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나의 복받으려는 속셈은 어떻게 없어졌는가
2003년,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고, 마음이 무척 벅찼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주 예수님이 드디어 돌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 저는 하나님 현현을 갈망하는 더 많은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어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종교계가 아무리 막고 욕하며 큰 붉은 용이 아무리 핍박하고 체포해도 저는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오랫동안 앓아 온 유선종양이 수술도 하지 않았는데 기적적으로 나았습니다. 집안의 사업 수입도 이전보다 세 배로 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본분을 이행하는 데 더욱 힘이 났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어디를 가든, 거리가 아무리 멀고 환경이 고되더라도 기꺼이 갔습니다. 2012년, 저는 교회 리더가 되었고, 본분이 바빠 줄곧 집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예배에 가던 길에 아들을 만났는데, 어린 손녀가 악성 뇌종양에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수십만 위안을 썼지만 낫지 않았고 의사가 길어야 두 달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세상에, 그렇게 어린 손녀가 어떻게 그런 병에 걸릴 수 있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손녀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한쪽 눈도 보이지 않는 상태인데도 TV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가슴 아파 도저히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손녀는 이제 겨우 세 살이라, 한창 활발하게 뛰어놀 나이인데 이 어린 생명이 이렇게 끝나야 하는 걸까요?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휩싸여 다급히 남편에게 가장 좋은 병원에 다시 가볼 수 없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소용없어. 이미 늦었고, 고칠 수도 없대. 길어야 두 달이래.”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의 말을 듣고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손녀가 이런 병에 걸릴 수 있지? 난 하나님을 믿은 후로 계속 본분을 이행하며 고생도 많이 했는데, 왜 하나님은 내 손녀를 지켜 주시지 않은 걸까? 왜 내게 이렇게 큰 시련을 주시는 걸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괴로워져 본분을 이행하러 나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제 내적 상태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을 저버리려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손녀를 지켜 주셔서 병이 낫게 해 주시길 바랐습니다. 성경에 한 소녀가 죽었는데 주 예수님이 손을 잡으니 그 소녀가 일어났다는 기록이 생각나, 저는 손녀를 하나님께 맡긴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빨리 나가서 본분을 이행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제가 이렇게 버리고 헌신하는 것을 보시고 손녀를 지켜 주셔서 병이 낫게 해 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아들과 남편에게도 아이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때 저는 손녀의 병이 낫기만을 바랐습니다. 본분을 이행할 때도 손녀를 마음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고, 머릿속은 온통 손녀의 활발하고 사랑스러운 모습들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본분을 이행하고는 있었지만 예전처럼 책임감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그렇게 사랑스러운 손녀가 두 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칼로 베는 듯 아팠습니다.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저는 소극적이고 연약한 상태에 빠져 본분 이행에서도 성과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제 내적 상태가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서 바로잡지 않으면 성령 역사를 잃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손녀가 이렇게 중병에 걸려 마음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제 마음을 지켜 주시고, 당신의 뜻을 깨닫도록 저를 깨우쳐 주시옵소서.” 그 후,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사람이 연약해지거나 소극적이 되거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거나 실행의 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다 정상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너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믿음이 있어야 하고, 욥처럼 하나님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욥이 비록 연약하여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지만, 그는 사람이 태어나서 가지게 된 모든 것은 여호와가 베풀어 준 것이고, 그 모든 것을 거두어 가는 이도 여호와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어떤 시련을 겪든 그의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네가 체험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떤 연단을 받든, 결국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사람의 믿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가 그렇게 사역함으로써 온전케 하는 것은 사람의 믿음과 사랑이며, 또한 사람의 의지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온전케 하는 사역을 할 때 사람은 그것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너의 믿음이 필요하다.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일에서 사람의 믿음이 필요하고, 네가 관념을 내려놓지 못할 때 너의 믿음이 필요하며, 네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알지 못할 때 너의 믿음이 필요하다. 너는 이러한 입장을 지키고 굳게 서야 한다. 욥이 이 수준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말씀했다. 다시 말해, 네가 믿음 안에 있어야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네게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너를 온전케 하지만, 네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도 너를 온전케 할 수 없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 중에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저는 손녀가 이런 병에 걸린 데에는 하나님의 허락이 있으며, 이는 저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자 제 믿음을 온전케 하시려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욥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막대한 재산과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는 것도 당연하다고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시련을 주셨을 때, 그는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지언정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 욥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있었고,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 손에 맡기고 하나님의 처분에 따랐습니다. 욥의 인성은 정말 정직하고 선했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예전에 저는 본분을 이행할 때 열정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며 아무리 고생하고, 종교계와 큰 붉은 용이 아무리 핍박하고 정죄해도 소극적이 되지 않고 늘 한결같이 복음을 전하며 헌신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에 집안 사업이 잘되고 하나님께서 제 병도 고쳐 주시는 등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손녀가 뇌종양에 걸려 두 달밖에 살지 못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제 요구대로 손녀를 고쳐 주시지 않는다며 과거의 헌신을 내세워 하나님께 따지고, 손녀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인정에 어긋나게 행하시며 제게 이렇게 큰 시련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보아하니 저는 인성과 이성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과 순종도 없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는데, 저는 더는 이렇게 탐욕스러워서는 안 되었습니다. 욥을 본받아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 후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형제자매들 집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손녀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손녀도 언젠가 건강하고 활발하게 내 주위를 뛰어다닐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예전에 제가 유선종양에 걸렸을 때, 의사는 종양이 이미 커져서 수술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꾸준히 본분을 이행했고, 종양은 기적처럼 나았습니다. 이번에도 본분을 잘 이행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하루 일과를 빡빡하게 짜서 형제자매들과 자주 모임을 갖고 사역을 상의했습니다. 형제자매들은 모두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새 신자를 붙들어 주었고, 사역은 조금도 지체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속으로 ‘어쩌면 어느 날 갑자기 손녀의 병이 나을지도 몰라’ 하고 생각했습니다. 두 달 후, 집에 돌아가 보니 손녀의 병은 호전되기는커녕 암세포가 온몸에 퍼져 숨만 간신히 붙어 있었고, 작은 관까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끊임없이 울고 있었고, 제 마음도 찢어져서 눈물이 참을 수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또 하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손녀가 아팠던 이 두 달 동안 저도 본분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믿은 후로 줄곧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했습니다. 사업도 그만두고, 세상 사람들의 비방과 친척들의 외면을 견디고, 큰 붉은 용의 체포에도 맞서며,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서도 본분을 지켰는데,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까? 제가 하나님을 명백히 대적하는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일이 제게 닥친 것입니까? 왜 하나님은 제 손녀를 지켜 주시지 않았습니까?’ 당시 제 내적 상태는 바닥까지 곤두박질쳤습니다. 걸을 힘도 하나도 없고, 밥도 먹고 싶지 않으며, 본분마저 그만두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고 소극적인 상태였습니다. 원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손녀의 모습을 보니 도저히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원망하고 싶지 않지만,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너무나 연약하고 무력합니다. 제 마음을 지켜 주셔서 원망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얼마 지나지 않아 손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마음이 너무 고통스러워 하나님 말씀을 볼 생각도, 예배에서 교제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습니다. 특히 형제자매들의 아이들 중에 우리 손녀와 나이가 같은 아이를 볼 때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소극적인 상태와 오해에 빠져 한동안 벗어나지 못한 채 본분에서도 아무런 성과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구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마음이 훨씬 환해졌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출생이 전생의 인연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죽음은 그 인연의 끝인 것이다. 사람의 출생이 현생에서 이행해야 할 사명의 시작이라면 죽음은 그 사명의 끝이다.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출생 배경을 정해 놓은 창조주는 죽음에도 당연히 각자의 배경을 안배해 놓았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의 출생은 우연이 아니고, 죽음 역시 돌연한 것이 아니다. 태어남과 죽음은 모두 그 사람의 전생 및 금생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 사람의 출생과 죽음의 배경은 모두 창조주의 예정과 관련이 있다. 이는 한 사람의 타고난 숙명이자 운명이다. 모두가 다른 배경에서 태어나듯, 죽음에도 각자 고유한 배경이 있다. 그래서 사람의 수명, 죽음의 방식과 시점이 모두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튼튼하고 건강하지만 일찍 죽는다. 어떤 이는 몸이 약하고 자주 아프지만 장수하며 편안히 눈을 감는다. 비명횡사하는 사람도 있고, 천수를 다 누리는 사람도 있다. 타지에서 마지막을 맞는 이도 있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는 이도 있다. 하늘에서 죽는 사람도 있고, 지하에서 죽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익사하고 누구는 재난을 만나 죽는다. 누구는 아침에, 누구는 밤에 죽는다…. 누구나 빛나고 당당하게 태어나 멋진 삶을 살다 명예롭게 죽기를 바란다. 하지만 숙명을 뛰어넘고, 창조주의 주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사람은 미래를 위해 어떤 계획이든 세울 수 있어도 어떻게 태어날지, 언제 어떻게 죽을지 계획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죽음이 닥치는 것을 피하고 막으려 애쓰지만 죽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조용히 다가온다. 그 누구도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 더 나아가 어디서 죽을지 알지 못한다. 인류의 생사를 주관하는 존재는 인류 자신도, 자연계의 그 어떤 생명체도 아닌 유일무이한 권병을 지닌 창조주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인류의 생사는 자연계 내 어떤 법칙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주 권병의 주재로 인한 결과이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저는 비로소 사람의 운명과 생사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며, 사람이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을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것이라 사람이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손녀가 어떤 병에 걸리고 언제 죽을지 역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이지, 제 주관적인 바람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사역하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른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역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손녀의 운명을 바꿔 주시길 바랐습니다. 그 본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손녀의 생사는 그 아이의 전생과 현생에 관련이 있어서 요 몇 년밖에 살지 못한 것이 바로 그 아이의 운명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집안의 아이들 중에도 여러 불치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한 믿지 않는 사람의 아이도 뇌종양에 걸렸다가 당시에는 치료되었지만, 열두 살에 병이 재발하여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를 통해 사람이 얼마나 살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이며, 가족이 하나님을 믿는지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하나님을 믿으니 손녀가 병에 걸려도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이었습니다. 이 점들을 깨닫고 나니 마음의 고통이 한결 덜어졌고, 손녀의 죽음에 대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깨달음을 남편과 아들에게 이야기해 주며 그들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제 문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복을 받고 화를 입는 일에 관해서는 구할 진리가 있다. 어떤 말씀이 사람이 지켜야 할 명언이겠느냐?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라고 말한 적 있는데, 이 말은 진리이냐 아니냐? 이 말은 사람의 말이므로 진리의 높이까지는 오르지 못하지만, 여기에 진리에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 진리에 부합하는 부분은 어떤 것이냐? 사람이 복을 받든, 화를 입든 모두 하나님 손에 달렸고, 모두 하나님의 주재라는 점, 이것은 진리다. 적그리스도가 그 점을 믿겠느냐? 믿지 않는다. 그는 이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왜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느냐? (그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는 복만 받으려 합니다.) (너무 이기적이어서 육적인 이익만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을 받으려 하고 화를 입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 복을 받고 좋은 것을 얻고 은혜를 받고, 더 많은 물질적 누림을 얻고, 큰 이득을 얻는 것을 보면 그는 그것이 하나님이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런 물질적인 축복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곧 이런 뜻이다. “당신이 정말 하나님이라면 사람을 축복하고 재앙을 없애야지 사람이 고통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당신을 믿는 일이 값지고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을 따르고도 화를 입고 고통받는다면 사람이 당신을 믿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는 만사 만물이 모두 하나님 손안에 있고 하나님이 모든 걸 주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인정하지 않는 원인이 무엇이냐? 적그리스도는 화를 입는 것을 겁내고, 이익을 얻고, 덕을 보고, 축복을 누리기만을 바란다. 그는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면서 하나님 손에서 이익을 얻기만을 바란다. 적그리스도는 이런 이기적이고 비열한 관점을 갖고 있다. 이것이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과 관련된 말씀에서 보이는 일련의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일련의 모습은 주로 적그리스도의 추구 관점과 관련되고, 또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이런 일을 대하는 그의 견해, 평가, 이해와 관련된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10조 진리를 멸시하고 공공연하게 원칙을 위배하며 하나님 집의 안배를 무시한다(6)>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적그리스도의 비열한 속셈을 폭로하였습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복과 이익을 얻기 위함이기에, 일단 화를 입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배반합니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복과 이익을 얻는 것을 기반으로 하며,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는 속셈과 목적을 반성해 보니, 적그리스도와 다를 바 없이 복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처음 하나님을 믿었을 때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유선종양이 저도 모르게 나았고 집안 사업이 번창하는 등 하나님께서 제게 많은 은혜와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기뻐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걸을 때도 흥얼거렸으며, 온 가족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남편과 아이들까지도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저 역시 본분을 이행할 때 힘이 넘쳤고, 버리고 헌신하며 고생하는 것도 가치 있다고 느끼며 마음 깊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손녀가 뇌종양에 걸려 두 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저는 하나님께서 손녀를 지켜 주시지 않았다고 원망했습니다. 손녀의 병이 낫게 해 달라고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했으며, 하나님께서 제가 충성스럽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보시고 손녀를 기적처럼 낫게 해 주시길 바라며 본분을 더 열심히 이행했습니다. 손녀가 세상을 떠나자, 저는 또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 원망을 쏟아냈고, 심지어 본분조차 이행하고 싶지 않았으며, 과거에 헌신한 것을 빌미로 하나님께 따지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제가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평생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감옥에 갇혀 고난까지 겪었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상과 축복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헌신을 의의 면류관과 맞바꿀 흥정의 밑천으로 삼아 하나님을 협박했고, 하나님의 성품을 심각하게 거슬러 결국 하나님의 징벌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관점도 바울과 같았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한 만큼 하나님도 제게 그만큼 주셔야 한다고 여기며,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원망했습니다. 저는 제가 너무나 이기적이고 비열하며 이익만 좇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세상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것처럼, 일한 만큼 삯을 받아야 하고, 안 주면 안 하겠다는 심보였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저는 오직 하나님께서 복과 은혜를 주시고 제 이익을 채워 주셔야만 본분을 이행했으니, 진심은 조금도 없는 거래일 뿐이었습니다. 저의 비열한 속셈을 생각하니 정말 하나님께서 혐오하고 역겨워하실 만했습니다.
그 후,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적그리스도 부류는 아무리 많은 일을 겪어도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를 구해 해결할 줄 모르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일을 바라볼 줄은 더욱 모른다. 이것은 순전히 그가 하나님이 하는 말씀 하나하나가 다 진리임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진리를 교제하든 적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적그리스도는 무슨 일을 대하든 올바른 태도를 보이지 않으며, 특히 하나님과 진리를 대하는 일에서는 더더욱 관념을 지키며 죽어라 놓지 않는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는 하나님, 초자연적인 하나님이다. 이적과 기사를 나타낼 수만 있으면 관세음보살이든 부처든 마조(媽祖)든 상관없이 그는 그것들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적과 기사를 나타낼 수 있는 존재만이 하나님 신분을 갖춘 하나님 자신이고, 이적과 기사를 나타낼 수 없는 존재는 아무리 많은 진리를 선포한다 해도 반드시 하나님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여긴다. 그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하나님의 큰 능력이자 전능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야만 하나님의 큰 능력이자 전능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성육신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해서 사람을 정복하고 구원하는 일, 하나님 선민을 양육하고 목양하고 이끄는 일, 사람에게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겪게 하는 일, 이로써 진리를 깨닫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일 등 이 모든 실제적인 사역을, 적그리스도는 사람이 한 것이지 하나님이 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그리스도의 생각에 하나님은 신주 뒤에 숨어서 사람에게 공양을 받고, 사람이 바치는 음식을 먹고, 사람이 피우는 향으로 호흡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손 내밀어 도와주고 사람이 도움을 청할 때 정성껏 소원을 빌면 마땅히 큰 능력을 보여 주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즉시 사람을 도와주고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이 바로 참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이 적그리스도의 눈에는 하찮게만 보인다. 왜 그렇겠느냐? 적그리스도의 본성 본질을 보면,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행하는 모든 양육, 목양, 구원 사역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필요한 것은 현세에서 일이 잘 풀려 만사형통하는 것이고, 현세에 징벌받지 않고 내세에는 천당에 가게 되는 것이다. 그의 관점과 필요는 진리를 증오하는 그의 본질을 증명한다.』(<말씀ㆍ4권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제15조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의 본질을 부정한다(1)> 중에서) 하나님 말씀의 폭로를 통해 저는 제가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여전히 막연한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보살처럼, 복을 내려주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제게 복을 주시고, 온 가족이 평안하고 병과 재앙이 없도록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손녀가 불치병에 걸리자, 저는 본분을 더 많이 이행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이적과 기사를 베풀어 손녀의 병을 고쳐 달라고 요구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큰 복을 내려주는 대상으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제가 헌신하는 ‘정성’을 보시고 제 요구를 만족시켜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제가 어찌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말세 사역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병을 고치고 귀신을 좇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선포하여 심판과 형벌의 사역으로 사람을 정결케 하고 구원하며,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사역을 알지 못했고,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관점을 추구하고 어떤 길을 걸었는지 반성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진리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환경 속에서 실제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며 성품 변화를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오로지 하나님과 거래하며 은혜와 축복을 요구했습니다. 제가 이런 태도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 추구에는 힘쓰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얻기만을 추구했습니다. 심지어 손녀의 죽음 때문에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반발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여기고 본분조차 이행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완전히 하나님의 반대편에 섰던 것입니다. 만약 회개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이 버리고 헌신해도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후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추구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좀 더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고난받는 것,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 것, 또는 육체가 평안하고 모든 것이 순조로우며 편안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모두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가져야 할 목적이 아니다. 네가 이렇게 믿고 있다면 너의 관점은 바르지 않은 것이며, 너는 절대로 온전케 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기묘함과 난측함에 대해 알아야 한다. 또한 이런 인식을 통해 네 마음속에 있는 개인적인 요구와 소망, 관념을 없애야 한다. 이런 것을 없애야만 하나님이 요구한 조건을 갖출 수 있고, 이것을 통해서만 생명을 가질 수 있으며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이 요구한 성품으로 살기 위함이다. 그래서 자격 없는 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통해 그의 행사와 영광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옳은 관점이자 네가 추구하는 목표여야 한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 중에서), 『사람의 본분은 사람이 복을 받거나 화를 입는 것과 무관하다. 본분은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천직이므로 보수나 조건을 따지지 말아야 하고 이유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본분 이행이라 할 수 있다. 복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심판받은 후 온전케 되어 누리는 복을 말하고, 화를 입는다는 것은 사람이 형벌과 심판을 거친 후에도 성품 변화를 이루지 못해, 즉 온전케 되지 못해 받는 징벌을 말한다. 그러나 복을 받든 화를 입든 사람은 피조물로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이것은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것이다. 너는 복을 받기 위해 본분을 이행해서도 안 되고, 화를 입을 것이 두려워 본분 이행을 거부해서도 안 된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성육신 하나님의 직분과 사람의 본분의 구별>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저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복을 받거나 본분을 이행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환경 속에서 진리를 구해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고 자신의 실제 체험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며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기 위함이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추구 관점임을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저는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복을 받거나 화를 입는 것과 관계가 없으며,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직책으로, 복을 받든 화를 입든 마땅히 자신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원망하고 당신께 은혜와 축복을 구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하시는 일은 다 좋은데, 제가 영안이 어두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당신의 사역을 알지 못한 채 당신과 거래하려 했습니다. 이제 저는 저의 잘못된 추구 관점을 내려놓고 당신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기 원합니다.”
이러한 시련과 연단을 겪으며 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을 받으려 했던 제 속셈과 불순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믿는 관점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전능과 주재에 대해서도 조금 알게 되었고, 고난과 연단을 겪는 것이 좋은 일이며 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