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란 무엇인가(15)

오늘날, 재난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계속 번지는 역병뿐만 아니라 기근까지 들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전쟁이 터졌다. 세계 각국이 혼란에 빠져 단결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전에 했던 “전쟁의 불길이 휘날리고 화약 연기가 자욱하다. 날씨가 따듯해지고 기후가 변하니 한 차례 역병이 만연할 것이다.”라는 말이 이루어졌다. 한 차례 역병이 만연하고 계속되는 중이다. 이방인들은 모진 고난 속에서 살고 있다. 하루하루, 한 해 한 해 더 상황이 나빠져 이미 재난 가운데 떨어진 것이다. 그들 모두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재난이 계속되는 나날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며, 정부가 자신들을 재난에서 구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정부도 그럴 힘이 없다. 흙으로 빚어진 보살이 강을 건너는 격이니, 자기 코가 석 자다. 언제 정권이 무너질지, 멸망할지 모른다. 이는 필연적인 일이다. 너희도 보았다시피 이방인의 삶은 정말이지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생스럽다! 지금 너희의 삶은 어떠하냐? 이방인에 비하면 훨씬 낫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들보다 어떤 면에서 나으냐? (저희는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교제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생명 진입을 추구할 수 있어 마음이 평안하고 든든하니 이방인보다 훨씬 낫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최소한 의지할 곳이 있다는 점에서 이방인보다 낫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믿으며,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믿는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이 진실하기에 진실로 의지할 곳이 있고 안정감을 느낀다. 외부의 전체적인 환경이 아무리 위험하고 혼란스러워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진실로 의지할 곳이 있으며, 안정감과 평안함, 기쁨이 있다. 그래서 어떤 환경을 겪든, 외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무슨 일이 생기든, 그것이 재난이든, 전쟁이든, 역병이든,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아무튼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서 세상의 풍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에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수 있으며, 모두 진리를 얻고자 추구하고 있다. 이는 변함없는 부분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중요한 목표는 변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고, 하나님을 아름답게 증거하는 것으로, 절대로 변할 수 없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사탄 세력이 어떻게 서로 싸우고 죽이든, 이 사회와 세상이 어떻게 혼란스럽든, 사탄이 인류를 미혹하고 패괴시키고 결박하고 통제하는 본질적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갖가지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이 사람과 만물을 창조한 법칙에 위배되는 여러 사상과 의견은 그대로다. 한편으로는 사탄에게 속한 그런 것들이 변하지 않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의 형편과 구조가 어떻게 변하든 사탄이 사람의 마음 깊숙이 심어 둔 갖가지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은 사람 마음속에서 제거되지 않았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고 사탄이 곤경에 빠져 세상을 통제할 여력을 잃었다고 해서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시키는 사탄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이 사람 마음속에서 희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가 않다. 사탄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은 사람의 마음속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를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켰을 때부터 이미 사탄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이 지음 받은 모든 인류의 생각과 마음속에 차츰차츰 깊게 심어졌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람의 생각 속에서 지금까지 그 어떤 변화도 없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오랫동안 사역하고 사람에게 많은 진리를 공급한 뒤에도 사람은 여전히 사탄이 주입한 각종 사상, 관점, 논조를 분별하지 못한다. 그 어떤 환경적 요소의 영향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그런 것들을 분별하고 마음속에서 없애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또한, 하나님 말씀의 공급과 인도하에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각종 사상과 의견을 능동적으로 버리지도 못한다. 사람이 처음 사탄에게 패괴되었을 때는 수동적이었어도, 사탄에게 패괴되는 과정에서 사탄 성품으로 살아가고 사탄의 사상 관점에 따라 일을 바라보며 점점 더 자발적으로 사탄에게 협조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갈수록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멀리하고, 저버리게 되었다. 그 끝은 사탄에게 완전히 사로잡히는 것이다. 사탄의 사악하고 황당무계한 사상 관점이 사람의 내면에 완벽하게 주입되면, 사람은 완전히 사탄에게 사로잡혀 사탄의 노예로 전락한다. 정확하게 말해 사탄의 화신이 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사람이 완전히 사탄의 성품으로 산다. 사탄의 철학과 사상으로 살 뿐만 아니라 사탄이 주입한 각종 관념과 관점이 이미 사람의 본성이 되어 버린 상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탄의 형상으로 살 뿐만 아니라 사람 자체가 사탄, 마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 시점에 이르면 사람이 더 이상 수동적으로 사탄에 의해 패괴되고, 영향받고, 미혹당하고, 통제당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탄 편에 서서 하나님과 대립한다. 사람이 사탄에 의해 그 정도까지 패괴되었으면 이미 사탄의 출구이자 화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탄의 출구이자 화신이 될 수 있는 피조물을 구원하려면, 진리를 공급하고 사람의 갖가지 패괴 성품과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태를 폭로하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내면 깊숙이 품고 있는, 사탄과 동일한 사상, 관점, 의견을 파헤치고 해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사상, 관점, 의견은 사탄과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진 것으로, 사탄이 그런 것에 따라 살듯이 사람 역시 사탄에게 너무 깊이 패괴된 탓에 자연스레 그런 것에 따라 살아간다. 사람 역시 그런 것에 따라 살면서 그 관점의 영향을 받고 거기에 좌지우지되고 그것의 통제를 받는 까닭에, 설령 일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도,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지도,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못한다. 사람이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속 깊은 곳이, 생각이 여전히 사탄의 갖가지 사상 관점에 점령당한 채 통제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정복된 뒤에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음에도, 사탄의 각종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흑암 권세에서 완전히 벗어나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못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려면 한편으로는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의 패괴 성품을 심판하고 정결케 함으로써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사람에게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올바른 길을 걸을지 가르쳐야 하며, 진리를 실행하는 법, 본분을 잘 이행하는 법,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법을 알려 주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탄의 사상 관점을 폭로하고, 사람을 패괴시키는 사탄의 갖가지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전부 폭로하고 해부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 분별력을 가지게 한 다음 사탄의 것들을 마음속에서 제거하게 하고, 정결케 되어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사람이 진리란 무엇인지를 깨닫는 한편 사탄의 성품과 본성, 사탄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따를 믿음을 얻는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사탄의 추함을 똑똑히 보게 되고, 사탄을 진정으로 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의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 비록 사람이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에게 맡기기 전이어도, 다시 말해 사람의 마음이 아직 진리에 점유되지 않고 하나님에게 얻어지지 않았어도, 최소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했다면 생활 체험 속에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사탄이 주입한 각종 의견을 분별하고 해부하고 간파할 수 있으며, 결국에는 그것을 버릴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탄의 자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급한 진리 원칙 등등 긍정적인 사물에 속하고 진리에 속하는 생명이 사람 내면에 차츰 뿌리를 내려 사람의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사람 마음속에서 왕권을 잡은 것이다. 즉, 사람을 패괴시키는 사탄의 각종 사상 관점,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사람이 분별하고 간파하여 증오하고 버리게 되면, 진리가 서서히 사람의 마음을 점유하고 사람의 생명이 된다. 그러면 사람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여 이끌든 적극적으로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체험 속에서 적극적으로 진리에 공을 들여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이러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생기는 데다가 진리를 점점 더 분명히 알게 되면서 믿음도 점점 커진다.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생기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따라서 생겨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생기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얻기를 갈망하고, 기꺼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순종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고, 자기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매일 혹은 매번 특별히 마련한 환경에 순종하게 된다. 사람은 이러한 바람과 갈망이 생기는 동시에 하나님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하게 된다. 사람에게 이러한 측면의 결실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실제적이 되면 사탄의 의견과 사상 관점이 사람의 마음에 작용하지 못한다. 사탄의 의견과 사상 관점이 사람에 대한 통제력과 영향력을 점차 잃어 간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일정 기간의 싸움과 사람의 적극적인 협력,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의지를 통해 사람은 사탄의 결박과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수준에 도달하면 이미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벗어난 것이다. 사람을 미혹하는 사탄의 의견과 사상 관점은 사람에 의해 완전히 버려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은 점점 커진다. 물론, 이 모든 결실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달린 한편, 더 중요하게는 사람의 추구와 협력에 달렸다. 만약 어떤 사람이 수많은 진리와 설교를 듣고도 여전히 사탄에게 속한 사상 관점에 대해 어떠한 지각도 없고, 조금도 증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분별하고 간파하여 버리려는 생각도 없으며, 수동적으로 대하거나 외면한다면, 사탄의 갖가지 사상 관점이 그 사람 안에 그대로 깊게 뿌리박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일상생활과 전반적인 인생길에서 어쩔 수 없이 계속 사탄의 갖가지 사상 관점에 영향을 받고 통제당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출발점은 여전히 사탄일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사탄에게서 비롯되었으니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 너는 진실한 믿음이 없고,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을 영영 진실하게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히 네 마음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로 향할 일도 없고, 마음을 하나님께 돌릴 수도 없다. 너는 하나님이 준 본분과 의무에 대한 진실한 충성심이 조금이라도 있을 리 없고,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할 리도 없으며,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하는 경지에 다다를 수는 더더욱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몇 가지를 달성하지 못하면 어떤 뚜렷한 결과가 있겠느냐? 너라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바로 그러하다. 보다시피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고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심어 놓은 사상 관점과 관념은 하나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가로막으며,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믿고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물론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진입하는 것을 가로막기도 한다. 표면적으로 이런 것들은 사람의 패괴 성품과 별개인 것 같지만, 그것들의 본질은 사탄 본성의 것이며,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수단에 속한다. 겉보기에 인류를 패괴시키는 사탄의 악행과 사탄의 외식 사이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는데, 보통 사람은 분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시킨 결과는 아주 뚜렷하다. 인류의 주류 사회 전체가 하나님을 부정하고, 대적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과 맞서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사람 내면의 사탄 성품은 완전히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시킨 결과다. 또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사탄의 갖가지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 철학, 법칙, 그리고 사람의 인생관과 가치관은 모두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시킨 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즉, 사탄은 사람을 미혹하여 하나님을 멀리하고 부정하게 한 뒤에 각종 사상 관점 및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전부 사람 안에 주입했다. 게다가 다양한 관념, 관점, 의견을 포함한 여러 논조를 공개적으로 떠벌려 사람이 모든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교화하고, 교사하고, 이를 사람 마음속에 받아들이게 했다. 그 결과 사람 안에 사탄의 각종 패괴 성품이 생겨났다. 사탄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패괴시킨다. 즉,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이 비어 있을 때, 올바른 사상이 없을 때, 빈 그릇일 때, 사탄의 각종 의견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태껏 구세주는 없었다.”, “천지 만물은 대자연이 만들어 낸 것이다.”,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 “여자는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해야 한다.”, “남자는 사내대장부다워야 한다.” 등의 다양한 의견이 생겨났을 때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영향을 받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 어떤 분별력도 없고, 사악한 세력 및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물리칠 힘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사람은 사탄에게서 온 각종 사상 관점을 받아들인다. 사람이 사탄의 이러한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이 미혹되고, 교사를 받고, 패괴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여자로서 네가 어떤 여자가 되어야 맞는지, 여자가 해야 할 일이 어떤 일인지 모를 때 사탄이 “여자는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해야 한다. 방에 틀어박혀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마라.”,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다.” 등등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제기하면, 그런 말이 꽤 수준 높고 좋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인다. 이런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이 사회에, 인간 세상에 퍼지면 너는 여성 중 하나로서 자기도 모르게 그 논조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엄격한 잣대로 삼아 자신에게 들이댄다. 우선은 자신과 대조해 본다. 자기도 여자인 이상 현명하고 어질고 정숙하고 유덕해야 한다고, 방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고,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다.” 등등을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너는 점차 사회에 퍼진 이러한 의견 혹은 사상 관점의 교사를 받고, 이것을 주입받고, 영향을 받아 결국 이러한 사상 관점에 동화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탄에게서 온 사상 관점에 미혹된 뒤에 그것에 결박당하고 통제당하는 부류가 된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런 사상 관점을 잣대 삼아 자신에게 들이대고 그것을 기준으로 타인을 대한다. 그리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그러한 생각과 의견이 네 마음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일종의 사상 관점이 된다. 그러면 너는 그 생각과 의견을 받아들여 행동과 사람됨의 준칙이자 근거로 삼는다. 이렇게 사탄의 각종 사상 관점이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에서 서서히 일종의 기풍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기풍이 사회에서 갈수록 성행하고, 그것의 교사를 받고 동화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 일종의 세력이 만들어진다. 그러한 세력이 형성됐을 때쯤이면 인류는 이미 완전히 그런 사상 관점에 속박당하고 통제당하는 상태다. 속박당하고 통제당한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 이미 그러한 사상 관점에 점유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이 이미 사탄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예컨대, 사탄의 세상에서는 남자들에게 “남자는 사내대장부다워야 한다. 기개와 도량을 가져라.”, “남자는 큰 포부를 품고 원대한 이상을 가져야 하며 불굴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남자는 먼저 몸과 마음을 수양하여 집안을 안정시킨 후에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해야 한다.”, “남자는 권력을 잡고, 국면을 장악하고, 세상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남자는 울지 않는다.” 등등을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와 사상 관점이 항상 모든 남성을 옭아매고 있다. 남자도 여자와 마찬가지로 전통문화의 다양한 논조에 얽매이고 결박당한다. 어떤 남자가 되어야 할지, 남자로서 집단에서, 사회에서, 나라에서 어떻게 존립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이러한 사상 관점을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그것에 점차 익숙해져서 그런 사상 관점을 준칙과 근거로 삼아 자신에게 엄격한 요구를 하는 동시에 그런 사상 관점을 이행한다. 즉, 실제로 그런 사람이 되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솔선수범하여 그런 목표를 향해 노력한다. 예를 들자면, 남자는 큰 포부를 품어야 하고, 나가서 큰일을 하고 큰 사업을 벌여야 하며, 애정의 늪에 빠져서는 안 되고, 부모와 자식을 부양하는 일을 평생의 책임과 목표로 삼을 것이 아니라 시야를 넓게 가지고 가슴에는 웅대한 뜻을 품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국면을 장악하는 법을 배우고, 더 나아가서는 권력을 잡아 인류를 통제하고 여자를 통제하는 법까지 배워야 한다. 사람은 이러한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생활 속에서 쭉 이를 실천하고 체험하며, 이 사상 관점이 자기에게 심어 준 목표를 추구한다. 여기까지가 한 측면이고, 다른 측면으로는 이러한 사상 관점이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만들어지고 뿌리를 내리면, 사람은 이런 사상 관점으로 인류와 사회를 대하고 세상 전체를 대한다. 이런 사상 관점이 남자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려 이미 뽑아낼 수 없을 만큼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면, 남자는 “사내대장부가 되어야 하고 남자다운 기개가 있어야 한다.” 등의 사상 관점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 이것이 남자의 세계관과 인생관이 만들어지는 이유이고 근원이다. 남자가 사탄에게서 주입받은 이러한 사상 관점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게 되면 모르는 사이에 그런 사상 관점이 인류 가운데에, 사회에 점차 만연하여 모든 사람의 마음 깊숙이 파고든다. 남자의 마음에만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마음에도 파고드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깊숙이 파고들고, 심지어는 옹알옹알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의 가슴속에도 깊숙이 주입됐을 때는 이미 이러한 사상 관점이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에서 일종의 기풍을 형성한 것이다. 이 기풍이 퍼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확산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시점에는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고, 인류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한 비율이 100%를 달성한 상태다. 이 수준에 도달하면 사회학자 혹은 정치인, 국가 원수,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탄을 추종하는 마왕들이 그러한 생각과 의견이 사람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더욱더 확신하고, 그것을 명문화하는 한편 각종 방증과 유리한 조건, 사람, 일, 사물을 체계적으로 이용해 널리 전파하고 보급한다. 그리하여 그 의견을 인류에게 퍼뜨려 사회 기풍과 고정된 사회적 도덕 준칙이 형성되게 하는 동시에, 그 도덕 준칙으로 인류를 통제하고 결박한다. 이렇게 되면 사탄이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사탄이 목적을 달성했을 때는 남녀를 막론하고 전 인류가 그러한 사상 관점에 미혹되고, 패괴되고, 점유된 뒤다. 인류가 사탄의 그러한 사상 관점에 미혹되고, 패괴되고, 점유되면 그 결과가 무엇인지 아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탄이 그러한 생각과 의견,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제기한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그저 인류를 패괴시키기 위한 것뿐이냐? 그저 사람을 빼앗아 가기 위한 것뿐이냐? 누구를 겨냥해 이 모든 일을 벌이는 것이냐? (하나님입니다.) 그렇다. 너희는 이를 똑똑히 알아야 한다. 사탄이 저지르는 모든 악행, 구체적으로 말해 사탄이 인류를 미혹하고, 교란하고, 통제하고, 패괴시키면서 저지르는 모든 일에서 사람은 단지 봉사만 하는 존재요, 도구에 불과하다. 사람은 그저 사탄이 제 모든 능력과 기량을 발휘하는 데에 이용되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사탄이 저지르는 모든 일은 사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겨냥한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에게 대항하려고 한다. 사람은 그저 사탄이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데에 쓰이는 그릇이고 도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탄은 왜 하나님에게 대항하려 드느냐? 왜 이렇게 인류를 패괴시키려 하느냐?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했고 인류를 구원하려 하기 때문이다. 사탄이 왜 동물, 식물, 외계인은 패괴시키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동물과 식물, 외계인을 구원할 생각도 없으며, 인류를 제외한 그 어떤 생물도 구원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대상은 하나님이 이 땅에 창조한 인류다. 하나님은 땅에서 이 인류를 얻고자 한다. 그것이 어떠한 인류이냐? 하나님을 따르며 죽을 때까지 충성하고, 하나님과 한마음 한뜻이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는 인류이다. 하나님은 이런 인류를 얻고자 한다. 하나님이 역사하기 전, 하나님이 이런 인류를 구원하고 얻기에 앞서 사탄이 먼저 손을 써서 인류를 패괴시켰다. 사탄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할 생각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먼저 인류를 패괴시켜 전부 사람 꼴이 아닌 괴물로 만들면 하나님이 구원할 수 없겠지? 그러면 하나님이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로 끝을 맺게 될 거야.” 이것이 사탄의 목적이다. 아까 내가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사탄은 사람의 성품을 패괴시키는 동시에 각종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 사상 관점을 제기하여 인류의 생각과 마음을 미혹하고, 마비시키고, 통제한다. 사탄의 목적은 무엇이냐? 너희는 대답하지 못하며 이를 알지 못한다. 사탄이 저지르는 이 모든 일은 사람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사탄이 패괴시키고 통제하는 대상은 인류지만, 이 모든 일을 저지르며 겨냥하는 대상은 하나님이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궁극적 목적과 달성하고자 하는 결과는 무엇이냐? 사람이 하나님과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철저하게 하나님과 대립각을 세우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면 사탄은 자기 음모와 심산이 뜻대로 이루어져 자기가 땅에서 사람이 따르고 경배하는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하기에 사탄의 각종 생각과 의견,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이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려 단단히 박히는 지경에 이르면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 주재를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사람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게 되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을 부인할 정도까지 인류를 패괴시켰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째서냐? 그 정도에 이른 시점이면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는 이미 사탄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점령당했고, 하나님과 완전히 대립각을 세우게 된 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목적이다.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못 해 보지 않았느냐? (맞습니다.) 너희는 잘 모른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것은 우리를 사로잡고, 곤경에 빠뜨리고, 해치고, 죽게 만들고, 지옥에 떨어뜨리기 위해서야.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구원의 은혜를 얻고 올바른 인생길을 걷는 것을 막으려는 거지. 사탄은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려 해.’ 이는 한 측면일 뿐이고, 사탄이 저지른 모든 일이 유발한 객관적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근원은 따로 있다. 그 근원이 무엇인지 이제 너희도 알지 않느냐? 말해 보아라. 사탄은 왜 사람의 생각을 미혹하고, 통제하고, 제한하려 드느냐? (사탄이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겨냥한 것입니다. 그 근원은 사람이 모두 하나님에게 대항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무엇이 있느냐?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려고 하기 때문에 사탄은 인류를 패괴시켜 하나님과 적이 되게 하고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없게 하려고 합니다. 사탄은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망치려고 합니다.) 사탄이 사람에게 각종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주입하고, 이 잘못된 사상 관점,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이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면 그때부터 사람의 생각을 통제하고 제한한다. 이로써 일종의 국면이 형성되는데, 어떠한 국면이겠느냐? 하나님과 대립각을 세우는 무리가 완벽하게 형체를 갖추고, 인류가 완전히 하나님의 적대 세력이 된다. 이러면 사탄은 기뻐한다. 사탄이 이루려는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사탄이 이 모든 일을 저지르는 목적은 무엇이냐? 한마디로 말해 보아라. (사탄이 사람에게 각종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주입하고, 이런 잘못된 사상 관점,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이 사람의 마음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면 일종의 국면이 형성되며, 하나님과 대립각을 세우는 무리가 완벽하게 형체를 갖추게 됩니다. 인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류가 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그러면 사탄이 목적을 달성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답이다. 간단하지 않으냐? (간단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켜 달성하려는 목적이자 결과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탄이 인류를 패괴시키는 것을 하나님이 알겠느냐, 모르겠느냐? (아십니다.) 그렇다면 사탄이 하는 짓을 하나님이 허락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너희가 깨달은 진리로 설명해 보아라. “하나님의 지혜는 사탄의 계략 위에 세워져 있다.”라는 말과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 이 말이 응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하나님 사역의 부각물이자 봉사만 하는 존재이다.”라는 말을 여기에 쓴다면 적절하지 않겠느냐? (적절합니다.) 두 가지 말 모두 적절하다. 둘 다 조금 전에 물은 문제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사실이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실이 바로 그렇다. 만약 누군가가 정말로 이런 질문을 한다면 너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두루뭉술하게 “하나님의 지혜는 사탄의 계략 위에 세워져 있다.”라고만 하면 상대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갈피를 못 잡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설명하기가 쉽지 않겠느냐? 인류를 패괴시키는 사탄의 행동을 하나님이 허락하는 것은 막을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그 모든 것을 돌볼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조금 전의 “하나님의 지혜는 사탄의 계략 위에 세워져 있다.”라는 말이 바로 그 이유다. 이는 일종의 논조나 이론이 아니라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킨 후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으로 이 사실이 증명된다. 사탄이 사람의 성품을 패괴시키고, 갖가지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주입하여 사람의 생각을 통제하고 제한하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제거하여 하나님의 경륜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 아니겠느냐? 이것이 사탄의 계략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계략이다. 사탄이 이런 계략을 쓸 때 하나님은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은 어떻겠느냐? 여기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어떻게 나타나겠느냐? 하나님은 사탄의 계략을 이용한다. 사탄에게는 한 가지 계략이 있다. 사탄이 이렇게 말한다. “인류가 전부 나 같은 일을 하도록 부추기고 패괴시킬 것이다. 부추겨서 한 명 한 명 다 작은 사탄으로 만들겠다. 나의 사상 관점을 지니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항상 나의 입장에 서서 하나님과 대립하도록 만들겠다. 나는 하나님이 창조한 인류를 전부 사탄으로 만들고야 말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한 것이 모조리 헛수고가 되게 하겠다. 그러면 하나님의 경륜이 물거품이 되지 않겠나?” 이것이 사탄의 계략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또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한다. “사탄, 너는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퍼뜨려 사람을 교란하고 미혹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사역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짓을 수도 없이 많이 저질렀다. 전부 다 사람에게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주입하고, 사람이 그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에 근거해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대립하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온다면 나는 인류가 패괴되었다는 점을 바탕으로 말하고 사역하겠다. 인류를 패괴시킨 너의 그런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을 폭로하고 사람의 각종 패괴 성품을 심판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사람이 네가 주입한 각종 생각과 의견을 분별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동시에 너의 갖가지 의견과 사상 관점을 분별하게 된다. 또한, 너의 성품, 본질, 각종 악행을 간파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더욱 정확하면서도 힘 있게 너 사탄을 분별하고 버릴 수 있다. 그러면 피동적인 측면에서는 너 사탄에게 다시는 미혹당하지 않게 되고 또다시 잡혀가거나 삼켜지는 일도 없게 된다. 능동적인 측면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와 신분, 그리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고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확인하고 더 굳게 믿을 수 있게 된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달성하면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에게 얻어진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이 하나님에게 얻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이러한 성과에 다다르면 다시는 너에게 미혹되거나 이용당하지 않는다. 대신에 너에 대해 깊이 있는 분별력이 생기고, 너를 간파할 수 있게 되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너를 버릴 수 있게 된다. 또한, 자기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창조주의 주재와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면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안배이고 계획이다. 당연히 하나님 마음속 깊은 곳의 생각이자 뜻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도 이렇게 진행되었으며, 또한 이렇게 지배한다. 사탄이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시키는 동안 하나님은 이처럼 순서에 따라 만물을 안배하고 모든 것을 안배하였으며, 하나님의 계획과 경영을 차근차근 하나하나 추진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인류는 사탄에게 철저히 패괴되었고 붙잡혀 갔다. 그러나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그러한 인류, 즉 사탄의 각종 독소에 절고 그것으로 가득 찬 인류가 하나님이 부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여전히 하나님 앞으로 오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들일 수 있는 데다가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러한 인류를 사탄과 같은 부류이자 하나님의 원수라고 정죄하고 저주해도 인류는 하나님을 떠나거나 버리지 않는다. 사람의 사상 관점이 사탄이 주입한 것들로 가득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계속 사탄의 사상 관점에 커다란 영향을 받고 통제당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마음은 점점 더 진실해지고 절실해진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 가까운 미래에는 사탄에게 깊이 패괴된 이런 인류가 하나님이 사탄의 각종 악행을 폭로하고 나면 완전히 사탄을 버릴 수 있게 되고, 사탄에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또,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주재, 지배, 안배하에 굳건하게 하나님을 따르기를 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대업이 이루어지는 흐름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특히, 진리 추구란 무엇인가를 교제한 이후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 더 늘어났다. 그러한 각오가 크든 작든, 사람이 이미 그러한 실제에 진입했든 진입하지 못했든, 사탄에게 깊이 패괴된 인류가 사탄으로부터 주입받은 갖가지 사상 관점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대신, 사탄을 버리는 한편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할 의향과 각오를 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이미 이겼다는 표징이다. 그렇다면 지금 사탄은 이미 수치를 당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지혜는 사탄의 계략 위에 세워져 있다.”라는 말은 공허한 말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객관적이며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탄이 행한 모든 악이 인류를 미혹하고 통제하는 지경에 도달했기에, 사탄은 하나님의 사역을 이미 교란하고 망쳤으니 하나님의 경륜이 더는 계속될 수 없을 것이라 보고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탄이 아무리 설친들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 경륜의 발걸음을 저지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이 사탄을 이기고 하나님의 경륜이 대성공을 거두는 것도 저지할 수 없다. 지금은 이미 하나님의 사역이 전 우주로 확대됐고, 하나님의 말씀이 집집마다 널리 전해졌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대업을 이룬 증거이다.

지금 누군가가 너희에게 다시 “사탄은 왜 사람의 생각을 미혹하고 통제하고 제한하려 드나요? 하나님은 왜 사탄이 그러는 것을 허락하시나요?”라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겠느냐? 완벽한 답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약간의 인식을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사탄은 무엇을 위해서 이 모든 짓을 하느냐? 사탄이 이 모든 짓을 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는 것에는 어떤 의의가 있느냐? 이런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마음속에 정확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 사역은 6천 년 동안 계속됐다. 잘 모르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의 사역이 6천 년이나 계속됐으면 너무 긴 것 아니에요?” 하나님의 사역이 얼마나 오래 이어졌든 하나님이 하는 일은 다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일이다. 사역 기간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이루는 결실은 더욱 의미가 있다. 6천 년 동안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역하고 경영한 사실이 없었다면, 무감각하고 어리석은 인류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으며, 온전히 하나님께 구원받지도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고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을 알려면 적그리스도의 미혹과 교란을 고작 한두 번 겪는다고 되겠느냐? 세 번이나 다섯 번이면 되겠느냐? 다 안 될 것이다. 더 많은 체험이 있어야만,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을 철저하게 간파해야만, 진정한 분별력이 생기고 적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버릴 수 있다. 특히, 큰 붉은 용의 광적인 탄압과 잔혹한 박해가 그 지속 기간이 너무 짧으면, 사람이 확실하게 체험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잊게 되어 큰 붉은 용을 진실로 증오하거나 버릴 수도 없게 된다. 사탄의 잔혹한 박해가 낙인처럼 사람의 마음에 새겨지게 해야만 사람이 마음속으로 사탄을 몹시 증오할 수 있으며, 사탄의 실제 모습을 철저하고 똑똑하게 볼 수 있다. 만약 짧은 박해만 한두 번 겪었다면 사탄을 증오하고 버리기가 어렵다. 기회가 생겼다 하면 사탄이 좋아할 만한 말을 하고 공적과 은덕을 찬양한다. 사람을 여러 차례 사탄 손에 넘겨 충분히 괴롭힘을 당하고 해를 입게 해야만 사람이 사탄의 사악함, 추함, 비열함, 뻔뻔함을 전부 다 똑똑히 보고 철저하게 사탄을 버릴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은 너무 짧게 겪으면 절대로 안 된다. 강철을 만들 때 불의 세기와 시간이 부족하면 좋은 강철이 만들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수없이 두드리고 불에 달구어야만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단계의 사역이든 아주 오랜 시간이 있어야 하며 긴긴 세월이 필요하다.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며,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없다. 시대마다 이러한 전반적 환경의 영향 아래 인류의 깊은 내면과 패괴 성품에 저마다 다른 정도의 변화가 일어났다. 각기 정도가 다른 그 모든 변화는 하나님이 단계별로 사람에게 행하려는 사역과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이 말세에 다시 한번 성육신하여 이렇게 대대적인 사역을 하고 많은 말씀을 하는 까닭은 이 마지막 시대의 인류가 가진 패괴 성품, 사상 관점, 그리고 사회 전반적인 환경과 배경이 전부 말세에 하나님이 사역하려는 배경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회 풍조든, 사회 기풍이든, 아니면 사회의 짜임새와 사회 상황 및 정치 상황이든, 심지어는 사탄 국가의 정치 세력까지, 이것들은 모두 전반적인 환경 요소이다. 배경에 이러한 요소가 있는 시기에 인류의 깊은 내면, 인류의 패괴 성품, 다시 말해 모든 인류의 내적 상태가 하나님이 사역하는 데에 필요한 상태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 시기는 하나님이 형벌 심판을 전개해 하나님의 공의와 위엄, 긍휼과 자비를 나타내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이다. 하나님은 각 방면의 요소가 모두 무르익고 충분히 갖추어졌을 때 사역을 전개했다. 이것이 바로 전반적 배경의 영향하에 하나님이 전개하는 사역이다. 이 측면에 대해 너희는 그냥 알아듣기만 하면 된다. 자질이 뛰어난 사람은 듣고 이해할 수 있겠지만, 경험이 많이 부족한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특히, 정치 상황과 사회 풍조의 본질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아직 생각이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은 그저 눈앞의 사소한 영적 체험과 간증에 만족할 뿐,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된 정치적 배경, 사회적 배경은 듣고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것을 너희가 듣고 얼마나 이해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서서히 체험이 쌓이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일들이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사역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커다란 이상(異象)이다. 이 화제는 더 교제하지 않겠다. 깊게 교제해 봤자 너희가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지난번에 “남에게 부탁을 받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덕행의 논조를 교제했다. 이어서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논조에 대해 교제하겠다. 우선 이 말 속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 그리고 사탄이 이 덕행에 관한 논조를 제기한 속셈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뱃속이 검다.”라는 말이 있다. 사탄의 검은 속내가 무엇인지, 이것이 우리가 분석하고 폭로해야 하는 것이다.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말 역시 사탄이 사람들 사이에 내놓은 일종의 생각이요, 의견이다. 얼핏 보기에는 대단히 호기로운 말인 것 같다. 기개가 넘치고 힘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부분이 기개가 있는 것이냐? 사람이 아끼고 가슴에 새길 가치가 있는 말이냐? 사람이 이러한 사상 관점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가치가 있는 말이냐? 이 말에 배울 점이 있느냐? 이것이 긍정적인 말이냐? 긍정적인 사물도, 올바른 사상 관점도 아니라면 이 말이 사람에게 끼치는 부정적 영향으로는 무엇이 있겠느냐? 사탄이 이 말을 꺼내 사람에게 이러한 사상 관점을 주입한 속셈이 과연 무엇이겠느냐? 이 말을 어떻게 분별해야겠느냐? 만약 네가 분별할 줄 알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 말을 부정하고 버릴 수 있고, 다시는 영향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설령 이 말이 시시때때로 네 머릿속에 떠오르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너를 교란하더라도, 만약 네게 그것에 대한 분별력이 있다면 그것에 결박당하고 손발이 묶이지는 않을 것이다. 말해 보아라.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말에 배울 점이 있느냐? 사람에게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말이냐? (아닙니다.) 너희는 군자가 되고 싶으냐? 군자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군자가 좋으냐, 아니면 거짓 군자가 좋으냐? 군자가 좋으냐, 아니면 소인배가 좋으냐? 너희는 이러한 생각을 안 해 보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해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너희는 ‘군자’라는 단어를 자주 쓰면서 이런 말을 한다. “진짜 소인배가 될지언정 거짓 군자가 되지는 않겠다.”, “그 사람은 진짜 군자라서 도량이 얼마나 넓은지 몰라. 누가 자기한테 뭘 잘못해도 따지는 법 없이 그냥 봐준다니까. 그게 바로 군자지!” 네 입에서 이러한 말이 나온다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네 사상 관점 안에 군자의 지위, 군자의 생각과 논조가 있음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사회에서 군자처럼 행동하거나 군자라고 불리는 부류를 지지하고, 그들을 속으로 부러워하고, 자기도 군자가 되고자 노력하고, 남들 눈에 소인배가 아닌 군자로 보이고자 한다. 누군가가 “너는 진짜 소인배야.”라고 하면 너는 몹시 속상해할 것이다. 반면 누군가가 “당신은 정말 군자네요.”라고 하면 마음이 흐뭇해질 것이다. 다른 사람이 너를 군자라고 칭찬하는 것은 은근히 네 인격적 수준을 높게 보는 것이요, 네 사람됨과 일 처리 방식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에서 이렇게 인정을 받으면 너는 자신이 비천하거나 열등한 사람이 아니라 존귀한 신분의 소유자가 됐다고 생각한다. 정인군자가 전해지는 인물이든, 아니면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든 간에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군자가 좋은지, 소인배가 좋은지 물어봤을 때 너희 중 누구도 감히 대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너희가 ‘그걸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나? 당연히 군자가 되는 것이 소인배가 되는 것보다 낫지. 군자는 좋은 사람이잖아? 군자는 정직한 사람 아니야? 품성이 고상한 사람 아니야? 군자가 나쁘다고 하면 상식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정상 인성에 어긋나는 것 아니야? 군자가 나쁜 사람이면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히 대답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는 너희가 마음속으로 군자와 소인배 중 하나를 확실하게 선택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너희의 선택은 어느 쪽에 쏠려 있느냐? (군자입니다.) 그렇다면 목표가 명확해졌다. 우리가 분별하고 분석할 대상은 군자이다. 모두가 좋아하지 않는 소인배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군자란 어떤 사람이냐? “군자가 되는 것이 나으냐, 아니면 소인배가 되는 것이 나으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분명하게 어느 쪽도 나을 것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군자든, 소인배든 다 긍정적인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소인배의 일부 행위, 행동 방식, 인격, 도덕성을 상대적으로 저열하게 평가하고 좋아하지 않을 뿐이다. 특히, 이렇게 저열한 도덕성과 인격을 감추지 않고 남들 앞에서 드러내면 사람들은 그런 이를 더욱더 소인배로 본다. 반면 군자는 우아한 말과 행동, 고상한 품성, 고귀한 인격을 더 많이 보여 주며, 남에게 존중받고 남에게 도움이 된다. 사람들은 이런 이를 군자라고 부른다. 군자의 이러한 모습은 사람들의 칭찬과 탄복을 유발하고 사람들이 우러러보게 한다. 그래서 모두가 군자를 좋아하고 소인배는 싫어한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고 군자인지 소인배인지 규정할 때 근거로 삼는 것이 무엇이냐? (표면적인 행위입니다.) 사람은 타인의 행위를 근거로 그 사람의 귀천을 규정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행위를 근거로 타인을 규정하느냐? 대다수가 갖춘 자질이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행위가 좋은지 나쁜지 그것만 똑똑히 볼 수 있을 뿐, 사람의 본질은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은 그저 행위를 근거로 한 사람이 군자인지, 아니면 소인배인지를 규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분별 방법이 정확한 것이냐? (정확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정확하지 않다. 그러니 군자가 사람들 사이에서 인격이 고귀하고 품성이 고상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정확하겠느냐?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정확하지 않다. 즉, 군자라는 부류가 인격이 고귀하고, 품성이 고상하고, 존엄성과 도덕성이 있다는 설명은 무엇 하나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군자’라는 칭호가 지금 봤을 때 긍정적이냐?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긍정적이지 않다. 군자는 결코 소인배보다 고귀하지 않다. 그러니 “군자가 되는 것이 나으냐, 아니면 소인배가 되는 것이 나으냐?”라는 질문을 받을 경우 정답은 무엇이겠느냐? (둘 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정확한 대답이냐! 왜 둘 다 나을 것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아주 간단하다. 군자든 소인배든 모두 긍정적인 인물이 아니고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둘 다 사탄의 패괴 성품과 사탄 독소로 가득 차 있으며, 사탄이 통제하고 해를 끼친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탄의 논리와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족속들이다. 그러므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소인배도 좋은 사람이 아니고, 군자 역시 긍정적인 인물일 수 없다. 남들 눈에 좋은 사람으로 보여도 외식하는 자다. 모두 하나님이 인정하는 정직한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군자는 좋은 행위를 조금 더 많이 하고 나쁜 행위는 적게 할 뿐이고, 소인배는 나쁜 행위를 조금 더 많이 하고 좋은 행위는 적게 할 뿐이다. 군자는 존중을 조금 더 받고 소인배는 경멸을 조금 더 받을 뿐이다. 군자와 소인배의 차이는 이것에 불과하다. 만약 사람의 행위를 근거로 판단한다면 사람은 이러한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모두 타인의 행위를 근거로 그 사람이 군자인지, 소인배인지를 규정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군자예요.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일을 많이 해서 다들 그렇게 평가해요. 그러면 군자인 거죠. 품성이 고상한 사람이죠.” 특정인을 모두가 군자라고 말하면 그 사람이 좋은 사람 혹은 긍정적인 인물이라는 뜻이 되느냐?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사람은 모두 패괴된 인간이고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진리 원칙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한 말이든 결국에는 사탄과 패괴된 인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의 판정 기준은 틀렸고 그에 따른 결과도 틀렸다. 하나님 말씀에는 군자며 소인배가 언급된 적이 없을뿐더러 사람에게 “너는 거짓 군자가 아닌 진정한 군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또, 하나님은 “너희는 모두 소인배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소인배가 아니라 군자이다.”라고 말씀한 적도 없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했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평가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에 사람의 본질을 근거로 판단하고 규정한다. 사람의 본질을 근거로 판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한편으로는 사람의 인성과 인품, 그리고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근거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근거로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에 근거해 사람의 귀천을 판단하고 규정한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는 군자니 소인배니 하는 것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하나님이 구원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군자가 되라는 요구를 하지 않으며, 군자가 되는 것을 장려한 적도 없고, 소인배를 비판할 사람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하나님 집에서는 전통문화의 덕행에 관한 논조를 근거로 누구의 품성이 고상한지 판단하여 누가 군자라고 해서 그를 발탁하고 양성하거나 누가 소인배라고 해서 그를 제명하고 도태시키는 일이 절대로 없다.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발탁하고, 양성하고, 제명하고, 도태시키는 데에는 다 하나님 집의 원칙이 있다. 덕행에 관한 논조의 기준에 근거해 사람을 바라보면서 누가 군자라고 해서 발탁하고 누가 소인배라고 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해 모든 사람을 대한다. 만약 교회에 군자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희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막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 항상 군자니 소인배니 하는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교회 리더가 방해하고 교란한 사람을 책망하고 훈계하는 걸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 리더도 군자는 아니라니까. 형제자매가 사소한 잘못이라도 할라 치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잖아. 군자는 그런 일이 임해도 문제 삼지 않고 남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데다가 달래 주기까지 하는걸. 얼마나 도량이 넓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저 리더는 딱 봐도 소인배야!” 누군가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려고 하면 그는 군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누군가가 진지하게, 빈틈없게, 책임감 있게 일하면 그는 소인배라고 말한다. 이렇게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어떠하냐?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는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다. 게다가 사탄이 사람을 판단하는 사상 관점과 방식, 방법을 교회에 가져와 전파하고 퍼뜨린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히 이방인과 불신파의 사상 관점이다. 만약 네게 분별력이 없다면, 군자가 좋은 사람이고 품성이 고상한 사람이며 교회에서 기둥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는 그에게 미혹당할 수도 있다. 너는 그와 동일한 사상 관점을 가지고 있기에 누군가가 군자와 같은 의견 또는 논조를 내놓으면 반드시 부지불식간에 포섭당하고 미혹당한다. 그러나 네가 이러한 일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런 논조에 미혹당하지 않고 그것을 버릴 것이다. 대신 꿋꿋하게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삼아,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과 일을 판단하고 시비를 가릴 것이다. 이렇게 사람과 일을 바라보면 정확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불신파와 분별력도 없고 하나님 집의 규칙을 준수할 의향도 없는 이들은 항상 이방에서 유행하는, 사탄에게서 비롯된 생각과 의견으로 형제자매를 미혹하고 형제자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교란한다. 만약 사람에게 분별력이 없다면 설령 그들에게 미혹되고 교란당하지 않더라도 수시로 그러한 의견에 구애되어 움츠러들고 입을 열 엄두를 못 낸다. 또한, 감히 진리 원칙을 견지하지도, 하나님 말씀의 요구에 따라 꿋꿋하게 행하지도 못하며, 하나님 집의 이익은 더더욱 지키지 못한다. 이것이 사탄의 생각과 의견에 대한 분별력이 없어서 생기는 일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그 때문임이 명백하다. 군자니 소인배니 하는 말은 교회 안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이방인은 모두 위장에 능하고 가면을 쓴 채로 살고 있으며, 소인배가 아닌 군자가 되기를 장려한다. 그들은 이러한 위장에 의지해 살아가면서 그것들에 기대어 사람들에게서 위신과 명망을 편취하고, 사람들 사이에 발붙이고, 명예와 이익을 얻는다. 하나님 집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도태시키고 없애야 한다. 이것들이 하나님 집과 하나님 선민 사이에 퍼지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고, 이것들이 하나님 선민을 교란하고 미혹할 그 어떠한 기회도 줘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전부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준수해야 할 진리 원칙은 더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 거짓 군자, 소인배는 전부 사람의 본질을 규정하는 정확한 말이 아니다. ‘군자’라는 말에 대하여 설명이 확실하게 되었느냐? (네.)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이 문장의 뜻을 글자 그대로 풀면, 군자로서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속된 말로 살은 쏘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는 의미로, 말을 했으면 꼭 책임지고 실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품성이 고상하고,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군자 부류가 되려면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말을 실행해야 한다. 즉, 신용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자기가 내뱉은 말과 약속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고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에 신용이 없거나 신의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상습적으로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은 군자가 아니고 좋은 사람도 아니며 소인배이다.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말은 이렇게 풀이된다. 이 말이 주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군자 부류의 사람이 품성과 신용 방면에서 보여야 할 언행이다. 그러면 우선 ‘군자의 말 한마디’에서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보겠다. 바로 약속한 말과 승낙한 일, 이렇게 두 가지를 가리킨다.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군자 부류는 좋은 인간이 아니다. 모두 사탄에게 깊이 패괴된 보통 사람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본질을 근거로 할 때 사람이 어떤 일을 약속하면서 주로 보이는 모습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교만한 말, 허풍 떠는 말, 자기를 높이는 말, 자기 실정에 맞지 않는 말,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말, 거짓말, 그리고 모진 말과 분풀이하는 말을 한다. 이 모두가 사람이 하는 말과 약속하는 일 안에 포함된다. 그럼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한 뒤, 너는 그에게 약속을 꼭 지키고 본인이 한 말을 실행하라고, 말에 신용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만약 그가 약속을 지키면 그를 군자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황당한 일이 아니냐? 패괴된 인류가 매일 하는 말을 자세히 알아보고 진지하게 따져 보면 100% 다 거짓말이고 빈말이며 과장된 말이다. 정확한 말이나 진실한 말, 사실에 부합하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다. 전부 다 사실을 왜곡하는 말이고 흑백이 전도된 말이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속셈이 음흉한 말로, 사탄의 계략이 내포되어 있다. 만약 이런 말들을 하는 족족 실행한다면 많은 혼란이 따를 것이다. 큰 집단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 내에서만 소위 군자라는 사람이 하나 나와도 그렇다. 온종일 마구잡이로 의견을 내고 공허한 이론, 교만한 말, 터무니없는 말, 음험하고 악독한 말을 잔뜩 떠드는 그가 만약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고 절대로 식언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그 가정이 얼마나 혼란해지겠느냐? 비슷한 예로 큰 붉은 용의 나라에 있는 마왕을 보면, 아무리 황당하고 사악한 정책일지라도 못 발표할 것이 없고, 아래에서는 그것을 전부 관철하고 실행한다. 감히 반대하거나 가로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 결과 나라가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거기에 더하여 각종 재난이 임하고 전쟁 준비에까지 돌입하면서 나라 전체가 아수라장이 됐다. 이러한 마왕 지도자가 한 국가와 민족 내에서 장기간 집권하면 그 국가의 국민들은 큰 재난을 당한다. 혼란이 어디까지 심화되겠느냐? 만약 마왕이 하는 허튼소리, 틀린 소리, 거짓말을 사람이 전부 집행하고 실행한다면 사람에게 좋은 결과가 있겠느냐? 점점 더 혼란해지고, 어두워지고, 사악해지기만 할 것이다. 다행히도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말은 그저 빈말이자 일종의 논조에 불과하다. 사탄에게는 자기가 한 말을 실행할 능력도, 이룰 능력도 없다. 그래서 세상에 질서가 조금은 있고 사람들이 그나마 안정된 것이다. 사탄에게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 사회 구석구석, ‘군자’가 있는 곳이라는 곳은 모조리 난장판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말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측면 중 하나이다. 사람의 본질을 고려할 때, 사람의 의견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사람이 한 말과 약속은 믿을 만하지 않다. 또 다른 측면을 보자면, 인류는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사상 관점에 구애되어 ‘뱉은 말은 꼭 실행해야 하고 언행이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 그런 사람이 군자다.’라고 여긴다. 이러한 사상 관점이 사람의 생각을 주도하는 동시에 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기준으로 타인을 대하고, 판단하고, 규정하게 한다. 이것이 적절하겠느냐? 정확한 것이냐?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정확하지 않으냐? 우선, 사람이 하는 말은 전부 별 가치가 없으며, 빈말, 거짓말, 허풍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상 관점을 이용해 사람을 통제하고 자기가 한 말을 실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람에게 불공평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사상 관점으로 다른 사람의 귀천을 판단하는 일이 잦다. 부지불식간에 사람은 많은 상황에서 자기가 한 약속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번뇌하고 거기에 구애된다. 만약 지키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얕보이고 비난당한다. 게다가 사소한 일 하나를 실행하지 못해 사람들 사이에 발붙이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이는 사람에게 불공평하고 몰인정한 일이다. 사람은 패괴 성품이 있는 탓에 자기 취향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한다. 그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사실에 위배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 패괴된 인류는 바로 이렇다. 닭은 닭답게 울고, 개는 개답게 짖고, 늑대는 늑대답게 포효해야 하는 법이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에 따라서 그에 맞는 성품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이 아닌 자에게 억지로 사람의 말과 사람의 일을 하라고 하면 그를 무척 곤란하게 만들 것이다. 사람에게는 사탄의 패괴 성품, 교만한 성품, 간사한 성품이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허풍을 떨고, 빈말을 하게 된다. 네가 진리를 깨달아 사람을 명확히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을 아주 평범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봐야지,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 또, 이러한 사상 관점으로 누군가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신용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고 규정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판단 방법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올바르지 않다. 올바른 방식은 무엇이냐?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기에 허풍을 떨고 자기 실정과 맞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이 정상이다. 너는 이를 올바르게 대해야지, 군자에게 요구되는 기준대로 그에게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키라고 해서는 안 되며,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사상 관점으로 타인 혹은 자신을 속박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군자인지 아닌지로 한 사람의 인성과 품성이 어떤지 판단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일종의 오류이지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그 근거가 틀렸고,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지 않으며, 진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이방인 세계에서는 어떤 사상 관점으로 사람을 판단하든, 이방인 세계에서 군자가 되기를 장려하든 소인배가 되기를 장려하든, 아무튼 하나님 집에서는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말을 권장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군자가 되기를 권장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당연히 네게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를 반드시 실행에 옮기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설령 네가 엄격하게 자신에게 군자가 될 것을 요구하고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것대로 실행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네가 이 부분을 아주 잘 해내고, 겸손하면서 단정한 사람이고, 약속을 잘 지키고, 신의를 저버린 적이 한 번도 없어도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고 진리 원칙에도 따르지 않는다면, 너는 영락없는 불신파이다. 수많은 사람이 너를 지지하고, 옹호하고, 너를 군자라 부르고, 네가 한 번도 신의를 저버린 적이 없으며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고 이야기한들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냐? 그것이 네가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이 되느냐? 그것이 네가 하나님의 도를 행한다는 뜻이 되느냐? 네가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덕행의 논조를 아무리 잘 실행해도, 아무리 그것에 맞게 행동해도,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한편 일을 처리할 때 진리 원칙을 따르고 준수하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

앞에서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사상 관점의 잘못된 점을 분별하고 분석했다. 이어서 사람의 언행 측면에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떤 사람으로 살라고 요구하느냐? (정직한 사람으로 살라고 요구하십니다.) 맞다. 정직한 사람으로 살고, 거짓말하지 말고, 기만하지 말고, 간사하게 굴지 말고, 수단 부리지 말아야 한다.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을 구해야 한다. 아주 간단하다. 딱 이 몇 가지뿐이다. 말을 정직하게 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고쳐야 한다. 허풍을 떨고, 거짓말을 하고, 주제넘은 소리를 했다면 스스로 반성하고 인식한 뒤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자신의 실제 상태와 마음속 인식, 그리고 사실에 부합하는 말을 해야 한다. 그 밖에 다른 사람에게 약속한 일은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빨리 상대에게 알려 줘야 한다. “미안한데 저는 잘 못할 것 같아요. 할 수도 없고요. 저는 그럴 능력이 없으니까 일을 그르치지 않으려면 얼른 도와줄 다른 사람을 찾아요.”라고 말이다. 꼭 뱉은 말을 지키고 신의를 지키려고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말과 행동이 정직해야 하며 거짓으로 꾸미거나 기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매사에 진리 원칙을 구하면 된다. 이렇게 간단하다. 얼마나 쉬우냐. 하나님의 요구에 사람의 위장을 요하는 요소가 있느냐? 요구하는 수준이 너무 높아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사람이 본능을 뛰어넘게 하는 요소가 있느냐? (없습니다.) 네 자질로 할 수 없는 일, 네 이해 능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일, 혹은 신체적 에너지와 체력이 부족해서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나님은 힘닿는 데까지만 최선을 다하라고, 전력을 쏟아부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너는 “이미 전력을 다했습니다만 하나님의 요구에 달하지 못했습니다. 제 능력은 이것밖에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셨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하겠지만, 사실 그 정도면 하나님의 요구에 달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리한 짐을 지게 하지 않는다. 네가 백 근을 짊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백 근이 넘는 짐을 네게 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압박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이렇게 대한다. 게다가 너는 무엇에도 구애될 필요가 없다. 그 누구에게도 구애될 필요 없고, 그 어떤 사상 관점에도 구애될 필요 없다. 너는 자유롭다. 어떠한 일이 임했을 때 네게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해도 되고 네 개인적 의사에 따라 실행해도 된다. 물론 사탄이 네게 주입한 사상 관점을 고집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자유롭게 선택해도 된다. 단, 선택을 했다면 자기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은 그저 네게 길을 알려 줬을 뿐,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한다고, 혹은 어떻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길을 알려 준 이후의 선택권은 너 자신에게 있다. 너는 충분한 인권과 선택권을 가졌다. 너는 진리를 선택할 수도, 사람의 의사를 선택할 수도 있으며, 당연히 사탄의 사상 관점을 선택할 수도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 최종 결과는 너 혼자 감당해야 한다. 대신 감당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네가 선택하는 동안 하나님은 전혀 간섭하지 않으며 그 어떤 강제적인 일도 하지 않는다. 무엇을 선택하든 근거가 되는 것은 너의 의사이다. 네가 올바른 길을 택하고 진리를 택했다고 해서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님이 너를 크게 칭찬하거나, 큰 이득을 보게 해 주거나, 네게 행복감과 본인이 대단히 고귀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사람의 뜻을 택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곧장 네게 징계와 저주가 임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네가 사탄에게서 주입받은 사상 관점에 따라 행동하고 제멋대로 굴더라도 하나님은 곧바로 재난을 내려 너를 징벌하지 않는다. 네가 선택하는 순간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선택한 후에도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하나님은 그저 관찰할 뿐이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그것의 발생 원인, 경과, 결과를 지켜본다. 물론,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사람을 평판하고 사람의 결말을 정할 때는 네가 개인적으로 매번 했던 선택에 따라 네가 걸은 길의 성질을 규정하고, 네가 걸은 길을 통해 네가 어떤 사람인지 종합해 보고, 네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고서 어떤 결말을 맞이해야 할지 규정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하나님이 사역할 때는 절대로 어떠한 의견, 논조, 사상 관점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종의 기풍을 형성하게 함으로써 사람의 생각을 제한하고 통제하지 않으며, 그로 인해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동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충분한 자유와 선택할 권리를 준다. 사람은 충분한 인권과 선택권을 누릴 수 있다. 어떠한 환경이 임할 때마다 사람은 사탄의 사상 관점을 받아들여 일의 성질을 판별하고 판단할 수도 있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근거해 일의 성질을 판별하고 판단할 수도 있다. 사실이 이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하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고, 진리를 얻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할 수 있게 되어 구원받는다. 반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언제나 제멋대로 굴고 자기 뜻대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싫어해서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무섭고 하나님의 징벌이 임할까 봐 무서워서 마지못해 하나님 집에서 생색내기용 일을 조금 하고, 힘을 조금 쓰고, 좋은 행위를 조금 한다.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하나님의 도를 행해 본 적이 없으며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길에 들어서지도 못했기에 항상 진리를 깨닫지도,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구원받을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이러한 부류는 봉사자가 대부분이다. 악을 행하지도, 방해하고 교란하지도, 적그리스도나 악인처럼 하나님 집에서 도태되고 제명되지도 않았어도 결국 가까스로 ‘봉사자’라는 칭호나 얻을 수 있을 뿐,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조차 장담하기 어렵다. 그 밖에 또 다른 부류로는 사탄에게 속한 자들이다. 그들은 사탄에게서 온 각종 사상 관점을 완고하게 고집하면서 죽어도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죽을 각오로 진리 및 하나님 말씀과 대립한다. 더 나아가서는 모든 긍정적 사물 및 하나님과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고, 악행을 수없이 많이 저지르고, 완전히 사탄 역할을 한 까닭에 누군가는 교회에서 제명당하고 누군가는 출교 처분을 받고 제적당한다. 어떤 사람은 제적과 출교 처분을 받지 않았다 해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에 의해 도태된다. 그들이 구원받을 기회를 잃는 것은 진리와 하나님의 구원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이 세상이 멸망될 때 그들은 사탄과 함께 멸망된다. 보아라,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은 이렇게나 자유롭고 모든 것을 흘러가는 대로 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역사하여 사람을 인도하고, 깨우치고, 돕는다. 때로는 일깨우고, 위로하고, 권면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 중 사람에게 널리 긍휼을 베푸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널리 긍휼을 베푸는 동안 사람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고 충분한 해방과 자유를 누린다. 무엇인가에 구애되는 느낌이나 무엇인가에 결박당한 느낌은 전혀 없었고, 어떠한 의견 혹은 사상 관점의 제한을 받는 느낌은 더더욱 없었다. 하나님은 한편으로 이렇게 사역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행정 법령과 규정, 각종 제도로 사람을 단속하고, 사람의 패괴와 패역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심판하고 형벌한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징계와 채찍질이 임하고, 하나님 말씀의 폭로와 질책 등등이 임한다. 그러나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누리는 동시에 하나님이 널리 베푸는 긍휼과 큰 진노도 누린다. 하나님이 가진 공의 성품의 또 다른 면인 큰 진노가 사람에게 나타날 때도 사람은 거기에 구애되고, 결박당하고,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낀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 중 어떠한 면이 사람에게 임하고 행해지든, 사람이 느끼는 것은 사실상 항상 하나님의 사랑이며, 사람에게 나타나는 성과는 항상 긍정적이다. 사람은 수확을 얻고, 당연하게도 최대 수혜자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사역한다. 아예 강요하지 않고, 강박하지 않고, 억압하지 않고, 결박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에게 해방감과 자유로움, 홀가분함과 유쾌함을 느끼게 한다. 사람이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이든, 아니면 공의와 위엄이든 결국 하나님에게서 얻는 것은 진리이다. 인생의 의의와 가치를 깨닫게 되고, 사람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과 사람됨의 방향 및 목표를 깨닫게 된다. 사람이 얻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사람은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며 사탄에게 주입받은 각종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에 결박당하고, 제한당하고, 손상을 입는다. 그것은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스스로 거기에서 벗어날 힘이 없다.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왔을 때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든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는 항상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이 바뀌지 않는 까닭이다. 하나님은 계속 진리를 선포해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고 본질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에게 역사함으로써 사람은 하나님의 자애와 긍휼을 충분히 누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위엄도 충분히 누렸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는 인류는 행복한 존재이다. 만약 이러한 환경에서도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못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 결국 진리를 얻지 못함으로써 구원받을 기회를 잃고, 심지어 일부는 징벌을 받고 사탄과 마찬가지로 멸망된다면, 이유는 오직 하나일 것이며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너희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사실일 것 같으냐? 사람은 본성에 따라서 각기 다른 길을 걷고 각기 다른 결말을 맞이한다. 최종적으로 각 부류 사람의 결말이 정해질 때가 바로 사람이 각기 부류대로 나누어질 때이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면 사탄이 아무리 많은 부정적 사물을 주입해도 마지막에 하나님이 말씀하고 역사할 때 그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고자 한다. 만약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싫어하면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말씀을 해도, 하나님 말씀이 아무리 간곡해도,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사역을 하고 커다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도,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싫어하는 성품이 사람의 내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이 점은 변하지 않는다. 악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단순히 진리를 싫어하는 것만이 아니라 본질이 사악하며, 진리를 증오한다. 그는 하나님과 대립하는 자이자 사탄 진영에 속한 자이다. 하나님을 믿더라도 결국에는 사탄에게 돌아간다. 이 세 부류의 사람은 똑같이 사탄에게 패괴되었고, 사탄의 각종 언사와 사상 관점에 미혹되고 제한당했다. 그런데 어째서 마지막에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냐? 주로 사람이 어떤 길을 걷는지, 그리고 과연 진리를 사랑하는지, 이 두 가지 측면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떤 사람은 진리를 사랑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냐? 어째서 어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걸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걷지 못하며, 심지어 공개적으로 하나님에게 대들고 진리를 헐뜯는 사람도 있는 것이냐? 어째서 이런 것이냐? 본성 본질이 이를 결정하지 않느냐? (맞습니다.) 똑같이 사탄에게 패괴되었어도 사람의 본질에는 차이가 있다. 보아라, 하나님의 사역에는 지혜가 있지 않으냐? 하나님은 인류를 명확히 알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준 것이냐? 어째서 강제적으로 주입하지 않는 것이냐? 하나님은 사람을 각기 부류대로 나누려 하고 모든 사람을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는 일에는 모두 원칙이 있다. 사람에게 어떤 사역을 하는지는 그 사람이 어떤 부류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의 부류는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느냐? 무엇에 따라 갈리는 것이냐?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사람이 걷는 길을 보고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사람이 걷는 길을 근거로 그 사람이 어떤 부류인지 구분한다. 그런 다음 사람의 부류에 따라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하고,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따라서 사람에게 그에 맞게 역사한다.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 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 짭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 새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칠 때, 다양한 음식을 놓아두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할지 알려 주지 않아도 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매운 것을 먹고,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단것을 먹고, 짭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짭짤한 것을 먹는 것과 같다. 사람에게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며 진리를 사랑할지, 어떤 길을 걸을지, 그 선택권은 본인 손에 쥐어져 있다. 그러나 사람이 마지막에 구원받을 수 있을지, 최종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사역에 원칙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원칙이 있다. 가장 큰 원칙은 사람이 추구하는 것과 걷는 길에 따라서 사람을 각기 부류대로 나누고, 모든 것을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밝히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는 권병이 있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권병은 어디에서 나타나는 것인가요?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강제적으로 주입하는 사역을 통해 권병을 나타내시지 않나요?” 하나님의 권병은 그렇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권병을 보게 하지 않는다.

이제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덕행의 논조를 분별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도 깨달았느냐?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일이 임하면 진리 원칙에 따라서 처리하고 위장하지 마라. 표면적인 행위에만 집중하지 말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네가 걷는 길이 옳고, 네가 추구하는 처신 원칙이 옳고,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부합하면 된다. 이것이 간단하지 않으냐? (간단합니다.) 사탄은 진리가 없고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기 때문에 사람이 좋고 옳다고 생각하는 논조로 사람을 미혹한다. 사람에게 군자가 되고, 좋은 행위를 하고, 소인배가 되지 말고,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의 관념과 기호에 부합하기 때문에 사람이 쉽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사람은 금방 그것에 미혹된다. 그것이 사람에게 시키는 일은 그저 표면적인 좋은 행위에 불과하다. 네가 뒤에서 얼마나 나쁜 짓을 하든, 네 패괴 성품이 얼마나 심각하든, 네가 악인이든 아니든, 사탄이 만든 논조와 사탄의 요구에 따라서 겉모습만 잘 위장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사람으로 통하기만 하면, 너는 좋은 사람이 된다. 이 요구 기준은 명백히 사람을 부추겨 간사한 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 되게 하고, 가면을 쓴 채로 처신하게 하며, 바른길을 걷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한 모든 사상 관점이 사람을 계속해서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하려는 사역은 사람에게 사탄의 온갖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에 대해 분별력을 심어 주어 그것을 간파하고 버릴 수 있게 한 다음 사람을 각종 잘못된 길에서 바른길로 데려오고, 사람이 원칙을 가지고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게 하는 것이다. 그 모든 원칙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진리 원칙이다. 사람이 진리 원칙을 깨달은 뒤에 그런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할 수 있게 되고, 진리 원칙의 실제에 진입하면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생명이 차츰차츰 사람의 내면에 만들어진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생명으로 삼으면 더는 사탄에게 미혹되어 잘못된 길, 사탄의 길, 돌아오지 못할 길로 향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사탄이 어떻게 미혹하고 패괴시키든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다. 이 세계가 어떻게 변하든, 세월이 얼마나 흐르든, 사람이 생명으로 삼은 것이 하나님 말씀이기에 그 생명은 썩지도, 쇠망하지도 않는다. 생명이 썩지도 쇠망하지도 않기에 사람도 그 생명과 공존하며 쭉 살아간다. 이는 좋은 일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너무나도 큰 복을 누린다!

지금 너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바로 진리를 많이 갖추는 것이다. 진리를 많이 갖추고, 많이 듣고, 많이 체험하고, 많이 깨달아야만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 말씀을 들어 근거로 삼을 수 있고,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이래야만 잘못된 길에 들어서지 않게 되고, 사람의 뜻과 사탄이 네게 주입한 사상 관점으로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을 대체하지 않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너희에게 가장 중요한 일, 가장 급하게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진리를 갖추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깨닫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여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는 아주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진리 항목도 아주 많다. 각 항목의 진리를 서둘러 갖추어야 한다. 만약 이를 갖추지 않아서 일이 임했을 때 하나님 말씀을 들어 근거로 삼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처리한 결과 원칙을 어기고 과오를 남기게 된다면, 이는 곧 오점이다. 일이 임했을 때 진리를 구할 줄 모르고 그저 자기 뜻대로 처리하여 자기 목적을 이루고, 자기 뜻을 따르거나 개인적인 불순물이 들어 있는데도 어떻게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해야 할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자신과 대조해 봐야 할지 모르면, 자신을 인식할 수가 없고 진실로 회개할 수도 없다. 네가 진실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어떻게 보이겠느냐? 이는 성품이 강퍅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너는 이 일로 또 오점을 하나 남기고 또 심각한 과오를 저지른다. 오점과 과오가 잔뜩 쌓이면 네게 이로운 점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로운 점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과오를 해결해야겠느냐? 앞서 “과오는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이다”라는 말씀을 선포했었다. 이는 곧 과오와 사람의 결말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사람은 어째서 항상 과오를 범하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그때 나쁜 짓을 할 생각이 없었어요.” 이것이 이유가 되느냐? 네가 그럴 생각이 아니었으면 과오가 아닌 것이 되느냐? 반성할 필요도, 회개할 필요도 없어지느냐? 고의가 아니었다면 과오이냐, 아니냐? 고의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고 행정 법령을 거스른 것은 사실이 아니냐? (맞습니다.) 사실이라면 그것은 과오이다. 무슨 이유를 대도 소용없다. 네가 “저는 아직 어리고, 소양이 부족하고, 사회 경험도 별로 없습니다. 그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몰랐어요. 저한테 알려 주는 사람도 없었고요.”라고 하거나 “그때는 환경이 너무 위험했어요. 급한 마음에 그렇게 했던 거예요.”라고 한다고 해서 이것이 이유가 되느냐? 이러한 것들은 전부 이유가 못 된다. 네게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할 기회가 있었으면, 사실 진리를 구할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너는 진리를 행동의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너는 왜 진리를 구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사람의 뜻에 따라 행하기를 택한 것이냐? 네가 진리를 너무 얕게 깨달았고, 평소에 진리 추구와 하나님 말씀을 갖추는 데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또 한 가지 원인, 한 가지 상황이 있는데 이 역시 사실이다. 즉, 너는 평소에 일을 처리할 때 마음속에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이 없고, 하나님 말씀이 네 마음속에서 주인 역할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너는 제멋대로 구는 것에 익숙하다. 습관적으로 너만 옳다고 생각하고, 무슨 일에서든 스스로 주인이 되고, 네 기호에 따라서 일을 처리한다. 네가 하나님에게 하는 기도는 그저 과정을 거치고 형식적일 뿐이다. 하나님 말씀은 네 마음속에서 지위를 얻지 못하고 주권을 잡지 못한다. 하나님은 네 마음속에서 지위를 얻지 못하고 주권을 잡지 못한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자연스럽게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다가 결국 진리 원칙을 어기면, 이것이 과오가 아니냐? 이미 모양이 형성되었으니, 그것은 과오이다. 이러한데 무슨 핑계를 대느냐? 그 어떤 핑계도 성립되지 않는다. 과오는 과오이다. 과오가 늘어나서 하나님 집의 이익과 교회 사역에 해를 끼치다가 결국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면 네가 구원받을 기회는 날아간다. 이것이 바로 “과오는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이다”의 정확한 말이며, 사실이 바로 이러하다. 이는 사람의 패괴 성품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사람의 패괴 성품 때문에 갖가지 행동 방식이 생기고, 사람의 갖가지 행동 방식이 사람이 걷는 길을 구성하고, 사람이 잘못된 길을 걸으면 본분을 이행하다가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각종 과오를 범한다. 네 과오가 지나치게 많아지고 거듭 쌓이면 구원받을 기회가 사라진다. 사람은 왜 항상 과오를 범하느냐?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이 아예 하나님 말씀을 갖추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하나님 말씀을 너무 적게 갖추었고, 일을 처리할 때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 원칙을 거의 근거로 하지 못해서 결국에는 항상 과오를 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과오를 범하고도 번번이 자신을 용서하며, 이유와 핑계를 댄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좋은 의도였어요. 그때는 상황이 급박해서, 누구누구 때문에, 이런저런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무슨 원인이 있었든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진리를 준칙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과오가 생기게 되며,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한다면 네 결말은 반드시 앞서 말했던 “과오는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이다”처럼 될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품이 지나치게 강퍅하고 불량기가 너무 심각한데, 언제나 일종의 요행 심리를 품고서 이렇게 생각한다. ‘자그마한 과오쯤은 별것 아니니 하나님께서 벌하지 않으셔.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인걸. 항상 사람을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인내하시지. 하나님의 날까지는 아직도 많이 남았어.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진리는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추구하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꽤 간곡하고 절박한 투이기는 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구원받을 기회는 아직도 많은걸.’ 그는 항상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절실한 심리도, 하나님을 몹시 원하는 마음도, 진리를 향한 갈망도 없다. 언제나 강퍅한 마음을 품고서 진리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요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와 내적 상태로 본분을 이행하면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과오와 오점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오점이 계속해서 나오고 과오가 끊임없이 생기는데도 정작 자기는 대충대충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위험하다. 하나님이 지금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앞으로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이러한 내적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주 위험하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보배처럼 사랑하지 않고, 구원받을 기회와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더욱이 하나님이 그에게 마련한 모든 환경을 보배처럼 여기지 않는다. 언제나 해이하고, 대충대충 하고, 무슨 일을 하든 아무렇게나 하고, 방만하고,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다. 이러한 사람은 아주 위험하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잘한다는 착각에 빠져서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일을 처리할 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가 있어. 가끔은 하나님의 징계도 있고. 내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셔!’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하기에 당연히 네가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고 결코 바닥나는 법이 없다. 하지만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냐? 하나님의 은혜는 진리를 뜻하지 않는다.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고 해서 진리를 갖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가엾게 여겨 아끼지만, 그렇다고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과 피조물 하나하나를 가엾게 여겨 아끼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는 데에 원칙이 없다거나, 하나님에게 공의 성품이 없다거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고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너는 하나님이 한 번도 네게 노한 적이 없고, 네게는 항상 상냥하고 자상하며, 너를 몇 배로 보살피고,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고 느낀다. 너는 하나님의 온정과 공급, 도움을 느끼고 심지어 하나님의 편애와 은총도 느낀다. 너는 하나님이 누구보다도 너를 가장 사랑하며, 다른 사람은 버려도 너를 버릴 리 없다고 생각한다. 너는 자신에 차 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생긴 것처럼, 더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성품 변화를 추구할 필요도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너를 버릴 일은 절대로 없을 것처럼 말이다. 네가 이렇게 자신하는 데에 하나님 말씀의 근거가 있느냐? 언젠가 네가 정말로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날이 오면 너는 당황할 것이다. ‘설마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건가?’ 그러면 네 결말이 어떨지는 너 스스로도 잘 알 것이다. 진리는 추구하지 않고 지나치게 독선적인 사람에게는 절대로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배처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가엾게 여겨 아끼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심지어 사람 중 일부를 특별 대우하거나 일부에게 은총을 베푸는 목적 혹은 그 성질은 절대로 총애나 익애가 아니고, 네가 잘못된 길과 나쁜 길을 걷게 하려는 것도 아니며, 네가 진리와 참도를 등지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하는 목적은 너를 붙들어 주어 바른길을 걷게 하고, 네가 하나님을 대단히 원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더욱 깊어져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항상 하나님의 총애를 누리려고 하고 하나님의 애완동물이 되고자 한다면 나는 네가 틀렸다고 말할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애완동물이 아니다. 하나님이 네게 은총을 베풀거나 너를 특별 대우하는 것은 절대로 총애나 익애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하는 목적은 네가 하나님 말씀을 보배처럼 사랑하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하에 굳세어지고, 각오와 의지력을 갖고서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고, 바른 인생길을 걷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확실하게 말하건대, 하나님이 이러한 진리를 선포할 때 공급과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린 네가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할 수 있고, 네 위치에 똑바로 서서 하나님 말씀을 많이 갖추는 한편 하나님 말씀을 더욱더 보배처럼 사랑할 수 있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 원칙을 구할 수 있고, 노력해서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 이른다면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반대로 네가 만약 하나님의 은총과 특별 대우를 이용하고, 하나님이 너를 가엾게 여겨 아끼는 것을 무시하고, 네 고집대로만 하면서 제멋대로 굴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착각에만 빠져 있을 뿐 하나님 말씀을 갖추지 않고, 진리에 이를 의지도 없으며,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여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너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가 물거품이 되었을 때, 다시 말해 네가 언제나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릴 때, 너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 자비가 조만간 바닥나게 될 것이다. 네가 그것을 바닥내는 그날, 즉 하나님이 그 모든 은혜를 거두어 가는 날이 오면, 네가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하게 되면, 너는 네 내면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될 것이다. 내면이 어두워지고, 가라앉고,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공허해지고, 앞길이 막막하고, 겁이 나고, 두려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는 무서운 일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하나님이 준 모든 것과 자기가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워야 하는 동시에 보답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 하나님이 네게 요구하는 보답이 하나님을 위해 대단한 공헌을 하라거나 하나님을 대단히 힘 있게 증거하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네가 바른길을 걷는 것, 하나님이 걸으라고 한 길을 걷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누리기에 충분하다. 하나님은 그 은혜를 사람에게 베푸는 데에 인색하지 않고, 그 은혜를 사람에게 베푼 것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누구에게 은총과 축복을 베풀든 그것은 하나님이 기꺼이 원해서 하는 일이고, 모두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신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베푼 것을 전혀 후회하지도, 아까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그 호의와 은혜를 모른 채 번번이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실망하게 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고 얼마나 오래 기다리든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심을 알아주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만 최대한 많이 누리려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얼마나 누리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줄도, 마음을 하나님에게 돌려 드리거나 하나님을 따를 줄도 모른다고 치자. 말해 보아라. 사람이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하겠느냐? (흡족할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진실한 태도를 보여야 하나님이 흡족하겠느냐? 회개하고 실질적인 행동을 해야 하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온갖 이유와 핑계만 붙들고 있지 마라. 하나님의 은혜와 관용, 인류를 가엾게 여겨 아끼는 마음은 네가 자신을 방임하는 데에 핑계나 근거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든, 사람을 위해 어떠한 심혈을 기울이든,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든,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이다. 바로 사람이 바른길을 걷고 바른길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바른길이란 무엇이냐?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많이 갖추는 것이다. 사람이 걷는 길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하면 하나님이 너를 위해 치른 대가와 모든 기대가 보답받는다. 말해 보아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높으냐? (높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높지 않다. 게다가 하나님은 충분한 인내심과 사랑을 가지고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네가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네게 고작 약간의 은혜와 축복만 베풀지 않는다. 진리와 생명 측면, 그리고 네가 걷는 길에서 너에게 공급하고, 너를 붙들어 주고, 인도한다. 하나님은 네게 더 크게 역사하려고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역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은 귀찮아하지도 않고 사람을 인도하며, 붙들어 주고, 사람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푼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처음에 품었던 뜻도, 특별히 원해서 하는 일도 아니지만, 어쩔 수가 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이 ‘서럽더라도’ 사람을 위해 어떤 대가든 치르고, 모든 대가를 아끼지 않고 이러한 사역을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이 모든 사역을 하면서 궁극적으로 사람에게서 보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돌아오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깨닫고,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는지 깨달으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점을 인식하게 되고, 분량이 조금 생기고, 자라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공급받은 여러 진리를 참답게 대하기 시작하고, 공을 들이기 시작하고, 여러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과 함께하거나, 사람을 위로하거나, 일깨워 주거나, 권면하는 것처럼 단순한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대신에 진리와 생명 측면에서, 사람이 걷는 길 측면에서 사람에게 더 많이 공급하고, 사람에게 더 크고 구체적인 사역을 한다. 어째서 하나님은 이러한 사역을 하기를 더 좋아하겠느냐? 하나님이 이러한 사역을 하면서 사람에게서 희망을 보고, 사람의 미래를 보고, 사람과 하나님이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을 보면, 그것은 사람에게나 하나님에게나 모두 대단히 좋은 일이며, 하나님이 오랫동안 기대하던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들어서면 사탄과 싸우고 굳게 서서 하나님을 증거할 힘과 실제적 분량이 차츰차츰 더 커진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또 한 명의 창조된 인류가 일어나 하나님을 위하여 사탄과 싸우는 것을 볼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사람은 분량이 커질수록 점점 더 굳세지고 간증이 생기며, 하나님을 점점 더 경외하게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이긴 자들을 얻을 희망이 생기고,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사람들 가운데서 영광을 얻을 희망이 생긴다는 뜻이다. 이는 좋은 일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대이자 하나님이 너희에게 바라고 희망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오래 기대한 일이기도 하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다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일에 공을 들이고 대가를 치를 것이며, 하나님이 하려는 일에 힘껏 협력하고, 하나님의 염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할 것이다. 네게 이럴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도 강요하지 않는다. 네가 “왜 저는 그럴 마음이 없죠? 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걸 해내고 싶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걸 해낼 생각만 하면 왜 마음이 거북하고, 불편하고, 순종하기 싫은 걸까요?”라고 말한다면 너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해내지 않아도 된다. 이는 자기가 원해야 하는 일이다. 네게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 너는 자유롭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억지로 시키지 않는다. 너희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그저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사실과 너희가 짊어진 책임, 하나님의 기대를 너희에게 충분히 이해시키기 위해서이다. 이에 대해 확실하게 알았느냐? (네.) 확실하게 알았으면 되었다. 알았으면 사람의 마음속에 생각이 있을 것이요, 앞으로 어떤 방면으로 노력하고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마음속에 계산이 서고 방향이 정해졌을 것이다.

오늘은 “군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라는 덕행의 논조를 교제했다. 앞서 사탄이 제창한 덕행 측면의 논조를 이미 몇 가지 교제했기에 이번 논조를 교제할 때는 분별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을 것이다. 덕행에 관한 어떤 논조든 대부분 사탄이 어떠한 의견을 이용해 사람의 행위를 속박하고 제약한 다음 사회에서 일종의 기풍을 형성하고, 기풍을 형성하는 것과 동시에 인류 전체의 생각을 미혹하고, 통제하고, 제한함으로써 인류 전체가 하나님과 대립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대립하게 한 이후, 사탄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르고 사역할 수가 없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사탄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사탄이 이 모든 일을 저지른 것의 본질이다. 사탄이 제창하는 덕행의 논조는 어떤 측면의 행위 혹은 사상 관점을 대표하든 간에 전부 다 진리와 무관하다. 게다가 진리와 상충되기도 한다. 사탄이 제창하는 덕행의 논조를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간단한 기본 원칙은 사탄이 내놓은 모든 의견은 우리가 폭로하고, 분석하고, 간파하고, 버려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탄에게서 온 것인 이상, 마음속으로 밝히 알았다면 그것을 정죄하고 버릴 수 있다. 사탄의 것이 교회 안에 존재하면서 하나님 선민을 미혹하고, 패괴시키고, 교란하는 작용을 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선민이 사탄을 버리게 하고, 하나님 선민에게서 더는 사탄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게 해야 한다. 대신에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하나님 선민의 마음속에서 주인이 되고 생명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러한 인류야말로 하나님이 얻으려는 인류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2022년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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