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9)

최근 우리는 계속 덕행 측면의 주제에 관해 교제하고 있다. 지난 시간에는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논조에 관해 교제하였다. 오늘은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에 관해 교제할 것이다. 이 또한 사람의 덕행에 대해 제기한 전통문화의 요구이다. 이 논조는 어떤 측면의 덕행과 관련이 있겠느냐? 이 논조는 사람에게 도량과 관용을 요구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인성의 도량에 관한 요구이다. 이 요구의 기준은 무엇이냐? 그 핵심은 어디에 있겠느냐?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 사람을 용서해야 할 때는 용서해야지 너무 몰아세워 활로를 없애 버리지는 말라는 것이다. 이 덕행의 논조는 사람에게 쪼잔하게 굴지 말고 도량을 보이라고 요구한다. 남과 사귈 때나 일을 처리할 때 분쟁이나 갈등, 불화가 발생하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너무 높고 과하며 가혹한 요구를 하지 말라고, 용서해야 할 때는 용서하고 도량을 보여야 할 때는 도량을 보이라고, 마음속에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을 품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그렇게 큰 도량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그렇게 큰 도량이 없다. 이런 일에 대한 본능의 수용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어디까지가 정상인지, 사람은 알지 못한다. 지난날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적대시한 사람, 혹은 자신의 이익을 빼앗아 간 사람을 대할 때, 정상인은 기본적으로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증오를 보인다. 사람의 마음속에 증오가 생겨났을 때,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러기가 쉽지 않으며, 대부분이 해내지 못한다. 인성에 갖춰진 양심과 이성으로 상대를 용서하고 과거의 잘못을 묻지 않는 게 대부분의 사람에게 가능하겠느냐?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왜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고 하겠느냐? 어떤 일인지, 중요한 일인지 사소한 일인지를 봐야 한다. 문제의 심각성 또한 다르므로 그 수준도 봐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가끔 말로 네게 상처를 주는 데 그쳤다면,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보통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도 악의는 없었을 거야. 말은 거칠어도 진심은 아니었을 테지. 오랜 세월 함께한 정을 봐서, 또 누구누구를 봐서, 어떤 일을 봐서 따지지 말고 넘어가자.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말도 있잖아. 그냥 한마디 한 것뿐이야. 내 체면에 먹칠을 한 것도 아니고, 뭔가 손해를 끼친 것도 아니야. 내 지위나 앞날에 영향을 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러니까 넘어가자고.’ 이렇게 사소한 일이 임했을 때, 사람은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상대가 네 직접적인 이익에 해를 끼치거나 네 가족에게 해를 끼쳤다면, 심지어 네 인생에 영향을 줄 만큼 큰 해를 끼쳤다면, 그때도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예를 들어, 누가 네 부모를 죽이고 구족을 멸했다면, 너는 그 사람에게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혈기를 지닌 정상인이라면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이 논조는 사람의 깊은 원한을 제약하지 못한다. 물론, 그 일에 대한 사람의 태도와 견해에는 더더욱 영향을 주지 못한다. 상대가 일부러든 무의식적으로든 네 이익을 침해하고 네 앞날에 지장을 주었다면, 혹은 네 몸에 상처를 입혀 장애가 생기게 하거나 어떤 흉터를 남겼다면, 혹은 네 정신세계나 마음속 깊은 곳에 그늘을 드리웠다면, 너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너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니 사람이 덕행 측면에서 관용과 도량을 보이라는 전통문화의 요구대로 할 수 있겠느냐? 이는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임한 일이 얼마나 큰 피해를 주고 과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사람의 양심과 이성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인지에 달려 있다. 만약 피해가 크지 않아서 감당 가능한 수준이고 인성의 수용 능력을 넘어서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정상적인 성인으로서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있고 원한과 증오를 풀며 상대적으로 쉽게 내려놓을 수 있다면, 사람은 상대에게 관용을 보이고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문화에 속하는 덕행 측면의 어떤 말이 너를 제약하고 지도하지 않아도,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지 않아도 너는 해낼 수 있다. 이는 정상 인성에 갖춰져 있고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일이 네게 준 상처가 그리 깊지 않고, 육적, 심적, 영적으로 네게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아주 쉽게 그 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일이 육적, 심적, 영적으로 네게 아주 큰 영향을 주고 네 인생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면, 언제나 그 일로 우울함과 분노를 느끼며 마음이 어두워지고 상실감이 들게 됐다면, 적대적인 시선으로 이 인류와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사라졌다면, 평생 원한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면, 다시 말해 그 일이 정상 인성의 수용 범위를 넘어섰다면,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으로서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말을 실행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누군가가 이것을 해낸다면 그것은 특수한 상황에 속한다. 그런 상황은 무엇을 기초로 성립하겠느냐? 어떤 기준이 갖춰져야겠느냐? “그럼 불교에 입문하여 원한을 내려놓고 부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이는 세상에서 해탈할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해탈에 불과하다. 소위 ‘해탈’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세상의 분쟁과 원한, 살육을 멀리하는 것이다. “보지 않으면 심란할 일도 없다.”라는 말처럼 말이다. 그것을 멀리하여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 일이 네 마음 깊은 곳에 주는 영향도 줄어들 것이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기억이 흐려질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용서에 이르지 못하고, 그 일에 있어 관용과 포용을 베풀며 철저히 내려놓지도 못한다. 그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흐려져 그 일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혹은 불교의 가르침으로 인해 억지로 원한 속에서 살지 않고, 더는 세상의 그 애증에 얽매이지 않게 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애증으로 점철된 분쟁이 있는 그곳에서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멀리한 것일 뿐,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정상 인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은 자신에게 발생하는 일이 육체나 정신, 몸에 심각한 상처를 줄 경우, 그러니까 감당하기 어려운 압박이나 상처를 줄 경우, 자신이 무엇을 갖추고 있든 견디지 못한다. 견디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사람의 정상 인성과 사상 관점이 그것들을 견뎌 내거나 풀어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말로 표현하면 사람이 견디지 못하고, 사람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말로 표현하면 그 일을 이해하고 간파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원한을 견뎌 내지도, 풀어 버리지도 못하는데,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실행할 수 없다는 말의 속뜻은 무엇이겠느냐? 정상 인성에 그런 도량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누가 네 부모를 죽이고, 네 구족을 멸했다면, 너는 그 일을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그 원한을 풀어 버릴 수 있겠느냐?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원수를 보고,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것처럼 원수를 떠올려 심신과 영혼에 아무 느낌도 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불교를 믿고 직접 자기 눈으로 인과응보를 확인해야만 원수를 죽이려는 생각을 버릴 수 있다. 어떤 이는 “저는 선량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습니다. 누가 제 부모님을 살해한다고 해도 저는 그를 용서하여 복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과응보를 누구보다 더 믿으니까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말은 너무도 훌륭합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 아닙니까? 게다가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고 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면, 그 원한은 풀린 것과 마찬가지이니 저는 그를 용서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사람이 그런 도량을 보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네가 그 원수를 잡은 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그를 잡지 못했다고 해도 매일 마음속으로 한순간도 복수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일은 너무 큰 상처와 영향을 주었기에 정상인이라면 틀림없이 평생 그 원한을 잊지 못할 것이다. 너는 꿈에서까지 가족들이 살해당하던 그 장면과 네가 복수하는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그 일은 평생, 네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네게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큰 원한을 사람은 결코 내려놓지 못한다. 물론, 이것보다 좀 가벼운 상황은 있다. 예를 들어, 누가 사람들 앞에서 네 뺨을 때려 망신과 모욕을 주었다고 해 보자. 너는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모욕을 당했고, 그 후로 많은 사람이 너를 멸시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조롱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네 부모나 가족을 죽인 것보다 훨씬 가벼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하기가 몹시 힘들다. 네게 일어난 그 일은 이미 정상 인성의 수용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것은 네 심신과 존엄, 인격에 크나큰 상처를 주었고, 너는 그것을 잊지도 내려놓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하기가 몹시 힘든 것이다. 이는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방금 교제한 내용을 보면 중국의 전통문화에 나오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의 논조는 사람을 제약하고 일깨우는 도리로서 사소한 일, 별 볼 일 없는 갈등에만 완화 역할을 할 뿐, 깊은 원한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 이 요구를 제기한 사람은 과연 인성을 이해했겠느냐? 이 요구를 제기한 자는 사람의 양심과 이성의 수용 범위가 얼마나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저 이 이론을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우아함과 고상함을 뽐내 사람들에게 동조를 얻고 칭찬을 받으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들은 사람이 존엄과 인격, 이익에 해를 입고 나아가 앞날과 인생에 영향을 받는다면, 인성의 각도에서 볼 때 반드시 복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에게 아무리 양심과 이성이 있어도 그대로 끝내려 하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복수의 정도와 방식이 달라지는 데 그칠 뿐이다. 이 현실 사회에서, 인권이 없고 극도로 어두우며 사악한 이 사회 환경과 사회 배경 속에서, 사람들 사이의 다툼과 살육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사람은 자신이 상처를 입었을 때 다 복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가 심할수록 복수하려는 마음이 강해지고 복수의 수법도 잔인해진다. 그럼 이 사회의 기풍이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되겠느냐? 이 사회는 살육과 복수로 점철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이 요구를 제기한 사람은 완곡한 방식으로 복수를 하지 말라고 알려 준 것인데,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의 논조로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려는 것이다.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을 때, 인격과 존엄이 모욕당하고 상처 입었을 때, 사람들이 이 덕행의 논조에 영향을 받아 충동적으로 굴거나 과격한 행위를 하지 않고 재차 생각하게 한 것이다. 만약 이 사회의 사람들이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을 때, 그 대우가 국가에서 온 것이든 사회에서 온 것이든, 아니면 접하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온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모두 복수를 한다면, 이 인류, 이 사회를 관리하는 것은 무척 어려워지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다툼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원한으로 인한 살인이 수시로 벌어질 것이다. 그럼 이 인류, 이 사회는 무척 혼란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회가 혼란해지면 통치자가 관리하기가 쉽겠느냐, 어렵겠느냐? (관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소위 사회의 교육가, 사상가들이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의 논조로 사람들을 권면하고 일깨운 것이다. 사람이 어떤 불공평한 대우나 차별, 모욕, 심지어 짓밟힘과 유린을 당해도, 마음과 육체가 아무리 큰 고통을 겪어도 일단 복수할 생각은 하지 말고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도덕 경전을 떠올리도록 말이다. 그럼으로써 사람이 부지중에 전통문화에 속하는 이 덕행의 논조에 제약을 받게 하고, 그것을 통해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제약하며, 다른 사람이나 국가, 사회에 대해 품고 있는 증오를 해소하게 한 것이다. 인성에 마땅히 갖춰져 있어야 할 적대감과 분노, 그리고 본능적으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생각이 완화되면,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의 다툼과 원한으로 인한 살인을 대폭 줄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관둘 거예요. ‘한순간을 참으면 무사 평온하고, 한발 물러서면 세상이 넓어 보인다’고 하잖아요. 또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말도 있고요. 그가 제 가족을 죽인 데는 이유가 있겠지요.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 법이잖아요. 양측이 모두 자기주장을 내세웠을 겁니다. 게다가 제 가족이 죽은 지도 오래되었는데 이제 와서 그 일을 언급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해야지요. 도량을 갖춰야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고, 원한을 내려놓아야 즐겁게 살 수 있는 거죠.”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지난 일은 꺼내지 않겠습니다. 그가 더 이상 예전처럼 그렇게 저한테 따져 들고 적대시하지 않는다면, 저도 그와 싸우지 않겠어요. 그건 없던 일로 하겠어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도 있잖아요.” 누구든 복수할 때가 되면 갑자기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그들의 언행, 그리고 이론은 기본적으로 다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사상 관점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싸우긴 뭘 싸워요! 사내대장부가 돼서 그 정도 일도 내려놓지 못하다니요! 훌륭한 사람은 마음속에 천하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아량이 크다고 하잖아요. 천하를 담을 아량은 없다고 해도 최소한의 도량은 갖춰야지요! 사람이 살면서 어느 정도는 도량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한발 물러서면 세상이 넓어 보이는 법이잖아요. 그렇게 하찮은 일로 따지고 싸워 봤자 웃음거리가 될 뿐이죠.”라고 말한다. 이런 말과 사상 관점은 세상사에 대한 사람의 한 가지 태도를 집중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그 태도는 분명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도덕 경전의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은 모두 이러한 말에 물들고 영향받아, 이 말들이 사람을 권면하고 일깨우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며, 이 말들을 맞는 것, 옳은 것으로 여긴다.

사람이 증오를 내려놓을 수 있는 주된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한 측면으로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의 논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작은 일을 따지고 들면서 늘 다른 사람을 증오하고 관용을 보이지 않다가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고 사회 여론에 질책을 받으며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될까 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하게 분을 삼키는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한 측면으로는 본능적으로 그러한 압박과 비합리적인 상처, 그리고 불공평한 대우를 견디지 못한다. 즉, 사람은 인성에 그러한 것들을 견디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요구는 누구에게든 불공평하고 비인도적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이런 사상 관점은 당연히 이런 일에 대한 사람의 관점과 견해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것을 왜곡시킨다. 그리하여 사람이 그 일들을 올바로 대하지 못하고,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논조를 올바르고 긍정적인 사물로 보게 한다. 불공평한 대우를 받을 때, 사람은 여론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받은 모욕과 불공평한 대우를 마음속으로 참고 억누르며 복수할 기회를 노린다. 입으로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잖아요. 관두죠. 복수할 필요 없어요. 다 지난 일이에요.”라고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인성의 본능 면에서 보면, 그는 영원히 그 일로 인한 상처를 잊지 못한다. 즉, 그 일이 그의 육체와 마음에 준 상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사라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소위 ‘원한을 잊자. 그 일은 지나간 거야. 이미 다 지나갔다.’라는 태도는 외적인 형식에 불과한데, 그것은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사상 관점에 속박되고 영향받아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물론, 사람은 이런 사상 관점에 얽매여 있기에, 이 말대로 행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하는 마음과 도량을 갖지 않는다면,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책망 들으며 나아가 이 사회나 사람들 사이에서 멸시받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멸시받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사람들과 접하고 일을 처리할 때, “이 사람은 쪼잔해서 원한이 있으면 꼭 갚으려고 듭니다. 이 사람하고 사귈 때는 조심하세요!”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 사이에서 일을 처리하는 데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생기게 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온 사회가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사상 관점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또한 이런 사상을 떠받드는 사회 분위기가 있고, 온 사회가 이런 사상에 얽매이고 영향받고 통제되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그 말대로 하지 못한다면, 이 사회에서 자리 잡는 것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도 무척 힘들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사회 분위기에 굴복하고,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논조, 관점을 따르면서 억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 소위 철학가라는 자들이 제기한 도덕적 사상 관점에 대한 이런 말에는 특정한 속셈과 목적이 있지 않겠느냐? 그들이 원한 것이 인류가 더 자유로워지고 육적, 심적, 영적으로 더 해방되는 것이겠느냐?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겠느냐?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덕행의 말들은 결코 정상 인성의 필요에 도움이 되고, 사람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내게 하기 위해 제기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통치 계급이 국민들을 통제하고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통치 계급을 위해 힘을 쓰고, 통치 계급이 사회 질서와 사회 분위기를 제대로 관리하도록 하기 위해 제기한 것이다. 그들은 이런 것들로 모든 사람, 모든 가정을 제약하고, 모든 개체와 군체, 단체를 제약하며, 각 단체로 이뤄진 사회를 제약한다. 이런 사회에서 이런 도덕적 사상 관점이 주입되고 또 거기에 영향받고 물들어 사회 주류의 도덕적 사상 관점이 생겨나고 형성되었다. 이 사회도덕, 사회 분위기의 형성은 인류의 생존이나 사상의 진보, 정화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며, 인성의 개선에 더욱 유리한 것도 아니다. 반대로, 이 도덕적 사상 관점의 형성으로 인해 인류의 사상은 통제 가능한 범위에 얽매이게 되었다. 그럼 결국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겠느냐? 사람들이겠느냐, 아니면 통치 계층이겠느냐? (통치 계층입니다.) 그렇다. 결국 이득을 보는 것은 통치 계층이다. 도덕 경전을 사상과 덕행의 기초로 삼는 사람들은 통치하기도, 양민으로 만들거나 지배하기도 더 쉽다. 또 모든 일에서 도덕 경전의 여러 논조나 사회의 제도, 도덕, 분위기, 여론으로 제약하기가 더 쉽다. 이렇게 하면 같은 사회 제도, 도덕 환경,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상 관점, 처신의 마지노선이 기본적으로 통일된다. 그들의 사상 관점은 소위 철학가, 사상가, 교육가들이 가공하고 규범화하여 통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통일’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사람의 사상과 정상 인성을 비롯해 모든 피지배자가 도덕 경전의 이런 말에 동화되고 얽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사상은 물론이요, 사람의 입과 뇌까지 제약을 받으며,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전통문화의 도덕적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사상 관점들로 자신의 행위를 판단하거나 제약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과 이 사회를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이와 동시에 이 도덕 경전의 말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여론에 통제된다. 일단 네 행동이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너는 마음이 씁쓸하고 거북해질 것이다. 이어서 ‘만약 내가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말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속 좁은 사람처럼 따지고 들고 옹졸하게 굴면서 증오를 전혀 내려놓지 못한 채 늘 마음속에 품고 있다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동료나 친구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는 스스로를 도량이 큰 사람으로 위장한다. 사람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사회 여론에 통제되었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네 마음 깊은 곳에는 무형의 족쇄가 있다. 즉, 사회 전체의 여론과 질책이 네게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된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고,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른길을 걷고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그 사실을 밝히거나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거나 나아가 복음을 전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째서 모두에게 밝힐 용기를 내지 못하겠느냐? 이는 사회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 사회 환경이 너에게 어떤 영향과 제약을 가져다주었겠느냐? 너는 왜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할 용기를 내지 못하겠느냐? 왜 복음조차 전하지 못하겠느냐? 전제 독재 국가에서 신앙이 있는 사람은 박해를 받는다는 특수한 상황 외에도 너는 사회 여론에서 비롯된 갖가지 말들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혹자는 네가 종교를 믿고 나서 집안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하고, 혹자는 너를 요괴처럼 생각하면서 종교를 믿는 사람은 다 신선이 되려고 하며 세상과 등지고 산다고 한다. 또 혹자는 종교를 믿는 사람은 모두 밥을 먹지 않고, 몇 날 며칠을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밖에도, 일부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더더욱 듣기 거북하다. 네가 처음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인정하지 못한 것은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 아니겠느냐? 이런 것들이 사회 환경 속에서 네게 영향을 주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는 네 마음에 영향을 주고 네 체면을 떨어뜨렸을 것이다. 그래서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못한 것이다. 이 사회는 신앙이 있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우호적이지 않고 적대적이며,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차마 들어 주기 힘든 모욕과 비방의 말을 하기에 너는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예배에 참석할 때도 도둑처럼 슬그머니 움직이며,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어 비난을 들을까 봐 몹시 두려워하는 것이다. 너는 울분을 참으면서 그렇게 조용히 숱한 고통을 참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견뎠기에 큰 도움을 얻고 많은 일을 밝히 알게 되며,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된 것이다.

방금 우리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의 논조에 관해 무척 많이 교제하였다. 인성의 각도에서 보면, 이 논조는 사람에게 도량과 아량 면에서 최소한 덕행을 갖추라고 요구한다. 사실, 사람의 인권, 존엄, 인격, 그리고 인성이 받는 상처와 영향을 볼 때,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강도나 산적들의 말 같은 것으로 사람을 위로하고 제약하는 것은 양심과 이성을 지닌 이에게 크나큰 모욕이며, 비인도적이고 부도덕한 일이다. 정상 인성에는 희로애락이 갖추어져 있다. ‘희’, ‘애’, ‘락’은 차치하고, ‘로’는 정상 인성에 지니고 있는 정서이다. 분노는 어떤 상황에서 생기고, 어떤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드러나느냐? 정상 인성의 분노가 표출될 때, 그러니까 사람의 인격과 존엄, 이익, 그리고 정신, 마음이 상처 입고 유린당하고 모욕당할 때,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고 본능적으로 화를 내며, 분노하고, 나아가 증오한다. 이것이 바로 분노가 생기는 원인이자 그 구체적인 표출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 이유 없이 화를 내며, 사소한 일에도 분노한다. 상대가 말을 하다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상처를 주면 그는 눈에 핏발을 세우며 화를 낸다. 이는 화가 너무 많은 것 아니겠느냐? 이는 사람의 마음이나 인격, 존엄, 인권, 정신세계와는 관련이 없다. 그가 너무 쉽게 성질을 내는 것은 화가 너무 커서 그럴 수 있다. 그리하여 무슨 일에서든 분노의 정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정상 인성으로 드러내는 분노와 화, 신경질, 증오로, 이는 사람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즉, 인격, 존엄, 인권, 그리고 마음이 유린당하고 모욕받고 상처 입을 때, 사람은 분노한다. 이 분노는 한때의 화도, 한때의 정서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인격과 존엄, 마음이 상처를 입었을 때 정상적인 인성이 보이는 반응이다. 사람의 정상적인 반응인 만큼 그 반응은 정당하고 이성에 부합한다고, 죄를 짓는 것에 속하지 않으니 제약할 필요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을 그 정도로 상처 입히는 문제는 마땅히 공정하게 해결하고 처리해야 한다. 만약 상황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거나 공평하게 처리하지도 못하는데, 무리하게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피해자에게 부도덕하고 비인도적인 처사이다. 이는 사람이 마땅히 인식해야 하는 부분이다.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의 논조에 대해 우리는 총 몇 가지를 이야기했느냐? 정리해 보자. 첫 번째는 다른 덕행의 논조와 본질이 같다. 그것은 모두 인성의 각도에서 출발해 제기한 것이 아니라 통치 계층과 사회 분위기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도덕 경전이 통치 계층과 사회 분위기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해하고 도달해야 하는 범위와는 좀 거리가 있을 것이다. 정치와 사회 과학, 인류의 사상을 약간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인성의 각도에서 볼 때, 그러니까 너 자신의 측면에서 볼 때, 이런 일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예를 들어,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지난날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고문으로 고통받았다고 해 보자. 큰 붉은 용은 너를 몇 날 며칠 재우지 않았고, 죽을 만큼 괴롭혔다. 네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하지 않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갖은 능욕과 괴롭힘을 주었으며, 그 마귀들은 더럽고 모독적인 말로 너를 모욕하고 경멸하고 공격했다. 이러한 고통을 겪었다면, 너는 이 나라와 정부에 어떤 생각을 품게 되겠느냐? (증오를 품게 될 것입니다.) 증오가 생겨난다. 이 사회 제도를 증오하고 이 집권당을 증오하며 이 나라를 증오하게 된다. 예전에는 경찰을 보고 존경심이 생겼다면, 그들에게 박해받고 괴롭힘 당하고 유린당한 후에는 예전의 그 존경심이 깡그리 사라지고 마음속에 단 하나, 증오만이 가득하게 되었다. 인간성 없고 부도덕하며 짐승과 마귀, 사탄 같은 그들을 증오하게 된 것이다. 경찰에게 괴롭힘 당하고 유린당하고 모욕받은 후, 너는 온갖 고통을 겪었지만 그들의 민낯을 똑똑히 보게 되었고, 그들이 인두겁을 쓴 짐승이며 진리와 하나님을 증오하는 마귀임을 깨닫게 되어 그들에 대한 증오가 넘쳐나게 되었다. 이는 개인적인 증오나 원한이 아니다. 이는 그들의 사악한 본질을 간파했기에 생겨난 감정이지, 네가 상상하거나 추측하거나 판단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너를 모욕하고 짓밟고 박해하는 모든 장면, 모든 행동과 동작, 말이 네 마음 깊은 곳을 증오로 가득 차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정상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증오로 가득 찬 너에게 만약 누군가가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세요. 증오 속에서 살아가지 마십시오. 증오를 풀어 버리는 것이야말로 증오를 대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너는 그 말을 듣고 어떤 감정을 느끼겠느냐? (역겨울 것입니다.) 역겨움 외에 또 뭐가 있겠느냐? 말해 보아라. 그 증오를 풀어 버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풀어지지 않는다. 불구대천의 증오가 어떻게 풀어질 수 있겠느냐? 만약 누가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로 네게 증오를 내려놓으라고 권한다면, 너는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어떤 반응을 보이겠느냐? 네 첫 번째 반응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니, 그건 사람을 기만하는 헛소리입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군요! 그 전통문화의 사상 관점을 퍼뜨린 사람들은 매일같이 크리스천과 좋은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그들이 그 말에 제약받고 영향을 받습니까? 그들은 우리를 말살하고 뿌리 뽑아 버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가면을 쓴 마귀요, 사탄이라고요. 사람을 산 채로 짓밟아 죽이고도 동정의 말 몇 마디로 미혹하죠. 이는 너무도 사악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반응, 이런 심정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 마음은 분명 이러할 것이다. 용서하라고 권유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증오할 것이며, 심지어는 그를 욕하고 싶어질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사람을 증오하는 것 아닙니까? 흉악한 것 아니냐고요.”라고 말하는데, 이는 남의 일이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너는 다음과 같이 반박할 것이다. “저는 사람입니다. 저한테도 존엄과 인격이 있어요. 그런데 그들은 저를 사람으로 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마치 동물이나 짐승을 대하듯이 취급했죠. 제 인격과 존엄은 크나큰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들의 그런 행동은 흉악하지 않습니까? 그들의 흉악함은 묵과하면서 우리가 그들에게 반항하고 그들을 증오하는 것은 정죄하니, 당신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입니까? 당신은 사악한 자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우리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고문하며 괴롭혔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더러 사람의 덕행을 지키고 덕으로 원수를 갚으라니, 이는 헛소리 아닙니까? 당신이 정상 인성을 지닌 사람입니까? 당신은 위선자요, 외식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극도로 흉악할 뿐만 아니라 염치도 모르고 사악한 자입니다!” 그러니 누가 “그만하세요. 다 지나간 일이니 따질 필요 없습니다. 계속 그렇게 따져 봤자 마지막에 상처 입는 것은 당신 자신입니다. 사람은 증오를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용서할 수 있을 때는 용서하라는 말을 실행하세요.”라고 말한다면 너는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중국의 전통문화 좋아하시네. 그건 다 통치 계급이 사람을 미혹하고 통제하는 수단일 뿐이야. 막상 그들은 그 사상 관점에 제약받아 본 적이 없어. 매일같이 사람을 미혹하고 해치지. 나는 엄연한 한 명의 사람인데 그들에게 동물이나 짐승처럼 함부로 우롱당하고 학대받았어. 그들 앞에서 수없이 모욕받고 유린당하며, 존엄이나 인격도 없이 괴롭힘 당했다고. 사람답지도 않게 말이야. 그런데 무슨 도덕을 논하는 거야? 무슨 큰소리를 치는 거냐고! 설마 내가 한 번 모욕당한 걸로는 부족하니 한 번 더 당하라는 거야? 나한테 이 증오를 내려놓으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정상 인성의 표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정상 인성의 발현이다. 혹자는 “그건 정상 인성의 발현 같지 않습니다. 증오를 선동하는 거죠.”라고 말하는데, 그럼 그의 이런 태도와 증오는 누가 만든 것인지 알고 있느냐? 큰 붉은 용에게 그렇게 잔혹하게 박해당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이런 태도를 보였겠느냐? 그가 박해당한 후 마음속 말을 좀 했다고 해서 어찌 증오를 선동하는 게 되겠느냐? 사탄 정권은 그렇게 사람을 박해했는데, 마음속 말을 좀 하는 것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거냐? 사탄은 사람을 박해하는 건 물론이고, 그 입까지 막아 증오를 품거나 반항하지 못하게 하고자 한다. 이는 어느 나라의 이치더냐? 설마 정상 인성으로 압박과 착취에 반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냐? 참고 견디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냐? 사탄은 수천 년간 인류를 패괴시키고 해쳤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진리를 깨달았으니 각성하여 사탄에게 대항하고 사탄을 폭로하고 증오하고 저버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상 인성인데, 당연한 이치이다. 또 이는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춰져야 할 선행이자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바이다.

어떤 각도에서 보든,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의 말은 무척 비인도적이고 역겹다. 그것은 피지배자들이 어떤 불공평한 대우를 받든, 그들의 인격과 존엄, 인권이 어떻게 공격당하고 유린당하고 상처받든 반항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견디라고, 복수해서는 안 되고 증오하는 일을 생각해서도 안 되며 보복은 더더욱 떠올려서는 안 된다고,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고 한다. 이는 비인도적인 것 아니겠느냐? 이는 분명 비인도적인 행위이다. 피지배층인 서민들에게 이를 실행하고 이런 덕행을 지니라고 요구한다면, 통치 계층의 덕행은 그보다 더 높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는 더더욱 그 말을 실행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가 그렇게 했겠느냐?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가 이 말로 자신을 제약하고 판단했느냐? 그가 이 말로 자신의 백성들과 자신이 통치하는 국민들을 대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는 법이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백성들에게 이 사회와 국가, 통치 계층을 증오하지 말라고, 사회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육적, 심적, 영적으로 어떤 상처를 입을지라도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는 법을 배우라고 알려 줄 뿐이다. 반대로 만약 백성들, 그가 민초로 보는 자들이 그에게 ‘아니오’라고 말하거나 그의 지위, 통치, 권위에 대해 다른 주장과 목소리를 제기한다면 강력한 통제를 받을 것이며, 더 심하게는 매서운 징벌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국민들에게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고 제창하는 통치 계층이 마땅히 갖춰야 할 덕행이겠느냐? 국민들 가운데서, 그러니까 피지배층 가운데서 아주 작은 움직임이나 수상한 거동이 보이기만 해도, 그것이 설령 사상적으로 그들에게 아주 약간 반대하는 뜻을 보인 것뿐일지라도, 시작 단계에서 바로 말살당한다. 그들은 사람의 사상과 마음을 통제하며, 사람들에게 에누리 없이 그들에게 복종하라고 강요한다. “임금이 신하에게 죽으라고 하면 신하는 죽어야만 한다.”,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온 천하에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라는 말처럼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통치자는 어떻게 하든 옳으니, 백성들은 마땅히 그에게 미혹당하고 통제되고 모욕당하고 우롱당하고 유린당하고 마지막에는 잡아먹혀야 한다는 뜻이 된다. 또 통치 계급이 어떻게 하든 전부 옳으니, 사람은 살아 있는 한 반드시 양민이 되어야지, 왕에게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며, 왕이 아무리 못되고 왕의 통치가 아무리 별로여도 백성들은 ‘아니오’라는 말을 하거나 반항의 뜻을 품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온 천하에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는’ 이상, 왕이 통치하는 백성들은 모두 그의 신민(臣民)이다. 그렇다면 왕이 백성들을 위해 먼저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하여 귀감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백성들은 우매하고 무지하며 식견이 없는 데다가 법도 잘 몰라 수시로 법을 어기고 죄를 짓는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럼 왕이 먼저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실행해야 하지 않겠느냐? 백성들을 자식처럼 여겨 용서하는 것 또한 왕이 해야 할 일 아니겠느냐? 왕 역시 이런 도량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 요구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와 신앙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 왕이 스스로에게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고 요구했느냐? 그의 군대와 경찰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잔혹하게 박해하고 고문으로 괴롭힐 때, 그가 자신의 정부에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고 요구했느냐? 그는 자신의 정부와 경찰에게 단 한 번도 그렇게 요구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정부와 경찰에게 종교와 신앙을 반드시 가혹하게 진압할 것을 종용하고 강요했다. 심지어는 “죽여도 상관없다!”, “소리 소문 없이 해치워 버려라!”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여기에서, 이 사악한 세상의 왕은 곧 마귀이자 마왕, 사탄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관리가 불을 지르는 것은 허락해도 백성이 등불을 켜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이 전통 도덕의 논조로 국민들을 제약하고 제한하는데, 국민들이 일어나 그에게 반항할까 봐 무척 두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통치 계급이 각종 덕행의 논조로 사람을 미혹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 국민의 수족을 제약하고 결박함으로써 국민들이 그의 통치에 순종하고, 반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이 덕행의 이론들로 국민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국민을 기만하며, 국민의 눈을 가려 국민이 그에게 머리를 숙이며 양민이 되도록 한다. 그가 아무리 제멋대로 굴고 백성들을 유린할지라도, 아무리 백성들을 압박하고 착취할지라도, 백성들은 꾹 참고 견뎌야만 하며, 조금도 반항을 할 수 없다. 죽을 지경에 몰려도 선택지는 도망가는 것뿐, 반항은 불가능하다. 반항하겠다는 생각조차 감히 품을 수 없으며, 심지어는 호미나 낫에도 눈길 한 번 주지 못하고 한쪽에 치워 두어야 한다. 주머니칼이나 손톱깎이조차 몸에 지닐 수 없다. 그렇게 자신이 양민이며, 영원히 왕의 통치에 순종하고 충성을 바칠 것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어느 정도까지 충성을 바쳐야겠느냐? 아무도 감히 “백성으로서 전통문화의 사상 관점으로 우리의 왕을 감독하고 제약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하며, 왕이 악을 행하는 것을 봐도 의견을 내지 못하는 정도이다. 그랬다간 죽음의 화를 자초할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통치자는 자신을 백성들의 왕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주재자, 지배자로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 중국 역사에서 황제들은 자신을 ‘천자’라고 불렀다. ‘천자’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늘의 아들을 줄여서 ‘천자’라고 한다. 그는 왜 자신을 ‘지자(地子)’라고 하지 않았겠느냐? 땅에서 태어났으니 ‘지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분명 땅에서 태어났으면서 왜 천자라고 한단 말이냐? 천자라고 칭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중생, 민초들을 내려다보려는 것 아니겠느냐? 그의 통치 방식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 권력과 지위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권력을 손에 넣어 황제가 되었으니 아주 자연스럽게 국민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권세를 부리는 것이다. 반면, 국민들은 조금만 태만하게 굴어도 머리가 떨어질 위험에 처한다. 천자라는 호칭은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을 지자라고 한다면, 지위가 낮아 보여 그가 말하는 왕의 위엄이 없을 것이며, 피지배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높여 천자라고 하면서 하늘을 대표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하늘을 대표할 수 있겠느냐? 그에게 그런 본질이 있겠느냐? 그런 본질이 없는데 대표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사칭이다. 그 통치자들은 하늘과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한편, 그들의 통치에 유리하게 하고자 스스로를 천자, 또는 하늘이 운명적으로 정한 사람이라고 사칭한다. 이는 염치를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사실로 볼 때, 그 덕행 측면의 갖가지 논조를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게 하는 목적은 사람의 정상적인 생각을 제약하고 사람의 손발을 결박하며 사람의 행위를 제한하고, 나아가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 있는 각종 생각, 관점, 태도를 제한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봤을 때, 이는 좋은 사회 분위기와 사회도덕을 형성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런 성과를 내는 것 또한 통치 계급의 장기적인 통치에 일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통치하든, 최종적인 피해자는 결국 인류이다. 인류는 그 전통문화의 갖가지 사상 관점에 얽매이고 영향받아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얻을 기회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구해 인생의 바른길을 걸을 기회마저 잃었다. 게다가 국민들은 통치자의 통제 아래에서 어쩔 수 없이 사탄에게서 비롯된 수많은 각종 독소와 사설, 궤변 등 부정적인 것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인류의 수천 년 역사에서 사탄은 지식과 각종 사상 이론을 전파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인류를 가르치고 물들이고 미혹해 왔다. 사람은 한 세대, 또 한 세대 그 사상 관점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또한 깊이 얽매이게 되었다. 물론, 사탄에게서 비롯된 사상 관점의 영향 속에서 사람의 패괴 성품은 갈수록 악화하고 심해졌다. 다시 말해, 사람의 패괴 성품은 그것을 기초로 심해지고 ‘업그레이드’되어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렸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대적하게 되었으며, 죄 속에 깊이 빠져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의 논조의 형성, 사람이 제기한 이 요구의 배후에 숨겨진 목적, 그리고 이 덕행의 논조가 생겨난 후 그것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피해 등 다양한 측면에 대해 교제하였다. 추후 다시 천천히 묵상하도록 하여라.

전통문화 중 덕행과 관련된 말은 중국인에게 낯설지 않다. 그것들이 사람에게 준 영향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너는 이런 사회 환경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 전통문화에 속하는 도덕 측면의 사상 교육을 받았고, 이러한 것들이 매우 익숙하다. 하지만 너는 그것들의 부정적인 역할이 몹시 크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그것들이 네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며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데 얼마나 큰 방해가 되는지, 또는 네가 앞으로 걸어갈 길에 얼마나 큰 영향과 방해를 가져다주는지 등의 문제를 의식할 수 있겠느냐? 오늘 교제한 주제에 대해 많이 묵상하고 분별하며, 전통문화가 인류를 교육하는 데 과연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것들은 과연 어떤 것들인지, 사람은 그것들을 어떻게 올바로 대할 수 있는지 간파하도록 해야 한다. 앞에서 교제한 말들은 너희가 전통문화에 속하는 것들을 인식하는 데 도움과 유익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인식은 전통문화를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류에 대한 사탄의 패괴,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키는 갖가지 방식과 방법, 심지어 구체적으로는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하는 각종 관점, 세상과 인류를 대하는 사탄의 각종 방식, 방법, 관점, 각도, 입장 등까지 아우른다. 전통문화에 속하는 이런 것들을 간파한 후,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전통문화의 갖가지 논조와 관점을 회피하고 거부하는 것만이 아니다. 자신이 지키고 신봉하는 덕행의 논조가 너에게 어떤 위해와 속박, 결박을 가져다주는지, 처신의 사상 관점, 네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 어떤 영향과 방해, 교란 작용을 하는지 등을 더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해부해야 한다. 또한, 그것이 너로 하여금 계속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깨닫거나 실행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절대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에 관해서도 인식하고 해부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람이 반성하고 인식해야 할 내용이다. 그저 회피하고 거부하는 것만으로 끝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분별하고 간파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전통문화 중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닌 것, 사람을 미혹하는 것들을 마음속에서 철저히 버릴 수 있다. 설령 어떤 덕행의 논조가 네게 깊이 뿌리내리지 않았고, 그저 네 사상 관점 안에서 가끔 드러날 뿐이라고 해도, 그것 역시 한 번쯤은 너를 교란할 수 있다. 그러니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면 어떤 논조나 관점을 꽤 긍정적인 것, 혹은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이는 무척 골치 아픈 일이다. 너는 어떤 덕행의 논조들을 마음속으로 꽤 좋아하여 동조할 뿐만 아니라 공개적인 자리에 갖고 가도 모두가 듣고 흥미를 보일 것이라고, 긍정적인 것으로 여겨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네가 가장 내려놓기 어려운 논조일 것이다. 네가 그것을 진리라고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은 네 마음속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인정되며, 너도 모르는 새에 네 마음속에 뿌리를 내려 네 생명이 된다. 그리하여 네가 하나님을 믿은 후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를 받아들일 때,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튀어나와 너를 교란하고,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그것들은 다 사람의 진리 추구를 방해하니,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면 진리와 혼동하거나 진리와 같은 선상에 놓기 쉽다. 이는 모두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너는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마라.”, “기꺼이 남을 도우라.”,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 등의 논조를 진리로 여기거나 자신의 덕행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거나 처신하고 추구하는 목표로 삼은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전통문화에 영향받지 않고 패괴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또 어쩌면 너는 비교적 사소한 것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 너는 자신이 재물을 주워도 갖지 않는 사람인지, 기꺼이 남을 돕는 사람인지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이해하고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너는 이런 사회 환경 속에서, 전통문화의 사상 교육에 물들어 가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사람이 떠받드는 그 논조들을 신봉하게 될 것이며, 적어도 그중 몇 가지를 덕행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것이다. 이는 네가 성찰해야 할 부분이다. 어쩌면 너는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마라’, ‘기꺼이 남을 도우라’를 덕행 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와 같이 네가 마음 깊이 무척 고상하다고 여기는 논조가 네 일생에 영향을 미치는 신조가 되었고, 혹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최고의 법칙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네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의식적으로 전통문화를 떠받들고 좇지는 않았을지라도 네 처신의 신조와 방식, 방법, 네 인생의 목표, 네가 추구하는 인생 목표의 원칙, 마지노선, 신조는 그 전통문화에서도, 인류가 신봉하는 인의예지신, 또는 인류가 떠받드는 덕행의 신조 중 어떤 한 가지에서도 전혀 벗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즉, 너는 그 범위를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패괴된 사람,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세상의 음식을 먹는 이상, 네가 신봉하는 처신과 삶의 원칙은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덕행 측면의 원칙, 신조일 수밖에 없다. 내가 한 이 말들과 내가 폭로한 문제들을 너희는 이해해야 한다. 어쩌면 네게는 그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서 내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사람은 정도만 다를 뿐 누구나 이런 문제를 갖고 있다. 네가 인식했든 인식하지 못했든, 이는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마땅히 성찰하고 이해해야 하는 일이다.

방금 이야기한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은 인류의 덕행에 대한 한 가지 측면의 요구였다. 우리는 이 말에 존재하는 문제점과 이 말이 인류에게 미친 영향을 해부하였다. 그것은 인류에게 옳지 않은 사상 관점을 가져다주고, 사람의 추구와 생존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는 사람이 마땅히 인식해야 할 내용이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인성 중 도량이나 아량 측면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해야겠느냐?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르고 긍정적이고 옳은 것이겠느냐? 이것 역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다. 추측할 필요도, 어떤 자료를 찾아볼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사람들 사이에서 한 말씀과 행한 사역을 통해, 또 하나님이 각 사람을 대하는 서로 다른 방식에서 드러낸 성품을 통해 전통문화의 논조와 관점을 대하는 하나님의 생각이 과연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과 관점을 통해 볼 때,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 생겼을 것이다. 사람이 신봉하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다.”라는 말은 사람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면 그 일은 끝난 것이니 더 이상 다른 것을 파고들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의 관점 아니겠느냐? 사람들 사이에는 보편적으로 이런 관점이 존재하지 않느냐? 즉, 한 사람이 살면서 육체의 생명이 끝나면 그의 일생은 끝나고 마무리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평생 아무리 못된 짓을 많이 저지르고 어떤 은원을 맺었을지라도 그것으로 끝이 선포된 것이며, 그의 일생은 끝났다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이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의 갖가지 흔적으로 본다면, 이것이 하나님 행사의 원칙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행사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무엇에 근거하여 그런 일을 하느냐? 혹자는 하나님이 그의 행정 법령에 근거한다고 하는데, 그 말도 옳지만 완전하지는 않다. 하나님의 행정 법령에 근거하는 한편,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근거하여 각 부류 사람을 대한다고 해야 완전하다. 하나님이 보기에, 한 사람이 죽임을 당해 머리가 땅에 떨어지면 그의 일생이 끝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끝내는 것이냐?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이러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죽어서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그걸로 끝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시작과 끝이 있으며, 처음과 마무리가 있다. 한 영혼이 사람으로 환생할 때부터 육적 생명이 끝나 영혼이 영계로 돌아갈 때까지, 그가 어디로 갈지, 영계든 물질세계든, 하나님의 처분을 받아들여야 하며, 마지막에 상을 받을지 벌을 받을지 또한 하나님의 행정 법령에 따라야 하는데, 모든 것에 천상의 법칙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는 각각의 사람에게 정해 놓은 평생의 운명에 근거한다. 운명이 끝난 후에 그가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상선벌악의 법칙과 천상의 법칙에 의한 처분이다. 만약 그가 세상에서 많은 악을 행했다면 많은 징벌을 받을 것이며, 이렇다 할 악을 행하지 않고 선행을 했다면 상을 받을 것이다. 그가 환생을 계속할 수 있을지, 환생하여 사람이 될지, 아니면 동물이 될지는 이번 생에서 보여 준 모습에 달려 있다. 내가 왜 이런 것들을 교제하겠느냐?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다.” 뒤에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구절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두리뭉실한 말이나 행동 방식이 없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대할 때, 시종일관 하나님의 행사를 펼치는 한편, 이를 통해 사람에게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며, 그 운명을 배치하고 안배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 후, 사람의 행위와 태도에 따라 상선벌악을 실행하는데, 벌받아 마땅한 자에게는 벌을 준다. 하나님의 규정에 따라 그가 얼마나 많은 악을 행했는지를 보고 몇 년을 벌할지, 몇 세대나 벌할지 결정한다. 영계에서는 규정에 따라 조금의 오차도 없이 그렇게 집행하며, 누구도 이를 바꿀 수 없다. 누군가 바꾼다면 하나님이 정해 놓은 천상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라 징벌받게 된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 하나님에게 있어 그 천상의 법칙은 거슬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어떤 사람이든, 어떤 악을 행했든, 천상의 법칙과 천상의 규칙 중 어떤 것을 거슬렀든, 마지막에 절충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인간 세상의 법률처럼 집행 유예나 정상 참작 같은 것은 없으며, 혹은 법관이 자기 뜻대로 호의를 베풀어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고, 정죄하지 않아 죄인이 상응하는 징벌을 받지 않는 일은 없다. 영계에는 그런 논리가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제정한 법칙, 그러니까 천상의 법칙을 엄격하게 따르며, 그것으로 모든 피조물의 전생과 금생을 대한다. 사람의 과오나 선행이 크든 작든, 얼마나 오랫동안 과오나 선행을 지속했든, 과오나 선행 이후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든, 창조주가 지음 받은 인류를 대하는 방식을 바꿀 수는 없다. 즉, 하나님이 제정한 천상의 법칙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행사의 원칙이자 방식이다. 인류가 존재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하나님이 제정한 행정 법령, 즉 천상의 법칙은 변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류의 과오와 선행, 그리고 각종 악행에 대해 결국 다루는 방식이 있다. 어떤 피조물이든 자신의 행동과 태도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에 대한 패역과 자신이 행한 악행, 자신이 남긴 과오로 인해 징벌받는 것이지, 하나님이 인류를 증오하기 때문에 징벌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인류 중의 일원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창조주이다. 어떤 피조물이 징벌받는 것은 창조주가 사람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이 제정한 천상의 법칙과 천상의 규칙, 율법, 계명을 거슬러서이다. 이 사실은 누구도 바꿔 놓지 못한다. 이러한 면에서 봤을 때, 하나님에게는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내가 한 이 말들이 너희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떻게 말하든, 최종 목적은 하나님에게는 증오가 없으며, 오직 천상의 법칙과 행정 법령, 법칙, 하나님의 성품,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만 있다는 사실을 너희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말로 하나님을 평가하지 마라. 그 말을 하나님에게 적용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겠느냐? 때때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긍휼과 관용을 보이면 어떤 이는 “보세요. 역시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고 사람을 사랑하신다니까요.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말이 있잖아요. 하나님이야말로 사람에게 정말 큰 관용을 보여 주시죠. 하나님은 마음이 가장 넓은 분이세요. 사람의 마음보다 넓어요. 하나님보다 도량이 큰 사람은 없을 걸요!”라고 하는데, 이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만약 네가 이렇게 하나님을 찬미한다면, 그 말이 적절하겠느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틀렸으며, 하나님에게 적용할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의 도량과 관용을 드러내기 위해서, 또 자신이 관용과 도량을 갖춘, 덕행이 고상한 사람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용서할 수 있을 때는 용서하려고 한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본질 안에는 긍휼과 관용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이지만, 그 본질이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할 것’을 실행할 때는 사람이 보여 주는 도량, 관용과 같지는 않다. 인류가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할 것’을 실행하는 목적은 남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기 위해서인데, 도량과 풍모를 갖춘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이 밖에, 사회적인 압박으로 인한 것인데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도량과 아량을 보이는 목적은 한 가지가 아니다. 그것은 양심의 준칙을 신봉하고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우러름과 숭배를 얻기 위해서이고, 또는 어떤 속셈이나 간계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하지 않다. 그럼 하나님이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는 일’을 하겠느냐?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도 사람을 용서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사람을 용서할 때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는 일’을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 두 가지는 차이가 있다. 사람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을 알아야겠느냐? 사람이 실행하는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는 일’에는 원칙이 없으며, 그 목적은 사회의 압박과 여론에 굴복하여 스스로를 좋은 사람으로 위장하는 데 있다. 이 단순하지 않은 목적에서 출발하여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자찬하는 것을 전제로, 억지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혹은 어쩔 수 없이, 복수를 하고는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아무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그 신조를 신봉하는 것이지, 내면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즉, 이것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진정으로 좋은 사람은 아니며, 진정으로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관용과 긍휼을 베푸는 것과 사람이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할 것’을 행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몇 가지 차이점이 있는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의 행사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니느웨 사람들은 진실로 회개한 후 하나님의 관용을 얻었습니다. 이 일에서 하나님의 행사에는 원칙이 있으며, 하나님의 본질에는 사람에 대한 긍휼과 관용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 말했다. 여기에서 차이점은 크게 두 가지다. 방금 너희가 말한 것이 무척 중요하다. 하나님의 행사에는 원칙이 있다는 것 말이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든 명확한 선과 범위가 있다. 그 선과 범위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사실상 일정한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의 과오를 용서해 준 일이 그 일례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손으로 행하는 악을 내려놓고 진실로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사면해 주었고, 더 이상 그 성을 파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행사하는 원칙이다. 여기에서 이 원칙을 무엇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느냐? 바로 마지노선이다. 인류의 이해나 논법에 따르면, 이는 하나님의 마지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니느웨 사람들이 손으로 행하는 악을 버리고 예전처럼 그렇게 죄 속에서 살지 않는다면, 예전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고 하나님께 진실로 회개하기만 한다면, 그 진실한 회개가 바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마지노선이 된다. 그들이 진실로 회개했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해 준 것이다. 반대로, 만약 그들이 진실로 회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생각이 바뀌었겠느냐? 그 성을 파멸하겠다는 하나님의 결정과 계획이 바뀌었겠느냐?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 첫 번째, 그들이 손으로 행하는 악을 계속한다면 멸망을 맞이하여 온 성이 파멸될 것이다. 두 번째, 그들이 손으로 행하는 악을 내려놓은 후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진실로 회개하며 마음 깊이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해 줄 것인데, 그들이 과거에 어떤 악행을 저질렀든,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하든,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를 봐서 그 성을 파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고, 그들은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 선택지,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진실로 회개하는 것을 택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느냐? 그들은 하나님이 마음을 돌리게 하였다. 즉, 하나님이 생각을 바꾸고 계획을 달리하여 그들을 용서하고, 더 이상 그 성을 파멸시키지 않게 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행사의 원칙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행사의 원칙이다. 이 밖에, 중요한 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하나님의 본질 안에는 사랑과 긍휼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것과 진노도 있다. 니느웨 성이 파멸될 뻔한 일에서는 하나님의 두 가지 본질이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악행을 보았을 때, 진노라는 본질이 나타나고 드러났다. 하나님의 분노에는 원칙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원칙이 있다는 말을 간단하게 하면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함부로 화를 내거나 분노를 발산하는 것이 아니며, 한 가지 정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어떤 배경 속에서 나타나고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성품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은 거스를 수 없다. 사람의 말로 하자면,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저지른 악행을 보고 성나고 화났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노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일면이 있기에, 사람의 악행과 부정적인 사물의 발생, 출현을 보고 자연스럽게 그의 진노를 드러낸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진노를 드러내면 그 성을 바로 파멸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행사에는 원칙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화내는 순간 “나에게는 권병이 있으니 너를 멸하겠다! 네가 어떤 상황이든,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지는 않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일들을 하겠느냐? 하나님이 행하는 일련의 일들이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석되겠느냐? 하나님이 행한 일련의 일들은 모두 그의 성품을 근거로 한다. 그것은 단순히 그의 진노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혈기가 아니며, 사람의 혈기 같지 않아 충동적으로 “나에게는 권력이 있으니 너를 죽여 버릴 것이다. 너를 손봐 주겠다.”라든가 큰 붉은 용처럼 “나는 너를 잡았으니 철저히 괴롭히겠다. 죽어도 상관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탄, 마귀만이 이렇게 일을 한다. 혈기는 사탄, 마귀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 안에는 혈기가 없다. 혈기가 없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니느웨 성 사람들의 심각하게 패괴된 모습을 보고 화나고 노했다. 하지만 노한 후, 하나님은 그 진노의 본질 때문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들을 멸하지는 않았다. 요나를 보내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장차 행할 일을 알려 주었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는지, 왜 그러려는지 똑똑히 알게 하여 한 가닥의 희망을 주었다. 이 사실은 인류에게, 하나님은 부정적인 사물과 사악한 사물이 생겨난 것 때문에 진노를 드러내지만 그것은 사람의 혈기나 정서와 같지 않음을 알려 준다. 혹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의 혈기나 정서와 다르다면, 통제 가능한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통제 가능하다’는 말은 합리적이지도 적절하지도 않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진노에는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를 발한 후 일련의 일들을 행했다. 그리고 그 일련의 일들은 하나님 행사에 진리와 원칙이 있다는 것을 더 여실히 보여 주며, 동시에 하나님에게는 진노 외에도 긍휼과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사람에게 향하면 사람은 어떤 유익을 얻게 되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가르친 방식대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다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삶의 기회와 살아남을 희망, 가능성을 얻게 될 것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데, 그 전제는 네가 진실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며,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일련의 말에는 원칙이 있지 않으냐? 보아라.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 모든 사역을 사람의 언어로 말하면 ‘근거가 있고,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로 하면 ‘진리와 원칙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의 행동과 다르며, 나아가 사람의 혈기가 섞여 있지도 않다. 혹자는 “그럼 하나님의 성품은 냉정하고 충동적이지 않은 거군요!”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성품을 냉정하고 침착하고 충동적이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이는 사람의 판단법이자 논법이다. 하나님의 행사에는 진리와 원칙이 있고,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든 근거가 있다. 이 근거가 바로 진리이자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에 대해 일련의 일들을 했는데, 먼저 요나를 보내 그들에게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라고 알려 주었다. 40일이라는 시간이 길지 않으냐? 딱 한 달 열흘이다. 이 시간은 사람이 한동안 생각하고 반성하여 진실한 회개를 하기에 충분할 만큼 길다. 만약 40시간, 혹은 4일이었으면 회개할 시간이 부족했겠지만, 하나님은 40일이라는 긴 시간을 주었고, 그 시간은 충분했다. 성 하나가 얼마나 크겠느냐? 성 이쪽에서 저쪽까지 한 바퀴 돌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며칠 안 가 성 전체에 소식이 전해졌고, 가가호호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굵은 베옷이든 잿더미든 혹은 어떤 준비를 하든 40일이면 충분했다. 이 일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어 하나님이 장차 니느웨를 파멸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했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이 준비하고 반성하고 성찰하게 하였다. 사람의 언어로 말하자면, 최대한의 성의를 보인 것이다. 40일이라는 시간은 충분했고, 위로는 왕에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까지 모두 반성하고 준비할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관용을 보인다는 것과 마음속으로 사람을 걱정한다는 것, 사람에게 진실한 사랑을 보이며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거짓 없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 하나님의 마음은 신실해서 거짓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고자 40일의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그 40일의 시간에는 하나님의 관용과 사랑이 드러난다. 그 40일의 시간은 하나님이 사람을 진실로 걱정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거짓 없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그 사실을 사람이 완전히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다. 혹자는 “전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증오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씀과 모순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모순되느냐?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사람을 걱정하며, 하나님에게는 사랑의 본질이 있다. 이것과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은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점이 다르냐? 하나님은 대체 사람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증오하느냐? (사랑하십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사람을 저주하고 형벌하고 심판하는 것이겠느냐? 이렇게 큰 일을 너희는 한 명도 정확히 말하지 못하니, 분명 이 일에 오해가 있을 것이다. 이는 너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 아니겠느냐? 만약 네가 이 일을 정확히 말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과의 사이에 벽이 생기기 쉽지 않겠느냐? 말해 보아라.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고, 또한 증오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을 증오하는 데 영향을 미치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증오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 영향을 미치겠느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사랑 아니겠느냐? 너희가 이것을 모른다면 정말 너무도 가련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조차 모르니,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무엇에서 비롯되겠느냐? (천성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 모성은 천성에서 비롯된다. 그럼 그 사랑이 자식의 선악과 관련이 있겠느냐? (관련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자식이 툭하면 말썽을 일으켜서 가끔 어머니를 너무 화나게 한다고 해 보자. 어머니는 그래도 그를 사랑해야 할 때는 사랑한다. 이는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어머니라는 역할의 천성에서 비롯되어 자식한테 그렇게 대하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모성이 있고, 천성이 있다. 그녀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자식의 선악과는 관련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어머니에게 자식을 사랑하는 천성이 있다면 어째서 자식을 때리기도 하는 것입니까? 어째서 미워하기도 하는 것입니까? 어째서 때때로 화를 내고 혼내는 것입니까? 어째서 너무 화가 나면 모자 관계를 끊으려고까지 하는 것입니까? 어머니는 사랑이 있고,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그렇게 매정할 수 있는 겁니까?”라고 하는데 이것이 모순되느냐? 모순되지 않는다.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자식의 태도와 자식의 행실에 달려 있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식을 어떻게 대하든, 설령 자식을 때리고 미워할지라도 그것이 모성의 존재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그럼 마찬가지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에서 비롯되겠느냐? (하나님께는 사랑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렇다. 마침내 깨달았구나. 그것이 바로 핵심이다. 하나님에게는 사랑의 본질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원인은 하나님에게 사랑의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 안에는 긍휼과 자비, 관용이 있고, 인내도 있으며, 당연히 걱정도 있다. 또 때로는 우려와 슬픔 등의 감정도 있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로 결정된다. 이는 주관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다. 객관적인 관점으로 보면, 사람은 하나님이 지은 존재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낳으면 자연스럽게 그 아이를 걱정하며, 아이와 어머니 사이에 떼려야 뗄 수 없는 혈연관계가 생기는 것처럼,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사람이 말하는 그런 혈연관계는 없을지라도 사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지은 존재이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걱정하고 그리워하며, 사람이 잘되기를, 바른길을 걷기를 바란다.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되어 사악한 길을 걷고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이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지 않으냐? 하나님이 이런 반응, 이런 느낌과 태도를 보이는 것은 전부 하나님의 본질에서 비롯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지었다는 사실과도 분리할 수 없다. 이는 전부 객관적인 사실이다. 혹자는 “하나님의 본질에 사랑이 있다면, 하나님은 왜 사람을 증오하시기도 하는 겁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걱정하시지 않나요? 왜 사람을 증오하시는 거죠?”라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객관적인 사실이 더 있다. 바로 사람의 성품과 본질 등의 면이 하나님이나 진리와 서로 합하지 못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보이고 드러내는 것들은 하나님의 반감과 혐오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은 패괴 성품을 점점 더 심각하게 드러내고, 점점 더 심각한 죄를 지으며 몹시 강퍅해져서 죽어도 회개하지 않고,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며 하나님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증오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증오는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무엇 때문에 생겼겠느냐? 하나님의 성품이 공의롭고 거룩하기에 생긴 것이다. 하나님의 증오는 하나님의 본질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사악한 것을 싫어하고 부정적인 사물을 혐오하며 사악한 세력과 사악한 사물을 증오한다. 그렇기에 이 패괴된 인류를 증오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드러내는 사랑과 증오는 모두 무척 정상적이다. 그것은 전부 하나님의 본질로 인해 결정된 것으로,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럼 하나님은 대체 사람을 사랑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증오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어보는데, 너는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이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 혹은 사람이 진실로 회개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그 말은 기본적으로 맞지만 그리 정확하지는 않다. 어째서 정확하지 않겠느냐?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반드시 사람을 사랑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한 말과 사람에게 한 모든 사역은 다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원칙이 있다. 하나님이 반드시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또 반드시 사람을 증오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꼭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 반드시 사람을 증오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니 사람은 이해해야 한다. 방금 너희는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할지 증오할지는 사람의 태도에 달렸다고 말했는데, 이 말이 왜 정확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반드시 너를 사랑해야 할 필요가 없고, 또 절대적으로 너를 증오해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를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면, 혹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한다면, 하나님은 마지막에 각자가 행한 대로 보응할 것이다. 선을 행한 자는 상을 받을 것이고, 악을 행한 자는 징벌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적인 일을 공정하게 처리한다’는 것이다. 즉, 한 명의 피조물로서 너는 하나님에게 반드시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한다고 요구할 근거가 없다. 하나님과 진리를 갈망할 때, 진리를 추구할 때, 너는 하나님이 반드시 너를 사랑해야 한다고 여긴다. 만약 하나님이 너를 신경 쓰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너는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하나님을 거역할 때, 너는 하나님이 너를 증오하고 징벌할 것이라고 여긴다. 만약 하나님이 이때도 너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너는 또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예를 들어 부모와 자식 관계는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즉,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증은 자식의 태도에 따라 달라질 때가 있다. 하지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그렇게 판단할 수 없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어떤 혈연관계도 없다. 그저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에게 반드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혹은 반드시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다. 이는 무리한 요구로서 그런 관점은 옳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사람은 그렇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럼 이제 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사람의 인식이 과연 정확하겠느냐? 여태까지의 인식은 정확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든 증오하든 모두 원칙이 있다. 사람의 행위나 추구가 진리에 부합한다면 하나님은 좋아하고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패괴 본질이 있고 패괴 성품을 드러내며,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고 좋아하는 이상과 바람을 추구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증오하는 것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생각한 대로, 하나님이 인정하면 계속 상을 주고, 인정하지 않으면 계속 징계하거나 징벌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행사의 원칙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을 이야기한 것이니 반드시 이렇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방금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고, 우리는 하나님의 행사에 원칙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본질, 이 두 가지 내용을 교제하였다. 내가 방금 한 질문은 무엇이었느냐? (하나님께서는 방금 하나님이 사람에게 관용과 긍휼을 베푸는 것과 사람이 신봉하는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말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이러한 처세 철학에 근거하여 행사하지 않으신다고 교제해 주셨고요. 하나님은 사람의 과오를 대할 때 주로 두 가지에 근거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행사에 원칙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본질 안에 긍휼도, 진노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다. 하나님 행사의 원칙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 근거한 것으로, 인류가 신봉하는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처세 철학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행동할 때 사탄의 철학에 근거하고, 사탄 성품에 지배된다. 하나님의 행사는 모두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의 발현이다. 하나님의 본질 안에는 사랑과 긍휼이 있으며, 당연히 증오도 있다. 그럼 이제 하나님이 사람의 악행과 갖가지 패역, 배반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태도는 무엇에 근거하여 나온 것이더냐? 하나님의 본질로 인해 생겨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본질 안에는 긍휼과 사랑, 진노가 있다. 하나님의 본질은 공의이고, 하나님의 본질로 인해 하나님이 행사하는 원칙이 생겨난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행사 원칙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이겠느냐? 널리 긍휼을 베풀고 크게 노를 발한다는 것이다. 이는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사람의 논조와 전혀 관련이 없다. 사람의 이 논조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치 매우 고상한 하나의 신조처럼 신봉되지만, 하나님에게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 논조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본질과 행사, 그리고 하나님이 행사하는 원칙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또한, 사람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도 이 처세 철학을 신봉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임한 일을 어떻게 선택하고 처리해야 하는지에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의 본질을 갖추지 않았다. 물론 사람은 하나님처럼 무슨 일을 하든 분명한 원칙을 지니거나 높은 위치에 서서 모두에게 기회를 주고 용서해 주지도 못한다.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없다. 그럼 너를 방해하고 상처 입히는 일, 또는 네 존엄과 인격이 모욕당하고 나아가 네 마음이 상처 입는 일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만약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덕행의 논조를 신봉한다면, 적당히 얼버무리고 무골호인이 될 것이고, 이 세상에서 섞여 살아가기는 쉽지 않으니 적을 만들지 말고 남에게 원한을 사지도 말자고, 가능한 한 누구에게도 원망을 사지 말고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자고, 어디를 가든 중재인이 되어 중용의 길을 가자고, 스스로를 어떤 위험에도 빠뜨리지 말고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우자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처세 철학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처세 철학이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친 원칙이 아니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친 원칙은 무엇이냐? 진리 추구의 정의는 무엇이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다. 만약 증오심이 생기는 일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무엇에 근거하여 대해야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렇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그런 일들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하면서 울분을 참으며 대충 원만하게 해결하려고 하고 기회를 틈타 복수하려고 하는 그런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진리를 추구하려면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아야 하며 ‘저 사람은 나한테 왜 저렇게 대할까? 나한테 왜 이 일이 생긴 거지? 왜 이런 결과가 생긴 거야?’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바라보아야 한다.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일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자신에게 도움과 유익이 되는 일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려면 먼저 그 일을 하나님이 배치하고 주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해 아래 발생하는 모든 일, 네가 느끼고 보고 들을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인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대입하면서 그 일을 한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그 일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그가 하는 말, 그가 하는 일이 너에게 피해를 주었는지, 네 마음에 타격을 주었는지, 네 인격을 짓밟았는지는 차치하고, 그 사람이 악인인지 아니면 평범한 패괴된 사람인지를 보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분별해야 한다. 그다음 다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그 일을 분별하고 그 일을 대해야 한다. 이런 절차가 옳지 않겠느냐? (옳습니다.)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그 일과 관련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평범한 형제자매인지 악인, 적그리스도, 불신파인지, 아니면 악령이나 귀신 들린 사람인지, 그것도 아니면 큰 붉은 용이 보낸 스파이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또 그가 하는 일이 일반적인 패괴 표출인지, 아니면 고의로 교란하고 방해하는 악행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전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대입해 보고 성질을 정의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이다. 사람을 분별할 때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 하며, 일을 대할 때도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너는 ‘이 일은 내 마음에 큰 상처를 주고, 내게 그늘을 드리웠어. 그런데 이 일이 내 생명 진입에 어떤 도움이 될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핵심적인 부분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는 네가 묵상하여 이해해야 할 내용이다. 이러면 바른길을 걷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이 일은 내 마음에 상처를 줬어. 나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괴롭지만,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원망해서는 안 돼.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이 일이 내게 과연 도움이 될지 여부를 분별하고 판별하고 판단해야 하는 거야. 만약 하나님의 징계에서 비롯된 거라면 내 생명 진입이나 스스로를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해. 하지만 만약 사탄의 시험에서 비롯된 거라면 하나님께 기도해서 지혜로 대해야 해.’ 이렇게 구하고 묵상하는 것이 긍정적인 진입 아니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다음에는 어떤 일을 대하든, 사람들과 왕래하면서 어떤 문제가 생기든,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찾아서 해결해야 한다. 이 일련의 행동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이겠느냐? 그 목적은 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데 있다. 그렇게 하면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시선과 입장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높은 명성과 체면을 얻고 사람들에게 우러름 받기 위해서도, 조화로운 나라와 사회를 만들고 통치 계급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도 아니라, 하나님 말씀과 진리로 살면서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실행해야 하나님의 뜻에 완벽히 부합한다. 그러므로 너는 전통문화 중 덕행의 논조에 근거할 필요가 없고, ‘이런 일이 닥쳤으니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말을 실행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실행하지 못한다면 사회 여론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겠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런 도덕적 신조로 스스로를 제약하고 통제할 필요가 전혀 없다. 마땅히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이 네게 가르쳐 준 진리 추구 방식으로 사람과 일을 대해야 할 것이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생존 방식 아니겠느냐? 이는 완전히 새로운 인생관과 인생 목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과 일을 대하면 일부러 자기 자신에게 ‘나는 도량을 가져야 해.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해.’라고 자신에게 요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너는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도, 속마음과 어긋나게 살아갈 필요도, 네 인성을 그렇게 왜곡시킬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환경, 사람과 일, 사물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 가운데서 생각지도 못한 성과를 얻게 될 것인데, 증오심이 생기는 일을 대할 때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을 분별하고, 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관련된 일들을 대하고 분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경험하고 체험하면서 내적인 전쟁을 겪으면 그 가운데서 그런 일을 대하는 진리 원칙을 찾을 것이며, 그런 사람과 일, 사물이 임했을 때, 어떤 진리 원칙으로 대해야 할지 배우게 된다. 이것이 바른길을 걷는 것 아니겠느냐? 이렇게 하면 진리 추구의 길을 걸었기에 인성이 좋아질 것이다. 즉, 더는 그렇게 단순하게 인성의 양심과 이성으로 살아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일이 임했을 때, 양심과 이성에 기반한 사상 관점으로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사역을 실제로 체험했기에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닫고 창조주인 하나님에 대해 참된 인식을 어느 정도 얻게 될 것이다. 그 수확은 더없이 클 것인데, 진리와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즉, 양심과 이성을 기초로 하나님 말씀과 진리로 네게 임한 모든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법을 배우며, 조금씩 하나님 말씀에 기대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어떠하냐?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겠느냐?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요구한,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조금씩 하나님이 행하는 구원 사역의 기대 성과를 이룰 수 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면 어떤 고통도 없이 사는 게 아주 편해진다. 반면, 전통문화 교육을 받은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전부 속마음과 어긋나고 거짓되며, 인성의 표출이 다 몹시 왜곡되고 비정상적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나는 당신과 끝장을 볼 거야. 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는 10년 걸려도 늦지 않는 법이지.’라고 하니, 이것이 속마음과 어긋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왜곡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겉으로는 인의와 도덕을 한가득 늘어놓지만, 뒤에서는 간음이며 강도질 등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른다는 의미다. 겉으로 인의와 도덕을 한가득 늘어놓는 것은 가면일 뿐, 내면은 각종 악과 추악한 사상 관점으로 점철되어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들 만큼 비열하고 저질이라 떳떳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왜곡되었다는 의미다. ‘왜곡되었다’는 말을 현대적 단어로 바꾼다면 ‘변태’라고 할 수 있다. 모두 이렇게나 변태적이 되었지만 사람들 앞에 있을 때는 한껏 체면을 차린 채 우아하고 신사답고 고상한 척 위장하니 정말 몰염치하고 극도로 사악하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리켜 준 길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 앞에서든 다른 사람 앞에서든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올바른 실행의 원칙과 실행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설령 네 이익에 손해가 생길지라도, 혹은 네 뜻과 다를지라도, 심지어 네게 평생 영향을 주는 일이 생길지라도 그런 일들을 대할 때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진정한 형제자매를 대할 때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관용을 보이고 도와주고 붙들어 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럼 하나님의 원수, 적그리스도, 악인, 불신파, 교회에 섞여 들어온 스파이, 첩자를 대할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철저히 저버려야 한다. 분별과 폭로를 통해 증오를 느끼고 마지막에 저버리는 것이 그 과정이다. 하나님 집에는 행정 법령과 규정이 있다. 적그리스도, 악인, 불신파, 사탄 마귀, 악령에 속하는 부류가 힘쓰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하나님 집에서 제거해야 한다. 그럼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저버려야 합니다.) 그렇다. 마땅히, 영원히 저버려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저버린다는 것은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저버린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실생활에서 어떻게 저버려야 합니까?”라고 말하는데, 그들과 공존을 거부하면 되겠느냐? 그렇게 힘들게 공존을 거부할 필요도, 서로 죽도록 싸울 필요도, 뒤에서 욕하는 등의 일을 벌일 필요도 없다. 그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들과 선을 긋고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그와 왕래하지 마라. 특수한 상황, 어쩔 수 없을 때는 정상적으로 이야기하고 그 후 바로 거리를 두고 그들과 관련된 어떤 일에도 개입하지 마라. 즉, 마음속 깊이 그들을 저버리고, 그들을 형제자매나 하나님 집의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진리를 증오하며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고 파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그들을 저주해 달라고, 영원히 그들을 결박하고 제약해서 철저히 저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뜻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는 입장과 원칙이 있어야 한다. 입장과 원칙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그들의 본질을 똑똑히 간파하여 영원히 그들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며, 절대 그들을 형제자매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귀이자 사탄이다. 그들에게는 용서를 논할 수 없으니 그저 확실한 선을 긋고 철저히 저버리면 된다. 이런 행동은 100% 근거가 있는 것이고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는 건 너무 독한 행동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입장과 원칙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알려 준 대로 하면 된다. 하나님이 용서하라고 하는 사람은 용서하고, 증오하라고 하는 사람은 증오하면 되는 것이다. 율법시대에는 율법과 계명을 어긴 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선민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 하지만 오늘날 하나님나라시대에 하나님에게는 행정 법령이 있다. 마귀 사탄에 속하는 부류는 그저 제명하고 출교시킬 뿐이다. 하나님의 선민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반포한 행정 법령을 반드시 실행하고 지켜야지, 절대 어겨서는 안 되며, 사람의 관념에 속박되고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 종교인들의 판단과 정죄를 두려워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은 마땅한 이치이다. 언제 어느 때나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사람의 말이 아무리 듣기 좋아도 그것은 진리가 아님을 믿어야 한다. 사람은 반드시 이러한 신심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에게 이런 믿음과 이렇게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는 태도의 문제이다.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의 논조와 하나님 행사의 원칙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이야기한 것 같다. 사람이 해를 입는 이런 일에 관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처리 원칙을 너희는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이 임했을 때 혈기로 대하지 말라고, 나아가 어떤 일도 사람의 도덕 준칙으로 대하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원칙은 무엇이냐? 사람이 마땅히 신봉해야 할 원칙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생기든 항상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대해야 한다. 만사와 만물 가운데서 발생하는 모든 일,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의 뒤에는 근원이 있는데, 그것은 전부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발생하는 모든 일은 마지막에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때가 있고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 때가 있다. 이 차이는 사람의 추구, 사람이 걷는 길에 달려 있다. 만약 네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대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마지막에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겠지만, 육과 혈기, 그리고 사람에게서 온 갖가지 말, 사상 관점으로 대한다면 마지막에 분명 혈기에 속하고 부정적인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만약 혈기에 속하고 그 부정적인 것들이 사람의 존엄과 육체, 마음, 이익 등에 해를 준다면, 결국 사람에게 증오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그늘만을 남길 뿐이다. 오직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만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이 생겨나는 원인을 찾을 수 있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만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 물론, 사람은 오직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만 현실 속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의 문제를 올바르게 처리하고 해결할 수 있으며, 마지막에 하나님이 배치한 그 모든 환경에서 유익을 얻고 생명 성장을 이루며 패괴 성품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그 가운데서 올바른 인생의 방향과 인생관, 생존 방식, 그리고 추구 목표, 길을 찾을 수도 있다.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의 논조에 관해서는 기본적으로 다 교제한 것 같다. 이 논조는 매우 깊이가 얕으나 진리에 근거하여 해부하면 그 본질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사람이 이러한 측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의 문제는 더더욱 그렇다. 이는 사람이 진리를 구하고 추구할 수 있는지와 관련이 있으며, 성품 변화를 이루고 구원받는 것과는 당연히 더 큰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가 단순하든 복잡하든, 깊이가 얕든 깊든 모두 올바로,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무릇 사람의 성품 변화와 구원받는 것과 관계가 있는 일 중 작은 일은 없다. 모두 아주 핵심적이고 중요하다. 너희는 앞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전통문화 중 덕행 측면의 각종 논조와 관점을 자신의 사상과 의식 속에서 끄집어낸 후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해부하고 분별함으로써 조금씩 인식하고 해결해야 한다. 그리하여 네 인생 방향과 목표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하고, 네 생존 방식이 철저히 변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기로 하겠다. 다음에 보도록 하자!

2022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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