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아들에 대한 마음의 빚을 내려놓다
어렸을 때, 저는 어머니가 집에서 저희들 밥과 옷을 챙겨 주시는 것 외에 밭에 나가 일도 하시고, 밭일이 끝나면 돌아와 다시 집안일을 하시는 것을 보고는 여자가 그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현모양처라고 생각했습니다. 결혼 후 저도 어머니처럼 남편과 아이의 하루 세 끼 식사와 의식주를 챙기며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한 살 때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저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더는 살아갈 의미가 없다고 느꼈지만, 아이를 위해 꿋꿋이 살아냈습니다. 아이에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어 재혼했고, 남편이 아이를 아껴 주는 것을 보고 마음에 위안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인 후, 저는 자주 형제자매들과 함께 모여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일부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본분도 이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마을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소문나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남편과 시부모님께 맡겼습니다. 밖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아이가 너무나 그리웠고, 늘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언젠가 상황이 허락되면 돌아가서 아이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습니다.
2023년 7월, 저는 몰래 집에 한 번 들렀다가 남편이 이미 저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또 아이가 제대로 일하지 않고 어떤 일이든 오래 하지 못한다며, 제가 이제라도 아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아이 인생은 끝장이라고 했습니다. 친정 부모님도 제가 아이를 돌보지 않아 아이의 앞길을 망쳤다고 원망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만약 내가 집에 있으면서 아이 옆에서 한마디씩 타일러 줬더라면, 아이가 제대로 된 일을 하며 바른길을 가지 않았을까?’ 아이의 상황을 보고, 주변 사람들의 질책을 들으니 아이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고모가 저희 집에 오셔서 사촌 동생이 아들을 위해 치킨 가게를 차려 줬지만, 그 아들은 일이 더럽다며 싫어하고 온종일 집에서 게임만 하며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고모의 말을 들었을 때, 저는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자녀가 바른길을 걷지 않는 것은 부모와 일정 부분 상관이 있다’는 말이 틀렸다. 어떤 사람이든 그가 걷는 길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분명한 사실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길을 걷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다. 그가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사람이 되든 그것은 그 자신의 일이며, 예정된 것, 타고난 것으로, 본성과 관계가 있다. 그럼 부모의 교육이 어떤 역할을 하겠느냐? 사람의 본성에 영향을 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부모의 교육은 사람의 본성에 영향을 줄 수 없고, 사람이 어떤 길을 걷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다. 부모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오직 무엇뿐이냐? 일상생활 속 자녀의 단순한 행위들, 깊이가 얕은 사상과 처신의 도리들은 부모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모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 책임은 바로 자녀가 바른길을 걷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가 열심히 공부하고, 성인이 된 후 두각을 드러내며,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나쁜 사람이 되지 않도록 가르치는 한편, 자식의 행위를 규범화하여 연장자를 보면 인사하는 등 예의를 알려 줘야 한다. 이렇게 행위와 관련된 것들을 가르치는 것이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이다. 자녀의 생활을 돌보고, 자녀에게 기본적인 처신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 부모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다. 하지만 사람의 성격은 부모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모는 성격이 굼떠서 무슨 일을 하든 느릿느릿하지만, 자식의 성격은 매우 급해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그는 열네다섯 살이 되면 사회에 나가 분투하며, 어떤 일이든 자기가 알아서 해서 부모를 필요로 하지 않는 등 매우 독립적이다. 이것이 부모가 가르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격과 성품, 나아가 그의 본질과 관계되는 것, 추후에 그가 선택할 길 등은 부모와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 “자식을 키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다.”라는 말에는 문제가 있다. 부모에게 자녀를 가르칠 책임이 있다고는 하나 자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사람의 본성이다. 교육으로 사람의 본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사람이 평생 어떤 길을 걷느냐 하는 것은 부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정한 바이다.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인류가 체험을 통해 종합해 낸 것이다. 상대가 미성년자일 때, 너는 그가 어떤 길을 걸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성인이 되면 사상이 생기고, 문제를 사고하게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일을 할지 선택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고위 관리가 되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변호사가 되겠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작가가 되겠다고 하는 등 각자 다른 선택을 하고, 자신만의 생각을 갖는다. 누구도 “부모님이 가르쳐 줄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부모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될 거예요.”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런 바보는 없다. 성인이 되면 사상이 활성화되고, 조금씩 성숙해지며, 눈앞에 놓인 길과 목표가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럼 그가 어떤 부류이고 어떤 집단에 속하는지가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나고 나타난다. 이때, 모든 사람의 성격이 점차 명확해지고, 성품도 점차 분명해지며, 그가 추구하는 길이나 인생 방향, 그가 속하는 집단 역시 점차 확실해진다. 이는 다 무엇에 근거한 것이겠느냐? 근원을 따져보면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지, 부모와는 상관이 없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9조(1)>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아이가 바른길을 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부모의 교육이 아니라 아이의 본성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는 단지 아이의 표면적인 행동을 교육하고 규범화할 수 있을 뿐, 아이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아이가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부모가 바꾸거나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사촌 동생만 해도 집에서 매일 아이 곁을 지키며 적잖이 훈육했지만, 아이는 여전히 제멋대로 온종일 게임만 하고 학교도 가지 않았습니다. 사촌 동생이 아이가 제대로 된 일을 하길 바라며 가게를 차려 주었지만, 아이는 그 후에도 여전히 빈둥거리며 부모님께 손을 벌려 용돈만 타 썼습니다. 반면 제 시누이는 남편과 자주 다투고, 화가 나면 친정으로 가버려 아이를 교육하는 데 마음을 쓰지 않았지만, 그 아이는 늘 공부도 잘하고 무척 어른스러웠습니다. 이는 시누이가 교육을 잘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가 천성적으로 공부하기를 좋아해서 그 방면에 노력을 기울이고 마음을 썼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니 저도 아들이 어렸을 때 열심히 공부하고 바른길을 가라고 자주 교육했지만, 아이는 자유분방해서 학교만 다녀오면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만 했습니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고, 엄하게 대하면 화를 내며 눈을 부라렸습니다. 지금 아이가 바른길을 가지 않고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이 자신의 선택이자 본성에 따른 것입니다. 제가 교육한다고 해도 아이의 선택을 바꿀 수 없고, 아이의 앞날을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 점을 깨닫고 나니, 더 이상 아이 곁에서 교육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직접 교육하여 아이의 미래와 인생을 바꾸려 했던 제가 얼마나 교만하고 무지했는지 깨달았습니다. 저는 정말 너무 비이성적이었습니다!
2023년 11월, 저는 다시 아들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당시 아들은 남편이나 시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고 예전에 살던 낡은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습니다. 밥은 직접 해 먹지 않고 늘 밖에서 사 먹었고, 집 안은 청소도 하지 않아 더러운 옷이 침대 위에 그대로 쌓여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찡했습니다. 말을 걸어도 아들은 들은 체 만 체했고, 제가 돌봐 주지 않은 것을 탓하며 저를 엄마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더욱 빚진 마음이 들었고, 어머니로서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집 안팎을 말끔히 치우고, 아이의 옷도 모두 깨끗하게 빨아 주었습니다. 아들은 자주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게임만 했습니다. 제가 “제대로 된 일을 좀 해라. 가족들 걱정 좀 그만 시키고.”라고 말했지만, 아들은 전혀 듣지 않았고 그 후에도 달라지는 게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남편마저 아들이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는다며 싫어하고 더 이상 먹여 살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내가 일자리를 구해서, 일하면서 아이를 돌보고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다해야겠다.’ 하지만 제게는 새신자를 양육해야 하는 본분이 있었습니다. 만약 돈을 벌기 위해 일하며 아들을 돌본다면, 새신자 양육이 지체될 것이기에 마음속으로 심한 갈등을 느꼈습니다. 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니, 양심 없이 본분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일을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마음에 걸려서, 본분이 바쁘지 않을 때는 집에 가서 아들을 돌보았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마음 한편으로는 늘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일부 새신자들이 정상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할 때, 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떻게 해결할지 구하고 묵상하려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아들 때문에 걱정이 되고 마음이 복잡해서 새신자들의 문제를 해결할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일부 새신자들이 소극적으로 변해 교회를 떠나려고 할 때가 되어서야 저는 서둘러 그들을 붙들어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사역 때문에 외지로 가서 본분을 이행해야 했는데, 더더욱 아이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지면 아이를 돌볼 수 없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하나님나라 복음을 확장하기 위해 사람들이 시급히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몇 년간 본분을 이행하며 어느 정도 훈련도 받았고, 일부 진리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양심 없는 사람이 될 수는 없었기에, 저는 외지로 가서 본분을 이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뜻밖에도, 바로 그 며칠 사이에 아들이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구해 출근하며 생활비를 벌고 자신을 돌볼 수 있게 되었고, 남편도 아들을 다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아들을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자 자신을 반성해 보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이 현실 사회를 살아가면서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었다.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 사람의 사상 관점에는 전통문화의 요소가 적지 않다. 특히 전통문화는 여자에게 남편을 돕고 자식을 가르치는 현모양처가 될 것을 요구한다. 여자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남편과 자녀를 위해 살아가며, 가족들 세끼 식사 준비와 뒷정리를 비롯한 모든 집안일을 훌륭히 해내야 한다. 이것이 모두가 인정하는 현모양처의 표준이다. 여성들도 모두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렇지 않으면 좋은 여자가 아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양심에 어긋나고 도덕 기준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도덕 기준에서 벗어나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남편과 자식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좋은 여자가 아니라고 느낀다. 네가 하나님을 믿은 후로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서 진리를 이해하고 일을 간파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피조물이니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야 해.’ 이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현모양처가 되는 일이 부딪히지 않느냐? 현모양처가 되려면 본분에만 전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본분에만 전념하려면 현모양처가 될 수 없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여 책임 있게 교회 사역을 대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길을 택한다면 현모양처가 되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데, 이럴 때 너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네 사상에는 어떤 파동이 일겠느냐? 네 자식과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겠느냐? 너의 그런 미안함과 불안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네가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드느냐? 미안함도 없고 죄책감도 없다면 그것은 네 마음과 네 사상 속에 진리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네가 이해한 바는 무엇이냐? 전통문화이고,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네 사상 속에는 현모양처가 못 되면 좋은 여자가 아니고, 바른 여자가 아니라는 관념이 생겨났다. 그때부터 너는 이 관념에 얽매이고 사로잡혀 하나님 믿고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여전히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본분 이행과 현모양처 되는 일이 부딪혔을 때, 너는 비록 마지못해 본분을 택하거나 하나님께 충성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안하고 죄책감이 든다. 그래서 본분을 이행하다가 틈이 생기면 자식과 남편에게 더 많이 보상해 주려는 마음에 여전히 그들을 챙길 기회를 찾는다. 설령 본인이 더 고생스럽더라도 마음만 편하면 된다. 이것은 전통문화 중에서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 이론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일이 아니냐? 너는 지금 양다리를 걸친 채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고 싶고 현모양처도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책임과 의무, 너희의 사명은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 하나뿐이다.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였느냐? 어째서 또 다른 길로 빠지려 하느냐? 설마 네 마음속에 죄책감도 참소도 없단 말이냐? 진리가 아직 마음에 단단히 뿌리내리지 않고, 마음에서 진리가 권세를 잡지 못한 까닭에 너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다른 길로 빠진다. 비록 지금 본분을 이행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사실 진리의 기준, 하나님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다. …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기회이자 하나님이 정한 운명,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래서 너는 어떤 사람에게도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다할 필요가 없고, 오로지 하나님에게 피조물이 다해야 할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가장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 사람의 일생에서 반드시 완성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일생일대의 과업이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너는 합격된 피조물이 아니다. 사람이 볼 때 너는 현모양처이자 훌륭한 주부, 효녀, 사회의 선량한 시민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 자신의 의무와 본분을 전혀 다하지 않은 사람, 하나님의 부탁을 받고도 완성하지 못한 사람, 도중에 포기한 사람일 뿐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이런 사람은 눈곱만큼의 가치도 없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자신의 잘못된 관점을 알아야 진정으로 돌이킬 수 있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주위의 여성들이 모두 현모양처가 되기를 추구하는 것을 보고 저 또한 그것을 좋은 여자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좋은 여자란 남편과 자식을 잘 돌보고, 집안의 모든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혼 후 저는 모든 집안일을 도맡았고, 아무리 힘들고 고단해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밖에 나가 본분을 이행하며 아들의 하루 세 끼 식사와 생활을 돌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저는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느끼며 마음속으로 자책하고 괴로워했고 아이에게 미안해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고 판단할 때면 더욱 제가 직분을 다하지 못했다고 느끼며, 오직 어떻게 아이를 돌봐 고생을 덜어주고 아이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을지만 생각했습니다. 새신자들이 정상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도, 저는 서둘러 관련 진리를 찾아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고, 새신자들이 소극적으로 변해 교회를 떠나려고 할 때가 되어서야 그들을 붙들어 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생명이 손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의 좋은 평가와 아이에 대한 책임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교회의 사역은 고려하지 않은 채 본분을 건성으로 대충 이행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다하여 아이의 하루 세 끼를 모두 챙겨 준다 해도,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잃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역대의 성도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수많은 형제자매들은 가정과 생업을 버리고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을 증거하여 더 많은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선하고 의로운 일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저의 생명과 저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많은 하나님 말씀의 양육과 공급을 누렸으니, 이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자 은혜입니다. 저는 마땅히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 합니다. 하지만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은 갖지 않고, 늘 아들에게 미안해하기만 했으니 제게 양심과 인성이 조금이라도 있었겠습니까? 사람들 눈에 좋은 어머니가 되기를 추구하는 것은 비록 남들을 흡족게 하고 칭찬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가정과 육을 위해 사는 것이며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일 뿐, 결코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할 수는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저는 또 두 편의 하나님 말씀을 보고, 자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실행의 길을 찾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이 미성년자이든 어른이든 부모의 생명은 그들 자신만의 것이지 자식의 것이 아니다. 물론 부모는 자식이 공짜로 부리는 가정부나 노예도 아니다. 자식에게 어떤 기대를 품든 부모는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식에게 함부로 부림을 당하는 하인, 식모, 노예가 될 필요는 없다. 자식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 부모 역시 독립된 사람이다. 그가 너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그가 어른이 된 이후의 생활을 당연한 듯 책임져서는 안 된다. 그럴 필요 없다. 그가 어른이 되었으니 너는 그를 부양하는 책임을 다한 것이다. 그가 앞으로 잘 살지 못 살지, 부유할지 가난할지, 즐겁게 생활할지 불행하게 생활할지 등은 그 자신의 일이지 부모와는 관련 없다. 부모는 이 모든 것을 바꿔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다. 그의 삶이 즐겁지 않다고 해도 부모는 “너는 불행하게 살고 있구나.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 재산을 팔고 내 평생을 다 걸어서라도 너를 즐겁게 해 줄게.”라고 말할 의무가 없다. 그럴 필요 없다. 너는 그저 책임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네가 그를 돕고 싶다면 그에게 왜 불행한지 물어보고 도리적, 정신적 차원에서 문제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는 있다. 그가 받아들인다면 물론 더 좋지만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는 책임만 다하면 된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가 기꺼이 고생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그 자신의 일이니 그것으로 인해 네가 근심하고 괴로워하며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잘 필요는 없다. 다 부질없다. 왜 그렇겠느냐? 왜냐하면 그도 이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모든 일을 처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부모가 만약 그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그건 정인 것이다. 부모가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모가 모질거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어른의 문제를 직면해야 할 뿐 아니라 어른이 견뎌야 할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해야 하지 모든 일을 다 부모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물론 부모 역시 자식이 어른이 된 후 자식의 일이 잘 풀리는지, 사업이 잘되는지, 가정이 화목한지, 그리고 결혼 생활이 순탄한지 여부에 대한 책임을 전부 부모 자신이 짊어져서는 안 된다. 너는 관심을 갖고, 물어볼 수는 있지만 모든 책임을 떠맡고 자식을 자기 곁에 묶어 둔 채 가는 데마다 데려가고 어디에 가든 다 지켜보며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늘도 밥 잘 먹고 즐겁게 지내고 있을까? 일은 잘하고 있겠지? 상사가 예쁘게 봐 주려나? 며느리(사위)가 걔를 사랑하겠지? 우리 손주는 말 잘 듣고 있겠지? 학교에서 공부는 잘하려나?’ 이런 것들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자식의 일은 자식 스스로 해결하면 되지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왜 물어보겠느냐? 정말로 너와는 상관없다는 뜻이다. 너는 자식에게 책임을 다했고 그가 클 때까지 정성 들여 길렀다. 그러니 너는 이제 물러나야 한다. 물러난다고 해서 네가 할 일 없이 한가한 것도 아니다. 너는 여전히 할 일이 많다. 네가 이번 생에 완수해야 할 사명에 있어 자식이 어른이 될 때까지 정성 들여 기르는 것 외에도 완수해야 할 다른 사명이 또 있다. 너는 네 자식의 부모일 뿐 아니라 피조물이기도 하다. 너는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에게 와서 너의 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너의 본분은 무엇이겠느냐? 너는 본분을 완수하였느냐? 전력을 다했느냐? 구원받는 길에 들어섰느냐? 너는 이런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자식이 어른이 된 후 어떤 길을 갈지, 어떻게 생활할지, 형편이 어떨지, 기쁘고 즐거울지는 부모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 형식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는 이미 독립했다. 너도 그를 독립적이 되게 하고, 그만 놓아주어야지 통제해서는 안 된다. 형식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육체적 혈연관계 차원에서든 너는 이미 책임을 다한 것이고, 더 이상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8)> 중에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너는 여생의 에너지와 세월을 네가 이행하는 본분과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에 쏟아부어야지 자녀를 위해 시간과 세월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네 생명은 자녀에게 속하지 않으며, 자녀의 삶이나 생존을 위해서, 자녀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소모해서도 안 된다. 네 생명은 하나님이 맡긴 본분과 부탁, 그리고 너라는 피조물이 완수해야 할 사명에 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네 생명이 지닌 가치이자 의미이다. 만약 네가 자녀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꺼이 존엄을 내팽개치고 자녀의 노예가 되어 자녀를 걱정하고 무슨 일이든 해 준다면 이는 의미도, 가치도 없는 행동이며, 하나님께 기억될 수도 없다. 한결같이 이렇게 하면서 이런 생각과 행동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그것은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도, 기준에 맞는 피조물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또한, 너라는 사람은 더없이 패역하고, 하나님이 준 생명과 세월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만약 네 생명과 세월을 하나님이 준 본분에 쏟지 않고 오직 네 육과 감정을 위해 쏟는다면 너라는 사람은 살아갈 필요가 없으며, 그 삶은 가치가 없으니 너는 살아갈 자격도, 하나님이 준 생명을 누릴 자격도, 하나님이 베풀어 준 모든 것을 누릴 자격도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부모의 책임과 의무는 자녀가 미성년일 때 잘 양육하여 사람됨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며, 자녀가 성인이 되어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문제를 처리할 능력을 갖추게 되면 부모는 손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요. 만약 현모양처가 되기를 추구하며 평생을 가족과 자녀만을 위해 살고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런 삶은 아무런 가치나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아들에게 다해야 할 책임은 아들을 성인으로 양육하고, 사상적으로 바른길을 가고 제대로 된 일을 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아들은 어렸을 때 늘 밤늦게까지 게임을 하곤 했는데, 저는 아이에게 온라인 게임이 사람에게 미치는 해로움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 되라고 교육했습니다. 또한 여러 차례 아이에게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이야기하며 하나님의 진실한 존재를 증거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듣지 않고 먹고 마시고 노는 것만 추구했습니다. 결국 남편은 아이가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싫어하며 더는 먹여 살리려 하지 않았는데, 이는 아들이 걸어온 길로 인한 결과이자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입니다. 저는 어머니로서 해야 할 책임을 다했으니, 더 이상 아들에게 빚진 것이 없었습니다. 만약 제가 아이의 생활만 고려하여 본분을 내려놓고 아이를 돌보며, 저의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아이에게 쏟고, 아들의 앞날까지 모두 떠맡는다면, 심지어 제 남은 인생까지 송두리째 쏟아붓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제 아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고, 자신만의 선택과 가야 할 인생길이 있으며,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문제를 처리할 능력도 갖추었습니다. 제가 아들을 평생 돌볼 수도 없고, 그의 운명을 바꿀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저는 단지 아이의 엄마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피조물이기도 하니 마땅히 저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살아야 하고, 제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못했고, 많은 새신자들이 아직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해 속히 양육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저의 책임이자 본분입니다. 저는 마땅히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본분을 이행하는 데 쏟아야 합니다. 아들에 관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그 후,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므로 평생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고 얼마나 많은 복을 누릴지, 어떤 가정과 결혼, 자녀를 갖게 될지, 이 사회와 인생 속에서 어떤 일들을 겪을지 자녀 스스로도 예측하거나 바꿀 수 없으며, 부모는 더더욱 바꿀 능력이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9)>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일생 동안 어떤 고난을 겪고 어떤 복을 누리며, 어떤 일을 겪을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이며 아무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요. 부모 스스로도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는데, 어떻게 자녀의 운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아이가 평생 어떤 운명을 살고, 어떤 험난한 길과 고난을 겪을지는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것이며, 그것이 바로 아이의 인생길이자 스스로 겪어야 할 과정입니다. 저는 큰 붉은 용에게 체포되고 박해받아 집에서 아들을 돌볼 수도 없었고, 경제적으로 도와줄 능력도 없었습니다. 아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독립적으로 생활하며 자신을 먹여 살리고, 앞으로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야 합니다. 실행 길을 찾게 되자 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저는 환경이 허락되고 적절한 기회가 생긴다면 집에 가서 아들을 볼 것이지만 제 본분을 잘 이행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마음이 평안하고 든든한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