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의의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은 인류를 대신해서 고통을 경험하고 이후에 그것을 인류의 아름다운 미래 종착지와 맞바꾸기 위해서다. 죄 있는 육신의 형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속죄 제물이 되어 인류 전체를 구속한 예수의 사역은 인류가 미래에 아름다운 종착지에 들어가기 위해 기반을 마련한 것에 불과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인류를 죄에서 구속했다. 즉, 사람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올 수 있는 하나의 증거가 되고, 사탄과의 전쟁에서 사용하는 패가 된 것이었다. 말세에 이르러 하나님은 사역을 끝내고 구시대를 종결하고, 살아남은 인류를 아름다운 종착지로 데려가려 한다. 하나님은 또다시 성육신하여 사람을 정복하고 심판하고 정결케 하는 동시에 사람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고, 이 증거와 사실로써 사람의 모든 고통을 면해 준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증언하고, 이 증거와 증언으로 사탄을 이기고 마귀에게 치욕을 안기는 한편, 이를 인류의 아름다운 종착지와 맞바꾼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성육신 하나님의 사역은 역시 하나님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그 사역은 육신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내면에서 지배하여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맞느냐? 그렇지 않다. 이미 얘기했지만, 성육신 하나님의 정복 사역은 정상 인성 안에서 이루어진다. 네가 본 것은 정상적인 인성이지만,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사역하고 있다. 이 육신이 사역하는 것이 곧 하나님 자신이 사역하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교제하면 사람은 종종 이 육신을 도구나 껍데기로 생각한다. 내면에서 하나님의 영이 말하고 지배하면 그가 움직이고, 영의 지배가 없으면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말이다. 영이 시키는 대로만 말하고, 영의 지배가 없으면 아무 말도 못 하는 줄 안다. 과연 그러하냐? 그렇지 않다. 영이 육신으로 실체화되면 영과 육신은 하나가 된다. 육신이 하는 일이 곧 영이 하는 일이고, 영이 하는 일이 곧 육신이 하는 일이다. 그래야 성육신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이것이다. 바로 말세에 하나님이 성육신하면 하나는 정복 사역을 통해 시대를 종결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육신으로 와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곧 하나님 자신이 와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육신과 하나님 자신은 하나라는 점이다. 육신은 사람이 생각하는 도구도 아니고, 껍데기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혹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지배를 받는 물질적 대상도 아니다. 이 육신은 하나님 자신의 화신이다. 사람의 본래 인식은 너무나 얄팍하다. 사람의 관념대로 교제한다면 육신과 영을 분리해서 육신은 육신, 영은 영이라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면 오류를 범하게 되고 자칫하면 남에게도 관념을 심어 주게 된다.

오늘날 사람은 이러한 측면을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와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지만 성육신으로 겪는 고난과 질병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 비범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사람인 이상 그런 고통은 피할 수 없다고, 사람이 아플 때 그도 아플 것이고, 사람이 고생하면 그도 고생할 것이고, 사람이 덥거나 추위로 몸이 얼어붙으면 그도 그럴 것이라고 말이다. 네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을 사람과 전혀 구분 없이 똑같다고 본 것이다. 사실 그가 받는 고통은 의의가 있다. 정상적으로 질병을 앓거나 고통받는 일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겪어야 한다. 패괴된 사람은 마땅히 고통받아야 하고, 이것이 정상적인 법칙이다. 그런데 왜 성육신 하나님이 그 고통들을 받아야 하느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당연한 일이냐? 성육신 하나님이었던 예수는 죄가 없었다. 당시 율법대로라면 그의 행동은 십자가에 못 박힐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왜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바로 인류 전체를 구속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에 성육신 하나님이 받는 이 모든 고통, 그가 받는 이 모든 핍박이 모두 우연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일부러 계획한 것이냐? 일부러 계획한 것도, 우연히 발생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법칙에 따른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하나님이 스스로를 사람들 가운데 두고 그가 자유롭게 그렇게 사역하도록 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사역하는 동안 그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통받았다. 하나님이 만약 일부러 그렇게 계획했다면, 며칠만 고통받고 평소에는 고통받지 않았을 것이다. 즉, 하나님이 사역하면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일부러 계획한 것이 아니며, 무심코 약간의 고통을 받은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함에 있어 자신을 사람들 가운데 두고 사람과 똑같이 고통받으며 동등하게 자신을 대한 것이다. 어떤 일에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예를 들어, 너희가 핍박받으면 그리스도도 핍박받지 않았느냐? 너희가 쫓기면 그리스도도 쫓기지 않았느냐? 사람이 질병으로 고통받는데 그리스도는 가볍게 지나간 적이 있느냐? 그도 예외가 없었다. 이것이 쉽게 이해가 되느냐? 아직도 하나님이 큰 붉은 용의 나라에서 사역하는 이상 이렇게 고통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냐? 하나님에게는 고통을 받아야 하고 말고의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몸소 경험한 대가로 인류가 또다시 받게 될 고통을 면해 준 다음, 인류를 아름다운 종착지로 데려가 사탄을 완전히 승복하게 하려 한다. 하나님 입장에서 그런 고통은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이번 사역에서 그가 고통받기를 원치 않고, 사람의 고통을 알아보는 것으로 끝내려 했다면, 사도 몇 명이나 성령께 쓰임 받는 사람으로 대신하고,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나중에 하나님께 보고하게 하면 그만이다. 아니면 몇몇 특별한 사람을 이용해 간증하게 할 수도 있다. 그들에게 인간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을 겪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런 고통을 견디고 간증한다면 사탄도 완전히 승복할 것이고, 그 대가로 인류도 앞으로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물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 자신의 사역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이 한다. 사람의 간증이 아무리 높다 한들 사탄에게는 힘 있는 간증이 되지 못한다. 사탄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성육신하셨는데 왜 인간 세상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지 않으십니까?” 이 말은 곧 하나님이 그렇게 고통을 몸소 경험하지 않으면 그와 같은 간증에 그다지 힘이 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 자신의 사역은 반드시 그 스스로가 해야 하고, 그래야만 실제적이다. 하나님의 이 단계 사역을 보면 하나님이 하는 일 하나하나가 모두 의의가 있고, 성육신이 받는 고통도 모두 의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떤 일도 아무렇게나 하지 않으며, 무의미한 일을 하지 않는다. 성육신으로 와서 사역하며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너무나 필요한 일이다. 그것은 인류와 인류 앞날의 종착지를 위해 너무나 필요하다. 또한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고 얻기 위한 일, 사람을 아름다운 종착지로 데려가기 위한 일이고, 이를 위해 치르는 대가다.

성육신 방면의 진리는 몇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얘기해야 한다.

1.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의 필요성이다.

2.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이 사역하는 실제적인 측면이다.

3.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와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의의, 즉 그 필요성이다.

하나님은 어째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몸소 경험하려 하느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냐? 여기에도 한 가지 의의가 있다. 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이 사역을 통해 사람을 정복하고 온전케 할 수 있더라도 사람은 그 본질과 생존 법칙에 따라 여전히 공허와 고통, 근심과 탄식 속에서 살아가고,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에 대한 네 사랑이 이미 일정한 경지에 이르러 하나님을 인식한 체험이 있고, 패괴 성품도 해결되었고, 또한 하나님은 네가 이미 온전케 되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했다고 하자. 만약 하나님이 사람을 여기까지만 구원하고 떠난다면, 그래서 성육신으로 하는 사역이 여기서 끝난다면, 사람의 병과 인간 세상의 공허, 육적인 근심과 번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이 마무리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한 사람이 온전케 되어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자신의 번뇌와 질병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느냐? 진리가 있다 해도 해결할 수 없다. 진리가 있으니 병이 나도 괴롭거나 고통스럽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 고통은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다. “지금 사는 건 무척 보람을 느끼지만, 몸이 아프니까 꽤 고통스러워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이렇게 느끼는 것이 실제적이지 않으냐?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이 사람을 정복하고 온전케 하는 사역만 한다면,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에만 그치고 사람의 육적인 고통은 해결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땅에서 살면서 마주하는 온갖 고통과 질병, 인간 세상의 애환, 사람 개인의 번뇌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사람을 땅에서 천년만년 살게 두더라도 이런 번뇌와 생로병사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와서 인간 세상의 이런 고통을 경험하고 난 뒤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해결되어야 훗날 인류에게 생로병사와 같은 일이 사라지는 것이다. 예수는 죽음을 경험했다. 하나님은 이번에 성육신으로 와서 ‘생’과 ‘병’의 고통만을 경험한다(늙음은 경험할 필요가 없고, 앞으로 사람은 늙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고통을 모두 경험하면 결국 사람의 그런 고통은 면제받게 된다. 사람을 대신해서 모든 고통을 겪은 후 하나님이 유력한 증거를 얻고, 마지막에 인류의 아름다운 미래 종착지와 맞바꾸어 사람의 생로병사를 없애 주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의의 있는 일이 아니냐? 이런 이유로 성육신은 ‘생’과 ‘병’, 고난과 아픔을 가리지 않고 인간 세상의 고통은 모두 경험한다. 그중 어느 쪽의 고통을 경험하든 그건 모두 인류를 대신해 받는 고통이다. 하나님은 하나의 상징, 하나의 예표가 된다. 그가 그 모든 고통을 겪고 감당하면 인류는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된다. 여기에 바로 의의가 있다. 사람이 온전케 되면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런 후에 사람의 번뇌와 고통은 모두 해결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대신해 고통받는 의의다. 사람은 땅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질병에 시달리고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인간 세상의 생로병사, 삶과 죽음의 윤회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 성육신하여 이런 고통들을 겪고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은 사람을 대신하여 이 모든 일을 짊어졌다. 그런 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예표다. 어떤 그릇된 인간들은 이렇게 묻는다. “그럼 다 하나님 혼자서 대신한단 말입니까?” 성육신 하나님이 사람을 대신하여 고통받는 것으로 충분한데 다른 사람이 더 대신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나님은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대신하고 대표할 수 있다. 또 모든 것을 상징할 수 있다. 일체의 아름답고 선한 사물, 일체의 긍정적인 사물을 모두 상징할 수 있다. 게다가 그가 지금 실제적으로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더 유력한 증언과 증거로 사람이 겪어야 할 모든 고통을 면해 줄 자격이 더더욱 있다.

성육신 하나님의 두 차례의 사역은 이렇게 해서 완벽해지고, 한 줄기 또렷한 획이 된다. 즉, 첫 번째의 성육신에서 지금의 성육신에 이르기까지 두 차례의 사역으로 인류의 모든 고통, 사람 개인의 고통을 모두 해결한 것이다. 왜 반드시 성육신으로 몸소 이렇게 해야 하느냐? 우선 먼저 사람의 일생에서 생로병사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지, 사람은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사람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는 그런 고통이 없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그런 고통은 어디서 비롯되었겠느냐? 사람이 사탄에게 유혹되고 패괴되어 타락한 뒤 그러한 고통이 생겼다. 육의 고통, 육의 번뇌와 공허,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참혹한 일들은 모두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된 후에 생겨났다. 사람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이후로 사탄은 사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사람은 점점 타락하고, 병이 점점 깊어지고, 고통도 점점 심해졌다. 인간 세상의 공허와 비참함을 더욱 실감하면서 인간 세상에서 생존할 수 없게 되었고, 인간 세상에서 살면서 희망이라곤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런 고통은 사탄이 사람에게 준 것으로,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되어 타락한 뒤에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되찾은 뒤 이들에게 아름다운 종착지를 안겨 주기 위해 하나님은 반드시 고통을 몸소 경험해야 한다. 설령 지금 사람에게 죄가 없더라도 고통스러운 일들은 여전히 남아 있고 사탄은 여전히 사람을 통제하고 지배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고통과 괴롭힘을 당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이 몸소 이런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사람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되찾아 와 앞으로는 더 이상 그런 고통을 겪지 않게 하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니냐? 과거 예수의 구속 사역은 겉으로 볼 때 율법 규례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율법을 완전케 한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율법시대를 끝내고 은혜시대를 열어 사람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고, 그런 다음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사람의 모든 죄를 사하였다. 예수는 자신의 보혈로 사람들에게 하나님 보좌 앞에 돌아올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증거와 사실로 사람들을 구속해 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죄는 하나님에게 사함 받았지만 이미 사탄에게 깊이 패괴된 인류는 죄성이 있어 계속해서 죄를 저지르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었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두 번째로 성육신하여 사람의 죄성을 정결케 하는 사역을 한다. 즉, 심판과 형벌로 사람의 패괴 성품을 정결케 하는 것을 말한다. 처음 성육신했을 때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인류를 구속했고, 이에 사람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로 성육신한 것은 사람을 정복하기 위함이다. 정복을 통해 사람은 구원에 이른다. 많은 이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을 늘 먹고 마시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바로 눈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에 대해 관념과 오해를 품고, 때로는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여전히 하나님과 적대적이다. 이건 어찌 된 일이냐? 바로 진리를 깨닫지 못한 까닭에 진실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게 되면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고난을 감내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사탄은 사람에게 있는 연약한 부분을 여전히 통제하고 있어서 고통을 줄 수 있고, 악령은 사람에게 역사하여 방해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사람을 얼이 빠지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며 마음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등 온갖 방해를 한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일부 생각이나 의식 속에 있는 것들도 사탄의 통제와 조종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질병과 고뇌가 생긴다. 너는 때로 세상의 처량함을 느끼고,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자살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이러한 고통은 여전히 사탄의 통제하에 있으며, 이것이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것이다. 사탄에 의해 패괴되고 유린된 것들은 사탄이 또 이용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탄에게 빌미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세에 다시 성육신하여 심판 사역을 펼치는 것이다. 그는 정복 사역에 그치지 않고 사람을 대신해 고통도 받을 것이다. 성육신으로 고통받은 대가와 수고로 사람의 고통과 치명적 약점을 해결해 없애고,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한 대가로 사람들을 되찾으면 사탄은 더 이상 사람에게서 빌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완전히 하나님에게 돌아오고 비로소 완전히 하나님께 속하게 된다! 네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지만 완전히 하나님께 속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이냐? 사람은 너무나 어리석기에 악령이 여전히 빈틈을 파고들어 너를 농락하고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성령의 감동과 악령의 교란을 구분하지 못하고 심지어 성령 역사와 악령 역사가 어떻게 다른지 분별하지 못한다. 이것은 치명적 약점이 아니냐? 악령은 틈만 있으면 역사한다. 네 내면에서 말을 하거나 네 귓가에 속삭이기도 하며, 네 마음과 생각을 교란하기도 한다. 악령은 성령의 감동을 가려 네가 느끼지 못하게 한 다음 너를 교란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네 생각을 혼란스럽게 하고, 이성을 잃게 하며, 심지어 너를 혼비백산에 이르게 한다. 악령은 사람에게 이러한 일들을 한다. 이것을 분별할 줄 모르면 너무도 위험한 일이다. 지금 하나님이 사람을 대신하여 고통을 짊어지면 훗날 사람에게 아름다운 종착지가 생기고, 그때가 되면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더는 사탄에게 속하지 않고 사탄에게 빌미를 잡힐 만한 요소도 사라지고, 사람의 생각과 영, 혼, 체는 모두 하나님께 속하게 된다. 너는 지금은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수도 있겠지만 가끔 자기도 모르게 사탄에게 이용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이 진리를 얻고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고 하나님을 완전히 경배하게 되더라도 사탄의 교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고, 질병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사람의 육체와 혼의 일부가 모두 사탄에게 유린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혼의 일부는 불결한 부분에 해당하고, 사탄이 살면서 이용한 적이 있기에 여전히 사탄이 와서 교란하고 통제하며 네 생각을 흐리고 무엇이 진리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사람을 대신하여 고통받는 일은 해도 되고 말아도 되는 일이 아닌, 너무나 필요한 일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두 번 성육신함으로써 인류 구원 사역이 완전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첫 번째 성육신만으로는 인류를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는데, 이는 첫 번째 성육신이 행한 구속 사역은 주로 죄 사함의 문제를 해결하여 사람에게 하나님 앞에 올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성육신은 심판 사역을 통해 사람의 패괴를 정결케 함으로써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한다. 하지만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께 속하도록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기에 두 번째 성육신은 반드시 인간 세상의 고통을 추가로 경험해야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된 부분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 이로써 사람이 고통받고 시달리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해결이 된다. 두 번의 성육신 사역은 이런 절차로 이루어지고, 둘 중 어느 하나도 빠뜨릴 수 없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이 받는 고통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그가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때로는 사람이 보기에 가슴 저미도록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너는 이런 것을 얕보지 말며, 이에 대해 관념은 더더욱 갖지 마라. 여기에 관념을 가진다면 그건 너무나 어리석고 패역하다. 정상적인 육신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그건 더욱 큰 잘못이다. 그런 말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두 번의 성육신이 받는 고통은 모두 필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닌 인류에게 너무나 필요한 것이다. 인류의 패괴가 선을 넘었으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패괴된 인류를 완전히 구원해 낼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역 방식은 사람이 직접 목도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일을 공개적으로 하며 어느 누구도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이 보고 관념이 생길까 봐 혼자 몰래 견디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길든 짧든, 나이가 많든 적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든 없든, 그 누구도 회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증거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육신한 동안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며칠만 슬며시 고통받고 대부분의 시간은 편안하고 안락하게 지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많이 고통받고, 확실하게 인류의 고통을 짊어졌음을 누구나 증명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사역과 수고를 어느 누구에게도 숨기지 않는다. 그는 네가 연약해질까 두려워하지 않고, 네가 관념을 품거나 믿지 않을까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가 어느 누구도 회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이것이 가장 의의 있는 일이라는 뜻이다! 성육신 하나님은 한가할 틈이 없다. 가끔 말씀을 하지 않고 음성을 발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 순간에도 사역을 계속하며 속으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사람이 이를 느꼈느냐? 사람은 보고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 물론 하나님이 지금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임을 아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이 지금 어떤 사역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너는 모를 것이다. 네 육안으로는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볼 수 있을 뿐, 내면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 눈에는 성육신 하나님이 정식으로 사역한 기간이 몇 년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사실 하나님은 한시도 한가할 틈이 없었다. 비록 말씀을 하지 않고 음성을 발하지 않거나 규모가 큰 사역을 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사역을 멈춘 적 없고, 여전히 사람을 대신하여 고통받고 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성육신하였는지, 과연 그리스도가 맞는지 가늠하기 위해 하나님이 말씀하는지를 살핀다. 그러다 2, 3년 말씀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니라며 더 이상 믿지 않고 그냥 가 버린다. 이런 자는 관망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 또 어떤 이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동안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면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 영이 가 버린 건가? 하늘로 올라가셨나?’ 이런 생각은 잘못되지 않았느냐?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 관념이 생기고 의혹이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보면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 절대 “아마 이렇게 된 거고, 혹시 저렇게 된 건지도 몰라.”라고 함부로 단정 짓지 마라. 너의 그 ‘아마’, ‘혹시’라는 말 따위는 모두 잘못된 말이요, 마귀 사탄의 관점이다! 하나님 사역은 일분일초도 멈춘 적이 없다. 하나님은 쉰 적이 없고 시종일관 사역을 계속하며 인류를 위해 이바지하고 있느니라!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해 여러 방면에서 인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본질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중요한 것은 이 육신이 하는 사역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영은 저렇게 했는데 육신은 저렇게 하지 않았다며 육신은 단지 영의 지배를 받는 것에 불과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고통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전 인류를 정복하고,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을 그리스도가 하는 사역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이 한 사람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행하기 때문이다. 영과 육신은 동시에 사역한다. 사람이 상상하듯 육신이 말하지 않는데 영이 육신에게 기어이 말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무척이나 자유롭다. 영과 육신이 하는 일은 같다. 육신이 보기에 곧 이루어질 일은 영이 보기에도 곧 이루어진다. 이 둘은 같이 행한다. 육신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한다고 한다면, 그 역시 틀린 말이다. 육신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여기에는 한 가지 배경이 있다.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육신이 하는 일만 눈에 들어오고, 성육신한 기간에는 육신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어쨌든 영과 육신은 동시에 행한다. 영이 육신에게 말하도록 지배하는데 육신이 싫어한다든가, 육신은 말하고 싶은데 영이 허락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람이 그렇게 여긴다면 그건 틀렸고, 잘못됐다. 영과 육신은 하나이고, 영이 육신으로 실체화했는데, 영은 말하고 싶지만 육신이 말하지 않는다든가, 육신은 말하고 싶지만 영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이냐?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했다 함은 영이 육신으로 실체화한 것으로, 육신으로 사역할 때는 언제 어디서든 말할 수 있다. 이는 성령이 사람에게 역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성령이 육신으로 실체화해야 비로소 성육신이 되며, 성령이 떠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성령이 사람에게 역사하는 것은 선택과 배경이 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으면 성령은 떠나고, 사람은 그걸 느낄 수 있다. 사람의 인식에는 언제나 치우친 면이 있다. 하나님 사역이 이 단계까지 왔으니 말씀도 더 이상 없고, 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런 것이냐? 하나님은 언제든 말씀할 수 있고, 영과 육신이 서로 방해가 된 적은 없었다. 어떤 사역을 하든, 어떤 방면의 진리를 선포하든, 어느 쪽에서 보든 영이 육신으로 실체화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육신이 받는 일체의 고통은 영이 인간 세상에서 몸소 경험하는 고통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결코 육신과 영을 따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성육신의 진리는 가장 심오하여 10년, 20년, 심지어 평생을 겪어야 진정으로 알 수 있다.

1997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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