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2)
지난번에 관념이라는 문제에 관해 주로 세 가지를 이야기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관념, 두 번째는 성육신에 대한 관념, 세 번째는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념이다. 앞의 두 가지는 이야기를 끝냈고, 세 번째 것도 대체적이고 개념적인 내용은 어느 정도 이야기했다. 그 후에 이 부분의 관념이나 이 부분의 관념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 너희는 이 부분의 관념과 관련된 것들, 이 진리와 연관된 것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자세히 묵상해 보았느냐? 어떤 진리든 단순한 표면적 의미가 아니라 모두 그의 실제적인 내용이 있고, 사람의 생명 진입과 일상생활, 하나님을 믿는 여러 방면과도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일상생활에서 너희는 이 방면의 진리에 관한 내용을 어느 정도 묵상해 내지 않았느냐? 그 자리에서 이 방면의 진리를 들을 때 너희는 그저 표면적으로만 일부 이해할 수 있고 명확한 관념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을 뿐이다. 나중에 다시 체험과 결부해 묵상하고 기도하고 구하며 형제자매와 교제한다면 더 깊이, 더 실제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표면적 의미로 보면 이 세 가지 진리 중 사람의 패괴 성품, 하나님 성품에 대한 사람의 인식, 사람의 실제 진입과 관련 있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무엇이 더 깊이 있겠느냐? (세 번째입니다.) 세 번째가 비교적 깊이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관념으로, 이런 관념은 비교적 평이하고 피상적이다. 두 번째는 성육신에 대한 관념으로, 일부 사람이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 생활 속에서 접할 수 있고 반성할 수 있는 내용과 관련 있다. 세 번째는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념으로, 사람의 패괴 성품과 관련 있기에 더 깊이 있다. 그렇다면 오늘은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념이 대체 무엇인지,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사람은 이런 관념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해야 하는지, 이런 관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교제해 보도록 하겠다.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이 사람의 추리와 판단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요구, 사치와 욕망, 반발심, 그리고 하나님 사역에 대한 일부 판정이나 판단으로 상승하면 이 관념은 이제 단순한 관점이나 생각이 아니라 사람의 패괴 성품과 관련된다. 패괴 성품과 관련되면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판단하며 나아가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고도 남는다. 그렇기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념이 상상과 추측에만 머무를 뿐이라면 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지만,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점이나 태도로 상승하여 네가 하나님에게 무리하게 요구하거나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혹은 야심과 욕망, 타산으로 가득 찬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관념이 아니다. 어째서 일반적인 관념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왜냐하면 이런 관념과 생각은 너의 생명 진입, 하나님 사역에 대한 너의 인식과 관련이 있고,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할 수 있는지, 하나님이 너의 주재자이자 창조주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지와 관련 있으며, 너의 입장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도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에게 이런 관념이 있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관념을 분석하려고 할 때, 이론적인 관점에서 말하면 너희가 듣기에는 다소 추상적이거나 일상생활과 조금 멀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일상생활 속이나 인류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여러 부류 사람의 생존 상태, 혹은 그들의 운명이나 그들이 삶을 대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를 대하는 여러 관점과 태도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그 안에서 사람의 관념을 분석하고, 또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인류를 주재하고 지배하는지, 하나님 사역의 실제 상황이 어떤지를 보여 주도록 말이다. 이는 교제하기 쉬운 주제는 아니다. 너무 이론적으로 교제하면 사람은 공허하다고 느낄 것이고, 너무 세세하거나 실생활에 가깝게 교제하면 사람은 그것이 너무 평이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든 간에 우리는 이야기하는 이런 비교적 평이하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교제해 보자. 사람은 이야기의 줄거리와 인물, 그리고 이야기 자체가 반영하는 인생의 철학 이론, 사람이 본 현상을 통해 그 안에서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과 방법을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실생활에서 하나님 사역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지배하는 것을 대하는 사람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 또는 사람이 고수하는 일부 잘못된 것들을 이 방식으로 교제하면 비교적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겠다.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 여자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평생 큰 부자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고 그저 의지할 곳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 소원이 과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높은 요구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가 미성년자일 때 그녀의 아버지는 죽었다. 그녀에게 이는 삶에서 의지처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생에서 그녀는 첫 번째 의지처, 즉 어린 마음에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잃은 것이다. 그녀는 어린 마음에 아주 고통스럽지 않았겠느냐? 그런 일이 닥쳤을 때 그녀는 분명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녀는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았겠느냐? 분명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런 상처는 어떻게 생긴 것이겠느냐? 그녀의 어린 마음에 아직 “난 이제 독립할 수 있어.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 부모님께 기대지 않아도 돼.”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개가 아직 덜 자랐다는 사람들의 말처럼 말이다. 그녀는 생각이 흐릿했는데,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고 부모를 떠나면 스스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 제대로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아직 이런 의식도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가 죽었는데, 이것은 그녀의 생계원이 사라졌으며 앞으로 더욱 어려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짐작할 수 있듯, 그 후 그녀는 어머니와 어린 남동생과 함께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며 어렵사리 살아갔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삶은 계속되어야 했기에 그녀는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허덕거리며 살아갔다. 몇 년 후 성인이 된 그녀는 독립적으로 생활비를 벌어 어머니와 남동생을 부양할 수 있게 되었지만 생활은 여전히 그리 넉넉지 않았다. 이때도 그녀 마음속의 소원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그녀는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어떤 의지할 곳이 필요했겠느냐? 그녀가 바라는 의지처는 대체 어떤 것이겠느냐? 너희가 설명해 보아라. ‘의지처’의 가장 간단한 개념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그녀가 스스로 노력할 필요도, 아무런 고통을 받을 필요도 없이 그녀에게 음식과 옷 등 삶의 원천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듬직한 어깨처럼 최소한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그녀의 의지처이다. 일상생활에서 그녀를 지원하고 먹여 살리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마음이 괴로울 때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그녀가 난관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고 비바람을 막아 줬으면 하는 게 그녀의 소원이었다. 이것이 높은 요구이겠느냐? 이것이 비현실적인 소원이겠느냐? 요구가 높지 않고 소원도 현실적인 편이다. 이 정도로 소박한 소원은 많은 사람이 다 가지고 있지 않느냐? 태어날 때부터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 세상에서, 군중 속에서 살면서 친구나 의지처가 있기를 바란다. 그 여자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여자아이는 혼사를 논할 나이가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의지할 수 있는 믿음직한 사람을 찾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 돈이 그렇게 많을 필요도 없고 그녀를 엄청난 부자로 만들어 줄 필요도 없으며 언변이 좋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그녀가 가장 힘들 때나 어려움과 병이 생겼을 때 그녀에게 의지처가 되어 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설사 그녀에게 그저 몇 마디 위로의 말만 건넬 뿐일지라도 말이다. 이 소원이 이루어지기 쉽겠느냐? 그건 미지수이다. 사람의 소원이 하나님이 주려는 것인지, 하나님이 성취하려는 것인지, 사람의 운명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 여자아이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과 다름없이 그 소원을 품은 채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그때 그녀는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지만 어쨌든 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그녀는 자신이 만나려는 그 사람이 과연 남은 반평생 동안 의지할 사람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여전히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원했다. ‘그 사람은 분명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일 거야. 지난 20여 년 동안 내 팔자는 사납기 그지없었어. 만약 지금 또 못 미더운 사람을 만나면 남은 생은 더 고통스러울 거야. 내가 또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겠어?’ 그녀는 마음이 괴로웠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어 이렇게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생을 무엇 때문에 사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를 때 사람은 생존을 위해 이런 소원과 미지의 기대를 품은 채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 순간이 왔을 때 그녀는 자신의 미래가 어떨지 알지 못했다. 미래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세상에는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은 법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왜 이렇게 안배하는지 일단 지금은 논하지 않겠다. 하나님이 일부러 이렇게 안배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의 패괴와 무지로 인해 사람의 소원 및 요구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안배한 운명과 상반되어 흔히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인지는 일단 논하지 않고, 우선 이야기 자체에만 집중하자.
여자아이는 결혼 후 소원을 품은 채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그 인생 단계에서는 무엇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겠느냐?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지만 두렵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다. 억지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했고, 하루하루 삶은 살아가야 했다. 그녀의 인생이 바뀌는 중대한 단계, 즉 하나님이 그녀를 위해 안배한, 그녀의 뜻과는 맞지 않는 운명이 드디어 찾아왔다. 그녀가 기대했던 핵가족 생활, 소박한 침대, 작은 책상, 단순하고 깔끔한 방, 남편과 아이, 이런 평범한 생활은 끝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결혼 후 남편은 일 때문에 다년간 타지에서 생활해야 했고 그녀는 남편과 따로 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삶을 사는 여성은 어떤 상황을 마주하겠느냐? 괴롭힘 당하고 차별받는다. 이런 생활 환경을 마주한 그녀는 생활적으로, 운명적으로 또 한 번 타격을 입었다. 이는 그녀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고 보고 싶지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현실은 그녀의 소원,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가 보고 싶지도, 겪고 싶지도 않았던 일이 공교롭게도 전부 그녀에게 발생했다. 남편이 오랫동안 타지에서 일했기 때문에 생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그녀는 반드시 독립해야 했고 스스로 밖에 나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아무도 그녀의 삶을 도와주지 않았고, 무슨 일이든 혼자서 해야 했다. 이런 생활 환경에서 그녀는 의지할 곳을 얻었겠느냐, 아니면 전혀 얻지 못했겠느냐? (얻지 못했습니다.) 결혼 후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졌느냐, 아니면 물거품이 되었느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녀의 생명 중 두 번째로 중요한 단계에서 그녀의 소원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었고, 그녀는 여전히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녀가 인생에서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그녀의 곁에 없었기에 전혀 의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든든한 조력자이자 지지자요, 의지처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의지할 수 없었고 모든 일을 직접 하고 혼자서 처리하며 마주해야 했다. 가장 힘들 때도 하소연할 사람이 없어 혼자 몰래 이불 속에 숨어 울 수밖에 없었다. 체면과 승부욕, 자존심 때문에 그녀는 겉으로 아주 강한 척했다. 그래서 그녀는 강한 여자처럼 보였지만 사실 마음속 깊은 곳은 여리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의지할 곳이 필요했고 의지할 곳을 얻길 기대했지만 그 소원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몇 년 후 그녀는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일정한 거처도 없이 여기저기 다니며 셋방을 구해 살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삶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요구도 조금씩 닳아 없어졌다. 원래 그녀는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 있는 작은 집을 원했을 뿐이다. 주방에서 요리하면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병아리나 몇 마리 기르는 단출한 살림을 꾸리고 싶었다. 큰 부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평범하고 평안하고 단란하게 사는 것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태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근근이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이 의지할 곳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아이들에게 의지할 곳이 되어 주어야 했다. 그녀는 인간 세상에서 사는 게 이토록 고통스러우니 이런 고통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자는 생각도 해 봤다. 예를 들어,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거나 어딘가로 수행을 떠나 속세와 이 고통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에게 의지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곳이 되어 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 삶은 너무도 피곤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 살아가도록 그녀를 지탱해 준 것은 무엇이었겠느냐? (아이입니다.) 그렇다. 아이가 없었다면 그녀는 매일매일을 더욱 고통스럽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생긴 후 그녀에게는 책임이 생겼고 아이에게 의지할 곳이 되었다. 아이가 ‘엄마’라고 부를 때 그녀는 어깨 위에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다고, 이렇게 무책임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수 없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곳이 되어 줄 수는 있었다. 그 역시 삶의 낙이자 태도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아이를 위해 또 십여 년을 버텼다. 긴 세월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왜 긴 세월이라고 하겠느냐? (그녀의 삶이 고달팠기 때문에 세월이 길게 느껴진 것입니다.) 경험이 있구나. 듣자마자 경험자가 하는 말이라는 게 바로 느껴진다. 삶이 고달프고 견디기 힘들면 세월이 유독 길게 느껴지고, 겪은 일 하나하나가 마음속 깊은 곳에 고통으로 남는다. 그래서 그녀는 손가락을 꼽아 가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견디기 쉽지 않은 나날이었다. 아이들이 조금 컸을 때도 그녀의 소원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이런 소원이 있었다. ‘아이들이 다 커서 보살피는 게 그렇게 힘들진 않네. 그래도 남편이 곁에 있고 온 가족이 모여 살면 더 좋을 텐데.’ 삶에 대한 희망의 돛을 올린다는 이방인의 말처럼 그녀는 또다시 아름다운 상상을 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이런 생각을 했다. ‘애가 커서 대학에 합격하고 나중에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돈을 벌 테니 삶에 여유가 생기겠지. 지금보다 더 잘 먹고 잘 입고 더 좋은 집에 살겠네. 게다가 남편까지 돌아오면 삶은 훨씬 더 나아질 거고, 나도 의지할 곳이 생길 거야! 예전에 의지할 곳을 둘이나 잃었는데 이제는 더 많이 생기다니, 하느님도 내게 꽤 잘해 주시네! 이제 좋은 날이 오려나 보다.’ 그녀는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좋은 일이겠느냐, 아니면 나쁜 일이겠느냐? 아무도 알 수 없다. 사람의 한평생 운명이 어떤지, 앞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사람은 모두 이렇게 비틀거리면서 아름다운 소원을 품은 채 살아간다.
10년이 흘렀고 남편의 전근으로 드디어 온 가족이 모이는 좋은 일이 생겼다. 그렇다면 그녀의 남편은 과연 그녀의 의지처가 될 수 있었겠느냐? 그녀의 삶 속 고통을 어느 정도 나눌 수 있었겠느냐? 같이 생활한 적도, 깊이 어울린 적도 없기에 그녀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후 그녀와 남편은 생활 속에서 손발을 맞추며 서로를 깊이 이해해 갔다. 그녀의 소원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그녀의 의지처가 되어 어떤 일이 닥치든 그녀를 위로하고 그녀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길 바랐다. 그러나 여전히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가 깊이 어울려 본 적 없는 남편이자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그 남자는 결코 그녀가 의지할 곳이 될 수 없었다. 생존 능력, 인품, 인생관, 가치관, 그리고 자녀와 가정,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이 다투고 사소한 일로 계속 언쟁했다. 여자는 남편이 그녀의 선량함과 인내, 어려움을 알고 감동받아 태도를 바꿀 수 있도록 마음속 깊이 자신이 계속 참아 낼 수 있길 바랐다. 그럼에도 그녀의 소원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과연 남편이 마음속 깊이 의지할 곳이겠느냐? 그녀의 의지처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위로하여 고통을 덜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하고 더 실망시켰으며 막막하게 했다. 이때 그녀가 인생에 대해 마음속 깊이 이해하고 느낀 것은 무엇이겠느냐? 실망과 고통이다. 이는 그녀의 마음속에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님이 있긴 한가? 이번 생은 왜 이렇게 힘들지? 난 의지할 곳을 찾으려던 것뿐이잖아? 이 나이까지 살았는데 왜 고작 이 정도 소원도 이룰 수 없는 거지? 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별다른 야심도 없어. 그저 일이 닥쳤을 때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뿐인데 어째서 이 정도 소원도 채워지지 않는 거지?’ 그녀는 그렇게 몇 년을 살았다. 분명히 알 수 있듯, 이 가정의 생활은 그다지 화목하지 않았고 자주 다툼이 일었다. 자식들의 삶은 기쁘지도 즐겁지도 않았으며 부모도 마찬가지로 즐겁지 않았다. 이 가정에는 평안과 즐거움이 없었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전전긍긍하며 겁을 낼 뿐이었고, 마음속 깊은 곳에는 고통과 불안함만 있었다.
몇 년 후 드디어 변화의 기회가 찾아왔다. 예수의 복음이 그녀에게 임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아버지에게도, 남편에게도, 주변의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 없어. 예수님께 의지하기만 하면 평안을 얻을 수 있어. 진정한 의지처가 생기고 진정으로 평안하고 즐거워질 거야. 그럼 삶이 그렇게 힘들진 않겠지.’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서 이 여자는 훨씬 즐거워졌고, 삶도 물론 훨씬 안정됐다. 그녀를 대하는 남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아 원래 그랬듯 여전히 모질었고, 그녀를 무시했으며,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고, 관심을 갖지도, 보살피지도, 나아가 인내하고 감사하고 양보하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예수의 구원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전과는 다른 태도로 이 모든 것을 대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과 언쟁을 벌이거나 시비를 따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게 사람이 다툰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예수에게 얘기하면 마음이 탁 트였다. 그렇게 그녀의 가정생활은 겉으로 보기에도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됐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의 생활에는 또 변화가 발생했다. 예수를 믿은 이후로 그녀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 생활을 하며 형제자매를 붙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동의하지 않았고 그녀를 핍박하며 자주 꾸짖었다. “살림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살림하기가 그렇게 싫으면 그냥 이혼해!” 그녀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주에게 기도하며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날은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예전에 비하면 마음의 상처는 훨씬 줄어들었고, 기도를 통해 어느 정도 위로도 받았다. 고통스러울 때 주에게 기도하자 그녀의 마음은 의지할 곳이 생겼고 일시적인 만족도 얻었으며 삶도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아이들도 점점 어른이 되어 갔다. 어릴 때부터 그녀와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살아왔기에 아이들은 그녀와 사이가 좋았다. 그녀는 ‘이제 자식들이 다 컸으니까 남편에게 의지하지 말고 아이들에게 의지하면 되겠네.’라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그녀가 이미 예수에게 의지하여 자신의 마음과 가정, 나아가 미래와 앞길까지 모두 예수의 손에 맡긴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마음속 깊이 그녀는 눈에 보이는 사람,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에게 여전히 한 가지 소원을 품고 있었고, 이런 소원이 언젠가 이루어지길 바랐다. 예수가 어디에 있는지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가 사람의 곁에,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고 했지만 그녀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기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녀는 중대한 일과 심각한 문제만 예수에게 의지하면 되고 실생활에서는 여전히 자식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변함없이 이런 소원을 가지고 있었고 내려놓지 않았다. 예수를 믿는데도 왜 그 소원은 변하지 않았겠느냐?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진리를 깨닫지 못해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를 잘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객관적인 이유이다. 주관적인 이유는 그녀가 나약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겪은 후에도 하나님을 믿는 의미와 사람의 운명, 하나님의 지배, 그리고 창조주의 사역 방식을 여전히 간파하지 못했다. 어떤 일에서 그녀가 간파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느냐? 우선 그녀는 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행복과 마음속 깊은 곳의 아름다운 삶에 대한 기대를 걸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지원의 손길 덕에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이는 인생과 운명에 대한 잘못된 관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관점은 옳지 않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희망을 좀 거는 것, 자식이 커서 효도하고 부모를 모시기를 바라는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잘못이라고 할 수 없고 지나치지도 않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무엇이 문제이겠느냐? 그녀는 항상 자식에게 의지하려 했고, 자식에게 기대어 남은 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길 바랐으며, 자식에게 기대어 무언가를 누릴 수 있길 기대했다. 여기에서는 무엇이 잘못된 관점이겠느냐? 왜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겠느냐? 그녀의 그런 관점은 어디에서 비롯됐겠느냐? 사람은 늘 특정한 삶의 방식과 기준에 과욕을 부리는데, 그것은 바로 아직 하나님이 자신의 일생을 어떻게 정했는지, 자신의 운명이 어떤지 알지 못할 때부터 자신의 삶의 기준은 행복해야 한다고, 평생 평안하고 즐거워야 한다고, 큰 부자가 되어야 하고 자신에게 도움을 받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계획해 놓은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삶의 길과 목표, 종착지 등 모든 내용을 이미 계획해 놓았다.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믿음이 없다. 이 여자는 늘 삶에 이런 관점을 품고 있었다. ‘누구누구에게 의지하면 내 삶은 더욱 평안하고 즐겁고 풍족해질 거야. 누구누구에게 의지하면 내 삶은 더 안정되고 보장되고 행복해질 거야.’ 이런 관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겪으며 이미 예수를 믿는 단계에 도달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인생이란 무엇인지 분명히 파악하지 못했고, 여전히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가진 채 자신의 미래의 길을 궁리하고 미래의 삶을 계획하고 있었다. 지금 보면 이런 삶의 태도와 계획은 올바르겠느냐, 아니면 올바르지 않겠느냐? (올바르지 않습니다.) 왜 그렇겠느냐? (그녀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것이 아닌 자신의 이상과 소원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정한 바와 관련 없는 것을 추구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자신이 먼저 의지할 곳을 찾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 단계에서는 이 사람에게 의지하고, 다음 단계에서는 저 사람에게 의지하면서 이리저리 의지하다 보니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게 됐다. 즉, 하나님에게는 의지하지 않고 사람에게만 의지하게 된 것이다. 항상 그런 소원과 계획을 품고 있으니 그녀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녀가 아등바등하며 받은 이 모든 고통은 무엇에서 비롯되었겠느냐? (그녀의 소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맞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그런 소원을 가지게 되었겠느냐? (하나님의 주재,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녀는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하나님의 주재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것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다.
이야기를 이어 가겠다. 이 여성의 자식들은 어른이 되어 누구는 일하느라, 누구는 가정을 꾸리느라 분명 다들 부모를 떠나 독립해 살고 부모와 자주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여성은 또 어떤 문제에 직면하겠느냐? 자식에게 의지하겠다는 소원이 또다시 물거품이 되어 그녀는 인생에서 또 한 번 가슴 아픈 비극을 맞이하고 또 한 번 타격을 입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자식들은 그녀의 곁에서 함께 살아갈 수도, 그녀를 자주 찾아뵙거나 보살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자식이 곁에서 효도하고 자신을 보살펴 주길 바라고, 자식에게 의지해 좀 더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했던 그녀의 이런 소원은 그녀에게서 점점 멀어져만 갔다. 그리하여 자식에 대한 그녀의 근심과 걱정, 그리움은 갈수록 커졌다. 이는 또 다른 고통이 아니겠느냐? 나이가 들고, 세월이 조금씩 쌓이면서 그녀는 더욱더 고통스러워졌고 자식에 대한 그리움도 깊어져만 갔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났다. 이 여성이 단계별로 의지하려 했던 대상은 달랐지만 그들 모두 어김없이 그녀를 떠나면서 그녀의 소원과 환상은 산산이 조각났다. 그녀는 마음이 너무도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이것이 그녀에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이냐? 인생에 대한 사색이냐? 아니면 창조주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안배하는지에 대한 사색이냐?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의 경우 설교를 좀 듣고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고 나면 창조주에 대해, 인생과 사람의 운명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 주인공인 본인의 문제를 포함한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그녀는 지금까지 인생의 각 단계에서 체험하고 맞닥뜨린 문제와 자신에게 존재하는 문제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어떻게 된 일인지도 알지 못했다. 마음속 깊이 그녀는 여전히 의지할 곳을 갈망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녀의 의지처이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의 의지처가 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사람에게 의지처가 되어 주는 것만은 아니다. 그게 다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창조주와 함께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하는지 알게 하는 것이다. 사람과 하나님은 단순히 의지하고 의지처가 되어 주는 관계가 아니다.
자식에게 의지할 수 없게 된 이 여성은 나이가 들자 다시 늙은 남편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녀의 배우자는 그녀가 잡을 수 있는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먹고 입는 것도 그렇고, 계속 살아가려면 배우자에게 의지해야만 했고 어떻게든 배우자를 좀 더 오래 살게 해야 했다. 그러면 자신도 덕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배우자는 곧 그녀가 의지할 대상이었다. 이 연로한 노인은 나이가 지긋해 서릿발을 이고 있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으며 이도 거의 다 빠지고 없었다. 얼굴은 그렇게 변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여러 번 난관에 부딪혔지만 의지할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다. 이 밖에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약속을 주는 것에 대한 환상, 자신과 인류, 운명과 앞길에 대한 일부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환상은 점점 모호해지고 아득해졌지만 아마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 여전히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살아생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면, 혹은 하나님 사역이 끝나 영광 얻는 날을 볼 수 있다면 인생을 헛산 건 아니겠지.’ 이 여성은 이렇게 일생을 살았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이 이야기의 제목을 뭐라고 지을 수 있겠느냐? (‘내 의지할 곳은 어디에’입니다.) 사색에 잠기게 하는 훌륭한 제목이구나.
다시 교제하던 주제로 돌아가자. 이 이야기가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어떤 관련이 있겠느냐?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관련 있는 부분은 어느 부분이겠느냐? 모두 어떤 관념과 관련되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기대하고 계획하는 대로 이루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이런 관념이 있습니다.) 사람의 관념으로는 좋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소원이라면 창조주가 모두 이루어 주어야 하고, 아름다운 삶을 동경할 권리를 사람에게서 빼앗아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일종의 관념이다. 그러나 창조주가 사람의 소원과 기대, 상상에 따라 이루어 주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창조주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누구든, 네가 어떻게 계획하든, 네가 얼마나 완벽하고 그럴듯하고 너의 현실 생활에 부합하게 상상하든 전혀 보지도 않고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그저 하나님이 정해 놓은 방식과 법칙에 따라 이루고 배치하고 안배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다. 어떤 사람은 ‘나는 평생 무수히 많은 고난을 겪었으니 편하게 살 자격이 있지 않나? 창조주 앞에 나아가 아름다운 삶과 아름다운 종착지를 요구하고 동경할 자격이 있지 않나?’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관념이 아니냐? 사람의 이런 관념과 사람이 갖고 있는 이런 생각은 하나님에게는 무엇이겠느냐? 무리한 요구이다. 이런 무리한 요구는 어떻게 생기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권병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건 객관적인 이유이다. 주관적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패역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진리를 구하려 하지 않고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대부분 사람에게 힘겨운 일생을 안배했겠느냐, 아니면 행복하고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일생을 안배했겠느냐? (힘겨운 일생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힘겨운 일생을 살아가며 수많은 우여곡절과 고통을 겪는다. 그렇다면 창조주가 사람의 일생에 이런 고난을 안배한 목적과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한편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권병을 체험하고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로 삶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체험하도록 하여 사람의 운명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느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주관적인 소원에 따라 변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다. 창조주가 무엇을 하고 사람에게 어떤 일생과 운명을 안배하든, 그는 사람이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고 사람의 운명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이 모든 것을 되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오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해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려 줄 때, 사람은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체험한 후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과 현실 생활에서 사람이 체험하는 모든 일이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런 진리의 실제성, 정확성, 진실성을 검증한 사람은 그 진리를 얻음과 동시에 인류가 창조주의 손에 의해 다스려지고 인류의 운명은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사람이 이 모든 것을 깨닫고 나면 자신의 인생에 대해 비현실적인 계획, 창조주의 염원, 창조주의 정한 바와 안배에 위배되는 계획은 세우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일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점점 더 정확하게 판단하고 인식하고 깨닫고 계획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가 사람의 일생에 수많은 고난을 안배하는 목적이자 의미이다.
이야기 자체로 돌아가 보자. 이야기의 주인공이 수많은 고난을 겪은 뒤 자신이 삶에서 고난을 겪어야 하는 이유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창조주의 이런 지배와 안배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느냐? 그녀는 이런 인식을 얻었느냐? (얻지 못했습니다.) 어째서 얻지 못했겠느냐?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인생의 모든 전환점에서 자신의 소원이 계속 물거품이 될 때 반성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평생 좇은 꿈이 한 번도 이루어진 적 없는 이유를 정리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녀가 반성하고 진리를 구했다면 변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창조주의 주재를 인식하지 못했고 그저 끈기에 기대어 자신의 꿈을 고수하며 언젠가 자신의 운명이 갑자기 바뀌길 기대했습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계속 대항하고 발버둥 쳤기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렇다. 그녀가 잘못된 길을 선택했지만 스스로 알지 못한 채 그것을 올바른 길이라고, 자신의 정당한 추구이자 정당한 소원이라고 여기며 그 방향으로 노력하고 사력을 다해 발버둥 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소원이 과연 현실적인지, 과연 올바른 것인지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그렇게 한 방향으로만 집요하게 추구하며 절대 달라지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녀의 인생에 그토록 많은 고난을 준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한 이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일생에 평범하지 않은 체험, 고통스러운 체험을 안배한다. 사실 창조주는 이런 방식과 사실을 통해 그 길은 막다른 길이고 네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니 그렇게 가지 말라고 알려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은연중에 무엇을 확인할 수 있겠느냐? 이는 사람이 잘못된 관념과 집요한 방식에서 나오도록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길을 선택해 주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을 구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네가 선택한 길은 진흙탕이자 불구덩이이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이니 그렇게 걸어가서는 안 된다고, 계속 걸어간다면 줄곧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그건 올바른 인생길이 아니고 네가 걸어야 할 길도 아니며 하나님이 너에게 정해 놓은 길도 아니라고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네가 현명한 사람이라면 고난을 한 번 겪은 뒤 이렇게 반성할 것이다. ‘왜 이런 고난을 겪은 거지? 왜 벽에 부딪힌 걸까? 설마 이 길이 내게 맞지 않나? 그럼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인생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네가 반성할 때 하나님은 너에게 일부 깨달음을 주고 인도할 것이고 혹은 앞으로 걸어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네가 현실 생활에서 하나님이 너에게 계획해 놓은 앞길을 더 실제적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끊임없이 너를 인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방금 했던 이야기 속 주인공은 이렇게 했느냐?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한 번도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강퍅한 것입니다.) 강퍅하면 문제가 심각하다. 미성년자일 때부터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 될 때까지 의지할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소원은 한결같았다. 하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창조주가 어떻게 천지 만물을 창조했는지 알지 못한 상황에서든, 아니면 하나님의 복음이 그녀에게 임하고 하나님이 그녀에게 이 모든 진실을 알려 준 때든 그녀의 이 소원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다. 사람은 사상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을 창조해 준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안배한 사람과 일, 사물, 그리고 환경을 느끼고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성과 양심을 가진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모든 피조된 인류는 하나님이 배치한 이 모든 것을 마음으로 이해한다면 많게든 적게든 혹은 깊게든 얕게든, 창조주의 뜻을 어느 정도는 깨달을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 중 하나로, 상당히 실제적이고 진실하다. 그러나 사람은 너무 교만하고 강퍅하기 때문에 진리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창조주의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사람의 강퍅함은 어디에서 드러나겠느냐?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사역하든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것을 고수하며 이런 마음가짐을 보인다. ‘내 인생은 내가 계획할 거야. 나는 사상과 생각, 교양도 있으니 내 삶을 통제할 수 있어. 나는 내 삶의 모든 일이 왜 일어나는지 볼 수 있고 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난 스스로의 행복과 미래, 앞길을 계획할 수 있어.’ 난관에 부딪힐 때 그는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다음에 다시 해 보자.”라고 말한다. 그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사람이 오기가 없으면 평생 무능하고 나약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는 왜 이렇게 끈질긴 것이겠느냐?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건 바로 반드시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나약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삶에 치여 무너져서는 안 되며 남에게 무시당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고, 사람이라면 독립적이어야 하고 오기와 의지가 있어야 하며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품과 생각, 사상이 그의 행위를 주도하여 그가 하나님이 배치한 어려움이나 곤경, 고통을 거듭 직면할 때 늘 한 가지 방식만을 선택하게 한다. 즉, 자기 생각을 고수하고 뒤돌아보지 않으며, 자신이 생각하기에 좋고, 옳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반드시 끝까지 견지해야 하는, 오기를 부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강퍅한 성품으로 인해 그는 어리석고 비현실적인 판단을 많이 내리고 수많은 비현실적인 인식과 이해를 가지게 된 것이다.
방금 사람 성품의 한 측면인 강퍅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은 강퍅함으로 인해 창조주가 마련한 고통스러운 환경과 곤경에 직면할 때 순종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고수하며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사람의 이런 행위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사역하겠느냐? 하나님 사역은 사람의 의지로 바뀌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의 이런 행동 방식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은 절대 “너는 이번에 실패했으니 끝장이다. 나는 너같이 형편없는 사람은 필요 없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사람이 같은 고통을 겪고 같은 곤경에 직면하도록 계속 같은 방식으로 여러 환경,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을 마련한다. 그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사람이 반성하고 각성하며 자신의 집요한 관점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몇 번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류와 대화하고 함께 살아간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런 사역 방식은 어떤 성과를 이루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을 인도하여 일생의 여러 곤경과 고통, 나아가 질병과 가정의 불행한 처지를 극복하게 한다. 사람에게 이런 고난을 겪게 하는 목적은 바로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반성하고, 인식하고, 마음속 깊이 검증하게 하는 것이다. ‘이건 하느님의 안배가 아닐까? 나는 어떻게 앞길을 걸어가야 하지? 방향을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 진리의 도를 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삶의 방법을 바꿔야 하는 건 아닐까?’ 하나님은 사람이 각종 고통, 환난, 불행, 곤경을 겪게 한 다음, 마음속 깊이 사람의 운명은 한 분의 주재자가 주재하고 있고 사람은 제멋대로 하거나 건방지거나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되며 순종하는 법, 즉 환경과 운명, 주변에서 생기는 모든 일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검증하게 한다. 네가 하나님의 명확한 말씀을 듣기 전에 하나님은 이런 방식과 사실로 네가 여러 환경과 다양한 사람과 일, 사물을 체험하게 하고,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이 안배하는 것이지 사람이 주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주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끊임없이 검증하게 한다. 너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이런 인식과 외침이 끊이지 않고, 네가 체험하는 이 모든 것이 어떤 사람이 너에게 야기한 것도, 우연히 발생한 것도 아니며 객관적인 원인이나 환경으로 초래된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검증하게 된다. 어쩌다 본인의 일생을 바꿔 놓을 사람을 만나 그런 일을 겪거나 어쩌다 그런 상황에 놓이는 사람은 없다. 어쩌다 병을 앓은 뒤 큰 복을 받게 되는 사람도 없다. 이는 모두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고 하나님이 사람의 하루하루를 보살피고 이끌고 있다는 사실, 모든 사람이 하루를 보내고 일생을 보내도록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이런 고유한 방식으로 우리 각자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 인류의 모든 삶, 인류의 종착지, 인류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 이외에 하나님은 또 무엇을 이루려는 것이겠느냐? 바로 하나님과 창조주에 대한 사람의 일부 비현실적인 관념과 상상, 요구가 서서히 옅어지고 사라지고 없어지도록 한 다음, 창조주가 어떤 방식으로 인류를 인도하는지, 창조주가 인류의 일생과 운명을 어떤 방식으로 안배하는지 사람이 점차 똑똑히 알고 깨닫게 하며, 이런 일을 통해 하나님이 성품을 가지고 있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진흙으로 빚은 상(像)이나 로봇이 아니고, 사람이 상상해 낸 생명 없는 생물이 아니라 생명과 성품을 가진 존재이다. 한편으로는 사람이 창조주가 사역하는 방식을 인식하고 여러 관념과 상상, 일부 비현실적이고 공허한 추론과 논리를 내려놓게 한다. 한마디로, 사람이 하나님 사역에 대한 모든 공허한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은 뒤 하나님의 사역과 주재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하게 한다. 이는 한 측면의 작은 성과일 뿐이다. 너희가 보지 못한 가장 크고 심오한 측면의 성과도 있는데, 그 성과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고 모든 일을 이룰 때 매우 실제적이고 진실한 상태로 사람에게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방식으로 알려 주는 것이다. 사람은 이런 사실을 깨닫고 나면 일부 공허하고 허무맹랑한 것에서 벗어나 창조주의 안배에 실제적으로 따르고 순종하게 된다. 그 후에는 일부 공허한 이론이나 종교 관념, 신학 지식으로 창조주를 상상하거나 생활 속의 일들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창조주가 마련한 모든 일을 현실 생활에서 실제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고자 하는 결과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려는 일이다. 따라서 네가 창조주의 음성을 듣기 전, 여러 진리에 대한 창조주의 명확한 말씀을 깨닫기 전 첫 번째 단계에서 하나님은 네가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환경을 안배하는 방식으로 네게 역사한다. 네가 어느 정도 검증하고 나면, 마음속 깊이 이런 것들을 어느 정도 느끼고 그에 감동하고 그것을 깨닫고 나면 하나님은 명확한 말씀으로 너에게 인생이란 무엇인지, 하나님이란 무엇인지, 사람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사람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등을 알려 줄 것이다. 이렇듯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왔고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믿음, 천지 만물 가운데 한 분의 주재자가 있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나님을 믿는 길을 걷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구원과 온전케 함을 받아들인다면 그 효과는 더욱 좋을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두 어떤 사람이겠느냐? 최소한 그들은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온 우주 세계를 주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이 밖에도 운명을 믿고 사람의 일생을 하나님이 정한다는 사실을 믿을 뿐 아니라 영계의 존재,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고, 사람에게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사실도 믿는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 가운데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 선민을 택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이자 원칙이다.
방금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는지,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사역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런 것만 언급했을 뿐 사람의 관념과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요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제 이 방면의 문제를 교제하도록 하겠다. 기왕 여기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공허하고 막연한 견해와 인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으니 몇 가지 예시를 찾아 이 일을 검증해 보자. 긍정적인 사례와 부정적인 사례를 모두 조금씩 다루어 보겠다. 이를 토대로 하면 사람은 어떤 상상이 비교적 공허하고 막연하며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념인지 깨달을 수 있지 않겠느냐? 앞에서 했던 이야기부터 말해 보자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생에서 고통스러운 체험을 여러 번 겪었다. 매번 고통스러운 체험이 끝난 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그녀의 운명을 안배하고 배치하며 그녀의 앞길을 인도했다. 그녀는 깨닫지도, 알지도 못했고 반성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예전과 다름없이 계속 그렇게 했다. 이 단계에서 그녀는 창조주의 이런 사역 방식에 대해 일부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느냐? 그런 생각을 관념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관념과 생각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우선 주인공에게는 원래 소원이 하나 있었다. 평생 큰 부자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고 그저 의지할 곳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분석과 분별을 통해 이런 소원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소원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배치하고 안배한 운명에 위배될 뿐 아니라 실제적이지도 않다. 그렇다면 그녀의 이런 소원에 대해 하나님은 뭐라고 정의하고 말씀하였느냐? 사람의 상상대로라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도리를 좀 깨닫게 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 아니겠느냐? 깨닫게 하면 사람은 바로 깨닫게 되지 않겠느냐? 그 여성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생각을 갖지 않게 하거나 그런 생각을 바꾸게 하면 될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했느냐?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럼 사람의 이런 생각은 관념이 아니겠느냐? 초자연적이지 않겠느냐? 공허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할 때 자유 의지를 주었고, 사람은 두뇌와 사상,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사람은 사탄의 패괴를 겪은 뒤 세상에서 보고 들은 것에 익숙해졌고 부모의 교육과 가정의 영향, 사회의 교육으로 사람의 사상 안에 많은 것들이 생겨났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마음에서 생긴 것으로, 모두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사람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이런 것들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이겠느냐? 우선 문제를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생기려면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다음 가정과 사회의 교육 등 종합적인 환경이 영향을 끼쳐야 한다. 거기에 패괴 성품과 야심, 욕망의 부추김까지 더해지면 이런 사상이 서서히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사상이나 생각이 현실에 부합하든, 공허하든, 아니면 어떻든 일단 그 성질을 규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런 생각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먼저 말해 보자. 하나님이 정죄하겠느냐?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생각을 없애지 않는다. 사람은 관념과 상상을 품은 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으로 가볍게 문지르기만 하면 사람의 사상이 바뀐다고 생각한다. 이는 막연하고 초자연적이고 공허한 관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이다. 말은 하지 않아도 사람은 마음속 깊은 곳에 하나님의 사역과 사역 방식에 대해 어느 정도 환상을 갖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창조주가 조용히 사람 곁에 다가와 거대한 손을 한 번 휘두르거나 입김을 한 번 불어넣으면, 혹은 생각을 한 번 바꾸기만 하면 강풍이 구름 한 점을 날려 버리듯 사람 내면의 그런 부정적인 것들이 소리 소문 없이 곧바로 사라진다고 상상한다. 사람의 이런 사상과 사람의 생각 안에 생기는 이런 것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은 초자연적이고 공허한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고 사람에게 환경을 마련해 준다. 어떤 환경을 마련해 주겠느냐? 이 역시 공허하지 않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일을 하여 이 모든 법칙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환경을 마련하여 사람이 이 일을 깨닫게 함으로써 끊임없이 반성하게 한다. 그런 다음 여러 사람과 일, 사물을 통해 일깨우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운명을 바꾸지 않고 그저 그의 운명에 몇몇 작은 에피소드를 추가해 이런 일들을 깨닫게 한다. 사람의 관념은 모두 초자연적이고 공허하며 막연하고 비현실적이며,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을 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입김만 한 번 부시면 난 배가 부를 텐데 굳이 내가 식사 준비를 해야 하나? 하나님께서 사람이 굶주리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면 이적을 좀 나타내시면 좋을 텐데.” 이것이 비현실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네가 하나님에게 배고프다고 하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겠느냐? 하나님은 너에게 먹을 것을 찾으러 가라고, 밥해 먹으라고 할 것이다. 네가 먹을 것도 없고 밥할 줄 모른다고 하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너에게 밥하는 법을 배우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역의 실제적인 면이다. 너희가 간파하지 못하는 일을 마주하더라도 더 이상 공허하게 기도하거나 당당한 태도로 하나님에게 막연히 의지하지 않을 때,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한 이런 관념과 상상에 희망을 걸지 않을 때 너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 자신의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방금 한 측면을 이야기했다.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을 사람이 깨닫지 못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느냐? 사람이 인생의 체험 속에서 창조주의 주재와 사람의 운명이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깨닫게 하고, 자신의 소원은 자신의 운명과 별개의 일이고 창조주의 안배와도 별개의 일이라는 사실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알게 한 다음, 자신의 소원을 점진적으로 내려놓고 창조주가 배치한 이 모든 것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나님은 계속해서 환경을 마련할 것이다. 이는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부분이다. 다른 한 측면으로는, 하나님의 명확한 말씀이 사람에게 임할 때도 사람에게 일부 관념과 상상이 생긴다. 어떤 관념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자 진리요, 하나님 자신이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곧장 똑똑해질 거야.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기만 하면 자질이 향상되고 특기도 늘어날 거야.’ 사람의 이런 생각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의 관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관념이니 하나님의 사역에 부합하지 않고 대립될 게 뻔하다.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어떤 길을 걸어야 하고 하나님에게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 각 사역에서 사람이 진입해야 할 원칙은 무엇인지 하나님은 얼굴을 맞대고 사람에게 알려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런 것을 명확히 알려 주었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 이외에 별도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려 주길 기다리고 기대하며, 예상치 못한 성과를 얻고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사람의 관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실제 환경을 마련해 주십니다.) 실제 환경을 마련했는데도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깨우치고 인도하십니다.) 깨우치거나 인도하지 않는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사역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얼굴을 맞대고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말씀을 했겠느냐? 너무도 많아서 몇 년을 읽어도 다 읽지 못할 정도이다. 그러나 사람은 얼마나 얻었느냐? 사람이 너무도 적게 얻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공을 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뜻이다. “저는 들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럼 귀담아들었느냐? 이해했느냐? 중요시했느냐? 네가 중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명확한 말씀으로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하며 어떻게 모든 일을 체험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데도 사람이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부 환경을 마련해 주거나 특수한 깨우침을 주거나 일부 특수한 일을 겪게 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며 하고자 하는 것은 거기까지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도 침륜되지 않고 만인이 구원을 얻길 원하시지 않나요?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하시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내 말을 듣고 내 도를 준행하는 사람은 몇이나 되느냐?” 가능한 만큼만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점이자 하나님의 사역 방식이다. 하나님은 거기까지만 한다. 사람은 이 일에서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이 인류를 불쌍히 여기시고 걱정하시니까 끝까지 책임지셔야 해. 끝까지 따른다면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얻을 거야.’ 이런 관념이 옳겠느냐?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겠느냐? 은혜시대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관념을 가지는 것이 정상이었다. 말세에는 하나님이 이 모든 진리를 사람에게 알려 주었고 하나님이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원칙도 정확히 말해 주었는데 사람의 마음속에 아직도 이런 관념이 있다면 참으로 터무니없다. 하나님이 이 모든 진리를 너에게 알려 주었는데 결국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 실행할지 모르겠다며 이런 대역무도한 말까지 한다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에게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항상 ‘하나님께서 이토록 큰 사역을 하시는데 적어도 전 세계 절반 이상의 사람은 얻으셔야지. 사람이 많고 세력이 크고 뛰어난 인물이 많은 것으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걸 증거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관념이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신약이든 구약이든 구원을 얻고 온전케 된 사람은 총 몇 명이냐?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냐? (욥과 베드로입니다.) 그 둘뿐이다. 사실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하나님과 창조주를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노아도 하나님의 눈에는 의인이었지만 욥과 베드로에 비하면 한 단계 모자랐다. 물론 하나님은 그때 사역을 그리 많이 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이렇게 인류에게 공급하지도, 명확한 말씀을 이토록 많이 하지도, 이렇게 큰 규모의 구원 사역을 하지도 않았다. 얻은 사람은 적었지만 그것 또한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었다. 그럼 이 일에서 창조주의 어떤 성품을 알 수 있느냐? 하나님도 사람을 많이 얻길 바라지만 사실상 사람들을 얻을 수 없다면, 하나님이 구원 사역을 하는 기간에 이 인류가 하나님에게 얻어지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차라리 포기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마음의 소리이고 관점이다. 사람은 이 방면에서 하나님에게 어떤 요구나 관념이 있겠느냐? ‘기왕 저를 구원하기로 하셨으니 반드시 끝까지 책임지셔야 해요. 기왕 제게 복을 약속하셨으니 반드시 주셔서 제가 받게 해 주셔야 해요.’ 사람의 내면에는 ‘반드시’와 요구가 무수히 많다. 이 또한 관념 중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큰 사역을 하시고 6천 년 경륜에서 결국 두 명밖에 못 얻으신다면 너무 아깝잖아요. 그럼 헛수고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설사 두 명밖에 얻지 못하더라도 기뻐한다. 사실 하나님의 목적은 겨우 두 명이 아닌 더 많은 사람을 얻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모두 깨닫지 못해 하나님을 오해하고 대적하며 쓸모없는 모습을 보인다면 하나님은 아예 원하지 않는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다. “안 됩니다. 그럼 사탄이 비웃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웃어 봤자 사탄은 어차피 하나님에게 패배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결국 인류를 얻었고, 인류 가운데 사탄을 저버리고 사탄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들을 얻었으며, 진정한 피조물을 얻었다. 그럼 하나님에게 얻어지지 않은 사람은 사탄에게 끌려갔겠느냐? 너희가 지금 온전케 되지 않았다고 해서 사탄을 따라갈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원하지 않으셔도 저는 사탄을 따라가지 않겠습니다. 사탄이 제게 복을 준다고 해도 저는 원치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에게 얻어지지 못한 사람이 사탄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이 영광을 얻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이 얻는 사람의 수나 규모에 관념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 몇 사람만을 얻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이런 관념이 생기는 것은 한편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얻으려는 것인지 간파하지 못하며,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늘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 마음속에 이런 관념이 있는 것은 자신의 운명과 앞길에 대해 스스로 위로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얻으신 사람이 너무 적어. 우리를 전부 얻으시면 얼마나 영광스러우시겠어! 하나님께서 한 사람도 버리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정복될 뿐만 아니라 결국 하나님께 온전케 된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고 구원하신다는 말도, 하나님의 경영 사역도 물거품이 되지 않을 텐데. 그러면 사탄은 더 부끄러워지고 하나님께서는 더 큰 영광을 얻으시지 않겠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창조주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심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앞길이 걱정되어 자신의 앞길과 창조주의 영광을 연결 짓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놓는다. 그 밖에 그는 또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이 하나님께 얻어지고 사탄을 부끄럽게 했으니 이건 사탄을 이긴 강력한 증거야. 세 마리 토끼를 잡은 거라고.’ 사람은 참으로 계산을 잘한다. 아주 교묘하게 관념이 생겨나지 않았느냐? 사람은 사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 사심 안에 패역이 담겨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담겨 있지 않겠느냐? 여기에는 ‘기왕 저희를 택하고 인도하셨는데, 저희에게 그토록 많은 공을 들이셨는데, 당신의 생명과 전부, 당신의 말씀과 진리를 저희에게 베풀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토록 여러 해 동안 당신을 따르게 하셨는데 결국 저희를 얻지 못하신다면 얼마나 손해입니까.’라는 소리 없는 반항이 담겨 있다. 그는 이런 핑계로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을 얻어야 한다며 하나님을 위협한다. 그를 얻지 않으면 손해 보는 건 그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과연 옳겠느냐? 여기에 한편으로는 사람의 요구가 담겨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상과 관념도 담겨 있다. 즉, 하나님이 이토록 큰 사역을 하기에 반드시 사람을 얼마만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반드시’는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느냐? 사람의 관념과 상상, 무리한 요구, 허영심에서 비롯되었고, 사람의 강퍅하고 흉악한 성품도 그 안에 섞여 있다.
사람의 이런 관념은 또 다른 측면으로 더 교제해 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창조주께서 몇 사람을 얻을지 신경 쓰지 않으시고 가능한 만큼만 얻겠다는 태도를 보이시니 우리는 어떻게 협력해야 하지? 너무 참답게 대할 필요 없이 대충 믿으면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하나님께서도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시니 우리도 하나님의 요구에 맞출 때 그렇게 진지하게 대할 필요도, 본업이자 평생의 추구로 삼을 필요도 없겠네. 하나님의 생각을 알았으니 우리도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어?’ 이런 관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기왕 하나님이 사람에게 태도를 명확히 밝혔고 사람이 그것을 이해했으니 관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관념을 내려놓고 나서 어떻게 행동하고 선택하며, 어떻게 이 일을 인식하고 대하는 것이 사람이 응당 가져야 할 관점과 태도이겠느냐? 우선 사람은 관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뒤로 사람은 하나님을 경모하고 앙망하는 막연한 상상을 품은 채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고 못하시는 게 없어. 이 패괴된 인류 가운데 한 무리의 사람을 택하셨으니 분명 그들을 온전케 하실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우리는 틀림없이 필연적으로 복을 받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런 ‘필연적’에는 요행심이 담겨 있지 않겠느냐? 진리를 추구하지도,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체험하지도 않으면서 복을 받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자 하는데, 이는 사람이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될 태도이다. 요행심을 품지 마라. 요행은 큰 적이다. 어떤 마음가짐이 요행이겠느냐? 사람의 어떤 내적 상태, 생각, 사상, 태도, 관념, 관점에 요행심이 담겨 있겠느냐? 너는 발견할 수 있느냐? 네게 복받으려는 요행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확인했다면 그것을 어떻게 고쳐야겠느냐?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이는 모두 실제적인 문제이다. 요행심은 반드시 간파해야 하고,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해결하지 않으면 그것이 너를 엎어뜨리기 쉽고, 너는 봉변을 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요행심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나는 하나님을 믿기 위해 가정도 일도 다 버렸어. 어쨌든 공로는 없어도 나름 고생했고, 고생이 아니더라도 나름 힘들었다고. 끝까지 따르기만 한다면 이긴 자, 구원받는 자, 복받는 자, 하나님나라의 일원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바로 요행심이다.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심리를 가지고 있지 않겠느냐?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며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 중 대다수가 기본적으로 이런 심리를 가지고 있다. 이런 요행은 관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왜 이를 관념이라고 하겠느냐? 창조주가 이 일에 대해 도대체 어떤 뜻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깨닫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을 때 너는 주관적으로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추구하며 그대로 행동하는데, 그것이 바로 관념이다. 이런 관념은 창조주에게는 협박이 아니겠느냐? 무리한 요구가 아니겠느냐? 즉, ‘제가 하나님을 따르고,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 집에 와서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이상 창조주의 안배에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니 저는 앞길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제 앞길은 막연하지 않고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해요.’라는 뜻인데 이게 바로 요행심이다. 이런 요행심은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해야 한다. 지금 이렇게 교제하고 나면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보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셨고 이런 관점과 태도를 가지고 계셨구나.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사람은 요행을 버려야 한다. 요행을 버리는 것이 “나는 내려놓았어.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난 참답게 본분을 대하고 책임을 지고 많이 공을 들일 거야.”라는 한마디 말로 끝나겠느냐?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요행이 생길 때면 사람의 일부 사상과 행동 방식이 있을 것이고, 더욱이 일부 성품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태도를 깨닫고 나면 요행을 품지 않는 것 아닌가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무슨 말이겠느냐?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말이고 빈말이다. 그럼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너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시면 난 어떻게 대해야 하지? 내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고 쏟는 건 기꺼이 원해서 하는 걸까, 아니면 거래하는 걸까? 거래하려는 속셈이 있다면 바람직하지 않으니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진리를 구해 그것을 해결해야 해.’ 이 밖에 너는 실행하는 도중에,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했는지, 어떤 일이 하나님의 요구와 뜻에 위배되는지, 어떤 길을 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길이고 화를 입는 길인지, 어떤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길인지 이런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요행심으로는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중병에 걸렸다가 하나님이 그를 구해 주어 병이 나았다. 그래서 그는 ‘당신들은 하나님을 믿을 때 모두 복받으려고 애쓰지만 나는 달라. 하나님께서는 나를 큰 사랑으로 이끌어 주셨어.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특수한 환경과 체험을 주셨다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내게 특별한 은총을 주시는 거야. 마지막에 살아남을 확률도 내가 당신들보다 높아.’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남들과 달리 하나님과 특수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자신이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런 특수한 체험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신분이 일반적이지 않고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을 품은 채 자신은 분명 다른 사람과 다르고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규정한다. 이 또한 요행심이다. 또 어떤 사람은 중요한 사역을 맡고 높은 지위에 있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고생하고 더 많이 책망 훈계를 받으며 다른 사람보다 더 분주하게 움직이고 말도 더 많이 하면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과 하나님 집이 나를 중용하고 형제자매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야. 내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복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도 요행심이고 관념이다.
방금 요행의 일부 실제 모습과 내적 상태에 관해 이야기했다. 또한, 내적 상태와 모습, 혹은 사람의 생각 속에 자주 생기고 한결같이 존재하는 것 중에 요행에 속하는 것으로는 또 무엇이 있느냐? 특수한 체험을 가진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 모든 것을 버리고 풀타임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 이외에 자격을 갖춘 사람, 일부 특수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 특수한 재능이 있는 사람도 요행심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자격을 갖췄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예를 들어, 일부 복음 전파자들은 열 사람에게 전하면 열매를 열 개 맺은 것이니 복받을 확률이 십 퍼센트이고, 열매를 오십 개 맺으면 오십 퍼센트, 백 개 맺으면 백 퍼센트라고 생각한다. 이는 관념이자 거래이며 더욱이 요행이다. 이런 요행심과 관념을 품은 채 하나님의 사역을 평가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겠느냐? 이는 어떤 길을 걷는 것이겠느냐? 그들의 추구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들에게는 왜 이런 것들이 생기겠느냐? 왜 한사코 고집하고 내려놓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옳겠느냐? 그건 빈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늘 이런 관점과 태도를 품고 있는 사람, 이런 관념을 품은 채 아주 완고하게 고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히 공들이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늘 무성의한 태도를 보인다. 즉, 희미하고 분명하지 않은 태도와 관점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을 때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얼마나 대가를 치렀는지,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 어떤 특수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능력이 뛰어난지,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하나님과 함께 어떤 ‘환난’을 같이했는지, 어떤 특수한 체험이 있었는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떤 특수한 것, 또는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는 은혜와 축복을 주었는지 등을 알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을 얼마나 고집하든 그들은 이런 관점이 올바른지, 이런 관점이 하나님의 어떤 말씀과 하나님 사역의 어떤 원칙에 맞서는지, 이런 관점이 하나님에게서 검증을 받았는지, 하나님이 이렇게 사역하고 이루는지 등을 되돌아본 적도 없고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진 적도 없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그저 자기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미리 준비하며 꿈꿀 뿐이다. 그러니 진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이 되었겠느냐? 장식품이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긴 하지만 하나님과도, 진리와도 관련이 없다. 그럼 그들의 믿음은 무엇과 관련 있겠느냐? 관념과 상상, 자신의 욕망, 그리고 최종적으로 얻는 복과 종착지, 오직 이런 것들과 관련 있을 뿐이다. 그들이 진리에 공을 들이지 않아 결국 이런 결과가 생긴 것이다.
오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사역 방식, 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점과 태도를 어느 정도 이해했을 것이다. 그것이 앞으로 너희가 하나님을 인식하기를 추구하거나 진리와 생명 진입을 추구하는 데에 어느 정도 효과나 성과를 낼 수 있겠느냐? 너희의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아 자신의 관념을 내려놓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사람에게 어떤 행동이 요구되겠느냐? (관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요구 기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이 이렇게 요구하고 규정했으니 반드시 그렇게 이룰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물거품이 되지 않고 모두 이루어지고 응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네가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자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판단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러실 수 있겠어요? 어떻게 가능한 만큼만 구원하실 수 있겠어요?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큰 사랑을 가지고 계시지 않나요? 한없는 인내와 관용, 긍휼도 가지고 계시고요.” 너는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온갖 핑계를 대고,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편의를 도모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창조주의 나타남을 무시하고, 마음속으로 진리인 줄 분명 알면서도 그렇지 않길 바란다. 이 안에는 불신의 요소, 창조주와의 겨루기, 창조주에 대한 반발심과 협박의 요소가 담겨 있다. 내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말을 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는 저희에게 경종을 울리고 겁주는 것이죠. 혹은 물러날 사람은 물러나게, 연약한 사람은 연약하게, 소극적인 사람은 소극적이게, 살림할 사람은 살림하게 한다는 걸 알려 주는 것이죠. 하나님이 사역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데다가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얻을 필요도 없다고 하셨으니 우리 그냥 해산합시다!”라고 말하는데, 정말 그렇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했든, 뭐라고 말했든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하고 진리를 깨닫게 한다. 그럼 사람은 어떤 길을 걸어야겠느냐?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 사람이 반성해야 하는 것, 구하여 해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을 적대하는 모든 관념과 상상, 요구이다. 이런 것은 모두 진리에 위배되므로 포기해야 하고, 반드시 마음속에서 이런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더 이상 이런 것들의 영향과 통제를 받지 말고,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고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밖에도 자신의 어떤 부분이 하나님과 일치하지 않는지, 진리에 위배되는지 끊임없이 반성해야 하고, 자신의 패괴 성품과 여러 사물에 대한 올바르지 않은 관점, 사람의 여러 방면의 관념과 상상 또한 끊임없이 반성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반성하고 정확히 인식하며 진리를 구해 철저히 해결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한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
방금 다루었던 ‘내 의지할 곳은 어디에’라는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아직 다 분석하지 못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뒤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 인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직접 한 모든 말씀을 귀담아듣기까지 이 기간에 하나님은 명확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이 깨달아야 할 모든 일을 사람에게 알려 준다. 하나님은 네게 글귀와 도리를 이해하고 신학을 배우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말씀으로 네게 고분고분한 사람, 좋은 사람, 동경하고 지향하는 바가 있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네게 그런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으로 네게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떤 도를 준행해야 하는지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말씀을 듣고 나서도 수긍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관점과 소원, 나아가 처신 원칙을 고수한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좋은 사람이 되는 게 그렇게 이루기 어려운 목표도 아닌 것 같고요. 저는 나쁜 일도 하지 않고 남을 해치거나 속이지도, 남의 등을 쳐 먹지도 않아요. 하나님을 믿고 나서는 더 좋은 사람이 됐어요. 다른 사람에게 진실만을 말하고 다른 사람과 어울릴 때도 거짓됨이 없죠. 본분을 이행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안배를 따르고요. 그럼 된 거 아닌가요?” 많은 사람이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이런 생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요구에 이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깨닫도록 요구하는 진리는 아주 많고, 사람이 배워야 할 공과도 적지 않다. 특히 이상 방면의 진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반드시 갖춰야 할 진리이자 기초적인 부분이다. 이런 진리를 깨닫지 못했는데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상상에만 기대어 스스로 잘났다고 착각하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일 자격이 있겠느냐? 하나님에게 정결케 되고 온전케 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는 틀림없이 불가능하다. 교회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절반 이상이거나 심지어 더 많을 수도 있다. 너희는 이런 상황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도 사람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어.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어리석고 완고하고 우매한 사람을 깨우쳐 주지 않으시는 거지? 왜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사역을 더 많이 하지도, 그들에게 더 공을 들이지도 않으시는 거지? 어째서 성령께서는 어리석고 완고한 사람들이 더 이상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고 우매한 사람들이 더 이상 우매하지 않도록 그들을 감동시키거나 징계하지 않으시는 거지?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걸까?’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이 말은 틀렸다. 하나님이 한 말씀이 적으냐? 하나님이 말씀을 너무 많이, 자세하게, 심지어 수다스러울 정도로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럼 하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는지 아는 사람 있느냐? 그건 바로 사람이 너무 강퍅하고 패역하며 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에 공을 들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는 강요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은 절대 억지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사역한다. 하나님이 한 말씀이 이미 너무도 많아 사람이 다 읽을 수 없을 정도인데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에게 강요하겠느냐? 사람은 왜 하나님의 고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냐? 이야기에서 평생 고통을 겪은 주인공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도를 들었으며 심지어 교회에서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누가 자신에게 의지가 되어 줄 수 있는지, 자신의 소원이 어떻게 생겨난 것이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깨닫지 못했으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보기에 이는 아주 간단한 문제이다. 네가 방향을 바꿔 하나님이 제시한 방향과 알려 준 길을 향해 착실하게 믿고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실행하며 아무런 의문이나 의심도 갖지 않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신의 관념과 상상, 기대, 그리고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환상을 꽉 잡고 놓지 않으며 그것들을 자신의 생명줄로, 나아가 생존의 근간으로 여긴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제시하는 방향은 제쳐 놓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겠느냐? 너에게 좋은 것을 주었지만 네가 인식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니 하나님은 거두어 간다. 거두어 가고 나면 사람은 무엇을 얻겠느냐? 빈털터리가 된다. 그래서 주인공은 마음 깊이 ‘하나님께서 과연 내 의지처가 되어 주실 수 있을까? 나는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구에게 의지해 살아가고 복을 받고 미래의 종착지를 얻어야 할까?’라는 질문의 답을 알지 못했고 갈수록 더 모호해졌다. 결국,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어떤 아쉬움이 남았겠느냐? 의지하고 신뢰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아쉬움이 남았을 것이다. 이 얼마나 비참하고 참담한 일생이냐! 창조주가 사람에게 일생을 안배한 의미가 대체 무엇인지 그녀는 모호해졌고, 알 수도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평생을 체험하면 늙어서도 여전히 이 모든 것을 똑똑히 알지 못하거나 정확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인생의 정확한 방향과 목표가 생기지 못한다.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얻지 못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 사람의 일생은 그렇게 종지부를 찍는다. 하나님은 이미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 환경을 마련했고 깨우치고 인도했으며 심지어 그녀가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 혹은 궁지에 몰렸을 때 그녀에게 계속 살아갈 원동력을 주며 최대한의 사랑과 지지력으로 그녀를 지금까지 살게 했다. 그 목적은 무엇이었겠느냐? 그녀가 돌아서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돌아서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었겠느냐? 아무도 너에게 의지가 되어 줄 수 없고, 어느 누구에게 의지해서도, 자신에게 기대어 행복한 생활을 창조하려고 해서도, 그 어떤 소원을 가져서도 안 되며 창조주 외에는 그 누구도, 너조차도 너의 운명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너는 어떤 선택을 해야겠느냐? 아무런 불평이나 조건 없이 창조주 앞에 와서 그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그의 도를 준행해야 한다. 고통이든 질병이든 모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부분이다. 일생에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도 사람이 이 모든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더 하겠느냐?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이 그를 포기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가 계속 자신의 관념과 욕망, 고집 속에서 살면서 강퍅하고 집요한 태도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오기를 부리는 태도로 하나님이 배치한 이 모든 것을 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일생이 곧 끝나려고 할 때 하나님이 배치한 이런 환경이나 과정을 그가 차근차근 겪어 왔다고 하더라도 창조주에 대한 그의 인식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고 일생의 운명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의 일생이 어땠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창조주는 더 이상 개입하여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사역할 때 사람은 또 어떤 관념과 상상이 생기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도태시키는 것을 보고 관념이 생겨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사람은 평생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겪었는데 창조주께서는 그가 불쌍하지도 않으신가?” 불쌍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베푼다고 해서 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겠느냐? 그의 운명을 바꿀 수 있겠느냐? 그의 관점을 바꿀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창조주가 사람에게 축복, 은혜, 물질적 향락을 얼마나 베풀어 주든, 그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재촉하거나 도울 수 없다면, 인생의 바른길을 걷다가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시해 준 길을 걸으며 사람이 일생에서 겪는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닫도록 도울 수 없다면 하나님이 한 모든 사역은 그에게서 허사가 된다. 이를 통해 이 사람의 하나님 믿는 생애가 곧 마침표를 찍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는 어떤 관념이 쉽게 생기겠느냐? ‘하나님께서는 포용과 인내, 위대하고 드넓은 사랑을 가지고 계시면서 왜 이런 사람 하나 사랑하지 못하시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겠느냐? 하나님이 과연 그를 사랑하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서 결실을 맺었느냐? 결실을 맺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겠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또 어떻게 나타나겠느냐? 하나님은 또 어떻게 하겠느냐? 사실상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기 전에 이미 그를 택했고 그에게 역사했으며 신경 써서 그의 일생을 정해 주었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그의 일생을 배치했다. 그 안에는 모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가 일생의 여러 과정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보살피고 지켜 주었으며 그에게 원동력을 주었다. 또 일부 환경을 마련해 주었고 일생의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지켜 주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아무리 고집스럽고 집요하더라도, 아무리 교만하고 강퍅하더라도 하나님은 계속 하나님의 방식으로, 창조주의 사랑과 도량으로, 하나님의 책임으로 그가 순조롭게 일생을 끝마치게 한다. 그가 일생 동안 위태로운 상황과 시험을 얼마나 많이 마주했든, 나아가 절망을 느껴 목숨을 버릴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그가 이번 생을 끝까지 살아가도록 인도한다. 하나님의 인도가 없었더라면 그의 일생은 분명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가운데 여러 유혹과 시험, 또는 위험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는 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람은 관념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는 이런 고통과 환난, 사람의 뜻에 맞지 않는 것들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하나님은 계속 사랑과 관용이라는 방식으로 사람에게 긍휼, 은혜, 축복을 베풀어 주고 마지막에는 또 지극히 큰 인내와 사랑으로 진리를 선포해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생명을 얻게 한다.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성과를 이루고, 차근차근 사람을 인도하여 사람이 인생을 인식하게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의미가 있는지 알게 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역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얕게 말하자면 사람이 인생에서 마주하는 모든 고통과 자신에게서 생기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고, 더 깊이 있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면서 정상적인 사람, 진정한 사람을 살아 내고 창조주의 인도 안에서 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개인의 자유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 의지, 사고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어 주었다. 그 후 사람은 지식, 전통문화, 사회의 흐름, 가정 교육 등 세상과 사회의 많은 것들을 받아들였다. 사탄에게서 비롯된 이런 것들을 하나님은 항상 혐오하고 폭로하여 사람에게 이런 것들이 터무니없고 허위적이며 진리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사탄에게 속하는 이런 것들을 멀리하도록 사람을 격리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사람이 직접 경험하고 분별하며 그 안에서 올바른 인생 체험과 인식을 얻도록 했다. 모든 과정이 끝나고 하나님이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나면 사람은 얻을 수 있는 만큼만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단계에서 사람에게는 어떤 관념이 생기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포기했다는 사실에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사람이 하나님에게 걸 수 있었던 얼마 되지 않는 따뜻한 희망이 그 순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약간 잔혹하다고 생각한다. 잔혹함을 느끼는 동시에 사람의 관념도 드러난다. 네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그가 구원받을 수 있게 돕는다 해도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하나님을 그토록 여러 해 동안 믿었지만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네가 그를 불쌍히 여겨 돕고자 해도 그에게 진리를 공급할 수 있겠느냐? 그에게 생명을 줄 수 있겠느냐? 너는 전혀 그럴 수 없다. 그럼 너는 왜 하나님에게 관념을 가지는 것이냐? 하나님의 사역은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합리적이다. 그 본인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두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고 원망해서야 되겠느냐? 그 안에는 분명 사람의 관념이 많이 들어 있다. 사람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관념이 너무도 많다. ‘하나님께서는 기왕 그렇게 많은 일을 하셨으면서 왜 마지막 한 단계를 완벽하게 마무리하지 않으시는 거지? 이건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 같지 않아. 하나님이 하셔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는 기왕 이토록 큰 사역을 하신 김에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실 거야. 이런 성과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사역의 완벽한 결과라고. 하나님께서는 왜 이 사람을 도태시키셨을까? 그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위배되잖아. 사람이 오해하게 하기 십상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이렇게 하신 거지? 사람의 뜻에 좀 맞지 않는 거 아닌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은 원래 그렇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다. 너희도 체험해 보아라. 그러면 언젠가 깨달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은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일부 관념과 상상에 관련된다. 그 안에는 사람의 상상과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요구가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다. 즉, 사람은 하나님이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역이 네 관념에 부합하지 않고 너의 요구나 상상과 충돌할 때 기분이 좋지 않고 괴로워서 너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내 하나님이 아니에요. 내 하나님은 당신 같을 리 없어요.’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네 하나님이란 말이냐? 이런 것들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자주 이런 내적 상태와 관념 속에 살게 되고 마음속으로 자주 이런 관념과 요구로 하나님의 사역을 평가하게 되며, 자기 행동의 옳고 그름, 자신이 가는 길의 정확성을 판단하게 된다. 이는 골치 아픈 일이다. 하나님의 요구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길을 걷고 있다면 설사 네가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도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인다 한들 최종적으로 구원받는 결과에 이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따라서 네가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교회 생활에 들어간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 경영 사역 중의 일원이 되고 하나님이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네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거나 구원받을 가망이 있다는 뜻도 아니다. 하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사람의 관념과 상상, 추리와 판단일 뿐이다.
방금 했던 이야기에서 어떤 것들이 사람의 관념과 관련 있는지 너희가 정리해 보겠느냐? 정리가 다 됐으면 읽어 보아라. (하나님, 네 가지를 정리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이 합리적인 소원과 추구를 가지는 것이 지나치지 않기에 하나님께서 응당 이루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큰 대가를 치르시며 사람에게 역사하셨는데도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인생의 바른길을 알 수 있도록 응당 초자연적인 사역을 하여 곧장 깨우쳐 주셔야지 사람이 평생 그토록 많은 고통을 받으며 스스로 탐색하고 직접 체험하고 느끼게 두셔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해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토록 많은 대가를 치르셨으니 결국 성과를 보셔야 하고 사람이 하나님께 얻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번째,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때 일부 요행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있느냐? 누가 더 말해 보겠느냐? (또 다른 관념이 있는데, 즉 하나님이 여러 해 동안 이토록 큰 사역을 하셨으니 응당 사람을 더 많이 얻으셔야 하고, 만약 적게 얻으시면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까지 다섯 가지이다. 더 있느냐? (저도 한 가지가 생각났습니다. 사람이 체포와 박해 같이 일부 특수한 체험을 하는 경우 그 과정에서 하나님과 진실하게 교류하고 하나님을 진실로 증거하면 그것을 자본으로 여기게 됩니다. 사람은 그런 체험 간증이 있으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고 생존할 확률도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또, 사람은 자신의 사역이 클수록, 자신이 치른 대가가 많을수록 하나님의 칭찬을 더 많이 받게 되고 구원받을 희망도 더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사람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확률이 자신이 얼마나 희생했는지를 근거로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정비례해야지 반비례해서는 안 되고 연관되어 있어야지 무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관념이다. 이것까지 일곱 가지이다. 또 있느냐?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실 때는 사람을 깨우쳐 깨닫게 하시는 건 괜찮지만 사람에게 시련을 주시거나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 고통스럽게 하셔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신다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관념이다. 또 어떤 관념이 있느냐?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얻으신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얻는 동시에 사탄을 부끄럽게 할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사실 이는 사람의 이기적이고 비열한 생각이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사역의 결과를 완벽하게 상상한다. 그 또한 관념이다. 사람은 이기적이고 비열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할 때는 응당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말은 반드시 완벽해야 하고, 사람이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하며, 사람의 상상에 부합하고 아름다운 사물에 대한 동경에 부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 사역이 끝날 때는 사실이 사람의 상상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이 모든 것의 결말도 사람이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사람도 하나님 사역이 끝날 때 소수만 생존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율법시대에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신도가 몇 명 되지 않자 사람은 하나님이 전능하기 때문에 하나님 사역의 결과가 그와 같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전능을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이런 정의 자체가 바로 관념이고, 사람이 상상하는 완벽주의의 한 개념이다. 이는 하나님이 하려는 것과 하나님이 사역하는 원칙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또 어떤 관념이 있느냐?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때 자신이 걷는 길이 어떤 길인지, 어떻게 해야 패괴를 벗어 버리고 구원받을 수 있는지 반성하지 않고 하나님이 전능하시니 하나님께서 변하라고 하시면 사람은 바로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알려 주어도 사람은 실행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며 늘 편한 길만 찾고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키길 바란다. 이는 공허한 상상이 담겨 있는 관념이다. 또 있느냐? (평생 고생을 많이 하고 벽에 많이 부딪힌 사람은 마지막에는 좋은 결말을 맞이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포기하셔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결국 하나님께 얻어지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하려 하실 때 사람은 ‘좋은 사람’의 입장에 서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사람의 뜻에 맞지 않고 너무 잔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무슨 문제겠느냐? 너희는 그저 일, 그리고 자신의 감성적 인식만을 조금 설명했을 뿐 그것이 관념의 문제라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안에는 주로 사람의 어떤 관념이 담겨 있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불쌍한 정도와 고생한 정도에 따라 사람을 구원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하나님이 마지막에 사람의 결말을 정할 때 당연히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과 도량, 관용, 사랑, 동정심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너무도 고생을 많이 하고 평생 불쌍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가 진리를 깨달았는지, 하나님에게 얼마나 순종했는지는 신경 쓰지 말고 그가 불쌍하고 고통을 많이 받고 자신의 꿈을 그토록 고집한다는 점을 봐서 이례적으로 그를 구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관념이다. 사람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많다. 수많은 ‘당연’함으로 하나님이 당연히 어떻게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정의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갈등이 생기고 사람은 하나님을 오해하게 된다. 그것이 오해뿐이겠느냐? 사람의 패역도 생겨난다. 관념은 사람에게 이런 폐해와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관념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조금 전 했던 이야기를 통해 주인공이 온갖 관념으로 하나님이 배치한 모든 것을 평가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주인공에게 발생한 모든 일과 하나님이 그녀를 대하는 방식을 보고 사람에게는 또 많은 생각과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생겨났다. 그런 것들이 다 관념이다. 너희가 더 말해 보아라. 사람은 또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느냐?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왕 그토록 큰 사역을 하시는 김에 사람을 더 많이 얻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능한 만큼만 얻겠다고 하시니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리 많이 얻길 원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여 추구하지 않습니다.) 관념이 사람의 추구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많이 얻길 원하지 많이 얻길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최종적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할 때 하나님은 무엇을 근거로 사람에게 더 이상 역사하지 않겠다고 하고 사람을 포기하겠느냐? 이에 관해 하나님에게는 기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원칙이자 마지노선이기도 하다. 이 기준과 원칙, 마지노선에 대해 관념을 가지거나 간파하지 못한다면 너는 하나님에게 약간의 반발심이나 상상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그토록 공을 많이 들이셨는데도 그녀는 바뀌지 않았어요. 자신의 소원을 내려놓지 않고 고집하며 하나님 앞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녀를 포기하신 거예요.” 이것이 주요 원인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주요 원인이겠느냐? 이야기의 마지막에 나이 든 주인공은 얼굴도 변했고 세월이 흘러 나이도 지긋해졌고, 시대도 변했다. 그러나 그녀의 소원과 거의 희미해진 환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가 이런 소원을 계속 고집하게 했겠느냐? (강퍅하고 패역한 성품입니다.) 그렇다. 그녀가 진리를 사랑하지도, 추구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진리를 실행하지 않았기에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교만하고 강퍅하며 고집스러운 그런 패괴 성품으로 인해 그녀는 계속 자신의 소원과 이상을 고집하며 자신의 이상을 내려놓지 못했다. 이는 무엇으로 초래된 것이냐? 그녀의 패괴 성품으로 초래된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길 끝까지 걸어갔을 때에도 성품이 여전히 강퍅하고 교만하며 고집스러운 것을 하나님이 보았다면 그건 무슨 뜻이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에서 그 사람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도 체험하지도 않았고 본질적으로는 생명의 진입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럼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에게 버려진 것이다. 그는 삶의 여정을 완주하여 비록 하나님 앞에 왔고 창조주가 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사람의 운명도 안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기간 그의 강퍅하고 교만하고 고집스러운 성품은 끝까지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불 보듯 뻔한 결과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포기하는 마지막 기준이자 하나님의 원칙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 원칙과 기준에 대해 어떤 견해와 평가를 갖든 하나님은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한다. 네가 어떤 사람과 가까이 지내보지 않고 그 사람의 마음속 본질이 대체 무엇인지, 그의 성품이 어떤지 이해하지 못한 채 겉모습만 본다면, 너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원칙과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영원히 깨닫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의 행사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규정을 판단할 것이다. 질문을 하나 하겠다. 인생의 온갖 고통을 겪은 이런 불쌍한 사람, 즉 평생 고통을 겪은 사람을 하나님은 왜 그런 식으로 처리하겠느냐? 하나님은 왜 그를 포기했겠느냐? 모든 사람이 그런 결과를 보길 원하지 않지만 그것은 확실히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왜 그를 그렇게 대했겠느냐? 그런 사람의 추구와 성품, 그가 걷는 길을 봤을 때 하나님이 10년 더 사역한다면 그가 바뀌겠느냐?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50년을 더 사역하여 그가 좀 더 오래 살게 한다면 그가 바뀌겠느냐?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 바뀌지 않겠느냐? (그의 본성 본질 때문에,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몇 년을 더 믿어도 변화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볼 사람 있느냐? (그가 걷는 길이 옳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몇 년을 더 믿어도 소용없습니다. 10년, 20년을 더 믿어도 그가 걷는 길과 그의 인생 방향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그는 내면에 관념과 상상을 품고 있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진입하는 것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형식적으로 계속 따르는 것을 추구할 뿐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10년, 20년 믿어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30년, 50년 믿어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 결국 흘러나오는 것, 살아 내는 것은 영영 변하지 않는다. 이는 그의 본성 본질이 결정한 것이다. 그가 가진 그런 성품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념과 상상도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처리하는 방법에는 원칙이 없겠느냐? 원칙이 있다. 사람은 늘 좋은 사람인 척하고 자신이 꽤나 너그럽고 위대하다고 생각하는데, 네가 하나님만큼 너그럽겠느냐? 네 사랑이 하나님 사랑만큼 크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너그러움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너그러움과 사랑을 너는 어떻게 확인하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로운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을 하나님 앞에 데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걷고 실행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관점을 계속 고수한다. 그럼 그가 일생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그를 포기한 적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한 적 없다. 그의 인생 모든 단계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한 모든 일, 그에게 체험하게 한 모든 일을 진지하게 끝까지 책임졌다.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진 목적은 무엇이었겠느냐? 좋은 결과, 만족스럽고 마음에 드는 결과를 보아 그의 소원 속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너그러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어떤 결과를 보았겠느냐?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원했던 결과를 보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보지 못했고, 이미 희망이 보이지 않았었다. 하나님이 희망을 잃었다는 건 무슨 뜻이겠느냐?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아무 희망도 품지 않는다는 뜻이고, 흔한 말로 절망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있다면 포기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너그러움과 사랑이다. 하나님은 너그러움과 사랑을 실제로 사람에게 행하지 단지 빈말 한마디로 끝내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은 그 사람의 패괴 성품이 여전히 변화하지 않았고 고집스러움도 그대로이며 소원도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은 복받기를 원했지만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상태로 하나님 앞에 왔다. 사람은 사소한 소원조차 평생 고집하고 지키며 꼭 붙잡고 있었다.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자신과 자신의 일생, 자신의 가족을 모두 하나님에게 맡겼지만 실제로는 어땠느냐? 그는 스스로 주관하길 원했다. 주변 사람, 자신의 가족, 자기 자신을 주관하고자 하며 서로 의지하고자 했지 이 모든 것을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맡기지 않았다. 어느 측면에서 보든 사람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길을 걷고 있지 않았고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길에 전혀 들어서지 않았다. 그는 평생 고난과 평범하지 않은 일을 그토록 많이 겪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이 그려 낸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의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고 조금도 반성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너무도 강퍅한 사람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인생의 바른길을 걷지 않은 사람은 결국 이런 결과를 맞이한다.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인의를 다해 도와주었고, 사람의 상상과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정도로 사람에게 너무도 많이 주었다. 사람의 패괴와 성품,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로 보면 사람은 이런 것들을 얻어선 안 되고, 이런 축복을 얻을 자격도 없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포기하였느냐? 하나님은 포기하기 전에 많은 사역을 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랑과 긍휼, 은혜와 축복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이런 것들을 얻고 나서 하나님을 어떤 태도로 대했느냐? 여전히 하나님을 피하고 멀리했으며 마음속으로 자주 의심하고 경계하고 반발하고 포기했다. 그는 왜 항상 사람에게 기대어 행복한 생활을 창조하려 했겠느냐?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을 바른길로 데려가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지 않았고 늘 자신의 길이 옳다고 생각했다. 만약 하나님이 그가 선택한 길과 그의 요구대로 그를 돕고 그가 목적을 실현하게 이끈다면 그는 받아들이고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를 선포해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 진리를 받아들여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 내게 한다. 이는 그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길을 걷고 자신의 삶을 살려 한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기대야지 하나님에게 기대면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관점만 고수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진다. 하나님은 진리이자 길이요, 생명이라는 사실, 사람은 너무도 심하게 패괴되어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 오직 하나님이 행한 모든 것만이 진리이며 모두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도록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을 아름다운 종착지에 데려가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이런 사람이 비로소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며 영원히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따를 수 있다.
방금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고, 사람에게 역사하는 여러 방식을 교제했다. 사람이 여기에 관념이 생긴다면 자주 성찰하고 반성하고 인식한 다음 바로잡아야 한다. 바로잡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이것이 관념과 상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대체 어떻게 했는지를 인식했다면 사람은 하나님에게 더욱 잘못되고 치우친 관념을 갖기 쉽겠느냐?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패역하고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여러 관념이 생기기 쉽다. 하나의 관념에서 다른 관념이 생기고, 거기서 또 다른 관념이 생기며 온갖 관념이 끊임없이 생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관념을 갖는 동시에 하나님을 계속해서 오해하고 또 끊임없이 반성한다. 그런 다음 또 부단히 진리를 깨닫는다. 이런 과정에서 점차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사람은 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겠느냐? 그는 무엇이 관념인지 모르고 자신 내면의 관념을 인식하지 못하며 자신의 관념을 반성하지도, 전혀 내려놓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관념을 고집하는 것만 중시할 뿐 하나님이 어떻게 했는지, 하나님 사역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전혀 이해하거나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패괴 성품 외에 또 다른 것이 생기고 그것은 사람이 구원받는 데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동시에 사람은 어떤 것들이 사람의 관념인지 더 자세하고 세세하게 인식해야 한다. 사람의 관념을 인식하고 해결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관념을 내려놓기 위한 것이겠느냐? 사람이 되도록 빨리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입하라고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고 하나님은 어떻게 한 것인지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네 상상대로 한다면 하나님이 너에게 하는 사역이 성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절대로 너에게 깨우쳐 주지 않고 명문 규정으로 어떻게 하라고 알려 주면 네가 그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일도 있는데, 너는 늘 하나님이 너를 감동시키고 깨우쳐 주길 기다린다. 그 결과 그 기다림 때문에 사역을 그르치고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하여 교체된다. 이는 무엇 때문이겠느냐? (관념 때문입니다.) 이제 보니 사람의 관념은 사람의 진입에 영향을 끼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로 영향을 끼치겠느냐? 작게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하는 데 영향을 끼치고, 크게는 사람의 올바른 선택에 영향을 끼쳐 사람이 잘못된 길에 들어서게 하기 십상이다. 사람은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을 오해하기 가장 쉽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사람을 책망, 훈계하고 심판, 형벌하는 것은 모두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고, 사람이 자신을 인식하고 진실로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일부러 자신과 대립하고 일부러 자신을 드러내 도태시키려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행하든 그는 하나님을 나쁘게 생각하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나아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을 바보로 대하기까지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바른길을 제시하여 진리를 실행하고 광명 속에서 살게 하지만 사람은 한사코 사탄 철학과 사탄 논리에 기대어 어둠 속에서 살려고 한다. 그러면 그가 걷는 길은 구원의 길이 아니다. 한사코 하나님과 반대로 하려 하니 너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점점 더 멀어지지 않겠느냐? 구원받는 길에서 점점 더 멀어지면 너는 철저히 도태될 것이다. 성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잠 10:21) 죽음은 심각한 일이겠느냐? 말세에 죽음은 심각한 일이 아니다. 멸망이야말로 심각한 일이다. 죽음은 멸망을 뜻하지 않는다. 하지만 멸망하면 필연적으로 결말이 없을뿐더러 영원히 죽는다. 과거에는 사람이 미련하여 죽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지금은 미련한 건 아무것도 아니다. 미련한 일을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죽음도 별것 아니다. 왜냐하면 죽는다고 반드시 멸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은 무엇 때문에 멸망하겠느냐? 사람은 고집과 횡포 때문에 멸망하는데, 이는 미련하여 죽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그러면 결말이 없다. 왜 고집과 횡포가 사람을 멸망에 이르게 한다고 하겠느냐? 이는 사람이 걷는 길과 관련된 문제이다. 고집은 어떤 성품이겠느냐? 강퍅함이다. 강퍅한 성품이 있으면 문제가 심각하다. 때때로 그는 깨닫지 못하여 그렇게 하려고 하지만, 깨달았음에도 그렇게 하려 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지 않을 때도 있다. 이 밖에 횡포도 성품 중 하나로, 막무가내인 것이다. 그 안에는 교만과 흉악이 있다. 이 두 가지 성품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결국 사람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 이게 단순한 일이겠느냐? 너희는 자신과 대조해 볼 수 있느냐? 교만하고 흉악한 성품이 사람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게 할 수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어느 누구든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 앞, 창조주 앞에서 하는 것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대로 사람을 판결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만하고 흉악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하는 일들은 어떤 결과를 불러오겠느냐? 왜 그것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라고 하겠느냐? 아마 다들 답을 알 것이다. 자, 이 이야기와 관련된 관념은 여기까지 다루겠다.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에 관해 아직 다 다루지 못한 게 있는지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념과 관련된 내용은 오늘 너희가 들은 것뿐이겠느냐?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 책망과 훈계, 사람을 드러내는 것,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 등을 다룬다면 어떤 내용과 관련 있겠느냐?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책망, 훈계하고 심판, 형벌하겠느냐? 어떤 사람이 시련과 연단에 임하겠느냐? 하나님이 이런 사역을 하고 이런 방식으로 사람에게 역사하는 데는 원칙과 범위가 있으며, 사람의 분량과 추구, 인성, 그리고 진리를 깨달은 정도를 근거로 한다. 오늘은 이를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어쨌든 하나님이 사람을 책망, 훈계하고 징계하며 사람에게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줄 때는 이 몇 가지 절차에 따라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는 원칙은 사람의 분량에 따라 어디까지 할지 정하는 것이다. 분량이라는 말이 너희에게는 다소 공허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주로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정도,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인지 여부,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정도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구분하면 대부분 사람이 지금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에 임했겠느냐? 아직 일러서 근처에도 못 간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보기만 해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방식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몇 가지 절차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각 방면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근거로 이 몇 가지 절차를 확정한다.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사람에게 역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절차와 원칙을 가지고 사역한다. 그는 너의 추구와 인성, 이해력, 그리고 네가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태도 등을 보고 이런 것을 근거로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고 사람을 어떻게 이끌지 확정한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살펴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하나님은 한두 가지 일을 근거로 대충대충 규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어떤 일을 행하든 그렇게 경솔하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시련을 주신 그 방식이 두려워요. 정말로 제게 임한다면 저는 아직 하나님을 증거할 수도 없는데, 만일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렇게 거두어 가신다면 저는 어떡하죠?” 걱정 마라.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대충 네게 행하지 않으니 두려워할 필요 없다. 왜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느냐? 너는 두려워하기 전에 먼저 사실을 통해 자신을 설득하고 자신의 분량을 살펴보아야 한다. 욥만큼 믿음이 있는지, 욥만큼 순종하는지, 욥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욥만큼 충성스럽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것을 가늠해 보고 만약 해당 사항이 한 가지도 없다면 너는 안심해도 된다. 하나님은 너에게 시련과 연단을 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의 분량이 닿지 않고 한참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에 대해서도 사람은 의심, 두려움, 회피, 경계 등을 포함해 관념과 상상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사람이 이런 것들과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는지를 철저히 인식한다면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념들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고, 사람은 진리 추구를 중시하며 하나님 말씀에 공을 들일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바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네가 하나님을 따를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네가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해야 한다. 색안경을 끼고 하나님을 바라보거나 소인배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늠해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 사역의 원칙이 대체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느 정도로 역사하는지, 하나님의 평가 기준이 무엇인지 등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것을 이해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네가 진리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포자기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이 모든 진실을 깨달은 뒤 더 착실하게, 마음 놓고 대담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이 공의로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하길 바란다. 네가 길 끝까지 걸어갔을 때 하나님이 너에게 준 기준에 이르고 구원받는 길에 들어선다면 하나님은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 책망과 훈계 측면에 대한 사람의 관념에 관해서는 우선 대략적으로 여기까지만 다루겠다. 세부적인 측면은 아직도 많다. 이런 세부적인 내용까지 명확히 말하려면 이 정도로는 부족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이 드러내고 표출하는 일부 실제 사례를 들어야 한다. 그 밖에 이런 실제 사례를 통해 너희가 사람의 관념이 대체 무엇인지 인식하거나 해독할 수 있도록, 이런 것들은 관념이고 비현실적이며 하나님이 행하는 원칙과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인물과 줄거리를 적절히 섞어 소소한 이야기도 좀 다루어야 한다. 하나님도 그러지 않는데 너는 무엇 하러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궁리하는 것이냐? 늘 자신의 관념과 상상 속에서 살면 너는 절대로 하나님의 요구대로 진리 추구의 길을 걷지 못하며, 늘 하나님의 요구와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다간 실행 길을 찾지 못하고 늘 속박받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이고, 곳곳에서 벽에 부딪혀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그렇게 전혀 순조롭지 않다가 종국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자격조차 갖추지 못할 것이다. 이 얼마나 서글프냐!
예전에는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 너희에게 진지하게 따지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제 진지하게 따질 때가 됐다. 지금은 아주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 일을 소꿉장난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온전케 하고 구하려는 결심을 내렸고 이 사역을 철저히 하려 한다. 어떻게 해야 철저히 하겠느냐? 각 측면의 진리를 모두 사람에게 알려 주어 분명히 깨닫고 치우친 길을 가지 않게 해야 한다. 네가 치우친 방향으로 걸으면 하나님은 너를 징계한다. 네가 자기 길로 치우칠 때가 많으면 바른길로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은 계속 너를 징계한다. 마지막에 하나님은 사역을 마쳤지만 네가 아직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 못했다면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너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 그때 사람은 가슴을 치며 통곡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는 데는 무엇이 가장 중요하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은 받아들인 후 진리를 구하고 일상생활과 연결 지을 수 있어야만 서서히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너는 설교를 들을 때 표면적으로 알아들으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알아들은 것은 그저 도리를 이해한 것일 뿐이다. 알아듣고 난 뒤 현실 생활 속에서 자신의 내적 상태, 자신의 진입과 연결 지어 자신을 인식하고 진리를 실행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이다. 이렇게 실행하지 않는다면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은 너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면 하나님도 너와 관련이 없게 된다.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너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2018년 10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