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더이상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원망하지 않게 되다
저는 평범한 시골 가정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리셨습니다. 저희 마을에는 부잣집이 하나 있었는데, 으리으리한 집에서 늘 새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그 집 아이들이 저는 무척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나와 괜찮은 직장을 구하면, 출세해서 남들에게 우러름과 부러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전신 홍반 루푸스라는 병에 걸렸습니다. 이는 완치가 불가능한 류머티즘성 면역 질환으로, 평생 약물 치료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몹시 의기소침했고, 제가 왜 이런 병에 걸렸는지 알 수 없어 공부에만 매달렸습니다. 제 성적은 항상 최상위권이었고 꿈꾸던 대학에 합격하면 제 운명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대입 시험을 20여 일 앞두고 고열이 내리지 않아 입원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 바람에 시험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결국 저는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하고 평범한 전문대에 진학했습니다. 운명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던 저는 입학 후 편입을 신청했지만, 반년 만에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잦은 미열과 손발 관절의 부종 및 통증으로 계단을 오르기도 힘들었고, 때로는 보온병조차 들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전 학교를 중퇴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자신의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또래 친구들을 보며 저는 하늘을 향해 깊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운명은 왜 이리 불공평한 걸까? 어째서 내 팔자는 이 모양인 거지?’ 저는 늘 세상을 원망하고 남을 탓했으며, 심지어 죽음을 생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바삐 사시는 부모님을 보면 차마 그럴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를 버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고, 몸이 많이 회복되어 정상인처럼 생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리더는 제게 영상 제작을 맡겼고, 저도 기꺼이 영상 제작 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웠습니다. 그 후 전 책임자로 발탁되었고 너무나도 기뻐서 더 적극적으로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가끔 미열이 날 때도 있었지만 꾸준히 본분을 지켰습니다. 나중에 리더는 제 건강 상태를 고려해 고향으로 돌아가 할 수 있는 만큼 본분을 이행하도록 안배해 주었습니다. 저는 상실감이 조금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앞으로 나한테 양성될 기회는 영영 없을 것 같아. 이런 병에 걸린 걸 누굴 탓하겠어? 내 팔자가 사나운걸!’ 그 후 저는 교회에서 문서 본분을 이행했습니다. 저는 항상 문서 본분만 이행할 뿐, 남들 앞에 나설 수 없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했습니다. 리더가 늘 각 예배 장소를 다니면서 하나님 말씀에 관한 교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무척 멋지고 주목받는 모습을 보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진리를 좀 더 깨닫고 형제자매의 내적 상태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면, 다들 날 리더로 뽑아 줄지도 몰라.’ 그래서 저는 예배에 갈 때마다 형제자매들의 내적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가, 돌아와서는 하나님 말씀을 찾아 다음 예배 때 형제자매들과 교제했습니다. 모두가 제 교제를 진지하게 듣는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뻤습니다. 그렇게 한창 열의에 차서 본분을 이행하던 어느 날, 저는 자전거를 타고 예배에 가다 넘어지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다쳐 걸을 수 없게 되었고, 집에서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곤혹스러운 마음에 ‘요즘 본분을 무척 적극적으로 이행했는데,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난 왜 이리 재수가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얼마 후 있을 교회 선거였습니다. 저는 리더로 선출될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리더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리더는 교회의 전반적인 사역을 책임져야 합니다. 자매님은 몸이 성치 않아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 문서 본분을 이행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듣자 제 마음은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하게 식어 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리더가 될 운명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 후 다시 예배에 갔을 때는 예전만큼의 열의가 없었고, 형제자매의 문제에 대해서도 애써 고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교회에서 새로 선출된 리더는 저와 동갑인 천팡(陳芳) 자매였는데, 저는 그녀가 무척 부러웠습니다. 그 자매는 건강해서 리더로 뽑힐 수 있었던 반면, 저는 고작 문서 관련 본분밖에 못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속으로 불평했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헌신하고 싶은데, 대체 왜 내 몸은 건강하지 않은 거야? 의욕만 있고 힘이 따라주지 않네. 아무래도 내 팔자가 사나운 것 같아!’ 상실감에 빠진 나머지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가 리더는 될 수 없지만, 문서 본분에서 성과를 내면 형제자매들이 예전처럼 나를 우러러보지 않을까?’ 그렇게 저는 적극적으로 원고를 검토했습니다. 그런데 연말 무렵 다리가 아파 걸을 수 없게 되었고, 검사 결과 대퇴골두 괴사로 나타났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에 또다시 사람들이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고, 저는 안전상의 우려로 밖에 나가 형제자매들을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은 끝없이 가라앉았습니다. ‘내 팔자는 왜 이렇게 기구할까? 예전에 공부로 운명을 바꿔 보려던 것도 뜻대로 안 됐고, 하나님을 믿으면 운이 좀 따를까 싶었는데 여전히 되는 일이 없어. 이젠 병세도 악화되고 안전 문제까지 생겨 본분마저 이행하지 못하게 됐으니, 더는 남들 앞에 나설 날이 없겠지. 나는 정말 고생만 할 팔자인가 봐!’ 저는 하루 종일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 당시 글을 쓰면 되겠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이런 제 운명을 생각하니 아무리 추구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 글 쓸 의욕이 사라졌고, 온종일 의기소침한 상태로 지냈습니다.
어느 날, 저희 집 근처에 사는 한 자매가 제게 하나님 말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무척 감사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긍휼히 여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동안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진 채 팔자 탓만 하며 진리를 구하지 않고 공과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나 패역했습니다!’ 그 후, 저는 하나님 말씀 두 구절을 보고 제 상태를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의기소침이라는 부정적 정서가 생겨난 근원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중 어떤 부류의 사람은 항상 자기 팔자를 탓해서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기기도 한다. 이것이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농촌 혹은 빈곤 지역에서 살았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그의 집에는 간단한 가구만 몇 개 있을 뿐, 귀중한 물건은 없다. 옷도 한두 벌이 전부이고, 낡아 빠졌더라도 입어야 한다. 평소에 맛있는 것도 잘 챙겨 먹지 못하고, 고기를 먹으려면 명절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예 헐벗고 굶주릴 때도 있다. 큰 그릇에 고기를 잔뜩 담아 놓고 먹는 것이 꿈이지만, 이루기가 어렵다. 과일 한 번 먹기도 힘들다. 그는 이러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대도시에 살면서 능력 있는 부모를 뒀고, 먹고 싶은 것은 다 먹을 수 있고, 입고 싶은 옷도 마음껏 입을 수 있고, 누리고 싶은 모든 것을 손만 뻗으면 얻을 수 있고, 식견도 있는 사람들과 자기는 다르다고 느낀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남들은 팔자가 얼마나 좋아. 그런데 내 팔자는 왜 이 모양이지?’ 그는 항상 두각을 나타내려 하고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운명을 바꾸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났는데 바꾼다고 무엇이 얼마나 바뀌겠으며, 좋아진다고 한들 얼마나 좋아질 수가 있겠느냐? 성인이 되어 사회에 진출해서는 뭘 하든 벽에 부딪히고 어디를 가든 꼭 괴롭히는 사람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재수 없다고 여긴다.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지? 왜 항상 저열한 인간을 만나는 거야? 어려서 팔자가 사나웠던 건 그렇다 쳐도, 커서까지 팔자가 이렇게 안 좋다니. 나를 드러내고 싶어도 기회가 없어. 기회가 없는 건 그렇다 쳐. 그냥 열심히 일하고 돈 많이 벌어서 잘 살고 싶을 뿐인데, 그것도 못 이룬단 말이야? 잘 사는 게 나한테는 왜 이렇게 아득한 일인 거지? 상류층의 삶을 바라는 것도 아니잖아. 최소한 도시 사람처럼 살기라도 하고 싶어. 남들한테 무시당하지 않고 2등, 3등 시민 취급을 당하지 않으면서. 적어도 누가 나를 부를 때 ‘어이, 이 자식아, 거기 너, 이리 와!’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내 이름을 부르고 존칭을 붙여 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그런 존칭 하나도 못 듣지. 무슨 팔자가 이 모양이람?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생해야 해?’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고생스러웠지만,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는 참도임을 알아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예전에 했던 고생은 다 가치 있는 것이었어. 모든 게 하나님의 지배이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야. 하나님의 행사는 너무나 좋았어! 그런 고생이 없었다면 나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을 거야. 하나님을 믿으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 운명도 바뀌겠지. 그리고 교회에서는 형제자매들과 평등하게 생활할 수 있어. 나를 ‘형제’ 혹은 ‘자매’라고 불러 주니 나한테도 존칭이 생긴 거야. 사람들한테 존중받는 기분이 들어.’ 운명이 바뀐 것 같고, 예전처럼 고통스럽지 않은 것 같고, 더는 팔자 사나운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 것이다. 하나님을 믿게 된 그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열심히 이행하기로 다짐한다. 괴롭고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매사에 다른 사람들보다 고생하고, 많은 사람의 지지와 높은 평가를 얻고자 노력한다. 나중에는 리더나 책임자, 또는 팀장으로 뽑힐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러면 조상과 가문을 빛내는 것 아니냐고, 그러면 운명을 바꾼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그는 실의에 빠진다. ‘나는 하나님을 오래 믿었고 형제자매들과도 잘 어울려 지냈어. 그런데 리더, 책임자, 팀장을 뽑을 때마다 왜 내 차례는 안 오는 거지? 생긴 게 너무 평범한 탓일까? 아니면 사람들 눈에 띌 만큼 비범한 일을 못 해서 그런가? 선거가 있을 때마다 한 줄기 희망을 품고 있다고. 팀장으로 뽑혀도 좋겠어! 난 하나님께 보답하고 싶어서 가슴이 뜨거운데, 선거가 있을 때마다 실망하게 돼. 번번이 나와는 인연이 안 닿아. 왜 이렇지? 정말로 나는 한평생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 보통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사람밖에 될 수 없는 건가? 어린 시절, 젊은 시절, 중년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쭉 이렇게 평범했어. 아무것도 이룬 게 없지. 야심이 없느냐고 하면 그건 아니야. 자질이 떨어지느냐, 그것도 아니야. 노력을 덜 한 것도 아니고 고생을 견디지 못한 것도 아니야. 나한테는 의지가 있고 목표가 있어. 더 나아가 야심이 있다고도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좀처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걸까? 결국은 내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고 운이 나쁘기 때문이야. 하나님께서 이렇게 안배하신 거야!’ 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난 것 같다고 느낀다. … 어떤 일이 닥치든 그는 항상 자기 팔자 탓으로 돌리며,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는 점에 집중하고, 더 깊이 인식하고 납득하려 한다. 이러다 보면 그의 정서는 점점 더 의기소침해진다. 본분을 이행하다가 실수라도 하면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휴! 팔자가 이 모양인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어?’ 예배 시간에 다른 형제자매들은 모두 교제하는데 자기는 아무리 궁리해 봐도 별로 인식이 없으면 또 같은 생각을 한다. ‘어휴! 팔자가 이 모양인데 무슨 인식이 있겠어!’ 남이 자기보다 말을 잘하고, 교제하는 인식도 분명하며 빛 비춤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그의 정서는 더 의기소침해진다. 남이 기꺼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면서 본분 이행에 성과를 내 형제자매들의 지지를 받고 발탁되는 것을 보면 그는 내심 씁쓸해진다. 남이 리더 일꾼이 된 것을 보면 그의 정서는 더욱더 의기소침해진다. 심지어는 남이 노래를 잘하고 춤을 잘 추는 것만 봐도 자기는 그 사람만 못하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진다. 어떤 사람과 일, 사물에 직면하든, 어떤 환경이 닥치든, 그는 의기소침이라는 정서로 대응한다. 남이 멋진 옷을 입은 것만 봐도, 남의 머리 모양이 보기 좋기만 해도, 그는 속상해하고 질투와 부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결국에는 언제나처럼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진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중에서), 『항상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이 부류의 사람들은 마음이 커다란 바위에 짓눌려 있는 것과 같다. 자기에게 닥친 일들이 모두 나쁜 운명으로 인한 것이라고 여기는 까닭에 무슨 일이 닥치든 사람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고 소극적이 되어 일을 게을리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 결국에는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는 생각에 자포자기하고 그럭저럭 되는대로 밥만 축내고 살아가면서 죽을 날을 기다린다. 그럼으로써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고, 구원받는 등 하나님의 요구에 흥미가 점점 떨어지고, 심지어는 갈수록 배척하고 거부하게 된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 팔자가 안 좋은 것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이자 근거로 삼는다. 그는 자기에게 임한 환경 속에서 자기의 패괴 성품과 부정적 정서를 분석하여 그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늘 팔자가 안 좋다는 점을 내세워 자기에게 닥치고 자기가 체험한 모든 사람과 일, 사물에 대응한다. 그 결과 의기소침한 정서에 더 깊이 빠져든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중에서)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것이 바로 저의 상태였습니다. 저는 줄곧 제 팔자가 사납고 기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늘 의기소침한 감정에 빠져 지냈습니다. 어릴 때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 때문에 공부로 운명을 바꾸려 했지만, 불행히도 고등학교 1학년 때 전신 홍반 루푸스에 걸렸고, 대입 시험 기간에 병이 재발하여 꿈꾸던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엔 병세가 악화되어 학교를 중퇴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식으로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저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마음에 늘 불공평한 운명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문서 본분을 묵묵히 이행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고, 형제자매들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줌으로써 리더로 선출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형제자매들이 제 건강 상태를 감안하여 저를 뽑지 않자, 저는 더더욱 제 팔자가 사납다고 생각했고, 다시 예배에 나갈 때 예전만큼 적극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제 상황에 따라 저를 섬김 가정에서 원고를 검토하게 안배했는데도, 저는 여전히 남들에게 우러름을 받으려 성과를 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병세가 악화되어 대퇴골두가 괴사되었고, 본분을 이행하러 외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욱 의기소침해진 저는 되는 일이 없다며 고생만 할 팔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의기소침한 감정 속에서 자포자기하며 더는 진리를 추구하고 싶지도, 글을 쓰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제 팔자가 사나워서 아무리 추구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일을 보는 제 관점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았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운명 탓으로 돌리고, 매사에 운명에 맞서려 했으며, 극복하지 못하면 제 기구한 운명을 원망했습니다. 저는 수년간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께 진실하게 순종하지 않았고, 진리를 구해 제 문제를 해결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저 의기소침한 채로 하나님을 원망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제가 어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후 저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 두 구절을 보고 나서 비로소 운명엔 좋고 나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정한 운명이 대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사람의 육적 안목이나 무속인의 안목으로 보고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한 사람이 일생 동안 부귀영화를 얼마나 누렸고, 고생을 얼마나 했으며, 명리와 장래를 추구하는 과정이 순조로웠는지 아니었는지에 근거해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기가 팔자를 잘못 타고났다고 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이 심각한 오류를 범한다. 물론, 이는 많은 사람이 자기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를 가늠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그럼 무엇으로 한 사람의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를 가늠하더냐? 세인들은 어떻게 가늠하더냐? 주요한 근거는 그 사람의 일생이 순조로웠는지, 부귀영화를 누렸는지, 상류층의 삶을 살았는지, 평생 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얼마나 즐겼는지, 그리고 수명이 얼마나 길었는지, 어떤 직업에 종사했는지, 힘들게 살았는지 아니면 편안하게 살았는지 등등이다. 이러한 것들로 한 사람의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를 가늠한다. 너희도 이렇게 가늠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너희 다수는 잘 풀리지 않는 일이 닥치거나 고난의 날들이 닥치거나 혹은 상류층의 삶을 누리지 못하면 자기 팔자가 나쁘다고 생각하면서 의기소침에 빠진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중에서), 『일생의 운명이 어떨지는 하나님이 이미 오래전에 정했으므로 바꿀 수 없다. 팔자가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도 다르고, 환경에 따라서, 사람의 자아 감각, 추구에 따라서도 다르다. 그러므로 ‘팔자’는 좋고 나쁨과 관계가 없다. 너는 아주 힘들게 살면서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나는 무슨 대단한 걸 바라지 않아.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다면 만족해. 살면서 고생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세인들이 자주 하는 말도 있잖아. 비바람을 겪지 않고 어떻게 무지개를 보겠느냐고, 고생하는 것도 값진 일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이 정도가 무슨 고생이야? 이건 팔자가 나쁜 게 아니야. 하늘이 내게 약간의 고통과 고난을 주고 단련시키는 건 나를 중히 여기기 때문이야. 나는 팔자가 좋은 거라고!’ 그런가 하면 고생은 나쁜 일이고 팔자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고생 없이, 생활이 안락하기만 해야 팔자가 좋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이를 두고 개인마다 관점이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팔자’라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 팔자가 좋다 혹은 팔자가 나쁘다는 말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말은 없다. 너는 하나님을 믿으니 곧 팔자가 좋은 것이라고 한다면,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바른길을 걷지 않아 징벌을 받고, 드러나고, 도태됐을 때는 대체 팔자가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드러나고 도태될 일도 없다. 이방인들과 종교계에서는 사람을 드러내거나 분별하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으며, 제명되거나 도태된다는 말도 없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그 사람은 팔자가 좋은 것이겠지만, 마지막에 징벌을 받는다면, 그렇다면 다시 팔자가 안 좋아진 것이냐? 한순간 팔자가 좋았다가, 또 한순간 팔자가 나빴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쪽인 것이냐? 팔자는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논할 수 없는 일이다. 전부 하나님이 행한 것이다. 하나님의 안배는 모두 훌륭하다. 다만, 사람마다 운명의 궤적이라든지 처한 환경이 다르고, 각자에게 임하는 사람과 일이 다르며, 한평생 경험하는 인생의 궤적이 다른 것이다. 저마다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각각 다른 생활 환경과 성장 배경을 안배했다. 한평생 겪는 일도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이른 바 좋은 팔자나 나쁜 팔자는 없다. 하나님이 모두 다 안배해 두었으며, 전부 하나님의 행사다. 하나님의 행사라는 관점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훌륭하고 옳다. 다만, 개인의 취향, 느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사람은 안락한 생활, 명리, 명망, 세상에서의 성공, 개인적 영달을 선택한다. 그는 이런 것들을 가져야 좋은 팔자라고 생각한다. 평생 제대로 이룬 것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면서 언제까지나 사회 밑바닥에 머문다면 팔자가 좋지 못한 것이라고 여긴다. 이는 이방인 혹은 세인들이 세상을 추구하는 각도에서, 세상에서의 생존을 추구하는 각도에서 논한 것이다. 그래서 팔자가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말이 생겼다. 팔자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은 운명에 대한 인간의 편협한 인식과 깊이 없는 감성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또한 사람이 육적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얼마나 누렸는지, 명예와 이익을 얼마나 얻었는지 등등을 논지의 출발점으로 삼는 탓에 팔자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이 나온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안배하고 주재한다는 점에 입각해서 이야기하자면, 팔자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은 존재할 수가 없다. 맞지 않느냐? (맞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라는 각도에서 사람의 운명을 논한다면 하나님의 행사는 전부 훌륭하고 개개인에게 필요한 것이다. 전생과 현생의 인과가 있고, 하나님의 정함과 주재,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과 안배가 있기에 사람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그러면 이러한 방면에서 볼 때, 사람은 자기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를 멋대로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나서야 저는 하나님께는 운명의 좋고 나쁨이라는 개념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옳은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운명에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가 있습니다. 사람은 일생 동안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리며, 명예와 이익, 앞날을 추구하는 과정이 순탄한지 여부를 기준으로 운명의 좋고 나쁨을 판단합니다. 이는 사람의 육적인 기호의 관점으로 판단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건강한 몸을 가지고 명예와 이익을 얻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은 운이 좋은 것이고, 몸이 아프고 가난하며 평생을 평범하게 살아 아무에게도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은 운이 나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늘 병마에 시달리고, 명예와 이익, 앞날을 추구하려 해도 되는 일이 없는 제 자신을 보며 제 팔자가 사납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일을 바라보는 제 관점은 이방인과 다름없는 불신파의 관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몸으로 평생 돈과 명예, 이익, 지위를 위해 발버둥 치며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 뜻대로 소원이 이루어져도, 평생 발버둥 치며 살았던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이들 중에는 하루하루를 허송세월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갖 자극을 찾아다니는 사람, 타락하여 방종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하는 사람마저 있습니다. 그들의 운명이 정말 좋은 것일까요? 그들의 삶이 정말 즐겁고 행복했을까요? 저는 비록 가정 형편은 평범하고, 하나님의 집에서 리더나 책임자로 선출되지도 못했지만,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고 진리도 어느 정도 깨달은 형제자매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개중엔 체험 간증문을 써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또한 나쁜 운명이 아니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면 전 비록 병을 앓긴 했지만, 그 병 때문에 늘 하나님께 기도해서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난 몇 년간 문서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습니다. 이는 제 생명 진입에 모두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본성이 매우 교만하고 명예와 지위에 대한 욕심도 무척 강해서, 지금 남들 앞에 나서는 본분에 발탁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보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만약 제가 건강했다면 틀림없이 전 세상의 돈과 명예, 이익을 추구하며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시달리고 조롱당하다가 완전히 사탄에게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세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병을 통해 많은 것을 수확했지만, 제 기구한 팔자를 원망하기만 했습니다. 참으로 복 속에 살면서도 복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병에 걸려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이 있다면, 그 병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베푼 은혜이다.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믿지 못했을 것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은혜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알 수 있다> 중에서) 이제 저는 이 하나님 말씀을 어느 정도 체험하게 되었고, 더는 병에 걸렸다고 해서 제 기구한 팔자를 원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항상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하는 부류의 사람이 가진 사상 관점이 과연 올바른 것이냐? (올바르지 않습니다.) 명백하게도, 그러한 이들은 극단에 빠져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긴 것이다. … 그는 이렇듯 극단적이고 올바르지 않은 각도에서 문제와 사람을 보는 탓에 반복적으로 소극적인 정서의 작용과 영향 아래서 생활하며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 그 결과 어떻게 생활하든 지쳐 보이고, 하나님을 믿으며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도 의욕을 느끼지 못한다. 어떠한 생활 방식을 선택하든 그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오래 믿었으면서도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거나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데에 집중해 본 적이 없다. 당연히,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 것은 더욱 어림도 없다. 원인이 무엇이겠느냐? 결론은 항상 자기 팔자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극심하게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겼고, 사람 자체가 의욕을 잃었고, 무기력해졌고, 산송장 꼴이 되어 활기라고는 없어졌고, 적극적이거나 낙관적인 태도가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본분을 위해, 자기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기가 마땅히 바쳐야 할 충성심을 바치겠다는 의지나 끈기는 더더욱 없는 탓이기도 하다. 그러기는커녕 무성의한 태도로 마지못해 살아간다. 무지몽매하고 흐리멍덩하게, 심지어는 지각없이 허송세월을 보낸다. 언제까지 그렇게 대충 살아갈 수 있을지 자기도 모른다. 정 안 될 것 같으면 이렇게 자신을 타이른다. ‘어휴, 되는대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그냥 이렇게 살자. 언젠가 버티지 못할 때 교회에서 날 출교시키고 도태시키겠다면 그냥 도태시키라지 뭐. 팔자가 이런 걸 어쩌겠어.’ 보아라, 말하는 것조차 이토록 무기력하다. 의기소침이라는 정서는 단순한 기분일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사상, 마음, 추구하는 바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제때에, 최대한 빨리 의기소침한 정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그것이 네 일생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네 일생을 망치고, 너를 죽음으로 끌고 간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진리를 얻어 구원받을 수 없으며, 결국에는 멸망에 빠진다. 그러니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한다. 언제나 팔자의 좋고 나쁨을 자세히 따지고, 운명이 어떤지를 탐구하고, 운명이 어떤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항상 자기 운명에 대해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고, 사소한 변동이 생기거나 무엇이 조금만 마음대로 안 돼도, 혹은 실패하고, 좌절하고, 난처해지기만 하면 대번에 자기 팔자가 안 좋아서 생긴 일이라고, 자기는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는 팔자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남들처럼 팔자가 좋지 못하다고 반복적으로 되뇌고, 자꾸만 자신을 의기소침하게 만들고, 의기소침이라는 부정적 정서에 에워싸이고, 결박당하고, 속박당해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것은 아주 무서운 일이자 위험한 일이다. 의기소침한 정서가 너를 더 교만하고 간사하게 만들거나 너로 하여금 사악함이며 강퍅함 등의 패괴 성품을 드러내게 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 의기소침한 정서는 네가 패괴 성품을 드러내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들거나, 패괴 성품을 드러내 진리 원칙을 어기게 하거나, 방해와 교란을 일으키거나 악을 행하게 만들기에는 역부족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본질을 보자면, 의기소침한 정서는 사람이 현실에 불만이 있을 때 드러내는 가장 심각한 모습이다. 현실에 불만을 드러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불만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한 불만은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하느냐? 그 결과는 아주 심각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공급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가르침, 권면, 일깨움, 경고를 알아듣지 못하게 되며, 그것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게 된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제가 이런 비관적이고 의기소침한 부정적인 감정에만 빠져 있으면 그 결과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는 자기에게 닥친 일을 올바르게 대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본분 이행과 진리 추구에 무관심하게 하여 결국 구원받을 기회를 잃게 만듭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의기소침한 감정은 현실에 대한 불만이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한 불만으로서,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며 무언의 반항이기 때문에, 그 성질이 너무나도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병이 재발하여 대입 시험에 실패하고, 또 병 때문에 학교를 중퇴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저는 몹시 고통스러워하며 하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병 때문에 발탁되지 못하고 양성될 수 없게 되자 제 팔자가 사납다는 생각에 제게 이런 몸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기만 했습니다. 본분 역시 적극적으로 협력하려는 마음 없이 건성으로 대했습니다. ‘팔자가 사납다’는 잘못된 관점에 사로잡혀 점점 더 의기소침해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하기만 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만약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구원받을 기회를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잘못된 사상 관점은 사람을 깊이 병들게 합니다. 자기에게 닥친 일을 순종하는 태도로 대하지 못하게 해서, 결국 사탄에게 우롱당하고 해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까지 묵상하고 나서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제 기구한 팔자를 원망하기만 하면서 의기소침한 부정적인 감정 속에 살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무언의 반항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짓입니다. 하나님, 저는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 후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운명을 어떻게 올바르게 대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어떤 태도로 운명을 대해야 하느냐? 창조주의 안배에 순응하고, 창조주가 이 모든 것을 안배한 목적이 무엇이며 그 의의가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열심히 구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네게 안배해 준 일생에서 네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고 피조물의 본분, 책임, 의무를 다하며, 네 삶을 더욱 유의미하고 값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창조주가 기쁘게 받아들이고 기억하게 해야 한다. 물론 네가 구하고 노력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장 좋다. 요컨대, 지음 받은 인류가 운명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는 함부로 평론하고 정의하거나 극단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게 아니며, 반항하고, 선택하고, 바꾸려 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마음으로 이해하고, 구하고, 모색하고, 순응한 다음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하며,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이 배치한 생활 환경과 인생 여정 속에서 하나님이 네게 가르쳐 준 처신 방식을 구하고, 하나님이 네게 걸으라고 한 길을 구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네게 안배한 운명을 경험한다면 마지막에 너는 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창조주가 네게 안배한 운명을 경험한다면 네가 맛볼 것은 슬픔, 근심, 눈물, 고통, 좌절, 실패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네가 기쁨, 평안, 위안을 체험하고 창조주가 베풀어 주는 진리상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체험하리라는 점이다. 또한, 인생길에서 네가 막막함을 느낄 때, 네가 좌절과 실패를 마주했을 때, 선택을 마주했을 때, 창조주의 인도를 체험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너는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유의미한가에 대한 인식과 경험, 이해를 얻는다. 그때가 되면 너는 살면서 더 이상 막막하지 않을 것이요, 더는 두렵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자기 운명이 안 좋다고 불평하지도 않을 것이며, 팔자가 나쁘다는 느낌 때문에 다시금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만약 네가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이러한 방식으로 창조주가 네게 안배한 운명과 마주한다면 인성 방면에서 더 정상적으로 바뀔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상 인성, 정상 인성의 사유와 관점, 일을 바라보는 원칙도 생길 것이다. 당연히 이방인이 얻을 수 없는, 인생의 의의에 대한 견해와 인식도 얻을 것이다.』(<말씀ㆍ6권 진리 추구에 관하여ㆍ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운명을 안배하시든 그분의 지배와 안배에 마땅히 순종해야 하며, 이것이 바로 피조물로서 가져야 할 이성임을 깨달았습니다. 운명이 어떻든 진리를 추구하고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면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욥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내려 주셔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소와 양, 재산을 주셨고, 아름다운 자녀들도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의 운명은 참으로 좋았습니다. 하지만 욥은 그것을 누리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는 데에만 집중했습니다. 나중에 시련이 닥치자 그는 하룻밤 사이에 모든 재산은 물론 자녀마저 잃었으며, 온몸에는 종기까지 났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너무나 불행했습니다. 하지만 욥은 자기에게 닥친 일을 사람의 관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반항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송했습니다. 결국 굳게 서서 증거한 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니 그는 하나님을 뵈었고,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얻어 천수를 누리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운명을 대할 때 마음을 다해 구하거나 적극적으로 마주하지 않고 늘 그것을 바꾸려 하거나 그것에서 벗어나려고만 했습니다. 그래서 삶이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고통의 원인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주재 탓일까, 아니면 사람의 운명이 나쁜 탓일까? 둘 다 틀렸다. 한마디로 말해, 사람들이 가는 길, 사람들이 선택한 생존 방식이 근본적인 원인이다.』(<말씀ㆍ2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관하여ㆍ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 3> 중에서) 제가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제가 추구했던 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지식으로 운명을 바꿔 출세해서 안락하고 부유한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은 후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전 여전히 명예와 지위를 추구했고, 남들 앞에 나서는 본분을 맡아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으려 했습니다. 병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자 제 기구한 운명을 탓하며 의기소침한 감정에 빠져 지냈습니다. 명예와 지위에 대한 욕심이 너무 컸던 것입니다! 저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설마 명예와 지위를 얻으면 좋은 운명이고, 그것이 가치 있는 삶이란 말인가?’ 교회에서 드러나 도태된 많은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그중 일부는 비록 리더 일꾼의 본분을 이행했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명예와 지위만 추구하며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자신을 높이고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책망과 훈계를 받아도 받아들이지 않다가 결국 드러나 도태되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착실하게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발탁되어 양성되고 많은 사람의 우러름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의 칭찬을 받지 못해, 결국에는 드러나 도태될 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전 병 때문에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 말씀의 공급을 누리며 진리도 어느 정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병을 앓고는 소극적인 상태에 빠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저를 깨우치고 이끌어 주시며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것이 정말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 착실하게 제 본분을 이행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하는 거라곤 온통 제 명예와 지위뿐, 하나님에 대한 진심은 없었으니, 실로 너무나 패역했습니다! 저는 후회의 눈물을 금할 길이 없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나 패역했습니다. 명예와 지위만 추구하며 바른길을 가지 않았으니,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오직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하며, 착실하게 제 본분을 이행하기를 원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전 더 이상 의기소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형제자매들을 만날 수 없어서, 매일 꾸준히 하나님 말씀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설교문을 쓰는 훈련을 했습니다. 때로는 병이 심해져 관절이 아파 움직일 수도, 두 발로 서지도 못했는데 그럴 때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쓰렸습니다. 특히 영상 속에서 형제자매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모습을 보면 부러웠습니다. ‘저 형제자매들은 건강해서 노래하고 춤추며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나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데.’ 제 상태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저는 조용히 제 마음을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역할은 달라도 몸은 하나다. 각자 맡은 바 직책을 다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미력이나마 전력을 다해 생명의 성숙을 추구한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그리스도의 최초의 말씀ㆍ제21편> 중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안배하신 본분은 모두 다릅니다.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하나님을 찬미하고, 저는 문서 본분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각자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니, 온 힘을 기울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제 팔자가 사납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고 진리를 잘 추구하며 제 본분을 잘 이행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팔자가 사납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 말씀의 인도 덕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