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대충 건성으로 대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말세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건성으로 대충 하려는 태도는 어떻게 생긴 것이냐? 이는 사탄의 패괴 성품 아니겠느냐? 건성으로 대충 하는 태도는 바로 패괴 성품의 한 가지로, 사람이 패괴 성품의 부추김을 받아 건성으로 대충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본분 이행의 성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역을 망쳐 교회의 사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니,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줄곧 건성으로 대충 본분을 이행하는 것, 이는 무슨 문제이겠느냐? 이것은 인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양심과 인성이 없는 사람만이 일관되게 건성으로 대충 할 수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일관되게 건성으로 대충 하는 사람이 믿음직스럽겠느냐? (미덥지 못합니다.) 매우 미덥지 못하다! 건성으로 대충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책임감 없는 사람이며, 일을 처리할 때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 아니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건성으로 대충 한다. 인품이 좋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니 결코 정직한 사람이 아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과연 부탁을 맡길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기에 절대 간사한 사람을 본분 이행에 쓰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정직한 사람만을 축복하며, 오직 정직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역사한다. 간사한 사람의 본분 이행은 다 사람이 안배한 것으로, 이는 사람의 잘못이다. 건성으로 대충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없고 인성이 나쁘니, 신뢰할 수 없고 미덥지 못하다. 그렇다면 성령이 이런 사람에게 역사하겠느냐? 절대 역사하지 않는다. 그러니 건성으로 대충 본분을 이행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께 온전케 되지 못하며, 또 영원히 하나님에게 쓰임 받지 못한다. 건성으로 대충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간사한 사람으로, 꿍꿍이가 너무 많고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다. 이들은 일을 처리할 때 원칙과 최저선 없이 그저 자신의 선호도에 따라 할 뿐이라 어떤 나쁜 일도 다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기분에 따라 행동한다. 기분이 좋고 기쁘면 약간 더 잘하고, 기분이 나쁘고 언짢으면 건성으로 대충 한다. 화가 나면 제멋대로 행동해 중대한 일을 망친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전혀 없는데, 그저 그럭저럭 대충 살며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따라서 본분 이행을 일관되게 건성으로 대충 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권면하거나 진리를 교제해도 소용이 없다. 아무리 여러 번 타일러도 고치지 않고 양심도 없으니, 그를 제명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가장 적절한 조치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사람은 하나님 경륜의 가장 큰 수혜자이다> 중에서

대충 건성으로 임하는 것은 본분을 이행할 때 절대 금물이다. 네가 대충 건성으로 임한다면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없다. 본분을 충실히 이행하려면 대충 건성으로 임하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며, 대충 건성으로 임하는 현상을 발견하는 즉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얼렁뚱땅 넘어가면 늘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늘 건성으로 임하며 형식과 절차에만 치중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반드시 본분 이행에 마음을 다해야 한다. 사람에게 본분을 이행할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기회는 잡지 못하면 사라지고 그 후에 다시 잡으려 해도 그런 기회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기회도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예전에는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지만 이제 다시 그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겠어.” 이런 의지가 있다는 것은 아주 좋다. 그러나 본분을 어떻게 제대로 이행할지 분명히 알고, 진리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으며,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진리를 명확히 깨달을수록 본분 이행 성과는 좋아진다. 네가 이 점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진리에 힘을 쏟을 수 있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희망이 있는 것이다. 지금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본분이 임해 네가 힘을 들여야 할 때, 이는 네가 자신을 바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네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때이다. 어떤 것도 숨기거나 잔꾀를 쓰거나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된다. 여지를 남기거나 요령을 피운다면 절대 그 일을 잘 해낼 수 없다. ‘아무도 내가 요령 피운 걸 못 봤어. 정말 다행이야!’, 이것은 대체 어떤 생각이겠느냐? 너는 사람을 속이고는 하나님까지 속였다고 생각하느냐? 사실 하나님은 알겠느냐, 모르겠느냐? 알고 있다. 사실, 너와 오랜 시간 함께 지내다 보면 누구든 네 패괴와 추악한 면을 발견하게 된다. 단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뿐이지, 속으로 몰래 너를 평가하기 마련이다. 많은 이가 드러나 도태된 이유는 그를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의 본질을 간파한 사람들이 그를 폭로하고 쫓아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고 말고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하고, 양심에 따라 실제적인 일을 해야 한다. 네게 비록 결점이 있더라도 본분 이행에 효과가 있다면 도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꽤 괜찮은 사람이니까 절대 도태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여전히 본인에 대한 반성도 인식도 하지 않고, 본연의 일도 하지 않으면서 계속 건성으로 대충 임한다면, 이를 보다 못한 하나님 선민들이 너를 폭로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도태될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너를 꿰뚫어 보았고 네가 네 존엄성과 인격을 모조리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무도 너를 신뢰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너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 사람의 폐부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생명 진입은 본분 이행에서부터 시작된다> 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 책임지지 않고 늘 대충 건성으로 넘기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를 발견할 수 있지만, 해결책을 구하기 싫어하고 남에게 미움받을까 몹시 두려워 그저 대충 얼버무리고 끝내는 것이다. 결과 재작업을 해야 한다. 본분을 이행하면 책임도 져야 하는데, 왜 진지하게 대하지 않느냐? 왜 대충 건성으로 대하는 것이냐? 이런 본분 이행은 직무 유기가 아니냐? 주요 책임을 누가 지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를 감독할 책임이 있으므로 부담을 가지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너희는 아무도 관여하지 않고, 그야말로 건성으로 대하고 충성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이것은 직무 유기다! 너희는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책임지기 싫은 것이다. 문제를 발견해도 신경 쓰기 싫어서 적당하다 싶으면 넘어간다. 이렇게 건성으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아니냐? 내가 사역하고 너희에게 진리를 교제하는 것도 그렇게 적당히 한다고 해 보자. 그러면 너희의 자질과 추구로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나도 너희 같은 태도로 임한다면 너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겠느냐? 하나는 너희가 무슨 일이든 진지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너희의 자질 자체가 매우 형편없고 모두가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같이 무감각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고, 자질도 형편없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해 줘야 한다. 무슨 일이든 자세히, 하나하나 풀어서 설명하고, 여러 각도에서, 또 여러 방식으로 설명해야 너희가 겨우 조금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만약 너희를 무성의하게 대한다면, 그래서 말하고 싶으면 아무렇게나 말하고,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애도 쓰지 않고, 마음도 쓰지 않고, 말하기 싫으면 말도 안 하는 식이라면, 너희가 과연 무엇을 얻겠느냐? 너희 자질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구원에는 더더욱 이를 수 없다.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는 못 하겠기에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의 내적 상태, 진리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 여러 가지 패괴 성품을 모두 자세히 설명하고, 예를 들어 설명해야만 너희가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다. 어느 방면의 진리를 교제하든 나는 항상 여러 방식으로 설명한다. 어른에게 교제하는 방식, 어린아이에게 교제하는 방식, 이치를 설명하는 방식, 이야기로 설명하는 방식, 이론을 설명하는 방식, 실행이나 체험을 설명하는 방식 등을 이용해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마음이 있고 자질을 갖춘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여 구원에 이를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너희가 본분을 대하는 태도는 늘 대충 건성으로 넘기며, 시간을 길게 질질 끌고도 전혀 조급해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할지도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 본분을 잘 이행해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을지도 고민하지 않는다. 이것은 올바른 일에 힘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생명이 너무 천천히 자라고, 긴 세월을 허비하고도 조바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사실, 너희가 열심히 책임 있게 본분을 이행한다면, 5, 6년 안에 체험을 이야기해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고, 각 사역도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 않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너희가 할 줄 모르는 것은 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 줄 것이니, 고민할 필요 없이 말을 잘 듣고 알려 준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그저 이 정도의 책임만 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너희의 충성심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의 충성심이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구나! 너희는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으면서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너희는 어떻게 해야 진리에 부합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실행하지 않는데, 이것은 문제가 심각하다. 이것은 두 눈 빤히 뜨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고, 이런 사람은 절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 최소한 갖춰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를 실행하지 못한다면 어떤 일에서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어떤 진리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런 자는 바로 불신파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나아가 진리를 실행하지도 않으며, 그저 하나님 집에서 허송세월만 보내는데, 너는 대체 무슨 목적이냐? 하나님 집을 양로원, 구제원으로 여기느냐? 그렇다면 잘못 생각했다. 하나님 집은 밥도둑이나 폐인을 먹여 살리는 곳이 아니다. 인성이 안 좋은 사람, 본분 이행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 본분 이행에 부적합한 사람은 모두 제명해야 하고, 끝까지 진리를 거부하는 불신파는 모두 도태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를 깨닫고도 실행하지 못하고, 문제를 발견할 수 있으면서도 해결하지 않으며, 자신의 책임인 줄 알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 네가 질 수 있는 책임도 지지 않는데, 네가 이행하는 본분이 무슨 가치가 있고 효과가 있겠느냐? 이렇게 하나님을 믿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진리를 깨닫고 있어도 실행하지 못하고, 겪어야 할 고난도 겪지 못하니, 이런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사실상 밥을 얻어먹으려고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거지다. 그들은 하나님 집에 와서 조금만 일하면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어서 직장에 다니지 않고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거저먹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하나님 집은 일없이 노는 사람을 먹여 살리지 않는다. 진리를 조금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들,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서 일관되게 건성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인정할 수 있겠느냐? 그런 사람들은 모두 불신파에 속하며 하나님이 보기에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최소한 양심과 이성이 있어야 한다> 중에서

네가 본분을 이행할 때 마음을 쓰지 않고 진리 원칙도 구하지 않은 채,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하고, 하기 쉬운 대로 한다면, 이것이 어떤 마음가짐이겠느냐? 이것은 건성으로 대하는 것이다. 본분을 대할 때 충성심도, 책임감도, 사명감도 없다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본분 이행이 합격점에 이를 수 있겠느냐? 본분 이행이 합격점에 이르지 못하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절대로 불가능하다. 본분을 이행할 때마다 마음을 쓰지 않고 온 힘을 다하지 않으려 하며 놀이를 하듯 가볍게 얼렁뚱땅 넘어간다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본분을 이행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결국 사람은 네가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서 책임을 다하지 않고 건성으로 임하며 형식적으로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러면 너는 도태될 위험이 있다. 하나님은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전체 과정을 감찰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느냐? (이 사람은 부탁할 가치도 없고 믿을 가치도 없다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라는 사람이 믿을 가치도 없고 도태시켜야 마땅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간에 그것이 중요한 본분이든 일반적인 본분이든, 그 일을 네게 부탁했는데 네가 온 마음을 다하지 않고, 네 책임도 다하지 않으며, 그 일을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이라고 여기지 않고, 자신의 본분과 의무로 여기지도 않고, 항상 건성으로 대한다면 곤란하다. ‘믿을 가치가 없다’는 일곱 글자는 네 본분 이행의 성질을 규정한 것이다. 네 본분 이행이 합격점에 이르지 못해 도태됐다는 뜻이며, 하나님이 너라는 사람의 인품이 나쁘다고 말한 것이다. 네게 한 가지 일을 부탁했는데 네가 이런 태도로 대하고 이런 방식으로 처리한다면, 앞으로 네게 본분 이행을 부탁할 수 있겠느냐? 네게 큰일을 부탁할 수 있겠느냐? 절대로 불가능하다. 네가 진실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면 몰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네게 안심할 수 없을 것이고, 항상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곤란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면 본분 이행의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고, 구원받을 수도 없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늘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묵상해야 실행할 길이 생긴다> 중에서

많은 사람이 너무나도 건성으로 대충대충 본분을 이행한다. 이들은 책망과 훈계를 받아도 여전히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치를 따지며, 하나님 집이 그를 불공평하게 대한다고, 그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고, 그를 너그럽게 봐주지 않는다고 원망한다. 어처구니가 없지 않으냐? 객관적으로 말해, 이것이 바로 교만한 성품이며,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적어도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일할 때 양심과 이성에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 책망과 훈계가 닥쳐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지나치게 교만하고 독선적인 자이니, 정말이지 말로 납득시킬 수 없다. 짐승이라고 말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무슨 일을 하든 그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결과가 어떨지 상관하지 않고, 문제가 생겨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힘쓰는 것에도 합격하지 못한다. 그가 이렇게 본분을 대하니, 다른 사람이 봐도 눈에 거슬리고 마음을 놓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느냐? 이런 최저 기준에도 이르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힘쓰는 것에도 합격하지 못하는 것이며, 도태될 수밖에 없다. …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본분을 건성으로 대충 이행한다. 그들은 정확한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단 한 번도 진리 원칙을 구한 적이 없고, 또한 하나님 집의 요구와 거둬야 할 성과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만약 네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건성으로 대충 하려는 내적 상태가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해야 하며, 자신의 패괴 성품을 저버리고 진리 원칙에 공을 들여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점차적으로 하나님 집의 요구에 도달할 수 있다. 사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저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지니고 있는지, 사람의 마음이 바른지, 사람이 마음을 쓰는지에 달려 있다. 이방인 중에 매우 진지하게 일해서 결국 성공한 자들도 많다. 그들은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었겠느냐? 바로 그들에게 마음이 있었고, 그들이 마음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지하고 참답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일을 수월하게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집의 본분은 모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한다면 다 잘 해낼 수 있다. 만약 마음이 바르지 않고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을 쓰지 않으며, 늘 수고를 덜 할 생각만 하고 건성으로 대충 해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다면, 그 결과는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을 망쳐 하나님 집에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이는 악을 행한 것이고 과오를 범한 것이니, 하나님이 혐오한다. 복음을 확장하는 중대한 순간에, 네 본분 이행이 성과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좋은 역할을 하지 못하고 방해와 교란만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께 혐오받고 도태되어 구원받을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영원히 한으로 남게 된다! 하나님이 너를 높여 주어 본분을 이행하게 하는 것, 이것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데 네가 무책임하고, 소홀히 하고, 건성으로 대충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네 태도인 것이다. 너에게 일말의 진심도 없고, 약간의 순종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 지금은 시간이 너무나 귀중하다. 하루하루, 심지어 일분일초가 다 매우 중요하다. 만약 네가 진리를 구하지 않고, 생명 진입을 중시하지 않으며, 본분을 여전히 건성으로 대충 이행하여 하나님을 기만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비이성적인 것으로, 매우 위험하다! 일단 하나님이 혐오하고 내치면, 성령이 다시는 역사하지 않을 것이며, 만회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서 형식만 따를 뿐 성과를 내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면, 그런 자는 외식하는 사람이며 양의 탈을 쓴 늑대이다. 네가 사람을 건성으로 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기만할 수는 없다. 본분 이행에 진실한 대가와 충성심이 없다면, 그것은 전부 합격한 본분 이행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할 때 진정으로 공을 들이지 않는다면, 늘 형식만 따르려 하고, 무슨 일을 하든 건성으로 대하는 태도를 지니며 사장에게 고용된 이방인처럼 군다면, 힘만 내고 마음은 쓰지 않으면서 하루하루 시간만 보내고, 문제를 보고도 알리지 않고, 기름병이 쓰러져도 세우지 않고, 자신의 이익과 관계되지 않는 일이면 전부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긴다면 문제가 심각하지 않겠느냐? 이런 자가 무슨 하나님 집의 사람이겠느냐? 이런 자는 이방인이지, 하나님 집의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는다. 네가 본분을 이행할 때 진심을 보였는지, 공을 들였는지를 하나님은 기록해 두고 있다. 사실, 너도 마음속으로 알고 있다. 너희는 본분을 이행할 때 정말 공을 들였느냐? 진지하게 대한 적이 있느냐? 자신의 책임과 의무로 여겨 이행했느냐? 자신의 본연의 일로 보고 임했느냐? 이러한 일들을 열심히 반성하고 인식하면 본분 이행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쉽다. 이는 자신의 생명 진입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 늘 책임을 지지 않고 문제를 발견하고도 리더 일꾼에게 보고하지 않으며, 스스로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도 않는다면, 항상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며 처세 철학으로 살아가면서 일말의 충성심도 없이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한다면, 책망과 훈계가 닥쳤을 때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몹시 위험하다. 이런 자는 힘쓰는 자에 속한다. 힘쓰는 자는 하나님 집의 사람이 아니라 고용인, 임시직이니 사역이 끝날 때 도태될 것이며, 자연스럽게 재난 속에 떨어질 것이다. 하나님 집의 사람은 다르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 혹은 힘을 들이고 복을 받기 위해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나는 하나님 집의 사람이야. 하나님 집의 일은 내 일이고, 하나님 집의 일거리는 내 일거리지. 나는 하나님 집을 위해 마음을 써야 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 집에 무슨 일이 생기든 마음을 쓰고 책임을 진다. 생각하거나 볼 수 있는 모든 것에 책임감을 갖는다. 눈에는 일거리가 보이고 마음에는 일을 담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 집의 사람이다. 너희는 이러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늘 육적인 안일만을 탐하면서 하나님 집에 일거리가 있는 것을 보고도 신경 쓰지 않고, 기름병이 쓰러져도 세우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해결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 집을 자신의 집으로 여긴 것이 아니다. 너희는 이런 것이냐? 만약 정말 이렇다면 너무 멀었다. 이런 자는 이방인과 아무 차이가 없으니, 회개하지 않는다면 너를 하나님 집 문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내버려 두고 도태시킬 것이다. 사실, 너희를 하나님 집 사람으로 대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지만 너희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늘 건성으로 무책임하게 본분을 이행하며,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회개하지 않는다. 너희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 집 문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를 구원하여 하나님 집 사람으로 만들려 하지만 너희는 받아들이지 않으니, 하나님 집 밖에 있는 사람, 이방인에 속한다.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이방인으로 보고 처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는 너 스스로 자신의 결말과 위치를 정한 것으로, 너는 하나님 집 문밖에 있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 있겠느냐? … 그러므로 본분을 잘 이행해야만 하나님 집에서 굳게 설 수 있고, 큰 재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 집에 있는 사람은 적어도 정직한 사람이고,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부탁을 받을 수 있고, 충성심을 가지고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람에게 진실한 믿음과 양심, 이성,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마음이 없으면 본분 이행에 적합하지 않다. 설령 본분을 이행한다고 해도 대충 건성으로 한다. 그들은 힘쓰는 자인데 진실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힘쓰는 자들은 언제든 도태될 것이다. 충성스럽게 힘쓰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충성스럽게 힘쓰는 자는 비록 진리 실제가 없어도 양심과 이성이 있고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살아남도록 허락하였다. 진리 실제를 갖추었으며 하나님을 위해 힘 있게 증거할 수 있고, 백성에 속하는 사람들도 모두 살아남을 수 있으며 하나님나라로 인도될 것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최소한 양심과 이성이 있어야 한다> 중에서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분을 이행할 때 본분을 지키고 악을 저지르지 않지만, 그들에게 충성심이 있느냐?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 사람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지는 인성 문제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어떤 것을 갖춰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리고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참답게 대하고 진지하게 임하며 책임을 다해야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할 수 있다.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느냐? 심혈을 기울이고, 마음을 다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 리더가 너에게 어떤 본분을 이행하도록 배정하고 간단한 원칙만 교제하고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을 때, 네가 어떻게 해야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양심에 따라 이행해야 합니다.) 최소한 양심에 따라야 한다. “양심에 따라야 한다.”라는 말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겠느냐? 이 말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겠느냐?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또한, 어떤 일을 할 때, 여러 번 고민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만약 일을 한 후에 마음이 평안하지 않고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조사를 해 보니 실제로 문제가 발견됐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빠르게 수정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것은 어떤 태도이냐? (참답고 꼼꼼하게 일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참답고 꼼꼼하게 하는 것으로, 바로 진지하고 엄격한 태도이다. 본분 이행은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를 가지고 “이 사역은 제게 맡겨졌으니 제가 인식하고 이룰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완수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대충 하면 된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항상 건성으로 대충 하려고 생각하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제대로 이행할 수 없습니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사람은 하나님 경륜의 가장 큰 수혜자이다> 중에서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어 본분을 늘 대충 건성으로 이행하는데, 이것은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충 건성으로 임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대충 건성으로 임하는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으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다. 따라서 대충 건성으로 임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행해야 하겠느냐? 먼저 마음가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본분을 올바르게 대하고, 참답게 책임을 다해 일해야 하며, 기만하거나 대충 하려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본분 이행은 어느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마음가짐이 단정해질 것이다. 또한, 일을 다 한 후에도 검토하고 반성해야 한다. 만약 마음이 불안해서 자세히 검토해 보니 정말 문제가 있다면, 이럴 때는 고쳐야 한다. 고치고 나면 마음도 편안해진다.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은 그 안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참답게 검토해야 하며, 중요한 부분에서 놓쳐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책임감 있게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이다. 사람이 참답고, 책임감 있고, 마음과 힘을 다하면, 사역을 잘할 수 있다. 때로 너의 마음가짐이 바르지 않으면 눈에 띄는 잘못이 있는데도 찾지 못하고 발견하지도 못한다. 네 마음가짐이 바르면 성령의 깨우침과 인도로 그 문제들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성령이 너를 인도해 어떤 깨달음을 주어 네가 마음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게 된다면 오류를 바로잡고 진리 원칙에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다. 네 마음가짐이 바르지 않고 건성으로 대강대강 한다면 그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너는 발견할 수 없다. 여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사람의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마음가짐이 매우 중요하며, 마음과 생각을 어느 측면에 쓰는지도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떤 마음가짐을 품고 있는지,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하나님은 감찰하고 있으며, 전부 볼 수 있다. 관건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다. 사람이 협력하는 이 부분이 매우 관건이다. 본분을 다 이행하고, 일을 다 끝낸 후 후회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하나님께 죄스럽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다. 만약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고 계속 대충 건성으로 넘기다가 사역에 커다란 손해를 입히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효과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때는 늦은 것이다. 이는 영원한 아쉬움을 남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오점이다! 일관되게 대충 건성으로 넘기는 것은 오점이고, 심각한 과오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는 자신이 맡은 범위의 일과 해야 할 일을 대충 건성으로 하지도, 아쉬움을 남기지도 않고 마음과 힘을 다해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네가 이행한 본분은 하나님께 기억될 것이다. 하나님께 기억되는 일은 선행이다. 그럼 하나님께 기억되지 않는 일은 무엇으로 간주되겠느냐? (과오로, 악행으로 간주됩니다.) 지금 악행이라고 말한다면 사람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 그 일로 심각한 결과가 초래되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그때 너는 그 과오가 행위상의 과오만이 아니라 하나의 악행이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너는 진작 알았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 당시에 조금만 더 신경을 쓰고 노력했더라면 그런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 거라고 후회할 것이다. 그 영원한 오점이 네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죄책감으로 남는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러므로 지금 너희는 하나님이 맡긴 부탁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매번의 본분 이행에서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아쉬움을 남기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억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절대 대충 건성으로 넘기지 마라. 충동적으로 저지른 잘못이 심각한 과오에 속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오점이다. 일단 아쉬움을 남기면 메울 방법이 없는데, 그것은 영원한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이 두 가지 길을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나님께 칭찬받겠느냐? 바로 마음과 힘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고 선행을 예비하며, 자신의 선행을 쌓아 가되 어떤 아쉬움도 남기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악을 행해 다른 이의 본분 이행을 교란해서는 안 되며, 진리를 위배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저질러서도 안 된다. 평생의 한을 남기지 마라. 사람의 과오가 너무 많아지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쌓아 가는 것이다! 네 과오가 많아질수록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도 많아지고, 마지막에는 징벌받게 된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 볼 때는 큰 문제가 없이 계속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 눈에 띄는 악행도 저지르지 않았고, 방해하거나 교란하지도 않았으며,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지도 않았다. 본분 이행에도 이렇다 할 큰 잘못이 없고, 원칙적인 문제도 없지만, 몇 년도 안 돼 그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파로 자신도 모르게 드러난다. 이는 어떻게 된 것이겠느냐? 사람은 문제를 간파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하므로 문제를 간파할 수 있다. 그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줄곧 대충 건성으로 하며 회개하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되니 드러날 때가 된 것이다. 줄곧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그가 본분을 계속 이행하고 있었지만 늘 잘못된 태도, 대충 건성으로 넘어가는 태도로 계속 본분을 대했다는 것이다. 공을 들이는 법이 없고, 마음을 다하는 법은 더더욱 없으며 힘을 좀 쓸 때도 그저 과정만 밟았을 뿐, 온 힘을 다하는 법이 없어 과오가 끊임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에 그는 계속 회개하지 않았고 대충 건성으로 하는 태도를 바꾼 적이 없다. 즉, 그는 손으로 행하는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서 회개하는 태도를 본 적도, 태도를 바꾸는 모습을 본 적도 없다. 그는 늘 이런 태도와 방식으로 자신의 본분을 대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대했다. 이렇게 완고하고 강퍅한 성품을 시종일관 고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죄스럽다거나 이렇게 대충 건성으로 하는 것이 과오이자 악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마음속으로 죄책감도, 미안함도 느끼지 않으며, 가책받거나 참소받지도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구제 불능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하든, 그가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든,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달았든, 그의 마음은 감동받지 못하고 마음가짐의 변화나 전환도 없다. 하나님은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가망이 없다. 아무리 말해도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고, 되돌릴 수도 없으며, 어떤 방식으로도 변화시킬 수가 없다. 이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자격도, 내 집에서 힘쓸 자격도 없다.” 어째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는 본분을 이행하고 사역을 할 때 일관되게 대충 건성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책망과 훈계를 하며 관용과 인내를 베풀어도 효과를 볼 수 없고, 진실한 회개를 하게 할 수도 없고, 그가 진실로 변화하게 할 수도 없다.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게 할 수도,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게 할 수도 없다. 그러니 그는 구제 불능인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이를 구제 불능이라고 정할 때, 그 사람을 단단히 잡고 놓지 않겠느냐? 그럴 리 없다. 하나님은 손을 놓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늘 ‘하나님, 저를 놓아주십시오! 제가 고통받게 하지 마시고 징계하지 마시고 좀 자유롭게 해 주십시오! 제가 대충 건성으로 임해도 봐 주십시오! 제가 방탕하게 굴어도 내버려두십시오. 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하며 구속받기 싫어한다. 그럼 하나님은 “네가 바른길을 걷기를 원치 않으니 나는 손을 놓고 방임하겠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나는 너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구제 불능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구제 불능인 사람이 양심의 감각이 있겠느냐? 마음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참소를 받겠느냐? 하나님에게서 온 질책과 징계, 채찍질, 심판을 느낄 수 있겠느냐?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을 전부 의식하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에 대한 생각이 희박하거나 심지어는 아예 없다.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면 이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구원받기 힘들다.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면 위험한 것이다. 너희는 어떻게 추구하고 실행하며, 어떤 길을 선택해야 이런 결과를 피할 수 있을지, 절대 이런 내적 상태가 나타나지 않을지 알고 있느냐?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다음 지금 이행해야 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최저 기준이며, 최소한의 기준이다. 이런 기초 위에서 다시 진리를 구하고, 또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기준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의 유대를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이 네게 어떤 일을 하라고 부탁하고 어떤 본분을 주었을 때 네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지, 네가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직관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바로 이런 문제이다. 하나님은 너의 태도를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빨리 하나님에게 너의 태도를 밝히고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여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이 핵심을 잡고 하나님이 맡긴 부탁을 제대로 완수한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정상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사역을 맡기거나 어떤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라고 했는데, 네가 무성의하고 진지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며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한다면, 이는 마음과 힘을 다하는 것과는 상반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하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분명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 네가 이행하는 본분은 분명 합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는 정말 중요하며, 선택하는 방식과 길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얼마나 오랫동안 믿었든, 본분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도태되어야 한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과 정직함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 태도는 훨씬 더 올바른 것 아니겠느냐? 어떻게 해야 그런 태도를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겠느냐? ‘마음과 정직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라.’라는 이 말이 네 실제가 되도록 해야 한다. 네가 대충 넘어가고 싶을 때, 꾀를 부리거나 게으름 피우고 싶을 때, 마음이 분산되거나 놀고 싶을 때, ‘이렇게 하면 신뢰를 줄 수 있을까? 이렇게 하는 게 마음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일까? 이렇게 하는 게 충성심이 없는 것 아닐까? 하나님의 부탁을 저버리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자신이 늘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본분에 충성심도 없어서 하나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당시에 속으로는 이 일이 좀 문제라고 느끼긴 했지만 진지하게 문제로 대하지 않고 얼렁뚱땅 넘겼어. 그리고 이제 와서야 그게 확실히 건성으로 대충 하고,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임을 알겠어. 난 정말 양심도 이성도 없어!” 문제를 발견하고,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했다. 그러면 돌이켜야 한다! 과거에는 그릇된 태도로 본분을 이행했다. 본분을 그저 추가적인 일로 생각하며 대충 이행하고, 마음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이렇게 건성으로 본분을 대한다면 하나님께 징계와 채찍질을 내려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 이런 의지를 지니고 있어야 진실로 회개할 수 있다. 양심이 편안해지고, 본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돌이킨 것이다. 회개하는 과정에서도 자주 자신이 과연 마음과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본분을 이행했는지를 돌아봐야 하며, 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가늠해 보고, 맞춰 보아야 한다. 그러면 자신이 본분 이행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부단히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실제로 마음과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바로 마음과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니냐? 만약 더 이상 양심에 참소를 받지 않고, 본분 이행이 합격점에 이를 수 있고 충성을 다할 수 있다면, 비로소 마음이 진정으로 평안하고 즐거워질 것이고, 본분 이행이 가외적인 부담도 아니고, 남을 위해 일해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불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본분을 이행할 때 마음이 충실해짐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렇게 처신한다면 마음이 안정되고, 살아 있는 송장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으로 살 수 있지 않겠느냐? 이렇게 처신하는 것이 쉽겠느냐 쉽지 않겠느냐? 사실 쉽다. 하지만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몹시 힘든 일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늘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묵상해야 실행할 길이 생긴다> 중에서

네가 본분을 이행할 때 대충 건성으로 하면서 자기 몸을 사리고 하나님의 감찰을 피하려 한다면, 그런 생각이 들 때 얼른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면서 그런 행동이 옳은 것인지 반성해야 한다. 또한, 이렇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거지? 내가 이렇게 건성으로 하면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어. 게다가 내가 몸을 사리려고 하나님을 믿는 건 아니잖아. 나는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거야. 내가 이렇게 하는 건 정상 인성의 모습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태도도 아니야. 안 되겠어. 세상에 있을 때는 몸을 사리면서 내 마음대로 행동해도 그만이었지만, 지금 나는 하나님 집에 있잖아. 하나님의 주재와 감찰 아래 있다고. 나는 사람이니까 마땅히 양심적으로 일해야지, 내 마음대로 행동해선 안 돼. 대충 건성으로 하면서 몸을 사릴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고.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몸을 사리거나 건성으로 임하는 게 아닐까? 더 노력해야겠다. 방금 나는 그렇게 하는 건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해 고생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이젠 나도 알아. 그렇게 하면 귀찮기는 해도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러니 그렇게 해야만 해.’ 막상 행동에 옮기려고 하면 그래도 고생할 게 걱정될 것이다. 그때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게으르고 교활한 사람입니다. 저를 징계하고 질책하여 제 양심이 자각하게 해 주시고, 제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저는 대충 건성으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패역과 추태를 알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해 주시고 깨우쳐 주십시오.’ 네가 이렇게 기도하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인식하면 후회의 마음이 생길 것이며, 자신의 추태를 증오할 수 있어 잘못된 내적 상태가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또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왜 나는 대충 건성으로 하는 걸까? 나는 왜 늘 몸을 사리려 드는 거지? 그건 양심도 이성도 없는 짓이야. 그러고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 나는 왜 일할 때 참답게 대하지 못하는 걸까? 그냥 에너지와 시간을 좀 더 들이는 것뿐이잖아? 그게 뭐라고? 그건 당연한 거잖아. 이런 것조차 해내지 못하면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 그래서 의지를 다지며 하나님께 맹세할 것이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 깊이 패괴되어 양심도 이성도 인성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제 회개하고자 하니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반드시 잘못을 바로잡겠습니다. 만약 제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저를 징벌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마음가짐이 바로잡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본분을 이행하거나 일을 할 때 참답게 대할 수 있다. 대충 건성으로 하는 부분이 줄어들고, 고생하며 대가도 치를 수 있다. 또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게 정말 좋다고 생각하며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깃들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면 내적 상태가 바로 달라질 것이다. 네 마음속 소극적인 상태가 바로잡히고 자신의 속셈과 육의 사욕을 저버리게 되고 육의 안락함과 즐거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며 더 이상 제멋대로 하지 않게 되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게 된다. 이렇게 육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쉽겠느냐? 대단히 하나님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육을 저버리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이렇게 실행하기만 하면 자기도 모르게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되는데, 조금도 어려울 것이 없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기초이다> 중에서

네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든, 너는 그것을 자신의 책임과 본분으로 받아들이고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요구한 대로 하면 된다. 하나님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제대로 이행하라고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해야 마음을 다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전혀 원칙 없이 자신의 뜻대로 함부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봤을 때, 네가 ‘어차피 내 책임도 아니니까 상관하지 않을래.’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마음을 다한 것이겠느냐? 마음을 다하지 않았으며, 무책임한 것이다. 만약 네가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이 생겼을 때는 ‘안 되겠다. 비록 이 일이 내 관리 범위는 아니지만, 리더한테 문제점을 이야기해서 그가 원칙대로 처리하도록 할 수는 있어.’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한 후 모두가 적합하다고 판단하면, 네 마음이 평온해지고 책임을 다한 것이다. 이러면 마음을 다한 것이다. 만약 네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신경도 쓰지 않고 소홀히 하며 ‘이 일은 간단하게, 대충대충, 무성의하게 해도 넘어갈 수 있어. 어차피 아무도 따지지 않고, 나도 최선을 다했어. 내 능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고 업무 능력도 뛰어나지 않으니, 대충 넘어가기만 하면 돼. 게다가 아무도 이 일에 관심 없고, 나에게 진지하게 따지는 사람도 없고, 또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아.’라고 한다면, 이런 속셈과 마음가짐이 있다면, 마음을 다한 것이겠느냐? 이는 마음을 다한 것이 아니라, 건성으로 대충 한 것으로, 바로 사탄 패괴 성품의 표출이다. 사탄의 패괴 성품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면 마음을 다할 수 있느냐? 마음을 다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너는 말할 것이다. “상부에서 이 일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고, 하나님 집의 모든 사역 중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게 제 본분이니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 일이 중요한지 아닌지와 제가 제대로 잘해 낼 수 있는지 없는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무엇이 중요하냐? 바로 네가 제대로 잘할 수 있는지, 마음을 다할 수 있는지, 원칙을 고수하며 진리에 따라 실행할 수 있는지, 이것이 중요하다.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으면, 이것이 바로 완벽하게 마음을 다한 것이다. 만약 네가 어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중요한 본분을 또 이행하려고 한다면, 또한 그것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면, 이것은 더더욱 마음을 다한 것이다. 네가 마음을 다할 수 있다는 것, 여기에 내포된 의미는 무엇이냐? 하나는 네가 하나님 말씀의 원칙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네가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였으며, 네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해 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성격대로 한 것도, 자신의 기호에 따라 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맡긴 부탁으로 여겨 이런 책임감과 마음으로 이행한 것으로, 자신의 뜻에 따라 한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하나님의 요구대로 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너의 마음을 다 쏟는 것, 이것이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어떻게 해야 마음과 뜻을 다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어떤 요구를 하든 전부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본분을 자신의 일로 여겨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이 단속하고 지켜보고 점검하고 독촉하고 감독하지 않아도, 나아가 책망과 훈계가 없어도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 본분을 이행하는 건 내 책임이고,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야. 이 일이 내게 주어졌잖아. 또 나는 원칙을 들었고 그 원칙에 관해 파악도 했어. 그러니 한결같이 열심히 해야 해. 최선을 다해 이 일을 제대로 해내야 한다고.’ 계속 그렇게 하면서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킨다는 것이며,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모습이다. 그럼 사람이 무엇을 갖춰야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지킬 수 있겠느냐? 먼저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양심이 있어야 한다. 이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이 밖에, 충성심이 있어야 한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면 충성심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일편단심으로 충성해야지, 딴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며, 책임을 지지 않거나 자신의 취미나 기분에 따라 일을 처리해서도 안 된다. 이는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충성하는 것이겠느냐?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기분, 환경, 사람, 일, 사물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거나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너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부탁을 받아들이겠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거야.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야. 그러니까 이걸 내 일로 간주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 어떤 식으로든 좋은 결과를 내도록 할 거야.’ 네게 이러한 내적 상태가 있으면 양심의 지배를 받을 뿐만 아니라 충성하는 마음도 있는 것이다. 효율과 효과를 따지지 않고 일을 끝내는 것에 만족하면서 그저 힘을 다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양심의 기준에 지나지 않으며 충성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요구 기준은 양심의 기준보다 약간 높다. 이것은 단지 힘을 다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까지 다해야 한다. 항상 본분을 자신이 해야 할 일로 여기고, 이 일에 대해 부담을 가지며, 사소한 실수라도 저지르거나 조금이라도 대충대충 하려는 내적 상태가 있으면 가책을 받고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돼. 하나님께 정말 죄스러워.’라고 생각해야 한다. 진정으로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은 누가 감독하든 안 하든 마치 자신의 일처럼 여겨 본분을 이행한다. 하나님이 그에 대해 기뻐하든 아니든, 그를 어떻게 대하든, 그는 항상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기 위해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이것이 바로 충성심이다. 이는 양심의 기준보다 높지 않으냐? 양심의 기준은 많은 경우 외부적인 일의 영향을 받거나 혹은 그저 힘을 다하면 그만인 것이라 순결도가 그다지 높지 않다. 하지만 충성심을 얘기하자면, 충성스럽게 본분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순결도가 높은 것으로, 이는 그저 힘만 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고 너의 몸과 마음을 모두 본분에 쏟아야 하는 것이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때로는 육적으로 고통을 좀 겪어야 한다. 대가를 좀 치러야 하며, 본분 이행에 모든 생각을 집중해야 한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본분 이행에 영향을 주거나 본분 이행을 지체시키지 않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면, 대가를 치를 수 있어야 한다. 육적 가정, 개인사, 개인의 이익을 모두 버려야 하고, 자신의 허영심, 감정, 육적 즐거움, 심지어 청춘, 결혼, 장래, 운명 등등 이런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버려야 하며, 기꺼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그러면 충성심이 있는 것이고, 이렇게 살면 사람다운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양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양심의 기준에 더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충성심으로 자신을 가늠하고 자신에게 요구하며 이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추구한다. 세상에 이런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하나님 선민 중에서도 어쩌면 천 명, 또는 만 명 중에 한 명 겨우 있을까 말까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의 삶은 가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 아니겠느냐? 당연히 삶이 가치 있고,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지금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은 별도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사람의 본분이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이다. 너희가 자신의 본분조차 다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서 고생하는 것 아니겠느냐? 죽음을 자초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래 놓고 또 무슨 훗날과 앞날을 바라느냐? 하나님의 사역은 인류를 위한 것이고, 사람의 협력은 하나님의 경영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다 한 다음에는 사람이 전력을 다해 실행하고 협력해야 한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에 자신의 온 힘을 다하고 충성을 바쳐야지, 관념을 계속 늘려 가거나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데, 사람은 왜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지 못하느냐? 하나님은 사람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하는데, 사람은 왜 조금도 협력하지 못하느냐?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사역하는데, 사람은 왜 하나님의 경영을 위해 자신의 본분을 조금도 이행하지 못하느냐? 이렇게까지 사역했음에도 너희는 보고도 행하지 않고 듣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자는 모두 침륜될 대상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는데, 사람은 왜 지금까지도 착실하게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냐? 하나님께는 사역이 첫째이고, 자신의 경영 사역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그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첫째이다. 이런 것은 너희 모두가 알아야 한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실행> 중에서

사람이 본분을 이행한다는 것은 사실 사람에게 원래 있는 것, 즉 사람이 본래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자신의 본분을 다한 것이 된다. 섬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폐단은 단계적으로 체험하고 심판받는 과정에서 점점 줄어들므로 본분을 가로막거나 본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섬기는 과정에서 폐단이 생길까 봐 섬김을 멈추거나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가장 나약한 자다. 사람이 섬기는 과정에서 표현해야 할 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본래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며, 건성으로 대충 하기까지 한다면, 피조물에게 있어야 할 기능을 잃은 것이다. 그런 자는 이른바 ‘둔재’이자 쓸모없는 폐물이다. 그런 자를 어찌 당당한 피조물이라 칭하겠느냐? 겉보기는 화려하나 속은 썩어 문드러진 자가 아니겠느냐? … 사람이 만약 자신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사람’이라 할 수 없고 피조물의 자리에 설 자격도 없다. 또한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을 섬길 자격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와 보살핌, 보호를 받거나 온전케 될 자격은 더더욱 없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신임을 잃은 후 하나님의 은혜를 잃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행을 증오하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의 도가 옳지 않다고 제멋대로 떠들어 댔으며, 더 패역한 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패역한 자에게 어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자격이 있겠느냐?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크게 거역한 것이고 하나님께 매우 죄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은 도리어 하나님이 행한 것이 옳지 않다고 떠들어 대며 욕한다. 그런 자에게 어찌 온전케 될 자격이 있겠느냐? 그것은 도태되고 징벌받을 징조가 아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죄악이 극에 달한 것이고 백번 죽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은 뻔뻔스럽게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고 하나님과 겨룬다. 이런 자에게 무슨 온전케 될 가치가 있겠느냐?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그것에 대해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느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 그리고 자신의 패역과 패괴를 증오하고, 나아가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야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피조물이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누릴 자격이 있고,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될 자격이 있다. 그런데 너희 대부분은 또 어떠하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서 살고 있는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 그의 앞에서 또 어떻게 너희의 본분을 이행하고 있느냐? 성심성의를 다하고 기꺼이 목숨을 바쳤느냐? 너희의 희생은 어떠하냐? 너희가 나에게서 얻은 것이 아직도 적단 말이냐? 너희는 분별할 줄 아느냐? 나에 대한 너희의 충성심은 어떠하냐? 나를 섬기는 것은 또 어떠하냐?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 주고 너희를 위해 행한 것은 또 어떠하냐? 너희는 가늠해 본 적이 있느냐? 너희의 쥐꼬리만 한 양심으로 가늠하고 비교해 본 적이 있느냐? 너희의 언행이 떳떳하냐? 설마 너희의 그 작디작은 희생으로 내가 베풀어 준 모든 것에 떳떳하단 말이냐? 너희에 대한 나의 마음은 한결같아서 다른 선택지가 없지만, 너희는 나에게 음흉한 속셈과 딴마음을 품고 있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본분이고 얼마 되지도 않는 너희의 기능이다. 그렇지 않으냐? 설마 너희는 자신들이 아예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했음을 모른단 말이냐? 그렇다면 너희가 어찌 피조물이라 불리겠느냐? 너희가 무엇을 말하고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는 자기 자신이 잘 알지 않느냐? 너희는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관용과 풍성한 은혜를 얻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은혜는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너희 소인배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라는 것 없이 기꺼이 헌신하는 이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다. 너희 같은 사람들, 너희 같은 둔재들은 하늘의 은혜를 누릴 자격이 전혀 없다. 오직 고난의 나날과 끝없는 징벌만이 너희와 함께할 것이다! 너희가 나에게 충성을 다할 수 없다면 너희의 운명은 곧 고통이고, 나의 말과 사역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면 너희의 결말은 곧 징벌이다. 그 어떤 은혜와 축복,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아름다운 삶도 너희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너희가 누릴 몫 또한 없다. 너희에게 이것은 당연한 결말이며 자업자득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육신 하나님의 직분과 사람의 본분의 구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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