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한 본분 이행이란 어떤 것인가
지난번 예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내용에 대해 교제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심판과 형벌을 받아 온전케 되는 데 필요한 네 가지 기본 조건에 관한 것이었다. 그 네 가지 기본 조건이 무엇이었느냐? (첫째,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셋째,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넷째,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이 네 가지 조건에는 각각 세부적인 내용이 있고, 구체적인 실행, 그리고 뜻하는 바가 있다. 사실, 이 네 가지 내용은 요 몇 년 동안 계속 말해 왔던 것이다. 오늘 다시 이 화제에 대해 말한다면 식상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지 않으냐? 이 네 가지 내용은 모두 진리 실제와 생명 진입에 관련되며, 끝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아직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고 그저 진리라는 글자 자체와 단순한 도리만 조금 이해할 뿐이다. 비록 실제를 조금 교제할 수는 있지만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어떤 측면의 진리든 항상 교제하고 자주 들어야 한다. 그러면 사람이 실제 체험 속에서 각 항목의 진리에 대해 점점 더 깊이 인식하고, 제대로 체험할 수 있다.
심판과 형벌을 받아 온전케 되기 위한 네 가지 기본 조건을 모두 정리했다. 다음은 첫 번째 항목인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에서부터 얘기해 보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근 몇 년간 계속 본분 이행에 관련된 내용을 교제해 주셔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는지, 본분 이행 시 어떤 원칙들을 지켜야 하는지 등도 손금 보듯 훤하니,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요 몇 년간 일상생활에서 접한 것 역시 전부 본분 이행 측면의 진리였습니다.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것에 관한 진리를 구하거나 먹고 마시며 들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화제를 교제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속으로 벌써 알고 있습니다.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한다는 내용 아닙니까? 본분 이행에 합격하려면 앞서 말한 그 몇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본분을 이행할 때는 원칙을 구하되, 자기 마음대로 하지 말며, 조화롭게 협력하고, 생명 진입과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는 내용이겠지요.” 너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고 체험한 것들이 이러한 내용이다. 또한, 너희가 깨달은 것 역시 이런 내용이다. 너희가 얼마나 깨달았든, 오늘 또다시 이 부분의 진리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중복된 내용이 있다면 너희에게도 유익하니 한 번 더 제대로 묵상해 보아라. 예전에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받아들이면 된다. 중복되는 것이든 아니든 자세히 듣고, 그 안에 어떤 진리가 있는지, 그 진리가 너희의 생명 진입에 유익한지,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들어 보아라. 그렇기에 다시 한번 ‘본분 이행에 합격하기’라는 화제를 교제하는 것이다. 이는 꼭 필요한 일이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에 관하여 ‘합격’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먼저 ‘본분’이란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하겠다. 다 듣고 나면 너희는 본분이란 무엇인지, 합격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고, 어떻게 실행해야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길이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본분이란 무엇이냐? (본분이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겨 주신 부탁이자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만 맞게 말했다. 이론적으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아볼 수 없지만 자세하게 파고든다면 그 말은 완벽하지 않다. 거기에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이 화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그가 일생 동안 어떻게 살아갈지, 이 세상에서 어떤 일들을 할지, 그의 운명이 어떨지 등은 모두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예컨대, 어떤 이는 세상에서 음악을 한다. 음악을 하는 것은 그의 일생의 사명이다. 그렇다면 그 사명을 본분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이는 전 세계가 놀랄 만한 위업을 이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고 어느 정도 기여를 했으며 시대도 바꿔 놓았다. 이는 그의 필생의 사명이다. 그렇다면 그의 이 사명을 본분이라 칭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그의 일생의 사명, 그가 일생 동안 한 일들을 하나님이 그에게 맡긴 부탁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네.) 그렇다. 하나님이 그에게 사명을 주고 그 부탁을 맡겼기 때문에 그는 온 인류 가운데서 인류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과 이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가 어떤 분야에 종사하든, 그게 예술이든 상업이든 정치든 경제든 또는 과학 연구든, 전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운명을 어떻게 정해 놓았든, 그들은 그저 하나님의 경영 사역 밖에 있는 사람으로, 이방인에 속한다. 그들이 한 일 또한 하나님의 경영 사역 밖에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책임과 그들이 받아들인 부탁, 그들의 평생 사명을 본분이라고 칭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한 일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는 수동적으로 창조주의 부탁과 창조주가 맡긴 사명을 받아들였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받은 사명과 다하는 책임은 본분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륜과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 또한 그들에게 역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떤 책임을 맡았든, 평생 어떤 부탁을 받아들이든, 어떤 사명을 완수하든, 그것을 본분 이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본분이란 무엇이고, 어떤 전제 조건을 달아야 본분이라는 말과 이 측면의 진리를 명확하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조금 전에 이렇게 교제한 것을 통해 너희는 한 가지 이치를 깨달은 것 아니냐? 어떤 이치이냐? 다시 말해, 인류 가운데서 어떤 한 사람이 얼마나 큰 사명을 받았든, 어떤 변혁을 이뤘든, 인류에 대한 기여가 크든 작든, 그러한 사명과 부탁은 다 본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륜과 무관하며, 그저 사명일 뿐이기 때문이다.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그들은 사명을 완수한 데 불과하며, 그것은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해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경륜,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과 무관한 것이라면, 사명을 완수한 그 행위를 본분 이행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본분이라 하겠느냐? 마땅히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즉,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 중 하나님이 맡긴 부탁과 사람의 사명이 본분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완전하고 정확하지 않겠느냐? 정확하다면 그것이 바로 진리이다. 정확하지 않고 편면적이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도리이다. 네가 무엇이 본분인지 완전히 깨닫지도, 분명하게 알지도 못하면, 본분이라는 측면의 진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예전에는 사람이 본분에 대해 잘못 이해한 부분이 많았을 수 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해 갖가지 관념과 모호함이 생겼다. 그래서 사람은 이런 관념과 모호함으로 본분을 해석한 다음 그것들에 따라 본분을 대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사람의 일생을 하나님이 정해 준 이상, 사람이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 것인지, 일생을 가난하게 살 것인지 부유하게 살 것인지, 어떤 일에 종사할 것인지도 모두 하나님이 정해 주는 것이며, 사람이 평생 무엇을 하고 어떤 일을 할 것인지도 모두 하나님이 맡긴 부탁이자 사람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사명에 관계된 이상, 모두 본분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본분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한다. 이것이 오해가 아니겠느냐? 어떤 이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 이렇게 말한다. “아이를 낳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부탁입니다. 이것은 사명이며, 아이를 부양해 기르는 것은 우리의 본분입니다.” 이것이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겠느냐?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번 생은 농사를 짓는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이런 운명을 타고 난 이상 우리는 농사를 잘 지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부탁이자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고되어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생은 농사를 잘 짓는 것이 바로 본분입니다.” 그는 운명과 사명, 운명과 본분을 동일시하는데, 이것은 오해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오해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장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제가 예전에는 뭘 해도 해내지 못했는데 장사를 한 뒤로 아주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보아 하니 하나님께서 제 이번 생은 장사해서 가족을 부양하는 운명으로 정해 주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생 동안 장사를 잘하고 크게 해서 온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이 제 본분일 것입니다.” 이것은 오해가 아니겠느냐? 사람이 자신이 살아가는 일, 무엇으로 생계를 꾸리는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생활을 누릴 것인지 등등 자기 사명과 관계된 이런 일들을 모두 본분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본분을 오해한 것이다.
본분이란 대체 무엇이겠느냐? 대다수 사람이 조금씩 치우치고 틀리게 이해한다. 하나님 집에서 네게 곡식과 채소를 재배하는 일을 안배한다면 너는 어떻게 대하겠느냐? 어떤 이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농사를 짓는 것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함이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분 속에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이 어째서 그렇게 이해하겠느냐? 본분 이행에 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무엇이 본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에 관한 진리를 깨달았다면, 농사짓기를 원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 집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자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사실, 이것도 하나님이 맡긴 부탁이다. 이 일이 깨알만 한 일일 수도 있고, 모래알만 한 일일 수도 있지만, 일의 크기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생겨난 일이다. 지금 하나님이 이 일을 네가 완성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너는 어떻게 이해하겠느냐? 너는 그것을 본분으로 간주해 받아들여야 하고, 도의상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그저 수동적으로 순종하며 농사짓는 일을 안배받았으니 농사짓는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네가 알아야 하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교회에서 네게 농사를 짓고 채소를 재배하는 일을 안배한 것은 너를 부자로 만들기 위함도 아니고, 네가 가족을 먹여 살리게 하기 위함도 아니다. 바로 재난 기간 동안 하나님 집의 사역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의 평소 식사를 보장하여 그들이 하나님 집의 사역을 지체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 사람들이 농장 교회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며, 이것은 일반 농민들이 농사짓는 것과는 성질이 다르다. 일반 농민이 농사를 짓는 것은 어떤 성질의 것이냐? 가족을 먹여 살리고 생존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정해 준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의 운명이다. 그래서 그가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짓는 것은 본분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지금 너는 하나님 집에 와서 똑같이 농사를 짓고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 집의 사역에 필요한 것이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집에서 농사를 짓는 것과 성질이 다르다. 이것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며,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본분이자, 창조주가 네게 맡긴 부탁이고 네게 부여한 책임이다. 네게 있어서 그것은 네 분분이다. 그러면 이 본분과 세상에서의 그 사명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하겠느냐? (본분입니다.) 왜 그렇게 말하겠느냐? 본분은 하나님에게 필요한 일을 네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네게 맡긴 것이다. 이것은 한 가지 측면의 원인이다. 이 밖에도 한 가지 주된 원인이 있다. 네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을 받아들이면, 너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관계가 있게 된다. 하나님 집에서는 고된 일이든 피곤한 일이든, 또 사람이 좋아하는 일이든 싫어하는 일이든, 네게 안배된 것이 바로 네 본분이다. 네가 그것을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이자 하나님이 네게 부여한 책임으로 받아들인다면, 너는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네가 행하는 것과 이행하는 본분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이 있는데, 네가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을 성심성의를 다해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하나님은 너를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복이겠느냐, 화이겠느냐? (복입니다.) 이것은 커다란 복이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조금 고생하면 불평을 쏟아 내는데, 네가 아주 큰 복을 받고도 그걸 알지 못하고, 아주 큰 혜택을 입고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이냐? 이것이 바보가 아니겠느냐? 이때 사람은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이것이 본분임을 알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너희에게 본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이 생겼느냐? 깊은 이해가 생겼느냐? 사람이 구원받는 일에서 본분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중요합니다.) 어느 정도로 중요하냐? 본분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평생 어떤 사명을 완수했든, 본분을 이행하지 못했다면 구원받는 것과는 무관하다. 다시 말해, 네가 평생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세웠든 그것은 그저 한 가지 사명을 완수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한 것이 아니기에 구원받는 일과는 무관하며, 인류를 경영하는 하나님의 사역과도 관계가 없다.
하나님 집에서는 늘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말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럼 본분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겠느냐? 크게 보자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으로 인해 생긴다. 작게 보자면,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되면서 여러 가지 사역이 생기는데, 그러한 사역은 사람이 협력하고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사람에게 책임과 사명이 생기게 되고, 그 책임과 사명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본분인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사람이 협력해야 하는 각종 사역이 바로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그렇다면 본분에는 상하 귀천이나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겠느냐? 그런 차이는 없다.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관계가 있고, 하나님 집의 사역에 필요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확장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곧 사람의 본분이다. 이것이 바로 본분의 유래이자 정의이다. 사람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든,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없다면 본분이 생기겠느냐? 아니다. 이제 확실해졌을 것이다. 본분은 무엇과 관계되느냐?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관계됩니다.) 그렇다. 인간의 본분, 피조물의 본분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인류 가운데서 전개하는 경영 사역이 없다면, 사람에게 본분이란 것도 생기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본분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비롯된 것이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이렇게 볼 때 본분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너무나 중요하다. 큰 측면에서 보면, 너는 하나님의 경륜 사역에 협력하는 것이고, 작은 측면에서 보면, 너는 서로 다른 시기, 서로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요구되는 하나님의 각종 사역에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어떤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든, 그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준 사명이다. 때로는 그것이 중요한 물건 하나를 간수하거나 보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사소한 일로서 네가 맡은 책임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것이고,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네 본분이다. 근본적으로 말하면 본분은 하나님의 부탁이며, 주로 복음 전파하는 것, 증거하는 것, 동영상 제작하는 것, 교회의 리더 일꾼이 되는 것, 혹은 더 위험하고 더 큰 몇 가지 사역이 포함된다. 어쨌든 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복음 확장 사역에 필요한 일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본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본분이란 크게 보면 한 사람의 사명이자 하나님이 맡긴 부탁이고, 작게 보면 네가 맡은 책임이자 의무이다. 너의 사명이자 하나님이 맡긴 부탁이고, 너의 책임이자 의무라면 본분 이행은 네 개인적인 일과 무관하다. 본분은 개인적인 일과 무관하다. 왜 이런 화제를 언급하겠느냐? 사람은 본분을 대하고 이해하는 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본분이란 하나님의 경영 사역 중에서 피조물이 받아들여야 할 부탁이자 완수해야 할 사명이다. 큰 전제는 알고 있겠지만 세부적으로 놓고 말한다면, 본분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올바른 이해겠느냐? 어떤 사람은 본분을 자신의 일처럼 여겨 하는데 이 원칙이 옳은 것이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으냐? 너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탁한 일을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차이가 있다. 자신을 위해 일할 때는 어떤 원칙으로 하느냐?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남과 상의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구할 필요도 없다. 무작정 자기 성질대로 하고, 자신에게 이롭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도 이런 원칙으로 하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어떤 이들은 “저는 제 일을 할 때 이렇게 진지하게 하지 않고, 이렇게 열심히 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본분을 제 일로 여기며 하고 있고, 이 원칙이 적절하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행하는 것이 본분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겠느냐?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본분을 대할 때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인다’라는 말은 아주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이 속의 진리를 실행할지는 네가 본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방금 본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본분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하나님이 맡긴 부탁이며, 하나님의 경륜 사역, 그리고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봤을 때, 본분과 네 개인적인 일 처리 원칙은 관계가 있겠느냐? 네 개인적인 취향과 생활 습관, 생활 규칙과 관계가 있겠느냐? 전혀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진리와 관계가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본분이 제게 주어진 이상 제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 본분 이행의 최고 원칙은 여러분 중 누구에게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본분을 잘 이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것 말고도 제게는 더 높은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본분을 자신의 큰일로 여기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며 잘 해내서 최고의 효과를 얻어 내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원칙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어째서 옳지 않으냐? 하나님으로부터 본분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부탁임을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다면, 하나님의 부탁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이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원칙과 관련된다. 본분을 하나님의 부탁으로 여겨 대하는 것이 자신의 일로 여겨 대하는 것보다 훨씬 높지 않겠느냐? 다르지 않겠느냐? 만약 본분을 하나님이 부탁한 일로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네 본분 이행의 원칙은 단순히 본분을 자기 일로 여기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본분을 대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며 하나님의 뜻에 맞겠느냐? 우선 먼저, 너는 이 본분을 누가 안배했는지, 어떤 급 리더가 너에게 시킨 건지 분석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분석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하는 것, 이것이 한 조목이다. 이 밖에도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것의 상하 귀천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 “이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부탁이고 하나님 집의 사역이긴 하지만, 이런 일을 하면 남들이 깔볼 거야! 체면이 서는 일은 남들보고 하라고 하고, 티 나지 않고 뒤에서 힘을 내는 일은 나한테 시키네. 이건 불공평하잖아! 난 이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 거야. 난 체면도 세우고 이름도 날리는 본분을 맡아야 해. 이름을 날리거나 체면을 세우지 못한다 해도 내게 이득이 되고 몸이 편한 본분이어야 돼.” 네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 태도가 옳은 것이냐?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고르는 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기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본분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본분을 거절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습이다. 그 안에는 개인적인 취향과 바람이 섞여 있다. 네가 자신의 이익과 체면 등 갖가지 요소를 고려하면, 그것은 순종하는 태도로 본분을 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어떤 태도로 본분을 대해야 하느냐? 첫째, 분석하지 말고, 누가 안배한 것인지 따지지도 말고,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너에게 부탁한 본분이니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상하 귀천을 논하지 말고, 어떤 성질의 본분인지, 그 본분을 이행하면서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 앞에서 하는 일인지 아니면 뒤에서 하는 일인지 등을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다른 한 가지 태도는 순종하고 자발적으로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한 가지 본분이 주어졌을 때 너는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잘못해서 도태될까 봐 두려워 몸을 사리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머문다면, 이것이 순종하는 태도이겠느냐? 가령 형제자매가 너를 리더로 뽑아 주었고, 너도 속으로 이왕 뽑혔으니 그것이 바로 자신이 이행해야 하는 본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본분을 대하는 태도가 별로 능동적이지 않다고 치자. 왜 그렇게 능동적이지 않은 것이겠느냐? 네 마음속에 몇 가지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너는 ‘리더가 되는 건 좋은 일 아니야. 칼날 위를 걷고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아! 잘해도 상을 받지 못하고, 잘못하면 책망과 훈계를 받아야 해. 책망을 당하는 건 그런대로 괜찮은데, 교체되거나 도태된다면 모든 게 다 끝이 아니겠어?’라는 생각에 마음속에서 싸움이 시작된다. 이것이 어떤 태도이겠느냐? 경계하고 오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본분을 대함에 있어서 가져야 하는 태도가 아니라,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다. 그러면 긍정적인 태도는 무엇이겠느냐?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짊어질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능동적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너희 말은 조금 공허하다. 네가 그 정도로 두려워하는데 마음에 거리낌이 없을 수가 있겠느냐? 짊어질 용기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어떤 마음을 가져야 짊어질 용기가 생길 수 있겠느냐? 네가 항상 일이 생겼을 때 감당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워하고, 네 내면에 많은 걸림돌이 있으면, 너는 전혀 짊어질 용기가 생길 수가 없다. 너희가 말하는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나 ‘짊어질 용기가 있는 것’ 또는 ‘만 번을 죽어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분노한 청년들이 구호를 외치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으로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지금 필요한 것은 올바른 태도다. 올바른 태도를 가지려면, 이 측면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만 네 내면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그 부탁과 본분을 순조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실행의 길이며, 진리이다. ‘짊어질 용기가 있다’와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는 말로 네 마음속 공포를 없애려 한다면 효과가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그것은 진리도, 실행의 길도 아니다. 네가 입으로는 “저는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음속에 어떤 다른 생각도, 불순물도 없습니다. 짊어질 용기가 있습니다.”라고 외친다. 겉으로는 본분을 짊어진 것 같다. 하지만 그 뒤에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감당하기 힘들 것 같고 마음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책망받는 것을 보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더 겁먹을 것이다. 자신의 분량이 보잘것없다는 생각이 점점 커질 것이고, 그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여길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본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네가 구호만 외치는 것으로는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너는 능동적으로 진리를 구하며 순종하고 협력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것으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 겁먹고 두려워하고 걱정해도 소용없다. 드러나서 도태되는 것이 리더가 되는 것과 관련이 있겠느냐? 네가 리더가 되지 않으면 그로 인해 네 패괴 성품이 사라질 수 있겠느냐? 너는 조만간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또 리더가 되지 않으면 너는 더 많은 훈련 기회를 얻을 수 없어 생명의 성장이 느려질 것이고, 온전케 될 기회도 적을 것이다. 리더 일꾼이 되면 고생은 좀 더 많이 하겠지만 수확도 많다.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서고 또 온전케 될 수 있다면,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이냐! 그러므로 너는 마땅히 순종하고 능동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이것이 네 본분이자 책임이다. 네 앞에 펼쳐진 길이 어떻든, 너는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본분 이행에 마땅히 가져야 하는 태도다.
본분 이행이라는 주제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주제다. 이것은 새로운 주제는 아니지만,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는 무척 중요하고, 사람이 반드시 깨닫고 진입해야 할 진리다. 피조물은 반드시 본분을 잘 이행해야 창조주의 인정을 받을 수 있기에, 본분 이행이 어떤 건지 이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본분 이행은 이론도, 구호도 아닌, 한 가지 진리이다. 그럼 본분 이행이란 무엇이냐? 이 측면의 진리를 이해하면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적어도 네가 하나님의 부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와 의지로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을 완수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 문제가 해결되는 동시에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비정상적인 관계도 해결된다고 할 수 있다. 본분 이행을 어떤 이는 밑천으로 여기고, 어떤 이는 일거리로 여기며,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직업, 사업으로 여기거나 심심풀이 소일거리나 오락거리, 취미로 여긴다. 어쨌든 네가 어떤 태도로 본분을 대하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피조물이 해야 할 일, 또는 협력해야 할 일로 여기지 않는다면, 네가 하는 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네가 본분을 자기 집에서 하는 장사라고 생각한다면 옳은 일이겠느냐? 자신의 일이나 취미로 여긴다면 옳은 일이겠느냐? 사적인 일로 여긴다면 옳은 일이겠느냐? 모두 옳지 않다. 왜 이런 화제를 언급하겠느냐? 무슨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러한 것을 교제하겠느냐? 사람이 잘못된 태도로 본분을 대하고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온갖 행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본분 이행 측면의 진리를 이해해야만 사람이 본분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되고, 점차 진리에 부합하여 하나님의 요구와 뜻에 부합할 수 있다. 사람이 본분 이행 측면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가 본분을 대하는 태도와 본분을 이행하는 원칙에 문제가 생길 것이고, 본분을 이행하는 효과도 얻을 수 없다. 본분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부탁이자, 사람이 마땅히 완수해야 할 사명이다. 그러나 본분은 결코 네 개인적인 경영도, 네가 두각을 드러낼 조건도 아니다. 본분 이행을 통해 어떤 이는 자신의 경영을 하고 당을 짓고, 어떤 이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어떤 이는 내적 공허함을 채운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요행 심리를 만족시키며, 본분을 이행하기만 하면 하나님 집에 분깃이 있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마련해 주는 아름다운 종착지에도 분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분을 대하는 이런 태도는 다 옳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이며, 사람이 하루빨리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이 본분인지, 사람은 어떻게 본분을 대해야 하는지, 본분을 대할 때는 어떤 관점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교제한 것 같다. 너희가 잘 묵상해 보고 이런 측면의 진리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이것이 급선무다. 지금 너희가 당장 알아야 하는 진리가 무엇이겠느냐? 한편으로는 그 속에 있는 이상(異象) 측면의 진리를 이해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행 중에 또 현실 생활 속에서 네가 이런 진리에 대해 어떤 오해가 있고, 또 치우치게 이해하는 부분은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본분 이행 측면의 진리와 관계된 일이 네게 닥쳤을 때, 이런 말과 진리가 네 내적 상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면, 이것은 교제한 이런 내용을 너희가 진정으로 확실하게 이해했다는 증거다. 만약 네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본분 측면에 관계된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다면, 네가 이런 진리에 진입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너희는 이런 진리를 다 들은 뒤 스스로 정리하고 반성했느냐? 매번 필기를 하고 나면 잘 이해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또 잊어버리고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너희 스스로 조금도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너희가 실행한 것이 이런 진리와 관계가 없는, 진리와 무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본분 이행의 진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깨닫고 진입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다. 만약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다 듣고도 얼떨떨하고 혼란스럽다면 그 사람의 자질이 너무 부족하고, 분량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네가 종교의 믿음 방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을 읽을 줄만 알고, 기도하고 예배할 줄만 알며, 네게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그것은 생명 진입도 없고, 아무런 분량도 없는 것이다. 아무런 분량이 없다는 것이 어떤 개념이겠느냐?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단 누가 미혹하면 곧 그를 따라가고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 잘못을 저질렀을 때 누가 두어 마디 책망하고 훈계하는데, 말투가 조금만 딱딱해도 너는 믿는 것을 그만둘 수 있다. 좌절에 맞닥뜨리거나 생활하면서 여러 방면에서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내려 주지 않고 네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않으면 금세 뒤돌아서서 하나님 집을 떠나 믿지 않을 수도 있다. 본분 이행이라는 이 가장 기본적인 진리에 네가 조금이라도 진입한다면 너는 이미 진리와 연결되어 있고, 진리 실제와 이미 연결되어 있으며 조금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만약 네게 이 측면의 진리 실제가 전혀 없고 조금도 갖추지 못했다면, 그것은 네 마음속에 아직 진리가 뿌리내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방금 본분이란 무엇인지와 본분의 유래, 생성에 대해 교제한 것은 대체 본분이란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함이다. 사람이 이것들을 알면 어떤 좋은 점이 있겠느냐? 본분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리를 깨달으면 사람은 본분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적어도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서 올바른 태도로 본분을 대해야 하고,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게 된다. 마음속에 적어도 이런 개념이 생긴다. 비록 본분은 네가 이행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이자 사명이지만, 네 개인적인 일이 아니고 너 자신의 일도 아니다. 이 말이 조금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이것은 진리가 틀림없으며, 진리에는 실제적인 측면이 있다. 또 이것은 사람의 실행, 진입과 관계가 있고, 하나님의 요구와도 관계가 있으며, 공허한 것이 아니다. 진리는 바로 이런 것이다. 네가 한 측면의 진리 실제를 체험하고 거기에 진입해야 비로소 그 진리를 갈수록 더 명확히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네가 늘 진리에 의구심을 품으며 의문을 제기하고 연구하거나 분석한다면, 진리는 네게 있어 영원히 진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네 실생활과 무관하며 너의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진리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행동의 지침, 사람됨의 지침, 또는 하나님을 믿는 지침으로 삼는다면, 진리는 네 삶과 인생 목표, 인생 방향, 그리고 처세 방식을 바꿔 놓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역할이다. 사람이 무엇이 본분 이행인지 알게 되면, 그것은 분명 본분을 이행하는 데에 큰 도움과 이익이 될 것이다. 적어도 너희는 본분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또한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데에 관심이 있거나 바람과 소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진리이자, 가장 기본적으로 진입해야 할 진리이다. 무엇이 본분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지, 어떤 태도로 본분을 받아들이고 대해야 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면 위험해진다. 한편으로 네가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무성의하게 본분을 대하거나, 또 한편으로 교회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저지르고, 심지어 악행을 저질러 하나님의 행정 법령을 거스른다면, 조금 보수적으로 말해서 반성하도록 격리될 수 있고, 심하면 도태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본분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진리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관계가 있으며 무관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사람이 본분이 무엇인지 이해했다면, 한 가지 이치를 알았다고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올바른 태도로 본분을 대하는 효과에 이르러야 한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단순히 힘을 내는 것으로는 효과를 거둘 수 없다. 힘만 내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사실 본분을 이행하는 것에는 세부적인 일들이 많다. 올바른 마음가짐, 실행 원칙, 진실한 순종이 포함되며, 영적인 지혜도 있어야 한다. 이런 몇 가지 측면의 진리를 갖춰야만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고,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문제를 철저히 해결할 수 있다. 본분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지 못한 사람은 모두 진리 실제가 없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며,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르려면 본분 이행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본분의 정의와 유래에 대해 이해하고 나면 본분의 성질과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일의 성질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 집에서 네게 맡긴 일을 본분으로 대하는 것과 세상의 일로 대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네가 그것을 본분으로 여긴다면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구해야 한다. “이 일은 제 본분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교회의 규정이 무엇인지, 여기에 담긴 원칙을 제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네가 이렇게 실행해야만 본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이며, 사람이 본분을 대할 때 마땅히 가져야 하는 태도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나 사생활과 관계된 일을 대할 때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느냐? 진리와 원칙을 구할 필요가 있느냐? 원칙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것,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 부자가 되는 것, 출세하는 것, 명예와 이익을 다 갖는 것 등이 바로 이런 원칙이다. 이런 원칙은 전적으로 세상에 속한 것이고, 풍조에 속한 것이며, 사탄에 속하고 이 사악한 인류에 속한 것이다. 본분을 이행하는 원칙이 무엇이겠느냐? 반드시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 진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사람이 세상에서 종사하는 직업이나 일은 진리나 하나님의 요구와 관계가 없다. 네가 능력이 있고, 고생을 각오하고, 충분히 부지런하고, 충분히 악하고 담력이 크다면 사회에서 출세할 수 있고, 큰일을 이룰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는 이런 원칙도 이런 철학도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 집에서는 네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 본분이 어떤 성질이든, 사람이 보기에 높든 낮든, 고귀하든 비천하든, 체면이 서는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하나님이 네게 부탁한 것이든, 교회의 리더가 네게 분배한 것이든, 하나님 집에서 네게 분배한 일이 무엇이든, 네가 일을 행하는 원칙이 진리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모두 진리와 연관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요구와 연관되어야 하며, 하나님 집의 규정, 사역지침과 연관되어야 한다. 요컨대 본분은 사람이 세상에서 종사하는 일과 구분되어야 한다.
어째서 본분 이행과 사람이 세상에서 종사하는 일의 차이에 대해 교제하겠느냐? 이것이 중요하냐,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어째서 중요하겠느냐? 이것은 사람이 본분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네가 세상에서 일하는 태도와 원칙으로 본분을 이행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자기 마음대로 일하게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일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것은 일을 처리하면서 남들과 상의하지 않으려 하고 자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하고,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좋으며 억울하거나 괴롭지도 않다는 것이다. 또 서로 다투고 시샘하고 싸우며 패거리를 만들기도 하고, 공을 내세워 상을 달라고 요구하거나 자신을 드러내고, 무성의하고, 책임지지 않고 위아래를 속이거나 독립 왕국을 세우는 등의 일들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요컨대 본분 이행은 세상에서 일하는 것과 다르다. 본분 이행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것이고, 하나님이 안배한 것이다. 이것은 본분 이행과 세상에서 일하는 것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요구에 따르고, 진리 원칙에 따라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경영이 아니고, 개인의 장사도 아니며, 누군가의 사적인 일은 더더욱 아니다. 이것은 개인의 이익이나 체면, 지위, 세력, 장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로지 사람의 생명 진입, 사람의 성품 변화,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관계가 있다. 반면 세상의 일에 종사하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경영을 하는 것이다. 네가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거나 한 기업을 경영할 때는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든,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여러 방면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겪든, 남에게 수모를 당하고 오해를 받든, 심지어 주변의 여론으로부터 받는 압력이 얼마나 크든, 네가 하는 그 모든 것은 네 개인적인 바람과 지향, 야심, 욕망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저 이런 성질일 뿐이다. 이런 성질은 개인의 경영과 사업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나서서 “내가 공익 사업을 하는 것은 인류를 위한 것이다. 나는 하늘이 내린 천도(天道)와 원칙에 따라 일하겠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설령 누가 나서서 “내가 인류를 위해 가장 공익적이고 위대한 사업을 하겠다. 인류를 위해 복지를 창출하고 좋은 일을 하겠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의 목적은 그리 순수하지 않다. 그는 이름을 날리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경영을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모두 개인의 경영을 위한 것이다. 그가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아무리 고생을 하고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고 아무리 큰 기여를 하더라도, 또 인류와 시대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기원을 연다고 해도, 그가 무얼 하든 그의 목적은 타인이 아닌 그 자신을 위한 것이다. 패괴된 사람이 일하는 것이 모두 이렇다. 어느 누구라도 큰일을 하든 작은 일을 하든 그의 목적은 명예 아니면 이익이다. 그가 이렇게 일하는 것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개인의 경영을 하는 것이다. 개인의 경영이 하나님의 경영과 관계가 있느냐? 털끝만큼의 관계도 없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건 아닙니다. 세상에 와서 한 시대를 바꾼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이 아닙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경영과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관계가 있느냐? (없습니다.) 어째서 관계가 없다고 하겠느냐?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경영 사역과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 대답했구나.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과 무관하면 하나님의 경영과 무관한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절반만 옳다.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와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경륜과 무관한 것은 모두 사람의 경영이다. 이것은 한 가지 측면이다. 그런데 내가 너희에게 조금 보충해 주어야 할 것이 있다. 그가 그 일을 하는 성질이 개인의 명예와 이익을 위한 것이며, 결국 이익을 얻는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라는 점이다. 그가 그 모든 것을 하는 성질과 원칙,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결과가 누구를 위한 것이냐?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누구를 위한 것이냐? (사탄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 사탄을 위한 것이다. 사탄을 위하는 것의 성질은 무엇이냐?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의 이면에 어떤 본질이 있느냐? 어째서 이것이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느냐? (일하는 출발점, 근원, 원칙이 모두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 가지 측면의 원인이며 근원적인 문제다. 그가 일하는 출발점, 근원, 원칙이 모두 사탄에 속하고 사악한 것이라면, 최종적으로 어떤 효과에 도달하겠느냐? 그가 증거하는 것은 누구이겠느냐? (사탄입니다.) 그렇다. 그가 증거하는 것은 사탄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사관(史官)이나 작가들 가운데 각 시대에 인류가 했던 그런 일들의 공로를 창조주에게 돌린 이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그것이 인류의 위대한 사업이 남긴 유적이나 위업이라고 말할 뿐이다. 이런 유적과 위업을 남긴 위인이나 유명인은 인류의 마음속에서 누구를 대표하느냐? 유명인이나 위인, 인류 중 위대하고 독창적인 일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패괴된 사람들이 숭배하는 대상이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들이 차지한 지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지위와 같다. 이것이 문제의 본질적인 면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방금 사람이 일하는 근원, 동기, 출발점, 원칙이 모두 사탄의 논리이며,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람은 사람의 수단이나 은사 등에 의지해 사업을 이루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이로써 최종적으로 도달한 결과는 바로 인류가 이 모든 공을 사탄에게 돌린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공자, 관우 등 역사적인 유명인과 위인을 숭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유명인과 위인들이 얼마나 큰 일을 했든 간에 사실 근본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이 다양한 인물들이 각기 다른 시기에 이 세상에 와서 특수한 일을 하게 안배한 것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기록을 통틀어, 고대사도 그렇고 근대사도 그렇고, 창조주의 행사를 증거한 기록은 없다. 성경에만 율법시대와 은혜시대의 두 단계 사역에 관한 일부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만, 거기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도 역시 제한적이다. 사실 하나님은 말씀도 많이 하고 일도 많이 했지만 인류가 기록한 것은 아주 미미하다. 반면 그 유명인과 위인들을 기록하고 증명하고 칭송한 책은 너무 많다. 이것으로 조금 전에 말한 그 문제의 본질을 해석할 수 있지 않으냐? 조금 전에 역사적인 유명인과 위인들이 행한 일이 모두 자신을 위한 것으로, 본질적으로는 사탄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들이 본분을 이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영과 자신의 사업을 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일에 종사할 때 그 성질은 무엇이냐? 그 본질은 무엇이냐? (개인의 경영을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개인의 경영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느냐? 근원이 무엇이겠느냐? 그가 증거한 것은 사탄이고, 그가 일을 행한 원칙과 동기는 모두 사탄에게서 나온 것으로, 진리와 전혀 무관하고, 하나님의 요구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면 본분의 성질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종사하는 일을 일컫는다. 이 일은 진리와 진리 원칙,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해야 하며,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사람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사람이 창조주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더 진실하게 순종하며, 피조물이 해야 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더 정상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일에 종사한다면 이런 효과를 거둘 수가 있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일에 종사한 기간이 길수록 하나님을 거역하는 부분도 많아지고,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또 개인의 경영을 잘할수록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개인의 경영이 성공할수록 하나님의 요구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이를 통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세상에서 일에 종사하는 것은 그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사람의 본분과 사람이 세상에서 종사하는 일의 차이점에 대해 얘기해 보았다. 이 얘기는 사람이 어느 방면의 진리를 깨닫게 하려고 한 것이냐? 네가 받아들인 본분이 무엇이건 언제나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네가 교회 리더로 선출되었다면 교회 리더의 사역이 바로 네 본분이다. 리더의 사역을 본분으로 삼았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선 리더 사역을 잘하는 것이 바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세상에서 벼슬을 맡은 것이 아니다. 리더가 된 것을 벼슬로 생각하면 오류가 생긴다. 하지만 네가 “교회 리더가 되면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몸을 낮춰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저보다 더 높아지고 커지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이런 태도도 옳지 않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가식을 떨어도 쓸데없다. 본분에 대해 반드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우선, 교회 리더라는 이 사역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교회 하나에 사람이 수십 명이 되는데, 너는 어떻게 그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많은 이들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연약하고 소극적인 사람들인 경우는 많이 양육하고 붙잡아 줘서 그 사람들이 연약하고 소극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 그 밖에도 본분 이행이 가능한 사람들인 경우는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그들이 원칙대로 일하고 본분을 잘 이행해서 더 좋은 효과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도 인성이 매우 악하여 언제나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책망할 사람은 책망하고, 한사코 회개하지 않는 사람, 제명해야 할 사람은 제명하여 원칙대로 처리하고 타당하게 안배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았다. 바로 교회 내 상대적으로 인성도 괜찮고 자질도 있어서 어느 한 방면의 사역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되도록 빨리 양성해야 하는 것이다. 지체하는 것은 좋지 않다. 미리 훈련해야 인재가 될 수 있고, 평생 훈련 없이는 아무것도 잘할 수 없다. 이런 것은 리더 일꾼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사역이 아니겠느냐? 리더가 되었는데도 속으로 이런 걸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사역할 수 없다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리더가 되면 반드시 교회의 여러 가지 사역을 일일이 살펴야 한다. 첫째, 인재 양성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인성이 좋고 자질이 있는 사람은 모두 발탁해서 양성하고 훈련시켜야 한다. 둘째, 형제자매들을 이끌고 진리 실제에 진입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을 반성, 인식하고, 이단 사설을 분별하고 사람을 분별해서 본분을 잘 이행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는 생명 진입 방면에 관한 것이다. 셋째, 대다수 본분 이행이 가능한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도록 하고(지나치게 인성이 부족한 자는 제외), 나아가 모두가 본분 이행에서 효과를 거두고, 대충 무성의하게 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넷째,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자들은 즉시 처리해야 한다. 진리 교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훈계하고 책망해야 한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격리해서 반성하게 하고, 심지어 제명, 출교해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 선민들이 불신파, 거짓 리더,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고 그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하고, 하루빨리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게 해야 한다. 이상 다섯 가지는 모두 중요한 사항으로, 리더의 본직 사역이다. 이 다섯 가지 방면의 사역을 잘 해내는 사람이 바로 합격한 교회 리더이다. 그 밖에 일부 특별한 상황도 처리할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일시적으로 소극적이고 나약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바르게 대해야 하지 일률적으로 처리하면 안 된다. 사람이 잠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그 사람을 ‘소극적인 사람’이라든가 ‘항상 소극적’이라고 규정하고 하나님이 그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 또한, 모든 사람이 각자 맡은 바 직책과 능력을 다할 수 있도록 그 사람의 은사, 특기, 자질, 연령, 하나님 믿은 기간에 근거해 적절한 본분을 안배해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각자의 상황에 맞는 일, 저마다 다른 일을 맡기고 그 사람이 하나님 집에서 기능을 최대로 발휘하여 본분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네가 속으로 이러한 것을 생각한다면, 부담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늘 주의 깊게 주변을 관찰할 것이다. 무엇을 관찰하느냐? 외모가 뛰어난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을 더 많이 접하거나 외모가 별로인 사람을 보고 배척하라는 게 아니다. 또한, 능력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을 보면 아첨하라는 것도 아니고, 너에게 불복하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든 혼내 주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걸 보라는 게 아니다. 그러면 어떤 걸 봐야 하느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다양한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와 그들에 대한 요구를 근거로 사람을 분별하고, 원칙에 따라 사람을 대해야 한다. 이것이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다. 먼저 교회 안의 다양한 사람을 유형별로 구분해 보아라. 자질이 뛰어나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부류, 자질이 형편없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부류, 본분을 이행할 수 없는 부류, 늘 불평하고, 관념을 퍼뜨리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교란을 일으키는, 불신파에 해당하는 부류 등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유형별로 나눈 다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각 부류의 진실한 내적 상태를 파악해 보아라. 어떤 사람들이 구원받고, 어떤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지 잘 살펴보면, 각 유형의 사람을 꿰뚫어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고 어떤 사람들을 도태시키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것은 부담을 갖고 있기에 알게 되는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본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 아니겠느냐? 네가 이런 올바른 태도를 갖고 부담을 갖는다면, 주어진 사역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네가 본분을 이렇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분 이행을 벼슬처럼 생각한다면, ‘리더가 된 것은 벼슬을 맡은 거나 마찬가지고, 이건 하나님 축복이야! 이제 지위가 생겼으니 다들 내 말을 들어야겠지. 정말 잘 됐구나!’라고 하면서 리더가 된 것을 벼슬에 오른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건 큰일이다. 분명 너는 벼슬을 수행하는 길, 벼슬을 수행하는 방법으로 리더 노릇을 할 텐데, 그러면 교회 사역을 잘할 수 있겠느냐? 네가 이런 관점을 지니고 있다면 반드시 드러나 도태되고 말 것이다. 너는 늘 벼슬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 어딜 가든 사람들이 옹위해 주고, 다들 네 말에 복종하고, 그것 말고도 교회에 무슨 혜택이 있으면 네가 가장 먼저 누리고, 교회에 무슨 사역이 있을 때는 네가 직접 나설 필요 없이 지시만 내리면 된다. 이건 어떤 마음가짐이냐? 이는 지위의 복을 탐하는 것 아니냐? 그건 패괴 성품이 아니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사탄 성품에 따라 본분을 이행한다. 수많은 리더 일꾼이 늘 사탄 성품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고 조금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로 드러나 도태되었다. 지금, 일부 리더들이 아직도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는 리더가 된 뒤에 속으로 축하하는 마음도 들고, 스스로 우쭐한 기분도 들고, 어떤 기분인지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스스로가 꽤 괜찮게 느껴졌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했다. ‘건방 떨지 말자. 건방지게 구는 건 나대는 태도고, 나대는 건 실패의 전조야. 좀 자중해야 해.’ 그는 겉으로 자중하며 입으로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하나님이 높여 준 것이고, 하나님이 맡긴 부탁이니 안 할 수가 없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남몰래 기뻐했다. ‘드디어 내가 뽑혔어. 누가 나보고 자질이 안 된대? 자질이 안 되는데 어떻게 선출됐겠어? 다른 사람은 왜 안 뽑히고? 아무래도 내가 남들보다 나은가 봐.’ 그 본분이 임하자 그는 맨 먼저 속으로 이런 생각부터 했다. 이런 고민은 없었다. ‘이 본분이 임했는데, 나는 어떻게 이행해야 하나? 전에 사역을 잘했던 사람을 보고 좀 배워야겠다. 이 본분 이행에서 하나님의 요구는 뭘까? 교회 사역지침에 이런 내용이 있을까? 전에는 교회 사역에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리더로 선출되었으니 어떻게 해야 하나?’ 사실, 의지를 가지고 진리를 구하면 길을 찾을 수 있고, 네가 사역을 본분으로 여기고 대한다면 쉽게 해낼 수 있다. 리더를 맡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을 저에게 맡기시는 겁니까? 이제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예배드리고, 어떤 사역을 안배해 주느냐는 제가 결정하는 거라고요? 어휴, 이 순간 마음이 정말 무겁군요.” 이런 말은 어떠냐? 마치 자기가 아주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데, 이것은 빈말이자 도리다. 이런 사람은 외식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느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도 꽤나 위선적이다. 그렇지만 사람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 것도 정상이다. 일반 사람들은 작은 관직이라도 맡으면 자랑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갑자기 자신의 몸값이 올라간 것 같고, 지위와 명예, 이익에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고, 전과 같지 않다. 그러면서 패괴 성품과 사치스러운 욕망을 드러낸다. 이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이것은 패괴된 인류의 공통된 특징으로, 패괴된 인류라면 누구에게나 있다. 어떤 사람은 리더가 된 후 걸음걸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어떤 사람은 리더가 된 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 물론,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소심해서가 아니라 리더가 되면 어떤 스타일을 지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리더가 된 다음에는 어떤 걸 먹고 어떤 걸 입어야 좋을지 모른다. 온갖 모습들이 다 있다. 이런 모습이 너희에게는 없느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분명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오래 걸려야 이런 내적 상태와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1~2년이냐, 3~5년이냐, 아니면 10년이냐? 이것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결심과 그 정도를 봐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진입이 정비례를 이루고, 둘 사이에 등호가 성립된다. 그가 진리를 많이 깨달으면 그만큼 많은 진리에 진입할 수 있고, 그가 진리를 깊이 깨달으면 그만큼 진리에 깊이 진입하고, 그만큼 깊이 이해하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는 도리는 많아도 실행과 진입은 제로다. 그래서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어도 내면의 어려움은 도무지 해결되지 않고 일만 조금 닥쳐도 추한 모습이 나온다. 스스로 아무리 제어하려 해도 제어할 수 없고, 아무리 꾸며 대도 여전히 패괴가 드러난다. 끝까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가식적인 태도와 기만, 외식만 늘어 간다. 패괴 성품을 끝내 벗어 버리지 못하고 바꾸지 못한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은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진리 추구는 매우 중요하다’는 얘기로 돌아오게 된다. 본분 이행에 관계되는 일도 마찬가지다. 네가 어떤 본분을 받아들이든, 어떤 본분이 네게 임하든, 그 본분이 무거운 책임을 요하는 것이든, 간단한 것이든, 또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이든, 진리를 구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대한다면, 너는 그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본분 이행 과정에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에도 각기 다른 정도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네가 진리는 추구하지 않으면서 본분을 그저 자신의 경영, 자신의 의무로만 여기고, 자신의 기호나 개인의 일로만 대한다면 그건 큰일이다. 자신의 사업으로 생각하며 본분을 대하는 것과 진리 원칙에 따라 본분을 대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차이가 있다. 자신의 경영으로 여기며 본분을 대할 때 네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전부 명예와 이익, 지위뿐이고, 남들이 네 요구를 충족시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끝에 가서 네가 이 본분을 이행한 결과가 어떻게 되겠느냐? 우선, 그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합격점에 이를 수 없고, 헛수고나 다름없다. 겉으로는 크게 힘쓴 것처럼 보이겠지만, 너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네 본분 이행 효과는 좋지 않고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는, 자주 과오가 생기고, 항상 교란과 방해를 일으키며, 늘 잘못을 저질러 좋지 않은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지금 형편없이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들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해서 효과는 거의 없고, 또한 교회 사역에 손해를 가져올 때도 있다. 이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분명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행위이고, 그런 사람은 그야말로 악인이다. 계속해서 본분을 대충 건성으로 이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폭로한 다음 자신을 반성하게 해야 한다. 그들이 정말 자신을 반성하고 잘못을 깨닫고 자신을 증오한다면, 남겨서 계속 본분을 이행하게 해도 된다. 만약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입장만 변호하고 표명하면서 하나님 집에는 사랑이 없고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한다고 판단한다면, 그건 죽어도 회개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런 경우라면 마땅히 교회에서 제명해야 한다. 그들이 방해하고 교란하는 근원은 무엇이냐? 그들이 일부러 방해하고 교란하려고 계획했던 것이겠느냐? 아니다. 주된 이유는 그들이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도 않고, 인성 또한 극도로 악하기 때문이다. 그들 중 일부는 어느 정도 자질도 있고, 진리도 깨달을 수 있지만,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실행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성이 극도로 악하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언제나 방해하고 교란하며 교회 사역을 파괴해서 수많은 나쁜 결과를 가져오므로, 그 영향이 매우 좋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불신파에 해당하고 악인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도태되는 주된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 불신파를 분별할 수 있게 되어서 그들의 갖가지 행태를 보면 분노를 느낀다. 그들이 어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란 말이냐? 하나같이 사탄의 심부름꾼이고,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러 온 자들이다. 일부는 순전히 밥이나 얻어먹는 자들로, 빈둥거리는 자에 해당한다. 일은 하나도 안 하면서 매일 좋은 음식만 먹으려 하는데, 그런 건 기생충이 아니냐? 그들은 집을 지키는 개만도 못하다. 그런 자들은 그대로 도태될 것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본분 이행을 기꺼이 원하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이 무엇이 본분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은 마음속으로 사람이 마땅히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한 본분 이행을 원한다. 하지만 사람이 본분 이행을 원하는 것이 진리 실행을 의미하느냐? 마음으로 원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본분을 잘 이행했다고 할 수 있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반드시 진리를 실행해서 원칙대로 일하는 기준에 도달해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한 것이다. 진리를 실행하기 전에는 네가 너의 믿음이 크고, 기꺼이 원하며, 목숨을 걸 수 있고, 불속에 뛰어드는 일일지라도 마다치 않겠다고 말해도, 이는 모두 구호일 뿐 아무 쓸모가 없다. 너는 본분을 이행하기 원하는 마음이 있는 기초에서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한다. 네가 “저는 진리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도 성품이 별로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킨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며,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순종하지는 못했지만 말은 따랐습니다.”라고 한다면, 이런 것을 해낼 수 있다면 교회에서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나 정리된 그 악인, 불신파들은 그만한 최소한의 조건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교란까지 일으켰다. 그런 불신파나 악인은 교회에 남겨 본분을 이행하게 해선 안 된다. 하나님 선민들은 모두 불신파와 악인에 대해 분별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 미혹되기 십상이다. 양심 있고 이성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신파와 악인에게 마땅히 저버리는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는 본분 이행이 가장 관건이므로, 우선은 본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런 다음 서서히 본분을 진정으로 체험하고 인식해야 한다. 본분에 대해서는 최소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느냐? ‘하나님 집에서 이 본분을 나한테 맡겼으니 이 본분은 이제 내 거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어. 이건 내 일이니까 아무도 간섭하면 안 돼.’ 이런 태도를 보이면 되겠느냐? 절대 안 된다.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가 바로 이런 것이라면 큰일이다. 네 태도는 진리 원칙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네 태도는 바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고, 여기에는 진리를 구하려는 뜻도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더더욱 없다. 사람이 너무 제멋대로라면 본분을 이행할 때 본연의 일을 하지 않게 된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어떤 태도가 있어야 하느냐?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죄송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하면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충실하게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 본분을 잘 이행하려면 우선 하나님 요구가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러니 먼저 진리를 구하고 원칙을 구해라. 하나님이 네게 맡긴 그 부탁이 너의 본분이라는 확신이 들면, 이렇게 구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을까? 어떤 진리 원칙들을 실행해야 할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시는 요구는 무엇일까? 내가 해야 할 사역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책임을 다하고 충성을 다할 수 있을까?’ 그러면 누구에게 충성하는 것이냐? 바로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충성하고, 사람에게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하나님 말씀, 진리 원칙을 근거로 일하고, 본분을 꼭 지켜야 한다. 본분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 예를 들면, 네가 어떤 본분을 맡은 지 이미 1~2년이 지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아무도 관심이 없으면 그 본분이 없어진 것이냐? 아니다. 누가 관심을 가지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검사하는 사람이 있든 없든 신경 쓰지 마라. 그 일은 너에게 맡긴 것이니 너의 책임이다.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고, 또 어떻게 하면 잘할지, 이것은 네가 생각해야 할 바이고 해야 할 것이다. 남이 신경 써 주기만 기다리고, 남의 감독과 독촉만 기다린다면, 그것이 본분을 이행할 때 가져야 하는 태도냐? 이런 건 어떤 태도냐? 이는 소극적인 태도로, 본분을 대할 때 지녀야 할 태도가 아니다. 이런 태도로 본분을 이행하면 결코 합격할 수 없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려면 우선 태도를 바르게 하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분명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
본분의 개념, 본분을 대하는 태도, 본분 이행과 세상의 어떤 일에 종사하는 것의 차이에 대한 화제는 여기까지 교제하도록 하겠다. 너희는 앞에서 교제한 내용들을 더 묵상해 보아라. 예를 들어, 왜 본분 이행과 개인의 경영을 하는 것의 관계를 말했겠느냐? 이것을 말하는 목적은 어떤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냐? 적극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람의 본분 이행에 올바른 길과 방향, 정확한 원칙을 제시해 줄 수 있다. 소극적인 측면에서 봐도 어떤 행동이 개인의 경영을 하는 것에 속하는지를 알게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각각 차이점도 존재한다. 이 두 측면을 깨닫는 것은 너에게 일부 진리의 글귀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그 내면에 어떤 내적 상태와 모습들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네가 그런 내적 상태와 모습들을 꿰뚫어 보고 분별한다면, 그리고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네게 잘못된 내적 상태나 그릇된 모습들이 나타날 때 너는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진리를 구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이 부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개인적인 경영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자신이 본분을 이행하고 있고, 게다가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바로 이런 결과가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 네게서 일부 생각과 행위, 그리고 일 처리 속셈이나 의도가 나올 때 너는 그것이 본분 이행이 아니며, 이미 본분 이행의 원칙과 범위에서 벗어나 성질이 변했음을, 네가 자신의 경영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네가 이런 진리를 깨달아야 비로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러한 생각이나 행동, 태도를 없앨 수 있다. 하지만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본분을 이행할 때 여전히 자신의 경영을 하면서도 그것이 원칙에 위배되었다는 점을 의식하지 못한다. 마치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바울은 오랫동안 사역하고 열심히 뛰어다녔는데,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큰소리쳤다. “저에게 면류관을 주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봐라, 그는 이런 말까지 내뱉었다. 지금 사람들이 만약 진리를 깨닫고도 바울과 같은 길을 간다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네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진리를 깨닫는 것이 너에게 무척이나 중요하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너는 분명 사탄 성품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나마 좀 나은 건, 기껏해야 규례를 지키고 눈에 띄는 나쁜 짓은 저지르지 않는 것인데, 너는 그걸 가지고 자기가 진리를 실행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정말 가련한 일이다. 그러니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면 먼저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는 목적은 바로 사람과 일을 바라볼 줄 알고, 분별할 줄 알며, 일하는 원칙과 실행 길을 찾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너는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분별하고, 올바른 실행 길을 택할 수 있고, 말과 행동에 원칙이 생기며,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네가 가는 길은 분명 잘못된 길이고, 생명 진입이 있을 수 없으며, 구원에 이를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은 특히 꾸미는 데 능해서 남들이 보면 정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을 할 때 원칙이 전혀 없고 교란과 방해만 일으키며 교회 사역에 많은 번거로움을 초래한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설교를 자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먹고 마시는 목적은 대충 보고 듣고 넘기거나 마음을 충실히 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도리를 갖추거나 말재주를 키우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갖추고 깨닫기 위한 것이다. 사실, 방금 말한 내용들이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과 관련된 매우 깊은 진리는 아니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데는 언제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깨닫는 정도도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자질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사람은 좀 깊이 이해하고, 즉 이해 능력이 있으며, 어떤 사람은 이해의 깊이가 무척 얕다. 이해의 깊이가 어떻든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대소로 나눌 수도, 귀천으로 나눌 수도, 더욱이 깊이에 따라 구분할 수도 없다. 즉, 진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 혹은 가장 초보적인 것으로 나눌 수는 있지만, 깊이에 따라 나눌 수는 없다. 단지 사람의 이해에 깊이가 있고, 체험에 깊이가 있을 뿐이다. 진리 본질에 관계된 것은 모두 심오한 것으로, 누구나 분명히 체험하고 완전히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방면의 진리인지를 막론하고, 그 진리에 대한 사람의 이해와 실행은 모두 가장 얕은 단계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점차 깊은 단계로 발전해서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진리의 가장 얕은 부분은 문자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이 실행하지 못하고 진입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글귀와 도리만 이해한 것이다. 글귀와 도리만 이해한 것으로 진리의 본질에 도달하려면 한참 멀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문자적 의미를 해석한 것을 가지고 진리를 깨달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의 우매함과 무지다. 네가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 있어 그저 규례만 지키면서 기계적으로 모방하고 원칙도 전혀 없다면, 그것을 진리를 실행하고 실제에 진입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는 아직 이르다. 네가 몇 년을 더 실행하고 체험해서 많은 빛을 발견하고, 또다시 몇 개월, 몇 년을 충분히 실행하고 체험하고, 나중에 더 체험해서 더욱 새로운 빛을 발견한다면, 이렇게 얕은 단계에서 깊은 단계로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진정으로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된다. 진리 실제에 완전히 진입한 사람이야말로 진리를 얻은 사람이다. 설령 언젠가 네가 진리 실제를 살아 내서 진리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더라도, 사실 네가 체험하고 인식한 것에는 한계가 있고, 네가 진리라고 할 수도 없다. 바울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 1:21)라고 했던 것처럼 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진리는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에 수십 년 사람의 일생 동안 체험하고 인식하는 데에는 너무나 한계가 있다. 이렇듯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진리를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얕은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또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 틀림없다. 진리에 전혀 이르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 끝까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없기에 살아도 폐물이고, 사람 탈을 쓴 짐승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부 도리를 이해한 것을 가지고 진리를 깨달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정말로 진리를 깨달았다면 어째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느냐? 어째서 원칙 없이 일하느냐? 이를 보면 도리를 이해하는 것은 소용이 없고, 아무리 많은 도리를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본분과 관련된 화제들을 교제했는데, 이제 합격한 본분 이행에 관해 교제하도록 하겠다. 합격한 본분 이행에서 핵심은 ‘합격’이라는 두 글자에 있다. 그렇다면 ‘합격’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느냐? 여기에도 구해야 할 진리가 있다. 합격이라는 것은 그저 최저 기준만 통과하면 되는 것이냐?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대해야 할지, 이를 위해서는 진리를 많이 깨닫고, 진리를 많이 교제해야 한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진리를 깨닫고 원칙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다. 사람은 왜 본분을 이행해야 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하나님 집의 사역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사역을 전개하는 곳에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갖게 된다. 또한, 그 의무와 책임으로 인해 하나님 사역 가운데의 일원이 되고, 하나님이 역사하고 구원하는 대상 중의 일원이 된다. 사람이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지,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을지, 이행한 본분이 합격인지 등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엄청난 관계가 있다. 네가 하나님 집의 일원이 되어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였기에 너에게는 본분이 있게 된 것이다. 그 본분을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지는 네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고 진리가 결정한다. 그것은 진리의 기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본분을 어떻게 가늠하는지, 무엇에 근거해 가늠하는지를 알고 이해하고 파악해야 한다. 이는 사람이 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에서 서로 다른 본분을 받아들이게 된다. 즉, 각자의 은사와 자질, 나이, 조건, 시기 등에 따라 서로 다른 본분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네가 받아들인 본분이 무엇이든, 네가 어떤 시기, 어떤 상황에서 받아들였든, 본분은 그저 사람이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일 뿐 사람의 경영이 아니고, 더욱이 사람의 사업도 아니다. 본분 이행에 대해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은 합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수준에 이르러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합격’이라는 말을 듣고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본분 이행이 합격인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불합격이라고 한다면, 네가 본분을 얼마나 오랫동안 이행하고 대가를 얼마나 치렀든 불합격이다. 그럼 결과는 무엇이냐? 완전히 힘쓰는 것에 해당한다. 힘쓰는 자 중 살아남는 자는 단지 충성심이 있는 소수의 사람뿐이다. 힘을 써도 충성심이 없으면 살아남을 희망이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재난 속에서 멸망될 것이다. 언제나 본분 이행에 불합격할 경우, 본분을 이행할 권리는 정지된다. 이 권리가 정지된 후, 어떤 사람은 방치되고, 방치된 후 별도로 처리되고 안배된다. 별도로 처리되고 안배되는 것이 도태되는 것이냐?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회개하는지를 본다. 따라서 어떻게 본분을 이행하는가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사람은 이 문제를 신중하고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본분 이행은 생명 진입에 직접적으로 연관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일,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큰일에 관련되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대해야 하고,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안 된다. 본분 이행 과정에서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각기 다양한 태도를 보이는데, 이 다양한 태도는 사람 눈에도 보이지만 하나님 눈에도 보인다. 교회만 점수를 매겨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는 하나님도 본분을 이행한 모든 사람에 대해 점수를 매겨 평가를 내린다. 어떤 사람은 기본적으로 합격이고, 어떤 사람은 합격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 일부 불합격한 사람들은 여전히 관찰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일부는 하나님이 이미 결정을 내린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 눈에는 불합격이겠느냐? 바로 인성이 좋지 않고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들, 계속해서 본분을 대충 건성으로 이행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누리든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는,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물론, 그 악인들은 더더욱 예외가 아니다. 인성이 좋지 않고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의 본분 이행은 모두 불합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뚜렷한 악인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틀림없이 온갖 악행을 저지를 것이다. 하루라도 제명하지 않으면 악행이 끝나지 않기에 그런 사람들은 즉시 제명해야 한다. 물론 겉으로 볼 때 인성도 괜찮고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지만, 본분은 대충 건성으로 이행하고 별 효과도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훈계와 책망을 받고 진리 교통을 들은 뒤 태도가 어떤지, 진실로 회개했는지, 하나님은 여전히 기다리며 관찰하고 있다. 인성이 좋지 않고 양심과 이성이 없는 데다 확실히 악인에 속하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미 결론을 짓고 규정하였다. 바로 철저히 도태시키는 것이다.
이어서 본분 이행에 불합격인 모습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교제해 보자. 먼저 예를 하나 들어 볼 테니 이 사람의 본분 이행이 과연 합격인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지 분별해 보아라.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리더로 선출되었는데, 그를 접대하는 가정은 반만 하나님을 믿는 집으로,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는 그런 가정이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이 하나같이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다. 바로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면 유난히 눈치를 살피며 굽신거리는 버릇이었다. 이 버릇이 리더에게는 은연중에 무엇이 되었겠느냐? (시험입니다.) 시험이 되었다. 이것은 그에게 복이 되겠느냐, 화가 되겠느냐? 아직은 복이 될지 화가 될지 모르니 계속 얘기를 이어 나가 보자. 그 집 사람들은 리더를 접대한 후 끼니마다 고기를 비롯한 좋은 음식을 대접했다. 그들이 리더를 이렇게 대접한 이유는 무엇이냐? 사랑하는 마음에서였느냐? 만약 형제자매를 접대했다면, 이렇게 음식을 대접했겠느냐? 분명 아닐 것이다. 리더가 갔으니까 매일 고기를 대접한 것이었다. 결국,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 리더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 집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군요. 형제님 어머니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형제님 아들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형제님과 부인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중에 온 가족이 모두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요.” 이 말을 들은 그 가족들은 몹시 기뻐했다. ‘우리 식구가 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구나. 안 믿는 사람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니, 리더에게 고기를 대접한 게 헛되지 않았어. 앞으로도 계속 대접해야지.’ 사실, 그 가족들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떤 건지는 잘 몰랐지만, 좋은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가 천국에 들어가서 복을 받는 일을 마다하겠느냐?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리더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으니까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닌가? 리더는 하나님을 대신하니까, 리더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 뒤로 그 리더가 그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할수록 그 집 사람들이 더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했다. 그러다 보니 그 리더는 다른 집에 갈 생각이 없었다. 다른 집에 가면 이렇게 좋은 대접도 못 받고, 이 사람들처럼 자기에게 굽신거리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리더는 점점 살이 쪘는데, 얼굴에도 살이 붙어서 ‘사람 머리’가 ‘돼지 머리’가 되고 말았다. 동역자 모임에서 그가 한눈에 들어왔다. 겨우 한 달 못 본 사이에 그렇게나 살이 찌다니, 얼른 그의 사역 상황을 캐물었다. 결국,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호되게 책망하며 이 문제의 본질을 해부한 다음, 그 거짓 리더를 교체했다. 나중에 더 많은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그 거짓 리더는 실제 사역은 조금도 하지 않고 매일 지위의 복을 누렸다.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발탁했지만, 뇌물을 주지 않는 사람은 억압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 닭고기 요리를 많이 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거짓 리더의 본분 이행이 어떠냐? 본분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어떤 것이냐? 그는 사역하러 간 것이 아니라 지방에 관직을 수행하러 간 것과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렇게 잘 먹고 살이 찔 수가 있었겠느냐?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그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접대 집만 찾고, 그 집에 살면 나갈 생각은 않고 계속 먹기만 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가 본분을 이행할 때 별 부담도 없고 별로 고생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부담이 있는 리더 일꾼이라면, 교회 사역이 그렇게 많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 상황에서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겠느냐? 조급하면 바빠지기 시작할 것이다. 서둘러 문제를 처리하고 에너지를 쏟으며 고생도 하다 보면 살이 빠질 수밖에 없다. 이는 법칙이다. 어떤 상황이라야 먹을수록 살이 찌겠느냐? 틀림없이 온종일 배불리 먹는 것, 신경 쓰지도 않는 것, 부담도 없는 것, 거들먹거리며 잘난 체하는 것, 사람들이 북적이는 사역 현장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는 것, 육적인 편안함을 누리는 것 등과 같은 상황이라야 먹을수록 살이 찌게 된다. 한 달 여만에 ‘사람 머리’가 ‘돼지 머리’가 되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거짓 리더는 본분을 어떻게 이행했겠느냐? 그가 이런 식으로 리더 사역을 하는 것은 성질이 변한 것이다. 이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벼슬아치가 되어 편안함을 누리고, 지위의 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는 실제 사역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나쁜 짓도 했다. 자기한테 굽신거리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지 않는 사람을 억누르고, 형제자매들에게 그 사람을 책망하도록 부추겼다. 결국, 사람들 사이에 불만이 터져 나오고, 그에게 반감을 느끼고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교체된 이유는 둘째 치고, 그가 그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한 것이 합격인지부터 얘기해 보자. 그가 지위의 복을 누리면서 실제 사역을 하지 않은 것은 가장 심각한 문제다. 그는 하나님 선민을 위해 일하지 않고, 하나님 선민들 앞에서 벼슬아치 노릇을 하면서 전혀 본분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리더 사역을 하면서 본분 이행에는 전혀 충실하지 않고, 마음도 힘도 다하지 않았다. 오로지 마음과 힘을 다해 먹고 마시고 즐기기만 하고, 어떻게든 지위의 복을 누릴 궁리만 했다. 접대 가정에 진리를 교제해서 그들의 그런 굽신거리는 행동을 제지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렇게 접대해야만 천국에 가고 상을 받을 수 있다고 거짓말로 속였다. 이것은 악행이 아니냐? 그가 접대 가정을 그렇게 대한다면 교회 사역을 대할 때는 어떻겠느냐? 하나님 선민을 대할 때는 어떻겠느냐? 기만과 무성의로 일관할 게 불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이 자는 대체 본분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하나님이 그에게 부탁한 사역이 과연 무엇인지 알겠느냐? 그는 이 부탁을 무엇으로 생각했느냐? 자신이 지위의 복을 누리기 위한 밑천이자 근거로 생각했다. 그 결과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교회 생활을 교란해서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에 손해를 입혔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불합격일 뿐만 아니라 악행이 된다. 본분 이행에 합격의 성분이 없는데 하나님께 기억되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당연히 불가능하다. 이는 너무나 가련하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도 가련하지만, 진리를 깨닫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은 더욱 가련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첫 번째 사례는 바로 ‘사람 머리가 돼지 머리로 변한’ 사례다. 이 사례는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즉, 지위의 복을 누리면서 본분 이행에는 눈곱만큼의 충성심도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더더욱 없으며, 하나님이 준 본분을 자신이 지위의 복을 누리기 위한 밑천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건 분별하기가 쉽다. 첫 번째 사례의 이름을 잘 기억했다가 나중에 거기에 대조해 보면서 타인을 분별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채찍질해야 한다. 내가 얘기한 이 사례를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사람, 이런 행위가 혐오스럽지 않으냐? (혐오스럽습니다.) 너희가 만약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면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느냐? 너희가 그 거짓 리더에 비해 좀 이성적이고, 절제할 줄 알고, 진리에 공을 들일 수 있다면 그나마 희망이 있다. 그러나 만약 그와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는 것만 좋아하고 지위의 복을 누린다면 드러나 도태될 것이다. 그러면 완전히 거짓 리더에 해당하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자이다. 이제 조금은 분별도 생기고, 진리도 조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네가 구원받을 희망이 얼마나 되느냐는 얼마큼 절제하고 단속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이 둘은 정비례 관계에 있다. 네가 절제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기호에 따라 행동하고, 패괴 성품 속에 살면서 지위의 복을 누리고, 누가 굽신거리면 그저 좋아서 거기에 도취되고, 자신을 전혀 반성하지 않고, 진실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희망은 제로이다.
다음 사례를 보도록 하자. 복음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많은 사람이 각지로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복음을 전하는 이 사역은 모든 사람의 본분이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대했든, 그 본분을 좋다고 여기든 아니든, 여하튼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부탁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부탁이라면 그것은 사람의 책임과 관련되고 사람의 본분과도 관련된다. 사람의 본분과 관련되기에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와도 관련된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잘 사는 동네, 잘 사는 사람만 찾는 사람들이 있다. 좋은 차 타고 큰 집에 사는 사람만 보면 속으로 부러워서 샘이 났고, 대접이 후한 집에 가면 눌러앉으려 하고 그 집에 미련을 가졌다. 그러면서 자기는 복음 전파 과정에서 공을 세웠으니까 은혜를 좀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의 복음 전파는 무엇이 되었느냐? 육적인 즐거움에 연연하며 힘쓰는 것을 대가로 육적인 즐거움과 맞바꾸었으므로, 노동력을 판 것이 되었다. 2~3년 뒤 그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을 얻고 교회를 세웠고, 그것으로 밑천이 생기자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금의환향’할 때는 신수가 훤해지고 완전히 멋쟁이로 변모했다. 그자는 고급 가전, 전자 제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온몸을 좋은 옷으로 휘감아서 고향 사람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다들 그가 어디서 큰돈을 벌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여기에 문제가 없느냐?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계속 밖에서 본분을 이행했다. 원래 집에는 값나가는 물건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누군가 좋은 옷과 가전제품을 베풀어 그것을 전부 집에 가져왔으니 입는 것,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물건들은 대체 어디서 난 것이냐? 복음을 전하며 고생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을 오래 믿은 것과 복음을 전하면서 고생하는 걸 알고 사람들이 좋은 물건을 챙겨 준 것이다. 이렇게 ‘준 것’이 베푼 것이냐? 사랑이냐? 그런 좋은 물건들이 복음을 전해서 얻은 것이고, 남들이 그에게 잘 보이려고 준 것이라면, 그가 그 물건들을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냐? 좀 거북한 소리지만, 그는 복음 전파 기회를 이용해서 얻은 것이다. 허구한 날 남 앞에서 궁한 소리만 하며 그 물건이 맘에 든다고 하는데, 그러면 상대는 마지못해 줄 수밖에 없다. 이건 재물을 갈취하는 사기성을 띠고 있지 않겠느냐? 일부 복음 전파자들은 이런 말을 즐겨 한다. “복음을 전하는 저희는 하나님의 사자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저희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았으니 얼마나 큰 복을 받았고, 얼마나 큰 이득을 보았습니까! 여러분은 이토록 부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토록 많이 누리고 있으니, 성의 표시를 좀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께 남는 것, 또는 쓰지 않는 것들을 저희에게 좀 나눠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자꾸만 이런 소리를 해 대니, 미안한 마음에 그에게 물건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자기가 물건을 받을 명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건을 준 사람은 마음이 달가웠겠느냐? 준 사람의 마음이 달갑고 말고를 떠나, 어쨌든 그 물건들은 복음 전파자들이 마땅히 얻어야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치를 따지는 사람들도 있다. “왜 얻으면 안 됩니까? 저도 힘들게 사역하고 복음을 전해서 그만한 물건을 좀 얻었는데, 이건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네가 복음을 전하는 건 어떤 일을 하는 것이냐? 일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냐? 복음을 전하는 건 거래가 아니다. 그것은 네 본분이다. 남에게 물건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하나님에게는 닿지 못하고, 감히 달라고 하지 못하니까 남에게 달라고 손을 내밀고, 영적인 이론을 한바탕 언급하며 사람을 미혹했다. 복음을 전해서 사람을 조금 얻으니까 너는 자신이 공도 있고 힘도 썼으니 보상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직접적으로 돈을 요구하기는 좀 그러니까 물건을 요구하며, 그렇게 해야 힘을 들인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본분을 이행한 것이냐? (아닙니다.) 이건 변질되었다. 그는 복음 전파를 무엇으로 둔갑시켰느냐? 하나님의 복음을 상품으로 둔갑시켜 팔았고, 물질적인 것과 맞바꾸었다. 이것은 어떤 행위냐? (투기입니다.) 이것이 투기라고? 이 성질을 그렇게 표현하는 건 너무 가볍지 않으냐? 악을 행한 것이고, 악행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왜 이것을 악행이라고 하겠느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본분을 이행해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행위다. 네가 어느 한 사람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면서 복음을 전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얻게 되면, 너의 사명이 완성된다. 네가 사명을 완수한 뒤, 네가 받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베풀어 준다. 그러니 너는 누구에게 달라고 요구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도 무언가를 베풀어서 복음과 맞바꿀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복음은 값을 매길 수 없다. 얼마를 주고도 살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다. 네가 복음 전파를 이용해서 물질적 도움을 요구하는 것은 증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행동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표시다. 또한, 네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다음, 너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어떤 성질이냐? 그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짓이다.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사역은 상품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복음을 인류에게 값 없이 베푼 것으로, 그것은 무료이고 그 안에는 어떤 거래도 담겨 있지 않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복음을 상품으로 취급해서 남에게 팔고 돈이나 물질을 요구한다. 이것은 간증이 없는 짓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행위다. 이것이 악행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행이다. 이런 식의 본분 이행은 합격이겠느냐? (불합격입니다.) 이것은 방금 얘기한 ‘사람 머리가 돼지 머리로 변한’ 그 사례보다 더 심각한 성질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심각한 부분이 어디냐? (하나님을 욕되게 했습니다.) 그건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모독하는 짓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짓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먹고, 복음을 상품처럼 남에게 판매해서 폭리를 도모하고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다니, 그런 자는 어떤 인간이냐? 그런 자는 강도이자 악인이다. 그것은 사탄의 짓거리다. 분명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인류를 창조했는데, 사탄과 악령은 자신들이 사람을 만들고 하늘과 땅을 만들었으니 자신들을 신으로, 창조주로 여겨 숭배하라고 사람들을 미혹한다. 그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짓이 아니냐? 죄를 짓는 것이고, 악행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짓이다. 사람이 복음을 팔아먹는 행위는 사탄의 행위와 같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가 복음을 팔아먹는 목적이 무엇이냐? 사람들이 자신을 복음의 사자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복음이 자신에게서 나오고 자신이 결정권을 갖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은 무슨 죄냐? 어떤 성질이냐? 그건 하나님을 대적한 악행이고, 하나님을 모독한 행위다. 그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본분 이행에 해당하느냐? 그건 완전히 악을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런 식의 복음 전파는 전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악을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복음을 전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좋은 물건 좀 받는 것도 당연하지. 그까짓 거 뭐라고. 이방인들 사이에서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것이 옳은 소리냐? 여기서는 네 의도가 무엇인지, 네가 탐낸 것이 무엇인지, 어떤 성질에 속하는지를 봐야 한다. 만약 네가 이익을 목적으로 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팔고, 진리를 팔아 너 개인적인 이익과 맞바꾸었다면, 이것이 바로 악행이다. 이런 행위를 악행이라고 정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여기느냐? (아닙니다.) 전혀 지나치지 않다. 사람이 본분을 받아들이고 이행하게 되었는데 이런 결과를 낳았다면, 누굴 탓해야 하겠느냐?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초래된 것이냐? 이는 사람의 본성이 사악한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어떤 이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지만 염치와 인격, 양심이 있다. 그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은 그런 사람이 인성이 없으며, 탐욕스럽고 성품이 흉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로 인해 그의 본분 이행이 합격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행으로 변질된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악행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까? 그는 복음을 전하여 적지 않은 사람을 얻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여 뚜렷한 효과를 낸 걸로 미루어 보면 악행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맞는 말이냐? (틀렸습니다.) 왜 틀렸다고 하느냐? 복음 전파는 그의 본분이자 책임이다. 본분을 이행하는 그의 의도와 목적, 원칙이 무엇인지, 그의 태도에 책임감이 있는지, 이런 것에 근거하면 그가 과연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악을 행하는 사람인지 규정할 수 있다. 그는 비록 본분을 계속 이행했지만, 그 출발점이 잘못되었다.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은 데다가 악행도 많이 저질렀고, 진리를 실행하는 모습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떤 성질이냐? (복음을 팔아먹는 것입니다.) 이 사례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느냐? ‘복음을 팔아먹는’ 사례라고 하자. 이 이름만 들어도 성질이 아주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팔아먹을 수 있느냐? 복음을 팔아먹는 문제는 그 성질이 매우 심각하다. 그렇다면 복음을 팔아먹는 얘기가 나올 때마다 사람은 그것이 무슨 일인지, 어떤 내적 상태인지, 어떤 행위, 어떤 방식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두 번째 사례이고, 이 사례의 성질은 첫 번째보다 더 심각하다.
다음의 사례 역시 복음 전파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다. 전에 하나님 집에서는 복음 전파 원칙과 방식을 정했는데, 그중에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친구를 사귀는 방식이 있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이 기회를 봐서 빈틈을 노렸다. 어떤 사람들이겠느냐? 본성이 사악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정말 사악한 그 사람들이 그 기회를 빌려 짝을 찾고, 연애를 하며 남녀 관계를 맺었다. 이런 일이 발생하니까 그들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사탄에 속하는 사악한 무리가 빈틈을 노린 것이었다. 그들은 복음 전파를 빌미로 이성을 만났으며, 그러다가 적합하다 싶거나 비교적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상대와 시시덕거리고 접촉했다. 겉으로 보기엔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얻기 위한 것 같지만, 사실상 개인적인 정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또 하나님의 사역을 확장한다거나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거나 본분을 이행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그런 일들을 저질렀다. 생각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없다. 사실, 다들 속으로는 다 알면서 뭐가 뭔지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누구나 그런 짓을 할 때는 속으로 그것이 죄짓는 것이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짓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짓이라는 것쯤은 다 안다. 하지만 그들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했고, 나아가 기를 쓰고 핑계를 대며 자신이 지은 죄를 변명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가릴 수 있느냐? 한두 번 잘못을 저지른 후 회개한다면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지만, 누차 타일러도 바뀌지 않는다면 위험해진다. 어떤 이는 그런 일을 저지를 때마다 마음이 불안해져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다가 다시 생각을 달리한다. ‘별 큰 악행도 아닌데 뭐. 기껏해야 패괴 표출일 뿐이야. 이제부터 하지 않으면 내 결말과 종착지에 영향이 미치지 않을 거야.’ 과오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이 진실로 회개하는 태도겠느냐? 그에게는 뉘우치는 마음조차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또 옛 버릇이 재발하지 않겠느냐? 내 눈에는 아주 위험해 보인다. 이런 사람이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그의 본분 이행에는 ‘사적 경영’의 요소가 있다. ‘공적, 사적으로 동시에 경영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커다란 불순물이냐! 이는 확실히 하나님 성품을 거스르는 행위다. 이 사람들의 본분 이행에는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없다. 이는 물건을 요구하거나 복음을 팔아먹는 성질보다 더 심각하다. 어느 부분이 심각하냐? 이건 일종 육체의 거래, 정욕의 거래로, 매우 역겨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성질은 어떠냐? 이는 참도를 알고도 고의로 죄를 지은 것이다. 여기에 ‘고의’라는 두 글자가 있는데, 그 성질이 달라졌다. 사실, 그들은 사역지침의 규정과 원칙이 사람을 지혜롭게 하여 사탄에게 꼬투리가 잡히지 않도록 해 준다는 점, 그리고 그 목적은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빈틈을 노렸다가 기회를 잡아 사악한 정욕과 사욕을 마음대로 드러냈다. 이는 고의로 저지른 행위이다.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히 10:26)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속죄제조차 없다면, 이 사람들은 구원받는 일과 관계가 있겠느냐? 이 또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어떤 이들은 어쩔 수 없었거나, 혹은 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았지만 그 당시의 환경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질렀다. 만약 횟수가 세 번 이하로 많지 않으면 용서할 수 있다.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뜻이냐? 처음 저질렀을 때, 그걸 깨닫고 진리를 구하며 뉘우치는 태도를 보인다면, 또한 돌아서서 더 이상 저지르지 않고, 또 본분을 이행하게 해 달라고 청한다면, 그에게 속죄할 기회를 주어도 된다. 이런 상황이면 그래도 구원받을 희망은 있다. 하지만 이 희망이 얼마나 될지는 개인의 추구에 근거해야 한다. 너에 대해 규정하거나 보증해 주는 사람이 없다. 주로 네 개인적인 추구에 달렸다. 나는 너에게 어떠한 약속도 해 줄 수 없다. 그런 잘못을 또 저지르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런 약속은 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용서할 수 있는 횟수를 초과한 데다 누차 타일러도 고치지도 않고, 복음을 전하는 동안 그 악행을 상쇄할 만한 어떤 선행도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완전히 끝이다. 그는 그토록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선행도 전혀 없었다. 그가 복음을 전한 것은 함부로 남녀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일 뿐, 본분을 잘 이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본분에서 어긋났다. 그것은 속죄제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규정해야 하느냐? 더러운 귀신이자 악령이라고 규정해야 할 것이다. 그는 정상인이 아니다. 그는 죄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본분과도 무관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느냐? 없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쫓겨나고 제거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구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저지른 행위는 합격한 본분 이행은커녕 본분과도 관련이 없다. 그러니 그들의 말로와 결말은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하는 것에 따라 결정된다. 이 사례는 역겹지 않으냐? 앞에서 말한 두 번째 사례보다 성질이 더 심각하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성질이 심각한 자들이 반성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진 후 더 이상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고 하나님 집에서 복음을 전하는 데 힘을 쓸 수 있겠느냐? 그런 사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힘쓸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기간에 일부 사람들을 얻었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들이 한 사역은 어떻게 됐느냐? 본분 이행이 아닌, 힘만 쓰는 일이 되었다. 사실, 그들도 적잖이 힘을 들였다. 하지만 그들이 걸어온 길이 그들의 운명과 결말을 결정지었다. 똑같이 복음을 전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시험에 부닥치게 되느냐? 장소와 정도만 다를 뿐, 누구나 그런 시험에 맞닥뜨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다 시험에 빠져들고 죄를 저지르겠느냐?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거나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들을 정죄할 수 있다. 그들의 성품과 인성에 문제가 있기에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그런 결과에 대해 누구를 탓하겠느냐?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그들 스스로를 탓할 뿐, 다른 누구도 탓할 수 없다.
복음 전도 기간에 어떤 과오를 저지르든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기도도 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 태도로, 끝내는 도태되고 만다. 어떤 한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한 여성을 강점하고 이 여성이 짝을 만나서 결혼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는 무척 심각한 성질의 문제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악인입니다.) 이런 부류의 악인이 하나님 집에 남아 있을 수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악질적인 인간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치욕스럽게 했다! 그가 그런 일을 저지르면 그로 인해 하나님을 보는 시선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느냐!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 어쩜 그럴 수 있어?” 이 일은 이미 하나님에게 치욕을 주었다. 교회가 이런 사람들을 출교하지 않고 처리하지 않은 채 복음을 계속 전하게 하고, 또 회개의 기회를 준다면 이건 완전히 잘못된 일이다. 그는 초범이 아니고, 그 성질이 매우 심각하므로 곧바로 출교시켜야 한다. 안 그러면 하나님을 욕되게 할 것이고, 사탄이 꼬투리를 잡아 하나님 집을 판단하고 정죄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 일관되게 음란한 사람은 반드시 교회에서 출교해야 한다. 그런 음란한 귀신 같은 자는 이미 하나님을 치욕스럽게 했으므로 하나님이 절대 구원하지 않는다. 그의 복음 전도 효과가 얼마가 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얻었든 관계없다. 그가 바른길을 걷지 않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망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 있을 수 없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그가 한 행위를 본분 이행이라고 볼 수 있느냐? 그렇지 않다. 그의 모든 노력은 하나님 앞에서 물거품이 되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 노력을 기념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합격의 성분도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본분 이행이 변질되어 악행으로 변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악을 행한 자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나님은 그를 제거해 버린다. 제거란 어떤 것이냐? 하나님이 선택하고 예비해서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제명되어 그런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악령과 더러운 귀신,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에게로 그를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구원받을 희망이 어떻게 되겠느냐? (없습니다.) 똑같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더라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결국 이 지경에 이르러 도태되었다. 이 역시 한 부류 사람이다. 이 사례는 방금 얘기한 사례보다 더 심각한 성질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심각하기도 하고 대표성을 띤다. 이 사례와 세 번째 사례는 하나로 합쳐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세 번째 사례 중에서도 특수하고 전형적인 사례에 속하므로 대표성이 있다. 이 사례를 뭐라고 해야 하겠느냐? ‘사악한 무리는 반드시 제거된다’, 이렇게 정하겠다. 이 세 가지 사례에 등장하는 세 가지 부류 사람들의 본분 이행은 대부분 힘쓰는 것도 효과가 없다. 어떤 경우를 두고 힘쓰는 것도 효과가 없다고 하느냐? 그들은 본분 이행을 힘쓰는 것으로 변질시키고, 힘도 제대로 쓰지 않고,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본분을 본분으로 대하지 않고, 온갖 나쁜 짓을 하고 온갖 악행을 저질러서 결국에는 도태되고 좋은 결말을 잃어버렸다. 이 세 가지 사례는 모두 심각한 성질을 지녔다.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이 사례 역시 아주 심각하다. 사역을 여러 해 해 온 어떤 사람이 있었다. 겉보기에는 열심히 진리를 추구하고, 진실로 헌신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결혼과 가정도 내려놓고 직장과 미래도 내려놓은 채 본분을 이행하느라 여러 곳을 다니며 크고 작은 사역을 가리지 않고 수행했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그가 깨달은 진리는 많지 않았다. 진리를 별로 구하지 않은 탓에 글귀와 도리만 조금 얘기할 수 있었는데도 스스로를 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사람이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본분을 이행할 때도 도리만 읊어 대고 규례만 지킬 뿐이었다. 평소에 남에게 선의를 베풀고,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았지만, 교회 사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또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고,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도 않았다. 요컨대 그가 사역하는 태도는 뜨뜻미지근했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치도록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건성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사역 효과는 별로 없었다. 한번은 어떤 일이 있었는데, 그때 직무에 소홀하고 건성으로 일한 탓에 하나님의 제물 중 천만 위안이 넘는 손실이 발생했다. 천만 위안이 넘는 금액은 어느 정도일까? 보통 사람에게 천만 위안이 넘는 금액은 천문학적인 숫자다. 놀라서 ‘헉’ 소리가 절로 나고 감히 상상도 안 되는, 평생 본 적도 없는 큰돈이다. 하지만 이 ‘나이 지긋한 양반’은 천만 위안이 넘는 제물을 잃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회개하거나 괴로워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 게다가 그 일로 교회에서 출교되자 불평하기까지 했다. 이건 어떤 놈이냐? 두 가지를 얘기해 보자. 첫째는 네가 사역하는 동안에 이 돈을 손해 보았다면 그게 누구 때문이든 너 역시 책임이 있다. 너에게도 그 돈을 잘 지킬 책임이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이것은 직무 유기다. 그건 사람의 돈이 아니라 제물이기 때문에 사람은 최대한 충성심을 발휘해서 대해야 한다. 만약 제물에 손해가 발생하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 사람이 죽더라도 갚지 못한다! 사람 목숨이 돈으로 얼마나 되느냐? 손실이 너무 클 경우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다! 관건은 이 문제의 성질이 너무나 심각하다는 것이다. 이 ‘나이 지긋한 양반’은 그 많은 제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정말 괘씸한 인간이다! 천만 위안이 넘는 제물을 잃어버리고도 백 위안 남짓 되는 돈을 잃어버린 것처럼 상부에 전혀 보고도 하지 않고 그 일에 대해 전혀 뉘우치지도 않았다. 아니면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우리 이 돈을 어쩌다 잃어버렸는지,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잘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돈을 갚아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할까요? 아니면 상부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책임지고 물러나고 하나님 앞에 죄를 인정합시다.” 그에게는 이런 태도조차 없었다. 괘씸하지 않으냐? (괘씸합니다.) 너무나 괘씸하다! 그는 이렇게 큰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본분을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드러냈다. 둘째, 출교되고 난 다음, 그는 거기에 따르지도 않고,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급기야 원망을 했다. 이런 사람들은 말이 안 통한다. 그가 무슨 원망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라. 그는 이렇게 원망했다. “저는 20년 넘도록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결혼도 안 하고, 많은 걸 버리고,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필요 없다고 출교시키는군요. 저도 다 갈 데가 있습니다!” 얼마 후 그는 결혼했다. 말해 보아라. 보통은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에게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렇게 빨리 결혼할 수 있느냐? 그럴 기분이 드느냐? 일반적으로 양심과 인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큰 일을 저지르면 죽고 싶은 생각마저 들기 마련이다. ‘이번 생은 끝났구나. 20년 넘게 하나님 믿으면서 어쩌면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지? 이건 다 내 탓이야. 출교되어도 싸지! 천만 위안은 고사하고 백만 위안도 못 갚는데. 나를 팔아도 못 갚을 거야. 내 목숨은 그만한 가치가 없어!’ 못 갚을 것을 아는데도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느냐? 설마 그 돈이 하나님께 봉헌한 제물이라는 걸 몰랐단 말이냐? 그 돈은 네 것이 아니고, 네 책임은 그 돈을 보관하는 것이다. 그건 너와는 무관한 것이 아니고, 네가 잘 보관해야만 하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이다. 네가 아무렇지 않게 책임을 내던지고 그 돈을 잃어버렸으면 더더욱 책임을 미루면 안 된다.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제물에 사고가 나지 않게 잘 보관할 의무와 책임이 있지 않으냐? 사고가 날 확률을 최대한 낮춰야 하지 않느냐? 그 정도도 못한다면 너는 어떤 놈이란 말이냐? 산 귀신이나 다름없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무나 역겹고 비인간적이구나! 그 뿐만이 아니다. 출교된 다음에는 하나님 믿는 걸 관두고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믿는 가족들까지 교란했으니 그 성질이 더욱 심각하다. 본분을 이행하는 긴 세월 동안, 그는 많은 것을 버리고 많은 대가를 치러 가며 적지 않은 사역을 했다.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기도 했고, 옥살이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그런 행위에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사람의 운명은 무엇으로 결정되느냐? 사람의 운명은 그 사람이 어떤 길을 가느냐에 달려 있다.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갔다면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 집에 이렇게 큰 손실을 입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큰 사고가 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인품, 그가 가는 길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너희가 보기에 그가 이런 길을 가리란 것을 하나님이 알았겠느냐, 몰랐겠느냐?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알았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발생한 것이 그의 입장에서는 드러난 것이냐, 아니면 도태된 것이냐? 드러난 것이기도 하고, 도태된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볼 때 그는 본분을 열심히 이행했다. 본분에 충실했고, 헌신했고, 대가도 치르고, 고생도 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에게 그런 일을 행했느냐? 왜 그를 드러내려 했느냐? 그의 무엇을 드러내려 했느냐? 겨우 그의 결말을 드러내려 했던 것이냐? 아니다. 그의 믿음, 그의 인성, 그의 본질과 본성을 드러내려 했고, 이런 것들은 모두 드러났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느냐? 아직도 그에게 한 줄기 희망을 품겠느냐?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일말의 희망도 품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직도 그에게 자애와 긍휼이 있겠느냐? 전혀 없다. 누군가 물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자애와 긍휼이 없다면 곧 공의와 위엄 진노만 있다는 뜻입니까?” 바로 정답이다. 그런 악인에게는 자애도 긍휼도 필요하지 않다. 이미 그럴 필요성이 없어졌다. 그가 하나님 성품을 심각하게 거슬렀기 때문에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위엄, 진노뿐이다. 그의 결말은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관계가 없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 사역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는 도태되고 제거되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든 하나님 눈에는 산송장이고, 더러운 귀신과 악령 속에서 사는 사람, 인면수심에 사람의 탈을 쓴 짐승들 가운데 사는 걸어다니는 고깃덩이일 뿐이다. 바로 이런 성질 때문에 창조주의 눈에서 제거되었다. 그의 결말, 자신에게 일어난 큰일을 대하는 그의 최종적 태도로 볼 때, 그가 줄곧 이행해 오던 본분에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가 이행한 본분에 ‘합격’이란 두 글자가 없다는 것을 너는 어떻게 알았느냐? 판단과 추리를 통해서 알았느냐, 아니면 사람의 본질을 보고 가늠한 것이냐? (사람의 본질을 본 것입니다.) 그렇다. 마치 바울과도 같다. 그가 만약 진리를 추구하고, 베드로처럼 온전케 되기를 추구했다면 그런 분수 모르는 소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의 그런 결과도 원인이 먼저 있었다. 이 사람이 오늘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제물을 대하는 태도, 자신의 악행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동안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과연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태도는 그의 본질과 그가 걸어온 길을 모조리 드러낸다. 그가 가는 길이 진리 추구의 길,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길이고, 그가 정말 본분을 자신의 책임과 의무로 생각했다면, 이런 피치 못할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이 일을 대하겠느냐? 반항, 원망과 같은 지금의 이런 태도는 절대 있을 수 없다. 귀신 같은 모습이 드러나고, 영혼 깊은 곳의 본성 본질이 완전히 드러나자 그는 사람이 아닌 마귀였다.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20년 넘게 믿으며 지금까지 와서 이런 광경에 이르지는 않는다. 사람이라면 그 많은 제물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뉘우치겠느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겠느냐? 얼마나 벌벌 떨리겠느냐? 그는 자신이 책임을 회피하기 어렵고,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 받을 수 없으니 하나님께 회개하고 죄를 뉘우쳐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적어도 교회에서 자기를 출교시켰다고 해서 하나님을 그만 믿고 배반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 믿는 가족들을 교란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이 사람이 끝에 가서 드러낸 여러 가지 모습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그는 불신파다.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고 인성도 악독하다. 이것이 네 번째 사례다. 이 사례는 뭐라고 명명하면 좋겠느냐? (‘제물 천만 위안 분실 사례’가 좋겠습니다.) 그의 태도도 덧붙여야 한다. ‘막대한 제물을 분실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태도’, 이렇게 부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사람에게는 경계심을 주고, 최소한 그가 저지른 일의 심각성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니 말이다.
앞에서 말한 일들의 발생과 사례 속 인물들의 갖가지 모습, 그리고 일이 벌어진 후에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등은 모두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기고 드러난 것들이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걷는 길과 사람의 결말은 본분 이행과 밀접하고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본분 이행이라는 이 화제는 영원한 화제인 셈이다. 또한 본분 이행에 관련된 진리 역시 영원한 화제로, 그것은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깨달아야 할 진리이자, 생명 성장과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다뤄야 할 화제이다. 그것은 사람의 성품 변화나 생명 진입, 사람이 가는 길, 마지막 결말 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오늘 본분 이행에 관해 많은 얘기를 했고, 아울러 몇 가지 사례도 교제해 보았다.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하나님이 인정하는지, 악행을 저지르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 또 합격한 본분 이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희가 깨닫도록 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 네 가지 사례에 등장하는 사건은 하나하나가 다 심각하고, 가슴이 철렁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일들은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이고,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참, 본분 이행을 안 하면 아무 일도 없는데, 본분만 이행했다 하면 사고가 나네. 그럼 본분 이행을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 생각은 어떠냐?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 담그는 격 아니냐?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너는 진리를 구해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적극적인 태도요, 정상인들이 갖춰야 할 태도이다. 본분 이행 과정에서 생긴 문제 때문에 정죄되고 출교되고 도태되고 제거되고, 나중에는 구원받을 희망이 사라지는 게 겁나서, 아예 본분 이행을 하지 않고 소극적이고 대항적인 자세로 본분을 대한다면, 이런 태도는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인성이 너무 부족해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은 무리야. 그렇다면 기꺼이 힘쓰면 되지 않을까? 힘쓰는 자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도 높지 않고, 원칙 기준도 별로 없으니 힘을 들이면 되잖아. 시키는 대로 하면서 말만 잘 들으면 되고, 무슨 큰 책임을 맡지 않아도 되고, 리더 일꾼이 되겠다는 야심도 없어. 나중에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게 가장 큰 복이지 뭐.” 이런 속셈은 어떠냐? 아주 비열하고 추하지 않으냐? 이렇게 진취적이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겠느냐? 인성이 없는 사람이 힘쓴다 한들 합격할 수 있느냐? 인성이 없는 사람은 힘을 써도 합격할 수 없고, 충성스럽게 힘쓰는 자가 되어 살아남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번에 몇 차례 교제하면서 사례를 비교적 많이 언급했다. 그런 사례들은 기억하기 쉽지만, 교제하는 진리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 한 가지 좋은 점은 바로 이런 사례를 언급하면 거기에 관계된 진리는 보다 쉽게 기억하거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례를 들지 않고 그런 효과를 내려면 아마 좀 힘들 것이다. 이렇게 사례를 들면 그것이 사람에게는 채찍이 되고 경고가 되어 그 안에서 올바른 길을 찾도록 해 준다. 또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길을 가야 하나님의 행정 법령을 거스르는 일을 피할 수 있고, 큰 잘못을 저지르는 그릇된 길을 가지 않을 수 있는지도 알려 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르도록 해 준다는 점이다. 이 네 개의 사례를 들으니 너희는 어떤 느낌이 드느냐?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기지 않았느냐?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이 쉬운 것이냐? (쉽지 않습니다.) 어떤 부분이 어려운 것이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원칙을 찾지 못해 늘 일을 그르치는 것이 문제냐? (아닙니다.) 그러면 대체 무엇이 문제겠느냐? 진리를 사랑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 것, 이것이 문제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도 실행하지도 않고, 거기에 흉악하고 사악하고 교만한 성품까지 더해지면 나쁜 결과가 초래되면서 사람이 예상치 못하거나 원치 않았던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결말이 나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결말은 보통이면 된다고, 어쨌든 마지막까지 그럭저럭 버텨서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 (있습니다.) 그런 부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 밥만 축내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자다. 이런 사람들이 본분을 이행하면 틀림없이 대충대충 이행하다 툭하면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합격한 본분 이행에 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있느냐? (인성을 갖춘 사람입니다.) 인성은 무엇을 포함하느냐? (양심과 이성입니다.) 이렇게 양심과 이성을 갖춘, 인성 있는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한다면 쉽게 합격한 본분에 이를 수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께서 본분 이행에 합격하지 못한 심각하고 부정적인 사례만 설명해 주시니까, 듣고 나서 자신이 없어집니다. 본분 이행은 언제 합격할 수 있습니까? 본분 이행에 합격한 긍정적인 예는 없습니까?” 그러면 이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예를 살펴보자.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진리 추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본분 이행에도 마음을 쓰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사람들과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게 되었다. 조화롭게 협력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 여기 그런 모습이 하나 있다. 조화롭게 협력한다는 것은 모두가 겉으로 화목하게 지내면서 다투거나 옥신각신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조화롭게 협력한다는 것은, 사역을 하면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네가 그 문제들을 꿰뚫어 볼 수 있건 없건, 또 네 관점이 옳건 그르건 모두 다른 사람들과 의논하고 교제하며 진리 원칙을 구하고, 합의점에 이르는 것이 바로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이다. 합의점에 도달하려는 목적이 무엇이냐? 본분을 더 잘 이행하고, 교회 사역을 더 잘해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효과에 이르기 위해서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려면 우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조화로운 협력을 달성해야 한다. 지금 이미 조화로운 협력의 방향으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진리를 깨달은 뒤에 비록 진리에 따라 완벽하게 실행하지 못해서 중간에 실패하기도 하고, 연약해지기도 하고, 오류가 생기기도 하지만, 진리 원칙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조화로운 협력에 도달할 희망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때는 네가 하는 방법이 옳다고 생각되더라도 자기만 옳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상의할 수 있다. 사람들과 진리 원칙을 자세히 교제하고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명확히 설명해서 모두의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고, 원칙을 벗어나지 않고, 하나님 집 이익을 고려할 수 있고, 최대한 하나님 집 이익을 지킬 수 있다고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다. 이렇게 실행하면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 비록 최종 결과가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네가 실행한 길과 방향, 목표가 옳다면 그건 하나님 눈에 어떻게 보이겠느냐? 하나님은 그 일을 어떻게 정의하겠느냐? 하나님은 네 본분이 합격이라고 할 것이다. 합격만 하면 하나님 마음에 합하는 것이냐?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완전히 하나님 요구대로 실행하는 것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 단지 너의 길이 옳고, 속마음이 옳고, 방향이 옳은 것만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그런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다. 순종을 예로 들어 보자.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집이 너에게 일을 하나 안배했을 때, 네가 어떻게 실행하면 본분 이행에 합격하겠느냐? 처음 그 일을 들었을 때 너는 생각이 좀 달랐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께서 이해가 안 되는 일도 구하고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으니 구해야지. 진리도 모르고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이 일이 나에게 주어졌으니 시키는 대로 따르고 순종해야 해. 규례라도 우선 지키고 보자.’ 이렇게 실행할 수 있다면 합격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합격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과 거리가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그 차이는 네가 진리를 아는 정도에 달려 있다. 너는 순종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리 원칙을 정확하게 찾아서 실행해 내지 못했기 때문에 규례를 고수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을 양심의 기준에 따라, 규례에 따라 지킨다면, 방법상으로는 문제가 없고, 그 성질 면에서도 잘못이 없지만 진리를 실행하는 기준에는 아직 못 미친다. 아직 하나님 뜻을 깨닫지 못한 너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본분을 지킬 뿐, 진리 원칙에 따라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고, 증거의 기준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식의 본분 이행은 합격이긴 하지만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수준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본분 이행이 합격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본분을 이행하는 길과 방향, 속마음, 근원, 원칙 등 이 몇 가지가 옳다면 사람이 이행하는 본분은 합격이다. 많은 이들이 이론상으로는 잘 알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어리둥절해진다. 어쨌든 너희에게 한 가지 원칙을 알려 주겠다. 바로 일이 생겼을 때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독단적으로 행동하면 안 되느냐? 먼저,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원칙이 아니다. 또 한 가지, 본분은 사적인 일이 아니다.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네 개인의 일을 하는 것도, 개인적인 경영을 하는 것도, 네 개인의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 모두 네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집의 사역이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너는 항상 이 점을 인지하고 인식해야 한다. “이건 저 자신의 일이 아닙니다. 저는 본분을 이행하고 있고, 제 책임을 다하고 있고, 교회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제게 맡기신 부탁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제 본분이지 사적인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장 우선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네가 본분을 사적인 일로 여겨서 일할 때도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속셈, 관점, 의도에 따라 행동한다면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네가 본분을 사적인 일과 확실히 구분해서 그것이 본분임을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 요구를 구하고, 원칙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다. 만약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알지 못하고, 생각은 있지만 아직 명확하지 않을 때는 진리를 깨달은 형제자매를 찾아 교제해야 한다. 이것이 진리를 구하는 것이고, 본분을 대할 때는 이런 태도를 가장 먼저 갖춰야 한다. 네 생각에 이렇게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해서 그렇게 규정하고 또 결정짓지 말아라. 그러면 쉽게 문제가 생길 것이다. 본분은 너 본인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 집의 일은 그 크기에 상관없이 어느 한 사람의 일이 아니다. 본분에 관계된 이상 그건 네 사적인 일, 너 개인의 일이 아니며, 진리에 관계되고, 원칙에 관계된다. 그러니까 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진리를 구하고 원칙을 구하는 일이다. 진리를 모른다면 먼저 원칙부터 구하도록 해라. 진리를 알고 나면 원칙을 정하기가 쉬워진다. 원칙을 모르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방법이 있다. 잘 아는 사람을 찾아가 교제하면 된다. 자기만 안다고,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러면 잘못을 저지르기가 쉽다. 늘 본인이 결정하려 하는 것은 어떤 성품이냐? 그건 바로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이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난 대학생이니까 수준이 당신들보다 높아. 나는 이해 능력이 있지만, 당신들은 분량도 작고 진리도 잘 모르니까 뭐든 내 말을 따라야 해. 나 혼자서 결정하면 된다고!’ 이런 관점은 어떠냐? 네가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된다. 너는 결코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 언제나 자기가 결정하려 하고 조화롭게 협력하지 않는데 어떻게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해서는 절대 합격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너는 늘 남들이 네 말을 듣도록 구속하려 하고,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고집이자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이다. 그런 식으로는 본인도 본분 이행을 제대로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본분 이행에도 영향을 준다. 이것이 교만한 성품으로 인한 결과다. 하나님이 왜 사람들에게 조화로운 협력을 요구하느냐? 우선은 그것이 사람의 패괴 성품을 드러내어 자신을 인식하고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의 생명 진입에 유익이 된다. 또 하나는,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이 교회 사역에도 유리하다. 모두가 진리를 잘 모르고, 다들 패괴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하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어서 교회 사역에 지장을 줄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결과다. 요컨대 본분 이행에 합격하려면 반드시 조화롭게 협력하는 법을 익혀서 일이 생겼을 때 진리 교제를 통해 해결할 줄 알아야 한다. 이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교회 사역에도 유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도 유리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조화로운 협력을 너무 번거롭게 여긴다. 어떤 때는 진리를 교제해도 결과를 얻기 힘들고 하니, 대뜸 이런 질문을 던진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려면 꼭 조화롭게 협력해야 합니까? 일이 생겼을 때 다같이 교제하면 꼭 결과를 얻습니까? 제가 보기에 그건 다 형식에 지나지 않고, 그런 규례를 지키는 건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이런 관점은 옳으냐, 옳지 않으냐? (옳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은 어떤 문제를 드러내느냐?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품이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들은 진리 교제를 원하지 않고, 늘 자신이 결정을 내리려고 한다. 그런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 남들하고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본분 이행에서 조화로운 협력을 요구하는 이유는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해서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중에 하나님 사역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래야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를 수 있다. 다른 사람과 협력하지 않고 언제나 독단적으로 행동하며 남에게 네 말만 들으라고 하는 것이 본분을 대할 때 지녀야 할 태도냐?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는 네 생명 진입과 관련된다. 네가 매일 어떤 일을 만나고,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하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가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네가 그 일들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를 보려 한다. 네가 그 일들을 하는 태도, 행동 방식은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지 아닌지와 관계가 있고, 네 생명 진입과도 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네 생명 진입을 보고, 네가 가는 길을 보려 한다. 네가 가는 길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고 네가 생명 진입이 있다면, 본분을 이행할 때 다른 이와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고, 본분 이행은 쉽게 합격할 수 있다. 그런데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자기가 밑천도 있고, 업무도 잘 알고, 경험도 있고, 하나님 마음도 잘 헤아리고, 남들보다 더 잘 추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면, 그래서 너 혼자 결정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과 의논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려 하면서 자기 경영을 하고, 독불장군이 되고자 한다면, 이는 생명 진입의 길을 가는 것이냐? 아니다. 이것은 지위를 추구하는 것이고, 생명 진입의 길이 아닌 바울의 길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명 진입의 길, 진리 추구의 길을 가도록 하는 것은 이런 식이 아니고 거기에는 이런 태도도 없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범사에 진리를 구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려면 네가 하나님을 얼마나 오랫동안 믿었는지, 네가 얼마나 많은 본분을 이행했는지, 하나님 집에 얼마나 많은 공적을 세웠는지, 본분을 이행하면서 얼마나 많은 경험을 가지게 되었는지 등과 상관없다. 하나님이 보는 것은 한 사람이 가는 길, 다시 말해 진리를 대하는 태도와 일 처리 원칙, 방향, 근원, 출발점 등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본다. 그것이 네가 가는 길을 결정한다. 만약 본분 이행 과정에 이런 긍정적인 것들을 네게서 전혀 볼 수가 없고, 네가 일하는 원칙, 길, 근거가 자신의 생각, 의도, 간계에 있고, 출발점도 자신의 이익, 체면, 지위를 지키는 데 있으며, 일하는 방식은 독단적이고, 자기 스스로 결정하며, 다른 사람과 절대 상의도 하지 않고, 조화로운 협력도 하지 않으며, 잘못을 저지르고도 충고도 듣지 않고 더욱이 진리도 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편에서는 어떻게 보겠느냐? 너의 그러한 본분 이행은 합격점에 이르지 못하고 너는 아직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들어서지 못했다. 그것은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고 항상 자기 뜻에 따르며 하고 싶은 대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이들이 본분 이행에 합격하지 못하는 원인이다. 그럼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본분 이행에 합격하기가 어렵겠느냐? 사실 어렵지는 않다. 자세를 낮추고 조금이나마 이성을 갖추며 적절한 위치에 설 수 있으면 된다. 네 학력이 얼마나 높든, 과거에 어떤 상을 받고 어떤 것을 이뤘든, 네 신분과 수준이 얼마나 높든, 그런 것들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권위적인 자세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한 영예가 아무리 높아 봤자 하나님 집에서는 진리보다 높을 수 없다. 그 허황된 것들은 진리가 아니고, 진리를 대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너는 이 문제를 똑똑히 알아야 한다. 만약 네가 “나한테는 은사가 있어. 나는 머리가 잘 돌아가고 반응도 빠르지. 배우는 것도 빠르고 기억력도 매우 뛰어나. 나는 내 마음대로 결정할 자격이 있어.”라고 말하며, 늘 이러한 것들을 밑천으로 삼고 보물처럼 대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러한 것들이 네 마음을 점령해 뿌리를 내리면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진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너는 먼저 네가 좋아하는 것, 언뜻 좋아 보이는 것, 보물처럼 여기는 것들을 내려놓고 부정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진리가 아니며, 오히려 네 진리 진입을 가로막을 수 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를 구하고, 진리대로 실행하여 본분 이행에 합격점을 받는 것이다. 본분 이행에 합격점을 받는다는 것은 곧 생명 진입의 길에 막 들어선 것과 같기 때문이다. ‘들어섰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입문을 의미한다. 어떤 일을 하든 입문하는 것이 있고,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것들이 있다. 본분 이행에 합격점을 받는 것은 생명 진입을 이루는 길이다. 만약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방식만 그저 보기에 적절하지만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합격한 본분 이행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노력해야겠느냐? 반드시 진리 원칙의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구해야 한다. 진리 원칙을 갖추는 것이 핵심이다. 행위와 성격만 좋아지고 진리 실제를 갖추지 못했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네게 은사와 특기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본분 이행에 써야 제대로 쓰는 것이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인성과 성격을 개선할 필요도 없고, 혹은 은사와 특기를 내려놓을 필요도 없다. 그러한 것들은 필요치 않다. 핵심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본분 이행 과정에서는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것은 피하기 힘들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반드시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네가 어떤 측면의 은사와 특기를 갖추었든, 어떤 업무적인 지식을 지니고 있든 그런 것을 본분 이행에 쓰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그래야 제대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 양심과 이성을 갖추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구해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본분을 이행하면서 생명 진입을 이룰 수 있고, 본분 이행에 합격점을 받을 수 있다.
이제 보니 합격한 본분 이행은 진리를 구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구나.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면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를 수 없다. 합격한 본분 이행은 이렇게 해석하고, 이렇게 정의하기로 하자.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요구가 높으냐, 높지 않으냐? 사실 높지 않다. 하나님은 그저 너에게 일을 할 때 올바른 태도와 속마음, 관점을 지닐 것을 요구하며, 그런 바탕이 있어야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너는 자신을 더욱 깊이 인식해서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이고, 진리에 더욱 깊이 진입해서 성품 변화에 이를 수 있다. 너를 시련하고 연단하기 전, 하나님은 네가 진리를 깨달은 상태에서 너에게 심판과 형벌을 내린다. 그런데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 이 두 가지 단계는 모두 무엇을 기반으로 하느냐? 네가 합격한 본분에 이르는 것, 다시 말해 너에게 생명 진입이 생기는 것이다. 네 생명 진입은 네가 교회에서 하는 사역, 교회에서 지고 있는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 네가 만약 온종일 집에서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입으로만 본분 이행을 논하고 생명 진입을 논한다면, 그것은 비현실적이고 효과가 없다. 마치 탁상공론처럼 하루 종일 합격한 본분 이행을 말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봉헌도 헌신도 없고, 고생도 하지 않고, 고난도 겪지 않는다면, 설령 찬양을 부르거나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이따금씩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해도 그것은 별다른 작용을 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르는 것은 구원받는 일과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사람이 심판과 형벌을 받는 일과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고자 한다면 사람은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르러야 한다.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이런 기준을 제시하며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를 것을 요구하느냐? 그건 바로 네 본분 이행을 가지고 네가 생명에 진입한 정도를 가늠하려는 것이다. 네가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른다면 그것은 네 생명 진입 정도가 이미 심판과 형벌을 받을 수 있는 기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너에게 하려는, 온전케 하는 사역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이런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시한 조건이 무엇이냐? 네가 이행하는 본분이 하나님 눈에 반드시 합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네 생명 진입에 기본적인 길과 방향이 생겨서, 하나님이 이를 보고 인정한다면, 이미 합격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통해 검증하느냐? 주로 네가 이행하는 본분을 통해 검증한다. 네가 본분 이행에 합격하면 하나님은 너를 인정하고,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너에게 심판과 형벌을 시작한다. 마치 너를 엄격하게 단속하기 시작하듯, 네가 저지른 잘못이 무엇이든 모두 징계할 것이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네가 하나님 검증을 통과하면 이제는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옳은 사람이니 이렇다 할 악한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은 하나님이 너를 지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관적인 면에서는, 네가 가는 길, 네 인생 목표와 방향이 이미 참도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너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치우친 길로 들어서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다음 단계는 하나님이 반드시 너를 온전케 해서 그 복이 네게 임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이 복을 이어받기 원하고, 온전케 되는 길을 가기 원한다면, 먼저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르러야 한다.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 집에서 보인 여러 가지 모습, 너에게 맡긴 임무, 부탁, 사명을 통해 네가 진리를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본다. 하나님은 너의 그 태도들을 통해 너란 사람이 과연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본다. 네가 가는 길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라면 너는 본분 이행에 합격할 것이고, 틀림없이 생명에 진입하고, 또 정도 차이는 있지만 성품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도달하는 것들이다. 하나님이 본격적으로 온전케 하기 전까지, 너는 사람의 역량으로 이 정도만 도달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사역하지 않으면, 너는 이 정도만 도달할 수 있게 되고, 그 이상 노력하면 무척 힘이 들 것이다. 너는 스스로 최선을 다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이를테면 의지로 극복하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고, 버리고, 감정에 대응하고, 세상을 포기하고, 사악한 풍조를 인식하고, 육을 배반하고, 충실하게 본분을 이행하고, 분별하고, 사람을 따르지 않는 등 이런 일들을 이루어 내면 그때는 하나님께 온전케 될 자격이 생긴다.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고, 그저 계속해서 너에게 진리를 공급하고, 진리를 깨닫도록 양육하고, 붙들어 준다. 어떤 방면의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진리 실제에는 어떻게 진입하는지와 같은 문제를 너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네가 이런 진리를 깨닫고 진입해서 하나님에게 합격증을 받으면 구원받을 희망은 80%가 된다. 하지만 80%에 이르기 전까지는 사람의 심혈과 에너지를 전부 쏟아야 하고, 이번 생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는 지금 하나님을 20년째 믿고 있는데, 에너지를 모두 쏟은 것 아닌가요?” 그런 건 햇수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도 있다. “저는 지금 하나님 믿은 지 5년이 됐는데, 이제는 진리를 조금 깨달아서 어떤 게 합격한 본분 이행인지 알고 있습니다. 지금 그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고, 길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평온하고 위안을 받는 기분입니다.” 이런 느낌은 기본적으로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원받을 확률이 80%에 도달했느냐? 아니다. 이제 몇 %냐? 10%~15%다. 본분 이행이 합격에 이르는 과정에서 너는 아직도 많은 훈계와 책망을 겪고, 많은 상황을 겪어야 한다. 긍정적인 면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네게 많은 것을 보고 깨닫게 해 준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네가 사람과 일, 사물을 보며 깨닫는 과정, 그러니까 그런 실제 상황 속에서 진리를 알게 한다. 사람과 일, 사물 가운데서 진리를 알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만약 그런 것들을 겪지 않으면 진리에 대한 너의 인식은 영원히 문자와 도리, 구호에만 머물게 된다. 일단 인생에서 여러 가지 상황을 겪고 나면 네가 전에 인식했거나 이해하고 깨달았다고 기억되는 그런 도리는 실제로 변할 것이다. 이런 실제가 바로 진리 실제의 일면이자 네가 깨닫고 진입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아직 합격한 본분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가 구원받을 확률은 얼마나 되느냐? 기껏해야 10~15%에 불과하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절대 진실로 순종할 리 없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원칙에 따라 일할 수 있겠느냐? 진지하고 책임 있게 본분을 대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일을 할 때는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 대충대충 처리하고, 사심도 많이 섞이고, 자기 취향에 따라 처리할 게 뻔하다. 설령 네가 많은 도리를 얘기할 줄 알고, 이론을 말하고 구호를 외칠 줄 안다 해도 그것이 네게 진리 실제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네가 구원받을 확률은 높지 않다. 참된 구원에 이르고, 사탄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려면, 앞으로는 여러 진리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노력을 기울이는 목적이 무엇이냐? 더욱 정확하고 확실하게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위해서다. 진리에 진입해야 바른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다. 도리만 말하고 구호만 외칠 줄 알았지 본분을 이행하는 일에서는 진리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진리 실제가 없는 것이고, 진리 실제와는 차이가 너무나 크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많은 일을 겪은 후 자신이 진리를 잘 모르고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진리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다면, 점차 도리를 말하고 구호만 외치던 상태를 벗어나 참된 인식을 얻을 것이다. 또 정확하게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사람이 구원받을 희망이 점점 늘어나고 구원받을 확률도 그만큼 높아진다. 그 희망은 무엇에 따라 늘어나느냐? (사람이 진리를 아는 만큼 늘어납니다.) 진리를 아는 정도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를 실행하는 것이다. 진리를 실행해야 진리를 알 수 있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영원히 진리를 알 수 없다. 글귀와 도리만 아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다. 네가 진리를 많이 실행할수록 실제가 생기고 변화가 생긴다. 그리고 진리를 인식할수록 구원받을 희망은 늘어날 것이다. 네가 본분 이행 과정에서 긍정적인 면으로는 자신의 본분을 올바로 대하며 어떤 환경이 임하든 자신의 본분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으며, 다른 이들이 모두 믿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지라도 너는 본분을 지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본분을 지켜 나가며 충성을 다한다면, 너는 진정 본분을 본분으로 여기고 완전히 충성을 다한 것이다. 이런 기준에 이를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이행한 본분이 합격인 셈이다. 이것이 긍정적인 면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르기 전에 부정적인 면에서 다양한 시험을 견뎌 내야 한다. 만약 한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시험을 견디지 못해서 본분을 포기하고 도망쳐서 본분을 저버린다면, 이것은 어떤 문제냐? 그건 바로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다. 하나님의 부탁을 저버리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배반이다. 하나님을 배반하고도 구원받을 수 있느냐? 그것으로 끝이다. 일말의 희망도 없다. 그가 예전에 이행한 본분도 힘쓰는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배반하는 순간 그마저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반드시 본분을 잘 지켜야 한다. 본분을 지키면 희망이 있다. 충실하게 본분을 이행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고,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본분을 지키는 일에서 모든 사람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시험에 임했을 때 굳게 설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시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돈, 지위, 남녀, 감정 등이 있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일부 본분은 위험 부담이 있고, 심지어 생명의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다. 이런 본분을 이행하다가는 감옥에 잡혀갈 수도 있고 박해받아 죽을 수도 있다. 너는 그래도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느냐? 꿋꿋이 버틸 수 있느냐? 이런 시험을 쉽게 이겨 내느냐 마느냐는 그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이런 시험들을 점차 분별하고 인식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 본질을 인식하고, 그 안에 숨은 사탄의 계략을 인식하고, 또한 자신의 패괴 성품, 자신의 본성 본질,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늘 하나님에게 자신이 그 시험들을 이겨 낼 수 있도록 지켜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시험을 이겨 낸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본분을 지킬 수 있고, 저버리거나 도망치지 않게 될 것이고, 이로써 구원받을 확률은 50%가 된다. 이 50%가 도달하기 쉬우냐? 한 걸음 한 걸음이 고비에다 위험한 상황이니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 진리 추구가 이토록 어려운 걸 알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느냐? 그건 어떤 사람이냐? 그건 불신파나 하는 소리다.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는 머리를 쥐어짜고 어떤 고통도 감수할 수 있다. 또한 재난 속에서도 굳세게 살아가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 믿으며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그런 의욕이 있다면 틀림없이 완벽하게 효과에 이를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위해 노력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못난이다! 진리 추구는 사람이 노력했다고 도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의 노력에 성령의 역사가 더해져야 가능한 일이고, 하나님이 여러 가지 상황을 마련해 사람을 시련하고 연단하고, 또 성령이 역사하여 사람을 깨우치고 빛 비추며 인도해야 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아무리 고생해도 당연한 것이다. 높은 산에 오르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는 등산대원들은 극한에 도전하기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심지어 생명도 도외시한다. 하나님 믿고 진리를 얻는 일이 등산보다 어려우냐? 복은 받고 싶은데 고생은 하기 싫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는 못난이다. 진리를 얻고자 추구하는 일은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하고 수고 없이는 불가능하다. 진리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방면의 진리와 관계된 합격의 정의, 합격의 기준, 하나님이 합격이라는 기준을 제시한 연유,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과 생명 진입의 관계 등을 사람이 모두 이해한 후,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포기하지 않고, 또한 각종 시험을 견딜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배치한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다양한 진리를 이해하고 인식하고 진입할 수 있다면, 하나님 편에서는 기본적으로 합격인 것이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데에 이르렀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에 이른 것이다. 첫째는 본분을 대하는 태도가 올바르고, 어느 때라도 본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각종 시험을 이겨 내고 넘어지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여러 가지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에 모두 도달해서 합격하면,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 온전케 되는 첫 번째 조건인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이 완벽해진다.
합격한 본분 이행에서 ‘합격’이라는 이 두 글자에 관계된 내용은 전에도 일부 얘기한 적이 있다. 예전에 얘기했던 ‘합격’은 기본적으로 어떻게 정의했느냐?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얘기하는 ‘합격’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요구 기준으로 상승했다.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본분 이행에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고 요구하느냐? 이것은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에 관련되고,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기준과 관련이 있다. 네가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데에 이르지 못하면 하나님은 너를 온전케 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관건은 사람의 본분 이행이 합격인지 아닌지를 보는 것이다. 본분 이행에 불합격한다면 사람을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사역은 너와는 무관하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걸어가는 길도 맞고, 방향도 맞는데 그래도 합격한 본분 이행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사람이 깨달은 진리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대신해서 집안일을 분담하고 싶어도 그만한 분량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언제쯤 분량이 생겨서 정말 부모 대신 집안일을 분담할 수 있느냐? 그가 일을 좀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른들이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때, 그때는 집안일을 분담할 수 있다. 그러면 가능하다. 지금 너는 일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 여전히 힘을 들이거나 힘쓰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네가 깨달은 진리가 너무나 얕고, 실행해 낼 수 있는 진리도 너무 적고, 파악할 수 있는 원칙도 너무 적고, 늘 모색하는 과정에 있고, 늘 몽롱한 상태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너는 자신이 하는 일이 과연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지 아닌지 확신하기 어렵고, 속으로도 늘 불확실하다. 그러면 네가 이행하는 본분이 합격한 것으로 볼 수 있느냐? 아직은 아니다. 깨달은 진리가 너무 적고, 생명 진입도 아직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도에 이르지 못하고, 분량도 너무 작기 때문이다. 분량이 너무 작다는 건 무슨 말이냐? 누군가는 진리를 깊게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데, 사실 진리를 깊게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숙한 인성, 혹은 형편없는 자질, 너무 많은 소극적인 부분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너에게 본분 한 가지가 임했는데, 네가 할 줄 모르는 일이다. 그러면 너는 스스로를 하나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는 무능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소극적이고 연약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안배도 잘못된 것 같고, 자기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분명 도태될 거라는 생각에 본분을 이행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이것은 분량이 작은 모습이 아니냐? 또한 지금 결혼 안 한 젊은 형제자매가 많은데, 멋진 남성이나 아름다운 여성과 마주치면 마음이 흔들리고, 둘이 눈이라도 맞으면 감정이 싹틀 것이다. 이렇게 정이 생겨서 연애라도 하게 되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바로 시험에 빠진 것이다. 분량이 작지 않으냐? 이게 바로 분량이 작은 것이다. 또 있다. 사람들 중에는 특별한 은사를 받아서 하나님 집에서 특별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그것을 밑천이 생긴 것으로 생각하고 거드름을 피우려 하며 자기를 자랑하려 한다. 그렇게 자랑하게 되면 행동에 원칙이 없어진다. 다른 사람의 칭찬 몇 마디에 그는 더욱 원칙 없이 행동하고, 우쭐해서 본분을 망각한다. 이 역시 시험에 빠진 것이다. 이것도 분량이 작은 모습이 아니냐? 분량이 작은 사람은 작은 일에도 넘어질 수 있다. 일례로 하나님 집에서 연기자로 활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외모도 그런대로 괜찮고 인기도 좀 있다. 영화를 몇 편 찍고 나자 그는 나름 유명해진 기분이었다. ‘이 정도 명성이면 나쁘지 않지. 세상에서라면 사인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생기지 않았을까? 하나님 집에서는 왜 아무도 사인해 달라는 사람이 없지? 아무래도 괜찮은 영화를 하나 더 찍어야 하겠군.’ 그런데 다음 영화 주연에는 발탁이 되지 않자 그는 본분 이행을 그만두고 싶었다. 다 시시했다. 늘 주연을 맡거나 유명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으니까 의기소침해지고, 기분 상하고, 심지어 본분을 내팽개칠 생각마저 한다. 이것은 분량이 작은 것이다. 분량이 작으면 중책은 감당하기 힘들다. 설령 하나님이 너에게 본분을 준다 해도 못 미더울 것이다. 잘못된 생각 하나, 뜻처럼 되지 않는 일 하나 때문에 본분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등질 수 있는데, 이건 분량이 작은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분량이 너무나도 작다. 분량이 이렇게 작은데, 이런 모습은 합격한 본분 이행과 얼마나 차이가 나느냐? 어느 부분에서 차이가 나느냐?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 정도에서 차이가 난다.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집안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병이 나면 예배도 본분도 중단하는데, 이삼일 본분을 포기하는 것은 별일이 아니지만, 그러다 가족은 죽으면 더 이상 못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본분 이행은 생명을 얻는 큰일에 관계되고 구원받는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인데, 그 생각은 미처 못 하고 감정이나 가족을 본분, 구원받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 역시 분량이 작은 것 아니냐? 분량이 너무나 작다! 이것은 인생에서 올바른 일이 무엇인지, 본연의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분량의 크기가 나이에 달렸느냐? 아니다. 패괴된 인류는 성별, 나이, 출신 지역, 국가를 막론하고 패괴 성품은 누구나 같고, 누구나 사탄 본성이 있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할 수 있고, 온갖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회개할 수 있겠느냐? 영원히 회개하지 못한다. 그는 달라질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병이 나면 입으로는 하나님께 의지한다고,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죽을 게 뻔하니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게 아니라 얼른 가서 본분을 이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현재 가장 바쁘고 가장 중요한 본분,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본분을 골라 얼른 신청했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늘 ‘과연 이 병이 나을 수 있을까? 나을 수 있겠지, 내가 생명도 내놓았는데 안 나을 수가 있겠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의 병은 죽을병이었고, 그가 본분을 이행하든 안 하든 죽을 운명이었다. 그가 본분을 이행하러 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한다.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그의 분량과 이러한 출발점으로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은 진리도 추구하지 않고, 인성도 나쁘며 마음속에 늘 자신만의 타산이 있다. 병이 재발하거나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다고 느껴지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긴 하신 걸까? 날 보살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걸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그럼 나도 이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래.’라고 생각한다. 몸이 약간만 불편해도 본분을 포기하려고 한다. 이것이 분량이 있는 것이냐? (분량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다양한 사람이 여기 모여 설교를 듣고 있고, 또는 가정과 사업을 내려놓고 하나님 집의 어떤 부분에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며, 자기가 파악한 업무나 자기가 배운 것과 관련된 일련의 사역들을 하고 있지만, 사실 모든 이가 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아니며, 모두가 본분을 기꺼이 이행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본분을 이행하는 모든 이가 어느 정도의 분량을 지닌 것은 더더욱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다 아주 바쁘게 보내며, 진정한 믿음을 토대로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일하며 헌신하는 것 같지만, 사실 각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은 수시로 연약해지며, 수시로 본분을 포기하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또한 늘 자신만의 타산이 있으며, 하나님의 사역이 빨리 끝나 복받을 수 있기를 더욱더 기대한다. 바로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이러한 연약함과 패역, 작은 분량, 무지한 생각, 행위 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언젠가 네가 이러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여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때면, 어떤 문제가 생기든 네 본분 이행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면 된 것이고, 네 분량이 자란 것이다. 사람이 최후에 어떤 길을 가고 어느 만큼 갈 수 있는지는 구호를 얼마나 외쳤는지와도 관계가 없고, 일시적인 기분과 염원이 어땠는지와도 관계가 없다. 그것은 사람의 추구, 진리를 사랑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너희는 어떤 상황에서 본분을 포기할 수 있느냐? 죽음이 임했을 때겠느냐, 아니면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겠느냐? 일부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요구가 많다. 하나는 바람이나 뜨거운 태양을 마주하지 않을 만큼 사역 환경이 편안해야 하고, 조금도 고생하는 건 안 된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 남편(아내)과 계속 같이 있으면서 둘만의 생활을 즐기고, 여가나 휴가 같은 사생활도 보장되어야 한다. 이렇게 모든 것이 만족스러워야 하는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만족스럽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아서 계속 대립각을 세우고 또 관념을 퍼뜨려 다른 사람들을 교란한다. 진리를 깨달은 일부 사람들은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불신파라는 사실을 분별하고 그를 멀리한다. 하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분량이 작고 분별하지 못해서 그에게 교란당한다. 너희가 볼 때 악을 행하는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제명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제명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관적으로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자는 반드시 교회에서 제명해야 한다. 그래야 분량이 작고 무지하고 우매한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다. 너희는 어떤 상황에서 본분을 포기하고 훌쩍 가 버릴 수 있느냐? 예를 들어, 네가 복음을 전하다가 뛰어난 외모에 분위기 있는 말투를 지닌 사람과 마주쳤다고 해 보자. 그가 볼수록 마음에 들었던 너는 속으로 생각했다. ‘본분 이행만 아니었다면 이런 짝을 만나면 정말 좋겠다!’ 이런 생각은 위험하다. 시험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일단 생각을 많이 하면 연애를 하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그리고 막상 쫓아다녀 사귀어 보면 그 역시 마찬가지로 패괴된 사람이고 남들하고 다를 바 없지만,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다. 사람은 일단 남녀 관계라는 시험에 빠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1~2년, 3~5년 내에는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이 3~5년이라는 시간을 망치게 되면 진리를 얼마나 덜 깨닫고, 네 생명이 얼마나 손해를 보고, 생명의 성장이 얼마나 지체되겠느냐!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명품을 걸치고, 좋은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을 보면 마음이 동해서 자기도 돈을 벌고 싶어 하는데, 이것도 시험이 임한 것이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마음이 흔들리거나 본분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자는 모두 시험을 이겨 내지 못하는 사람으로, 위험하다. 이는 분량이 작은 모습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맛있는 것을 먹는 걸 보면 기분이 나빠지고 씁쓸한 생각이 들며, 누군가 좋은 결혼 상대를 찾은 것을 보면 또 마음에 달가워하지 않는다. 너와 나이도, 생김새도 고만고만했던 사람이 너보다 잘 차려입고 명성까지 얻은 것을 보면, 너는 괴로워하며 예전에 자신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졸업해서 일자리를 찾았더라면 저 사람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을 만날 때마다 너는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한다. 이런 시험은 네 입장에서는 속박이 되고 시달림이 된다. 이것은 분량이 작은 것이다. 너희가 복음을 전할 때 적당한 이성을 만나고, 킹카나 퀸카를 만난다면 반드시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게 무슨 의미겠느냐? 너의 분량이 각종 시험을 이겨 낼 수준에 이르지 못해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네가 피할 수 없으면 너의 마음이 점유되고 홀리게 된다. 네 마음속으로 그 일을 생각하고, 머릿속에 그 일을 떠올리며, 심지어 꿈에서도 그 일을 꿈꾸고, 다른 이와 대화할 때도 그 일을 화제에 올릴 것이다. 본분 이행 시에도 영향을 받고, 진리를 교제할 때 다른 사람은 할 말이 많은데 너는 말수가 점점 줄어들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일에도 관심이 없어질 것이다. 이것이 꼬임에 넘어간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시험에 빠진 것이다. 그러면 위험하다. 어떤 이들은 반드시 연애를 하고 이성과 함께해야만 시험에 빠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상황이 거기까지 발전하면 이미 돌려세울 방법이 없다. 너희는 그런 일을 마주했을 때 똑같은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는 건 분량이 작다는 의미이다. 왜 모른다는 것은 분량이 작은 것이라고 하겠느냐? 하나는, 네가 이런 일을 만난 적도 없고, 이런 일을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너는 스스로를 파악하지 못한다. 또 하나는 이런 일을 만났을 때 너에게는 이런 문제에 대응하는 올바른 태도와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 줄 모른다면, 너는 수동적인 사람이다. 수동적이라는 것은 분량이 작아서 우매하고 무지하다는 뜻이다. 네가 먼저 남을 꾀어 내지는 않겠지만, 남이 먼저 너를 꾀어 낼 수도 있다. 이것은 너에게 시험을 가져오는데 이걸 이겨 내지 못하면 문제는 심각하다. 예를 들어, 상대가 너에게 돈과 지위를 주거나 너를 유혹할 더 나은 대상이 있다면 그걸 이겨 내기가 쉽겠느냐? 네가 이겨 낼 확률이 얼마나 되느냐?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드는 누군가를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상대가 자기한테 초콜릿 두 조각을 주니까 마음이 흔들려서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분량이 겨우 이 정도다. 이게 하나님 믿은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것이냐? 꼭 그런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믿은 지 10년이 되어도 이런 비슷한 일을 만나면 시험에 들기도 한다. 그런 일을 처음 만나 한 번은 시험에 들 수 있지만, 두세 번 만나도 또 시험에 드는 것은 어찌 된 일이냐? 분량이 작고, 정말 깨닫지 못한 진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왜 깨닫지 못하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언제나 흐지부지해서 그렇다. 그에게는 이런 일이 대수롭지 않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결혼을 안 하나? 지금은 단지 적당한 짝을 못 만나고, 내 눈에 차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이렇게 지내는 것뿐이지.’ 그냥 그렇게 지내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도 아니고,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길을 가려는 자세도 아니다. 그는 그냥 그렇게, 되는대로 살려고 한다. 하루살이처럼 그때그때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날이 오면 그때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이다. 그는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마음,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하려는 사역에는 관심이 없다. 또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여러 가지 진리도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매번 설교 잘 듣는 사람한테 어쩌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고 하십니까?” 단지 예배 의식을 지키고 설교를 듣는 것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르다. 설교를 듣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진리 추구의 길을 가는 사람은 더 적다. 설교를 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론을 이해함으로써 본인의 관념 상상을 키우는 일에만 열중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설교를 들으면 진리를 추구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설교를 들으면 자신을 반성하며 자신의 상태에 맞춰 보는가 하면,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일에 집중한다. 진리 실제 부분을 파악하고, 실행과 체험에 열중해서 진리를 얻는다. 그러므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설교를 듣는 것은 생명을 얻기 위함이다. 그는 진리를 깨달아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진리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인다. 진리를 실행할 때 그가 속으로 알고 있는 진리는 그에게 도움이 된다. 진리를 깨달으면 길이 생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설교를 들을 때도 흐리멍덩하게 듣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고 나서 알아들었냐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다 알아들었습니다. 하나 하나 확실하게 적어 뒀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본인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느냐고 물으면 그는 어쨌든 도움이 되긴 됐다며 얼버무린다. 정말 도움이 되었을까? 아니다. 그 진리를 얻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왜 얻지 못했느냐?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얻을 수 있었겠느냐? 이런 사람이 있다. “왜 못 얻었다는 겁니까? 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거죠? 열심히 듣고 이렇게 받아 적기까지 했는데요.” 어떤 사람은 형식적으로 적기만 할 뿐, 진리를 갈망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교제했다고 해서 꼭 받아들였다고 할 수는 없는데, 그 사람의 마음이 진리를 정말로 갈망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진리를 정말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 하나님 말씀을 읽은 다음, 말씀을 자신의 내적 상태, 자신의 행동, 하나님 믿는 원칙, 하나님이 맡긴 부탁과 책임, 자신이 걸어가는 길과 결부시켜 자신에게 맞춰 보고 반성해야 하며, 그것들을 명확히 분별해서 진리를 깨닫고, 거기에다 실행하고 진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방금 분량이 작은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은 진리를 점차 깨닫는 과정에서 우매함과 무지함, 두려움, 연약함 등과 같은 분량이 작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연약함이란 무엇이냐? 너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요소가 극히 적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특별히 작은 것을 말한다. 너는 도리적으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고 주재한다는 것을 믿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에 마음 놓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며, 순종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연약함이다. 사람의 우매함과 무지함, 두려움, 패역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는 오직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구하면서 점차 해결하거나, 혹은 정도는 다르지만 개선이 가능하다. 개선이란 어떤 것이냐? 이런 부정적 요소를 점진적으로 해결해서 너의 본분 이행 효과가 점점 좋아지고, 일에 부딪혀도 예전보다 잘 버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에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너는 분량이 작은 관계로 연약해지고 소극적으로 변했다. 심지어 그것이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너는 기분 나빠 하고, 내팽개치고,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고 충성심도 없었다. 지금은 비슷한 일이 생겨도 본분에 대한 너의 충성도가 줄어들지 않고, 마음이 힘들거나 연약해지더라도 스스로가 진리를 구해 해결할 수 있다. 즉, 개인의 생명 진입 문제가 더 이상 본분 이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되고, 너의 정서와 내적 상태, 너의 연약함이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너의 책임, 본분, 의무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일 처리 능력, 그리고 외부 사물에 대한 대응 능력이 강해진 것이 아니냐? 이것이 바로 분량이 자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주연을 맡기면 신나서 경쾌하게 걷다가도 단역을 맡기면 달가워하지 않고 언짢아서 고개를 떨구고 걷는다. 복음을 전할 때 늘 앞에 나서려 하지만 진리를 교제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는 훈련은 하지 않으면서 늘 높은 자리에 얼굴을 내밀려고 한다. 이것이 참된 순종이냐? 이것이 올바른 본분 이행 태도냐? 그릇된 생각, 잘못된 내적 상태는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만 한다. 그래야 나중에는 어떤 일이 닥쳐도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체험이 생겨난 것이다. 네가 여러 가지 일을 분별하게 되면 면역력이 생겨서 언제 어떤 일을 만나든 본분 이행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사소한 일이나 기분, 사람과 일, 사물과 같은 환경적인 변화 때문에 본분 이행이 지장받는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또 네가 죄를 이기고 다양한 환경, 다양한 정서를 이기는 능력이 커진다. 이것이 바로 분량이 자란 것이다. 그렇다면 분량은 어떻게 자란 것이냐? 그것은 사람이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고 서서히 진리 실제에 진입함으로써 도달한 효과다. 네가 진리를 일부 깨달으면 이런 진리는 네 생명으로 변하고, 사람됨의 근본으로 변하고, 네 사물 보는 관점이 되고,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 그러면 너는 강해져서 여간해서는 연약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전에 너는 리더를 맡으면 뛸 듯이 기뻐하다가도 교체가 되면 한두 달을 소극적으로 지냈다. 무슨 일을 맡겨도 하기 싫어하고, 무슨 일을 맡겨도 소극적인 정서로, 무성의한 태도로 대하고, 심지어 내팽개치곤 했다. 지금 너는 교체하겠다고 하면 이렇게 대답한다. “교체된다고 해도 저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단 하루도 소극적으로 지내지 않을 겁니다. 오늘 교체되고 내일 뭔가를 해야 한다면 이어서 하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 강해진 것이다. 이런 강인함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네가 만약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면,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런 분량이 생겼겠느냐? 이방인들의 처세술로 살아간다면 너는 영원히 강해질 수 없다. 진리에 따라 살아야만 체면과 지위, 허영을 점차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러면 결국 어떤 일도 너를 넘어뜨릴 수 없고, 어떤 일도 네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분량이 생긴 것이고, 강해진 것이다. 강해지고 분량이 자라면 본분 이행이 점점 합격에 가까워지지 않겠느냐?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동시에 일정한 분량을 이미 갖춘 것 아니겠느냐? 이 분량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느냐? 분량이 생기면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진실로 순종하고, 진실로 충성하게 된다. 또 자신의 본분을 바르게 대하게 된다. 범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분량이 자라난 모습이다.
이제는 구원받는 이 일이 반드시 일정에 있어야 하고, 더 이상 흐지부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겠느냐? 각각의 진리를 깨닫는 것은 구원받는 일에 아주 중요하다. 너는 그 어떤 진리도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힘만 들이고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고생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시련이 닥쳤을 때 넘어지지 않고 버틴다고 다가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정말 구원받는 일을 일생일대의 큰일로 생각하고, 진리 얻는 것을 일생일대의 큰일로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든 내려놓을 수 있고, 내려놓기가 쉽다. 만약 구원받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매하고 무지한 것이고, 믿음이 너무 작아서 여전히 위험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본분 이행에 합격하기가 무척 어렵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려면 사람은 많은 진리를 깨닫고 많은 진리에 진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닫고 진입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이행하는 본분은 점점 합격점에 이르게 된다. 사람의 온갖 연약함, 다양한 정서는 점차 달라지고 여러 가지 내적 상태도 점차 개선된다.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동안 사람 내면에서는 하나님 믿고 구원받는 일에 대한 이상이 갈수록 또렷해지고, 동시에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과 요구는 점점 절실해질 것이다. 절실하다는 건 어떤 뜻이냐? 구원받는 일이 급선무이고 너무나 중요한 일임을 깨닫는 것이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으면 너무 위험하고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이런 마음가짐을 절실하다고 하는 것이다. 너는 처음에 구원받아 온전케 되는 일에 전혀 개념이 없다. 그러다가 점차 사람은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죄악과 패괴 성품 속에서 사는 것은 자유롭지 않고 너무 고통스럽고, 결국에는 사악한 사탄 조류에 휘말려 혼자서는 굳게 서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네가 얼마나 강하고 굳건하든 끝까지 하나님을 따라간다는 보장이 없으니 반드시 진리를 추구하고 반드시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겪어야 진리를 깨달아 자신을 인식할 수 있고, 하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는 의지가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비로소 구원받는 일에 절실함을 느낄 것이다. 구원을 받으려면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 필수적이다. 진리 추구는 사람이 영원히 포기하면 안 되고, 가볍게 보아서도 안 되는 큰일이다. 진리를 추구하느냐 마느냐는 구원받는 일과 직접적으로 관계되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 모든 어려움은 모두 진리 추구를 통해 해결할 수 있고, 사람의 연약함, 무지와 우매함도 점차 바뀔 수 있다. 여기서 바뀐다는 의미는 무엇이냐? 바로 네가 죄를 이기는 능력이 강해졌다는 뜻이다. 패괴 성품, 사악한 사물에 대해 점점 민감해지고, 마음속으로 이 일에 점점 분별이 생기고 감각이 생긴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이런 의식이 없다. 죄악과 사악함, 그리고 사탄에 속한 것들을 보더라도 마음에 아직 감각이 없는데, 그러면 안 된다. 그건 분량이 부족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각종 범죄 행위, 사탄의 온갖 추한 모습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고 아무런 분별도 없고, 진실한 증오는 더더욱 없다. 자신의 행동, 자신이 드러내는 패괴,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패괴 성품, 추악한 요소에 대해서도 전혀 지각하지 못하고 전혀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니 증오는 말할 것도 없다. 그건 분량이 너무나 모자란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부족하든, 지금 사람이 얼마나 연약하고 분량이 얼마나 작든, 그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길을 주고 방향을 주어 사람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본분 이행이 합격점에 점점 다가가는 동안, 너 역시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 노력하고 있다.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죄를 이기는 능력도 점차 강해지고, 사악한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도 점점 강해진다. 그 후 너의 연약함, 패역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해결된다. 예를 들면, 네 분량이 작을 때는 어떤 일을 만나면 너는 그것이 좋지 않은 걸 알면서도 거기에 구애를 받고 얽매였다. 심지어 그 속에 빠져들기도 했다. 네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일부 실행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너는 그 일에 대해 속으로 혐오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하지 않겠다고 거절할 수도 있고, 동시에 다른 사람이 거기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울 수도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발전한 것이고 분량이 자란 것이다. 분량이 자랐다는 표징이 무엇이냐? 먼저 본분을 충실하게 이행하며 건성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진실하고 실제적이며, 하나님에게도 진실로 순종하게 된다. 그리고 사탄의 시험과 교란을 분별하고 이겨 낼 수 있다. 사탄의 미혹과 통제가 더 이상 통하지 않고, 그러면서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구원의 기준에 이른 것이다.
너희는 오늘 이 교제를 통해 자신이 이행한 본분이 합격인지 가늠할 수 있겠느냐? 가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네가 이 진리들을 조금은 깨닫고 성장했다는 뜻이다. 아직도 가늠할 수 없다면 그것은 네가 아직 알아듣지 못했고, 아직은 이를 수 없다는 뜻이다. 우선은 가늠할 줄 알아야 하고, 또 한 가지는 어떻게 해야 합격인지 알고, 길을 알아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잘 알아야 한다. 전에는 본분 이행에 관한 얘기가 대부분이었고, 합격한 본분 이행에 관한 얘기는 별로 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주로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기준을 다루고, 합격의 기준 및 그에 관련된 각각의 진리를 자세하게 교제해 보았다. 그리고 본분을 이행할 때 사람이 어떤 문제를 피하고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 어떤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하는지, 이런 것들은 모두 중요하다. 특히 제물을 훔쳐 먹지 말고, 함부로 연애하지 말고, 사역지침을 어기지 마라. 이런 짓을 저지르면 너는 완전히 끝이고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 그러니 잘못된 길을 가지 말고 악인의 길을 가지 마라. 그런 길을 가면 정말 희망이 없고, 아무도 너를 구해 줄 수 없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지 않으면 너 또한 너 자신을 구할 수 없다. 만약 그 지경까지 간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이니 돌려세우기 힘들다. 그러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것이다.
2018년 1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