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다

너희 대부분은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이 흘러 기본적으로 참도에 대한 기반이 생겼다. 이제 너희는 가정과 세속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 이행을 훈련하며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고, 또한 진리를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이는 너희가 철들기 시작하고 양심과 이성이 좀 생겼다는 뜻이며, 좋은 일이다. 본분 이행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일과 직결된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해야만 생명 진입이 있을 수 있고, 본분을 잘 이행해야만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그래서 너희의 본분 이행에 대한 요구가 좀 높고 책망과 훈계도 좀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너희에게도 이로운데, 적어도 생명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너희에게 좀 높은 요구를 하거나 가끔 어려운 문제를 내어 주며 너희를 검증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모두 너희 생명이 성장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또한 업무 방면의 지식을 더 많이 파악해 본분 이행에서 더 좋은 성과를 내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에게 이렇게 요구하지 않으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느냐? 너희가 도리를 말하거나 규례를 지킬 줄만 알 뿐 아무리 오래 믿어도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언제 성장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진리 측면에서 성장하지 못할 뿐 아니라, 본분 이행에 관한 업무 지식 측면에서도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면 본분 이행에 합격하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겠느냐? 너희의 지금 분량으로 보면 깨달은 진리가 너무 얕고 본분 이행에서도 원칙을 파악하지 않아 본분 이행의 합격 기준으로 평가할 때 아직 크게 못 미친다. 그런데도 너희는 여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몹시 독선적이고 겁 없이 함부로 행동하는데, 언행이 떳떳하지 못해 진리 원칙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문제를 제기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핑계만 늘어놓는다. 이것은 무슨 문제이겠느냐?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이성도 없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최소한 대다수 사람들이 볼 때 적합해야 한다.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그들의 말이 맞다면 받아들인 뒤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사람들이 보기에 효과가 좋아서 통과되면 비로소 합격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너희가 본분 이행에 있어서 원칙에 따라 일을 행하고, 성숙하고 노련하게 문제를 처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너희도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진리를 깨달아 생명 진입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일이 닥쳤을 때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평온한 마음으로 공과를 배워야 한다.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만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네가 만약 ‘내가 너희보다 더 전문가니까 내 말대로 해야 해. 너희는 내 말을 들어야 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어떤 성품이겠느냐?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이라 하는데, 사탄의 패괴 성품이다. 이것은 정상 인성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독선적이지 않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느냐? (모두의 의견을 듣고 다 같이 상의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생각과 주관을 가졌든지 그것이 옳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맹목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이다. 자기가 가진 생각과 주관이 옳은 것 같더라도 자신을 전적으로 믿지 않고 교제하고 구하여 결정한다면 이것은 독선적이지 않은 것이다. 모든 이의 동의와 찬성을 얻은 뒤에 행해야만 이성적인 것이다. 누구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진지하게 대해야 하고 업무 방면에서 세심하게 대해야 한다. 못 본 척하고 “당신이 잘 알겠어, 내가 잘 알겠어? 내가 이 방면의 업무를 이렇게 오랫동안 접했는데 내가 당신보다 모르겠어?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성품이 나쁜 것인데, 너무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이다.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업무 방면에 대해 잘 모르는 문외한이고, 네가 사리에 맞고 적절하게 일 처리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너의 이런 성품은 문제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행동해야 옳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네 생각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두가 살펴보게 해야 한다. 누군가 의견을 내놓으면 우선 받아들인 뒤 모두가 올바른 실행 방법을 결정하게 하고,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최종적으로 적절한 방법을 결정해 그대로 처리하면 된다. 문제를 발견했을 때 모두의 의견을 구하면서 다 같이 진리를 구하고 교제하면 성령의 깨우침을 얻어 모든 이의 마음이 환해질 것이며, 또 더 좋은 방법이 나올 것이다. 그런 뒤에 행하면 원래보다 훨씬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가 아니겠느냐?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네가 독선적인 생각을 버리고 자기 상상과 생각을 내려놓은 뒤 타인의 올바른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성령의 깨우침을 얻어 마음속이 환해지고 올바른 실행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행할 길이 생긴 다음에 실행하면 틀림없이 진리에 부합할 것이다. 이렇게 실행하고 체험하면 진리 실행을 배우는 동시에 네가 업무적으로도 더 배울 수 있으니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이 일을 통해 너는 일이 닥쳤을 때 독선적이어서는 안 되고 진리를 구해야 하며, 독선적이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두가 싫어하고 하나님도 틀림없이 혐오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공과를 배운 것이 아니겠느냐? 항상 이렇게 추구하고 진리를 실행하면, 한 측면으로는 본분 이행의 업무 방면에서 계속 향상되고 본분 이행의 효과도 점점 좋아지고, 하나님이 너를 깨우치고 축복하여 네가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진리 실행 방면에서도 실행 방법이 생겨 네가 진리를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알고 천천히 원칙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너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를 받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혐오하고 널 상대하지 않는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인정과 축복을 받는지 알게 될 것이므로 네게 행할 수 있는 길이 생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과 깨우침을 받으면 생명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고, 날마다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가 있으면 사람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깃든다. 그러면 즐겁지 않겠느냐? 네가 하는 일을 하나님 앞에 가져올 수 있고 하나님 편에서 통과될 수 있다면, 너는 즐겁고 평안하고 기쁠 것이다. 이런 평안과 기쁨이 바로 하나님이 네게 주는 느낌이자 성령이 네게 주는 감동이다.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탄 성품이며,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정결케 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다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이 있어 늘 스스로 옳다고 여긴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보든, 자신의 관점과 태도가 올바르고 다른 사람의 말은 자신이 말한 것보다 좋지도 옳지도 않다고 여기며, 자기 의견을 고집하면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것이다. 설령 다른 사람의 말이 옳고 진리에 부합할지라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저 겉으로만 들을 뿐 받아들이는 법이 없다. 막상 실행할 때가 되면 여전히 자기 뜻대로 행동하며, 늘 자기 말이 옳고 이치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네 말이 옳고 이치에 부합할 수도 있고, 또는 네 행동 역시 올바르고 아무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네가 드러내는 성품은 무엇이겠느냐?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품 아니겠느냐? 이런 성품을 벗어 버리지 못한다면 본분 이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느냐? 진리 실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느냐?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품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큰 화를 초래하지 않겠느냐? 분명 그러할 것이다. 이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사람의 그런 태도를 볼 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너무나도 잘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할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모든 언행을 지켜본다. 하나님이 네 이런 태도를 보고 어떻게 말씀하겠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할 것이다. “너라는 사람은 강퍅하구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 의견을 고집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의견을 고집하며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너는 지독한 고집불통이니 곤란하다. 누가 의견을 내든 너는 소극적이고 반발하는 태도로 대하며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속으로 완전히 반발하고 차단하고 거부한다면 너라는 사람은 너무도 터무니없이 그릇된 자이다. 너는 너무나 다루기 어렵다!” 왜 다루기 어렵겠느냐? 네가 나타내는 것은 행동 방식이나 행위상의 잘못이 아니라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다루기 어려운 것이다. 어떤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겠느냐? 너라는 사람은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한다. 진리를 증오한다고 정의 내려지면 하나님은 너를 곤란하다고 본다. 하나님은 너를 혐오하여 버리고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사람은 성품이 안 좋고 고집스러우며 강퍅하고 교만해! 저 사람하고는 함께 지내기가 힘들어.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법도 없거든.” 기껏해야 이런 평가를 내리는 데 그친다. 그런데 이 평가가 네 운명을 결정할 수 있겠느냐? 너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네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네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는 동시에 사람의 모든 언행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하나님이 너를 이렇게 정의한다면, 즉 너라는 사람은 패괴 성품이 좀 있다거나 말을 좀 안 듣는 수준이 아니라 진리를 증오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문제가 심각하지 않겠느냐? (심각합니다.) 그러면 곤란해진다. 곤란해진다는 것은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진리를 증오하는 네 패괴 성품을 하나님이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은 그저 네가 진리를 증오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규정하면 끝이겠느냐? 그렇게 간단한 것이겠느냐? 진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더냐? 진리는 누구를 대표하더냐? (하나님을 대표합니다.) 그렇다면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사람이 진리를 증오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을 적대시한다고 보실 것입니다.) 이는 심각한 문제 아니겠느냐? 진리를 증오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증오하는 것이다. 어째서 하나님을 증오한다고 하겠느냐? 그가 하나님을 욕했느냐? 하나님 앞에서 반대했느냐? 뒤에서 판단이나 정죄하는 말을 했느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왜 진리를 증오하는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곧 하나님을 증오하는 거라고 하겠느냐? 이는 문제를 너무 확대하여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 진리를 증오했기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처럼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그 결과는 끔찍하다. 즉, 사람이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데, 그런 성품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지 않겠느냐? 진리와 관련된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의 선택과 관련된 일이 닥쳤을 때,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패괴 성품으로 살아간다면 당연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게 된다. 그 패괴 성품은 곧 하나님을 증오하고 진리를 증오하는 성품이기 때문이다. 네게 이런 성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너는 의문을 품고 분석하고 해부한 뒤에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가요? 제가 보기에는 진리도 아니고 반드시 맞는 말도 아닌 것 같습니다!”라며 하나님 말씀을 의심할 것이다. 진리를 증오하는 성품이 드러난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분명 그럴 수 없다. 네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면 하나님이 여전히 네 하나님이겠느냐? 그럴 리 없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을 무엇으로 생각하겠느냐? 연구의 대상이자 의심과 정죄의 대상으로 생각하거나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정죄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성품으로 초래된 것이겠느냐? 교만한 성품이 어느 정도까지 팽창되어 초래된 일이다. 비단 사탄의 성품을 드러낸 것만이 아니라 사탄의 몰골까지 완전히 드러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경에 다다르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심하게 거역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떻게 되겠느냐? 적대 관계가 되어 사람이 하나님을 대립적인 존재로 여기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진리에 순종하지도 못하면 하나님은 네 하나님이 아니다. 네가 진리를 거절하고 배척하면 너는 이미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너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분명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네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며 너를 원수로 여기지 않았는데, 너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립적인 존재로 여겼다. 너는 하나님이 네 진리이자 길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이지 못하니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서둘러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예를 들어, 본분을 이행하다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는 문제와 어려움에 맞닥뜨린다면, 혼자서 아무렇게나 궁리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어떻게 나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고 그 일이 어떤 진리와 관계된 것인지 알 수 없다면, 너는 한 가지 원칙, 즉 우선 순종하고 개인적인 뜻과 생각을 품지 않은 채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하나님이 어떻게 계획하고 어떻게 하려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을 기다려야지 맹목적으로 아무렇게나 행동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누군가 건의를 하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말해 준다면 먼저 받아들여 모두에게 교제하게 한 후 그 길이 옳은지,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진리에 부합한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렇게 실행하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렇게 실행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다. 진리를 구할 때는 여러 측면으로 구해야 한다. 누가 말하든 일단 들어 보고 진지하게 대해야지, 보고도 못 본 척하거나 상대를 냉대해서는 안 된다. 이는 네 본분 범위 안에 포함되는 일이니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태도이자 올바른 내적 상태이다. 네 내적 상태가 올바르다면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성품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실행은 사람의 패괴 성품을 대신하는 것이며, 이는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실행한다면 어떤 성과를 얻을 수 있겠느냐? (성령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것은 한 측면의 성과이다. 때로 어떤 일은 아주 간단해 네 머리로 해결이 가능하다. 타인이 낸 의견을 네가 이해한 후에 고치고 원칙대로 하면 된다. 이는 사람이 보기에 작은 일이지만 하나님이 보기에는 큰일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네가 그렇게 실행하면 하나님은 너라는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네 마음을 보게 되는 동시에 네 성품도 보게 되는데, 이것이 큰일이다. 다시 말해, 네가 하나님 앞에서 본분을 이행하거나 일을 할 때 살아 내고 드러내는 것이 모두 사람이 갖추어야 할 진리 실제라는 것이다. 네가 각각의 일을 할 때의 태도와 마음, 내적 상태 등은 하나님 앞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감찰한다.

일이 닥쳤을 때 가치 없는 문제에 끝까지 매달리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겠느냐? 이것은 큰 문제다. 명철한 사고를 가진 사람은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지만 황당한 사람은 이런 행동을 한다. 그는 항상 남들이 그를 괴롭히고 의도적으로 골탕 먹이려 한다는 생각에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한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겠느냐? 그는 진리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에게 닥친 일에서 가치 없는 문제에 끝까지 매달려 평판을 회복하고 체면을 다시 세우려 하며, 사람의 방법으로 이런 일을 대하려고 한다. 이것이 사람의 생명 진입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네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실행하면 영영 진리를 얻을 수 없다. 네가 도무지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늘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지 않고 하나님이 네게 배치해 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 모든 것을 항상 진리가 아닌 사람의 방법으로 대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볼 때 너는 하나님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네 마음이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너라는 사람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항상 가치 없는 문제를 파고들어 끝까지 매달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 이렇게 보이는 것이다. 말재주가 좋고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은 ‘내 뛰어난 언변 때문에 모두들 나를 부러워하고 우러러보며 내게 감탄하고 대다수가 나를 인정하고 있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쓸모가 있느냐? 사람들 사이에서는 신망을 얻었지만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 앞에서 보여 주는 모습을 결코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를 불신파이자 진리를 증오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네가 사람들 사이에서 팔방미인이고 처세에 능해서 어떤 사람과도 잘 지낼 수 있고 어떤 일도 잘 처리할 방법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 와서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아주 곤란하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한 마디로 이렇게 평가한다. “이런 자는 불신파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명목으로 복을 얻으러 온 사람이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평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가 원하는 것이냐?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개의치 않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든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저희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까요. 저희에게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우선 주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겁니다. 입지를 다진 뒤에 리더 일꾼을 제압해 모든 사람들이 감탄하게 만드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런 사람이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이런 자는 불신파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이 닥치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진리를 구해야 하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에게 “너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하나님이 좋아하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구나. 하나님은 네 마음을 보았고 네가 순종하는 것도 보았다.”라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런 평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사람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 너희가 이 사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느냐?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외부의 사무적인 일을 하든 아니면 하나님 집 각 방면의 사역이나 업무와 관련된 본분을 이행하든, 항상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살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감찰을 받을 용기도 없고 하나님에게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면, 그런 자는 불신파이며 믿지 않는 사람과 아무 차이가 없다. 너희가 이 점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지금 환경이 적합하지 않거나 본분을 이행하지 못해 이방인의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항상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를 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여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지 없는지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네가 마음속으로 항상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연약하고 소극적이거나 방탕하거나 본분 이행에 아무런 부담이 없고 항상 흐리멍덩하다면, 이것이 좋은 내적 상태이겠느냐, 나쁜 내적 상태이겠느냐? 하나님 앞에서 사는 내적 상태이겠느냐, 아예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는 내적 상태이겠느냐? (하나님 앞에서 사는 내적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면 너희 스스로 판단해 보아라. 너희가 하나님 앞에서 살 때가 많으냐? 그럴 때가 매우 적고 기도조차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읽지도 않으면 곤란하다. 이것은 네가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어떤 이들은 항상 올바른 일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단속도 받지 않고 방탕하며, 일이 닥치면 언제나 흐리멍덩해 진리를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본분 이행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또 매일 하는 행동들 중에 어떤 행동이 하나님께 죄짓는 것인지, 어떤 행동이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어떤 행동이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인지 등을 전혀 모른다. 그저 되는대로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이런 내적 상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내적 상태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겠느냐? 원칙 있게 일 처리를 할 수 있겠느냐? 이성적인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본분을 이행할 때 “저는 단속을 받아야 하고 잘해야 하며 마음과 힘을 다해야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충성심을 가질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겠느냐? 힘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얻은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손해가 매우 크다. 이런 멍청이들은 어째서 진리를 추구할 줄 모르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을 믿은 지 10년, 20년이 됐는데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듣고도 무엇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지 모른다. 이렇게 중요한 일들도 모른다면 좀 바보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 너무 어리석고 무감각한 것이다. 진리에 대해 조금도 반응이 없는데, 이는 위험하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진리를 얻는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얻으면 어떤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첫째, 사람의 범죄와 패괴 성품 문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겪는 모든 어려움, 사람의 잘못된 관점 등을 해결할 수 있다. 사람이 진리를 얻으면 어디에 써야 하겠느냐? 바로 본분 이행과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 써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 너희 마음속에 아직 진정한 인식이 자리 잡지 못하고, 진리의 가치와 의의도 아직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너희가 인식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욥기를 읽어 보았느냐? 읽을 때 마음속에 감동을 받았느냐? 욥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하는 마음이 생겼느냐? (그랬습니다.) 그런 내적 상태와 마음이 얼마나 지속되더냐? 하루 이틀 가더냐, 한두 달 가더냐, 아니면 일이 년 가더냐? (며칠 정도 지속됐습니다.) 며칠이 지나니 사라지더냐? 감동을 받았을 때는 기도해야 한다. 욥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 너에게도 그렇게 해 달라고, 너를 인도해 달라고, 환경을 배치하고 힘을 더해 달라고, 네게 닥친 환경 속에서 굳게 설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언제나 이 목표를 위해서, 네가 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을 위해서 간구하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네 진실한 마음을 보면 행사할 것이다. 하나님이 행사해도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은 욥에게 시련을 준 것처럼 그렇게 너의 온몸에 악창이 생기게 하거나 네 모든 것을 빼앗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며, 네 분량에 맞춰 조금씩 네게 더해 줄 것이다. 너는 진심으로 간구해야지, 오늘 보고 감동받았다고 이틀 구하고, 또 사흘 안 봤다고 뇌리 저편으로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마음속에 이 일이 없으면 문제가 되는 것 아니겠느냐? 네가 욥과 같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네 마음속에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될지에 대한 길이 있어야 한다. 너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러내야 하며, 그다음에는 늘 그 일에 대해 기도하고 마음속으로 항상 그 일을 되새겨야 한다. 그런 후에 하나님이 욥에 관해 한 말씀들을 먹고 마시면서 끊임없이 묵상하기를 반복하고, 그런 체험과 인식이 있는 사람과 교제해야 한다. 너는 그 목표를 향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노력해야겠느냐?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노력이 아니다. 실행에 옮겨야 한다. 이 일에 공을 들이는 한편, 고난을 감내하겠다는 마음,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후에 이 일과 관련해 기도하며 하나님이 행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행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어떻게 행하겠느냐? 하나님은 네 분량에 맞춰 환경을 배치하고 안배하기 시작한다. 너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목표를 이루고 싶은지, 어떤 의지를 지니고 있는지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 너는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했느냐?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하고 간구했느냐? 가끔 두어 번 기도한 다음 하나님이 아무것도 행하지 않은 것을 보면 ‘관두자. 그냥 이대로 살자고. 될 대로 되라지 뭐. 순리에 맡기는 거야. 뭐가 닥치든 그러려니 해야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선 안 되는데, 네 마음이 진실되지 않은 것이다. 네 열정이 작심삼일에 불과하다면, 하나님이 너를 위해 행사하고 네게 환경을 배치해 주겠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 진실한 마음을 보며, 네 진심과 의지가 얼마나 오래가는지를, 네 마음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본다. 또한 하나님은 기다린다. 그는 네 기도와 간구, 네 다짐과 소망을 들었다. 그러나 고난을 감내하겠다는 네 의지를 보지는 못했으니 행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는 바로 사라졌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행하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너는 많이 기도하고 간구해야 하며, 이 일을 위해 공을 들이고 곰곰이 생각한 다음, 하나님이 너를 위해 배치한 환경을 세심하게 음미해야 한다. 그것들이 하나씩 네게 닥칠 것이고, 하나님이 행하기 시작할 것이다. 진실한 마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너는 “저는 욥이 부럽고 베드로가 부럽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르는데, 부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아무리 부러워해도 너는 그들이 아니며, 아무리 부러워해도 하나님 또한 네게 같은 사역을 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게는 그들이 지녔던 의지도, 인성도, 진리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마음도 없다. 언젠가 네가 이러한 것들을 갖추게 되면 하나님은 그제야 네게 더 많은 것을 더해 줄 것이다.

너희는 지금 진리를 추구하고 얻어서 구원받고 온전케 되겠다는 뜻을 품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 뜻이 얼마나 큰 것이냐?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느냐? (내적 상태가 좋을 때는 뜻이 있지만, 자신의 육적인 이익과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 닥쳐서 마음이 연단받거나 어려움이 있으면 소극적인 내적 상태에 빠져 처음에 가졌던 믿음도 뜻도 조금씩 사라집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너무 연약한 것이다. 어떤 환경이 닥치든 네 뜻을 바꿔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참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이다. 일에서 조금 어려운 점을 맞닥뜨리면 금세 움츠러들고 소극적이고 우울해져서 자신의 뜻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너는 목숨을 내걸 듯이 힘을 내고 “무슨 일이 닥치든, 저를 죽게 하더라도 진리를 포기하지 않고, 진리 추구라는 목표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어려움도 네 발목을 잡지 못할 것이다. 정말 어려움이 닥쳐서 사람이 막다른 길에 몰리면 하나님이 행사할 것이다. 너는 또 이런 인식을 가져야 한다. ‘어떤 일이 닥쳐도 모두 내가 진리를 추구하면서 배워야 하는 공과이고 하나님께서 배치하신 것이야. 나는 연약하지만 소극적이 되지는 않을 거야. 내게 공과를 배울 기회를 주시고 이런 환경을 배치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얻겠다는 뜻을 포기할 수 없어. 포기한다면 그건 사탄과 타협하는 거고, 나를 망치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거야.’ 네게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 어떤 작은 일이 닥쳐도 그것은 생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는 작은 해프닝이니 그것이 네가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가로막게 해서는 안 된다. 어려움이 있다면 구할 수도 있고 기다릴 수도 있지만, 네가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은 바뀔 수 없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널 어떻게 대하든, 하나님이 널 어떻게 대하든, 네 뜻은 변치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나는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 너를 혐오한다.”라고 말할 때, 네가 “하나님도 저를 혐오하시는데 제가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죽어 버리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혐오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너는 분발해야 하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무능하고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도 너를 혐오하여 버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너희는 분량이 너무 작아서 아직 하나님이 시련을 줄 만한 요구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너희가 그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느냐?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제가 당신의 뜻을 깨닫도록 인도하고 깨우쳐 주소서. 진리 추구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믿음과 의지를 제게 주시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해 주소서. 제가 비록 연약하고 분량이 보잘것없지만 제게 힘을 더해 주시어 제가 당신을 끝까지 따를 수 있도록 지켜 주소서.’ 너는 항상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남들은 세속을 그리워하고 육을 방종하며 세상의 조류를 따르더라도 너는 따르지 말고 오로지 자기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남들은 소극적이 되면 본분을 이행하지 않지만, 너는 구속받지 말고 진리를 구하고 남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남들이 안일함을 누려도 부러워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남들이 명리와 지위를 추구해도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도와주며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이런 일에 영향받지 말아야 한다.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리를 구하여 자신을 단속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시시각각 사람을 감찰하며, 성령은 바로 그런 사람의 내면에 역사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겠느냐? 하나님은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환경을 배치해 손으로 네 마음을 어루만진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어떤 환경을 배치할 때, 네가 마음속으로 반감이나 증오를 품는지 아니면 좋아하고 순종하는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진리를 구하는지를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네 마음과 생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는지를 본다. 네 내적 상태는 긍정적일 때도 있고 부정적일 때도 있다. 만약 네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하나님이 네게 배치한 사람과 일, 사물, 각종 환경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올바르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님 말씀을 읽고 마음으로 곰곰이 되새기는 것을 통해 네 마음과 뜻, 생각, 기분 하나하나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너는 이러한 것들을 잘 알고 있고, 하나님 또한 감찰하고 있다. 네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기도하지도 않았으며, 마음속으로 자신만의 세계에서 생각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매우 분명하고 일목요연하게 알고 있다. 사람은 눈으로 너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으로 네 마음을 어루만진다. 너와 이렇게 가까이 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감찰을 느낄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감찰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자기 세계 안에 살면서 자기 느낌과 패괴 성품에 따라 산다면 너는 곤란하다. 네가 하나님 앞에서 살지도 않고,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며, 하나님의 감찰을 받지도 않는다면, 이런 것들을 하나님도 알고 있다. 하나님은 너무도 잘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온전케 되겠다는 의지와 목표가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네게 그런 의지가 있다면, 늘 그 일을 위해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며,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떠나지 말아야 한다. 이 일은 너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며, 하나님 역시 알고 있다. 어떤 이는 “제가 잘 알고 있다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아실까요?”라고 말하는데, 그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네가 하나님과 교류해 본 적이 없으며,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다는 의미이다. 어째서 아무 관계도 없다고 하겠느냐? 너는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정말 너와 함께하는지, 너를 인도하고 지켜 주는지, 네가 그릇된 일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이 질책하는지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느낌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혼자 상상하고 혼자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너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다.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 무엇을 통해 유지할 수 있겠느냐?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하고 교류함으로써 유지해야 한다. 이런 관계는 사람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으려면 우선적으로 평온한 사람이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항상 표면적으로 행동하고 겉면의 사무적인 일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하루 이틀 영 생활을 하지 않아도 자각하지 못하고, 3~5일, 심지어 한두 달이 흘러도 자각하지 못한다. 이것은 기도하지도 않고, 간구하지도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간구란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에게 너를 돕고 인도하고 공급하고 깨우쳐 달라고,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진리가 무엇이고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진리를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알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간구해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수 있다. 기도는 범위가 매우 넓다. 가끔은 그저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는데, 어려운 문제가 있거나 소극적이고 연약해질 때 하나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이다. 또한 자신에게 패역이 있을 때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 혹은 매일 맞닥뜨리는 일들 가운데 스스로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나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얘기하는 것 등이 있다. 이것을 기도라고 한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하나님에게 진리를 구하는 것이다. 정기적일 때도 있고 비정기적일 때도 있고,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다. 영적으로 교제하는 것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일이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고, 할 말이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저 그 일을 하나님에게 얘기하고 기도하여라.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사랑하고 걱정하는지 평소에 많이 묵상하고, 하나님이 어째서 사람을 책망하고 훈계하는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란 무엇인지 등등 이런 문제에 대해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과 교류하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구하여라. 이것이 바로 영적인 교제이며, 이를 줄여서 ‘영교(靈交)’라고 한다. 가끔 네가 길을 가다가 문득 한 가지 일이 떠올라 마음이 괴로워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무릎을 꿇거나 눈을 감을 필요 없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 제 앞에 닥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인도해 주소서.’ 네 마음이 움직여 속마음을 좀 말하면 하나님은 곧 알 수 있다. 가끔 집 생각이 나면 ‘하나님, 집이 그립습니다.’라고 말하고, 구체적으로 누가 그리운지 말하지 않고 그저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나님에게 얘기할 수도 있다.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사람에게 말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만난다면 그나마 괜찮을 것인데, 문제를 해결하고 이로움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에게 말하면 하나님은 너를 위로하고 감동시킬 것이다. 네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은 뒤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다면, 진리를 깨달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길을 찾아 난관을 극복하고 이 작은 고비를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고비가 너를 넘어뜨리거나 통제할 수 없고, 네 본분 이행에 영향을 줄 수도 없을 것이다. 가끔 네가 갑자기 영적으로 다운되고 약간 어둡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서둘러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마음을 나누면 네 내적 상태가 곧 되돌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바로 ‘하나님은 언제나 내 곁에 계셔. 한 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으시지.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어. 내가 어디에 있든 무얼 하든, 예배할 때도, 또는 본분을 이행할 때도 나는 하나님이 내 손을 잡아 이끌어 주신다는 걸, 나를 떠나신 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어.’라는 것이다. 때로는 이렇게 하루하루 걸어온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 자신의 분량이 이미 자란 것 같고, 그것은 전부 하나님이 인도해 준 덕분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늘 지켜 준 덕분이라고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럴 때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라는 사람은 너무도 연약하고 나약하며 깊이 패괴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이렇게 저를 인도해 주지 않으셨다면 저 혼자서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이다. 이것이 영교 아니겠느냐? 사람이 늘 이렇게 하나님과 교류한다면 하나님께 할 말이 많지 않겠느냐? 며칠 동안 할 말이 한마디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할 말이 없다는 것은 네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뜻이다. 만약 네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네 마음속 모든 말,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들까지 포함하여 전부 하나님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네 마음을 가장 잘 아는 분이다. 네가 하나님을 네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존재, 가장 의지할 수 있고 기댈 수 있으며, 믿을 수 있고 마음이 맞는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할 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늘 할 말이 있다면, 늘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깨우쳐 주고 인도하는지, 어떻게 돌보고 지켜 줌으로써 네게 평안과 기쁨을 주는지,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축복하고, 또 어떻게 꾸짖고 징계하고 처벌하고 심판하고 형벌하는지 매 순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네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날마다 흐리멍덩하고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을 뿐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면, 겉으로는 본분을 이행하고 예배하며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과정만 거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네가 지키는 그런 종교 의식은 진리와 무관하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날마다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하나님 말씀 안에서 기도하고 교제하며, 하나님 말씀 안에서 빛 비춤을 얻고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특히 본분 이행에 있어서 진리를 구해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하고, 날마다 생명 체험이 있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문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을 가장 친하고 가깝고 신뢰할 수 있는 가족이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네 하나님이 아니다. 한동안 내가 말한 대로 실행하면서 너희 내적 상태에 변화가 있는지 살펴보아라. 내가 말한 대로 실행하면 너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고 정상적인 상황과 내적 상태가 있을 수 있다. 사람이 내적 상태가 정상적이고, 생명 체험의 각 단계에서 그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을 만나고 그 어떤 환경을 마주하든,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실제 분량이 있는 것이며, 진리 실제에 진입한 사람이다.

2017년 7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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