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자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다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지 아닌지는 본분을 이행하는 데서 드러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본분 이행에 원칙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전혀 원칙 없이, 늘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이행한다. 이는 건성으로 하는 게 아니냐?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아니냐?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너희는 생각해 보았느냐? 너희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고, 무얼 하든 효율이 없고, 마음과 힘을 전혀 쏟지 않는다. 그러고도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많은 사람들이 마지못해 본분을 이행하고 오래가지도 못한다. 조금만 고생해도 견디지 못하고, 크게 손해를 본다고만 생각하고, 무슨 어려움이 있어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데 하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겠느냐? 무슨 일이든 건성으로 하면 되겠느냐? 양심적으로 볼 때 넘어갈 수 있겠느냐? 사람의 기준으로 평가해서도 불합격이라면 이것을 합격한 본분 이행으로 볼 수 있겠느냐?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너는 영원히 진리를 얻을 수 없고, 너의 힘쓰는 것에도 불합격인데, 어떻게 하나님께 인정받겠느냐? 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 고생을 두려워하고, 너무나 게으르고, 육적인 편안함만 탐하고 있다. 업무를 배우는 일에 대가를 치르지도 않고, 열심히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를 묵상해 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대충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수고를 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료를 찾을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알아볼 필요도 없고, 머리를 쓰거나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육적으로 전혀 고생하지 않고도 아주 손쉽게 일을 마칠 수 있다는 것이다. 네가 그를 책망하면 그는 꼭 불복하고 따진다. “저는 꾀를 부리거나 한가하게 보낸 것도 아니고, 일도 다 마쳤는데, 왜 또 흠을 잡으려 하세요? 공연히 트집 잡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본분 이행한 것만으로도 잘했는데, 왜 아직도 불만이세요?” 너희가 볼 때 이런 사람이 발전할 수 있겠느냐? 늘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면서 핑계만 가득하고, 문제가 생겨도 지적도 못 하게 하는데, 이는 어떤 성품이냐? 사탄의 성품이 아니냐? 이런 성품으로 본분을 이행하면 합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본분을 이렇게 이행하는 것이 아니냐? 겉으로는 바빠 보이고, 협력도 척척 하고, 다투지도 않지만, 본분 이행에 누구도 공을 들이지 않고, 누구도 마음을 쓰지 않고,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이도 없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리를 구하고 원칙을 지키는 이도 없다. 다들 건성으로 어영부영 지나는데, 진정 본분에 책임을 다하는 사람은 너무도 적다.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같이 열심히 기도하지도 않고, 함께 문제를 대면하고 해결하지도 않는다. 아무도 효과를 생각하지 않고 일만 마치면 그만이다. 결국에는 다시 해야 한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순전히 건성으로 하는 것으로, 이방인이 일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이 바로 힘쓰는 자의 마음가짐이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바꾸지 않으면 드러나 도태되는 수밖에 없다.
너희는 사역을 하거나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어떤 고통을 받았느냐?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거기에만 몰두했느냐? 본인의 어떤 어려움도 극복했느냐? 대가를 치렀느냐?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면 너무 힘들어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왜 그럴까? 본분을 잘 이행하고 싶은데 자신이 진리가 부족하고 힘에 부쳐서 애가 타는 것이다. 만약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것은 본분을 다하지 못한 것이고 충성하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에 양심에 참소를 받고, 마음이 편치 않다. 다른 사람들은 식사를 하는데, 혼자서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지난번 그 부분이 또 잘못됐는데, 내가 제대로 확인을 못 했어. 이걸 어쩌지? 이것은 책망을 받느냐 마느냐의 일이 아니라 내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거야.’ 남들이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을 봐도 먹고 싶은 생각도 없고, 오로지 어떡하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을지만 고민한다. 이것은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냐? 공을 들이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공을 들인 적이 있느냐? 만약 너희에게 책임감이 하나도 없고, 나쁜 짓을 저지르거나 건성으로 일하고도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거나 아무런 자각도 없다면, 무슨 충성을 논하겠느냐? 전혀 논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 어떤 본분을 맡겼는데 빨리 완성해야 해서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한다면 너는 어떻게 실행해야 하느냐? 그저 시늉만 하면서 마음도 쓰지 않고, 고민도 하지 않고, 자료도 찾아보지 않고, 잘 아는 사람을 찾아가 교제하지도 않고, 거기서 시간만 보낸다면, 그런 본분 이행 태도는 어떤 것이냐? 바로 말만 번지르르하고, 진심은 동하지 않은 것이다. 말만 번지르르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겉으로는 듣기 좋게 말하지만, 그저 말만 그런 것이고, 남들이 착각하게 만들거나 혹은 네가 고생하고, 마음 쓰고, 애쓴다고 생각하도록 고의로 남들을 오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네가 신경을 쓰고, 정말로 네 마음을 다한다면, 정말 네 마음에 본분을 담고 있다면, 행동해야 한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 바빠져야 한다. 자료를 찾거나 하나님 집 원칙이 무엇인지 자주 들여다보거나 혹은 그 분야 업무를 잘 알고 잘하는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야 한다. 어떤 때는 바빠서 밥 먹을 시간도 없겠지만, 바쁘더라도 잊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지해야 한다. 대략적인 길을 찾고 원칙을 대부분 파악했으면 그때는 착수해야 한다. 3~5일 후에 제대로 된 작품이 만들어지면 이것이 바로 성과다. 네가 그렇게 열심히 하지도 않고 무성의한 태도로 임해도 3~5일 후면 작품 하나쯤은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작품의 질이 어떻겠느냐? 겉으로야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고 크게 흠잡을 데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작품도, 심혈을 기울여 작업한 결과물도 아니고, 그저 허접한 결과물에 불과하다. 대충 완성해서 제출하면 합격할 리가 있겠느냐? 결국 다시 작업해야 하는데, 그건 일을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냐?
어떤 사람들은 대강대강 일하고, 어떤 일에도 마음을 들이지 않고 그저 무성의한 태도로 임한다. 이런 사람은 마음씨가 좋지 않다. 마음씨가 좋지 않은 사람이 책임감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마음씨가 좋으냐, 좋지 않으냐? (좋지 않습니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에게는 좋은 마음이 없다! 어떤 일에도 무성의한 태도로 임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고, 대가를 치러 성과를 내려는 마음도 없다. 그런 태도로 본분을 이행한다면, 이행하는 본분이 합격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합격한 본분 이행은 시간에 있어서 요구 기준이 있느냐, 없느냐? 본분 이행하는 태도에 요구 기준이 있느냐, 없느냐? 누군가는 말한다. “저는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 무리하지 않기, 둘째, 식사 거르지 않기, 셋째, 무모하게 나서지 않기’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나오지 않았는데 제가 미리 도착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나가지는 않으려고요. 또 다른 사람이 아직 본분을 이행하고 있어도 저는 마무리하고 쉴 생각을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고생은 저도 하지 않고, 남들이 고생해야 저도 합니다. 다들 해야 저도 하고, 남들이 안 하면 저도 안 합니다.” 이런 기준은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다. “저는 기분이 안 좋으면 본분을 잠시 미루고, 작업 시간도 줄입니다. 그럴 때 저한테 협력하라고 하면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해요. 기분이 좀 괜찮아지면 그때는 적극적으로 하지요.” 이런 기준은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그건 기분에 따라 일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사람도 있다. “본분을 이행하는데 다들 저한테 잘해 주고 제 뜻을 따라 주고, 설령 제가 좀 실수해도 저를 책망 훈계하지 않으면 그건 괜찮아요. 그러면 저는 70% 정도의 노력은 하죠. 그런데 누군가 저를 꾸짖고, 제 흠을 들추면 본분 이행하기가 싫어져서 그냥 피합니다.” 이런 태도는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또 이런 사람도 있다. “제가 본분을 이행할 때는 누구도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하고 싶어야 합니다. 저는 체면이 중요하니, 누가 본분을 이행하라고 재촉하고, 효율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저더러 원칙을 어긴다고만 하는데, 그건 저한테 어려운 문제고, 저를 난처하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 집의 진리 원칙을 저한테 요구한다면, 제 분량이 작아서 그렇게 못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하겠지만, 제 능력이 따라 주지 않는 일은 그걸로 저를 난처하게 하지 마십시오. 저를 난처하게 하면 그냥 때려치우고 갈 것입니다. 저를 난처하게 하지 않으면 그때 다시 오겠습니다.” 이런 태도는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이 태도들이 다 좋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고, 다들 잘 알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어떻게 본분을 이행한 것이냐? 너희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느냐? 방만하고, 제멋대로이고,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누구 말도 듣지 않고, 무성의하고, 어떤 일도 진지한 태도로 임하지 않고, 잘하는 게 좀 있으면 거들먹거리고, 조금만 수틀리면 짜증 내고, 인상 찌푸리고, 하기 싫어하고, 바로 본분을 포기하려 한다. 이런 태도가 너희에게는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이런 태도가 나타날 때, 너희는 같이 교제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시도해 본 적 있느냐? 이런 문제가 있으면 사람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느냐? 본분 이행에 합격해서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느냐? 당연히 그럴 수 없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패괴 성품을 드러내든 그것은 모두 실제적인 문제이며, 본분 성과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그 즉시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실제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경우 저절로 사라지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악화될 것이다. 악화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이런 패괴 성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것은 네 내적 상태에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 문제는 네 본분 이행을 가로막고, 네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네가 하나님 앞에 오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이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문제이다. 시간이 갈수록 네 마음속 불평과 원망,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 사람에 대한 편견, 사람 사이의 벽과 같은 것이 점점 마음에 많이 쌓여서 틀림없이 너를 잘못된 길로 이끌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마음을 교란하여 사람을 부정적으로 만들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바로 사람의 관념, 오해 등은 모두 부정적 사물이자 사탄 독소로, 이런 것들이 사람 마음속에 축적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믿음을 부식시키고, 사람의 열정, 사람의 진심을 전부 소모시키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믿음이 없고, 열정이 없다면 본분을 이행하려는 의욕이 갈수록 작아지지 않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데서 오는 평안과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본분을 이행해도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를 느끼지 못한다면 사람은 내면이 굳건해질 수 없고, 관념과 오해, 불평, 소극성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에 의해 통제될 것이다. 사람이 이런 내적 상태 속에서 살다 보면 본분을 이행할 때도 힘만 낼 수밖에 없다. 억지로 버티고, 대충 처리하고, 무슨 일을 해도 의지력으로 억제할 뿐,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는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축복을 볼 수 없다. 그 뒤로 따라오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아무리 본분을 이행해도 원칙을 찾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만 하고 점점 자신이 없어지고, 본분 이행할 의욕도 점점 사라질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처음에 본분을 이행했을 때는 감동도 있고, 깨우침도 있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같았어요. 마음에 기쁨도 있고, 어떤 일도 꿰뚫어 볼 수 있고, 어떤 일을 해도 마음이 홀가분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너무 멀어져서 기도도 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아요.” 이건 어찌 된 일이냐? 사람의 마음이 병든 것이다. 무슨 병일까? 바로 사람 내면의 패괴 성품이 늘 못된 짓을 해 교란하는 것이다. 이런 패괴 성품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본분에 늘 문제가 생기고, 심하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할 것이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고 싶다면 항상 진리를 구하여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한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게 해서 패괴 성품이 해결되면 본분 이행도 수월하고 순조로워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구해 패괴 성품을 해결할 생각은 않고, 그저 좋은 마음, 열정, 사람의 의지로만 극복하려고 한다. 그러면 패괴 성품이 흘러나오는 것을 일시적으로는 피할 수 있겠지만, 패괴 성품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이 되겠느냐? 진리를 구하지 않으면 패괴 성품은 해결할 수 없고, 사람이 패괴 성품 안에서 살아간다면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없고, 이행하는 본분이 합격일 수 없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무골호인이 정말 좋은 사람이겠느냐? 어떤 사람이 하나님 눈에 진정으로 좋은 사람, 진리가 있는 사람으로 보이겠느냐? 먼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다음으로 진리를 깨달은 기초에서 진리를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관념과 상상, 사람에 대한 편견, 사람에 대한 오해와 하나님에 대한 오해 등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이런 것들을 언제든 발견하고 언제든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좋지 않은 내적 상태나 소극적인 상태로 살아갈 때 즉시 이를 바로잡고, 이런 패괴된 것들을 고수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 언제든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구하고 해결하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비록 연약함과 패역이 있고 교만, 독선, 교활함, 간사함 등 갖가지 패괴 성품을 드러낼지라도 성찰하여 문제를 발견한 후에는 제때 해결하고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런 사람이 바로 진리를 사랑하고 실행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눈에 어떻게 보이겠느냐?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 눈에는 좋은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낡은 관념을 부여잡고, 자신의 편견과 오해를 완고하게 고수하고, 늘 소극적인 정서로 본분을 이행한다. 자신이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관점을 고집하고, 책망을 받으면 반감을 품고 이치를 따진다. “저는 그냥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 자신을 내려놓지 않으렵니다. 하나님 집에서 그렇게 처리하는 것은 불공평한 것 같군요.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공평하다고 해도 저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당신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당신은 제 본분 태도가 바르지 않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제가 악을 행한 것도 아닙니다.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한다고 하는데,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건성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닌 겁니까? 제가 이렇게 본분 이행하는 것도 충분히 괜찮습니다. 제가 본분을 이렇게 이행했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도 불공평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공의도 거짓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냐?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는 것이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이방인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하나님이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혐오하십니다.) 이런 자는 강퍅하고 패역한 자가 아니냐? 너에게 비록 패괴가 있지만 하나님은 이를 기억하지 않고, 네가 패괴된 사람이라는 이유로 너를 버리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네가 진리를 깨닫고도 고의로 대적하고 고의로 거역하기 때문에, 네 이런 태도 때문에 하나님이 상심하고, 혐오하고, 반감을 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태도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보기에 좋은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보기에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고 싶다면 반드시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한다. 우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눈에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만약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추구할 수 있고, 아무리 패괴 성품이 드러나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진리를 구해서 해결할 수만 있다면, 또 책망과 훈계를 받고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다면, 이것은 완전 구원받을 희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줘야 하는데, 이 요구가 너무 높아서 도달하기 어렵고, 너에게 그런 의지와 분량도 없고, 네 믿음도 너무 작다면 우선은 주변의 형제자매들에게 네가 좋은 사람, 옳은 사람,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고,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는 사람임을 보여 줘라. 네가 비교적 정직한 사람이라서 잘못이 있으면 고칠 줄 알고, 자신의 패역한 상태를 발견하면 얼른 바로잡을 줄 알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발견하면 얼른 진리를 구하고, 사람들과 교제하고, 또 인식한 뒤에는 회개할 줄 안다는 사실을 보여 줘라. 이렇게 추구하면 발전이 있을 것이다. 우선 형제자매들에게 네가 좋은 사람, 옳은 사람, 생명 진입이 있는 사람임을 보여 주고, 그런 다음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라. 이렇게 실행하면 쉽게 진입할 수 있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요구하는 것이 비교적 실제적이다. 먼저 형제자매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의 판단 기준은 무엇이냐? 우선 본분 이행에서부터 보자면, 본분 이행은 몇 가지 요구 기준에 도달해야 하느냐?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 기꺼이 고생하고, 기꺼이 대가를 치르고, 일을 진지하게 대하고, 건성으로 일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좀 더 기준을 높이자면, 일 하나하나 거기에 해당하는 원칙을 찾은 다음, 그 원칙에 맞게 처리해야 한다. 누가 한 말이든 관계없다. 설령 네가 가장 우습게 여기는 형제자매가 얘기한 원칙일지라도, 그게 옳은 말이고, 진리에 부합한다면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여 보고, 자신의 생각, 자신의 관념을 저버려 보려는 이런 태도는 어떠냐? (좋습니다.) 입으로만 본분을 잘하겠다고 하는 건 쉽다. 입만 열면 된다. 하지만 합격된 본분 이행에 이르기는 어렵다. 그러려면 일정 부분 대가를 치르고, 버려야 한다.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까? 가장 기본적으로 시간을 들이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하루에 남들보다 시간과 에너지를 더 많이 써야 하고, 더 오래 지속하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책임감을 가지고 본분을 잘하고 싶다면 속으로 항상 어떻게 해야 본분을 잘할지, 본분 이행할 때 어떤 진리를 갖추고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잘 생각해야 한다. 그런 후에 하나님께 기도로 진리를 구하고, 자신의 소망을 표현하고, 하나님께 깨우치고 인도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저녁에 남들이 쉴 때도, 너는 따로 시간을 내서 잘 생각해 보아라. 오늘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스스로가 어떤 패괴를 드러냈는지 반성하고 길을 찾은 뒤 비로소 휴식에 든다면 그날 하루는 수확이 있고, 헛되이 보내지 않은 것이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생각해 내지 못하면 밥도 넘어가지 않고, 잠도 오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수고요, 이것이 바로 대가다. 네가 남들보다 더 많은 수고와 대가를 치르고,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가며 진리를 향해 노력한다면, 이것이 실제적인 대가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이런 대가를 치러 본 적이 있느냐? 자매들 중에는 꾸미기를 좋아해서 매일 화장하고 머리를 만지는 데 최소 한두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이 있다. 육이 누리는 일에서는 아무것도 포기한 적 없고, 늘 자신을 예쁘게 꾸미고 옷차림도 늘 맵시 있다. 하지만 본분은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열심히 해 본 적도 없다. 열심히 하지 않는 모습은 어디서 드러나느냐? 본분 이행할 때 진심을 들이는 법이 없고, 결코 마음을 쓰지 않는다. 가끔 늦게 자는 것도 남들이 늦게 자니까 그도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거나, 일이 끝나지 않아 마무리를 못하니까 자리를 뜨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개인을 놓고 볼 때, 본분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더 쏟은 적도 없고, 대가를 더 치른 적도 없고, 고생도 전혀 하지 않았다. 비록 사람들과 같이 본분을 하느라 똑같이 시간을 쓰더라도 전혀 효과가 없고, 대충 일하는 시늉만 하면서도 속으로는 본인이 무척 고생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는 어떠냐? 이런 태도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느냐? 결코 아니다. 너희는 평소에 어떻게 본분을 이행하느냐? 진지하게 대했느냐? 본인에게 그런 의지도 없고, 그렇게 대가를 치러 본 적도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본인의 본분 이행이 전적으로 억지로 겨우 버티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 것이다. 이런 상태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를 고쳐 본 적이 있느냐?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이냐? 우선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때로는 늦게 자고 때로는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이는 육적인 수고다. 이것 말고도 마음을 더 쓰고, 에너지를 더 쏟고, 머리를 더 쓰고, 더 묵상하고, 하나님 앞에 더 많이 기도하고 구해야 한다. 네 시간과 에너지를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모든 것을 본분을 이행하는 데 쏟고, 하나님 부탁을 완수하는 데 쏟고, 진리를 추구하는 데 쏟는 것, 이것이 본분 이행에서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본분을 이행할 때 가장 부족한 점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 너희는 힘을 다했을 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지는 않았다. 이 세 가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너희가 본분을 이행할 때 그저 힘만 다할 줄 안다면, 하나님 눈에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겠느냐? (힘쓰는 자입니다.) 너희는 힘쓰는 자가 되기를 바라느냐? (아닙니다.) 너희는 힘쓰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면서도 힘만 쓰고 있다. 게다가 즐거이 힘쓰고 있다. 너희가 가는 길은 바로 이런 길이다. 힘쓰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적극적으로 힘쓰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냐? 바로 사람이 가는 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네가 어떤 길을 가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목표가 무엇인지는 바로 어떤 꽃을 피워서 어떤 열매를 맺는가 하는 것과 같다. 네가 힘쓰는 길을 택했다면 최종적인 결과는 힘쓰는 자가 되는 것이다. 네가 힘을 들이는 것을 빌미로 복을 얻으려는 생각만 할 뿐, 본분에서는 진리를 구하고 원칙대로 일해서 합격된 본분 이행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고, 본분을 이행할 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는 그저 힘을 다하는 것에 만족하는데, 그러면 결국 힘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모순이 아니다. 하지만 힘쓰는 자라는 사실에 속으로 갈등을 겪는데, 이는 어디가 모순이냐? 사람은 그 누구도 힘쓰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복은 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본인이 힘쓰는 자라는 말을 들으면 싫어한다. ‘이건 나를 모욕하고 멸시하는 거잖아? 사람 차별하는 거 아냐? 내가 이렇게 노력하고, 이렇게 힘을 들이는데 어째서 힘쓰는 자라는 거지?’ 맞는 말이다. 진리는 하나도 실행하지 않고, 그저 힘을 들이는 것으로 만족했으니 너는 바로 힘쓰는 자이다. 본분 이행을 힘만 조금 들이면 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라. 마음을 쓰지 않으면 본분을 잘할 수 없다. 마음을 쓴다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것이고, 너는 이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말을 지금 본분 이행에 적용하면 꼭 알맞다. 네가 만약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그러면 네가 바로 하나님 눈에 좋은 사람이다. 하나님 눈에 좋은 사람은 어떻게 판단하느냐? 어떤 면을 봐야 하느냐? (본분 이행을 봐야 합니다.) 먼저 본분 이행을 봐야 한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와 관점은 어떤 것인지, 의도와 목적은 무엇인지, 본분 이행할 때 진리 원칙이 있었는지, 일을 해서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 등, 이런 부분에서 그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인지, 하나님 보기에 정직한 사람인지,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직관적인 원칙과 기준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이해가 되느냐? 너희는 진리를 추구하여 백성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힘을 들여 본분을 이행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진리를 향해 노력하고, 하나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수 있다. 힘을 들이는 것으로만 만족한다면, 그 요구 기준이 너무 낮다. 본분을 이행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을 하면서 힘만 조금 들이면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업무 기술에 관계된 일은 기술이 없으면 제대로 할 수가 없다. 특히 하나님 집 본분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과 관계가 있기에 진리가 없으면 안 된다. 진리 원칙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과를 낼 수 없다. 따라서 본분을 이행할 때는 반드시 진리를 깨닫고 원칙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조금 힘을 들이는 것으로 하나님 축복과 맞바꾸려 했다면, 그 생각은 틀렸다. 하나님은 본분 이행이 불합격인 너 같은 사람은 쓰지 않고 도태시킨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기준은 사람이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이지 힘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힘쓰는 자가 된 사실이 못마땅하겠지만, 사실 하나님도 그 일로 상심하고 슬퍼한다. 너는 하나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하나님이 힘쓰는 자들을 구원하려고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사람들을 온전케 하려는 것이다. 힘쓰는 자에게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힘쓰는 자를 구원하는 일이 가치가 있느냐? 그것이 하나님이 영광을 얻었다는 표시냐? 단순히 힘만 쓰는 것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냐? 힘쓰는 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가야 할 길도 아니다. 누군가는 말한다. “저는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힘쓰겠습니다. 저더러 어떻게 힘을 들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고, 이미 전력을 다했습니다. 다만 자질이 좀 부족하고, 진리를 모를 뿐이죠. 하나님은 제 마음을 아실 테니 저를 칭찬해 주시겠죠!” 이 말이 하나님 요구에 부합하느냐?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은 본분 이행에 합격한 사람, 그러니까 본분을 이행할 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사람이다. 만약 네가 힘만 다하고 마음을 쓰지 않았다면, 그렇게 본분을 이행한 것은 마음을 다한 것이 아니다. 마음을 다하지 않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느냐?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느냐? 힘만 들이고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힘쓰는 자밖에는 될 수가 없는데, 힘쓰는 자가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있느냐? 그것은 불가능하다. 본분을 이행하는 데 있어 하나님 말씀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것입니다.) 이는 진리에 관계되고, 진리 원칙에 관계되고, 실행 원칙에 관계된다. 실행 원칙이란 어떤 것이냐? 바로 네가 살아가면서, 또 본분을 이행하면서 해내야 하는 것이고, 네가 실행해야 할 길이고, 네 인생의 방향이자 목표이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이 말씀을 가슴에 좌우명으로 새기고, 일을 할 때 이 말씀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판단해야 한다. 본인이 어느 부분은 도달했고 어느 부분은 아직 부족한지, 본인의 내적 상태는 어땠는지, 패역은 없고 사심은 없었는지, 하나님께 조건을 들먹이며 거래하려 들지는 않았는지, 강퍅함은 없었는지, 태만하게 일한 부분은 없었는지, 무성의한 부분은 없었는지 등을 살펴야 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겨라. 즉 하나님의 이 말씀, 이 진리를 마음속으로 기억해야 한다. 마음속에 새기는 목적은 무엇이냐?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바로잡고, 자신의 행위를 단속하여, 자신이 일을 할 때마다 옳은 방향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 있다고 하자. 너는 하나님 말씀에서 뭐라고 했는지 얼른 떠올릴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는 게 마음을 다하는 걸까?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사람한테 물어보고 교제해 봐야겠다.’ 교제를 마친 다음 기도를 하고, 자신에게 잘못된 속셈은 없는지 돌아봐라. 개인의 사심과 목적이 없다면 완전히 진리에 부합한 것으로 단정하고, 그 진리를 실행해 내면 마음은 평온해진다. 즉 너는 마음을 쏟았고, 마음을 완전히 다한 것이다. 이것이 최선이다. 네가 마음을 다하고 싶다면, 마음속으로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마음을 털어놓아야 한다. 이것은 마음의 일이다. 네 마음이 하나님에게 가까워지고, 마음이 늘 진리를 생각하고, 진리를 향해 노력한다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된 것이다. 마음을 다하는 것만 가능해지면,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도 저절로 가능해진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이 말은 너에게서 실제가 된다.
어째서 하나님 말씀이 사람에게 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된다고 하느냐? 하나님 말씀은 빈말이 아니라 사람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론도 아니고, 탁상공론도 아니고, 논조도 아니다. 하나님 말씀은 네가 응용하고 실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일이 닥쳤는데 해결할 길도 없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를 때, 너는 하나님 말씀에서 어떻게 요구하는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 말씀을 바탕으로 잘 생각하면 길을 찾고, 또 하나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하나님 뜻에 따라 실행하면 된다. 실행한 뒤에는 검증이 될 것이고, 그렇게 실행하면 마음이 평온하고 즐겁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동안 너는 깨우침을 얻고, 경험과 체험을 얻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 어떤 깨달음이냐?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하고,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실행 원칙을 발견하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근원이 무엇이고, 의의는 무엇인지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고 나면, 일할 때도 더는 얼떨떨하지 않고, 미련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게 된다.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뜻이냐? 어려움이 닥치면 진리를 구해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알게 되므로 완전히 길이 생긴다는 말이다.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면 길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네가 하나님 말씀의 실행 원칙을 깨닫고, 하나님이 하신 그 말씀이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지 이해하고 나면,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알게 된다는 말이다. 어째서 하나님 말씀이 사람의 생명이요, 사람의 길이라고 하느냐? 하나님 말씀이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고,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만이 사람을 인생의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이 통속적이고 알기 쉬운 이유는 사람이 진리를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람이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다 보면 어느새 인생의 바른길로 들어서게 된다. 하나님 말씀 중 어떤 말씀은 간단하고 가장 알기 쉬운 말씀이다. 그런데 그 말씀들은 모두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가는지,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하는지, 어려움을 만나면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알려 준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그 말씀은 너의 길이 되어 네게 일이 닥쳤을 때 지혜와 원칙, 실행 길을 얻게 해 준다. 네가 만약 본분을 이행하거나 다른 방면의 일을 할 때, 언제나 행할 만한 길이 있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고,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것은 네가 진리를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바로 네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말씀을 깨달았음을 뜻한다. 힘쓰는 자는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필요 없이 힘만 들이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힘쓰는 것을 간단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너무나 형편없는 자들이다! 너무 형편없다고 하는데, 그건 무슨 말이냐? 바로 힘쓰는 일도 감당하지 못하고, 힘을 들이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말썽만 피우고, 교란하고, 태만하게 일하고, 다른 사람이 달래고 지켜봐 줘야 해서 그렇다. 그러면 그 사람은 본분 이행이 불합격이고, 사람의 기준에 미달인 자이다. 너희는 지금 어떤 길로 가려고 하느냐?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느냐? 표준적인 힘쓰는 자가 되려 하느냐, 아니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본분을 잘 이행하는 사람이 되려 하느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본분을 잘 이행하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건 좋은 일이고, 목표도 옳다. 다들 힘쓰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고, 힘만 들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 진리를 향해 노력하려면 우선 어떤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냐? 바로 자신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를 보고,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진리 추구와 본분 이행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그렇다면 본분 이행 방면의 진리가 무척 중요하다. 원칙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면 평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거기에다 또 하나님 사역을 알고,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여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한다면 하나님을 따르는 데서 달콤함을 맛볼 것이다. 그러면 진리 추구의 길로 쉽게 들어설 수 있다.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다. 하나님 말씀에 “너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라.”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진리이냐, 아니냐? 만약 이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한다면 마땅히 본분 이행에 공을 들여야 한다. 본분 이행은 진리를 알수록 원칙이 생기고 효과가 있다. 본분 이행에 합격한다면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울 뿐만 아니라 진실한 믿음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따르며 본분을 이행해서 얻는 효과다. 하나님을 따르면 갈수록 길이 밝아진다는 것은 정말 사실이다. 따라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일이다. 네가 하나님 요구에 따라 진리를 향해 노력한다면, 그 출발점은 옳다. 네가 이 방면에 노력을 기울인다면 서서히 성과를 얻고 사람다워질 것이다. 그리고 차츰차츰 하나님과 가까워질 것이다. 그때는 사람이 시련과 환난을 만나도, 조금 소극적이고 연약해져도, 관념과 오해가 있어도, 진리를 구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그런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너희 대부분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어서 중국 교회의 형제자매들처럼 박해를 받아 본 적도 없고, 고생도 별로 하지 않았다. 생활이 너무 편한 것은 너희에게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다. 진리를 추구하려면 힘에 부치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려 해도 힘이 든다. 자유민주주의 제도 아래에서 성장한 사람은 대개 곱게 자란 탓에 남들의 책망이나 질책을 못 견디고, 사상도 비교적 자유롭고 개방적이다. 늘 프라이버시와 자유를 요구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육적인 즐거움과 관련된 것들을 요구한다. 그런 것을 내려놓지 못하면, 너희는 힘만 들이려 하고 진리는 추구하지 않는 그런 내적 상태와 상황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언제나 자아와 프라이버시를 내세우는데, 그런 얘기만 하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다. 그보다는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이야기하고, 무엇이 긍정적 사물이고, 무엇이 올바른 인생길인지 이야기해야 한다. 자유, 민주, 독립은 좋은 것이고, 진보된 사회 제도이기는 하지만, 그런 제도는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이 어둡고 사악한 세계에서 하나의 진보된 사상이자 제도로서, 사람의 생존에 상대적으로 적합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하나의 제도일 뿐, 결코 진리가 아니다. 너희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나는 이런 사회 제도 아래 살고 있고, 나한테는 그럴 권리가 있어.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해도 누구도 간섭할 수 없어. 이건 내 권리야. 사회와 국가에서 나한테 부여한 권리라고.’ 이런 생각은 하지 마라. 네가 그것을 최고의 진리로 생각한다면 그건 큰일이다. 너에게 그런 사상이 있다는 것이 너에게 진리가 있다는 뜻이냐? 그것들은 어디서 왔느냐? 사람에게서 왔고, 패괴된 인류로부터 생긴 것으로, 절대 하나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갖추도록 요구한 진리는 더더욱 아니다. 만약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진리로 여겨서 하나님 집에서도 그저 자유를 추구하며 구속받지 않으려고 하고, 본분도 아무렇게나 이행한다면 너는 큰일이다. 이런 사상이 있다면 네가 진리를 쉽게 받아들이겠느냐? 진리를 쉽게 실행하겠느냐? 그러고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따르려면 진리를 깨닫고, 순종할 줄 알아야 하고, 진리에 구속받아야 하고, 멋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자유와 민주를 추구하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없다. 또 너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지 않고, 본인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골치 아파진다. 이것이 너희의 어려움이다. 사람에게는 관념과 상상에서 비롯된 것, 전통문화적 관점, 또 사회적 조류에서 제시되는 것 등이 있다. 이것은 사회적 배경이나 환경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이 문제의 본질과 심각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항상 인권과 자유라는 방식으로 본분 이행을 대하고, 하나님 믿는 일을 대하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맡긴 부탁을 대한다면 너희는 결코 바른길에 들어설 수 없고,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중국 사람들은 독재 통치라는 어두운 배경 아래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달리 우월감도 없고, 태어나면서부터 일종의 습관에 길들여진다. 바로 고난을 견디고, 소처럼 부지런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사회적 배경과 환경 때문에 중국 사람들에게는 그런 생활 습관 혹은 사람됨의 원칙이 형성됐다. 하지만 자유 민주 국가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상이 없다. 그는 남에게 간섭받고 통제받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을 억압으로 느끼고 속박이나 모든 규율에서 벗어나려 한다. 심지어 하나님 집에 왔는데도 하나님 집의 행정 제도나 사역지침, 교회의 규칙을 벗어나려 한다. 간섭과 통제를 싫어해서 누가 책망하거나 꾸짖어도 안 되고, 사역이 바쁘고 힘들어도 안 된다. 그러면 큰일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모습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정예병이 지녀야 할 모습도 아니다. 은혜시대에는 항상 성도의 품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를 현재에 가져와도 적용되지 않느냐? 당연히 적용된다! 품위는 긍정적 사물이기에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적용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닿도록 요구하는, 피조물이 지녀야 할 모습은 제쳐 놓고, 너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지녀야 하지 않겠느냐? 품위도 없으면 너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될 자격이 없고, 하나님은 너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려면, 네가 피조물이 되어도 좋고,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되어도 좋지만, 어쨌든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네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당신을 따르려 합니다. 저는 이런 의지와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당신 보시기에 그것이 당신 뜻에 부합하는지요?” 아니면 하나님께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더라도,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고 속으로 다짐하고, 하나님께 네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 보여 줄 수도 있다. 네가 어떤 나라, 어떤 사회적 배경에서 태어났든, 지금 하나님을 따르는 이상 너는 어떤 나라,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 하나님 믿는 사람, 하나님 집의 사람이다. 너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하나님 집의 사람, 하나님을 따르는 자로 여기고 그리스도의 정예병이 되기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성도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해야 한다. 네가 늘 스스로를 한국 사람, 대만 사람, 미국 사람이라 일컫고, 우리는 다 자신만의 생활 방식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러고도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 너의 그 관점은 잘못됐다. 그건 분명 이방인의 관점이고, 그런 사람은 불신파이다! 네가 불신파라면 어쩌자고 하나님 집에서 비비고 있느냐? 그리스도인인 척하고 싶은 것이냐? 여기서는 속이려 들지 마라. 머릿수만 채우려는 것은 절대 안 된다. 네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진리를 받아들여야 하고, 제대로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면 네가 어느 나라 사람이라도 소용이 없고,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하나님을 믿으면 무조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런 자는 불신파이다. 이방인과 다를 바 없고,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은 얼른 정리해야 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그런 사람을 원치 않는다. 만약 네가 스스로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나라 백성의 기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 “하나님나라 백성은 무슨, 저는 민주 국가의 사람입니다. 존엄과 인권이 있다고요. 그러니 저에게도 민주 국가의 기준으로 요구해야죠. 안 그러면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네가 만약 이렇게 말했다면 미안하다. 여기는 사탄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 선민, 하나님나라 백성이다. 알아들었느냐? (네, 알겠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른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도 좋은데, 저한테 선택의 자유가 있어야죠. 저는 사람이 하는 말, 제가 좋아하는 말을 듣고 싶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러니 간섭하지 마세요. 저한테는 국가 정책과 법규를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가장 우선적으로 따를 수는 없죠. 나라와 민족이 우선이고, 진리는 둘째나 셋째랍니다. 받아들여도 그만,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네가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미안하지만 하나님 집을 떠나라! 하나님 집에 너 같은 사람은 필요 없다. 너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도 아니고, 천국의 백성도 아니다. 너는 세계 시민에 해당하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는 입을 열지 않고, 그런 사람을 구원하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가 없다. 그러니 얼른 떠나거라. 빠를수록 좋다!
어떤 사람은 명인과 위인들을 숭배하면서 하나님 말씀이 정말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지 늘 의심한다. 언제나 명인이나 위인의 말만 무게가 있고 수준이 있다고 여기면서 속으로 ‘우리 나라의 지도자들을 보라. 얼마나 위엄이 넘치는가! 우리 나라가 회의를 열 때의 그 위풍과 분위기, 위엄을 보라. 하나님 집이 어디 비교나 되겠는가!’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네가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정계의 사악함과 국가의 흑암, 인류의 패괴를 너는 잘 알지 못한다. 너는 하나님 집은 진리가 다스린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 선민의 체험 간증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 집에는 진리가 있고, 수많은 간증이 있고, 하나님 선민은 모두 각성하고 있고, 변화하고 있다. 다들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고 진리 실제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훗날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면을 너는 볼 수 있겠느냐? 너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 집의 모든 것이 세상보다 백배 천배 낫다. 앞으로도 하나님 집은 모든 것이 갈수록 좋아지고, 갈수록 정규적이고 완벽해질 것이다. 이런 일들은 모두 차츰차츰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으로 성취하려는 것이다. 하나님 선민은 하나님이 택하고 하나님이 예정했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낫다. 이런 사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눈이 먼 것이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늘 세상을 좋다고 느끼고, 속으로는 세상의 유명 인사나 위인을 숭배하는데, 이는 마귀 사탄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냐?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느냐? 진리를 받아들이겠느냐?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들인데, 네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냐? 세상 유명 인사나 위인들을 숭배하면서 왜 또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너는 도대체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말씀을 어떻게 취급하는 것이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취급하는 것이냐?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경외심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존중도 하지 않는데, 그런 자는 불신파가 아니냐? 그런 자들은 얼른 나가 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얼른 쫓아내고 제명해야 한다. 불신파는 지저분한 파리와도 같아서 보고 있으면 너무나 역겹다. 하나님 집은 진리가 다스리고, 하나님 말씀이 다스리고,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곳이니, 이런 사람은 마땅히 제명해야 한다. 그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 집을 우습게 보고 하나님을 멸시한다. 너희는 이런 불신파가 너희 가운데 섞여 있으면 좋겠느냐? (싫습니다.) 그러니까 서둘러 제명해야 한다. 아무리 교육 수준이 높고 대단한 능력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제명해야 한다. 그러면 사랑이 없는 것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니다. 그건 원칙대로 처리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네 분량의 크기가 얼마인지를 떠나, 진리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하든, 또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든 없든,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바로 그리스도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이는 너의 반석, 네가 하나님을 믿는 데 있어서 가장 확실한 기반이어야 한다. 이 한 가지는 네 마음속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어야 한다. 이마저도 의심한다면 너는 하나님 집에 머물 자격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 민족은 위대한 민족입니다. 우리는 고상한 인종이고, 풍속과 문화도 너무나 고상해 진리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불신파의 목소리가 아니냐? 이것이 바로 불신파의 목소리이니, 이런 불신파는 제명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주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 때로는 성품이 무절제하고 구속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진실하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어서 책망 훈계를 겪으면 회개가 가능하다. 이런 사람은 기회를 줘야 한다. 사람은 어리석거나 일을 간파하지 못하거나 미혹되거나 혹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탓에 일시적으로 우매해져서 바보 같은 말을 하기도 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패괴된 성품으로 초래되는 것이고, 어리석고 무지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해 초래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불신파 부류는 아니다. 그러면 진리 교제를 통해 그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래 믿어도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전혀 변화가 없다. 이 사람들이 바로 불신파이고, 하나님 집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도 이런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뜻은 무엇이냐? 힘만 들일 게 아니라 열심히 진리를 추구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 사람을 구원한다.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너희가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진리를 깨닫고 실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서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만족하고, 하나님 마음도 위안을 받는다. 하나님이 가장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많은 말씀을 하고, 많은 진리를 선포하고, 너희를 위해 많은 심혈과 대가를 치르고도 마지막에 힘을 들이는 자들만 얻고, 힘쓰는 자들만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이자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하나님 마음을 모른 채 그저 힘만 들였을 뿐이다. 살아남더라도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 자도 아니요, 진정한 피조물이라고 볼 수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원치 않는 결과이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 경륜의 본래 의도도 아니다.
세상의 흐름을 좇으며 사탄의 철학대로 살지 말고, 열심히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따르려면 반드시 본분을 이행해야 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려면 반드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귀담아듣지 않고, 몇 년을 믿어도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이런 자들이 바로 불신파로, 언젠가 도태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육을 위해 살고, 이익을 위해 살면서 인간관계를 위해 무척 고민한다. 자신의 본분을 내려놓고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육적인 즐거움만 추구한다. 이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비열하지 않으냐? 이런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익과 허영, 체면만 좋아한다. 사소한 이익을 위해 기를 쓰고 달려들어 인격을 상실하고 사람으로서의 존엄성도 잃어버린다. 참으로 우매하고 어리석은 자가 아니냐? 진리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만나든,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진리를 구하는 것이다. 절대 남과 시비하고 설전을 벌이지 마라. 그건 유치하고 식견이 없는 모습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 모이면 별일이 다 생긴다. 별별 사람이 다 있기 때문에 시비와 잘잘못이 끊이지 않는다. 패괴된 인류는 바로 이렇다. 이방인은 더 심각하다. 매일같이 살기가 넘치고, 어두운 기운이 넘실댄다. 세상은 이렇게 험악하다. 하나님 집에는 다들 하나님 믿는 사람들만 있어서 악인이 훨씬 적고, 괴롭힘 당할 일도 훨씬 적다. 단지 시비나 말다툼을 벌이는 정도다. 진리를 깨닫지 못해 하루 종일 그런 일로 실랑이를 벌이고, 마음은 오로지 그런 일에 사로잡히고 얽매인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가 없다. 너희는 이런 내적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건 다 분량이 작은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분량이 작은 사람은 육적인 일,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생각한다. 자신의 사욕을 채우려다 보면 결국 본분 이행이라는 본연의 일을 그르치고 만다. 이런 사람은 일 처리가 어설퍼서 항상 실수를 한다. 이것은 성숙하지 않은 아이의 모습이다. 너희는 생명의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성장이란 무엇이냐? 진리를 깨닫고 또 어른의 분량이 생겨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사람의 본분을 감당할 수 있는데, 일반적인 본분을 모두 감당할 수 있고, 남이 잘 이행하는 본분은 너도 잘 이행할 수 있고, 남이 도달하면 너도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늘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을 본받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본받고,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 추구의 길을 모색하고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생명이 성장하는 과정이다. 정상적인 사람이 어떻게 일하는지, 본연의 일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일하는지, 그가 일하는 스타일과 방식, 원칙이 어떤 건지 구해야 하고, 모색할 줄 알아야 한다. 어른이라면 어른의 일을 해야 한다. 무슨 일이 닥치든, 설령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본업에 충실해야 하고, 해야 할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아이는 밖에서 무슨 일만 생기면 궁금해서 나가 보려 한다. 어떤 일이든 아이한테 영향을 줄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교란을 줄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것이 아니냐? 사소한 일도 그에게는 방해가 되고 남의 말 한마디에도 마음이 교란받는다. 농담 한마디에도 오해가 생기고, 기분이 상하고, 심지어 2, 3일 소극적이 되기까지 한다. 그 때문에 본분을 그르치고, 내팽개칠 생각마저 하는 바람에 리더 일꾼이 항상 달래 주고, 진리를 교제해 주고, 설득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분량이 너무 작고 성숙하지 못한 모습이 아니냐? 사람이 언제나 성장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하고, 아이처럼 유치하고 가소로워서 남에게 무시당하고, 존중받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존엄도, 인격도 없이 살아가게 되고, 하나님도 좋아하지 않는다.
너희는 진리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생명 진입을 할 수 있다. 생명 진입이 있어야 다른 이들에게 공급하고 그들을 이끌 수 있다. 다른 이가 하는 일이 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가 진리를 향해 노력할 수 있게 사랑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반면, 누군가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한다면 그에게서 배우고 본받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교회에는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모두가 진리에 집중하고 진리를 향해 노력하는 분위기 말이다.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 경험이 풍부한지 모자란지, 자질이 뛰어난지 부족한지, 이런 것들을 따지지 마라. 모든 사람은 진리 앞에 평등하다. 다만 누구 말이 옳고 누구 말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누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위해 생각하고 하나님 집의 사역에 가장 부담을 갖는지, 누가 비교적 분명하게 진리를 깨닫는지, 누가 정의감을 갖고 있고 누가 기꺼이 대가를 치르려 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런 사람은 마땅히 형제자매의 지지와 동조를 얻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런 올바른 분위기가 교회에서 기류를 형성한다면 성령 역사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은 축복하며 인도할 것이다. 반면, 시비를 따지고 서로 겨루고 미워하며 질투하고 다투는 분위기가 교회에서 기류를 형성하면 너희에게는 분명 성령 역사가 없을 것이다. 서로 다투고 뒤에서 싸우며 간계와 기만, 음모로 상대를 대하는 것은 사악한 분위기이다! 이것이 교회에서 기류를 형성한다면 성령은 절대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이것은 하나님 말씀이고 진리이다. 하나님은 말씀한 대로 행한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하나님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를 멀리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읽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폭로와 심판,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형제자매의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고, 늘 남의 결점이나 문제만 살피고, 또 자기는 훌륭하고, 남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면 큰일이다. 첫째, 성령이 너에게 역사하지 않는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께 축복받지 못할 것이다. 둘째, 형제자매도 너를 멀리하고 아무도 너를 도와주지 않는다. 그러면 너는 형제자매들로부터 유익을 얻기 힘들다. 하나님 역사도 축복도 없을 것이고, 형제자매들에게서 도움도, 유익도 얻지 못해 곤경에 빠지고 한 발짝도 나아가기 힘들 것이다. 사람의 은사와 재능만으로 교회 사역을 잘할 수 있느냐? 그저 헛수고가 되고 헛되이 힘을 들이는 것밖에 안 된다.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른다면 너무 위험하지 않으냐? 속으로 얼마나 시달리겠느냐! 어쨌든 사람은 바른길, 즉 진리 추구의 길로 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축복받고, 형제자매들도 너를 도울 것이다. 자신만의 길로 빠진다면 미래가 없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도태되고 말 것이다. 너희가 차차 이 일을 겪다 보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진리 원칙을 구해서 한마음 한뜻에 이르러야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고, 힘을 한데 모을 수 있다. 조화롭게 협력해야 본분을 잘 이행해서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9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