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병고를 체험하며 매우 많은 것을 얻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추구하는 것은 다 나중에 복을 얻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러한 속셈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있는 패괴된 것들은 반드시 시련과 연단으로 해결받아야 한다. 사람의 내면에 정결케 되지 않은 부분이 있고 패괴 표출이 있다면 반드시 그 부분에서 연단을 받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안배이다. 하나님은 환경을 마련해 네가 그 환경 속에서 연단을 받으면서 자신의 패괴를 알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지막에는 죽음을 맞이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의도와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놓고 말하면 몇 년간의 연단과 어느 정도의 고난을 겪지 않는다면 사람은 생각과 마음속에서 패괴된 육체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사탄 본성에 통제되는 부분이 있고, 자신의 욕망과 요구가 있다면 그 부분에서 고난을 겪어야 한다. 오직 고난 속에서만이 공과를 배울 수 있다. 즉, 진리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수많은 진리는 다 고난과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깨닫게 된다. 편안하고 순탄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저는 제가 겪었던 병고를 체험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병고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저는 오로지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었던 저의 그릇된 관점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고, 앞날과 종착지에 대한 근심과 걱정도 내려놓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환경을 마련하시어 제가 이번 병고를 겪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로 인해 뜻밖의 수확을 얻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잦았습니다. 스물 한 살 때는 기관지염을 앓았는데, 석 달 내내 열이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크고 작은 병원을 여러 곳 다녀봤지만 소용이 없었고, 치료에 사용했던 약물이 위와 혈관에 심각한 손상을 주는 바람에 집에서 요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로는 입맛을 잃어 몸은 갈수록 쇠약해졌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제 모습을 본 어머니는 제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셨다는 것과 인류 패괴의 기원, 사람이 왜 이토록 고통스럽게 사는지, 어떻게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는 삶인지 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고 그러면 몸의 병고마저 잊을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몸이 조금 나아진 후, 저는 교회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년 뒤, 제 몸은 거의 다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나자, 저는 평생을 바쳐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그 사랑에 보답하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 후 저는 적극적으로 본분 이행에 매진했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혹한이나 폭염이 닥쳐도, 또 중공 정부의 추적이나 박해를 받을 때도 흔들림 없이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9년이 흘렀고, 중공의 박해는 날로 심해졌습니다. 저는 운 좋게 중국을 떠나 민주주의와 자유가 있는 나라에 와서 계속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저는 줄곧 꾸준히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한동안 제가 양육하는 새 신자들과 제가 있는 지역에 시차가 있어서 매일 본분을 이행하느라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몸이 피곤할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저희를 위해 예비하신 아름다운 종착지를 생각하면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021년이 되었을 때 저는 자주 가슴이 답답하고 두근거렸으며,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가 느려지기를 반복했습니다. 게다가 온몸에 힘이 없고 자주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좀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또 새 신자들은 믿음의 기반이 약해서 제때 양육하지 않으면 생명에 손실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몸의 증상은 점점 더 심해졌고, 때로는 심장 부위에 찌르는 듯한 통증까지 느껴졌습니다. 저는 덜컥 겁이 났고, 혹시 심각한 병에 걸린 건 아닐까 걱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하긴 했어도 지금껏 중병에 걸린 적은 없었고, 최근 밤을 새운 탓에 나타나는 정상적인 반응일 수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지난 몇 년간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으니, 하나님께서 분명 저를 지켜 주셔서 중병에 걸리게 하지는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2022년 2월 어느 날 저녁, 저는 평소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 본분을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심장이 은은하게 찌르는 듯 아파왔습니다. 처음에는 참고 견디면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고 쥐어짜는 듯한 고통과 함께 숨도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점점 앉아 있기가 힘들어지더니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쓰러지는 순간 너무나 두려웠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집에 있던 자매가 저를 발견하고 침대로 부축해 주었고, 저는 어느새 잠이 들었습니다. 깨어 보니 밤 9시가 넘어 있었습니다. 저는 천장을 바라보며 방금 일어난 일을 떠올렸습니다. ‘내가 심장 통증 때문에 쓰러진 걸까? 설마 내가 정말 심장병에 걸린 걸까? 심장병이 심해지면 죽을 수도 있다던데! 내가 죽는 걸까?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본분을 이행했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지켜 주지 않으실까?’ 저는 이 병이 임한 것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아무리 생각해도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휴대폰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사람이 연약해지거나 소극적이 되거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거나 실행의 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다 정상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너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믿음이 있어야 하고, 욥처럼 하나님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욥이 비록 연약하여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지만, 그는 사람이 태어나서 가지게 된 모든 것은 여호와가 베풀어 준 것이고, 그 모든 것을 거두어 가는 이도 여호와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어떤 시련을 겪든 그의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네가 체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떤 연단을 받든, 결국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사람의 믿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가 그렇게 사역함으로써 온전케 하는 것은 사람의 믿음과 사랑이며, 또한 사람의 의지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온전케 하는 사역을 할 때 사람은 그것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너의 믿음이 필요하다.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일에서 사람의 믿음이 필요하고, 네가 관념을 내려놓지 못할 때 너의 믿음이 필요하며, 네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알지 못할 때 너의 믿음이 필요하다. 너는 이러한 입장을 지키고 굳게 서야 한다. 욥이 이 수준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말씀했다. 다시 말해, 네가 믿음 안에 있어야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네게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너를 온전케 하지만, 네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도 너를 온전케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네가 바라는 것을 베풀어 준다. 너에게 믿음이 없으면 온전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행사를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전능은 더더욱 볼 수 없다. 네가 실제 체험 중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볼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은 너에게 나타나 네 안에서 너를 깨우쳐 주고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네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네가 하나님께 희망을 잃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네게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든 그에 대한 참된 믿음을 지녀야 체험 속에서 그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을 수 있고, 그의 행사를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연단이 있어야 믿음이 생기고, 연단이 없으면 믿음도 생기지 않는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 마음이 좀 진정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게 임한 하나님의 시련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병이 생긴 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지만, 단지 제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욥은 시련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지만, 그는 입으로 죄를 짓지 않았고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구하며 하나님을 위해 아름답게 증거하니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오늘 저는 심장이 불편해서 쓰러졌습니다. 비록 지금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저 역시 욥을 본받아 입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제가 참된 믿음이 있는지도 보고 계십니다. 예전에 병이 없었을 때 저는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고, 본분을 이행하며 고난을 겪고 대가를 치르면서도 원망이 없었습니다. 지금 병고가 찾아왔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 후로 제 몸은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자주 가슴이 두근거리고 답답했으며, 온몸에 힘이 없었습니다. 말을 하다가도 숨쉬기가 어려웠고 숨이 차올라 간단한 집안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제 몸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척 괴로웠습니다. ‘이제 겨우 서른인데, 앞으로 폐인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 생각해 보면, 스물한 살 때부터 하나님을 믿으며 청춘을 바치고 모든 것을 버렸어. 심지어 중공 정부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지켜 주시지 않는 걸까? 지금 다들 적극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데, 나는 이 병에 걸려 이 중요한 시기에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고 선행도 예비하지 못하고 있어. 이런 내가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괴로워져 베란다에 숨어 몰래 한바탕 울었습니다. 울수록 더 서러웠고 제 처지가 너무나 서글프게 느껴졌습니다. 울고 나니 정신이 좀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병고가 찾아오니 마음이 너무 괴롭고,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원망의 말을 뱉어서도 안 되고 비이성적으로 당신께 요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너무나 연약하고, 제 분량이 매우 작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부디 제가 당신의 뜻을 깨닫고 이 환경 속에서 저 자신을 알고 공과를 배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기도 후에 하나님의 말씀 한 단락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족으로 여겼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낯선 사람으로 대했다. 그러나 일정 기간 하나님이 사역한 후, 사람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참하나님임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이때 사람은 하나님을 무엇으로 여겼느냐? 생명줄로 여겼다. 그러면서 하나님에게서 은혜와 축복을 받고 약속을 받기를 원했다. 이때 하나님은 사람을 무엇으로 여겼을까? 하나님은 사람을 정복할 대상으로 여겼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검증하고 시련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사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하는 대상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가 사람을 정복하고 구원할 수 있음을 보았고, 하나님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는 종착지를 얻을 기회가 있음을 보았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은 조금이나마 진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르려고 했던 것이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으로 맺게 될 결실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니 마음이 무척 찔리고 아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구원하셔서 가족처럼 대해 주시며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본분을 통해 제가 여러 방면의 진리를 얻어 결국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을 마지막 지푸라기처럼 여기며 그저 하나님에게서 은혜와 축복만 받으려 했습니다. 병고가 찾아왔을 때, 저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버렸는지를 따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했으니 제가 병에 걸려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제 몸이 건강하게 축복해 주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저는 낙심하고 실망했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거래하여 은혜와 축복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렇게 비열한 속셈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속으로 너무 괴로웠고, 저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죄송스러웠습니다. 제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함이라는 것을 보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우셨을까요! 마치 자녀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으려고 부모를 돌보는 것과 같으니, 부모님은 분명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제가 바로 그 불효자식처럼 오로지 제 이익만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 점을 깨닫고 저는 하나님 앞에 나아 와 복 받으려는 속셈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하기 원한다며 회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 저는 생활 패턴을 조절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식단을 조절하며 매일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뜻밖에도 일주일 뒤 제 몸은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했고, 저는 저도 모르게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같은 해 12월, 저는 새로운 본분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사역에 익숙해져야 하는 데다 팀의 형제자매들의 사역까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며칠간 비교적 늦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하루는 저녁 5시가 넘었을 때, 갑자기 심장 부위에 은은한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통증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일어나서 화장실에 갔다가 나오는데 심장이 더 심하게 아파왔고 숨쉬기도 어려웠습니다. 저는 좀처럼 서 있기가 힘들어 문을 붙잡고 바닥으로 천천히 주저앉았습니다. 바닥에 30분 정도 누워 있었는데, 심장이 몹시 아프고 온몸이 계속 떨렸습니다. 제가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자매는 깜짝 놀라 저를 침대로 부축해 주었습니다. 밤 10시가 넘었을 때, 침대에서 쓰는 작은 컴퓨터 책상을 가지러 일어나려 했지만,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몸이 안 좋으면 어떡하나 싶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한 자매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지만, 결과는 모든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이 결과를 보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병이 없다니 좋은 일이지만, 제 몸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고, 병명을 찾아내지 못하면 치료할 방법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책임자는 제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제 업무량을 줄여 주었습니다. 제 본분이 계속해서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본분이 조금씩 줄어들면, 내가 선행을 예비할 기회도 점점 줄어드는 거 아냐? 그럼 앞으로 어떻게 선행을 예비해서 구원받을 수 있겠어?’ 이 생각이 들자, 저는 조금 소극적이 되었습니다. 그 후 제 몸은 갈수록 나빠져 방에서 화장실까지 갈 때조차 벽을 짚어야 했습니다. 평소에는 침대에 앉아만 있어야 했고, 앉아 있기 힘들면 벽에 기대거나 책상에 엎드려 있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요즘 매일 꼬박꼬박 쉬었는데, 왜 몸은 갈수록 나빠지는 걸까? 전에는 좀 쉬기만 하면 회복되었는데, 지금은 왜 갈수록 안 좋아지는 거지? 다들 열정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데, 내가 병 때문에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면 구원받을 기회도 없어지는 거 아닐까? 손이라도 움직일 수 있으면 계속 본분을 이행해야 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본분은 제한적이지만, 본분을 지키기만 한다면 구원받을 희망은 있어. 어쩌면 하나님께서 내가 굳건히 본분을 지키는 것을 보시고 빨리 낫게 해주실지도 몰라.’ 그 후 저는 몸이 허락하는 한 본분을 이행했지만, 몸 상태는 여전히 매우 좋지 않았고, 심장 통증의 빈도도 점점 잦아졌습니다. 평소에 놀라면 안 되었고, 큰 소리가 나면 심장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발병 후에도 저는 힘닿는 데까지 본분을 이행했는데, 왜 몸은 갈수록 나빠지는 건지, 하나님은 어째서 저를 고쳐 주시지 않는 것인지 싶었습니다. 이 병이 벌써 2년 가까이 계속되었고, 병원에 가도 무슨 병인지 진단도 나오지 않으니 치료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혼자 생활하기도 어렵고, 본분을 이행할 기력도 없는데, 저는 이대로 도태되는 건가 싶었습니다. 마음이 점점 더 연약해져, 하나님 앞에 나아 와 기도하며 구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 병에 걸리면 고통스러워하며 괴로워한다. 저마다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자기 힘으로 병을 없애거나 병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결국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병에 걸린 상태에서 고통과 괴로움이 가중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병에 걸렸을 때일수록 더욱 진리를 구하고, 어떻게 실행해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지를 구해야 하며, 병에 걸렸을 때일수록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패괴를 인식하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무리한 요구를 인식해야 한다. 병에 걸렸을 때일수록 네 진정한 순종을 검증할 때인 것이다. 그러므로 병을 감당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하고, 자신의 불평과 무리한 요구를 버린다면, 네가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며 네게 간증이 있고 하나님에 대한 네 충성심과 순종이 진실하여 검증을 이겨 낼 수 있고 그것이 구호도, 도리도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병에 걸렸을 때 한편으로는 네 여러 무리한 요구와 하나님에 대한 여러 현실에 맞지 않는 상상과 관념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과 순종을 검증한다. 만약 이런 측면에서 검증을 모두 통과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과 충성심 그리고 순종에 진정한 증거와 실증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고, 피조물이 갖추고 살아 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모두 긍정적인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는 모두 사람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네게 병을 허락했다면 언제 어디서든 그 병을 거둬 가기도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든 네 병을 거둬 갈 수 있다면, 병이 계속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같은 병을 네게서 거두지 않는다면, 너는 계속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겠느냐? 이는 네게 검증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 병이 몇 달 후 완쾌되면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과 충성심, 순종이 어떤지 검증되지 않으니 네게는 증거가 없는 것이다. 몇 달을 참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만약 그 병이 2, 3년 이어져도 네 믿음,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고자 하는 소망이 변하지 않고 점점 더 실제적이 된다면, 생명이 성장한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수확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병에 걸린 동안 병이 그에게 가져다주는 다양한 이로움을 경험하고 체험하지 조급하게 병에서 벗어나려 하거나 병세가 길어지면 어떤 나쁜 결과가 있을지, 어떤 번거로움을 불러오게 될지, 악화되거나 죽지는 않을지 등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 것들을 걱정하지 않음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진입하여 하나님에 대해 진정한 믿음과 충성심 그리고 순종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증거가 생기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명 진입, 성품 변화에 엄청난 수확을 가져오며, 자신이 구원받는 것에 견고한 기초를 쌓기도 한다. 이 얼마나 좋으냐!』(<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4)>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처럼 제게 위로를 주면서 실행의 길도 열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제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환경을 마련하신 것은 제가 그 안에서 진리를 구하여 저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게 하시려는 것이었고, 동시에 저의 믿음과 순종을 검증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의 생로병사는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병을 없애시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제 병세는 더 악화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두 차례의 병고를 체험하면서 저의 수많은 패역이 드러났습니다. 병고가 임할 때마다 처음에는 순종하고 원망하지 않으려는 마음이었지만, 병세가 악화하자 마음속으로 원망하고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년간 저는 계속 이 환경을 겪었지만 굳게 서서 증거하지 못했고, 늘 거래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제가 꾸준히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보시고 병고를 없애 주시기 바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이런 환경을 마련하시어 제게 겪게 하신 것은 제 생명에 책임지시는 것이자 저를 구원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비양심적으로 굴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을 원망해서도 안 됩니다! 이 환경 속에서, 한편으로는 제게 참된 순종이 필요했고, 제 능력이 닿는 데까지 본분을 다해야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 드러낸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진입해야 할 진리를 구해야 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방금 적그리스도가 진리는 싫어하면서 불의하고 사악한 일은 좋아한다는 것에 관해 언급했다. 그들은 이익을 추구하고 복받기를 추구해서 항상 복받으려는 속셈과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과 거래를 한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떻게 분별하고 규정해야겠느냐? 만약 이익에 눈이 멀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약하다. 마치 바울이 그의 몸에 가시가 있어서 속죄하기 위해 사역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마지막엔 공의의 면류관을 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어떤 성질이냐? (흉악함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흉악한 성품이다. 그런데 이 일의 성질은 무엇이냐?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질이 있는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든 이득을 보려 하고 거래를 한다. 이방인의 말 중에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적그리스도 역시 같은 논리다. ‘제가 당신을 위해 사역하는데 당신은 제게 무엇을 주시나요? 제가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죠?’ 이 성질을 어떻게 결론지어야 하겠느냐? 이익이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익에 눈이 멀었다, 이기적이고 비열하다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다. 적그리스도는 오로지 이익과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약간 고생하고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그것 역시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것이다. 복을 받고 상을 얻으려는 그의 속셈과 욕망이 너무 커서 단단히 붙잡고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토록 많은 진리를 선포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한결같이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한 것, 즉 좋은 종착지를 얻기 위한 거야. 이는 지고지상의 원칙으로서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어. 만약 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선 안 되지. 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는 의미나 가치는 사라져 없어지는 거야.’ 적그리스도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누군가가 주입했기 때문이냐? 누가 가르치고 영향을 주기라도 했느냐? 전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본성 본질에 의해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 오늘날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는데 그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고 정죄한다.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그의 본성은 영원히 바꿀 수 없다. 그가 바뀔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의 본성이 사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성품이 사악하여 대놓고 하나님에게 고함치며 맞서는 것이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이며 그의 실체이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7조 사악함과 음험함, 그리고 간사함(2)>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저를 깊은 반성으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복을 받기 위함이며, 그들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지, 결코 진리를 추구하여 생명 성품의 변화를 이루기 위함이 아님을 폭로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니 지난 2년간 계속 병을 앓으면서 저의 실제 분량이 드러났습니다. 처음에는 정상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 병세가 악화되자 제 안의 원망과 오해가 터져 나왔고, 제가 버리고 들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이치를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에게 생로병사가 있는 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제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으며 본분을 이행한 것 역시 저 자신의 선택이었고, 제가 기꺼이 원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헌신하며 본분을 이행한 것과 병이 난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헌신한 것을 밑천 삼아 하나님께 비이성적인 요구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며 본분을 이행했으니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저를 지켜 주셔야 하고, 이런 병에 걸려 이렇게 많은 고통을 겪게 해서는 안 되며, 나중에는 저에게 아름다운 종착지까지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저는 원망하며 하나님께 따지며 대들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럽의 절반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역을 했는데 그 모든 것이 훗날 면류관을 받고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기 위함이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 바울의 이 말은 노골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높여 주신 것인데, 바울은 거래의 관점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일을 대함으로써 본분 이행의 의미를 완전히 왜곡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상을 받지 못하게 되자 하나님께 따지고 대들었습니다. 이는 바울의 흉악하고 사악한 성품을 완전히 폭로한 것입니다. 제가 걸어 온 신앙의 길도 바울과 같다는 것을 반성했습니다. 만약 제가 계속 이렇게 걸어간다면, 결국 바울처럼 징벌을 받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 생각이 들자, 제 속으로 조금 두려워졌습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을 추구하는 것의 성질과 결과가 이렇게 심각했던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이 그릇된 추구 관점을 따라 걸어갈 수 없었습니다.
제 내적 상태는 어느 정도 바로잡혔지만, 건강 상태는 호전되지 않고 날로 악화되었습니다. 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고, 때로는 ‘이번에 병이 든 것은 나를 드러내고 징벌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왜 계속 낫지 않고 점점 더 나빠지겠어?’ 하는 소극적인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 마음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 마음에 합하지 않는 것들과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종종 성찰해야 한다.” 그 후 저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찾아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 마음에 합하지 않는 것들과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종종 성찰해야 한다. 이러한 오해는 어떻게 생겨나느냐? 사람은 어째서 하나님에게 오해가 생기느냐? … 하나님의 사랑을 규정하기 때문이 아니냐?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사랑이니까 당연히 사람을 보살피고, 지켜 주고, 은혜와 축복도 내려 주셔야 해.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지! 나는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을 사랑하시는 게 마음에 들어. 특히 사람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게 하신 걸 보니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겠어. 그 시대 사람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야! 나도 그중 한 명이었으면 좋았을걸.’ 거기에 도취된 너는 하나님이 그 순간 나타낸 사랑을 최고의 진리로 생각하고 하나님 본질의 유일한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하나님을 네 마음속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이 그 순간 행한 모든 것을 최고의 진리라고 규정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사랑스러운 부분이자 사람이 제일 존경하고 경외하는 부분이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하나님이 그렇게 행한 것 자체는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네가 규정하는 바람에 그 일은 네 마음속에서 관념이 되고, 하나님을 규정하는 근거가 되어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마치 하나님의 사랑이 긍휼과 보살핌, 보호, 인도, 은혜, 축복과 같은 것 외에 다른 것은 없고, 하나님의 사랑은 그 정도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너는 어째서 그런 면을 그토록 애지중지하느냐? 네 이익과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의 어떤 이익과 관계가 있느냐? (육적인 즐거움과 편안한 생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에게서 그런 것들만 바란다. 다른 것들, 이를테면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 하나님을 위해 고통받고, 버리고, 헌신하고, 심지어 목숨을 내던지는 것 등은 원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 보호, 인도만을 누리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 본질의 유일한 상징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의 유일한 본질로 규정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게 한 사실에서 하나님이 행한 일들이 사람이 관념을 품게 된 근원이 된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것이 인류가 하나님에게 관념을 품게 된 배경이다. 이런 관념이 생긴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성품을 진실로 인식할 수 있겠느냐?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해와 관념이 생겨날 게 뻔하다. 이것은 사람의 인식이 너무나 단편적이고 진실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관념 상상과 사욕으로 분석하고 해석한 사랑이자 인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실한 본질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긍휼과 구원, 보살핌, 보호를 베풀어 주고 간구를 들어주는 것 말고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채찍질과 징계, 훈계와 책망,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이 있습니다.) 맞다. 하나님의 사랑에 해당하는 것은 너무나 많다. 매질, 징계, 꾸짖음, 심판, 형벌, 시련, 연단… 이런 것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야 비로소 전면적이 되고, 진리에 부합하는 사랑이 된다. 이런 걸 인식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성찰할 때 자신의 치우친 면을 인식하고, 자신의 잘못된 점을 훌륭히 반성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경지에 이르려면 진리를 구해야 한다. 사람은 진리를 구하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없앨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없애면 하나님의 모든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 … 하나님은 사람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고, 일용할 양식을 내려 줄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릴 수도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병이고, 또 하나님의 본질이자 성품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를 깨달아야 하나님의 행사를 알 수 있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제 마음은 굉장히 환해졌습니다. 알고 보니 제 마음속에는 줄곧 그릇된 관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은 늘 축복하시고 모든 일이 순조롭고 평안하게 해 주시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수많은 우여곡절과 역경, 병고 등 고통스러운 일을 겪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몸이 갈수록 나빠지자 저는 이것이 저를 향한 하나님의 징벌일지도 모른다고 여기며 저의 관념과 상상 속에서 살며 소극적이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지난 2년간 병고 속에 자신을 찬찬히 돌이켜보면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음을 느꼈습니다. 또한, 제가 복을 받으려는 속셈이 얼마나 강했는지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자, 제가 덤으로 얻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긍휼과 자비, 보살핌과 보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 역시 하나님의 사랑이며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단지 제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었을 뿐, 그것은 제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이 없었다면 저는 저 자신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때 저는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고심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구원하시는 동시에 저의 오해와 원망까지 견뎌 내셔야 했습니다. 이 생각이 들자 제 자신이 몹시 증오스러웠고,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그 무렵 저는 베드로의 체험을 종종 떠올렸습니다. 저는 제가 베드로의 인성에는 못 미치고 베드로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의지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베드로가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당했을 때 어떻게 체험했는지, 그가 극심한 고통과 연약함 속에서 어떻게 이겨 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저는 《베드로가 ‘예수’를 알아 간 과정》과 《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하나님 말씀 낭송 영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제 너는 베드로가 간 길이 어떤 길인지 분명히 보아야 한다. 베드로가 간 길을 분명히 보았다면 지금의 사역을 확신하게 될 것이며, 불평을 터트리거나 소극적이 되지 않고 뭔가를 바라지도 않게 될 것이다. 너는 베드로의 그때 심정을 체험해야 한다. 그는 몹시 괴로워 죽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어도 좋은 미래나 복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또한, 그는 세상의 명예나 복, 부귀영화를 좇지 않았으며, 그저 가장 의미 있는 인생, 즉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는 종종 예수께 기도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는 당신을 사랑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않았나이다. 비록 입으로는 당신을 믿는다고 떠들었지만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나이다. 저는 그저 당신을 앙망하고 우러러보고 그리워했을 뿐 당신을 사랑하지도 진심으로 믿지도 않았나이다.” 그는 항상 기도하며 뜻을 세웠고, 언제나 예수의 말씀에 격려를 받으며 이를 동력으로 삼았다. 한동안 체험한 후, 예수가 베드로에게 시련을 주자 그는 예수를 더욱 사모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당신이 너무도 그립고 뵙고 싶사옵니다. 저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아 당신의 사랑에 보답할 수 없나이다. 저를 빨리 데려가 주소서. 언제쯤에야 제가 필요하겠나이까? 언제쯤에야 저를 데려가시겠나이까? 언제쯤에야 당신의 얼굴을 다시 뵐 수 있나이까? 저는 더 이상 육체에 살길 원하지 않으며, 더 이상 패괴되지 않고 거역하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저는 한시라도 빨리 제 모든 것을 당신께 전부 바치길 원하옵니다. 더 이상 당신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나이다.” 그는 당시에 이렇게 기도했으나 예수가 그에게서 무엇을 온전케 하려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시련을 받고 극도로 고통스러워할 때 예수가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나서 말씀했다. “베드로야, 나는 너를 온전케 하여 한 알의 열매로 만들 것이니라. 그것은 내가 온전케 한 후의 결정체로, 난 그것을 누릴 것이니라. 너는 정말 나를 증거할 수 있겠느냐? 네게 하라는 일을 하였느냐? 내가 한 말을 살아 냈느냐? 너는 나를 사랑했느니라. 나를 사랑했으나 나를 살아 냈느냐?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너는 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베드로는 예수를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전에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일을 떠올리며 불평을 멈추었다. 다시 기도할 때는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그는 다시 기도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는 당신을 떠난 적이 있고, 당신도 저를 떠나신 적이 있나이다. 우리는 이별했던 때도 함께했을 때도 있지만 당신은 그 무엇보다 저를 사랑하셨나이다. 저는 여러 번 당신을 거역하고 여러 번 당신을 슬프게 했나이다. 이를 어찌 잊을 수 있겠나이까? 저는 당신이 제게 행하신 사역과 제게 맡기신 부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당신께서 제게 행하신 사역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나이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당신께서 아시나이다. 제가 무슨 기능을 할 수 있는지는 당신께서 더 잘 아실 것이옵니다. 저를 당신의 지배에 맡기길 원하옵고 제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길 원하옵나이다. 제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당신만이 아시나이다. 사탄이 이렇게 저를 우롱하고, 저 역시 당신을 거역한 적이 있으나 당신께서는 그런 이유로 저의 과오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며, 그런 것들로 저를 대하지 않으실 것이라 믿사옵니다. 저는 제 일생을 당신께 바치길 원하옵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른 바람이나 계획도 없사옵니다. 오직 당신의 생각과 뜻에 따라 행하길 원할 뿐이옵니다. 저는 당신의 쓴잔을 마시고, 저 자신을 당신의 지배에 맡기길 원하나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베드로가 ‘예수’를 알아 간 과정> 중에서), 『너희는 너희가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또 너희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 하나님이 온전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너희에게 맡긴 부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느 날 시련이 닥칠지도 모르는데, 그때 너희가 베드로의 체험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이는 너희가 베드로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베드로가 ‘예수’를 알아 간 과정>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저는 크게 감동했고, 하나님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베드로의 마음에 또 감동했습니다. 베드로의 체험을 보니, 저는 너무나 부끄럽고 죄스러웠습니다. 베드로는 시련 속에서 늘 어떻게 하면 더 순결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지를 구했고,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지 못하는 자신을 증오했습니다. 그는 늘 어떻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지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병고 속에서 패역과 오해만 드러냈고, 늘 병세가 악화되면 앞으로 저의 종착지가 어떻게 될지 걱정하고 죽음이 닥칠까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이 환경을 마련해 주신 것이 저를 드러내고 징벌하시기 위함이라고 여겼습니다. 저는 오직 저 자신의 이익만 생각했고,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제 분량이 너무나 보잘것없어서 작은 시련조차 견뎌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지금 제 육체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제가 할 수 있는 본분도 지극히 제한적이지만, 진리를 추구하려는 의지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 저는 언제나 피조물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제가 평생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다. 하루를 더 살더라도 진리를 추구하고, 제가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합니다.
하루는 아침부터 몸에 힘이 없고, 심장 통증이 이전보다 더 잦아지고 지속 시간도 길어졌습니다. 거의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저녁이 되자 상태는 더 심각해져 숨쉬기조차 어려웠습니다. 집에 있던 자매가 구급차를 불렀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이제 곧 죽을 것 같습니다. 당신께서 제가 이 나이까지 살도록 정하신 것인가요? 제가 이제 죽는 건가요?” 그때, 제 머릿속에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너에게 한 모금의 숨이라도 붙어 있는 한, 하나님은 너를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그리스도의 최초의 말씀ㆍ제6편>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한 줄기 빛처럼 제 마음을 비춰 주었습니다. 제가 숨을 한 번 더 쉴 수 있는지 없는지조차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저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 자주 보았던 베드로의 체험이 떠올랐습니다. 베드로는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며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의 체험은 제게 힘을 주었고, 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죽든 살든, 저의 모든 것이 당신의 손에 있음을 믿습니다. 당신께서 제가 이 나이까지만 살도록 정하셨다 해도 저는 아무런 원망이 없습니다. 비록 제가 베드로의 분량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베드로를 본받아 당신의 모든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기 원합니다. 이것이 피조물로서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 당신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그 후 구급차가 저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의사가 여러 가지 검사를 하는 동안 제 마음은 아주 평온했습니다. 검사를 마쳤지만, 의사는 여전히 제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확진하지 못했고, 치료할 방법도 없어 일단 집으로 돌아가 요양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제 목숨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더욱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제 생사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제가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의사도 저를 살릴 수 없고, 죽지 않을 운명이라면 저는 죽지 못할 것입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저는 여전히 기력이 없어 누워서 쉬었습니다. 잠에서 깨어 무심코 주먹을 쥐어 보았는데, 뜻밖에도 손에 이전보다 힘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신발을 신고 침대에서 내려와 보니, 놀랍게도 아무것도 붙잡지 않고도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병이 정말 이렇게 나은 건가 싶었습니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이전에 있던 무기력한 증상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저는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난 지금, 제 몸은 서서히 회복되어 이제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 있습니다.
이번 체험을 통해 저는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이 바로 사람을 정결케 하고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고통을 겪기는 했지만, 제가 얻은 것은 제가 겪은 고통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이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제 생명의 자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