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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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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진입 (9)

유구한 ‘민족 전통’, ‘정신 풍모’는 너무나 일찍 사람의 순결하고 어린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덮어씌웠고, ‘인성’이 전혀 없이 사람의 영혼을 공격하고 있는데, 마치 인정사정없는 듯하다. 이 마귀들의 수단은 극히 잔인한데, 마치 ‘교육’과 ‘양육’이 사람을 살해하는 마귀의 ‘전통’ 수단이 된 것 같다. 그것은 그것의 ‘깊은 가르침’을 빌어 자기의 추악한 영혼을 전부 덮어 감추고, 양가죽을 쓰고 사람의 신임을 사취한 후 사람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사람을 전부 삼키려고 시도한다. 가련한 인류가 어찌 자기가 나서 자란 곳이 마귀굴이고, 자기를 양육한 자가 뜻밖에 자기를 해치는 원수임을 알겠는가? 하지만 사람은 전혀 각성하지 못하고, 실컷 먹고 마신 다음 ‘키워 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한다. 사람이 이럴 수가! 아직도 자기를 양육해 준 ‘국왕’이 바로 자기의 원수임을 모르고 있다. 땅 위에는 죽은 사람의 뼈가 널려 있고, 마귀는 미친 듯이 좋아하며 ‘음부’에서 계속 사람의 육체를 삼키고 있으며, 사람의 시체를 자신과 함께 순장시키고 마지막으로 남겨진 온전하지 않은 일부분 사람들까지 전부 다 삼키려고 망상한다. 그러나 사람은 늘 깨닫지 못하고, 마귀를 원수처럼 대한 적이 없으며, 성의를 다해 그것을 섬기고 있다. 이와 같이 타락된 민족이 어찌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그들 가운데서 그의 모든 구원 사역을 하는데,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겠는가? 이미 음부에 떨어진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요구에 닿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인류의 사역을 위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 얼마인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왔고, 사람이 살고 있는 생지옥에 내려와 사람과 함께 나날을 보내면서도 지금까지 인간 세상의 초라함을 원망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사람의 패역을 책망하지 않았으며, 크나큰 치욕을 참으며 자신이 친히 해야 할 사역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어찌 지옥에 속할 수 있겠는가? 어찌 지옥의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전 인류를 위해, 전 인류가 빨리 안식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치욕과 억울함을 참고 땅에 와서 친히 ‘지옥’, ‘음부’에 들어가, 호랑이 굴에 들어가 사람을 구하는데,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가? 무슨 이유로 또 하나님을 원망하는가? 무슨 낯으로 또 하나님을 만나겠는가? 하늘의 하나님은 가장 더러운 음란한 곳에 왔어도 억울함을 전혀 하소연하지 않고, 사람을 원망하지도 않고 묵묵히 사람의 학대를 받고 있으며, 사람의 기만과 억압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의 무리한 요구에 반항한 적이 없고, 사람에게 지나친 요구를 제기한 적이 없으며, 사람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적이 없이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사람을 위해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사역, 곧 가르침, 깨우침, 책망, 말씀 연단, 일깨움, 권면, 위로, 심판, 폭로하는 사역을 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단계가 사람의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닌가? 비록 사람의 앞날과 운명을 거두어 갔지만, 하나님이 하는 어느 단계가 사람의 운명을 위한 것이 아닌가? 어느 단계가 사람의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닌가? 어느 단계가 사람이 이 고난스럽고도 칠흑 같은 흑암 세력의 억압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어느 단계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가? 누가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겠는가? 누가 하나님의 그 절박한 마음을 이해하겠는가? 하나님의 불같이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기대에 돌아온 것은 뜻밖에도 얼음장같이 차가운 마음이고, 돌아온 것은 냉혹하고 무정한 눈길이며, 돌아온 것은 사람의 한번 또 한번의 훈계이고 한번 또 한번의 욕설이며, 돌아온 것은 풍자와 조소, 조롱, 폄하이고, 돌아온 것은 사람의 비웃음이며, 돌아온 것은 사람의 짓밟음과 사람의 저버림이고, 돌아온 것은 사람의 오해, 원망, 멀리함, 피함이며, 돌아온 것은 전부 기만이고, 돌아온 것은 전부 타격이며, 돌아온 것은 전부 쓴 열매이다. 따스한 말씀이 뜻밖에도 ‘매서운 눈초리와 만인의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으니, 하나님은 ‘머리 숙여 어린아이의 소가 되는’ 고통을 참는 수밖에 없다. 오랜 세월 동안, 별을 대한 적이 얼마였고, 달을 이고 별을 진 적이 얼마였던가! 아버지와 헤어지는 것보다 천배가 넘는 고통을 참고, 사람의 공격과 ‘깨뜨림’을 참고, 사람의 ‘훈계’와 ‘질책’을 참으며 전전반측했다. 하나님의 ‘비미은장’으로 바꿔 온 것은 뜻밖에도 사람의 경시와 사람의 불공평한 견해와 대우이며, 하나님의 침묵과 인내와 포용으로 바꿔 온 것은 뜻밖에도 사람의 탐욕스러운 눈길인데, 조금도 사정없이 하나님을 발로 짓밟아 죽이려고 꾀하고, 하나님을 땅 틈에 밟아 넣으려고 꾀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어쩌다 ‘이렇게 총명할’ 줄이야! 사람이 업신여기는, 사람이 깔보는 하나님을 만인의 발아래에 꾹 눌러놓고 자기를 높이 내세우는데, 마치 ‘산을 차지하여 왕 노릇을 하려는’ 듯하고, 마치 ‘대권을 독점하고’ ‘수렴청정’하여 하나님으로 온순하게 고분고분 ‘배후 감독’이 되게 할 뿐만 아니라 반항하지 못하게 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으로 ‘마지막 황제의 배역’으로 분장시켜 ‘꼭두각시’ 역을 맡게 하고 조금도 자유가 없게 하려는 듯하다. 사람의 행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데, 또 어찌 계속 하나님께 이런저런 요구를 할 자격이 있겠는가? 또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건의’를 하겠는가? 또 어찌 계속 하나님께 사람의 연약을 이해해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겠는가?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자격이 있겠는가? 어찌 하나님의 한 차례 또 한 차례의 너그러움을 받을 자격이 있겠는가? 어찌 하나님의 한 차례 또 한 차례의 사함을 받을 자격이 있겠는가? 사람의 양심은 어디에 있는가? 일찍이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하였고, 일찍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뜨렸다. 하나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기쁨을 가득 안고 인간 세상에 왔는데, 사람이 조그마한 따스함이라도 베풀기를 바랐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아직도 사람의 위로를 얻을 수 없었으며, 돌아온 것은 더욱 심한 타격과 괴롭힘뿐이었다. 사람은 마음이 너무나 탐욕스럽고 욕망이 너무나 커서 늘 욕심이 한도 끝도 없고, 방해하고 무모하게 행동하는데, 하나님에게 조금의 자유도 용납한 적이 없고, 하나님에게 조금의 발언권도 준 적이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잠자코 참으면서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조종을 받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창세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고통을 얼마나 많이 참았고, 사람의 타격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렀어도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요구를 늦추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연구’하고 있으며, 그를 관용하지 않고, 그를 ‘지도’하고 ‘질책’하고 ‘징계’하고 있을 뿐인데, 마치 하나님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까 봐 매우 걱정하고, 또 하나님이 땅에서 막무가내로 하고 제멋대로 하여 일을 성사시키지 못할까 봐 매우 걱정하는 듯하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언제나 이런 태도를 가지는데, 어찌 하나님을 상심케 하지 않겠는가? ‘성육신한 것’만 해도 이미 크나큰 고통을 참고 이미 크나큰 치욕을 참은 것인데, 거기에 하나님으로 사람의 가르침을 받게 한단 말인가? 인간 세상에서 자유가 전혀 없어 마치 음부에 앉아 있는 듯하고, 또 조금도 반항하지 못하고 사람의 ‘해부’를 당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 치욕스러운 일이 아닌가? ‘예수’가 정상 사람의 가정에 온 것은 이미 크나큰 억울함을 참은 것인데, 지극히 낮추어 먼지 세상에 오고 극히 평범한 육신을 취한 것은 더욱 크나큰 치욕이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이 작디작은 사람이 된 것은 고통받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닌가? 그 자신을 위해 생각한 것이 몇 차례나 되는가? 그는 유대 족속에게 버림받고, 죽임당하고, 사람에게 풍자와 조롱을 받았지만, 전혀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고 땅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몇천 년의 비극이 또다시 유대와 유사한 족속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는데, 사람은 모두 같은 죄를 짓지 않는가?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겠는가? 하나님을 대적한 후에 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은 역시 사람이 아닌가? 왜 사람은 언제나 정의를 향하지 않고,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는가? 왜 사람은 하나님이 한 것에 언제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가? 사람의 공의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의 공평이 어디에 있는가? 사람이 무슨 낯으로 하나님을 대표하겠는가? 사람의 ‘정의감’이 어디에 있는가? 사람이 기뻐하는 것 중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얼마나 되는가? 사람은 모두 진주를 어둠 속에 던지고, 언제나 흑백을 혼동하며 정의와 진리를 억누르고, 불공평과 불의를 공중에 높이 쳐들며, 광명을 몰아내면서 흑암 속에서 향락을 즐긴다. 진리와 정의를 찾는 사람이 오히려 빛을 쫓아내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을 발아래에 밟고 자기를 높이 떠받든다. 사람은 모두 도적 떼와 같은데, 무슨 이지(理智)가 있겠는가? 누가 시비를 분명히 가릴 수 있겠는가? 누가 정의를 지킬 수 있겠는가? 누가 기꺼이 진리를 위해 고난받으려고 하겠는가? 모두 극악무도하다!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는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미친 듯이 외치는데, 모두 개와 닭 같은 것들이다. 작당하고 독립왕국을 세우며, 주위를 방해하여 계속 떠들썩하게 하고, 눈을 감고 미친 듯이 계속 짖어 대는데, 닭도 울고 개도 짖으며 난장판을 이루어 ‘매우 시끌벅적하다’. ‘원칙과 주견이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나 모두 그 조상의 ‘뛰어난 명성’을 높이 받들고 있다. 이 개와 닭 같은 것들은 일찍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떨지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사람은 모두 개와 닭 같아 남이 말하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라 한다.”라고 말씀한 것도 이상할 것 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오늘날까지 ‘기세 드높게’ 하였는데, 하나님의 사역이 어떠하든, 정의가 있든 없든, 하나님이 발붙일 곳이 있든 없든, 내일이 어떠하든, 자신이 비천하든, 자신이 더럽든, 사람은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것을 고려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내일을 위해 걱정하지 않았다. 모든 이익과 모든 보배를 전부 자신의 품속에 끌어안고, 하나님께 던진 것은 다만 먹다 남은 음식인데, 얼마나 흉악하고 잔인한 인류인가! 하나님께 조그마한 체면도 남겨 두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훔쳐 먹은 다음, 하나님을 뒤에 멀리멀리 버려두고 더 이상 그의 존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누리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고, 또한 발로 하나님을 밟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미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또 하나님을 기만하고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받들고’ 하나님의 얼굴을 앙망하면서도 어깨를 으쓱거리며 전혀 겸양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좌 위에 앉아 하나님의 ‘불의’를 ‘심판’하고 있으며, 입으로 “하나님께 빚졌어요.”라고 말하고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비방하고 있고, 하나님을 ‘관용’하면서도 하나님을 압제하고 있고 또한 입으로는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요.”라고 말하고 있으며, 손으로 하나님의 물건을 쥐고 있고 입으로 하나님이 주는 음식을 씹고 있지만 눈으로는 냉혹하고 무정하게 하나님을 주시하고 있는데, 마치 통째로 삼키려는 듯하다. 진리를 보고는 기어이 ‘사탄의 궤계’라고 우기고, ‘정의’를 보고는 억지로 그것을 ‘자기 희생’으로 바꾸며, ‘사람의 행위’를 보고는 기어이 ‘하나님의 소시(所是)’라고 우기려고 하며, ‘사람의 타고난 자질’을 보고는 기어이 ‘진리’라고 우기며, ‘하나님의 행사’를 보고는 기어이 ‘오만 자대(自大)’, ‘교만 독선’이라고 우기며, ‘하나님’을 보고는 기어이 그에게 ‘사람’이란 라벨을 붙여 그를 억지로 끌어다가 사탄과 한 패거리인 ‘피조물의 자리’에 놓으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임을 뻔히 알면서도 기어이 ‘사람의 글’이라고 말하며, ‘영이 육신에 실제화되고’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기어이 ‘사탄의 *후예’라고 말하며, ‘하나님이 비미은장(卑微隱藏)하였음’을 뻔히 알면서도 기어이 “사탄이 수치당하고 하나님은 이미 이겼다.”라고 말한다. 이런 폐물들! ‘집 지키는 개’의 기능보다도 떨어지다니! 흑백을 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부러 흑백을 전도한다. 사람의 세력과 포위 공격이 어찌 하나님에게 *나설 기회가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고의로 하나님을 대적한 후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심지어 하나님을 사지에 몰아넣으며 하나님으로 얼굴을 전혀 내밀지 못하게 하는데, 어디 공의가 조금이라도 있는가? 어디 사랑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하나님의 곁에 앉아 하나님을 자기의 무릎 아래에 눌러 자기에게 용서를 빌게 하고, 자기의 모든 안배에 순복하게 하고, 자기의 모든 배치에 복종하게 하며, 하나님으로 자기의 눈치를 보며 일 처리하게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노발대발하며 호통을 친다. 흑백을 전도하는 이런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어찌 하나님을 슬퍼하지 않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하나님을 염려하지 않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왜 하나님이 이번의 사역을 전개하는 것은 마치 천지개벽의 사역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가? 사람의 행위가 어찌 그렇게 ‘풍부’한지, ‘아무리 솟아 흘러도 마르지 않는’ ‘생수의 원천’이 끊임없이 사람의 마음을 ‘적시고’ 있는데, 사람의 그 ‘생수의 원천’은 또한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하나님과 ‘겨루고’ 있어 양립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또 기탄없이 하나님을 대신해 사람에게 공급하고 있고, 사람도 ‘몸을 돌보지 않고’ 그것과 협력하고 있는데, 무슨 성과가 있겠는가? 하나님을 쌀쌀하게 한쪽에 내버려 두고, 사람이 주의하지 않는 곳에 멀리 두는데, 하나님이 사람의 주목을 끌까 봐 매우 두려워하고, 또한 하나님의 생수의 원천이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켜 사람을 얻을까 봐 매우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세상사를 오랫동안 겪은 후에 또 하나님과 암투를 벌이기 시작하는데,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그가 ‘비판하고 투쟁할’ 대상으로 여긴다. 마치 하나님이 그의 눈의 들보가 되기라도 한 듯이 손으로 확 잡아 불 속에 던져 철저히 연단하지 못해 한스러워한다. 사람은 하나님이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고 배를 끌어안고 크게 웃어 대며, 기뻐 날뛰면서 하나님도 연단 속에 빠졌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불결한 불순물을 깡그리 태워 버리겠다고 말한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이 인정과 도리에 맞는 것이고, ‘하늘’의 공평하고 합리적인 방법인 듯하다. 사람의 이런 포악한 행위는 고의적이기도 하고 무의식적이기도 한 듯하다. 사람은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 보이고, 또 그 추악하고 더러운 영혼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사람의 가련한 거지 꼴도 드러내 보이며, 도처에서 횡행한 후에 또 가련한 꼴로 가장하여 하늘의 용서를 간구하면서 매우 가련한 발바리 꼴을 드러낸다. 사람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행동을 취하고, 또 언제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리고 즉흥적으로 얼버무리며,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신분과 비교하지도 않으며 말없이 하나님께 저항하고 있을 뿐인데, 마치 하나님이 그를 억울하게 한 듯하고, 마치 본래 그를 그렇게 대하지 말아야 하는 듯하며, 마치 하늘이 보는 눈이 없어 고의로 그를 괴롭힌 듯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늘 몰래 잔인한 수단을 쓰고 하나님에 대한 요구를 조금도 늦추지 않으며, 하나님의 일거일동을 호시탐탐하고 성난 눈으로 주시하고 있으며,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고는 전혀 여기지 않고 언젠가 하나님이 짙은 안개를 거두고 사실을 분명히 밝힌 다음 자기를 ‘호랑이 아가리’에서 구출하여 자기를 위해 신원해 주기를 바란다. 사람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자신이 계속 역대 이래의 많은 사람들이 맡았던, 하나님을 대적하는 역을 맡고 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사람이 어찌 사람이 한 것이 이미 잘못된 길에 들어섰고, 사람이 터득한 것이 일찍이 대해에 잠겨 버렸음을 알 수 있겠는가?

누가 진리를 터득한 적이 있는가? 누가 하나님의 오심을 기쁘게 맞이한 적이 있는가? 누가 하나님의 나타남을 기쁘게 바란 적이 있는가? 사람의 행위가 일찍이 부패하여 하나님의 전을 원래 모습이 전혀 없게 오염시켰지만, 사람은 여전히 자기의 사역을 계속하면서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았는데, 마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이미 본성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뀔 수 없는 듯하다. 그러므로 저주를 받을지언정 자기의 ‘언행이 더 이상 억울함을 당하지’ 않도록 하려고 한다. 이런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이 어찌 하나님과 함께 안식을 누릴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이 어찌 하나님 앞에 올 자격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경영 계획을 위해 봉헌해야 하는 것은 물론 조금도 틀림없지만, 사람은 왜 언제나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전부를 잊어버린 채 자신의 ‘심혈’을 사심 없이 봉헌하는가? 사람의 사심 없는 봉헌 정신은 물론 소중하지만 사람이 토해 낸 ‘실타래’가 하나님의 소시를 대표할 수 없음을 어찌 알겠는가? 사람의 호의는 물론 소중하고 얻기 힘들지만 어찌 ‘*값으로 칠 수 없는 보물’을 삼킬 수 있겠는가? 너희들 각 사람은 왜 무정한 형벌과 저주가 늘 너희를 떠나지 않는지, 왜 위엄 있는 말씀과 공의로운 심판이 언제나 사람과 ‘격의 없이 아주 친밀한지’ 너희의 과거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정말로 하나님이 사람을 시련한 것인가? 정말로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을 연단한 것인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연단 속에서 진입한 것인가?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참으로 인식하였는가? 하나님의 역사와 진입에서 사람이 도대체 어떤 공과를 배웠는가?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부탁을 잊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를 꿰뚫어 보고 확신하며, 사람의 진입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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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순장(殉葬): 사람을 핍박하여 죽은 사람과 함께 생매장하는 것을 가리킴.

② 학대[摧殘]: 몸과 마음이 심각한 박해를 받는 것을 뜻함. 여기에서는 인류의 패역을 폭로했음.

③ 머리 숙여 어린아이의 소가 되는: ‘매서운 눈초리와 만인의 손가락질을 당하고’와 ‘머리 숙여 유자의 소가 되다’라는 시구는 원래 한 구절인데, 여기에서는 따로 씀으로 문제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음. 앞 구절은 사람의 ‘행위’를 가리키고 뒷 구절은 하나님이 받은 고통과 비미은장을 가리킴.

④ 전전반측(輾轉反側): 걱정거리로 누워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가리킴.

⑤ 비미은장(卑微隱藏): 낮추고 드러내지 않다.

⑥ 경시[岐視]: 평등하지 못하게 대하는 것을 뜻함. 여기에서는 사람의 거역 행위를 가리킴.

⑦ 대권을 독점하고[獨攬大權]: 여기에서는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따르면서 고생하도록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사람의 거역 행위로 하나님의 적대 세력을 가리킴.

⑧ 꼭두각시[傀儡]: 인형극에 나오는 인형을 뜻함.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풍자함.

⑨ 더욱 심한[雪上加霜]: 여기에서 사람의 비열한 행위를 더욱 두드러지게 함.

⑩ 진주를 어둠 속에 던지고[明珠暗投]: 재능 있는 사람이 중용되지 못하거나 귀중한 물건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함을 뜻함. 여기에서는 사람이 사리 분별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사탄의 것으로 추하게 묘사함을 가리키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모든 행위를 가리킴.

⑪ 흑백을 혼동하며[黑白混淆]: 진리와 가상, 정의와 추악한 것이 뒤섞임을 가리킴.

⑫ 도적 떼[土匪]: 사람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식견이 없음을 가리킴.

⑬ 난장판을 이루어[烏烟瘴氣]: 환경이 혼잡하거나 질서가 혼란스럽거나 사회가 어두운 것을 비유함.

⑭ 원칙과 주견이 없이 행동[吠影吠聲]: 사건의 진위를 분명하게 알아보지 않고 쉽게 다른 사람의 언행을 따르는 것을 비유함. 여기에서 남의 장단에 맞추고 대세를 따르는 사람을 가리킴.

⑮ 먹다 남은 음식[殘羹冷炙]: 사람이 하나님을 억압하는 행위를 가리킴.

* 후예(後裔): 여기에서는 풍자했음.

* 나설 기회[出頭之日]: (직역) 머리 내밀 날.

* 조금도 거리낌 없이[毫不顧忌]: 대수로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음을 가리킴.

* 매료[引人入勝]: 사람을 아름다운 경지로 이끌어 들어감을 뜻함.

* 값으로 칠 수 없는 보물[無價之寶]: 하나님의 전부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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