깊이 이 방안이 옳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의 본성에 따르면, 그는 절대로 너의 옳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반드시 온갖 방법을 마련해 너의 방안을 부정하고 다른 방안을 세울 것이다. 그리하여 네가 자신의 방안이 아무런 쓸모도 없다고, 역시 그의 방안이 좋다고, 역시 그를 떠날 수 없다고, 오직 그가 사역해야만 다들 자신의 역할을 발휘할 수 있다고, 그가 없으면 어떤 사역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사람이 그를 떠나면 쓸모없어져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든다. 적그리스도의 일 처리 수법은 항상 새롭고 특별한 것과 이상론을 내세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소용이 없으며, 그는 그것을 부정한다. 설령 다른 사람의 의견이 그의 생각과 일치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먼저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면 절대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며, 어떻게 해서든 깎아내리고 부정하고 정죄하는데, 의견을 제시한 사람이 자기 생각이 틀렸다고 느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만 그제서야 그만둔다.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은 스스로를 내세우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림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숭배하고 중심에 두게 한다. 그는 자기 혼자만 빛나고자 하고, 다른 사람은 그저 그의 들러리가 될 뿐이다.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은 전부 옳으며,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은 전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늘 새롭고도 기이한 관점을 내세워 다른 사람의 관점과 행동을 부정하며, 다른 사람의 의견에 트집을 잡고, 다른 사람이 제시한 방안을 교란하고 부정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그의 방법대로 움직이게 된다. 그는 이런 방식과 수법으로 끊임없이 너를 부정하고 공격하면서 네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네가 그에게 점점 더 복종하고, 점점 더 그를 우러러보고 앙모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너는 그에게 철저히 통제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제압하고 통제하는 과정이다.

적그리스도는 다양한 수단으로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한다. 그저 눈짓이나 몇 마디 말로 사람들이 그의 말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사람을 통제하든, 아니면 어떤 인사권, 재무권, 발언권과 같은 어떤 한 분야의 권력을 통제하든, 그는 각기 다른 수단을 사용한다. 이는 결코 어쩌다 한 번 하는 게 아니며, 남들이 그에게 감탄하고 그를 선출할 때까지 꾸준히 자신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면 권력이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그가 일정 기간 동안 경영해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는 또 다른 수단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속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어 남들이 그를 이해하게 하고, 더 많은 사람이 그가 하나님 집을 위해 했던 공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그는 “예전에 제가 복음 전파 방법을 좀 생각해 내서 복음 전파의 성과가 어느 정도 좋아졌습니다. 지금도 일부 교회들에서는 이런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사실 각지의 교회들은 많은 복음 전파 경험을 종합했는데, 적그리스도는 끊임없이 자신이 했던 올바른 결정과 공로를 뽐내고,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될 때까지 여러 곳에서 이를 알리고 강조하고 반복한다. 그의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자신의 이미지와 명망을 세우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동조하고, 그를 옹호하고 앙망하고, 일이 생길 때마다 그에게 도움을 청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러면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는 목적을 이룬 것 아니겠느냐? 대부분의 적그리스도는 모두 이렇게 하는데, 사람을 미혹하고, 구슬리고, 통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어디에 있는 교회이든, 어떤 무리이든, 어떤 사역 장소이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만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를 숭배하고 앙모하게 된다. 어려움에 부딪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누군가의 인도가 필요할 때, 특히 중요한 일을 결정해야 할 때, 많은 사람이 은사가 있는 적그리스도를 떠올리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그가 여기에 있으면 좋을 텐데. 그 사람만이 우리가 난관을 헤쳐 나갈 방도를 마련해 줄 수 있어. 그는 아이디어와 방법이 가장 많고, 경험이 가장 풍부해. 머리도 제일 잘 돌아가.’ 이들이 적그리스도를 이 정도로 숭배할 수 있는 것, 이는 적그리스도가 평소에 자기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연출한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만약 그가 말과 행동이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면, 일만 할 줄 아는 사람, 말수가 적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 절대 자신을 떠벌리거나 드러내지 않는 사람, 더 나아가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사람을 미혹해 그를 중시하고 앙망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째서 비교적 정직한 사람들, 진리를 실행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거의 리더 일꾼으로 선출되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바로 대부분의 사람이 진리 실제가 없고 또 분별에 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들 은사가 있고, 말주변이 좋으며, 자기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사람을 선호한다. 이런 사람을 특히 부러워하고, 이들에게 특히 동조하며, 이들과 함께하고자 한다.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사람이 숭배하고 앙망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어쨌든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통제하는 일련의 수단들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어 자신들의 지위와 사람들 마음속의 자신의 이미지를 경영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사람을 통제하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한다. 사람을 통제하는 목적이 달성되기 전,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지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겠느냐? 단순히 좋아하고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계획해 의도적으로 얻으려 한다. 그는 권력과 지위를 무척이나 중요시한다.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할 때 반드시 갖춰야 하는 조건이 지위이며, 지위만 있으면 모든 혜택을 저절로 누리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는 것은 심혈을 기울여 경영해 이루는 것이지 결코 어쩌다가 이 길을 걷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한 모든 일은 목적과 속셈이 있으며, 모두 오랫동안 계획한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얻어 사람을 통제하는 목적을 이루면, 그에게는 이것이 수확이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마음속으로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성과이다. 그는 속셈, 목적, 의도를 가지고 권력과 지위를 추구하며, 또한 심혈을 기울여 이를 경영한다. 그가 말하고 행동할 때 목적성과 의도성이 무척이나 강하며, 목표가 매우 분명하다. 예를 들어 보자. 그는 자신이 예전에 어떤 레벨의 리더 일꾼이었는지, 복음 전파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얻었는지, 어떤 주옥같은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했는지를 뽐낸다. 사람들에게 그의 이런 경험과 자본을 뽐내는 것이다. 이렇게 뽐낼 때, 그는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겠느냐? 그의 출발점은 무엇이겠느냐? 어떤 말들을 할지, 진실된 말과 거짓된 말을 어떻게 섞어서 이야기해야 할지, 그의 마음속에 계획이 있지 않겠느냐? 그는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하는 말은 모두 목적을 지니고 있지 결코 단지 몇 마디 말로 자신을 치켜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하는 말이 너에게는 무척이나 적절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며, 적정선을 매우 잘 지키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것을 보면, 그는 마음속으로 경계하며 그 사람 앞에서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그가 분별할까 봐 좀 얌전히 군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새 신자이거나 일반 신자라면, 그는 이런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를 고민한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모두 리더 일꾼이라면, 그는 리더 일꾼과 같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고민한다. 이런 사람들이 업무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는 외부적인 일에 있어서는 무척이나 영리하여 어떤 사람에게 어떤 말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으며, 이런 것들을 매우 분명히 구분한다. 즉, 적그리스도와 같은 부류의 사람은 행동할 때 모두 의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과 행동, 더 나아가 말할 때 어휘조차도 의도를 가지고 선택한 것이다. 그가 일시적으로 패괴를 표출하거나, 또는 분량이 작거나, 우매하고 무지해서 어디에서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의 수단, 일 처리 방식, 말할 때의 어휘 선택을 보면, 적그리스도와 같은 부류의 사람은 매우 기이하고 사악하다. 그들은 자신의 지위를 위해, 사람을 통제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회만 생기면 자신을 드러내며, 어떠한 틈도 놓치지 않고, 어떠한 기회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이 내 앞에서 이런 모습을 표출하겠느냐? (표출합니다.) 어째서 표출한다고 하는 것이냐? (그의 본성 본질이 바로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적그리스도가 그저 단순히 드러내는 것이겠느냐? 그는 무엇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겠느냐? 그는 지위를 얻으려는 것이며, 그 의미는 ‘넌 내가 누군지 모르지? 내가 예전에 한 일을 봐봐. 이런 좋은 일은 내가 한 거야. 하나님 집에 많은 공헌을 했지. 네가 알았으니 나한테 더 큰 사역을 맡겨야 하지 않겠어? 너도 나를 우러러봐야 하지 않을까? 네가 무슨 일을 하든 나를 의지해야 하지 않을까?’이다. 이는 목적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다 통제하려고 한다. 통제를 다른 말로 뭐라고 하겠느냐? 조종과 우롱이며, 너를 지배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형제자매가 모두 어떤 일을 잘했다고 칭찬하면, 적그리스도는 즉시 자기가 한 것이라고 말해 사람들이 자신에게 고마워하게 만든다. 정말로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겠느냐?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하면 늘 다른 사람들이 다 알고 자신을 우러러보고 칭찬하게 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 그는 만족한다. 적그리스도는 무슨 일을 하든 사람들의 칭찬과 숭배를 받고 싶어 해 이를 위해서 어떤 고난이라도 달게 받는다. 적그리스도는 지위와 권력을 위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는다. 설령 드러내는 것이 매우 어리석어 보이거나 수단이 서툴러 사람들의 경멸을 받을지라도 그는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는 사람을 통제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끊임없이 이를 위해 공을 들이고, 심혈을 기울이고 머리를 쥐어짜 계획을 세운다. 그는 자기가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하면 끊임없이 여기저기에 자랑하고 드러내지만, 다른 사람이 좋은 일을 하면 질투하고 미워한다. 게다가 생색을 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마련해 좋은 일은 자신이 한 것처럼 만들거나 자신도 한몫했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통제하는 수단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결코 일시적인 간사함이 아니며, 어쩌다가 한두 가지 일을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많은 일과 말을 한다. 그들의 말과 행동 방식은 미혹성이 있으며, 그들이 그런 말과 일을 하는 최종적인 목적은 바로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통제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의 마음속에서 권위와 지위를 갖기 위함이다. 권위와 지위가 생기면, 그들은 지위가 주는 복과 지위가 가져다주는 다양한 이익을 누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날씨가 더울 때 다른 사람은 에어컨이 없는 방에 살아도 그는 에어컨이 있는 방에 살 수 있으며, 식사할 때 다른 사람은 반찬 하나만으로 밥을 먹어도 그는 고기와 국을 추가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방에 들어가 앉을 자리가 없어 모두 바닥에 앉아야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의자는 그를 위해 남겨둬야 한다. 이런 특별 대우는 지위가 가져다주는 것이며, 그들은 이런 지위가 주는 복을 누리기를 좋아한다. 물론 이런 이익과 즐거움은 그들의 야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지위가 그들에게 가져다주는 이런 혜택뿐만 아니라, 지위가 그의 내면세계에 가져다주는 허영심, 만족감, 안전감도 필요로 한다.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고, 회유되고, 통제된 사람은 어떤 모습들을 보이겠느냐? 그들은 서로 지위와 권력, 은사와 능력을 비교하고, 또 가정 환경과 출신, 누가 꼼수가 더 많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지를 비교한다. 종교계에 있는 적그리스도들은 함께 있으면 누가 더 오래 기도하는지도 비교한다. 어떤 사람이 10분 기도하면, 다른 사람은 20분 기도하고, 예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하는데, 마치 불당에서 사람이 경을 외우는 것처럼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이런 기도를 하나님이 듣겠느냐? 그들의 기도를 보면 성령이 그들에게 역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누가 더 오래 기도하고 더 큰 소리로 기도해서 다른 사람을 압도할 수 있는지를 겨룬다. 이는 정신이 이상한 것 아니겠느냐? 그들이 하는 일은 이해할 수 없고 어처구니가 없다.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고 통제된 사람은 주로 이런 모습을 보인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인도하면 이런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네가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고 통제되면, 너는 그를 앙망하고 따르게 된다. 모든 일에 그의 말을 따르고,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으며, 하나님이 말씀해도 듣지 않게 된다. 네가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통제한다는 것은 바로 사탄이 사람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네가 사탄에게 통제되어 마음속에 사람의 지위와 사탄의 지위가 생기면,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 너를 버리게 된다. 너는 적그리스도를 따르기 좋아하지 않느냐? 그를 앙망하기를 좋아하지 않느냐? 그의 통제와 지배를 받기 좋아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너를 그에게 넘겨주겠다. 적그리스도가 무슨 말을 하든 너는 그것이 모두 진리라고 생각하면, 너는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따라가거라. 너를 그에게 넘겨주겠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네가 책임져야 한다. 어느 날 네가 구원받지 못해도 하나님을 찾거나 원망하지 마라. 이는 하나님과 무관하다. 이는 네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너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통제하는 이 방면의 모습에 대해서는 거의 다 교제하였다. 사람은 이제 통제란 무엇인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따르고 있고, 하나님의 설교를 듣고 있으며,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있고, 교회 생활을 하며, 본분도 이행하고 있고, 하나님 집을 떠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적그리스도에게 통제되었느냐? 가장 주된 원인은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먼저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었고, 그런 다음 적그리스도를 무척이나 숭배하게 되면서 적그리스도에게 통제된 것이다. 통제란 무엇이겠느냐? 바로 그에 의해 좌우되고 속박되는 것이다. 비록 네가 본분을 이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본분 이행 과정에서 진리 원칙을 구할 때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면, 적그리스도의 주장과 관점이 너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면 할수록 너는 그것이 옳고 진리에 부합한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면 너는 더 이상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게 되고, 너 자신조차 독립적인 사고를 하기 싫어하게 되며, 하나님 말씀에 따라 실행하지도 않게 된다. 너는 적그리스도의 관점이 전혀 틀리지 않다고 마음속으로 완전히 인정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네가 진짜로 하나님 말씀에 따라 실행할 때 오히려 마음이 불안하고 안심이 되지 않으며, 이렇게 하는 것이 적그리스도에게 미안한 짓이니 절대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주장과 관점에 완전히 속박된 것 아니겠느냐? 너는 일을 할 때 하나님 말씀에 따라 판단하고, 구하고, 지키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할 줄 모르고, 할 용기도 없다. 어째서 할 줄 모르고 할 용기도 없겠느냐? 적그리스도가 말하지 않았고, 그가 너에게 결정이나 결론을 내려 주지 않았으며, 결과를 알려 주지 않았고, 길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자신이 이해한 대로 하지 못하고, 길을 잘못 들까 봐, 실수를 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이것이 통제된 것 아니겠느냐? 너는 어째서 늘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이냐? 하나님 말씀이 명확하지 않단 말이냐? 하나님 말씀에서 네게 원칙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지 않았단 말이냐? 너는 어째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기어코 적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것이냐? 이러면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고 통제된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에게 벽을 쌓으라고 했다고 해 보자. 얼마나 높고 길게 쌓아야 하는지, 어디에 쌓아야 하는지를 모두 그에게 알려 주었다. 그런데 적그리스도가 와서 “이 벽이 이 정도 높이인 것은 괜찮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쌓으면, 바람이 불 때 쓰러지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면, 그는 “그렇네요. 쓰러지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았으니, 일단 쌓지 않을래요.”라고 한다. 내가 가서 보고 “왜 쌓지 않는 것이냐?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쌓지 않았다니, 이는 일을 지체하는 것 아니냐?”라고 하자, 그는 “어떤 사람이 바람이 불면 쓰러질까 걱정된다는 문제점을 제시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그에게 또 바람에 쓰러질까 걱정이 되면, 기둥으로 지지대를 만들면 된다고 하자, 그는 그 말을 기억해 두었다. 나중에 적그리스도가 또 그를 교란하러 와서 “기둥 하나로 되겠습니까? 두 개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하자, 그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를 사용하라고 하셨지, 두 개를 사용하라고는 하지 않으셨어.’라는 생각에 또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적그리스도에게 이렇게 미혹되고 교란된 후에는, 내가 앞에서 한 말들이 전부 소용이 없어졌고, 그는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적그리스도에게 통제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이 일을 할 때, 너는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너는 어째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느냐? 듣기 싫었느냐? 듣고 싶었지만, 네가 적그리스도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에 미혹된 것이다. 이렇게 미혹되어 네가 적그리스도에게 순종하게 되었는데, 이는 적그리스도에게 납치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너의 행위와 생각이 그에게 속박되고 결박되어 있다면, 그것은 통제된 것이다. 결국 너는 본분도 이행하지 못했고,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못했으며,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도 못했다. 이 결과는 누가 초래한 것이겠느냐? 너의 우매함이 만든 것이며, 또한 적그리스도의 미혹, 교란, 통제와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가 여기에 끼어든 것은 어떤 의미이겠느냐? 그는 자신의 뛰어남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하나님이 너에게 여기에 벽을 쌓으라고 하셨다고 무작정 따르는 거야? 네 생각은 어쩜 그렇게 단순해? 여기에 벽을 쌓으면, 바람이 불면 무너지지 않겠어? 네가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내 말을 따르는 게 더 정확하니, 넌 내 말을 들어야 해. 네가 내 말을 들으면 내 기분이 좋아지지만, 네가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내 기분이 나빠지고 언짢아져. 네가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큰일 나지, 그럼 나를 어떤 위치에 두는 거야?’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중간에 끼어들어 일부러 이렇게 훼방을 놓았다. 훼방 놓은 후 이 일이 성사되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그가 뛰어나 보이게 되었기에 그는 기뻐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벽을 쌓으라고 하였으면, 사람은 최대한 빨리 벽을 쌓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결과는 벽을 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누가 초래한 것이겠느냐?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 사람이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고, 교란되고, 통제된 것이다. 이는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이런 말씀은 진리 아니겠느냐? 진리이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네가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저 네가 그 말을 따르고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지, 분석해서는 안 된다. 비록 네가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정의를 마음속으로 알아야 한다. 즉, 이 진리를 네가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너의 관념에 부합하든 아니든, 네가 이해하든 못하든, 네가 아무리 어리석더라도 너는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너의 직책과 본분이다. 네가 이것을 확실히 하면, 사탄이 또다시 너를 유혹할 때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준칙이다. 사탄이 어떤 말을 하든 신경 쓰지 마라.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뱀의 말을 들었는데, 그 최종 결과는 무엇이었느냐? 사탄에게 미혹되고 통제되었다. 사탄은 그럴듯하고 모호한 마귀적인 말로 아담과 하와의 행위를 좌지우지하고 통제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보고자 했던 결과가 아니다. 뱀이 그 말을 한 목적은 무엇이었겠느냐? 바로 그 말을 통해 사람의 생각을 어지럽히고, 사람의 행위를 좌지우지하여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저버리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된 후에는 뱀이 가리킨 그 길을 따르게 되었다. 사탄의 목적은 무엇이었겠느냐? 바로 ‘하나님 말씀을 듣지 말고, 내 말을 들어야 해. 넌 이 열매를 먹어야 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먹지 말라는 것이었고, 사탄의 뜻은 먹으라는 것이었는데, 결국 아담과 하와는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 (먹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통제한 것이다. 네가 적그리스도의 마귀적인 말을 들으면 혼란스러워 뭐가 뭔지를 모르게 되고 방향을 잃게 되며,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너의 행위와 생각이 그에게 좌지우지되고 통제된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통제의 의미이다. 너희는 이런 상황에 부닥친 적이 있느냐? 일부 심사가 사나운 사람은 네가 어떤 일을 매우 순조롭게 잘해서 곧 성과가 나와 네가 돋보이게 될 때, 자신이 이 일에 참여할 수 없으며 네가 돋보이면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럴듯한 관점이나 문제를 제시해 너를 미혹하고, 교란하고, 통제한다. 결국 너는 얼떨결에 그의 말도 옳다고 생각해 어찌할 바를 몰라 본분도 이행하지 못하고 중단하게 된다. 어리석지 않으냐? 처음에 네가 미혹되지 않았을 때는 그래도 꽤 냉철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가 교란하자 흐리멍덩해져 어떻게 해야 적합한지 모르게 된다. 이는 무슨 문제이겠느냐? (미혹된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와 사탄에게 쉽게 미혹되고 통제되는 사람은 우매한 사람이자 어리석은 사람이다.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는 이런 모습에 대해 충분히 구체적으로 교제하지 않았느냐?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일이 닥쳤을 때 각각의 진리와 대조해 자신의 언행과 본질을 반성해야 한다. 또한 이와 동시에 주변에서 발생하는 사람, 일, 사물을 인식하고 분별하여 진리를 더 밝히 알고 다양한 부류 사람의 본성 본질을 더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지금 너희 중 대부분은 이제 막 각종 진리의 구체적인 내적 상태와 모습을 접했다. 어째서 이제 막 접했다고 하겠느냐? 바로 이제 막 세부 사항을 이해하기 시작해 진정한 진입과는 아직도 일정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해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진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이해했다는 것은 단지 네가 마음속으로 이런 일들에 대한 개념과 정의가 상대적으로 좀 더 정확해졌고, 진리에 좀 더 부합하게 되었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는 네 개인의 진입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네가 듣고 이해했다고 해서, 인식했다고 해서, 자신의 내적 상태와 결합할 수 있다고 해서, 또한 자기 주변의 사람, 일, 사물과 결합할 수 있다고 해서 네가 진입한 것은 아니다. 이는 완전 별개의 일이다. 사람이 구원받고 성품 변화에 이르는 것은 각 방면의 진리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 또한 각각의 진리를 실행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만약 너희가 각각의 진리에 대한 인식과 진입에서 어느 정도 기초가 있다면, 내가 너희에게 예를 들어 보라고 할 때, 너희는 즉시 자신의 모습, 또는 자신이 체험하고 본 일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교제하기 훨씬 더 수월해지고, 그렇게 자세하게 말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는 너희가 이미 체험했고,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너희에게 묻는다면, 너희는 현장에서 생각해야 하고, 당장 기억을 뒤져 찾아야 한다. 내가 보기에 너희는 이런 일들에 대해 알지 못하고 경험도 없으면, 내가 자세히 말해 줘야 한다. 이런 일들의 중심과 핵심적인 것들, 그리고 본질적인 문제를 모두 다 이야기해서 너희가 각종 진리의 세부 사항을 기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면, 실행할 때 개념과 정의에 관한 것을 혼동하지 않게 되며, 개념 바꿔치기를 하지 않게 되고, 또 너무 복잡하다고 느끼지도 않게 된다. 각 항목별로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면 나중에 교제하기 쉬워진다. 지금은 너희가 아직 닿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늘 자세히 얘기해야 한다. 우리가 예배에서 교제하는 이런 내용들을 너희는 얼마나 되새기고 소화할 수 있느냐? 만약 10%밖에 안 된다면, 너희는 분량이 전혀 없는 것이다. 30%라면, 약간 이해한 것뿐이고, 50%에 이른다면, 너희가 어느 정도의 분량을 갖추었으며, 어느 정도 진입한 것이다. 만약 이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진입이 거의 없는 것이다. 이해하였느냐? 내가 이렇게 너희에게 교제해 주는데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질이 너무 부족하여 진리를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자, 오늘 교제는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다. 다음에 보도록 하자!

2019년 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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