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본분 이행에 대가를 들이지 않으려는 이유
저는 교회에서 미술 디자인을 맡고 있습니다. 한번은 팀장이 제게 새로운 형식의 이미지 제작을 맡긴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경험이 부족한 데다가 원칙이나 제작 요령도 파악하지 못해, 힘겹게 만들어 낸 결과물의 완성도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추후 몇 번이나 다시 수정했지만,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죠. 그래서 저는 이 새로운 형식의 이미지 제작이 정말 까다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팀장이 다시 그런 이미지를 제작하라고 했고, 저는 반발심이 들어 어떻게든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싶었습니다. 심지어는 팀장 앞에서 대놓고 제가 그 종류의 이미지 디자인을 잘하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팀장도 제 생각을 알아챘는지, 더는 그 이미지 제작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리더가 제게 이미지를 하나만 수정해 달라고 하면서 팀장을 통해 구체적인 요구 사항들을 전달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기존 작업을 기초로 구조를 수정하고 세부적인 부분은 다듬는 식으로 진행하며 속도를 내야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간단하네. 이미 이미지 형태가 있으니까 조금 손만 보면 되는 거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팀장은 제가 수정한 이미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수정하라며 의견을 제시했죠. 귀찮아진 저는 수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잖아. 쓸 수만 있으면 되지, 꼭 그렇게 세세하게 수정할 필요가 있나? 그러려면 시간과 정력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뜻밖에도 팀장은 이런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자매님은 마음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지 않네요. 성과를 내려고도 하지 않고요. 어떻게든 일을 줄여 보려고 하고, 대충 건성으로 임하죠. 그런 태도로 어떻게 본분을 잘 이행하겠어요?’ 질책하는 말들을 보자 마음이 뒤집히고 괴로웠고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정말 그렇게 심각하다고?’라는 생각이 들었죠. 며칠 후, 리더는 또 제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육적인 안일을 탐하며 어려운 것은 피하려고 한다고, 난이도가 있는 이미지를 보면 귀찮아하면서 열심히 수정하지 않는다고, 그런 식으로 대충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너무 찔리는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저를 잘 아는 자매 한 명도 직설적으로 말했습니다. “자매님은 제작 인력이면서 어떻게 해야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생각도 안 하잖아요. 그러면서 무슨 본분을 이행하겠어요?” 자매의 말에 얼음물 세례를 받은 듯 심장이 서늘해졌습니다. 이제 본분 이행도 끝이라고,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모두가 알았으니 앞으로 아무도 저를 믿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날 밤, 저는 최근 벌어진 일들을 한 장면 한 장면 돌아보는 한편, 저에 대한 형제자매들의 평가를 되새겼습니다. 견디기 힘들 만큼 마음이 괴로웠고, 어떻게 본분을 이런 식으로 이행했는지 열심히 일하지 않은 자신이 증오스러워서 저는 엉엉 소리 내 울었습니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 늘 수월하고, 힘들지 않고, 몸이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 고른다. 이는 몸을 사리는 것이고,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모습이다. 또 있느냐? (본분을 이행할 때 조금 힘들고 고생스럽고 대가를 치러야 할 경우 늘 불평을 합니다.) (평소에 먹고 입는 것, 육적인 즐거움을 중요시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다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모습이다. 너무 힘들고 위험 부담이 있는 일을 보면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편한 일만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자질이 부족하고 사역 능력이 없어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대지만, 사실상 그것은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데 목적이 있다. … 이 밖에도 본분을 이행하면서 어렵다고만 하고 열심히 노력하려고 하지 않고, 틈만 나면 쉬거나 잡담하거나 여가를 즐긴다. 사역이 바빠져서 생활 리듬과 규칙이 깨지면, 언짢아하면서 불만을 품고,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가 하면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한다. 이는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것 아니겠느냐? … 육적인 안일을 탐하는 사람이 본분 이행에 적합하겠느냐? 본분 이행에 관한 얘기만 꺼내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얘기만 꺼내면 그는 한사코 고개를 젓는다. 어려움이 너무 많다며 불평을 가득 늘어놓으며 소극적으로 군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쓸모가 없다. 그는 본분을 이행할 자격이 없으니 도태돼야 마땅하다.』(<말씀ㆍ5권 리더 일꾼의 직책ㆍ리더 일꾼의 직책(2)>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쉽고 간단한 일만 고르고, 복잡하고 난이도 있는 일을 만나면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은 지능과 자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안일을 탐하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대가를 들이려 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니, 저는 처음 팀장이 새로운 형태의 이미지 제작을 맡겼을 때 연습한 지 얼마 안 돼 난이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업무에서 좋은 성과를 내려면 고생하고 대가를 들이며, 세세한 부분까지 고민하면서 수정을 거듭해야 했으니까요. 저는 귀찮은 것이 싫어 어려운 일을 보고 뒷걸음질 쳤으며, 심지어는 핑계를 대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미룬 채 저는 간단하고 쉬운 일만 골라서 했습니다. 리더가 이미지 수정 작업을 맡겼을 때, 팀장은 세세한 내용까지 일일이 짚어 주며 제가 그 이미지를 더 훌륭하게 만들어 주었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겠다고 했지만 귀찮은 것이 싫어 열심히 고민하지 않았으며, 공을 들여 수정하지도 않고, 어떻게 해야 일을 덜 할지만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떤 일을 하든 고민하고 대가를 들이는 것을 싫어했으며, 육적인 것만 생각했고요. 저는 “이런 부류의 사람은 쓸모가 없다. 그는 본분을 이행할 자격이 없으니 도태돼야 마땅하다.”, 이 말씀을 보고 나서야 덜컥 겁이 났습니다. 저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육적인 것만 생각하고 안일을 탐했으며, 고난을 겪거나 대가를 들이려는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언제나 어떻게 해야 제 몸이 일을 덜 할지, 어떻게 하면 마음과 신경을 덜 쓸지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저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조금도 진심과 충성을 보이지 않으며, 건성으로 대충 임무만 끝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좋은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역 진도에까지 영향을 주었죠. 뉘우치지 않고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언젠가 하나님께 도태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또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 볼 때는 큰 문제가 없이 계속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 눈에 띄는 악행도 저지르지 않았고, 방해하거나 교란하지도 않았으며,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지도 않았다. 본분 이행에도 이렇다 할 큰 잘못이 없고, 원칙적인 문제도 없지만, 몇 년도 안 돼 그는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파로 자신도 모르게 드러난다. 이는 어떻게 된 것이겠느냐? 사람은 문제를 간파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하므로 문제를 간파할 수 있다. 그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줄곧 대충 건성으로 하며 회개하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되니 드러날 때가 된 것이다. 줄곧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그가 본분을 계속 이행하고 있었지만 늘 잘못된 태도, 대충 건성으로 넘어가는 태도로 계속 본분을 대했다는 것이다. 공을 들이는 법이 없고, 마음을 다하는 법은 더더욱 없으며 힘을 좀 쓸 때도 그저 과정만 밟았을 뿐, 온 힘을 다하는 법이 없어 과오가 끊임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에 그는 계속 회개하지 않았고 대충 건성으로 하는 태도를 바꾼 적이 없다. 즉, 그는 손으로 행하는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서 회개하는 태도를 본 적도, 태도를 바꾸는 모습을 본 적도 없다. 그는 늘 이런 태도와 방식으로 자신의 본분을 대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대했다. 이렇게 완고하고 강퍅한 성품을 시종일관 고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죄스럽다거나 이렇게 대충 건성으로 하는 것이 과오이자 악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마음속으로 죄책감도, 미안함도 느끼지 않으며, 가책받거나 참소받지도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구제 불능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하든, 그가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든,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달았든, 그의 마음은 감동받지 못하고 마음가짐의 변화나 전환도 없다. 하나님은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가망이 없다. 아무리 말해도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고, 되돌릴 수도 없으며, 어떤 방식으로도 변화시킬 수가 없다. 이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자격도, 내 집에서 힘쓸 자격도 없다.” 어째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는 본분을 이행하고 사역을 할 때 일관되게 대충 건성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책망과 훈계를 하며 관용과 인내를 베풀어도 효과를 볼 수 없고, 진실한 회개를 하게 할 수도 없고, 그가 진실로 변화하게 할 수도 없다.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게 할 수도,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게 할 수도 없다. 그러니 그는 구제 불능인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이를 구제 불능이라고 정할 때, 그 사람을 단단히 잡고 놓지 않겠느냐? 그럴 리 없다. 하나님은 손을 놓을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사람의 행위가 선인지 악인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바로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드러내는 것, 행하는 것에 진리를 실행한 간증, 진리 실제를 살아 낸 간증이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네게 그러한 실제가 없고 그러한 살아 냄이 없다면, 너는 의심할 나위 없이 악을 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겠느냐? 네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 겉으로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사탄을 수치스럽게 하거나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어디서나 하나님을 욕보이는 표가 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 네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도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냐? 정확하게 말하면 사탄을 위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하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할 것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네가 행한 것이 선행이 아니라 오히려 악행이어서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죄받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냐? 믿어도 결국에는 전부 허사가 되지 않겠느냐?』(<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야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있다> 중에서) 여태까지 저는 비교적 힘들고 어려운 이미지 제작 프로젝트를 꺼리기는 했어도 매일 빈둥거리지 않았고, 때로는 밤을 새우면서 추가 작업을 하기도 했으니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겉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얼마나 많은 힘을 쓰는지 보지 않으십니다. 본분을 어떻게 대하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지, 진리를 실행한 간증이 있는지 등으로 사람이 이행한 본분을 인정할 것인지를 가늠하시죠. 여태까지 저는 표면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기는 했지만, 언제나 태만하고 건성인 태도로 임하면서 육적인 것만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여지를 주었습니다. 하기 쉬운 일만 하고 하기 힘든 일은 남에게 미루면서요. 충성심이나 순종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힘쓰는 일조차 합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을 우롱하고 기만하는 행위니까요. 그러고 보면 처음에는 팀장도 제게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겼습니다. 하지만 제가 늘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면서 어려운 일을 피하고 교회 사역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육만 생각했기 때문에, 더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기지 않게 되었죠. 저는 하나님도, 다른 사람들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단순한 일만 하면서 힘만 쓰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본분을 대하는 것은 선행을 예비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과오를 쌓는 것입니다. 만약 손안의 악을 내려놓지 않고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다면, 과오가 점점 더 많아져 하나님께 내쳐지게 된다면, 철저히 드러나고 도태될 것입니다. 그때, 불현듯 이런 식의 본분 이행 태도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덜컥 겁이 났고, 이번 책망과 훈계는 저에 대한 하나님의 일깨움이자 경고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감각하고 둔했습니다. 형제자매들이 날카롭게 지적하며 책망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직도 이런 식의 본분 이행 태도가 하나님의 혐오를 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루빨리 하나님께 회개해 바르지 않은 상태를 돌려세워야지 더는 강퍅하고 패역한 상태로 살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육을 좇고 안일을 탐하는 제 상태와 관련된 하나님 말씀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무슨 사역을 하든,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해내지 못하고 감당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이행해야 할 어떠한 의무나 책임도 다하지 못하니, 이는 폐물 아니겠느냐? 이런 자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바보, 지적 장애인, 각종 신체장애자 외에 누구든 살면서 자기 본분과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이 부류의 사람들은 늘 잔꾀를 부리면서 책임을 다하려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람답게 살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사람답게 살아갈 기회를 주고 자질과 은사를 주었는데, 그는 그것을 본분 이행에 쓰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잘 누리려고만 한다. 이런 부류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역을 시켜도, 그것이 중요한 사역이든 평범한 사역이든, 혹은 어려운 사역이든 간단한 사역이든 그는 다 건성으로 임하며 잔꾀를 부린다.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미루려 하며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계속 기생충의 삶을 살고자 한다. 이런 자는 쓸모없는 폐물 아니겠느냐?』(<말씀ㆍ5권 리더 일꾼의 직책ㆍ리더 일꾼의 직책(8)> 중에서), 『폐인이란 어떤 부류의 사람이냐? 폐인은 어리석은 사람, 하루하루 시간만 보내는 사람이다. 이 부류의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책임감을 갖지 않고 진지하게 임하지도 않으며 엉터리로 처리한다. 또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신경 쓰지 않고 ‘나는 이렇게 되는대로 살 거야. 무슨 상관이야! 당장 본분을 이행하면서 먹을 것만 있으면 그만이야. 적어도 구걸은 안 해도 되잖아? 먹을 게 없어지면 그때 다시 생각하지 뭐.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으니까. 나더러 양심도 이성도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럼 어때? 내가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니잖아. 기껏해야 인품이 좀 나쁠 뿐인데. 내가 무슨 손해를 본 것도 아니잖아. 먹을 것만 있으면 그만이야.’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이 어떠하냐? 말해 두겠는데,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 하루하루 시간만 보내는 사람은 도태될 운명을 맞이하게 될 자로,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 무릇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으면서도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체험 간증이 없는 사람은 모두 도태될 것이다.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폐물이나 못난이는 전부 공밥을 먹는 자들이니 반드시 도태될 것이다. 만약 리더 일꾼이 공밥을 먹는 자라면 더더욱 교체되고 도태되어야 한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임에도 리더 일꾼이 되고 싶어 하는데, 그는 자격이 없다! 실질적인 일을 전혀 처리하지 않으면서도 리더가 되려고 한다니, 정말이지 염치도 모르는 사람이다!』(<말씀ㆍ5권 리더 일꾼의 직책ㆍ리더 일꾼의 직책(8)> 중에서) 하나님의 엄하신 폭로의 말씀을 보고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늘 건성으로 무책임하게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폐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마음을 쓰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면서 하루하루 시간만 때우며, 자기 일에 집중하지 않고 학식도 재능도 없는 그런 사람은 아무 쓸모가 없죠. 돌아보면, 저도 그렇게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을 하든 머리를 쓰거나 고민하지 않았고, 고생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성과를 내려고 하지도 않았고요. 그저 겉으로 바빠 보이는 데 만족하면서 놀지만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죠. 이런 사상을 갖고 본분을 이행하는 건 하루하루 시간만 때우는 거잖아요. 그러고 보면 저는 어릴 때부터 가정 환경이 좋은 사람을 부러워했습니다.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삶, 그런 삶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사람의 일생은 고작 몇 십 년에 불과한데 제대로 누리지 않는다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죠. 성인이 된 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을 보고 저도 장사를 시작했지만, 많은 정력을 투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툭하면 드라마나 소설 따위에 빠져서 장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죠. 돈을 버는 것에도 집중하지 않았고요. 연말이 되면 돈을 못 모은 것은 물론이고 적자가 나곤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 정도 손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굶지만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죠. 제 인생관은 “내일이야 어찌되든 오늘을 즐기자.”, “인생은 괴롭고 짧으니 어찌 제때에 즐기지 않겠는가?”였습니다. 이러한 사탄의 사상과 관점에 영향을 받아 무슨 일을 하든 집중하지 않고 진취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으며, 인생의 목표라고 할 것도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저는 이런 사상과 관점으로 살았습니다. 매일 가볍게 약간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 힘도 머리도 쓰지 않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것, 이런 삶이 무척 좋았죠. 하지만 사실 저는 폐물처럼 어떤 사역도 책임지지 못하고, 어떤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제 행동을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충격적이었습니다. 제가 바로 하나님이 폭로하신 기생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말씀을 선포하여 우리에게 진리와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데만 그치지 않고, 우리가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 우리가 사탄의 시험에 빠지지 않게 보살피고 지켜 주셨고요. 하지만 저는 염치도 없이, 본분 이행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는커녕 하루하루 시간만 때우는 기생충이 되었습니다. 사탄의 사상과 관점에 물들고 해를 입어 육적인 것을 누리는 방종한 삶만 알 뿐, 마음을 다해 고민하거나 일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서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릴 수 있을지 신경 쓰지도 않았고요. 여기까지 생각하자 스스로가 역겹고 혐오스러우며 경멸스러웠습니다. 정말 사탄에게 너무 심하게 패괴되어 양심과 이성을 잃어버리고 아주 무감각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죠. 사탄이 이런 사상으로 사람을 마비시켜 점점 더 타락하게 하고, 결국에는 산송장처럼 철저히 폐인으로 만든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위안을 드리는 일을 전혀 하지 않은 스스로가 무척 후회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 죄스럽기도 했고요.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사탄에게 너무 심하게 패괴되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드러내 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제 문제가 이렇게 심각한지 몰랐을 것입니다. 여태까지 저는 무책임한 태도로 본분을 이행했고, 인성도 없었습니다. 당신이 주신 크나큰 은혜를 누리면서 당신의 사랑에 보답할 줄 몰랐습니다. 정말 기생충같았죠. 이제는 육을 저버리고 당신께 회개하여 의식적으로 진리를 구하고 당신의 요구대로 본분을 이행하겠습니다.’
그 후, 저는 또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사람인 이상 사람의 책임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방인들이 무엇보다 강조하는 효도나 부모 부양, 가문을 빛내는 것 등은 말할 가치도 없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공허하며, 실제적인 의미가 없다. 그럼 한 사람이 다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은 무엇이겠느냐? 가장 현실적인 것은 지금 어떻게 해야 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충 형식만 취하는 데 만족한다면 그것은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글귀와 도리만 말할 수 있는 것도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진리를 실행하여 성과를 내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매사에 진리 원칙대로 해야만 진실로 책임을 다한 것이다. 사람의 방법으로 형식만 따르는 것은 건성으로 임하는 것이다.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네가 책임을 다하면, 이는 충성을 다하는 모습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모습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이러한 책임감과 의지, 바람을 갖고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하나님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고 인정한다. 이러한 책임감조차 없다면 하나님은 너를 건달이나 멍청이로 보아 경멸할 것이다. … 하나님이 교회의 어떤 사역을 누군가에게 맡길 때, 그에게 어떤 기대를 하느냐? 첫째, 그가 직책을 다하고 그 사역을 중요하게 여기며 잘 해내기를 바란다. 둘째,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이기를 바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환경이 어떻게 바뀌든 책임감이 변하지 않고, 그의 인격이 검증에 통과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안심하고 더는 그 일을 감독하거나 점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그를 믿고 있으며, 그 일을 그에게 맡기면 차질없이 임무를 완수할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서 이런 기대를 하지 않겠느냐? (그런 기대를 하십니다.)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지, 또 하나님 눈에 들고 신뢰를 얻을 수 있는지 속으로 알아야 한다. 만약 네가 자신의 모습과 행위, 그리고 본분을 대하는 태도를 똑똑히 볼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을 알고,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 안다면, 그래도 하나님에게 너를 눈여겨봐 달라고 요구하고, 너에게 은총을 베풀고 너를 편애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조차 너 스스로를 무시하고 깔보면서 하나님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기를 바라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기를 바란다면, 적어도 사람들이 너를 신뢰하게 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받고 사람들 마음에 들고 인정받고 싶다면 최소한 존엄과 책임감을 갖고 신용을 지켜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거기에서 나아가 직책을 다함으로써 충성심을 보여야 한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희망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말씀ㆍ5권 리더 일꾼의 직책ㆍ리더 일꾼의 직책(8)>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사람의 삶에 존엄과 가치가 있는지를 가늠하는 핵심은 바로 책임감 있게 본분을 대하는가, 하나님이 맡기신 모든 일을 참답게 마음을 다해 대하는가, 남들이 몇 번씩 당부하고 강조하지 않아도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하는가 하는 거죠.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생기든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어떻게 마음을 다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자가 바로 존엄 있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 하는 일이라야 하나님께 인정받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니 마음이 한결 밝아졌고, 실행의 길도 보였습니다. 그 후로 본분을 이행할 때면 마음을 다하자고 항상 스스로를 일깨우며, 진리의 원칙을 구해 최고의 성과를 내고자 노력했습니다.
한번은 한 자매와 이미지 제작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자매는 이런 이미지를 제작할 때는 서양의 디자인을 참고해서 과감하게 하는 게 어떠냐고 했습니다. ‘과감’이라는 말을 듣자 난이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양의 디자인이 보기 좋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려면 다양한 꽃무늬 효과를 넣어야 하고 제작이 꽤 복잡해집니다. 여태까지 이런 이미지는 다 다른 자매가 제작했습니다. 저는 이런 업무를 그다지 잘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성과를 내기가 무척 힘든 일이었죠.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여야 했고요. 저는 조금 망설여져서 거절하고 다른 자매에게 시키라고 할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전에 먹고 마셨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교회에서 네게 어떤 사역을 안배해 준다면,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맡기든 저는 마음과 힘을 다해 그 사역을 책임지겠습니다. 모르는 부분이 있거나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할 것이며, 진리 원칙에 근거해 문제를 해결하고 일을 제대로 처리할 것입니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온 힘을 다해 제대로 이행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제 몫의 책임을 다할 것이며, 최소한 양심과 이성에 어긋나거나 건성으로 임하거나 몸을 사리거나 다른 이의 노동의 결실을 누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양심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준이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최소한 가슴에 손을 얹고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며, 공밥을 먹지 말고 네 하루 세끼의 값을 해야 한다. 이런 것을 두고 책임감이 있다고 한다. 자질이 좋든 나쁘든, 진리를 깨달았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너는 이런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 사역을 나에게 맡겼으니 열심히 해야 해. 항상 이 사역을 신경 쓰며 마음과 힘을 다해 제대로 해내야지. 100% 잘 해낼 거라는 장담은 못 해도 내 태도는 온 힘을 다해 잘 해내도록 노력하는 거야. 절대 건성으로 임하지 않을 거라고. 만약 사역에 문제가 생긴다면 책임을 지고 그 일에서 교훈을 얻어 제대로 본분을 이행해야겠어.’ 이것이 바로 올바른 태도이다.』(<말씀ㆍ5권 리더 일꾼의 직책ㆍ리더 일꾼의 직책(8)> 중에서) 저는 여태껏 정말 무책임하게 본분을 이행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건성으로 임하면서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일을 많이도 저질렀죠. 더는 육을 좇고 안일을 탐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본분에 책임감을 가져야 했죠. 저는 어디까지 할 수 있든, 먼저 순종하는 태도로 열심히 노력하자고 다짐했습니다. 마음과 힘을 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니 방향이 잡혔습니다. 저는 제작 원칙을 생각한 뒤, 참고 자료를 모으고 몇 개의 샘플을 만들어 다른 자매들의 의견을 들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몇 번의 수정 끝에 완성작을 만들었죠. 이렇게 실행하니 마음이 무척 편안해졌고, 예전보다 일을 잘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후, 저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육을 저버리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일상생활의 작고 소소한 일, 교회에서 맡긴 일들을 할 때도 의식적으로 신경을 쓰면서 어떻게 해야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을지 생각했고요. 이렇게 실행하니 사실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뿌듯했죠. 또 이렇게 사니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은 육을 따르고 스스로에게 여지를 주는 일이 있었지만, 제가 드러낸 패괴에 대해 예전보다 좀 더 예민해졌습니다. 그런 잘못된 태도를 깨달으면 얼른 하나님께 기도하며 육을 저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제가 또 우롱하고 기만하며 무책임하게 굴면 저를 징계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러니 조금씩 본분 이행에 부담이 생겼고, 제 책임과 본분을 다하고 싶어졌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인격과 존엄이 있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도 편안해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