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의 두 번째 측면의 의의

성육신 하나님의 평범하고 정상적인 면이 갖는 의의는 무엇이냐? 사역을 하기 위함이겠느냐?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기 위함이겠느냐? 어떤 이들은 말한다. “성육신은 반드시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이어야 합니다.” 겨우 그 정도 의의밖에 없느냐? 그리스도라면 반드시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이어야 한다는 것, 이 역시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이 ‘반드시’라는 말에는 어떤 의의가 담겨 있느냐?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사람이 쉽게 접촉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 때문이냐? 그리스도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리스도의 본질은 완전한 하나님 자신이다. 그가 하는 모든 것에는 다 의의가 있다. 특정한 육신, 육신의 특정 생김새, 특정한 가정, 특정한 생활 환경 등 하나님이 하는 이런 일들은 모두 의의를 지닌다. 누군가는 말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을 입은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지 잘 모르겠는걸? 그건 껍데기에 불과하지 않나? 하나님이 사역을 마무리하시면 그 껍데기는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상상과 의식으로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의 껍데기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경륜에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그저 현 단계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람과 쉽게 접촉하고 사람이 하나님의 말을 듣기 쉽도록, 보고 만질 수 있는 그런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이것이 지금까지 사람이 이해한 성육신의 의의다. 사실 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은 사역하는 동안에, 성육신 기간에 자신의 본업 말고도, 그 누구도 미처 생각지 못한 사역을 담당했다. 그게 어떤 측면의 사역이겠느냐? 바로 하나님 자신의 사역 외에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은 성육신 하나님이 늘 병의 고통에 시달리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런 고통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낮추고 감추십니다. 그분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그토록 고통받으시죠.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세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설명이다. 사람을 구원하려면 꼭 이런 고통을 직접 받아야 하는 것이냐?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그런 고통을 받지 않았다면 하나님 자신이 이룰 수 있느냐? 이룰 수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은혜시대에는 병이 났을 때 하나님께 기도만 드리면 좋아졌어. 약도 먹을 필요가 없었지. 기도로 암이 나은 사람도 있었어. 그런데 성육신 하나님은 왜 늘 병으로 고생하지? 왜 늘 건강이 좋지 않을까? 어째서 성육신 하나님은 사람만큼도 은혜를 못 받는 걸까?” 이 점은 사람들 사이에서 늘 수수께끼이자 마음속에서 풀리지 않는 매듭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 일을 별로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한다느니,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고통을 받는다느니 하는 식으로 어설프게 설명하면서 지금까지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성육신의 책임 중 하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목적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이것도 역시 문제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일은 영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오직 성육신 하나님이 평범하고 정상적이고 온전한 육신이어야만, 온전히 사람이 되어야만 인간 세상의 고통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 영이 사역할 경우, 그 영은 인간의 고통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그저 보고 알 수 있을 뿐이다. 보고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이 같으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간 세상의 공허를 알고, 인류의 생존의 고난을 안다. 사람들 사이를 다니며 인간 세상의 온갖 처참한 모습을 보았고, 사람들 삶의 고난과 비참함, 공허를 보았노라.” 하지만 그 고통을 경험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경우, 네가 그것을 보고 알았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것을 경험하였느냐? 그 어려움과 고통, 그 심정과 기분을 느꼈느냐? 그렇지 않다. 따라서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른 것이다. 이 일과 사역은 반드시 성육신으로 해야지, 영은 결코 할 수 없다. 이것은 성육신이 지니는 또 다른 측면의 의의다. 즉,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고, 사람이 겪는 고통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경험하는 고통은 어떤 것일까? 사람들이 겪는 생활의 어려움, 가정의 불행, 기만과 저버림, 핍박, 병마의 고통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이 바로 인간 세상의 고통이다. 병마의 고통,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로부터 받는 타격, 가정의 불행, 사람에게 버림받는 일, 사람의 모독과 비방, 대적, 사람의 패역, 사람의 모욕, 사람의 오해 등, 이런 것들이 성육신 하나님에게는 일종의 타격이 된다. 이런 일을 겪는 사람에게도 타격이다. 위인이나 훌륭한 사람, 혹은 제아무리 도량이 넓은 사람일지라도, 그런 고통을 겪고 그런 일을 겪는 것은 누구에게나 타격이다.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서 핍박을 겪으며 머리 둘 곳도, 편히 거할 곳도, 마음 알아주는 이도 하나 없다. 이런 것이 다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고통들이 반드시 정점에 이르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경험한다. 전에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했다. ‘성육신 하나님이 사역하실 때 그 병을 다 없애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당신 사역을 순조롭게 진행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대적하지 못하게 말이야. 이런 일을 하실 수는 없나? 하나님이 징벌하시면 사람은 감히 그분을 대적하지 못하잖아. 하나님은 권병을 지니고도 어째서 스스로에게 병을 허락하실까? 사람은 병이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다 낫는데, 어째서 하나님 자신은 병을 앓으시는 걸까?’ 그건 바로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환난과 병마의 고통, 인간 세상에서 버림받는 일을 피하지 않는다. 그저 고난의 환경 속에서 순리대로 자라고 사역한다. 그럼으로써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만약 그런 일들이 사라지면 이런 고통은 경험할 수 없다. 아니면 병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거나, 정상적인 사람들이 걸리는 병을 본인은 걸리지 않는다면 고통도 줄어들지 않겠느냐? 남들은 신경을 많이 쓰면 머리가 아픈데, 본인은 신경을 써도 머리도 아프지 않고, 피곤하지도 않은 일이 그에게는 가능할까? 그것은 가능하지만 이번에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가 사역했을 때는 40일 밤낮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지만 배고프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사역에서는 한 끼만 굶어도 배가 고프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 아니었나? 내가 볼 때는 아닌 것 같아. 이런 것도 못 하시잖아. 그분 말씀을 보면 하나님인데, 이런 건 왜 못 하시지?” 하나님은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한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일들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며, 그렇게 하는 것은 모두 의의 있는 일이다. 혹자는 이렇게 묻기도 한다. “하나님, 당신께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당신께서 받는 고통이 사람의 고통을 대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은 지금도 고통받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아무렇게 하는 법이 없다. 인간 세상의 고통을 다 겪고, 인간 세상이 어떠한지 살펴본 다음 그냥 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으로 해야 할 모든 사역을 철저하게 완수한다. 혹자는, 아마 하나님이 호강에 겨운 나머지 고생도 좀 해 보고 싶으신가 보다, 복에 겨워 사느라 고생이 어떤 건지 잘 모르니까 한번 경험해 보고 싶으신가 보다 생각하는데, 그건 다 사람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성육신한 동안에만 가능하다. 성육신 하나님의 사역이 완전히 끝나고 다음 단계 사역이 시작되면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일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사람은 아느냐? 전에 예언하기를 앞으로 사람에게는 눈물도, 울음도, 고통도, 인간 세상의 병도 절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이런 고통을 다 경험하고 난 뒤, 훗날 인류에게 아름다운 종착지를 가져오면 지금까지의 고통은 다 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왜 고통이 사라지느냐? 성육신한 하나님 자신이 이미 그 고통들을 경험함으로써 인류가 이를 면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이유는 훗날 인류에게 더욱 훌륭하고 아름답고 완벽한 종착지를 예비하기 위해서다. 이는 성육신의 가장 중요한 면이자 성육신 사역의 한 방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성육신 하나님이 이러한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인류는 그 고통들을 면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육신하지 않고 그 고통들을 경험하지 않을 경우, 인류가 고통을 면할 수 있을까 없을까? 여전히 면할 수 있다. 은혜시대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를 보자. 의인이었던 예수는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속죄 제물이 됨으로써 인류 전체를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속해 냈다. 이것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목적이자 의의다. 그가 보혈로 인류를 구속한 덕분에 인류의 죄는 사함을 받았다. 지금 하나님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자신이 인류를 대신하여 고통들을 겪는다는 의미이고, 인류는 앞으로 더 이상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하는 각 단계의 사역은 모두 사탄과의 전쟁이며 그 어떤 사역도 그 전쟁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을 기억하라. 은혜시대 사역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인류의 죄를 사하고, 인류를 구속해 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 없이 말로만 사람의 죄를 사한다면 사탄은 불복하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은 아직 이렇다 할 고통도 받지 않고, 인류의 죄를 짊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말 한마디로 그 죄를 사하려 하는데, 그건 안 됩니다! 인류는 당신이 창조하셨으니 당신이 인류를 대신해 죄를 짊어지지 않고서는 인류의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사역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아름다운 종착지로 이끌어 들어가고, 다음 시대로 이끌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인류는 더 이상 고통받지 않고, 병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이 더 이상 병에 시달리지 않고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겪지 않게 되는 것이냐? 이치대로라면 사람은 패괴 성품이 있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니 당연히 그런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그래서 하나님이 이번에 성육신하여 또 한 번 아주 의의 있는 일을 했다. 그것은 바로 인류를 대신하여 모든 고통을 겪는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한다. 이 ‘경험’은 바로 인류를 대신하여 고통받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이 인류를 대신해서 고통받으신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지금도 고통받고 있습니까?” 너는 지금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고 있으며 아직 완전히 온전케 되지 않았다. 아직은 다음 시대로 완전히 들어간 것이 아니고, 패괴 성품이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 하나님의 사역은 절정에 이르지 않았고 진행 중이다. 따라서 사람이 고통받는다고 원망하지 마라. 성육신 하나님도 여전히 고통받고 있으니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일은 커다란 의의를 지니지 않느냐? 성육신 하나님은 와서 사역 몇 개만 끝내고 가 버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인식이 너무 얕아서 성육신은 단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하기 위한 것인 줄 알고, 이 육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대신해 사역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 육신은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믿는 이들도 있는데 이건 더 큰 잘못이다. 아예 성육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다. 육신으로 사역한다함은 하나님 자신이 와서 육신을 입고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그 고통들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인식대로라면 하나님 육신의 껍데기는 고통을 경험하지만 하나님 내면의 영은 고통받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이 맞는 말이냐? 하나님 영은 함께 고통받는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을 때 이렇게 기도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에게 이런 바람이 있었던 것은 육신이 고통받는 동시에 영도 내면에서 고통받았기 때문이다. 단지 육신의 껍데기만 고통받고, 신성은 조금도 괴롭지 않고 시달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틀렸다. 그렇게 인식한다면, 그것은 네가 성육신 하나님의 본질적인 면을 보지 못했다는 증거다. 하나님이 지금 육신으로 실체화되었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언제든 가거나 올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이 되어서 실제로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게 했다. 게다가 하나님은 자신이 받은 고통을 몸소 느끼고 경험했다. 어떤 고통에 시달릴 때, 육신만이 그것을 느끼고 영은 느끼지 못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육신과 영이 같이 느끼고 같이 고통받았다. 이 말이 쉽게 이해되느냐? 이해하기 쉽지 않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분명 육신에 불과하고, 육신과 함께 고통받는 영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고통받을 때 그의 영혼도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믿느냐? 왜 마음 깊은 곳이 어떻다고 말하는 것이냐? 이는 사람의 육과 영이 하나라는 뜻이다. 누구에게나 영과 육은 하나이고, 이 둘은 같이 고통받고 같이 기뻐한다. 정말 괴로울 때 육만 괴롭고 마음은 기쁜 사람은 없다. 또 마음이 괴로울 때 육은 하나도 괴롭지 않은 사람도 없다. 마음속에서 받는 느낌, 고통, 기분을 육도 똑같이 느낀다.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와서 사역하며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이유는 사람이 받는 모든 고통을 짊어지기 위함이다. 그 고통을 다 받고 나면 다음 단계 사역에서는 더 이상 똑같은 사역을 할 필요 없이 인류를 아름다운 종착지로 이끌어 들어갈 수 있다. 사람을 대신해 고통받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사람을 아름다운 종착지로 이끌어 들어갈 자격이 생기며, 이것이 그의 계획이다. 일부 터무니없는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왜 내 눈에는 성육신 하나님이 많은 고통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 않지? 제대로 고통받은 것도 아니잖아. 고통은 무엇이든 가리지 말고 받아야 하는 거라고. 최소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은 받아야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은 이미 받았으니 다시 받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된다. 성육신 하나님이 그동안 겪은 고통이 아직도 부족하냐? 못된 인간만이 그런 생각을 한다. 성육신 하나님이 받은 고통의 범위 안에서 인간 세상의 그 고통들은 기본적으로 찾아온다. 너무 큰 고통의 경우, 그러니까 천 명 중 한 명이 받을 만한 고통이라면 받을 필요가 없다. 그 고통들로 대신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 고통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정상인과 다르거나 사람과 구분되지 않거나 사람과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사람과 똑같이 고통받는다는 뜻이다. 사람이 고통받는 동안에는 하나님도 고통받고, 사람이 늘 아프고 고통받을 때는 하나님도 그 고통들을 몸소 경험한다. 그런 고통을 다 경험했다. 이번에 성육신 하나님이 고통받을 때는 지난번처럼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음을 경험할 필요는 없다. 그 일은 이미 겪었으니 말이다. 이번에는 단지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고 사람의 고통을 짊어지는 것이다. 옛날에 여호와는 영의 방식으로 사역했고, 사람도 뭔가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성육신으로 사역하면 사람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어 이는 영의 사역에 비해 편리하고 사람에게 더욱 가깝다.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한편 성육신 하나님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일은 영의 사역으로 결코 불가능하고, 반드시 성육신이어야만 가능하다. 영은 사역할 때 말씀을 끝내면 가 버린다. 사람과 접촉하더라도 인간 세상의 고통은 경험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아마도 이렇게 물을 것이다. “성육신이 고통받으면 영도 따라서 고통받는 것 아닙니까? 영도 경험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역시 잘못된 것이 아니냐? 그 고통은 영이 육신을 입은 후에 비로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영과 육신은 뗄 수 없고, 육신이 고통받으면 영도 같이 경험하지만, 영이 육신을 입지 않고서는 경험할 길이 없다. 육신이 고통받는 느낌은 더욱 섬세하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영은 이를 수 없는 경지다. 물질세계에서 어떤 일은 영의 사역으로는 대신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이 지닌 가장 포괄적인 의미다.

그리스도는 인간 세상에서 가정의 즐거움과 관계가 없다고 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리스도는 어딜 가든 대접받고, 좋은 물건을 사 주는 사람들도 있어. 어딜 가든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말이야. 분명 호강하며 지내느라 고생도 별로 하지 않을 텐데 어째서 가정의 즐거움과 관계가 없다고 하는 거지?” 이 말은 어떠냐? 관계가 없다는 것이 그런 것들을 누리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그런 것들을 누린다고 해서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네가 병이 났는데 누군가 좋은 옷을 사 주었다. 그렇다면 그 옷 덕분에 네 질병의 고통이 가벼워지느냐? 그렇지 않다. 병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는다. 받아야 할 고통은 고스란히 받는 것, 이것을 두고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병이나 주위 환경의 억압처럼 이런 고통은 육적인 즐거움 때문에 가벼워지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이런 것들을 즐거움으로 삼지 않기에 관계가 없다고 한다. 못된 인간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이런 즐거움과 관계가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접대하든 괜찮은 거네. 어쨌든 하나님은 고통받으니까 말이야.’ 이건 대단히 잘못 이해하는 것이고 악독한 심보다. 사람은 마음을 다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이 예전에 복을 다 누려서 이제는 인간 세상의 고통을 한번 체험해 보려는 거구나.’ 이토록 간단한 것이냐? 너는 하나님이 어째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려 하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에는 상당히 깊은 의의가 있다. 예컨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말이다. 예수는 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겠느냐? 전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냐? 이번에 성육신하여 인간 세상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는 것에도 훗날 인류의 아름다운 종착지를 위해서라는 큰 의의가 있다. 하나님이 행하는 사역은 모두 가장 현실적이다. 왜 하나님이 보기에 사람은 지금 죄가 없고 복이 있어 하나님 앞에 올 수 있겠느냐?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사람의 죄를 담당하여 사람을 속량했기 때문이다. 왜 인류에게는 훗날 조금의 고통도, 슬픔도, 눈물도, 탄식도 없느냐? 이번에 성육신한 하나님이 이런 고통을 모두 담당하여 사람 대신 이 고통들을 다 받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자식이 병이 났을 때 자신이 몇 년 덜 살아도 좋으니 자식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하늘에 기도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사역한다. 그가 받은 모든 고통을 대가로 인류의 아름다운 미래 종착지를 바꾸어 와 훗날 인류에게는 슬픔도, 눈물도, 탄식도, 고통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직접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한 대가로, 그 희생으로 인류의 아름다운 미래 종착지를 바꾸어 온다. ‘바꾼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아름다운 종착지를 내려 줄 권력과 능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진심으로 탄복하게 할 더 실제적이고 강력한 증거를 찾으려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미 이러한 고통을 경험해 봤기에 인류를 아름다운 종착지로 이끌고 인류에게 아름다운 종착지와 아름다운 약속을 줄 자격과 능력이 있고, 더욱이 그럴 권리가 있다. 사탄도 탄복하고, 전 우주 위아래의 피조물도 탄복해 최종에는 인류가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을 이어받게 한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것은 공허하지 않고 실제적이며, 전부 그 자신이 경험한 것들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경험한 고통을 대가로 인류의 종착지를 바꾸어 오니, 이것이 실제적인 사역이 아니겠느냐? 자식을 위해 치르는 부모의 참된 대가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렇게 행하는 것도 당연히 인류에 대한 가장 큰 진실함이요, 신실함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신실하다. 그는 말씀한 이상 반드시 행하며, 행한 이상 반드시 이룬다. 사람에게 행한 그의 모든 것은 다 진지하다. 단순히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치르겠다고 하면 실제적으로 대가를 치르고, 사람의 고통을 감당하고 사람 대신 고통을 받겠다고 하면 실제적으로 사람들 가운데 와서 살면서 그러한 고통을 받으며 직접 그 고통들을 경험한다. 그리고 전 우주 위아래의 만물로 하여금 하나님이 행한 모든 것이 옳고 공의롭다는 것을, 전부 현실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이는 강력한 증거이다. 한편, 인류에게는 훗날 아름다운 종착지가 있다.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이 행한 것이 확실히 사람에 대한 사랑임을 찬미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낮춰 평범한 한 사람으로 인간 세상에 왔다. 그는 어느 정도의 사역과 말씀을 마친 후에 바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더없이 실제적으로 말씀하고 사역하며 동시에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한다. 그는 그 고통들을 전부 경험한 후에야 떠날 것이다. 하나님은 이토록 현실적이고 실제적으로 사역한다. 이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찬미할 것이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과 선량한 면을 보게 될 것이다. 성육신 측면의 의의를 보면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함의 본질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떤 일을 하든 참되게 하고 말 한마디 한마디를 진지하게 하며, 모든 것이 신실하다. 그는 말만 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하려는 일을 모두 실제적으로 행하며, 대가를 치르는 것 역시 실제적으로 치른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요, 신실한 하나님이다.

1997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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