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불성실함으로 인해 망가진 나

2021년 10월, 저는 새신자 양육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일주일 정도 흐르고 보니, 제가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각 방면의 진리 원칙을 숙지해야 할 뿐 아니라, 진리를 교제하며 새신자의 여러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도 훈련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리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얕고, 사람과 대화하는 것도 서툴러, 그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팀장은 저에게 단기간에 새신자의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새신자들이 가진 문제가 적지 않은데, 다 해결하려면 그들의 문제에 대해 진리도 많이 구해야 했고, 어떻게 교제해야 내용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 연구도 해야 했습니다. 대체 얼마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입니까? 저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아 팀장에게 제가 자질이 부족해 그 일은 못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제 말을 들은 팀장은 본분에 책임감을 가져야지 고생할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교제해 주었습니다. 팀장의 말에 마지못해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배에서 저는 그저 차례에 따라 형식적으로 새신자와 교제하였습니다. 새신자의 문제와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교제도 되는 대로 하는 바람에 별로 성과가 없었고, 그 바람에 예배에 정상적으로 참석하지 않는 새신자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문제를 발견한 팀장은 저보고 서둘러 그들을 돕고 붙들어 주라고 했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복음 인원이 하나님 사역의 이상 방면의 진리를 적잖이 교제해 주었는데도 예배를 안 나오는 새신자들이 내가 교제한다고 나오겠어? 거기다, 꽤 긴 기간 예배에 나오지 않은 새신자들이라 분명 교제해 주는데 시간을 많이 써야 할 거야. 분명 고생을 많이 해야 하겠지.’ 이런 생각에 저는 새신자들에게 안부를 묻는 간단한 메시지만 보냈고, 제 메시지에 답장을 안 한 사람들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두었습니다. 문제와 어려움이 많은 새신자들에 대해서는 최대한 미루다 교제하거나, 그들을 붙들어 주는 역할을 복음 인원에게 넘겨버리기도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끝내 해결되지 않은 일부 새신자들은 예배에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새신자가 예배에 나오지 않는 것을 볼 때마다 저는 마음의 괴로움과 자책감을 느꼈고, 더 많이 대가를 치러 새신자의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하려고 하니 너무 귀찮아서 그냥 그렇게 어물쩍 넘어갔습니다.

새신자 중에 천주교에서 귀의한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하나님께서 말세에 성육신으로 현현하신 사역에 대한 관념 때문에 예배에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해도 그녀는 제 연락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틀 뒤 그녀가 저에게 이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저는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천주를 믿은 지 벌써 64년이 됐습니다. 저는 주 예수를 믿지, 전능하신 하나님은 믿지 않아요.” 저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다시 오신 주 예수입니다. 말세에 현현하신 천주의 사역을 받아들여야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 후, 그녀에게서는 답장이 없었습니다. 저는 몇 번 더 연락을 시도했지만, 그녀는 저를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까다로운 문제를 팀장에게 넘겨 버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팀장은 저에게 관련된 하나님 말씀들을 보내주며 저보고 스스로 진리를 구해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갖춰야 할 진리가 너무 많았고, 어떻게 교제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연구도 해야 했습니다. 그건 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지금 그 새신자는 제 문자에 답장도 없고, 제가 시간을 들여 준비를 해가도 제 교제를 들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그녀는 내버려두고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또 매일 일 때문에 바빠서 예배에 참가할 시간이 없는 새 신자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매일 그녀에게 하나님 말씀과 찬양을 꾸준히 보내주었지만, 그녀가 매번 ‘아멘’이라고 답장할 뿐 예배에는 나오지 않자 저는 더 이상 그녀에게 하나님 말씀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일 때문에 바쁜 것 역시 실제적인 상황이니, 제가 시간을 들인다 해서 그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 역시 먼저 그녀의 어려움에 따라 합리적으로 예배 시간을 안배하고,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찾아 교제하며 그녀의 관념을 해결해 줘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너무 복잡하고 힘들게 느껴졌고,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그녀와 교제를 하지 않는다는 걸 리더가 알게 되면 분명 제가 착실히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다며 책망할 터였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그 새신자에게 두 번 정도 교제를 해주었습니다. 그래도 그녀가 예배에 나오지 않자, 저는 그녀를 진리를 간절히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더 이상 공을 들여가며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그녀를 전혀 상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본분 이행에 있어 늘 불성실하고, 어려움은 피하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또다시 관념이 있거나 실제적인 어려움이 있는 새신자를 만나면 어떻게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지 고심하지 않고 바로 팀장에게 문제 해결을 넘겨 버렸습니다. 몇 달 후에 보니, 제가 양육한 새신자 중 정상적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문제를 발견한 리더는 본분 이행에 불성실 하다고 저를 책망하고 폭로하며 조속히 바뀔 것을 촉구했습니다. 저도 육을 저버리고 성실히 새신자를 양육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새신자의 문제가 많은 것을 볼 때면, 저는 여전히 대가를 치르며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싫어했고, 저의 자질이 부족해 이 본분을 이행하기 적합하지 않다며 핑계를 댔습니다. 저의 불성실한 태도가 바뀌지 않고, 본분에 아무 성과가 없자, 리더는 저를 혹독하게 책망했습니다. “자매님은 본분 이행에 너무 불성실하군요! 새신자의 어려움에 대해서 묻는 법이 없고, 설령 문제를 알았다 해도 해결하려 정성을 들이지 않아요. 이게 어디 본분을 이행하는 겁니까? 자매님은 지금 새신자를 망치고 있어요! 만약 (그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자매님을 교체하겠습니다.” 이런 책망과 경고에 저는 두렵기도 하고 자책감도 들었습니다. 저는 왜 이 본분을 잘하지 못하는 것인지, 왜 늘 이 본분을 어렵게 느끼는지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묵상을 하다,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전혀 원칙 없이, 늘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이행한다. 이는 건성으로 하는 게 아니냐?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아니냐?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너희는 생각해 보았느냐? 너희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고, 무얼 하든 효율이 없고, 마음과 힘을 전혀 쏟지 않는다. 그러고도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많은 사람들이 마지못해 본분을 이행하고 오래가지도 못한다. 조금만 고생해도 견디지 못하고, 크게 손해를 본다고만 생각하고, 무슨 어려움이 있어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데 하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겠느냐? 무슨 일이든 건성으로 하면 되겠느냐? 양심적으로 볼 때 넘어갈 수 있겠느냐? 사람의 기준으로 평가해서도 불합격이라면 이것을 합격한 본분 이행으로 볼 수 있겠느냐?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너는 영원히 진리를 얻을 수 없고, 너의 힘쓰는 것에도 불합격인데, 어떻게 하나님께 인정받겠느냐? 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 고생을 두려워하고, 너무나 게으르고, 육적인 편안함만 탐하고 있다. 업무를 배우는 일에 대가를 치르지도 않고, 열심히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를 묵상해 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대충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수고를 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료를 찾을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알아볼 필요도 없고, 머리를 쓰거나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육적으로 전혀 고생하지 않고도 아주 손쉽게 일을 마칠 수 있다는 것이다. 네가 그를 책망하면 그는 꼭 불복하고 따진다. “저는 꾀를 부리거나 한가하게 보낸 것도 아니고, 일도 다 마쳤는데, 왜 또 흠을 잡으려 하세요? 공연히 트집 잡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본분 이행한 것만으로도 잘했는데, 왜 아직도 불만이세요?” 너희가 볼 때 이런 사람이 발전할 수 있겠느냐? 늘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면서 핑계만 가득하고, 문제가 생겨도 지적도 못 하게 하는데, 이는 어떤 성품이냐? 사탄의 성품이 아니냐? 이런 성품으로 본분을 이행하면 합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겠느냐?(<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자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다>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데 있어 너무 게으르고, 항상 육적인 편안함을 탐하며, 애는 쓰지 않고 겉으로 뭔가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그걸로 만족하는데, 이러면 결코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없다고 폭로하십니다. 저의 본분에 항상 성과가 없었던 이유는, 제가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가 너무 게으르고, 고생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새신자를 양육하려면 많은 진리를 이해해야 하고, 새신자의 여러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신경을 너무 많이 써야 할 것 같아서 늘 불성실하게 이 본분을 대했던 것입니다. 팀장은 저에게 서둘러 새신자의 어려움을 해결하라고 요구했는데, 사실 노력하면 해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여야 할 것 같자, 저는 팀장과 복음 인원에게 그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새신자가 관념을 가지거나 어려움과 문제 때문에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도, 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에게 해결의 길을 말해줘도 저는 귀찮아하며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새신자에게 하나님 말씀과 찬양을 보내긴 했지만, 그러는 것도 며칠 가지 못하고 이내 그들을 내버려두었습니다. 저는 정말 너무나 게으르고 육적인 편안함을 탐냈습니다. 본분 이행에 진심이라고는 없이, 순전히 기만을 일삼으며 교회에서 허송세월하고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하나님의 혐오와 증오를 살 일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또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지금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본분이 주어져 네가 힘을 들여야 할 때, 이는 네가 자신을 바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네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때이다. 어떤 것도 숨기거나 잔꾀를 쓰거나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된다. 여지를 남기거나 요령을 피운다면 절대 그 일을 잘 해낼 수 없다. ‘아무도 내가 요령 피운 걸 못 봤어. 정말 다행이야!’, 이것은 대체 어떤 생각이겠느냐? 너는 사람을 속이고는 하나님까지 속였다고 생각하느냐? 사실 하나님은 알겠느냐, 모르겠느냐? 알고 있다. 사실, 너와 오랜 시간 함께 지내다 보면 누구든 네 패괴와 추악한 면을 발견하게 된다. 단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뿐이지, 속으로 몰래 너를 평가하기 마련이다. 많은 이가 드러나 도태된 이유는 그를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의 본질을 간파한 사람들이 그를 폭로하고 쫓아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고 말고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하고, 양심에 따라 실제적인 일을 해야 한다. 네게 비록 결점이 있더라도 본분 이행에 효과가 있다면 도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꽤 괜찮은 사람이니까 절대 도태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여전히 본인에 대한 반성도 인식도 하지 않고, 본연의 일도 하지 않으면서 계속 건성으로 대충 임한다면, 이를 보다 못한 하나님 선민들이 너를 폭로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도태될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너를 꿰뚫어 보았고 네가 네 존엄성과 인격을 모조리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무도 너를 신뢰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너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 사람의 폐부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 신뢰할 만한 사람은 모두 인성이 있고, 인성이 있는 사람은 양심과 이성을 갖췄으니, 이들에게는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이 손쉬운 일이다. 본분을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틀림없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본분이든 책임감 없이 임한다. 늘 남들이 걱정하고 지켜보고 물어봐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본분을 이행하면서 화를 초래할 수 있으며, 일은 조금밖에 안 하고 나쁜 일을 저지를 수 있으니 득보다 실이 많다. 요컨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는 언제나 자신의 본분 이행이 합격인지, 정성으로 임하고 있는지, 건성으로 대충 넘어가려는 내적 상태를 보이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늘 건성으로 대충 임한다면 위험하다. 작게는 너라는 사람이 신용을 잃어서 다른 사람이 너를 믿지 않게 된다. 크게는 본분 이행에 늘 건성으로 임하고 하나님을 늘 기만한다면, 크게 위험할 것이다! 네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속임수를 쓴다면, 그 결과는 어떻겠느냐? 사람들은 누구나 네가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너는 순전히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고 매사에 건성으로 임하며 진리는 전혀 실행하지 않으니, 이것은 인성이 없는 것이다! 계속 그런 식으로 살면서 큰 잘못은 아니더라도 사소한 잘못이 계속되고, 그러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악인이요, 불신파에 해당되니 출교 조치를 해야 한다. 이는 무척 심각한 결과로, 바로 불신파, 악인이 완전히 드러나 도태되는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생명 진입은 본분 이행에서부터 시작된다> 중에서), 『하나님의 부탁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고, 이는 심각한 일이다!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으며,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부탁은 당연히 완수해야만 한다. 이는 사람이 이행해야 할 가장 큰 책임으로, 목숨만큼 중요한 일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부탁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심각한 배반인 것이다. 그런 사람은 유다보다 더 비참한 자로, 반드시 저주받게 되어 있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하나님 말씀의 폭로를 마주하며, 하나님께서 본분 이행에 불성실한 사람을 얼마나 혐오하고 그들에게 분노하시는지 느껴졌습니다. 그런 부류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없고, 인격과 존엄이 없어, 전혀 신임할 가치가 없습니다. 만약 계속 이렇게 회개하지 않는다면, 악인과 불신파에 속하여 도태될 터였습니다. 새신자를 양육하는 것은 중요한 사역입니다. 새신자는 이제 막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받아들였으니, 그들이 참도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서둘러 양육을 해줘야 사탄에게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간단하고 순조롭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깨우치고 이끌어 주시는 것이고, 거기다 형제자매들이 대가를 치러가며 양육하고 공급하며, 붙들어주고 도와주면서 새신자를 하나님 앞으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저는 양육 인원으로서, 새신자를 잘 양육하는 것이 저의 책임입니다. 특히 새신자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불이라도 붙은 듯 조급한 심정으로 해결 방법을 찾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저는 쉬운 일만 하려 하고 어려운 일은 피하려 하며 농간을 부렸습니다. 새신자가 문제를 만나면, 저는 간단하고 쉬운 문제만 골라 해결하고, 복잡한 문제는 내버려둔 채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더 심각했던 점은, 분명 제가 꾀를 부리고 무책임하게 본분을 이행하는 바람에 일부 새신자들이 예배에 나오지 않게 되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물러나기까지 했는데도, 저는 책임을 미루려 새신자들이 진리를 간절히 사모하지 않는다고 하거나, 저의 자질이 부족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핑계로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그렇게 불성실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제가 본분을 이행하는 모습은 사장을 위해 일하는 이방인의 그것과 같지 않습니까? 농간을 부리고, 건성으로 하루하루 보내며, 양심과 자각이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으면서도, 눈을 똑바로 뜬 채 하나님을 기만하고 속였습니다. 정말이지 교활하고 간사했습니다. 어디 인성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제가 막 하나님의 말세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를 돌아보았습니다. 당시 매일 일 때문에 바빴고, 제가 하나님 믿는 것을 막는 부모님 때문에 스트레스가 무척 커서 예배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형제자매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매번 저에게 진리를 교제해 줬고, 저의 시간에 맞춰 예배를 안배해 줬습니다. 때로는 일이 너무 바빠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면, 형제자매들은 자전거를 타고 먼 길을 달려와 저에게 하나님 말씀을 교제해 주며 저를 붙들어 주고 도와줬습니다. 그렇게 저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믿으며 진리를 추구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 저는 예배에 참석하고 본분을 이행하길 원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줄곧 새신자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새신자의 어려움을 많이 고려하고, 사랑으로 도와주며, 예배에 참석하도록 격려하여, 그들이 조속히 참도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사랑과 긍휼이 충만하시고, 최대한 사람을 구원하려 하시며, 참도를 고찰하는 모든 사람을 각별히 책임지심이 보였습니다. 한 가닥 희망이 보이는 한 하나님께서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저는 새신자에게 무척 냉정했고, 책임감이 없었습니다.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새신자의 문제를 제때 해결하지 못했고, (그러자) 어떤 이들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하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악을 행하고 있었고, 하나님을 기만하고 속이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인식한 저는 자책감을 느꼈고, 인성이 없는 스스로가 미웠습니다.

그 후, 저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너는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면서 평안하고 즐겁고 육의 편안함을 조금 얻는 것에만 만족하느냐? 그런 사람은 가장 비천한 사람 아니더냐? 구원을 보고도 구원을 얻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보다 미련한 사람이고, 육적인 것을 탐하는 사람이며, 사탄을 즐기는 사람이다. 너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어려움과 환난, 고통이 조금도 없기를 바란다. 너는 늘 이런 가치 없는 것들만 추구하고, 정작 생명은 한 푼의 가치도 없다고 여기며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각을 진리보다 앞자리에 놓는다. 너는 너무도 무가치한 사람이다! 네가 돼지처럼 산다면 개돼지 따위와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육적인 것을 좋아하는 자는 모두 짐승 아니겠느냐? 영이 없는 죽은 자는 모두 걸어 다니는 송장 아니겠느냐? 내가 너희 가운데서 얼마나 많이 말했더냐? 내가 너희 가운데서 행한 사역이 적더냐? 너희 가운데서 너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공급했느냐? 그런데 너는 어째서 얻지 못했느냐? 또 무슨 불평이 있단 말이냐? 네가 얻지 못한 것은 육을 너무 귀하게 여긴 탓이 아니더냐? 네 생각이 너무 사치스러운 탓이 아니더냐? 네가 너무 어리석은 탓이 아니더냐? 너는 이 복을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지 않았다고 원망할 수 있겠느냐? … 아무 대가도 없이 참도를 네게 베풀어 주었는데 너는 추구하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느냐? 진정한 인생을 베풀어 주었는데 추구하지 않는다. 그럼 너는 개돼지 따위가 아니겠느냐? 돼지는 인생을 추구하지 않고 깨끗함을 바라지도 않으며 인생이 무엇인지 모른 채 날마다 배불리 먹고 쿨쿨 잠만 잔다. 참도를 베풀어 주었건만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런 돼지 같은 삶을 계속하고 싶으냐? 그런 사람이라면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비루하고 저속하며, 더럽고 음란하게 살면서 추구하는 목표가 하나도 없으니 너의 일생은 가장 비천한 일생 아니겠느냐? 무슨 낯으로 하나님을 뵙겠느냐? 계속 그렇게 체험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 아니겠느냐? 네게 참도를 베풀어 주었지만 결과적으로 네가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너 자신의 추구에 달려 있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하나님의 문책하시는 말씀을 한 마디 한 마디 보며, 저는 큰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패괴 성품을 정결케 하고 변화시켜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기 위해, 입이 닳도록 이렇게 많은 진리를 선포하셔서 우리에게 공급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셔서, 각 방면 진리에 대해 무척 상세하게 교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정성을 쏟고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진리를 추구하는 데 힘쓰고, 충성스럽게 본분을 이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양심이라고는 없었고, 진리를 조금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육적인 편안함만을 탐하여 지금껏 사탄 철학 법칙에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 중이 되면 하루 종을 친다’, ‘인생은 괴롭고 짧으니, 어찌 제때에 즐기지 않겠는가?’, ‘짧은 인생 즐겁게 살자’와 같은 사탄의 철학 법칙들을 지당한 명언으로 여겼습니다. 인생은 고작 수십 년에 불과하니 자신을 잘 대우해야 하며, 자신에게 너무 큰 스트레스를 줄 필요 없이, 육이 편하고 즐거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본분을 이행할 때면 제 육이 힘들게 고생하면 안 된다는 전제하에, 쉽고 수월하게 이행할 수 있으면 그렇게 했습니다. 일단 고민을 해야 하거나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면 거부감을 느끼며 피해버리고는, 문제를 남에게 넘기거나 방치한 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본분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탓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새신자들은 예배에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사탄의 철학이 저를 점점 더 타락시켰음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편안함만을 탐하고, 진리를 조금도 추구하지 않으며, 본분을 엉망진창으로 이행하면서도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이, 결국 얻어야 할 진리도 얻지 못하고, 다해야 할 책임도 다하지 못했습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된 것 아닙니까? 저는 진정으로, 육적인 편안함을 탐하는 것은 자신을 망치는 길이고, 구원받을 기회를 끊어버리는 짓임을 실감했습니다! 사실, 본분을 이행하는 중에 어려움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께 의지해 진리를 구할 좋은 기회입니다. 어려움 덕분에 저는 진리를 구하게 되고, 원칙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생명 진입을 추구하기 좋은 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것들을 모두 귀찮은 짐으로 여기고 (남에게) 떠넘겼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는 육을 너무나 아끼느라 진리를 깨달을 좋은 기회를 너무 많이 놓친 것을 후회했습니다.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육을 저버리고 저의 본분을 성심껏 이행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거짓 리더를 폭로하는 하나님 말씀을 보고, 저는 본분을 대충 이행하는 것의 결과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항목의 사역은 한 사람이 한 달이면 끝낼 수 있다. 그런데 그 사역을 반년 동안 한다면 나머지 5개월의 지출은 손실 아니겠느냐? 복음 전파를 예로 들어 보겠다. 참도를 살펴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때, 한 달이면 그에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 후 교회에 가입시켜 계속 양육하고 공급하면 반년 안에 토대를 마련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신경 쓰지 않거나 건성으로 임하는 태도를 보이고, 리더 일꾼 역시 책임감을 보이지 않아서 결국 반년이나 끌다가 사람에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한다면, 그 사람의 생명 측면에서 볼 때 반년의 시간을 손해 본 것 아니겠느냐? 만약 대재난이 닥쳤는데 그가 아직 참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면 위험해질 것이다. 그러니 이는 그 사람에게 빚을 진 것 아니겠느냐? 그 손실은 금전적, 물질적으로 가늠할 수 없다. 너는 그가 진리를 깨닫는 것에 반년이나 지장을 주었으며, 또 그가 토대를 마련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반년이나 늦어지게 했다. 그 책임을 누가 져야겠느냐? 리더 일꾼이 그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 그 누구도 사람의 생명에 지장을 준 데 대해 책임질 수 없다.(<말씀ㆍ5권 리더 일꾼의 직책ㆍ리더 일꾼의 직책(4)>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본 저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뉘우쳤습니다. 제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거짓 리더처럼, 직무를 소홀히 하고 무책임하게 굴자, 새신자들이 예배에 오지 않게 되었고, 심지어 어떤 새신자는 문제에 대해 해결을 받지 못한 탓에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양육하는 것은 새신자를 해치는 짓 아닙니까? 물러나지 않은 새신자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의 관념을 고집하며 오랜 시간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 생명에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피해는 제가 메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당시 제가 육을 좇지 않고, 대가를 치르며, 각 새신자들의 어려움을 진지하게 대했더라면, 아마도 어떤 새신자들은 일찍 진리를 깨달아 참도에 뿌리를 내리고, 하루빨리 교회 생활을 시작해 본분을 이행함으로써 선행을 예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는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저는 마음이 괴로웠고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너무나 죄송스러웠습니다. 이것은 저의 본분 이행이 남긴 과오이자 오점이었습니다! 큰 사고를 쳤다는 생각에 너무나 후회되었고, 또 두려웠습니다. 저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본분을 이행하며 항상 편안함만을 탐하여 불성실하게 굴어 하나님의 혐오를 샀습니다. 회개하겠으니 부디 제 마음을 살펴주세요. 만약 제가 또다시 무성의하게 굴면, 부디 저를 벌하고 징계해 주세요.’

그 후, 저는 소극적이고 연약하여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새신자들을 찾아내어, 그들의 문제와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찾아 해결해 주었고, 양육 성과가 좋은 자매에게 원칙과 길을 구했습니다. 그 후, 저는 종교적 관념 때문에 예배에 참석하지 않던 새신자를 찾아, 그녀에게 연달아 여러 개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답장이 없자,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냥 여기까지 하자. 어차피 그녀에게 답장이 없잖아. 이 역시 실제적인 상황이야.’ 그 후에는 일이 바빠 예배에 나오지 않던 새신자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녀가 이번에도 저의 초대를 거절하자, 그녀에게 대가를 치르기 싫다는 생각이 또다시 들었습니다. 그때, 제가 하나님 앞에서 했던 기도와 함께 다음과 같은 하나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다하고 정직한 태도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 태도는 훨씬 더 올바른 것 아니겠느냐? 어떻게 해야 그런 태도를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겠느냐? ‘마음과 정직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이 말이 네 실제가 되도록 해야 한다. 네가 대충 건성으로 하고 싶을 때, 꾀를 부리거나 게으름 피우고 싶을 때, 마음이 분산되거나 놀고 싶을 때, ‘이렇게 하면 신뢰를 줄 수 있을까? 이렇게 하는 게 마음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일까? 이렇게 하는 게 충성심이 없는 것 아닐까? 하나님의 부탁을 저버리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자신이 늘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본분에 충성심도 없어서 하나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당시에 속으로는 이 일이 좀 문제라고 느끼긴 했지만 진지하게 문제로 대하지 않고 얼렁뚱땅 넘겼어. 그리고 이제 와서야 그게 확실히 건성으로 대충 하고,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임을 알겠어. 난 정말 양심도 이성도 없어!” 문제를 발견하고,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했다. 그러면 돌이켜야 한다! 과거에는 그릇된 태도로 본분을 이행했다. 본분을 그저 추가적인 일로 생각하며 대충 이행하고, 마음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이렇게 건성으로 본분을 대한다면 하나님께 징계와 채찍질을 내려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 이런 의지를 지니고 있어야 진실로 회개할 수 있다. 양심이 편안해지고, 본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돌이킨 것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늘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묵상해야 실행할 길이 생긴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저로 하여금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사람은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해야 하고, 농간을 부리거나 불성실하게 굴면 안 됩니다. 이런 태도를 갖춰야 비로소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는 절대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겠노라 다짐했습니다. 제가 도와주고 붙들어줬음에도 새신자가 예배에 나오지 않는 한이 있어도 저는 그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도록 책임을 다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후 저는 다른 자매를 찾아 실행의 길을 구했고, 동시에 종교 관념을 고수하던 새신자와 교제하며 제가 하나님을 믿었던 체험에 대해 마음을 활짝 열고 이야기했습니다. 뜻밖에도 그 새신자는 제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 사실 예배를 무척 좋아했지만, 몇 가지 관념과 고민이 해결되지 않아서 그랬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새신자가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을 보고 저는 감동하였고, 그녀의 관념에 대해 교제를 해주었습니다. 결국 해당 새신자는 예배에 나오겠다고 응했고, 곧 본분까지 이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를 보고 저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기쁘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 말씀의 깨우침과 빛 비춤으로 제가 자신을 인식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더라면, 저는 또 과오를 남길 뻔했습니다. 이어서, 저는 일이 바쁜 새신자를 찾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예배에 나올 것만 강요했지 그녀의 어려움은 헤아리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그녀의 실제적인 상황에 맞게 하나님 말씀을 교제하여 그녀를 도와주었고, 그녀의 예배 시간을 합리적으로 조정해 주었습니다. 그 새신자가 예배에 참석할 시간이 없을 때는, 그녀가 시간이 날 때 찾아가 하나님 말씀을 읽어주었고, 인내심을 가지고 교제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도 저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이 봤던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그녀는 기뻐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예배나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 그 새신자는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일이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이렇게 붙들어주고 도와주니, 예배 참석을 꺼리던 일부 새신자들도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마음을 바르게 먹고 하나님께 의지해 실제적으로 공을 들이자, 본분의 성과도 좋아졌습니다.

제가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서 늘 농간을 피우고 불성실하게 굴었던 것을 돌이켜보면, 비록 육은 고생하지 않았지만, 저는 늘 어려움 속에 살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했고, 본분의 성과도 나날이 나빠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버려지고 도태될까 봐 늘 걱정스러웠고 마음이 무척 답답하고 괴로웠습니다. 제가 마음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자, 저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인도하심이 느껴졌고, 본분에서도 발전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참 평온하고 편안했습니다. 저는 본분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실제적으로 대가를 치르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성령의 깨우침과 인도를 받을 수 있고, 본분에서도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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