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질병과 고통을 대하는 법

말세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우선 먼저 사람의 일생에서 생로병사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지, 사람은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사람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는 그런 고통이 없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그런 고통은 어디서 비롯되었겠느냐? 사람이 사탄에게 유혹되고 패괴되어 타락한 뒤 그러한 고통이 생겼다. 육의 고통, 육의 번뇌와 공허,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참혹한 일들은 모두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된 후에 생겨났다. 사람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이후로 사탄은 사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사람은 점점 타락하고, 병이 점점 깊어지고, 고통도 점점 심해졌다. 인간 세상의 공허와 비참함을 더욱 실감하면서 인간 세상에서 생존할 수 없게 되었고, 인간 세상에서 살면서 희망이라곤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런 고통은 사탄이 사람에게 준 것으로,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되어 타락한 뒤에 있게 된 것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는 의의> 중에서

늘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해도 호전되지 않고 병고에서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가 없다. 때로는 생명이 위태로워져도 어쩔 수 없이 마주할 수밖에 없다. 사실,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제일 먼저 사람의 수명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는지는 이미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 하나님이 사람이 병으로 고통받게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다. 사람은 그것이 병이라고 느끼지만, 사실 사람은 병이 아니라 은혜를 얻은 것이다. 사람은 먼저 이 일을 인식하고 확신하며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사람은 병으로 고통받으면 하나님 앞으로 자주 오게 되고,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해내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조심히 더 진지하게 자신의 본분을 대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에게 보호이지 멍에가 아니다. 이는 소극적인 면에서 병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 밖에도 모든 사람의 수명은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 이 병이 의학적으로는 죽을병이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네 수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면, 너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네게 부탁한 것이 있고 네 사명이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면, 설령 죽을병에 걸려도 너는 죽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너를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네가 기도하지 않고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열심히 치료하지 않고 심지어 치료를 게을리해도 죽을 수가 없다. 특히 하나님의 부탁을 받은 사람이 아직 그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면, 어떤 병에 걸리든 바로 죽지 않으며, 사명을 완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야 한다. 네게 이런 믿음이 있느냐? 믿음이 없으면 너는 “하나님, 저는 당신께서 맡기신 부탁을 완수해야 합니다. 마지막 남은 시간 동안 여한 없이 당신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저를 지켜 주소서!”라고 입에 발린 말로 기도할 뿐이다. 네가 이렇게 기도해도 자발적으로 진리를 구하지 않으면, 충성을 다하려는 의지도 힘도 없는 것이다. 네가 진실로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고 항상 이런 핑계와 방식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흥정한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병이 낫는다면 정말로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장담할 수 없다. 사실, 네가 병이 나아서 죽지 않으려고 흥정하든, 아니면 다른 속셈과 목적이 있어서 흥정하든, 하나님이 보기에 네가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쓸모가 있으며 하나님이 너를 쓰기로 마음을 정했다면 너는 죽어서는 안 된다. 너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 사람이 터무니없이 굴고 온갖 악행을 저질러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게 될까 봐 걱정된다. 그러면 빨리 죽게 된다. 수명이 단축되는 것이다. 사람의 수명은 창세전에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았다. 사람이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순종한다면, 병이 있든 없든, 건강이 좋든 나쁘든, 하나님이 정해 놓은 나이까지 살 수 있다. 네게 이런 믿음이 있느냐? 네가 도리상으로만 인정한다면 진실한 믿음이 없는 것이니,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네가 마음속 깊이 하나님이 이렇게 할 것임을 확신한다면, 네 행동 방식과 실행 방식이 저절로 바뀔 것이다. 물론 병에 걸렸든 안 걸렸든 누구나 살면서 건강 관리 상식은 어느 정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한 본능이자,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한 자유의지 안에 갖춰져야 하는 이성과 상식이다. 지금 병에 걸렸다면 너는 그 병에 관한 건강 관리 및 치료 상식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네가 이런 방식으로 병을 대하는 것은 하나님이 네게 정해 준 수명에 도전하거나 하나님이 네게 정해 준 나이까지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이렇게 말해 볼 수 있다. 소극적인 측면에서 네가 이 병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하는 방식으로 본분을 이행하면서 남들보다 조금 더 휴식을 취해 본분을 지체하지 않는다면, 죽을 정도로 병이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네가 하나님이 정한 수명을 다하지 않았다면, 네가 병들어도 하나님은 너를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아직 죽을 정도로 병에 걸린 것은 아니지만 너의 수명이 다했다면 하나님은 언제든 너를 데려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정한 대로 되는 것이다! 이 일은 이렇게 봐야 한다. 병에 걸리면 적절하게 치료하고 약을 먹고 보건 운동을 할 수도 있겠지만 너는 사람의 목숨이 하나님께 달려 있고 사람의 수명도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는 점을 마음속으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정한 운명을 뛰어넘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이런 인식도 없다면 너는 진실로 믿는 사람이 아니고, 너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도 없는 것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만유의 머리인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좌 위에서 왕권을 잡고 우주와 만유를 주관하며 온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늘 그를 가까이하고 그의 앞에 와 마음을 평온히 하라. 한순간도 놓치지 말라. 매 순간 배울 공과가 있다. 주변 환경과 사람, 일, 사물은 모두 보좌가 허락한 것이므로 절대로 원망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질병에 걸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속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다. 비록 육체가 조금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사탄의 생각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질병 속에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찬미 속에서 하나님을 누리며, 질병 앞에서 낙심하지 말고 계속 구하며 포기하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이 빛을 비추어 깨우쳐 줄 것이다. 욥의 믿음이 어떠했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은 전능한 의사이다! 병 안에서 살면 그저 병뿐이지만 영 안에서 살면 병이 없다. 너에게 한 모금의 숨이라도 붙어 있는 한, 하나님은 너를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 실로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부족하니 하나님이 우리 안에 참된 믿음을 더해 주길 바란다. 하나님 말씀은 참으로 달콤하다! 하나님 말씀은 특효약이며, 마귀와 사탄을 치욕스럽게 한다! 하나님 말씀을 알면 의지할 곳이 생기며, 하나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 데 즉효이다! 만사가 해결되고 모든 것이 평안해진다. 믿음은 외나무다리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건너기 어렵고 목숨을 내걸면 편안히 건널 수 있다. 사람에게 겁나고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은 사탄의 우롱으로 인한 것이다. 사탄은 우리가 믿음의 다리를 건너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탄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항상 자신의 생각을 보낸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빛 비춤과 깨우침을 구하고, 하나님께 의지해 우리 안에 있는 사탄의 독소를 정결케 하며, 영 안에서 늘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훈련을 하여 하나님이 권세를 잡고 온몸과 마음을 점유하게 해야 한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그리스도의 최초의 말씀ㆍ제6편> 중에서

병이 찾아오면 어떻게 겪어야 하느냐? 하나님 앞에 와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구하고, 자신이 한 어떤 일이 진정 진리에 어긋나는지, 자신에게 아직 해결되지 않은 패괴가 어떤 것이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없다. 사람은 고통을 통해 단련받아야만 방종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 고통이 생기면 늘 기도하느라 옷이나 음식, 즐거움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다. 마음속으로 내내 기도만 하면서 그동안 잘못하거나 진리에 어긋나는 부분은 없었는지 성찰하기 마련이다. 대개 큰 병이나 희귀한 질병으로 크게 고통받는 경우, 그건 우연이 아니다. 네가 병이 나거나 건강한 것에는 모두 하나님의 뜻이 있다. 평소에 성령이 역사하고 건강할 때는 하나님께 구하다가도, 막상 병이 나서 고통스러울 때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또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병 속에서 살면서 빨리 병을 치료할 생각에만 골몰한다. 그 순간은 병이 없는 사람이 부럽고, 어서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다. 이것은 일종의 소극적이고 대항적인 정서다. 사람은 가끔 병에 걸리면 생각한다. ‘이런 병에 걸린 것이 나의 무지 때문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일까?’ 속으로 도무지 알지 못한다. 사실 감기나 상초열, 독감과 같은 병에 걸리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무릇 큰 병이 찾아와 너를 쓰러뜨리거나 그것 때문에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산다면, 그건 모두 우연이 아니다. 질병, 고통이 찾아왔을 때, 너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구했느냐? 성령은 어떻게 역사하여 너를 인도하고 이끄느냐? 단지 너에게 깨우침과 빛 비춤만 주느냐? 단지 이런 방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또한 너를 연단하고 시련을 준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사람에게 시련을 주느냐? 사람에게 고통을 겪게 함으로써 시련을 주지 않느냐? 시련에는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시련을 받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고통을 받겠느냐? 사람이 고통 없이 어떻게 변화하겠느냐? 시련에는 고통이 뒤따르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 역사다. 하나님은 가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데, 그러지 않으면 사람은 세상 모르고 나댈 것이다. 패괴 성품 문제는 진리 교제만으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문제를 지적해 줄 경우, 너는 알면서도 변화하지 못한다. 네가 아무리 의지로 극복하려 애쓰고, 심지어 제 뺨을 때리거나 머리를 쥐어박거나 벽에 찧는 등 육을 손상시키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내면에서 사탄 성품이 사람에게 온갖 궁리와 생각을 주어 계속 사람을 괴롭히고 교란하기 때문에 패괴 성품은 자연스레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그럼 해결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바로 병을 통해 연단받아야 한다. 연단 속에서 고통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기도하며 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너는 병에 걸리지 않았을 때는 무척 방종하게 굴며 나대다가도 병이 나면 얌전해진다. 병이 났는데도 나댈 수 있느냐? 말할 때 힘이 하나도 없으면서 남을 꾸짖고 교만하게 굴 수 있느냐? 그럴 때 너는 그 어떤 요구도 없고, 고통만 없앨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먹고 입고 즐길 생각이 완전히 없어진다. 너희 대부분은 그런 기분을 느껴 보지 못했을 텐데, 직접 겪어보면 알 것이다. 지금, 지위만 다투고, 육적인 즐거움, 이익만 다투는 자들이 있는데, 이건 다 그들이 너무 안일하고, 고생을 덜해서 함부로 나대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고난과 연단을 각오해야 한다!

하나님은 가끔 환경을 마련하여 주변 사람을 통해 너를 책망한다. 네가 고통받고 공과를 배워 진리를 깨닫고 일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이런 사역을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네 육을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야 네가 공과를 배우고, 나아가 패괴 성품을 해결하여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 바울이 항상 자기 몸에 가시가 있다고 했는데, 그 가시는 무엇이냐? 그것은 병을 말하는 것으로, 바울은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병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바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의 성품과 본성 때문이었다. 만약 그의 몸에 박힌 가시가 없었다면, 그를 따라다니는 그 병이 없었다면, 바울은 언제 어디서나 독립왕국을 세우는 짓을 저지를 수 있었다. 하지만 병의 고통 때문에 그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따라서 많은 경우 병은 사람에게 ‘보호막’이 되기도 한다. 병이 없으면 기운이 넘쳐 악행을 저지르거나 화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이 건방을 떨고 방종하면 이성을 잃기 쉽다. 그러다 악을 행하고 후회하지만 그때는 이미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다. 따라서 병을 앓는 것은 좋은 일로, 그것은 사람에 대한 보호이다. 너는 다른 사람이 겪는 어려움도 쉽게 해결해 주고, 자신이 안고 있는 사상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유독 질병 앞에서만은 속수무책이다. 병이 나는 것은 정말 자기도 어쩔 수 없다. 병이 났을 때 어떤 방법을 써도 낫지 않는다면 그것은 네가 받아야 할 고통이다. 그러니 벗어나려 하지 말고 우선은 순종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패괴되고 본성도 좋지 않습니다. 당신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일,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습니다. 제게 이런 병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당신 뜻이 무엇인지, 당신께서 저의 어떤 면을 변화시키고 온전케 하시려는지 알 수 있게 저를 깨우쳐 주십시오. 부디 제가 진리를 깨닫고 바른 인생길을 가도록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얼렁뚱땅 넘기지 말고, 구하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받는 징계가 아닐 거라고 쉽게 결론짓지 마라. 정말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는 자라면, 어떤 일이 닥치든 쉽게 넘기지 말고 기도하고 구해야 한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 뜻을 모색해야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네게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확인하면 하나님은 네 고통을 덜어줄 것이다. 하나님은 고통과 연단을 통해 이런 효과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진리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중에서

어떤 사람은 큰 병이 임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고, 나아가 어떤 사람은 죽음까지 직면하게 되었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시련은 대부분 사람에게 더해 주는 부담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큰 부담을 더해 주든 너는 마땅히 그것을 짊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네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네게 주는 부담은 네 분량이나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초과하지 않으므로 너는 분명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부담과 시련을 주든 이것 하나는 기억해라. 네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든 그러지 못했든,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었든 얻지 못했든, 그 시련이 너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든 경고든, 네가 알지 못해도 상관은 없다. 네가 본분 이행을 지체하지 않고 충성을 다해 자신의 본분을 지키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만족할 것이고, 너는 굳게 설 것이다. 큰 병을 얻어 죽음을 목전에 둔 후 ‘내가 하나님을 믿은 이유는 죽지 않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그렇게 오랜 세월 본분을 이행했는데도 하나님은 나를 죽게 하시네. 그럼 내 일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어. 이루지 못한 사적인 소망을 이루고, 이번 생에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며, 일단 본분은 이행하지 말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어떤 태도겠느냐? 그렇게 오랜 세월 본분을 이행하고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었는데도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시련 한 번에 넘어지고 쓰러져 드러났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걱정이 가당키나 하겠느냐? (가당치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조금의 충성심도 없다. 그럼 지난 세월 동안 그가 행한 본분 이행을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느냐? 힘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힘을 들인 자가 된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질병의 고통이나 내 뜻과 다른 어떤 일이 닥치게 허락하셔도, 하나님이 어떻게 하셔도 나는 순종해야 한다. 피조물로서의 위치에 제대로 서야 한다. 먼저 순종과 관련된 진리를 실행하여 실천에 옮기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실제를 살아 내야 한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부탁과 내가 이행해야 할 본분을 팽개쳐서는 안 된다. 마지막 숨이 붙어 있는 한 내 본분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증거가 아니겠느냐? 네게 이런 다짐과 내적 상태가 있는데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너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은 내게 숨결을 주셨어. 또 지난 세월 동안 내게 공급하고 보호해 주셔서 많은 고통을 겪지 않게 하셨고, 수많은 은혜와 진리를 베푸셨지. 나는 역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진리와 비밀을 깨달았고, 하나님에게서 너무도 많은 것을 얻었어. 그러니 하나님께 보답해야 해! 예전에 나는 분량이 작고 개념이 없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만 했지. 앞으로는 하나님께 보답할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내가 아직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힘을 다 바쳐야 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해. 그래서 하나님께 그동안 내게 헛되이 공급하신 것이 아님을, 성과가 있음을 보여 드려야 해. 그리고 내게서 위안을 얻으시게 해야지. 더는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거나 실망시켜 드려선 안 돼.’ 이런 생각이 어떠하냐? 목숨을 구하려 하거나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면서 ‘병이 언제 나을까? 병이 나으면 본분을 잘 이행하고 충성을 다해야지. 병이 있는데 어떻게 충성을 다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지 마라. 숨이 붙어 있는 한 본분을 이행할 수 있지 않겠느냐? 숨이 붙어 있는 한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을 수 있느냐? 또 숨이 붙어 있고 제대로 사고를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기 쉽지만, 막상 그 일이 정말로 닥치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진리를 추구하고 늘 진리에 공을 들이며,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 할지, 어떻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할지를 많이 생각해야 한다. 피조물이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면 피조물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내야 한다. 하나님이 네게 이렇게 많은 진리와 길, 생명을 베풀어 준 것은 네가 살아 내고,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라는 것이다. 이는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일로, 너의 책임과 의무이다. 너는 이런 일들을 늘 묵상해야 한다. 네가 늘 그렇게 하다 보면 여러 방면의 진리에 깊이 들어갈 수 있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늘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묵상해야 실행할 길이 생긴다> 중에서

어떤 사람은 병에 걸리자 온갖 방법으로 치료해도 병이 낫지 않고 오히려 계속 악화되기만 하는데도 그 병이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하나님께 기도하여 구하지 않고, 근원을 찾지 않으며, 스스로 인위적인 방법을 강구한다. 결국, 수많은 방법을 동원하고 거금을 들여도 병이 낫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치료를 포기한 뒤 시간이 좀 지나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병이 나았다. 그도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사소한 병에 걸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결국 어느 날 병세가 악화되어 급사한다. 이게 어찌 된 일이겠느냐?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겠지만, 사실 하나님이 봤을 때는 그가 세상에서의 사명을 완수했기 때문에 그를 거두어 간 것이다. 흔히들 “병도 없이 죽는 사람은 없다.”라고 하지만 정말 그렇겠느냐? 어떤 이들은 건강 검진에서 아무런 병도 발견되지 않고 아주 건강했는데, 결국은 며칠 만에 갑자기 죽어 버린다. 이런 죽음을 자연사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는 사람의 수명이 다해서 영계에서 그를 거두어 간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은 암이나 결핵에 걸렸는데도 죽지 않고 일흔, 여든까지 산다. 이런 사람도 적지 않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한 것이다. 네가 이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에게 진실한 믿음이 있는 것이다. 몸에 병이 생겨서 약으로 다스려야 할 때 네가 정상적으로 약을 먹거나 운동을 하며 마음을 편하게 갖고 태연하게 대처한다면, 이것은 어떤 태도이겠느냐? 하나님에게 진실한 믿음을 가진 태도이다. 네가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거나 운동을 하거나 건강 관리도 하지 않으면서 죽을까 걱정되어 “하나님, 저는 본분을 잘 이행하겠습니다. 제 사명을 아직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본분을 잘 이행해서 당신의 부탁을 완수하고 싶습니다. 제가 죽으면 당신의 부탁을 완수할 수 없습니다. 여한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저를 살려 주십시오. 제가 본분을 잘 이행하고 당신의 부탁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영원히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께서 영광을 얻는 날을 하루빨리 보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한다고 치자. 겉으로 보면 약도 먹지 않고 주사도 맞지 않아 마치 강인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충만한 것 같지만, 사실 네 믿음은 겨자씨보다도 작다. 너는 죽을까 봐 겁이 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없다. 어째서 믿음이 없는 것이냐? 어째서 그렇게 된 것이냐? 창조주가 피조물을 대하는 태도, 원칙, 방식을 사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 알량한 안목과 관념, 상상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할 것인지 추측하고, 하나님이 그를 치료해 오래 살게 할 수 있는지를 걸고 하나님과 도박을 한다. 이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살려 준다면 너는 아무리 중병에 걸려도 죽을 수 없고, 하나님이 너를 살려 주지 않는다면 너는 병에 걸리지 않아도 죽어야 한다. 네 수명은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진실한 인식이자 믿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병에 걸리게 하는 것은 우연이겠느냐? 우연이 아니라 사람의 믿음을 연단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 너를 병에 걸리게 해도 너는 회피하지 말고, 병에 걸리지 않게 해도 구하지 마라. 그 모든 것은 창조주의 손에 있다. 사람은 순리에 따를 줄 알아야 한다. 무엇을 두고 순리라고 하느냐? 모든 순리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똑같은 병에 걸려도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살게 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네가 살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부여한 사명이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너는 잘 완수해야 한다. 주어진 그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바로 이런 것이다. 병에 걸렸다고 회피하지 말고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구하지 마라. 어떤 일도 네가 구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고, 또 네가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려고 결심한 일은 아무도 바꾸지 못한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병 때문에 늘 걱정하며 말한다. “병이 악화되면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악화되면 죽는 거 아냐? 그럼 이 병 수술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다 수술대에서 죽으면 어떡해? 순종했는데 하나님께서 이 병으로 내 목숨을 가져가시지는 않을까?” 이런 일들을 생각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병을 감당하기를 원하거나 병에 걸렸다고 희희낙락하며 기쁨으로 축하할 사람은 없다. 그것은 정상적인 인성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상적인 사람이 병에 걸리면 고통스러워하며 괴로워한다. 저마다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자기 힘으로 병을 없애거나 병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결국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병에 걸린 상태에서 고통과 괴로움이 가중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병에 걸렸을 때일수록 더욱 진리를 구하고, 어떻게 실행해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지를 구해야 하며, 병에 걸렸을 때일수록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패괴를 인식하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무리한 요구를 인식해야 한다. 병에 걸렸을 때일수록 네 진정한 순종을 검증할 때인 것이다. 그러므로 병을 감당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하고, 자신의 불평과 무리한 요구를 버린다면, 네가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며 네게 간증이 있고 하나님에 대한 네 충성심과 순종이 진실하여 검증을 이겨 낼 수 있고 그것이 구호도, 도리도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병에 걸렸을 때 한편으로는 네 여러 무리한 요구와 하나님에 대한 여러 현실에 맞지 않는 상상과 관념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과 순종을 검증한다. 만약 이런 측면에서 검증을 모두 통과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과 충성심 그리고 순종에 진정한 증거와 실증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고, 피조물이 갖추고 살아 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모두 긍정적인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는 모두 사람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네게 병을 허락했다면 언제 어디서든 그 병을 거둬 가기도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든 네 병을 거둬 갈 수 있다면, 병이 계속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같은 병을 네게서 거두지 않는다면, 너는 계속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겠느냐? 이는 네게 검증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 병이 몇 달 후 완쾌되면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과 충성심, 순종이 어떤지 검증되지 않으니 네게는 증거가 없는 것이다. 몇 달을 참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만약 그 병이 2, 3년 이어져도 네 믿음,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고자 하는 소망이 변하지 않고 점점 더 실제적이 된다면, 생명이 성장한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수확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병에 걸린 동안 병이 그에게 가져다주는 다양한 이로움을 경험하고 체험하지 조급하게 병에서 벗어나려 하거나 병세가 길어지면 어떤 나쁜 결과가 있을지, 어떤 번거로움을 불러오게 될지, 악화되거나 죽지는 않을지 등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것들을 걱정하지 않음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진입하여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믿음과 충성심 그리고 순종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증거가 생기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명 진입, 성품 변화에 엄청난 수확을 가져오며, 자신이 구원받는 것에 견고한 기초를 쌓기도 한다. 이 얼마나 좋으냐! 다시 말해, 병이란 것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지만 크든 작든 모두 사람을 연단한다. 병을 한번 겪고 나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순종하며 불평하지도 않는다면 사람의 태도가 기본적으로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병을 겪고 나서 수확도 조금 생기고 사람도 만족한다면, 이는 일반적인 병으로, 짧은 시간 동안 걸린 것이니 사람이 감당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병은 한동안 치료를 받으면 좋아졌다가 다시 재발하여 악화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현대 의학의 다양한 방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지경까지 악화되기도 한다. 어느 정도까지 심각해지겠느냐? 언제 어디서든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정도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병에 걸리지 않았을 때 죽을 날이 아득히 멀어 무감각했던 그런 것이 아니라 죽음이 가까이 와서 죽을 날을 감지한 것임을 의미한다. 죽음이 가깝다는 것은 사람의 평생에 가장 힘들고 중요한 시간이 도래한 것이니 어쩌겠느냐? … 죽음은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죽음만 생각하면 마음을 칼로 쑤시는 것 같고, 온몸의 뼈가 부스러질 것만 같다. 죽음만 생각하면 마음이 시리고 눈물이 나와 울고만 싶다. 곧 자신이 맞게 될 죽음 때문에 흐느끼고 눈물 나고 마음이 아픈 것이다. ‘왜 죽고 싶지 않을까? 어째서 죽음이 이토록 두려울까? 예전에 중병에 걸리지 않았을 때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는데 말이야. 죽음을 피해 가는 사람이 어딨고,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딨어? 죽으면 죽는 거지 뭐!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 말은 그렇게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어. 정말 죽을 때가 되니 그렇게 쉽게 볼 문제가 아니야. 어쩌면 이렇게 괴로울까?’ 너희는 죽음을 생각하면 괴롭지 않으냐?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괴롭고 고통스럽다. 가장 염려하고 걱정하는 일이 끝내 온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할수록 마음속에 두려움과 무력감, 괴로움이 커진다. 마음이 편치 않고 죽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죽지 않는 이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줄 수 있느냐? 아무도 해결해 줄 수 없고, 자신도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그럼 죽고 싶지 않다고 또 어쩌겠느냐? 죽을 수밖에 없다. 아무도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이 ‘죽음’에 갇혀 버리면, 죽고 싶지 않아도 마음속에서는 온통 죽는 생각뿐이다. 죽지 않을 것도 죽을 수밖에 없지 않으냐? 그럼 정말 죽는 것이냐? 자기가 언제 죽을지, 어느 해에 죽을지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느냐? 누가 알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점을 본 적 있어서 제가 어느 해, 몇 월, 며칠에 어떻게 죽을지 알죠.” 단언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단언할 수 없다. 너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이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병이 정말 너를 곧 죽게 만들 텐데 네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네가 고민하고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이다. 너는 순종의 태도로 마주하겠느냐, 아니면 저항하고 거부하거나 혹은 달갑지 않은 태도로 마주하겠느냐? 너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느냐? (순종입니다.) 이 순종은 입으로 말한다고 이를 수 있거나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순종에 이를 수 있겠느냐? 어떤 인식을 가져야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단순하지 않은 문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희의 진심을 말해 보아라. (병세가 심할 때 정말 죽는다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람이 이토록 깊이 패괴되었으니 죽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공의이며, 반드시 살아야 한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에겐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나서 어쨌든 인생의 바른길을 알고 많은 진리를 깨달았으니 설사 곧 죽는다고 해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으냐? 이것이 어느 정도 이론적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느냐? (네.) 누가 더 말해 보아라. (하나님, 만약 언젠가 정말 병에 걸려 죽게 된다면 사람은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운명이자 주재이니 아무리 염려하고 걱정해도 소용없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도 어떻게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할지 생각한다면, 설사 정말 죽는다고 해도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면,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이런 이해는 어떠냐? 좀 더 낫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 너는 ‘죽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바라보아야 한다. 사람의 인생은 결국 죽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즉, 사람이 마지막에 이르러 직면하는 것은 모두 죽음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죽음에는 여러 성질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이 정한 시간이다. 네가 사명을 완수하여 하나님이 육의 생명에 마침표를 찍으면 네 육의 생명은 끝난다. 그렇지만 그것이 네 생명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사람의 육체가 사라진다고 해서 그 생명도 사라진다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그 생명이 나중에 어떤 형태로 존재할지는 네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려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네가 나중에 어떤 형태로 존재할지, 존재하기는 할지는 네가 살아 있을 때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 달린 것이다. 만약 너란 사람이 살면서 죽음과 여러 병에 직면했을 때 거역하고 저항하며 싫어하는 태도로 진리를 대했다면, 훗날 네 육의 생명이 끝날 때 너는 어떤 형태로 존재하겠느냐? 분명 다른 형태일 것이고, 그 생명은 존속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네가 살아 있어서 육의 감각이 있을 때 순종과 충성심, 진실한 믿음으로 진리와 하나님을 대했다면 네 육의 생명은 끝날지라도 네 생명은 또 다른 세계에서 다른 형태로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죽음의 정의 중 하나이다. 그 외에 또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죽음의 문제가 다른 일과 같은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은 사람이 선택할 수도 없고, 더욱이 사람의 의지에 의해 바뀌지도 않는다. 죽음은 인생의 여타 모든 큰일과 마찬가지로 창조주가 정한 운명과 주재 아래 있다. 한 사람이 죽고 싶어 한다고 해서 꼭 죽는 것도 아니고, 살고 싶어 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재와 정한 운명 아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병과 공의로운 성품,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로 인해 바뀌거나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중병에 걸리면 그 중병이 죽음을 불러올 수 있지만 꼭 죽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죽음은 누가 결정하느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결정한다. 어차피 이 일을 사람이 결정할 수 없고 하나님이 결정하는데 사람이 염려하고 근심할 게 무엇이냐? 어떤 부모에게, 언제, 어디에서 태어날지 네가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일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은 바로 순리에 맡겨 순종하는 것이다. 선택하지 말고, 이에 대해 아무런 신경이나 힘을 쓰지 말며, 그 일로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선택할 수 없는데 그 일에 그토록 많은 힘과 신경을 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미련한 짓이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4)> 중에서

병에 걸린 어떤 사람이 있다. 초기에는 늘 기도했지만, 나중에는 기도해도 병이 낫지 않으니 병 속에서 살면서 늘 속으로 이렇게 원망했다. ‘하나님을 믿어도 좋을 게 없어. 병이 났는데 하나님은 고쳐 주지도 않는구나!’ 이것은 진실된 믿음이 아니다. 그는 조금도 순종하지 않다가 결국 원망을 쏟아 낸 뒤 죽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육체를 끝장낸 후 지옥에 떨어지게 할 것이란 의미다. 이러면 완전히 끝장이다. 이번 생에 구원받을 기회는 얻지 못했기에 영혼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지금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 사역의 마지막 단계로, 여기서 도태되면 영원히 기회가 없다! 네가 하나님이 구원 사역을 하는 기간에 죽는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라 징벌받아 죽는 것이다. 그런 자에게 구원받을 기회란 없다. 바울은 음부에서 계속 징벌받고 있지 않느냐?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거기서 징벌받고 있다! 알고도 죄를 짓는다면 더욱 큰일이다. 더 무거운 벌을 받을 것이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나는 항상 병에 시달리며, 늘 고통스럽고, 힘들고, 상황도 안 좋았어. 성령 역사도 느끼지 못했지.” 맞는 말이다. 성령 역사는 대부분 이런 식이어서 너는 그것이 연단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성령이 너를 깨우칠 때는 교제를 통해 진리를 깨닫게 할 때도 있고, 환경을 통해 너 스스로 깨닫게 할 때도 있다. 환경 속에서 시련을 내려 너를 연마하고 단련시켜서 성장하게 하는 식이다. 과거에 너희가 일을 겪고도 인식하지 못한 것은 마음속으로 진리를 구하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사람은 어떤 일도 간파하지 못하고 항상 치우치게 이해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병이 나면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사실 어떤 병은 불규칙한 생활에 기인한 것으로, 사람이 자초한 것이다. 무분별한 식생활에 보건 상식이 없어서 생겨난 온갖 병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하는데, 사실 그것은 자신의 무지로 초래된 것이다. 어찌 됐든 본인이 자초한 병이든, 성령이 내린 병이든, 모두 하나님이 너를 매우 후대한 것이요, 네가 공과를 배우게 하기 위함이니 불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한 번 불평할 때마다 오점이 하나 남을 것이며, 이는 씻을 수 없는 죄가 될 것이다! 불평을 한 번 하면 내적 상태가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회복되겠느냐? 네가 조금 소극적이면, 어쩌면 한 달 지나 회복될 수 있다. 네가 부정적인 말을 뱉으며 한 번 불평하면, 일 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을 수 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것이다. 네가 늘 불평하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성령 역사를 얻기가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사람은 많은 노력을 쏟고 기도해야 마음가짐을 바로잡아 성령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 마음가짐을 완전히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반드시 진리를 구해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어야 해결이 가능하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진리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중에서

사람의 이 낡은 육체는 어떤 병에 걸리든, 호전될 수 있든 없든, 얼마나 괴롭든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병에 걸리면 네가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하고 그 사실을 감당하고 받아들이기를 원한다고 해도 그 병은 네 몸에 남아 있고, 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질병이 네게서 떠나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다. 네가 질병에 적극적으로 맞서든, 소극적으로 맞서든 결국 결과는 같다. 다시 말해, 네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네게 질병이 있다는 사실은 바꿀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똑똑한 사람은 어떤 선택을 내리겠느냐? …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질병에 걸리면 근심, 염려, 걱정 등의 정서에 빠지느냐? (아닙니다.) 그는 질병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일단 순종한 다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자 구합니다. 그런 다음 자신에게 어떤 패괴 성품이 있는지 반성할 것입니다.) 그 몇 마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단지 반성만 할 뿐 병은 치료하지 않느냐? (치료도 병행할 것입니다.) 그렇다. 만일 치료해야 하는 큰 병인데 치료하지 않는다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치료해야 한다면 치료하는 것이 똑똑한 사람의 방식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병이 없을 때는 항상 근심한다. ‘아, 내가 병에 걸릴까? 병에 걸리고 나면 악화되지 않을까? 내가 그런 병에 걸리지 않을까? 그런 병에 걸리면 단명하게 되는 걸까? 죽을 때 고통스럽지는 않을까? 평생 살아온 삶이 행복할까? 만약 그런 병에 걸리면 최대한 일찍 뒷일을 계획해 놓고 인생을 즐겨야 하지 않을까?’ 어리석은 사람은 항상 이런 일로 인해 근심하고 염려하며 걱정한다. 그는 진리를 전혀 구하지 않는다. 그 일에서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똑똑한 사람은 남들이 병에 걸릴 때나 자신이 아직 병에 걸리지 않았을 때에 그 일에 대한 인식과 견해를 갖춘다. 그렇다면 어떤 인식과 견해를 갖추어야 하겠느냐? 먼저, 사람의 질병이 근심, 염려, 걱정 등의 정서가 있다고 해서 피해 가겠느냐? (아닙니다.) 누가 언제 어떤 병에 걸리는지, 어느 연령대에 건강 상태가 어떻고 어떤 큰 병이나 중병에 걸릴지에 대해 정해진 운명이 있는지 말해 보아라. 있다. 분명히 있는 것이다. 일단 우리는 하나님이 네 운명을 어떻게 정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사람의 생김새, 이목구비, 사람의 체형, 사주팔자에 분명히 밝혀져 있다. 점을 보거나 별자리와 손금을 보는 이방의 점술가는 손금과 생김새, 사주팔자를 통해 이 사람에게 언제 재앙이 닥칠지, 저 사람이 언제 곤경에 빠질지 등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 사람이 병에 걸리는 것은 겉으로는 힘들어서, 울화 때문에, 혹은 형편이 좋지 않아 영양실조로 인한 것처럼 보인다. 겉으로는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같은 연령대의 누군가는 똑같은 상황에서 그 병에 걸리고 다른 사람은 걸리지 않는 것이냐? 이것은 정해진 운명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문외한이 하는 말로 정해진 운명이라 한다면 진리에 부합하는 말로는 어떻게 말하겠느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아래 있다고 한다. 그러니 네가 먹고사는 생존 환경이 어떻든 그것은 사실 네가 언제 어떤 병에 걸릴지와는 무관하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늘 객관적인 원인을 찾아 병에 걸리는 원인을 강조하며 말한다. “운동을 많이 하고, 육식은 줄이고 채식을 많이 하세요.” 그런 이유겠느냐? 종일 고기 한 점 먹지도 않는 사람이 고혈압과 당뇨병에 걸리고, 심지어 종일 채식하는 사람의 콜레스테롤이 높게 나오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의학도 정확하고 합리적인 해석을 내놓지 못한다. 내가 알려 주겠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들어 준 먹거리는 모두 사람이 먹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과하게 먹지는 말고 적당량을 먹어야 한다. 건강 관리를 배우는 것은 필요하지만, 질병 방지를 배우는 것에만 매달리는 것은 옳지 않다. 방금 우리는 어느 연령대에 건강 상태가 어떻고, 심각한 질병은 없을지는 모두 하나님이 안배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은 손금, 사주팔자, 관상을 보고도 알아내고 모두가 이를 믿는데, 늘 하나님을 믿으며 설교를 듣고 진리 교제를 듣는 네가 이것조차 믿지 않는다면 넌 그야말로 불신파이다. 네가 진실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는다면, 심각한 병과 크고 작은 병, 건강 상태가 어떤지는 모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아래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어떤 중병에 걸리고, 어느 연령대에 건강 상태가 어떨지는 모두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긍정적이고 정확한 인식이다. 진리에 부합하느냐? (부합합니다.) 진리에 부합한다. 진리라면 사람은 받아들여야 하고, 이 일에 대한 태도와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 그렇게 바뀌면 무엇이 해결되겠느냐? 네 근심과 염려, 걱정이 해결되지 않겠느냐?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질병에 대한 네 근심, 염려, 걱정 등의 부정적 정서가 해결된다. 그것이 네 생각과 관점을 바꾸었기 때문에 네 부정적 정서를 해소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측면이다. 사람이 병에 걸릴지, 어떤 중병에 걸릴지, 각 연령대에서 건강 상태가 어떨지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그럼 제가 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괜찮나요?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길 바라는 건 괜찮을까요? 하나님이 저를 이 고난과 역경에서 피해 가게 하시길 바라는 건 괜찮을까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괜찮겠느냐? (괜찮지 않습니다.) 너희는 매우 확고하게 말하지만, 이 일은 아무도 명확히 알 수 없다.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의지가 있고 하나님 집의 어떤 사역에 매우 중요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본분과 사역, 몸의 기력과 체력에 영향을 주는 중병은 거둬 갈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사역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있을까? 누구겠느냐? 모르지 않느냐? 이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진정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 질병이나 화는 거두어 갈 수 있다. 하나님의 한 마디면 될 일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생각 하나면 될 일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이 사람은 이 연령대의 어느 달에 이런 질병이 생기는데, 지금 사역이 바쁘니 병에 걸리게 하지 않겠다. 그는 이 질병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 지나가라.’라고 말하지 못할 것도 없다. 하나님의 한 마디면 될 일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누가 이런 복이 있겠느냐? 누가 진정 이런 의지와 충성심이 있으며 하나님의 사역에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이런 복이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다룰 문제가 아니니 여기까지 하겠다. 질병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는 많은 사람이 평생에 겪는 문제이다. 언제 어느 연령대에 사람이 어떤 병에 걸릴지, 사람의 건강 상태가 어떨지는 모두 하나님이 안배해 놓았다. 이는 사람이 태어나는 시간을 정할 수 없듯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네가 결정할 수 없는 일을 두고 근심하고 염려하며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손을 써서 해결하고,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묵묵히 순종하며 하나님이 보호해 주길 바라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정말로 병에 걸리고 죽음이 닥치면 사람은 불평하지도 말고, 하나님을 거역하지도,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공격하지도 말고 순종해야 한다. 피조물 본연의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모든 것을 경험하고 체득해야 한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이를 하나의 특별한 경험으로 삼아 네 인생을 풍성하게 해야 한다. 이것을 꼭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러니 질병이라는 일에 대해 일단 질병의 근원에 대한 사람의 잘못된 생각과 관점을 해결하면, 사람의 이런 염려는 사라지게 된다. 아울러 미지의 일이나 이미 알고 있는 일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나 능력이 사람에게는 없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재 아래 있기 때문에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와 실행 원칙은 기다림과 순종인 것이다. 인식에서 실행까지 모두 진리 원칙에 따라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 추구이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4)> 중에서

네가 질병 속에 있든 아니면 고통 속에 있든 네가 숨이 붙어 있는 한, 네가 살아 있는 한, 네가 말하고 걸을 수 있는 한, 본분을 이행할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럼 너는 성실하고 착실하게 본분을 이행해야지, 피조물의 본분과 창조주가 네게 맡긴 책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네가 죽지 않는 한 너는 너의 본분을 완수해야 하고 제대로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의 이런 말은 사람의 생각과 좀 동떨어져 있어요. 저는 병에 걸렸고 괴롭단 말이에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일부 있다. 네가 괴로울 때는 쉬어도 되고 요양하면서 치료를 받아도 된다. 그래도 본분을 이행하고 싶다면 업무량을 줄여서 적합한 본분을 이행하면 된다. 요양에 영향을 주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네 마음이 본분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고 하나의 피조물이 되려는 소원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이것들을 모두 해내면 하나님이 내 병을 없애 주실까?”라고 말한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애 주든 말든, 치료해 주든 말든 네가 하는 것은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이다. 네 건강 상태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든 없든, 그 어떤 사역을 감당할 수 있든 없든, 네 본분 이행을 허락하든 말든 네 마음이 하나님과 멀어져서도, 네 본분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그러면 네 책임과 의무와 본분을 다하는 것으로, 이것이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충성심이다. 네 손이 일을 할 수 없다거나, 네 입이 말할 수 없다거나, 네 눈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응당 너를 치료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하나님이 너를 치료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속 깊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본분을 포기하며 하나님을 떠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한다면 어떤 성질이겠느냐?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배반이다! 어떤 사람은 병에 걸리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 앞에 자주 나와 하나님께 기도한다. 또 병에 걸려 하나님이 치료해 주기를 바랄 때는 희망을 하나님께 걸고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만, 시간이 좀 흘러도 치료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께 실망하고 마음속 깊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본분을 포기한다. 어떤 사람은 병세가 약할 때는 하나님이 치료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저버리지는 않지만 병세가 심하거나, 임종이 임박하면 그는 하나님이 진정 치료해 주지 않은 것으로 결론짓고 그렇게 오랜 시간 기다려 온 결과가 죽음이라는 사실에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부인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치료해 주지 않았으니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를 치료해 주지 않았으니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며 믿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그를 치료해 주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믿은 것이 후회되어 믿지 않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배반한 것 아니냐? 이는 심각하게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 절대 그 지경까지 가지 마라.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질병에 걸렸을 때 사람은 어떤 길을 걸어야 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느냐? 근심, 염려, 걱정에 빠진 채 자신의 장래와 퇴로를 위해 고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때일수록, 이런 특수한 환경과 배경에 있을수록, 그리고 이렇게 절실한 고충이 있을 때일수록 사람은 더욱 진리를 구해야 하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네가 예전에 들었던 설교와 깨달은 진리가 물거품이 되지 않고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네게 그런 고충이 있는 때일수록,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해야 하는 때인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그런 환경을 배치하고 그런 조건을 안배한 목적은 너를 근심, 염려, 걱정의 정서 속으로 몰아넣기 위한 것도, 네가 질병에 걸렸을 때 과연 하나님이 치료해 주는지 시험해 보고 실제 상황을 알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네게 그런 특수한 환경과 조건을 배치한 목적은 그런 환경과 조건에서 네가 실제적인 공과를 배우고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더 깊이 진입할 수 있게 하여 더욱 분명하고 정확하게 하나님이 사람과 일, 사물을 어떻게 지배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든 없든,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든 없든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은 순종이지, 반항이나 거부가 아니며, 시험은 더더욱 아니다.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네가 만약 반항하고 거부하며 시험한다면 마지막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반대로 네가 만약 같은 환경과 조건에서 피조물이 창조주의 지배에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 구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임하게 한 환경에서 네가 어떤 공과를 배우고 자신의 어떤 패괴 성품을 인식해야 하는지를 구하고, 그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네가 제대로 간증하여 하나님의 요구에 이를 수 있다면, 이것이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질병 하나를 안배한다면 크고 작음을 떠나 그 목적은 네가 질병의 경과, 인간에 대한 질병의 해악, 인간에게 미치는 질병의 여러 불편과 고충 및 감각을 체험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질병 속에서 질병을 체험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질병 속에서 공과를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모색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드러내는 패괴 성품과 하나님을 대하는 옳지 못한 태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함으로써 굳게 서서 증거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은 질병을 통해 너를 구원하고 정결하게 하고자 한다. 너의 무엇을 정결하게 하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너의 여러 사치스러운 욕망과 요구, 더 나아가 생존을 위해, 살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여러 계산과 판단 그리고 계획을 정결하게 한다. 하나님은 너 스스로 계획하고 판단하며 하나님에 대해 사치스러운 욕망을 품는 것을 금하고 오직 네가 순종하기를, 순종을 실행하고 체험하면서 질병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와 하나님이 네게 준 이런 건강상의 조건에 대한 태도, 그리고 네 개인적 소원을 인식하기를 바란다. 이런 것들을 인식하면 너는 하나님이 네게 준 질병이라는 환경이나 신체 조건이 네게 무척 많은 이점이 있다는 것을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네 성품의 변화, 네 구원, 네 생명 진입에 대단히 커다란 도움이 된다. 그러니 질병에 걸렸을 때 사람은 늘 벗어나려 하지 말고 도망치거나 거부하려고도 하지 마라. … 질병에 맞서 적극적으로 치료하되 그 병을 어느 정도까지 치료할 것인지, 완치될 수는 있는지에 관해서도 적극적인 태도로 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가 무엇이든 너는 순종하고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네가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이다. 너는 피조물이고 네게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너는 “이 병이 완치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임을 믿겠지만 완치될 수 없다면 난 하나님께 불만이야. 하나님은 왜 나한테 이런 병을 주셨지? 왜 내 병을 완치될 수 없게 하신 거야? 이 병은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나한테 떨어진 거지? 정말 못마땅하단 말이야! 왜 나는 이렇게 젊은 나이에 요절해야 하는 거야? 왜 남들은 더 살 수 있는데? 어째서?”라고 말하면 안 된다. 이유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배일 뿐 달리 이유는 없는 것이다. 네가 물어야 할 것은 ‘왜’가 아니다. 왜냐고 묻는 것은 패역한 질문이며 피조물이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니다. 그저 이유 없이 하나님은 그렇게 안배하고 계획한 것이다. 네가 이유를 묻고자 한다면 너란 사람은 너무나도 패역하고 강퍅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살짝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하나님이 네 소원을 이뤄 주지 않고, 네 목적을 달성시켜 주지 않을 때면 너는 언짢아하고 마다하며 계속 이유를 묻는다. 그럼 하나님이 네게 물을 것이다. “너는 피조물로서 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느냐? 왜 본분 이행에 충성하지 않았느냐?” 너는 뭐라 답하겠느냐? “이유는 없어요. 원래 제가 이런 걸요.”라고 말해서 되겠느냐? (안 됩니다.) 하나님이 네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네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서는 위치가 틀렸고 너무나도 비이성적이다. 피조물은 어떤 곤경에 처하든 창조주의 안배와 배치에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네 부모가 너를 낳아 키우고, 너는 그들을 엄마, 아빠라고 칭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유도 없이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네가 복을 누리든 고통받든 하나님이 네게 배치한 그 모든 것 역시 당연한 것이다. 네가 선택하지 않고 끝까지 순종한다면 넌 베드로처럼 구원받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일시적인 질병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버리며 배반한다면 과거 네가 버리고 헌신했던 것과 이행했던 본분, 치른 대가는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예전에 네가 기울인 모든 노력이 네가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피조물의 위치에 제대로 서기 위해 기반을 닦지도 않았고, 네 어떤 것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네가 질병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으니 네 결말은 바울과 같아 최종에는 징벌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성질을 규정한 원인은 바로 네가 예전에 했던 모든 것이 면류관과 복을 받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만약 병으로 임종을 맞게 되는 마지막 순간에도 여전히 아무런 원망도 없이 순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네가 예전에 했던 것이 하나님께 진심이며 기꺼운 마음이었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네게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있으면 결국 그 순종이 네 신앙생활에 완벽한 마침표를 찍어 줄 것이니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질병 하나가 결국 너를 좋은 결말로도, 나쁜 결말로도 이끌 수 있다. 이는 네가 어떤 길을 걷는지,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어떤지에 달린 것이다.

―<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상)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3)> 중에서

고통 없이 일생을 보내는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은 가정 때문에, 어떤 사람은 직장 때문에, 어떤 사람은 결혼 때문에, 어떤 사람은 육적 질병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누구나 어느 정도 고통을 받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왜 사람은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한평생 평안하고 행복하고 즐겁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고통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까?” 안 된다. 누구든 다 고통을 받아야 한다. 고통은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적극적인 것이든 소극적인 것이든 모든 사람이 육체적 삶이 가져다주는 여러 가지 느낌을 체험하게 한다. 고통은 너에게 다양한 느낌과 이해를 갖게 하는데, 이런 것은 모두 인생의 체험이 된다. 이것이 한 측면인데, 사람의 경력을 늘리기 위한 것이다. 네가 그 가운데서 진리를 구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점점 가까워질 것이다. 다른 측면으로는 이 역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책임이다. 무슨 책임일까? 이는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이다. 네가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고 견딜 수 있으면 그것은 간증이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병에 걸리면 다른 사람이 알까 봐 두려워하며 부끄럽게 여기는데, 사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병고 속에서도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고 갖가지 고통을 견딜 수 있을 뿐 아니라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여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을 완수할 수 있다면 이는 좋은 일이겠느냐, 아니면 나쁜 일이겠느냐? 이는 좋은 일이다. 이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간증이자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간증이며, 사탄에게 수치를 안기고 사탄을 이기는 간증이다. 그러니 어느 측면에서 고통을 받든 모든 피조물과 모든 하나님 선민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 반드시 이렇게 이해하고, 공과를 배워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본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대할 때 다 이렇게 안배한다. 하나님이 너에게 특정한 환경과 조건을 마련해 준 것은 특정한 책임과 의무, 그리고 부탁을 맡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너는 응당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진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하나님이 네게 그런 요구를 하고,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리이다. 왜 그런 것들을 진리라고 하겠느냐? 네가 그런 말씀을 진리로 여겨 받아들이면 네 패괴 성품과 관념, 패역을 해결할 수 있어 너에게 다시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거나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너는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간증을 함으로써 사탄에게 수치를 안길 수 있으며, 진리를 얻어 구원받을 수 있다.

―<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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