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란?
말세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사람은 하나님이 지었으므로 하나님께 경배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을 등지고 사탄을 경배하며 사탄을 마음속 우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리를 잃게 되었다. 다시 말해, 사람을 지은 의의를 잃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지은 의의를 되찾으려면 반드시 사람의 원래 모습을 회복시키고, 패괴 성품을 없애야 한다. 또한 사람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되찾아 오려면 필히 사람을 죄에서 구원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사람을 조금씩 원래 모습으로 회복시키고 원래 기능을 회복시키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할 수 있다. 마지막에 패역한 자식들을 철저히 멸하는 까닭도 사람이 하나님을 더욱 잘 경배하고 땅에서 더욱 잘 살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지은 이상 사람이 그를 경배하게 할 것이고, 사람의 원래 기능을 회복시키려는 이상 불순물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도록 철저히 회복시킬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권병을 회복하는 것은 바로 사람이 그를 경배하고 순종하게 하며, 그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그의 원수가 모두 그의 권병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그의 모든 것을 사람 가운데 남기며, 그 누구도 대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가 세우려는 나라는 그 자신의 나라이며, 그가 원하는 인류는 그를 경배하고 그에게 완전히 순종하며 그의 영광을 가진 인류이다. 패괴된 인류를 구원하지 않는다면 그가 사람을 지은 의의는 사라지고, 그가 사람들 가운데서 가졌던 권병은 없어질 것이며, 땅에는 더 이상 그의 나라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님을 거역한 원수들을 멸하지 않는다면 그는 완전한 영광을 얻을 수 없고, 땅에 그의 나라를 세우지도 못할 것이다. 인류 가운데의 패역자들을 철저히 멸하고 온전케 된 자들을 모두 안식으로 인도하는 것은 바로 그의 사역이 완성되고 그의 대업이 이루어졌다는 표징이다. 인류가 처음의 모습을 회복하고, 각자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며, 자신의 본래 자리를 지키면서 하나님의 모든 안배에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은 땅에서 그를 경배하는 사람들을 얻고 그를 경배하는 나라를 세우게 된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안식에 들어갈 것이다> 중에서
하나님을 믿을 때는 반드시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무척 중요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진리가 왜 중요하겠느냐? 이는 피조물의 책임이자 본능이며 제일 중요한 일이다. 네가 이런 본능과 개념, 인지를 갖추지 못했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진리조차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도 스스로 진리를 적잖이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이는 헛소리 아니겠느냐? 다 헛소리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고, 어떻게 해야 창조주를 만족게 할 수 있는지 모르며, 어떤 일을 해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면, 이는 사람의 본능을 잃어버린 것 아니겠느냐? 이는 사람의 본능을 잃어버린 것이고,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조차 모른다는 것은 얼마나 가련하냐! 너희가 하나님을 믿은 지도 최소 3~5년은 되었건만,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떻게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하는지 모르는구나. 이는 무척 위험한 일로, 너무 쉽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그때 당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법을 몰랐다. 하나님이 선악과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을 때,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그러셨을까? 이유를 말씀해 주지 않으셨으니, 그냥 먹지 말자.’ 그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으며, 경멸하는 태도로 하나님 말씀을 대하고 무시했다. 사탄은 그들을 미혹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나님께서 정말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창 3:1)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죽지 않을 수도 있노라 너희가 그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분별할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이니라”(창 3:4~5)라고도 했습니다.) 사탄의 이 말은 무슨 의미냐? ‘하나님은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먹으면 어떻게 될까? 꼭 죽으리라는 법도 없다.’라는 뜻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을 확신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했다면,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갔겠느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하나님에게 순종한다는 개념이 없었고,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으니, 누가 먹으라고 해도 나는 먹지 않을 거야.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해.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왜 먹지 말라고 하셨는지, 먹으면 정말 죽는지는 모르겠어. 먹어 본 적이 없으니까. 죽을 수도 있고 안 죽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해.’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에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게 중요하겠느냐, 중요하지 않겠느냐? (중요합니다.) 사실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위해 많은 진리를 깨달을 필요도, 깊이 깨달을 필요도 없다. 그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어떻게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하는지만 알면 순종할 수 있다. 어떤 행위가 네 결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 등은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최소한 이성을 갖추고, 순종하는 마음과 태도를 갖춰야 한다. 이는 인성에 갖춰져야 할 부분이다. 즉, 너는 네가 누구고 하나님은 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너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둘의 신분과 지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또 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네가 “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겁니다. 하나님의 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지요.”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순종하는 태도다. 반면, 입으로는 “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겁니다.”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일까? 이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될까?’라고 생각하고 언제나 이익만을 고려한다면, 이는 옳지 않다. 어디가 잘못됐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는 잘못된 위치에 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사람의 패괴 성품 때문이고,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잘못된 위치에 서는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마음에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순종을 모르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이성이 없으면 잘못된 위치에 서게 된다. 순종은 매우 중요한데, 네가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하느냐에 달렸다.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는 많고 많지만, 가장 높은 진리가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피조물은 반드시 창조주의 지배와 안배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언제 어디서든, 어느 해 어느 달이든, 어떤 공간, 어떤 지리적 환경에서든 이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이 세상과 인류가 사라지고, 이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순종해야 한다.”라는 이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이는 네 이성에 갖춰져야 할 부분이고, 하나님을 믿는 자가 갖춰야 할 첫 번째 진리다.
― 하나님의 교통 중에서
네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사역을 믿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 이상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조차 할 수 없다면 믿고 안 믿고는 거론할 수도 없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도 하나님께 순종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이 네게 순종하고 너의 관념대로 따르게 한다면, 너는 가장 패역한 사람이며 불신파다. 이런 사람이 어찌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가장 패역한 사람은 일부러 하나님께 불복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원수이며 적그리스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새 사역을 항상 적대적인 태도로 대하고, 순종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며, 기꺼이 순종하거나 자신을 낮춘 적도 없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가장 대단하다고 여기며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도’에 대해 가장 잘 나누고 다른 사람의 일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원래 가지고 있던 ‘보배’를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오히려 그것을 가보로 삼아 섬기고 다른 사람에게 얘기함으로써 자신을 우러러보는 아둔한 이들을 가르친다. 교회에는 확실히 이런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굴복을 모르는 영웅 세가’로, 대대로 하나님 집에 얹혀산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도’(리)를 얘기하는 것을 자신의 최고 직책으로 삼고, 한 해 또 한 해, 한 세대 또 한 세대 이어 가며 자신들의 신성불가침한 직책을 수행하고 있다. 누구도 감히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고, 누구도 감히 그들을 공개적으로 질책하지 못한다. 하나님 집에서 ‘거물’이 된 그들은 시대마다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날뛴다. 이 악마의 무리가 연합하여 나의 사역을 허물려고 하는데, 내가 어찌 이런 산 귀신이 내 눈앞에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느냐? 내게 절반만 순종하는 사람들도 마지막까지 가지 못하는데, 하물며 순종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이 악한 자들은 어떻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전력을 다해도 그중 일부만 얻고서 최종적으로 온전케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역을 망가뜨리려고 시도하는 천사장의 후손들은 어떻겠느냐? 그들은 더더욱 하나님께 얻어질 희망이 없지 않겠느냐? 내가 와서 정복 사역을 하는 목적은 그저 정복을 위한 정복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의와 불의를 드러내기 위해 정복하고, 사람에게 징벌을 내릴 증거를 손에 넣기 위해 정복하며, 또 악인을 정죄하기 위해 정복하고, 더욱이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해 정복한다. 최종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각기 부류대로 나누는데, 온전케 된 사람은 순종하는 마음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이루는 사역이다. 하지만 패역한 행위로 가득한 자들은 모두 징벌받고 타오르는 불길 속에 떨어져 영원히 저주받는 대상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역대로 ‘위세와 무력에 굴복하지 않는 대단한 영웅 세가’의 사람들은 가장 비천하고 냉대받는 ‘나약하고 무능한 겁쟁이 세가’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모든 공의와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을 나타낼 수 있고, 또 이렇게 해야만 내 마음에 맺힌 한이 풀리게 된다. 말해 보아라. 이렇게 하는 것이 아주 합리적이지 않겠느냐?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진다> 중에서
성육신 기간에 하나님이 요구하는 순종은 사람의 상상처럼 판단하지 않고 대적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람에게 그의 말씀을 삶의 원칙과 생존의 토대로 삼고 절대적으로 말씀의 본질을 실행하여 그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를 요구한다. 성육신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요구는 그의 말씀을 실행하라는 것이며, 또한 그의 정상적인 면과 실제적인 면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이는 모두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기준을 충족한 사람은 모두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자기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이다. 성육신 하나님은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인성으로 사역한다. 그러기에 그가 취한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인성의 외형은 사람에게 크나큰 시련이자 어려움이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면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는 아무리 방법을 찾아도 정상적인 인성의 외형을 없애 버릴 수는 없다. 그는 어디까지나 하늘에 계신 ‘영’인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의 외형을 지닌 하나님이다. 그러한데 그의 정상적인 인성의 외형을 없애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이겠느냐? 그러므로 그는 어찌 됐든 육신의 입장에서 그가 하려는 사역을 해야 한다. 이 사역은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하나님의 발현인데, 사람이 순종하지 않으면 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행사를 어찌할 수 있겠느냐?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한다. 그런데 사람이 순종하지 않으면 또 무슨 좋은 방법이 있겠느냐? 아직까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순종’뿐이다. 이것 외에 다른 최상의 방법은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시련하려고 하는데, 사람이 어찌하겠느냐?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결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성육신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가 하고자 하는 바를 사람은 바꿔 놓을 수 없다. 하늘의 하나님조차 그의 행사에 간섭하지 않으니, 사람은 더욱 그에게 순종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가 비록 실제적이고 정상적이지만 그는 틀림없이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이다. 그는 자신의 뜻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한다. 하늘의 하나님이 모든 임무를 그에게 맡겼으니 그가 어떻게 하든 너는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인성을 지니고 있고 너무나 정상적이지만, 이 모든 것은 그가 특별히 예비한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어찌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보면서 불만을 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 되길 원하면 정상적인 사람이 되고, 인성으로 살기 원하면 인성으로 살고, 신성으로 살기 원하면 신성으로 산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하나님은 어쨌든 하나님이고, 사람은 어쨌든 사람이다. 그러니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로 인해 그 본질을 부정해서는 안 되며, 그를 ‘하나님’의 ‘위격’에서 밀어내서도 안 된다. 사람에게는 사람으로서의 자유가 있고,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으로서의 존엄이 있다. 이는 서로 침범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조금이라도 자유를 줄 수 없느냐? 하나님이 ‘마음대로 하는 것’은 조금도 용납하지 못한단 말이냐? 하나님에게 너무 ‘각박’하게 굴지 마라. 서로 ‘포용’하면 모든 일이 척척 해결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거리가 생길 리 있겠느냐? 이렇게 작은 일도 용납하지 못해서야 아량이니 도량이니 하는 말을 어찌하겠으며, 어떻게 대장부가 되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난처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자잘하기 그지없는 일을 크게 부풀려 처리하니, 침소봉대라고 말할 수밖에 없구나. 정말이지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은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인성으로 사역하지만, 그가 하는 것은 사람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가 하는 사역의 본질은 보지 않고 인간적인 모습만 본다. 이렇게 큰 사역은 보지 못하고 하필이면 하나님의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성만 보며 물고 늘어지니, 이것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늘의 하나님은 오늘날 땅의 하나님이 ‘되었다’. 이제는 땅의 하나님이 바로 하늘의 하나님이다. 겉모습이 어떤지, 어떤 사역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하는 분이라면 하나님 자신이다. 너는 원하든 원치 않든 순종해야 한다. 이는 네가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사람의 순종을 받아야 하고, 사람이라면 마땅히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여기에 조금의 거짓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의 ‘실제’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다> 중에서
하나님, 성육신, 진리 이 세 가지를 대할 때 사람은 어떤 태도를 갖춰야 하느냐?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 이것만큼 간단한 일이 없다. 말씀을 듣고 속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완전히 받아들일 때까지 스스로 계속 구하고, 받아들인 다음에는 바로 순종해야 한다. 순종한다는 것은 어떤 뜻이냐? 바로 실행하고 이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듣고 끝이 아니다. 겉으로는 알았다고 하고, 노트에 적어 두고, 말 그대로 기억하고, 귀로는 들었지만 정작 마음에는 담아 두지 않고, 실행해야 할 때는 여전히 구태의연한 방식을 따르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노트에 적어 둔 그 말들은 모두 까맣게 잊은 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순종이 아니다. 진정한 순종은 정성을 다해 듣고 이해하고, 진실되게 받아들이는 것, 즉 당연히 해야 할 책임으로 여겨 받아들이는 것이다. 말로만 받아들인다고 끝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받아들인 후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고, 절대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기 위해 생각하고, 일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 이행이란 이런 것이다. 순종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냐? 바로 실행하고 이행하여 그것을 현실로 바꾸는 것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이 한 말씀, 하나님의 요구를 노트에 기록하고 종이에 받아 적더라도 정작 마음속에 새기지 않고 일을 할 때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겉으로 볼 때 그 일은 네가 했어도 자기 뜻대로 한 것이 된다. 이것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패역이다.
―<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부록 3 노아와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였는가(2)> 중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는 것은 본래 같은 뜻이다. 하나님께만 순종할 뿐 하나님의 사역에는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순종하는 사람이라 할 수 없고, 진심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만 아첨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진심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서 어느 정도 얻는 것이 있고, 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 진심으로 순종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모두 새로운 사역 가운데서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변화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인정받은 사람이고, 온전케 된 사람이며, 성품이 변화된 사람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하는 사람이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기꺼이 순종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옳은 사람이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원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진다> 중에서
하나님께 순종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가장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고 또한 이를 받아들여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순종이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고, 그저 현 상태에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이유는 기존에 있던 것들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 내면에 여러 가지 관념과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상상을 만들어 냈으며, 이런 것들이 모두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의 관념이자, 자신의 상상 속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네가 너의 상상 속 하나님을 기준으로 오늘날 실제적으로 사역하는 하나님을 판단한다면 너의 믿음은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며, 이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원치 않는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자격을 갖추고 아무리 많이 헌신해도, 설령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심지어 순교를 해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는 은혜를 조금 베풀어 주어 잠시 누리게 할 뿐이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실천했다고 할 수 없다. 성령은 이런 사람에게 역사하지 않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하나씩 도태시킬 것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 마음가짐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은 모두 대적하고 방해하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의심의 여지 없이 모두 도태될 대상이다. 하나님에 대해 조금의 순종도 없이 그저 하나님의 이름만 인정하고 하나님의 친절함과 사랑스러움을 조금 느낄 뿐 성령의 발걸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성령의 현재 사역과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얻어질 수 없고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누리는 것을 통해, 생활 속의 고난과 연단을 통해 사람을 온전케 한다.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야 성품이 변화될 수 있고, 하나님을 진실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인 자세로 진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며, 하나님께 얻어지기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믿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은혜만 누린다면, 순종, 경건함, 사랑과 인내는 모두 표면적인 것에 그칠 뿐 온전케 되거나 변화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만 누린다면, 하나님을 참되게 알지 못한다. 설령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해도 얄팍한 것이다. 혹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한다거나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사람에게 생명이 있거나 참된 인식이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을 연단할 때, 또는 사람에게 시련을 줄 때, 사람이 순종하지 못하고 의심하며 넘어진다면,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관한 여러 가지 규정과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쌓은 낡은 경험, 또는 성경을 원칙으로 한 각종 규례만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인간적인 것으로 가득 찼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모두 개인의 취향에 따라 ‘순종’하는데 하나님이 그런 순종을 바라겠느냐? 이는 규례를 지키는 것이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며, 자기만족과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만약 이런 것을 일컬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라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중에서
종교 관념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현재 말씀과 사역을 머리로 가늠할 필요 없이 바로 순종하게 된다. 하나님의 현재 사역이 예전과 확연히 다르다 할지라도 과거의 관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현재 사역에 바로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이 예전에 어떻게 했든 현재 하나님의 사역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너는 고정 관념을 내려놓은 사람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하는 사람이다. 너는 하나님의 사역을 분석하거나 연구하지 말고 하나님이 지난날의 사역을 ‘잊어버린’ 것처럼 너 역시 ‘잊어버려야’ 한다. 현재는 현재이고 과거는 과거이다. 현재 하나님은 과거에 행한 사역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너도 그것을 마음에 담아 두지 마라.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고 종교 관념을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의 현재 사역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중에서
하나님의 사역은 시대마다 서로 다르다. 네가 이 기간의 사역에 잘 순종했더라도 다음 기간의 사역에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거나 순종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너를 버릴 것이다. 하나님이 이 단계로 올 때 네가 따라왔다면 다음 단계로 갈 때도 반드시 따라가야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성령께 순종하는 사람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시종일관 변함없이 순종해야 한다. 기분이 좋을 때만 순종하고 기분이 나쁠 때는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런 순종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 내가 새 사역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따라오지 못하고 과거의 견해를 고집한다면 너의 생명이 성장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은 말씀을 통해 너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네가 순종하고 받아들인다면 성령은 반드시 너에게 역사할 것이다. 성령은 내가 말하는 대로 역사하므로 너희가 내 말대로 한다면 성령이 곧바로 너희에게 역사할 것이다. 나는 새 빛을 너희에게 보여 주고 너희 모두를 현재의 빛 속으로 인도한다. 네가 현재의 빛 속으로 들어가면 성령은 즉시 너에게 역사할 것이다. 누군가 인정하지 못하고 “저는 당신의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한다면 나는 네게 이제 길이 없으며 메마르고 생명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품 변화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빛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부 사람들에게 역사하고, 더욱이 교회에서도 역사하는데, 누구에게 역사할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네게 역사한다면 너는 체험할 것이고, 다음에 다른 사람에게 역사한다면 너는 빨리 따라야 할 것이다. 현재의 빛을 따를수록 생명은 더 자란다.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성령이 역사한 것이라면 너는 따라야 한다. 네가 체험하는 가운데 그의 체험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면 더 높은 것을 얻게 되는데, 이렇게 실행하면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을 온전케 하는 길이요, 생명이 성장하는 경로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얻어진다> 중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려면 무엇보다도 사람이 하나님께 지나친 욕망을 품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속셈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를 보아야 한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께 늘 요구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어떤 일이 닥치든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리를 구하지 않으며, 늘 자신의 이치를 따지고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하나님이 진리이고 공의롭다는 것을 의심한다면, 문제가 된다. 이런 사람은 가장 교만하고 하나님을 제일 심하게 거역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늘 요구하는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요구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거래한다는 의미이며, 자기 뜻을 선택하고 자기 뜻에 따라 행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배반이고, 불순종이다. 네가 하나님께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성이 없는 행위이다. 그가 하나님임을 진실로 믿는다면, 너는 무리한 요구든 합리적인 요구든 감히 그에게 요구할 수 없고, 그에게 요구할 자격도 없다. 네가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고, 그가 하나님임을 믿는다면, 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오로지 경배하고 순종할 것이다. 오늘날 사람은 자신이 선택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 뜻대로 행할 것도 요구한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선택하기는커녕 하나님께 자기에게 순종하라고 하는데, 이는 너무 비이성적이지 않으냐? 그러므로 사람의 내면에 진실한 믿음도, 실질적인 믿음도 없으면 영원히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언젠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요구가 적어지면 진실한 믿음과 순종의 성분은 많아질 것이며, 사람의 이성도 비교적 정상적이 될 것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요구는 너무나 많다> 중에서
노아가 하나님의 명대로 일을 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고,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려는지도 몰랐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명하여 그가 해야 할 일을 지시했을 뿐 많은 설명은 하지 않았다. 노아는 명대로 행했지 사사로이 하나님의 뜻을 추측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대항하지 않았고 두 마음을 품지도 않았다. 그는 순진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그가 일을 하는 데 있어 가졌던 신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부탁을 대함에 있어 그토록 명쾌하고 단순했다. 노아의 본질, 즉 그 행위의 본질은 순종이다. 의심하지 않고 대항하지 않으며 개인적 이익이나 이해득실을 고려하지도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한다고 말씀하자 그게 언제냐고 묻지 않았고, 상세한 내용도 묻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왜 세상을 멸하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명대로 행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무엇으로, 어떻게 지으라고 명한 대로 그는 일일이 행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하나님을 흡족게 해 드려야겠다는 태도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했다. 노아는 자신이 재난을 피하기 위해 그랬던 것이냐?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 얼마 후 세상을 멸할 것인지 물어보았느냐?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방주를 짓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하나님께 물어보았느냐? 아니면 노아 스스로 알고 있었느냐? 노아도 몰랐다. 그는 단순하게 순종하고 명령대로 행했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1> 중에서
하나님이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할 때, 이 ‘지배’는 대부분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으며, 이해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자 검증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드러났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것이다. 이때,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 ― 이삭을 바치라는 것 ― 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인류에 대해, 즉 자신이 선택한 아브라함이란 사람에 대해 참으로 안심했고, 그를 진정으로 인정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그 사람이 자신의 약속과 앞으로의 경륜을 맡아서 실행해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주요 인물이라고 확신했다. 비록 그 일이 시련과 검증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은 이미 위안을 받았고, 그에 대한 사랑을 느꼈으며, 또한 처음으로 사람에게 위로를 받았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고 하던 그 찰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더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삭의 생명을 가져갈 생각이 없었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행동을 바로 저지했다. 하나님이 보기에, 아브라함의 순종은 이미 검증을 통과했다. 아브라함의 행동은 그것으로 충분했으며, 하나님은 자신이 하고자 한 일에서 결과를 얻었다. 그 결과에 하나님은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그 결과에 만족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한 것, 보고자 기대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더냐? 비록 하나님이 서로 다른 배경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 사람을 검증한다고는 하나,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았고, 아브라함의 마음이 진심임을 보았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무조건적인 것이었고, 이 ‘무조건’은 바로 하나님이 원한 것이었다.
―<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자신 2> 중에서
그럼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어느 정도까지 역사하여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겠느냐? 우리는 전에 베드로의 말 한마디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느냐? (“설령 하나님께서 저를 장난감으로 생각하신다 해도 제가 어찌 기꺼이 달가워하지 않겠습니까?”입니다.) 그렇다. 바로 그 말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사역이나 인도를 체험하고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은 사람을 장난감으로 여기시는 것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는 일의 출발점은 결코 그런 게 아니다. 사람은 인간의 시선과 머리, 지식으로 이 일을 판단하면서 아무래도 하나님은 사람을 장난감처럼 마음대로 갖고 노는 것 같다고, 오늘은 이렇게 하는 게 맞는다고 했다가 내일은 또 저렇게 하라고 한다며 자기도 모르게 ‘아이고, 하나님은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도대체 뭘 하고 계신 걸까?’라고 생각한다. 또 사람은 아리송해지고 갈팡질팡하며,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베드로에게 시련을 주었다. 시련의 최종 성과는 무엇이었느냐? (베드로는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순종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원한 것은 바로 그 결과였으며, 하나님은 그 결과를 보았다. 그럼 베드로의 어떤 말을 통해 그가 순종했고, 그의 분량이 성장했음을 알 수 있겠느냐? 베드로는 어떻게 말했느냐? 베드로는 하나님의 모든 행사와 사람을 장난감 취급 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했느냐? 그의 태도는 무엇이었느냐? (그는 “제가 어찌 기꺼이 달가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 그것이 베드로의 태도였고, 그가 한 말이다.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그 이면의 맥락을 모르며, 체험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체험한 적이 없기에 그 이면의 일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 분명히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함부로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이는 사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시련과 연단을 체험했고, 하나님이 그에게서 많은 것을 거두어 갔으며, 이와 동시에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준 후에는 또 거두어 가고, 거두어 간 후에는 그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한 다음 다시 주었다.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많은 행사가 변덕스러워 보인다. 하나님은 사람을 장난감으로 여길 뿐 사람을 존중하거나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 같고, 사람의 삶은 장난감처럼 존엄이 없는 것 같다. 또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주지 않고 무슨 말이든 다 해도 되는 것 같다. 너에게 뭔가를 줄 때는 “네 그런 행동은 상을 받아 마땅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라고 하고, 거두어 갈 때는 또 다른 말을 하니 말이다. 그럼 이 과정에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라는 것도, 하나님 행사의 성질을 알아내라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 이 과정에서 더 존엄 있게 살라는 것도 아니다. 네게 이런 것을 선택하게 하지는 않으며, 네 역할은 이런 게 아니다. 네 역할은 무엇이겠느냐? 너는 체험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도,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도 못한다면 네 유일한 선택은 순종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순종하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습니다.) 순종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이 바로 네가 배워야 할 공과이다. 만약 순종하기 쉽다면 공과를 배울 필요도,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순종하기가 쉽지 않기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네게 시련을 주는 것이고, 너를 장난감처럼 마음대로 대하는 것이다. 언젠가 네가 쉽게 순종하게 되면, 아무 어려움도, 장애물도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즐겁게 순종하게 되면, 너 자신의 선택이나 의도, 기호를 갖지 않게 되면 하나님은 너를 장난감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네가 “하나님이 저를 장난감으로 여기시면 제 삶에는 존엄이 없어요. 저는 이런 상황에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순종하지 않겠다고요.”라고 말한다면, 그날은 하나님이 너를 버리는 날이 될 것이다. 반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고, 하나님은 늘 제게 감추시지만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옳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저는 기꺼이 순종할 것입니다. 순종할 수 없어도 그런 태도를 지녀야 하고요. 원망을 품거나 저 자신의 선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피조물이고, 제 본분은 순종하는 것이니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되겠죠.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하나님의 행사는 모두 옳습니다. 하나님의 행사에 어떤 관념도, 상상도 품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피조물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니니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면 감사드리고, 주지 않으시거나 혹은 줬다가 다시 거두어 가실지라도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사는 다 제게 도움이 됩니다. 설령 어떤 이로움도 없다고 할지라도 저는 순종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네 분량이 이 정도 수준에 이른다면 “제가 어찌 기꺼이 달가워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베드로의 말이 이룬 성과와 같지 않겠느냐? 이런 분량을 갖추어야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중에서
사람은 반드시 창조주가 피조물을 대할 때는 기본적인 원칙이자 최고의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어떻게 대하든 전부 그의 경륜에 근거하고 그의 사역의 필요에 근거한다. 그는 누구에게 자문할 필요가 없고, 누구의 동의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는 행하고 싶은 대로 행하고, 대하고 싶은 대로 대한다. 그가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대하든 모두 진리 원칙에 부합하고, 창조주가 일하는 원칙에 부합한다. 피조물은 오로지 창조주께 순종해야지, 어떠한 선택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피조물이 마땅히 지녀야 할 이성이다. 만약 이런 이성을 갖추지 못하면 사람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사람은 반드시 창조주는 영원히 창조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에게는 모든 피조물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주재할 권력과 자격이 있으며, 거기에 이유는 필요치 않다. 이는 그의 권병이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행한 일이 옳은지 그른지, 어떻게 해야 적합한지 평가할 권리도 자격도 없다.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일지 말지 선택할 자격이 있는 피조물은 없으며, 창조주에게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어떻게 주재하고 안배해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는 피조물도 없다. 이것은 최고의 진리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든 피조물인 인류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바로 창조주가 행한 이 모든 것에서 구하고 순종하고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최종적인 결과는 바로 창조주가 자신의 경륜을 이루고 자신의 사역을 성취하여 그의 경륜이 아무 방해 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한편, 피조물은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 가운데서 진리를 얻고 창조주의 뜻을 깨달으며 창조주의 성품을 알게 되는 것이다. 너희에게 또 하나 알려 줄 원칙이 있다. 창조주가 무엇을 하고 어떠한 태도를 보이든, 큰 행사를 하든 작은 일을 하든 그는 창조주라는 것이다. 반면 피조물인 인류는 무엇을 하든, 얼마나 큰 재능과 은사가 있든 결국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류는 창조주의 은혜와 축복을 얼마나 많이 받았든, 창조주의 긍휼과 자비 또는 은총을 얼마나 많이 받았든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자신이 고급 피조물이 되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너에게 아무리 많은 은혜를 베풀고, 은사를 주고, 일찍이 은총을 베풀거나 특별한 재능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너의 밑천이 아니다. 네가 피조물이라면 영원히 피조물이다. 너는 영원히 ‘나는 하나님 품속의 아기이니 하나님은 영원히 날 버리지 않으실 거야.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나를 사랑으로 대하실 거고, 나를 보호해 주실 거야. 또 나를 살살 어루만지시고, 작고 낮은 소리로 따뜻하게 위로하며 격려해 주실 거야.’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바꿔 말해, 창조주의 눈에 너는 다른 피조물과 같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너를 쓸 수 있고, 또 마음대로 너를 지배할 수도 있으며, 마음대로 너를 각종 사람과 일, 사물 속에 배치해 어떤 역할을 맡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인식이고 이성이다. 이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차 정상적이 될 것이고, 또 하나님과 가장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고 자신의 위치에 똑바로 설 것이며, 자신의 본분을 잘 지킬 것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를 깨달아야 하나님의 행사를 알 수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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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순종하는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