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억압된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다

중국 린펑(林楓)

저는 교회에서 작곡 본분을 이행하고 있습니다. 2020년 10월, 리더가 저를 왕천(王辰) 형제와 함께 작곡가의 작품을 검사하도록 안배했습니다. 당시 저는 스트레스를 별로 받지 않았고, 매일 약간의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리더는 저를 책임자로 발탁했습니다. 저는 책임자가 되면 전면적인 사역을 책임져야 하니 분명 매일 바쁘고 지금처럼 홀가분하고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약간 원치 않았지만, 교회에서 저를 이렇게 오랫동안 양성해 주었으니 양심껏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전력을 다해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수락했습니다.

앞으로 본분을 이행할 때, 저는 팀원의 잘못된 내적 상태를 교제하고 해결해야 할 뿐만 아니라, 편지에 답장해 팀원의 문제에 답해야 했습니다. 가끔은 이쪽에서 작품 검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저쪽에서 즉시 답장해야 할 편지가 있어 잠시라도 쉴 틈조차 없었습니다. 가끔은 좀 느긋하게 쉬고 싶었지만 어떤 편지는 즉시 답장하지 않으면 사역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얼른 답장해야 했습니다. 그 후, 리더는 왕천이 검사한 작품에 몇 가지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저더러 다시 한번 검사하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저의 시간은 더욱 촉박해졌습니다. 이렇게 많은 세부 사역을 해야 하는 것을 보고 저는 너무 억압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사역들은 하나라도 안 하면 안 돼. 항상 이런 식이라면 너무 힘들잖아!’ 그리고 언제 좀 제대로 느긋하게 쉴 수 있을까 고대했습니다. ‘예전에 책임자가 아니고 작품 검사만 했을 때 얼마나 수월했어, 차라리 원래 본분을 이행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도 순종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계속 협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저는 자신이 마치 기계처럼 느껴졌고, 머리는 늘 팽팽히 긴장된 상태에 있으며, 항상 답장하고 처리해야 할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겉으로는 멈추지 않고 해야 할 일도 다 했지만, 피동적으로 사역에 끌려다녔고, 마음속에 부담이 없고 성과를 구하지도 않으며 매뉴얼 대로 손에 든 일을 완수만 했을 뿐이어서 사역은 늘 활기를 띠지 못했습니다. 왕천은 제가 부담이 없다고 말했는데, 저는 듣기 싫어하며 속으로 원망했습니다. ‘난 이미 충분히 바빠. 그렇게 많은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어떻게 다 돌아보겠어! 나한테 너무 높은 요구를 하는 거 아냐?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 어딨어? 내가 몸을 둘로 쪼갤 수도 없고!’ 저는 스스로 반성하지도 않고 왕천에게 편견까지 생겼습니다. 때로는 ‘차라리 관둬버리자, 한 가지 사역만 하던 때로 돌아가면 그렇게 힘들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의 내적 상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작품 속에 명확히 드러나는 문제도 검사해 내지 못했습니다. 왕천은 제가 본분을 대충 이행하면서 마음을 쓰지 않아 사역 진행에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고, 그제야 저는 스스로를 반성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본분은 너무 어려워요. 마음이 고통스럽고 억압돼서, 자꾸 본분을 포기하고 싶어져요. 이런 내적 상태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지만 제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어요. 저를 깨우쳐 주시고 잘못된 내적 상태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 후,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보통 정상적인 사람은 난이도가 높다는 말을 들으면 속으로 난처해하고 압박감을 느낀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서 압박감을 느끼면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에게 인도해 달라고, 믿음을 더해 달라고 구하고, 깨우침과 도움을 구하고, 일을 그르치지 않게 보호해 달라고 구하고, 또한 충성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게 해 달라고 구할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 부류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사역에서 구체적인 지침을 내려 그에게 시행하도록 했을 때, 또한 그 사역에 어려운 부분이 있을 때, 그는 속으로 반발하며 하기 싫어한다. 하기 싫어하는 태도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그는 말한다. “왜 좋은 일은 저한테 안 오는 겁니까? 어떻게 저한테는 어려운 문제만 주고, 요구만 하십니까? 제가 한가한 사람인 줄 아세요? 노예나 심부름꾼인 줄 아세요? 전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일을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는데, 그럼 직접 한번 해 보세요!” 이것이 순종이냐? 받아들이는 태도이냐? 그가 하는 행동은 무엇이냐? (반발이고 대항입니다.) 어째서 반발하고 대항하는 것이냐? “가서 고기 몇 근만 사 오세요. 요리해서 다 같이 먹게.”라고 말하면 그가 대항하겠느냐? (대항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가서 밭 좀 갈도록 해요. 밭 갈 때 돌도 좀 골라내고요. 그런 다음 식사합시다.” 이렇게 말하면 그는 달가워하지 않는다. 육이 고생해야 하는 일, 어렵고 압박을 받는 일 앞에서는 불만이 생기고, 하기가 싫고, 반발심과 원망이 들기 시작한다. ‘왜 좋은 일은 나한테 안 오지? 가벼운 일, 하기 쉬운 일을 할 때는 왜 내가 안 보이나? 어려운 일, 힘든 일, 지저분한 일은 나한테 시키고 말이야. 내가 착실해서 만만해 보이나?’ 그는 속으로 반발하기 시작한다. 왜 이렇게 반발하는 것이냐? 어떤 게 더러운 일, 힘든 일이냐? 어떤 게 어려움이냐? 모두 본분이 아니냐? 배정받은 대로 가서 하면 되지 뭘 그렇게 고르려 드느냐? 이게 일부러 못살게 구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는 그것을 일부러 자기를 못살게 굴고 난감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본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고, 받아들이기 싫어한다. 이건 어떤 상황이냐? 어려움이 닥쳐서 육이 고생해야 하고 편하게 있을 수 없게 됐다고 반발하는 것이 아니냐? 이것이 조건 없이, 불평 없이 순종하는 것이냐? 어려움이 좀 있으면 하기 싫어하고,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이라면, 자기가 볼 때 어려운 일, 안 좋은 일, 천한 일, 남들이 무시하는 일이라면 기를 쓰고 반발하고 반항하고 거절하며 전혀 순종하지 않는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4)>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인성이 있는 사람은 본분에 어려움이 닥쳐 스트레스를 받을 때 반발하고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해 전력을 다해 협력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적그리스도는 본분을 이행할 때 어려움과 스트레스가 조금이라도 있고 수고하고 대가를 치러야 할 때 먼저 드러나는 모습이 반발하고, 반항하며, 원망을 내뱉는 것이며, 심지어 자신을 괴롭히고 자기를 한가한 사람, 노비처럼 부린다고 여깁니다. 이를 통해 적그리스도가 특히 이기적이고 비열하며, 하나님의 뜻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행실에 비춰보았을 때 제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제가 책임자가 될 기회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역량이 많고, 리더가 모든 사역을 너무 촉박하게 점검하는 것을 보고 스트레스가 크고 육이 많이 고생해야 한다는 생각에 원하지 않아 마음속으로 반발했고, 그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너무 억압받고 고통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사역에 부담이 없었고, 점검해야 할 사역에도 마음을 두지 않아 왕천이 제게 부담이 없다고 일깨워 주었는데도 내키지 않아 하면서 형제에 대해 편견까지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고 안배하신 환경에 제가 반발하고 반항하며 전혀 순종하지 않았는데, 바로 적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낸 것이 아닙니까? 생각해 보면, 리더가 사역을 촉박하게 점검하든가 파트너 형제가 제 문제를 지적하든가 모두 교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고, 사역이 좋은 성과를 거두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전력을 다해 협력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정상인이 가져야 할 양심과 이성입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속으로 반발하며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았고, 억울하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본분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정말 너무 어처구니없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본분을 대하는 것이 어디에 조금이라도 인성이 있습니까! 저는 전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았고, 항상 제 육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전력을 다해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려 하지 않아 교회 사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확실히 하나님의 마음을 거역하고 아프게 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본분을 대하는 태도를 바로잡기를 바랐습니다.

그 후 저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시련은 대부분 사람에게 더해 주는 부담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큰 부담을 더해 주든 너는 마땅히 그것을 짊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네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네게 주는 부담은 네 분량이나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초과하지 않으므로 너는 분명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부담과 시련을 주든 이것 하나는 기억해라. 네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든 그러지 못했든,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었든 얻지 못했든, 그 시련이 너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든 경고든, 네가 알지 못해도 상관은 없다. 네가 본분 이행을 지체하지 않고 충성을 다해 자신의 본분을 지키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만족할 것이고, 너는 굳게 설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늘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묵상해야 실행할 길이 생긴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더해주시는 짐은 모두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고, 사람이 감당하는 한계를 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본분이 제게 임한 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검증하시는 것이니, 저는 육의 안락함을 위해 본분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 자신을 저버리고 순종해서 예전의 본분을 이행하던 태도를 바로잡겠다고 기도드렸습니다. 매일 사역량에 따라 제 시간을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경중과 완급을 나눠서 전체 사역 효율을 높였습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 사역이 많아지면 저는 여전히 억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자신을 저버리고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아가 주동적으로 원칙을 구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사역 성과는 전체적으로 높아졌습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 저는 교회가 저를 발탁해 외지에 가서 본분을 이행하도록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앞으로 사역량이 더 많아질 것을 생각하니 제 안의 억압된 부정적인 감정이 저도 모르게 다시 터져 나왔습니다. 저는 이런 내적 상태가 잘못되었음을 알았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루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느냐? 바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하는 것은 일과 삶에 대한 요구이다. 그러나 법률, 혹은 생활 환경, 혹은 특정 집단의 규칙, 제도, 규정, 규율 등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자기의 바람이나 상상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 깊이 억압을 느낀다. 이런 억압은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서운함을 느끼는 것이다.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억울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사람의 성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여러 원인과 객관적 환경 및 조건의 제약으로 인해 사람이 자신의 성격대로 할 수 없고 자유롭게 방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본분을 늘 건성으로 대충 이행하고 몸을 사리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 교회 사역을 서둘러야 할 때가 있는데, 그는 제멋대로만 하려 하고, 요즘 컨디션이 안 좋다거나 기분이 좋지 않고 의욕이 없다고 생각되면 수고하며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교회 사역을 하려 하지는 않는다. 너무나도 나태하고 안일을 탐하는 것이다. 그는 마음에 의욕이 없으면 축 늘어져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래도 리더에게 책망을 받거나 형제자매로부터 게으르다는 평판은 받고 싶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너무나도 원하지 않고, 달갑지 않으며, 내키지 않아 한다. 그리고 억울해하고 답답해하면서 사는 것이 피곤하다고 생각한다. 성격대로 하고 싶지만, 하나님 집의 요구와 규정을 감히 뿌리치거나 어기지도 못한다. 그렇게 억압이라는 정서가 차차 생기는 것이다. 이런 억압의 정서가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시간이 흐르면 사람의 겉모습이 퇴폐적이고 무기력해 보이게 된다. 로봇처럼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어찌 되었든 매일 하라면 하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손발을 멈추지 않고 하면서 본분을 이행하는 환경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마음은 억압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피곤하고 답답하다고 생각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중에서) 하나님 말씀의 폭로를 통해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사역량이 많고 스트레스가 큰 본분만 직면하면 억압된 감정이 생겼던 주된 이유는 늘 마음대로 본분을 이행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육이 원하지 않거나 제 마음대로 일을 할 수 없으면 저는 억압되받고 고통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예전에 저는 작품 검사만 맡아서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너무 많은 어려움과 스트레스도 없어서 저도 정상적으로 협력할 수 있었지만, 책임자가 된 후 전면적인 사역을 책임져야 하고, 모든 방면의 사역에 신경을 쓰고 모두 점검해야 하며 리더가 왕천이 검사한 작품까지 확인하라고 해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하자 제 마음은 반발하면서 순종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또 리더가 저를 부담이 없다고 할까 봐 감히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겉보기에는 물론 일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내키지 않아 했습니다. 때로는 작품을 대충 보면서 검사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문제가 생겨 재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왕천이 제 문제를 지적했을 때 저는 오히려 이치를 따지며 억지를 부리고 심지어 책임지고 관두려고까지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 말씀의 공급을 그렇게 오랫동안 누렸으면서도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제가 충성을 다해야 했을 때 오히려 제멋대로 일하고 본분을 회피해 교회 사역을 돌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저는 확실히 너무 인성이 없었습니다! 그 모든 기억들을 돌이켜 보니 제 문제가 정말 너무 심각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억압된 감정을 즉시 해결하지 못하면 점점 의기소침해지고 무기력해질 뿐,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습니다.

그 후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제 문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이런 억압은 어찌하여 생기는 것이냐? 분명 육적인 피로로 인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이겠느냐? 만약 사람이 늘 육의 안일과 쾌락만을 찾거나 추구하며 고생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육이 조금이라도 괴롭거나 남보다 더 고생하거나 혹은 평소보다 피로할 때 그는 억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억압을 야기하는 원인의 하나이다. 만약 사람이 육적인 고생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해서 육의 안일을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를 추구한다면, 육적인 고생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설령 때로 분주하고 피곤하여 지치더라도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진다. 괜찮아지면 계속 분주히 보낸다. 그의 마음은 본분과 사역에 있으니 육적으로 조금 피곤하더라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에 문제가 생겨 늘 육의 안일만 추구하고자 한다면, 육적으로 조금 억울하거나 만족을 얻지 못할 때 부정적 정서가 생겨난다. … 그는 이런 일로 자주 억압을 느끼고 형제자매들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도, 리더의 감독을 받으려 하지도 않는다. 잘못을 저질러도 남들이 책망과 훈계를 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 어떤 단속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인데, 어째서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걸까? 삶은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야 해. 이런 규정, 저런 제도 같은 걸 따질 게 아냐. 열심히 지켜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을 할 거야. 당신들은 잠자코 있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너무 제멋대로이고 방탕하고 단속받지 않는다. 그 어떤 사역 환경에서도 그 어떤 단속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의 규정, 원칙을 지키려 하지 않고, 처신하면서 지켜야 할 원칙 역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양심과 이성으로 해야 할 최소한의 것도 지키지 않는다.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하고 즐거울 수만 있으면, 자기에게 득이 되거나 편한 일이면 하는 것이다. 그는 그런 단속을 받는 것은 자기답게 사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학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 되고 자유와 해방 속에서 자신의 육체와 욕망, 자신의 이상과 소원,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방종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며 뒷일이나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책임과 의무, 하나님을 믿으면 이행해야 하는 본분 혹은 지키고 살아 내야 하는 진리 실제, 걸어야 하는 인생의 길 역시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사회에서나 사람들 속에서 항상 제멋대로 하려 하지만, 어딜 가든 바라는 대로 이루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 집에서 인권을 중시하고 사람들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며 하나님 집에서 인성과 인내, 관용을 중시하니 하나님 집에 오면 육체와 욕망을 마음껏 방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도 행정 법령과 규정이 있기에 그는 여전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의 이런 억압의 부정적 정서는 하나님 집에 오고 나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사는 것은 그 어떤 책임이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진정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사명을 완수하여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어떤 무리 속에 있든, 어떤 환경에 처하든,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상관없이 최종 목적은 자아를 찾고 자기만족을 실현하는 것이다. 처신의 취지도 이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자기만족이 그들 평생의 소원이자 추구 목표인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중에서), 『사회에서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망나니, 멍청이, 얼간이, 깡패, 건달, 무뢰한 같은 사람이다. 그들은 기술을 배우거나 역량을 키우려 하지 않고, 제대로 된 직장이나 생계를 도모할 직업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이들이 사회에서 망나니, 무뢰한 같은 사람이다. 그들은 교회로 섞여 들어와 공짜로 무언가를 얻으려 하고 복을 받으려 하는데, 기회주의자에 속한다. 이런 기회주의자는 본분을 전혀 기꺼이 이행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억압을 느낀다. 그리고 늘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그런 삶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그는 고통이라면 조금도 받고 싶지 않아 하며, 그저 놀고먹기만 하려 한다. 이런 사람은 사는 것조차 피곤하다고 생각하며 부정적 정서에 얽매여 있다. 그들은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지치고 곤혹스러워하며 본연의 일이나 중요한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본업이나 본분, 의무나 책임으로 여겨 그것을 잘해서 결실을 맺겠다거나 그것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건성으로 임하면서 본분 이행을 빌어 생계를 유지하려 한다. 압박감이나 통제가 조금이라도 생기거나 그에게 조금이라도 엄격히 대하여 약간의 책임을 지우면 그는 마음이 불편해지고 억압을 느낀다. 또한 그런 부정적 정서가 생기면서 사는 것이 너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고 괴로워한다. 그들이 삶이 피곤하다고 느끼는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이런 부류의 사람은 이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성이 불건전한 사람으로, 하루 종일 비현실적인 생각에 빠진 채 뜬구름만 잡으며 꿈속에 살면서 기상천외한 생각만 하니 그들의 억압은 해결되기 어려운 것이다. 진리에 흥미가 없는 그들은 불신파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 집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 자신의 안식처를 찾도록 할 수밖에 없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에게 억압된 감정이 생기는 주된 이유는 육이 고통받고 지쳐서가 아니라, 사람의 사상과 관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똑같이 더 많은 짐을 지고, 더 많은 대가를 치르면서 육이 모두 똑같이 고통받고, 걱정하며, 에너지를 소모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억압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높여주심이라고 생각해 전력을 다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고통스럽고 억압받는 일이라고 생각할까?’ 사실 사역이 너무 바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된 이유는 사람이 너무 육을 헤아려 늘 안락함을 추구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추구하고 동경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것에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만약 동경하는 것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진리를 얻고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이행해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는 것을 추구한다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조금 고되고 힘들더라도 억압감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마음이 든든하고 즐거울 것입니다. 저에게 억압된 감정이 생겼던 주된 이유는 바로 저의 추구하는 관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술을 마주하고 노래하니, 인생이 길어 봐야 얼마나 될까?’, ‘인생은 괴롭고 짧으니, 어찌 제때에 즐기지 않겠는가?’와 같은 사탄 철학에 따라 살면서 사람이 즐겁고 편안하게 살면 그만이고, 아무런 제약과 통제를 받을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비로소 시원시원하다고 여겼고, 늘 제약을 받고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면 너무 답답하며,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를 생각해 보면, 많은 반 친구들이 장차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지만, 저는 45분 동안 수업을 받으면 제약을 받는다고 느꼈고, 직장에 다닌 후에는 직장의 규칙과 제도의 제약도 받기 싫어했습니다. 만약 늘 고도로 긴장된 상태에 있으면 저는 자리를 바꿔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저의 이런 사상과 관점은 늘 저를 만족시켜 주는 사욕을 최우선으로 삼았고, 사역 일정을 자기 뜻대로 안배하려고 하고, 어떤 스트레스도 받지 않으려 했습니다. 만약 본분이 너무 바쁘고, 사역 스트레스가 커서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면, 저는 반발하고 억압받았고, 본분을 대충 이행하고 심지어 소극적이 되어 사역을 소홀히 해서 결국 사역의 성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의 이런 본분을 대하는 태도는 신뢰할 만하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본분을 이행하며 마음대로 해서 육을 만족시켰고 이것은 분명 본업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추구하는 바는 사회의 건달들, 망나니들과 같았지만, 저는 오히려 이렇게 살아야 시원시원하고 개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이성이 불건전하다’, ‘불신파에 속한다’그들이 하나님 집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 자신의 안식처를 찾도록 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고 저는 더욱 깊이 후회하고 자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예전의 잘못된 추구 관점을 바로잡고, 더 이상 마음대로 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부담과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아무리 큰 어려움과 스트레스에 직면해도 충성스럽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여 당신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겠습니다.’

그 후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 한 단락을 보았고, 거기에서 실행의 길을 찾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본연의 일을 하며 기꺼이 본분을 이행한다. 그들은 한 가지 사역을 능히 감당할 수 있으며 자신의 자질을 바탕으로 하나님 집의 규정에 따라 사역을 제대로 해낸다. 물론 처음에는 이런 생활에 적응하는 게 좀 어려워서 몸과 마음이 힘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협력하고자 하는 의지나 정상인, 좋은 사람이 되어 구원받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면,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하고 하나님이 징계하도록 해야 한다. 네 마음대로 하고 싶을 때 그것을 등지고 내려놓아 제멋대로인 성질과 사리사욕을 조금씩 줄여야 할 것이다. 또 중요한 일과 시기, 사역에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네게 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채찍질과 징계를 구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깨우침을 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더 좋은 결실을 볼 수 있다. 네게 정말 의지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간구한다면 하나님은 행사할 것이며 네 내적 상태와 사상을 바꿔 줄 것이다. 성령이 약간 역사하여 네게 감동과 깨우침을 주면, 네 마음은 달라질 것이며 네 내적 상태도 변화할 것이다. 네게 변화가 생기면 이렇게 사니 억압받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낄 것이며, 억압적인 내적 상태와 정서가 다소 바뀌고 해소되어 예전과는 달라질 것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즐겁다고, 이렇게 살고 처신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규칙을 지키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이것이 바로 정상인이 살아야 할 삶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진리에 기대 살고 본분을 잘 이행하면 마음이 놓이고 평안하고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어쩜 그렇게 제멋대로였을까? 예전에는 사탄의 철학과 사탄 성품으로 살아서 사는 꼴이 말이 아니었지. 그러다 보니 살아갈수록 고통스러웠고. 이제 진리를 깨닫고 나니 패괴 성품을 어느 정도 벗어 버릴 수 있게 되었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진리를 실행하며 사는 삶이 참으로 평안하고 기뻐!’ 이는 마음이 바뀐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신이 예전에 왜 억압과 고통 속에서 살았는지 깨달으면, 그 근원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면 변화의 희망이 생긴다. 진리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 말씀에 공을 많이 들이며 진리를 많이 교제하고 또한 형제자매의 체험 간증을 들어 보기도 하면 더 분명한 길이 생길 것이다. 그럼 너는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겠느냐? 네 내적 상태가 더 좋게 바뀌고 억압적인 정서도 점점 해소되어 더 이상 너를 옭아매지 않을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알고 마음속에 늘 바른 일을 간직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는 것을 자신의 책임과 사명으로 여깁니다. 어려움과 스트레스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여 전력을 다해 모든 사역을 이행해냅니다. 제멋대로 방종하고 싶을 때도 자신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채찍질과 징계를 구할 수 있습니다. 저는 노아가 하나님의 부탁을 받았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절박하신 마음을 체험하고, 방주 짓기처럼 거대한 공사가 아무리 어렵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노아는 전혀 회피하거나 도망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대충대충 형식적으로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급해져서 최대한 빨리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려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모든 당부를 마음을 다해 순종하고 그대로 처리했고, 세부 사항 하나라도 빠뜨려서 공사의 품질과 진행에 영향을 줄까 봐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다시 저를 돌아보니 정말 너무 인성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저에게 지나치게 높은 요구를 하지 않으셨고, 다만 저의 분량, 자질에 따라 제게 좀 더 많은 짐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이는 제가 더 많은 훈련을 받아 생명이 더 빨리 성장해서 하루빨리 합격된 본분 이행에 도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니 정말 하나님께 너무나 죄스럽습니다. 만약 다시 제게 좀 더 짐을 지게 하신다면 저는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의 고심을 더 이상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막 이 공과를 배웠는데, 그 후 리더가 편지를 보내와 저더러 외지에 가서 본분을 이행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부담이라는 것을 알고, 아무리 큰 스트레스가 있더라도 이 책임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 또한 제가 과오를 만회할 기회였기에 저는 수락했습니다. 외지에 가서 본분을 이행한 후 사역량이 확실히 늘어났고 저도 큰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게 짐 하나를 더해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저를 지켜주셔서 제가 육을 방종할 기회를 없애 주시고, 모든 에너지를 본분에 쏟기 더욱 유리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 이상 육을 따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담과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에 사역에 일부 어려움과 스트레스가 있어도 더 이상 억압받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책임으로 여겨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졌고,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평안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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