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파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지난번 예배 때는 합격한 본분 이행에 관해 이야기했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네 가지 기본 조건 중 첫 번째이자 가장 기본적인 항목이다. 지난번에는 본분 이행의 정의와 여러 원칙에 관해 교제했고, 몇 가지 예를 들어 불합격한 본분 이행의 갖가지 양상에 관해 교제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선민들에게 이런 문제를 전부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실과 이런 본분 이행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등을 분명히 알려 주었다. 이런 것에 관한 교제를 마친 후, 사람은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합격점에 이를 수 있는지, 본분을 이행할 때는 어떤 점에 주의해야 하고, 어떤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지, 어떤 일을 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고 멸망에 이르는지 대체로 이해하게 되었다. 어떻게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지에 대한 교제를 통해 이 측면의 진리에 관해 개념적으로 어느 정도 기초적인 이해와 인식이 생겼느냐? 각 항목의 본분을 이행할 때 너희는 각 부류 사람이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 어떤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 이런 구체적인 내용들이 분명히 이해되었느냐? (아직 분명히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합격한 본분 이행이란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분류해서 교제할 필요가 있겠구나.
하나님 집의 사역은 크게 몇 가지로 나뉜다. 하나님 집의 모든 사역 가운데서 제일선에 있는 사역은 복음 전파 사역이다. 이 사역은 관련된 인원이 많고, 관련 범위 또한 무척 넓으며, 사역량도 방대하다. 이는 첫 번째 사역이자 교회의 전체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하나님의 경륜 중 복음 확장 사역은 무엇보다 중요한 사역이니 반드시 첫 번째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그럼 이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의 직명은 무엇이겠느냐? ‘복음 전파자’이다. 두 번째, 교회의 내부 사역 중 가장 중요한 본분은 무엇이겠느냐? (리더 일꾼입니다.) 그렇다. 교회의 각급 리더 일꾼으로, 각 팀의 책임자와 팀장도 포함된다. 이 본분이 가장 중요하다. 그들이 맡고 있는 업무는 전부 중요한 사역이다. 이것이 두 번째 부류이다. 세 번째, 복음 확장 사역 중 어떤 본분이 비교적 중요한 사역이겠느냐? (특수 본분들입니다.) 그렇다. 글쓰기, 번역, 뮤직, 촬영, 디자인, 외부 업무 등 각종 특수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들이다. 이것이 세 번째 부류이다. 네 번째는 주로 평범한 본분 이행으로, 접대, 요리, 물품 구매 등 후방 업무 사역에 속하는 본분이다. 이 본분은 너무 구체적으로 세분화할 필요는 없다. 다섯 번째 부류는 가정 환경이나 건강 상태 등의 이유로 시간이 날 때만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도 힘닿는 데까지 본분을 이행하는 부류에 속한다. 이것이 다섯 번째 부류이다. 이 외에,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섯 번째 부류에 속한다. 이들은 본분 이행과 관계가 없는데, 왜 한 부류로 구분했겠느냐? 그들 또한 교회의 인원이라고 할 수 있기에 마지막 부류로 나열한 것이다. 그들이 설교를 많이 듣고 진리를 깨달아 자발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겠다고 요청할 경우,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한, 또 자질이 너무 떨어지지 않고 악인이 아니어서 교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한 본분을 이행하도록 허락해서 회개의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방금 총 여섯 부류에 관해 이야기했다. 교회의 인원은 기본적으로 다 여기에 속한다. 나머지는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량이 작고 진리에 대한 이해가 너무 얕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어떤 사람은 자질이 좀 있다고 할지라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원칙을 모르니 어떤 본분도 이행할 수 없다. 그들이 2~3년쯤 믿어 본분을 이행하게 되면 각 부류의 본분 이행 인원으로 구분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 이 여섯 부류에 관해 분명히 구분했다. 첫 번째는 복음 전파자, 두 번째는 교회의 각급 리더 일꾼, 세 번째는 특수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 네 번째는 평범한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 다섯 번째는 시간 날 때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 여섯 번째는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인원이다. 몇 가지 유형을 나열한 이 순서는 어떤 원칙에 근거한 것이겠느냐? 사역의 성질과 사역에 필요한 시간, 사역량, 그리고 책임지는 사역의 중요성을 근거로 구분한 것이다. 예전에 본분 이행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기본적으로 본분 이행과 관련된 다양한 측면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하는 진리 원칙에 따라 교제했을 뿐 분류를 나누지는 않았다. 각 부류 사람이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 어떤 진리에 진입하는 데 집중해야 하는지 등에 관해서도 세부적으로 교제하지 않았다. 이제 이 측면의 진리를 완벽히 교제하고, 유형별로 하나하나 이야기하겠다. 그러면 분명해질 것이다.
먼저 복음 전파자가 깨달아야 할 진리에 관해 교제하겠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깨닫고 갖춰야 할 최소한의 진리는 무엇이냐? 어떻게 해야 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너는 반드시 복음 전파와 관련된 이상(異象) 측면의 진리를 갖추어야 하며, 복음 전파의 원칙을 파악해야 한다. 복음 전파의 원칙을 파악한 후에는 어떤 진리를 갖추어야 사람의 관념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분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에게 전해도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하면 안 되는지 먼저 이 원칙을 이해해야 한다. 전해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 전한다면 헛수고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환을 불러일으키기가 쉽다. 이는 반드시 이해해야 할 부분이다. 이 밖에, 전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해도 네가 한두 마디 말이나 심오한 도리를 좀 말한다고 해서 바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쉽지는 않다. 어쩌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다가 인내심이 바닥나서 참도를 알아보려는 사람을 포기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랑과 인내입니다.) 사랑과 인내를 지녀야 한다. 사랑이 전혀 없다면 인내심도 없을 것이다. 복음을 전할 때는 이상 측면의 진리를 깨닫는 것 외에도 크나큰 사랑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야 복음 전파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 복음 전파의 본분을 어떻게 정의해야겠느냐? 어떻게 바라보아야겠느냐? 복음 전파자는 다른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과 어떤 다른 점이 있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말세 사역과 하나님이 왔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혹자는 그들을 ‘복음 사자’, ‘보냄을 받은 자’, ‘강림한 천사’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정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럼 복음 전파자의 사명은 무엇이냐?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이미지냐? 어떤 역할을 하느냐? (전도자입니다.) 전도자, 사자, 그리고 또 뭐가 있느냐? (증인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정의한다. 그럼 이런 정의가 정확하겠느냐? 흔히들 ‘전도자’, ‘증인’, ‘복음 사자’ 등 비교적 고상한 말을 쓰는데, 이 세 가지는 자주 들리는 단어이다. 사람이 이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의 직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하든 ‘복음’이라는 두 글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그럼 이 세 가지 말 중 어떤 것이 이 측면의 본분과 그나마 관계가 있고 적절하며 이성적인 호칭이겠느냐? (전도자입니다.) 많은 사람이 ‘전도자’라는 호칭이 비교적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증인’이라는 호칭에 동의하는 사람은 없느냐? (있습니다.) ‘복음 사자’라는 호칭에 동의하는 사람은 없느냐? (없습니다.) 복음 사자라는 호칭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먼저 ‘전도자’라는 호칭이 적절한지 이야기해 보자. ‘전(傳)’이란 전하고 전파하고 전달하고 선전한다는 의미이다. ‘도(道)’는 무슨 의미이냐? (참도를 가리킵니다.) 그렇게 말하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도’란 하나님이 사역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그 참도를 의미한다. 먼저 전도자에 관해서는 이렇게 해석하고 정의하겠다. 이제 ‘증인’이라는 호칭에 대해 말해 보자. 증인이 증거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세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증거한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호칭은 상대적으로 적절해 보인다. 복음 사자는 어떠하냐? ‘복음’이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나님이 사역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돌아왔다는 이 좋은 소식, 희소식을 말한다. ‘사자’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사자’라는 두 글자를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일 것이다. 즉, 하나님이 친히 사람을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거나 하나님이 어떤 시기에 어떤 사람을 보내 하나님의 말씀이나 중요한 소식을 전하게 할 때 그 사람을 가리켜 사자라고 한다. 그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모두 이런 역할을 수행하겠느냐? 이런 사역을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들이 하는 것은 어떤 사역이겠느냐?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그 사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증거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 사명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그것은 피조물의 본분입니다.) 이는 사람의 본분이다. 하나님이 일찍이 너에게 하나님의 새 사역과 복음을 전파하라고 분부하고 알려 주고 부탁했든 그렇지 않든 네게는 이 복음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전하고 전파하여 그들이 이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앞으로 오고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게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는 사람의 본분이자 직책일 뿐, 하나님이 파견했다거나 보냈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므로 ‘사자’라는 단어를 여기에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럼 이 단어를 쓰는 것은 어떤 성질을 갖겠느냐? 거짓되고 거창하고 공허한 성질을 갖는다. ‘사자’라는 단어는 너무 거창하고 부적절하다. 구약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사자’라는 역할은 없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전체 경륜 사역 기간에 그런 역할은 없었다는 뜻이다.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사자’라는 호칭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그런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류 가운데 이런 역할은 없고, 이 두 글자와 연관되거나 상관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사자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이 인류를 경영하는 이 크고 방대한 사역과 그리 큰 관계가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세 단계 사역에 사자라는 역할은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말을 언급하지 마라. 그 말은 유치하다. 사람이 ‘복음 사자’라는 호칭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한다. 사람은 피와 살로 구성된 육이면서 또한 패괴된 인류이다. 사자가 어떤 유형인지 너희는 아느냐? (모릅니다.) 모르면서 감히 그 호칭을 쓴다면 이는 사칭이다. 딱 잘라 말하건대, 사자는 인류와 관계가 없으며, 인류는 ‘사자’라는 두 글자와 무관하고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복음 사자, 사자의 강림, 사자의 사역 등의 일은 기본적으로 구약 아브라함 시대에 이미 일단락되고 끝맺음 되었다. 하나님이 정식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기 시작한 후로는 더 이상 ‘사자’라는 단어를 써서는 안 된다. 어째서 더 이상 써서는 안 된다고 하겠느냐? (사람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감당하고 못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패괴된 인류와 무관하며, 패괴된 인류 중에는 이런 역할이 없고, 이런 호칭도 없다. 이제 ‘전도자’라는 단어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도’라는 단어를 비교적 객관적이고 정확하고 깊이 있게 정의한다면 과연 어떤 의미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좀 두루뭉술한 표현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그것이 단순히 하나님이 이번에 사역을 한다는 이 복음, 사역만을 가리키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복음 전파자가 전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복음 전파자가 하는 사역은 ‘도’와 얼마나 관계가 있느냐? 그들은 자신이 이행하는 본분 범위 안에서 과연 어떤 사역들을 하느냐? 그들이 하는 일은 말세 하나님이 이미 땅에 와서 어떤 사역을 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등 기본적인 소식을 복음 대상자에게 알려 주어 상대가 듣고 받아들인 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뿐이다.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면 그들은 복음 전파 직책을 다한 것이다. 그럼 그들이 사람에게 알려 주는 그 소식 안에 ‘도’의 함의가 조금이라도 있겠느냐? ‘소식’과 ‘복음’ 두 가지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럼 ‘도’와는 관계가 있겠느냐? (관계가 없습니다.) 어째서 관계가 없겠느냐? ‘도’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 가장 간단한 말로 해석하자면 ‘길’이다. ‘길’은 ‘도’에 대한 정의를 개괄하는데, 이는 비교적 구체적인 해석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도’는 하나님이 선포한, 인류를 구원하여 사탄의 패괴 성품과 결박,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는 모든 말씀이다. 이렇게 말하면 정확하고 구체적이지 않으냐? 그럼 ‘전도자’라는 단어로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을 정의하는 게 적절하겠느냐? (부적절합니다.) 전도자의 본분은 복음 전파보다 훨씬 크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증거하는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호칭이다. 평범한 복음 전파자가 전도자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복음 전파는 그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역을 간략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전도자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며, 전도자가 이행하는 본분에 이르지도 못한다. 그러니 그들을 전도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전도자라는 호칭은 비교적 고차원적이다. 복음 전파자는 이 호칭에 닿을 수 없으니 이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제 남은 것은 ‘증인’이라는 표현 하나구나. 증인이 증거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세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전파하고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면 적절하겠느냐? 증인에 대해 정확하게 정의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증인이지 복음의 증인이 아니다. 만약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증인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그럼 이 ‘증거’라는 말을 여기에서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세부적으로 파고든다면 ‘증거’라는 단어를 여기에서 쓰는 것 역시 적절하지는 않다. 복음 전파자는 그저 하나님이 발한 음성을 하나님 말씀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하나님의 현현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뿐, ‘증거’라는 두 글자의 진정한 의미에는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증거’란 그가 교제하고 전파하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고,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과 관련된다. 지금 그들은 그저 사람들을 교회로, 하나님이 땅에서 사역하는 장소로 데리고 올 뿐, 하나님의 성품과 소유, 어떠함, 사역을 증거하는 것 같은 사역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증인이라는 호칭이 그들에게 적합하겠느냐? 정확히 말해 너무도 부적합하고 부적절하다. 지금 복음 사자, 전도자, 증인이라는 세 단어를 따져 보고 헤아려 보았다. 복음 전파자들에게 이런 호칭을 쓰는 것은 전부 부적절하다. 이 단어들이 종교적으로 생겨났든, 아니면 하나님 집 사람들이 자주 쓰는 것이든 전부 적합하지 않고 적절하지도 않다. 이제 이것은 한 가지 질문으로 이어진다. 호칭이 중요하겠느냐, 중요하지 않겠느냐? (중요합니다.) 중요하겠느냐? 예를 들어, 네가 원래는 장삼(張三)이라고 불렸는데 이제 이사(李四)라고 불린다고 해서 너라는 사람이 달라지겠느냐? 너는 여전히 너 아니겠느냐? 그러니 어떻게 부르든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데 왜 이 몇 가지 단어를 해부하겠느냐? 사람이 복음 전파의 본분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이 본분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정의하며, 어떻게 그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을지, 어떻게 그 본분을 대해야 할지 알게 하여 반드시 먼저 그 본분에서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정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무척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호칭 역시 정확해야 한다.
방금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에 대한 몇 가지 호칭과 표현에 관해 간략히 분석했다. 증인, 전도자, 복음 사자 등 몇 가지 호칭과 정의는 모두 정확하지 않다. 어째서 정확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이런 명칭에 부합하는 실질적인 사역을 전혀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행사와 사역, 본질을 증거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사역을 한 적이 없고, 그들이 이행한 본분 또한 그런 것이 아니므로 증인이라는 호칭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전도자라는 호칭도 마찬가지로 그런 성질을 갖고 있으며, 복음 사자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이 호칭은 너무도 공허하며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에게 씌운 감투이다. 사자라는 호칭은 어떻게 비롯되었느냐? 인류의 교만한 성품이 커져서 생겨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감투를 씌우고 싶은 것이 아니냐? 자신에게 이런 호칭을 씌우는 것은 전부 이성적인 모습이 아니다. 다른 호칭은 더더욱 적합하지도 적절하지도 않으니 더 이상 하나씩 나열하거나 해부하지는 않겠다. 이 몇 가지 호칭이 전부 부적절한 이상, 우리는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이 이행하는 본분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보도록 하자. 종교계에서는 복음을 전해 사람을 얻는 것을 어떻게 칭하느냐?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람을 얻는 것을 두고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그들이 만나서 하는 말은 전부 자기가 어떤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고,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가 하는 것들로, 서로 누가 맺은 열매가 많은지,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등을 비교한다. 왜 그런 것을 비교하겠느냐? 그들이 표면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열매를 맺은 개수지만, 실질적으로는 무엇이겠느냐? 공로, 그리고 천국에 들어갈 밑천이다. 이렇게 서로 비교하는 그들이 복음 전파 사역을 본분으로 여기겠느냐? 그들은 왜 열매를 맺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겠느냐? 그들은 그것이 천국에 들어가고 복을 얻고 상을 받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여긴다. 만약 이러한 것과 무관하다면, 그들이 서로 만났을 때 그런 것을 비교하겠느냐? 다른 것을 비교할 것이다. 상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관계있는 것 말이다. 복음을 전해 사람을 얻고 열매를 맺는 일은 천국에 들어가고 상을 받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렇기에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고 상을 받기 위해 누가 복음을 전해 더 많은 사람을 얻었는지, 누가 더 많은 열매를 맺었는지 질리지도 않고 비교한다. 그 후 천국에 들어가고 상을 받을 밑천을 더욱 늘리고 확신을 키우기 위해 어떻게 더 많은 사람을 얻고 더 많은 열매를 맺을지 마음속으로 계산한다. 복음 전파 본분을 대하는 각 부류 사람의 태도는 이렇게 전부 드러났다. 그들의 이런 복음 전파 태도와 출발점이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함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그릇된 관점이다. 그들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저 상을 받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렇게 거래적인 성격을 띤 본분 이행은 분명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위배되며, 하나님의 뜻에도 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혐오를 산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든 그들의 마지막 종착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은 복음 전파를 하나의 직업으로 여기고, 복과 상을 받기 위한 길, 교량으로 삼았다. 그들이 이 본분을 이행하고 이 부탁을 받아들인 속셈은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기 위한 것도,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복과 상을 받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맺은 열매가 얼마나 되든, 그들은 증인도 아니고 전도자도 아니다. 그들이 한 사역도 본분을 이행한 것이 아니라 복을 받기 위해 고생하며 힘만 쓴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복과 상을 받는 데 있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얻는 것을 이용해 하나님과 거래했으며, 그것을 대가로 상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얻으려 했다. 이 문제가 심각하지 않으냐? 이 문제의 본질은 무엇이냐? 이는 복음을 팔아넘긴 것이다. 복음을 ‘팔아넘김’으로써 그 대가로 복을 받는 것, 이는 하나님과 거래하는 성질을 띠지 않느냐? 그들의 이런 속셈과 행위 방식, 그리고 일 처리 성질은 이런 본질을 지닌다. 복음을 팔아넘겨 상을 얻는 것은 마치 교계에 있는 소위 ‘전도자’들의 문제와 같다. 그럼 지금 하나님 집에서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과 그들 사이에는 공통적인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 공통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무엇이냐? 바로 복음을 팔아넘겨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것이며, 그리하여 복을 받고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이 일을 이렇게 말한다면 누군가는 불복하겠지만, 분명 많은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복음 전파자 중 많은 이가 사람을 얻은 후에 자기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공을 세웠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에게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제가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영원히 하나님을 믿지 못했겠죠. 당신이 이 복음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아서입니다. 저한테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죠.” 상대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로 그는 늘 이 일을 마음에 두고 물어본다. “당신은 누구 덕에 복음을 얻게 됐습니까?” 하지만 상대는 생각 끝에 “당신이 복음을 전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성령이 역사하신 겁니다. 당신의 공이라고는 할 수 없겠네요.”라고 대답하고는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상대가 입을 닫자 화가 나서 계속 물어본다. 그가 계속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는 무엇이겠느냐? 공치사를 하는 것이다. 또 어떤 복음 전파자들은 전한 대상이 교회에 들어갈 조건이 돼도 교회에 넘겨주지 않는다. 혹자는 몇 사람에게 전한 후 넘겨주지 않으며, 또 혹자는 20~30여 명에게 전하여 교회 하나를 세울 정도가 되었는데도 교회에 넘겨주지 않는다. 어째서 그러겠느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아직 토대가 견고하지 못합니다. 이들의 토대가 견고해지고 의심을 품지 않고 쉽게 미혹되지 않을 정도가 되면 그때 교회에 넘기겠습니다.” 하지만 반년이 지나 그들에게 어느 정도 토대가 생기고, 교회에 들어갈 원칙에 부합돼도 그는 여전히 그들을 넘겨주지 않는다. 그는 직접 그 사람들을 이끌려고 한다. 이는 어떤 의미겠느냐? 만약 얻을 이득이 없다면 그가 기꺼이 그 사람들을 이끌려고 하겠느냐? 그가 바라는 이득은 무엇이겠느냐? 그 사람들에게서 이익을 꾀하고 이점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들을 교회로 넘긴다면 그런 이득을 얻지 못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분별해야 한다. 이는 교계의 많은 목사와 장로가 참도임을 분명히 알고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나아가 신자들까지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사실 그 이유는 명리 때문이다. 만약 신자들이 참도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교회에 얹혀살지 못할 것이다. 이 복음 전파자들은 복음 대상자가 교회에 들어가는 순간 자기를 잊어버릴까 봐, 그렇게 되면 교회에 얹혀살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을 넘겨주지 않는 것이다. 그럼 언제 넘겨주겠느냐? 그 사람들이 모두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 순종하게 되면 그제야 교회에 넘겨준다. 그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간 후, 인성이 괜찮고 순수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며 진리를 사랑하는 이들은 자주 설교를 듣고 얼마간 진리를 깨닫고 그를 분별하게 되어 “그 사람은 적그리스도나 바울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후 그와 다시 만나면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는 상대가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화를 낸다. “양심도 없군요! 제가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다면 당신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참도를 얻을 수 있었겠어요?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이끌어 준다고 어머니 같은 저를 까맣게 잊은 겁니까?”라고 말하며 ‘어머니’ 운운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이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분명 좋은 작자가 아닐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해 얻은 자들은 누구의 사람이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비록 복음을 전하면서 공을 들였다고는 하나 그가 얻은 사람은 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지 그를 믿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가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자기 손안에서 통제하여 자신을 따르게 하려고 한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길에서 강도질을 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을 가로막고, 그들이 모두 그를 통해 하나님 앞으로 가게 하며, 자신이 모든 것을 전달해 주려고 한다. 이는 교회에 얹혀살려는 것 아니겠느냐? 그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어떤 행위냐? 사탄에게 속하는 행위이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정체를 드러내 교회와 하나님의 선민들을 통제하려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각지 교회 어디에나 존재한다. 심각한 경우, 손안에 수십 명, 심지어 백여 명을 틀어쥐고 있으며, 정도가 덜한 경우 3~5명에게 전하고는 늘 상대가 자신에게 감사하기를 바라고 그들을 만날 때마다 옛날 일을 들먹이면서 그들이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의 일을 끄집어낸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사는 의도는 무엇이겠느냐? 은혜를 잊지 않게 하는 한편, 그들이 하나님 집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복음을 전했기 때문임을, 그의 공로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가 이 일을 언급하는 데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이 이뤄지지 않으면 그는 상대를 욕한다. 첫 번째로 뭐라고 욕하겠느냐? (양심이 없다고 욕할 것입니다.) 그의 그런 말이 이성적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 비이성적이라고 하겠느냐? (그는 잘못된 위치에 서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의 본분이자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후 그것이 자신의 공로라고 생각할 뿐 자신의 본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공로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먼저, 그는 서 있는 위치가 잘못되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은 협력할 뿐이다. 하나님이 사역하지 않으면 사람이 뭘 할 수 있겠느냐? 다음으로,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의 공로가 아니고, 그에게는 어떤 공로도 없다. 그것은 사람의 본분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얻으려 할 때 그가 그저 약간 협력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을 구원하고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니 그와는 무관하다. 그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저 전달 사역을 하는 것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사람에게 전하는 것일 뿐이니 은혜니 뭐니 언급할 만한 건 못 된다. 그러므로 상대가 그를 무시해도 양심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복음 전파의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들이 자주 생기지 않느냐? 너희는 이런 패괴를 표출한 적이 있느냐? (있습니다.) 심하게 표출했느냐? 사람을 욕할 정도였느냐? 사람을 미워할 정도였느냐? 사람을 저주하고 통제하려는 정도까지 갔느냐? 네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그를 독점하고 통제하며 네 소유로 만들려고 하고, 하나님에게 바치지 않고, 네가 복음을 전한 상대는 네 충실한 자식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느냐? 많은 사람이 복음 전파를 열매 맺는 것이라고 본다.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으면 그 사람은 그의 열매이니 그의 부하가 되어 오직 그의 명령만 들어야 하고 그를 신이나 주인으로 여겨야 한다는 이런 생각을 가진 적은 없었느냐? 설사 이렇게 눈에 띄게 드러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해도 이런 측면의 패괴 성품이 있었을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이냐? 기본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사람이 자신의 위치에 제대로 서 있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복음 전파를 자신의 본분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복음 전파를 본분으로 여긴다면, 네가 어떻게 행동했든,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얻었든 그것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며, 자기가 다해야 할 책임, 의무이니 공로를 논할 것은 못 될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야 진리에 부합한다. 그럼 복음 전파자 중 일부는 왜 자기가 전해서 얻은 사람을 자기 손아귀에 움켜쥐고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 하겠느냐? 그들의 본성이 너무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비이성적이기 때문이며, 또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이러한 측면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어리석고 교만하고 미개한 일을 저질러 모두가 역겨워하고 하나님도 혐오하는 것이다.
사람은 일을 좀 하고 밑천이 좀 생기고 공을 좀 세우면 뽐내고 싶어 하며, 남을 통제하고자 하고, 그것으로 거래해서 상과 좋은 종착지를 얻어 내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하나님의 복음을 교환물로 삼기도 한다. 그것으로 어떤 교환을 하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복음 대상자 집에 갔는데, 그 집이 무척 가난해서 그 사람을 얻은 후에도 이렇다 할 이득을 얻지 못할 것 같아 상대에게 흥미를 잃는다. 심지어는 상대를 무시하고 늘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리더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을 거예요. 설령 믿을지라도 진리는 얻지 못하겠죠.” 이렇게 핑계를 대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할 때 상대가 받아들였다면 너는 어떻게 해명할 것이냐? 너는 왜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리 없다고 했느냐? 왜 그렇게 함부로 재단했느냐? 그가 믿을지 믿지 않을지,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냐? 알 수 없다. 그런데 너는 왜 그 사람을 얻지 않았느냐? 그 사람에게 편견이 있었고, 그를 무시했으며, 사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너는 그를 얻지 못했다. 이런 식의 본분 이행은 직무 유기이다. 너는 사랑과 책임을 전혀 다하지 않았다. 그럼 하나님은 그것을 공로로 보겠느냐, 아니면 과오로 보겠느냐? (과오로 보실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과오이다. 그 과오는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이냐? 네가 그 사람에게서 이득을 얻지 못한 것이 원인 아니겠느냐? 그에게 복음을 전해 봤자 아무 이익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너는 반감과 앙심을 품고는 그가 구원의 은혜를 얻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고는 이유와 핑계를 찾아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이는 심각한 직무 유기이자 과오이다! 취할 만한 이득이 없다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어떤 태도냐? 복음을 팔아먹는 전형적인 태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팔아먹겠느냐? 구체적인 내용과 과정을 말해 보아라. (그는 자신이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 여부에 근거하여 상대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지를 판단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복음을 상품으로 삼아 판매하고, 자신이 얻고자 하는 이익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이익을 볼 수 없을 것 같자 복음을 전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자신의 사유 재산으로 여기면서 돈과 세력이 있고 잘 먹고 잘 입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한테 복음을 전하면 앞으로 나도 그의 집에서 머물면서 좋은 것을 먹고 입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어떤 행위냐? 복음을 팔아먹는 전형적인 행위이다. 그는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이 새 사역을 한다는 기쁜 소식을 상품으로, 자신의 사유 재산으로 취급하여 가는 곳마다 사기를 치며 사적인 이익과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얻어 냈다. 이것이 본분 이행이겠느냐? 이는 ‘장사’라고 한다. 복음을 판매해 이익을 얻은 것이다. 판매란 거래의 방식으로 자기가 보유한 물건을 팔고, 그 대가로 원하는 돈이나 물질을 얻는 행위이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복음을 판매했느냐? 복음 대상자에게서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 의미는 ‘나에게 이익이 되면 복음을 전하겠지만, 콩고물이 하나도 떨어지지 않으면 핑계를 대고 복음을 전하지 않을 거야. 그건 거래가 성공하지 못한 거야.’라는 것이다. 어째서 거래가 성공하지 못했겠느냐? 그가 이익을 꾀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부류를 뭐라고 부르겠느냐? ‘강호의 사기꾼’이라고 부른다. 즉, 진실된 것은 없고 도처에서 속임수로 사기를 치며 입을 놀려 돈과 이익을 얻는 것이다. 이런 복음 전파가 본분 이행이겠느냐? 이는 100% 악행이다. 그들의 행동은 본분 이행과 무관하다. 그들은 복음 전파를 본분으로 삼거나 자신의 직책이나 의무, 하나님의 부탁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것을 하나의 일, 직업으로 여겨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어 내고 자신의 이익과 요구를 충족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부유한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먹고 입고 거하는 것 모두 좋아지자 떠나기를 원치 않으며, 복음 대상자 앞에서 우는소리를 한다. “이곳은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고 축복해 주셨군요. 집집이 차가 있고 이층 양옥에서 살잖아요. 좋은 옷을 입고, 끼니마다 고기를 먹고요. 저희 고향은 안 그렇답니다.” 복음 대상자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고향이 그렇게 가난하다면, 저희 집에 자주 와서 머물다 가세요.” 그리고 그에게 선물을 안겨 준다. 이것이 바로 또 다른 형태로 얻어 내고 돈과 물질을 강탈하는 행위이다. 그들이 강탈하는 근거는 무엇이냐? “우리는 아무 대가 없이 당신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했죠. 당신들은 이렇게 큰 복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여 저희에게 좀 베푸는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까?”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갖가지 방식으로 형태를 바꿔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물질과 돈을 강탈한다. 이들이 복음 전파를 기회로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첫 번째 행위는 복음을 팔아넘기는 것이다. 이는 가장 심각한 성질을 띤다. 그다음은 다른 형태로 강탈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어느새 주머니가 두둑해지고 삶이 여유로워진다. 혹자는 “삶이 여유로워지는 것은 좋은 일 아닙니까? 하나님의 축복 아닐까요?”라고 말하는데, 그건 헛소리다! 개인의 간계와 수법으로 재물을 강탈하고 사취하고도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말을 하다니, 이는 어떤 성질을 띤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축복하지 않는다. 그럼 사람이 왜 그런 인식을 갖고 있겠느냐? 그것은 사람이 지닌 야심과 탐욕스러운 사탄 본성 때문이다.
복음 전파자는 모두 숱한 고생을 한다. 종교인들로부터 박해와 집중 공격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사탄 정권에 넘겨지는 등 조금만 조심하지 않으면 큰 붉은 용에게 체포되기 쉽다. 그런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일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는 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조금만 고생해도 원망을 입에 달고 다닌다. 어떤 복음 전파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정말 많은 말을 했는데 물 한 잔 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상대가 물을 따라 주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느냐? 그 복음 전파자의 말에는 한 가지 성품이 숨어 있다. 그 함의인즉슨, 복음을 전할 때는 누림과 이익이 있어야 가치가 있지 고생하거나 물 한 잔 얻어 마시지 못하면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강요와 거래의 의미가 들어 있다. 복음 전파가 항상 거래의 성질을 띤다면 그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겠느냐? 그는 본분 이행에서 그 정도 고생조차 하지 않으려 하며, 작은 일 하나만 생겨도 소극적으로 변한다. 그렇게 해서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그는 또 “물만 안 따라 주는 게 아니라 점심때가 됐는데 밥도 안 주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상대가 그에게 밥을 주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는 왜 몇 년 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늘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접대하는지, 어떤 먹고 마실 것을 주는지, 어떤 선물을 주는지에 신경 쓰겠느냐? 설마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겠느냐? 이는 인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에게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조금이라도 있겠느냐? 이 밖에, 복음을 전할 때는 어떤 측면에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 그는 왜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냐? 어째서 조금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냐? 복음을 전해 주는데 상대가 물을 따라 주지 않고, 식사 대접도 안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겠느냐? 그것은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그것은 우리의 본분이다. 거기에는 어떤 부차적인 조건도 없다. 상대는 너에게 먹을 것, 마실 것을 주거나 네 시중을 들거나 너를 웃는 낯으로 대해 줄 의무도, 네 말을 경청하고 네게 순종해야 할 의무도 없다. 만약 네가 상대에게 그런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태도이니 이 일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상대가 하나님 집에서 규정한 복음 전파 원칙에 부합하는 한, 우리는 그에게 복음을 전할 의무가 있다. 설사 그가 지금은 좋은 태도를 보이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 언제까지, 어느 정도로 인내해야겠느냐? 그가 너를 거부하고 집에 들이지 않으며, 네가 아무리 이야기하고 전화해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을 통해 약속을 잡아도 안 되며, 네게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 복음을 전할 방도가 없다. 이럴 때는 네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본분 이행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다면, 모든 방법을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고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해야 한다. 예를 들어, 네가 어떤 사람을 2~3년 동안 접하면서 여러 차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했는데도 그가 받아들이려는 뜻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 보자. 하지만 그 사람이 이해력이 뛰어나 확실히 복음 전파 대상에 속한다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먼저, 절대 그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계속 정상적으로 교류하면서 그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고 하나님 사역을 증거해야 한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 언젠가 그가 깨달음을 얻으면 참도를 알아볼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인내하며 끝까지 견디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어째서 그렇게 해야겠느냐? 이는 피조물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그와 교류한 이상, 너는 그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가 하나님 말씀과 복음을 듣고 돌아서기까지 중간에 수많은 과정이 있을 것이고,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 너는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돌아서는 날, 너는 그를 하나님 앞으로, 하나님 집으로 인도해야 한다. 이는 너의 의무이다. 무엇을 의무라고 하겠느냐? 미룰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책임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식이 아무리 말을 안 듣고 말썽을 부려도, 혹은 병이 나서 밥을 먹지 않는대도 어머니로서 어떤 의무가 있겠느냐? 그녀는 네가 자기 자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한결같이 너를 아끼고 사랑하고 보호해 줄 것이다. 네가 그녀를 어머니라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녀를 어떻게 대하든 그녀는 네 곁을 지킬 것이며 매분 매초 너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네가 그녀를 어머니라고 믿고 그 품으로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 그녀는 줄곧 그렇게 너를 지키고 보호할 것이다. 이것을 바로 거부할 수 없는 책임이라고 한다. 만약 복음 전파자가 이렇게 실행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이런 사랑을 보인다면 이는 복음 전파의 원칙을 지킨 것이니 100%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늘 자신만의 이치를 내밀고 조건을 따진다면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이는 본분 이행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면서 늘 복음 대상자한테 문제와 어려운 점이 많고 자질이 떨어진다고 트집을 잡을 뿐,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면서 그를 얻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나 가족이 많은 어려움을 갖고 있고 자질이 떨어진다면, 사랑으로 대했을 것이다. 이는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에게 사랑이 있겠느냐?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늘 객관적인 조건에서 원인과 이유를 찾거나 누구를 보든 못마땅해하고 자기보다 못나게 여기며, 항상 복음을 전할 대상이 없다고 생각해서 결국 한 사람도 복음을 전해 얻지 못했다. 이런 복음 전파에 원칙이 있겠느냐? 그는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는 사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전부 복음을 전할 대상이다. 분명히 드러난 악인이나 그릇된 부류에게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된다. 만약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본분을 이행하고 남을 대할 때 원칙을 지닐 것이다.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든, 혹은 그가 얼마나 많은 패괴 성품을 드러내든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귀찮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고 하나님 사역을 증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사랑이 전혀 없는 복음 전파자들이 있다고 한다.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들의 관념과 문제를 대할 때, 여러 차례 교제했는데도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면 참지 못하고 훈계하기 시작한다. “여러분은 문제가 너무 많네요. 진리를 아무리 교제해도 이해하지 못하잖아요. 자질이 너무 떨어지고 이해력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진리 생명을 얻지 못해요. 모두 힘쓰는 자일 거예요.”라고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견디기가 힘들어 한동안 소극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어떤 이들은 참도를 알아볼 때 하나님 말씀이 모두 진리임을 깨달으며, 관념이나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 말씀을 읽는 과정에서 해결된다. 그들은 이렇게 순수하고, 진리를 쉽게 받아들인다. 또 스스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구하고 알아보며, 다른 사람이 교제까지 해 주면 참도를 받아들이고 교회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문제가 무척 많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다양한 측면으로 분명히 알아보아야 하며, 조금이라도 확실히 알아보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그들은 어떤 일을 하든 조심스럽다. 몇몇 복음 전파자는 이런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한다. 그들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믿든 믿지 않든 마음대로 해! 하나님 집에 당신 하나쯤 있으나 없으나 전혀 상관없으니까. 그러니 못 믿겠으면 가 버리라고! 대체 질문이 왜 그렇게 많은 거야? 벌써 다 대답해 준 내용이잖아.’라는 태도를 보인다. 사실 그 복음 전파자는 복음 대상자의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고, 진리도 분명히 교제하지 않았으며, 상대의 마음속 의혹을 철저히 해소해 주지 못했다. 그러면서 상대가 관념을 버리고 하루빨리 받아들이기를 바라니 이는 강요하는 것 아니겠느냐? 상대가 이해하지 못했다고 솔직히 말하면, 너는 그의 문제와 관념에 초점을 맞춰 하나님 말씀을 몇 단락 읽어 준 후 진리를 교제하여 이해하게 해 주어야 한다. 어떤 복음 대상자는 집요하게 따져 묻기를 좋아하며 모든 일을 확실히 알려고 한다. 그는 너를 괴롭히거나 생트집을 잡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대하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진지하게 대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옳은 대답을 해 주지 못하고 못난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해 교제해 주지 않으려는 복음 전파자가 있다. 그는 “오랫동안 복음을 전했지만 이렇게 까다로운 사람은 처음 봅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런 상대를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실, 그는 어떤 측면의 진리든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다. 대략적인 도리와 빈말을 늘어놓아 상대가 그것을 진리로 여겨 받아들이게 하는데, 이는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것 아니겠느냐?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자세히 물어보면 그는 꺼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하나님의 세 단계 사역에 대해 분명히 다 말해 줬습니다. 이렇게 많은 말을 했는데도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스스로 하나님 말씀을 보면서 관념을 해결하십시오. 하나님 말씀이 저쪽에 있으니 혼자 읽고 이해가 되면 믿고, 이해가 안 되면 믿지 마세요!” 복음 대상자는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한다. ‘더 물었다가는 구원받을 기회를 잃고 복을 받지 못할지도 모르겠어. 물어보지 말고, 얼른 따라서 믿자!’ 그 후, 그는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고 열심히 설교를 듣다 보니 서서히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고, 관념도 조금씩 해결되었다. 지금 그가 어떻게 믿든, 이런 식의 복음 전파가 적절하냐? 이 복음 전파자가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우선 책임을 다해야 한다. 양심적이고 이성적으로 네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은 다 해야 한다.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어떤 관념을 갖고 있거나 어떤 질문을 하든 사랑하는 마음으로 답해 주어야 한다. 네가 정말 답할 수 없는 일이라면 관련된 하나님 말씀 몇 단락을 찾아 읽어 줘도 되고, 관련된 체험 간증 영상이나 복음 간증 영화를 찾아 보여 줘도 된다. 그러면 온전히 효과를 볼 수 있다. 최소한 너 또한 책임을 다했기에 양심에 가책이 없다. 만약 대충 넘어가면 일을 그르치기 쉽고 사람을 얻기가 어렵다.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책임’이라는 두 글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책임을 어떻게 실제 상황에 정확하게 적용해야 하겠느냐? 네가 주님을 영접했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체험한 이상 너는 하나님의 현현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 어떻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느냐? 온라인 전도든, 대면 전도든 사람을 얻을 수 있는 방식, 성과가 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네가 전하고 싶을 때 전하는 것이 아니고, 네 기분이 좋을 때는 전하고 좋지 않을 때는 전하지 않는 것 역시 아니다. 또한, 네 기호에 따라 사람을 골라 가며 전하거나 네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전하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 집의 원칙에 따라 전해야 한다. 피조물의 책임과 본분을 다하고,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네가 깨달은 진리, 하나님 말씀과 사역을 힘자라는 대로 증거해야 한다. 그러면 피조물의 책임과 본분을 다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어떻게 해야겠느냐? 책임을 다해야 하며,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어쩌면 너는 복음을 전한 기간이 짧고 경험이 부족하며 말재간이 그리 좋지 않고, 지식수준도 높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적절한 하나님 말씀을 선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네 진리 교제가 핵심을 관통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네 태도가 진실하여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네가 어떻게 말하든 복음 대상자는 듣고 싶어 할 것이다. 특히 네 진실한 체험의 말, 마음속 말을 듣고자 할 것이다. 복음 대상자가 너를 좋아하게 하고, 너와 교류하고 교제하기를 원하게 하며, 네가 증거하는 내용을 듣고 싶어 하게 하면 성공한 것이다. 그는 너를 소울메이트로 대하며,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듣고 싶어 하고, 어떤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든 좋다고, 더없이 실제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다 받아들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를 얻기가 쉽다. 이는 복음을 전할 때 반드시 갖춰야 할 지혜이다. 만약 사랑으로 도와주지 못하고, 상대의 지기(知己)가 되지 못한다면 복음을 전해 사람을 얻는 것이 무척 힘들 것이다. 어째서 단순하게 마음을 열어 말하고 비교적 직설적이며 열정적인 사람들의 복음 전파 성과가 뛰어나겠느냐? 누구나 그런 사람을 좋아하며 그런 사람을 접하고 그런 사람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 교제가 무척 실제적이고 명확하다면, 인내심을 갖고 진리를 교제해 상대의 갖가지 문제와 어려움, 고충을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그리하여 상대의 마음을 밝게 해 주고 상대에게 큰 위안을 줄 수 있다면 상대는 마음속으로 그를 좋아하고 신뢰하며, 소울메이트로 여기고,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들으려고 할 것이다. 만약 늘 높은 곳에 서서 상대를 훈계하고, 어린아이나 학생 취급을 한다면 혐오감과 반감을 불러일으키기가 쉽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갖춰야 할 지혜는 먼저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 네 화법을 좋아하게 하고, 네 말을 들은 후에 무언가를 얻고 이점을 취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복음 전파는 순조롭고 형통하며 성과가 생길 것이다. 혹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지라도 네가 좋은 사람임을 알아보고 너와 교류하고자 할 것이다. 복음 전파자는 다른 사람과 교류할 줄 알아야 하며, 널리 친구를 사귀는 방법이 좋다. 이 밖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다. 즉,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든 먼저 준비를 많이 하고, 진리를 갖추고, 원칙을 파악하여 사람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며, 지혜로운 방식에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이렇게 사전 준비를 하는 훈련을 이어 나가야 한다. 먼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이 어떤 배경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 종파에 속하는지, 주로 어떤 관념들을 갖고 있는지, 성격이 내성적인지 외향적인지, 이해력은 어떤지, 인품은 어떤지 등을 알아 가고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복음 대상자의 상황을 여러 측면에서 파악해야만 복음 전파 성과가 좋아지며, 상대의 문제에 정확히 초점을 맞춰 관념과 문제점을 해결하는 법을 알게 된다. 그러면 악인이나 무신론자, 마귀의 시험에 부닥쳐도 알아차리고 분별하여 재빨리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각 종류의 사람이 모두 드러난다. 악인이나 무신론자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반감을 가지며, 마귀는 하나님 말씀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만이 관심을 갖고 진리를 구하며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이는 전도 가능한 복음 대상자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으로, 이렇게 해야 체계적으로 진리를 교제할 수 있다. 진리를 교제할 때 복음 대상자의 자질이 어떤지, 진리에 대한 이해는 어떤지, 인품은 어떤지 100% 파악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들에게 공을 들여야 할지, 어떻게 진리를 교제해야 할지 알게 되며, 얼마나 공을 들이든 헛수고를 하지 않게 된다. 만약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내적 상태를 이해하거나 파악하지 못하고, 상대의 문제에 정확히 초점을 맞춰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복음 전파로 사람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설령 몇 명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연이다. 진리를 깨닫고 일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 시행착오가 적거나 아예 없다.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에게 전하고, 전하면 안 될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으며, 제대로 파악해서 전하고, 헛수고를 하지 않으니 이런 본분 이행은 효율이 높고 수포가 되는 일이 적으며 성과도 좋다. 그렇기에 복음 전파에 성과를 내고 싶다면 반드시 진리를 갖추고 충분한 사전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성경 지식이 있는 종교인을 만났는데 너는 성경을 읽어 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제 와서 성경의 진리를 갖추기는 늦었다. 그러니 얼른 그에게 성경을 잘 아는 복음 전파자를 소개해야 한다. 성경을 잘 아는 사람에게 넘기는 것이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 무리하게 억지로 복음을 전한다면 결국 상대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네 무책임한 태도로 초래된 결과이다. 이 밖에, 너는 여가 시간에 틈을 내서 성경 지식을 좀 갖추어야 한다. 복음을 전하면서 성경 지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이 제기하는 질문은 성경 내용과 관련된 것들도 적지 않다. 성경을 잘 안다면 성경의 진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복음 대상자에게 어떤 관념들이 있든 성경 속에서 상응하는 장절과 하나님 말씀을 찾아 그의 관념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야 성과가 난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는 성경 지식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구약에 어떤 예언이 있는지, 신약 중 어떤 장절들이 하나님의 재림과 말세 사역을 증거하고 있는지 많이 읽어 보고 묵상하여 마음속에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 밖에, 종교인들은 이러한 성경 장절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어떻게 교제해야 그들이 정확하고 순수하게 이해하도록 할 수 있을지 묵상한 후 관련된 성경 장절과 결부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이해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이는 사전 준비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사전 준비이다. 너는 참도를 알아보는 각 부류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야 하며, 그 후 상황에 맞춰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이는 네 책임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몇 번 훑어보면 그만이죠.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든 저는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면서 하는 말들은 변함없이 늘 똑같죠. 상대가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죠. 믿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하겠지만 저를 탓할 수는 없을 겁니다. 어쨌든 저는 책임을 다했으니까요.” 이것이 책임을 다한 것이냐?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이 어떤 상황인지, 예를 들어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지식수준이 어떤지, 결혼은 했는지, 취미나 성격, 인성, 가정 형편은 어떤지 등등을 하나도 모른 채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무 준비도, 노력도 안 한 것이다. 이래 놓고 어찌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이는 사람을 속이는 것 아니겠느냐? 이렇게 본분을 대하는 것은 대충 건성으로 임하는 태도, 무책임하고 무성의한 태도이다. 너는 이런 태도로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결국 사람을 얻지 못하고는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으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진리를 얻지 못하고 구원받을 수도 없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무책임한 말이고 책임 회피의 말이다. 분명 네가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고,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며, 본분에 충성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 놓고 갖가지 이유를 대며 모면하려 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말을 하니 이는 어떤 행위냐? 이를 기만이라고 한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람을 판단하고 규정하고 무책임하게 헛소리를 하는 것은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음험하고 악독한 것이다. 이 역시 기만이라고 한다. 그런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기만이다.
하나님이 네게 복음 전파의 본분을 맡겼으니 너는 마땅히 공경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참도를 알아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과 인내로 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괴로움과 고생을 참고 견디며, 책임감 있게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를 분명히 교제하여 하나님에게 보고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본분을 이행할 때 지녀야 할 태도이다. 참도를 알아보려는 사람이 네게 진리를 구하는데 네가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진리를 교제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며, 핑계를 대면서 “지금 저는 그럴 기분이 아닙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진리와 하나님의 현현 사역을 얼마나 갈망하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죠. 그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저에게 달린 게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아무리 많이 준비해도 소용없을 테니, 저는 그런 공을 들이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제가 아는 진리는 전부 이야기했으니 그가 받아들일지 말지는 하나님의 일이고, 저와는 무관합니다.”라고 한다면, 이는 어떤 태도겠느냐? 이는 무책임한 태도, 강퍅한 태도이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무척 많지 않으냐?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데 합격점에 이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높이고 증거할 수 있겠느냐? 전혀 불가능하다. 이런 식의 복음 전파는 힘을 조금 쓰는 것일 뿐, 결코 본분 이행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합격점에 이를 수 있겠느냐? 누가 와서 참도를 알아보든, 먼저 준비를 하고 진리를 갖춘 다음 사랑과 인내, 포용, 책임감으로 그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하며, 다른 불순물 없이 성의를 다해 최대한의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격점에 이를 수 있다. 만약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혹은 그가 듣지 않고 떠나갔다면 그것은 네 책임이 아니다. 너는 해야 할 일을 했으니 양심에 가책도 없을 것이고, 이미 책임을 다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복음 전파의 원칙에 부합하지만, 지금 당장 복음을 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그럴 때는 잠깐 보류해 두어야 한다. 잠깐 보류해 둔다는 것이 복음을 전해 주지 않는다는 뜻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적당한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하라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겠느냐? 예를 들어, 방언을 한 적이 있는데, 하루 이틀, 혹은 1~2년 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그래 와서 언제 어디서든 방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이런 자는 악령이니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된다. 이 밖에도 겉으로 볼 때는 좋은 사람 같지만, 좀 알아보고 조사해 보면 많은 사람과 음란한 짓을 벌인 자도 있다. 이런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교회로 데려온다면 문제가 심각해지고, 하나님의 선민들에게 교란을 가져다주기 쉬우니 절대 전해서는 안 된다. 또 교계의 목사들은 진리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며, 설령 받아들인다고 해도 반드시 리더 일꾼 자리를 달라는 조건을 건다. 그런 자들은 대부분이 적그리스도이므로 원칙을 따른다면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이 옳다. 그들이 기꺼이 복음을 전하고 힘쓰려고 하며,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상황은 제외하고 말이다. 그런 경우라면 복음을 전해도 된다. 하지만 인성이 몹시 악하고, 얼굴만 봐도 악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라면, 그런 부류는 절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영원히 회개하지도 못한다. 그런 사람은 교회로 데려온다고 해도 출교 대상이 될 테니, 절대 전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사탄 마귀를 교회로 데려오는 것과 같다. 또 한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하는 미성년자들의 경우 말이다. 하지만 일부 해외 민주 국가에서는 미성년자들이 교회 생활을 하고 본분을 이행하려면 반드시 후견인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 점을 간과하지 말고, 합리적으로 해결하며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부모 중 한 명이 미성년자 아이를 데리고 하나님을 믿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인이 된 아이가 진리를 이해하고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하지만 부모가 반대하고 제약할 경우, 아이가 가정을 버리고 부모의 통제와 방해에서 벗어나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완전히 정당한 일이다. 이는 베드로가 하나님을 믿을 때의 상황과 동일하다. 요컨대, 어떤 상황이든 객관적인 조건이 허락하고 법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복음 전파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는 진리 원칙과 지혜로 대해야 한다.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해야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먼저, 복음 전파 측면의 진리를 깨닫고 이해해야 한다. 진리를 깨달아야 올바른 관점이 생기고, 잘못된 관점과 그릇된 관점을 어떻게 해결할지 알게 되며, 어떻게 일을 하고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 알 수 있고, 진리 원칙에 어긋난 각종 잘못된 행동과 적그리스도의 행동을 분별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떤 진리 원칙을 파악해야 할지도 알게 된다. 그럼 이 본분을 이행할 때 먼저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사역한다는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은 모든 하나님 선민의 책임이자 의무이며,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본분의 기원이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복음팀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에게는 그런 책임과 의무가 없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하는데, 그 책임과 의무는 누구에게나 있다. 이 측면의 본분과 관련된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유용하다. 너희가 주의를 기울였을지 모르겠지만, 교회에서 각 부류 인원을 배치할 때는 한 가지 현상이 드러난다. 어떤 사람은 한때 리더 자리에 있었지만, 얼마 후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해 교체되었다. 교체된 후에는 특별한 기술도, 특기도 없어 특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는 관계로 결국 복음팀에 배치되어 복음을 전하거나 새 신자를 양육하거나 평범한 본분을 이행하게 되었다. 교회에서 어떤 본분도 이행하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겠느냐? 이런 자는 폐물이니 도태시켜야 한다. 그렇기에 교회 리더로 있다가 직무를 감당하지 못해 교체되었는데 특별한 재능도 기술도 없다면 복음을 전하러 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복음을 전할 수 있어 복음팀에서 본분을 이행한다면, 합격한 본분 이행의 진리는 너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 전파의 본분조차 이행하지 못한다면, 합격한 본분 이행의 진리는 너와 무관할 것이며,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이 사역하는 기간에 본분 이행이라는 이 사역은 너와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다. 이 말의 함의가 무엇인지 너는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 것이다. 네가 아무 본분도 이행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의 사역이 너와 어떤 관계가 있겠느냐? 그렇기에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자기 본분을 끝까지 제대로 이행한다면 이는 당연히 가장 좋은 일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늘 낯선 사람을 접해야 하잖습니까. 온갖 나쁜 사람들이 다 있을 테고, 그들은 어떤 악행이든 다 저지르겠죠. 특히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원수처럼 대하고, 사탄 정권에 넘깁니다. 이방인보다 더 악독한 자들이죠. 저는 그런 고초를 치를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그들이 저를 구타해 죽이거나 장애를 안겨 주거나 큰 붉은 용에게 넘긴다면 저는 완전히 끝장일 테니까요.” 네가 고초를 치르지 못하겠고, 또 네 분량이 그렇게 작다면 지금 네 본직 사역을 잘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물론, 여러 본분을 이행하고 복음도 전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팀 인원들뿐만 아니라 모두의 직책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이 새 사역을 한다는 이 복음과 기쁜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이 복음을 전해 더 많은 사람이 이 기쁜 소식을 듣고 하나님 집으로, 하나님 앞으로 와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고, 하나님의 사역이 하루빨리 끝나게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는 하나님의 부탁이자 뜻이다.
어떤 복음 전파자는 매일 바쁘게 복음을 전하지만, 그렇게 몇 년이 지나도 한 명을 얻지 못한다. 이는 어찌 된 일이겠느냐? 그의 바쁜 모습을 보면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사람을 얻지 못하겠느냐? 사실 복음 전파의 본분에서 깨달아야 할 진리는 다른 본분과 비슷하다. 그런데 몇 년간 복음을 전하면서 한 명도 얻지 못한다면, 이는 그에게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무슨 문제이겠느냐? 가장 주된 문제는 복음 전파의 이상(異象) 측면 진리를 분명히 교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분명히 교제하지 못하겠느냐? 자질이 너무 떨어져서 미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온종일 정신없이 바빠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묵상할 시간이 없어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어떤 관념이나 사설, 궤변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이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한다면, 복음 전파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아마 사람을 얻기가 무척 힘들 것이며, 몇 년 동안 복음을 전해도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복음을 전할 때는 먼저 반드시 이상 측면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상대가 어떤 질문을 하든, 진리를 밝히 교제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 측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리 교제해도 명확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성과를 낼 수 없을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진리를 구하고 교제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설교를 많이 듣고 복음 전파 측면의 진리를 많이 교제하며, 늘 이상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는 데에 노력하고 훈련하여 정말 이상 측면의 진리를 깨닫고, 종교인들에게서 가장 흔히 보이는 관념과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것이며, 성과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 사역에 관한 이상 측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복음 전파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한 가지 원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원인은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의 질문을 파악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마음속 가장 큰 의문이 어디에 있는지, 주로 어떤 문제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가로막히는지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분명히 하지 못한다면 상대에게 복음을 전해 하나님을 증거할 수가 없다. 복음 전파와 관련해 실속 없는 이론만 늘어놓는 것을 훈련해서는 안 된다.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이 질문했을 때 답을 주지 못한 채 대충 도리를 늘어놓아 상황을 모면한다면, 그런 식의 복음 전파로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네가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의 질문에 분명한 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가 선뜻 참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네가 그렇게 오랜 기간 하나님을 믿었는데도 그런 질문에 똑바로 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정말 참도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래서 감히 믿지 못하고 받아들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실상은 이렇지 않겠느냐? 이것이 복음 전파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두 번째 원인이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지만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상대에게 복음을 전할 수가 없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복음을 전해 성과를 내고 싶다면 반드시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이 제기하는 모든 질문에 관해 열심히 진리를 구하고 완벽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진리를 교제하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몇몇 복음 전파자는 늘 객관적인 이유를 찾으며 “저 사람들은 무척 까다롭습니다. 하나같이 치우친 자들이라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죠. 또 패역하고 강퍅하며 늘 종교 관념을 고집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상대의 어려움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노력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 명에게 전하든, 두 명에게 전하든 모두 실패하는 것이다. 사랑이 전혀 없으며 끈기를 갖고 지속할 수 없다. 그는 겉보기에 무척 바쁜 것 같지만, 사실 참도를 알아보는 모든 사람에게 공을 들이지 않는다. 또 상대가 제기하는 질문을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대하거나 진리를 구해 해결하여 그 문제들을 조금씩 해결해 줌으로써 그 사람을 얻지도 못한다. 그저 적당히 건성으로 대하면서 몇 명을 놓치든 여전히 똑같은 방식을 고수하고, 일을 하다 말다 한다. 그는 복음 전파를 뭐라고 생각하느냐? 오락거리나 사교 활동으로 생각한다. 그는 오늘은 이런 사람을 만나는 게 신나고, 내일은 저런 사람을 만나는 게 새롭다고 여기기에 항상 사람을 얻지 못한다. 항상 사람을 얻지 못하는데도 자책하거나 부담을 느끼지 못하니 이런 식의 복음 전파로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이는 대충 건성으로 하며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 아니겠느냐? 언제나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진실로 본분을 이행하는 게 아니다. 그는 전혀 책임을 다하지 않고 늘 건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복음 전파로 사람을 얻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원칙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도 있다. 복음을 전할 때 복음 대상자의 수에만 신경 쓸 뿐 원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경우도 대부분 사람을 얻지 못한다. 이 밖에도 한 가지 경우가 더 있다. 즉, 복음팀 내부에서 몇 명이 복음 대상자를 두고 경쟁하면서 많은 사람한테 복음을 전하면 큰 공을 세운 거라고 여기는 것이다. 복음 대상자는 이렇게 경쟁하는 그들을 보고 도움을 받기는커녕 관념을 갖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질투하고 싸우는구나.’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이는 사람을 쓰러뜨리는 일이다. 이 또한 복음 전파에서 사람을 얻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복음 대상자는 사회에 오래 있다 보니 각 부류의 사람을 경계한다. 특히 낯선 사람의 경우, 중간에 소개해 주는 이가 없으면 처음에는 다 경계할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낯선 이를 처음 접했다면 네 이름이나 주소, 전화번호를 함부로 알려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 친해지고 서로 어느 정도 가까워져서 그에게 어떤 악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친구가 된다면, 그런 상황에서는 알려 줘도 된다. 하지만 어떤 복음 전파자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 상대가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면 간사하고 사악하다고 말하며 상대의 그런 경계심을 정죄하고, 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 너도 낯선 사람을 경계하지 않느냐? 왜 너 자신은 정죄하지 않고 반대로 그런 행동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어떤 복음 전파자는 복음 대상자와 처음 만났을 때 상대의 개인정보를 물어보는데, 만약 상대가 대답해 주지 않으면 복음을 전해 주기 싫어한다. 이는 어떤 성품이냐? 악독한 성품이다. 사소한 일에서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심사가 뒤틀려 복음을 전하지 않다니, 이 얼마나 비열하냐! 그럼 너는 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하느냐? 그것은 본분 이행 아니더냐? 네 취향대로 한다면, 그것이 본분 이행이겠느냐? 그것은 순전히 힘만 쓰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에게 어떻게 보고할 것이냐? 그대로 계속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게 정죄되고 내쳐질 것이다. 이는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일을 들은 적이 있다. 두 복음팀의 사람이 동일한 복음 대상자를 접하게 되자 자기가 먼저 그 복음 대상자를 만났다며 서로 실랑이했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실랑이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는 무지한 것 아니겠느냐? 이 일은 그렇게 처리해선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하겠느냐? 모두 함께 상의해야 한다. 누가 먼저 접했는지는 따지지 마라.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같이 복음을 전하면 된다. 업무를 분담하고 협력하는 것이다. 원래는 두 달에 걸쳐 그를 얻으려고 했는데 이제는 복음 전파자가 많아졌으니 한 달 안에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모두 함께 복음 대상자에게 어떤 문제와 어려움이 있는지, 어떤 측면의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하는지, 두 팀이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지 등을 교제해라. 이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 사람을 얻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함이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같이 교제하고, 힘을 한데 모으면 성령이 깨우치고 인도해 줄 것이다.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된 상황에서 일을 하는 건 쉽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가 함께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 늘 다른 사람에게 삐딱하게 굴면서 자신만의 경영을 하고 남들과 분명히 나누려 한다면,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가 사람을 얻는 것만 신경 쓰며 ‘너는 네 복음 대상자한테나 전해라. 나는 내 복음 대상자를 얻으련다.’라고 생각한다면 한마음 한뜻으로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가끔은 혼자 본분을 이행해도 되지만, 또 가끔은 모두가 조화롭게 협력해야 교회 사역을 잘해 낼 수 있다. 만약 단독 행동만 하면서 조화롭게 협력하지 않는다면 교회 사역을 망치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그럼 누가 그 책임을 지겠느냐? 모두에게 책임이 있지만, 주요 책임자의 책임이 더 크다. 사역을 망치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을뿐더러 큰 악을 저질러 하나님의 혐오와 반감을 사게 된다. 이러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만약 하나님에게 악인이나 적그리스도가 사역을 교란한 것으로 정죄된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그러면 분명 드러나 도태될 것이며, 심지어는 징벌받게 될 것이다. 네가 네 본분을 버린다면 이는 무슨 의미겠느냐? 너는 하나님의 사역에 분깃이 없으며,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이 아니라 이방인에 속해 살아가는 의미를 잃게 된다. 오늘 네가 살아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복음팀에서 네 가치는 무엇이냐? 어떻게 해야 너라는 사람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겠느냐? 너는 착실하게 네 책임을 다하고, 네 본분을 잘 이행하며, 하나님에게 이렇게 다짐해야 한다. “저는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을 얻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비록 자질이 떨어지고 진리 실제를 많이 얻지는 못했지만, 온 힘을 다했습니다. 저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책임을 내팽개치지 않았고, 불만을 품지도 않았으며, 소극적으로 변해 사역을 게을리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본분 이행을 빌미로 명리를 추구하지도 않았고요. 저는 복음을 전하면서 적잖은 수모를 당했으며, 종교계로부터 욕설을 듣고 내쫓겨 길거리에서 노숙해야 했습니다. 소극적으로 변하고 연약해질 때도 있었지만 본분을 저버리지는 않았고, 한결같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진실로 책임을 다한 것이다. 언젠가 너는 가슴에 손을 얹고 한 점 부끄럼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보고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네가 만난 복음 대상자가 무척 많은데도 얻은 사람은 얼마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네 자질과 행동에 비춰 봤을 때, 최선을 다했는데도 그 정도의 사람밖에 얻을 수 없었다면, 하나님은 너를 어떻게 평가하겠느냐? 네 본분 이행은 합격했다. 너는 힘을 다했고 마음을 다했다. 너는 한 명의 복음 대상자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최선을 다해 이상 측면의 진리를 갖췄으며, 성경의 관련 장절을 정독했다. 외워야 하는 건 외우고 외우지 못하는 건 노트에 적어 두었다가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질문을 듣든 해결해 주었다. 이렇게 하니 복음 전파의 성과가 점점 좋아졌고,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었다. 복음을 전해 더 많은 사람을 얻고 네 본분과 책임을 다하기 위해, 너는 네 결점과 연약함, 소극적인 정서 등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했으며, 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반드시 이런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밖에,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사역을 이해하고 인식하며, 참도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너는 더 많은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역을 더 잘 증거할 수 있다. 네 진리 교제에 깊이가 있든 없든 마땅히 사랑과 인내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복음을 듣는 사람이 너를 비웃거나 욕하든, 거부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든 네가 올바르게 대하고 인내심 있게 진리를 교제하며,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많은 대가를 치렀다면 그것은 책임을 다한 것이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합격점에 이를 수 있다.
어떤 복음 전파자가 만난 복음 대상자는 무척 거만했다. 집이 잘살고 사회적 지위도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 전파자는 그에게 다가갈 때마다 아랫사람이 된 것처럼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이럴 때, 이 불편함이 네 본분 이행에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 만약 영향을 주어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지도, 책임을 다하지도 못했다면, 너는 본분을 이행한 게 아니다. 반면, 네 마음에만 영향을 주어 불쾌하고 불편한 기분이 들었지만 네 본분을 내려놓지도 책임과 의무를 잊지도 않았으며, 마지막에 그 사역을 완수하고 잘해 냈다면 이것이야말로 참된 본분 이행이다. 이는 진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진리이니 사람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 다음과 같은 상황도 마주할 수 있지 않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복음 대상자가 너를 농촌에서 상경한 사람이라 여겨 무시하고 비하한다면 너는 어떻게 대하겠느냐? “저는 생활 환경이 열악한 농촌에서 태어났고, 당신은 환경이 좋은 도시에서 태어났죠. 이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일입니다. 하지만 어디에서 태어났든 전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따르게 되었으니 복받은 거죠.”라고 말한다면, 이 말은 과분하지 않고 참된 것이다. 그가 “그래도 당신들은 우리만큼 복이 있지는 않네요. 우리는 이번 생과 다음 생을 누리겠지만, 당신들은 다음 생만 누릴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가 누리는 것이 당신들보다 훨씬 많은 거죠.”라고 말한다면 너는 “그 또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라고 말해라. 그가 하나님의 사역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그와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겠느냐? 이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와 논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다. 너는 마음속에 생각이 있어야 한다. ‘내 마음속에는 본분이 있고, 내 어깨 위에는 부담이 있어. 나한테는 사명과 의무가 있으니 그와 이런 것을 두고 논쟁하지 않을 거야. 언젠가 그가 하나님을 믿게 되어 하나님 집으로 돌아온다면, 설교를 많이 듣고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닫는다면 오늘 이 행위와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겠지.’라고 말이다. 네가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넓어진다. 그리고 사실이 그러하다. 만약 네가 정말 그를 얻어서 그가 진리를 추구하게 된다면, 3~5년 정도 하나님을 믿은 후 지난날 그렇게 남을 대한 건 부적절하고 비인성적이며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너를 만났을 때 사과할 것이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런 상황을 적잖이 마주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 나는 어떻게 대할 것 같으냐? 나는 이런 일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긴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개의치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분량이다. 만약 네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를 갖춘다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수많은 말이나 행동을 간파할 수 있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간파하지 못한다면 평생 기억할 것이며, 상대의 눈빛 하나, 말 한마디, 동작 하나까지 네게 상처를 줄 것이다. 어느 정도로 상처를 주겠느냐? 네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남겨 부자나 너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 한때 너를 무시하고 공격한 부류를 보면 두려워하고 위축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위축되지 않겠느냐? 그의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든, 어떤 신분과 지위를 지니고 있든 그는 패괴된 사람일 뿐, 특별할 것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속박되지 않는다. 복음 전파 사역을 하다 보면 분명 이런 문제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는 다 흔히 발생하는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너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차별하고, 심지어는 듣기 힘든 말로 빙빙 돌려 비웃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네가 돈을 벌고 이득을 얻으며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해서 복음을 전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일을 마주할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와 논쟁을 벌이면 되겠느냐? 특히 집에 돈이 좀 있는 복음 대상자의 경우, 그의 집에서 식사라도 한다면 그의 눈치를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만약 네가 체면 때문에 그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지 않는다면, 배를 굶주린 채로 계속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느냐? 이럴 때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오늘 이 집에서 밥을 먹게 되어 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그는 복음 전파자를 접대할 수 있게 됐어. 이는 그의 복이야.’ 사실 그렇다. 이는 그의 복이다. 그가 스스로 깨닫지 못해도 너는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아야 한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렇게 비웃음이나 조롱, 조소, 비방의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심지어는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일례로, 어떤 형제자매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악인에게 고발당하거나 납치되고, 또 어떤 이는 경찰에 신고되어 정부에 넘겨진다. 붙잡혀 감옥에 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심지어는 맞아 죽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언제나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복음 전파 사역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겠느냐? (그래선 안 됩니다.) 복음 전파는 모든 사람의 직책이자 의무이다. 어느 때든, 우리가 무엇을 듣든, 무엇을 보든, 어떤 대우를 받든 복음 전파에 대한 책임감을 굳게 지켜야 한다. 절대 소극적이 되거나 연약해져 이 본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고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복음을 전할 때 만나는 대상은 천사도, 외계인도, 로봇도 아니다. 너희가 마주하는 대상은 사악하고 패괴된 인류, 살아 있는 귀신, 짐승들이자 이 사악한 공간, 사악한 세상에서 사탄에 의해 깊이 패괴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류이다. 그렇기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는 틀림없이 갖가지 위험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소한 비방이나 조롱, 몰이해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것은 너무도 흔한 일이다. 만약 네가 정말 복음 전파를 네 책임이자 의무, 그리고 네 본분으로 여긴다면, 그런 일을 올바르게 대하고 올바르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로 인해 너의 책임과 의무를 포기하거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겠다던 초심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이 책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네 본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본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느냐? 이는 사람이 이번 생을 살아가는 가치이자 첫 번째로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세에 사역한다는 기쁜 소식을 널리 알리고 하나님 사역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로,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가치이다.
오늘은 복음 전파의 본분을 이행하는 측면의 진리를 교제했는데, 얻은 것이 좀 있느냐? (있습니다.) 여태까지 복음 전파의 진리에 관해 교제할 때는 이상(異象)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즉, 전적으로 이상 측면의 진리를 교제했지 오늘처럼 이렇게 수많은 세부 문제에 초점을 맞춰 교제하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이 이상 측면의 진리를 큰 틀의 내용만 좀 알 뿐,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세부 실행의 길이나 원칙에 관해서는 잘 모르기에 오늘은 이 구체적인 문제들을 가져와 교제하였다. 몇몇 사례와 사람들의 태도, 혹은 사람이 이런 일을 직면할 때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인지, 사람의 관점은 무엇인지, 사람이 어떻게 이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할지 등의 다양한 화제를 교제했는데, 이를 통해 복음 전파 측면의 진리가 어느 정도 구체화되고 실제 상황에 적용되었느냐? 나는 너희가 이 측면의 진리를 들은 후 마음속이 한결 밝아졌으리라 믿는다. 또 복음 전파 과정에서 구체적인 문제들에 부닥쳤을 때, 이런 말씀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도 믿는다. 이 말씀들은 전부 공허하지 않고 실제적이며, 진리 원칙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복음 전파와 관련된 일이 닥쳐 그릇된 내적 상태로 살거나 복음 전파 과정에서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너희는 이러한 진리로 너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만약 해결할 수 있다면 오늘의 교제는 헛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다면, 혹은 아예 제멋대로 굴면서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함부로 굴고, 본분이나 책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런 진리는 너희에게 공허한 말일 것이며, 어떤 작용도 하지 못한 것이다. 어떤 작용도 하지 못한 것은 진리가 너를 도울 수 없어서도, 진리가 네게 도움이 되지 않아서도 아니다. 네가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고 실행하지 않으며, 복음 전파 본분을 여가 활동이나 시간 때우는 소일거리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만약 너희가 이런 관점으로 복음 전파라는 이 본분을 대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합격한 본분 이행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럼 먼저 묻겠다. 이런 관점으로 복음 전파라는 이 본분을 대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너희는 이 점을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 것이다. 이런 관점, 이런 태도로 이 본분을 대한다면, 너 스스로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고, 네 그런 태도를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하면 사람을 좀 얻어 겉으로 선행을 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네 본분 이행의 속셈과 동기는 진리 원칙에 어긋난다. 종교인들이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거래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속셈과 동기는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의 속셈과 동기를 판단한다. 또 하나님은 본분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관찰하며, 이러한 것들에 근거하여 사역함으로써 사람의 패괴를 정결케 하고, 사람이 죄악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복음을 전하든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네 자질이 어떻든, 과거에 어떤 본분을 이행했든, 어떤 본분을 이행하다가 복음 전파팀에 들어가게 됐든 너는 복음 전파의 진리 원칙들을 지켜야 하며, 복음 전파를 본분과 책임으로 여겨 맡아야 한다.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고,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해 교체된 후 복음팀에 배치되어 복음을 전하게 된 리더 일꾼이 있다. 그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저는 리더 일꾼이었는데 사역을 잘해 내지 못해 복음팀에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제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은 한동안 저를 단련시키기 위함일 것입니다. 제가 진리를 갖추고 스스로를 훈련하게 하시는 거죠. 그러니 저는 복음 전파에 공을 들일 필요가 없이 대충 임해도 됩니다. 어쨌든 저는 리더 감이니 제 분량이 성장하면 다시 저를 리더로 삼으실 겁니다. 저는 자질이 좋으니까요. 리더가 되지 않으면 재능을 낭비하는 거죠. 지금 교회에는 리더 일꾼이 부족하잖아요!” 이 말의 속뜻인즉슨, 하나님 집에서 그가 리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시킨 것은 훈련할 기회를 준 것이고, 진리를 갖추게 하는 것이며, 기본적인 사역을 좀 해 보도록 훈련시키고 양성시키는 것이란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복음 전파 본분을 대할 때 임시적이라는 관점을 가졌다. 즉, 복음을 전했다는 명분을 얻고 기분 전환을 하며, 식견을 키우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 성과를 내고, 진리를 깨닫고, 사역을 좀 하게 되면 자신을 다시 리더 일꾼으로 발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을 갖고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데 진실로 회개할 수 있겠느냐? 이는 스스로를 반성하며 인식하지 않는 것이고,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무척 까다롭지 않으냐? 복음 전파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고 스스로를 꽤 대단하게 여기니, 정말이지 분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실상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는 전혀 모르고 있다. 사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해력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저 겉으로만 말재간이 좀 있고 마음을 쓰는 것 같아 자질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하지만 리더 일꾼이 되자 인품이나 자질 등 여러 부분이 전부 합격점을 받지 못했고, 리더 일꾼의 기준과 조건에 맞지 않아 도태된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주제를 모른 채 뻔뻔스럽게 큰소리를 치고, 낯짝도 두껍게 허풍을 떤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 자기 위치를 그렇게 설정한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나 복음 전파에 배치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 집의 모든 본분은 상, 중, 하의 등급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복음 전파 본분을 하나님 집의 모든 본분 중 가장 비천한 사역으로 여긴다. 즉, 잘못을 저지르고 본분 이행에 합격점을 받지 못한 사람이 복음 전파팀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본분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이런 식의 이해는 복음 전파를 자기 책임이자 평생 이행해야 할 의무로 여기는 것과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그와 같이 이해한다면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무엇을 잘못했느냐? 그는 사람이 평생 이행해야 할 가장 큰 책임과 의무, 즉 복음 전파 사역을 가장 비천한 일로 여기고, 그것을 자기 책임이나 의무로 삼지 않았고 본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복음 전파는 본분 중 하나라고 하나님 집에서 아무리 교제해도 그는 그렇게 여기지 않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 집의 각급 리더 일꾼과 책임자는 상위 계급이고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어. 그들은 마지막에 큰 상을 받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겠지. 그 아래에서 따르는 사람들은 전부 졸개들이야. 특히 복음 전파자들은 항상 교회 밖의 사람들을 접하니까 모든 사역 중에서 그들의 사역이 가장 고되고 힘들 거야. 그 사람들은 마지막에 온전케 될지 장담할 수 없어.’ 그는 복음 전파라는 본분을 이렇게 설정했다. 이것이 그의 잘못 아니겠느냐? 복음 전파라는 신성한 책임과 의무를 가장 비천한 일로 여기고, 등급에 따라 가장 낮은 일로 구분하는 그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그들은 이 본분을 무시하고, 이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을 깔본다. 그러니 그들이 이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떤 관점을 갖고 있겠느냐? (임시적이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복음 전파를 자신의 본분 내 사역으로 여겨 최선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얻을 수 있으면 얻고, 얻지 못하겠으면 관두자는 것이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복음 전파라는 이 본분을 무시한다. 그러니 복음 전파의 성과가 또 어떻겠느냐? 그들이 복음 전파 본분을 잘 이행하기 위해 각 측면의 진리를 갖출 수 있겠느냐?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하나님 말씀 발췌문과 성경의 장절을 외우고, 각종 체험 간증을 숙지함으로써 복음 전파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갖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치우치게 이해하거나 관념이 좀 많은 사람을 만나 어려운 질문을 받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대하겠느냐? (포기할 것입니다.) 그것이 한 가지 태도이다.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복음을 전할 때 왜 이렇게 그릇되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된 걸까? 정말 운도 없지!”라고 말하지 않겠느냐? 그는 복음 대상자에게 사랑을 보이지 않으며,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일에서 그는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는 육적인 기호대로 복음 대상자를 대하는 것을 선택한다. 질문이 많고 관념이 큰 사람을 만나면 포기하고, 관념이 없거나 적은 사람만 골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또 그는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으려 한다. 허영과 체면, 명예, 지위 등에 도움되지 않을 때, 육적인 기호에 맞지 않고 육적인 누림과 충돌될 때 그는 무엇을 선택하겠느냐? 포기하고 도망치기를 선택하며, 그 책임을 이행하지 않고 거부하기를 선택한다. 이와 동시에 마음속으로 몰래 하나님을 원망한다. ‘이렇게 그릇된 사람, 관념이 많은 사람을 왜 만나게 하신 겁니까? 왜 저한테 이런 고통을 겪게 하시는 거냐고요. 체면이 떨어지고 헛수고를 했는데 사람도 얻지 못했잖습니까.’라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무의식중에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된다. 그래서 그는 복음 전파 본분을 받아들이길 원치 않으며, 복음 전파의 책임을 다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복음 전파 본분에 대한 태도가 이런 것이라면, 도태되기까지 멀지 않았다.
많은 복음 전파자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대충 건성으로 사역하는 태도를 보이며 줄곧 바뀌지 않는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로 사역을 대하지 않고 ‘어차피 시간도 많고 할 것도 없는데 이거라도 하지 뭐. 지금 복음팀이 활발하게 활동하니까 나도 거기 껴야겠다.’라고 생각하고는 덩달아 복음을 전한다. 사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치르는 대가는 한정적이다. 시간을 좀 쓰고 좀 뛰어다니는 것일 뿐, 진정한 대가는 치르지 않는다. 그들은 복음을 전할 때 늘 육적인 기호와 자신의 관념, 상상에 근거하며, 진리 원칙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부자나 자산가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좋아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전하려 하지 않는다. 또 외모가 뛰어난 사람에게 전하기를 좋아하고, 외모가 평범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 밖에도, 말이 잘 통하는 사람한테 복음을 전하기를 좋아하고, 말이 안 통하는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는다. 또 관념이 적은 사람에게 전하기를 좋아하고, 관념이 너무 많은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하기 쉬운 사람에게 전하기를 좋아한다. 말을 많이 안 해도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말을 많이 해야 하거나 피곤할 것 같으면 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다가 가정 환경이 훌륭한 대상을 만나게 됐다. 그는 집도, 차도 있었고, 부모님이 좋은 직업에 종사했으며, 외동인 데다가 외모도 훌륭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에게 시집가면 부자의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다. 그가 받아들인다면 더없이 좋을 거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누군가 그녀를 막으며 그는 진리를 구하는 사람도, 복음을 전할 만한 사람도 아니라고 했지만, 그녀는 “우리가 진리를 많이 교제해 주면 받아들일지도 모르잖아요. 이렇게 좋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구원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 아니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 그녀에게는 목적이 있었다. 그녀가 정말 그 사람을 얻어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했겠느냐? 그녀는 그에게 어필하려고 했다. 한동안 어필하자 마침내 성과가 있었고, 그녀는 그와 이어지게 됐다.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일을 처리할 때 늘 자신만의 속셈을 가진 것이고, 진리 원칙을 어긴 것이다. 결국, 그녀는 갖가지 수법으로 ‘전해’ 데려왔고, 그 사람과 결혼까지 했다. 그리고 “제가 복음을 전하면서 거둔 최고의 성과는 소울메이트를 만나게 된 거예요. 이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겠죠. 결혼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거니까, 제가 그를 만나 결혼할 수 있었던 것도 다 하나님의 안배에서 비롯된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자 축복이에요.”라고 말했다.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꾸리게 됐는데, 그녀가 계속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느냐?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1, 2년이 지나자 기분이 좋을 때만 가끔 복음을 전할 뿐, 대부분 시간을 가정생활에 전념했고 마음이 갈수록 공허해졌다. 그러다가 결국 가정생활은 집안일을 하는 것,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 떠들며 티격태격하는 것뿐임을 깨달았다. 그런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느낀 그녀는 뉘우치며 생각했다. ‘역시 하나님을 믿는 게 의미가 있지.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자!’ 나중에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잘 포장해서 늘어놓으며 말했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이니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죠.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는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다면 살길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돌아와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부르신 거죠.” 이 얼마나 낯 두꺼운 짓이냐! 돌아온 그녀는 본분을 이행하겠다고 하며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니 공허하더라고요. 사람은 본분을 이행해야 해요.”라고 했다. 진리를 실행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하는 말은 다 역겹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왜 하나님에게는 너를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 묻지 않는 것이냐? 너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짝을 찾아 본분을 내팽개치고 도망갔다. 그때는 왜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동의하는지,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묻지 않았느냐? 너는 네 책임을 다했느냐?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을 완수했느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했느냐? 본분을 본분으로 여겼느냐? 전부 아니다. 너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냐? 길에서 알게 된 친구에 불과하다. 인사 한 번으로 안면을 트고는 취할 만한 이익이 있으면 함께 지내고, 없으면 그대로 안녕이다. 그러다가 또 언젠가 필요한 게 있으면 다시 생각나는 그런 관계 말이다. 너는 하나님을 그렇게 한때 알던 친구로 여겼다. 그럼 하나님은 너를 어떻게 보겠느냐? 너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네가 마음이 괴롭고 하루하루 사는 게 공허해서 하나님이 필요해졌다고, 돌아와서 본분을 이행하겠다고 하면, 하나님이 아무 생각 없이 네게 본분을 주겠느냐? (그러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 그렇겠느냐? 너는 자격이 없다! 이런 부류는 하나님을 믿은 후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데도 본분을 다하기 전에 한마디 인사도 없이 그렇게 하나님을 저버렸으며, 사역 장소를 떠나고 본연의 사역을 버렸다. 하나님은 이것을 어떻게 보겠느냐? 이는 어떤 성질이겠느냐? (배반입니다.) 배반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는 탈영병과 같다! 탈영병이 어떻게 본분을 이행하겠느냐? 그들은 본분 이행의 기치를 들고 사익을 취했으며, 개인의 앞날과 생계를 위해 계산하고 계획하면서 본분 이행의 본래 취지를 어겼다. 결국, 본분을 이행하다가 중도에 도망가 탈영병이 되었다. 이런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게 아니라 개인의 속셈과 목적을 품고 하나님을 기만하다가 결국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 아니겠느냐? “하나님 집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은 맞지만, 하나님 집에 들어올 때는 심사를 거쳐야 한다. 하나님 집을 떠나는 것은 자유이므로 아무도 막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하나님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반드시 몇 단계에 걸쳐 교회 리더 일꾼의 심사와 검증을 받고, 진실로 회개한 것이 확인되어야 받아들여진다. 이것이 바로 나갈 때는 쉬워도 돌아올 때는 어렵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면서 너무 어렵고 고생이 너무 심해 책임을 내팽개치고 도망친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탈영병이 된 것이다. 복음 확장 기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모든 복음 전파자, 특히 중요한 직위에 있는 책임자는 하나님에게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들이다. 복음 확장 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면서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제멋대로 자리에서 이탈해 탈영병이 되었으니, 이는 가장 심각한 과오이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에 속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의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은 탈영병이 된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 같으냐? (방임하실 것입니다.) 방임한다는 것은 상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이다. 방임된 사람이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하나님이 보기에 회개의 태도가 괜찮을 경우 다시 그를 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본분 이행 과정에서 탈영병이 된 사람에게만은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를 구원하지 않고 혐오하여 내치실 것입니다.) 아주 정확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중요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에게는 다 하나님의 부탁이 있다. 그런데 본분을 이행하는 도중에 제멋대로 도망쳐 탈영병이 되었다면, 그 사람이 예전에 어땠는지, 앞으로 어떠할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런 부류를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으로 보며, 다시는 본분 이행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다시는 본분 이행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네가 만약 “저는 무척 후회하고 있고, 하나님께 죄스럽습니다.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뭐에 씌어서 정신이 혼미해졌나 봅니다. 지금은 너무 후회스럽습니다. 제가 다시 본분을 이행하여 공을 세우고 회개할 수 있도록, 제 과오를 만회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은 기회가 없다고 할 것이고, 더 이상 너를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탈영병을 이런 태도로 대한다. 평범한 과오를 저지른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은 어쩌면 그건 한때의 과오라고, 혹은 환경이 열악하고 분량이 작으며 진리를 깨닫지 못한 등의 이유 때문에 그랬을 거라고 할 것이며,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탈영병들에게만은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요? 설마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도 이행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일까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본분을 이행하거나 복음을 전해도 되고, 설교를 듣거나 교회에 들어와도 된다. 교회에서는 네 이름을 제명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네가 아무리 본분을 이행하고 회개한다고 해도, 설령 힘쓴다고 해도 너를 원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태도이다. 이 일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하나님은 왜 그렇게 그들에게 매정하고 단호하신가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나 이 일은 사람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은 이런 태도를 갖고 있으니 네 마음대로 생각해라.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결정할 권력이 있다. 권력이 있어서 그렇게 행하고 처리하는데, 사람이 어찌할 수 있겠느냐? 항의할 수 있겠느냐? 그러게 누가 너더러 바른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탈영병이 되라더냐? 복음 확장 사역은 혼자서 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네가 본분을 이행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택한다. 네가 그 본분에 협력하지 않고 그 본분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네가 눈이 멀었다는 의미이고, 어리석고 못났다는 의미이다. 너는 그것이 복인 줄 모르니 네게는 그 복이 없다. 그러니 썩 물러가라! 네가 물러갔다가 얼마 후 다시 돌아온다면 하나님은 너를 원하겠느냐?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탈영병들에게만 이런 태도를 취한다. 혹자는 “제가 돌아와서 본분을 이행하니까 성령의 깨우침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당시 네가 본분을 이행하다가 제멋대로 떠날 때도 성령이 가로막지 않았는데, 이제 돌아왔다고 해서 성령이 네게 깨우침을 줄 리 있겠느냐? 착각하지 마라.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어기면서 일하지 않으며, 누구를 대하든 원칙이 있다. 이 일은 사람에게 어떤 경고를 하느냐? 본분과 진영을 지키고, 자신의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탈영병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지나치냐?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째서 지나치지 않다고 하겠느냐? ‘지나치지 않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어떤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든, 지금 이 시기에 모두가 이행하는 각각의 본분은 하나님이 정한 것과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무척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네가 그 본분을 이행하기까지 하나님이 많은 사역을 하지 않았겠느냐? 하나님은 창세 때부터 너라는 사람을 예정해 놓았다. 네가 어떤 시대, 어떤 시기에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지, 그 가정이 네게 어떤 영향을 줄지, 하나님은 네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필요한지, 네가 미리 어떤 지식을 익히게 할지 등을 말이다. 예를 들어, 네가 외국어를 배우고 그 자질과 재능을 갖춰 네 본분을 감당할 수 있게 되기까지 하나님은 수많은 예비 사역을 했다.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그런 예비 사역을 했겠느냐? 네가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하기 위함이겠느냐? 네가 세속을 추구하고 사탄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겠느냐?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의 복음 확장 과정에서,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하나님이 네게 준 것들을 바치게 한다. 그런데 네가 하나님이 준 것들을 바칠 수 없고 오히려 사탄을 위해 봉사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기분이겠느냐?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하나님의 성품대로라면 어떤 처분을 내리겠느냐? 하나님은 단번에 너를 차 버리고 원치 않을 것이다. 너는 배은망덕하며, 네 뿌리를 알지도 못한다. 또 하나님이 준 것을 다시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도리어 사탄에게 갖다 바쳤으니, 이는 심각한 배반이다. 하나님은 그런 배신자를 원치 않는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 사역 과정에서 자신의 자질을 각자가 이행해야 할 본분에 발휘하고, 하나님을 믿은 후의 체험이나 인식, 깨달은 진리 등을 다 본분 이행에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사람이 하나님나라 복음 확장 사역에서 미약한 힘이나마 다할 수 있다. 여기에서 미약한 힘이란 무엇이냐?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하나님이 네게 진리를 깨닫고, 총명과 지혜를 갖추게 하는 목적은 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네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치이자 의미이다. 만약 네가 그 가치와 의미를 살아 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뜻이며, 하나님 집에서 폐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네가 사탄과 육을 살아 내는데, 하나님이 너를 원하겠느냐? 네가 살아가는 가치와 의미가 사라지면 하나님이 보기에 너라는 존재는 하나님 집에서 마땅히 없어져야 할 사람, 영원히 사라져야 할 사람으로, 하나님은 더 이상 너를 원치 않는다. 이 밖에,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확장되는 기간에,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각자의 본분을 이행하면서 한번 또 한번 큰 붉은 용의 탄압과 잔혹한 박해를 겪었다. 하나님을 따르는 길은 평탄하지 않고 더없이 힘겹다. 이는 하나님을 2~3년만 따라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이행하는 본분이 특수한 것이든, 임시로 안배된 것이든 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시로 누군가가 잡혀가고, 하나님의 사역이 교란되고 파괴되고, 본분 이행 인원이 확실히 부족하다. 특히나 자질이 좋고 전문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와 크나큰 능력, 권병 때문에 하나님 집은 이미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났고, 모든 사역이 정상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는 사람이 보기에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현현하여 사역할 때부터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갖은 풍파와 환난을 겪었다. 만약 하나님의 인도가 없었더라면, 하나님 말씀이 사람에게 믿음과 힘을 더해 주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오늘까지 걸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선민이 몸으로 느끼는 바이다. 하나님 집의 사역은 뭐 하나 순조로운 것이 없다. 모두 맨주먹으로 일으킨 것이고, 첩첩이 놓인 고난을 뚫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내디딘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우리는 큰 붉은 용 정권의 광기 어린 탄압과 박해만 마주한 게 아니라 종교계와 패괴된 인류로부터 차별과 비방, 정죄를 받고, 심지어 시대 전체로부터 버림받고 억압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경영 사역은 사탄이 권력을 잡고 사탄의 사악한 흐름으로 가득한 환경, 배경에서 전개되고 진행되는데, 결코 쉽지 않고 험난하다. 그렇기에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에게 위로가 되며, 기특한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치는 진심과 충성심, 대가, 그리고 본분을 대하는 성의 있고 책임감 있는 태도, 하나님 부탁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앙모하는 태도는 하나님에게 무척 소중한 것으로,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반면, 탈영이나 본분 이행을 장난으로 여기는 등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 방식, 태도를 하나님은 몹시 혐오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배해 놓은 각종 환경과 사람, 일, 사물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 진도를 방해하고 망치고 지연시키고 교란하고 지장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탈영병과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를 대하는 하나님의 기분과 반응은 어떻겠느냐?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갖겠느냐? (그들을 몹시 미워하실 것입니다.) 오직 혐오와 미움뿐이다. 긍휼이 있겠느냐? 없다. 긍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혹자는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십니까?”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이 왜 그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겠느냐? 그런 사람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 네가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리석은 사랑일 뿐이며, 네가 사랑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그를 소중히 여긴다고 해도 하나님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소중히 여길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단호히 버리고 어떤 기회도 주지 않는다. 이것이 합리적이지 않으냐?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한 가지 성품이며 또한 진리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파 과정에서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채 늘 자기 뜻대로 날뛰고, 복음 확장 사역의 방해물이나 걸림돌이 되며, 복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고 파괴하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복음 사역의 확장을 가로막는다. 그렇기에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혐오와 미움, 도태이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 공의 성품을 드러낸 것이다. 혹자는 “그렇게 처리하시는 건 좀 과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데, 전혀 과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런 마귀들을 혐오하고 증오한다. 하나님은 위장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고 분명하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 중 가장 두드러지는 두 가지는 무엇이더냐? (널리 긍휼을 베풀고, 크게 노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점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크게 노하느냐?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저버리며 사탄을 따르는 사람에게 크게 노한다. 즉, 사탄을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 배신자, 탈영병을 하나님은 원치 않는다. “저는 일시적으로 연약해져서 본분을 이행할 마음이 사라졌지만, 사실 하나님을 떠나려는 것도, 속세나 사탄 진영으로 돌아가려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연약해졌어도 좋고,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어도 좋다. 너의 그런 연약함을 대할 때 하나님은 상황에 따라 너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널리 긍휼을 베푼다.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연약해지고, 소극적이고 나태해지기가 쉽다. 하나님은 그것을 전부 감찰하며, 상황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네가 탈영병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너를 탈영병 취급 하지 않을 것이고, 네가 연약해졌다면 하나님은 네 연약함에 근거하여 너를 대할 것이다. 네가 일시적으로 패괴를 드러내거나 연약해지거나 방향을 잃은 거라면, 하나님은 너를 깨우치고 인도하고 붙들어 줄 것이며, 네 미약한 분량과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 맞춰 너를 대할 것이다. 이는 본성 본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왜 버리지 않겠느냐? 그들은 그저 한때 연약해져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뿐, 하나님과 진리를 버리고 사탄을 따르고자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회를 준다. 그럼 이렇게 일시적으로 연약해져서 본분을 이행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돌아와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어떻게 처리해야겠느냐? 받아 주어도 된다. 이는 탈영병이 된 것과 성질이 다르니 천편일률적으로 일괄 처리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연약해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탈영병에 해당하는데, 네가 그를 받아 준다 해도 언젠가 비슷한 일이 생기면 그는 여전히 탈영병이 된다. 그는 한 번 탈영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런 인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들을 단번에 차 버리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전혀 지나치지 않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두를 구원해도 그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구원할 사람들 중 한 명이 적어지면 하나님이 즉시 한 명을 메우면 그만이지만, 그런 사람은 원치 않는다. 하나님은 그를 영원히 잘라내고 원치 않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파 과정에서 종종 복음 사역을 교란하고 망치는 모습을 보이지만, 얼마간 사역을 하고 사람을 좀 얻기도 한다. 이를 선행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일단 그들이 선행을 한 것인지는 잠시 차치하고, 먼저 복음 전파 과정에서 수시로 복음 사역을 교란하고 망치는 그들의 모습에 관해 말해 보자. 일례로, 복음 사역을 책임지면서 늘 남들과 지위와 권력을 놓고 다투거나 수시로 분쟁을 일으키며 복음 사역을 교란하고 망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은 그의 공과(功過)를 서로 상쇄시키겠느냐, 아니면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은 그의 과오를 기록하실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가 몇몇 사람에게 전하고 일부 사역을 했으며, 얼마간 성과를 내기는 했지만, 끊임없이 악을 행했다. 큰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지만 작은 잘못은 수시로 저질렀다. 작은 잘못을 수시로 저질렀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진리를 실행하지는 않고, 명리와 지위를 놓고 다투며, 말에 조금의 경건함도 없고, 진리 원칙을 전혀 구하지 않으면서 늘 제멋대로 굴고, 자제하지 않고, 조금도 변화하지 않아 이방인과 같다는 의미다. 이는 교회 생활과 하나님의 선민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을 넘어뜨렸다. 이것이 악행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악을 행한 사람들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힘은 많이 썼겠지만 정말 책임을 다한 것이겠느냐?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보겠느냐? 그들이 사역을 조금 했다고는 하나 거리낌 없이 악을 행할 수 있는데, 그들이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들은 왜 그렇게 거리낌 없이 악을 행하느냐? 한 가지 이유는 패괴 성품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요행 심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는 복음을 전하고 많은 공을 세웠어. 모 교회의 신자 백여 명을 다 내가 전했지. 그들이 하나님께 구원받는다면 내 공이 얼마나 크겠어? 그러니 하나님도 나를 기억해 주셔야 하지 않겠어? 그 사람들을 봐서라도 나를 정죄하지는 않으실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는 자신을 과대평가한 것 아니겠느냐?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겠느냐?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것이겠느냐? 그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상과 면류관을 얻고자 했으며,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었다. 또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모른 채 감히 하나님과 거래하고자 했다. 이는 그가 진리 실제를 전혀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은 몇 년간 복음을 전했고 어느 정도 경험도 있었다. 복음 전파 과정에서 숱한 고생을 하고, 징역 판결을 받아 몇 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으며, 출소 후에도 계속 복음을 전했는데, 수백 명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중에서 인재도 여럿 나왔고, 리더 일꾼으로 발탁된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자신이 대단한 공로를 세웠다고 생각한 그는 그것을 밑천으로 여기저기 떠벌리면서 자신을 과시하고 증거했다. “저는 예전에 8년이나 옥살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굳게 서서 증거했죠. 또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중 일부는 리더 일꾼이 되었고요. 저는 하나님 집에 공을 세우고 기여를 한 거죠.”라고 말이다. 그는 어디에서 복음을 전하든 그곳 리더 일꾼에게 우쭐거리면서 “여러분은 제 말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윗선 리더도 저한테 말할 때는 예의를 좀 차려야 하고요. 저한테 무례하게 구는 자가 있으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자는 악질 아니겠느냐? 이런 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사람들을 얻지 않았어도 감히 그렇게 거들먹거렸겠느냐?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거들먹거릴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본성 안에 그런 것이 들어 있다는 의미이며, 그의 본성 본질이 바로 그런 것이고,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교만하다는 의미이다.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얻자 교만한 본성이 커져서 더더욱 거들먹거리게 된 것이다. 이런 부류는 가는 곳마다 자기 밑천을 내세우고 공을 내세우며, 각급 리더들을 협박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윗선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부류 사람들의 행위와 태도에 근거하여 그들의 본성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악마가 하나님 집에 섞여 들어와 힘을 좀 쓰면 저절로 본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누가 책망하고 훈계해도 듣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 집과 대항하는데, 그들의 이런 행동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하나님이 보기에는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들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말해야 적절할 것이다. ‘죽음을 자초한다’라는 말에는 실제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 어떤 것이겠느냐?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은 본디 좋은 일이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은사가 있는데, 이는 복받은 것이지만, 그가 바른길을 걷지 않는다면 아주 곤란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말재간이 있어서 누구를 만나든 상대에 따라 말할 수 있고, 누구와도 말이 통한다. 이 또한 하나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일단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차치하고, 핵심은 사람의 본성을 보고, 바른길을 걷는지 아니면 그릇된 길을 걷는지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 사역이 확장되는 동안 재능을 바치고, 적잖이 애를 써서 많은 사람을 얻은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다. 너는 복음 사역에 작은 힘이나마 일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기억될 만하다. 만약 네가 묵묵히 그 본분을 제대로 해낸다면, 형제자매들은 그것을 눈여겨보고 너를 존중할 것이며, 모르는 것이 있으면 너를 찾아와 구하고 가르침을 청할 것이다. 또 네가 인성을 갖추고 진리를 추구한다면 사람들도 너를 좋아하고, 하나님 또한 너를 축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바른길을 걷지 않고 하나님이 준 그 은사를 밑천 삼아 어딜 가든 자신이 한때 옥살이했다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녔다. 사실 옥살이한 것이 뭐 대단한 일도 아니다. 큰 붉은 용의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 사역을 하다가 잡혀가 옥살이한 사람은 적지 않다. 그것은 무슨 밑천이 아니라 사람이 마땅히 겪어야 할 고난이다. 고난을 겪고 나서 간증이 있다면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할 수 있을 것이고, 박해받는 동안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해 사탄을 이겼는지, 어떤 고난을 겪고 어떤 수확을 얻었는지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른길이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이 바른길을 걷지 않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닌다. “저는 한때 몇 년이나 옥살이하면서 적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저한테 잘해 줘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건 어리석고 무지하고 비양심적인 겁니다.” 이것이 바른길을 걷는 것이겠느냐? 옥살이를 하고 고초를 겪으면서도 형제자매를 팔아넘기지 않고 판결을 받은 후 굳게 서서 증거했다면 이는 좋은 일로, 하나님이 보기에 기억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본연의 일을 하지 않고 가는 곳마다 자신의 공을 과시함으로써 존경과 동정을 얻어 내려 했으며, 심지어는 물질적인 것까지 받아 내려 했다. 이것이 바로 공을 내세우는 행위이다. 그가 사람들에게 공을 내세우는 속뜻은 무엇이겠느냐? 사람들에게 공을 내세운다면 하나님에게도 공을 내세우지 않겠느냐? 공을 내세워 사람들에게서 지위와 명리, 체면, 육적인 즐거움까지 충분히 얻어 낸 후에는 하나님에게 요구할 것이다. 이런 자는 바울 아니겠느냐? 한편, 그는 그 본분을 이행하며 적잖은 사람을 얻었다. 하나님 눈에 그가 깨달은 진리를 기초로 계속 본분을 이행하고, 그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보였다면 하나님은 계속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기는커녕 자신이 큰 공을 세우고 자격을 갖췄다고, 모두에게 떠벌려도 된다고 생각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떠벌리고 밑천을 늘어놓으며 공로를 따진 것이다. 또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 몇백 명, 몇천 명을 얻었다고 뽐낼 뿐,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거나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증거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이는 죽음을 자초한 것 아니겠느냐?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바른길을 걷지 않았다. 그럼 그는 어떤 태도로 설교와 교제를 듣겠느냐?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안 들어도 돼. 옥살이하면서도 유다가 되지 않았으니까 나한테는 간증이 있어. 게다가 내가 복음을 전해 얻은 사람도 누구보다 많지. 치른 대가도 가장 많다고. 온갖 고생을 다 겪었지. 덤불도 헤치고, 산속 동굴에서도 지내 봤으니까. 내가 견디지 못하는 고통도 없고, 안 가 본 곳도 없어. 당신들 중 누가 나랑 비교가 되겠어? 그러니 어떤 설교를 듣든 너무 잘 이해할 필요는 없어. 설교를 듣는 건 실행하기 위해서잖아? 나는 다 실행해 냈고, 다 살아 냈다고. 성육신 하나님이라 해도 마찬가지일 거야.’ 이는 어떤 부류가 하는 말과 비슷하냐? (바울의 말과 비슷합니다.) 그는 그야말로 바울의 복사판이다. 그는 또 “당신들은 저만 한 능력이 없죠. 만약 있다면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을 필요도, 매일 하나님 말씀을 받쳐 들고 적고 베끼고 외울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저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언제 당신들처럼 그렇게 공부했나요? 저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무엇이든 갖추게 되니까요.”라고 말하는데, 이는 몹시 어리석은 것 아니겠느냐? 교만하기 짝이 없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일을 어떻게 여기느냐? 장난으로 여긴다. 그는 사람이 얼마간 좋은 행위를 갖추고, 사역을 하고,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싸워야 할 싸움을 마치면 마지막에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고, 만약 하나님이 면류관을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종교인들과 같은 관점을 지니고 있다. 또 그는 “지금 저는 모든 고난을 겪고 모든 대가를 치렀습니다. 하나님이 겪으신 고난을 저도 거의 다 겪었죠. 그러니 마땅히 하나님께 상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바울과 같은 부류 아니겠느냐? 그는 자기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언제나 자격과 서열을 따진다. 만약 그가 정말 그리스도가 되려고 한다면 곤란해진다. 이런 자가 바로 두 번째 바울이다. 이런 길을 걷는 사람에게 되돌릴 여지가 있겠느냐? 없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막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오랜 세월 믿었는데도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이냐? 이는 사람의 본성 본질에 의해 결정된다. 악인,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모두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당연히 적그리스도의 길을 택하게 된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똑같이 하나님 말씀을 읽으며 똑같이 설교를 듣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고 복받기를 추구하는 길을 택하느냐? 객관적인 환경은 다 비슷하다. 다만 인품이 다르고 개인적인 기호가 다르기에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이 말세에 그토록 많은 말씀을 했고, 그 말씀이 선포된 지도 어언 30년이 되어 가는데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가 하나님의 양이겠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양이 아닌 자는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진리를 사랑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무엇에 집중하겠느냐? 무엇을 추구하겠느냐?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지위와 복을 추구하는 마음이 매우 강하며,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목을 빳빳이 세우고 명리와 지위를 추구한다. 자신을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늘 공로를 비교하고 가는 곳마다 자기 밑천을 뽐낸다. 이런 행위, 행동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죽음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바울이 그렇게 죽음을 자초했다. 사람이 오랫동안 설교를 들었는데도 바울처럼 회개할 줄 모르고 진리를 전혀 깨닫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면, 이는 죽음을 자초하는 것 아니겠느냐? 처음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사람의 일부 행위와 행동은 개인의 뜻에서 비롯되고, 불순물이 섞여 있고, 어쩌면 거래 심리나 개인적인 속셈, 욕망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보지 않는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이 사람에게 분명히 전해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패괴와 불순물, 연약함이 있어도 허용하고, 사람이 거래를 해도 허용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느 정도 많은 말씀을 한 후에도 기어이 네가 지키고 행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부정하고, 심지어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시하고,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한다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어떤 태도로 대하겠느냐? 이런 일을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너를 불신파라고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진리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진리이자 사람이 구원받기 위한 길이라는 것도 믿지 않는다. 그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의 모습과 표출에서 그가 걷는 길이 진리 추구의 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가 걷는 길은 어떤 길이냐? 자신의 밑천과 공로에 기대 하나님에게 상을 요구하는 것인데, 걷는 것은 바로 바울의 길이다. 바울을 어떻게 해부하든, 그는 스스로에게 대입하지 않으며, 뉘우치고 회개하지도 않고, 자신을 인식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한 모든 일이 옳고 진리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말씀을 선포하든, 이런 부류를 어떻게 해부하고 정죄하든 그는 전혀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관점과 복받으려는 속셈, 하나님과 거래하는 행동이 흔들리거나 변하는 일도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하나님 음성을 듣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그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당신은 당신 마음대로 말씀하십시오. 저는 제 생각대로 행동할 테니까요. 당신은 당신이고 저는 저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행사하시든, 당신의 뜻이 무엇이든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그건 제 생사와 무관합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냐? (불신파입니다.) 그가 믿는 것은 누구냐? 그가 믿는 것은 그 자신이다. 이런 부류가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역겨우며, 멸망해야 마땅하다. 이런 자는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자기 밑천에 기대고, 경험이 많다고 거들먹거리며, 하나님께 공을 내세워 상을 요구한다면, 곤란해질 것이다. 그들의 행위에 근거하여 그들의 결말을 정의한다면 ‘죽음을 자초한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앞으로 이런 부류를 만났을 때, 죽음을 자초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 적절하겠느냐? 그가 그래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마라. 그를 일깨우고 경고해 주며, 말을 돌려서 이끌면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어라. 하지만 그 사람의 본질과 성품이 정말 바울과 똑같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그가 죽음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도 사실을 알려 주지는 말고 계속 봉사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라. 이것이 바로 사탄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행동하는 게 적절하지 않겠느냐? (적절합니다.) 사탄이 봉사하도록 이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이다. 만약 네가 이렇게 형제자매를 대한다면 그것은 악행이니 하나님은 혐오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사탄을 이용해 봉사하게 한다면 이는 사탄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고, 지혜로운 것이다. 큰 붉은 용, 사탄, 마귀가 하나님의 선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보느냐? 이는 하나님의 지혜이니 정죄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진리이다. 사탄이라는 놈은 이용해야 한다. 사탄을 이용해 봉사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일부 사역을 제대로 해낼 수 없고, 성과를 내기도 힘들다. 진리를 추구하는 길, 구원받는 길을 걷는 사람도 힘쓰는 단계를 거치지만,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혜로 네가 봉사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네가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이다.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많은 일을 할 때 원칙 없이 자기 뜻대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봤을 때 너는 힘쓰기를 원치 않지만, 객관적 사실로 볼 때는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힘을 써서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과 진리를 깨달아야 점차 진리 추구 단계로 넘어가 진실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 뜻에 부합하여 구원받는 길을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힘쓰는 것은 사탄을 이용해 봉사하게 하는 것과는 완전히 성질이 다르다. 하나님은 사탄을 이용해 봉사하게 할 뿐 사탄을 구원하지는 않는다. 반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힘쓰는 자가 진리를 추구한다면 그는 바로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이다. 일부 힘쓰는 자의 경우, 그가 쓸모 있다면 그를 이용해서 봉사하게 하지만, 만약 그가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한다면 엄하게 경고하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단번에 차 버리고 출교해야 한다. 이렇게 대해야 한다. 그가 평소에 착실히 힘을 쓰고 사역을 교란하지 않는다면 계속 힘쓰게 해야 한다. 어쩌면 언젠가 진리를 깨닫고 구원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좋은 일이니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으냐? 사람을 미리 정죄하지 마라. 어떤 사람들이 정죄받는 원인이 무엇이냐? 바로 교란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본분을 열심히 이행하지 않고, 본성 본질이 바울과 똑같아서 죽어도 회개하지 못한다. 이런 자는 죽음을 자초하는 인간이 분명하다. 이런 부류는 교회에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존재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들에게 실상을 알게 하는 것이 좋은 일이겠느냐? 이들이 실상을 알게 될 것이 두려우냐? (두렵지 않습니다.) 그가 만약 스스로에게 대입하여 회개한다면 이는 좋은 일이니 기회를 주어야지 단번에 내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가 실상을 알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오면서 계속 교란한다면, 이는 정말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다. 그 스스로 옳은 길을 가지 않으니, 이때는 사정 봐줄 필요 없다. 이런 부류는 제명하고 도태시켜야 한다.
복음 전파의 실행 원칙과 관련된 부분은 기본적으로 이러하다. 복음을 전할 때는 책임을 다하고, 반드시 모든 복음 대상자를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최대한 구원하려 하니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참도를 구하고 알아보려는 사람은 누구라도 쉽게 놓쳐서는 안 된다. 또한, 복음을 전할 때는 반드시 원칙을 파악해야 한다. 참도를 알아보려는 사람들의 종교적인 배경, 자질 고하, 인품 등 여러 측면을 관찰하고 알아보고 파악해야 한다.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을 발견했는데 그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면, 이는 하나님이 예정한 사람이니 온 힘을 다해 진리를 교제하여 그를 얻어야 할 것이다. 인성이 좋지 않고 인품이 너무 나쁘며 갈망하는 척하고 늘 변명을 늘어놓거나 관념을 끌어안고 내려놓지 않는 경우라면, 그 사람을 한쪽에 내버려두고 포기해야 한다. 참도를 알아보려는 사람 중에 이해 능력이 있고 자질도 무척 좋지만 지나치게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종교 관념을 고수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랑으로 인내심 있게 진리를 교제해 해결해 주어야 한다. 만일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포기해도 된다. 그러면 우리도 모든 성의를 다한 것이다. 요컨대,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이 참도를 알아보고자 하고 진리를 구하는 한, 최선을 다해 그에게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 주고 진리도 많이 교제해 주며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해야 한다. 또 그의 관념이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를 얻기 위해 노력하며 그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복음 전파 원칙에 부합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를 얻을 수 있겠느냐? 만약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자질도 괜찮고, 인성도 좋은 사람인 게 확실하게 판단되면 반드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네 책임을 다해야 한다.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하고 방식과 방법도 있어야 한다. 어떤 방식과 방법을 사용하든 그건 모두 그를 얻기 위한 것이다. 요컨대, 그를 얻기 위해 책임을 다하고, 사랑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하여 네가 깨달은 진리를 전부 교제해 주고, 네가 해야 할 일을 다해야 한다. 설령 그를 얻지 못해도 너는 전혀 거리낄 게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성의를 다한 것이다. 네가 진리를 명확하게 교제하지도 않고, 상대가 관념을 죽어도 내려놓지 않는다고 네가 인내심을 잃고 스스로 그 사람을 포기한다면, 그건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 너에게 그건 과오이자 오점이다. “오점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정죄하십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그 사람이 고의적으로, 일관되게 그렇게 했는지를 봐야 한다. 이따금 과오를 저지른 것이라면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회개하면 된다. 하지만 알면서도 일부러 과오를 저지르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정죄될 것이다. 참도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일부러 죄를 저지르는 것인데 정죄되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진리 원칙에 따르면 이것은 무책임하고 무성의한 것이고, 최소한 네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네 잘못을 평가할 것이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정죄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실수를 줄이거나 피하려면 온 힘을 쏟아 책임을 다해야 하고, 참도를 알아보려는 사람의 모든 문제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해결해 주어야 한다. 특히 중요한 문제는 절대 질질 끌거나 미루어서는 안 된다. 만약 참도를 알아보려는 사람이 같은 질문을 반복적으로 한다면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귀찮아하지 말고 대답해 주되, 그가 이해해서 더는 물어보지 않을 때까지 어떻게든 문제를 분명하게 교제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네 책임을 다한 것이고, 마음속으로 죄책감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일에서 하나님께 죄책감이 없을 것이다. 그 본분, 그 책임은 하나님이 네게 맡긴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하고, 하나님을 향해 하고, 무엇이든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따라 한다면 그런 실행은 진리와 하나님의 요구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그러면 네 언행으로 상대가 도움을 얻을 것이고, 찬성하며 쉽게 받아들일 것이다. 네 말에 빛 비춤과 실제적인 것이 있으며 또 분명하게 말한다면, 논쟁이나 의견 충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상대가 진리를 깨닫고 도움을 얻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네 말이 모호하고 애매하며 분명하게 진리를 교제하지 못하고 빛 비춤도 실제적인 것도 없다면, 상대의 관념이나 문제를 해결해 주기는커녕 상대가 약점을 잡고 너를 판단하거나 정죄하기 쉽다. 그러면 그 문제는 더욱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 말씀을 몇 단락 더 교제해야 상대가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는 지혜롭게 말해야 하고, 진리도 분명히 교제해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해결함으로써 상대가 감탄하고 진심으로 승복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성과를 내기 쉽고, 상대가 순조롭게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 이는 복음 확장에 도움이 된다.
복음 전파의 실행 원칙과 관련하여 한 가지 측면이 더 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반드시 바르고 단정해야 하며, 언행이 성도의 품위에 부합해야 한다. 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자제하고, 행동을 신중히 해야 한다. 어떤 복음 대상자는 낯선 이가 방해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럼 어떻게 그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느냐? 혹자는 복음을 전하면서 하루에 세 번씩 전화를 하고, 상대가 퇴근하기만 하면 바로 그의 집으로 달려가며, 얼굴을 보자마자 하나님 말씀을 읽어 준다. 상대가 얼마나 바쁜지 신경 쓰지 않고 적절한 때를 고르지도 않는데, 이렇게 하면 상대를 성가시게 하기 쉽다. 또 혹자는 너무 어리석어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은 정말 사악합니다. 그러니 직장을 그만두고 일하러 나가지 마세요. 지금이 어떤 시기입니까? 대재난이 곧 닥칠 테니 얼른 하나님을 믿으셔야죠!” 이런 식의 복음 전파가 적절하겠느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상대는 이방인이고, 아직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 밖에, 복음 대상자의 사생활이나 개인의 관점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복음 대상자에게 “보세요.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런 이방인의 옷을 입지 않습니다.”라든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런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어떠어떠한 것을 먹어야죠.”라고 말하는데, 이는 쓸데없는 참견 아니겠느냐? 이런 것을 가리켜 어리석다고 한다. 한순간의 적절치 않은 언행 때문에 네가 이번에 복음 전파를 위해 치른 대가가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니 항상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자기 행동을 제약하고 규범화하고 단속해야 한다. 단속이란 무엇이냐? 일을 할 때 규율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떤 말을 하는 게 적절한지, 복음 대상자가 어떤 말을 듣고자 하는지 파악하여 상대가 싫어하고 혐오하는 이야기를 하거나 그런 행동을 하지 마라. 또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일은 묻지도, 나아가 간섭하지도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상대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네가 “아들이 둘이나 있다니 좋네요. 딸 하나만 더 있으면 참 좋겠어요.”라고 말했다고 해 보자.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어떤 복음 대상자는 영어를 할 줄 아는데, 그에게 “영어 실력이 정말 좋으시네요. 당신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 집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없거든요.”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적절하겠느냐? 사람은 모두 다르다. 어쩌면 그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너보다 더 적극적이고 열정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니 절대 상대를 곤혹스럽게 하거나 상대의 삶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또 이런 상황도 있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고 일부 진리를 깨달으면 자기가 평범한 범인, 속인들보다 고귀하다고 생각하면서 이방인을 무시하고, 심지어는 참도를 알아보려는 사람들을 봐도 무시하고 업신여긴다. ‘당신들은 말이야.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눈멀고 어리석으며 무지한 자들이야. 죽어 마땅한 존재지. 아무 가치가 없다고. 내가 오늘 당신에게 복음을 전하는 건 이게 본분이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을 상대도 안 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어떤 태도냐? 너는 그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을 뿐 다른 사람보다 고귀하지 않다. 설령 네가 한 나라의 왕이라고 해도 패괴된 인류 중 한 명 아니겠느냐? 네가 다른 사람보다 무엇이 대단하냐?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을 무시하지 마라. 네가 그에게 복음을 전해 준다고 할지라도 너는 그보다 고귀하거나 고상하지 않다. 너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패괴된 인류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이를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세상 사람들을 구제한다거나 중생을 제도한다는 시선으로 다른 이를 보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당신들은 정말 불쌍해. 나는 매일 당신들 같은 사람을 위해 속을 끓인다니까.’라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왜 속을 끓이느냐? 너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으면서 다른 사람 때문에 속을 끓인다면, 이는 가식 아니겠느냐? 남을 기만하는 것 아니겠느냐? 외식하지 마라. 사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인 지 20년, 30년이 지났을지라도 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 매일 하나님과 같이 생활하며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한다고 해도 너는 평범한 사람이다. 이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으로, 이는 너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몇 사람을 얻든, 너는 언제까지나 너이며 다른 사람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너는 여전히 패괴된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설령 네가 수많은 사람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거만하게 굴거나 나아가 오만 방자하게 굴어서도 안 되며, 경험이 많다고 거들먹거리면서 스스로를 뽐내서도 안 된다. “저는 오랫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숱한 경험과 교훈을 종합했습니다.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든 한눈에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아볼 수 있죠.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게 쉬울지 어려울지, 사람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저는 다 감이 옵니다. 전도 가능한 사람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그를 얻을 수 있을지 역시 방법이 있고요.”라고 말한다. 복음 전파의 경험이 있다고는 하나 네 생명 진입은 여전히 무척 얕은 상태이다. 또 약간의 생명 체험이 있고 변화를 얻었다고는 하나 너는 때때로 허풍을 떨며 스스로를 뽐낸다. 이것이 문제 아니겠느냐? 은사가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쉽게 큰소리를 치며, 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복음 대상자를 훈계하려 들고,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숭배하기를 바란다. 이는 성품의 문제 아니겠느냐? 행위의 변화만 있고 성품 변화가 없는데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겠느냐? 성품 변화의 간증이 없이 복음 진리만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한다면 이런 자가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하겠느냐? 상대가 참도를 받아들여 생명 진입의 진리와 실행 측면의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데, 네게 실제적인 체험이 없어서 어떻게 체험 간증을 말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면, 이는 결함 아니겠느냐? 언제나 도리를 늘어놓아 사람들에게 앙망과 우러름을 받는 데만 집중하고 높은 자리에 서려고 한다면, 이것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이는 자신을 증거하는 것으로, 패괴 성품에 속한다. 심판과 형벌을 체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품 변화를 이룰 수 있겠느냐? 어떤 복음 전파자들이 체험 간증을 말하면, 그것을 들은 상대는 큰 도움과 감동을 받으며 마음속으로 탄복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있고, 어떤 복음 대상자도 무시하지 않으며,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정상적으로 지내며 친구가 될 수 있으니 확실히 정상 인성의 이성이 있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이룬 것이겠느냐? 이는 그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수확을 얻었고, 최소한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았으며, 자신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생명 성품에 변화가 생겨 더는 교만하게 굴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을 보고 ‘예전에 나도 저랬지. 저들을 무시해선 안 돼. 나라고 뭐 특별한 것도 없잖아.’라고 생각하며 마음가짐이 달라졌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자신의 본성을 인식한 후에 복음 대상자가 드러내는 무지와 어리석음, 혹은 연약함을 보면 무척 정상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남을 비웃지 말고, 누구를 보더라도 보잘것없는 중생이라는 생각, 태도를 갖지 마라. 이런 태도를 갖는다면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고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많은 사람을 볼 때 마음속에서 이런 패괴된 내적 상태가 나타날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인 지 20년이 됐고, 복음 전파도 10년이나 했다고 해 보자. 복음 대상자들 사이에 있을 때, 그들은 늘 네가 자신들보다 대단하다고 여기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하나님을 20년이나 믿었는데, 저희는 이제 막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분량도 보잘것없고요. 이렇게 비교하니 당신과 저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이네요. 당신은 어른이고, 저희는 갓 태어난 아기죠.” 그들이 이렇게 비교하면 너는 어떻게 생각해야겠느냐? ‘내가 저들보다 일찍 복음을 받아들였고, 하나님을 믿은 기간도 저들보다 길지만, 생명 진입이나 진리에 있어서는 아직 멀었어. 아직 하나님의 진정한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나는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길에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어.’라고 생각해야 한다. 너는 마음속으로 네 실상을 알고 있다. 상대가 아무리 너를 우러러보고 앙망해도 너는 어떤 느낌이겠느냐? “저는 평범한 사람이니 저를 앙망하지 마십시오.”라며 반감을 가질 것이고, 즐겁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마음속으로 네가 아무것도 아니며,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저 글귀와 도리만 좀 말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리석어 다른 이를 앙망하기를 좋아한다. 만약 네가 앙망받는 기분을 좋아하고 그 가운데서 즐거워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만약 네가 그것을 싫어하고 그런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면, 다른 사람이 그런 방식으로 너를 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로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고, 올바른 내적 상태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너는 쉽게 잘못을 저지르거나 일을 그르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한 이런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자주 직면하는 일들이다. 먼저, 소극적인 측면에서 너희는 부적절한 말이나 방식, 행위, 그리고 성품 면에서 표출하는 부적절하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피해야 한다. 이 밖에, 적극적인 측면에서 너희는 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본분에 충성을 다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를 보여 본분 이행에 합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조금씩 진리와 원칙을 구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자신이 이행하는 모든 본분을 끝까지 견지하고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네가 이행한 어떤 측면의 본분이든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하나님께 기억되며, 취할 만한 부분과 합격한 부분이 있어야 한다. 또 복음을 전하는 동안 너는 과오와 실수를 점차 줄이고, 본분을 이행할 때 거래하고 공치사를 하려는 내적 상태와 욕망, 야심도 줄여 나가도록 노력하는 한편,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그 책임을 절대적으로 이행하고, 본분을 자기 본직 일로 여기고자 추구해야 한다. 이 밖에도, 네가 이행한 그 본분을 몇 년 후에 돌아본다 해도 한 점 부끄러움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죄책감을 갖는 일을 점점 줄여 나가야지 변화가 전혀 없어서는 안 된다. 복음 대상자에게 복음을 전할 때, 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면 마음이 괴롭고 죄책감이 들 것이며, 사전 준비가 부족했다고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 복음을 전할 때도 똑같은 내적 상태로 변화가 없다면, 그 기간에 너는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이 측면의 진리를 실행하지도 얻지도 못했으며, 내가 교제한 것들이 너에게는 항상 도리에 불과했다는 의미이다. 만약 네 과오와 실수가 점점 줄어들며, 죄책감을 느끼고 참소받는 것들 또한 점점 줄어든다면, 이는 어떤 의미겠느냐? 네 본분 이행의 순수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책임감이 점점 강해진다는 의미이다. 이는 네가 이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면서 점점 더 충성심이 생긴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복음을 전할 때 진리를 교제하거나 성경 장절을 얘기하지 않고 사람의 방법에만 의지했다면,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부적절하며, 그것은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인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니고, 어느 정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동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느낌을 받았느냐? 어쩌면 지금은 그런 느낌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각 측면의 진리를 더 많이 갖추고 어느 정도 분량이 생기면 더 정확하고 실제적인 태도와 시선으로 과거의 네 행동을 바라볼 것이다. 이는 네 내적 상태가 정상적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지금 너는 예전의 그런 행동 방식에 대해 아무 느낌이 없고, 경멸하지도 않으며, 올바른 관점을 갖거나 올바른 평가를 내리지도 못하고 뜨뜻미지근하고 무감각하다면, 이는 무척 골치 아픈 일 아니겠느냐? 이는 네가 마음속으로 이러한 측면과 관련된 진리를 전혀 갖추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사람의 갖가지 악행이나 간계,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 방식에 대해 무감각한 태도를 보이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것, 심지어는 그것들과 한패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네 내면은 어떤 상태겠느냐? 너는 불의한 것들, 죄와 관련된 것들, 진리와 부합하지 않고 어긋나는 것들을 좋아하니 문제가 심각하다. 계속 이런 행동 방식으로 실행해 나간다면 무척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어떤 결과겠느냐? 네 악행을 쌓아 갈 뿐만 아니라 구원받는 길에서 점점 멀어진다. 어째서 점점 멀어진다고 하겠느냐? 너는 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구하지 않고, 일 처리를 할 때도 원칙 없이 네 뜻대로, 네 기호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목적은 진리에 진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임무를 완수한 후 보고하기 위해서이다. 네가 준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네가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부탁이 아니다. 그것은 성질이 다르다. 그러므로 네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걷는 길은 구원을 향한 길이 아니라 힘만 쓰는 길이며, 바울이 하나님과 거래한 그런 길이다. 그러면 네 모든 행동은 언젠가 하나님에게 바울과 똑같은 결말로 규정될 것이다. 이런 결과가 초래되지 않겠느냐?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반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네 방식과 방법이 모두 실용적이고, 네 출발점과 마음가짐이 모두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면, 또 네 일 처리 원칙과 걷는 길이 전부 하나님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고 진리에 완벽히 부합한 것이라면, 이런 실행은 어떤 성과를 가져오겠느냐? 너는 점점 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고, 일 처리에 원칙이 생길 것이며, 생명도 갈수록 성장할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충성심 역시 점점 커질 것이다. 그러면 구원받는 길에 오른 것이다. 이와 동시에, 너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조금씩 네 패역과 패괴, 각종 패괴 성품을 성찰한 후 이러한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갈수록 자제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 후 책임감은 점점 더 커지고, 네 충성심의 순수도는 점점 더 올라갈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또한 깊어질 것이다. 이와 함께, 각 진리 실제의 측면에 대해서도 갈수록 체험과 인식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네가 걷는 길은 바울의 길과 완전히 상반되는, 베드로가 진리를 추구한 길, 구원받는 길이 된다. 그럼 마지막에 어떤 결과를 얻을지 너 자신도 체험할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도 너를 칭찬할 것이며, 네 마음속에는 더 큰 평안과 기쁨이 생겨날 것이다. 네가 행동하고 드러내고 보여 주는 과정에서 아무리 우여곡절을 겪었어도, 시행착오를 겪거나 소극적이 되고 연약해지고 심지어는 실패하고 쓰러졌어도 하나님이 보기에 네가 걸어온 길은 전반적으로 구원받는 길이다. 그럼 하나님은 네 결말을 어떻게 정하겠느냐? 하나님은 성급하게 네 결말을 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차근차근 타이르며 너를 붙들어 주고 도와주고 인도하여 구원받는 길에 오르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여 마지막에 온전케 되게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너는 완벽히 구원받은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점에 근거한다면,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것 또한 구원받는 길에 오를 기회와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기회가 있는 것이고, 완벽하게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단, 그것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진리 추구의 길을 걷는지에 달려 있다.
오늘은 주로 복음 전파의 본분 이행과 관련된 각 항목의 진리에 대해 교제하였다. 그럼 다시 처음에 교제하던 화제로 돌아가 보자.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을 어떻게 불러야겠느냐?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렇다. 증인이라거나 전도자라고 불러서는 안 되며, 복음 사자라고 불러서는 더더욱 안 된다. 결국, 그들은 복음 전파자이다. 그러니 절대 스스로를 증인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사람은 뭔가를 증거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만 않아도 훌륭하다. 전도자라고 부르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그 호칭과는 더 거리가 있으니 말이다. 네가 전하는 것은 ‘도’가 아니며, 네가 전하는 말은 ‘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자에 대한 호칭을 정하면, 이 본분에 대한 정의가 정확해진다고 하는 것이다. 한 가지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은 절대 증인, 전도자가 아니다. 그런 것과는 차이가 너무 크다. 만약 증인, 전도자라고 부른다면 사람은 자신을 남보다 더 높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사람은 과시하고 거들먹거리기가 쉬울 것이다. 과시하고 거들먹거리는 것이 좋은 일이냐, 아니면 나쁜 일이냐? (나쁜 일입니다.) 네가 그를 추켜세우거나 높여 주지 않아도 그는 항상 거들먹거리려고 하는데, 만약 네가 그를 추어올리면서 증인, 전도자, 또는 복음 사자라고 부른다면 의기양양해진 그는 어떻게 되겠느냐? 어깨가 올라갈 것이다. 이제 복음 전파의 본분과 관련된 각 항목의 진리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느냐? (네.) 복음 전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반드시 많은 진리를 갖추어야 한다. 혹자는 “저는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진리를 갖출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라고 말하고, 또 혹자는 “저는 아직 언제 복음을 전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복음을 전해 본 경험이 없고, 말도 잘 못하는데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는데, 복음을 전하지 못한대도 복음 전파 측면의 진리는 갖출 수 있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다가가는 연습은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만약 네가 이런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이 본분을 잘 이행하고 싶고 하나님과 협력하고 싶다면 복음 전파 측면의 진리, 이상(異象) 측면 및 실행 측면의 진리를 갖추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진리를 갖추는 것은 하나님의 선민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다. 이러한 진리는 누가 갖추든 쓸데없지 않고, 복음 전파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런 진리를 깨달으면 어떤 도움이 되겠느냐? 사람에게 어떤 복을 가져다주겠느냐? 어쩌면 사람은 누구나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이 부단히 깊이를 더하고,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부단히 체험하며 진리에 대한 인식이 계속 깊어지고,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갈수록 친밀해지며, 사람과 하나님의 교류 역시 갈수록 빈번해짐에 따라, 사람은 조금씩 이런 이상 측면의 진리와 하나님 사역 측면의 진리를 하나님의 행사, 그리고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 대조해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대조해 보는 과정이 곧 하나님을 알아 가는 과정이다. 네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꽤 되는데도 하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떻게 현현 사역을 하는지 등을 모른다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게 오랫동안 본분을 이행했는데 결국 하나님에 대해 하나도 이해하는 바가 없다면, 헛되이 믿은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 마귀가 퍼뜨리는, 하나님에 대한 헛소문을 듣는다면 너는 믿겠느냐? (믿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믿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네가 정말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느 날 그런 헛소문을 들었을 때 의심을 품고 마음속으로 ‘설마 저 말이 진짜일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까?’라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할 것이며, 본분도 이행하고 싶지 않아질 것이다. 또 헛소문에 영향을 받아 앞에 놓인 길이 한없이 어두컴컴하다고 느끼며 미망에 빠질 것이다. 사람이 늘 미망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정말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모르기에 늘 미망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미망은 어떤 상태에서 생겨나겠느냐? 모순적으로 보이는 수많은 것들이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고, 방향감을 잃게 하며,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게 해 미망에 빠지는 것이다. 너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을 정확히 이해하고 분별하며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느냐? 이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이해, 진리를 갖춘 정도와 관련이 있다. 늘 미망에 빠지는 사람은 어째서 그렇겠느냐? 실제로 정말 눈앞의 길이 흐릿해 보이기 때문이겠느냐? 사람이 늘 미망에 빠지는 것이 정말 눈이 멀었기 때문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마음의 눈이 멀어서이다. 즉, 진리와 하나님, 모든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한 판단이 무감각해진 것이다. 어째서 무감각하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행사와 성품을 인식하지 못하며, 모든 일에 대한 정확한 판단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일을 판단하고 규정하든 기준이 없고 모호하다. 또 어떤 일을 바라보든 명확하지 않고 불분명하며,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꿰뚫어 보지 못한다. 이것을 무감각하다고 한다. 무감각함은 사람을 눈멀게 하고, 눈먼 사람은 늘 미망에 빠진다.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럼 사람은 그렇게 오랫동안 설교를 듣고도 왜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어떤 일도 파악하지 못한 채 제멋대로 규례에 맞추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눈멀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완전히 눈멀었다고 할 수는 없어도 반쯤은 눈이 먼 것이다. 사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어떤 일도 꿰뚫어 볼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고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든, 계속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는 자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지 여부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대다수의 사람은 여러 해 동안 설교를 들으면 결국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된다. 너희도 적잖은 진리를 깨달았지만 적절한 환경이 갖춰지지 않아 몇몇 진리는 적용하지 못했기에 자신이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정말 체험의 시간이 다가와서 선택을 하거나 진지하게 따져 봐야 한다면, 이 측면의 진리가 점차 명확해질 것이다. 지금은 네 인상 속에 공허한 큰 틀의 것, 도리적인 것들로 남아 있겠지만, 체험과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많은 진리가 네 내면에서 점차 실제적, 현실적이 될 것이고, 너로 하여금 진리의 본질적인 면을 깨닫게 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게 되고, 민감하게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인성과 패괴 성품, 사람의 각종 내적 상태, 그리고 각 부류 사람의 갖가지 본질적 모습에 대해 두 눈 시퍼렇게 뜨고도 알아채지 못하니 눈뜬 봉사와 다름이 없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겉보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지만, 사람의 행동거지 하나, 표정과 태도 하나에도 감응하며, 자기도 모르게 이런 일로부터 인상을 받는다. 이런 인상과 느낌은 어떻게 생긴 것이겠느냐? 이는 사람이 깨달은 진리가 사람에게 일종의 분별력을 주어 그런 행위나 행동 방식, 또는 태도의 본질에 대해 정의를 내리게 하는 것이다. 이 정의는 어떻게 나온 것이겠느냐? 진리가 깨닫게 한 것이고, 진리가 사람에게 준 분별력과 판단력으로 인한 것이다. 지금 너희는 일부 진리를 깨닫고, 몇 가지 일에 어느 정도 분별력이 생겼지만 그리 정확하지 않고, 안정제를 복용한 것 같은 느낌도 없으며, 아직 모색하는 과정에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럼 모든 일을 하나하나 다 저희에게 교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그럴 필요는 없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책임이 있고,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사역 범위가 있다. 나는 각 항목의 진리를 모두 너희에게 알려 줄 것이니, 남은 것은 너희가 일상생활 속에서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체험하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고 배치할 것이다. 사람은 반드시 한 가지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협력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네가 추구하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분명히 말해 줘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강제로 주입하지도, 강압적으로 네가 알고 깨닫고 진입하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며, 성령도 그렇게 역사한 적이 없다. 오직 네가 스스로 원하며 주동적, 자발적으로 실행하고 진입해야만 이런 진리가 네 내면에서 부지중에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열매를 맺을 때 네 마음은 밝아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무슨 일을 대하든 무감각할 것이고, 반응이 둔할 것이며, 무엇을 보든 밝히 알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일을 했는데 남들이 그것을 가리켜 악행이라고, 어떤 성질이라고 하면 너는 알지도 알아채지도 못한 채 다른 사람이 알려 주는 말을 듣고 도리상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너는 아직 인정하지 못한 것이다. 인정하지 못했는데 정말 깨달았겠느냐? 너는 깨닫지 못했다. 그렇기에 어떤 일들이 닥칠 때 그저 규례만 지킬 뿐이다. 이는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해 초래된 결과이다.
어떻게 해야 복음 전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먼저, 복음 전파 본분과 관련된 각 항목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예를 들어, 복음 전파 본분에 관한 정의, 지위 설정, 그리고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할 때 실행하고 진입해야 할 진리, 지녀야 할 태도와 겪어야 할 고난, 치러야 할 대가 등의 진리를 모두 깨닫는다면 복음 전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가 쉬울 것이다. 이 밖에, 소극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어떤 그릇된 행동 방식을 피해야 하는지, 어떤 것들이 사람의 선의에 속하는지, 사람의 생각과 행동 방식이 과연 복음 전파 원칙에 부합하는지 등을 돌아보아야 한다. 즉, 복음 전파와 관련된 모든 행위와 행동 방식, 원칙, 규정이 정말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를 분명히 성찰해야 한다. 진리 원칙에 부합할 때만 지속하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해야 성과가 점점 좋아진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반드시 조화롭게 협력해야 한다. 이는 복음 사역에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조화롭게 협력하지 않으면 사역을 전개하기가 무척 힘들어진다. 형제자매 간에는 서로 포용하고 인내하고 붙들어 주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 반드시 조화롭게 협력해야 한다.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순종해야지 늘 자신은 옳고 남을 틀렸다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확정하고, 하나님 집에서 규정한 원칙에 근거하여 진리를 교제함으로써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협력하여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서로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보완하는 법을 배워야지 남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또 한 측면으로는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은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그들은 모두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설령 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매우 연약하며, 관념에 맞지 않는 일이 조금만 있어도 반항하고,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말이 한 마디만 나와도 논쟁을 벌이기 쉽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포용과 인내, 크나큰 사랑이 필요하고, 어느 정도 방식과 방법도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고 하나님이 선포한, 사람을 구원하는 모든 진리를 전해 주어 하나님의 음성, 창조주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하나님의 현현을 갈망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보고 하나님 음성을 듣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말은 적게 하고 하나님 말씀은 많이 읽어 주며, 읽어 준 후에는 다시 진리를 교제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얼마간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가 쉽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이 의무가 누구에게 주어지든 미뤄서는 안 되며, 어떤 핑계나 이유를 대면서 거부해도 안 된다. 혹자는 “저는 말재간이 없고, 성경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데다가 나이도 어립니다. 만에 하나 시험과 위험이 닥치면 어떡합니까?”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복음 전파는 위험한 일을 하라고 안배한 것이 아니다. 위험성이 있다면 하나님 집에서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교회에서 복음 전파자를 안배하는 데는 원칙이 있으며, 위험을 무릅쓰게 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조건과 자질, 장점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안배하고, 형제자매가 서로 협력하여 누가 어떤 일을 하는 게 어울리는지 보고 결정하는 것이다. 위험한 요소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위험한 일을 직면하니 말이다. 만약 하나님이 직접 보내는 거라면, 설령 그 앞에 시험과 고통, 혹은 위험이 있다고 할지라도 너는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째서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겠느냐? (그것은 사람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복음 전파를 자신의 책임이자 본분으로 여기는 것이며,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태도이다. 이것은 진리이니 사람은 가감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언젠가 네가 다른 본분을 이행하는 게 적합하지 않거나 복음 전파에 사람이 필요해 너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안배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반발심도 품지 말고, 분석하거나 연구하지도 마라. 이는 하나님의 부탁이자 네 책임과 본분이니 골라서는 안 된다. 네가 하나님을 따르기로 한 이상, 스스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부탁이며, 하나님의 선민은 누구나 거기에 몫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저는 여든이 넘어 문밖으로 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한테 그런 부탁을 하실까요?”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저는 이제 겨우 18살입니다. 세상을 겪어 본 적이 거의 없고, 사람들을 사귀는 법도 모르는 데다가 담이 작고 겁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제게 그 본분을 주실까요?”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줄 수 있다. 네 나이가 어떻게 되든, 힘닿는 데까지 복음 전파의 본분을 이행하고, 전할 수 있는 만큼 전해야 한다. 또 네가 현재 어떤 본분을 이행하고 있든,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 한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온다면 전해야 하지 않겠느냐?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옳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갖고 있지만 남는 시간을 활용해 복음을 전하면서 성과도 낸다. 이는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일이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는 모든 사람의 책임이니 선택하지도 거부하지도 말고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또한,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행동하거나 거부하거나 자신을 위한 어떤 이유, 핑계를 지어내 그 본분을 이행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너무 위험한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혹시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는데, 만약 지금 네 분량이 미미하고, 다른 사람이 너를 대신해 줄 수 있다면, 또 네가 다른 본분을 이행하는 데 적합하다면 바꿔도 된다. 하지만 네가 꼭 그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다. 거부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모든 피조물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몸이 약해 외부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고초를 치르는 걸 견디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데, 큰 고초를 치르지 못하겠다면 작은 고생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만약 네가 조금의 고생도 하지 못하겠다면 징벌의 큰 고통을 받게 되지 않겠느냐? 살아 있는 한, 숨이 붙어 있는 한 너는 본분을 이행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다. 만약 네가 본분을 거부하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며, 피하고 벗어나려 한다면, 이는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가 아니다. 반발하고 경계하는 것 역시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는 아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준비하고 있어야 하며, 복음 전파를 자신의 의무와 본분으로 여겨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하나님을 이렇게 오랫동안 믿었는데 교회에서는 한 번도 제게 복음을 전하라고 안배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좋은 일이겠느냐, 아니면 나쁜 일이겠느냐? 그것은 좋고 나쁨과 상관이 없다. 어쩌면 하나님이 아직 네 복음 전파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네가 다른 본분을 이행하는 게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모두 중요한 본분이라면 어떻게 선택해야겠느냐? 교회의 안배에 순종해야지 개인적인 바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네 복음 전파를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이 “지금 그 본분은 네게 적합하지 않고 중요하지도 않구나. 복음 전파 본분이 더 중요하겠다.”라고 말씀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되, 분석하지도 판단하지도 연구하지도 말고, 나아가 반감을 갖거나 거절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바로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보여야 할 올바른 태도이다. 사람이 이런 태도를 지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봤을 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이고 적절하다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무엇을 통해 나타나느냐? 하나님이 일을 시켰을 때 네가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하나님이 어떤 일을 부탁했는데, 네가 연구하고 궁리하면서 ‘왜 나한테 시키셨을까? 이게 나한테 도움이 될까?’라고 생각한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정상이 아니며, 너는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네가 “이 일은 큰일이고, 하나님께서 나한테 시키신 일이야.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은 허술하게 처리해선 안 되고 신중히 대해야 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시키시든, 어떤 부탁을 맡기시든 그건 내가 이행해야 할 본분이고, 나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해. 하나님이 어떻게 안배하시든 나는 거부하지 않고 그렇게 할 거야. 내 본분을 지키지 않고 거부한다면,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완수하지도 않는다면 그건 하나님을 배반한 것과 같아.”라고 말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피조물이 지녀야 할 이성이고, 피조물이 본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이기도 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탁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거부하고, 이유를 대면서 본분을 거절한다면 그 문제의 성질은 심각하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을 때는 반드시 피조물의 입장과 지위에 서서 창조주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태도이다. 본분을 올바른 태도로 대하지 않는다면, 그 문제의 성질은 무척 심각하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돼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네게 진지하게 따져 볼 필요는 없겠지만, 하나님을 몇 년간 믿고 일부 진리를 깨달았는데도 하나님의 부탁을 거절하여 복음을 전하지 않고 대충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한다면 이는 어떤 성질의 문제겠느냐? 이는 양심과 이성이 없는 것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짓이며, 또한 하나님을 배반하는 짓이다. 이는 대역무도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자는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반드시 징벌받아야 할 것이다. 네가 스스로를 피조물이라고 인정했다면 피조물이 지녀야 할 이성은 무엇이겠느냐? 창조주가 시키는 대로 하고, 창조주가 안배한 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지녀야 할 양심과 이성이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지 조금이라도 거역해서는 안 된다.
복음 전파 측면의 진리는 많은 사람에게 적용된다. 아마 모든 사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처음 이 측면의 진리에 관한 교제를 들을 때, 그것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모든 사람이 복음 전파라는 이 본분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며, 이 측면의 진리를 인지하고, 이 본분에 정확한 정의를 내렸을 것이다. 그럼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피조물로 생각합니다.) 너는 피조물이다. 그럼 피조물의 첫 번째 임무는 무엇이냐? (창조주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에게 순종하는 첫 번째 태도는 무엇이냐?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럼 피조물이 첫 번째로 이행해야 할 본분은 무엇이냐? (복음을 전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바로 그 대답을 원했다. 한참을 돌아서 본론으로 왔구나. 모든 피조물의 첫 번째 임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하고 전파하여 온 세상 땅끝까지 퍼져 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이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할 직책이자 의무이다. 어쩌면 지금 너는 그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 본분이 네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으며, 그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너는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본분이 너와 관련이 있으며, 그것은 다른 사람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네 책임, 네 본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록 현재 네게 그 본분을 이행하라고 안배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너와 무관한 것은 아니며, 네가 그 본분을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네게 그 본분을 맡기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복음 전파라는 본분에 대한 견해가 진리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겠느냐? 이 수준까지 이해한 후, 어느 날 수중의 일을 마쳤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모두 각지로 흩어지라는 명령을 듣는다면, 심지어 가장 낯설고 원치 않는 곳, 열악한 곳으로 가라는 명령을 듣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만, 정말 그 순간이 오면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칠지도 모른다. 지금 너희는 다음과 같은 준비를 하고, 인식을 가져야 한다. ‘저는 이번 생에 이 시대에 태어나 복 있게도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경륜 사역에 동참하게 됐습니다. 제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치와 의미는 하나님의 복음 사역 확장을 위해 필생의 에너지를 바치는 데 있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너희에게는 이런 의지가 있느냐? (있습니다.) 이런 의지를 갖고, 이런 준비와 계획을 해야만 진정한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사랑하는,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다. 혹자는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지금 당장 복음을 전하러 가라고 하신다면 저는 두려울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는다. 설령 준비가 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에게 당장 쓰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언제 쓰임 받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는 일이니 조급해할 것 없다. 하나님이 너를 쓸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예비한 후, 네 분량이나 경력 등 모든 조건이 적절히 갖춰졌을 때, 너를 각지로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때 너를 ‘복음 사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이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을 복음 사자라고 할 수는 없다. 이는 변치 않는 사실이다. 그럼 뭐라고 해야겠느냐? (‘복음 전파자’라고 해야 합니다.) 비교적 정확하다. 어떻게 부르든 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이는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이다. 만약 호칭이 달라지고 사람의 신분이 달라진다면 그 사역의 본질도 달라질 것이다. 본질이 변하는 순간, 진리의 궤도를 벗어나게 된다. 또 진리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순간, 종교적 행위가 되며, 그렇게 되면 사람은 구원받는 길에서 점점 멀어져 완전히 반대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절대 그릇된 길을 가서는 안 된다. 언제 어느 때라도, 각지로 파견되거나 보내진 복음 전파자는 그저 복음을 전하는 본분을 이행하는 것일 뿐 증인도 전도인도 아니며, 복음 사자는 더더욱 아니다. 이는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이다.
많은 사람이 여기까지 듣고 마음이 밝아졌을 것이다. 또 많은 사람이 고무되어 기대감을 품고 ‘잘됐네. 앞길이 밝겠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해 주신 길은 광명의 길이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안배가 있고, 하나님이 예비한 본분 이행의 환경이 있으며,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비해 놓은 특수한 환경들, 사람이 겪어야 할 수많은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상상처럼 그렇게 순조롭지 않다. 이 밖에, 만약 네가 스스로 피조물임을 인정한다면, 복음 전파라는 책임을 다하고, 그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 고난을 겪으며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 그 대가는 육적인 병고나 고난일 수도 있고, 혹은 큰 붉은 용의 박해와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일 수도 있다. 그리고 복음 전파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환난일 수도 있는데, 배신당하는 것, 욕먹는 것, 얻어맞는 것, 정죄되는 것일 수도 있다. 심지어는 집단 구타를 당해 생명의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것, 즉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고 하나님의 영광의 날을 보기 전에 복음 전파 과정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준비를 해야 한다. 이는 너희를 겁주는 게 아니라 사실이다. 이 말을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얘기했다. 만약 너희에게 이런 의지가 있고,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충성을 다한다면 이는 분량이 있다는 의미이다. 종교 신앙의 자유와 인권이 존중받는 외국에서 복음을 전하면 어떤 위험도 맞닥뜨리지 않을 거라고, 무슨 일이든 순조롭고 하나님도 축복해 줄 거라고, 하나님의 크나큰 능력과 권병이 사람과 함께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것은 사람의 관념이자 상상이다. 지난날,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을 믿었지만, 결과적으로 성육신한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럼 지금의 교계가 성육신 하나님에게 어떤 나쁜 짓들을 저지를 수 있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모독하는 등 너무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무슨 나쁜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 잊지 마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오직 그들에게만 그런 일을 저지를 기회가 있었다. 이방인들은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 그들이 정부와 결탁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또한, 예수의 사도들은 모두 어떻게 죽었더냐? 어떤 자는 돌에 맞아 죽고, 어떤 자는 말에 끌리다가 죽었으며, 어떤 자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고, 어떤 자는 거열형에 처해지는 등 온갖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무엇이더냐? 그들이 나쁜 짓을 저질러 법적 제재를 받은 것이냐? 그렇지 않다. 그들은 주의 복음을 전파했지만, 세상 사람들은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들을 정죄하고 욕하고 때렸으며, 나아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그렇게 순교했다. 순교한 사람들의 마지막 결말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어떻게 규정했는지 등은 차치하고, 하나만 물어보겠다. 그러니까 그들이 마지막에 이르러 죽음을 맞이한 방식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느냐?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관념으로 본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전파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대가를 치렀고, 또 마지막에는 사탄에게 잔혹한 죽임을 당했으니 관념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런 일이 닥쳤고,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다. 여기에는 구해야 할 어떤 진리가 있느냐?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죽도록 허락했다. 이는 하나님의 저주와 정죄겠느냐, 아니면 안배와 축복이겠느냐? 전부 아니다. 그럼 무엇이겠느냐? 현대인들은 그들의 죽음을 떠올리기만 해도 몹시 가슴 아파하지만, 사실이 그러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여기까지 말하면 너희는 감정이 이입되어 마음이 불편하고 아프지 않겠느냐?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으니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런데 왜 그런 결말, 그런 말로를 맞이한 걸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그들의 육은 그렇게 죽고 사라져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결말이 그런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이 죽을 때, 세상을 떠날 때 어떤 과정과 방식을 겪었든 그것은 그들의 생명과 그 피조물들의 마지막 결말에 대한 하나님의 규정이 아니다. 너는 이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반대로, 그들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한 것이다. 그 피조물들은 가장 귀한 생명, 그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이용해 하나님의 행사와 크나큰 능력을 증거함으로써 사탄과 이 세상에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옳은 것임을, 예수는 하나님이자 주님이며, 하나님이 입은 육신임을 선고했다. 생명이 끝나는 순간에도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의 심판 아니겠느냐? 그들은 목숨으로 세상에 선고하고 인류에게 증명했다. 예수는 주이자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고, 그가 행한 구속 사역은 전 인류를 살아남게 했다는 것을,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순교한 사람들은 어느 수준까지 본분을 이행했느냐? 궁극의 경지에 오르지 않았느냐? 이 궁극의 경지를 무엇으로 보여 주었느냐? (목숨을 바침으로써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다. 목숨을 대가로 바쳤다. 사람의 삶에서 가정, 재물, 물질 등은 모두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며, 자신과 관계가 있는 것은 오직 생명뿐이다. 생명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가장 귀하게 여길 만한 것, 가장 귀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가장 귀한 것을 바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증하고 증거했으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이름과 사역을 부정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을 이용해 이 사실의 존재를 증거했다. 이는 최고 수준의 증거 아니겠느냐? 이는 최고의 본분 이행으로, 책임을 다한 것이다. 사탄이 위협하고 협박해도, 심지어 마지막에 생명을 대가로 바치라고 할 때도 그들은 자신의 책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본분 이행이 궁극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 말이 무슨 의미겠느냐? 너희도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겠느냐?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너의 책임이라는 것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필요로 한다면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은 내면에 두려움과 걱정이 있겠지만, 그 걱정이 소용 있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네가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네가 걱정하든, 걱정하지 않든 소용이 없다. 반대로 만약 하나님이 네가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너는 핑계를 대지도 거부하지도 말고, 주동적으로 협력하며 받아들여야지 걱정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어떻게 죽든 사탄 앞에서 죽어서는 안 되며, 사탄의 손안에서 죽어서도 안 된다. 죽더라도 하나님 손안에서 죽어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와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피조물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이성이자 태도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고 본분을 이행할 때 알아야 할 마지막 진리이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한다는 이 복음을 목숨 바쳐 전파하고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이런 의지를 갖고 이렇게 증거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런 의지를 갖추지 못했다면 최소한 눈앞의 책임과 본분을 다한 후에 나머지는 하나님에게 맡겨라. 아마 시간이 흐르며 나이와 경력이 많아지고 진리에 대해 깨달은 정도가 점점 깊어지면서 너에게는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해 일생을 바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심지어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이 화제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이미 확장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난날 율법시대와 은혜시대의 옛 선지자, 성도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니 말세에 태어난 사람들이 복음 전파를 위해 몸 바치는 것은 새로울 것도, 갑작스러울 것도 못 되며, 나아가 지나친 요구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자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이것은 진리, 그것도 최고의 진리이다. 네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고 얼마나 많이 헌신하고 대가를 치르겠다고 구호만 외쳐 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 사실이 닥쳤을 때, 목숨을 바치라고 할 때, 최후의 순간에 원망할지, 기꺼운 마음을 품을지, 진실로 순종할지 등이 네 분량을 검증하는 것이다. 목숨을 빼앗기는 순간에 마음이 편안하고 달갑다면, 원망 없이 순종한다면, 네 책임과 의무, 본분을 마지막까지 해냈다고 생각하여 마음이 기쁘고 평안한 채로 그렇게 갈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떠나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공간에서 또 다른 형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방식을 바꿔 살아가는 것일 뿐 정말로 죽었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다니 정말 가엾구나!’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 눈에 그것은 죽음도 아니고, 고난을 겪으러 간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복을 누리러 간 것이고 하나님에게 더 가까워진 것이다. 네가 피조물로서 이행한 본분이 하나님에게 합격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는 네 본분을 마쳤고, 하나님은 네가 피조물의 대열에서 더는 그런 본분을 이행하기를 원치 않는다. 네 ‘떠남’을 하나님은 ‘떠남’이 아닌 ‘거둬 감’이나 ‘이끌고 감’, 또는 ‘데려감’이라고 한다. 이는 좋은 일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데려가기를 원하느냐? (원합니다.) 원하지 마라. 사람이 살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무척 많다. 그러니 너무 급히 그 길을 가지 마라. 그날이 오기 전에 더 많은 진리를 깨닫고, 창조주에 대해 더 많이 인식하여 어떤 아쉬움도 남기지 않도록 노력해라. 어째서 어떤 아쉬움도 남기지 말라고 하겠느냐? 사람이 인생에서 관련된 일을 이해할 때부터 그 기회를 얻고 그 자질과 조건을 갖춰 창조주와 대화하게 되기까지, 창조주에 대해 진실한 이해와 인식, 경외를 품게 되기까지, 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게 되기까지의 세월은 사실 그리 길지 않다. 지금 하나님이 한시바삐 너를 데려갔으면 한다면, 그것은 네 인생에 무책임한 것이다. 책임감을 갖는다면 한시바삐 진리를 갖추는 한편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을 많이 반성하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얼른 보완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며, 진리 실제에 진입해 하나님을 더 많이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해할 수 있고 그 삶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 창조주가 어디에 있는지, 창조주의 뜻이 무엇인지, 창조주의 희로애락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더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전부를 깨닫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하나님을 기본적으로 알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하나님과 기본적으로 합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배려하고 하나님에게 기본적인 위안을 줄 수 있고, 피조물이 해야 할 것들,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조금씩 스스로를 인식하고, 나아가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은 사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상호 작용이며, 평생 추억할 만한 과정이다. 또한, 그것은 사람에게 고통스럽고 괴로운 과정이 아니라 누림이 있는 과정이다. 그러니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는 모든 나날과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 세월을 짐이나 부담으로 여기지 말고, 소중히 여기면서 그 단계의 삶을 음미하고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진리를 깨닫고, 어느 정도 사람답게 살게 되며, 하나님께 경외심을 품게 되고, 악행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네가 적잖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이 가슴 아파하거나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오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너를 혐오하지 않는다고 느낄 것이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이 수준에 이른다면, 죽어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지금 죽음을 원하는 자들은 어떤 것이겠느냐? 도피하려는 것이고, 고난을 치르지 않으려는 것이며, 대충 생을 마감한 후 하나님께 가서 도착 보고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께 도착 보고를 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너를 원치 않는다. 하나님이 부르기 전에 왜 도착 보고를 하려는 것이냐? 미리 도착 보고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네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 낸 후 하나님이 너를 데려간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오늘 이야기한 내용을 모두 이해했느냐? 이런 말이 너희에게 새로운 부담을 안겨 주지 않았기를 바란다. 또 오늘 교제한 이런 내용이 겁을 준 게 아니라 너희가 깨달아야 할 일부 진리를 깨닫게 했기를,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더 확신이 생기고, 더 든든하고 명확해졌기를 바란다. 이런 성과를 얻었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말해 보아라. (여태까지는 복음 전파를 진정한 본분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내면에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이 많이 있었지요. 다른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복음을 전하러 가도록 안배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복음 전파가 가장 안 좋은 본분인 것처럼 말입니다. 복음 전파를 진정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기신 부탁으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은 사람의 책임이니 거부하지 말고 행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자 그제야 제 관점이 너무도 그릇되었으며, 그로 인해 복음 전파라는 본분을 진정으로 잘 이행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교제를 들으면서 제 관점을 바로잡았습니다.) 훌륭하다. 또 다른 사람이 말해 보겠느냐? (저는 여태까지 제가 보잘것없는 피조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행하는 본분을 중요한 일이 아니라 별 볼 일 없는 일로 생각했지요. 하지만 오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예정하신 모든 사람이 이행하는 본분은 다 당신이 정해 놓으신 것이며, 심혈을 기울여 계획하고 안배하신 거라고, 만약 사람이 본분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피하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맡기신 부탁이자 피조물의 직책이라는 교제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이 길을 가겠다는 크나큰 믿음과 의지가 생겼습니다. 제 인생에 책임을 지고, 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며, 제 사명을 완수하여 하나님께 어느 정도 위안을 드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마음속에 더없는 감동을 받았고, 더 이상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부탁을 그렇게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훌륭하구나. 모두 공감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흐리멍덩하다. 복음 전파 같은 큰일을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분명히 교제하면, 그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며, 자신이 살아가는 가치를 알게 된다. 이러면 방향을 갖게 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다. 진리 외에 어떤 이론이 네 마음을 흔들고 네 관점을 바꿀 수 있겠느냐? 없다. 오직 진리의 도만이 네 관점을 바꿔 놓을 수 있다. 진리의 도가 왜 네 관점을 바꿀 수 있겠느냐? 이런 진리는 무척 실제적이라서 아무도 반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는 사람의 생명이나 평생의 사명과 관계가 있다. 사람과 무관하거나 별로 상관이 없는 게 아니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진리는 평생의 사명과 관계가 있으며, 사람이 살아가는 가치나 의미와도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런 내용을 분명히 교제하면 사람의 마음이 바뀔 수 있고, 사람이 받아들여 관점을 바꿀 수도 있다. 오늘의 교제는 본분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진리가 사람의 인생, 삶과 추구 방향을 바꿔 놓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그럼 오늘 이런 말을 한 것도 헛수고가 아닐 테니 말이다. 이런 진리를 교제한 후 실생활 속에서 조금씩 적용하고 체험하고 소화하여 그런 진리들이 네 실제가 되고 생명이 된다면 피조물이라는 네 호칭은 하나님에게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진정으로 얻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정말 네게 생명을 바치라고 하고, 네 목숨으로 하나님의 행사와 복음을 증거하라고 하면 너는 걱정도 두려움도 없을 것이고, 거부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너는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이 창조주가 너에게 맡긴 부탁이므로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 사람은 그날을 기다리고 맞이하기 위해 이런 진리를 듣고 깨닫는 것 외에도 하나님 말씀을 많이 갖추고,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을 더 많이, 더 깊게 인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18년 1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