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6)

최근 각 부류를 분별하는 내용에 관해 교제하였다. 사람의 유래에 따라 각 부류와 속성을 구분하고, 각 부류가 실생활에서 보이는 여러 모습을 통해 그들의 본질을 분별했다. 각 부류를 분별하는 법을 배우면 각 부류나 자기 자신을 올바로 대하는 방법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내용을 교제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 대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온갖 관념과 상상이 해결되지 않겠느냐? 예를 들어, 예전에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교회 사람이기만 하면,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기만 하면 아무리 악행을 저질러도, 인성이 아무리 나빠도, 성품이 아무리 교만하고 교활하며 간사해도, 죄다 형제자매로 대하면서 사랑으로 도와주었다. 이런 사람이 분별력이 있는 것이겠느냐?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의 양육을 통해 너희의 관점이 많이 바뀌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관점이 변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원칙을 가지고 각 부류를 대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각 부류를 대하는 관점과 태도가 예전과는 다소사뭇 달라지지 않았느냐? (네, 달라졌습니다.) 이런 문제에 관해 교제하기 전에는 사람이 각 부류를 분별하지 못해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다 좋은 사람이라고, 하나님 집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인성이 안 좋아도 하나님이 구원할 대상이라는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이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은 좋은 사람이 많은 것 같으냐? 아니면 나쁜 사람이 많은 것 같으냐? (제 생각엔 나쁜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교제해 주신 말씀을 듣고 다시 각 부류의 모습을 종합해 보니 나쁜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기껏해야 확실한 불신파나 기회주의자, 악령, 더러운 귀신, 그리고 확실하게 방해하고 교란하는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그나마 조금 분별해서 그들이 좋은 사람이나 형제자매는 아니라는 것을 아는 정도였다. 이제는 이런 교제를 통해 겉모습이 분명한 자들만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표출과 모습을 통해 모든 사람을 거의 분별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교제하고 나서 너희가 사람들을 만나면 예전과 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느냐? (약간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사람을 만나면 일이 생겼을 때 표출하는 모습이나 밝히는 관점에 주목해 그 사람이 사람에게서 환생했는지, 짐승에게서 환생했는지, 아니면 마귀에게서 환생했는지 가늠할 줄 알게 되었고, 사람의 본질과 속성으로 분별하는 것에 집중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을 분별할 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분별할 수도 있겠느냐? (조금은 분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측면의 주제에 대한 교제는 사람을 분별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각 부류의 행동과 관점을 분별하고 각 부류의 본질을 간파하는 데 도움이 되므로, 각 부류를 대하는 원칙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특수한 사람, 일, 사물에 직면했을 때 관념이나 상상대로 대하지 않고 기본적인 원칙을 파악하여 문제를 처리할 수 있게 되는데, 그러면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경우가 줄어든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 치우친 생각이나 관점을 지닌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자질이 부족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없다고, 혹은 그들이 설교를 많이 못 듣고 기초가 부실하니 그들을 양육하고 도와주는 데 많이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교제를 통해 짐승에게서 환생하거나 마귀에게서 환생한 두 부류를 분별하게 되었으니, 예전의 어리석은 행동은 그만두고 더 이상 쓸데없는 노력은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진리 원칙대로 사람을 대할 수 있겠느냐?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치우치게 실행하지는 않겠느냐? (그 사람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아보지 못하면 치우치게 실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치우치게 실행하겠느냐? 만약 그가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 많은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고 대가를 치를 수 있거나 버릴 줄도 안다면, 그리고 언제나 옳은 말을 하고 항상 베풀며 남을 돕는다면, 인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사람은 선량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비정상이라서 항상 극단적인 행동이나 초자연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이런 자를 분별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고 있느냐? (저번에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서야 그런 사람은 마귀에게서 환생한 사람의 족속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본질이 마귀라는 것을 규정하고 간파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일상적인 모습이나 현 상태를 보고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합당한지 확정할 수 있겠느냐? 이는 사람을 대하는 원칙과 관련되는 문제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를 어떻게 대해야 합당하겠느냐? 그가 대체로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교회 사역을 교란하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도 않는다면, 그를 올바로 대하고 봉사할 수 있으면 하게 해라. 봉사는 하지도 못하면서 남을 교란하며, 이미 대다수 사람이 그의 모습과 표출을 간파해서 그의 본질을 마귀라고 단언할 수 있을 때 제명 처리해도 늦지 않다. 이것이 원칙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원칙이니, 마음속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나중에 어떻게 처리하든, 처리 시기는 적절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를 접하지 않았고 더구나 간파하지도 못했는데, 네가 그를 간파했다고 해서 진리를 교제하지 않고 분별에 관한 말도 없이 곧장 그를 규정하여 처리한다면 이는 너무 경솔한 행동이다. 그의 본질을 간파했다고 그에게 반감부터 품고, 기회를 봐서 그를 책망하고 훈계한다면, 또는 늘 그자를 겨냥해서 말하고 행동하며 진리를 교제한다면, 이게 바람직한 행동이겠느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 바람직하지 않으냐? (그를 그렇게 대하면 많은 사람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사실을 바탕으로 그자의 본질을 드러내고 폭로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자를 분별하고 나서, 그를 폭로하고 해부하거나 책망하고 훈계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면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지만 교란하지 않고 봉사할 수 있다면 봉사하게 해야지, 그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책망하고 훈계만 한다면 그의 본분 이행에 지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원칙이 없어진다. 마귀에게서 환생한 자나 짐승에게서 환생한 자를 대할 때 네가 오랜 시간 접하고 관찰하여 그들의 본질을 간파했다고 하더라도 지혜로와야 한다. 원칙에 따라 대하면서 지혜를 발휘하는 것은 괜찮지만, 원칙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 원칙에 따라 대하는 것에는 많은 세부 사항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가 진리를 싫어한다는 것, 본질은 마귀의 족속이라는 것을 간파하더라도 늘 흠을 들추거나 트집을 잡아 책망하고 훈계하거나 걸핏하면 그를 폭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아직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두서를 잡지 못해 왜 자기를 책망하고 겨냥하는지 알지 못하는데 네가 그렇게 행동하면 그의 본분 이행에 지장을 줄 것이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 네 말과 행동이 옳다고 해도 네 그런 행동은 효과는커녕 부작용만 낳을 것이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어떤 부류를 대하든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 개인적인 느낌대로 행동하지 마라. 약간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은 괜찮지만, 반드시 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하면 첫째, 체계적이고 원칙적이니 쉬이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고, 둘째, 네가 제멋대로 나쁜 짓을 일삼거나 경거망동하는 자가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부류를 대하든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가 마귀에 속하든, 짐승에 속하든, 아니면 인간에 속하든 원칙대로 대해야 한다. 이 부류를 반드시 분별할 줄 알아야 하며 그에 대한 원칙을 파악해야 한다. 이 일을 치우치게 이해하면 안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절대 방해하는 짓은 하지 말아라. 만약 방해하고 교란하는 짓을 한다면 너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다. 이는 사람이 해야 할 행동이 아니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예전에 짐승에게서 환생한 부류와 마귀에게서 환생한 부류, 이 두 부류 속성을 가진 사람의 본질에 해당하는 모습에 관해 교제하였다. 이를 통해 각 부류가 겉으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본질이나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속성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의 겉모습은 단정하고 점잖으며 선량해 보일 수도 있고, 지적이고 교양 있으며 신분이 높고 멋져 보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그 사람이 존엄하고 위대해서 비범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겉모습이 어떻든 그것이 그의 본질을 규정하는 근거는 아니다. 그의 외모가 어떻든, 키가 크든 작든, 뚱뚱하든 말랐든, 피부색이 어떻든, 또한 그의 생활이 부유하든 빈곤하든, 이것들이 한 사람의 본질이 대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한 사람의 본질에 대한 규정은 인간의 전통 문화나 덕행의 기준에 근거해서는 안 되며, 각 역사적 시대에 사람이 정리한 좌우명이나 명사의 명언, 혹은 사람을 미혹하는 집권당의 말에 근거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무엇에 근거해야겠느냐?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하고,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근거로 각 부류의 본질을 평가하고 판단해야 한다. 절대 한 사람의 외모나 그의 은사,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근거로 해서는 안 되며 물론 그 사람이 사회나 집단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나 하고 있는 역할을 근거로 해서도 안 된다. 이런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다. 한편으로는 진리를 근거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와 그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지를 근거로 해야 한다. 진리를 근거로 한 사람의 본질을 분별하고 그의 속성을 판단하는 것보다 정확한 것은 없으며, 오차가 있을 리 없다.

짐승에게서 환생한 부류와 마귀에게서 환생한 부류, 이 두 부류의 모습에 관해 다 교제했으니 이제는 진정한 사람에게서 환생한 부류의 모습에 관해 교제하겠다. 가장 중요한 내용을 교제할 차례다. 짐승에게서 환생한 부류는 짐승에게서 환생한 부류의 모습과 특징을 가지고 있고, 마귀에게서 환생한 부류는 마귀에게서 환생한 부류의 모습과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서 환생한 사람도 그에 상응하는 모습과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분명 그럴 것이다. 진정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인성의 모습과 특징에 관해서는 우리가 예전에도 다룬 바 있다. 오늘 교제하고자 하는 내용은 사람에게서 환생한 부류의 구체적인 모습과 특징이다. 본격적으로 교제하기에 앞서 먼저 다같이 생각해 보자. 이 부류의 속성이 사람이라면 사람의 기본적인 특징은 무엇이겠느냐? 혹은 네가 오랫동안 사람들과 접하고 왕래하면서 관찰한 사람의 속성을 가진 부류의 특징은 무엇이냐? 어떤 모습이 보이더냐? 너희가 먼저 말해 보아라. (사람의 속성을 가진 부류에게는 양심과 이성이 있습니다. 가령 잘못을 저지르거나 남에게 미안한 일을 하거나 혹은 진리에 위배되는 일을 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을 것입니다.) (이런 부류는 최소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으며 긍정적인 것을 사랑하고 부정적인 것을 혐오합니다. 양심과 이성이 건전하죠.) ‘사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라는 것은 제법 높은 기준인데, 진리를 접해본 적이 없을 때 이런 부류는 어떤 인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겠느냐? 그의 언행이나 됨됨이와 처세에 어떤 특징이 있겠느냐? 어떤 정상적인 인성을 보이고 표출하겠느냐? 다른 사람과 접하거나 왕래할 때 그의 어떤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그를 긍정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겠느냐? (그는 비교적 이성적이고 됨됨이가 선량하며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해치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남을 해칠 마음을 먹지도 않고요.) 너희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런 비교적 인성에 부합하는 긍정적인 모습, 즉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모습이다. 마음씨가 선량하고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거나 해치지 않는 것, 비교적 신용을 지키고 책임감이 있으며 남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것, 긍정적인 것을 동경하고 부정적인 것을 혐오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인성의 긍정적인 모습들이다. 또 생각나는 것이 있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것도 있습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인성과 무관하다. 우리는 주로 일을 처리하는 인성의 각종 관점, 그리고 처신하거나 사람을 대할 때의 본질적인 모습,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최소한의 원칙 등의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이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인성의 긍정적인 모습은 많지 않다. 인간 중에 처신할 줄 아는 사람이 너무 적은 것 같구나. 어쩐지 자기가 처신에 실패했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했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긍정적인 인물을 연기하는 사람이 어떤 일에서 표출하는 관점, 모습, 태도를 볼 때, 배우가 연기나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이는 그가 이런 측면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건달이나 깡패, 조폭 두목, 매춘부, 음탕한 여자 혹은 유명인, 위인을 연기하라고 하면 정말 연기를 잘한다. 그들의 몸짓이나 동작 하나하나, 사소한 말투와 행동, 심지어 눈빛 하나까지 정확하고 섬세하게 연기한다. 심지어 악역을 연기하면 그를 극 중 악당으로 오해해서 그를 만났을 때 때리려 하거나 침을 뱉는 관객이 있을 정도이다.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극 중 악당을 실감 나게 연기하는 그를 보아라. 그럼 좋은 사람을 연기할 때는 어떠냐? 사람들이 그의 연기를 통해 깨달음을 얻어서 어떻게 하면 인성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알게 할 수 있느냐? 이런 배우는 정말 없다. 인간은 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방법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각본가나 감독은 물론 관객도 아는 게 없어서 인성을 갖췄다는 게 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속 연기가 공허하기 짝이 없다. 예를 들어 보자. 공산당 당원이 죽기 직전 눈을 감으면, 관객은 “안 죽은 게 분명해. 아직 당비도 안 냈는걸!”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과연 일초도 안 돼서 다시 눈을 뜨고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속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며 이렇게 말한다. “여기 내 당비요. 당에 누가 될 순 없습니다. 걱정 마십쇼. 저세상에 가서도 반드시 당에 충성할 겁니다. 죽어도 변함없이요!” 그러고 나서야 이승을 떠난다. 이것이 바로 영화나 드라마가 만들어낸 인성을 가진 사람인데, 관객의 눈에는 사실 공허하게 보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이 그렇게 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인간은 진정한 인성이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에 대한 기준도 정하기 어려워서 너무 높고 공허하게 정하거나 갈피를 잡지 못해 아무렇게나 정해 버린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진정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인성은 매우 단순하다. 어느 정도로 단순하겠느냐? 네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고, 너도 지닐 수 있을 정도이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이냐? 전혀 공허하지 않고 무척 실제적이며 진실하고 객관적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무척 객관적이고 실제적이다 보니 사람은 이를 몹시 평범하고 거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더 나아가 이것을 인간이 갖추어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고급스럽고 당당하며 품위 있는 것을 장려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진정한 인성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상 인성의 모습이 너무 실제적이고 일반적이며 평범하다며 이를 멸시한 채 지식만 추구하고 숭상한다. 이러다 보니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사악한 조류가 사회 전체에 형성되었다. 진정으로 인성을 갖춘 사람조차도 이렇게 처신하는 사람을 진정한 사람, 인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의 사악한 조류가 장려하는 소위 고상한 사람, 비범한 사람이 되는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일부 인성을 지닌 사람의 인성 본질이 부정되고 은폐되는 것이다. ‘은폐’란 무슨 뜻이겠느냐? 아무도 널 인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슨 일을 하든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무시당하며, 사람들 속에서 재능을 펼치거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가 없고, 특기를 발휘할 기회도 없는 것이다. ‘부정’의 의미는 네 정상 인성이 패괴된 인간 사이에서는 거론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들은 인성을 지니는 것을 장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을 장려하느냐? 기회를 잘 살릴 줄 아는 것, 요령을 피우는 것, 비위를 잘 맞추는 것, 거짓말로 속일 줄 아는 것, 낯 간지럽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줄 아는 것을 장려한다. 네가 하는 진실한 말은 이 사회에서 통하지 않는다. 네 인성이 아무리 좋아도 이 사회에서는 그런 것을 장려하지 않고 전부 부정하기만 할 뿐이다. 네가 긍정적인 말, 정의로운 말, 바른 말, 양심적인 말을 하고, 올바른 편에서 이성적인 말을 하면 그들은 너를 배척하고 부정하며 폄훼하며,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비꼬고, 빈정대며 모욕하기도 한다. 그런 다음에는 모든 사악한 세력과 힘을 한 데 모아 너를 공격하고 따돌려서 결국 네가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창피를 당하게 하고 스스로 부정하게 만든다. ‘난 글렀어. 사회의 조류를 따라가지 못하겠고 이 사람들도 도무지 적응이 안 돼. 난 음모도 모르고 간계나 술수도 쓸 줄 모르니까 이 집단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거야.’라며, 열등감이 생기고 그 집단에 융화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실 너는 그들의 처세 철학, 일 처리 수단과 방식, 그리고 생존 방식에 융화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악한 조류, 사악한 집단에 부정당하고 나면 너는 자신의 인성을 부정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적응하고 그들을 따라 이 사회에, 이 사악한 집단에, 그리고 이 사악한 조류에 융화되려 한다. 그들이 쓰는 술수나 음모, 간계를 배우고 그들의 아첨하는 말, 낯간지러운 말, 마음에도 없는 말을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아무리 배우고 공을 들여도 결국 그건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닐뿐더러 원하는 일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말을 할 때마다 마음에 없는 말이라고 느끼고, 행동할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으니, 이것이 네가 해야 할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다. 매일 이렇게 가면을 쓰고 살면 겉으로는 행동이나 말 혹은 생각이나 관점 면에서 이미 사악한 조류와 패괴된 인간에 융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고통스럽고 답답하며 울분이 치민다. 이런 생활을 체험하고 나면 너는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우받기를 갈망하게 되고, 긍정적인 것과 빛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대체 어떤 인성의 특징을 가졌길래 사람들과 사악한 조류 속에서 이런 느낌을 받고 이런 경험과 체험을 가질 수 있겠느냐? 사실 무척 간단하다. 양심과 이성과 같은 인성 본질을 갖춘 사람이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면 이런 경험과 체험을 하게 된다.

인성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두 가지는 양심과 이성이다. 이 두 가지는 평소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다 보니 새로울 것은 없지만 사람에게 무척 중요한 것이자, 한 사람이 사람의 속성을 지녔는지 판단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양심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느냐? 예전에 내가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일종의 작용이 양심이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요구로서 주로 처신의 원칙, 처신의 마지노선 측면에서 발현된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면, 한 사람이 처신하는 신조가 무엇인지, 됨됨이와 처세의 원칙이 무엇인지, 어떤 인성을 표출하는지로 사람에게 양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할 수 있다. 방금 내가 양심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냐고 물었을 때 너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너희는 너희 생각에 심오하다고 생각하는 진리에만 집중하며, 이런 진리는 너무 사소하고 평범하며 보잘것없어서 거론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전혀 거들떠보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한 사람에게 양심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성 속에 다음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는 뜻이다. 하나는 올곧음이고 다른 하나는 선량함이다. 한 사람이 선량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겉모습으로 분간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의 마음씨가 선량하다면 교류하면서 알게 된다. 한 사람이 올곧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무엇을 근거로 판단하느냐? 그의 됨됨이와 처세 원칙을 근거로 한다. 만약 그의 됨됨이와 처세가 간사하거나 교활하고, 음험하거나 노련하며 음흉하다면 그 사람은 절대 올곧은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의 됨됨이와 처세가 단순하고 직설적이며 솔직하다면, 다른 사람과 가식 없이 이야기하고, 교활하거나 간사하게 굴지 않고 교류한다면, 사실을 근거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구분한다면, 긍정적인 것을 지키면서 사악한 세력과 타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무척 올곧은 사람이다. 만약 한 사람이 올곧고 선량하다면 그 사람이 바로 양심을 지닌 사람이고 최소한의 인성 특징을 갖춘 사람이다. 인성의 또 다른 특징은 이성이다. 이성 역시 우리가 자주 언급하는 용어이자 한 측면의 주제이지만 이성이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한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어떤 내용이 이성에 포함되고 어떤 모습이 이성적인 모습인지 분명히 알고 있느냐? 대부분 아직 잘 모르고 있으며, 이 측면의 개념도 아직 비교적 모호하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을 보고 이성을 지녔다고 하느냐? 올바른 입장을 가지고 해야 할 말과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성을 지닌 모습이다. 만약 네가 인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네 언행에 적정선이 있을 것이고, 현재 환경에서 네 신분과 지위에 따라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 말을 어떤 입장에서 말하고 그 일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하는지 알 것이다. 이것들에 대한 기준과 적정선이 네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즉, 네가 적절하게 말하고 행동하도록 네 이성이 네 말과 행동을 단속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남들에게 이성이 있고 적정선이 있으며 흠잡을 데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니 사람들이 이를 통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네 언행이 네 자질이나 교육 수준, 나이에 완벽하게 걸맞든 그렇지 않든, 최소한 네 마음속에는 마지노선이란 게 있고 자신을 통제하고 있는 하나의 기준이 있어서 네가 이성적인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바로 이성을 지닌 모습이다. 이성을 지닌 사람은 어떤 사람과 마주하든, 그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지위가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기분에 따라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으며 자신에 대한 유불리를 따지지도 않는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를 단속할 수 있는 하나의 제약, 하나의 기준 혹은 마지노선이 있어서 의도적으로 억지를 쓰거나 생트집을 잡는 법이 없다. 간혹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 부적절한 표현을 쓸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말은 억지나 황당한 논리가 아닌 내세울 수 있고 성립될 수 있는 말이다. ‘성립된다’는 게 무슨 뜻이겠느냐? 그가 하는 말이 꼭 진리에 부합하지는 않더라도 많은 사람이 그의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고 보고 옳은 것으로 공인하여 반대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이성을 지닌 사람이다.

양심과 이성, 이 두 가지에 관해 확실하게 교제했다. 인성을 지닌 모습에는 주로 다음의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양심을 지닌 모습이고, 하나는 이성을 지닌 모습이다. 대답해 보아라. 이것이 헛된 모습이냐? (헛되지 않습니다.) 무척 진실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무척 진실하고 헛되지도 않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런 모습을 장려하지 않겠느냐? 양심을 지닌 사람은 올곧고 선량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올곧고 선량한 사람은 사악한 조류나 사악하고 패괴된 인간에게 반감을 사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비주류라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한다. 네가 올곧고 선량하다면 그들이 네게 물을 것이다. “올곧고 선량해서 뭐 해요? 당신에게 지식이 있습니까? 사회적 지위가 있습니까? 아니면 사회적 명성이나 세력이 있기라도 합니까?” 네가 “제겐 명성이나 세력 같은 건 없어요. 단지 올곧고 선량할 뿐이죠.”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이 너를 비웃고 싫어할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너의 양심이나 올곧음, 선량함은 밑천이 아니다. 지식이나 지위, 명성, 세력이 없으면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지닌 양심이 밥 먹여 주나요? 그런다고 뭘 할 수 있겠어요? 음모나 간계를 쓸 줄 아나요? 아니면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나요? 사람을 구슬리거나 매수할 수나 있나요?” 너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한다. 양심을 지니고 있고, 올곧고 선량한 측면의 인성을 갖추고 있는 너는 사회의 사악한 조류와 관련된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 조류를 따르지 않을 테니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이고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것이다. 그들이 너를 왜 배척하려 하겠느냐? 많은 사람이 사악한 조류를 숭상하여 그 사악한 조류가 사회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어떤 일이든 양심을 중시하면서 공정하고 원칙적으로 처리한다면 사람들이 너를 별종이라고 생각하고 배척할 것이다. 네가 교회에서 말하고 행동할 때 양심에 따라 진리 원칙을 견지하면서 서슴없이 악인을 폭로하고 해부한다면 마귀의 족속들이 버티지 못하고 드러날 것이며 그들의 음모와 간계, 진리를 증오하는 사탄의 본성이 완전히 밝혀질 것이다. 그래서 마귀의 족속들이 교회에서 진리 원칙을 견지하는 사람을 무척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 보면 배척하고 억압한다. 그리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일어나 자기를 폭로해서 드러내고 도태시킬까 봐 몹시 두려워한다. 그들은 사탄의 본성에 지배되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 마귀의 족속이 설 자리는 없다. 하나님 집은 진리가 권세를 잡고 있고 하나님이 권세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 세상은 다르다. 이 세상은 무신론이라는 사악한 조류가 득세하고 있어서 인성을 지닌 사람은 사악한 조류나 사악하고 패괴된 인간 사이에서 설 자리가 없다. 그런데 그들 중 우두머리나 잘난 사람, 이른바 엘리트는 항상 악랄하고 음험하며 교활한 술수를 쓰는 사람이다. 인성을 지닌 사람은 그가 어떤 자질이나 은사, 특기, 재주를 가졌든 배척의 대상이 되니 빛을 볼 기회가 없다. 바른말을 하거나 공정하고 원칙적으로 행동하기만 하면 악인과 마귀가 그를 괴롭힌다. 그래서 마귀의 족속인 사악한 인간은 양심을 등한시하고 오직 인성을 지닌 사람만이 양심을 갖췄다고 하는 것이다. 이성이라는 측면과 관련하여, 어떤 일이 일어나든 이성적으로 대하면서 공정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이성을 지닌 모습이다. 정이나 명성, 지위에 기대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통제하지도 않는다. 즉 한 가지 일을 이성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 일이 맞으면 맞는다고, 틀리면 틀렸다고, 옳으면 옳다고, 그르면 그르다고 공정하게 평가하고 처리한다. 또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인성의 도덕적 마지노선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이성을 지닌 사람의 모습이다. 양심과 이성, 이 두 가지는 사회에서 통하지 않는다. 특히 사악한 국가나 사악한 조류에서는 더더욱 통하지 않고 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양심과 이성이야말로 정상 인성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이며,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특징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특징을 갖춰야만 진정한 사람인 것이다. 만약 네가 양심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대단히 원칙적으로 처신하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할 것이다. 너와의 관계가 어떻든, 네게 해를 끼친 적이 있든 없든 그 사람을 올바로 대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올곧은 측면의 인성 특징이다. 또한 네가 선량한 측면의 인성 특징을 지녔다면 사람을 대하거나 일을 처리할 때 어느 정도 선이란 게 있을 것이다. 이 선이 네가 말하거나 행동할 때 양심을 어기지 못하게 제한해 준다. 예를 들어 악인은 불합리한 말을 하고, 억지 논리를 펼치며, 시비를 전도시키고 사실을 왜곡한다. 그리고 자기한테 도움이 안 되거나 자기에게 해를 끼친 적이 있는 사람, 자기를 겨냥했던 사람에게 앙심을 품고는 어떻게 해서든 괴롭히고 보복할 기회를 찾는다. 하지만 인성을 지닌 사람은 비록 자기에게 해를 끼치거나 자기를 곤경에 빠뜨린 적이 있는 사람에게 보복하고 싶고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에 일순 충동적으로 “그가 미워 죽겠어요!”라고 모진 말을 할 때도 있지만, 그는 양심 속의 올곧음과 선량함을 지녔기 때문에 막상 보복할 기회가 생겨도 마음이 약해지고 여려져서 차마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독하게 굴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 미워하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이 선량한 사람이다. 만약 너를 곤경에 빠뜨리고 네게 해를 끼친 적이 있는 사람에게 보복해서 원수가 징벌받고 죗값을 치르는 것을 볼 기회가 생긴다면 네가 정말 보복할 수 있겠느냐? 네가 화가 났을 때는 “그에게 꼭 보복하고 말겠어요. 그는 아주 나쁜 자식에 악질이거든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보복할 기회가 생기면 차마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됐어요. 이미 지난 일인데요 뭘. 보복은 이제 그만둘래요.” 너는 그에게 끝까지 따지고 들지 않을 것이고 구태여 원수의 징벌이나 불행한 말로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또 마음속으로 늘 증오하면서 원한을 품고 살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그 증오마저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씨가 선량한 모습이다. 선량함은 양심을 지닌 자의 특징적인 모습이자 사람의 속성을 가진 자의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일부 사람들에게는 선량함이 하나의 약점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이방인들은 네가 나약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독해야 해요. 마음에 독기를 품어야 합니다. 정말 보복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직접 응징해 줘야 해요. 그놈의 피를 봐야 합니다.”라고 꼬드기기까지 한다. 하지만 너는 이런 생각을 한다. ‘그자의 피를 본다는 건 악행을 저지르는 거잖아? 그가 살아 있어도 나한테는 아무런 영향이 없어. 그의 지나친 행동으로 내가 피해를 보기는 했지만 다 지나간 일인걸.’ 시간이 흐르면 그를 미워하지 않게 된다. 어떤 사람은 너를 보고 너무 무르다고, 독기가 없다고 한다. 네가 생각해도 이상하긴 하다. ‘나는 왜 독하지 못할까? 어째서 원수에게 늘 마음이 약해지고 앙심을 품지 못할까?’ 일부 사람들은 선량한 마음씨를 인성의 약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는 인성의 특징 중 하나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인성의 특징에 포함되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인 양심과 이성에 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이어서 그중에서 가장 놓치기 쉽거나 혹은 의식조차 한 적 없는, 가장 구체적인 두 가지 측면에 관해 교제해 보자. 만약 한 사람이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췄다고만 이야기한다면 사람에게는 다소 개괄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모습을 지녀야 진정으로 양심과 이성을 지닌 것인지 단정하기 어려울뿐더러, 그가 정말 정상 인성을 지닌 사람인지 판단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양심과 이성의 두 가지 측면의 구체적인 모습을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두 가지 측면에서 교제해 보겠다. 그것은 바로 인성 본질을 지닌 사람은 첫째, 시비에 밝고, 둘째, 옳고 그름도 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을 갖췄는지 여부는 한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갖췄는지를 잘 나타내준다. 즉, 한 사람의 인성 속에 양심과 이성이 갖춰져 있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해부해 주는 것이다. 시비에 밝고, 옳고 그름을 아는 이 두 가지 측면을 갖추고 있어야 한 사람이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었다는 것을 진정으로 의미한다. 만약 이 두 가지 측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스스로 양심과 이성을 지녔다고 한다면 이는 거짓말이다. 사실과 다르다. 먼저 시비에 밝은 측면부터 살펴보자. ‘밝다’는 명백하다, 알다, 깨닫다, 이해하다라는 뜻이다. ‘시비’는 무슨 뜻이냐?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옳고 그름을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예를 들어 보자. ‘인간은 하나님이 지었다’는 말이 옳으냐? 그르냐? (옳습니다.) ‘인간은 유인원이 변한 것이다’는 말은 옳으냐? 그르냐? (그릅니다.) 어떤 관점이 옳고, 어떤 관점이 옳지 않은지 분별하고 판단할 줄 아는 것이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유인원이 변한 것이다.”라는 마귀의 말을 듣고서 “옳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셨어요.”라고 한다면 너는 이 사실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옳고 그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옳고 그름과 시비에 차이가 있느냐?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말은 옳으냐? 그르냐? (옳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자기 손에 달렸다’는 말이 옳으냐? 그르냐? (그릅니다.) ‘사람의 수명은 사람의 건강 관리에 달렸다’는 말이 옳으냐? 그르냐? (그릅니다.) ‘사람의 수명은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는 말이 옳으냐? 그르냐? (옳습니다.) 옳고 그름을 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제 시비에 밝다는 말을 살펴보겠다. 방금 ‘시비’가 무슨 뜻이라고 했느냐?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보자.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긍정적인 것입니다.) 황금만능주의는 어떠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누가 예를 더 들어 보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다’는 긍정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향을 피우고 부처에게 절한다’는 어떠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진리를 구하며 일한다’ (긍정적인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다’ (부정적인 것입니다.) 어떤 일이 긍정적인 것이고, 어떤 일이 부정적인 것인지 알고, 어떤 관점이 올바르고 어떤 관점이 올바르지 않은지 판단할 줄 아는 것을 시비에 밝고,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식견과 인식을 지니면 마음속에 이런 것들에 대한 분별력이 생기는데 이런 사람이 바로 인성의 특징을 지닌 사람이다. 시비에 밝고, 옳고 그름을 안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사람의 인성에 이런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에 대한 분별력이 있다는 것이며, 어떤 일이 옳은지 그른지 마음속에 의식이나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설령 진리를 들어본 적이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해도 인성 속에 이런 분별력이 갖춰져 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없어도 속으로는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것인지 알고, 부정적인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마음속에 혐오감이 들 경우, 그것을 버리고 순종하지 않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사람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그다지 분명하게 분별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에 대해 각각 다른 느낌이 들고 그에 대해 각각 다른 태도를 취한다. 예를 들어 인성을 지닌 사람이 사회의 사악한 조류를 보면 마음속에 심한 혐오감이 들면서 그것은 바른길이나 긍정적인 것이 아니며, 사람이 따르거나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록 그런 사회 환경에서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사악한 조류를 따르긴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를 경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경멸하는 동시에 어떻게든 기회를 틈타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거나 도피해서 사악한 조류를 따르지 않으려 한다.

시비에 밝은 것은 한 사람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다. 시비라는 것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에 연관된다면 긍정적인 것에는 어떤 게 있고 부정적인 것에는 어떤 게 있는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경배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 그리고 본분을 이행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 등이 모두 긍정적인 것에 속합니다. 거짓말로 기만하는 것,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며 배반하는 것은 모두 부정적인 것입니다.) (긍정적인 것은 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진리에 부합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각 측면의 성과,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사람의 진실한 인식은 모두 긍정적인 것으로 진리에 부합합니다.) 긍정적인 것이 헛되다거나 숭고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사실 긍정적인 것은 긍정적이고 올바르며 사람에게 유익한 각 유형의 사람과 일이다. 사람에게 유익한 모든 것, 사람의 정상적인 생활에 유익하여 해롭지 않은 모든 것이 긍정적인 것에 속한다. 예를 들어 자연법칙이 긍정적인 것이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이며 긍정적인 것이다. 진리에 속하는 모든 것은 긍정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명과 진리를 공급하고, 인간을 경영하며 구원하는 사역 속에 포함된 내용은 모두 진리와 관련된 긍정적인 것이다. 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 하나님의 모든 말씀, 그리고 각 진리의 실행 원칙도 모두 긍정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경영하는 사역 이외에도 인간의 생존에 유익하고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 긍정적인 것이 많이 있는데, 너희가 알아볼 수 있겠느냐? 판별할 수 있겠느냐? 그것을 내면 깊이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겠느냐? 그것에 순종하고 적응하며 그것을 준수할 수 있겠느냐? 예를 들어 사계절의 규칙은 긍정적인 것이냐? (그렇습니다.) 봄에는 날씨가 따뜻하고 꽃이 핀다. 그리고 만물이 깨어나고 소생하며 얼음과 눈이 녹는다. 이것이 긍정적인 것이냐? (그렇습니다.) 여름에는 태양이 작열해서 햇볕이 뜨겁다. 그리고 만물이 빠르게 자라나 사방을 비추는 햇볕을 쬔다. 이것이 긍정적인 것이냐? (그렇습니다.) 가을에는 무덥던 날씨가 서서히 쾌청해진다. 온갖 식물이 무르익어 알곡과 과실을 맺으니 소출이 생긴다. 이것이 긍정적인 것이냐? (그렇습니다.) 겨울에는 기온이 떨어져 날씨가 점점 추워진다. 눈발이 휘날릴 때도 있다. 다른 계절만큼 즐겁거나 쾌적하고 자유로운 계절은 아니지만 만물은 겨울에 비축할 수 있다. 인간 역시 겨울에는 휴식을 취하며 원기를 회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규칙은 긍정적인 것이냐? (그렇습니다.) 이른 아침 해가 뜨면 아침이 밝았으니 일어나서 생활과 생계를 위해, 그리고 삶을 이어가기 위해 일과를 시작하라고 종달새와 아침 새가 지저귄다. 이것이 긍정적인 것이냐? (그렇습니다.) 인간이 아침 새와 종달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깨어나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다. 날이 저물면 온갖 곤충과 생물이 그들의 규칙에 따라 먹이를 구하러 나온다. 개중에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갖가지 활동을 시작하는 것도 있다. 이 시간에 인간은 조용히 잠든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말이다. 온갖 생물의 울음소리와 야간 활동과 함께 인간은 꿈나라로 간다. 이토록 달콤하고 행복하며 평안하게 잠드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냐? (그렇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것은 사람에게 늘 일어나는 일이다. 너는 그것들의 여러 정보와 신호를 받을 수 있고 그것들이 네 생활에 주는 이점이나 네 생존 과정에 가져다주는 각 측면의 변화, 그리고 네게 미치는 영향을 느낄 수 있다. 만약 주변에 존재하는 각종 긍정적인 것들에 올바로 반응하고 그것을 올바로 받아들이며 올바른 방식으로 대한다면 이는 너라는 사람이 시비를 어느 정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이라는 생존 환경에 반응하고 그것을 느끼며 지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주변 만물이 네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혹은 네 생활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네가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이 실질적이라 사실, 만물이 네게 주는 유익과 네 모든 측면에 미치는 영향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가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이런 느낌을 갖는다면 너는 시비를 깨닫고 인성을 갖춘 사람이다. 긍정적인 것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에 적응하고 순응할 수 있는 너는 그것들과 공존하면서 반감을 품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깨달아 이 모든 긍정적인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긍정적인 것의 존재에 대해 더욱 감사할 것이다. 그러면 그와 상응하여 네 마음속에 부정적인 것에 대한 반감과 혐오가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환경 오염과 과도한 채굴이 있습니다.) 환경 파괴, 환경 오염, 무분별한 벌목, 과도한 채굴과 개발은 모두 부정적인 것이다. 이것들 외에 또 어떤 것을 보면 부정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것 혹은 그 일에 대해 확실하게 싫은 마음이 드느냐? 인간은 늘 자연을 정복하려 하는데 이것이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폭풍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에 늘 이런 생각만 하는 사람이 있다. ‘폭풍이 몰아치면 집이고 밭이고 쑥대밭을 만들어 놓으니 어떻게든 벽을 세워서 막아야 해. 인류의 과학기술이 발전했고 인간의 능력이 강해졌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이것이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니 어떤 마음이 드느냐? (사람은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분수도 모르는 것이다. 어떤 지역은 초원이 제법 많다 보니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목축민은 초원에서 유목민의 삶을 삽니다. 사시사철 좋은 음식은 별로 먹지도 못하고, 더구나 일 년 중 절반을 늘 야외에서 보내면서 초원에서 소나 양을 키우죠. 이런 고단한 삶은 언제쯤 끝나는 겁니까? 어떻게든 목축민의 생활을 개선할 방법을 강구해야 해요. 초원과 목장에 건물을 지어서 도시를 조성해야 합니다. 그러면 목축민은 방목하며 살지 않아도 되니 삶이 나아질 것이고, 국가와 정부에 감사하게 될 거예요.” 이것이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부정적인 것이라는 게 느껴지느냐? 초원에 건물을 지어서 도시를 조성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과 관점이다.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는 발상이다!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는 ‘그건 정부가 할 일이지 우리 소관이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이 일에 대해 무감각한 것이다. 또 인간은 늘 우주 산업을 발전시켜서 달, 화성, 목성을 탐측하려 하고, 태양을 근거리에서 탐사하려고 한다. 결국 온도가 너무 높아 가지 못했다. 우주비행선을 만들어 지구의 중력을 극복해서 달이나 화성에 가는 것이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과 관련된 것 중에 긍정적인 것이 있느냐? 긍정적인 주장이 무엇이 있느냐?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의 자연법칙에 부합하느냐? (컴퓨터같이 과학적 수단으로 발명되어 제작된 도구들은 우리의 작업 효율을 높여줄 수 있습니다. 이는 긍정적인 것에 속합니다.) 그것은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 논할 대상이 못 된다. 그것은 그저 도구일 뿐 사상과 관련되지 않고 그 어떤 이론이나 논조와도 관련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긍정적인 것, 부정적인 것은 사물의 본질, 원리와 관련되고, 각종 과학 연구를 하는 인간의 취지와 관련된 것이다. 이것들을 근거로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것에는 또 어떤 게 있느냐? (현재 인간은 만물의 성장 법칙을 준수하지 않고 과학적인 수단으로 그 규칙을 바꿔버립니다. 예를 들면 호르몬을 섞은 사료를 닭에게 먹여서 30일 만에 다 키우기도 하고 제철이 아닌 채소나 과일을 심기도 합니다. 과학 기술이 발전한 것 같지만 이는 만물의 성장 법칙을 어기고 인간의 식욕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부정적인 것입니다.) 이는 부정적인 것이다. 그 밖에 호랑이나 사자를 정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얼굴에는 위엄이 넘치고 하품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을 공포에 떨며 얼씬도 못 하게 만드는 호랑이를 보면 그는 그것을 정복해서 이빨을 뽑아 자기 집 마당에서 키우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개처럼 자기 집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이다. 인간이 육적인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온갖 과학적 수단으로 자연 규칙을 위배하며 행하는 모든 일이나 발명한 각종 물건은 죄다 긍정적인 것이 아닌 부정적인 것이다. 그것이 인간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 인간의 생존 환경을 심각하게 파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몹시 건조한 지역이 있었는데 정부가 비행기로 촉매제를 살포해 강제로 비가 오게 했다. 이것이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어떤 지역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가 일어나면 정부가 비행기를 띄워 구름을 흩어서 강우량을 통제한다. 이것은 자연법칙을 위배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자연법칙을 파괴하고 어기며 이에 순응하지 않고 제멋대로 하면서 인간의 첨단 기술을 선보이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다. 이것들 외에 또 어떤 부정적인 것이 있느냐? 생화학 세균 연구, 유전자 변형 연구가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유전자 연구를 통해 인간은 더 많은 유전자 변형 식품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유전자 변형 식품이 긍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왜 부정적인 것이라고 하느냐? 어떤 사람은 “과학의 성과잖아요. 더 많은 사람이 굶주리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죠. 더구나 유전자 변형 식품을 몇십 년 먹으니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아졌어요. 특히 젊은이들의 경우는 기성세대보다 키가 크더라고요. 이게 다 과학이 인간에 기여한 덕분이죠. 유전자 변형 식품이 사람에게 이렇게나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는데 왜 부정적인 것이라고 하시죠?”라고 묻는다. 너희가 분명하게 답할 수 있겠느냐? (현재 사람의 키는 커졌지만 체질은 점점 나빠지고 있고 질병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게 다 사람이 과학적으로 가공된 음식을 먹어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걸 부정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유전자 변형 식품이 사람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의 키가 커지고 덩치도 좋아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체질은 나빠졌다. 결론적으로 사람에게 부작용을 일으켜 유익이 아닌 해악을 가져다준 것이다. 사람에게 느껴지는 것이 유익이든, 해악이든, 어쨌든 이는 부정적인 것이다. 절대로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든 자연법칙에 어긋나고, 인간의 몸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가장 원시적인 생물이 담당하는 역할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아직 초반이라 인간에 대한 그것의 영향이 느껴지지 않았을 뿐 20년 후에는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온갖 괴질에 걸리고 심지어 생식 능력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 이것만으로도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고도 남는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유전자 변형 식품이 과학 기술의 산물이고 인간에 대한 과학의 기여겠지만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절대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은 늘 달을 연구하려 하고 각 행성이 인간의 생존에 적합한지 연구하려 한다. 이런 과학 연구나 관점이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왜 부정적인 것이냐? (하나님께서는 지구에서 살라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저희에게 다른 행성에 가서 살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은 늘 야심을 품고 어디든 가고 싶어 하는데 결국 헛수고일 뿐입니다. 어디에도 갈 수 없습니다.) 사람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런 것들을 연구하는 건 지극히 정상이다. 인간의 미래를 위해 생존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니 바람직한 일이다. 지구에 하나님이 설정해 놓은 많은 기능이 모두 망가져서 온갖 재난이 빈번히 발생하고 지구의 생존 환경이 파괴되었다. 공기, 물, 토양이 심각하게 오염되었고 각종 생물이 멸종 위기에 놓이면서 지구에서 살기 힘들어졌다. 일부 연구기관은 다른 행성으로 영역을 넓히고자 외행성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후세의 생존을 위해 지금 미리 준비하지 않을 경우 나중에 인류가 지구에서 생존할 수 없게 된다면 꼼짝없이 멸망하지 않겠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이런 관점이나 과학 연구가 과연 부정적인 것이겠느냐? 아니면 긍정적인 것이겠느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부정적인 것이라고 하느냐? (하나님께서 다른 행성에는 사람에게 적합한 생존 조건을 전혀 예비해 놓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그 근거입니다. 외행성은 말할 것도 없고 지구상의 더위나 추위가 극심한 지역만 해도 사람이 살기에 부적합합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늘 야심을 품고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를 벗어나 외행성에 가서 살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안배하고 예정해 놓으신 바를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지구라는 좋은 생존 환경을 만들어 주었는데 사람이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과학의 발전과 현대 산업에만 힘쓴 결과, 지구의 생태 환경이 파괴되었다. 공기와 물은 물론 땅까지 오염되어 사람이 유기농 곡식이나 채소를 먹지 못해 온갖 병에 걸린다. 지구에서 생존할 수 없게 되었다고 이젠 다른 행성으로 갈 생각을 하다니, 자기 몸뚱이에 그런 조건이 있는지는 생각도 안 하느냐? 사람의 몸뚱이는 지구에서 살기에만 적합하기 때문에 지구에서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한 것이다. 사람의 각 측면의 선천적 조건으로 어딜 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라. 새는 날갯짓을 해서 수천 미터 상공까지 날아갈 수 있지만 사람은 그럴 재간이 없어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면 위험할 때도 있기 때문에 사람은 지구에서 사는 게 가장 적절하다. 인체의 속성은 지구의 토양에 알맞고, 지구상의 만물과 사계절, 법칙 등 각 측면의 생존 조건에 알맞다. 그러니 인간을 지구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생존 법칙과 생존 조건은 하나님이 만물을 지을 때 이미 사람에게 정해놓은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오직 지구에서 살기에만 적합하고 다른 행성에서 살기에는 부적합한 것이다. 인간은 더는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지구를 짓밟고 파괴했다. 그러고는 떠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만한 다른 행성을 찾으려 한다. 무의미한 발악이다. 이는 하나님이 지구인에게 정해놓은 자연법칙에 순응하는 행동이 아니라 지구인의 육적인 생존 법칙에 위배되는 행동이며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이다. 설령 각 행성에 공기가 있어서 지구인이 둘러볼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곧 인간이 그 행성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네가 지구의 남극과 북극에 가서 둘러보고 그 땅을 밟아볼 수는 있겠지만 일 년 내내 거기서 살라고 하면 버틸 수 있겠느냐? 또 기온이 사시사철 섭씨 60도가 넘는 꽤 더운 지방도 있는데 이곳 역시 인간이 생존하기에 부적합하다. 지구의 각 지역도 특수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인간이 장기간 살아가기에 부적합한데 하물며 다른 행성에서 사는 것은 어떻겠느냐? 이는 하나님의 안배가 아니다. 인체의 특징으로 보면 인간은 오직 지구에 살기에 적합하다. 여기에는 근거가 있다. 하나님이 지구를 창조한 목적은 인간에게 적합한 주거 환경을 안배해 주기 위한 것이다. 네가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 또 다른 탈출구를 찾으려 한다면 오로지 파멸의 길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네가 만약 외행성에서 살 연구만 하는 것이 부정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행성에 가서 살길을 찾는 과학 연구에 대해 속으로 찬성한다면 이는 네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이다. 너는 시비를 깨닫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모른다. 네가 만약 이 길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음 세대에 외행성에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대한다면 너는 정상인이 아니라 괴상한 사람이다.

시비를 깨달은 사람은 긍정적인 것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며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것을 분별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인성과 이성을 지니고 있어서 부정적인 것에 대해 반감을 품고 그것을 싫어한다. 물론 진리를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그것을 경멸하고 비판하며 부정할 수도 있다. 만약 네가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너는 시비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며 너란 사람은 인성 측면에서 무엇인가 결여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시비에 밝다는 조건이 인성 측면에서 결여되었다면 네 인성에서 한 측면의 중요한 조건과 요소가 결핍된 것이니 정상 인성을 지니지 못한 너는 진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방금 드신 예는 현실 생활에서 사람의 의식주와 관련되고 과학과 관련됩니다. 만약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분별해야 할 텐데 그러면 그것을 거부해야 하나요?” 그럴 필요는 없다. 시비에 밝다는 말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속으로 분별한다는 뜻이다. 네 인성 속에 평가와 판단의 기준이 있어서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것인지 알고, 태도도 명확해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각각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안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것을 대할 때 너는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적응할 수 있고, 내면 깊은 곳에 거부감이나 반감이 들지 않을 것이다. 반면 부정적인 것을 대할 때는 내면 깊이 그것을 분별하고 경멸하며 그것에 대해 반감과 혐오감을 품을 수 있고 나아가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비에 밝은 부류가 지녀야 할 태도와 모습이다. 만약 긍정적인 것이 분명한데도 네가 마음속 깊이 경멸하거나 혐오하고 심지어 부정적인 것과 비교해 긍정적인 것이 더 보잘것없다거나, 너무 평범하고 저속해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반면 부정적인 것은 속으로 부러워하고 동경하며 추구하는 것도 모자라 사회와 세상의 부정적인 것들에 동조한다면, 그리고 진리나 분별의 원칙에 관해 아무리 교제해도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면 네 안의 인성은 정상 인성이 아니다. 만약 네가 어려서 아무런 경험이나 식견이 없거나 이런 것들이 너와 연관되지 않고 네 삶에 찾아오지 않아서 네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에 대해 아직 아무런 의식이나 명확한 관점을 가지지 않은 거라면 너를 시비에 밝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것인지 다 교제해 주었는데도 여전히 긍정적인 것을 내면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에 순응하지도 못하며 마음에 반감이 들고 그것을 경멸하면서 부정적인 것은 온 힘을 다해 떠받들고 동경한다면 너는 시비에 밝은 사람이 아니다. 이런 점만 봐도 이미 이런 사람은 인성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시비를 가리는 일을 통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에 대한 한 사람의 성향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속성이 어떤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어떤 일이 생기든 그의 성향이 긍정적인 것이 아닌 부정적인 것으로 기운다면 그 사람은 인성을 지니지 않았고 양심이나 이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확실하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는 사악한 것을 동경한다. 사탄과 사악한 사람이 추종하고 동조하며 발을 담그고 있는 모든 일과 모든 연구 혹은 특정 분야의 과학기술은 동경하면서,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가장 원초적이고 긍정적인 것의 규칙과 법칙은 동경하거나 준수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인간이 아닌 게 틀림없다. 이 측면이 분명히 설명되었느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인성 중에서 시비에 밝은 것과 관련된 모습에 대해 교제했다. 즉, 사람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가릴 줄 아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이런 측면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사람이 살다 보면 항상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사람의 정상적인 희로애락은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긍정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분에 넘치는 욕망은 긍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일상에서 사람은 자기가 접할 수 있는 많은 일을 사실 지각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긍정적인 것은 사람의 생활이나 생존과 함께하면서 사람의 생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의 생존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그 어떤 부정적인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이런 긍정적인 것을 자주 등한시한 채 오히려 사람과 함께하면서 사람의 생활을 지탱하고 사람의 생존을 곁에서 지키고 있는 것은 많은 부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많은 사람이 사실 긍정적인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감지하지 못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네가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에 대해 반감을 품지 않고 내면 깊이 그것을 동경하며 사랑할 수 있는 한 네 인성이 긍정적인 것을 동경한다는 것이 입증된다. 그런데 만약 네가 무엇이 긍정적인 것인지 알고, 무엇이 부정적인 것인지 아는데도 여전히 긍정적인 것은 좋아하지 않으면서 부정적인 것에 대해서는 속으로 호감을 품는 것도 모자라 대단히 흥미를 느낀다면, 더 나아가 여건과 기회가 되면 꼭 그것을 따르면서 얻고자 한다면 이는 이것들에 대한 네 성향이 긍정적인 것은 사랑하지 않고 부정적인 것만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가 긍정적인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는 네가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네가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너는 틀림없이 양심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 아닌 부정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네가 양심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너는 비인간적일 것이다. 사람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토마토를 심었는데 토마토가 자랐을 때 화학약품을 발라주면 하루 만에 색이 붉어져서 바로 팔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정말 좋은 방법이다. 다들 이렇게 파니 나도 그렇게 해야지. 그러면 수입이 짭짤할 거야. 게다가 토마토를 일찍 먹을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 없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토마토를 팔았고 자기도 먹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화학 약품으로 숙성을 촉진한 토마토는 사람 몸에 해롭기 때문에 그걸 파는 것은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고 해치는 행위라고 알려 주었다. 그런데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이게 왜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고 해치는 행위죠? 이건 과학 연구의 성과에요. 긍정적인 거라고요. 과학은 사람을 위한 학문이에요. 과학이 이런 걸 발명했다면 사람의 삶에 보급해야죠. 사람은 과학을 떠나서 살 수 없어요. 과학에 의지해야 합니다.” 심지어 과학을 진리로 여기고는 사람들에게 과학을 사랑하고 배우며 이용하라고 하면서 모든 것은 과학을 바탕으로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는 과학이 항상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학을 통해 발명된 것 중에는 사람에게 해로운 것도 있다. 예를 들면 화학 무기, 첨단 무기는 인간을 학살할 수 있다. 특히 인간에 대한 유전자 변형 식품의 해악은 끝도 없지만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기는커녕 이런 말을 한다. “과학이 틀릴 수 있나요? 만약 과학이 틀렸다면 국가가 지원하겠습니까? 전 인류가 과학을 배우고 이용하고 있는데 설마 인류 전체가 틀렸을까요?” 이게 맞는 말이냐? 그는 전 인류가 과학을 숭상하고 이용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회 조류가 바로 이렇다. 아무리 부정적인 것이라도 긍정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시비에 밝은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의 말은 무엇이냐? (황당한 논리입니다.) 황당한 논리와 그릇된 주장이고 억지스러운 논리이다. 사악한 인간 중 많은 사람이 이런 주장에 대해 동조하고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주장을 인정하고 수긍하든 틀린 것은 틀린 것이고, 부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이며, 그릇된 논리는 그릇된 논리라는 점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긍정적인 것이 될 수 없고, 진리가 될 수도 없다.

늘 사회 조류를 따르고 황당한 논리를 늘어놓기 좋아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것을 무척 좋아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가 진리나 긍정적인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긍정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는데 사실 그 병은 운동하거나 일과나 휴식 시간만 조정하면 낫는다. 하지만 그는 굳이 최신식 첨단 과학 기술의 수단과 방법으로 치료받으려 한다. 네가 “과학이 발전했고 그런 방식으로 치료하면 효과가 분명한 건 사실이지만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후유증이 생기면 돌이킬 수 없어요. 자연적인 방식으로 치료해야 해요. 운동을 하거나, 일과 및 휴식 시간을 조정하고, 식습관을 개선하거나 규칙적으로 식사하면 서서히 몸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리듬으로 돌아올 거예요. 증상들도 조금씩 호전될 거고요.” 이런 생각과 관점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지만 그러지 못하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군. 그건 수천 년 전의 치료 방식이고 치료 철학이야. 치료는 3할이 약, 7할이 요양이라는 것도 옛말이지! 지금은 의학이 발전해서 첨단 과학 기술로 치료해야 효과가 빨라. 약만 먹으면 병이 바로 낫는다고!’ 그의 생각과 관점대로 인간의 온갖 병을 치료해서 사람이 장수할 수 있을 정도로 의학이 발전하기만 한다면 의학은 긍정적인 것이 될 것이고 사람은 의학과 과학을 믿어서 과학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아무리 병에 걸려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첨단 과학 기술만 있으면 어떤 난치병도 치료할 수 있으니 말이다. 설사 후유증이 있더라도 걱정 없을 것이다. 이런 주장이 정확하냐? 이것은 황당한 논리다. 대답해 보아라. 무엇이 긍정적인 것인지에 관해 이런 부류와 이야기한다면 말이 통하겠느냐? 그가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와 말이 통하지 않을 겁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이 긍정적인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 세계 사람이 한 명도 빠짐없이 이런 사악한 조류에 휩쓸려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진리와 긍정적인 것을 내면 깊이 받아들이지 못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지 않는다. 여전히 사탄의 사상과 관점, 사탄의 사악한 조류를 근거로 모든 일을 바라보거나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부류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설교를 제법 들었으며 본분도 이행하고 있고 말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싶다고 하지만 현실 생활에서 일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에 대한 취사선택도 변하지 않았다. 그가 받아들인 부정적인 것이 이미 마음에 뿌리내려 진리가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지키려 한다. 이는 그가 속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가 아닌 부정적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설령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진리에 관한 설교를 듣고 도리상 그 말씀이 옳다는 것, 그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미 오래전에 내면 깊이 받아들인 부정적인 것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부정적인 것을 분별하지도 않을 것이다. 구체적인 일이 일어나면 속으로 그는 여전히 기존의 잘못된 관점을 고집하고 계속해서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잘못된 관점을 올바른 관점으로 간주한다. 반면 긍정적인 것을 보면 그가 부정적인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부정적인 것을 포기하고 긍정적인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긍정적인 것은 세력이 너무 작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도 너무 적은 것 같아. 사회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건 객관적 사실이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 사람의 마음이 시비에 밝지 않고,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부류는 긍정적인 것에는 흥미가 없고, 늘 자연을 바꾸고 싶어 한다. 자연의 생존 법칙, 사람의 생리 법칙과 생존 법칙을 바꾸고 싶어 하고 늘 자연과 각종 생물을 정복하고 싶어 한다. 예를 들면 그는 늘 이런 생각에 빠진다. ‘어떻게 하면 개 유전자 속에 고양이 유전자가 생기게 해서 개도 고양이처럼 쥐를 잡게 할 수 있을까? 고양이가 쥐도 잡고 개처럼 집도 지킬 줄 알면 정말 좋지 않을까?’ ‘암탉이 알도 낳고 울기도 한다면 암탉만 키우면 되니 얼마나 좋아!’ 보아라. 그는 항상 올바른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시비에 밝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동물은 참 대단해! 때맞춰 울 줄 아는 수탉은 암탉의 짝이 되어 주고, 암탉은 알을 낳고 병아리를 키워 번식하지. 그럼 인간은 수탉, 암탉 둘 다 잡아먹을 수 있어. 개를 키우면 개는 집을 지키면서 주인 옆을 지켜. 고양이를 키우면 고양이는 쥐를 잡아 주고 눈에 띄진 않지만 때로는 가족이 되어 주기도 해. 정말 대단해. 저마다 제 역할이 있잖아.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게 대단한 것 같아!’ 그런데 이런 긍정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사탄의 관점으로 긍정적인 것을 부정하거나 정죄하고 사탄의 관점으로 각 생물의 생존 법칙과 자연계의 각종 법칙을 바꾸려 한다. 심지어는 사람의 생존 법칙까지 바꿔서 과학이 권세를 잡게 하는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이런 사람은 정상 인성을 지니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그의 인성 속에는 시비에 밝은 특징이 갖춰져 있지 않다. 또한 그는 자연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관리할 줄 모르고, 늘 자기 뜻대로 행동하고 싶어 한다. 과학 기술이나 인위적인 방법으로 육의 정상적인 생활 법칙을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상인은 하루에 일고여덟 시간 정도 쉬어야 기운을 차릴 수 있고, 하루의 생활과 일과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부류는 ‘사람이 안 자고 안 먹고도 하루의 일과와 생활을 정상적으로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하면 실현할 수 있으려나?’라는 고민만 한다. 그는 머릿속으로 황당하고 기괴한 생각만 떠올릴 줄 안다. 정상 인성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런 법칙에 적응하고 그것을 준수해서 각종 육적인 욕구와 문제에 올바로 대응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정상인과 달리 자신의 육적인 본능을 뛰어넘어 육의 통제와 제한을 받지 않게 그 법칙을 바꾸려고만 한다. 너무 끔찍하지 않으냐? 그는 늘 남들과 다르고 싶어 한다. 남들이 하루에 여덟 시간을 잘 때 그는 하루에 십 분에서 길어야 한두 시간의 수면만으로 기운을 차리고 싶어 한다. 이는 정상인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인체의 자연법칙은 하나님이 정해 놓았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다. 한 사람의 식욕이 얼마나 되는지, 오장육부가 어떤 법칙으로 작동하는지, 한 사람의 체력이 얼마나 되는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사람의 뇌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문제를 생각할 수 있고, 문제를 얼마나 오래 생각할 수 있는지는 모두 고정되어 있다. 인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법칙들은 사실 모두 정상적이고 긍정적인 것이다. 인간은 일정한 법칙을 준수해야 이렇게 한해 한해를 살아갈 수 있고, 대를 이어 번성할 수 있으며 생존을 이어갈 수 있다. 각종 생물도 마찬가지이다. 일정한 자연법칙과 생활 법칙을 따르면서 움직이기도 하고 쉬기도 해야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만약 자연법칙을 어긴다면 사람이 생명을 이어가는 데에 문제가 생길 것이고 사람의 생명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사람의 정상적인 생활이나 하루 세 끼 식사,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 및 하루에 소화할 수 있는 작업량 등은 지장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자연법칙은 인간의 정상적인 생존을 지켜주는 긍정적인 것으로 경시하거나 귀찮아하지 말고 존중하며 준수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 아닌 사탄의 족속은 늘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인간의 자연법칙을 준수하면 너무 무능하고 나약해 보여! 늘 이런 자연법칙에 제한받다 보니 졸리면 자야 하고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해. 안 그러면 말하고 생각하는 게 둔해지고 손이랑 가슴도 떨려. 발에 힘이 풀려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지. 귀찮아 죽겠어! 만약에 먹기만 해도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약이 있어서, 며칠 쉬지 않아도 로봇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기운이 넘치고, 배고플 땐 어떤 혈만 누르면 바로 허기가 사라져서 며칠을 굶어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또 몸도 야위지 않고 체력도 떨어지지 않아서 몸이 정상적이고 건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이 늘 이런 자연법칙을 바꾸려 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을 부정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것의 존재는 인간의 정상적인 생존을 지키고 인간의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해 준다. 따라서 사람은 이를 준수해야 할 뿐 아니라 이성적으로 대해야 한다. 자연법칙을 어기거나 억누르지 말고 걸고넘어지지도 말며 더욱이 대항하지도 마라. 그리고 인간의 자연법칙에서 벗어나는 것들, 즉 사람의 상상, 사람의 평범하지 않은 생각이나 초자연적인 행동은 모두 부정적인 것이다. 이 모든 게 다 부정적인 것이니 사람은 이를 받아들이지 말고 분별하고 거부해야 한다. 네가 만약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분별하고 생존 과정에서 이를 올바로 대하면서 이성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네 인성은 정상이다. 그런데 네가 늘 자신에 대한 이런 긍정적인 것의 긍정적인 효과를 느끼지 못한 채 그것에 대항하고 그에 반하는 행동만 하며 늘 부정적인 말과 관점에 따라 이런 긍정적인 것을 바꾸고 객관적 사물의 법칙을 어긴다면 이는 네 인성이 시비를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교제해 주니 이제 이해가 되느냐? (이해했습니다.)

인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무엇이 긍정적인 것인지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것을 어느 정도 분별하면서 속으로 혐오하고 거부하기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잘 모르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긍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 (긍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패괴된 인간은 주로 어떤 관점으로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대항하느냐? (사람의 운명은 자기 손에 달렸으며 운명은 지식으로 바꿀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패괴된 인간의 관점으로서 분명 부정적인 것에 속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를 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느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말이 옳다고, 긍정적인 것이라고 도리적으로 인정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사람의 노력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운명을 자기가 통제하면서 스스로 결정해도 된다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지 않거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없고, 좋은 직장, 밝은 장래, 윤택한 생활 환경을 가질 수 없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런 사람이 시비에 밝은 사람이냐? (아닙니다.) 이삼십 년을 살고도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도 운명은 자기 손에 달렸고 지식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좋은 종착지를 얻으려면, 잘 누리고 잘 살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이방인의 말처럼 말이다. 이런 사람이 시비에 밝은 사람이냐? (아닙니다.) 시비에 어두운 사람이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입으면서 윤택한 삶을 누리고, 사회에서 남들의 우러름도 즐기게 되면 그는 지금의 삶을 자신의 근면한 노력으로 얻어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사람의 운명은 자기가 통제해야지 남에게 기대서는 안 된다’는 말이야말로 참되고 올바른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정상 인성의 모습이겠느냐? (아닙니다.) 사람은 지식을 습득하기 전에는 이런 걸 모른다. 그런데 일단 지식을 습득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말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사람의 운명은 자기 손에 달렸어. 자기 손으로 행복을 일굴 수 있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시비에 밝은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어떤 작자냐? 인성이 없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시비에 어둡다. 그가 삶의 진실을 진정으로 접하고 나서도 여전히 무엇이 긍정적인 것인지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고 긍정적인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시비에 어두운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인성을 지니지 않았으니 절대 사람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도리적으로는 “모든 사물의 규칙과 법칙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모두 긍정적인 것이고 사람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준수하고 동경하며 추구해야 할 것이기도 하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다 첨단 과학 기술에 관한 정보나 사물을 접하고 나면 결국 이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 어떤 논조로 바뀌겠느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생활의 규칙이나 만물의 법칙과 생존 규칙에 관해 이야기하고 이것들을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인 생각입니다! 식견이 없는 거죠. 우물 안 개구리처럼요! 이젠 과학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우리가 직접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많아졌어요. 과학 기술 제품들이 대신 해주거든요. 이런 게 진보죠! 자율 주행 기능이 있는 자동차를 보세요. 차에 타서 목적지를 설정하고 한 마디만 하면 차가 출발해요. 이게 남들이 부러워하는 진짜 첨단 과학 기술입니다! 첨단 과학 기술을 실현한 덕분에 인간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만물의 주인이 되었어요. 그래서 과학을 확실한 도리라고 하는 겁니다! 배움과 지식이 없거나 과학을 모르면 뒤처지고 저속해지는 거예요!” 그의 생각이 바뀌지 않았느냐? 그는 속으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은 항공박물관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이렇게 감탄한다. ‘와! 안목이 엄청 넓어진 것 같아. 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했구나! 일반인이 오면 상경한 시골 쥐처럼 눈이 휘둥그레지겠네. 지금 과학이 어느 정도로 발전했는지 상상도 못할 걸? 이런 최신 첨단 과학 기술은 난생처음이야!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연 규칙 따위만 늘어놓고 있으니, 정말 시대착오적이야!’ 이렇게 현대 사회에서 눈을 어지럽히는 것들을 보고 나면 기존에 깨달았던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에 관한 이론들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철저하게 부정 당한다. 사람은 무엇이 긍정적인 것인지 더욱 명확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이 시대에 뒤떨어져서 현대 과학 기술과 현대 인류의 발전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부정적인 것들을 열렬히 지지하고 동경하면서 현대 첨단 과학 기술 발전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한다. 이런 부류가 시비에 밝은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시비에 밝은 것이 인성이 갖추어야 할 특징 중 하나라면 이는 인성 속에서 저절로 생기거나 원래부터 있던 것이지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즉, 시비에 밝은 인성의 특징은 시간이 흐르고 지리적 환경이나 사람, 일이 변한다고 해서 변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도 그것을 바꿀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바꾸거나 없앨 수 없다. 이런 부류는 언제나 긍정적인 것을 마음속 깊이 동경하는 반면 부정적인 것은 언제나 반감을 품고 혐오한다. 그의 인성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겠느냐? 그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의 육적인 생활 규칙, 육적인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 자연적인 것, 사람을 차분하고 평온하게 해주는 것,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적 필요에 부합하는 것이지 고급스럽고 당당하며 고상한 것 따위가 아니다. 생각해 보아라. 처신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간소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고 떵떵거리는 것을 싫어한다. 평온한 것을 좋아해서 평안하고 즐거우며 차분하게 생활한다. 그런가 하면 이런 것을 싫어하고 떵떵거리는 것이나, 고급스럽고 당당하며 고상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자기를 드러내는 것, 남들 앞에 나서는 것, 유명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평범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인성의 차이다.

시비에 어두운 부류도 일부 옳은 말, 긍정적인 말에 따르거나 겉으로는 사람들을 따라 일부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고 동경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상황이 변함에 따라 사람과 일에 변화가 생기면 그 즉시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긍정적인 것들이 부정적인 것으로 바뀌고 그가 정말로 좋아하는 부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으로 바뀌어 자기가 따르는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해 자기가 좋아하는 부정적인 것을 보기 전에는 그에게 긍정적인 것은 단지 도리의 하나일 뿐인 것이다. 그 역시 대세를 따르면서 부화뇌동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가 속으로 정말 사랑하는 것이나 진실한 관점이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늘 이런 말을 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정말 좋아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바른길을 가는 훌륭한 사람이죠.” 그렇게 하나님을 몇 년 믿다가 하나님 집의 설교와 교제가 모두 정직한 사람이 되고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라는 내용뿐이라는 걸 알게 되면 반감이 들고 하나님을 믿는 게 따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는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의 마음이 교회를 떠난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이렇다. 이런 부류는 사실 긍정적인 것을 사랑하지 않고 마음속에 생억지와 그릇된 주장이 가득하다. 이런 생억지와 그릇된 주장이 그들에게는 긍정적인 것이다. 반면 진정으로 긍정적인 것에는 마음속 깊이 반감을 품고 그것을 혐오하며 경멸하면서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이 긍정적인 것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런 부류의 인성 속에는 시비에 밝은 특징이 없다.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오로지 복을 받기 위해 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오랫동안 설교를 듣고 나서야 마침내 깨닫는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며 기꺼이 대가를 치러야 하는구나. 또 진심으로 하나님을 대하며 제멋대로 굴지 말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기도 해야 해. 특히 하나님 집의 이익이 내 이익과 충돌할 때는 사적인 이익은 버리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켜야 하는군.’ 각 측면의 진리를 깨닫고 나면 그는 하나님을 믿은 것을 후회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만한 큰 집단이나 세력이 생기는 줄 알았어. 그리고 많이 버리고 고생하며 대가만 치르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좋은 종착지가 생기는 줄 알았어. 다음 시대에 떵떵거리며 들어가서는 다음 시대의 주인이 되고 왕권을 차지하는 거지. 그런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어. 하나님을 믿으면 한다는 이야기는 죄다 처신,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악에서 떠나는 것에 관한 내용뿐이야. 특히 정직한 사람이 되고 정직한 말을 하라고만 하고, 자기 혼자 결정하지 말고 진리를 실행하라고 시키기만 해. 이러면 하나님을 믿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는 원망의 마음이 들어서 여길 떠나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믿지 않으면 몇 년간 하나님을 믿은 게 헛수고가 될 거란 생각에 선뜻 내키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계속 믿자니 진리에 흥미가 없고 진리를 추구하여 실제에 진입하는 것,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진리를 구해 원칙대로 행동하는 것에 관한 하나님 집의 이야기는 질리도록 들어서 이제는 듣기 싫다. 특히 진리의 실행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괴롭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들고, 긍정적인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반감이 생기고 경멸하게 되니 듣기 싫어진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끝까지 믿어도 진리와 좋은 종착지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아예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중엔 일을 하거나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집에 돌아가 결혼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집이 늘 진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교제하는 것에 대해 그들은 극도의 반감을 품는다. 이는 이 부류가 양심과 이성을 지니지 않았고 시비에 어둡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비에 어둡다는 것은 곧 그들의 인성에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분간하는 기준이나 능력이 없다는 뜻이며 그것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부류에게 정상적인 인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정말 인성을 지닌 사람일 경우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하다. 그것은 바로 이런 사람은 속으로 긍정적인 것을 사랑하고 동경한다는 점이다. 설령 그가 속으로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공명정대한 사회나 긍정적인 것, 진리가 권세를 잡는 것을 동경할 것이다. 하지만 이 사악한 사회에서는 아무도 이런 여건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만약 긍정적인 것을 표출한다면 배척과 탄압을 받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는 자기가 좋아하고 동경하는 긍정적인 것을 얻을 수 없기에 그가 속으로 고뇌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어서 많은 진리를 깨닫게 되는데 이 진리는 사람의 인성이 사랑하는 긍정적인 것과 일치하고 그에 부합하여 긍정적인 것에 대한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 준다. 그러니 그가 긍정적인 것을 더욱 동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비록 당장은 환경의 제약이나 적은 분량, 자신의 특정 패괴성품으로 인한 속박과 구속 때문에 진리를 완전히 실행하지는 못하지만 그에게는 언젠가 온전히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행하겠다는 의지와 소망이 있다. 이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긍정적인 것을 사랑하는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인성 속에 시비에 밝은 특징이 있는 사람, 즉 인성을 지닌 사람이다. 만약 네가 입으로만 긍정적인 것을 사랑한다고 하고, 하나님의 행사가 모두 선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는 도리만 떠들고 구호만 외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듣기 좋은 말, 옳은 이론을 늘어놓거나 큰소리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네가 정말 긍정적인 것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네가 진리를 들을 때 그것을 사랑하고 동경하게 된다면, 그리고 진리를 들을수록 진리를 갈망하고 구하고자 하는 의욕이 커지고, 하나님을 따라 구원에 이르리라는 믿음도 굳건해지는 데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각 측면의 추구에 수확이 생긴다면, 또 네가 패괴 성품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거역하는 행동이 점점 줄어든다면 너는 긍정적인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진리 실제를 갖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성과와 수확이 있다. 자기에게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태도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예전에는 사소한 일에서도 하나님을 거역했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했으며 진리도 실행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의 추구와 본분 이행, 그리고 다방면에서의 노력을 통해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고, 일이 생기면 진리를 구해서 육의 욕망을 저버리게 되었다. 또 원칙과 관련된 중요한 일들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고 원칙대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 집의 이익과 교회 사역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어느 정도 분량이 생긴 것이다. 스스로를 저버리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진리에 순종하는 측면에서 실행의 진입이 생겼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각 측면의 패괴 성품에도 각각 변화가 생겼다. 이것이 진정으로 인성을 지닌 사람이 보이는 시비에 밝은 모습이다.

시비에 어두운 사람 역시 진리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고, 진리를 추구해 구원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막상 일이 일어나면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패괴 성품에 따라 살면서 늘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데도 자각하지 못한다. 십년 전에도 하나님을 거역했고 십년 후에도 여전하다.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실행하지도 않는 것에는 두 가지 측면의 원인이 있다. 첫째, 그는 무엇이 진리인지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도리와 주장, 생각만 고집한다. 둘째,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전혀 아니다. 십년 전이나 십년 후나 하나님을 거역한 모습은 변함없이 그대로다. 그가 얼마나 오래 믿었든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증거하지 않는다. 육을 저버리고 패괴 성품을 저버리는 것은 더더욱 증거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시비에 밝은 사람이 아니며, 인성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이 아니다. 이 말에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전 십년 넘게 하나님을 믿었고 줄곧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간혹 실수해서 책망과 훈계도 조금 받았지만 그게 정상 아닌가요? 사람은 누구나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누가 뭐라든 제 믿음은 진실합니다. 어떻게 제게 인성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거죠?” 네 믿음이 진실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진실한 믿음이 곧 네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느냐? 진실한 믿음이 곧 네가 육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느냐? 그렇지 않다. 진실한 믿음이 다가 아니다. 그것이 곧 네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에 이르려면 네 인성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네가 시비에 밝아질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실한 믿음이 최종적으로 구원받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아니며 필수 조건도 아니다. 너 스스로는 자기 믿음이 진실하다고 하는데 그럼 네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닫고 얻었느냐? 하나님 집의 이익과 관련될 때 네가 하나님 집의 이익을 몇 번이나 지켰느냐? 자기가 믿음이 진실한 사람, 양심과 인성을 지닌 진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십년 전에 하나님을 거역하고서는, 십년 후에도 여전히 똑같은 일로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느냐? 네가 변했느냐? 육을 저버렸느냐? 만약 육을 저버리지 않았다면 다음 십년이라고 저버릴 수 있겠느냐? 네가 아직 육을 저버리지 못해 하나님을 거역한다면 이는 네 인성에 문제가 있고 진리를 실행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너 혼자 자신의 믿음이 진실하다고 해 봤자 소용없다. 너는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고 싶다고,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고 싶다고 하지만 이런 바람은 무의미하다. 이는 단지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위한 전제일 뿐, 네가 실행해 낼 수 있는지는 결국 네 인성의 유무에 달린 것이다. 만약 네 마음이 시종일관 네 패괴 성품을 단속하거나 통제하지 못해 계속 자기 이익을 지키는 것을 택하고 긍정적인 것이 아닌 부정적인 것을 택한다면 이는 네 인성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패괴 성품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패괴 성품의 표출을 통제할 능력이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너는 오랫동안 진리에 관한 설교를 들었는데도 여전히 자신의 패괴 성품을 단속하지 못하고 있고,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지 못해 올바른 선택을 내리지도 못하고 있다. 교회 사역을 교란하는 악인이 뻔히 보이는데도 너는 나서서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도 못한다. 그런데 네 직접적인 이익을 침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자신의 이익을 지켜낸다. 이는 네 인성 속에 네가 올바른 길과 실행 원칙을 택하도록 스스로를 규제하거나 단속할 수 있는 양심과 이성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네가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인정한다면 이는 네 양심과 이성이 이미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너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네 인성 속에 양심과 이성이 없고 네가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알겠느냐?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한다. “제 분량은 아직 적습니다. 전 가정 환경, 가정 교육 때문에 제멋대로에 방종하고 거만하거든요. 그래도 현실 생활에서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것인지, 무슨 일을 해야 하고 무슨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압니다. 다만 제 분량이 적고 저를 지도하고 독려해 줄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없을 뿐이죠. 그래서 제가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과오를 저지르는 겁니다. 조금 아쉬울 따름이죠.” 이런 사람도 현실 생활에서 양심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규제하고 스스로를 단속해서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조금이라도 진리를 실행해서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보통 사람보다 진전이 조금 더디고 성장의 폭이 작을 뿐, 그는 변하는 중이다. 좋은 땅에서 자란 씨는 성장이 빠르고 모래밭이나 자갈 틈에서 자란 씨는 성장이 더디고 험난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성장하기 마련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의 인성에 사람이 갖추어야 할 양심과 이성이 있는 이상 그가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나면 변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남들은 십년 만에 크게 성장하는데 그는 이삼십 년이 지나야 겨우 성장할 정도로 그 변화가 더디겠지만 말이다. 조금 더디긴 해도 그는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변화하고 있으며, 그의 생명도 끊임없이 자라고 있다. 그 속도가 빠르든 더디든, 어쨌든 이런 부류는 인성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도 생명이 눈곱만큼도 자라지 않은 부류가 있다. 이들은 진리를 교제해 주는 사람이 있어도 반감만 품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떤 환경을 배치하든 그는 거기에서 진리를 구하여 공과를 배우지 못하고 긍정적인 인도나 도움을 받지 못한다. 그가 속으로 긍정적인 것을 싫어하니 자기 입맛대로 하려는 그의 성품과 생활 방식이 계속 바뀌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바로 양심과 이성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다. 즉,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교제해 주니 들을수록 분명해지고 이해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또 한 부류는 하나님을 믿으면 좋다는 것은 알지만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고 부정적인 것인지 모른다. 이들이 양심을 통해 자신의 언행을 규제하고 단속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니 더 쉽게 분별된다. 이런 부류가 긍정적인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며, 이들은 진리를 깨닫지도 못한다. 이 모든 게 그에게는 아리송하다.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냐고 그에게 물으면 그는 도리상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가 모두 긍정적인 것이라고 할 것이다. 대답은 제법 그럴싸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는 비춰볼 줄 모르고, 분별할 줄 모른다. 머릿속이 마치 곤죽 같다. 그는 무지몽매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에게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진리를 얻었는지 물어보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주재하십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는 모두 선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괴롭히고 박해하며 해칩니다.” 또 무엇을 얻었냐고 물어보면 그는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하며, 더욱 고생하고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어서 본분은 어떤 원칙에 따라 이행해야 하는지 물으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상부의 말을 따르고, 상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아무리 더럽고 힘든 일이라도 열심히 해야 해요. 방해하며 교란하거나 말썽을 일으키지 말고 모든 사람과 하나님 집에 유익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가 말한 이 도리들은 모두 옳다. 틀린 말은 한마디도 없다. 하지만 일이 일어나면 치우치고 어리석은 관점을 표출한다. 네가 아무리 바로 잡아 준들 그는 변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어떤 작자냐? (머저리입니다.) 머저리가 사람이겠느냐? 점잖은 말로는 금수요, 속된 말로는 짐승이다. 그는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긍정적인 것인지, 또 무엇이 부정적인 것인지 모르고 아무리 하나님을 거역해도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선천적으로 마음씨가 착해서 동정심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고생하는 사람을 보면 괴로워하며 자기가 대신 고생해 주지 못해 한스러워하고, 못 먹고 못 입는 사람을 보면 자기 옷과 음식을 나눠 주고 싶어 한다. 인간의 패괴를 폭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자기가 누구보다도 훌륭한 줄 알고,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자신의 어디가 잘못됐는지 모르니 자기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법이 없다. 그에게 “당신은 패괴된 인간이 아닌가요? 패괴 성품이 없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있죠. 사람은 누구나 패괴된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저라고 왜 없겠습니까? 별 실없는 소리를 다 하시네요!”라고 하면서 너더러 실없다는 말까지 한다. 하지만 그는 잘못을 저지르면 인정하기는커녕 남한테 책임을 전가한다. 어떤 잘못도 그는 인정하지 않고, 아무리 심각한 악행을 저질러도 핑계나 이유를 대며 변명한다. 이런 사람이 이성을 지녔겠느냐? 시비에 밝은 사람이겠느냐? (이성도 없고 시비에 밝지도 않습니다.) 그는 매일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밤낮없이 설교를 듣고, 하나님 말씀을 본다. 하지만 진리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일은 하나도 행하지 못하며, 진리에 부합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진리에 부합하는 건 고사하고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부합하는 말조차 하지 못한다. 그저 터무니없는 말이나 억지스러운 논리만 늘어놓을 뿐이다. 이런 사람은 절대 양심과 이성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냥 머저리인 것이다. 머릿속에 있는 것이라고는 온통 생억지뿐이다. 설교를 많이 들으면 그 역시 영적인 말을 조금은 할 줄 안다. 그의 영적인 말을 들어 보면 그가 꽤 정통한 사람처럼 느껴질 것이다. 제법 이해하는 것처럼 말하니 말이다. 그런데 막상 일을 처리할 때가 되면 그는 어리석고 그릇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가 억지스러운 논리를 펼치면 너는 할 말을 잃을 것이다. 할 말을 잃는다는 게 무슨 뜻이겠느냐? 이런 황당무계한 말을 할 수 있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란 말이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으니 결국 침묵으로 그를 대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최선책이다.

사람이고, 정상 인성을 가졌다면 시비에 밝은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공급받지 못해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시비에 관한 단순한 일밖에 깨닫지 못해도 단순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정도는 분간할 수 있다. 현실 생활에서 접하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분별력과 인지력이 어느 정도는 있는 것이다. 기본적인 인성의 상식, 사람의 생존 규칙 그리고 늘 사람이 마주하는 사람과 일들을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다. 더는 무지몽매하게 살지 않고 인간 세상의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에 대해 스스로 분별하고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생각과 입장 그리고 올바른 태도도 지니고 있다. 이런 사람은 삼십 대부터 인생의 여러 측면의 일을 차츰 접하게 되는데 그러다 오륙십 대가 되면 설령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보지 않았고, 하나님 말씀을 공급받지 않았더라도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것인지 차츰 정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나면 자신이 깨달을 수 있는 긍정적인 것에 따라 살아가고 긍정적인 것의 규칙을 준수한다. 부정적인 것의 경우는 그것을 분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음속 깊이 멀리할 수도 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세상 조류나 사람들 속에서 처세하는 철학과 말을 따른다면 그는 양심에 어긋난다는 생각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마음속으로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저 생존을 위해, 그리고 잠깐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닌 불가피한 선택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나면 사람의 삶과 생존 등 각 측면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은 과연 뭐라고 말씀하는지에 더 집중한다. 사람의 삶 속에서 생겨나는 난제들에 대해 하나님은 정확하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사람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는지 등의 질문에 대한 답을 그는 갈망한다. 답을 얻고 나면 그는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기가 너무 어렵다거나 인성의 필요에 너무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진리들이야말로 바른길이자 사람이 갖추고 실행해야 할 것이라고, 사람이 살면서 보여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만약 이렇게 산다면 정말 사람의 양심과 인성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살아야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안심이 되며 기쁨과 평안이 있다. 그리고 그래야 사람에게 희망과 삶의 의욕이 생기며 각종 사악한 세력이나 조류, 그리고 인생의 공허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는 마음속 양심의 작용으로 각 측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나 가르침, 공급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마음 깊이 호응한다. 그리고 그는 추구를 통해 진리를 얻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말씀이 많이 선포되고 점점 실제적이고 자세하게 공급될수록 진리와 긍정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충족된다. 들을수록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귀찮아하거나 흐리멍덩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들을수록 깨달아지고, 일을 간파할 수 있게 되었으며, 길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고, 앞으로 희망과 빛이 보이고, 진리를 실행해서 구원에 이르는 길이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점점 안심되고, 하나님을 믿는 길이 옳다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매일 치렀던 대가, 매일 쏟았던 에너지나 피와 땀이 모두 값지고 의미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속 양심이 검증되고 충족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인성의 모습이다. 비록 그의 양심이 충족되었고, 시비에 밝은 모습에 대한 갈구도 충족되었지만 진정으로 인성이 있고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충족된 상태에만 머무르지 않고 곧이어 다짐하고 계획을 세우려 할 것이다. 각 측면의 진리에서 스스로 실행하고 진입하고자 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각 측면의 진리 원칙, 각 측면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스스로 실천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 생활 중 본인의 행동과 됨됨이의 준칙, 생명의 실제가 되게 할 것이다. 예전에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그저 글귀와 도리나 몇 마디밖에 할 줄 몰라서 일이 일어나면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처럼 편견을 가졌다.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삶이 따분하다고 생각했고, 아무런 목표나 기대도 없이 무지몽매하게 살았다.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수록 깨달아지고 진리를 교제할수록 이해하게 되니 길이 점점 환해지고 명확해져서, 갈 길이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말하고 행동할 때마다, 그리고 한 부류를 만날 때마다 따를 수 있는 하나님 말씀의 근거가 생기니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실제적이고 훌륭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른길이라고,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내는 건 더없이 의미 있고 값진 일이다! 그는 진리를 갈망하고 실행하는 동시에 그 진리에 끊임없이 진입하고 끊임없이 좋은 수확을 거두기도 한다. 또한 긍정적인 것에 대한 그의 양심과 인성의 갈망이나 욕구가 충족되고 이와 함께 그의 생명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비록 항상 패괴 성품을 표출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일이 생기면 자기도 모르게 패괴 성품과 육, 그리고 어리석고 그릇되며 터무니없는 자신의 생각과 관점에 따라 행동하지만 그와 동시에 바람직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그가 그렇게 행동하면 그의 양심이 늘 불안하고 자신의 패괴 성품이 고질적이라 쉬이 바뀌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엔 양심의 작용으로 늘 가책을 받아 죄책감이 들고 후회가 된다. 그리고 늘 자기 행동의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반성하며 회개한다. 이 모든 게 양심의 작용이다. 사람이 양심을 지니면 이런 생각이 들고 이런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양심을 지니면 늘 반성하고 늘 회개하며 뉘우치는 생활의 양상을 보일 것이다. 비록 항상 실패와 좌절에 직면하고 잘못을 저질러 책망과 훈계, 심판과 형벌을 받지만 항상 회개하기 때문에 변화도 늘 일어난다. 그러니 진리를 추구하는 그의 목적에 변함이 없어 결국 좋은 결과나 좋은 수확도 거두는 것이다. 늘 가책을 받고 죄책감을 느끼며, 늘 뉘우치고 회개하기도 하니 이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는 그가 이미 올바른 길을 가고 있으니 결국 진실한 수확을 거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패괴 성품이 어느 정도 완화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마음도 줄어들어서 예전에 그는 관념에 부합하지 않은 일이 생기면 원망했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고 진리를 구할 수 있다.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대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황당하며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둘째, 예전에 그는 어려움이 생기면 소극적으로 변했지만 이젠 그러지 않고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를 올바르게 대하고 이에 순종할 수 있다. 비록 소극적으로 변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의 양심이 옳다고 하는 일을 하면 그는 마음이 편하고 참소를 받지 않으며 그럴수록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실행할수록 그는 범사에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 중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진리를 구해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고, 이것이 옳은 길이며 이렇게 실행하면 수확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이런 수확이 생기면 사람은 자기와 하나님의 관계에 변화가 생기고 자기 내면의 생명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다. 패괴 성품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사람에 대한 구속과 속박도 줄어든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갈망하고자 하는 바람은 점점 커지고 진리를 실행하여 패괴 성품을 이겨내는 힘도 점점 커진다. 그러면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자기가 패괴 성품을 벗어버리고 구원에 이를 희망이 있다는 생각, 자기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며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 말이다.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바로 이렇고, 차츰차츰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사람이 보이는 모습이 바로 이렇다. 이는 더없이 정상적인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갖추지 못한 사람의 경우 기본적으로 그의 양심이 아무런 규제의 역할도 하지 못한다. 만약 네게 양심이 있다면 네 양심은 분명 규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양심이 규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너의 그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 네게는 양심이 없는 것이다. 사람이 만약 양심을 지녔다면 시비에 밝을 것이고,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으며 부정적인 것을 버리고 긍정적인 것을 택할 것이다. 사람이 만약 양심을 지녀서 시비에 밝다면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실행하며 진리에 순종하는 것을 택해서 진리 원칙대로 행동할 것이다. 만약 네가 이번에 진리를 실행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을 것이고, 다음에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그때도 가책을 받을 것이다. 만약 네가 양심과 지각을 지녔고 시비에 밝으며 많은 진리를 들었는데도 잘못을 거듭한다면 너는 양심으로부터 더 강한 가책과 참소를 받을 것이며 양심에서 비롯된 생각대로 올바른 선택을 내릴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는 잘못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긴 하지만 십 년, 이십 년이 흘러도 여전히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잘 들어라. 네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 너는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고 하지만 그토록 오랫동안 네가 뉘우치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며, 네가 말하는 양심이 네가 올바른 길을 택하도록 통제하는 역할도 하지 못한다면 네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 너는 인성마저 없는 것이다. 네가 “그래도 저는 옳고 그름을 아는데 어떻게 제게 양심이 없다고 할 수 있죠?”라고 한다면 네 마음이 너무 강퍅해서 이미 양심이 제 기능을 잃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네가 정말 인성의 양심을 지녔다면 잘못을 저질러서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 인성에 긍정적인 성향이 생겨 양심이 속에서 너를 참소할 것이다. ‘이건 옳지 않아. 그게 얼마나 인성이 없는 행동인데!’ 늘 이렇게 질책하는데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오직 양심이 없는 사람만이 자각하지 못한다. 네가 만약 정말 양심을 지녔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는데도 계속 강퍅할 수 있겠느냐? 네가 “전 십 년, 이십 년간 양심의 가책을 받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던데요?”라고 한다면 너는 양심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양심도 없으면서 인성을 지녔다고 한다면 이는 기만이 아니냐? 양심을 지녔는데 어떻게 양심이 없을 수 있느냐? 네게 양심이 없다면 인성도 없는 것이다. 인성을 지니지 못했다는 상징 중 하나가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것인지 알지 못하는 모습이다. 스스로 양심이 있다고 하면서 어찌 시비에 어두운 것이냐?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듣고도 어찌 진리 추구를 동경하지 않느냐? 스스로 “제 마음은 진리를 추구하길 원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도 원합니다.”라고 하는데 너는 어떤 진리를 실행했느냐?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네 마음이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길 원한다면 어찌 진리를 실행하지 않느냐? 기만이 아니냐? 사기꾼의 거짓말이나 다름없지 않으냐? 큰 붉은 용이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은 국민을 섬기는 일이고, 사람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일이라고 선전해 놓고 결국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바른길을 가자 미친 듯이 체포하고 박해한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 진리를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했다. 오직 당을 따르고 당의 말을 듣는 것만 허용해서 결국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져 징벌받으면 큰 붉은 용은 기뻐한다. 그렇다면 ‘국민을 섬긴다’는 큰 붉은 용의 말이 사실이냐? 거짓이냐? 사탄은 늘 사람에게 잘 대해준다고 하지만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지 못하고 사람을 인생의 바른길로 이끌지 못한다. 그저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논리만 주입해서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노름과 계집질에 빠지라고, 그릇된 길을 가라고, 세상이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라고, 서로 다투고 괴롭히라고 한다. 그러면서 바른길은 못 가게 하고 사람을 하나님의 곁에서 빼낸다. 결국 사람은 명예와 이익을 얻지만 몸과 마음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마음속에 하나님은 없고 사탄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논리만 가득하게 된다. 더 이상 하나님에게 지음받았다는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적대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탄이 사람에게 잘 대해준다는 게 이런 것이냐? 이는 사람을 괴롭히고 망치는 게 아니냐? 시비에 어두운 사람은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 인성이 있고 시비에 밝은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보다 양심도 있고요.” 그렇다면 오늘 교제한 내용에 비춰 보면서 본인이 양심을 지녔는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는지, 잘못을 저질렀을 때 후회하고 죄책감을 갖는지, 진실하게 회개하고 변화하는지 살펴보아라. 네가 만약 생명 진입 면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네가 하나님을 믿고 나서 그렇게 오랫동안 설교를 들었어도 양심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양심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다니 어찌 된 일이냐?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네가 양심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제게 생명 진입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전 어떤 진리든 깨달을 수 있다고요.” 진리를 깨달았으면서 왜 실행하지는 않느냐? 왜 진입하지 않았느냐? 지금껏 네 생명에 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느냐? 진리를 깨달아 놓고 실행하지 않는다니, 양심이 있긴 한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논쟁까지 벌인다.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제가 양심을 지니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것을 버리고 이렇게까지 수고하며 대가를 치를 수 있었겠습니까? 제가 기꺼이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을까요?” 네게 양심이 있다면 그토록 많은 진리를 듣고서 네 양심이 어떤 역할을 했느냐? 네가 진리 원칙에 따라 일하도록 너를 단속했겠느냐? 네 행동과 생각을 관리했겠느냐? 그렇게 오랫동안 설교를 들었으면서, 또 많은 도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많이 수고하며 대가를 치를 수 있으면서 왜 네 양심은 네가 원칙을 어기지 않고 원칙대로 행동하게 네 행위를 관리하지 않는 것이냐? 그렇게 양심과 인성이 있고 그렇게 많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왜 실행하지는 못하느냐? 어째서 그렇게 대놓고 원칙을 어기고 교회 사역을 교란하느냐? 네가 양심을 지녔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본분을 이행하면서 네 생명에 변화가 생겼느냐?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아무런 진리에도 진입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네가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양심을 지니지 않았다면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습니까?” 너는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게 아니라 힘만 쓰고 있는 것이다. 힘만 쓰는 데에는 양심이 필요하지 않다. 힘만 들이면 그만이다. 이는 힘만 쓰는 사람은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 생명 진입과 진리는 추구하지 않고 힘쓰는 것만 추구하니 힘만 들이려 한다는 말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힘만 쓰는 자의 특징이 무엇이냐? 바로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에서 기쁨을 찾고 자신의 존재감이나 가치를 찾아 복을 받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야심을 채운다. 고생한 대가로 복을 받으려는 심산이다. 그에게 힘쓰는 일을 시키거나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라고 하면 의욕이 넘친다. 그런데 원칙대로 일하고 진리를 실행하라고 하면 의욕을 잃고 멍해져서는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른다. 심지어 난색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 ‘나한테 힘쓰라고 하거나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라고 하면 얼마나 고생스럽든 상관없어. 아무리 힘들어도 군소리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나한테 원칙대로 하라는 건 일부러 괴롭히는 거잖아? 군말 없이 힘쓰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는 것도 대단한 건데 왜 원칙대로 하라고 그러지? 사람한테 너무 과한 요구야!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일만 잘하면 그만이지. 제대로 못 하면 차근차근 바로잡아주면 되고!’라고 생각한다. 그는 힘만 쓰고 싶어 한다. 힘만 쓰는 일엔 꽤 의욕적이면서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는 무기력하다. 생명 진입에 관해 이야기하면 더더욱 정신을 못 차린다. 그러면서 자기가 훌륭한 사람인 줄 안다. 그는 늘 “전 양심이 있고 선량하며 본분도 요령 피우지 않고 있는 힘껏 이행하는 사람입니다. 가정과 직장까지 버리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어요. 제가 왜 이렇게 의욕적이겠습니까? 태생이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이죠!”라고 떠든다. 사실 그는 그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했고 더구나 진리 원칙대로 일할 줄도 모른다. 무식하게 힘쓰는 것밖에 모르면서 자기가 대단한 줄 안다. 상황이 이런데 양심과 이성은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만약 정말 양심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억지를 늘어놓을 수 있느냐? 어째서 진리를 순정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양심이 있고 인성이 있는데 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준칙이 무엇이고, 일할 때마다 준수해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마음을 다해 들어 보지 않느냐? 만약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진리를 지각하지 못한다면 너는 양심이 없고 인성이 없는 놈이다. 무식하게 힘만 쓰면 그 대가로 진리와 생명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느냐? 구원을 대가로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느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건 통하지 않는다. 네가 힘쓰고, 진심으로 전력을 다하길 원하며 고생도 할 수 있어서 남들에게 충성스러워 보이더라도 끝까지 충성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네 짐승의 성품이 발작하여 못된 짓을 저지르고 방해하며 교란할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정리해 버려야 한다. 최근 교회에서 몇 사람을 정리하지 않았더냐? 이런 부류는 말은 그럴싸하게 한다. 누가 들어도 그를 보고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 말은 그럴싸하게 하지만 실질적인 일을 하지 않고 사람에게 맞설 뿐 아니라 하나님 집에도 맞선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게 아니냐? 하나님 집이 그를 용납할 수 있겠느냐? 본분을 이행하고자 한다면 성실하고 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주인 노릇하고 교란하며 망치려 한다. 어느 정도로 교란하느냐? 심지어 내가 어떤 일을 하든 참견하면서 왈가왈부하고 막아서며 교란하려 한다. 나한테까지 교란하려 하는데 내가 그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겠느냐? 만약 내 개인 생활만 교란한다면 내버려두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 집에서 사역하고 하나님의 선민에게 실질적인 일을 하는 것까지 교란하고 망친다면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정리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집에는 사람을 처리하는 원칙이 있다. 이런 사람은 정리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전 억울합니다. 이게 당신께 죄가 되는 행동인 줄 몰랐어요. 이게 상부와 하나님께 대드는 행동인 줄 몰랐습니다. 고의가 아녔어요.”라고 한다. 네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의다. 네가 몇 년 동안 설교를 들었느냐? 네게 양심이나 인성이 있느냐? 네가 사람이라면, 그리고 인성이 있고 양심과 이성을 지녔다면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이런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행사를 고의로 교란하고 망치는데 그가 그러고도 사람이겠느냐? 이는 마귀가 아니냐? 만약 사람이 정말 양심과 이성, 그리고 인성을 지녔다면 설사 보통 사람의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교회 사역과 형제자매에게 유익하다면 그것을 망치지 말고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물며 내가 친히 하는 일은 어떻겠느냐? 하지만 그는 중간에서 교란하고 망치려 한다.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못한다. 이는 마귀의 습성이 생긴 것이 아니냐? 잘 들어라. 이런 놈은 심각한 악행을 저질렀다. 그에게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집에는 사람을 처리하는 원칙이 있으니 그를 제명 처리해라. 그렇게 대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느냐? (합당합니다.) 만약 그가 삶에서 개인적인 기호를 따를 뿐이라면 이는 괜찮다. 예를 들어 내가 “나는 면 요리를 즐긴다.”라고 하자 그가 “전 면 요리를 좋아하지 않아서 밥을 차릴 때 당신께는 면 요리를 해드리고 저 혼자 밥을 해 먹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이 일은 교회 사역과 관련되지 않고 진리 원칙과 관련되지도 않는다. 더구나 네 인성의 양심과 관련되지도 않으니 개인적인 기호를 따라도 된다. 하지만 교회 사역에 관련된 일에서는 안 된다. 네가 만약 제멋대로 악행을 저지르고 방해하며 교란한다면 이는 행정 법령을 어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버젓이 행정 법령을 어기느냐? 어떤 사람이 대놓고 진리와 하나님 집에 트집을 잡느냐? (마귀입니다.) 이런 무모한 머저리와 짐승들은 이렇게 트집을 잡고 교란할 수 있다. 특히 마귀는 더더욱 이런 짓을 할 수 있다. 하나님 집이 무슨 일을 하든 마귀는 늘 교란한다. 마치 귀신 들린 사람처럼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교란한다. 그는 자기가 이렇게 교란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는커녕 자기는 교란하지 않았다고, 무고하다고 생각하면서 변명한다. 이런 부류는 아무것도 교제해 주지 말고 곧장 제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마귀이다. 그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너더러 꼭 진리를 추구하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범사에 진리를 실행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규율은 알아야 한다. 네가 규율과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을 모르고 행정 법령을 어기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러고도 네가 인성이 있는 사람이겠느냐? 너는 인성을 지니지 못한 마귀이다. 마귀는 무의식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그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판단하며 모욕하는 것은 본성의 자연스러운 표출이다. 다른 사람이 굳이 부추기거나 세뇌하지 않아도 그는 자연스럽게 이런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마귀의 본성에 지배된 탓이다.

오늘은 사람의 양심 및 이성에 해당하는 시비에 밝은 특징에 관해 교제했다. 교제를 통해 이 측면을 분명히 알게 되었느냐? 진정한 사람은 양심을 지니고 있고 시비에 밝으며 그의 양심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나 일에 직면하고 어떤 문제가 일어나든 기본적으로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양심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네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판단하고 분별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네가 확실히 길을 살피고, 선을 넘지 않게 처신하도록 도움을 주어서 결국 올바른 길을 취사선택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물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나 하나님을 오래 믿어서 기초가 있는 사람은 양심의 작용으로 결국 긍정적인 것을 택하고 진리를 구하는 것을 택하여 진리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서 양심이 인성 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긍정적인 것을 택하도록 규제하는 역할을 한다. 만약 한 사람에게 양심이 없다면 그는 긍정적인 것이나 올바른 길을 택하지 못할뿐더러 무슨 일이에서든 양심으로부터 최소한의 단속과 규제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안 봐도 뻔하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위험하다. 너무 쉽게 악행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다. 그가 만약 짐승에게서 환생했다면 악마가 하는 짓을 저지를 것이고 악마나 마귀의 부류는 그보다 더 악한 짓을 저지를 것이니 너무나도 끔찍하다. 그래서 양심을 지니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이제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만약 한 사람에게 자기 행동을 규제하고 자기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양심이 없다면 이 사람은 필연적으로 잘못된 길을 선택할 것이고 부정적인 짓을 일삼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로 인한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는 대담하게 진리나 사물의 발전 규칙을 어길 것이며, 거리낌 없이 모독하고, 진리와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판단할 것이다. 심지어는 대놓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행정 법령을 어기며 하나님을 맹렬히 욕하고 정죄하며 모욕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사탄, 마귀와 완전히 똑같다. 그는 사탄, 마귀가 하는 모든 악행을 저지를 수 있고 사탄, 마귀가 하는 모든 일을 행할 수 있으며, 사탄, 마귀가 하는 모든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논리, 생억지를 늘어놓을 수 있다. 이들이 바로 진정한 사탄, 마귀이다.

오늘 예배에서 나눈 교제를 통해 너희는 무엇을 깨달았느냐? (인성을 지닌 사람은 양심과 이성을 지녀서 시비를 확실히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비에 밝은 측면에 대해 하나님께서 다양한 사례를 결합해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고 부정적인 것인지 무척 명확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일이 일어났을 때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올바른 추구와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긍정적인 사물은 동경하고 추구해야 하며 부정적인 것은 증오하고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인성에 갖춰져 있는 양심과 이성은 사람이 구원받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만약 네가 이 두 가지 기본 조건을 갖추었으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깨달았으면서 실행하지 않아 결국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된다면 너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양심과 이성은 구원받기 위한 기본 조건일 뿐이다. 어떤 길을 가는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 네가 만약 정말 양심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양심의 규제를 통해 진리 추구의 길을 갈 기회가 있다. 그런데 만약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규제하고 인도해 줄 양심을 지녔는데도 네가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을 원하지 않고 육을 저버리고 자신의 육적인 이익과 관련된 것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아서 진리 추구의 길을 가지 않는다면 네게는 여전히 구원의 희망이 없을 것이다. 이 구원의 희망은 네 인성의 양심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면서 치를 대가, 진리를 실행하고자 하는 네 결심이나 소망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양심은 단지 네게 구원받기 위한 기본 조건을 제공하고, 진리를 실행할 많은 기회를 만들어 주어서 양심의 규제를 통해 올바른 길을 갈 기회를 줄 뿐이다. 네가 올바른 길을 갈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고 네 구원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커서 50퍼센트 이상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100퍼센트는 아니다. 그러니 스스로 양심을 지녔고 인성을 지녔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을 이유로 자기가 양심과 이성을 지녔으니 훌륭한 사람이라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자부하지 마라. 네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잘 들어라. 너는 이 일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네가 양심을 갖추고 있고 인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를 통해 네가 하나님이 택한 대상, 하나님에게 부름받은 대상이라는 점만 확실해질 뿐이다. 네가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네 개인의 추구이다. 네 양심이 항상 지각하면서 네 행동을 규제하고, 네가 올바른 길을 택하도록 규제한다고 해도 네가 늘 양심을 어기고 올바른 길을 택하지 않는다면, 또 진리를 실행하지도 않고 사적인 이익이나 명예, 체면만 지키면서 본인의 장래나 야심, 욕망만 생각한다면 네가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번번이 자기 손으로 망쳐버릴 테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교제는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자!

2024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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