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3)
지금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이 점점 바빠지면서 다들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다. 이는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사실 이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많은 일을 밝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갈수록 책임감이 커지고 본분 이행을 참답게 대하고 사역을 더욱 꼼꼼하게 하게 되면서 이행해야 할 본분이 점점 더 많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분 이행이 점점 더 바빠지는 것이다. 이 밖에,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 중 다수가 매일 본분을 이행하는 것 외에도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교제하며 스스로를 반성해야 하고, 문제가 닥치면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하며, 어느 정도 업무 지식을 쌓아야 한다. 그래서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루하루 너무 바쁘게 지나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밤에 하루 동안 무엇을 했는지 되짚어 보면 이렇다 하게 가치 있는 일을 하지 않은 것 같고, 성과도 크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자신의 분량이 너무 보잘것없어 보이고, 부족한 점은 너무 많게 느껴져 한시바삐 분량을 키우고 싶어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역이 언제쯤 끝날까? 언제쯤 마음을 평온히 하고 제대로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진리를 갖출 수 있을까? 일주일에 한두 번의 예배에서 얻는 건 한계가 있어. 더 많이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들어야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기다리고 기대한다. 그렇게 3년, 5년이 눈 깜빡할 새에 지나가자 시간이 너무 빠르다고 느끼게 된다. 혹자는 10년 넘게 하나님을 믿었는데도 이렇다 할 체험 간증을 말하지 못해 마음이 조급해지고,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면서 한시바삐 진리를 갖추고자 한다. 그래서 시간이 너무 빠듯하다고 느끼는데,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다. 본분 이행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모두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생각한다. 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안일과 누림을 탐하는 사람은 시간이 빨리 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의 날은 대체 언제쯤 옵니까? 사역이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늘 말씀하시는데, 왜 아직 안 끝나는 겁니까? 하나님의 사역은 언제쯤 전 우주로 확장됩니까?”라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시간이 너무 늦게 간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진리에 관심이 없으며, 언제나 세상으로 돌아가 자신만의 삶을 꾸리고 싶어 한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과 완전히 다른 내적 상태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본분 이행이 아무리 바빠도, 문제가 닥치면 진리를 구해 해결할 줄 알며, 설교를 듣고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구하고 교제한다. 또 매일 마음을 평온히 하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체험 간증 영상을 보면서 얼마간 수확을 얻는다. 이런 자는 본분 이행으로 아무리 바빠도 전혀 생명 성장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생명 진입에 지장을 주지도 않는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렇게 실행한다. 하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본분 이행으로 바쁘든 바쁘지 않든, 어떤 문제가 닥치든 진리를 구하지 않으며, 마음을 평온히 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거나 인식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래서 본분 이행으로 바쁘든 한가하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사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마음을 갖고 진리를 갈망하며 자신의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에 부담을 느낀다면, 사역이 아무리 바빠도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다가가고 기도할 것이며, 성령의 깨우침과 빛을 얻을 것이고, 생명이 끊임없이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에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거나 관심이 없다면, 수확이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어떤 패괴 표출이 있는지 반성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본분을 이행할 때 패괴를 드러냈다면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한편, 스스로를 돌아보고 패괴 성품을 인식하며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이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로, 업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것이 어렵겠느냐? 이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에 달려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 성장에 관심이 없으며, 마음속으로 이런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생명 성장에 마음을 쓰고자 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문제를 수시로 묵상하며, 어떻게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되새긴다. 사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곧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한다면, 그렇게 몇 년간 실행한 후 적잖은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본분 이행에 합격점을 받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패괴 표출도 훨씬 줄어들며,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 진실한 체험도 많아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그럼 이런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부터 하나님을 증거할 때까지 어떻게 체험했겠느냐?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는 체험을 했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본분 이행이 아무리 바빠도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며, 원칙대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진리를 실행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 진입의 과정이자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과정이다. 본분을 이행하느라 바빠서 진리를 추구할 시간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사역을 하든, 문제를 발견하는 즉시 진리를 구해 해결하며, 진리를 깨닫고 얻을 수 있다. 이는 절대적인 일이다. 많은 사람이 매일 예배에 참석해야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단단히 틀린 것이다. 예배에 참석하거나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해야 하며, 또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핵심은 진리를 구하는 데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문제가 닥치든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 반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본분 이행으로 아무리 바빠도 문제가 닥치면 진리를 구한다. 그러므로 본분을 이행하느라 너무 바빠 예배에 참석할 시간이 없고, 그래서 진리 추구에도 지장이 있다고 투덜대는 사람들은 분명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릇되게 이해하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듣고도 왜 본분 이행 과정에서 실행하지 못하고 적용하지 못하겠느냐? 왜 하나님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하지 못하겠느냐? 이는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말해 준다. 그러므로 본분 이행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마주하든 진리를 구하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이 사람들은 전부 힘쓰는 자들이다.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나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조차 제대로 계획하지 못한다. 두세 가지 일이 있으면 어떤 일을 먼저 처리하고 어떤 일을 나중에 처리해야 할지 모르며, 두세 가지 문제가 닥치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진리에 이를 수 있겠느냐?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할 것이다. 자질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나 결국 하나님을 10년, 20년 믿고도 체험 간증을 전혀 말하지 못하고, 어떤 진리도 얻지 못하는데, 그 주요 원인은 바로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데 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여부는 본분 이행으로 바쁜지, 시간이 없는지에 달린 게 아니라 마음으로 진리를 사랑하는지에 달려 있다. 사실, 사람이 가진 시간은 누구나 똑같다. 다만 개개인이 사용하는 곳이 다를 뿐이다. 진리를 추구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육적인 누림에 시간을 쓰거나 표면적인 일로 바빠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다. 이는 생명 성장에 지장을 주는 큰일이다.
지난 두 번의 예배에서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및 그 주제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교제했다. 먼저 지난번 예배 때 이야기한 내용을 짚어 보도록 하자. 지난번에는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한편,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관련된 세부 문제와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교제했다. 지난번 예배 때 교제한 마지막 내용은 무엇이었느냐? (하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사람이 좋고 옳다고 여기는 것이 진리가 아닐진대, 사람은 왜 그것들을 진리로 여겨 추구하는 것이냐?”) 사람이 좋고 옳다고 여기는 것들이 진리가 아닐진대, 사람은 왜 그것들을 진리로 여겨 지키면서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 문제에 관해 지난번에 세 가지 내용을 교제하였다. 첫째, 사람이 추구하는 그것들은 진리가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왜 그것들을 진리로 여겨 실행하겠느냐? 사람이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 사람의 눈에는 진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좋고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여겨 추구한다. 명확하게 얘기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모두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여겨 지키면서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완벽한 대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둘째, 사람은 왜 자신이 좋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진리로 여겨 지키면서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겠느냐?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사람은 복받으려는 욕망이 있으며, 욕망과 야심을 품고 자신이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추구하면서 그것이 곧 진리 실행이고 진리 추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다. 셋째, 정상적인 양심과 이성을 갖추었다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양심과 이성에 기대 일을 처리하게 되며, 몇몇 규례와 법칙, 규율 등을 지킬 수 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양심 안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인성에 부합한다고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삼아 지킨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부 사람의 양심과 이성의 범위 안에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 집에서 정상적으로 힘을 내는데, 이는 다 정상적인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기꺼이 하나님 집에서 힘쓰며,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종하고, 복을 얻기 위해 고생하면서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양심과 이성의 범위 안에서 도달할 수 있는 것들을 진리 실행, 진리 추구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주로 위의 세 가지 내용으로 귀결된다. 지난번에 우리는 이 세 가지 내용에 대해 대략적으로 교제하였다. 오늘은 이 세 가지 내용에서 남겨진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교제하겠다. 또 각각의 내용과 관련된 문제들을 해부하고, 각각의 내용과 진리 추구의 차이, 충돌을 분석함으로써 진리 추구란 무엇인지, 도대체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진리 추구인지에 관해 더 정확하게 알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사람이 실생활에서 정확하게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하는 데 더 큰 추진 작용을 할 것이다.
일단 첫 번째 내용에 대해 교제하겠다. 첫 번째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에 관한 교제이다. 왜 이 내용을 교제하겠느냐? 이 내용과 관련된 문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먼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만약 예배 때 이 내용을 정식으로 구체적으로 교제하지 않은 채, 너희 스스로 묵상하거나 시간을 들여 체험하고 인식한다면 정확하게 알 수 있겠느냐? 이 내용이 어떤 진리들과 관련되어 있는지 알 수 있겠느냐? 묵상해 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일단,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이라는 말을 사전적으로 묵상하고, 너희가 어디까지 인식할 수 있는지 보겠다. 먼저, 이 말을 통해 교제하려는 중점 내용은 무엇이겠느냐? 너희는 알아채지 못했느냐? 이 말이 추상적이냐? 오묘하냐? (사람 내면의 관념과 상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괄적인 말이다. 예를 들어 보아라. (사람은 관념적으로 버리고 헌신하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기만 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밖에도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하기,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가르치기 등의 전통문화를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너희는 중점을 파악했느냐? 여기에서 어떤 부분이 주제와 관련되어 있느냐? (버리고 헌신하며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부모에게 효도하기,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가르치기 등이 있습니다.) 그렇다.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표면적인 경건함과 인내, 포용이 있는데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겸손과 인내, 포용은 행위상의 구체적인 모습, 설명과 관련된다. 우리가 이 측면의 내용을 교제할 바에는 구체적인 설명을 통해 자세히 교제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문제를 놓고 교제하면 더 정확하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 너희는 어떤 맥락도 잡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바로 교제하겠다. 괜찮겠느냐? (네.) 중국의 5천 년 문화는 ‘넓고 깊으며’, 무척 다양한 속담, 성어가 있다. 또한, 공자, 맹자 등 유명한 ‘고대 성현’들도 수없이 많다. 그들은 중국의 유가 학설을 만들었고, 이는 중국의 전통문화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전통문화를 보면 세대를 거듭하며 사람들이 종합한 것, 고전에서 비롯되거나 그렇지 않은 것, 민간에서 유래된 것, 명인들의 말이나 어휘, 주장이 무척 많다. 어쩌면 너희가 전통문화를 좋아하지 않거나 이미 이 저속한 전통문화에서 벗어나서 혹은 나이가 너무 어린 탓에 중국의 이 ‘넓고 깊은’ 전통문화를 심도 있게 공부하고 연구하지 않아서 아직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알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는 오히려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했어도 사상과 관념이 전통문화에 시나브로 물들고 전염되어 결국 부지중에 그러한 것들로 살아가게 된다. 조상 대대로 전해진 것, 즉 선조 때부터 내려온 이 전통문화들은 사람의 말과 일 처리, 행동 방식에 수많은 주장을 제시했다. 사람마다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각종 말들을 다르게 이해하고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고는 하나, 그런 전통문화를 기본적으로는 인정한다. 이러한 현상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인류가 생활하고 생존하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원천은 전통문화이다. 종족마다 신봉하는 도덕 기준과 도덕 준칙의 견해는 서로 다르지만, 대략적인 의미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오늘은 그 일부에 대해 구체적으로 교제하고 해부하도록 하겠다. 인류가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전부 다루고 해부할 수는 없겠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기본적으로 이러하다. 그것은 진리 추구의 정의와 관련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는 두 가지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는 바라보는 것이고 하나는 행동하는 것이다. 즉, 사람은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로 이 세상의 사람들과 일을 대하며, 그것을 기초로 삼고 근거와 준칙으로 삼아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 그럼 이 좋고 옳은 것들에는 과연 무엇이 있겠느냐? 전반적으로 보자면,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은 그저 좋은 행위 및 좋은 인성, 도덕, 인품이라는 두 가지를 요구할 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기본적으로 이 두 가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하나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인품과 도덕이다. 인류는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행동을 판단하는 기본적인 기준으로 이 두 가지를 만들었다. 이 중 하나는 사람에게 표면적인 좋은 행위를 갖추라고 요구하고, 다른 하나는 좋은 덕행을 갖추라고 요구한다. 이 두 가지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판단하기 때문에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과 도덕 기준도 그에 따라 생겨났다. 이와 동시에, 사람은 자연스럽게 덕행이나 행위에 대한 각종 말들을 듣게 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말들이 있는지 알고 있느냐?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다.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과 논조에는 어떤 것이 있더냐? ‘교양 있고 사리 밝다.’, ‘온화하고 우아하다.’라는 말은 표면적인 행위에 대한 것이다. 이 밖에, ‘점잖고 예의 바르다.’라는 말도 포함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나머지도 대부분 비슷하니, 이것들로 유추하면 어떤 어휘, 어떤 말이 사람의 행위 측면을 판단하는 기준인지, 어떤 말이 도덕적인 측면을 판단하는 기준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하라.’라는 말은 표면적인 행위에 대한 기준이겠느냐, 아니면 도덕에 대한 기준이겠느냐? (도덕과 품행 측면의 기준입니다.) ‘도량이 넓고 크다.’라는 말은 어떠하냐? (그 또한 도덕적인 측면의 기준입니다.) 그렇다. 이것들은 도덕적인 측면, 사람의 인품, 덕성과 관련이 있다. 사람의 행위와 관련이 있는 말에는 주로 ‘점잖고 예의 바르다.’, ‘온화하고 우아하다.’, ‘교양 있고 사리 밝다.’ 등이 있다. 이런 것들은 다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다. 사람은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말에 근거하여 이것을 긍정적인 것이라고, 적어도 양심과 이성에 부합하며, 부정적인 사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언급한 것들은 사람이 옳고 좋다고 공인한 것들이다. 그럼 사람의 표면적인 행위와 관련된 말들 중 방금 내가 말한 세 가지 외에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한다.’, ‘상냥하고 친절하다.’, ‘가까이하기 쉽다.’ 등은 모두 상대적으로 익숙하며 잘 알고 있는 말들이다. ‘교양 있고 사리 밝다.’, ‘온화하고 우아하다.’, ‘점잖고 예의 바르다.’,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한다.’, ‘상냥하고 친절하다.’, ‘가까이하기 쉽다.’ 등 이런 모습을 갖춘 사람은 전부 사람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좋은 사람, 착한 사람, 인성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위에 근거해 남을 평가하며, 표면적인 행위를 보고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가늠한다. 어떤 사람이 교양과 인성을 갖추고 있는지, 사귀고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를 볼 때 사람은 언제나 전통문화의 사상과 관점, 겉으로 보이는 행위와 모습으로 판단하고 판별하고 가늠한다. 사람에게 물질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더냐? 전혀 없다. 사람은 그저 행위를 통해 판단하고 판별하며, 다른 사람과의 교류, 대화, 협력을 통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혹은 어떤 사람인지 관찰하고 규정할 뿐이다. 네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교양 있고 사리 밝은지, 상냥하고 친절한지,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지 등을 명확한 판단 기준으로 삼았든 그렇지 않든, 네 판단 기준은 기본적으로 이 몇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다른 이의 내면세계를 간파하지 못할 때, 그의 행동거지를 관찰하고, 이 몇 가지 행위 기준으로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혹은 귀한 사람인지 천한 사람인지 판단한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것들이 판단 기준이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방금 정리한 이 몇 가지 말들을 보았을 때, 인류는 모두 어떤 평가 기준을 가지고 있겠느냐? 인류가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내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일단 덕행 측면은 차치하고, 사람의 행위와 태도에서 드러나는 좋고 옳고 긍정적인 것들에 대해 교제하고 해부하면서 이것들이 정말 긍정적인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방금 우리가 예로 든 여러 말들 중 진리와 관련된 것들이 있더냐? 진리에 부합하는 내용이 있더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고, 그런 행위와 겉모습을 갖춘 사람이 되기를 추구한다면, 그것이 진리 추구겠느냐? 그가 추구하는 것과 진리 추구가 관계가 있겠느냐? 사람이 그러한 행위를 갖추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하는 것이겠느냐? 그러한 행위와 태도를 갖춘 자가 진정한 의미의 좋은 사람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이는 너무도 뻔한 사실이다.
먼저 ‘교양 있고 사리 밝다.’라는 말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교양 있고 사리 밝다.” 이 말 본연의 뜻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교양이 있고 예의를 안다는 뜻입니다.) 교양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어느 정도 규율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어떤 규율을 알고 있겠느냐? 구체적으로 이야기할수록 이 일, 이 측면의 본질을 더 분명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규율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더냐? 예를 들어 보겠다. 식사를 할 때, 연장자가 먼저 자리에 앉지 않으면 아랫사람이 앉을 수 없는 것, 연장자가 말을 하지 않으면 아랫사람이 입을 열 수 없는 것, 연장자에게 남겨 둔 음식을 연장자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먹지 못하는 것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식사할 때 말하거나 치아를 보이거나 크게 웃지 않는 것, 쩝쩝 소리를 내지 않고 접시에서 이것저것 집지 않는 것 등이 있다. 연장자가 식사를 마치면 아랫사람은 얼른 식사를 중단하고 일어나야 하며, 연장자가 떠난 후에야 다시 자리에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다. 이것이 규율을 지키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규율은 모든 집, 모든 가문의 대가족 사이에 정도만 다를 뿐 다 존재한다. 또 정도만 다를 뿐 모두 이러한 규율들을 지키고 거기에 제약받는다. 가문마다 서로 다른 규율이 있다. 이 서로 다른 규율은 누가 정한 것이냐? 각 가문에서 서로 다른 시대에 살던 조상이나 명망 높은 연장자들이 정한 것이다. 특히 큰 명절이나 기념일을 보낼 때면 이러한 규율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모두가 반드시 지켜야 하고, 어기는 사람이 있어선 안 된다. 만약 규율을 깨거나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가법으로 매서운 벌을 받으며, 심한 경우 사당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규율이라고 한다. 우리가 방금 말한 것들은 한 가정 또는 한 가문에 존재하는 한 부분의 규율에 불과하다. 이러한 규율이 교양 중의 하나 아니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양을 갖췄는지를 알려면 식사하는 태도를 보면 된다. 식사할 때 쩝쩝거리고, 반찬을 고르면서 계속 다른 사람에게 반찬을 집어 주고, 먹으면서 말하고 큰 소리로 웃는 것, 혹은 젓가락으로 다른 사람을 가리키며 말하는 것 등은 다 교양 없는 태도이다. 교양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그의 행위가 남들에게 질책받고 의심받고 경멸당한다는 뜻이다. 그럼 교양 있는 사람은 어떠하냐? 식사할 때 말하지 않고 소리 내어 웃지 않으며 반찬을 고르지 않고 남에게 음식을 집어 주지 않는 등 규율을 무척 잘 지킨다. 사람들은 그의 행위와 태도를 보고 교양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교양을 갖췄기에 존중과 우러름, 호감을 얻는다. 이는 ‘교양 있다’는 말의 한 가지 내용이다. 그럼 그 교양이라는 것은 대관절 무엇이냐? 방금 말했듯, 그 교양은 그저 사람의 행위와 관계가 있을 뿐이다. 좀 전에 예로 든 사례가 그러하다. 식사할 때 장유유서를 지켜야 하고, 규율에 따라 자리를 잡아야 하며, 잘못 앉아서는 안 된다. 어른이든 아이든 할 것 없이 모두 가문의 규율을 지켜야 하며, 누구도 어겨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면 규율을 무척 잘 지키는 것 같고 매우 우아하며 고상하고 존귀해 보이지만,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결국에는 표면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이것이 패괴 성품과 관련이 있겠느냐? 없다. 이는 그저 사람의 표면적인 행위에 대한 판단 기준일 뿐이다. 어떤 행위겠느냐? 주로 사람의 언행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식사할 때 말을 하면 안 된다든가, 음식을 씹을 때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든가, 자리에 앉을 때도 순서가 있다든가, 평소에 어떻게 서 있고 어떻게 앉아야 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전부 행위, 표면적인 행위일 뿐이다. 그럼 사람이 이러한 규율을 정말 지키고 싶어 하겠느냐? 사람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어떻게 느끼고 있느냐? 이 하찮은 규율을 지키는 것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겠느냐? 생명 성장을 가져올 수 있겠느냐? 이 하찮은 규율들을 지키는 것은 어떤 문제겠느냐?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생명 성품에 변화가 생기는 것 등의 문제와 관련이 있겠느냐? 전혀 관련이 없다. 그것은 그저 사람의 행위와 관련이 있을 뿐이고, 사람의 행위에 대해 요구를 할 뿐이다. 즉, 사람에게 어떤 것들을 하고 어떤 규율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설사 이러한 규율을 증오하고 경멸할지라도 가족이나 조상들 때문에, 그리고 가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속박 아래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상적으로 이러한 규율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지, 어떤 관점과 태도가 있는지 아무도 따져 보지 않는다. 이런 정해진 범위 안에서 좋은 행위를 보이고 이 규율들을 지키기만 하면 그만이며, 그런 너는 교양 있는 사람인 것이다. ‘교양 있고 사리 밝다.’라는 것은 사람의 행위에 대한 여러 가지 요구에 불과하며, 그것은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하는 데 쓰일 뿐이다. 그 행위에는 앉는 자세, 서 있는 자세, 몸짓, 오관의 움직임은 물론이고 눈으로 어떻게 보는지, 입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고개를 어떻게 갸웃거리는지 등이 포함된다. 이는 표면적인 행위에 대해 기준을 제시할 뿐, 사람의 마음이나 성품, 인성의 본질이 어떤지와는 관계가 없다. 이것이 바로 ‘교양 있고 사리 밝다.’라는 것의 기준이다. 이 기준을 갖추었다면 너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고,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좋은 행위를 갖춘 것이다. 그런 너는 사람들 눈에 우러러보고 존중할 만한 이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말은 사람의 행위에 대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행위의 기준이 대체 어떤 쓸모가 있겠느냐? 주로 사람이 교양을 갖추었는지, 규율을 아는지, 남들과 함께 지낼 때 존중받고 우러름을 받는지, 사람들의 탄복을 자아내는지 등을 판단하는 데 쓰인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진리 원칙에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어떤 의미도 없다.
좀 전에는 사람의 교양 측면에 관해 중점적으로 이야기했다. 이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의 한 가지 요구 사항이었다. 그럼 여기에서 ‘사리 밝다’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예절과 예의를 안다는 것입니다.) 좀 부족한 감이 있으나 그 또한 한 측면의 내용이다. ‘사리 밝다’란 사리에 밝고 이치를 따진다는 뜻 아니겠느냐? 이 측면으로 확장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예절과 예의를 알고 사리에 밝다는 것이다. 그럼 전반적으로 봤을 때, 사람이 ‘교양 있고 사리 밝은’ 행위를 갖추었다면, 보통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너희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너희 집의 연장자, 친척, 혹은 친구 중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있느냐? 그들의 특징은 무엇이냐? 규율이 무척 많다. 말에 신경을 많이 쓰고 우악스럽거나 상스럽지 않으며 남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는다. 앉아 있으면 앉아 있는 대로, 서 있으면 서 있는 대로 자태가 있으며, 여러 측면에서 행위가 더없이 우아하고 품격 있어 보여 모두 그를 좋아하고 부러워한다. 그들은 사람을 만나면 바로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며, 인사치레 말을 하고, 공공 규칙이나 질서를 철저히 지킨다. 사회 하층민 같은 습성이나 불량기도 없다. 요컨대, 남들을 편하게 해 주고 동조를 얻는 외적 행위를 보인다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으니, 무슨 일을 하든 규율이 있다.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규율, 잠을 잘 때는 잠자는 규율, 길을 걸을 때는 길 걷는 규율, 심지어는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는 것에도 규율이 있다. 이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무척 조심스러워지고 구속받는 기분이 든다. 너는 그가 언제 규율을 적용할지 모른다. 실수로 규율을 어기면, 몹시 경솔하고 무식해 보이며, 반대로 상대는 고상해 보인다. 웃을 때조차 아주 우아해서 치아를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 앞에서 우는 경우도 없다. 깊은 밤 혼자 있을 때 이불 속에서 울 뿐이다. 이처럼 무슨 일을 하든 다 규율이 있다. 이것을 가정교육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예의지국, 대가족 속에서 살아가는데, 규율이 무척 많고 가정교육도 엄격하다.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좋은 행위는 어떻게 말하든 한 가지 행위일 뿐이다. 이는 사람이 자라온 환경에 영향을 받은 한편, 자신의 행위에 대한 높은 기준과 엄격한 요구로 인해 조금씩 완성된 좋은 외적 행위이다. 이 행위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든, 결국 그것은 사람의 표면적인 행위와 관련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이 표면적인 행위를 좋은 행위라고 여길지라도, 동경하고 인정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의 성품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표면적인 행위가 아무리 훌륭해도 사람의 패괴 성품을 덮을 수는 없고, 패괴 성품의 변화를 대신할 수도 없다. 설사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의 행위가 매우 모범적이며 남들에게 존중과 우러름을 받을지라도 그의 패괴 성품이 드러날 때, 그 좋은 행위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의 행위가 아무리 고상하고 성숙해도 진리 원칙과 관련된 일이 닥쳤을 때, 그 좋은 행위는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으며, 진리를 더 깨닫게 해 주지도 못한다. 한편, 그는 관념적으로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이 긍정적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진리로 여겨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의구심을 제기하기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을 근거로 자신의 언행을 판단하게 된다. 이는 또한 그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이제 다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한다는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에 관한 정의에 대해 살펴보자. 그럼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외적 행위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 진리와 조금이라도 연관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연관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충돌한다. 어디에서 충돌하겠느냐? (그 말들은 사람이 좋은 외적 행위에만 집중하고, 내적인 속셈과 패괴 성품은 간과하게 합니다. 또 사람이 이 좋은 행위들에 미혹되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반성하지 않고, 사람 내면의 패괴 성품을 간파하지도 못한 채, 행위에 근거하여 맹목적으로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고 숭배하게 합니다.)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말들을 받아들이면 그런 결과가 생긴다. 그래서 사람은 좋은 행위를 보고 그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는 먼저 그러한 행위가 좋고 올바르다고 생각하여 긍정적인 사물로 여기며, 그것을 기초로 그러한 행위를 진리로 삼아 대한다. 그 후, 그것을 준칙으로 자신을 옭아매고 다른 이를 판단하며, 그것을 근거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한편,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 이것이 진리와 충돌하지 않겠느냐? (충돌합니다.) 일단 ‘교양 있고 사리 밝다.’라는 말이 사람을 미혹하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이 말 자체에 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교양 있고 사리 밝다.”라는 말은 우아하고 고상하다. 누구나 이 말을 좋아해 옳고 좋은 것, 준칙으로 여긴다. 그것을 기초로 남을 판단하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한편, 이 말을 기준으로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판단할 때, 그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다. 무엇을 근거로 하겠느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일까? 겉으로 보이는 행위에 교양이 드러날까? 규율을 알고 있을까? 사람을 존중할 줄 알까? 예의가 있을까? 남과 이야기할 때 겸손한 태도를 보일까? 양보 같은 좋은 행위를 보일까? 이런 사람일까?’ 그가 이러한 의문과 견해를 갖게 된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먼저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이 준칙에 근거했다. 이것을 근거로 삼은 것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어째서 옳지 않겠느냐? 가장 쉬운데도 너희는 답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판단하지 않으며, 사람에게 그렇게 판단하라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이 그렇게 판단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사람이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과 일을 판단한다면, 그것을 기준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것이다. 이는 전통 관념과 진리가 충돌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을 근거로 남을 판단하게 하느냐? 무엇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게 하느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을 바라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한 가지이다. 이 밖에, 그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진리에 순종하는지에 근거해야 한다. 이것이 구체적인 내용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군가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판단할 때 무엇에 근거하느냐? 교양이 있는지, 규율을 지키는지, 식사할 때 쩝쩝거리지는 않는지, 음식을 가리지는 않는지, 연장자가 자리에 앉은 후에 착석하는지 등을 보며 판단한다. 이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행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이 정확하겠느냐?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결코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럼 이런 판단의 마지막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이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에게 진리를 교제하라고 하면 그는 집안 규율이나 가정교육, 좋은 행위로 다른 사람을 양육하며, 이러한 것들을 주입한다. 그리고 결국 사람들을 좋은 행위로 끌고 가기에 사람의 패괴 본질에는 어떤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이런 행동은 진리에서 멀어지고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좋은 행위만 좀 갖췄을 뿐이다. 이 사람의 내면에 있는 패괴 성품이 좋은 행위로 인해 바뀌겠느냐?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할 수 있겠느냐? 한참 부족하다. 이들은 모두 어떤 사람이 되었겠느냐? 좋은 외적 행위만 보일 뿐,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며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못하는 바리새인이 되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의 겉모습에 트집 잡을 만한 것이 있었더냐? 안식일을 지켜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말할 때는 점잖고 예의 발랐으며, 규율을 잘 알고 규례를 지켰다. 교양을 많이 갖추었고, 문화적인 지식 또한 높았다. 하지만 위장에 능하고 하나님을 전혀 경외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했기에 결국 하나님께 저주받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바리새인, 악을 행하는 자들로 규정했다. 마찬가지로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좋은 행위를 처신과 일 처리의 준칙으로 삼는 사람들은 결코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아니다. 그들이 이런 규율로 남을 판단하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 역시 당연히 진리 추구가 아니다. 또한, 그들이 어떤 사람과 일을 평가할 때, 그 평가 기준과 근거는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어긋난다. 그들이 집중하는 것은 사람의 행위와 행동일 뿐, 성품이나 본질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전통문화 중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과 같은 행위적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렇게 판단한 결과, 겉으로 볼 때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좋은 행위를 갖추고 있기만 하면 좋은 사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된다. 사람이 이러한 정의를 하는 순간, 진리와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그들이 이런 행위 기준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수록 하나님 말씀과 진리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결과가 생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상황에서 희희낙락하면서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일부 좋은 말들을 지키면서 자신이 진리와 참도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지키고 고수하든, 결국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전혀 체험하거나 경험하지 못하며, 하나님께 전혀 순종하지도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는 더더욱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과 같은 좋은 행위를 지킨 결과이다. 사람이 좋은 행위에 집중하고, 좋은 행위로 살아가는 데 집중하며, 좋은 행위를 추구하는 데 집중할수록 하나님 말씀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며,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질수록 진리를 깨달을 수 없게 된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사람의 행위가 좋아진 것이 성품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겠느냐? 너희는 이러한 측면에서 경험이 있느냐? 너희는 자기도 모르게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기를 추구한 적이 없느냐?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귀하고 고상해 보이며, 신뢰받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좋은 행위들을 갖추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좋은 행위와 좋은 모습이 있다고 해서 사람의 패괴 성품이 해결되겠느냐?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을 피할 수 있겠느냐? 만약 불가능하다면, 이 좋은 행위가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그저 겉보기에만 좋아 보일 뿐, 아무 쓸모가 없다. 이런 좋은 행위가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좋은 행위는 진리 실행을 대신할 수 없다. 바리새인들처럼 말이다. 그들의 행위는 훌륭했고 더없이 경건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를 어떻게 대했더냐? 그들이 인류의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을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좋은 외적 행위만 있고 진리를 얻지 못한 사람은 무척 위험하며, 계속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할 수 있다. 이 점을 밝히 알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사람의 좋은 행위에 미혹될 것이다.
교양 있고 사리 밝다는 것은 사람의 전통 관념으로, 진리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이 진리와 충돌한다면, 사람은 과연 무엇을 갖추어야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어떤 실제를 살아 내야 진리에 부합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합할 수 있겠느냐? 알고 있느냐? 이렇게 교제하면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그저 좋은 외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하신다면, 저희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살면 더 자유롭게, 어떤 속박이나 규례의 제약도 없이 원하는 대로 하고 살아갈 수 있겠지요.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사람의 좋은 행위와 결말이 관계가 없다니 더 자유롭게 살아도 되겠습니다. 교양이니 규율이니 뭐니 하는 것들 다 필요 없겠네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이는 치우친 이해로,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럼 이런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없겠느냐? “교양 있는 사람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할 수 있다면, 저는 교양 있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교양 있는 사람을 무시할 것입니다. 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 온화하고 우아한 사람,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을 경멸하겠습니다. 그런 태도를 갖춘 사람을 보면 코웃음을 치면서 공개적으로 꾸짖을 것입니다. ‘그건 바리새인의 행위로, 사람을 미혹하는 짓입니다. 그것은 진리 추구가 아니며, 진리 실행은 더더욱 아니죠. 우리를 기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의 기만과 속임수에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아닙니다.) 아니라니 되었다. 그런 비이성적인 일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너무 치우친 것이다. 치우치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순수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규례를 지킬 줄밖에 모르기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럼 어째서 이 문제를 교제하고 해부하겠느냐? 진리 추구가 좋은 외적 행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좋은 행위를 하고 규율을 알고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네가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며, 진리에 근거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네 행동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에 부합해야 한다. 진리에 부합하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는 행위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과 같지 않으며, 전통문화나 전통 도덕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기준과도 같지 않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일이다. 하나님 말씀은 곧 진리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의 선악과 시비를 판단하는 유일한 준칙이다. 반면, 전통문화 중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의 기준은 진리 원칙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 하나님이 언제 네게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 교양 있고 고상하고 저속한 느낌이 없는 사람이 되라고 하더냐? 하나님의 어느 사역 단계에서 그렇게 말하더냐? 하나님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더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럼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에 어떤 말과 요구를 제시했느냐?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라 하였다. 그럼 여기에서 하나님 말씀의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어떤 진리를 준칙으로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할 수 있겠느냐? 이것을 이해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사람의 행위 측면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요구 기준은 무엇이냐? 너희가 명확한 하나님 말씀을 찾을 수 있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상당히 많다. 너희가 적절한 처신을 하고, 품행이 바르고,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하기 바란다. 또한 진리와 인성을 갖추고,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생명까지 포기할 수 있는 사람, 이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너희의 부족함, 패괴, 패역 때문에 이런 바람을 가지게 된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과오는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이다> 중에서)) 그 말씀들은 다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관한 원칙과 요구이다. 그러면 구체적인 실행 측면에는 어떤 말씀이 있느냐?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항상 마음을 평온히 하여 일이 닥쳤을 때 조급해하거나 고집을 부리거나 과격하게 굴거나 가식을 부리거나 위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정상 인성에 갖춰져 있어야 하는 모습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길> 중에서)) 그것은 구체적인 실행이자 사람의 외적 행위,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과 요구이다. 그것을 하나님 말씀의 근거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 이 정도면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 보아라. (“너는 항상 마음을 평온히 하여 일이 닥쳤을 때 조급해하거나 고집을 부리거나 과격하게 굴거나 가식을 부리거나 위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정상 인성에 갖춰져 있어야 하는 모습이다.”) 그 몇 가지를 적어 두어라. 이는 앞으로 일을 처리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다. 즉, 사람에게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이성적으로 직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알려 주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에 기대 일을 처리하는 것을 기초로 진리 원칙을 구할 수 있다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원칙이 있을 것이고, 실행의 길이 있을 것이다.
방금 그 “너는 항상 마음을 평온히 하여 일이 닥쳤을 때 조급해하거나 고집을 부리거나 과격하게 굴거나 가식을 부리거나 위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대로 하기가 쉽겠느냐? 사실 한동안 훈련하면 할 수 있다. 만약 정말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한 가지만 하면 된다. 일이 닥쳤을 때, 또는 다른 사람과 사귈 때 최소한 다음의 한 가지는 지켜라.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면서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한 가지이다. 이것을 근거와 준칙으로 실행하고 지키면 기본적으로 남에게 큰 피해는 주지 않을 수 있고, 자신도 큰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다.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남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타인의 이익에 해를 끼치면서 자신을 만족시켜서는 안 되며, 자신의 기쁨과 행복이 남의 고통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 ‘도움이 되는 것’의 가장 기본적인 이해는 무엇이겠느냐? 적어도 인성의 양심, 이성으로 네 행위를 판단했을 때, 다른 사람이 봐 줄 정도는 되어야 하며,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부합해야 한다.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 수준에 도달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집에서 쉬고 있는데 네가 들어와 주변을 살피지 않고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을 틀어 놓는다면 이것이 적절한 행동이겠느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는 다른 이의 고통 위에 네 기쁨을 세운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진리를 교제하고 있는데 네가 굳이 그에게 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면, 이것이 타인을 존중하는 것이겠느냐? 다른 이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최소한 다른 이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른 이가 말하고 일할 때 방해하지 않는 것, 이는 정상 인성이 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느냐? 만약 네가 이 정도도 하지 못한다면, 양심과 이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 더더욱 불가능하다. 진리를 실행하려면 최소한 양심과 이성을 갖춰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려면 적어도 언행에 있어서 양심과 이성의 기준에 부합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야 하며,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방금 말한 것처럼, 최소한 행위 면에서 적절하게 행동하고, 남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남에게 이익을 준다는 뜻이겠느냐? 사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상호 간의 공간을 존중하여 다른 사람이 방해받거나 교란되거나 간섭받지 않게 해 주는 것이며, 네 행위로 인해 피해를 보거나 고통받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움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어떻게 이해했느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네게서 많은 이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당한 권익과 권리를 누리는 것이며, 또한 네 제멋대로인 행동과 정당하지 않은 행위로 인해 그 권익과 권리가 간섭받거나 박탈당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지금 너희는 사람이 어떻게 처신하고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요구하는 하나님 말씀에 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가장 기본은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남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자 한다. 이것이 일 처리의 원칙이다.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했느냐? (네.) 혹자는 말하고 일할 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교양 있고 사리 밝다고 말하는데, 이는 기만 아니겠느냐?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에는 배울 만한 공과가 있지 않겠느냐? 이는 일종의 행위이자 태도지만, 그렇게 하기가 쉽겠느냐? 진리를 좀 깨달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원칙에 부합하고 다른 이에게 도움과 이로움이 되는지 알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기대 일을 처리할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일이 닥치든 진리를 구하는 법 없이 자신의 기호대로 행동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일 처리에 원칙이 있겠느냐? 밝히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수시로 예배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는다. 만약 정말 진리를 얼마간 깨닫게 된다면,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고 여러 가지 일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실행하면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떤 느낌을 받겠느냐? 열심히 묵상하면 어떻게 실행해야 남에게 도움이 될지 알게 된다. 너희는 평소 어떤 일이 닥치든, 어떻게 하는 것이 정상 인성이나 진리 실행과 관련되는지, 이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이 닥쳤을 때, 너희에게 어떻게 실행하고 일을 처리해야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명확한 길이 없는 것처럼 느낀다. 내가 예배 때 교제한 것은 전부 이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너희는 이 문제들을 접할 때면 언제나 따라가지 못하고 머리가 백지가 된다. 이것이 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얻었느냐? 약간의 도리와 구호를 얻었을 뿐이니, 빈궁하고 가련하기 그지없구나!
우리는 사람이 관념적으로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 중 하나인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이라는 행위 기준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 안에는 사람의 구체적인 관념과 상상, 이러한 측면의 행위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법이 어느 정도 들어 있다. 요컨대, 지금 보면 이러한 측면의 행위와 태도는 진리, 진정한 인성과 관계가 없다. 진리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측면의 행위는 하나님이 요구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어울리지도 않고 어떤 관계도 없다. 이러한 것들은 그저 사람의 행위일 뿐이다. 사람이 이 행위를 아무리 잘 해내고 제대로 실행해도 그것은 하나의 행위일 뿐, 진정한 정상 인성조차 될 수 없다. ‘교양 있고 사리 밝다.’라는 말은 사람의 외적 행위에 대한 포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포장하고 미화하기 위해 열심히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리하여 남들에게 우러름과 존중을 받고,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와 몸값을 올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진정한 사람이 갖추어야 할 도덕이나 인격, 존엄에조차 이르지 못한다.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은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는 또한 패괴된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 낸,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행위이자 태도이다. 이러한 행위와 태도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점을 받고 몸값을 높이며 존중받고 뛰어난 사람이 되어 무시당하거나 괴롭힘 받지 않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인성이나 도덕, 인품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이 외적 행위를 사람은 그렇게나 대단하고 중요하게 생각한다. 말해 보아라. 거기에 기만적인 성분이 얼마나 크겠느냐! 그렇기에 하는 말인데, 만약 네가 현재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고자 추구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규범화하고 있다면,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을 목표로 열심히 추구하고 실행하고 있다면, 당장 걸음을 멈추라고 권하고 싶다. 그런 행위와 행동은 점점 더 스스로를 꾸미고 외식하게 할 뿐이며, 정직한 사람, 순수하고 솔직한 사람이 되는 길에서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 너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될수록 더 꾸미게 될 것이며, 점점 더 꾸미고 심하게 위장할수록 사람들은 너를 간파하거나 이해하기 힘들어질 것이고, 네 패괴 성품 역시 더 깊이 감춰질 것이다. 그러면 진리를 받아들여 구원받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이 몇 가지를 고려했을 때,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고자 추구하는 길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겠느냐? 이것이 올바른 추구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부정적인 성질이나 효과 외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측면의 행위 배후에는 타인과 자신에 대한 기만성이 더 많이 존재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의 배후에는 남에게 밝힐 수 없는 수많은 비밀이 감춰져 있으며,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되는 비열하고 지저분하고 사악하고 밝히기 힘든 각종 그릇된 사상과 관념, 관점, 태도, 생각이 숨어 있다.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의 좋은 행위 배후에는 더욱 심각한 패괴 성품이 숨겨져 있다. 교양 있고 사리 밝다는 외적 행위에 가려진 그는 스스로의 패괴 성품을 직면할 용기도, 인정할 자신도 없다. 스스로의 패괴 성품, 치우친 인식, 사악한 생각과 속셈과 목적, 나아가 흉악하고 악독한 생각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용기나 자신은 더더욱 없다. 배후에 숨겨진 이 많은 것들을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눈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좋은 행위를 갖춘 소위 ‘호인’이 보일 뿐이다. 이것이 하나의 기만책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의 모든 행위와 태도, 추구, 본질이 다 기만책으로, 그는 남을 속이고 또한 자신을 속인다. 이런 사람의 마지막 결말은 무엇이겠느냐?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버리고 참도에서 등 돌려 하나님에게 내쳐지게 된다.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좋은 행위의 뒤에 숨겨진 것은 온통 위장하고 기만하는 행동, 행위이며, 또한 사람의 교만함, 사악함, 진리에 대한 혐오, 흉악함, 강퍅한 성품이다. 그러므로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자일수록 더욱 기만성을 지니고 있으며,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고자 추구하는 자일수록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혐오한다. 너희가 보기에도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좋은 행위에 관해서는 일단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방금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좋은 행위에 관한 말들 중 하나,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에 관해 교제하였다. 다른 몇 가지는 일일이 교제하지 않겠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좋은 행위에 관한 모든 말들은 그저 사람의 외적 행위와 이미지에 대한 포장일 뿐이다. 듣기 좋은 말은 포장이고, 적절해 보이는 말은 사실 위장으로, 허상을 통해 사람의 호감과 좋은 평가, 존중을 얻어 내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마음속 어두운 면, 패괴 성품, 진면목을 모두 숨기고 포장하기 시작한다. 이 좋은 행위들의 후광 뒤에는 패괴된 인류의 패괴된 진상과 교만하고 간사하고 흉악한 성품, 그리고 진리를 혐오하는 사악한 인류가 숨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어떤 사람이 보이는 외적 행위가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이든, 온화하고 우아한 것이든, 아니면 상냥하고 친절한 것이든, 가까이하기 쉬운 것이든,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그것은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표면적 행위일 뿐이다. 사람은 좋은 행위를 통해 다른 이의 본성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비록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의 좋은 외적 행위가 무척 좋게 느껴질지라도, 온 세상이 이것들에 호감을 가질지라도, 사람의 패괴 성품이 이 좋은 행위의 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람은 진리를 싫어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한다. 또 창조주가 한 말을 싫어하고 창조주를 대적하는 사람의 본성 본질은 실제로 존재한다. 여기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다. 사람이 아무리 잘 위장해도, 사람의 행위가 아무리 적절하고 괜찮아 보여도, 아무리 보기 좋고 아름답게 포장해도, 또 아무리 기만적인 면을 갖고 있어도, 패괴된 인류는 모두 사탄의 성품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표면적인 행위 뒤에서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고, 창조주를 거역하고 대적한다. 물론 인류는 이 좋은 행위들을 겉옷이나 은폐물로 삼는 동시에 매일 매시 매분 모든 일에서 패괴 성품을 드러내며 패괴 성품과 죄악 속에서 살아간다. 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람에게 적절한 행위와 듣기 좋은 말, 꾸며 낸 겉모습이 있을지라도, 사람의 패괴 성품은 전혀 줄어들지 않으며, 외적 행위가 있다고 해서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외적 행위에 가려진 채 패괴 성품이 계속 드러나며,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발걸음은 멈추는 법이 없다. 물론 흉악하고 사악한 성품에 지배되어 야심과 욕망, 사치스러운 요구 또한 끊임없이 확장되고 커진다. 보아라. 점잖고 예의 바르며, 상냥하고 친절하고, 가까이하기 쉬운 겉모습을 지닌 사람 중 살아 내는 이미지와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가 긍정적인 자가 있더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부합하는 자가 있더냐? 교양 있고 사리 밝고, 온화하고 우아한 사람 중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있더냐? 하나님의 말씀에서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찾고자 하는 자가 있더냐? 인류의 구원에 기여한 자가 있더냐? 이런 사람을 하나라도 찾을 수 있겠느냐? (찾을 수 없습니다.) 사실, 인류 가운데서 지식과 문화적 소양, 사상, 지위, 명망이 있는 사람, 그러니까 소위 교양 있고 사리 밝고, 상냥하고 친절하고, 가까이하기 쉬운 사람이 내세우는 이론일수록 더 쉽게 남들을 미혹한다. 그들은 행하는 악도 더 많고, 하나님을 더 심각하게 대적한다. 명망과 지위가 있는 사람일수록 더 심각하게 남을 미혹하고 광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인류 가운데 명인, 위인, 사상가, 교육가, 문학가, 혁명가, 정치가 등 ‘가(家)’가 붙은 사람 치고 교양 있고 사리 밝고, 가까이하기 쉽고, 상냥하고 친절한 모습이 없는 사람이 있더냐? 사람들에게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찬사를 듣고 존중받는 외적 행위를 지니지 않은 자가 있더냐? 그러나 사실 인류에 대한 그들의 기여는 무엇이더냐? 그들이 인류를 옳은 길로 인도하더냐, 아니면 그릇된 길로 인도하더냐? (그릇된 길로 인도합니다.) 그들이 인류를 창조주의 권세 아래로 이끌더냐, 아니면 사탄의 발아래로 이끌더냐? (사탄의 발아래로 이끕니다.) 그들이 인류에게 창조주의 주재와 공급, 인도를 누리게 하더냐, 아니면 사탄의 유린과 해악, 능욕을 마주하게 하더냐? 역사적인 영웅, 명인, 위인, 달인, 초인, 권력자 중 수천수만의 사람을 죽여 권력과 지위를 얻지 않은 사람이 있더냐? 인류에 대한 기만과 미혹, 유인으로 명망을 얻지 않은 자가 있더냐? 표면적으로 보면 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을 접할 때 가까이하기 쉽고 무척 부드러우며 남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것 같고, 말할 때는 상냥하고 친절하다. 하지만 그 뒷면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어떤 자는 계략을 써서 남을 해치고, 어떤 자는 간계를 부려 남을 괴롭히고 손봐 주며, 어떤 자는 기회를 잡아 남에게 보복한다. 많은 정치가가 숱한 사람을 해치고 망쳐 놓았다. 그들은 무수히 많은 사람의 머리와 선혈을 밟고 그 지위와 권세를 얻었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모습은 가까이하기 쉬운 외양과 상냥하고 친절한 행위이며, 온화하고 우아하고, 교양 있고 사리 밝고, 예의 있고 겸손한 태도이다. 겉으로 봤을 때 그들은 점잖고 예의 바르거나 온화하고 우아하지만, 그 뒤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독식하며 수도 없이 남의 것을 빼앗고 사람을 우롱한다. 또 앞에서는 온갖 사탕발림을 늘어놓지만 뒤에서는 나쁜 짓을 일삼는다. 그러면서도 염치도 부끄러움도 모른 채 강단에 올라 설교하면서 어떻게 해야 가까이하기 쉽거나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국가와 인류에 기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국민을 위해 일하고 국민의 공복이 되며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이는 몰염치한 것 아니겠느냐? 전부 후안무치하고 욕심이 끝도 없는 인간 말종이다. 요컨대, 겉으로 볼 때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맞는 사람, 좋은 행위를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진정한 피조물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렇듯 좋은 행위를 추구하는 이면에는 어둡고, 차마 남에게 밝힐 수 없는 비밀이 수도 없이 감춰져 있다. 사람이 어떤 부분의 좋은 행위를 추구하든, 그 이면의 목적은 더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사고 존중받는 것이며, 자신의 몸값을 높여 존귀한 사람, 믿을 만하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만약 너도 이렇듯 좋은 행위를 갖춘 사람이 되기를 추구한다면, 그 성질은 명인이나 위인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느냐? 좋은 행위를 갖춘 사람이 되기만을 추구할 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도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면, 네 성질은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럼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너는 진리를 버릴 것이며 구원받을 기회를 잃을 것이다. 이는 가장 어리석은 행위로, 바보나 할 만한 선택이고 추구이다. 너희는 오랫동안 동경했던 무대 위의 초인이나 위인, 명인, 또는 가까이하기 쉽고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 점잖고 예의 바르고 온화하고 우아하며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 겉으로 보기에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 적이 있느냐? 그런 사람을 숭배하고 추종한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지금까지도 그런 사람을 추종하거나 숭배하고 있다면, 알려주겠다. 너는 죽음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네가 숭배하는 사람은 모두 외식하는 악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인을 구원하지 않는다. 네가 악인을 숭배하며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파멸할 것이다.
가까이하기 쉬운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등 좋은 행위의 이면에 숨겨진 본질은 바로 두 글자, ‘위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좋은 행위’들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생겨난 것이 아니며,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서 생겨난 것도 아니다. 그럼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사람의 속셈과 간계에서 나왔으며, 위장과 포장, 그리고 기만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이 이 ‘좋은 행위’들을 고수하는 목적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함이다. 그게 아니라면 사람은 절대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고, 본심에 어긋나게 살지도 않는다. 본심에 어긋나게 사는 것이란 어떤 것이겠느냐? 사람의 본모습은 스스로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솔직하고 무던하고 온유하고 선량하고 어질지 않다. 사람은 양심과 이성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어떤 목적이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살아간다. 사람의 본모습은 어떠하냐? 흐리멍덩하다. 만약 하나님이 율법과 계명을 주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무엇이 죄인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과거의 인류는 그렇지 않았더냐? 하나님이 율법과 계명을 반포한 이후에야 사람은 죄에 관해 어느 정도 개념이 생겼다. 하지만 옳고 그름이나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에 관해서는 여전히 개념이 없다. 이런 배경 속에서 사람이 자신의 언행과 관련된 정확한 원칙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정상 인성에 갖추어야 할 행동과 좋은 행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 수 있겠느냐? 진실로 좋은 행위는 무엇을 토대로 생겨나는지, 어떤 도를 지켜야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낼 수 있는지, 이러한 것들을 사람이 알겠느냐? 알지 못한다. 사람은 사탄 본성과 사람의 본능 때문에 위장을 통해 자신을 포장할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체면과 존엄성을 갖추고 살아가려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의 기만책이 생겨났다. 이런 속임수, 남을 기만하는 수법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생겨난 후, 사람은 이 기만책의 범위 안에서 선택적으로 그중 한 가지, 또는 여러 가지를 고수한다. 어떤 사람은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을 선택하며, 어떤 사람은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몇 가지를 모두 선택한다. 그러나 이런 ‘좋은 행위’를 갖춘 사람을 나는 한 가지 단어로 규정한다.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자갈이다. 자갈이란 무엇이냐? 강에서 오랜 세월 강물에 씻기고 마모되어 모서리가 사라지고 반들반들해진 돌멩이다. 자갈은 발로 밟아도 배기지 않으나, 자칫 방심하면 미끄러져 넘어질 수 있다. 이 돌멩이들은 겉모양이 무척 예쁘지만, 막상 집에 가져가면 아무 쓸모가 없다. 버리자니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고 갖고 있지도 못하는, 이런 것이 바로 자갈이다. 내가 볼 때, 표면적으로 좋은 행위를 갖춘 사람들은 온화하고 자신을 잘 꾸미지만,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실제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들이 바로 자갈이다. 네가 그에게 진리와 원칙에 대해 교제하면, 그는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네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네가 그에게 처신할 때는 원칙이 있어야 하며, 본분을 이행할 때는 원칙을 구해야지, 자기 뜻대로 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 그는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그는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일입니다. 저는 그저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사람이 되어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듣고자 할 뿐입니다.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서 사람들에게 동조를 얻으면 그만이죠.”라고 말한다. 그는 좋은 행위에만 집중할 뿐, 진리에는 집중하지 않는다. 그는 평소에 노인과 연장자, 연륜이 있는 사람, 명망이 높은 사람을 존중하는 한편, 어리고 약한 사람들은 아끼고 보살피면서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사회 규칙을 엄격하게 지킴으로써 고상함을 드러낸다. 하지만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과 충돌할 때, 그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태도를 한쪽에 치워 둔 채 ‘앞뒤 안 가리고’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으며 자신의 이익을 지킬 것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좋은 행위가 그를 접하고 알게 되고 친해진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가 이렇듯 남들에게 인정받는 좋은 행위를 갖춘 동시에, 자기 이익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사람의 ‘제약’도 받지 않은 채 자신의 이익을 쟁취해 낸다는 것이다. 그가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태도는 자신의 이익에 영향이 가지 않는 것을 기초로 하는 일시적인 행위일 뿐이며, 행동의 범위 안에만 머물러 있다. 자신의 이익에 전혀 관련이 없고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이익이 눈앞에 보일 때, 그가 마지막으로 쟁취하는 것은 역시 자신의 이익이다. 그래서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그의 태도는 그 자신의 이익 추구에 영향을 주거나 제약하지 못한다.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그런 행위는 특정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이익에 영향이 가지 않는 조건하에서 실행할 수 있는 좋은 행위일 뿐, 사람의 생명에서, 혹은 뼛속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이러한 행위를 얼마나 실행하든, 얼마나 오래 고수하든 사람이 의지해 살아가는 패괴 성품을 전혀 변화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해, 이 좋은 행위들이 없을지라도 사람은 똑같이 패괴 성품을 드러내며, 이 좋은 행위들을 갖춘 후라도 사람의 패괴 성품은 전혀 줄어들거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이 감춰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좋은 행위의 배후에 숨겨진 본질적인 것들이다.
이제 전통문화 중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의 좋은 행위에 관해 어느 정도 교제하고 해부한 것 같다. 이것들은 전부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과 성질이 비슷하며, 어떤 의미도 없다. 사람은 이 좋은 행위들을 버려야 한다. 사람이 가장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삼고 진리를 준칙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야 빛 속에서 살아갈 수 있고,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낼 수 있다. 빛 속에서 살려면 진리에 따라 행동해야 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 정직한 말을 하고 정직한 일을 해야 한다. 처신함에 있어 진리 원칙을 갖는 것이 바로 근본이다. 사람이 진리 원칙을 잃어버리고 좋은 행위만 강조하면 거짓되고 위장하는 성분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처신함에 있어 원칙을 잃는다면 행위가 아무리 훌륭해도 외식하는 것이 된다. 한순간 남을 미혹할 수 있어도 영원히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행동하고 처신해야 비로소 진정한 토대가 생긴다. 만약 처신함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두지 않고 좋은 행위를 꾸미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그렇게 해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좋은 도리와 행위는 사람의 패괴 성품을 바꿔 놓을 수 없고, 사람의 본질 또한 바꿔 놓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만이 사람의 패괴 성품과 사상, 관점을 바꿔 놓고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다. 사람의 전통문화, 관념적으로 좋은 행위라고 여기는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은 하나의 행위일 뿐, 생명이 아니고 진리는 더더욱 아니다. 전통문화는 진리가 아니며,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모든 좋은 행위 역시 진리가 아니다. 사람이 전통문화를 얼마나 많이 파악하고, 좋은 행위를 얼마나 많이 살아 내든 패괴 성품에 변화가 생기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인류가 전통문화에 물든 몇 천 년간, 패괴 성품에 변화가 생기기는커녕 패괴가 점점 더 심각해지며, 세상은 점점 더 어둡고 사악해진 것이다. 이는 전통문화의 교육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인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으로 삼아야만 진정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 이는 부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행위에 어떤 규범과 요구를 제시하느냐? 율법과 계명에서 규정한 것 외에도 사람의 행위에 대한 예수의 요구가 있고, 특히 하나님이 말세 심판 과정에서 사람에게 제시한 요구와 규정이 있다. 이러한 말씀이야말로 인류에게 가장 귀한 것이고, 가장 기본적인 처신의 원칙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 기준을 찾는다면, 중국 전통문화 속 ‘좋은 행위’의 그릇된 인도와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길과 원칙을 찾은 것이다. 또한, 이는 구원받는 길과 원칙을 찾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현시점 말씀을 근거로 하고, 하나님이 현재 교제하는 진리를 준칙으로 하여 인류가 관념적으로 좋은 행위라 여기는 기준을 대신한다면,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늘 어떤 사람이 되라고, 어떤 길을 걸으라고 요구했지, 단 한 번도 어떤 행위를 갖추라고 따로 요구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간사한 사람이 되지 말고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했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추구하며 하나님께 충성하고 순종하고 간증이 있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했다. 몇몇 좋은 행위를 갖추면 된다고 요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중국의 전통문화는 사람이 좋은 행위와 좋은 모습에만 집중하게 할 뿐, 사람의 패괴 성품이 무엇인지, 사람이 패괴된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하나도 밝히 알려 주지 못하고,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는 길은 더더욱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전통문화가 사람에게 어떤 좋은 행위들을 갖추라고 어떻게 제창하든, 인류가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 정상인의 모습을 살아 내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덕에 관한 이런 말들이 아무리 고상하고 감동적이라도 인류의 패괴 본질은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패괴된 인류는 전통문화에 물들고 영향을 받아 많은 잠재의식이 생겨났다. 잠재의식이란 무엇이겠느냐? 자기도 모르는 새에 전통문화에 물들고 전염되어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 명확한 말과 주장, 규정 또는 인지가 없는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보편적인 생각과 행동대로 실행하고 지키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이런 배경, 이런 상태 속에서 살아간다. 또 사람은 부지중에 잠재의식 속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건 좋은 거야. 긍정적이고 진리에 부합하는 거지. 온화하고 우아한 건 좋은 거야. 사람다운 모습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진리에 부합하겠지. 점잖고 예의 바른 것,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상냥하고 친절한 것, 가까이하기 쉬운 것 등은 정상 인성의 모습이야.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부합하는 거라고.’ 하나님 말씀에서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는 없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전통문화의 요구 기준과 비슷하다고,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고 곡해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한 적이 있더냐?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한 적이 없고,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곡해하고 왜곡한 것이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그렇게 말씀한 적이 없으니 너희는 절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을 자세히 읽고, 사람의 행위 측면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요구를 제대로 찾는 한편, 하나님 말씀을 여러 대목 찾아 종합한 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교제하여 인식을 얻어 실행하고 체험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 말씀을 실생활 속으로 가져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로 삼게 된다. 사람의 언행은 무엇을 근거로 삼아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 그럼 사람의 언행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무엇이냐?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진실한 말, 솔직한 말을 하여 다른 사람이 유익을 얻게 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적어도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어야지, 기만하거나 미혹하거나 조롱하거나 놀리거나 비방하거나 비웃거나 속박하거나 남의 단점을 까발리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정상 인성의 모습이고 인성의 미덕이다. 하나님이 네게 어떤 어투로 말하라고 한 적이 있더냐? 표준어를 사용하라고 요구한 적이 있더냐? 화려한 수식어와 고상하고 우아한 말을 쓰라고 요구한 적이 있더냐? (그러신 적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표면적이고 거짓되며 가식적이고 실속 없는 것들은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요구한 것은 전부 정상인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것들이며, 언어 행위의 기준이자 원칙이다. 어떤 곳에서 태어났든, 어떤 언어를 쓰든 어쨌든 네가 하는 말, 네 입에서 나온 단어와 내용은 남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도움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남들이 네 말을 듣고 진실하다고 느끼는 한편, 유익과 도움을 얻어 더는 어려움에 빠지거나 사람에게 미혹되지 않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실한 말,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되 남을 기만하거나 미혹하거나 조롱하거나 놀리거나 비방하거나 비웃지 말라고, 또 속박하거나 남의 단점을 까발리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지도 말라고 요구했다. 이는 말을 할 때의 원칙 아니겠느냐? 여기에서 ‘단점을 들추지 말라’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사람의 약점이나 잘못, 혹은 단점을 잡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점이다. 그럼 긍정적인 면에서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말은 어떤 것이겠느냐? 주로 격려하고 일깨우고 인도하고 권면하고 이해하고 위로해 주는 말이다. 이 외에, 특수한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의 단점을 들추고 책망 훈계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가 진리를 깨닫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가져야 성과가 날 수 있다. 이렇게 실행하면 사람에게 큰 유익이 된다. 이것이 진정한 도움 아니겠느냐?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않겠느냐? 예를 들어, 네가 몹시 제멋대로이고 교만한데 스스로 늘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 보자. 이런 상황에서 너를 잘 아는 사람이 직설적으로 네 문제점을 지적해 준다면 너는 ‘내가 제멋대로라고? 교만하다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감히 못 하던데, 이 사람은 나를 알고 있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아. 열심히 반성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다른 사람들은 다 듣기 좋은 말만 해 주고 칭찬만 합니다. 툭 터놓고 솔직한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없죠. 저한테 존재하는 단점이나 문제점을 짚어 주는 사람도 없고요. 오직 당신만이 제게 툭 터놓고 이런 말을 해 주네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 말은 제게 가장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나누는 것 아니겠느냐? 상대는 자신의 마음에 있는 말, 너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했다. 또 지난날 자신이 그런 일을 겪을 때 가졌던 관념과 상상, 소극성과 연약함, 그리고 진리를 구해 그 상태에서 벗어난 체험 등을 하나하나 교제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나누는 것이며 마음의 소통이다. 요컨대, 말을 할 때의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마음속에 있는 것, 진실한 체험과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에게 가장 이로운 말이고, 공급과 도움이 되는 말이며, 가장 올바르고 긍정적인 말이다. 거짓된 말, 상대에게 도움과 이로움이 되지 않는 말은 절대 하지 마라. 그랬다간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 있고 상대를 쓰러뜨려 소극적인 상태에 빠뜨릴 수 있으며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올바르고 긍정적인 말을 하면서 최대한 상대를 도와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에게 도움과 공급을 주고, 하나님께 진실한 믿음이 생기게 하며, 그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네 체험과 문제 해결 방식, 방법을 통해 도움을 얻고 큰 수확을 거두게 해야 한다. 또 그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길을 깨달아 생명 진입과 생명 성장을 이루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원칙 있게 말해 상대에게 도움을 줄 때 얻을 수 있는 성과이다. 이것들 외에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웃고 한담하는 것은 원칙이 없는 것으로, 패괴 성품을 드러낼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것도 아니고 진리 원칙을 지킨 것도 아니며, 사람의 처세 철학에 불과하다. 또한, 그것은 패괴 성품에 통제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할 때 원칙이 있어야 하며 남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것이 사람의 외적인 좋은 행위와 관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조금의 관계도 없다. 예를 들어, 네가 말할 때 다른 이를 속박하지 않고 거짓말하거나 기만하지 않으며, 또 상대를 격려하고 일깨우고 위로해 주는 등 두 측면의 역할을 모두 할 수 있다고 해 보자. 그럼 너는 가까이하기 쉬운 태도로 행할 필요가 있겠느냐? 반드시 가까이하기 쉬워야겠느냐? 반드시 점잖고 예의 바르며, 온화하고 우아한 행위의 틀 속에서 행동해야겠느냐? 그렇지 않다. 네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전제 조건은 전통문화가 규정한 좋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 진리에 근거하는 것이다. 네 말에 원칙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면 앉아서 말해도 되고 서서 말해도 된다. 목소리가 커도 상관없고 작아도 상관없다. 또 어투가 온화해도 괜찮고 날카로워도 괜찮다. 최종적으로 긍정적인 성과만 낼 수 있다면 너는 책임을 다한 것이고 상대는 이로움을 얻은 것이니, 이는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며, 네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을 근거로 한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서 도움을 받고 수확을 거둔다면 이는 양쪽 모두에게 이로운 일 아니겠느냐? 만약 전통문화의 사상에 구속되어 살아가면서 너도 위장하고 그도 위장한다면, 너는 점잖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그는 연신 굽실거리면서 서로 꾸민다면, 둘 다 좋은 인물은 아닐 것이다. 온종일 굽실거리고 예의를 차리면서 솔직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좋은 행위’만을 살아 낸다. 겉으로 볼 때는 규범화된 행위 같지만, 그것은 전부 외식하는 행위요, 사람을 기만하고 미혹하는 행위이자 사람을 속이는 행위이다. 그들에게서는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도 들을 수 없다. 만약 그들과 친구가 된다면 마지막에는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는 그들의 좋은 행위에서 어떤 이로움도 얻지 못한다. 그저 위장하고 기만하며, 서로 속고 속이는 법을 배울 뿐이다. 결국 너는 네 인격과 존엄성이 심각하게 모욕받았다고 느끼겠지만, 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겉으로 점잖고 예의 바르고 교양 있고 사리 밝은 양 행동하면서 남의 흠집을 잡아내지 않고, 사람에게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으며, 인내하고 포용할 것이다. 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넓은 도량을 보이며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띨 것이다. 얼마나 오랜 세월 수련해야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느냐! 자신에게 이렇게 요구하고,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 피곤하지 않겠느냐? 자신에게는 분명 그러한 사랑이 없는데도 크게 사랑하는 척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외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너는 점점 이렇게 사는 것이 너무 피곤하다고, 다음 생에 태어나면 우마나 개돼지가 될지언정 사람이 되지는 않겠다고, 사람은 너무 가식적이고 못됐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아가겠느냐? 전통 관념 속에서 살면서 이러한 관념에 속박되고 결박되며, 사탄의 패괴 성품에 기대 죄 속에서 살아가며 벗어나지 못하고, 출구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사람과 사람 간에 진심 어린 말 한마디조차 듣거나 얻을 수 없다. 부부나 모녀 사이, 부자 사이 등 가장 친근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음속에 있는 말이나 따뜻한 말, 위안이 되는 말을 들을 수 없다. 그럼 이 외적인 좋은 행위들은 어떤 역할을 하겠느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상적인 거리와 관계를 잠시간 유지해 줄 뿐이다. 사람들은 이 좋은 행위의 뒤에서 서로 깊은 교류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결국 ‘거리의 미학’이라는 말을 종합해 냈다. 이는 인류의 본모습이 드러난 것 아니겠느냐? 거리에서 어떻게 미학이 생길 수 있겠느냐? 이런 거짓되고 사악한 실생활 속에서 사람은 점점 더 외로워지고 자기 안에 갇혀 있고 억압받고 분노로 속을 끓이고 불만스러워하며 길을 찾지 못한다. 이것이 이방인들의 실제 상태이다. 그러나 지금 너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집에 와서 하나님 말씀의 공급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수시로 설교를 듣고 있다. 그런데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좋은 행위를 좋아한다. 이는 한 가지 사실을 설명해 준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너에게는 조금의 실제도 없다는 것 말이다. 너는 왜 여전히 그렇게 억압받고 외로우며 가련하고 비굴하게 사는 것이냐? 단 하나의 이유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조금의 변화도 없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너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지 않으며, 여전히 패괴 성품과 전통 관념에 기대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외롭게 사는 것이다. 너에게는 친구가 없고 마음을 나눌 사람도 없다. 너는 다른 이로부터 당연히 받아야 할 격려나 인도, 도움, 이로움을 얻지 못하며, 너 자신 역시 다른 이에게 격려와 인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최소한 이런 행위에서도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지도, 진리를 준칙으로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문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은 진리나 하나님 말씀과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다!
방금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관해 교제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이 말하고 행동할 때 원칙을 갖고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이것을 기초로 한다면 인류가 종합해 낸 그 좋은 행위들이 정말 가치가 있는지, 소중히 여길 만한 것들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소중히 여길 만한 것들이 아닙니다.) 소중히 여길 만한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행해야겠느냐? (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버려야겠느냐? 버리려면 구체적인 실행의 길과 절차가 필요하다. 먼저, 자신에게 ‘교양 있고 사리 밝은 것’, ‘온화하고 우아한 것’ 등 전통문화가 제창하는 행위와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 한다. 성찰의 방식과 내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자신이 평소에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사탄의 어떤 요소들이 자기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혈액과 뼛속까지 침투했는지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릴 때부터 응석받이로 자랐고 규율도 잘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래도 그는 인성이 나쁘지 않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라서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할 때 진심을 다하며,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 있는데, 식사할 때 반찬을 고르고 쩝쩝거린다는 것이다. 그 소리에 너는 괴롭고 제대로 밥을 먹을 수가 없다. 너는 여태까지 그런 사람을 몹시 경멸하며, 가정 교육이 되지 않았고 규율을 모른다고, 교양 없고 사리 밝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또 그런 사람은 비천하고 품격 없다고, 하나님이 택하는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닐 거라고 무시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무엇이냐? 너는 그의 본질을 간파했느냐? 그의 본질에 근거하여 판단했느냐? 너는 무엇에 근거하여 판단했느냐? 너는 분명 중국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각종 말들로 사람을 판단했다. 그럼 네가 이 문제를 발견했을 때, 오늘 교제한 진리에 근거하여 어떻게 생각해야겠느냐? ‘이런, 나는 여태까지 그를 무시하면서 늘 그의 교제를 듣기 싫어했어.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만 보면 그게 아무리 옳아도, 그가 교제하는 말이 아무리 실제적이어도, 그가 밥 먹을 때 쩝쩝거리고 반찬을 고르는 것만 떠올리면서 그가 하는 말을 듣기 싫어했지. 언제나 그를 교양도 자질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서 내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사람을 본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그의 나쁜 생활 습관과 좋지 않은 행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정 교육이 부족하거나 보기에 좋지 않은 부분을 인성 본질이 드러난 것으로 생각한 거야. 지금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판단해 보니, 그건 다 인성 본질과 관련 없는 작은 문제라는 걸, 원칙적인 문제는 결코 아니라는 걸 알겠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이러한 일을 밝히 알 수 있다. 그럼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겠느냐? 길이 있느냐? 그에게 당장 그 나쁜 습관들을 고치라고 한다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그 작은 문제들은 이미 오래 쌓여 고치기 힘들며, 하루 이틀 새에 바꿀 수 없다. 행위적인 문제라면 그래도 해결하기 쉽다. 하지만 생활 습관과 관련된 문제는 시간을 들여야 고칠 수 있다. 다만 이 문제들은 인품과 관련이 없고, 인성 본질과도 관련이 없으니, 지나치게 물고 늘어지지 마라. 사람마다 각자의 생활 습관과 생활 방식이 있다. 진공 상태에서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조금씩 문제가 있고, 어떤 문제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고쳐야 한다. 그러면 남들과 화목하게 함께 지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이상적이지는 않을 수도 있다. 지역별로 생활 습관이 다르니 서로 포용해야 한다. 이는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추어야 할 부분이다. 사소한 문제를 따지지 말고, 포용하는 태도를 취해라. 사람을 대할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이것이 바로 포용의 원칙이며, 이런 일을 처리하는 원칙이자 방법이다. 사람의 사소한 문제에 근거하여 그의 본질과 인성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 그 근거는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어떤 문제나 결함이 있든, 그것들은 그 사람의 본질을 대표하지 않으며, 그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거나 나아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의 장점을 봐야 한다. 또한, 하나님 말씀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근거하여 사람을 봐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을 공평하게 대할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겠느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을 바라볼 수 있겠느냐? 상대가 양심과 이성을 갖췄는지, 선량한 사람인지 아니면 악인인지를 보면 된다. 그와 접하면서 그에게 사소한 문제와 결점이 많지만 인성은 무척 선량해서 남들과 함께할 때 포용하고 인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 다른 사람들이 소극적이고 연약할 때 사랑으로 공급하고 도와준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 이것이 바로 사람을 대하는 그의 태도이다. 그럼 그는 하나님을 어떤 태도로 대하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면 그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를 더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행한 것에 순종하고 구하고 갈망하는 태도를 보이며, 본분을 이행하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과정에서나 행동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는다. 함부로 날뛰거나 제멋대로 굴지 않고, 되는대로 행동하거나 말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이나 하나님 사역과 관련된 일이 닥치면 무척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그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의 인성에서 드러낸 것들에 근거하여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어떻게 판단해야 하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그리고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는지,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어떤지에 근거해서 판단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측면으로 판단하고 나면 그 사람의 행위에 몇몇 문제나 결점이 있어도 그는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을 대할 때 순종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며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본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는 이상, 너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판단한다면 그는 진정한 형제자매이니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편견을 갖거나 색안경을 끼고 대해서는 안 되고,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말들에 근거하여 대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 말씀으로 그를 판단해야 한다. 그의 행위에 나타난 결점을 대할 때, 네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마땅히 그를 도와 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알려 줘야 한다. 그가 받아들이기는 해도 바로 고치지는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포용해야 한다. 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네게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의미이다. 너는 그를 대하는 태도에서 진리를 구하는 한편,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반성하고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올바르게 사람을 대할 수 있다. 반대로, 만약 네가 “그 사람은 문제점이 아주 많은 데다가 교양도 없고 규율도 몰라. 사람을 존중하는 법도, 예의도 모르지. 그는 이방인이야. 나는 그 사람하고 사귀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도 않고.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 말이 아무리 옳아도 나는 듣기 싫어.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누가 믿겠어? 그가 그럴 주제나 되겠어? 그에게 그런 자질이 있겠냐고.”라고 말한다면 이는 어떤 태도겠느냐? 이렇게 사람을 대하는 것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돕는 것이겠느냐?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겠느냐?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것이겠느냐?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겠느냐? 네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으면서 최소한의 사랑조차 없다면, 그런 사람에게 진리 실제가 있겠느냐? 네가 언제나 자신만의 관념을 고집하며, 사람과 일을 바라볼 때 여전히 자신의 느낌과 인상, 기호, 관념에 근거한다면 이는 네가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사탄의 철학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며, 진리를 사랑하거나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독선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교제하든 자기 관점을 고집한다. ‘나는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될 거야. 그게 왜? 나는 적어도 좋은 사람이라고. 이렇게 처신하는 게 뭐가 나빠? 최소한 사람들이 나를 존중하기는 할 거 아냐.’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네가 좋은 사람이 되겠다면 나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위장한다면 진리 생명을 얻을 수 있겠느냐?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처신하는 것이 네 인격이나 처신의 목표, 방향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는 알아야 한다. 그런 식으로 해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으며,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도 없다. 결국 마지막에는 진리도 생명도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구원도 얻지 못할 것이다. 오직 이러한 결과뿐이다.
방금 사람의 관념 속 좋은 행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 관념 속 좋은 행위를 어떻게 분별하여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에 관해 교제하였다. 너희는 길이 생기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야겠느냐? (먼저 스스로에게 이러한 행위가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 후, 자신이 평소에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근거와 준칙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그렇다. 먼저, 자신이 여태까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측면에서 오늘 내가 교제한 것과 충돌하거나 어긋나는 부분이 없는지 밝히 알아야 한다. 또 사람과 일을 바라볼 때 자신의 각도와 관점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 전통문화의 기준이나 어떤 명인, 위인의 말에 근거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그다음, 전통문화의 사상과 관점, 명인이나 위인의 사상과 관점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진리와 어느 부분에서 충돌하며 어디가 틀렸는지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이는 성찰의 2단계 세부 내용이다. 그럼 3단계는 무엇이겠느냐?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관점과 방법, 근거, 준칙이 모두 사람의 뜻에서 나왔고, 사악한 사회 흐름과 전통문화에서 비롯되었으며, 진리와는 위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떻게 해야겠느냐?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찾아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 중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측면의 진리 원칙을 찾아야 한다. 주로 하나님 말씀의 내용에 근거하되,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 말씀의 진리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 이 진리 원칙은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 준칙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사람은 먼저 자신의 관점과 관념, 견해와 태도를 부정해야 한다. 이는 사람의 잘못되고 치우친 관점과 관련이 있으니 먼저 그것을 파헤쳐 인식하고 철저히 해부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관련된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정확한 가르침을 찾아 묵상하고 교제한 뒤 진리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다음은 사람이 어떻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이 진리 원칙을 알았다고 해서 곧바로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패역과 패괴 성품은 한순간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어 설령 하나님 말씀의 뜻을 이해했다고 할지라도 바로 실행할 수는 없다. 언제나 한 차례 전쟁을 겪어야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패역 성품이 있고, 편견과 제멋대로인 습성, 강퍅함, 거만함, 독선, 자만, 그리고 수많은 이유와 핑계가 있다. 사람은 자신의 몸값과 지위, 명예, 체면 등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러므로 관념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내려놓으려면 이러한 이익과 네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 이것들을 모두 버리고 내려놓아야 비로소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할 희망과 기회가 생기며,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다. 자신을 내려놓고 부정하는 것은 가장 깨기 힘든 관문이다. 일단 이 관문을 지나가면 네 마음속에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또한 네가 진리를 깨달아 좋은 행위의 본질을 간파하면 사람과 일에 대한 관점이 바뀔 것이고, 조금씩 이 전통문화와 관련된 것들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잘못된 관점을 바꾸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방법을 바꾸며, 일 처리의 근원과 동기를 바꾸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는데, 이는 가장 바꾸기 힘든 부분이다. 사람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생활 방식은 모두 패괴 성품에서 비롯되었다. 패괴 성품 때문에 너는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고, 남을 무시하면서 자신의 명성과 지위를 지키고, 사람들 사이에서 우러름 받고 얼굴을 드러내는 데에만 집중하게 되는 한편, 항상 앞날과 운명 등을 생각하게 된다. 이는 전부 패괴 성품에서 비롯된, 네 이익과 관련된 것들이다. 네가 이것들을 하나씩 깨부수고 간파하고 부정하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을 조금씩 내려놓아야 비로소 오롯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에 관해서는 모두가 알고 있으며, 이해하기도 쉽다. 사람의 이성과 사유, 그리고 의지, 이상에 따르면 여기에 도달할 수 있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 말을 지키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때는 그것이 몹시 힘들다. 실제로 진리 실행을 가로막는 걸림돌과 문제는 외부 환경의 어려움만이 아니다. 주된 원인은 사람의 패괴 성품과 관련되어 있다. 패괴 성품은 사람이 마주하는 갖가지 어려움의 근원이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면 사람의 각종 문제와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때 마주하는 모든 어려움은 패괴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때, 진리 실행이라는 실제에 진입할 때, 너는 점점 더 의식하게 될 것이다. ‘나한테는 패괴 성품이 있어.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패괴된 인간이고, 사탄에 의해 심각하게 패괴되어 사탄 성품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야.’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여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자 한다면, 부정적인 사물을 인식하고 간파하는 것은 생명 진입의 1단계이자 첫걸음에 불과하다. 어째서 많은 사람이 얼마간 진리를 깨닫고도 실행하지 못하며, 수많은 글귀와 도리를 말할 줄 알아도 진리 실제에 통 진입하지 못하겠느냐? 그들이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해서겠느냐? 그렇지 않다. 반대로, 그들은 진리에 대한 여러 측면의 이론과 글귀를 제대로 알고 있고, 심지어는 물 흐르듯 줄줄 읊는다. 당연히 의지와 좋은 마음가짐, 바람도 있어서 진리에 공을 들이고자 한다. 그런데 왜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진리 실제에 도통 진입하지 못하겠느냐? 이는 사람이 알고 있는 그 글귀와 이론들을 도통 실생활에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되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이 중간에서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러므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 진리 추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실패하고 좌절하고 진리를 실행하지 못할 때마다 맹세하고 다짐한다. 하지만 수없이 다짐하고 맹세했는데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그 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된다. 계속 거기에 막혀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때, 늘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하면서 매일 스스로를 독려하는데, 그렇게 3~5년간 노력해 봤자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여전히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실패로 끝난다. 그들이 알고 있는 그 정도의 도리는 아무 데도 쓸데가 없다. 어떤 일이 닥쳐도 간파하거나 밝히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근거로 삼지 못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일을 바라봐야 할지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말씀 중 어떤 측면의 진리가 그 일과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조급해서 스스로를 증오하는 한편, 하나님께 기도하며 힘과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하며, 마지막에는 스스로를 독려한다. 이런 자는 어리석은 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실제로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진리 추구라는 일을 대하는 모습은 이렇게 유치하지 않더냐? 사람은 늘 다짐과 맹세, 자제, 자기 독려를 통해 진리를 실행하고자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진리의 실행과 진입은 사람이 자기를 독려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정말 내가 알려 준 방식대로 착실히 한 걸음 한 걸음 진입하고 실행해야만 성과를 볼 수 있고, 진리를 추구하여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이것 외에 다른 지름길은 없다. 얼마간 열의가 있고 헌신하려는 소망이 있으며 큰 다짐과 원대한 목표가 있다고 해서 진리가 네 실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실생활 속에서, 사람과 일, 사물 속에서 구하고 진입하고 실행하고 순종하는 이 기본적인 공과들을 모두 배워야 한다. 그러고 나면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험과 경험, 인식이 생긴다. 그러지 않으면 몇 년을 노력하고 스스로를 독려해도, 내면의 공허함을 채워 줄 약간의 도리밖에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으로 한순간 정신적인 만족은 얻겠지만, 정말 실속 있는 것은 얻지 못한다. 정말 실속 있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지도,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관점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너는 대충 있는 대로, 막막하게 살아갈 뿐이다. 일이 닥쳐서 네 관점과 원칙, 입장을 밝혀야 할 때가 오면 무지와 어리석음, 공허함, 그리고 막막함이 더 또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너는 평소에 올바른 도리와 구호를 입에 침이 마르게 늘어놓으면서 무엇이든 아는 것처럼 굴지만, 막상 일이 닥쳐서 네게 진지하게 따져 태도와 입장을 밝혀 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제가 왜 할 말이 없겠습니까? 저는 그냥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왜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단 말이냐? 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왜 확신하지 못하겠느냐? 네가 그 일을 할 때, 그렇게 행동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그 일을 하는 원칙은 무엇인지 명확하게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일을 바라보고 행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했는지도 명확하게 한 적도 없다. 그래서 일이 닥쳤을 때, 더없이 당황하면서 무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혹자는 인정하지 못하고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대학생이에요. 저는 석사라고요.”라고 말하고, “저는 철학가입니다. 저는 교수예요. 저는 고급 지식인이라고요.”라고 말하며, “저는 교양인이에요. 저는 언변이 뛰어나요.”라고 말하고, “저는 인재예요.” 혹은 “저는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한다. 이런 것들을 밝히는 게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은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네게 얼마간 지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하나님 집에서 쓸모가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네가 지니고 있는 그 지식들은 적어도 진리가 아니며, 네 분량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네 분량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그것들은 네 생명이 아니며, 신외지물(身外之物)인 것이다. 그럼 네 생명은 무엇이겠느냐? 사탄의 논리와 철학을 근거로 하고 준칙으로 한 생명인 것이다. 네 지식과 문화적 소양, 머리는 이러한 것들을 제압하지 못하며, 통제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너의 뛰어난 재능과 풍부한 지식은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 또는 네가 어떤 한 측면의 패괴 성품을 드러낼 때, 네 인내와 교양, 지식 등이 전혀 역할을 하지 못해 막막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않은 자의 난처한 모습이다. 진리에 진입하는 것이 쉽겠느냐? 난이도가 높겠느냐? 무엇이 어렵겠느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리 어려울 게 없다는 사실이다. 다짐하고 맹세하는 데 골몰하지 마라. 그래 봤자 아무 소용 없다. 다짐하고 맹세할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공을 들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했는지, 하나님 말씀 중 어떤 대목이 현재 네 내적 상태와 관련 있는지 묵상해라. 다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리며 다짐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이나 귀신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하나님은 네 그런 다짐을 열납하지 않는다. 너는 몇 번이나 다짐했느냐? 너는 혼자 맹세하고 그 맹세를 깨며, 그 후에는 또 맹세하고 깨기를 반복한다. 그러니 네가 어떤 사람이겠느냐? 너는 언제쯤 네가 한 말을 지킬 것이냐? 네가 한 말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짐도 중요하지 않고, 맹세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네가 현재, 지금, 당장 깨달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설령 가장 얕고 보잘것없어 보이며, 네가 가장 중요하지 않게 보는 진리일지라도 당장 실행하고 진입해라. 그러면 바로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들어설 것이며, 얼마 안 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또한, 이 기초 위에서 곧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 수확이 얼마나 크고 실질적이냐!
너희는 전통문화에 포함된 좋은 행위에 대한 교제를 듣고 느낀 바가 있느냐? 이러한 좋은 행위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늘부터 저는 교양 있고 사리 밝으며, 온화하고 우아하며,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 따위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소위 좋은 사람이 되지도 않을 거예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하며, 상냥하고 친절하며, 가까이하기 쉬운 사람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 정상 인성의 자연스러운 표출이 아니라 위장과 거짓이 들어간 기만행위니까요. 이런 건 진리를 실행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될까요? 저는 정직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말할 때 문화적 소양이 부족하거나 규율을 모르거나 지식이 부족해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해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할 것입니다. 처신할 때도, 일을 처리할 때도 위장하거나 꾸미지 않겠습니다. 제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마음속에 있는 말일 것입니다. 속으로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저는 스스로를 돌아보되,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일만 하겠습니다. 말할 때는 제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명예와 체면에 얽매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남들의 우러름을 받으려는 속셈은 더더욱 갖지 않겠습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만 신경 쓸 것이며, 남에게 상처 주지 않는 것을 최저 기준으로 삼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요구대로 일을 처리하되,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일 역시 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일만 할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변화 아니겠느냐? 앞에서 한 말들을 정말 실행한다면, 그에게는 진실로 변화가 생길 것이고, 그의 앞날과 운명에는 전환점이 생길 것이다. 그는 머지않아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걸을 것이며, 진리 실제에 들어서서 구원받을 희망이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는 좋은 일, 긍정적인 일이다. 여기에 다짐과 맹세가 필요하겠느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 다짐할 필요도, 자신의 지난 잘못과 과오, 패역을 되뇌며 한시바삐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고 죄를 사해 달라고 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형식은 다 필요하지 않다. 네가 현재, 지금, 당장 정직한 말,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고 실질적인 일을 하며, 거짓말과 기만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성과가 날 것이며, 정직한 사람이 될 희망이 생길 것이다. 일단 정직한 사람이 되면 진리 실제가 생기고,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게 된다. 그런 자가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2022년 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