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조 일 처리가 기이하고,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남들과 교제하는 법이 없고, 남들에게 순종을 강요한다
참고 다밍과 샤오밍 이야기
본 주제를 교제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떤 장점이 있겠느냐? (기억하기 쉽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억하기 쉬운 이야기를 몇 개나 이야기하였느냐? (다바오와 샤오바오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바오와 샤오바오의 이야기>는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이다. (<포서기(捕鼠記)>와 여성 리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적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겠느냐? 사실 좀 가볍고, 단순하며, 이해하기 쉬운 형식을 빌려 사람이 깨달아야 하는 진리들을 교제하는 것이다. 만약 너희가 내가 한 이야기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너희가 각 방면에 진입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이 이야기를 한 것이 헛된 것은 아니다. 이는 너희가 정말로 이 이야기와 관련된 진리를 깨달았음을 의미한다. 그저 이야기로만 듣지 않고 이 방면 진리의 실제적인 면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우리는 다바오와 샤오바오의 이야기를 하였다. 오늘 우리는 다밍과 샤오밍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너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이야기가 너희에게 깨닫게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방면의 진리와 관련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다밍과 샤오밍은 부자지간이다. 얼마 전, 다밍이 아들 샤오밍을 데리고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였다. 이는 좋은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좋은 일이다. 샤오밍이 어리고 아는 글자가 많지 않아, 다밍은 매일 샤오밍을 데리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었으며, 샤오밍이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해 주었다. 얼마 후, 샤오밍은 처신의 도리를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전혀 접해 보지 못했던 ‘순종’, ‘믿음’, ‘정직’, ‘간사함’ 등과 같은 어휘들도 이해하게 되었다. 다밍은 아들의 성장을 보고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밍은 샤오밍에게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읽어 줘도 샤오밍의 행위나 말에서 큰 성장이 없음을 발견했다. 다밍은 마음이 조급해졌고 부담을 느껴 ‘어떻게 하면 아들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좀 깨닫고 변하게 할 수 있으며, 남들이 인정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착한 아이라고 칭찬하고, 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역시 좋다고 칭찬하게 할 수 있을까? 이와 동시에 아이의 변화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라고 생각했다. 이런 부담을 갖게 되자, 다밍은 마음속으로 계속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샤오밍을 잘 교육해 샤오밍이 처신의 도리를 더 많이 이해하고 더 좋은 모습을 보여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할 수 있을까? 최종적으로, 샤오밍이 착한 아이가 되어 사람들이 모두 샤오밍을 칭찬할 때,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 그때가 되면 내 마음속 큰 짐을 내려놓을 수 있어.’ 다밍이 갖게 된 이런 부담에 대해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합당하냐? 본연의 일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출발점은 옳고, 합당하다고도 할 수 있으며, 본연의 일에 충실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밍이 샤오밍을 위해 선택한 길은 올바른 길이겠느냐, 아니면 잘못된 길이겠느냐? 좋은 것이겠느냐, 안 좋은 것이겠느냐? 계속해서 살펴보겠다. 다밍은 항상 이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고 기도하여 결국 어느 날 ‘영감’이 생겼다. 어떤 ‘영감’이겠느냐? 이른바 따옴표가 붙은 ‘영감’이다. 이 ‘영감’에 따옴표가 붙었으니, 그렇다면 다밍이 가리키는 길은 어떻겠느냐? 너희는 이야기의 다음 부분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 상상할 수 있겠느냐? 잘 모르겠지 않느냐? 약간 미지수이다.
어느 날, 다밍이 아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준 후, 매우 엄숙하게 샤오밍에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은지 안 좋은지 묻자, 샤오밍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아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들 남을 괴롭히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면 재난을 당하지 않으며, 천국에도 갈 수 있고, 죽은 후에도 지옥에 가지 않아요.” 샤오밍의 말이 맞느냐? 아이의 어린 마음에, 샤오밍이 이 정도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훌륭하다.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한 샤오밍의 인식은 매우 간단하고,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얕지만, 샤오밍의 입장에서는 이미 매우 심오한 것이다. 다밍은 이를 듣고 매우 기뻐했으며 위안도 받았다. “잘했어. 샤오밍이 수확을 얻었구나. 보아하니 하나님을 믿는 기초가 조금 생겼네. 아빠는 아주 기쁘고 위안도 받았단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렇게 간단한 것일까?” 샤오밍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말씀에서 말씀한 것이 이런 것들 아닌가요? 또 뭐가 있나요?” 아빠는 바로 이어서 말했다. “하나님의 요구는 이것들만이 아니란다. 네가 하나님을 이렇게 오랫동안 믿었는데, 형제자매가 와도 인사할 줄도 모르는구나. 앞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만나면 할아버지나 할머니라고 부르고, 젊은 사람을 만나면 삼촌이나 이모, 또는 형이나 누나라고 불러야 해. 이렇게 하면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아이가 될 거야.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아이여야 하나님께서도 사랑하신단다. 앞으로 내 말을 듣고, 내 말대로 하렴. 내가 부르라는 대로 그대로 부르는 거야.” 샤오밍은 아빠의 말을 마음에 새겼다. 아빠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어린 마음에 아빠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하나님 말씀도 자기보다 많이 읽었고, 아는 것도 자기보다 많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아빠는 자기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니, 분명 자기에게 잘못된 길을 가르쳐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아빠가 말한 것은 분명 옳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샤오밍은 진리란 무엇인지, 도리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은 알고 있었다. 아빠가 말을 마친 후, 샤오밍 마음속에도 이 일에 대한 부담이 조금 생겼다. 그 후, 샤오밍은 매번 아빠와 외출할 때마다 사람을 만났을 때 아빠가 이모라고 부르라고 하면 “이모, 안녕하세요.”,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하면 “안녕하세요, 삼촌.”이라고 인사했다. 사람들이 다들 샤오밍을 착한 아이이고 예의 바르다고 칭찬했으며, 이와 동시에 또 다밍이 아이 교육을 잘한다고 칭찬했다. 샤오밍은 매우 기뻐하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아빠가 가르쳐 준 게 정말 맞아. 다들 날 좋아해.’ 샤오밍은 매우 흐뭇했고 자부심을 느꼈으며, 아빠가 알려 준 길이 정말 좋고 옳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샤오밍이 학교에서 막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빠에게 달려가 말했다. “아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옆집 장 노인이 이만큼 큰 물고기를 낚았는데…” 샤오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빠가 말했다. “샤오밍, ‘장 노인’이라니, 네가 그렇게 부르면 되겠니? 그러고도 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 어떻게 ‘장 노인’이라고 부를 수 있어? 너한테 한 말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니, 아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구나. 너는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니야. 봐봐,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널 도와주고 일깨워 줄게. ‘장 씨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해. 기억했니?” 샤오밍은 생각을 좀 하다가 “‘장 씨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괜찮아요.”라고 하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옆집 장 씨 할아버지께서 이만큼 큰 물고기를 낚으셔서 장 노파가 무척 기뻐했어요!” “너 또 잊었구나? 너도 참…… 아직도 철이 없네. 방금 너한테 말했잖아. ‘장 노인’이 아니라 ‘장 씨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이야. 그렇다면 장 씨 할아버지의 아내는 같은 항렬이니까 뭐라고 불러야 할까? ‘장 씨 할머니’라고 불러야 해. 앞으로 잘 기억해 둬. 다시는 장 노인이나 장 노파라고 불러서는 안 돼. 남들이 들으면 웃음거리가 될 거야.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 얼굴에 먹칠하는 것 아니겠니? 우리가 예의범절이 없다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지 않다고 사람들이 흉볼 거야. 이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란다.” 원래 샤오밍은 신나서 아빠에게 장 노인이 큰 물고기를 잡았다고 이야기하려 했는데, 결국에는 아빠에게 이렇게 혼나 흥미가 완전히 사라졌고, 말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책가방을 메고는 고개를 돌려 가버렸고, 걸어가면서 중얼거렸다. “아빠만 뭐든 다 알지 뭐. 장 씨 할아버지, 장 씨 할머니라니. 우리랑 무슨 관계라고? 아빠만 영적이지 뭐!” 다밍이 말했다. “내가 영적인 것은 맞잖아! 보통 사람이 나이가 어느 정도이든, 난 그 사람의 나이만 보고도 연배를 알고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아. 나는 나이가 많은 사람은 전부 ‘삼촌, 이모’라고 부르는데, 넌 어째서 호칭조차 부르지 않는 거니?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이런 걸 잊어선 안 돼. 위아래를 몰라서는 안 된다.” 샤오밍은 꾸중을 듣고 기분이 언짢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아빠가 옳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하는 건 모두 옳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잘못을 인정했다. 그 이후로 샤오밍은 장 노인 부부를 만날 때면 장 씨 할아버지, 장 씨 할머니라고 불렀다. 샤오밍은 아빠가 가르치고 주입한 이러한 것들을 마음속 깊이 새겨 두었다. 이것이 좋은 일이겠느냐, 나쁜 일이겠느냐? 지금까지는 그래도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으냐?
어느 날, 샤오밍은 아빠와 산책을 하다가 늙은 암퇘지 한 마리가 새끼 돼지들을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미와 새끼의 관계가 무척이나 가까워 보였다. 샤오밍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들은 모두 좋고, 돼지든 개든 모성애가 있으며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오밍은 이번에는 경솔하고 예의 없이 ‘늙은 암퇘지’라고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실수하면 아빠가 화를 낼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샤오밍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 이 어미 돼지는 나이가 얼마나 됐어요? 새끼를 이렇게나 많이 낳았는데 제가 이 돼지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다밍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뭐라고 불러야 할까? 참 말하기 어렵구나.” 아빠가 한참을 고민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샤오밍은 아빠를 원망했다. “하나님 말씀 많이 읽으셨잖아요?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데, 어째서 이것도 모르시나요?” 아빠는 샤오밍의 말에 조급해져 “외할머니라고 부르던지.”라고 말했다. 샤오밍이 부르기도 전에 다밍은 약간 생각하더니 또 말했다.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안 돼. 외할머니라고 하면 네 외할머니와 같은 항렬이 되는 거잖아? ‘돼지 할머니’는 더 안 돼. 그러면 우리 어머니와 같은 항렬이 되니까. 이렇게나 많은 새끼를 낳았으니, 돼지의 신분과 지위에 걸맞고 항렬도 맞게 ‘돼지 아주머니’라고 불러야 해.” 샤오밍은 이 말을 듣고 돼지에게 공손히 허리 굽혀 인사하며 “돼지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늙은 암퇘지는 깜짝 놀랐고, 놀란 돼지들은 모두 뛰어 달아났다. 샤오밍은 이를 보고 잘못 부른 게 아닌지 의심했지만, 다밍은 “돼지는 분명 기쁘고 흥분해서 그런 거야. 앞으로 이런 일이 닥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든 상관하지 말고, 이렇게 해야 해. 예의범절이 있는 사람은 돼지도 좋아한단다.”라고 했다. 이 일을 통해 샤오밍은 또 하나를 배웠다. 무엇을 배웠겠느냐? 그는 말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만물이 서로 존중하고, 예의와 항렬을 차리고, 어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면, 만물이 모두 조화롭게 지낼 수 있어요.” 샤오밍은 이 도리를 이해했다. 아빠는 이 말을 듣고 샤오밍에게 가르친 보람이 있다고 칭찬했다. 그때 이후로, 샤오밍은 더욱더 매너를 지키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어디에서나 단정하고 예의 발랐기에 특별해 보였다. 이것이 ‘착한 아이’ 아니겠느냐? 따옴표가 붙은 ‘착한 아이’ 말이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이 이야기는 어떠하냐? 꽤나 우습지 않으냐? 이 이야기는 어디서 나왔겠느냐? 현실 생활 속 사람의 말과 행동, 사상과 관점에서 추출해 이렇게 작은 이야기로 압축해 낸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떤 문제를 말하느냐? 이야기 속에서 너희는 다밍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발견하였느냐? 샤오밍에게 있는 문제는 무엇이냐? 다밍에게 있는 문제의 본질은 또 무엇이냐? 우선, 너희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다밍이 도출해 내고 행한 것들이 조금이라도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실행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관념과 상상입니다.) 그의 그 관념과 상상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전통문화에서 온 것입니다.) 그 근원은 전통문화이다. 그것은 전통문화에 전염되고 물들고 교육받은 산물이다. 그는 전통문화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고 긍정적이며 정수라고 여기는 것들을 가져와 포장한 후 자기가 생각하는 ‘진리’로 둔갑시켜 아들에게 실행하게 했다. 이 이야기는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편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이야기 속에서 깨달은 것과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해 보아라.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저는 다밍의 문제는 바로 그가 하나님을 믿지만 한 번도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이지 않은 점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사람의 전통 관념에 따라 하나님을 믿으면서 겉면의 그런 것들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거라고 생각하고는 하나님 말씀 속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사람이 어떻게 정상 인성을 살아내야 하는지를 찾거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밍은 무엇으로 살고 있느냐? (관념과 상상입니다.) 관념과 상상에 의지한다는 것, 이는 공허한 말이다. 사실 그는 전통문화로 살고 있으며, 전통문화를 진리로 삼은 것이다. 그가 전통문화로 살고 있는 것에는 어떤 구체적인 내용이 있느냐? 그가 왜 샤오밍에게 그런 호칭을 사용하라고 요구했겠느냐? (그는 겉으로는 그런 좋은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고 아이 교육을 잘 시킨다는 칭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맞다. 이것이 그의 의도이다. 그는 아이를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깨닫게 하지 않았으며, 아이가 그의 체면을 세워 주는 일을 하여 그의 개인적인 허영심을 만족시키게 했다. 이 또한 한 가지 측면의 문제이다. 늘 행위적인 면에서 자신을 꾸미고 포장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문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그 사람이 걷는 길에 문제가 있으며, 이 문제는 가장 심각한 것이다. 늘 행위를 포장하는 데 집중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남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하고, 받들며 칭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어떤 성질이겠느냐? 이는 외식하는 것으로, 바리새인의 행동 방식이다. 표면적으로 좋은 행위를 보이는 것과 자신의 행위를 포장하는 데 집중하고, 행위 면에서 공을 들이는 데 신경 쓰는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느냐?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꽤 많이 읽었고 공도 꽤 많이 들였는데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경영하고 구원하는 것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며, 사람을 온전케 하고 성품 변화를 이루게 하기 위함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읽든지 간에, 내가 남들이 비교적 동조하고 칭찬하며, 엄지를 치켜세우게 하는 말, 방법, 행위를 도출해 내고, 그다음 실생활 속에서 그러한 것들을 살아 내고 지키면, 그런 사람이 바로 진정한 신자지.’라고 생각한다.
너희에게는 다밍과 같은 문제가 없느냐? 방금 말한 것처럼 눈에 띄게 규범을 지키고 항렬을 따지며, 노인 공경이나 아이 사랑, 장유유서를 강조하는 것 외에 이와 비슷한 행위나 사상, 관점, 인식이 있지는 않으냐? 너희 스스로 그것을 파헤치고 해부할 수 있겠느냐? 예를 들어, 교회에 연장자, 혹은 하나님을 믿은 햇수가 오래된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너는 마음속으로 늘 그의 체면을 지켜 주고 싶어 한다. 말을 할 때 그가 먼저 말을 끝마치도록 해 주고, 그가 쓸데없는 말을 해도 끊지 않으며, 그가 무슨 잘못을 해서 책망과 훈계를 해야 할 때도 그의 체면을 지켜 주느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나무라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억지를 부리고 엉망으로 일을 해도 모두가 그를 용서하고 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에는 또 늘 “어르신의 체면을 지켜 드려야죠. 그분들 체면이 깎이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손아랫사람이잖아요.”라며 다른 사람을 교육한다. ‘손아랫사람’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겠느냐? (전통문화입니다.) 전통문화 사상에서 파생된 것이다. 또한, 교회에 나이가 좀 많은 형제자매를 만나면 ‘형’, ‘누나’, ‘이모’ 또는 ‘연세 많은 형제’라고 부르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한 가족처럼 아주 친근하게 부르고, 그들을 각별히 존중하여 어느새 사람 마음속에 좋은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전통문화의 것들은 중국인의 사상과 뼛속에 아주 깊이 뿌리내려져 있어 교회 생활에서도 끊임없이 만연해 분위기를 형성한다. 사람은 늘 이러한 것들에 제약받고 통제받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것들을 인정하며 열심히 그 방향으로 행동하고 실행할 뿐만 아니라 남들도 그렇게 하도록 도와주고 가르친다. 전통문화는 진리가 아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전통문화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만 알면 그만이겠느냐? 전통문화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은 한 가지 측면이다. 어째서 그것을 해부하려고 하겠느냐? 그 근원은 어디에 있겠느냐? 문제의 본질은 어디에 있겠느냐? 어떻게 해야 그런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전통문화를 해부하는 이유는 너로 하여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이러한 측면의 이론과 사상, 관점을 완전히 새롭게 인지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완전히 새롭게 인지할 수 있겠느냐? 먼저 전통문화가 사탄에게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럼 사탄은 어떻게 그런 전통문화를 사람의 내면에 주입했겠느냐? 사탄은 매 시기마다 유명 인사나 위인을 통해 이러한 사상들을 전파하고, 이러한 이른바 견해와 이론을 전파한다. 그런 다음 점차 체계화하고 구체화하여 점점 사람의 생활과 가까워지게 하고, 또 그다음에는 점차적으로 사람 사이에 퍼트려 이러한 사탄의 사상, 견해, 이론을 조금씩 사람의 사상 속에 주입한다. 이러한 것들이 주입되면, 사람은 사탄에게서 비롯된 이런 사상과 이론들을 인류가 마땅히 실행하고 지켜야 하는 가장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사탄은 이러한 것들을 이용해 사람의 사상을 억압하고 통제한다. 인류는 이런 환경 아래에서 끊임없이 교육받고 물들고 통제되며, 한 세대 한 세대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렀다. 각 세대의 사람들은 모두 전통문화가 옳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누구도 이런 이른바 ‘좋은 것’, ‘옳은 것’의 출처와 근원이 어디인지 해부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심각성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오랜 세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후에도 이것들이 옳고 긍정적인 사물이라고 생각하며, 나아가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읽었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한 삼종사덕(三從四德)이나 인의예지신 등 소위 전통 사상과 전통문화를 버릴 수는 없어. 이것들은 선조 때부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기 때문이지. 우리의 선조들은 성현이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선조들의 가르침을 어겨서는 안 돼. 옛 선조들의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버려서는 안 돼.’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마음속에 늘 이런 생각, 이런 의식을 갖고 있으며, 여전히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이런 전통문화의 것들에 통제되며 결박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20여 세쯤 된 너를 보고 ‘삼촌’이라고 불렀다고 해 보자. 너는 무척 기쁘고 흐뭇할 것이다. 반면, 직접 네 이름을 불렀다면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 아이는 예의를 모른다느니, 교육을 받아야 한다느니 생각하며 다른 태도를 보일 것이다. 사실, 너를 삼촌이라고 부르든 네 이름을 부르든, 네 인격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왜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해서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이겠느냐? 이것이 바로 전통문화에 지배되고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네 내면에 먼저 자리 잡아 네가 사람과 일을 대하고 모든 사물을 평가하며 판단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되었다. 기준이 틀렸을 때 네 행동의 성질이 옳을 리 있겠느냐? 분명 옳지 않을 것이다. 만약 네가 진리로 판단한다면, 이 일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다른 사람이 너를 뭐라 부르든 그것을 마음에 담아 두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가 너를 욕하거나 모욕한다면 너는 틀림없이 마음이 불편해질 것이다. 이는 인성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만약 네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또는 하나님에게서 온 문화로 평가하는 것이라면, 그 아이가 네 이름을 부르든 아니면 너를 삼촌이나 형으로 부르든 너는 절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는 지역 풍습을 따라도 된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누군가 너를 삼촌이라고 하면 그것이 너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서방에 가면 그 호칭이 매우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네 이름을 부르면 아주 좋다고, 그것은 너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중국이라면, 너보다 나이가 많이 어린 사람이 네 이름을 부를 경우 기분이 나빠져서 위아래가 없다고, 큰 모욕을 당했다고 여길 것이다. 너는 그것 때문에 화를 내거나 심지어는 그 일로 그 사람을 정죄할 수도 있다. 이것이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려는 문제이다.
나라마다, 인종마다 각자의 전통문화가 있다. 우리는 모든 전통문화를 비판해야겠느냐? 비판해서는 안 되는 문화가 하나 있다. 어떤 문화인지 너희가 말해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예를 하나 들어 주겠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했는데, 아담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느냐?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고, 인류와 함께 지낼 때 사람을 어떻게 불렀느냐? (이름을 직접 부르셨습니다.) 맞다. 이름을 직접 불렀다. 하나님이 너에게 이름을 주었으니, 그 이름은 하나님에게 의미가 있다. 이것은 하나의 별칭이자 호칭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별칭을 주었고, 바로 그 별칭으로 너를 불렀다. 이는 일종의 존중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가장 큰 존중이며, 가장 진리에 부합하고 가장 긍정적인 존중이다. 이는 사람을 존중하는 기준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는 일종의 문화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문화를 우리가 권장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은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른다. 하나님이 너에게 이름과 별칭을 주고, 그 별칭으로 너를 대표하고 부른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을 대한다. 두 번째 사람을 만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였느냐?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녀의 이름을 짓게 했다. 아담은 그녀의 이름을 하와라고 지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불렀느냐? 불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게서 온 문화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각각의 별칭을 지어 주었다. 그 별칭을 부를 때 인류와 하나님 모두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알면 된다. 이것이 바로 존중이자 평등이라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이가 예의를 아는지, 인성 안에 규범을 갖추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다. 이것이 정확하지 않겠느냐? (정확합니다.) 이것이 정확하다. 성경에는 어떤 사건을 기록하든 혹은 어떤 가족의 족보를 기록하든 인물들마다 이름과 별칭이 있다. 그러나 너희가 주의를 기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이모, 또는 큰아버지, 큰어머니 등의 호칭은 없다는 것이다. 전부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정해 준 규율이든 법칙이든,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인류가 계승해 온 전통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으로, 항렬에 따른 존칭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삼촌, 큰이모, 작은이모, 큰고모, 작은고모 등과 같은 복잡한 호칭이 없다. 그런데 사람은 늘 이런 항렬과 호칭을 따지니, 이는 어떤 의미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일을 가장 혐오하는데, 사탄에 속한 부류가 늘 이런 일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전통문화만 보더라도, 하나님에게는 매우 실질적인 점이 하나 있다. 하나님은 전 인류를 창조했기에, 한 사람 밑에 얼마나 많은 가족과 후손이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으므로, 항렬 같은 것은 필요 없다. 하나님은 단지 너에게 자손이 번성하라고, 가문이 흥성하라고 했을 뿐이니, 너는 그저 이것만 분명히 기억하면 된다. 각각의 세대가 얼마나 많은 후손을 번성했는지, 그리고 그 후손이 또 얼마나 많은 후손을 번성했는지, 그것만 기억하면 되는 것이다. 항렬은 필요 없으며, 후손들도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 알 필요 없고, 사당이나 절을 지을 필요도 없고, 그들을 섬기거나 그들에게 제사를 지낼 필요는 더더욱 없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과 여호와를 믿는 사람은 모두 제단 앞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가문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와 제사를 드렸다. 중국의 집집마다 사당이 있고, 사당 안에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의 위패로 가득 찬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이 사역을 처음 시작한 발원지에는 이런 것들이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 장소와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은 사탄과 악령에게 통제되었으며, 이런 불교 국가에서는 사탄에 속한 것이 특히나 성행했다. 사람들은 늘 조상에게 절을 해야 했으며, 모든 일을 가문에 물어봐야 했고, 조상에게 모든 것을 말해야 했다. 심지어 조상의 유골조차 남아 있지 않아도 향을 피우고 절을 해야 했다. 근대에 서양의 새로운 사상을 접하고 전통적인 가문의 속박을 뚫고 나온 사람들은 이러한 가문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가문에 의해 철저하고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다고 느꼈다. 무슨 일만 있으면 가문의 어른들이 다 와서 간섭했으며, 특히 결혼 문제에 있어서는 더 심했다. 중국에서 이런 일은 흔하다. 사탄이 사람에게 항렬을 따지게 했는데, 사람들은 이런 말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사람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에 항렬이 있어요. 맨 위 항렬이 바로 우리의 조상이죠. ‘조(祖)’자가 붙으면, 신을 대하듯이 무릎 꿇고 절해야 해요.”라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가문에서 이렇게 영향을 받고 물들며, 또 이렇게 교육을 받으면 어린 마음에 어떤 한 가지가 주입되게 된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가문을 떠나서는 안 되며, 가문을 떠나거나 가문의 속박을 벗어나는 것은 대역무도한 짓이라는 것이다. 대역무도가 암시하는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네가 가문의 말을 듣지 않으면 불효자이며, 불효자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은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중국인은 항렬, 그리고 삼종사덕(三從四德), 삼강오상(三綱五常)과 같은 것들에 심각하게 물들고, 전염되고, 통제되었다. 젊은이가 나이가 약간 더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삼촌’이나 ‘이모’, 또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으면 항상 예의와 교양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네가 이 집단과 이 사회에서 저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는 네가 규범을 모르고, 교양도 없으며, 장래성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옷을 잘 차려입고 위장을 할 줄 알고, 말도 예의 바르고 교양 있게 하며, 듣기 좋은 말도 잘하는데, 네가 ‘삼촌’이나 ‘이모’라고 부르지도 못한다면 남들에게 교양 없다는 소리를 듣고, 어디를 가든 무시당한다는 것이다. 중국인은 이런 사상을 주입받는다. 아이가 사람을 보고도 호칭을 부를 줄 모르면 부모에게 심하게 혼나거나 맞기도 한다. 어떤 부모는 때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누가 너보고 예의 없이 굴래. 못난 데다가 교양도 없으니, 차라리 때려죽여 버리겠어! 너 때문에 망신만 당하잖아. 남들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겠어!” 아이가 사람을 보고 호칭을 부를 줄 모른다고 부모가 자신의 체면을 위해 지나치게 문제 삼아 아이를 심하게 때린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내가 이 일에 대해 이렇게 교제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의식할 수 있겠느냐? 실생활 속에서 어떠한 현상을 통해,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이러한 일들을 조금씩 꿰뚫어 보고 인생의 방향과 네가 걷는 길의 방향을 바꿀 수 있겠느냐?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깨닫는 능력이 많이 부족한 것이다. 매사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요구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가장 옳은 것으로, 조금의 틀림도 없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탄에게서 온 것이 사람의 관념에 아무리 부합하고, 사람의 입맛에 아무리 맞으며, 겉보기에 아무리 그럴싸해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목적은 바로 너희의 생각을 트이게 하여 무엇이 진리인지, 사람이 대체 무엇을 얻고자 하나님을 믿는지, 하나님이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고 사람이 진리를 얻게 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이 말씀한 진리와 하나님의 요구가 사람의 사상 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 또는 국가와 사회 환경이 교육하고 영향을 주어 만들어 낸 사상, 관점, 각종 인식과 대체 관계가 있는 것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너희 자신도 해부해 보아라. 오늘은 한 측면의 예만 이야기했지만, 사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런 전통문화의 것들이 여전히 적지 않게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항렬을 따지지 않는다면, 부모님의 이름을 직접 불러도 되지 않나요?”라고 하는데, 이래도 되겠느냐? ‘부모님’이라고 한다면 또 항렬의 문제뿐 아니라 전통문화에 빠지는 것 아니겠느냐? 아니다. 부모님은 그대로 부모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아빠’, ‘엄마’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렇게 부르게 한 것이며, 이는 마땅히 있어야 하는 호칭이다. 마치 너의 부모가 너를 ‘아이’ 또는 ‘아들’이나 ‘딸’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너희가 주로 무엇을 깨닫게 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느냐? 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냐? (사람이 사물을 평가하는 기준이 바뀌어야 하며, 모든 일을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요구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맞다. 자기가 함부로 지어내면 안 된다. 사람은 항상 스스로 ‘진리’를 만들어 내려 한다. 어떤 일을 하고 싶으면 일련의 주장과 이론을 만들어 내고, 또 일련의 행동 방식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렇게 한다. 그 결과 몇 년간 실행하면서 성과가 있든 없든 그냥 그렇게 죽어라 고수하고는 자신이 매우 어질고, 의롭고, 선량하다고, 자신이 살아 낸 바가 매우 훌륭해 남들이 무척이나 칭찬하고 우러러본다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점점 더 자기가 위대하다고 느끼게 된다. 사람은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요구했는지, 각각의 일을 할 때의 원칙은 무엇인지, 자신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맡긴 것에 충성을 다했는지를 결코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으며, 구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부정한 것만 궁리한다. 이것이 사악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무릇 겉으로는 매우 온화하고, 행동이 단정하며, 교양 있고, 예의 바르며, 입만 열면 인의예지신을 이야기하고, 유식한 단어를 구사하며,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는지 안 하는지 너희가 관찰하여라. 만약 그가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가 바로 외식하는 위선자이다. 바로 다밍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며, 다른 점이 전혀 없다. 좋은 행위에만 집중하고, 좋은 행위로 남을 속여 칭찬과 우러름을 얻어내는 자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외식하는 사람입니다.) 이 부류의 사람이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실행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실행할 수 없겠느냐? (무엇이 진리인지 모르기에 겉으로 좋아 보이는 행위와 사람이 좋게 보는 것들을 진리로 여겨 실행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된 이유가 아니다. 그가 아무리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몇 가지 분명한 일 처리 원칙은 그도 알지 않겠느냐? 그가 본분을 이행할 때 네가 그에게 어떻게 하라고 알려 주면, 그가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으니, 진리를 실행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네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듣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말한다. 우리는 요즘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들이 변화가 있고, 어떤 사람들이 행위와 일 처리 원칙에 전혀 변화가 없는지 네 주변 사람들을 관찰해 보아라. 네가 아무리 교제해도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설령 자신과 대조되어도 고치지 않고 고칠 생각도 없으며, 여전히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지 살펴보아라. 너희는 이런 사람을 발견하였느냐? 발견하지 않았느냐? 어째서 어떤 사람은 리더 일꾼을 하다가 교체되었겠느냐? 바로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실제적인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도리를 다 알면서도 자기 방식대로 하고, 아무리 진리 원칙을 교제해 주어도 자신만의 생각이 있어 자기의 견해만 고수하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기가 하던 대로 하니, 이런 리더 일꾼은 교체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교체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은 어떤 길을 걷고 있는 것이겠느냐? (적그리스도의 길입니다.)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면 적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이는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다. 만약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전혀 변화가 없다면, 이러면 골치가 아파진다. 이미 적그리스도가 된 것이다.
오늘 이 이야기가 너희에게 주는 가장 큰 일깨움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잘못된 길에 들어서기가 매우 쉽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첫째,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사상과 내면 깊은 곳이 결코 공백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너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기 쉽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 가지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사람은 자신이 좋고 옳다고 여기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해 지키기 쉬우며, 성경 지식과 영적인 도리를 하나님 말씀으로 여겨 실행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를 이해한 후, 너희는 자신이 앞으로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모든 일들에 대해 어떤 새로운 인식, 생각, 계획을 갖게 되었느냐? (앞으로 일을 할 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 자신이 생각한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하나님의 요구와 부합하는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그다음 하나님 말씀에서 실행 원칙을 찾아서 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자기가 한 것이 진리 실행임을, 하나님을 믿으며 걷는 길이 올바른 길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에 공을 들여야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너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자질이 부족하다. 네가 생각해 낸 것들이 아무리 대단해도 진리가 아니다. 설령 네가 행한 일이 단 하나의 실수도 없이 옳다고 확신한다 할지라도 끄집어내 형제자매들과 교제하며 검증하거나 관련된 하나님 말씀과 대조해 봐야 한다. 이렇게 하면 100% 틀림이 없겠느냐? 꼭 그렇지는 않다. 네가 진리 원칙을 완전히 파악하거나 하나님이 한 이 말씀의 근원을 헤아리지 못하는 한 어쩌면 실행에 오차가 생길 수도 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그의 행동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남들에게 칭찬받을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진리를 대체할 수는 없다. 진리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니며, 긍정적인 사물도 아니다.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느냐?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정죄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이 정죄하는 일을 저질렀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하나님께 혐오받을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모두 부정적인 사물이며,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이 말을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천천히 체험해 보아라.
오늘 한 가지 일을 진지하게 비판하였는데, 무슨 일을 비판하였느냐? 늙은 암퇘지를 ‘아주머니’라고 부른 일이다. 그렇지 않으냐? 돼지를 ‘돼지 아주머니’라고 부르다니, 이는 부끄러운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부끄러운 일이다. 사람은 늘 존칭을 두고 싶어 하는데, 존칭의 ‘존’자는 어디에서 온 것이겠느냐? ‘존’자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항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항상 남들의 손윗사람이 되려 하고, 늘 항렬을 따지고 싶어 하는데, 이는 좋은 것이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항렬을 따지는 것이 어째서 좋지 않으냐? 항렬을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분석해 봐야 한다. 네가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간단하겠느냐. “하나님께서 항렬을 따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당신은 어째서 함부로 항렬을 따지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면서 교양 있는 척하는군요. 당신은 본분을 이행할 때 전혀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으니, 팔이 완전히 밖으로 굽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관련이 있을 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고요. 그런데도 좋은 사람인 척하다니요! 그럴 자격이나 있나요?” 이렇게 말하면 되지 않겠느냐? (됩니다.) 그럼 좀 더 엄하게 말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하겠느냐? “무슨 헛소리입니까? 당신이 바로 어리석은 돼지이고, 어리석은 자입니다.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면서 뭘 사칭하는 겁니까? 당신은 공부도 했고, 교양도 있으며, 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 자신이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진리 실행이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이러니 어리석은 돼지이자 어리석은 자 아니겠습니까?”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교제하도록 하겠다.
일 처리가 기이하고,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남들에게 순종을 강요하는 적그리스도를 해부하다
1. 일 처리를 기이하게 하는 적그리스도를 해부하다
지난번에는 그리스도의 모습 중 제5조, ‘사람을 미혹하고 회유하고 위협하고 통제한다’는 것에 관에 대해 교제했다. 오늘은 제6조, ‘일 처리가 기이하고,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남들과 교제하는 법이 없고, 남들에게 순종을 강요한다’는 것에 관해 교제하겠다. 이것이 다섯 번째와 차이가 있겠느냐? 성품 측면에서 보면 큰 차이는 없다. 일 처리할 때는 언제나 권력을 잡으려 하고,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성품은 사악하고, 교만하고, 강퍅하고, 흉악하다. 성품은 동일하지만, 여섯 번째에서는 적그리스도의 또 다른 두드러진 모습, 바로 일 처리를 기이하게 하는 것을 언급하였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일을 처리하는 성질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먼저 ‘기이함’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문자 그대로 봤을 때, ‘기이함’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이겠느냐, 아니면 긍정적인 의미이겠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기이한 일을 했다면, 그 일은 좋은 일이겠느냐, 나쁜 일이겠느냐? (나쁜 일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일 처리가 기이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겠느냐, 나쁜 사람이겠느냐? 사람들의 인상과 느낌에 일 처리가 기이한 사람은 별로 좋은 작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기이한 일이 생겼다고 한다면, 그 일은 기뻐할 만한 일이겠느냐, 아니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겠느냐?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입니다.) 그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문자 그대로 봤을 때, ‘기이함’은 부정적 단어이다. 어떤 일을 묘사하든, 아니면 어떤 사람의 일 처리 방식을 묘사하든 모두 긍정적인 것이 아니며, 부정적인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제 ‘기이함’에는 어떤 모습들이 있는지 먼저 설명해 보겠다. 어째서 ‘간사함’이 아닌 ‘기이함’이라고 하겠느냐? 여기에서 ‘기이함’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겠느냐? ‘기이함’은 ‘간사함’보다 그 정도가 더 깊다. 일 처리를 기이하게 하는 사람을 간파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더 어렵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매우 분명하다. 그럼 너희가 이해한 말로 ‘기이하다’라는 단어를 해석해 보아라. ‘기이하다’에서 ‘기(원문: 詭)’는 음험하고 교활함을 의미한다. ‘이(원문: 異)’는 이상하다는 뜻이다. ‘기이하다’라는 것은 음험하고 간교하며 행위가 몹시 이상하다는 것이다. 이상하다는 것은 깊이 숨긴 채 드러내지 않아 일반적으로 사람은 종잡을 수 없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꿰뚫어 보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즉, 사람들은 이 부류 사람이 일하는 방식과 동기 그리고 출발점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때로는 그 행위마저 수상쩍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기이함의 실제 특징과 상태를 형용할 수 있는 말이 하나 있는데, 바로 ‘투명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남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적그리스도의 일 처리에는 다음과 같은 성질이 있다. 바로 어떤 일을 하려는 그의 속셈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네가 알아차리거나 느꼈을 때 매우 두려운데 시간이 짧거나 어떤 이유 때문에 그의 동기나 속셈을 꿰뚫어 볼 수 없으면, 너는 부지중에 그의 일 처리가 매우 기이하다고 느낄 것이다. 어째서 그런 느낌을 받겠느냐? 그의 언행은 누구도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그는 항상 빙빙 돌려서 말하거나 빗대어 말한다. 결국에는 어떤 말이 진실이고 어떤 말이 거짓인지, 그 말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한다. 그가 거짓말할 때는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대체 어떤 말이 진실이고 어떤 말이 거짓인지 알 수가 없어 늘 우롱당하고 농락당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런 느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겠느냐? 이 부류 사람들의 일 처리에는 투명성이 없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너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바쁜지 명확히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엔 그의 성품이 간사하고 음험하며 또 사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기이하다’는 단어는 매우 으슥해 딱 들어도 평범하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왜 ‘투명성이 없다’는 단순한 말로 설명하려 하겠느냐? 투명성이 없다는 말에는 내포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적그리스도는 어떤 일을 할 때 항상 네게 허상을 보여 주어 그를 간파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 왼쪽 뺨을 때리려 한다면, 그는 네 오른쪽 뺨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릴 것이다. 그리하여 네가 오른쪽 뺨을 피하는 순간 그는 정확히 네 왼쪽 뺨을 치게 된다. 그렇게 그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기이함’인데, 전부 계략이다. 다시 말해, 그와 함께 지내고 왕래하는 모든 사람은 다 그에게 음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는 왜 항상 남들을 음해하겠느냐? 남을 통제하고, 남의 마음속에서 자리를 차지하려는 생각 외에도 그는 모든 사람에게서 이익을 얻고자 한다. 이 밖에, 이런 사람에게서 사악한 성품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특히 다른 이들을 이용하기 좋아하거나 자신의 장점으로 다른 이들의 단점을 놀리면서 이를 기쁨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사악한 모습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에게 꿍꿍이가 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나 꿍꿍이가 있지, 젊은 사람들은 경력이 많지 않은 데다가 처세 경험도 없는데 무슨 꿍꿍이가 있겠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렇겠느냐? 그렇지 않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성품은 나이와는 상관이 없다. 그는 선천적으로 이런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그저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을 때는 이런 수단들을 써도 능숙하지 않고 어설플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빈틈이 없어진다. 늙은 마왕들처럼 빈틈없이 일을 처리해서 대부분 사람은 전혀 꿰뚫어 보지 못한다.
앞에서 ‘기이하다’는 단어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을 했으니 이제 ‘기이함’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와 모습을 보이는지 교제하겠다. 이것이 교제할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 교제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분별할 수 있겠느냐? 밝히 알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100% 분별하지 못하고 밝히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너는 어떤 사람은 정말 약아빠져 네가 어리석게 이용당할지도 모르니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 적그리스도가 형제자매들과 주변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이 행하는 어떤 일과 표출하는 어떤 언행이 그들의 기이한 일 처리와 사악한 성품을 보여 주겠느냐? 이는 교제할 가치가 있다. ‘기이함’이라는 단어만 설명한다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전만 좀 찾아보면 무슨 뜻인지를 대충 알 수 있으니 간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이 어떤 일을 행하는지, 사람의 어떤 행위와 성품이 이 단어와 연관이 있고 이 단어의 구체적인 모습과 내적 상태인지에 관련해 이는 좀 힘들고 이해하기 어렵지 않겠느냐? 먼저 너희가 보고 접한 사람들, 또는 구체적으로 어떤 적그리스도를 떠올려 보아라. 그들이 어떤 일을 했을 때 그들의 일 처리 성질이 기이함과 관련이 있다고 느꼈느냐? 또는 그가 일상생활 속에서 보이는 어떤 언행이 기이함과 관련이 있다고 느꼈느냐? (예전에 저는 한 적그리스도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지위를 빼앗으려 하고 리더가 되려고 했지만 형제자매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거짓 리더와 거짓 일꾼을 고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어요. 거짓 리더를 고발하거나 폭로하지 않으면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함께 일어나 교회 사역을 지켜야 해요.” 그는 교회 사역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리더 일꾼의 약점을 잡고 이를 크게 부풀려 형제자매가 리더 일꾼을 고발하도록 선동하였습니다. 그의 목적은 리더 일꾼을 끌어내려 자신이 리더가 될 기회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형제자매가 분별력이 없어 그에게 미혹되었으며, 또한, 원칙에 따라 문제를 분별하는 게 아니라 리더 일꾼의 사소한 문제와 패괴 표출을 물고 늘어져서 정죄하고, 누명을 씌우고, 확대 해석했고, 그 결과 교회에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것이 기이한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 어째서 기이하다고 하겠느냐? 정의의 깃발을 내걸고 자신의 숨겨진 목적을 이루며, 이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부추겨 행하도록 하면 그는 드러나지 않고 숨어서 성과를 지켜볼 수 있다. 마지막에 일이 성사되면 더 좋지만, 성사되지 않아도 그가 깊이 숨어 있어 아무도 그를 간파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기이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 가지 모습이다. 즉,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진짜 생각을 네가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추측해 내면, 그는 얼른 온갖 핑계와 견해를 내세워 애써 은폐하고 변호할 것이다. 남들이 진상을 간파할까 봐 두려워 일부러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기이함이다. 또 있느냐? (몇 년 전에 저희 교회에 적그리스도 무리가 나타나 교회를 통제하고 교회 사역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적이 있습니다. 상부에서 사람을 보내 사역을 인수했지만, 그 적그리스도 무리는 이렇게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저희는 리더가 있으니 외부에서 파견한 리더를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저희끼리 사역을 잘 해낼 수 있어요.” 결국, 많은 사람이 미혹되어 다들 적그리스도의 말을 따르고 상부에서 파견한 리더를 거부했습니다. 그 적그리스도들은 또 상부에서 파견한 사람을 한 곳에 연금시켜 형제자매와 접촉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교회 사역에 간여할 수 없었으며, 사역을 제대로 실행하지도 못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행동은 매우 기이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숨겨진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교회를 통제하여 독립 왕국을 세우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이함이며,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하는 짓이다.
적그리스도의 기이한 일 처리는 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겠느냐? 하나는 투명성이 없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이면에 숨겨진 음모가 있는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이 계획하고 생각한 것을 모든 이에게 알린다면, 그 일이 이뤄지겠느냐?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일 처리할 때 기이한 수단을 쓰는 이 부류의 사람들은 왜 그렇게 행동하겠느냐? 그렇게 일 처리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너희가 지금 생각한 것은 그저 ‘교회를 통제하기 위해서’가 전부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은 교회나 모든 사람을 통제하는 것과 관계가 없다. 한 교회나 한 지역의 사람들을 모두 미혹하는 것은 비교적 큰일이다. 그럼 적그리스도가 평소에 작은 행위를 보이고 일을 처리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 목적은 사람을 이용하여 그를 위해 힘을 들이게 하고, 그의 이익을 충족시키며, 그에게 부림을 당하게 하는 데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배하고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 적그리스도도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싶어 하고,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가 너를 지배하고 싶다고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네가 동의하겠느냐? 그가 너를 노예로 삼아 부리고 싶다고 말한다면 네가 동의하겠느냐? 너에게 그가 리더이니 네가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네가 동의하겠느냐? 너는 분명히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특별한 수단을 써서 네가 모르는 새에 이용당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기이함이다. 예를 들어 보자. 큰 붉은 용은 일 처리가 특히나 기이해서, 늘 정당한 기치를 내걸고 사람들을 미혹한다. 지주와 자본가의 재산을 몰수하고 싶을 때 큰 붉은 용은 어떻게 하겠느냐? 정책을 명문으로 규정해서 자산이 얼마 이상이면 반드시 공유화한다고 하겠느냐? 직접적으로 말하는 게 가능하겠느냐?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능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이 수긍할 만한 방식을 찾아 정정당당하게 지주와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공유화한다. 그렇게 지주와 자본가들은 세력을 잃고, 국가는 부유해지며, 그들의 통치는 공고해진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방식을 취했느냐? (토호를 때려잡고 농지를 나눠 가졌습니다.) 그들은 ‘토호를 때려잡고 농지를 나눠 갖자’, ‘만인은 평등하다’ 등 기치를 내세운 후 ‘백모녀(白毛女)’ 같은 이야기를 지어내 모든 지주와 자본가들을 모함하고 정죄했다. 여론 선전의 힘을 이용해 인민에게 이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을 주입시킨 후, 사리에 어두운 모든 사람이 지주와 자본가는 나쁘다고, 힘들게 일하는 서민들과 평등하지 않다고, 이제 인민들이 주인이 되었으니 국가는 인민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소수의 사람이 그 많은 재산을 점유하고 있으니 마땅히 가져와 국유화하고 모두 함께 나눠야 한다고 말이다. 이른바 좋고, 올바르며, 가난한 사람에게 유리한 이런 사상과 이론의 선동 아래, 사람들은 모두 미혹되고 눈이 가려져, 토호를 때려잡고 지주 및 자본가와 투쟁하기 시작했다. 결국 결과가 어떠하였느냐? 지주와 자본가 중 일부는 맞아 죽거나 불구가 되었고, 일부는 외국으로 도망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최후의 결과는 바로 큰 붉은 용의 뜻대로 되었다. 우매하고 무지한 대중이 이 같은 사기극 속에서 점차 인도되어 마귀들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의 일 처리 또한 이와 유사한 기이한 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적그리스도가 다른 사람과 협력하여 리더를 할 때, 상대방이 정의감도 있고, 진리도 깨닫고,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면, 그는 속으로 불안해하며 ‘저자가 뒤에서 나를 무너뜨리는 건 아닐까? 뒤에서 뭔가 일을 벌이는 것 아냐? 나는 왜 저 사람을 간파하지 못하겠지? 저 사람이 나와 한마음일까? 나에 대해 상부에 보고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한다. 일단 이런 생각이 들면 그는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게 되지 않겠느냐? 그럼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겠느냐? 바로 그 사람을 괴롭히겠느냐? 어떤 사람은 공개적으로 괴롭히지만, 기이한 부류의 사람은 직접적으로 괴롭히지 않는다. 그는 먼저 비교적 나약하고 어리석고 분별력이 없는 일부 형제자매를 찾아가 물어보며 의견을 떠본다. “누구누구는 하나님을 거의 10년 동안 믿었으니 기초가 있겠죠?” 어떤 사람이 “어느 정도 기초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고, 가정과 일도 다 버렸어요. 저희보다 믿음이 더 큽니다. 그와 협력하면 괜찮을 거예요.”라고 말하면,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한다. “괜찮기는 한데, 그는 늘 형제자매들과 함께 있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그렇지 않아요. 그 사람은 저희보다 진리를 더 잘 추구합니다. 우리는 항상 같이 수다를 떨지만, 그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하나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고, 찬양을 배우는 데 사용해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하나님 말씀을 교제하고요.”라고 하면, 적그리스도는 그들이 그 사람을 좋게 평가하고 동조하는 것을 듣고는, 더 이상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말꼬리를 돌린다. “그는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어서 우리보다 체험이 많으니, 앞으로 그와 많이 접촉해야 해요. 그를 고립시키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도 그다지 분별이 없다. 적그리스도는 대부분 사람이 그 사람에게 동조하여 자신의 속셈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보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그 후 그는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을 찾아가 말한다. “여러분이 보기에 누구누구는 평소에 하나님 말씀을 읽나요? 어째서 저는 그가 항상 다른 사람과 교제하고, 겉으로 행하기 좋아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혀 읽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까요?” 이 사람들은 눈치가 빨라서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궁리한다. ‘둘이 사이가 안 좋은가 보구나. 이건 우리에게 그 사람을 무너뜨리라는 거고, 그를 배척하려는 거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한다. “그래요. 그는 쓸데없이 바빠요. 사람과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걸 즐기죠. 하나님의 말씀도 읽지 않고요. 어쩌다 한 번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는 졸더군요. 그런 모습을 몇 번이나 봤습니다.” 첫 번째 무리의 사람들부터 두 번째 무리의 사람들에게까지 적그리스도가 한 말에는 어떤 성품이 들어 있느냐? 사악함이 들어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의 일 처리 성질과 수단은 어떤 것이냐? 기이함이다. 첫 번째 무리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두 번째 무리 사람들은 낌새를 챘지만 그의 말에 동조했다. 그는 두 번째 무리의 사람이 그에게 동조해서 말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회유할 수 있겠다 싶어서 이 무리의 사람을 통해 그의 동역자를 제거하려고 한다. 이러한 사고 과정을 기이하다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무리의 사람은 그의 말 몇 마디에 미혹되고 회유되어 말한다. “그 사람은 교회 리더로서의 원칙과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니, 다음 리더 선거에서는 다들 그를 뽑지 말아야 하지 않겠어요?” 이들은 매우 교활해서, 이 말을 하고는 적그리스도의 태도를 살핀다. 적그리스도가 “그건 안 되죠. 그렇게 하면 불공평해요. 여기는 하나님 집이지 사회가 아닙니다!”라고 하자 이 말을 들은 그들은 “그러면 안 돼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그럼 다음번에도 그에게 투표해야겠네요.”라고 한다. 적그리스도는 즉시 말한다. “투표도 안 됩니다.” 보아라. 무슨 말을 해도 다 옳지 않다면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실 그는 어떤 방식을 사용해 이들을 자신의 길로 이끌려는 것이고, 함정을 파서 빠트리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이 계속 듣다가 의도를 알아내고 “그렇다면 공정하게 뽑읍시다. 어차피 그는 사람이 별로여서 결국 뽑히지 않을 수도 있어요.”라고 하면, 적그리스도는 기뻐한다. 보아라. 하나는 낭(狼), 하나는 패(狽), 낭과 패가 결탁하여 나쁜 짓을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 내 적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세력의 일 처리 원칙과 성질이다. 바로 이런 모습인 것이다. 그들이 “그럼 선거를 하죠. 어차피 그는 사람이 별로라서, 선거를 해도 당선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어떤 음모가 숨겨져 있겠느냐? 그들이 일을 꾸미지 않겠느냐? 그들은 서로 주고받는 말 속에서 낌새를 눈치챘지만, 누구도 직설적으로 어떻게 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서로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어도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적그리스도는 직설적으로 자신의 의중을 말하며 그 사람을 뽑지 말라고 하지 않았고, 아랫사람들도 “우리는 그를 뽑지 않고 당신을 뽑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째서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겠느냐? 아무도 상대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기이하지 않으냐? 이는 극도로 사악한 것이다. 대화를 나눌 때 다들 말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들어도 아무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결국에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이를 사탄의 대화라고 한다. 그들 중 ‘바보’ 하나가 듣고도 이해하지 못해서 그들에게 대체 그 사람을 뽑으라를는 건지 뽑지 말라는 건지 물으면,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말하겠느냐? 만약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라고 한다면, 이 말은 너무 노골적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위협과 유도의 성질을 띤다. 사악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집에 사역지침이 있지 않습니까? 뽑아야 할 사람은 뽑고, 뽑지 말아야 할 사람은 안 뽑아야지요.”라고 말한다. 이 말이 애매하지 않으냐? 그는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지요. 제 말을 듣지 마시고요. 제가 하는 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원칙은 아니니까요. 하나님 말씀이 원칙이지요.”라는 그럴싸한 기치를 내세운다. 이에 그 ‘바보’는 “원칙대로 하면 뽑아야겠죠.”라고 말한다. 그가 멍청해 자신들의 일을 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 그 무리는 힘을 모아 그를 내치고 그가 자신들 사이에 있지 못하게 한다. 결국 그 ‘바보’는 대체 뽑으라는 건지, 뽑지 말라는 건지 또 물어본다. 누군가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하죠. 그 사람 하는 걸 봐서 결정할 겁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 속에 규정이 있느냐? 정직한 성분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에 대체 무엇이 담겨 있겠느냐? 이 말 속에는 사악한 성품, 그리고 그들의 은밀한 동기, 속셈, 목적이 담겨 있다. 그 안에는 낭과 패가 계획한 음모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적그리스도의 눈에 거슬리는 그 사람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이 무리는 어째서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들 자신의 사악한 성품에 지배받는 것을 제외하고,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직속상관인 적그리스도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그 사람을 뽑는다면, 적그리스도가 알게 되는 날에는 그들에게도 좋을 게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 입장에서는 지금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핵심적이며, 그들에게 가장 유리한 것은 바로 그를 뽑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전적으로 적그리스도의 말을 따른다. 그들은 적그리스도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그의 화제가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그쪽으로 따라간다. 진리 원칙이라든가 하나님 말씀과 같은 것은 전부 내팽개쳐 버린다. 보아라.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만 하면 반드시 그를 따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적그리스도가 일을 행하기만 하면 바로 몇몇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따르고 추종한다. 혼자서 외롭게 일을 행하는 적그리스도는 한 명도 없다.
조금 전에 이야기한 것은 적그리스도의 기이한 일 처리 모습 중 하나이다. 여기에서 이야기한 ‘기이함’이란 바로 적그리스도는 일을 처리할 때 그 자신의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있어도 너에게 알려 주지 않고, 네가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네가 발견했을 때, 그는 온 힘을 다해 은폐하고, 다양한 수단을 써서 너를 미혹함으로써 그에 대한 너의 견해를 바꾸려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기이한 부분이다. 만약 그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쉽게 드러내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며, 여기저기서 사람들에게 얘기해서 알게 한다면, 이는 기이한 것이겠느냐? 이는 기이한 것이 아니다. 이를 뭐라고 하겠느냐? (어리석음입니다.) 이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교만해서 이성을 잃은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일 처리가 기이한데, 어떤 부분이 기이하겠느냐? 바로 그는 항상 수단을 써서 일을 처리하고, 말에 빈틈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 그의 속셈과 목적을 추측하기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기이함이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든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자신의 부하나 청중이 자신의 뜻을 알아차리게 한다. 사람들은 그의 뜻을 이해한 후, 그의 의도와 동기에 따라 행동하고, 그의 명령을 집행한다. 결국에 일이 성사되면 그는 당연히 기뻐하지만, 성사되지 않더라도 아무도 그의 약점을 잡을 수 없고, 또 그의 일 처리 동기, 속셈,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전혀 꿰뚫어 볼 수 없다. 적그리스도는 일 처리를 기이하게 하며, 주로 내면에 음모와 은밀한 목적을 숨기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모든 사람을 기만하고, 우롱하고, 통제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기이한 일 처리의 본질이다. 기이함, 이는 단순히 거짓말을 하거나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이 짐작할 수 없는 더 큰 속셈과 목적이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일을 했는데 다른 사람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했다면, 이를 기이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는 그저 간사함일 뿐, 기이함이라고 할 수 없다. 기이함은 간사함보다 어떤 점에서 깊이가 있겠느냐? (사람이 짐작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짐작하기 어렵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사람들이 그의 약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맞다. 주로 사람들이 그의 약점을 잡기 어렵다는 점이다. 설령 몇몇 사람이 그가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그가 대체 좋은 사람인지 아니면 나쁜 사람인지, 악인인지 아니면 적그리스도인지를 분별할 수 없다. 사람들은 그를 꿰뚫어 보지 못하고, 여전히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미혹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기이함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거짓말을 하거나 잔꾀를 쓰기 좋아한다. 이는 단지 간사함일 뿐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일반적인 간사한 사람보다 훨씬 음험하여, 마치 마왕처럼 아무도 그의 일 처리를 짐작할 수 없다. 그가 정의의 기치를 내걸고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사람을 해쳐도 사람은 여전히 그의 공적과 덕을 찬양한다. 이것을 기이함이라고 한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떤 리더가 상부와 접촉하고 교제하는 과정에서, 상부에서 그에게 하나님 집의 몇 가지 사역 계획을 이야기했는데, 당시에는 사역지침이 아직 공식적으로 하달되지 않았다. 그가 돌아가서 자랑하기 시작했지만, 그가 자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예배에서 엄숙하게 교제하다가 교제 중에 갑자기 아무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을 했다. “하나님의 사역이 오늘에 이르러 각 단계가 완료되었고,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다음 달부터 복음을 확장해야 하니, 우리가 복음팀을 구성해야 합니다. 복음팀은 어떻게 구성할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세부 사항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생각했다. ‘저 말은 어디에서 나온 거지? 상부에서 사역지침을 내려 주지도 않았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알았을까? 선견지명이 있군!’ 이는 그를 숭배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즉시 달라졌다. 그는 그저 복음팀을 구성한다고만 말했을 뿐, 그 후에는 어떤 구체적인 사역도 하지 않고, 그저 공허한 구호만 외쳤다. 물론 그는 자신만의 목적이 있었기에 공허한 구호를 외친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숭배하도록 자신을 과시한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부의 사역지침이 내려왔고, 형제자매들은 이를 보고 매우 놀라며 말했다. “정말 대단해요! 선지자 아닌가요? 어떻게 그걸 알았죠? 당신은 정말 우리보다 진리를 더 깨달았고, 우리보다 분량이 크네요. 우리는 분량이 너무 작아서, 복음을 전할 때가 되어 당신이 얘기했는데도 둔해서 깨닫지 못했어요. 보세요, 당신이 교제한 내용이 상부의 사역지침과 일치하지 않습니까? 사전 논의도 없었는데 일치하다니, 검증이 되었군요.” 이 일을 통해 다들 그를 더 숭배하게 되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수준의 숭배가 아니라 무척 고분고분하여 거의 무릎 꿇고 절을 할 정도였다. 이 일은 일반인이 모른다. 만약 그가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있다. 이렇게 명백한 일을 그는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기만했다. 이런 행동 방식은 기이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어째서 이렇게 속이겠느냐? 어째서 이런 행위와 행동 방식이 있을 수 있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대체 어떤 생각을 한 것이겠느냐?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다른 부류로 보고,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주기를 원했다. 이것이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하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일 처리가 역겹고, 염치를 모른다. 이는 기이함에 해당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기이할 뿐만 아니라 조금은 역겹기도 하다.
적그리스도 중 어떤 부류의 경우, 아무도 그가 틀린 말을 하는 것을 듣거나 그릇된 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모두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옳다고 여기고 동조한다. 그는 늘 미소를 띠고 보살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누구도 책망하거나 훈계하지 않는다. 누군가 그릇된 일을 해도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포용한다. 교회에서 행정 법령을 거스르고, 방해하고 교란하며,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이 있어도 처분을 내리는 법이 없다. 처분을 내리지 않는 이유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겠느냐, 아니면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이겠느냐? 둘 다 아니다. 그는 볼 수 있고 분별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이 사람들을 정리하고 내보내 일단 교회가 평온해지면, 모두가 정직한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니, 나를 분별하기도 쉬울 거야. 그럼 나는 아마 교회에서 자리를 잡을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들을 남겨 두어 악행을 저지르는 자는 계속 악행을 저지르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계속 거짓말을 하며, 교란하는 자는 계속 교란하게 한다. 교회가 안정을 찾지 못할 정도로 교란하면 그의 지위는 지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누군가를 출교하거나 처분을 내리거나 격리하거나 교체하자는 말이 나오면 그는 어떻게 말하겠느냐?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결점이나 패괴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누군들 실수하지 않겠어요? 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형제자매들이 곰곰이 생각한 후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과오가 있거나 우매하고 무지해도 포용하겠지만, 악인을 포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악인이니까요.”라고 하면,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어째서 악인입니까? 어쩌다 한 번 모진 말을 하는 것을 두고 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살인이며 방화를 하는 자들이 바로 악인이지요.” 사실, 적그리스도는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겠느냐? ‘그가 악인이라고? 그가 나보다 악할까? 너는 내가 한 일을 보지 못했고,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지 못해. 만약 알게 된다면 어떻게든 나를 정리해 내보내려 하겠지? 그를 처리하겠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처분을 내리지 못하게 할 거야. 누가 처분을 내리면, 내가 처분을 내린 사람에게 화를 내고 가만히 있지 않겠어! 누가 그를 처분하면 내가 처분을 내린 사람을 출교시킬 거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입으로 그렇게 말하겠느냐?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먼저 상대를 달래고 상황을 진정시켜 자신에게 그 교회를 이끌고 여러 세력의 균형을 유지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그 교회에 그가 없으면 안 된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의 지위가 공고해지지 않겠느냐? 그의 지위가 공고해지면 그의 밥줄도 지킬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것을 기이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은 이 부류의 사람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는 진실을 말하는 법이 없고, 가볍게 행동하지도 않는다. 상부에서 뭔가를 시키면 대충 과정은 밟는다. 교부해야 하는 책이 있으면 교부하고, 일주일에 몇 번씩 꼬박꼬박 예배도 드린다. 예배 시간에 교제할 때는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 일도 없다. 표면적으로 매우 완벽하고 모난 데가 없어서 누구도 그의 허점을 찾지 못한다. 그러나 너희가 분별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다. 즉, 그는 악인에게 처분을 내리는 법이 없고, 오히려 악인을 보호하고 일관되게 감싸 주며 지켜 준다는 것이다. 기이하지 않으냐? 여기에서 그의 기이한 모습은 무엇이며, 주안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반드시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는 절대 진실한 말을 하지 않고, 항상 거짓말로 하나님 집을 기만한다. 악인이 악행을 저질러도 처분을 내리지 않고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며, 인내와 포용을 이야기한다. 그가 이런 일을 하는 출발점은 무엇이겠느냐? 진짜로 사람들이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단점을 보완하며, 서로를 포용하게 하려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의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자신의 세력과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다. 그는 악인을 정리해 내보내면 다음에 정리될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래서 그는 악인을 남겨 두어야 한다. 악인을 남겨 두면 그의 지위를 지킬 수 있지만, 악인을 정리해 내보내면 그는 끝장이 난다. 악인은 그의 보호막이자 총알받이이다. 그러므로 누가 악인을 폭로하거나 악인을 정리해야 한다고 해도,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그 사람은 아직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봉헌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아직은 힘을 쓸 수 있어요!”라며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악인을 위해 변호한다. 일반적으로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그가 마음속으로 과연 어떤 나쁜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분별해 내지 못한다.
일 처리를 기이하게 하여 너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적그리스도가 또 있느냐? 누가 말해 보아라. (복음팀의 책임자인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복음을 전해 매달 사람을 몇 명씩 얻었는데, 그중 일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자 적그리스도는 사역지침을 꺼내 앞뒤 내용은 다 잘라먹고 한 부분만 왜곡해서 설명하며 “복음을 전할 때는 반드시 종파 사람을 위주로 해야 합니다. 이방인은 부차적으로 해야 하고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면 그것은 사역지침을 심각하게 어기는 것입니다.”라고 했어요. 그는 또 <진리를 행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경고>라는 하나님 말씀을 들먹이며 이런 행위를 해부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 자매 같은 사람이 책임자가 되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으며 투표를 하자고 했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하나님을 믿은 지 1~2년 된 새 신자들이 대부분이어서 분별을 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역지침을 어기는 것은 매우 심각한 성질의 문제라 여겨 그 자매를 교체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 당시 자매는 매우 소극적이었습니다. 적그리스도에 의해 해부되고 정죄된 후에는 자신은 적그리스도이니 분명 하나님에 의해 도태될 것이라고 생각해 무척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이 밖에도 그 적그리스도는 상부의 설교 교제를 내려보내지 않아 저희가 듣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는 상부의 교제는 매우 엄하기에 새 신자인 데다가 분량도 작은 저희가 그걸 들으면 관념이 생길 거라고 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저희를 잘 생각해 주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저희가 상부의 설교를 듣고 그를 분별하게 되면 저희를 통제할 방도가 없어지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사람을 괴롭히고 속여 사람들이 그의 일 처리가 매우 합리적이고 당연하며, 전부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을 따른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 사건은 기이하다고 할 수 있다. 적그리스도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일관된 행위는 다 같으며, 조금의 차이도 없다. 무슨 일을 하든 그들의 속셈이나 목적 또한 동일하다. 이것이 적그리스도가 곧 마귀이자 악령임을 증명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적그리스도 같은 마귀와 악령의 기이한 일 처리를 묘사하기에 매우 적절하며, 전혀 과하지 않다.
이러한 예를 든 후, 너희도 식견을 좀 키우고, 적그리스도의 기이한 일 처리에 대해 조금은 분별이 생기지 않았느냐? 일 처리가 기이한 것에는 차마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의도와 동기가 있다. 이는 정상인의 행동이 아니며, 정직한 사람의 행동도 아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행동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 그의 행동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겠느냐?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겠느냐? 그는 교회의 사역을 방해하고 망치며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거나 하나님 집의 사역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하는 것은 교회의 사역이 아니다. 그는 그저 교회 사역을 한다는 기치를 들고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지키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이익이자 사탄의 이익이다. 너희에게 다른 예는 없느냐? (2015년, 상부에서 사역지침이 내려왔습니다. ‘각성자’의 글을 통해 교제하며 거짓 리더를 분별하고, 참교회와 거짓 교회를 분별하라는 것이었지요. 교회에서 교체된 지 얼마 안 된 한 리더가 저희는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짧고 분량도 작아 상부의 사역지침을 너무 겉핥기 식으로만 이해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행사는 측량할 수 없고, 상부의 지침에도 깊은 뜻이 있을 거라고요. 그는 또 말했습니다.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측면의 진리는 예전에 상부에서 많이 교제했어요.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했죠. 단순히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기 위해서라면, 또 사역지침을 내려보낼 필요가 있나요?” 그 후, 그는 또 과거 상부의 사역지침과 설교 중에서 일부만 왜곡 해석하고는, 이를 몇만 자의 자료로 정리해 형제자매들을 미혹하고, ‘각성자’를 분별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 저희는 미혹되어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것을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사람은 적그리스도로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이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면서 그의 악행을 발견하고 그를 분별해 낼까 봐 일부러 저희가 ‘각성자’를 분별하도록 오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행위는 관심 돌리기이자 성동격서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모두가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이 수법이 매우 익숙하지 않으냐? 큰 붉은 용은 통치가 위태로워지는 순간, 즉 정치 체계 내부에 혼란이 생기거나 국민들이 파업이나 반란을 벌일 때, 바로 ‘시선 돌리기’라는 수법을 사용한다. 이는 큰 붉은 용이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다. 위기가 생기기만 하면, 큰 붉은 용은 전쟁의 공포를 조성해 사람들이 애국하게 만든다. 그다음에는 계속해서 항전 영화, 애국 영화 같은 것들을 상영하거나 가짜 뉴스를 퍼트려 민족 감정을 선동함으로써 시선을 돌린다. 큰 붉은 용이 이러한 짓들을 하는 데에는 다 의도가 있으며, 그 배후에는 사람들에게 밝힐 수 없는 목적이 있다. 이를 가리켜 행위가 기이하다고 한다. 적그리스도 배후의 조상은 누구겠느냐? 바로 큰 붉은 용과 마귀이다. 그들의 일 처리 성질은 마치 서로 미리 짜기라도 한 듯 완전히 똑같다. 적그리스도의 음모와 수법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그의 조상인 마귀 사탄이 전수해 준 것이다. 그의 내면에는 사탄이 살고 있다. 그래서 일 처리를 기이하게 하는 것은 그에게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이는 그가 적그리스도의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 준다.
(하나님, 제가 한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적그리스도 사건은 지진구(冀晉區)에서 발생했습니다. 대략 2012년 봄에 안(安) 아무개라는 적그리스도가 있었는데, 그는 각 교회에 숱한 궤변을 퍼트렸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땅을 떠나기 전에 가장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소책자를 써서 사사로이 각 교회에 배포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땅을 떠나기 전에 가장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떠난 후, 하나님 선민들이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의 말을 듣는지 여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고, 지금은 단지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의 설교와 사역지침만 보면 된다고, 그것으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을 대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형제자매가 미혹되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이루고자 했던 목적이었지요. 적그리스도의 음험함은 바로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을 증거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떠나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기를 포기하게 한 점입니다.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땅을 떠나기 전에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시는지조차 다 알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를 매우 우러러보고 숭배하게 되었지요.) 그는 왜 성령에게 쓰임 받는 사람을 높였겠느냐? 성령에게 쓰임 받는 사람도 사람이고, 그 또한 사람이다. 그가 성령에게 쓰임 받는 사람을 높이는 것은 사실상 사람들이 그를 숭배하고 높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목적이다. 그가 한 말이 옳은지 그른지만을 들어서는 안 된다. 그가 한 말이 어떤 결과에 이르고,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지를 봐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그가 성령에게 쓰임 받는 사람을 높이는 목적은 사실 그 자신을 높이기 위함이며, 그의 목적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성령에게 쓰임 받는 사람을 높이면 분명 모두가 불만이 없을 것이고, 이렇게 하면 다들 그에게 동조하고 그를 높이게 되겠지만, 그가 직접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면 사람들이 그를 폭로하고 분별하고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성령에게 쓰임 받는 사람을 높임으로써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음험함이다. 적그리스도 안 아무개는 일 처리가 매우 기이하고, 매우 쉽게 사람을 미혹했다. 이는 전형적인 적그리스도 사건이다. 하나님 선민은 이 적그리스도 사례에서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적그리스도의 기이한 점이 무엇인지, 그가 흔히 어떤 방식과 수법으로 사람을 미혹하는 결과에 이르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면,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누가 또 예를 들어 보아라.
(하나님, 저도 적그리스도의 사례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적그리스도 사건은 허난(河南) 대교구에서 발생했습니다. 2011년경, 적그리스도 위(餘) 아무개는 교체된 거짓 리더였는데, 약간의 은사와 사역 경험이 있었기에 교회에서 그녀에게 정리 사역을 맡겼습니다. 그 당시 상부에서는 사역지침을 하나 내려보내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철저히 폭로하고 제거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지위를 좋아하는 위 아무개는 그 기회를 빌려 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녀는 사역지침을 시행한다는 기치 아래, 끊임없이 형제자매들과 교제하며 저희가 성령 역사의 흐름을 따르면서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데 중점을 두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원칙은 교제하지 않았고, 저희가 리더 일꾼에게만 시선을 집중하게 했습니다. 매번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녀는 형제자매에게 리더 일꾼의 태도를 말하게 했고, 형제자매가 말한 후에는 리더 일꾼의 사역에 드러난 몇몇 착오와 패괴 성품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 곧바로 그들을 거짓 리더로 규정하고 교체했습니다. 그 후에도 끊임없이 형제자매들에게 그녀가 그 거짓 리더와 거짓 일꾼을 어떻게 제거했는지 증거하여 모두 그녀가 분별이 있고 업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했습니다. 사실 그녀는 이 리더 일꾼들을 제거함으로써 재기할 기회를 얻고, 계속해서 리더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은 위 아무개에게 미혹되어 리더 일꾼의 패괴 표출과 사역 착오를 보고는 그들이 거짓 리더가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의 각급 리더에게도 의심을 품게 되어 리더 일꾼의 사역에 정상적으로 협력하지 못했습니다. 분량이 작은 많은 리더 일꾼 또한 속박을 당하였으며, 소극적이고 경계하는 내적 상태로 살면서 본분을 정상적으로 이행하지 못해 교회에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이 적그리스도를 숭배하였고, 십여 곳의 교회가 이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고 통제되었습니다. 이 적그리스도가 드러난 후에도 몇몇 사람들은 그녀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녀가 교회 사역을 수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위해 분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미혹된 형제자매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느냐? (교제와 도움으로, 일부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고 구출되었지만, 일부 사람들은 아무리 교제해도 고집을 꺾지 않고 단호히 적그리스도를 따르려 해서 도태되었습니다.)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게 되지 않았느냐? (다들 어느 정도는 분별력이 생겼습니다.) 고집을 꺾지 않는 나머지 사람들은 멸망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를 따른 결말이다.
앞에서 우리는 일 처리를 기이하게 하는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에 대해 교제했다. 이제 정리해 보자. 적그리스도의 이런 행위는 어떤 본질과 성품을 드러내느냐? (사악함을 드러냅니다.) 사악함을 위주로 하는 성품이다. 그렇다면 성품이 사악한 사람은 언제나 일 처리가 기이하며, 일 처리가 기이한 사람의 성품은 모두 매우 사악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추측한 것이겠느냐?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추측한 것 같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성품이 사악한 사람은 보통 매우 기이하게 일을 처리한다. 일 처리를 기이하게 하는 적그리스도의 이 본성 본질은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분명히 마귀 사탄과 동일하다. 적그리스도가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를 보면 마귀 사탄이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를 알 수 있다. 진짜 마귀 사탄, 큰 붉은 용의 일 처리는 그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일개 적그리스도의 일 처리조차 이렇게 기이하고 수법이 고명하며 말에 빈틈이 없어 아무도 허점을 찾거나 약점을 잡지 못하는데, 마귀 사탄은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일 처리를 기이하게 하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때, 일반적으로 만약 지위가 없는 사람이 평소에 남들과 소통하거나 마음을 나누는 일이 거의 없고, 일 처리에 투명성이 없으며, 자신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일을 하는 의도는 무엇인지 남들이 모르게 하고 싶어 한다면, 자신을 아주 깊이 숨기고 단단히 포장한다면, 이러한 사람들이 말하거나 행동할 때도 어느 정도 기이한 성질이 있지 않겠느냐? 이 부류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로 규정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분명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일 것이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이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이의 의견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나아가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면, 지위가 생겼을 때 틀림없이 적그리스도가 될 것이다. 이것은 시간문제이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사악한 성품을 지니고 있고, 한때 적그리스도의 길을 걸었으며, 적그리스도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해 보자. 그들이 책망과 훈계를 받은 후에 회개하여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이 여태까지 걷던 길을 포기할 수 있으며, 되돌아설 수 있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면 그 결과는 어떻겠느냐? 그러면 적그리스도의 길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기 쉬워지며, 구원받을 희망도 생기게 된다. 이제까지 적그리스도의 기이한 일 처리 모습에 관해 이야기했다. 다음에는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모습을 다루겠다.
2.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남들에게 순종을 강요하는 적그리스도를 해부하다
적그리스도는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남들과 교제하거나 상의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게다가 남들에게 순종을 강요한다. 적그리스도는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안배를 하든,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남들과 교제하지 않으며, 남들과 합의하지 않고,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본분 이행 시 실행해야 하는 원칙을 구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왜 이렇게 하는지 사람들이 이해하게 하지도 않아 사람들은 흐리멍덩한 채 그의 말을 따라야만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해하지 못해 그에게 질문하려 하면, 그는 교제하기 싫어하고 설명하기도 싫어한다. 그는 이 일을 어떤 상태로 통제하고 싶어 하겠느냐? 아무도 내막을 알지 못하게 하고, 어느 누구도 알 권리가 없으며,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상태이다. 그가 옳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끝까지 관철해야 하며, 다른 사람은 참견할 권리가 없고, 그와 협력할 자격은 더더욱 없다. 오직 따르고 순종하기만 해야 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저를 리더로 선출했으니 여러분은 제 소관 안에 있고 제 말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제 말을 듣지 않을 거라면 저를 뽑지 말아야 했어요. 저를 뽑았으니 제 말을 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할지는 제가 결정합니다!” 그의 시각에서 볼 때, 형제자매와 그는 어떤 관계이겠느냐? 그는 명령을 내리는 자이고, 형제자매는 옳고 그름을 분석하거나 질문을 해서는 안 되며, 그를 질책하고 분별하거나 추궁하고 의혹을 품어서도 안 된다. 이런 것들을 모두 하면 안 된다. 그가 방안, 의견, 방법을 제시하기만 하면, 모두가 손뼉 치며 찬성해야지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 이는 강제성이 있지 않으냐? 이런 수단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런 성품은 무엇이겠느냐? (흉악한 성품입니다.)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말의 표면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독단’은 바로 한 사람이 결단을 내리는 것이며,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다.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바로 한 사람이 단독으로 판단과 결단을 한 후, 모두가 이를 집행해야 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이 다른 의견이나 견해를 가져서는 안 되며, 더 나아가 질문조차 해서도 안 된다.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바로 일이 닥쳤을 때 그가 혼자 고민하고 생각해서 어떻게 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며, 주변 사람을 무시하고 남몰래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하는지, 다른 사람들 심지어 그의 파트너, 동역자, 윗선 리더조차도 간섭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일관된 방식과 방법은 바로 어떤 일이 닥치든 혼자 마음속으로 고민하고,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면서도 절대 다른 사람과 상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만, 그가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째서 아무도 모르겠느냐? 그가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건 말하기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냐? 이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네가 알려 주지 않는 것이다. 그는 혼자서 일을 하려 하며, 그가 어떻게 할지는 자신만의 계산이 있다. 그는 무엇을 계산하겠느냐? 그는 자신의 이익, 지위, 명리, 명성과 같은 것들을 위주로 계산한다. 그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지위와 명예가 손상을 입지 않을지, 어떻게 해야 남들이 간파하지 못할지를 고민한다. 그중 핵심은 어떻게 해야 상부를 속여 결국에는 그에게 유리하고, 남들이 아무도 허점을 찾아내지 못하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만약 잠깐의 부주의로 말을 잘못해서 모두가 나를 꿰뚫어 봤는데, 어떤 사람이 쓸데없이 입을 놀려 상부에 이 일을 보고한다면, 상부에서 나를 교체해서 자리를 지키지 못할지도 몰라. 또한, 내가 항상 다른 사람과 교제하면, 내 이 보잘것없는 능력을 다른 사람이 간파하지 않겠어? 다른 사람이 나를 우습게 보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만약 정말로 다른 사람이 간파한다면 이는 좋은 일이겠느냐, 나쁜 일이겠느냐? 사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과 정직한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간파해서 체면과 명예가 깎이는 것은 별것 아니다. 마치 이런 일들에 대해 별다른 느낌이 없고 별로 뚜렷한 의식이 없는 것처럼 이런 일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정반대이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자신의 지위, 그리고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시각과 태도를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네가 그에게 속마음과 진실한 말을 하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나 어렵다. 심지어 아무리 많은 혜택을 주어도 너에게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그에게 자신의 사생활이나 비밀을 말하게 하려면, 그건 더 어렵다. 그의 목숨을 빼앗아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어떤 본성이겠느냐? 이런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이런 것을 두고 “강산은 쉽게 변해도 본성은 바뀌기 어렵다.”라고 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의 신분, 지위, 체면, 그리고 그의 권력을 수호할 수 있는 이런 것들을 특히나 중시한다. 네가 그와 교제하면서 “당신이 교회의 사역을 할 때, 외부의 일이든 아니면 내부의 행정 법령이나 인원 조정이든, 모든 일을 다 형제자매와 교제해야 해요. 협력하는 법을 배우는 첫걸음은 바로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랍니다. 교제는 잡담이 아니고, 단순히 자기 내면이 어떻게 소극적이고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하는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내면의 소극적인 내적 상태와 거역하는 내적 상태를 분출하여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면 안 됩니다. 주로 어떻게 하나님 말씀 속에서 원칙을 찾고 진리를 깨달을지를 교제하는 거예요.”라고 아무리 그에게 진리를 교제해도 그를 움직이게 하지 못하고, 그의 일 처리나 처신의 원칙과 방향조차 바꾸게 하지 못한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가볍게 말하면 강퍅함이고, 심하게 말하면 흉악함이다. 사실 흉악함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생각해 보아라. 늑대가 입에 양을 물고 있을 때는 맛있는 먹잇감이 입안에 있기 때문에 네가 늑대에게 “토끼를 줄 테니 양을 놔주는 것에 동의하겠느냐?”라고 상의해 봤자, 늑대는 동의하지 않는다. 네가 “소 한 마리를 줄 테니 동의하겠느냐?”라고 해도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늑대는 먼저 양을 먹고, 그다음에 소를 먹으려 할 것이다. 한 마리만 먹는 것으로는 안 되고, 늑대는 둘 다 먹으려 한다. 이는 무슨 성품이겠느냐? (탐욕스럽기 그지없고 흉악하기 그지없는 성품입니다.) 너무 흉악하다!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의 흉악하기 그지없는 이런 성품에 대해서는, 네가 진리를 교제하고, 책망과 훈계를 하고, 또는 타일러 이끌어도 다 소용이 없다.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지위에 대한 추구와 사람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을 전혀 바꿀 수 없다. 네가 더 높은 지위와 이익으로 그를 매료시키지 않는 한, 그에게 있어 입에 들어온 기름진 먹잇감은 절대 놓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절대 놓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느냐? 바로 그가 일단 지위를 얻으면 그 기회를 통해 있는 힘껏 자신을 연기하고 과시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무엇을 과시하겠느냐? 자신의 다양한 특기와 은사, 자신의 출신, 학력, 신분, 그리고 사회적 지위이다. 자기가 얼마나 유능하고 재능이 있는지, 얼마나 남을 우롱하고 가지고 놀 수 있는지, 얼마나 남을 잘 부릴 수 있는지를 떠벌리고 자랑한다. 진리와 분별이 없는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그가 매우 대단하다고 생각해, 자신들이 그보다 못함을 부끄러워하며 기꺼이 그의 통제를 받는다.
일부 적그리스도는 특히 교활하다. 그들은 속내가 매우 깊으며, 최고의 사탄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경우에도 쉽게 입을 열어 말하지 않으며, 어떤 일이 닥쳐도 쉽게 견해를 밝히지 않고, 어쩔 수 없을 때까지 절대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그저 각각의 사람들의 동태를 주목하고 관찰한다. 마치 말을 하고 행동을 하기 전에 눈앞의 사람들을 모두 분명히 살펴보고 통찰하는 것이 그의 목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는 먼저 누가 자신의 사냥감이고 자신의 조수가 될 수 있는지, 누가 자신이 경계해야 하는 대상인 ‘정적(政敵)’인지를 파악하려 한다. 그는 때로는 말을 하지 않고 견해를 밝히지 않으며 침묵을 지키지만, 마음속으로는 궁리하고 계산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계략에 능하고 쉽게 입을 열어 말하지 않는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은 매우 음흉하지 않으냐? 그가 쉽게 입을 열지 않는데, 네가 어떻게 그를 분별하겠느냐? 네가 쉽사리 그를 꿰뚫어 볼 수 있겠느냐? 너무 어렵다. 이런 사람의 마음은 완전히 사탄 철학으로 가득 차 있다. 기이하지 않으냐? 적그리스도는 만약 자신이 늘 말하기를 좋아하고, 늘 자신의 관점을 발표해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것을 좋아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꿰뚫어 보게 될 것이며, 그를 깊이가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해 존중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사람들 마음속에 있던 그의 고귀한 지위를 잃게 되어 그가 그다지도 하찮고, 무지하며, 평범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교회에서 다른 사람이 늘 자기가 소극적이라고, 하나님을 거역했다고, 어제 어떤 일을 잘못했다고, 오늘 또 정직한 사람이 되지 못해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다고 적나라하게 털어놓는 것을 보면, 그들이 어리석고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절대 그런 일을 말하지 않으며, 마음속 깊이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이 평소에 말수가 적은 이유는 바로 자질이 부족하고 머리가 단순해 생각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은 이런 이유가 아니라 성품에 문제가 있어서 말수가 적은 것이다. 그는 사람을 만나면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무슨 일을 말하든 그는 쉽게 관점을 밝히지 않는다. 그는 어째서 관점을 밝히지 않는 것이겠느냐? 무엇보다 먼저 그가 분명 진리가 없어 어떤 일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단 말을 하면 실수를 하게 되고, 남들이 자신을 꿰뚫어 보게 되어 자신을 무시할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침묵하는 척하고, 깊이 있는 척하여 남들이 자신을 짐작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이 뛰어나고 평범한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느끼게 한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감히 그를 무시하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의 침착하고 차분한 겉모습을 보고 그를 우러러보게 되고, 전혀 그를 소홀히 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기이하고 사악한 점이다. 그는 자기 관점을 쉽게 밝히지 않는다. 그의 관점이 대부분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전부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며, 전혀 공개 석상에 내놓을 만한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침묵을 지킨다. 그도 마음속으로는 빛 비춤을 얻어 그것을 분출함으로써 남들의 우러름을 받고 싶어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것이 없다. 그래서 진리를 교제할 때 그가 침묵하고 숨는 것이다. 마치 귀신처럼 어두운 구석에 숨어 기회를 기다리다가 다른 사람이 빛 비춤을 이야기하는 것을 발견하면 방법을 마련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여 자신을 자랑한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교활하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두각을 나타내고 남보다 뛰어나야 마음이 즐겁다. 만약 기회가 없다면 그는 우선 숨어 있으며, 쉽게 관점을 밝히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교활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 집에서 설교를 한 편 내려보냈을 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 같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상부의 교제 같다고 한다고 한다. 비교적 순진한 사람은 마음속에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말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의견이 있어도 깊이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관찰하려 한다. 어떤 주장이 많은지 보고 그 주장을 따라가려고 준비하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전혀 꿰뚫어 보지 못한다. 그렇게 약삭빠르고 간사한 그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겠느냐? 참된 분별을 가질 수 있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무엇을 꿰뚫어 볼 수 있겠느냐? 그는 아무것도 꿰뚫어 보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면서도 깊이 있는 척하지만, 사실 그의 내면에는 분별이 별로 없어서 늘 다른 사람이 자신을 꿰뚫어 볼까 두려워한다. 이런 일에 직면했을 때, 올바른 마음가짐은 “이 일은 우리가 꿰뚫어 보지 못해요. 알지 못하면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해요. 잘못 말하면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저는 상부에서 어떻게 얘기하는지 기다려 보겠습니다.”이다. 이것이 진실한 말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는 어째서 이렇게 간단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겠느냐? 다른 사람이 자신을 꿰뚫어 보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주제를 알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보기를 바라는 비열한 속셈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가장 역겹지 않으냐? 모두가 이야기를 마친 후, 그는 대부분의 사람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고, 소수의 사람만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하나님 말씀이 아닌 것 같다고 느끼지만,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은 제가 함부로 규정할 수 없으니, 소수가 다수 의견에 따르도록 하죠.” 그는 자신이 꿰뚫어 보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고, 이런 표현을 써서 위장하고 은폐한다. 그러고는 자신이 매우 지혜롭고 수단이 아주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며칠 후, 하나님 집에서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통지하면, 그는 즉시 “거봐요. 제가 뭐랬어요? 저는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진작에 알았어요.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알아보지 못한 여러분이 나약해질까 봐 말할 수 없었어요. 만약 제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면, 그건 여러분을 정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얼마나 상처받겠어요? 여러분이 나약해지면, 제 마음이 편하겠어요? 그러면 리더인 제가 뭐가 되겠습니까?”라고 말한다. 정말 위장을 잘한다! 적그리스도의 말에는 모두 속셈과 목적이 있다. 입을 열어 말하기만 하면 자신을 자랑하려 하고, 자신의 공로를 과시하려 하고, 자기가 예전에 했던 좋은 일과 휘황찬란했던 과거를 과시하려 한다. 그가 입을 열어 말하기만 하면 바로 이런 일들이니, 그를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사람은 그를 숭배하고,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지나치게 음험하고 간사해 절대 자신의 단점을 말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적그리스도는 일 처리와 행위가 은밀하고, 말이 애매모호하며 대부분 헛소리이고, 어떤 일도 꿰뚫어 보지 못하며,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한다. 더 가증스러운 점은 그가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하면서 깨달은 척하려 하고, 모든 일에 다 참여하려 하며, 모든 일을 다 결단 내리려 하고, 모든 일을 결정하려 하며, 그의 주변 사람은 알 권리조차 없다는 점이다. 결국 어떤 상황이 벌어지겠느냐? 그와 협력하는 사람, 그와 함께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모두 그가 겉으로는 매우 충성을 다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그와 여러 해를 함께 한 사람도 그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꿰뚫어 보지 못하고, 또한 그가 대체 어떤 재능을 가졌는지도 알지 못한다. 일반 사람은 그를 꿰뚫어 보지 못한다. 그가 한 말은 모두 거짓말과 빈말이며, 모두 겉과 속이 다른 말이고, 사람을 속이는 말이다. 그는 무슨 일이든 다 참여하고 싶어 하고, 다 결단을 내리고 싶어 하지만, 결단을 내린 후 발생하는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으며, 그러고도 자신의 이유를 말한다. 즉, 그는 결단만 내리고 일은 다른 사람을 시키고는, 자신은 또 다른 일을 참견하러 가 버린다. 그 일의 뒷부분을 누가 지속적으로 체크하고 있는지, 실행되고 있는지, 성과는 어떤지,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방법에 대해 의견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 집의 이익이 손해를 입지는 않았는지, 형제자매가 이 일에 대해 분별이 있는지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마치 자기 일이 아니고 그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가 유일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자신을 과시할 수 있고 남들이 우러러보게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에만 관심이 있으며, 그는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사역할 때 그는 단지 명령만 내려 사람들에게 규례를 지키게 하며, 자신은 권모술수만 부리고 사람을 가지고 놀기만 하면서도 스스로 득의양양해하며 자기가 사역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사역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 선민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으며,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로막고 있고, 독립 왕국을 세우고 있다.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남들과 교제하는 법이 없고, 남들에게 순종을 강요한다.”라는 적그리스도의 이런 행위의 본질은 주로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들의 성품이 사악하고 흉악하며, 사람에 대한 통제욕이 특히 강해서 정상인의 이성적인 범주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이행하는 본분에 대한 그들의 인식, 견해, 태도는 무엇이겠느냐? 진정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과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진정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일 처리를 할 때 원칙을 구한다. 이것이 우선적으로 갖춰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는 자신이 이행하는 본분을 어떻게 이해하겠느냐? 그가 본분을 이행할 때 표출하는 것은 어떤 성품과 본질이겠느냐? 그는 높은 위치에 서서 내려다보며 아랫사람을 대한다. 일단 리더로 선출되면 그는 자신이 지위와 신분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본분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지위를 얻은 후 그는 자신이 지위와 권력을 갖추고 신분이 남들과 다르니 높은 위치에 서서 다른 사람을 내려다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생각대로 명령을 내리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본분 이행하는 기회를 빌려 자신의 감투욕을 충족시키고, 다른 사람을 강권 통치하고 이끌려는 욕망과 야심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드디어 자기 말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적그리스도는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남들과 교제하는 법이 없는 모습인데, 저희 리더는 비록 적그리스도의 성품과 표출을 지니고 있지만, 항상 저희와 교제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적그리스도가 아니란 말이냐? 적그리스도도 때로는 가장한다. 그는 모두와 교제를 한 후 각 사람의 생각을 다 알아보고 파악하여 어떤 사람들이 자신과 한마음인지, 어떤 사람들이 자신과 한마음이 아닌지를 분류한다. 그런 다음에 무슨 일이 있을 때, 그는 자기와 관계가 좋고 자신과 마음이 맞는 그 사람들에게는 이야기를 하지만, 자신과 한마음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대부분의 일을 그들에게 알리지 않으며, 심지어는 하나님 말씀 서적도 그들에게 주지 않는다. 너희는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남들과 교제하는 법이 없는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있느냐?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한 적은 분명히 있겠지만, 남들과 교제하는 법이 없는 이런 행동은 그렇게 절대적인 건 아니고, 가끔 교제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제 후에는 여전히 네가 말한 대로 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너와 교제하기는 해도 사실 나는 일찌감치 생각을 정했어. 너와의 교제는 그저 형식적인 과정일 뿐이야. 내가 일하는 원칙이 있다는 것을 너에게 알려 주는 거지. 네 주제를 내가 모를 것 같아? 결국은 너도 내 말을 듣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해야 하잖아?’ 사실 그는 마음속으로 일찌감치 생각을 정했다. 그는 ‘난 말발로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산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 아무도 말로는 날 이기지 못해. 그러니 결국에는 당연히 내 말을 들어야만 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미 계산을 다 끝내 놓은 것이다. 이런 상황이 있지 않으냐?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어쩌다가 실수로 표출하는 행동이 아니라 어떤 성품이 내면에서 통제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말과 일 처리 형식을 보면,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의 성품과 일 처리 성질을 보면, 그가 바로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 또한 형식적인 과정을 거치고, 또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다른 사람이 말하게 하며, 또 다른 사람이 일의 전말을 알게 하고, 또 하나님 말씀이 어떻게 요구하는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는 말과 주장으로 다른 사람이 자신과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최종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모든 것이 다 그가 계획해 놓은 대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음험한 부분이다. 이 또한 순종을 강요하는 것으로, 일종의 ‘부드러운’ 강요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네가 듣지 않잖아? 깨닫지 못하잖아? 내가 말해 줄게.’라고 생각한다.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이리저리 말을 빙글빙글 돌려가며 다른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돌려 한 말을 다른 사람이 듣고 “당신 말이 다 맞아요. 모두 당신 말대로 실행해야 하고, 진지하게 굴 필요도 없어요.”라고 하면, 그는 기뻐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의 말에 대한 분별이 없다. 너희는 분별이 있느냐? 이런 일이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그 속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고, 대체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것인지 당장 뭐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네가 순종을 강요당했다고 느낀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관련된 원칙을 찾거나 상부에 구해도 되고, 그와 교제해도 된다. 또 진리를 깨달은 사람과 함께 그 일에 대해 토론하고 교제해도 된다. 어떨 때는 성령이 역사하고 인도하여 네가 적그리스도나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이 제기하는 방안에, 또는 그들의 이론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들의 음모는 과연 무엇인지 알게 하기도 한다. 모두 함께 교제하다 보면 깨달을 수 있지만, 교제하지 않은 채 ‘이 일은 별로 큰 문제도 아닌걸.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자. 어쨌든 내가 주요 책임자도 아니니,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내가 책임질 일도 없고. 일이 터지면 그가 책임지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어떤 행위겠느냐? 이는 본분 이행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 행위이다. 본분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은 유다이다! 많은 사람이 권력 앞에서 결국 타협을 택하고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된다. 이는 본분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 모습이다. 네가 적그리스도를 대하든. 아니면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너에게 순종을 강요하는 사람을 대하든 네가 선택하고 고수해야 할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어떤 길을 가야 하겠느냐? 만약 자신이 한 것이 하나님 말씀 및 사역지침과 충돌하지 않고 괴리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고수해야 한다. 진리를 고수하는 것은 옳은 일이며, 하나님이 칭찬하는 일이다. 하지만 사탄, 사악한 세력, 악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타협하는 것은 배반 행위이며 악행이다. 이는 하나님이 증오하고 저주하는 행위이다. 적그리스도는 자신과 논쟁하는 사람을 만나면 늘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은 제가 결정합니다. 반드시 제 말대로 해야 해요. 일이 생기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이 말은 어떤 성품을 의미하겠느냐?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실행하는 사람이 정상적인 인성을 갖고 있겠느냐? 그는 왜 다른 사람에게 순종을 강요하려 하겠느냐? 그는 왜 일이 닥치면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것이냐? 왜 진리 실행 원칙을 확정하지 못하겠느냐? 이는 그에게 진리가 없음을 증명한다. 너희는 이 말의 문제점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행위이다. 하지만 비교적 교활한 적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자신을 분별할까 봐 두려워 모두가 찬성하고 모두가 듣기에 옳은 말을 하여 사람을 미혹하고 자신의 입지를 굳힐 수 있는 그런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어떻게 하나님 선민을 통제할지 고민한다.
적그리스도에겐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런 측면의 모습이 적지 않다.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런 행동 방식, 성품, 성질은 모든 패괴된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으며, 적그리스도는 더 말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신이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한 예를 들 수 있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은 단발이 예뻐요.”라고 했는데, 네가 “단발이 뭐가 예뻐요. 저는 긴 머리가 좋아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예요.”라고 한다면, 이는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이것은 개인의 취향이고, 정상적인 인성이다. 어떤 사람들은 안경을 쓰고 싶어서 근시가 아닌데도 안경을 쓰려고 한다. 몇몇 사람들이 “당신은 근시가 아닌데도 안경을 쓰네요. 그건 멋 부리는 거죠!”라고 논단하자, 그가 “멋 부리는 게 어때서요. 난 그냥 쓸 겁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겠느냐? 아니다. 이는 개인의 취향이다. 기껏해야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일 뿐, 성품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어쩌면 며칠 쓰다가 재미없어져 안 쓸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주로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주로 사람이 걷는 길, 사람의 성품, 그리고 일 처리 원칙 및 출발점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부부가 생활하는데 남편이 자동차를 좋아한다고 해 보자. 집에 2만 위안밖에 없는데, 남편이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20만 위안짜리 차를 사서 즐기는 바람에 끼니를 때울 수조차 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런데 남편이 차를 산 것을 아내조차 몰랐다면, 이는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한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느낌, 생각, 의견 또는 태도, 관점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일상생활에서 개인의 육적인 즐거움, 욕망, 사심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본분과 관련해서는 지위와 권력을 추구하는 야심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보자. 교회에 집이 한 채 있는데, 그 옆에 길을 하나 만들어야 했다. 길의 폭이 얼마가 되어야 적절한지는 집과 마당의 크기를 봐야 했고, 미관과 실용성을 모두 갖춰야 했다. 이 집과 마당의 면적이 비교적 커서 최소 2미터 폭의 길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책임자는 “이 일은 제가 결정했습니다. 1미터 폭의 길을 만들죠.”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 “매일 많은 사람이 드나들고, 때로는 물건을 옮기기도 해야 하는데, 1미터 폭은 절대 안 됩니다. 너무 좁아요.”라고 했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관점을 고수하며 의논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결국 길을 다 만들고 나서 보니, 너무 좁아서 집과 마당과 어울리지 않았고 실용적이지도 않아 다시 길을 만들어야 했고 재공사를 했다. 다들 그 사람을 원망했다. 사실 길을 만들기 전에 이미 누군가가 다른 의견을 제시했지만, 책임자가 동의하지 않고 자신의 관점을 고수하며 자기 뜻대로 집행하도록 강요했기에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는 왜 다른 사람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겠느냐? 다른 의견이 나왔는데도 어째서 종합적으로 고려해 올바른 방식을 찾지 못하였느냐? 만약 의논할 사람이 없다면 혼자 결정해도 괜찮지만, 지금은 상의할 사람이 있고, 게다가 더 훌륭한 의견도 나왔는데 왜 받아들이지 못하였느냐?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최소한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이 사람이 머리가 나쁜 어리석은 사람인 경우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성품이 지나치게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의 말이 아무리 옳더라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인데, 이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교만한 것이다. 바로 이렇게 간단한 일로도 사람의 성품이 드러난다. 사람이 지나치게 교만하면 이성이 없어진다. 이성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느냐? 어떤 것들이 이성이 없겠느냐? 짐승은 이성이 없다. 사람이 이성이 없다면 짐승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사람의 머릿속에는 판단력과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사람이 교만해 이지(理智)를 잃고 이성도 없다면, 짐승과 별 차이가 없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부류이며, 사람의 이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이성을 갖고 있겠느냐?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적그리스도는 더더욱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짐승만도 못하며, 그는 마귀이다. 마치 하나님이 사탄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라고 질문한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질문은 사실 매우 명확하다. 하나님은 어떤 정보를 말씀했느냐? (사탄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은 분명 뒤에 물음표가 있으니, 질문이다. “사탄”이라 했으니 호칭이 있으며, “너”가 주어이고, “어디서 왔느냐”는 문법이 정확하다. 하나님의 질문은 한 번 들으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사탄은 뭐라고 대답하였느냐?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욥 1:7)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명언이다. 사탄의 말에 이성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성이 없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다시 사탄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자, 사탄은 여전히 같은 말을 했다. 마치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탄이 한 말을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사탄의 말에 이성이 있느냐? (없습니다.) 사탄에게는 이성이 없다. 그렇다면 사탄은 진리를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사탄은 하나님의 이렇게 간단한 질문조차 이런 식으로 대답하니, 하나님이 말씀하는 진리는 더더욱 알아듣지 못한다. 적그리스도 또한 이성이 없으며, 일 처리가 기이하고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이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네가 아무리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하며, 본분을 이행할 때 원칙을 구해야 하고 사람들과 많이 교제해야 한다고 말해도, 그는 이해했다고, 알았다고 말해 놓고는 일을 할 때는 네가 그에게 했던 말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성품이다! 이런 마귀의 성품을 갖고 있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이성도 없다. 그들이 가장 이성이 없는 부분, 즉 가장 파렴치한 부분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였다.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여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느냐? 바로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하며, 하나님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인생의 바른길을 걸어 최종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고,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점점 더 좋아지게 된다. 반면 적그리스도는 어느 정도로 이성이 없겠느냐? 그는 ‘하나님, 당신께서 사람을 당신 앞으로 인도하셨으니, 그럼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신께서 사람을 택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고, 주재할 수 있으니,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신께서 사람이 당신께 순종하게 하고, 당신의 말을 듣게 하며, 당신이 행하실 때면 당신의 말을 듣도록 직접 사람들에게 지시할 수 있으니,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생각한다. 이는 이성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성이 없다는 것은 염치가 없다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너의 것이냐? 사람이 너를 따르느냐? 왜 너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너는 그저 작디작은 피조물 중의 하나일 뿐인데, 어째서 모든 것 위에 군림하려고 하느냐? 이는 이성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운 좋게 교회 리더로 선출되지만, 사실 그의 자질과 분량에 따르면 결코 그 수준에 걸맞지 않다. 이는 하나님이 높여 준 것이지만, 그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리더가 되었으니, 난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고 높아. 평범한 사람이 아닌 거지. 너희는 하나님 앞에 가서 고분고분하게 굴며 엎드려 경배하지만, 난 그럴 필요 없어. 왜냐하면 난 너희와 다르기 때문이야. 너희는 피조물이지만 난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이냐? 너 또한 육체를 가진 평범한 인간 아니냐? 네가 다른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다른 점은 바로 네가 다른 사람보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너는 염치와 이성이 없으니, 개만도 못하다. 너는 일할 때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다른 사람이 아무리 조언해도 듣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다른 점이다. 자신의 자질이 아무리 부족하고, 업무 효율이 아무리 낮아도 여전히 자신이 일반 사람보다 뛰어나고, 능력과 재주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다른 사람과 상의하여 합의할 필요가 없으며, 자신에게 모든 것을 통제할 자격이나 절대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교만해서 이성을 잃은 것 아니겠느냐?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리더가 되기 전에는 꼬리를 감추고 처신하면서 자신에겐 재주와 능력이 있고, 일에 대한 야망도 있는데 기회가 없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리더가 된 후에는 자신을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분리해 내고, 오만하게 굴기 시작한다. 꼬리가 치켜 올라가 여우 꼬리가 드러났다. 그는 자신이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 집은 사람을 잘못 뽑지 않았어. 난 내가 인재라고 생각해. 인재는 언젠가는 빛을 발하거든. 어때? 하나님 눈에 띄었잖아?’라고 생각한다.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너는 그저 평범한 피조물 중 하나일 뿐이다. 네가 아무리 큰 은사와 재능이 있다고 해도 너의 패괴 성품은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만약 네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해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려 하고, 모든 것 위에 군림하려 한다면, 네가 틀렸다. 이런 착각 때문에 네가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남들과 교제하거나 상의하지 않으며, 게다가 다른 사람이 너에게 순종하고 네 말을 따르는 것을 누리고 싶어 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점은 무엇이겠느냐? (잘못된 위치에 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왜 늘 잘못된 위치에 서겠느냐? 너희가 의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는데, 바로 그의 인성 속에는 다른 사람보다 뭔가 한 가지 더 많다는 사실이다. 그는 늘 일종의 착각을 하고 있다. 이런 착각은 어디에서 온 것이겠느냐? 하나님이 준 것이 아니라 사탄이 준 것이다. 즉, 그가 한 이 모든 일, 그가 표출하고 나타낸 이 모든 것들이 정상 인성의 범주 안에 있는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의 힘이 그가 그렇게 하도록 몰아세운 것이다. 왜 그의 일 처리가 기이하고, 그의 야심과 욕망이 통제 불가능하다고 하겠느냐? 사람을 통제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은 이미 한계점을 넘어섰다. 한계점을 넘어섰다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성과 염치를 뛰어넘어서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네가 아래로 누르면 잠시 내려가는 듯하지만, 손을 떼면 다시 튀어 오르는 스프링처럼 말이다. 이는 욕망의 불길이 마음을 불태우고, 사도에 빠진 것 아니겠느냐? 이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고 있는 교회는 교회라고 부를 수 없다.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느낀 바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는 평온하고 즐거우며 모두가 발전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암담한 기운이 감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몹시 초조하고 불안하며, 마치 뭔가 큰 화가 닥칠 것처럼 안정되지 않는 느낌을 받는다. 적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은 어떤 분위기를 조성해 사람의 마음을 혼탁하게 하며,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게 한다. 또한, 적그리스도에게 오래 미혹되면,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비정상적이게 된다. 마치 종교를 믿는 사람처럼,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을 믿지만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다. 이 밖에도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으면 교회가 분열되고 혼란해지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배에서 즐거움과 해방을 얻지 못해 교회를 떠나 집에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게 된다는 점이다. 교회에 성령 역사가 있을 때는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모두 함께 같은 곳을 향해 노력한다. 그런 분위기는 평온하고 안정적인 편이며, 초조한 데가 없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일만 했다 하면 초조하고 기이한 분위기를 가져온다. 그가 훼방 놓으면 파벌로 나뉘며, 사람들이 서로 경계하고 판단하고 공격하고 뒤에서 헐뜯는다. 그러니 적그리스도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겠느냐? 사탄의 심부름꾼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적그리스도가 일을 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야기한다. 첫째, 형제자매들이 서로 판단하고 시기하며 경계하게 된다. 둘째, 남녀 간에 선이 없어져 점점 난잡하게 뒤엉키게 된다. 셋째, 사람의 마음속 이상(異象)이 모호해지며, 진리 실행에 집중하지 않고,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 원칙에 맞는 것인지도 알지 못하게 된다. 기존에 알고 있던 도리도 전부 사라지고 생각이 혼탁해져서 적그리스도를 따라 함부로 행동하게 되며, 표면적으로 행하고 뛰어다니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적그리스도를 따르면 정말 길이 없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본분을 이행한다면 얼마나 누림이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일단 교회에서 권력을 잡으면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며, 형제자매들의 내면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데 의욕을 잃게 된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다수 형제자매가 하나님께 도태되지 않겠느냐?
오늘 적그리스도의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모습을 해부하는 한편, 또 한편으로는 이런 모습을 해부함으로써 자신이 적그리스도가 아니더라도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적그리스도의 성질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 ‘일 처리할 때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정상적인 인성의 모습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이는 분명히 패괴 성품의 표출이다. 네가 아무리 지위가 높고, 여러 본분을 이행할 수 있어도, 남들과 교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진리 원칙을 지킨 것이다. 이는 마땅히 갖춰야 하는 최소한의 것이다. 왜 남들과 교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겠느냐? 네가 남들과 교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이는 네가 지위를 밥벌이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고, 지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너의 지위가 얼마나 높든, 너는 본분을 이행하는 것일 뿐이며,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지 결코 지위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문제에 부딪혔을 때 네가 남들과 교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평범한 형제자매든 아니면 너와 협력하는 사람이든, 네가 그와 함께 구하고 교제할 수 있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너에게 진리를 구하고 진리에 순종하는 태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선적으로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너의 태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본분 이행은 너의 직책이며, 사역을 하고 진리를 구하는 것은 네가 가야 할 길이다. 네가 내린 결단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순종할 수 있을지, 또는 어떻게 순종하는지는 다른 사람의 일이지만, 너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지, 본분 이행이 합격할 수 있을지는 너의 일이다. 그러니 너는 반드시 본분 이행의 원칙을 이해해야 한다. 어떤 한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원칙에 순종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자신이 진리 원칙을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모두와 교제하여 합의를 이루었으며, 형제자매들이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몇몇 사람이 인정하지 않고 방해하려 한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이때는 소수가 다수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 다수의 사람이 합의했는데, 너는 왜 방해하는 것이냐? 파괴하려는 것이냐? 네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모두가 분별하도록 할 수도 있다. 모두가 너의 의견이 원칙에 부합하지 않으며 성립될 수 없다고 한다면, 자신의 관점을 내려놓아야 한다.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마라. 이 일을 대하는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옳은 것은 고수해야 하고, 그른 것은 남들에게 따르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알겠느냐? 사실, 적그리스도는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런 모습과 행동 방식이 있기 전부터 이미 특정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분명 올바른 일을 하거나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분명히 옳지 않은 일과 진리에 위배되는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잘못된 결단을 내리고도 사람들에게 따르게 하는 것, 이것이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만약 옳고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고수해야 한다. 이것은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구분해야 한다. 이른바 적그리스도가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주로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원칙과 진리에 부합하지 않게 일을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맞다, 무슨 일이 닥치든, 어떤 문제를 처리하든 그는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결단을 내린다.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하면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따르고 순종하게 하려 한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일관된 행동 방식이다.
막 복음을 확장하기 시작했을 때, 어떤 사람이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을 가지고 종교계에 가서 복음을 전파했다. 종교인들은 하나님 말씀 중 비밀에 관한 해석, 이상(異象)에 관한 교제, 그리고 생명 진입과 같은 측면의 말씀을 읽고는 다들 매우 좋다고 했고, 다만 사람을 심판하고 폭로하는 일부 말씀 중 몇몇 단어가 지나치게 엄하다고 말했다. 그들이 느끼기에는 사람을 욕하는 것 같아서 받아들일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욕을 하실 수도 있나요? 이 말씀들은 기껏해야 어떤 높은 분이 쓴 거겠죠.”라고 말했다. 복음 전파 책임자는 자기에게 해결법이 있다고 했다. 나중에 그는 하나님 말씀 중에서 사람의 관념과 상상, 입맛에 맞지 않는 말씀, 사람이 읽으면 관념이 생길 우려가 있는 말씀을 모두 수정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사람의 본성을 폭로할 때 언급한 ‘음녀’, ‘창녀’, ‘나쁜 놈’ 같은 단어들과 ‘지옥에 떨어진다’, ‘유황불 못에 떨어진다’와 같은 표현을 모두 삭제했다. 요컨대, 사람이 쉽게 관념을 가질 수 있고 오해할 수 있는 말들을 모두 삭제한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 말씀 중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하고, 저주하는 표현을 모두 삭제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원래 말씀이겠느냐?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심판 사역을 할 때 선포한 말씀이겠느냐? 이 ‘노선생’은 어느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있는 연단 측면에 관한 표현과 사람의 패괴 성품 폭로에 관한 표현 중 일부 매우 엄한 표현, 특히 봉사자 시련 그 시기의 말씀을 많이 삭제했다. 나중에 종교인이 보고는 “좋네요. 이런 하나님이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라며 받아들였다. 이 노선생은 ‘내가 얼마나 똑똑한지 봐라! 하나님 말씀이 지나치게 엄한 것도 지혜롭지 못해. 그 사람들을 구슬리기도 바쁜데, 어떻게 사람들이 욕으로 오해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겠어? 이것도 지혜롭지 못해! 내가 수정을 좀 했는데, 수정한 후에는 어떻게 됐지? 종교계의 목사들도 믿기를 원하고, 많은 사람이 계속해서 받아들이고 있어. 어때? 내가 지혜롭지 않아? 똑똑하지 않아? 대단하지 않아?’라고 생각했다. 수정한 후 이런 성과를 거두자 그는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몇몇 종교인들이 교회에 들어온 후, 그들이 본 하나님 말씀은 수정된 것이며, 교회의 하나님 말씀 원본 서적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 문제를 보고했다. 이후 이 노선생이 하나님 말씀의 내용을 수정한 사실이 밝혀졌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노선생이 한 일이 어떠하냐? 다른 것은 차치하고, 이 말씀은 네가 한 말도 아니니 너에게는 수정할 권리가 없다. 설령 사람이 쓴 글이나 책이라도, 만약 네가 수정하려면 먼저 원저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원저자가 동의해야 네가 수정할 수 있고, 그가 동의하지 않으면 절대 한 글자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이것이 저자를 존중하고 독자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한다. 만약 저자가 수정할 여력이 없어 너에게 권한을 위임하며 “당신이 수정해도 됩니다. 어떻게 수정하든 다 괜찮아요. 원문의 의미에 맞추어 효과를 얻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한다면, 이런 경우 수정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저자가 권한을 위임하거나 저자의 동의를 얻은 경우에는 수정할 수 있다. 이런 행위를 뭐라고 하느냐? 명분이 있고, 처사가 적절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만약 저자도 동의하지 않았고, 너도 저자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지 않았으면서 마음대로 수정했다면, 이는 무엇이겠느냐? (제멋대로 구는 것입니다.) 이는 제멋대로 굴며,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지금 이 노선생이 수정한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원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마음, 성품,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한 데에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할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어떤 의도였는지, 어떤 성과를 얻으려 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짐작하지도 못하면서 뭘 함부로 고치는 것이냐?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은 앞뒤 말에서 어떻게 단어를 사용하고, 어떤 어조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사람들에게 그 안에 담긴 분위기, 마음, 정서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한다. 이 모든 것에는 견해와 규칙이 있다. 하나님은 생각과 지혜가 있다. 이 노선생은 무엇이라 생각했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렇게 본 것이다. 그는 ‘종교계에서 떡으로 배만 불리려는 이 사람들은 달래야 하고, 사랑과 긍휼로 대해야 해. 그렇게 엄하게 말해서는 안 돼. 엄하게 말하면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겠어? 그러면 복음을 확장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했다. 설마 하나님이 이 일을 모르겠느냐? (아십니다.) 하나님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여전히 그렇게 말씀하는 것이겠느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한다. 믿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양이고, 믿지 않으면 너는 늑대이다. 하나님 말씀이 너를 폭로하고 몇 마디 욕했다고 해서 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 네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닌 게 되고,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닌 게 되는 것이냐? 만약 네가 이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다면, 너는 바로 악인이고 마귀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교회 또한 이런 사람을 억지로 끌어들이고 달래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저를 욕하시더라도 저는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니 저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저를 때리셔도 마땅합니다. 그분께서 저를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시면, 저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저는 어리석은 사람보다 더 멍청합니다. 그분께서 저를 음녀라고 하시면, 제가 음녀 짓을 하지 않은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저는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는 가장 단순한 믿음, 인정, 수용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가장 단순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얻고자 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이 지나치게 엄하고 정곡을 찌르면, 자기가 복을 얻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 믿지 않으려 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당신이 하나님이라도 저는 믿지 않아요. 당신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당신을 따르지 않겠어요.’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빨리 꺼져라! 네가 하나님조차 인정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너를 그의 피조물이라고 인정할 수 있겠느냐? 그건 불가능하다! 하나님 말씀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믿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라. 믿지 않는다면 꺼져라. 너는 얻지 못할 것이다. 네가 믿는다면 구원받을 일말의 희망이 있다. 이것이 공평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노선생이 이렇게 생각했겠느냐? 그가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겠느냐?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그가 어리석지 않으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바로 이런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다. 그는 하나님을 매우 작고 단순하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생각이 사람 두뇌의 사고력보다 크게 뛰어나지는 않다고 여긴다. 평소에는 늘 하나님의 생각이 사람의 생각보다 높다고 말하며, 툭하면 이런 큰 도리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일이 닥치면 이 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하나님답지 못하다고 생각해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이런 말씀들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그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마침 복음을 전파할 때라, 그는 이 기회를 빌려 재빨리 하나님의 그런 말씀을 수정했다. 그러면서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결국 그의 이런 행위를 내가 어떻게 규정했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고쳤다고 규정했다. 고쳤다는 것이란 무엇이냐? 바로 멋대로 덧붙이거나 삭제하고 함부로 원래의 의미를 바꾸어 저자의 뜻을 모두 바꾸는 것이며, 저자의 초심과 의도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수정하는 것이다. 이를 고쳤다고 한다. 여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아주 간이 부었구나! 이것이 사람이 할 짓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마귀나 하는 짓이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 한 말이라도 네가 멋대로 고쳐서는 안 되며, 저자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만약 네가 수정하려고 한다면, 사전에 저자에게 통지하고 저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허락을 받은 후에야 저자의 뜻에 맞게 수정할 수 있다. 이것이 존중이다. 하나님께는 어떻겠느냐? 존중하는 것만으로 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를 잘못 인쇄해서 ‘의’라는 조사 하나만 빠져도 괜찮은지 물어봐야 한다. 만약 안 된다고 하면, 그 페이지를 다시 인쇄해야 한다. 이렇게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 그 노선생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겠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그의 눈에는 하나님이 없었고, 그는 너무 겁이 없었다. 이런 사람은 출교해야 한다.
얼마 전 또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몇몇 사람들이 또 복음을 전파해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라는 이유와 핑계를 대며 함부로 하나님 말씀을 수정하려고 했다. 이번에는 지난번보다는 조금 나았다. 지난번에는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남들과 교제하지 않고, 멋대로 함부로 하며, 하나님 말씀을 고치는데, 이번에는 상부에 물어보았다. “〇〇 민족 사람은 하나님 말씀 중 몇몇 표현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모두가 대책을 논의해 하나님 말씀 중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의 어휘와 표현 또는 몇몇 말씀을 삭제하거나 수정한 후에 그들에게 전파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에게 따로 정리된 하나님 말씀을 주는 거죠. 그러면 그들이 믿지 않겠습니까?” 보아라. 정말 대담한 사람이 있구나. 이는 무슨 행위이겠느냐? 이런 부류의 사람을 가볍게 처벌하면, 어리석고 무지하며 나이가 어리다고 치부하고, 앞으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성질을 규정한다면, 이는 사탄의 환심을 사기 위해 멋대로 하나님 말씀을 수정한 것이다. 이를 무엇이라 하겠느냐? 이는 유다의 행위이며, 매국노이고 배신자이다. 이는 주님을 팔아 영화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고치고, 하나님 말씀을 사람이 받아들이기 원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듣기 좋은 말로 바꾸어 그들의 환심을 사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지상에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해도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 아니겠느냐? 하나님 말씀의 성질이 바뀌었느냐? (바뀌지 않았습니다.) 설마 그들이 받아들여야만 하나님 말씀이 진리이고,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이 진리가 아니란 말이냐? 하나님 말씀의 성질이 이 때문에 바뀔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진리는 진리이다. 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 일부 복음 전파자들은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니 얼마나 불쌍해! 얼마나 위대하고 고상한 민족인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있겠어? 하나님 말씀을 조금 수정해서 그들이 받아들이게 해야지. 그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시고, 얼마나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데. 우리가 하나님 마음을 헤아려야 해!’라고 생각한다. 이는 가장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또 한 명의 가장하는 자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은 짓만 하고 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고쳐 처리되고 출교되었다고 진작에 말한 적이 있는데, 지금 또 어떤 사람이 고치려 한다. 이는 무슨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겠느냐? 이는 주님을 팔아 영화를 누리려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팔아 영화를 누리고 사탄의 환심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실제적이지 않다는 것이냐? 공개 석상에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냐? 네가 진리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 네가 인정하지 않으면서 왜 믿는 것이냐? 네가 진리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그렇다면 네가 하나님을 믿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러면 구원받을 수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어떤 말씀이 너의 관념과 부합하지 않든, 그는 하나님이고, 그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네가 아무리 듣기 좋게 말해도, 네가 어떻게 하든, 네가 아무리 자신을 선량하고 인자하다고 생각해도, 네가 아무리 자신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도 너 역시 사람이며, 패괴된 사람이다. 네가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고쳐 사탄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데 이런 행위는 어떠하냐? 사람들이 멸시할 것이다! 나는 예전에 하나님 말씀을 고치는 것이 어떤 성질인지를 교제했으니 지금 복음을 전파할 때는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여전히 누군가는 감히 고치고, 또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네가 말해 보아라.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 것이냐? (경시합니다.) 정말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다! 그의 마음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무게가 없다. 그는 ‘하나님 말씀이 뭐라 하든 상관없어. 내 마음대로 수정하니까. 사람의 관념과 입맛에 맞게 수정하면 더 좋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야!’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말씀을 고치는 이런 짓을 한 사람은 적그리스도로 규정할 수 있다. 그들은 방자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그리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마음대로 고치며,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한다. 그들은 다른 적그리스도와 성품이나 성질이 같다. 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그들이 위험에 직면했거나 자신의 이익이 손해를 볼 때, 그들이 제일 먼저 하는 생각과 행동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무엇을 선택하겠느냐? 하나님의 이익과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 자신을 지키는 것을 선택한다. 하나님 말씀을 고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정말로 복음 전파의 효과를 위한 것이겠느냐? 그들이 말하는 효과 뒤에 숨겨진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자신의 재주와 능력을 자랑하려는 것이다. 이 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봐라, 내가 능력이 있지! 내가 이렇게 수정하니까 어때? 복음 전파의 효과가 괜찮지? 너희는 그런 능력이 없어서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지. 거봐.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하니까 효과가 있잖아?’라고 보여 주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 말씀을 고침으로써 명예와 지위를 추구하는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시킨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질 아니겠느냐? 그들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는 것은 전혀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것이 아니다.
적그리스도가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또 다른 모습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결코 형제자매들과 진리를 교제하지 않으며, 사람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오로지 글귀와 도리만을 이야기하며 사람을 훈계한다. 심지어 남들에게 순종을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상부와 하나님을 대할 때, 그들은 또 어떤 태도와 행동 방식을 취하겠느냐? 윗사람을 기만하고 아랫사람을 속인다.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든 전혀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무엇을 하든 결코 상부에 문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상부의 교제와 지도가 필요한 문제가 없는 것처럼 굴며 뒤에서 몰래 한다. 이를 밀실 공작이라 한다. 바로 자기가 말한 대로 하려고 하고, 자기가 결정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도 위장을 한다. 깨알같이 작은 일을 가져와 상부에 문의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 척하여 상부에서 그가 모든 일에 진리를 구하는 줄 오해하게 한다. 정말이지 조금도 빈틈이 없다. 사실 그는 모든 큰일은 구하지 않고, 자기 혼자서 결정하며, 게다가 상부가 알지 못하게 한다.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는 더더욱 보고하지 않는다. 자신의 권력, 지위, 명성과 관련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적그리스도는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남들과 교제하는 법이 없고, 남들에게 순종을 강요한다. 이런 행위의 주된 모습은 바로 개인 경영을 하고, 개인의 세력, 단체, 인맥을 육성하고 개인 사업을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과 자기에게 유리한 일을 한다. 게다가 일 처리가 투명하지 않다. 적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순종하게 하려는 염원과 욕망이 특히 강하다. 그는 마치 사냥개가 주인의 명령에 따르는 것처럼 사람들이 자신에게 순종하게 하고,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며, 반드시 절대적으로 따르고, 절대적으로 순종하게 한다.
적그리스도가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또 다른 모습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한 교회의 리더가 적그리스도인데, 만약 윗선 리더 일꾼이 이 교회의 사역을 알아보고 개입하려 한다면, 이 적그리스도가 동의할 수 있겠느냐? 그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교회를 어느 정도로 통제하겠느냐?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고, 물 한 방울 샐 틈도 없이, 마치 철옹성처럼 다른 사람이 참여하거나 물어보지도 못하게 한다. 리더 일꾼이 사역을 알아보러 온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형제자매들에게 “이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우리 교회의 실정을 모릅니다. 만약 그가 개입한다면 우리 교회의 사역을 교란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형제자매들을 미혹한다. 리더 일꾼이 도착한 후, 그는 온갖 이유와 핑계를 대며 형제자매들과 리더 일꾼이 접촉하는 것을 막고, 마음에 없는 친절로 리더 일꾼을 대접하며 그들을 한 곳에 안배해 숨긴다. 말로는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형제자매들과 만나 상황을 알아보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리더 일꾼이 그에게 사역 상황을 물을 때, 적그리스도는 허위로 날조하고, 윗사람을 기만하고 아랫사람을 속인다. 적그리스도가 하는 말은 모두 과장된 것이다. 그는 각 측면의 사역을 모두 좋게 말해 리더 일꾼을 기만한다. 리더 일꾼이 교회의 형제자매들과의 접촉을 요청하면, 그는 “안배하지 못했어요! 당신이 오기 전에 알려 주지도 않았잖아요. 만약 알려 줬더라면 몇몇 형제자매들을 안배해서 만나게 했을 텐데요.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안전을 위해 형제자매들과 접촉하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그럴듯하지만, 분별이 있는 사람은 문제를 알아챌 수 있다. ‘그가 리더 일꾼이 형제자매와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진상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서야. 그가 한 사역의 허점과 착오가 모두 폭로될까 봐 두려운 거네.’라고 말이다. 적그리스도가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철저히 통제하기 때문에, 리더 일꾼이 책임감이 없다면 쉽게 적그리스도에게 기만당하고 속을 수 있다. 교회 형제자매들의 실상이 어떠한지, 해결되지 못한 어려움은 뭐가 있는지, 상부의 설교 교제와 하나님 말씀 서적이 제때 형제자매들 손에 전달되는지, 교회의 각종 사역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착오와 문제는 없는지, 이 모든 것들을 리더 일꾼이 알 수 없게 되며, 하나님 집에 어떤 새로운 사역지침이 있어도 형제자매들 또한 알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적그리스도가 교회를 완벽하게 통제하여 권력을 독점하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게 된다. 교회의 형제자매들 또한 윗선 리더 일꾼과 접촉할 기회가 없고 실상을 알지 못해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고 통제받게 된다. 사역을 점검하는 리더 일꾼들은 적그리스도가 뭐라고 말하든 그것을 분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그리스도가 사역했다고 생각해 적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게 된다. 이는 바로 적그리스도에게 하나님 선민을 책임지라고 맡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할 때, 리더 일꾼이 이를 분별할 줄 모르고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또 처리할 줄도 모른다면 이는 교회 사역을 지체시키고 하나님 선민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리더 일꾼은 거짓 리더와 거짓 일꾼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가 통제하는 교회는 리더 일꾼이 반드시 개입하고 물어보아야 한다. 또한, 적시에 적그리스도를 처리하고 해결해야 한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약 거짓 리더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고,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선민을 미혹하는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하나님 선민은 거짓 리더와 거짓 일꾼을 폭로하고, 고발하고, 파면하고, 교체해야 하며, 훌륭한 리더를 선출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리더 일꾼은 어쩌면 자질이 부족하고 분별이 없어서 적그리스도 문제를 처리하거나 해결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어요. 그들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니, 한 번 더 기회를 줘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 이런 어리석은 리더에게 또 기회를 주면 안 된다. 또 기회를 준다면 하나님 선민을 계속 곤경에 빠뜨릴 뿐이다. 이는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양심과 이성이 없고 일 처리 원칙도 없는 비열한 소인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태시켜야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어떤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연합하여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일부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파면하고, 교체하고, 도태시켰다. 이는 좋은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나는 이런 좋은 소식을 듣는 게 좋다. 이는 하나님 선민의 생명이 성장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했다는 최고의 증거이다. 이는 사람이 약간의 분별과 분량이 생겼고,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 악마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또한, 일반적인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선민을 미혹하거나 통제할 수 없게 되어 하나님 선민이 지위와 권력의 속박을 당하지 않고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고 폭로할 용기를 갖게 되어 용감히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끊어내고 파면시켰다는 의미이다. 사실, 리더 일꾼이든 아니면 평범한 하나님 선민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지위가 평등하다. 단지 본분이 다를 뿐이다. 하나님 집에서는 지위의 차이가 없으며, 그저 본분이 다르고 책임이 다를 뿐이다.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가 교회 사역을 교란할 때, 리더 일꾼과 하나님 선민은 모두 이를 폭로하고, 고발하고, 제때 처리하여 적그리스도를 교회에서 출교해야 한다. 이는 모두의 동일한 책임이자 공동의 책임이다.
적그리스도는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남들과 교제하는 법이 없고, 무슨 일이든 다 자신이 결정한다. 이 측면의 문제를 모두 분명히 볼 수 있겠느냐? 다른 사람과 교제하고 원칙을 구하는 것은 형식에 치우치거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본분을 이행할 때 원칙과 길이 있기 위해서입니다.) 맞다. 본분을 이행할 때 원칙과 길이 있기 위해서이다. 오직 하나님 말씀 안에서 진리를 구하고 원칙을 깨달아야만 본분 이행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진리를 교제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방식을 써야 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이 참여해야겠느냐? 적합한 대상을 선택해야 한다. 자질이 훌륭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을 주로 찾아 교제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성과를 얻을 수 있으며, 이럴 필요가 있다. 만약 자질이 부족한 어리석은 사람과 이성이 없는 사람을 선택한다면, 아무리 많이 이야기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진리에 도달할 수도 없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아무리 많이 교제해도 성과를 얻지 못한다.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든, 하나님 선민은 모두 이를 알 권리가 있으며, 교회 사역 상황과 거기에 존재하는 문제를 알아야 한다. 만약 리더 일꾼이 윗사람을 기만하고 아랫사람을 속이며 감추는 방식을 사용한다면, 하나님 선민은 이를 적발하고 고발하거나 윗선에 보고할 권리가 있다. 이 또한 하나님 선민이 이행해야 하는 본분과 의무이다. 몇몇 거짓 리더는 교회에서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하나님 선민을 통제한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으로, 적그리스도의 일관된 행동 방식이다. 만약 하나님 선민이 적발하고 고발하지 않아서, 그 결과 교회 사역이 지체되고 사역이 정지되어 진행되지 않는다면, 이는 리더 일꾼만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 선민의 책임이기도 하다.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가 교회에서 권력을 잡으면, 하나님 선민이 손해를 입고 구원받는 기회를 잃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 선민은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를 고발하고 적발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 이는 교회 사역과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모두 유익하다. 어떤 리더 일꾼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한다고 여러분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제가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자기 의견을 말해 보세요. 여러분이 말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때로는 특별한 문제로 며칠 동안 논쟁을 해도 결과가 없지만, 그는 여전히 계속 기다렸다가 모두가 합의하고 나서야 사역을 한다. 이는 사역을 얼마나 지체하는 것이냐? 일을 너무나 지체하니, 이는 명백히 무책임한 태도이다. 리더 일꾼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어떻게 교회 사역을 잘할 수 있겠느냐? 교회 사역의 결정권은 리더 일꾼에게 있다. 형제자매들에게 알 권리가 있지만, 최종 결단은 리더 일꾼이 내려야 한다. 만약 리더 일꾼이 결단을 내릴 줄 모른다면, 그의 자질이 지나치게 떨어진 것이니 리더에 적합하지 않다. 설령 리더를 하더라도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며,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없다. 일부 리더 일꾼은 어떤 일 때문에 아무리 오랫동안 논쟁을 해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결국은 대단해 보이는 사람의 말을 듣는다. 이런 행동에 원칙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런 자가 무슨 리더란 말이냐? 그저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다. 만약 네가 “적그리스도는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합니다. 저는 적그리스도가 될까 봐 두렵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의견을 제시하면 그 의견들을 종합한 후 적절한 방법을 찾아 결론을 내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겠느냐? (그래선 안 됩니다.) 어째서 안 되겠느냐? 만약 그 결과가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행한들 성과가 나겠느냐? 하나님이 만족하겠느냐? 성과가 나지 않고 하나님도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 문제는 심각해진다. 너는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고, 책임감 있게 본분을 이행하지 않았으며, 건성으로 임하면서 사탄의 철학으로 일을 처리했다. 이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만한 것이다! 너는 사람들에게 적그리스도로 의심을 받거나 판단을 당하지 않으려고 네가 짊어져야 할 책임조차 다하지 않고 ‘절충’이라는 사탄 철학을 선택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선민들에게 해가 되었으며 교회 사역에도 지장을 주었다. 이는 원칙이 없는 것 아니냐? 이기적이고 비열한 것 아니냐? 네가 리더 일꾼이라면, 말과 행동에 반드시 원칙이 있어야 하고, 본분 이행에 반드시 성과가 있고 효율성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집 사역에 이로운 방법으로,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방법으로 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교회를 위해 물건을 구입할 때는 반드시 실효성을 따져야 한다. 물건 구매 가격이 합리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용적이어야 한다. 만약 원칙 없이 돈을 함부로 쓴다면, 하나님 집 이익과 하나님 제물에 손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이 닥치면 너희는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상부에 구합니다.) 상부에 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또한, 게으름 피우지 마라. 자료를 많이 찾아보고, 많이 알아보고 물어보고, 세부 사항을 많이 알아보아라. 충분히 준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절한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세부 사항을 명확히 알아보지 않은 채로 아무렇게나 한다면, 결국에는 많은 돈을 낭비하게 된다. 이를 무엇이라 하겠느냐? 건성으로 대충 하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본분을 이행한다. 일 처리가 불투명하고, 사역을 보고할 때 반만 말하고 반은 숨긴다. 일을 너무 명확하게 설명하면 자신에게 골칫거리가 생길 뿐만 아니라 계속 자료를 찾아 보강하라고 할까 봐 아예 다른 사람이 실상과 세부 사항을 알지 못하도록 바로 일을 마무리하고 하나님 집이 비용을 내게 한다. 결국, 검사 결과가 불합격으로 나와 재공사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 많은 돈을 쓰게 된다. 이는 하나님 집에 해를 끼치는 것 아니겠느냐? 이는 유다의 행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유다의 행위는 일부러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는 것이다. 일이 닥쳤을 때, 팔이 밖으로 굽어 하나님 집의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육만을 헤아린다.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조금이라도 있겠느냐? (없습니다.) 충성심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고, 교회 사역에 해를 끼치는 것을 즐긴다. 이것이 바로 유다의 행위이다. 이외에도 또 다른 경우가 하나 있다. 몇몇 본분이 업무 지식이나 다른 분야의 것과 관련이 있어서 사람들이 낯설어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에는 번거로워해서는 안 된다. 요즘은 정보가 발달했으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 관련 자료와 정보를 많이 찾아봐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얻기 시작하면서 너는 이 측면의 업무나 이 영역의 것에 대해 가장 기본적인 이해를 하게 된다. 그런 다음 점차 이 측면의 업무 범위 내의 것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고, 데이터나 전문적인 측면의 다양한 주장들에 기본적으로 익숙해지게 된다. 이 정도까지 하면, 네가 본분 이행에 합격하고, 충성심을 다 하는 데에 더 이롭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본분을 이행할 때 하는 이런 예비 사역은 대체 무엇을 위함이겠느냐? 자료를 찾고, 세부 사항을 알아보고, 다시 교제와 논증을 통해 실행 가능한 방안을 찾는 것은 모두 본분 이행에 합격하기 위해 하는 예비 사역이다. 제대로 된 예비 사역은 본분 이행에 대한 사람의 충성심을 나타내며, 이와 동시에 건성으로 대충 하는 사람도 드러낸다. 불신파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태도로 본분을 이행하겠느냐? 그들은 전부 건성으로 대충 한다. 교회에 어떤 물건을 구입하든 자기 멋대로 함부로 돈을 쓰며, 전혀 상부에 구하지 않는다. 자신이 뭐든지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 결과 하나님 집의 돈을 헛되이 낭비하게 된다. 이런 자는 집안 말아먹는 놈이고 재수 없는 놈 아니겠느냐? 그는 하나님의 제물에 손해를 입혀 놓고도 그것이 악을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조금도 뉘우치지 않는다. 하나님 선민이 그를 폭로하고 분별하여 그를 제명하고 출교하기로 거수 표결할 때에야 그는 약간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 일의 결과가 이렇게 심각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정말이지 관을 보기 전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다 얼간이고, 머리에 나사가 하나 빠져 있다. 그런데도 리더 일꾼이 되어 하나님 집의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정말 돼지도 낯을 붉힐 정도로 뻔뻔하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불신파이다. 하나님을 아무리 오래 믿었어도 어떠한 진리도 깨닫지 못하면서 항상 하나님 집의 리더 일꾼이 되고 싶어 하고, 늘 권력을 잡아 자기가 결정하고 싶어 한다. 이는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 아니겠느냐? 왜 이런 부류의 사람은 다 불신파라고 하겠느냐? 바로 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오랫동안 설교를 들어도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전혀 실행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자들이 불신파이다. 너희에게 이런 모습이 있지 않겠느냐? 이런 모습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아라. 다들 그러냐? 그렇다면 너희는 모두 불신파이다. 이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오랫동안 설교를 들으면 몇몇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어느 정도 성장할 수 있고, 말하거나 일 처리할 때 좀 더 믿음직해진다. 만약 오랫동안 설교를 들어도 전혀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이며, 짐승이고, 불신파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지 3~5년 만에 많은 일을 깨닫고, 말하거나 일 처리할 때 진리를 구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실수가 생기거나 하나님 집에 조금이라도 손해를 입히면, 그는 마음속으로 괴로워하고 자책하며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모두 자신이 순간적으로 실수하고,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게으르고, 육적 편안함을 즐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렇게 큰 실수가 생기고, 이렇게 큰 손해를 초래했다고 생각해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이런 뉘우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 인성이 있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 만약 오랫동안 설교를 듣고도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본분을 이행할 때 항상 실수하고, 항상 하나님 집에 문제를 일으키고, 교회 사역에 손해를 입힌다면, 그래 놓고도 뉘우치는 마음조차 없다면 이런 사람은 인성이 전혀 없으며, 정말 개돼지만도 못하다. 그러니 본분인들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본분을 이행한다고 하더라도 건성으로 대충 할 것이며,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할 때 항상 하나님 집을 ‘우리 집’이라고 하며, 늘 ‘우리 집’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 얼마나 달콤한 말이냐! ‘우리 집’이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 집과 교회이다. 늘 ‘우리 집’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적절한 말이겠느냐? 내가 듣기에는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우리 집’이라는 말을 할 수는 있지만, 네가 그 말에 어울리게 행동해야만 그 말이 적절한 것이다.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본분을 항상 건성으로 대충 이행하며, 교회 사역을 전혀 수호하지 않고, 교회 사역을 전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네가 여전히 말끝마다 ‘우리 집’이라고 한다면, 이는 적절하지 않다. 이는 다소 위선적이며 위장하는 느낌이 들어 사람들이 반감을 갖고 혐오하게 된다. 만약 네가 정말로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교회 사역을 수호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집을 ‘우리 집’이라고 해도 괜찮다. 남들이 듣기에 진실되고 가식적이지 않다고 느껴질 것이며, 또 너를 형제자매로 여길 것이고, 너를 좋아하고 부러워할 것이다. 만약 네가 마음속으로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본분 이행 또한 무책임하다면, 하나님 집을 ‘우리 집’이라고 하지 마라. 너는 진리를 열심히 추구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며, 또 교회 사역을 수호하여 하나님 선민이 너를 하나님 집의 사람으로 느끼게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네가 다시 ‘우리 집’이라고 말해야 남들이 듣고 친밀감을 느껴 전혀 반감을 갖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네가 마음속에서 정말로 하나님 집을 자신의 집으로 여기게 되었고, 네가 정말로 책임감 있게 본분을 이행하고 교회 사역을 수호할 수 있게 되어 네가 ‘우리 집’이라고 말해도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그 말에 걸맞고 거짓의 요소가 전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만약 교회 사역에 전혀 책임을 지지 않고, 어떤 본분이든 다 건성으로 대충 이행한다면, 심지어 기름병이 넘어져도 바로 세우지도 않고, 방이 더러워져도 청소조차 하지 않으며, 겨울에 눈이 와도 눈을 쓸거나 마당을 치우지도 않는다면, 하나님 집의 사람 같지 않고 외부 사람 같다면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 집을 ‘우리 집’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겠느냐? 그가 바로 봉사자이고, 임시 직원이며, 생명이 없는, 사탄에게 속한 사람이지 결코 하나님 집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항상 뻔뻔하게 하나님 집을 ‘우리 집’이라고 한다. 말끝마다 매우 친밀하게 ‘우리 집’이라고 하고, 형제자매를 부를 때도 무척이나 친밀하다. 하지만 실질적인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며, 일만 했다 하면 잘못을 저지르고 하나님 집에 해를 끼친다. 이는 외식하는 사람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은 너무 부도덕하고, 일말의 양심과 이성도 없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가장 기본적으로 양심과 이성을 갖춰야 하며,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한다. 만약 양심과 이성조차 없고,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 집을 ‘우리 집’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겠느냐? 그는 그저 임시 직원이며, 봉사자이고, 사탄에게 속한 자로, 하나님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보기에 이런 사람은 악인에 속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집의 일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문제를 발견해도 무시하고, 그가 책임져야 하는 일도 신경 쓰지 않으며, 형제자매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멀리 도망가고, 누군가가 나쁜 일을 해서 하나님 집 이익에 손해를 끼치고 교회 사역을 파괴해도 증오하지 않으며, 근본적인 옳고 그름과 관련된 일에 직면해도 지각이 없고, 하나님 집에 무슨 일이 발생하든 모두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하나님 집을 자신의 집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겠느냐? 분명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집을 ‘우리 집’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으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모두 외식하는 자이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 집’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겠느냐? 최근 나는 몇몇 사람들이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소수에 불과하다. 우선 그들이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는지, 분량이 얼마나 큰지, 믿음이 얼마나 큰지는 차치하더라도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며, 실질적인 일을 할 수 있고, 어떤 본분이든 참으로 책임감을 갖고 이행하며, 사람다운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런 사람이어야 하나님 집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이 ‘우리 집’이라고 말할 때 사람들이 따뜻함과 실제로 그렇다고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교회에 책상이 필요한데, 사려면 6~700위안이 필요했다. 그러자 몇몇 형제자매들이 “너무 비싸네요. 저희가 목재를 사서 직접 만들면 많이 절약할 수 있어요. 쓰기에는 다 똑같아요. 전혀 사는 것만 못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내가 어떤 느낌을 받았겠느냐? 마음속으로 약간 감동했다. ‘이 사람들은 괜찮네. 하나님 집을 위해 돈을 절약할 줄 알아.’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은 제물을 낭비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낫다. 최소한 약간의 양심과 이성이 있으며, 인간미도 좀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집에 수백 위안, 수천 위안의 손해를 입히고도 아무런 지각이 없고, 오히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전혀 마음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10위안, 8위안을 절약하는 것도 가치가 있어요.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돈을 들여 살 필요 없습니다. 아낄 수 있는 건 아껴야죠. 불필요한 돈을 쓰지 말아야 해요. 우리가 조금 더 고생하고 수고하는 게 당연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며, 정상적인 인성을 가진 사람이고, 하나님 집과 한마음이 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만이 하나님 집을 ‘우리 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그가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데, 이는 그가 고려를 할 줄 모르는 것이겠느냐? 자기 살림을 할 때는 그도 무척이나 돈을 절약할 줄 안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 하고, 물건을 구매할 때는 늘 저렴하고 실용적인 것을 사려 하고, 아낄 수 있는 것은 아끼며, 값을 깎을 수 있는 것은 깎으려 한다. 무척이나 세세하게 계산해서 척 보기만 해도 살림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집을 위해 일을 할 때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의 돈을 펑펑 쓰며, 어떻게 쓰든 다 상관없고, 안 쓰면 손해라고 생각한다. 이는 인품이 너무 나쁜 것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은 너무나 이기적이다. 하나님 집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 만족하면 된다. 그는 또 최소한의 대가로 천국에 들어가 큰 복을 받으려고 하는데, 이런 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람이 이렇게 큰 야심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니, 이것은 바로 인품이 지나치게 나쁜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일 처리가 기이하고,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모습에 대해 충분히 교제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요약해 보자. 적그리스도의 일 처리가 기이하고,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 두 가지 행위 모습은 적그리스도라면 다들 갖고 있는 두 가지 다른 모습이다. 이 두 가지 행위 모습은 동등하고 동시에 나타난다. 이 모습에서 폭로된 적그리스도의 주요 성품 두 가지는 사악함과 흉악함이다. 사악하기도 하고 흉악하기도 하다. 때로 네가 그의 악한 면은 볼 수 없어도, 그의 사악한 면은 볼 수 있다. 어쩌면 그가 일 처리를 매우 부드럽게 해서 네가 그의 어떤 강제적이거나 야만적인 행위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겉으로는 그다지 흉포하지 않고, 너에게 뭔가를 강요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매우 사악한 다른 방식으로 이리저리 우회해 가며 너를 끌어들여 그에게 부림을 당하게 하는 것이다. 너는 이런 식으로 그에게 이용당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함정에 빠져 기꺼이 그의 지배와 우롱에 따르게 된다. 무엇 때문에 이런 결과가 생기겠느냐? 적그리스도는 늘 옳은 말과 논리로 너를 가르치고 교화하며 부추겨 어떤 일들을 하게 한다. 그의 말은 옳은 것이니 마땅히 수행하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진리를 어기는 것이라고, 그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느끼게 하며, 동시에 기꺼이 그의 말을 따르게 한다. 최종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그의 말을 듣고 그가 말한 대로 실행한들 진리를 깨닫게 되겠느냐?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점점 가까워지겠느냐, 아니면 점점 멀어지겠느냐?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 속에서 진리 원칙을 찾거나 하나님의 마음과 요구를 헤아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을 이렇게 오랫동안 믿으면서 주로 리더의 붙들어 줌과 공급에 의지해 왔습니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리더가 교제해 주기만 하면 행할 길이 생겼어요. 역시 리더가 없으면 안 됩니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게 된다.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으면서 분량이 겨우 이 정도이고, 아직도 리더가 없으면 안 된다니, 매우 불쌍하지 않으냐? 이 말이 암시하는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그가 하나님께 기도할 줄 모르고, 하나님을 의지할 줄 모르며, 하나님을 앙망할 줄 모르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줄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전부 리더가 붙들어 주어야만 이해할 수 있으니, 그가 믿는 하나님을 리더가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리더를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리더의 말을 따르고, 리더가 말한 대로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대상은 대체 하나님이겠느냐, 아니면 리더이겠느냐? 이는 종교인이 명목상으로는 주를 믿지만, 실제로는 목사를 믿고 따르며 목사의 말을 곧이듣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이는 다른 사람에게 통제당한 것 아니겠느냐? 네가 리더를 숭배하여 모든 일에서 리더의 말을 따른다면, 이것은 바로 사람을 믿고 따르는 것이며, 사람에게 속박과 통제를 당한 것이다. 너는 그렇게 명확한 하나님 말씀도 알아듣지 못하고 어떻게 실행하는지도 모르면서 마귀 사탄이 몇 마디 하니까 바로 이해가 되었느냐? 너는 무엇을 이해하였느냐? 때로는 규례와 도리를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게 진리를 깨달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미혹된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일 처리가 기이하고,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런 모습에서, 그들의 주된 성품은 사악함과 흉악함이다. 사악함은 어디에서 나타나겠느냐? 기이한 일 처리로 나타난다. 흉악함은 어디에서 나타나겠느냐?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주로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남들에게 순종을 강요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강제성 내면에는 흉악한 성품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진리에 순종하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사역 방식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말씀을 선포한 후,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진리에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네가 이 측면의 진리를 알게 되었고 이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네가 순종하는지, 어떻게 순종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어떠하냐? 너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으며,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러니 네가 순종하고 싶으면 순종하고, 순종하기 싫다면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네가 순종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하나님이 사람의 무엇을 감찰하고 사람을 어떻게 결론 내리는지, 하나님은 이러한 일에서 결코 별도로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은 경고하고 위협하고 강요하여 네가 이를 위해 대가를 치르게 하거나 너를 징벌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동안, 하나님이 말씀을 선포해 사람에게 공급하는 동안 하나님은 사람이 실수하는 것과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허락하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어리석은 일을 하는 것도 허락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몇몇 사역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진리란 무엇인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사람들이 점차 깨닫게 한다. 책망과 훈계, 채찍질과 징계, 그리고 권면이 바로 그 예이다. 때로는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 내면에서 너를 감동하게 하거나 너에게 빛 비춤과 깨우침을 주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하나님의 요구는 대체 무엇인지, 사람이 서야 할 위치는 무엇인지, 사람이 실행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네가 알게 하며, 그와 동시에 너에게 선택하게 한다. 만약 네가 “저는 거역하고, 제 마음대로 하겠어요. 저는 옳은 것을 선택하고 싶지 않고, 충성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냥 이렇게 하고 싶어요!”라고 한다면, 결국 너의 종착지와 결말은 네가 책임져야 한다. 즉, 너는 너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고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공평하고 공의롭다. 네가 하나님의 요구대로 한다면 너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니, 너의 종착지가 어디이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지 않았다면 너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니, 너의 종착지는 또 어디이겠느냐? 하나님은 이를 일찌감치 정해 놓았기에 별도로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 오늘 네가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즉시 너를 징계하고 채찍질하고 징벌하여 네가 재앙에 직면하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하는 것은 단지 사람이 순종 측면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에 ‘강요’라는 두 글자는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하고, 이 측면의 진리를 실행하라고 할 때, 여기에 강요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지배하든,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든, 사람을 인도하든,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든 이러한 일들을 하는 전제 조건에 강요는 없으며, 반드시 해야 하는 것도 없다. 네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 그렇게 했다면 점점 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네 상태도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좋은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해 나간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네가 깨닫지 못했던 것들도 하나님이 깨우쳐 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진리를 추구하기 싫어한다면, 네가 얻는 것은 매우 제한적일 것이다. 이는 양자 간 확연히 다른 부분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매우 공평하다. “만약 하나님께서 저에게 강요하셨다면, 제가 실행해 내지 않았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사탄이나 하는 짓이지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하나님이 강요해야만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면, 너는 어떤 존재냐? 네가 순종하는 대상이 하나님이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순종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순종은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기초 위에서 양심과 이성에 따라 기꺼이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의 원래 의미이다. 여기에는 강요, 규제, 협박이 없으며, 결박과 통제의 의미도 없다. 그러므로 네가 어떤 일에서 심하게 결박과 속박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행사가 아닐 것이다. 한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사람의 사상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쩌면 네가 치우치게 이해하고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누군가 너를 속박하고 있을 것이다. 규례와 옳은 말이나 이론으로 너를 속박하여 네 사상에 치우친 것들이 생기게 한 것이며, 이는 네 인식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만약 네가 기꺼이, 기쁘게 순종하길 원한다면 이는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며, 진정한 인성, 양심과 이성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진리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 순종하지 않으며, 교회의 안배에 순종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강제적으로 집행하는 방법으로 해결하겠느냐? 만약 리더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고 사역지침대로 사역하지 않으며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또는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교체합니다.) 바로 교체하면 끝이다. 출교하겠느냐? (출교하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으면 출교하지 않는다. 일반 형제자매의 경우, 만약 그에게 어떤 본분을 이행하도록 안배했는데 그가 가지 않는다면, 이는 순종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그가 안 가면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되는데, 강요하겠느냐? (강요하지 않습니다.) 강요하지 않는다. 만약 진리 교제를 통해 그가 받아들이고 순종하기를 원한다면, 그것도 괜찮다. 이는 강요라고 할 수 없다. 이는 그 사람 개인이 동의하고 원하는 상황에서 그에게 이 본분을 이행하라고 안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청소를 안배하면, 그는 “저에게 청소하라고 하면 청소하겠습니다. 저는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강요한 것이겠느냐?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시키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그가 원하고 순종하는 상황에서 안배한 것이지, 하기 싫은 사람에게 억지로 시킨 것이 아니고, 또 시행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일 수도 있다. 일시적으로 그 본분을 이행할 사람을 찾지 못해 네가 잠깐 대신하도록 안배해서, 비록 원하지 않지만 그 사역을 해야만 하는 상황 말이다. 이는 특수한 경우이다. 너는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 하나님 집의 밥을 먹고 있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 스스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고 인정해 놓고, 그 정도의 일에 육을 저버리지 못한단 말이냐? 이는 순종이니, 고난을 겪느니 하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그저 잠시 잠깐의 일일 뿐, 너에게 장기적으로 이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시킨 일이 더럽고 힘들다며 하기 싫어한다. 만약 그가 말을 꺼내면 빨리 교체해 주어라. 하지만 그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실제로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순종하고 고난을 겪기를 원한다면, 그가 계속 본분을 이행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게 적절하지 않겠느냐? (적절합니다.) 이 원칙이 옳지 않겠느냐? (옳습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절대 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또 이런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은 무슨 본분을 이행하든 게으르고, 무책임하고, 충성심이 없으며, 때로는 몰래 나쁜 짓들을 하기도 한다. 그는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그 본분이 자신에게 맞지 않으며 자신이 잘하는 것이 아니라 업무를 모른다고 핑계를 대는데, 사실 그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이유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의 사람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느냐? 만약 그가 다른 곳으로 가서 본분을 이행하겠다고 요청한다면, 동의하겠느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이런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억지로 본분을 이행하며, 올바른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으니, 그를 내보내면 된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은 본분 이행 이야기만 나오면 머리를 긁으며 난처해하고 거부감을 느낀다. 마음속으로는 절대 내키지 않으면서도 억지로 꾹꾹 참으며, ‘우선 여기서 때를 기다리며 아쉬운 대로 몇 년 버텨야지. 나중에 어디로 갈지 아직 알 수 없으니까!’라고 생각한다. 이런 계산을 하는 사람은 본분 이행을 하게 하면 안 된다. 그가 다른 본분을 이행하겠다고 요구하더라도 안 된다. 이런 경우는 강제로 처리해야 한다. 이는 어째서이겠느냐? 그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모두 그가 불신파라고 하고, 그의 주변 사람들도 그가 본분 이행에 적합하지 않은 이방인이라고 하니, 정리해야 한다. 만약 정리하지 않으면, 그가 교회에서 교란하고, 나쁜 짓을 하고, 하나님 선민을 곤경에 빠뜨릴 수밖에 없는데, 이는 절대 안 된다. 이런 경우에는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에 대한 교회 원칙에 따라 처리해야 하며, 그가 원하지 않아도 할 수 없다. 이것이 강제적인 것이겠느냐? 이는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원칙에 따른 일 처리이다. 이것은 하나님 집의 이익과 사역을 수호하는 것이고, 불신파와 하나님 집에서 공짜 밥을 먹는 사람을 정리하는 것이다. 네가 공짜 밥을 먹고 싶다면, 다른 곳으로 가라. 여기에서 되는대로 살지 마라. 하나님 집은 양로원이 아니며, 놀고먹는 사람을 먹여 살리지 않는다. 알겠느냐?
자신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 적그리스도들이 있다. 어떤 일을 봐도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많은 일에서 침묵을 지키고 듬직한 척하면서 태도를 드러내지 않는다. 처음 막 접할 때는 네가 그를 꿰뚫어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가 무게감이 있고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분별하겠느냐? 네가 반드시 주의해서 관찰해야 한다. 그가 대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중요시하는지, 무엇에 흥미를 갖는지, 어떤 사람과 접촉하는지 등 몇 가지 측면을 관찰하면, 그를 알 수 있게 된다. 그 외에 너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어떤 레벨의 리더 일꾼이든 너희가 그들이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닫고 은사가 있다는 이유로 그들을 숭배하고, 그들이 진리 실제가 있어 너를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일에서 그들을 앙망하고 그들에게 의존하여 구원받으려고 한다면, 이는 무지몽매한 것으로, 결국 모두 허사가 될 것이다. 이는 출발점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누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닫고 있든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는 없으며,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은사가 있든 그 사람이 진리를 갖추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숭배하고 앙망하고 따르는 자는 결국 모두 도태되고 정죄받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믿으면 오직 하나님만 앙망하고 하나님만 따라야 한다. 어떤 레벨의 리더 일꾼이든 다 평범한 사람이다. 만약 네가 그를 네 직속상관으로 보고 그가 너보다 높다고, 너보다 능력 있다고, 마땅히 너를 이끌어야 한다고, 모든 면에서 남들보다 뛰어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다. 그것은 너의 착각이다. 이러한 착각이 너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겠느냐? 한 측면으로는, 네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요구들로 네 리더를 판단하며 그에게 존재하는 문제와 부족함을 올바로 대하지 못하게 한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너도 모르는 새에 그의 기질, 은사, 재능에 깊이 빠져들어 결국 자기도 모르게 그를 숭배하게 되고, 그가 너의 하나님이 된다. 그가 너의 롤모델, 숭배의 대상에서 네가 따르는 대상이 되기까지, 그 과정에서 너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서도 너는 하나님을 따르고 있다고, 네가 하나님 집에, 하나님 앞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네가 이미 사탄의 심부름꾼이나 적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 갔는데도 모르고 느낌이 없는 것이다. 이는 더없이 위험한 일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한 측면으로는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을 분별해야 하며, 진리를 증오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추악한 몰골을 간파해야 한다. 게다가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고 농락할 때 쓰는 통상적인 수법과 그의 일 처리 방식에 대해 파악해야 한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인식하고자 추구해야 한다. 그리하여 오직 그리스도만이 진리요, 길이요, 생명임을, 어떤 사람을 숭배해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재난과 화뿐임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 더 충만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인생길이다. 어떤 이는 “제가 리더를 숭배하는 데도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재능 있는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숭배하게 됩니다. 또 제 관념에 부합하는 리더를 숭배하게 되죠.”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왜 굳이 사람을 숭배하겠다는 것이냐? 너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이는 대체 누구냐? 진실로 너를 사랑하고 지켜 주는 이가 누구인지, 설마 똑똑히 보이지 않는 것이냐? 네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누군가 옳은 말을 하고 옳은 행동을 하며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 해도 너는 진리에 순종하면 그만인 것 아니냐? 너는 어찌 그리 천박하게 기어코 숭배할 사람을 찾아 따라야 하겠느냐? 어째서 사탄의 노예가 되는 것을 좋아하느냐? 어째서 진리의 종이 되지는 않는 것이냐? 사람에게 이성과 존엄이 있는지는 여기에서 알 수 있다. 마땅히 너 자신부터 행동해야 한다. 각 방면의 진리를 갖추어 각 종류의 일과 각 부류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각 부류 사람의 모습이 어떤 성격인지, 어떤 성품을 드러낸 것인지를 파악하여 각 부류 사람의 본질을 분별하고, 주변 사람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너 자신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네 리더는 또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 똑똑히 알게 되면 사람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고, 진리 원칙대로 대할 수 있다. 형제자매라면 사랑으로 대하고, 형제자매가 아니라 악인이나 적그리스도나 불신파라면 멀리하고 저버릴 것이다. 진리 실제를 갖춘 사람이라면 탄복할지라도 숭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도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실제의 하나님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따라야만 진리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네가 이런 일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면 분량이 있는 것이고, 적그리스도에게 쉽게 미혹되지 않을 것이며,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될까 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몇몇 적그리스도가 드러나 도태되는 것을 보고 근심하며 말한다. “적그리스도는 겉으로는 악인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그가 한 일을 분별해 보면 어쩜 그렇게 악한가요? 적그리스도는 정말 무척 기이한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자질이 부족해서, 만약 이런 적그리스도를 또 만난다면 분별해 내지 못할 거예요. 그럼 저는 어떻게 적그리스도를 경계해야 하나요?” 너의 자질이 부족해도 미혹될까 봐 늘 걱정할 필요 없으며, 어떻게 경계해야 할지를 항상 고민할 필요도 없다. 너는 그저 진리를 깨닫는 것에만 집중하여라.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시간 날 때는 적그리스도가 어떤 악을 저질렀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라. ‘그의 어떤 부분이 악했지? 그는 무엇 때문에 그런 악을 저지를 수 있었지? 평범한 사람이 그런 악을 저지를 수 있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분별한 거지? 나는 어떻게 분별했지?’라고 말이다. 네가 하나님 말씀을 바탕으로 사람의 본질을 확실히 알게 되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네가 늘 이런 일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분별할 수 있게 되고, 만약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는 일을 다시 마주하면 자연스럽게 분별이 생긴다. 이는 많은 일을 체험해야 하는 것이지, 설교를 많이 듣는다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사람이 사회에서 많이 손해를 보고 속으면 경험이 쌓이는 것과 같다. “좌절한 만큼 현명해진다.”라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그런 이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네가 깨달은 진리가 많을수록 네가 꿰뚫어 볼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네가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면, 지식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지식이 있어도 아무것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의 관점과 같으며, 무엇을 평론하든 다 헛소리이고 터무니없는 말이다. 네가 몇몇 사람들을 꿰뚫어 보지 못하더라도 조급해하지 마라. 진리를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분별이 생기게 된다. 지금은 그저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며, 진리를 많이 묵상하기만 하여라. 언젠가 진리를 깨달으면, 사람을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람의 모습만 보아도 어떻게 된 일인지를 네가 마음속으로 알게 되고, 사람이 어떤 문제를 보고하는 것만 들어도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며,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사상 관점을 말하는 것만 들어도 그 사람의 분량을 알 수 있게 된다. 어떤 일이든, 어떤 사람이든 모두 그다지 공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명확히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진리를 깨달아 얻는 성과이다.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늘 상상에 기대 사람을 판단하고, 늘 사람을 숭배하고 의지하며, 또 사람에게 함부로 아첨하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걷지 않는다면 최후의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누구나 다 너를 미혹할 수 있고, 너는 아무도 꿰뚫어 보지 못할 것이다. 가장 뚜렷한 적그리스도조차 네가 꿰뚫어 보지 못하여 그가 너를 정신없이 우롱해도 너는 그의 재능에 탄복하며 매일 그의 주변을 맴돌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바로 진정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네가 믿는 대상은 실제 하나님이 아니라 막연한 하나님이며, 너는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설교를 몇 번 듣고도 여전히 적그리스도를 분별할 줄 모르고, 그저 분별하는 방식만 조금 알 뿐이다. 하지만 실제 체험이 부족해서 정말로 적그리스도가 악을 행하는 일에 직면하면 또 분별해 내지 못한다. 비록 설교를 듣고도 적그리스도를 분별할 줄 모르지만, 그는 그런 말씀에 근거해 자신과 맞춰 보고는 자신이 점점 적그리스도 같다고 느껴 결국에는 자신이 적그리스도라고 인정하게 된다. 이렇게 분별하면 별로 착오가 없다.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세부 사항을 그가 마음속으로 완벽하게 알고 있지만, 그저 성질을 규정하는 원칙이 부족할 뿐이다. 이는 큰 문제가 아니며, 그가 설교를 들은 게 그래도 효과가 있다는 증거이다. 비록 진짜 적그리스도는 아직 분별해 내지 못했지만 자신을 분별해 냈으니, 이 또한 좋은 일이다. 먼저 자신을 구원하여 자신이 적그리스도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는 이런 설교를 듣고 마침내 성과를 얻은 것이다. 자신이 적그리스도임을 분별해 낼 수 있는 것, 이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분별하는 것에는 세부 사항이 많다. 내가 보기에는 이 정도면 이미 분별할 줄 아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자신을 분별해 내는 것은 좋은 일이며, 아직 늦지 않았다. 일단 악을 행하고 화근을 만들어 적그리스도로 규정된다면, 그때는 이미 늦었다. 지금 네가 분별해 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네가 적그리스도와 같은 성질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네가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고 있고, 네가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는 것뿐이며, 이렇게 규정할 수밖에 없다. 지금 되돌아선다면 아직 시간이 있지만, 네가 되돌아서지 않을까 봐 걱정이다. 이러면 위험해진다.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이 주제에 대해 이미 여러 차례 교제하면서, 지금까지 몇몇 사람들은 진짜로 분별할 줄 알게 되어 자신이 표출한 적그리스도 성품을 분별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성과이고, 이미 분별이 생겼다는 증거이다. 만약 여기서 더 나아가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을 가진 사람과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닌 사람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완전히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머지않아 실현될 일이니 조급해할 필요 없다. 만약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적그리스도 성품을 분별할 줄 알고,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적그리스도의 길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볼 수 있으며, 또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면, 이는 이미 적그리스도를 분별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적그리스도를 분별할 수 있는 것, 이는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는지와는 상관이 없으며, 사람이 진리에 닿도록 노력할 수 있는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래 믿었고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는 설교도 적지 않게 들었지만, 그의 적그리스도 성품과 모습은 전혀 변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교제해도 깨닫지 못한다. 그 당시에는 그도 자신과 대조해 보지만, 일을 하거나 본분을 이행할 때는 여전히 하던 대로 한다. 이런 사람은 골치 아프고 위험하지 않겠느냐? 매우 위험하다! 내가 아무리 교제하고, 그 당시 그가 듣고 아무리 가책받고 괴로워했어도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전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왜 아부하고 아첨하는 사람들만 발탁하고 양성하는지, 왜 원칙에 따라 사람을 대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설령 그가 악인이나 나쁜 사람이라도 싫어하지 않고 여전히 발탁해 쓰는지 반성하지 않는다. 자신이 왜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고 적그리스도의 길에 들어섰는지는 더더욱 반성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많은 악을 행했으면서도 끝까지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았고,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다. 이는 매우 위험하다. 근래 들어, 예배에서 교제한 것은 모두 적그리스도의 성품과 본질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적그리스도의 성품은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패괴 성품보다 더 숨겨져 있고, 더 사악하다.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적그리스도는 절대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의 결말과 말로는 무엇이겠느냐? 분명 도태될 것이다. 하나님은 적그리스도를 어떻게 규정하였느냐? 진리를 증오하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자로, 하나님의 원수이다! 진리를 적대하고, 하나님과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증오하는 것, 이는 일반인의 일시적인 나약함이나 어리석음이 아니며, 또한 일시적으로 치우치게 이해해 그릇된 사상 관점을 표출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적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원수이고, 모든 긍정적인 사물과 모든 진리를 증오하고, 하나님을 증오하며, 하나님을 적대하는 그런 존재이다. 하나님은 이런 존재를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은 구원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멸시하고 증오하는데,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다. 너희는 이 일을 분명히 이해했느냐? 여기에서 폭로한 것은 사악함, 흉악함, 그리고 진리에 대한 증오이다. 이는 패괴 성품 중 가장 심각한 사탄 성품이고, 사탄의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것들이지, 일반적인 패괴된 인류가 표출하는 패괴 성품이 아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세력의 일종으로, 그들은 교회를 교란하고 통제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경영 사역을 무너뜨리고 방해할 수 있다. 이는 일반적인 패괴 성품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오직 적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다. 너희는 이 일을 가볍게 보지 마라.
악인이라면 모두 사악한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사악함은 흉악한 성품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늘 착한 사람을 괴롭히고 비꼬고 조롱하며 놀림감으로 삼고 등쳐 먹지만, 악인을 보면 굽신거리며 아첨하고 머리 숙여 굴복하며, 약자를 만나면 머리 꼭대기에서 멋대로 전횡하는 극악무도한 사람이다. 크리스천을 괴롭히고 박해하는 자는 모두 사람의 탈을 쓴 마귀이며, 영혼이 없는 짐승이고, 악마가 환생한 것이다. 만약 악인 무리 속에 착한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크리스천을 해치지 않으며, 자신의 이익을 침해하는 사람만 위협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이방인 중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은 무엇이 다르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은 주로 매우 강한 호전성으로 나타난다. 그는 감히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고, 사람과 싸운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혼낸다. 매일매일 어떻게 남들을 괴롭힐지를 궁리한다. 만약 그가 어떤 사람을 질투하거나 미워하면 그 사람을 끝까지 가만두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한 부분이다.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은 또 어떤 부분에서 드러나겠느냐? 바로 기이한 일 처리에서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머리가 좀 좋은 사람, 학력과 지식이 좀 있는 사람, 사회 경험이 좀 있는 사람들도 그를 온전히 헤아리기 어렵다. 그의 행동이 특히나 기이한데, 이는 일반적인 간사함이 아니라 사악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는 음모와 술수를 잘 쓰는데, 일반 사람보다 훨씬 고단수라서 일반 사람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그를 상대할 수조차 없다. 이런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왜 일반 사람은 그를 상대할 수 없다고 하겠느냐? 바로 그가 지나치게 사악하고, 사람을 대단히 잘 미혹하기 때문이다. 그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사람들이 자신을 숭배하고 따르게 하며, 게다가 다양한 사람들을 이용해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파괴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 집에서 여러 차례 적그리스도의 다양한 모습, 성품, 본질을 교제하여 사람들이 분별하게 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해 “어째서 늘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것만 교제하나요?”라고 말하는데, 이는 적그리스도가 지나치게 사람을 잘 미혹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치사율이 매우 높은 전염병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이 한 번에 전염되고, 전염 속도가 빠르며, 범위가 넓고, 전염률과 사망률이 비교적 높다. 이런 결과는 매우 심각하지 않으냐? 만약 너희에게 이렇게 교제하지 않으면, 너희가 적그리스도의 미혹과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너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매우 어렵다. 일반 사람들은 교만한 성품을 표출할 때 기껏해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교만한 추태를 보일 뿐이다. 때로는 큰소리치고 허풍을 떨거나, 때로는 자신을 과시하고 드러내거나, 때로는 지위를 앞세워 남에게 훈계하기를 좋아하기도 한다. 그런데 적그리스도가 이렇겠느냐? 겉으로는 그도 지위를 앞세우지 않고, 지위를 좋아하지 않으며, 지위에 전혀 흥미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지위에 대한 매우 강한 욕망이 있다. 마치 이방의 몇몇 황제와 산적 두목이 권력을 쟁취할 때는 자신의 형제들과 동고동락하며, 무척 수더분하고 별다른 야심이 없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의 내면 깊숙한 곳의 욕망을 네가 보았느냐? 그가 왜 그런 고생을 감수했겠느냐? 욕망이 지탱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거대한 야심이 숨겨져 있다. 그는 언젠가 황위에 오르기 위해 어떤 고생이든 감수할 수 있으며, 어떤 모함과 비방, 거슬리는 말, 모욕도 다 참을 수 있다. 이것이 기이함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그가 이런 야심을 아무에게나 다 알릴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꼭꼭 숨긴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보통 사람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 내고, 모두가 견디지 못하는 고통을 견뎌 내며, 끈기 있고, 별다른 야심이 없으며, 무척이나 수더분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해 주는 모습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가 황위에 올라 실권을 잡게 되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남이 황위를 찬탈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그는 자신과 동고동락하며 권력을 쟁취했던 공신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 진상이 드러나는 그날, 사람들은 비로소 이 사람의 속내가 무척 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너는 그가 행한 이 모든 것이 어떤 야심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음을 돌아볼 때 아주 사악한 그의 성품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그의 이런 수단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기이함이다. 적그리스도는 일할 때 이런 성품을 보인다. 적그리스도와 집권자인 마왕은 모두 같은 부류이다. 그들은 권력과 지위를 얻지 못하면 절대 교회에서 아무 이유 없이 계속 이렇게 고난을 겪고 인내하지 않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절대 평범하게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에서 참고 양보하며 평범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되어 묵묵히 한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 그들은 절대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지위가 생긴 후 적그리스도의 길을 걸었다는 이유로 교체되어 ‘앞으로는 지위가 없으니 얌전히 보통 사람으로 살아야겠어. 할 수 있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말이야. 지위가 없어도 난 여전히 열심히 하나님을 믿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가 적그리스도이겠느냐? 이는 한때 적그리스도의 길을 걸었고 잠시 어리석어 길을 잘못 든 것일 뿐, 적그리스도는 아니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지위가 없으면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또 온갖 방법을 동원해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신을 숭배하고 따르게 함으로써 권력을 잡으려는 야심과 욕망을 채우려 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과 적그리스도의 차이점이다. 우리가 적그리스도의 이런 성품, 본질, 모습을 가지고 분별하고 해부하는 이유는 이 문제의 성질이 매우 심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적그리스도를 분별하지 못한다. 평범한 형제자매들은 고사하고, 진리를 약간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일부 리더 일꾼들도 적그리스도를 분별해 낼 수 있다고 확실하게 자신하지 못하며, 몇 퍼센트나 자신할 수 있는지도 말하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분량이 너무 작은 것이다. 적그리스도를 정확하게 분별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참된 분량이 있는 사람이다.
지금 너희가 직면한 중대한 문제는 무엇이냐? 대부분의 사람은 분별할 줄 몰라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에게 쉽게 미혹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다양한 사람을 분별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사람의 다양한 행위와 말이 사람의 어떤 성품을 의미하는지를 분별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또한, 너희는 진리 실제란 무엇인지, 글귀와 도리란 무엇인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이런 것도 분별할 줄 모른다면, 너희는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가 없다. 분별이 없는데, 어떻게 실제에 진입하는 길이 생길 수 있겠느냐? 일부 리더 일꾼은 글귀와 도리만을 이야기하며, 글귀와 도리를 이해하면 실제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 편히 글귀와 도리를 이야기하고, 이야기할수록 더 흥이 난다. 그 결과 시험에 직면해 넘어지게 되면, 자기 자신조차도 왜 넘어졌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고는 “하나님께서 왜 저를 지켜 주지 않으셨나요?”라고 말한다. 이는 수치스러운 실패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일부 리더 일꾼이 늘 글귀와 도리만 말한다면, 너희는 분별할 수 있겠느냐? (분별할 수 없습니다.) 때로 내가 몇몇 형제자매의 보고를 들어 보면, 어떤 리더가 항상 글귀와 도리만 이야기해 리더로 적합하지 않으니 교체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그들에게 재선거를 하게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분별이 없어 선출된 리더 일꾼 역시 모두 글귀와 도리를 이야기하고 실제가 거의 없는 사람이다. 이는 매우 심각한 일이자 매우 난처한 일이다. 너희는 내가 교제하는 이러한 말, 이러한 일들을 듣고 평범한 리더의 말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느냐? 차이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무엇이 진리 실제인지 아는 것이다. 만약 네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 똑같다고 생각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도 배웠어. 우리가 하는 말과 하나님 말씀의 의미는 다 같아.’라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된다. 이는 네가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 말씀을 따라 할 줄만 알고, 하나님 말씀을 약간 암기할 줄만 알지, 전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대부분의 적그리스도는 모두 어느 정도의 은사와 말솜씨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사람을 미혹할 자본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성품이 사악하고 말과 행동을 할 때 수단을 써서 사람을 매우 잘 미혹한다. 너희가 글귀와 도리만 말할 줄 알 뿐 무엇이 진리 실제인지 분별할 줄 모른다면,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될 수밖에 없다. 이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지 않는 것조차 불가능한데,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게 쉽겠느냐?
2019년 6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