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로운 협력에 관하여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이방인 사이에서 일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데, 어떤 점이 다르냐? 형제자매는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 영적으로 서로 통한다. 화목하게 함께 지내며 속 이야기를 하면서 지낼 수 있고, 단순하고 솔직하게 진리를 교제하며 하나님 말씀을 누리고 서로 도울 수 있다. 누가 어려움이 있더라도 모두 함께 진리를 구해 해결하기에 마음에서부터 합일을 이루어 모두가 진리 앞에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 있다. 이방인은 다르다. 이방인은 모두 각자가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 어느 누구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고 또한 서로를 경계한다. 심지어 암투를 벌이고 서로 싸우다 결국 서로 불쾌하게 헤어져 각자 갈 길을 가 버린다. 교회와 이방 세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문제나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솔직하게 교제하여 서로 도울 수 있고, 만약 패괴를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면 꾸중, 책망, 훈계를 통해 회개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모두 평등하며, 서로 함께하는 원칙은 하나님 말씀을 근간으로 한다. 만약 패괴 표출이 있거나 혹은 말을 잘못하거나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 솔직하게 교제할 수 있다. 모두 함께 진리를 구하고 서로 도와 진리를 깨달으면, 완전히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과 다툼이 사라지고 서로 경계할 필요도 없어질 뿐만 아니라, 서로 격려하여 서로를 사랑하며 합일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으로 이룬 성과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교회 생활에서 진리를 깨닫고 패괴를 벗어버릴 수 있으며, 형제자매와 조화롭게 협력하여 자신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모두와 화목하게 지내며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싶다면 우선 조화롭게 협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는 형제자매와 협력할 때 ‘조화란 무엇인가? 내가 말하는 것이 그와 조화를 이루는가? 내가 생각하는 것이 그와 조화를 이루는가? 나의 이러한 방법이 그와 조화를 이루는가?’라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조화로운 협력인지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조화롭다는 것은 인내와 양보, 포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입장을 견지하고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조건적 타협도 아니고, 무골호인 노릇을 하는 것도 아니고, 중용의 도를 지키는 것도 아니며, 어떤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은 더욱 아니다. 이것이 원칙이다. 네가 이 몇 가지 원칙을 제대로 파악하면 말하거나 행동할 때 너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하게 되고, 진리의 실제를 살아 내게 된다. 이러면 하나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집에서 사람이 처세 철학으로 살고, 관념과 자신의 뜻을 따르고, 욕망과 사심을 따르고, 자신의 은사와 잔머리에 의지해 사람들과 함께 지낸다면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고 하나가 될 수 없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그것은 사람이 사탄 성품으로 살면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최종 결과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역사 없이, 사람이 자신의 보잘것없는 능력과 잔머리, 미미한 특기, 그리고 자신이 배운 얼마 안 되는 지식과 기술에 의지하면, 하나님 집에서 능력을 발휘하기 힘들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하기 어렵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너는 절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요구를 파악할 수 없고, 실행 원칙을 파악할 수 없다. 본분 이행의 원칙과 길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뜻에 맞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면 너는 규례를 지키거나 제멋대로 규례에 맞추게 될 것이다. 이렇게 흐리멍덩하게 본분을 이행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너는 절대 하나님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틀림없이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도태될 것이다.

두 사람이 협력하며 본분을 이행할 때, 때로는 원칙적인 문제로 인해 마찰이 생길 수도 있다. 서로 다른 견해 때문에 의견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것은 자주 발생하는 문제 아니더냐? 이는 정상적인 현상이다. 사람의 두뇌와 자질, 식견, 나이, 경험 등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생각과 관점이 완벽히 똑같을 수는 없기에 서로 다른 의견과 견해가 생기는 것은 매우 흔한 현상이자 지극히 당연한 일로, 호들갑 떨 것이 못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협력하느냐,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어 관점과 의견 일치를 이루느냐 하는 것이다. 관점과 의견 일치를 이루는 길은 무엇이겠느냐? 그 부분에서 진리 원칙을 찾는 것이다. 자신의 뜻이나 남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 이것이 바로 조화롭게 협력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요구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네 의견으로 기울면 그가 탐탁지 않아 하고, 그의 뜻에 따르자니 네가 마음이 불편하고 껄끄러워진다. 너는 이를 완벽하게 꿰뚫어 볼 수 없고,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못해 ‘이렇게 하면 적합한가?’라고 늘 생각한다. 너는 누구의 의견대로 하는 것이 적합한지 꿰뚫어 보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지도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리를 구해 원칙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구해야 한다. 네가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을 찾아내어 그와 교제하고 그가 또 자신의 깨달음과 인식을 교제하면 너는 명확하게 알 것이다. ‘나의 이 생각은 다소 편향되고 깊이가 없지. 역시 그의 의견이 좋아.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근접하거든. 그렇다면 내 생각을 내려놓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그의 의견을 따르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면 너는 그에게서 예상 밖의 수확을 얻은 것 아니냐? 그는 한 가지를 내놓았고, 너는 공짜로 누리게 되니,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너는 예상 밖의 수확을 얻은 것이다. 너는 성령이 너를 깨우쳐 주는 것만이 예상 밖의 수확이라고 생각하느냐? 누군가 어떤 의견 혹은 어떤 빛 비춤을 가지고 너와 교제하거나 혹은 그가 말한 원칙대로 실행하였는데 네가 보기에 효과가 괜찮다면, 이것 또한 네가 얻은 것 아니겠느냐? 이는 예상 밖으로 얻은 것이다. 본래 형제자매들이 함께 협력하는 것은 서로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과정이다. 너는 네 장점으로 다른 이의 단점을 보완해 주고, 다른 이는 그의 장점으로 네 부족한 점을 보완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며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이다. 사람은 조화롭게 협력해야만 하나님 앞에서 축복받을 수 있다. 체험할수록 더욱 실제가 생기고, 길은 걸을수록 더 환해지며, 마음이 더 편안해진다. 만약 조화로운 협력이 없어 늘 의견이 맞지 않는다면, 네가 다른 사람의 말에 불복하고, 다른 사람 또한 네 말을 듣기 싫어한다면, 네가 그의 체면을 세워 줘도 그가 네 체면을 세워 주지 않는다면, 너는 불쾌해질 것이다. 또 그가 무슨 말을 했을 때 네가 그의 체면을 봐주지 않는다면, 그는 그 일을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번에 일이 생겼을 때 너에게 똑같이 할 것이다.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이는 혈기로 힘겨루기하는 것이 아니냐? 이는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이 싫어할 수밖에 없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조화로운 협력이 있어야 성과가 있고 하나님의 요구에 달할 수 있다. 조화로운 협력이란 무엇일까? 어떤 것이 조화롭게 협력하는 모습이 아니겠느냐? 너는 네 본분을 이행하고 나는 내 본분을 이행하며, 각자 자신의 본분만 이행할 뿐 서로 간에 호흡이 맞지 않고, 교류와 교제가 없고 어떠한 공감대도 형성되지 않으며, 그저 마음속으로 ‘나도 본분을 이행하고 있고 너도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 서로 간섭하지 말자.’라고 알고 있다. 이것이 조화로운 협력이겠느냐? 겉으로 보기에는 두 사람 사이에 별다른 다툼이나 의견 차이가 없고, 누가 누구를 간섭하거나 제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음속에 조화로운 협력이 없고, 전혀 호흡이 맞지 않으며, 서로를 보살피지도 않는다. 단지 각자가 자신의 일을 하고 각자의 힘을 쏟을 뿐 어떠한 조화로움도 없으니,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이냐?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도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고, 상대방을 구속하지도 않으며, 상대방을 이끌거나 맹목적으로 상대방의 말을 따르는 것도 아니니, 이성적인 것 같다. 하지만 사람 내면에는 패괴 성품이 있다. 바로 모두가 영웅이 되고자 하고,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고 잘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돌보고 도우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 여기에 조화로운 협력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네가 협력 없이 고군분투하면, 많은 일들이 전면적이고 완벽하게 진행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이러한 내적 상태는 하나님이 보고자 하는 바가 아니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바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일하는 것을 좋아하여 어느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이 정해지면 그냥 해 버린다. ‘나는 리더 일꾼이고 너희는 하나님 선민이니, 너희는 나를 따라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해. 이게 당연해.’라고 생각한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기 때문에 투명성이 전혀 없다. 늘 마음속으로 몰래 노력하고 암암리에 일을 한다. 마치 일당독재를 하는 큰 붉은 용처럼 늘 다른 사람들을 하찮고 전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속이고 통제하려 한다. 또한 늘 모든 일을 자기 한 사람이 결정하려고 하여 다른 사람과 소통과 교류를 하지 않고, 절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하지 않는다. 이런 행동 방식은 어떠하냐? 정상적인 인성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것은 큰 붉은 용의 본성 아니냐? 큰 붉은 용은 독재를 저지르고 독단적으로 행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패괴 성품이 있는 사람이 바로 큰 붉은 용의 자손 아니겠느냐?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 너희도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느냐? (그렇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행동할 때, 너희는 의식할 수 있느냐? 만약 의식할 수 있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 하지만 의식할 수 없다면 곤란한데, 이는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니겠느냐? 의식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형제자매의 일깨움과 책망과 훈계가 필요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라는 사람은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을 이끌기를 좋아해. 미리 말해 두지만, 내가 이렇게 할 때 불만을 품지 말고 너희가 좀 참아. 나도 이렇게 하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천천히 고치고 있으니, 너희가 날 포용해 주면 좋겠어. 이런 일이 닥치면 너희가 좀 참고 나와 협력해 주어 우리가 조화로운 협력을 이룰 수 있도록 하자.”라고 미리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면,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떠하냐? (좋지 않습니다. 비이성적입니다.) 왜 비이성적이라고 하느냐?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진리를 구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여전히 이렇게 하려 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구속하여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협력하고 자신을 지지하기를 요구하니, 이는 작심하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려는 것이며, 고의로 진리를 어기는 것이다. 이는 고의로 잘못을 범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다. 악인이나 적그리스도만이 이렇게 할 수 있으니, 이것 또한 적그리스도의 행위이다. 일부러 진리를 어기고 하나님을 대적하니, 이는 매우 위험하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이다. 자신은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구속하고 회유하여 다른 사람이 자신을 따라 진리를 어기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려 하니, 이것은 일부러 하나님에게 맞서는 것 아니냐? 특히 그가 그렇게 행동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고 지지하도록 미리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해 놓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더 교활한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기선을 제압하고 최후통첩을 하는 것이다. ‘너에게 말해 두는데, 난 만만한 사람 아니야. 보통 사람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난 최종 결정권을 갖기 좋아한다. 아무도 나와 상의를 할 생각도 하지 마. 상의의 여지가 아예 없으니까! 내가 이런 단점이 있어서, 나보고 하라고 하면 나 혼자 결정할 테니 어느 누구도 나와 협력할 생각은 하지도 마. 네가 나와 협력하고 싶다 해도 넌 아직 그럴 자격이 없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냐? 이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탄의 대표적인 행동 방식으로, 단순히 패괴 성품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그는 직접 권세를 잡고 최종 결정을 내려 다른 사람이 모두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따르며 그에게 순종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마귀 사탄이 정체를 드러낸 것 아니냐? 이는 결코 일시적으로 패괴 성품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적그리스도의 행동은 모두 사탄의 본성에 지배된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오는 것은 권세를 잡기 위함으로, 바로 하나님에게 맞서고 하나님 선민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로 인도하려는 것이다. 그는 각 종교 각 교파의 우두머리와 마찬가지로 모두 본질은 적그리스도이며, 사탄처럼 하나님과 대등해지려고 한다. 적그리스도가 정체를 드러내는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 선민은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도와주어야 하느냐? 마땅히 그를 폭로하고 분별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의 사탄 몰골을 보고 그를 버리게 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 선민이 마땅히 깨닫고 파악해야 하는 원칙이다. 만약 적그리스도가 정체를 드러낸 것을 패괴 성품을 드러낸 것 혹은 일시적인 과오라고 여긴다면, 또한 적그리스도의 이른바 솔직하게 털어놓고 자기를 인식하는 모습에 미혹되어 그와 진리까지 교제한다면, 이는 매우 어리석어 전혀 분별력이 없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이 패괴 성품을 드러내면 다른 사람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겠느냐? 그는 잘못을 저질러도 결코 자기반성을 하지 않으며 자신을 인식하지도 않는다. 그가 자신을 털어놓는 것은 다른 사람을 미혹하기 위한 것으로, 적그리스도의 자기변명에 불과하다. 이러니 도대체 무엇이 진정으로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가 “나는 성질이 좋지 않으니, 건드리지 마!”라고 한다면, 이것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는 너에게 그를 건드리지 말라고, 그를 건드리면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우리 집에서는 내 말이 법이야. 우리 부모님도 모두 다 내 말을 들어.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이니 너희가 양해 좀 해 줘. 나도 어쩔 수 없어. 우리 부모님마저 능력이 있는 사람이 성질도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다 날 양해해 주셔.”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다들 성질이 있으니, 네가 마땅히 양해해야 한다고 너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만약 그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두말하지 않는 이런 성격이라 완벽과 자아를 추구했어. 지금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많이 좋아져 보통은 참고 견딜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완벽을 추구해. 완벽하지 않으면 절대 안 되며, 나한테서는 절대 통과될 수 없어.”라고 하면, 이것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는 무엇을 하는 것이냐? 이는 남들이 자신을 높게 평가하도록 자신을 치켜세우고 드러내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려 주는 것이다. 마치 불량배나 조폭이 만나자마자 일단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는 말을 하거나 근육을 자랑하는 것과 같으니, “네가 나를 건드릴 용기가 있어? 네가 만약 날 건드릴 용기가 있다면, 우리 둘 누구의 주먹이 센지 겨뤄 보자!”라는 의미이다. 이는 사탄의 진면목 아니냐? 이것이 바로 사탄의 몰골이다. 솔직하게 털어놓는다고 다 같지는 않다. 적그리스도가 솔직하게 털어놓을 때는 늘 다른 사람을 위협하고 기선을 제압하고 겁을 주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늘 다른 사람을 억누르려고 하는데, 이는 사탄 몰골이다. 이는 정상적으로 순수하게 솔직히 털어놓는 것이 아니다. 정상 인성을 살아 내려면 어떻게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하겠느냐? 자신이 드러내는 패괴 성품을 툭 터놓고 남들에게 마음속 진심을 보여 줘야 한다. 그러고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문제의 본질을 해부하고 인식하고 마음속 깊이 스스로를 증오하고 혐오해야 하며, 솔직하게 털어놓을 때 스스로를 위해 뭔가 변명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단순하게 진리를 실행하여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분명히 성품이 나쁜데도 늘 자신은 성질이 나쁘다고 한다. 이는 변명 아니냐? 성품이 나쁜 것은 그냥 성품이 나쁜 것이다. 비이성적인 일을 하거나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하는 것은 성품과 인성의 문제이다. 하지만 그는 늘 잠깐 성질을 못 참아서 혹은 화가 좀 많이 나서 그랬다고 하며, 결코 문제를 본질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으로 자신을 솔직히 털어놓고 분석하는 것이냐? 본질적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자신을 해부하며 털어놓으려면 정직한 마음, 성실한 태도를 갖고 자신이 깨달은 성품의 문제를 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이다. 두 번째, 자신의 그런 성품이 너무 심각하다고 생각한다면 모두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제가 또 이런 패괴 성품을 드러낸다면 모두 저를 일깨워 주십시오. 책망하고 훈계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받아들이지 못해도 저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 측면의 제 패괴 성품이 심해 모두 저에게 진리를 많이 교제하며 저를 폭로해 주세요. 여러분의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저를 감독하고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잘못된 길을 걷지 않게 말입니다.” 이런 태도는 어떠하냐? 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 후 마음속으로 기분이 좋지 않아 고민한다. ‘만일 다들 나를 폭로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견딜 수 있을까?’ 너희는 다른 사람의 폭로가 두렵느냐? (두렵지 않습니다.) 마땅히 이런 용기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폭로를 두려워하는 것은 치욕이다. 네가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한다면 체면 깎이는 것이 두렵겠느냐? 또한 다른 사람들의 책망을 두려워하겠느냐? 너의 이러한 두려움은 나약한 것이며 소극적인 것으로, 이는 패괴된 것이다. 사람이라면 모두 패괴 표출이 있지만, 그 성질은 다르다. 고의로 저지르거나 교란하고 방해하는 것만 아니라면, 모두 정상적인 패괴 표출로, 사람들이 올바른 태도로 대할 수 있다. 만약 속셈과 목적을 가지고 교란과 방해를 하고 고의로 교회 사역을 파괴한다면, 그런 자는 마음속으로 사람들의 폭로를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이는 매우 심각한 성격의 문제라서 일단 폭로되면 그는 바로 드러나 도태되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 두려움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과 같은 심리이다. 지금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든, 이는 모두 사람의 패괴를 정결케 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다. 만약 네가 올바른 사람이라면, 네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여 하나님이 맡긴 일을 완수하기 위한 것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이를 분명히 볼 수 있다. 다들 이러한 분별력은 갖고 있다. 또한 폭로하고 책망하고 훈계하는 것은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여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교회의 사역을 지키도록 도와주기 위함이니, 이는 정당한 것이다. 사람은 패괴 성품을 정결케 하기 위해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인다. 이는 성품 변화를 위해 마땅히 갖춰야 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태도를 갖춘 후에는 또 적합한 실행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실행할 때 여전히 약간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싸움이 생기면 육을 저버려야 하며, 허영심과 감정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다가 육체적 고충이라는 이 난관을 돌파하면 많이 홀가분해진다. 바꿔 말하면 바로 자유로워진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과정이다. 다들 약간의 고통을 겪어야 하며 털끝만큼의 고통도 겪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육체가 패괴되고, 허영과 체면도 있고, 늘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진리 실행의 가장 큰 걸림돌이기 때문에 약간의 고통을 받지 않으면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없다. 진리 실행의 단맛을 보고, 진정한 평안과 즐거움을 누리게 되면, 진리 실행을 원하게 되고, 쉽게 자신을 부정하고 육을 저버리며 사탄을 이기게 되고, 온전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된다.

교회에서 생활할 때 어떤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느냐? 바로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이 아닌 그 일에만 초점을 맞추는 분위기여야 한다. 때로 의견의 불일치로 논쟁이 발생하여 얼굴을 붉히며 언쟁을 하더라도 서로 마음의 벽은 별로 없는 것이다. 모두 성품 변화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모두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 위함이니, 서로 증오하지 않는 것이다. 모두 다 구원받는 시기에 놓여 있고 모두 다 같은 패괴 성품을 갖고 있어 때로는 말이 좀 심하거나 지나치기도 하고 때로는 태도가 좀 나쁘다 하더라도 서로서로 따지지 마라. 그래도 여전히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면, 최후의 해결 방법이 아직 하나 남아 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리는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따르니 어떠한 견해 차이나 다른 의견이 있다 하더라도, 어떤 장벽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하나다. 동일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우리가 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렇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구속을 안 받지 않겠느냐? 결국 최종 목표는 무엇이냐? 바로 조화롭게 협력하여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자 구할 수 있기 위함이며, 원칙 합일, 목표 합일, 일을 하는 의도와 근원의 합일이라는 합일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이는 말로 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실행하기는 그다지 쉽지 않다. 왜 그렇겠느냐?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사람의 성질과 성격 혹은 나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며, 또한 사람이 각기 다른 가정에서 왔기 때문도 아니다.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원인이다. 만약 근본적인 원인이 패괴 성품에 있다는 것을 다들 간파할 수 있다면 제대로 대할 수 있고,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하는지 여기에서 또 세세하게 말할 필요가 있느냐? 그럴 필요 없다. 너희가 많은 설교를 들어 다들 몇몇 방법들을 알고 있고, 또 이 방면의 체험도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구해 모든 일을 해결하는 것을 계속해 나갈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있는 문제를 반성할 수 있다면, 그리고 공평하게 사람을 대할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조화로운 협력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이 교만하거나 독선적이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건의를 제대로 대할 수 있다면 협력할 수 있다. 만약 문제가 생겨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면 쉽게 협력이 된다. 어느 한쪽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솔직하게 교제하면, 다른 한쪽 또한 쉽게 감화되어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조화로운 협력에 이르기는 그다지 큰 문제가 없어 한마음 한뜻이라는 이 목표를 쉽게 이룰 수 있다.

2017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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