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5)
지난번 예배 때는 어떤 내용을 교제했느냐? (하나님께서 먼저 샤오샤오와 샤오지의 이야기를 교제해 주셨습니다. 그다음 사람이 좋은 행위라고 여기는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교제해 주셨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측면과 관련해 깨달아야 할 진리 원칙을 중점적으로 교제해 주셨습니다.) 지난번에는 진리 추구와 관련해서 사람의 관념에 가장 부합하는 화제이자 부정적인 화제, 즉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행위에 관해 교제하였다. 이 화제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든 후 하나님이 제기한,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요구에 관해서도 몇몇 예를 드는 등 기본적으로 이러한 세부 내용을 교제하였다. 큰 항목은 많지 않았지만, 사람의 인식이나 실행, 진리에 대한 이해 등에 관련된 세부 내용이 적지 않았다. 오늘 다시 한번 간단히 되짚어 보자. 사람이 생각하는 좋은 행위를 개괄적으로 말하자면 무엇이냐? 종합적인 결론과 개괄적인 정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결론을 냈느냐? 예배 때 이 일에 관해 교제한 적이 있느냐? (교제했습니다. 하나님의 여러 차례 교제를 통해,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좋은 행위는 그저 하나의 행위일 뿐 진리가 아니며, 그런 행위는 전부 사람이 자신을 위장하는 수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종합한, 외적 행위에 관한 결론을 보면, 이 행위들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냐? 이 좋은 외적 행위들이 과연 사람의 본질과 관계가 있겠느냐? 이 좋은 외적 행위들은 사람의 눈에 몹시 적절하고 보기 좋아 보인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과 칭찬을 받게 하고, 좋은 인상과 평가를 남기게 한다. 그러면 이 좋은 인상이 사람이 지닌 패괴 성품의 본질과 일치하겠느냐?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러한 면에서 봤을 때, 좋은 행위의 성질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그저 외관상의 행동과 포장에 불과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외관상의 행동과 포장이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춰져야 할 모습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이 관념적으로 좋고 옳다고 여기는 행위는 그저 사람의 외관적인 행동과 포장에 불과하다고, 바로 이런 성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도, 정상 인성을 표출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표면적인 행동일 뿐이다. 이러한 행동은 사람의 패괴 성품을 숨기고, 사람의 사탄 본성 본질을 숨기며, 사람의 눈을 기만한다. 사람이 이런 좋은 행위를 실행하는 목적은 오직 남들의 호감과 우러름, 존중을 얻기 위해서지,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고 솔직하게 함께 지내기 위해서가 아니며, 사람답게 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좋은 행위들은 내면에서 비롯된 정직한 행동이 아니며, 정상 인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도 아니다. 이 좋은 행위들은 결코 사람의 본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부 사람의 위장, 가장에 속하는, 패괴된 인류의 장식품으로, 인류 죄악의 본질을 가린다. 이것이 사람의 좋은 행위의 본질이자 그 이면에 숨겨진 진상이다. 그럼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 요구의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지난 두 번의 교제에서 우리는 사람이 행위 면에서 살아 내고 행동하는 것에 관해 하나님이 어떤 요구를 했는지 언급했다. 어떤 것들이 있었느냐?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말 것,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 것, 부모에게 효도할 것, 성도의 품위를 지킬 것,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남의 물건을 탐하지 말 것, 거짓 증거를 하지 말 것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요구의 본질은 무엇이냐? 그러니까 하나님이 제기한 이 요구들의 전제는 무엇이냐? 기본 조건은 무엇이냐? 인류가 사탄에게 패괴되었고, 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배경과 전제로 제기한 요구 아니겠느냐?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서 제기한 요구 아니겠느냐? 정상 인성이 도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전부 정상 인성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을 기본 조건으로 제기한 요구들이다. 그럼 이러한 면에서 봤을 때,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 요구의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진정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정상 인성에 최소한 갖춰져야 할 면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우리가 제시한 예시 중에는 성도의 품위를 지킬 것, 자제할 것, 방탕하게 굴지 말 것,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 것,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부모에게 효도할 것,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 등이 있었다. 또한, 은혜시대에는 인내하고 포용할 것 등을 언급했다. 하나님이 제기한 이런 요구들이 하나의 행동에만 국한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사람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 준칙을 제시했다. 준칙이란 무슨 뜻이냐? 요구 기준이다. 한 사람으로서 어떤 것을 살아 내야 정상 인성을 갖춘 것이겠느냐? 하나님이 제기한 그 요구들에 도달해야 한다. 우리가 언급한 것들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중 일부에 불과하다.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 것,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등은 전부 정상 인성으로 도달할 수 있는 요구로서, 진리보다 낮고 진리에 미치지 못하지만, 한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본적인 기준이다.
우리가 방금 종합한,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 요구의 본질은 무엇이었느냐?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이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를 실행하거나 살아 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눈에 정상 인성을 갖춘 자로 보일 것이다. 정상 인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느냐? 그 사람이 행위와 행동, 살아 내는 부분에서 이미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 기준을 갖추고, 정상 인성의 기준에 도달했다는 말이다. 그는 하나님이 요구한 대로 정상 인성을 살아 내고 표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진실한 신앙이 있든 없든, 만약 도둑질하고 남을 속이며 다른 이의 이익을 점하면서 입으로 늘 상스러운 말을 한다면, 자신의 명성이나 지위, 체면 등의 이익과 관련될 때 아무 거리낌 없이 손을 뻗어 다른 사람을 때리고 상처 입힐 수 있다면, 심지어 간음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면, 특히 하나님을 믿은 후로 인성을 살아 내는 부분에 여전히 이런 문제가 있다면, 그 사람의 인성이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비정상입니다.) 네가 이방인을 판단하든,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 대해 판단하든, 하나님이 제기한 이 행위 기준은 그저 인성을 판단하는 최저 기준, 최소한의 기준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후로 얼마간 버리고 헌신하며 대가를 치르지만, 하나님이 제기한 행위 기준에는 늘 미치지 못한다. 여기에서 그런 사람에게는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도, 최소한의 사람다운 모습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이 없다는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정상 인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성을 살아 내는 것조차 인류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이르지 못하니, 인성이 무척 뒤떨어진 것이다. 이렇게 악평을 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인성을 판단하는 최소한의 판단 기준은 바로 그의 행위가 인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부합하는지 보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믿은 후로 자제하는지, 언행에 성도의 품위가 보이는지,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 남의 이익을 점하지는 않는지, 가족이나 형제자매를 대할 때 사랑이나 포용, 인내를 보이는지, 부모를 대할 때 힘닿는 만큼 책임을 다하는지, 뒤에서 우상을 숭배하지는 않는지 등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 근거하여 한 사람의 인성이 과연 어떠한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가 진리를 사랑하는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에 관해서는 일단 신경 쓰지 마라. 먼저 그에게 정상 인성이 있는지, 그의 언행이 하나님이 제시한 행위 기준에 이르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제시한 행위 기준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살아 내는 정도에 따라 그의 인성에 ‘평범, 부족, 매우 부족, 최악’의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이렇게 순서대로 배열하면 정확하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살 때나 공공장소에 있을 때 남의 물건을 슬쩍하는 등 나쁜 손버릇을 보인다면, 그의 인성은 어떻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는 손을 뻗어 남을 때리기도 한다. 그의 욕은 사람의 본질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그저 상스러운 말을 쏟아내며 함부로 남을 정죄하고, 원하는 대로 화풀이를 하면서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는 것이다. 특히 어떤 사람은 부모나 형제자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 심지어 이방인 친구들한테까지 그런 말을 한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귀가 더럽혀질까 봐 피하고 싶어질 정도다. 이런 사람은 인성이 어떻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인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항상 돈만 생각한다. 돈이 있는 사람, 잘 먹고 잘 입는 사람, 가정 형편이 여유로운 사람이 있으면 늘 그의 이익을 점하려 하고, 말을 빙빙 돌려가며 뭔가 얻어 내려 한다. 혹은 공밥을 먹거나 다른 사람의 물건을 공짜로 쓰거나 물건을 빌리고 안 돌려준다. 그가 점한 이익이 크지는 않아서 횡령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손버릇이 나쁜 이런 행동은 정말 비열하고 치사하며, 사람들에게 멸시당한다. 더 심각한 사람들은 미색에 눈이 멀어 수시로 이성에게 추파를 보내고 간음까지 저지르며 남녀 관계에서 죄를 짓는다. 이런 사람 중에는 싱글도 있지만, 가정이 있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나이가 많은데 간음을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 더 심각한 경우는 동성의 몸에 관심을 갖고 집적거리는데, 그야말로 역겹기 짝이 없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점은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으면서도 진리가 모든 것 위에 있다는 사실도,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이룬다는 사실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뒤에서 자주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보거나 부처 앞에서 향을 피우고 절을 하며 우상을 숭배한다. 또 어떤 이는 바늘로 인형을 찌르면서 남을 저주하고 접신을 하는 등 사술을 부리는데, 이는 더욱 심각한 행위이다. 이런 자는 불신파에 속하며,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이 행하는 일의 내용이 가볍든 무겁든, 일단 이런 모습이 있다면 인성을 살아 내는 것이 비정상적이고 불순물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일부 행위는 그릇되고 황당하여 그야말로 죄를 범하는 행위에 속한다. 이 밖에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로 매우 요염하게 차려입으며, 이방인처럼 섹시해 보이려 하고 세상의 흐름을 좇으며, 성도의 모습이 전혀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배 때는 얌전하게 입는데 집에 돌아가면 이방에서 유행하는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의 복장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같지 않고, 이방인과 별 차이가 없다. 게다가 시시덕거리면서 말하고 행동하는데 자제하지 않고 몹시 방종하다. 이런 사람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흐름과 성적인 매력, 인기를 얻는 것, 남들의 시선을 끄는 것을 추구하여 온종일 단장하고 진하게 화장하고 이성을 유혹한다. 이런 사람들이 살아 내는 것은 매우 뒤떨어진다. 복장과 화장, 언행 모두 제약받지 않고 성도의 품위가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이 인성을 살아 내는 것이 무척 뒤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 구체적인 사례들로 볼 때, 하나님이 사람에게 살아 내라고 요구한 행위는 정상 인성의 요구에 완전히 부합하며, 당연히 정상 인성을 지닌 사람이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이렇게 살아 내야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정상인 같은 것이며, 최소한의 정상 인성을 갖췄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요구한 세부 내용들을 보면, 인성을 살아 내는 것들이 거짓도, 꾸며 낸 것도, 남을 기만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모습이자 실제이다. 사람은 정상 인성을 살아 내야 조금의 기만도 없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 또 사람은 정상 인성을 살아 내야 남들에게 존중받을 수 있으며, 존엄 있게 살 수 있다. 이 밖에도 사람은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성도의 품위, 그리고 정상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있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네가 살아 내는 이런 것은 전부 긍정적인 것들이며,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위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대로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낸 것이다.
좋은 행위의 본질과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의 본질, 이 두 가지를 모두 분명하고 확실히 이야기했다. 그럼 사람이 어떻게 실행하고, 어떻게 정상 인성을 살아 내야 하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느냐?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 관한 문제에서 극단으로 달리거나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들이 인성과 무관한 삶의 사소한 일들과 관련이 있겠느냐? 그릇된 사람들은 이 일에 관해 밝히 알지 못한다. 혹자는 “하나님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교제해 주신 이상 우리는 삶 속의 모든 사소한 일을 진지하게 따져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고구마를 쪄서 먹는 것과 구워서 먹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영양가가 있을까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관련이 있겠느냐? 전혀 관련이 없다. 무엇을 먹을지, 어떻게 먹을지는 생활 상식으로, 모두가 알고 있다. 먹어서 문제가 생기지만 않는다면 어떻게 먹든 상관없다. 이렇게 단순한 상식까지 가져와서 진리를 구하고, 진리로 여겨 실행한다면, 이는 그릇되고 황당한 사람 아니겠느냐? 현재 어떤 사람들은 진리와 무관한 일을 두고 진지하게 따지면서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을 진리로 여겨 탐구하고 연구하며, 심지어는 여럿이서 함께 얼굴을 붉히며 싸우기까지 한다. 이는 어떤 성질의 문제겠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너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고구마를 먹는 방법을 진리로 여겨 구하는 것은 우습고도 혐오스러운 일이며, 이런 사람은 구제 불능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 추구가 무엇인지 모르며, 삶 속의 가장 단순한 상식 문제조차 알지 못하고 스스로 해결하지도 못한다. 그럼 그 나이 먹도록 헛산 것 아니겠느냐? 그들은 왜 그 잡스러운 일들을 예배 때 가져와 진리를 구하는 화제로 삼고 교제하며 토론하겠느냐? 주된 이유는 이해가 치우친 데다가 영적인 이해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지하게 따지려 드는 배경은 무엇이겠느냐? 왜 그런 마음과 생각이 생겼겠느냐? 왜 고구마를 먹는 일을 예배 때 가져와 교제하고 토론하겠느냐? 내가 교제한 문제들이 너무 세부적이어서 늘 글귀만 따지며 끝까지 파고드는 사람들에게 착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겠느냐? 이런 문제나 현상이 나타날 때, 나는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꼭 원숭이를 사람으로 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숭이는 본래 산이나 숲에서 사는 동물이다. 생김새는 물론이고, 행동거지며 생활 습관이 상당 부분 인류와 비슷한 데다가 한때는 인류의 조상으로 여겨졌지만, 어떻게 말하든 원숭이는 원숭이다. 원숭이는 숲이나 산에서 살아야 한다. 만약 원숭이를 집으로 데려와 사람과 함께 살게 한다면, 이는 잘못 아니겠느냐? 원숭이를 사람으로 대해야 하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너희는 대체 원숭이냐, 아니면 사람이냐? 만약 너희가 사람이라면 너희에게 말할 때 아무리 입이 아프고 아무리 고생해도 마땅하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너희가 원숭이라면 내가 너희를 사람으로 대하면서 입이 아프도록 진리와 하나님 뜻에 관해 말하는 것이 타당하겠느냐? 가치가 있겠느냐? (가치가 없습니다.) 그럼 너희는 사람이냐, 아니면 원숭이냐? (사람입니다.)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 너희는 예배 때 고구마를 먹는 방법을 교제하는 것에 관해 어떻게 이해했느냐? 너희도 이런 일을 두고 진지하게 따지지는 않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파란색 옷을 입을까, 아니면 흰색 옷을 입을까? 흰색 옷을 입는다면 어떤 흰색을 입을까? 어떤 흰색이 성결해 보이고 성도의 품위에 맞을까? 나한테 파란색 옷이 어울린다면 어떤 파란색을 입어야 할까? 어떤 파란색이 더 하나님이 제기한 요구 준칙에 맞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너희는 이런 일을 두고 진지하게 따져 본 적이 없느냐? 헤어스타일을 어떤 식으로 할지, 어떤 높낮이와 어조로 말하는 게 성도의 품위에 맞을지 생각해 본 사람은 없느냐? 이러한 일에서 진지하게 따져 보지 않았느냐? 한때 이런 일을 두고 진지하게 따져 보며 공을 들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기 전에 머리를 노란색이나 빨간색, 혹은 더 이상한 색으로 염색하기를 좋아했지만, 하나님을 믿은 후로는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염색하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는 머리를 물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2~3년이 지난 후에야 확실히 깨달았다. 머리를 무슨 색으로 염색할지, 어떤 스타일로 할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핵심은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지, 진리를 사랑하는지 등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무관한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따지던 사람들이 이제 조금씩 그런 일에 공을 들이는 게 아무 쓸모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문제들은 진리와 전혀 관계가 없으며, 그것은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 있는 문제일 뿐, 진리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성을 살아 내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맞으면 된다. 너희는 모두 한때 이런 일들을 두고 얼마간 고민하거나 막막해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고구마를 먹는 방법을 두고 예배 때 논쟁을 벌이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성 생활의 사소한 문제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전부 사실이다. 그럼 그런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근거하여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은 무엇인지 마음속으로 알고 있느냐? 또다시 특별한 일들이 닥쳤을 때 진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비록 그 극단적인 행위들, 예를 들어 고구마를 먹는 방법과 같은 문제는 사라졌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또 특별한 문제가 나타난다면 한동안 막막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예를 들어 보아라. 어떤 문제에서 한동안 막막해졌느냐? 너희가 보기에는 여성이 화장하는 것이 잘못 같으냐? 하나님이 요구한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 부합하지 않는 것 같으냐?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성도의 품위에 맞으며, 야하고 짙은 화장만 아니면 됩니다.) 야하고 짙은 화장만 아니면 적절하다. 어떤 사람들은 “야하고 짙은 화장이 적절하지 않다면, 화장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말하는데, 내가 그렇게 말했느냐? (아닙니다.) 화장하는 것은 문제라고 할 수 없으며,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 부합한다. 여기에서 부합하는 원칙은 야하고 짙은 화장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준이다. 그럼 여성이 어느 정도까지 화장을 해야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 부합하겠느냐? 그 기준은 어디에 있겠느냐? 야하고 짙은 화장이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어떤 화장이 야하고 짙은 화장에 속하겠느냐? 이 선을 분명히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세부 내용 아니겠느냐? 예를 들어 보아라. 야하고 짙은 화장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얼굴은 너무 희게 화장하고, 입술은 너무 붉게 칠하며, 눈은 너무 검게 표현하여 보는 사람이 불편하고 부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입니다.) 마치 귀신 같고, 원래 모습이나 면모를 알아볼 수 없어 보는 사람이 깜짝 놀라는 것이다. 몇몇 나라나 민족 그리고 특수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화장을 매우 짙게 한다. 예를 들어, 술집이나 나이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더냐? 그들은 모두 짙은 화장을 하는데, 이는 남들에게 도움이 안 된다. 그들이 화장하는 목적은 다른 사람을 유혹하는 데 있다. 이런 화장은 야하고 짙은 화장에 속한다. 그럼 어떤 종류의 화장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 부합하겠느냐? 커리어 우먼이 하는 옅은 화장으로, 단정하고 우아해 보이는 선을 넘지 않으면 된다. 중국 노년층 사람들에게는 화장 유행이라는 것이 없다. 나이가 들었지만 특별한 신분이나 지위가 없는 평범한 서민이 밖에 나갈 때 늘 화장하고 단장한다면, 사람들은 그런 자를 보며 늦바람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서양은 다르다. 만약 네가 사람을 만나거나 일할 때 전혀 화장도 하지 않고 꾸미지도 않는다면 상대는 네가 일을 존중하지도, 일에 최선을 다하지도 않는다고, 남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이 또한 하나의 문화이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는 최소한 단정하고 성실해 보이는 선에서 화장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화장을 해도 남들 눈에 정직한 사람으로 보여야지, 음탕한 마음이 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적절하다. 이것이 바로 원칙으로, 매우 간단하다. 어떤 사람들은 “외출할 때 화장하지 않으면 안 됩니까? 저는 화장하는 게 익숙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구해 보아라. 하나님이 화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더냐? 하나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 집에서도 사람에게 화장을 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만약 네가 화장을 좋아한다면 이런 준칙과 범위를 말해 주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알려 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화장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집에서는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화장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외출할 때 거지처럼 꾀죄죄하게 하고 나가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복음을 전하러 가면서 외출 전에 옷매무시를 만지지도 않고 세수도 하지 않고 꼬질꼬질한 옷을 입은 채 “괜찮아. 나는 마음속으로 진리를 깨닫고 있으니까 뭘 입든 상관없어!”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차림새에 원칙이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의 최저 기준은 정상 인성을 살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도, 네 인격과 존엄을 욕보이는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사람들에게 존중받아야 한다. 경건한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제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며 성도의 품위를 갖추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이런 인상을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는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다.
외적 행위와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관련된 문제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부담이나 어려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정상적인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은 추상적이지 않으며 이해하기 쉽다. 그러므로 외적 행위와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관련된 화제가 교회 생활에서 수시로 토론하는 주요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가끔 얘기하는 것은 괜찮지만, 진리를 구하는 화제로 자주 가져와서 열심히, 진지하게 토론한다면, 이는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보통 어떤 사람들이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느냐? 고구마를 먹는 방법 같은 문제를 가져와서 진리를 구하는 화제인 양 예배 때 토론하고 교제하고, 심지어는 여러 번의 예배에서 그 일을 교제하는데 교회 리더가 제지하지도 않는다. 이는 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치우친 사람들의 모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예배 때 토론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진리나 사람의 패괴 성품에 관한 문제다. 진리나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생활에서 영원불변한 화제이다. 반면, 정상 인성의 외적 행위처럼 가장 기본적이고 평범한 내용이 교회 생활이나 예배 때 주요 교제 화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배 때를 제외하고 형제자매들 사이에 서로 지적하고 일깨워 주며 교제하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 교제하고 토론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한다면 정상적으로 예배하며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 영향을 줄 것이고, 사람의 생명 진입에도 지장이 생길 것이다. 교회 생활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생활이니, 진리를 교제하고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생명 성장에 지장을 주지 않을 수 있다. 네게 정상 인성의 이성이 있다면, 이 일을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원칙에 부합하는지 밝히 알 것이다. 늘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 진리 원칙과 무관한 일을 따지고 늘 가치도 없는 일에 집착하면서 스스로 지식과 학문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해부해야 하지 않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차림새에 무척 신경을 쓰면서 하나님을 믿으면 이상한 복장을 해서는 안 되는지 캐묻는다. 또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지 캐묻는다. 이 밖에도 장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지 캐물으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날이 언제쯤 올지 캐묻는다. 그들은 이런 일에서 진리를 구해 올바른 답을 찾고자 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에 대한 명확한 말씀은 없지만,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대하는 원칙을 분명하게 언급했다.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읽지 않는다면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을 위해서인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그저 몇몇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복을 얻으려 할 뿐이다. 그들의 어려움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핵심은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이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진리 교제하기를 중요시하는 법 없이 늘 아무 의미 없는 일을 캐물으면서 그것을 예배 때 가져와 교제하고, 명확한 답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리더 일꾼은 그들을 제지하지 못한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자기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너는 진리를 실행하지는 않고 늘 옆길로 가려 한다. 어찌하여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하고 해부하지 않는 것이냐? 너는 언제나 무골호인이 되어 본분 이행에 책임을 다하지 않은 채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혼자 결정하며 제멋대로 군다. 왜 이것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따지거나 파고들거나 해부하지 않는 것이냐? 어찌하여 그런 것이냐? 너는 왜 일이 닥쳤을 때 늘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하며 스스로를 규정하고,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고 교회는 불공평하다고 원망하는 것이냐? 이것들이 문제 아니겠느냐? 교회 생활에서 교제하고 해부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교회를 구분하고 인원을 정리하면, 너는 늘 불만과 관념을 품으며 소극적인 것을 퍼뜨린다. 이것은 문제 아니겠느냐? 파고들고 해부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늘 지위를 추구하고 권모술수를 부리며, 자신의 지위를 경영한다. 이것은 문제 아니겠느냐? 교제하고 해부해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 교회는 인원 정리 사역 중이다. 그런데 “본분 이행에서 성과를 내면 정리되지 않겠지. 성과를 좀 유지해서 정리당하지만 않으면 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소극적으로 대항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렇게 간사한 성품을 드러낸다면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 패괴 성품이나 사람의 본성 본질과 관련된 문제가 고구마를 먹는 문제보다 훨씬 중요하지 않겠느냐? 예배 때나 교회 생활 시간에 가져와서 교제하고 해부하여 하나님의 선민들이 분별력을 키우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들은 훌륭한 반면교사의 사례 아니겠느냐? 이런 패괴 성품의 문제들은 사람의 성품 변화나 구원받는 일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니 사소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너희는 왜 이런 것들을 예배 때 가져와 교제하고 해부하지 않는 것이냐? 이렇게 핵심적인 문제를 예배 때 가져와 진리를 구해 해결하기는커녕 사소하기 그지없는 쓸데없는 일들을 끝도 없이 교제하고, 작은 문제 하나를 두고 예배 시간 내내 이야기하며,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시간만 잡아먹는다면, 이것이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계속 그대로 간다면, 너희는 모두 자질도 떨어지고 어리석은 데다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않고, 진리에 이르지도 못하는 폐인이 될 것이다. 너희는 예배 때 교제해야 할 것들을 교제하지 않고, 교제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끝도 없이 교제한다. 또 언제나 진리와 관련이 없는 것, 개인의 치우친 이해나 사소한 일에 속하는 것들을 예배 때 가져와 교제하며 모두 함께 토론하게 하면서 시간을 낭비한다. 이는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교회 사역의 정상적인 진전에도 영향을 준다. 그러니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일은 마땅히 ‘교란’이라고 정의해야 한다. 이는 고의적인 교란이니, 이런 사람은 제약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예배 때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진리를 교제하며, 패괴 성품의 문제, 본분 이행의 어려움과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사소하기 그지없는 잡일들, 일상생활의 상식과 관련된 일들을 예배 때 가져와 교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문제는 형제자매들끼리 교제하여 해결할 수 있으니 예배 때까지 교제할 필요는 없다.
교회에는 늘 치우치게 이해하고, 의미 없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의 좋은 행위에 관해 교제한다고 하니 그는 정말 행위 측면에 공을 들이는데, 왜 그런 것을 교제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왜 이러한 측면의 문제를 교제해야겠느냐? 이 문제를 교제하여 어떤 성과를 내려는 것이냐? 일단 왜 이 문제를 교제해야 하는지 말해 보아라. 사람의 좋은 행위와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 기준에 관한 화제는 어떤 상황에서 제기되었느냐?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라는 화제를 교제할 때 제기했다. 이 문제는 사람의 진리 추구 방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때 보이는 좋은 행위는 모두 진리와 관련되고 상관이 있다. 반면, 진리 실행과 관련이 없는 행위는 사람 눈에 아무리 좋아 보여도 진리와는 무관하다. 혹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좋은 행위가 진리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그 부분이 이해가 안 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너희는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관한 교제를 전제로, 사람이 관념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행위를 해부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한편, 사람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이 제기한 준칙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어 정상 인성의 살아 냄을 판단하는 준칙을 알게 하였다. 이것을 기초로 마지막에는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좋은 행위들이 진리의 준칙이 아니며, 진리와 상관도, 관련도 없음을 알려 주는 성과를 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좋은 행위를 지키는 것이 진리 추구라고 착각하지 않게 하고, 동시에 오직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 기준에 도달해야만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기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려 주었다. 사람이 제창하는 좋은 행위가 모두 위장이요 거짓이고, 쇼나 연기를 하는 것임을, 사탄의 간계가 들어간 그릇된 것임을 알려 준 것이다. 오늘 그것들을 빼앗고 없애면 사람은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르겠느냐? 마음속으로 ‘그럼 대체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지? 하나님이 요구하신 행위 기준은 대체 뭐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준칙, 그리고 세부적인 가르침들은 이렇게 간단하다. 하나님이 요구한 그런 실제를 살아 내기만 하면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기준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은 이 일에서 지나치게 파고들거나 막막해하거나 어리벙벙하지 않을 것이다. 정상 인성으로 살아 내야 하는 기준에 도달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서 실제적인 문제를 하나 해결한 것 아니겠느냐?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길에서 장애물을 하나 제거하고 걸림돌을 하나 해결한 것 아니겠느냐? 적어도 지금까지 사람이 숭배해 온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의 표면적인 행동은 더 이상 사람의 추구 목표가 아닐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때 표면적으로 살아 내려는 목표가 아닐 것이며, 정상 인성을 살아 내야 하는 기준도 아닐 것이다. 자제할 것, 성도의 품위를 갖출 것 등으로 대체될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요구들은 사람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준칙이자 정상 인성으로 살아 내야 하는 모습이다. 이러면 진리 추구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과 목표, 방향이 정해진 것 아니겠느냐?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부분이 정해졌으니,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목표는 더 이상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등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한 정상 인성의 살아 냄이 될 것이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정상 인성을 살아 내고 드러내는 행위로서 위장도, 사탄의 간계도 없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화제에 관계된 좋은 행위와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 기준에 대한 교제 내용이 진리 추구와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어느 정도 진리 추구의 기본 방향과 목표를 정해 준다. 그렇게 한다면 최소한 진리를 추구하기 전까지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네 목표가 올바를 것이다. 그 목표는 인위적인 행동이나 포장, 위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한, 인성의 정상적인 살아 냄이다. 이 화제가 진정한 진리 추구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지만, 진리 추구라는 큰 방향에서 보면 없어서는 안 될 내용이며, 사람이 알아야 하는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행위 기준이다. 교제한 이 화제가 진리 추구나 진리의 준칙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나 하나님이 인류에게 제시한 행위 기준과 관련이 있고, 당연히 어느 정도는 진리의 준칙과도 관련이 있으므로 사람은 이러한 문제들 또한 알아야 한다.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이런 요구도 사람이 지켜야 할 준칙이니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이러한 측면의 문제를 알게 되면 최소한 정상 인성의 살아 냄과 외적 행동에 있어서 더 이상은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 온화하고 우아한 사람,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 가까이하기 쉬운 사람,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남자는 반드시 신사여야 하며, 여성을 위해 문을 열어 줘야 하고, 여성이 자리에 앉을 때는 의자를 빼 주고, 공공장소에서는 레이디 퍼스트를 지켜야 한다는 등 서양인들이 요구하는 좋은 행위를 분별한 후에는 적어도 더 이상 그러한 것들을 기준으로 정상 인성의 살아 냄과 행위를 추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마음으로, 또 사상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버려 더는 그것에 영향받거나 속박되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너희가 해야 할 것들이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저런, 그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아닌 것 같네요.”라고 말한다면, 너는 어떤 반응을 보이겠느냐? 그 자리에서 당장 그를 힐끗 볼 것인데, ‘틀렸습니다. 여기는 하나님 집인데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게 중요하겠습니까?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사람이 살아 내야 하는 모습도 아닙니다.’라는 뜻을 내비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 리더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할 줄 모릅니다. 이렇게 나이가 많은 저를 노자매라고 부르지 않고 바로 이름을 부르더라고요. 그가 제 이름을 부를 자격이 된답니까? 제 손자가 그보다 나이가 많을 겁니다. 그러니 그건 저를 무시하는 처사 아니겠어요? 그는 상냥하고 친절하지도, 가까이하기 쉽지도 않습니다. 그런 태도를 보면 리더로서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데, 이 관점이 어떠하냐?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사람을 판단할 때는 외적 행위나 태도를 근거로 할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람을 판단하는 원칙이다. 그럼 리더 일꾼을 판단할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는지, 하나님의 선민들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이끄는지, 교회의 문제들을 진리로 해결하고 몇 가지 핵심적인 사역들을 잘 해내는지를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복음 사역을 어떻게 하는지, 교회 생활은 어떤지, 하나님 선민들의 본분 이행 상황은 어떤지, 각 업무와 사역의 진전은 어떤지, 불신파나 악인, 적그리스도를 제명했는지 등이 교회의 핵심 사역이다. 리더 일꾼을 판단할 때는 주로 이 몇 가지 사역을 제대로 해냈는지를 보면 된다. 이 몇 가지 사역에서 다 성과를 냈다면 합당한 자격을 갖춘 리더이다. 행위 면에서 좀 결점이 있다고 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외적 행위만을 보는 것은 리더 일꾼을 판단하는 적합한 기준이 아니다. 사람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 리더는 나이 많은 사람을 이모나 할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으니 예의를 모르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한다면 그 리더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고, 하나님의 선민들은 제대로 리더를 고른 것이다. 그는 교회의 여러 사역을 책임질 수 있고, 하나님 선민들의 생명 진입에 도움이 되고 유익이 있으며, 복음 사역까지 제대로 해낸다. 그러니 우리는 그의 인도를 받아들이고 그의 사역에 협력해야 한다. 그 리더에게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등의 좋은 외적 행위가 없다는 이유로 그의 사역에 협력하지 않거나 그를 곤란하게 하거나 약점을 잡아 그를 판단한다면, 그런 행동은 교회 사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리더 일꾼을 원칙 없이 대하는 행동이며,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태도이다. 그런 사람은 올바른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악을 행하는 것에 속한다. 만약 어떤 리더 일꾼이 노인을 공경할 줄 모른다고 해서 그를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의 인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죄까지 한다면, 이는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이겠느냐? 이는 바로 전통문화의 관점에 근거해 사람을 쓰는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한 부정적인 결과이다. 만약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여 사람을 판단하고 리더 일꾼을 뽑는다면, 이는 정확하고 하나님의 뜻에도 부합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사람을 공평하게 대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사역의 정상적인 진행을 지킬 수 있어 하나님도, 사람도 만족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소위 ‘좋은 행위’에 대해 해부하고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관해 교제한 후,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시선과 판단 기준, 시야가 달라졌고, 판단 결과 또한 달라졌다.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판단한다면, 그 결과는 분명 정확하고 공정하며 객관적이고 모두의 이익에 부합할 것이다. 그러나 판단하는 시선과 방식, 근거가 사람이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라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겠느냐? 좋은 사람을 모함하고 정죄하거나 외식하는 사람에게 미혹되어 누군가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근거가 잘못되었기에 마지막 결과 역시 잘못되고 공정하지 않을 것이며, 틀림없이 하나님의 뜻에도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관념 속 좋은 행위의 본질을 교제하고 해부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이것이 진리 추구와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매우 큰 관계가 있다! 그것은 정상 인성의 살아 냄, 표면적인 행동이나 드러냄과 관계가 있을 뿐이지만, 사람이 올바른 준칙, 하나님이 요구한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준칙을 알게 되면 사람을 판단하거나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옳고 규범화된 근거와 준칙을 갖게 된다. 그러면 이런 측면에서 진리 추구의 방향과 길, 목표는 더욱 정확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더욱 정확해지고 규범화될 것이다. 이 화제가 좀 평이하기는 하지만,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과 가장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며 긴밀한 관계가 있으니 전혀 공허하지 않다.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에 관해서는 이미 많이 이야기했다. 내가 반복적으로 이야기한 목적은 이 화제가 진리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고 진리와 같은 선상에 놓을 수도 없지만,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그것을 진리가 아닌 것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의 지식이나 이론으로 생각하지도 마라. 그것은 공허하지 않다.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거나 좋다고 여기는 것들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늘 생각을 통제하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시선, 입장을 통제하기에 이러한 것들을 분명히 알려 주어 깨닫게 하고 분별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사람이 관념적으로 좋다고 여기는 행위를 내려놓고 더는 그러한 것들을 긍정적인 것으로도,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행위 기준으로도 보지 않게 해야 한다. 그것들은 하나님 말씀이 전혀 아니며, 진리는 더더욱 아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관점과 입장을 끊임없이 고쳐 나가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자신의 마음속에 생겨난 각종 관념과 관점이 정말 진리에 부합하는지 부단히 성찰하면서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념과 관점을 제때 바로잡아야 한다. 그 후 올바른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 기준을 통해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이는 진리 추구의 가장 기본적인 실행이자 구원받고 정상 인성을 살아 내기 위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추구 방향, 추구 목표이다. 너희는 이 말씀들을 지금 막 들었으니 그리 깊이,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험이 계속 깊어짐에 따라 관념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전통문화에 대해 끊임없이 해부하고 분별하여 결국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각종 말들을 버리고 더는 전통문화에 근거해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여 사람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전통문화의 관념적인 것들을 철저히 제거하고 포기한 것이다. 만약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간단한 도리만 깨달아 전통문화가 요구하는 좋은 행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안다면 ‘나는 현대인이고 남들보다 뛰어나고 세속적이지도 않아. 그렇게 전통적이지도 않지. 나는 전통문화를 아주 혐오한다고. 그렇게 번거로운 허례허식 따위는 싫어한단 말이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과 일을 바라볼 때면 아주 자연스럽게 예전 관념으로 바라보고 판단한다. 그때 너는 ‘나는 현대인이야. 옛것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나는 그렇게 전통적이지 않아. 나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어.’라고 여긴 말들이 거짓되고 잘못되었음을, 자신의 느낌에 속았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야 네 마음 깊은 곳의 오래된 사상 관점, 오래된 관념이 이미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려 관념이 바뀌고 생각을 버렸다고 해서 바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새 시대의 사람, 현대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저 외적인 표지일 뿐이다. 태어난 연도나 시대가 다를 뿐, 인류 공통의 오래된 것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을 너는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갖고 있다. 네가 사람인 이상 이러한 것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못 믿겠다면 체험해 보아라. 체험하다 보면 어느 날, 내 말에 아멘 하게 될 것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 거만한 사람,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는 석사고 박사야. 내가 사회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나는 새 시대의 문화와 교육, 특히 서양 교육을 접했어. 그런데 나한테 그런 낡아 빠진 것들이 있으려고? 나는 전통과 낡아 빠진 규율을 가장 싫어해. 가족하고 함께 있을 때 전통이나 규율과 관련된 얘기가 나오면 하나도 듣고 싶지 않다고.’라고 생각한다. 일단 성급하게 부정하지 마라. 언젠가 너는 그러한 생각을 내려놓고, 너 역시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탄에게 패괴된 사람 중 한 명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네 내면에 있는 낡은 관념을 원해서 받아들이고 드러낸 것은 아니지만, 인류의 선조와 전통문화가 오래전부터 너에게 영향을 주고 전염시켰으므로 네 내면세계와 사상 관념 속에는 그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 있다. 어째서겠느냐? 전통문화의 그런 것들은 단순한 말이 아니고, 어떤 주장이나 행동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사상과 이론으로서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 주장과 행동을 만들어 낸 근원은 패괴된 인류가 아니라 사탄이다.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아가는 한, 너는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것들에 물들고 미혹되고 패괴될 수밖에 없다. 지금 너는 내 말이 전부 사실이고 진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말들을 체험할 때 깨닫게 될 것이다. 너는 전통문화와 번잡한 허례허식, 낡아 빠진 규율을 싫어하지만,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모르게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을 근거로 삼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은 전통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전통문화의 정수이다. 그때가 되면 너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도 진리를 깨닫지도 못하고 진리를 얻지도 못했다면 가장 기본적인 정상 인성의 살아 냄에조차 사탄의 독소와 성분, 사탄의 간계가 들어간다는 것을, 그것은 전부 부정적인 것이고, 하나님이 혐오하여 버리는 것이며 육에 속하는 것임을, 하나님이 제기한 것, 좋아하는 것,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긍정적인 사물과는 어떤 관계도, 조금의 연관성이나 유사성조차도 없음을 알게 되고 똑똑히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들을 똑똑히 확인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은 진리 실행이란 무엇인지 모를 것이고, 언제까지나 사람이 긍정적인 사물이라고 여기는 좋은 행위들을 지킬 것이다. 그럼 사람의 행위와 태도는 영원히 하나님에게서 통과되지 못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진리를 받아들이고 추구할 수 있을 것이며,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명확히 알려 준 인생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 이 진리 원칙은 사람에게 더없이 중요하고 필수적이다. 이는 구원받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진리 원칙이니,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일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이 진리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네 나이가 많든 적든, 지식이 있든 없든, 믿음이 크든 보잘것없든, 어떤 사회 계층이나 집단에 속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요구한 기준과 전혀 관계가 없을 것이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이다. 이는 네가 추구해야 할 유일한 길이니 까탈스럽게 따지고 고르면서 “내 관념에 맞는 거라면 진리로 여겨 받아들이겠지만, 내 관념에 맞지 않는 거라면 거부할 거야. 나는 내 뜻대로 할 거라고. 진리를 추구할 필요는 없어. 하나님 말씀의 입장에 서서 사람과 일을 바라볼 필요도 없지. 나한테는 내 관점이 있으니까. 내 관점도 꽤 고상하고 객관적이고 긍정적이거든. 하나님 말씀과 별로 차이가 없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를 대신할 수도 있는 거야. 이 부분에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거나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과 추구 방식은 잘못되었다. 사람의 관점이 아무리 좋고 옳아도 잘못된 것으로, 결코 진리를 대신할 수 없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무엇을 추구하든 다 잘못된 것이다. 그렇기에 말하는데,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에 있어 너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너는 그저 착실하게 이 말대로 행동하고 실천하고 체험하며, 조금씩 이 말을 인식하고, 네 패괴 성품을 알고 이 말의 실제에 진입하면 된다. 그렇게 해야 마지막에 진리 추구로 도달해야 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네 노력과 버린 것, 네가 지불한 대가는 전부 물거품이 되고, 모두 헛수고가 될 것이다. 이해했느냐?
진리 추구란 무엇이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착실하게, 온전히, 절대적으로 그 말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그 말을 네가 추구하는 목표이자 생명의 실제가 되게 한다면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어떤 불순물도, 사람의 뜻도 들어가서는 안 되며, 요행 심리를 가져서도 안 된다. 그래야 옳다. 그렇게 한다면 진리를 얻을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럼 사람의 관념 속 좋은 행위를 교제하고 해부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에게 어떤 긍정적인 지도와 도움을 가져다주겠느냐? 이 말들이 너희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와 준칙이 될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배 때나 영 생활 때 이 두 번의 교제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읽어 보아라. 이 말씀들을 확실히 소화한다면,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정확히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네 언행에 근거와 준칙이 생기고,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정확해지며, 일을 바라보는 입장과 시선 또한 올발라진다. 더는 정서나 감정으로, 또 전통문화나 사탄의 철학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네 근거가 옳으면,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결과 역시 상대적으로 정확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은 너희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화제를 교제해 주는 이유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도, 무료해서 너희를 심심풀이 상대로 여기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문제이자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는 길에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이러한 문제들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해 얽매이고 결박되며 그런 문제로 가로막히고 시달린다. 물론, 사람은 구원받는 길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소극적인 측면에서든 적극적인 측면에서든, 혹은 부정적인 면에서든 긍정적인 면에서든, 이러한 문제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실생활 속에서 비슷한 문제가 닥쳐 선택을 마주해야 할 때 진리를 구할 수 있으며, 올바른 시선과 입장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고, 원칙을 지킬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네 결정과 선택은 근거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 뜻에 부합할 것이다. 또 더 이상 사탄의 철학이나 궤변에 미혹되지 않고, 사탄의 독소나 황당무계한 논리에 혼란을 겪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가장 기본적인 측면에서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사람과 일을 대할 수 있으며, 감정이나 사탄의 철학에 영향을 받거나 통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의 관념 속 좋은 행위를 인식하고 분별하는 것은 진리 추구의 과정에서 큰일은 아니지만,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사람은 일상생활 속에서 수시로 이런 일들을 접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닥쳐서 어떻게 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너는 평소 그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이 경우, 그의 견해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겠느냐? 모른 척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너는 마음속으로 그에 대한 견해와 평가, 정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네 생각과 판단을 조종하며, 또 그 일에 대한 네 결론을 조종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제시한 다른 견해에 대해 반드시 침착한 태도로 진리에 근거하여 분별하고 꿰뚫어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의 말이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비슷한 일과 사람이 다시 한번 임했을 때 또 막막해지고 어쩔 줄 몰라 하고 마음이 복잡해질 것이다. 심지어 극단적인 수단으로 대처하거나 대충 건성으로 넘어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로 인해 상상하기 힘든 결과가 생길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한 판단 기준으로 사람을 바라본다면, 마지막 결과 또한 긍정적이고 좋은 것이며, 사람과 사람 간에 어떤 충돌도 없이 화목할 것이다. 반면 사탄의 논리와 사람의 관념 속 좋은 행위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면 두 사람 사이에 분쟁이 일고 싸움이 벌어져 화목하게 지낼 수 없을 것이다. 그에 따른 결과는 다양하다. 서로 헐뜯거나 깎아내리거나 판단할 수도 있고, 심각할 경우 치고받고 싸울 수도 있다. 결국 둘 다 손상을 입게 되는데, 이는 사람이 원치 않는 바이다. 그러므로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것은 종종 사람이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이성적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요구하고 알려 준 행위 기준에 근거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며 판단하면 마지막에 분명 객관적인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혈기나 사람의 정서,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이로우면 이로웠지, 해로운 점은 하나도 없다. 이러한 면에서 봤을 때,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것은 사람이 관념적으로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요구한 행위 기준이겠느냐?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행위 기준입니다.) 너희는 모두 그 답을 알고 맞힐 수 있구나. 좋다. 이 화제는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자. 이제 너희가 해야 할 일은 관련 내용을 계속 묵상하고 교제하여 이 문제들을 체계화하고, 몇 가지 실행의 원칙과 길을 종합해 내는 것이다. 그 후,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체험하고 경험하여 이 말씀들의 실제에 진입해야 한다. 물론, 이 말씀들의 실제에 진입하는 것은 사람이 초보적으로 추구하고 진입해야 하는 진리 실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조금씩, 사람은 체험 과정에서 내가 교제한 내용의 면면에 서로 다른 정도의 이해와 인식이 생길 것이고, 서로 다른 각도에서 점차 수확을 거둘 것이다. 네 수확이 많을수록 이 말씀들에 대한 깨달음과 진입도 깊어질 것이며, 네 체험과 진입이 깊어질수록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에 관한 진입과 깨달음도 깊어질 것이다. 반대로, 만약 네가 전혀 진입하지 않고, 이러한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훑어보거나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면서 자기가 늘 살던 대로 살아간다면, 문제가 나타나도 진리를 구하지 않으며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스스로에게 대입하고 해결하지 않는다면, 너는 영원히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할 수 없다. 영원히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다시 말해, 너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며, 영원히 진리를 실행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영원히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저는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한 적이 없지만 꽤 괜찮게 살아왔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꽤 괜찮게 살아왔다.’라는 게 어떤 것이더냐? 죽지 않으면 괜찮은 것이냐? 네 추구 목표는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너는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꽤 괜찮게 살아왔다고 한다면, 네 삶의 질은 매우 떨어지고, 네가 살아 낸 인품은 더없이 낮을 것이다. 관용적 표현으로 이야기하자면 너는 사람답지 않게 살아온 것이다. 너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지 않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사탄의 성품과 사탄 철학으로 살기 때문이다. 너는 인두겁을 쓴 존재이지, 인간이 아니다. 그런 사람의 삶의 질이 어떨 것이며, 그런 사람의 삶이 어떤 가치가 있겠느냐? 자신과 타인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런 삶은 질이 무척 떨어지고, 어떤 가치도 없다.
오늘 왜 전통 관념과 전통문화에 관해 교제하고 해부하는지 너희는 알고 있느냐?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이런 화제를 교제하는 의의는 무엇이겠느냐? 최종적으로 이루려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저희의 어떤 행위와 태도가 전통문화에 지배되고 있는지, 저희가 사탄의 철학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성찰하는 데 도움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진리를 깨달아 분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요구와 준칙대로 정상 인성을 살아 낼 수 있으며, 진리 추구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그런데 답변이 좀 장황하구나. 가장 간단하고 직접적인 답은 무엇이겠느냐? 이 화제를 교제하는 최종 목적은 딱 하나다. 사람으로 하여금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진리 실행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질문을 알면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좋은 행위를 분별할 수 있고, 더 이상 그런 좋은 행위들을 진리 실행이나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내는 기준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진리를 깨달아야만 전통문화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고, 진리 실행이나 사람이 갖추어야 할 좋은 행위에 대한 잘못된 이해, 잘못된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정확하게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할 수 있다. 만약 무엇이 진리인지 모른 채 전통문화를 진리로 여긴다면, 사람의 추구 방향과 목표, 길은 전부 틀릴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위배될 것이며, 진리와 어긋나고 참도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고,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진리를 구하지 않고 실행하지도 않는다면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진리를 얻지 못한다. 진리를 얻지 못하면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 봤자 헛수고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러한 전통 관념과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말을 교제하고 해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의미 있고 아주 중요한 화제이다. 너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이 진리인지 정말 이해하고 있느냐?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 알고 있느냐? 목표를 정했느냐? 길을 정했느냐? 만약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면 진리를 어떻게 추구할 수 있겠느냐? 잘못 추구할 수 있지 않겠느냐? 옆길로 빠지지 않겠느냐? 그럴 공산이 크다. 그러므로 오늘 교제하는 이런 말들이 표면적으로는 깊이가 없어 보이고 한 번에 이해가 되는 것 같아서 너희 입장에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어 보이겠지만, 이런 내용, 이런 화제는 진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고 하나님의 요구와 관계가 있다. 너희 대부분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너희는 모두 이치상으로 전통문화나 인류의 사회과학이 진리가 아니며, 민족의 풍습은 더더욱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정말 이러한 것들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느냐? 정말 이러한 것들의 속박에서 벗어났느냐?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는 사람에게 민족 문화나 풍습을 열심히 익히라고 요구한 적이 없고, 전통문화의 어떤 부분이라도 받아들이라고 한 적은 더더욱 없다. 이러한 일을 하나님 집에서는 언급한 적이 없다. 하지만 오늘 교제한 이 내용들은 무척 중요하다. 이는 너희에게 분명히 알려 줄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말을 하는 목적은 전부 너희가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너희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공을 들이고 대가를 치르고 정력을 들인다면, 이 측면에서 최종적으로 수확을 얻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후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위해 추구하면 성과를 내기가 쉽다.
일전에 우리가 교제한,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 중 한 가지는 좋은 행위였다. 그러면 다른 한 가지는 무엇이었느냐? (인품과 도덕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람의 덕행이다. 패괴된 인류는 모두 사탄 성품으로 살아가지만, 위장에 매우 능하다. 표면적인 행동이나 행위에 대한 특정한 주장 외에 사람의 덕행 측면에도 각양각색의 주장들과 요구가 있다. 그럼 덕행 측면에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너희가 알고 있는 것, 익숙한 것들을 예로 들어 보아라. 그다음 자주 보이는 말 몇 개를 찾아 해부하고 교제하도록 하자.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마라. 기꺼이 남을 도우라.)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 (남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라.)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하라.)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 그런 것들이 있다. 그 밖에도 “물을 마실 때는 우물을 판 사람을 기억하라.”,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 등이 있다. 이는 전부 사람의 덕행에 대한 요구이다. 또 뭐가 있느냐?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 그것 또한 사람의 덕행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이자 덕행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이다. 또 있느냐?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 깊이가 얕기는 하나 그것 역시 해당한다. 이 밖에도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 등이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또 “봄날의 누에는 실을 다 뽑아내야 죽고, 초는 다 타 버려야 눈물이 마른다.” 같은 것도 있다. 보아라. 사람의 품행과 처신에 대한 요구가 얼마나 높으냐! 사람이 일생을 양초처럼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리라는 것인데 그렇게 처신해야 품행이 고상하다는 것이다. 이 요구가 높지 않으냐? (높습니다.) 인류는 몇천 년 동안 전통문화에 영향받고 속박되어 왔다. 그 결과가 어떠하냐?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냈더냐?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 냈더냐? 사람은 전통문화가 요구하는 것들을 위해 살아가며, 자신의 청춘, 심지어는 일생을 바치면서 빛나고 영광스럽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죽음이 임했을 때에도 자기가 왜 죽는지, 그 죽음이 가치가 있는지, 의미가 있는지, 창조주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인지 등은 전혀 모른다. 사람의 덕행에 관한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주장과 요구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더냐? “국가의 흥망에는 민초도 책임이 있다.”,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등이 있다. 이 밖에도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말도 있다. 이는 사람의 신용에 대한 요구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진흙에서 자라도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다.) 그 말도 비슷하기는 하구나. 예는 여기까지만 들도록 하자. 방금 다룬 말들은 사람의 봉헌, 애국심, 신용, 정조 등에 대한 요구였고, 이 밖에도 남들과 함께할 때의 원칙, 은인을 대하거나 은혜를 갚는 방법 등이 있었다. 어떤 것은 깊이가 얕고, 어떤 것은 깊이가 있다. 이 중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은 “기꺼이 남을 도우라.”,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마라.”,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는다.”로, 이는 처신 측면의 요구이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사람의 절개와 정조에 관한 요구로서 기본적으로 중국 전통문화의 인의예지신의 범위 안에 있다. 지금까지 전부 몇 가지를 종합했더냐? (21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읽어 보아라.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마라.”, “기꺼이 남을 도우라.”,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 “남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라.”,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하라.”, “물을 마실 때는 우물을 판 사람을 기억하라.”,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부귀에도 미혹되지 않고 가난에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 위세나 무력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온몸을 바쳐라.”, “봄날의 누에는 실을 다 뽑아내야 죽고, 초는 다 타 버려야 눈물이 마른다.”, “국가의 흥망에는 민초도 책임이 있다.”,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 “진흙에서 자라도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다.”) 오늘은 먼저 인류가 덕행 측면에서 종합한 갖가지 좋은 인품에 대해 예습해 보자. 덕행 측면에 대한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각종 말은 사람의 인성과 덕행에 다양한 요구를 했다. 그중에는 은혜를 갚으라는 것도 있고,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것도 있으며,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나 방법에 대한 것도 있고, 사람의 문제나 결점 또는 문제가 있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방법에 관한 것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람에게 선을 그어 주고 요구 기준을 제기한 것이다. 이는 전부 전통문화가 사람의 덕행에 대해 제기한 요구 기준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것들이다. 중국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주 들어 보았으며, 심지어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익숙할 것이다. 전통문화 중 덕행과 관련된 이런 말은 기본적으로 다 인의예지신이라는 범위에 포함된다. 물론 이 범위 밖에도 여러 말들이 있겠지만, 대부분은 인의예지신의 범위 안에 있다. 이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어떤 한 덕행에 관한 말이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구체적으로 교제하지 않을 것이며, 또 그런 말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구체적으로 해부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먼저 전통문화의 덕행과 관련된 말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살아 내라고 요구한 정상 인성의 기준이 어떻게 다른지 예습해 보아라.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어떤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와 확연하게 충돌하더냐? 어떤 말의 사전적 의미가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와 유사성 혹은 관련성이 약간 있더냐? 그런 말들 중 어떤 것이 네가 생각하는 긍정적인 사물이고, 혹은 어떤 것이 네가 하나님을 믿은 후 한때 그 말을 스스로에게 엄격히 요구하고 자신이 진리 추구의 준칙으로 삼아 실행하고 지킨 것이냐? 예를 들어, ‘남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라.’는 말이 너희에게는 익숙하지 않으냐? 하나님을 믿은 후로 그런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남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는’ 행동을 하면 인성이 좋은 거라고, 하나님도 분명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어쩌면 하나님을 믿기 전에 너는 원한을 덕으로 갚는 품행을 갖춘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다만 너 스스로는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거나 그렇게 하지 못하거나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은 후로 그 기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하고, 너에게 상처 준 사람이나 한때 너와 원한이 있던 사람들에게 더 이상 따지고 들지 않으며 용서해 주었을 것이다. 너는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덕행에 관한 말이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예수의 말과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는 말로 스스로를 단속하고자 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진리로 여겨 실행하고 지키면서 원한을 덕으로 갚는 사람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너희는 이런 생각과 태도를 갖고 있느냐? 너희는 어떤 말의 정수가 진리나 하나님 말씀과 비슷하며, 심지어 진리를 대신할 수 있고, 진리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국가의 흥망에는 민초도 책임이 있다.”라는 덕행에 관련된 말은 분별하기 쉬워서 대부분의 사람이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을 미혹하는 번지르르한 구호일 뿐이다. “국가의 흥망에는 민초도 책임이 있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 대한 말이다. 자국민에 대한 국가와 정부의 요구로, 국민들에게 마땅히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고 교육하는 것이다. 이 말은 진리와 부합하지 않고, 근거가 되는 하나님 말씀도 없다. 그러니 결코 진리가 아니며 진리를 대신하지도 못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말은 100% 사탄에게서 나오고 사탄에게서 비롯된 관점이며, 통치 계급을 위해 복무하는 것으로,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와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국가의 흥망에는 민초도 책임이 있다.”라는 말은 절대 진리가 아니고,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요소도 아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이 말을 진리로 여기겠느냐? 명리와 지위를 꾀하고 관직을 얻고자 하는 사람, 통치 계급에 아첨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만이 이 말을 진리로 여겨 실행한다. 이 밖에도 사람이 분별하기 쉽지 않은 말들이 있다. 사람은 그것이 진리가 아님을 알지만, 마음속으로는 옳고 이치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에 기대 살고 그 방식으로 처신함으로써 자신의 도덕 수준과 인격적 매력을 높이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은 인성을 갖췄으며, 비인간이 아니다는 인상을 주려고 한다. 너희는 어떤 말을 분별하기가 힘드냐? (저는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라는 말을 분별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긍정적인 사물로 생각해 은혜에 보답하는 사람을 양심 있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또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받았으면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해 줘야 한다는 의미인데, 긍정적인 사물 같습니다.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또 말해 보겠느냐? (이 밖에도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 인성과 도덕을 갖춘 사람 같습니다.) 또 있느냐?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기가 한 말을 지키고 신용이 있는 것은 좋은 덕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여태까지 그것을 좋은 덕행이라고 여겼다면 지금은 어떠하냐? (그 ‘말 한마디’가 과연 어떤 성질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긍정적인 것인지 아니면 부정적인 것인지 말입니다. 만약 그가 악인이나 적그리스도에게 “저는 반드시 당신을 지켜 줄 것입니다.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고 했으니까요.”라고 하면서 하나님 집에서 그들의 상황을 알아보고 조사할 때, 악인이나 적그리스도를 비호해 준다면 이는 악을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분별하는 것이 옳다. 그 ‘말 한마디’가 어떤 성질의 말인지,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를 보아야 한다. 만약 나쁜 일을 저지르고 악을 행하면서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말을 실행한다면, 악을 행하는 그의 발걸음은 한 필의 준마처럼 내달려 곧장 지옥으로 치달아 끝도 없는 심연에 빠질 것이다. 반면, 그 ‘말 한마디’가 진리에 부합하고 정의감이 있으며 하나님 집의 사역을 지키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라면,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말을 실행하는 것은 옳다. 이러한 일들을 볼 때 전통문화의 말을 반드시 분별할 줄 알아야 하며, 상황과 배경을 보아야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어떤 말들은 분명히 현실에 부합하지 않으며, 잘못된 것이다. 이런 말들은 특히 신중하게 대하되, 사설이나 궤변으로 보아야 한다. 반면 어떤 말들은 특정 배경이나 범위에서만 옳다. 만약 환경과 배경을 바꾼다면 성립하지 않고 틀릴 것이며, 사람에게 해가 될 것이다. 이런 것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중독되거나 해를 입기 쉽다. 전통문화의 말이 사람 눈에 옳게 보이든 틀리게 보이든, 성립하든 성립하지 않든,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사람이 보기에 옳아도 하나님이 보기에 꼭 옳으리란 법은 없다. 또 사람의 눈에 좋은 말로 보여도 실행하면 사람에게 꼭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가 아닌 것은 사람이 실행하든 하지 않든, 쓸 수 있든 없든 모두 사람에게 해가 되니 받아들여서도 사용해서도 안 된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사람의 눈에 옳게 보이는 것, 혹은 패괴된 인류가 옳다고 공인한 것들을 다 진리로 여겨 대하며, 진리로 여겨 지키고 실행한다. 이것이 적절하겠느냐? 이렇게 거짓 진리, 가짜 진리를 실행해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인류가 옳다고 공인하는 것, 진리라고 공인하는 것은 모두 거짓되고 꾸며 낸 것들이며, 영원히 버려야 하는 것들이다. 그럼 너희가 마음속으로 옳고 긍정적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정말 진리가 맞겠느냐? 수천 년간 누구도 그 말들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모두가 옳고 긍정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리가 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진리가 될 수 없다면 그것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진리가 아니다. 만약 사람이 그런 말들을 진리로 보고 하나님 말씀에 섞어 함께 실행한다면 그런 말과 주장들이 진리의 경지에 오를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사람이 어떻게 추구하고 지키든, 하나님은 영원히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패괴된 인류가 사탄에게 속하는 것을 진리나 하나님의 말씀과 한데 섞는 행위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의 사상과 관점에서 생긴 것들은 모두 사탄에게서 비롯되었기에 아무리 좋아도 진리가 아니고, 사람의 생명이 될 수도 없다.
전통문화 중 덕행과 관련된 말들은 사탄에게서 비롯되었고, 패괴된 인류 가운데서 나타났기에 이방인이나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먼저 이러한 것들을 분별하고 버려야 한다. 그런 말들이 부정적인 역할을 하며 방향을 헷갈리게 하고 사람이 그릇된 길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방금 예로 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가 그러하다. 먼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만약 여기에서 임금이 성군이고 긍정적인 인물이라면 그를 옹호하고 따르고 지키는 것은 네게 인성과 덕행이 있고 인품이 고상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반면, 그 임금이 폭군, 암군, 마귀인데 그를 따르고 지키며 저버리지 않는다면, 너의 그 ‘충성’이란 무엇이겠느냐? 어리석은 충성, 눈먼 충성이다. 눈멀고 어리석은 것이니 네 충성은 잘못된 것이고, 부정적인 사물이 된다. 그런 마귀나 마왕에게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을 더 이상 고수해서는 안 된다. 너는 그를 버리고 멀리하고 포기해야 한다. 잘못된 길을 버리고 옳은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계속 마왕에게 충성을 다한다면 너는 마왕의 앞잡이, 공모자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제창하는 사상이나 긍정적인 의미, 가치는 특정 환경이나 배경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봤을 때, 그 말이 무척 정의롭고 긍정적으로 보여도 그것은 특수한 환경과 배경에 국한될 뿐, 모든 환경이나 배경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사람이 맹목적으로, 어리석게 그 말을 고수한다면 방향을 잃고 잘못된 길에 들어설 것인데,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다음 구절은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이다. ‘열녀’란 무엇을 가리키더냐? 정절을 지키는 여인, 한 남편만을 섬기는 여인이다. 그녀가 혼인한 남편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끝까지 섬기고 마음이 변치 말아야 한다. 남편이 죽어도 마지막까지 지조를 지켜야 한다. 이러면 소위 정절을 지킨 열녀인 것이다. 전통문화는 모든 여성에게 정절을 지키는 열녀가 되라고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여성을 대하는 것이 공평하겠느냐? 왜 남편은 몇 번이고 후처를 두는 것이 가능하고, 아내는 남편이 죽어도 재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냐? 이는 남녀의 지위가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만약 여성이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에 얽매여 정절을 지키는 열녀가 되기를 선택한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기껏해야 죽은 후에 열녀비를 하나 세워 줄 뿐인데, 그것이 의미가 있겠느냐? 말해 보아라. 여성의 운명이 가혹하지 않으냐? 남편이 죽었는데 왜 새로운 남편에게 재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냐? 이는 전통문화가 제창한 관점이자 인류가 줄곧 지켜 온 관념이다. 만약 아이들을 남겨 놓고 남편이 죽었는데 그녀 혼자서는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거지가 되어 밥을 빌어먹어야 한다. 하지만 그녀가 아이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살길을 찾고자 재가한다면 오명을 뒤집어써야 하며, 여론의 질책을 받고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과 멸시를 받아야 했다. 그녀는 자식을 무사히 키우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며 사회의 질타를 무릅써야 했다. 이러한 면에서 봤을 때, 그녀가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은 지키지 못했지만, 그녀의 행위나 행동, 그녀가 지불한 대가는 존중받을 만하지 않겠느냐? 적어도 자식들이 커서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으면 그녀를 존중하지, 절대 어머니의 그런 행위를 두고 멸시하거나 손가락질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에게 감사하면서 그런 어머니가 위대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여론은 그렇지 않다. 사회 여론의 시선으로 보면, 그러니까 사람이 제창하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시선으로 보면 그녀는 어떻게 봐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 또한, 그녀는 전통적인 도덕관념을 위배했기에 그녀의 덕행에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럼 자식들이 그녀를 대하는 사상과 관점은 왜 전통문화의 관점과 차이가 있겠느냐? 그녀의 자식들은 생존의 각도로 그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만약 그 여인이 재가하지 않았더라면 자식들은 물론이고, 그녀 자신조차 살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전통 관념을 지켰다면 살길이 없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과 자식들의 생존을 위해 재가를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볼 때, 그녀에 대한 전통문화와 사회 여론의 정죄는 완전히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이는 사람의 사활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통 도덕관념을 지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겠느냐? 어떤 가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고 해치는 것들이다. 피해자인 여인과 그녀의 자식들은 이 일을 절실히 느꼈지만, 아무도 신경 써 주거나 동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힘든 일이 있어도 속으로 꾹 참아야만 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사회가 공평하더냐? 이런 사회, 이런 국가는 왜 이다지도 사악하고 어둡겠느냐? 사탄이 주입한 전통문화가 여전히 사람의 사상을 통제하고,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누구도 이 일을 간파하지 못했다. 이방인들은 여전히 전통문화의 관념과 관점을 고수하면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지금까지도 버리지 않고 있다.
이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을 보자. 어떤 각도에서 보든 이는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속한다. 어째서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말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이는 공허한 이론이며,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사회에서 하나의 여론을 형성하였기에, 수많은 사람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로 비슷한 일을 평판한다. 그럼 사회 여론이 그런 일을 평판하는 시선과 입장의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어째서 재가한 여인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겠느냐? 왜 그런 사람을 비판하고 손가락질하고 멸시하겠느냐? 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너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사실이 임했을 때 너희는 확실히 말하지 못하고 그저 그것이 진리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만 안다. 그러니 내가 알려 주겠다. 내 말이 끝나면 너희는 이 일을 분명히 간파하게 될 것이다. 사회 여론은 여인의 재가라는 그 행위, 그 사건만 두고 평판했기 때문이다. 즉, 그녀의 진정한 인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일만 두고 편협하게 그 여인의 인품을 정의 내린 것이다. 이는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것 아니겠느냐? 사회 여론은 그 여인이 평소에 어떤 인성을 보였는지, 그러니까 그녀가 악인인지, 선량한 사람인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지, 남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해하지는 않았는지, 재가하기 전에 음란한 짓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등을 보지 않는다. 사회의 사람들과 사회 여론이 이런 것들에 근거해 그 여인을 종합적으로 평가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당시 사람들이 그 여인을 평가하는 근거는 무엇이었겠느냐?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 한마디였다. 사람들은 모두 ‘여인은 평생 한 명의 남편하고만 살아야 해. 남편이 죽어도 평생 수절해야 해. 그러게 누가 여자로 태어나래? 당신이 수절하면서 재가하지 않으면 열녀비를 세워 주겠어. 열 개라도 세워 주지. 당신이 아무리 고생해도, 자식들을 키우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당신이 거리에서 밥을 빌어먹어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래도 당신은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을 지켜야 해. 이 말을 지키면 좋은 여인인 거고, 인성과 도덕을 갖춘 거야. 하지만 재가한다면 당신은 나쁜 여인, 음란한 인간인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 말의 속뜻은 무엇이겠느냐? 여인은 재가하지 않아야 좋은 사람이고 정절과 지조를 지키는 사람이며 덕행을 갖추고 인품이 고상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전통문화의 인의예지신에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은 사람을 평가하는 근거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 말을 진리로 여기고,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여겼다. 그 본질은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전통문화가 제시한 요구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는 인품이 떨어지고 덕행이 비천한 사람, 인성이 나쁘고 악랄한 사람으로 정의된다. 여기에 공정성이 조금이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좋은 여인이 되려면 어떤 배경 속에서 어떤 대가를 치러야겠느냐? 네가 좋은 여인이 되겠다면 반드시 평생 한 명의 남편만 둬야 하며, 남편이 죽는다면 수절해야 한다. 자식을 데리고 길거리에서 밥을 빌어먹으며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욕설, 괴롭힘, 모욕을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을 이렇게 대하는 것이 적절하냐? (부적절합니다.) 하지만 인류는 그렇게 한다. 네가 길거리에서 밥을 빌어먹고 노숙하며 입에 제대로 풀칠조차 못 해도 아무도 신경 쓰거나 동정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 자식이 몇 명이라도,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이 굶어 죽어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재가하는 순간 너는 좋은 여인이 아니다. 손가락질과 멸시의 말이 너를 삼킬 것이고, 욕설과 정죄의 말이 쏟아질 것이다. 너를 상대로 못 하는 말이 없을 것이다. 오직 극소수의 친척이나 친구, 자식만 네게 동정하고 동조하는 말을 좀 해 줄 뿐이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겠느냐? 이는 전통문화의 교육이나 영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바로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로 초래된 결과이다. 그럼 이 일에서 무엇을 알 수 있겠느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느냐? 사람의 거짓과 위선, 흉악함이 숨겨져 있다. 여인이 밥도 못 먹고 살아갈 길이 없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다 해도 아무도 동정하지 않을뿐더러 정절을 지키라는 요구만 한다. 그녀가 굶어 죽으면 열녀비를 세워 줄지언정 삶을 도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일에서 인류의 낡아 빠진 사상이 드러나는 한편, 인류의 거짓됨과 흉악함이 드러난다. 어떤 취약 계층이나 불쌍히 여길 만한 사람에게도 동정이나 이해, 도움을 전혀 주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발로 짓밟으면서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황당한 이론과 규례로 사람을 정죄하고 죽인다. 이는 불공정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 말씀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요구에도 위배되며, 동시에 사람의 양심과 이성의 기준에도 위배된다. 그럼 이 여인의 자식들이 이 일을 보는 시선은 공정하겠느냐? 자식들은 어머니가 재가하고 대가를 치른 데서 실익을 얻지 않았겠느냐? 이 일 자체로 봤을 때, 자식들은 어머니를 존중하고 동조할 것이다. 그럼 그 동조는 어떻게 나온 것이겠느냐? 어머니가 그들의 생존을 위해 재가를 선택하고, 그들에게 살길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들의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게 전부다. 만약 그들을 살리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어머니가 재가를 선택하는 것을 찬성하거나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으로서 어머니의 재가를 보는 그들의 시선 또한 진실로 공정하다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사회 여론의 시선으로 보든 자식의 시선으로 보든, 그들이 이 어머니를 대하는 방식과 판단하는 기준은 그 어머니의 진정한 인성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이는 여인의 재가를 대할 때 사람들이 범하는 잘못이다. 이 일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 전통문화에서 언급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진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세상 사람들이 일을 대하는 시선과 사람의 덕행이 좋은지 나쁜지를 바라보는 근거는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전통문화의 관점과 전통문화 속 인의예지신이 사람에게 제기한 요구이다. 그럼 인의예지신이란 무엇이더냐? 그것들은 어디에서 왔더냐? 표면적으로 보면 고대의 명인들이 말한 것이지만, 사실 그 근원은 사탄에게서 온 것이다. 사탄이 사람의 행위를 통제하고 속박하며, 사람의 덕행에 본보기와 모델,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이러한 주장을 제시한 것이다. 사실 그 고대의 명인들은 모두 사탄의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사탄을 위해 봉사하고, 사람을 미혹하는 마귀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의 근원이 사탄에게서 왔다고 말하는 것은 100% 사실에 부합한다.
사람은 다른 이의 도덕성과 인성의 좋고 나쁨을 판단할 때 오직 전통문화의 명언 한마디에만 근거하며, 한 가지 일에서의 행동만 보고 상대의 인품을 규정하고 결론 내린다. 이는 분명 잘못되고 옳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성의 좋고 나쁨을 어떻게 판단해야 정확하고 객관적이며 공정하겠느냐? 판단 원칙과 기준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정확히 말하자면, 판단의 원칙과 기준은 반드시 진리여야 한다. 오직 창조주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권병과 능력이 있다. 패괴된 인류의 말은 진리가 아니고 권병이 없기에 근거나 원칙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사람의 도덕성과 인성의 좋고 나쁨을 판단할 때는 오직 창조주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해야 정확하고 객관적이며 공정하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은 패괴된 인류의 명언으로, 근원 또한 옳지 않다. 그것은 사탄에게서 비롯되었다. 사탄의 말에 근거하여 사람의 인품을 판단하면 잘못된 결론, 불공정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럼 사람의 도덕성과 인성의 좋고 나쁨을 평가할 때는 어떻게 해야 공정하고 정확하겠느냐? 반드시 사람이 일하는 속셈과 목적, 결과를 근거로 해야 하며, 그 일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이 밖에도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그의 시선과 선택을 근거로 하면 100% 정확하다. 그가 반드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게 선택받지 않은 이방인들 중에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인성이 괜찮은 자들도 있는데,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 어떤 사람들보다 인품이 더 좋다.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인 일부 교계 사람들은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었지만, 형제자매들을 접대할 때 늘 교회에 돈을 요구할 궁리만 하고, 형제자매들에게 돈이 없다고 앓는 소리를 내며 돈과 물건을 탐낸다. 또 형제자매들이 접대용 고기나 채소, 음식을 가져다주면 몰래 숨겨 두고 자기 가족들을 먹인다. 이런 사람이 어떠하냐? 인성이 좋으냐? (좋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탐욕스럽고 남의 이익을 점하기를 좋아하며 인격이 비천하다. 반면, 어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인 후 기꺼이 형제자매들을 접대하는데, 교회의 돈을 받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자기 돈을 쓴다. 교회에서 얼마를 주든 한 푼도 쓰지 않고 탐내지도 않으며, 모두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교회에 돌려준다. 또 형제자매들이 접대용 물품을 사서 가져가면 그대로 남겨 뒀다가 그가 접대하는 형제자매들이 먹고 쓰게 하며, 형제자매들이 떠나면 보관해 두었다가 형제자매들이 다시 올 때 꺼내 사용한다. 그는 이 구분이 무척 분명하여 교회의 어떤 물건도 점한 적이 없다. 이 일을 누가 가르쳐 주었겠느냐?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럼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느냐?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느냐? 많은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그는 할 수 있었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인성의 차이 아니겠느냐? 이는 인품의 차이, 덕행의 차이이다. 이 두 부류 사람들은 덕행에서 차이가 있다. 그럼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도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있습니다.) 두 부류 중 어떤 사람들이 진리에 진입하기가 쉽겠느냐? 어떤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할 가능성이 크겠느냐? 덕행이 좋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가능성이 좀 더 크다. 너희는 이렇게 보느냐?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다. 그저 어리석게 규례에 맞춰 종교를 믿은 적이 있는 사람들, 글귀와 도리를 말할 줄 아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고, 이방에서 하나님을 막 믿기 시작해 글귀와 도리를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너희의 이런 관점이 그릇되고 황당하지 않으냐? 나는 너희처럼 보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접할 때, 그가 다양한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종합적으로 본다. 특히 두 부류 사람이 같은 일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보이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본다. 이는 그들의 인성이 어떤지를 더 잘 설명해 준다. 사람을 대하는 이 두 가지 방법 중 어떤 것이 더 객관적이고 공정하겠느냐? 사람의 표면적인 행동이 아니라 본성 본질에 근거하여 평가하는 것이 더 공정하다. 전통문화의 관점에 근거하여 어떤 일에서의 행동을 보고 약점을 잡아 그 사람을 규정하고 결론을 내린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고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는 것이다. 반드시 사람의 인품에 근거해서, 또 그의 일관된 태도와 그가 걷는 길에 근거해서 정확한 평가를 내려야만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사람을 공평하게 대할 수 있다.
오늘 종합한 덕행과 관련된 말들 중 하나님의 말씀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진리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 말이 아무리 전통적이고 긍정적일지라도 진리가 될 수는 없다. 덕행에 관한 말은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바에서 비롯되었으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추구하라고 요구한 진리와는 어떤 관계도 없다. 사람의 덕행에 대한 이 각종 말을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게 말하고 아무리 올바르게 행동하며 아무리 확고하게 지켜도 그것이 진리라는 의미는 될 수 없다. 세상의 숱한 사람이 지키고 믿는 것들일지라도 진리가 되지는 못한다. 거짓말을 만 번 할지라도 그것은 거짓말일 뿐, 영원히 진리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거짓말은 허상이며, 그 안에는 사탄의 간계가 들어 있기 때문에 진리를 대체할 수 없으며, 진리가 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종합한, 덕행에 관한 각종 요구 또한 진리가 될 수는 없다. 네가 어떻게 지키든, 얼마나 잘 지키든 간에 사람들 눈에 좋은 덕행을 가진 자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 눈에도 네가 인성을 지닌 사람으로 보이겠느냐? 꼭 그러리란 법은 없다. 반대로, 만약 네가 전통문화 중 인의예지신의 모든 면면과 조목조목을 더없이 잘, 제대로 지킨다면, 너는 진리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진 것이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그런 덕행에 관한 말을 근거와 준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개를 기울이고 시계를 보는 것처럼 관점이 올바르지 않다. 그러니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전부 진리나 하나님의 요구와 무관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또한, 그것은 네가 준행해야 하는 하나님의 도와 거리가 멀며, 심지어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완전히 상반된다고 할 수 있다. 네가 그 덕행에 관한 말들을 지키고 소중히 여길수록 하나님은 너를 싫어할 것이며, 너는 진리나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질 것이고, 하나님을 더더욱 적대시하게 될 것이다. 네가 덕행에 관한 그런 말들 중 어떤 것이 어떻게 옳다고 생각하든, 언제까지 지키든, 그것은 네가 진리를 실행한다는 의미가 될 수 없다. 네가 전통문화 중 어떤 행위 기준을 옳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든 그것은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가 아니며, 절대 진리가 될 수 없고, 진리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나는 네게 한시바삐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권하겠다. 네가 지키는 그것들은 어디에서 왔느냐? 네가 그것들을 사람을 판단하고 사람에게 요구하는 원칙과 기준으로 삼은 것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것이냐? 진리에 근거한 것이냐? 네가 전통문화의 그 요구를 실행하여 어떤 결과가 생겼는지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느냐? 그것이 진리와 정말 관계가 있느냐? 너는 전통문화의 그 요구를 일 처리 근거와 준칙, 긍정적인 사물로 삼는데, 그것이 진리에 어긋나지는 않는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건 아닌지, 진리를 위배하는 건 아닌지 등을 분별하고 해부해야 한다. 만약 네가 언제나처럼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그 관점과 주장들을 지킨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그것에 미혹되고 속아 넘어간다면 네 결말과 결과는 뻔하다. 너는 전통문화의 관점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면,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덕행과 관련된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각종 말과 요구를 해부해야 한다. 어떤 것이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인지, 어떤 것이 네가 줄곧 지켜 온 것인지, 어떤 것이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와 준칙으로 삼은 것인지 해부해야 할 것이다. 그다음 네가 지켜 온 그것들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요구와 대조하여 그 전통문화에 속하는 것들이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와 모순되고 대립되지는 않는지 보아라. 정말 문제를 발견했다면 한시바삐 그 전통문화에 속하는 것들이 도대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어떤 부분이 황당한지를 해부하여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궤변인지 알게 되고 실행의 길이 생길 것이며, 네가 걸어야 할 길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진리를 구하면 잘못을 깨닫고 올바른 길로 되돌아올 수 있다. 인류 가운데서 소위 사람의 품행 방면에 대한 이러한 요구와 주장이 아무리 규범적이고 대중의 입맛과 관점, 염원, 나아가 이익에 부합해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너는 이 점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진리가 아닌 이상, 되도록 빨리 그것을 부정하고 버려야 하며, 그 본질은 무엇인지, 사람이 그것으로 살아갈 때 과연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해부해야 한다. 그것이 정말 너에게서 진실한 회개를 이끌어 낼 수 있겠느냐? 네가 자신을 인식하도록 해 줄 수 있겠느냐? 네가 진정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게 할 수 있겠느냐? 전부 불가능하다. 그것은 너를 외식하는 사람,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 되게 할 뿐이며, 너를 더 교활하고 사악하게 만들 뿐이다. “예전에 저희는 전통문화에서 나온 것들을 고수하면서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저희의 모습을 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사실 저희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어떤 악을 행할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지금 좋은 일을 좀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위장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전통문화가 요구하는 좋은 행위를 포기한다면, 어떤 일들을 해야 할까요? 어떤 행동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까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질문이 어떠하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떤 진리들을 실행해야 하는지도 모른단 말이냐?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진리를 선포했고, 사람이 실행해야 할 진리는 더없이 많거늘 어째서 진리를 실행하지는 않고 하필 좋은 사람인 척하고, 외식하는 사람이 되려 한단 말이냐? 너는 어째서 위장하려는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전통문화에는 좋은 것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라는 것이 그렇지요.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이는 사람이 마땅히 실행해야 하는 바인데 왜 버려야 하지요? 또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말도 있습니다. 얼마나 의롭고 영웅 같습니까! 그런 벗이 있다면 삶 또한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 밖에도 ‘봄날의 누에는 실을 다 뽑아내야 죽고, 초는 다 타 버려야 눈물이 마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는 무게감이 있습니다. 풍성한 문화를 담고 있지요! 저희더러 이렇게 살지 말라고 하신다면, 무엇에 기대 살아가라는 말씀입니까?”라고 말한다. 네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지난 몇 년간 설교를 헛들은 것이다. 처신할 때 적어도 양심과 이성의 기준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니 너는 진리를 전혀 얻지 못한 것이고, 정말이지 그동안 헛산 것이다.
종합하자면, 전통문화 중 덕행에 관련된 말들을 열거하긴 했어도 그 목적은 이러한 것들이 그저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며, 사탄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것만이 아니다. 나아가 이러한 것들의 본질이 거짓되고 가식적이며 사람을 기만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게 하려는 것이다. 설령 사람이 이러한 행위를 갖추고 있다고 할지라도 정상 인성을 살아 냈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가식적인 행위로, 사람의 속셈과 목적을 가리고, 또 패괴 성품과 본성 본질을 가리는 것이다. 그 결과, 인류는 점점 더 가식적이고 기만적으로 변하고, 그리하여 패괴된 인류는 갈수록 더 패괴되고 사악하게 변한다. 패괴된 인류가 지키는 전통문화의 도덕 기준은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와 전혀 맞지 않으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친 어떤 말씀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 만약 네가 마음속으로 여전히 전통문화에 속한 것들을 고집한다면 그것에 철저히 미혹되고 해를 입을 것이다. 네가 어떤 일에서 전통문화를 지키고 전통문화의 원칙과 관점을 준수한다면, 그 일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진리를 위배하며 하나님과 다른 길을 갈 것이다. 네가 덕행에 관련된 말 중 어느 한 조목이라도 지키고 충성하고, 그것을 준칙이나 근거로 삼아 사람과 일을 대한다면, 거기에서 잘못을 저지를 것이다. 만약 사람을 판단하고 심하게 해칠 경우 죄악을 저지르게 된다. 언제나 전통문화의 그 덕행 기준으로 모든 사람을 판단한다면 네가 정죄한 사람, 억울하게 만든 사람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고, 나아가 너는 하나님을 정죄하고 대적하게 될 것이다. 그럼 너는 죄의 원흉이 된다. 보아라. 지금 모든 인류가 전통문화의 교육에 영향을 받아 점점 더 사악해지고 있지 않느냐?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지 않느냐? 사탄 마귀에게 속한 사람일수록 더욱 숭배받고,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탄압받고 배척당하고 정죄되며,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된다. 이것이 사실 아니더냐? 너희는 앞으로 오늘 교제한 이 말씀들을 수시로 꺼내 교제해야 한다. 교제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일단 내려놓고, 이를 수 있는 것을 교제하여 이해해라. 그 말씀들을 명확히 교제하여 머릿속으로 완전히 이해가 되면 정확히 진리를 실행하여 실제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 진리인지, 어떤 것이 진리가 아닌 전통문화인지 하나하나, 조목조목 분명히 분별하면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길이 생길 것이다. 결론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모든 진리를 하나하나 교제하여 이해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며 동일한 견해와 인식을 갖게 된다. 또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무엇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무엇이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런 내용을 교제하여 분명하게 이해해야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그다음, 실행해야 하는 진리 원칙을 찾으면 하나님이 제시한 행위 기준에 이를 수 있고, 최소한 사람다운 모습을 얼마간 갖출 수 있다. 또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할 수 있으면, 오롯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부합할 수 있다.
2022년 3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