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가지 방면의 패괴 성품을 알아야 진실로 자신을 아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무엇이냐?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의 영원한 주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하고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실행이다. 늘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은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냐?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진리를 깨달아 진실로 하나님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또 있느냐? (진리를 구하여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말은 설교에서 자주 하는 말로, 영적인 용어이다. 또 있느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을 체험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며 진리를 구해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마지막에 진리와 인성을 갖춘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몇 년 동안 설교를 듣고 많이 깨달았구나. 그렇다면 너희가 깨달은 바를, 너희가 체험하면서 만나는 현실적 문제나 실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적용할 수 있느냐? 이를테면 그릇된 생각이라든가, 이따금 소극적이고 나약해지는 문제라든가, 관념 상상과 관련된 문제들을 제때 해결할 수 있느냐? 아마 어떤 사람은 작은 문제는 해결할 수 있겠지만, 크고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욥과 같은 시련이 닥치면 너희가 지금 깨달은 정도의 진리로 굳게 설 수 있겠느냐? (굳게 서고자 하는 의지는 있지만 막상 일이 생겼을 때 자신의 실제 분량이 어떠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일이 생기지 않았다 해도 자신의 실제 분량이 어떠한지는 마땅히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걸 모른다면 아주 위험하다! 흔히 말하는 그런 영적인 용어, 고정적인 표현의 실제적인 면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말 한 마디 한 마디의 진실된 함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느냐? 그 안에 담긴 진리가 대체 무엇인지 아느냐? 네가 그걸 알고, 또 체험했다면 그건 진리를 깨달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일부 영적 용어나 구절을 말할 수 있을 뿐, 정작 체험할 때 그것들을 적용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어려운 점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건 네가 그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여전히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실제 체험이 없다는 증거다. 내가 하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종교계 사람이나 이방인보다 진리를 좀 더 깨달았고, 하나님 사역의 이상(異象)을 알고, 규례적인 것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주재를 알고 느끼고, 진정한 이해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 인해 사람의 생명 성품에 변화가 생겼느냐? 너희가 자주 듣던 하나님 사역의 이상이라든가 하나님 사역의 근본 취지,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 이런 이상 방면의 진리에 대해 너희는 어느 정도 이야기할 수 있고, 인식을 말해도 종교계 사람들보다는 훨씬 높다. 하지만 그런 것이 너희에게 성품의 변화를 가져오거나 너희 성품에 부분적인 변화라도 가져올 수 있느냐? 너희는 그걸 가늠할 수 있느냐? 이것은 핵심적인 일이기도 하다.
요즘 땅의 하나님을 과연 어떻게 알아야 하는지, 땅의 하나님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등을 교제했다. 이는 모두 가장 현실적인 문제들이 아니냐? 이는 모두 실행 방면에 관한 진리이다. 이런 내용을 교제하는 목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지내면서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실행 방면의 이 진리들, 너희가 들은 것과 깨달은 것들, 너희가 실행할 수 있는 것들로 너희 성품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느냐? 이렇게 진리에 따라 실행하는 일에 사람이 정말 최선을 다하면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이 진리들이 사람의 실제가 된다면 사람의 성품이 변화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 (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품 변화가 어떤 건지 간파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영적인 도리를 많이 얘기하고 진리를 많이 깨닫는 것이 성품 변화를 의미하는 줄 아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진리를 깨닫는 것에서 실행하기까지, 거기서 다시 성품 변화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기나긴 생명 체험의 과정이다. 너희는 성품 변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너희가 지금까지 체험해 오는 동안 생명 성품에 변화가 있었느냐? 너희는 아마 그런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할 것인데, 그런 게 다 어려움이다. 성품 변화에서 ‘변화’라는 두 글자는 사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품’이란 무엇이냐? (사람의 생존 법칙, 사탄의 독소입니다.) 또 어떤 게 있느냐? (사람 내면의 천연적인 것, 생명 본질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늘 그런 영적인 용어만 사용하는데, 그건 다 도리이자 윤곽이고, 자세한 내용이 없다. 이것은 진리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늘 성품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부터 예배 때도, 설교를 들을 때도 항상 이 주제에 관해 거론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성품 변화란 무엇인지, 자신의 성품에 변화가 있는지, 변화에 이를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많은 이들이 모르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어디서부터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성품은 무엇일까? 이는 주된 화제이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과연 네 성품에 변화가 있는지, 어느 정도로 변화되었는지,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몇 가지 일을 겪은 후 성품 변화에 이르렀는지 등과 같은 문제들을 거의 이해할 수 있다. 성품 변화에 대해 얘기하려면 우선 먼저 성품이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성품’이라는 두 글자는 누구나 알고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하지만 성품이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성품이란 대체 무엇인지, 이는 한 두 마디로 명확하게 풀이하기 힘들고, 전문 용어처럼 해석하지도 못한다. 그러면 너무 추상적이고 이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해하도록 예를 들어 보겠다. 양과 늑대는 모두 동물이다. 양은 풀을 먹고 늑대는 고기를 먹는데, 이는 그것들의 본성에 의해 결정된다. 어느 날 양이 고기를 먹고, 늑대가 풀을 먹는다고 할 때 그것들의 본성이 달라졌겠느냐? (아닙니다.) 먹을 풀이 없어서 너무 배가 고픈 양에게 고기를 주면, 양은 고기를 먹는다. 하지만 양은 여전히 너에게 온순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품이고, 양의 본성 본질이다. 양의 온순함은 어떤 점에서 드러나느냐?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 데서 드러납니다.) 그렇다, 그것은 온순한 성품이다. 양이 드러내는 성품은 말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양은 흉악하지 않고 온순하고 착하다. 그러나 늑대는 다르다. 늑대는 흉악한 성품이 있어 각종 작은 동물을 잡아먹는다. 배고픈 늑대를 마주치면 아주 위험하다. 설령 네가 늑대를 자극하지 않더라도 늑대에게 잡아먹힐 수 있다. 늑대의 성품은 온순하거나 착하지 않고 잔인하고 사나운데, 일말의 동정이나 연민도 없다. 이것이 바로 늑대의 성품이다. 양과 늑대의 성품은 그것들의 본성 본질을 대표한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어떤 상황에서든 그것들이 드러내 보이는 것은 자연스레 표출되는 것이지 누군가 인위적으로 꾸며 내거나 부추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드러내므로 사람이 가공할 필요가 없다. 늑대의 흉악함과 잔인함도 사람에게 강요당한 것이 아니고, 양의 착함과 온순함도 사람에게 길들여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천성이고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으로, 그것들의 본질이 그러하다. 그것이 바로 성품이다. 이런 예를 들어 설명하니 성품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느냐? (네.) 성품은 개념적인 것도 아니고, 전문 용어를 풀이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담긴 진리는 무엇이냐? 사람의 성품은 사람의 본성과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성품, 사람의 본성은 모두 사탄에 속한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하고 변화되지 않는다면, 사람이 살아 내는 것,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은 모두 악이요, 부정적인 사물로,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앞서 양과 늑대의 성품을 얘기했다. 양과 늑대는 전혀 다른 동물로, 성품도 각자 다르고, 드러내는 것도 각자 다르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의 성품과 어떤 관계가 있겠느냐? 이 예를 통해 사람의 성품이란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면, 사람에게는 어떤 패괴 성품들이 있느냐? (사람과 접촉해 보면 그 사람이 대개 어떤 성품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과 접촉했는데, 그가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고 완곡하게 말해서 대체 무슨 뜻인지 가늠할 수 없다면 이는 그의 내면에 간사한 성품이 있다는 뜻입니다. 평소 그의 말과 일 처리, 행위나 동작을 보면 기본적으로 대략적인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접촉과 왕래를 통해 성품의 문제들을 알 수 있다. 보아하니 앞서 말한 예를 통해 너희도 성품이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알게 된 것 같구나. 그렇다면 사람에게는 어떤 패괴 성품들이 있느냐? 패괴 성품 중에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지만 확실히 패괴 성품에 속하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예를 들어, 정에 치우치는 어떤 이에게 하나님이 말씀했다. “너는 정에 치우쳐 누구든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가족에 관련된 일에 대해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려고 한다면 조금도 알려 주지 않을뿐더러 감싸기까지 한다. 그게 감정적인 것이다.” 그는 이 말을 알아듣고 그것이 사실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고, 또 그것이 진리임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폭로에 감사드렸다. 여기서 성품을 알 수 있느냐?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실을 받아들이며 반감을 품지 않고 순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느냐? (알 수 없습니다. 일이 생겼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거의 정답이다. 앞에서는 받아들였다 해도 나중에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여전히 그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한 가지 성품을 뜻한다. 어떤 성품이겠느냐? 당시 그 말을 듣고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설교를 이렇게나 많이 들었는데 내가 정에 약하다는 사실을 모르겠어? 내가 정에 약하긴 하지만, 누군들 그러지 않겠어? 가족이나 나와 사이가 좋은 사람을 내가 감싸지 않으면 누가 감싸겠어? 대장부도 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데!’ 이게 그의 속마음이다. 일을 처리할 때 그가 품는 생각이나 계획,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는 모두 그의 성품에 의해 결정된다. 그는 어떤 태도냐?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말씀하시고 폭로하시고, 나는 나대로 앞에서는 받아들일 거야. 하지만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고, 정을 떨쳐 버릴 생각은 없어.’라는 것이다. 이는 성품이 아니냐? 여기서 성품이 드러나고 본모습이 드러난 것이 아니냐? 이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이냐? 완고하게 대항하는 것이다. 앞에서는 ‘아멘’ 하고 받아들이지만 마음은 요지부동이다.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겨 실행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이것은 일종의 성품이 아니냐? 이런 성품은 본성의 표출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방면의 성품 본질은 무엇이냐? 강퍅함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강퍅함, 이것은 사람 성품 중 하나로, 모든 사람에게 이런 성품이 다 있다. 왜 이것을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이것은 본성 본질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이 널 가르치거나 설득하고 혹은 사탄이 미혹할 필요도 없다. 너는 자연스럽게 그런 것을 드러낼 수 있으니 그것은 네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든 다 사탄을 탓한다. 늘 “사탄이 저에게 그런 생각을 심었고, 사탄이 방해한 탓에 그렇게 한 겁니다.”라고 말한다. 잘못은 모두 사탄의 탓으로 돌리며 자기 본성에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게 옳은 말이냐? 너는 사탄에게 깊이 패괴되지 않았다는 말이냐? 만약 인정하지 않는다면 네가 어떻게 사탄의 성품을 드러낼 수 있느냐? 당연히 악인이나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거나 사주를 받을 때, 혹은 악령이 역사해서 생각을 심어 줄 때와 같이 사탄이 교란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흔치 않고, 대부분의 경우는 역시 본인의 사탄 본성에 지배되어 각종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기호와 염원에 따라 행동하고, 자신의 방식, 자신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행동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패괴 성품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런 것들에 기대어 사는 것은 곧 자신의 본성대로 사는 것인데,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람이 사탄 본성에 지배되고 사탄 본성에 따라 살면서 드러내는 것은 모두 자신의 패괴 성품이다. 사탄의 탓으로 돌리면서 사탄이 심어 준 생각이라고 해선 안 된다. 깊이 패괴된 사람은 사탄에 속하는 존재이며, 사탄과 별 차이가 없고, 사람은 살아 있는 마귀, 살아 있는 사탄이다. 따라서 사탄에 속하는 것들이 표출되면 사탄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네가 사탄보다 나을 것도 없고, 그건 곧 너 자신의 패괴 성품이다.
사람에게 강퍅한 성품이 있으면 내면은 어떤 내적 상태이냐? 주로 완고하고 독선적이다.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고, 늘 자기 말만 옳고, 자기 뜻만 고집하고, 자기가 맞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강퍅한 태도이다. 한 가지만 옳다고 단정 짓고, 누가 말해도 듣지 않는다. 소 열 마리로도 끌고 올 수 없을 정도인데 옳든 그르든 꼭 그렇게 하려 한다. 어찌 보면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죽은 돼지는 끓는 물을 겁내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다. 바로 어떻게 하는 게 옳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죽으면 죽었지 진리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일종의 ‘강퍅함’이라는 성품이다. 너희는 어떤 상황에서 강퍅한 성품을 드러낼 수 있느냐? 강퍅할 때가 많으냐? (많습니다.) 너무나 많다! 강퍅함이 네 성품이 돼 버린 이상, 일상의 매 순간에 드러난다. 사람은 강퍅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올 수 없고, 강퍅하기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고, 강퍅하기 때문에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없다.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없다면 이 방면의 성품이 변화에 이를 수 있겠느냐? 매우 어려울 것이다. 현재 너희는 강퍅함이라는 이 방면의 성품에 변화가 있느냐? 어느 정도로 변화되었느냐? 예를 들어, 예전에는 소 열 마리로도 끌고 올 수 없을 만큼 강퍅했는데, 지금은 좀 변화되었다고 하자. 일이 생길 때 마음에 약간의 양심 지각이 생기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일에서 난 진리를 실행해야 해. 하나님께서 강퍅한 성품을 폭로하셨어. 난 그것을 들었고 인식했으니 변화해야지. 전에 비슷한 일이 몇 번 닥쳤는데, 그때마다 육을 따르느라 실패했어. 그게 마음에 계속 걸려. 이번에는 반드시 진리를 실행해 내야겠어.’ 이런 의지가 있으면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고, 그러면 어느 정도 변화한 것이다. 한동안 이렇게 실행하면 더 많은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더 큰 변화를 가져와서 패역하고 강퍅한 성품을 점차 덜 드러내게 된다. 이것이 생명 성품에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니겠느냐? 패역한 성품이 갈수록 적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점점 많아지는 게 보이면, 이것이 곧 진정한 변화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변화해야 진실로 순종할 수 있겠느냐? 강퍅함이 전혀 없고 순종만 할 때 성공이다. 그것은 서서히 이루어진다. 성품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장시간 체험해야, 심지어 평생 체험해야 이루어진다. 간혹 큰 고통이 많이 따르기도 하는데, 마치 죽었다 살아나는 것과 같아 독을 제거하기 위해 뼈를 깎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괴로울 수도 있다. 강퍅한 성품이 얼마나 변화되었느냐? 가늠할 수 있느냐? (전에는 어떤 일을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남들이 다른 의견을 말해도 듣지 않다가 벽에 부딪혀야 생각을 바꾸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나아져서 남들이 다른 견해를 말하면 그 순간은 거부감을 가지더라도 나중에는 조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태도상의 변화도 일종의 변화다. 조금 변화가 있다는 의미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 말이 맞다는 걸 알고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뜻만 고집했는데,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미 조금은 돌아섰다. 이 정도면 몇 프로 변화한 것이냐? 아직 10%도 안 된다. 10%가 변화되면 적어도 다른 사람이 다른 관점을 얘기해도 반감의 태도나 반발하는 마음도 전혀 없고 정상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다. 비록 속으로는 기분이 언짢겠지만 강퍅한 태도 없이 다른 사람과 의논할 수 있고, 실행할 때 조금은 순종하고 완전히 자기 뜻대로 하지는 않게 된다. 나중에도 간혹 자기 뜻을 고집할 수는 있지만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성품 변화는 이렇게 반복적인 과정을 거친다. 많은 굴곡을 겪어야 약간의 변화가 가능하고, 많은 실패를 겪고서야 겨우 성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련과 연단을 몇 년씩 겪지 않고서는 사람의 성품이 변화하기 힘들다. 가끔 기분이 좋을 때는 다른 사람의 올바른 말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 이러면 일을 그르치게 되지 않겠느냐? 어떤 때는 파트너와 협력이 잘되지 않아도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고 사탄 철학대로 살 것이고, 파트너가 너보다 자질이 좋고 더 뛰어나서 그의 눈치를 보느라 일이 닥쳤을 때 원칙을 견지하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고, 너보다 못한 파트너가 어리석게 행동하면 그를 얕잡아 보고 진리 교제도 하지 않으려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또 진리를 실행하고 싶어도 육적인 정에 얽매이는 경우나 육의 편안함에 연연한 나머지 육을 저버리려 해도 그러지 못하는 경우, 설교를 듣고 진리를 깨달았지만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겠느냐? 사람 스스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사람에게 시련과 연단을 주어 많은 고통을 겪게 하고, 궁극적으로 진리가 없으면 정말 공허하고, 진리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러면 사람은 연단받아 믿음이 생기고, 진리를 향해 노력해야 함을 느끼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마음이 괴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시련과 연단을 통해 이루게 되는 성과다. 성품 변화는 이렇게 쉽지 않다. 왜 너희에게 쉽지 않다고 말하겠느냐? 너희가 소극적으로 되는 게 걱정되지 않겠느냐? 그건 너희에게 성품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런 비현실적인 이미지, 외식하는 이미지, 거짓된 영적인 이미지를 추구하지 않고, 실제에 맞지 않는 영적인 도리와 방법, 규례를 고집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면 너희에게 해롭고 자신에게 유익이 전혀 없을 것이다.
방금 성품의 한 방면인 ‘강퍅함’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강퍅함은 통상적으로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일종의 태도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게 분명하지 않지만, 특별히 드러나는 게 분명할 때는 쉽게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사람은 너무 완고해.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니까. 너무 강퍅해!” 성품이 강퍅한 사람은 모두 한 가지로만 단정 짓고 어떤 것을 끝까지 고집하며 놓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의 성품은 이 한 방면뿐이겠느냐? 당연히 아니다. 그 외에도 아주 많다. 지금부터 말하는 성품은 무엇인지 들어 보아라. 누군가 말한다. “저는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 말고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진리가 있고, 사람에게는 진리가 없으니깐요. 사람은 누구든지 패괴 성품을 갖고 있고, 사람이 하는 말은 확실하지 않아요. 그래서 전 하나님께만 굴복합니다.” 이것이 맞는 말이냐? (아닙니다.) 왜 그럴까? 이것은 어떤 성품이냐? (교만하고 잘난 체하는 성품입니다.) (사탄의 성품, 천사장의 성품입니다.) 이것은 교만한 성품이다. 늘 사탄의 성품, 천사장의 성품이라고 하지 마라. 이렇게 말하는 건 구체적이지 않고 너무 두루뭉술하다. 사탄과 천사장의 패괴 성품은 너무 많다. 네가 천사장, 마귀, 사탄을 같은 선상에 놓고 말하는 것은 너무 두루뭉술해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그것이 교만한 성품이라고 한다면 좀 구체적이다. 물론 그가 이 한 가지 성품만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만한 성품이 너무 뚜렷하게 드러날 뿐이다. 그것이 교만한 성품이라고 하면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므로 이렇게 말하는 게 가장 적절하다. 어떤 사람은 특기나 은사, 잔재주가 조금 있어서 교회를 위해 어떤 일이라도 좀 하게 되면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쳐 든 채 읽고, 베끼고, 쓰고, 적으면서 영적인 사람처럼 행동하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지? 실제적인 일을 할 수 있어? 일은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면서 그게 영적인 거야? 당신들은 생명이 없어. 난 생명이 있고, 실제적인 일만 처리한다고.’ 이것은 무슨 성품이냐? 재능과 은사가 있고, 좋은 일을 좀 했다고 이를 생명으로 여겨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고 아무나 가르치려 들고 다른 사람들을 다 얕잡아 보는 것이다. 이것은 교만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함이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교만을 드러내느냐? (어느 정도 은사나 특기가 있고 실제적인 일을 할 수 있어 밑천이 있을 때입니다.) 그것은 한 가지 상황이다. 그러면 은사나 특기가 없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으냐? (역시 교만합니다.) 앞서 말한 그 사람은 항상 “하나님 말고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누가 들으면 ‘이 사람은 진리에 정말 잘 순종하는구나. 진리를 제외하고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다는데, 정말 맞는 말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보기엔 맞아 보이는 그의 이 말 속에는 교만한 성품이 담겨 있다. “하나님 말고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분명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번 물어보자. 이 말을 한 사람이 정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절대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가장 교만한 사람이다. 그가 한 이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맞는 말 같지만 사실은 교만한 성품이 가장 교활하게 나타난 방식이다. 그는 ‘하나님 말고’라는 말로써 자신이 이성적임을 증명했지만 사실 그렇게 말함으로써 뻔한 거짓말이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어리석지 않으냐? 너희가 볼 때 가장 교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어떤 말을 하는 사람이 가장 교만한 사람이냐? 아마 다들 교만한 말들을 들어 봤을 텐데 가장 교만한 말이 무엇인지 너희는 아느냐? “저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하나님 말씀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라고 감히 말할 사람이 있느냐? 오직 큰 붉은 용이라는 악마만이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 말고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습니다.”라고 한다면 그는 큰 붉은 용과 별반 다를 게 없는데, 교만함에 있어 나란히 천하제일이며, 가장 교만한 사람에 속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똑같이 교만한데 그 안에 차이가 있겠느냐, 없겠느냐? 경계는 어떻게 정해야 하느냐? 패괴된 인간은 누구나 교만한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그 교만에도 차이가 있다. 교만이 어느 정도에 달하면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는데, 말할 때 이성적이냐 아니냐가 그 경계가 된다. 교만해도 어느 정도 이성적인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일 경우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어떤 사람은 비이성적으로 교만한데, 쉽게 말해 눈에 뵈는 게 없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 사람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교만하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막무가내로 교만을 떨 줄밖에 모른다. 이런 것이 모두 교만한 성품의 표출과 모습이다. 교만한 성품이 없다면 “하나님 말고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교만한 성품이 있으면 분명 교만한 모습을 드러내는데, 틀림없이 교만한 말을 하고, 교만한 행동을 할 것이다. 이성이라곤 전혀 없다. 누가 “저는 교만한 성품은 없지만 그런 부분의 표출은 있어요.”라고 한다면 말이 되느냐? (말이 안 됩니다.) 또 “저는 통제가 잘 안 돼서 실수로 교만한 말이 나와요.”라고 한다면 말이 되느냐? (말이 안 됩니다.) 왜 말이 안 되느냐?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근본 원인이 무엇이냐?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다. 그는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누가 “당신은 왜 그렇게 교만해요? 당신이 뭐 교만할 게 있나요?”라고 하면서 농담이라도 하면 부끄러워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체면이 상하기 때문에 핑계를 대서 감추고, 꾸미고, 포장하면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가 한 말은 말이 되지 않는다. 교만한 성품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입을 열지 않더라도 교만하다. 교만은 본성 안에 있고, 마음속에 숨어 있어서 언제라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므로 성품이 변화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교만하고 독선적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새로 선출된 리더가 교회에 왔는데,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표정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고 하자. 그는 생각한다. ‘나를 반기지 않는 건가? 새로 뽑힌 리더인 내게 어떻게 저런 태도를 보이지? 왜 나를 좀 다르게 봐 주지 않는 거야? 난 형제자매들이 뽑은 사람이라고. 그러니 내 영적 분량이 당신들보다 크지 않겠어?’ 그래서 그는 말한다. “저는 새로 당선된 리더입니다. 불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누가 하나님의 말씀 구절을 더 많이 외우고 이상 방면의 진리를 교제할 수 있는지 겨뤄보기로 하죠. 저보다 진리를 더 명확히 교제하는 사람이 있으면 리더 자리를 그 사람에게 넘기겠습니다. 어떠세요?” 이건 어떤 행동이냐? 사람들이 자신에게 냉랭한 태도를 보이자 그는 불만을 갖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보복하려는 것이다. 리더가 되자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 한다. 이것은 어떤 성품이냐? (교만한 성품입니다.) 교만한 성품을 해결하는 것이 쉽겠느냐? (쉽지 않습니다.) 사람의 교만한 성품은 수시로 드러난다. 어떤 사람은 누가 새로운 깨우침과 인식에 대해 교제하는 걸 들으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난 왜 저렇게 교제하지 못할까? 안 되겠다. 머리를 짜내서 저 사람보다 더 수준 있게 교제해야겠어.’ 그러고는 이치를 잔뜩 읊어 대며 다른 사람을 넘어서려 한다. 이건 어떤 성품이냐? 바로 명예와 이익을 다투는 것으로, 이 역시 교만한 성품이다. 성품에 관계된 일은 설령 네가 가만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아도 여전히 내면에 존재하고, 네 생각과 표정에도 그대로 드러날 수 있다. 교만함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갖은 방법으로 억제하고, 애써 통제하고, 조심한다고 해도 소용이 있겠느냐? (소용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만한 말을 내뱉으면 바로 알아차린다. ‘또 교만한 성품을 드러내다니 정말 부끄럽구나.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지만 이렇게 다짐해도 소용없다. 그것은 네가 아닌 성품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성품을 드러내지 않으려면 교만한 성품을 해결해야 한다. 그것은 말 한마디를 고치는 일도 아니요, 행동 하나를 바로잡는 일도 아니요, 규례 하나를 지키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성품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일이다. 성품이 무엇인지 이야기했으니 자신에 대한 이해가 더 깊고 투철해지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표면적인 성격, 성질, 나쁜 습관을 인식하고, 어떤 우매한 일,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는지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해야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떤 악을 저지를 수 있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관건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거친 제 성격을 고치기 힘든데, 언제면 이 성품이 변화될까요?”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말주변이 없고 말을 잘할 줄 몰라서 남들한테 상처 주고 미움만 받는데, 언제쯤 변화될까요?” 이 말이 맞느냐? (아닙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그것은 본성의 것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 성격이 본성을 결정하는 게 아니다. 성격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해도 패괴 성품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두 가지 방면의 성품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첫 번째는 강퍅함이고, 두 번째는 교만함이었다. 교만함에 대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교만한 모습을 많이 드러내는데, 너희는 그것이 성품의 한 면이라는 것만 알면 된다. 또 다른 성품이 하나 있다.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남과 대화할 때면 속으로 늘 궁리하고 가공하기 때문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떤 것이 참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 알 수가 없다. 오늘 하는 말과 내일 하는 말이 다르고, 이 사람에게 하는 말과 저 사람에게 하는 말이 다른데, 죄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겠느냐? 네가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려 해도 쉽지가 않다. 그의 입에서는 정확한 말 한마디를 얻어 낼 수가 없다. 이것은 어떤 성품이냐? 바로 간사함이다. 간사한 성품은 쉽게 변화할 수 있느냐? 이것은 가장 변화하기 힘들다. 성품과 관련되었다 하면 사람의 본성과 관련되고, 본성의 것은 가장 변화하기 힘들다. 흔히들 “강산은 쉽게 변해도 본성은 바뀌기 어렵다.”라고 하는데,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간사한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일을 하든, 거기에는 모두 속셈과 목적이 담겨 있으며, 속셈과 목적이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네가 그의 속셈과 목적을 알려고 한다면, 그는 한 마디도 더 하려 하지 않고, 일단 사실이 한 마디라도 드러나면 어떻게든 둘러대며 진상을 알지 못하게 널 미혹할 것이다. 간사한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아무도 실상을 알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그와 얼마 동안 함께했든 아무도 그의 진심을 알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간사한 사람의 본성이다. 간사한 사람이 말을 얼마나 하든 사람들은 영원히 그의 속셈이 무엇인지, 그의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 그가 이루려는 목적이 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설령 그의 부모라 해도 알기 힘들다. 간사한 사람을 파악하려면 아주 어려운데, 아무도 그의 마음을 알아낼 수 없다. 간사한 사람이 말하고 행동할 때는 바로 이런 식이다. 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절대 얘기하지 않고, 실상을 털어놓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성품이 아니겠느냐? 사람에게 간사한 성품이 있으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든 관계없이, 너는 내면이 줄곧 그 성품에 지배받아 수작을 부리고, 남들을 속이고, 우롱하고, 사실을 은폐하고, 스스로를 포장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간사함이다. 간사한 사람의 구체적 행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이 자신에 대한 인식을 얘기하는데, 계속 스스로가 좋게 변했다고 하면서 상대가 이를 믿게 하려 하지만 실제 사정은 얘기하지 않는다. 여기에 한 가지가 숨겨져 있는데, 이는 일종의 성품, 즉 간사함을 의미한다. 너희가 분별할 수 있는지 보자. 이 사람이 말했다. “최근 어떤 상황을 체험했는데, 그동안 하나님 믿은 일이 다 헛수고 같아요. 아무것도 얻은 게 없고, 빈곤하고 가련해요! 최근에는 좋은 모습도 별로 보이지 못해서 회개하고 싶어요.” 그런데 이 말을 하고 한동안 지나도 그에게서 회개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건 어떤 문제이냐? 이것이 바로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한다. ‘이 사람이 전에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진심으로 회개하는 게 분명해. 예전의 시선으로 사람을 보지 말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그의 말에 사람들은 속으로 이렇게 고민하고,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금 그의 내적 상태는 정말 그가 말한 것과 일치하느냐?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는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았지만 그가 사람들에게 한 말은 사람들이 그가 정말 회개하고 좋게 변했다고, 예전과는 달라졌다고 생각하도록 일종의 착각을 일으켰다. 이것은 그가 말을 해서 도달하려는 목적이다. 그가 그렇게 말해서 사람들을 속일 때 드러낸 성품은 무엇이냐? 바로 간사함이다. 너무나 음험하다! 사실 그는 본인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실패했고, 본인이 빈곤하고 가련하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영적인 용어, 영적인 말로 사람들을 속임으로써 사람들에게서 좋은 시선,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하는 목적을 이루었다. 이것은 간사함이 아니냐? 이것이 바로 간사함이며, 사람이 너무 간사하면 변화하기 힘들다.
또 말할 때 결코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고 늘 감추고 숨기는 사람들도 있다. 언제나 남을 떠보는 말로 사람을 시험하는가 하면, 늘 남의 실제 사정을 알려고 하면서도 자기 속마음은 밝히지 않는다. 누구든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그의 실제 사정을 알려는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즉, 어떤 일을 할 때 그는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아 하고, 누구에게 알리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어떤 성품이냐? 이게 바로 간사한 성품이다. 이런 사람은 엄청 약삭빨라 누구도 그를 간파할 수 없다. 간사한 성품을 지녔다면 의심할 것도 없이 간사한 사람이고, 그의 본성 본질이 바로 간사함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진리를 추구할 리가 있겠느냐? 사람들 앞에서도 사실을 말하지 않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사실을 말하겠느냐?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간사한 사람은 언제든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진실하겠느냐? 그는 하나님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느냐? 틀림없이 속으로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어디 계셔? 안 보이시잖아! 어떻게 증명해?’, ‘하나님이 모든 걸 주재하신다고? 정말일까? 사탄 정권이 하나님 믿는 사람을 이토록 광적으로 핍박하고 잡아가는데 하나님께선 왜 그것을 멸하지 않으실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신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구원하실까? 그게 정말일까? 잘 모르겠는데.’, ‘하나님을 믿으면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증명할 수 없으니 확실히 말하긴 힘들지.’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 가득한데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겠느냐? 그럴 리 없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걸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유를 둬야지. 난 저들처럼 바보같이 살진 않을 거야. 모든 걸 하나님께 바치면 앞으로 어떻게 사느냔 말이야. 누가 나를 먹여 살려 준대? 뒷일을 생각해야지.’ 간사한 사람이 얼마나 ‘영리한지’, 얼마나 멀리까지 생각하는지 봐라.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예배 때 자신의 패괴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인식하고, 자기 마음속에 감췄던 것을 모두 교제하며, 또 자기가 몇 차례 음란을 저질렀는지 사실대로 말하는 것을 보고 생각한다. ‘바보 같으니라고! 그런 사생활을 왜 남들한테 얘기하는 거야? 맞아 죽어도 말하면 안 되지!’ 간사한 사람은 이렇다. 죽는 한이 있어도 사실을 말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실제 사정을 털어놓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있다. “저는 과오가 있습니다. 나쁜 짓을 몇 번 저질렀는데, 사람들에게 대놓고 얘기하자니 좀 부끄럽습니다. 어쨌든 사생활이고 떳떳한 일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하나님께는 숨길 수 없습니다. 그분께는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씀드려야죠. 제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나 사생활을 사람들에게는 말을 못 하지만 하나님께는 꼭 말씀드려야죠. 모두를 모르게 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모르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정직한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다. 하지만 간사한 사람은 누구든 경계하고, 누구도 믿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않고 실제 사정을 털어놓지 않아서 아무도 그를 간파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이 가장 간사한 사람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람은 누구나 간사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설령 네가 예배 시간에 마음을 열고 자신의 문제를 교제한다고 해도 네게 간사한 성품이 없겠느냐? 너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예를 들어, 허영과 체면에 관계되지 않은 일, 고개를 못 들 정도는 아닌 일, 솔직히 얘기해도 책망과 훈계를 받지 않을 일이라면 너는 전부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네가 진리 원칙에 위배된 일을 저질러서 솔직히 얘기할 경우 모두에게 반감과 혐오를 산다면, 그 일을 예배에서 솔직하게 교제할 수 있겠느냐? 만약 네가 입에 담기도 어려운 일을 저질렀다면 솔직하게 털어놓기란 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혹여나 조사하고 책임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너는 그 일을 어떻게든 감추려 할 것이다. 그 일이 밝혀질까 봐 늘 꽁꽁 감추고 어물쩍 넘기려고만 할 것이다. 이것이 간사한 성품이 아니냐? 너만 조용히 있으면 아무도 모를 것이고, 하나님도 별수 없을 거라 믿는데, 그것은 틀렸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한다. 만약 이 점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너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간사한 자는 사람은 물론 감히 하나님도 속이고, 간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고 거룩하며,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사람이 바로 간사한 사람이다. 따라서 간사한 사람은 구원받기가 누구보다 힘들다. 본성이 간사한 사람은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거짓말로 하나님도 속이려 하면서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데, 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가끔 패괴 성품이 드러나 거짓말로 사람을 속일 뿐, 하나님에게만큼은 솔직하게 털어놓고 회개한다면, 이런 사람은 그래도 구원받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 만약 네가 정말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하나님에게 솔직하게 터놓고 얘기해서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앞으로 다시는 하나님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언제라도 하나님을 속이지 말아야 하며, 나아가 하나님에게 숨기지 말아야 한다. 사실, 굳이 남들이 알 필요가 없는 일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된다. 일을 할 때는 절대 하나님을 모르게 하지 말고, 남에게 말하기 부적절한 일은 모두 하나님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다. 남에게 털어놓을 필요가 없는 일이 있는데, 그것을 간사하다고 할 수는 없다. 간사한 사람은 다르다. 그는 어떤 일이든 숨겨야 하고, 남에게 얘기하면 안 된다고, 사생활에 해당하는 일은 더더욱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얘기해서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없는 일이라면 하나님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간사한 성품이 아니겠느냐? 너무나도 간사한 사람이다! 하나님에게조차 사실을 말할 수 없을 만큼 간사하고, 무슨 일이든 하나님을 모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하나님에 대해 진실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그는 하나님을 의심하며, 속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믿음은 거짓이 아니겠느냐? 그런 자는 바로 불신파요, 거짓 신자다. 너희는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하나님을 경계한 적이 있느냐?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은 어떤 성품이냐? 이것이 바로 간사한 성품이다. 간사한 성품은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에게나 있다. 진리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회개하고 변화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일이 닥치면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 관념과 생각 혹은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거나 몰래 헐뜯는 일을 저지른 뒤, 스스로 반성하고 숨김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다. 만약 입에 담기도 어려운 일을 저지르면 마음을 걸어 잠그고 영원히 마음속에 묻어 두려 한다. 남에게 얘기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말하지 않고, 심지어 어떻게든 거짓 이미지를 이용해 가리고 감추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간사한 성품이다. 네가 이렇게 생각할 때, 이런 내적 상태로 살아갈 때, 너는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자신은 정직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한 정직한 사람의 모습이 자신에게는 없음을 잘 알아야 하고, 자신이 바로 영락없는 간사한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본인이 어리석고 자질이 떨어지며, 머리 회전은 느리지만 간사한 사람임을 잘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자신의 뚜렷한 패괴 표출을 잘 알고 분별해서 진리를 구해 해결하는 것, 이것이 자신을 인식할 때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만약 정말로 자신의 간사한 성품을 인식했다면 늘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분별하고 해부해서 간사한 성품의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간사한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희망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게 간사한 사람이고 어떤 게 정직한 사람인지 명확히 분별하지 못하는데, 이는 자질이 너무 떨어진다는 의미이다. 본인 자질이 떨어지고, 어리석고 무지하고, 식견이 없고, 말주변이 없어서 말을 잘 못하고, 다른 사람과 잘 지낼 줄 모르고, 늘 잘 속는 것 등을 자신이 정직한 사람이라는 근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리고 늘 사람들에게 말한다. “저는 너무 정직해서 늘 손해를 보고, 잇속을 차릴 줄 몰라요. 하지만 하나님은 저를 좋아하시죠. 제가 정직한 사람이라서요.” 이 말이 맞느냐? 이는 사람을 미혹하는 터무니없는 소리이며 뻔뻔하고 염치없는 말이다. 어리석은 사람, 바보 같은 사람이 어떻게 정직한 사람일 수 있겠느냐? 둘은 전혀 다르다. 너는 네가 저지른 그 어리석은 일을 정직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커다란 착각이다. 다들 알다시피 바보도 교만하고 잘난 체하며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아무리 우매하고 자질이 떨어져도 얼마든지 거짓말로 남을 속일 수 있다. 이것이 사실 아니더냐? 바보나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이 정말 나쁜 짓을 안 하겠느냐? 정말 패괴 성품이 없겠느냐? 분명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남에게 거짓말한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떳떳하지 못한 일은 차마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한다. 교회에서 그의 문제를 처리할 때 그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조금도 순종하지 않는다. 그리고 뒤에서 사람들을 떠보고 실제 사정을 알아보려 한다. 이렇게 간사한 사람이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은 조금도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정직한 사람으로 생각하니 뻔뻔하지 않으냐? 너무나 어리석다! 이런 사람은 절대 정직한 사람도 아니고, 착실한 사람도 아니다. 바보는 어디까지나 바보이고, 멍청이는 어디까지나 멍청이다. 간사함이 없는 착실한 사람이야말로 정직한 사람인 것이다.
간사한 사람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느냐? 간사한 사람의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누구와 함께 지내고 교제하든 항상 속내를 알지 못하게 한다. 늘 남을 경계하고, 남몰래 행동하고, 속마음을 결코 털어놓지 않는다. 때로는 자신을 인식하는 말을 하지만 핵심이 되는 부분이나 단어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말실수를 할까 무척 겁낸다. 그는 이런 것에 매우 민감하게 굴며 다른 사람이 뭔가 눈치챌까 봐 두려워한다. 이것이 일종의 간사한 성품이다. 또 남들에게 착실하고 고생을 견디며 불평하지 않는 사람, 혹은 영적이고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거짓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자신이 분명 그런 사람이 아니면서 억지로 그럴듯하게 꾸민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 준다. 이 또한 간사한 성품이다. 간사한 사람은 말하거나 행동할 때 그 이면에 항상 속셈이 있다. 속셈이 없으면 말하지 않고 속셈이 없으면 행동하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내면에 있는 어떤 성품의 지배를 받은 것인데, 바로 간사한 성품이다. 간사한 성품이 있으면 변화하기 쉽겠느냐? 너희는 얼마나 변화했느냐? 정직한 사람이 되길 추구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느냐? (네, 그쪽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몇 걸음 내디딘 것이냐, 아니면 일종의 지향점에 머물러 있는 것이냐? (여전히 지향점일 뿐입니다. 어떤 일은 하고 난 뒤에야 그 안에 사람을 기만하는 요소가 있었고 다른 사람에게 거짓 이미지를 보여 주었음을 발견하곤, 자신이 간사하게 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것이 간사함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 그것이 일종의 패괴 성품임을 인식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간사한 것들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이냐? (본성입니다.) 그렇다.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패괴된 것들이 사람을 몹시 교란하지 않느냐? 무척이나 성가시고 대처하기 힘들다. 벗어 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 정말 골치가 아프다. 어느 부분이 골치 아프냐? 무엇이 널 고통스럽게 만드느냐? (변화되고 싶은데 이겨 내지 못할 때가 무척 고통스럽습니다.) 한편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도 골치 아픈 정도는 아니다. 사람이 간사한 성품에 지배되면 언제 어디서든 거짓말로 남을 속일 수 있다. 어떤 일이 생기든 거짓말로 남을 속이고 미혹할 궁리만 하게 된다. 마음처럼 자제가 안 되는데 자기도 어쩔 수가 없다. 이 점이 바로 문제다. 이것이 바로 성품의 문제이다. 간사한 성품을 드러내는 데는 몇 가지 방식이 있느냐? 시험, 기만, 경계가 있고, 그리고 의심, 위장, 위선이 있다. 그런 행위가 드러내고 나타내는 성품이 바로 간사함이다. 이런 주제들에 관한 교제를 통해 너희는 간사한 성품을 예전보다 더 확실히 인식하게 되지 않았느냐? “저는 간사한 성품이 없고, 간사한 사람도 아닙니다. 벌써 정직한 사람에 가까워졌습니다.” 아직도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정직한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순박하고 우직한 사람, 어디를 가든 업신여김을 받고 소외되는 사람, 혹은 말이나 행동이 남보다 어눌한 사람을 모두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또 바보나 어리석은 사람, 늘 멍청한 짓을 저질러서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사람도 자신을 가리켜 정직한 사람이라고 한다. 배운 것이 없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사람, 열등감이 있는 사람도 자신을 정직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과연 어디가 잘못된 것이냐? 그들은 정직한 사람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겠느냐? 주로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하는 정직한 사람이 바보나 멍청이, 교육 수준이 낮고 말도 어눌하고 억압받는 사람, 또 쉽게 당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 이면에는 사회적 지위가 낮고 머리도 나쁘고 늘 억압받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고, 하나님이 이런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면 누구를 구원하느냐는, 그런 의미가 숨겨져 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구원하는 사람들이 정말 그런 사람들이겠느냐? 그건 하나님 뜻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 자질이 좋고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고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는 사람, 진리를 받아들이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는 사람,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경배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다수가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 출신이라 노동자나 농민 출신이 많지만, 결코 바보나 멍청이, 얼간이가 아니다.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고 진리에 순종할 줄 아는 슬기로운 사람이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포기할지라도 하나님을 따르며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으려는 정의로운 사람,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정직한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칭찬과 축복을 받고 온전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전(殿)의 기둥이 되는, 하나같이 금은보화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 바보나 멍청이, 그릇된 자, 얼간이들은 도태될 대상인 것이다. 불신파나 그릇된 자들이 하나님 사역과 경륜을 뭐로 본 것이냐? 폐품 수거소로 생각한 것이 아니냐? 이들은 자질만 너무 부족한 게 아니라 그릇된 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다. 이 정도로 어리석은데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원하겠느냐? 오랜 시간 하나님을 믿었는데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헛소리만 지껄이면서 스스로는 정직한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너무 뻔뻔스럽지 않으냐? 이런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해 늘 하나님의 뜻을 곡해한다. 게다가 자기가 곡해한 내용을 가는 곳마다 진리인 양 퍼뜨린다. “사람이 좀 괄시받아도 괜찮고, 좀 손해 보고 바보 같아도 괜찮아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죠.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구원하시죠.”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 역겹다. 이는 심하게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역겹기 그지없구나! 하나님나라의 기둥, 하나님에게 구원받는 이기는 자들은 모두 진리를 깨달은 사람, 지혜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천국에 분깃이 있다.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 염치를 모르는 사람, 사리 분별을 못하는 사람,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한 사람, 덜떨어지고 모자라는 부류의 사람은 하나같이 얼간이가 아니냐? 이런 자들이 어찌 천국에 분깃이 있을 수 있느냐? 하나님이 말하는 정직한 사람은 진리를 깨달으면 실행할 수 있는 사람,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 하나님께 숨김없이 털어놓는 사람, 일을 처리할 때 원칙이 있는 사람,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고, 일을 처리할 때 원칙을 중시하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고자 추구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정직한 사람이다. 정직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정직한 사람의 본질이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또 정직한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기에 정직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정직하고, 진리를 실행하기에 정직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어리석고 분별이 없다. 정직한 사람은 결코 사람이 생각하는 착실한 사람, 멍청이, 어리석은 자, 바보가 아니라 정상 인성을 갖추고,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다. 그리고 정직한 사람의 슬기로운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직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축복받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고, 빛 속에서 살아가게 해 준다. 정직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며 정직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인간이 아닌 짐승, 인간의 탈을 쓴 금수이다.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요구대로 처신해야 하고,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경험해야 한다.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되고 진리를 실행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게 되면 정직한 사람이 된다. 어리석은 사람, 바보, 착실한 사람은 절대 정직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건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이 되어 간사함과 가식을 벗어 버리고, 거짓말하거나 속이지 말고,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실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이라야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정예병이 되라고 요구하는데, 그리스도의 정예병이란 무엇이냐? 반드시 진리 실제를 갖추고 그리스도와 한마음 한뜻이어야 한다. 언제 어느 때건 하나님을 높이 받들고 증거할 수 있어야 하고, 진리로 사탄과 전쟁을 치를 수 있어야 한다. 범사에 하나님 편에 서서 간증이 있고 진리 실제를 살아 냄으로써 사탄에게 수치를 안기고 하나님을 위해 아름다운 승리를 거둘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정예병이다. 그리스도의 정예병은 이기는 자, 사탄을 이기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간사한 사람이 되지 말고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바보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간사한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말이다. 이것이 진리를 실행해서 이룰 수 있는 성과이다. 이것은 행동 방식의 변화가 아니고, 말 한 마디를 덜 하거나 더 하는 것, 혹은 어떻게 행동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속셈, 사람의 마음과 생각, 사람의 야심과 욕망에 관한 것이다. 패괴 성품의 표출에 속하는 것과 잘못된 것에 속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근본적으로 바꿔 진리에 부합하게 해야 한다. 성품이 변화되려면 사탄 성품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간사한 성품의 본질, 즉 간사함은 바로 사탄의 성품이자 마귀의 몰골이라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네가 사탄을 증오하고 버릴 수 있다면 패괴 성품을 쉽게 벗어 버릴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내면에 간사한 내적 상태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또 그것이 간사한 성품의 표출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할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간사한 성품은 쉽게 변화하지 못한다. 우선은 네가 드러내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측면의 패괴 성품인지를 인식해야 한다. 만약 네가 드러낸 그것이 간사한 성품이라면 속으로 증오하겠느냐? 만약 증오한다면 너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겠느냐? 자신의 속셈을 단속하고 자신의 관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우선 이런 측면에서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요구에 도달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도 사람도 속이지 않아야 하며, 설령 상대가 좀 바보 같거나 어리석더라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만약 바보 같은 자, 어리석은 자를 속인다면 그건 부도덕한 짓이니 그런 자는 곧 마귀다. 정직한 사람이 되려면 그 누구에게도 거짓말을 하거나 속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탄, 마귀에게는 반드시 지혜롭게 대해야 한다. 지혜를 발휘하지 않으면 사탄, 마귀에게 우롱당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기 쉽다. 지혜를 발휘하고 진리를 실행해야만 사탄을 이기고 그것에게 치욕을 안길 수 있다.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 미련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은 영원히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이고, 사탄에게 미혹되고 희롱당하며 짓밟혀서 결국 사탄에게 삼켜질 수밖에 없다.
다음은 네 번째 방면의 성품에 대해 얘기해 보자. 어떤 사람이 예배 때 자신의 내적 상태를 어느 정도 교제하면서도 문제의 본질, 개인적인 속셈과 생각에 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다. 누군가 그에게 속셈과 목적이 있다고 폭로하자 그는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지만, 상대가 더 깊이 폭로하고 해부하자 견디지 못해서 자리를 뜨고 말았다. 왜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느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마주하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건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냐? 일부 리더 일꾼들은 어떤 설교를 가장 듣기 싫어하느냐? (적그리스도와 거짓 리더를 분별하는 것에 관한 설교입니다.) 그렇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계속 적그리스도, 거짓 리더만 분별하고, 바리새인 얘기만 하시는구나. 이런 얘기는 왜 한번 시작하시면 끝이 없을까? 머리가 터질 것 같군.’ 거짓 리더, 거짓 일꾼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할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는 핑계를 대며 가 버린다. 이렇게 ‘가 버린다’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빠져나간다고 하고, 자리를 피한다고 한다. 왜 자리를 피하겠느냐?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사실이면 한번 들어 보면 된다. 들으면 너에게 유익이 된다. 엄한 말, 받아들이기 힘든 말은 우선 적어 둔 다음, 자주 곱씹어 보고, 천천히 소화하고, 천천히 변하면 되는데, 피할 일이 뭐가 있느냐? 그는 사람을 심판하는 말이 너무 엄하고 듣기 거북해서 반발심이 들고 반감이 생겼다. ‘내가 적그리스도, 거짓 리더도 아닌데, 왜 계속 나에 대해서만 얘기하시고, 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얘기하시지 않지? 악인을 분별하는 방면에 관한 얘기나 좀 하시지, 나에 대해서 얘기하시지 말고!’ 그는 회피하고 반감을 품었다. 이것은 무슨 성품이냐?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항상 자신을 위해 이치를 따지고 해명하는데, 거기에 패괴 성품의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다. 리더 일꾼에게 이런 내적 상태가 있으면, 보통의 형제자매들에게는 이런 내적 상태가 있겠느냐, 없겠느냐? (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다들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글귀와 도리의 것을 얘기하기 좋아하는데, 모두가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개개인의 문제, 실제 어려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입을 닫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결혼에 얽매여서 본분도 이행하지 않으려 하고, 진리도 추구하지 않으려 했다. 그에게는 결혼이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자 짐이 되어 버렸다. 예배 시간에 다 같이 이 측면의 내적 상태를 교제하는데, 그 내용이 본인 상황과 일치하니 자기를 가리키는 말처럼 느껴져 말했다. “당신들이 진리를 교제하는 것은 좋은데요, 왜 저에 대해 얘기하세요? 당신들은 문제가 없습니까? 왜 저만 가지고 그러세요?” 이건 어떤 성품이냐? 예배 시간에 진리를 교제할 때는 실제 문제와 결부시키고 해부해서 사람들에게 인식한 것을 얘기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무슨 성품이냐? 명확히 분별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은 모두 진리를 싫어하는 모습에 속하는데,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사람이 진리를 싫어하면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패괴 성품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느냐?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절대 아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사람이 설교를 듣는다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느냐? 수확이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설교는 사람의 각종 패괴된 내적 상태를 폭로하고, 그것을 사람이 인식하도록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해부한 다음, 실행 원칙을 교제해서 사람들에게 실행 길이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효과에 도달한다. 폭로된 내적 상태 중에 본인에게 해당되는 내용이 있거나 자신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것을 듣고 알게 되면 그는 창피한 나머지 화가 난다. 그러면 일어나서 예배 자리를 떠날 수도 있고, 설령 자리를 뜨지 않는다고 해도 언짢아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예배드리고 설교를 듣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설교를 듣는 것은 진리를 깨닫고 자신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 언제나 자신의 문제가 폭로될까 두렵고, 자기 얘기가 나올까 봐 두렵다면 왜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패괴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느냐? 패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하나님 믿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여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살아 내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은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룰 수 있다. 만약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책망과 폭로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구원받을 방법이 없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교회마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냐, 적으냐? (많습니다.) 이는 교회 내 하나님 선민들의 실제 상황, 실제 문제가 아니냐?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 바로 패괴 성품인데, 만약 이런 성품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완전 불가능하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무척 힘들어한다. 어려움이 결코 적지 않다. 이 문제는 모두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어느 정도 받아야 해결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설교에서 폭로한 내적 상태를 근거로 자신과 대조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무슨 성품이냐?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입니다.) 이것이 바로 네 번째 패괴 성품인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다. 어느 정도로 싫어하느냐? (하나님 말씀을 읽으려 하지 않고,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고, 진리 교제도 원하지 않는 정도입니다.) 이것이 가장 두드러진 모습이다. “당신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군요. 본분 이행을 위해서 가정도 직장도 내려놓고, 그동안 꽤 고생하고 대가를 치렀잖아요.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크게 축복하신다고 했어요.”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 측면의 진리에 대해 너는 아멘 하고 받아들인다. 상대가 말을 계속 이어 나간다. “하지만 그래도 진리를 향해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늘 속셈이 있고, 자기 뜻대로 함부로 군다면 언젠가는 하나님을 거슬러 그분께 혐오받을 겁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면 너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너는 진리를 교제하는 얘기를 듣고도 받아들이기는커녕 화가 나고 속으로 반박한다. ‘당신네는 하루 종일 진리를 교제하는데, 당신들 중 천당에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못 봤다고.’ 이것은 어떤 성품이냐?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입니다.) 실행을 얘기하면서 너에게 그 일을 진지하게 따지면 너는 극도로 반감을 품고, 짜증을 내고, 반발하는데,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은 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바로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이런 성품에 의해 나타나는 일종의 내적 상태이다. 책망받을 때는 속으로 무척 반발한다. ‘듣기 싫어! 듣기 싫다고!’ 혹은 ‘왜 다른 사람은 책망하지 않으면서 나한테만 그러는 거지?’ 진리를 싫어한다는 것은 어떤 뜻이냐? 무릇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뜻에 관계된 것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 것에 대해 때론 반감을 품고, 때론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때론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이거나 하찮게 생각하거나 대충 무성의하게 넘기고, 또는 아주 무책임한 태도로 대응하는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주된 모습은 진리를 들으면 반감을 품는 것만이 아니라 진리를 실행하기 싫어하는 것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진리를 실행할 때가 되면 뒤로 물러서고, 진리는 본인과 무관한 것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에서 교제할 때 매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글귀와 도리, 고상한 이론을 읊어 대며 사람들을 미혹하고 농락하기 좋아하는데, 그럴 때면 얼굴이 환해지고 기분이 한껏 들떠서 거침없이 떠들어 댄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드리고, 찬양을 듣고, 필기를 하는 등 하루 종일 하나님 믿는 일로 바쁜데, 한순간도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는 듯하다. 본분 이행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들은 정말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냐? 이들에게는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 없느냐? 이들의 실제 내적 상태는 언제 알 수 있느냐? (진리를 실행해야 할 때가 되면 도망치고, 책망과 훈계를 받았을 때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은 알아듣지 못해서이냐, 아니면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이냐? 둘 다 아니다. 그것은 본성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이는 바로 성품의 문제이다. 속으로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자 긍정적인 사물이고, 사람은 진리를 실행함으로써 성품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뜻을 충족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받아들이지도 실행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너희는 어떤 사람들에게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을 보았느냐? (불신파입니다.) 불신파가 진리를 싫어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고,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구원할 수가 없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진리를 싫어하는 모습은 어떤 경우에 볼 수 있었느냐? 아마 그는 네가 진리를 교제할 때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도 않고, 본인의 어려운 점이나 문제에 관련되어도 올바르게 대하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부분에서 이를 알 수 있느냐? (설교는 자주 듣는데, 듣고 나서도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점입니다.)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은 분명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가끔 진리를 조금 실행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 있느냐, 없느냐?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런 성품이 있으며, 단지 정도만 다를 뿐이다. 네가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너에게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네가 진리를 실행한다고 바로 생명 성품이 변화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반드시 패괴 성품의 문제를 해결해야 생명 성품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한 번 진리를 실행했다고 해서 패괴 성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네가 이 측면에서 진리를 실행했지만, 그렇다고 꼭 다른 측면에서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배경과 원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패괴 성품이 존재한다는 점이고,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그러니 성품이 변화되면 진리를 실행하는 일에서의 모든 어려움, 핑계, 이유와 같은 문제가 다 해결되고, 패역, 결함, 나쁜 버릇 등도 다 해결된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진리 실행에 늘 어려움이 따르고, 언제나 이유와 핑계가 끊이지 않는다. 범사에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먼저 성품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은 주로 어떤 것을 가리키느냐? 우선 한 가지 내적 상태에 대해 얘기해 보자. 설교를 듣는 일에 무척 관심이 많은 사람이 있다. 진리를 교제하는 말들을 들을수록 마음이 밝아지고, 흥분되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태도가 생긴다. 이런 것이 이 사람에게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 없다는 뜻이냐?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일고여덟 살짜리 아이가 하나님 믿는 얘기에 관심을 보이고, 또한 늘 부모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말한다. “이 아이는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도 없고, 아주 똑똑해서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재목이야. 하나님이 택하신 아이지.” 어쩌면 그 아이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반만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아직 어려서 인생의 추구 방향이나 목표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생관, 사회관이 형성되기 전에는 어린 마음에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아이에게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어린아이는 나이가 어리고 아직 인성이 성숙하지 않아서 체험도 전혀 없고 식견도 부족해서 진리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단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아이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고, 더욱이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다. 또한, 아이들은 경험도 없고, 속으로 과연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어떤 본성 본질인지 사람은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런데 단지 하나님을 믿고 설교를 듣는 일에 관심을 보인다고 해서 아이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어리석고 무지한 행동이다. 아이는 진리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진리를 사랑하고 싫어하고를 논할 수 없다. 진리를 싫어한다는 것은 주로 진리에도, 긍정적인 사물에도 관심이 없고 게다가 반감까지 가진다는 말이다. 진리를 알아들을 수 있고 또 긍정적인 사물임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여전히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에 반발하거나 반감을 품고, 무성의하게 얼버무리며 건성으로 대하는 태도와 내적 상태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은 누구에게나 다 있지 않으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하나님 말씀이 진리란 걸 알아도 좋아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최소한 현재로서는 못 받아들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겠느냐?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그 내면의 성품은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어떤 진리든 다 깨달았습니다. 다만 실행을 못 할 뿐이죠.” 이는 그가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이고, 그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 어떤 진리도 실행하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사람들도 있다. “제가 사업으로 돈을 이렇게 많이 번 것은 하나님의 주재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진정으로 축복해 주셨고 제게 참 잘해 주셨습니다. 많이 베풀어 주셔서 우리 가족이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이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셨죠.” 그 사람은 하나님이 축복해 준 것을 보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재했음을 알았고, 하나님의 축복 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아예 이렇게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인식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이 실패해서 형편이 어려워지고 생활이 힘들어졌다. 왜 그렇게 되었겠느냐? 그가 편안함을 탐하며 어떻게 하면 본분을 잘 이행할지 고민하지도 않고, 언제나 돈만 추구하려 하며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린 탓에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앗아 간 것이다. 그는 속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축복해 주고 그토록 많이 베풀어 주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려 하지 않고 가정을 벗어나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소심해서 늘 잡혀갈까 걱정하고 돈과 본인이 누리는 것들을 잃어버릴까 걱정했는데, 결국 하나님이 정말로 앗아 가 버렸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이 앗아 가고 징계를 내린 것임을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은 저를 한 번 축복해 주실 수도 있고, 두 번 축복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니 당신의 축복도 인류와 함께합니다.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어찌 되었든 당신의 축복과 약속은 변치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앗아 가신다 해도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그렇게 힘차지 않았다. 입으로는 순종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 후에 가만 생각해 보니 영 언짢았다. ‘예전에는 그렇게 잘 지냈는데, 하나님이 왜 앗아 가셨을까? 집에서 지내면서 본분을 이행해도 똑같잖아! 내가 뭔 지장을 줬다고!’ 지난날만 그리며 하나님에게 원망과 불만을 느끼니 우울하기만 했다. 그의 마음에 여전히 하나님이 있겠느냐? 그의 마음에 돈과 안일함, 편한 생활이 가득 차 있지만 하나님의 자리는 전혀 없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의 하나님이 아니다. 비록 ‘주신 이도 하나님,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알지만, ‘주신 이도 하나님’이라는 말은 좋아하고,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라는 말은 싫어하는 걸 보면, 그가 진리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이든 진리로 여기고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이 거둘 때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나님의 이런 주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항하고 불만을 품는다.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나온다. “하나님께서 저를 축복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본분을 이행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이 없고 저희 집안 형편도 너무 어려운데 어떻게 본분을 이행하겠습니까? 그럴 기분도 아닙니다!” 이건 어떤 성품이냐? 비록 속으로 이미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느꼈지만, 하나님이 앗아 갔을 때 그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어째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느냐? 돈을 내려놓지 못하고 편안한 생활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소란을 피우며 하나님에게 손 내밀어 억지로 달라고도, 사람의 힘으로 원래 재산을 되찾아 오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한 일에 대해 이미 낙담하고 풀이 죽어서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게 너무 맘에 들지 않고 이해가 안 돼요. 그런데도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가 인정하지 않으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런 게 일종의 성품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사탄이 바로 이런 성품이며,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부인한다. 이런 성품은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성품이다. 만약 이 정도로 진리를 싫어한다면 사람이 어느 지경까지 갈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은 물론, 끝까지 완고하게 대항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완전히 끝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은 과연 어떤 성질이냐? 진리를 싫어하는 것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을 싫어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말세에 행하는 심판 사역을 누구 하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을 폭로하고, 정죄하고, 형벌을 내리고, 시련과 연단을 내리고, 채찍질과 징계를 내리는 이런 도는 듣고자 하는 사람이 아주 적고, 하나님이 축복과 권면의 말씀, 약속의 말씀을 하면 누구나 듣고자 하고 아무도 거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의 죄를 사하고 사람을 용서하고, 은혜를 베풀어 사람을 축복하고, 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 주고, 사람에게 약속을 주는 은혜시대의 사역을 할 때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이려 하고, 다들 예수가 사람을 너무 사랑한다며 입을 모아 찬미했던 것과 같다. 하지만 하나님나라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이 심판 사역을 시작하고 수많은 진리를 선포해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무리 사람을 폭로하고 심판해도 아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이런 생각마저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을까?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잖아?’ 책망과 훈계, 채찍질과 징계라도 받으면 사람은 더욱 관념을 가진다. ‘이게 어디 하나님의 사랑이지? 이건 심판과 정죄의 말씀으로, 절대 사랑이 아니야. 이런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을래. 난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고!’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듣고 이렇게 말한다. “무슨 진리요? 이론에 불과하죠. 너무나 고상하고, 위대하고, 거룩해 보이지만 그건 듣기 좋은 말일 뿐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 아니냐?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다. 너희에게는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이 없느냐? (있습니다.) 방금 내가 말한 내적 상태 중 너희가 가장 많이 빠져들고, 너희에게서 가장 흔히 볼 수 있고, 또 가장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냐? (본분을 이행할 때 어려운 일이나 심판과 형벌이 닥치지 않기를 바라고, 모든 게 순조롭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재를 거부하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질과 징계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속으로는 여전히 반발하는 것, 이것이 한 가지 모습이다. 또 있느냐? (본분 이행에 효과가 있으면 기뻐하지만, 효과가 없으면 소극적이고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어느 방면의 모습이냐? (강퍅함입니다.) 정확히 알아야 한다. 혼동하지 말고, 함부로 규례에 맞추지 마라. 때로 사람의 내적 상태는 매우 복잡하다. 단순히 한 가지가 아니라 두세 가지가 섞여 있다면 너희는 어떻게 그 성질을 정할 것이냐? 어떤 때는 한 가지 성품이 두 가지 내적 상태로 나타나고, 어떤 때는 세 가지 내적 상태로 나타난다. 비록 내적 상태는 달라도 결국은 한 가지 성품으로 귀결된다. 진리를 싫어하는 이런 성품은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너희는 진리를 싫어하는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파헤쳐야 한다. 그러면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을 진실로 인식할 수 있다. 너는 진리를 싫어한다. 너는 어떤 것이 옳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때로는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 말씀이나 진리 원칙은 아닐 수도 있고, 때로는 긍정적인 사물, 옳은 일, 옳은 말, 옳은 제안일 수도 있다. 하지만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건 진리가 아니고 그저 옳은 말일 뿐이에요. 전 듣고 싶지 않아요. 사람의 말은 안 듣는다고요!” 이건 어떤 성품이냐? 여기에는 교만함, 강퍅함이 있고,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도 있다. 이 몇 가지 방면의 성품이 모두 담겨 있다. 각각의 성품은 모두 여러 가지 내적 상태를 생기게 할 수 있고, 한 가지 내적 상태는 또한 여러 가지 성품에 관련이 되기도 한다. 너는 그 내적 상태들이 어느 방면의 성품에서 생겨난 것인지 잘 알아야 한다. 그러면 각종 패괴 성품을 분별할 수 있다.
지금까지 네 가지 방면의 패괴 성품을 교제해 보았다. 어느 하나로도 사람에게 사형을 내릴 수 있다. 이게 너무 심한 말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패괴 성품은 모두 어떻게 생겨나느냐? 전부 사탄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탄 마귀, 유명 인사나 위인들이 퍼뜨린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이론이 사람 내면에 주입되어 각종 패괴 성품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성품들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부정적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것을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느냐? (진리를 근거로 하면 그렇습니다.) 이런 성품들은 진리에 위배되는 것,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에 딱 적대된다. 따라서 사람은 이런 패괴 성품 중 한 가지만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된다. 만약 이 네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으면 그건 큰일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그는 분명 죽음의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진리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어떤 성품이든 그것이 나타내는 성질은 모두 하나님을 겨냥하고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같이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네 성품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과 합할 수 없고, 너는 진리를 증오하는 사람이자 하나님의 원수이다.
이번에는 다섯 번째 방면의 성품을 교제해 보자. 우선 예를 하나 들어 볼 테니 이것이 과연 어느 방면의 성품인지 잘 생각해 보아라.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데 한 사람이 말을 너무 직설적으로 해서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상대는 속으로 불만을 품었다. ‘당신은 왜 말로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 내가 만만해 보여?’ 속으로 상대에 대해 증오가 생겼다. 이 문제는 사실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말로 남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때는 상대에게 사과하면 그 일을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상처를 받은 쪽은 넘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는 10년 걸려도 늦지 않다.”라고까지 한다면 이는 어떤 성품이냐? (악독함입니다.) 맞다, 바로 악독함이다. 이 사람은 성품이 흉악한 사람이다.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서 책망과 훈계를 받았다. 책망하고 훈계할 때 종종 꾸짖는 말이나 닦달하는 말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분명 불쾌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고 반박할 이유를 찾으려 했을 수도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책망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떤 건 듣기 너무 거북하단 말입니다. 창피하기도 하고 기분도 상하고요. 여태껏 하나님을 믿어 오면서 나름 애도 많이 썼는데 어쩜 저를 이런 식으로 대할 수 있죠? 왜 다른 사람은 책망하지 않지요? 분해서 못 살겠네요!” 이런 건 일종의 패괴 성품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런 패괴 성품이 단지 원망, 불복, 저항으로만 나타났을 뿐 아직 절정에 달하지 않고 극으로 치닫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징조가 나타나고 임계점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의 그다음 태도는 무엇이냐? 그는 순종하지 못하고, 속으로 괴롭고 불복하게 되어 분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치를 따지며 변명했다. “리더 일꾼이 책망하는 말이 다 맞다고 할 수도 없죠. 여러분은 받아들이겠지만 저는 싫습니다. 책망을 받아들이는 건 여러분이 어리석고 못나서 그런 거고, 저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못 믿겠으면 우리 한번 따져 봅시다. 누가 옳은지 보자고요.” 모두가 그에게 교제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우선은 순종해야죠. 당신은 본분을 이행할 때 불순물이 전혀 없을 수 있습니까? 당신이 한 일은 다 옳습니까? 설령 다 옳다고 해도 당신을 책망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도움이 된다니까요! 전에 그렇게 원칙을 교제해 줘도 듣지 않고 자기 뜻대로 마구 행동해서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그렇게 큰 손해를 입혔는데 책망과 훈계를 받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말씀이 좀 엄하고 듣기 거북한 것도 아주 당연한 겁니다. 뭘 그리 따집니까? 나쁜 짓을 했는데 어떻게 책망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 그는 계속해서 따지고 반항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드러내는 것은 어떤 성품이냐? 마귀의 성품, 흉악한 성품이다. 그가 뜻하는 바가 무엇이냐? ‘내가 그리 호락호락할 줄 알아? 누구든 내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생각하지 마. 잘못 건드렸다는 걸 알게 해 주지. 그럼 나중에 다시는 감히 날 책망하지 못하겠지. 그러면 내가 이기지 않겠어?’ 어떠냐? 성품이 드러나지 않았느냐? 성품이 흉악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성품이 흉악한 사람이 진리를 싫어하기만 하겠느냐? 하나같이 진리를 증오하는 자이다! 그런 자는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회피하거나 아니면 무시하는데, 마음속에 원한이 가득하다. 결코 몇 마디 따지는 말로 그칠 만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는 전혀 그런 태도가 아니다. 그는 불복하고 반항하면서 무식한 여편네처럼 너에게 시비를 걸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 지금 나를 모욕하고 있어. 일부러 날 난감하게 만들면서 말이야. 누가 모를 줄 알고? 내 감히 앞에서 대들지는 못하지만 기회를 봐서 보복할 테다! 당신이 날 책망하고 괴롭히는 거잖아? 사람들을 다 내 편으로 끌어들여서 당신을 고립시킬 거야. 그리고 괴롭힘 당하는 이 기분을 당신도 맛보게 해 주지!’ 이것이 바로 그의 속마음이다. 그의 흉악한 성품이 마침내 드러난 것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분노를 터뜨리기 위해 열심히 이유를 대며 스스로를 위해 변명하고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그러면 그는 기뻐하며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이게 악독함이 아니냐? 이런 걸 두고 성품이 흉악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책망과 훈계를 받기 전에는 순한 양 같다가 책망과 훈계를 받거나 본인의 실상이 폭로되면 사나운 늑대로 돌변해서 늑대의 본성을 드러낸다. 이것이 흉악한 성품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하느냐? (그와 관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를 자극하거나 그의 이익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배가 고프지 않은 늑대가 너를 잡아먹지 않은 것과 같은데, 그렇다고 그것이 늑대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느냐? 잡아먹으려고 할 때 그것이 늑대라고 한다면 그때는 늦지 않겠느냐? 잡아먹으려 하지 않을 때에도 너는 늘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늑대가 너를 잡아먹지 않는다고 해서 잡아먹고 싶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다. 때가 되면 그의 늑대 본성이 튀어나올 것이다.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각 부류의 사람이 다 드러난다. 어떤 사람은 생각한다. ‘왜 나만 책망하는 거야? 왜 맨날 나한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내가 만만해 보이나? 나도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고!’ 이것은 어떤 성품이냐? 정말 그 사람만 책망했느냐? 그건 사실과 다르다. 너희 중에 책망과 훈계를 겪지 않은 사람이 있느냐? 다들 겪었다. 리더 일꾼도 사역을 제멋대로 하거나 사역지침을 따르지 않을 때는 대개 책망과 훈계를 받았다. 이것은 교회 사역을 지키고, 사람이 치우친 길을 가는 일을 피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 절대 특정인을 타겟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은 분명 사실을 왜곡한 것이며 이 또한 흉악한 성품을 나타내는 모습이다.
흉악한 성품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그것은 진리를 싫어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사실 진리를 싫어하는 모습이 심각하게 나타나 대적하고 판단하는 성질을 띠게 되면, 이는 흉악한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성품에는 여러 가지 내적 상태가 포함된다. 진리에 관심이 없는 데서 싫어하는 데 이르면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상태로 발전하게 된다. 진리를 싫어하는 정도가 심해지면 하나님을 부정하고 증오할 수 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 있다. 이 몇몇 내적 상태가 흉악한 성품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내면에 더 심각한 내적 상태가 있다. 그 안에는 한 가지 성품, 즉 흉악한 성품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어떤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이 앗아 가는 바람에 이익에 손실이 생겼을 때 겉으로는 원망하거나 저항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다. 이것은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 기다리는 태도인데, 이는 확실히 진리를 싫어하는 내적 상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심각한 내적 상태는, 앉아서 죽기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저항하고, 하나님이 앗아 가는 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저항하겠느냐?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기도 하고, 혹은 헐뜯는 일이나 독립 왕국을 세우려는 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것도 맞다. 어떤 교회 리더는 교체된 뒤로는 교회 생활을 할 때 방해와 교란을 일삼았다. 새로 선출된 리더가 하는 말마다 반감을 품고 불복하고 또 뒤에서 리더를 깎아내렸다. 이것은 어떤 성품이냐? 이것이 바로 흉악한 성품이다. 그의 뜻은 이런 것이다. ‘내가 리더가 될 수 없다면 누구도 여기에 발 들일 생각 말고 썩 꺼지라고! 당신을 몰아 내고 내가 원래대로 리더를 할 테야!’ 이것은 단순히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흉악함이다! 지위를 다투고, 자리를 다투고, 개인의 이익과 명예를 다투는 것, 복수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재주를 다 동원하는 것, 즉 자신의 능력을 전부 쏟아부어서 어떻게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것, 자신의 명예와 체면, 지위를 만회하고 복수하려는 의도를 충족하려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다 흉악함이다. 흉악한 성품에 포함되는 행동 중에 어떤 방식은 말을 많이 해서 교란하고 방해하는 것이고, 일부 방식은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르는 것이다. 말이든 행동이든 모두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에 위배되며, 모두 흉악한 성품의 표출에 해당한다. 어떤 사람은 분별할 줄 몰라서 눈에 확 띄는 잘못된 말이나 행위가 아니면 분간하지 못한다. 하지만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악인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악이며, 진리에 부합하는 옳은 성분이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100% 악이고, 절대적으로 흉악한 성품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흉악한 성품을 드러내기 전, 악인의 속셈은 무엇이냐? 그는 어떤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냐? 왜 그런 짓을 하느냐? 너희는 분별할 수 있느냐?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은 집이 안전 위험이 있다. 큰 붉은 용에게 감시당해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매우 고통스러웠다. 형제자매에게 접대를 받았는데, 평온한 접대 가정을 보며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당신네 집은 어째서 의심을 안 받지? 왜 우리 집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할까? 참 불공평하군. 안 되겠어. 내가 어떻게든 이 집이 안전하지 않게 하여 당신도 집에 못 돌아가게 만들어야겠어. 나처럼 고생 좀 해 보라고.’ 실제로 그 일을 저질러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든 안 했든, 그의 이런 속셈은 하나의 성품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자기가 순조롭게 지내지 못한다고 다른 사람도 잘 지내지 못하게 하는 이런 성품은 어떤 성질이냐? (악독함입니다.) 성품이 흉악하다. 이자는 너무 못됐다! 쉽게 말해 뼛속까지 못돼 먹었는데, 한 사람의 흉악한 정도를 이 말로 형용한다. 이런 성품은 어떤 성질이냐? 너희가 해부해 보아라. 그가 이런 성품을 드러낼 때 그의 동기, 속셈, 목적이 무엇이냐? 그가 이런 성품을 드러내는 출발점이 무엇이냐? 이루려는 목적이 무엇이냐? 자기 집이 안전 위험이 있어 남의 집에서 아주 잘 지내는데도 어떻게 교란을 저지를 수가 있겠느냐? 그가 교란해서 남의 집도 안전하지 못해 당사자가 집에 돌아가지 못하면 그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냐? 만약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그는 당연히 일이 생기지 않게 그 집을 잘 보호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해쳐서도 안 된다. 남을 해치는 것은 곧 자신을 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는 대체 왜 그런 것이냐? (자기가 순조롭게 지내지 못하니까 남도 잘 지내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런 걸 바로 흉악함이라고 한다. 그의 마음은 이렇다. ‘큰 붉은 용이 우리 집을 파괴해 난 집이 없어져 버렸어. 그런데 당신은 아직도 집이 있고, 집에 가면 가정의 따스함을 누릴 수 있으니 이건 불공평해. 당신이 집으로 돌아가는 걸 보면 심기가 불편해서 당신을 괴롭히고 싶어. 당신도 나랑 똑같이 집에 돌아가지 못해야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아.’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심보가 못되고 심사가 뒤틀린 것 아니냐? 그렇다면 이런 건 어떤 성질이냐? (흉악함입니다.) 악인의 말과 행동은 모두 한 가지 목적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보통 어떤 일들을 저지르느냐? 성품이 흉악한 사람이 저지르는 가장 흔한 일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고, 파괴합니다.) (앞에서는 떠받들고 뒤에서는 헐뜯습니다.) (타격을 가하고, 보복하고, 악의적으로 공격합니다.) (헛소문을 퍼뜨려 모함합니다.) (비방하고,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이런 행동 방식들의 성질은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파괴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공격하는 행동에 해당한다. 흉악한 성품의 표출에 해당한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악인에 속한다. 대개 모종의 흉악한 성품의 모습을 갖춘 사람은 악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악인의 본질은 무엇이냐? 마귀요 사탄이다. 이렇게 말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너희도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느냐?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어떤 행동이냐? (판단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감히 타격을 주고 보복하는 짓을 할 수 있느냐?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행동에 옮기지는 못합니다.) 너희는 그런 생각만 있고 감히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만약 지위가 너보다 낮은 사람이 너에게 상처를 주면 감히 보복할 수 있느냐? (때로는 그럴 수 있는데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만약 대단하고 언변도 뛰어난 사람이 너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보복할 수 있느냐? 아마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이렇게 약자를 괴롭히고 강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흉악한 성품이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어떤 행동 방식이든, 타겟이 누구이든, 형제자매에게 보복을 가하는 악행을 저지른다면 그건 내면에 흉악한 성품이 있다는 증거다. 흉악한 성품은 겉으로 볼 때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반드시 구분할 줄 알아야 하고, 대상이 누구인지 제대로 구분해야 한다. 만약 사탄을 심하게 대하고 사탄을 제압하고 그것에게 치욕을 안기면 그것도 흉악한 성품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런 건 흉악한 성품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건 정의를 위해 용감히 나선 것이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건 정의감이다. 어떤 경우가 흉악한 성품이라고 할 수 있느냐? 좋은 사람, 형제자매를 괴롭히고 짓밟고 능멸하는 것이 흉악한 성품이다. 그러니 사람은 양심과 이성을 갖추어야 하고, 사람과 일에 대해 원칙을 갖추어야 하고, 악인과 마귀에 대해 분별이 있어야 한다. 정의감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 선민, 형제자매에 대해 포용과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고, 진리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 이것이 완전히 옳고 하나님 뜻에 부합한다. 흉악한 성품이 있는 사람은 다양한 사람을 이런 원칙으로 대하지 않는다. 누구든 자기에게 상처를 주면 보복을 가한다. 이런 것이 바로 흉악함이다. 악인이 일을 처리할 때는 원칙이 없고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 분노를 터뜨리는 것도, 약자를 업신여기고 강자를 두려워하는 것도, 누구에게나 보복을 가하는 것도, 전부 흉악한 성품에 속하는데, 다 패괴 성품에 해당한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성품이 흉악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모습이 무엇이냐? 바로 착실한 사람, 만만한 사람만 보면 괴롭히거나 조롱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선량한 사람은 착실한 사람이나 나약한 사람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생겨 도와주지는 못해도 괴롭히지는 않는다. 너는 형제자매가 착실한 사람이라는 걸 알 때 어떻게 대하느냐? 괴롭히고 놀려 대느냐? (업신여깁니다.) 업신여김은 일종의 태도, 시선, 생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하거나 무슨 말을 내뱉는다면 그것은 성품과 관계된다. 너희가 소심하고 나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얘기해 보아라. (부려 먹고 괴롭힙니다.) (본분 이행을 제대로 못했을 때 무시하고 배척합니다.) 너희가 말한 경우는 모두 흉악한 성품을 나타내는 모습에 해당하고, 성품에 관계된 일이다. 그런 일은 그것 말고도 많으니 자세히 얘기할 필요가 없다. 너희는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누가 자기 눈 밖에 났다 하면 그 사람을 죽도록 괴롭히려 하고,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 사람을 저주하고 지구상에서 아예 사라지게 해 달라는 사람 말이다. 비록 사람은 그런 권병이 없지만 속으로는 그런 권병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거나 하나님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너희도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느냐? (복음을 전하다가 만난 악인이 저희를 욕하고, 때리고, 신고까지 했을 때는 그가 미워서 언젠가는 하나님께 징벌받는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그나마 객관적이다. 얻어맞고 육이 고통받으니까 마음이 괴롭기도 하고, 인격과 존엄성이 짓밟혀 땅에 떨어졌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겨 내기 힘들다. (어떤 사람이 인터넷에서 교회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숱한 정죄의 말을 올렸습니다. 그걸 보니 무척 화가 나고 미웠습니다.) 그건 흉악함이냐, 혈기냐, 아니면 정상적인 인성이냐? (정상 인성입니다. 원수, 마귀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정상 인성이 아닙니다.) 맞는 말이다. 이것은 정상 인성의 표출이고, 모습이고, 반응인 것이다. 부정적인 사물을 증오하고 긍정적 사물을 사랑할 줄 모른다거나 양심의 기준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이 어떤 짓을 저지르면 흉악한 성품으로 발전하겠느냐? 이 원한과 증오가 일종의 행위로 발전하면, 이성을 상실하고 최소한의 인성마저 포기하고 행동한다면, 심지어 살인하고 법을 어기는 짓을 저지를 수 있다면 이런 걸 흉악함이라 하고, 이것은 혈기에 따른 행동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악인에 대해 분별이 생기고 사악함을 증오하게 되는데, 이것이 정상적인 인성이다. 하지만 혈기에 따라 일을 대한다면 그것은 원칙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이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과는 다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차이가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너무나 못되고, 사납고, 악하고, 도덕성이 결여되었다면, 속으로 그에게 크게 반감을 느끼고 그 반감이 어느 정도에 이르러 하나님에게 그를 저주해 달라고 한다면 그래도 괜찮다. 하지만 두세 번 기도해도 하나님이 행사하지 않는다고 네가 직접 손을 쓰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네가 기도로써 하나님에게 네 관점과 태도를 밝히고, 진리 원칙을 구한다면 일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너 대신 분풀이해 달라고 요구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되며, 혈기에 따라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건 더더욱 안 된다. 이성적으로 그 일을 대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참아야 한다. 하나님께 많이 기도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지혜롭게 사탄 마귀를 대하는지 지켜봐야 한다. 그러면 너는 인내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하게 하여라. 그것이 이성적인 것이고, 그것이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이다. 혈기대로 행동하지 않도록 해라. 혈기대로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고, 하나님께 정죄될 것이다. 그때 드러나는 성품은 인성의 연약함이나 일시적인 분노의 정서가 아니라 흉악한 성품이다. 일단 흉악한 성품으로 규정되면 곤란하다. 그러면 구원받기가 쉽지 않다. 사람에게 흉악한 성품이 있으면 너무나 쉽게 양심과 이성을 위배하고 법을 어길 뿐만 아니라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행정 법령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일을 어떻게 피해야 하겠느냐? 최소한 세 가지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첫째는 양심과 이성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법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의 행정 법령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극단적인 일이나 교회 사역을 교란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이 몇 가지 원칙만 잘 지키면 최소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고 도태되지 않는다. 만약 온갖 악행을 저질러서 책망과 훈계를 받게 되었다고 아주 흉악하게 반항한다면 더욱 위험하다. 하나님 성품을 직접적으로 거슬러 제명되고 출교되기 십상이다. 하나님 성품을 거스르면 법을 어기는 것보다 더 무거운 징벌을 받게 된다. 그건 죽느니만 못한 고통이다. 법을 어기면 기껏해야 징역형으로 몇 년 고생하다 나오면 그만이지만 하나님 성품을 거스른다면 영원히 징벌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흉악한 성품을 지닌 자가 이성도 전혀 없다면 그건 너무나 위험하다. 너무 쉽게 악행을 저지르고, 반드시 징벌받고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이성이 조금이라도 있어서 진리를 구하고 진리에 순종할 수 있고 많은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피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사람이 이성과 지혜를 갖추는 것이 관건이다. 이성이 있는 사람은 진리를 쉽게 받아들이고, 책망과 훈계를 바르게 대하는 일이 수월하다. 이성이 없는 사람이 책망과 훈계를 받게 된다면 위험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리더로부터 책망과 훈계를 받고 무척 화가 났다. 그래서 헛소문을 지어내서 리더를 공격하고 싶었지만 시비를 일으킬까 봐 감히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런 성품이 마음속에 이미 존재한다면 그런 일을 저지르지 말란 법도 없다. 마음속에 그런 성품이 있고, 그런 생각이 있다면 비록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해도 위험이 존재한다. 일단 합당한 상황이 생기고 기회가 주어지면 일을 저지를지도 모를 일이다. 흉악한 성품이 존재하는데 해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악행을 저지르기 마련이다. 또 어떤 상황에서 사람이 흉악한 성품을 드러내는지 대답해 보아라.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해서 성과가 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리더가 원칙에 근거해서 저를 교체했는데, 속으로 불복했습니다. 그러다가 리더가 패괴 성품을 드러내는 것을 보자 투서를 넣어 고발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그냥 생긴 것이냐? 결코 아니다. 그건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본성 안에 있는 것은 언젠가는 드러난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나 어떤 상황에서 드러나고, 일을 저지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간혹 아무런 일도 저지르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건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진리를 구해서 해결할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 취향대로 행동하게 되며, 상황만 허락한다면 얼마든지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으면 화를 자초하기가 너무나 쉬우며 그러면 사람은 그 죗값을 치러야만 한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일관되게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했는데, 책망과 훈계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회개하지 않아서 결국 격리되어 반성하게 되었다. 늘 교회 생활을 교란하며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자가 되어 교회에서 제명된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온갖 악행을 저질러 교회에서 출교되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든 패괴 성품을 자주 드러내면서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는다면 악행을 저지르기가 쉽다. 인간의 패괴 성품은 교만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악함, 흉악함도 있다. 교만함은 공통적인 것인데, 흉악함도 공통적인 것이다.
흉악한 성품을 드러내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의 패괴 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성품이 무척 흉악하고, 악독하고, 교만하고, 막무가내다. 그것이 바로 악인의 본성이고, 그런 자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일단 권력을 잡게 되면 그건 마귀, 사탄이 권력을 잡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님 집에서 악인은 다 온갖 악행을 저질러서 드러나고 도태된다. 악인에게 진리를 교제하고 책망과 훈계를 한다면 공격이나 판단을 받기 십상이다. 심지어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그의 성품이 너무 악독해서 벌어지는 결과다. 이런 일은 사실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사이가 무척 좋아서 늘 서로를 생각해 주고 잘 이해해 주는 두 사람이 있다. 그러다 이해관계 때문에 갈등이 생겼는데, 결국 사이가 뒤틀어지고 만다. 어떤 사람들은 서로 원수가 돼서 서로 보복을 하기도 하는데, 둘 다 무척 흉악하다. 본분을 이행하는 일에서 너희는 흉악한 성품의 범위에 속하는 모습이나 표출이 어떤 건지 발견했느냐? 분명 몇 가지가 있을 텐데, 반드시 파헤쳐 봐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분별하고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파헤칠 줄도 분별할 줄도 모르면 너희는 결코 악인을 분별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고 통제당해서 생명에 손상을 입고 나서야 적그리스도가 어떤 것이고 흉악한 성품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너희는 깨달은 진리가 너무 피상적이다. 대다수 진리에 대한 인식이 그저 말이나 문자적 의미에 그치거나 글귀와 도리를 이해하는 수준이고, 실제 상황과는 전혀 대조해 보지 못한다. 아무리 설교를 듣고 이해한 것 같고, 마음이 밝아진 것 같아도 실제 일에 부딪히면 여전히 분별하지 못한다. 이론적으로는 적그리스도의 모습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현실에서 적그리스도를 보면 분별할 줄 모른다. 이는 체험이 너무 적어서 그렇다. 체험이 쌓이고 적그리스도에게 심하게 피해를 당하고 나면 철저하게 분별이 생길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예배에 나와 설교를 들으며 진리를 향해 노력하고자 한다. 하지만 설교를 들어도 단지 문자적인 의미만 이해하거나 이론적인 이해에만 그치고, 진리의 실제적인 일면은 체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진리 실제에 대한 진입이 무척 얕다. 그러다 보니 악인, 적그리스도에 대한 분별이 무척이나 서툴다. 적그리스도는 악인의 본질을 지닌다. 그런데 적그리스도, 악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흉악한 성품이 없겠느냐? 사실, 사람은 누구나 다루기 어려운 존재다. 아무 일 없을 때는 만면에 웃음을 띠지만 자신의 이익을 해치는 일이 생기면 태도가 돌변하는데, 이것이 바로 흉악한 성품이다. 흉악한 성품을 언제든 드러낼 수 있으며 자기도 모르게 드러낸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사람 안에 악령이 살고 있는 것이냐? 악마가 환생한 것이냐? 이 두 가지 상황이라면 그런 자는 악인의 본질이고, 구제할 수가 없다. 악인의 본질이 아니라 단지 이 방면의 패괴 성품이 있는 것이라면 그건 불치병이 아니다. 만약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래도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그렇다면 흉악한 패괴 성품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우선은 일이 닥치면 늘 기도해야 하고, 자신이 어떤 속셈과 욕망을 품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반드시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행위를 단속해야 한다. 더욱이 악한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사람에게 옳지 못한 속셈이 생기거나 악한 마음이 들어서 나쁜 짓을 하고 싶어지면, 그럴 때는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찾아 인식하고 해결해야 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지켜 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게 되면 자신을 저주하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하면 자신을 지키고 악행을 멈출 수 있다. 만약 일이 닥쳤는데 악한 마음이 생겨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그대로 따른다거나 그렇게 행동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은 악인에 속하는 자이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복을 받아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느냐? 그건 허황된 생각인 것이다. 다섯 번째 성품은 흉악함이다. 이는 모두 패괴 성품의 문제인데, 이 방면의 문제도 거의 다 얘기했다.
여섯 번째 패괴 성품은 사람에게도 익숙할 텐데, 바로 사악함이다. 먼저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 보자.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할 때 사악한 성품을 표출한다. 그는 원칙에 따라 전하지 않으며, 누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인성이 훌륭한 사람인지도 모른 채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 자기가 좋아하거나 마음이 맞는 이성에게만 전도한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잘 안 맞는 사람에게는 전도하지 않는다. 그는 상대가 복음 전파 원칙에 부합하는지 상관하지 않고 본인이 관심 있는 상대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남들이 그 상대는 복음 전파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알려 줘도 기어코 전도하려 했다. 그의 행동을 지배한 건 그의 내면에 있는 한 가지 성품으로, 그 성품은 그가 복음 전파를 명목으로 자신의 삿된 감정과 사욕을 채우고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게 했다. 이것은 영락없는 사악한 성품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그렇게 하면 하나님에게 죄를 짓고 행정 법령을 거스른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손을 떼지 않는다. 이것이 한 가지 성품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사악한 성품에 해당하는 모습 중 하나다. 하지만 삿된 감정과 사욕을 드러내는 내적 상태만을 사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육적인 정욕에만 초점을 두면 사악함의 범위가 너무 좁다. 사악한 성품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아라. 한 가지 성품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행동 방식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내적 상태와 모습, 표출이 포함된다. 그래야 비로소 성품으로 규정할 수 있다. (세상의 흐름을 따르며 그것에 관련된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악한 흐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하나이다. 세상의 사악한 흐름을 꽉 붙든 채 집착하고, 지대한 관심을 갖고, 열심히 좇는 것이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하고 책망과 훈계를 해도 그런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거나 심지어 미련의 지경에 이른 사람들이 있다. 이런 것이 사악함이다. 그렇다면 사악한 흐름을 따를 때 나타나는 어떤 모습들이 그 사람의 성품이 사악하다는 것을 뜻하겠느냐? 그는 어째서 그런 것들을 좋아하겠느냐? 세상의 사악한 흐름 중 어떤 것들이 그의 마음과 요구, 기호와 욕망을 채워 주겠느냐? 예를 들어, 그가 영화배우를 좋아한다고 해 보자. 그럼 그는 그 배우의 어떤 점에 빠져들어서 좇게 되었겠느냐? 그런 사람들의 기풍, 분위기, 외모, 명성, 또 자신이 동경하는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진 것이다. 그가 좇는 것들은 전부 사악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과 서로 배치되고, 하나님의 요구와도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도리이다. 그 스타와 배우들, 그들의 생활, 스타일, 나아가 사람들이 숭배하는 그들의 외적인 분위기와 차림새 등을 분석해 보아라. 그들은 왜 그런 생활을 하겠느냐? 어떻게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개인 메이크업 아티스트, 코디네이터를 이용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이 스스로를 그런 이미지로 보이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사람들을 유혹하고 미혹해서 따르게 만들고, 거기서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명성을 숭배하든, 외모나 생활을 숭배하든 전부 어리석고 황당한 행동에 불과하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마귀를 숭배할 수 있겠느냐? 마귀는 하나같이 사람을 미혹하고 속이고 해하는 존재다. 마귀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전부 사탄을 추종한다. 그들이 마귀 사탄을 따르는 목적은 무엇이냐? 마귀를 모방하고 본받아서 언젠가 자기도 마귀가 되고, 마귀나 스타들처럼 예뻐지고 섹시해지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느낌을 즐기길 좋아한다. 어떤 스타를 숭배하든, 어떤 유명 인사나 위인을 숭배하든 결국 그 목적은 하나다. 즉, 사람들을 미혹하고 유혹해서 자기를 숭배하고 추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사악한 성품 아니겠느냐? 이게 바로 사악한 성품으로,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사악한 성품에는 또 하나의 모습이 있다.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 집에서는 예배드릴 때 늘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교제하고, 자신을 인식하는 얘기를 하며, 본분을 잘 이행하고 원칙대로 일하는 법,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법,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법 등 온갖 진리를 교제한다. 그렇게 몇 년을 듣다가 점점 싫증이 난 그는 불평을 해 댔다. “하나님을 믿는 건 복을 받기 위해서 아닌가요? 왜 맨날 끝도 없이 진리만 얘기하고, 하나님의 말씀만 교제하는 겁니까? 정말 지겹다고요!” 하지만 그는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는 건 참 따분하고 재미없는 일이야. 어떻게 해야 재미있을까? 재미나는 일을 좀 찾아보자.’ 그래서 그는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녔다. “교회에 신자가 몇 명쯤 되나요? 리더 일꾼은 전부 몇 명인가요? 교체된 사람은 얼마나 되고요? 젊은 대학생, 대학원생은 몇 명이죠? 이걸 아는 사람 없나요?” 그는 이런 일이나 정보를 진리처럼 대했다. 이건 어떤 성품이냐? 이것을 사악함이라 하며, 쉽게 말해 비정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무리 많은 진리를 들어도 어느 것 하나 주목하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누군가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나 교회 내부 정보를 좀 얘기하면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웠다. 이것이 비정상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비정상적인 사람의 특징이 무엇이냐? 진리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으면서 외적인 일에만 흥미를 느낀다. 지치지도 않고 집요하게 그 항간의 소문들을 파고드는가 하면 자신의 생명 진입이나 진리와 무관한 여러 방면의 일들을 수소문하고 다닌다. 그는 그런 일, 그런 소식들을 속속들이 파악해서 잘 알고 있으면 그게 바로 진리 실제가 있는 거라고, 그런 사람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 집의 사람이고, 틀림없이 하나님께 인정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너희 생각에 정말 그렇겠느냐? (아닙니다.) 너희는 이 일을 간파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 중 많은 이가 간파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런 정보를 아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정보들을 다 알면 하나님 집의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 그런 자는 누구보다 허영심이 많고 무지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말세에 성육신으로 와 사람을 심판하고 정결케 하는 사역을 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성과는 사람에게 생명이 되는 진리를 베풀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일은 중시하지도 않고 늘 온갖 잡다한 항간의 소문만 알아보며 교회 내부의 일을 많이 알고 싶어 한다. 이런 자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본연의 일에 충실한 사람이겠느냐? 내가 보기에는 사악한 사람이고 불신파이다. 이런 사람 역시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늘 그렇게 떠도는 소문에만 관심을 가지면 호기심은 채워지겠지만 하나님께 혐오받는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순전히 사탄의 심부름꾼에 속하는 사람, 교회 사역을 교란하러 온 사람이다. 특히 늘 하나님을 연구하고 조사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큰 붉은 용의 심부름꾼이자 앞잡이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가장 역겨워하고 증오한다. 너는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느냐? 하나님을 연구하고 조사하는 것이 진리를 구하는 것이냐? 진리를 구하는 일이 그리스도가 태어난 가정이나 성장 환경과 관계가 있느냐? 늘 하나님을 연구하는 사람은 너무나 역겹지 않으냐? 네가 그리스도의 인성 방면에 대해 언제나 관념을 품고 있다면, 하나님 말씀을 인식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진리를 깨달아야 관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네가 그리스도의 가정과 출생 환경을 조사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그리스도의 신성 본질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완전 불가능하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공을 들이며, 그래야 그리스도의 신성 본질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늘 하나님을 연구하는 그 사람들은 왜 항상 이상한 짓을 하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그 천한 것들은 한시라도 빨리 하나님 집에서 사라져야 한다! 진리를 그렇게나 많이 선포하고, 예배 때 설교도 그렇게나 많이 했는데, 너는 왜 아직도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냐? 네가 늘 하나님을 연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너무나 사악하다는 뜻이다! 더 심한 경우, 그 떠도는 소문을 듣고는 본인에게 밑천이 생겼다고 여겨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으스댄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에게 혐오와 미움을 사게 된다. 그런 자가 사람이겠느냐? 살아 있는 마귀 아니겠느냐? 그런 자가 어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겠느냐? 비뚤게만 생각한다. 마치 떠도는 소식을 많이 알면 하나님 집 사람이 되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도 되는 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자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하나님 집에서는 그런 사람이 가장 역겹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비현실적인 것을 중시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늘 하나님나라가 어떤지, 셋째 하늘은 어디에 있는지, 음부는 어떻고 지옥은 어디 있는지 등을 연구한다. 늘 비밀만 캐려 할 뿐, 생명 진입은 중시하지 않는다. 이것이 비정상적인 것이고 사악함이다. 어떤 사람은 설교 교제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진리가 대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한가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글귀만 파고들며 느낌을 찾으려 하고, 또 늘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는지 연구한다. 만약 이루어졌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행사라고 믿고,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행사임을 부인한다. 완전 그릇된 자 아니냐? 이상하지 않으냐?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졌을 때, 사람이 전부 볼 수 있겠느냐? 어떤 말씀들은 이루어졌더라도 사람 눈에 꼭 보인다고 할 수 없고, 또 어떤 말씀들은 사람이 보기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님에게는 이미 이루어졌다. 사람은 이런 것을 간파할 수 없으며, 10~20% 알 수 있어도 괜찮은 편이다. 어떤 사람들은 늘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지만 진리를 실행하고 실제에 진입하는 것은 중시하지 않는다. 이는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많은 진리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언제나 예언이 이루어진 증거만 찾으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생명과 동력으로 삼는다. 예를 들면,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제가 가서 하길 원하신다면 내일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만약 제가 가는 걸 원하시지 않는 거라면 일곱 시까지 자게 해 주십시오.” 그는 늘 이런 식이다. 이런 행동 방식을 원칙으로 삼고 진리로 여겨 실행한다. 이게 바로 비정상이다. 일을 할 때도 늘 느낌대로 하고, 초자연적인 것을 중시하며, 근거 없는 헛소문 같은 얼토당토않은 것에 의지하고, 이상한 것을 파고든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그는 진리는 통하지 않는다고, 느낌에 의지하거나 어떤 일을 찾아 맞춰 보고 검증하는 것만큼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비정상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안배한다는 사실을 그는 믿지 않는다. 비록 입으로는 하나님 말씀이 진리라고 인정하지만 속으로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단 한 번도 하나님 말씀을 통해 일을 바라보지 않는다. 어떤 유명한 사람이 뭐라고 한마디 하면 그는 그것을 진리로 믿고 그 말을 따르며, 점쟁이나 관상가가 이듬해에 과장으로 승진할 거라고 하면 그걸 그대로 믿는다. 이는 이상한 짓을 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는 점이나 사주팔자에서 하는 말, 초자연적인 것을 믿는데, 오로지 이상한 것만 믿는다. 마치 어떤 사람들이 “저는 무슨 진리든 다 깨달았지만 단지 실행해 내지를 못합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문제는 이제 결론이 났다. 즉, 비정상인 것이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소용이 없다. 그에게는 결코 통하지 않고, 어떤 성과도 볼 수 없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단순히 진리를 싫어하는 것을 넘어 사악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의 중요한 특징이 무엇이냐? 진리를 깨닫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듣고 싶어 하지 않고, 반발하고, 반감을 품으며, 진리가 옳은 것, 좋은 것임을 알지만 실행하지 않는다. 그 길을 가려 하지 않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고,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은 더욱 원치 않는다. 사악한 사람은 이렇지 않다. 그는 사악한 것을 진리로 생각하며, 그 길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따르고 모방하면서 계속해서 안으로 파고든다. 하나님 집에서 자주 교제하는 기도의 원칙은, 시간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고 진리를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수시로 들었을 것이고, 또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악한 사람은 어떻게 실행하느냐? 매일 새벽 첫닭이 울 때 반드시 남쪽을 향해서 무릎을 나란히 꿇은 다음, 두 손을 나란히 바닥에 대고 최대한 크게 절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는 그때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어줄 거라고 믿는다. 그때는 하나님이 바쁘지 않고 여유가 있으니까 기도에 귀 기울여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건 그릇되지 않으냐? 이상하지 않으냐? 또 어떤 사람은 새벽 한두 시, 인적 없는 깊은 밤에 기도하는 것이 가장 영험하다고 말한다. 왜 그렇게 말하겠느냐? 그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때는 사람들이 다 자고 하나님이 바쁘지 않으니까 그의 일을 처리해 줄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그릇되지 않으냐? 너무나 이상하지 않으냐? 네가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가장 터무니없는 사람으로,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다. 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좋은 일을 하고, 착한 사람이 돼야 해요. 살생도 육식도 하면 안 되죠. 육식은 살생이고 죄를 짓는 거라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원치 않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게 근거가 있는 말이냐?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그건 누가 한 말이냐? 이방인이나 그릇된 놈들이 한 말이다. 사실 그런 말을 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고기를 안 먹는 것도 아니다. 아마 사람들 앞에서는 안 먹어도 뒤에서는 꽤나 먹을 것이다. 더군다나 시치미 떼는 능력도 탁월해서 여기저기 궤변을 퍼뜨리고 다니는데, 이게 바로 사악함이다. 이런 사람은 너무나 비정상이다. 그는 이런 사설과 궤변을 계명이나 규례로 여기는가 하면 심지어 진리 또는 하나님의 요구라고 생각해 실행하고 고수한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끈질기게 뻔뻔스럽게 가르친다. 사람의 그런 행동과 말, 추구 방식을 왜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그런 것들은 모두 진리와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무관하면 사악한 것이냐? 만약 그렇게 이해한다면 곤란하다. 사람의 일상생활 중 어떤 일들은 진리와 무관하다. 그런데 그걸 전부 사악하다고 한다면 사실 왜곡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은 일은 사악하다고 하면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이 정죄한 것만 사악하다고 할 수 있다. 진리와 무관한 일을 모두 사악한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그건 단단히 착각한 것이다. 사람의 의식주와 같은 세세한 일, 예를 들면 먹고, 마시고, 자고, 쉬는 일들은 진리와 무관하지 않으냐? 이런 것이 사악한 것이냐? 이는 인체에 당연히 필요한 일, 생활 규칙에 부합하는 일로, 사악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방금 말한 그런 행동 방식들을 사악한 것으로 분류하겠느냐? 그런 행동 방식들은 사람을 잘못된 길, 터무니없는 길, 종교의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실행하고, 또 남들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친다면 사람을 사악한 길로 이끌게 된다. 이는 필연적인 결과다. 사람이 세상의 사악한 흐름을 숭배하고 사악한 길을 걷는다면 종국에는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타락하고, 이성을 잃게 되고, 수치심이 없어지고, 결국 세상의 흐름에 완전히 사로잡혀 이방인들처럼 멸망을 향해 가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설과 궤변을 규례와 계명으로 여기고 지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진리로 여기며 지키는데, 이들은 누구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그릇된 놈으로, 마지막에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진리에 대한 이해가 지나치게 치우친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겠느냐?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악령이 역사할 것이다. 그가 걷는 길이 사악한 길이고 그는 악령의 길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악령이 원하는 바에 꼭 맞아서 결국 악령이 들러붙게 되어 있다. 전에 “사탄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라는 말씀을 한 적이 있다. 나쁜 길을 걷는 자는 필연적으로 악령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너를 악령에게 넘길 필요도 없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보호받을 수 없고, 하나님도 너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얻지 못하면 그냥 내버려둘 것이고, 그러면 악령이 그 틈을 타서 들어와 너에게 들러붙을 것이다. 이것이 결과 아니겠느냐?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하고, 늘 성육신의 사역을 정죄하며 세상의 흐름을 좇는 것, 대놓고 성경과 하나님 말씀을 곡해하며 사설과 궤변을 퍼뜨리는 것은 모두 사악한 성품에서 표출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이해가 치우친 탓에 그럴싸한 궤변을 만들어서 사람을 미혹하고, 공상가나 이론가가 된다. 이 역시 이상한 짓을 저지르는 것으로, 그런 자는 사악한 사람에 해당한다. 바리새인과 같다. 바리새인들은 외식하기만 하고 자신은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미혹해서 우러름과 숭배를 받았고, 예수가 나타나 사역할 때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했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에게 저주받았다. 지금 종교계는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가증스러운 건, 그들이 큰 붉은 용의 편에까지 서서 사악한 세력에 영합하고 그들과 손잡고서는 하나님 선민들을 박해하고 하나님에게 맞서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종교계는 지금껏 사탄의 사악한 세력을 증오해 본 적도, 큰 붉은 용 국가의 사악함을 증오해 본 적도 없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축복한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무릇 사탄, 악령과 관계를 맺거나 연합하는 행위를 모두 사악하다고 일컫는다. 부정한 수단에 속하는 과격하고 극단적인 실행 방법 역시 사악함이다. 어떤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을 오해하는데,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오해를 풀지 못하고, 늘 자신의 이치를 말하며 그릇된 논리를 고집한다. 이 역시 좀 사악하지 않으냐?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진리를 여러 번 교제해 주면 다 깨달았다고, 관념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여전히 관념을 고수하며 계속 소극적으로 지내고 자신의 이유를 내려놓지 않는다. 이것이 사악함 아니겠느냐? 이 역시 일종의 사악함이다. 요컨대,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모두 비정상인 사람이고, 얼마간 사악한 성향이 있는 사람이다. 사악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구원받기가 쉽지 않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악한 이론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로 구제할 방법이 없다.
지금까지 강퍅함, 교만함, 간사함, 진리를 싫어함, 흉악함, 사악함 등 전부 여섯 가지 성품에 대해 교제했다. 이 여섯 가지 성품에 대한 해부를 통해 너희는 성품 변화를 새롭게 인식하고 이해했느냐? 성품 변화가 대체 어떤 것이냐? 일종의 결점이라든가 행동, 혹은 성격을 고치는 것이냐? 결코 그런 게 아니다. 그렇다면 성품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이제 좀 명확해지지 않았느냐? 이 여섯 가지 성품을 모두 사람의 패괴 성품이고, 사람의 본성 본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여섯 가지 성품은 긍정적 사물이냐, 아니면 부정적 사물이냐? (부정적 사물입니다.) 영락없는 패괴 성품이라고 할 수 있고, 사람의 패괴 성품은 주로 이 몇 가지로 구분된다. 이 여섯 가지 패괴 성품은 하나같이 하나님과 진리에 적대적이고, 어느 하나도 긍정적 사물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여섯 가지, 즉 여섯 측면을 패괴 성품이라고 통칭한다. 패괴 성품은 바로 사람의 본성 본질이다. ‘본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본질은 사람의 본성을 말한다. 사람의 본성은 곧 사람이 살면서 의지하는 것이고, 사람의 삶의 방식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본성에 의지해 살아간다. 네가 살아 내는 것이 무엇이든, 너의 목표와 방향이 무엇이든, 너의 생존 법칙이 무엇이든 너의 본성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따라서 너에게 진리가 없고 네가 이런 패괴 성품에 의지해 살아간다면 네가 행하는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알 것이다. 성품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느냐?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면 만약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사람이 하나님과 합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이 여섯 가지 패괴 성품 중 어느 것이든, 네가 그 내적 상태를 어느 정도로 나타내고 드러내든 어쨌든 네가 이런 패괴 성품들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네 행위의 속셈과 목적이 무엇이든,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행위의 성질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에게 정죄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결과다. 하나님에게 정죄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누구나가 최종적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결과이냐? (아닙니다.) 사람이 보고 싶은 결과가 아닌 이상 사람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자신의 패괴 성품과 패괴 본질을 인식하고, 진리를 깨닫고, 그런 후에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마련한 상황을 통해 서서히, 조금씩 이런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과 합하고 진리와 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품 변화의 과정이다.
과거에 성품 변화를 아주 쉽고 간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하거나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짓을 하지 않도록 자제하면, 내 관점을 바르게 하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그런 다음 진리를 깨닫고, 많이 노력하고, 많이 고생하고, 대가도 많이 치르면, 몇 년 뒤에는 분명 성품 변화에 이를 수 있을 거야.’ 이것이 맞는 말이냐? (아닙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자신의 패괴 성품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패괴 성품을 인식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변화의 결과는 무엇이냐? 진리를 얻는 것이다. 네 성품에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 가늠하려면 네가 하는 행동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위배되는지를 보면 되고,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하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보면 된다. 네 성품이 어느 정도 변화했는지를 알려면 패괴 성품을 드러낼 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지, 육을 저버리고 네 속셈과 야심, 욕망을 저버리고 진리에 따라 실행할 수 있는지를 보면 된다. 네가 진리에 따라, 하나님 말씀에 따라 어느 정도로 실행할 수 있는지, 또 진리의 기준에 완전히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보면 네 성품이 변화한 정도를 알 수 있다. 이것들은 정비례 관계이다. 강퍅함이라는 성품을 예로 들어 보자. 처음에 성품이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을 때,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에게 강퍅한 측면의 성품이 있는지도 몰랐다. 너는 진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진리는 어쩜 사람의 상처만 들추어 낼까?’ 진리를 다 듣고 난 뒤에는 하나님 말씀이 다 맞다고 생각했지만 1, 2년이 다 되도록 한 마디도 제대로 새겨듣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면 이것이 강퍅함이 아니냐? 2, 3년이 지났지만 전혀 못 받아들이고, 내면의 상태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면, 비록 본분도 차질 없이 이행하고, 고생도 꽤 했지만 강퍅한 내적 상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거나 10분의 1도 줄어들지 않았다면 이 방면에서 너는 성품이 변화했겠느냐?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역한 것이냐? 그 이유가 무엇이든 무턱대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역한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고 그렇게 사역을 많이 했건만 네 성품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간증을 전혀 얘기하지 못할까? 생명 성품에도 전혀 변화가 없고 말이야.’ 그때 너는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정말 패역하고 강퍅하구나! 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야.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도 않은 거야! 이걸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거라 할 수 있겠어? 몇 년씩 하나님을 믿고도 아직까지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마음이 하나님과 가깝지도 않구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도 마음에 새기지도 않았고, 잘못을 저질러도 아무런 가책도 못 느끼고, 회개하려는 마음도 없었어. 이런 게 강퍅함 아닌가? 난 패역한 자식이 아닌가?’ 마음이 괴로웠다. 괴롭다는 건 무슨 의미냐? 회개하고 싶다는 뜻이다. 너는 자신의 강퍅함을 의식하고, 자신의 패역을 의식했다. 이때부터 성품은 변화되기 시작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의 의식에는 변화하고자 하는 생각과 바람이 조금씩 생겨난다. 더 이상 하나님과 대치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고, 더는 강퍅하게 굴지 않고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 생활로 가져와 실행하고, 진리 원칙으로 여겨 실행하고자 한다. 이런 의식이 생긴다. 이렇게 의식이 생기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의식이 생긴다고 바로 달라지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몇 년의 시간을 체험해야 한다. 이 의식이 마음속에서 점차 선명해지고, 강렬한 요구로 바뀌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안 돼. 세월을 낭비할 순 없어. 진리를 추구하고 바른 일을 해야 해. 전에는 본연의 일은 하지 않고 먹고 입는 것만 생각하고, 명예와 이익만 추구하다 결국 아무런 진리도 얻지 못했어. 후회스러워. 회개해야겠어!’ 이러면 하나님 믿는 정상 궤도로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이 진리 실행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그건 성품 변화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몇 년을 믿었든 관계없이, 자신이 흐리멍덩하고 늘 허송세월을 보내느라 몇 년이 지나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여전히 텅 비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서글퍼진다. 그래서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하는데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 세월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때에야 하나님이 한 권면의 말씀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양심과 이성이 너무나 없는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뉘우치는 마음이 들면서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살아가고 싶어진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할 순 없어. 하나님께서 하신 그 많은 말씀은 구구절절 사람에게 좋은 말씀이고 사람에게 바른길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야.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정말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하신 분이야!’ 이것이 바로 변화의 시작이다. 이런 깨달음이 생긴 것은 좋은 일이다! 만약 네가 이런 것도 모를 만큼 무감각하다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이제 사람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관건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 진리를 깨닫고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점을 인식했고, 나아가 진리를 실행해 내고 진리를 자신의 실제로 바꿔야 하나님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너희가 볼 때 마음속에 이런 인식과 생각이 자리 잡으려면 몇 년을 체험해야 하느냐? 영리한 사람, 이해력이 있는 사람, 간절히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1~2년이면 바로잡고 진입하기 시작할 것이다. 똑똑하지 못한 사람, 무감각하고 우둔하고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흐리멍덩하게 3~5년이 그냥 흘러가고, 별 수확이 없어도 의식하지 못한다. 열심으로 본분을 이행하면 흐리멍덩하게 10년이 또 흘러도 여전히 확실한 수확이 없고, 여전히 체험 간증을 얘기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돌려 보내지거나 도태되면 그제서야 깨닫기 시작한다. ‘역시나 진리 실제가 전혀 없구나. 나는 정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때 깨닫는다면 좀 늦은 것이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은 멍하니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날이 오기만을 기대하지만 진리는 조금도 추구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10여 년이 지나도 아무런 수확을 거두지 못하고, 간증도 전혀 얘기하지 못한다. 그러다 호된 책망과 훈계, 경고를 받고 나서야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가슴을 찌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강퍅한 것이냐! 책망과 훈계, 징벌이 없으면 되겠느냐? 엄한 징계가 없으면 되겠느냐? 어떻게 해야 사람이 지각하고 반응하게 만들 수 있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관을 봐야만 눈물을 흘린다. 기어이 못된 짓을 하고, 숱한 악행을 저지르고 나서야 이렇게 의식한다. ‘하나님 믿는 내 삶은 이제 끝인가? 하나님이 나를 원하지 않으시는 건 아닐까? 내가 정죄된 건 아닐까?’ 그러면서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한다. 소극적일 때는 그 긴 세월을 헛되이 믿었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원통해하고, 한술 더 떠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생각하다가 깨닫는 순간 이렇게 의식한다. ‘이건 스스로를 망치는 거잖아? 다시 일어서자. 내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떤 일 때문에 내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일까? 내 어떤 점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내가 어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뿐이겠어. 깨달은 진리도 실행하지 않았어. 이건 진리를 싫어하는 모습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후회도 되고 두렵기도 하다. ‘계속 이대로 가다가는 분명 징벌받게 될 거야. 안 돼, 얼른 회개해야겠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서는 안 돼.’ 그 순간 강퍅한 정도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겠느냐? 마치 마음이 바늘에 찔리듯 지각이 조금 생긴 것이다. 지각이 생기는 순간, 너는 마음이 움직이고 진리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관심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이냐?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없으면 책망과 훈계를 받았을 때 순종하지 못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련이 닥쳤을 때 굳게 서지 못한다. 리더가 된다면 거짓 리더가 되지 않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지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네게 지위가 생겨서 다른 사람들이 너를 높이 받드는데, 그걸 이겨 낼 수 있겠느냐? 너에게 상황을 마련하고, 시험이 닥치게 하면 이겨 낼 수 있겠느냐? 너는 자신을 너무 잘 알고, 너무 잘 파악하고 있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나는 이 모든 걸 이겨 낼 수 없어. 난 폐물이고 아무것도 못 해.” 이것이 어떤 생각이냐? 진리가 필요해진 것이다. 진리가 필요할 때, 네가 가장 무기력할 때 너는 진리에 의지하고 싶어진다. 그 어떤 사람에게 의지해서도 안 되고 진리에 의지해야만 네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책망과 훈계, 시련, 시험을 이겨 낼 수 있고, 어떤 환경도 극복할 수 있게 된다고 느낄 것이다. 네가 진리에 의지할수록 진리가 좋고 유용하고, 너에게는 가장 크게 도움이 되고, 네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때 너는 비로소 진리를 갈망하기 시작하게 된다. 사람이 이 정도가 되면 패괴 성품이 조금씩 줄어들고 변화하지 않겠느냐?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이기 시작해서 일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이 바뀌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성품도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하나의 더딘 과정이다. 초반의 작은 변화는 스스로가 느끼지 못하지만,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게 될 때, 본질적인 변화가 생기고, 사람은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이 처음에 진리를 갈망해서 진리를 얻고자 갈망하는 마음,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에서부터, 일이 닥쳤을 때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진리를 실행해서 하나님 뜻을 충족게 하기까지, 나아가 자기 뜻대로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속셈, 자신의 교만과 패역, 강퍅함, 배반의 마음을 극복하기까지, 이런 과정을 이겨 내게 된다. 그러면 진리는 조금씩 사람의 생명이 되지 않겠느냐? 진리가 네 생명이 되면 교만과 패역, 강퍅함, 배반의 성품은 네 내면에서 더 이상 네 생명이 아니고, 너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그럴 때 네 처신을 인도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네 생명이 되었다면, 이것이 변화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 뒤로는 점점 좋아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성품 변화의 과정이며, 이런 효과는 기나긴 시간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다.
성품 변화에 걸리는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며, 정해진 기간이 없다. 만약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7~8년, 10년이면 성품 변화를 볼 수 있다. 자질이 평범하고 진리를 추구하기 원한다면 아마 15년, 20년 정도가 되어야 성품 변화를 볼 수 있다. 관건은 그 사람의 진리를 추구하려는 의지와 이해력이 얼마나 되는지 봐야 하는데, 이런 것들에 의해 결정된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각의 패괴 성품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모두 사람의 본성이며, 깊이 뿌리내린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성품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함으로써, 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을 받음으로써 서로 다른 정도로 변화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성품 변화는 시간에 달린 것 아닙니까? 때가 되면 무엇이 성품 변화인지 알게 되고 진입할 수 있게 되겠지요.”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만약 시간이 지났다고 성품 변화에 이를 수 있는 것이라면, 이론적으로 말해서, 평생 하나님을 믿은 그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성품 변화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이 그러하냐? 그들이 진리를 얻었느냐? 성품이 변화되었느냐? 모두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무수히 많지만 성품이 변화된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 찾아보기 힘들다. 진정으로 성품이 변화된 사람은 모두 진리 추구를 통해 이룬 것이고, 성령 역사에 의해 온전케 된 것이다. 성품 변화는 진리 추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한편으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즉, 진리 추구에 대가를 치르고, 진리를 얻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해야 한다. 그 밖에도 옳은 사람, 마음씨가 선량한 사람,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하나님께 검증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성령 역사에 의해 온전케 될 수 있다. 사람의 협력도 없어서는 안 되지만, 성령 역사를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만약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고,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교회 사역에 부담이 없고, 사람들에게 사랑이 없고, 특히 본분을 이행할 때 충성심이 조금도 없다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결코 온전케 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은 무턱대고 규례에 맞출 게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무슨 일을 하든, 순종해야 하고, 교회 사역을 지켜야 하고, 마음이 올발라야 한다. 그래야 성령이 역사할 수 있다.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춰야 한다. 또 본분을 이행하는 일에서 하나님께 충성해서 하나님을 만족게 해야 한다. 그래야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다. 성령 역사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깨우침이 있고, 진리를 실행하는 데 길이 있고, 본분을 이행하는 데 원칙이 있고,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인도가 있고, 어떤 고통을 겪어도 마음이 평안하고 즐겁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하에 10년, 20년 겪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변화가 빠를수록 평안이 빨리 찾아오고, 행복도 빨리 찾아온다. 성품에 변화가 생겨야 참된 평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없고, 점점 삶이 공허하고 힘들어진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사는 것도 고통스럽고 힘들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진리를 얻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고, 진리는 빨리 얻을수록 좋다. 진리가 없으면 삶이 공허하지만, 진리를 얻으면 평안과 기쁨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고, 성령 역사의 깨우침과 인도, 인솔이 있고, 마음이 갈수록 밝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점점 커진다. 이제 성품 변화에 관계된 진리가 좀 명확해졌느냐? (네, 알겠습니다.) 만약 정말로 명확해졌다면 길이 생긴 것이고,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효과가 있는지 알 것이다.
2017년 4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