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조 자신을 높이고 증거한다
참고 포서기(捕鼠記)
최근에 나는 희한한 일을 하나 전해 들었다. 너희는 이 일이 사람의 행위, 성품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 이야기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어떤 문제를 설명하려는 것인지 한번 들어 보아라. 일부 중국인이 미국에 오면 사회 환경과 풍조가 중국과 크게 다른 것 외에도 아주 재밌다고 느끼는 일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이 국가에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을 포함한 여러 생물도 아주 자유롭고 그들을 해치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자유로운 것은 당연히 사회 제도 덕분이겠지만 동물을 포함한 여러 생물은 어째서 자유로운 것이겠느냐? 사회 제도와 관련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자연환경 전체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사회 제도, 그리고 정부 정책과 관련 있다. 여기에서는 곳곳에 야생 동물이 있어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도로변에서는 풀밭에서 풀을 뜯어먹는 기러기를 볼 수 있고, 공원과 잔디밭, 숲속에서는 사슴, 곰, 늑대, 혹은 칠면조나 꿩 같은 각종 조류 등의 야생 동물을 볼 수 있다. 이런 광경을 보면 사람은 제일 먼저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대자연을 보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대자연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여기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자유롭구나. 여기서 동물로 다시 태어나는 게 중국에서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 낫겠어. 여기는 동물들이 다 자유롭고, 동물을 해치는 사람도 없으니까.” 이렇게 말하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오래 머물면서 이런 것들을 늘 보다 보면 신기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환경에 익숙해진 뒤 이런저런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런 동물들이 자유롭게 살면서 아무도 관리하거나 지켜보지 않는데, 잡아먹어도 되지 않을까? 먹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먹을 순 없지.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한번 알아봐야겠어.’ 자료를 찾아보니, 모든 야생 동물은 예외 없이 국가의 법적 보호를 받고 있으므로 함부로 잡아 죽여선 안 된다고, 사냥하려면 국가가 정한 사냥 구역에 가야 할 뿐 아니라 허가증도 있어야 하고, 사냥한 동물에 대해 비용을 납부할 수도 있다고 법에서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요컨대 법적으로 야생 동물을 보호하고 있다고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야생 동물 보호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맛있는 야생 동물이 이렇게나 많은데 마음대로 잡아먹지 못하게 하다니 너무 아쉽군! 중국에서는 아무도 이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아. ‘신고 없으면 조사하지 않는다’는 거지. 한 마리 잡아먹어도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하지만 민주 국가에서는 그럴 수 없어. 법적 규정도 있는 데다가 다른 나라에 와서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하지만 이런 동물들이 다 야생 동물들인데 다 그림의 떡이라니 너무 아깝군! 방법을 좀 생각해 보자. 어떻게 하면 야생 동물을 먹고도 들키지 않고 법을 위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방법을 하나 생각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우리를 하나 만들어서 그 안에 맛있는 음식을 갖다 놓고 동물을 유인해 야생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을 잡은 다음, 아무도 없는 데서 잡아먹으면 법을 위반한다고 할 수 없지 않나? 이런 작은 동물은 국가에서 보호 동물도 아니고 법률상 구체적인 규정도 없잖아. 그러면 야생 동물도 먹을 수 있고 법을 위반할 일도 없으니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격이지.” 그는 이런 생각을 갖게 된 뒤 우리를 만들어 사냥을 시작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에 쥐 한 마리가 들어오자 그는 얼른 잡아먹고는 이것이 진정한 야생 동물 고기라고 생각했다! 그는 먹고 나서 어떤 결론을 내리겠느냐? ‘야생 동물은 정말 맛있군. 앞으로 다른 야생 동물 고기를 먹을 방법도 생각해 봐야겠어. 법을 위반하지만 않으면 난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고.’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요, 아니면 지어낸 얘기인가요?” 우선 진짜인지 가짜인지,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들려준 이 일에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아라. 그런 일을 하는 것을 큰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법에 저촉된다고 할 수 있겠느냐? 도의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도의에 어긋나느냐, 인성에 어긋나느냐, 아니면 다른 무엇에 어긋나느냐? 우선, 이런 행위가 칭찬받을 행위인지, 비난받을 행위인지부터 말해 보아라. 너희는 어디에 찬성하느냐? (비난받을 행위입니다.) 도의에 어긋나든 법률에 위배되든, 아니면 인성에 어긋나든 결국 이런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고 인성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에 속하겠느냐? 사람의 이런 성품이나 행위를 무슨 큰 문제라고 할 수 있겠느냐? 너희의 기준으로는 이 일을 어떻게 평가하겠느냐?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각 무리에서 이런 행위가 많으냐, 적으냐? (많습니다.) 이는 아주 간악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떳떳하지 못한 행위이고 정상 인성이 보여야 할 모습은 아니다. 그럼 그것은 대체 어떤 모습인지 너희가 분류해 보아라. 이는 어떤 행위에 속하겠느냐? 권장할 만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권장할 만하지도, 칭찬할 만하지도 않은 것으로, 비난하고 경멸해야 하는 일이다. 기왕 모든 무리와 일상생활에서 자주 나타나고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이런 행위가 많이 일어나고, 게다가 항상 누군가 이런 일을 저지르는 만큼, 모든 사람이 이런 일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가능한 한 이런 행위를 멀리할 수 있도록 이를 공개적으로 논의할 만하지 않겠느냐? 그러면 좋지 않겠느냐? (좋습니다.) 그럼 정의해 보자. 이는 어떤 행위이겠느냐? 교만함이겠느냐? 강퍅함이겠느냐? 간사함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사악함이겠느냐? (조금 사악합니다.) 어느 정도 근접했다. 너희가 배우고 이해한 단어 중에 이런 행위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있느냐? (‘비열하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비열하다는 뜻도 어느 정도 있다. ‘비열하다’는 이런 행위와 본질을 포함하는 단어이긴 하지만 이런 행위를 요약하고 일괄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는 악독하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쥐를 죽인 것을 악독하다고 한다면 쥐를 박멸하는 것은 부정적인 사물이 되기 때문이다. 쥐를 박멸하는 것은 사실 긍정적인 사물이다. 쥐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쥐를 박멸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쥐를 박멸하는 것과 먹는 것은 다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위를 한 마디로 뭐라고 요약할 수 있겠느냐? 이런 행위와 관련 있는 단어로 어떤 것이 떠오르느냐? (‘구질구질하다’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인격이 떨어진다’라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인격이 떨어지고, 비열하고, 구질구질하다. 일상생활에서 어떤 사람의 행위가 다소 저속하고,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무엇이겠느냐? (‘불량하다’입니다.) ‘불량하다’라는 단어로 이런 행위를 요약하면 정확하게 딱 들어맞는다. 왜 불량하다고 정의하겠느냐? 비열하고 이기적이고 지저분하다고 하면 그런 것은 그저 불량배 같은 사람이 표출하는 하나의 모습일 뿐이다. ‘불량하다’는 단어에는 비열하고 저질스럽고 지저분하고 이기적인 것, 도덕적이지 않은 것, 예의 없이 행동하는 것, 떳떳하지 못하거나 남몰래 행동하는 것, 부적절한 일만 하는 것 등 여러 가지가 포함된다. 이것이 바로 불량배 같은 사람의 각종 행위와 모습이다. 예를 들어, 정상인은 무슨 일을 하고 싶을 때 정당한 일은 거침없이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법률에 위배되면 포기하고 하지 않는다. 반면 불량배 같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법률이 제한하는 일에 대해서는 나름의 대책이 있다. 법망을 피하고 백방으로 손을 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인륜과 도덕, 인성에 부합하는지, 결과가 어떤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할 뿐이다. 이런 것을 ‘불량하다’고 한다. 불량배 같은 사람에게 인격이나 존엄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고상하겠느냐, 아니면 저속하겠느냐? (저속합니다.) 어떤 면에서 저속하겠느냐? (처신에 최소한 지켜야 할 선이 없습니다.) 그렇다. 이런 사람은 처신할 때 최소한 지켜야 할 선도, 원칙도 없다. 결과를 고려하지도 않은 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법률과 도덕, 양심에 맞든 맞지 않든, 누가 비난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이득을 얻고 누리기만 하면 그만이다. 행동이 저속하고 생각이 비열한데, 떳떳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량하다는 의미이다. ‘불량하다’는 단어를 전에 언급했던, 성품을 나타내는 몇 가지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겠느냐? 정말 대체하기 어렵다. ‘불량하다’는 단어가 꽤 특수하니 이런 사람은 특수한 사람이겠느냐? 그렇지도 않다. 너희에게도 불량 습성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세수와 양치를 다하고 나서 세면대 위에 여기저기 물이 있어도 닦지 않고, 밥을 다 먹고 나서 밥알과 국물이 식탁 위에 떨어져 있어도 정리하지 않습니다. 입던 옷이 더러워지면 개어 놓지도 않고 아무 데나 던져둡니다. 이것도 불량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런 일들은 생활 속의 사소한 부분이다. 위생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진정한 불량 습성이 아니다. 그것은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관련 있다. 무리에서 사람에게 이로운 일을 하지 못하고, 교양과 예의가 없어 반감과 혐오를 일으키며, 어디에 가든 규칙과 제도를 지킬 줄 모르고, 그런 의식이 없다면 이것은 인성에 무언가 부족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무엇이 부족하겠느냐? 이성이 부족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존엄성이 없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존엄성도, 인격도, 교양도 없다. 이는 처신의 최소한의 선, 그리고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관련 있다. 이 기준조차 충족하지 못한다면 진리 실행을 어떻게 논하겠느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어떻게 논하겠느냐?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어떻게 논하겠느냐? 그러려면 한참 멀었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이런 사람은 관리하기 쉽겠느냐? 변화하기 쉽겠느냐? 그럴 리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변화할 수 있겠느냐? 사람들이 서로 감독하고 제약하고 지적해야 하고, 심각해지면 다 같이 일어나 질책해야 한다. 질책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를 돕기 위한 것이다. 그가 제대로 처신하고 볼썽사납거나 저속한 취미의 일을 하지 않도록 도우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량 습성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주로 어떤 증상이나 모습을 보이겠느냐? 내가 정확히 요약했는지 너희가 살펴보아라. 불량 습성이 있는 사람은 무엇과 같겠느냐? 길들여지지 않고 버릇도 없는 야생 동물과 같다. 가장 주된 특징은 바로 교만하고 거칠고 제약을 받지 않고, 함부로 굴며 진리는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누구도 관여해서도 안 되며 아무에게나 대들고 아무도 안중에 없다. 너희가 보기에 불량 습성에 포함된 여러 특징은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이렇게 교만하고 이성적이지 않으며 함부로 구는 성품은 너무도 심각한 것이다. 설사 그가 겉으로는 하나님을 판단하거나 거역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 해도 그의 교만한 성품으로 보아 그는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기가 너무나 쉽다. 그의 모든 행동은 다 패괴 성품의 표출이다. 이런 불량 습성이 어느 정도까지 심각해지면 사람은 토적이나 마귀가 되고, 토적이나 마귀는 영영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파멸되어야 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룰 만한 가치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비록 사람의 본성 본질이나 성품과 관련이 없지만 사람의 행위에 관련되는데, 그것은 사람의 본질과 크게 차이가 없고 아주 무관하지도 않다. 이 이야기의 제목을 뭐라고 지으면 좋겠느냐? 너무 직접적이지 않은 우의적인 특징을 가진 제목으로 지어 보아라. (‘포서기’가 좋겠습니다.) ‘포서기’는 그런대로 괜찮은 제목이다. ‘명분도 정당하고 이유도 타당하게’ 쥐를 잡아 놓고 “어쩔 수 없었어요. 쥐가 제 발로 뛰어 들어온걸요. 너무 불쌍해요. 다쳐서 도망가도 어차피 죽을걸요. 죽으면 다른 동물이 먹을 텐데 그럴 바에야 제가 먹는 게 낫죠. 제가 먹는 게 명분도 정당하고 이유도 타당하지 않나요?”라고 말한다. 먹기 위해 갖은 핑계와 이유를 만든 다음 편안한 마음으로 먹었다. 이게 바로 불량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겨우 이런 일 때문에 고생하고 애쓰는 건 무의미하다. 그러나 불량 습성이 있는 사람은 이런 일을 한다. 정상인이 이런 일을 하겠느냐? 인성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 이런 일을 하겠느냐? (하지 않습니다.) 왜 하지 않겠느냐? 이는 인격과 관련 있다. 도둑 근성을 고치지 않는 사람은 늘 좀도둑질하며 떳떳하지 못한 일을 저지른다. 그의 집에 물건이 부족해서겠느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그런 불량 습성이 있기 때문에 도둑질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도둑질로 그의 기호와 탐욕스러운 성품을 충족시키면 그는 마음이 위로받고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괴로워한다. 이것이 바로 불량 습성이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지난번에 교제한 내용을 되새겨 보자. 하나님 선민의 본분 이행은 주로 여섯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으로, 관련 내용은 전부 다루었다. 두 번째는 교회에서 각급 리더 일꾼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으로, 이런 사람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로 나뉘는데, 지난번에는 적그리스도 부류에 대해 다루었다.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사역하는지, 그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그들이 하는 어떤 일을 통해 적그리스도로 규정될 수 있는지, 우리는 이런 사람의 모습과 성품을 분류해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느냐? (제1조 사람의 마음을 농락한다. 제2조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를 공격하고 배척한다. 제3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배척하고 공격한다. 제4조 자신을 높이고 증거한다. 제5조 사람을 미혹하고 회유하고 위협하고 통제한다.) 지난번에 제5조까지 정리했다. 이 다섯 가지는 너희가 다 적었을 테니 나머지는 이어서 적어라. 제6조 일 처리가 기이하고,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남들과 교제하는 법이 없고, 남들에게 순종을 강요한다. 제7조 사악함과 음험함, 그리고 간사함. 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 제9조 두각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 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 제11조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잘못에도 회개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관념을 퍼뜨리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판단한다. 제12조 복받을 희망이나 지위가 없으면 물러나려 한다. 제13조 사람의 마음뿐만 아니라 교회의 재정도 통제한다. 제14조 하나님 집을 자기 세상으로 생각한다. 제15조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의 본질을 부정한다. 총 열다섯 가지 조항으로, 모두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을 분석하고 폭로한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각종 행위와 태도, 성품이 이 열다섯 가지 조항에 기본적으로 다 요약되어 있다. 일부는 겉으로 보기에는 행위 같지만 그 행위의 이면에는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이 있다. 이 열다섯 가지는 표면적으로 보면 다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모두 통속적인 말이기 때문에 사람이 이해하기 쉬우며, 그 밖에 각 조항에 요약되어 있는 내용이 다 사람의 모습과 표출, 그리고 본질과 관련 있다. 각 조항은 일시적인 행위나 생각이 아닌 성품의 일종이다. 성품이란 무엇이냐? 성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어디서든, 시간이나 지리적 위치가 변한다고 해도 그의 생각과 사상, 일 처리 원칙, 행동 방식, 추구하는 목표는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만약 환경이 변하여 이런 행동 방식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행위일 뿐 패괴 성품의 표출이라 할 수 없다. 사실 성품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말과 행동을 지배하고 어떤 조건에도 제약받거나 영향받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본질이다. 본질은 사람이 생존을 위해 의지하는 것으로, 시간과 장소, 또는 외부 요소가 변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본질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도 정리한 적그리스도의 열다섯 가지 모습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지위를 추구하지도 않고, 천성적으로 야심도 별로 없어요. 그 밖에도 지금 어떤 책임을 짊어지고 있지도 않고 리더 일꾼도 아니고 나서는 걸 좋아하지도 않죠. 그럼 저는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과 관련이 없는 것 아닌가요? 관련이 없다면 이런 교제를 들을 필요도, 저 자신을 비춰 볼 필요도 없지 않나요?” 과연 그렇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적그리스도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이런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교제한 진리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이런 교제를 통해 진리를 깨닫고 자신을 인식한 다음 올바른 길을 찾아 원칙을 가지고 본분을 이행하거나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그래야만 적그리스도의 길에서 벗어나 온전케 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다. 너희가 적그리스도의 이런 모습을 자신과 대조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너희에게 경계이자 지적이요, 폭로이자 심판일 것이다. 대조하지 못했더라도 자신에게도 비슷한 내적 상태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너는 자신을 많이 반성하고 인식하며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그러면 점차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있다.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어떻게 높이고 증거하는지 해부하다
오늘은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 중 제4조인 ‘자신을 높이고 증거한다’를 교제하겠다. 패괴된 인간은 모두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며 뽐내 남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숭배하게 할 수 있다. 이는 사탄의 본성에 지배된 사람이 본능적으로 보이는 반응이자, 패괴된 인류의 공통적인 특성이다. 사람은 보통 어떻게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느냐? 어떻게 남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숭배하게 하는 목적을 달성하느냐?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역을 했고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헌신을 했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했는지 증거한다. 자신의 밑천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높여 사람들 마음속에 자신의 지위를 더 높게, 더 공고하게, 더 안정되게 만든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고 우러러보고 부러워하며, 심지어는 숭배하고 앙망하고 추종하게 한다. 사람은 이 목적을 위해서 겉으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나 본질적으로는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일을 많이 저질렀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성적인 것이냐? 그것은 이성의 범주를 넘어선 일로, 염치없는 것이다. 즉, 염치도 모르고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고,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증거하며 심지어는 자신에게 어떤 은사나 재능, 특별한 기능, 어떤 경험이나 좋은 처세술, 남을 우롱하는 수단 등이 있다고 자랑하기까지 한다.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수단은 자신을 뽐내고 남을 깎아내리는 것이며, 또한 자신을 위장하고 포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들이 자신의 약점과 결점, 부족한 부분을 보지 못하게 하고, 영원히 자신의 빛나는 일면만 보게 한다. 심지어는 소극적이 되어도 남들에게 알리거나 마음을 열고 교제하지 못하며, 일을 잘못해도 애써 포장하고 숨긴다. 자신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교회 사역에 끼친 손실은 입에도 올리는 법이 없지만, 아주 작은 기여나 성과만 있어도 즉시 끄집어내 자랑한다. 자신이 얼마나 재능 있고 자질이 좋은지, 자신이 얼마나 남다르고 일반인보다 뛰어난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해 한스러워한다. 이것이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방식이 아니냐?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이러한 행위가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럼 사람이 이런 일을 할 때, 일반적으로 어떤 성품을 드러내겠느냐? 교만함이다. 이는 가장 주된 성품 중 하나다. 그다음으로는 간사함이 있다. 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하려는 것이다. 말할 때 조금의 허점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 속셈과 간계를 갖고 말을 하고 자신을 뽐내고 있으면서도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결과는, 그가 남들보다 대단하고 아무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며 그의 앞에만 가면 작아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수단으로 이뤄진 것 아니겠느냐? 그 수단의 이면에는 어떤 성품이 있겠느냐? 여기에 사악한 성분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사악한 성품이다. 그가 쓴 그런 수단은 간사한 성품에 지배된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럼 어째서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그것이 사악함과 어떤 관계가 있겠느냐? 말해 보아라. 그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목적을 공개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한 가지 욕망이 있는데, 그는 말하고 행동할 때 그 욕망을 위해 하는 것이다. 또한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동기와 목적은 아주 은밀하다. 예를 들어, 그는 성동격서의 수단, 또는 떳떳하지 못한 수단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이 은밀함에 괴이한 성질이 들어 있지 않겠느냐? 그 괴이함을 사악함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네.) 그것은 사악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간사함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그는 일부 수단과 방법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그런 성품은 간사함이다. 하지만 그는 늘 남의 추종과 앙망, 숭배를 받고자 하는 마음속의 야심과 욕망에 지배되어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염치없이 그런 일을 저지른다. 이것은 어떤 성품이겠느냐? 이는 사악함에 이른 것이다. 사악함은 웬만큼 옹졸하거나 간사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패괴를 뛰어넘어 사악함에 이르렀다면 이는 더 심하게 패괴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 사악함의 정도를 너희가 한번 설명해 보아라. 뭐라고 하면 적절하겠느냐? 어째서 평범한 패괴를 뛰어넘어 사악함에 이르렀겠느냐? 너희는 이 일을 간파할 수 있겠느냐? 간사함과 사악함은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나타나는 모습으로 보면 사악함과 간사함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사악함은 간사함보다 더 심각하다. 사악함은 간사함의 극치이다. 어떤 사람의 성품이 사악하다고 하면 그 사람은 보통 간사한 게 아니다. 보통 간사한 사람이라면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행동이 그다지 정직하지 못한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사악함은 간사함보다 심각하고 정도가 심하다. 성품이 사악한 사람은 간사함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 더 심각하다. 일을 처리하는 수단과 방식, 생각이 더 교활하고 은밀하여 보통 사람은 꿰뚫어 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보통 사람도 남들이 자신을 우러러보도록 늘 자신을 과시하고 뽐내고, 또한 그런 성품과 내적 상태를 드러낸다. 그럼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할 때는 보통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어디에서 차이가 나겠느냐? 이는 분명히 해야 한다. 가끔 자신을 높이거나 과시하는 모습을 보고 전부 다 적그리스도 범주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 이는 개념적 오류를 범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겠느냐? 어디에서 차이가 나겠느냐? 이를 명확히 말할 수 있다면 너는 적그리스도의 본질이 대체 무엇인지 간파할 수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적그리스도의 일 처리 방식은 더욱 은밀합니다. 그는 아주 정당해 보이는 수단으로 사람을 현혹합니다. 정당한 일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람들이 의식하기도 전에 그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높이고 증거합니다. 그의 방식이 비교적 은밀합니다.) 방식이 비교적 은밀하다는 것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방식으로 구별한 것이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너희가 보기에 의식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과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은 성질상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마음가짐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이 차이가 나는 부분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패괴 성품을 가진 보통 사람이 자신을 높이고 뽐내는 것은 과시하기 위해서이다. 과시하고 나면 그만이지 다른 사람이 우러러보든 내려다보든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의도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은데, 그것은 그저 성품의 지배를 받은 것이고 성품의 표출일 뿐이다. 이런 성품이 쉽게 변하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책망과 훈계, 심판과 형벌을 겪고 나면 점차 변화한다. 속도는 느리지만 갈수록 염치와 이성이 생겨 그런 행위가 점차 줄어든다. 그는 그런 행위를 정죄하고 언행을 삼가며 자신을 단속한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과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은 그 내면에 있는 성품은 같지만 성질은 다르다. 성질이 어떻게 다르겠느냐? 의식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에는 의도가 있다. 그는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높이고 증거할 때마다 일정한 속셈과 남에게 알릴 수 없는 목적, 사탄의 야심과 욕망을 가지고 그런 일을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모습이지만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을 하나님 편에서는 어떻게 정의하겠느냐? 패괴 성품의 표출이라고 정의한다. 반면 의식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을 하나님 편에서는 어떻게 정의하겠느냐? 사람을 현혹하려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의 의도는 남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숭배하고 앙망하여 추종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의 그런 행동의 성질은 현혹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단 추종받고 숭배받기 위해 사람을 현혹시키고 점유하려는 의도가 있으면 그는 말하고 행동할 때 일부 수단과 방식을 동원한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기반이 비교적 얕은 사람은 쉽게 현혹되고 오도될 수 있다. 그들은 분별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듣고 옳다고 생각하여 그를 앙망하고 우러러보며, 시간이 지나면 그를 숭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추종하기까지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있는데, 바로 일부 사람들은 설교를 들은 직후에는 꽤 이해한 것 같지만 나중에 일이 닥쳤을 때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와서 구하여도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해 결국 리더에게 물어 해결한다. 아편을 피우는 데 중독되고 그게 습관이 되면 피우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일이 닥칠 때마다 리더를 찾아 해결하려고 한다. 따라서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은 은연중에 분량이 작고 분별력이 없으며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마약이 되어 버린다. 그들은 일이 닥치면 적그리스도를 찾아가 물어보고, 적그리스도가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설사 여럿이 상의해 공감대를 형성한 일이라고 해도 감히 실행하지 못한다. 적그리스도의 뜻에 위배되어 억압받을까 두려워 무슨 일이든 적그리스도가 말하고 나서야 행동하고, 심지어 분명 이미 진리 원칙을 깨달았음에도 결정을 내리지도, 그 일을 행하지도 못한 채 그들이 앙망하는 그 주인이 결정을 내리기만을 기다린다. 주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누가 그 일을 하든 확신을 갖지 못한다. 이는 중독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걸 중독이라고 한다. 적그리스도가 얼마나 사역을 많이 하고 독을 많이 탔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심하게 중독되겠느냐? 그가 자주 자신을 분석하고 인식하며 자신의 연약함과 잘못, 과오를 모두 털어놓았다면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숭배했겠느냐? 그랬을 리 없다. 보아하니 그는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일에 꽤 공을 들인 듯한데, 그 덕에 이런 ‘성과’를 얻은 것이다. 이게 바로 그가 원하는 성과이다. 사람들은 그를 떠나서는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적절한지 알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사람들을 통제하는 기간 동안 그가 독을 얼마나 많이 타고 준비를 얼마나 많이 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가 몇 마디 말만 하고 말았다면 사람들이 그에게 그렇게 휘둘리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적그리스도는 이 일에서 남들이 그를 숭배하게 하고 무슨 일이든 그를 앙망하고 따르게 하려는 목적을 달성했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일도 많이 행하고,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말도 많이 하지 않았겠느냐? 그가 그렇게 한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사람들이 그를 떠나서는 행할 길도 없고 살아갈 수도 없게 된다. 마치 그를 떠나면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돌아가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도 가치와 의미가 아예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설교를 들어 봤자 아무 소용없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있으면 살아가는 데 희망이 좀 있지만 그가 죽으면 살아가는 데 희망조차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사탄에게 끌려간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탄에게 끌려가도 당연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왜 당연하다고 하겠느냐? 너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왜 적그리스도를 숭배하고 추종하며 모든 면에서 그에게 휘둘리고 그에게 통제받는 것이냐? 게다가 어느 방면의 본분을 이행하든 하나님 집에서는 사람에게 명확한 원칙과 규정을 알려 주기에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면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 구해야 하고 큰일의 경우 상부에 구해야 한다. 그런데 너는 진리를 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숭배하고 앙망하며 적그리스도의 말을 곧이들으니, 너는 사탄의 앞잡이가 된 것이다. 이는 자업자득이고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느냐?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공통적인 행위이자 모습이며 가장 흔한 모습이기도 하다.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할 때 보이는 주된 특징은 무엇이겠느냐? 보통 사람이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과 어떻게 다르겠느냐? 그가 내면에 자신의 의도를 품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절대 무의식적이지 않고 의도와 욕망, 야심을 품고 있다. 그렇게 자신을 증거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오는데, 사람을 현혹시키고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예를 하나 들 테니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과 관련 있는 모습과 성품인지 너희가 살펴보아라. 전에 어떤 리더가 한곳에서 이삼 년 동안 교회 사역을 했는데, 그는 여러 교회들을 돌아다니다가 그곳에 정착한 것이었다. 정착했다는 게 무슨 뜻이겠느냐? 대부분의 사람이 그를 알고 우러러볼 정도로 그 지역에서 꽤 인지도가 높다는 뜻이다. 그가 가기만 하면 다들 환영하고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다. 그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다들 리더인 그에게 꽤나 익숙해졌고 마음속으로도 그의 행동 방식을 비교적 인정하며 그의 인솔을 받아들였다. 그가 거기에서 얼마나 사역을 많이 하고 말을 많이 했는지, 어떤 말들을 했는지, 이런 세세한 부분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이 그가 리더를 맡는다는 것에 찬성하는 편이었다. 한동안 지난 후 그 리더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는 형제자매들은 다들 말도 잘 듣고 순종적이죠. 교회 여러 면의 상황도 꽤 좋고요. 다만 좀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는 거예요. 환경이 괜찮다면 화창한 날에 넓은 공원에서 만 명 정도 모이는 대예배를 열고,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확성기를 켜 놓고 마이크로 진리를 방출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그럼 우리의 사역이 성과를 거둘 수 있지 않겠어요?”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아멘 하며 찬성했다. 너희가 보기에 “진리를 방출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라는 말에 문제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겠느냐? (그는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겼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너희는 모두 알아차리는데 그 지역의 그 멍청한 작자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게다가 그 말에 아멘 하고 답하기까지 했다! 진리는 그가 방출할 수 있는 것이냐? 그가 누구냐? 그는 그저 평범한 리더일 뿐이다. 사역을 몇 년 했다고 안하무인이 되어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은 채 진리를 선포하려 하니 꽤 힘에 부쳤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증명하겠느냐?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자신이 어떤 본분을 이행하는지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성품을 가진 그가 평소 하는 사역과 말에 진리에 부합하는 부분이 있겠느냐? 분명 터무니없는 말과 마귀적인 말만 지껄여 교회에 공급하고 양육하는 성과를 절대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진리 선포가 무엇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한곳에서 이삼 년 사역했다고 자신에게 명망과 밑천이 생겼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은 채 저 잘났다고 진리를 선포하려 한 것이다. 그의 이런 착각이 역겹지 않으냐? 이런 착각은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정신이 잘못된 것이겠느냐, 아니면 일시적 충동이겠느냐? 그가 사역을 좀 했고, 그 지역의 교회에서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기에 그는 모든 것이 꽤 순조롭다고 느끼고, 그 모든 것이 다 자신이 사역하여 이룬 성과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자신이 공을 세웠다는 느낌에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나 큰 사역을 할 수 있다니 혹시 내가 하나님 아닐까? 내가 하나님이라면 이런 상태로 있는 건 너무 억울해. 외부 환경이 좋으면 내가 진리를 선포할 수 있을 텐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튀어나오다니 이는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는 이성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사탄과 적그리스도의 언행이 정상 인성의 이성을 갖출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사역을 좀 하고 성과를 좀 이루었다고 갑자기 그는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그가 그런 이성적이지 않은 말을 내뱉은 것이 그의 성품과 관련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관련이 있겠느냐? 그의 성품으로 보아 그가 기꺼이 따르는 자가 되려는 것이겠느냐? 자신이 하나님을 따르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했겠느냐? 그랬을 리 없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신분이 존귀하기 그지없고 비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너희는 이런 행위와 그 성질에 익숙하지 않으냐? 애초에 사탄은 무엇 때문에 반 공중으로 쫓겨났느냐? (그는 하나님과 대등해지려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과 대등해지려 했다. 사탄은 앞뒤 가리지 않고 무모하게 날뛰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분수도 몰랐기에 하나님이 그것을 하나님과 같은 공간에서 걷게 했을 때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다. 사탄은 하나님이 하는 일을 하려 하고 하나님을 대표하고 대체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려 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에게 반 공중으로 쫓겨났다. 적그리스도 역시 같은 행동을 하는데, 성질도 같고 그들의 출발점도 같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모습은 가끔 드러나는 것도, 즉흥적인 것도 아니며 사탄 본성의 지배를 받은 것이자 사탄 성품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임이 분명하다. 방금 언급한 이 사람의 모습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적그리스도의 성질입니다.) 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한다는 조항에서 이 모습을 다루겠느냐? 이 모습의 성질과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은 어떤 관련이 있겠느냐? “진리를 방출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라는 그의 말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왜 이 말이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과 관련 있다고 하겠느냐? (그는 자신이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뜻이다. 그의 그런 말을 듣고 나면 다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아주 품격이 넘치네. 저런 어투로 말할 수 있다니, 이는 하나님에게 있는 어투 아닌가? 저런 품격과 도량은 하나님이 갖추신 게 아닌가?’ 이는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목적을 이룬 것 아니겠느냐? 은연중에 남들에게 그를 추앙하고 숭배하고 앙모하는 마음이 들게 한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추한 모습이다. 이는 변칙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이다.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모습으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너희 모두 이 일에서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너희도 자신을 증거하는 일을 할 수 있느냐? 너는 양심과 이성의 단속을 받아 자신을 증거하는 낯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느냐? 단속할 수 있다면 너는 이성이 있고 적그리스도와 다르다는 뜻이다. 네가 이성을 갖추지 못했고 여전히 야심과 욕망을 가진 채 자신을 증거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면 너는 적그리스도와 다를 바 없다. 너희 상황은 어떠냐? 행동할 때 단속을 받느냐?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수치심,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행동을 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이 하나님에게 혐오를 받고 하나님에게 죄짓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고, 그러면 너는 자신을 단속하여 자신을 증거하는 일을 감히 저지르지 못할 것이다. 한두 번 단속하는 것에 성공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그런 속셈과 생각이 조금씩 줄어든다. 그런 생각에 대한 분별력이 생기고 그것이 경멸스럽고 역겹다고 느끼며, 그런 행동을 하고 싶은 충동과 욕망이 점점 줄어들며, 점차 행동을 삼가고 통제할 수 있게 되어 그런 생각도 잘 들지 않게 된다. 네가 의식은 했지만 단속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만의 의도가 특히 강해 그저 남에게 숭배받고 싶어 하고, 아무도 너를 숭배하고 추종하지 않으면 언짢아지고 마음속에 원한이 생기면서 어떤 일을 저지르고 싶어 하며 서슴없이 자신을 증거하고 드러낸다면, 너는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너희는 어떤 상황이냐? (의식하면 단속할 수 있습니다.) 무엇에 기대어 단속하는 것이냐? (하나님에 대한 약간의 인식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면 단속받을 수 있다. 단속은 억제하거나 저지하여 이루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이루게 되는 성과이다. 이성과 인지로 단속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에게 죄지을까 두려워 단속받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이성으로도 단속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없어 자신을 증거하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며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성질이 다르다. 그러면 적그리스도이다.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수법과 모습은 다양하다. 일부는 직접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며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 말하고, 일부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완곡한 표현이나 방식을 써서 변칙적으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한다. 이로써 다른 사람의 앙망, 숭배, 추종을 받고 나아가 사람 마음속에 자리를 차지하려는 목적을 이룬다. 이것이 바로 이런 행위의 성질이다.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이런 성품은 성질이나 이룬 결과로 보든, 아니면 드러나는 방식과 방법, 속셈과 목적으로 보든 보통 사람의 이런 성품과는 다르다. 그 밖에,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사람이 단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만 말하고 말겠느냐? 자신의 단점을 말할 때도 있지만 그런 말을 할 때 그가 정말로 자신을 분석하고 인식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가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진실하지 않고 그 안에 불순물과 의도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느냐? 이 일을 어떻게 간파할 수 있겠느냐?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약점과 단점, 결점, 그리고 패괴 성품을 폭로하는 동시에 죄의 책임을 면하고자 자신을 위한 핑계와 이유를 찾는다는 점이다. 변칙적으로 사람들에게 이렇게 알려 주는 것이다. “누구든 잘못을 저지를 수 있어요.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죠. 제가 이런 잘못을 저지른 데는 다 용서할 만한 이유가 있어요. 작은 실수일 뿐이고요. 여러분이 이런 잘못을 저지른다면 저보다 훨씬 심각할 거예요. 왜냐하면 여러분은 자신을 반성하고 분석하지 않으니까요. 저는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여러분보다 나아요. 더 이성적이고 인격적이죠.” 사람들은 듣고서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게 말이야. 당신은 진리도 많이 깨달았고 분량도 있어. 잘못을 저질러도 자신을 반성하고 분석할 수 있어. 우리보다 훨씬 낫지.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지 않았을 거야. 망신당하기 두려워 자신을 분석할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 역시 당신이 우리보다 분량도 있고 더 용기도 있어.” 그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여전히 남들에게 우러름 받고 이렇게 자신을 자랑하기도 한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일부 적그리스도는 위장하고 속여 다른 사람에게 허상을 보여 주는 데 특히 능하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만나면 자신을 인식하는 얘기를 꺼내고 자신은 마귀요, 사탄이며 인성이 좋지 않아 저주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당신은 스스로를 마귀 사탄이라고 했는데 그럼 어떤 악행을 저질렀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저는 별다른 일은 저지르지 않았지만 마귀예요. 마귀일 뿐 아니라 사탄이기도 하죠!”라고 답한다. 그에게 또 “당신이 스스로를 마귀 사탄이라고 했으니 당신이 어떤 마귀 사탄의 악행을 저질렀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했는지, 당신이 악행을 저지른 사실을 한번 말해 줄 수는 없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저는 별다른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니까요!”라고 말한다. 이번에는 “별다른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으면서 왜 자신을 마귀 사탄이라고 하는 거죠? 그렇게 말하는 목적이 뭔가요?”라고 진지하게 따지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사실 그는 나쁜 일을 많이 저질렀지만 절대 사실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그저 큰소리치고 도리나 들먹이며 자신에 대한 인식을 공허하게 떠들 뿐이다. 구체적으로 그가 어떻게 사람을 구슬리고 속였는지, 어떻게 정에 휘둘려 사람을 썼는지, 어떻게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어떻게 사역지침을 위배했는지, 어떻게 상부를 기만하고 형제자매를 속였는지, 하나님 집에 얼마나 많은 손해를 끼쳤는지, 이런 사실은 일절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진실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가 스스로를 마귀 사탄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인식하는 척 꾸며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는 일종의 수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보통 사람은 이런 수단을 꿰뚫어 볼 수 없다. 일부 리더는 교체된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뽑히는데, 네가 이유를 물으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 리더는 자질이 훌륭하고 자신이 마귀 사탄이라고 인식할 수 있어요. 그 정도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그 정도로 인식할 수 있어요. 우리는 다 인식할 수 없죠. 보통 사람은 그 정도 분량이 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다들 또 그를 뽑은 거예요.” 이는 어찌 된 일이겠느냐? 이는 현혹된 것이다. 자신이 마귀 사탄이라고 그가 인식했는데도 다들 그를 뽑았다면 그가 스스로 마귀 사탄이라고 한 말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과 결과를 불러온 것이겠느냐? (다른 사람이 그를 우러러보게 했습니다.) 그렇다. 다른 사람이 그를 더욱 우러러보게 했다. 이런 수단을 이방인은 “나아가기 위해 물러선다.”라고 한다. 이는 남이 그를 더욱 우러러보게 하기 위해 자신의 단점을 먼저 말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그가 자신을 털어놓고 인식할 수 있다고, 그는 깊이가 있고 높은 경지에 도달했으며 높은 이해력이 있다고 생각하게 하고, 그로 인해 다들 그를 더욱 숭배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를 더욱 숭배하는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다음번 리더 선거에서도 그는 둘도 없는 적임자가 된다. 꽤 뛰어난 수단이 아니겠느냐? 그가 자신에 대한 인식을 그렇게 얘기하지 않고, 자신이 마귀 사탄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소극적인 상태로 있었다면, 사람들은 그를 보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교체되고 지위를 잃더니 소극적으로 변했네요. 전에는 당신이 우리에게 소극적으로 변하지 말라고 가르쳤는데 지금 소극적으로 변한 모습을 보니 당신이 우리보다 더 심각하군요. 우린 당신을 뽑지 않겠어요.”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보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그에 대한 분별력은 부족하지만 최소한 그를 리더로 뽑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우러러보게 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마귀 사탄이에요. 제가 18층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환생하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저를 저주해 주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듣고 가슴 아파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리더가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았어요. 너무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어요! 하나님께서 그가 리더를 하지 못하게 하신다면 저희가 그를 리더로 뽑겠어요.” 다들 그를 이 정도로 옹호하니 이는 사람을 현혹시킨 것 아니겠느냐? 그가 그런 말을 한 본심이 확증됐고 그가 그렇게 사람을 현혹한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사탄은 사람을 현혹할 때 때로는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고,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완곡하게 잘못을 인정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보여 준 것은 모두 허상일 뿐 그 목적은 다른 사람의 동정과 이해를 얻으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완벽한 사람이 없어요. 사람은 모두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어요. 잘못을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좋은 사람인 거죠.”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옳다고 생각하고 계속 그를 숭배하고 추종한다. 그의 수단은 바로 자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변칙적으로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변칙적으로 사람들 마음속 자신의 자리를 높여 사람들이 그의 모든 것, 나아가 그의 잘못까지 받아들이게 한다. 그런 다음 그의 잘못을 용서하고 점차 잊어버리고, 결국 완전히 그를 받아들여 죽을 때까지 그에게 충성하고 그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따르게 한다. 이는 사탄이 일을 처리하는 수단이 아니겠느냐? 사탄은 이렇게 일을 처리한다. 적그리스도 역시 남에게 숭배받고 추종받으려는 야심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런 수단으로 일을 처리한다. 그 결과는 사탄이 사람을 현혹하고 패괴시키는 결과와 같고 별 차이가 없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신은 엉망진창이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심지어 자신은 사탄 마귀이니 저주받아 마땅하며 하나님이 자신을 도태시켜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본성 본질과 패괴 성품은 진실로 인식하지 못하고 실제 상황도 전혀 말하지 못하면서 그저 허상으로 사람을 현혹하려고 하고, 자진해서 잘못을 시인하거나 나아가기 위해 물러서는 방식과 수단으로 사람을 기만하고 속여 남의 호감을 얻으려 한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행동한다. 너희가 이런 사람과 다시 마주친다면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세부적인 내용을 따져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 문제를 추궁하고 세부적인 내용을 따져 물어볼 줄 알아야 한다. 어느 정도로 추궁해야 하겠느냐? 그가 “다시는 여러분을 현혹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리더로 뽑는다고 해도 사양할게요.”라며 용서를 빌 때까지 추궁해야 한다. 너는 “우리가 또 현혹되어 당신을 리더로 뽑는 일은 없을 테니 꿈도 꾸지 마세요!”라고 말해라. 이렇게 하는 게 어떠하냐? 자신을 인식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너무 과장하거나 심지어 자신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진실한 구석이 조금도 없다. 그들은 모두 영적인 척하고, 외식하는 사람으로, 그들이 하는 말은 다 남을 현혹하는 말이다. 너희는 이런 사람이 하는 말의 특징과 세세한 부분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제물을 보관하는 데 관한 맹세서를 쓰게 한다면 너희 생각에 맹세서의 첫마디를 뭐라고 써야 하겠느냐? 이성과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어떻게 써야 하겠느냐?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태도를 밝히려면 어떤 말투와 어휘를 사용해야 하겠느냐? 보통 사람이 하는 말은 정상적으로 느껴지지만, 악인이나 적그리스도 부류의 야심가들의 말에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유의 말투가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 누구누구가 만약 하나님의 제물을 조금이라도 횡령한다면 제 명에 못 죽고 밖에서 차에 치여 죽게 하소서!” 이게 무슨 말투냐? ‘나’라는 글자로 아주 경망스럽게 운을 떼니 글자만 봐도 그의 말투와 어조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나’라는 첫 글자가 아주 경망스럽고 건방지다. 이는 큰소리치며 맹세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맹세를 두고 뭐라고 하겠느냐? 큰소리치는 것이라고 하고 외식하는 것이라고 한다. 맹세서 하나 쓰는데 이토록 건방을 떠는 것은 어떤 성품이겠느냐? 너는 지금 맹세를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맹세하는 것이냐? 하나님에게 맹세하는 것이다. 정상인이라면 어떻게 말해야 하겠느냐? 낮은 자세로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하나님에게 마음속의 말을 좀 털어놓아야지, 큰소리를 치거나 건방을 떨어서는 안 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맹세할 때조차 이렇게 건방을 떠니 사탄의 성품이 너무나도 심각하다! 그렇다면 그가 한 맹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는 이런 뜻이다. ‘당신이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제가 하나님 집의 이익을 탐하고 제물을 훔쳐 먹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가요? 저를 쓰시면서도 믿지 못하고 맹세까지 하라고 하시다니요. 그럼 맹세해 드리지요. 제가 뭐 못할 줄 아시나요? 전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요.’ 이게 무슨 태도이냐? 이는 건방을 떠는 것이고 제멋대로 구는 것이다. 감히 하나님에게 대들며 맹세로 자신을 변명하고 남을 현혹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겠느냐? 조금도 경건하지 않다. 이런 사람이 바로 사탄이요, 적그리스도이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맹세할 때조차 건방짐이 묻어 나오니 이는 어떤 성품이냐? 이런 사람을 구원하겠느냐? 너희는 이런 사람을 본 적 있느냐? 이들의 이런 모습과 표출, 성품을 너희는 분별할 줄 모르지 않느냐? 어떤 사람은 이런 사람이 생각이 뚜렷하고 영적인 이해력도 있으며 정직한 데다 하나님에게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리석지 않으냐? 분별력이 없는 것 아니냐? 맹세서의 표면적인 뜻과 어휘 사용에서도 이렇게 악질적인 행동과 성품이 드러나는데 그것을 좋게 여긴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있겠느냐? 보아하니 너희가 깨달은 것은 모두 도리인 것 같다. 도리와 빈말만 떠들 줄 알지 구체적인 일과 문제는 분별할 줄 모른다. 앞으로 이런 일을 마주하면 분별할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인성도 갖추지 않은 짐승이다. 이런 맹세서를 본 적 있느냐? 너희는 이런 맹세서를 쓴 적 있느냐? (쓴 적 있습니다.) 이런 말투로 이렇게 첫머리를 쓰지 않았느냐? (그 사람처럼 그렇게 직설적으로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 성질은 같지 않겠느냐? (같습니다.) 그 성질은 같은 것이다. 맹세는 의를 위해 용감히 목숨을 바치겠다는 그런 사기(士氣)가 필요한 전쟁터 출전이 아니다. 맹세에는 사기가 필요 없다. 하나님께 맹세할 때 너는 곰곰이 생각하여 네가 왜 맹세서를 써야 하는지, 누구에게 맹세하고 다짐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사람의 태도이지 사기가 아니다. 너의 그런 사기는 건방을 떠는 것이고, 대드는 것이고, 사탄의 교만한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경건한 것이 아니고, 피조물이 갖춰야 할 태도도 아니고, 피조물이 서야 할 위치는 더더욱 아니다.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국가 영웅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 아니겠느냐? 이와 관련 있지 않겠느냐? 사람은 너무 심하게 중독되어 맹세 보증서를 쓰기만 하면 국가와 국민에게 충성을 다한 역대 명사를 떠올린다. 그런 사람은 다 사탄과 한패이다. 자신을 부각시키고 증거하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좋은 평판을 받아 훌륭한 명성을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한다. 후세 사람들은 그들이 어리석게 충성을 바쳤다고 평가하는데, 너는 그들이 정말 어리석다고 생각하느냐? 사실 이제 와서 보면 그들의 어리석음은 무엇이었느냐? 가장 간교하고 사악한 행동 방식이며 그 속에 개인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음도, 충성도 아닌 사악함이다.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증거하는 주제는 이미 적지 않게 교제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너희가 간파하지 못한 문제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자신을 증거할 때 언어로 자신을 과시하는 말을 어느 정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행동으로 과시하는 사람도 있다. 행동으로 자신을 증거하는 것에는 어떤 모습들이 있느냐? 겉으로 보기에 비교적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고 사람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꽤 고상하고 도덕적 기준에 부합해 보이는 행동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그가 존귀하고 인격적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주 경건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가득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항상 겉보기에 좋은 행위를 보여 주는 것으로 사람을 현혹하는데, 이것도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느낌이 들지 않느냐?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가장 흔한 방식이 바로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뛰어나고, 남다른 고견을 가지고 있는지 명확한 말로 표현해서 남들이 그를 높이 보고 우러러보게 한다. 그러나 명확한 말을 사용하지 않고 겉면의 행동으로 그가 남보다 낫다는 것을 증거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행동 방식은 심사숙고를 거친 것으로, 속셈과 의도가 어느 정도 담겨 있으며 목적성이 강한 편이다. 포장과 가공을 거쳐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고 고상하며 경건하고 성도의 품위에 맞는,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진리에 부합하는 행위와 행동 방식을 남에게 보여 준다. 이렇게 해도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여 남들의 우러름과 숭배를 받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 너희는 이런 일을 접하거나 목격한 적 있느냐? 너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느냐, 없느냐? 내가 다루는 이런 주제와 일이 현실 생활과 동떨어져 있느냐? 사실 동떨어져 있지 않다. 가장 간단한 예를 들겠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 겉으로는 몹시 바빠 보인다. 그는 굳이 남들이 밥을 먹거나 잠을 잘 때 계속 일하고 남들이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하면 밥을 먹거나 잠을 자러 간다. 그가 이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남들이 그가 침식도 잊고 바쁘게 본분을 이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관심을 끄는 것이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너희는 참 부담도 없네. 밥 먹고 잠자는 데 어쩜 저리도 적극적일까? 못난 것들! 나를 좀 봐. 나는 당신들이 밥 먹을 때나, 밤에 잠잘 때도 일하잖아. 당신들이라면 이런 고생을 견딜 수 있겠어? 나니까 견딜 수 있는 거지. 솔선수범하는 거라고.’ 너희에게는 이런 행동과 모습이 어떻게 보이느냐? 그는 일부러 그러는 것 아니겠느냐? 일부러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어떤 행위겠느냐?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려는 것이다. 남들과 달라지려 하고, 밤새 본분을 이행하고 고생을 특별히 잘 견디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를 안타까워하고 알아줄 것이고, 매일 온갖 일을 돌보느라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가 어깨에 짊어진 짐이 무겁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다들 그를 위해 하나님에게 간구하고 사정하며 기도할 것이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바로 그가 고생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등의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좋은 행위와 행동 방식으로 남을 기만하여 동정과 찬사를 얻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어떤 결과를 낳겠느냐? 그와 접하고 그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보는 모든 사람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 리더는 가장 자격 있는 리더입니다. 가장 잘 고생을 견디고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리더죠!” 이는 사람을 현혹하는 목적을 이룬 것 아니겠느냐? 언젠가 하나님 집에서 “너희 리더들은 실제적인 사역은 하지도 않으면서 쓸데없이 바쁘고 엉망으로 일하는 데다가 제멋대로 못된 짓을 저지르고 독선적으로 행동했다. 교회 사역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해야 할 사역은 하지도 않았다. 복음 사역도, 영상 사역도 하지 않았다. 교회 생활도 엉망으로 해서 형제자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생명 진입도 없어 간증 문장도 쓰지 못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분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리더는 너무나 자격이 없고 거짓 리더이므로 교체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이런 상황이라면 쉽게 교체할 수 있겠느냐? 쉽지 않을 것이다. 형제자매가 모두 그에게 동조하고 그를 옹호하기 때문에 누군가 그를 교체하면 형제자매는 항의할 것이고 상부에 그의 유임을 요구할 것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겠느냐?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가 겉으로 보기에 고생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좋은 행위와 듣기 좋은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회유하며 현혹했기 때문이다. 이런 허상으로 사람을 현혹하고 나면 사람들이 모두 그의 편에 서서 말하고 그를 떠나지 못하게 된다. 그가 실제적인 사역을 얼마 하지 않았고 하나님 선민이 진리를 깨닫고 생명 진입이 있도록 이끌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를 옹호하고 그에게 동조하고 그를 따르며, 설사 진리 생명을 얻지 못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에게 현혹되어 그를 숭배하고, 그가 아니라면 누가 와서 이끌든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조차 원하지 않는다. 이는 그를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 아니겠느냐? 만약 하나님 집에서 이 사람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거짓 리더이자 적그리스도라고 하면 그 교회 사람들이 항의하며 들고일어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어느 지경까지 현혹한 것이란 말이냐! 만약 성령이 역사한 것이라면 사람의 상황은 갈수록 좋아지고 진리도 더 많이 깨닫게 되며 하나님에게 더욱 순종하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도 점점 커질 뿐 아니라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잘 분별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방금 말한 상황은 절대로 성령이 역사한 것이 아니다. 적그리스도나 악령이 한동안 역사해야만 사람을 그 지경까지 현혹시킬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이 적그리스도에게 현혹되고 통제되어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는 없고 그의 자리만 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겉면의 좋은 행위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여 얻게 되는 최종적인 결과이다. 고생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겉면의 좋은 행위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현혹하고 통제하는 수단 중 하나이다. 이제 너희도 확실히 알겠느냐? 적그리스도는 고생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겉면의 좋은 행위로 사람을 현혹하는데, 이는 아주 교활하고 음험하지 않으냐? 너희도 때때로 이렇게 행동하지 않느냐? 어떤 사람은 저녁이 되면 밤새워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 졸음을 쫓으려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다. 형제자매가 그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까 염려되어 닭곰탕을 끓여 주면 그는 다 먹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겁니다. 제겐 그럴 자격도 없는데 말이죠. 닭곰탕을 먹었으니 더 효율적으로 본분을 이행해야겠어요!” 실제로는 여전히 평소와 같이 본분을 이행할 뿐 효율은 전혀 오르지 않는다. 이는 외식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는 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외식하는 행위는 변칙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결과 사람들은 그에게 동조하고 그를 우러러보며 끝까지 그를 따르게 된다. 사람이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을 잊은 것 아니겠느냐?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미 하나님이 없다. 사람이 밤낮으로 그리워하는 그 사람은 누구겠느냐? 그들의 ‘좋은 리더’이자 ‘사랑하는 이’이다. 일부 적그리스도는 겉으로는 많은 사람에게 무척 사랑으로 대하고 말할 때도 화법에 신경 써서 사람들이 그를 사랑의 마음이 있다고 여기고 그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게 만든다. 누가 그에게 다가가고 접촉하든 그는 늘 만면에 미소를 띠고 부드럽게 말한다. 어떤 형제자매들이 원칙 없이 행동하여 교회의 이익에 손해를 끼쳤다고 해도 그는 전혀 책망하지 않고 그저 격려하고 위로하며 본분을 이행하라고 구슬리는데, 어르고 달래어 사람들을 그의 앞에 데려온다. 사람들은 점차 그에게 감동되어 그가 사랑의 마음이 있다는 데 공감하고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까지 말한다. 결국 모두가 그를 숭배하며 무슨 일이든 그에게 교제해 달라고 하고 속마음을 전부 그에게 털어놓는다. 심지어 하나님에게 기도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 이는 그에게 현혹된 것 아니겠느냐? 이 역시 적그리스도가 사람을 현혹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너희에게 이런 행위와 행동 방식, 또는 속셈이 있다면 너희는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느냐? 알아차리고 나면 네가 행동하는 방향을 바꿀 수 있느냐? 네가 자신의 행위와 행동 방식, 또는 마음가짐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성찰했을 때 자신을 반성하고 진실로 뉘우칠 수 있다면 이는 네가 돌아섰다는 뜻이다. 만약 의식하고 나서도 여전히 내버려두고 자신의 의도에 따라 행동하고, 갈수록 깊이 빠져들어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이는 돌아서지 않은 것이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에게 반항하고, 의도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며, 의도적으로 참도를 등지는 것이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이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이는 심각한 일이 아니겠느냐? (심각한 일입니다.) 어느 정도로 심각하겠느냐? 더욱 음험하고 간사한 방식으로, 고생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현혹하여 사람들이 그를 숭배하고 추종하게 할 수도 있다. 그 결과는 대놓고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과 똑같다. 성질이 동일한 것이다. 네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든, 그것이 명확한 말로든 아니면 비교적 뚜렷한 좋은 행위로든, 그 성질은 모두 같다. 모두 적그리스도의 성질이며 하나님 선민을 빼앗기 위해 하나님과 다투는 성질이다. 네가 드러내는 형식이 무엇이고 사용하는 방식이 무엇이든 네 의도가 변하지 않고, 초래되는 결과가 같다면 그 성질은 같다. 이를 통해 적그리스도는 아주 교활하고 진리를 사랑하지도, 추구하지도 않지만 고생하고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사람을 현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이다.
어떤 사람은 괴상한 이야기와 추상적인 논조로 남들이 그가 지식과 학식을 갖추었고 깊이 있게 행동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사람들에게 숭배받는 목적을 달성한다. 무슨 일이든 그는 다 참여하며 의견을 내려 들고, 이미 결정된 일이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큰소리치며 자신을 과시하려 한다. 이는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방식이 아니겠느냐? 실제로 다들 이미 토론과 상의를 마쳐서 원칙도 찾았고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린 일이더라도 그는 그냥 넘어가지 않고 중간에서 딴지를 걸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럼 안 돼요. 여러분이 고려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요. 저는 이런 부분들 말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어요.” 사실 그가 생각해 낸 그 부분은 괴상한 이야기이다. 그는 무의미한 일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무의미한 일에 매달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 그러는 것이다. 그의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자신이 출중하고 남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 뜻은 ‘너희들 수준이 다 이 정도 아닌가? 내가 너희보다 뛰어나다는 걸 알게 해 줘야겠어.’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대도 안 하지만 중요한 일이 닥치면 그는 나서서 훼방을 놓는다. 이런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쉽게 말해 트집쟁이고, 나쁜 놈이라고도 한다. 트집쟁이는 보통 어떻게 행동하느냐? 큰소리치고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곤 한다. 네가 그에게 올바른 실행 방안을 내놓으라고 해도 그는 내놓지 못하고 정당한 일을 하라고 해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이상한 일만 저지르며 늘 남들에게 ‘서프라이즈’를 선사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 한다. 이런 말이 있지 않으냐? 할머니가 립스틱을 바르는 것, 본때를 보여 준다. 늘 한 수 보여 주고 싶어 하는데 제대로 보이는지를 떠나 그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알게 하고자 한다. ‘내가 너희보다 한 수 위야. 너희는 글렀어. 다들 평범한 사람이고 보통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는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지. 내가 뛰어난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게 당신들이 놀랄 만한 의견을 하나 내지.’ 이는 훼방을 놓는 것 아니겠느냐? 이는 일부러 훼방을 놓는 것이다. 이는 어떤 행위이겠느냐?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이다. 그의 뜻은 이렇다. ‘이 일에서 나의 출중함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누구의 이익이 손해를 보든, 누구의 지불한 대가가 물거품이 되든 난 이 일을 망쳐 버리고 말 거야. 다들 내가 뛰어나고 능력 있고 대단하다고 생각할 때까지 난 이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겠어.’ 이런 나쁜 사람이 있지 않으냐? 너희는 이런 일을 한 적 있느냐? (있습니다. 때때로 남들이 어떤 일에 대해 의논을 마치고 방안도 적합하더라도 결정을 내릴 때 제게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는 일부러 그 일에서 트집을 잡곤 합니다.) 그럼 그렇게 행동할 때 너는 속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명확히 알고 있었느냐? 그 문제의 성질이 심각하고 그것이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느냐?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형제자매들의 엄한 책망과 훈계를 받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형벌하시는 말씀을 먹고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그 성질이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그것은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것이며 사탄의 행위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일의 심각성을 인식했다면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닥쳤을 때 행동 방식을 어느 정도 바꾸고 조금 진입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의 생각이 다시 표출되면 그것은 사탄의 성품이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고,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옳지 않은 생각을 저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패괴 문제가 있으면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하고 자신을 구속하고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한다. 남들이 너를 무시하고 우러러보지 않으며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는 생각에 교란하고 싶을 때, 이런 생각이 들 때 너는 그것이 정상 인성이 아닌 사탄 성품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대로 가다간 골치 아파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기 쉽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너는 우선 단속하는 법을 배운 다음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고 돌이켜야 한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패괴 성품 안에서 살면 모든 행동이 다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없으며 전부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이다. 이제 너희는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느냐? 늘 명예와 이익만 추구하려 하며 명예와 지위를 얻기 위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마저 불사하는 것, 이 역시 적그리스도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이다. 사실 모든 사람은 다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만약 네가 알아차리고 인정한 다음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뉘우치는 태도를 보인다면, 너의 행동 방식과 행위, 성품이 다 변화한다면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네가 이런 실제적인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회개하는 태도도 보일 리 없을 테고, 그럼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네가 만약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것을 고집하고, 끝까지 그 길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회개하려고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그렇게 한다면, 또 명예와 이익을 놓고 리더 일꾼과 다투거나 남보다 돋보이고 뛰어나려 하며 어느 무리에 있든 항상 남보다 우월해지려 한다면 이는 아주 골치 아프다! 네가 계속 명예와 지위만 추구하고 절대로 뉘우치지 않는다면 너는 적그리스도이고 결국 징벌받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양심과 이성이 너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면 너는 적그리스도의 말로를 맞이하게 될 것이 뻔하다. 너는 구원받지 못하고 구제 불능이 될 것이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걸을 수 있는지는 사람이 자신을 인식하고 나서 진실하게 회개하는 모습이 있는지, 또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어떻고 사람이 선택한 길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다. 만약 네가 적그리스도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채우기로 선택하고 공공연히 진리를 어기고 하나님에게 대항한다면 너는 구제 불능인 것이다. 얼마나 큰 잘못과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지르든 무서운 줄 모르고, 죄스럽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늘 변명만 늘어놓으며 조금도 뉘우치지 않는다면 이런 자는 바로 전형적인 적그리스도이자 마귀이다. 만약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설 줄 알며 뉘우치는 마음이 있다면 이는 적그리스도와는 다른 성질의 것으로, 별개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따라서 구원받을 수 있는지 여부에서 핵심은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지, 회개하는 마음이 있는지,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제4조 자신을 높이고 증거한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일관된 행동 방식이다.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수단, 방식, 방법 중 명확한 것은 이제 너희도 분별할 수 있다. 하지만 비교적 은밀한 행위와 모습도 분별할 수 있겠느냐? 명확하게 언어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경우, 너희 자신에게 이런 표출이 있고 남들에게도 이런 표출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분별할 수 있다. 반면 언어 없이 행위적인 모습만 있다면 너희는 분별할 수 있겠느냐? 대다수 사람이 분별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행위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겠느냐? 분명 사람의 관념과 상상, 도덕, 양심, 감정에 부합할 것이다. 또 어떤 특징이 있겠느냐? (다른 사람의 동조를 얻고 숭배를 받습니다.) 다른 사람의 동조를 얻고 숭배를 받는 것은 도달하게 되는 결과이다. 결과로 보면 확실히 현혹성이 있고, 행동의 성질로 보면 목적성이 특히 강하다. 예를 들어, 병에 걸린 어떤 사람이 우러름을 받고자 남을 현혹하려 한다면 그는 약을 먹을 때 남들 앞에서 먹겠느냐, 아니면 남몰래 먹겠느냐? (남들 앞에서 먹습니다.) 이는 의도적이지 않으냐? 그래서 그의 목적성이 특히 강하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그가 그렇게 약을 먹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그 일로 공을 인정받으려는 것이고 너에게 이렇게 알려 주는 것이다. “보세요. 저는 본분을 이행하다가 힘들어서 병이 났는데도 불평하지 않고 눈물도 한 방울 흘리지 않았어요. 병을 치료해야 하면 치료하지만, 약 먹고 치료받는 기간에도 저는 본분 이행을 견지할 수 있어요.” 사실 그는 본분을 이행하다가 힘들어서, 또는 하나님을 믿고 나서 병에 걸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는 그저 갖은 행위를 통해 자신이 고생하고 대가를 지불하고 있으며 이런 환경에서 그토록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불평 하나 없이 이렇게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정도니 자신에게는 고생을 견디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는 은연중에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어느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충성심과 자신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 또한 변칙적으로 자신을 높이는 것 아니겠느냐? 그에게 이성이 있다면 그는 이 일을 언급하지 않고 남몰래 혼자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다짐했을 것이다. 혹은 자신을 인식하거나 정상적으로 약을 먹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이런 표면적인 행위로 자신이 고생을 견디며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고 있고 자신이 마땅히 상을 받아야 한다고 남에게 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속셈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남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칭찬하게 하고자 유독 눈에 띄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목적성이 강한 것이다. 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들에게 전달한 정보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효과에 이르는 것이다. 네게 충성심이 있다면 하나님은 알 텐데 왜 굳이 남에게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고 알리려는 것이냐? 남에게 알리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남이 우러러보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목적이 없다면 그는 고의로 이런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고 남들도 그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다. 반면 목적성이 강하다면 그는 행동의 수위를 조절하며 시간과 장소에 신경 쓰고 공들여 모두가 있을 때 약을 가져오게 하고 이 일을 대대적으로 퍼뜨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목적성이 아주 명확한 것이다. 이런 목적이 없다면 그는 아무도 없을 때 약을 먹을 것이다. 네가 기꺼이 고생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너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이기에 굳이 드러내어 남에게 알게 할 필요는 없다. 남에게 드러낸다고 해서 그들이 너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 동정과 칭찬 외에 네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본분을 이행하며 고생하고 대가를 좀 지불하는 것은 한편으로 이는 네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고 네가 기꺼이 하는 일이기도 한데, 너는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피조물로서 창조주에게 마땅히 보여야 하는 모습이다. 그러니 퍼뜨릴 게 뭐 있겠느냐? 퍼뜨리는 순간 역겨워지는데, 어떤 성질로 바뀌겠느냐?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고 사람을 현혹하는 것으로 바뀌는데, 성질이 바뀌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남들 앞에서 늘 머리를 긁는데, 누가 물으면 이렇게 말한다. “열흘 넘게 머리를 안 감았어요. 복음 대상이 연달아 있었거든요. 그날 시간을 좀 내서 머리를 감으려고 했는데 복음 대상이 알아보러 오는 바람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지 뭐예요.” 사실은 일부러 머리를 감지 않았으면서 남이 그가 본분을 이행하느라 바쁘다고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쇼한다고 한다. 쇼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남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하려는 것으로, 그 성질이 바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이다. 이 정도로 사소한 일조차 놓치지 않고 신경 쓰며 자신을 드러내고 야심과 욕망을 채워 남의 우러름과 숭배를 받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치 있는 자원으로 이용하다니, 이는 부끄러운 일 아니겠느냐? 부끄럽고 역겹다. 이런 것들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이냐? 사탄의 패괴 성품에서 비롯된다. 그 안에는 가식, 간사함, 사악함, 그리고 야심이 담겨 있다. 그는 늘 자신의 체면과 지위, 명예를 염두에 두며 어떤 일도 놓치지 않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것을 자신의 자본으로, 남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숭배하게 할 수 있는 자원으로 바꾸려 한다. 결국 목적을 이루고 나서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물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도 일종의 허상으로, 사실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축하하며 뿌듯해한다. 이는 더욱 역겹지 않으냐? 분명 이미 높은 지위에 올라 모두들 그를 우러러보고 앙망하며 따르고 추종하고 있지만 그는 겉으로는 지위를 좋아하지 않는 척하니, 더욱 가식적이다. 결국 다들 그에게 현혹되어 그가 천성적으로 야심이 없는 착실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실 소소한 실험 하나면 알 수 있다. 지위를 교체하는 순간 그가 곧장 본분 이행을 그만둘 것이다. 그의 야심은 이렇게 빨리, 작은 일 하나로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패괴 성품 때문에 사람에게 생겨나는 행위와 행동 방식, 온갖 추태이다. 이런 모습을 통해 사람이 지위를 좋아한다는 사실, 남의 마음속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사람의 마음을 점유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 사람을 구슬려 남이 자신을 숭배하고 앙망하며 나아가 추종하게 함으로써 사람 마음속의 하나님 지위를 대체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증명하겠느냐? 사람의 생명에서 사람을 통제하는 것은 사탄 성품임을 증명한다. 패괴된 인류 가운데 지위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다. 바보조차 관직에 오르려 하고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조차 남을 다스리려 든다. 모두가 지위를 좋아하고 지위를 위해 행동하며 하나님과 지위를 다툰다. 모두 이런 행위와 행동 방식, 성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을 폭로하는 것은 동시에 모든 사람의 패괴 성품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폭로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행위와 모습은 정상 인성이 갖추어야 할 것이 아니라 패괴 성품의 표출이자 부정적이고 증오할 만한 것임을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다. 네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수단이 얼마나 뛰어나든, 네 행동이 얼마나 은밀하든 모두 정상 인성이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혐오하고 정죄하며 저주하는 것이기에 사람은 마땅히 이런 행동 방식을 버려야 한다.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들어 준 본능이 아니라 사탄의 패괴 성품의 가장 전형적인 표출이며, 더욱이 사탄의 패괴 본질의 가장 전형적이고 구체적인 성품이자 행동 방식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교제하는 것이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여러 모습, 그것이 뚜렷한 것이든 비교적 은밀한 주장과 행동 방식이든 너희가 그것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느냐? (도움이 됩니다.) 어떻게 도움이 되느냐? 자신을 분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타인도 분별할 수 있게 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이런 내적 상태와 모습, 표출 모두 너희에게서 흔히 볼 수 있으니 너희는 마땅히 자신의 내적 상태와 대조해 보고 자신이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 자신이 생존을 위해 기대고 의지하는 생명이 과연 무엇인지, 그 안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 이런 성품에 지배받아 사람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그것에 지배받아 사람은 무엇을 살아 내는지 인식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이 인식한 이런 구체적인 행위와 모습, 행동 방식, 그리고 성품으로 점차 자신을 분석하고 인식하게 되는데, 자신의 본질, 하나님을 적대하는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고, 그럼으로써 이런 행동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와서 진실하게 돌이키며 진리대로 실행하고 살아 내게 된다.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 방식이고, 사탄과 적그리스도에 속하는 행동 방식인 이상, 제가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으면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네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을 높이거나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같은 일을 한다고 해도 만약 네가 자신을 드러내고 증거한다면 일부 사람들에게 우러름과 숭배를 받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솔직히 털어놓는 것으로 자신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성질이 다른 것이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 아니냐? 마음을 열고 솔직히 털어놓으며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얘기하는 것은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하는 것으로, 이는 긍정적인 사물이다. 만약 정말 스스로를 인식하여 자신의 내적 상태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고 진실하게 말하며 완전히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인식만을 이야기한다면, 그 얘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된다면, 또한 하나님의 사역도 증거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마음을 열고 솔직히 털어놓는답시고 자신의 장점을 늘어놓으면서 자신이 어떻게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렀는지, 어떻게 굳게 서서 증거했는지를 떠들어 댄다면, 그 결과 사람들에게 우러름과 숭배를 받게 된다면, 이는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시련이 닥쳤을 때 자신이 어떻게 연약해지고 소극적으로 변했는지, 그 후 어떻게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믿음이 생기고 굳게 서서 증거하게 됐는지 이야기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이지, 자신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다면 주로 진실한 체험을 말하는지,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는지를 보면 된다. 또 체험 간증을 이야기하는 의도와 목적을 보면 분별이 쉬워진다. 만약 간증할 때의 의도가 올바르다면, 설령 그를 우러러보고 숭배하는 사람이 나오더라도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도가 올바르지 않다면 그를 우러러보고 숭배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가 된다. 그를 우러러보고 숭배하는 이가 나온다면 더욱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지를 분별하려면 결과만 봐서는 안 된다. 주로 그 사람의 의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의도에 근거하여 분별해야 정확하다. 결과만 보고 분별한다면 좋은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기 쉽다. 특별히 진실하게 간증하여 우러름과 숭배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을 두고 자신을 증거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간증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다. 그가 말한 증거와 그가 이행한 본분은 사람에게 유익하다. 그저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이 치우치게 이해하여 사람을 숭배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이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지를 분별할 때의 핵심은 간증하는 사람의 마음속 의도가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만약 의도가 모두에게 자신의 패괴 표출을 알게 하고 자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게 하며, 그것을 통해 유익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면, 네가 하는 말은 진실하고 간절하며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이런 의도는 올바른 것으로, 이는 자신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네게 진실한 체험과 변화, 진리 실제가 있음을 모두에게 보여 주어 우러름과 숭배를 얻고자 한다면 그 의도는 그릇된 것으로, 이는 자신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이다. 만약 네 체험 간증에 거짓과 과장이 있어 사람들을 기만하고 네 실제 내적 상태를 알지 못하게 하고, 네 의도와 패괴, 또는 연약함과 소극적인 것을 남들 앞에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이라면, 그런 말은 사람을 속이고 미혹하는 것으로, 거짓되게 간증하는 것에 속한다. 또한, 이는 하나님을 기만하고 욕되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가장 증오하는 행위이다. 이 몇 가지 내적 상태의 분명한 차이는 전부 의도를 보고 분별할 수 있다. 네가 남을 분별할 수 있게 되면 남의 내적 상태를 간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도 분별하고 자신의 내적 상태도 간파할 수 있게 된다.
설교를 이토록 많이 듣고 나서도 여전히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사람이 있는데, 너희는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분별하고 폭로하고 멀리해야 한다. 그가 하는 말이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으면 받아들여도 되지만 참고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면 그를 버리고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가 리더라면 그를 폭로하고 고발하고 버려야 하며, 그의 인솔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당신은 자신을 증거하고 높이며 우리를 마비시키고 통제하기만 했어요. 우리는 현혹되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 아닌 당신만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일어나 당신을 버릴 거예요.” 바로 이렇게 해야 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감독하며 서로 감독해야 한다. 너희는 남들 앞에서 자주 머리를 긁지 않느냐? 혹은 사실 몰래 간식을 많이 먹었지만 자신이 밥을 몇 끼 안 먹었는지 늘 말하고 다니지 않느냐? 가끔 환경이 여의치 않아 한 달 동안 씻지 못하는 것은 정상이다. 또는 일이 너무 바빠 한 번 덜 씻고 머리 한 번 덜 감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다. 이는 사람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다. 별거 아니니 호들갑 떨지 마라. 만약 정말 누군가 이런 일로 호들갑 떨고 의식적으로 남들 앞에서 머리를 긁으며 며칠 동안 머리를 감지 않았는지 말한다면, 혹은 의식적으로 남들 앞에서 약을 먹거나 몸이 좋지 않고 피곤한 척한다면 모두 일어나 폭로하고 그에게 반감을 표해야 한다. 그러면 이런 파렴치한을 억제할 수 있다. 그 자신은 외식하고 남에게 보여 주려 쇼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남이 그의 이런 행위를 높이 평가하며 부러움과 탄복, 칭찬이 담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이는 남을 속이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행동 방식은 바리새인이 성경을 들고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바리새인이 성경을 들고 큰 거리 어귀에 서서 성경을 읽거나 기도한다는 말만 하면 그는 ‘그건 너무 창피한걸. 난 그런 일은 절대 하지 않아.’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일부러 남들 앞에서 약을 먹고 머리를 긁는 것이 같은 성질의 일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고 간파하지 못한다. 앞으로 이런 일을 마주치면 너희는 분별하고 폭로할 줄 알아야 한다. 외식하는 그의 모습을 전부 폭로하면 그는 감히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를 좀 압박하여 그런 행동 방식과 행위, 성품이 부끄럽고 남들이 혐오하는 것이라고 느끼게 해야 한다. 사람도 그 정도로 혐오하는데 하나님은 당연히 혐오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더더욱 혐오할 것이다. 너는 본디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가련한데 이렇게 가련한 상태에서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기까지 한다면 사람을 역겹게 하지 않겠느냐? 너는 원래부터 본분 이행에 충성을 다하지 않았고 일 처리에도 원칙이 없었으며 여러 면에서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 못했다. 그것만 해도 이미 골치 아픈데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기까지 하면 더욱 곤란하지 않겠느냐? 이러면 하나님의 요구에서 더욱 멀어질 뿐 아니라 구원받는 기준에도 더욱 멀어지게 된다.
너희가 보기에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은 대체 어떤 성질의 문제이겠느냐? 사탄이 인류를 이 정도로 패괴시켰으니 인성과 이성이 모두 비정상이지 않겠느냐? 너희가 지금 본분을 이행할 때 아직도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모습이 있느냐? 누가 한번 말해 보겠느냐? (저는 본분을 이행하느라 늦게까지 밤을 새울 때 예배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럼 남들이 제가 그렇게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제가 고생하고 대가를 지불할 줄 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저 스스로도 그렇게 해 본 적 있고 다른 사람이 그러는 것도 자주 봅니다.) 보아하니 그런 사람이 적지 않고 꽤 많은 것 같구나. 쓸데없는 행동이 아니겠느냐? 얼마나 어리석으냐! 또 누가 말해 보겠느냐? (저는 교회 사역에 문제가 좀 있는 걸 발견하면 해결하겠다고 떠벌립니다. 겉으로는 마치 아주 열성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말만 할 뿐 실제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일을 처리할 때도 진도가 나가지 않고 비효율적이라 결국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열성적인 겉모습으로 남을 속이고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진상을 숨깁니다.) 그것은 빈말하고 큰소리치며 실제로는 행하지 않는 것이다. 남이 보기에는 진리를 실행하는 듯 열성적이지만 정작 일을 해야 할 때면 착실하게 하지 않는데, 그저 구호만 외치며 결국 용두사미로 흐지부지된다. 이런 모습에도 현혹하는 성질이 있다. 앞으로 다시 이런 일이 닥치면 분별할 줄 알겠느냐? (이제 조금은 분별할 줄 압니다.) 그럼 바로잡을 수 있는 방향이 있느냐? 만약 다시 이런 일이 닥치면 너는 두 단계로 나누어 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우선 자신이 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지 판단하는 것인데, 할 수 있다면 진지하고 실제적으로 해야 한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 이끌어 달라고 하나님에게 구해야 하며, 행동에 옮길 때 사람들의 감독을 받아들여야 할 뿐 아니라 너 스스로도 호흡을 맞추려는 의지를 가지고 사람들과 함께 협력하여 일을 완성해야 한다. 단계적으로 착실하게 일을 처리할 줄 알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늘 빈말하고 큰소리치고 지키지도 못할 말만 하며 정작 일을 할 때는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대충대충 형식만 거치고 조금도 착실하지 않은 것이 바로 불량 습성이다. 네가 교회 사역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해결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면 이는 어쩌면 네가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잠재력과 업무 능력을 갖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다만 내면의 성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일을 경솔하게 처리하고 대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고 그저 구호만 외치는 데 집중한다. 문제를 발견하면 우선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일을 끝까지 짊어져야 한다. 그 일을 완수하고 제대로 책임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서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자 착실하게 처신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리더에게 보고하여 적절한 사람을 배치해 처리하게 해야 한다. 우선 너는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데, 그러면 너는 본분을 지킨 것이고 올바른 자리에 선 것이다. 문제를 발견한 뒤 해결은 못하지만 보고한다면 첫 번째 책임은 다한 것이다. 그 일이 자신이 이행해야 하는 본분이자 자신이 닿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형제자매에게 도움을 구하고 먼저 원칙을 교제하고 방안을 확정한 뒤 다 같이 조화롭게 협력하여 그 일을 완성해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 책임이다. 이 두 가지 책임을 모두 짊어질 수 있다면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이고 너는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다. 사람의 본분은 바로 이 두 가지일 뿐이다. 네가 본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짊어지고 본분을 잘 이행한다면 너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다.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모습에는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저는 요즘 본분을 이행하며 하루 종일 일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교회에 존재하는 일부 문제를 실제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하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제가 매일 바쁘게 본분을 이행하는 모습을 보고 저를 우러러보고 제게 탄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에도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요소가 있지 않을까요? 이 일을 간파하지 못하고 늘 속박받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겠느냐? 네가 본분을 이행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고생하면서도 불평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 선민이 네게 탄복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이는 네가 자신을 증거하여 초래된 일이 아니다. 너는 그저 본분을 이행하느라 바빴을 뿐 자신을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않았고 너 자신이 고생한 체험을 떠벌리지도 않았다. 이는 자신을 증거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겉으로는 아주 바빠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하고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면 이렇게 바쁜 모습을 하나님이 칭찬하겠느냐? 분명 진리를 깨닫고 원칙을 파악한 사람은 어쩌면 두 시간이면 해결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문제인데, 너는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해야 하고 스스로도 상당히 피로하고 크게 고생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쓸데없이 바쁘고 공연히 바쁜 것 아니겠느냐?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역 효율이 너무도 떨어진다! 이 일에서는 진리 원칙을 구해야 한다. 때때로 할 일이 아주 많고 진짜로 바쁜 것인데, 이는 정상적인 바쁨이다. 그러나 일이 그리 많지 않은데도 아주 바쁠 때가 있는데 이는 왜 그런 것이겠느냐? 한 가지 원인은 네가 사역 계획을 적절히 안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는 핵심적인 본직 사역을 파악하고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안배하여 본분 이행의 효율을 높여야 한다. 하나님은 쓸데없이 바쁘고 공연히 바쁜 것을 칭찬하지 않는다. 다른 한 가지 경우는 일부러 남들이 네가 바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이런 방식과 허상으로 남들을 속이는 것이다. 일부 리더 일꾼들은 예배할 때마다 실제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않고 계속 쓸데없이 의논만 하고 엉뚱한 이야기만 하는데 한참을 얘기해도 핵심을 말하지 못한다. 이렇게 효율과 진도를 따지지 않는 바쁨도 쓸데없는 바쁨이다. 쓸데없이 바쁜 것은 어떤 태도이냐? 형식적이고 건성으로 사역하며 시간이나 때우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든 난 양심에 찔리지만 않으면 돼. 어쨌든 내가 빈둥거리면서 공밥 먹는 건 아니니까.’ 겉으로 보면 너는 빈둥거리지도, 공밥 먹지도 않았다. 매일 예배드리지 않으면 본분을 이행하는데, 하는 일도 모두 교회 사역과 관련 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너도 네가 하는 일들이 아무 소용도, 가치도 없고 그저 형식만 거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럼 너는 본분을 어떻게 이행한 것이냐? 너는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건성으로 대하는 것이고 무감각하며 강퍅한 것이다. 이렇게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시간을 끌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느냐? 하나님에게 칭찬받을 리 없다. 왜냐하면 너는 원칙도, 효율도 없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고,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순전히 힘만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망하고 도와주는데도 회개하지 않고 불평하고 일을 게을리한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진리를 추구하여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본분 이행 시간이 아무리 길더라도 소용없고 본분 이행에 충성을 다하는 기준에 이르지도 못한다. 이는 반성해 볼 만한 문제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원칙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고, 진리를 실행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한다. 이런 진리에 다 진입해야 하는데, 그러면 본분 이행에서 성과를 이룰 수 있고 최소한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이것이 효율을 끌어올리는 기초이자 핵심이다. 진리 원칙이 없다면 아무리 분주하게 본분을 이행하고 매일 얼마만큼 바쁘게 일하든 진실한 성과를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 충성심이 있는지 본다. 본분을 이행한 시간이 얼마나 긴지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성과와 사역 효율을 보고, 일 처리가 원칙적이고 진리에 부합하는지 본다. 간단히 말해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 진실한 체험 간증이 있는지, 생명 진입이 있는지 본다. 진리 실제가 조금도 없으면 힘쓰는 자일 뿐이다. 반면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을 가지고 일을 처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백성이 본분을 이행하는 표징이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이행한 본분이 합격인 사람만이 하나님 백성이며, 이행한 본분이 합격이 아니고 늘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힘쓰는 자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진리를 깨닫고 원칙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전혀 문제될 게 없고 얼마간 모색하기만 하면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다. 자질이 많이 떨어지거나 늘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요구에 달하기 아주 어렵고 그들의 본분 이행은 힘만 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멍청이나 얼간이, 인성이 아주 나쁘거나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진리를 교제하든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제멋대로 못되게 군다. 이런 사람은 도태될 수밖에 없으니 믿고 싶은 대로 믿어라. 따라서 본분 이행에 원칙이 없고 매일 쓸데없이 바쁘고 공연히 바쁘다면 서둘러 진리를 구해 해결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몇 시간 동안 바빴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그칠 것이 아니라 매일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효율이 있고 완성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이자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다.
현재 하나님을 따르며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한결같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도 일부 있다. 그런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 함부로 굴고 자기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큰 잘못은 저지르지 않지만 작은 실수는 끊이지 않고, 특히 날마다 겉으로는 아주 바빠 보이지만 실제로는 해야 할 일을 얼마 하지 않고 그저 허송세월한다. 대충대충 살아간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아주 위험하지 않겠느냐? 늘 이런 오만한 태도로 본분과 하나님의 부탁을 대한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심하지 않은 경우에는 사역해도 성과가 없어 본분이 교체된다. 온갖 못된 짓을 일삼는 경우에는 정리되어야 하며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사탄에게 넘긴다. 사탄에게 넘긴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느냐? 하나님이 돌보지도, 구원하지도 않아 사람이 비뚤어진 길을 걷기 시작하고 결국 징벌받는다는 뜻이다. 알겠느냐? 지금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드러내는 때인데, 네가 잠시 바른길을 걷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실제 환경을 빌려 네게 자신의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네게 반성하라고 준 시간이자 하나님이 준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네가 여전히 돌아서지 않고 완고하게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한다면 하나님은 일을 할 것이다. 니느웨 성을 멸했을 때 하나님이 바로 멸했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일할 때 첫 번째 단계가 무엇이었느냐? 우선 요나에게 일렀다. 요나에게 그 일의 원인과 결과,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알리자 요나가 니느웨 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렇게 선포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 요나의 말은 모든 사람에게 전해졌다. 바로 성 안의 남녀노소, 온갖 직업의 사람들에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나아가 그들의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왜 그렇게 했겠느냐?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거나 드러내고 징벌하고 대하는 방식에는 단계와 원칙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못마땅하다고 해서 즉흥적으로 곧장 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차를 둔다. 이렇게 시간차를 두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에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려는 일을 알고 자신을 반성한 다음 조금씩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여 점차 돌아서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람이 그 일을 인식하려면 과정을 하나 거쳐야 한다. 그 사십 일은 사람이 돌아서도록 하나님이 남겨둔 시간이었다. 만약 사십 일 후 사람이 여전히 돌아서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죄를 인정하지도 않는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일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면 반드시 책임지고 책임지는 이상 반드시 이룬다. 이는 결코 거짓이 아니다. 그럼 이 소식을 알게 됐을 때 니느웨 성의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 그들이 바로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느냐? 그렇지 않다. 일련의 과정이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의문을 제기했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멸하겠다고 하셨다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리가 뭘 어쨌다고요?” 그 후 집집마다 그 일을 서로에게 알리고 함께 논의했다. 그들은 위기와 생사존망의 고비가 닥쳤다고 생각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했겠느냐?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했겠느냐, 아니면 의심하고 반항해야 했겠느냐? 정말로 의심하고 반항한다면 사십 일 후 멸해지는 것이었고, 죄를 인정하고 돌아서면 한 가닥 살아남을 희망이 있게 되는 것이었다. 하류층에서 상류층까지 여러 날을 논의한 끝에 백성들 가운데서 극소수의 백성은 죄를 인정하고 돌아서는 태도를 보이고 무릎 꿇고 절하고 제사를 드리거나 바람직한 행위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 성을 구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누구겠느냐? 바로 니느웨 왕이었다. 그는 국왕에서부터 가장 어린 백성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여호와 하나님에게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하명했다. 그렇게 명령하자 성에서 감히 그렇게 하지 않을 자가 있었겠느냐? 왕은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수중의 권력으로 나쁜 일을 저질렀다면 온 나라 사람들이 다 같이 화를 입게 된다. 그러나 그가 수중의 권력을 이용해 좋은 일, 즉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에게 회개하는 일을 한다면 그 성은 살아남게 되고, 온 나라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며, 죄를 사함 받을 희망이 생기게 된다. 이는 그의 순간의 생각에 달린 일이 아니겠느냐? 그가 만약 “너희 중 누가 회개하려 하든 나는 회개하지 않을 테다.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어쨌든 나는 이 일을 믿지 않는다. 내가 악을 행한 것도 아니다. 더구나 지위도 높은 나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수 있겠는가? 내 지위를 없애실 수 있겠는가? 성은 사라지면 사라지라지 뭐. 너희 백성들이 없어도 나는 여전히 왕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면, 그가 이런 생각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땠겠느냐? 그럼 구원받는 백성의 수는 크게 줄었을 것이고 어쩌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회개하고자 하는 사람만 선택해 데리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데리고 나온 뒤, 죽어도 회개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과 그 성은 멸해졌을 것이다. 물론 그 왕도 포함해서 말이다. 반면 회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성에서 데리고 나온 뒤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훌륭한 일은 니느웨 왕이 앞장서서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고, 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고위 관료에게든 미천한 사람에게든, 귀족에서부터 평민에게까지 성의 모든 백성에게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여호와 하나님에게 무릎 꿇고 엎드려 죄를 인정하라고, 돌아서고자 하는 그들의 태도를 전하고 걷고 있던 악한 길을 떠나고 손으로 행하던 악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회개하라고, 하나님에게 그들을 멸하지 말라고 간청하라고 말한 것이었다. 니느웨 왕이 앞장서서 하나님에게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성의 모든 백성을 구했는데, 많은 사람이 덩달아 덕을 본 것이었다. 앞장서서 그렇게 행동했으니 그의 권력은 가치 있는 것이다. 이 국왕이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에게 돌아선 일은 하나님께 기억되는 일이었다.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에 대해 이토록 자세하게 교제했는데, 너희에게 도움이 되었느냐? 이렇게 반복해서 교제하고 예를 들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다양한 방식과 어휘로 설명하고 정의했는데도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고, 정말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구제 불능이다. 이렇게 자세하게 교제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이런 말들을 다 듣고 나서 사람이 도리나 표면적인 뜻, 특정한 표현이 아니라 어떤 실정, 그리고 사람의 본질과 생존, 생활과 관련된 일부 원칙과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자신의 실제 내적 상태나 생활 속 표출을 이런 표현이나 우리가 다룬 사례에 비춰 볼 수 있다면 너희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다. 비춰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사례를 들고 한 가지 일을 말할 때마다 그것을 자신의 내적 상태에 비춰 볼 수 있고, 하나의 진리를 교제할 때마다 그 진리를 자신의 내적 상태, 표출에 비춰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네가 이렇게 결부하고 활용할 줄 안다면 너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이고, 진리 실제에 진입할 희망이 있는 것이며,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을 비춰 보지 못한다면, 아무리 들어도 자신의 표출, 자신의 본성 본질과 관련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자신에게 결부하지 못한다면 너는 정말 밀반죽 방망이로 불을 피우는 것, 앞뒤가 꽉 막힌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힘만 쓸 수밖에 없고,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없다.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진리 실제에 진입해야 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면 이런 말들을 알아들어야 한다. 내가 말하는 이런 이야기와 줄거리, 여러 가지 일과 각종 표출, 다양한 사람의 본질과 내적 상태, 모습이 무엇인지 알아듣고 자신을 비춰 볼 수 있어야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이는 닭을 기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른 지 반년이 되었는데도 알을 낳지 않았다고 해서 그 닭은 알을 안 낳는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닭을 삼 년 기르는 동안 주인이 곡물도 먹이고 채소도 먹였는데 아무리 먹어도 알을 낳지 않는다면 이 닭은 알을 안 낳는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사람의 경우,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네가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또 듣고 나서 깨닫긴 하지만 실행하지도, 돌아서지도 않는 사람도 있는데, 이러면 끝장이다. 이러면 소돔 성의 백성처럼 반드시 멸해질 대상이다. 적그리스도가 바로 이런 부류 사람인데, 네가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그는 돌아서지 않는다. 그의 이런 성품이 단지 강퍅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적대하고 진리를 원수로 여기는 본성 본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을 두고는 진리를 깨달았는지 아닌지 논할 수 없다. 그는 진리와 적이 되고 진리와 하나님을 적대시하며 긍정적인 사물을 원수로 여기기 때문에 네가 진리를 교제해도 그는 진리로 듣지 않고 일종의 이론이나 학술, 도리로 듣는다. 다 듣고 나서는 나중에 자신을 뽐내고 자신의 이익과 지위, 명리를 얻는 데 쓰려고 자신의 마음속에 그것을 갖춘다. 이것이 그의 목적이다. 진리를 어떻게 교제하든, 어떤 사례를 들든 네가 그를 감화할 수도, 그의 의도를 바로잡을 수도, 그의 행동 방식을 바꿀 수도 없다면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진리를 듣고 나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진리에 의해 바뀔 수 없고 하나님도 이런 사람은 구원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기본적으로 진리를 적으로 여기는 사람이라고 규정할 수 있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와 보통 사람의 차이이다.
어떤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있어 자주 패괴 성품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며, 또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다. 한동안 지나면 그에게서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는 대상이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버리고 헌신하며 고생하고 대가도 지불하지만 그의 본성 본질이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데, 네가 그에게 진리를 교제하면 그는 싫어하고 반항한다. 그는 예배할 때 설교를 들으면 졸려 하고 잠을 자며 재미없다고 생각하고, 설사 알아들었다 해도 실행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들을 때 겉으로는 꽤 진지해 보이지만 마음속으로는 진리를 사모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인 지식과 이론으로 여겨 평가하는 태도를 보인다. 따라서 그가 하나님을 몇 년 믿든,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읽고 설교를 얼마나 듣든 결국 지위를 추구하고 권력을 숭상하는 내면의 관점과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는다. 이런 자가 바로 전형적인 적그리스도이다. 만약 네가 그를 폭로하며 “당신의 행동 방식은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는 겁니다. 당신이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은 사람을 현혹하는 것이자 하나님과 지위를 다투는 것이며 사탄과 적그리스도의 행동 방식입니다.”라고 말하면 그가 이런 정죄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받아들일 리가 없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내가 이렇게 하는 건 정당해. 나는 이렇게 할 거야. 당신이 어떻게 정죄하든, 당신이 뭐라고 하고 얼마나 바른 소리를 하든 나는 이런 행동 방식과 바람, 추구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러면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할 수 있다. 네가 뭐라고 하든 그의 관점과 속셈, 의도, 야심, 욕망을 바로잡을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로, 아무도 그를 바꿀 수 없다. 진리를 어떻게 교제하고 어떤 언어와 말을 사용하든 어떤 시간과 공간, 배경에서도 그를 바꿀 수는 없다. 환경이 어떻게 변하고 주위 사람과 일, 사물이 어떻게 변하든,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하나님이 얼마나 큰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그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든, 심지어 그에게 어떤 징벌을 내리든 일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과 의도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권력을 쟁탈하려는 그의 야심과 욕망, 그가 처신하는 방식, 진리와 하나님을 증오하는 그의 태도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남이 그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여 사람을 현혹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 그는 남이 문제를 찾아내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도록 말하는 방식을 바꾼다. 그는 더욱 교활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경영을 하여 스스로 권력을 잡고 하나님 선민을 통제하려는 목적을 이룬다. 이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며 적그리스도의 본질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설령 하나님이 그를 징벌하겠다고 말씀하고, 그의 결말이 다가왔다고, 그는 저주받을 만하다고 말씀한다 해도 그의 본질을 바꿀 수 있겠느냐? 진리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바꿀 수 있겠느냐? 지위와 명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바꿀 수 있겠느냐? 바꾸지 못한다. 사탄에 의해 패괴된 사람을 정상 인성을 지니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는 사역으로,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마귀와 인두겁을 쓰고 있어도 본질이 사탄인 사람,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람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그런 사역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구원하는 인류에는 그런 사람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규정하겠느냐? 그는 사탄에 속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택하고 구원하는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원치 않는다.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든, 혹은 무슨 일을 했든, 그의 의도는 변할 리 없다. 그는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버릴 리도 없고, 사람과 지위를 놓고 하나님과 다투려는 그런 속셈과 욕망을 버릴 리는 더더욱 없다. 이런 자는 틀림없는 적그리스도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적그리스도가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잠깐 어리석어 그러는 것 아닐까요? 그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나님이 이적과 기사를 좀 나타내거나 징벌을 좀 내린다면 그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더 이상 하나님과 지위를 다투지 않지 않을까요? 그는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시는 것과 하나님의 영체를 보지 못해 믿음이 없어서 연약해지고 사탄에게 속은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 적그리스도의 야심과 욕망, 본질은 일시적으로 속고 우매하며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과는 구별되고 완전히 다르다. 적그리스도는 천성적으로 사탄 본성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사람이다. 그가 바로 하나님과 공존할 수 없고 끝까지 하나님에게 대항하고 다투는 사탄이자 인두겁을 쓴 살아 있는 사탄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본성 본질에 따라 적그리스도로 규정되는데, 그럼 그는 하나님 집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어떤 일을 하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며 무너뜨리고 파괴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 집에서 그런 일을 저지른다. 그는 원래 그런 인간이고 사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늑대가 전적으로 양을 잡아먹으려 양 떼에 침입하듯 그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집에 등장하는 것을 허락하겠느냐? 하나님 선민의 분별력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사탄 마귀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일을 저지르며 그 본질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표출하는지, 사람들 가운데서 어떻게 사람을 현혹하고 어떻게 하나님과 맞서는지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사탄 마귀가 언급되면 사람은 추상적이고 공허하며 구체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탄이 어디 있나요?” “반 공중에 있어요.” “그럼 사탄은 얼마나 큰가요? 구체적으로 어떤 뛰어난 재주를 부리나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과 맞서나요? 그 본성 본질은 무엇인가요?” 이렇듯 사람은 추상적이고 막연하며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적그리스도의 모습과 표출을 통해 그런 것들을 사탄의 행동, 본성 본질과 대조할 수 있다. 그러면 구체화되기 때문에 추상적이지도, 공허하지도 않게 된다. 구체화되면 사람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있고 그의 행위를 볼 수 있으며 공을 들여 그의 본성 본질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한 사탄 마귀의 본질이 더욱 구체적이고 진실해 실제로 대조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은 분량이 작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순간적인 우매함으로 인해 적그리스도에게 속아 넘어가고 현혹되어 일 년쯤 떠나게 된다. 그러다 다시 하나님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사탄을 따르는 것이 아주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사람은 처음에 적그리스도를 따라갔을 때는 당당하게 “상부에서는 적그리스도를 따르지 말라고 하지만 우리는 따르고 말 거예요. 언젠가는 우리가 옳다는 사실이 증명될 거예요!”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는 한동안 성령 역사가 사라졌다고 느끼게 되고 마음속으로도 확증을 얻지 못한다. 마치 하나님이 사라진 것 같고 하나님을 믿는 것의 의미와 방향도 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다가 서서히 적그리스도를 더욱 잘 분별하게 된다. 과거에는 적그리스도가 진리를 깨달았으니 그를 따라 믿으면 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적그리스도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마치 진리를 깨달은 듯 말하지만 절대로 진리를 실행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이다. 적그리스도를 그토록 오랫동안 따랐지만 진리를 조금도 얻지 못했으니, 그는 적그리스도를 계속 따르는 것이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하며 적그리스도를 버리고 하나님 집으로 돌아오려 한다. 하나님 집에서 그를 받아들인 뒤 그에게 그 체험을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적그리스도는 사람을 현혹하는 데 아주 뛰어나요. 그때는 아무리 봐도 옳은 사람 같았는데 그를 일 년 넘게 따랐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아무런 진리도 깨닫지 못했어요. 진리 실제도 전혀 갖추지 못하고 귀중한 시간만 허비했으니 손해가 막심하죠!” 이 실패한 체험이 그에게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하나님 집에 돌아온 이후 그는 설교를 들을수록 진리를 더 많이 깨닫게 되고 마음속도 더욱 환해진다. 자신이 적그리스도를 따라 걷던 그 길을 다시 떠올리고 자신이 입은 손해를 확인하고는 적그리스도는 사탄이 분명하며 진리도 전혀 갖추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후 그는 더 이상 사람을 따를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다. 다시 리더를 뽑을 때 그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투표하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자칫하다간 내가 행사한 이 한 표 때문에 적그리스도가 뽑힐지도 몰라. 내가 투표를 안 한다면 적그리스도는 안 뽑힐 수도 있지. 사람을 평가할 때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원칙대로 평가해야 해.’ 일 처리에 원칙과 기준이 생기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바람직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적그리스도에게 현혹되어 이렇게 말한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닥쳤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두시고 돌보지 않으시는 게 아닐까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네게 적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게 한다면 너는 동의하겠느냐? 너는 동의하지 않고 기어코 따르려 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네가 따르도록 허락한 다음, 사실을 이용해 너에게 교훈할 수밖에 없다. 너는 한동안 적그리스도를 따르다가 갑자기 각성하여 자신의 생명이 손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후회하며 적그리스도를 버리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려 할 것이다. 다행히 하나님께 관용과 긍휼이 있어 너를 원하기에 망정이지, 만약 하나님이 너를 원하지 않았더라면 너는 완전히 끝장났을 것이고 더 이상 구원받을 기회가 없을 것이다. 적그리스도를 따라가면 좋은 결말을 얻지 못한다.
적그리스도를 분명히 파악하고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적그리스도의 여러 모습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본성 본질이 적그리스도와 많은 부분에서 같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둘 다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만 적그리스도는 사탄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어 사탄과 한패가 되고 사탄을 위해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너 역시 패괴된 인간이지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아직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그러나 너는 본질이 적그리스도와 똑같은 부분이 많고, 행동 방식, 의도도 같다. 다만 너는 진리를 듣고 설교를 들으면 돌아설 수 있으며 돌아설 수 있기 때문에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바로 이 점이 다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는 동시에 너도 자신을 비춰 보고 자신이 적그리스도와 어떤 점이 같은지, 적그리스도의 모습, 성품, 본질과 어떤 부분이 같은지 인식해야 한다. 이러면 자신을 더 잘 인식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만약 네가 늘 반항하며 자신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며 마음속으로 적그리스도를 가장 증오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비춰 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반성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사탄 성품이 있으면 너는 적그리스도가 되기 쉽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 중 자신이 일부러 추구하여 적그리스도가 된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모두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종교계에서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적그리스도가 아니겠느냐? 자신의 본성 본질을 반성하거나 인식하지는 않고 관념과 상상에 기대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런 사람은 모두 적그리스도이다. 적그리스도의 길에 올라 일단 지위가 생기고 거기에다 은사와 지식까지 있다면 다들 너에게 탄복할 것이고, 사역 시간이 길어지면 너는 사람 마음속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 갈수록 사역도 커지면서 갈수록 이끄는 사람도 많아지며 자본도 생기면 영락없는 바울이 된다. 이게 네 마음대로 되겠느냐? 이 길로 갈 계획도 없던 네가 어째서 자신도 모르게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겠느냐? 중요한 원인은 바로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너는 분명 지위와 명망을 추구하게 되고 자신의 경영을 하게 되면서 결국 자기도 모르게 적그리스도의 길에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의 길에 오른 사람이 제때에 돌아서지 않는다면 지위가 생기는 순간 바로 적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이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 일을 간파하지 못하면 위험하다. 사람은 모두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고 명예와 지위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명예와 지위 때문에 넘어지기 쉽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없다면 모든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고 명예와 지위 때문에 넘어질 것이다. 이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너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그저 가끔씩 이런 표출이 있을 뿐이에요. 일시적인 모습일 뿐이라고요. 비록 적그리스도와 본질은 같지만 저는 적그리스도와는 달라요. 왜냐하면 저는 야심이 그렇게 크지 않은 데다 본분을 이행하는 기간에도 계속해서 반성하고 뉘우치며 진리를 구하면서 진리 원칙에 따라 행하거든요. 행위로 보면 저는 아직 적그리스도가 아니죠. 게다가 적그리스도가 되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저는 적그리스도가 될 리 없어요.” 너는 아직까지는 적그리스도가 아니지만 앞으로도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지 않고 적그리스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장담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장담할 수 있겠느냐? 유일한 길은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추구해야겠느냐? 길이 있느냐? 우선 너는 너와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이 같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비록 지금은 적그리스도가 아니지만 네게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한 점은 무엇이겠느냐? 너와 적그리스도가 같은 본성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네게 좋은 일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일일 리 없다. 이것은 네게 치명적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의 다양한 모습을 폭로하는 설교를 들을 때 너는 그런 일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태도는 옳지 않다. 그럼 어떤 태도로 이런 사실과 모습을 받아들여야겠느냐? 자신을 비춰 보고 자신에게도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다음 자신의 모습, 표출 중 어떤 것이 적그리스도의 모습, 표출과 완전히 같은지 성찰해야 한다. 너는 우선 자신을 위장하지도 포장하지도 말고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네가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고 있으니 너를 적그리스도라고 해도 사실에 부합한다. 다만 하나님 집에서 너를 규정하지 않고 네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알겠느냐? 우선 받아들이고 인정한 다음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이 징계하고 구속하게 해야 하며, 하나님의 얼굴빛과 보호를 떠나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는 한편으로는 행동할 때 양심과 이성으로 자신을 구속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에게 빛 비춤을 주고 너를 이끌며 동시에 너를 구속도 할 것이다. 그 밖에 성령도 역사하여 너를 인도하며 주위의 사람과 일, 사물을 안배해 너를 일깨워 주고 징계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너를 일깨워 주겠느냐?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한다. 때로 하나님은 구속을 받아야지 제멋대로 굴면 안 되며, 일단 잘못하면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고 망신을 당한다는 것을 네가 마음속으로 명확히 느끼고 분명히 의식하게 한다. 그래서 너는 삼가게 된다. 이는 너를 보호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일종 방식이다. 때로 하나님은 네 안에서 너를 꾸짖고 네게 명확한 말씀을 주어 그렇게 하면 부끄러운 것이며 하나님께 혐오받고 저주받을 만한 일이라고 네게 알려 주기도 한다. 즉, 네가 자신을 비춰 볼 수 있게 명확한 말씀으로 너를 꾸짖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꾸짖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네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 너는 영향과 결과, 자신의 염치를 고려할 것이고 행동과 행동 방식에서도 어느 정도 조심할 것이다. 이런 체험이 많아지면 너는 이런 패괴 성품이 사람 안에 뿌리내려져 있더라도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패괴 성품의 본모습을 똑똑히 인식한다면 의식적으로 육을 저버릴 수 있으며, 사람이 진리를 실행해 내는 순간 사탄의 성품이 정결케 되고 변화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사탄 성품은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해 낼 때 사탄 성품은 자연스럽게 무너지고 대체된다. 진리 실행의 달콤함을 맛보면 너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과거의 난 너무 부끄러움을 몰랐어. 남의 숭배를 받기 위해 아무리 말을 노골적으로 하고 아무리 자신을 높여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고, 그 후에는 아무런 느낌조차 들지 않았지.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는 게 옳지 않고 창피하다고 생각해. 마치 많은 눈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이는 하나님이 일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네게 느낌을 주어 네가 자신을 꾸짖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러면 너는 악을 행하거나 홀로 자기 길을 걷지 않게 될 것이고,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행동 방식도 알게 모르게 조금씩 줄어들 것이다. 너는 갈수록 삼갈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놓이며 양심에 찔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빛 속에서 사는 것이며, 더 이상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되고, 거짓말이나 듣기 좋은 말로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 예전에는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매일같이 거짓말을 하고 둘러대야 했다. 거짓말을 하나 할 때마다 이리저리 둘러대야 했고 들통날까 봐 두려워했다. 결국 거짓말이 점점 늘어나 나중에는 갖은 애를 쓰고 머리를 쥐어짜며 거짓말을 둘러대야 했다. 사람답게 살지 못했는데, 너무 피곤하게 산 것이다! 너는 이제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마음을 활짝 열고 바른말을 할 수 있다. 매일같이 거짓말을 하고 둘러댈 필요도 없고 더 이상 거짓말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고생도 훨씬 덜하고 갈수록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며 마음속으로 평안과 기쁨을 누린다. 이러면 달콤함을 맛본 것이다. 달콤함을 맛보는 동시에 네 마음속 세상도 더 이상 간사하고 사악하거나 가식적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오고자 한다. 일이 있으면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고 사람들과 상의하지 더 이상 자신의 생각대로 결정하거나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너는 갈수록 과거의 행동 방식이 비열하다고 생각해 그렇게 하려 하지 않고 진리와 이성,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대로 행동한다. 너의 행동 방식은 이렇게 바뀐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너는 적그리스도의 길에서 멀어진 것 아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길에서 멀어지면 구원받는 길에 오른 것 아니겠느냐? 구원받는 길에 오르면 너는 자주 하나님 앞에 오고 너의 태도, 마음가짐, 관점, 살아가는 목표, 인생의 방향 모두 하나님과 적대되지 않으며 너는 긍정적인 사물과 공평함, 공정함, 진리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이때는 너의 마음과 생각이 이미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네가 구원받는 길에 올랐을 때 그래도 네가 적그리스도가 될 리 있겠느냐?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리 있겠느냐? 그럴 리 없다. 그러면 위험에서 멀어진 것이다. 사람은 이런 내적 상태에 진입해야만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게 되고, 이렇게 진리를 구하고 받아들여야만 사탄 본성과 적그리스도 본성의 괴롭힘, 통제, 교란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제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올바른 인생길에 올랐느냐? 그렇지 않다면 어서 그러기 위해 노력해라.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오르지 못한다면 여전히 위험 속에 살게 된다.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은 언제든 도태될 위험이 있다.
본분 이행 기간에 대다수 사람은 자신의 적그리스도 성품과 싸우는데, 명예와 지위, 돈과 이익을 위해 고단하게 싸우느라 몸도 마음도 지친다. 그럼 언제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서서히 적그리스도 본성 본질의 통제와 결박에서 벗어나고 사탄 성품을 차차 약화시키고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러면 너에게는 사탄의 권력에서 걸어 나올 희망이 생긴다. 너희는 이런 일로 인해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은 어째서 늘 변하지 못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못하며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지 생각하고, 자신을 원망한 나머지 스스로 뺨을 때리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한 적이 있느냐? 그런 적이 많으냐? 많지 않다면 그 사람은 매우 무감각한 것 아니겠느냐? 그는 항상 자신에게 패괴가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데다가 스스로 제대로 사역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이 자질과 재능을 갖추었고 진리도 꽤 많이 깨달았으며 많은 일을 원칙대로 처리한다고 생각하여 안심한다. 이것이 바로 무감각하고 스스로 잘났다고 착각하는 것으로, 이는 아주 위험하다! 너희는 지금 자신이 분량이 너무도 작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려면 아직 멀었으며 여전히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느끼지 못하고, 성령 역사가 없는 사람도 이렇게 느끼지 못한다. 대다수 사람은 어리둥절하고 흐리멍덩한데, 정해진 틀에 맞춰 본분을 이행하고 악을 행하지만 않으면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게 아니라고, 온갖 못된 짓을 일삼지만 않으면 적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무감각한 상태에 있다. 자주 우쭐거리며, 스스로 나쁘지 않고 곧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적그리스도의 길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매일 하는 기도로 너희가 이런 내적 상태에 놓여 있지는 않는지 평가할 수 있다. 너희가 매일 하나님 앞에 와서 하는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냐? 네가 매일 “하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당신께 순종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께서 제게 맡기신 부탁을 완수하고 싶습니다! 저는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당신을 흡족게 하고 당신께 온전케 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제게 적그리스도의 어떤 모습이 있든, 제가 얼마나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든 당신은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고 저를 구원하려 하십니다.”라고 기도한다면 이는 어떤 모습이겠느냐? 이는 무감각한 것이다. 각오만 밝히고 자신의 본성 본질은 조금도 인식하지 못한다. 이는 열성적인 단계에 있는 것인데, 진리 실제를 갖추려면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다. 너희는 얼마 만에 한 번 진실로 기도하여 하나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자신의 속사정을 알려 마음속으로 평안과 기쁨을 누리면서 자신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느끼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주기가 어떻게 되느냐? 한두 달에 한 번이냐, 아니면 반년이나 일 년에 한 번이냐? 만약 늘 진실하게 기도하지 않고 종교계에서 하는 것처럼 기도한다면, 늘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각오만 밝히며 상투적인 말만 늘어놓는다면 너희는 갈 길이 너무 멀고 진리 실제가 조금도 없는 것이다. 보통 하나님을 믿은 지 3~5년 정도 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와서 그런 어린애 같은 무지한 말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따르기로 확실히 정했고 믿음도 있으며 하나님의 사역과 뜻, 경륜, 그리고 하나님 사역의 근본 취지 같은 이상 측면의 진리를 환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 와서 주로 어떻게 기도하겠느냐? 하나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른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오늘 제게 이러이러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이러한 일을 해서 당신께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러이러한 일에서 아직도 부족합니다. 저를 지켜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깨우쳐 주시고 제게 빛 비춤을 주세요.” 그는 비교적 진실하고 진리 실제와 관련 있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열성이 넘치는 사람이 자주 하는 각오를 밝히는 말이나 구호는 사라진다. 왜 사라지겠느냐? 그는 그런 말을 해 봤자 소용없고, 자신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진리에 대한 필요와 생명 진입에 대한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네가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나 되었든,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 형식만 차리든 아니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오든, 열흘 중 며칠이나 빈말 또는 입에 발린 말을 하느냐? 하루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 나머지 구 일 동안에는 무슨 기도를 하느냐? 자신의 본분이나 생명 진입과 관련 있다면 그나마 괜찮다. 그것은 너희가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 자신의 본분에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가지고 있고 그다지 무감각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다지 무감각하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이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과 관련된 일, 여러 내적 상태와 관련된 일을 언급하면 듣고 나서 무언가를 느끼고 의식하며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데, 어떻게 말하든 거의 바로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면 어느 정도 분량이 있는 것이다. 무감각한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매일 그저 그렇게 현실에 안주하고 조금도 발전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도 전부 상투적인 말뿐이다. 그는 생명 진입이라는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영적인 이해력도 없으며 아무 느낌도 없다.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반응이 없고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모두 같은 말에 같은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에게 더 할 말이 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와서 무엇을 기도하고 어떤 말을 할지는 사람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에게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하나님에게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요구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자신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하나님의 요구를 어떻게 충족시켜야 하는지, 최소한 마음속에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한다. 만약 네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저 듣기 좋은 말이나 늘어놓고 구호와 도리나 좀 외치며 형식만 갖춘다면 그건 기도가 아니다. 아무리 여러 해 동안 굳게 맹세하더라도 실속 있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고 결국 쉽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부인하며, 쉽게 믿음을 포기하고 물러날 수 있다면 이는 바로 분량이 없는 것이다. 지금 너희가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할 때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나님의 요구, 자신의 성품 변화와 관련된 범위 안에서 유지할 수 있다면 너희는 이미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것이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지는 않을 것이다. 즉,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제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여러 모습, 이런 행위의 성질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이해하지 않았느냐? 적그리스도의 모습과 보통 사람이 가진 패괴 성품의 모습은 다르지 않으냐? 정말로 일이 닥쳤을 때 너희는 비춰 볼 수 있겠느냐?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평범한 패괴된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평범한 패괴된 사람의 모습을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느냐? 이는 어떻게 분별해야겠느냐? 한 사람의 일관된 모습과 표출을 통해 그의 성품을 판단하고, 성품에서 그의 본질을 판단하는 것, 이렇게 규정하는 것이 정확하다. 적그리스도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하나님은 높이지 않고 자신만 높이고 증거한다. 이런 측면의 모습이 특히 뚜렷하고 두드러진데, 사탄 본성에 철저히 지배된 것이다. 비록 보통 사람도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긴 하지만 네가 진리를 교제해 주면 그는 받아들인다. 그는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진리를 받아들인다. 다만 그리 빠르고 쉽게 변하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와 보통 사람의 차이이다. 이렇게 말하면 쉽게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 적그리스도가 가진 특징이 하나 있는데, 진리를 사랑하지 않거나 진리를 부정할 때 그가 바로 부정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부정하길래 너는 그가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느냐? 그는 궤변을 늘어놓는 방식으로 네게 반박하는데, 네가 교제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고 그가 교제하는 것이 진리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그가 자신을 증거해 누군가 그를 폭로한다면, 폭로한 후 그의 어떤 모습을 보고 그는 진리를 사랑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겠느냐? 궤변을 늘어놓으며 설명하는 것이 하나이고, 사실의 진상을 숨기는 것도 있는데, 그 진상이 바로 그의 의도이다. 그의 의도는 남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하기 위해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는 네가 그의 그런 의도를 알지 못하도록 감언이설로 궤변을 늘어놓고 너를 속이며 헷갈리게 하면서 결국 네가 그는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게 한다. 그러면 그는 목적을 이룬다. 그는 감언이설과 궤변을 늘어놓고 사람을 속이며 그가 자신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너의 폭로와 지적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사실에 대한 규정은 더더욱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 데다가 이유를 찾아내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저는 자신을 증거한 게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말한 데는 다 이유와 배경이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적절치 못한 말을 몇 마디 하는 건 정상이고 별문제도 되지 않잖아요. 그 정도 가지고 자신을 증거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게다가 저는 사역을 이렇게나 많이 했는데, 공로는 없어도 나름 고생했으니 저를 우러러보고 숭배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 이토록 부끄러운 행위와 역겨운 행동을 두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이겠느냐? 그는 이런 악행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스스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바로 악인의 본질이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능력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자격이 있겠어? 사람들이 나를 옹호하는 건 다 내가 노력했기 때문이야. 내가 교회 사역에 얼마나 공을 많이 들이고 하나님 집을 위해 얼마나 큰 공을 세우고 얼마나 큰 위험을 부담했는데! 이런 내게 어느 정도의 상과 이익을 주지 않는다면 불공평한 거 아니야?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다며? 사람의 행동에 따라 보응을 내리신다며? 그럼 지금 이렇게 큰 공을 세우고 큰 위험을 부담하는 나를 사람들이 옹호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나?’ 그는 본분을 이행하면 반드시 보수가 따라야 하며, 사람들에게 옹호받고 그가 누려야 할 추대, 명예, 혜택을 누리는 것이 최소한의 보수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여기에서는 무엇이 진리이겠느냐? 예를 들어, 너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얼마나 고생하든 사람은 피조물이고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으니 고생을 견뎌야 해요. 그 고생 중 하나가 바로 본분 이행이죠. 우리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고 우리에게 어떤 은사가 있든 보수를 언급해서도, 하나님과 거래를 해서도 안 돼요.” 이것이 진리 아니겠느냐? 이는 피조물이 깨달아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그의 처세 철학과 사상 관점 안에 이런 내용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 방면의 진리를 들었을 때 그가 받아들이겠느냐?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 그는 하나님 집에서도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일한 만큼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가 없이는 본분을 이행할 수 없고, 위험을 부담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혜택과 은혜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분 이행은 모든 사람의 책임이자 의무로, 거기에는 보수라는 개념이 없다. 적그리스도가 이 진리를 받아들이겠느냐? 그는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그는 멸시하고 반항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런 말을 받아들이다니 당신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요. 그게 진리겠어요? 그건 진리가 아니라 사람을 속이는 거예요. 모두가 공평하고 평등한 게 바로 진리라고요!” 이게 무슨 말이냐? 이는 사탄의 논리이자 그릇된 주장이요, 황당한 이론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이라면 사람은 그에게 현혹될 수 있지 않겠느냐? 현혹되기 아주 쉽다! 연약하고 본분 이행에 관련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데다가 자질과 이해 능력이 떨어지고 믿음이 그리 크지 않은 사람들이 듣기에 이 말은 구미에 딱 맞는다. ‘그러게 말이야. 난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오늘 드디어 똑똑한 사람을 만났네. 저 사람 말이 맞아!’ 이런 사람들은 누가 일리 있고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말을 하면 그대로 따르고 받아들인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원칙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감정, 사고와 논리, 풍습이나 전통문화에 부합하든 부합하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한 치의 빈틈도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구구절절 전부 진리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분석할 필요 없다. 인류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든 그르다고 생각하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든 없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의 검증이 필요 없고 인간의 체험으로 확증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진리이다. 그럼 적그리스도는 이렇게 생각하겠느냐?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도 합리적이셔야지! 하나님의 공의는 뭐겠어? 고생을 많이 하고 능력이 뛰어나면 큰 상을 받고, 고생도 적게 하는데 능력도 하찮고 기여도 크지 않으면 작은 상을 받는 거 아니겠어?’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뭐라고 말했느냐? 하나님은 본분 이행이 모든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본무이고 본분 이행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으며 모두가 마땅히 진리 원칙대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고, 그것이 피조물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보수를 언급했느냐? 상을 언급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보수나 상은 언급한 적 없다. 이는 의무이다. 의무란 무엇이냐? 의무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로, 일한 만큼 보수를 받는 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본분을 많이 이행하면 나중에 큰 상을 받고, 본분을 적게 이행하거나 형편없이 이행한 사람은 작은 상을 받는다고 규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한 적 없다. 그럼 하나님은 뭐라고 했겠느냐? 하나님은 본분 이행이란 모든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본무이자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이는 진리이다. 적그리스도가 이렇게 이해했겠느냐? 그는 하나님의 이런 말씀들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는 다른 방식으로 대한다. 자신의 이익의 관점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그의 방식대로, 그가 이해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다른 말로 바꾸는 것이다. 이런 말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겠느냐? 그 자신에게 이롭고 사람을 현혹하며 나아가 사람을 선동하고 유인할 수도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가 말하는 방식대로 바꾸어 마치 그가 선포한 진리인 척한다. 하나님이 한마디를 하면 그는 그 말씀하는 방식과 원칙을 그의 방식대로 좀 바꿀 것이다. 그의 방식대로 바뀐 것이 여전히 진리이겠느냐? 그건 진리가 아니라 궤변이고 사설이다. 너희는 이 일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 (조금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이토록 많이 들었으니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적그리스도가 진리에 반대하고 진리를 부인하는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잘못 해석하는 속셈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남들에게 진리가 아니라 그의 궤변과 사설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의 사고와 논리, 이익과 관점, 관념에 따라 진리를 왜곡한다. 왜곡하고 나면 한편으로는 그 자신에게 유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지몽매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선동하고 현혹할 수도 있다. 그의 이런 말들은 얼핏 듣기에는 옳은 것 같지만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 안에 사탄의 야심과 계략이 담겨 있다. 그의 야심과 계략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겠느냐? 바로 자신이 이익을 얻고, 자신의 행동 방식과 행위가 자리를 잡아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려는 것인데, 그들의 나쁘고 악한 행위를 정당하고 진리에 부합하는 행위와 행동 방식으로 바뀌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다들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도 그를 정죄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사람들을 현혹해 사람들이 그를 버리지 않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과연 하나님이 그를 정죄하지 않게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본질을 바꿀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가장 어리석은 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말재주와 ‘똑똑한 머리’로 궤변과 사설을 생각해 내 진리를 왜곡하고, 그의 말이 자리 잡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뒤집고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려 한다.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느냐? 그가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적그리스도가 일부 사람들을 현혹했다면 어쩌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만약 정말로 현혹되어 되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드러나고 도태된 것으로, 그래도 싸다. 이런 것을 두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한다. 그는 죽어야 할 운명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구원할 생각이 없다. 그는 교회에 섞여 들어와 힘을 좀 쓰고 은혜를 좀 누리다가 하나님이 더 이상 그를 원하지 않으면 사탄에게 넘겨진다. 그는 마침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하나 듣고는 박수치며 찬동한 다음 사탄을 따라갔다. 이를 무엇이라 하겠느냐? 사탄을 이용해 봉사하게 한다고 한다. 계시록에 이런 말이 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계 22:11) 이것이 바로 각기 부류대로 나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잠시 부주의해서 적그리스도를 따라갔겠느냐? 하나님이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겠느냐? 이런 걸 두고 죽어야 할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동안 어울려 보면 너는 그들이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비천하다! 그들의 인품과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은 본성이 사악하고 진리를 싫어하므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를 입을 자격이 없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그들은 얻지 못한다. 따라서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세 어절로 요약하면 가장 정확하다.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가장 주된 모습이다. 이 조항에 따라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규정하면 아주 적절하고 구체적이며 공허하지 않다. 그의 의도와 야심, 본질의 표출, 일관된 행동의 목적을 보면,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은 적그리스도가 보이는 특유한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번도 자신을 높이고 증거한 적 없는 적그리스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왜 없겠느냐? 그는 야심과 욕망이 너무도 커서 통제할 수 없다. 어느 무리에서 살아가든 아무도 그를 높이고 숭배하지 않는다면 그는 삶에 가치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여 목적을 달성하길 간절히 원한다. 살아 있는 한 그는 반드시 남들보다 뛰어나려 하고 그를 숭배하고 추종할 사람이 필요한데, 설사 ‘똥파리’나 ‘비렁뱅이 무리’라도 상관없다. 그는 개의치 않는다. 그를 숭배하고 추종하는 사람이 있기만 하면 그는 마음이 편안하다. 만약 유명 가수처럼 팬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는다면 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만족하고 즐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성이다. 어떤 사람이 추종하고 숭배하든 그가 보기에 다 좋다. 아무리 미천하고 역겨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설사 짐승 같은 놈이 그를 따르더라도 그를 높이고 지위에 대한 그의 야심과 욕망을 충족할 수만 있다면 그는 싫어하지 않는다. 그럼 그가 가는 곳마다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고 과시하지 않도록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본질이다. 너희가 보기에 어떤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을 따르겠느냐? 하나님은 인류 가운데서 특정한 유형의 인간을 택하고 구원하려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최소한의 양심과 이성, 염치를 가지고 있다. 좀 더 나은 경우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 하나님의 공평과 공의를 사랑하고 사악함을 증오한다. 정의롭지 않고 사악한 일을 보면 속으로 분개하고 설사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그런 일들을 증오한다. 하나님은 최소한 이런 사람을 원한다. 이런 인성과 본질을 갖추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훌륭하고 위대하다고 아무리 떠들어대도 하나님은 그들을 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종교계에 있는 바리새인들은 천편일률적인 공허한 이론과 겉치레하는 말로 하나님을 높이고 증거하는데, 2천 년 동안이나 그런 말을 해 왔음에도 지겨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이 선포한 이토록 많은 진리는 알아보지 못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심지어 정죄하고 모독하는 사람도 있다. 이로써 그들은 철저히 드러났다. 하나님은 일찍이 그들을 외식하는 바리새인이자 사탄과 한패라고, 그들 같은 부류의 사람을 마귀 사탄, 개돼지 같은 짐승이라고 규정했다. 이 무리에 가서 이런 사람들 중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안 되고 다들 분별력과 능력이 없는 것을 확인하면 적그리스도는 재빨리 기회를 틈타 자신을 과시한다. 자신이 예전에 세계적인 명문대 두 곳에 동시에 합격했지만 나중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어느 대학에도 진학하지 않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떤 이들은 이 말을 듣고 그를 특히 우러러본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데다가 네가 좋아하는 것과 너의 세계관이 세상 사람과 똑같다면 너는 이런 사람을 숭배하게 된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의 말에 현혹되고 우롱당할 수 있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변칙적으로 자신을 높이는데, 어리석고 분별력 없는 사람은 현혹되고 만다. 결국 적그리스도는 자신의 수하에 있는 사람은 모두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상당히 흡족해하지만 사실 그들은 한 무리 멍청한 자들이자 변변치 못한 자들이다.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는 사람은 모두 사탄과 적그리스도에게 현혹될 수 있다. 그들은 사탄과 적그리스도가 하는 말을 들으면 유독 마음에 들고 구미에 맞다고 생각하며 듣기 좋아한다. 그들은 그 말을 정상적인 사고로 판단하지 못하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찾아가 분별하지도 않는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만 하면 받아들이려 하기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현혹된다.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고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나서 그가 사람을 현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버린다. 분별력이 없는 멍청이들은 적그리스도가 유식하고 자질이 뛰어나며 전도유망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일을 바라보고 일부 표면적인 현상에 현혹되며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탄을 따라간다. 이런 사람은 무지몽매함 때문에 멸망하지 않겠느냐? 바로 그렇다. 적그리스도가 자주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여러 모습이나 다양한 행동 방식을 네가 분별할 수 있고 그가 말하는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다면 너는 적그리스도의 본질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래야만 재빨리 그를 버리고 저주하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수 있다. 왜 이렇게 하겠느냐? 적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은 혐오스럽고 증오스러우며 마치 파리를 본 것처럼 역겨워 너는 서둘러 그를 쫓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의 행동 방식과 행위를 분별할 줄 알게 되면 가장 먼저 적그리스도를 폭로하여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게 한 다음, 원칙대로 그를 교회에서 출교시켜야 한다. 너희는 이렇게 할 용기가 있느냐? 하나님 선민은 이렇게 할 수 있어야만 분량이 자란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 집 사역을 지킬 수 있다. 하나님 선민이 진리를 깨닫고 분별력이 생긴다면 적그리스도는 교회와 하나님 집에서 설 곳이 없게 된다.
적그리스도는 어떤 상황에서든 기회만 있으면 자신을 과시하고 증거하며, 자신을 숭배하고 자신에게 탄복과 선망, 추앙의 시선을 보내기만 하면 그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기뻐한다. 그가 자신을 추종하고 숭배하며 앙망하는 사람에게 요구 기준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바보, 지적 장애인이든, 아니면 악인이나 불신파든,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심지어 제명하고 도태시켜야 할 사람까지 포함해 그를 추종하고 숭배하고 높이기만 한다면 그는 모두 받아들이고 몹시 좋아한다. 게다가 이런 사람을 자신 곁에 끌어들여 보호한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사람을 자신의 양이나 사유 재산으로 생각하며 그 누구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거나 폭로하고 처분을 내리지 못하게 한다. 이런 사람이 적그리스도에게 어떻게 아첨하고 알랑거리며 굽실거리든 어떤 역겹고 메스꺼운 말을 하든 적그리스도는 그저 즐거워하는데, 상대가 자신을 치켜세워 주기만 하면 그만이다. 적그리스도는 남이 그를 우러러보고 좋아하고 추종하게 하기 위해 말하고 행동한다. 그는 곁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이 나쁜 일을 아무리 많이 저질러도 따져 묻지 않고, 그 사람의 인성이 아무리 음험하고 악독해도 싫어하지 않는다. 그저 그를 추종하고 숭배하기만 하면 다 좋아하며, 그의 권력과 지위를 지킬 수만 있고, 그를 거역하거나 맞서지만 않으면 몹시 흡족해한다. 이런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다. 반면 늘 그를 폭로하며, 그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멸시하는 사람, 그리고 그에게 진리를 교제하고 그가 지닌 문제점의 본질을 간파하며 그를 진정으로 분별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는 즉시 분노하고, 경계하고 배척하고 공격하는 방식을 취하다가 결국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를 분별하고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고립시킨다. 그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자신을 높이고 증거할 때, 그는 늘 그 사람이 거슬리고 눈엣가시 같다고 느낀다. 또 그 사람이 그를 분별하고 내치려 할 뿐 아니라 그를 폭로하고 그의 좋은 일을 망치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만 보면 마음이 불안해져서 늘 그 사람을 처리하려고 한다. 그는 그 사람을 처리하기만 하면 그가 또 자신을 높이고 증거할 때 아무도 그를 폭로하고 방해하지 않아 거리낌 없이 악을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행동 원칙이다. 그를 치켜세우고 칭찬하고 높이는 사람들이 누구든, 그들이 하는 말이 사실에 부합하든 말든, 설사 거짓말이라고 해도 그는 받아들이고 마음속으로도 듣고 싶어 하며 진심으로 그들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든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설사 그들의 문제점을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숨기고 감싸주며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이 곁에서 그를 추종하고 치켜세워 주기만 하면 그는 즐거워한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행동 방식이다. 너희도 적그리스도처럼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느냐, 없느냐? 예를 들어, 너희가 교회의 리더 일꾼으로서 하나님 선민 가운데 지위와 신분이 있는 사람인데, 형제자매가 너를 우러러보고 치켜세우고 네게 아첨하면서 너는 설교도 잘하고 외모도 뛰어나며 그의 마음속 최고의 리더라고 자주 칭찬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너는 이런 사람이 하는 말의 속셈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 이런 사람을 버리고 멀리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면 너는 몹시 위험하다. 자신이 외모도 보잘것없고 진리 실제를 교제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누가 이렇게 자신을 치켜세우는 걸 들으면 마음이 흐뭇해서 늘 그 사람을 가까이하고 발탁하려 하니, 이는 골치 아픈 일 아니겠느냐? 이는 위험한 일이다.
리더 일꾼은 사역할 때 가끔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 덕에 진실한 체험을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스레 우러러보고 숭배하고 좇으며 그림자처럼 따르는 사람이 생기는데, 이럴 때는 이런 일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사람은 모두 나름의 기호와 허영심을 가지고 있어 자신에게 동조하고 아첨하는 말을 들으면 속으로 즐기기 마련이다. 이는 정상적인 느낌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을 치켜세우고 자신에게 아첨하는 사람을 발탁하여 중용한다면 이는 위험하다. 아첨하고 치켜세우기 좋아하는 사람은 무척 교활하고 간사한데, 정직한 사람도, 성실한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일단 지위를 얻으면,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과 교회 사역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에 속하는데, 그 누구보다 일을 그르치는 데 능하다. 비교적 올곧은 사람들은 보통 남을 치켜세울 줄 모르고 마음속으로는 네게 동조해도 입으로 내뱉지는 않으며 너의 결점이나 실수를 발견하면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솔직한 사람을 싫어해서 누가 자신의 결점을 지적하거나 자신을 꾸짖으면 억누르고 배척하며 나아가 상대의 결점과 단점을 물고 늘어지면서 끊임없이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좋은 사람을 억누르고 해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일을 저지르고 이렇게 좋은 사람을 박해하는 것을 가장 혐오한다. 좋은 사람을 박해하는 것은 부도덕한 짓에 속한다! 좋은 사람을 많이 박해한다면 그런 자는 바로 마귀이다. 리더 일꾼은 누구든 공평하게 사랑으로 대해야 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특히 네게 아부하고 알랑거리며 늘 너를 중심에 두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그가 이방인의 아첨하는 수법을 배우지 않고 본연의 일을 할 수 있게 반드시 그를 올바르게 대하고 사랑으로 도와야 한다. 또 그가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느껴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너의 입장과 관점을 밝혀야 한다. 네가 원칙을 고수하고 공평하게 사람을 대한다면 이렇게 날뛰는 소인배와 사탄에 속하는 부류들이 부끄러워하지 않겠느냐? 그러면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는 것이다. 아첨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리더 일꾼은 모두 아첨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치켜세우고 비위를 맞추는 말을 할 줄만 알면 사람의 허영심과 지위욕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수작을 좋아하지 않으며 마음속으로 몹시 혐오하고 역겨워한다. 거짓 리더나 이런 수작을 좋아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그를 치켜세우거나 칭찬하지 않지만 그를 치켜세우거나 칭찬해 주는 하나님 선민이 있으면 유독 흡족해하고 즐거워하며 결국 좀 위로를 받는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수작을 더더욱 좋아하는데, 이런 사람이 그에게 접근해 그를 중심에 두는 걸 가장 좋아한다. 이는 골치 아픈 일 아니냐?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으로, 남이 자신을 칭찬하고 치켜세우고 숭배하고 추종하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비교적 올곧은 사람은 이런 수작을 좋아하지 않는다. 너는 네게 솔직한 말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해야 한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큰 도움이 된다. 특히 네 문제점을 발견하면 용기 있게 너를 질책하고 폭로해 주는 좋은 사람이 곁에 있으면 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을 피할 수 있다. 그는 네 지위가 어떠하든 상관하지 않고 네 일 처리가 진리 원칙에 위배될 경우, 질책해야 하면 질책하고 폭로해야 하면 폭로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올곧은 사람이자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어떻게 폭로하고 질책하든 너에게는 다 도움이 될 것이며, 그러한 것들은 전부 너에게는 감독이자 채찍질일 것이다. 너는 이런 사람을 가까이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곁에서 도와주면 상대적으로 훨씬 안전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호이다. 진리를 깨닫고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매일 곁에서 감독하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사역을 잘해 내는 데 무척 큰 도움이 된다. 절대 아첨하고 알랑거리는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을 너의 조력자로 삼지 마라. 그런 사람이 네 곁에 붙어 있는 것은 똥파리가 붙어 있는 것과 같은데, 얼마나 많은 세균과 바이러스를 옮기는지 모른다! 그들은 너를 교란하고 네 사역에 영향을 주기 쉬우며, 네가 시험에 빠져 잘못된 길에 들어서게 하고 재난과 화를 불러오게 한다. 그들을 반드시 멀리해야 하는데,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좋고, 불신파인 그들의 본질을 분별해 내고 그들을 교회에서 제명할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올곧은 사람은 네게서 문제점을 발견할 경우, 네게 지위가 있든 없든, 네가 그를 어떻게 대하든, 설사 네가 그를 교체하려 할지라도, 진실을 말한다. 절대 이리저리 감추거나 얼버무리지 않는다. 곁에 이런 사람이 많다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느냐! 그는 네 행동이 원칙에 어긋났을 때 너를 폭로할 수 있고, 네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허심탄회하게 네 문제나 결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는 네 체면을 봐주지도 않고, 심지어 많은 사람 앞에서 널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다. 너는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혼내 줄 것이냐, 다가갈 것이냐? (다가갈 것입니다.) 다가가는 것이 맞다. 너는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교제해야 한다. “당신의 의견이 맞습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는 허영심과 지위욕이 있었어요. 이렇게 오래 리더 자리에 있었는데, 제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고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제 문제를 지적했다고 생각해서 받아들이지를 못했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제 행동은 확실히 원칙과 진리에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리더라는 지위를 갖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건가요? 그냥 본분일 뿐 아닌가요? 우리는 모두 본분을 이행하고 있고, 지위도 평등합니다. 저는 그냥 당신보다 책임을 좀 더 많이 지고 있을 뿐이고요. 앞으로 문제를 발견하면 생각한 걸 그대로 얘기해 주세요. 우리 사이에 개인적인 원한은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면 함께 교제하는 것도 좋고요.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과 진리 앞에서 우리는 장벽 없이 하나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태도다. 적그리스도의 길을 멀리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 올곧은 사람에게 주동적으로 다가가야 하며, 의견을 제시해 주는 사람, 네게 문제점이 발견되면 솔직하게 말하고 지적해 주는 사람, 특히 문제점이 발견됐을 때 너를 책망하고 훈계해 주는 사람을 가까이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네게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이니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런 좋은 사람을 배척하고 제거하면 하나님의 보호를 잃게 될 것이고, 조금씩 화가 닥칠 것이다. 좋은 사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가까이하면 평안과 기쁨이 생기고, 화를 멀리할 수 있다. 반면, 소인배, 몰염치한 사람, 아첨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면 위험해진다. 사기당하거나 속임수에 넘어가기 쉬울 뿐만 아니라 언제든 화가 닥칠 수도 있다. 너는 어떤 사람이 네게 가장 도움이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네가 일을 잘못하거나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고 남을 미혹할 때 일깨워 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네게 가장 큰 도움이 되는데, 이런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은 옳은 길이다.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누군가 네 체면이 깎이는 말을 했을 때 평생 앙심을 품고 “당신은 왜 저를 폭로하는 거죠? 제가 당신을 서운하게 한 것도 없습니다. 왜 늘 저를 못살게 굴죠?”라고 말하면서 마음속에 기억해 두고 거리감이 생긴다면, 언제나 ‘나는 리더야. 나한테는 신분도, 지위도 있다고. 그러니 당신이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해선 안 돼.’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어떤 태도겠느냐? 이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상대와 힘겨루기를 하는 것인데, 말이 좀 안 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위욕이 작간을 부리는 것 아니겠느냐? 이는 패괴 성품이 너무나 심각하다는 뜻이다. 항상 지위욕이 있는 자는 적그리스도의 성품이 심각한 사람이다. 거기에다 악행까지 저지른다면 바로 드러나 도태될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다! 늘 지위를 두고 다투려 하고, 지위의 복을 누리려 하는 것은 위험한 징조이다. 마음이 늘 지위에 속박받고 있는데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늘 명예와 이익, 지위를 위해 일하고, 언제나 권력을 이용해 일을 한다면, 이는 영락없는 적그리스도가 정체를 드러낸 것 아니겠느냐?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가장 흔한 모습으로, 일상생활에서든, 인간관계에서든, 아니면 교회 생활에서든 다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은 전부 패괴 성품의 표출에 속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본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분별해야 하는지 등과 관련된 진리는 우리가 교제한 내용에 다 언급되었다. 너희도 평소 이런 구체적인 모습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문제라고 느끼지 못한 것이냐? 아니면 이런 구체적인 문제에 착안해 진입하지 않은 것이냐? 너희가 성품 측면에서 착수하지 않았거나 때로 이런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성품 문제인지 알지 못해 신경 쓰지 않았다면 성품 변화까지 아직 갈 길이 먼 것이다. 이런 모습이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는 것임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패괴 성품에 지배받은 것임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성격이나 태생적인 행동 방식, 또는 인지로 여겨 약화시킨다면, 그것을 패괴 성품이나 패괴 본질의 표출로 여기지 않는다면 너의 이 측면의 패괴 성품은 변화하기 어렵다. 사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성품과 관련된 것은, 그것이 행동 방식이든 내적 상태든, 표면적 행위이든 아니면 언어나 말이든, 사상 관점이든 어떤 일에 대한 이해든, 성품 본질과 관련만 있다면 사람의 본성 본질의 발현이나 표출로 여겨야 한다. 그러면 인식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지 않겠느냐? 그저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며 지위를 탐하거나 일종의 표현으로 사람을 미혹하는 등의 큰 측면뿐 아니라 작게는 구체적인 생각, 마음가짐, 크게는 논조나 주장에 이르기까지 전부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방금 나는 사상 관점과 일에 대한 이해를 포함해 총 여섯 가지 측면을 다루었다. 사상 관점은 의식과 생각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이해는 이미 인식한, 구체적인 글과 말이 될 수 있는, 형체를 갖춘 것이다. 여기에 행동과 언어를 더하면 총 네 가지 측면이다. 이 밖에, 주장과 논조도 있다. 주장과 논조에 상대되는 개념은 무엇이겠느냐? (마음가짐과 생각입니다.) 생각이란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비교적 모호한 것으로, 정말 옳은지 그른지 아직 정의되지 않았고, 그저 그렇게 여길 뿐 내면에서 형체를 갖추지 않은 것이다. 반면 입 밖으로 뱉어 낸 논조는 형체를 갖추고 있다. 총 세 부분과 여섯 가지 측면이 있다. 너희가 이 여섯 가지 측면을 패괴 성품의 본질을 해부해 성품 변화에 이르는 길로 삼고, 앞으로 이 여섯 가지 측면에서부터 시작해 자신의 패괴 성품과 패괴 본질을 인식한다면 진실로 자신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교제한 이 내용들은 듣고 나서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예배할 때 이것을 기반으로 어느 정도 빛 비춤을 교제해 내거나 자신을 비춰 볼 수 있겠느냐? 이것이 가장 핵심으로, 가장 유익하다. 너희는 예배 때 교제하고 교류하며 체험과 체득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예전에 자주 언급했던 ‘묵상’은 쉽게 말해 ‘되새긴다’라고 하는데, 많이 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많이 읽으며 많이 생각하고 많이 구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당시에 듣고 이해한 것과 듣고도 이해하지 못해 그저 도리로 삼은 것들, 그리고 중요한 부분과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모두 꺼내어 중점적으로 교제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되새긴다’라고 한다. 이러면 진리의 세세한 부분과 각 측면의 차이, 각 진리의 정의를 점점 더 뚜렷하고 정확하게 알게 된다. 너희는 최근 몇 년간 깨닫고 실행한 여러 진리가 전에 비해 더 모호해진 것 같으냐, 아니면 더 뚜렷해진 것 같으냐? (더 뚜렷해졌습니다.) 요 몇 년간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길과 처신하는 방향, 본분 이행의 마음가짐과 동기, 출발점에 큰 변화가 생기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채찍질과 징계를 체험한 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니 어느 정도 변화한 것 같습니다.) 변화가 생겼다는 건 옳고 당연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설교를 이토록 많이 들었는데도 전혀 변화하지 않았고 마음속으로 감명을 받지도 않았다. 즉, 예배하고 교제한 내용이 단 한 번도 그가 나아가는 방향을 바꾸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 무감각하고 우둔한 것이다! 이제 구원받는 길이 점점 더 뚜렷해졌을 것이며, 체험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방식과 근본 취지를 분명하고 명확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여러 해 동안 믿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의 패괴를 정결케 하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면 그건 네가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했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인식이 조금도 없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은 흐리멍덩하게 믿은 것 아니겠느냐?
2019년 3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