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실제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많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적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어떻게 분별해야겠느냐? 어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는 어떻게 가늠해야겠느냐? 하나님을 7~8년 동안 믿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많은 글귀와 도리를 말할 수 있고, 입만 열면 영적인 단어를 쏟아 내며, 게다가 늘 다른 사람을 돕고, 겉으로 보기에도 아주 열성적이고, 버릴 줄 알며, 의욕이 넘치게 본분을 이행한다. 그러나 진리를 얼마나 실행하는지 확인할 수 없고, 또 생명 진입의 참된 체험을 말하지도 못하고, 더군다나 생명 성품의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확언할 수 있다. 정말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일정 기간 체험한 후에 조금이나마 인식을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최소한 몇몇 일에 있어서는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생명 진입의 체험을 하게 될 것이고, 적어도 약간의 행동 변화를 보일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영적 상태가 나날이 좋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점차 커지며, 자신이 표출하는 것이나 패괴 성품에 대해서도 얼마간 인식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하는지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경험과 참된 깨달음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점차 수준이 높아질 것이다. 한 사람에게서 이런 모습이 보인다면,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열정만 좀 있을 뿐,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좋은 사람이 되고 바른길을 걷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설교를 들으면서 다양한 일을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게 되고, 사람은 패괴 성품이 있으니 마땅히 해결하기 위해 진리를 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점차 깨닫게 된다. 이런 것들이 조금씩 누적되면 점차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오르게 된다. 진리 실제 측면의 이런 인식과 경험들은 표면적인 의미, 혹은 글귀와 도리에 머무르지 않고 조금씩 높아진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는데도 여전히 늘 글귀와 도리를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믿는 일에 관한 관용어를 늘 말해 마치 믿음이 깊은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 체험과 자신에 대한 인식을 말하지 못한다면, 또한 불신파와 악인을 분별할 줄 모르는 등의 문제를 보인다면, 이는 그에게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동안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매우 명확한 표지이다.

리더 일꾼이 진리 실제를 지니고 있는지를 가늠하려면 우선 그의 설교에 참된 간증과 새로운 빛 비춤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어떤 사람을 몇 년 만에 만나서 그의 교제를 들으면, 처음에는 신선하게 느껴진다. 이는 그가 설교를 들은 지 얼마 안 돼 새로운 빛 비춤을 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3일 같이 지내면 과거 작은 체험과 간증, 하나님이 어떻게 그를 구했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그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풀었는지 등의 소소한 이야기를 다시 하기 시작하는데, 일주일도 안 되어 전에 자신이 말한 그 얕은 체험과 인식을 또다시 이야기한다. 이것이 성장한 것이겠느냐? 성장하지 않았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글귀와 도리를 적잖이 갖추었고 올바른 말도 좀 할 수 있지만, 일이 닥치면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처리하지 못한다. 진리 원칙을 찾지도, 사람을 분별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성장한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본분을 이행했는데도 하나님에게 충성심이 있는지 물어보면 그 자신조차도 잘 모른다. 어쨌든 예배 때마다 시간 맞춰 참석하고, 본분도 모두 정상적으로 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참된 변화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그 자신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이러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진리를 깨달았다면 이 문제들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본분 이행에서 얼마간 성과를 냈는데도 왜 본분을 이행하느냐고 물으면, 피조물이라면 당연히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고만 말할 뿐 세부적인 내용은 분명히 말하지 못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 실행 원칙이 있는지 물어도, 그는 이 또한 판단하지 못한다. 말해 보아라. 그의 본분 이행이 합격할 수 있겠느냐? (합격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 성장하지 못했다면 큰일 아니겠느냐? 그에게 본분을 이행하다가 책망과 훈계가 닥치면 어떻게 대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며, 반항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몇 년 전에도 그 원칙을 지니고 있었고, 지금도 그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어쨌든 하라는 대로만 하는 것이다. 네가 그에게 책망과 훈계를 통해 인식을 좀 얻었느냐고, 자신의 패역한 내적 상태와 패괴 본성을 발견했느냐고, 자신을 좀 더 깊이 인식하게 되었느냐고 물어도, 그는 이런 것들을 전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어쨌든 그는 책망과 훈계가 닥치면 순종하고, 마음가짐을 바로 하며, 반항하거나 변명하지 말고, 인내하고, 참고 견뎌야 한다는 이 한 가지만을 고수할 뿐이다. 예전에도 이런 관점이었고, 지금은 더욱 그러하다. 이것이 진리를 얻은 모습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어떤 진리도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고, 어떤 진리에 대해서도 원칙을 파악하지 못했다. 설령 “일이 닥치면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원칙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 범위를 벗어나면 안 돼요.”라고 알려 준다 해도 일이 닥쳤을 때 여전히 진리 원칙을 구할 줄 모르고, 참답게 대하지도 않은 채 얼렁뚱땅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이다. 큰 방향은 지키고, 순종하고 말을 따르며, 자기가 이행하고 있는 본연의 사역을 무성의하게 대충 하지 않고 제대로 하며, 교회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것 같지만, 각 진리의 세부 사항을 이해했겠느냐? 그것을 실행해 낼 수 있겠느냐? 이는 각 진리에 대한 참된 인식과 체험이 있는지에 달려 있다. 각 진리가 서로 어떤 관계인지 알지 못하고, 일이 닥쳤을 때 구체적으로 어느 측면의 진리나 내적 상태와 관련이 있는지, 어느 측면의 성품이 그런 내적 상태를 초래한 것인지 역시 알지 못한다. 또 두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그들의 본성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진리를 깨달은 것이겠느냐? 이는 다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3~5년 동안 하나님을 믿고도 이런 진리의 실제적인 면을 전혀 알지 못하고, 8~10년 믿고도 마찬가지라면, 이는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이다. 지금 너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냐? 사람은 대부분 진영을 지키듯이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믿는 일’이라는 말을 끝까지 지키기만 하면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진리를 구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굳게 서지도, 원수 사탄을 물리치지도 못하고, 진리와 생명을 얻지도 못한다. 이 얼마나 큰 실수냐! 하나님을 여러 해 믿었는데도 생명 체험이 없으면 이렇게 가련하다. 사람은 이런 내적 상태에 빠지면 매일 표면적으로는 일로 바삐 보내고, 몇 가지 규례를 지키고, 그 범위 내에서 행정을 어기지 않고, 자기 일을 마무리할 뿐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적절하다고도 할 수 있으며, 진리로 가늠해 보아도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믿는 것이 어떠하냐? (하나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리이다. 너 자신의 입장에서 봐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항상 성장할 수 없기에 진리를 얻지 못한다. 하나님 집에서 한동안 하나님을 알아 가는 측면의 진리를 이야기하면 너는 하나님 알기를 중시하고, 성품 변화를 이야기하면 성품 변화를 중시한다. 성육신에 대한 인식을 이야기하면 성육신에 대한 인식을 중시하고, 사역의 이상(異象)을 이야기하면 또 이상 측면의 진리를 중시하며, 복음 전파 측면의 진리를 이야기하면 이 측면의 진리를 중시한다. 이야기해 주는 것은 따라 듣고 이해하는데 언젠가 아무도 너에게 공급해 주는 설교를 하지 않을 때 너 자신에게 길이 있겠느냐? 네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느냐? 어떻게 가야겠느냐? 예배 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 교제했다고 해 보자. 네가 “저는 깊은 체험은 없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이 네가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실행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는 겁니다.”라고 하면, 또 일이 닥쳤는데 순종할 수 없을 때나 개인의 이익과 관련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세부 사항을 더 교제해 달라고 할 것이다. 이때 네가 “그건 아직 체험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한다면, 이는 아직 진입하지 못한 것이다. 얼마 후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측면의 진리에 대해 교제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성장했는지 물으면, 너는 “성장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늘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게 될 것이고, 항상 그렇게 한다면 사람은 흑암에 빠져 피상적인 말밖에 할 줄 모르고,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할 거예요. 마치 이방인처럼 늘 진리에 어긋나는 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게 되겠죠.”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상대는 또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나요?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주재, 하나님의 인도를 체험하는 매일의 삶 속에서, 어떤 것들이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인지 인식합니까? 하나님의 주재를 분명히 느낄 수 있나요? 당신은 하나님의 주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죠? 실생활 속 당신이 느낀 것 중에 하나님의 주재에서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보았나요?”라고 물을 것이다. 이때 네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면, 이는 체험이 없다는 증거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인도라고 느낀 일이 하나 있었어요.”라고 한다면, 이는 약간의 느낌이 있는 것일 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실생활 속의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하고, 정한 것이다. 체험이 많아지면 어떤 일이든 간단하지 않음을, 전부 사람이 공과를 배우고 하나님의 주재와 전능을 깨달아 결국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성과에 이르러야 너는 어떻게 순종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를 알 수 있게 되고, 너의 실행은 온전한 길을 찾게 된다. 이 정도까지 체험하면, 믿음만 커지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인식이 생겨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래야 진리를 얻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할 때 늘 치우친 데가 있다. 항상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영적 도리와 공허한 이론을 늘어놓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다. 이런 식의 추구가 어떠하냐? 너희가 스스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든 안 하든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실제적인 것, 바꿔 말해 실제적인 인식을 얻었는가 하는 점이다. 너희는 얻었느냐? (약간 얻었습니다.) 무엇을 얻었느냐? 판단할 수 있느냐? (사람이 어떻게 사탄에게 패괴되었는지, 그리고 이 사악한 세상에 대해 약간의 인식과 깨달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약간의 인식이다. 그렇다면 그런 인식이 실생활 속에서 네 삶의 방향과 인생 목표, 처신의 원칙을 바꿀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사람들 속에서 살든 네가 얻은 그 인식이나 네가 깨달은 진리가 너의 삶과 인생 목표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느냐? 너를 완벽하게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약간의 변화는 보여야 하며, 말과 행동에 최소한의 제약은 있어야 한다. 지금 너희 대부분의 분량은 바로 이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성장이 필요하다. 진리를 너무 얕게 깨달아서는 안 되며, 단지 도리만 좀 말할 줄 알고 약간의 제약만 받아서도 안 된다. 반드시 진리를 깨달아야 실행의 길이 생기고, 너의 인생 목표를 바꿀 수 있다. 만약 네가 깨달은 진리와 네가 들은 설교를 마음속에 이미 받아들여 너의 삶에 영향을 주고, 너의 처신 방향이나 목표, 처신 원칙을 바꿀 수 있다면 약간의 제약만 받는 것보다 더 성과가 좋지 않겠느냐? 지금 너희는 그저 제약을 받고 규례를 지키는 선에 머물러 있는데, 이것이 긍정적인 측면에서 실행하고 진입하는 길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만약 계속 제약을 받거나 규례를 지키는 선에 머물러 있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참된 변화가 생길 수 있겠느냐? 또한 제약을 받고 규례를 지킬 때 진리 실행의 성과를 낼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러니 진리를 깨닫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제약을 받고 규례를 지키는 것이 진리를 깨달았다는 의미는 아니며, 진리를 실행한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평생 제약을 받고 규례를 지킨다 해도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성과를 낼 수는 없다. 이는 헛수고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고통을 겪으며 제약을 받고 규례를 지켜도 이는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다.

설교를 듣고 진리를 깨달은 후, 참된 변화가 좀 생겼느냐? 예를 들어, 예전에는 그럴듯한 지식과 이론, 그리고 명리와 지위를 추구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닌 종교 신앙이었으며,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는 것은 사악하고, 그렇게 살고 처신하면 완전히 마귀로 변해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그렇게 사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 말이다. 너희는 이런 느낌과 인식을 얻었느냐? 네가 절실히 느낀 것은 무엇이냐? 지식, 명리, 지위를 추구하는 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다! 이방인들 사이에서 살아가면 시시비비가 너무 많고, 골치 아프고, 사는 게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저는 그렇게 살 수 없어요. 그들처럼 그렇게 살아가면 저도 그들처럼 고통스러워지겠죠. 그들의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야 해요.”라고 할 것이다. 이는 네가 절실히 느낀 것 아니겠느냐? 너는 패괴된 인간은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며, 다들 암투를 벌이고, 서로 속고 속이고, 궁지에 빠뜨리고, 작은 이익을 위해 피 터지게 싸우고, 아무도 인생의 바른길을 걸을 생각을 하지 않고, 수법과 음모를 써서 일을 처리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그런 환경에서 살면서 네가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무엇이냐? 이 세상에 공평과 공의란 없으며, 세상은 너무 사악하고 어둡다고, 모두가 마귀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네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도 쉽지 않고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런 세상에 적응하려면 너도 반드시 마귀가 되어 마귀처럼 살아야 그 무리에 섞이고, 사회의 흐름에 융합할 수 있다. 생계를 위해서, 자신의 밥그릇과 생존을 위해서 그들과 싸우고 마음에도 없는 말과 일을 해야 한다. 매일매일의 삶이 무척이나 피곤하지만 그렇게 살지 않으면 남들에게 배척되어 살길이 없어진다. 그런 생존 환경 속에서 너는 무엇을 느꼈느냐? 고통, 마음 졸임, 무력감, 인간 세상의 사악함과 잔혹함, 그리고 어둠을 느꼈고, 인생의 빛을 볼 수 없었다. 그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 읽기에 집중할 때는 무엇을 느꼈느냐? (마음속으로 진리를 깨달아 역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다고 느끼며 위안을 얻었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살아가며 행복을 느낀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많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형제자매와 함께 서로 돕고 붙들어 줄 수 있고, 또 평등하게 대하고 화목하게 함께 지낼 수 있어 매일 마음이 편하고 자유로우며 해방감을 느낀다. 또한, 속임수에 넘어갈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이나 학대를 받지도 않으며, 악을 행하는 사람은 점차 드러나고 도태되어 갈수록 줄어든다. 하나님 집에서는 진리가 권세 잡고, 하나님이 권세를 잡는다. 하나님의 선민들은 누구나 제약 없이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고, 선거권을 가지며, 악인을 고발할 권리가 있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전부 점차 제명된다. 하나님 집에는 사람을 괴롭히거나 억압하는 현상이 없다. 무슨 일이 있으면 모두 함께 상의하고, 문제가 있으면 리더 일꾼이 진리를 교제해 해결한다. 모두가 조금씩 진리를 깨닫게 되고 불법적인 일들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또 하나님의 선민이 모두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제약받으며 언행이 조금씩 변화하게 된다. 누군가가 악을 행하면 다들 분명히 파악하고 고발하니 악인이 점차 줄어들게 된다. 지금은 점점 더 하나님 집의 이런 환경이 정말 좋다고 느낄 것이다.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하고, 어려움이 있거나 치우친 부분이 있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어려움이 있어도 해결되니 말이다. 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여 하나님 말씀에 따라 해결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나님 집에서 살면 행복과 희망을 느낀다. 빛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이런 환경은 사람의 생명 성장에 매우 도움이 된다. 진리가 있는 교회라는 환경에 살면 점차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마음이 점점 밝아지고 자유를 느끼고 해방감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진리를 깨달아 얻게 되는 성과이다. 사람이 진리를 얻으면 명확히 드러나는 특징이 있는데, 다들 비교적 자유롭고 해방되는 것이다. 제약받을 필요 없이, 진리가 너의 마음속에서 네 말과 행동에 영향을 주어 네 삶의 방식과 인생 방향을 바꿀 것이다. 네 내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 네가 행하는 일이 예전에 자제하고 제약받으면서 한 일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너에게 지위를 주어 남을 괴롭히고 손봐 줄 기회와 환경이 있게 된다면 그때도 똑같이 그렇게 하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러지 않겠느냐? 남을 괴롭힐 생각이 없는 것이냐, 아니면 남을 괴롭힐 능력이 없는 것이냐? (성품이 변화되었기에 그러지 않는 것입니다.) 맞다. 네 내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겨 일 처리의 원칙과 마지노선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때는 어떤 시험에 직면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아. 하나님께 죄짓는 일을 해서는 안 돼.’라고 말할 수 있다. 네 분량이 자연스럽게 이 수준에 이르렀고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너희는 지금 자연스럽게 이 정도 수준까지 이를 수 있느냐? (아직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진리가 네 내면에서 아직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너의 행위를 제약할 뿐 너의 마음은 제약하지 못하고, 또 너의 인생 방향, 처신의 원칙, 처신의 목표를 바꾸지는 못한 것이다.

이제 너희는 모두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 추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너희는 무엇에 근거하여 처신하느냐? 양심, 처신의 마지노선, 도덕에 근거한다. 이런 것들은 진리와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 양심, 처신의 마지노선, 도덕이 진리와 관계가 있느냐? 진리와 관계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양심에 따라 처신하면 기껏 해 봤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뿐, 하나님의 요구에는 한참 못 미친다. 하나님은 사람이 진리에 따라 처신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진리에 닿고, 진리를 깨닫고 실행할 수 있으며, 진리 원칙에 따라 자신을 단속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른으로 성장한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의지를 다지며 이렇게 말한다. “최선을 다해 진리를 향해 노력할 겁니다.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이 감시하고 단속하고 감독하지 않아도 여전히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따라 실행하고, 공적인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며, 일 처리에 원칙과 선을 두고, 하나님 성품을 거스르는 일, 하나님께 죄짓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감독하는 사람이 없어도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께 죄짓게 되는 것이라면,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설령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지라도 저는 스스로 제약할 것이고 행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내적 상태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 귀중품을 보관하게 했는데, 그 일을 아는 사람이 몇 명 안 된다고 해 보자. 내막을 아는 사람이 있는 상황일 때 너는 그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파손하지 않도록, 또는 도난당하거나 망가뜨리지 않도록 잘 보관하면서 마음속으로 늘 이 일을 생각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욕심이나 점유욕을 갖지 않을 것이다. 너는 마음속으로 그 물건을 완전히 거룩하게 구별하였으니 좋은 사람 아니겠느냐? 지금까지만 보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은 탐내어 점유하려는 마음과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직책에 충성을 다하며 마음과 책임을 다해 그 물건을 보관하니 마음을 다하고 직책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날 변화가 생긴다. 내막을 아는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외지로 발령이 났다. 그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너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환경이 변한 것 아니겠느냐? 환경이 변했고 검증의 시간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너도 마음의 변화 없이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그 물건을 보관하고,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난 후, 내막을 아는 사람들의 행적이 묘연해졌다는 말을 듣고도 여전히 ‘이 물건을 탐해서는 안 돼. 잘 보관하고 있어야 한다고.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니까!’라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냐, 아니냐? (지금까지는 좋은 사람입니다.) 어째서 그런 것이냐? ‘좋은 사람’의 기준으로 가늠하면, 이 정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네 집에 큰일이 생겨 급하게 돈이 필요한데, 수중에 돈이 부족하다면 환경은 또 변한 것이다. 그리고 환경이 변했으니 검증의 시간이 또 다가온 것이다. 처음에는 너도 돈을 빌릴 궁리를 하겠지만 여러 번 시도했는데도 빌리지 못하면 마음이 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보물을 보관하고 있잖아? 돈을 지키고 있으면서 돈을 빌리려 다니다니 멍청이 아냐? 내가 그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 걸 아는 사람도 없잖아. 게다가 여기에 그냥 놔두기보다는 내가 쓰는 게 더 좋지 않겠어? 안 쓰면 바보지!’ 또 ‘이건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것 아니겠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총이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며 더 좋고 그럴싸한 생각을 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느껴지고, 이삼일 고민해 봐도 마음이 평온하고 양심의 가책이 들지 않게 되자 결국 ‘이 돈을 쓰자!’라고 결정하게 된다. 어떠하냐?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생각이 변했겠느냐? (환경 때문입니다.) 그럼 환경에 문제가 생긴 것이겠느냐? 환경으로 그가 바뀌어진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정확하겠느냐? 예전에 환경이 두 번 바뀌었을 때는 왜 마음이 동하지 않았겠느냐? (찢어지게 가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지경이 되지 않으면 사람 내면의 진실한 생각과 성품이 드러나지 않는다. 전에 그는 하나님에게 충심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느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느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다른 생각도 품지 않았고, 생각이 갈팡질팡하지도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 제물을 보관했기 때문이다. 한 번도 그 물건을 노린 적 없었다. 얼마나 좋은 사람이냐! 하지만 생활 환경이 변해 막다른 궁지에 처하자 생각이 많아지고 제물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사실, 예전에 그에게 이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마음속에 감춰져 있었을 뿐이다. 적당한 환경이 닥치자 그런 생각이 샘물처럼 자연스럽게 솟아 나왔고 결국에는 하나님이 예비한 거라는 ‘근거’까지도 찾아내게 된 것이다. ‘근거’를 찾아냈을 때, 그의 사악한 본성이 드러난 것 아니겠느냐? 충성심, 선량함, 정의감은 다 어디로 갔겠느냐?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기존에 보여 준 그의 모습은 꾸며 낸 것이었겠느냐? 그것 또한 꾸며 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표출이었다. 다만 깊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얕은 표면적인 현상이었을 뿐이다. 인성의 표면적 현상에는 얼마간 거짓 이미지가 있는데, 때로 사람들은 이를 꿰뚫어 보지 못해 쉽게 미혹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반년이나 1년 동안은 꽤 좋은 모습을 보이지만, 1년이 지나면 소극적으로 변하며, 2년이 지나면 도망쳐 세상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돈을 벌러 가는 사람도 있고, 세속적인 삶을 살러 가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반년이나 1년 이내의 모습만 보고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반년 또는 1년 동안의 모습은 사실 거짓 이미지이자 일시적인 열정에 불과하다. 환경과 시험이 임하면 본모습과 하나님을 믿는 속셈, 불순물이 드러난다. 이것이 사실 아니겠느냐? 이것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대체 사람의 무엇을 변화시키려고 하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사람의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의 본성 속에 있는 것들을 해결하려고 하십니다.) 그렇다. 사람 본성 속에 있는 것들을 해결하려고 한다. 일이 닥치지 않았을 때, 사람은 모두 가장 기본적인 도덕적 마지노선을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 특히 노인들은 늘 “다른 사람의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자신의 것을 버리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이는 자신의 물건을 함부로 남에게 주지 않고, 남의 물건도 탐하거나 탐욕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춰져야 할 것일 뿐, 진리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것을 해낼 수 있겠느냐? (해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것도 해내지 못하면서 탐욕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탐욕이 생기기도 전에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로채 버린다. 이는 본성에 지배된 결과다. 환경이 허락하기만 하면 생각을 거칠 필요도 없이 사람 내면의 사악한 본성, 흉악함, 탐욕, 그리고 간사한 성품이 표출된다. 방금 말한 예에서, 제물을 점유한 그 사람의 어떤 생각과 모습이 간사함이냐? (그는 하나님의 제물을 점유하고도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것이며 탈출구를 마련해 주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간사함이고, 자신과 남을 속이는 짓이다. 자신을 기만했고 하나님도 기만하려 한 것이다. 이런 듣기 좋은 말로 자신을 속이고 양심에 참소를 받지 않도록 위안을 얻는다. 그 밖에 그럴싸한 거짓말을 꾸며 내고, 그 거짓말로 하나님을 속이고 기만하려 했다. 이것이 간사함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간사함이다. 그런 환경에 직면해 네 본성 속에서 뭔가 일을 저지르려는 생각이 들 때, 우선 양심이 네 내면에서 작용하며, 그다음에는 네가 깨달은 진리도 작용해서 너의 그런 생각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은 비열하고 사악하다는 것을, 네가 생각하고 여기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너는 일시적인 충동으로 그런 일을 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는 ‘그렇게 하면 안 돼, 그건 하나님께 죄짓는 거야. 사악한 짓이라고! 그렇게 하는 건 진리에 부합하지 않아. 그건 하나님을 기만하는 짓 아니겠어? 어떤 순간이 와도 그렇게 해서는 안 돼. 그건 거룩하게 구별된 것이고, 하나님께 속하는 거야.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고. 비록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그 물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시니 절대 건드리면 안 돼.’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실제 분량이 있다는 의미이다. 만약 사람의 선의와 도덕적 마지노선에 의지한다면 자신을 단속할 수 있겠느냐? 제물을 훔쳐 먹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느냐?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무엇을 갖춰야 이것을 해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춰야 합니다.) 오직 네가 깨달은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만이 너의 마음과 행동 방식을 단속할 수 있고, 네가 어떤 길을 선택하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도 결정할 수 있다.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사람이 이런 성과를 내도록 도울 수 있는 다른 것이 또 있겠느냐? 없다. 이것은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어떤 환경에 직면하든, 그것이 시련이든 시험이든 하나님에 대한 너의 충심과 순종을 변하게 할 수는 없다. 네가 다짐하면 영원히 변하지 않을 수 있다. 아무리 큰 환경에 직면하더라도, 그 일이 설령 너에게 아무리 큰 시험이라 할지라도 너의 의지와 일 처리 원칙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굳게 서서 증거한 것이고, 진리를 얻은 것이다. 하나님은 다시는 그 일로 너에게 시련을 주지 않을 것인데, 너는 이긴 것이고 굳게 선 것이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분량에 이를 수 있겠느냐? (이를 수 없습니다.) 아직 이르지 못했다. 이는 진리가 아직 사람의 생명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지금 사람의 생명이 된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탄의 처세 철학과 독소, 그리고 도덕과 처신의 마지노선을 지키는 사람의 본능, 하나님을 믿고 나서 파악한 일부 영적인 도리와 말이다. 사람은 이런 것들을 파악하고는 늘 ‘진리를 얻었어. 하나님을 믿고 깨달은 게 많아. 난 변화했고 수확을 거뒀어.’라고 생각하는데, 이 수확이란 무엇이냐? 사실 표면적인 것으로, 그저 행위가 좀 제약받고 비교적 규범화된 것뿐이다. 또한 사상적, 심리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민할 수 있고, 긍정적인 것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이다. 항상 설교를 듣고, 본분을 이행하며, 긍정적인 사물을 점점 더 많이 접하게 되는 환경적 영향으로 인해 긍정적인 영향을 좀 받을 수 있는데, 이는 교회 환경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이점이자 변화이다. 그런데 진리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변화는 얼마나 크고 많겠느냐? 이는 사람의 추구에 달려 있다. 만약 네가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진리 실제 측면에서 반드시 수확이 있을 것인데, 단계마다 약간의 수확과 인식이 있을 것이다. 다들 마음속으로 자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짐작하고 느끼고 있다. 지금 많은 사람이 느낀 것은 무엇이냐? 바로 늘 사람의 선의에 따라 열심히 의도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사람이 보기에 양심과 이성이 있는 일, 남에게 참소나 질책을 받지 않는 일들을 하지만 그것들이 설령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진리 실행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대부분 양심에 따라 일 처리를 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지니고 있다. 진리는 지나치게 심오하고 추상적이어서 사람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진리를 잘 알지 못하고 분명히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양심에 따라 행동하며 하루하루 그럭저럭 지낸다. 양심과 지각조차 없어 양심의 기준에 따라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본분 이행에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밥만 축내고 공짜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마음의 가책도 받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겠느냐? 만약 네가 그에게 “당신처럼 살면 어떤 느낌이에요?”라고 물으면, 그는 “하나님의 뜻은 지극히 높아서 닿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저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악을 행하지도 않았으니 마음이 평온합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겠느냐? 그가 본분을 이행하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의 눈에는 그도 본분을 이행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성과가 전혀 없는데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어쩌면 그는 “저는 양심에 따라 본분을 이행합니다. 놀지도 않고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아요. 게다가 대가도 많이 치른다니까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심의 기준이라는 것이 진리 실행을 의미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한가할 때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함께 교제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 실행인지 살펴봐야 한다. 늘 양심의 기준,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좋은 행위를 갖추는 기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무골호인이 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진리의 차원으로 추구하고 진입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으며,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네가 늘 양심을 충족시키고 도덕적 마지노선을 넘지 않는 것만을 추구한다면, 이 범주 내에서만 일을 하게 되고, 이 범주를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인데, 이는 진리가 너와 늘 무관하다는 의미이다. 너의 행동과 말이 늘 진리와 무관하다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얻기가 무척 힘들다.

고대에 공부하던 사람들은 모두 ≪논어≫나 ≪도덕경≫, ≪삼자경≫과 같은 책을 읽었다. 마치 경문을 읊는 것처럼 온종일 머리를 흔들며 입으로는 ‘옛말에 이르길’과 같은 말들을 달고 다녔는데, 책 몇 권을 읽고 당시(唐詩)나 송사(宋詞)를 몇 수 외우면 지식이 있다고 생각해서 항상 남을 가르치며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평생 정의로운 일 같은 건 한 번도 할 수 없었고 오직 자기가 읽은 그 성현들의 책 몇 권에 따라 처신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어떤 일도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대충 되는대로 살면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혼자 마음속으로 흡족해하면서 자기가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남들은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스스로 고결하다고 여긴다는 말이 딱이다. 너희는 절대 이런 내적 상태로 살아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늘 자기가 지식과 인의(仁義)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 고결하다고 여기고, 자신은 가슴에 손을 얹고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좋은 사람, 군자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의리를 무척 중요시해서 벗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양심을 무척 중요하게 여겨서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라는 말을 실행한다. 이 밖에도 어떤 사람은 혼인을 하지 않고 수양을 하면서 불로장생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일념으로 성현들 책만 읽으며 바깥세상의 일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런 소위 ‘좋은 사람’들이 진정 좋은 사람이겠느냐? 그들은 지식으로 살아가며, 말하고 행동할 때 양심을 좀 중요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진리 실제를 갖췄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정말 악을 행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 호의를 갖고 늘 선의를 베풀며 남을 도우는데 그것을 이유로 자기가 대단한 선인(善人)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전통문화에 관련된 말로 사람이 선인지 악인지 판단하는 것이 정확하겠느냐? 언제나 도덕적인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자신을 치켜세우는 것은 스스로 고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고결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진리가 있겠느냐?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분명 그럴 수 없다. 만약 그들이 권력을 쥐고 지위를 얻는다면, 하나님에게 맞서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잔혹하게 박해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이는 그들의 본성 안에 악독함이 있으며, 그들의 본성이 사탄 본성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언제나 지식과 전통문화로 살아가는 자는 외식하는 사람이요,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도 이러한 전통문화나 지식을 분별하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의 본질이 전부 사탄의 철학과 논리, 법칙이며 사람을 해하는 지식과 문화임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이런 사람에게 진리 실제가 있겠느냐? 전통문화와 지식을 꿰뚫어 보지도, 분별하지도 못하는 사람은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진리 실제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혹자는 어떤 지식은 남을 좋은 사람이 되게 도울 수도 있고, 남이 선행을 하도록 가르치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는 틀려도 단단히 틀린 것이다. 지식은 생명이 아니라 하나의 규례이며, 진리와 적대되는 궤변이다. 사람의 지식이 얼마나 높고 깊든, 인간의 패괴된 본질과 자신의 본성, 패괴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조차 꿰뚫어 보지 못하는데, 그런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는 가장 얄팍한 도리이자 무엇보다 사람을 미혹하는 도리 아니겠느냐? 유가 학설이나 ≪도덕경≫과 같은 소위 중국의 고전적인 성현의 책에 나오는 말들이 언뜻 보기에는 전부 맞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전부 사람을 미혹하는 마귀적인 말이자 외식하는 사설, 궤변이며, 사탄의 독소이자 논리이다. 이러한 것들을 진리라고 받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겠느냐? 너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믿으며, 매일 설교를 듣고 하나님 말씀을 읽는데 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냐? 왜 진리를 추구 목표로 삼지 못하는 것이냐? 이런 자는 바로 가장 어리석은 사람, 지극히 우매한 사람이자 사람의 탈을 쓴 짐승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에 속하다.

진리란 무엇이냐? 먼저, 처세 철학은 진리가 아님을 확실히 해야 한다. 또 명인이나 위인의 좌우명은 진리가 아니고, 유가나 도가의 말들, 패괴된 인류에게 이어져 내려온 것들, 모두가 공인하는 좋은 행위나 행동 방식, 사람의 사상을 지도하는 것들, 이론 등은 전부 진리가 아니다. ‘기꺼이 남을 돕는 것’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기꺼이 남을 돕고 선행을 즐기는 것은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적어도 마음씨가 착하고 남을 가엾게 여길 줄 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진리에 부합하지 않겠느냐? (그들이 사람을 돕는 데는 원칙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칙 없이 사람을 돕는 자가 좋은 사람이겠느냐? 그런 자는 무골호인, 무골충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진리겠느냐? (아닙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옳고 긍정적인 사물이다. 그런데 왜 진리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사람은 원칙 없이 부모에게 효도하며, 부모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대하는 방법은 진리와 관계가 있다. 만약 부모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네게도 잘한다면 너는 효도하겠느냐? (효도할 것입니다.) 어떻게 효도하겠느냐? 형제자매와 다르게 대한다면, 부모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며, 부모가 나이가 들면 곁에서 돌봐 주면서 본분을 이행하러 가지 않는다면, 이러는 것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이럴 때는 상황을 보아야 한다. 만약 네가 집 근처에서 본분을 이행하여 부모를 돌볼 수 있고 부모도 네가 하나님 믿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자식의 책임을 다해 부모의 일손을 도와주면 된다. 부모가 병에 걸리면 돌봐 주고, 부모에게 힘든 일이 있다면 위로해 주어라. 또 경제적인 여건이 된다면 적당히 영양 보조 식품을 사 주어라. 하지만 네가 본분으로 바쁜데 부모를 돌봐 줄 사람이 없다면, 또 부모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럴 때는 어떻게 선택해야겠느냐? 네가 실행해야 할 진리는 무엇이겠느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사람의 책임이나 의무에 불과한 이상, 네 의무가 본분과 충돌할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본분을 위주로 하고, 본분을 일 순위에 놓아야 합니다.) 의무가 꼭 본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분 이행을 선택하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지만,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진리 실행이 아니다. 만약 조건이 된다면 그 책임과 의무를 이행해도 되겠지만, 당장 환경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저는 본분을 이행하러 가야 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겁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지만, 진리 실행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본분을 위주로 하고 본분을 지켜야 한다. 만약 지금 네가 본분이 없고 외지에서 사역을 하지도 않으며 부모 곁에 있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부모를 돌봐 주며 최선을 다해 부모가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고 덜 고생을 하게 해도 되지만, 그것도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를 봐야 한다. 만약 부모가 인성이 좋지 않고, 늘 네가 하나님 믿는 것을 가로막고, 네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네가 실행해야 하는 진리는 무엇이겠느냐? (그들을 저버려야 합니다.) 이럴 때는 저버려야 한다. 너는 의무를 다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네게는 그들에게 효도할 어떤 의무도 없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한 가족이고 너의 부모겠지만,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너희는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그들은 사탄을 신봉하고 마왕을 받들며 사탄의 길을 걷고 있으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는 다른 길을 걷는 것이고, 한 가족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적이나 원수로 여기니 네게는 그들을 돌봐 줄 의무가 없다. 그들을 철저히 저버려라.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본분 이행 중 어떤 것이 진리겠느냐? 당연히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진리이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단순히 의무를 다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부탁이 있는데 그것은 네 의무이자 책임이다. 그 책임은 진정한 책임으로, 창조주 앞에서 네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 대한 창조주의 요구이자 인생의 큰일이기도 하다. 반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그저 자식의 책임이자 의무일 뿐, 절대 하나님의 부탁이 아니고, 나아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본분 이행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일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오직 본분을 이행하는 것만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진리이고, 천직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사람에게 효도하는 것으로, 본분 이행에도, 진리 실행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렇게 교제하면 너희 스스로 구분이 되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진리가 아닌지 알게 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 중 또 어떤 것들이 진리로 여겨지더냐? (사회에서 자주 말하는 ‘긍정 에너지’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 또한 부정적인 사물로, 진리가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하는 말은 대부분이 마귀적인 말이다. ‘긍정 에너지’라는 단어는 어떤 배경에서 생긴 것이냐? 사회에 나타난 이런 말, 황당한 이야기, 혹은 유행어들은 모두 똑같은 배경을 지닌다. 너희는 이런 유행어들이 어떤 배경에서 생겼는지 알고 있느냐? 중국의 사회적 분위기는 갈수록 사악해지고 있고, 사람들은 모두 사악한 것을 숭배한다. 마귀가 어떻게 말하든, 어떻게 행동하든 다 따르고 있다. 도저히 보고 있지 못하여 비평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누구도 거기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중국에서 사악함은 이미 흐름이 되어 어떤 집단도 이 사악한 흐름을 막지 못한다. 모두가 나라의 사회적 기풍이 갈수록 못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악마가 완전히 권력을 잡고, 국가와 국민들을 완전히 통제하였다. 마귀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누구도 막을 방법이 없다. 정권을 쥔 자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해 그럴듯해 보이는 일로 사람을 미혹하고 기만하면서 그것이 긍정 에너지에 속한다고 말한다. ‘긍정 에너지’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이방인이 말하는 긍정 에너지는 무슨 뜻이더냐? 그들이 말하는 정직한 기상 혹은 좋은 행위를 뜻한다. 하지만 사실, 이 긍정 에너지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 사악한 흐름의 범람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사악한 흐름의 발전 추세를 제지할 수 있겠느냐? 제지하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도 바꿔 놓지 못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긍정 에너지’라는 단어는 듣기에 매우 강력한데 왜 어떤 일도 바꿔 놓지 못하고,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겠느냐? 그것은 아이들이 온종일 인터넷에 빠져 있는 상황조차 바꿔 놓거나 해결하지 못한다. 지난날, 사람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정과 의리, 양심과 이성을 중요시했으며, 이웃 간에 서로 오고 가는 정을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인심이 각박해져서 서로 모르는 사람 취급하며, 심지어는 이웃에 일이 생겨도 신경 쓰지 않고, 구조를 요청하는 모습을 봐도 더더욱 관여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사람에게 긍정 에너지가 없어서 이렇게 되었겠느냐? 그럼 예전의 그 사회에는 늘 긍정 에너지가 있었겠느냐? 그렇지 않다. 전부 똑같다. 긍정 에너지는 그저 듣기 좋은 말일 뿐, 어떤 실제적인 내용도 없는 공허한 이론으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말해 보아라. 옛날 사람들이 나쁘겠느냐, 요즘 사람들이 나쁘겠느냐? (요즘 사람들이 나쁩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냐? 너희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 요즘 사람들은 냉혹하고 가족 간에 정이 없으며, 진정한 친구도 없고, 의리나 양심을 중요시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항상 “양심이 돈이 돼?”, “양심이 뭐라고, 돈 많이 버는 게 최고지!”라는 말을 하며 양심을 잃었다. 물건을 팔 때 무게를 속이는 것도, 검은돈을 버는 것도 정상이다. 누구에게든 사기 칠 수 있고, 누구라도 해할 수 있다. 반면, 고대의 상인들은 장사에 원칙이 있었는데, 물건값을 바꾸지 않았고, 상도덕을 지켰으며, 사람을 기만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때 사람들이 요즘 사람들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 ‘낫다’는 말은 무엇에 초점을 맞춘 것이냐? 사실, 양심과 살아 내는 행위에 근거한 것이다. 이 기준에 근거해 판단한다면, 옛날 사람들은 요즘 사람들보다 낫다. 옛날 사람들은 훨씬 소박했으며, 양심과 염치가 있고 처신에 마지노선이 있었다. 최소한 양심에 지나치게 어긋나는 일, 남에게 비난받을 만한 일, 오명을 남기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염치가 없는 것이다. 오직 돈을 벌고 이름을 알리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요즘 사람들은 너무 못됐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 요즘 사람들이 너무 못된 것은 어디에서부터 발전해 온 것이겠느냐? 고대에서부터 한 세대 한 세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 아니겠느냐? 요즘 사람이라고 해서 고대 사람들과 다를 건 없다. DNA도, 외모나 생김새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생활 여건이 고대보다 좀 나아졌고, 좀 더 복잡한 것들을 배우며, 익힌 각 분야의 전공이 많아지고, 지식은 고대인보다 높고 능력도 고대인보다 훨씬 크고, 교만한 밑천이 생겼을 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현대인들이 옛날 사람들보다 못됐다고 말하는 게 과연 정확하겠느냐? 이 말이 정확한지, 진리에 부합하는지 어떻게 판단해야겠느냐? 우리는 이 일을 이렇게 논증한다. 역사 드라마를 보면, 다루는 내용이 조정이나 강호의 일이든, 아니면 백성들 가정의 일이든 전반적인 줄거리에 분쟁이 가득하다. 이것이 바로 인성의 진실한 일면이다. 인류는 권력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서로 죽어라 싸워 댄다. 사람의 본성이 남김없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조금도 부족함 없는 사탄의 몰골이다. 그럼 네가 본 그것들이 한 시대에서만 발생하는 일이겠느냐? 지구상의 어떤 지역이 풍토가 좋지 않고 더러운 귀신들이 군거하고 있어 사람들이 심각하게 싸우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그 몇몇 사람의 유전자가 나쁘고 본성이 호전적인 것이겠느냐? (전부 아닙니다.) 그럼 그 분쟁은 어떻게 생긴 것이겠느냐? 권력과 지위, 이익 때문에 생긴 것이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계층을 막론하고 끝없이 싸우고 다투는데,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싸우고 죽도록 다툰다. 이 현상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전 인류 역사 발전의 축소판을 통해 볼 때, 또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볼 때 인간의 본성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사람이 사탄의 권력 아래에서 살아가는 한 모든 시기, 모든 단계에서 벌어지는 삶의 내용은 동일하고, 그 본질 역시 모두 같다. 사람이 싸우는 목표와 원인, 근원이 전부 동일하기 때문이다. 모두 권력과 지위를 위한 것이고, 결국 다 이익을 위한 것이다. 싸우는 수법의 기원 또한 동일한데, 전부 사탄의 본성과 성품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이 싸우는 수법과 방식이 왜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겠느냐? 그것은 100% 사람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은 머리를 쥐어짜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고 해치고 서로 망치고 속이고 기만하는 등 함정과 사기의 수법을 전부 동원한다. 큰 정치적 분쟁이든, 평범한 집안싸움이든 전부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이 바로 인성의 진면목이자 인간의 본모습이다. 인류는 오늘날까지 발전해 왔지만 여전히 똑같은 인류이고, 인류를 패괴시킨 것 역시 똑같은 사탄이다. 비록 외부 환경은 조금씩 변했지만, 환경의 변화가 사람의 본성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방식과 수법은 어느 정도 달라졌지만, 싸우는 본성이나 출발점은 전혀 변함이 없다. 본성도 근원도 싸우는 목적도 동일하다. 전혀 바뀐 것이 없는 것이다. 너희는 옛날 사람들이 낫다고 했는데, 어떤 점이 낫겠느냐? 그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전통문화에 제약받아 좋은 일을 조금은 했다. 인류는 오늘날까지 발전했지만, 현재 삶의 질이 얼마나 좋든, 사람이 지닌 지식과 문화 수준이 얼마나 되든, 식견이 얼마나 넓든 사람의 본성은 줄곧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은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점점 더 사악하고 노골적으로, 거리낌 없이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고 얼마나 많은 진리를 선포하든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사람은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을뿐더러 더더욱 싫어하고 증오하게 되었다. 지금 이 사회에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느냐? (있지만 줄어들었습니다.) 그럼 그 사람이 착하다고, 여전히 나쁘게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진공 속에서 살아가겠느냐? 그가 한 그 정도의 좋은 일이 뭐가 어떻단 말이냐? 그것은 그저 좋은 행위, 좋은 마음에 불과하다.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일, 하나님을 믿어 좋은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대해 말하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아라. 하나님을 믿는 일로 정부에 박해받는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너를 원수로 여기고 비웃을 것이다. 만약 네가 체포되고 박해받을 위기에 처해 그의 집에 좀 숨어 있기라도 하면 그는 경찰에 신고해 너를 정부에 넘길 것이다. 그는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을 병원에 데려가 구해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좋은 사람을 악마의 손아귀에 넘겨 짓밟히게 하고 심지어는 박해로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어떤 모습이 그의 본성을 대표하겠느냐? 후자가 바로 그의 본성이다. 사람을 구한 자도, 사람을 죽음에 밀어 넣은 자도 그 사람이다. 이런 자는 과연 사람이겠느냐, 아니면 마귀겠느냐? 사탄 본성을 벗어 버리지 못하는 한, 사람은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한,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이 맞지 않느냐? (맞습니다.) 어떤 점이 맞느냐? (그가 실행한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외적인 행동과 행위가 아무리 좋아도 본성은 하나님과 적대적입니다.) 그의 본성이 하나님과 적대적이라는 말은 맞다. 그럼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어째서 하나님과 적대적인 자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하나님은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적대적이라는 것은 그의 내면에 있는 그런 것들이 전부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그 말이 맞다. 사람이 겉으로 아무리 훌륭하고 경건해도, 아무리 기꺼이 남을 돕고 남에게 선의를 베풀어도 긍정적인 사물에 대해 들으면 반감을 갖고 좋아하지 않으며, 진리를 들으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싫어한다면,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런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를 적대시하는 사람은 모두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일괄적으로 말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세부 내용이 있다.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면 왜 이 말이 진리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 가정을 버린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로 인해 이름이 알려지자 정부에서는 수시로 그의 집을 찾아가 수색하며 그의 부모를 괴롭히고, 그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이에 이웃사람들은 “양심도 없지. 부모를 봉양하지도 않고 말이야. 효도는 고사하고 부모에게 이렇게 많은 폐를 끼치다니 불효자야!”라고 비난했다. 이 비난에 진리에 부합하는 말이 한마디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말이 이방인의 눈에는 옳은 것으로 보이지 않겠느냐?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런 관점은 가장 정당하고 합리적이며, 윤리에 부합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처신의 기준에도 부합한다. 그 기준 안에 얼마나 많은 내용이 들어 있든, 예컨대 부모를 어떻게 공경해야 할지, 부모를 어떻게 죽을 때까지 책임져야 할지, 부모에게 얼마나 보답해야 할지 등의 기준이 진리에 부합하든 부합하지 않든, 그 기준은 이방인의 눈에 긍정적인 사물이자 긍정적 에너지, 옳은 것으로 보이며, 어떤 집단에서도 질책받지 않는다. 이방인들 사이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기준은 바로 이런 것인데, 네가 이런 것들을 해내야 남들 눈에 합당한 자격을 갖춘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깨닫기 전까지, 너 또한 이렇게 처신하는 자가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게다가 너는 이러한 것들로 자신을 평가하고 제약하며, 스스로에게 이런 사람이 되라고 요구했다. 만약 네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네 처신의 기준 안에는 분명 이 한 가지가 들어 있을 것이다. 부모에게 어떻게 효도할 것인지, 어떻게 부모의 걱정을 덜어 줄 것인지, 어떻게 부모를 자랑스럽게 하고 체면을 살려 주고 조상을 빛낼 것인지 등은 네 마음속에서 처신의 기준이자 방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를 듣고 난 후, 네 관점은 바뀌기 시작했다. 너는 모든 것을 버리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사람이 그렇게 처신하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진리임을 아직 확신하지 못했을 때, 너는 마땅히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모순적인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의 끊임없는 양육과 목양을 통해 조금씩 진리를 깨닫게 되면서 너는 비로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이치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람의 전통 관념과 상상 속 처신의 기준을 철저히 저버렸다. 이러한 것들을 완전히 내려놓으면,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할 때 이방인의 판단과 정죄의 말에 통제되지 않고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 네 마음속 낡은 전통 관념들은 어떻게 사라졌겠느냐? 설마 네가 나쁘게 변한 것이겠느냐? 네 마음이 강퍅해지고 양심이 없어진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사실 네 양심은 변하지 않았고, 너는 여전히 똑같은 사람이다. 네 성격과 기호, 양심적 기준과 도덕적 기준 모두 변하지 않았다. 그럼 왜 이방인들에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말을 들어도 괴롭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평안하고 기쁜 것이겠느냐? 이는 크나큰 변화이다. 어째서 이렇게 바뀔 수 있었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일부 진리를 깨달았고, 올바른 평가 기준을 갖게 되었으며, 그들이 하는 말이 전부 궤변임을 분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저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로 가정을 돌보지 않습니다. 혈육 간의 정도 없이 아주 냉혹합니다. 마치 냉혈동물처럼 변한 것 같다니까요.”라고 헛소리를 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눈먼 사람은 보지 못한다. 설마 정말 하나님을 믿은 후 진리가 사람을 냉혹하고 무정하게 만들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겠느냐?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아 분별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써 이룬 성과이다. 그럼 이 성과는 어떻게 이룬 것이겠느냐? 무엇이 일을 바라보는 네 관점을 바뀌게 했겠느냐? 언제부터 바뀌기 시작했겠느냐? 하나님 말씀이 사람의 관점을 바꿔 인생과 갖가지 사물을 대하는 관점을 이방인과 다르게 변화시킨 것이다.

지난날, 사람은 언제나 양심에 기대 일을 처리하고 다른 이를 판단했다. 늘 양심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고, 또 늘 소문이 무섭다고 생각하면서 남들에게 비웃음당하거나 오명을 남기거나 “양심도 없는 사람 같으니. 제대로 된 작자가 아니야.”라는 욕을 들을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마지 못해 말을 하고 행동을 하면서 대충 환경에 대처해 왔다. 이제 이런 일을 어떻게 판단해야겠느냐? (진리 원칙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과거 이방인의 관념과 궤변에 얽매였을 때, 사람은 어떤 상태로 살아갔느냐? 예를 들어, 네 부모가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네게 “얘야, 나중에 어른이 되면 엄마 아빠 체면을 세워 줘야 한다. 우리 가문을 빛내야 해!”라고 주입시켰다고 해 보자. 이 말은 네게 어떤 의미였겠느냐? 일종의 격려였겠느냐, 아니면 제약이었겠느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겠느냐, 아니면 부정적인 통제로 작용했겠느냐? 사실 그것은 하나의 통제이다. 그들은 사람이 옳고 좋다고 생각하는 말과 이론으로 네게 하나의 목표를 설정해 주고는 네가 그 목표를 보며 살게 했다. 그리고 결국 너는 자유를 잃었다. 어째서 자유를 잃고 그것에 통제되었겠느냐? 사람은 모두 조상을 빛내는 것이 좋은 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조상을 빛내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너는 바보, 쓰레기, 못난 인간, 멍청이가 되는 것이고, 사람들은 너를 무시할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위해 너는 열심히 책을 읽고 능력을 키워 조상을 빛내야 한다. 그러면 앞으로 사람들이 너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한 모든 행동이 무형의 족쇄가 되어 너를 결박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조상을 빛내는 것은 부모의 요구이기에, 부모는 네가 잘되고 앞으로 좋은 날을 맞이하고 가문을 빛내게 하기 위해 한 것이기에 너는 자연스럽게 이런 생활 방식을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네게 무형의 고통이자 족쇄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사람은 이런 것들을 긍정적인 것, 진리, 바른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것들을 지키거나 따르며, 부모의 말과 요구에 절대적으로 순종한다. 만약 네가 이 말대로 살아가고 노력하며 네 청춘과 삶을 모두 바친다면, 결국 뛰어난 사람이 되어 좋은 날을 맞이하고 조상도 빛내며 너 또한 사람들 앞에서 빛이 나겠지만, 네 내면은 갈수록 공허해질 것이다. 너는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앞으로의 종착지는 무엇인지, 사람이 살면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마음속으로 동경하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은 인생의 비밀들을 너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얻지도 못했다. 그러니 너는 부지중에 부모의 그 좋은 마음 때문에 망쳐진 것 아니겠느냐? 네 청춘과 인생은 소위 “너를 위해서야.”라는 부모의 말에 의해 망치게 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를 위해서야.”라는 네 부모의 말이 과연 옳겠느냐, 아니면 틀렸겠느냐? 어쩌면 네 부모의 출발점은 정말 너를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네 부모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냐? 네 부모에게 진리가 있느냐?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평생 ‘부모의 체면을 세워 주고 조상을 빛내야 한다’는 부모의 말을 위해 살아간다. 이 말은 그에 대한 깨우침이었고, 그는 평생 부모의 그 말에 영향을 받아 왔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부모의 말은 그의 인생의 기점이자 노력해야 할 방향, 목표였다. 그 결과, 그가 평생 얼마나 화려하게 살았든, 얼마나 존엄 있게 살고 성공했든, 사실 그의 그 인생은 망쳐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부모의 그 말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은 망쳐지지 않겠느냐?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그 스스로에게 목표가 있을 수도 있다. 어떤 목표겠느냐? ‘좋은 날을 맞이하고 부모님의 체면을 세워 드리자’라는 것으로, 똑같은 말이다. 부모가 그에게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 다른 곳에서 받아들여 이 말을 목표로 살아가며, 조상을 빛내고 뛰어난 사람, 고상한 사람, 존엄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의 목표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러한 것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평생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사회에서 옳다고 여기는 수많은 도리나 주장, 논조를 받아들이면 인생에서 이 ‘옳은 것’들을 노력의 방향과 기반, 동력으로 만들어 버리며, 결국 한 치 오차도 없이, 남김없이 그 목표를 위해 살면서 눈 감는 순간까지 분투하게 된다. 어떤 이는 심지어 눈 감는 순간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사람의 삶은 이토록 가련하다! 하지만 사람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이 소위 ‘옳은’ 것들, ‘옳은’ 교육, ‘옳은’ 주장, 그리고 부모의 기대를 조금씩 내려놓게 되지 않겠느냐? 네가 이 소위 옳은 것들을 조금씩 내려놓고, 더 이상 전통문화에 관련된 말을 근거로 일을 판단하는 기준을 세우지 않는다면 더는 전통문화에 관련된 말에 결박되는 일이 없지 않겠느냐? 이러한 것들에 결박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살게 되지 않겠느냐?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족쇄가 가벼워질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수많은 관념과 상상, 속셈, 불순물, 그리고 사람의 처세 철학과 간사한 생각, 패괴 본성 등을 지니고 있다. 언젠가 이러한 것들이 해결되고 완전히 진리에 기대 살아가게 되면, 그때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것이고, 진정으로 해방되고 자유를 얻을 것이다.

지금 진리를 추구하고 얻기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무엇이겠느냐? 여태까지 자신이 옳다고 여기던 것, 전통 관념에 속하는 것,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궤변과 말을 먼저 해부하여 본질을 꿰뚫어 본 후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을 결박하는 한 겹의 족쇄이다. 이러한 것들은 너희 마음속에 아직 얼마나 남아 있느냐? 완전히 벗어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게 쉽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감정과 연관되어 있다. 만약 네가 항상 감정을 다루면서 부모와 가족들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면서 진리에만 집중하자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부모를 생각한다면, 이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말, 지식, 이론을 해부해야 한다. 이 밖에, 부모를 대할 때 자녀의 의무를 다해 그들을 보살필 것인지 등 모든 것은 네 개인적인 여건과 하나님의 배치에 근거해야 한다. 확실하게 얘기한 게 아니냐? 어떤 사람들은 부모를 떠날 때 자기가 부모에게 너무 죄스럽다고, 부모를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부모와 함께 살 때 전혀 효도하지 않고 어떤 의무도 다하지 않는다. 이런 자가 정말 효도하는 사람이겠느냐? 이는 입만 놀리는 것이다. 네가 어떻게 행동하든, 혹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획하든 그런 것들은 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피조물이든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지, 진실로 믿는지 하는 점이다. 어떤 부모는 그런 복과 운명이 있어서 자손이 번창하고 천륜의 즐거움을 누리는데, 이는 하나님의 주재이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복이다. 반면 어떤 부모는 그런 운명이 없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안배해 주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녀가 옆에서 지켜 주고 온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는 그런 복이 없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배치로, 사람이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다. 어찌 됐든 결론적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에 있어서 사람은 최소한 순종하는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 환경이 허락하고 여건이 된다면 효도해도 된다. 환경이 허락하지 않고 여건도 되지 않는다면 무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뭐라고 하겠느냐? (순종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순종이라고 한다. 이 순종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순종의 근거는 무엇이냐?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안배와 주재가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사람이 선택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다. 사람은 선택할 권리가 없으며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 사람은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또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배치라는 것을 느낄 때, 네 마음은 한결 편안해지지 않겠느냐? (그럴 것입니다.) 그럼 양심의 가책을 느끼겠느냐? 언제나 가책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며,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주를 이루지도 않을 것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날 수도 있다. 인성에는 정상적인 생각이나 본능이 있는데, 이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병에 걸린 것을 보았을 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괴로워하고, 자신이 어머니 대신 아플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한다. “어머니의 병이 낫기만 한다면, 제 수명이 몇 년 줄어도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인성의 긍정적인 일면이자 사람의 본능이다. 그러니 어머니가 병이 난 것을 보고 마음이 괴로울 때, 그 고통스러운 심정이 문제가 되겠느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네 마음이 괴로운 것은 좋은 일인데, 그것은 네게 마음과 인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는 하나님이 네게 안배해 준, 너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어머니가 병에 걸려 괴로워하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면 네가 사람이겠느냐? 네가 “저는 어머니에게 아무 감정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괴로워해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이 괴로워하셔야 저도 괴로울 겁니다!”라고 말한다면, 이 말이 진심이겠느냐? 그것은 진실하지 않고 가식적이다. 네 어머니는 너를 낳아 주고 지금까지 키워 주었으며, 너와 가장 가깝고 너를 가장 아끼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가 병에 걸렸을 때 조금도 괴롭지 않다면 네 마음은 얼마나 강퍅한 것이냐! 이는 정상이 아니니 이런 사람이 되기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괴로워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다. 하지만 괴로움 때문에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이것이 정상이겠느냐? (비정상입니다.) 어째서 비정상이겠느냐? 네 생각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것이 아니기에 비정상인 것이다. 사람은 사탄 본성을 지닌 채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니 진리에 어긋날 수 있고, 양심과 이성을 잃을 수도 있다. 갑자기 정신병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이는 비정상적이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런 상황이 생기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 때문이다.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순간,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생각이나 하나님을 거역하는 생각이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다. 바로 이런 것이다.

패괴된 인간은 누구나 감정을 갖고 있으며 수시로 감정에 통제되어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거나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려면 반드시 감정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가장 심하게 진리 실행을 가로막는 것이고 반드시 떨쳐 버려야 하는 감정은 무엇이냐? 어떤 감정이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것으로,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또 어떤 감정이 패괴 성품에 속하겠느냐? 이러한 것들을 분명히 분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네 자식이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자 너는 자식을 감싸고, 네 자식을 때린 자의 가족을 찾아 따지러 간다고 하자. 이것이 정상 아니겠느냐? 그 아이는 네 자식이니 네가 감싸는 것은 정당하며, 이는 정상적이다. 하지만 만약 네 자식이 다른 집 아이를 때리고 착한 아이를 괴롭혔는데, 너는 보고도 못 본 체하며 네 자식이 능력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뒤에서 사람을 때리라고 가르치기까지 한다면, 다른 사람이 따지러 왔을 때 여전히 자식을 감싼다면 이런 행동이 옳겠느냐? 옳지 않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이것이 바로 감정의 문제이다. 어째서 감정의 문제라고 하겠느냐? 다른 사람이 네 자식을 괴롭히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네 자식이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으면 너는 즉시 가서 해결하고 짚고 넘어가려고 하는데 네 자식이 다른 집 아이를 괴롭히는 건 왜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게다가 너는 자식이 남의 집 아이를 때리도록 부추기기까지 하는데 이는 악독함 아니겠느냐? 성품 측면에서 볼 때 이런 사람은 악독하다. 그럼 감정 측면에서 본다면 어떻게 설명해야겠느냐? 감정은 어떤 특징을 보이느냐? 그것이 긍정적일 리는 없다. 육적인 관계에 집중하고 육적인 기호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편을 들고 잘못을 감싸 주고 익애하며 오냐오냐하고 방임하는 것, 이런 것은 전부 감정에 속한 것들이다. 어떤 사람은 감정에 너무 치우쳐서 어떤 일이 닥치든 정에 휘둘린다. 마음속으로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하며, 나아가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지도 못한다. 늘 감정의 속박을 받는다면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수많은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감정 때문이다. 그들은 감정을 몹시 중요하게 여기며, 1순위에 둔다.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겠느냐? 그럴 리가 없다. 감정의 본질이란 무엇이냐? 바로 패괴 성품의 일종이다. 감정적인 모습을 몇 가지 단어로 표현하자면 편들기, 감싸기, 육적인 관계 지키기, 불공정함 등을 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감정이다. 사람이 감정이 있어 감정에 기대 살아가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하나님은 왜 사람의 감정을 가장 혐오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늘 감정에 얽매여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나 그러지 못하기에 감정으로 고통받는다. 또 수많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도 실행하지 못하는데, 이 또한 감정에 얽매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지만 마음속으로 늘 가족을 그리워하고 밤낮으로 생각하느라 본분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문제 아니겠느냐? 어떤 이는 누군가를 짝사랑하는데, 마음속에 오직 그 사람뿐이라 본분 이행에 지장을 준다. 이 또한 문제 아니겠느냐? 또 어떤 이는 누군가에게 탄복하고 그 사람을 숭배한다. 다른 사람 말은 안 듣고 오직 그 사람 말만 듣는데, 심지어 하나님이 한 말씀마저도 듣지 않는다. 설령 누가 진리를 교제해 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직 그 사람의 말, 그 우상의 말만 들을 뿐이다. 이 밖에도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우상이 있어 다른 사람이 자신의 우상에 대해 말하거나 터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누가 그 우상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면 화를 내면서 어떻게든 변호해 주려고 하고, 그 주장을 뒤집어 놓으려고 한다. 또 자신의 우상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걸 용납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우상의 명성을 지키면서 잘못된 것도 맞다고 하며, 사람들이 사실을 말하지도, 폭로하지도 못하게 한다. 이는 불공정한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 감정이라고 한다. 감정의 대상이 가족에만 국한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의 적용 범위는 무척 넓다. 그것은 하나의 패괴 성품으로, 가족 간의 혈연관계라는 범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 대상은 상사일 수도 있고, 네게 은혜를 베풀거나 도움을 준 사람일 수도 있고, 너와 가장 사이가 좋거나 마음이 맞는 사람일 수도 있고, 네 동향 사람이나 친구일 수도 있으며, 네가 앙모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감정을 떨쳐 버리는 것이 부모나 집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겠느냐? 그렇게 간단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을 떨쳐 버리는 게 그렇게 쉽겠느냐? 많은 사람이 30살쯤 되면 독립적으로 살아가면서 별로 집을 그리워하지 않으며, 40살 정도가 되면 완전히 정상이 된다. 사람은 미성년자일 때 집을 무척 그리워하면서 부모 곁을 떠나지 못한다. 아직 독립적으로 생존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집과 부모를 그리워하는 것은 정상으로,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일을 하는 태도와 관점에 감정의 불순물이 섞여 있는 것이 바로 감정의 문제가 된다. 너와 부모는 육적으로 혈연관계가 있으며, 함께 오랜 세월을 살았으니 네가 부모를 그리워하는 것은 정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를 전혀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쩌면 집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돼 무엇을 보든 새롭고, 간신히 부모의 잔소리에서 벗어나 아무도 관여를 하지 않으니 기분이 좋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분이 좋다고 해서 감정이 없다는 뜻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으면서 얼마간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본분을 이행할 때 감정에 전혀 얽매이지 않죠. 저는 감정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실제적이겠느냐? 딱 봐도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하는 말이다. 사람이 설교를 많이 들으면 얼마간 글귀와 도리를 알게 되며, 영적인 이론을 말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분량이 생겼고 적잖은 진리를 깨닫게 됐어. 이제 체포되어도 유다가 되지 않을 거라는 최소한의 믿음과 의지가 있다고. 이게 바로 분량 아닐까?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의 열정을 떠올려 봐. 내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기 원했잖아. 그 열정과 맹세는 지금도 전혀 변하거나 퇴색하지 않았어. 이러면 성장한 것 아니겠어?’ 이는 표면적인 현상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다 표면적인 현상이다. 사람이 진실로 성장하고 싶다면 반드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도리와 영적인 이론을 말할 수 있다고 해서 진실한 변화가 생기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겠느냐? 설교를 듣고 도리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해야 하며, 진리를 깨닫고 실행해야 한다. 그래야 실제가 생긴다. 진리를 실행해야 더 깊이 있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아야 진리를 얻을 수 있으며, 진리를 얻어야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

오늘은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옳은 말인지 교제하고 구분하였다. 너희는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일을 바라보아야지 평상시의 표면적인 좋은 행위와 영적인 도리를 진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행위와 옳은 말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것은 아무리 옳아도 진리가 아니며, 나아가 진리와 무관하다. 만약 네가 늘 그것을 지키고 진리로 여겨 대한다면, 영원히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또 영원히 진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 영적인 도리가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영적인 도리가 옳은 말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사람의 패괴 성품을 변화시키는 성과를 내지는 못한다. 사람의 패괴 성품을 변화시키려면 도대체 무엇에 기대야겠느냐? 어떤 사람은 진리에 기대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진리를 실행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말이 옳으냐? 문자적으로 보면 모두 옳은 면이 있다. 하지만 이는 전부 가장 얄팍한 도리이다. 이러한 도리는 너를 구해 주지 못하고, 네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도 못한다. 네게 일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너는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저는 어려움이 있어 내려놓지를 못하겠어요!”라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도리가 진리 실행의 길이 되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라고 한다. 이 말을 적잖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네 어떤 문제를 해결해 주더냐? 하나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셔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어떤 측면의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셔야겠느냐? 어떻게 대조해야겠느냐? 대조한 후에는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실행의 길은 무엇이냐? 어떤 측면의 진리로 네 그 어려움을 해결해야겠느냐? 이는 현실적인 문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옳은 도리는 사람의 실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못하고, 사람의 패괴 성품은 더더욱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해 주겠느냐? 오직 진리만이 사람의 패괴 성품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거나 진리를 구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면,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패괴 성품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체험해야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반드시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해야 한다. 그래야 성과를 낼 수 있다.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영적인 도리를 이해하는 데만 집중하면서 영적인 도리가 진리가 맞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그것을 진리로 여겨 받아들이면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이 밖에,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네가 패괴 성품을 드러낼 때 분별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에 대조할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어쩌면 너는 함부로 규례에 끼워 맞출 수도 있는데, 그러면 패괴 성품을 더더욱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하겠느냐?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 많은 사람이 도리를 진리로 여기며,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한다. 방금 예로 든 감정 문제처럼 말이다. 그 어머니의 첫 번째 행동은 자식이 괴롭힘당하지 않게 지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너희는 ‘그건 감정이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돼. 그런 행동은 비판받고 정죄되어야 한다고.’라고 볼 것이다. 너희는 진리와 관련이 없고 무관하지만 사실 사람이 본능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전부 진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한 후 저버린다. 그러면서 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 진리 실행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자기 자식이 다른 집 아이를 괴롭히는 것을 좌시한 두 번째 행동처럼 정말 패괴 성품의 표출이나 진리 실행과 관련되는 일이 있을 때는 ‘악을 행한 것만 아니라면 큰 문제는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생각과 인식을 갖게 되었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진리를 깨닫지 못해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선택한 후 스스로 진리를 실행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많은 경우 진리를 깨닫지 못해 규례에 끼워 맞추고 규례를 지키고, 일이 닥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규례를 지키는 것을 진리 실행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데 생명 성장을 이룰 수 있겠느냐?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많은 사람이 글귀와 도리를 말할 수 있으면 진리를 깨달은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데 합격점을 받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여전히 많은 일에서 패괴 성품을 드러내겠느냐? 또 왜 실제적인 문제를 마주했을 때 해결하지 못하겠느냐? 이는 글귀와 도리를 말하는 것이 결코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며, 도리를 얼마나 많이 말할 수 있든 이는 진리를 얻었다는 의미가 아님을,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실행 원칙을 찾을 수 있어야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임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고 고난을 겪으며 대가를 치르기만 하면 어떤 패괴 성품을 드러내든 큰 문제는 아니라고, 본분을 이행하고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충심을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에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해 호의를 보이지만 사실은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는 자기가 하나님의 이익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켰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이 없기에 일을 할 때 늘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이와 동시에 자기가 한 일이 옳다고, 자기는 진리를 실행했다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이다. 단, 문제이긴 해도 해결 방법은 있다. 유일한 방법은 바로 문제에 부닥치고 패괴 성품을 드러낼 때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진리를 구해 확실히 하는 것이다. 너에게 패괴 성품이 존재하는 한, 여러 가지 내적 상태가 생겨날 수 있다. 사람은 서로 다른 환경과 내적 상태 속에서 살아가면서 여러 생각과 관점, 속셈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사람 내면의 실제 내적 상태이다. 사람의 생각과 관점, 속셈을 보면 그의 성품을 알 수 있고, 그의 본성이 어떤지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른 사람을 분별하면 쉽게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패괴 성품의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완전한 자기 인식의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자연히 어떻게 진리를 구해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할지 길이 생길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으면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되며, 사람의 패괴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 만약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영원히 생명 성품의 변화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너희는 모두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니 진리에 집중해야 한다.

사람의 본성을 해결하려면 행동이 아니라 근원부터, 사람의 성품부터 파헤쳐야 한다. 또한 객관적인 이유, 조건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진리와 대조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는 모두 사람의 패괴 성품에 초점을 맞추어 선포된 것이다. 방금 이야기한 ‘감정’을 예로 들어 보겠다. 사람은 가끔 부모를 보고 싶어 하거나 집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감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말하는 감정과 같은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이해하는 그 감정은 하나님이 말하는 감정과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 없다. 네가 말하는 그 감정은 패괴 성품이 아니라 사람의 정상적인 내적 상태에 속한다. 만약 육적인 가족을 우상으로 여겨 대한 나머지 네가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없게 되면 이는 감정에 너무 치우친 것으로, 패괴 성품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는 진리를 순수하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와 연관된다. 너는 집을 그리워하거나 부모에게 잘해 주려는 마음을 감정으로 여긴 것인데, 이는 진리를 치우치게 이해한 것 아니겠느냐? 사실 네가 이해한 것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 진리가 아니며, 진리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말하는 감정이란 무엇이냐? 방금 이야기한,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는 두 번째 행동 방식인 편들어 주고 두둔하는 내적 상태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폭로하는 감정이며, 그 어머니가 이 일에서 드러낸 패괴 성품이다. 그 두 가지 행동 방식은 완전히 다르지 않으냐? 첫 번째 행동 방식은 정상적인 현상으로 책망하거나 깊이 파헤치거나 해부할 필요도, 나아가 대조해 보거나 어떤 측면의 진리를 실행하거나 뭔가를 내려놓을 필요도 없다. 그럼 이런 행동이 정당하겠느냐? 반드시 그렇게 해야겠느냐?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두 번째 행동 방식은 성품과 관련이 있다. 나타내는 어떤 감정이 패괴 성품과 관련이 있겠느냐? (편들어 주는 것, 두둔하는 것, 육적인 관계를 지키는 것, 공정함을 잃은 것 등이 패괴 성품과 관계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말하는 ‘감정’이라는 두 글자에 포함된 내용이다. 만약 네가 이 정도까지 인식하고 진실로 자신에게 대조해 볼 수 있다면, 이런 패괴 성품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감정에 통제되지 않아야 네 모든 행동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 네가 인식한, ‘감정’에 포함되는 이 내적 상태들이 하나님이 말하는 ‘감정’이라는 두 글자와 완전히 부합한다면, 그것이 바로 네가 인식한 진리이다. 네게 감정에 대해 교제하라고 할 때, 그 어머니의 첫 번째 행동 방식을 교제한다면 이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만약 네가 그 어머니의 두 번째 행동 방식을 교제하며 그녀의 패괴 성품을 해부한다면, 이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네가 교제하고 체험하고 인식한 것들이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에 부합하고, 모순되거나 어긋나는 부분이 없으면, 이는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 말씀의 뜻을 파악하고 인식하고 실행하고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너는 진리와 생명을 얻은 것이다. 이 말의 뜻인즉슨, 이미 진리 실제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그때 다시 비슷한 일을 봤을 때 분별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표출이 정상이고 어떤 표출이 패괴 성품인지 마음속으로 완전히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면 네 일 처리가 정확하고, 진리에 부합하며, 진리 실제를 갖추게 되지 않겠느냐? 일 처리가 정확해지고 진리를 깨닫게 되면, 네가 교제하는 인식과 체험 또한 남에게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 실제의 일면이다.

어떤 사람은 자질이 떨어져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서 항상 자신은 양심이 없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어떤 말이 정확하겠느냐? (자질이 떨어진다는 말이 맞습니다.) 때로 어떤 사람은 한 가지 본분을 이행하면서 기본적인 업무 지식은 파악해도 더 깊이 있는 것들은 갖추지 못한다. 그런 것들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리더는 그에게 대충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며 몸을 사린다는 꼬리표를 붙이지만 사실 그는 업무 관련 지식이 부족하고,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일 뿐 이미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도 리더는 그에게 대충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한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는 용어를 남용하고 함부로 꼬리표를 붙인 것이다. 용어를 남용하고 함부로 꼬리표를 붙이는 원인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자질이 떨어지고 너무 어리석어 초래된 거라고 할 것이고,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인성이 너무 악하고 속셈이 바르지 못해 초래된 거라고 할 것이다. 어떤 말이 맞겠느냐? 사실 이 세 가지 내적 상태 모두 존재하므로 구체적인 상황에 근거하여 판단해야 한다.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초래된 건데, 자질이 부족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 말은 맞지 않다. 또 분명히 인성이 너무 악하고 속셈과 목적이 있어서 초래된 건데, 자질이 부족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사실 왜곡이며, 악인이 속임수로 빠져나가게 하기 쉽다. 이 밖에도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초래된 일을 두고 인성이 악해 초래된 것이라 한다면, 이는 일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한 것으로, 좋은 사람을 악인으로 대하고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많은 사람이 이런 일을 분별하지 못하고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도 못한다. 그들은 함부로 규례에 맞추고, 자기 뜻대로 결론을 내리면서 자기는 분별력이 있다고, 일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 아니겠느냐? 인성이 좋지 않고, 개인의 속셈과 목적을 지니고 함부로 꼬리표를 붙여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악인의 성질에 속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은 매우 적으며, 대부분은 그저 진리를 깨닫지 못한 탓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함부로 규례에 맞추고 영적 용어를 남용한다. 예를 들어, 인성에 분명히 문제가 있어 몸을 사리면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이를 가리켜 자질이 떨어진다고 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분명히 정의감이 있어서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보면 바로 이야기해 교회의 이익을 지키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종종 교만하고 독선적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며, 심지어는 악인으로 여겨지기도 하니, 그야말로 좋은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다. 또 분명히 분량이 작아서 한순간 감정에 얽매여 좀 연약해진 사람들이 있는데,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들을 보고 감정에 휘둘리며 하나님에게 진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진리가 없는 사람은 바로 이렇다. 배경을 따지지 않고, 실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괄적으로 함부로 규례에 맞추며, 어떨 때는 이렇게 말했다가 어떨 때는 저렇게 말한다. 이런 사람이 진리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문제를 해결할 때 상황에 맞게 대처할 수 없다. 마치 배가 아픈데 굳이 머리를 치료하는 것처럼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가리키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지금 너희가 깨달은 진리는 많으냐, 적으냐? (적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왜 순종할 수 없을까요?”라는 질문을 듣는다면, 사람은 종종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이 옳으냐? 옳을 때도 있고 옳지 않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옳지 않다. 이는 함부로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다. 영적 용어들을 좀 파악했다고 함부로 적용하고 사용하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 어떤 것은 곡해하는 것이고 어떤 것은 판단하는 것인데, 이는 부정적인 결과를 야기하고, 심지어는 혼란이 벌어지게 한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뭔가 배우면 함부로 적용하고 사용하기에 문제가 생기기가 가장 쉽고, 원칙적인 잘못을 저지르기도 쉽다. 반면,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원칙적인 문제는 아니며, 거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만약 사람이 그릇되게 이해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곡해하며, 설교를 들어도 치우치게 이해한다면, 게다가 툭하면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건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길어지면 함부로 굴어 교회 사역에 교란을 가져올 수 있다. 그 결과는 심각하다.

이제 너희는 묵상해 보아야 한다. 너희가 늘 말하는 글귀와 도리, 영적인 이론이 정말 진리겠느냐? 너희가 깨달은 것이 과연 진리겠느냐, 아니면 도리겠느냐? 너희가 깨달은 것 안에 과연 진리 실제는 얼마나 있겠느냐? 이 문제들을 분명히 한다면, 정말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자기 주제를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너희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방법에 대한 진리를 꽤 많이 교제했다. 그런데 정말 그것에 대해 이해했느냐? 너희 모두 어느 정도 교제하고 인식을 이야기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에는 얼마나 진입했느냐? 지금 너희는 정말 정직한 사람이냐? 분명히 말할 수 있느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숨기지도, 가리지도, 피하지도 않는 거죠. 이것이 바로 정직한 사람의 기준입니다.” 이 말이 어떠하냐? 진리에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글귀와 도리는 말할 수 있어도, 실행의 세부 내용이나 구체적인 문제와 관련되면 할 말을 잃는다. 이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지만 늘 ‘나는 꽤 많은 진리를 깨달았는데 하나님이 써 주시지를 않네. 만약 하나님이 나를 써 주셔서 내가 교회 리더가 된다면, 나는 모든 형제자매가 진리를 깨닫게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너무 거창한 것 아니겠느냐? 네게 정말 이런 능력이 있느냐? 허풍을 떨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겠느냐? 진리를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큰소리를 치고, 허풍을 떠는 사람은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너희가 지금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계속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언젠가 바리새인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고, 그러면 현대판 바리새인이 될 것이다. 이런 가능성이 없겠느냐? (있습니다.) 이런 가능성은 무척 크다. 사람은 내면에 사탄 본성이 뿌리 깊이 박혀 있어 지식을 좀 배우고 소양이 좀 쌓이고 옳은 이론을 얘기하거나 고매한 설교를 할 수 있으면, 바리새인이 되기가 너무 쉽다. 바리새인이 되지 않고, 바리새인의 길을 걷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기를 추구하는 것이며, 네가 이해한 도리를 진리 실제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정직한 사람이 되는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과연 정직한 사람이란 무슨 의미인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정직한 사람에 대해 어떤 요구 기준을 제시했는지, 사람은 이 요구 기준 중 어떤 것들을 실행할 수 있는지, 하나님이 말하는 정직한 사람은 어떤 모습인지,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과연 어떤 측면의 패괴 성품을 겨냥한 것인지 등을 너희 스스로 묵상해 보고, 시간이 있으면 교제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깊이 파헤쳐 볼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실행하도록 요구하는 말씀과 진리들은 사람의 어떤 행동 방식이나 행위가 아니라 사람의 사탄 본성과 사탄 성품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렇기에 그 말씀들이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히 사람의 행위를 바꿔 놓고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데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학설일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교육가라면 누구나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일부 행위를 바꿔 놓을 수 있으며, 실천과 종합을 통해 조금씩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의 지식은 너무도 많다. 하지만 이것들은 전부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패괴 성품도, 사람이 죄짓는 근원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사람의 패괴를 정결케 하고 해결할 수 있으며,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사람의 사탄 본성을 철저히 해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이다.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이겠느냐? 이는 묵상하고 생각하며, 수시로 함께 교제해 볼 가치가 있다. 언제 어느 때든 잊지 마라. 사람의 행위만을 바꿔 놓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지식이나 법률에 불과하다. 진리는 사람의 행위를 바꿔 놓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패괴 성품과 생각, 관념을 바꿔 놓고,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지금 이 일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극소수다. 사람의 행위를 어느 정도 규범화하고, 사람을 표면적으로만 그럴듯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들은 진리가 아니라 전부 지식, 도리, 사탄 철학임을 대다수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면 외적 행위는 점점 고상하고 우아하고 단정해지겠지만 마음속은 음험함과 사악함으로 가득해지고, 갈수록 어두워진다. 그런 것은 바로 사탄의 독소이자 이론이며, 사람을 미혹하고 패괴시키는 사탄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진리도,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오직 사람을 정직하고 해방되고 자유롭게 해 주는 것, 창조주를 인식하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며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게 하는 것만이 진리이다. 네가 어떤 관점을 받아들였든, 어떤 길을 걷든, 행위가 좋아지고 인간관계도 점점 좋아져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나 진실한 믿음은 여전히 보잘것없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아직 갈 길이 멀고 네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면, 네가 고수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고, 결코 진리도 아니다. 만약 네가 어떤 길, 어떤 생활 방식을 선택하고 어떤 것들을 받아들였는데, 그것들이 너를 진실하고 정직하게 변화시키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게 하고, 사악하거나 부정적인 사물을 증오하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기를 원하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리이고 진정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너희는 이런 것을 근거로 판단하면 된다. 어떤 도리들은 많은 사람이 말할 줄 알고 오랫동안 이야기해 왔지만,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람 내면의 성품은 변하지 않았고, 내적 상태 또한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며, 사람의 관점과 사유 방식, 일 처리의 출발점, 속셈에 어떤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 이것들을 한시바삐 버리고 더는 고수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결코 진리가 아니다. 어떤 말들은 처음 실행할 때 무척 힘들고 어려운 것 같고 원칙을 파악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동안 실행하며 체험하고 나면 내적 상태가 좋아지고 마음이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일이 닥쳐도 더는 그렇게 강퍅하거나 패역하지 않고 개인의 속셈이나 욕망이 그렇게 강렬하지 않게 되었으며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상태는 긍정적인 것이다. 그 말들은 진리이고 바른길이다. 너희는 이 원칙대로 분별하면 된다. 무엇이 진리인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정의해 냈을 때 너희가 그것을 듣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규례나 도리로 여겨 지킨다면 문제가 된다.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에게 원칙을 제시해 주면, 너희는 그 원칙에 맞춰 대조하고 체험하고 실행하고 체득해야 한다. 그 원칙에 맞춰 행동하고 처신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고 사람을 판단해야 한다. 이렇게 체험하고 실행하면 과연 무엇이 진리인지 알게 된다. 무엇이 진리인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이 전부 진리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생명을 얻을 수 있겠느냐? 생명 성품의 변화를 이룰 수 있겠느냐? 겉으로 보면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사람에게 제시한 요구가 엄격하지 않고 무척 간단하다고 생각될지 몰라도 진리의 함의가 무엇인지, 진리의 실제적인 내용이 얼마나 포함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진리의 글귀와 도리 부분만 이해한다면 영원히 하나님이 요구한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없을 것이다.

2017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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