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6)
지난 예배에서 어디까지 교제했느냐? (지난번 하나님께서는 전통, 미신, 종교 측면에서 가정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내용을 주로 교제하셨습니다. 세부적으로는 “떠날 땐 만두를 먹고 돌아와선 국수를 먹는다.”와 “왼쪽 눈이 떨리면 재물이 들어오고 오른쪽 눈이 떨리면 재난이 닥친다.” 등의 미신적인 말을 교제하셨고, 새해와 명절의 전통 풍습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도 교제하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이러한 전통적이고 미신적인 주장과 행위를 올바르게 대하는 방법도 교제하셨습니다. 어떤 일들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점을 믿는 한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말들이 무엇을 예고하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저희는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따라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지난번 예배에서 교제한 기본 내용이다. 가정에서 사람이 교육받은 전통, 미신, 종교 측면에 관한 내용에서, 우리는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교제했다. 비록 교제 내용이 우리가 아는 중국인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전통, 미신, 종교 측면의 화제에 국한되어 여러 민족과 인종을 대변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은 다양한 지역에 살며 다양한 인종에 속한 사람들이 고집하는 전통, 미신, 종교와 성질이 똑같다. 하나같이 선조가 남긴 전통, 생활습관, 미신적인 말을 생활 속에서 지키는 것이다. 그러한 미신적인 것이 사람의 심리적 작용이든 아니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든 간에 너희가 그것을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는 미신 뒤에 있는 주요 사상 혹은 본질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의 영향을 받거나 방해받지 말고, 사람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어야 한다. 미신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미신이 사람의 운명과 사람의 하루하루를 주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미신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영험하든 아니든, 혹은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어쨌든 그러한 종류의 일을 대할 때는 진리에 부합하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것에 사로잡히거나 조종당해서는 안 되며, 그것으로 인해 너의 정상적인 추구 목표와 실행 원칙이 방해받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 전통, 미신, 종교와 같은 화제 중에서도 미신은 사람의 생활과 생각, 그리고 사람이 각종 사물을 대하는 관점을 가장 심하게 방해하고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보통 미신적인 주장과 정의를 감히 포기하지 못해서 그것이 사람의 생활 방면에 일으키는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 사람은 일상생활 속에서 미신적 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엄두를 못 낸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직 부족하고, 하나님이 만물과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아직 진실로 꿰뚫어 보지도 정확하게 인식하지도 못했음을 증명한다. 그래서 어떠한 미신적 주장이나 미신과 관련된 느낌을 마주했을 때 너는 손발이 묶이게 된다. 특히 그것이 생사와 관련된 큰일이거나 사람의 운세 또는 자기 가족의 생사와 관련이 있다면 소위 미신적 금기와 주장에 손발이 묶여 무척 자유롭지 못하다. 만에 하나 금기를 어겼는데 만에 하나 그것이 영험하면 자기에게 모종의 액운이 닥치거나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봐 항상 두려워한다. 사람은 미신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언제나 그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고, 더욱이 갖가지 미신적 말들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신이 사람의 생활에 도대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간파하지 못하는 것도 물론이다. 사람의 태도를 보면, 그리고 미신에 대한 사람의 이러한 사상 관점을 보면, 사람의 사상 의식과 사상 관점은 여전히 상당 부분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으며, 물질세계 밖의 어떠한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사람의 운세나 생사, 그리고 생존과 관련된 미신적 말에 계속 조종당한다. 요컨대, 사람은 내심 그러한 미신적인 말이 진짜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는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주재되고 지배된다는 사실을 진실로 알지 못하고, 사람이 여전히 그러한 미신 뒤의 보이지 않는 마수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편안한 마음으로 기꺼이 자기 운명을 하나님 손에 맡기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사탄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평소에 장사하는 사람, 자주 외출하는 사람, 그리고 과거에 관상, 주역 팔괘, 음양학 등의 미신적 활동과 미신적 주장을 믿는 편이었던 사람들은 일상생활, 생존 법칙, 관념 등의 면에서 미신의 영향을 크게 받고, 조종당하고, 지배당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 미신에서 비롯된 이론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예컨대 집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달력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살펴보며 혹시 무슨 금기는 없는지 확인한다. 오늘이 장사나 계약 체결, 혹은 주택 매매 등등을 하러 가는 날이면 꼭 달력을 봐야 한다. 보지 않으면 자신이 없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달력을 보고 나서 일을 하거나 결정을 내려야만 자신이 생기고 마음이 놓인다. 게다가 자꾸 금기를 깨서 좋지 않은 일이 생기다 보면 미신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더욱더 확실하게 알고 믿게 되어 미신에 속박당한다. 그러면서 사람의 운명과 운세, 사람의 생사가 미신에 의해 조종된다고, 드러나지 않은 가운데서 커다란 손이 자기 운세와 생사를 틀어쥐고 있다고 더욱더 믿게 된다. 그래서 그는 미신적인 주장은 무엇이든 굳게 믿는다. 특히 자기 생활 및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내용이라면 더 그렇다. 이 때문에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입으로는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면 깊숙한 곳은 자기도 모르게 늘 각종 미신에 의해 방해받고 조종당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소위 생활 속의 금기, 무엇과 무엇은 상극이라든지 어떤 살이 끼었다는 등의 미신적인 주장을 진리 원칙과 섞어서 지킨다. 미신을 대하는 사람의 이러한 태도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하나의 피조물이 창조주를 대하는 태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당연히 하나님이 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기꺼이, 어쩔 수 없이 계속 사탄에게서 주입받은, 갖가지 미신에 관계된 생각과 주장에 의해 통제당하고 방해받는 동시에 미신과 관련된 갖가지 생각과 주장을 내려놓기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교육받은 내용 중 사람을 가장 심각하게 방해하는 것은 사실 미신이며, 사람에게 가장 크고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도 미신이다. 그러므로 미신이라는 방면에 있어서 사람은 자기가 가정이나 집안 혹은 종족으로부터 미신 방면의 각종 교육과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실생활 속에서 하나하나 조사하고 인식하며 살펴봐야 한다. 만약 있다면 그것을 고집하지 말고 하나하나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은 진리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드러나는 전통적 생활방식의 행동 양식 하나만 해도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고분고분하게 사탄의 통제를 받도록 만들 수 있으니 사상적으로 영향력을 지니는 미신적인 주장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더 나아가 한 사람이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꼼짝없이 통제받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전통과 종교 외에 미신에 관련된 일부 사상 관점과 주장 혹은 규율은 모두 고집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즉시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금기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요구, 하나님의 뜻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에 명문으로 선포되었다. 게다가 하나님이 모든 말씀으로 사람에게 알려 주거나 사람에게 하라고 요구한 것들은 전부 진리와 관련된 것이다. 거기에는 그 어떤 괴상한 요소도 없다. 하나님은 그저 사람에게 명확하고 직설적으로 어떻게 할지, 어떤 일에 있어서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할지 알려 줄 뿐이다. 그 어떤 금기도 없고 특별한 사항이나 어떤 주장도 없다. 사람이 지켜야 할 것은 오직 자신의 실제 상황에 근거해 진리 원칙에 따라 행하는 것뿐이다.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진리 원칙을 지키는 일은 날짜나 시간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 어떤 금기도 없는 것이다. 달력을 볼 필요도 없고 별의 위치를 살피거나 오늘 달이 둥근지 이지러졌는지 신경 쓸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러한 것을 상관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하나님의 주재 속에서 사람은 자유롭고 해방되어 있다. 또한, 마음이 평온하고 기쁘며 편안하다. 당황스럽거나 두렵지 않고 억압받는 느낌은 더더욱 들지 않는다. 당황스러움, 두려움, 억압감은 각종 미신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느낌에 불과하다. 진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요구, 그리고 성령 역사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평안과 기쁨, 자유와 해방, 홀가분함과 유쾌함이다. 미신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이와 정반대로, 미신은 너의 손발을 묶는다. 네게 이것도 못 하게 하고 저것도 못 하게 하고 이것도 못 먹게 하고 저것도 못 먹게 한다. 무엇을 하든 옳지 않고 무엇을 하든 금기가 있어서 항상 오래된 책력의 말을 따라야 한다. 지금이 음력으로 언제인지, 어느 날에 무슨 일을 해도 되는지, 외출을 해도 괜찮은지, 심지어 머리 자르기, 목욕하기, 옷 갈아입기, 어떤 사람을 만나는 일에도 금기가 있다. 특히 관혼상제, 이사, 일 처리, 취업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책력을 봐야만 한다. 사탄은 갖가지 미신적인 말과 괴상한 말로 사람의 손발을 꽁꽁 묶는다.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것이겠느냐?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즘 사람들 말로 하면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무슨 뜻이냐? 사람들에게 자기 존재를 알리고, 자기가 제시한 금기와 관련된 말들이 허구가 아니고, 자기가 결정권자이고 한다면 하는 자이니 말을 듣지 않는다면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뜻이다. “할머니가 립스틱을 바르는 것, 본때를 보여 준다.”라는 말이 있지 않으냐? 이는 만약 네가 말을 안 듣고 금기를 깨뜨리면 어디 두고 보겠다고, 뒷일을 감당해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그러한 금기를 두려워하게 된다. 육에 속한 인간은 영계의 온갖 마귀 사탄을 이길 수 없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제 너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 네 생각과 네 하루하루의 생활을 포함한 모든 것은 하나님 손의 주관하에 있다. 하나님이 너를 보살피고 지킨다. 너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생활하고 생존하는 것이지 사탄의 손에 장악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더는 그런 금기를 지킬 필요가 없다. 반대로 만약 네가 여전히 사탄이 해를 끼칠 수 있을까 봐 두려워하고, 사탄의 말을 듣지 않거나 미신에서 말하는 금기 사항을 믿지 않았다가 나쁜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곧 네가 여전히 사탄이 네 운명을 통제할 수 있음을 믿는다는 뜻이다. 이와 동시에 네가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고 기꺼이 사탄의 지배를 받고자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탄이 이 모든 짓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사람에게 확실히 알리기 위해서이다. 사탄은 자신의 마력으로 인류를 통제하고 모든 생명체를 통제하려고 한다. 통제의 목적은 유린이고, 유린의 목적과 최종 결과는 집어삼키는 것이다. 물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경배하게 하는 것 역시 통제의 목적이다. 마귀 사탄이 존재감을 드러내려면 약간의 영험함을 보여 줘야 한다. 예를 들어, 그가 달걀을 똥이 되게 할 수 있다고 치자. 한 악령의 위패에 바쳐진 달걀이 있는데 배고픈 네가 먹고 싶은 마음에 달걀을 빼앗으려 하면 그는 달걀을 똥이 되게 하여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네게 보여 준다. 그러면 너는 두려워져서 감히 먹을 것을 두고 그와 다투지 못한다. 한 가지 일로 그를 두려워하게 되면 다른 일로도 그를 두려워하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너는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게 될 것이고, 오랫동안 맹목적으로 믿게 되면 마음 깊이 그것을 숭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일을 하는 목적이 아니겠느냐? 사탄은 바로 이런 목적으로 일을 한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어느 인종 사람들이든, 모두가 악령이나 귀신에게 무릎을 꿇고 절한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들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악령 귀신 앞에 대대로 향불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만약 네가 그 악령 귀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어째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믿으면서 대대로 악령 귀신을 위해 향을 피우고, 머리를 조아리고, 소원을 빌고, 또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냐? 그 악령 귀신이 어떠한 일을 한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악령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악령들은 너에게 병이 나게 하고, 일이 잘 안 풀리게 만들고, 재앙이 임하게 하고, 집의 소가 모두 병들어 밭을 갈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는 가족에게 교통사고가 나게 한다. 악령은 너를 괴롭힌다. 괴롭힘이 점점 심해지면 너는 도저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악령에게 무릎을 꿇고 절해야 한다. 기꺼이 자기에게 머리 숙여 굴복하면 악령은 신이 난다. 이때부터 너는 악령의 것이 된다. 사회에서 여우 신선을 모신다느니 영계의 온갖 인물을 모신다느니 하는 위패들을 보아라. 우리는 그것들을 뭐라고 칭하느냐? 악령에 씌었다고 하거나 빙의되었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무슨 신선을 모신다고 하거나 무언가가 들러붙었다고 한다. 악령이 들러붙을 대상을 찾을 때 그 대상이 거부하면 악령은 그를 방해하고 교란한다. 그 때문에 그 사람은 집에 문제가 생기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적자가 나고 손님이 끊긴다. 도저히 살 수가 없게, 상황이 몹시 어려워질 정도로 악령의 방해를 받으면 그 사람은 결국 백기를 들고 동의한다. 동의하고 나면 악령은 그의 육체를 빌려 일한다. 약간의 이적과 기사를 행해 사람들을 불러 모은 뒤 진찰도 해 주고 관상도 봐 준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 주는 등의 일도 한다. 악령은 이러한 수법으로 사람을 현혹하고, 패괴시키고, 통제하는 것 아니겠느냐?
만약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러한 미신적인 주장에 대해 이방인과 똑같은 관점과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 성질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하는 것입니다.) 맞았다. 너무나 정확한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너는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동시에 미신에 의해 통제되고 방해받고, 더 나아가 미신이 주입한 생각을 추종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미신과 관련된 생각과 사실을 두려워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가장 큰 모독이다. 너는 하나님을 증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탄을 따라 하나님의 주재에 저항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사람이 미신을 믿거나 미신을 따르는 것의 본질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미신으로부터 받은 다양한 영향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내려놓기를 실행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것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곧이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에 방해받지 않는 것이다. 설사 미신에서 말하는 그 일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방해받거나 통제받지 말아야 한다. 어째서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사탄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하나님의 허락하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다면 하나님이 말씀했듯이 사탄은 너의 털끝 하나도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 이것은 사실이자 사람이 믿어야 할 하나의 진리이기도 하다. 그러니 네 어느 쪽 눈꺼풀이 떨리든, 꿈에서 이가 빠졌든, 머리카락이 빠졌든, 사람이 죽었든, 그 어떤 악몽을 꾸더라도 사람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믿고 그것의 영향을 받거나 그것에 방해받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일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하나님이 예정해 둔 일 또한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하나님이 예정해 둔 일, 하나님이 계획해 둔 일은 기정사실이다. 네가 예감했든 아니든, 영계의 마귀 사탄이 네게 어떤 예시를 줬든, 너는 그것에 방해받지 말고 오직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믿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 곧 일어날 일 혹은 일어날 리 없는 일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장악되어 있고 하나님의 예정에 포함되어 있다.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간섭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이것이 사실이다. 사람이 무릎 꿇고 경배해야 할 대상은 창조주이지 미신을 영험하게 만들거나 환원할 수 있는 영계의 그 어떤 세력이 아니다. 마귀 사탄이 아무리 신통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어떤 이적을 보인다거나 어떤 일을 영험하게 만든다거나 누구의 예감과 미신적인 주장을 사실로 만들 수 있다 해도 그것이 사람의 운명이 그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이 무릎 꿇고 경배하고 믿어야 할 대상은 마귀 사탄이 아니라 창조주이다. 가정에서 교육받은 전통, 미신, 종교 관련 화제에 대해 사람은 이런 점을 알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전통이든, 미신이든, 종교든 그와 관련된 것이 하나님의 말씀, 진리,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요구와 무관하다면 사람은 반드시 그것을 버리고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이 일종의 생활 형식이든 사상이든, 규례이든, 아니면 일종의 이론이든, 진리와 관계가 없다면 전부 다 사람이 버려야 할 대상이다. 예를 들어, 종교에 관계된 것들은 사람에게 관념적으로 미신이나 전통 혹은 우상 숭배보다는 비교적 고상하고 신성하게 여겨진다. 사람의 관념과 생각 깊은 곳에는 기독교, 천주교, 유대교와 같은 종교에 대해 약간의 흠모 또는 호감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사람은 종교와 관련된 표지, 기념일, 또 일부 상징적인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들을 보배처럼 지극히 아껴서도, 진리를 대하듯이 대하며 무릎 꿇고 절해서도, 더 나아가 마음에 그것들을 위한 자리를 남겨 두어서도 안 된다. 종교적 표지와 종교 활동, 종교적 경축일과 휴일, 종교적 상징물들, 그리고 종교의 비교적 고상한 주장 등등이 모두 우리가 말하는 종교라는 주제의 범위에 포함된다. 아무튼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은 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다. 미신, 전통, 종교와 관련된 것들은 그것이 고상하든 아니면 조금 괴상하든 간에, 진리에 관계되지 않는다면, 진리와 무관하다면 전부 다 사람이 내려놓아야 할 것이지 사람이 고집해야 할 것이 아니다. 물론 진리 원칙을 거스르는 주제들은 더욱더 내려놓아야 하며, 절대로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반드시 가정에서 물들거나 영향을 받은 이러한 것들을 남김없이 내려놓아 그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를 들어, 마침 성탄절에 즈음하여 형제자매들을 만나게 되면 너는 보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성탄절 즐겁게 보내세요! Merry Christmas! Happy Christmas!” 여기서 “성탄절 즐겁게 보내세요.”라는 말이 괜찮은 것이냐? (괜찮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이니까 기념으로 하루 쉬면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사역과 본분이 아무리 바빠도 잠시 멈추고, 과거 하나님께서 사역하신 가장 기념비적인 날을 기념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말이 적절하겠느냐? (부적절합니다.) 어째서 부적절하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사역이며, 진리와는 무관한 일이기도 합니다.) 도리상으로는 그렇다. 너희는 이론상으로 이 문제의 근원을 파악했다. 그렇다면 사실상으로는 어떠하냐? 무엇보다도 간단한 일이건만 너희는 대답하지 못하는구나. 사람이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면서 혐오한다. 이렇게나 간단하다. 보아라. 기념일에 이방인은 이런 말을 한다. “Happy New Year!” “Happy Christmas!” 그가 나에게 인사를 건네면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You too!”라고 한다. ‘당신도 성탄절 즐겁게 보내라’는 뜻이다. 형식적으로 대답하고 끝낸다. 그러나 형제자매를 만났을 때는 이런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어째서겠느냐? 그것은 이방인의 기념일이고 상업적인 기념일이다. 서양에서는 전통적인 것이든 인위적인 것이든 거의 모든 기념일이 사실 상업과 관계가 있고 경제와 맞물려 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민족의 기념일이 단지 전통과만 관계있는 것임에도 20세기에 들어서는 점차 각종 상업적 이벤트로 변질되어 장사꾼이 물건을 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러한 기념일이 상업적이든 아니면 전통적이든, 결론적으로 전부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는 관계가 없다. 이방인이나 심지어는 종교인들이 그러한 기념일에 얼마나 열중하든, 그 기념일이 어느 나라 혹은 민족 사이에서 얼마나 장중하고 성대하게 치러지든,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기념일도 아니고, 우리가 축하하고 기억해야 할 기념일은 더욱 아니다. 이방인은 물론이고 어느 인종과 민족의 것이든, 어느 시기에 생겨난 전통적 기념일이든 전부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 하나님의 3단계 사역의 각 시대 및 부분과 연관된 기념일조차도 우리와는 무관하다. 예컨대 율법시대의 기념일들도 우리와 관계가 없고, 은혜시대의 부활절, 성탄절 등등은 우리와 더더욱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이를 교제하는 것은 사람에게 무엇을 알게 하기 위함이겠느냐? 하나님은 일할 때 기념일이나 그 어떤 규례를 지키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유롭고 얽매임이 없이 일하며, 어떠한 금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기념일도 기념하지 않는다. 하나님 본인이 과거에 했던 사역의 시작일이라든지 종료일, 혹은 어떤 특별한 날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기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기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그러한 날짜나 날, 시간을 일부러 알게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러한 날들을 기념하지 않고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도 그날을 기념하거나 축하할 필요가 없고 그러한 날들을 지키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 준다.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된 그 어떤 날과 시간도 사람은 기억할 필요가 없고 기념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사람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인도하에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일상생활 속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토록 간단하다. 이러면 사람의 생활이 훨씬 홀가분하고 유쾌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제에 대한 교제는 사실 누구에게나 속박이 아닌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준다. 이러한 주제는 한 측면으로는 객관적인 사실이자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진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을 거기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람이 지키면 안 되는 이런 것들을 내려놓게 하는 동시에, 사람에게 그것들은 진리를 대변하지 않으며 사람이 반드시 준수해야 할 하나님의 도는 오직 하나, 진리뿐임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가정과 관련된 주제에는 너에 대한 가정의 영향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측면의 내려놓아야 할 것들도 포함된다. 앞서 우리는 가정이 사람의 생각에 주는 영향을 교제했고, 그다음에는 생활 방면의 여러 가지 주장들로 가정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을 교제했다. 모든 가정은 사람에게 안정된 생활과 성장 공간을 제공하며, 성장 과정에서 사람에게 안전감과 의지할 곳, 생활의 기본 요소들을 해결해 주는 원천을 제공한다. 사람은 가정에서 감정적으로 필요한 것 외에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 또한 얻는다. 물론 생활에 필요한 것과 성장 과정에서 필요한 생활 상식도 얻는다. 사람은 가정에서 아주 많은 것을 얻는다. 그래서 가정은 누구에게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다. 가정이 사람에게 주는 이점은 아주 많다. 그러나 우리가 교제한 내용을 보면 가정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갖가지 부정적 영향과 부정적 생활 태도 및 관점도 많다. 즉, 가정은 네게 육적인 생활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주었고, 너를 따뜻하고 배부르게 해 주었으며, 감정적인 버팀목과 의지처를 제공했지만 이와 동시에 네게 불필요한 문제를 야기했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문제들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벗어나거나 내려놓기 힘든 것들이다. 그것은 일정 부분 네 일상생활과 네 생존에 크고 작은 방해가 되고, 네가 늘 가정에 대해 복잡하고 모순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감정적으로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 주는 동시에 감정적으로 너의 생활을 방해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가정’이라는 용어에 대해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든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가정을 그리워하고 가정에 연연하며, 당연히 가정에 깊이 감사한다. 또, 그리워하고 연연하고 감사하는 동시에 가정이 너에게 가져다준 얽매임은 너에게 그것이 아주 골칫거리라고 생각하게 한다. 즉, 성인이 된 사람의 가정에 대한 개념 혹은 생각, 관점은 상대적으로 복잡하다는 것이다. 가정을 완전히 내려놓거나 팽개치고 상관하지 않는다든지 가정 생각을 안 하기로 하면 양심에 찔린다. 그렇다고 가정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어렸을 때처럼 몸과 마음을 전부 가정에 바치자면 그 또한 내키지가 않는다. 사람은 흔히 이러한 내적 상태, 사상 관점 혹은 양상으로 가정을 대한다. 이러한 사상 관점과 양상 역시 가정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교제하려는, 가정이 사람에게 지운 짐이라는 주제이다.
방금 우리는 가정이 늘 사람에게 아주 모순되고 난감하게 하는 것에 대해 교제했다. 완전히 내려놓자니 양심에 참소를 받아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고, 내려놓지 않고 몸과 마음 전부를 가정에 바쳐 가정과 하나가 되자니 종종 가족과의 관점 차이 때문에 어찌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그래서 사람은 가정을 대할 때 무척 어렵다고 느낀다. 가족들과 완벽하게 맞을 수도 없고, 가족들을 완벽하게 끊어 낼 수도 없다. 오늘 우리는 사람이 가정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교제해 보도록 하겠다. 이 주제는 가정에서 기인한 짐과 연결된다. 바로 가정을 내려놓으라는 내용에 포함된 주제 중 세 번째인 가정에서 비롯되는 짐 내려놓기로, 이는 중요한 주제이다. 가정이 지운 짐과 관련된 내용 중에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는 무엇이 있느냐? 이는 사람의 책임, 의무 그리고 효도 등등과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가정이 지운 짐은 사람이 가정을 위해 다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 그리고 효도와 관련이 있다. 이것들은 사람에게 있어 한편으로는 마땅히 다해야 하는 책임이자 의무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특수한 환경하에서 일부 특수한 케이스의 사람에게는 그것이 생활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는데, 그 방해 요소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짐이다. 가정이 지운 짐을 두 측면으로 나누어 이야기하겠다. 한 측면은 부모의 기대이다. 부모 혹은 집안 어른이라면 누구나 자녀에게 저마다 조금씩 다른, 크고 작은 기대를 품고 있다. 자녀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 처신하기를 바란다. 학교에서 열등생이 아닌 우등생, 수재가 되어 선생님과 동급생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란다. 시험 성적은 늘 80점 이상이기를 바라는데 만약 60점을 받으면 때리고, 60점도 못 받으면 벽을 보고 반성하게 하거나 벌로 오래 세워 두거나 밥을 안 주거나 잠을 안 재우거나 TV를 못 보게 하거나 컴퓨터를 못 쓰게 하거나 사 주기로 했던 좋은 옷과 장난감을 안 사 준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에게 갖가지 기대를 품고, 자녀에게 커다란 희망을 건다. 다들 자녀가 굵직한 인물이 되고 출세 가도를 달려 조상과 가문을 빛내기를 바란다. 자기 자녀가 나중에 거지, 농사꾼이 되거나 심하게는 강도, 도적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아무도 없다. 자기 자녀가 사회에 나가 남의 아랫사람 노릇을 하거나 고물을 줍거나 노점상을 하거나 영세 상인이 되거나, 혹은 남에게 무시당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다. 부모의 이러한 기대가 실현될 수 있든 없든 아무튼 부모는 자녀에게 갖가지 기대를 품는다. 그들의 기대는 자기가 좋다고 여기거나 고상하다고 여기는 것, 혹은 그러한 추구를 자녀에게 의탁하고, 자녀에게 희망을 걸고, 그들이 부모의 바람을 실현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의 이러한 바람은 알게 모르게 자녀에게 무엇으로 작용하겠느냐? (압박감입니다.) 압박감이 되고 또 무엇이 되느냐? (짐이 됩니다.) 압박감이 되고 일종의 족쇄가 된다. 부모는 자녀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으므로 자신들의 기대에 맞추어서 자녀를 가르치고, 인도하고, 교육한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들이 기대하는 것을 위해 자녀에게 투자를 하거나 그 어떤 대가든 치른다. 자녀가 학교에서 수재이자 뛰어난 학생으로서 시험을 볼 때마다 90점 이상을 받아 1등을 하고, 아무리 못해도 5등 안에는 들기를 바라는 부모를 예로 들겠다. 부모가 이렇게 말하고 나면 아이가 그 목표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 자기들도 어느 정도 희생하지 않겠느냐? (맞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목표를 실현하게 만들기 위해서 아이가 아침 일찍 일어나 복습하고 교과서를 외우면 자기들도 일찍 일어나 함께하고, 더운 날에는 아이에게 부채질을 해 주고 시원한 음료를 준비해 주거나 아이스크림을 사다가 먹인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이에게 콩국, 꽈배기 튀김, 달걀을 준비해 준다. 특히 시험 기간에는 아이에게 긴 꽈배기 하나와 달걀 두 개를 주면서 먹고 100점 받기를 바란다. 만약 네가 “못 먹겠어요. 달걀은 하나만 먹을래요.”라고 하면 “뭘 모르는구나. 달걀을 하나만 먹으면 10점밖에 못 받으니까 하나 더 먹어. 힘내서 이 달걀까지 먹으면 100점 받을 거야.”라고 한다. 아이가 “방금 일어나서 안 들어간단 말이에요.”라고 하면 “안 돼. 꼭 먹어야 해! 착하지, 엄마 말 들어. 다 너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 먹으렴.”이라고 한다. 그러면 아이는 고민하다가 이런다. “엄마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시는구나. 다 나를 위해서 저러시는 거니까 먹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달걀이지만 사실상 삼키는 것은 무엇이냐? 압박감, 달갑지 않은 마음이다. 음식이 좋고 어머니의 기대가 아주 크니 인성과 양심상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러한 사랑에 반항해야 하고 그러한 방식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만약 먹지 않는다면 어머니가 화를 낼 것이고, 너를 때리고 야단치거나 심지어 몹쓸 말을 퍼부을 수도 있다. 어떤 부모들은 이렇게 말한다. “못나게 구는 것 좀 봐. 고작 달걀 하나 먹기가 그렇게 힘들어서야. 꽈배기 하나랑 달걀 두 개를 먹으면 100점 아니겠니? 다 너를 위해서 이러는 것 아니겠어? 그런데도 못 먹겠다니. 못 먹겠으면 앞으로는 나가서 빌어먹을 거야. 마음대로 해라!” 정말로 들어가지 않는데 부모가 억지로 먹으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먹고 나서 토하는 아이도 있다. 그렇게 토하면 부모는 더 화를 낸다. 아이는 동정과 이해를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꾸짖음까지 당해야 한다. 꾸짖음을 당하면서 더욱더 부모님에게 미안해지고 더욱더 자책하게 된다. 말해 보아라. 이런 아이가 사는 것이 쉬우냐? (쉽지 않습니다.) 다 토한 다음에도 계속 토하는 척하면서 화장실에서 혼자 몰래 운다. 화장실에서 나올 때는 얼른 눈물을 닦는다. 엄마에게 눈물을 들켜서는 안 된다. 어째서냐? 엄마가 봤다가는 야단맞을 테고, 더 나아가 몹쓸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이런 한심한 녀석을 봤나, 울기는 왜 울어! 머저리 같은 놈아, 이렇게 잘 차려 줘도 못 먹겠다니 그럼 뭐가 먹고 싶은 건데? 네가 굶어 봐야 먹겠다고 하지. 너는 고생할 팔자야! 공부도 열심히 안 하고 시험도 열심히 안 볼 거면 앞으로는 빌어먹을 거야!” 어머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교육 같기도 하고 꾸짖음 같기도 하지만 네가 느끼는 것은 무엇이냐? 부모의 기대와 부모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어머니가 아무리 모진 말을 하더라도 너는 눈물을 머금은 채 어머니의 말을 받아들여 삼켜야 한다. 밥이 넘어가지 않더라도 참고 먹어야 하고, 구역질이 나더라도 먹어야 한다. 이러한 나날을 보내기가 좋으냐, 좋지 않으냐? (좋지 않습니다.) 어째서 좋지 않으냐? 너는 부모의 기대 속에서 어떠한 교육을 받느냐? (시험을 반드시 잘 봐야 하고 나중에 성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꼭 성공해야 하고, 꼭 어머니의 사랑과 고생스레 치른 대가를 헛되게 만들지 말아야 하고, 꼭 어머니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그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너를 너무나 사랑하고, 너를 위해 전부를 바쳤으며, 생명으로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이 치른 그런 대가와 그들의 교육, 그들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전부 무엇이 되느냐? 네가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 되는 동시에 네 짐이 된다. 그 짐은 바로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부모가 그러는 것이 본능 때문이든, 사랑 때문이든, 아니면 이 사회에서 필연적인 것이든 아무튼 부모는 그러한 방식으로 너를 교육하고, 대하고, 심지어는 네게 갖가지 생각을 주입한다. 결국 네 마음이 얻는 것은 자유, 해방, 위로, 기쁨이 아니다. 그들은 너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압박감, 공포, 양심의 가책, 불안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멍에와 결박이 있습니다.) 멍에와 결박이다. 그리고 바로 부모의 이러한 기대 속에서 너는 자기도 모르게 그들의 기대를 위해 살아간다.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그들을 실망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매일 열심히, 꾸준하게 모든 과목을 공부하고 그들이 시키는 모든 일을 한다. TV를 보지 말라고 하면 너는 시키는 대로 TV를 보지 않는다. 사실 너무 보고 싶으면서도 어째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냐? (부모가 실망할 것이 두려워서입니다.) 부모 말을 안 들었다가 정말로 성적이 떨어져서 좋은 대학에 못 갈까 봐 두려운 것이다. 자기 인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 부모의 단속, 꾸짖음, 압제가 없으면 앞길이 도대체 어떨지 모를 것 같다. 너는 그들의 속박에서 벗어날 엄두도, 그들이 채운 족쇄에서 벗어날 엄두도 못 낸다. 그저 그들이 네게 각종 규칙을 정해 주도록 내버려두고, 그들이 지배하도록 내버려둘 뿐, 감히 거역하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전혀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양심과 인성상 그들을 거역하거나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너는 자식으로서 응당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다 네가 잘되기를 바라서 하는 것이고 너의 장래와 너의 앞길을 고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네게 각종 규칙을 정해 주면 너는 그저 묵묵히 따른다. 속으로는 너무 싫더라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지시에 복종한다. 그들이 TV를 못 보게 하면, 학교 공부와 관계없는 책을 못 보게 하면 너는 보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급우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면 너는 그 아이와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그들이 몇 시에 일어나라고 하면 너는 그 시간에 일어난다. 그들이 몇 시에 쉬라고 하면 너는 그 시간에 쉰다. 그들이 네게 얼마만큼 공부하라고 하면 너는 그 시간만큼 공부한다. 그들이 네게 책을 얼마만큼 읽으라고 하고 교과 외 기능을 얼마만큼 배우라고 할 때 그들이 돈을 들여서 너를 배우게 하는 한, 너는 그들이 마음대로 지배하고 좌지우지하게 내버려둔다. 특히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특별한 기대를 건다. 자녀가 그들을 넘어서기를 바라고, 그들 세대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룰 수 있기를 더더욱 바란다. 무용가가 되고 싶었던 부모를 예로 들겠다. 본인 성장기의 시대적 배경 또는 당시의 집안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자기는 결국 무용가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부모는 그 꿈을 네게 투영한다. 기본적으로 네게 학교에서 반드시 상위권을 차지해야 하고 명문대에 붙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거기에 더하여 너를 무용 학원에 등록시켜 학과목 외에 여러 가지 무용을 배우게 한다. 학원에서 열심히 배우고 집에서도 열심히 연습해 무용 학원 내의 에이스가 되라고 하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명문대에도 붙고 무용가도 되라고 한다. 네게 주어진 선택지는 무용가가 되거나 명문대에 들어가 석사, 박사 학위를 따는 것이다.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 길뿐이다. 그들의 기대는 한편으로는 네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 명문대에 들어간 다음 두각을 나타내어 앞길이 유망하고 찬란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네가 대신 이루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부 혹은 미래의 직업 측면에서 너는 동시에 두 개의 짐을 지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들이 너를 위해서 치른 모든 대가에 보답하며, 훗날에 두각을 나타내어 그들을 호강시켜 줘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젊었을 때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 그들의 꿈을 대신 이루어 줘야 한다. 힘들지 않겠느냐? (힘듭니다.) 어느 쪽 짐이든 네게는 벅차다. 어느 쪽 짐이든 모두 너를 숨 막히게 짓누른다. 특히 지금처럼 경쟁이 극도로 치열한 시대에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갖가지 요구는 말 그대로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고 잔인무도하다. 그야말로 생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이를 뭐라고 하느냐? 가스라이팅이라고 한다. 이방인들이 어떤 표현을 쓰든 간에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똑똑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은 가스라이팅이라 하고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멍에, 짐이라고 합니다.) 짐이라고 한다. 짐이라는 것이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것이냐? (아닙니다.) 이는 별도의 것이다. 다시 말해 네가 따로 하나를 더 짊어진 것이다. 너라는 사람과 일체가 아니다. 그것은 너의 몸, 마음, 영이 갖추고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것이다. 그것은 외부에서 온 것이지 너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부모는 네 학업과 네가 종사할 직업 측면에서 네게 여러 기대를 품는 동시에 네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갖가지 대가를 치르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한편으로는 네가 그들의 바람을 충족시키는 것을 돕기 위해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너를 향한 부모의 기대가 정당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부모의 그러한 행동과 관점, 태도, 방식은 누구에게나 일종의 보이지 않는 멍에가 된다. 그들이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든, 네 앞길을 위해서라고 변명하든, 아니면 너를 잘살게 해 주기 위해서라고 변명하든, 그들이 어떤 구실을 대든 간에 그러한 요구의 목표와 요구의 방식, 그리고 그들 생각의 출발점은 누구에게나 일종의 짐이 된다. 그것은 인성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인성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 짐은 사람의 인성을 왜곡시키고, 비정상적으로 만들고,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인성에 대한 일종의 박해이자 상해이고 압제이다. 그 결과는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며, 심지어는 사람에게 평생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부모의 신분으로 너에게 인성이 필요로 하는 것에 부합하지 않는 온갖 일들, 혹은 인성 본능에 맞지 않고 인성 본능을 초월한 일들을 시킨다. 예를 들면, 성장기에 아이를 매일 5~6시간만 재운다. 밤 11시가 되기 전에는 못 자게 하고, 아침 5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놀이 활동은 하나도 없고 일요일에도 못 쉬게 한다. 반드시 숙제를 얼마만큼 해야 하고 교과 외 도서를 얼마만큼 읽어야 한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반드시 외국어 한 가지를 배우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 과정 외에 꼭 추가로 다른 기능과 지식을 어느 정도 익혀야 하는 것이다. 익히지 않는다면 너는 좋은 아이, 착한 아이가 아니고 열심히 하는 아이, 철든 아이가 아니다.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며, 머저리이고, 바보이다. 부모는 자녀가 잘되기를 바란다는 전제하에 네게서 잠잘 자유를 빼앗고, 네 어린 시절의 자유를 빼앗고, 네 어린 시절의 즐거운 시간을 빼앗는 동시에 네가 한 명의 미성년자로서 누려야 할 갖가지 권리도 빼앗았다. 네 몸에 휴식이 필요할 때마저도, 예를 들어 7~8시간은 쉬어야 몸이 겨우 회복될 상황에서도 그들은 너를 고작 5~6시간만 쉬게 했다. 혹은 어쩌다가 7~8시간을 잤더라도 너를 못 견디게 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바로 부모가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거나 아니면 네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오늘부터 학교 갈 필요 없으니까 집에서 잠이나 자! 자는 게 그렇게 좋으면 평생 집에서 자라. 학교 다니기 싫어하니 나중에 거지 돼서 구걸이나 하게 될 거다!” 너는 딱 한 번 늦게 일어났다고 이런 취급을 받는다. 이는 비인도적인 취급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거북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너는 참고 양보하면서 자신을 단속할 수밖에 없다. 아침에는 5시에 일어나야만 하고 밤에는 11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네가 원하는 일이냐? 달가우냐? 둘 다 아니다. 마지못해 하는 것이다. 네가 부모의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그들은 인상을 쓰거나 너를 야단친다. 때리지는 않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책가방 쓰레기통에 버렸다. 학교 다닐 필요 없어.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도 좋지. 성년이 되면 나가서 고물이나 주우면 되니까!” 그들의 이런 나무람은 폭력도 욕설도 아니지만 이렇게 너를 자극하면 너는 견디지 못한다. 무엇을 견디지 못하느냐? ‘한두 시간 더 자면 나중에 빌어먹는 거지가 될 거다.’라는 부모의 말이다. 너는 속으로 자기가 두 시간 더 잔 것에 심한 불안감과 괴로움을 느낀다. 두 시간 더 잔 것 때문에 부모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며, 오랜 세월 자기를 위해 부모가 고생스럽게 치른 대가와 자기에게 들인 정성을 저버렸다는 생각에 자기가 미워진다. ‘왜 이렇게 한심한 거야! 두 시간 더 잔다고 뭐가 더 나아지나? 점수를 더 받을 수 있기를 해, 아니면 명문대에 합격할 수 있기를 해? 왜 그렇게 자각성이 없어?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야지 왜 조금 더 눈을 붙인 거야?’ 이러다가 곰곰이 생각한다. ‘너무 졸렸는걸. 난 정말로 휴식이 필요했다고!’ 이러다가 또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이러면 부모님께 불효하는 것 아니겠어? 이렇게 생각하다가는 나중에 정말로 거지가 되지 않겠어?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부모님께 죄송한 일이야.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자. 제멋대로 굴지 말고.’ 부모의 갖가지 책벌 속에서, 부모가 네게 정해 준 갖가지 규칙 속에서, 너를 향한 부모의 갖가지 정도를 넘어서거나 넘어서지 않은 요구 속에서 너는 점점 고분고분해진다. 하지만 고분고분해지는 동시에 부모가 네게 하는 모든 일이 부지불식간에 멍에가 되고 너의 짐이 되어 네가 떨쳐 내려 해도 떨쳐 낼 수 없고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게 된다. 너는 어디를 가든 항상 그 짐을 짊어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짐이 무슨 짐이냐? ‘부모님이 하는 일은 전부 내 장래를 위한 거야. 나는 아직 어리고 철이 없으니까 부모님 말씀을 들어야 해. 부모님이 하는 일은 뭐든 옳고 좋아. 나 때문에 너무 많이 고생하고 너무 많은 대가도 치르셨으니까 부모님을 위해 분발해야 해.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좋은 직업을 얻어 돈을 번 다음 부모님을 부양하고 호강시켜 드려서 보답해야지. 그거야말로 내가 해야 하고 생각해야 하는 일이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모가 너를 대하던 방식과 네가 보낸 힘겨운 세월, 그리고 네가 잃어버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더 나아가 부모의 가스라이팅을 떠올리면 내심 부모가 한 모든 일이 네 인성과 마음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감히 미워하지 못하고, 그것을 감히 올바르게 대면하거나 직시하지 못하고, 감히 하나님이 알려 준 방식을 써서 이성적으로 부모가 한 모든 일과 너에 대한 부모의 태도를 대하지 못하며, 감히 가장 올바른 방식으로 부모를 대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오늘날까지 너희는 학업과 직업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부모가 너희에게 들인 정성, 너희를 위해 치른 대가, 그리고 그들이 네게 하라고, 응당 추구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에 대해 분별이 있었느냐? (전에는 그런 것들에 대해 분별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그러는 것이 다 저에 대한 사랑이고 제가 나중에 더 잘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교제를 통해 약간의 분별이 생겨서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느냐? (멍에와 결박, 짐이 있습니다.) 사실은 인성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고, 어린 시절의 행복을 박탈하는 것이며, 잔인무도한 압제이다. 만약 상해라고 말한다면 너희가 양심상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인성의 자유와 어린 시절의 행복을 박탈하는 것이요, 미성년자에 대한 일종의 압제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만약 괴롭힘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별로 적절하지 않다. 네가 어리고 철이 없으니 무엇이든 그들 마음대로 정한 것이다. 그들은 네 곁에서 너를 쥐락펴락했고, 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들이 네게 무언가를 시키면 너는 그대로 따랐다. 네게 무용을 배우라고 하면 너는 반드시 배워야만 했다. 네가 “배우고 싶지 않아요. 저는 싫어요. 박자도 못 따라가겠고 저는 균형 감각도 없어요.”라고 하면 “안 돼. 너는 꼭 배워야 해. 내가 좋아하니까 나를 위해서 배워야 한다고!”라고 했다. 너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배울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네게 이런 말도 했다. “엄마를 위해 배워야 해. 엄마 말 들어. 너는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 나중에 크면 다 너를 위해서였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보렴, 엄마는 어렸을 때 조건이 안 받쳐 줬어. 돈을 털어서 무용을 배우게 해 줄 사람이 없었거든. 엄마의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못했단다. 너는 지금 얼마나 좋으니. 엄마 아빠가 너를 위해 돈을 벌고 저축해서 무용을 배우게 해 주잖니. 너는 공주, 왕자나 다름없어. 얼마나 행복하니! 엄마 아빠는 너를 사랑하니까 배우라는 거야.” 너는 이 말을 듣고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부모들은 보통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니 어른에게 결정권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시비를 가릴 줄도 모르고 옳고 그름을 살필 줄도 모른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가 어른이 되기 전까지 자기들도 속으로는 그다지 자신이 없는 말로 종종 아이를 현혹하고, 아이의 어린 마음을 마비시키며, 아이가 기꺼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지배에 따르도록 만든다. 또한, 그보다 더 많은 부모가 아이를 교육하고, 생각을 주입하고, 아이에게 어떠한 일을 하도록 요구하는 부분에 있어서 흔히 말을 그럴듯하게 꾸며 내고, 말하고 싶은 대로 아무렇게나 말한다. 게다가 거의 99.9%의 부모가 올바르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아이가 모든 일을 하고 모든 일을 이해하도록 인도하지 않고, 자기들만 선호하고 자기들만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강압적으로 주입하여 아이에게 강제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당연하게도 아이가 받아들이는 것의 99.9%는 진리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이 가져야 할 사상 관점이 아니며, 동시에 아이 연령대의 인성이 필요로 하는 것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한 예로 틈만 나면 인형 놀이를 하거나 줄넘기를 하고 만화 영화를 보는 대여섯 살짜리 아이가 있다고 치자. 이는 정상적인 것이 아니겠느냐? 부모가 옆에서 다해야 할 책임은 오직 무엇이냐? 감독하고, 규범에 맞게 하고,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아이가 이 시기에 부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도와주고, 자기 연령대에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긍정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연령대에서는 친구와 잘 지내는 법, 집과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해야 한다. 그를 더 잘 교육하자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또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 걱정거리가 있거나 말을 듣기 싫을 때는 기도해야 한다는 것 등등을 배우게 해야 한다. 나머지는 그의 유아적 취향을 충족시켜 주는 일이다. 예컨대 아이가 만화 영화를 보고 싶어 하고 인형 놀이를 하고 싶어 할 때 꾸짖어서는 안 된다. 어떤 부모는 대여섯 살짜리 아이가 만화 영화를 보거나 인형 놀이를 하고 있으면 야단친다. “못났구나! 넌 몇 살인데 공부도 할 줄 모르고 네 할 일을 할 줄 모르니! 만화 영화 보는 게 무슨 쓸모가 있어? 쥐 아니면 고양이나 나오겠지. 좋은 것 좀 배울 수 없니? 그 만화에는 온통 동물만 나오잖아. 사람 나오는 것 좀 볼 수 없어? 너는 언제 클 거니? 인형 버려! 그 나이에 인형 놀이나 하고 있다니 못난 것 같으니!” 말해 보아라. 어린아이가 이 말을 듣고 어른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 나이의 아이가 인형 놀이나 흙장난을 안 하면 무엇을 하고 논다는 말이냐? 원자 폭탄을 가지고 놀겠느냐? 소프트웨어를 만들겠느냐? 할 수 있겠느냐? 그 아이의 나이에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놀아야 한다. 나무 블록, 기차,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이 정상이다. 놀다가 지치면 쉬어야 하며, 몸이 건강하고 기분이 즐거워야 한다. 무언가를 할 때 제멋대로 굴거나 억지를 부리고 소란을 피우면 어른이 이렇게 교육해야 한다. “너 이러면 철없이 구는 거야. 이러면 착한 아이가 아니야. 하나님도 싫어하시고 엄마 아빠도 싫어해.” 아이를 잘 타일러야 한다. 이것이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이다. 성인의 방식과 시선으로, 그리고 성인의 욕망과 야심으로 아이에게 무언가를 주입하고,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은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이 아니다. 연령과 관계없이 부모가 자녀를 위해 다해야 할 책임은 그저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교육하고, 지도하고 감독하고, 타이르는 것뿐이다. 자녀의 일부 생각, 행동 방식, 행위에서 극단적인 점을 발견하면 긍정적으로 코치하고, 인도하고, 교정하여 자녀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무엇이 긍정적이고 무엇이 부정적인지 알게 해야 한다. 이것이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이다. 이러면 부모가 올바른 방식으로 교육하고 인도하는 가운데 아이는 예전에 몰랐던 많은 것들을 부지불식간에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렸을 때 긍정적인 사물을 많이 받아들이고, 옳고 그름을 어느 정도 알게 되면 사람의 마음과 인성이 정상적이고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그 어떤 학대와 압제도 받지 않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얼마나 건강한지는 차치하고, 최소한 마음만은 비틀리지 않고 건강하게 된다. 사람은 좋은 교육 환경에서 성장하는 것이지 나쁜 교육 환경의 압제 아래에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녀의 성장 과정에서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는 자녀에게 압박감을 주고 자녀를 결박하거나 자녀의 선택을 방해하여 자녀에게 짐을 하나 또 하나 짊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자녀의 성격과 자질이 어떻든지 간에, 자녀가 성장하는 동안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은 긍정적이고 좋은 방향으로 자녀를 인도하는 것인데, 자녀에게서 일반적이지 않고 올바르지 않은 말과 행위 혹은 생각이 발견됐을 때 즉시 심리적으로 코치해 주고, 행위를 지도하고 교정해 주는 것이다. 자녀가 배우기를 원하는지 아닌지, 공부를 잘하는지 아닌지, 지식과 기능을 배우는 데에 얼마나 관심을 갖는지, 커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자녀가 천성적으로 무엇을 갖추었고, 무엇을 선호하며, 어디에 관심을 갖는지에 맞추어야 한다. 그리하여 자녀가 부모 손에서 건강하고, 자유롭고, 튼튼하게 자라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이자 부모가 자녀의 성장, 학습, 직업을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이다. 자기 바람과 뜻,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 더 나아가 자기 욕망을 억지로 자녀에게 강요하여 자녀가 실현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한 측면으로는 부모도 지나치게 희생할 필요가 없고, 다른 측면으로는 자녀 역시 부모의 올바르고 정당한 교육 속에서 자유롭게 성장하며 반드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울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의 특기, 관심사, 그리고 자녀의 인성에 따라서 올바르게 자녀를 대할 수 있게 되고, “사람의 운명은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라는 원칙에 근거하여 자녀를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최종 결과는 분명 좋을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라는 원칙에 근거하여 자녀를 대하라는 것은 자녀에게 상관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가르쳐야 할 때는 가르치고 엄격해야 할 때는 엄격해야 한다. 그러나 엄격하든 느슨하든 간에, 자녀를 대할 때의 원칙은 좀 전에 말한 대로 순리에 맡긴 채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인도와 도움을 제공하고, 그런 다음 자녀의 실제 상황에 근거해 기능과 지식 혹은 물질 측면에서 힘닿는 데까지 지원하고 지지해 주는 것이다.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은 이런 것이지 자녀에게 그들이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키거나 인성에 위배되는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자녀에 대한 기대는 현재 사회의 경쟁,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 사회적 풍조, 사회적 주장, 혹은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녀를 대하는 갖가지 생각을 근거로 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모든 것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라는 원칙을 근거로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다. 자녀가 훗날 어떤 사람이 될지, 훗날 어떤 직업을 선택할지, 훗날 물질생활이 어떠할지, 이는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느냐?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손에 달려 있지 부모의 손이나 다른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운명도 주관하지 못하는 부모가 자녀의 운명을 주관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자기 운명도 주관하지 못하는데 부모라고 주관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부모로서 자녀의 학업과 직업이라는 문제를 대할 때 미련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현명한 방법으로 자녀를 대해야 한다. 자기 기대를 자녀의 짐으로 만들지 마라. 자기가 한 희생, 자기가 치른 대가, 자기가 한 고생을 자녀의 짐으로 만들지 마라. 가정을 자녀의 연옥(煉獄)으로 만들지 마라. 이것이 부모가 알아야 할 사실이다. “그러면 아이가 부모와 어떤 관계로 지내게 해야 하나요? 친구인가요, 동료인가요, 아니면 손윗사람과 손아랫사람인가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네가 알아서 해라. 자녀가 좋아하는 대로, 네가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면 된다. 이는 사소한 문제이다.
자녀는 부모의 기대를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만약 자녀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부모를 만났다면, 이렇게 말이 안 통하고 악마와 같은 부모를 만났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부모의 교육을 계속 듣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일을 바라봐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원칙적인 면에서 그들의 교육 방식이 틀렸고 그들이 너를 대하는 방식은 네 인성에 상해를 가하는 것이자 네 인권을 박탈하는 것임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너 스스로 사람의 운명은 다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어야 한다. 네가 무엇을 배우기를 좋아하는지, 네가 무엇을 잘하는지, 혹은 네 인성의 자질로 무엇에 이를 수 있는지, 이는 모두 하나님이 정해 두었으며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부모가 너를 낳기는 했지만 이 모든 것은 그들 역시 바꿀 수 없다. 그러니 네가 이를 수 없고, 도달할 수 없고, 하고 싶지 않은 그 어떤 일을 부모가 억지로 네게 시키더라도 너는 모두 거절해도 되며 그들을 상대로 이치를 따져도 된다. 그런 다음 다른 면에서 보충하여 그들을 안심시키면 된다. 네가 “마음 놓으세요. 사람의 운명은 다 하나님 손에 달려 있어요. 저는 절대로 잘못된 길을 가지 않을 거고 반드시 바른길을 걸을 거예요. 하나님의 인도하에 꼭 진정한 사람이 되고 좋은 사람이 될 거예요. 저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도, 키워 주신 은혜를 잊지도 않을게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부모는 어떻게 반응하겠느냐? 만약 부모가 이방인이고 마귀에 속한 자라면 미친 듯이 화를 낼 것이다. ‘키워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부모님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네 말이 빈말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렇게 했느냐? 부모의 요구대로 했느냐? 두각을 나타낼 수 있겠느냐? 고위 관료가 되거나 큰돈을 벌어 부모를 호강시켜 줄 수 있겠느냐? 그들에게 실익을 안겨 줄 수 있겠느냐? (못 합니다.) 알 수 없다. 이는 미지수이다. 그들이 화를 내든, 기뻐하든, 아니면 묵묵히 인내하든, 네가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이냐? 사람이 세상에 한 번 오는 것은 하나님이 부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은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부모를 빛내기 위해서, 부모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네 책임이 아니다. 그들이 너를 키우며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든 그것은 전부 그들이 기꺼이 원한 일이다. 너를 키우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고 의무였다. 그들이 네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든, 네게 건 그 기대를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배척당하고 냉대받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든, 전부 다 그들이 자청한 것이다. 네가 요구한 것이 아니고, 네가 그들에게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들의 각도에서 보면 그저 자기들을 위해서였다. 표면적으로는 네가 잘살고 장래가 유망하기를 바라서였지만 사실은 네가 자기들을 망신시키지 않고 체면을 세워 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므로 네게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갚아야 할 의무도 없고 그들의 바람과 너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 줄 의무도 없다. 어째서 그럴 의무가 없느냐? 하나님이 네게 시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네게 부여한 의무가 아닌 까닭이다. 그들에 대한 너의 책임은 그들에게 네가 필요할 때 자녀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힘닿는 데까지 책임을 다하는 것뿐이다. 그들이 너를 낳고 기른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너의 책임은 그저 그들이 네 시중을 필요로 할 때 옷을 빨아 주고, 밥을 해 주고, 청소를 해 주고, 그들이 아플 때 병상 곁을 지켜 주는 것뿐이다. 네게는 그들의 말을 무조건 따를 의무가 없고, 그들의 노예가 될 의무도 없으며, 그들이 아직 실현하지 못한 바람을 유업으로 받을 의무는 더더욱 없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거는 다른 측면의 기대로는 가업 혹은 선조의 유업을 계승하는 것이 있다. 대대로 화가를 배출한 집안을 예로 들겠다. 조상이 정한 규칙에 따르면 한 세대에 한 명은 반드시 가업을 잇고 가족의 전통을 계승해야 하는데, 이번 대에서는 네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너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지 않고 그림 그리기에 흥미도 없다. 너는 단순한 과목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네게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 네게는 집안의 전통을 계승할 의무가 없고 집안의 그 어떤 가업이나 선조의 유업을 계승할 의무가 없다. 무술이나 일종의 수공 기술, 어떤 기능 등이 그 예이다. 네게는 그들이 계승하라고 요구하는 것을 계승할 의무가 없다. 또 대대로 전통극을 공연하는 집안도 있는데, 네 대에 이르러 부모가 네게도 초등학교 때부터 전통극을 시켰다고 치자. 전통극을 배우기는 했지만 너는 가슴 깊이 그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직업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너는 절대로 전통극과 관련된 그 어떤 직업에도 종사하지 않을 것이다. 네 내면 깊숙한 곳에는 그 직업에 대한 반감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네게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 네 운명은 부모의 손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무슨 직업을 선택할지, 어느 쪽에 관심이 있을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할지, 어떤 길을 걸으려 할지, 이는 전부 다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배하는 것이지 가족 중의 누군가가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부모가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부모가 모든 자녀를 위해 맡은 역할은 그저 성장기에 자녀를 감독하면서 보호하고, 정성껏 기르고, 함께해 주는 것뿐이다. 더 나은 경우에는 자녀를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교육하고, 지도할 수 있는 것이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이뿐이다. 네가 자라서 독립하고 나면 부모의 역할은 그저 감정적 버팀목이자 의지처로만 남게 된다. 언젠가 네가 독립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고 생활 형식상에서 독립하면 그때 부모의 책임과 의무도 완수된다. 너와 부모는 교육자와 피교육자, 감호자와 피감호자의 관계에서 벗어난다. 사실상 이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부모고 친척이고 친구고 간에 모두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자기만 혼자 믿는다. 어떻게 된 일이냐? 이는 하나님의 예정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너는 택하고 그들은 택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빌려 너를 어른이 될 때까지 정성껏 기른 뒤에 하나님 집으로 데려왔다. 그렇다면 자녀로서 부모의 기대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는 바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너를 대하는 방식이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지 않고 “사람의 운명은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라는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면 너는 거부해도 되고, 그들을 상대로 이치를 따져 그들이 깨닫게 해도 된다. 네가 아직 미성년자인데 그들이 자신들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도록 강제로 네게 압제를 가한다면 조용히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길을 열어 달라고 할 수밖에 없다. 네가 성인이라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아뇨. 저는 부모님이 정해 준 방식대로 살지 않아도 되고 부모님이 정해 준 방식대로 제 인생길과 생존 방식, 추구 목표를 선택하지 않아도 돼요. 부모님은 저를 기르는 의무를 이미 완수했어요. 만약 우리가 화목하게 지낼 수 있고 우리에게 공통된 추구와 목표가 있다면 원래 관계가 유지되겠지만, 우리 사이에 더 이상 공통된 뜻과 목표가 없다면 잠시 안녕을 고해도 될 것 같아요.” 어떠하냐? 이렇게 말할 엄두가 나느냐? 물론 반드시 형식상으로 부모와 이렇게 관계를 끊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마음속으로는 이 점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부모는 너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지만 네게 진정으로 생명을 주고, 바른 인생길을 걷게 해 주고, 사람됨의 모든 원칙을 깨닫게 해 준 분은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부모는 네게 진리를 줄 수 없고 진리와 관계된 그 어떤 올바른 제의를 할 수도 없다. 그러면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들이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든, 네게 얼마나 많은 돈과 에너지를 들였든 너는 어떤 죄책감도 느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어째서냐? (그것은 부모의 책임이자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그 모든 대가를 치른 것이 자녀가 두각을 나타내 자기들의 바람을 충족시켜 주길 원해서였다면, 그것은 자기들의 속셈과 목적이지 하나님께서 그러라고 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그저 한 측면일 뿐이다. 다른 측면으로는, 네가 지금 걷는 길이 올바른 길이고,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있으며, 네가 창조주 앞에 와서 하나의 피조물로서 본분을 이행하고 있기 때문에 너는 그들에게 죄책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소위 그들이 너를 위해 다한 책임이라는 것은 그저 하나님이 안배해 준 것이다. 만약 네가 그들 손에서 자라는 동안 행복했다면 그것은 덤으로 얻은 것이다. 만약 네가 행복하지 못했다면 당연히 그 또한 하나님의 안배이다. 너는 하나님이 오늘날 너를 나오게 해서 그들의 본질을 똑똑히 알게 하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게 하였음에 감사해야 한다. 가슴 깊이 그 모든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정확한 해결 방식과 처리 방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속이 한결 평온해지지 않겠느냐? (네.) 만약 한결 평온해졌다면 참으로 잘된 일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일에 있어서는 부모가 이전에 네게 무엇을 요구했든, 혹은 현재 무엇을 요구하고 있든, 네가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라고 요구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으며 너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네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게 된 이상, 너는 이 일에 있어서 더는 그 어떤 짐도 짊어지지 말아야 한다. 부모에게 미안해하고, 자기가 하나님을 믿으며 본분을 이행하느라 부모를 호강시켜 드리지 못하고, 부모 곁에서 자녀가 다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아 그들이 감정적인 결핍을 겪는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런 것들은 모두 부모가 지운 짐이며, 사람이 반드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다. 네가 정말로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면 부모가 한평생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복을 누릴지도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어야 한다. 네 효도 여부에 따라 무엇이 바뀌지는 않는다. 네가 효도한다고 그들이 고생을 덜 하거나 네가 효도하지 않는다고 그들이 고생을 더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운명은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이 예정해 두었다. 그 모든 것이 그들에 대한 너의 태도에 따라, 너와 그들 사이의 정이 얼마나 깊은지에 따라 바뀌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운명이 있다. 그들이 이번 생에 빈곤할지 부유할지, 잘 풀릴지 안 풀릴지, 생활의 질이 어떻고, 물질적인 혜택이 어떻고, 사회적 지위가 어떻고, 생활 현황이 어떨지, 그 모두는 너와 별 관계가 없다. 네가 그들에게 죄책감이 드는 것 같고, 그들에게 빚을 진 것 같고, 그들 곁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치자. 설령 네가 그들 곁을 지킨다고 한들 무엇을 바꿀 수 있겠느냐?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양심에 참소를 받지 않게 되고 죄책감은 없어지더라도 매일 그들 곁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을 추구하며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과 시시비비에 대해 떠드는 그들을 보고 있자면 네 심정이 어떻겠느냐? 마음이 편하겠느냐? (편치 않습니다.) 네가 그들을 바꿀 수 있겠느냐? 네가 그들을 구원할 수 있겠느냐? (못 합니다.) 그들이 아플 때 네가 병상 곁에서 시중들 여건이 되어서 그들의 고생을 덜어 주고 자녀로부터 약간의 위안을 얻게 해 줬다고 치자. 그들은 병이 낫고 육적으로는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 믿는 일에 관해 한마디라도 꺼낼라치면 그들은 아홉 마디, 열 마디로 반박한다. 황당한 이론을 떠드는데 얼마나 추악하기 짝이 없는지 너를 다음 생까지 구역질 나게 할 정도이다. 겉으로 보기에 너는 양심의 평안을 얻었다. 부모가 너를 헛되이 키우지는 않은 것 같고, 네가 배은망덕한 인간은 아닌 것 같고, 이웃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양심이 평안하다고 해서 네가 정말로 마음 깊이 그들의 온갖 사상 관점과 생존관, 생존 방식을 받아들인 것이냐? 네가 정말로 그들과 잘 맞는 것이냐? (아닙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다른 사상 관점을 가지고 있는 두 부류의 인간은 육체적, 감정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고 어떻게 얽혀 있든지 간에 다른 한쪽의 사상 관점을 바꿀 수 없다. 쌍방이 함께 있으면서 담론을 나누지 않는다면 몰라도 담론을 나누게 되면 바로 의견 충돌과 갈등이 생겨서 서로 미워하고 싫어하게 된다. 겉으로는 혈연관계이지만 안은 원수인데, 물과 기름 같은 두 부류의 인간이다. 그렇다면 네가 아직 그들 곁에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냐? 수모를 당하고 싶어서냐,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냐? 만날 때마다 후회하게 되는데, 이는 기분 상할 일을 사서 하는 꼴이다. 곰곰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부모님을 안 뵌 지 몇 년이나 됐네. 예전에 부모님이 가증스럽게 행동하기는 했지. 하나님을 모독하고, 내가 하나님 믿는 걸 반대도 하고. 그래도 그간 연세도 드셨으니 변했겠지? 그럼 나도 부모님이 나쁜 짓을 저질렀던 걸 따지지 말아야겠어. 거의 다 잊기도 했고. 게다가 정 때문에도 그렇고 양심상으로도 부모님이 염려돼.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르겠네. 집에 한번 가 봐야겠다.’ 집에 간 지 하루도 안 되어서 예전에 그들에게 느꼈던 혐오감이 다시 올라오면 후회스러워진다. ‘이게 집이야? 저런 사람들이 부모야? 저들은 원수 아니야? 원래도 그랬고 지금도 이 꼬락서니야. 하나도 변한 게 없어!’ 그들이 변할 리가 있겠느냐? 원래 어떤 존재이면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들이 나이를 먹었다고 바뀌어서 너와 맞을 줄 알았느냐? 안 맞는다. 네가 집에 들어서면 그들은 곧장 네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귀한 식재료나 명품 가방, 명품 옷인지 아니면 귀금속인지부터 살핀다. 손에 들린 비닐봉지 두 개에 각각 만두와 바나나 몇 개가 담긴 것이 보이면, 네가 여전히 그토록 가난해 보이면 또 잔소리를 해 댄다. “어느 집 딸은 외국 나가서 외국 남자랑 결혼하더니 팔찌를 사도 순금으로만 사더라. 걸핏하면 꺼내서 자랑한다니까. 어느 집 아들은 차 샀다고 틈만 나면 부모님 모시고 여행 다니고 해외도 나가더라. 부모가 아들딸 덕을 보는 거지! 어느 집 딸은 집에 빈손으로 와 본 적이 없대. 엄마 아빠한테 족욕기도 사 주고 안마 침대도 사 주고. 옷은 꼭 실크나 울 소재로만 산다더라. 남의 자식들은 참 효성스러워. 애지중지해 준 보람이 있다니까! 그런데 우리는 배은망덕한 인간을 키웠어!” 이는 너 들으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네가 산 만두와 바나나가 부모의 눈에는 차지 않았지만 너는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효도하려고 생각했다. 부모가 만두와 바나나를 좋아했기에 여러 해 만에 보는 그들에게 그것을 사다 주면서 감화시키고 양심상의 죄책감을 덜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집에 가서 죄책감을 덜기는커녕 한바탕 꾸짖음만 듣고 낙담해서 뛰쳐나왔다. 네가 그들을 보러 집에 간 것이 의미가 있느냐? (없습니다.) 네가 아무리 오랫동안 집에 가지 않았어도 그들은 너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네가 왔으면 됐지. 아무것도 사 올 필요 없어. 바른길을 걸으면서 건강하고 평안한 걸 보니 좋네. 얼굴 보고 속 이야기 나누는 걸로 충분해.”라고 말하지 않았다. 네가 그간 잘 지냈는지,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가슴 아픈 일이 임하지는 않았는지,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았는지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따뜻한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다면 네가 떠나지 못했을 것이 아니냐? 너는 욕을 한바탕 먹고 점잖아졌다. 마음이 편해지고 모든 죄책감에서 벗어나 이렇게 생각했다. ‘빨리 가자. 여기는 그야말로 연옥이야! 내 껍질을 벗기고 살점을 뜯어 먹고 피까지 빨아 먹으려고 할 거야!’ 부모와의 관계는 사람이 감정적으로 가장 처리하기 어려워하는 관계이지만 사실 처리 못 할 일은 아니다. 사람은 오로지 진리를 깨달은 기초에서만 이 문제를 올바르고 이성적으로 대할 수 있다. 감정의 각도나 세인의 시선과 각도를 출발점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올바르게 부모를 대해야 한다. 부모의 역할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자녀는 부모에게 어떤 존재인지, 자녀가 부모를 대할 때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인지, 사람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고 해결해야 하는지, 이런 문제에 있어서 감정을 근거로 해서는 안 되며 그 어떤 잘못된 사상 혹은 사회 여론의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올바르게 대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정한 환경 속에서 네가 부모에게 어떤 책임도 다하지 못한다거나 그들의 생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치자. 그러면 불효하는 것이냐? 네가 양심에 참소를 받겠느냐, 받지 않겠느냐? 네 주변 이웃, 동창, 그리고 친척들이 모두 뒤에서 너를 욕하고, 헐뜯고, 너를 불효자라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네 곁에서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고, 얼마나 정성을 들이고,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이 불효자 같으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는 잘 지내는지 연락 한 번을 안 하고. 새해에도 집에 안 오면서 전화 한 통조차 없고 부모님 안부도 안 묻고.”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네 양심이 피를 흘리고, 눈물을 흘리고, 가책을 느낀다. ‘아아, 저 말이 맞아.’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고 가슴이 꼭 바늘에 찔린 것처럼 흠칫흠칫 떨린다. 이런 느낌이 들지 않느냐? (예전에 그랬습니다.) 네가 불효한다고 하는 이웃과 친척들의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불효한 것이 아닙니다.) 이유를 말해 보아라. (그간 부모님 곁에 있거나 세인들처럼 부모님의 바람을 충족시켜 드리지는 못했지만 저희가 하나님 믿는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해 두신 일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인생길이고 정의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불효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너희의 말은 여전히 과거에 모두가 알고 있는 도리에 머물러 있다. 현실적인 말이 아니고 현실적인 인식이 아니다. 누가 또 말해 보겠느냐? (막 출국했을 때가 기억납니다. 제가 밖에서 뭘 하는지 모르는 가족들이 저를 손가락질하면서 불효한다고 하고, 부모님 곁에서 그들을 돌보지 않는 불효녀라고 할 거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면이 그것에 의해 결박당하고 속박당했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부모님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니 예전에 부모님이 저를 돌봐 줬던 것은 부모로서 책임을 다한 것이고, 부모님이 저에게 잘해 준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해 두신 일이기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가 하나님을 믿으며 올바른 인생길을 걷고 있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니 부모님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자녀가 곁에서 보살펴 주는 복을 부모가 누릴 수 있을지 역시 하나님께서 예정해 두신 일입니다. 이를 깨닫자 마음속의 죄책감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훌륭하다. 우선, 많은 사람이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한 측면으로는 객관적인 전체적 환경 때문이다. 반드시 부모를 떠나야 하고, 부모 곁을 지키면서 그들을 돌보고 그들과 함께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원해서 부모를 떠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한 측면의 객관적 원인이다. 다른 측면을 보면, 주관적으로 말해서 네가 밖에 나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부모를 떠나 네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들여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서 부모를 떠나야만 했고, 그들 곁에 남아 함께하면서 그들을 돌볼 수 없었던 것이다. 너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책임을 회피하려고 나온 것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들인 네가 그들을 떠나 밖에 나와서 본분을 이행해야만 했던 것은 서로 다른 성질의 문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네 마음속에는 그들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이 있다. 아무 감정도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 객관적인 환경이 허락했다면, 그들 곁을 지키는 동시에 본분을 이행할 수 있었다면 너는 그들 곁에서 항상 그들의 생활을 돌보고 네 책임을 다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환경 때문에 너는 반드시 그들을 떠나야만 했고 그들 곁을 지킬 수 없었다. 네가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두 가지는 성질이 다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가 집을 떠난 것이 그들에게 효도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면 이는 불효이고 인성이 없는 것이다. 부모가 너를 키워 줬는데 너는 머리가 커지자마자 나가서 혼자 살지 못해 안달이고, 부모를 보기 싫어하고, 부모한테 어려운 점이 있다는 말을 들어도 아랑곳하지 않으려 하고, 상관할 여건이 돼도 상관하지 않으면서 그냥 못 들은 척하고, 남들이 뭐라고 하든 책임을 다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효이다. 하지만 지금이 이런 상황이냐?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자 자기가 살던 현(縣)을 떠나고, 시(市)를 떠나고, 성(省)을 떠나고, 심지어 나라를 떠났다. 이미 고향을 멀리 떠난 데다가 갖가지 이유로 집에 연락하기가 어려워서 가끔 고향에서 온 사람을 통해 부모의 현재 상황이 어떤지 전해 들으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안심한다. 사실 너는 불효하는 것이 아니다. 인성을 상실한 수준에 이르러 부모마저 신경 쓰지 않으려 들고 책임을 안 지려는 것이 아니다. 갖가지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이렇게 하기를 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는 불효가 아니다. 여기까지가 두 가지 원인이고, 이 외에 한 가지 원인이 더 있다. 만약 부모가 하나님 믿는 것을 유난히 박해하고 가로막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네가 하나님 믿는 것을 부모가 지지했다면, 혹은 너처럼 하나님을 믿는 형제자매였고 모두가 하나님 집의 사람이었다면 마음속에 부모가 떠오를 때 묵묵히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부모를 하나님 손에 맡기고 그들의 건강과 안전, 그들 생활에 필요한 것 일체를 하나님 손에 맡기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네가 부모를 하나님 손에 맡긴다면 그들에게 최고로 효도하는 것이다. 너는 그들의 생활에 온갖 난관이 임하기를 바라지 않고 그들이 잘살지 못하고, 잘 먹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너는 마음속으로 분명 그들이 평안하도록 하나님이 지켜 주기를 바랄 것이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본분을 이행하고 굳게 서서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면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한 것이다. 사람은 인성으로 그 정도에만 이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그토록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으며 그토록 많은 진리를 들었으면 최소한의 인식과 이해는 있다는 것이다. 바로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하며, 사람은 하나님 손안에서 살고, 하나님의 보살핌과 지킴이 자녀의 걱정과 효도, 자녀가 곁에 있어 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이 부모를 보살펴 주고 지켜 준다면 네 마음이 푹 놓이지 않겠느냐? 너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만약 네가 걱정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너무 작은 것이다. 만약 네가 정말로 그들이 걱정되고 마음에 걸린다면 자주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그들을 하나님 손에 맡겨 하나님이 지배하고 안배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매일을 주재하며 그들에게 임하는 모든 일을 주재하는데, 네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냐? 너는 너 자신도 주재하지 못하고 네 코가 석 자이다. 네가 무슨 수로 부모를 매일 행복하게 해 주겠느냐? 너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에게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결국에는 구원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해라. 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자기들이 원하는 길을 걸으라고 해라. 조금 낫고 인성이 조금 있는 부모라면 여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된다. 하나님이 어떻게 행할지는 하나님의 안배가 있을 것이니 사람은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종합해 보자면, 사람이 자식으로서 다할 책임에 대해서는 사람의 양심 속에 지각이 있다. 그 지각으로 인해 사람이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어떻든지 간에, 걱정을 하든 아니면 그들 곁에서 함께하길 선택하든 간에 결론적으로 사람은 객관적 환경의 영향으로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고 해서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 등등을 느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믿는 삶 속에서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그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과 관련된 화제가 나왔을 때 사람은 이렇듯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더는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 한 측면으로는, 너는 마음 깊이 네가 불효하는 것이 아니고 책임을 다하기가 싫어서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다른 측면으로는, 부모가 하나님 손안에 있는데 네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냐? 사람이 무슨 걱정을 하든 전부 쓸데없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물 흐르듯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따라 마지막까지 살아가고 길을 끝까지 걸어간다. 조금도 빗나가는 법이 없다. 그러니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더 번뇌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인지,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했는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 게 아닌지, 이것들은 네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네가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기대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사람의 학업과 직업 측면을 교제했다. 이 측면에서 사람이 반드시 깨달아야 할 사실은 무엇이냐? 네가 부모의 말을 듣고 부모가 기대하는 대로 아주 열심히 공부한다면 꼭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는 것이냐? 정말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이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너를 위해 안배해 둔 것, 즉 네게 있어야 할 운명과 사람들 사이에서의 위치, 네가 걸어야 할 길, 네게 있어야 할 생활 환경이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일찌감치 너를 위해 안배해 두었다. 그러니 부모의 기대라는 문제에 있어서 너는 어떠한 짐도 짊어지지 말아야 한다. 네가 부모의 요구에 따라 행동해도 네 운명은 이렇고, 네가 부모의 기대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부모의 기대를 저버려도 네 운명은 이렇다. 네 앞에 펼쳐진 길은 정해진 그대로다. 하나님이 이미 예정해 두었다. 마찬가지로, 네가 부모의 기대에 미쳤고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으며 그들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해서 과연 그들을 호강시켜 줄 수 있겠느냐? 고생하고 모욕당할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겠느냐? (바꾸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가 자기를 키워 준 은혜가 너무나 크고, 자기를 키우는 동안 부모가 너무 고생을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좋은 일자리를 얻은 다음 고생을 견디고, 괴로움을 참으며, 근면하게, 열심히 일해서 큰돈을 벌고 부자가 되어 나중에 부모를 떵떵거리며 살게 해 주려고 한다. 양옥에 살며 세단을 타고 좋은 것을 먹고 마시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몇 년 바쁘게 일해서 생활 환경과 조건이 좋아졌지만 부모는 하루도 복을 누려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만약 네가 흘러가는 대로 하나님의 지배에 맡기고 그 짐을 짊어지지 않았다면 어느 날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었을 것이다. 부모에게 보답하려고 필사적으로 돈을 벌어서 잘살게 됐는데 부모가 세상을 떠났다면 네 심정이 어떻겠느냐? 본분을 이행할 시간도 허비하고 진리를 얻을 시간도 허비했는데 남은 생을 잘 보낼 수 있겠느냐? (잘 보낼 수 없습니다.) 네 인생이 영향을 받게 되고, 너는 영원히 ‘부모를 저버렸다’는 짐을 진 채로 남은 생을 살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부모를 저버리지 않고 키워 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분투하며 돈을 벌었다. 나중에 부자가 되어 좋은 것을 먹을 여건을 갖추게 되자 부모에게 식사를 대접하러 가서 고급 요리를 한 상 가득 시키고는 이렇게 말한다. “드세요. 어렸을 때 이런 걸 좋아하셨던 기억이 나요. 잡수세요!” 그러나 나이 든 부모는 이가 거의 다 빠지고 입맛도 없어서 부드럽고 소화가 잘되는 채소나 국수 같은 것만 몇 입 먹고는 배가 부르다고 한다. 너는 한 상 가득 차려진 요리를 몇 입 먹지도 않은 것을 보고 속이 상한다. 부모는 기분이 꽤 좋다. 그 나이에는 그만큼밖에 먹을 수 없는데 정상적인 일이다. 그들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너는 마음이 괴롭다. 무엇이 괴로우냐? 네가 한 일들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부모가 이번 생에 얼마나 많은 복을 누리고 얼마나 고생할지는 미리 정해져 있다. 네 염원 때문에 바뀔 리가 없고 네 감정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바뀔 리도 없다. 하나님이 오래전에 예정해 두었기에 사람이 무엇을 하든 전부 쓸데없는 짓이다. 이 사실이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느냐?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너를 정성껏 길러 건강하고 순조롭게 어른이 된 뒤에 바른길을 걸으며 피조물로서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다하게 하는 것이다. 부모가 하는 그 모든 일은 네 운명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고, 네 운명을 바꿀 수도 없다. 그것은 그저 보조하고 인도하는 일일 뿐인데, 너를 성인으로 키우고 바른 인생길을 걷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네가 하는 일도 너 자신의 손으로 부모를 위해 행복을 만들고, 부모의 운명을 바꾸고, 부모가 너로 인하여 큰 복을 누리며 좋은 음식을 먹고 마시게 하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 이는 전부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 짐은 네가 짊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너는 네 개인의 양심 혹은 감정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부모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 어떤 무의미한 희생을 하거나 무의미한 일을 하여 부모에게 보답하려 하고, 부모가 복은 더 누리고 고생은 덜하도록 그들의 운명을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네 책임이 아니고 네가 생각해야 할 일도 아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한 책임을 다할 때는 자신의 여건과 하나님이 예비한 조건 및 환경을 근거로 해야 한다. 자녀도 부모를 대할 때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조건과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근거로 해야 한다. 단지 그뿐이다. 부모 혹은 자녀가 하는 모든 일은 개인의 힘이나 사욕으로 상대방의 운명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 노력으로 상대방을 더 잘 지내게 하고, 더 행복해지게 하고, 더 뜻대로 풀리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부모이든 자녀이든 모두 하나님이 안배한 환경 속에서 순리를 따라야 한다. 자기 노력이나 자신의 그 어떤 의지로 무언가를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부모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가졌다고 해서 부모의 운명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들의 운명은 하나님이 오래전에 예정해 두었다. 하나님은 네가 그들의 생활 범위 안에서 살고, 그들에게서 나고, 그들에게 정성껏 길러지도록 예정했고 너와 그들 사이가 그런 관계가 되도록 예정했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너의 책임은 그저 자신의 여건에 따라 그들과 함께하고 약간의 의무를 다하는 것뿐이다. 네가 부모의 현황을 바꾸려 하고 부모를 더 잘 살게 해 주려는 것은 전부 쓸데없는 짓이다. 혹은 이웃과 친척들이 우러러보게 하고, 부모의 면목이 서게 하며, 집안에서 부모의 체면을 세워 주려 한다면 이는 더 불필요한 일이다. 또, 홀어머니나 홀아버지가 버림받은 뒤에 혼자 너를 어른으로 키워 낸 경우, 너는 더욱더 그들이 어려웠으리라 생각하기에 평생을 바쳐 은혜를 갚고 보답하려고 한다. 심지어 그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고, 그들이 네게 요구하는 것, 그들이 네게 기대하는 것, 거기다가 네가 하기를 원하는 것까지 모조리 네 이번 생의 짐이 된다. 이는 전부 옳지 않은 일이다. 창조주 앞에서 너는 하나의 피조물이다. 네가 이번 생에 해야 할 일은 그저 부모에 대한 책임만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하고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책임을 다하더라도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을 근거로 해야지 네 감정 혹은 양심상의 필요에 근거해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서는 안 된다. 물론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그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 이 또한 네가 피조물로서 이행해야 할 본분의 일부로,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한 책임이다. 이 책임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다하는 것이지 사람의 필요를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는 홀가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부모를 대하고, 부모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면 된다. 이렇듯 간단하다. 하기 쉬운 일이 아니냐? (하기 쉬운 일입니다.) 어째서 하기 쉬운 것이냐? 그 본질과 사람이 지켜야 할 진리 원칙은 아주 명확하다. 본질은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누가 누구의 운명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네가 노력하든 노력하지 않든, 네가 책임을 다하려고 하든 책임을 다하려고 하지 않든, 어차피 상대방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네 마음속에 그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그저 그런 감정적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일 뿐, 어떤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가장 간단한 한 가지는 바로 너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네게 지운 갖가지 짐을 내려놓는 것이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모든 일을 대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부모와의 관계를 대하고 처리해야 한다. 이렇듯 간단하다. 쉽지 않으냐? (쉽습니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일들이 전부 쉬울 것이다. 게다가 체험하는 과정에서 정말로 이렇다는 것을 점점 더 느낄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사람의 운명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이 전부 사실인 건 맞지만 그러는 건 너무 몰인정한 느낌이에요. 저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못 견디겠어요.” 못 견디겠다면 네 감정을 충족시키면 된다. 부모 곁에 딱 붙어서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시중을 들고, 효성을 다하고, 부모가 옳은 말을 하든 틀린 말을 하든 무조건 따르며 그들의 껌딱지, 그들의 들러리가 되어도 된다. 그러면 뒤에서 너를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사돈의 팔촌까지 다들 너를 대단한 효자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손해를 보는 사람은 너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 너는 효자라는 평판을 지키고, 자신의 감정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양심에 참소를 받지 않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소홀히 하고 잃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그 모든 일을 대하고 처리하지 않아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잃은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네가 부모에게는 효도했으나 하나님을 배반했고, 효도하면서 부모의 육체적, 감정적 필요를 충족시켰으나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는 차라리 효자가 되기를 선택했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선택하기를 원치 않았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큰 불경이다. 하나님은 네가 대단한 효자이고, 부모를 저버리지 않았고, 양심이 있고,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했다고 해서 네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며 인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기 양심과 육체적, 감정적 필요만을 충족시킬 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 문제를 대하거나 처리하는 근거 및 원칙으로 삼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심하게 거역하는 것이다. 사람이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려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모든 일을 바라보고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 합당한 자격을 갖췄다고 할 수 있고, 인성과 양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이 문제를 대하거나 처리하는 원칙 및 근거로 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들여 본분을 이행하러 나가지도 않는다면, 혹은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놓치거나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부모 곁을 지키며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에게 행복을 주고, 노년을 즐겁게 보내게 해 주며 그들의 은혜에 보답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인성도 양심도 없는 인간이라고 할 것이다. 너는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은 너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의 기대를 대하는 측면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과 내려놓아야 할 짐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지 않았느냐? (네.) 여기서 사람의 짐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부모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하고, 부모를 호강시켜 줘야 하고, 부모가 하는 일은 모두 너를 위한 것이고, 부모 말을 따라야 효도하는 것이다. 또한, 어른이 되면 부모를 위해 일해야 하는데,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고,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며, 그들 곁을 지켜야 하고, 그들을 상심하게 하거나 실망하게 해서도 안 되고, 그들을 저버려서는 안 되고, 힘닿는 데까지 그들의 고생을 줄여 주고, 더 나아가 아예 고생을 안 하게 해 줘야 한다. 만약 이걸 해내지 못하면 배은망덕한 것이고 불효자이며, 천벌을 받고 버림을 받아 마땅하며,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네 짐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짐이라면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여 이를 올바르게 마주해야 한다.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이러한 짐과 잘못된 사상 관점을 내려놓을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 만약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네게 다른 선택지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과 육체의 어떤 짐이든 그것을 내려놓는 일의 시작은 올바른 사상 관점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네 안의 잘못된 사상 관점이 점차 무너지고, 분별되고, 간파당한 뒤에 차츰차츰 버려진다. 그러한 잘못된 사상 관점이 무너지고, 분별되고, 그런 다음 네가 그것을 내려놓고 버리는 과정에서 그러한 일들에 대한 네 태도와 행동 방식이 서서히 바뀐다. 사람의 양심 혹은 감정에서 비롯된 생각들이 점차 흐릿해지며, 더는 네 생각 깊은 곳에서 너를 괴롭히거나 결박하지 못하고, 네 생활을 좌우하지도, 네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도, 네 본분 이행을 교란하지도 못한다. 예컨대, 네가 올바른 사상 관점과 이 측면의 진리를 받아들이면 부모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그저 눈물만 조금 흘린다. 키워 준 은혜에 그간 보답하지 못했고, 부모를 너무 고생시켰고, 그들에게 조금도 갚은 것이 없고, 그들을 호강시켜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책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정상적인 인성의 감정적 필요에 따른 정상적인 표출이 있을 뿐이다. 잠깐 울고 나서 그들을 조금 그리워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곧 자연스러워지고 정상이 된다. 너는 금방 정상적인 생활과 본분 이행에 몰입하고, 그 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는다. 네가 이런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부모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끝도 없이 울게 된다. 너는 부모가 가엾다고, 평생 힘들게 살면서 너 같은 불효자를 키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아플 때 병상 곁에서 시중들어 주지 못했고, 그들이 사망했을 때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입고 곡해 주지 못했다고, 그들을 저버렸고, 그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줬고, 그들을 호강시켜 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너는 오래도록 이런 죄책감을 품고 살아가게 된다.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고 마음이 찌릿찌릿 아프게 된다. 관련된 환경이나 사람과 일, 사물을 만날 때마다 감정이 표출된다. 이런 죄책감은 너의 여생 내내 계속될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진리와 올바른 사상 관점을 받아들여 네 생명으로 삼은 적이 없고, 낡은 사상 관점이 줄곧 네 안에서 주인 노릇을 하며 네 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네 여생은 부모의 사망으로 인해 쭉 고통스러울 것이다. 계속되는 고통은 네게 약간의 육적인 괴로움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네 생활,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 네가 교회 사역을 대하는 태도,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네 심금을 건드리는 사람 혹은 일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너는 더 많은 일에 대해 낙심하고, 의기소침해지고, 수동적으로 되고, 살아갈 자신이 없어지고, 모든 일에 대한 열정과 동력을 잃는 등의 문제를 겪을 수도 있다. 이러다 보면 간단한 일상생활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와 네가 걷는 인생길에도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러면 아주 위험하다. 이러한 위험으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결과는, 네가 피조물로서의 본분 이행에 합격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네가 본분 이행을 도중에 중단하거나 자신이 이행하는 본분에 반항하는 정서나 태도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일은 분명히 점점 더 악화될 것이고 그에 따라 네 기분, 정서, 심리 상태가 나쁜 방향으로 변해 갈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오늘 교제한 주제가 네게 알려 주는 것 중 하나는 올바른 사상 관점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사상 관점의 근원은 일 자체의 본질을 근거로 한다. 그것의 근원과 본질이 이러하기에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하며, 표상에 속거나 감정과 혈기에서 비롯된 사상 관점에 속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한 가지이다. 다른 한 가지는 이렇게 해야만 사람이 굽은 길이나 비뚤어진 길을 걷지 않고 하나님이 주재하고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순리에 따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은 올바른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고 올바른 사상 관점의 인도를 받아야만 항상 혈기와 감정 혹은 양심의 작용에 따라 사는 대신 부모가 지운 짐에서 벗어나고 그 짐을 내려놓은 다음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면서 더 자유롭고 해방된 삶을 살고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면 여기까지 이야기했는데 부모의 기대로 인해 만들어진 짐에 대해 조금은 인식이 생기지 않았느냐? (네.) 정확한 인식이 조금 생겼으니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해방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네게 진정한 인식이 생기고 네가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한다면 네 마음이 해방될 것이다. 만약 네가 사실에 근거하여 이러한 일을 대하지 않고 여전히 맞서고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저 일종의 이론이라 생각하며 듣는다면 너는 내려놓기가 몹시 힘들 것이고, 육적 생각과 육적 감정이 지배하는 대로 이러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결국 감정의 굴레 속에서 살며 오직 고통과 괴로움만을 맛보게 될 것이요, 그 누구도 너를 구해 주지 못할 것이다. 감정의 굴레에 얽히는 일에 직면하면 사람에게는 빠져나갈 길이 없다.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너를 얽매고 결박하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학업과 직업 선택 측면에서만 부모가 갖가지 기대를 품고 어떤 행동 방식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결혼에 대해서도 부모는 온갖 기대를 하지 않더냐? 어떤 기대들이 있는지 너희가 한번 말해 보아라. (보통 부모는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중에 남편 될 사람은 다른 건 몰라도 돈은 있어야 한다. 집과 차가 있어야 하고, 너를 돌봐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물질적으로 너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고, 책임감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배우자 선택의 기준이 있습니다.) 부모가 하는 말 중 일부는 먼저 겪어 본 사람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너를 생각해 하는 말은 맞지만 그래도 문제가 있다. 네 결혼에 대한 기대 면에서 부모들은 저마다 안목과 취향을 가지고 있다. 자녀에게 최소한 돈, 지위, 능력이 있고 밖에서 얕보이지 않을 만큼 대단하며 네가 남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나서서 너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라고 한다. “상관없어요. 저는 그렇게 물질적인 사람이 아닌걸요. 저를 좋아해 주고 저도 그 사람을 좋아한다면 그걸로 돼요.” 자녀가 이렇게 말하면 부모는 이렇게 대꾸한다. “너는 어쩜 그렇게 미련하니? 어쩜 그렇게 단순해? 딱 보니까 너는 너무 어리고 미숙해서 생활의 고단함을 몰라. ‘가난한 부부는 근심 걱정이 가득하다.’라는 말도 못 들어 봤니? 생활을 꾸려 나가려면 여기에도 돈이 필요하고 저기에도 돈이 필요해. 돈 없이 잘살 수 있을 것 같아? 돈 있고 능력 있는 상대를 찾아야 한다니까.” 네가 “돈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은 못 미덥다고요.”라고 하면 부모는 이렇게 말한다. “못 미덥더라도 우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지. 네가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입고 싶은 것 다 입으면서 만족스럽게 살면 다들 부러워할걸.” 네가 “마음이 즐겁지 않잖아요.”라고 하면 부모는 이렇게 대꾸한다. “마음 따위가 뭐가 중요해? 마음이 어디에 붙어 있는데? 마음이 즐겁지 않으면 뭐 어떻게 되는데? 몸이 편하면 그만이지!” 또 어떤 사람은 현재의 생활 환경에 따라 독신으로 지내고 싶어 해서 나이를 많이 먹도록 연애를 하지 않고 결혼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러면 부모가 속이 타서 계속 결혼을 독촉하며 선 자리를 마련하고 사람을 찾아 소개한다. 어떻게든 집안끼리 수준이 맞고 남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상대를 빨리 찾아서 자녀를 결혼시키려고 한다. 집안 수준이 안 맞는다고 해도 최소한 조건이라도 좋아야 한다. 대졸이나 박사, 석사여야 하고 아니면 해외 유학파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의 잔소리를 견뎌 내지 못한다. 처음에는 독신이면 자기 한 몸만 건사하면 되니 참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믿은 후 매일 본분을 이행하느라 바쁘고 배우자 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연애도 안 하고 나중에 결혼도 안 하려고 하지만, 부모라는 벽에 부딪친다. 부모는 네 뜻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계속 너를 재촉하고 압박한다. 얼굴만 봤다 하면 잔소리를 한다. “연애는 안 하니? 마음에 드는 사람 없어? 얼른 집에 데려와. 내가 어떤지 봐 줄 테니까. 적당하면 빨리 결혼해서 혼인 신고 하고. 네 나이가 몇인데! 여자가 서른이 돼서도 시집을 안 가고, 남자가 서른다섯이 돼서도 신붓감을 안 찾고, 뭐 하자는 거야? 세상을 뒤엎기라도 하게? 결혼 안 하면 늙어서 누가 너 돌봐 주니?” 부모는 항상 결혼 문제를 걱정하고 신경 쓴다. 너한테 이런 사람을 찾아라, 저런 사람을 찾아라 하면서 짝을 구해 결혼하라고 너를 압박한다. 결혼을 해도 부모는 계속 떠들어 댄다. “얼른 아이 낳아. 내가 아직 젊을 때 낳아야 대신 봐 주지.” 너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 안 봐 주셔도 돼요. 안 급해요.” “안 급하기는, 빨리 낳으라니까! 낳으면 내가 대신 봐 줄게. 어느 정도 크면 그때부터는 네가 키우고.” 부모의 태도가 어떻든, 자녀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올바르든 올바르지 않든 그 모든 기대는 자녀에게 부담이 된다. 부모 말을 들으면 본인이 불편하고 즐겁지 않고, 부모 말을 듣지 않으면 양심에 찔린다. ‘부모님이 틀린 건 아니야. 연세도 많으신데 아들딸이 결혼해서 아이 낳는 걸 못 보고 있으니 속상하시겠지. 자식한테 결혼해서 아이 낳으라고 재촉하는 것도 부모님의 책임인걸.’ 그래서 부모의 이 측면에 관한 기대를 대할 때 사람은 언제나 속으로 은근히 부담을 느낀다. 부모 말을 듣는 것도 좀 아닌 것 같고, 안 듣는 것도 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부모의 요구나 염원을 거역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고 부도덕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일인 것 같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이렇게 자녀를 간섭한다. “얼른 결혼해서 아이 낳아. 일단 떡두꺼비 같은 손자 하나 낳아 다오.” 남자아이를 낳을지 여자아이를 낳을지까지 간섭하는 것이다. 어떤 부모는 이런 말도 한다. “여자아이 하나 낳았으니까 빨리 손자도 낳아 다오. 나는 손자 손녀 다 원한다. 부부 둘이 하나님 믿고 본분 이행하느라 종일 바쁘다고 진짜 할 일은 안 하고 말이야. 아이 낳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 자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크다.’라는 말 모르니? 계집아이 하나 낳고 끝이야? 빨리 손자 낳아 줘야지! 우리 집에 아들은 너 하나인데 네가 손자 안 낳아 주면 우리 집 대가 끊기는 거 아니니?” 너는 곰곰이 생각한다. ‘그렇기도 하지. 내가 대를 끊으면 조상님께 너무 죄송한 일이잖아?’ 결혼 안 하면 안 되고, 결혼해서 아이를 안 낳아도 안 되고, 여자아이만 낳아도 안 된다. 아들까지 낳아야 한다. 아들을 먼저 하나 낳으면 부모가 이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로는 안 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니? 하나 더 낳으렴. 아이가 둘이면 서로 친구도 되잖니.” 부모가 자식 앞에서 자기 멋대로 결정하고 생트집을 잡는데, 얼토당토않은 논리조차 떠들어 댈 수 있다. 그런데도 자녀는 그런 부모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부모가 자녀의 생활, 직업, 결혼, 그리고 각종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 함부로 간섭하고 지적해도 자녀는 그저 꾹 참을 수밖에 없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고 떨쳐 내려 해도 떨쳐 낼 수 없다. 자기 부모한테 욕을 할 수도 없고 부모를 교육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쩌겠느냐? 그렇게 참으면서 최대한 안 만나고, 반드시 만나야만 할 때는 그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 이야기가 나오면 바로 대화를 끊거나 피한다. 그러나 사람들 중 일부는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부모의 요구에 동의한다. 마지못해 서둘러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자손을 낳는다. 하나로는 안 되기에 한 무리를 더 낳아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부모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부모가 희망하는 바를 이루어 줄 수 있든 없든 부모가 제시하는 이러한 요구는 자녀 된 입장이라면 누구에게나 골칫거리이다. 부모가 어떻게 하든 그것은 위법 행위가 아니고, 너는 지적할 수도, 남한테 이야기할 수도 없으며 부모를 상대로 이치를 따질 수도 없다. 그렇게 흘러가다 보면 그 일은 네 짐이 된다. 너는 줄곧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일에 관해 부모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 주지 못하면 부모와 조상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네가 부모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았다면,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고 그들의 요구대로 후손을 낳아 혈통을 잇고 대를 잇지 않았다면 너는 압박감을 느낀다. 부모가 그런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며 네게 자유를 주고 너를 순리대로 살게 해야만 너는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것이다. 그러나 네 여러 친척들과 친구, 동문, 동료 등등의 사회 여론이 하나같이 이 방면에서 너를 비난하고 뒤에서 너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면 그것은 또한 네게 있어 하나의 짐이 된다. 네가 스물다섯일 때는 결혼을 안 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서른이 되면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친척과 가족을 피하고 그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서른다섯까지 결혼을 안 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결혼 왜 안 해?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너 어디가 좀 정상이 아닌 거야?” 네가 결혼한 뒤에도 아이를 낳으려는 의향이 없으면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결혼했으면서 왜 아이를 안 낳아? 남들은 결혼해서 딸 하나 낳으면 아들도 하나 낳고, 아들 하나 낳으면 딸도 하나 낳는데. 너는 왜 안 낳으려고 해?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렇게 인간미가 없어? 너 정상인 맞아?” 부모에게서 비롯된 것이든 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든 이러한 일은 다양한 환경과 배경 속에서 네게 짐이 된다. 너 자신도 정당한 이유를 대기가 어렵다고 느끼는데, 특정 연령대에 속한다면 특히 더 그렇다. 예를 들어, 서른에서 쉰 사이의 나이에 결혼을 안 한 상태라면 너는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밀 엄두를 못 낼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 여자는 평생 혼자 사네. 노처녀를 누가 좋다고 할 것이며 누가 데려가겠어.” “그 녀석은 평생 부인을 안 얻었어.” “무슨 이유가 있길래 시집 장가를 안 간 거야?” “누가 알겠어. 무슨 결함이 있나 보지.” 너는 곰곰이 생각한다. ‘나 아무 결함도 없는데. 그러면 결함도 없으면서 왜 시집 장가를 안 간 거지? 부모님 말씀을 안 들은 게 죄송해.’ 누군가가 말한다. “그 녀석은 장가를 안 갔고 그 아가씨는 시집을 안 갔지. 지금 그들 부모 신세가 얼마나 불쌍하게 됐는지 봐. 다른 부모들은 손자며 증손자를 품에 안았는데 그는 아직도 혼자야. 조상이 부덕했나? 이제 뒤를 이을 사람이 없는 거 아니야? 나중에는 대가 끊기겠어. 그 집 식구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지금 네 태도가 얼마나 강경하든 네가 평범한 사람이자 보통 사람이고 이 측면의 진리를 충분히 깨달아서 이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너는 언젠가 결국 이 문제로 시달리고 방해받게 된다. 지금 사회에는 서른넷, 서른다섯에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많기에 별일이 아니다. 그러나 서른다섯, 서른여섯 이상의 나이인데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다. 현재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연령대에 따라 볼 때, 네가 서른다섯 이하라면 ‘결혼 안 한 건 정상이야.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부모님이야 뭐라고 할 테면 하시라지. 난 겁 안 나니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서른다섯이 넘으면 사람들이 너를 이상하게 보며 독신, 노총각, 노처녀라고 한다. 그러면 너는 견뎌 내지 못하고, 이 문제가 네 짐이 된다. 네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인식 또는 적절한 실행 원칙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언젠가는 결국 이 문제가 네 골칫거리가 되거나 특정한 시기에 네 생활을 방해할 수 있다. 이는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에 관계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진리를 깨달아야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문제로 네가 지게 되는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우선, 어떤 결혼 상대를 만나는지가 사람의 의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냐? (아닙니다.) 네가 어떤 유형의 사람을 찾고 싶다고 해서 그런 사람을 꼭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예비해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은 진작에 너의 결혼 상대를 예정해 두었다. 어차피 정해진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므로 너는 부모의 필요나 부모가 제시한 조건에 방해받을 필요가 전혀 없다. 또한 부모가 네게 돈 있는 결혼 상대를 찾으라고 요구하든 지위가 있는 결혼 상대를 찾으라고 요구하든 네 훗날의 빈부귀천이 그에 따라 결정되겠느냐? (아닙니다.) 아니다. 대단한 집안에 시집갔다가 결국 빈털터리로 내쫓겨 고물이나 줍는 신세가 된 여자들이 적지 않다. 돈과 지위에 빌붙으려다가 종국에는 완전히 실패해서 신세를 망치고 보통 사람만도 못하게 된 것이다. 종일 나일론 포대를 둘러메고 다니며 페트병과 깡통을 주워서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바꾼 뒤에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사 마시면서 여전히 부귀한 사람으로 사는 것 같은 기분에 젖는다. 얼마나 처량하고 비참하냐! 결혼은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다. 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가 운명으로 정해져 있듯이 결혼 역시 부모의 필요나 네 가족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네 개인의 안목과 취향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는 것이다. 정확한 타이밍에 알맞은 사람을 만나고, 적당한 때에 네게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그 모든 안배는 드러나지 않은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관하고 주재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 문제에 있어서 타인의 안배를 따르거나 타인의 사주 혹은 지배,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해 부모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든, 네게 어떤 타산이 있든, 너는 부모의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고 네 타산의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 그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따라야 한다. 상대를 찾든 안 찾든, 찾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해야지 부모의 요구나 부모의 필요를 근거로 해서는 안 되며, 부모의 기대를 근거로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러므로 결혼이라는 문제를 대함에 있어서 부모의 기대가 네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결혼 상대를 찾는 일은 네 여생을 책임지고 네 배우자를 책임지는 일인 동시에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일이지 부모의 요구와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이 아니다. 네가 상대를 찾든 찾지 않든, 혹은 어떤 상대를 찾든 부모의 기대를 근거로 해서는 안 된다. 그 문제에 있어서 부모에게는 너를 통제할 권리가 없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네 결혼을 도맡아 처리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 네가 결혼 상대를 찾겠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찾아야 한다. 만약 찾지 않겠다고 하면 그 또한 네 자유이다. 너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본분을 이행하든 안 하든 평생 독신이고 싶어요. 혼자 살면 얼마나 자유로워요. 새처럼 날개를 펼치면 언제든지 날아갈 수 있잖아요. 부양할 가족 없이 어디를 가든 혼자이니 좋죠! 저는 혼자라도 외롭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시며 저와 동행하시니까요. 저는 외로울 때가 거의 없어요. 가끔 멍하니 있을 때도 있지만 그건 육체가 필요로 하는 일이죠. 때로는 멍하니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어쩌다가 한 번씩 공허하거나 외로운 기분이 들 때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거예요. 하나님 말씀을 읽고, 찬양을 배우고, 생명 체험 간증 영상을 보거나 하나님 집의 영화를 보기도 할 것입니다. 얼마나 좋아요. 그러면 외롭지 않아요. 나중에, 미래에 외로울지 아닐지는 신경 쓰지 않아요. 어쨌든 지금은 외롭지 않고,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형제자매들도 곁에 꽤 있어요. 결혼 상대를 찾으려면 퍽 골치가 아플 거예요. 착실하게, 제대로 살 정상인이 많지는 않으니까 저는 결혼 상대를 찾고 싶지 않아요. 찾았다가 도저히 같이 살 수가 없어서 이혼이라도 하게 되면 그게 무슨 생고생이에요? 이미 그 점을 명확히 아니까 상대를 안 찾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상대를 찾아서 결혼하는 목적이 잠깐의 쾌락과 행복일 뿐이고 결국에는 이혼하게 된다면 그건 그냥 생고생이죠. 저는 그런 고생을 하고 싶지 않아요. 아이를 낳는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한 인간으로서 저는 종족 번식을 위한 도구가 아니에요. 어느 집 대를 잇는 게 제 책임과 의무도 아니고요. 대는 잇고 싶은 사람이 이으라죠. 어느 성씨든 한 사람만의 것은 아니잖아요.” 대가 끊기면 또 어떠하냐? 그것은 그저 육적인 성씨의 문제일 뿐이 아니냐? 영혼끼리는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기에 계승을 하고 안 하고 존속되고 말고가 없다. 인류의 조상은 하나뿐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류의 조상이 남긴 후손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대가 어디서 끊긴다고 말할 수가 없다. 대를 잇는 것은 네 책임이 아니다. 바른길을 걸으며 살고, 자유롭고 해방된 삶을 살고, 진정한 피조물로 사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인류의 번식을 위한 기계가 되는 것은 네가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니다. 어느 집을 위해 자손을 낳고 대를 잇는 것 또한 네가 져야 할 책임이 아니다. 하나님은 네게 그런 책임을 부여하지 않았다. 자손은 낳고 싶은 사람이 낳으면 되고, 대는 잇고 싶은 사람이 이으면 되며, 그 책임은 지고 싶은 사람이 지면 된다. 그것은 너와 상관이 없다. 네가 그 의무를 짊어지고 싶지 않고 다하고 싶지 않다면 그래도 된다. 그것은 너의 권리이다. 맞지 않느냐? (맞습니다.) 부모가 계속 잔소리를 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제가 자손을 안 낳고 대를 안 잇는 게 불만이면 어떻게든 자식을 하나 더 낳아서 그 애한테 대를 이으라고 하세요. 아무튼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니까 누구한테 시키든 마음대로 하세요.” 이렇게 말하면 부모는 할 말이 없지 않겠느냐? 부모가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간에 나이를 그 정도 먹었으면 자녀의 결혼과 출산 문제에 관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이 일생 부유할지 빈곤할지, 자식을 몇이나 둘지, 결혼 여부가 어떨지는 다 하늘이 정하고, 타고난 운명이 있는 것이다. 누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부모가 자녀에게 이렇게 강요한다면 그 부모는 분명 무지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부류일 것이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부모를 대할 때는 그들이 하는 말을 그저 공기 취급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다. 잔소리가 길어지면 이렇게 말해라. “알겠어요. 그렇게 하죠. 내일 바로 결혼하고 모레 아이를 낳고 글피에는 증손자를 안아 보게 해 드릴게요. 마음에 드세요?” 대충 상대해 주고 돌아서서 자리를 뜨면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시원스럽지 않으냐? 아무튼 이것은 명확히 알아야 한다. 결혼은 하나님이 예정한다는 사실은 일단 차치하고,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일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는 것이다. 너는 독신으로 살기를 선택할 수도 있고 결혼하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부부 둘이서 살기를 선택할 수도 있고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선택은 너의 자유이다. 네가 그런 선택을 하는 근거가 무엇이고 이루려는 목적이나 결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권리는 하나님이 네게 부여했고, 너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 “저는 본분을 이행하느라 너무 바쁘고 아직 나이도 어려서 결혼 생각이 없어요. 독신으로 살면서 본분을 잘 이행하는 데에 모든 시간을 투자하고 싶어요. 결혼 문제는 나중에 생각할래요. 쉰 살이 돼서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이야기할 곳이 없을 때, 그때 상대를 찾아볼래요.” 네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도 괜찮다. 하나님은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이제 제 청춘도 끝나 가는 것 같아요. 청춘의 끄트머리를 붙잡아야겠어요. 아직 젊어서 얼굴도 봐 줄 만하고 조금이라도 매력이 있을 때 하루빨리 곁에 있으면서 대화 상대가 되어 줄 사람, 아끼고 사랑할 사람을 하나 찾아서 짝을 이루어 살고 결혼도 해야겠어요.”라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너의 권리이다. 물론 여기에 한 가지가 있다. 즉, 만약 결혼하기로 결정했다면 우선 네가 현재 교회에서 어떤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지, 리더 일꾼이나 하나님 집의 양성 대상은 아닌지, 중요한 사역이나 본분을 담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네가 현재 받아들인 사역이 무엇인지, 네가 지금 처한 환경이 어떠한지 잘 고려해 봐야 하는 것이다. 네가 결혼할 경우 본분 이행에 지장은 없을지, 앞으로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영향이 없을지, 네가 리더 일꾼으로서 하는 사역과 네가 구원받는 데에 영향이 없을지, 이 모든 것이 네가 고려해야 할 문제이다. 하나님이 네게 권리를 부여하기는 했지만 그 권리를 행사할 때는 네가 곧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그 선택이 네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잘 생각해야 한다. 어떤 결과가 초래되든 너는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말아야 한다. 너는 네 선택이 초래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결혼만 하는 게 아니라 아이도 잔뜩 낳고 싶어요. 아들 낳고 딸도 낳고 식구끼리 평생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서로의 곁을 지키며 화기애애하게요.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 저를 잘 봉양하며 기쁘게 해 주는 자식들이 있고, 가족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릴 거예요. 얼마나 좋겠어요! 본분 이행이며 진리 추구, 구원받는 일은 그다음이에요. 일단 그런 것들은 고려하지 않을래요. 아이 문제부터 해결하고 다시 생각하죠.” 그 또한 너의 권리이다. 단, 네 선택이 최종적으로 네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그 결과가 쓰든 달든, 쓰라리든 아리든, 너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네 선택을 위해 대신 값을 치르거나 그것을 책임져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알겠느냐? (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면 결혼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네가 내려놓아야 할 짐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네가 독신이기를 선택하는 것은 네 자유이고, 결혼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도 네 자유이며, 자식을 많이 낳기를 택하는 것도 네 자유이다.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다 네 자유이다. 우선, 네가 결혼하는 것을 선택한다고 해서 그것이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나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네가 독신이기를 택한다고 해서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도 아니다. 또 하나, 네가 결혼하는 것을 택하거나 자식을 많이 낳기를 택해도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거스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다고 해서 정죄되지는 않는다. 네가 독신이기를 택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 때문에 마지막에 너를 구원받게 해 주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네가 독신이든, 결혼을 하든, 아이를 많이 낳든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네가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 결혼 배경이나 결혼 여부를 보지 않는다. 단지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지, 본분을 이행하는 네 태도가 어떠한지, 네가 얼마나 많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했는지, 네가 행동할 때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지를 본다. 최종적으로도 하나님은 네 결혼 여부를 제쳐 두고 너라는 사람이 선택한 인생길, 생존 원칙, 생존 법칙이 과연 무엇인지를 보고 네가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정한다. 물론,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독신 또는 배우자와 헤어진 사람, 다시 말해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 또는 혼인 관계에서 벗어나거나 혼인 관계를 떠난 사람은 유리한 조건에 놓여 있다. 바로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일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고, 그런 책임과 의무를 짊어질 필요가 없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이다. 시간상으로도 자유롭고 에너지도 더 넉넉할 뿐 아니라 인신의 자유도 더 있다. 예를 들어, 한 명의 성인인 네가 밖에 나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제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네 부모도 제한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이 안배해 주면 가방만 메고 훌쩍 떠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네가 결혼해서 가정이 있다면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다. 너는 가족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우선 생활 조건과 수입원 측면에서 너는 최소한 가족들을 먹이고 입혀야 하며 아이가 어릴 때는 학교에 데려다줘야 한다. 너는 그 모든 것을 반드시 감당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혼자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사회적 의무와 가정에서의 의무를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가 없는 사람은 간단하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 배고플 일도 추울 일도 없고, 먹을 것과 지낼 곳이 있다. 가정생활에 필요한 것들 때문에 바쁘게 뛰어다니거나 나가서 돈을 벌고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가 없다. 바로 이런 차이가 난다. 결국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해 할 말은 앞에서 한 것과 같다. 그 어떤 짐도 짊어지지 말아야 한다. 부모의 기대든, 사회의 전통 관념이든, 너 자신의 사치스러운 욕망이든 너는 그 어떤 짐도 짊어지지 말아야 한다. 독신이기를 택하든 아니면 결혼하는 것을 택하든 그것은 너의 권리이다. 언제 독신에서 벗어날지, 언제 결혼할지를 선택하는 것도 너의 권리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단정 짓지 않는다. 결혼해서 자녀를 몇이나 낳을지는 하나님이 예정해 두었지만 네가 선택할 수도 있다. 자기 실제 상황과 자기 추구에 따라 선택해도 된다. 하나님은 규정하지 않는다. 네가 자기는 백만장자, 천만장자, 억만장자라며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저는 아홉 명을 낳든 열 명을 낳든 문제없어요. 아이를 잔뜩 낳아 키우더라도 본분 이행에 필요한 에너지를 빼앗기지는 않을 거예요.” 번거로움이 걱정되지 않는다면 낳아도 된다.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결혼에 대한 네 태도가 어떻든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너를 구원할지 말지가 바뀌지는 않는다. 바로 이런 것이다. 확실히 알았느냐? (확실히 알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네가 지금 독신이기를 택했더라도 자기가 독신이라는 이유로 모종의 우월감에 빠져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저는 화려한 싱글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저는 우선적으로 구원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이 네게 그런 특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알겠느냐? 네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저는 결혼했으니 상대적으로 열등한 존재인가요?” 열등하지 않다. 너 역시 패괴된 인류 중 하나이다. 결혼했기 때문에 짓밟히고 유린당해 남보다 더 패괴되거나 더 구원하기 어려워지거나 하나님을 더 상심하게 만들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기를 원치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전부 사람의 잘못된 사상 관점이다. 사람의 결혼 여부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람의 결혼 여부와 사람이 마지막에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역시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사람이 마지막에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근거합니다.) 맞다. 사람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와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수 있는지 여부에 근거한다. 이것이 그 사람의 최종 결말을 가늠하는 근거이다. 여기까지 교제했는데, 결혼이라는 문제로 인해 사람이 짊어지게 되는 짐을 대체로 내려놓을 수 있지 않겠느냐? (네.) 내려놓을 수 있다면 너희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더 유익할 것이다. 이 말을 못 믿겠으면 결혼해 본 사람들에게 그들이 구원받을 희망이 얼마나 있는지 물어보아라.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결혼 생활을 오래 하다가 하나님을 믿는 일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는데, 제가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감히 말 못 하겠네요.” 나이 서른이 넘은 노총각 노처녀들에게도 물어보아라.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 이방인과 같다. 네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을 때 그들 역시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고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결혼이라는 문제에 관해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는 이런 것들이다. 우리가 교제한 주제 중에 두세 마디로 확실히 설명이 가능한 것은 없다. 여기에는 분석해야 할 다양한 사실도, 갖가지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의 상황도 많다. 여러 상황에 따라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 역시 두세 마디로 확실히 설명 가능한 것이 아니다. 각각의 문제마다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고, 깨달아야 할 사실의 진상이 있으며, 더 나아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사람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이 있다. 당연하게도 그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은 사람이 응당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다. 그것들을 내려놓으면 어떤 일에 대한 네 사상 관점이 비교적 긍정적이고 정확하게 된다. 그러면 비슷한 일에 다시 직면했을 때는 더는 그것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릇되고 터무니없으며 황당한 사상 관점에 구애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너는 결박당하거나 교란당하지 않고 그 일을 올바르게 마주할 수 있게 되며, 다른 사람이나 자신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정확해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 원칙을 근거로 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긍정적 효과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고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자!
2023년 4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