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 일꾼의 직책(8)
제8조 사역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곤혹과 어려움을 제때 보고해 해결 방법을 구한다(2)
지난번에는 리더 일꾼의 직책 제8조인 ‘사역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곤혹과 어려움을 제때 보고하고 해결 방법을 구한다’는 내용을 교제했다. 제8조는 비록 한 문장으로 되어 있고, 리더 일꾼의 직책에 대한 요구도 기본적으로 한 가지로 매우 간단하지만, 우리는 예배 한 차례 분량의 시간을 들여 이 내용 한 가지를 교제했다. 이 한 가지 내용을 가지고 지난번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방면들을 교제했느냐? 이와 관련된 리더 일꾼의 직책은 주로 무엇이냐? (곤혹스러운 일과 어려움을 만났을 때는 예배드리며 교제해야 하고, 교제를 해도 밝히 알지 못하면 제때 구하고 상부에 보고해야 합니다.) 이 조항에서 언급한 리더 일꾼의 주요 직책은 사역에 참여하고 각각의 실제적인 사역에 직접 뛰어들어 사역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각종 문제를 쉽게 발견하고 제때 해결하는 것이다. 만약 여러 가지 방식을 사용해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문제가 여전히 남아서 곤혹스러움과 어려움이 된다면 리더 일꾼은 그것들을 쌓아 두거나 방치하지 말고 제때 방법을 생각해서 해결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형제자매나 각급 리더 일꾼에게 구하고 그들과 교제해서 문제 해결에 도달하는 것이다. 만약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리더 일꾼은 큰 문제를 작게 만들고 작은 문제를 무마하거나 혹은 아예 한구석에 제쳐 두고 신경 쓰지 않아서는 안 된다. 대신 상부에 제때 보고하고 해결 방법을 구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사역이 어려움과 장애물이 없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사역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곤혹과 어려움을 제때 보고해 해결해야 한다
1. ‘제때’의 정의
리더 일꾼의 직책 제8조에서는 사역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곤혹과 어려움을 제때 보고한다고 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하다. 만약 오늘 문제를 발견했는데 8일이나 10일, 심지어 반년이나 일 년을 끌다가 해결한다면, 이런 것을 제때라고 하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때란 무슨 뜻이냐? (즉시, 당장, 가장 빠른 시간에 가서 처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좀 가혹하냐? 만약 시간과 관계된 용어를 이용해 해석하자면 즉시, 당장, 즉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것을 제때라고 한다. 하지만 이 단어들의 문자적 의미를 놓고 보면, 사람이 쉽게 도달할 수 없어서 현실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제때’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는 것이 정확하겠느냐? 만약 이것이 큰 문제는 아니지만 사역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 몇 시간 안에 해결이 가능하다면 그 안에 해결해 버려야 한다. 이것을 제때라고 할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문제가 좀 복잡하고 어려워서 해결하는 데 2, 3일이 걸리지만, 사람이 노력을 기울여 진리를 구하고 자료를 많이 찾아서 어떻게든 하루 만에 해결하고자 노력한다면, 이것이 사역에 더욱 유리하지 않겠느냐? 이런 경우도 있다. 어떤 문제를 간파하지 못하고 조사와 연구도 필요해서 시간을 좀 들여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길어야 3일이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 3일을 넘기면 일부러 시간을 끈 것으로 의심을 받고, 또한 시간을 낭비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3일 안에 보고하고, 구하고, 해결해야 한다. 이런 것을 바로 제때라고 한다. 또 어떤 문제는 해결하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 전달하고 조사해야 하고, 또 한 단계 한 단계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 등 다방면에 걸친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한 달까지는 걸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만약 시간을 서둘러 속도를 내고 적절한 사람을 몇 명 골라 쓰면 일주일 안에 해결할 수 있다고 할 때, 이 ‘제때’는 일주일 이내로 한정해야 한다. 일주일을 넘기는 건 부적절하고, 또 제때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번잡한 이런 일을 처리할 때 정해진 시간이다. 이 시간 범위는 무엇을 근거로 하느냐? 사건의 크기와 난이도에 따라 확정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를테면 업무 방면의 문제라든가 원칙에 대해 명확하지 않은 문제처럼 몇 마디 말이면 해결되는 일의 경우, 시간제한을 얼마나 두고 해결해야 제때라고 할 수 있겠느냐? 만약 사건의 크기와 난이도를 근거로 제때를 정의한다면, 반나절도 안 걸려 해결되는 일이 대부분이고, 길어야 일주일 걸리는 일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만약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면 그건 또 별도로 봐야 한다. 따라서 ‘즉시, 당장, 즉각’이라는 말로 제때를 정의할 경우, 문자적인 의미로 본다면 사람에게 가혹한 요구 같지만, 시간제한으로 본다면 대부분의 일은 사람이 제때 보고하고 구하면 길어야 반나절, 하루면 해결된다. 이것이 시간적으로 어려운 편이냐?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어렵지 않다면 리더 일꾼에게 사역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곤혹스러운 점과 어려움을 제때 보고하고 해결 방법을 구하라고 하는 요구는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곤혹스러운 일과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존재해서는 안 되고, 사역하는 과정에서 몇 년씩 누적되는 일은 더더욱 있어서는 안 된다. ‘제때’에 대한 시간 개념은 모두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리더 일꾼이 사역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곤혹스러움과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시간적인 면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의 문제다. 요컨대, ‘제때’라는 개념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의는 바로 가능한 한 빠른 것이다. 반나절 안에 보고하고, 구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반나절 안에 그렇게 처리하고, 하루 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루 안에 해결함으로써 어떻게든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사역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이 리더 일꾼의 직책이다. 사역하는 과정에서 문제에 맞닥뜨리고 문제를 발견하면 제때 교제하고 해결해야 한다. 만약 해결할 수 없으면 가급적 빨리 상부에 보고하고 구해야 한다. 한쪽으로 제쳐 두고 방치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문제가 생기면 제때 해결해야 하며, 미루거나 기다리거나 방치하는 것은 모두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다.
2. 문제를 제때 해결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
문제 해결의 주요 원칙은 제때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제때 해결해야 하느냐? 많은 문제가 생긴 다음 제때 해결되지 않는다면, 한편으로는 사람이 멍한 상태에 머물면서 어찌 해야 할지를 모를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잘못된 방식대로 계속 가다가 나중에 다시 작업하거나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 결과가 어떻겠느냐? 대량의 인력과 자금, 물자가 낭비되고 소모되며, 이것이 바로 손실이다. 사역에 문제가 생겼는데 리더 일꾼이 눈이 먼 탓에 제때 발견하고 해결하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계속 일할 것이다. 문제가 발견된 뒤에 해결하고 고치려 한다면 그때는 이 문제로 교회 사역이 이미 손실을 입은 뒤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인력과 자금, 물자는 모두 낭비된 것이 아니냐? 이렇게 초래된 손실은 리더 일꾼이 제때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리더 일꾼이 사역을 점검, 감독, 검사, 지도한다면 문제를 제때 발견하고 해결하는 일이 완전히 가능하다. 만약 리더 일꾼이 건성으로 임하느라 사역을 점검, 감독, 검사, 지도하지 않고 이 방면에 무척 수동적이고, 그러다 문제가 점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많아져야 비로소 해결할 생각을 하고 상부에 보고하고 구할 생각을 한다면, 이런 리더 일꾼이 책임을 다한 것이냐? (아닙니다.) 이것은 심각한 직무 유기이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집의 인력과 물자에 손실을 초래한 동시에 교회 사역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리더 일꾼이 직책을 다하지 못하고, 직무를 소홀히 하고, 무감각하고 우둔한 탓에 사역에서 생긴 많은 문제를 제때 발견하고 해결하지 못하고, 심지어 제때 상부에 보고하고 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역이 일을 다 끝난 뒤에도 재작업을 해야 하고, 재작업 후에는 원칙을 찾지 못해 또 문제가 생기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런 식으로 하면 사역 기한이 많이 늦춰져서 원래는 한 달이면 완성될 일이 결국 3개월이 걸리고, 3개월이면 완성될 일이 8, 9개월이 걸린다. 이것은 리더 일꾼이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리더 일꾼이 문제가 생겨도 제때 발견하지 않고 제때 수정하지 않는 등 사역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각종 사역은 계속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마비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직접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느냐? (리더 일꾼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리더 일꾼이 실제적인 사역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실제적인 사역을 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비록 가끔 문제를 발견했는데 해결할 줄 모르더라도 제때 상부에 보고하고 해결 방법을 구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것은 더욱 중요하다. 많은 리더 일꾼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사역할 때는 우리만의 방식이 있어. 상부에서는 우리에게 원칙만 알려 주면 되고 나머지 실제적인 사역은 우리가 알아서 하면 돼.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아래에서 우리끼리 교제하고 기도하면 되는 거야.’ 문제 해결 강도가 어떤지, 문제가 철저하게 해결되고 실효를 거두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관심도 갖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무책임한 태도로 사역에 임하고, 그 결과 교회의 각종 사역이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심각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된다. 이는 리더 일꾼의 자질 부족 혹은 무책임,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아 초래된 결과이다.
제8조 직책에 근거하여 몇 가지 부류의 거짓 리더들을 해부하다
1. 영적인 체하는 부류의 거짓 리더들
지난번에는 곤혹과 어려움이 무엇인지 교제하고, 또 제때 보고하고 구해야 할 문제들이 무엇인지 정의해 보았는데, 기본적으로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한 가지는 사역하는 과정에서 간파할 수 없거나 확실하지 않은 문제로, 이런 문제는 원칙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비록 이론적으로는 원칙을 알고 있지만 어떻게 실행하거나 적용해야 할지 모르는 문제를 가리키며 이는 곤혹스러움에 관계된 문제들이다. 또 한 가지는 해결 방법을 모르는 실제적인 어려움이나 문제점이며, 이런 문제는 곤혹스러운 점과 비교할 때 정도가 좀 더 심각하다. 이 역시 리더 일꾼이 보고하고 구해야 할 문제들이다. 지난번에는 주로 리더 일꾼의 직책은 사역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를 보고하고 구하는 것이라고 교제하고, 리더 일꾼이 해야 할 일과 주의해야 할 사항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교제했다. 오늘은 제8조 내용에 맞춰 거짓 리더에게 어떤 모습이 있는지, 그들이 리더가 해야 할 사역을 하고 리더가 다해야 할 책임을 다하는지 해부해 보도록 하겠다. 사역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라면, 거짓 리더는 이 방면에서 분명 감당할 수 없다. 그들은 이 방면의 사역을 하지 못하고 이 방면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 어떤 부류의 거짓 리더들은 사역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관념을 갖는다. ‘나는 사역을 할 때 그런 형식적인 것들은 하지 않을 거고, 무슨 지식이니, 학문이니, 기술이니, 교리니 하는 것들도 중요시하지 않는 거야. 단지 예배에서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를 명확하게 교제하는 일만 신경 쓰면 돼. 일주일에 두 번 팀별 예배를 드리고, 보름에 한 번 리더 일꾼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한 달에 한 번 전체 형제자매들과 함께 대예배를 드리는 거야. 각 방면의 예배를 이렇게 잘 조직하면 돼.’ 이것이 바로 그들이 사역하는 근거이자 방식이다. 이런 부류의 리더 일꾼은 단지 계속해서 설교 연습만 하고 글귀와 도리를 갖추는 일에만 무척 공을 들인다. 매번의 예배를 위해 주제 리스트를 만들고, 내용과 사례를 준비하고, 교제해야 할 진리를 준비하고, 일부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문제에 맞춰 몇 가지 해결 방안도 준비한다. 그들은 리더 일꾼으로서 설교만 잘하면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것, 이를테면 복음 전도 방식이 적절한지, 교회 사람과 일에 대한 안배는 어떤지, 또 각 업무의 사역 담당자가 직무에 적합하고 합당한지 등은 신경 쓸 필요 없고 책임자가 알아서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런 부류는 어디를 가든 예배와 설교만 중요하게 생각해서 어떤 예배를 드리든 설교만 하려 든다. 표면적으로는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찬양을 배우도록 그들을 이끌고, 가끔 사역에 관한 얘기도 나눈다. 이런 부류는 자주 교제하는 문제들, 이를테면 각 부류의 사람들이 마주한 문제들은 하나님의 어떤 말씀으로 대조해야 하는지, 사람이 무엇 때문에 연약하고 어떤 내적 상태가 생겼는지, 어떤 말씀에 담긴 진리로 교제해 해결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다. 요컨대 그들의 설교와 교제는 다방면에 걸친 진리 실행을 다룬다. 책망과 훈계에 관한 내용, 시련과 연단에 관한 내용, 하나님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는 것에 관한 내용, 심판과 형벌을 어떻게 겪는지에 관한 내용 등 그들은 각 측면의 진리에 대해 모두 어느 정도 교제할 수 있다. 그들은 새 신자를 보면 새 신자에게 맞는 설교를 하고, 하나님을 믿은 지 오래된 사람을 만나면 생명 진입에 관한 설교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각 업무 기술과 관계된 사역에 대해서는 결코 관여하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으며, 각 항목의 사역을 점검하고 참여하고 깊이 들어가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그들 눈에는 설교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고, 찬양을 배우는 것이 곧 사역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리더 일꾼의 직책이다. 그 외의 사역은 모두 중요하지 않은 것이고, 전부 자기와는 상관없는 남의 일이다. 그는 설교만 제대로 하면 천하태평이다. 천하태평이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냐? 예배를 마치는 것이 곧 사역을 끝내는 것이고, 쉬는 시간이 되면 쉬는 것이다. 교회 사역에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신경 쓰지 않으며, 누군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를 찾아도 쉽게 찾을 수 없다. 사역이 아무리 바빠도 낮잠은 필수이고, 다른 사람들은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은 안일함을 즐긴다. 그는 생각한다. ‘나는 설교도 했고 예배도 드렸어. 당신들한테 할 얘기는 다 했는데 무슨 얘기를 더 하라는 거야? 내 사역은 끝났고 나머지는 당신들 일이지. 내가 하나님 말씀도 다 알려 주었으니까 당신들끼리 원칙에 따라 일하면 돼. 무슨 문제가 생겨도 그건 다 당신들 일이고 나랑은 상관없어. 당신들이 알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드리고 예배하고 교제해서 해결해야 돼. 나는 찾지 말라고.’ 그는 예배를 마치면 절대 사람들에게서 질문을 받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지도 않으며, 더욱이 문제를 발견하지도 못한다. 예배를 마치면 끝이라고 생각하며 시간 맞춰 자고, 먹고,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이런 사람이 실제적인 사역은 전혀 하지 않는 거짓 리더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리더 일꾼의 경우, 직책을 맡은 지 반년이 되도록 그와 가까운 사람은 그를 자주 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형제자매들은 그를 만나지 못하고 그저 온라인에서 그의 설교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떤 문제가 있어도 그는 해결해 주지 않는다. 본분을 이행하다가 어려움을 만난 형제자매가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몰라서 발을 동동 구르는데 리더는 찾으려야 찾을 수도 없다. 이런 리더가 사역을 잘할 수 있겠느냐? 형제자매들은 그가 매일 뭘 하느라 바쁜지도 모르고, 누적된 문제와 어려움은 많은데 그가 언제 와서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 다들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데 그는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이 번개처럼 나타났다 번개처럼 사라지니 숨어 지내는 재주도 뛰어나다! 그는 설교 하나는 똑소리 나게 하지만, 설교가 끝나면 예쁘게 치장을 하고 아무 일도 안 하면서 한곳에 숨어서 편안함을 즐기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가 아주 훌륭하게, 제대로 사역한다고 생각한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설교도 다 하고 예배도 다 드렸다고, 해야 할 말도 다 하고 설명할 것도 다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결코 형제자매들 사이에 깊이 들어가 사역을 점검하거나 참여하려 하지 않고, 그들을 도와 검토하거나 그들이 제때 문제를 처리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일도 없다. 만약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도 상부에 보고해 해결 방법을 구할 줄도 모른다. 그는 속으로 고민도 하지 않는다. ‘형제자매들이 내가 교제해 준 원칙을 지킬 수 있을까? 사역에서 어려움이나 곤혹스러운 일을 만나면 진리를 고수하며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누가 사역에서 긍정적인 작용을 할까? 어떤 사람들이 부정적인 작용을 할까?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이나 파괴하는 사람, 늘 못된 생각을 내놓는 터무니없는 사람은 없을까? 요즘 사역은 얼마나 진행되었지?’ 등과 같은 모든 문제에 대해 그는 일률적으로 관심이 없고 알아보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사역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설교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설교 원고를 준비하고, 개요를 만들고, 심지어 사역 보고서도 쓴다. 생명 체험에 관한 설교 원고를 자주 쓰는 리더들도 있는데 그들은 집에서 글을 쓰느라 3~5일을 두문불출해서 누군가 물과 식사를 가져다줘야 하고, 남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네가 그에게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는 억울해할 것이다. “제가 어떻게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은 건가요? 저는 형제자매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늘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했습니다. 입이 마르도록 설교하고 심지어 밤을 샐 때도 있었다고요.” 겉보기에 그는 무척이나 바쁘고 쉴 틈이 없어 보인다. 설교도 꽤 많이 하고, 말하고 글 쓰는 일에 꽤 공을 들인다. 종종 소식과 편지도 전달하고 상부에서 요구하는 원칙도 전달하는가 하면, 예배드릴 때 입이 닳도록 교제하고 강조하는 등 말도 많이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역은 절대 참여하지도 않고 점검하지도 않으며, 결코 형제자매와 함께 어떤 문제도 마주하지 않는다. 네가 그에게 어떤 사역이 어느 정도 진전되었느냐고, 사역 성과가 어떠냐고 물어보면 그는 모르고, 그제야 알아봐야 한다. 지난번 문제가 해결되었느냐고 물어보면 그는 예배도 드렸고 원칙도 교제했다고 대답한다. 네가 계속 묻는다. “진리 원칙을 교제한 후 형제자매들이 정말 깨달았나요? 그래도 치우친 길을 갈 수 있나요? 그들 중 상대적으로 원칙을 더 잘 깨닫고, 업무에 좀 더 정통하고, 자질이 좀 더 좋아서 양성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는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못하며 아무것도 모른다. 네가 사역 상황에 대해 물으면 그는 대답한다. “원칙을 교제했습니다. 방금 예배도 드렸고 책망과 훈계도 했습니다. 그들도 다짐했고 사역을 제대로 하겠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속 사역이 어떻게 되는지는 하나도 모른다. 이런 사람이 기준에 맞는 리더 일꾼이라고 할 수 있느냐? (아닙니다.) 이런 리더 일꾼이 사역을 하면 그저 사람들에게 말씀을 좀 읽으며 글귀와 도리만 얘기해 줄 뿐,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상부에 문제를 보고하고 해결 방법을 구하는 일을 겁내는데 상부에서 자신들의 실상을 알게 될까 봐 몹시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성질은 무엇이냐? 그들은 본질적으로 어떤 부류이냐? 정확히 말해서 이런 부류는 전형적인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들은 행동이 단정하고, 언행이 고상하며, 말과 행동은 모두 성경을 근거로 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람들을 만나 대화할 때도 성경 내용을 이야기하며, 많은 성경 내용을 줄줄 암송한다. 거짓 리더는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겉보기에는 흠을 잡을 수 없고 무척 영적으로 보인다. 겉에 드러난 언행과 행위에서는 누구도 그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교회 사역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영적’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엄밀히 말해서 영적인 체하는 것이다. 영적인 체하는 이들 부류는 매일 분주하게 크고 작은 무리들 사이를 오가며 어디서든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 말씀을 좋아하고, 누구보다 하나님 말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누구보다 하나님 말씀을 통달해서 어떤 대표적인 구절이 몇 페이지에 있는지 바로 말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떤 문제에 부닥치면 그는 그 사람에게 관련된 하나님 말씀이 몇 페이지에 있다고 알려 주면서 가서 읽으라고 한다. 겉으로 볼 때 그는 항상 하나님 말씀을 준칙으로 삼고, 일이 닥치면 하나님 말씀을 증거할 수 있어서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가 한 사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이런 글귀와 도리를 전하는 동시에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만약 어떤 사역에서 그가 진리 교제를 통해 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를 발견하고 남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했다면, 이는 그가 하나님 말씀을 깨달았다는 뜻이고 그의 진리 교제가 분명했다는 뜻이다. 영적인 체하는 이런 부류는 정반대이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줄줄 암송해서 사방에 전하고, 머릿속, 마음속에 담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 말씀뿐이지만, 사역에 문제가 생기면 크든 작든 문제를 보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은 예배가 끝난 뒤 사람들이 자기더러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러니 예배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떠나기 바쁘다. 속마음은 이런 것이다. ‘누가 나한테 질문을 했는데 대답을 못 하면 얼마나 난감하고 창피할까!’ 이것이 바로 그의 실제 분량이고 진짜 내적 상태이다.
주변의 어느 리더 일꾼이 진리 교제로 문제를 잘 해결하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형제자매들과 한데 뭉쳐서 같이 사역을 진행하는지 보아라. 그런 사람은 자신의 직책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누가 문제를 잘 발견하고 해결하는지, 누가 실제적인 사역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역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거두는지 보아라. 이런 리더 일꾼이 바로 직무와 책임을 다하는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반대로 어떤 리더가 글귀와 도리를 무척 잘 설명하는데, 논리적이고, 체계적이고, 중심이 있고, 내용이 있고, 조리 있게 잘 설명해서 듣는 사람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만 늘 형제자매를 피하고, 형제자매가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형제자매와 같이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하는 것도 두려워한다면 이 리더는 영적인 체하는 거짓 리더이다. 너희 주변의 리더, 책임자들은 어느 부류에 속하느냐? 평소에 예배드리고 설교하는 것 말고, 그들이 사역을 점검하고 참여하면서 종종 사역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할 수 있느냐, 아니면 예배 시간에 얼굴만 한 번 비추고 더는 나타나지 않느냐? 영적인 체하는 이런 부류의 거짓 리더는 언제나 설교 거리가 없을까 봐, 형제자매를 만나면 할 얘기가 없을까 봐 혼자서 집안에 틀어박혀 하나님 말씀을 암송하고 설교하는 연습을 한다. 그는 설교는 공부하고 암기하면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 지식을 공부하고 대학 공부를 하는 것처럼 ‘상투를 대들보에 매달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부류의 거짓 리더는 속으로 이렇게 이해한다. 이것은 치우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런 부류는 높은 자리에 서서 도리를 좀 얘기하고 쓸데없는 일에 좀 참견하는 것을 리더의 사역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결코 사역 현장에 가서 사역을 지도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법이 없다. 늘 집안에 틀어박혀 ‘문 걸어 잠그고 수련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갖추는 것이다. 꼭 그래야 하느냐? 어떤 상황에서 리더 일꾼이 교회 사역, 형제자매들을 한쪽에 제쳐 두고 혼자서 진리를 갖추어도 되느냐? 사역이 바쁘지 않을 때,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설명해야 할 원칙과 주의 사항을 모두 설명했을 때, 형제자매들에게 질문이 없을 때, 어떤 어려움도 없고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도 없을 때, 사역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어떤 장애물도 없을 때 이럴 때가 리더 일꾼이 하나님 말씀을 읽으며 진리를 갖추어도 될 때이다. 이것이 바로 실제적인 사역을 하는 것이다. 거짓 리더는 이렇게 사역하지 않는다. 그는 늘 얼굴을 내미는 것만 중시하고, 눈에 띄는 곳에서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사역을 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행여나 하나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어서 새로운 빛 비춤을 발견할 수 있게 되면 자신이 얻었고 진리 실제가 생겼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남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찾는다. 그는 조리 있고, 체계적이고, 논리적이고, 그 안에 중심 내용이 있는 도리를 설교하는데 유명인의 강연, 학술 강연보다도 강력하고 깊이가 있다고 여기며 무척 만족한다. 하지만 이렇게 고민한다. ‘이번 설교가 끝나면, 다음에는 무슨 얘기를 하지? 더는 없는데.’ 그래서 또 얼른 가서 ‘문 걸어 잠그고 수련하면서’ 수준 높은 도리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교회 사역 현장에서는 그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다. 어려움이 있어서 그가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그를 찾을 수 없다. 거짓 리더가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이 아니냐? 실제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면서 사람들에게 수준 높은 설교를 하며 자신을 드러내려 하다니, 이런 게 바로 후안무치한 것이다.
모든 거짓 리더는 글귀와 도리를 말할 줄 알고 영적인 체만 할 뿐, 실제적인 사역은 전혀 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오래 믿었으면서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볼 때 하나같이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교회 리더가 되는 것이 그저 글귀와 도리를 좀 얘기하고 구호를 좀 외치면 되는 줄 알고,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한번 해석해 주면 그것으로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는 줄 안다. 그들은 사역을 한다는 게 어떤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리더 일꾼의 직책이 과연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 집에서 어떤 사람을 리더 일꾼으로 선발하여 쓰는 목적이 무엇인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하나님 집에서 리더 일꾼은 사역을 점검하고 검사하고 감독해야 하고, 사역하는 과정에서 제때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등을 아무리 교제해도 그들은 그런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고 알아듣지도 못한다. 리더 일꾼에 대한 하나님 집의 요구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닿지도 못한다. 그들은 본분 이행에 관계된 기술 업무 문제 및 책임자를 선발하는 원칙적 문제 등과 같은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문제를 알고 있더라도 처리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거짓 리더의 인도 아래에서는 교회 사역 중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하나도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 선민들이 본분을 이행할 때 발생하는 업무 기술 관련 문제뿐만 아니라 하나님 선민들이 생명 진입 과정에서 부딪히는 어려움도 오랜 시간 해결하지 못하고, 일부 리더 일꾼이나 각 사역의 책임자들이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해도 제때 교체하거나 조정하지 않는 등, 모든 문제를 제때 해결하지 않아서 결국 교회의 각종 사역은 갈수록 효율도 낮아지고 성과도 떨어진다. 인사 방면에서는 은사가 좀 있어서 말 잘하는 사람들은 모두 리더 일꾼이 되지만, 진리를 사랑하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에 매진하는 사람들은 발탁되지도 양성되지도 못한 채 힘쓰는 자 취급을 받고, 특기가 있는 다양한 기술자들도 합리적으로 쓰이지 못한다.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은 생명 공급을 받지 못해 소극적이고 연약한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또한 적그리스도, 악인은 아무리 악행을 저질러도 거짓 리더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하다. 누군가 악인과 적그리스도를 폭로해도 거짓 리더는 이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면서 그들이 교회에서 악행을 저지르고 교란하도록 내버려둔다. 그 결과 악인, 불신파, 적그리스도는 오랫동안 제명되거나 출교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계속 악행을 저지르며 교회 사역을 교란하게 된다. 이런 모든 문제를 거짓 리더는 처리하거나 해결할 줄 모른다. 그들은 사람을 공평하게 대할 줄 모르고, 사역을 합리적으로 안배할 줄 모른다. 횡포를 일삼고 쓸데없는 일만 하다가 결국 교회 사역을 엉망으로 만들고 난장판으로 만든다. 하나님 집에서 진리를 아무리 교제하고, 교회 사역을 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을 아무리 강조해도 즉, 악행을 저지르는 각 부류의 사람, 불신파들 중에 제한할 사람은 제한하고, 제명할 사람은 제명해야 한다고, 또 자질이 좋고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 중에 발탁할 사람은 발탁하고, 양성할 사람은 양성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교제해 주어도 거짓 리더는 이해하지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고 계속 자신의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관점, 거짓된 사랑의 방법만 고집한다. 거짓 리더는 본인의 진지한 지도하에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다들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혼란이 없이 질서가 잡혀 있고, 다들 믿음도 강하고, 본분을 이행하기 원하고, 감옥에 가는 것도 위험에 직면하는 것도 겁내지 않고, 누구나 고생을 감당하려는 의지가 있고, 유다가 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교회 생활 분위기가 좋아지는 것은 본인이 사역을 잘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악인이 교란을 일삼거나 불신파가 사설과 궤변을 퍼뜨리는 일이 발생해도 그는 별문제 될 게 없고 해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일을 맡긴 사람이 멋대로 굴면서 복음 사역을 교란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더욱 눈이 멀어 보이지 않는다. 또 이런 말까지 한다. “제가 설명해야 할 사역 원칙은 다 설명했고, 또 몇 번이고 당부했으니 문제가 생겨도 저와는 무관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일을 맡긴 사람이 옳은 사람인지 그것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설명하고 당부한 그 말들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거짓 리더는 예배 때마다 수많은 글귀와 도리를 끊임없이 읊어 대지만 결국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가 커다란 사역을 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대단하게 생각하며 우쭐댄다. 사실 그가 얘기한 글귀와 도리는 어리석고 무지하고 자질이 부족한 머저리, 바보, 멍청이들이나 속일 수 있을 뿐이다. 이자들은 그걸 듣고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도 그가 한 말이 아주 옳고, 틀린 말이 한 마디도 없다고 생각한다. 거짓 리더는 이런 어리숙한 사람들이나 만족시킬 수 있을 뿐 실제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 당연히 기술 업무나 지식 방면에 관계된 문제는 거짓 리더가 더더욱 닿을 수 없고 그가 다루기에 역부족이다. 하나님 집의 문서 사역을 예로 들어 보자. 이는 거짓 리더에게 가장 골치 아픈 분야로, 그는 도대체 어느 사람이 영적인 이해력이 있고 자질이 좋아서 문서 사역에 적합한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안경 쓴 사람, 학력이 높은 사람을 자질이 좋고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으로 보고 그 사람에게 문서 사역을 안배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한다. “여러분은 문서 사역 분야의 인재들입니다. 문서 분야는 제가 잘 모르니 여러분만 믿습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여러분에게 다른 요구는 없고 그저 각자의 특기를 발휘하고 여러분이 배운 것을 아낌없이 모두 바치면 됩니다. 여러분은 고마운 줄 알고 하나님의 높여 주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만 늘어놓은 거짓 리더는 사역을 안배했으니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가 안배한 그 사람들이 적합한지 아닌지도 모르고, 그 사람들이 업무 지식과 관련해서 부족한 점이 무엇이고 어떻게 보완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사람을 볼 줄도 분별할 줄도 모르고, 업무상의 문제도 이해하지 못하고, 작문 지식도 모른다. 이런 일에는 일자무식이다. 입으로 자기는 이해도 못 하고 알지도 못한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들은 나보다 좀 더 배운 것뿐이지 않나? 비록 내가 사역은 지도해 주지 못해도 당신들보다 영적이고 설교도 잘하지. 하나님 말씀도 더 잘 깨닫고 말이야. 이래 봬도 내가 당신들을 이끄는 사람이고 당신들 상사야. 당신들은 내가 관리해야 하고 당신들은 내 말을 들어야 해.’ 거짓 리더는 자신을 아주 높게 생각한다. 하지만 기술 업무와 관련된 각종 사역에 대해서라면 그는 가치 있는 건의는 전혀 제시할 수 없고, 지도도 할 수 없다. 기껏해야 사람과 일을 안배하면 다행이고, 후속 사역은 조금도 할 수 없다. 그는 업무 지식도 배우지 않고 사역도 점검하지 않는다. 거짓 리더는 다들 영적인 체한다. 글귀와 도리를 조금 얘기할 줄 알면 자신이 진리를 깨달은 줄 알고 하나님 선민 앞에서 계속해서 으스대면서 예배드릴 때마다 몇 시간씩 설교하지만 결국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는 본분 이행에 관련된 업무 지식에 대한 문제는 하나도 모른다. 명백히 문외한이면서 영적인 체하고 숙련자를 지휘하려 하는데 어떻게 사역을 잘할 수 있겠느냐? 거짓 리더는 업무 지식을 배우지 않고 실제적인 사역을 조금도 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역겨운데, 게다가 영적인 사람을 사칭하고 영적인 글귀를 뽐내기까지 하다니 이건 너무나 비이성적이다! 바리새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바리새인에게서 가장 비이성적인 부분은 바로 하나님이 그들을 혐오했지만 그들은 속으로 전혀 모르고 오히려 자기가 꽤 괜찮고 아주 영적인 줄 생각했다는 것이다. 거짓 리더는 이렇게나 자기 자신을 모른다.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는 게 분명한데도 영적인 사람을 사칭하고 외식하는 바리새인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하나님이 버리고 도태시키는 대상이다.
영적인 사람인 체하는 거짓 리더 부류의 주요 특징은 무엇이냐? 설교를 잘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의 ‘설교’는 진정한 설교가 아니다. 진리 교제의 설교도, 진리 실제를 갖춘 설교도 아니라 글귀와 도리의 설교이고, 영적인 체하는 설교, 바리새인의 설교이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의 글귀에 노력을 쏟는 재주가 있고 글귀와 도리를 말하는 것을 특히나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구하지 않고, 어떻게 진리 실제에 진입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일도 결코 없다. 단지 글귀와 도리를 얘기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이치에 맞는 도리를 얘기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면서 자기는 진리 실제가 있으니까 사람들 앞에서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높은 자리에 서서 남을 꾸짖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의 말과 행동은 진리와 관계가 있는 것 같고,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 같지도 않고,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잘못된 행동 방식을 부추기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 어떤 실제적인 사역도 감당하지 못하고, 조금도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결국에는 사역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사역을 하는 것은 마치 소경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다. 느낌과 상상에 따라 무턱대고 규례에만 맞추려 할 뿐 문제의 본질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거기다 헛소리까지 한다. 실제적인 문제는 조금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거짓 리더가 정말 진리를 깨달았다면 자연히 문제를 발견할 수 있고, 또한 진리를 구해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짓 리더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 분명한데도 영적인 체하고, 자신이 교회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지위의 복을 누린다. 정말 역겹지 않으냐? 그들은 자신이 설교를 잘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한다. 그들이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글귀와 도리는 그들이 사역을 제대로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없고, 그들이 사역의 문제점을 발견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없고, 그들이 직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더더욱 도움이 될 수 없다. 그들이 일정 기간 사역을 하고도 체험 간증을 전혀 얘기하지 못한다면, 이런 리더 일꾼이 기준에 맞는 리더 일꾼이냐? 당연히 아니다. 기준에 맞지 않는 거짓 리더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 교체하고 도태시키는 것은 물론, 만약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선거 때가 와도 다시 리더 일꾼으로 선출해서는 안 된다. 만약 누군가 도태된 거짓 리더, 거짓 일꾼을 다시 선출한다면 그것은 일부러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파괴하는 것이고, 이는 그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거짓 리더를 숭배하고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너희는 영적인 체하는 부류의 거짓 리더를 선출한 적이 있느냐? (있습니다.) 꽤 많이 선출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은 지 오래되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설교를 많이 듣고 설교와 사역 경험이 풍부해서 몇 시간이고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이런 사람은 분명 사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를 리더로 선출한 뒤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형제자매가 도통 그를 만날 수 없고, 일이 있어도 찾을 수 없고, 그가 어디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한 곳에 몸을 숨기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는 사역의 중요한 순간에 늘 숨바꼭질을 하며 형제자매가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려 해도 도통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본연의 일을 하는 사람이냐? 왜 어떤 사람은 리더 일꾼이 된 다음 형제자매와 마주할 엄두를 내지 못하느냐? 왜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느냐? 그는 대체 무엇이 그리 바쁘냐? 왜 실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느냐? 그가 무엇 때문에 바쁘든 확실한 것은 일정 기간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자는 거짓 리더이니 서둘러 교체하고 다시 사람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그래도 이 부류의 거짓 리더를 선출하겠느냐? (선출하지 않겠습니다.) 왜 그런 것이냐? 너희가 볼 때 소경을 길잡이로 선택하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느냐? 자기 앞도 못 보는 자가 다른 사람들을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겠느냐?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 15:14)라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과 같다. 소경은 혼자 걸을 때도 방향과 목표가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이끌겠느냐? 소경을 길잡이로 선택했다면 그 사람은 소경보다 더 눈이 먼 사람이다. 이방 세상에는 ‘소경에게 길을 묻는다’는 말이 있다. 거짓 리더를 교회 리더로 선택하는 것 역시 소경에게 길을 묻는 것이다. 이는 황당한 일이 아니냐? 거짓 리더에게 표를 주는 사람은 모두 소경을 선택한 소경들이고, 그들 중 진리를 깨달은 자는 한 명도 없다.
어떤 사람은 영적인 체하는 사람을 리더로 선택하고 속으로 기뻐한다. ‘이번에 우리는 훌륭한 리더가 생겼어. 우리 리더는 설교를 어찌나 잘하는지 설명도 조리 있게 하고, 죄다 일리 있는 말만 하지.’ 분별력이 없는 일부 사람들은 감동한 나머지 계속 눈물을 흘리며 그 앞을 떠나지 못하고, 본분도 이행하러 가지 않으려 한다. 교제를 들을 때는 속으로 이해가 잘 되었는데 정작 본분을 이행할 때 문제를 발견하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고, 이럴 때는 속이 답답해진다. ‘리더 교제를 들을 때는 뭐든 다 알 것 같았는데 어째서 사역하다가 어려움을 만나면 해결할 수 없는 거지?’ 이것은 무슨 문제냐? 이런 부류의 거짓 리더들은 글귀와 도리, 빈말, 구호, 쓸데없는 말만 하면서 네 실제적인 문제는 해결해 주지 않았다. 그는 너를 속인 것이다. 너에게 그림의 떡만 보여 주고 구호만 외치면서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지만 사실상 문제에 맞게 진리 원칙을 교제해 주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교제하면 어떻게 문제가 해결되겠느냐? 그가 말하는 도리는 실제 문제와 무관하며 모든 문제의 본질을 비켜 가는 공허한 이론에 불과하다. 그는 글귀와 도리만 읊어 대고 영적인 이론만을 떠들지 무엇이 진리 실제인지 모르고 정작 문제가 생기면 머리가 멍해진다. 그의 설교는 실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그저 일종의 학설, 지식, 도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부류의 거짓 리더들은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일종의 글귀와 도리, 구호로 생각하며 설교하고, 모든 현실적인 문제는 비켜 가면서 공허하고 뜬구름 잡는 소리만 떠든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아무리 긴 시간 설교를 해도 기껏해야 사람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효과밖에 없다. 사람들에게 열정을 좀 불어넣어서 힘이 나게 할 뿐, 그것 말고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진리는 현실과 괴리된 것이 아니라 현실, 그리고 실제 존재하는 모든 방면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면 너희가 또다시 영적인 체하는 그런 거짓 리더들을 만나면 분별할 수 있겠느냐? 분별할 수 없다면, 너희가 리더로 선출하고 싶은 자에게 우선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 보아라. 그가 원칙에 맞게 문제를 해결한 데다 성과도 상당히 괜찮은 데 그것이 진리 실제로 해결한 것이라면 그를 선택하면 된다. 그가 문제의 본질과 실제 상황을 비켜 가며 이를 언급하지 않고, 그저 공허한 도리를 말하고, 구호를 외치고 규례를 지킬 줄만 안다면 그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 왜 안 되겠느냐? (그는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글귀와 도리밖에 말할 수 없는 그는 외식하고 영적인 체하는 바리새인이다. 진리를 깨닫는 자질이 결여되고 문제 해결 능력이 없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그를 리더로 선출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거짓 리더가 될 것이다. 그는 리더 사역을 해내지 못하고 리더 직책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그를 뽑는 것은 그를 해치는 것 아니냐?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어째서 그를 해친다는 겁니까? 저희도 좋은 의도로 그를 뽑은 겁니다. 그도 자질이 좀 있으니 그를 선출하면 사역을 책임질 사람이 생기는 거 아닙니까?” 누군가 책임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는 책임을 지지 못한다. 그저 탁상공론만 할 줄 알지 실제 상황과 연관 짓지 않으므로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면 네가 그를 선택하는 것은 그에게 악행을 저지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냐? 그를 거짓 리더의 길로 내모는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부류의 사람은 리더로 선출해서는 안 된다.
너희 주변에서 자주 접하는 사람, 비교적 잘 아는 사람 중에 누가 공허한 이론만 늘어놓고 실제 문제는 해결할 줄 모르는 사람인지 너희는 분별할 줄 아느냐? 매번 수준 높은 이론만 얘기하고, 다들 처음 듣는 기발하고 특별한 방안을 제시하지만 구체적인 처리 방안과 세부 사항을 어떻게 실행하고 이행할지 얘기해 보라고 하면 멍해지고 입을 다무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그가 하는 말들은 모두 공허하고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실제 상황, 실제 환경, 사람이 실제로 도달할 수 있는 능력, 사람의 분량, 사람의 업무 수준과도 무관하고 거기에 부합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집의 요구에는 더더욱 어긋난다. 그는 순전히 함부로 지껄이고, 비현실적인 생각만 하고, 생각나는 대로 말한다. 그의 생각에는 어떤 말을 해도 책임질 필요가 없고, 허풍을 떨고 호언장담을 해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 그는 이런 태도로 관점을 밝히고 생각을 제시한다. 이런 자들이 영적인 체하는 부류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쨌든 허풍을 떨고 호언장담하고 큰소리를 쳐도 그걸 진지하게 따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게다가 자기가 수준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만약 잘못해도 책임질 필요가 없고, 잘하면 사람들이 우러러봐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대로 떠들고 무슨 일이든 간단한 것처럼 얘기한다. 그의 아이디어는 많지만 어느 하나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있어서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가 제시하는 관점이 순수하고 올바르든 치우치든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오늘은 이렇게 말하지만 내일은 또 저렇게 말하며, 그가 말하는 관점, 이론, 근거는 모두 수준은 높지만 공허하기만 하고 실제적이지 않다. 어쩌다 공허하지 않고 치우치지 않은 방안을 제시할 때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지 얘기해 보라고 하면 그는 말을 못 한다. 구호를 외치고 큰소리치고 관점을 발표할 때는 무척 신이 나고 특히나 적극적으로 나서다가 구체적인 사역, 구체적인 방안을 이행해야 할 때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숨어 버리며, 그럴 때는 아무런 관점도 없다. 이런 부류가 리더를 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럼 이런 부류가 리더를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느냐? 남들에게도 자신에게도 해가 되지 않겠느냐? 교회 사역에 지장을 주고 또 스스로를 무척 힘들게 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도리도 제한적이어서 얘기가 끝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러니 그는 ‘문을 걸어 잠그고 수련’을 해야 한다. 이건 그에게도 힘든 일이 아니냐? 리더가 되면 마치 세 개의 산이 머리를 짓누르는 것처럼 매일 사는 것도 피곤하고 압박감도 큰데, 그럴 필요가 있느냐? 그는 그런 자질이 없어서 일이 닥치면 그저 상상에 따라 함부로 규례에 맞추지만 실제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이런 부류는 리더를 할 수 없다. 그는 실제적인 사역을 할 줄 모르는 거짓 리더이다.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을 지체시키고도 그는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들 영적인 체하는 부류의 자질과 인품을 발견하고 파악한다면 너희는 그래도 그를 리더로 선출할 수 있겠느냐? 만약 네가 그런 부류라면 누군가 너를 선출하려 할 때 어떻게 하겠느냐? (자신의 주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자신은 리더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네가 말했는데 다들 그래도 너를 꼭 선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렇게 말하도록 해라. “저는 리더 사역을 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제가 자질도 좀 있어 보이고, 가끔은 좋은 아이디어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고, 또 작은 빛 비춤도 있는 것 같지만 글귀와 도리를 얘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저는 확실히 리더 일꾼을 할 수 없고, 여러분보다 뛰어나지 않으니 절대 저를 뽑지 마십시오. 설령 제 표가 많더라도 저는 리더를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망칠 수 없죠! 전에도 리더를 했는데, 할 때마다 실패하고 교체되었습니다. 매번 교체된 원인이 다 자질이 부족하고 사역 능력이 없어서 실제적인 사역을 못하기 때문이었죠. 저는 글귀와 도리만 얘기할 줄 알았지, 그것 말고 리더가 다해야 할 책임은 하나도 제대로 이행하거나 다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거짓 리더였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단순히 자기는 리더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 한 마디면 다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이 팀에서 본분을 이행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으니 아무래도 원로급에 해당하지. 공로는 없어도 나름 고생은 했단 말이야. 그런데 왜 아무도 내 장점을 발견하지 못할까? 나도 리더를 할 재목이야. 나도 가치 있고 실용적인 생각이나 아이디어, 제안도 자주 내놓았다고. 리더가 채택하고 말고를 떠나 전반적으로 보면 나도 태도와 생각, 관점이 있는 사람인데 다들 왜 나를 뽑지 않는 걸까?’ 만약 네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한번 잘 판단해 보아라. 너의 그런 생각과 아이디어, 제안이 단지 말뿐이냐, 아니면 정말 실용적인 것이냐? 너는 사역 과정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발견하고 해결할 수 있느냐? 네 아이디어와 생각이 쓸모가 있느냐? 너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느냐? 네 생각과 관점이 글귀와 도리에만 머물고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면,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집의 사역 원칙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면 네 자질은 도대체 어떤 것이냐? 리더로 선출되면 너는 리더 일꾼의 직책을 다할 수 있느냐? 네가 리더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야심 때문이냐, 아니면 부담감을 가지기 때문이냐? 만약 네가 정말 사역 능력을 갖추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어 일부 리더 일꾼들이 사역을 너무 형편없이 하고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속이 탄다면, 의견을 제시해도 그들이 듣지도 않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을 때 네가 하나님 집 사역이 걱정돼서 애가 타고, 또 거짓 리더가 교회 사역을 지체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괴로워서 견딜 수 없다면 너는 부담감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단지 자기가 가진 생각을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더 많은 사람들을 청중으로 삼아 네가 하는 말, 네 고담준론을 들려주고 싶고,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은 것이라면 그것은 부담감이 아니라 야심이다. 야심 있는 사람은 글귀와 도리만 얘기할 줄 알고, 아이디어가 좀 있더라도 역시 공허한 글귀와 도리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되면 틀림없이 거짓 리더일 것이며, 그가 만약 악인이라면 곧 적그리스도일 것이다. 네 아이디어가 만약 공허한 글귀에 머문다면 너는 리더가 된 다음 반드시 모든 영적인 체하는 거짓 리더와 마찬가지로 될 수밖에 없다. 항상 ‘문을 걸어 잠그고 수련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위기감을 느낄 것이고 설교할 것이 없을 것이다. 네가 그들과 마찬가지로 높은 자리에 서서 설교하면서 사역 과정에 존재하는 어떤 문제도 발견하지 못하고, 당연히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너는 분명 거짓 리더일 것이다. 거짓 리더는 어떤 결과를 맞이하느냐?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해서 교체되는 것이다. 틀림없이 이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늘 속으로 분개하고 안달이 나는데 리더와 책임자를 선출할 때만 되면 늘 자기가 당선되고 싶어 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은 지 가장 오래고, 고생도 가장 많이 하고, 본분을 이행한 시간도 가장 길고, 충성심도 가장 강하니까 리더가 될 자격이 제일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남들이 자기를 뽑아 주기를 바란다. 너를 뽑아 주면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 거짓 리더라는 칭호를 벗어 버릴 수 있느냐? 리더 일꾼의 직책을 다할 수 있느냐? 이런 것들은 모두 실제 문제인데 아무도 이렇게 고려하지 않는다. 이들 중 누군가가 충분한 자질이 있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으면 진리를 구하고, 또 진리를 깨달은 뒤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으면 기준에 맞을 수 있다. 또한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인성이 상대적으로 괜찮다면 기준에 맞는 리더 일꾼이 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어떤 사람들을 사역을 하면서 늘 어려움을 호소하지만 진리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대가를 치르려 하지는 않고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원망한다. 이런 사람이 기준에 맞는 리더 일꾼이 될 수 있겠느냐? 그의 속셈과 태도는 옳지 않으며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어떻게 요구하든 그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런 사람은 리더 일꾼이 될 자격이 없다. 그는 마음속에 부담감이 없고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서 아무리 분명하고 알기 쉽게 얘기해 놓았어도 사역을 제대로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사역을 제대로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첫째, 모든 교회 사역은 하나님 집에 구체적인 사역지침이 있고, 상부에서 구체적인 규정을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어느 사역이든 너희가 창의적으로 하거나 독자적으로 완성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상부에서 너희에게 범위와 방향, 원칙을 제시하고, 또한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한다. 너희의 사역은 맨주먹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방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둘째, 어떤 사역도 책임자가 누구이든, 사역의 중심이 해외에 있든 국내에 있든 주로 상부 형제가 구체적으로 점검하고, 지도하고, 감독하고, 검사하고, 검토하고 자주 물어본다. 어느 정도로 구체적이냐? 대본, 영화, 프로그램, 찬양 등 어느 것이든 상부 형제가 다 직접 참여하고 점검하고, 일부 사역은 나도 같이 참여해서 너희에게 큰 방향과 틀을 알려 주기도 한다. 셋째, 진리 원칙에 관계된 모든 측면의 사역은 상부에서도 자주 진리 원칙을 교제해 주면서 도와주고 지도한다. 그뿐만 아니라 책망하고, 훈계하고, 점검해 주면서 수시로 너희의 치우친 부분을 바로잡아 준다. 넷째, 인사, 행정 방면의 중요한 사역은 상부에서 직접 너희를 도와 점검하고 의사 결정을 내린다. 사실 너희가 어떤 사역을 하든 독자적으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상부에서 안배하고 이끌고 지도하고 검토해 준다. 그렇다면 너희는 모두 무엇을 하느냐? 너희는 기존에 만들어 놓은 것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 정말 복이 있다! 어떤 일도 신경 쓸 필요 없이 그저 손만 대고 발품만 팔면 된다. 이것이 바로 너희가 해야 할 일이다. 너희가 추가로 대가를 치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런 크고 중요한 사역은 상부에서 다 했다. 그러니 너희가 하는 사역은 쉽고, 큰 어려움은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사역을 제대로 못 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되고, 사람이 전혀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고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뜻밖에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사역에 전혀 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설마 약간의 문제라도 있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너희에게 만점을 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합격하기만 하면 리더 일꾼의 직책을 다한 셈이다. 이것을 가혹하다고 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상부에서 지도하고 검토하는 것을 바탕으로 합격하는 것은 쉬운 일이며, 그저 사람이 진심으로 진리를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진리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늘 건성으로 임하려고만 한다면, 형식적으로 사역하면서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방해와 교란을 저지르지 않으며 양심의 가책이 없는 것에만 만족한다면 이런 식으로는 합격할 수 없다. 대부분의 리더 일꾼이 사역을 이런 태도로 한다. 사역을 조금 하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힘든 것은 싫고, 일반적인 수준에 만족하며, 결과가 어떤지는 하나님의 일이지 자기와는 관계가 없다는 식이다. 이런 태도가 괜찮으냐? 만약 네 태도가 이렇다면 네가 할 수 있는 사역은 매우 제한적일 것이며 네가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없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너는 응당 거짓 리더로 정의될 것이며, 이것은 그야말로 적절하고 너를 억울하게 하는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저희에 대한 당신의 요구가 너무 높습니다. 이 사역을 하지 않았다고 거짓 리더라고 하시고, 그 요구에 이르지 못했다고 거짓 리더라고 하신다면 저희를 무엇으로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저희는 로봇도 아니고 완전한 사람도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평범한 사람, 육체를 지닌 인간에 불과합니다. 저희에게 평범한 사람, 보통 사람이 되라고 하시면서 왜 리더인 저희에 대한 요구가 그렇게 높습니까?” 사실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렇게 높지 않다. 그저 사람이 다해야 할 책임을 다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당연히 해야 할 일,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리더 일꾼으로서 너희가 해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너희가 만약 진리를 향해 노력하지 않고 늘 고생을 꺼리고 안일을 탐한다면 그 원인과 이유가 무엇이든 너희는 틀림없이 거짓 리더이다. 이것은 한 명의 성인이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야 하고, 하루에 밥은 몇 끼를 먹고 일은 몇 시간 해야 하고, 더러워진 옷은 언제 세탁해야 하는 것과 같은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이 해야 할 일, 성인이 자기 스스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다. 이런 일은 네가 반드시 스스로 처리해야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만약 네가 뭐든 물어본다면,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건 지능이 모자란 것이고 바보라는 소리가 아니냐? 스스로를 돌볼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이런 사람도 리더 일꾼이 될 수 있겠느냐? 이런 자가 바로 거짓 리더가 아니겠느냐? 이런 자는 교체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그럼에도 지위에 연연하며 내려오지 않으려 하고 리더를 하려고 하는구나! 어떤 리더 일꾼들은 교체된 뒤에 억울해하며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그는 왜 우느냐?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이른바 사람에 대한 요구는 높지 않다는 것은 너에게 하라고 하는 일은 네가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길을 다져 놓고, 범위를 정하고, 의사 결정을 했으니 너는 가서 하기만 하면 된다. 마치 네가 밥을 먹는 것과 같다. 곡식, 야채, 각종 조미료, 냄비, 불을 모두 준비해 놓았으니 너는 배우면서 만들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성인이 해야 하고 해내야 할 일이다. 만약 해내지 못하면 너는 바보이고, 정상적인 성인의 지능 범위 안에 들 수가 없다. 이런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는 일부 리더들은 교체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런 사역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어떻게 정의하고 확정할 수 있느냐? 네가 성인의 지능과 자질을 갖추고, 성인이 갖추어야 할 책임지려는 마음, 책임감을 갖추고 있다면 당연히 해낼 수 있다. 만약 네가 해내지 못하고 하지 않으면 너는 거짓 리더이다. 이렇게 확정하면 되고, 이렇게 하면 정확하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정죄나 판단이 아닌데, 가혹하다고 할 수 있느냐? 전혀 가혹하지 않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2. 자질이 부족한 거짓 리더
방금 거짓 리더의 한 부류가 사역 중 맞닥뜨리는 곤혹스러운 점과 어려움을 제때 보고해 해결 방법을 구할 때의 모습, 그리고 이 부류가 리더 일꾼의 직책을 다하지 못하는 원인에 대해 교제했다. 이 부류는 영적인 체하는 사람들로, 그들은 사역 중의 곤혹스러운 점과 어려움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방면의 책임도 다하지 못한다. 이것이 한 부류이다. 또 다른 한 부류가 있는데, 영적인 체하는 부류와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사역 가운데 존재하는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므로 제때 상부에 보고해 해결 방법을 구하지 못한다. 이들 부류도 사역하느라 바빠서 하루 종일 분주하고 쉴 틈이 없다. 설교하느라, 여기저기 형제자매들을 방문하느라, 사역을 배치하느라, 심지어 교회 사역을 위해 각종 물품을 구매하느라 바쁘다.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를 찾아 주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내적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은 적극적으로 붙잡아 주고 문제를 해결해 준다. 어쨌든 이들은 사무적인 일을 하기에만 바쁘다. 교회의 실제적인 사역, 복음 전도 사역, 교회 생활에서 생기는 문제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매일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 교회의 공적인 일, 형제자매의 사적인 일을 모두 처리하고 해결하느라 바쁘다. 그들은 리더 일꾼이라면 당연히 이런 사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리더의 본질적인 사역이 무엇인지 시종일관 알지 못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교회에 존재하는 실제 문제나 핵심 문제는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니 교회 생활이 교란과 방해를 받고 하나님 선민들의 생명 진입에 어려움이 생겨도 그들은 제때 해결하지 못한다. 그들은 비록 사역하느라 바빠서 매일 쉴 틈도 없지만 이 정도로 바쁘다 한들 무슨 소용이냐? 교회 사역 가운데 존재하는 많은 문제를 그들은 발견하지 못한다. 겉보기에는 그들도 빈둥대지 않고 직책을 다하는 것 같지만 사역에서의 문제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그들은 구멍을 메우느라 바쁘고, 각종 ‘난제’들을 해결하고 교회에 나타나는 각종 악인과 방해하고 교란하는 자들을 처리하느라 바쁘다. 이렇게 사역에만 바삐 보내면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도 분별하지 못한다. 무엇이 좋은 인성이고 무엇이 나쁜 인성인지, 무엇이 좋은 자질이고 무엇이 부족한 자질인지, 무엇이 진정한 실력을 갖춘 것이고 무엇이 은사를 갖춘 것인지 그들은 하나도 명확히 분별하지 못한다. 또 하나님 집에서는 어떤 사람을 양성하고 어떤 사람을 도태시키는지, 어떤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고 어떤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지, 어떤 사람들이 기꺼이 본분을 이행하고 어떤 사람들이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지, 어떤 사람들이 온전케 되어 백성이 되고 어떤 사람들이 봉사자인지 등, 이런 것들을 그들은 하나도 간파하지 못한다. 허풍을 떨며 공허한 이론만 늘어놓을 뿐 실제적인 사역은 못하는 사람을 중점 양성 대상으로 삼아 중요한 사역을 안배하거나 맡기고, 순수하게 이해하고 자질을 갖추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 믿은 기간이 짧거나 교만한 성품을 표출했다는 이유로 좀처럼 발탁하거나 양성하지 않는 등, 이런 류의 문제가 교회에 빈번히 발생하는데, 이는 교회 사역의 진전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문제들이야말로 진정한 문제이지만 이 부류의 리더들은 그 문제를 보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혀 지각하지도 못한다. 그는 악인이 방해하고 교란할 때 그들에게 반성하도록 기회를 주면서 관찰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악인도 아니고, 단지 어리고 무지하고 일 처리에 원칙이 없다 보니 가끔 사소한 잘못을 저지르는데 그것이 원칙적인 문제도 아니지만 그는 그것을 사함 받을 수 없는 죄로 취급하며 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낸다. 이런 부류의 거짓 리더는 매일 사역으로 분주해서 겉보기에는 무척 열심히 하고 시간도 많이 쏟는 것 같지만, 그들이 어떻게 사역하든 사람들에 대한 참된 생명 공급이 없다. 또 하나님 선민들에게 무슨 문제나 어려움이 있어도 진리 교제를 통해 해결해 주지 못하고 그저 사랑으로 권면하고, 글귀와 도리로써 하나님 선민들을 격려할 뿐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 선민들은 그의 인솔 아래서는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고 그저 열정에 기대어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할 뿐 생명 진입이 없다. 이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느냐? 그러니 어떤 사람들은 자주 소극성과 연약함에 빠지고, 하나님의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이상(異象)은 갈수록 모호해지고, 일이 닥치면 하나님에 대해 관념과 오해를 품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경계하기까지 한다. 거짓 리더들은 이런 문제를 마주하고도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회피하기만 한다. 그가 하나님 선민들과 같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는 결코 이런 사역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매일 사무 사역과 외부의 일에만 매달리는데, 그것은 생명 진입이나 진리와 무관한 일이다. 그는 바쁘게 일하기만 하면 그것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고, 그러면 절대 거짓 리더가 아니라고 믿는다. 사실상 그가 그런 사무에만 매달리는 것은 형제자매들에게 생명 성장을 조금도 가져오지 못하며 나아가 하나님 선민들을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하지도 못한다. 너희가 볼 때 이런 부류의 거짓 리더들은 자질에 문제가 있지 않으냐? 그는 어떤 일도 간파하지 못한 채 사역만 부지런히 하면 아무 문제가 없고, 간접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줄 안다. 이런 부류는 너무나 멍청하지 않으냐? 자질이 너무 부족하지 않으냐? 그는 아무 일도 간파할 수 없고 실제적인 사역도 전혀 할 수 없다. 이런 자들이 바로 전형적인 거짓 리더, 거짓 일꾼이다. 이는 가장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 각 지역의 어느 교회에나 거짓 리더, 거짓 일꾼이 있다. 그들은 단지 열정에만 기대어 사역할 뿐 진리는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리더 일꾼의 본연의 사역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진리 교제로 문제를 해결할 줄도 모르면서 하루 종일 사무 사역을 처리하는 데만 급급하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필요한 물품을 하나 구입하는 것은 무슨 대단한 일이 아니다. 잘 아는 사람이 가서 구매하도록 안배하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거짓 리더는 돈을 많이 쓸까 봐 여러 곳을 다니며 가장 싼 물건을 사도록 사람을 안배한다. 그 결과 싸구려를 사서 며칠 쓰지도 않았는데 고장이 나서 다시 사야 했다. 돈을 아끼기는커녕 오히려 더 쓰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원칙에 맞느냐? 물건을 살 때 유명 브랜드를 살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품질이 기본은 돼서 사용할 수 있어야 적합하다. 거짓 리더가 이런 사무적인 일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 집의 중요한 사역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며, 이것이 바로 본질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복음 사역, 영화 제작 사역, 문서 사역, 체험 간증 영상 사역, 그리고 리더 일꾼을 조정하는 사역 등은 무척 중요한 사역이다. 하지만 거짓 리더는 이 사역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한쪽으로 제쳐 둔 채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는 본인 자질이 부족해서 사역을 할 수 없으면서도 배우지 않고 이렇게 생각한다. ‘누구라도 그 사역을 책임지기만 하면 되지 굳이 나까지 필요한가? 나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니 그런 사소한 일들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원칙만 설명해 주면 되는 거야.’ 거짓 리더는 무척이나 바빠 보이지만 그가 매달리는 일을 보면 교회의 중요한 사역도 하나 없고, 생명을 공급하는 사역도 하나 없고,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역도 하나 없다. 그가 매달리는 일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순전히 쓸데없이 바쁜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리더 일꾼이 어떤 사역을 해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열정에만 기대어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만 매달린다. 형제자매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헤어스타일을 하는지, 어떤 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어떤 언행을 하고 다니는지 등 교회 사역과 무관한 이런 사소한 일들은 참 자세히도 물어본다. 그는 이것이 붙임성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의 현실 생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리더가 해야 하는 일이자 정상 인성에 갖춰져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복음 사역, 영화 제작 사역, 찬양 사역, 문서 사역, 행정 사역, 새 신자 양육 사역, 교회 설립 사역, 사람을 발탁하고 양성하는 사역 등과 같은 중요한 사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참여하지도 않고 점검하지도 않는다. 마치 자기와는 무관하다는 식이다. 거짓 리더는 교회에 누적된 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교체해야 할 거짓 리더를 교체하지 않고, 악인이 악을 행하고 제멋대로 못되게 굴어도 제재하지 않고 처리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들이 본분을 건성으로 방만하게 이행하면서 질질 끌어도 진리를 교제해 해결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무슨 문제냐? 이런 실제 문제를 그는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는다. 이런 자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는 사람이냐? 자신이 하는 그런 사소한 사역이 그의 마음속에서는 핵심적이고 중요한 사역이다. 그는 하루 종일 그런 가치 없는 일로 분주히 움직이면서 자신이 책임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이 맡겨 준 본질적인 사역은 한 가지도 하지 않는다. 이런 부류가 거짓 리더가 아니냐? 그들은 사회의 주민 센터 주임과 같아서 그야말로 사무적인 일에만 신경 쓰는 아주머니가 따로 없다. 그러고도 하나님 집의 리더 일꾼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런 자가 바로 전형적인 거짓 리더, 거짓 일꾼이다. 이런 부류를 거짓 리더, 거짓 일꾼으로 정의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자질이 너무 부족해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없고 하찮은 일밖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체적인 원인이다. 이런 부류는 자질이 너무 부족해서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듣고 사역지침을 많이 들여다보더라도, 하나님 집에서 오랫동안 본분을 이행하고 리더를 맡더라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기가 하는 일이 옳은지 아닌지, 본인이 다해야 할 책임을 다했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리더 일꾼이라는 직함과 호칭에 대해 그가 내리는 정의는 바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마치 연자매를 돌리는 나귀처럼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계속 움직이는 것이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방향으로 돌리든, 돌리는 힘이 적절하든 아니든 다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많은 문제를 간파하지 못하고, 본인이 해결하지도 않으며 상부에 보고해 해결 방법을 구하지도 않는다. 사역을 얼마나 오래 하고 사람들을 얼마나 오래 접하든 그는 한 사람의 모습이 금방 믿어서 기초가 튼튼하지 않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불신파에 해당하는 것인지, 어떻게 분별하고 규정해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두 사람이 똑같이 소극적인 내적 상태를 보일 경우 어느 쪽이 양성할 가치가 있고, 어느 쪽이 그렇지 않은지 그는 모른다. 두 사람이 모두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할 때 어느 쪽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어느 쪽이 봉사자인지, 어느 쪽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고 어느 쪽이 진리 실제가 없는지 그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이 리더가 된 뒤에 적그리스도의 길을 갈지 그는 모른다. 설령 그 사람과 오랫동안 어울렸더라도 알지 못한다. 자신이 쓸데없는 일이나 무의미한 일을 아무리 많이 해도 주위에 아무리 많은 문제가 있어도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이런 부류는 자질이 부족하고 생각이 혼탁해서 사역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리더 일꾼의 직책을 다하기 어렵다. 이 부류의 리더 일꾼은 간단한 사무 사역은 조금 할 수 있지만,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에 관련된 것은 하나도 할 줄 모르고, 사역할 때 발생하는 실제 문제 역시 전혀 보지도, 해결하지도 못한다. 이런 자질을 지닌 이런 리더는 양성할 가치가 있겠느냐? 그들은 무엇이 곤혹스러운 것이고 무엇이 어려움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원칙에 따른 일 처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교회 사역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것이 설령 흔히 볼 수 있는 문제라 하더라도 그들은 종합해서 분류할 줄 모르고, 어떻게 진리를 교제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교회에서 자주 발생하는 이런 문제들을 이 부류의 거짓 리더들은 하나도 처리하거나 해결하지 못한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는 것이나 바쁘고 피곤한 것을 꺼리는 것이 아니라, 자질이 부족하고 생각이 또렷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중요한 사역과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없고, 단지 일부 사무적인 일을 하거나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는 것으로 리더 일꾼의 역할을 때우려 한다. 이는 야심과 욕망이 지나치게 큰 머저리가 아니냐? 교회의 핵심 사역, 이를테면 복음 확장 사역, 교회 새 신자 양육 사역, 영화 제작 사역, 문서 사역, 각급 리더 일꾼의 인사 관련 사역 등 진리 원칙에 관계된 이런 사역이나 복잡한 업무 사역을 자질이 부족한 리더는 일률적으로 하지 못한다. 왜 하지 못하느냐? 바로 그들의 자질이 너무 부족해 원칙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역은 그들이 전혀 닿지 못하고 배우지도 못한다. 예를 들어, 그에게 다섯 사람을 맡기고 이 다섯 명의 교육 수준과 자질, 특기, 인품에 따라 사역을 분배하도록 한다고 하자. 이는 분배하기가 쉽지 않겠느냐? 이것은 리더 일꾼의 자질과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있습니다.) 자질이 보통인 리더 일꾼은 일정 기간 관찰하고 접촉하고 익숙해진 다음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분배할 것이다. 반면 자질이 부족한 리더 일꾼은 다섯 명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사람이 많아지면 멍해져서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 모르며, 설령 분배하더라도 속으로 그게 적절한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것은 인사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일 처리 측면의 경우, 예를 들어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고 해결해야 할 때 그는 그 몇 가지 일의 관계를 어떻게 판단하고 분별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느 문제를 먼저 처리하는 것이 적절하고 어느 문제를 나중에 처리해야 일에 지장이 없을지 비교할 줄 모른다. 다시 말해, 그는 이익과 손해를 따질 줄도 모르고 일의 경중과 완급을 구분할 줄도 모르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더 일꾼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하는 척하고 몰라도 아는 척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간신히 도리를 어느 정도 얘기하며 때우고, 듣기 좋은 말 몇 마디로 대충 마무리를 짓는다. 자신이 한 말이 과연 정확한지, 원칙에 맞는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는 속으로 다 알면서도 그저 대충 넘기려고만 한다. 자신의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가 결국 사역에 지장을 줘서 교체된다. 이런 사람은 바보가 아니냐? 어떤 리더 일꾼들은 문제를 보고할 때 케케묵은 옛날 일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데, 그가 한참을 말한 뒤에는 네가 또 그 안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대신 분석하고 판단해 주어야 한다. 그는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도 모르고 한참을 얘기해도 그 문제의 초점과 본질은 분명하게 짚어 내지 못한다. 그가 하는 말은 전부 표면적인 것에만 관계되는 것이며, 그야말로 헛소리다! 이런 사람은 자질이 지나치게 부족하고 머리가 모자란 것이 아니냐? 자질이 있는 사람이 이런 일을 들으려 하겠느냐? 상대는 원래 그가 보고한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상황이고 어떤 모습인지, 어떤 내적 상태가 있기에 그가 곤혹스러워하고 해결하지 못하는지 파악하고 싶은데, 그는 정작 그 사람이 전에 어떤 사역을 했는지만 얘기하고, 그 사람의 현재 상황이나 자신의 곤혹스러운 점과 문제가 무엇인지는 얘기하지 않는다. 그는 장황하게 떠들지만 아무도 그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설령 질문을 하고 싶어도 그는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도 모르고, 어떻게 표현해야 효과가 있고 상대가 알아듣는지도 모른다. 그는 언어를 조직하는 능력도 없다. 이것이 자질이 너무 부족한 모습 아니냐? 일부 거짓 리더는 자질이 부족하므로 문제를 보고할 때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만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제가 알려 드린 정보가 어마어마하죠? 과거 일은 물론 현재의 일도 다 얘기를 드렸으니 이제는 제가 묻고자 하는 문제를 판단할 수 있지 않겠어요?’ 네가 아무리 그에게 물어보고 그를 인도해도 그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모르고, 문제의 핵심을 짚어 내지 못한다. 이것은 그가 말주변이 없거나 교육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자질이 부족하고 생각이 짧기 때문에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고, 머릿속이 흐리멍덩하여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도 어느 정도 부담감은 있기에 시간이 지나면 어떤 일에 대해서는 감각이 조금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하니 요약하거나 종합하는 일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정도까지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사역을 할 수 있겠느냐? 리더 일꾼의 직책을 다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다. 그에게 문제를 보고하고 문제를 설명할 시간과 기회를 주어도 그는 해내지 못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과 대화가 가능하겠느냐? 그를 쓸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째서 쓸 수 없겠느냐? 그는 말도 분명하게 하지 못하고 언어로 생각과 뜻, 태도를 표현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도 없다. 그런 사람이 무슨 사역을 할 수 있겠느냐? 그는 비록 힘도 있고 성실한 태도와 약간의 책임감,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자질이 너무 부족해서 아무리 가르쳐도 배우지 못한다. 네가 말하는 법을 가르쳐도 요령을 터득하지 못하니 너는 답답하고 속이 끓고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그가 하는 말은 마치 엉킨 실타래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으며, 그는 아무것도 분명하게 얘기하지 못한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헛소리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계속 마구잡이로 일하고 자기가 실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네가 책망해도 그는 불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리더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 리더 일꾼으로서 언어 표현 능력이 없을 정도로 자질이 부족하다면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냐? 이것은 사역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이나 문제를 제때 발견할 수 없음을 의미하고, 당연히 사역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나타나든 제때 해결할 수 없고 제때 문제를 상부에 보고해 해결 방법을 구할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어렵고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자질이 부족한 이런 부류에게는 이 사역이 무엇보다 어려워서 마치 오리를 횃대에 올라가게 하거나 소를 나무에 올라가게 하는 것처럼 매우 힘든 일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딱해요. 바쁘게 움직여도 결국 자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짓 리더로 규정되잖아요. 그럼 그가 한 고생은 다 헛고생 아니에요? 이는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것 아닌가요?” 거짓 리더를 교체하는 것은 하나님 선민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고, 교회 사역에 대해 책임지는 것인데, 그것이 어째서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냐? 네가 거짓 리더가 계속 리더를 하도록 고집한다면, 너는 하나님 선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너의 뜻은, 하나님 선민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냐? 하나님 집에서 거짓 리더를 교체하는 것은 거짓 리더를 정죄하는 것이나 거짓 리더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도 아니라 그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는 것이다. 만약 그가 계속 리더를 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궁극적으로 어떤 결말을 맞이하겠느냐? 너는 어째서 이런 식으로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냐? 또한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무엇이냐? 설마 리더를 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겠느냐? 리더를 하지 않으면 이행할 본분이 없는 것이냐? 리더를 하지 않고 자질이 부족하면 활로가 없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실행의 길이 무엇이냐? 지금 우리는 자질이 부족한 이런 부류의 거짓 리더의 모습과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부하고 있다. 정죄하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해부하는 것이다. 해부하는 목적은 이런 부류가 정확하게 자신을 알고 자신의 위치를 정하고, 자기 주제를 알게 하려는 것이고, 또 리더 일꾼이 무엇이고 리더 일꾼이 해야 할 사역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한 다음 자신과 대조해 보고, 자기가 리더 일꾼이 되기에 적합한지 생각해 보게 하려는 것이다. 만약 네 자질이 정말 부족하다면, 언어 표현 능력도 없고,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표현할 능력도 없고, 문제를 발견할 능력도 없을 정도로 자질이 부족하다면 너는 리더 일꾼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 너는 리더 일꾼의 본분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고 리더 일꾼의 사역을 하지 못한다. 너는 자질이 부족하니 이렇게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자질이 부족한 게 뭐 어때서요? 저는 인성이 좋으니 리더가 돼야 합니다.” 이것이 원칙이냐?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인성이 좋은 데다가 기꺼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려 하고, 설교도 할 줄 알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기초도 튼튼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수감된 적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리더 일꾼이 될 밑천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리더 일꾼이 되려면 밑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진리이냐? (아닙니다.) 지금 얘기하는 것은 리더 일꾼의 직책이며, 직책 안에서 자질의 문제를 언급했다. 네가 자질이 부족해서 이 직책을 다할 수 없다면 네가 지녀야 할 스스로에 대한 인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이런 자질을 갖추고 있지 않아서 리더 일꾼이 될 수 없어. 어떤 밑천이 있든 소용없어.’ 너는 너 자신이 인성도 좋고, 믿을 만하고, 고생하려는 의지도 있고, 기꺼이 대가를 치르려 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 집에서 너를 푸대접했느냐?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쓸 때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 사람에게 꼭 맞는 일을 맡김으로써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한다. 만약 네가 인성은 좋은데 자질이 부족하다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본분을 잘 이행하면 된다. 꼭 리더 일꾼을 해야만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설령 네가 마음 쓰기를 원한다 해도 너는 리더로서 써야 할 마음을 쓸 수 없고, 리더로서 갖춰야 할 자질을 갖추지 못했고, 네가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그럴 경우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고,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마라. 네가 25kg를 들 수 있다면 25kg만 짊어지면 된다. “25kg로는 부족해. 더 큰 짐을 짊어져야 해. 50kg는 짊어질 거야. 지쳐 쓰러져도 괜찮아!”라며 무리하지 마라. 리더 일꾼을 하지 못하는데도 계속 무리해서 하려 한다면, 너는 비록 지쳐 쓰러지지 않더라도 교회 사역에 지장을 주고, 사역 진행과 효율에 영향을 주고, 여러 사람의 생명 성장에 지장을 줄 것이다. 너는 이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 네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네가 자기 주제를 안다면 먼저 나서서 사직 의사를 밝힌 후 자질이 좋고, 진리를 사랑하고, 너보다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리더 일꾼으로 추천해야 한다. 이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이렇게 해야 참으로 인성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고, 정말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사람이다. 네가 리더 사역을 하지 못해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 자신에게 적합한 본분을 선택해서 충성을 바치고 하나님에게 인정받는다면 너는 더없이 슬기로운 사람이다. 너는 늘 생각한다. ‘나는 비록 자질이 부족하지만 인성은 괜찮아. 기꺼이 마음 쓰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려는 의지가 있고, 뭘 하든 당신들보다 근성이 있어. 나는 마음도 넓고 책망과 훈계를 겁내지 않고 시련을 겁내지 않아. 자질이 좀 부족하다고 해도 여전히 리더를 할 수 있어.’ 자질이 부족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너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너를 분류하여 너에게 자신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느 방면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적합한지 똑똑히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문제는 네가 자질이 부족해서 리더 일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령 리더 일꾼으로 뽑히더라도 너는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없고, 사역을 망칠 뿐이다. 네가 인성도 괜찮고, 양심과 이성도 있고 기꺼이 마음을 쓰고 대가를 치르려 한다면 네게 적합한 사역,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이 있을 것이며 하나님 집에서 합리적으로 안배해 줄 것이다. 네게 리더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 집의 규정과 원칙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네 자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결코 본분을 이행할 너의 권리, 하나님을 믿고 따를 너의 권리를 박탈하지 않는다. 이것이 합당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 일에 대해 더 자세히 교제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할 것이다. “더 이상 교제하지 마세요. 정말 얼굴을 들지 못하겠네요. 제가 자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앞으로 리더 일꾼은 하지 않겠습니다. 팀장이나 책임자가 되거나 혹은 잡일이나 주방 일이나 청소하는 일을 하겠습니다. 무엇을 하든 괜찮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 집의 안배와 하나님의 배치에 순종하겠습니다. 자질이 부족한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고, 여기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옳습니다.” 네가 이렇게 바라볼 수 있으면 충분하다. 이러면 자기 주제를 어느 정도 아는 것이다. 이 문제는 더 이상 교제하지 않겠다. 어쨌든 우리가 자질이 부족한 부류의 사람에 대해 문제를 해부하고 사실의 진상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그럼으로써 더 많은 이가 이런 부류의 사람을 올바른 태도와 관점으로 대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고, 또한 이 부류의 사람은 자질이 부족하다는 자신의 문제를 올바른 태도와 관점으로 바라보고, 앞으로 정확하게 자신의 위치를 정하고 자기에게 맞는 위치와 본분을 찾을 수 있게 하며, 이로써 대가를 치르겠다는 의지력, 고생하겠다는 각오가 합리적으로 사용되고 발휘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데 영향을 주지 않으며, 하나님 집에서의 네 이미지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3. 게으르고 편안함을 즐기는 거짓 리더
앞서 두 부류의 거짓 리더에 대해 교제했다. 또 한 부류의 거짓 리더는 우리가 ‘리더 일꾼의 직책’이라는 주제를 교제하면서부터 늘 교제했던 부류이다. 이 부류는 자질도 좀 있고 머리도 나쁘지 않다. 사역할 때도 방식과 방법이 있고, 문제 해결 방안도 가지고 있어서 그에게 어떤 사역을 맡기면 열에 아홉은 이행할 수 있다. 사역에 문제가 생기면 발견할 수도 있고, 일부는 해결할 수도 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이 보고하는 문제를 듣거나 어떤 사람들의 행위와 모습, 언행을 관찰하게 되면, 그는 속으로 반응을 하고, 관점과 태도를 가진다. 물론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데 부담이 있다면 이런 문제들은 모두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오늘 교제하려는 이 부류가 책임지는 사역 범위 내의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이들이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편안함을 좋아하고 수고하는 것을 싫어하며, 형식적으로 노력한다. 이들은 한가함을 좋아하고 지위의 복을 누리고 명령 내리기를 좋아해서 입만 움직이고 제안이나 좀 하면 끝이다. 교회의 실제적인 사역과 하나님이 맡겨 준 핵심 사역은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의 마음에는 그런 부담감이 없고, 설사 하나님 집에서 누차 강조해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하나님 집의 영화 제작 사역이나 문서 사역에 개입하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역들의 진행과 성과가 어떤지도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간접적으로 알아보기만 하고,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리고 있거나 일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 나면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는다. 사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분명 알면서도 교제해서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고 본분 이행 상황을 물어보거나 알아보지도 않는다. 왜 물어보거나 알아보지 않는 것이냐? 만약 그런 것들을 알아보면 자기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을 것이고 그러면 너무 신경이 많이 쓰일 것으로 생각한다. 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하겠느냐! 너무 신경 쓰면 밥맛도 없고 잠도 푹 자지 못하고 육도 피곤할 텐데 그러면 삶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디에 문제가 있을 경우 가능한 한 회피하고, 가능한 한 관여하지 않는다. 이런 부류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느냐? (너무 게으릅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게으른 사람과 자질이 부족한 사람 중 어느 부류 사람의 문제가 더 심각하겠느냐? (게으른 사람입니다.) 어째서 게으른 사람의 문제가 더 심각하겠느냐?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리더 일꾼이 될 수는 없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본분을 이행한다면 얼마간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게으른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자질이 있어도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이런 자를 두 글자로 요약하면 ‘폐인’이다. 2급 장애인이다. 게으른 사람의 자질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장식에 불과하다. 자질이 좋아도 그는 너무 게으르기에 그것을 발휘하지 못한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하지 않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으며, 어떤 고생을 해야 성과가 날지 아는데도 그 가치 있는 고생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 결과 그는 어떤 진리도 얻지 못하고 어떤 실제적인 사역도 해내지 못한다. 그는 사람이 겪어야 할 고생을 겪지 않으려 하면서 그저 편안함을 즐기고, 즐겁고 여유로운 시간, 자유롭고 편한 삶을 누리는 것밖에 모른다. 그러면 아무 쓸모가 없지 않겠느냐? 고생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살아갈 자격이 없다. 언제나 기생충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는 양심과 이성이 없는 자이며 바로 짐승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힘쓰는 것조차 자격이 없다. 그는 고생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힘쓰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며, 진리를 얻고자 한다면 희망은 더더욱 없다. 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폐인이다. 힘쓰는 것조차 기준에 맞지 않으니 인성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짐승이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도태시켜야 하나님의 뜻에 맞다.
어떤 사람은 농장 사역을 담당하는데, 매우 부지런하다. 마음속으로 계획이 있어서 계절마다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그는 농사를 지을 때 모든 밭을 다 둘러보고 어느 밭에 무엇을 심을지 다 계획해 놓은 다음, 실제로 대조해 보고 계획이 적절한지, 실제 상황에 맞는지 확인한다. 또한 그 해 토양의 건습이 어떤지, 어떤 비료가 부족한지, 무엇을 심는 것이 적합한지 확인한다. 그런 다음 속으로 감을 잡으면 육묘는 했는지, 얼마나 심었는지 서둘러 알아보고, 비닐하우스에 가서 육묘를 하는 사람이 믿을 만한지, 묘목을 망치지는 않을지 확인한다. 만약 한 사람이 제대로 못 할 것 같으면 파트너를 찾아 주고 두 사람이 서로 감독하게 한다. 게으른 사람이 이렇게 하겠느냐? 그러지 않는다. 누가 재촉하지 않으면 그는 절대 직접 현장에 나가지 않는다. 하나님 집에서 어떤 사역의 진행 상황을 캐묻지 않으면 절대 먼저 나서서 사역의 실제 상황을 점검하지 않을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부류는 무슨 일이든 자기 힘으로 직접 처리하지만 경중과 완급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저 마구잡이로 해치운다. 하지만 이런 게으른 부류는 무척 영리해서 무슨 일이든 입만 움직이고 다른 사람이 가서 하도록 지휘만 할 뿐 결코 직접 하는 법이 없고, 실제적인 사역도 할 줄 모른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전화나 문자로 물어보면 되는 거고, 문제가 해결되는 거야. 그러면 얼마나 수고를 덜 수 있는데! 나라는 리더 일꾼의 자질이 어떤지 보라고. 말 한마디로 일을 처리하잖아. 이것도 책임을 다하는 것 아닌가? 직무를 유기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만약 상부에서 물어보면 이런 일은 죄다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고 무엇이든 확실히 얘기할 수 있어. 현장에 가서 들여다보는 게 무슨 소용이야? 애먹고, 고생하고, 햇볕에 시커멓게 타기나 하지. 그런 과정을 거칠 필요 없어. 수고를 덜 수 있으면 덜어야지. 그렇게 스스로를 힘들게 할 필요가 없는 거야.’ 꽤나 ‘영리하지’ 않으냐? 이런 부류는 사역을 할 때 교묘하게 꾀를 부리며 지름길을 찾는 데 능하다. 방식과 방법이 있으며 어떤 일도 직접 나서지 않고, 참여하지도 않는다. 전화로 물어보면서 형식적으로만 일하고, 전화를 끊으면 자러 가든가 마사지를 받으며 육적인 즐거움을 누리기 시작한다. 이런 부류는 정말 ‘사역을 할 줄’ 알고, 빈둥거릴 줄 알고, 과정만 거치면서 사람을 속일 줄 안다! 그가 갖춘 그깟 자질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것은 공산당 국가의 관료들이 출근해서 차 마시고 신문이나 보고, 퇴근 시간 전부터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놀지 궁리하면서 정말 편하게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부류의 거짓 리더도 이런 원칙으로 사역을 한다. 고생도 힘든 일도 전혀 하지 않으면서 그래도 벼슬을 하며 지위의 복을 누리고 있는데, 대부분의 형제자매가 아직 이것이 문제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사역하면서 실제적인 사역은 전혀 하지 않고 현장에 나가 사역을 점검하고 검사하지도 않는데 그러면 그가 사역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겠느냐?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체하고 자질이 부족한 거짓 리더는 문제를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이다. 이런 부류의 쓸모없는 인간들은 어떠하냐? 그는 말한다. “저는 실제적인 사역에도 참여하지 않고 현장에 가서 그들과 한데 뭉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생겨도 저더러 눈뜬 소경이라고 할 수는 없으시겠죠. 저는 현장에 가지 않아 보지도 못했는데 문제가 생기면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당사자를 찾아가셔야죠.” 정말 교활한 인간이 아니냐? 그는 명령을 내려 사람을 안배하기만 하면 그만이고, 그러면 자기는 책임을 다한 것이니까 거들먹거리며 본인의 여가 시간을 보내도 된다고 생각한다. 아래에 무슨 문제가 생겨도 물어보지 않다가 누군가 상부에 문제를 보고하면 그제서야 급히 서두르며 처리한다. 그는 매일 지위의 복을 누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며, 여기저기 다니고, 사역을 검사하는 척하지만 사실 정말 문제가 있는 곳은 절대 가지 않고, 중요한 사역은 결코 검사하지 않는다. 이런 행태는 꼭 공산당 관료가 형식적인 일만 하고 체면치레만 하는 것 같지 않으냐? 그에게 일을 맡기면 대답은 시원시원하게 하지만 점검하지 않고 감독하지도 않는다. 설령 현장에 간다 해도 형식적인 절차만 밟고, 절대 자기 손으로 일하지 않고 자기가 직접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한다. ‘이런 일은 굳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어. 누군가 하고 있으면 되지. 어쨌든 돈도 한 푼 안 주는데 대충 하면 돼.’ 이런 마음가짐으로 사역을 잘할 수 있겠느냐? 그는 속으로 속셈이 있다. ‘먹은 만큼 일하고 하루 중이 되면 하루만큼만 종을 치면 되지.’ 하지만 그는 결코 구체적인 사역을 하지 않고, 사역 현장에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 있느냐?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잘 수 있는, 환경 좋고 안전한 곳에서 즐기고 있는 것이다. 사치스럽고 안일하게 지내면서 정해진 시간에 목욕하고 마사지도 받고 옷도 갈아입으면서 고생은 전혀 하지 않는다. 자기가 어떤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있고, 어떤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하나님 집의 사역에 어떤 공헌을 했고, 이런 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이런 문제는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자는 어떤 인간이냐? 이런 쓰레기는 자기 주제도 모르고 염치가 없는 인간으로, 교회의 리더 일꾼이 될 자격이 없다.
무릇 거짓 리더는 끝까지 실제적인 사역은 하지 않고, 리더가 된 것을 벼슬로 여기며 지위의 복을 누린다. 그러면서 리더로서 이행해야 할 본분과 해야 할 사역을 귀찮은 일, 번거로운 일로 여기고, 속으로 교회의 사역에 대해 반발심이 가득하다. 그에게 사역을 감독하면서 사역에서 점검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면 끔찍이 싫어한다. 이는 리더 일꾼이 마땅히 해야 할 사역이고, 본직 사역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왜 계속 리더 일꾼이 되려는 것이냐?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것이냐, 아니면 감투를 쓰고 지위의 복을 누리려는 것이냐? 감투를 쓰기 위해 리더가 된 것이라면 염치가 없는 것 아니겠느냐? 이런 자는 인격이 가장 비천하고 존엄도 없는 후안무치한 사람이다. 육적인 안일을 누리고 싶다면 속히 세상으로 돌아가서 네 능력껏 경쟁하고 빼앗고 쟁취해라.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은 하나님의 선민들이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이며, 사람이 진리를 추구해 구원받는 곳이지, 육적인 안일을 누리는 곳도, 더욱이 사람이 사치를 부리며 안일하게 지내는 곳도 아니다. 거짓 리더 부류는 뻔뻔하고 후안무치하고 이성이 없다. 어떤 구체적인 사역을 분배해 주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까맣게 잊어버린다. 입으로 대답은 그렇게 잘 하면서 실질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정말 부도덕하지 않으냐? 그는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혼자서 대권을 독차지하고 재무와 인사 각 방면의 권리를 손에 넣고 주무르면서 사람들이 매일 자기에게 보고하도록 한다. 그는 이런 일에는 참 부지런하다. 상부에 사역을 보고할 때는 형제자매의 사역 성과를 자기 것으로 돌려서 상부에서 그가 사역을 잘한 것으로 오해하게 하지만 사실은 다 다른 사람이 한 것이다. 복음을 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얻었는지, 어떤 사람들이 발탁되어 양성되었는지, 어떤 사람들이 직책에서 해임되었는지, 어떤 사람들이 제명되었는지 등, 이런 구체적인 사역 중 어느 하나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면서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보고한다. 이는 후안무치한 것이 아니냐? 기만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부류는 너무 간사하고 교활하다! 그는 그래도 자기가 똑똑한 줄 아는데 이건 정말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것이고 결국 자신을 드러내 도태시키는 것이다. 무슨 사역을 하든,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해내지 못하고 감당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이행해야 할 어떠한 의무나 책임도 다하지 못하니, 이는 폐물 아니겠느냐? 이런 자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바보, 지적 장애인, 각종 신체장애자 외에 누구든 살면서 자기 본분과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이 부류의 사람들은 늘 잔꾀를 부리면서 책임을 다하려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람답게 살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사람답게 살아갈 기회를 주고 자질과 은사를 주었는데, 그는 그것을 본분 이행에 쓰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잘 누리려고만 한다. 이런 부류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역을 시켜도, 그것이 중요한 사역이든 평범한 사역이든, 혹은 어려운 사역이든 간단한 사역이든 그는 다 건성으로 임하며 잔꾀를 부린다.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미루려 하며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계속 기생충의 삶을 살고자 한다. 이런 자는 쓸모없는 폐물 아니겠느냐? 사회에서 자기 힘으로 생존하지 않는 자가 있더냐? 성인이 되면 누구나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부모의 책임은 이미 끝난 것이다. 설령 부모가 계속 지원해 주겠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편치 않고, ‘부모님의 자식 양육 사명은 이제 끝났어. 나는 성인이 되었고, 또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니 혼자 힘으로 살아야 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성인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이성 아니겠느냐? 만약 정말 이성이 있다면 남들에게 비웃음을 받고 체면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라도 계속 부모에게 빌붙어 살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일하기는 싫어하고 편한 것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성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는 늘 공밥을 먹으려 하고,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며, 하늘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 입안으로 굴러 들어오기만 바란다. 또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삼시 세끼 잘 먹고 마시도록 챙겨 주기를 바란다. 이는 기생충의 사고방식이 아니겠느냐? 기생충에 속하는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겠느냐? 인격과 존엄이 있겠느냐? 절대 없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남에게 빌붙어 사는 못난이로, 양심과 이성이 없는 짐승이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 집에 남아 있을 자격이 없다.
만약 교회에서 네게 어떤 사역을 안배해 준다면,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 사역을 하면서 남들 앞에 나설 수 있든 없든 제게 주어진 일이면 제대로 해내고 책임을 짊어질 것입니다. 저에게 접대하도록 안배한다면 온 힘을 다해 접대하겠습니다. 형제자매를 잘 돌보고 최선을 다해 안전을 확보하겠습니다. 저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안배한다면 진리를 잘 갖춘 다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것입니다. 외국어를 배우도록 안배한다면 열심히 배우고 죽어라 공부해서 되도록 빨리 1, 2년 안에 외국어를 제대로 익혀 외국인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에게 간증문을 쓰라고 하면 열심히 연습하며 진리 원칙에 근거해서 일을 바라보고, 언어 지식을 공부할 것입니다. 설령 미사여구가 뛰어난 글은 못 쓰더라도 최소한 저의 체험 간증을 분명하게 얘기하고, 진리를 알기 쉽게 교제하고, 진실되게 하나님을 증거해서 사람들이 제 글을 보고 도움과 유익을 얻게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맡기든 저는 마음과 힘을 다해 그 사역을 책임지겠습니다. 모르는 부분이 있거나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할 것이며, 진리 원칙에 근거해 문제를 해결하고 일을 제대로 처리할 것입니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온 힘을 다해 제대로 이행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제 몫의 책임을 다할 것이며, 최소한 양심과 이성에 어긋나거나 건성으로 임하거나 몸을 사리거나 다른 이의 노동의 결실을 누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양심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준이다. 이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최소한 가슴에 손을 얹고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며, 공밥을 먹지 말고 네 하루 세끼의 값을 해야 한다. 이런 것을 두고 책임감이 있다고 한다. 자질이 좋든 나쁘든, 진리를 깨달았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너는 이런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 사역을 나에게 맡겼으니 열심히 해야 해. 항상 이 사역을 신경 쓰며 마음과 힘을 다해 제대로 해내야지. 100% 잘 해낼 거라는 장담은 못 해도 내 태도는 온 힘을 다해 잘 해내도록 노력하는 거야. 절대 건성으로 임하지 않을 거라고. 만약 사역에 문제가 생긴다면 책임을 지고 그 일에서 교훈을 얻어 제대로 본분을 이행해야겠어.’ 이것이 바로 올바른 태도이다. 너희는 이런 태도를 갖추었느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사역이 저에게 주어졌다고 해서 꼭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죠.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고 그렇게 힘들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잘못을 하더라도 그렇게 걱정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크게 압박감을 느낄 필요도 없어요. 왜 스스로를 그렇게 힘들게 해야 하나요? 어쨌든 저는 계속하고 있는 중이고 공짜 밥을 먹은 것도 아닌 걸요.” 본분을 이행하는 이런 태도는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만큼만 하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돼요. 그렇게 진지하게 대할 필요는 없어요.” 이런 사람은 본분을 대할 때 책임지려는 마음도 없고, 책임감도 강하지 않다. 너희는 어떤 사람이냐? 만약 첫 번째 유형의 사람이라면 너희는 이성과 인성이 있는 사람이다. 만약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이라면 너희는 내가 해부한 이 부류의 거짓 리더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저 그럭저럭 사는 것이다. ‘피곤하게 살지 말고, 힘들게 살지 말고 많이 즐기자. 설령 어느 날 교체된다 해도 별로 잃을 건 없어. 최소한 며칠은 지위의 복을 누렸으니 손해 본 건 아니지. 나더러 리더를 하라고 하면 난 이렇게 할 거야.’ 이런 사람의 마음가짐은 어떠냐? 이런 사람이 바로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불신파이다. 만약 네가 정말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너란 사람이 양심이 있고 이성이 있다는 뜻이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누가 시킨 일이든, 하나님 집에서 맡겨 준 일이든, 교회 리더 일꾼이 시킨 일이든 너는 이런 태도여야 한다. ‘본분을 나에게 맡긴 이상 그건 하나님의 높여 주심이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총을 베푸신 거야. 그러니 나는 진리 원칙에 따라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해. 비록 내 자질은 보통이지만 나는 이 책임을 짊어지기 원하고 최선을 다해 본분을 잘 이행하고 싶어. 잘 이행하지 못하면 책임을 져야 하고, 잘 이행하더라도 그건 공로가 아니라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야.’ 어째서 본분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가 원칙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냐? 만약 너란 사람이 정말 책임감이 있고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면 너는 교회의 사역을 짊어질 수 있고, 네가 이행해야 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 만약 네가 본분을 대수롭지 않게 대한다면 네가 하나님을 믿는 관점도 바르지 않고, 하나님을 대하고 본분을 대하는 너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관점은 바로 건성으로 대하고 어영부영 넘기는 것이다.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든 원하지 않는 것이든, 네가 잘하는 것이든 못하는 것이든 너는 모든 일을 대충 때우는 태도로 대한다. 그렇다면 너는 리더 일꾼을 하기에 합당하지 않고 교회 사역을 할 자격이 없다. 게다가 내가 아주 직설적으로 말하겠는데 너 같은 부류가 바로 못난 인간이고 결코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는 폐물이다. 폐인이란 어떤 부류의 사람이냐? 폐인은 어리석은 사람, 하루하루 시간만 보내는 사람이다. 이 부류의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책임감을 갖지 않고 진지하게 임하지도 않으며 엉터리로 처리한다. 또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신경 쓰지 않고 ‘나는 이렇게 되는대로 살 거야. 무슨 상관이야! 당장 본분을 이행하면서 먹을 것만 있으면 그만이야. 적어도 구걸은 안 해도 되잖아? 먹을 게 없어지면 그때 다시 생각하지 뭐.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으니까. 나더러 양심도 이성도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럼 어때? 내가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니잖아. 기껏해야 인품이 좀 나쁠 뿐인데. 내가 무슨 손해를 본 것도 아니고 말이야. 먹을 것만 있으면 그만이야.’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이 어떠하냐? 말해 두겠는데,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 하루하루 시간만 보내는 사람은 도태될 운명을 맞이하게 될 자로,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 무릇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으면서도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체험 간증이 없는 사람은 모두 도태될 것이다.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폐물이나 못난이는 전부 공밥을 먹는 자들이니 반드시 도태될 것이다. 만약 리더 일꾼이 공밥을 먹는 자라면 더더욱 교체되고 도태되어야 한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임에도 리더 일꾼이 되고 싶어 하는데, 그는 자격이 없다! 실질적인 일을 전혀 처리하지 않으면서도 리더가 되려고 한다니, 정말이지 염치도 모르는 사람이다!
교체된 어떤 리더 일꾼은 이런 말을 한다. “리더 일꾼을 안 하니까 정말 좋아요. 그렇게 근심할 필요도 없고 신경 쓸 필요도 없고요. 평범한 형제자매가 되니까 정말 좋은데요. 그런 걸로 뭣 하러 신경 써요? 힘들게 일하려고 자질이 있는 것도 아닌데요.” “리더 일꾼을 안 하면 뭘 하실 건가요?” “너무 피곤하거나 큰 힘을 들이지만 않으면 뭐든 괜찮아요. 가볍게 가서 둘러보거나 앉아서 얘기만 하는 것도 좋고, 컴퓨터를 보는 것도 좋아요. 시간은 너무 오래 걸리면 안 되고, 육적으로 고생하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이건 무슨 소리냐? 선출된 리더 일꾼이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하면 너희는 속으로 어떤 기분이겠느냐? 무척 후회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속으로 어떤 느낌이 들지 않겠느냐? 너는 말할 것이다. “처음에 당신이 자질이 좀 있길래 당신을 발탁하고 양성해서 기회를 주고, 진리를 많이 깨닫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인간일 줄은 몰랐죠. 처음에 당신을 사람으로 본 게 후회되네요. 사람이 아닐 줄은 몰랐지 뭐예요. 당신은 개돼지만도 못한 폐물이에요. 사람의 탈을 쓸 자격도 없고 사람이 될 자격도 없어요!” 이 말이 듣기 거북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는 거북하지 않지만 이런 폐물이 듣기에는 아주 거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폐물 같은 인간들은 마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말, 나쁜 말을 그가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마음이 없는 사람은 어떤 일이 닥쳐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이익과 도움이 되고 편안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당신이 뭐라고 하든, 당신이 나를 어떻게 보고 평가하든, 나를 어떻게 규정하고 처리하든 나는 상관없어!’ 이것이 바로 그의 명언이다. 이런 자는 폐물이 아니냐? 네가 뭐라고 하든 그는 지각하지 못하고 마음에 담지 않는다. 왜 마음에 담지 않느냐? 그가 마음이 없는 건달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존엄성이 없고 인격이 없으며, 네가 뭐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네가 아무리 매서운 말을 해도 마음이 찔리지 않는다. 오직 존엄성과 인격, 이성이 있는 사람만이 이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아프고 괴로워한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게 처신하는 건 저열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존엄성을 잃었으니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도록 내 존엄성을 되찾자. 자존심을 지키고, 존엄성 있게 살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그는 자신의 존엄성을 해치는 말, 그의 아픈 곳과 약점을 찌르는 말에 대해 지각이 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다. 지각이 있고 존엄성이 있는 사람이 옳은 말을 듣고 긍정적인 사물을 본 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때는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는 존엄성이 있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달이나 쓸모 없는 인간들은 존엄성이 없다. 그러니 네가 어떻게 말해도, 네 말이 아무리 옳고 정확하고 진리에 부합해도, 그 말이 아무리 긍정적인 사물이라고 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 그의 마음은 전혀 동하지 않는다. 존엄성이 없는 사람은 어떤 긍정적인 사물, 어떤 정론과 폭로에도 아무런 지각이 없고, 어떤 인생길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올바른 태도가 없다. 따라서 네가 뭐라고 얘기하든, 뭐라고 폭로하고 정의하든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에게 진리를 얘기하고 설교하는 것이 소용이 있느냐? 책망과 훈계가 소용이 있느냐? 심판과 형벌이 소용이 있느냐? 소용없다! 이런 부류는 쓸모 없는 인간에 해당하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짐승에 해당하는 인간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자격이 없다. 이런 못난 인간, 기생충이 만약 교회 리더를 맡으면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발견할 수 있겠느냐?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 선민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그가 해결할 수 있겠느냐? 분명 그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가 어떻게 리더 사역을 하겠느냐?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리더 일꾼을 하려면 최소한 교회 사역에서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 선민들의 생명 진입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일정 기간 훈련해서 체험이 좀 생기고, 나아가 진리를 조금 교제하고 체험 간증을 조금 얘기할 수 있게 된다면, 점차적으로 리더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어떤 문제도 발견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한다면 리더 사역을 할 수가 없다. 이런 자는 거짓 리더에 속하므로 그를 교체하고 리더를 다시 선출해야 한다.
리더가 되는 자는 적어도 진리를 조금 깨닫고 실제적인 체험도 조금 있어야 한다. 체험이 조금도 없다면 진리를 조금도 깨닫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리더를 맡은 어떤 사람은 글귀와 도리를 말하는 데 능하고, 또한 많은 이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거짓 리더 역시 질문에 답변할 수 있지만 진리 원칙을 교제해 내지 못하고 오직 공허한 이론만 얘기할 뿐 조금도 실제적이지 않다. 갓 듣고나서는 입맛에 맞는 것 같아서 분별이 없는 사람들은 무척 공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중에는 실행의 길이 없고 실행 원칙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이 문제를 해결한 셈이냐? 여전히 건성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실제적인 사역을 하는 것이냐? 거짓 리더는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지만, 어떻게 관리 노릇을 하는지는 알고 있다. 그런 자가 리더가 되면 가장 먼저 무슨 일을 하겠느냐? 사람들의 마음을 매수한다. 그는 “새로 온 관리는 일을 벌인다.”라는 말을 실행한다. 먼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나 생활 복지 면에서 일을 몇 가지 해 모두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준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리더로 보여지게 하고, ‘그는 우리의 부모 같은 리더다!’라고 칭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정식으로 자리에 오른다. 그는 대중적 기반이 마련되었고 지위도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며, 당당하게 지위의 복을 누리기 시작한다. 그의 인생 격언은 바로 “세상을 사는 데는 먹는 것과 입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인생은 괴롭고 짧으니, 어찌 제때에 즐기지 않겠는가?”, “오늘 술이 있으면 오늘 취하고, 내일 걱정은 내일 한다.”라는 것이다. 그는 오늘 하루 누렸으면 그만이고 한순간 즐겼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 않고, 나아가 리더가 마땅히 어떤 책임과 본분을 이행해야 할지 고려하지도 않는다. 그저 형식적으로 글귀와 도리를 읊어 대고 체면을 세우는 일을 약간 할 뿐, 실제적인 사역은 전혀 하지 않는다. 교회에 존재하는 실제 문제들을 파고들어 철저히 해결하지도 않는데 그런 표면적인 일만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은 사람을 기만하는 행위 아니겠느냐? 이런 거짓 리더 부류의 인물에게 중임을 맡길 수 있겠느냐? 그들이 리더 일꾼을 선발하는 하나님 집의 원칙과 조건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일말의 양심과 이성조차 없으며, 조금의 책임감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감투를 쓰고 리더가 되고자 한다. 어찌하여 염치를 모르는 것이냐?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도 자질이 부족하면 리더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 책임감조차 없는 폐인은 리더가 될 자격이 더더욱 없다. 먹는 것만 밝히고 일은 게을리하는 이런 부류의 거짓 리더는 어느 정도로 게으르겠느냐?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아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책임감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말재간이 있고 자질도 좀 있는 것 같지만, 막상 교회 사역에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하지 못한다. 결국 사역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문제가 갈수록 많아져도 내버려둔 채 상관하지도 않고, 여전히 형식적으로 표면적인 일만 계속해 나간다. 그로 인해 마지막에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교회 사역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되지 않겠느냐? 교회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히 흐트러지고 혼란스러워지지 않겠느냐? 이것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거짓 리더가 상부에 보고하겠느냐?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교회에서 누군가 상부에 그의 문제를 보고하려 하면 그가 동의하겠느냐? 틀림없이 억압하고 봉쇄해서 누구도 상부에 문제를 보고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누가 문제를 보고하면 그는 그 사람을 제재하고 억압하고 격리할 것이다. 너희가 볼 때 이런 거짓 리더는 너무 비열하지 않으냐? 그는 교회 사역에 어느 정도로 해를 끼치든 상부에서 모르게 할 것이며 더욱이 상부에서 나서서 해결하지도 못하게 할 것이다. 그는 지위의 복을 누리는 일만 신경 쓰고, 자신의 허영과 체면을 지키는 데만 급급하다. 이런 사람은 비열하고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양심도 온데간데없고 인성도 없지 않으냐? 상부에서 사역에 대해 물어보면 그는 문제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하거나 적당히 얼버무리고 둘러대는데, 이는 위아래를 속이는 짓이 아니냐? 교회 사역에 그토록 많은 문제가 쌓였는데 그는 본인이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마치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여전히 안일을 즐긴다. 하루 종일 아무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되는대로 살고 전혀 속을 끓이지 않는다. 문제가 불거지고 상부에서 추궁하기 시작해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역을 하도록 사람을 안배했으니 제 책임은 다 한 거죠. 사역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 탓이지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이 한 마디로 책임을 깨끗이 미루는데 마치 자기는 조금도 책임이 없는 것 같다. 그는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속 편하게 이런 소리를 한다. “어쨌든 저도 본분을 이행하면서 한가하게 보내지 않았습니다. 공짜 밥을 먹지는 않았다고요. 상부에서 교체하지 않으면 저는 계속 리더를 하겠습니다. 제가 리더를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잖아요? 그러면 본분에 충성을 다하지 않은 것 아닌가요?” 네가 그를 책망한다 해도 그는 수많은 이유를 대며 너를 반박할 수 있다. 그는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그의 책임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으며, 자기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것이 어떤 성질인지 반성하지 않는다. 이런 부류는 너무나 역겹지 않으냐? 교회 사역을 마비시키고 하나님 선민에게 이렇게 오랜 시간 해를 끼치고도 속으로 전혀 뉘우치지 않는데, 그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그에게 그래도 일말의 양심과 이성이 있느냐? 누군가는 말한다. “이런 사람은 리더로 선출하면 안 됩니다.” 이치는 그렇다. 하지만 선거에서 당선된 리더 일꾼 중에 이런 사람이 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다 하나님 선민들에게 분별력이 없어서 벌어진 결과이며, 대부분 사람들이 무골호인을 좋아해서 일부 거짓 리더, 거짓 일꾼을 선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 선거 전에는 반드시 리더 일꾼을 선출하는 원칙을 많이 교제하고, 또 거짓 리더와 거짓 일꾼을 분별하는 원칙도 교제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원칙에 따라 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 선거가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너희가 볼 때 이런 비열하고 뻔뻔한 건달이 리더 일꾼을 하면 교회 사역을 잘할 수 있겠느냐?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 하나님 선민들이 마주한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겠느냐?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거짓 리더를 만나면 너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만약 누군가 “저희는 자질이 부족해 분별할 줄 모르니 거짓 리더를 만나도 어쩔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옳은 말이냐? 교회에 자질이 부족하고 분별이 없는 사람들만 있을 리가 없지 않으냐? 적어도 상대적으로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몇 명은 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거짓 리더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고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한다면, 진리를 깨달은 사람과 교제해서 그에게 분별하고 결정을 내려 달라고 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느냐? (네, 적절합니다.) 어째서 적절하겠느냐? 교회 리더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냐? 누가 피해자가 되느냐? 교회에 있는 하나님 선민들이 되지 않겠느냐? 만약 거짓 리더가 교회를 3~5년 통제한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는 데 영향을 받겠느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일에 지장을 받겠느냐? 그 결과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따라서 거짓 리더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고,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한다면, 이는 모든 하나님 선민들에게 큰일이므로 마땅히 제때 폭로하고 고발해서 사역이 지체되지 않게 해야 한다. 교회 리더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하나님 선민이 입는다. 만약 하나님 선민들이 폭로해서 고발하지 않고, 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이런 교회는 희망이 없다. 만약 너희가 속으로 늘 무책임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어쨌든 당신이 리더잖아요. 당신이 실제적인 사역도 하지 못하면서 상부에 문제를 보고하지 않은 것이고, 그 때문에 교회 사역을 그르쳐서 상부에서 당신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건데,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죠? 우리가 걱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요? 우리가 책임자도 아닌데. 그 책임은 다 당신한테 있죠.’ 속으로 늘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일을 그르치지 않겠느냐? 너희가 진리를 추구하고 실제에 진입해서 하나님에게 구원받는 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느냐? 만약 교회 사람들이 모두 무책임하다면 그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 증거할 수 있을지,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과연 몇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는 더욱 장담하기 어렵다. 만약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생각하고 모두 이런 관점이라면 그 교회는 일말의 희망도 없다. 지금 영화 제작팀에는 이런 문제가 있지 않으냐? 너희 리더가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고 보고하지도 않는데 그가 거짓 리더임을 너희는 알아차릴 수 있느냐? 그가 너희에게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데, 너희는 그것이 문제임을 발견하지 못했느냐? 무척 기뻐한 것은 아니냐? ‘리더가 문제를 보고하지 않아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 덕분에 좀 쉴 수 있으니 너무 좋은데! 게다가 최근에는 상부에서 이 일을 직접 물어보시지 않았으니까 우리도 문제를 보고할 필요가 없지. 굳이 일을 만들어서 뭐 해? 영화를 꼭 그렇게 빨리, 시간에 맞춰 다 찍어야 하나? 지금 진도도 괜찮은데, 뭐! 다 못 찍으면 어때? 그렇다고 정죄할 수 있나?’ 너희는 이런 태도가 아니냐? 너희는 하나님 집의 사역에 그렇게 엄격한 시간표가 없으니 무기한 연기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상부에서 물어보지 않고 추궁하지만 않으면 걱정할 필요 없고, 압박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문제는 해결할 수 있으면 해결하고, 해결할 수 없으면 그냥 놔두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이 아니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희에게 문제가 있을 때 어째서 보고하지 않는 것이냐? 거짓 리더가 너희를 통제해서 그런 것이냐, 아니면 너희에게 ‘미혼약(迷魂藥)’을 투여한 탓에 정신이 흐려지고 말도 못 하게 된 것이냐? 이것은 무엇이 문제이냐? 문제가 있을 때 스스로가 알 수 있느냐? 모른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고, 알고 있으면서도 보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를 소홀히 한 것이고 심각한 직무 유기이며, 본분에 전혀 충성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세상에서 일해서 돈을 벌 때도 몇 푼 임금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한다. 더군다나 너는 오늘날 하나님 집의 밥을 먹고 있으며, 본분을 이행하면서 구원받기를 추구하고, 너 자신의 종착지를 위해 길을 닦고 예비하고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너는 하나님 집을 위해 일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한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 나를 위해 일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너는 너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조금 듣기 좋게 말하면 구원받기 위한 것이고,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복을 받고 좋은 종착지를 얻기 위해서이다. 너는 이 일을 분명히 알아야 하고 어리석게 굴면 안 된다.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다. 네 부모를 위해서도 아니고, 네 조상을 빛내고 가문을 빛내기 위해서도 아니다. 너 자신을 위해서 이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창조하고, 창세 때부터 너를 말세에 태어나도록 예정했다. 너를 하나님의 집으로 데려오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했으며, 매일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생명을 공급받게 하면서 하나님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기회를 주었다. 이것이 피조물인 너에게는 가장 좋은 구원의 기회이자 유일한 기회이다. 만약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네 손으로 이 기회를 망친다면, 결국 네가 재난 속에 떨어져 징벌을 받든, 슬피 울며 이를 갈든 그것은 자업자득이고 마땅한 일이다! 너 자신을 탓해야 한다. 네 책임을 다른 사람이 너 대신 감당할 필요가 없고, 다른 사람의 책임 역시 네가 감당할 필요가 없다. 네가 오늘날 걸어가는 길과 네가 하는 모든 일은 오직 너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최후의 결과 역시 오직 너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해야 할 말, 너희에게 알려 줘야 할 것을 너희가 깨닫도록 하는 것이고, 너희가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는 것이다. 명확히 얘기했으니,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는 너희의 몫이다. 나는 너희의 사사로운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만 하고, 그 이상의 사역은 조금도 더 하지 않는다. 너는 너 자신의 종착지를 위해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 아니냐? “이 많은 문제를 리더도 보고하지 않으니 저도 보고하지 않겠습니다.” 네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짓이 아니냐? 속이 좁은 것이 아니냐? 이 문제를 네가 알았으면 네 책임은 무엇이냐? 그것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차분하게 이 문제에 대해 구하고 교제해서 과연 어느 방면에 문제가 생겼는지 살피고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는 것이다. 토론을 좀 거쳐 문제의 근원을 찾아내었는데 너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면 얼른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누가 보고해야 하느냐? 네가 자진해서 나서야 한다. “제가 보고하겠습니다. 안 되면 대표를 몇 사람 찾아서 같이 보고하죠.” 어떤 사람들이 말한다. “리더가 있잖습니까?” 그러면 너는 이렇게 말하도록 해라. “그게 무슨 리더입니까! 그는 사람의 책임을 전혀 다하지 않습니다. 사람 탈을 쓴 짐승이니 한쪽으로 차 버리고 교체해야죠! 그가 문제를 보고하지 않으니 우리가 보고해요. 이건 우리 책임입니다. 우리 책임을 다해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람으로 대해 주시죠. 만약 자신의 책임임을 알면서도 다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하나님도 우리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으실 겁니다.” 너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상 너를 무엇으로 대한다는 말이냐? 개돼지로 대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그러고도 너를 구원하겠느냐?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네가 좋은 종착지를 얻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냐? 네 본분 이행도 헛수고가 되지 않겠느냐? 이 길은 네가 어떻게 선택하는지에 달렸고, 네가 어떻게 걷는지에 달렸다. 네가 어떤 길을 택하고 결국에 어떤 결과를 얻든 책임은 네가 지는 것이다. 아무도 네가 걷는 길과 네가 초래한 결과를 책임져 주지 않을 것이다.
리더 일꾼으로서 너희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심지어는 갖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며 책임을 미룬다. 어떤 문제들은 해결할 수 있는데도 해결하지 않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상부에 보고하거나 알리지 않는다.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양 말이다. 이는 직무 유기 아니겠느냐? 교회 사역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이 영리한 행동이겠느냐, 어리석은 행동이겠느냐?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이런 리더 일꾼은 약빠리 아니겠느냐? 일말의 책임감도 없는 자들 아니겠느냐? 문제가 생겼는데 거들떠보지도 않으면, 이는 양심 없는 사람 아니겠느냐? 교활한 사람 아니겠느냐? 교활한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문제에 직면했을 때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어떻게든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절대 교활한 사람이 되지 마라. 문제가 닥쳤을 때 책임을 회피하며 본인이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데만 급급하다면, 이런 행동은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비난을 받는데 하나님 집에서는 오죽하겠느냐! 이것은 하나님에게 정죄되고 저주받는 짓이고, 하나님 선민들에게 혐오받고 버림받는 짓이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좋아하며, 간사한 사람, 교활한 사람을 혐오한다. 네가 교활한 사람이 되어 농간을 부리는데 하나님이 너를 혐오하지 않을 리 있겠느냐? 하나님 집에서 너를 용서할 리 있겠느냐? 언젠가는 너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좋아하고, 교활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이를 분명히 알아야 하고 더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 한순간 어리석게 군 것은 그래도 용서할 수 있다. 만약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고집불통이다. 정직한 사람은 책임을 질 줄 안다. 그는 자신의 이해득실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집의 사역과 이익을 지킨다. 또 마음이 정직하고 선량하며, 한 그릇의 맑은 물처럼 한눈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이런 사람은 일 처리도 투명하다. 간사한 사람은 늘 농간을 부리며 늘 꾸미고 숨기고 가리면서 자신을 아주 빈틈없이 포장해 아무도 꿰뚫어 보지 못하게 한다. 네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남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네 내면의 가장 깊은 곳까지도 감찰할 수 있다. 하나님 눈에 네가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 교활한 인간이고, 좀처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께 간사한 수작을 부리며 마음을 보여 주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를 좋아하지 않고 혐오하고 포기할 것이다. 이방 세상에서 형통하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너희는 알고 있느냐? 그들의 본질은 무엇이냐? 하나같이 꿍꿍이가 가득한 사람, 몹시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이고, 영락없는 마귀 사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하겠느냐?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자는 바로 마귀, 즉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런 부류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너희는 절대 그런 사람이 되지 마라. 말을 할 때 항상 주변 상황을 세심하게 살피고, 일을 처리할 때 늘 분위기를 보면서 처세에 능한 사람, 내가 알려 주겠는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가장 혐오한다. 이런 사람은 구제 불능인 사람이다.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이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해도 그것은 전부 사람을 기만하는 마귀적인 말이다.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일수록 마귀 사탄이다.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말해 보아라, 간사한 사람, 거짓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말을 잘하는 사람이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을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혐오하고 버리며, 한쪽으로 제쳐 두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짐승과 같은 부류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눈에, 이런 자들은 사람의 탈을 썼지만 본질적으로는 마귀 사탄 부류의 자들이고,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절대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지금 어떤 내적 상태일까? 그들은 마음이 어둡고 진실한 믿음이 없다. 어떤 일을 만나도 깨우침과 빛 비춤이 없고, 재난과 환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기도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다. 그들 마음속에는 진정한 의지처가 없다. 그들은 복을 받기 위해 좋은 모습을 보이려 하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다. 양심과 이성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으려 해도 통제가 되지 않고 저지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쫓겨나고 도태된 후에는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비록 본인들은 그것이 당연한 결과임을 알면서도 입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설령 겉으로는 어느 정도 본분을 이행할 수 있지만 농간을 부리고, 본분에 눈에 띄는 효과도 없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런 자들이 과연 진실로 회개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양심과 이성이 없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교활한 자, 악인을 구원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 한들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의미도 이미 상실했고, 결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시종일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오래 믿어도 소용이 없다. 그런 사람은 마지막까지 믿는다 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얻고 싶다면 반드시 진리를 얻어야 한다.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여 진리 실제에 진입해야만 진리를 얻고 하나님께 구원받은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얻은 것이다. 진리를 얻고 싶다면 그 첫걸음은 책임을 다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즉,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 이것이 가장 기본이다. 절대 거짓 리더를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 글귀와 도리만 얘기하고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하든 책임감이 없고 건성으로 임하다 결국 도태될 것이다. 본분 이행은 작은 일이 아니다. 본분 이행은 사람을 가장 잘 드러낸다. 하나님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 드러내는 일관적인 모습을 근거로 사람의 결말을 규정한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참된 회개가 없어서 하나님에게 도태된다는 것이다. 거짓 리더, 거짓 일꾼이 교체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것은 이런 사람들을 대하는 하나님 집의 태도를 의미한다. 당연히 이 부류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쓸모없는 인간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는 어떤 것이냐? 바로 버림과 정죄, 도태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지위의 복을 탐내며 거짓 리더가 되기 원하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뒤 만나는 일 중에는 어떤 게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냐? 가장 큰 일은 뭐니 뭐니 해도 자신이 제명되거나 출교되었고, 하나님에게 드러나 도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을 믿은 뒤 이런 일을 마주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이런 일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느냐? 적어도 양심에 따라 일해야 한다. 즉, 우선은 책임을 다하는 법을 배우고 절대 건성으로 임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맡긴 일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 네가 사람인 이상 사람의 책임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방인들이 무엇보다 강조하는 효도나 부모 봉양, 가문을 빛내는 것 등은 말할 가치도 없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공허하며, 실제적인 의미가 없다. 그럼 한 사람이 다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은 무엇이겠느냐? 가장 현실적인 것은 지금 어떻게 해야 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충 형식만 취하는 데 만족한다면 그것은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글귀와 도리만 말할 수 있는 것도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진리를 실행하여 성과를 내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매사에 진리 원칙대로 해야만 진실로 책임을 다한 것이다. 사람의 방법으로 형식만 따르는 것은 건성으로 임하는 것이다.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네가 책임을 다하면, 이는 충성을 다하는 태도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이러한 책임감과 의지, 바람을 갖고 충성스러운 태도를 보여야 하나님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고 인정한다. 이러한 책임감조차 없다면 하나님은 너를 건달이나 멍청이로 보아 경멸할 것이다. 사람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너를 존중하지 않고,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여겨 무시할 것이란 의미이다. 이를테면 네가 어떤 사람을 한동안 접하면서 봤더니 말이 과장되어 현실성이 없고, 뜬구름 잡는 얘기나 하고, 허풍 떨고 큰소리치는 걸 좋아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를 존중할 수 있겠느냐? 섣불리 그에게 일을 맡길 수 있겠느냐? 그가 어떤 이유로 네가 맡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 너는 섣불리 이런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못할 것이다. 속으로 이런 사람을 싫어하고 또 그와 교류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만약 그런 사람에게 일을 맡겼으면 평생 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네가 어떤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교류하다 보니 이 사람이 인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책임감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에게 일을 맡길 경우, 지나가듯 던진 한 마디도 마음속에 새기고, 방법을 강구해 가며 일을 제대로 해서 너를 만족시키고, 네가 부탁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그 후로도 너를 보기 미안해한다면, 그런 사람이 바로 책임감 있는 사람이다.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리더 일꾼이든 상부에서든 자기에게 말 한 마디를 하거나 어떤 일을 맡기면 이렇게 생각한다. ‘나를 이렇게 존중해 주는데 이 일은 꼭 잘해야지. 실망시키면 안 돼.’ 양심과 이성을 갖춘 이런 사람에게는 일을 맡길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네가 속으로 중시하고 신뢰하는 사람이다. 특히 그가 너를 위해 몇 가지 일을 매우 열심히 처리했고 네가 요구한 바를 완전히 충족시켰다면 너는 그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속으로 감탄하고 존중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사람과 교류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 그렇지 않겠느냐! 너희가 볼 때 하나님이 교회 사역,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신뢰할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어 하겠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이 교회의 어떤 사역을 누군가에게 맡길 때, 그에게 어떤 기대를 하느냐? 첫째, 그가 직책을 다하고 그 사역을 중요하게 여기며 잘 해내기를 바란다. 둘째,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이기를 바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환경이 어떻게 바뀌든 책임감이 변하지 않고, 그의 인격이 검증에 통과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안심하고 더는 그 일을 감독하거나 점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그를 믿고 있으며, 그 일을 그에게 맡기면 차질없이 임무를 완수할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서 이런 기대를 하지 않겠느냐? (그런 기대를 하십니다.)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지, 또 하나님 눈에 들고 신뢰를 얻을 수 있는지 속으로 알아야 한다. 만약 네가 자신의 모습과 행위, 그리고 본분을 대하는 태도를 똑똑히 볼 수 있다면, 자기 주제를 알고,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 안다면, 그래도 하나님에게 너를 눈여겨봐 달라고 요구하고, 너에게 은총을 베풀고 너를 편애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조차 너 스스로를 무시하고 깔보면서 하나님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기를 바라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기를 바란다면, 적어도 사람들이 너를 신뢰하게 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받고 존중받고 인정받고 싶다면 최소한 존엄과 책임감을 갖고 신용을 지켜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거기에서 나아가 직책을 다함으로써 충성심을 보여야 한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희망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게 해내기 어려운 일이냐?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신뢰할 만한 사람과 일하고 어울리려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라고 하는 이만한 요구가 지나친 것이냐? (아닙니다.)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이는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정당한 것이다. 다만 사람에게 그런 마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님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저 계속 하나님에게 요구만 할 뿐이다.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제게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이냐? 정말 양심과 이성에 따라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느냐? 정말 직무와 책임을 다하고 충성을 다할 수 있느냐? 이것은 네가 하나님 눈에 들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런 것이 사람이 노력해야 할 방향이 아니냐? 하나님을 믿으면 진리를 향해 노력해야 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노력해야 할 방향이다. 사람은 올바른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추구한다면 공허하지 않을 것이다.
거짓 리더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하는 일에 개념이 있느냐? 태도가 있느냐? 분명 없다. 그들은 되는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오만불손하고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취한다. 이런 태도는 심하게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무척이나 혐오하는 태도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을 주고, 사람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주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준 모든 것, 하나님이 생활하도록 안배한 것, 하나님의 부탁과 사역, 자신의 본분을 대할 때 멸시하고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보인다. 가볍게 여긴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 되는대로 살려 하고 어떤 일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런 태도를 극도로 혐오하기 때문에 이런 부류를 절대 구원하지 않는다. 이런 일에 대해 너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절대 이런 부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네가 리더이든 아니든, 리더가 되고자 하는 야심과 욕망이 있든 없든 너는 먼저 사람됨을 배워야 하고 절대 건달이나 망나니, 양아치 같은 부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처신할 때 단정한 태도를 갖추고 존엄성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다. 이런 것이 바탕이 되어야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에 이를 수 있고,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할 수 있다. 네가 이런 기본도 갖추지 못했다면 무슨 얘기를 해도 소용없다.
2021년 4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