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깨달을 수 있어야 영이 통하는 사람이다

먼저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모습들이 있는지 교제해 보자.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이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을 몇 년 동안 믿었든, 그가 겉으로 보기에 어떻게 추구했든 간에, 생명이 계속 성장하지 못하고 생명 진입을 실행하는 방법도 전혀 없는 것이다.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패괴 성품을 드러내도 자신을 반성하거나 인식하지 않고, 심지어 패괴 성품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아무리 교만한 성품을 유로하고 표출하든 그는 지각하지 못하고, 어떻게 거짓말을 하고 간사한 짓을 하든 아무런 느낌도 없다. 또 하나님을 어떻게 거역하고 대적하든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는 이방인처럼 제멋대로 행동하고 나쁜 짓을 일삼으며 무슨 짓을 하든 다 핑계가 있고, 누가 꾸짖거나 충고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늘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지만 무엇이 순종인지, 무엇이 패역이고 대항인지 전혀 모르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거부한다. 그는 사람의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 무엇인지, 진리에 따라 실행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런 세세한 차이들을 전혀 모른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본분을 이행할 때 충성을 다했는지, 대충 건성으로 임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이 어떤 패괴 성품을 드러내고 어떤 속셈을 갖고 있었는지, 자신이 걷는 길이 옳은 길인지 모른다. 또한, 자신이 그렇게 실행하는 관점이 옳은 것인지, 하나님은 사람이 어떻게 행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증오하는지 등도 전부 알지 못한다.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에 관련된 영적인 일을 알지 못한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정상적으로 영 생활을 하며, 본분을 이행할 때 게을리하지도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으며, 고의로 방해하거나 교란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만 지킨다. 시키는 대로 행하면서 그저 약간의 간단한 규례만 지킬 뿐이다. 세부적인 면으로 들어가면, 생명 진입과 관련된 내적 상태, 각 측면의 관점과 태도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네가 관념을 해결하는 진리에 대해 교제하면 그는 자신에게는 관념이 없고 그의 관념이 전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며, 네가 교제하는 그러한 것들이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긴다. 그는 네가 말하는 관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 안에 들어 있는 진리 실제는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네가 자신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 말하면 그는 “사람은 패역하고 교만한 존재 아닙니까? 패역하지 않으면 되잖습니까? 일이 임했을 때 자신을 뽐내거나 오만하게 굴지 말며, 겸손한 자세로 임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또 네가 순종에 대해 말하면 그는 “순종하고 안 하고가 뭐가 중요합니까? 나쁜 짓만 안 하면 그만이지요. 무슨 일이 그렇게 많습니까?”라고 말한다. 네가 육을 저버리고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고, 패괴를 벗어 버리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에 대해 말하면, 그는 “육을 저버리거나 진리를 실행하는 건 필요 없어요. 저는 좋은 사람만 되면 그만입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생각은 이렇게 단순하다. 이런 사람이 최종적으로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얻을 수 없습니다.) 그는 어떤 태도로 진리를 대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서 폭로한 패괴 성품이 그에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사람의 패괴 성품이 내게는 별로 없어. 있다고 해도 아주 가볍고, 일시적인 생각일 뿐이야. 별거 아니야. 그저 사람보고 순종하라는 거잖아? 당신이 뭐라고 하시든 제가 그 말을 잘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시키는 대로 하면 그것이 바로 순종이 아닙니까?’ 그렇게 단순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이 단순해서 소극적인 사람을 보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지, 뭘 울면서 그렇게 소극적으로 굴어요?” 이런 이들이 바로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영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겠느냐?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어떤 방면의 진리를 말씀하든 그가 보기에는 이론일 뿐이다. 그는 이런 문제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이 방면의 진리를 교제함으로써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지, 사람의 생명 진입이나 어떤 길을 가는지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사람이 드러내는 패괴 성품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내 구원받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도 알지 못한다. 이런 것에 대해 전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이런 말씀과 이런 진리가 사람의 패괴 표출이나 모습, 사람의 실행이나 진입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그는 알지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한다. 아무리 들어도 “순종하고 충성하라.” “건성으로 대충하지 말라. 교란하고 방해하지 말라.”라는 말밖에는 듣지 못하고, 결국 이런 한 마디로 귀결시켜 버린다. “다른 건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해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 힘쓰는 일은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힘쓰는 것 외에도 야심, 욕망, 기호, 관념, 상상 그리고 사람의 잘못된 관점, 사탄의 처세 철학 등 사람의 내면에 해결해야 하는 패괴된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나님이 한 그런 말씀은 사람에게 그러한 것들을 해결하여 진리로 대신하라고 요구한다. 하나님이 그러한 진리를 선포하는 목적은 네가 진리를 깨닫고 마음속으로 받아들인 후 실생활에서 그런 진리로 너의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하라는 것이며, 그 진리를 네 실제가 되게 하고 이를 살아 내고 나타냄으로써 더는 교만과 야심, 욕망, 관념, 상상, 지식, 철학 등등 패괴된 것들이 아닌 진리 실제를 나타내라는 것이다.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한다. 그는 오랜 세월 설교를 들었어도 그저 ‘왜 설교가 매번 비슷비슷할까? 자신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도 여러 해 동안 말씀하셨잖아.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과 패괴를 인식하는 것 아니겠어?’라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은 지금의 설교가 예전보다 훨씬 깊이 있고 자세해졌다고 말하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은 자질은 충분한데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영원히 영이 통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자질이 부족해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진리의 세부 사항에 대해 들으면 들을수록 더 혼란스럽기만 할 뿐 올바른 실행 방법을 갖지 못한다. 이렇게 자질이 너무 부족한 사람들은 아무리 오래 믿어도 그저 규례를 지키거나 힘만 약간 쓸 뿐이다. 양심과 이성이 조금 있는 사람은 그래도 본분을 이행할 때 약간의 충성심을 갖고 건성으로 대충 하지 않는데, 두드러진 죄를 범하지 않고 약간의 선행을 예비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일에서 간단하게 순종할 수 있어 시키는 대로 하고, 하지 말라는 일은 내려놓을 수 있다. 약간의 징계도 받아들일 수 있고, 적어도 양심의 기준에 따라 일할 수 있다. 직접 하나님을 거스르거나 눈에 띄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다만 더 깊은 수준의 순종은 하지 못한다. 욥과 같은 시련과 그런 간증에 그는 더더욱 도달할 수 없다. 그는 욥이 한 말과 욥이 한 간증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욥에게 임한 일이 하나님의 빼앗음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간파하지 못한다. 그에게 이런 시련이 임하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며 크게 원망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진리를 참으로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이 폭로한 사람의 패괴 성품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이 한 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또한 어떤 일이 닥치든 정확히 이해할 수 있고, 모르는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거나 규정하거나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진리를 참으로 깨달은 사람은 진리와 그릇됨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고, 사람의 내적 상태가 정상적인지도 분별하여 실제에 결부시킬 수 있으며, 현실 생활에 결부해 자신의 패괴 표출을 인식하고,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도 있다. 또한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진리를 적용할 수 있으며, 하나님 말씀에 따라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영이 통하는 사람은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사람의 생명 진입 정도는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정도와 관련이 있다. 진리를 깨달은 정도란 무엇을 가리키느냐? 어떤 것이 진리를 깨달은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방면의 실제를 말하고 있는지, 사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인지, 사람의 어떤 방면의 패괴 성품에 대한 것인지, 그 방면의 진리 원칙이 무엇이고, 다른 진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 방면의 진리에서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을 이해한 것이 바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순종 방면의 진리를 예로 들어 보자. 너는 우선 무엇이 순종인지, 어떻게 해야 진정한 순종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순종의 기준은 무엇인지 등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순종의 실제이자 순종의 진리이다. 단순히 순종의 개념과 정의, 이론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의 실행 원칙을 이해하고, 어떻게 적용할지 알고, 적용할 때 어떻게 행해야 진리 원칙에 부합하고 어떻게 행하면 진리 원칙을 어기는 것인지 알며, 올바른 실행과 잘못된 방식을 모두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았음을 의미한다. 네가 자신에게 이 방면의 진리를 적용할 수 있으면, 이 진리들을 살아 내고 실행할 수 있다. 그럼 너는 이런 진리로 다른 사람을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성과에 이르면 너는 이 방면의 진리에서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이고, 그렇다면 너는 영이 통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영이 통하는지 아닌지는 진리를 깨닫는 속도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네가 말씀을 들은 당시에는 이해한 것 같지만 막상 일이 닥쳤을 때 모른다면, 이것은 영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말씀을 들은 당시 이해한 것 같지만 완전히 깨달은 것은 아니고, 일정 시간 체험을 통해 일이 닥쳤을 때 그 일을 꿰뚫어 보고 그 방면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이것은 영이 통하는 것이다. 문자적으로나 이치적으로 얼마나 이해했는지와는 무관하다. 이는 사람의 자질과 관련이 있고, 사람의 추구, 사람이 걷는 길과 관련이 있다. 적그리스도는 겉으론 머리가 좋고 은사도 있으며 말주변도 좋지만 생명과 관련된 영적인 일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 설교를 듣자마자 그 말을 그대로 따라 할 줄 알고 요점도 파악하기 때문에 다들 그가 설교를 듣고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내용이 그에게 임한 일과 전혀 맞지 않고 그는 대조할 줄 모르고, 자신이 말한 걸 적용할 줄 모른다. 사실 그가 교제하는 말을 들으면 그가 그 방면의 진리를 깨달았고 원칙도 파악한 것 같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일단 일이 닥치면 그는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다른 이론을 꺼내 드는데, 이는 서로 모순된다. 그러면 그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가 말하는 것들은 다 도리이자 이론이다. 그가 도리를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 꽤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이 들리지만, 사실 그는 영이 통하지 않는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그가 어려움에 직면해 소극적이 됐을 때 네가 그와 진리를 교제하면 그는 “저한테 교제하지 마세요. 저는 뭐든 다 알고 있어요.”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모른다. 진짜 안다면, 최소한 그렇게 소극적이 되거나 억지소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하는 억지소리나 궤변을 들어 보면 그가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했고 그는 영이 통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 닥쳤을 때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하고, 심지어 관념을 퍼뜨릴 수도 있다. 그가 한 말이나 퍼뜨린 것들을 듣고,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들을 보면, 그는 진리를 조금도 깨닫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사람이 영이 통하는지를 분별해 보면, 대다수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으로 드러난다. 평소 글귀와 도리는 능숙하게 얘기한다. 특히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글귀와 도리를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밑천이 더 있다고 여기는데, 결국엔 전혀 영이 통하지 않는 자로, 하나님 집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폐인으로 드러난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영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느냐? 한마디로 말하면, 사실 영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에 관련된 영적인 일에 통하지 않고, 영계의 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다.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말하고 관점을 얘기하는 것만 보아도 그들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말주변도 좋고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 힘과 믿음이 솟는 것 같은데 왜 영이 통하지 않는 것이겠느냐? 그가 본분을 이행할 때 늘 힘이 있고, 몹시 열성적이고, 소극적일 때가 적고, 고통도 받고 대가도 치른다. 하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어떤 일을 해도 원칙이 없다. 이런 사람은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영이 통하는 사람은 일할 때 원칙이 있다. 이들은 양심에 따르든, 자신이 깨달은 진리에 따르든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처리해야 원칙이 있는 것인지 알고 있다. 얼떨떨한 상태로 아무렇게나 처리하지도, 규례를 지키지도 않는다. 이것이 영이 통하는 사람의 뚜렷한 특징이다. 그러나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겠느냐? 그들은 일을 할 때 진리 원칙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제멋대로 규례에 맞추고, 가끔 경험에 따라 일하고, 또 가끔은 은사에 따라 일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양심이나 열의, 타고난 선의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 사람이 어떤 방면에서 영이 통하면 그 방면에서 총명하고 지혜로워 진리를 구할 줄 알고 누구의 말이 원칙에 부합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면 그는 가장 잘 영이 통하는 사람이다. 진리를 깨달은 후에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랜 시간 믿었어도 여전히 힘만 쓰고 있다고 하겠느냐? 그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데는 두 가지 주된 원인이 있다. 한편으로는 그가 영이 통하지 않아 진리를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진리를 싫어하고 사랑하지 않아 진리를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열의나 선의 또는 경험에 따라 일하고 이런 것들을 진리로 삼아 지키며 좋은 일도 많이 한다. 또 일생 동안 이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일해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들은 일생 동안 좋은 일을 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그러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도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좋은 사람이겠느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 결과는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탄 악령을 따르며 하나님을 평가하고 정죄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사탄에게 미혹되고 이용당하기가 가장 쉽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어떤 이들은 좋은 일을 많이 하지만, 또 악을 행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평생 좋은 일을 한다고 반드시 진정한 좋은 사람이라 볼 수 없고, 평생 좋은 일을 한다고 반드시 진리를 실행한다고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너는 그런 좋은 일들이 어떤 성질인지, 진리에 부합하는지, 진리 실제에 속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네가 이런 본질적인 문제를 간파하지 못하고, 계속 열의와 호의, 경험에 의지해 일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것이겠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것은 전적으로 양심의 기준, 인위적인 호의로 행하는 것이고,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런 문제를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너희가 관찰해 보아도 좋다. 교회에 영이 통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많으냐? (예전에는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릇되게 이해하고 무감각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이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교제를 다 듣고 난 뒤 진정으로 영이 통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이런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다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영이 통하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소수이고, 영이 통하지 않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다수다. 예를 들면, 순종에 관한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인식해야 하겠느냐? 많은 사람들은 순종은 말을 잘 듣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이 임했을 때 반항하거나 패역을 드러내지 않으면 순종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하는지, 사람은 순종의 의의와 원칙이 무엇인지,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 순종을 실행할 때 사람 내면의 어떤 패괴들이 해결돼야 하는지, 이런 세부적인 일들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저 규례만 지킨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순종은 밥하라고 했을 때 청소하지 않고 청소를 시켰을 때 유리를 닦지 않는다는 의미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이렇게 간단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쓸 필요 없어. 하나님은 그런 건 보지 않으셔.’ 사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동시에 패역과 패괴를 해결함으로써 진정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의 진리이다. 결국,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깨닫고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요구하든 다 마땅하고,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으므로 사람은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정도이다. 사람이 이 정도로 인식할 수 있으면, 순종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규례만 지킨다. 그러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순종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순종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실행하기도 힘들고 방법과 실행 원칙도 찾지 못한다. 영이 통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진리를 아무리 교제해도 그는 알아듣지 못하고, 순종의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생명 진입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생명 진입이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드러내는 속셈과 관념, 기호, 선택을 분석하고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패역한 내적 상태를 인식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전혀 합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정도까지 깨달으면 진리를 실행하기 쉽다. 이것은 순종에 관한 진리 실행의 시작일 뿐이다. 자신의 패괴 성품을 반성하고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패괴 성품을 해결하고, 너의 패역과 하나님에 대한 지나친 욕망, 너의 기호, 타산, 야심을 해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너는 끊임없이 자신의 패괴를 발견하고, 자신이 가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의 본성 본질을 알게 되고,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기가 쉽지 않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이치는 쉽게 이해가 되고 말하기도 쉽지만, 실행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슨 목적으로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겠느냐? 그저 사람을 드러내기 위해서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는데, 이 안에 담긴 진리는 무엇이냐?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과정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정결케 하는 과정이다. 즉, 하나님이 순종 방면의 진리로 사람을 정결케 하고 단속하며,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자신을 인식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패역과 패괴 성품,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신의 본성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본질을 인식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어떤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사람은 심하게 패괴된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인식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으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피조물로서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는지를 인식하여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하고 더 이상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효과를 거둔 것이며,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이다. 이것이 자신에 대해 세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포함된 세부적인 문제가 아니겠느냐? 사람이 순종 방면의 진리를 들을 때 이렇게 세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느냐? 사람은 이런 세부적인 내용을 생각하지 못한다. 이러한 세부 사항에 대해 알지 못하면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으면,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자신의 세부 사항을 인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구원받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공과다. 사람이 끝까지 순종하면,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해도 연구하거나 개인적 관점을 가지지 않는다. “내 생각에”, “내가 보기에”, “나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란 말을 최우선에 둔 생각과 욕망, 야심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분부에 따르고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것이다. 이러면 하나님이 너를 정결케 하는 과정이 끝이 나고, 너의 패괴는 정결케 되고 너는 진정한 피조물이란 신분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면 자신의 위치를 찾고 자신의 위치에 제대로 선 것이다. ‘나’란 말을 최우선에 둔 생각과 결정, 욕망 등 이런 것들의 교란이 없으면 너는 쉽게 순종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늘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시는데 이는 불합리해요! 좀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제 불만이 나름의 이유가 있고 합리적이지 않나요?” 이것이 순종이냐? 이런 사람은 순종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냐? 그는 순종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그는 순종의 의의가 무엇인지, 자신의 의무와 책임이 무엇인지, 자신의 본분은 무엇이고 사람이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는지 모른다. 하나님이 사람을 폭로한 말씀은 때로 엄해 들으면 가슴이 찔리고 괴롭고 고통스러우며 심지어 존엄과 인격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러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랑과 이해심이 없으셔. 사람을 봐주거나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고 양해해 주거나 관용을 베풀어 주지도 않으셔. 너무 가혹하셔!’ 사람은 다 자신의 존엄과 인격을 중히 여긴다. 존엄과 인격에 상처를 입으면 사람은 받아들이기 가장 힘들어한다. 순종하고 싶어도 순종하지 못한다. 그는 속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너무 높은 요구를 하시네. 이것은 나를 놀리고 괴롭히시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틀렸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람에게 억지로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강요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의 요구에는 조건이 있으며, 그것은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고, 또 진리를 깨닫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했다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말씀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선포하는 모든 진리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요구하지 않는다. 보아라.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즉시 징계나 징벌을 받는 경우가 있느냐? 그런 경우는 없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진리를 향해 노력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이 그에게 반드시 하라고 요구한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는 대상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의중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멋대로 평론해서는 안 된다. 네가 늘 자신의 이치를 따지며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정결케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네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실제를 살아 내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그럼 네가 말하는 순종은 그저 이치일 뿐이며, 영원히 하나의 이론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배치한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의 환경 속에서 항상 마음속에 관념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고 하나님께 반항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순종에 관한 진리 실제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순종이란 그저 이치이자 공허한 말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어떤 배경에서 비로소 조금이라도 순종할 수 있겠느냐? 적절한 환경이 필요하고, 그의 관념에 부합해야 하며, 또 기분이 좋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가 순종의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실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의 순종이 너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관념에 부합해야 하고, 또 그의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순종할 수 있는데 이런 배경은 극히 드물다. 그러면 진실한 순종은 어떤 모습일까? 그가 진리라고 인정하기만 하면 이유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사람의 입맛이나 관념에 맞든 맞지 않든 모두 순종하는 것이다. 그에게 죽으라고 해도 이유를 따지지 않고 순종할 수 있다면 그것을 죽기까지 순종한다고 한다. 이것이 베드로의 순종인데 이런 순종을 갖출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몇 명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진리는 어디서든, 어느 시대든, 사람이 당연히 지켜야 할 도이다. 누구든 마땅히 지켜야 할 도인 것이다. 사람이 지킬 수 있든 없든, 지키길 원하든 원치 않든, 진리는 패괴된 인류든, 사탄에 의해 패괴되지 않은 인류든, 현재의 인류든, 앞으로의 인류든, 인류라면 마땅히 지켜야 하는 도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왜냐하면 진리는 바른길이자,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 모든 피조물이 행해야 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너의 사상 관점이나 너의 성품과 충돌할 때, 너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순종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순종의 진리이다. 순종의 진리가 무엇이냐?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이 진리의 실제적인 측면은 무엇이냐? 네가 실행하길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네가 보기에 맞든 틀리든, 너의 관점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에 대해 네가 어떻게 보든, 너는 당연히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것이 순종이자 순종의 진리이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지 못한다고 진리가 진리가 아니고 빈말이 돼 버리는 건 아니다. 이런 관점은 터무니없고 잘못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이 실행하지 못해도 그건 진리일 수 있겠죠. 만약 모든 사람이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지 않나요?” 이 말이 맞느냐? (틀렸습니다.) 그것은 논리적 추론이다. 사실, 진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네가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진리는 사람이 행해야 할 도이자 올바른 길이다. 한 사람이 어떻게 해도 진리를 실행할 수 없다고 해서, 진리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없고, 만 명의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없어도 진리는 여전히 옳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진리는 여전히 옳다. 진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다. 오직 진리만이 인류를 정상적으로 생존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며,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게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며, 또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효과다. 진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이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모두 진리다. 진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진리이다. 사람이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길 원하는 상황에서 순종하려면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느냐? 사람의 모든 패괴 성품, 개인의 선택과 타산, 계획 등을 해결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인식한 후 단번에 내려놓을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이 순종의 진리를 구하거나 실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상황을 마련해 달라고, 사람과 일, 사물을 일으켜 달라고 구하고, 하나님의 채찍질과 징계,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구함으로써 점차 해결되고 정결함을 얻게 된다. 네가 정결함을 얻어야 절대적인 순종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네가 순종하면 이 문제들은 해결될 수 있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이 문제들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다. 마지막에 이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어 네가 정결함을 얻으면, 너란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너희는 이 관계를 이해했느냐? 네가 순종해야 이 방면의 진리가 네 안에서 너의 실제가 된다. 네가 이 방면의 실제를 살아 내면 이 방면과 관련된 너의 문제는 해결된다.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람이 영이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어떻게 가늠해야 정확하겠느냐? 하나님 말씀 글자 그대로를 이해할 수 있는지만 보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영이 통한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겠느냐?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고, 설교 교제를 들으면 모두 알아듣고 마음속으로 깨닫고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어떤 말씀들은 분명히 얘기하든 얘기하지 않든 조금만 얘기해 주어도 금방 깨닫고, 뜻을 완전히 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차리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영이 통하는 사람이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고 설교 교제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며 항상 오해하고 모순된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영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네가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진리를 분명히 교제해도 그는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고 그저 도리만 이해할 뿐이다. 규례를 지킬 줄만 알아도 다행이다. 그러므로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기가 어렵다. 하지만 영이 통하는 사람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은 영이 통하든 통하지 않든 모두 진리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진리를 분명히 깨달을수록 사람에게 이롭다. 일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려면 한 방면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정성을 쏟아 묵상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교제하고, 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네가 실행하고 체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너의 실제가 되어야 비로소 너는 하나님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거기에 내재한 진리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네가 진리를 깨닫게 되면 자연히 영이 통할 수 있다. 영이 통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럼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목적은 진리를 실행하고 깨닫는 것이다. 실행할 때 길이 열리며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알게 되고, 실행한 후에 거기에 내재한 진리를 깨닫고 그 안의 관계와 실행의 원칙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사람은 영이 통하는 사람으로, 진리를 깨닫는 효과를 얻는다. 영이 통하는지 아닌지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지, 진리를 얻을 수 있는지와 관련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영이 통하는지 아닌지는 큰 문제인데,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지 없는지와 관계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하는데, 대체 순종이 무엇이냐? 순종하는 대상은 무엇이냐? (진리에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마련한 현실적 상황, 사람과 일, 사물, 그리고 각 본분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순종의 실제에는 또 무엇이 있느냐? (상부의 사역지침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가지이다. 또 있느냐? (하나님 집에서 우리에게 안배한 모든 본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본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몹시 중요한 일이다.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는지는 진리 실제의 유무와 관련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람됨의 기준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됨에는 무엇이 포함되느냐? 어떻게 형제자매를 대하고, 어떻게 재물을 대하고, 어떻게 앞날과 결혼, 정, 그리고 육적인 즐거움을 대하는가 하는 것들이 모두 포함된다. 이런 여러 방면의 일에서 모두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하며, 진리의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진리의 원칙에 따라 실행하고 살면, 그것은 다 순종이고, 모두 순종의 실제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형제자매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순종의 진리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이 올바르냐? 이는 처신과 관련이 있다. 어떤 형제자매가 눈에 거슬린다고 늘 그를 괴롭히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게 사람됨의 원칙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을 대하라고 했느냐? (공평하게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공평이란 무엇이냐? 사람을 진리 원칙에 따라 대하는 것이지, 사람의 겉모습이나 신분, 지위, 지식 유무에 따라 대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취향과 감정에 따라 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어째서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을 대해야 공평한 것이겠느냐? 많은 사람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방인이 이해하는 공평함이 진정한 공평함이겠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공의롭고 공평하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대할 때 어떻게 요구하는지, 여기에 바로 공평함이 있고, 이를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을 대해야 비로소 공평하다. 교회에서 사람에게 어떻게 요구하고,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그가 이행할 수 있는 본분을 안배해 주고, 그가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란할 경우, 제명해야 할 것은 제명해야 한다. 너와 관계가 좋아도 안 된다. 이것이 공평으로,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원칙에는 이런 것들이 포함된다. 이것은 사람됨의 원칙과 관련된다. 순종의 진리는 한편으론 본분 이행, 그리고 우환과 질병이 임했을 때 사람이 어떻게 순종하고 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굳게 설 수 있는지와 관련된다. 또한, 처신의 측면에서는 주로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해야 하고, 양심과 이성을 가져야 하며, 정상인의 생활과 의식주가 있어야 한다. 삶의 질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요구하느냐? (입고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요구하셨습니다.) 그건 은혜시대 하나님의 요구였다.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떤 요구를 하느냐? 의식주행, 말과 행동, 차림새 같은 방면에 모두 하나님의 요구가 있다. 네가 마음이 깨끗하고 욕심 없는 사람이 되라는 건 아니지만, 육적인 안락을 탐해서도 안 된다. 게으르고, 육적인 안락을 탐하고, 즐거움을 좇는 건 하나님이 요구하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무엇이냐? 너의 본분에 마음을 다하고, 직무와 책임을 다하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사역하는 것이다. 재물을 대하고, 세상을 대하고, 사악한 조류를 대하고, 너와 관련 있는 불신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 하나님은 요구 기준이 있고, 그 안에는 진리가 있다. 이 몇 가지 큰 항목에는 모두 사람이 실행하고 순종해야 할 진리가 있다. 어떤 사람은 안락을 탐하고,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하며, 육적인 사욕을 따르길 좋아한다. 또한, 사회의 풍조를 좇아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자기도 해 보려고 하는 등 마음이 늘 밖에 가 있다. 이러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름답게 꾸민 이방인을 보고 자신은 하나님을 믿으며 평범한 차림을 하고 있어 늘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어느 부부가 둘이서 즐겁게 사는 것을 보고 자신의 외롭고 적적한 처지를 떠올린다. 늘 이 일로 괴로워 진리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도 않는다. 이러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사소해 보이고 아주 명백한 진리와는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가장 기초적인 진리와 관련이 있다. 사람이 이런 문제들을 이겨 내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것들은 늘 내면에서 너를 교란하여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데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기 매우 어렵다.

어느 방면의 진리든, 그것이 가장 기초적인 것이든, 아니면 비교적 깊은 수준의 것이든, 모두 진리이다. 진리는 어떤 상황에서 사람이 어떤 것들을 실행해야 하는지의 구분이 있을 뿐 깊이의 구분은 없다. 어떤 건 사람의 본분과 관련이 있고, 어떤 건 사람의 일상생활, 예를 들어 일상생활 속 습관, 규율, 개인적 취향과 관련이 있으며, 어떤 건 하나님이 사람에게 마련한 상황, 사람과 일, 사물과 관련이 있다. 어떤 방면의 문제이든, 그것이 일상생활과 관련된 것이든 본분과 관련된 것이든, 일의 크기를 떠나서 너는 진지하게 대하고 진리를 구하며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설교를 듣고도 진리 실행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들어 보지 못한 설교를 듣는 데만 치중하며, 항상 셋째 하늘의 언어와 비밀을 듣고 싶어 한다. 또 남에게 높은 수준의 설교를 하고 남이 알아듣지 못하면 의기양양해한다. 이것은 너무도 이성이 없는 것이다. 이런 공허한 것들만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본분과도 관련 없고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드러내는 내적 상태, 패괴 성품과도 관련이 없고, 사람의 생활, 사람의 진입, 본분과도 연관성이 없고,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드러내거나 보이는 다양한 내적 상태와도 무관하다.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것은 모두 도리고 빈말이지 진리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설교를 많이 듣고는 진리를 깨달은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고는 몇 가지 도리와 규례로 정리한 뒤 늘 사람들에게 말하고 교제한다. 하지만 문제나 어려움이 닥치면 처리하지 못한다. 어째서 그가 깨달은 도리가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겠느냐? 이것은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다. 어떤 이들은 몇 년 동안 글귀와 도리를 얘기해 왔지만, 그에게 진리를 교제해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면 그러지 못한다. 체험 간증문을 쓰라고 해도 쓸 줄 모르고, 누군가 일이 생겨 그에게 도움을 구해도 도와주질 못한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런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고 영이 통하지 않으니 참으로 가련하다! 다른 사람의 숭배와 부러움을 사고 싶어서 큰소리치고 구호를 외치며 지식과 도리, 신학에 열중하고, 남들에게 없는 것을 갖추거나 남들이 못 들어 본 것을 배우는 일, 또는 머리로 암기하는 일에만 열중한다. 이러면 영이 통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영이 통할 수 없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이 통하는 것과 진리를 깨닫는 것은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몇 년을 믿었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지가 영이 통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가장 잘 드러내 준다. 영이 통하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쉽게 깨닫고, 설교를 들어도 쉽게 진리를 깨닫는다.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영이 통하는 사람이다. 영이 통하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면 쉽게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2020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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