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측면의 말씀

발췌문 79

찬양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그분>을 부르고 나니까 속으로 어떤 느낌이 드느냐?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느냐? 누구든지 살아가면서 많은 고통을 겪지만 사람은 그 이유도 모르고, 사람이 이런 고통을 겪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도대체 그럴 가치가 있는지, 사람의 이런 삶의 방식이 도대체 옳은 것인지에 대해 아무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 사람은 어릴 때는 항상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성장한 뒤에는 열심히 공부해야 비로소 출세하여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른이 된 후에는 돈도 많이 벌고, 명예와 이익, 권세를 손에 쥐고 잘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또 늘 관리가 되어 사람들의 우러름과 숭배를 받으려고만 한다. 자식이 생긴 뒤에는 자손이 번창하여 대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계속해서 번영하고 발전하기를 바란다. 사람의 이 한발 한발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어째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느냐? 왜 사람은 모두 이렇게 살아가느냐? 사람의 삶에는 길이 없다. 어째서 길이 없다고 하느냐? 바로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자신이 한평생 무엇을 하러 온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러한 일들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째서 이렇게 바득바득 명예와 이익, 행복한 삶을 추구하면서 죽을 때까지도 뉘우치지 않을 수 있느냐? 그것은 바로 사탄에게 패괴된 사람은 잘못된 생각과 인생관이 생겨 이렇게 사는 것을 옳은 것이라고,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명예와 이익을 얻으면 곧 행복하다고 여기면서 그저 이런 신념으로 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한발한발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길로 미친 듯이 달려가지만, 결국에는 죽을 때까지도 행복을 얻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살아가는데, 이 세상에는 달리 갈 길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돈을 벌어 잘살고 싶어 한다. 돈이 없으면 고통스럽게 살고 돈이 있으면 많은 일을 성사시킬 수 있기 때문에 다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한다. 생활이 부유해지면 재산을 지키고 자식에게 상속하려고도 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공허하다는 것을 그 누구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은 모두 아쉬움과 의혹, 미련을 가지고 인간 세상을 떠난다. 사람은 이 한평생을 살면서 가난한 자도 있고 부유한 자도 있으며, 수명이 긴 사람도 있고 짧은 사람도 있다. 서민도 있고 고관대작도 있는데 온갖 계층의 사람이 다 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하나다. 바로 야심과 욕망, 그리고 사탄 성품에 기대어 명리를 다투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고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은 왜 다 이렇게 살아갈까? 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정말 없는 건가? 사람은 단지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건가? 죽고 나면 또 어디로 가는 걸까? 대대로 그 많은 사람들은 왜 다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걸까? 이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인류는 스스로 어디에서 왔는지, 이 한평생의 사명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누가 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주재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사람은 한 세대 한 세대 왔다가 또 한 세대 한 세대 가 버린다. 대대로 사람은 모두 이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죽는다. 같은 방식으로 왔다가 같은 방식으로 가 버리며 진정한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과 길을 찾지 못하고 이 일에 관해 진리를 구하는 사람도 없다.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 모두 탐색하고 기다리며 앞으로의 인류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하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이다. 결국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주관하는 그분이 누구인지, 모든 것을 주재하는 그분이 도대체 존재하긴 하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은 이 답을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마다 이렇게 기대하고 날마다 이렇게 견디며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사람이 만약 이 모든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안다면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길이 생긴 것 아니겠느냐? 이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사람의 바람과 갈망에 기대어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이 왜 살아가는지, 또 왜 죽는 건지, 이 세상을 누가 주관하는지 깨닫고 나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그분이 바로 창조주라는 답을 얻고 나면 사람은 드디어 행할 길이 생긴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진리를 구하고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며 더 이상 바람과 갈망에 기대어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지 않아도 된다. 만약 사람이 왜 살아가고 또 왜 죽는 건지 답을 찾았다면 사람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은 해결되지 않겠느냐? 그럼 사람은 해탈하지 않겠느냐? 사람은 진정으로 해탈하고 완전히 자유롭고 해방되는 것이다.

너희는 찬양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그분>을 듣고 나서 마음속으로 무엇을 사색해야 하겠느냐? 인류가 왜 살아가고 왜 죽는 건지 알게 되면, 이 세상 만물의 주재자, 즉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그분이 도대체 누구이며 어디에 있고 인류에게 그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안다면, 이런 일들을 모두 깨닫는다면 인류는 창조주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게 된다. 창조주에게 어떻게 경배하고 순종해야 하는지 알게 되고 마음속에 의지할 곳이 생겨 평안하고 행복해지며 이렇게 괴롭고 고통스럽게 살아갈 필요가 없어진다. 결국 사람은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살아가는 방식도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길을 걷는지가 사람이 이 한평생 행복할지, 아니면 비통할지를 결정한다. 사람은 이를 깨달아야 한다. 이 찬양을 듣고 나서 사람은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인류는 모두 이런 규칙 속에서 살아가는구나. 고대의 사람도 예외 없고, 현재의 사람도 예전대로 여전히 이러한 방식들을 바꾸지 않았구나. 그럼 이 인류 가운데 한 분의 주재자, 전설 속의 한 분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는 것 아닐까? 만약 하나님을 찾고 나면,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그분을 찾고 나면 인류는 마음속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중요한 건 인류의 뿌리를 찾는 거야. 이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뿌리를 찾고 나면 사람은 다른 경지의 삶을 살 수도 있어. 만약 이 뿌리를 찾지 못하고 인류가 계속 이대로 살아간다면 인류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사람이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인류가 깊이 패괴되었다는 것을 알더라도 뭘 어찌할 수 있겠느냐? 패괴의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구원받을 길이 있겠느냐? 네가 좋게 변하고 싶고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고 싶다고 한들 가능하겠느냐? 너는 행할 길이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식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네가 자식을 위해 살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들 그럴 수 있겠느냐? 금전과 명리를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바쁘게 지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네가 이러한 것들을 위해 분주히 지내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그럴 수 있겠느냐? 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길을 걷고 있고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가 없다. 네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지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의 근원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이 참하나님을 믿지 않고 진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의 정신적 지주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정신을 어느 곳에 의지하겠느냐? 단란한 가정, 행복한 혼인, 물질적 향락, 금전, 명리, 지위, 감정, 사업, 그리고 후손의 행복, 이런 일들에 의지한다. 모든 사람의 정신적 지주는 다 이러한 것들 아니겠느냐?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에게 의지하고 자식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사업과 혼인, 사회적 지위와 명리에 의지한다. 그래서 생겨나는 삶의 방식이 모두 같은 것이다. 모두 사탄의 권력과 통제 아래에서 자기도 모르게 명리를 얻기 위해, 자신의 앞날, 사업, 혼인, 가정, 후손, 육적 향락, 이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바쁘게 지내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길이겠느냐? 인류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바쁘게 지내고 사업이 아무리 성공했다 한들, 가정이 아무리 행복하고 가족이 아무리 대가족이라 한들,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한들 인생의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겠느냐? 인류가 명리와 세상을 좇고 사업을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하고 인류 운명을 주재한다는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이는 불가능하다.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든, 어떤 길을 걷든 만약 그가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가 걷는 길은 잘못된 길이고 올바른 길이 아니며 비뚤어진 길이자 사악한 길이다. 너의 정신적 지주가 만족스럽든 그렇지 않든, 너의 정신적 지주가 어디에 있든 그건 모두 진정한 신앙이 아니고 인생의 올바른 길이 아니다. 진정한 신앙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들이 바로 인생의 올바른 길이며 사람이 추구해야 할 진리이자 생명이다. 인생의 올바른 길을 걷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 말씀의 인도하에 진리를 깨닫고, 선악을 분별할 줄 알고,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알고, 하나님의 주재와 전능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했을 뿐 아니라 우주 만유의 주재자라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하나님의 모든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 그러면 인생의 올바른 길에 들어선 것이다. 사람이 인생의 올바른 길에 들어서면 사람이 왜 살아가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빛 속에서 사는 것이고 비로소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다.

너희는 지금 왜 살아가고 있느냐? 너희는 알고 있느냐?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맡기신 일을 완수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하나님이 맡긴 일을 완수하려는 것은 너의 주관적인 염원이자 네가 선택한 인생의 길이다. 이는 옳은 것이다. 그러나 깨달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사람이 인간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안배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은 다 사명을 가지고 인간 세상에 온 것이지 그냥 온 것이 아니다. 모두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하며 지배한 것으로, 조금도 틀림이 없다. 모든 사람은 인간 세상에 와서 그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하든 다 이 세상에서 하나의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역할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그가 이 세상에서 한 가지 임무를 완수하고 어떤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결혼하여 아이를 하나 낳으면 이 세 사람은 하나의 완전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 가정에서 아내는 그녀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살아간다. 즉, 아이와 남편을 잘 보살피고 이 집을 잘 보살피는 것이다. 그럼 아이는 왜 살아가겠느냐? 그는 무슨 역할을 하겠느냐? 그는 한 가정의 후손으로서 이 가정의 대를 이은 것이며 이 가정의 다음 세대에 속한다. 아이가 등장함으로써 이 가정은 완전해졌다. 이는 그가 우선적으로 하는 역할이다. 이 아이는 아들이든 딸이든 자신만의 사명이 있다. 앞으로 그의 운명이 어떨지, 성장한 뒤 어떤 학력과 기술, 특기를 가질지, 어떤 일을 하고 언제 하나님을 믿을지, 하나님을 믿은 후 어떤 본분을 이행할지 이 한발 한발이 하나님이 안배하고 계획해 놓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한 가정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그의 운명 속의 모든 발걸음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안배해 놓은 것이다. 모두 하나님이 미리 안배해 놓은 것이니 이 속에 진리가 있다. 이는 사람이 왜 살아가는지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네가 음악을 공부하는데 그럴 조건과 가정 환경을 갖추고 있다면 음악을 공부하는 것은 네가 선택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네가 이 환경에서 태어나 환경의 영향을 받아 하나의 특기를 배운 것이다. 네가 이런 사명 하나를 완수한 것은 무엇으로 인한 것이겠느냐? 하나님의 예정으로 인해 완수한 것이지 너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럼 이 일을 완수한 것은 창조주가 지배한 결과가 아니겠느냐? 지금까지 너는 본분을 이행했고 네가 배우고 아는 것을 본분을 이행하는 데 활용했는데 이는 누가 결정한 것이겠느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결정한 것이지 너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럼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지금 너는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다 마찬가지다. 모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네가 자각하고 있든 자각하지 못하고 있든, 의식이 있든 의식이 없든지 간에 말이다. 사람은 마치 바둑돌과 같다. 하나님이 너를 어디에 두고 네게 무엇을 하도록 하며 네가 어디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도록 하든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배라는 방면에서 보면 사람은 사실 모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위해, 하나님의 경영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데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네 능력이 아무리 크고 은사가 아무리 많다 한들 너는 하나님이 너에게 예정한 운명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누구든 살아가며 이 범위를 뛰어넘을 수 없고 창조주가 사람에게 설정하고 안배해 놓은 운명과 일생을 뛰어넘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사람 자신은 사실 전혀 알지 못한다. 사람은 모두 저절로,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지배와 주재하에 지금까지 걸어온 것이다. 객관적으로 이 일을 볼 때 사람은 무엇을 인식했느냐? (사람의 삶과 죽음은 스스로에게 결정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재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주관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인식할 수 있다면 성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려면 어떤 진리들을 깨달아야 하겠느냐? 네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든, 너의 자질, 사고 능력, 사상 각 방면이 어떻든 결국 너의 운명, 너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지배 속에 있는 것이다. 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사람이 선택해야 하는 길은 바로 자신의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안배했는지, 어떻게 인도했는지, 앞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할 것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깨닫고자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가 주재하고 지배한 운명의 궤적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다투거나 가로채거나 빼앗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의 의도, 하나님이 너에게 안배한 이 모든 것을 연구하고 그에 대항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떳떳하지 않겠느냐? 이로써 ‘사람은 왜 살아가고 왜 죽는 걸까’라는 의혹에서 벗어나고 ‘산 사람은 또 죽은 사람의 역사적 비극을 재연하며 살아간다’라는 고통에서 벗어난다. 사람은 이 한평생 이렇게 살아가는 것에 별로 어려움이 없고 생명의 원천을 찾았다고 느끼며 사람의 운명이란 무엇인지 알게 되고 사람이 창조주의 안배에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어 더 이상 반항하지 않는다. 이렇게 살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머리에 기대 상상하거나 자신의 힘에 기대 분투하지 않으며 행복을 쟁취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모두 우매하고 완고한 방법이라는 걸 알고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으며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할 줄 알게 된다. 이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줄인 것이냐! 너희는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느냐? 자신이 지금 아주 억울하게 재능을 썩히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스스로의 특기와 본분은 하나님이 주고 안배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아주 억울하고 고작 이 정도의 본분을 이행해 봤자 자신의 포부를 펼치지 못한다고 느끼느냐? 사실 자신의 목표는 꽤 원대한데 지금 본분을 이행하는 이 장소에서는 그 목표를 다 펼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야심과 욕망은 사라졌고 사치스러운 요구도 사라졌으며 버려야 할 것도 버릴 수 있게 됐으니 이제 진리를 깨닫고 패괴 성품을 해결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사람이 걷는 길, 나아가는 방향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사람은 왜 살아가고 또 왜 죽는 걸까?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그분은 도대체 누구일까?’와 같은 질문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진다. 사람이 추구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오직 창조주 앞으로 돌아와 성실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이행해야 할 본분을 제대로 완수해야 한다. 이렇게 살아야만 만족스럽고 떳떳하며 별다른 고통이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삶의 의미이고 가치이다.

발췌문 80

사람은 모두 사람의 운명을 하나님이 주재하고 사람의 일생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만약 사람의 일생이 어느 시간, 어느 시기에 어떤 큰일들이 발생하든 모두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해 놓은 것으로, 사람이 스스로 계획하고 안배할 수 없다는 것, 사람이 아무리 싸워도 운명과 싸워 이길 수 없으며 받아야 할 고통은 조금도 덜 수 없다는 것을 진실로 느낀다면, 네가 이런 느낌이 들 때는 진실한 믿음이 생긴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십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어요.”라고 하는 네 말도 훨씬 더 실제적일 것이다. 하나님의 주재,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느끼는 것은 섬세한 일이고 체험하는 일이다. 만약 체험하지 않으면 명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사람이 많이 겪고 많이 체험하면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 옛말에 ‘나이 오십이면 지천명’이라 했다. 지천명이란 무슨 뜻이냐? 사람이 막 세상을 접하기 시작하는 20대는 어리고 경솔하며 아무것도 모른다. 사람의 이 한평생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늘 운명에 맞서려 한다. 늘 스스로 능력과 특기가 있다고 생각하며 혼자 힘으로 분투하여 출세하고, 관직에 오르고,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실패해도 굴하지 않고 언제나 다시 분투하고 쟁취하려 한다. 50대가 되면 돌이켜 보며 생각한다. ‘아이고, 30여 년 동안 세상을 살아오면서 갖은 고생을 다 하고 참 쉽지 않았어! 가정도, 일도, 자식을 키우는 것도, 무엇 하나 계획하고 생각한 대로 된 게 없구나. 이게 다 운명이지!’ 이게 바로 지천명인데, 더 이상 운명과 맞서지 않는 것이다. 나이 오십이면 지천명이라는 말은 사실 사람이 50살까지 살면서 많은 벽에 부닥친 후에야 운명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사람이 타고난 운명을 알고 나면 더 이상 운명과 맞서지 않게 된다. 그렇지만 인생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인류를 주재한다는 게 무엇인지,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런 일들을 사람이 꿰뚫어 보았느냐? 이방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 이런 일들을 간파하지 못한다. 그들은 기껏해야 운명을 받아들이고, 또한 운명에 대항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되어 자손이 운명과 맞서는 것을 보면 이렇게 말한다. “순리대로 살아야지. 자손들도 저마다 복이 있으니 관여하지 말자. 그들도 50살이 되면 더 이상 운명과 맞서지 않을 거야. 사람은 대대로 모두 이렇게 살아왔어. 다들 운명과 맞서다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타고난 운명을 알게 되면 훨씬 얌전해질 거야. 그렇게 날뛰지도 제멋대로 굴지도 않을 거고, 사람도 훨씬 안정적이 될 거야.” 이방인은 기껏해야 여기까지 볼 텐데 그들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나이 오십이면 지천명이라는 말이 사람이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이겠느냐? 사람이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한다.”라고 믿는 것이 하늘의 뜻에 순종한다는 뜻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 믿는 것만으로는 소용없다. 이러한 것들을 아는 것은 단지 운명과 맞서지 않게 됐다는 뜻이지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려면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 말씀의 심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에게서 온 진리와 생명의 공급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은 이 모든 것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70, 80살까지 살더라도, 100살까지 살더라도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사람은 왜 살아야 하고 왜 죽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 세상에 와서 한 번 사는데 몇십 년을 살아도 사람이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끝난다. 죽을 때도 만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일 저 일 걱정하면서 결국 아쉬움을 간직한 채 떠나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다음 생에 환생하더라도 여전히 이렇게 살아가면 불쌍하지 않으냐? (불쌍합니다.) 대대로 사람은 이렇게 불쌍하게 왔다가 가고, 갔다가 또 온다.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고 결국 또 새로 태어난 세대가 그들을 떠나보낸다. 이렇게 이어지고 순환하며 흐리멍덩하게 살면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인 너희는 다르다. 너희는 말세에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와 사람을 구원하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나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목양과 인도를 받을 수 있게 됐다. 너희는 수많은 비밀과 진리를 깨달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패괴 성품이 정결해지고 변화했다. 너희가 얻은 것은 너무나 많은데, 역대 성도를 뛰어넘는다. 이는 가장 복된 일이 아니겠느냐? 너희는 가장 복 있는 사람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몇 년 체험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이 인류를 경영하는 근본 취지와 하나님이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싶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 사는 것이 편안하고 충실하다고 느낀다. 하나님은 너를 살아가게 하고, 너는 하나님을 위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기 위해 살아간다. 이렇게 살아가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살아가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깨닫지도 못한 채 단지 육을 위해 살아간다면 그것은 조금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 너희는 지금 모두 진리를 향해 노력하고 있고, 점점 더 양심과 이성을 가지고 살아가며 갈수록 사람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점점 더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줄 알게 되며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 하나님을 증거할 수도 있게 됐다. 이렇게 살아가면 마음속은 평안과 즐거움으로 충만해진다. 이는 가장 의미 있는 인생이고, 인류 전체에서 오직 너희만 이런 복을 받았다. 이 광활한 세상에서, 인류 전체에서 하나님은 오직 너희를 선택하여 너희가 이 마지막 시대에 큰 붉은 용 국가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했다. 너희는 하나님의 마음에 든 자들이고,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자들이다. 이는 가장 복된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너무나 복된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긴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본분을 이행하지는 못한다. 이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본분을 이행하더라도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힘을 보태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하나님과 거래하며 복을 얻기를 기대한다. 언젠가 진리를 깨달으면 편안하게 기꺼이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자신의 생명과 하루하루를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다. 그건 사실 너희가 이렇게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고 하나님이 너희에게 이 기회를 준 것이다. 네가 살아가며 본분을 이행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도록 하나님이 기회를 준 것은 가장 의미 있는 일이다. 너희는 이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젊은 너희가 이런 열악한 환경과 조건에서, 재난 가운데서도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을 따르고 증거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은 기회다! 하나님은 말세에 성육신하여 이토록 많은 진리를 선포해 인류를 철저히 구원함으로써 인류가 진리를 얻고 정결함을 얻도록 했다. 이는 정말 흔치 않은 기회다. 시간은 많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갈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이 기회를 잘 잡아서 얻어야 할 진리는 모두 얻어야 한다. 이는 가장 큰 복인데, 역대 성도의 복보다도 더 큰 복이다.

발췌문 81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최소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한 내용이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막 14:33)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게 어떤 뜻이겠느냐? 바로 가정, 직장, 세속적인 모든 얽매임을 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쉽겠냐, 쉽지 않겠느냐? 너무나 쉽지 않다. 만약 의지가 없으면 절대로 도달할 수 없다. 버리려는 의지가 있으면 당연히 고생할 의지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만약 고생을 견디지 못하면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가정을 버리고 가족을 멀리하지만 밖에서 한동안 본분을 이행하다 보면 집을 그리워한다. 도저히 참지 못하면 몰래 집에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와 본분을 이행한다. 어떤 사람들은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하다가 명절을 쇨 때가 되면 가족을 그리워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밤에 남들이 잘 때 몰래 울기도 한다. 다 울고 나서 다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는 기분이 많이 나아져 계속 본분을 이행한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가정을 버릴 수는 있지만 큰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데, 만약 육적 가족에 대한 감정도 떨쳐 버리지 못하면 어떻게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비록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며 직장과 가정도 모두 버렸지만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린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어떤 사람은 은혜와 축복을 얻기 위해서, 또 어떤 사람은 바울처럼 면류관과 상을 얻기 위해서다. 오직 소수 사람만이 진리와 생명을 얻어 구원받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 그럼 무엇을 추구해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겠느냐? 물론 진리를 추구하고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부합하며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사람이 만약 세상과 금전을 내려놓지 못하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분명 얻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비록 모든 것을 버리고 본분을 이행하긴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늘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한다. 이렇게 몇 년 대충대충 살면서 체험 간증이 조금도 없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명리와 지위만 좇으며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더더욱 진리를 얻지 못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저 여유롭고 시간 날 때만 본분을 좀 이행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사람이 진리를 쉽게 얻을 수 있겠느냐? 내가 보기엔 쉽지 않다. 진리를 얻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고생을 많이 하고 대가도 많이 치러야 한다. 특히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의 고통을 체험해야 할 뿐 아니라 책망과 훈계의 고통도 겪어야 한다. 이러한 고통을 모두 받아야 한다. 수많은 고통을 받아야만 비로소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이 기간에 얼마나 많이 기도하며 진리를 구하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에게 통회하고,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을 수 있을지, 얼마나 많은 영적인 전쟁을 치러야 사탄을 이길 수 있을지, 이러한 체험 과정이 얼마나 걸리고 몇 년을 겪어야만 비로소 진리를 얻고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지는 너희가 베드로의 체험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것이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겠느냐? 모든 것을 버리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이 “모든 것”은 그저 외적인 일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 가족, 친구, 그리고 직업, 임금, 재산, 장래, 이런 것들 외에 사람의 사상과 정신 방면의 지식, 학문, 일을 바라보는 관점, 생존 법칙, 육적 선호도 포함한다. 그리고 사람이 추구하고 동경하는 것, 예를 들어 명리, 지위 등도 있다. 주로 이런 것들을 포함하는데 이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의 내용이다. 외적인 것은 단번에 쉽게 버릴 수 있지만 사람이 마음 깊이 좋아하는 것, 추구하는 것, 굳게 지키는 것은 모두 사람 마음속으로 가장 아끼고 중요하게 보는 것으로,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할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은 버리기 가장 어렵다. 지금 대다수 사람이 버릴 수 없는 것은 주로 마음속에서 이런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사람이 가장 중시하고 아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명리와 지위, 부귀영화, 그리고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사업,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물건 등이다. 이는 사람의 모든 것이고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다. 한 은행장이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고, 하나님이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려고 결심했을 때 은행장이라는 이 지위 때문에 계속 망설였다. 마음속으로 ‘은행장이라는 지위는 소중한 거야. 돈과 권세를 다 가질 수 있잖아.’라고 생각했다가 ‘하나님을 믿으면 진리와 영생을 얻을 수 있으니 역시 이게 중요하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싸움은 계속되었다. 은행장을 하고 싶다가도 하나님을 믿고 싶기도 했고, 금전을 원하다가도 진리를 얻고 싶기도 했으며, 지위를 내려놓지 못하다가도 영생을 얻고 싶기도 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흔들렸다. 은행장이라는 지위는 그의 마음속에서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에 그는 늘 내려놓지 못했다. 마음속 싸움은 몇 달 동안이나 이어졌고, 그는 결국 아마도 마지못해 지위를 내려놓은 것 같다. 그에게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게 너무나 어려웠다. 비록 그는 은행장이라는 지위가 덧없이 금방 사라져 버릴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려놓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의사, 변호사, 임원으로서 임금도 높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내려놓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싸움을 몇 개월이나 벌여야 내려놓을 수 있다. 만약 몇 년을 싸워야 내려놓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사역이 다 끝났을 텐데, 그때 내려놓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재난 속에 떨어져 이를 갈며 슬피 울 수밖에 없다. 만약 네가 제일 중요시하는 것마저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본분을 이행하며 진리를 추구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너는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건 무슨 뜻이겠느냐? 바로 네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며 모든 것에서 하나님에게 순종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의 주인이자 너의 하나님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것이다. 앞으로 어떤 재난이 닥치든 너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살아남을 수 있으며 너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네가 그를 따르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거나 너를 온전케 하겠다고 너에게 약속을 준다. 그러나 그 첫걸음으로 너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나라의 훈련에 몫이 있다. 만약 네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다면 하나님은 너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만약 너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네가 구원을 받고 싶고 하나님의 약속과 온전케 함을 얻고 싶다고 해도 가능하겠느냐? 불가능하다. 네가 하나님의 칭찬을 얻고 싶다면 우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어야 한다. 네가 모든 것을 버리고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면, 본분을 이행할 때 진리를 구하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진실한 체험 간증이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일 자격을 갖춘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를 수 없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조차 없는 것이고, 너는 하나님의 축복, 그리고 약속과 조금도 관련이 없는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비록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있지만 그들이 반드시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진리를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여가 시간에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것이 제한적이어서 진리를 얻는 것이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로만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본분은 이행하지 않고 세상을 추구하기까지 하는데 이게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겠느냐?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겠느냐? 예수의 제자들을 보면 어부나 세관도 있었고 농민도 있었다. 예수가 그들을 불러 “나를 좇으라”라고 말하자 그들은 수중의 일을 내려놓고 주를 따랐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 문제를 고려하지도, 앞으로 세상에서 살길이 있는지의 문제도 고려하지 않고 바로 예수를 따랐던 것이다. 베드로는 몸과 마음을 다해 예수의 부탁을 마지막까지 완수하고 자신의 본분을 지켰다. 그는 일생 동안 하나님 사랑하기를 추구했고 결국 하나님께 온전케 되었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지도 못하면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데 이는 허황된 꿈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믿을 때는 열성만으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방식,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온전케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이 일에 대해 사람이 어떤 태도와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 밖에 사람이 하나님을 따를 때는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반드시 알아야 하는데, 이는 사람이 진리를 얻을 수 있는지의 문제와 관련 있다.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가리키며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진리를 얻는 핵심이다.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실행할 줄 모르면 진리를 얻을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을 때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고, 진리를 실행해야만 진리를 완전히 깨달을 수 있다. 진리를 완전히 깨달아야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두 진리를 실행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성과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든 하나님은 누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인지, 누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인지, 누가 진실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인지 본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실행해야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어떻게 하는지, 진리를 추구할 때 어떤 성과에 도달해야 구원을 받은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 등을 우선적으로 알아야 한다. 예전에는 이런 진리들을 깨달은 사람이 없어 모두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하나님을 믿었으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 복과 면류관, 그리고 상을 얻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위배했고 참도에서 벗어나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 따라서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어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이전에 가지고 있던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특히 사람의 종교적 관념과 상상, 신학적 관점은 모두 황당하다. 그것은 진리와 적대되는 것이고 사이비 같은 황당무계한 논리다. 하나님은 종교인의 믿는 법을 전혀 칭찬하지 않는다. 지금 사람이 만약 여전히 종교인의 믿는 법을 지키고, 복과 면류관, 그리고 상을 얻기를 추구하며, 여전히 이런 태도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진리 생명을 얻을 수 있겠느냐? 절대로 얻을 수 없다. 사람은 대체 어떤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느냐? 우선 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네가 만약 진리를 구하지 않고 여전히 관념과 상상에 기대 하나님을 믿는다면, 여전히 명리, 지위, 금전, 세상을 추구한다면 너는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결국 목숨을 잃게 될 것인데, 그게 가치가 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돈을 충분히 벌고 사업에 성공하여 제 이상과 꿈을 실현한 다음에 하나님을 제대로 믿겠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기다리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이 너를 기다리겠느냐? 네가 지금 내려놓지 못하면 하나님도 너에게 바로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지 않지만 너는 내려놓기를 실행해야 한다. 도저히 내려놓지 못하겠다면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인도해 달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은 협력하여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본분을 이행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실은 선행을 예비하기 위해서다. 설령 마지막에 완전히 온전케 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너는 선행을 어느 정도 예비하여 하나님이 상선벌악할 때 하나님에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젠가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고 하나님이 상선벌악을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선행을 꺼내 놓으라고 할 때 네가 선행이 조금도 없으면 너는 끝난 것이다. 분명 징벌받을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하나님을 믿은 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네가 이행한 가장 가치 있는 본분이 고작 여가 시간에 복음을 전해 사람 몇 명을 얻은 것뿐이고, 네가 복음을 전한 그 몇몇 사람들이 굳게 설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면 이를 하나님에게 얘기할 수 있겠느냐? 틀림없이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어떤 성과가 있어야 하나님에게 얘기할 수 있을지, 어떤 체험 간증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이 그를 따르는 자로 너를 인정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단순히 하나님이 이번에 성육신한 사실을 인정하는 데만 만족하고 마음속으로 말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보려는 것은 너의 진실한 체험 간증이고 네가 하나님 사역에 순종해 얻은 성과이다. 하나님이 마지막에 검증하려는 것은 네가 진리를 얻었는지 얻지 못했는지,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 그 사실이다. 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만약 네가 교회에 이름만 걸어 놓거나 단지 본분만 이행하면서 진리는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몇 년 믿었는데도 체험 간증이 전혀 없으면 하나님이 너를 인정할 수 있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너를 인정하지 않으면 너는 여전히 하나님 집 밖에 있는 사람이다. 만약 네가 단지 말로만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네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서 결국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너는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진리를 얻는 것은 사람의 상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수많은 환난과 고통, 시련과 연단을 겪어야만 진리를 얻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이런 사역을 체험하고도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얼마 되지도 않는 여가 시간에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 하나님 사역을 체험할 수 있겠느냐? 네가 집에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떻게 체험하겠느냐? 네가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체험하겠느냐?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조건이다. 만약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면 너는 절대 진리를 얻을 수 없고, 진리를 얻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이는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발췌문 82(형제자매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

(저는 본분을 이행할 때 아직도 정에 얽매입니다. 늘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본분 이행에 지장을 받습니다. 지금은 내적 상태가 조금 좋아졌지만, 아직도 가끔은 큰 붉은 용이 가족들을 잡아가서 저를 위협할까 봐 걱정되고, 제가 굳게 서지 못할까 봐 두렵습니다.) 지금 네가 하는 걱정은 기우다. 그런 일이 생각날 때는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어떤 상황이 임하든 그것이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임을 알아야 하며,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 너에게 닥친 일에서 진리를 구하고 굳게 설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사람이 배워야 할 공과다. 너는 늘 생각해 봐야 한다. 그동안 하나님이 너를 양육하고 목양한 일을 너는 어떻게 체험했느냐? 네 실제 분량은 어떻게 되느냐? 어떻게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하느냐? 이 문제들을 잘 생각해 봐야 한다! 큰 붉은 용이 너를 위협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면서 어째서 진리 방면에서 어떻게 진입할지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냐? 어째서 진리를 위해 고민하지 않는 것이냐? (그런 생각이 들면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언젠가 정말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죽어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제 분량이 작아서 이겨 내지 못할까 봐 두렵습니다.) 너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제 분량이 작아서 이겨 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죽을 만큼 두려우니 제발 그렇게 하지 마시고, 제가 분량이 생기면 그때 그렇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너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지금 분량도 작고 신심도 작아서 내심 일이 닥칠까 봐 두렵습니다. 사실 만사 만물이 모두 당신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아서 저 자신을 당신 손에 맡기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패역입니다! 이제는 당신 안배와 지배에 순종하겠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하시든 제 마음은 당신을 증거하기 원하고, 당신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굳게 서서 증거하기 원합니다. 그러니 당신의 뜻대로 하시길 바랍니다.” 네가 하려는 말, 네 의지를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한다. 그러면 참된 신심이 생길 것이다. 이런 기도마저 할 용기가 없다면 네 믿음이 얼마나 작다는 말이냐! 자주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꼭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태도와 의지를 밝히면 하나님은 열납할 것이다. 하나님이 열납할 때 너는 속으로 이런 일에 교란되거나 얽매이지 않게 된다. ‘남편이고, 자녀이고, 가정이고, 재산이고, 다 하나님 손안에 있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우주 전체가 다 하나님 손안에 있는데,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 아니겠어? 내가 걱정한들 무슨 소용이야? 나한테는 결정권이 없어. 그럴 능력도 없고, 가족을 지켜 줄 수도 없어. 가족의 운명, 가족의 모든 건 다 하나님 손안에 있는 거야!’ 너는 신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한편, 각오를 단단히 하고 마음을 다잡아 하나님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면 네 내적 상태가 달라지고, 뒷일에 대한 염려가 사라져 걱정하지 않게 되고, 무슨 일을 하든 조심스럽고 우려가 앞서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남들은 다 적진으로 돌격하는데 너만 뒤에 숨어서 도망칠 궁리를 한다면, 그건 겁쟁이가 아니냐?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나라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는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의연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약하게 벌벌 떨면서 이것저것 걱정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 내적 상태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걱정하고, 또한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는다면, 너는 그런 내적 상태에 얽매이고 속박당해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마음과 뜻, 힘을 모두 기울여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 하는데, 그럴 수 있겠느냐? 너는 마음을 모두 기울이지 못한다. 그것은 네 마음이 본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1할만 마음을 기울여도 잘한 셈이다. 마음을 모두 기울이지 못하는데, 어떻게 힘과 뜻을 모두 기울이겠느냐? 네 마음이 본분에 있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려는 바람이 조금밖에 없으니 마음과 뜻을 다하여 제대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너에게 진리를 실행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필연적으로 가정과 정에 얽매여 손발이 묶이고 생각과 마음이 통제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진리와 하나님 요구에 이르지 못한다.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지만 힘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니 너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 첫째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고, 둘째는 피조물이 서야 할 위치를 알아야 하고, 자신이 가져야 할 의지와 태도를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한다. 너에게 이런 태도가 없으면 안 된다. 왜 남들은 이런 걱정이 없느냐? 설마 남들은 가족이 없고 이런 어려움이 없는 것이냐? 사실 누구나 육과 가정에 얽매인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 해결할 수 있다. 한동안 진리를 구해 이런 육적인 감정을 확실히 간파하고 마음속으로부터 내려놓았으니, 이런 것들이 그에게는 더 이상 어려움이 아니다. 그는 더 이상 그것에 통제되거나 얽매이지 않고, 본분 이행이 그 때문에 지장을 받지 않게 되면서 자유로워졌다. 성경에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막 14:33). 모든 걸 버린다는 것이 무엇이냐? ‘모든 것’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지위, 명예와 이익, 가족, 친구, 재산 등 이런 것이 다 ‘모든 것’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네 마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무엇이냐? 누군가는 자녀이고, 누군가는 부모이고, 누군가는 금전이고, 누군가는 지위나 명예, 이익이다. 네가 이런 것을 소중히 여긴다면 그것에 통제되지만,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철저히 내려놓는다면, 거기에 통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네가 그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는지,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달렸다.

너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어느 시기, 어느 단계에서 사역하든 모두 일부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이들이 하나님 사역에 협력하거나 복음 전파에 협력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일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정해 놓은 모든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겠느냐? 누구나 사명이 있고, 책임이 있고, 하나님이 맡긴 일이 있다. 하나님이 너에게 일을 맡기면 그것은 곧 네 책임이 된다. 너는 이 책임을 짊어져야 하며, 그것이 곧 네 본분이다. 본분이란 무엇이냐? 하나님이 너에게 준 사명이다. 사명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맡긴 일이 곧 사람의 사명입니다. 사람은 평생 하나님이 맡긴 일을 위해 살아야 하고, 마음속에는 그 일만 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맡긴 일이 바로 사람의 사명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인간 세상에 온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맡긴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네가 이번 생에서 출세하고 돈 벌고 잘사는 데만 열중하고, 화목한 가정, 명예와 이익, 지위만 추구해서 사회적으로 지위도 생기고, 집안도 잘되고, 가족들도 편안하게 지낸다고 해 보자. 그런데 정작 하나님이 너에게 준 사명은 거들떠보지 않는다면, 네 일생은 살 가치가 있느냐? 죽어서 하나님께 뭐라고 보고할 것이냐? 제대로 보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가장 큰 패역이고, 가장 큰 죄과다! 지금 너희 중 누가 하나님 집에서 우연히 본분을 이행한 것이냐? 어떤 배경에서 나와 본분을 이행하든 모두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아무나 몇 명 찾는다고 해서 그들이 이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정해 놓은 것이다. 정해 놓았다는 것은 어떤 뜻이냐? 자세한 내용은 어떻게 되느냐?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전체 경륜 안에서 일찍부터 계획해 놓았다는 뜻이다. 네가 몇 번 인간 세상에 올지, 말세에 네가 어느 집안, 어느 가정에서 태어날지, 네 가정이 어떤 조건일지, 네가 남자일지 아니면 여자일지, 어떤 특기가 있고 교육 수준이 어떨지, 네 말주변이 어떻고 자질과 외모가 어떨지, 네가 몇 살에 하나님 집에 와서 본분 이행을 시작할지, 언제 어떤 본분을 이행할지, 하나님은 일찍부터 하나하나 정해 놓았다. 네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네가 전생에 여러 번 인간 세상에 왔을 때 하나님은 네가 마지막 단계 사역에서 이행해야 할 본분을 모두 안배해 놓았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네가 지금 여기서 설교를 듣는 것도 하나님이 정한 일이다. 그건 사소한 일이 아니다! 그 밖에도 네 키가 얼마이고, 생긴 건 어떻고, 눈은 어떤 모양이고, 몸집은 어떻고, 건강 상태는 어떻고, 나이는 몇이고어떤 경력이 있고, 어느 방면 본분을 감당할 수 있고, 어느 방면에 자질과 재주가 있는지 등은 하나님이 일찍부터 너에게 정해 놓은 것이지 지금 안배한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일찍부터 네게 정해 놓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너를 쓰려고, 너에게 이 일과 사명을 맡기기 전부터 너란 사람을 예비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네가 도망치려 해서야 되겠느냐? 딴마음을 품어서야 되겠느냐? 그래서는 안 된다. 그건 하나님에게 죄송한 일이다!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가장 큰 패역이고, 극악무도한 일이다. 하나님은 심혈을 기울이며 만세 전부터 네가 오늘날까지 오도록, 너에게 이 사명을 주기로 예정해 놓았다. 그렇다면 이 사명은 네 책임이 아니냐? 네가 일생을 살아가는 가치가 아니냐? 만약 하나님이 너에게 준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네 삶은 가치와 의미를 잃게 될 것이고, 너는 헛되이 산 것과 다름없다. 하나님은 너에게 적합한 조건과 환경, 배경을 안배하고, 너에게 지금의 자질과 재주를 베풀어 주었고, 네가 지금까지 살도록 예비하고, 네가 이 방면의 본분을 이행할 때 갖춰야 할 모든 조건을 예비해 놓았다. 하나님은 모두 안배해 놓았다. 하지만 네가 이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하고 시험을 견디지 못해서 도망치는 쪽을 택한다면, 늘 좋은 날만 보내려 하고 세상만 추구하려 한다면, 하나님이 너에게 준 은사와 재주를 이용해 사탄을 섬기고 사탄을 위해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느냐? 너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가 물거품이 되면, 하나님이 너를 혐오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향해 크게 노한다면, 이 일은 끝난 셈이냐? 네가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겠느냐? 네가 이번 생에 네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 줄 아느냐? 그건 끝이 아니다. 네 영혼에 재앙이 닥칠 수도 있다. 네가 네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하나님이 맡긴 일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도망친다면, 그건 문제가 심각하다. 네가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느냐? 하나님 손에서 도망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규정하느냐?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도망친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규정하느냐? 침륜에 빠지고 멸망하는 것이다. 너는 더 이상 다음 생도 없고, 내세도 없다. 하나님은 다시는 너에게 어떤 일도 맡기지 않을 것이다. 네게 사명이 없으면 구원받을 기회도 없다. 이것은 큰일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자는 내 눈에서 한 번 도망친 적이 있다. 내 심판대 앞에서, 내 앞에서 도망쳤었다. 사명을 이행하지 않고 내가 맡긴 일을 완수하지 못했다. 이 자의 생명은 여기서 끝났고, 마침표를 찍었다.” 이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다! 너희가 오늘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은, 본분의 크기를 떠나, 본분에서 힘을 쓰느냐 머리를 쓰느냐를 떠나, 외부 일을 하느냐 내부 일을 하느냐를 떠나, 그 누가 본분을 이행하든 모두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어디가 너의 선택이냐? 이는 하나님이 이끈 것이다. 하나님이 부탁을 해서야 너는 이런 감동과 사명감,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방인 중에는 외모가 뛰어난 자, 유식한 자, 재능 있는 자가 너무 많은데, 하나님이 그들을 눈에 들어 했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바로 너희를 눈에 들어 했고, 너희가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하고 다양한 본분을 이행하고 다양한 책임을 짊어지도록 했다. 최후에 하나님의 경륜이 끝을 맺고 성취되면, 이 얼마나 영예롭고 영광스러운 일이냐! 그러니 사람이 오늘날 본분을 이행하면서 고생도 좀 하고, 버리고 헌신하기도 하고, 대가도 좀 치르고, 세상에서 지위를 잃고, 명예와 이익을 잃기도 하는데, 그런 게 하나도 없는 것이 마치 하나님이 모두 앗아간 듯하지만,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얻었느냐? 본분을 이행함으로써 진리 생명을 얻었다. 네가 본분을 잘 이행해서 하나님이 맡긴 일을 완수한다면, 평생 네 사명과 하나님이 맡긴 일을 위해 살며 아름답게 증거했다면, 네 인생은 가치 있는 삶이고, 네가 바로 진정한 사람이다! 네가 진정한 사람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경영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도록 하나님이 너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네 삶에서 가장 커다란 가치이자 의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요구는 높지 않다. 하나님이 너에게 일을 맡기고 책임을 주었는데 네가 믿음이 작아서 이만큼만 힘을 쏟고, 이만큼만 헌신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만한 일만 맡을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는다. 너에게 100%를 요구했는데 95%만 달성했다고 해서 못마땅해하며 용서하지 않고, 계속해서 네 마음을 움직이고 재촉해서 하나님이 요구한 100%를 달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 분량과 에너지에 따라, 네가 이를 수 있는 것에 따라, 순차적으로 천천히 도달하게 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합리적이며, 사람에게 조금도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에게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할 것이며, 하나님이 너에게 하는 모든 일이 너를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임을 느끼게 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고심을 알아야 하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관용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협력해야 하겠느냐? 이런 식으로 협력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해 드리기 위해 노력해야 해. 하나님은 100%를 요구하시는데 내가 60%를 달성할 수 있다면 30%에서 그치지 않을 거야. 온 힘을 다하고, 꾀부리거나 교활한 짓 하지 말고, 요행을 바라지 말자.’ 이렇게 하면 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본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천편일률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가정과 자녀를 버리고 직장을 포기했다고 해서 너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획일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너의 분량, 네가 도달할 수 있는 것에 따라 요구한다. 그러니 근심이나 압박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저 네가 도달할 수 있는 것에 따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어떤 어려움을 만나거나 어떤 속박을 받더라도 위축되지 말고, 그런 일에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된다. 일단 영향을 받았다 하면 너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하는 게 영 신통치 않아서 하나님이 만족하지 못하시겠지? 좀 조심하고 너무 앞서 나가지 말자. 여지를 좀 남겨 둬야지.’ 이런 생각은 옳지 않다. 그건 하나님에 대한 오해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차츰 겪다 보면 갈수록 자신의 신심이 너무 작다고 여기고, 심지어 관념 상상에 따라 하나님을 오해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마음을 가늠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만 감히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재를 믿지만 감히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한다. 사람은 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 “만물은 모두 하나님 손안에 있다.”라고 말하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주재할 수 있나? 하나님을 믿을 만할까? 그러지 말고 사람한테 의지하자. 안 되면 내가 방법을 생각하지 뭐.’ 그런 다음 자신이 아주 유치하고 가소롭고 분량이 너무 작다는 사실을 의식하고는 다시 뉘우치며 하나님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지만 역시 길이 없다. 그런데 속으로는 하나님은 신실하고 믿을 만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단지 사람의 신심이 작아서 언제나 의심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사람이 체험해야 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진실한 신심이 생겨난다. 네가 체험할수록, 하나님에게 의지할수록, 하나님이 믿을 만하다고 더욱 느끼게 된다. 많은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매번 어떻게 네가 난관을 헤쳐 나가고 위험을 넘기도록 지켜 주는지 알고 나면, 너는 어느새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의지하게 되며, 하나님이 신실하고 믿을 만하다고 느끼게 된다. 사람은 우선 마음속에 이런 신심이 있어야 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운명이 있다. 그 운명은 모두 하나님이 정한 것으로, 누구도 다른 사람의 운명을 관장할 수 없다. 가족을 대할 때 너는 마음을 크게 가지고, 손을 놓을 줄도 알고, 모든 것을 내려놓도록 해라. 어떻게 놓아야 하느냐? 우선은 하나님께 기도해라. 또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이 세상을 추구하고 금전과 물질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점에 대해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들은 사탄에 속한 자들이고, 너와는 다른 부류이다. 네가 만약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면, 평생 고통스러울 것이다.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과 잘 어울릴 수도 없고, 오히려 괴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행복은 없고 고통만 따를 것이다. 정이 너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겠느냐? 육을 돌보는 일은 너에게 고통과 공허만을 가져다주고, 평생의 한만 남긴다는 점을 너는 알아야 한다. 그러니 네가 가족을 그리는 것은 일방적인 사랑에 불과하고, 혼자 좋아서 정을 베푸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네가 가는 길과 그들이 가는 길은 다르다. 인생관, 세계관, 인생의 길, 추구 목표가 모두 다르다. 지금 너는 가족과 함께하지 않아도, 혈연관계 때문에 늘 그들과 가깝게 느끼고 한가족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막상 가족들과 같이 생활한다면 며칠만 지나도 지겨워질 것이다. 그들은 거짓말을 달고 살기에 입만 열면 허울 좋고 듣기 좋은 말, 상대를 속이는 말뿐이다. 그들이 처신하고 처세하는 방식은 하나같이 사탄 철학과 사탄의 인생 격언을 따르고, 그들은 사상 관점도 죄다 그릇되고 황당해서 듣고 있으면 민망하기 짝이 없다. 너는 생각할 것이다. ‘전에는 그래도 늘 가족들을 생각하고 힘들게 생활할까 봐 걱정했는데, 지금 이렇게 같이 생활하니까, 이건 하루하루가 고역이구나!’ 이렇게 반감이 생긴다. 지금도 너는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기에 아직도 혈연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진실하다고 생각하며 여전히 정에 얽매인다. 정이란 것은 놓을 수 있는 한 놓아 버려야 한다. 만약 놓지 못하겠으면, 본분을 위주로 살도록 해라. 하나님이 맡긴 일, 자신의 사명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낫다. 육과 가족에 관계된 일은 우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이 맡긴 일과 본분을 잘 이행하면 사람은 진리에 대해 점점 밝히 알게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에 가까워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커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점점 크고 뚜렷해진다. 그러면 내적 상태도 달라질 것이다. 내적 상태가 달라지면, 네 세속적인 관점과 정이 점차 희미해지고,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네 마음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만족할 모습을 살아 내고 진리가 있는 삶을 사는지를 추구하고 싶어질 것이다. 마음으로 이 방면에 힘쓰다 보면 육의 정과 관계된 일은 점점 희미해져 더 이상 거기에 얽매이고 통제되지 않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본분을 이행할 때는 정에 얽매이지 않는데, 한가해지면 가족이 생각납니다.” 그렇다면 가족을 그리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느냐? 만약 그것 때문에 네가 소극적으로 변하고 본분을 이행하기가 싫어진다면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한가할 때도 오로지 가족 생각만 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고, 무슨 나쁜 결과도 낳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든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가족이 생각나는 것은 겁낼 일이 아니다. 관건은 네가 집 생각만 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너는 이렇게 고민해야 한다. ‘내 이런 내적 상태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어째서 속으로 가족들 생각만 날까? 내가 밝히 알지 못한 진리가 어떤 것일까? 내가 어떤 진리에 진입해야 할까?’ 이런 식으로 실행하면 진리에 금방 진입할 수 있다. 사람은 속으로 언제나 진리를 묵상해야 한다. 묵상할수록 진리를 밝히 알 수 있고, 마음속에 실행의 길이 생긴다. 그러면 수박 겉핥기식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이때 너는 누군가를 찾아 교제하고 싶어질 것이다. 교제의 목적이 무엇이냐? 검증을 통해 진리를 오류 없이 더 정확히 알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너는 어려움이 없어지고 마음은 해방감과 자유를 얻고,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게 된다. 그러면 늘 가족을 그리는 일은 없어지고, 세속적인 짐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네 내적 상태는 점점 정상에 가까워질 것이다. 너희는 진리를 묵상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묵상하느냐? 예를 들어, 오늘 네가 어떤 일을 했는데, 그게 옳지 않고 원칙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어디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야 한다. ‘이 일은 어떤 진리와 관련될까? 어떤 원칙과 관련될까?’ 다른 사람을 찾아가 진리를 교제하고, 되돌아보고, 반성해서 결국 문제의 근원을 발견하고, 진리를 구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된다면, 너는 하나님에게 더욱 신심이 생기고, 진리에서 더 성장했음을 느끼고, 일부 일들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고, 영적인 말을 일부 이해할 수 있다. 혹은 자주 입버릇처럼 내뱉는 도리나 말이 실제로 가리키는 바나 실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진리를 조금 깨닫고,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알게 되면, 다른 사람과 교제하도록 해라. 습관처럼 뱉는 이 말을 명백하게 교제하고 실행의 길로 바꾼다면, 이건 좋은 일이 아니냐? 이것도 역시 하나의 길이다. 가끔 누군가에게서 어떤 내적 상태를 발견할 때 너는 생각에 잠긴다. ‘이 사람이 어쩌다 이런 내적 상태를 갖게 되었을까? 이런 내적 상태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나는 왜 이런 내적 상태가 없을까? 그가 한 그 말은 일종의 내적 상태, 심리를 뜻하는 건데, 그의 그런 심리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어디서 문제가 생겼을까? 이건 어느 방면의 진리와 관련되는 것일까? 내가 진리를 구해야 하는 것 아닐까?’ 교제하고 구하다 보니 문제를 발견했다. 그의 그런 내적 상태가 너에게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과 맞춰진 것 아니냐? 이만한 노력은 기울일 만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문제를 발견하고 나서 또 다른 사람과 교제하여 드디어 답을 찾았다. 무슨 문제인지 알고 나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만약 발견하지 못하면 문제는 끝까지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바로 진리를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좋은 기회다. 절대 이 기회를 감정적으로 얽히는 일에 쓰지 마라. 언제나 가족과 한자리에 모일 생각만 한다면, 그건 골치 아픈 일이다. 너는 속으로 늘 가족들을 생각하며, 기회만 생겼다 하면 가족들과 감정적으로 얽힌다. 언제나 속으로 정에 연연하면서 내려놓지 못한다. 너는 많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형제자매들과 자주 교제해야 한다. 진리를 깨달으면 최소한 가정, 육, 정에 얽매이지 않게 되고, 이런 것들을 내려놓기가 쉬워진다. 이것이 길이다. 사실, 많은 사람의 체험이 다 이런 식이다. 정과 관계된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한동안 체험해야 하며, 진리를 깨달으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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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나님을 몇 년 믿은 사람은 비록 뿌리는 내렸지만 반드시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대다수의 사람은 각 방면의 진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고, 옳은 말과 옳은 도리를 다 말하고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 생활 속에서 이런 말씀의 정확성은 아직 체험하지 못했고, 이런 말씀 속 진리의 진정한 의미와 본질적인 부분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아직 진실로 체험하지 못했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면 적절한 환경이 필요하고, 주변에 올바른 사람이 있어야 하며, 너의 생명을 자라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사람과 일, 사물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네가 깨달은 진리든, 도리든 실증될 수 있고 네가 체험을 얻을 수 있다. 생명이 있는 씨앗 하나가 비옥한 토양에 떨어지더라도 햇빛과 빗물이 부족하면 자라난 싹은 시들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네가 수많은 도와 진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이 길이 맞다고, 인생의 바른길이라고 정확히 판단했으면, 이때 너는 무엇이 필요하겠느냐? 하나님에게 너의 생명에 유익과 도움을 주는, 너의 생명을 자라게 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마련해 달라고 구해야 한다. 이 환경은 아마 그렇게 안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의 육체는 고생을 해야 하고,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리고 내려놓아야 한다. 이런 것을 너희는 이제 모두 체험했다. 예를 들어, 박해를 받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자식과 남편(아내)을 만나지도, 그들과 연락하지도 못하며 친척 및 친구들과 만나지 못하고 그들의 소식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깊은 밤 모두가 잠든 때면 너는 집안일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어떠시려나? 이제 연로하셔도 내가 효도 못 하는데. 어머니도 몸이 안 좋으신데 지금은 어떠시려나 모르겠네.’ 늘 이런 일들을 염려하고 있지 않느냐? 만약 마음속에서 늘 이런 일들의 통제를 받는다면 본분 이행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느냐? 육적이고 세속적인 일들에 덜 개입하고 덜 관여하면, 이는 사람의 생명 성장에 이롭다. 네가 염려하고 신경 쓰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 이런 일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 그들이 어떤 운명이건 너는 바꿀 수 없다. 너는 하나님을 믿을 때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의 본분을 이행하고 진실한 믿음을 얻고 하나님 말씀 실제에 진입해 자신의 생명이 자라나게 하며 진리를 얻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겉으로 보면 사람이 자발적으로 세상과 가정을 버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떻게 된 것이겠느냐? (하나님이 주재하고 지배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지배한 것이다. 하나님이 네가 그들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좀 더 적절한 표현을 쓰자면 하나님이 너에게서 거두어 간 것이다. 이 말이 가장 실제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늘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한다고 말하는데, 그럼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주재한 것이겠느냐? 하나님은 너를 집에서 데리고 나와 그들이 짐이 되어 너를 얽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너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은 너를 육체의 얽매임이 없고 가족을 볼 수 없는 환경으로 데리고 가려는 것이다. 네가 그들을 걱정해서 그들을 위해 힘을 쓰려 해도 쓸 수 없게 됐고, 효심을 보이려 해도 보일 수 없게 됐으며, 그들도 너를 얽맬 수 없게 됐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배하여 너의 이 모든 얽매임을 거두어 갔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계속 그들에게 효도하고 그들을 위해 힘을 쓰며 목숨을 내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바깥의 얽매임을 모두 지배했는데 이는 좋은 일이겠느냐, 아니면 나쁜 일이겠느냐? (좋은 일입니다.) 이는 좋은 일이니 후회할 필요 없다. 기왕 좋은 일이라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날 너무 사랑하시는구나!”라고 말해야 한다. 스스로는 이 감정의 속박을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모두 감정의 통제를 받고 온 가족이 한데 모여 단란하게 지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매일 부모와 자식이 모두 모여 평안하고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며 영원히 헤어지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좋지 않은 것이 있다. 네 한평생의 에너지와 심혈, 너의 청춘과 아름다운 세월, 네 한평생의 가장 좋은 것을 모두 그들에게 바치고 육체, 가정, 가족, 직업, 명리, 그리고 각종 복잡한 관계에 네 평생을 모두 쏟아부으면 너는 스스로를 철저히 망치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겠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말했다. “수렁 속에서 망치지 마라. 네 두 발이 빠지면 너 스스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빼내지 못한다. 너는 그 분량이 안 되고 그럴 용기도 없으며 그럴 수 있는 믿음은 더더욱 없으니 내가 너를 데리고 나오겠다.” 하나님은 이렇게 할 때 너와 상의하지도 않는다. 왜 하나님은 사람의 의견을 구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시는 거야. 사람은 개미와 빈대처럼 하나님의 눈에는 별것도 아니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대하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수많은 진리를 선포해 인류에게 베풀어 줌으로 인류의 패괴를 정결케 하고 하나님에게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한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다. 이는 모두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뜻이 있고, 너를 데리고 나온 목적은 네가 인생의 바른길을 걷고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하려는 것이다. 너 스스로는 이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주관적인 바람은 평안하게 일생을 보내려는 것이다. 큰 부자가 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온 가족이 한데 모여 영원히 함께 살길 원한다. 이런 가정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고 앞으로의 종착지,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도 고려하지 않는다. 사람이 모르는 것에 대해 하나님도 문제 삼지 않고 사람에게 너무 많이 얘기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너는 알지 못하고 분량이 너무 작아 너와 의논해도 의논이 안 되기 때문이다. 왜 의논이 안 되겠느냐? 왜냐하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이 큰일은 한두 마디 말로 분명히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직접 책임지고 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너도 깨달을 것이다.

하나님은 일부 하나님 선민을 중국의 열악한 환경에서 데리고 나왔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다. 사람은 이제 모두 보았으니 이 일에 대해 항상 감사해야 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한다. 너는 그런 가정 환경에서 나와 육적인 모든 이런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났고, 모든 세속의 얽매임, 육체의 얽매임에서 벗어났다. 하나님은 너를 복잡한 속박 속에서 데리고 나와 하나님 앞에 데려왔고 하나님 집으로 데려왔다. 하나님은 말했다. “여기는 조용하고 이 땅은 매우 좋으니 네가 자라기에 적합하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인도가 있다. 여기서는 진리가 권세를 잡는다. 여기에는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마음도 있고 구원 사역의 중심도 여기 있으니 너는 마음껏 여기서 성장하거라.” 하나님은 너를 이런 환경 속으로 데리고 왔다. 이 환경 속에는 가족의 위로도 없고, 네가 아플 때 곁에서 보살펴 줄 자식도 없으며, 다정한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도 없다. 네가 혼자 있을 때 육체의 고통과 어려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마주할지 생각해 보면 너는 그때 외로움을 느낀다. 왜 너는 외로움을 느끼겠느냐? 사람의 분량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이는 한 방면의 객관적인 원인이다. 주관적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육적인 가족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맞다. 사람이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 육체 속에 사는 사람은 이러한 육적인 각종 관계와 혈육 간의 정을 탐닉하며, 사람이 자기 가족을 떠나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너는 네가 어떻게 인간 세상에 왔는지는 왜 생각하지 않느냐? 너는 혼자 온 것이다. 너는 그들과 원래 별 관계가 없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하나 데려온 것이니, 사실 너는 올 때도 외로웠던 것이다. 너는 왜 그때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으면서 이제 하나님이 너를 데리고 나오니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냐? 너는 너에게 다정한 이야기를 해 주는 동반자가 줄었다고 생각한다. 그 동반자는 너의 자식일 수도 있고 너의 부모일 수도 있으며 너의 반려자, 즉 남편이나 아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너는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럼 너는 외로울 때 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동반자가 아니냐? (동반자입니다.) 네가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 누가 네 마음을 진실로 위로해 줄 수 있겠느냐? 누가 너의 어려움을 진실로 해결해 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의 어려움을 진실로 해결해 줄 수 있다. 네가 병에 걸렸을 때 자식이 곁에서 차를 대접하고 물을 따르며 시중을 들면 너는 매우 기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식은 귀찮아하고 시중을 들려 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그때는 정말 외로워질 것이다! 너는 이제 동반자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동반자가 없어진 것이냐? 사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줄곧 너와 함께해 왔다! 하나님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이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자 피난처이며 유일하게 사람의 마음을 아는 자이다. 그러니 너에게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닥치든, 어떤 억울한 일과 소극적이고 연약해지게 하는 일이 닥치든 너는 서둘러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에게 위로를 주고 너의 어려움과 각종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너의 외로움은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고 진리를 얻는 기본 조건이 될 것이다. 너는 이렇게 체험하다 보면 서서히 느끼게 될 것이다. ‘부모를 떠나도 나는 여전히 잘 사는구나. 남편을 떠나도 나는 여전히 충실하게 살아가는구나. 자식을 떠나도 나는 여전히 평안하고 즐겁게 사는구나. 나는 더 이상 공허하지 않고 사람에게 기대지 않아. 나는 하나님을 의지할 줄 알게 되었어. 하나님은 언제든 내게 공급과 도움을 줘. 비록 나는 그분을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든 내 곁에 계신다는 것을 알아. 내가 그분께 기도하고 부르짖기만 하면 그분은 내게 감동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보도록 하실 거야.’ 그때 하나님은 정말로 너의 하나님이 된 것이며, 너의 모든 문제는 해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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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은 민주 제도의 국가로, 사회는 안정되어 있고 생활은 부유하며 사회 치안, 민생, 민속 등 각 방면에서 모두 중국보다 훨씬 나을 뿐 아니라 사람도 매우 안락하게 살아간다. 생활이 안락한 것은 비록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이 안락한 삶 속에서는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지 않고, 더욱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 헌신하기가 어렵다. 이것이 실정 아니겠느냐? 사람은 생활이 안락하면 늘 먹고 마시고 노는 것과 어떻게 육체를 누리고 인생을 즐길지만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이런 안락한 사회 환경 속에서는 본분을 좀 이행하고 싶어도 힘이 들고 고생은 조금도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본분을 이행하고 교회 각 방면의 사역을 할 때 사역 효율도 낮고 사역 진도도 때로는 영향을 받는다. 이는 사회 환경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너희가 여기에 앉아서 도를 듣는데, 매번 예배 때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늘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걸 보고 나는 매우 감동을 받았다. 중국 사람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데, 환경의 강요와 압박, 사회 차별과 박해를 심하게 받는 사람들도 있고, 단순히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을 찾고자, 정신적 지주와 기댈 곳을 찾고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의 열성, 믿음, 충성심은 큰 붉은 용의 잔혹한 박해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해외로 망명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매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추적당하고 숨을 곳이 없어 해외로 망명한 것이다. 중국의 억압되고 고통스러운 생활 환경에 비해 대만 사람의 생활 환경은 아주 안락하다. 생활이 너무 안락하면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때 고생하려 하지도 않고 대가를 치르려 하지도 않으며 일단 핍박과 환난을 당하면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 않는다. 생활이 너무 안락하면 사람은 먹고 마시며 노는 것만 좋아하고 늘 이런 생각만 한다. ‘뭘 먹을까? 어디로 여행을 갈까? 안 가 본 나라가 어디지? 사람이 일평생 살아 봐야 몇십 년인데 세계 각국에 가서 구경도 해 보고 견문을 넓히지 않으면 헛사는 거 아니겠어?’ 그러다 보니 사람의 마음이 방만해지고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런데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있겠느냐? 예배 중 집중해서 설교를 들을 수 있겠느냐?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며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면 그는 억울하고 답답해하며 늘 헛살았다고 생각한다. 우월한 환경이 사람에게 가져오는 시험과 장애물이 크지 않으냐? 아주 크다. 사람은 모두 육적 안락을 탐하지만, 생명 성장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안락이 꼭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조금만 고생을 하면 바로 소극적이고 연약해지며 끈기가 조금도 없는 사람이 대다수인데, 이는 안락한 환경으로 초래된 것이 아니겠느냐? 중국의 형제자매가 수감되어 고문을 당하고 실형을 선고받으며 감금되는 등 각종 체험 간증 영상을 너희는 모두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그럼 너희의 시청 소감은 어떠하냐? (하나님, 제 소감을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중국의 형제자매가 그런 고문과 박해를 겪고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대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에 한 걸음씩 굳게 서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이 저희보다 더 믿음과 분량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만약 저에게 그런 환경이 닥친다면 그들처럼 그렇게 믿음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의 분량이 아주 작다고 느꼈습니다.) 중국의 형제자매는 큰 붉은 용의 잔혹한 박해를 받는 환경에서도 굳건히 하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며 본분을 이행한다. 이는 증거다. 그것도 강력한 증거다. 그들은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굳게 설 수 있다. 이는 증거다. 그럼 너희는 이런 안락한 환경에 있으면서 어떻게 다른 증거를 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우선, 하나님이 준 이 모든 생활과 이런 환경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해야 굳게 서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고 이기는 자가 될지 생각해야 한다. 해외의 민주 국가에서 하나님을 믿을 때는 비록 국가 정부의 탄압과 고문, 그리고 박해는 없지만 가정과 가족의 핍박이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며 진리를 얻고 굳게 서야 한다. 어떤 환경에서 하나님을 믿든 진리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두 고생하고 대가를 치러야만 진리를 깨닫고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하나님을 증거하려면 반드시 각 방면의 체험 속에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단순히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생명의 체험 간증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만약 진리에 기대 살아가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면 어떤 무리 속에서든, 어떤 국가와 사회 제도 아래서든 어느 정도 차별, 배척 또는 핍박을 받게 돼 있다. 왜냐하면 민주 국가 역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국가가 아니며, 무신론 정당이 권력을 잡고 있고 진리와 하나님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이런 국가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핍박과 환난은 없더라도 네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려면 어느 정도 제한이 있고 어느 정도 차별, 비방, 평가, 정죄도 받게 된다. 이는 모두 사실이다. 만약 이런 일들을 꿰뚫어 보지 못하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어떤 국가에서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따를 때는 많든 적든 어느 정도 핍박과 환난이 있으니 신중하게 행동하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하나님을 앙망해야 할 뿐 아니라 총명과 지혜를 갖춰야 한다. 어느 국가에 있든, 어떤 사회 환경 속에 있든 하나님이 너에게 적절한 환경을 안배했으니 이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안락한 환경이든, 고문과 박해든 사람에게는 모두 시험이며, 시련도 있다. 그럼 안락한 환경에서는 시련이 있겠느냐?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시련이 있다. 하나님이 너에게 이런 안락한 환경을 마련해 주었는데, 네가 어떻게 체험하는지에 달려 있다. 네가 곳곳에서 사탄의 속박과 시험에 빠지는지, 아니면 모든 방면에서 사탄을 이기고 하나님을 증거하며 자신의 충성심과 본분을 지키는지, 이는 네가 어떻게 체험하고 선택하는지에 달려 있다. 중국의 형제자매들이 체험하는 환경은 좀 더 힘들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부담은 좀 더 무겁고, 그들에게 마련한 환경은 좀 더 고생스럽기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 준 것도 많다.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이 어렵고 시련이 클수록 사람이 얻는 것은 더 많다. 그런데 안락한 환경에서도 사람은 곳곳에서 시험과 시련을 겪기에 하나님은 너에게도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준다. 만약 네가 매번 닥친 시험 속에서 그것을 이길 수 있다면 네가 얻는 것은 고문과 박해를 겪은 형제자매가 얻는 것보다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역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분량이 있어야만 이길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고 잘 먹고 잘 마시며 놀고 즐기는 것, 그리고 육체의 안일함을 누리게 하고 타락하게 하는 일부 사회 흐름 등 이런 것들은 모두 너에 대한 시험이다. 이런 시험들이 너에게 닥쳤을 때 한편으로는 너의 눈이 볼 수 있게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너의 마음을 교란하여 동하게 한다. 네가 세속과 사회의 흐름을 따를 때 사탄의 시험이 닥친다. 하나님의 시련이 닥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시험과 시련을 어떻게 대할지는 네가 선택해야 한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검증하는 때이자 사람을 드러내는 때다. 하나님이 너에게 한 말씀과 네가 깨달은 진리가 역할을 발휘할 때다.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너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있다면 너는 이 시험을 이길 수 있고, 하나님이 너에게 마련한 시련 속에서 굳게 서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만약 네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세상과 사회의 흐름을 사랑하며 안락을 탐하고 육체를 만족시키기를 좋아하며 공허한 삶을 좋아한다면, 너는 세속을 따르고 마음속으로 이런 것들을 부러워하며 이런 것들에 끌리고 점유될 것이다. 그런 다음 마음속에서 조금씩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흥미를 잃고 진리를 싫어하게 될 것이다. 그럼 너는 시험 속에서 사탄에게 사로잡히고, 이런 시련 속에서 증거를 잃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도를 많이 들었고 본분도 이행하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공허함을 느끼고 연예인, 사회의 흐름, 유명 인사를 좇으며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데다가 심지어 드라마를 보느라 밤낮이 바뀌기도 한다. 게다가 게임하는 젊은이들도 있다. 아무튼 그들은 어떤 대가라도 감내하고 심취한 듯 이런 세상의 흐름에 속하는 것들을 좇는다. 어째서 이러겠느냐? 바로 그들이 진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리를 얻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고 느낀다. 마음속은 여전히 공허하고 사는 게 의미 없다고 느낀다. 세상의 흐름을 좇으면 삶이 조금은 충실해지고 삶의 내용이 좀 더 풍부해지며 매일 조금은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만약 하나님을 믿고 세상의 흐름을 좇지 않게 돼도 여전히 사는 게 의미 없고 공허하다고 느낀다. 이는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는데 이 사람은 진리를 조금도 깨닫지 못했고 진리 실제가 없기 때문에 세상의 흐름을 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시종일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고 있어도 안심하지 못하며, 일단 시험이 닥치면 굳게 서지 못해 조만간 물러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는 본분을 이행하는 데 꽤 열성을 보이고 의지도 있지만, 시험이 닥치면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하고 건성으로 대충 하며 마음을 들이지 않는다. 이는 간증이 없는 것이다. 만약 시험이 하나 닥친다고 본분을 내려놓고 자신의 취미를 선택한다면 이는 간증이 없는 것이다. 만약 시험이 하나 더 닥친다면 하나님을 부정하고 세상의 흐름을 좇아 교회를 떠나려고 할 수도 있다. 만약 시험이 하나 더 닥친다면 그는 하나님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도대체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마음속으로 확신하지도 못하며, 스스로가 유인원에서 진화한 것이라고 믿기도 할 것이다. 이는 사탄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것이다. 매번 시험 속에서 그는 하나님에게 기도하지도 진리를 구하지도 않고 육체의 운명만을 생각한다. 결국, 그는 굳게 서지 못하고 사탄에 의해 한 걸음 한 걸음 지옥과 죽음의 심연으로 끌려간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었으므로 더 이상 구원받을 기회도 없다. 너희가 보기에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겠느냐? (중요합니다.) 진리는 아주 중요하다. 진리는 어떤 역할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 최소한 시험이 닥쳤을 때 네가 사탄의 계략을 간파하도록 한다. 네가 해야 할 게 무엇인지, 하지 말아야 할 게 무엇인지, 네가 선택해야 할 게 무엇인지, 최소한 네가 이런 것들을 알도록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네가 시험 속에서 굳게 서서 입지를 굳히고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준 본분과 너의 본분에 대한 충성심을 지키고 사탄을 버려 시련 속에서 욥처럼 굳게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최소한 얻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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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원칙이 있느냐? 다들 어떤 상황에서 기도하느냐? 다들 어떠한 내용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느냐? 대다수는 고통스러울 때 기도한다. ‘하나님, 저는 고통스럽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기도의 첫 마디를 시작한다. 항상 자신이 고통스럽다고 기도하는 것이 좋은 것이냐? (좋지 않습니다.) 왜 좋지 않으냐? 좋지 않음에도 왜 그러한 기도를 하는 것이냐? 그것은 너희가 기도할 줄 모른다는 뜻이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어떠한 말을 해야 할지,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른 채 그저 약간의 고통으로 인해 괴로우면 이렇게 기도할 줄밖에 모른다 ‘하나님, 저는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이는 이제 막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자의 기도인데, 어린아이의 기도다. 하나님을 믿은 지 몇 해가 지났는데도 이렇게 기도한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이는 사람이 여전히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으며 생명이 자라지 않았음을 뜻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줄 모르는 자는 생명이 자라지 않은 자이며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지 못한 자이다. 진정으로 생각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어떻게 체험할지 고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먹고 마실지, 어떻게 체험하고 실행할지 고민하고, 하나님이 말씀한 만큼 체험하고 따라가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면 닥치는 문제가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것이다. 늘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다. 문제를 계속 해결함으로써 어려움이 점점 줄어들면 진리를 조금씩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사역을 알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협력할지, 어떻게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할지 알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선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줄 모르는 일부 사람은 마음이 항상 흐리멍덩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묵상하지 않고 설교를 들어도 교제하지 않으며 일이 생겨도 진리를 구할 줄 모른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모색할 줄도 모르고 어떠한 마음가짐을 지녀야 할지, 어떻게 협력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일들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자는 문외한이고 영이 통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어떤 문제가 닥쳐도 기도하거나 진리를 구하는 법이 없고, 마음속으로 진실로 하나님에게 의지하고 하나님을 앙망하지도 않는다. 그저 “하나님, 저는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도 고통스럽습니다.”라는 말만 입에 달고 사는데 이 말을 들으면 혐오감이 들고 구역질이 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기도에서 사람의 상태가 너무도 가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는 고통스러울 때만 하나님을 찾는다. 고통스럽지 않거나 아무 일 없을 때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의지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바로 이런 상태가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체험하며 자신을 인식할 때, 다수 사람들은 대부분 어떻게 기도하느냐? 천편일률적으로 ‘하나님, 저는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도 고통스럽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이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속이 무척 메말라 있는 사람의 상태가 너무나 가련하다! 매번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간단하게 말할 뿐 마음속의 말은 한마디도 털어놓지 못한다. 진리를 구하지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무슨 기도란 말이냐? 기도를 하면서 마음속의 말을 털어놓지 않고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도 알지 못한다.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하나님 앞에 왔는데 하나님이 네게 무엇을 깨우쳐 줄 필요가 없단 말이냐? 믿음도 필요 없고 힘도 필요 없으며, 하나님이 네 뒤에서 너를 호위해 줄 필요 없고, 나아가 하나님이 네가 나아갈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깨우쳐 주거나 인도해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냐? 설마 너는 진리를 깨달아 너의 내면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는 것이냐? 설마 너는 하나님의 징계도, 채찍질도, 인도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냐? 설마 너는 하나님이 너의 고통을 없애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냐? 설마 너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냐? 기도할 줄 모르는 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네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줄 모른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것은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생활에 가져오지 못했고, 너는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류가 매우 적고, 따르는 자와 하나님의 관계를 전혀 수립하지도 못했으며,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를 수립하지도 못했다는 의미이다. 일이 임하면 여전히 자신의 주관적인 억측과 관념, 사상, 지식, 은사와 재능, 패괴 성품이 주체가 되며, 하나님과는 관계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도 늘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의 비애다! 이런 상태는 너무도 가련하다! 사람이 영적으로 메마르고 마비되어 있으니 생명에 관련된 영적인 일에 아무 느낌도 없고 어떤 인식도 없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왔을 때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네가 어떤 환경이나 어떤 곤경에 처해 있든, 어떤 어려움에 직면해 있든, 하나님 앞에 나아왔을 때 할 말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네 믿음에 의문을 던져야 하지 않겠느냐? 이는 사람의 가련한 모습 아니겠느냐?

사람은 왜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하느냐?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유일한 길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에게 의지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에게 의지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기도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는다면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 역사와 인도를 얻을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에게 고충을 맡기지 않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너의 고충을 해결해 주겠느냐? 어떻게 네가 하나님을 따라 앞으로의 길을 걸어가도록 인도해 주겠느냐? 어떻게 네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도록 구원하겠느냐? 하나님을 믿으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은 반드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상징이며 진실하게 기도했는지 기도하지 않았는지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인지 정상적이지 않은지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기도로 마음속의 말을 털어놓고 기도로 진리를 구할 수만 있다면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는데, 이는 사람과 하나님이 정상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기도를 너무 적게 하고, 마음속의 말을 하지 않고 늘 하나님을 경계한다면,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기도를 조금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기도를 잘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면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고,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이다. 진실한 기도를 자주 하면 정직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무릇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가 없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대다수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구하지 않는 사람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구하지 않는 사람은 진실한 기도를 하지 못한다. 그들은 어떠한 고충이 있어도 기도하지 않으며 하나님에게 기도한다고 해도 단지 하나님을 이용해 고충과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고 고충 속에서 어느 방면의 진리에 진입해야 하는지 구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갈망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없는데, 그 본질은 불신파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모든 일에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야 한다. 기도 후 네 마음이 바로 밝아졌다거나 실행의 길을 찾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더라도 너는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구할 수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거나 설교를 들을 때 문제를 가지고 묵상하고 구하는 것을 중시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실제적으로 협력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거나 설교를 들을 때 너는 갑자기 마음이 밝아질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깨달음을 얻어 네가 해결하려던 문제의 답을 찾을 수도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이자 안배가 아니겠느냐? 그러니 진심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 효과는 네가 기도 후 바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물론 사람의 협력과 실행도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성령이 언젠가 너를 깨우쳐 주고 너에게 답을 줄 것이다. 이것이 진리를 구하고 깨닫는 과정이며, 생명이 성장하는 경로이기도 하다. 너희는 하나님을 여러 해 동안 믿었지만 기도는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 너희는 어떻게 기도하는지 아직 모른다. 일이 닥쳤을 때 구호를 외치거나 뜻을 세우고, 아니면 하나님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신이 어떻게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그도 아니면 설명하고 변명할 뿐이다. 마음속에 이런 것들만 담겨 있으니 너희가 진리에 진입하는 것이 그토록 느린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본연의 일을 다하지 않고 어떻게 진리를 추구하는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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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찬양에 “진리 사랑하는 이들, 모두가 형제자매.”라는 가사가 있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 집의 사람이며, 진정한 형제자매이다. 네 생각에 하나님 집에서 늘 예배드리는 사람은 모두 형제자매이냐? 꼭 그렇지는 않다. 형제자매가 아닌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냐?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모두 악인이자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성이 없고 본연의 일을 하지 않으며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한다. 또한 사탄의 철학대로 살아가며 잔꾀를 부리고 사람을 이용하고, 속이고, 기만한다. 그들은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 집에 섞여 들어온 것은 순전히 복을 받기 위해서다. 왜 그들을 불신파라고 하느냐? 그것은 바로 그들이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해 교제하기만 하면 바로 흥미를 잃고, 속으로 싫어하며, 귀 기울이지 않고, 재미없다고 느끼며, 앉아 있지를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분명히 불신파이자 이방인이다. 너는 절대로 그들을 형제자매로 대해서는 안 된다. 그는 아마 너에게 접근해 이득을 주고 작은 선심으로 너와 관계를 맺으려고 할지도 모르지만, 네가 그와 진리를 교제할 때는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고 오로지 육적인 얘기, 일 얘기, 세속적인 얘기, 세상 조류에 관한 얘기, 정에 관한 얘기, 가정 얘기 같은 겉면의 일만 얘기한다. 진리에 관한 얘기, 하나님 믿는 것에 관한 얘기, 진리를 실행하는 것과 관련된 얘기는 하나도 없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 말씀도 읽지 않고, 진리도 교제하지 않고, 기도도, 영 생활도 하지 않는다. 이들이 형제자매이냐? 형제자매가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진리를 싫어한다. 그들은 하나님 집에 섞여 들어온 뒤, 예배에서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교제하며 자기를 인식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문제를 교제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싫어한다. 그들은 아무런 인식도 체험도 없고, 할 말도 없어 교회 생활에 싫증을 느낀다. 마음속으로 늘 생각한다. ‘왜 맨날 하나님 말씀만 교제할까? 왜 맨날 자기를 인식하는 얘기만 할까? 어째서 교회 생활은 재미도 없고, 누리는 것도 없을까? 언제면 이런 교회 생활이 끝날까? 언제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복을 받게 될까?’ 그들은 진리 교제가 재미없다고 느끼고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구하겠느냐?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진리에 관심이 없는데 어떻게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럼 그들은 무엇으로 살아가겠느냐? 분명 사탄의 철학으로 살아가면서 그저 얕은꾀나 꿍꿍이를 부리고, 정상 인성의 삶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진리를 구하는 법이 없다. 그저 사람의 간계와 사람의 수단, 처세 철학으로 모든 일을 처리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척 피곤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형제자매와 지낼 때 마치 이방인과 지내듯 하고, 사탄의 철학에 따라 거짓말하고 속이며, 분란을 일으키고 외곬으로 치닫기 좋아한다. 어떤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든 누가 누구와 한패인지, 누가 누구와 같은 무리인지 늘 관찰하고, 말할 때 눈치를 보며 항상 조심하고,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언제나 이러한 처세 철학으로 주변의 모든 일과 인간관계를 처리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 무척 피곤하다. 그는 사람들 속에서 꽤나 활동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의 고충은 그 자신만이 안다. 네가 그의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도 피곤함을 느낄 것이다. 명리나 체면과 관련된 일이라면 누가 맞고 틀렸는지, 누가 옳고 그른지, 누가 낫고 못한지 기어코 분별하려고 하고, 이치를 다퉈야 직성이 풀린다. 다른 사람은 듣기 싫어서 이렇게 말한다. “말을 좀 간단하게 하면 안 될까요? 할 말이 있으면 직접적으로 말하면 안 될까요? 왜 그렇게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죠?” 그의 심사는 이토록 복잡하고 뒤틀려 있고, 이렇게 피곤하게 살아가면서도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어째서 그는 진리를 구해서 정직한 사람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냐? 왜냐하면 진리를 싫어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그는 무엇으로 살아가겠느냐? (처세 철학과 사람의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일을 하면 웃음거리가 되고 추태를 드러내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 매일 하는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의 체면과 명리, 허영심 등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물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이 일 때문에 변명하고 저 일 때문에 설명하는데, 늘 자신을 위해 이야기한다. 그는 생각이 복잡하고 헛소리가 너무 많으며, 말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 늘 끝도 없이 시비를 따지는데, 체면을 위한 것이 아니면 명예나 지위를 위해 다투는 것이다. 그는 시종일관 이런 것들을 위해 살아간다. 그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체면을 얻은 것 같지만 모두가 그를 싫어하고 꿰뚫어 보게 된다. 그가 진리 실제가 전혀 없으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님을 모두가 알게 되는 것이다. 리더 일꾼, 혹은 형제자매들이 몇 마디 책망하면 그는 죽어도 받아들이지 않는데, 끈질기게 변명하고 설명하며 책임을 미룬다. 또한, 예배 때도 이치를 따지면서 변명하고, 이쪽저쪽 말을 전달하면서 시비를 일으키며, 하나님의 선민들 사이에서 시끄럽게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이치를 가릴 곳도 없단 말인가?’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이런 자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겠느냐? 그는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짚고 넘어가며 시비를 가리려 든다. 그는 진리를 구해 진리 원칙대로 대하지 않는다. 아무리 간단한 일도 그에게 가면 이렇게 복잡해지고 만다. 이는 그야말로 고생을 자처하는 것이니 삶이 피곤한 것도 당연하다! 사람의 많은 고충은 사실 자신이 자초한 일로, 사서 고생하는 것이다. 속된 말로 밥 먹고 할 짓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터무니없는 사람의 생활 방식이다. 일부 얼간이들은 시비에 말리지는 않지만 자질이 너무 형편없어 아무것도 간파하지 못하는데, 돼지처럼 흐리멍덩하게 살아간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왼쪽으로 치우쳤고 다른 하나는 오른쪽으로 치우쳤지만 모두 이방인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아무리 오래 믿어도,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모른다. 어떤 일이 닥쳐도 진리를 구하지 않고 사람의 방법으로 살아가며 사탄의 철학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피곤하고 불쌍하다.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형제자매라고 할 수 없다. 오직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형제자매다. 그렇다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모두 이방인이다.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를 저버리는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 섞여 들어온 이방인이다. 만약 그들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한다면, 그들은 사탄의 심부름꾼이니 제명하고 도태시켜야 한다. 절대로 그들을 형제자매로 대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사랑을 베푼다면 어리석기 그지없고 무지몽매한 사람이다.

발췌문 87

너희가 아직 성도가 되는 느낌과 원칙을 찾지 못했다면 이는 너희의 생명 진입이 너무 얕으며,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평소 행동하고 처신할 때, 일상생활의 환경 속에서 세심하게 음미하고 묵상하며 서로 교제하고 격려하고 일깨우고 돕고 보살펴 주고 공급하고 붙들어 줘야 한다. 형제자매들과 함께 지낼 때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늘 다른 사람의 문제점만 봐서는 안 되고 수시로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그다음 자신의 어떤 행동들이 상대에게 교란이 되거나 피해를 주었는지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교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하면 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 어떤 일이 임하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일을 바라봐야 한다. 진리 원칙을 깨닫고 실행의 길을 찾으면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으며, 형제자매들의 관계도 정상이 될 것이다. 이방인처럼 냉담하고 냉혹하고 잔인하지 않을 것이고,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형제자매 간에 마음을 이해하고 서로 붙들어 주고 사랑할 수 있다. 또 선량한 마음을 갖고 관용을 베풀고 상대를 아끼며 서로 붙잡아 주고 도와줄 수 있다. 서로 배척하거나 질투하거나 비교하거나 몰래 경쟁하거나 불복하지 않게 된다. 이방인들처럼 군다면 어떻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런 태도는 자신의 생명 진입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와 영향을 주게 된다. 예를 들어, 너를 보는 상대의 눈빛이 이상하거나 상대의 말 한마디가 네 뜻에 맞지 않아도 화를 내게 된다. 또 누군가 어떤 일을 한 결과 네가 주목받지 못하게 되면 원한을 품고, 마음이 불편하고 불쾌해지며, 어떻게든 체면을 되찾고자 하게 된다. 특히 나이가 어린 여성들은 이런 것들을 이겨 내지 못한다. 늘 사소한 시시비비에 얽매여 짜증을 내며 소극적인 상태로 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지도 않으려 한다. 이러면 생명 진입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람이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기도, 진리를 실행하며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기도 몹시 힘들어진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면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고 인식하며, 하나님께 진실한 기도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 후 형제자매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서로 포용하고 관용을 베풀며, 다른 이의 장점과 뛰어난 점을 보는 법, 다른 이의 의견과 올바른 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을 방종하지 말고, 야심과 욕망을 갖지도 마라. 늘 자신이 다른 이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위인으로 여기며, 다른 사람에게 자기 말을 들으라고 하거나 자신에게 복종하고 자기를 우러러보고 떠받들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는 비정상적인 것이다. 교만한 성품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야심과 욕망이 커지면 비정상적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매우 위험하다. 늘 야심을 갖고 위인이나 초인이 되려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며, 극도로 교만해서 이성을 잃은 것이다. 이런 자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바로 마귀이다. 교만한 성품에 지배되면 마음속으로 다른 이를 무시하게 되며, 다른 사람을 한없이 보잘것없고 무지한 존재로 보게 된다. 남의 장점은 보지 못하고 단점은 무한대로 확대해서 마음속으로 비하하고 여기저기 퍼뜨리며 깎아내리고 해하고 자극하다가 마지막에는 사람들에게 네 말을 듣고 네게 복종하게 하거나 너를 두려워하고 피하게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런 관계가 나타나거나 존재하는 것이 너희가 보기 원하는 것이냐? 너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예를 들어 주겠다. 만약 네가 다른 사람보다 키가 좀 더 크고 외모가 좀 더 뛰어나다면 어떤 사람들은 너를 부러워할 것이고, 너는 마음속으로 흡족해하며 키가 좀 작고 외모가 덜 뛰어난 사람을 얕볼 것이다. 이것은 어떤 성품을 드러낸 것이냐? 어떤 사람은 누군가 외모가 못나고 키가 좀 작으며 게다가 어리석고 좀 멍청한 것을 보면 그 사람을 멸시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조롱하는 말로 상대방을 비방할 수도 있다. 이렇게 사람을 대하는 게 옳으냐? 이것이 정상 인성의 발현이냐?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대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이냐?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원칙이다. 보아하니 너희는 이 일에 대해 조금은 느끼는 바가 있는 것 같다. 그럼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가 어떤지, 키가 큰지 작은지를 보지 않고 사람의 마음이 선량한지, 진리를 사랑하는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지를 본다. 하나님은 이런 것에 근거해 사람을 대한다. 만약 사람도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사람을 공정하게 대할 수 있는데, 이는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다. 우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도 원칙과 길이 생긴다. 보통 사람은 모두 허영심이 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듣기 좋게 몇 마디 칭찬을 하면 득의양양해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든 채 길을 걷는다. 이것이 바로 일종의 사탄 성품의 표출이다. 만약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멸시할 수 있다면 이것은 어떤 성품이냐? 이것은 흉악하고 교만하며 사악한 성품이다. 만약 사람이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는 추악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면 이러한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기 쉽지 않고 진정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 수 없다.

발췌문 88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생명이 되도록 베풀어 주는 것이냐? 어떤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냐?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 만약 이 문제를 꿰뚫어 볼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이 어떤 부류의 사람을 구원하는지 알게 된다. 우선 하나님은 인성과 이성이 있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며, 양심과 지각이 있는 사람에게 들려주기 위해 진리를 선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 듣고도 무관심하며, 전혀 감동받지 못하고, 아무런 가책도 감각도 없는데, 바로 산송장으로, 생명 진입이 없는 자임이 분명하다. 어떤 사람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인성이 나쁘며,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는 자로, 그저 봉사자일 뿐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애를 쓰시면서 많은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이 말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려 하지 않지만, 그래도 소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진리를 추구하려 하고, 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는 사람은 바로 이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맞다. 하나님 말씀은 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지, 짐승과 마귀에게 들려주려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교회의 1/3을 차지하든 아니면 1/5을 차지하든, 어쨌든 마지막에는 소수의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누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누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 어떻게 가늠해야 하겠느냐? 바로 사람이 양심이 있는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감각이 있는지,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지, 설교를 듣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지, 진리를 깨닫고 실행해 낼 수 있는지, 패괴 성품이 변화될 수 있는지, 이런 것들에 근거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인지, 하나님의 양인지를 분별한다. 하나님의 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반응과 지각이 있으며, 하나님을 따르길 원한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양이다. 이런 사람들의 인성에는 무엇이 갖추어져 있느냐? (이런 사람들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며, 진리를 향해 추구하고자 하고, 양심이 조금 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들의 인성에 진리를 사랑하는 부분이 있고, 양심과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을 줄 알고, 자신의 내적 상태와 결합할 수 있으며, 그런 다음 하나님 말씀을 자기 생활의 일부분으로, 자신의 생명으로, 자신의 행위와 사람됨의 목표, 원칙, 근간으로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 말씀이 그들 삶의 실제가 되는 것인데,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양이다.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는 나쁘지 않아 보이고 또 꽤 성실해 보이지만, 하나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할 줄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양이 아니다. 봉사자 중 이런 사람들이 많다. 아무리 들어도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건 더더욱 못하는데, 아무리 오래 믿어도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한 그런 말씀들이 대체 어떤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할 때 사람 수에 연연하지 않는다. 설령 단 한 사람만이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가 해야 하는 사역을 한다. 다들 알다시피,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던 그 시기 구원을 받은 사람은 단지 8명에 불과하며, 구약에서부터 현재까지 구원받은 사람 또한 많지 않다. 하나님이 아직 정식으로 구원 사역을 하지 않고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지 않았던 율법시대에, 하나님이 열납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되었느냐? 그 수가 많았느냐? 그 당시에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은 매우 적었다. 말세의 이 단계 사역은 어떠하냐?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통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율법시대나 은혜시대에 하나님이 얻은 사람들보다는 훨씬 많다. 현재만 해도 체험 간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으며, 성품이 변화한 사람도 확실히 좀 있다. 이런데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게 위안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교회의 대부분 사람들이 하나님을 몇 년이나 믿었는데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전혀 변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이방인과 같은 것을 보면, 너희는 소극적으로 변하느냐? (때로는 약간 소극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패역하고 자질이 부족해도, 마음이 올바르고 진리 추구를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커다란 인내로 줄곧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가능한 한 최대한 자세히 저희에게 진리를 조금씩 거듭 반복해서 교제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그렇게 많은 대가를 치르시고, 사람을 꼭 온전케 하시고자 하는 것을 보면, 마음속으로 깊이 감동받고 자신의 자질이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더 노력해야 하고 제대로 추구해야 하며 낙담하면 안 된다고 느낍니다.) 사람의 자질이 부족하거나 패역이 있는 것, 이는 공개된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에게 패역이 있고 너의 자질이 부족하니 너를 구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왜 여전히 너에게 그런 말씀들을 하고 그렇게 많은 대가를 치르겠느냐?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할 때, 사실 이미 하나님의 뜻을 매우 분명히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이미 매우 명확하게 사람들이 알게 한 것이다. 은밀하지 않고 공개적이어서 마음과 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수 있다. 영이 통하지 않는 멍청이만이 소극적으로 변할 수 있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만이 낙담하고 실망하여 자신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느끼게 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한 그런 말씀과 진리를 네가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의지를 가지고 진리를 실행해 낼 수만 있다면, 진리는 너의 생명이 될 수 있다. 마지막에 너의 생명이 얼마나 크든 상관없이 네가 계속해서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기만 하면, 일부러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어기지 않는다면, 네가 깨달은 만큼 실행할 수 있다면, 진리를 향해 노력할 수 있다면, 마음과 힘을 다해 본분을 이행할 수 있기만 하면, 합격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측면의 진리를 다 교제해 주며, 굉장히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준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이냐? 어느 한 소규모 집단이나 한두 부류의 사람에게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공급하기 때문이다. 전 인류에게 공급하는 모든 진리 중에 네가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사실 한정적이며, 네가 이를 수 있는 것 또한 한정적이다. 왜 한정적이라고 말하겠느냐? 각자의 자질, 사고력, 이해력이 다 다르고,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마련해 준 환경도 다 다르며, 각 개인이 이행하는 본분 또한 다르다. 이러한 ‘다름’으로 인해 각 개인이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수 있고 진입할 수 있는 것은 일부분에 불과하고, 사람이 이를 수 있고 실행해 낼 수 있는 것도 다 한정적이다. 예를 들어 보자. 병고의 시련을 체험한 사람이 이런 시련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알게 되자, 하나님이 마땅히 모든 사람에게 이런 병고의 시련을 체험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합당하겠느냐?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는 완전히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각각의 사람에게 다르게 역사한다. 이 시련은 바로 일부 특별한 부류를 상대로 한 것으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역사하여 그들이 병고의 시련을 체험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이 한 부류의 사람에게 병고의 시련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얻게 하느냐? 바로 병고의 시련을 체험할 때, 어떻게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하는지, 어떻게 자신의 패역을 인식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한다.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바르게 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어떤 일이 임하더라도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고 우선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이 측면의 진리를 얻게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체험을 통해 이 측면의 진리를 얻게 되면, 네가 또 이런 시련을 겪을 필요가 있겠느냐? 꼭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이 서로 다른 사람을 선택하려 하는데, 맞는 사람을 선택할 수도 있으며, 또 특별한 사람을 선택해 이 시련을, 하나님의 이 부분 사역을 체험하게 할 수도 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약속이자 하나님이 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을 잃는 고통을 체험한다. 가족을 잃은 일을 통해, 어떤 사람은 체험도 간증도 생기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되며 진실한 의지와 진실한 믿음을 갖게 된다. 하나님이 특별한 무리의 사람에게 행한 이 사역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간증을 보게 된다. 즉, 하나님이 행한 것이 모두 옳으니, 사람은 마땅히 순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석과 연구를 해서는 안 되며, 이 일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이야기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져서도 안 된다. 대신 원망하지 말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또한,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이 행한 이 모든 사역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 인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이런 방식들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한 다양한 측면의 말씀에서, 각 개인이 체험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 말씀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이렇게 작디작은 일부분 중에서, 너의 자질, 가정 환경, 현재 이행하는 본분에 따라 네가 하나님 말씀 중에서 체험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 말씀의 만분의 일에 불과하다. 단지 만분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만분의 일에 네가 진입하여 정말로 하나님에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다면, 자신을 피조물의 자리에 놓고 창조주의 모든 주재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이루려는 이 마땅한 결과를 성취한다면, 그럼 너는 구원받을 것이다. 이는 이해하기 매우 쉽다. 바로 이런 것이다.

너희가 본분을 이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충성심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충성심이 있다는 것은 무엇이냐? 바로 조금도 건성으로 대충 하지 않고, 진지하게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책임을 완벽하게 다한다는 것이다. 만약 건성으로 대충 했다가 문제가 생긴다면, 이는 바로 부끄러움의 기호로,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 집에서 너희에게 맡긴 사역을 다 같이 함께 많이 교제하고 진리 원칙을 구해야 한다. 정확한 원칙을 찾아서 문제를 발견하면 제때에 해결하고, 해결할 수 없으면 제때에 상부에 보고하여 하나님 집 사역이 방해받지 않고, 빈틈없이, 지연되지 않고, 순조롭게 전개되도록 해야 한다. 너희 본연의 사역을 제대로 함으로써 복음 사역 확장을 촉진하여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온전히 통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너희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한 것이다. 사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범위를 놓고 봤을 때, 사람이 실행할 수 있는 진리, 사람이 이를 수 있고 관련될 수 있는 진리는 그저 이 몇 가지 측면에 불과하다. 이러한 진리에서 실제에 진입하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최저 기준에 도달한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작고, 어떤 사람들은 나약하며, 어떤 사람들은 자질이 부족하고, 어떤 사람들은 치우치게 이해하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이 우매하다. 이처럼 각 측면의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이 모두 사람의 진리 실행과 본분 이행의 성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자질, 인품, 진리를 깨달은 수준에 근거해 사람에게 요구한다. 이 요구 기준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살핀다. 이 두 가지 기준이 가장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우매하여 치우치게 이해할 뿐 아니라 식견도 부족하고 무엇을 배우든 상당히 느리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해 줘도 잘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으며, 모든 것을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자질이 지나치게 부족한 자이다. 이런 것들은 바꿀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지식을 배워 학식이 풍부하며 겉으로 봤을 때 특히나 영리해 보인다. 하지만 진리에 관련된 일을 치우치게 이해하기 쉬우며, 설령 진리를 듣고 깨달았다 해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것이 그의 치명적인 부분이다. 이런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 지식과 도리의 영향을 받기 쉬우며, 진리 원칙에 따른 일 처리를 하기 어렵고, 일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 또한 쉽게 바뀌지 않는다. 사실 그도 진리를 추구하고 싶어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핵심은 바로 그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만, 죽어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냥 끝나는 것이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구원도 받지 못할 것이다. 학력이 높든 낮든, 식견이 있든 없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 말씀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에서 너에게 깨우침을 주어 깨닫게 한 진리를 네가 얼마나 실행할 수 있는지, 네가 하나님이 요구한 일에 얼마나 마음과 힘을 쓰고 공을 들이는지를 살핀다. 예를 들어, 객관적으로 너는 자질이 평범하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며 이해력도 부족하고 또 치우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하자. 하지만 어떤 일이 임했을 때 하나님은 너에게 그 일의 허점과 문제를, 그리고 도대체 누구의 책임인지를 보게 하는데, 이 일에서 네가 원칙을 고수할 수 있는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인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만약 네가 본분을 이행할 때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대한다면, 너는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네가 어떻게 해야 진리에 부합하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겠느냐?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너의 자질과 학력이 어떤지, 하나님을 몇 년이나 믿었는지는 살피지 않으며, 네가 이 일에 임할 때 어떤 관점과 태도를 지니는지, 너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 너의 양심이 그 순간에 제대로 된 역할을 하는지를 살핀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대한다면 책임감이 있을 것이고, ‘비록 이 일이 내 책임은 아니지만, 교회 사역에 관련된 일이니 좀 물어보고 알아봐야 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알아본 후, 책임자가 안일하고 무책임해서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바람에 지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너는 그 책임자를 찾아가 교제하여 제때에 문제를 바로잡을 것이다. 상부에 구할 필요도 없이 네가 혼자서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비록 너의 자질이 평범하고, 또 다른 결함과 결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이 네가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느냐? 네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하나님에게 충성하는 데에 영향을 주었느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치우치고 우매하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영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자질이 부족하고 배움이 짧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일이 임했을 때 진리를 실행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자질과 학력을 보지 않는다. 이는 진리 실행과 별로 관계가 없다. 이런 결핍과 부족함은 네가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한 너의 충성심에 영향을 주지 않고, 네가 책임감 있게 본분을 이행하는 데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진심이 있는지만을 살핀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실제적이며, 또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실제적인 방식으로 각각의 사람을 가늠한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자질이 부족하고 우매하며 지식이 너무 많아 진리 실행에 영향을 받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다 핑계이다. 이런 이유는 말이 되지 않는다. 왜 그렇겠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을 가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 자신의 기준일 뿐,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가늠하느냐?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과 진심이 있는지를 살핀다. 만약 네가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지니고 있다면, 좀 치우치거나 그릇되게 이해하더라도 상관없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영이 통하지 않기까지 해요.”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지니고 있느냐? 만약 충성심을 지니고 있다면, 네가 진리를 실행하는 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 매우 명확하지 않으냐? 네가 하나님께 충성심을 지니고 있고 본분 이행에 진심이라면, 책망과 훈계가 임했을 때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연약해질 리 있겠느냐? 만약 정말 소극적으로 변하고 연약해진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또 자신이 어떤 면에서 부족한지, 무엇이 잘못됐는지 반성하여 넘어진 데서 일어서야 합니다.) 그렇다.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연약해지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며, 하나님도 정죄하지 않는다. 넘어진 데서 일어나 교훈을 얻고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으면 된다. 너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니 절대 끝도 없이 소극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본분까지 팽개친 채 도망간다면, 그것은 자신을 철저히 망치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연약해질 때가 있다. 진리를 구하기만 하면 소극성과 연약함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혹자는 하나님 말씀을 한 편 읽고 찬양을 몇 곡 부르기만 해도 내적 상태가 완전히 달라져서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된 것 아니겠느냐? 사실, 책망과 훈계가 임한 것은 절대적으로 좋은 일이다. 설령 책망하고 훈계하는 말이 좀 엄하고 날카로울지라도 그것은 네가 너무 비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원칙을 어기고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책망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사실 이런 책망은 너를 도와주는 것이고 너에 대한 사랑이니, 원망하지 말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책망과 훈계가 임했을 때 소극적으로 변해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지한 행동이며, 비이성적인 태도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중요하게는 무엇을 중시해야 하느냐? 사람의 자질이 어떻든, 영이 통하든 안 통하든, 또 사람이 어떤 책망과 훈계에 임하든, 이러한 것들은 모두 중요하지 않다. 현재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너희가 어떻게 진리 실제에 진입하느냐’이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위해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반드시 진심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심이 있다면 어떤 모습이어야겠느냐? 바로 일이 임했을 때 잔꾀를 부리거나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거나 다른 사람과 암투를 벌이지 말아야 하며, 또 하나님에게 간사함을 부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만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진심이 없다면, 너는 완전히 끝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지 않으면, 네가 진리를 깨달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영이 통하고, 자질이 훌륭하며, 말을 잘하고, 이해력도 좋으며,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한 말씀을 다 깨달을 수 있어도, 일이 임했을 때 하나님에게 간사함을 부린다면, 이는 사탄의 성품으로, 대단히 위험하다. 네 자질이 아무리 훌륭해도 소용이 없으며, 하나님도 너를 원하지 않고 이렇게 말씀할 것이다. “너라는 사람은 말을 매우 잘하고, 자질도 상당히 훌륭하며, 똑똑하고, 영도 통하지만 딱 한 가지 나쁜 점이 있는데, 바로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큰일이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이 못되면, 그 사람은 폐기된다. 마치 겉으로는 잘 유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엔진이 망가진 자동차는 완전히 폐기 처분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너의 외적인 자질이 얼마나 훌륭하든, 아무리 영리하고 말을 잘하고 능력이 있고 문제를 잘 처리하든, 다 소용이 없다. 이는 핵심적인 것이 아니다. 핵심은 무엇을 살펴야 하겠느냐? 어떤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지를 살필 때는 그가 어떻게 말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약속하는지를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네가 행한 것에 진리 실제가 있는지를 보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은 네 행동이 얼마나 대단하고 심오하며 위대한지 신경 쓰지 않는다. 네가 작은 일을 해도 하나님은 네 일거수일투족에서 진심을 보고 이렇게 말씀할 것이다. “이 사람은 진심으로 나를 믿는구나. 이 사람은 허풍을 떠는 법이 없는, 성실한 사람이다. 하나님 집에 그리 크게 기여하지 못했고 자질도 부족하지만, 언제나 성실히 일하고 진심을 보인다.” 이 진심에는 무엇이 들어 있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순종, 그리고 진실한 믿음과 사랑이 들어 있다.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모두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꼭 대단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쩌면 요리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청소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평범한 본분을 이행하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엄청난 공적을 세운 것도 아니며, 남들이 우러르고 감탄하고 부러워할 만한 부분도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요구한 것을 모두 갖추고 살아 내며, 또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또 무엇을 바라겠느냐? 하나님은 그에게 만족한다. 그러니 너희는 자신의 분량이 너무 작아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환난을 겪고 시련과 연단을 체험하여 온전케 되는 길을 걷는 것을 봤다고 해서, 낙담하고 소극적으로 되거나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지 않고 너를 온전케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 조급해하느냐? 하나님은 각각의 사람에게 다 다른 것을 준다. 네가 자신을 가늠할 때, 먼저 하나님이 너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너 자신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가늠해야 하나님이 행한 모든 것이 다 좋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저는 자질이 부족한데,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그래도 좋은 것인가요?”라고 하는데, 좋은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저는 정말 우둔한데,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그래도 좋은 것인가요?”라고 하는데, 모두 좋은 것이다. 왜 좋은 것이냐? 만약 네가 우둔하지 않았다면 교만해져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이는 너를 보호해 주는 것이라 좋은 일이다. 너희가 만약 지금보다 더 많은 수완과 능력을 갖게 되었다면, 누가 이렇게 기꺼이 성실하게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행한 것은 모두 좋은 것이며,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다. 단지 사람이 이 일을 명확히 알지 못할 뿐이다. 사람은 늘 하나님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려 한다. 마치 하나님이 사람에게 많이 주면 줄수록 진리를 더 잘 실행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이미 너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주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너에게 주었다. 하나님의 생명마저 너에게 베풀어 주었는데, 넌 또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이냐?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한 말씀들과 하나님이 행한 그 모든 사역만으로도 이미 매우 풍족하고 충분하다. 더 이상 하나님에게 요구할 것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자질을 주셨으니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저에게 은사를 이만큼밖에 안 주셨는데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할 것도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척이나 많다. 하나님은 네가 상상하는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고, 이행해야 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것을 요구한다.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함부로 한다면, 이는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걷지도 못하면서 뛰려고 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람들 사이에서 위신을 세우고, 말과 행동이 사람들의 탄복과 우러름을 받아 사람들 사이에서 명망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은 네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너에게 그 측면의 것들을 주지 않았다. 만약 그런 사람이 될 기회가 생긴다면, 네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쉽게 놓칠 수 있겠느냐?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너는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일부 사람들이 어째서 적그리스도가 되었겠느냐? 바로 자신이 능력이 좀 있다고 오만해졌기 때문 아니겠느냐? 그들은 왜 그 길을 갈 수 있었느냐? 그들이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 언젠가는 모두 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래부터 그들에게 진리를 말해 줄 생각이 아예 없었으며, 그들을 구원할 생각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에게 주는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만약 네가 늘 비교하고, 늘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을 얻고자 한다면, 이것이 순수하게 이해하는 것이겠느냐? 이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자질이 부족하고, 영이 통하지 않으며 치우치고, 때로는 또 종종 연약한 것을 발견하여 자신에게 문제와 결점이 너무나 많다고 느낄 때, 너는 우선 하나님이 왜 너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지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다. 너는 은사와 재능이 있는 대다수의 사람이 어떤 길을 갔는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다시 살펴보아라. 네가 이 일을 이해했을 때, 제일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보호에 감사드립니다.”입니다.) 맞다. 마땅히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 당신께서는 저에게 너무 잘해 주십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은사와 재능을 주시지 않고 제가 바보 멍청이 같도록 하신 것, 이 모든 것이 저의 복입니다! 저는 소극적이거나 괴로워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저에게 부족한 점은 당신에 대한 진심과 충성심입니다. 저는 영리해지거나 말을 잘하게 되거나 은사와 재능이 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저의 진심을 바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은사, 재능, 지식,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의 지위와 명성, 이는 모두 좋은 것들이 아니니 저는 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러면 변화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여전히 자신이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는 것으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게 되고, 너 또한 섭섭해하지 않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너를 책망할 때, 네가 ‘내가 어리석어 세상에 있을 때 사람이 다 깔보고, 하나님 집에서도 발탁이나 중용을 받지 못하는 거야.’라고 느끼게 된다. 여기에 숨겨진 뜻은 ‘하나님께서는 나한테는 너무 조금 주셨으면서, 다른 사람한테는 어째서 그렇게 많이 주셨지?’라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늘 원망하고 섭섭해한다. 사실 그렇게 큰 복이 너에게 임했는데 네가 모르는 것이다.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임하면, 관점이 달라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관점이 달라지면, 사람은 어떻게 변하겠느냐? (걷지도 못하면서 뛰려고 하지 않게 되고, 너무 높은 목표를 추구하지 않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착실하게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은 편안해지고, 진실되고 현실적인 삶을 살 수 있고, 추구하는 목표가 달라지게 된다. 말해 보아라. 네가 착실하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너를 멍청이나 바보로 살게 하는 것이 좋으냐, 아니면 네가 어디를 가든 우러름을 받는 뛰어난 사람이 되어 나중에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도록 너에게 훌륭한 자질, 학력, 외모를 주고, 말재주, 사역 능력, 특기를 갖게 하는 것이 좋으냐? 너는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바보 멍청이가 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네가 그렇게 말하지만, 만약 정말 누군가가 너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한다면, 네 마음이 무척 불편할 것이다. 그럴 때 너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자질이 부족한 우매한 사람이야. 그래도 악인이나 적그리스도보다는 낫지. 구원받을 기회가 있으니까.’ 자신을 위안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저와 함께 하나님을 믿던 몇 명을 돌아보면, 그들은 모두 자질이 무척 훌륭하고 영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줄곧 권력과 이익을 위해 다투고 교회 사역을 교란해서 모두 제명되거나 출교되었어요. 제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자질이 부족하고 어리석고 성실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 또한 하나님의 큰 보호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너를 보호하겠느냐? 네가 어리석어 하나님이 보호하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이 약자를 동정하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이 약자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이 말하는 것처럼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 일은 어떻게 봐야 정확하겠느냐? 어떻게 봐야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심과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약간 있어서 진리를 향해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양한 환경을 마련하시어 사람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맞다. 너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는 하나님에 대한 너의 진심으로 맞바꾼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가장 소중하겠느냐? 사람의 진심이 가장 소중하다. 너에게 약간 있는,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진심으로 너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을 맞바꿔 왔다. 네가 예상 밖으로 많이 얻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저는 자질이 부족해서 예상 밖의 수확을 얻었다고 해도 저는 별로 깨달은 것이 없어요.”라고 말하는데, 네가 깨달은 것이 아직도 적다는 말이냐? 지금 네가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은 네가 진리를 깨달은 것과 관계가 있다. 어떤 사람은 “제가 뭘 깨달았는데요? 저도 뭐라고 분명히 말하지 못해요.”라고 말하는데, 비록 네가 분명히 말하지는 못해도 네가 하나님 집에서 줄곧 본분 이행을 고수할 수 있다는 것은, 네가 그래도 많이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가 깨달은 것들이 깊이가 있든 없든, 그것들은 분명 진리와 관계가 있으며 진리에 근접한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줄곧 본분을 이행하며 지금까지 올 수 있도록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 자신을 바보 멍청이라고 느끼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이제는 ‘바보’, ‘멍청이’가 애칭이지, 멸시와 비하의 의미가 아니다. 바보 멍청이와 적그리스도 중에서 어느 것이 좋으냐? (바보, 멍청이가 좋습니다.) 만약 어느 날 하나님이 “바보는 이리 오라. 멍청이는 이리 오라.”라고 한다면, 네가 듣기에 기분이 나쁠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 보면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보는 이리 오라고 하셨으니, 그럼 가야지.’라는 생각이 들어 네가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갈 것이다. 다른 사람이 “바보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기뻐할 수 있어요?”라고 물으면, 너는 “바보라고 하셨지, 적그리스도라고 하시지는 않았잖아요. 또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지도 않았어요. 그러니 기쁘죠.”라고 답할 것이다. 너를 ‘바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너를 남이 아니라 친숙한 가족으로 여긴다는 의미이다. 마치 사람이 자신의 아이를 ‘강아지’라고 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비록 썩 듣기 좋지는 않지만, 이 또한 사실이며 그냥 애칭인 것이다. 만약 너를 적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어떻겠느냐? 큰일이다. 호칭을 바꾸면 성질이 달라지며, 결말 또한 달라진다. 너희는 무엇을 택하겠느냐? (바보, 멍청이를 택하겠습니다.) 늘 바보나 멍청이만 하는 것도 좋지 않으니, 자질도 좀 높여야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너희의 자질이 높아졌느냐? (많이는 아니고, 약간 높아지기는 했습니다.) 생명 진입이라는 이 일에 있어 너희가 정말 노력한다면 분명히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즉각적으로 매우 많이 높아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매우 느리게 성장하는 과정이다. 너에게 진입이 있기만 하다면 퇴보하지 않을 것이며, 네가 추구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천천히 조금씩 성장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 내면에 진리를 만들어 주는 것,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땅에 씨를 심으면 싹이 나는 것처럼 그렇게 속도가 빠르지 않다. 이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일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 이는 사람의 사탄 성품을 완전히 정결케 하고 변화시켜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진리 실제를 살아 내게 하는 것이다. 이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네가 아무리 매일매일 설교를 듣고, 하나님 말씀을 보고, 기도하고, 체험한다 하더라도, 성장 또한 제한적이다. 생명 성장은 느리게 이루어진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여러 번 반복해서 체험해야 하며, 또한 사람이 향상하고자 노력하고 마음을 써서 이해해야만 깨달을 수 있다. 성령 역사가 없어서도 안 되는데, 그러면 사람이 얻는 것은 더욱 한정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20~30년을 믿었어도 체험 간증을 얘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혀 마음을 써서 진리를 깨닫고자 노력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20~30년을 믿었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이다. 사람은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체험을 해야 하며, 또한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해 준 환경도 필요하다. 이러한 여러 측면이 결합되어야 사람이 약간의 인식과 진입이 있게 된다. 너의 내면에 생겨난 이런 인식과 진입으로 네가 다른 인식, 감각, 생각을 갖게 되고, 너의 의식과 생각 면에서 약간은 성장하고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약간의 성장과 변화로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이 조금 더해지고, 진리와 자신의 인생길을 대하는 너의 태도가 조금 변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다 조금씩이고 매우 미약하지만, 이런 미약한 변화가 사람의 인생관, 사상 관점, 그리고 사물과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를 매우 크게 변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의 위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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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기간에 사람이 얼마나 패역하든, 패괴 성품이 얼마나 심각하든 상관없이 사람에게 정해 준 마지노선은 무엇이겠느냐? 다시 말해,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 사람을 포기하고 도태시키겠느냐? 어떤 최저선은 지켜야 하나님이 너를 도태시키지 않고 남겨 두겠느냐? 이는 모든 하나님의 선민이 반드시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부분이다. 우선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는 것에는 실제적인 내용이 있다. 그것은 그저 신의 존재나 하나님이 성육신한 사실, 혹은 하나님의 이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것만으로는 안 되며, 이는 하나님을 믿는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적어도 성육신한 하나님은 실제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의심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으며 관념이 있어도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기준이며, 네가 이 기준에 도달해야만 하나님은 네가 그를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준 마지노선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으며 따를 수 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한편, 악행도 교란도 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마지노선이다. 둘째, 하나님을 따르는 기간에는 적어도 본분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말을 듣고 순종해야 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얻어야 하며 최소한 힘쓰는 데 합격해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 마지노선이다. 셋째, 인성이 반드시 합격점에 이르러야 한다. 좋은 사람이라고, 최소한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많은 선민과 기본적으로 어울릴 줄 알아야 하고, 해를 끼치는 존재여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람은 적어도 나쁜 사람이나 악인은 아니어야 한다. 이것이 세 번째 마지노선이다. 만약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사코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이런 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인성은 불합격인 것이다. 이는 마지노선을 지키지 못한 것이니 반드시 도태시켜야 한다. 인성이 좋지 않고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교란과 방해를 하고 교회에서 좋은 역할을 못 하는 사람은 악인으로 규정할 수 있다. 많은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자는 해를 끼치는 존재이자 악인이며, 나아가 마지노선을 지키지 못해 도태되는 사람이다. 악인이나 적그리스도 역시 본분을 이행하지만 그들은 방해와 교란, 파괴, 악행만 일삼는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겠느냐? 이것이 본분 이행이겠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들의 그런 작태는 마지노선을 지키지 못한 것이고 본분을 이행할 수 없는 것이며, 본분을 이행하더라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것이니 그들을 출교시켜야 한다.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대하는 원칙은 이렇지 않으냐? 한순간 내적 상태가 좋지 않아 소극적으로 변하거나 연약해져서 제명되는 사람이 있더냐? 가끔 좀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했다가 본분 이행이 중단된 사람이 있더냐? 본분 이행의 성과가 좋지 않거나 좋지 않은 마음과 생각을 좀 드러냈다고 제명된 사람이 있더냐? 분량이 작아 하나님에게 관념과 의문을 품었다고 제명된 사람이 있더냐?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제명하는 원칙은 무엇이냐? 제명되고 본분 이행이 중단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냐? (힘을 써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사람, 언제나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자격이 없다. 이는 누군가 그에게 편견이 있거나 개인적 원한이 있어서 그를 제약하고 제명하는 게 아니다. 그가 본분을 이행하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는 데다 방해하고 교란해 정말로 본분을 이행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진리 원칙에 완전히 부합한다.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대하고 사람에게 처분을 내리는 원칙은 모두 공평하다. 하나님 집에서는 트집을 잡지 않고 사소한 일을 요란스레 처리하거나 확대 해석 하지도 않는다. 너희는 하나님 집이 진리가 권세를 잡는 곳임을 믿어야 한다. 물론 제명된 사람도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에게 진실로 회개할 수 있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하지만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한 불신파나 악인은 드러나면 영원히 도태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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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아 가도록 요구하겠느냐? 왜 사람에게 스스로를 인식하도록 요구하겠느냐?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겠느냐? 어떤 성과에 도달하려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은 또 무엇을 위한 것이겠느냐?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아 가도록 하는 것은 또 사람에게서 어떤 성과를 이루려는 것이겠느냐? 이런 질문들을 너희는 생각해 본 적 있느냐?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를 인식하게 하려고 다양한 방식을 사용했다. 다양한 환경을 마련해 사람의 패괴를 드러냄으로써 사람이 체험 속에서 점차 스스로를 인식하도록 했다. 하나님 말씀의 폭로든, 심판과 형벌이든 하나님이 하는 이러한 사역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너희는 알고 있느냐? 하나님이 이렇게 사역하는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라는 것에는 어떤 내용들이 포함되겠느냐? 바로 사람이 자기의 신분, 지위, 본분과 책임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 네가 사람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스스로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얻게 되는 최종 목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또 왜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 가도록 하겠느냐? 이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게 되면 사람은 수많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수많은 비밀을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써 사람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가장 의미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아 가도록 추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이자 가장 큰 축복이다. 하나님은 또한 다양한 경로로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 가도록 한다. 가장 주요한 경로는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 말씀의 인도, 말씀의 공급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 가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심판과 형벌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알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지름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보고 알게 됨으로써 최종적으로 얻게 되는 성과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에게 하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사람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이야말로 조물주이며, 피조물은 어떻게 조물주에게 순종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생의 길은 완전히 명확해진다.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을 인식하게 되면 사치스러운 욕망, 각종 불의한 속셈을 점차 내려놓게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이는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정확히 인식하고 정의해야만 하나님에 대한 사치스러운 욕망, 각종 요구를 진정으로 내려놓게 된다. 이러한 사람만이 베드로처럼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과 소망을 표현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실행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과 자신을 인식하는 것 중 하나라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만약 네가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알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점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어떤 면이 가장 사랑스러우냐? 인식하지 못하면 너는 사랑할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고 심지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에게 관념과 패역이 생겨 소극적으로 변한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여기서 소위 ‘사랑’은 모두 텅 빈 이론이며 사람의 논리적 추리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식함으로써 생겨난 것이 아니며, 하나님에게는 근본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말하는 이 두 가지를 분명히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방금 전에는 말하지 못했느냐? 이것은 너희가 실제 체험에서 자신에 대한 인식이 흐리멍덩하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도 없다는 뜻이다. 이게 무슨 문제인지 너희는 아느냐? (저희는 정확한 실행의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과 자신을 인식하는 두 방면에 동시에 진입하지 못하고 한 방면에 진입하는 것만 중시해 생명의 성장이 제한적입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지금 이러한 내적 상태에 놓여 있는데 너희의 분량은 어떠하냐? 아주 작지 않으냐? 자신을 인식하는 방면에서 하나님의 요구 기준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냐? 최소한 개인의 욕망과 속셈도 아직 내려놓지 못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진리에 부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너의 마음속에서 지위가 있는지 없는지 인식할 수 있겠느냐?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도대체 사람인지 하나님인지 의심하고 있다. 여전히 양다리를 걸치는데, 땅의 하나님을 믿다가 하늘의 막연한 하나님을 믿다가 한다. 그리고 일부 사람은 심지어 하나님의 본질을 의심하며 “성육신하신 하나님과 하늘의 하나님이 어떻게 한 분의 하나님이실 수 있습니까? 그분이 정말 하나님이라면 왜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으시죠?”라고 말한다. 이는 너희에게 영적인 이해력이 너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말씀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는데, 이게 바로 너희의 분량이다. 너희는 지금 성육신을 인정하고 성육신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를 인정할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질, 신분, 지위에 대한 인식은 별로 없다. 너희의 마음속에는 인식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내가 하나님의 본질이나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진리를 교제하지 않았을 때 너는 네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아주 깊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확고하고 변함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본질에 관련된 진리를 교제하자 이러한 말씀과 내용은 너희의 마음속에 큰 반응을 일으켰다. 이 반응은 매우 강렬했고 너희가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며 너희가 마음속으로 상상한 하나님과 크게 충돌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껏 너희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을 하자 너희는 일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치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너희의 분량이 너무 작고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는 몇 년을 더 체험해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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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에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말세에 하나님은 베드로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했을 뿐만 아니라 욥이 하나님에 대해 진실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증거했고,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따르려면 최소한 욥과 같은 믿음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나님의 선민에게 요구했다. 그렇다면 너희의 상상 속에서, 너희가 이해하는 유한한 문자의 범위 안에서 욥은 어떤 사람이냐? 좋은 사람이냐? (그렇습니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주로 어디에서 드러나느냐? 우선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며 한 번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이는 좋은 사람의 가장 주된 모습이자 상징이다. 그 밖에 처신할 때도 원칙이 있었다. 그는 자식과 가족을 대할 때도 원칙이 있었다. 자식의 단점을 감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자식을 하나님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이를 보면 자식을 대하는 욥의 태도가 완전히 올바르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식으로서 이런 아버지가 있다면 너희는 어떻겠느냐? 행복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욥의 친구 몇몇은 어떠했느냐? 욥에게 시련과 환난이 닥쳤을 때 그의 친구들은 그를 어떻게 대했느냐?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를 이렇게 판단하기까지 했다. “자네는 하나님께 죄지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거야! 하나님을 믿어 이 지경이 되다니? 자네도 참 불쌍하군!” 심지어 욥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욥이 그렇게 극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을 때 그의 친구와 아내는 그를 그렇게 대했는데, 그에게 너무나 큰 상처와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욥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지금 욥의 이야기를 보아도 여전히 욥 같은 사람이 가장 믿음직스럽고 신뢰할 수 있으며, 역시 이런 사람이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든 그는 너를 곤경에 빠뜨리거나 해치지 않으며 너를 대할 때 원칙을 고수할 것이다. 만약 네가 옳은 사람이라면 그는 네가 나쁜 일을 한 가지 한다거나 다른 사람이 너를 험담한다고 해서 네가 나쁘다고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실을 왜곡해 모함하지 않고 정에 휘둘려 말하지 않으며 기호대로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너는 알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이야말로 좋은 사람이구나. 우리는 자그마한 어려움이 닥쳤을 때 바로 본분을 팽개쳤는데, 이 사람은 아무리 큰 시련과 환난이 닥쳐도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았어.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좋아하시는구나. 내 곁에 만약 이런 사람이 하나 있다면 내가 병에 걸리든 혹은 환난에 부닥치든 그는 변함없이 나를 도와주고 붙들어 주고 보살펴 주며 포용해 주겠구나. 이런 사람은 정말 훌륭하다. 가끔 그가 내 눈에 거슬리거나 그와 마음이 맞지 않더라도 곁에 사탄 마귀가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사탄 마귀는 평소에 겉으로는 “너는 참 훌륭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고 생각하는데.”라고 말하지만 일단 너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너를 상대하지 않는다. 그때 너는 누가 좋은 사람인지, 누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알게 된다. 믿을 만한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은 아주 소중하다. 욥 같은 사람이 곁에 여남은 명 있으면 너무나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도 없다! 그때 너는 좋은 사람 얻기가 아주 힘들다고 느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이런 좋은 사람이 필요하다. 모두가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을 좋아하고, 마음씨 곱고 일할 때 원칙이 있으며 정의감 있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을 좋아한다.

환난과 질병의 고통이 닥쳤을 때, 그러니까 너의 마음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 네 곁에는 어떤 사람이 필요하겠느냐?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사람이겠느냐? 너를 평가하고 정죄하며 비난하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네가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너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너를 위로하며 네가 마음속의 고통을 털어놓을 때 경청할 수 있고, 또한 네가 소극적이고 연약하며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일어서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너를 도울 수 있는데, 너를 웃음거리로 삼지 않고, 네 고난을 틈타 너를 해치지도, 너의 어려움을 보고 모른 척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네가 그의 위로가 필요할 때, 어려움이 있거나 연약해질 때, 또는 사적인 비밀이 있을 때 그에게 말할 수 있는데, 그는 뒤에서 그것을 퍼뜨리지 않고 너를 비웃지도 멸시하지도 않을 것이며 너의 일을 망치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너의 어려움, 연약함, 소극적인 면, 그리고 네 인성의 약점을 올바르게 대할 것이다. 이를 올바르게 대하는 것은 원칙이 아니겠느냐? 이는 좋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은 너를 이해하고 포용하며 세심하게 보살필 수 있다. 게다가 너를 붙들어 주고 너에게 공급해 주고, 네가 고통과 연약함에서 일어나도록 도울 수 있다. 너에게 큰 도움을 주는 이런 사람은 아주 소중하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좋은 사람이다! 누군가 너의 어려움을 보고도 모른 척하고, 너를 비웃고 비꼬기까지 한다고 하자. 너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좀 있겠지만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말하면 안 돼. 말하고 나면 후환이 있을 거야. 이 사람은 어쩌면 몰래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할지도 몰라. 그럼 사람들은 나를 비웃겠지. 또 어쩌면 헛소문을 퍼뜨리고 나를 헐뜯을지도 모르지.’ 너는 감히 이런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겠느냐? 너는 그가 어떤 일을 할지 알 수 없다. 그는 너를 돕지도 붙들어 주지도 못할 뿐 아니라 네 일을 망치고 너를 곤경에 빠뜨리고 해칠 수도 있다. 그에게 감히 네 마음속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그때 너는 좋은 사람이 아주 중요하고 가치 있고 소중하며,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그 어떤 사람이 되는 것보다도 가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너의 부모조차도 네가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 너의 어려움과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너를 위로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밖에서 열심히 살고 일하는 자식들이 있는데, 특히 어떤 여성은 사장과 가깝게 지내야 하고 심지어 몸을 팔아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데도 부모는 한 번도 딸이 밖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버는지 묻지 않는다. 게다가 가져오는 돈이 적으면 부모는 싫어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까지 한다. 그럴 때 자식은 어떤 기분이겠느냐? (마음이 쓰리고 아릴 것입니다.) 마음이 쓰라리고 이 세상이 너무 어둡다고 느낄 것이다. 자기의 부모조차 이러한데 살길이 있겠느냐?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좋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은 어떻게 생기겠느냐?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겠느냐? 땅에서 바로 태어나겠느냐? 어떤 동물이 직접 진화하는 것이겠느냐? 고등교육으로 길러 내는 것이겠느냐? 수도나 수련으로 만들어지겠느냐? 모두 아니다. 이건 절대로 불가능하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여야만 좋은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다. 좋은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구원받아야 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성령 역사를 얻어 온전케 되어야 하는 것이지 패괴된 인류가 순식간에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모두 친구나 지기(知己)로 곁에 둘 좋은 사람이 필요하다. 네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은 필요하지 않겠느냐? (필요합니다.) 하나님도 좋은 사람이 필요하고 사람도 좋은 사람이 필요하다. 이 일을 이해하는 것이 너에게 어떤 작용을 하겠느냐? 너는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려는 의지와 소망이 있어야 한다. 네가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어렵고 힘들지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좋은 사람이 너무나 필요해요.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렇다면 저 자신이 먼저 좋은 사람이 돼서 다른 사람을 돕고 붙들어 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사람을 더 많이 얻으실 수 있도록 말이죠.”라고 말한다면 바람직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 만약 네가 “인류가 이렇게 패괴되고 사악해요. 하나님을 믿는 몇몇 사람만이 좋은 사람이 되어 봤자 소용없어요. 여전히 괴롭힘 당할 거예요. 왜냐하면 악인이 너무 많으니까요.”라고 말한다면 너는 어리석은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이다. 네가 좋은 사람이 되고 의인이 된다면 하나님은 너를 축복할 것이다. 인류가 아무리 패괴되고 사악하더라도 하나님은 다루는 방법이 있으니 사람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너는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께 구원받는 데에만 집중하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 노아가 만든 방주로 목숨을 건진 사람은 결국 여덟 명뿐이었다.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올바른 길을 걷지 않은 사람은 결국 하나님이 홍수로 멸하였다. 이는 공인된 사실이다. 너는 왜 하나님의 전능함을 인식하지 못하느냐? 너는 왜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사역이 끝날 때 구원받는 사람이 얼마나 되든 이 시대는 결국 끝날 것이다. 대재난은 결국 내릴 것이고, 하나님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네가 진리를 추구해 의인이 되는 것은 너를 위한 것이다. 그것은 너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며 타인에게도 이로운 것이다. 혹자는 “좋은 사람은 좋은 보답을 받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틀렸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 천국에 몫이 있지만 악인들은 살아 있을 때 아무리 잘 풀려도 결국 멸해지고 지옥에 떨어진다. 이는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있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욥기에 기록된, 욥이 행한 몇 가지 일은 사실 편폭이 짧고 아주 간단하며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 몇 가지 일에서 사람은 실마리를 찾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욥의 원칙과 실행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자식을 대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을 대할 때 그의 원칙은 무엇이었느냐? 정에 휘둘리지 않고 원칙을 고수하며 그런 일들로 하나님께 죄짓지 않았다. 이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첫 번째 기준으로, 자기의 가족을 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다음으로 재산을 대하는 방면에서 욥은 재산이 비록 몸 이외의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며 하나님이 축복하고 베풀어 준 것이므로 사람은 재산을 정성 들여 잘 관리하고 보살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잘 보살핀다는 것은 점유하고 탐하거나 그것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 손의 지배, 하나님의 주재를 보고 이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면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할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좋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만약 네가 사람에 대해서는 원칙을 고수할 수 있는데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없다면 이는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겠느냐? 그러면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대하는 방면에서 욥은 하나님의 모든 주재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안배에는 하나님의 박탈과 시련이 포함된다. 때로는 박탈하고, 때로는 시련을 준다. 시련은 무엇을 포함하겠느냐? 때로는 너에게 질병의 고통을 주거나 가정에 일부 환경을 주거나 본분을 이행하는 도중에 일부 어려움, 책망과 훈계, 그리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질과 징계, 심판과 형벌을 마주하게 하기도 한다. 이 모든 하나님의 안배를 너는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만약 네가 순종하지 못하고 늘 벗어나고 싶어 한다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밖에, 본분을 대할 때 사람은 충심이 있어야 하고 충심을 다해야 한다. 충심은 무슨 뜻이냐?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자기가 소유한 전부를 바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야말로 충심이다! 이것이 바로 좋은 사람의 기준이다. 너희 가운데 지금 만약 욥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많을 필요 없이 하나라도 있다면 너희 가운데 기둥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그는 언제든 곁에서 너희의 모범이 될 것이다. 그가 어떻게 하는지 보고 따라 하면 너희도 서서히 변화할 것이다. 생각에서부터 행동에 이르기까지, 진리를 구하는 데서부터 진리를 실행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내적 상태가 급격히 나아지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설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몇 년간 체험하면 너희도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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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말세에 살고 있다. 대부분 가정생활이 전에 비해 풍요로워졌고 생활 각 방면의 물자도 꽤 풍부해졌다. 너희는 어떤 느낌이 드느냐? 그저 육적으로 행복감이 조금 생겼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마음속의 행복과는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너희도 어느 정도 체험을 했고 어떤 일들은 꿰뚫어 보게 됐으며 하나님을 믿으면서 추구하는 것도 전보다 더 실제적이 되었다. 육적 향락을 추구하는 것은 공허하다고 느끼고 진리를 향해 노력하려고 한다. 다들 이러한 것을 체험하지 않았느냐? 육적으로 각종 물질적인 것을 누리는 것이 사람에게 마음의 위로를 가져다줄 수 있겠느냐? 생활의 우월감, 풍족한 물질적 생활이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겠느냐? 그저 사람을 타락시키고 방향을 잃게 만들 뿐이다. 그러면 사람은 이성을 잃기 쉽고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데다가 이치로 깨우칠 수 없게 되어 점차 인성을 상실한다. 갈수록 안일을 탐하고 교만하고 무지하게 된다. 심지어 혼자 생활하는 능력을 잃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아예 독립적으로 살지 못하고 제 앞가림을 못해 부모에게 의존하게 되며, 또한 점점 더 탐욕스럽고 뻔뻔해진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월한 생활 조건과 풍족한 물질적 삶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오직 타락뿐인데, 사람이 편한 것만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며 탐욕스럽기 그지없고 뻔뻔스럽게 만든다. 그것은 사람에게 조금도 이로운 점이 없다. 육체는 네가 잘해 줄수록 더 탐욕스러워지기 때문에 조금 고생을 하는 것이 낫다. 조금 고생을 하면 사람은 올바른 길을 걷고 본연의 일을 한다. 육체가 고생하지 않고 안일을 탐하며 축복받은 가정에서 자라면 사람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진리도 얻지 못한다. 천재(天災)와 인재(人災)가 닥치면 사리를 분별하지도 못하고 이치로 깨우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타락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례가 많지 않으냐? 이방의 수많은 가수와 영화배우들을 보아라. 무명 시절에는 고생도 할 줄 알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지만 일단 유명해지고 큰돈을 벌면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다. 마약을 하는 자도 있고 자살하는 자도 있는데, 다 단명하고 만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이겠느냐? 물질적 향락을 과도하게 누리고 너무 안일하며 어떻게 누리고 어떻게 자극해야 하는지 몰라 어떤 이들은 더 큰 자극과 재미를 찾으려고 마약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끊지 못하는데, 마약을 과다 복용하여 죽고 마는 이도 있고, 어떻게 벗어날지 몰라 아예 자살해 버리는 이도 있다. 이러한 사례가 너무나 많다. 네가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아도, 아무리 좋은 것을 누리고 안일한 삶을 살아도, 너의 욕망이 아무리 충족되어도 마지막은 공허하고 공허할 뿐이며, 그 결과는 곧 멸망이다. 이방인이 추구하는 그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겠느냐? 사실 그건 행복이 아니라 사람의 상상이고 타락하는 방식이며 사람을 타락시키는 길이다. 사람이 추구하는 소위 행복은 가짜이며 사실은 고통이다. 그것은 사람이 추구해야 할 목표도 아니고 사람이 살아가는 가치도 아니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는 방식과 수단 중 일부는 사람에게 육체를 만족시키고 정욕을 방종하는 것을 목표로 삼게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을 마비시키고 유혹하며 패괴시켜 사람이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느끼게 하고 그 목표를 추구하도록 한다. 사람은 그런 것들을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전력을 다해 그 목표를 추구하지만 얻은 후에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공허해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이로써 그것은 올바른 길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왜 이방인의 길을 걷지 않는 것이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느끼는 행복은 어떤 것이겠느냐? 이방인이 추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이후 부자가 되는 것, 세상에서 형통하는 것, 사업을 벌이는 것, 유명 인사가 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묵묵히 본분을 이행하고 검소하게 살아가며 삶의 질에 대한 요구도 그리 높지 않다. 심지어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어둡고 사악한 인간 세상에서 그들은 어떻게 이런 길을 선택할 수 있었겠느냐? 너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형제자매가 큰돈을 벌 능력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나서 많든 적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며 이 행복은 세상의 어떤 물질적인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이미 느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시도해 보았는데, 세상에서 몇 년간 고생해 보니 참으로 피곤하고 힘들다고 느꼈다. 비록 돈은 좀 벌고 육체적 향락도 누렸지만 존엄 있게 살지 못했고 갈수록 공허하고 고통스럽게 살았으며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런 일을 이미 꿰뚫어 보게 되었다.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분명하게 느낀 것이다. 바로 하나님을 따르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고 하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것이 마음이 가장 위로받을 수 있는 일이며, 일생 중 가장 큰 일이라고, 하나님을 얻고 진리를 얻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며 사람의 마음을 가장 편안하고 기쁘며 안정되게 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이 행복을 이미 느낀 것이다. 이는 상상한 것이 아니다. 일부 하나님 선민은 어느 정도 환난과 시련을 겪은 후에 진리를 깨달았고 많은 일을 명확히 알게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는 것이 올바르고, 인간 세상에서 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하고 이 길을 가기로 확정했다. 이런 사람은 진실한 믿음이 생긴 것이고 지난 몇 년 간의 고생이 헛된 것이 아닌 것이다. 그가 얘기한 체험 간증이 깊든 얕든 한 가지는 명확하다. 네가 그에게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하고 그에게 세상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그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금으로 된 산이 있어 그를 유혹한다 해도 그는 순간 마음이 끌릴 수는 있지만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금으로 된 산과 은으로 된 산을 얻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보다 행복하진 않아. 금은보화를 얻는 순간에는 기쁘겠지만 마음속은 괴롭고 고통스럽기 그지없으니 절대로 그 길을 걷진 않을 거야. 간신히 하나님을 찾았는데 만약 지나온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면 앞으로 어디에 가서 하나님을 찾겠어? 하나님을 따를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들어! 금방 사라지고 말 거야! 얻기 어려운 기회라고!’ 그는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을 보았고 그가 하나님을 붙잡은 것은 마지막 지푸라기를 붙잡은 것과 같았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물에 빠진 사람이 구명 튜브를 붙잡을 때 그는 어떤 느낌이겠느냐? (생환의 희망이 생긴 느낌일 것입니다. 필사적으로 붙잡고 절대로 손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느낌이다. 그가 구명 튜브를 붙잡을 때 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이제 살았어. 드디어 살 희망이 생겼어!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살 수 있는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있다면 온 힘을 다해서라도 절대 손을 놓아선 안 돼. 아무리 어렵고 괴로워도 희망을 흘려보내선 안 돼. 마지막 한 가닥의 숨결밖에 남지 않았더라도 이 구명 튜브를 꼭 붙잡아야 해.’ 살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느꼈을 때 사람은 행복을 느끼지 않느냐? 지금 너희가 묵묵히 생각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또는 영 생활을 할 때 자기가 하나님을 따르면서 얻은 것이 아주 많다는 것을 깨달으면 마음속에 이런 행복한 느낌이 생기지 않느냐? 너희는 마음속 말을 좀 해 보거라.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았다면 벌써 재난에 빠져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결과를 맞이했을 겁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본분을 이행함으로써 저희는 많은 진리를 깨달았고 진실한 믿음이 생겼으며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저희는 얻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렇다. 하나님을 따르면서 본분을 이행하여 너희는 아주 많은 것을 얻었다. 모두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이니 하나님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하나님을 칭송해야 한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구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체험한 후에는 진리를 좀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진리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행복은 물질과 안일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향락을 대체하기에 충분하다. 그런 것들을 많이 얻을수록 너는 만족할 줄 모르고 사리를 분별할 줄 모르게 된다. 반면 진리를 분명하게 깨달을수록, 더 많이 얻을수록 사람은 하나님에게 더욱 감사하고 은혜에 더욱 감사할 줄 알게 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갈망하고 하나님에게 더 순종하고 하나님을 더 경외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행복이다. 그렇다면 물질적 향락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겠느냐? 공허와 타락이다. 물질에 대한 추구와 욕망이 갈수록 커져 사람은 지위와 명리라는 시험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러한 물질적 향락을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었겠느냐? 매일 기도하고 자제함으로써 이룬 것이냐?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을 이미 명확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명확히 알게 되었느냐? (한편으로는 하나님 말씀의 폭로를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체험하고 이해한 게 있기 때문에 서서히 일부 진리를 깨닫고 이러한 것들을 명확히 알게 된 것입니다.) 네가 진리를 깨닫고 나서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은 네가 진리를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한 것과 사람에 대한 요구를 네가 마음속 깊이 이미 받아들였고 그것이 너의 실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이 실제는 너의 생명이 아니겠느냐? 이미 너의 생명이 된 것이다. 너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를 얻어 너의 생명이 되게 한다. 아마 너는 아직 별 느낌이 없을 수도 있고, 스스로의 분량이 너무 작은 것 같고 많은 일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생명이 이미 너의 내면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생명이 자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너는 무엇을 느낄 필요가 없다. 네가 명확하게 말하지 못해도 사실 너는 이미 성장한 것이고 변화한 것이다. 그러니 너는 하나님의 생명 진리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너의 마음 역시 네가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에게 다가가고 있고, 하나님도 너를 감찰하고 너의 마음을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을 지금 자세히 생각해 보면 행복하지 않으냐? 아주 행복할 것이다! 말세에 살고 있는 너희는 아주 행복한 것이다. 운 좋게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따르면서 본분을 이행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너희의 내면에 만들어짐으로써 너희가 진리를 얻어 생명이 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 생명이 되게 하고 진리를 실제 생명이 되게 한다면 사람이 가치 있게 사는 것 아니겠느냐?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존귀해지지 않겠느냐? 서서히 존엄하게 살게 되지 않느냐? 그때야 사람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수확이 매우 크다고 느낀다. 진리를 조금 깨달으면 이런 변화가 생긴다. 예전에는 이 일을 명확하게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전부 깨달았다. 알고 보니 스스로의 내면에 이미 하나님 말씀의 진리가 생명이 된 것이다. 진리가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것, 그것이 생명이다. 그것은 진리를 깨달아 맺은 열매로,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징계와 채찍질, 심판과 형벌을 좀 겪고 거기에다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게 되면 스스로도 모르게 수많은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고, 생명이 점점 더 성장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금씩 자라는 것 아니겠느냐? 너희도 그날을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온 힘을 다하여 진리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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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무엇에 기대 일을 처리하겠느냐? 바로 사람의 방법, 사람의 머리, 사람의 알량한 잔꾀에 기댄다. 이러한 것들에 기대 일을 끝내고 완성하면 오만해진다. 밑천이 생겼다고 생각하며 허풍을 떨고 고참티를 낼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비이성적이라고 한다. 사실 그는 그 일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처리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는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일이 닥치면 사소한 데 집착하기 좋아한다. 본분을 이행하다가 실수해서 책망을 받으면 그는 외적인 원인을 찾고 이것저것 탓한다. 환경이 좋지 않다고 탓하고 자기가 그때 이 일을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고 탓한다. 외적인 이유만 찾고 자신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진리 원칙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마음이 소극적으로 변하고 하나님을 오해하기까지 하며 하나님이 그를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 것이겠느냐? 그가 본분을 이행할 때 드러내는 것은 패괴 성품뿐이다. 일을 처리할 때는 원칙이 하나도 없으며 전부 진리와 무관하다. 이토록 가련하다. 이런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 순종하지 않는다. 충심이 없고 마음을 다하지도 않고 더욱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지도 않는다. 그저 끊임없이 사람의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고 외적으로만 행동하고 힘을 쓰는데, 결국 마지막까지도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이런 사람의 생명 성품에 변화가 있겠느냐? 그와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이겠느냐? 하나님에 대해 순종하고 경외하는 면에서 더 나아졌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은 자라지 않았고 패괴 성품에도 변화가 없다. 그저 사람만 교활하고 간사해지며 속임수만 늘고 더 교만해진다. 어떤 일이 닥치든 그는 여전히 사탄의 철학에 기대 살아가며 끊임없이 경험과 교훈을 정리한다. 어떤 일들에서 실패하고 넘어졌는지, 어떤 교훈을 얻어야 다시 실패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을지 늘 이렇게 경험과 교훈을 정리하고 진리는 조금도 구하지 않는다. 사탄의 철학에 기대 살아가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있겠느냐?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지 못하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이런 일들을 만약 제대로 알지 못하면 위험해지고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한다. 이렇게 흐리멍덩하게 하나님을 몇 년 믿으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사람의 양심과 이성이 갈수록 정상적일 수 있겠느냐? 사람이 정상 인성을 살아 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렇게 경험과 교훈을 정리하고 자기의 행동을 바꾸면 비록 실수는 줄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행동이 진리와 무관하고 하나님과도 무관한 사람은 불신파에 속하고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없다! 너희는 이런 사람을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한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그가 본분을 이행하고 있든 자기의 사적인 일을 처리하고 있든 너는 그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힘을 쓰고 있는지 봐야 한다. 그가 만약 처세 철학으로 힘을 쏟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어떤 일이 닥쳐도 진리를 향해 노력한다면, 늘 진리를 향해 고민하며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까?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일까?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 죄짓지 않을까?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을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혐오하지 않을까? 이렇게 하는 게 이성적일까?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지 않을까?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지 않을까?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을까? 이렇게 하는 게 진리를 실행하는 걸까? 악을 행하는 건 아닐까? 하나님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라고 생각한다면, 늘 이런 것에 대해 묵상한다면 이는 어떤 모습이냐? (진리를 구하고 추구하는 모습입니다.) 맞다. 이게 바로 진리를 구하고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는 모습이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일이 닥치면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자기의 머리와 은사에 기대 처리합니다. 하나님과 조금도 관련 없고 자기 뜻이 너무 많이 섞여 있습니다.) 그는 자기 뜻을 섞을 뿐 아니라 자기 뜻에 따라 일을 처리할 때 성찰도 반성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는 에누리 없이 완고하게 자기 방식을 고수하며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일을 처리하고, 하나님에게 기도하지도,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데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이런 사람은 잘못을 저질러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기 쉽지 않겠느냐? 이는 너무 위험하지 않겠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일상생활 속에서의 처신과 드러내는 성품에 어떤 특징이 있겠느냐? (제멋대로 함부로 행동하고, 단속을 받지 않으며, 안하무인에 특히 교만하고 방탕한 데다 독단적입니다.) 주로 이런 것들이다. 오만 방자하고 제멋대로 함부로 행동하며, 방탕하고 단속을 받지 않는 데다 비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늘 거칠며 불량기가 너무 심하다. 책망과 훈계가 없으면 마구 날뛴다.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그는 소극적으로 변하고 반발하고 불복하며 반항하는데, 마귀의 본성이 완전히 드러난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은 일을 처리하거나 말을 하지 않을 때는 그래도 사람처럼 보이지만 일단 일을 처리하기 시작하면 야만적이고 짐승 같은 패괴 성품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어떻게 얘기했느냐? (“너희가 드러내는 것은 부모에게서 벗어난 어린애의 장난기가 아니라 주인의 채찍을 벗어난 우마에게서 분출되는 짐승의 성품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에 대해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중에서)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드러내는 성품은 짐승 같고, 정상 인성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 이런 부류의 사람이 있다면 너희는 분별할 수 있겠느냐? (조금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과 진리를 구하지 않는 사람은 각 방면의 모습과 표출이 모두 다르다. 진리를 구하지 않는 사람의 뚜렷한 모습은 바로 이성과 양심이 없고 일을 처리할 때 진리 원칙이 없을 뿐 아니라 제멋대로 못된 짓을 저지르고 함부로 행동하는 데다가 간덩이가 부은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가련하고 가증스러우며 갖은 추태만 보여 주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데 하나님이 혐오하지 않겠느냐? (혐오하실 겁니다.) 그럼 그 스스로는 의식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왜 그가 가련하다고 하겠느냐?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고 사람다운 모습도 없으면서 스스로 훌륭하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감히 제멋대로 못된 짓까지 저지른다. 그러니 가련하기 짝이 없다! 사람을 분별하는 것은 주로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는지, 진리를 구하는지, 진리를 받아들이는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을 분별하면 정확하고 각 부류의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있다.

너희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냐? (과거에는 추구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럼 너희가 지난 몇 년간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을 때 방금 내가 말한 모습들이 있었느냐?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모습들이 보였을 때, 그런 상황 속에서 살았을 때 마음이 고통스럽지 않았느냐? (고통스러웠지만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가련하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 실제가 없는 것이 가장 가련하고 슬픈 일이다. 이러한 진리들을 지키고 설교도 자주 듣지만 얻지 못해 여전히 사탄의 결박에서 살고,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고 말을 하는데, 딱 봐도 인성이 없다. 너무나 가련하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의식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의식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의식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사람이 무감각하고 둔감해 의식하지 못할까 두려운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는 아니다. 의식하고 나서도 여전히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한사코 회개하지 않는 것이 가장 두려운 것이다. 이는 알면서도 고의로 저지르는 것이다. 알면서도 고의로 저지르고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강퍅하고 악독하며 진리를 싫어한다. 마음이 강퍅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겠느냐? (합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강퍅한 사람은 하나님을 어떤 태도로 대하겠느냐? 반발하고 거역하며 한사코 회개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진리임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과 끝까지 대항하려고 한다! 이런 사람은 어떤 말로를 맞이하겠느냐? (하나님께 징벌받고 파멸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성경에 기록된 그 250명의 족장들은 강퍅하고 패역한 사람이 아니냐? 그들은 결국 어떤 말로를 맞이했느냐? (그들은 갈라진 땅에 의해 삼켜졌습니다.) 바로 그런 결말이다.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길든 짧든 만약 마음으로 진리 추구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가증스러움과 그 결과를 알지 못하면 그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겠느냐? 분명 도태될 것이다. 처음 믿는 사람은 무지몽매하고, 본연의 일을 할 줄도 올바른 길을 걸을 줄도 모른다. 이는 사람의 가련한 모습이다. 만약 하나님을 몇 년간 믿어 본분을 이행할 수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봉사만 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충성스럽게 본분을 이행하고 기꺼이 봉사하며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아직 진리를 추구하진 않더라도 충성스럽게 본분을 이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만약 진리를 조금 깨닫고 진리 추구의 중요성을 의식했지만 여전히 진리를 추구할 수 없다면 이런 사람은 구원받기 쉽지 않고 기껏해야 충성스러운 봉사자로 살아남을 수 있을 뿐이다. 봉사조차 기꺼이 하지 않으면서 권력과 이익을 다투며 교회 생활과 교회 사역을 교란하는 사람의 결말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이미 재난에 빠져 죽음을 기다리는 중이니 서둘러 후사를 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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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는데 자주 소극적이고 연약해진다. 이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분량이 너무 작으며 하나님을 믿는 데 관한 각 방면의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자질이 부족하고, 따라가지 못하며, 어려움이 많다고 생각하여 소극적으로 변하며 심지어는 자포자기하기까지 한다.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자신을 도태시키는 것이다. 그는 ‘어쨌든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께 인정도 못 받고, 하나님이 날 좋아해 주시지도 않잖아. 나는 예배드릴 시간도 많지 않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돈도 벌어야 하고 말이야.’ 등과 같이 생각한다. 이런 것들이 모두 예배에 나가지 않는 이유가 된다. 사정을 제때 알아보지 않는다면, 너는 그저 그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규정하기 쉽고, 혹은 그가 육적 편안함만 탐하고, 세상을 추구하고, 세속에 미련이 남아 있다고 규정할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를 포기해 버릴 것이다. 이는 진리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이러한 이유가 정말 사람의 본성 본질을 대표할 수 있겠느냐? 사실, 그는 그런 어려움에 얽매이다 보니 소극적이 된 것이다. 만약 그를 위해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면 그는 소극적이 되지 않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소극적이고 연약해질 때가 바로 붙잡아 줄 사람이 필요한 때이다. 네가 도와준다면 그는 일어설 수 있고, 내버려 둔다면 그는 소극적이 되고 믿음을 포기하고 물러나기 쉽다. 그것은 교회 사역을 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마음과 책임감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에 자주 나오지 못하는데 그것이 그 사람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또한 그들이 육적 즐거움만 탐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가정과 일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들이 정에 이끌리고 돈을 좋아한다고 판단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저 그런 일에서 사람의 분량이 저마다 다르고, 의지 역시 저마다 다를 뿐이다.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고생해도 내려놓을 수 있다. 믿음이 작은 사람은 구체적인 어려움을 만나면 무기력해지고 이겨 내지 못하는데, 도와주고 붙잡아 주는 사람이 없으면 자포자기해 버릴 것이다. 이때는 곁에서 붙잡아 주고 관심을 기울이고 도와주어야 한다. 그가 불신파이거나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거나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내버려 두어도 된다. 만약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일부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예배에 자주 나오지 못한다면 포기하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와주고 붙잡아 주어야 한다. 좋은 사람이고 이해 능력이 있는 데다 자질도 괜찮다면 더욱 붙잡아 주고 도와주어야 한다.

발췌문 95

본분을 이행할 때는 힘만 쓰면 안 되고 마음도 다해야 한다. 마음을 다해야만 전력을 다할 수 있고 마음을 다하지 못하면 전력을 다할 수 없다. 힘만 다하고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그저 힘만 쓰고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하면 하나님은 열납하지 않는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언제든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흡족게 해야 한다. 만약 네가 절반의 힘은 남겨 놓고 남은 힘만 다하면서 ‘너무 무리하면 안 돼. 무리해서 몸이 망가지면 앞으로 누가 나를 먹여 살리겠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은 어떻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네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본분을 이행하면 손해가 있겠느냐? (있습니다.) 어떤 손해가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혐오하셔서 서서히 성령 역사를 잃게 됩니다.) 성령 역사를 잃는 것이 바로 손해다. 만약 하나님을 몇 년 믿고도 성령 역사가 없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만큼 큰 손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러면 헛되이 믿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 몇 년 믿고 나면 바로 도태된다. 즉, 본분을 이행하는 데 힘을 얼마나 쓰든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너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손해가 아니겠느냐? 너희는 이것이 손해라는 것을 의식했느냐? 만약 정말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이 손해가 아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똑같이 하나님을 5년, 10년 믿었는데 진리 실제를 얻은 사람이 있는 반면 지금까지도 글귀와 도리만 얘기하는 사람도 있으니 이 차이는 크지 않으냐? (큽니다.) 진리 실제를 얻은 사람은 어떻게 얻은 것이겠느냐? 경험과 체험으로 얻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준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 실제는 얻지 못했으면서 여전히 글귀와 도리만 말하는 사람은 어째서 그런 것이겠느냐? 바로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 힘만 쓰고 마음은 다하지 않았는데, 그 결과 하나님을 여러 해 믿었어도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은 복이겠느냐, 화이겠느냐? (화입니다.) 어째서 화이겠느냐? 이 일을 명확히 알 수 있겠느냐?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은 큰일이겠느냐, 작은 일이겠느냐? (큰일입니다.) 무엇과 관련된 큰일이겠느냐? 구원받는 것과 관련이 있느냐? (있습니다.) 하루 종일 글귀와 도리만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구원받는 데 물음표를 그린 것이고 도달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하나님을 10년 정도 믿었는데 여전히 글귀와 도리만 말하는 사람도 있고, 20년 정도 믿었는데도 여전히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으며 진리 실제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위험하지 않겠느냐? 구원받을 수 있을지가 미지수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믿은 햇수가 같다면 어떤 부류의 사람이 구원받을 기회가 더 크고 희망이 더 크겠느냐? 글귀와 도리만 말하는 사람이겠느냐, 아니면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겠느냐?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는 불 보듯 뻔하다. 그럼 너희는 어떤 부류의 사람이 되겠느냐?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 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제로 실행해야 합니다.) (본분을 이행할 때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바로 그거다.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하면 너는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이는 무엇과 관련이 있겠느냐? 사람의 결말과 종착지와 관련이 있다. 어떤 사람은 멍청하게도 잘난 체하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큰 손해를 보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큰 손해를 입는지도 모르면서 번지르르하게 글귀와 도리만 얘기하는데 위험한 벼랑 끝에 서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어떤 말로를 맞이하겠느냐? 우선은 하나님에 의해 도태되는데, 멀리 내다보면 결말이 어떻겠느냐? (침륜되고 멸망됩니다.) 바로 이런 결말과 이런 종착지이다. 하나님을 믿고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면 이게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초심이겠느냐? (아닙니다.) 누구도 이런 결말을 원치 않을 것이다.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는다면 너는 그런 길을 걷지 마라.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걸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말세의 이 단계 사역을 얻지 못한다면 사람은 완전히 끝난 것이고 더 이상은 기회가 없다.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도 네가 어느 국가에서 태어났든 하나님의 말세의 이 단계 사역의 기회를 기다릴 수 있는 은혜시대의 사역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말세의 이 단계 사역이 끝나면 하나님의 경륜이 끝나는 것이다. 끝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결말을 정할 것이니 만물의 결말이 가까워졌고 인류의 결말 역시 가까워졌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사역이 이 정도까지 이르렀는데 사람 마음속에 만약 이런 이상(異象)이 없고 늘 흐미멍덩하고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면, 진리 추구도 중시하지 않으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구원받을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 어느 날 대재난이 닥치고 사역이 완전히 끝나 하나님이 더 이상 양육과 진리 공급의 사역을 행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어떤 성품으로 인류를 대할지 아느냐? 하나님은 크게 진노할 것이고, 그의 공의 성품이 유례없는 방식으로 온 인류에게 드러날 것이다. 이는 인류 최후의 대재난이다. 지금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 기간이다. 하나님은 줄곧 인내하고 관용하며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기다리겠느냐? 하나님이 예정한 사람, 하나님의 선민,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사람이 모두 그의 앞으로 돌아와 그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고 그의 구원을 받아들이길 기다리고 있다. 이들을 온전케 하여 하나님의 대업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은 더 이상 인류 구원 사역을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노아시대도, 멸망한 소돔시대도, 창세 때도 아닌 세상의 마지막 때이다. 그런데 아직도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는지 아직 모르고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을 받아들였는데도 조급해하지 않으며 무지몽매하여 그것을 중시하지도 않는다. 이 사역이 끝나면 사람은 결국 정해진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그 결말은 더 이상 바뀌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어리석게도 ‘괜찮아. 하나님이 또 기회를 주실 테니까!’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기간에나 기회를 주는 것이지 시대가 다 끝나면 기회가 또 어디 있겠느냐? 그것이 꿈을 꾸는 게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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