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4)
일단 한번 돌아보겠다. 지난번 예배 때는 어떤 내용을 교제했느냐? (지난번 예배 때는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라는 화제에 관해 교제하셨습니다. 먼저 ‘사람이 좋고 옳다고 여기는 것이 진리가 아닐진대, 사람은 왜 그것들을 진리로 여겨 추구하는 것이냐?’라는 질문에 세 가지 측면의 원인을 나열하셨습니다. 그중 첫 번째 측면의 원인에 대해 중점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지난번 예배 때는 주로 첫 번째 측면의 원인에 대해 교제하면서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 번째는 좋은 행위였고, 두 번째는 좋은 덕행이었다. 또 좋은 행위로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 여섯 가지 예를 들었다. 좋은 덕행에 대해서는 따로 교제하지 않았다. 어떤 문제들은 교제를 마친 후 돌이켜 보면서 교제한 진리와 원칙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종합해서 윤곽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진리를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지난번에 교제한 내용에는 큰 항목이 있었고, 예로 든 세부 조목이 있었다. 언뜻 많아 보이지만, 사실은 큰 항목 안에서 몇몇 세부 내용을 교제한 것뿐이다. 이 세부 내용들은 또 몇 갈래로 나뉘는데, 이렇게 분류하여 교제하면 윤곽이 좀 더 분명해진다. 한편, 좋은 행위로 여섯 가지 예를 들었지만, 하나씩 구체적으로 교제하지는 않았다. 그중 교양 있고 사리 밝은 태도는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전형적인 예로서, 이 예를 상대적으로 많이 교제했다. 나머지는 이것과 유사하니, 너희가 동일한 방식으로 해부하고 분석하면 된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교제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짤막한 이야기를 하나 해 주겠다. 너희는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느냐? (좋아합니다.)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리 피곤하지 않고, 신경을 집중할 필요가 없으며, 압박감이 상대적으로 작은 데다가 재미도 있다. 그러니 잘 들어 보아라. 이 이야기가 전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 들으면서 왜 이 이야기를 했는지, 이 이야기가 내포하고 있는 구체적인 중심 사상은 무엇인지,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이 어떤 실제적인 것들을 얻을 수 있는지 묵상해 보아라.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는 샤오샤오와 샤오지의 이야기이다.
샤오샤오와 샤오지의 이야기
샤오샤오는 최근 눈이 불편했다. 시야가 뿌옇고 빛에 대해 민감하고, 바람이 불면 눈물이 나고 이물감이 느껴지는 등의 증상이 나타났는데, 눈을 비벼도 소용이 없었다. 샤오샤오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여태까지 눈에 질환이 생겼던 적이 없는데. 시력도 괜찮았고. 그런데 오늘은 왜 이럴까?’ 거울에 비춰 봐도 예전과 다른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좀 눈이 충혈되고 실핏줄이 보일 뿐이었다. 샤오샤오는 답답하고 마음이 다소 편치 않았다. 처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증상이 점점 더 자주 나타나자 자기도 모르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 볼까? 아니면 비슷한 증상에 대해 찾아볼까? 자료를 찾는 건 너무 번거로워.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확신할 수도 없고. 아무래도 병원에 가 보는 게 속 시원하겠어. 의사 말을 들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그래서 그는 병원에 갔지만, 검사를 마친 후에도 이렇다 할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의사는 통상적인 조치로 안약을 처방하면서 눈을 보호해야 하니 과로하지 말라는 당부만 할 뿐이었다. 눈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집에 돌아온 후, 그는 의사의 당부대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안약을 정량 사용했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증상이 좀 완화되었다. 가슴을 누르고 있던 바윗덩어리가 마침내 사라진 것 같았다. 약으로 치료가 가능할 정도면 큰 병이 아니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자 그의 눈은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갔다. 약용량을 늘리자 증상이 좀 완화된 것 같았지만, 며칠 안 가 다시 처음처럼 불편해졌다. 게다가 상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증세는 점점 더 빈번해졌다. 샤오샤오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제 어떡하지? 의사한테 처방받아 온 약으로 해결이 안 되잖아. 내 눈에 정말 뭔가 큰 문제가 있는 걸까? 그냥 무시하면 안 될 것 같아.’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기로 결심한 샤오샤오는 의사에게 눈과 관련된 자문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자기 증상과 관련된 동영상이나 자료를 검색해 봤는데, 대부분 그런 문제가 나타나는 건 눈을 너무 혹사해서라고, 눈 건강에 신경 쓰고 올바르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 말들이 의미도 없고, 자기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다고 생각한 샤오샤오는 계속 자료를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눈에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 건 안구 충혈이나 녹내장의 전조일 수 있고, 백내장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자료를 보았다. ‘녹내장’, ‘백내장’이라는 단어를 본 샤오샤오는 머리가 웅 하고 울리는 듯하더니 눈앞이 캄캄해져 쓰러질 뻔했다. 심장이 미칠 듯이 뜀박질했다. ‘하나님,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설마 제가 정말 녹내장이나 백내장에 걸리는 겁니까? 백내장에 걸리면 수술을 해야 하고, 녹내장에 걸리면 시력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끝장 아닌가요? 저는 아직 젊습니다. 정말 눈이 멀어 장님이 된다면 남은 세월을 어떻게 살아간단 말입니까? 더는 희망이 없는 것 아닐까요?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녹내장’, ‘백내장’이라는 단어를 보자 더는 앉아 있을 수가 없었고, 마음은 더욱 심란해졌다. 샤오샤오는 더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앞으로의 날들을 어떻게 직면해야 할지 서글프고 막막했다. 샤오샤오는 그 일로 완전히 절망에 빠졌고, 삶의 의욕을 잃었으며, 본분을 이행할 때도 힘을 내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병원에 가고 싶지도, 다른 이에게 자신의 눈 문제를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자기가 곧 녹내장이나 백내장에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기운을 잃은 샤오샤오는 그렇게 소극적인 상태 속에서, 또 막막함 속에서 하루, 또 하루를 보냈다.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용기가 나지 않았고, 앞날을 계획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에게 미래는 너무도 잔인하고 가슴 아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매일 소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태로 살면서 기분이 극도로 저하되었다.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도 싫었으며, 다른 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더더욱 원치 않았다.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샤오샤오는 문득 생각했다. ‘이런 상태는 안 좋은 것 같아. 앞날이 막막하고 게다가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지 않아 내가 이런 병에 걸렸는데, 왜 열심히 본분을 이행해야 하지? 인생은 아주 짧다고. 그런데 나는 왜 눈 상태가 괜찮을 때 내가 좋아하는 일을 더 많이 하고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 거야?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거지? 왜 나 자신을 괴롭히고 홀대하는 거냐고?’ 그래서 샤오샤오는 매일 먹고 자고 일하는 시간 외에 남는 시간을 모두 게임을 하고 동영상이나 드라마를 보는 등 인터넷을 하는 데 쏟아부었다. 외출할 때도 끊임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매일 온라인 세계에 빠져 지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눈이 점점 더 불편해지고 증상이 심각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면 안약을 한 방울 떨어뜨려 증상을 좀 완화시킨 뒤 다시 인터넷에 빠져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았다. 이런 방식으로 마음속 깊은 곳의 공포와 두려움을 달래고 시간을 때우며 하루하루를 보낸 것이다. 눈이 불편하고 증상이 심각해졌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샤오샤오는 무의식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나처럼 눈을 쓰는데 왜 저들은 충혈되거나 수시로 눈물을 흘리거나 이물감을 느끼지 않는 거지? 왜 나만 이런 병에 걸린 거야? 하나님은 사람을 너무 차별하시는 것 아닐까?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지켜 주지 않으신 거야? 하나님은 불공평해! 다른 사람들은 왜 다 그렇게 운이 좋은 걸까?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말이야. 그런데 왜 나는 아닌 거야? 왜 하필 나한테 이렇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거냐고!’ 샤오샤오는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인터넷에서 놀 거리를 찾아 그 원망과 분노를 풀어 버리려 했다. 그는 눈병이 하루빨리 사라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인터넷에 몰입해도, 기분을 해소하려고 할수록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더 줄어들었고 자신이 너무 운이 나쁘다고 생각되어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원망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흘렀지만, 샤오샤오의 눈병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그는 점점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샤오샤오는 더더욱 막막했고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계속되었지만,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었고 그 또한 어떤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막막하고 의기소침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이것이 샤오샤오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이제 샤오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샤오지 역시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샤오샤오와 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두 눈의 시야가 흐릿해지고 수시로 붓기가 느껴졌으며, 시리고 이물감이 들었다. 눈을 비벼도 전혀 좋아지는 감이 없었다. 샤오지는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는 항상 눈이 좋았고, 안과에 가 본 적도 없어. 그런데 요즘 들어 왜 이러는 걸까? 설마 눈에 문제가 생긴 걸까?’라고 생각했다. 거울에 비춰 봐도 예전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저 눈이 좀 화끈거렸고, 눈을 세게 깜빡이면 시린 느낌이 심해지면서 눈물이 났다. 샤오지는 눈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야. 무시해서는 안 돼. 하지만 그렇게 불편한 느낌은 없고, 내 삶이나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도 않잖아. 가뜩이나 교회 사역이 바쁜 시기인데 병원에 가면 본분 이행에 지장이 생길 거야. 좀 한가해지면 검색부터 해 보자.’ 그렇게 결정한 그는 본분을 이행하는 틈틈이 관련된 정보를 찾았고, 자기 눈에 큰 문제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저 눈을 많이 써서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것뿐이었다. 눈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적절히 관리하며 제대로 신경 쓰면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여기까지 확인한 샤오지는 무척 기뻤다. ‘큰 문제가 아니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올바르게 눈을 쓰고 관리하라고 하니까, 올바른 방법을 찾아서 눈을 원래대로 회복시키자.’ 샤오지는 다시 관련 정보를 찾아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골랐다. 그리고 그 후로는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 외에도 눈 건강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고, 자료에서 본 대로 매일 눈을 관리했다. 그렇게 노력하는 한편, 증상이 좀 완화되지 않았는지 주의를 기울였다. 한동안의 노력과 시도 끝에 샤오지는 몇몇 방법들이 주효한다고 생각했다. 또 어떤 방법들은 이론적으로는 괜찮아도 실제로 적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방법들은 적어도 그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샤오지는 그동안의 노력을 종합해 자신에게 맞는 눈 관리 방식을 몇 가지 선택한 다음, 매일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올바르게 눈을 쓰는 연습을 하고 눈 관리를 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정말 눈 상태가 점점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예전에 나타나던 충혈이나 눈 시림, 화끈거림 등의 증상이 점점 완화되고 있었고, 증상이 나타나는 빈도도 줄어들었다. 샤오지는 한시름 내려놓으며 ‘하나님의 인도에 감사드립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자 인도하심입니다.’라고 생각했다. 눈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증상도 완화되었지만, 샤오지는 눈 관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올바르게 눈을 쓰고자 노력했다. 얼마 안 가 샤오지의 눈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샤오지는 눈 관리 방법을 알게 됐고, 어떻게 올바르게 눈을 쓰는지, 또 어떻게 올바르게 생활하는지를 배웠다. 인생 경험에 올바른 생활 상식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샤오지는 무척 기뻤다. 우여곡절과 비일상적인 일을 겪었지만, 마지막에는 그로 인해 귀한 삶의 경험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눈이 불편하다고, 눈이 붓고 시리다는 말을 할 때마다 샤오지는 자신의 경험과 방법을 있는 그대로 알려 주었다. 샤오지의 도움 덕에 눈에 증상이 나타난 사람들도 올바른 눈 사용법과 관리법을 배우게 되었다. 샤오지는 무척 기뻤으며, 주변 사람들도 샤오지에게서 많은 도움을 얻었다. 그렇게 샤오지와 주변 사람들은 일상적인 시간을 보내면서 인성 생활에 반드시 갖춰져야 할 상식을 갖추게 됐으며, 모두 함께 사역하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즐겁고 행복하게 지냈다. 샤오지는 눈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막막해하지 않았고, 자신이 불운하다며 원망하는 법도 없었다. 자료를 검색할 때 그 역시 샤오샤오가 본 것과 같은 무서운 정보를 보았지만, 가슴에 담아 두지 않고 긍정적이고 올바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똑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샤오샤오는 계속 의기소침해져서 무기력과 막막함 속에 빠졌고, 샤오지는 낙담하거나 막막해하거나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하기는커녕 그 가운데서 도움이 되고 긍정적이며 올바른 생활 태도를 얻어 자신은 물론 남들에게까지 도움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샤오샤오와 샤오지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이해가 되느냐? 샤오샤오와 샤오지, 이 두 사람 중 너희는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느냐? (샤오지가 마음에 듭니다.) 그럼 샤오샤오는 왜 별로이냐? (그는 일이 닥쳤을 때 올바로 대하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대항했습니다.) 소극적으로 대항하는 것은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구해 해결하는데, 그는 진리를 구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대항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는 스스로 파멸을 초래하는 것이다. 지금은 정보 기술이 발달한 시대지만, 이 사탄의 세상에는 도처에 거짓말과 기만이 존재하며, 온통 거짓말과 기만으로 점철되어 있다. 사람은 이 혼잡하고 어수선한 세상 속에서 어떤 일을 대하든, 어떤 정보를 대하든 지혜와 예지, 예민함을 발휘하여 분별해야 한다. 또한, 갖가지 정보를 엄격하게 선별하고 올바른 입장을 가져야지, 어떤 정보도 너무 쉽게 믿거나 나아가 너무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탄의 세상 속에서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게다가 거짓말하는 사람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며, 말한 것으로 끝이다. 이 세상에 거짓말을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없고, 기만행위를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없다. 사람의 마음은 예측하기 어렵고, 거짓말하는 사람들 뒤에는 항상 속셈과 목적이 있다. 예를 들어, 네가 병원에 가면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환자분의 병은 치료가 시급합니다.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향후 암으로 발전할 수 있어요!” 그럼 간이 작은 사람은 덜컥 겁을 먹고 “아이고,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면 빨리 치료해야겠네요!”라고 말한다. 그 결과, 치료하면 할수록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다가 결국 정말 입원하게 된다. 사실,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은 아직은 암이 아니라는 의미지만, 너는 그것을 지금 당장 암으로 간주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소리로 잘못 받아들였다. 이것이 죽음을 자초하는 것 아니겠느냐? 암으로 간주하고 치료하면 치료가 거듭될수록 더 빨리 죽을 뿐인데, 네가 살아 있는 날이 길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현재 네 병은 암이 아니다. 그런데 왜 치료하지 않을 경우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의사가 있겠느냐? 그들의 목적은 돈을 버는 데 있다. 즉, 네가 큰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치료받게 하려는 것이다. 작은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치료받지 않을 테고, 그럼 돈을 벌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많은 의사가 진찰을 하면 귀신이 사람을 물고 늘어지듯 환자를 물고 늘어지면서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이는 많은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일상적인 수법이다. 먼저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유명하고 진찰을 잘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치료했고 무슨 질환을 고쳤는지, 의사 경력이 얼마나 되는지 늘어놓으며 네 신뢰를 사서 착실히 앉아 자신의 치료를 받게 한다. 그 후, 너에게 곧 어떤 큰 병에 걸릴 거라고,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정말 그 병 때문에 죽겠느냐? 반드시 그러리란 법은 없다. 사람의 생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의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다. 의사는 사람을 속일 때 종종 이런 수법을 쓴다. 간이 작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여기저기 의학적 조언을 구하고 의사에게 확진을 받고자 하며, 의사가 암 발병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바로 믿고는 한시바삐 치료를 받아 암으로 죽는 일을 피하고자 한다. 이는 제풀에 놀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의사에 관한 일은 말하지 않겠다. 샤오샤오와 샤오지 두 사람에 관해 계속 이야기해 보자.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그들의 각도와 관점,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샤오샤오는 그야말로 소극적인 자다. 반면, 샤오지는 일이 닥쳤을 때 올바로 대할 줄 알며 정상 인성의 이성과 판단력을 갖추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직면하면서 본분 이행을 이어 나갔다. 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부류이다. 샤오샤오는 일이 닥치자 자포자기하면서 올바른 방식이나 방법을 찾아 대처하지 않았다. 게다가 상황을 분별하지도 못한 채 바보 같고 어리석고 고집스럽고 강퍅했으며, 또한 무척 악독했다. 그는 무슨 병에 걸리거나 어려움이 닥치거나 좋지 않은 일이 닥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모두 그런 일이 닥치기를 바랐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며 분노를 발산하고자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발산하고 화풀이할 용기는 없어 자기 자신에게 발산하고 화풀이했다. 이는 흉악한 성품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좀 닥쳤다고 원망하고 증오하며 질투하는 것이 바로 흉악함이다. 샤오지는 일이 닥쳤을 때 정상 인성의 이성과 판단력을 보였고, 정상 인성에 마땅히 지녀야 할 지혜와 선택을 보여 주었다. 비록 샤오샤오와 같은 병에 걸리기는 했어도 마지막에 샤오지는 문제를 해결했고, 샤오샤오의 문제는 줄곧 해결되지 못한 채 악화되기만 했다. 샤오샤오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그것은 육적인 질병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성품이 드러난 것이다. 그의 완고함과 강퍅함, 어리석음, 악독함이 드러났다는 말이다. 이 둘에게는 이런 차이가 있다. 만약 너희가 이 둘의 생활 방식과 일을 대하는 태도, 방법을 더 세부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교제하며 스스로에게 대입해 보고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샤오지처럼 긍정적인 측면에서 진입하여 삶을 올바로 대하는 한편,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샤오샤오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옳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마땅히 이렇게 추구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어서, 지난번 예배 때 교제한 내용을 되짚어 보도록 하겠다.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 중 첫 번째 내용은 좋은 행위였다. 우리는 이에 관해 여섯 가지를 나열했는데, 전부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것이자 실생활 속에서 사람이 좋아하는 ‘좋은 행위’였다. 말해 보아라. 어떤 것들이더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이 있었습니다.) 더 많은 예를 들지는 않았다. 각국의 전통문화에는 중국 전통문화에서 종합해 낸 이 여섯 가지 대표적인 좋은 행위와 다른 것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하나씩 열거하지는 않겠다. 지난 시간에는 이 여섯 가지에 관해 구체적인 내용을 교제하고 해부하였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이 겉면의 좋은 행위들은 인성 안에 있는 긍정적인 것들을 의미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의 성품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또한,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를 살아 낸다는 의미 역시 절대 될 수 없다. 이는 사람이 볼 수 있는 외적 행위, 간단히 말해 사람의 외적 태도에 불과하다. 그런 겉면의 태도와 표출은 그저 사람들이 서로 교제하고 함께 지내며 생활할 때의 예절과 관련된 것일 뿐이다. 예절과 관련된 것이란 무슨 의미겠느냐? 가장 표면적인 것, 사람이 편하게 보는 것으로, 사람의 본질이나 사상, 관점, 긍정적인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를 의미하지 않으며, 나아가 사람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표면적 행위에 대한 인류의 이 요구와 판단 기준들은 그저 사람이 이해하고 해낼 수 있는 예절과 관련된 것일 뿐, 사람의 본질과는 어떤 관계도 없다. 어떤 사람이 겉보기에 얼마나 상냥하고 친절하든, 얼마나 가까이하기 쉽든, 겉으로 살아 내는 행위가 얼마나 호감과 존중, 경모, 숭배를 받든, 이런 것들은 그가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가 될 수 없으며, 그의 본성 본질이 선량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며 정의감 있다는 의미도 될 수 없다. 물론, 그가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사람이 종합해 낸 그런 좋은 행위들은 그저 인류가 다른 생물과 구별되기 위해 제창한 외적 태도이자 살아 냄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등의 좋은 행위는 한 사람이 외적으로 꽤 단정하고 예의가 있으며, 교육 수준이 높고 교양을 갖췄다는 것을, 동물처럼 규율도 모르는 것은 아님을 의미할 뿐이다. 사람은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면 손이나 티슈로 입가를 닦아 청결을 유지한다. 반면, 개는 밥을 먹고 물을 마신 후 네가 입을 닦아 주려고 해도 싫어한다. 동물은 그러한 것들을 모른다. 그럼 사람은 어째서 알겠느냐? 사람은 ‘고등 동물’이기 때문에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런 좋은 행위들은 인류라는 생물종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데 사용되며, 인류라는 생물이 다른 하등 생물들과 차이를 갖게 해 줄 뿐, 사람으로서 처신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다시 말해, 네가 표면적으로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과 같은 몇 가지 요구 기준과 좋은 행위를 갖추었다고 해도, 그것이 네가 인성과 진리를 갖추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절대 그런 의미가 될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그것은 그저 너라는 사람이 체계적인 행위 교육과 예의범절 교육을 받은 후 말과 표정, 행동거지 등의 여러 측면에서 어느 정도 규범화되었으며, 동물보다 나아져서 어느 정도 사람다운 모습을 갖게 됐다는 뜻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며, 심지어는 진리 추구와 어떤 상관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네가 그런 좋은 행위들을 갖췄다고 해도, 그것은 네가 진리 추구의 조건을 갖췄다는 것은 아니며, 이미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진리를 얻었다는 의미는 더더욱 될 수 없다. 그런 의미는 전혀 없다.
개나 고양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녀석들이 꽤 귀여우며, 어느 정도 선을 지킨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어떤 새끼 고양이는 주인 방에 들어가고 싶을 때, 일단 방 앞에서 야옹거린다. 주인이 들어오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들어가지 않으며, 주인이 “들어와도 돼.”라고 말해야 들어간다. 고양이는 이러한 선을 알기에 문 앞에서 먼저 주인의 동의를 구한다. 이는 일종의 좋은 행위 아니겠느냐? 동물조차도 이러한 면을 갖추었는데, 사람이 그 정도의 좋은 행위를 갖추었다고 동물보다 얼마나 더 낫겠느냐? 이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상식이며, 교육받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일이다. 그런 좋은 행위는 사람에게 상대적으로 편하고 안정된 기분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런 좋은 행위를 살아 내는 것이 인성의 품질과 본질을 의미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저 일을 처리할 때 갖춰야 할 규율과 방식일 뿐, 인성의 품질이나 본질과는 어떤 관계도 없다. 예를 들어, 고양이와 개의 공통점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먹을 것을 주면 친밀함과 감사의 뜻을 드러내며, 그런 행동, 행위를 보일 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고양이는 쥐를 잡는 데 특화되어 있고, 개는 집을 지키는 데 특화되어 있다. 고양이는 언제든 주인을 떠날 수 있으며, 재미있는 곳에 가면 주인을 잊어버리고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개는 영원히 자기 주인을 떠나지 않는다. 개가 너를 주인이라고 인정하면, 나중에 주인이 바뀔지라도 너를 알아보고 주인으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품행과 본질 면에서 나타나는 개와 고양이의 차이이다. 이제 사람에 대해 말해 보겠다. 사람이 좋은 행위라고 여기는 것들, 예를 들어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 몇 가지는 다른 생물보다 고차원적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생물들보다 고차원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표면적인 행위이자 규율일 뿐이다. 또한,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여 사람을 다른 생물이나 동물과 다르게 하는 행동에 불과하다. 사람은 그런 좋은 행위들이 있기에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고, 혹은 낫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어떤 부분에서는 동물보다 못하다. 예를 들어,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을 보자. 동물계에서 늑대 무리는 사람보다 더 낫다. 늑대 무리는 누구의 새끼든 성체(成體)들이 함께 보살펴 주며, 괴롭히거나 해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 부분에서 사람은 늑대보다 못하다. 너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 사람이 정말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평범한 사람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 사람은 이 부분의 좋은 행위를 갖추지 않았으며, 이런 인성이 없다. 예를 들어, 아이의 부모가 곁에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아이에게 무척 상냥하고 친절하거나 가까이하기 쉬운 태도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부모가 곁에서 사라지면 귀신의 몰골이 드러난다. 아이가 말을 걸어도 신경 쓰지 않으며, 마음에 안 들 경우 학대까지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부덕한 행위이냐!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아동 유괴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이는 세계적인 문제가 되었다.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행위를 사람은 갖추지 못했으며, 어린아이를 괴롭히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말해 보아라. 여기에 인성이 있겠느냐? 그러면서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척하니, 전부 외적인 허상이다. 어째서 이 예를 들었겠느냐? 인류가 좋은 행위들을 종합해 내고 사람의 행위에 그런 요구 기준들을 제시했을지라도 사람이 해낼 수 있든 없든, 사람이 좋은 행위를 얼마나 갖추었든, 사람의 패괴된 본질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준칙은 완전히 패괴된 인류의 사상과 관점에서 비롯되며, 패괴 성품에 의해 결정된다. 인류가 종합해 낸 요구 기준을 모두가 공인할지라도, 그것이 좋고 높은 기준일지라도, 사람이 그것을 해낼 수 있겠느냐? (해낼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이다. 표면적으로 좀 좋게 행동하여 보상을 받고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해도 거기에는 위장과 기만의 불순물이 들어가 있다. 사람은 얼마간 좋은 일을 하는 건 쉽지만 평생 하는 건 어렵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렵겠느냐? 그러므로 사람이 말하는 소위 좋은 기준, 공인하는 기준은 아무도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전부 과장이고 거짓이고 허구이다. 표면적으로 어느 정도 행하고 좋은 행위를 갖출 수는 있다고 해도, 즉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과 같은 몇 가지를 사람이 해내고 갖출 수 있다고 해도, 그 또한 단기간만, 혹은 한순간이나 한때의 상황에서 필요할 때만 해낼 수 있을 뿐이다. 지위나 체면, 돈, 이익, 나아가 운명이나 앞날과 관련되는 순간, 사람의 본성과 흉악한 모습이 드러난다. 그것은 교양 있고 사리 밝거나 온화하고 우아하거나 점잖고 예의 바르거나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거나 상냥하고 친절하거나 가까이하기 쉬운 이미지가 아니라 암투를 벌이고 속고 속이고 서로 모함하고 해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런 일은 너무도 많이 일어난다. 설령 친구나 친척, 심지어는 부자지간에도 이익과 지위, 권력 때문에 서로 목숨 걸고 싸우는 지경이다. 여기에서 인간 세상의 참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은 한때의 상황에서 나온 산물로, 누구도 진정으로 해내지는 못한다. 심지어는 중국인이 숭배하는 성인이나 명인들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설교나 이론은 모두 황당한 것, 그야말로 헛소리에 속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개인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여 해결할 수 있으며,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가 갖춘 진리 실제는 인류가 공인하는 그런 좋은 행위의 기준보다 높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이익이라는 관문을 넘어서지 못하니, 진리를 실행하지도 못한다. 그는 좋은 행위라는 이 규례와 관련된 것조차 지키지 못한다. 그러니 그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무엇을 근거와 준칙으로 삼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가 아니라 규례, 도리, 사탄의 철학과 법칙을 근거와 준칙으로 삼는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이익만 좇으니 당연히 진리를 실행할 수 없고, 좋은 행위조차 지키지 못한다. 꾸미고 싶어도 꾸미지 못하고,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는 자기 이익을 위해 싸우고 다투고 뺏으며, 음모와 간계를 쓰고 기만행위를 하며, 남을 괴롭히고, 심지어는 죽일 수도 있다. 이 흉악한 일들을 모두 할 수 있다. 이는 본성이 드러난 것 아니겠느냐? 본성이 드러날 때, 사람들은 그가 말하고 일을 처리하는 속셈이 무엇인지, 무엇에 근거하는지 쉽게 간파할 수 있으며, 그가 완전히 사탄의 철학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가 사탄의 철학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 “푸른 산이 있는 한 땔나무 걱정은 없다.”, “도량이 좁으면 군자가 아니요, 배짱이 없으면 장부가 아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그 사람의 방법으로 그 사람을 다스리다.” 등 사탄의 논리와 법칙이 그의 내면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 사람이 이러한 것들로 살아갈 때,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등의 좋은 행위는 위장의 가면이 되어 허상으로 변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사람이 살면서 진정으로 기대는 근거와 법칙이 진리가 아니라 사탄이 주입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지닌 최소한의 양심과 도덕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익과 얽히는 순간, 그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그때, 사람들은 그의 진면목을 보고 놀라서 말한다. “저 사람, 평소에는 온화하고 점잖고 예의 바른 신사 아니었어? 일이 닥치니까 꼭 사람이 변한 것 같네?” 사실 변한 게 아니라 본모습이 드러나고 폭로된 것이다. 이익과 관계가 없을 때, 인간관계가 틀어지지 않았을 때,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위장이고 기만이다. 그의 이익에 영향과 위협이 미쳐 더 이상 위장하지 않을 때, 그가 드러내는 생존의 근거와 법칙이야말로 그의 본성이고 본모습이며 본질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어떤 좋은 행위가 있어도, 사람의 표면적인 행위가 아무리 흠잡을 데 없어도 그가 진리를 추구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최소한 그 사람에게 정상적인 인성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며, 그가 믿을 만하고 사귈 만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좋은 행위 중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의 몇 가지를 열거했다. 이제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교제하겠다.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인류의 삶 속에서 무척 정상적인 현상이다. 이와 같은 일은 일부 동물 무리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니 당연히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잘 드러나야 할 것이다. 인류는 이 부분을 다른 동물들보다 더 제대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지켜야지, 대충 흉내만 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다른 생물에게 없는 양심과 이성을 지녔기에,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행위를 더 제대로 해내야 하며, 이 부분에서 인간의 인성이 다른 생물의 본질보다 낫다는 사실을,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 줘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정말 그렇게 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그렇게 하더냐? (여전히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 서민들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사회의 상류층, 혹은 궁중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요즘 몇몇 국가에서 사극 드라마가 자주 방영되면서 여러 황실의 복잡하고 어수선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황실 사람들은 민간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장유유서를 강조하며, 황실에서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백성들보다 더 깊이 있고 세부적으로 교육한다. 황실에서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백성들보다 더 연장자를 공경하고 존중하며, 관련된 예법도 무척 많다. 또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행위에 대한 요구가 무척 높아서 조금만 부족해도 안 된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들은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한다는 전통문화의 요구를 다 지킨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잘, 제대로 해내고 표면적으로 얼마나 그럴듯하며 흠잡을 수 없는 모습을 보이든, 그 흠잡을 수 없는 행위 뒤에는 각종 권력의 교차와 세력의 각축전이 숨겨져 있다. 아들과 아버지, 손자와 할아버지 간에, 노비와 주인, 신하와 군주 간에, 표면적으로는 모두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 준칙을 지키고 있지만, 황권과 각종 세력이 얽혀 있기에 이 외적 행위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며, 황권 계승과 각종 세력 다툼의 마지막 결과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물론, 이 좋은 행위는 황권을 노리거나 권력에 야심을 가진 자들을 전혀 제약하지도 못한다. 백성들은 모두 선조 때부터 내려온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한다는 규범을 지키며, 이 규범의 제약 아래에서 살아간다. 이익이 얼마나 얽혀 있든, 이익 분쟁이 일어날 때 어떤 싸움을 벌이든, 얼마 후에는 함께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황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더 큰 이익과 권세에 얽혀 있기에 다툼 끝의 마지막 결과는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된다. 즉, 상대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이다. 승자든 패자든 그들은 모두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규범을 지킨다. 그러나 각자의 세력과 욕망, 야심이 다르기 때문에, 또는 실력이 다르기 때문에 결국 누구는 살아남고 누구는 패망한다. 이는 무엇이 결정한 것이겠느냐?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한다는 규범이 결정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결정한 것이겠느냐? (사람의 사탄 본성이 결정한 것입니다.) 내가 한 이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이러한 규범, 사람들 사이에서 기발한 소위 좋은 행위들이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어떠한 길을 걸을 것인가는 그가 교양 있고 사리 밝은지, 상냥하고 친절한지,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본성에 달려 있다. 요컨대, 인류에게 생겨난 이런 좋은 행위와 관련된 말을 하나님 집에서는 제창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좋은 행위라고 여기는 것들은 그저 좋은 행위와 모습일 뿐, 진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좋은 행위, 모습이 있다고 해서 진리를 실행한다는 것은 아니며,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좋은 행위’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도, 하나님 집에서 제창하는 것도,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에 맞지도 않는다면, 하나님에게는 사람의 행위에 대한 요구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신자들의 행위에 대해 여러 말을 한 바 있다. 그 말들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기한 진리 측면의 요구와 달리 상대적으로 간단하지만, 그래도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요구를 하겠느냐? 예를 들어, 성도의 품위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 있다. 이는 사람의 행위에 대한 요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밖에도 방탕하게 행동하지 말 것, 자제할 것, 기이한 복장을 하지 말 것,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말 것,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 것,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 부모에게 효도할 것 등은 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에 대한 행위상의 요구이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니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의 행위에 대해 구체적인 요구를 했다. 이 구체적인 요구들은 이방인들이 말하는 좋은 행위와 다르다. 이방인들이 말하는 좋은 행위는 사람을 다른 하등 동물과 구별되는 고등 동물이 되라는 것뿐이다. 반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사람이 이방인,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구별되라는 것이다. 동물과 구별되라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거룩하게 구별되다’라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은 좀 과장된 감이 있고 정확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제기한, 행위상의 요구였다. 다시 말해 보아라. 어떤 것들이 있느냐? (성도의 품위를 갖춰야 하고, 방탕하게 굴면 안 되며, 자제해야 합니다. 또 기이한 복장을 해서는 안 되고,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셔도 안 되며, 사람을 때리거나 욕해도 안 됩니다. 이 밖에도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부모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그 외에 또 있느냐? (다른 이의 물건을 탐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며, 거짓 증거를 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들도 포함된다. 이는 율법에 있는 것으로, 시초에 하나님이 인류의 행위에 대해 제기한 요구이며, 지금 보아도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요구들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행위를 규범화한다. 그 표면적인 행위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표식이다. 만약 네가 그러한 행위와 모습을 갖추었다면,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고 너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최소한 너에게 동조하고 수긍하면서 너라는 사람은 이방인과는 달리 성도의 품위를 갖추었다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 있다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늘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싸우고 때리며, 심지어는 간음이나 도둑질까지 한다. 행위조차 자제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못하니, 이방인들은 그를 보고 “저런 자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어째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거지?”라고 말한다. 그를 존경하지도, 믿지도 않기에, 그가 복음을 전하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요구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사람, 마음씨가 선량한 사람,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바로 실행할 수 있으며, 그 행동은 꾸며 낸 것이 아니다. 그는 최소한 양심과 이성에 기대 행동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기한 그 구체적인 요구들은 인류가 제창하는 좋은 행위와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척 실제적이어서 사람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내게 합니다. 반면, 전통문화가 요구하는 것은 전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행위로, 이렇다 할 실제적인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 전통문화가 사람에게 요구하는 그 좋은 행위들은 전부 거짓이고 꾸며 낸 것으로, 속임수이다. 겉으로는 더없이 듣기 좋겠지만, 그 속은 다르다. 그것이 바로 가면, 허상이다. 그것은 인성의 본질 속에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체면과 명성, 지위를 위해 꾸며 낸 것이다. 그것은 쇼를 하는 것이고 외식하는 행동이고,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고의로 연극하는 것이다. 사람은 때로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별해 내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의 본모습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은 좋은 외적 행위, 소위 경건한 모습을 수도 없이 보여 주었다. 하지만 예수가 와서 진리를 선포하고 구속 사역을 할 때,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그들은 예수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는 사람의 좋은 행위와 외적인 행동이 그의 본성 본질을 의미하지 않으며, 양자 간에는 어떤 관계도 없음을 의미한다. 반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반드시 지키라고 요구한 그 규정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양심과 이성을 갖췄다면 실행할 수 있는 것들이고, 실제적으로 살아 낼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람들 앞에서든 뒤에서든 너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또 네 인성 본질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요구대로 반드시 해야 한다. 네 패괴 성품이 아무리 심각해도, 하나님을 따른다면 자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체험하면 진실로 진입하게 되고 참된 변화가 생긴다. 그 참된 변화야말로 실제적인 것이다.
정리해 보자.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몇 가지가 있었느냐? 규칙을 지키고 제약받고 존엄성 있게 살 것, 남들에게 존중받을 것, 위장하지 말 것 등은 사람의 행위 측면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즉, 하나님은 사람이 남들 앞에서든 뒤에서든, 어떤 환경에서든, 어떤 사람을 직면하든 마땅히 이런 실행과 실제를 갖춰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제는 정상인이 갖추어야 할 부분이며, 사람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행동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목소리가 무척 크지만 그는 남을 욕하지도 않고, 상스러운 말을 하지도 않으며, 사실 그대로를 정도에 맞게 말하면서 남을 공격하지도 않는다. 설령 그가 누군가를 나쁘다거나 좋지 않다고 말해도 다 사실이다. 그의 표면적인 언행이 이방인들이 제창하는 ‘상냥하고 친절한 것과 온화하고 우아한 것’에는 맞지 않지만, 그가 하는 말에 원칙과 근거가 있기에, 존엄과 인격을 갖추고 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규칙을 지킨다’는 것이다. 모르는 일은 함부로 말하지 않고, 간파하지 못한 사람을 마음대로 평가하지 않는다. 설사 겉으로 볼 때 온화하지 않으며 이방인이 말하는 ‘교양 있고 규율을 지키는’ 행위 기준에는 맞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고 언행을 제약받기에, 그가 살아 내는 것은 인간이 말하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등의 행위보다 훨씬 뛰어나다. 이런 모습이 제약받고 규칙을 지키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뭐라고 하든,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제기한 이런 좋은 행위와 관련된 하나님의 요구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중 어느 것이 사람이 실제로 살아 내는 것에 관한 구체적인 규정이 아닌 것이 있더냐? 그중 어느 것이 사람더러 위장하라고 하는 것이 있더냐? 없지 않더냐? 의구심이 든다면 말해도 좋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저는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좀 위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끔 남을 욕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으시니까요.”라고 말한다. 남을 욕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요구에서 ‘욕하다’라는 단어는 무슨 의미이냐? (패괴 성품대로 자신의 불쾌한 정서를 발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서를 발산하고 상스러운 말을 하는 것, 이것이 욕한다는 의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 듣기 좋지는 않지만, 상대의 패괴 본질에 부합한다면 그것은 욕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며 수많은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네가 그에게 “그렇게나 많은 악을 행했으니 너는 나쁜 놈이다. 사람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욕을 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패괴 성품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정서를 발산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성도의 품위에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은 사실에 부합하니, 욕하는 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그렇게 볼 수 없다. 사실에 부합하고, 있는 그대로 말했으며, 가리거나 숨기는 것도 없었다. 비록 ‘교양 있고 사리 밝으며 온화하고 우아한 것’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사실에는 부합한다. 욕을 들은 사람은 그의 말을 자신에게 대입하여 반성한 후, 자신이 옳지 않은 행동을 하고 너무 많은 악을 행했기에 욕을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마음속으로 자신을 증오할 것이다. ‘나는 정말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구나! 이런 짓은 얼간이나 하는 거야. 나는 정말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욕한 건 옳은 일이고 좋은 일이었어!’ 이렇게 받아들인 후 자신의 본성 본질을 인식하고, 얼마간의 경험과 체험을 통해 진실한 회개를 하게 되며, 그 후부터는 본분을 이행할 때 원칙을 구할 줄 알게 된다면, 이는 욕을 듣고 정신을 차린 것 아니겠느냐? 그럼 이 욕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욕하지 말라’는 항목의 ‘욕’은 다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다르겠느냐? ‘욕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요구의 ‘욕’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한 측면으로는 욕하는 내용과 단어가 상스러우면 안 된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의 입에서 상스러운 말을 듣기를 원치 않으며, 그런 단어를 듣기 좋아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실의 진상을 폭로할 때 좀 듣기 힘든 말이 나온다면 이런 상황은 예외로 친다. 이는 욕을 하는 게 아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 욕하는 행위의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혈기를 드러내는 것 아니겠느냐? 만약 정상적인 교제와 일깨움, 소통을 통해 제대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왜 욕으로 대신하겠느냐? 그것은 옳지 않으며, 그렇게 하는 건 부적절하다. 긍정적인 행동과 비교했을 때, 욕하는 것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정서를 발산하고 혈기를 드러내는 것에 속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일을 처리하든 정서를 발산하고 혈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처리하기를 원치 않는다. 사람이 혈기를 드러내고 정서를 발산할 때, 통상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말로 욕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듣기 거북한 말, 남에게 상처 주고 화풀이하는 말을 해서 말이 끝난 후에는 상대만 더럽히고 상처 주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더럽히고 상처를 주는데, 이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일을 대할 때 보여야 할 태도나 방식이 아니다. 더군다나 패괴된 인류는 언제나 남에게 보복하고 자신의 정서나 불만을 발산하며 혈기를 드러내려는 마음을 품은 채 걸핏하면 상대를 욕하려 한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드러내는 행위는 욕하는 것이다. 욕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욕하려 한다. 이는 사탄의 행위 아니겠느냐?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해도 자기 집에서도 욕을 하려 하는데, 이는 불쾌한 감정을 발산하는 것 아니겠느냐? 혈기를 드러내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혈기를 드러내고 불쾌한 감정을 발산하는 것은 총체적으로 말하면 혈기를 부리는 방식으로 어떤 일을 대하고 처리하며, 혈기를 부리는 태도로 모든 일을 직면한다는 것이다. 그중 한 가지 행위, 태도가 바로 욕하는 것이다. 남을 욕하는 것의 본질이 이러할진대, 욕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좋은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욕하지 말라고 한 데는 일리가 있지 않겠느냐?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사람에게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라고 요구한 목적은 사람이 늘 정서와 혈기 속에서 살지 않도록 제약하기 위함이다. 정서와 혈기 속에서 살아가면 어떻게 욕하든 패괴 성품만을 드러내게 된다. 어떤 패괴 성품이겠느냐? 최소한 흉악한 성품, 교만한 성품이 드러난다.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대하기를 원치 않는다. 여기에 내포된 뜻은, 하나님은 사람이 남을 욕하고 때리는 방식으로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욕하는 것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데 지장이 생긴다. 최소한 욕하는 행위는 긍정적인 행위가 아니며,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행위도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욕하는 것’ 안에는 정서와 혈기가 들어 있다. 그럼 정서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원한과 저주를 품고, 다른 사람이 잘되기를 원치 않는 마음, 상대가 자기 뜻대로 보응을 받고 나쁜 결과를 맞이하기를 바라는 마음 등 부정적인 것들이다. 이것이 정서 안에 있는 세부 내용이다. 그럼 혈기란 무슨 의미이냐? 사람이 극단적인 방식,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방식, 사악한 방식으로 정서를 발산하면서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일이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사라지거나 재앙이 임해 자기 뜻대로 남의 불행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이것이 혈기이다. 혈기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증오, 원한, 저주, 좋지 않은 바람 등이다. 이것들이 다 혈기 안에 들어 있다. 그중 긍정적인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없습니다.) 사람이 이런 정서와 혈기로 살아가면 어떤 상태가 되겠느냐? 곧 미치광이가 되지 않겠느냐? 욕하면 할수록 더 화가 나고 독해지며 욕하고 싶어지다가 결국 손을 뻗어 상대를 때리고 싶어진다. 또 사람을 때릴 때는 치명적인 공격을 하고 싶어진다. 치명적인 공격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나는 너를 끝장내고 죽여 버릴 것이다!’라는 뜻이다. 사소한 정서, 부정적인 정서 하나 때문에 혈기가 팽창되고 폭발하여 결국 한 생명을 없애고 죽여 버리려는 것이다. 이것이 정상 인성에 지니고 갖춰져야 할 부분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어떤 몰골이냐? (마귀의 몰골입니다.) 이는 마귀의 본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요괴가 사람을 집어삼키려 할 때의 몰골과 같은데, 마귀의 본성이 드러나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자를 바로 미치광이라고 한다. 어느 정도까지 미쳤겠느냐? 사람의 육체와 영혼을 삼키려는 마귀로 변한다. ‘욕하는 것’으로 초래되는 가장 심각한 결과는 단순한 일이 180도 바뀌어 누군가의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일이 두 사람의 사소한 마찰에서 시작된다. 서로 욕하다가 폭력을 쓰고, 그 후 살기를 품고, 그것이 실제로 이뤄져 한 사람은 죽임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살인죄로 사형을 판결받는다. 결국 둘 다 함께 망하는 것, 이것이 마지막 결과이다. 욕도 다 하고 정서도 발산하고 혈기도 전부 드러내고 둘 다 지옥에 빠진다. 바로 이런 결과가 생긴다. 정서를 발산하며 혈기가 팽창되고 폭발하면 이런 결과로 이어진다. 이는 좋은 결과가 아니라 끔찍한 결과이다. 보아라. 단순히 부정적인 정서 하나에서 비롯된 행위가 사람에게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결과를 보는 것도, 직면하는 것도 원치 않지만, 갖가지 불쾌한 정서 속에서 살아가는 데다가 혈기에 얽매이고 통제되기에 혈기가 수시로 팽창되고 폭발하여 마지막에 이런 결과가 초래된다. 보아라. ‘욕하는’ 행위가 단순해 보이느냐?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이 하는 욕이 이런 결과에까지 이르지는 않겠지만, 그러니까 욕하는 것의 후속 효과가 다 그런 나쁜 결과가 초래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욕하는 것의 본질은 이러하다. 그것은 정서의 발산이자 혈기의 팽창, 폭발이다. 그러므로 욕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며, 해로운 점은 단 하나도 없다. 또한,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러한 요구를 한 의의 중 하나이다. 남을 욕하지 말라는 요구를 진리 실행이나 진리 추구와 같은 선상에 둘 수는 없지만, 사람은 그 요구를 지켜야만 한다.
다른 사람을 욕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사람이 자제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겠느냐? 화를 낼 때, 사람은 대부분 자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남을 욕하지 말라는 요구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 남을 욕하기 전에, 특히 자제하지 못할 때, 빨리 기도해야 한다. 한참 기도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면 화가 누그러질 것이며, 효율적으로 스스로를 제약하고 정서와 혈기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가끔 다른 사람이 네게 모욕감을 주는 말을 할 때, 혹은 뒤에서 너를 판단하거나 의도적 혹은 부지불식간에 네게 상처 줄 때, 너한테서 이득을 보고 네 물건을 훔쳤을 때, 나아가 네 실질적인 이익에 해를 끼쳤을 때, 이러한 일들이 닥치면 너는 ‘그는 나한테 상처를 줬어. 나는 그를 증오해. 그에게 욕하고 싶고 보복하고 싶어. 심지어는 때리고 싶다고. 뒤에서 뭔가 꼼수를 부려 혼내 주고 싶단 말이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불쾌한 정서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느냐? 불쾌한 정서로 초래되는 결과는 네가 이런 일을 하고 싶게 하는 것이다. 너는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날 것이고, 그가 너를 괴롭히고 있다고 느낄 것이며, 네 존엄과 인격이 모욕받았다고 생각해 마음이 편치 않고 보복하고 싶을 것이다. 이것이 부정적인 정서가 가져온 혈기의 충동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보복하고자 하는 행위는 무엇이겠느냐? 혈기를 드러내려는 것 아니겠느냐? 이럴 때는 마음을 차분히 하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제해야 한다. 곰곰이 생각하며 진리를 구하고, 지혜로운 방식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마음이 혼란해지거나 원한과 정서, 혈기가 생기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둘이서 온종일 함께 사역하니, 피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피할 수 없다고 해도 보복해서는 안 되고 자제해야 한다. 어떻게 자제해야겠느냐? 먼저 ‘내가 그렇게 행동하면 하나님은 분명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그러니 그렇게 해서는 안 돼. 원한, 보복, 증오 등은 전부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으시는 거야.’라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데 네가 하고 싶고 자제하지 못하겠다면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당연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밖에, 만약 네 분량이 너무 작고 혈기는 너무 커서 도저히 정서와 혈기를 자제하지 못하고 보복하고 싶다고 해도 절대 남을 욕해서는 안 된다.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 다른 사람이 대신 나서서 해결하게 해야 한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몇 구절 암송한다면, 그렇게 기도한다면 혈기가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남을 욕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뿐더러 패괴까지 드러내 하나님을 욕되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 너희가 보기에 이 방법이 어떠하냐? (좋습니다.) 하나님이 말한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라.’라는 행위 규범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키게 한 좋은 행위에 관해 교제했다. 어떤 것들이 있었느냐? (성도의 품위를 지킬 것, 방탕하게 굴지 말 것, 제약받을 것, 기이한 복장을 하지 말 것,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 것,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말 것,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 부모에게 효도할 것, 도둑질하지 말 것, 남의 물건을 탐하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거짓 증거를 하지 말 것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었다. 그럼 말해 보아라. 율법에 언급된, 도둑질하거나 남의 이익을 탐하지 말라는 요구가 오늘날에도 성립하지 않느냐? 아직 유효하지 않으냐? (성립하고 유효합니다.) 그럼 은혜시대의 계명은 어떠하냐? (역시 성립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언급한 그 구체적인 요구들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겠느냐? 그 구체적인 요구들은 어떤 측면의 실행과 관계가 있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았더라면 사람이 알 수 있겠느냐?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언급한,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그런 구체적인 요구들은 사실 다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런 구체적인 요구들을 제기한 목적은 사람이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에 대해서, 또 무엇이 옳고 그릇되었는지에 관해서 정확하게 분별하고 감별하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은 간음이라는 행위를 혐오하며 그것은 수치스럽고 사람에게 경멸받는 부정적인 사물임을, 사람은 마땅히 제약받아 그런 일을 하지 말고 그런 일에서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함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또한, 남의 이익을 탐하고 도둑질하는 등의 행위는 전부 부정적인 사물임을,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람에게 알려 주기 위함이다. 그러한 일들을 좋아하고 또 행한다면, 너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성이 좋은지 나쁜지, 긍정적인 인물인지 부정적인 인물인지 어떻게 구분하겠느냐? 먼저 오직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만 정확하게 사람을 분별할 수 있고, 사람과 일, 사물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이 언급한,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그 요구 기준들에 근거해야만 사람을 분별하고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손버릇이 좋지 않은 어떤 사람이 남의 물건 훔치기를 좋아한다고 해 보자. 그 사람의 인성이 어떻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도둑질은 심각한 악행이니 도둑질하는 사람은 악인에 속한다. 모두가 경계하고 멀리하며 그를 도둑으로 여길 것이다. 도둑은 사람들 마음속에서 부정적인 이미지이고, 도둑질은 부정적인 사물로서 범죄 행위이다. 확실히 그렇지 않으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간음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이 긍정적인 사물인지 부정적인 사물인지 모르는 자들이 있다고 해 보자. 그럴 때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판단해야 정확하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이다. 지금 법률적으로, 도덕적으로 간음죄에 대해 어떤 새로운 주장이 있든 그것은 전부 진리가 아니다. “간음하지 말라.”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진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간음하지 말라.’라는 요구를 했으니 사람들은 간음하기 좋아하는 자를 내치고 멀리해야 한다. 그런 자는 인성이 있는 사람이 아니며, 최소한 인성 면에서 판단했을 때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 그런 인성을 지닌 사람은 수치스러운 사람이고 모두가 혐오하는 대상이며, 사람들 사이에서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사람, 모두에게 버림받는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간음하는 것이 부정적인 사물이고, 간음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사회의 흐름이 얼마나 사악해지든, 간음하거나 음란을 저지르는 행위는 모두 부정적인 사물이고,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인물이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 일을 밝히 알아야지, 사회의 사악한 흐름에 현혹되거나 유혹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밖에도 더 구체적인 요구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고 성도의 품위를 지키라는 등의 요구를 했다. 이 구체적인 요구들은 다 하나님이 인류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기준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기 전에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일이 옳고 긍정적인지, 어떤 일이 그릇되고 부정적인지 알게 하며,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어떤 좋은 행위를 갖춰야 정상 인성이 있는 사람인지, 정상 인성이 있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어떤 일들을 하고 어떤 일들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게 하여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그런 요구들은 모든 정상인이 실제로 살아 내야 하는 것들이며, 또한 모든 사람이 실제로 모든 일을 직면하고 처리하는 근거이다. 예를 들어, 네가 다른 사람의 좋은 물건을 보고 네 것으로 삼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지만 또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탐하지 말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나는 훔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다고 해 보자. 이는 도둑질하는 행위가 제약된 것 아니겠느냐? 제약받는 동시에 사람의 행위가 규범화된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그런 요구를 하기 전까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좋은 물건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가져다가 자기가 쓰려고 했다. 그런 행동이 옳지 않다거나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것은 하나님이 혐오하는 행위이며, 부정적인 사물이고, 나아가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러한 사실을 몰랐고, 그런 개념도 없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도둑질하지 말라는 요구를 한 후로, 사람의 사상에는 이런 일에 대한 선이 생겼다. 이 선을 통해 그는 도둑질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도둑질을 하는 것은 부정적인 일, 나쁜 일, 악행을 하는 것과 같아 수치스러운 일이고, 반면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은 인성과 도덕을 지키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사람의 부정적인 행위와 행동을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여 사람이 정상 인성 속에서 살아가면서 정상적인 행위와 태도를 갖게 했고, 최소한 사람, 정상인으로 보이게 한 것이다. 보아라.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하나님의 그 요구들에는 무척 큰 의미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의미가 있다. 하지만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그런 구체적인 요구들은 지금 말하는 진리와 거리가 멀어 진리와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오래전, 율법시대에 그러한 요구는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율법에 불과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단순하고 직설적인 말로 사람이 어떤 일들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규칙을 세워 준 것이다. 그러다가 은혜시대에 이르러 이는 그저 하나의 계명이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는 사람이 자신의 행위와 사물을 판단하는 하나의 준칙에 불과한 것이다. 이 준칙은 진리와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고, 또 진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것 역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할 때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이다. 어떤 사람이 그러한 규칙을 지키고 율법과 계명을 지키며,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하나님의 요구와 행위 준칙들을 지킨다면, 그는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하기 위한 기본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행동하고, 게다가 간음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탐하고 수시로 도둑질을 한다면, “그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니, 분명히 진리를 실행할 수 있을 것이고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성립하겠느냐? (성립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성립하지 않겠느냐? (그는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요구조차 해내지 못하니, 진리를 실행하지도 못할 것이며, 그를 가리켜 진리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다. 그는 가장 기본적인 자제조차 하지 못한다. 이 말에 숨겨진 뜻은, 그는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양심과 이성조차 지니지 않았다는 뜻이다. 즉, 그에게는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 없다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하나님의 말씀, 사람에 대한 요구, 하나님이 정한 규칙을 들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니 훔치지 말라고 하면 그는 ‘왜 훔치지 말라고 하는 거야? 나는 이렇게 가난한데, 남의 것을 훔치지 않고 어떻게 살겠어? 훔치지도 않고 남의 이익을 빼앗지도 않고 부자가 될 수 있겠냐고?’라고 생각한다. 이는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는 하나님의 요구들을 지키지 못하니, 정상 인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정상 인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 진리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가능하겠느냐? (불가능합니다.) 그는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도 않고, 도둑질하거나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따르지 못하며 오히려 싫어한다. 그런 그가 진리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진리는 그러한 행위 준칙보다 훨씬 높다. 그런데 그가 도달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는 단순한 행위 준칙이 아니다. 또 진리의 역할은 사람이 죄를 지을 때, 혹은 함부로 행동할 때 진리를 떠올리고 제약받아 더는 죄를 저지르거나 함부로 행동하지 않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진리는 그렇게 단순하게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생명이 되어 사람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 진리를 받아들여 생명이 되게 하려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한편, 진리를 인식하고 실행해야 한다. 진리를 받아들일 때 마음속에서는 전쟁이 벌어질 것이며, 사람의 패괴 성품 또한 드러나기 쉽다. 사람이 진리로 패괴 성품을 해결할 때, 진리는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고, 사람이 처신하고 살아가는 법칙이 될 수 있다. 이는 진리를 사랑하고 인성을 갖춘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인성이 없는 사람들이 여기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제정한,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그 요구들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제기한 구체적인 규정 하나하나가 쓸데없는 것이냐? (아닙니다.) 의미가 있지 않으냐? 가치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 사람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지키는 동시에, 전통문화가 사람에게 가르친 ‘교양 있고 사리 밝다.’, ‘온화하고 우아하다.’ 등의 말을 버리고,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하나님의 요구 하나하나를 따라 엄격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처신하며, 하나님의 요구대로 정상 인성을 살아 내야 한다. 물론 엄격하게 그러한 요구대로 사람과 일을 판단하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요구가 진리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사람에게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인도 역할을 한다.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관해 정의할 때, 어떻게 이야기했느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포함하는 범주는 무척 넓다. 때로는 말씀 한마디가 한 가지 진리이고, 때로는 말씀 몇 마디, 한 단락이 한 가지 진리를 설명할 수 있으며, 또 때로는 말씀 한 편이 한 가지 진리를 선포할 수도 있다. 진리는 언뜻 간단해 보여도 실은 그렇지 않다. 크게 보자면 하나님이 곧 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길이가 길고 내용이 많으며, 전부 진리의 선포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제정한 율법과 계명, 그리고 새 시대에 사람의 행위에 대한 요구들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이다. 비록 몇몇 말씀은 진리와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고, 진리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지만, 그것 역시 긍정적인 사물이다. 그것이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는 말에 불과해도 사람은 그것을 지키고 최소한 그러한 행위를 갖춰야지, 그 기준 아래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반드시 그런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한다. 그러한 것은 전부 하나님 말씀이므로 사람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또 하나님 말씀이기에 마땅히 그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해야 한다. 이것이 옳지 않으냐? (옳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이 말씀하면 반드시 책임지고, 책임지는 이상 반드시 이루며,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영원까지 지속된다 말한 적이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말씀을 했든, 언제 말씀했든 그것은 진리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시대가 바뀔지라도 하나님 말씀은 바뀌지 않으며, 사라지지도 않는다. 어째서 하나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진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언급하고 제시한 것이 율법이든, 계명이든, 그리고 사람의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든 전부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모든 요구는 피조물인 인류에게 도움이 되며,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한다. 또한,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사람으로 처신하는 방법에 이롭고 가치가 있다. 그러한 말씀은 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고, 진정으로 사람답게 살게 한다. 이와는 반대로,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그러한 말씀을 부인하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부인하면서 오히려 사람이 제기한 좋은 행위에 관련된 말들을 지킨다면, 그 사람은 무척 위험해진다. 그는 인성과 이성을 갖추기는커녕 갈수록 간사하고 거짓된 사람이 될 것이며, 점점 더 많은 기만행위를 할 것이다. 또한, 인성으로 살아 내는 것에는 기만의 성분이 더 많아져서 사람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까지 속이려 할 것이다.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중에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항목이 있다. 사람은 보통 다른 요구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나 관념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항목에 대해 너희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너희의 관점이 하나님이 말한 진리 원칙과 모순되지는 않느냐? 밝히 알 수 있다면 다행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규례만을 지키고 글귀와 도리만을 말하는 사람은 분별하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늘 관념을 품으며, 뭔가 모순되고 이해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반면,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보고는 모순되지 않으며 무척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고, 진리를 깨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때로 밝히 알지 못하면서도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 너희에게는 문제점도, 어려움도 무척 많다. 그저 너희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이는 너희의 분량이 너무 작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하나님이 말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가 옳은지, 사람이 지켜야 하는 것인지를 보자. 어떠하냐?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는 확실하며, 부정할 수 없고, 주저할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 말씀은 옳다. 그럼 무엇이 옳겠느냐? 하나님은 왜 이런 요구를 했겠느냐? 하나님이 말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항목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알고 있느냐? 또 모르는구나. 어째서 늘 모르는 것이냐? 글귀와 도리를 말할 때는 끝도 없이 늘어놓으면서 진리와 관련되기만 하면 모르니,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그럼 너희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실행할 것이냐? 이는 진리와 관련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라는 하나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이 부모님에게 효도하라고 하셨으니 효도하자.’라고 생각해 효도하기 시작했다. 부모가 하라는 대로 따르고, 부모가 아프면 침대맡에서 시중을 들고 물을 따라 주며, 맛있는 요리를 해 드렸다. 명절이 오면 부모가 좋아하는 물건을 사 주고, 평소 부모가 피곤해 보이면 어깨와 등을 안마해 주었다. 또 부모에게 뭔가 어려움이 있으면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 내서 해결해 주니, 부모는 무척 만족했다. 부모에게 효도한 너는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고 정상 인성을 살아 냈기에 마음이 편안해져서 이렇게 생각했다. ‘봐봐. 부모님은 내가 하나님을 믿은 후로 변했다고, 효도할 줄 알고 철이 들었다고 하시잖아. 무척 좋아하셨고, 하나님을 믿는 게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셨지. 자식이 효도할 뿐만 아니라 인생의 바른길을 걷고 사람답게 살아가니 이방인들보다 훨씬 낫다고 말이야. 나는 하나님을 믿은 후로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고, 하나님 요구대로 행동했어. 부모님은 내가 변한 모습을 보고 기뻐하셨지. 나도 자신이 자랑스러웠어. 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렸으니, 하나님도 틀림없이 만족하셨을 거야. 나를 보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라고, 성도의 품위를 갖추었다고 하시겠지.’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네게 외지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다. 어쩌면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너는 하나님의 부탁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여겨 수락했다. 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서는 하나님의 부탁을 지켜야 한다고, 둘 다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집에 가서 상의할 때, 네 부모는 그 소식을 듣고 화를 냈다. “이 불효막심한 놈! 그렇게 힘들게 키워 놨더니 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떠나겠다는 거야? 네가 가 버리면 우리 둘은 누가 돌봐 준다는 말이냐? 우리가 아프거나 문제가 생기면 누가 병원에 데려다 준다는 거야?” 부모의 반대 앞에서 너는 고민에 빠졌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하셨지만, 부모님은 내가 본분을 이행하는 걸 막고 계셔. 부모의 말을 따르려면 하나님의 부탁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럼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으시겠지. 그렇다고 하나님 말씀대로 본분을 이행하러 가면 부모님이 좋아하지 않으실 테고. 이를 어쩌지?’ 너는 ‘하나님께서 먼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를 하셨으니, 이것을 지키자. 본분을 이행할 필요는 없어.’라고 생각하고는 본분을 내팽개치고 집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마음은 계속 편치 않았다. 부모에게 효도는 했지만, 본분을 이행하지 못해 하나님께 죄스러운 마음이 든 것이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야 한다. 언젠가 진리를 깨닫고 본분 이행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자연히 집에서 나와 본분을 이행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제게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시고, 또 부모님께 효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서로 모순되고 충돌되는 것 아닙니까? 대체 제가 어떻게 실행해야 합니까?”라고 말한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것은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였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가 아니겠느냐? 이는 더더욱 하나님의 요구이다. 그렇지 않으냐? 더더욱 진리를 실행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두 가지가 충돌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혹자는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하나님의 부탁도 완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지키고 진리도 실행해야죠. 이건 쉬운 일입니다. 집안일을 처리하고, 부모님의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두며, 가정부를 고용한 다음 나가서 본분을 이행하는 겁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돌아와서 부모님을 살핀 후 별일 없으면 그냥 가고, 일이 있으면 이틀 정도 머무르면 됩니다. 계속 밖에서 지내면서 돌아오지 않거나 집에만 있으면서 본분을 이행하러 나가지 않으면 안 되고요. 이렇게 하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는데, 이 방법이 어떠하냐? (통하지 않습니다.) 이는 비현실적인 상상이다. 그럼 이런 상황이 임했을 때 어떻게 해야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충과 효를 모두 지킬 수 없다면 본분을 지키는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를 했고, 그다음 진리를 실행하고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데 대해 더 높은 요구를 했다. 너는 어떤 것을 지켜야겠느냐? (더 높은 요구를 지켜야 합니다.) 더 높은 요구대로 실행하면 옳겠느냐? 진리에 높고 낮음과 새롭고 오래된 것의 구분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럼 진리를 실행할 때는 무엇에 따라야겠느냐? 무엇을 진리 실행이라고 하느냐?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진리 실행은 서로 다른 시간, 장소, 환경, 배경 조건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다. 규례에 얽매이지 않고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 이것을 진리 실행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요구를 지키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부탁, 본분을 완수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현시점 말씀이고 요구겠느냐? 먼저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같지 않고 차이가 있다. 리더 일꾼의 경우,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니 버릴 줄 알아야지, 부모 곁에서 효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며,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한 가지 상황이다. 이 밖에 평범한 신자의 경우,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부모 곁에서 효도해도 된다. 열심히 효도해도 뭔가 상은 없고 축복을 얻을 수도 없겠지만, 효도하지 않는다면 인성이 없는 것이다. 사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하나의 책임일 뿐, 진리 실행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리 실행이고,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이며, 모든 것을 버리고 본분을 이행하는 자야말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어쨌든,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는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이다. 그럼 현재 실행해야 할 진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본분 이행입니다.) 그렇다.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진리 실행이다.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힘만 쓰는 것에 불과하다.
좀 전의 그 질문은 무엇이었느냐? (하나님은 먼저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하셨고, 그 후 진리 실행과 본분 이행,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에 관해 더 높은 요구를 하셨습니다. 이 중에서 먼저 어떤 것을 지켜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방금 너희는 더 높은 요구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이론적으로는 옳다. 어째서 이론적으로는 옳다고 하겠느냐? 그러니까 이 일을 규례와 공식에 맞춘다면 답은 ‘옳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실생활 속에서는 이 말이 통하지 않고 이루기 힘들 때가 많다. 그럼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겠느냐? 먼저 네가 직면한 상황과 생활하는 환경, 그리고 처한 배경이 어떤지 봐야 한다. 네가 생활하는 환경과 처한 배경을 볼 때,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충돌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실행할 수 있다. 너는 형식적으로 부모와 떨어질 필요가 없으며, 형식적인 의미에서 버리고 포기할 필요도 없다. 어떤 상황에서 그러하겠느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충돌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러합니다.) 그렇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을 네 부모가 막지 않고, 그들 역시 믿으면서 네가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하여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는 것을 무척 지지하고 독려해 준다면, 너와 부모는 평범한 의미의 육체적 혈연관계가 아니라 형제자매 관계이다. 그러니 너는 형제자매의 관계로 부모와 함께 지내는 것 외에도 자녀로서 책임을 다해야 하며, 그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너는 본분 이행이 영향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즉 네 마음이 그들에게 속박받지 않는 상황에서, 전화로 안부를 묻고 관심을 가지며, 그들을 도와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생활 속 문제들을 처리해 줄 수 있다. 나아가 그들이 생명 진입에서 겪는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가능하다. 이는 하나님 믿는 것을 부모가 막지 않는 상황에서 가능한 일이다. 이 관계는 지켜야 하고, 너는 네 책임을 다해야 한다. 어째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안부를 물으며 그들을 돌봐 주어야겠느냐? 너는 그들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 관계 때문에 너에게는 하나의 책임이 더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 때문에 너는 그들에게 안부를 묻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네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네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그들이 가로막거나 방해하지 않고 네 발목을 잡지 않는 상황에서 네가 그들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 최소한의 기준이다. 만약 환경적 영향이나 방해로 인해 집에서 부모에게 효도할 수 없다면, 규례를 지킬 필요는 없다. 그럴 때는 하나님의 배치를 따르고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 무리하게 지키지 않아도 된다. 그것을 하나님이 정죄하겠느냐?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려운 일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교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본분 이행이 충돌하면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교제하고 있는 것은 실행 원칙이고 진리이다. 네게는 부모에게 효도할 책임이 있다. 상황이 허락된다면 그 책임을 다할 수 있겠지만, 감정에 속박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부모 중 한쪽이 몸이 안 좋아 입원했는데, 보살펴 줄 사람이 없다고 해 보자. 네가 본분 이행으로 정신이 없어서 집에 돌아갈 수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럴 때는 감정에 얽매이지 말고 이 일에 관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배치에 따라야 한다. 이런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그의 목숨을 거두어 그를 데려가려 한다면, 너도 순종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순종하겠지만, 마음이 무척 괴롭고 며칠 동안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 아닙니까?”라고 하는데,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인간미이자 인성으로,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너는 울어도 된다. 하지만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으면서 운다면, 또 본분 이행을 할 생각이 없고 돌아가서 부모를 보고자 한다면, 그래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진리를 실행하지도 못한다면, 너의 그 효도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감정 속에서 살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책임을 다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너는 하나님의 부탁을 포기했으니,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본분에 지장을 주지 않고,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데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힘닿는 데까지 부모에게 효도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한마디로 인성의 범위 안에서 사람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감정에 빠져서 본분 이행에 지장을 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어긋난다. 하나님은 네게 그렇게 요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저 부모에게 책임을 다하면 된다고 요구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는 배경이 있다. 여러 조건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범위에서라면 책임을 다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 큰 병에 걸릴지, 죽게 될지 등을 네가 결정하는 것이겠느냐? 그들이 어떻게 살지, 언제 죽을지, 어떤 병으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 등이 너와 관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아무 관계가 없다. 혹자는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서 저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분들이 병에 걸리지 않게, 특히 암이나 불치병에 걸리지 않게 확실히 보장해야죠. 그분들이 100살까지 사시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릇된 인간 아니겠느냐? 이는 그야말로 사람의 상상이지, 절대 하나님의 요구가 아니다. 너 자신이 100살까지 살지조차 분명하지 않은데 부모에게 100살까지 살라고 하다니, 이는 황당무계한 소리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은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서 네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양심과 도덕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지 않느냐? (부합합니다.) 물론 방금도 말했듯이,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부모가 가로막는다면, 그들의 본성 본질은 불신파이고 이방인이며, 나아가 악인, 마귀이다. 그들은 너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과 너는 아예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 가정에서 오랜 세월 같이 살아왔지만, 그들은 너와 같은 것을 전혀 추구하지 않고 인격도 다르며, 나아가 기호와 동경하는 것도 다르다. 너는 하나님을 믿지만, 그들은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을뿐더러 대적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들을 버려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네게 그들을 버리고 저주하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하나님이 말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는 여전히 성립한다. 그들과 함께 살 때, 너는 계속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를 지켜야 한다. 이 일이 모순되느냐? (모순되지 않습니다.)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너는 간만에 집에 돌아갔을 때 부모에게 요리해 주고, 만두를 만들어 줘도 된다. 조건이 되어 건강 용품을 사 준다면 그들은 무척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신앙 얘기가 나왔을 때 그들이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고 너를 욕한다면, 꼭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필요는 없다. 그들과 접촉할 조건이 된다면 그렇게 실행해라. 만약 접촉할 조건이 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의 배치이니 서둘러 그들을 멀리하고 피해라. 이 원칙은 무엇이냐? 만약 부모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너와 이야기할 화제가 없으며 같은 추구 목표도 없다면, 또한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로막고 핍박한다면, 너는 그들을 분별하고 그들의 본질을 간파하여 버려도 된다. 물론,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욕하거나 너를 저주하면 너 또한 마음속으로 그들을 저주해도 무방하다. 그럼 하나님이 말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는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어떻게 실행해야겠느냐? 책임을 다할 수 있으면 다해라. 그러나 만약 기회가 없거나 부모와 함께 있을 때 이미 마찰이나 충돌이 일어나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한시바삐 떨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언급한, 이런 부모에 대한 효도란 자식의 입장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즉, 자식으로서 해야 할 바를 다하며, 부모를 노엽게 하거나 욕하고 때리거나 학대하거나 싸우지 말고, 힘닿는 데까지 책임을 다하라는 뜻이다. 이는 인성의 범위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를 지킬 때 실행해야 할 원칙이다. 이것이 쉽겠느냐? 너는 혈기로 그들을 대하면서 “당신들은 마귀요, 불신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들을 저주하셔서 유황불 못, 무저갱 속에 빠뜨리고 18층 지옥에 떨어뜨릴 것입니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않아도 된다. 적절한 환경에서 필요하다면 자식으로서 책임을 다해도 되지만, 필요하지 않거나 상황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또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면 생략해도 무방하다. 그들과 만나고 함께 지낼 때 자식으로서 책임을 다하면 그만이고,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이 원칙이 어떠하냐? (좋습니다.) 부모까지 포함해서 어떤 사람을 대하든 원칙이 있어야지, 혈기에 기대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부모가 핍박한다고 해서 그들을 욕해서도 안 된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이방인, 하나님을 욕하는 자들이 무척 많다. 그들을 모두 저주하고 욕할 것이냐? 그들을 욕하지 않았으면 네 부모도 욕하지 마라. 그들을 욕하지는 않았으면서 네 부모를 욕한다면, 너는 혈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네가 아무 이유 없이 그들을 마귀라고, 살아 있는 사탄이자 사탄의 앞잡이라고 욕하며, 지옥에 빠지라고 저주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만족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네가 그렇게 긍정적인 태도를 꾸며 낸다고 해서 너를 열납하거나 네게 인성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네 그런 행동에 감정과 혈기가 들어 있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행동은 너무 극단적이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 자신의 부모까지 포함해서 어떤 사람을 대하든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혹은 악인에 속하든 속하지 않든, 그들을 대할 때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것으로, 공평하게 대하되, 다만 부모를 대할 때는 책임감을 더 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니 책임을 다하면 그만이다. 그들이 믿든 믿지 않든, 추구하든 추구하지 않든, 네 인생관과 인성이 그들과 맞든 맞지 않든, 너는 책임을 다하면 그만이니, 그들을 피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을 순리에 맡기고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근거해라. 만약 그들이 네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가로막는다고 해도 힘닿는 데까지 효도의 책임을 다해야 하며, 최소한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말아야 한다. 그들이 너를 가로막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지지해 준다면, 원칙대로 실행하면서 할 수 있는 만큼 잘 대해 줘야 한다. 요컨대, 어떻게 하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변하지 않으며, 사람이 실행해야 할 진리 원칙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러한 일에서 원칙을 지키고, 할 수 있는 만큼 책임을 다하면 된다.
이제 하나님이 왜 사람의 행위 측면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를 했는지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다른 것들은 다 사람 스스로가 처신하는 행위 규범에 관한 요구였다. 그런데 왜 하필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 관해서만 다른 요구를 했겠느냐? 말해 보아라. 자신의 부모에게조차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본성 본질이 어떠하겠느냐? (좋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가 힘들게 그를 낳아서 기르고, 어렵사리 성인으로 키운 것은 사실 그에게 큰 행복이나 기쁨을 얻기를 바라서가 아니다. 부모는 그저 그가 성인이 된 후에 행복하게 살면서 걱정만 끼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제구실을 못 하면서 노력하지도 않고, 삶을 잘 꾸려 나가지도 않는다. 부모에게 기대 살아가는 캥거루족이 되어 효도는커녕 부모를 협박하고 재산을 받아내려고 한다. 이렇게 악질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이 어떠하냐? (인성이 나쁩니다.) 자신을 낳아 주고 키워 준 사람에게 전혀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어떤 가책도 느끼지 못하니, 이런 면을 봤을 때, 그 사람에게 양심이 있겠느냐? (양심이 없습니다.) 그는 누구든 때리고 욕할 수 있다. 거기에는 부모까지 포함되는데, 부모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하면서 내키는 대로 때리고 욕하며, 기분이 나쁘면 부모에게 화풀이하고, 그릇을 던져 부모를 겁에 질리게 한다. 이런 사람에게 이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데다가 자기 부모조차 함부로 학대하는 자가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겠느냐? (짐승입니다.) 짐승이다. 이 표현이 정확하지 않으냐? (정확합니다.) 사실, 부모에게 책임을 다하며, 아껴 주고 지켜 주는 것은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추어야 할 면모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부모를 노엽게 하고 학대한다면 양심이 찔리지 않겠느냐? 정상인이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부모를 화나게 했다면 며칠 동안 괴로워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다혈질이라서 순간적으로 발끈한 마음에 부모에게 성질을 부릴지는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리하여 사과는 하지 않을지라도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이는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추어야 할 점으로, 정상 인성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인성이 없는 사람들은 부모를 학대하면서도 느끼는 바가 없다. 어릴 때 부모에게 맞은 일을 평생 기억하면서 성인이 되어 자기도 부모에게 손을 올리고 되갚아 준다. 평범한 사람들은 어릴 때 부모에게 맞아도 대들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서른 살 이후에 부모에게 맞아도 가만히 있으며, 맞아서 아파도 소리 한 번 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추어야 할 면모이다. 그가 왜 소리 한 번 내지 않겠느냐? 만약 다른 사람이 그를 그렇게 때린다면 수긍하고 가만히 있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게 누구일지라도 그렇게 맞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욕 한마디만 들어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럼 왜 부모가 때리면 대들지도, 화내지도 않고 참겠느냐? 인성에 양심과 이성이 갖춰져 있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는 ‘부모님이 나를 키워 주셨으니 나를 때리는 게 잘못됐을지라도 참아야 해. 게다가 부모님은 나 때문에 화가 나신 거잖아. 나를 때리시는 것도 당연하지. 내가 말을 안 들어서 부모님을 화나시게 한 거니까, 난 맞아도 싸! 앞으로는 그런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정상 인성에 갖추어야 할 이성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정상 인성의 이성은 그에 대한 부모의 행동을 참게 한다. 이것이 바로 정상 인성이다. 그럼 참지 못하고 되갚아 주는 사람이 이런 인성을 갖추었겠느냐? (갖추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갖추지 않았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부모를 때리고 욕할 수 있다. 그럼 하나님과 형제자매를 대할 때는 어떻겠느냐? 그는 자신을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조차 그렇게 대하는데, 자신과 어떤 혈연관계도 없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더더욱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데, 양심과 이성으로 하나님을 대하겠느냐?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 순종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를 책망하고 훈계하고 심판하고 형벌한다면, 반항하지 않겠느냐? (그럴 것입니다.) 보아라. 사람이 갖춘 양심과 이성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어느 정도 사람의 행위를 제약하고 규범화하여 일이 닥쳤을 때 올바른 태도를 지니고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며, 양심적이고 이성적으로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을 대하게 한다. 대부분의 경우, 양심적이고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면 많은 화근을 피할 수 있다. 물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것을 기초로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걸으며,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을 택한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인성이 없고, 이러한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했기에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는 하나님에게 어떤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대한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욕할 수도, 모독할 수도, 고발할 수도, 팔아넘길 수도 있으며, 하나님에게 복수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너무도 심각하다. 이렇게 되면 일이 커지지 않겠느냐? 인성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늘 혈기로 복수하며, 인성과 이성에 제약되지 않는다. 그는 극단적인 사상과 말을 생각해 내기 쉽고, 그 후에는 극단적인 행위를 하며, 양심도 이성도 없는 행동을 수도 없이 저질러, 마지막에는 수습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진리 실행에 관련된 교제는 이만하면 다 한 것 같구나. 결국에는 인성으로 귀결된다.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요구를 했겠느냐? 이것이 처신하는 것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 요구로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고, 동시에 그 사람의 인성을 검증하고 확정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양심과 이성 없이 부모를 대한다면, 그는 분명 인성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혹자는 “그럼 그의 부모가 인성이 안 좋아서 자식에게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면, 그런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라고 말하는데, 자식으로서 양심과 이성이 있다면 부모를 학대해서는 안 된다. 부모를 학대하는 사람은 분명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요구가 어떤 것이든, 그것이 부모를 대하는 태도와 관련된 것이든, 평소 사람이 인성을 살아 내고 드러내는 것이든, 결국 외적 행위와 관련된 그런 행동을 하나님이 언급한 이상 그만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그 요구들이 진리와는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제기한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기준으로, 모두 의미가 있기에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기한 행위 준칙과 하나님이 요구한 진리 간에 어떤 연관성과 차이가 있는지 면면을 교제하였다. 이제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 중 좋은 행위에 관해 어느 정도 교제한 것 같지 않으냐? 이 부분의 교제를 마친 뒤, 우리는 또 사람의 행위와 삶을 규범화하는 하나님의 기준과 가르침에 대해 교제하면서 몇 가지 예를 들었다. 그중에는 사람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 것, 부모에게 효도할 것,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남의 이득을 점하지 말 것, 거짓 증거를 하지 말 것,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 등이 있었다. 물론, 이는 중요한 항목으로, 더 세부적인 것들도 있으나 더는 말하지 않겠다. 그럼 이러한 교제를 한 후, 너희가 얻어야 할 진리는 무엇이겠느냐? 실행해야 할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느냐?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할 필요가 있겠느냐?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될 필요가 있겠느냐? 상냥하고 친절하거나 가까이하기 쉬운 사람이 될 필요가 있겠느냐? 여자가 온화하고 우아하거나 교양 있고 사리 밝을 필요가 있겠느냐? 남자가 사나이 대장부가 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런 것들은 필요치 않다. 물론 누차 교제했듯이,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그것들은 분명히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는 도구로서, 강력한 미혹성을 지니고 사람을 기만한다. 너희는 자신에게 그러한 사상과 관점, 행위와 태도가 없는지 성찰해야 한다. 만약 있다면 한시바삐 진리를 구해 해결한 다음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너희는 자신이 지난날 전통문화에 기대 살아갈 때, 어떤 내적 상태였는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무엇을 얻었는지, 어떤 결과가 생겼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 후, 다시 하나님이 요구한 대로 자제하고 성도의 품위를 지키며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않는 것 등을 기준으로 처신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보아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더 홀가분하고 자유로우며 편하고 평안한지, 더 인성을 갖고 살 수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면을 쓴 것처럼 매우 가식적으로 고통스럽게 사는 것인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에 점점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점점 더 정상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인지 살펴보아라. 실제로 체험해 보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실행해야만 자유로워지며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너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며 예의 바르고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 나이 많은 형제자매를 만나면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어르신’이라고 부른다. 또한, 민망해하면서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큰 무례라고 생각한다. 네 마음속에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전통 관념이 숨어 있다. 그렇기에 노인을 보면 온화하고 예의 바르고 교양 있게 행동하면서 허리를 15~90도까지 굽히며 공손히 대한다. 너는 나이가 많은 사람 앞일수록 더 고분고분하게 군다. 그렇게 고분고분한 태도가 좋으냐? 그것은 줏대도, 존엄도 없이 사는 것이다. 또 어린아이를 보면 아이처럼 귀엽고 활발한 척 꾸미고, 동년배를 만나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어른 행세를 하면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게 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냐? 다중 인격자 아니냐? 태도 변화가 무척 빠르지 않으냐? 나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 할아버님, 할머님이라고 하고, 연장자를 보면 숙부님, 이모님, 형님, 누님이라고 하며, 자기보다 어린 사람을 보면 아우, 동생이라고 한다. 나이에 따라 서로 다른 호칭과 애칭을 붙이는데, 그것이 무척 적절하고 정확하다. 그는 이러한 것들이 뼛속에 뿌리를 내려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을 믿은 후로는 더더욱 ‘하나님을 믿으니까 예의 바르고 교양을 갖춰야 해. 교양 있고 사리 밝아야 한다고. 이방의 문제아처럼 버릇없고 반항하면서 사람들의 비호감을 사면 안 돼. 모두에게 사랑받으려면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해야지.’라고 생각해서 더욱 엄격하게 자신의 행위를 규범화하고, 사람들에게 나이에 따라 다른 존칭과 애칭을 붙인 후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실행에 옮긴다. 그런 다음 점점 더 ‘나를 보라고. 하나님을 믿은 후로 달라졌잖아.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람답게 사는 거야. 나는 어떤 연령대를 만나든 다 호칭을 부를 수 있어. 부모님이 가르쳐 주시거나 주변 사람들이 알려 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라고 생각한다. 이 좋은 행위들을 실행한 뒤, 그는 자기가 인성을 갖추고 예의 바르니 하나님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는 자기 자신은 물론이요, 남까지 속이는 짓 아니겠느냐? 지금부터 이런 것들은 전부 버려야 한다. 예전에 다밍과 샤오밍의 이야기를 해 준 바 있다. 그 이야기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태도와 관계가 있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을 보면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더 친절하고 교양 있어 보이려고 할아버님, 할머님이라고 부른다. 너는 그를 무척 존중하고 있다. 그럼 그에 대한 네 존중은 무엇에서 비롯되었느냐? 너의 얼굴을 보면 남을 존중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빨을 드러내고 발톱을 세우며, 건방지고 오만한 꼴이다. 또 누구보다도 오만하게 일을 처리하고, 진리 원칙을 구하기는커녕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은 채 혼자 알아서 하는 등 인성이 전혀 없다. 지위가 있는 사람을 보면 어르신님, 이모님이라고 부르면서 칭찬받고 싶어 하는데, 그렇게 꾸미는 게 소용이 있겠느냐? 그렇게 위장한다고 해서 네게 인성과 덕행이 생기겠느냐? 그와는 반대로, 사람들은 그런 너를 보고 더더욱 역겨워한다. 하나님 집의 이익과 관계된 일이 닥치면 어김없이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 치우고, 자기 자신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그런 인성을 가졌으면서 다른 사람을 이모님이라고 부르다니, 이는 위장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위장을 참 잘도 하는 것이다!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들이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기는커녕 팔아 치우는, 팔이 밖으로 굽는 존재이니 하나님 집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 너희는 자신의 어떤 사상과 관점, 태도, 행동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인류가 공인하는 ‘좋은 행위’에 속하는지 성찰해 보아라. 사실,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증오하는 것들이다. 그 무가치한 것들을 절대 지키지 말고 한시바삐 내려놓아야 한다. 혹자는 “그렇게 행동하는 게 뭐가 안 좋습니까?”라고 하는데, 그런 행동을 보면 내가 너를 역겨워하고 증오하게 되니, 절대 그렇게 하지 마라. 또 혹자는 “당신이 역겨워하시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당신과 함께 사는 것도 아니니까요.”라고 하는데, 네가 나와 함께 살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내가 너를 역겨워하는 이유는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실행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너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니 하루빨리 그런 것들을 내려놓는 것이 좋겠다. 위장하지 말고, 가면을 쓴 채 살아가지도 마라. 서양인들은 이런 면에서 매우 정상적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다른 사람을 부를 때 그냥 이름을 불러도 무방하다. 굳이 어색하게 할아버지니 할머니니 하고 부를 필요가 없으며, 사람들이 너를 판단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당당하게 이름을 부르면 상대는 아주 좋아한다. 성인이든 어린아이든 모두 그렇고, 그것이 자신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이와는 반대로, 만약 네가 상대의 이름을 아는데도 미스터라든가 혹은 이모라고 부른다면 상대는 좋아하지 않으며, 너를 상대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 너는 어리둥절해진다. 서양 문화는 중국의 전통문화와 다르다. 중국인은 전통문화에 물들고 영향을 받아 언제나 높은 자리에 서려고 하고, 선배가 되어 남들의 존중을 받으려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노릇을 하려는 것으로도 모자라 ‘노(老)’자를 붙여 노할아버지, 노할머니, 노숙부, 노백부라고 하고, 큰아주머니, 큰아버지라고도 부른다. 나이가 많은 사람, 아니면 큰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역겹지 않으냐?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못된 습성 아니겠느냐? 너무도 역겹다! 이런 사람은 남들에게 존중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혐오받고 멸시당하며 멀어지고 버림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통문화의 이러한 부분을 폭로하고 내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것들에는 다 사탄의 성품과 간계가 들어 있기에 사람이 처신하는 방식과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당연히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사람의 눈을 가려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데에도 영향을 준다. 그러면 사람은 마땅히 이러한 것들을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중국인은 전통문화에 심각하게 영향을 받았다. 물론, 나라마다 각국의 전통문화가 있으며,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어떤 말은 중국의 전통문화와 다를지 몰라도 그 성질은 동일하다. 즉, 사람에게 정상 인성이 없고 패괴 성품이 있기에, 표면적으로 좋아 보이고 사람의 관념, 상상에 맞고 사람이 실천하기 쉬운 몹시 기만적인 행위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신사로, 고상하고 남들의 존경을 받는 존재로, 인격과 존엄을 갖춘 사람으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이러한 전통문화가 사람의 눈을 가리고 기만하며, 진정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사탄이 이러한 전통문화로 사람의 인성을 패괴시키며, 사람을 오도하여 올바른 길을 선택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도둑질하거나 간음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사탄은 사람에게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 온화하고 우아한 사람,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되라고 한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요구에 상반되는 것, 반기를 드는 것 아니겠느냐? 사탄이 사람에게 알려 준 것은 어떻게 이 표면적인 방식과 행위, 삶으로 세상 사람들을 기만하는가 하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었느냐? 표면적인 행위로 남들의 신뢰를 얻어 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여 처신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야 사람들의 신임과 신뢰를 얻을 수 있고, 그런 자야말로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차이가 있지 않으냐? 이 차이는 무척 크다. 하나님은 너에게 처신하는 법을 알려 주지만, 사탄은 위장하고 남을 기만하는 법을 알려 준다. 이 차이가 무척 크지 않으냐? 그럼 사람이 마지막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이제 알겠느냐? 어떤 것이 바른길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바른길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바른길이다. 하나님 말씀이 사람의 행위에 대해 어떤 요구를 하든,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것이 규범이나 계명 혹은 율법일지라도 모두 의심할 여지 없이 올바르니, 반드시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바른길, 긍정적인 사물이기 때문이다. 반면, 사탄의 말은 아무리 사람의 입맛에 맞고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해도 사람을 기만하고 패괴시키니, 바른길이 아니다. 거기에는 사탄의 간계가 들어 있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오늘 교제한 내용을 듣고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 이것이 진리와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관계있습니다.) 예전에 너희는 이 측면의 진리를 알고 있었느냐? (밝히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밝히 알게 되었느냐? (예전보다는 밝히 알게 되었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러한 진리를 깨닫는 것은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그것은 향후 진리 추구와 인성을 살아 내는 것, 그리고 인생의 추구 목표, 방향에 전부 도움이 된다.
2022년 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