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사탄의 철학과 각종 사설, 궤변을 분별하는 법
말세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자신은 바로 진리이고, 그는 모든 진리를 지니고 있다. 그는 진리의 원천이다. 모든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는 다 하나님에게서 왔고, 그는 만사 만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그는 과거에 발생한 일이든,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일이든, 아니면 앞으로 발생할 인류가 모르는 일이든 모두 판단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재판관이다. 즉, 모든 사물의 옳고 그름은 오직 하나님만이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사물의 준칙을 알고 있고, 언제 어디서나 진리를 선포할 수 있다. 하나님이 곧 진리의 화신이다. 즉, 그 자신이 진리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었다고 해도 진리의 화신과 관계가 있겠느냐? 없다. 이는 틀림없는 것이다. 사람이 온전케 되면 하나님이 지금 행하는 이 모든 사역과 하나님이 요구한 여러 방면의 기준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되고, 정확한 실행 방법을 얻게 된다. 또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깨닫게 된다. 어떤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어떤 것이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분별할 줄 알게 되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 알게 된다. 하지만 사람이 닿을 수 없고 꿰뚫어 볼 수 없는 일들도 있는데,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주어야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아직 사람에게 알려 주지 않은 일, 미지의 일은 사람이 알 수 있겠느냐? 사람이 예측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이 밖에,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진리를 얻어 진리 실제를 갖추고, 수많은 진리의 본질을 깨닫고, 시시비비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사람에게는 모든 사물을 통제하고 주관할 능력이 있겠느냐?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람과 하나님의 차이점이다. 피조물은 영원히 진리의 원천으로부터 진리를 얻을 뿐이다. 사람에게서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사람이 진리이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공급해 줄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차이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너는 진리를 받아들이기만 할 수 있을 뿐, 진리를 공급해 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너를 진리를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너를 진리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진리의 화신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공급하는 원천이요, 모든 사물을 주관하고 주재하는 원천이요, 또한 만사 만물을 판단하는 유일한 준칙이자 기준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화신이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3)> 중에서
하나님의 진리 선포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본질을 발현한 것이지, 인류가 종합한, 사람이 생각하는 각종 긍정적인 사물과 가르침에 근거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고 진리이며, 인류가 의지해 생존해야 할 유일의 법칙이자 토대이다. 반면, 이른바 사람의 각종 ‘신조’에서 비롯된 것들은 전부 그릇되고 황당한 것이고, 하나님에게 정죄된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의 원천이나 근거는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해 그의 성품과 본질을 발현한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으며, 하나님은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므로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말씀은 진리이다.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규정하고 정의하고 바라보고 인식하든, 하나님 말씀은 영원히 진리이며, 이 사실은 언제까지고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되든, 이 패괴되고 사악한 인류에게 어떻게 정죄받고 버림받든 한 가지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바로 하나님 말씀은 영원히 진리이며, 사람은 그 사실을 영원히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인류는 모두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사람이 추앙하는 전통문화와 과학 지식은 영원히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할 것이다. 이는 절대적인 사실이다. 인류의 전통문화와 생존의 길은 시간이 바뀌고 오래되었다고 해서 진리로 변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 말씀 역시 인류가 정죄하고 망각했다고 해서 사람의 말이 되지는 않는다. 진리는 영원히 진리이며, 이 본질은 언제까지고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사실이 존재하느냐? 사람이 종합한 그 속담들의 기원은 사탄이고 사람의 상상과 관념이며, 혹은 사람의 혈기와 패괴 성품에서 비롯된 것으로, 긍정적인 사물과 어떤 관계도 없다. 반면,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본질의 발현이자 하나님 신분의 발현이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 말씀들을 선포했겠느냐? 왜 이 말씀들을 진리라고 하겠느냐? 만물의 모든 법칙과 규율, 근원, 본질, 본모습, 비밀은 다 하나님이 주재하며 하나님 손안에 있기에 그 모든 규율과 본모습, 사실, 비밀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있다. 하나님은 만물의 모든 근원을 알고 있고, 그 근원이 과연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이 만물에 대해 내린 정의만이 가장 정확하다. 또한,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인류가 살아가는 기준이자 원칙이며, 인류가 의지해 생존하는 진리이자 법칙이다. 반면, 인류가 사탄에게 패괴된 후 의존해 살아가는 사탄의 법칙과 이론들은 한 가지 측면에서는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에 위배되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하나님이 만물의 법칙과 규율을 주재한다는 사실에 위배된다. 사탄에 속하는, 사람의 각종 이론은 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 속에서 생겨난 것이자,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사탄은 어떤 역할을 하겠느냐? 먼저, 사탄은 진리를 사칭한다. 두 번째로 사탄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이 모든 규율과 법칙을 교란하고 파괴하고 짓밟는다. 그렇기에, 사탄에게서 온 것들은 사탄의 본질과 너무도 어울리며, 사탄의 사악한 속셈과 위선, 위장, 영원불변한 야심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패괴된 인류가 사탄에게서 비롯된 그 철학과 이론을 분별하든 못 하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것을 떠받들고 퍼뜨리고 추종하든, 패괴된 인류가 그것을 얼마나 오래 추앙하고 숭배하고 전해 왔든 그것이 진리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것의 본질과 근원, 원천은 사탄이고, 하나님과 진리에 적대하는 사탄이기에 영원히 진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영원히 부정적인 사물이다. 진리와 대조해 보지 않았을 때, 그것은 선하고 긍정적인 것을 사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리로 폭로하고 해부하면, 그것은 완벽하지 않으며 굳게 설 수 없고, 아주 빨리 정죄되고 버려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는 하나님이 지은 인류의 정상 인성의 필요에 부합하지만,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것들은 인류의 정상 인성의 필요에 위배된다.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을 비정상으로 만들며, 과격하고, 편협하고, 교만하고, 어리석고, 사악하고, 강퍅하고, 흉악하게 만든다. 심지어는 안하무인이 되는데, 그게 심각해지면 정신이 이상해져서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며, 정상적인 사람, 평범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고, 반드시 초인이나 비범한 사람, 고급 인간이 되려고 한다. 그것은 사람의 인성과 본능을 왜곡한 것이다. 진리는 사람이 더 본능적으로 정상 인성의 규율과 법칙, 그리고 하나님이 제정한 모든 규율대로 생존하고 살아가게 한다. 하지만 그 이른바 속어나 사람을 미혹하는 가르침들은 사람의 본능에 위배되며, 하나님이 예정하고 제정한 법칙에서 벗어나게 한다. 심지어는 사람이 정상 인성의 궤도에서 벗어나 극단적인 일, 정상인이 행해서도, 상상해서도 안 되는 일을 하게 만든다. 이 사탄의 법칙들은 사람의 인성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정상 인성과 정상 인성의 본능을 상실하게 한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1)> 중에서
인류에게 사회 과학이 생긴 이래, 과학과 지식은 인류의 마음을 차지했으며, 나아가 인류를 지배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로 인해 인류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과 유리한 여건을 잃게 되었고, 인류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자리는 점점 사라졌다. 하나님의 자리가 없는 인류의 내적 세계는 어둡고 절망적이며 공허하다. 뒤이어 사회 과학자, 역사학자, 정치가들이 일어나 사회 과학론, 인류 진화론 등을 발표하여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했다는 진리에 어긋나는 관점을 인류의 머리와 마음에 채워 넣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만유 창조를 믿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고, 반대로 진화론을 믿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다. 또한 갈수록 많은 사람이 하나님 사역의 기록과 구약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신화나 전설로 대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존엄과 위대함은 희미해졌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한다는 믿음도 아득해졌다. 사람은 더 이상 인류의 존망이나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인류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공허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이 오늘날 어디에서 사역하는지, 인류의 종착지를 어떻게 주재하고 계획하는지를 적극적으로 찾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어느덧 인류의 문명은 이렇게 기대와 멀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많은 사람이 이런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오히려 죽은 사람이 더 행복하겠다고 생각할 정도다. 지난날 문명이 발전했던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조차 이런 원망을 품고 있다. 하나님의 인도가 없기에 통치자나 사회학자가 아무리 머리를 짜내 인류의 문명을 유지하려 해도 소용이 없다. 그 누구도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없으므로 인류 마음속의 공허함을 메우지 못하고, 어떤 사회적 담론도 공허의 질곡에서 사람을 구하지 못한다. 과학, 지식, 자유, 민주, 즐김, 안락으로 사람이 얻는 것은 그저 일시적인 위안에 불과하다. 인류는 이런 것들이 있어도 불가피하게 계속 죄를 짓고, 사회의 불공평을 원망한다. 또한 이런 것들이 있어도 인류의 탐구하려는 갈망과 욕망이 멈추지는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했기에, 인류의 무의미한 희생과 탐구는 사람에게 점점 더 많은 고뇌를 안겨 줄 뿐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불안에 떨며 인류의 미래와 앞길을 어떻게 직면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과학과 지식을 두려워하고, 공허함을 더욱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 네가 이 세상의 자유 국가에 있든, 인권이 없는 국가에 있든 너는 인류의 운명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네가 통치자이든, 통치를 받는 자이든 너는 인류의 운명, 비밀, 종착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떨쳐 버릴 수 없고, 영문 모를 공허함을 떨쳐 버릴 수도 없다. 사회학자는 인류의 이러한 공통적 현상을 가리켜 사회 현상이라 말하지만, 나서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위인은 한 명도 없다. 결국 사람은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리와 하나님의 생명은 어떤 사람도 대신하지 못한다.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사회,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정한 사회뿐만이 아니다. 인류에게는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 공급이 필요하다. 인류는 하나님의 생명 공급과 구원을 얻어야만 필요와 탐구욕, 그리고 심적 공허함을 해결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이나 보살핌을 얻지 못하는 국가와 민족은 몰락과 흑암으로 나아갈 것이고, 종국에는 하나님에 의해 멸망될 것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부록 2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 중에서
고대 문화의 지식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몰래 훔쳐 마왕과 그 자손에게 넘겼다. ‘사서오경(四書五經)’은 사람의 사상과 관념을 또 다른 패역의 시대로 끌어갔으며, 사람이 ‘서경(書經)’의 편자를 더욱 숭배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관념은 한층 더 깊어졌다. 어느덧 마왕은 사람 마음속의 하나님을 무정하게 내쫓고, 득의양양하게 사람의 마음을 차지했다. 그때부터 사람은 추악한 영혼을 가지게 되었고, 마왕의 몰골을 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마왕의 사악한 독은 하루하루 사람 안에서 퍼져 나갔고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사람은 더 이상 자유를 누릴 수 없었고, 마왕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마왕에게 사로잡혀 항복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어린 마음에는 오래전에 ‘무신론’이란 암세포가 심어졌다. “과학과 기술을 배워 4대 현대화를 실현하자. 세상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그릇된 이론을 교육시키고, 말끝마다 “우리의 근면한 노동으로 아름다운 삶의 터전을 꾸려 가자.”라고 외쳐 대며 누구나 어린 시절부터 이에 동참하여 조국에 보답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마왕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자기 앞에 오게 만들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공로(하나님이 손으로 온 인류를 받들고 있는 공로)를 자신에게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없으며, 게다가 뻔뻔하게 하나님의 백성을 빼앗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고, 자신은 쥐처럼 책상 위로 ‘뛰어올라’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하나님’으로 간주하고 경배하게 한다. 이 악당들아! 입으로 “세상에는 하나님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은 자연법칙에 의한 변화이고, 비는 안개가 찬 공기를 만나 응결되어 작은 물방울로 맺힌 후 땅에 떨어지는 것이다. 지진은 지형의 변형이 초래한 지각의 흔들림이고, 가뭄은 태양 표면의 핵자가 깨지고 갈라지면서 공기의 습기가 사라진 현상이다. 이것이 자연 현상이지 어떻게 하나님의 행사일 수 있겠는가?”라고 외치며 끔찍한 소문을 퍼뜨리는구나. 그뿐만 아니라 “사람은 고대 유인원에서 진화한 것이고, 지금의 세계는 약 억만년 전의 원시 사회가 교체되며 형성된 것이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국민의 두 손에 달려 있다.”라는 등의 입에 담기도 민망한 논리를 외치는 자도 있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화상을 벽에 걸거나 책상 위에 봉안하고 경배하게 한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치면서 스스로를 신으로 간주하고, ‘사정없이’ 하나님을 지계(地界) 밖으로 밀어내며,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마왕 노릇을 하려 드는구나. 실로 터무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사탄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하나님에게 맞서고 있다. ‘오랜 문화유산’이니 소중한 ‘고대 문화의 지식’이니 ‘도가 학설, 유가 학설’이니 ‘공자의 경전, 봉건적 예교’니 하는 것들은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간다. 현대의 선진적인 과학기술과 발달한 공업, 농업, 상업은 그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고대 ‘유인원’이 가져다준 봉건적 예교만을 강조하면서 고의로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하고, 대적하고, 무너뜨리며 오늘날까지 사람을 해쳐 왔다. 게다가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키려[1] 한다. 사람은 봉건적 예교의 가르침을 받고 고대 문화의 지식을 물려받아 크고 작은 마귀로 물들어 버린 지 오래다.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접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오심을 즐겁게 맞이하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얼굴에 살기가 가득하고, 여기저기 독살스러운 기운이 잔뜩 올라와 있으며, 하나님을 육지에서 몰아내려 한다. 손에 칼을 쥔 채 진을 치고 하나님을 ‘말살’하려 한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사역과 진입 7>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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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어삼키려[呑噬]: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은 마왕의 잔혹한 행위를 가리킴.
지금 너의 지식수준이 얼마나 높든, 학벌과 학력이 얼마나 뛰어나든 내가 지금 얘기하는 것은 지식에 대한 사람의 관점과 지식에 대한 나의 관점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지식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아느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인류의 과학이 발달하기를 바라고 인류가 과학 지식을 더 많이 깨닫기를 바라지 사람이 너무 뒤떨어져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옳은 말이지만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봉사하도록 이용하는 것이지 이런 것들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보기에 얼마나 좋든 이런 것들은 모두 진리가 아니며 진리를 대체할 수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리를 선포해 사람을 바꾸고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도 말씀에서 간혹 유가 학설이나 사회 과학 같은 지식 방면의 관점과 견해들을 언급하긴 하지만 그저 상징적으로 일부 언급하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 말씀의 행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인류의 지식을 혐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류의 이런 지식들 속에는 간단한 문구나 도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일부 사상 관점이 포함돼 있고, 사람의 황당무계함, 편견, 그리고 사탄의 독소도 포함돼 있다. 어떤 지식들은 심지어 사람을 현혹시키고 패괴시키기도 한다. 이런 지식들이 바로 사탄의 독소이자 악성 종양으로, 사람이 일단 받아들이고 파악하면 사탄의 독소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악성 종양이 되어 온몸으로 퍼질 수 있다. 만약 하나님 말씀의 치료, 진리의 치료를 받지 못하면 사람은 죽게 된다. 그래서 배운 지식이 많을수록, 파악한 지식이 많을수록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 어렵고 오히려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한다. 왜냐하면 지식은 모두 사람이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으며 대부분 다 사람의 생활과 관련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학교에서 지식은 많이 배울 수 있지만 지식의 출처, 그리고 지식과 영적 세계와의 관계는 조금도 명확히 볼 수 없다. 사람이 배우고 파악하는 지식은 대부분 다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위배된다. 특히 유물론과 진화론은 모두 무신론의 궤변과 사설에 속하므로 의심할 여지 없이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황당한 이론이다. 만약 네가 역사책들, 명인의 저서와 위인전기들을 읽거나 어떤 분야의 과학 기술을 배우면, 너는 무엇을 얻게 되느냐? 예를 들어, 사람이 물리를 배워 일부 물리 원리와 뉴턴의 학설 혹은 다른 학설들을 익혔다고 해 보자. 사람이 이것들을 배워 마음에 새기면 이것들의 통제를 받는다. 이것들은 네 내면에서 너의 생각을 주도한다.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너는 ‘하나님 말씀에는 어째서 지구 인력에 대한 이야기가 없지? 왜 우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지? 달에 공기가 있는지, 지구의 산소는 얼마나 되는지 하나님은 어째서 이러한 것들을 말씀하지 않으실까? 하나님은 이것들을 밝혀 주셔야 해. 이것들이야말로 밝힐 필요가 있는 것이고, 인류에게 말씀해 주셔야 하는 것들이야.’라고 여기게 된다. 네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너는 진리와 하나님 말씀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네가 배운 지식 이론을 주요한 위치에 둘 것이다. 너는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대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지식적인 것은 사람에게 그릇된 감각을 주어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도록 만든다. 너희가 믿든 안 믿든, 너희가 오늘 이를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언젠가 너희는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지식은 사람을 멸망으로 이끌며, 사람을 지옥으로 이끌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너희는 간파할 수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너희 중 지식을 아주 많이 갖춘 사람, 학력이 아주 높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풍자하거나 비꼬는 것이 아니고 그저 사실을 얘기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너희가 이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천천히 이 방면에 대해 인식하라는 것이다. 지식이라는 것은 너에게 머리와 생각을 써서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을 분석하고 대하도록 한다. 지식은 네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데 방해물이자 장애물이 되고, 너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들고, 네가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너는 이미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겠느냐? 어떤 지식들이 실용적이고 어떤 지식들이 사탄에게서 비롯된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인지 분별해야 한다. 만약 네가 받아들인 것이 모두 무신론의 지식, 엉터리 지식이라면 그것은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로막을 것이고, 너와 하나님의 정상적인 관계뿐 아니라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 역시 교란할 것이며, 너의 생명 진입도 방해할 것이다. 너는 이렇게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옳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성품 변화를 위한 실행의 길> 중에서
지식과 경험, 교훈 같은 것들은 모두 진리가 아니고 근본적으로 진리와 아무 관련도 없다. 심지어 그런 것들은 진리에 위배되고 하나님에게서는 정죄된다. 예를 들어, 지식의 경우, 역사를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인류의 역사와 어떤 국가나 민족의 역사, 현대사, 고대사, 나아가 일부 야사까지 이런 지식과 역사서는 모두 어떻게 생겨났느냐? (사람이 썼습니다.) 그럼 사람이 쓴 그런 것들이 진실한 역사에 부합하겠느냐? 사람의 사상 관점은 하나님의 행사 원칙이나 방식, 방법과 배치되지 않겠느냐? 그럼 사람이 하는 그런 말들이 진실한 역사와 관련이 있겠느냐? (관련 없습니다.) 관련 없다. 따라서 역사서에 아무리 사실과 일치하게 기재돼 있더라도 그건 지식일 뿐이다. 역사학자들의 말재간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역사를 아무리 논리적으로 명확히 얘기해도 듣고 나면 결국 어떤 결론을 얻겠느냐? (그런 일들을 알게 될 뿐입니다.) 그런 일들을 알게 될 뿐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것들을 얘기하는 것이 단지 네게 한 가지 일을 알려 주려는 것뿐이겠느냐? 그는 일정한 사상을 네게 주입하려는 것이다. 그가 주입하는 사상의 핵심은 무엇이냐? 우리는 그것을 분석하고 해부해야 한다. 그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입하려는 것인지 예시를 들면 너희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결국 한마디 말을 정리해 낼 수 있다. 인류의 역사가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한 가지 사실은 바로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지식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 지식은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방식이나 방법과 관련이 있느냐? (없습니다.) 사실상 상반되고 상호 위배되거나 저촉된다. 그럼 그가 네게 이것을 주입하는데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거나 이방인이라면 너는 듣고 나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너는 이 말을 어떻게 보겠느냐? 우선, 역사학자나 역사서는 그런 일들을 전부 열거하고 충분한 증거나 역사적 사건으로 이 말의 정확성을 증명한다. 너는 처음에는 아마 단지 책에서만 이 말을 배운 적이 있고 그저 이 말을 알고 있을 뿐일 것이다. 그런 일들을 알기 전에 너는 한 가지 차원이나 정도에서만 이 말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그런 역사적 사실을 듣고 난 뒤에는 이 말을 더 깊이 인정하고 수긍하게 될 것이다. 너는 절대 “그렇지 않은 일들도 있어요.”라고 말하지 않고 “맞아요. 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류는 그렇게 발전했어요.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됐다고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 일에 대해 그런 인지를 갖게 될 때, 너는 마음속으로 네 처신과 사업, 생활, 주위의 사람과 일, 사물을 어떤 관점과 태도로 대하겠느냐? 그런 인지는 네 태도를 바꾸지 않겠느냐? (바꿀 것입니다.) 일단 그럴 것이다. 그럼 어떻게 바꾸겠느냐? 네 인생 방향과 처세 방식을 인도하고 바꾸지 않겠느냐? 아마 예전에 너는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 ‘좋은 사람은 일생이 평안하다.’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된다잖아. 벼슬길에 오르고 싶으면 누구누구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해. 그는 내 편이 아니니까 그를 발탁해야 하더라도 발탁하면 안 돼.’ 이렇게 고민하면 네 태도는 달라지고 금세 바뀐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생기겠느냐? 네가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된다’는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생긴다. 너는 수많은 사실을 듣고 나서 이런 관점이 인류의 현실 생활 속에서 얼마나 정확한지 더욱 확신하게 되고, 네가 행동하고 처신할 때 이런 관점을 이행하여 앞으로의 생활과 앞길을 추구해야겠다고 깊이 느끼게 된다. 이런 사상 관점이 너를 바꾸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를 바꾸는 동시에 너를 패괴시킨다. 바로 그런 것이다. 이런 지식이 너를 바꾸고 패괴시킨다. 그럼 근본적으로 보면 아무리 사실과 일치하게 역사를 말하더라도 결국 그런 말을 정리해 내고 그런 사상을 네게 주입한다. 그럼 그 지식은 진리의 화신이겠느냐, 아니면 사탄의 논리겠느냐? (사탄의 논리입니다.) 바로 그거다. 내가 충분히 세세하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이제 이해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생을 두 번 더 살아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살아갈수록 자신이 어리석고 충분히 모질지 못하다고 느끼고 좀 더 모질고 약아야 한다고, 좀 더 음험하고 나쁘고 악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살인을 할 수 있다면 나는 방화를 하겠어. 그가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나는 열 명을 죽이겠어. 그가 감쪽같이 사람을 죽인다면 나는 사람을 해치고 나서도 그에게 알리지 않고 그의 가족이 삼대에 걸쳐 내게 감사하게 하겠어!’ 이게 바로 사탄의 철학과 지식, 경험과 교훈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사실상 해를 입히고 패괴시킨다. 따라서 이 세상은 어떤 지식을 전파하고 퍼트리든, 그와 동시에 네게 일종의 사상 관점을 주입할 것이다. 만약 네가 분별할 줄 모른다면 해를 입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런 지식은 민간에서 비롯된 것이든 정부에서 비롯된 것이든, 소수의 사람이 숭배하는 것이든 절대다수의 사람이 숭배하는 것이든 모두 진리와 무관하다. 진리는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다. 그것의 정확성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인정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 자체가 바로 진리이고, 아무도 그것을 바꾸거나 부인할 수 없다. 진리는 영원히 진리이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8조 그는 사람들이 진리와 하나님이 아닌 오직 그에게 순종하도록 한다(3)> 중에서
마귀에 속한 사람은 모두 스스로를 위해 살아간다. 그런 사람은 주로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사람은 재물 때문에 죽고, 새는 먹이 때문에 죽는다.” 등등 사탄의 말을 인생관이나 좌우명으로 여기며, 세상의 마왕, 위인, 철학자들의 말을 생명으로 삼는다. 특히 중국인들이 ‘성인’으로 떠받드는 공자의 말 중에서 대부분은 이미 사람의 생명이 되었다. 이것 외에도 불교나 도교의 명언, 유명인 입에서 나온 전형적인 말들은 모두 사탄 철학, 사탄 본성의 정수이자 사탄 본성에 대한 최고의 설명이고 해석이다. 인류의 마음에 주입된 이러한 독소는 모두 사탄에게서 온 것이며,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하나도 없다. 그 마귀적인 말들은 또 하나님의 말씀과 대립된다. 여기에서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는 하나님에게서 오고, 사람을 해하는 모든 부정적인 사물은 다 사탄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통해 그 사람의 본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에게 속하는지를 알 수 있다. 사탄은 국가 정부, 유명 인사와 위인들의 교육과 가르침을 통해 사람을 패괴시키며, 그들의 마귀적인 말들은 사람의 생명 본성이 되었다.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말은 사탄의 명언으로, 이미 모든 이의 내면에 침투해 생명이 되었다. 이 밖에 처세 철학에 관한 말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탄은 각국의 전통문화를 이용해 사람을 교육하고 미혹하고 패괴시킴으로써 끔찍한 재난의 망망대해로 빠뜨리며, 사람은 결국 사탄을 섬기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께 멸망당하고 만다. 사회에서 수십 년간 공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당신은 관직에 오르고 벼슬길이 그렇게 형통하신데, 당신을 그렇게 만들어 준 명언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한 가지만 알고 있습니다. 바로 공직에 있으면 뇌물 주는 자를 꾸짖지 않는다는 것과 아부 없이는 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탄 철학인 이 말에 기대어 관직에 올랐다. 이 말이 그 사람의 본성을 대변하지 않겠느냐? 공직에 오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그의 본성이 되었고, 관직에 올라 사업을 이루는 것은 그의 목적이 되었다. 사람의 삶과 행위, 사람됨에는 아직도 사탄의 독소가 많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처세 철학, 일 처리 방식, 사람의 좌우명에는 모두 큰 붉은 용의 독소가 가득하며, 이것들은 모두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뼛속과 핏속에 흐르는 것은 모두 사탄의 것이다. 공직에 있는 자, 권세를 잡은 자, 성공한 자에게는 모두 그들만의 성공의 길, 성공 비법이 있다. 그 비법이 곧 그의 본성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들은 세상에서 큰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 뒤에 숨겨진 음모와 간계를 아무도 꿰뚫어 보지 못한다. 이는 그들의 본성이 매우 음험하고 악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는 사탄에 의해 심하게 패괴되었고, 모든 사람의 혈액 속에 흐르는 것은 사탄의 독액이다. 사람의 본성이 패괴되고 사악하고 불온적인 것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사탄의 철학과 사탄의 독소로 점철되고 뼛속까지 물들어 완전히 사탄의 본성 본질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적대시하는 것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라는 말은 사탄의 철학으로, 인류에게서, 그리고 모든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주입되어 자리 잡고 있으므로 풍조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람도 실생활에서 이 말을 접했을 때 차츰 묵인하게 되고 이 말이 사실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과정 아니겠느냐? 이 말에 대한 이해도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거나 자신이 직접 겪은 일에 기반하여 각기 다른 정도로 해석하고 수긍한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이 이 말을 얼마나 체험했는지는 차치하고, 이 말이 사람의 마음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은 무엇이겠느냐? 너희 모두를 포함해 이 세상의 인류에게서, 성품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돈을 숭배하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이를 지우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을 것이다! 사탄이 사람을 참 심각하게도 패괴시켰다! 사탄은 바로 돈으로 사람을 유혹하여 사람이 돈을 숭상하고 물욕적인 것을 숭상하도록 패괴시킨 것이다. 사람이 돈을 숭상하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너희는 돈 없이는 이 세상에서 단 하루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사람은 돈을 많이 가질수록 높은 지위를 누리고 존귀해진다. 기를 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과 달리 부자는 높은 지위를 누리고 거만을 떨며 큰소리를 치면서 오만 방자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 말과 이런 풍조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겠느냐? 많은 사람이 돈을 위해 어떠한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지 않겠느냐?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 존엄성과 인격을 잃게 되지 않겠느냐? 수많은 사람이 돈 때문에 본분을 이행할 기회와 하나님을 따를 기회를 놓치지 않겠느냐? 진리를 얻고 구원받을 기회를 놓치게 되는데, 이는 사람에게 가장 큰 손해 아니겠느냐? 사탄은 이런 방식, 이런 말로 사람을 이 정도로 패괴시켰다. 사탄의 속셈이 음흉하지 않으냐? 이는 아주 악랄한 수법이 아니더냐? 이런 말이 유행할 때 처음에는 수긍하지 못하던 네가 이를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너라는 사람의 마음은 사탄에게 철저히 빼앗겼다. 그래서 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말대로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너는 이 말에 벌써 얼마나 영향을 받았더냐? 참도이고 진리임을 알면서도 추구할 힘이 없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뻔히 알면서도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으며, 진리를 얻기 위해 고난을 감내하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미래와 운명을 희생하더라도 하나님과 끝까지 맞선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어떻게 행해도, 너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알게 되어도, 너는 오로지 이 말만 고집하고 집착하며 자신을 바친다. 즉, 이 말이 네 사상을 미혹하고 통제하며, 네 행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이 말에 네 운명이 좌우될지라도 돈에 대한 추구를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 사탄의 말에 좌지우지되어 끌려다니는 것은 사탄에 의해 미혹되고 패괴된 것 아니겠느냐? 사탄의 철학 사상과 사탄 성품이 네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것 아니겠느냐? 네가 계속 돈만 추구하고 진리 추구는 포기한다면 이는 사탄이 너를 미혹하려는 목적을 달성한 것 아니겠느냐? 사실이 바로 이러하다. 그럼 너는 사탄이 너를 미혹하고 패괴시키는 것을 느꼈느냐? 너는 느끼지 못했다. 너는 사탄이 네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지 못했고, 사탄이 배후에서 한 짓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런데 네가 사탄의 사악함을 볼 수 있겠느냐? 사탄이 어떻게 인류를 패괴시키는지 알 수 있겠느냐? 사탄은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패괴시킨다. 사람은 막으려고 해도 막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사탄의 사상, 관점, 사탄에게서 비롯된 사악한 것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후에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만 아니라 보물처럼 끌어안고 소중하게 여기면서 사탄의 지배를 받고 농락당한다. 이렇게 사람은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사탄에게 순종하게 되며 사탄에 의해 갈수록 패괴된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5> 중에서
지금도 여전히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이 실용적이고 맞는 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분별력이 있겠느냐? 그가 진리를 깨달았겠느냐? 그런 사람은 사상 관점에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만약 교회에서 누가 이 말을 퍼뜨린다면 그는 속셈이 있고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그는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로 자신에 대한 남들의 우려나 질의를 불식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 뜻인즉슨 남들이 그가 사역할 줄 알고 쓸 만한 사람이라고 믿게 한다는 말이다. 그는 이런 속셈과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겠느냐? 틀림없이 그렇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늘 나를 믿지 않고 의심해. 어쩌면 언젠가 내 자그마한 문제점을 발견하면 바로 나를 교체해 버릴지도 몰라. 항상 마음이 놓이지 않는데 어떻게 사역을 하겠어?’ 따라서 그가 이런 관점을 퍼뜨리는 것은 하나님 집이 자기를 의심하지 않고 믿게 만들고, 자기가 마음 놓고 사역하게 내버려두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목적이 달성된다. 만약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집에서 그의 사역을 감독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올바르게 대할 것이고, 그게 자신을 지키는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 집 사역을 책임지는 것임을 알 것이다. 그 역시 패괴를 표출하긴 하지만 하나님에게 자신을 감찰하고 지켜 달라고 기도하거나, 악을 행하면 하나님의 징벌을 받겠다고 하나님에게 맹세할 수 있다. 이러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겠느냐? 왜 황당한 이론을 퍼뜨려 사람을 미혹하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냐? 일부 리더 일꾼은 하나님 선민의 감독이나 윗선 리더 일꾼이 사역을 파악하는 것에 대해 늘 반발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말라는 말도 있는데, 당신들은 왜 항상 나를 감독하는 거야? 나를 믿지도 못하면서 왜 쓰는 거지?’ 만약 그에게 사역 상황이나 사역 진도를 물어보고 그 개인의 내적 상태를 물으면 그는 더더욱 불만을 갖는다. ‘이 사역은 내게 맡겼으니 내 권력 범위 안에 있는데 당신들은 왜 내 사역에 개입하는 거야?’ 그는 감히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못하고 빙빙 돌려 말한다.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속담도 있잖아요. 의심이 너무 많으시네요!” 그는 너를 정죄하고 네게 낙인을 찍기까지 한다. 만약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분별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가 의심이 많나요? 그럼 제가 잘못했네요. 제가 간사했어요! 당신 말이 맞아요.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말아야 해요.” 이는 미혹된 것 아니겠느냐?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이는 허튼소리다! 그 사악한 자는 음험하고 간사해서 속담을 진리로 여겨 이 멍청이를 미혹했고, 결국 그 멍청이는 그 말에 정말 미혹되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게, 저 사람한테 미안하게 됐네. 저 사람이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까지 했는데 나는 왜 저 사람을 못 믿을까? 사역을 이런 식으로 할 게 아니라 저 사람을 격려해 줘야 해. 그에게 사역에 관한 일은 캐물으면 안 돼. 저 사람을 쓰려면 믿어야 하고 알아서 하게 내버려둬야 해. 저 사람을 속박하지 말고 능력을 발휘할 여지를 줘야 해. 저 사람은 그럴 능력이 있어. 그럴 능력이 없다고 해도 어차피 성령이 역사하시잖아!’ 이게 다 무슨 논리란 말이냐? 진리에 부합하는 말이 한마디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듣기에는 다 맞는 말이다. ‘사람을 속박하면 안 돼.’, ‘사람은 뭘 할 수 없고 전부 성령이 역사하시는 거야. 성령이 모든 걸 감찰하시니까 우리는 의혹을 품을 필요 없어. 하나님이 전적으로 책임지시잖아.’ 사실 이는 다 어떤 말이겠느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멍청이가 아니겠느냐? 그들은 이만한 일조차 간파하지 못하고 그 말에 미혹됐다. 대다수 사람이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을 진리로 여겨 대하고 모두 이 말에 미혹되고 얽매이며, 사람을 뽑고 쓸 때도 이 말에 교란되고 영향받고 심지어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수많은 리더 일꾼이 교회 사역을 파악하거나 사람을 발탁하고 골라 쓸 때 늘 어려움과 우려를 겪다가 결국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로 그저 자신을 위로하고 만다. 사역을 검사하고 따져 물을 때마다 그들은 생각한다.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말라잖아. 형제자매를 믿어야 해. 게다가 성령이 감찰하고 계시잖아. 늘 사람을 의심하고 감독하면 못써.’ 이는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말에 영향을 받은 것 아니겠느냐? 이 말에 영향을 받으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첫째, 마음속에 “일단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마라.”라는 관점이 있으면 사람의 사역을 검사하고 지도하겠느냐? 사람의 사역을 감독하고 체크하겠느냐? 만약 누구를 쓰든 다 믿어서 검사하지도, 지도하지도, 감독하지도 않는다면 그게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겠느냐? 교회의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할 수 있겠느냐? 그게 하나님의 부탁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겠느냐? 둘째,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네 본분을 지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처세 철학, 사탄의 음모와 계략을 진리로 여겨 준수하고 실행했다. 이는 사탄에게 순종하고 사탄 철학에 기대 살아가는 것 아니냐? 너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너는 완전히 망나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제쳐 놓고 오히려 사탄의 말을 진리로 여겨 실행하다니, 이는 진리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 집에서 사역하지만 네가 일을 처리하는 원칙은 처세 철학과 사탄의 논리이다. 이런 자는 어떤 사람이냐? 이런 자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심히 욕되게 하는 사람이다. 이 성질은 무엇이냐? 이는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정죄하고 공개적으로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런 성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탄의 헛소리와 사탄의 처세 철학이 교회에서 횡행하게 했다. 너는 사탄의 공범자가 되어 사탄이 교회에서 일을 저지르고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도록 도왔으니 문제의 성질이 아주 심각하지 않으냐?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부록 1 무엇이 진리인가> 중에서
그럼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실패하거나 좌절을 겪거나 그릇된 길을 걷더라도 인정하지 않고 완강하게 계속해 나가는 것, 실패해도 기죽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아무리 많은 사람이 지적하고 정죄해도 뉘우치지 않고 자신의 방향과 목표를 향해 분투하고 노력하고 추구하면서 어떤 대가도 따지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정신이다. 이런 정신은 상당히 고무적이지 않으냐?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말은 보통 어떤 상황에 쓰이겠느냐? 여러 가지 상황에 쓰이는데, 패괴된 인류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이런 말과 이런 정신이 존재한다. 그럼 사탄에게 속하는 인류가 이런 말을 만들어 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영원히 자신과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고, 자신의 취약하고 나약하고 무능한 면만을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 있고 위대하고 용맹스러운 면을 보게 하려는 것이며, 자신을 깔보지 않고 자신이 능력 있다고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네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할 수 있다고, 실패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으며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다고, 네가 그런 결심과 의지, 야심과 욕망만 있으면 다 이룰 수 있다고, 사람은 보잘것없지 않고 위대하다고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방인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네 마음의 크기가 네 무대의 크기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무척 좋아한다. “어머, 그럼 제가 십 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원하면 가질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벤츠 한 대를 원하면 가질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마음이 이렇게 크면 물건을 바로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황당한 이론이다. 솔직히 말하면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라는 말을 믿거나 인정하는 사람은 지극히 오만한 사람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어떤 말씀과 정반대되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을 인식하고 착실하게 처신하라고 한다. 사람은 패괴 성품과 결점,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사람은 모두 완벽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떻게 처신하라고 훈계하느냐? (착실하게 처신하라고 하십니다.) 착실하게 처신하고 성실하게 피조물의 본위를 지키라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실패를 입에 올리지 말라고 하더냐?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러지 않는다. 그럼 사람이 그릇된 길을 걷거나 패괴 성품을 표출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느냐?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받아들이고 인정한 다음 인식하고 돌아서서 진리를 실행하라고 한다. 그런데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은 자신의 문제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고,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또한 죽어도 뉘우치거나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는 더더욱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운명이란 대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떻게 지배하고 안배하는지 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운명을 자신의 손에 쥐고 스스로 결정권을 가지려 한다. 그 밖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을 인식하고 정확하게 가늠하고 평가하며 무언가를 할 수 있으면 착실하고 성실하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잘해 내라고 하지만, 사탄은 사람에게 교만한 성품을 충분히 이용하고 발산하며 초인이나 위인, 심지어 초능력을 가진 사람,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탄의 철학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바로 틀려도 틀린 게 아니고, 불복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되고 염원과 목표도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럼 이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도 있지 않겠느냐?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고 그릇된 길을 걸을 수도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 외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갖은 방식과 음모로 자신의 야심과 욕망을 실현시킨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에 운명을 기다리고 운명에 순종하는 사람의 태도가 담겨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 사람은 운명을 완전히 자신의 손에 쥐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다스리려 하며, 자신이 앞으로 어느 길로 갈지, 복을 누릴지 아니면 어떻게 생활할지를 모두 스스로 결정하려 한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부록 1 무엇이 진리인가> 중에서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것은 재물을 주워도 갖지 말라나 기꺼이 남을 도우라는 말처럼 사람의 덕행에 대한 전통문화의 요구 중 하나다. 마찬가지로 이 측면의 덕행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지, 실행 가능한지 등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것 또한 사람에게 인성이 있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이나 준칙이 될 수 없다. 어쩌면 네가 정말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를 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행동거지를 매우 조심하며, 무슨 일을 하든 남을 먼저 고려하고 생각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굴지도 않아 매우 공평무사해 보일지도 모른다. 또한, 네게는 사회적인 책임감과 도덕심이 있어 네 주변 사람들, 너와 함께하고 왕래하는 사람들 눈에 고상한 인격과 인품을 지닌 것처럼 비칠지도 모른다. 네 행위는 한 번도 어떤 질책이나 비난을 받을 일이 없으며, 언제나 큰 칭찬, 나아가 감탄을 받을지도 모른다. 사람들 눈에 비치는 너는 진정으로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네 마음 깊은 곳에서 생각하는 것이 이러한 겉모습, 겉으로 보이는 행위와 일치하겠느냐?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네가 그렇게 행동하는 데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 있겠느냐? 분명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그 목적이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것이고 어둡고 사악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럼 그 목적이 어째서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것이고 사악한 것이겠느냐? 사람의 인성이 패괴 성품에 통제되고 조종되기 때문이다. 인성의 모든 생각, 그것은 사람이 말하든 말하지 않든, 드러내든 드러내지 않든 부정할 여지 없이 패괴 성품에 주도되고 통제되고 조종당한다. 이로 인해 사람의 속셈과 목적은 음험하고 사악하다. 사람이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를 행할 수 있든 없든, 이 측면의 덕행을 겉으로 제대로 보여 주든 그렇지 않든 그의 인성은 이러한 덕행에 영향을 받거나 통제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럼 진정으로 인성을 조종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에 가려진 인성 본질, 그것이 바로 사람의 본모습이다. 사람의 본모습은 곧 사람의 인성 본질이다. 사람의 인성 본질이란 과연 무엇이겠느냐? 주로 사람의 기호, 추구, 인생관, 가치관, 그리고 진리를 대하거나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등을 가리킨다. 이러한 것들만이 사람의 인성 본질을 대표할 수 있다. 단언컨대, 무릇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을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위욕이 매우 강하다. 그들은 패괴 성품에 지배되어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 마음속의 지위와 명망, 사회적인 지명도를 추구한다. 이러한 것들은 그들의 지위욕과 관계가 있으며, 그들이 좋은 덕행에 가려진 가운데서 추구하는 것들이다. 그러면 그들이 추구하는 이러한 것들은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전부 그들의 패괴 성품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며, 패괴 성품에 지배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어쨌든, 누군가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을 행할 수 있든 없든, 제대로 해낼 수 있든 없든 그의 인성 본질을 조금도 바꿔 놓을 수 없다. 이 말의 숨은 뜻은 바로 그것이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을 조금도 바꿔 놓을 수 없으며,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을 좌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일수록 위장과 가식에 능한 사람이고, 좋아 보이는 말과 행동으로 남을 미혹하는 사람이며, 본성이 간사하고 사악한 사람이다. 또 이런 사람일수록 지위와 권세를 깊이 사랑하고 추구한다.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덕행이 아무리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옳아도, 아무리 보기 좋아도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차마 밝힐 수 없는 추구와 본성 본질, 심지어 야심은 언제든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들의 덕행이 아무리 훌륭해도 인성 본질을 가릴 수는 없고, 그들의 야심과 욕망을 가릴 수도 없으며,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추악한 본성 본질을 가릴 수도 없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말은 더없이 황당하다. 또한, 야심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말과 행위로 차마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야심과 욕망을 숨기려 시도한다는 사실이 더욱 드러난다. 교회의 적그리스도나 악인들에게 대입해 보아도 좋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공고히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더 높은 명성을 얻기 위해 본분 이행 과정에서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를 수 있다. 심지어는 직장과 가정을 버리고, 모든 것을 팔아치운 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기도 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치른 대가와 겪은 고난 중 일부는 평범한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것들이다. 그들은 와신상담의 정신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증거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 않으며,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추구 목표는 지위와 권세, 그리고 하나님이 주는 상이다. 그들이 행한 것 중 진리와 관련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든, 마지막 결말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과연 그들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들이 표면적으로 살아 낸 좋은 행위로 그들의 결말을 정하겠느냐?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이러한 행위와 모습으로 다른 이를 바라보고 판단하는데, 그러면 상대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해 속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말을 실행했다고 해서 절대 그들의 덕행을 기억하거나 칭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야심과 그들이 지위를 추구하면서 걸어간 길 때문에 그들을 정죄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마땅히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사람을 판단하는 준칙을 분별해야 한다. 이 황당한 판단 기준을 철저히 부정하고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사람을 분별해야 한다. 사람이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는지, 어떤 길을 선택하고 걸어가는지 등에 근거하여 상대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인성을 지녔는지 정의 내려야 한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면 오류가 생기거나 잘못을 범하기가 너무 쉽다. 네가 사람에게서 온 원칙과 말로 다른 이를 그릇되게 분별하고 바라본다면, 그 일에서 진리를 위배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될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사람을 바라보는 근거가 옳지 않아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와 전혀 맞지 않으며, 심지어는 서로 적대되거나 다른 길을 가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남에게는 관대하라.”라는 덕행에 관한 말로 한 사람의 인성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런데 네가 굳이 그 말을 준칙으로 사람의 덕행을 판단함으로써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확정 짓고자 한다면, 진리 원칙을 완전히 위배한 것이다. 그러니 너는 분명 과오를 범할 것이며, 잘못을 저지르고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6)> 중에서
처세 철학 중에 “문제가 보여도 말하지 않아야 좋은 친구다.”라는 말이 있다. 좋은 친구라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의 문제점을 간파했어도 말해서는 안 되며,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들추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라는 것이다. 서로 기만하고 숨기고 음모를 꾸미며, 마음속으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솔직히 말하지 않고, 교활한 수법으로 그 관계를 지키는 것이다. 왜 그런 관계를 지키려 하겠느냐? 이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적을 만들어 자신이 수시로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상대의 단점을 들추거나 상대에게 상처를 주면 상대가 너의 원수가 되어 너에게 해악을 끼칠 것을 알고, 너 스스로도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것을 원치 않기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처세 철학을 취하는 것이다. 이 점으로부터 봤을 때 이런 관계의 두 사람을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없다. 마음을 나눈 사이는 더더욱 아니다. 그럼 이들은 과연 어떤 관계겠느냐? 기본적인 인간관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인간관계에서는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없고, 깊이 사귈 수 없으며,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도 없다. 또 자신의 마음에 있는 말, 자신이 본 상대의 문제점,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할 수도 없다. 상대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저 듣기 좋은 말만 찾아서 한다. 다른 사람들의 적의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감히 참말을 하지 못하고 원칙도 견지하지 못한다. 아무도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평안하게 살 수 있지 않겠느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말을 제창하는 이유는 이런 것 때문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남에 대한 경계심이 들어 있는, 완곡하고 간사한 생존 방법으로, 자기 보호에 그 목적이 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 누구와도 마음을 나눌 수 없을 것이며,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친한 친구가 하나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저 피차간에 서로 경계하고 이용하며 수작을 부리고 원하는 것을 취할 뿐이다. 그렇지 않으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말의 근본적인 목적은 남의 원망을 사거나 상대와 적이 되지 않고,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지키려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상처받지 않기 위한 수법이자 방식이다. 이 몇 가지 측면의 본질을 봤을 때, 사람의 덕행 중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요구를 고상하고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이것이 사람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누구에게도 원한을 사거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마지막에 상처 입는 사람은 너 자신이 된다고 말이다. 또한,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네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 누구라도 상처를 주는 순간 그 관계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는데, 그는 친하고 가까운 친구에서 네게 낯선 사람, 적으로 변할 것이다. 사람을 이렇게 가르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설령 네가 이렇게 행동해서 적을 만들지 않고 몇 명의 원수를 줄여 사람들에게 탄복과 동조를 샀다고 할지라도, 영원히 너와 친구가 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완벽하게 덕행의 기준에 도달한 것이겠느냐? 이는 기껏해야 처세 철학에 불과하다. 이런 말과 방식을 지키는 것을 좋은 덕행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이는 자식이 밖에서 맞고 왔을 때 부모가 “이 못난 녀석, 왜 똑같이 때려 주지 못한 거냐? 그놈이 너한테 주먹질을 하면 너는 발길질을 했어야지!”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올바른 방식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겠느냐? 이는 부추기는 짓이다. 부추기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손해 보지 않고 이익을 점하는 데 있다. 상대가 네게 주먹질을 했다고 해도 기껏해야 며칠 아플 뿐이다. 하지만 네가 상대에게 발길질을 한다면 더 심각한 결과가 초래되지 않겠느냐? 그 결과는 누가 야기한 것이겠느냐? (부모의 부추김이 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니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말과 이 일의 성질이 비슷하지 않으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말이 올바른 처세 방식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올바르지 않다. 그러니 이런 각도에서 볼 때, 그것은 사람에게 일종의 부추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남들과 함께할 때 지혜를 갖고 사람을 분별하라고, 올바른 방식과 방법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지혜로운 방식으로 남과 함께하라고 가르치겠느냐? 좋은 사람, 인성을 갖춘 사람을 만나면 진심으로 대하고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되, 도와줄 수 없으면 포용을 보이며 올바로 대하라고, 상대의 결점을 참아 주고 너에 대한 상대의 오해와 판단을 참아 주며 상대의 장점과 뛰어난 점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치겠느냐? 그것이 이렇게 사람을 가르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 가르침으로 사람이 마지막에 얻게 되는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을 정직하게 바꿔 놓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간사하게 만드는 것이겠느냐? 사람이 간사하게 변한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벽이 높아지고, 사람과 사람 간에 거리가 멀어지며, 관계도 복잡해진다. 이는 사람의 인간관계가 복잡해지는 것과 같다. 사람들 사이에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 사라지고, 상호 간에 경계심이 생겨난다. 이러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정상적이겠느냐? 사회 분위기가 좋을 리 있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말은 분명히 틀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가르치면 정상 인성을 살아 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광명정대하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없으며, 절대 긍정적인 성과를 얻을 수 없다.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고,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라는 말에는 때리고 들추는 두 가지 동작이 나온다. 하나는 때리는 것이고, 하나는 들추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정상적으로 지내려면 남을 때려서 되겠느냐? (안 됩니다.) 때리는 것이 사람들과 함께할 때 보여야 할 정상 인성의 태도나 행위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때리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은 행위이다. 얼굴을 때리든 때리지 않든 전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라’는 말은 아예 옳지 않다. 이 말의 주장대로라면 얼굴을 때리는 것만 안 되고 다른 곳을 때리는 것은 괜찮아 보인다. 얼굴을 때리면 맞은 사람의 얼굴이 빨개지거나 부어오르고 상처가 나서 남들 보기에 좋지 않고 품격이 떨어지기 때문이며, 남을 대하는 네 방식이 너무 거칠고 천박하고 고상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 다른 곳을 때리면 고상하겠느냐? 그 역시 고상하지 않다. 사실, 이 말의 중점은 어디를 때리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때리다’는 단어에 있다.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 때리는 방식으로 문제를 대하고 처리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옳지 않다. 그것은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혈기에서 비롯된 것이며, 당연히 진리를 실행하는 것도,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남의 체면을 깎아내리지는 않으며 말할 때도 좀 요령을 부린다. 얼굴을 때리지는 않지만 뒤에서 수작을 부리는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악수를 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발길질을 하고, 앞에서는 좋은 말을 하지만 뒤에서는 음모를 꾸미며 약점을 잡고 기회를 노려 복수하거나 죄를 뒤집어씌워 모함하거나 헛소문을 퍼뜨려 중상모략하거나 분쟁을 만들고 남을 이용해 해치는 것이다. 이 음험한 수작들이 얼굴을 때리는 행동보다 과연 얼마나 낫겠느냐? 얼굴을 때리는 성질보다 더 심각하지 않겠느냐? 더 음험하고 악독하고 비인간적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때려도 얼굴은 때리지 말라’는 말은 처음부터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 관점은 아예 그릇되었으며 거짓되고 위선적인 성질을 지닌, 외식하는 수단이므로 더더욱 증오스럽고 역겹고 혐오스럽다. 이제 우리는 사람을 때리는 것이 혈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가 뭐라고 사람을 때린단 말이냐? 법적으로 권한을 부여받았느냐, 아니면 하늘이 네게 그런 권리를 주었더냐? 그런 것도 아니면서 왜 사람을 때리려 하느냐? 만약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지낼 수 있다면, 올바른 방식으로 함께하고 사귀면 된다. 하지만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없다면, 혈기를 내세우고 무력을 쓸 게 아니라 헤어지면 그만이다. 이는 인성의 양심과 이성의 범위 안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혈기를 내세우면 얼굴이 아니라 다른 곳을 때린다고 할지라도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는 정상적으로 지내는 것이 아니다. 이는 원수들이 함께 지내는 방식이지 사람들 사이에서 정상적으로 지내는 방식이 아니며, 인성과 이성의 범위를 뛰어넘은 것이다. 그럼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에서 ‘들추다’라는 말은 좋겠느냐? 이 ‘들추다’는 단어에 하나님 말씀에서 사람을 드러내고 폭로하는 그런 의미가 들어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인류의 언어를 통해 이 ‘들추다’는 단어에 그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악의적으로 남을 폭로하는 성질을 갖고 있는데, 사람의 문제점이나 결점, 또는 아무도 모르는 일, 행위, 그리고 배후의 음모나 생각, 관점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에서 ‘들추다’는 단어의 뜻이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 어울리며 서로 마음이 통하고 마음의 벽이 없다면, 또 상대가 자신으로부터 이로움과 도움을 얻었으면 하며, 앉아서 문제를 솔직히 털어놓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정당한 일이지 단점을 들추는 것이 아니다. 만약 네가 상대의 문제를 발견했는데 상대가 네 지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아예 입을 닫고 분쟁이나 충돌을 피하면 된다. 네가 그를 도와주고 싶다면, 그의 의견을 구하며 먼저 “저는 당신의 문제점을 발견했고, 의견을 말해 주고 싶은데 당신이 받아들일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받아들이겠다면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지금은 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물어봐도 된다. 그가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적절한 말을 하죠. 저는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이는 인정받은 것과 같다. 그때 하나씩 문제점을 교제해 주면 된다. 상대가 전부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도움을 얻는다면 너희는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솔직하게 서로를 대하는 태도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올바르게 함께하는 방식이지 약점을 들추는 것이 아니다. 그럼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에서 ‘약점을 들추지 말라’는 말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사람의 결점이나 상대가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문제를 말하지 말고, 문제의 본질을 폭로하거나 그렇게 노골적으로 들추지도 말며, 표면적인 부분, 모두가 자주 이야기하는 부분, 상대도 인식하고 있는 부분만 말하라는 것이다. 그가 예전에 저지른 잘못이나 민감한 부분은 들추지 말고 말이다. 이렇게 행동한다면 상대에게 어떤 유익이 되겠느냐? 그에게 원한은 사지 않고 그의 적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 행동은 그에게 어떤 도움도, 유익도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에서 ‘약점을 들추지 말라’는 것은 솔직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 교활하고 간사하며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 검은 속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사람들과 올바르게 지내는 방법이 아니다. 이방인은 ‘약점은 농담으로라도 들추지 말라’는 말을 도덕적으로 고상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로 여기는데, 단언컨대 이는 남과 함께하는 간사한 방법이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지, 절대 정당한 방식이 아니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8)> 중에서
중국의 전통문화에 나오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에 관한 말은 사람을 제약하고 일깨우는 도리로서, 사소한 일, 별 볼 일 없는 갈등에만 완화 역할을 할 뿐, 깊은 원한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럼 이 요구를 제기한 사람은 과연 인성을 이해했겠느냐? 이 요구를 제기한 자는 사람의 양심과 이성의 수용 범위가 얼마나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저 이 이론을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우아함과 고상함을 뽐내 사람들에게 동조를 얻고 칭찬을 받으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들은 사람이 존엄과 인격, 이익에 해를 입고 나아가 앞날과 인생에 영향을 받는다면, 인성의 각도에서 볼 때 반드시 복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에게 아무리 양심과 이성이 있어도 그대로 끝내려 하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복수의 정도와 방식이 달라지는 데 그칠 뿐이다. …
사람이 증오를 내려놓을 수 있는 주된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한 측면으로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덕행에 관한 말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작은 일을 따지고 들면서 늘 다른 사람을 증오하고 관용을 보이지 않다가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고 사회 여론에 질책을 받으며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될까 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하게 분을 삼키는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한 측면으로는 본능적으로 그러한 압박과 비합리적인 상처, 그리고 불공평한 대우를 견디지 못한다. 즉, 사람은 인성에 그러한 것들을 견디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요구는 누구에게든 불공평하고 비인도적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이런 사상 관점은 당연히 이런 일에 대한 사람의 관점과 견해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것을 왜곡시킨다. 그리하여 사람이 그 일들을 올바로 대하지 못하고,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을 올바르고 긍정적인 사물로 보게 한다. 불공평한 대우를 받을 때, 사람은 여론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받은 모욕과 불공평한 대우를 마음속으로 참고 억누르며 복수할 기회를 노린다. 입으로는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잖아요. 관두죠. 복수할 필요 없어요. 다 지난 일이에요.”라고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인성의 본능 면에서 보면, 그는 영원히 그 일로 인한 상처를 잊지 못한다. 즉, 그 일이 그의 육체와 마음에 준 상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사라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소위 ‘원한을 잊자. 그 일은 지나간 거야. 이미 다 지나갔다.’라는 태도는 외적인 형식에 불과한데, 그것은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사상 관점에 속박되고 영향받아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물론, 사람은 이런 사상 관점에 얽매여 있기에, 이 말대로 행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하는 마음과 도량을 갖지 않는다면,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책망 들으며 나아가 이 사회나 사람들 사이에서 멸시받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멸시받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사람들과 접하고 일을 처리할 때, “이 사람은 쪼잔해서 원한이 있으면 꼭 갚으려고 듭니다. 이 사람하고 사귈 때는 조심하세요!”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 사이에서 일을 처리하는 데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생기게 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온 사회가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사상 관점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또한 이런 사상을 떠받드는 사회 분위기가 있고, 온 사회가 이런 사상에 얽매이고 영향받고 통제되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그 말대로 하지 못한다면, 이 사회에서 자리 잡는 것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도 무척 힘들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사회 분위기에 굴복하고,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 관점을 따르면서 억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 소위 철학가라는 자들이 제기한 도덕적 사상 관점에 대한 이런 말에는 특정한 속셈과 목적이 있지 않겠느냐? 그들이 원한 것이 인류가 더 자유로워지고 육적, 심적, 영적으로 더 해방되는 것이겠느냐?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겠느냐?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덕행의 말들은 결코 정상 인성의 필요에 도움이 되고, 사람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내게 하기 위해 제기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통치 계급이 국민들을 통제하고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통치 계급을 위해 봉사하고, 통치 계급이 사회 질서와 사회 분위기를 제대로 관리하도록 하기 위해 제기한 것이다. 그들은 이런 것들로 모든 사람, 모든 가정을 제약하고, 모든 개체와 군체, 단체를 제약하며, 각 단체로 이뤄진 사회를 제약한다. 이런 사회에서 이런 도덕적 사상 관점이 주입되고 또 거기에 영향받고 물들어 사회 주류의 도덕적 사상 관점이 생겨나고 형성되었다. 이 사회도덕, 사회 분위기의 형성은 인류의 생존이나 사상의 진보, 정화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며, 인성의 개선에 더욱 유리한 것도 아니다. 반대로, 이 도덕적 사상 관점의 형성으로 인해 인류의 사상은 통제 가능한 범위에 얽매이게 되었다. 그럼 결국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겠느냐? 사람들이겠느냐, 아니면 통치 계층이겠느냐? (통치 계층입니다.) 그렇다. 결국 이득을 보는 것은 통치 계층이다. 도덕 경전을 사상과 덕행의 기초로 삼는 사람들은 통치하기도, 양민으로 만들거나 지배하기도 더 쉽다. 또 모든 일에서 도덕 경전의 여러 말이나 사회의 제도, 도덕, 분위기, 여론으로 제약하기가 더 쉽다. 이렇게 하면 같은 사회 제도, 도덕 환경,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상 관점, 처신의 마지노선이 기본적으로 통일된다. 그들의 사상 관점은 소위 철학가, 사상가, 교육가들이 가공하고 규범화하여 통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통일’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사람의 사상과 정상 인성을 비롯해 모든 피지배자가 도덕 경전의 이런 말에 동화되고 얽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사상은 물론이요, 사람의 입과 뇌까지 제약을 받으며,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전통문화의 도덕적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사상 관점들로 자신의 행위를 판단하거나 제약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과 이 사회를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이와 동시에 이 도덕 경전의 말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여론에 통제된다. 일단 네 행동이 “사람을 죽여 보았자 머리가 땅에 떨어질 뿐이니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라는 말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너는 마음이 씁쓸하고 거북해질 것이다. 이어서 ‘만약 내가 용서할 수 있을 땐 용서하라는 말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속 좁은 여자처럼 따지고 들고 옹졸하게 굴면서 증오를 전혀 내려놓지 못한 채 늘 마음속에 품고 있다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동료나 친구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는 스스로를 도량이 큰 사람으로 위장한다. 사람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사회 여론에 통제되었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네 마음 깊은 곳에는 무형의 족쇄가 있다. 즉, 사회 전체의 여론과 질책이 네게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된 것이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9)> 중에서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라는 말의 속뜻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을 남에게 베풀고 공급해 주라는 것이다. 패괴된 인류가 좋아하고 즐기는 것은 어떤 것들이냐? 모두 패괴된 것, 황당한 것이고, 과한 욕망이다. 그 부정적인 것들을 남에게 베풀고 공급한다면, 온 인류는 점점 더 패괴되지 않겠느냐? 또한, 긍정적인 것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이것이 사실 아니겠느냐? 인류는 심각하게 패괴되었다. 이는 사실이다. 패괴된 인류는 모두 명리와 지위, 육적인 누림을 추구하기 좋아하며, 명인이나 위인, 초인이 되고자 한다. 또 다들 놀기만 좋아하고 일하기는 싫어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남이 대신해 주기를 바란다.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만약 인류 모두가 자신의 패괴와 기호를 남들에게 베풀고 공급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안 봐도 뻔하다. 인류는 점점 더 패괴될 것이다.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라는 관점을 제창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패괴와 기호, 과한 욕망을 베풀고 공급하게 하며, 모두가 사악함과 누림, 출세하고 부자가 되는 것을 추구하게 한다. 이것이 인생의 바른길이겠느냐? 여기에서 알 수 있듯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라는 말은 문제가 너무도 크며, 허점과 맹점이 너무도 명확하므로 해부하고 분별할 가치가 없다.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그 말의 문제점과 황당한 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 중 많은 이가 이 말에 쉽게 설복되어 영향을 받고, 전혀 분별하지 않은 채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남들과 함께 지낼 때 수시로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게 충고까지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고상한 인격을 드러내고 아주 이성적으로 처신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그 말은 네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네 처신의 원칙과 입장을 팔아넘기는 한편, 다른 사람들까지 미혹하고 잘못된 길로 이끌어 너와 같은 관점과 입장으로 사람과 일을 대하게 한다. 또 너는 말 그대로 중재인이 되어 중용의 길을 걷게 된다. 너는 “무슨 일이든 따지지 말고,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도 마십시오. 남을 괴롭히는 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고, 남에게 잘 대해 주는 건 스스로에게 잘 대해 주는 것입니다. 남을 힘들게 하는 건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고요. 굳이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최고의 포상이자 관용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엄연히 모든 일을 참답게 대하지 않는 태도이다. 어떤 일에도 정확한 입장과 관점을 보이지 않고, 어떤 사물을 대하든 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참답게 대하지 않으며, 보고도 못 본 척 넘어가다가 결국 하나님 앞에서 결산 보고를 해야 할 때가 오면 흐리멍덩한 것투성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늘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 말은 네게 큰 위안과 누림이 되어 주었지만, 동시에 네게 엄청난 문제를 가져다주어 네가 많은 일에서 명확한 관점과 입장을 갖지 못하게 했고, 물론 눈앞에 닥친 일들 앞에서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무엇인지, 어떤 성과를 내야 할지 등을 분명히 알지 못하게 했다. 이 결과는 네가 모든 사물을 참답게 대하지 않고, 흐리멍덩한 태도와 관점을 가졌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라는 말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마땅히 지녀야 할 관용의 태도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옳은 것 같고 고상하고 선한 이론 같지만, 그런 이론은 결코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다. 물론 사람이 지켜야 할 진리 원칙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라는 요구를 하지 않고, 갖가지 일을 대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이 과연 무엇인지 분명히 알라고 했다. 만약 옳은 것,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반드시 견지해야 한다. 자기 자신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일깨워 주고 권하며 교제하여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진리 원칙은 과연 무엇인지 알게 해야 한다. 이는 네 책임이자 의무이다. 하나님은 네게 중용의 길을 가라고 하지 않았으며, 나아가 네 아량이 얼마나 큰지 보여 주라고 하지도 않았다. 네가 지켜야 할 것은 하나님이 네게 일깨워 주고 가르쳐 준 것, 하나님 말씀에서 제기한 요구 준칙, 그리고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진리 원칙이다. 너는 그런 진리 원칙을 영원히 지키는 한편, 솔선수범하여 실행하며, 남들도 너와 같이 그 진리 원칙을 견지하고 지키고 실행하도록 권하고 감독하고 돕고 지도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요구이자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이니, 너 자신만 실행하고 다른 이는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네게 요구한 것은 올바른 입장을 갖고 올바른 준칙을 견지하며, 하나님 말씀의 준칙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하고,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라는 것이다. 설사 너 자신은 실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으며 좋아하지 않고 관념과 반발심을 품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하나의 책임이자 의무, 바르고 옳은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온 긍정적인 사물을 다른 사람에게 교제해 주는 한편,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도움과 영향과 가르침을 주고, 상대가 그 가운데서 유익과 도움을 얻고 인생의 바른길을 걷게 해야 한다. 이는 네 책임이다. 사탄이 주입한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라는 말을 죽어라 지켜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눈에 그 말은 그저 처세 철학이고, 사탄의 간계를 담고 있는 하나의 사상 관점일 뿐 결코 바른길도, 긍정적인 사물도 아니다. 하나님이 네게 요구한 것은 정정당당하게 처신하며,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은 네게 무골호인이나 중재자가 되라고 하지 않았고, 중용의 길을 걸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진리 원칙과 관련된 일에서 해야 할 말은 반드시 하고 깨달아야 할 것은 반드시 깨닫는 한편, 다른 사람이 깨닫지 못한 것을 네가 깨달아서 알려 주고 도와줄 수 있다면, 마땅히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지, 수수방관해서는 안 되며, 나아가 사탄이 주입한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라는 사탄 철학을 지켜서도 안 된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설령 네가 옳은 것,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고 실행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이를 수도 도달할 수도 없을지라도, 반발심과 관념을 품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옳은 것이고 긍정적인 사물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사람의 패괴 성품이나 정서, 감정, 바람, 관념으로 인해 그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의 본질과 진리의 본질은 영원히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알고 깨닫고 체험하고 얻게 되면, 너에게는 의무가 생긴다. 너는 그 체험 간증을 다른 이에게 교제하여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한편, 진리를 깨닫고 얻으며,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무엇인지, 진리 원칙은 무엇인지 깨닫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다양한 부류의 일이 닥쳤을 때 멍해지지도, 사탄의 각종 사상 관점에 제한되지도 않고 실행할 길을 얻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라는 덕행의 말은 그야말로 사람의 사상을 통제하는 사탄의 간계 중 하나이다. 언제까지고 그것을 신봉한다면, 너는 사탄 철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전적으로 사탄 성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0)> 중에서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덕행의 말은 시대와 계층을 막론하고, 어디서든 그럭저럭 통용되는 말로서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상대적으로 부합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말은 사람이 양심적으로 신봉하는 ‘의리’에 부합한다. 의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자 한다. 벗이 아무리 어렵고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기꺼이 나서서 벗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것이다. 이것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정신이다.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덕행의 말이 사람에게 주입한 것은 기본적으로 ‘의리’이다. 또 그 말이 사람의 인성에 대해 제기한 요구 기준과 그 말의 정수는 의리를 중요시하라는 것이다. …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라는 사상 관점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이 질문은 사실 어렵지 않으며 무척 간단하다. 세상에 사는 사람 중에 태어날 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은 없다. 누구나 위로는 부모가, 아래로는 자녀가 있다. 누구든 가족이 있고,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말이 무슨 의미겠느냐?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위로는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자녀를 부양하는 것은 가정에서의 네 책임이다. 또 사회에서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 농민, 상인, 학생, 지식인 등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네가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는 적지 않다. 즉, 너는 평생 네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 외에도 할 일이 무척 많으며, 해야 하는 일, 다해야 하는 의무도 매우 많다. 하나님을 믿는 바른길을 걷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너는 하나의 개체로서 수행해야 할 가정에서의 책임과 사회적 의무가 엄청 많다. 너는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네 어깨에 놓인 책임은 신나게 친구들을 사귀거나 말 잘하고 도움이 되는 이를 만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책임은 가정과 사회에 있다. 가정에서의 책임과 사회에서의 의무를 다 제대로 수행해야 이번 생에서 완전하고 완벽하게 처신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가정에서 네가 다해야 할 책임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자녀로서 너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를 봉양해야 하며, 부모가 병이 나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힘닿는 데까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가장으로서 너는 피땀 흘리고 고통을 감내하며 가족 모두를 먹여 살리는 등 가장의 중임을 맡아야 할 것이다. 또 자녀를 성인으로 키우고, 바른길을 걷도록 교육하며, 사람으로 처신하는 이치를 깨닫게 해야 한다. 그렇기에 가정에서의 네 책임이 무척 많다고 하는 것이다. 너는 부모를 봉양하고 자녀를 부양하는 책임을 맡는 등 해야 할 일이 무척 많다. 그럼 사회에서는 어떤 책임이 있겠느냐? 법과 규율을 준수하는 한편,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는 원칙을 가져야 한다. 직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일을 해내고, 또 네 사업을 잘 경영해야 할 것이다. 너는 8~9할의 시간과 에너지를 이러한 일에 쏟아부어야 한다. 다시 말해, 가정과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든, 어떤 길을 걷든, 무엇을 추구하고 동경하든 사람이 맡아야 할 책임은 누구에게나 무척 막중해서 거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과 사회에서의 책임을 통해 볼 때, 너라는 사람, 네 생명이 이 인간 세상에 태어난 가치는 무엇이겠느냐? 하늘이 네게 준 책임과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이다. 네 생명은 너에게만 속하지 않는다. 물론 타인에게 속하는 것도 아니다. 네 생명은 네 사명과 책임을 위해 존재하며, 네가 인간 세상에서 이행해야 할 책임과 의무, 사명을 위해 존재한다. 네 생명은 네 부모에게 속하지 않고, 너의 아내(남편)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당연히 자녀에게도 속하지 않고, 나아가 후손들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그럼 네 생명은 누구에게 속하겠느냐?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네 생명은 하나님이 준 책임과 사명에 귀속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네 생명은 마땅히 하나님에게 속해야 한다. 하나님이 네 모든 것을 주재하고 안배한다. 그러니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자기 생명을 허락해서는 안 되며, 의리 때문에 함부로 아무에게도 네 생명을 바쳐서는 안 된다. 즉, 자신의 생명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 네 생명은 가치가 없으며, 특히 사탄이나 이 사회, 이 패괴된 인류에게는 무가치하다. 하지만 네 부모나 가족들에게 네 생명은 더없이 소중하다. 네 책임이 그들의 생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더 중요한 점은 만물과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와 네 생명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네 생명은 하나님이 주재하는 뭇 생명 중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어쩌면 너는 자기 생명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자기 생명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 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부모나 가족들에게 네 생명은 무척 소중하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너는 그들에게 책임이 있고, 그들 또한 네게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또 너는 이 사회에 책임이 있다. 사회에 대한 네 책임은 이 사회에서의 네 역할과 관련이 있다. 모든 사람의 역할과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간주되며, 또한 하나님이 인류와 이 세상, 이 지구, 이 우주를 주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하나님 눈에는 모든 생명이 모래알보다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고, 개미만도 못할 정도로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생명, 살아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재 속에서 그의 역할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그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누군가가 너무 쉽게 벗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한다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 벗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며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고, 가정과 사회에서의 책임은 물론, 자기 어깨에 짊어진, 하나님이 준 사명과 본분조차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안 될 일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대역무도한 짓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것 중 가장 귀한 것은 사람의 숨결, 이른바 생명이다. 그런데 네가 함부로 자기 생명을 네가 맡겨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벗에게 허락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보기에 대역무도한 짓이 아니겠느냐?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짓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명백히 가정과 사회에서 다해야 할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네게 준 사명을 거부하는 것으로, 대역무도한 짓이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평생 짊어져야 할 책임, 즉 가정에서의 책임과 사회적 책임, 그리고 하나님이 준 사명이다. 이러한 책임과 사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만약 네게 생명이 없다면, 한때의 의리와 혈기 때문에 함부로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준다면, 네 책임이 존재하겠느냐? 무슨 사명을 논할 수 있겠느냐? 너는 분명 하나님이 준 생명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겨 아끼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네 목숨을 바친 것이고, 가정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전혀 생각지 않거나 저버린 것이다. 이는 부도덕하고 불공평한 행동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려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자신의 생명을 함부로 타인에게 바치거나 허락하지 말라는 것이다. 혹자는 “부모님에게 드려도 안 됩니까? 배우자에게 줘도 안 되는 겁니까?”라고 묻는데, 안 된다. 어째서 안 되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이 이어지게 한 것은 가정과 사회에 책임을 다하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완수하게 하기 위함이지, 생명을 갖고 장난치면서 함부로 타인에게 허락하고 맡기고 타인을 위해 내어 주고 바치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생명이 없으면, 가정에서의 책임과 사회적 책임, 그리고 사명을 다할 수 있겠느냐? 그것들을 완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의 책임과 사회적 책임이 없어졌는데 사회에서의 역할은 남아 있겠느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회에서의 역할이 사라졌는데, 사람의 사명이 남아 있겠느냐? 남아 있지 않다. 사람의 사명과 사회에서의 역할이 사라졌는데, 하나님이 주재하는 대상이 존재하겠느냐? 하나님이 주재하는 것은 생명체, 생명을 지닌 인류이다. 사람의 사회적 책임과 생명이 모두 사라지면, 사회적 역할 역시 전부 무로 돌아가 버린다. 이는 하나님이 주재하는 인류와 하나님의 경륜을 없애 버리려는 것 아니겠느냐?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이는 대역무도한 짓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대역무도한 짓이다. 네 생명은 오직 네 책임과 사명을 위해서만 존재하며, 네 생명의 가치는 오직 네 책임과 사명에서만 드러난다. 이것 외에, 벗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것은 네 책임이나 사명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생명을 받은 한 사람으로서 너는 하나님이 준 책임과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벗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것은 하나님이 준 책임과 사명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적인 일 처리이고 일방적인 생각으로, 네 생명에 무책임한 사상이다. 물론, 그것은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사람의 생명을 멸시하고 유린하는 하나의 사상이기도 하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0)> 중에서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사람의 처세 원칙, 삶의 방식, 생존 방식 심지어는 종교나 신앙을 대하는 태도와 관념 그리고 사람이나 일, 사물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관념과 관점은 가정의 교육에 물들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나이가 얼마든, 어떤 성별이든, 직업이 무엇이든,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가 극단적이든 아니면 이성적이든 결국 다방면의 일에 있어서 사람의 생각과 관점, 그리고 일을 바라보는 태도는 가정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달리 말해, 가정이 한 사람의 다방면에 미치는 교육은 상당 정도 한 사람의 일 처리에 대한 태도와 방식 그리고 생존관을 결정하고, 나아가 사람의 신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미치는 가정의 교육과 영향이 크다면 사람의 일 처리 방식이나 처세 원칙, 생존관 그리고 신앙을 바라보는 관점, 그 근원은 가정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가정 자체는 진리가 생기는 곳이 아니고 진리의 근원도 아니므로 가정이 네게 교육한 모든 사상 관점, 생존 방식의 원동력이나 목적은 거의 하나밖에 없다. 바로 네가 잘되라는 것이다. 네가 잘되기 위한 것들이 부모에게서 오든, 조부모에게서 오든, 아니면 네 조상에게서 오든 그 누구에게서 비롯되든 그것은 결국 모두 사회나 사람들 속에서 네 이익을 지키고 남에게 차별받지 않으며 더욱 자유롭고 원만하게 사람들 가운데서 생존하여 네 이익을 최대한 지키기 위한 것이다. 너에 대한 가정의 교육은 너를 보호하고 네가 차별이나 수치를 받지 않게 하며 뛰어난 사람이 되게 한다는 뜻으로, 네가 남을 얕보거나 괴롭힐지언정 본인에게만 해가 되지 않으면 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가정이 네게 영향 준 것 중 가장 중요한 일부이며 네게 영향 준 모든 사상의 정수이자 주요 목적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가정이 네게 영향을 미친 모든 것의 목적과 핵심에서 봤을 때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더냐? 설령 그것이 인성적 윤리나 인성의 정당한 이익과 권익에 부합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와 상관이 있느냐? 그것이 진리이겠느냐? (아닙니다.) 확실히 말하건대 진리가 아니다. 가정이 네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긍정적이고 정당한 것일지라도, 아무리 인성화 되고 도덕적 준칙에 부합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며 진리를 대표할 수 없음은 물론 진리를 대신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이런 측면의 것 역시 가정이라는 주제에서 사람이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 주제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너에 대한 가정의 영향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는 가정에 해당되는 주제 중 두 번째 측면에서 사람이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가정이 네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얘기가 나왔으니 우선 가정이 네게 미치는 영향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이야기해 보자. 사람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에 따라 구분한다면 어떤 것은 상대적으로 정확하고 긍정적이어서 공개 석상에 꺼내어 놓을 수 있고, 어떤 것은 이기적이고 비루하며 추하여 상대적으로 부정적인데,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가정으로부터 받는 이러한 영향은 사람에게 일종의 방호복으로, 사람의 육적인 이익을 보호하고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의 존엄을 유지하여 업신여김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가정이 네게 미치는 영향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교제해 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 가정에서 어른이 자주 말하는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것은 네가 명예를 중시하고 체면이 서는 삶을 살면서 망신당할 일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을 긍정적으로 이끄느냐, 아니면 부정적으로 이끄느냐? 너를 진리로 이끌겠느냐? 네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한다. 네가 과오를 저지르거나 잘못된 일을 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진리에 위배되는 일을 하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자기를 인식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해부하고 진정으로 회개한 다음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 되려 할 때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말과 상충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부분이 상충되겠느냐?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말은 사람이 화려한 모습을 살아 내는 것을 중시하여 체면이 서는 일을 많이 하라고 하지, 옳지 않은 일, 불명예스러운 일을 해서 자신의 추한 면을 드러내라고 하지 않는다. 망신을 당하거나 존엄하지 않게 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체면과 체통, 명예를 위해 자기를 쓸모없는 사람처럼 말하면 안 되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어두운 면이나 떳떳하지 못한 부분을 남에게 말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체면을 세우고 존엄하게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존엄은 사람의 체면에 달려 있고, 사람의 체면은 가식과 포장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이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과 상충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정직한 사람으로 살 때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말에 정확히 위배되는 것이다. 네가 정직한 사람이 되려면 체면을 차리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체면은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진리 앞에서 사람은 자신을 폭로해야지 위장이나 가식을 떨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진정한 생각과 잘못한 일, 진리 원칙에 위배되는 부분 등의 실상을 낱낱이 하나님에게 보이고 형제자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한다. 체면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진정한 피조물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구원받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때 종종 가정의 교육에서 비롯된 것들에 지배되어 잘못된 일을 저지르면 포장하고 위장하며 생각할 것이다. ‘말하면 안 돼. 아는 사람도 말하면 안 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끝장을 보겠어. 내 체면이 우선이야. 산다는 건 다른 걸 위한 게 아니라 바로 체면을 위한 거지. 체면이 무엇보다 중요해. 사람이 체면을 잃으면 존엄도 잃는 거야. 그래서 사실도 사실대로 말해서는 안 되고 위장하고 포장해야 하는 거야. 안 그러면 체면이나 존엄은 실추되고 삶의 가치도 없어지는 거야. 존중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싸구려가 되는 거야.’ 네가 이렇게 실행한다면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자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해부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정이 네게 교육한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말을 따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네가 만약 이 말을 내려놓고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한다면 이 말이 네게 아무런 작용을 하지 못할 것이고 더 이상 네 좌우명이나 행동 원칙이 되지 않을 것이니, 네가 하는 행동은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라는 말과 상반될 것이다. 네가 체면이나 존엄을 위해 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며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산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진정한 피조물 되기를 추구하기 위해 산다면, 네가 이런 원칙을 따른다면 너는 가정이 교육한 그런 것들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2)> 중에서
사람에 대한 가정의 교육은 한두 마디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수많은 명언이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라는 말은 집안 어른이나 부모가 자주 하는 말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일생에 다른 게 아닌 바로 이름을 위해 살아야 한다. 사람들 가운데 좋은 명성을 남기고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어디서든 덕담과 칭찬을 많이 하고 선의의 말을 많이 해야 한다. 남에게 미움을 사지 말고 좋은 일과 착한 일을 많이 하라.”라고 알려 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가정의 교육은 사람의 행위나 행동 원칙에 일정한 영향을 미쳐 사람이 명예와 이익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즉, 자신의 명성과 명망,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인상, 그리고 자기가 하는 모든 일, 나타내는 모든 관점이 사람들로부터 받는 평가를 매우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명예와 이익을 중요시하면 무의식중에 본분 이행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원칙에 부합하는지, 하나님을 흡족게 하는지, 본분 이행이 합격인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차순위, 후순위로 본다. 반면 가정이 네게 교육한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라는 말은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네가 사람들 마음속의 사소한 부분까지 주목하게 만든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뒤에서 남들이 하는 그에 대한 평가까지 너무 신경 쓴 나머지 몰래 훔쳐 듣기도 하고 심지어는 남들이 그에 대해 적은 평가를 훔쳐 보기까지 한다.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나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좋게 얘기하는지 얼른 들어 봐야겠다. 아, 내가 게으르고 좋은 음식을 즐겨 먹는다고 하네. 그럼 고쳐야지. 앞으로는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해야겠다.’라고 생각한다. 한동안 부지런하게 지내다가 고민한다. ‘다들 아직도 날 게으르다고 하는지 들어 봐야겠다. 최근엔 별말 없었던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그는 안심이 되지 않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모두에게 말한다. “제가 좀 게을러요.” 그럼 사람들이 말한다. “게으르지 않아요. 예전보다 훨씬 부지런해지셨어요.” 그는 곧 마음을 놓고 기쁨과 위안을 얻는다. ‘거봐. 나에 대한 모두의 평가가 달라졌어. 내 행동을 모두가 눈여겨봤나 보군.’ 네가 한 모든 것은 진리를 실행하기 위한 것도,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닌 자신의 명성을 위한 것이다. 그러면 무의식중에 네가 한 모든 것이 어떻게 변하겠느냐? 종교 행위가 된다. 너란 사람의 본질은 어떻게 변하겠느냐? 전형적인 바리새인이 된다. 네가 걷는 길은 어떻게 변하겠느냐? 적그리스도의 길이 된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렇게 규정하는 것이다. 네가 한 모든 일의 본질은 변질되어 바뀌어 버린다.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도,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것도 아닌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네 본분 이행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불합격이란 한 마디로 끝난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네가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과 피조물의 본분이 아닌 오로지 자기 명성에만 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정의하면 네 기분이 어떻겠느냐? 그간 하나님을 믿은 것이 헛믿음이 아니겠느냐?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았다는 의미 아니겠느냐?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의 명성만 매우 중시한 것은 근본적으로 너에 대한 가정의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가 교육받은 것 중 가장 중요한 말은 무엇이냐?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라는 말이 네 마음에 깊이 뿌리내려 네 좌우명이 된 것이다. 어려서부터 이 말에 영향받고 교육받아 커서도 자주 그 말을 되뇌면서 네 후대와 네 주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을 네 행동 및 일 처리 방식과 준칙으로 삼고, 나아가서는 네 인생에서 추구하는 목표나 방향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목표와 방향이 잘못되면 마지막 결실은 부정적일 것이 분명하다. 네가 한 이 모든 일의 본질은 그저 이름을 위한 것이었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라는 말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데도 너는 그것을 여전히 모르고 있다. 넌 사람은 이름을 위해 살지 않느냐며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이 말은 긍정적이고 정당해 보여서 너도 모르게 이 말에 물들어 이 말을 긍정적인 사물로 간주한다. 네가 이 말을 긍정적인 사물로 간주한다면 너는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추구하고 실행할 것이고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얼떨결에 그것을 진리로 여기고, 진리 준칙으로 여길 것이다. 네가 그것을 진리 준칙으로 간주한다면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든 듣지도 않을뿐더러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다. 네가 무조건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라는 네 좌우명에 따라 실행하고 일을 한 결과로 얻는 것은 좋은 명성일 것이다. 너는 바라는 것을 얻겠지만 진리를 위배하고 진리를 포기했기에 구원받을 기회도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결과가 이럴 것이니 가정이 너에게 교육한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가죽을 남긴다.”라는 사상을 내려놓아야 하며 거부해야 한다. 그것은 네가 보류해야 할 것도 아니고 네가 평생의 노력과 시간을 기울여 실천해야 할 말과 사상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사상 관점의 주입이자 영향인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내려놓아야 한다. 네가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너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멸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과가 아주 심각하다. 네게 있어 그것은 단순히 말 한마디가 아니라 하나의 암 덩어리이며 사람을 패괴시키는 수단과 방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좋은 명성이나 명망을 추구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으며, 사람들 가운데서 좋은 인상을 남겨서 남들의 지지를 받거나 남들이 엄지를 치켜세우게 만들라고 한 적도, 이름을 위해, 좋은 명성을 남기기 위해 살라고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하나님과 진리에 순종하라고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은 네가 내려놓아야 하는, 너에 대한 가정의 영향 중 하나인 것이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2)> 중에서
가정이 네게 미치는 영향에는 하나가 더 있다. 예를 들면, 부모나 어른이 너를 채찍질할 때 “고생을 해 봐야 뛰어난 사람이 된다.”라는 말을 자주 할 것이다. 그 목적은 네가 고생과 끈기, 근면을 배워서 무슨 일을 하든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생하고, 인내하고, 근면하고, 불굴의 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만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사람은 무슨 뜻이겠느냐? 사람들에게 얕보이거나 무시당하거나, 차별받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 높은 위신과 지위, 발언권과 의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나은 삶, 수준 높은 삶을 살고 남들로부터 우러름과 감탄을 받으며 부러움을 사는 것이다. 즉, 모든 인간 중에서 네가 상위층이라는 것이다. 상위층이란 무슨 의미겠느냐? 바로 네가 많은 사람들을 밟고 있어 그들에게 수모를 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이것이 ‘뛰어난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이런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네가 ‘고생을 해 봐야’ 한다. 그러니까 남이 못하는 고생을 네가 해야 한다는 말이다. 뛰어난 사람이 되기 전까지 너는 반드시 사람들의 백안시와 조롱, 비아냥, 비방 그리고 사람의 몰이해, 나아가서는 미움 등을 견뎌야 한다. 육적인 고생 외에도 사람은 여론으로부터 받는 비아냥과 비방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야 사람 가운데 성공한 모습을 보일 수 있으며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이 말의 목적은 뒤처진 사람이 아닌 뛰어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뒤처지면 고생을 하고 수모와 억울함을 겪으며 존엄과 체면을 잃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 비롯되는 이런 측면의 교육의 목적 역시 네가 잘되라는 것이다. 네가 잘되기 위한 목적은 바로 네가 사람들 가운데서 수모를 당하지 않고, 권력을 쥐며 유명해지고, 좋은 것을 먹고 즐기며, 어딜 가도 무시당하지 않고, 어디서든 집단을 주름잡고 좌지우지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네게 허리 숙여 머리를 조아리게 하려는 것이다. 뛰어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너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문과 조상을 빛내고 부모와 가족이 덕을 보고 수모를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네가 고생을 해서 뛰어난 사람이 되어 승용차를 몰고 호화 주택에 살며, 고위 공직자가 되어 주변에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으면 네 가정이 너로 인해 덕을 볼 것인데, 가족들도 승용차를 타고 좋은 음식을 먹을 것이다. 너는 산해진미를 먹고 싶은 만큼 먹고, 가고 싶은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며, 떵떵거리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제멋대로 살 수 있을 것이고, 기가 죽거나 몸을 사릴 필요 없이 오만방자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심지어는 법을 초월하여 겁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가정이 이런 면에서 교육하는 목적인데, 억울한 일을 당하지 말고 뛰어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대놓고 말하자면, 남을 이끌거나 지휘하며 다른 사람을 부리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고, 남을 업신여길지언정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며, 남에게 이끌리는 사람이 아닌 뛰어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어떤 요구를 하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서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 세속적인 사람, 일반인이 되지 말고, 위인이나 유명인,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더냐? 하나님이 그렇게 요구하더냐? (아닙니다.) 아주 분명한 것은 가정이 네게 영향을 미친 “고생을 해 봐야 뛰어난 사람이 된다.”라는 말은 긍정적인 지향점이 아님은 물론 진리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가정이 네게 고생하라고 하는 목적은 불순한데, 그 속엔 졸렬하고 떳떳하지 못한 저의가 숨겨져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고생하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되려면 사람은 고생해야 하는데,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그 밖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고생은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이며 정상적인 사람이 감수해야 하고 가져야 할 태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게 뛰어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말씀에 따르고 순종할 수 있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한다. 하나님이 네게 깜짝쇼를 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으니 네가 세상을 뒤흔들 일을 하거나 그 어떤 명사나 위인이 될 필요도 없다. 너는 그저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실제적인 사람이 되면 그만이다. 네가 얼마나 고생할 수 있든, 혹은 고생할 수 있든 없든, 결국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나면 그것이 최고의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진정한 피조물이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고 정상 인성,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지, 이방인이나 패괴된 인간이 생각하는 어떤 높은 사람이나 위인이 아니다. 이런 측면으로 예전에 많이 교제했으니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고생을 해 봐야 뛰어난 사람이 된다.”라는 말은 분명 네가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이겠느냐? 네가 가정에서 이런 측면으로 영향을 받아 생긴 추구하는 방향이다. 즉, 네가 추구하는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람들 가운데서 출중하고 빼어나기 위해, 남들로부터 우러름 받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마음가짐과 목적, 원동력을 내려놓고 진정한 피조물이 되기 위해 매사에 착실하게 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착실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방식과 원칙에 따라 모든 일에 임하는 것이다. 설령 그 일이 놀라운 업적도, 남들에게 인정받는 일도 아니고, 나아가 누구에게도 지지를 받거나 중시받지 못한다고 해도 너는 그것을 해야 하며 그것을 피조물로서 이행해야 할 본분으로 삼고 견디고 지속해야 한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이 보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다. 바꿔야 하는 것은 네가 처신에서 추구하는 바와 인생관이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2)> 중에서
가정이 네게 미치는 교육과 영향은 몇 가지가 더 있는데, 예를 들면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라는 말이다. 가족들은 늘 이렇게 가르친다. “선의로 남을 대하고 남과 다투지 마라. 적을 만들지 마라. 적이 많으면 사회에서의 입지가 좁아진다. 너를 해하거나 적대시하는 사람이 많으면 사회에서 안전하지 못할 것이고, 언제든 위협받을 것이다. 네 생존과 지위, 가정, 신변의 안전, 나아가 직업에서의 발탁 등에 있어서 해코지를 당할 수 있고,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누구든 다정하게 대해야 하고 불쾌하게 해서는 안 된다. 무슨 말이든 여지를 남기고, 다른 사람의 체면을 깎거나 단점을 들추어서는 안 된다. 또 남이 껄끄러워 하는 말은 삼가거나 아예 하지 말고 입에 발린 말만 하는 것이다. 아첨이 죄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리고 크고 작은 일을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한순간을 참으면 무사 평온하고, 한발 물러서면 세상이 넓어 보인다’는 것이니까.” 생각해 보아라, 한 번에 두 가지 생각과 관점을 주입한다. 하나는 선의로 남을 대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내하며 입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할 말이 있으면 참았다가 집에 와서 하라고 한다. 심지어는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기 때문에 말이 새어나가서 네게 좋을 게 하나 없다는 말이다. 이 사회에서 발붙이고 살아남으려면 사람은 한 가지를 습득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회색분자가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모나지 않고 교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자기 생각을 그대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 현명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같은 성질이라 생각나는 대로 말해 버리니 상사에게 미움을 사서 곤욕을 치른다. 상사는 그의 상금을 취소하고 별일 아닌 일에도 흠을 찾는 것이다. 더는 버티기 어려워서 퇴사하자니 생계가 걱정이고 퇴사하지 않으려 하니 버틸 수가 없다. 너는 진퇴양난에 빠져 당할 수밖에 없으니 이를 무엇이라 하겠느냐? ‘걸렸다’고 한다. 스스로 걸려 버린 것이다. 그러면 가족들이 말한다. “당해도 싸지. 그러게 누가 너더러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를 잊으라던! 그리고 누가 너더러 경솔하게 곧이곧대로 말하라고 하대? 원만하게 지내면서 말하기 전에 신중했어야지, 생각 없이 그대로 말했잖아. 상사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겠니? 사회가 그렇게 만만하던? 늘 자기가 야무지다고 생각하더니 이번에 쓴맛 좀 봤겠네.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으라고. 앞으로는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는 말을 기억하도록 해!” 너는 교훈으로 삼고 명심하게 된다. ‘부모님 말씀이 정말 맞는구나, 이것이 인생의 깨달음이자 정수이니까 듣지 않으면 안 되겠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하니 명심해야지.’ 하나님을 믿은 후 하나님 집에 와서도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는 말을 기억하면서 형제자매를 만나면 안부를 묻고 듣기 좋은 말만 한다. 리더가 “제가 한동안 리더를 맡았습니다만 사역 경험이 아직 부족합니다.”라고 하면 그는 재빨리 아첨한다. “잘하셨습니다. 당신이 리더를 맡지 않으면 저희는 헤맬 거 같아요.” 또 “저는 자신을 인식하게 됐어요. 전 정말 간사한 사람이에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말한다. “간사하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정직하신대요. 저야말로 간사하죠.” 그리고 누군가 귀에 거슬리는 말을 몇 마디 하면 그는 고민한다. ‘귀에 거슬리는 말 몇 마디 하는 게 대순가? 이보다 더 심한 말도 참아 봤는 걸 뭐. 당신이 아무리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해도 난 한 귀로 흘리고 당신 비위 맞추면서 계속해서 아부할 거야. 아부가 죄는 아니니까!’ 누군가 그에게 의견을 묻거나 마음을 터놓고 교제해 달라고 해도 그는 진심을 얘기하지 않고 누구와도 화기애애하다. 사람들이 “어째서 늘 그렇게 화기애애하세요? 혹시 양의 탈을 쓴 늑대 아녜요?”라고 말한다.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양의 탈을 쓴 늑대로 살아도 손해 본 적이 없으니 이것이 내 최고의 처세 원칙이지.’ 이것이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에서 다년간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 집에 와서도 똑같이 생활한다. 전혀 진심을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터놓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인식하는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형제자매 중 누구든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아도 그가 진심을 이야기하지 않으니 아무도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한다.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관점을 가졌는지 드러낸 적이 없다. 누구와도 관계가 무척 좋으니 그가 어떤 유형의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성격의 사람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사람에게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개가 어떤지 그를 통해 알아보려고 하면 그가 말한다. “하나님을 믿은 지 십여 년 정도 됐는데 무척 좋은 사람입니다.” 누구든 그에게 알아보면 그는 언제나 좋은 분, 멋진 분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결점이나 흠을 발견한 적이 있으세요?”라고 물어보면 그는 말로는 “여태껏 발견하지 못했어요. 앞으로 주의 깊게 살펴보겠습니다.”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나더러 미움받는 짓을 하라고 하는데, 그럴 내가 아니지! 내가 사실대로 말해서 그 사람 귀에 들어가면 내 적이 되지 않겠어? 옛날부터 적을 만들지 말라던 가족들의 말을 명심하고 있거든. 내가 어리숙하다고 생각하고, 진리 몇 마디만 교제하면 나에 대한 가정의 교육과 가르침을 잊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어림없지!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 ‘한순간을 참으면 무사 평온하고, 한발 물러서면 세상이 넓어 보인다’는 말은 언제든 옳아. 이 말이 내 부적인 셈이지. 누구의 흠이든 말하지 않을 거고, 내 신경을 건드리는 사람이 있어도 참을 거야. 내 이마에 붙어 있는 글자 못 봤나 보지? 참을 ‘인(忍)’ 자 말이야. 아무리 듣기 싫은 소리를 해도 참고, 누가 책망 훈계를 해도 참는 거야. 그 목적은 모두와 화목하게 지내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거야. 원칙만 고수해서도 안 되고, 어리석게 굴어서도 안 돼. 고집부리지 말고 융통성을 배워야지! 거북이가 왜 그렇게 오래 사는지 생각해 봐. 단단한 게 보이면 껍데기 속으로 숨어서 그런 거 아니겠어? 그러면 스스로를 보호하여 천년만년 살게 될 것이고. 이게 장수의 비결이자 처세의 비결 아니겠냐고.’ 너는 그의 입에서 사실이나 진심 어린 말을 듣지 못한다. 그는 진정한 관점이나 처신의 마지노선을 밝히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하고 고심하기 때문에 그 자신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누구에게나 상냥해서 선해 보이고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곤경에 빠뜨리지는 않지만 사실은 명실상부한 회색분자, 빛 좋은 개살구이다. 교회에는 항상 이런 유형의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크게 잘못하는 것이 없고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며 교회 리더나 형제자매가 그를 누구와도 잘 지내는 사람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본분 이행도 그럭저럭 하고 무슨 일이든 시키면 한다. 특히 말을 잘 듣고 환심을 사며 사람과 이야기하고 일을 처리할 때에도 결코 사람을 해하거나 남의 덕을 보려 하지 않는다. 또 사람에게 나쁜 말을 전혀 하지 않고 뒤에서 판단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하는지, 속으로 각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가 좀 괴상하고 짐작하기 어려운 것 같아서 그를 머물게 하면 골칫거리란 생각이 들 것이다. 어찌하면 좋으냐? 너무 난감하지 않으냐? 본분을 이행할 때 그를 보면 일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 집에서 당부한 원칙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어쨌든 큰 실수를 하지 않고 형식만 거치면 그만이어서 책잡히거나 흠잡힐 여지를 남기지도 않는다. 일 처리는 완벽하지만 속으로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 하는 것이겠느냐? 만약 교회 행정 법령이나 교회의 리더와 형제자매의 감독이 없다면 그가 악인과 한패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들과 나쁜 짓을 저지르고 악행을 일삼지 않겠느냐?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다. 할 수 있지만 아직 그러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가장 골칫거리이다. 이는 전형적인 빛 좋은 개살구이자 교활한 여우인 것이다. 그는 누구와도 실랑이를 벌이지 않는다.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거나 그의 존엄과 연관되는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 ‘내가 참는다. 너랑 실랑이하지는 않겠지만 망신살이 뻗는 날이 올 거다!’ 정말 그 사람이 처분되거나 망신을 당하는 날이 되면 그는 남몰래 즐거워한다. 그는 남들과 리더를, 그리고 하나님 집을 비웃으면서 자기는 비웃지 않는다. 자기에게 어떤 문제가 있고 흠이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남에게 해가 되거나 남이 자기를 간파할 수 있는 일은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드러내지 않는다. 남의 경계를 늦추거나 남을 미혹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이든 드러내 보인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가장 음흉하고 다루기 어렵다. 그러니 하나님 집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겠느냐? 쓸 수 있으면 쓰고 그렇지 않으면 제명하는 것이 원칙이다. 어째서겠느냐? 이런 부류의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집과 형제자매, 그리고 리더를 비웃을 수 있는 불신파이다. 그가 하는 역할이 무엇이냐? 사탄 마귀의 역할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가 형제자매를 인내하는 것은 진정한 포용이나 사랑이 아니다. 그는 자기를 보호하고 적을 만들지 않으며 위험이 생기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형제자매를 보호하거나 사랑에서 우러나와서 형제자매를 포용하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진리 추구를 취지로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 것도 아니다. 완전히 남에게 해를 끼치고 남을 미혹시키려는 태도인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회색분자이자 빛 좋은 개살구이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무의미한 세월을 보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이런 부류의 사람이 받은 가정 교육은 그들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처세 방식과 처세 원칙은 그의 인성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가정 교육까지 더해지니 그의 행동이 좀 더 철저하고 구체적이게 되고 그의 본성 본질이 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만약 원론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집의 이익과 연관된 일에서 적절한 취사선택을 하고, ‘화합은 귀하고, 인내는 고귀하다’는 자신의 처세 철학을 내려놓음으로써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고 네 과오와 하나님 앞에서의 악행을 줄인다면, 이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최소한 훗날 하나님이 한 사람의 결말을 정할 때 너에 대한 징벌과 처벌을 줄여 줄 테니 그렇게 실행하면 너로서는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지 않으냐? 그에게 전부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는 인성 본질에 연관되는 문제이고 이런 부류의 빛 좋은 개살구나 회색분자는 완전히 진리를 받아들이지는 않기 때문에 그들이 오랫동안 가정에서 물든 사탄의 철학을 내려놓기란 그렇게 간단한 일도, 쉬운 일도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 교육 외에 그들 자신도 사탄 철학을 맹신하여 개인의 주관적인 처세의 태도인 이런 처세 태도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만약 똑똑하다면 자신의 이익에 아무런 위협이나 손해가 없는 상태에서는 이런 방식을 내려놓고 적절하게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킬 것이다. 이것은 네게 좋은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 네 죗값과 너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 줄어들 것이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을 상과 기억으로 바꿀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2)> 중에서
네가 받은 가정 교육에는 또 무엇이 있느냐? 부모는 항상 네게 일러둔다. “가벼운 입으로 무턱대고 떠들고 다니면 언젠가는 그 주둥이 때문에 고생할 날이 올 거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을 명심해라! 이게 무슨 뜻이겠니? 말이 많아지면 반드시 빈틈이 생긴다는 뜻이야. 어딜 가든 입을 조심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먼저 들어 본 다음에 말해라. 대세를 따르면 무탈하겠지만, 늘 나서면서 혼자 떠들면 장관, 상사, 다른 사람들의 의사를 알 수 없어. 네가 먼저 의견을 말했는데 장관, 상사가 그런 의사가 아니라면 그로 인해 네가 곤욕을 치를 텐데 좋은 결과가 따르겠니? 이 녀석아, 앞으로는 조심해야 한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니, 말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입은 먹고 숨 쉴 때나 쓰고, 상사나 남들에게 아부할 때 써야지 속 얘기할 때 쓰는 것이 아니란다. 말도 골라서 하고 말에 기교와 방식이 있어야 한다. 머리를 써야 하는 거야.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 전에 마음속으로 곱씹어 봐야 한다. 곱씹고 난 다음에도 조금 기다렸다가 말해야 해. 그리고 말을 할 때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만약 의사를 약간 밝혔는데 다들 반기지 않고 반응이 썩 좋지 않으면 즉시 멈추고 어떻게 말해야 모두가 좋아할지 고민해 본 다음에 말을 이어 가거라. 그래야 똑똑한 거야. 그렇게 하면 너는 화를 면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너를 좋아할 거다. 사람들이 모두 너를 좋아한다면 네게 좋은 일 아니겠니? 앞으로 기회도 많아지지 않겠어?” 너에 대한 가정 교육은 네가 어떻게 해야 좋은 평판을 얻고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사람들 가운데서 입지를 굳힐 수 있을지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겉모습으로 어떻게 남을 속일 수 있는지를 알려 주고 진심을 이야기하지 말고 마음속 얘기를 전부 쏟아내지 말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진심을 얘기했다가 손해를 좀 보고는 가정에서 들었던 이 말을 떠올리며 교훈으로 삼는다. 갈수록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을 실행하려고 하고 그 말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어떤 사람은 손해를 보기도 전에 그가 받은 이런 측면의 가정 교육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어떤 장소에서든 계속해서 이 말을 실행한다. 그가 이 말을 실행하면 할수록 ‘아버지 어머니가 정말 내게 잘해 주셨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내게 잘해 주셨어. 그들은 내게 항상 진심이셨던 거야. 내가 잘 되기를 바라시면서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을 내게 알려 주셔서 다행이야. 알려 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이 가벼운 입 때문에 엄청 손해를 보고 곤욕을 치르고, 또 많은 사람의 백안시와 비아냥, 조롱을 받았을지 몰라. 정말 유용하고 실용적인 말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말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실제적인 이득을 많이 보았다. 물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때에도 이 말이 가장 유용하고 실용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형제자매가 개인의 내적 상태나 패괴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체험적 인식을 교제할 때 그도 교제하고 싶어 한다. 털어놓고 자기 마음속 생각이나 인식을 솔직하게 말해서 수년간 스스로 억눌렀던 마음을 잠시 이완시키거나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매번 아버지, 어머니가 늘 신신당부했던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나팔이 되지 말고 수신기가 되어라. 남의 말을 듣는 법을 배워라.”라는 이런 말들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속 가득한 하고 싶었던 말을 삼킨다. 모두가 말을 다 하고 나서도 그는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한다. ‘좋았어. 이번에 말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말하고 나면 다들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잖아. 어쩌면 손해일지도 모르니 말하지 않는 게 훨씬 낫지. 그러면 모두들 줄곧 내가 간사하지 않고 정직하다고, 선천적으로 과묵한 사람이라 별로 잔꾀 부리지 않고 그렇게 패괴되지도 않았다고 생각할지 몰라. 특히 하나님에 대해 별다른 관념이 없어서 순수하게 털어놓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을지도 모르지. 나한테 이런 인상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어?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은 여전히 내게 유효한 것 같으니 계속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이 말을 지키는 것이 스스로 멋지고 얻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 번, 두 번 얘기하지 않다가 어느 날 정말 답답해서 형제자매에게 털어놓고 싶은데 입에 자물쇠를 채운 듯, 붕대를 감은 듯하여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다. 형제자매에게 말할 수 없다면 하나님에게 말해 보고자 ‘쿵’ 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한다. “하나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아무개….” 속으로는 다 생각해 놓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표현도 못 한다. 영락없이 벙어리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문장을 어떻게 맞춰야 할지조차 모른다. 이렇게 오랫동안 답답하게 살았으니 스스로 억압을 느끼고 자신의 삶이 어둡고 옹졸하게 느껴진다. 하나님께 마음속 얘기를 시시콜콜 얘기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말문이 막힌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어째서 하나님께 할 말이 없겠느냐? 그저 자기소개만 할 뿐이다. 하나님께 털어놓고 싶었던 속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결국 한 마디밖에 하지 못한다. “하나님, 제가 해야 할 말을 베풀어 주세요!” 하나님이 말한다. “네가 해야 할 말은 무척 많았다. 네가 말하려 하지 않았고, 기회를 줘도 말하지 않았으니 하나님은 네게 주었던 모든 것을 다시 거두어 갔다. 너는 받을 자격이 없으니 네게 주지 않을 것이다.” 그때서야 너는 지난 몇 년간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기 자신을 빈틈없이 완벽하게 포장하여 존엄하게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형제자매가 한동안 결실을 얻는 것을 볼 때, 형제자매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패괴를 털어놓을 때 자기는 한마디도 못 하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으니 자신을 인식한 것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험과 체험을 이야기하고 싶고, 하나님으로부터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고 얼마간 수확도 얻고 싶지만 아쉽게도 자기가 늘 지키던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 때문에, 또 그런 생각에 얽매이고 통제되어 오랫동안 이 말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깨우침이나 빛 비춤도 얻지 못했다. 생명 진입에 있어서도 가진 것 없이 빈털터리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말과 생각을 제대로 실행하고 철저히 준수했지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진리에 있어서는 아무런 수확도 없이 빈궁하고 눈이 먼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입을 주었는데 그에게는 진리를 교제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이 없고 자신의 감상과 인식을 이야기할 능력도 없으며, 더욱이 형제자매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더욱 가련한 것은 하나님과 대화할 능력마저 잃어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가련하고도 슬픈 일이다. 너는 말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느냐? 말이 많으면 실수할까 봐 걱정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너는 영원히 말을 하지 마라. 너는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네게 준 것을 포장하고 억누르고 봉인하여 밖으로 발산하지 못하게 했다. 그저 네 체면이 깎일까, 위협을 받을까, 남들에게 간파당할까 염려하고, 더 이상 남들의 눈에 완벽하고, 정직하며,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여 스스로를 포장하고 진실된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결국 어찌 되었느냐? 너는 철저하게 벙어리가 된 것이다. 누가 너를 해친 것이냐? 근본적으로는 가정 교육으로 인한 것이다. 하지만 너 자신에게서 보면 네가 사탄의 철학에 따라 사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너는 가정 교육이 옳다고 믿으면서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긍정적인 것임은 믿지 않았다. 너는 너에 대한 가정 교육을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 너에 대한 하나님의 공급과 도움, 가르침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자 부정적인 사물로 간주했다. 그러니 하나님이 처음에 네게 얼마를 베풀어 주었든 여태껏 네가 경계하고 거부한 결과는 하나님이 네게 주지 않고 모든 것을 거두어 간 것이다. 넌 가질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아직 이런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을 때 너는 이런 측면으로 가정이 주입한 것을 내려놓고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너를 더욱 폐쇄적이고 음흉하며 위선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고 마음을 터놓으라고 한 하나님 말씀에 정확하게 위배되고 배치된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마땅히 진리를 추구할 때 너에 대한 이른바 올바른 가정 교육을 마땅히 내려놓고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가정이 네게 어떤 교육을 했든, 그것이 네게 얼마나 좋고 유리하든, 또 너를 얼마나 든든하게 보호해 주든 그것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내려놓아야 한다. 반면 하나님 말씀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설령 그것이 네가 받은 가정 교육과 상충하고, 나아가 네 이익을 침해하고 네 권리를 박탈하며, 심지어 네가 생각하기에 너를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네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네가 창피를 당하게 하는 것일지라도 너는 그것을 긍정적인 사물로 여겨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네가 가정 교육으로 받은 것이 사람의 생각, 처신에 해당되거나 사람의 생존관과 걸어가는 길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너는 그것을 고수하지 말고 내려놓아야 한다. 그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상응한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을 대체하고 아울러 그 속의 문제와 본질을 끊임없이 분별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더욱 정확하고 실제적이며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실행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생각을 받아들이고,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실행 원칙을 받아들이는 것은 피조물의 마땅한 책임이자 피조물로서 지니고 행해야 할 생각과 관점이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2)> 중에서
가정에서는 또 한 가지를 교육한다. 예를 들어, 가족은 항상 네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사람들 가운데서 너무 출중해선 안 되고,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다. 언행이나 개인의 재능, 역량, 지능 따위를 자제하면서 나서는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 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뾰족한 서까래가 먼저 썩는다’는 속담이 잘 말해 주잖니. 자기를 지키면서 사람들 속에서 오랫동안 평온하게 지내고 싶으면 네가 모난 돌이 되지 말고 자제해야지 설치면 안 되는 거야. 피뢰침의 경우를 생각해 보거라. 번개가 치면 피뢰침이 먼저 맞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침이 제일 먼저 맞기 마련이다. 태풍이 불면 높은 나무가 먼저 바람을 맞아 피해를 입고, 날씨가 추우면 높은 산이 먼저 얼어붙어. 사람도 마찬가지야. 사람들 가운데 네가 늘 나서서 당의 눈에 띈다면 당이 너를 혼내 줄 생각을 할 거다. 그러니 모난 돌이 되어 혼자 튀려고 하지 말고 돌 더미 속에 머물러 있거라. 그러지 않으면 어떤 사회적 운동이 있을 경우 너 같은 모난 돌을 혼내 주려 할 테니 말이다. 교회에서도 리더나 팀장이 되려 하지 마라. 혹 하나님 집의 어떤 사역에 손실이나 문제가 생기면 우선적으로 리더이자 책임자인 너부터 처분할 것이다. 그러니 모난 돌이 되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기 마련이니까. 너는 거북이처럼 안으로 움츠리는 법을 배워서 머리 숨긴 거북이가 되어야 한다.” 너는 부모의 말을 명심하고 리더를 뽑을 때 리더직을 사양하며 말한다. “아, 전 안 돼요! 제겐 가정이 있고 아이가 있거든요. 저는 가정에 많이 얽매여 있어 리더직을 맡을 수 없어요. 절 찍지 마시고 여러분이 하세요.” 리더로 뽑혀도 맡으려 하지 않는다. “아, 저는 사직해야 할 것 같아요. 리더는 여러분이 하세요. 여러분께 기회를 양보하고 저는 기권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흥,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야. 높은 곳일수록 처참하게 추락하고 추위도 심하다고. 선출되면 큰코다칠 날이 있을 테니 리더는 당신이나 해. 난 리더는 전혀 하고 싶지 않고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높은 곳에서 떨어질 일도 없지. 아무개가 리더가 되었다가 교체된 거 못 봤어? 교체된 다음 제명됐잖아. 평신도가 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어졌다고. ‘모난 돌이 정 맞고, 뾰족한 서까래가 먼저 썩는다’는 말에 딱 들어맞는 경우잖아. 어때? 혼쭐났지? 사람은 스스로 보호하는 법을 배워야 해. 머리는 뒀다 뭐 해? 머리가 있으면 스스로를 지키는 데 써야지. 이걸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사회나 집단이나 마찬가지야.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당신이 나서면 체면이 설지는 몰라도 정을 맞는 순간 깨닫게 될 거다. 사람이 설치면 언젠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이야.’ 이는 모두 부모와 가정이 네게 단단히 일렀던 당부이며 그들의 경험담이자 그들의 인생에서 얻어낸 정수이다. 이를 하나도 빠짐없이 네게 조곤조곤 알려 주는 것이다. 조곤조곤 알려 준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어느 날 어머니가 네 귀에 대고 말한다. “엄마 말 잘 들어. 엄마가 평생을 살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는데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거야. 사람이 너무 나서기 좋아하고 설치면 혼쭐나기 십상이란다. 네 아빠를 보렴. 왜 지금도 숨죽이고 얌전히 지내시겠니? 예전에 사회 운동 때 억압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야. 네 아빠는 글재주가 있어서 글도 잘 쓰고 언변도 뛰어난 데다 리더로서의 역량도 겸비하고 있었어. 너무 출중했던 거지. 결국 사회 운동에 의해 억압받았지 뭐야. 생각해 보렴. 그 이후로 네 아빠가 왜 공무원이 되거나 얼굴을 내미는 것에 대해 얘기하지 않겠니? 바로 이런 이유가 있어서야. 엄마가 너한테 하는 속 얘기나 진심 어린 말은 꼭 귀담아 듣고 잊지 말고 명심해야 된다. 어딜 가서도 기억해야 해. 이건 엄마가 네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란다.” 그때부터 너는 기억하게 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을 생각하면 곧바로 아버지가 떠오르고, 아버지를 생각하면 바로 이 말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 당시 정 맞은 모난 돌이었고 지금 아버지의 불운과 낙담한 모습이 네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다. 그래서 나서려는 생각이 들거나 마음속 얘기를 하고 싶을 때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 집에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싶을 때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고 조곤조곤 얘기하던 엄마의 진심 어린 그 한 마디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스스로 움츠러든다. ‘어떤 재능과 특기가 있든 드러내선 안 돼. 참고 견뎌야 해.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도 적당히 취사선택해야지, 무턱대고 뛰어들면 안 돼. 그렇게 무턱대고 나서서 교회 사역을 맡았다가 만에 하나 하나님 집 사역에 무슨 문제라도 생겨서 책임을 물으면 어쩌려고? 내가 어떻게 감당하겠어? 제명당하지 않을까? 내가 희생양이나 모난 돌이 되는 거 아냐? 하나님 집이라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러니 무슨 일이든 살길을 마련해 놔야 돼. 일단 나부터 지키는 법을 꼭 배워야 되는 거야. 일단 자구책부터 최대한 확보해 놓은 상태에서 말을 꺼내고 행동하는 거지. 이것이야말로 현명한 행동이지.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엄마가 말했잖아.’ 이 말은 그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그의 일상생활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본분 이행에 대한 그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 때문에 본분 이행에 진심으로 헌신하고자 할 때마다, 그리고 성심성의껏 자신의 온 힘을 다 쏟고 싶을 때마다 항상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에 발목 잡혀 결국 자기 살길을 마련해 두고 여지를 남기게 된다. 자기 살길을 마련한 다음에야 본분을 적당히 이행하는 것이다. 어떠냐? 이런 측면에서 받은 가정 교육이 네가 드러나지 않고 처리되지 않도록 최대한 지켜 주느냐? 네게 또 하나의 부적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2)> 중에서
가정 교육에서 사람의 처세에 관련된 불문율은 이외에도 많을 것이다. “나쁜 마음은 먹지 말되 경계심은 가져라. 넌 어리숙하고 고지식해.”라는 부모의 말처럼 말이다. 부모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심지어 어른들은 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좋은 사람이 되거라. 남을 해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경계심은 가져야 한다. 사람은 모두 나쁘니까 네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의 겉모습만 보지 마라. 뒤에 어떤 꿍꿍이가 있을지 모른다. 사람 속은 천 길 물속이다. 용이나 호랑이는 그려도 그 뼈는 그리기 어렵듯이 사람의 얼굴은 알더라도 마음은 알 수 없다.” 이 말에 일리가 있느냐? 문자적으로 보면 한 마디 한 마디가 틀림이 없다. 남들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사람의 마음이 흉악한지 선량한지 알 길이 없다. 한 사람의 영혼을 사람은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의 표면적인 의미는 맞지만 이는 단지 하나의 도리에 불과하다. 사람이 이 몇 마디 말을 토대로 정리할 수 있는 처세 원칙은 결국 무엇이겠느냐? 바로 “나쁜 마음은 먹지 말되 경계심은 가져라.”라는 노인의 말이다. 노인이나 가장은 항상 이런 말로 너를 일깨운다. “눈치를 키우고 순진하게 속 얘기를 그대로 말하지 마라. 남을 경계하고 조심할 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너무 깊게 사귀지 말고 마음을 주거나 목숨까지 걸지는 말아야 한다.” 노인의 이런 권고의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모두 사람에게 기만적인 방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취지는 좋다. 네가 위험한 지경에 빠지지 않게 보호하고, 너를 해치고 속이려는 자들로부터 보호하며, 네 육적인 이익과 네 신변의 안전을 보호하고, 네 생명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또한 네가 어떤 골치 아픈 일이나 송사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며, 그 어떤 시험에 빠지지도 않고 평안하고 순조롭게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가장과 노인의 취지는 그저 너를 지켜 주기 위해서일 뿐이지만 너를 지켜 주는 방식, 네게 일깨워 준 원칙 그리고 네게 주입한 이런 사상은 결코 올바른 것이 아니다. 그들의 취지는 옳지만, 네게 주입한 이런 사상은 은연중 너를 극단적인 방향으로 이끈다. 그들이 주입한 이런 사상은 사람이 처세하는 원칙과 근거이다. 네가 친구, 동료와 교류할 때나 업무 파트너, 상사와 교류할 때, 사회의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교류할 때 부모가 주입한 너를 지켜 주는 이런 사상은 은연중 대인관계를 처리할 때 너의 가장 기본적인 부적이나 원칙이 된다. 어떤 원칙이겠느냐? 그것은 바로 ‘너를 해치지는 않겠지만 네가 나를 속이거나 곤경에 빠뜨릴 수 있고, 내가 골치 아픈 일이나 송사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가세가 기울어 패가망신하거나 징역을 살 수 있으니 매사에 너를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이런 사상 관점에 지배되어 이런 태도로 처세하며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면 너는 더욱 답답해지고 피곤하여 몸과 마음이 지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 세상과 이 인류에 대해 더 큰 거부감과 반감을 갖게 되고 더욱 혐오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을 혐오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경멸할 것이다. 자신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사는 게 힘들고 억눌린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코지 당하지 않게 매사에 다른 사람을 경계하면서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 한다. 자신의 이익과 신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항상 가면을 쓰고 자신을 위장해야 하는 것이다. 절대 진심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삶의 현실 속에서 네 속마음은 답답하고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네게는 항상 네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고 영원히 네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에게 네 속 얘기나 마음속의 불평을 털어놓아도 네가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도 없고 비난이나 비방, 조롱을 받을 일도 없으며 아무런 뒷감당을 할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 “나쁜 마음은 먹지 말되 경계심은 가져라.”라는 사상 관점을 처세 원칙으로 삼은 상황에서 네 마음은 두렵고 불안할 것이며 물론 억압받고 답답할 것이다. 너는 너를 위로해 주고 네 하소연을 들어 줄 대상이 필요하다. 그러니 이런 측면에서 보면 부모가 네게 말한 “나쁜 마음은 먹지 말되 경계심은 가져라.”라는 처세 원칙은 너를 지켜 줄 수는 있지만 좌우에 날 선 검과도 같다. 네 육적인 이익과 신변의 안전을 어느 정도 지켜 주지만 이와 동시에 너를 억눌리고 고통스럽고 답답하게 만든다. 심지어는 네가 이 세상과 인류를 더욱 혐오하게 만들고 자기가 이런 사악한 시대에, 이런 사악한 인간들 속에 태어난 것으로 인해 마음속 깊이 혐오하게 만든다. 너는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든지, 왜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 하는지, 왜 항상 자기를 위장해야 하는지, 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항상 남을 경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의 진심을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말하고 나면 그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자기도 남몰래 더럽고 부끄러운 일을 하며 어둠 속에 살아가는 비열한 사람이 아닌 떳떳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진정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어째서 떳떳한 사람이 될 수 없느냐? 자기가 했던 일을 돌이켜 보면 속으로 조금씩 거리낌을 느낀다. 이런 사악한 조류와 사악한 세계를 증오하고 혐오하면서 자기 자신 역시 극도로 혐오하게 된다. 이렇게 살고 있는 자신이 혐오스럽지만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다. 비록 부모가 말과 행동으로 네게 부적을 알려 주었지만 너는 여전히 삶에서 행복감과 안전감을 느끼지 못한다. 네게 행복감과 안전감, 인격과 존엄이 없다고 생각될 때 한편으로 너는 부모가 네게 이런 부적을 준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이런 족쇄를 준 부모를 혐오하게 된다. 부모가 자기에게 왜 이렇게 처신하라고 알려 주었는지, 왜 이렇게 처신해야만 사회에 발붙이고 사람들 속에 융화되며 자신을 지킬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비록 그것은 부적이지만 동시에 족쇄이기도 해서 네 마음속에 애증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어쩌겠느냐? 네겐 올바른 인생의 길이 없고, 아무도 네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직면해 있는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앞으로의 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 알려 주는 사람도 없다. 넌 그저 헤매고 방황하면서 고통과 불안 속에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부모와 가정이 네게 처세 철학을 주입한 결과이다. 단순한 사람이 되겠다는 너의 가장 단순한 소망, 즉 이런 처세 수단 없이 떳떳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망도 실현되지 못해 그저 옹졸하게 살고 뜻을 굽히며 살고, 자신의 체면을 위해 살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사람을 경계하기 위해 자기를 강하게 만들어야 하고,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자기가 강한 척, 잘난 척, 굉장한 척, 대단한 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는 이렇듯 본심에 어긋나게 살 수밖에 없는데, 이는 너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너는 이런 처세 방식과 처세 수단에서 벗어날 길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너는 가정과 부모가 가르쳐 준 사상에 지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이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정과 부모로부터 주입된 사상에 의해 농락당하고 통제당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지 못해 운명에 삶을 맡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록 양심에 지각이 조금 있고, 사람답게 살면서 모든 사람과 공평하게 지내며 경쟁하고 싶은 소망이 조금은 있지만 네게 어떤 소망이 있든, 너는 가정에서 배운 여러 사상 관점의 영향과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너는 “나쁜 마음은 먹지 말되 경계심은 가져라.”라는 가정에서 물든 사상 관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달리 네가 갈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는 모두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얻지 못해 초래되는 결과이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4)> 중에서
이러한 전통문화는 왜 진리가 아니겠느냐? 근본을 따져보면, 그것들은 인류가 사탄에게 패괴된 후에 생겨난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그 안에는 사람의 상상과 관념이 섞여 있다. 더욱이 그것은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켜 초래한 결과이다. 사탄은 인류를 패괴시키는 사상과 관점, 각종 가르침, 논조를 이용해 사람의 사상을 속박하고 패괴시킨다. 만약 사탄이 눈에 띄게 황당하고 그릇되며 잘못된 것들로 사람을 미혹한다면, 사람은 분별할 것이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 이런 분별력으로 그것을 부정하고 정죄할 것이다. 그러면 그 학설은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사탄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는 것,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상과 이론으로 사람을 물들이는 한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주입하기에 사람은 아주 쉽게 그것에 미혹되며, 그 가르침은 아주 쉽게 받아들여지고 전파된다. 그렇게 한 세대 한 세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악비(岳飛)나 양가장(楊家將) 등 중국 영웅들의 이야기, 문천상(文天祥)의 애국 이야기 등이 있다. 이러한 사상이 왜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왔겠느냐?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역대 어느 시기든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나 통치자들이 항상 이런 사례와 인물들의 사상, 정신을 통해 한 세대, 또 한 세대 사람들을 지도했다. 그리하여 한 세대, 또 한 세대 사람들이 착실하고 성실하게 그들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했으며, 이 사상들을 통해 매우 수월하게 한 세대, 또 한 세대 사람들을 통치하는 한편, 자신들의 통치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악비와 양가장의 우국충정 이야기, 문천상과 굴원의 애국정신 등을 들어 피통치자인 민중을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에게 한 가지 도리를 알게 했다. 바로 사람이라면 충성해야 하며, 이는 인품이 고상한 사람이 갖추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 말이다. 어느 수준까지 충성해야겠느냐? ‘임금이 신하에게 죽으라고 하면 신하는 죽어야만 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처럼 충성해야 한다. 이는 그들이 떠받드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또 애국지사들을 떠받든다. ‘애국’이란 무엇을 사랑하는 것이냐? 그 땅을 사랑하는 것이냐? 그 국민들을 사랑하는 것이냐? 국가란 무엇이냐? (통치자입니다.) 통치자는 국가의 대변인이다. 만약 네가 “제가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 제 고향, 제 부모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들 같은 통치자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네가 “애국이란 마음속 깊이 통치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받아들이고 네 그런 ‘사랑’에 동의할 것이다. 만약 네가 사랑하는 것이 그가 아니라고 명확하고 분명하게 말한다면 그는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역대의 통치자들은 무엇을 대표하느냐? (사탄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사탄을 대표하며, 사탄과 한 패거리로, 마귀에 속하는 존재이다. 그들은 백성들이 하나님, 창조주를 경배하도록 가르칠 리가 없다. 그렇게 하지 않을뿐더러 백성들에게 통치자는 천자(天子)라고 알려 준다. 천자란 무슨 의미냐? 하늘이 한 사람에게 권력을 내려 준 것으로, 그 사람을 ‘천자’라고 부르며, 그에게는 천하의 백성들을 다스릴 권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통치자가 백성들에게 주입한, 일종의 사상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천자가 된다는 것은 하늘이 정하는 일로, 하늘의 뜻이 그에게 있는 것이니 백성들은 무조건적으로 그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어떤 통치든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이 사람에게 주입한 것은 이런 사상으로, 네가 하늘의 존재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가 천자임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가 천자임을 받아들이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하늘, 하나님,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는 게 아니라 그가 천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그는 하늘의 뜻이 있기에 천자로 태어난 것이니, 백성들은 마땅히 그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입하는 것은 전부 이런 사상이다. 인류의 기원부터 오늘날까지 생겨난 이 사상의 배후에는 해부하는 것이 유래가 있는 단어나 성어든, 아예 유래가 없는 민간의 속담이나 속어든 다 인류에 대한 사탄의 결박과 미혹이 있으며, 패괴된 인류가 이런 사건 자체에 내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정의가 있다. 이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정의가 후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겠느냐? 좋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겠느냐, 아니면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겠느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와신상담’, ‘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 ‘큰일을 위해 치욕을 참는다’,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겉으로는 잔도를 만드는 척하면서 몰래 진창으로 진군해 기습한다’ 등의 말은 후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가져다주었느냐? 사람은 이러한 전통문화를 받아들인 후 한 세대 또 한 세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며,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고 구원하는 사역, 하나님의 경륜 사역과도 점점 멀어졌다. 인류는 전통문화의 잘못된 관점들을 받아들인 후 점점 더 사람의 운명은 자기 손안에 있는 거라고, 행복은 자신의 두 손으로 만드는 것이고 기회는 준비된 자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류는 점점 더 하나님과 하나님의 주재를 부정하고,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게 되었다. 현대인들이 즐겨 말하는 것들은 사실 2천 년 전 사람들이 즐겨 말하던 사상과 내용이 동일하다. 다만, 현대인들은 점점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말하며, 하나님의 존재와 주재를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갈수록 심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한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1)>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 그리고 진리와 도리는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르냐?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갈수록 이성과 양심을 갖추고 원칙 있게 일을 하도록 변화시킨다. 그리고 사람이 점점 더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를 살아 낼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사람의 말은 겉으론 사람의 기호나 관념에 부합하지만 진리가 아니고 내면에는 함정과 유혹, 그릇된 주장과 황당무계한 논리가 가득하기 때문에 사람이 이런 말들에 따라 행하면 점차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람의 삶이 점점 더 사악해지고 사탄처럼 변해 간다는 점이다. 사람이 철저하게 인류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무계한 논리에 따라 살고 행하며 이런 논조들을 오롯이 받아들였을 때, 사람은 곧 사탄으로 살게 된다. 사탄으로 살게 된다는 말은 사람이 곧 사탄이라는 뜻 아니냐? (맞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성공적으로’ 살아 있는 사탄이 된 것이다. 어떤 이는 “나는 믿지 않아.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고, 많은 사람이 볼 때 좋은 사람이 될 거야. 하나님이 날 기뻐하실 수 있을지 없을지 한번 봐야지.”라고 한다. 네가 하나님이 한 말씀을 믿지 못하겠다면 도대체 하나님 말씀이 진리인지 사람의 관념이 진리인지 한번 두고 보아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과 사람 말의 본질적인 차이이고, 진리와 그릇된 주장, 황당무계한 논리의 본질적 차이다. 사람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무계한 논리는 표면적으론 사람의 기호에 맞더라도 결코 사람의 생명이 될 순 없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얕고 이해하기 쉬워도, 아무리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더라도 그 본질은 진리이다. 사람이 만약 하나님 말씀의 원칙에 따라 행하고 살아간다면 결국 언젠가는 진정한, 그리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고, 악에서 떠날 수 있다. 반대로 사람이 만약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고, 하나님 요구대로 처신하지 않으면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될 수 없으니 사람의 모든 행위와 사람이 가는 길을 하나님이 혐오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실이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5)> 중에서
많은 사람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찬미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이 말씀들을 사랑하지 않고, 진리에 관심이 없다. 또 늘 사탄의 철학과 세상의 각종 학설로 살아가는 것이 정상인이라고, 그래야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이 세상에서 가치 있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겠느냐? 아니다. 위인, 명인의 말은 매우 철학적이고, 사람을 쉽게 미혹한다. 네가 그것을 진리나 좌우명으로 여겨 지키면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평범한 한마디, 예를 들어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정직한 사람이 되고 착실히, 고분고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착실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은 실행하지 못하고 진리로 여기지도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진리를 실행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네가 실행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맞느냐? 네가 지킨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냐?”라고 묻는다면, 너는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너는 사탄의 말에 근거한 것이다. 네가 살아 낸 것은 사탄의 말인데도 네가 진리를 실행했다고, 하나님을 만족게 했다고 말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 아니겠느냐? 예를 들어,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정직한 사람이 되려면 어떤 실제적인 내용이 있는지,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 내고 드러내는 것이 정직하지 않은 것이고 어떻게 살아 내고 드러내는 것이 정직한 것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의 본질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이방의 책을 찾아 읽으며 ‘이방인의 명언도 괜찮네. 좋은 걸 배우라는 거잖아! 예를 들어, ‘좋은 사람은 일생이 평안하다.’, ‘솔직한 사람은 오래간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라 나중에 이득을 보게 된다.’ 등 말은 옳기도 하고, 진리에도 부합해!’라고 생각하고는 이 말들을 지킨다. 그가 이방인의 이런 격언을 지키면 어떤 모습을 살아 낼 수 있겠느냐? 그가 진리 실제를 살아 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아주 많지 않으냐? 지식을 좀 익히고 책 몇 권 읽었다고, 명작 몇 권 봤다고, 식견을 좀 쌓고 명언과 민간의 속담들을 좀 들었다고, 그런 것을 진리로 여기고 그 말대로 행동하거나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을 믿는 삶에 적용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했다고 생각하니, 이것이 가짜로 진짜를 바꿔치기하는 것 아니겠느냐? 기만행위 아니겠느냐? 이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이런 행동은 모든 사람에게서 적잖이 일어난다. 민간의 듣기 좋은 말, 옳은 도리를 전부 진리로 여겨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은 한 곳에 치워 둔 채 신경도 쓰지 않고, 몇 번을 읽어도 마음속에 새기지 않으며,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지 않는 이런 자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겠느냐?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종교를 믿고 있는 것이고, 사탄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사탄이 한 그런 말에 철학적 이치와 심오한 뜻이 있다고, 너무나 전형적이라고, 최고의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무엇을 포기해도 그런 말은 포기하지 못한다. 그런 말을 포기하면 목숨이라도 잃는 것 같고, 마음이 텅 비기라도 하는 것 같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런 사람은 사탄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사탄의 명언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각기 다른 배경 속에서 자신의 다양한 내적 상태를 분석하고 인식할 줄 아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늘 하나님 말씀을 읽지만, 일이 닥치면 늘 “우리 엄마가 그러셨는데”,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어떤 명사가 한 말인데”, “어떤 책에서 그렇게 말했는데”라고 말하고, “하나님 말씀에서 그렇게 말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런 거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라고는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면, 이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내적 상태를 사람이 발견하기 쉽겠느냐? 발견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사람 내면에 존재하면 매우 치명적이다. 너희는 하나님을 3~5년, 혹은 8~10년 믿었으면서도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실행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며, 무슨 일이 닥치든 사탄의 말을 근거로 삼고 전통문화에서 근거를 찾는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사탄을 따르는 것 아니냐? 너는 사탄의 말과 성품으로 살아가니,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아니냐? 네가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르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대로 따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그 어떤 지배와 요구에도 순종하지 못한다면, 너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따르는 것이다. 사탄은 어디에 있느냐? 사탄은 바로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사탄의 철학과 논리, 법칙, 각종 허튼소리는 이미 오래전에 사람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다. 이는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수시로 자신의 모든 행동과 사상, 관점, 일 처리의 근거를 하나님 말씀과 맞춰 보고, 자신의 사상 속에 있는 것들을 해부해야 한다. 자기 안에 있는 것 중 어떤 것이 처세술, 속담, 전통문화인지, 어떤 것이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너희 자신이 항상 옳거나 진리에 부합하는 것으로 여기고, 진리로 삼아 지키면서 진리를 대신하려 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너희는 이런 것들을 해부해야 한다. 특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진리로 삼기에 네가 그걸 간파하기란 쉽지 않다. 그걸 간파했다면 사람은 커다란 난관을 돌파한 셈이다. 그것들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등을 모두 가로막는다. 사람이 온종일 흐리멍덩하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일을 생각하지도, 이러한 문제 해결에 신경 쓰지도 않는다면, 이런 것들은 네 마음속에서 화근, 독소로 작용할 것이다. 뿌리 뽑지 않는다면 진실로 하나님을 따를 수 없고, 진리를 실행하며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을 것이니, 구원받을 방법도 없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종교를 믿으며 종교 의식을 행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 중에서
어떤 일이든 네가 사탄 철학이나 사람의 방법으로 해결하는지, 아니면 진리를 구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결하는지, 혹은 절충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지, 네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네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장 명확히 드러낸다. 만약 언제나 사탄 철학과 사람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쪽을 택한다면 그 결과는 진리를 얻지 못하고,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 인도를 얻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에 대해 관념과 오해가 생겨나 결국에는 하나님께 버림받고 도태될 것이다. 만약 네가 범사에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해결할 수 있다면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 인도를 얻을 것이고, 갈수록 진리를 깨닫고 갈수록 하나님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한동안 이렇게 실행하고 체험하면 패괴 성품이 점차 정결케 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경우도 줄어들어 마지막에는 하나님과 완전히 합하게 된다. 언제나 절충하는 방식을 택한다면 그것은 사실 여전히 사탄 철학에 기대어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살면 영원히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고 드러나 도태되는 수밖에 없다. 잘못된 방식을 택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셈이다. 그렇다면 얼른 바로잡아야 한다. 늦기 전에 방향을 돌려서 올바른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그러면 아직 구원받을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올바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려면 스스로 구하고 모색해야 한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한동안 체험하고 나면 바른길을 찾기 마련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를 추구해야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를 해결할 수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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