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하나님을 시험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말세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어떻게 할지 모르고, 또 하나님을 인식하지도 알지도 못해 항상 하나님에게 무리한 요구를 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아프면 하나님에게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 병은 제가 고치지 않고 하나님이 낫게 해 주시는지 보겠습니다.’ 결국 한참을 기도해도 하나님이 행사하지 않자 그는 말한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 해 주시는군. 그럼 내가 약을 먹고 하나님이 말리는지 봐야지. 약 먹을 때 목에 걸리거나 물이 쏟아지면 그건 아마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막는 거겠지.” 이런 게 시험이다. 예를 들어, 너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할 때는,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본분에 어떤 게 필요하고 뭘 해야 하는지 다 같이 교제하고 의논해서 결정한 다음, 해야 할 때 가서 하면 된다. 만약 중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재다. 하나님이 만약 너를 막을 생각이라면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행사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사람이 하나님에게 기도를 한다고 치자. “하나님, 저는 오늘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데 제가 외출하는 것이 당신 뜻에 맞습니까? 오늘 복음 대상이 받아들일지 말지, 당신이 과연 어떻게 주재하실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제게 안배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이런 것을 저에게 보여 주십시오.” 너는 이렇게 기도를 마치고는 거기 가만히 앉아서 말한다. “하나님이 왜 말씀을 안 주시지? 아마 내가 본 하나님 말씀이 너무 적어서 보여 줄 수가 없으신가 보군. 그렇다면 얼른 나가자. 만약 나갔다가 넘어지면 그건 아마도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이고, 만약 나가서 모든 게 순조롭고 하나님이 막지 않으면 그건 아마도 전도하러 가라는 하나님의 뜻일 거야.” 이게 바로 시험이다. 왜 이런 걸 시험이라고 하겠느냐? 하나님 사역은 실제적이다.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과 본인의 하루 생활을 어떻게 안배할지는, 정상 인성의 생활이라면 원칙을 따르면 된다. 하나님이 과연 어떻게 할지, 하나님이 과연 어떻게 이끌지 테스트할 필요가 없다. 네가 해야 할 일은 가서 하면 될 것이다. ‘하나님이 과연 이 일을 하라고 허락하실까? 이걸 하면 하나님이 날 어떻게 처리하실까? 이 일은 이렇게 하는 게 맞을까?’라면서 더 생각하지 마라. 옳은 일이 분명하다면 너는 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기도하는 것은 괜찮다. 하나님께 이끌어 달라고, 그날 하루를 이끌어 주고 그날 이행할 본분을 이끌어 달라고 기도해도 괜찮은 것이다. 순종하는 마음, 순종하는 태도를 갖추면 된다. 예를 들어, 손으로 전기를 만지면 감전되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너는 고민한다. ‘괜찮아. 하나님이 지켜 주실 테니 한번 시도해 봐야겠어. 하나님이 지켜 주실 수 있을지, 하나님이 지켜 주시면 어떤 기분일지 한번 보자.’ 그러고는 너는 전기에 손을 대는데, 결국 전기가 통하고야 만다. 이것이 바로 시험이다. 옳지 않은 일이고 해서는 안 될 일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 일을 해서 하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살피는 것이 바로 시험이다. 이런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요염하게 꾸미고 화장을 진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 그럼 내가 그렇게 꾸민 다음 하나님이 내면에서 꾸짖으시면 어떤 기분일지 볼 거야.” 이렇게 해서 화장을 끝낸 다음 거울을 본다. “세상에, 정말 살아 있는 귀신 같네! 그런데 거울 속 내 모습을 눈뜨고 보기가 좀 민망하고 역겹긴 해도 다른 느낌은 없는걸.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느낌도 없고, 하나님 말씀이 즉시 임해서 날 치고 심판하는 것 같지 않은데.” 이런 행위가 무엇이냐? (시험입니다.) 너는 가끔 본분을 대충 이행할 때가 있고, 속으로 본인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면 회개하고 뉘우치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너는 언제나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제가 건성으로 대했습니다. 저를 징계해 주십시오!” 네 양심이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이냐? 양심이 있다면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고 그 행위를 거둬들여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 기도는 시험이 된다. 진지한 일이 웃음거리가 되고 시험이 된다. 하나님은 이를 혐오한다. 사람은 일을 만나서 속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구할 때, 또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요구, 방식에서 자주 시험을 하게 된다. 이런 시험은 주로 무엇을 뜻하느냐? 그건 네가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지 보려 한다거나 하나님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보려 한다는 말이다. 너는 하나님을 테스트하고 싶어 한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증명하고, 하나님이 했던 어떤 말씀이 맞는지, 정확한지, 들어맞는지,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지를 증명하려 한다. 그런 게 다 시험이다. 그런 행동은 너희에게서 자주 나타나지 않느냐? 예를 들어, 어떤 한 가지 일이 있는데 그 일을 하는 게 옳은지,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는 네가 그 일에서 한 행동이 시험인지 아니면 긍정적 행동인지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 방법은 네가 겸허하게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갖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일 앞에서 나는 이렇게 처리하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결과적으로 지금 이렇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태도는 어떠냐? 이는 진리를 구하는 태도이고, 그 안에는 시험의 요소가 없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있다. 네가 “이 일은 우리가 다 같이 교제한 다음 결정했습니다.”라고 했는데 누군가 물었다. “이 일을 누가 맡고 있나요? 이 일을 주로 결정한 사람이 누굽니까?” 그러자 너는 대답했다. “우리 다같이 했습니다.” 너의 속셈은 이것이다. ‘만약 저 사람이 일을 원칙에 맞게 처리했다고 하면 내가 한 일이라고 하고, 원칙에 맞지 않다고 하면 이 일을 누가 했고 누가 결정했는지 알려 주지 말아야지. 그러면 책임을 추궁해도 내가 당하지는 않을 거고, 창피를 당해도 나만 당하지는 않을 거야.’ 네가 이런 속셈을 품고 말했다면 그게 바로 시험이다. 이런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세속을 따르는 것을 혐오하셔. 인류의 기념일, 축제 같은 걸 혐오하셔.” 그걸 알고 있다면 사정이 허락하는 한 가급적 그런 일을 피하면 된다. 하지만 만약 네가 일부러 어떤 축제 기간에 세속을 따르느라 행사를 챙기고, 그럴 때 이런 속셈을 품는다면 어떻겠느냐?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징계하시는지, 또 나를 상대해 주시는지 볼 거야. 하나님이 날 어떤 태도로 대하시는지, 얼마나 혐오하시는지 한번 보자. 하나님은 혐오하신다고, 또 거룩하신 분이고 사악을 증오하시는 분이라고 하던데, 그분이 과연 어떻게 사악을 증오하시는지, 또 날 어떻게 징계하시는지 봐야지. 만약 하나님이 내가 행사를 치를 때 구토나 설사, 현기증이 생겨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신다면 하나님이 정말 이런 일을 혐오하시는 거야. 말씀으로만 그러시는 게 아니라 그게 사실로 일어나게 하신 거야.’ 네가 늘 이런 장면을 보고 싶어하는 건 어떤 행위이며, 어떤 속셈이냐? 그게 바로 시험이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네가 하나님을 시험할 때 하나님은 네게서 모습을 감추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 네가 기도해도 소용없다. “제가 정성을 다해도 안 됩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악을 증오하는 하나님이다. 네가 이런 사악한 마음과 생각을 가질 때 하나님은 네게서 모습을 감추고 너를 깨우쳐 주지 않을 것이며 너를 한쪽에 내버려둘 것이다. 그러면 너는 계속 어리석은 짓을 하고 방해와 교란을 일삼다가 결국 드러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이 마주하게 될 결과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1)> 중에서
시험하는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어떤 행동, 혹은 어떤 사상이 드러내는 내적 상태와 본질이 시험이냐? (어떤 과오를 저지르거나 악을 행하면 늘 하나님에게서 내막을 알려고 하고,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고 하며, 자기가 과연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얻을 수 있을지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생각하는 것의 측면이다. 그럼 통상적으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것, 혹은 일이 닥쳤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시험이겠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과오를 저지른 후 하나님이 그 과오를 기억하고 정죄할 것 같고, 그 본인도 확신이 없고 하나님이 정말 자신을 정죄할지 알 수 없다면, 그는 테스트할 방법을 생각할 것이고, 하나님이 과연 어떤 태도인지 볼 것이다. 먼저 그는 기도를 한다. 그러면서 아무 깨우침도 빛 비춤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때까지 추구해 온 방식을 철저히 버리려고 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어떤 일을 하든 대충 건성으로 임하며, 5의 힘을 쓸 수 있는데도 3만 쓰고, 3의 힘을 쓸 수 있는데도 1만 썼다면, 이제 5의 힘을 쓸 수 있으면 5를 쓰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든 일도 자기가 하고, 늘 앞다투어 남 앞에 나서서 많은 형제자매가 그 모습을 보게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과연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기가 저지른 그 과오를 만회할 수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나 평범한 사람들이 이겨 내지 못하는 일이 닥치면 그는 하나님이 과연 어떻게 하는지, 그를 깨우치고 인도하는지 살핀다. 하나님의 함께함을 느끼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느끼면 그는 하나님이 기억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고, 그 과오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반면, 그렇게 헌신하고 대가를 치르며, 그렇게 큰 태도 변화를 보였는데도 하나님의 함께함을 느끼지 못하고, 나아가 예전과 뭔가 다른 점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예전의 그 과오를 정죄하고 그를 원치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그를 원치 않으니, 그 후로는 본분을 이행해도 그렇게 노력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이 그래도 그를 원하고 정죄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아직 복받을 희망이 있다면 얼마간 진심을 바쳐 본분을 이행할 것이다. 이런 모습과 생각은 시험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능과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는 일에 대해 어떤 인식이나 체험도 없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진실로 느끼는 바가 없다. 그러니 당연히 그 일에 대해 의혹으로 가득할 것이다. 비록 그가 주관적인 바람으로는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한다는 사실을 믿고 싶더라도 명확한 증거가 없기에, 그는 마음속에서 몇 가지 일을 계획하는 동시에 집행하고 시행하기 시작한다. 시행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이 과연 알고 있을지, 그 일을 들킬지, 그가 말하지 않으면 알아채는 사람이 있을지, 하나님이 어떤 환경을 통해 드러내지는 않을지 끊임없이 관찰한다. 물론, 평범한 사람도 하나님의 전능과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는 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적그리스도 부류는 단순히 확신하지 못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의혹으로 가득하며, 이와 동시에 하나님에 대해서도 경계심이 가득하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시험하는 많은 행동 방식이 생기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한다는 사실에 의혹을 품으며, 나아가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에 늘 마음속으로 어떤 일들을 생각한 후 두려움이나 알 수 없는 공포감을 품고 몰래 뒤에서 이런 생각을 퍼트려 사람들을 미혹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을 조금씩 드러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과연 그 일을 막을지, 폭로할지 살핀다. 만약 폭로하고 규정한다면, 급히 꼬리를 말고 다른 방법을 쓴다. 만약 그가 보기에 아무도 그 일에 대해 모르고, 그를 간파하거나 꿰뚫어 보지도 못하는 것 같다면, 마음속으로 자기 직감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옳다고 100% 믿으며,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된다. 이는 어떤 행동 방식이겠느냐? 이런 행동 방식이 바로 시험하는 것이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부록 6 적그리스도의 인품과 성품 본질에 관한 정리(3)> 중에서
과거 하나님 집에는 한 가지 규정이 있었다. 제명되고 출교된 사람이 나중에 진심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꾸준히 하나님 말씀을 읽고, 꾸준히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을 증거하고, 또 진실로 회개한다면 교회로 돌아오는 것을 받아주는 규정이었다. 마침 제명된 사람 한 명이 이 조건에 부합하기에 교회에서는 사람을 보내 그를 찾아가 교제한 후 교회로 돌아오라고 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과연 정말 나를 돌아오게 하려는 걸까,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걸까? 하나님께서 정말 내가 회개하는 모습을 보셨을까? 정말 나를 긍휼히 여기고 관용을 베풀어 주시는 걸까? 정말 예전에 내가 저지른 그 일들을 문제 삼지 않으시는 걸까?’ 그는 믿지 못하고 궁리했다. ‘돌아오라고 했지만, 점잔을 좀 빼야지, 바로 그러겠다고 하면 안 돼. 제명되었던 몇 년 동안 외부에서 무척 고통스럽고 가련하게 산 것처럼 말이야. 자중해야지, 돌아오라고 했다고 바로 어디에서 교회 생활을 하고 어떤 본분을 이행할지 알아봐서는 안 되는 거야. 그렇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물론 기분은 아주 좋지만 차분해져야 해. 하나님 집에서 진심으로 나를 돌아오게 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나를 돌아오게 한 다음 나를 이용해서 일을 처리하려는 건지 알아보자.’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출교되고 나서 그동안 자신을 반성해 보았습니다. 제가 저지른 잘못이 너무 크고, 하나님 집의 이익에 너무 큰 손해를 끼쳐서 평생 만회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죠. 저는 마귀 사탄이고,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대상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충분히 반성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돌아오라고 한 이상, 하나님 말씀을 더 많이 먹고 마시고, 자신을 더 많이 반성하고 인식해야겠죠. 지금 저는 아직 하나님 집에 돌아갈 자격도,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자격도 없습니다. 형제자매들과 만날 자격도 없고, 하나님을 뵐 낯은 더더욱 없지요. 제가 충분히 인식하고 반성했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교회로 돌아가겠습니다. 모두가 진심으로 납득할 수 있도록요.” 그는 이렇게 말하는 한편 두려워했다. ‘나는 그냥 거짓으로 이렇게 말한 건데, 만에 하나 내가 돌아가지 않는 것에 리더가 동의하면 끝장 아닌가?’ 사실 속으로는 무척 걱정하면서도,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교회에 그다지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척했다. 그가 무슨 의도로 이 말을 했겠느냐? (교회에서 정말 그가 돌아오는 것을 받아들일지 시험한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이는 사탄 마귀의 행동 아니겠느냐? 정상적인 사람이 이렇게 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정상인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좋은 일이 생겼는데도 이런 수를 두었으니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교회로 돌아오는 것을 받아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자 긍휼이니 너는 마땅히 자신의 패괴와 부족함을 반성하고 인식한 후, 지난 잘못을 만회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만약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이렇게 대한다면, 이는 은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사람의 이런 생각과 행동은 바로 사악한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모습과 표출은 이론적으로 말하면, 늘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선, 정의 등을 테스트해 보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진리를 구할 수 있다면, 이런 행동을 저버리고 내려놓으며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 성품 본질을 지닌 부류는 이런 행동을 내려놓지 못하고, 이런 행동에 염증을 느끼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자신에게 그런 수단과 방식,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긴다. ‘내가 얼마나 똑똑한지 보라고. 내가 어디 당신들처럼 바보같이 하나님과 진리를 대할 때 순종하고 말을 듣겠어? 난 당신들처럼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방법을 생각해서 몇 가지 방식과 수단으로 이 일에 대해 알아낼 거야. 순종하고 말을 듣는다 해도 그 내막은 알아야지. 무슨 일이든 나를 속이거나 기만하거나 우롱할 생각은 말라고.’ 그는 이런 사상 관점을 지니고 있다. 적그리스도는 성육신한 하나님을 대할 때 순종하거나 경외하지 않고, 진심도 없으며, 나아가 충성심도 없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부록 6 적그리스도의 인품과 성품 본질에 관한 정리(3)> 중에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표출하는 가장 사악한 성품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나서 과거 자기가 옳지 않은 길을 걸으며 나쁜 짓을 하고 많은 과오를 범했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좋은 종착지가 없을 거라고, 결말을 장담할 수 없다면서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근심한다. 늘 자신의 결말과 종착지 때문에 불안해하고 걱정한다. 그는 늘 ‘앞으로의 결말과 종착지가 과연 좋을까 나쁠까? 지옥에 떨어질까, 아니면 천국에 갈까? 내가 하나님의 백성일까 봉사자일까? 멸망할까, 아니면 구원받을까? 이런 측면을 언급하신 하나님 말씀엔 무엇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라는 생각뿐이다. 하나님 말씀이 모두 진리이고, 온통 사람의 패괴 성품을 폭로하는 것이라 그가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하면 어딜 가서 물어볼지 고민한다. 그 후 발탁되어 중용될 기회를 찾으면 이렇게 떠보려 한다. ‘상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괜찮게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예전에 내가 저지른 악행과 과오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지 않고 나를 구원하시겠다는 방증이니 아직 희망이 있어.’ 이어서 그는 자기 생각대로 입을 연다. “저희 형제자매 중 많은 사람이 업무에 숙달되지 못했고 하나님을 믿은 기간도 짧아요. 저는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제일 길고, 실족하여 실패한 적도 있어서 체험도 있고 경험도 있죠. 기회가 된다면 중임을 맡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습니다.” 이런 말로 상부가 자기를 발탁할 의향이 있는지, 자기를 포기하진 않았는지 시험해 본다. 사실 그는 정말 그 짐과 책임을 지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은 자기에게 아직 구원의 희망이 있는지 속을 떠보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험이다. 이 시험의 방식 이면에는 어떤 성품이 있느냐? 사악한 성품이다. 이 방식을 얼마간 표출하고 그가 어떻게 했든, 얼마나 실행에 옮겼든, 결국 표출한 성품은 분명 사악함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런 일을 할 때 많이 생각하고, 염려하며,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악한 성품이 표출될 때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이 인성이 있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고, 어떤 행동이 이런 부류의 사람이 사악한 본질이 아닌 패괴 성품만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느냐? 이런 말과 행동을 하고 나면 양심적이고, 이성적이며, 인격적이고, 존엄한 사람은 속으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마음을 졸이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는 거지? 어쩜 아직까지 내 종착지에 연연해하고,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떠보면서 확답을 얻으려 할까? 비열하기 짝이 없군!’이라는 생각에 내심 불안해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고 말도 뱉어 버렸으니 주워 담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는 속으로 깨닫게 된다. ‘나란 사람은 선의와 정의감이 조금 있지만 이런 비열한 짓을 할 수도 있어. 이건 소인배의 수작이야! 이런 행동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게 아니겠어? 그리고 하나님을 협박하는 게 아니겠어? 너무나도 비열하고 뻔뻔한 짓이야!’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리적이겠느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죄를 자백해야 하느냐, 아니면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자신의 방식을 고수해야 하느냐? (기도하고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처음 생각했을 때부터, 행동으로 옮기고, 다시 기도하며 죄를 자백하기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어느 단계가 정당한 패괴 성품의 표출이고, 어느 단계가 양심의 작용이며, 어느 단계가 진리의 실행이겠느냐? 생각에서부터 행동에 옮기는 단계는 사악한 성품에 지배되고, 반성하는 단계는 양심의 작용에 지배되지 않겠느냐? 그가 반성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행동이 옳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양심의 작용에 지배되는 것이다. 그 후엔 기도하며 죄를 자백하는데, 기도하며 죄를 자백하는 것 역시 인격, 양심, 인품의 작용에 지배된다. 그가 뉘우치고 회개하며 하나님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인성과 패괴 성품을 반성하고 인식하여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는 세 가지 단계가 아니냐? 패괴 성품이 표출되고 나서 양심이 작용하고, 그러고 나서는 손에 쥔 악을 내려놓고, 회개하며, 자신의 육적인 욕망과 생각을 내려놓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저버리고, 진리를 실행한다. 이 세 가지 단계는 인성이 있고 패괴 성품이 있는 보통 사람이라면 이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양심과 지각이 있어서 인성이 상대적으로 좋기 때문에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는 뜻으로, 다시 말해 인성이 좋은 부류의 사람이 구원받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말이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부록 5 적그리스도의 인품과 성품 본질에 관한 정리(2)> 중에서
시험하는 것은 사악한 성품 본질 중 비교적 눈에 띄는 모습이다. 사람은 갖가지 방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정보를 얻고 확실한 소식을 알아낸 후 마음의 평안과 안정을 얻는다. 시험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어떤 자는 말로 떠보고, 어떤 자는 물건으로 시험하며, 또 어떤 자는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방법을 꾀한다. …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하든, 만약 그렇게 해서 양심에 참소를 받는다면, 그리고 자신의 그런 행동과 성품을 인식하고 바로 뉘우칠 수 있다면,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상적인 패괴 성품이다. 하지만 사람이 일관되게, 한결같이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그런 행동이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고수하며 저버리지도 내려놓지도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질이다. 적그리스도의 성품 본질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 그는 자신을 반성하는 법이 없고, 진리를 구하는 법도 없다. 그저 일관되게, 한결같이 갖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사람에 대한 규정, 그리고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무엇인지 시험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법도, 진리를 구하는 법도 없고, 나아가 어떻게 해야 진리에 순종하고 성품 변화를 이룰지 구하는 법도 없다. 그가 그 모든 일을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 뜻을 간파하기 위함이다. 이런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적그리스도의 이런 성품은 분명히 사악하다. 그는 이런 짓을 하고 이런 모습을 보일 때 어떤 참소도 받지 않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설사 대조해 보더라도 후회하거나 그만둘 뜻이 없고 여전히 똑같이 행동하려 한다. 그가 이렇게 하나님을 대하고, 이런 태도와 행동을 보인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을 반대편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의 사상 관점 속에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사랑하고, 경외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그런 생각과 태도가 없다. 그저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원하는 정보들을 얻고 자신의 방식과 수단으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정확한 태도와 정의를 알아내려는 것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가 자신의 이런 행동을 하나님이 폭로한 말씀과 대조해 볼지라도, 그런 행동은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이고 사람이 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조금이나마 있을지라도 전혀 포기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부록 6 적그리스도의 인품과 성품 본질에 관한 정리(3)> 중에서
예수는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라고 했다. 예수의 이 말씀에 진리가 담겨 있지 않으냐? 틀림없이 진리가 담겨 있다. 겉보기에는 명령의 말씀, 아주 간단한 말씀 같아도 사람과 사탄은 이를 자주 거스른다. 그래서 예수는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라고 말씀한 것이다. 사탄은 항상 그렇게, 그칠 줄 모르고 하나님을 시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사탄의 본성 본질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경외심도 없다. 사탄은 하나님의 곁에서 하나님을 보았지만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시험한다. 이 때문에 예수는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라고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항상 한 이 말씀이 오늘날에도 유효하지 않으냐? (유효합니다. 저희도 자주 하나님을 시험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도 자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에게 사탄의 패괴 성품이 가득하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위에서 사탄이 했던 말들을 사람도 자주 하지 않더냐? 어떤 상황에서 말하느냐? 사람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한다. 이는 사람의 성품이 사탄의 패괴 성품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증거이다. 예수는 아주 간단한 말씀을 했지만, 이는 진리를 대변하는 것이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사탄과 언쟁을 벌이며 한 말씀이 있더냐? 사탄과 맞붙어 싸우면서 한 말씀이 있더냐? (없습니다.) 그는 사탄의 시험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역겹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느냐? 혐오스럽고 역겹다고 느끼면서도 그는 사탄과 언쟁을 벌이지 않았다. 사탄에게 큰 이치를 설명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왜 그랬겠느냐? (사탄은 줄곧 그렇게 해 왔고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치로 깨우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진리임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영원히 알지도, 인정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사탄의 본성이다. 사탄의 본성에 혐오스러운 점이 또 하나 있는데 무엇이겠느냐? 사탄은 예수를 시험해서 성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일단 시도해 보려고 했다. 징벌을 받을지라도 그렇게 행동하며, 하나님을 시험해서 얻는 것이 없을지라도 그런 짓을 계속하고, 하나님께 끝까지 맞섰다. 이는 어떤 본성이겠느냐? 사악함 아니겠느냐?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중에서
마지막으로 너희에게 세 가지 충고를 하겠다. 첫째,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네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든, 절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둘째, 하나님과 지위를 다투지 마라. 하나님이 너에게 어떤 지위를 주고 어떤 사역을 담당하게 하든, 하나님이 어떤 본분을 맡겨 너를 높여 주든, 네가 예전에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바쳤든, 절대 하나님과 지위를 다투지 마라. 셋째, 하나님과 겨루지 마라. 하나님이 네게 행한 일과 마련해 준 일, 그리고 네게 닥친 일을 네가 이해할 수 있든 없든, 순종할 수 있든 없든, 절대 하나님과 겨루지 마라. 이 세 가지를 지킬 수 있다면 너는 비교적 안전할 것이며, 쉽게 하나님을 노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하나님의 본질에는 사랑이라는 요소가 있어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푼다. 하지만 사람은 그의 본질에 존엄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잊어버린다. 그에게 사랑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그를 제멋대로 거슬러도 아무 느낌과 반응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에게 긍휼이 있다고 해서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원칙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고 진실로 존재하는 분이지, 사람이 상상해 낸 목석이나 어떤 물체가 아니다. 그가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마땅히 매 순간 그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태도를 중시하며, 그의 느낌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상상으로 하나님을 규정해서는 안 되고,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바라는 바를 하나님께 강요하여 사람의 방식과 상상대로 사람을 대해 달라고 해서도 안 된다. 네가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을 거슬러 노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노를 시험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엄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이 심각성을 알았다면 너희 모두 조심스럽게 행하고, 말하며, 하나님을 대할 때 부디 신중하고 또 신중하며 조심하고 또 조심하기를 권고한다! 하나님의 태도가 어떤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함부로 말하지도, 일을 하지도 말며, 함부로 딱지를 붙이지 말고, 함부로 결론짓는 일은 더욱 하지 말아야 한다. 기다리면서 구해야 한다. 이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행실이다. 네가 우선 이렇게 행할 수 있고 이런 태도를 갖출 수 있다면, 하나님은 네가 무지몽매하고 사리를 모른다고 탓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는 너의 태도로 인하여 너를 기억하고 인도해 깨우쳐 주거나 혹은 어리고 무지한 너에게 관용을 베풀어 줄 것이다. 그와 반대라면, 함부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뜻을 추측하며 정의를 내리는 너의 오만불손한 태도 때문에 하나님은 너를 정죄하고 징계할 것이다. 나아가 너에게 벌을 주거나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 결론은 아마 너의 결말과 관련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너희 모두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대함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한다.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일해서도 안 된다.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해 봐야 한다. 단순한 일일지라도 마음속으로 많이 되새겨 보고 많이 생각해 봐야 한다. 네가 정말 언제 어디서나 매사에 이런 원칙에 따라 실천하고, 특히 네가 모르는 일에서도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너를 인도하며 실천의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사람이 어떤 행실을 보이든 하나님 쪽에서는 모든 걸 분명하고 명확하게 보고 있을 것이며, 너의 행실에 따라 정확하고 합당한 평가를 내려 줄 것이다. 네가 마지막 시련을 겪을 때, 하나님은 너의 모든 행위를 종합하여 너의 결말을 정할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진심으로 탄복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너희가 행한 모든 것과 마음속으로 생각한 모든 것이 너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하나님을 믿을 때는 반드시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하며, 하나님의 폭로를 통해 사람의 본성을 인식하고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의 폭로는 사람의 본성을 드러내어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 인류의 패괴된 본질을 꿰뚫어 보게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사탄은 어리석은 것이어서 그것이 하는 헛소리는 알아듣기 어렵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라고 묻자 사탄은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욥 1:7)라고 대답했다. 사탄의 대답을 자세히 들어 보아라. 대체 간 것이냐 아니면 온 것이냐? 분별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말을 헛소리라고 하는 것이다. 사탄의 이 말을 통해 사탄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탄에 의해 패괴된 사람도 어리석어 무슨 일을 하든 다 잣대, 기준, 원칙이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치우친 길로 접어들기 쉽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하며 “왜 저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 거야?”라고 물었을 때, 하와가 “하나님께서 저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어.”라고 하자 사탄은 “저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죽지 않을 수 있어.”라고 말했다. 사탄의 말 속에는 유혹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사탄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확실하게 말하지 않고 그저 죽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죽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럼 내가 먹어 봐도 되겠네!’라고 생각해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그 열매를 먹었다. 이렇게 사탄은 사람을 유혹해 죄를 저지르게 하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먹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책임을 지지도 않았다. 사람은 모두 내면에 사탄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마음속에는 다 사탄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사람을 유혹하는 다양한 독소를 가지고 있다. 때로 사람은 사탄의 말투로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시험과 유혹의 의미가 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모두 사탄의 독소로 가득 차 있으며, 사탄의 냄새를 풍긴다. 때로는 사람의 눈빛 또는 행동에도 시험과 유혹의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이렇게 따르면 확실히 얻을 수 있어요.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도 저는 하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했어요. 끝까지 버틸 힘이 있어요. 설령 과오가 좀 있어도 하나님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버리지 않으실 겁니다.”라고 말한다. 사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내면에 패괴된 것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어떻게 변화될 수 있겠느냐? 만약 하나님의 보호가 없다면, 이 정도로 패괴된 사람은 언제라도 넘어져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날 수 있다. 너희는 이를 믿느냐? 네가 아무리 자신에게 강요해도 끝까지 가지 못한다. 이는 마지막 단계의 사역은 이기는 자들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상상하는 만큼 그렇게 쉽겠느냐? 사람이 최종적으로 100% 또는 80%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30%나 40%는 변화되어야 한다. 최소한 반드시 네 내면 깊숙한 곳에 뿌리박혀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을 파내어 정결케 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이 요구하는 30~40% 정도 변화된다면, 가장 이상적으로는 60~70% 정도 변화된다면, 이는 네가 진리를 얻었고,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다시 일이 닥칠 때는 쉽게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성품을 쉽게 거스르지 않게 된다. 그러면 온전케 될 수 있고,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을 믿으면서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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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세 가지 충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