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고난이 닥친 것도 하나님의 사랑
제가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마저 시력을 잃으셨어요.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저는 결혼할 수밖에 없었죠. 결혼 후에 시댁 형편이 좋지 않았는데, 남편이 저 몰래 많은 빚을 진 탓에 집에는 늘 빚쟁이들이 찾아왔어요. 그 때문에 저는 늘 한숨을 쉬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는데, 너무나 고통스럽고 무력했어요. 그러다 친척이 저에게 하나님의 말세 복음을 전해 주었어요. 하나님께서 진리를 선포하시어 사람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하시는 것을 보면서 저는 마치 생명줄이라도 붙잡은 듯 집안의 어려움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을 앙망했어요. 그 뒤로 점점 집안 형편이 나아졌고, 저는 속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렸죠. 그러다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집안의 모든 돈을 다 써 버렸는데, 친척이나 친구 그 누구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저는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생활상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저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의 축복을 조금씩 경험했어요. 어릴 때 허약했던 아이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로는 별로 아프지 않았고, 저의 신경 쇠약 증세도 점차 나아졌으며, 전에 뇌물을 줄 돈이 없어 받지 못했던 기초 생계비까지 받게 되었어요. 하나님의 긍휼과 보호하심을 보면서 진심으로 감사드렸고, 하나님이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의지처임을 더욱 확신하게 됐어요. 저는 더욱 힘내어 추구했고, 제가 본분을 잘 이행하기만 하면 아무런 재앙도 화도 없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이 잘되게 지켜 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때 교회에서 어떤 본분을 안배하든 저는 최선을 다해 협력했고,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말씀 서적을 운반하는 일조차 거절하지 않았어요. 저는 딸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은혜를 자주 이야기해 주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주었는데, 나중에는 딸도 학업을 그만두고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했어요.
2020년 4월의 어느 날이었어요. 딸이 갑자기 다른 지역에서 본분을 이행하다 집에 왔는데, 심장이 아파서 며칠 동안 집에서 쉬려고 한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저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고, 가끔 피곤하면 가슴이 두근거렸으니, 좀 쉬면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했죠. 며칠 후 딸의 몸 상태가 좀 나아져서 다시 본분을 이행하러 나갔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딸이 다시 돌아온 거예요. 그러면서 가끔 본분을 이행하고 나서 접대 집에 도착하게 되면 숨이 막히고 경련을 일으킬 때가 있다고 했죠. 그래서 딸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어요. 병원에서는 딸이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데, 이 병은 특별한 치료 약이 없어서 그저 건강 관리를 잘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게다가 자주 발작하지 않으면 괜찮지만, 자주 발작하면 몸이 망가지기 쉽고, 도저히 안 되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는 거예요. 딸아이의 병이 그렇게 심각하다는 말을 듣고, 저는 가슴이 철렁했고 짠하더라고요. 저는 ‘우리 애가 병이 왜 이렇게 심한 거야? 하나님은 왜 보호해 주시지 않은 거지?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이렇게 자주 아프면 어떡하지? 이대로면 몸이 그냥 다 망가지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거의 매일 가슴을 졸이면서 애 병이 점점 더 심해질까 봐 걱정했어요. 그리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딸의 병을 하나님께 맡겼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이 상황 속에서 공과를 잘 배우면 딸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번은 딸과 함께 예배드리러 가게 되었는데, 딸이 접대 집에 도착하자마자 발작을 일으키는 거예요. 온몸을 떨고 헐떡이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새빨개지는 게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죠. 딸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고, 속으로 막 원망이 생기는 거예요. ‘애가 젊은 나이에 학업까지 포기하고 전적으로 본분을 이행했는데, 왜 이렇게 심각한 병에 걸릴 수 있지? 남은 생은 계속 병고에 시달려야 하는 건가? 계속 발작하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만약 딸이 없어지면 나 혼자 어떻게 살라고?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셔야잖아. 왜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으시는 거지?’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자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고통스러웠고, 밤에는 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어요. 그때는 정말 부정적이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사느라 본분에도 소홀해졌어요. 대부분의 사역은 동역자 자매한테 맡겼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도 건성으로 했으며, 기도도 형식적으로 하다 보니 하나님과의 관계는 멀어졌죠. 딸은 그런 저를 보더니 그러더라고요. “엄마, 이 병에는 제가 겪어야 할 게 있는 거예요. 엄마가 최근에 계속 소극적이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하나님과 벽이 생긴 것 같아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으로 해결해야 해요.” 저도 제 내적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깨닫고 진심으로 기도했어요. ‘하나님, 제가 지금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아이 병이 낫지 않고 점점 더 심해질까 봐 걱정됩니다. 아이가 견디지 못하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가 병든 것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속에서 공과를 배우고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어느 날 아침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봤어요. 『많은 사람들은 늘 병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해도 호전되지 않고 병고에서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가 없다. 때로는 생명이 위태로워져도 어쩔 수 없이 마주할 수밖에 없다. 사실,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제일 먼저 사람의 수명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는지는 이미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 하나님이 사람이 병으로 고통받게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다. 사람은 그것이 병이라고 느끼지만, 사실 사람은 병이 아니라 은혜를 얻은 것이다. 사람은 먼저 이 일을 인식하고 확신하며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사람은 병으로 고통받으면 하나님 앞으로 자주 오게 되고,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해내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조심히 더 진지하게 자신의 본분을 대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에게 보호이지 멍에가 아니다. 이는 소극적인 면에서 병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 밖에도 모든 사람의 수명은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 이 병이 의학적으로는 죽을병이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네 수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면, 너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이 있고 네 사명이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면, 설령 죽을병에 걸려도 너는 죽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너를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네가 기도하거나 진리를 구하지 않고, 열심히 치료하지도 않고 심지어 치료가 늦어지더라도 죽을 수가 없다. 특히 하나님의 중요한 부탁을 받은 사람이 아직 그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면, 어떤 병에 걸리든 바로 죽지 않으며, 사명을 완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야 한다. 네게 이런 믿음이 있느냐?』(<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이 말씀을 보니까 안정제를 먹은 것처럼 마음이 한결 평온해졌어요. 사람의 생사는 모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으니까 제가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어요. 제 딸이 자기 사명이 완수되지 않았다면 죽을병에 걸려도 죽을 수 없는 거였죠. 반대로 자기 사명을 완수했다면 제가 붙잡아 둘 수도 없는 거고요. 돌아보면, 제 남편이나 아버지도 건강했었지만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어요. 근데 시어머니는 병약한 몸을 갖고도 여든 넘게 살아 계셨고요. 그걸 보면, 누구든지 언제 죽을지랑 아픈 거랑은 관련이 없더라고요. 다 하나님의 주재와 정하심에 달린 거였어요. 그렇다면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일을 바라보고 진리를 구하면서 이 상황 속에서 공과를 배우는 게 맞더라고요.
그 후에 저는 왜 이런 상황이 제게 닥쳤는지 찾고 구하다가 <시련과 연단을 겪는 원칙>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됐어요.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추구하는 것은 다 나중에 복을 얻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러한 속셈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있는 패괴된 것들은 반드시 시련과 연단으로 해결받아야 한다. 사람의 내면에 정결케 되지 않은 부분이 있고 패괴 표출이 있다면 반드시 그 부분에서 연단을 받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안배이다. 하나님은 환경을 마련해 네가 그 환경 속에서 연단을 받으면서 자신의 패괴를 알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지막에는 죽음을 맞이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의도와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놓고 말하면 몇 년간의 연단과 어느 정도의 고난을 겪지 않는다면 사람은 생각과 마음속에서 패괴된 육체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사탄 본성에 통제되는 부분이 있고, 자신의 욕망과 요구가 있다면 그 부분에서 고난을 겪어야 한다. 오직 고난 속에서만이 공과를 배울 수 있다. 즉, 진리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수많은 진리는 다 고난과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깨닫게 된다. 편안하고 순탄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제3부> 중에서) 이 말씀을 보니까 하나님의 뜻을 조금 알겠더라고요. 사람의 믿음 속에는 너무나 많은 불순물이 섞여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시련과 연단을 통해 드러내야 하는데, 오직 연단 속에서만 사람의 진실한 분량을 드러내고 자신의 패괴를 인식할 수 있는 거였어요. 전에는 제가 다 버리고 헌신하면서 본분을 이행했고,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 서적을 운반하는 위험한 본분조차 피하지 않았으며, 아이까지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으니까 제가 꽤나 열심히 추구한다고 생각했어요. 하나님께서 제가 이렇게 헌신하고 애쓰는 것을 보시고 늘 긍휼히 여기시며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여겼어요. 그러나 아이가 심장병에 걸려 자주 발작하고 몸이 매우 허약해질 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느낄 수 없으니까 제 진짜 분량이 드러난 거예요. 그때부터 전 소극적으로 변하여 불평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이전에 헌신했던 것들을 내세워 하나님께 따졌고 본분에도 소홀해졌어요. 보니까 제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유익을 얻고자 함이었을 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더라고요. 그제야 아이가 병든 것에는 하나님의 고심이 담겨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황을 배치하신 것은 제 안의 패괴되고 불순한 것들을 깨끗하게 변화시키기 위함이었어요. 저는 더 이상 소극적인 상태로 대항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믿는 저의 잘못된 속셈과 관점을 해결해야겠더라고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니 조금이나마 순종할 수 있게 되었고, 마음도 덜 고통스러웠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이 말씀도 봤어요. 『너는 하나님을 믿은 뒤 평안만 얻고자 한다. 자식에게 병이 없고, 남편에게 좋은 직업이 있고, 아들이 좋은 배우자를 찾고, 딸이 좋은 남자와 결혼하고, 너의 우마가 밭갈이를 잘하고, 한 해의 농사가 잘되길 바란다. 네가 추구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너는 오직 편안하게 살기만을 바라고, 너의 집에 나쁜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며, 바람이 불어도 네 몸에는 불지 않고, 모래가 날려도 네 얼굴은 때리지 않으며, 홍수가 나도 네 집의 곡식은 잠기지 않고, 모든 재난이 너와 무관하길 바란다. ‘하나님의 품속’에서 살고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생활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처럼 육적인 것만 추구하는 못난 놈에게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영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너는 짐승 아니겠느냐? 아무 대가도 없이 참도를 네게 베풀어 주었는데 너는 추구하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느냐? 진정한 인생을 베풀어 주었는데 추구하지 않는다. 그럼 너는 개돼지 따위가 아니겠느냐? 돼지는 인생을 추구하지 않고 깨끗함을 바라지도 않으며 인생이 무엇인지 모른 채 날마다 배불리 먹고 쿨쿨 잠만 잔다. 참도를 베풀어 주었건만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런 돼지 같은 삶을 계속하고 싶으냐? 그런 사람이라면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비루하고 저속하며, 더럽고 음란하게 살면서 추구하는 목표가 하나도 없으니 너의 일생은 가장 비천한 일생 아니겠느냐? 무슨 낯으로 하나님을 뵙겠느냐? 계속 그렇게 체험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 아니겠느냐? 네게 참도를 베풀어 주었지만 결과적으로 네가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너 자신의 추구에 달려 있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베드로의 체험 ―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 중에서), 『하나님을 믿어서 복을 받을 수 있겠다 싶으면 바로 열의가 생겨나고, 연단받는 것을 보면 바로 열의가 사라지는 이들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하나님을 믿으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있고, 수많은 종교 관념을 버리지 못하며, 개인적인 이익을 놓지 않고, 육적인 복이 내리기를 바라면서 하나님께 너의 육과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한다면, 이는 전부 관점이 바르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육적인 이익만 추구할 뿐, 성품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종교 신앙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이는 전혀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것이 아니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 중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상태가 딱 제모습이었어요. 저는 고통스럽고 무력할 때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보면서 전 하나님을 저를 도와주시고 제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의지처로 간주했어요. 무엇보다도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애랑 의지할 곳 없이 홀로 남겨졌을 때, 하나님을 더욱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양 붙잡았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본분을 잘 이행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안하게 지켜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저는 이런 관념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다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 주시고 재앙 없이 평안하게 지켜 주실 때는 기꺼이 헌신하면서 열정적으로 본분을 이행했어요. 반대로 애가 심장병에 걸려 점점 심해지는데도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지 않으실 때는 바로 낙심하고 실망하면서 금세 소극적으로 변하고 불평하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어요. 심지어 제가 헌신했던 것들을 내세워 하나님께 따졌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대하시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본분에 마음을 다하는 것도 싫어졌고 소극적인 태도로 하나님께 맞섰어요. 그제야 제가 하나님을 믿는 건 그저 하나님을 저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고 평생 평안하게 지켜 주시는 분으로 이용하려는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실 그동안의 헌신에는 진심이 전혀 없었고 하나님께 터무니없는 요구와 지나친 욕망만 가득했는데, 온통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속이려는 것밖에 없었어요. 정말 비이성적이었어요. 전에는 제가 분량이 작다 보니 하나님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인데, 그것만으로도 이미 특별히 은총을 베푸신 거잖아요. 근데도 저는 끝없이 탐욕스럽게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랐고,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지 않으면 금세 돌변했죠. 정말 인간성이라곤 없었어요. 제가 비록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고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서 이치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고 정결케 하시는 사역을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제 관점은 여전히 은혜시대에 머물러 있었어요. 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계속 하나님께 은혜와 축복을 얻어 내려 했는데, 이는 떡으로 배를 불리려는 종교인들과 다를 바 없는 거잖아요. 그럼 그건 종교를 믿는 것이고, 불신파인 거죠. 제가 계속 그런 식으로 믿는다면 결코 진리를 얻을 수도, 성품이 변화될 수도 없죠. 그러니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조차 없겠더라고요.
나중에 또 하나님의 말씀을 한 단락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인식을 갖게 됐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 마음에 합하지 않는 것들과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종종 성찰해야 한다. 이러한 오해는 어떻게 생겨나느냐? 사람은 어째서 하나님에게 오해가 생기느냐? (사람의 이익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유대인이 유대 땅에서 쫓겨난 그 사실을 알고 서글픔을 느낀다. ‘처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아끼셨어. 그들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해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또 만나와 마실 샘물도 주셨어. 그런 다음 또 친히 율법을 반포해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가르치며 그들을 이끄셨지. 사람에게 정말 사랑이 가득했으니 그 시대 사람들은 너무나 행복했겠구나! 그런데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하나님 태도가 180도 달라질 수 있나?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로 간 거지?’ 사람의 정서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이 순간 의심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과연 사랑일까? 예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하던 태도는 어째서 전혀 안 보일까?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 이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하나님은 과연 사랑이 있는 걸까?’ 이렇게 오해가 생겨난다. 그렇다면 사람이 오해가 생겨난 배경은 무엇이냐? 설마 하나님이 한 일이 사람의 관념 상상에 맞지 않아서, 그 사실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냐?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규정하기 때문이 아니냐?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사랑이니까 당연히 사람을 보살피고, 지켜 주고, 은혜와 축복도 내려 주셔야 해.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지! 나는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을 사랑하시는 게 마음에 들어. 특히 사람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게 하신 걸 보니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겠어. 그 시대 사람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야! 나도 그중 한 명이었으면 좋았을걸.’ 거기에 도취된 너는 하나님이 그 순간 나타낸 사랑을 최고의 진리로 생각하고 하나님 본질의 유일한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하나님을 네 마음속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이 그 순간 행한 모든 것을 최고의 진리라고 규정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사랑스러운 부분이자 사람이 제일 존경하고 경외하는 부분이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하나님이 그렇게 행한 것 자체는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네가 규정하는 바람에 그 일은 네 마음속에서 관념이 되고, 하나님을 규정하는 근거가 되어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마치 하나님의 사랑이 긍휼과 보살핌, 보호, 인도, 은혜, 축복과 같은 것 외에 다른 것은 없고, 하나님의 사랑은 그 정도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너는 어째서 그런 면을 그토록 애지중지하느냐? 네 이익과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의 어떤 이익과 관계가 있느냐? (육적인 즐거움과 편안한 생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에게서 그런 것들만 바란다. 다른 것들, 이를테면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 하나님을 위해 고통받고, 버리고, 헌신하고, 심지어 목숨을 내던지는 것 등은 원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 보호, 인도만을 누리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 본질의 유일한 상징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의 유일한 본질로 규정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게 한 사실에서 하나님이 행한 일들이 사람이 관념을 품게 된 근원이 된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것이 인류가 하나님에게 관념을 품게 된 배경이다. 이런 관념이 생긴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성품을 진실로 인식할 수 있겠느냐?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해와 관념이 생겨날 게 뻔하다. 이것은 사람의 인식이 너무나 단편적이고 진실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관념 상상과 사욕으로 분석하고 해석한 사랑이자 인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실한 본질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긍휼과 구원, 보살핌, 보호를 베풀어 주고 간구를 들어주는 것 말고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채찍질과 징계, 훈계와 책망,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이 있습니다.) 맞다. 하나님의 사랑에 해당하는 것은 너무나 많다. 매질, 징계, 꾸짖음, 심판, 형벌, 시련, 연단…. 이런 것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야 비로소 전면적이 되고, 진리에 부합하는 사랑이 된다. 이런 걸 인식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성찰할 때 자신의 치우친 면을 인식하고, 자신의 잘못된 점을 훌륭히 반성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경지에 이르려면 진리를 구해야 한다. 사람은 진리를 구하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없앨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없애면 하나님의 모든 안배에 순종할 수 있다.』(<말씀ㆍ3권 말세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진리를 깨달아야 하나님의 행사를 알 수 있다> 중에서) 하나님 말씀을 보고 나서야 애가 아프다고 할 때, 그토록 크게 반응하고, 그렇게 소극적이고 고통스러워했던 이유가 바로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규정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제가 의지할 곳 없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을 얻게 되니까 그냥 제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평안과 행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단정 지었던 거예요. 일단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도하면 하나님은 길을 열어 주시고,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도우시는 분이라고 간주했고,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여겼어요. 그래서 애가 병에 걸렸을 때, 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니 당연히 딸을 치료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죠. 근데 애 병이 어떻게 해도 낫지 않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을 품고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 냈어요.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하는 기준은 오로지 저한테 이득이 되는가에 따라 달라졌어요. 하나님께서 저희를 돌보시고 보호해 주실 때는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인정했지만, 하나님께서 배치하신 상황이 제 뜻에 맞지 않고 저에게 조금 불리하면 저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어요. 보니까 전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도 단편적으로 이해했고, 그릇되고 터무니없게 이해했는데, 아예 진리에 부합하지도 않았어요. 오늘날 하나님은 말씀을 선포해 사람을 심판하고 정결케 하시는 사역을 하시는 거지 은혜를 베푸는 일을 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사람이 막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는 분량이 작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데 그건 하나님의 사랑의 한 가지 방식인 거죠. 하지만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분량이 자라나면, 하나님은 사람의 분량에 따라 다양한 상황을 배치하셔서 사람한테 시련을 주시고 연단하시죠. 바로 사람이 여러 상황 속에서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알게 되며, 성품이 변화되고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만드시는 거예요. 그건 더더욱 하나님의 사랑이더라고요. 이번에 제 딸이 병에 걸리면서 우리 둘 다 고통을 겪었지만, 이를 통해 제 믿음의 불순물이 드러났고, 또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관념과 상상이 가득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제때에 돌이키고 바뀔 수 있게 됐어요. 딸 아이 또한 자신이 헌신하고 애썼던 것이 복을 받기 위해서였고, 그동안 자기 관념 속의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잘못된 믿음의 관점을 바로잡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졌어요. 이런 게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베푸신 사랑이자 구원이더라고요. 이런 걸 깨닫고 나니,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오해가 사라지고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 됐어요.
그 후, 저는 하나님의 이 말씀 속에서 실행해야 할 길을 찾았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야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자 해야 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상, 너는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하고, 개인적인 선택과 요구가 없어야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해야 한다. 너는 지음 받은 사람인 이상 너를 지은 창조주께 순종해야 한다. 너는 원래부터 너 자신을 주관할 수 없고, 너의 운명을 지배할 본능도 없기 때문이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 이상 성결해지고 변화되기를 추구해야 한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 중에서) 말씀을 보고 나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만 추구하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피조물의 위치를 제대로 지키며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다양한 사람과 일을 체험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설령 고난과 연단이 닥쳤는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때라도 순종하는 자세로 많이 기도하고 구하면서 자신이 표출한 패괴 성품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변화하여 본분을 지키며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려야 하는 게 맞더라고요. 그게 진짜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인 거죠. 그동안 저는 늘 안락한 환경에서 지내다 보니 바람과 비를 견디지 못하는 온실 속의 화초 같았는데, 믿음의 분량도 너무 작고 약했어요. 그러니 조금만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쉽게 소극적이 되고 연약해졌고 시련과 연단 앞에서 전혀 굳게 서지 못했어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제 믿음의 분량이 조금이나마 자라났고, 저 자신의 패괴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어요. 이건 저한테 너무나 유익했어요.
지금도 딸의 병이 완전히 나은 건 아니라서 가끔 발작하기도 해요. 애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마음이 아프고 안쓰럽지만, 그래도 이제는 그거에 크게 좌우되지 않고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 됐어요. 제가 이만큼 변화받고 이 정도의 앎을 얻게 된 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낸 결과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