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깨달아야 하나님의 행사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온 우주 만물을 주재한다. 하나님의 주재에서 사람이 본 사실은 무엇이냐? 바로 세계와 우주가 아무리 크다 해도, 거시에서 미시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 속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류의 염원이 무엇이든, 인류의 포부와 요구가 무엇이든, 인류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든, 하나님에게 있어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는 전혀 이러한 것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고 지배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무엇에 근거하느냐?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행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무엇을 중심으로 행하느냐? (하나님의 경륜을 중심으로 행하십니다.) 맞다. 하나님은 경륜을 중심으로 이 모든 것을 행한다. 이 말이 조금 불가사의하게 들리겠지만, 이 말에는 깊은 뜻이 있다. 즉, 하나님의 이 모든 사역은 사람의 의지에 따라 바뀌지 않으며, 하나님이 주재하고 지배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어떤 국가, 민족, 종족을 지배하거나 혹은 어떤 시대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를 안배하는데,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의지로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은 시간, 공간, 지리, 인물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이 행한 모든 것은 계획에 따라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사람은 이를 타파할 수 없고 또 이를 교란할 수도 없다.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인류 또는 어떤 종족의 주관적인 염원이 무엇이든, 하나님이 행하기로 결정한 일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도 교란, 파괴, 좌우할 수 없다. 여기에서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하나님의 권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병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류가 단계적으로 발전하기까지, 전체 인류 중에는 하나님의 선민, 이방인, 하나님을 적대하는 자가 있는데, 하나님 눈에는 이 여러 부류의 사람이 모두 인류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여러 부류 사람들을 차별 대우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하나님 선민을 특별히 인도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선민과 그 밖의 인류를 차별 대우 한다. 하지만 하나님 선민 중에서 어떤 자는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어떤 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느냐?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십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할 때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직면하게 됩니다.) 맞다. 네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여기든, 하나님을 따르는 자라고 여기든, 또는 이전에 하나님 집의 사역에서 어떤 공로를 세웠든, 하나님은 그런 외적인 것들을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 있고, 원칙을 가지고 사람을 대한다. 심판해야 할 것은 심판하고, 징벌해야 할 것은 징벌하며, 멸망시켜야 할 것은 멸망시킨다. 예를 들어 보자.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나면서 예수의 천국 복음이 이방으로 전파된 이 사실에서 너희는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만약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따르고 유대교의 논리에 따르면,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며, 하나님의 소중한 아기이고, 하나님이 가장 걱정하는 인류이자 하나님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존재이다. 사람의 말로 표현하면, 바로 가장 사랑하는 자식인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니 사랑하고 보호하여 조금이라도 상처받지 않게 하고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해야 하며, 이들이 무엇을 간구하든 하나님이 모두 충족시켜 주고, 늘 사람이 간구하고 생각한 것 이상으로 사람에게 베풀어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였느냐?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였느냐?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여 로마 병사를 일으켜 유대 땅을 점령하고 유대인을 고향에서 쫓아내게 했다. 그 현장은 살육과 피비린내가 진동하였으며, 수많은 사람이 죽고 핏물이 강이 되어 흘렀다. 많은 유대인이 세계 각국으로 도망가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런 사실을 통해 너희는 하나님의 성품 속에 어떤 본질이 갖춰져 있는지 보았느냐?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사람이 거스를 수 없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둘째 치고, 먼저 사람을 예로 들어 보자. 현실 생활 속에서,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아들이 한 명 있는데 앞으로 그 아들이 자신의 재산과 모든 것을 물려받게 하려 할 때, 어떻게 하겠느냐? 한편으로는 인재가 되어 자신의 기술을 물려받도록 엄격하게 대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조금도 상처 입지 않고 어떠한 위험에도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그가 살아남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행하겠느냐?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자식이나 외부인에게도 이런 행동을 하겠느냐? 이런 행동 방식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자기 자식에게 하는 이 모든 것은 사심, 감정, 사욕에서 비롯되며, 사람의 본성 본질에 이미 이러한 것들이 갖춰져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사람의 감정과 사심에 진리가 있겠느냐? 공평함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모습이다. 다시 하나님이 행한 일을 보자. 하나님은 하나님 선민인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다. 복음이 유대 땅에서 유대 이외의 이방 각 종족, 즉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각 지역으로 전파되게 하였는데, 어떻게 전파하였느냐? 하나님은 외부의 침략자가 그 땅을 침략하고 점령하여 그곳의 유대인, 즉 구주 예수를 전파하는 사람을 쫓아내게 하였다. 그들이 자신의 고향을 잃고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 후, 그들은 세계 각지에 기거하며 살아남았고, 바로 각자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구주 예수의 복음을 점차적으로 세계 각지로 전파하여 땅끝까지 전파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사역이 무척이나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주로 어디에 나타나느냐? 하나님은 매우 특별하고 비범한 방식으로 이스라엘 사람을 각국으로 쫓아내어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다. 만약 그들에게 자발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러 각국에 가게 했다면, 그들은 가정과 고향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그들을 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천국의 복음을 위해, 하나님은 이런 대가를 치렀다. 하나님의 선민이 전쟁과 살육을 직면하게 했으며, 내쫓김을 당하게 했다. 유대인은 어쩔 수 없이 살 곳을 잃고 떠돌게 되었으며, 세계 각국으로 망명해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 이런 방식은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도 사람의 뜻과 동떨어져 있다. 그렇지만 ‘사람의 뜻과 동떨어져 있다’는 이 말로 하나님의 본질을 묘사할 수 있겠느냐? 분명히 그럴 수 없다. 이는 사람의 뜻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는 사심과 감정이 없으며,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행한 것은 다 전 인류의 발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면, 전 인류의 다음 단계 발전은 완전히 하나님의 경륜 절차에 따라 성취되고 실현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 절차는 이미 여기까지 진행되었으며, 하나님이 이렇게 하니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고 좋아 완전히 적합하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오직 하나님만이 이렇게 할 수 있지 어떤 국가나 종족도 이렇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다. 유대인을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고, 오늘날 하나님의 선민은 깨달음을 좀 얻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였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고, 걱정하고, 긍휼히 여기고, 자비롭게 대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명을 줄 때, 하나님 눈에 사람은 어떤 존재이겠느냐? 너희가 그 의미를 느낄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가치가 없네요. 사람은 그저 하나님이 가라는 대로 가고, 하라는 대로 하는 바둑알에 불과하네요.” 이 말이 옳으냐? 옳지 않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의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일할 때 그렇게 많은 것을 고려하지 않고, 사람의 전통적인 사상과 관념을 갖고 있지 않으며, 속박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전부 그렇게도 해방되고, 자유로우며, 공개적이고, 밝고, 정의롭다. 한편으로는 하나님 경륜의 절차에 따라 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도록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의 인류가 하나님의 손에서 정상적으로 하나님 경륜에 따라 발전하고 전진하도록 한다. 인류의 발전과 하나님의 경륜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약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지 않으면, 아픔을 참고 아끼는 것을 버리며 그 한 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인류의 발전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하나님의 모든 선택, 모든 절차, 모든 일을 하나님이 다 신경 쓰고 있으며, 이 모두에 하나님의 능력, 권병, 지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종종 하나님이 행한 어떤 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냐? 사람이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관념은 일부는 상상이고, 일부는 전통문화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또 일부는 사람의 사심과 판단이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견해에도 영향을 미친다.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일을 통해, 너희는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사람처럼 사심을 갖고 계시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정의롭고, 전 인류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만약 그 일을 지금 너희에게 한다면, 살육이 횡행하고 피가 낭자하며, 패가망신하고 가족이 산산이 흩어지게 한다면, 너희는 어떻게 인식하겠느냐? (저희의 인성과 사탄에 의해 패괴된 정도에 따르면, 아마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오해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의 이런 교제를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은 의미가 있으며, 모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을 받든, 저희는 기꺼이 하나님의 모든 지배에 순종하고 온 힘을 다해 하나님과 협력하면서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널리 전하고 증거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사람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하려고 결심한 일을 사람은 선택할 권리가 없다. 이 말을 듣고도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생각하겠느냐? 사람은 마음이 반쯤 차갑게 식게 되고 “이 사실 앞에서 사람이 선택할 수가 없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 사역에서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는 겁니까?”라는 말을 하게 된다. 너희는 아느냐? (피조물의 역할을 합니다.) 피조물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부각물의 역할을 하며,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고 형벌하는 대상이고, 더욱이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이다. 너희는 바로 이런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피조물인 사람은 어떤 기능들이 있느냐? 이는 사람의 실행 및 본분과 관련된다. 피조물인 너에게 하나님이 노래하는 은사를 주었고,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 노래하도록 안배했다면, 너는 열심히 노래를 불러야 한다. 만약 너에게 복음 전파의 은사가 있고,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 복음 전파를 안배했다면, 너는 복음을 잘 전해야 한다. 하나님 선민이 너를 리더로 선출하면, 너는 리더라는 이 부탁을 받아 하나님 선민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진리를 교제하고, 실제에 진입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의미가 깊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이 부탁을 받아 너의 기능을 발휘해야 하겠느냐? 이것이 바로 네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이고, 너는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 이는 네가 진리를 얻어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네가 자신의 뜻에 따라 제멋대로 나쁜 짓을 저지르고, 하나님이 맡긴 일을 완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집의 사역을 교란한다면, 너는 반드시 징벌을 받는 결말, 즉 바울과 같은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너에게 한 가지 일을 시킬 때, 너의 기능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일을 제대로 하고, 일을 망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 봉사하는 것이다. 너에게 무엇을 봉사하라고 하든 성실하게 제대로 봉사한다면, 너는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다. 만약 네가 성실하게 봉사하지 않고 늘 개인적인 속셈을 가지고 왕권을 잡으려 한다면, 너는 사탄이자 적그리스도이니, 징벌을 받게 된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고 그저 힘쓰는 일만 할 줄 아는데, 그렇다면 이런 피조물의 기능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힘을 쓰고 봉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가 결론을 내어 보아라. 하나님이 보기에 피조물은 대체 어떤 본분을 이행해야 하고, 어떤 모습을 살아 내야 하겠느냐? 이는 너희의 실행과 관련된다.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의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눈에 비친 피조물을 걱정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보살피고, 은혜를 베풀어 준다는 것이다. 그 후에 하나님은 징계, 책망, 훈계하며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손으로 떠받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일편단심으로 그를 온전케 하려 할 뿐만 아니라, 그가 온전케 될 때까지 그의 안전을 보장해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눈에 비친 피조물이다. 사람이 이러한 것들을 느낄 때, ‘하나님은 그지없이 사랑스럽구나!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셔!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받을 가치가 있어!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시고, 하나님이 너무 좋아!’라고 느끼게 된다. 만약 사실과 대조해 본다면, 하나님이 피조물을 단지 이렇게만 대했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을 대했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사람은 또 어떤 관념과 상상을 갖고 있느냐?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들은 또 무엇이냐?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 책망과 훈계, 그리고 징계와 박탈이다.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불신파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성질의 문제이겠느냐? 이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거절하는 성질이다. 이런 사람은 재난을 당해 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된 후, 하나님이 어떤 상황을 마련해 그를 드러내든 상관없이, 이렇게 드러나는 과정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 보살핌과 보호를 볼 수 있느냐? (볼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볼 수 없지만, 시련과 연단을 겪은 후에는 볼 수 있지 않겠느냐?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겪은 후에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전혀 볼 수 없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관념과 상상을 고수하며,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과 거역이 가득하다. 이것이 바로 불신파, 악인, 적그리스도 부류의 사람이며, 이런 사람들이 하는 모든 것은 바로 반면교사이다. 바울의 예를 들어 보자. 바울에게서 사람은 무엇을 보았느냐? (바울은 적그리스도의 길을 걸었으며, 저희가 경계심을 갖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육적 장래와 종착지만을 추구했으며, 상과 면류관을 얻는 것만 추구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하고, 그렇게 그를 징계하고 깨우쳐 주고 빛을 비춰 주었어도,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줄곧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였으며, 결국 적그리스도가 되어 정죄되고 징벌을 받았다. 이는 반면교사이다. 사람은 바울의 그 전형적인 적그리스도 사례를 통해 바울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 멸망의 길을 걸었음을 보았다. 많은 사람이 이를 통해 교훈과 이점을 얻어 모두 진리 추구의 길,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바울의 교훈에서 이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갖겠느냐? (구원과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폭로, 심판, 정죄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눈에 바울이라는 피조물은 무엇이 되었느냐? 봉사자가 되었다. 똑같이 다 피조물이지만, 이점을 얻은 자와 드러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대처법은 완전히 다르다. 사실, 하나님 눈에 이 두 부류의 사람은 모두 개미와 구더기처럼 가치 없는 인류지만, 하나님은 달리 대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다. 이 두 부류를 달리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는 무엇에 근거한 것이냐? (사람이 걸은 길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 본질, 그리고 진리를 대하는 태도와 사람이 걸은 길에 근거한다. 겉으로 봤을 때, 하나님은 사람의 뜻과 동떨어지고 감정이 없는 듯하고, 하나님이 행한 이 일은 지나치게 매정한 듯하다. 사람은 관념과 상상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울을 대하셔서는 안 돼. 바울이 그렇게 많은 사역을 하고 고생을 했는데, 게다가 하나님께도 매우 충성스러웠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렇게 대하셨지?’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으냐? 진리에 부합하느냐? 바울이 어떤 점에서 하나님에게 충성스러웠느냐? 이는 사실 왜곡 아니냐? 그는 자신이 복을 얻는 것에 충실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충실이냐?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문제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면서 감정에 따라 함부로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 아니겠느냐? 어쩐지 사람이 다들 바울을 숭배하더라니! 사탄에게 속하는 부류는 늘 사탄을 숭배하고, 또 감정에 따라 사탄을 대변하는데, 이는 바로 사람이 사탄과 여전히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람이 사탄을 대변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바울을 동정하는 이유는 자신이 바울과 마찬가지로, 바울의 길을 걷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렇게 바울을 대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정리와는 완전히 정반대로 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며,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사람의 정리에 따르면, 사람은 “바울이 공로는 없다 하더라도 고생은 했고, 고생을 안 했다 하더라도 고단하기는 했어요.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고생한 걸 봐서라도 그가 살아남도록 했어야 하죠. 그게 설령 봉사자라 해도 말이에요. 그가 징벌을 받고 저승 지옥에 떨어지게 하지 말아야 했어요.”라고 말할 것이다. 이는 사람의 정리이고 감정이지,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점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사람의 정리를 갖고 있지 않으며,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것은 전부 진리와 하나님의 본질에 따른 것이고,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공의 성품이라는 점이다. 너의 주관적인 염원이 무엇이든, 또 객관적인 사실로 네가 무엇을 했든, 하나님은 상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한 것, 표출한 것, 걸은 길에 근거해 너의 성질을 정하고 너를 규정하며, 너에게 가장 적합한 태도를 취한다. 바울의 결말이 바로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바울의 사례를 보면, 마치 하나님은 사랑이 없는 듯하다. 베드로와 바울은 똑같이 다 피조물인데, 하나님이 베드로에게는 칭찬과 축복을, 바울에게는 폭로와 분석, 심판과 정죄를 하였다. 하나님은 그렇게 바울의 결말을 규정하였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바울의 사례를 통해 너는 하나님께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이 그를 여러 번 징계하고, 또 빛을 비춰 주어 회개할 기회를 주었는데도, 바울이 죽어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걸어, 결국에는 하나님께 정죄되어 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사례를 겉으로 보면,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사람에게는 선택권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하나님이 사람의 선택에 간섭하지는 않지만, 사람이 복받기를 추구하는 길을 선택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정죄하고, 사람은 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사람이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진리 추구의 길을 가는 것만 허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판을 받고, 정결함을 얻고, 온전케 되는 것,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이런 식으로 보고, 이렇게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터무니없고 황당하지 않으냐?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이 공의롭고 거룩하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늘 자신의 길을 걷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 걷기를 선택한다. 게다가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니,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다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그 사람을 대하시는지, 또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어떤 사명을 주시어 어떤 사역을 하게 하시고 어떤 본분을 이행하게 하시는지,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어. 결국, 자신의 길을 걷기로 선택한 사람은 모두 정죄되고, 오직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을 선택하고 진리 추구의 길을 가기로 선택해야만 하나님께서 축복하고 칭찬하셔.’ 일부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 같고, 하나님이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에 간섭하는 것 같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겠느냐?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전부 원칙에 따라 행한다. 사람이 실상을 알지 못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오해가 생기기 쉬우며 쉽게 하나님을 판단하게 된다. 네가 실상을 알고 진리를 깨닫게 되면, 너는 이런 오해가 일말의 가치도 없으며 지나치게 비열하고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이때 너는 하나님이 행한 것이 모두 옳으며,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이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우매하며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일을 간파하지 못하면서도 그저 자신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하나님을 규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네가 이해하게 되었을 때, 너는 바울을 위해 변호하지 않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게 될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너무나 옳게 행하셨어요. 사람은 다 패괴되어 속이 좁고 지나치게 우매해서 일을 간파하지 못해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보았든,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든, 어쨌든 하나님이 행하신 것은 모두 옳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 나타난 것이며, 모두 하나님의 본질이고, 모두 진리에 부합해요. 틀림이 없어요!”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이 너희에게 역사하여 너희를 구원하고 있으니, 너희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이 너희에게 간섭하였느냐? 너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겠느냐? 바울에게서 교훈을 얻어야 하지 않겠느냐? 베드로를 본받아 진리 추구의 길을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는 너희가 진리를 깨달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진리를 깨달으면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느냐? 진리를 깨닫는 목적은 바로 사람의 패괴 성품과 다양한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네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할 때, 그리고 너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과 일, 사물에 직면할 때, 이런 진리가 너에게 작용하게 된다. 그렇다면 네 개인의 생명 진입 및 어떻게 자신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에 있어 바울의 사례는 어떤 도움이 되느냐? (하나님 앞에 나와 자신을 반성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장벽과 오해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너희 모두가 조금씩 언급하였고, 모두가 약간의 수확을 얻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진리 추구의 길을 선택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왜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축복하고 칭찬하는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유대인이 쫓겨나 세계 각지로 떠돌아다니는 상황에 대해 방금 얘기했다. 이 사실에서 사람은 무엇을 보았느냐? 어떤 진리를 깨달았느냐? 이 일을 통해 사람은 성찰해야 한다. 하나는 사람이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생각해 보고, 또 하나는 여기서 하나님 성품을 인식해야 한다. 그럼 우선 사람이 이 일에서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얘기해 보자.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의 의지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이 일할 때는 하나님 자신의 원칙이 있다. 사람의 태도는 어때야 하느냐? 어떤 일을 만나든, 그것이 자신의 관념에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절대 하나님에게 대항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제가 비록 거역하고 대적하는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이런 태도는 어떠냐? 엄연히 안 된다. 그것은 진실한 순종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대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해야 하고, 어떻게 실제 상황에 적용해야 하느냐? 두 가지 실행 원칙이 있다. 첫째,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어떤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부탁을 어떻게 협력해서 완수해야 하는지를 구해야 한다. 이것은 적극적인 면에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둘째, 자기 내면의 하나님을 오해하는 부분, 순종하지 못하는 부분, 사람의 관념 상상에 관한 부분, 하나님과 합하지 못하는 부분을 성찰하고 인식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정확하게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일할 수 있고, 이로써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여 하나님께 기억될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다. 이 실행 원칙이 간단하지 않으냐? (간단합니다.) 이 ‘간단하다’는 말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느냐? 바로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 말의 윤곽과 표현이 분명해서 한 번 들으면 어떻게 실행할지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실행하려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사람은 패괴 성품이 있고 늘 이치를 따질 뿐만 아니라 상상과 관념도 많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런 것을 해부해야 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야 한다.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 관념이 생겨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던데, 하나님은 왜 사람의 사상 관념을 드러내고 심판하려고만 하실까? 게다가 하나님의 사랑은 본 적도 없어. 내가 본 건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이 거스를 수 없다는 것뿐이야.’ 이것은 사람의 관념이 아니냐? 패괴된 인류의 관념 상상대로 인류 전체의 발전 과정에서 하나님이 계속 긍휼과 자비만 나타내고, 공의도 진노도 없었다면 인류가 지금까지 살 수 있었겠느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진작 사탄에게 집어 삼켜졌을 것이다. 마귀 사탄을 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패괴된 인류를 대할 때 하나님이 나타내고 드러내는 것은 사람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공의 성품이고, 증오와 혐오, 심판과 형벌, 징벌과 멸함이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성품이 공의롭고, 거룩하고, 거스를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내어 사탄을 철저히 부끄럽게 할 수 있고, 진정한 인류를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 하나님은 줄곧 이렇게 인류를 이끌어 왔고, 또 이렇게 인류를 구원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 마음에 합하지 않는 것들과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종종 성찰해야 한다. 이러한 오해는 어떻게 생겨나느냐? 사람은 어째서 하나님에게 오해가 생기느냐? (사람의 이익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그 사실을 알고 서글픔을 느낀다. ‘처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아끼셨어. 그들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해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또 만나와 마실 샘물도 주셨어. 그런 다음 또 친히 율법을 반포해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가르치며 그들을 이끄셨지. 사람에게 정말 사랑이 가득했으니 그 시대 사람들은 너무나 행복했겠구나! 그런데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하나님 태도가 180도 달라질 수 있나?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로 간 거지?’ 사람의 정서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이 순간 의심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과연 사랑일까? 예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하던 태도는 어째서 전혀 안 보일까?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 이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하나님은 과연 사랑이 있는 걸까?’ 이렇게 오해가 생겨난다. 그렇다면 사람이 오해가 생겨난 배경은 무엇이냐? 설마 하나님이 한 일이 사람의 관념 상상에 맞지 않아서, 그 사실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냐?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규정하기 때문이 아니냐?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사랑이니까 당연히 사람을 보살피고, 지켜 주고, 은혜와 축복도 내려 주셔야 해.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지! 나는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을 사랑하시는 게 마음에 들어. 특히 사람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게 하신 걸 보니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겠어. 그 시대 사람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야! 나도 그중 한 명이었으면 좋았을걸.’ 거기에 도취된 너는 하나님이 그 순간 나타낸 사랑을 최고의 진리로 생각하고 하나님 본질의 유일한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하나님을 네 마음속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이 그 순간 행한 모든 것을 최고의 진리라고 규정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사랑스러운 부분이자 사람이 제일 존경하고 경외하는 부분이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하나님이 그렇게 행한 것 자체는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네가 규정하는 바람에 그 일은 네 마음속에서 관념이 되고, 하나님을 규정하는 근거가 되어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마치 하나님의 사랑이 긍휼과 보살핌, 보호, 인도, 은혜, 축복과 같은 것 외에 다른 것은 없고, 하나님의 사랑은 그 정도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너는 어째서 그런 면을 그토록 애지중지하느냐? 네 이익과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의 어떤 이익과 관계가 있느냐? (육적인 즐거움과 편안한 생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에게서 그런 것들만 바란다. 다른 것들, 이를테면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 하나님을 위해 고통받고, 버리고, 헌신하고, 심지어 목숨을 내던지는 것 등은 원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 보호, 인도만을 누리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 본질의 유일한 상징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의 유일한 본질로 규정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게 한 사실에서, 하나님이 행한 일들이 사람이 관념을 품게 된 근원이 된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것이 인류가 하나님에게 관념을 품게 된 배경이다. 이런 관념이 생긴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성품을 진실로 인식할 수 있겠느냐?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해와 관념이 생겨날 게 뻔하다. 이것은 사람의 인식이 너무나 단편적이고 진실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관념 상상과 사욕으로 분석하고 해석한 사랑이자 인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실한 본질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긍휼과 구원, 보살핌, 보호를 베풀어 주고 간구를 들어주는 것 말고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채찍질과 징계, 훈계와 책망,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이 있습니다.) 맞다. 하나님의 사랑에 해당하는 것은 너무나 많다. 매질, 징계, 꾸짖음, 심판, 형벌, 시련, 연단…. 이런 것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야 비로소 전면적이 되고, 진리에 부합하는 사랑이 된다. 이런 걸 인식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성찰할 때 자신의 치우친 면을 인식하고, 자신의 잘못된 점을 훌륭히 반성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경지에 이르려면 진리를 구해야 한다. 사람은 진리를 구하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없앨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없애면 하나님의 모든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없앤다면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나는 광경을 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류와 피조물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는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매질하고 쫓아내는 방식으로 이끌어 주시기도 하는구나. 사람이 하나님의 태도를 대할 때 아무 선택도 있어선 안 돼. 순종해야만 하고 대항해선 안 돼.” 사람의 관념 상상으로는 유대인을 대한 하나님의 그런 태도는 사람의 뜻과 동떨어진 것 같지만, 이제 와서 보면 하나님이 한 일은 너무도 좋고, 하나님이 나타낸 것은 모두 공의 성품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고, 일용할 양식을 내려 줄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릴 수도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병이고, 또 하나님의 본질이자 성품이다.

유대인들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이 관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그 일에서 깨우침을 얻는다.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사람이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사람에게는 그런 이해 능력이 없다. 만약 하나님이 한 그 일이 자기 관념에 맞지 않는다면, 우선 하나님은 공의롭고, 하나님의 성품은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서, 유대인이 대체 무슨 짓을 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기에 하나님을 노하게 했는지 봐야 한다. 그래야 철저하게 사람의 관념을 해결할 수 있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기란 정말 쉽지 않다. 네가 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렸어도 관계없고, 혹은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여 사역을 했어도 관계없다. 봉헌하고 버린 것도 관계없고, 심지어 사람이 볼 때 네가 공헌이 있어도 관계없다. 어쨌든 이런 것들을 밑천으로 내세우지 마라. 이것이 첫 번째다. 절대 이런 것들을 카드로 내세워 하나님에게 너를 어떻게 대하라고 협박하지 마라. 이것이 두 번째다. 다음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하나님이 하는 말씀과 너를 대하는 태도가 네 관념에 맞지 않고 인지상정에 어긋날 때, 절대 하나님께 대적하거나 대항하지 마라. 이것이 세 번째다. 이 세 가지를 지킬 수 있겠느냐? 이 세 가지는 실제에 관련된다. 사람에게는 이 몇 가지 내적 상태가 쉽게 생겨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왜 이런 내적 상태가 생기느냐? 왜 이런 모습이 나오느냐? 하나님은 인류 전체를 경영하고 만물을 주재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것을 밑천으로 내세웠느냐? 공로로 인정해 달라고 했느냐? “내가 이렇게 큰일을 했는데 너희는 어째서 고마운 줄도 모르느냐?” 하나님이 이런 태도를 보였느냐? (아닙니다.) 하나님 마음에는 그런 게 없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조금만 버리고 헌신해도, 조금만 공헌해도 하나님에게 공로를 인정받으려 하느냐? 왜 그런 모습과 태도를 보이느냐? 그 문제는 사실 아주 간단하다. 바로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는 왜 그런 모습과 태도가 없겠느냐? 바로 하나님의 본질은 진리이고, 진리는 거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정답이다. 사람이 그런 모습과 태도를 드러내는 것은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있느냐? 방금 말한 세 가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실행하려면 쉽지 않지만, 해결 방법이 다 있다. 이 세 가지를 들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이것도 못 하게 하고 저것도 못 하게 하면 꼭두각시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라는 거잖아.’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내가 알려 주겠다. 너에게 그런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은 너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다. 네가 추구하는 그 방법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바른길이 아니다. 이미 앞선 실패의 교훈도 있다. 자신의 버림과 헌신을 밑천이나 카드로 내세워 하나님이 너를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맞지 않을 때 대항한다면, 너의 그런 태도는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비인간적이고, 정당하지 않다. 네게 설령 천 가지, 만 가지 이유가 있다 해도 너의 그런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진리에 전혀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에 속한다. 사람이 갖춰서는 안 되는 태도다. 이것이 두 번째다. 네가 만약 그런 태도를 고집한다면 결코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얻을 수도 없다. 진리를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네가 손해를 보고, 피조물이 지녀야 할 존엄과 본분을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다. ‘난 내 태도를 버리지 않을 거야. 누가 날 어쩌나 보자고! 내 생각엔 내가 옳아. 그러니 내 생각을 밀고 나가겠어. 내 생각이 이치에 맞으니 끝까지 밀어붙이자!’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그렇게 밀고 나간다면, 너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밀고 나가거나 계속 그렇게 고집을 부린다고 해서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네 그런 강경한 태도 때문에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너의 그런 거역과 끝까지 대항하는 태도를 보고 그에 상응하는 태도로 너를 대한다. 이것이 네 번째이다. 이는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네 가지 중에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항목이 있느냐? 공허하고, 사람의 실제 상태에 맞지 않고, 사람의 생활에서 실제적인 면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그런 항목이 어느 하나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모두 도움이 됩니다.) 어느 하나 공허한 이론에 그치고 실행의 길이 아닌 항목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 네 항목은 사람이 현실 생활에서 진리 실제에 어떻게 진입하는가 하는 것에 도움이 되느냐? (도움이 됩니다.) 이 네 가지를 확실히 인식하고, 거기에 따라 실행하고 체험한다면, 너는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이 네 가지는 네가 많은 시험 가운데 있을 때나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을 만났을 때 보호받도록 해 줄 것이다. 네가 그런 패역한 상태를 드러낼 때, 이 몇 가지 진리를 생각하고 거기에 대조해 본 다음 그에 따라 실행하면 된다. 처음에 실행하지 못할 경우, 기도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는지 인식하고, 자신이 어떤 패괴된 내적 상태에 처해 있고, 어떤 패괴를 드러냈기에 실행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는지 반성하고 인식해야 한다. 네가 이렇게 진리를 구하면 네 내적 상태는 정상을 유지할 것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어느 방면의 일이든, 진리를 모르면 네가 행하는 것은 관념 상상 아니면 거역과 대적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백 퍼센트 확실하다. 어떤 때는 겉보기에 네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나쁜 짓도 하지 않고, 교란이나 방해도 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한 일이 진리에 부합한다고 볼 수는 없다. 어떤 때 너는 관념 상상대로 일하기도 한다. 그런데 비록 교란이나 파괴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그것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네가 한 그 일은 하나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 또 어떤 때 너는 속으로 하나님에게 관념을 갖기도 한다. 비록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면서 계속 네 관념 상상을 고집하고 계속 하나님을 규정한다. 그러면 네가 겉으로는 별다른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내적 상태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방금도 말했지만, 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일종의 관념과 규정을 가지고 있다. 비록 네가 자신의 관념 상상 때문에 하나님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한 적은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너의 내적 상태는 네가 계속해서 속으로 하나님을 규정하고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결론은 무엇이냐? 그건 바로 네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 사실 아니냐? (사실입니다.) 어느 날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면, 너는 너의 그 관념 때문에 하나님이 한 일에 아멘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한 일을 보고도 하나님을 찬미하거나 경외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다. 오히려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원망이 생겨나고, 심지어 조금은 반발심이 생겨날 것이다. 너는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시는 건 사람 뜻과 너무 맞지 않습니다! 어찌 피조물을 이렇게 대하십니까? 어찌 당신 선민을 이렇게 대하십니까? 저는 당신의 행사를 보고 찬미할 수 없고, 찬양하는 소리도 못 내겠습니다. 마음이 무척 괴롭고 처량합니다. 제가 마음속으로 무한히 숭상하던 하나님은 제가 의지할 만한 분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믿는 하나님은 이러시지 않습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당신의 피조물을 이렇게 대하면 안 됩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이렇게 냉정하고 잔혹하지 않습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인류를 아기처럼 부드럽고 자상하게 대하십니다. 사람에게 넘치는 행복과 포근함을 주시지, 이렇게 차갑고 쌀쌀맞지 않습니다.” 네 내면 깊은 곳에 이렇게 서러움이 생겨날 때, 그 순간 네 눈앞에 발생한 그 사실은 네가 보기에 하나님이 한 것이 아니다. 너는 인정하지 않고, 아멘 하지 않고, 찬송은 더더욱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너의 그런 정서, 그런 내적 상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냐,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대항이냐? (대항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진실한 순종이 아니다. 여기에 순종은 없고, 원망과 대항, 불복, 심지어 분노만 있을 뿐이다. 설마 이것이 피조물이 창조주를 대할 때 지녀야 할 태도란 말이냐? 아니다. 너는 속으로 갈등할 것이다.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왜 나는 마음속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걸까?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지?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왜 이렇게 사람 뜻에 맞지 않을까?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왜 그 안에는 살육과 유혈 사건이 가득할까?’ 이 순간 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 하나님과 현실 속에 진실로 존재하는 창조주가 서로 모순이 되고, 충돌이 일어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어느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냐? 이 순간 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관념 속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냐, 아니면 눈앞에서 실제로 행하는 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냐? (눈앞에서 실제로 행하는 하나님입니다.) 사람은 주관적인 바람으로는 실제로 행하는 이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람의 관념과 사욕, 사람의 정 때문에 자기 내면 깊은 곳의 그 하나님을 숨기고, 눈앞에서 실제로 행하는 이 하나님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면서도 사람 내면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창조주가 행한 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여전히 자신을 감춘 채 자기만의 작은 세계에 살면서 내면 깊은 곳에서 상상한 그 하나님과 기쁘게 교류하고 함께한다. 반면 참된 하나님은 사람에게 계속 막연한 존재로만 남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이런 생각마저 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안 계셨으면 좋겠어. 내가 속으로 상상하는, 사랑이 넘치고 사람에게 따스함을 느끼게 해 주시는 그분이야말로 나의 하나님, 참된 하나님이야. 지금 이 실제 하나님은 내가 상상하는 하나님이 아니야. 그분이 한 일은 너무 실망스럽고, 따스함도 느껴지지 않아. 특히나 그분의 심판 형벌도 그렇고, 그토록 많은 사람을 정죄하고 도태시킨 일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아.’ 이런 건 어떤 사람들 입에서 나오는 소리냐? 모두 불신파들이 내뱉는 소리,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내뱉는 소리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행사를 모를 때, 사람의 상상과 하나님의 실제 사역이 모순을 일으켰을 때를 배경으로 생겨나는 갖가지 내적 상태다. 그렇다면 이런 내적 상태는 어째서 생겨날까? 우선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다. 또 한편으로, 사람의 관념 상상에 맞지 않는 사실이 하나 나타났을 때, 사람의 꿈과 환상이 깨져 자신의 속셈과 복을 바라는 욕망이 채워질 수 없을 것 같을 때, 사람은 결국 어떤 선택을 하느냐? 도피하고, 타협하고, 보류한다. 심지어 절충안을 택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둘 다 받아들입니다. 원래부터 제 마음속에 있던 그 하나님도 하나님이신데, 그분은 또한 사랑이 있는 분입니다. 또 눈앞에서 큰일을 하시고, 권병이 있는 이분도 역시 하나님입니다. 저는 둘 다 받아들이고, 어느 분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사람은 늘 이렇게 양다리를 걸친 상태로 살아간다. 속으로 늘 자기 상상 속 하나님에게 도취되어 막연한 하나님을 위해 뛰어다니고, 헌신하고, 봉헌하고, 사역하고, 어떤 대가라도 치러서 본분을 이행하고, 심지어 생명도 바치고 자신의 모든 걸 바칠 수도 있다. 사람의 태도가 어떻고, 또 내적 상태가 어떤지를 떠나, 사람 마음속에 이런 하나님이 존재하는 동시에 진정한 창조주에게는 사람이 하는 이 모든 것이 선행이냐, 아니면 악행이냐? 순종이냐, 아니면 대적이냐? 당연히 선행도 아니고, 기념할 가치도 없다. 또한, 사람에게 진정한 순종도, 진정한 봉헌도 없고, 대적과 거역, 대항만 가득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람이 이런 내적 상태를 지니고 늘 이런 상태로 살기 때문에, 꿈에서 깨어나 현실 생활 속에서 살게 될 때는 현실 생활 속의 이 하나님이 한 일이 사람의 심리적인 요구와 정신적인 필요를 전혀 채워 줄 수 없고, 언제나 상처를 주고, 쌀쌀하고 야속한 느낌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은 대체 사랑일까? 사람을 사랑하시기는 할까? 하나님은 사람을 걱정하고 자기 몸처럼 사랑하신다고 하던데, 어디가 그렇다는 거지? 왜 내 눈에는 안 보이지?’ 이러면 큰일이다! 사람이 늘 이런 내적 상태로 살다 보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갈등은 점점 깊어지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도 점점 멀어진다.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하나님의 일을 보고 사람은 생각한다. ‘나의 하나님께서 세상이 놀랄 일을 하셨구나. 이분이 바로 내가 정말 믿고자 하는 하나님이고, 바로 나의 하나님이야. 이분의 피조물로 살아가야지. 이분이야말로 나의 창조주야.’ 그런데 사람이 현실 생활 속에서 어려움을 만나 소극적이고 연약해질 때 상상 속의 그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시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수시로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은 그것 때문에 약해지고 심지어 사라진다. 사람의 이런 내적 상태와 태도, 모습은 모두 어떻게 초래된 것이냐? 그것은 사람이 이 창조주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가 그를 알지 못하는 것이 유일한 원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과 하나님 사이가 멀어지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온갖 갈등과 오해가 빚어지는 근원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먼저, 사람의 관념을 해결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모든 사역을 현실 생활 속에서 느끼고, 체험하고, 구하고, 헤아려서 하나님이 너에게 안배한 모든 일에 완전히 순종하고, 하나님이 너를 위해 마련해 준 모든 사람과 일, 사물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순종의 목적이 무엇이냐? 이 모든 진리를 인식하고 깨닫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교제한 내용이 너희가 듣기에 다소 깊이가 있느냐?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이해할 수 있겠느냐? (네.) 이론적인 면은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이해했다고 해서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깨닫고 받아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일상생활에서 늘 성찰해야 하는데, 무엇을 성찰해야 하느냐? (자신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런 내적 상태와 모습이 있는지, 또 자신이 하나님께 어떤 관념이나 오해가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맞다. 너에게서 어떤 패괴가 드러나고, 어떤 상상 관념이 있는지, 그런 것들을 성찰해야 한다.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간단하다. 먼저 다른 사람부터 보면 된다. 다른 사람은 너를 비추는 거울이다. 다른 사람이 이 측면의 성품이나 상태를 드러냈을 때, 역으로 자신에게 그런 관념 상상이나 상태가 있지 않은지, 자신을 성찰하고 거기에 자신을 맞춰 보면 된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꺼내서 털어놓고 해부해야 하느냐, 아니면 ‘꽃 피우고 열매 맺을 때까지’ 꼭 지키고 있어야 하느냐? (털어놓고 해부해야 합니다.) 꺼내고 해부해서 모두에게 유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 모두가 이를 통해 패괴된 내적 상태를 정확히 인식하고, 진리를 깨닫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여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관념을 해부하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상태를 해부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사람의 관념과 소극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입니다.) 거기서 벗어나려는 목적은 무엇이냐? 진리를 얻기 위해서다. 관념을 해결하려는 목적은 네가 그 관념의 잘못된 점을 인식하고, 그것이 네가 지녀야 할 것이 아님을 인식하기 위한 것이다. 너는 그것을 고수하지 말고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 다음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능동적으로 구해야 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받아들여 네가 지녀야 할 실행 원칙과 사상 관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변화가 생긴 것이고, 진리를 얻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방면의 진리를 근거로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일을 바라볼 것이냐? 이 일에 대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념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유대 땅에서 쫓아내선 안 되고 마땅히 유대인을 보호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도 하나님은 유대인의 죄를 영원히 사해 주셔야 하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관념이다. 너무나 황당하지 않으냐? 하나님이 사람의 관념대로 하면, 그래도 공의 성품이 있는 것이냐? 비록 쫓겨나게 돼서 사람의 마음이 조금 언짢을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이미 선을 넘은 행동이고, 사탄이 하는 짓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어떻게 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대하실 수 있지? 이런 사랑의 방식이라면 사람이 받아들일 수가 없어. 사람 뜻에 너무 어긋나잖아! 이제 보니 이건 사랑도 아니야. 하나님이 유대인을 이렇게 대했다면, 하나님에게는 사랑이 없는 거야.’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했는데, 이것은 사람의 관념이다. 사람의 관념은 무엇이냐?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규정합니다.) 그렇다. 사람이 한 가지 일을 규정하는 것은 사람의 관념이다. 그것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사람은 무엇을 규정했느냐?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을 규정했다. 하나님은 꼭 어떻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행사이고, 하나님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을 사람이 규정한다면, 그 규정이 바로 사람의 관념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을 뭐라고 규정했느냐? 사람이 뭐라고 규정했길래 속으로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한 것에 대해 마음이 편치 않고, 하나님에게 오해와 반발이 생겼느냐? (사람은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모든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의 상상과 관념, 사람의 예상을 벗어나 유대인을 쫓아내고, 그들을 떠돌아다니게 하시니까 사람은 그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커다란 관념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행한 방법에 대해 많은 사람이 관념이 생기고 오해를 품었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의 그 방법에 대해 마음이 불편하고 하나님이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관념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규정이 아니냐? 하나님이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무슨 근거로 하나님이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느냐? 네 생각에는 그러면 안 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면, 설마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냐? 하나님이 한 일이 틀렸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이것이 사람의 어리석은 부분이 아니냐? 사람은 너무나 어리석고 무지하고, 너무나 교만하고 독선적이다. 너무나 쉽게 하나님에게 관념이 생기고, 하나님을 규정한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너무나 위험하고, 아주 쉽게 도태될 것이다.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이 관념과 의견을 품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가장 간단한 방법을 하나 알려 줄 테니 너희의 그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는지 잘 들어 보아라. 가장 간단한 그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은 먼저 자신이 하나의 피조물이고,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점을 알아야 하고, 늘 관념이 생겨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대역무도한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반드시 창조주가 피조물을 대할 때는 기본적인 원칙이자 최고의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어떻게 대하든 전부 그의 경륜에 근거하고 그의 사역의 필요에 근거한다. 그는 누구에게 자문할 필요가 없고, 누구의 동의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는 행하고 싶은 대로 행하고, 대하고 싶은 대로 대한다. 그가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대하든 모두 진리 원칙에 부합하고, 창조주가 일하는 원칙에 부합한다. 피조물은 오로지 창조주께 순종해야지, 어떠한 선택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피조물이 마땅히 지녀야 할 이성이다. 만약 이런 이성을 갖추지 못하면 사람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사람은 반드시 창조주는 영원히 창조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에게는 모든 피조물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주재할 권력과 자격이 있으며, 거기에 이유는 필요치 않다. 이는 그의 권병이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행한 일이 옳은지 그른지, 어떻게 해야 적합한지 평가할 권리도 자격도 없다.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일지 말지 선택할 자격이 있는 피조물은 없으며, 창조주에게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어떻게 주재하고 안배해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는 피조물도 없다. 이것은 최고의 진리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든 피조물인 인류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바로 창조주가 행한 이 모든 것에서 구하고 순종하고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최종적인 결과는 바로 창조주가 자신의 경륜을 이루고 자신의 사역을 성취하여 그의 경륜이 아무 방해 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한편, 피조물은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 가운데서 진리를 얻고 창조주의 뜻을 깨달으며 창조주의 성품을 알게 되는 것이다. 너희에게 또 하나 알려 줄 원칙이 있다. 창조주가 무엇을 하고 어떠한 태도를 보이든, 큰 행사를 하든 작은 일을 하든, 그는 창조주라는 것이다. 반면 피조물인 인류는 무엇을 하든, 얼마나 큰 재능과 은사가 있든 결국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류는 창조주의 은혜와 축복을 얼마나 많이 받았든, 창조주의 긍휼과 자비 또는 은총을 얼마나 많이 받았든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고, 자신이 고급 피조물이 되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너에게 아무리 많은 은혜를 베풀고, 은사를 주고, 일찍이 은총을 베풀거나 특별한 재능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너의 밑천이 아니다. 네가 피조물이라면 영원히 피조물이다. 너는 영원히 ‘나는 하나님 품속의 아기이니 하나님은 영원히 날 버리지 않으실 거야.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나를 사랑으로 대하실 거고, 나를 보호해 주실 거야. 또 나를 살살 어루만지시고, 작고 낮은 소리로 따뜻하게 위로하며 격려해 주실 거야.’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바꿔 말해, 창조주의 눈에 너는 다른 피조물과 같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너를 쓸 수 있고, 또 마음대로 너를 지배할 수도 있으며, 마음대로 너를 각종 사람과 일, 사물 속에 배치해 어떤 역할을 맡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인식이고 이성이다. 이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차 정상적이 될 것이고, 또 하나님과 가장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고 자신의 위치에 똑바로 설 것이며, 자신의 본분을 잘 지킬 것이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어떤 생각이 드느냐? 그래도 하나님에게 오해가 생기겠느냐? 누군가는 말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을 대하시는데, 그러면 예전에 늘 사람을 개미 같다 하시고, 하나님 눈에는 구더기만도 못하다고 하셨던 그 말은 이제 보니 이론이 아니라 사실이었네요!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각만큼 그렇게 친밀하고 가까운 분이 아니군요.” 사람은 마음이 싸늘해진다. 이건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에 찬물을 끼얹어서 사람 마음을 차갑게 식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 마음을 차갑게 하는 것이 나으냐, 아니면 계속 하나님에게 오해를 품게 두는 것이 나으냐? (차갑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좀 냉정해져야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이나마 인식할 수 있다. 피조물이 갖춰야 할 이성은 바로 모든 것에 있어 진리를 원칙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일을 대할 때는 진리를 근거로 해야 하고, 모든 일을 할 때는 진리를 원칙과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 반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늘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생각하고 서로 동등한 지위에서 지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좋은 것이냐? (좋지 않습니다.) 어디가 좋지 않으냐? 사람은 잘못된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너무 많이 오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오해, 혹은 사람의 집착 때문에 태도를 바꾸지는 않는다. 태도를 바꾸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전과 다름없이 원칙에 따라 사람에게 일하고, 인류의 모든 생활을 주재하고 안배한다. 그런데 사람이 쉽게 관념을 품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한다면, 커다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친한 척하고 하나님에게 육적으로 줄을 서려 하면서, 정을 내세우고, 밑천을 내세우고, 자신의 재주와 능력을 내세우고, 자신의 노력과 과거의 영광을 내세우고, 온갖 이유를 내세운다. 늘 이런 내적 상태 속에서 사는데 그러고도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너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은 없고 늘 잘못된 관점을 품는다. 피조물의 위치에 서지 못하고 늘 야심을 품고 늘 더 높은 자리를 탐한다. 그 때문에 결국 자신의 본분을 바르게 대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너에게 한 요구, 너에 대한 태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늘 연단을 받고, 고통받아도 자신의 상상 관념을 내려놓지 못하고, 자기를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가장 사랑하고 염려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맞닥뜨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은 그렇지 않고, 그것은 네 일방적인 생각이라는 걸 알고 좌절을 당하고 충격을 받아 한바탕 원망하고, 억울해하고, 감정도 꺾이고 만다.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이 가치가 있느냐? (가치가 없습니다.) 사람의 일방적인 생각, 사람의 상상 관념은 스스로를 몹시 괴롭히고, 사람에게 최대의 골칫거리이기 때문에 사람은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느냐?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공의롭고, 하나님이 하는 모든 사역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이 해야 하는 건 바로 피조물의 자리에 서서 창조주의 주재,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고, 창조주가 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거기서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인식하는 것이다. 사람이 늘 자신의 관념으로 하나님이 한 일을 평가하고 규정하며, 하나님에게 늘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자기 뜻을 따르도록 한다면, 너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도태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다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바로 창조주가 하는 모든 것에서 구하고, 순종하고,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인식해서 하나님께 진실로 순종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

2018년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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