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 일꾼의 직책(2)

우선 지난번 예배에서 교제했던 주요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지난번에는 리더 일꾼의 직책 15개 조항을 열거했으며, 앞의 두 개 조항을 주로 교제했습니다. 제1조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깨닫도록, 하나님 말씀의 실제에 진입하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제2조는 각 부류 사람의 내적 상태를 파악하여 그들이 현실 생활에서 부딪히는 생명 진입에 관련된 여러 고충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 두 조항에 근거해 이와 관련된 거짓 리더의 모습을 해부했습니다.) 만약 너희에게 리더를 하게 한다면, 너희가 이 두 조항 중 어느 조항을 해낼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적 있느냐? 많은 사람은 늘 자신이 자질이 좀 있고 약간 똑똑하며 부담도 좀 있다고 생각해 앞다퉈 리더가 되려고 하지 평범하게 따르는 자는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먼저 이 두 조항을 네가 해낼 수 있는지, 이 두 조항의 사역 중 어떤 조항의 사역을 네가 비교적 감당할 수 있고 담당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아라. 네가 리더의 자질을 갖추었는지, 그런 사역 능력과 부담이 있는지는 차치하고, 우선 네가 이 두 조항의 사역을 잘 해낼 수 있는지를 살펴보아라. 너희는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본 적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리더가 될 생각도 없는데 이 문제를 뭐 하러 생각해요? 제 사역만 제대로 하면 그만이죠. 이 문제는 저와 상관없습니다. 저는 일평생 리더가 될 생각이 없고, 리더 일꾼의 직책을 맡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니 이런 문제는 일평생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이 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설령 네가 리더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너를 이끄는 사람이 이 두 조항의 사역을 어떻게 하는지, 책임을 다하는지, 그런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 그런 능력과 부담이 있는지, 이 두 조항의 요구에 부합하는지 등을 네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만약 네가 깨닫지 못하고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그가 너를 구렁텅이로 이끌어도 네가 알 수 있겠느냐? 만약 네가 어리벙벙하게 따르기만 하는 멍청이라서 그가 거짓 리더인 것도 알지 못하고, 그가 너를 잘못 이끄는 것도, 너를 어디로 인도하는지도 알지 못한다면 너는 위험해진다. 네가 리더 일꾼의 직책 범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짓 리더를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벙벙하게 따를 것이며, 그가 시키는 것이라면 뭐든 다 할 것이다. 너는 그가 교제해 준 것이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부합하는지, 실제인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가 열의가 있고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동분서주하며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수 있고 누가 어려움에 직면하면 모른 척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도와주니 그게 바로 합당한 자격을 갖춘 리더라고 생각한다. 이런 거짓 리더에게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어찌 모르느냐? 거짓 리더가 사람들을 아무리 오래 인도해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무엇이 도리이고 무엇이 진리 실제인지조차도 분별할 줄 모른다. 사람들은 어떤 하나님 말씀을 치우치게 이해했는지조차 알지 못하며,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먹고 마셔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는 너에게 교제하여 형식적인 절차는 다 밟았다. 하지만 네가 어떤 내적 상태에 처해 있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도대체 해결되었는지는 그도 분명히 알지 못하고 너 자신도 알지 못한다. 겉으로는 그가 너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고 진리도 교제해 주었지만, 너는 여전히 잘못된 내적 상태 속에서 살며 돌이키지 못하고 있다. 네가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든 겉으로는 그가 책임을 다하지만, 너의 어떤 어려움도 그의 교제와 도움으로는 해결되지 못해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리더가 합당한 자격을 갖춘 리더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네가 어떤 진리를 깨달아야 이런 일들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 리더 일꾼이 하는 모든 사역과 그들이 처리하는 모든 문제가 하나님 말씀의 요구에 따라 한 것인지,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이 실제적이고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부합하는지, 이런 것들을 너는 알아야 한다. 그 밖에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가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네가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실행의 길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글귀와 도리를 좀 이야기하고 구호를 좀 외치거나 꾸짖을 뿐인지도 알아야 한다. 일부 리더 일꾼들은 권면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돕기를 좋아하고, 또 일부는 격려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또 어떤 리더 일꾼들은 폭로하고 질책하며, 책망하고 훈계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어떤 방식을 쓰든, 만약 정말로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도록 인도할 수 있다면, 정말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너의 어려움을 해결하여 네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함으로써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게 하고 실행의 길을 갖게 할 수 있다면 이후 이런 일에 또 직면했을 때 네게 실행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진리로 사람의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하여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실행의 길을 얻게 할 수 있는지는 리더 일꾼이 합당한 자격을 갖췄는지를 가늠하는 최소한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난번에 우리는 리더 일꾼의 직책 제1조와 제2조를 대략적으로 교제하면서 이 두 조항에 맞춰 거짓 리더의 몇몇 모습을 해부했다. 그들의 주된 모습은 바로 하나님 말씀을 얕고 피상적으로 이해하며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분명 그런 식으로는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이끌 수 없다. 사람들이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거짓 리더는 자신의 체험적 인식에 근거하여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도록 인도함으로써 그들이 실행할 길을 얻도록 할 수 없으며, 사람들이 각 측면의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는 동시에 어려움을 해결하게 할 수도 없다. 그럼 오늘은 먼저 생명 진입의 고충이 무엇인지, 사람이 생활 속에서 자주 직면하고 흔히 볼 수 있는 생명 진입에 관련된 여러 고충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교제하고,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겠다. 이것을 교제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제 너희는 생명 진입 측면과 관련된 이런 주제에 흥미가 생겼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와의 접촉과 대화를 처음 시작했을 때, 무슨 말을 하든 너희는 무감각하고 우둔했으며 반응이 느리고 둔했다. 너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분량도 별로 없어 보였으며, 생명 진입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명 성품 변화와 관련된 일을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이 측면의 주제에 비교적 흥미를 갖고 약간의 반응을 보인다. 이는 좋은 현상이다. 만약 너희가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이런 것을 얻을 수 있겠느냐? (얻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이 모든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제2조 각 부류 사람의 내적 상태를 파악하여 그들이 현실 생활에서 부딪히는 생명 진입에 관련된 여러 고충을 해결한다(2)

생명 진입의 여덟 가지 고충

1. 본분 이행 측면의 고충

생명 진입의 고충에 관해, 우선 큰 방향에서 본분 이행 측면의 고충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네가 본분 이행 중 진리 실행과 관련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원칙에 따라 일 처리를 할 수 없다면, 이는 생명 진입의 고충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바로 본분을 이행할 때 생기는 다양한 내적 상태, 생각, 관점, 그리고 올바르지 않은 사고방식들이다. 그렇다면 이 측면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들이 있겠느냐? 예를 들어 보자. 본분을 이행할 때 늘 건성으로 대충 하고 꾀를 부리려는 것, 이것은 본분을 이행할 때 자주 드러나고 표출되는 내적 상태가 아니겠느냐? 또 본분을 이행할 때 본분에 집중하지 않고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고 하며, 본분 이행 장소를 게임이나 다툼의 장소로 여기기도 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마다 ‘비교 대상’을 찾아 ‘누가 나보다 더 뛰어나 내 투지를 자극할 수 있는지 좀 봐야겠어. 그와 대결해서 경쟁하고 겨루어 봐야지. 누구의 본분 이행 성과가 더 좋고 효율이 더 높은지, 누가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잘 얻는지 보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본분 이행의 원칙을 알면서도 준수하기 싫어하고,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와 하나님 집의 요구대로 하기 싫어하며, 늘 개인적인 기호를 섞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저는 이렇게 하는 걸 좋아하고, 저렇게 하는 걸 좋아합니다. 저는 이렇게 하길 원하고, 저렇게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제멋대로인 것이다. 늘 자기 뜻대로 하려 하고, 자신의 기호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한다. 하나님 집에서 어떤 요구를 하든 귀 기울이지 않고 잘못된 길을 가길 좋아한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본분을 이행할 때의 실제 모습 아니겠느냐? 분명 이런 문제들은 모두 본분 이행 측면의 고충과 관련된다. 너희가 더 보충해 보아라. (본분을 이행할 때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하고, 늘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합니다.) 이것 또한 어려움의 한 측면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하고 늘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혼자 결정하려고 한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자세를 낮추어 자문을 구하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자 하지만 실행해 내지 못하며, 실행하려고 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이것이 바로 문제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 늘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며 이기적이고 비열합니다. 사실, 문제에 직면했을 때도 어떻게 해결하는지 알고 있지만, 마음속으로 그 일이 자기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잘못했다가 책임을 지게 될까 봐 두려워 나서지 못합니다.) 문제를 보고도 해결하지 않고,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나 몰라라 한다. 이것 역시 본분 이행에 충성심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네가 책임진 사역이든 아니든, 문제를 꿰뚫어 보고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너의 본분이자 네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만약 책임자가 해결할 수 있다면 네가 상관하지 않아도 되고, 만약 책임자가 해결하지 못한다면 네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 누구의 책임 범위인지 나누지 마라. 이렇게 범위를 나누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것이다. 또 있느냐? (본분을 이행할 때 머리와 은사에 의지해 사역하고 진리를 구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매우 많다. 늘 자신이 똑똑하고 자질이 있다고 생각해 어떤 일이 닥치든 개의치 않고, 전혀 진리를 구하지 않으며, 전부 자기 뜻대로 행동한다. 그 결과 어떠한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이 모두 본분 이행 측면의 고충이다.

2. 앞날과 운명을 대하는 측면의 문제

앞날과 운명을 대하는 측면에 관한 것 또한 생명 진입과 관련된 큰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고 느끼면 기꺼이 대가를 치르지만, 희망이 없다고 느끼면 소극적으로 변한다. 하나님 집에서 발탁하거나 양성하지 않으면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고, 본분 이행도 형식적으로만 하며 책임을 지지 않는다. 무엇을 하든 앞날과 운명을 고려하면서 “저에게 과연 아름다운 종착지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약속 중에 저와 같은 부류 사람들의 앞날과 종착지가 대체 무엇인지 언급한 내용이 있나요?”라고 질문하는데, 정확한 답을 얻지 못하면 뭘 하든 의욕이 없다. 하나님 집에서 발탁되고 양성되면 의욕이 생겨서 무엇이든 무척 적극적으로 하지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교체되면 그 즉시 소극적으로 변하고, 본분을 내팽개치며 자포자기한다.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싫어하시게 된 걸까? 나를 싫어하시면 빨리 말씀해 주시지. 내가 세상을 추구하는 데 지장을 받지 않도록 말이지!’라고 생각한다. 교체되면 또 ‘나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건가? 누가 나를 고발했나? 내가 도태 대상인 건가? 그렇다면 빨리 말해 달라고!’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의 마음속은 하나님에 대한 거래, 독촉, 무리한 요구로 가득 차 있다. 교회에서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안배하든 그는 아름다운 앞날과 운명이 있는지,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지를 전제로 삼는다. 최소한 좋은 표정과 좋은 태도로 그를 대해야 하며, 그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이런 것들이 전제되어야만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다. 이것이 앞날과 운명을 대하는 모습들이 아니겠느냐? 너희가 더 보충해 보아라. (만약 본분을 이행할 때 착오나 문제가 생겨서 훈계와 책망을 받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경계하며, 드러나 도태될까 봐 항상 자신을 위해 퇴로를 남겨 둡니다.) 드러나 도태될까 봐 항상 자신을 위해 퇴로를 남겨 두는 것, 이 또한 앞날과 운명을 대하는 모습의 한 측면이다. (하나님이 폭로하시고 규정하시는 말씀이 자신과 일치하는 것을 보게 되거나 훈계와 책망을 받아 망신을 당하게 되면, 자신이 어리석은 자이며 마귀 사탄이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라고 확정하고 자신은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규정하고 소극적으로 변합니다.) 앞날과 운명에 대해 사람은 자신의 속셈과 욕망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는 없다. 늘 그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 추구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추구하는 원동력이자 전제로 삼는다.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에 직면하고 드러나거나 위험한 환경에 직면했을 때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는 걸까? 나를 혐오하시는 걸까? 하나님께서 내게 그렇게 엄한 말투로 말씀하시는데, 나를 구원하기 싫으신 걸까? 나를 도태시키시려는 걸까? 도태시키시려면 일찍 이야기하시지. 지금 내가 아직 젊을 때 세상을 추구하는 게 지체되지 않게 말이야.’라는 생각이 들어 소극적으로 변하고, 반발하고, 대항하며, 본분을 게을리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사람이 앞날과 운명을 어떻게 대하는지와 관련된 내적 상태와 모습들이다. 이는 생명 진입과 관련된 큰 고충의 한 측면이다.

3. 인간관계 측면의 고충

이어서 다음 측면인 인간관계를 살펴보자. 이것 역시 생명 진입과 관련된 큰 고충이다. 자기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자신과 가족 관계이거나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늘 적시에 너를 일깨워 주고 너에게 진실한 말을 하며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네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할 수 있는지, 다른 사람과 다툼이 생겼을 때 네가 어떻게 실행하는지,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질투와 분쟁이 생겨 화목하게 지낼 수 없는 것, 심지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조화롭게 협력할 수 없는 것, 이러한 것이 모두 인간관계 측면과 관련된 일부 내적 상태와 모습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무골호인이 되어 다른 사람의 문제를 발견했을 때에도 밉보일까 봐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밉보일까 봐 두려울 때 생겨나는 내적 상태이다. (리더 일꾼이나 권세와 지위가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리더 일꾼이나 권세와 지위가 있는 사람을 대할 때 환심을 사고 아첨하며 비위를 맞추는지, 아니면 올바르게 대하는지는 권력이 있는 사람을 대하는 구체적인 모습이다. 인간관계라는 이 측면의 고충은 대략 이런 것이다.

4. 사람의 정 측면의 문제

사람의 정 측면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자. 정과 관련된 문제에는 무엇이 있느냐? 먼저 자기 가족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들이 한 일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있다. ‘그들이 한 일’, 물론 여기에는 가족들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한 일, 뒤에서 남을 판단한 일, 그 외 불신파의 행동 등이 포함된다. 너는 이런 일을 공정하게 대할 수 있느냐? 평가서를 써야 한다면, 너는 정을 배제하고 그들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느냐? 이는 자기 가족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부분이다. 그 밖에, 너는 너와 비교적 잘 맞는 사람 혹은 너를 도와주었던 사람에게 정을 갖고 있느냐? 그의 행위, 사람됨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고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느냐? 만약 네가, 그가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행위를 발견했다면, 즉시 이를 보고하거나 폭로할 수 있느냐? 또한, 너는 너와 비교적 가까운 사람 혹은 관심사가 같은 사람에게 정을 갖고 있느냐? 이들의 모든 행위에 대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와 정의 및 처리 방식을 갖고 있느냐? 교회에서 원칙에 따라 너와 감정적으로 얽혀 있는 이들을 처리할 때, 만약 그 처리 결과가 네 관념과 맞지 않는다면 너는 어떻게 대하겠느냐? 순종할 수 있느냐? 뒤에선 여전히 그들과 얽히고, 그들에게 미혹당하고, 심지어 그들의 부추김으로 그들을 위해 설명하고 변명하고, 그들 대신 나서 주겠느냐? 너는 네게 은혜를 베풀어 준 이를 위해 진리 원칙을 저버리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외면한 채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고 어떤 희생도 감수하며 도와주겠느냐? 이건 정과 관련된 여러 측면의 문제가 아니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정이란 결국 가족이나 친척과 관련된 것 아닙니까? 결국, 자기 부모, 형제자매, 그리고 집안사람, 이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아니다. 정과 관련된 범위는 매우 넓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족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과 비교적 친한 친구나 절친을 평가할 때조차 공정하지 않아서 사실을 왜곡해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절친이 본분을 이행할 때 본분 이행에 힘쓰지 않고 늘 부당한 일을 저질러도, 그는 그 절친이 놀기를 좋아하는 편이고 인성이 성숙하지 않아 아직 안정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이 말에 정이 담겨 있지 않으냐? 이는 정을 담아 하는 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와 상관없는 사람이 본분에 힘쓰지 않고 부당한 일을 저지른다면, 그는 비교적 심하게 말할 것이며, 심지어 그 사람을 정죄할 것이다. 이는 정에 치우쳐 말하고 일 처리하는 모습 아니겠느냐? 정에 치우쳐 살아가는 사람이 공정할 수 있겠느냐? 올곧은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정에 치우쳐 말하는 사람은 무엇이 문제이겠느냐? 왜 공평하게 사람을 대하지 못하겠느냐? 왜 진리 원칙에 따라 말하지 못하겠느냐? 한 입으로 두말하며 늘 사실의 진상에 근거해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악하다. 말도 공정하지 않고, 오직 정에 치우쳐 말하며, 자기 자신만을 위해 말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말하지 않으며, 하나님 집 사역을 위해 고려하지 않고, 오직 개인의 감정과 자신의 명리와 지위만을 지키는 것,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성질이다. 적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식으로 말한다. 항상 이상하게 말하며 방해와 교란을 일삼는다. 육적 기호와 이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며, 정에 치우쳐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다. 정에 치우쳐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진리 실제가 전혀 없다.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된다면 분명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일 것이다. 그들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온갖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데, 반드시 도태되고 징벌을 받게 된다.

5.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측면의 문제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것, 이 또한 심각한 문제 중 하나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모습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너희가 체험을 통해 본 것 중에서 어떤 것들을 예로 들 수 있겠느냐? 지위의 복을 누리는 것이 포함되겠느냐? (포함됩니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본분을 이행할 때 몸을 사리고 늘 수월한 일만 골라 하려는 것입니다.)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 늘 수월하고, 힘들지 않고, 몸이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 고른다. 이는 몸을 사리는 것이고,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모습이다. 또 있느냐? (본분을 이행할 때 조금 힘들고 고생스럽고 대가를 치러야 할 경우 늘 불평을 합니다.) (평소에 먹고 입는 것, 육적인 즐거움을 중요시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다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모습이다. 너무 힘들고 위험 부담이 있는 일을 보면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편한 일만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자질이 부족하고 사역 능력이 없어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대지만, 사실상 그것은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데 목적이 있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고생하기 싫어한다. 만약 일을 끝내면 훙사오러우(紅燒肉)를 먹을 수 있다고 하면, 매우 빠르고 효율적으로 일을 한다. 재촉할 필요도, 강요할 필요도 없고, 지켜보고 있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훙사오러우도 없고 본분을 이행하며 추가 근무도 좀 해야 한다면 느릿느릿 일하고, 다양한 이유와 핑계를 대며 회피한다. 잠깐 일하고는 바로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가 저려요. 너무 피곤해요! 몸이 여기저기 다 아파요. 쉬어도 될까요?”라고 한다. 이는 어떤 문제이겠느냐? 이는 바로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본분을 이행하면서 어렵다고만 하고 열심히 노력하려고 하지 않고, 틈만 나면 쉬거나 잡담하거나 여가를 즐긴다. 사역이 바빠져서 생활 리듬과 규칙이 깨지면, 언짢아하면서 불만을 품고,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가 하면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한다. 이는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것 아니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이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정해진 시간에 에어로빅을 하고 피부 미용에 좋은 시간에 잠을 잔다고 해 보자. 사역이 바빠져서 이런 것들이 보장받지 못하게 되면, 그녀는 언짢아한다. ‘안 되겠어. 이 사역을 하니 너무 방해가 되네. 내 일에 지장을 주면 안 돼. 누가 진도를 재촉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내 페이스대로 하겠어. 요가 할 시간에는 요가 하고, 피부 미용을 위해 잠을 자야 할 때는 잘 거야.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나는 당신들처럼 그렇게 어리석지 않고, 그렇게 죽어라 일하지 않을 거야. 몇 년 지나 폭삭 늙고 몸매도 망가지고 더 이상 날씬하지도 않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거고, 스스로도 삶에 자신감이 없어져.’ 그녀는 자신의 육적 즐거움을 만족시키기 위해, 아름다움을 위해, 남들이 자신을 좋아하게 하기 위해, 더 자신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본분 이행이 아무리 바빠도 육적인 즐거움과 기호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마음이 조급하시니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그녀는 “하나님께서 조급해하셔도 제가 보지 못했으니, 저만 조급하지 않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제가 헤아려 드리면 제 마음은 누가 헤아려 주나요?”라고 말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인성이 있겠느냐? 마귀 아니겠느냐? 또 어떤 사람들은 사역이 아무리 바쁘고 급해도 자신의 옷차림과 꾸밈새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는 화장하느라 매일 몇 시간씩 소비하고, 매일 무슨 옷을 입고 어떤 신발을 매치할지, 언제 피부 관리를 받고 언제 마사지를 받을지, 이런 일들을 손금 보듯이 분명하게 기억하며 조금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자신이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는지, 어떤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아직 진입하지 못했는지, 어떤 일들을 할 때 건성으로 대충대충 하고 충성심이 없는지, 어떤 패괴 성품을 표출했는지 등 진리와 관계있는, 생명 진입과 관련된 문제들을 전혀 알지 못하고, 물어보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육적으로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그런 주제에 관해서는 말이 끊이지 않아서 중간에 끊을 수가 없다. 교회 사역이 아무리 바빠도, 본분이 아무리 바빠도 그 자신의 생활 규칙이나 평소의 생활 상태는 전혀 무너지지 않으며, 자신의 육적인 생활의 어떤 세부 사항도 그는 소홀히 하지 않는다. 다 적절하게 관리한다. 무척 엄격하고, 또 무척 진지하게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 집의 사역을 대할 때는 아무리 큰 일이라도, 설령 형제자매들의 신변 안전과 관련된 일이라 할지라도 그는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대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부탁이나 그 사람 개인이 이행해야 할 본분과 관련이 있어도 그는 전혀 마음에 담아 두지 않고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것이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것 아니겠느냐?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사람이 본분 이행에 적합하겠느냐? 본분 이행에 관한 얘기만 꺼내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일 얘기만 꺼내면 그는 한사코 고개를 젓는다. 어려움이 너무 많다며 불평을 가득 늘어놓으며 소극적으로 군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쓸모가 없다. 그는 본분을 이행할 자격이 없으니 도태돼야 마땅하다.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측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치겠다.

6. 자신을 인식하는 측면의 고충

생명 진입 측면에서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 되었다. 그래서 무릇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진정으로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고 확정할 수 있다. 자신을 인식하는 것에는 어떤 측면들이 포함되겠느냐? 먼저, 자신이 말하고 행동할 때 어떤 패괴 성품이 표출되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때로는 교만함이, 때로는 간사함이, 때로는 사악함이, 때로는 강퍅함과 배반 등이 표출된다. 또한, 일이 닥쳤을 때 자신에게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속셈과 동기가 있는지 성찰해야 하며, 자신의 말과 행동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부분이 있는지, 특히 본분에 대한 부담과 충성심이 있는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지, 거래를 하거나 무성의하게 대하지는 않는지 성찰해야 한다. 자신을 인식하는 것에는 또 다음의 내용이 포함된다.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 사치스러운 요구, 오해와 원망이 있는지,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종할 수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 사람, 일, 사물을 대할 때 진리를 구할 수 있는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는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는지, 자신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일이 닥쳤을 때 순종하는지 아니면 이치를 따지는지, 관념과 상상에 따라 대하는지 아니면 진리를 구할 수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자기 인식의 범주에 속한다. 다양한 환경, 사람,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자신이 진리를 사랑하는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있는지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만약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할 수 있고, 자신이 하나님을 너무 많이 거역했음을 알 수 있다면 성장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대하는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이름과 성육신에 대한 관념이 있는지, 경외심을 지니고 있는지, 순종이 있는지, 특히 진리를 대할 때 어떤 태도인지를 알아야 한다. 아울러 자신의 부족함과 분량을 알아야 하고, 자신에게 진리 실제가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추구와 걸어가는 길이 옳은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인식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여러 측면을 인식한다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자질과 인품, 일 처리할 때의 속셈과 동기, 자신이 표출하는 패괴 성품과 본성 본질, 자신의 취향과 추구, 자신이 걷는 길, 자신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인식하는 것이 포함된다. 자신을 인식하는 것에는 주로 이런 측면들이 포함된다.

7.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다양한 모습

생명 진입 측면에 관한 다음 내용은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다양한 모습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생기고, 하나님을 오해하고 경계하며, 하나님께 무리한 요구를 하고, 마음속으로 늘 하나님을 피하려고 하며,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지 않고, 늘 하나님을 연구하려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전능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밝히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및 하나님의 권병에 대해 늘 의심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고,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방인이나 세상의 비방과 모독을 회피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실인지 진짜인지를 알아보고 싶어 한다. 이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 아니겠느냐? 이 외에 또 무엇이 있느냐? (하나님을 추측하고 시험합니다.) (하나님의 환심을 사고 아첨합니다.) (하나님의 감찰을 받기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감찰을 받기 싫어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하는 것을 의심한다. (하나님께 대항하기도 합니다.) 이 또한 하나의 모습으로, 하나님에게 대항하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다. 거만하고 멸시하는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며, 하나님과 대화하고 일 처리를 한다. 더 있느냐? (하나님을 무성의하게 대하고 기만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일이 닥치면 늘 순종하지 않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으며, 늘 자신의 이치를 따지고 늘 원망한다. (또한 하나님을 판단하고 모독합니다.) (지위를 두고 하나님과 다툽니다.)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버리고, 배반합니다.) 이는 모두 본질적인 문제이며, 사람이 하나님을 대할 때 생기는 다양한 내적 상태와 패괴 성품이다.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다양한 모습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8. 진리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와 다양한 모습

생명 진입에 관한 또 다른 항목의 내용은 진리를 대하는 측면이다. 이 측면에는 어떤 모습들이 있느냐? 진리를 이론적 구호나 규례로 삼고, 자신이 교회에 얹혀살거나 지위의 복을 누리기 위한 밑천으로 삼는다. 너희가 더 보충해 보아라. (진리를 정신적인 의지처로 삼습니다.) 진리를 자신의 정신적인 의지처로 삼아 자신의 정신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싫어합니다.) 이것은 진리를 대하는 태도이다. (하나님 말씀은 다른 사람을 폭로하는 것이지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진리의 주인으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한 이런 진리를 자신이 다 이해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폭로한 사람의 패괴 성품과 패괴된 본질은 모두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진리의 주인으로 간주하여 항상 하나님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꾸짖는다. 마치 자신에게는 패괴 성품이 없으며, 자신이 이미 진리의 화신이자 진리의 대변인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이는 어떤 작자이겠느냐? 진리의 화신이 되고 싶어 하다니, 바울 아니겠느냐? 바울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임을 부정하였고,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려 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자 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바울이나 마찬가지이다. 바로 바울 부류의 사람이며, 적그리스도이다. 또 있느냐? (하나님 말씀을 평범한 사람의 말로 여깁니다. 진리로 삼아 실행하지 않으며, 경시하고 얼버무리는 태도로 하나님 말씀을 대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거나 실행하지 않고 사람의 말로 대하는 것, 이것이 그중 하나다. (하나님 말씀을 이방의 철학 이론과 연계시킵니다.) 하나님 말씀과 철학을 연계시키고, 하나님 말씀을 장식품이나 빈말로 여긴다. 하지만 명사와 위인의 명언을 진리로 삼고, 지식과 전통문화, 풍습을 진리로 여겨 하나님 말씀을 대신한다. 일이 닥치면 입으로는 말끝마다 진리를 실행해야 한다고,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전파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세상의 명사와 위인을 숭배한다. 심지어 고대 송나라의 포공(包公)을 치켜세우기까지 한다. “그는 공정하고 엄격하며 청렴한 판관입니다. 단 한 번도 공정하지 않은 판결이 없었어요. 그의 손을 거쳐 간 사건 중에는 억울한 사건이 하나도 없었고, 그의 작두 아래에서 억울하게 죽은 목숨도 없었어요!” 이는 명사와 성현을 치켜세우고 숭배하는 것 아니겠느냐? 명사가 한 말과 일을 진리로 사칭하려 하다니, 이는 진리에 대한 중상이자 모독이다! 교회에서 입으로는 말끝마다 진리를 실행해야 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가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것과 평소 하는 말은 민간의 속담이다. 조리 있고 유창하게 말하지만, 그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험적 인식을 말하는 것은 전혀 들을 수 없으며, 어떤 하나님 말씀들이 그의 일 처리와 사람됨의 준칙이자 근거인지는 더더욱 들을 수가 없다. 그는 입을 열 때마다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다.”, “불쌍한 사람은 미운 데가 있는 법이다.”, “사람이 너무 매몰차게 굴면 안 된다.”, “공로는 없어도 노고는 있고, 노고는 없어도 피로는 있다.”, “배은망덕하거나 토사구팽 해서는 안 된다.”, “일벌백계,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보여 주다.”, “신임 관리가 의욕이 대단하다.” 등과 같은 말을 하는데, 이는 모두 궤변이며 한 마디도 진리인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은 현대 시인의 말을 외울 수 있고, 또 그것을 하나님 집 영상에 댓글로 달기도 하는데,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모습 아니겠느냐? 그 말들이 진리이겠느냐? 진리와 관련이 있겠느냐? 어떤 사람은 걸핏하면 “머리 위 삼척에 신이 지켜보고 있다.”, “선과 악 모두 응보가 있다. 응보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 말이 진리이겠느냐? (아닙니다.) 이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이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있느냐? 이는 불교문화이지 하나님을 믿는 일과는 관계가 없다. 관계가 없는데도 사람들이 늘 이런 말을 진리와 연관시킨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모습이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의지를 좀 갖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 집에서 저를 발탁하였고 하나님께서 저를 높여 주셨습니다. 그러니 저는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라는 말을 실천해야 해요.” 네가 ‘선비’도 아닐뿐더러 하나님도 너에게 죽으라고 하지 않았다. 본분 이행에 그렇게 엄청난 사기(士氣)가 필요하겠느냐? 네가 살아서도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데, 죽는다 한들 그렇게 할 희망이 있겠느냐? 어떻게 본분을 이행하겠느냐?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라는 사람은 천성적으로 의리를 중시하는 기분파라서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걸 좋아해요.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택하시고 발탁하시고 높여 주셨으니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합니다. 저는 반드시 하나님을 위해 죽을 때까지 온갖 희생을 감수하겠습니다!” 이것이 진리이겠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말씀을 했는데 어째서 그는 한 마디도 기억하지 못하느냐? 그는 교제를 할 때마다 늘 “다른 말 할 필요 없어요.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습니다.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하고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한다.”라는 말조차 할 줄 모른다. 이렇게 수년간 설교를 듣고 수년간 하나님 말씀을 읽었는데도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영적 용어조차 말할 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진리에 대한 그의 마음속 인지와 정의이다. 말해 보아라, 불쌍하지 않으냐? 우습지 않으냐? 이것이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모습 아니겠느냐?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듣고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당당하게 그런 마귀적인 말,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말, 우습기 짝이 없는 말로 진리를 대체한다. 자신이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전수하여 그들도 자신처럼 이해하게 한다. 이는 방해와 교란의 성질을 지닌 것 아니겠느냐? 보아하니,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이 사람들은 매우 위험하다. 언제 어디서나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진리를 대하는 측면에 또 어떤 모습들이 있겠느냐? (진리를 멸시합니다. 자신의 관념과 부합하면 받아들이지만, 자신의 관념과 부합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고 실행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면 받아들이고 실행하지만,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으면 일률적으로 반발하고 정죄한다. 이는 일종의 태도이다. (진리가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고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 것, 이 또한 일종의 태도이다. 또 다른 모습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진리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 기분, 환경, 정서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오늘 기분이 좋고 정서가 매우 고조되면 ‘진리는 정말 좋아! 진리는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고, 인류가 실행하고 전파할 가장 가치 있는 것이야.’라고 생각하지만, 기분이 나쁘면 또 ‘진리가 뭔데? 진리를 실행하면 무슨 이익이 있는데? 돈이라도 벌 수 있어? 진리가 뭘 바꿀 수 있는데? 진리를 실행한다고 해서 뭘 어떻게 될 수 있는데? 내가 실행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라고 생각한다. 마귀의 성품이 튀어나온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들이 전부 사람이 진리를 대할 때 표출하는 성품과 다양한 내적 상태이다. 또 어떤 구체적인 모습들이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진리와 생명으로 여기지 않고, 연구하고 분석합니다.) 학자의 마음가짐으로 하나님 말씀을 대하고, 늘 지식에 근거하여 진리를 분석하고 연구하며, 조금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태도가 없다. 진리를 대하는 측면의 고충 중 정의할 만하고, 개괄적인 제목으로 삼을 만한 것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생명 진입 측면에 관한 고충과 관련된 내용은 총 여덟 개 측면이 있으며, 이 여덟 개 측면은 모두 생명 진입을 통해 구원받는 것과 관련된 주요 고충이다. 이 여덟 개 측면에서 사람이 표출하는 내적 상태와 성품은 하나님 말씀에 다 폭로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이미 사람들에게 요구를 제시하고 실행의 길을 가리켜 주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일 수 있고, 진지하고 갈망하는 태도를 지닐 수 있으며, 자신의 생명 진입에 부담을 가질 수 있다면, 이 여덟 개 측면의 문제는 하나님 말씀에서 전부 관련된 진리를 찾아 해결할 수 있다. 실행의 길도 다 있으니, 이는 해결하지 못할 어려운 문제가 아니며, 비밀도 아니다. 만약 사람이 자신의 생명 진입에 대해 아무런 부담이 없고, 진리와 성품 변화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면, 하나님 말씀이 아무리 분명하고 정확해도 너에게는 그저 문자와 도리일 뿐이다. 네가 추구하지 않고 실행하지도 않는다면, 너에게 어떤 측면의 문제가 있든 모두 해결할 수 없다. 그러면 너는 구원받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네가 영원히 봉사자의 단계에 머물러 있게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거나 하나님께 버림받아 도태되는 단계에 머물게 될지도 모른다.

거짓 리더의 사역으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과 결과

사람이 생명 진입에서 직면하는 이러한 어려움에 대해 거짓 리더는 어떻게 하였느냐? 사람들이 이 여덟 개 측면의 어려움 중 어느 한 내적 상태에 직면했을 때 거짓 리더가 대조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과 자신의 체험적 인식으로 사람들의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불행히도 거짓 리더들은 사람들이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저 겉으로 보기에 번듯한 일만 한다. 얕고 피상적이며, 중요하지 않고, 사람의 성품 및 실제 어려움과 전혀 상관없는 말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예를 들어, 거짓 리더는 늘 “당신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라며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의 실제 어려움을 해결하고 그 사람의 본질을 규정한다. 아주 작은 문제나 내적 상태라도 그는 네가 하나님 말씀에서 답을 찾도록 도와줄 수 없으며, 진리 교제를 통해 해결하지도 못한다. 그저 도리의 성격을 띤 말이나 중요하지 않은 말을 하고 또는 문제를 확대 해석해 사람을 전면 부정하고 회개의 기회도 주지 않는다. 사실,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고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말씀에서 이 여덟 개 측면의 내적 상태에 대해 하나님이 폭로한 것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거짓 리더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자질도 부족하고 이해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게다가 일부 거짓 리더는 그저 열정적이고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며, 외식하고, 영적인 사람인 척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다. 사람들이 직면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거짓 리더는 이렇게 권한다. “하나님의 사역이 이 정도까지 진행되었는데 당신은 아직도 질투하고 분쟁을 일으키고 있나요? 그럴 시간이 있어요? 그걸 다퉈 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요? 안 다투면 뭐가 어떻게 되기라도 하나요?”, “하나님의 사역이 이 정도까지 진행되었는데 당신은 아직도 이렇게 감정에 연연하고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있네요. 언젠가는 감정 때문에 죽게 될 겁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이 정도까지 진행되었는데 당신은 어째서 아직도 먹고 입는 그런 일들에 그렇게 신경을 쓰나요? 치마 한 벌 안 입으면 뭐가 어떻게 되기라도 하나요? 구두 한 켤레 안 사면 뭐 어떻게 되기라도 합니까? 당신은 하나님 말씀과 본분에 공을 들여야 해요!”,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 많이 기도하세요. 무슨 일이 닥치든 그것은 하나의 공과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인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죠.” 이렇게 권하면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절대 해결할 수 없다. 그것도 아니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사탄에 의해 깊이 패괴되었습니다. 당신이 감정에 연연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문제에 직면하든 거짓 리더는 진리를 교제해 사람의 본질과 내적 상태를 해부할 줄 모른다. 사람의 내적 상태가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를 꿰뚫어 보지 못하며, 또 사람의 내적 상태에 맞춰 진리를 교제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적절한 도움과 공급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천편일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해야죠! 본분을 열심히 이행하고,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있어야 합니다. 일에 직면하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든 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이며,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진리를 구하지 않으면 안 돼요.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모든 일을 다 분명하게 이야기했는데,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을 뿐이죠!”, “재난이 눈앞에 다가왔고 만물의 결말이 가까워졌으며 하나님의 사역도 끝나가고 있는데 당신은 아직도 급할 게 하나도 없네요. 사람들의 나날이 이제 며칠이나 남았겠어요? 하나님나라가 이미 강림하였습니다!” 거짓 리더는 이처럼 핵심에서 벗어난 말들만 한다. 다양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해부하여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공급과 도움을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나님 말씀을 몇 구절 찾아 사람들에게 읽어 주거나 중요하지 않은 권고하는 말만 좀 하며 대충 넘어간다. 결국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거짓 리더의 해악 아래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품이 어떤지, 자신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어떤 본성 본질을 지니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자질이 어떤지, 자신에게 이해 능력이 있는지, 자신이 걷는 길이 어떤 길인지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 자기 마음속에서 중시하고 사랑하는 세속과 유행하는 것들도 내려놓지 못하며, 아무도 이런 것들을 인식하고 해부하고 분석하도록 도와주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거짓 리더가 사역한 결과이다. 일이 닥쳤을 때 무작정 사람들을 꾸짖고 함부로 죄를 덮어씌우고 함부로 정죄하거나 뜨뜻미지근하게 권고하고 교육한다. 이도 저도 아니면, 아무 상관도 없는 하나님 말씀을 억지로 끌어다가 사람에게 대조한다. 그러면 듣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알아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이해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어찌 된 일이지? 리더가 한 말은 다 옳은데 왜 내 마음속에서 이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걸까? 왜 내 고충은 해결되지 않는 걸까? 어째서 난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여전히 그렇게 하고 싶은 거지? 어째서 난 문제의 본질과 근원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리더는 내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도 내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 그런데 어째서 나는 빠져나오지 못하는 걸까?’ 리더가 역할을 했느냐? 그가 이야기도 했고 사역도 했지만, 전부 뒤범벅이 되어 명확하지가 않아서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지도 못했으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대조하여 자신의 내적 상태를 정확히 알아보고 자신의 고충을 해결하도록 하지도 못했다.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능구렁이’ 같은 사람들의 경우, 리더가 그들에게 입이 닳도록 거듭 말하면 극도로 반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마음속으로 리더가 하는 말을 따라 한다. 리더가 앞 구절을 말하면 그들이 다음 구절을 이어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인내심이 일찌감치 바닥이 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만 하세요. 당신이 말하는 그런 것들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더 이야기하면 구역질이 나서 토할 것 같아요!” 리더가 또 “당신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러는 겁니다. 만약 당신이 진리를 사랑한다면, 제가 하는 이런 말들을 다 알아들을 수 있어요.”라고 하면, 그들은 “제가 진리를 사랑하든 아니든, 당신은 이런 말들을 몇 번이나 반복했고, 새로운 게 하나도 없어요. 저는 이미 지겹도록 들었다고요!”라고 한다. 거짓 리더는 이런 식으로 사역한다. 죽어라 규례에 끼워 맞추고, 죽어라 글귀에만 매달려 사람의 실제 어려움을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 만약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갖게 되면,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성이 나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고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없으면, 그는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라며 두 사람을 모두 꾸짖고 무조건 양쪽을 똑같이 처벌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됐습니다. 공평해졌어요. 우리는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합니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요. 이치에 맞는 말을 한 사람이 바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한 사람은 앞으로는 입 다무세요. 말을 줄이고 일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을 더 많이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겠느냐? 이게 사역하는 것이겠느냐? 이는 어린아이를 달래고 사람을 속이는 것 아니겠느냐? 거짓 리더는 신나게 일하는 것 같지만, 어느 누구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 사역을 한 것이 어떠하냐? 아무런 가치도 없고 황당하다! 이는 이방인의 행동 방식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체험 속에서 자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데, 거짓 리더는 이를 해결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명백히 알 수 있고 몇 마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어려움도 해결하지 못하며, 또한 일을 크게 벌이고 작은 일도 크게 만든다. 어떤 사람은 악인도 아니고, 그저 인성 측면에서 교양이 좀 없고 예의범절을 모르며 약간 불량 습성이 있을 뿐인데, 거짓 리더는 이런 소소한 일로 문제를 만들어 형제자매들이 이를 토론하고 비판하고 정죄하게 한다. 거짓 리더가 이렇게 하는 목적은 바로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럴 필요가 있겠느냐? 이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겠느냐?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인성 측면에 큰 문제만 없다면, 그 사람이 악인이 아니고 진심으로 헌신할 수만 있다면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에서 조금 더 설득해서 일깨워 주고 도와주고 교제해 주고 불들어 주면 된다. 만약 계속해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이는 바로 인품의 문제이자 성품이 흉악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엄하게 책망하고 훈계하고 징계해야 한다. 만약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의 본분을 정지하거나 그를 제명해야 한다. 거짓 리더는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며, 이렇게 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런 악인을 만나면 오히려 형제자매로 여겨 붙들어 주고 도와준다. 이것이 사역을 하는 것이겠느냐?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거짓 리더가 하는 사역은 황당하고 유치하고 우습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은 하나도 없고, 무슨 일을 하든 딱 봐도 문외한이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으며, 제멋대로 못된 짓을 하고 원칙이 없다. 마찬가지로, 그는 사람들이 생명 진입에서 직면하는 다양한 어려움도 꿰뚫어 보지 못하고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해결할 때 무척이나 서툴고 어리석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 또한 불편함과 억압감을 느끼며, 시간이 지나면 심지어 어떤 사람은 믿음을 잃고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리더가 저에게 그렇게 여러 번 교제해 주었는데 어째서 저는 변하지 않는 걸까요? 어째서 여전히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걸까요? 제가 인성이 특히 나빠서 구원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더 심할 경우에는 ‘나라는 사람은 영이 잘못된 게 아닐까? 악령 역사가 있는 건 아닐까?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으시는 건 아닐까? 그럼 나는 희망이 없는 거 아닌가?’라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바로 거짓 리더의 사역으로 초래된 결과이다. 거짓 리더는 사역할 때 사실을 잘못 알고, 황당하고 터무니없으며, 어리석고 서툴다. 그래서 결국은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어려움이 제때 해결되지 못해 사람들이 소극적이고 나약하게 되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관념과 오해를 갖게 된다. 마음속에 ‘내가 그렇게 많은 하나님 말씀을 읽었는데 어째서 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걸까? 하나님 말씀이 과연 사람을 구원할 수 있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생기고, 미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 리더가 사역하면 긍정적인 측면의 성과는 많지 않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은 무척이나 많다. 그가 사역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과 의심, 판단을 해소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경계심을 더 크게 만들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오래 믿어도 이런 문제들은 해결되지 못한다. 거짓 리더의 미혹과 오도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와 경계심이 한층 더 깊어지는데, 이러고도 생명 진입이 있을 수 있겠느냐?

진리에 대한, 그리고 사람의 성품 변화 등 긍정적인 사물에 대한 거짓 리더의 이해는 긍정적인 사물에 대한 많은 사람의 관점과 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가 사역하지 않으면 몰라도, 사역하기만 하면 편차가 생기고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기며 교회 내에 그릇된 풍조가 생기게 된다. 즉, 잘못된 주장과 터무니없는 주장이 자주 생겨나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서 늘 언급하는 영적 용어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사용할 줄도 모르게 되고, 거짓 리더가 자주 말하는 이른바 영적 용어와 주장이 오히려 교회 안에 널리 퍼지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에게 적잖이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를 더 실제적이고 더 정확히 인식하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에서 정확한 실행의 길을 찾게 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 대한 사람의 인식이 더 치우치고, 이론화되고, 도리화되게 하며, 동시에 실행의 길도 더 모호하게 한다. 거짓 리더는 이런 식으로 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이 진리를 순수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지장을 준다. 거짓 리더가 이런 일들을 해서 어떤 작용을 일으켰느냐? 그는 어떤 역할을 맡았느냐? 방해와 교란이라고 규정한다면 조금 과할 수 있지만, 이런 사람들을 설쳐 대는 광대라고 한다면 전혀 과하지 않다. 이 단계 사역을 막 시작했을 때, 나는 어떤 사람들과 접촉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대화 중에 누군가가 어떤 사람의 상황을 물으니, 다른 사람이 갑자기 “완전히 불타서 재가 되어 버렸습니다.”라고 툭 던지는 말을 들었다. 내가 “완전히 불타서 재가 되어 버리다니? 무슨 뜻이냐?”라고 하자 그는 “완전히 불타서 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은 교체되었고, 아마 더 이상 믿지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의 이 말은 너무 독하고 여지를 남기지 않는구나.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더냐? 어째서 이런 말이 있다는 걸 내가 모를까? 나는 어떤 사람도 이렇게 규정한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떠났다고 해서 완전히 불타서 재가 되어 버렸다고 말한 적이 없다. 너희가 한 이 말은 어디에서 나온 거냐?” 나중에 알아보니, 이 말은 오랜 신자이자 고루한 학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학문이 높고,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어 왔으며, 자격도 오래된 사람이라 그가 이렇게 한마디 하니 어리석은 무리가 분별도 하지 않고 따라 해서 유행어가 된 것이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말이 옳겠느냐? 근거가 있겠느냐? 정확하겠느냐?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이 말이 교회에 남아 있게 해야 하겠느냐? (그러면 안 됩니다.) 이 말을 폭로하고 비판하여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나중에 비판과 해부를 통해 그 어리석은 자들은 감히 말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어쩌면 사정을 모르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뒤에서 몰래 말할지도 모른다. 그는 이 말이 매우 영적이라고, ‘명사’의 입에서 나왔으니 반드시 계속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희의 리더가 이와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없었느냐? 너희의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 그리고 너희가 걷는 길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준 적이 없었느냐? (예전에 복음을 전할 때 어떤 거짓 리더가 “하나님께서 형벌과 심판으로 우리를 정복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종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말을 좀 세게 해서 그들을 꾸짖어야 해요. 그래야만 그들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었습니다.) 이 말은 꽤 합리적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진리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였느냐? 하나님 말씀에 “널리 복음을 전파할 때, 너는 일어나 철장으로 그들을 다스리고, 심판과 형벌로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라는 말씀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겠느냐? 분명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거짓 리더가 머리로 상상해 낸 이론이다. 이 말은 겉으로는 문제없어 보인다. “온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통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을 수 없다면, 간접적으로 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모두 하나님 말씀이 이루려는 성과인, 전 인류를 정복하는 것이니까요. 그들이 일찍 받아들이는 게 늦게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성과가 좋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기 전에 우리가 먼저 예방 주사를 놔 주면, 사람들이 면역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말로 형벌하고 심판하실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항하고 배반하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상심하시지 않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이는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겉으로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옳고, 도리상으로도 논리에 부합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진리 원칙이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어떻게 규정하였느냐? 이렇게 하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하였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이론은 성립되지 않으며, 이 이론을 내놓은 사람은 바로 거짓 리더이다.

거짓 리더는 항상 영적인 척하며, 그럴듯하지만 황당한 이론으로 사람을 미혹하고 잘못된 길로 이끈다. 이러한 황당한 이론들은 얼핏 듣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사람의 생명 진입에 악영향을 미치며, 사람이 진리 추구의 길을 걸을 때 교란하고 미혹하고 방해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말로 인해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고 거부하게 되며,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갖게 되고, 심지어는 오해하고 경계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거짓 리더의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말들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이런 거짓 리더의 미혹과 영향으로 인해 그 교회는 종교로 변해 버린다. 마치 기독교나 천주교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사람의 말과 가르침만을 지키고, 모두 바울의 가르침을 숭배하며, 심지어 바울의 말로 예수의 말씀을 대신하지만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모두 외식하는 바리새인, 적그리스도가 되어 버려 하나님의 저주와 정죄를 받게 된다. 거짓 리더는 바울처럼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며, 사람들을 미혹하고 교란하여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종교의식에 끌어들인다. 이는 종교인이 하나님을 믿는 방식과 다를 바가 없으며,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오랫동안 진입하지 못하게 한다. 사람들이 거짓 리더에게 끊임없이 미혹되고 교란당하면서 일련의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론과 주장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이론, 주장, 행동은 진리와 완전히 상반되며 진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거짓 리더의 미혹과 오도로 인해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라고 여기게 된다. 사람들은 모두 이런 것들이 바로 진리이니, 마음속으로 믿고 잘 말하며, 다들 동조하기만 하면, 사람이 진리를 얻은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이런 사상 관점의 오도로 인해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도 실행하고 체험할 줄 모르게 된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과는 더 멀어지게 된다. 거짓 리더가 하는 말이나 그가 외치는 구호는 문자만 보면 틀린 것이 없으며 모두 옳은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전혀 성과가 없는 것이겠느냐? 바로 거짓 리더가 깨닫고 이해한 것이 너무 얕기 때문이다. 전부 도리적인 것으로, 하나님 말씀 속의 진리 실제와 전혀 관련이 없으며, 하나님의 뜻과 요구와도 전혀 관련이 없다. 실제로 거짓 리더가 이야기하는 모든 도리는 진리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정확히 말하면, 모두 진리와 무관한 말들이며, 하나님 말씀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거짓 리더가 항상 이런 글귀와 도리를 말할 수 있는 것, 이는 무엇과 관련이 있겠느냐? 왜 그들은 줄곧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없겠느냐? 이는 바로 거짓 리더의 자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거짓 리더가 자질이 부족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없어서, 아무리 하나님을 오래 믿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생명 진입이 있을 수 없다고 확정할 수 있다. 그가 아무리 오래 믿어도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어렵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만약 거짓 리더를 교체하지 않고, 여전히 그가 리더를 계속하게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겠느냐? 거짓 리더의 이러한 인도 방식은 더 많은 사람들을 종교의식과 규례 속으로, 글귀와 도리 속으로, 막연한 관념과 상상 속으로 이끌 것이다. 적그리스도와 비교했을 때, 거짓 리더는 비록 사람들을 자신의 앞이나 사탄의 앞으로 데려가지는 않지만, 만약 그가 하나님 선민을 하나님 말씀의 진리 실제 속으로 이끌지 못한다면, 하나님 선민이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겠느냐? 분명 그럴 수 없다. 하나님 선민이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다면, 이는 여전히 사탄의 권력 아래에 사는 것 아니겠느냐? 여전히 과거와 마찬가지로 사탄의 권력 아래에 있는 인간쓰레기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하나님 선민이 여전히 거짓 리더의 손에 망쳐지지 않겠느냐? 그러니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의 사역 결과가 기본적으로 별로 다를 게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 둘 다 하나님 선민이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해 구원을 얻게 할 수 없으며, 하나님 선민을 곤경에 빠뜨리고 망치니, 그 결과는 완전히 똑같다.

거짓 리더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나중에 너희가 스스로 정리해 보아라. 이 과제를 너희에게 주고 너희가 분별할 수 있는지 보겠다. 너희 주변의 리더가 과거에 영적인 말과 인정미가 있는 말, 겉보기에는 매우 정확하고 진리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을 하면서도 너의 생명 진입에 공급을 주지 못하고 너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적이 있지 않더냐? 만약 네가 그런 말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말을 보물로 여겨 마음속에 담아 둔다면, 수시로 그 말이 너를 점유하고 주도하게 한다면, 수시로 너의 생각과 행위를 좌우하게 한다면 그 결과가 매우 심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그런 문제의 근원을 파헤칠 필요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신앙으로 바뀔 정도로 사람을 타락시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버림받게 하는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찾아봐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리더가 되려고 추구하지 마세요. 리더가 된 후에 교체되거나 도태되면 평범한 신자가 될 기회조차 사라집니다.” 이런 말은 거짓 리더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하냐? 거짓 리더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적그리스도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과 구분해야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느냐? 말 속에 어떤 속셈이 있겠느냐? 떳떳하지 못한 것들이 있지 않겠느냐? 분명 그 안에는 사람을 미혹하는 계략이 있으며, 그 의미는 리더를 해 봤자 끝이 좋지 않으니 리더가 되기를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목적은 바로 사람들이 모두 리더가 되려는 생각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명예와 지위를 두고 그와 다툴 사람이 없게 되고, 그가 마음 놓고 계속해서 리더를 할 수 있게 된다. 이와 동시에, 그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알려 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 집에서는 리더 일꾼을 이렇게 대합니다. 필요할 때는 발탁하지만 필요 없을 때는 발로 차 버립니다. 그러면 평범한 신자가 될 기회조차 없어지는 거예요.” 이는 어떤 성질의 말이겠느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겠느냐? (적그리스도입니다.)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어서 두 가지 결과를 이룰 수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지위를 다투지 말라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그의 지위가 굳건해진다. 다른 하나는 네가 하나님을 오해하게 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를 믿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명백한 적그리스도이다. 보아하니, 너희는 이해 능력이 없는 것 같구나. 내가 이 측면의 예를 든 적이 있는데, 너희는 기억력이 나쁠 뿐만 아니라 생각이 없고 이해 능력도 부족해서 이렇게 명백한 적그리스도조차 분별해 내지 못한다. 거짓 리더가 이런 말을 하겠느냐? 그가 공개적이고 의식적으로 사람을 미혹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겠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거짓 리더는 비록 겉으로는 말과 행동에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사역할 때 원칙이 없고 성과를 이루지 못하며,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어도 해결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하나님 믿는 정상 궤도나 하나님 앞으로 이끌지도 못한다. 그는 옳은 말만 하고, 사역도 전혀 적게 하지 않으며, 열정과 정열도 있다. 겉보기에는 믿음도 있고 의지도 있으며, 기꺼이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고, 인내심도 매우 강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자질과 이해 능력이 부족해서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 능력이 없으니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규례와 도리로 해결하고, 자신이 늘 이야기하던 영적 이론으로 해결한다. 이런 식으로 그가 몇 년 동안 리더를 하면 사람들 사이에 각종 도리, 규례, 겉면의 행동 방식이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이러한 도리, 규례, 행동 방식을 지키면서 자신들이 진리를 실행하고 있다고, 진리 실제에 진입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진리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사람의 마음이 일단 이런 것들로 가득 차고 점유되면, 이런 것들이 마음을 주도하게 되면 이를 해결하기도 매우 번거로워진다. 하나씩 해부하고 분석해 사람들이 인식하게 한 후, 진리란 무엇인지, 도리, 구호, 규례란 무엇인지, 진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란 무엇인지, 정확한 주장이란 무엇인지, 진리 원칙이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려 줘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하나씩 해결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비교적 솔직하고 착실한 사람들이 거짓 리더에게 미혹되어 망가지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경건하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를 수 있고, 일이 닥치면 기도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인처럼 하나님이 왔는데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또 새로운 사역을 하였다는 것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 반발하는 것이다. 이는 어찌 된 일이겠느냐? 바로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가 사람들을 미혹하여 그런 것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해치고 망쳤는지 모른다.

거짓 리더는 글귀와 도리만을 이야기한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모두 도리이지 결코 진리가 아니며, 그들이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 또한 영적인 척하는 것이다. 글귀와 도리를 이야기한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영적인 척하고, 깨달은 척하고, 인식한 척하고, 실행한 척하고, 준수한 척하는 것으로, 전부 거짓이다. 이 ‘거짓’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겠느냐? 바로 거짓 리더가 진리를 치우치게, 단편적으로, 얕게 이해하고, 진리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비롯된 것이다. 거짓 리더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규정, 글귀와 도리, 그리고 몇몇 구호와 이론을 많이 가져다주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된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며, 각종 복잡한 환경에 직면하면 어떻게 처리하고 대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받아들여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너희가 거짓 리더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정리해 거짓 리더를 분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또 매우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정리할 때 반드시 적그리스도가 사람들을 미혹하는 황당한 이론과는 구별해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각 부류 사람의 내적 상태를 파악하여 그들이 현실 생활에서 부딪히는 생명 진입에 관련된 여러 고충을 해결한다’는 리더 일꾼의 직책 제2조에 맞춰 거짓 리더의 여러 가지 행동 방식과 문제의 본질을 해부하였다. 이에 관한 교제는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다.

제3조 각각의 본분을 잘 이행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진리 원칙을 교제한다(1)

거짓 리더는 글귀와 도리를 이야기하고 사람을 권면할 줄만 안다

다음으로 리더 일꾼의 직책 제3조인 ‘각각의 본분을 잘 이행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진리 원칙을 교제한다’에 대해 교제하겠다. 이것은 리더 일꾼의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사역이다. 이 조항에서 언급한 리더 일꾼의 직책에 근거하여 거짓 리더의 모습을 교제하고 해부해 보자. 리더 일꾼에게 있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진리 원칙을 명확하게 교제할 수 있는지 여부는, 그가 진리 실제가 있는지를 가장 잘 드러내고, 또 리더 일꾼이 실제적인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핵심이다. 이제 거짓 리더가 이 사역을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자. 거짓 리더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진리 원칙과 관련된 문제는 하나도 명확하게 이야기하거나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가 그에게 구하면 그는 공허한 말과 도리만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면, 그는 항상 이런 말을 한다. “여러분은 모두 이 본분을 이행하는 전문가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저에게 묻지 말고 스스로 연구하세요. 저는 문외한이라 모르니 여러분 스스로 해결하세요.” 어떤 사람이 “저희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당신에게 묻는 겁니다. 저희가 해결할 수 있으면 당신에게 묻지도 않아요. 여기에 진리 원칙과 관련된 문제가 있는데, 저희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라고 하면, 거짓 리더는 “원칙을 다 알려 주지 않았나요? 각자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마세요. 뭘 또 물어봅니까? 원칙대로 처리하는 거죠! 하나님 말씀에 다 나와 있잖아요. 하나님 집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라고요.”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도 종잡을 수 없어서 마음속으로 ‘그게 문제 해결 방법은 아니잖아!’라고 생각한다. 거짓 리더는 바로 이렇게 사역을 대한다. 그는 그저 사역을 시찰하고 형식적인 과정을 거칠 뿐,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무슨 문제를 물어봐도 그들에게 스스로 진리를 구하라고 말한다. 그 자신 또한 사람들에게 자주 이렇게 묻는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생명 진입은 어떠세요? 본분을 건성으로 대충 이행하는 건 아니죠?” 누군가 “간혹 건성으로 대충 하려는 내적 상태가 있기는 하지만, 기도로 해결해 돌려세웠습니다. 다만, 본분 이행의 진리 원칙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어요.”라고 하면, 거짓 리더는 “구체적인 원칙은 지난번 예배에서 제가 교제하지 않았나요? 게다가 하나님 말씀도 여러 단락 찾아 드렸으니, 이제는 알아야 하지 않나요?”라고 한다. 사실 도리는 그도 다 알고 있지만,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짓 리더는 또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는다. “어째서 해결하지 못하는 건가요? 바로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기도를 많이 하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으면, 무슨 문제든 다 해결됩니다. 여러분은 함께 상의하고 방법을 찾을 줄 알아야 해요. 그러면 문제는 결국 해결될 겁니다. 업무적인 문제는 저에게 묻지 마세요. 제 책임은 사역을 점검하는 것이고, 저는 저의 임무를 완수했어요. 업무적인 사역만 남았는데, 그건 저도 잘 몰라요.” 거짓 리더는 항상 “저는 잘 몰라요. 저도 배운 적이 없고, 문외한이에요.”라는 이유와 핑계를 대며 대충 둘러대거나 회피한다. 마치 매우 겸손한 것 같지만, 여기에서 거짓 리더 부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심각한 문제가 드러난다. 몇몇 사역과 관련된 업무적인 지식 측면의 문제에 대해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해 무력감을 느끼며, 매우 어색하고 난감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그저 하나님 말씀을 몇 단락 더 찾아 사람들과 함께 예배 모임을 갖고 교제하며, 도리를 이야기해 사람들을 권면할 수밖에 없다. 마음씨가 좀 좋은 리더라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도 있어서, 때로는 “최근 생활에 곤란한 점이 있나요? 옷은 충분한가요? 말썽부리는 사람은 없나요?”라고 묻기도 한다. 사람들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는 “그럼, 별문제 없군요. 다들 볼일 보세요.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요.”라며 황급히 자리를 뜬다. 사람들이 또 그가 해결해 주길 바라는 문제를 제기해 난처해질까 봐 두려운 것이다. 거짓 리더는 바로 이렇게 사역한다. 아무런 실제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어찌 교회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 결국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점점 쌓여 교회 사역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거짓 리더가 사역할 때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모습이다.

거짓 리더는 사역할 때 그저 설교에만 열중하며, 글귀와 도리,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는 말을 하기를 가장 좋아한다. 또 사람들이 의욕적으로 바쁘게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만 하면 사역을 제대로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밖에도 거짓 리더는 모든 사람의 생활 상태에 관심을 두는 데 열중하며, 항상 사람들에게 생활에 어려움은 없는지 물어보고, 정말 어려움이 있다면 자신이 해결해 주려고 한다. 그는 이런 사무적인 일들로 매우 바빠 제때 밥을 못 먹을 때도 있으며, 항상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난다. 이렇게 바쁘게, 또 열심히 하는데 어째서 교회 사역에 문제가 생겨도 해결되지 않고, 하나님 선민이 본분을 이행할 때 겪는 어려움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겠느냐? 바로 거짓 리더가 본분 이행과 관련된 진리 원칙을 도무지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데다가 그가 말하는 글귀와 도리 그리고 사람을 권면하는 말들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현실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아무리 바쁘고 애를 써도 교회 사역은 시종일관 진전이 없다. 겉으로는 사람들이 다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데도 실제적인 성과가 별로 나오지 않는 이유는 바로 거짓 리더가 본분 이행과 관련된 진리 원칙을 교제할 줄 모르고 진리로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줄 몰라 본분 이행 과정에 존재하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 말씀 서적을 인쇄해야 해서 리더가 이 사역을 담당할 두 사람을 선택해야 했다.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이겠느냐? 인성이 비교적 좋아야 하고, 믿을 만해야 하며, 위험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을 선택한 후, 이 리더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두 분을 부른 것은 일을 하나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집에 인쇄할 서적이 있습니다. 두 분은 인쇄소를 찾아서 그 서적을 인쇄한 후 제때 하나님 선민에게 나눠 줘야 합니다. 하나님 선민들이 하나님 말씀을 제때 먹고 마실 수 있도록 말이죠. 결심이 서셨습니까? 이 짐을 짊어지고 이 위험을 감수하기를 원하십니까?” 두 사람은 이것이 하나님의 높여 줌이라고 생각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거짓 리더가 “그렇다면 두 분은 하나님의 이 부탁을 완수할 결심이 섰습니까? 맹세하겠습니까?”라고 하자 두 사람은 이렇게 맹세했다. “만약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지 못하고 이 사역을 망쳐 하나님 집의 사역에 손해를 입힌다면 천벌을 받겠습니다. 아멘!” 거짓 리더가 “그 밖에 우리는 진리를 교제해야 합니다. 지금 이 사역을 하는 것이 장사를 하는 것이겠습니까? 두 분에게 일하라고 하는 것이겠습니까?”라고 하자 그들은 “아닙니다. 이는 저희의 본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거짓 리더는 또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의 본분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하나님이 걱정하시게 하면 안 됩니다.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충성심도 있어야 합니다. 일이 닥치면 많이 기도하고 두 사람이 상의해야지 제멋대로 하거나 자기 생각만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왜 두 분이 협력하게 하겠습니까? 일이 생겼을 때 함께 상의하면 일 처리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상의해도 안 되면 기도하세요. 각자 자신의 의견을 내려놓았다가 마지막에 의견이 일치되면 일을 하는 겁니다. 두 분이 이 사역을 훌륭히 완수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리더가 또 어떻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지에 관한 하나님 말씀을 찾아서 셋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몇 번 읽었다. 이 일은 이로써 완전히 맡겨지고, 리더의 책임도 다한 셈이다. 이런 식으로 사역하는 것이 어떠하냐? 리더는 마음속으로 매우 만족했고, 두 사람도 매우 만족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이 리더는 정말 사역을 잘하네. 말이 논리적이고 근거가 있어. 일 처리에도 절차가 있어. 먼저 두 사람에게 사역을 분배하고 나서 두 사람의 사상 관점 문제를 해결했잖아. 그런 다음에 좀 더 강하게 이야기해서 그들이 맹세로 보증하게 했지. 정말 빈틈없이 꼼꼼하게 사역했네. 정말 리더다워. 경험도 있고 부담도 있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리더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 가지를 명심하세요. 책을 인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도 아니죠. 이 사역은 제가 두 분에게 맡긴 것도 아니고, 하나님 집에서 맡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두 분에게 맡기신 일이죠. 그러니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사역을 제대로 완수하기만 하면, 두 분은 생명이 성장하고 실제가 생길 것입니다.” 이론상, 이 말에 원칙적인 문제는 없으며, 기본적으로 옳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이 일에 관해 분석해 보자. 거짓 리더의 ‘거짓된’ 모습은 어디에서 나타나느냐? 그가 이 사역과 관련된 업무나 기술 등 각 측면의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한 바가 있느냐? 구체적인 진리 원칙과 요구 기준에 대해 조금이라도 교제한 바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는 그저 빈말, 쓸데없는 말이나 좀 했을 뿐이다. 이는 일반인이 자주 하는 그런 말로, 이렇다 할 무게감이 없다. 리더가 직접 말하고 직접 당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말의 무게감이 보통이 아니라고 느꼈다. 사실 그것들은 전부 중요하지 않은 말이며, 서적 인쇄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서적 인쇄와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우리는 이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이 리더가 한 사역들이 거짓 리더의 소행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서적을 인쇄하려면 우선 편집을 해야 하며, 그다음으로 문자를 교정하고, 목차와 본문의 형식을 정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종이의 무게, 색상, 품질을 정하고, 반양장으로 할지, 양장으로 할지 표지 재질과 표지 디자인을 정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색깔, 도안, 글씨체는 어떻게 할지 정하고, 마지막으로 무선 제본을 할지, 사철 제본을 할지 제본 방식을 정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다 서적 인쇄 범주 안에 있는 문제들이다. 그런데 이 리더가 이에 대해 말했느냐?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외에도 인쇄소를 찾는 문제가 있다. 인쇄소의 인쇄 기계와 제본 기계가 최신식인지, 인쇄와 제본의 품질은 어떤지, 가격은 어떤지, 이런 것들을 다 설명하고 원칙과 범위를 정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만약 리더가 “이런 것들은 저도 잘 모르니, 여러분이 알아서 찾아보세요.”라고 한다면, 이 리더가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그가 말한 중요하지 않은 말 몇 마디가 서적 인쇄와 관련된 각종 세부적인 문제를 대신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짓 리더는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진리를 그렇게나 많이 교제했고, 원칙도 전부 알려 줬어. 그런 일들은 그가 당연히 알아야지!’라는 것이다. 이 ‘당연히’가 바로 거짓 리더의 논리이자 거짓 리더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결국 책이 인쇄됐지만, 종이 품질이 너무 나쁘고 얇아서 앞 뒷면의 글자가 서로 비치는 바람에 나이가 많거나 눈이 나쁜 사람이 보기에는 무척 힘겹고 버거웠다. 이 외에, 마지막 공정인 제본 문제도 있었다. 제본이 제대로 되었는지는 책 전체의 품질 및 수명과 관련된다. 리더가 설명하지 않았고, 일 처리하는 사람도 원칙과 경험이 없는 데다가 무책임하게 함부로 가격을 깎아 버렸기 때문에 인쇄소에서는 원가를 맞추기 위해 날림으로 작업했다. 결국, 책이 형제자매들 손에 들어간 지 두 달도 채 안 되어 제본에 사용된 실밥이 터지고 책 표지와 책장이 다 떨어졌다. 책을 인쇄한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겠느냐? 만약 책임을 따진다면 직접적인 책임자는 책 인쇄를 맡은 그 두 사람일 것이고, 간접적인 책임자는 당연히 그 거짓 리더일 것이다. 그런데도 거짓 리더는 “이 사역이 제대로 안 되었다고 해도 저를 원망해서는 안 되죠. 저도 몰랐는걸요! 책을 인쇄해 본 적도 없고 인쇄소를 운영하는 것도 아닌데 제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습니까?”라는 이유를 댔다. 이 이유가 성립하느냐? 리더로서, 이는 너의 직책 범위 내에 있는 사역이다. 업무, 기술, 지식과 관련된 것이든, 아니면 진리와 관련된 것이든 네가 다 알 필요는 없다. 하지만 너는 모르는 일을 배우기는 하였느냐? 진지하게 책임을 지고 책임을 다하였느냐? 어떤 사람들은 “저도 책임을 다하고 싶죠. 하지만 아는 게 없는걸요. 아무리 배워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너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리더이고, 명실상부한 거짓 리더이다. 형제자매들은 책의 품질이 너무 안 좋아 속으로 약간 원망하며 말했다. “이 책은 공짜지만 품질이 너무 안 좋네요! 리더 역할을 어떻게 한 겁니까? 어떻게 사역을 이렇게 하죠?” 리더는 이 말을 듣고도 “그게 제 탓입니까? 인쇄소가 제 것도 아니고, 제 말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하나님 집을 위해 돈을 아끼느라 그런 것 아닙니까? 하나님 집을 위해 돈을 아끼는 것도 잘못인가요?”라고 말했다. 그가 한 말은 다 맞고, 틀림이 없으며, 법적인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책 인쇄 비용이 헛되이 쓰였다. 책이 형제자매들 손에 들어간 지 두 달도 안 돼서 실밥이 터지고 책장이 떨어져 나간 이 결과는 누가 책임져야겠느냐? 이는 리더의 책임 아니겠느냐? 이는 네가 리더를 할 때 너의 사역 범위 내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러니 마땅히 네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그 잘못을 회피할 수 없고,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저는 그 사역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해 본 적 없는 사역인데 실수하면 안 됩니까?”라며 억지를 부리는 사람도 있다. 이 말만 봐도 너는 리더 자격이 없으니, 교체되어야 한다. 너는 리더의 재목이 아니며, 영락없는 거짓 리더이다. 듣기 좋은 말만 잔뜩 늘어놓고 실제적인 사역은 전혀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거짓 리더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이다.

일부 거짓 리더는 각종 실제적인 사역은 어느 것 하나 착실하게 제대로, 구체적으로 하지 못하고 사무적인 사역만 할 줄 알면서 자신이 합당한 자격을 갖춘 리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해 늘 이렇게 자랑한다. “교회의 일은 전부 제가 신경 써야 합니다. 무슨 문제든 다 제가 처리해야 하죠. 제가 없으면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제가 여러분과 함께 예배 모임을 갖지 않으면, 여러분은 전부 뿔뿔이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만약 제가 영상 사역을 살펴보지 않고, 지키는 데 도움을 주지 않으면, 늘 누군가가 교란하지 않겠습니까? 영상 사역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까요? 저는 찬양 사역에 문외한이지만, 제가 자주 여러분을 찾아가 시찰하고, 자리를 지켜 주고, 함께 예배 모임을 갖지 않으면, 여러분이 그 찬양들을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오래 걸리겠습니까?” 다 맞는 말이고 일리도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자세히 살펴보아라. 거짓 리더가 담당하는 각종 업무 사역의 진전 상황이 어떠하냐? 그가 진리 원칙을 명확히 교제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한 번은 영상팀에서 의상 색상 관련 문제에 관해 의견을 구한 적이 있다. 그들이 스틸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사진 속 배경이나 인물은 달랐지만 의상 색상은 전부 암회색이나 황갈색으로 거의 같은 계열이었다. 내가 “어떻게 된 것이냐? 어째서 이런 색의 의상을 입은 거냐?”라고 하자 그들은 일부러 이런 색상의 의상을 찾은 거라고, 엄청나게 고생해서 시장에서 구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왜 이런 색상을 고른 것이냐? 상부에서 지시했느냐? 상부에서는 여러 가지 단정하고 바른 느낌의 색상을 요구하지 않았느냐?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이냐?” 나중에 알아보니,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다른 색상을 입으면 그다지 단정하고 바르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같지도, 성도 같지도 않죠. 오직 이 색 계열을 입어야 훨씬 더 하나님을 믿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 색상의 의상을 입는 게 가장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 집의 이미지를 잘 대표할 수 있다는 데 모두 동의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에게 모두 이 색상의 의상을 입으라고 한 적이 없다. 단정하고 바른 느낌의 색상은 많다. 하나님이 사람들과 언약을 할 때 만든 무지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아라. 빨주노초파남보가 다 있다. 유독 너희가 몸에 걸친 그 색이 없는데 어째서 그 색을 고른 것이냐?” 이런 일에 대해, 리더가 구체적으로 점검 사역을 했겠느냐? 절대 안 했을 거라고 장담한다. 만약 리더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이해했고, 정말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요구를 이해했다면, 영상팀 사람들이 그런 의상을 골라 상부에 자문을 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래 하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이런 의상 문제조차 거짓 리더는 해결하지 못하고 뻔뻔하게 상부에 가져와 물어보았다. 이런 사람은 책망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가장 간단한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거짓 리더가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너는 정말이지 폐물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증거하라고 했더니, 하나님을 욕되게만 하는구나. 너는 아는 게 무척 많은 것 아니었느냐? 숱한 지식과 도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니었느냐? 그런데 네가 말한 그런 지식과 도리가 왜 여기에서는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냐? 왜 의상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점검하지 못한 것이냐? 너는 리더가 해야 할 역할을 하였느냐? 리더가 다해야 할 책임을 다하였느냐? 이것이 바로 거짓 리더의 모습이다. 거짓 리더는 어떤 구체적인 사역의 원칙도 알지 못하고, 진리를 치우치게 이해하는 어떤 문제도 제때 바로잡거나 해결하지 못하며, 사람들이 그 속에서 방향과 길을 찾도록 해 주지도 못한다. 그는 글귀와 도리를 말하고 구호를 외치는 것 외에는 어떤 구체적인 사역도 할 수 없다.

거짓 리더는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고 본분에 집중하지 않는다

어떤 거짓 리더는 구체적인 사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무적인 일을 하고는 그것이 바로 구체적인 사역을 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자기 직책 범위 내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매우 진지하게 공을 들여서 그럴듯하게 한다. 예를 들어 보자. 교회에 제과사였던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서 기어코 나에게 과자를 구워 주겠다며 나에게 알리지도 않고 바로 만들 준비를 했다. 그가 리더에게 만들어도 되냐고 물어보자 리더는 “만드세요. 맛있게 만들어지면 하나님께 드리고, 맛없으면 우리가 먹죠.”라고 했다. 리더의 위임을 받아 사역에 명분이 생기자 그는 재빨리 모든 재료를 구입해서 구워 내고는 이렇게 말했다. “맛이 있을지, 하나님께서 만족하실지, 하나님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그러자 리더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해결하기 쉽습니다. 저희가 시간과 자신의 몸을 좀 희생해서 하나님을 위해 위험을 좀 감수하면 됩니다. 저희가 먼저 맛을 보고 하나님 대신 점검하는 거죠. 만약 정말 맛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드시고 얼마나 기분이 안 좋으시겠어요. 저희에게 얼마나 실망하시겠어요. 그러니 리더인 우리가 이걸 점검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체적인 사역을 하는 거죠.” 그러고 나서 ‘책임감’ 있는 리더급인 사람들이 모두 맛을 봤다. 맛을 본 후에 다들 평가를 했다. “이번 거는 오븐의 불이 너무 세서 온도가 너무 높았습니다. 먹으니 상초열이 나는 데다가 약간 쓴맛이 납니다. 이건 안 되겠어요! 다시 한번 책임지는 태도로 구워서 맛을 봐야 합니다!” 한 번 더 만들어 맛을 본 후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 거는 그래도 좀 괜찮습니다. 크림 맛과 계란 향이 느껴지고, 참깨도 있어요. 역시 제과사답네요! 이렇게나 많이 구워서 하나님 혼자 다 못 드시니까 작은 통에 10개나 20개쯤 담아서 상징적으로 하나님께 드려 맛보시게 하죠. 만약 하나님께서 맛있다 하신다면, 다음에 더 많이 구웁시다.” 그들은 나에게 한 통을 가져다주었고, 나는 두 개를 먹어 봤다. 그러고는 이런 과자는 맛이나 좀 보면 되고, 밥 대신 먹을 수는 없겠다고 생각해 더 이상 먹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또 이것은 자기네 사람들이 직접 만든 거라 사랑하는 마음, 충성심, 경외심이 가득 담겼기에 비록 맛은 그저 그럴 수 있지만 의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나는 그 통을 그들에게 돌려줬다. 나는 그런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그런 걸 먹고 싶지도 않다. 게다가 만약 내가 과자가 먹고 싶다면, 시장에서 각국의 다양한 맛의 과자를 살 수 있고, 돈도 얼마 안 든다. 나중에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의 마음은 잘 받았지만, 다음에는 하지 마라. 난 안 먹는다. 먹고 싶으면 내가 직접 사겠다. 만약 필요하면 만들라고 할 테니 그때 만들어라. 너에게 알리지 않으면 더 이상 만들 필요 없다.” 매우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느냐? 만약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기억하고는 더 이상 만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한 것은 그렇다면 그런 거고 아니라면 아닌 것이니, 만들지 말라면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그들은 또 과자를 두 통 보내왔다. 내가 “만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하자 그들은 “이번 것은 지난번 것과 다릅니다.”라고 했다. 내가 “달라도 과자인 건 마찬가지지. 과자라면 만들 필요 없다. 말로만 사양하는 게 아니다. 먹고 싶었으면 너희에게 말했겠지. 너는 어째서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냐? 다시는 만들지 마라.”라고 했는데,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만드는 사람은 도무지 이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냐? 만약 리더가 이 일을 제대로 점검했다면, 그렇게 적극적으로 그가 이 일을 하도록 협조하거나 격려하지 않았다면, 제때 그를 제한할 수 있었다면 과자를 만드는 사람이 또 섣불리 만들 수 있었겠느냐? 최소한 이렇게 대놓고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리더들은 중간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느냐?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든 일에 다 참견하고 나 대신 책임지고 점검하려 했다. ‘사랑하는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 일이 그가 마땅히 해야 하는 사역이겠느냐? 하나님 집의 사역 원칙에는 이런 것들에 대한 지시가 없으며, 나도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지 않았다. 이 일은 사람에 의해 시작된 것이지 내가 요구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이 리더들이 어째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느냐? 이것이 바로 거짓 리더의 모습인 본분에 집중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에 그들이 점검, 검사, 독촉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고, 그들이 진리를 교제해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가 얼마나 많은데, 그들은 그런 것은 하나도 하지 않고 한가하게 주방에서 나 대신 과자나 맛보았다. 게다가 이 일에 꽤나 진지하고 공을 들였다. 이는 거짓 리더가 하는 짓 아니겠느냐? 이 자체로 이미 매우 역겹지 않으냐? 뜻밖에도 얼마 후 이 일이 또다시 반복됐다. 과자를 만들었던 그 사람이 또 나에게 과자를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한 리더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네가 이 일을 해결해라. 반드시 그에게 분명히 말해라. 만약 그가 또 만든다면 너에게 책임을 묻겠다!” 교회에 사역이 그렇게나 많고, 어떤 일도 너를 한동안 바쁘게 만들 수 있는데, 어째서 너는 그렇게 한가한 것이냐? 여기에 살을 찌우려고 온 것이냐, 아니면 잡담이나 하려고 온 것이냐? 여기는 살찌우거나 잡담하는 곳이 아니다. 그 후에는 이 일에 대한 소식이 없었다. 내가 이 일을 지시하고 나서 그 리더가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더 이상 아무도 나에게 그런 소소한 간식을 보내 주지 않아 한시름 놓게 되었다. 이 일을 봤을 때, 그 리더들은 본분에 집중하지 않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일은 그다지 심각한 것이 아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일도 있다.

나는 자주 여러 교회를 다니며 그곳의 리더들을 만나 몇 가지 사역을 지시하고 몇몇 문제들을 해결한다. 때로는 정오에 그 교회에서 밥을 먹어야 할 때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누가 그 밥을 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그 리더들은 매우 책임감이 강해서 자칭 요리사라는 사람을 선택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요리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음식을 간단하게 먹는다는 것이다. 난 음식 본연의 맛을 좋아하니, 너무 짜거나 기름져서는 안 되고, 너무 자극적이어도 안 된다. 겨울에는 따뜻한 걸 먹어야 한다. 또한 음식은 충분히 익혀야지 설익혀서는 안 되고, 소화가 잘되어야 한다.” 이 몇 가지 원칙들을 내가 명확하게 지시하지 않았느냐? 하기 쉽지 않으냐? 하기 쉽고 기억하기도 쉽다. 만약 어떤 가정주부가 3~5년 동안 밥을 했다면, 이 몇 가지 원칙을 확실하게 알고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밥을 해 줄 때 굳이 요리사를 찾을 필요가 없으며, 평범한 집밥을 할 수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 리더들은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굳이 ‘요리사’를 찾아 밥을 해 나를 대접하려 했다. 요리사가 정식으로 나를 위해 밥을 하기 전에 리더는 점검도 해야 했다. 어떻게 점검하겠느냐? 그들은 요리사에게 한 끼는 만두, 한 끼는 다루몐(打鹵麵)을 만들게 했고, 또 몇 가지 요리를 하게 했다. 그러고는 리더와 리더급 사람들이 다들 책임지고 맛을 봤는데, 모든 음식의 맛이 다 괜찮다고 생각해 결국 이 요리사에게 나를 위해 밥하는 일을 담당하게 했다. 리더가 맛을 본 결과가 어땠는지, 그 내면에 있는 문제의 성질은 무엇인지는 일단 차치하고, 이 요리사가 한 밥이 어땠는지를 먼저 이야기해 보겠다. 처음 갔을 때는 요리사가 만든 몇 가지 요리를 다들 매우 만족스럽게 먹었다. 두 번째 갔을 때, 이 요리사는 만두를 빚었다. 나는 첫 번째 만두를 먹자마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약간 매웠는데, 옆 사람도 좀 매워서 혀가 붓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식은 만두뿐이라 매워도 다 먹어야 했다. 만두소에서 고추가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매운 것이 무엇인지를 간과하고 그냥 그렇게 다 먹었다. 그 결과 저녁에 몸에 알레르기 반응이 생기기 시작했다. 온몸의 여러 군데가 몹시 가려워서 계속 긁어야 했고, 피가 날 때까지 긁으니 겨우 좀 나아졌다. 이렇게 3일간 가렵다가 비로소 조금씩 괜찮아졌다. 이렇게 알레르기를 겪고 나서 나는 만두소에 분명 후추를 넣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매울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내가 못 먹으니까 후추와 같은 매운 재료를 넣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잔뜩 넣어 버렸고, 이미 정상적인 보통 양을 훌쩍 뛰어넘어서 먹을 때 고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요리사가 밥을 하면서 이런 비율조차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먹고 알레르기를 일으킬 정도로 후추를 넣은 것이다. 나중에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못 먹으니, 두 번 다시는 절대 그런 매운 재료를 넣지 마라. 너에게 정말 인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렇게 하지 마라. 네가 자신을 위해 밥을 할 때는 네가 무엇을 먹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만약 네가 나를 위해 밥을 한다면 넣지 마라. 내 요구 기준대로 해야 한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리더가 이 사역을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안타깝게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당연히 해야 할 사역도 전혀 하지 않았다. 한번은 또 밥을 하게 되었는데, 이 요리사가 또 후추를 들고 넣으려 하자 옆 사람이 이를 보고 제지해서 엄격한 감시 덕에 넣지 못했다. 리더가 이렇게 깨알같이 작은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데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요리사가 밥을 할 때는 매우 적극적으로 맛을 보았으며, 여러 사람들이 다들 맛을 봤다. 다 집밥인데 무슨 맛볼 만한 가치가 있단 말이냐? 네가 전문적인 미식가이기라도 하느냐? 네가 리더가 되었다고 해서 뭐든지 다 알기라도 한다는 것이냐? 네가 건강의 원칙을 아느냐?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 이 일을 하라고 안배하였느냐? 내가 언제 너에게 나 대신 음식을 맛보라고 당부하거나 부탁한 적이 있느냐? 너무나 이성이 없고, 염치라고는 전혀 없다! 염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렇게 노골적이고 역겹고 이성이 없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 몇몇 사람들이 염치가 전혀 없음을 말해 준다. 나 대신 음식을 맛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내가 너에게 알려 준 그 몇 가지 원칙을 너는 하나도 준수하지 않았으며, 하나도 해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어떤 음식이 맛있거나 너희의 입맛에 맞으면 요리사에게 그 음식을 하게 하다니, 그것이 나를 위해 밥을 한 것이겠느냐? 너희 자신을 위해 밥을 한 것 아니겠느냐? 너는 이런 식으로 리더를 하는 것이냐? 모든 기회를 잡아 실속을 차리고 빈틈을 파고들 뿐만 아니라 나의 환심을 사려 하는데, 네가 나의 환심을 사려거든 나를 곤경에 빠뜨리지나 마라! 이는 부도덕한 것 아니겠느냐? 마음이 삐뚤어진 것 아니겠느냐? 몰염치하고 마음이 삐뚤어졌으면서도 자신이 충성심이 가득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한 이 몇 가지 일 중에 리더가 정말로 해야 하는 일이 한 가지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 기준이 없고, 자신조차 무엇을 먹어야 건강하고 무엇을 먹으면 건강하지 않은 줄도 모르면서 내 앞에서 건강 전문가나 미식가 행세를 하려 한다! 나를 위해 밥을 할 때는 반드시 네가 점검해야 한다고 누가 정했느냐? 교회에 이런 규정이 있느냐? 하나님 집에서 이런 지침을 하달하였느냐? 교회의 각종 사역에 아무리 많은 허점이 생기고, 아무리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해도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서 그저 주방이라는 작은 공간에만 공을 들이고 ‘책임’을 다한다. 이것이 바로 명실상부한 거짓 리더이고, 외식하는 것이다! 내 앞으로 나아와 점검하다니, 네가 뭘 아느냐? 네가 나에게 물어봤느냐? 네가 말한 것이 도대체 너의 뜻이냐, 아니면 나의 뜻이냐? 만약 나의 뜻을 전달하라고 한 것이라면 네가 한 것이 맞다. 이는 너의 책임이다. 하지만 나의 뜻이 아니고 너의 뜻인데, 네가 억지로 사람들에게 따르고 받아들이게 했다면, 이는 어떤 성질이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내가 이 일을 역겨워하지 않겠느냐? 내가 바로 앞에 있는데, 그는 내가 무엇을 먹고 요구하는지 나에게 한 마디도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뒤에서 이래라저래라 지시했다. 나를 대표하려는 것이냐? 이것이 바로 거짓 리더가 제멋대로 못된 짓을 하는 것이며, 영적인 척하고, 하나님의 부담을 헤아리는 척하고, 진리를 깨달은 척하며 외식하는 짓만 하는 것이다. 이 일이 충분히 지나치지 않으냐? 이미 매우 역겹고 혐오스럽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식견이 넓어지지 않았느냐? 여기에서 공과를 좀 배우지 않았느냐? 이런 일들은 하나같이 다 역겹지만, 이보다 더 역겨운 것도 있다.

올해 겨울, 한 자선가가 나에게 ‘예쁜’ 거위 털 외투를 사 주었다. 예쁜 이유는 그 옷의 색깔이나 디자인 때문이 아니라 가격이 매우 비싸고 고급스러운 좋은 옷이었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말 중에 “천 리 밖에서 거위 털을 보내왔으니 선물은 보잘것없으나 그 정성이 갸륵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옷은 정성이 깃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확실히 매우 비쌌다. 그 옷을 보기 전에 나는 이미 그 옷이 매우 예쁘고, 디자인도 괜찮으며, 빨간색이고, 만져 보면 매우 도톰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은 바로 어떤 사람들이 실물을 봤다는 것이다. 즉, 이 옷을 많은 사람이 이미 보았고, 얼추 대보았고, 자세히 살펴봤다는 것이다. “이 브랜드, 저도 알아요.”, “이 색 괜찮네요. 아주 예뻐요.”, “다 보고 나면 저에게도 보여 주세요.” 이런 식으로 소문이 퍼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소문이 돌다가 내 귀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제야 겨우 이 정도의 정보를 알게 된 것이다. 너희가 들어 보아라,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내가 아직 그 옷을 보지도 못했는데, 이미 많은 사람이 내 물건을 돌아가며 이리저리 살펴보고 관람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 아니겠느냐? 내 물건이 아무나 멋대로 보고, 만지고, 관람할 수 있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누구의 물건을 아무나 멋대로 만지고 보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도 원하지 않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물건은 더 안 되는 것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왜 안 됩니까? 당신은 공인입니다. 보세요, 사회에서는 유명인과 연예인의 사생활도 전부 노출되지 않습니까? 어디서 운동하는지, 어디에서 미용하는지, 누구와 어울리는지, 어떤 명품 브랜드를 입는지 전부 노출되지 않습니까? 당신은 왜 공개하지 않습니까?” 내가 유명인이냐? 나는 유명인이 아니고, 너 또한 나의 팬이 아니다. 너는 누구이냐? 너는 평범한 사람이고, 피조물이며, 패괴된 사람이다. 나는 누구이냐?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공인이 아니니, 모든 일을 너에게 노출하고 보고하여 네가 알게 할 의무가 없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나의 물건을 건드리느냐? 그렇게 하면 역겹지 않겠느냐? 내가 너에게 봐 달라고, 점검해 달라고 부탁하기라도 하였느냐?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감히 이렇게 대놓고 내 물건을 마음대로 보고는 여기저기 소문을 퍼뜨린다. 네가 뭐라고 소문을 퍼뜨리느냐? 너에게 그런 의무가 있느냐?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너와 나는 서로에게 낯선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네가 하나님을 믿어서 네가 누구인지를 내가 아는 것이지 너의 가정 상황, 생활 형편, 경제 상황이 어떤지 나는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다. 우리가 친한 사이이냐? 나는 너의 단짝 친구도 아니고, 절친도 아니며, 전우도 아니다. 우리는 아직 무슨 물건이든 보여 주어야 할 정도로 친하지 않다. 너라면 너의 물건을 다 나에게 보여 주고, 모두가 구경하고 만지도록 전시하겠느냐? 시장에 가서 아무거나 사서 집에 가져와도 몇 번이나 씻고 소독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함부로 만진 물건이라면 역겹지 않겠느냐? 너무 격의 없이 대하는 것 아니겠느냐? 남의 옷을 점검하라고 누가 너에게 부탁하기라도 하였느냐? 그가 너를 믿느냐? 함부로 남의 옷을 만지다니, 손은 깨끗이 씻었느냐? 그가 너를 역겨워하지 않겠느냐? 너는 마음속으로 알고 있느냐? 어찌 이렇게 부끄러움을 모르느냐? 너무 이성이 없다! 너는 몇 년 동안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었으면서도 어째서 이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냐? 함부로 하나님의 제물을 열고, 함부로 남의 옷과 물건을 만지다니, 이는 무슨 문제이겠느냐? 그 물건들의 포장이 다 벗겨져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내 마음속에서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는 이런 일이 역겹고, 이런 사람들을 혐오한다. 더 이상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으며, 이러한 개돼지만도 못한 사람과는 더더욱 함께 지내고 싶지 않다! 기억해라, 사람은 누구나 존엄성 있으며, 나는 더더욱 존엄성이 있다. 내게 속한 물건을 건드리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혐오하고 몹시 미워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거짓 리더는 별다른 큰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또 대단히 교활하고 악랄한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거짓 리더를 가장 증오하는 부분은 바로 눈앞에 실제적인 사역이 있는 것을 보면서도 하지 않고,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진리를 구하지 않으며, 악인이 교란하는 것을 보면서도 처리하지 않고, 겉면의 사무적인 일들만 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몇몇 지엽적이고 소소한 일들은 예의 주시하고 엄격하게 관리하지만,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과 관련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진리 원칙을 위배하는 각종 일들도 전혀 상관하지 않으며, 진리와 관련이 없는 일들만 한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거짓 리더이다. 거짓 리더는 교회의 각종 사역과 관련된 진리 원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리더 일꾼의 원칙과 기준에 따라 가늠해 본다면, 거짓 리더는 대단한 멍청이고 바보이다. 교회 사역에 아무리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도, 설령 그들 눈앞에서 발생한다고 해도 그들은 이를 보지 못하고 해결하지도 못해 결국은 상부에서 직접 해결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거짓 리더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분명 거짓 리더이다. 예를 들어, 교회 문서 사역의 경우 어떤 책들을 정리해야 하는지, 어떤 책을 번역해야 하는지, 이런 사역은 모두 교회의 핵심적인 사역이니, 어떻게 정리하고 번역해야 하는지, 원칙이 있지 않겠느냐? 이 사역은 매우 엄격한 원칙이 있고 너무나 원칙적이라서, 구체적인 교제와 지도가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거짓 리더는 이런 사역을 할 줄 모른다. 그는 형제자매들이 본분 이행으로 바쁜 것을 보고는 가식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문서 사역과 번역 사역은 특히 중요하니, 여러분이 마음을 다해 제대로 해야 합니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제가 다 해결해 드릴게요.”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로 문제를 제기하면, 거짓 리더는 “이 일은 제가 잘 모릅니다. 저는 외국어 번역에 문외한이에요.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해 보세요.”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또 “어떤 언어는 적합한 번역가를 구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물으면, 거짓 리더는 또 “이 일은 제가 문외한이니, 여러분이 알아서 처리하세요.”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핑곗거리로 자신이 사역을 하지 않는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고, “저는 문외한이라 업무를 모릅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짓 리더의 사역 방식이다. 누군가가 문제를 제기하면, 거짓 리더는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세요. 저는 업무를 모르지만, 여러분은 잘 아시잖아요.”라고 한다. 매우 겸손해서 자신이 부족하고 업무를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리더의 사역을 전혀 할 수 없다. 물론, 리더라고 모든 분야의 업무를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측면과 관련된 업무 문제이든 문제를 해결하는 진리 원칙은 명확하게 교제해야 한다. 사람들이 진리 원칙을 알게 되면, 문제도 그에 따라 해결될 수 있다. 거짓 리더는 “저는 문외한이라 업무를 모릅니다.”라는 이유로 문제를 해결하는 진리 원칙을 전혀 교제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거짓 리더가 항상 “저는 문외한이라 업무를 모릅니다.”라는 이유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그는 리더의 사역을 할 자격이 없다.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책임지고 사퇴해 다른 사람이 자신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짓 리더가 이런 이성이 있겠느냐? 그가 책임지고 사퇴하겠느냐?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는 ‘왜 내가 사역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 난 매일 예배를 드리느라 바빠서 밥도 제때 먹지 못했고 잠잘 시간도 부족했어. 누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하는 거야? 난 예배를 드릴 때 그들에게 교제해 주었고 하나님 말씀도 찾아 줬단 말이야.’라고 생각한다. 네가 “사람들이 어떤 언어는 적합한 번역가를 찾을 수 없다고 했을 때, 그런 구체적인 문제를 당신은 어떻게 해결했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저는 업무를 모르니 그들 스스로 상의해서 처리하라고 했죠.”라고 대답한다. 또 그에게 “그 문제는 제물의 지출 및 교회 사역의 진도와 관련이 있어요. 그들은 결정할 수 없으며 당신이 결정을 내려 주고 진리 원칙을 찾아 해결해야 해요. 당신은 그렇게 했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왜 안 했겠어요? 어떤 사역도 지체하지 않았어요. 그 언어의 번역가를 찾지 못하면, 다른 언어를 번역하면 되죠!”라고 말한다. 보아라, 거짓 리더는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면서도 많은 이유를 늘어놓는다. 정말 구역질이 날 정도로 뻔뻔하다! 자질이 그렇게 부족하고, 업무도 전혀 모르며, 모든 업무적인 사역과 관련된 진리 원칙도 모른다. 그렇다면 너라는 리더를 둬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정말이지 바보고 식충이다! 실제적인 사역도 하지 못하면서 너는 왜 교회 리더를 하려는 것이냐? 이것은 이성이 없는 것이다. 네가 자신을 정확히 모른다면, 하나님 선민의 반응을 듣고 자신이 리더의 기준에 부합하는지 가늠해 보아야 한다. 하지만 거짓 리더는 그런 일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오래 리더를 해도 교회 사역을 얼마나 많이 지체시켰든,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 얼마나 많은 손해를 입혔든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거짓 리더의 추악한 몰골이다.

너희는 리더 일꾼이 어떻게 사역하는지 보아라. 내가 말한 것들과 일치하지 않느냐?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자가 없느냐? 그가 거짓 리더임을 네가 분별할 수 있느냐? 만약 그가 거짓 리더임을 분별해 낸다면 오늘부터 너는 더 이상 그를 리더로 여겨서는 안 되고, 일반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이것이 정확한 실행 원칙이다. ‘이는 그가 거짓 리더라서 차별하고, 폄하하고, 배척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없으며, 그저 글귀와 도리, 빈말로 얼버무리고 둘러댈 줄만 안다. 이는 너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바로 그가 너의 리더가 아니니 사역에서 어떤 문제나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그에게 물어볼 필요 없으며, 필요할 경우에는 그를 건너뛰고 상부에 보고하거나 어떻게 처리하고 해결해야 하는지 물어봐도 된다는 것이다. 실행의 길은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지만, 어떻게 할지는 너희에게 달려 있다. 나는 모든 리더가 다 하나님이 정한 것이니 네가 반드시 따르고 순종해야 한다고, 설령 그가 거짓 리더임을 분별해 내도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어떻게 거짓 리더를 분별하는지에 대해 교제하고 있다. 그가 거짓 리더임을 네가 분별해 냈을 때, 그의 옳은 말과 진리에 부합하는 말은 네가 받아들이고 순종해도 되지만, 만약 그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얼버무리고 둘러대기까지 해서 사역 진도에 지장을 준다면 너는 그의 인도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너희 스스로가 원칙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면 원칙에 따라 하고, 만약 파악할 수 없거나 확신하지 못해 원칙을 확정할 수 없다면 진리를 구해 의논해 가며 해야 한다. 만약 의논했는데도 결정하지 못한다면 상부에 보고하고 물어봐야 한다. 이는 모두 좋은 해결 방법이며, 해결하지 못할 난제는 없다.

오늘 교제는 여기에서 마치겠다. 다음에 만나자!

2021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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